"뭐, 뭐인 거냐?.... 그 날개는 또 무어고...." 갑작스러운 이카르트의 변화는 겔크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이카르트는 그런 그의 모습에 다시 한차례 냉소를 터트렸다. 하지만.... 입술이 움직이지 않은 채, 겔크의 마음에 직접 이야기했다. "후훗.... 혼과 육체와 분리되어.... 혼도 육체도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라고 할까요?.... 후후후.... 보통의 저로써는.... 당신을.... 처참하게 죽이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 하더군요...." 이카르트는 이렇게 말하면서 날개를 한차례 펄럭였고, 겔크는 크게놀라 두 팔을 앞으로 뻗어 이카르트를 막으려 하였다. 하지만, 이카르트를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지지는 못하였다. 이카르트의 검정색 날개가 한줄기의 검정색 빛이 되어 겔크의 오른쪽겨드랑이를 꿰뚫었고, 푸학, 하는 소리와 함께 겔크의 오른팔이 부서져 사방으로 흩날렸다. 빛의 속성을 가진 차원버그이여서 인지, 흩어질 때의 모습이 단지 빛으로 화할 뿐이었고, 그 때문에 보기에 그다지역하지는 않았다 겔크는 순간 일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방금 전의 이카르트가 아니었다. 겔크는 자신의 팔을 부수고 지나가자신의 뒤에 있을 이카르트의 모습을 시야에 잡기 위해 서둘러 몸을돌렸으나, 채 어깨가 돌기도 전에 눈앞으로 검정색 빛이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왼쪽 팔마저 부서지며 이카르트의 목소리가 느껴졌다. ".... 형편 없으시군요...." 겔크는 이 이카르트의 조롱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며 힘을 극한으로끌어 올렸다. 사라졌던 두 팔은 어깨에서 불쑥 솟아 나와 다시 원래의모습을 복원했고, 겔크는 잠시 손을 움직여 보다가 이카르트를 향해외쳤다. "닥쳐라!! 난 아직 내 힘의 10분의 1도 끌어내지 않았다!!" "그러시군요...." 채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느껴진 이카르트의 목소리.... 그리고그와 거의 동시에 자신의 바로 앞에까지 다가온 이카르트의 모습....휘둘리며 검정색의 빛을 내뿜는 보라색 검.... 그리고 그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흑광에 잘리어 나가는 자신의 몸.... "크아아악!!!" 온 몸이 찢기어져 나가는 느낌에 겔크는 비명을 질렀다. 한편으로는두 주먹을 거칠게 휘둘러 막무가내의 공격을 이카르트에게 퍼부었고,다른 한편으로는 몸의 조직을 재생시키며, 그는 말 그대로 악전고투를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카르트는 입가에 비웃음을 띄울 뿐이었다. 가끔, 겔크의공격이 정확히 이카르트의 정면을 가격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벽을 내려치기라도 하는 듯 이카르트의 바로 앞에 쳐있는 무색의 벽에 퉁겨져나갔다. 잠시 더 즐기듯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카르트는 한차례 날개를 퍼덕였고, 이내 뒤로 조금 물러섰다. 물론, 겔크의 난잡한 공격에 짜증이나서였다. 겔크는 이러한 사실은 아는지 모르는지, 이카르트의 공격이 멈춘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여 뒤로 성큼 물러섰고, 잠시 더 이카르트를 바라보다가 멀리 엔클레이브의 경계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도망칠 생각이었던 것이다. 당해낼 수 없는 상대와 다툴 이유도 필요도 없다. 방금전의 자신감 넘치며 외치던 소리는 이미 잊었다. 평소의 이카르트라면 그런 그의 모습에 비웃음을 던지며 다시 봉인을해 버리는 선에서 끝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카르트는 돌연 몸 주위에 검정색의 불꽃이 몇 송이 피어올랐고, 이카르트는 날개를 여유 있게 퍼덕여 겔크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주위에 생겨난 불꽃은 긴 꼬리를 그리며 이카르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겔크를 따라갔다. 오래지 않아 겔크의 몸에는 이카르트가 쏘아보낸 불꽃이 작렬했고, 겔크의 몸의 일부가 부서지며 빛으로 화하였다. 이카르트는 잠시 주춤거리는 겔크의 모습에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계속해 그의 뒤를 쫓았다. 분명.... 처참히 죽이겠다고 약속했다.... 싱거운 괴물이 어디론가 사라진 이후.... 란테르트는 하얀 색의 검을 든 채로, 망연히 서 있었고, 엠과, 에스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넋을 잃은 채 있었다. 차라리 그것이 얼마나강하건 간에 자신들에게 싸움을 걸어왔다면, 정확히는 자신들 쪽에서싸움을 건 것이겠지만, 지금보다 조금은 덜 당황스러웠으련만, 나타나서 한차례 노려보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림에, 일행은 당황을 넘어서황당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뭐 잘된 일 아닌가? 에스가 뭐야? 라고 중얼거린지도 잠시, 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목표는 완수했습니다. 이제 해야 할 일은, 무사히 살아 돌아가는 것입니다." 엠의 이 말에 란테르트를 제외한 다른 세 사람은, 아, 하는 탄성을내지르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나가야 하지요?" 일전 엠에게서, 이 신전의 구조에 대해 대강 이야기를 들은 세레티는이렇게 물었고, 엠은 그녀의 물음에, "아마 이 방안에 밖으로 연결되어 있는 게이트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답하며 아이렌을 바라보았다. "아이렌, 몸은 이상 없지?" 그의 물음에 아이렌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엠은 뒤이어 다른 일행을 한차례씩 바라보았다. 세레티도 에스도 별다른 문제는 없어보였다. 하지만.... 엠의 시선이 막 란테르트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을 무렵.... 다른일행들도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검을 멍청히 든 채로, 그는 그 흰색괴물이 사라진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약간 얼이 빠진 듯 보였고, 눈동자도 그다지 또렷하지 못한 것이, 무언가에 상당히놀란 모양이었다. 엠은 잠시 왜 그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으나, 알수 없었다. 방금전 받은 공격 때문 같지도 않았고, 그것 외에는 별달리 그가 놀랄 만한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엠은 순간 한가지에 생각이 미치었다. 혹시.... 검에 저주가 걸린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순간, 큰일이다, 라는 생각을하며 란테르트에게 검을 버리라고 외치려는 순간, 란테르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입속으로 몇 마디를 중얼거리더니, 들고 있는, 아까의 그 흰색괴물을 봉인하는데 쓰였던 검에 마법을 걸었다. 흑색의 기운이 손에서뿜어져 나와 검을 휘감았고, 이내 검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란테르트가 막 실패다....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검을 감싸고 있던 흑기는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엠도, 에스도 다른 두사람도 란테르트가 무슨 의미에서 이런 행동을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점은바로 그 다음에 그가 보인 행동으로, 그는 손에 들려 있는 화려하고아름다운 봉인용의 검을 주저 않고 땅바닥에 내던져 버렸다. 워낙 대단한 검이기에, 검은 란테르트의 손을 벗어나 바닥에 슥 하는 소리와함께 꽂혀 버렸으나, 란테르트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란테르트는 곧바로 자신의 하르제 검을 뽑아들었다. 아직까지.... 이하르제 검 이외에 이 마법을 성공한 경우는 단 한차례도 없었다. 다시 검을 흑기가 감쌌다. 란테르트가 막 마법을 일으키는 순간, 엄청난 힘이 그의 몸에서 퍼져나왔고, 나머지 일행들은 그 힘에 압도당하여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없었다. 그의 손에 들리어져 있는 흑색의 검은 방금전 결계를 부술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위세였다. 그는 검을 든 채 몸을 날려 눈앞에 있는 공간에 돌연스레 검을 휘둘렀다. 엠과 에스는 물론이거니와, 세레티와 아이렌 모두 란테르트가 왜 이런 광기를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멍하니 있는 것도 그러하고, 갑자기 검에 흑기를 씌워 허공에 칼질을 하는 것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란테르트가 가른 공간이 왜곡과 균열을 차례로 일으키며 창,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부서져 나갔고, 그곳에는 다른 어떠한 공간으로 통하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흠...." 엠은 놀랍다는 표시로 이렇게 헛기침을 한차례 했고, 에스는 엇, 그리고 아이렌은 앗, 하는 탄성을 각각 내질렀다. 그리고 세레티는, "저건.... 엔클레이브...." 라고 놀라 외쳤다. 란테르트가 깨뜨린 공간의 벽은 몇 차례나 이야기로 들었던 엔클레이브와 아주 흡사했다. 일행이 이렇게 놀라는 사이, 란테르트는 그 공간 안으로 주저 않고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멀리 반공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두 개의 인영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누구인지를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공간을 무리해서 깨고 들어온 것이다. "이카르트!!!!" 란테르트는 외쳤다. 목청이 부서져라, 폐부가 찢어져라, 온 힘을 다해 위에 있는 인영을 향해 외쳤다. 워낙 멀리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카르트는 검정색 망토 비슷한 것을 휘날리며 검을 들고 싸우는 듯 했다. 그리고 그 상대는 방금전 보았던 흰색의 괴물이다. 란테르트는 다시 한차례 이카르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 순간그의 눈 안에 들어온 것은 산산이 부서지며 빛으로 허물어져 버리는흰색의 괴물과....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이카르트의 모습뿐이었다. 창.... 맑은 소리가 란테르트의 귓속에 울렸다. 그리고.... 이카르트가 만든 공간은, 저 천장쪽 부터 깨어지듯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흡사 비가 되어 내리는 듯한 이카르트가 만든 공간의 파편을 맞으며, 아니 맞는 듯한 착각을 하며 란테르트는 천천히 무릎을 꿇어버렸다. 밖에서 란테르트가 공간 안으로 사라진 모습을 본 일행은 순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알 수 없었다. 란테르트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가기에는 일단 그의 목적을 알 수 없었고, 그렇다고 기다리고만 있기에는영 기분이 찜찜했다. 그러던 차에, 그리 오래지 않아 눈앞의 공간이 살짝 왜곡을 일으키며란테르트가 무릎을 꿇은 채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일행은 약속이나한 듯 달려 그에게로 다가갔다. "오지 마십시오!" 순간, 자신에게 접근하는 모두를 향해 란테르트가 이렇게 외쳤다. 일행은 걸음을 멈추었고, 란테르트는 검을 두 손으로 잡아 몸을 기대며,두 무릎을 꿇고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회색의 머리칼이 그의 몸을 따라 흘러 바닥에 넓은 호수를 그려냈고.... 란테르트는 컥, 하는 소리를 내며, 그 호수에 홍화를 피워냈다. 다시몇차레나 울컥 피를 토한 란테르트는 천천히 허물어지듯 몸을 앞으로숙였다. 하지만 기절하지는 않았다. 검을 잡고 있던 두 손중 하나를 풀어 소매로 입가에 고인 피를 슥 닦아내고는,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5년동안.... 독을 당했던 그 날 하루를 제하고는 단 한차례도 기절한적이 없었다. 그런 것을 할만큼.... 결코 한가하지 않다. 란테르트는 검을 검집에 갈무리하며 일행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그대로 일행을 스쳐 지나갔고, 자신이 바닥에 내던졌던 검이 있는 곳으로 가 바닥에 박혀있는 그 검을 뽑아들었다. 고개는 푹 숙인 채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엠에게 돌아왔다. 이 모든 행동을 하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들은 멍하니 그를 바라볼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고, 란테르트는 조용히 검을 들어 엠에게건넸다. "필요 없는 물건입니다." 란테르트의 말에 엠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굉장한 명검입니다. 란테르트씨가 허리에 차고있는 하르제 검 보다 백배는 뛰어난 검입니다."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물론 그렇지만.... 제게는 필요 없는 검입니다." 란테르트의 말에 엠은 조금전 란테르트가 사용했던 그 이상한 마법을떠올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엠은 더 이상 사양 않고 란테르트로부터 검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란테르트에게 무언가 다른 것이라도 해 주고 싶어 이렇게 말했다. "전 전에도 말씀 드렸듯 상인입니다. 만약 란테르트씨께서, 돈으로해결해야 할 어떠한 일이 생길 경우.... 저를 찾아 주십시오." 엠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 저었다. 란테르트가 돈으로밖에 해결할 수 없는 일이란.... 아마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란테르트는 엠의 그 말에 돌연 귀찮을 정도로 어깨가 무거워 짐을 느꼈다. 가방 속에 손을 불쑥 집어넣었고, 사람의 머리 만한 크기의 커다란 가죽 주머니가 그의 손에 들려 나왔다. "돈 말입니까?...."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주머니를 뒤집었다. 촤르르 하는 소리와함께 수백 개의 금화가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일부는 통통 튀었고,다른 일부는 떼구르르 구르며 사방으로 확 하고 퍼졌다. 엠과 에스 이 두사람은 란테르트의 이 돌연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엠은 자신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내 그의 심기를 거스른 것인가하고 생각해 보았으나, 특별히 그가 화를 낼 이유는 없는 것 같았다. 란테르트는 돈을 다 쏟아 버린 후 입을 열었다. "이 돈은.... 두분께서 8년전에 조언해 주신대로....용병단에서 일을해 번 돈입니다.... 하지만.... 쓸모는 없더군요...."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고, 엠과 에스는 입을 다문 채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두분께 돌려드리겠습니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쓰디쓴 미소를 더더욱 짙게 지었고, 엠은잠시동안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금화를 하나 들어올렸다. "돈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하고 계시다는 말씀 이시군요.... 모두.... 781개의 금화.... 라...." 그의 말에 세레티와 아이렌은 크게 놀라며,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설마 이 짧은 순간에 이 금화들의 수를 모두 다 샌 것은 아니겠지요?" 세레티는 이렇게 엠을 향해 물었고, 엠은 그녀의 말에 그저 담담히미소를 지어 주었다. "대단해요.... 오라버니." 아이렌이 놀랍다는 듯이 칭찬을 할 무렵, 에스가 입을 열었다. "그런 것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이 녀석은 그냥 되는대로 지껄인 거야." 에스의 말에 세레티와 아이렌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엠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가 그런 장난을 할 수도 있었으나, 왜인지 지금 상황과는어울리지 않는 농담이었다. "에스의 말이 맞습니다." 엠은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세상의 일이란.... 이렇게 분명치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미력하나마, 우리 두 사람의 힘이 필요하다면.... 연락을 주십시오. 어떠한 대륙이던지.... 상점이 있을 정도 규모의 도시마다 반드시 있을 겁니다. 쿠텔토 상사의 건물이...." 엠의 이 말에 아이렌이 아, 하는 탄성을 내 질렀다. 지금까지 자신들의 정체(?)를 감춰 오던 엠오빠가 돌연 이렇게 자신의 성을 밝혔기 때문이었다. 엠은 이렇게 말한 후 고개를 숙여 란테르트와 세레티에게 사과했다. "부득이한 이유로 정체를 감추어 왔으나.... 그다지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깨닳았습니다. 전 멜브라도 쿠텔토, 마곡의 쿠텔토 상사의 소유주입니다. 이쪽은 제 친우이자 제가 고용한 경호인인 센타포쥰, 그리고 저쪽은 아이렌느 쿠텔토로 제 동생입니다." 이 몇 마디 말에, 세레티는 얼굴이 파래지며 입을 크게 벌렸다. 이일곱 대륙 안에 살고 있으면서, 쿠텔토란 이름을 알지 못하는 인간은겨우 란테르트와 몇십년전부터 산 속에 은거하는 기인들뿐일 것이다. "설마.... 그...." 세레티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약간 더듬거리며 이렇게 놀란 표정을 지었고, 멜브라도는 온화이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마 그 쿠텔토일 것입니다. 트레져 헌팅을 하는 동안에는.... 전트레져 헌터이길 바랍니다. 쿠텔토 상사의 주인이라는 굴절된 시각으로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싫어 본명을 숨긴 것입니다. 용서 해 주시겠습니까?" 멜브라도의 이 사과에 세레티는 순간 멍 해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요.... 쿠텔토 가의....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이 세상 어느 누구라도 편견을 가지고 바라볼 테니까요." 멜브라도는 세레티가 흔쾌히 사과를 받아 주자 감사하다는 의미에서고개를 한차례 끄덕여 주었고, 이내 조금도 표정의 변화가 없는 란테르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란테르트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혹시 몰랐다 하더라도, 지금으로써는 놀라거나 할 만한 정신이 아니었다. 란테르트는 지금 한가지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그것은 당연하거니와이카르트에 대한 생각이었다. 엠은 란테르트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가 더 이상 그를 방해해서는안될 것 같았기에 이어 아이렌과 세레티를 바라보았고, 지친 기색이확연한 이 두 여자의 모습에 이곳에서 하룻밤을 묶어야 겠다는 생각을하게 되었다. "그럼....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도록 하지요." 그의 말에 세레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세레티의 물음에 엠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위험하지만, 그래도 이곳이 신전 안에서는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적어도 이런 저런 괴물들은 없으니까요. 검에 봉인되어 있던 조금전의 그 괴물은 한 번 떠나 버리고는 돌아올 줄을 모르니.... 일단은 안심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란테르트가 몸을 부딪히며 약간 깨어진 벽을 제외하고는 여전 단정하고 조용한 신전의 한쪽에 일행은 잠자리를 마련하기 시작했으나, 란테르트는 그때까지도 멍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는 정신을 차렸고, 이내, 후.... 하는 한숨을 내쉬며 일행 모두가 한눈에 들어올 만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무리 그라 해도, 벽에 처박힐정도로 얻어맞았는데 멀쩡할 리는 없었다. 게다가, 방금전 이카르트의엔클레이브를 뚫기 위해 무리하게 마법력을 일으킨 바람에 정신을 읽을뻔 하기도 했었다. 자리에 앉고 나니 란테르트는 약간 몸이 나른 한 듯 했다. 저쪽에서는 휴대하고 다니던 약간의 마른 땔감으로 저녁을 간단히 준비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건량을 물과 함께 약간 삼키는 것으로 저녁을 때울 터이지만, 멜브라도도, 센타포도 아이렌을 끔찍이 아꼈다. 장작을 등에지고 다닐 정도로.... 오래지 않아 따듯한 수프가 완성되었고, 세레티는 두 그릇을 퍼 란테르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으나, 다른 일행과는 확실히 거리감이 느껴지는 장소에 란테르트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란테르트는 세레티가 건네는 수프를 조용히 받아들었다. 그럭저럭 10월, 가을도 상당히 깊어있는 이때이기에, 신전 안은 약간 서늘했고,따듯한 수프의 기운이 손바닥에 전해지자 알 수 없는 편안한 마음이일었다. 세레티는 란테르트의 곁에 가만히 자리잡고 앉았다. 하지만, 란테르트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카르트.... 5년만에 처음으로.... 뒷모습이나마.... 아주 먼 곳에서나마 그의 모습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몰히 해요?" 세레티가 물었다. 그리고 란테르트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돌려 한차례 그녀를 바라보고는 다시 수프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생각.... 당연히 보라색 머리칼을 가진 친구에 대한 생각이다.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뒤를 돌보아 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일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방금 전의 그 괴상한 존재.... 그것의 힘은 더 분명히, 분명 자신보다 강했다. 만약 싸웠더라면, 어쩌면 자신은 이곳에 뼈를 묻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때 이카르트가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그 흰색의 존재를 해치웠다. 우연히.... 이 임무를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우연이 너무 많다. 세레티는 그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없자 약간 기분이 상했으나, 한두번 당해보는 일도 아니기에 차분히 다시 물었다. "그 마법.... 도대체 뭐지요?" 방금의 것이 란테르트 개인에 관한 물음이었다면, 이번의 것은 그의마법사로써의 호기심에서 나온 물음이었다. 보통 란테르트는 전자와같은 류의 질문에는 잘 대답하지 않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열에 일고여덟쯤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데스틴.... 더.... 비...." 란테르트는 띄엄띄엄 입을 열었고, 세레티는 처음 듣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군요.... 하지만, 대단해요... 마족의 엔클레이브까지 뚫다니...." 마족의 엔클레이브를 뚫을 수 있다.... 그녀의 이 의미 없는 한마디에 란테르트는 잠시 두 눈을 꼭 감았다. 엔클레이브를 뚫다.... 이 한마디 말에 란테르트는 예전 이카르트와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린 것이다. 그때도 오늘과 비슷했다. 이카르트는, 그의 표현을 빌자면, 마법사 나부랭이들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자신은 엔클레이브의 이질적인 느낌에 지금과 같은 데스틴 더비라는 마법을 사용하여 엔클레이브를 깨뜨렸다. 그렇게 그가 안에서 발견한 존재는.... 그때 세레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속성의 마법이죠?" 란테르트는 세레티가 오늘 이상하게 질문이 많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돈입니다." 이렇게 대답한 란테르트는 잠시 멍 해 있었다. 혼돈....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단 한차례도 이 마법에 대해 아는 사람을 만난 적이없었다. 이카르트와 트레시아는 약간 알고 있는 듯 했으나, 그네들도자세히는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이 데스틴 더 비를 알지 못하였다. 하긴.... 사용하는 자기 자신조차 엘디마이어의 마법이라는 것밖에는 알지 못하니.... 마계마법의 경우도 마법의 효과만을 보고 그것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거의 없었으나, 적어도 마법의 이름을 입밖에 내면 거의 대부분 알아듣고 한다. "혼돈?.... 음.... 처음 듣는 군요. 혼돈이면 누가 관장하는 거지요?마왕 압그랑인가?"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엘디마이어님 입니다." "아, 샤텐 테미시아.... 그 마황의 마법이군요." 세레티는 란테르트의 말에 이렇게 아는 척을 했다. 란테르트는 이점도 평소 상당히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마계 마법과 엘디마이어의 마법 이 두 가지 모두를 할 줄 아는 자신으로써는 이 두 마법 계열의 마법이 서로 조금의 연관성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세상에서는 엘디마이어를 마황이라 부르고 있었다. 마계마법을 가르쳐 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란테르트가 마법을배운 그 노인에게서도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다. 세상에 떠도는신화에 의한다면 엘디마이어는 그냥 압그랑 이전에 존재했던 매우 강한 마왕이었으나, 란테르트의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맞지 않다. 세레티가 찬탄하듯 중얼거렸다. "아무튼.... 당신은 언제나 저를 놀라게 해요.... 이번의 마법은....숨이 다 막히는 듯 했으니...." 마법사이기 때문에 그녀가 느낀 느낌은 멜브라도나 센타포가 느낀 것에 비해 몇 배는 강했다. 몇 번을 찬탄해도 오히려 부족할 듯 했다. "역시 당신은 인간이 아니에요.... 어떻게 인간이 이런 힘을 가질 수있겠어요?" 세레티는 마지막으로 밝게 웃으며 이렇게 한마디 보탰고, 란테르트는순간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고개를 돌려 세레티를 바라보았고,자신의 돌연한 행동에 약간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세레티를향해 이렇게 입을 열었다. "혼자 있고.... 싶습니다." 란테르트의 말에 세레티는 곧바로, "그런...." 이라고 하며 무어라 입을 열려 했으나, 이내 한숨만 한차례 쉬며 조용히 수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란테르트가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는것은 단지 말을 걸지 말아달라는 뜻으로, 곁에 있고 없고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란테르트는 반쯤 먹다 만 수프를 바닥에 내려 놓은 채 등뒤에 있는벽에 몸을 한껏 기대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아이렌이 두 오빠들 사이에서 환하게 웃으며 수프를 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티없이 맑은 웃음이 몹시도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멜브라도와 센타포는 마음이 조금 놓이자 또 다시 말싸움을시작했다. 왠지 평화로와 보이는 이 모습에 란테르트는 괜히 씁쓸한미소가 배어 났다. 그때 세레티가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세레티가 말을 꺼내자 란테르트는 고개를 돌려 세레티를 바라보았고,그녀는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일전에.... 얼마나 더 살 수 있느냐고 물었었지요? 그때 1년이라고답했는데.... 장난이었어요. 사실은 저도 알 수 없어요. 하지만, 다른말들은 모두 사실이에요...." 세레티는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아까 각혈을 할 때 흐른 피가 회색 빛의 옷을 검게 물들였다. "아까.... 지나치게 강한 마법을 사용했어요." 세레티는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가 어떤 마족의 엔클레이브를 깨뜨리는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제가 전에 그런 행동은 생명을 깎아 먹는 짓이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까지 강한 마법을 사용해서라도.... 그 안으로 들어갔어야 했나요?그런 언밸런스의 몸으로 강한 마법을 자꾸 사용하다가는 죽는단 말이에요. 이건 절대 농담이 아니에요." 세레티는 뒤로 갈수록 약간씩 흥분에 목소리의 톤이 올라갔으나, 막마지막 이야기를 했을 무렵 한숨을 한차례 내쉬어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니까.... 몸을 아끼도록 해요."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 목숨은.... 도구일 뿐입니다. 도구는.... 망가지지 않도록만....관리하면 됩니다." 란테르트의 이번 말에 세레티는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지금까지 그와 만난 후 들어온 말들 중에서 가장 파격적인 말이었다. "도구.... 라니요? 자신의 생명을 그렇게 이야기하다니...." 하지만, 란테르트는 그녀의 그런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눈을감은 채 머리를 벽에 기대며 조그맣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날까지.... 망가지지 않도록...." 날개도.... 검도 없다. 이카르트는 떠나기 전과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방 서쪽 기둥에 몸을기대었다. 동그란 방의 가장자리를 따라 아치로 연결된 기둥이 열 여섯 개나 있었지만, 이카르트 그가 머무는 곳은 언제나 이 기둥이었다. "어째서.... 그냥 봉인 정도에서만 끝을 내실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아르페오네의 자리 역시 거의 정해져 있는 듯 하다. 이카르트가 기둥에 등을 기댄 채 한쪽 다리를 다른 기둥 방향으로, 그리고 다른 쪽 다리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겨 앉아 있을 때면, 그녀는 그의 오른편으로두걸음쯤 떨어진 곳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정면으로는아르카이제와 이 탑 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다.... "귀찮았다...." 이카르트는 조용히 입을 열어 그녀의 물음에 대꾸했고, 아르페오네는당치 않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이유로 꺼내 들어서는 안됩니다.... 아르카이제님, 당신의 혼을 그러한 이유로 꺼내 드는 것은....." "나를 가르치려는 것이냐?...." 이카르트는 아르페오네의 말에 이렇게 되물었고, 아르페오네는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조아리며 곧바로 대답했다. "결코 아닙니다. 다만.... 아르카이제 님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드린간언입니다." "그렇다면 그쯤 해 두어라." 이카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시선을 밖으로 돌렸고, 아르페오네는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만 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혼을 개방한 상태에서 대적할경우 방어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져 버립니다. 자칫하면 크게 위험한경우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카르트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려 아르페오네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바닥에 조아린 채 이렇게 이야기하는 아르페오네의 모습에 이카르트는 더 이상 귀찮다는 듯한 대꾸를 할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일으켜 아르페오네에게 다가갔고,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어 일으켜 세웠다. "그만 두거라....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것이 아닐 터.... 괜한말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아라." 이카르트의 이 말에 아르페오네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말 그대로였다. 이미 성공한 일이고.... 간언을 하는 것은 한 번으로도 충분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계속해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르카이제 님은, 란테르트 님의 일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감정적이 됩니다.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르페오네는 이윽고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꺼냈고, 이카르트는 그녀의 말에 훗, 하는 웃음을 한차례 터트렸다. "내가 그렇던가?...." 이카르트의 말에 아르페오네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농담으로 끝내서는 안될 일입니다. 나크젤리온 님이 지금까지 아무말씀 없으신 것은 결코 아르카이제 님의 이러한 행동을 몰라서가 아닐것입니다. 제발 부탁드리오니, 그분의 분노는 사지 마십시오...." 아르페오네가 이카르트를 사랑하기에 란테르트를 질투하고 있다, 라는 점을 계산에 넣는다 하더라도, 그녀가 이카르트에게 한 이야기들은거의 대부분 옳은 것이었다. 이카르트에게서 대답이 없자 아르페오네는 다시 한차례 고개를 조아렸다. "그분.... 그분에 대해서는 저보다 아르카이제 님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분노를 살 경우에는...." 아르페오네의 이 말에 이카르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한차례 어루만져 주었다. "아이야...." 아르페오네는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느껴진 이카르트의 손길에 놀라며 고개를 퍼뜩 들었고,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평온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이카르트의 모습이었다. 이카르트는 그 미소를 얼마간 더 지으며 몸을 천천히 돌려 창밖으로시선을 향했다. "영원한 생명.... 쓸모 없이 길기만 한.... 아이야. 나는, 이 긴 생명을 마지막까지 이어가는 것 따위에는 흥미가 없단다." 그의 말에 아르페오네가 놀라 외치듯 말했다. "아르카이제 님!!" "아르페오네야.... 네게도 목숨과 맞바꾸는 한 이 있더라도 꼭 하고싶은 일이.... 그것이 한가지쯤은 있겠지?" 이카르트의 말에 아르페오네는 입을 꼭 다문 채 시선을 다른 곳으로피했고, 이카르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다시자리에 앉았다. 등을 기둥에 기대고.... 몸을 편안하게 한 채.... "아이야. 네게 부탁이 하나 있다." 잠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이카르트가 다시 말을 꺼냈고, 아르페오네는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던 시선을 이카르트에게로 돌렸다. "명령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부탁을 하고 싶구나.... 무슨 뜻인지 알겠지?" 이카르트의 말에 아르페오네는 몇 걸음 그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꿇었다. "무엇이든지.... 말씀해 보십시오." 이카르트는 다시 한차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란테르트를.... 보호해 주렴." 이카르트의 말에 아르페오네는 눈썹이 조금 움찔 했다. 아마 싫다는뜻의 그것이리라. "그분은.... 저보다 훨씬 강합니다. 보호라는 것이 필요 없습니다." 어깨 위에 있던 아르에가 맞다는 의미에서인지 종종 하고 한차례 울었다. 그녀의 말에 이카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그렇겠지.... 하지만, 너보다 생각이 깊지는 못하다.... 오늘 같은일이 또 다시 일어날까 두렵다..... 다행히 빛의 속성을 가진 디아여 서, 내가 곧바로 움직일 수 있었지만.... 어둠의 속성을 가진 디라면, 내가 함부로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어둠의 디아와 마족은 동맹관계이니...." 이카르트의 말에 아르페오네는 으음, 하는 신음을 내뱉었다. 이카르트의 말은 사실이었다. 란테르트가 검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한,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 자신이 란테르트를 도와야 하는 것인가? 아르페오네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마족에 있어서의 서열이라는 것은 혼을 건 계약이기에, 결코 어길 수없는 것이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불순한 태도를 보인다면 하급 마는상급 마에게 아무런 재판 없이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만약 인간사회에서 이러한 법률이 있다면 크게 반발이 일며 수많은문제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가까운 예로 란테르트를 보아도,이러한 하급 인간이, 분명 평민은 계급상 귀족보다 하급이다, 함부로하고 돌아 다녀도 전혀 손을 쓸 방도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상급인간이 하급인간보다 나은 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인간이라는 집단은 다분히 적자생존적 양상을 띈다. 하지만, 마족의 경우, 상급마가 하급마보다 물리, 정신적으로 약한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체재가 유지 가능한 것이다. 이단아하나가 나오면 그보다 상급마가 물리적으로 제재를 가하거나, 계약에따라 혼을 깨뜨려 버리거나 이 두 가지 일이 모두 다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단, 법률은 이렇게 강압적이지만, 이러한 법률이 아니더라도 마족의 사회에서 서열을 어기려는 이는 거의 없었다. 방금도 말했듯이,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존재가 자신보다 위에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가지는 존재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르페오네는 이러한 사회에서 아주 예외적인 존재였다. 물론, 이카르트도 나크젤리온의 명령을 종종 어기며 인간세상을 돌아다니거나 하곤 했지만, 결코 나크젤리온이 내린 명령을 거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르페오네는 달랐다. 내려진 명령이 자신의 마음과 합치되지 않을 경우에는 가끔 거절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아르카이제의 명령일 때뿐이었다. 나크젤리온의 명령은지금까지 단 한차례도 어긴 적이 없었다.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그녀였다. 막 이카르트의 명령을 거절하려던 아르페오네는 순간 이상한 느낌이들었다. 그것은 바로 이카르트의 말 때문으로.... 그는 분명히 명령이아닌 부탁을 한다고 했다. 지금 이것을 거절한다면.... 명령이 부당하여 따르지 않겠다는 뜻을나타내기보다는.... 자신의 상관이 자신을 믿기 때문에 하는 부탁을거절한다는 뜻이 되어버린다. 전자는 상관없으나.... 후자의 것은.... 아르페오네는 천천히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잔혹하십니다. 하지만.... 아르카이제 님의 부탁.... 따르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이카르트는 흡족하다는 뜻의 미소를 지었다. "고맙구나.... 네가 하는 일의 명분은, 마족의 공적 란테르트를 곁에서 감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하는 내 부탁은 그가 위험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해 주겠지?" 아르페오네는 다시 한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대답은 했습니다. 그럼.... 적당한 시점에 그와 만나, 그의 동료가 되겠습니다." 아르페오네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이카르트는 아르페오네가 있던 곳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멀리로 돌렸다. "미안하구나.... 너에게까지 짐을 맡겨서...." 이카르트는 내뱉듯이 중얼거리며 두 눈을 감았다. 서서히 서편으로져 가는 태양이.... 오늘은 왜인지 달갑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자신의엔클레이브를 뚫고 안으로 들어온 란테르트의 모습이.... 그리고 그가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귀에 선한 듯 했다. "그때도.... 지금과 같았지.... 너는 나의 엔클레이브를 뚫고 안으로들어왔고.... 후후후...." 이카르트는 눈을 감은 채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중얼거렸고.... 마지막의 나지막한 웃음소리는, 낮의 싸움으로 지쳐버린 몸과 함께나른하게 늘어져 어느덧 잠속으로 스며들어갔다. 태양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지금이 몇 시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란테르트가 언제나 비슷한 시간에 깨어난다는 것을 가만 한다면, 아침때가 조금 지난 것 같았다. 아이렌과 세레티 이 두 아가씨는 전날의강행군이 굉장히 피곤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이때까지 잠속에서 헤어나지 못하였고, 더 이상 늦어지다가는 해가지기전에 던젼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멜브라도가 그녀들을 깨웠다. 란테르트가 잠에서 깨어난지 두세 시간쯤 지난 듯 했다. 그 시간까지그는 차분히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명상에 잠겨 있었는데, 이는 마법력을 운용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멜브라도와 센타포도 란테르트와 거의 비슷한 시간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들은 일어나자 마자 주위를 한차례 살폈고, 이내 차분히 나아갈통로를 찾기 시작했다. 미러링 양식으로 지은 신전은 보통 신전의 가장 중요한 곳, 즉 신전을 지은 목적을 간직하고 있는 곳에 출구가 있다. 워프게이트가 있는것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멜브라도와 센타포는 아침부터 그곳을 찾은 것으로, 오래지 않아 워프게이트를 찾을 수 있었다. 방 중앙에 있는 제단 뒤편에 있는 아홉개의 동심원의 마법진으로, 물론 확인은 해보지 못했으나, 거의 확실했다. 두 사람을 깨운 나머지 일행은 빵으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때운 후,짐을 정리하여 밖으로 나갈 준비를 갖췄다. 세레티는 붉은 머리칼을끈으로 얼기설기 묶어 흩어지지 않게 고정했고, 아이렌은 세레티의 도움을 받아 화려한 금발을 손질했다. 역시 아가씨들이어서 인지 몸단장에 꽤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식수를 이용해 세수까지했다. 그렇게 준비를 모두 마친 일행은 워프게이트 위에 걸음을 올려놓았다. 가장 먼저 그곳에 발을 올려놓은 것은 란테르트로, 게이트 반대쪽에 어떠한 상대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아이렌과 세레티가 함께, 그리고 이어 멜브라도와 센타포 순으로 각각 워프 게이트 위에 발을 올려놓았고, 일행 모두는 희끄무레한 빛에 휩싸여 순간 어두운 알 수 없는 곳으로 떨어졌다. 아이렌과 세레티는 워프 아웃 하는 순간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일단,신전 안의 그 환한 방에서 갑작스레 어둡기 짝이 없는 동굴 안으로 떨어졌기 때문이었고, 게다가 쿠에엑 거리는 괴성이 바로 곁에서 울려퍼졌기 때문이었다. 오래지 않아 나타난 멜브라도와 센타포에 의해 이 두사람은 진정을할 수 있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두려운 그것이었다. 그때, 일행 근처에서 환한 빛의 구가 솟아올랐다. 란테르트가 만든것이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아마, 아이렌과 세레티가 놀란 것에 대한 사과랍시고 한 말인 듯 했다. 일행은 잠시 무엇이 오래 걸렸느냐, 라는 생각에 잠기었었으나,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의 주위에는 알 수 없는 괴물들이 수마리쓰러져 있었고, 바닥은 이들의 체액으로 질펀해져 있었다. 아이렌은 엄청난 공포 때문에 눈물까지 찔끔 거렸고, 세레티도 가슴언저리에 손을 가져간 채 있었다. 하긴,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며 동시에 커다란 괴성이 울려 퍼지면,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 하더라도 기절하기 꼭 알맞을 것이다. 일행은 란테르트의 빛의 구에 의해 환해진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이곳이 어디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의례히 동굴 밖으로 떨어졌으려니 생각했던 일행은 약간 실망하는 기색을 띄었고, 센타포가 약간은 여유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용은 투덜거리는 것이었으나,목소리만은 활달한 것이, 목표를 이룬 데서 오는 여유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거 길 잊어 먹은 거 아냐? 보통 워프게이트면 밟는 순간 밖으로나와야 하는 건데.... 이래 가지고서는 어딘지도 모르겠으니...." 그의 말에 멜브라도가 웃으며 대꾸했다. "아마 그래도 입구에 가까운 곳일 꺼야." 그때 세레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한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어요." 워프게이트가 있는 동굴은 일단 출구가 하나뿐이었기에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세레티의 물음에 멜브라도가 말해보라는 듯한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왜 워프게이트가 있는 것이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않아요. 기껏 그 검이 있던 제단까지는 사람들이 오는 것을 막으며,신전 자체도 일방 통행으로 만들었는데.... 왜 이렇게 친절하게 출구를 만들어 놓는 것이죠?" 세레티의 물음에 멜브라도는 웃으며 대꾸했다.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그 워프 게이트가 있는 곳까지는 모두 시련이었고, 그 시련을 극복한 사람은 그 장소에 있을 물건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으로, 그것 때문에 그곳에 워프 게이트가있다는 겁니다." 멜브라도의 말에 세레티는 고개를 끄덕였고, 멜브라도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다른 것으로는, 조금 더 복잡한 이유에서인데.... 지금과 같이 신전의 중심부가 완전히 폐쇄된 공간일 경우, 그리고 그 공간에 엄청난 힘을 가진 어떠한 물건이 안치되어 있을 경우, 그 공간의 마법에너지 농도가 지나치게 높아지게 됩니다. 들어올 수만 있고, 나아갈 수는 없으니, 끌어들인 마법력이 계속해 쌓이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하다보면 공간의 균형이 깨어지고, 그 결과로는 여러 가지가 나타날 수 있지만 아무튼 결코 신전을 지은 목적과 합치되는 결과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다시 일방 통행의 워프게이트를 만든 것입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환기구 같은 것이겠지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이에도 일행은 계속해 던젼 안을 해메고 다녔다. 이러한 쪽에는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멜브라도의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은 지형인 것을 보아 처음 지나는 곳이 분명했다. 지금 일행은 처음 던젼 안을 돌아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물론 그때는엠과 에스였지만, 가장 앞열에 멜브라도와 센타포, 그리고 둘째 열에두 아가씨들, 마지막에 란테르트가 위치한 채로 던젼 안을 걷고 있었다. 멜브라도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나돌고 있는데, 사실 거의 다가 각각의경우에 맞추어 보면 들어맞습니다. 예를 들어 마도사들이 살던 던젼의경우에 워프게이트는 암호가 있는 양방향형인데, 이것은 이동수단으로쓰였을 가능성이 크지요. 대강 이런 정도입니다." 세레티는 흥미롭다는 듯 눈동자에 호기심을 나타내며 그의 말에 응대했다.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들이에요. 어디서 그런 이야기들을 찾을 수 있죠? 저는 거의 접해보지 못했어요." "던젼에 관한 것은, 몇몇 대학의 사학과에 분과학문으로 고고학에서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법대학의 마법사魔法史과에서도 조금다루지요. 하지만 극히 일부 대학에서만 다루는 것으로, 약간 천대받고 있는 과목입니다." 그의 말에 세레티가 다시 물었다. "그쪽 공부를 상당히 많이 하셨나보죠?" 세레티가 막 이것을 물을 무렵, 일행은 어떤 커다란 홀에 걸음을 들여놓았고, 멜브라도는 그녀의 물음에 채 답하지 못한 채 고개를 번쩍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상당히 낯익은 풍경이었다. 세레티 역시 자신이 질문한 것조차 잊어 버린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태양을 상징하는 팔망성과 아홉 개의 동심원이 너무나 선명하게 천장에 세개져 있는 이곳은, 처음 세갈레의 갈레길이 나오는 곳이었다. 일행이 나온 동굴입구 바로 맞은 편이 들어갔던 곳이었다. 이 모습에 센타포가 중얼거렸다. "설마.... 저 워프게이트.... 양방향의 것은 아니겠지?" 만약.... 방금 일행이 빠져 나온 워프게이트가 양방향의 것이었다면....일행은 하루동안이나 거의 헛수고를 한 것이었다. 그의 말에 멜브라도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는걸." 이제 부터는 아는 길이니 거칠 것이 없었다. 한시간 가량을, 물론 아이렌의 걸음 속도에 맞춰 걷고 또 걸어 일행은 다시 햇빛을 볼 수 있었다. 태양의 위치를 보니 거의 점심때가 다 되었다. 만 하루가 조금더 걸린 던젼 탐사였는데.... 멜브라도와 센타포의 경험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시간이었다. 상당히 커다란 편인 던젼이었음에도 이 정도시간밖에는 걸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일행은 가까운 한적한 곳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두시간 가량을 쉬지도 않고 걸었으니 상당히 피곤했다. 게다가 아침이든든하지 못해 뱃속이 허전한 듯 했기에 조금 이르지만 점심을 먹기로했다. 아이렌은 요리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고, 세레티 역시 그러하기에 요리담당은 이 두사람에게로 넘어가 있는 상태였고, 멜브라도와 센타포는 요리에 필요한 땔감 따위를 준비해 주고는 비로소 던젼에서 찾은물건을 살피기 시작했다. 흰색과 검정색의 선명한 대비가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검은 장검의 길이에 손가락 길이쯤 되는 넓이덕분에 상당한 중량 감이 느껴졌다. 검의 재질은 당장으로써는 알 수없었고, 검날은 자를 대고 긋기라도 한 듯 똑바른 것이 인간이 만든것 같지가 않았다. 시험삼아 동전을 꺼내 검날을 거칠게 긁어 경도를시험해 보았는데, 역시나 이 하나 나가지 않았다. "확실히 뛰어나군...." 센타포는 내뱉듯 이렇게 중얼거렸고, 멜브라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내가 가지고 있는 검들중 첫째로 꼽아도 되겠는걸...." 멜브라도는 이렇게 말한 후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일행 모두를 시선에 담아두고 있는 란테르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란테르트씨. 정말, 이 검 필요 없으십니까?" 그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멜브라도는 음, 하는 신음을 한차례 내뱉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떠한 검을 찾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아는 한 이보다 뛰어난 검은 없습니다. 이 검에 대한 흔적을 처음 발견한 것은 1년쯤 전이었는데, 어떤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문서에 적혀 있었습니다. 그곳에 이르기를, 이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며, 그 강함은 어떠한 금속으로도 따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란테르트가 되물었다. "대륙 3대 명검들과 비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란테르트의 물음에 멜브라도는 다시 한차례 음, 하는 신음성을 냈다. "아무래도.... 이쪽이 뛰어난 듯 합니다. 저와 여기 센타포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신 분은 게이튼 님으로, 당금 레카르도 가의 가주인 케이시스 씨의 아버지 되십니다. 그러한 교분 덕에 케이시스 씨와도 몇 차례 면식이 있고, 그분의 검인 루플루시카도 여러 번 보았습니다. 확실히 대단한 검이더군요.... 하지만, 이것보다 크게 나을 것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전 이쪽이 더 뛰어나 보이는군요." 멜브라도의 말에 이번에는 란테르트가 음, 하는 신음을 내뱉었고, 이내 다시 물었다. "레카르도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마몸산으로 은거했다고 들었는데..." 란테르트의 물음에 멜브라도는 잠시 센타포를 바라보았다. 이야기해도 될 것 같으냐는 무언의 물음이었고, 센타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천천히 입을 열었다. "케이시스 님은 마몸산의 북사면 정상 부근에 살고 계십니다." 센타포는 레카르도 가의 정식 제자가 되었기에, 지금의 가주인 케이시스를 님이라고 불렀고, 멜브라도는 수학 도중 그만 두었기에 씨라고부르고 있었다. 센타포가 이렇게 자신의 스승 가문의 비밀에 가까운 사실을 란테르트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센타포는 란테르트를 완전히 신용하겠다는뜻을 밝혔으나, 이 사실을 알아챈 것은 겨우 멜브라도 정도였다. 란테르트는 센타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음...." 멜브라도가 다시 물었다. "도대체 찾고 있는 검이 어떤 것입니까?" 그의 물음에 란테르트가 답했다. "꼭 검일 필요는 없습니다.... 무기라면.... 무엇이든지 상관없습니다. 다만, 데스틴 더 비를 걸 수 있는 강대한 무기라면...." 란테르트의 물음에 멜브라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데스틴 더 비면 신전에서 사용했던 그 마법 말씀이십니까?" 그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스틴 더 비는, 마법을 거는 무기마다 조금씩 다른 위력을 내보이고 있습니다. 어떤 병기들은 힘을 견뎌내지 못하고 깨어져 버리고....또 다른 병기들은 아예 받아들이지 않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마법을거는데 온전히 성공한 검으로는, 이 순수한 하르제 검뿐입니다. 이 검보다 훨씬 뛰어난 검들도 마법을 견뎌내지 못하고 깨어진 적도 있으니.... 검의 경도와 반드시 상관 있는 듯 보이지는 않고...." 란테르트의 이 말에 멜브라도는 음, 하는 신음을 내뱉었고, 곁에서듣고 있던 세레티와 센타포 아이렌까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그의 말을 들어보니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았다. 그때 아이렌이 입을 열었다. "혹시 하르제 검에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꼭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몇몇 검에도 마법을 덧씌울 수 는 있었지만.... 이 하르제 검만큼의 위력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아이렌이 입을 열었다. "그것은, 그 검들에 섞여있는 하르금속 때문이 아닐까요?" 아이렌의 이러한 물음에 모두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마법이 금속을가린다는 것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대강 이야기가 맞아 들어가기는 했지만, 너무 작위적인 생각인 것같았다. 아이렌 역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는 헤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런 건 아니겠지요?" 라고 말하며 아이렌은 다시 요리에 열중했고, 세레티도 그녀와 함께요리를 했다. 란테르트는 다시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검이 일정이상 뛰어날 필요는 있지만, 꼭 가장뛰어난 검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본 검중 가장 뛰어난 것은, 이 이 검을 제외하고 에디엘레 가의 시클로네 였는데....그것 역시 마법에 거부반응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말에 멜브라도와 센타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요리를 하고 있던 세레티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검을 찾기 위해.... 그 많은 사람들을 죽였단 말이에요?" 크림슨 아이즈가 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 거의 대부분은 과대포장 되었으나, 적어도 이점에 있어서는 정확한 편이었다. 검을 빼앗고, 부숴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핑계를 보태자면, 나에게 먼저 검을 휘두른 사람에게만 일 검을 돌려줄 뿐이다,라고 할 수도 있었으나, 란테르트에게 그런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세레티는 조금 더 자세히 묻고 싶었다. "이해가 가지 않아요.... 왜 여기 멜브라도 씨와 센타포 씨의 검은빼앗지 않는 것이지요?" 정말 그러했다. 멜브라도와 센타포 이 두 사람의 검 역시 상당히 뛰어난 물건으로 지금까지 란테르트가 만났던 수많은 검들 중에서도 상위 클래스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란테르트는 그들의 검에 조금의 관심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순간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잊고 있었다. 저 검, 신전 안에 있는 검 앱슈바르에 대한 생각에 골몰해 있은덕에 두 사람의 검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있고 있었다. "그렇군요.... 잊고 있었습니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주었고, 아이렌은그 모습에 긴장이 되어 요리를 젖던 손을 멈추었다. 세 사람이 뒤엉켜싸운다면.... 결과는 뻔한 것이었고, 아이렌은 괜한 소리를 한 세레티가 잠시 바보같이 느껴졌다. 세레티 역시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으나 수습하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고, 잠자코 그들 셋을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동안 일행들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으나, 그리 오래지 않았다. 멜브라도와 센타포 둘은 동시에 자신들의 검을 검집에서 꺼냈고, 이내 검자루를 란테르트에게로 향했다. "아이렌을 돌보아 준 것에 대한 사례입니다. 어차피, 이 앱슈바르는필요 없다고 하셨으니, 이것으로 대신 사례하겠습니다." 멜브라도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란테르트에게 진 빚을 떼어 버렸고,란테르트는 흔쾌히 그들에게서 검을 받아 실험해 보았다. 멜브라도의것은 우웅 떨릴 뿐으로 마법이 걸리지 않았고.... 센타포의 것에는 분명 마법이 일었으나, 자신의 검에 비해서 그다지뛰어난 것 같지 않았다. 란테르트는 두 자루의 검을 각각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둘 모두.... 저에게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란테르트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며 검을 되돌려줄 때마다, 입맛이 씁쓰레해짐을 느꼈었다. 5년동안.... 지난 5년동안의 노력 같은 것이.... 어쩌면 소용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에서 였다. 란테르트는 센타포의 검에 환영왕의 마법이 걸리는 것을 보며 물었다. "센타포 씨의 검은?...." 란테르트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센타포가 답했다. "순수한 하르제 검입니다. 마곡의 사헬 가에서 만든 검으로, 하르검중 극상의 것입니다."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센타포는 그에 한마디 보탰다. "원래.... 레카르도 가의 제자들은 하르제 검을 반드시 가지고 다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덕에 가주 케이시스께서는, 세자루의 검을 몸에 지니고 다니시지요. 하나는 하르제의 평범한 검이고, 다른 하나는남풍령 소디나, 그리고 다른 하나가 바로 그 루플루시카입니다." 그의 설명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건..... 이번의 고생도 결과적으로는....실패이니 말이다. 16. 이상한 점술사.... 빅팀 시는 에노사 안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 상업도시이다. 에아산맥의 동단에서 약간 남쪽에 위치한 이 도시는 수도 고아에서 레냐와 노마티아로 향하는 노상에 있었고, 인구가 거의 10만에 육박했다. 중심부의 구시가지와 길을 따라 늘어선 신시가지 모두, 3층에서 5층의 고층 건물들이 열을 지어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로 나있는 폭 20휴리하 가량의 넓은 중심가는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그 물건들을 실어 나르는 마차로 그득 했다. 물론, 이것을 모두를 움직이게 하는 원인이 되는 사람들도 충만하다 할 정도로 많았다. 그런 이 빅팀시 동쪽 신시가지의 한 주점에, 오랜 여행으로 옷에 먼지가 많이 묻어있는 5명의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느덧 10월도 3일로, 본격적인 가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뭇잎들도 슬슬 가장자리부터 노랗게 변해가고 있었고, 마을 어귀의 흙더미에서는 노란 소국들이 조그마한 노란 꽃잎을 하늘하늘 흔들었다. 그 다섯 사람은 바로 오늘 아침 막 에아산맥의 발치를 벗어나 이 마을에 당도한 이들로, 바로 란테르트 일행이었다. 근 2일 동안 산 속을 걷고 걸어 가장 가깝고 또 휴식을 취할 만한 이 도시에 도착한 일행은 짐을 채 풀기도 전에 식당을 찾았다. 각자 입맛에 맞는 음식을 시키고, 절반 가까이나 먹을 때까지 멜브라도와 센타포를 제외한 다른 세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란테르트에 대해서는, 굳이 말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이야기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음, 이 집 음식 좋은데?" 센타포가 막 스테이크 조각을 쓸어 입에 넣으며 이렇게 이야기하자, 멜브라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상당하다고 할 수 있겠지." 다시 센타포가 입을 열었다. "오래간 만에 먹어보는 제대로 된 음식이로군...." 이 말에 아이렌이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톡 쏘았다. "센타포 오라버니는 제가 만든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녀의 눈까풀은 졸음의 신이 기대어 앉아 있기라도 한 듯 반쯤 감겨있었고,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 어려 있었다. 아이렌의 말에 센타포는 아차 하는 마음에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의 그런 모습에 세레티는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천만에.... 그런 뜻이 아니야. 물론 음식은 아이렌의 것이 더 맛있지. 제대로 된 음식이라는 것은 격식이 갖춰져 있다는 뜻이야. 멜 그렇지 않아?" 센타포는 이렇게 말하며 멜브라도에게 도움을 청했고, 멜브라도는 그런 그의 모습에 온화이 미소지으며 대꾸했다. "물론이지. 몇몇 향신료가 빠진 아이렌의 음식이 이곳의 음식에 비해 격식이 모자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도와준 것인지, 아니면 측면공격을 감행한 것인지 모호한 이 멜브라도의 말에 센타포는 잠시 생각에 잠겨야 했으나 일단은 믿기로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거 봐. 어쩔 수 없는 일 이였어. 만약 같은 재료로 만든다면 아이렌이 훨씬 뛰어날 꺼야." 센타포의 당황해 쩔쩔매는 모습에 아이렌은 키킥 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만 해요. 센타포 오라버니답지 않아요." 아닌게 아니라 센타포는 아이렌의 일에 있어서는 지나치리만큼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다. 그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멜브라도는 잠시 더 아이렌의 환하게 웃는 모습과 센타포의 당황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대화를 전환했다. "저희는 이쯤 작별을 고해야 겠습니다. 내일 아침, 저희는 남쪽으로 갑니다. 마곡으로 가 볼 생각입니다." 멜브라도의 말에 세레티는 아, 하는 조그마한 탄성을 내질렀고, 멜브라도는 그런 세레티를 향해 한차례 미소지으며 물었다. "두분은 어디로 가십니까?" 그의 물음에 세레티가 답했다. "전 위다로 갑니다. 오래간 만에 집에 들려 보려고요. 란테르트씨는 저를 경호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멜브라도는 이렇게 응대하며 시선을 란테르트에게로 향했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의 시선에 의미 없이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세레티의 말에 긍정을 표하는 것 같았다. 아이렌이 그때 입을 열었다. "아, 아쉬워요.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은데...." 그녀의 말에 세레티가 한차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저도 그래요." 뒤이어 아이렌이 말했다. "저, 세레티님...." 약간 머뭇거리는 것이 무슨 부탁이 있는 듯 했고, 세레티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든지 말해 봐요." 그녀의 말에 아이렌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기.... 언니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 전부터 언니가 한명 있었으면 했어요." 아이렌의 말에 세레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아니, 물론이야." "고마워요." 아이렌은 세레티가 주저 않고 자신의 청을 들어주자 활짝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청초함은 백합에서 따왔고, 화사함은 해바라기에서 빌려온 듯 한 미소였다. 오랜 노숙과 여행으로 옷이 더러워진 것 정도로는 그녀의 천진한 아름다움을 감출 수 없었다. 멜브라도는 아이렌의 그러한 모습을 온화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세레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이렌을 잘 부탁드립니다." 멜브라도가 이렇게 말했고, 세레티는 한차례 미소를 지어 답했다. 아이렌과는 다른 발랄함이 있는 미소였다. "그런데 세레티 언니의 성은 무엇인가요?" 아이렌이 이렇게 물었고, 세레티는 순간 큰 실례를 범했다는 생각을 했다. 상대편이 성을 밝혔는데, 자신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아, 정식으로 제 소개를 다시 하지요. 세르테이나 폰 다르나시안입니다. 위다의 재상직을 맡고 있는 백작 가의 사람입니다." 세레티는 이렇게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고, 멜브라도와 센타포는 각각 조금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면 아이렌은 호들갑스럽게 놀라며 말했다. "백작가문.... 대단하네요. 아.... 정말 언니라 불러도 괜찮을까요?" 아이렌의 말에 세레티는 그녀의 손을 다정히 잡아주며 말했다. "물론이야. 한 번 허락한 일은 상황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그런 거야." 아이렌은 그런 그녀의 말에 고맙다는 의미의 미소를 한 번 더 지었고, 세레티 역시 조용한 미소를 그녀에게 보내 주었다. 던젼에서 함께 떨며 쌓인 정이 제법 되는 모양이었다. 다시 일행은 점심을 먹으며 이런 저런 몇 마디 말을 더 나누었다. 대화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 살아온 배경이 전혀 다른 세 무리의 사람들 사이의 공통적 경험인 던젼에서의 모험으로 이어졌고, 막 아이렌이 아쉬웠던 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제일 바보 같았던 건 저였을 꺼 에요. 우앙, 소리만 지르고.... 멜브라도 오라버니가 많은 돈을 들여 구해주신 총은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뒤이어 세레티가 입을 열었다. "저야말로.... 대현자라는 직위의 마법사면서.... 아무튼, 이번에 나는 경험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깨달았어요." 세레티는 이렇게 말하며 볼을 살짝 붉혔는데, 아직도 부끄럽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얻은 것이 많은 하루였어요.... 가장 큰 소득은, 트레져 헌팅이 생각보다 재미있는 직업이라는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며 두 사람에게 짓는 그녀의 미소는 화사하기 짝이 없었고, 멜브라도는 그녀의 말에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딱히 대답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으나, 확실히 기분 좋은 이야기였다. 이윽고 식사가 모두 끝났고, 일행은 호텔을 얻어 잠시 각자의 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아이렌은 세레티와 같은 방을 사용하였고, 멜브라도와 센타포가 한방, 그리고 란테르트가 다른 한 방을 사용하여 모두 세 개의 방을 얻었다. 슬슬 무역 철이 다가와 방값이 꽤 비싼 편이었으나, 대륙 제일의 쿠텔토 상사가 경영하는 호텔이 있었기에, 일행은 무료로 방을 얻을 수 있었다. 아이렌과 세레티는 오래간 만의 샤워를 즐겼고, 멜브라도와 센타포는 방안에 있는 테이블에 마주앉아 한 권의 책에 무언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트레져 헌팅에 관한 무슨 일기 비슷한 것인 듯 보였다. 그리고 란테르트는 홀로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제.... 내일이 오고 멜브라도 등과 헤어지고 나면, 다시금 조용한 나날이 찾아올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다지.... 시끄럽지는 않지만.... 한 시간쯤 휴식을 취하는 동안, 란테르트는 계속해 방안 창측의 의자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 든다. 조용히 내려다보면, 사람들은 움직이고 있다. 만약, 바로 눈앞에서 뚫어져라 바라본다면 결코 사람들은 저렇게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창문을 격하고, 저들의 시선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자면,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할 일에 빠져 창문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이상한 느낌의 원인이다. 단절감이랄까? 겨우 창문하나를 격할 뿐으로, 그들과 란테르트의 물리적 거리는 20휴리하(1휴리하=약1미터) 안팎이다. 하지만, 그들은 란테르트의 존재에는 별다른 관심을 나타내지 않은 채, 흡사 어느 누구도 자신을 지켜볼 리가 없다는 듯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인다. 한 남자는 막 주점으로 가지고 갈 술이 가득 담겨있을 커다란 나무통을 짊어진 채, 길거리에서 한 여자를 만나 노닥거리고 있었다. 가슴에 포인트를 준 요염한 옷을 입고 있는 그 아가씨는 아무리 높이사도 주점에서 일하는 여자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둘 곁으로는 대여섯 명쯤 되는 꼬마아이들이 한 아이를 쫓아 우르르 복잡한 중앙도로를 가로지른다. 가끔 마차가 씽씽 달려와 위험하기도 했으나, 이렇게 밝을 때에는 아마 괜찮을 것이다. 한 명의 여자는 지금 장신구 상점 앞에서 멀리 보이는 시계탑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서 있었다. 흡사, 장신구점에 고용된 근위병이라도 되는 듯, 좌 우 서너 걸음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그녀는 아마 누군가와 약속이 있는 듯 했다. 그녀 역시 란테르트라는 존재는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완전히 다른 공간에 속한 사람들을.... 흡사 수정구슬을 통해 바라보기라도 하는 듯, 란테르트는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수정구슬 안에 또다시 일군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마차도, 사람도 많은 곳이였지만, 이번의 것은 마차도, 사람도 그 수많은 마차와 사람들 사이에서 굉장히 눈에 띄는 것이었다. 일단, 4두 마차라는 점에서 란테르트의 시선을 잡은 이 커다란 마차는, 두명의 시종과 두명의 마부, 마부보조등 네명이 매달려 있었으며, 앞뒤로 모두 4명의 기사가 호위하고 있었다. 마차의 옆면에는 알 수 없는 화려한 꽃이 양각되어 있었고, 그 외에도, 전체적으로 짙은 갈색에 금박이 입혀진 것이 언뜻 보아도 고위 귀족의 마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마차를 이끄는 대장격의 사람은 20세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마차의 왼쪽에 붙어 회색 얼룩이 있는 흰색의 말을 타고 있었는데, 상당히 활달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어깨는 조금 좁은 편이었고, 턱선이 약간 날카로운 반면에 눈매는 상당히 부드러워 그다지 부담을 주는 인상이 아니었다. 갈색의 머리칼을 짧게 쳐 올린 그는 뒷머리는 길게 길러 한 가닥으로 묶었고, 허리에는 한 자루의 장검을 차고 있었다. 하지만 검을 찬 자세는 약간 어설픈 것이, 의장용 검인 듯 하였다. 말에 매여 있는 짐 중에 2현금 에세리아가 있는 것을 보아 악기 연주를 꽤 즐기는 듯 보였다. 란테르트는 그 악기를 보자 마자, 이카르트가 사현금의 현을 모두 끊어버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 이후로.... 악기는 연주하고 있는 것일까? 그 갈색머리칼의 남자에게서는 미약하나마 정령의 힘과 마법력이 느껴졌다. 바람과 물의 하급정령인 디나와 루피의 힘이었는데, 정령사를 그다지 자주 보지 못한 란테르트로써는 꽤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 외 느껴지는 마법력이라는 것도 그다지 높지는 않았고, 아무리 보아도 그렇게 강해 보이는 인간은 아니었다. 막 마차가 이 호텔 앞을 지날 무렵, 한 여자가 밖으로 뛰쳐나왔다. 사실, 마차가 지나가고 여자가 란테르트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뛰어 나오는 것은 그다지 큰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여자를 발견하자마자 마차가 멈추었다는 점과, 그 여자가 다름 아닌 세레티라는 점에서 결코 무의미한 사건은 아니었다. 마차가 멈추자 마자, 그 회백색 말을 탄 20세의 청년은 말을 돌려 세레티에게로 다가왔다. "세르테이나님! 어째서 이런 곳에...." 그 청년의 물음에 세레티는 오히려 자신이 놀랐다는 듯 말했다. "지크, 너야말로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야?" "물론 세르테이나 님을 모시러 왔죠." 아마도 서로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이들의 이러한 만남이 언듯 보기에는 상당히 우연적인 것 같았지만, 꼭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었다. 원래 이 빅팀이라는 곳은 에노사의 주 교역로상에 위치하는 도시로, 에노사 북부에서 중남부로 향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즉, 세레티는 위다로, 그리고 지크라는 남자는 위다에서 세레티가 있는 곳으로 각각 향하던 중이었으니, 중간에서 이렇게 만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잠시동안 이 우연 아닌 우연에 놀라워하던 세레티는 이들의 행장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내 마차까지 끌고 오다니, 본국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세레티의 말에 지크라고 불린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때쯤, 아이렌이 밖으로 나와 세레티의 곁에 섰다. 아마도 둘이 함께 로비에서 차를 마시거나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세레티도 아이렌도 옷을 갈아입었는데, 세레티의 경우에는 여전히 활동하기 좋은 바지를 입고 있었고, 아이렌의 경우에는 귀부인들의 외출복에서 장식을 약간 줄여 움직이기 편하게 만든 그런 옷이었다. 지크는 아이렌의 옆에 선 화려한 금발의 아가씨의 모습에 잠시 넋을 잃었고, 세레티는 그런 그의 모습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그 낙천적인 성격은 여전하구나. 본국에 도대체 무슨 일이야?" 지크는 세레티의 말에 하핫, 하는 밝은 웃음을 한 번 터트리고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을 할 무렵에는 굉장히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실트 태자전하가 유폐 당하셨습니다." 그의 말에 세레티는 앗, 하는 비명을 질렀고,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던 란테르트마저도 음, 하는 소리를 한차례 냈다. 그러고 보니 한 번 만났던 사람이다.... 아이실트.... 로렌시아라는 정령술사 공주.... 무슨 부탁을 한가지 들어주기로 한 것 같다. 뭐.... 이제 와 서.... 에라브레가 사라진 지금.... 의무감 같은 것은 없었지만. 당시 그런 약속을 했던 것은 모두 에라브레를 위해서였다. 에라브레가 작위를 받은 나라의 공주였기 때문에.... 유폐라.... 귀족이 왕위 계승권자를 변방으로 추방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알고 있다. 란테르트는 이런 생각에 잠시 잠겨 있다가, 돌연 후훗, 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돌연 그날의 키스세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마구잡이로 매달려오며 육탄공세를 펼쳤던 트레시아.... 덕분에 얼굴이 온통 루즈로 뒤덮였고.... 그리고.... 이카르트.... 그도.... 당시에는 당황스럽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었으나, 이제와 다시 떠올리니 상당히 재미있는 추억거리중 하나로 남아 있다. 돌연 자신의 입술을 훔치고(?) 공간 저편으로 사라지는 그의 모습이라니....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란테르트는 아래의 두 사람의 대화를 조금 놓쳤다. "세상에.... 그 녀석들, 아주 간이 부었구나!! 우리 다르나시안 가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던 거야! 재상가문 이라는 곳이...." 그녀의 말에 지크가 대답했다. "재상각하께서는 현재 의사표명을 보류하고 계십니다. 상대편 귀족들의 세력이 너무 커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셨고.... 어쩌면 벌써 돌아 가셨을지도 몰라요." 란테르트는 지크라는 남자의 말투를 들어보니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차를 인솔하고 왔기에 세레티의 집안 막하의 무슨 기사쯤 되는 줄 알았는데, 위다 국왕에게 승하하셨다라는 말 대신 돌아가셨다, 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아 기사는 아닌 듯 하였다. 기사는 원래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대외에 선전하고 다녀야 하는 집단이다. "우리가 충성을 바치고 있는 곳은 위다 본국이야. 귀족 나부랭이 따위에게 왜 겁을 먹어야해?" 세레티의 이번 말은 목소리가 조금 컸다.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은 너나없이 세레티를 바라보았는데, 일부 사람들은 눈에 띌 정도의 적개심을 드러내었다. 생각해 보니 이곳은 에노사의 영토였고, 지금 에노사는 위다의 공격을 심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적대관계라는 뜻이다. 세레티는 순간 지나치게 흥분했다라는 것을 느꼈는지, 조금 목소리를 낮춰 지크에게 말했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 소개할 사람들도 있으니...." 세레티는 이렇게 말하며 호텔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지크는 간단히 마부에게 말과 마차를 세워 두게 하고 돈을 몇 푼 쥐어 주어 시종들과 함께 요기라도 하게 하였다. 그리고 네명의 호위기사들에게도 쉴 것을 명령했다. 마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아마도 세레티만을 데려가기 위해 온 마차인 모양이었다. 란테르트는 오래지 않아 누구나 자신의 방문을 두드리리라는 것을 알았으나 특별한 준비는 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똑똑 거리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딸깍,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아이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란테르트님, 잠시 로비의 티숍으로 내려와 주세요." 아이렌의 말에 란테르트는 천천히 한차례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렌은 살짝 미소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얼핏 보니 멜브라도와 센타포도 문밖에 나와 있었을 듯 했다. 란테르트는 언제나와 같이 곁으로 매는 가방과 망토, 그리고 검을 몸에 걸쳤다. 금화를 모두 버리고 나서 홀가분해져 버린 가방 덕인지 몸이 가벼웠다. 로비에는 그 지크라는 갈색 머리칼의 사내와 세레티, 그리고 아이렌과 멜브라도, 센타포가 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자리가 아직 남아있는 것을 보아, 란테르트 자신도 초대된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저 남아있는 것일지도 몰랐지만. 란테르트가 앉자 마자, 일행은 차를 주문했다. 이 대륙에는 차나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차는 조금 더 남쪽에서 자생하는 것으로, 이 일곱 대륙 정도의 기온으로는 차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이곳에서의 차라는 것은, 여러 과일들을 달인 액체나, 몇몇 향기 좋은 풀잎들을 끓여낸 물로, 상당히 많은 종류가 있었다. 멜브라도는 언제나 즐겨 마시는 최고급 베니아 차를 주문했다. 베니아는 봄에 꽃을 피우는 관상용 나무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조그마한 꽃이 일품이다. 꽃잎은 겨우 사람의 손톱크기 정도였으며 색깔은 연한 분홍색을 띄고 있었다. 베니아 차는 이 베니아의 꽃잎과 나뭇잎을 말려 두었다가 나뭇잎을 우린 물에 꽃잎을 띄워 내놓는 것이다. 은은히 느껴지는 꽃의 향이 일품인 차이다. 아이렌 역시 같은 것을 마셨고, 센타포는 관심 없다는 듯, 그냥 메뉴 판에 손이 가는 데로 시켰다. 세레티는 향기가 매우 달코름한 리락 차를 시켰고, 지크 역시 같은 것을 주문했다. 마지막으로 란테르트에게 메뉴판이 놓여졌을 때, 란테르트 그는 손을 그저 한차례 가로로 저어 아무것도 마시지 않겠다는 뜻을 표했고, 점원은 이 괴상한 손님들을 향해 억지 미소를 한차례 지어 보이며 바로 돌아갔다. 막 차를 시킨 일행은 잠시동안 서먹히 바라보다가, 먼저 세레티가 일행에게 지크라는 이름의 남자를 소개했다. "이쪽은 지그프리드 폰 트라미스로, 현재 위다의 자작가문인 트라미스 가의 외동아들이에요. 조금 방랑끼가 있어 음유시인으로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제 외사촌이지요." 세레티의 말에 멜브라도와 아이렌은 환한 미소로 인사를 했고, 센타포는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으며, 란테르트는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센타포보다 훨씬 작은 각도로 고개를 한차례 까딱거렸다. 지크는 이들의 이러한 반응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천차만별의 반응이 왜인지 재미있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지그프리드입니다. 지크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세레티는 곧이어 일행을 지크에게 소개했다. "이 두분은...." 세레티는 여기까지 말하다 돌연 멜브라도와 센타포의 이름을 밝혀도 될지를 고민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멜브라도의 얼굴을 한차례 바라보았다. 멜브라도는 그런 세레티를 향해 온화이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헤어질 일행이니 그다지 상관은 없었다. "대륙 제일의 상업회사인 쿠텔토 상사의 주인이신 멜브라도 씨와 그분의 친구이신 센타포 씨야. 너도 이분들의 이름은 들어보았겠지? 그리고 여기 아름다운 숙녀 분은 이 두분의 동생으로 아이렌느양 이시지." 세레티의 소개에 지크는 놀라 입을 쩍 벌렸고, 동시에 근처에서 차를 마시던 몇몇 사람들도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 호텔 역시 쿠텔토 상사의 소유였다. "그 대륙 전체 상권의....3분의 1을 점유하고 있다는.... 쿠텔토?" 지크의 말에 멜브라도는 살짝 미소지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의 말에 지크는 잠시 으음.... 하는 신음을 내뱉었고, 뒤이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세레티는 이렇게 소개하고는 란테르트를 어떻게 소개할까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저 란테르트라고 소개하려니, 지크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왠지 멜브라도를 소개할 때보다는 더더욱 놀라는 표정이 나왔으면 하는 게 세레티의 마음이었다. 물론, 크림슨 아이즈라고 소개하면.... 멜브라도에게 놀라는 것 이상의 놀라는 표정을 볼 수 있겠으나.... "이분은 란테르트씨야.... 마검사시지. 실력은 나보다 훨씬 위이고." 역시나 세레티의 말에 지크는 의례적인 놀라움을 표했다. "아, 대단하시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지크의 인사에 란테르트는 별다른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뒤이어 세레티가 입을 열었다. "전 이제 곧 떠나야 할 것 같아요. 본국에 일이 생겼어요. 아이실트 태자 전하께서 유폐를 당하셨습니다." 그녀의 말에 멜브라도는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고, 센타포 역시 약간 표정이 변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표정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았으나, 남의 나라 태자가 유폐 당한 것에 안타까워하는 표정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세레티가 뒤이어 입을 열었다. "아이실트 전하는 비록 약간의 괴벽을 가지고 계시기는 하지만...." 그때 지크가 곁에서 끼여들었다. "세르테이나님, 약간이 아닙니다...." 세레티는 자신의 말에 끼여든 지크를 약간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보았으나, 반박하지는 않았다. 사실인걸 어찌 하겠는가? "아무튼, 하지만 왕가의 계승서열법상 제 1 왕위 계승자이십니다. 지금까지 이렇다할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신 분인데.... 전 돌아가서 그분을 지지해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세레티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란테르트만이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차피 내일 헤어질 일행이었기에 멜브라도 등은 별다른 느낌이 없었고, 아이렌만이 서운한 기색을 띄었다. 세레티 역시 멜브라도 일행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란테르트에게만은 달랐다. 이렇게 헤어진다면.... 어쩌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몰랐다. 순간 세레티는 마음속에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만나지 못하는 것이 어떻단 말인가?.... 세레티는 도저히 란테르트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알 수 없었다. 던젼을 나온 바로 그날 밤, 세레티는 혹시 이것이 사랑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으나, 사춘기때 마저도 마법에 빠져 남자를 거들떠보지 않은 그녀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신기한 남자에 대한 호기심일 뿐이다.... 라고 세레티는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새로운 책을 구입해 10여 페이지쯤 읽었을 때 느껴지는 그 두근거림과 비슷했다. 다음페이지에는 무엇이 있을까? 도대체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무엇인 것일까?....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책장을 뒤적이다 보면 어느덧 그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하고.... 호기심은 사라져 버린다. 이제는 아, 그러한 내용이 이었구나, 라는 기억으로 머릿속에 기억될 뿐이다. 세레티는 잠시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는 짐을 챙기는 대로 당장 떠나야 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아이렌이 입을 열었다. "세레티 언니.... 정말 서운해요." 세레티는 미소로 그런 아이렌의 말에 대꾸해 주었다.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나도 너도.... 서로를 찾기 그다지 힘들지 않으니까." 세레티의 말대로 쿠텔토 가의 아가씨를 찾는 것이나, 다르나시안 가의 아가씨를 찾는 것이나 매한가지로 아주 간단했다. 이윽고 일행은 차를 모두 마셨고, 세레티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려주세요. 금방, 제 짐을 챙겨 내려오겠습니다." 세레티의 말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고, 세레티는 이내 재빠른 몸놀림으로 자신이 묶고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짐이라고는 보통의 배낭 절반크기에 모두 들어갈 것이었고, 그녀의 말대로 금방 다시 돌아왔다. 이어 일행 모두는 호텔 밖으로 나왔다. 세레티는 모두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마차로 올랐고, 일행은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전송했다. 마차는 북동쪽으로 뻗은 길로 점차 멀어져 갔고, 그렇게 갑작스럽게 사라져가는 그녀의 모습에 일행은 잠시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별은 그다지 즐겁지 못한 경험이다.... 다음날 아침, 다시 한 번, 예정되었던 이별이 찾아왔다. 화려한 금발을 가진, 29세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젊은 외모의 이 멜브라도라는 사내는, 아직 모험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듯 여전히 트레져 헌터의 복장 그대로였다. 그리고, 센타포 역시 경호원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동료 트레져 헌터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이렌, 그녀는 반면 화사한 외출복을 몸에 걸쳤다. 금발과 너무 잘 어울리는 연노랑색 투피스 드레스는 주홍색 정장 풍의 겉옷과 함께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해 냈다.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이는 아침이었다. 그들은 이 호텔에서 갈색만 한 마리를 구했다. 어차피 자신의 소유물이니 가져가건 말건 상관없는 것이었으나, 멜브라도는 정중히 부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쿠텔토 호텔의 빅팀시점 지배인은 이 멜브라도라는 사람에게 꽤나 감동해 있는 상태였다. 떠난다는 이야기에 가족까지 데려와 전송을 한다. 멜브라도의 미소는 온화하다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적당한 말이 없었다. 그는 이러한 미소 외에는 거의 짓지 않았다. 조소도, 냉소도 그의 입가에 머무는 일이 없었다. 천성이 그러한 것인지, 상인이라는 직업이 그러한 미소를 만들어 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찌 되었건 바라보고 있으면 편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는 그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란테르트에게 입을 열었다. "란테르트씨.... 당신은 상인으로써의 제가 아닌 모습으로 만나 이름을 서로 교환한 몇 안되는 사람중 한 명입니다." 멜브라도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고, 란테르트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몇 일전 산중에서 당신을 보았을 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벌써 세 번째이다.... 이 사람과 나의 인연이 앞으로 몇 번의 만남을 더 안겨줄 것인가?...." 멜브라도는 여기까지 이야기 하다가 잠시 시선을 친구인 센타포에게로 돌렸다. 센타포는 지금 란테르트가 있는 곳을 제외한 모든 방향으로 경계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비록 멜브라도처럼 온화한 목소리와 사교적 말투를 사용하는 법은 모르지만, 그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행동으로 내 보이고 있었다. 뭐,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고 업고는 알 수 없었지만.... "당신도.... 또한 저도, 서로에게 비밀이 많군요.... 그렇지만, 이 한마디 정도는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이 있다면.... 그곳으로 나아가십시오. 저처럼.... 우유부단한 모습은 보이지 마십시오." 그의 진심 어린,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진심어린 이 이야기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고, 이어 센타포가 간단히 말했다. "별 것 아닌 일로는 죽지 마십시오." 그 다운 인사였다. 아무튼 죽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으니, 이것은 분명 덕담이다. 곧바로 아이렌이 작별인사를 했다. "란테르트님. 몸건강히 지내세요. 혹시 마곡에 올 일이 있으면, 저희 집에 한 번 들려 주시 구요. 두 오라버니는 모르지만, 전 거의 집에 있답니다." 센타포와 아이렌의 인사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두차례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언뜻 보면 그가 무성의하게 인사하는 듯 보였으나, 이 세사람은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인사가 모두 끝나자, 멜브라도는 아이렌을 부축해 준비한 그 한 마리의 말 위에 앉혔다. 말 위에는 이미 몇몇 짐들이 올려져 있었다. 멜브라도는 말의 고삐를 움켜 쥔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센타포 역시 그의 곁을 따랐다. 아이렌은 잘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들어 좌우로 흔들었고, 란테르트는 그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네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건물 뒤로 그들이 모습을 감추었고, 란테르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몸을 돌려 그들과는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 번.... 만나고 헤어졌다.... 란테르트의 여행은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여전 검은 찾지 못하였고, 그다지 강해지지도 못하였다. 일단 후자의 것은 바라지도 않지만, 전자의 것은 점점더 란테르트 그를 초조하게 만든다. 게다가 이런 녀석들이라도 꼬이는 날이면.... "악마 크림슨 아이즈!! 너같이 사악한 자가 거리를 활보하게 둘 수는 없다." 백주대로에 덩치큰 장한과 젊은 남녀, 그리고 나이든 노인, 이렇게 네명이 란테르트의 앞을 막았다. 빅팀 시에서 벗어난지 채 한시간도 되지 않아서였다. 덩치큰 장한은 전사인 듯 거대한 몽둥이를 들고 있었고, 젊은 남자는 검을, 그리고 여자와 늙은이는 마법사인 듯 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파티였다. 보통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전투력을 낼 수 있다. 두 마법사중 한 명은 분명 회복술사일 것이고, 다른 한 명은 공격술사일 것이다. 전사 쪽은 엄청난 체력과 공격력을 갖추고 있을 테고, 검사는 그런 그가 속도 면에서 쳐지는 것을 보조해 줄 것이다. 이렇게 파티를 구성할 경우, 한 종류의 사람들로 파티를 구성할 때보다 두배 이상의 효율을 낼 수있다. 물론, 개개인의 능력이 받쳐준다는 전제하에서지만. 전사는 이렇게 말하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고, 검사는 그의 측면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마법사 둘은 뒤로 몇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란테르트가 이런 일을 당한지 어느덧 4년 가까이 흘렀다. 처음 한해동안은 비교적 한가로운 생활들이었는데, 점점 명성, 물론 악명이 높아져 감에 따라 덤벼드는 부나방들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다. 하지만, 요즘은 오히려 뜸해졌는데, 크림슨 아이즈를 죽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역시 100만 하르라는 현상금은 사람을 혹하게 하기에 오히려 남음이 있는 액수이다. 눈앞의 사람들, 란테르트가 보아하니 그다지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검사나 전사는 어느 기사단에 들어가 대장隊長이나 단장團長쯤은 할 수 있을 듯 보였고, 마법사들도 술법사쯤은 되어 보였다. 이 정도 파티면, 무엇을 하던 꽤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많은 돈을 바랬다. 이윽고 전사가 쇠바늘이 촘촘히 밖혀있는 커다란 방망이를 휘둘러 란테르트를 공격해 왔고, 동시에 검사가 몸을 날려 란테르트의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먼저 공격해온 것은 전사였으나, 검사 쪽이 란테르트의 몸에 더 빨리 접근했다. 그것이 눈앞에 있는 검사와 전사의 속도의 차이인 것이다. 그러나 그게 어쨌단 말인가? 란테르트는 검을 뽑으며 검끝으로 반원을 그렸고, 검의 허리는 그대로 전사의 목을 지나쳐 검사의 어깨에 꽂혔다. 목이 잘려버린 전사는 달려오던 관성에 의해 란테르트가 있는 쪽으로 몇 걸음 더 디디다 쿠당 앞으로 엎어져 버렸고, 어깨에 검이 박힌 검사는 손에서 검을 놓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란테르트가 막 두 번째 검을, 한 명당 일검씩이라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휘두르려는 순간, 멀리 있던 마법사들로부터 마법이 폭사되어 왔다. 둘 모두 화염계 마법으로 정념계 마법인 플레임 스피어였다. 란테르트는 그러한 상대의 마법은 무시해 버린 채 두 번째 검을 사선으로 휘둘러 검사의 목숨마저 빼앗아 버리고는, 엔클레이브에 막혀 사방으로 흩어지는 마법을 뚫고 두 마법사를 향해 걸어갔다. 두 마법사들은 그런 란테르트의 모습에 다리가 풀려버려 도망치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고, 란테르트는 다시 한차례 검을 휘두를 준비를 하였다. 그때, 돌연 두 마법사중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외쳤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올 이야기는 뻔했다. 제발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뭐 아마 그런 것 아니겠는가? 란테르트의 이런 예상은 거의 정확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어떠한 것이라도....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성의껏 해드리겠습니다." 노인은 벌벌 떨며 머리까지 조아리며 이렇게 빌었다. 조금전 악마 크림슨 아이즈를 잡겠다던 의기는 멀리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곁에 있던 여마법사가 냉소를 터트렸다. "당신, 그러고도 감히 마법사라고 말할 수 있어요? 상황이 위급해 지니까 머리를 숙이다니!!" 노인은 그런 여자의 말에는 아랑곳 않은 채 고개를 조아렸다. 하긴, 자신도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주제에 큰소리만치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행동이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란테르트는 그 모습을 무덤덤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이름난 무기나 마법 아이템이 잠들어 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아십니까?" 시체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면 딱 이러하리라.... 이것은 노인과 여자 두 사람이 느낀 공통된 감정이었다. 노인은 그의 물음에 잠시동안 머리를 굴렸다. 그러고 보니 이 근방에 그러한 것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 듯 했다. "아, 하나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가다보면 해안가에 피치토라는 어촌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 서쪽에 전설의 무기가 하나 잠들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란테르트는 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대로 검을 그의 복부에 찔러 넣었다. "목숨은.... 구걸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곁에 있던 여 마법사는 그 모습에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란테르트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았고, 란테르트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여자에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제게 해 온 공격을 똑같이 돌려 드립니다. 플레임 스피어.... 당신의 마법을 돌려 드릴 테니, 막고 살 수 있으면 사십시오." 그 여마법사는 란테르트의 이야기를 듣고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그러한 이야기를 들은 듯도 한 것 같았다. "좋.... 좋아요...." 여자는 이렇게 말하며 뒤로 미친 듯이 달렸다. 아무래도 거리가 멀면 마법의 위력이 약해지는 것이 당연했으니 말이다. 그녀는 이 정도면 됐다 싶은 생각이 들자 마법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실드 마법을 쳤다. 동시에 가지고 있던 아이템중 빙계 마법이 담겨있는 부적을 꺼내들었다. 쓸모가 있을 것 같아 마법용품점에서 1000하르나 주고 구입한 물건이었다. 오래지 않아 머리 있는 푸른 머리칼의 남자에게서 화염의 덩어리가 날아왔다. 상당히 멀리 떨어졌음에도 마법은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여마법사는 마법이 어느 정도까지 접근했을 때, 정말로 이 마법이 플레임 스피어인가? 라는 생각을 저절로 머릿속에 떠올렸다. 마법력의 느낌은 분명 플레임 스피어였으나, 그 위력 면에 있어서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손에 든 빙마법 봉인 부적의 시동어를 외우며 불꽃을 향해 던졌고, 이내 더더욱 정신을 모아 실드 마법을 강화시켰다. 란테르트는 마법을 쏘아 보내자 마자 더 이상 그 여자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은채 걸음을 북쪽으로 옮겼다. 새로운 정보를 얻었으니 확인해 봐야 할 것이 아닌가. 이번만은....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것도 잠시....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쩐지.... 뻔히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할 쳇바퀴를 도는 듯한 기분이 문득 들었다. 그 노인이 이야기 한 마을은 빅팀 시에서 거의 정북방에 있는 곳이었다. 거의 100휴리하나 되는 거리였으나, 란테르트는 비행마법을 이용했고 저녁 무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 라지만, 이 정도의 거리를 날아 이동하는 것은 꽤나 체력소모가 심한 것이었기에, 그는 마을에 도착하자 마자 아무 곳에나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이른 아침,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그 무기가 봉인되어 있다는 장소로 향했다. 만났던 마을 사람중 한 사람의, "그거요? 몇 년전에 사람들이 와서 가지고 갔다는 것 같던데...." 라는 말에 역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속는 샘 치고 한 번 가 보았다. 피치토 마을은 굉장히 아름다웠다. 란테르트는 막 마을을 벗어나 마을 서쪽의 언덕으로 오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전형적인 어촌이었다. 깊숙한 만의 입구는 흙으로 쌓아 방파제를 만들어 두어 배가 정박하기 좋게 해 두었고, 그 만을 따라 마을의 건물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을의 밖으로는 완만한 언덕이 빙 둘러서 있었고, 그 언덕중 서쪽의 것에 영주의 성이 떡 버티고 있었다. 원래 이 피치토 정도의 마을이라면 성까지 있을 이유는 없었으나, 인근 3개 도시를 다스리는 자작이 이곳의 경치가 아름답다며 성을 지어 수도로 삼아 버렸다. 꽤나 무책임한 한량인 모양이었다. 한편, 달리 생각해 보면, 행정수도인 영주의 성을 도시에서 벗어난 곳에 짓는 경우는 상당히 많은 편이었으니, 꼭 욕할 일도 아닐 듯 하다. 언덕을 넘어 란테르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시원스런 바다와 희디흰 모래사장 그리고, 해안 가에 우거진 침엽수의 숲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시커먼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있는 동굴이 있었다. 피치토 마을의 아늑함과는 또 다른 시원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언덕을 따라 걸어 내려가는 것도 잠시, 란테르트는 이윽고 숲이 있는 해안 가에 도착했고, 침엽수림 가장자리의 모래와 흙이 섞인 땅을 밟으며 걷고 걸어 그 동굴이 있는 곳 근처에 다다랐다. 동굴 근처의 바닥은 온통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굉장히 울퉁불퉁해 걷기 상당히 힘들었다. 란테르트는 이곳을 밟는 순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왠지 낯익은 느낌이었다. 언젠가, 언젠가 밟아 본적 있는 땅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이와 비슷한 울퉁불퉁한 곳을 수도 없이 밟아 보았으나, 왠지 이곳은 낯익었다. 란테르트는 이러한 느낌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 걸음.... 발끝이 돌부리에 탁 하고 걸렸다.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쓰러질뻔 했으나, 한 번 휘청거리는 것을 끝냈다. 다시 다음 발걸음.... 그리고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밑 조심하세요.....", "바보, 겨우 이런 곳도...." 낯익은 발의 느낌.... 란테르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몇 걸음을 옮겼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이대로 걷고 싶었다. 눈을 감은 채로.... 두 자매들의 부축을 받으며.... 어째서 기억해 내지 못했는지.... 신에게 이유를 물어야 할 것 같았다. 빅팀시 북쪽, 헬튼시를 지나 해안 가에 있는 동굴.... 왜 이곳을 기억해 내지 못했는지, 란테르트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전에는 듣지 못한 피치토라는 마을이 끼여들어서 인가? 아니면.... 고의로 잊은 채.... 다시 한 번 와 보고 싶었던 것인가?.... 란테르트는 조용히 눈을 떴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암혈 속을 들여다보았다. 걸음소리가 동굴이라는 갇힌 공간 안에서 반향을 일으켜 긴 여운을 남겼고, 란테르트는 첫 번째 발걸음의 여운이 사라지기를 기다려 두 번째 발걸음을 들여놓았다. 이제 더 이상 바닥은 울퉁불퉁하지 않았다. 그때도, 동굴 안은 꽤 맨질맨질 했던 것 같았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한가운데 나지막한 제단이 있는 넓은 반구형 홀이었다. 얼마전 앱슈바르가 봉인되어 있던 곳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침침하고 또, 어수선한 곳이었다. 상급 디아는 신전까지 지어 주는데, 중급마족은 동굴에 제단 하나 달랑 있다. 역시 강하고 볼일이다. 란테르트는 다시 눈을 감고 과거로 돌아갔다. 피엘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시그니아의 모양을 설명해 주었고.... 그러고 보니, 아르트레스를 처음 만난 곳도 이곳이었다. 란테르트는 잠시 그 안에서 머물다가 밖으로 나와 숲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숲을 등뒤로 한 채 바다를 향해 섰다. 시간은 없다.... 이제, 또 다른 검을 찾아 떠나야 한다.... 또 다른, 마법력을 올릴 수 있을 만한 마법 아이템을 찾아 떠나야 한다.... 그렇지만.... 란테르트는 가까이 서 있는 둘레가 한 아름은 족히 될 듯한 나무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잠시만.... 태양이 정오를 나타내는 정남 쪽에 위치할 때까지만.... 쉬어 가는 것도.... 란테르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지루한지 모르는 시간이 꽤 흘렀다. 돌연 란테르트의 귓가에 흥얼흥얼거리는 어린 여자아이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동요 같지는 않은 노래로, 가만히 들어보니, 뱃사람들이 부르는 바르칼로르 같았다. 어렸을 때 부두 노동을 했던 란테르트는 이러한 풍의 노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란테르트가 있던 곳이 내해, 즉 티타스 해에 위치한 카에스항구 였고, 이곳은 북해, 즉 노우판다라사에 속하는 조그마한 어촌이어서 두 지방의 노래는 확연히 달랐으나, 그 힘찬 기상과 반복적인 운율은 상당히 닮아 있어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여자아이는 한참동안 흥얼거리다가 돌연 노래를 멈추었다. 그리고는 걸음을 란테르트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여보세요?" 여자아이는 이렇게 물었고, 란테르트는 눈을 뜨지도, 대답을 하지도 않았다. 여자아이는 란테르트에게서 대답이 업자 돌연 무언가로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란테르트는 눈을 떠 그 모습을 보았는데, 아이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채 기다란 나뭇가지로 란테르트의 배랑 허벅지를 콕콕 찌르고 있다가 란테르트가 갑자기 눈을 뜨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안 죽었군요. 다행이에요." 란테르트는 아이의 말에 무엇이 다행이냐 라는 생각이 돌연 들었으나, 그냥 입을 다문 채 눈을 감았다. 여자아이는 그런 란테르트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그의 곁에 앉았다. "오늘은 덜 심심하겠네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으니...." 란테르트는 다시 눈을 떠 아이를 바라보았다. 나이는 아무리 많게 잡아도 8살을 넘기 힘들 듯 보였다. 갈색의 헐렁한 긴팔 원피스를 입은 아이는, 담갈색 눈동자와 담갈색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란테르트는 그 모습에, 피엘이나 라브에가 어렸을 때, 꼭 이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머리는 어깨가 조금 못되는 길이었는데, 굉장히 거칠게 깎여 있는 것이, 아이 어머니의 손재주가 어지간히도 없는 모양이었다. 아이는 란테르트가 바라보자 고개를 들어 한차례 빙그레 미소를 지었고, 이내 고개를 바다 저 멀리로 향했다. "다행이에요." 아이는 다시 다행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란테르트는 여전히 무엇이 다행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귀찮다는 생각에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오늘은 다행히 프넨티아가 잘 보이네요.... 어제도, 그저께도 보이지 않았는데...." 아이의 말에 란테르트는 다시 한 번 눈을 떴다. 프넨티아.... 그러고 보니.... 피엘과 라브에도 이곳에서 프넨티아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양친을 잃은 그들 자매는.... 그때 꽤나 우울해졌었다. 아이는 이렇게 말하며 가지고 온 바구니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바구니를 덮었던 하얀 천을 벗겼고, 그 안에는 과일 두 개와 햄을 저며 넣은 샌드위치가 하나 놓여있었다. "같이 먹을래요? 이거 제가 만든거에요." 란테르트는 소녀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한편으로는 굉장히 이상한 아이라고 느꼈다. 나이가 몇인데, 벌써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것일까? 아이는 란테르트의 말은 무시한 채 샌드위치를 반으로 나누었고, 이내 과일 하나와 함께 란테르트에게 건넸다. "자 먹어요. 어차피 전 집에 돌아가 또 먹을 수 있으니까요. 저기 언덕너머 피치토 마을에 살아요." 란테르트는 또 거절하는 것도 그렇고 하여 그냥 받아들었고, 아이는 다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며, 아이는 이내 시선을 멀리 바다 저편으로 돌렸다. "혹시 망원경이라는 물건에 대해 들어보셨어요?" 아이가 물었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망원경은 한 2, 300년전쯤 처음 나온 것으로 100년전의 대학자 크란트가 개량하면서 본격적으로 항해등에 이용되기 시작했다. "그것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멀리 있는 것을 잘 보이게 해 준다던데...." 란테르트는 아이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강 알 수 있을 듯 했다. 그리고 이렇게 혼자 도시락까지 싸 가지고 이곳을 찾아오는 이유도 알 듯 하였다. "아빠, 엄마, 두분 모두 프넨티아에 살고 계신다고 할아버지가 말해주셨어요. 하지만, 워낙 멀어서인지 잘 보이지는 않네요. 망원경이 있다면 조금은 더 나을텐데...." 아이의 말에 란테르트도 순간 망원경이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프넨티아가 망원경 따위로 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다면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차라리 배를 한 대 빌려 타고 직접 찾아가고 말 것이다. 아이는 이렇게 말하며 다시 샌드위치를 한입 먹었고, 란테르트도 그때까지 가만히 들고만 있던 샌드위치를 입에 베어 물었다. 아이가 먹을 것이여 서인지 한입 물고 나자 남는 것이 없었다. 엄마 아빠가 없기 때문에 이 아이는 꽤 음식솜씨가 있는 편이었다. 적어도 짜거나 싱겁지는 않으니 말이다. "아저씨는 왜 이곳에 앉아 있어요?" 아이는 멀리 바다 저편을 보면서 이렇게 물었고, 란테르트는 그녀의 물음에 간단히 답했다. "우연히...." 란테르트의 말에 아이는 고개를 돌려 란테르트를 한차례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우연히...." 다시 프넨티아를 바라보는 아이였다. "하지만 우연은 우연이 아니래요. 우리 마을에 지금 점을 아주 잘 보는 여자가 한 명 찾아왔는데, 모든지 척척 알아맞혀요. 제 친구중 켈파라는 아이가 있는데, 나무꾼 집안이에요. 아무튼 그 아이가 산에서 손도끼를 잊어버리고는 그 점쟁이 누나에게 찾아갔는데, 어디어디 있다는 것을 아주 정확히 이야기 해 주었어요. 그뿐 아니라, 이 마을 영주의 아들인 피아텔의 고양이도 찾아 주었어요. 피아텔도 제 친구에요. 그리고.... 또.... 어부집안의 테리트론도 친구인데.... 그 점쟁이 언니는, 테리트론이 좋아하는 음식을 단번에 알아 맞췄어요. 그러면서 그 언니가 해주는 말이, 모든 것은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인 데요. 어느 한가지도 우연은 없는 법이래 나요?" 란테르트는 아이의 말을 모두 듣고 있다가 마지막 말을 천천히 되씹었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을 따라 움직인다고요?.... 신의.... 뜻...."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점술사.... 그녀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란테르트의 말에 아이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전 오이니아 자피토로, 8살이에요. 평어를 사용해도 괜찮아요. 언니는 지금쯤 항구 근처의 공터에서 점을 봐주고 있을 꺼 에요. 이곳 저곳을 유랑하는 유랑 점쟁이래요." 자피토라는 성이 어디선가 들어본 듯 했으나 생각나지는 않았다. 란테르트는 오이니아라는 아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고는 마을로 걸음을 향했다. 그러다 이내 몸을 돌려 아이에게 다가와서는 허리에 매어져 있는 가죽 주머니를 뒤적거려 은화를 열 개쯤 꺼냈다. 1000하르이다. 돈이 더 있었더라면 좋았으련만.... 금화는 그 신전에서 모두 쏟아 버렸다. "이 돈이면, 쓸만한 망원경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맛있는 점심에 대한 사례입니다." 하지만, 오이니아는 란테르트가 건네는 돈을 받지 않았다. "돈은.... 집에도 많아요. 다만.... 제가 원하는 망원경이 없을 뿐이지요.... 어떤 망원경도 프넨티아에 사는 사람들이 보이지는 않는데요." 란테르트는 순간 한방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에게 놀림을 당한 듯도 했고.... 너무 이 아이를 과소평가 했다라는 느낌도 들었다. "점심은 제가 대접해 드린 것이니 마음에 두지 마세요. 그러면, 어서 마을로 가 보세요. 혹시 지금쯤 어디 다른 마을로 떠났을지도 모르니.... 저는 조금 더 여기 있을 꺼 에요." 오이니아는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바닷가 쪽으로 돌렸고, 란테르트는 잠시 더 담갈색 머리칼의 이 여자아이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피치토 마을로 향했다. 마을은 아침에 떠나올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안개에 살포시 뒤덮여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풍경을 연출하던 이 어촌마을은 이제는 선명한 유채화가 되어 사람 한 명 한 명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힘찬 필치로 담아내고 있었다. 란테르트는 오이니아가 이야기 해 준대로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항구로 향했다. 조그마한 어촌 마을이니 만큼, 항구도 조그마했다. 부두라고는 겨우 십여 척의 어선을 정박하기에 빠듯했고, 조금이라도 큰배는 멀리 방파제밖에 정박하여 작은 배를 이용해 항구로 들어와야 했다. 이날도 무슨일 때문인지 멀리 마스트 두 개의 중형 범선이 정박해 있었다. 해안 가에 정박해 있는 소형 어선들은 거의 대부분 라틴세일(삼각돛)의 배들이었다. 삼각 돛은 추진력이 좋지 못한 대신 맞바람에 강한 편이어서 풍향을 종잡을 수 없는 근해 어업에는 상당히 편리했다. 조금 먼바다로 조업을 나가는 배들은 사각 돛을 사용했고, 수부를 두어 노를 겸해 사용했다. 뭐 이런 게 어찌되었건 란테르트는 알 바 없었고, 그는 항구 근처의 광장으로 나가 그 점술사라는 여자를 찾았다. 점술사 여자를 찾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많은 어부들이 점을 보기 위해 몰려들어 있었기 때문이다.막 아침 조업을 마치고, 저녁 조업을 나가기 전이 이 시간대에, 저녁조업의, 혹은 내일아침 조업의 결과를 알아보기 위해 점을 보려는 모양이었다. 와하하, 하는 박장 대소가 터졌다. 아마도 좋은 점괘를 얻은 모양이었다. 여자는 근처 주점에서 빌린 테이블과 탁자 위에서 카드 몇 장을 뒤집어 점을 보고 있었다. 란테르트는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모습을 한차례 살펴보았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아름답다 였다. 어쩌면 청초하다도 어울릴지 몰랐다. 반면 얼음 같은 차가움도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이미지에는 청백색의 머리칼이 한몫 단단히 했다. 눈동자는 맑은 청색을 띄고 있었는데, 보통의 벽안 보다 맑아 하늘색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하늘색보다는 훨씬 투명했다. 그밖에 눈에 띄는 것으로는 그녀의 어깨에 앉아있는 한 마리의 새였다. 그녀의 머리칼처럼 밝은 청색을 띄는 한뼘가량의 몸통에, 몸만한 길이의 청색 꼬리가 길게 늘어져 있는 이 새는 손님을 끌어 모으기라도 하려는 듯 진종일 종종 종종 울어댔다. 꽤나 귀여운 울음소리였다. 란테르트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당연하거니와 점을 보기 위해서였다. 물론, 오이니아의 말을 전적으로 신용하기에 점을 보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보려는 생각에 점이라도 한 번 보려는 것이었다. 란테르트가 천천히 다가가자 그곳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냉막한 눈매에, 뺨에 나있는 가느다란 붉은 상처가 결코 쾌한 느낌은 주지 못했다. 검사라는 존재는 일단 피하는 편이 좋다. 란테르트는 그런 식으로 피하는 사람들에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그 푸른 머리칼의 여자에게 다가갔다. 목에 사제건을 두르고 있는 것을 보니, 어느 신전의 사제인 모양이었다. 사제들은 종종 이렇게 마을을 돌아다니며 점술사 일을 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신전을 선전하고, 또한 여행경비를 마련했다. 소매도 품도 넉넉한 하늘색과 흰색이 교차된 옷을 입고 있는 그 여자는 란테르트가 다가오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무덤덤한 표정에 냉막한 눈동자였다. 란테르트와 함께 세워놓으니 흡사 남매 같았다. 특히 표정에 있어서는 누가 더 무표정한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점을 보던 사람도 어디론가 피해 버렸고, 란테르트는 빈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았다. 푸른 머리칼의 점술사가 물었다. "무엇에 관해 알고 싶으십니까?"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가 대답했다. "미래.... 입니다. 제가하고 있는 일의 가능성과.... 그것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 그의 대답에 푸른 머리칼의 여자는 바닥에 놓여있던 30장 남짓의 카드를 모아 섞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의 색은 투명한 흰색을 띄고 있었는데, 도저히 유랑 점술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어디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아가씨라고 하는 편이 더 신빙성이 있을 듯한 고운 손이었다. 여자는 카드를 모두 섞자 그것을 셋으로 나누어 놓았다. 그리고는 첫 번째 무리에 있는 카드를 뒷면을 위로하여 탁자의 가장 위쪽, 란테르트가 있는 바로 앞에 가로로 놓았고, 뒤이어 중간에 있는 무리의 카드 가장 위쪽에 있는 것을 뒤집어 그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식으로 몇 장의 카드를 뒤집고, 또 뒤집지 않으며 탁자 위에 배열했고, 이내 무언가 있을 것 같은 배열로 카드가 놓였다. 막 마지막 카드를 올려놓은 순간.... 그 푸른 머리칼의 여자는 눈썹을 꿈틀 거렸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눈치였다. "....이런.... 배열이...." 나지막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여자를 향해 란테르트가 물었다. "이야기 해 주시겠습니까? 저의 점괘를...." 란테르트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그 청백색 머리칼의 여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어째서.... 알 수 없다는 점괘가 나온 것이지...." 여자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다시 카드를 섞었다. 원래 다시 한 번 카드를 섞어 나오는 점괘는 무시하는 것이었으나,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란테르트는 그저 잠자코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한참동안 손을 놀리던 푸른 머리칼의 여자는 이내 다시 아까와 같은 배열을 만들어 냈고, 이번에는 놀라 입까지 조금 벌어졌다. 란테르트가 언뜻 보니, 조금전과 카드의 배열이 비슷비슷해 보였다. 청백색 머리칼의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 저으며 다시 카드를 모았다. 한 번 더 해보려는 모양이었다. 란테르트는 원래 점이라는 것이 이렇게 보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잠자코 바라만 보았으나, 푸른 머리칼의 여자는 이 괴상한 결과 덕분에, 이마에 땀까지 고였다. 다시 카드를 배열했고.... 그 결과는 같았다. 여자는 한참동안이나 망연히 카드의 배치를 바라보다가 다시 카드를 모았다. 또 한 번 해 보려는 모양이었고, 란테르트는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며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그만 두기로 하겠습니다." 란테르트가 몸을 일으킴에 여자도 따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표정은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그것이었고, 말투는 그녀답지 않게 조금 동요해 떨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도 기이해 그렇습니다. 제가 점을 보아온 이래로, 세 번이나 연속으로 같은 점괘가 나온 것은 처음입니다." 그제서야 란테르트는 몸을 돌려 다시 자리에 앉았고, 여자 또한 자리에 앉았다. "그럼.... 해석을 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미래는, 간단히 말해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이 바라고자 하는 일이 이루어질지 그렇지 않을 지에 대하여.... 저의 카드는 판단을 유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루는 방법에 대해서도.... 단지 남쪽이라는 점괘만이 나왔을 뿐입니다."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음, 하는 신음을 냈다. 알 수 없다라.... 그래도 불가능하다라는 점괘는 나오지 않은걸 보니, 가능성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남쪽 이라니요? 마곡을 말하는 것입니까?" 란테르트는 이렇게 되물었고, 그 푸른 머리칼의 여자는 란테르트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남쪽이라는 것이.... 정말 해가 정오에 머무르는 방향을 이야기하는 것인지도 확실치 않고...."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적지 않게 실망했다. 세상에 무슨 이런 엉터리 같은 점이 다 있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채를 지불하지 않을 수는 없었고, 란테르트는 가죽 주머니에서 은화 하나를 꺼내 내려놓았다. 100하르면 상당히 큰돈이다. 그 파란 머리칼의 여자는 조용히 돈을 받아들었다. 이어, 란테르트가 몸을 일으켰고, 그 푸른 머리칼의 여자도 몸을 일으켰다. "잠시만요...." 란테르트는 또 무슨 일로 부르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푸른 머리칼의 여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점괘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녀의 이 말에 란테르트는 잠자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점괘에 의하면.... 당신에게는 제가 모시는 카이그라미온 님의 저주가 쓰여져 있습니다." 란테르트는 여기까지 듣는 순간 다시 몸을 돌렸다. 뻔한 수작이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는 부적을 강매한다거나, 성스러운 뭐니 하면서 마법장신구를 비싼 값으로 판매한다. 비록 점은 본적이 없었으나, 이런 비슷한말을 하는 성직자는 수도 없이 만나본 란테르트였다. 게다가 카이그라미온이라니.... 막 지어낸 듯한 냄새가 짙게 풍기는 이름이었다. 란테르트는 적지 않은 신화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았지만, 이런 이름의 신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더 이상 이 여자를 상대할 이유가 없는 란테르트는 그대로 떠나려 했으나, 파란 머리칼의 여자는 걸음을 재빨리 놀려 란테르트의 앞에 섰다. "저의 말을 무시할 경우 결코 당신은 당신이 이루려는 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않 그래도 그다지 마음이 편치 않은 자신에게 불길한 소리를 하는 이 여자가 기분 좋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란테르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짐짓 여자를 무시한 채 앞으로 걸어갔고, 여자는 줄기차게 그의 뒤를 쫓았다. 란테르트는 그냥 걸음을 조금 더 빨리 하여 여자를 떨어뜨리려 했으나, 다리에 힘을 가해도 여자는 계속해 란테르트의 뒤를 따라왔다. 그러한 쫓고 쫓기는(?) 형세는 마을 밖을 벗어나자마자 몸을 돌린 란테르트에 의해 끝이 났다. 란테르트는 천천히 손을 검으로 가져갔다. 더 이상 자신을 방해할 경우에는.... 이런 생각을 하며 란테르트는 그 파란 머리칼의 여자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꽤나 겁이 없는 여자였다. 가드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있는 마을 안에서 이렇게 란테르트에게 끈덕지게 따라 붙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일지 모르지만, 마을 밖에서는 아니었다. 일 검에 베어 버려도 무어라 할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여자는 조금도 겁먹지 않은, 아니 오히려 자신감으로 약간 도도한 눈매를 한 채 란테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는 중키 정도로 란테르트의 눈 높이쯤 되었는데, 당당한 태도 덕인지, 호리한 몸매 덕인지 보통의 여자들보다 조금 커 보였다. 물론, 란테르트의 눈썹을 훨씬 넘어선 아르트레스보다는 분명 작았지만. 그때 여자가 입을 열었다. "절 믿지 못하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면, 제가 몇 가지 당신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맞춘다면, 저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주십시오." 란테르트는 대꾸치 않았고, 여자는 아랑곳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란테르트님.... 이시군요. 당신의 이름은 란테르트이며.... 성은 루렌드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꺼낸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순간 움찔 했다. 하지만, 잠시 더 생각해 보니, 알아내는 것이 그다지 힘들지는 않을 듯 싶었다. 어찌되었건, 크림슨 아이즈는 상당히 유명한 편이니 말이다. 그녀는 란테르트가 아무말 하지 않자 다시 입을 열었다. "어둠에 속한 존재와, 빛에 속한 존재 그 둘 모두와 친분이 있으며.... 지금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어둠과 관련 있는 일입니다." 어둠.... 이것은 분명 이카르트와 트레시아 등을 이야기하는 것일 테고.... 빛의 존재란.... 란테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모라이티나, 그녀를 지칭하는 듯 했다. 엘프.... 빛에 속한 존재이다. 란테르트는 여기쯤 이야기했을 때, 이 눈앞에 있는 여자가 아주 엉터리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원래 이런 쪽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말을 아주 교묘하게 돌려 말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 꼭 어둠이라고 해서, 그것이 마족을 지칭한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아직도 란테르트에게서 말이 업자 여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두번의 커다란 슬픔.... 당신에게서는 이것 역시 느껴지는 군요.... 두명의 소중한 존재를 잃고...." 여기까지 말했을 때, 란테르트는 돌연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그만 하십시오.... 당신의 말을 믿기로 하겠습니다." 듣고 싶지 않았다. 란테르트는 이 눈앞의 기분 나쁜 여자에게서 더 이상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그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까지 얼굴에 동정의 빛 하나 띄지 않는지.... 란테르트는 그 여자가 볼수록 신기했다. 란테르트의 대답에, 파란 머리칼의 여자는 낯빛을 조금 더 진지하게 고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카이그라미온 님의 저주가 씌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저주를 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저뿐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 이야기는.... 극히 전형적인 신관 사기꾼들의 사기 패턴을 그대로 닮아있었다. 란테르트는 이 눈앞의 여자를 종잡을 수 없었다. 자신에 대한 것은 그렇게 까지 정확히 이야기하면서, 아직도 카이 뭐인지 하는 물건의 이름을 들먹이다니.... 예지력은 가지고 있되, 순전 그것을 돈을 버는 목적에만 사용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런 신이 있다고 믿는 것인지.... 란테르트에게서 아무런 말도 없자 여자는 계속해 입을 열었다. "이 저주를 푸는 법은 굉장히 오랜 시일이 걸리며, 또한 많은 노력이 필요로 합니다. 당신과 동행하여 당신의 그 저주를 풀어 드렸으면 하는 것이, 제가 이렇게 당신을 따라온 이유입니다."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곧바로 말했다. "필요 없습니다...." 란테르트의 대답에 그 맑은 파란 머리칼의 여자는 잠시동안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헤매이기만 하며 일을 이루지 못한 것도, 모두 다 카이그라미온 님의 저주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분의 저주 하에서 당신은 오랜 세월을 옳지 못한 판단들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닙니다." 란테르트는 그녀가 여기까지 말했을 쯤, 돌연 두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흥분으로 한 행동이기에, 손아귀에는 꽤 큰 힘이 들어갔고, 여자는 아픈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무엇입니까?" 란테르트의 이러한 난폭한 행동에도 여자는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입을 열었다. 물론, 어깨의 통증에서 오는 약간의 변화는 어쩔 수 없었으나, 일단 심적 동요는 없어 보였다. 한마디로, 란테르트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카이그라미온 님의 충실한 종.... 세이피나라고 합니다." 란테르트는 얼핏 들은 듯 한 이 세이피나라는 이름을 잠시 어디서 들었는지 생각해 보았으나 누구인지 떠올리지는 못하였다. "도대체 목적이 무엇입니까? 어째서 저에게 접근하신 겁니까?" 란테르트는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약간 더하며 외치듯 물었으나, 여전 여자는 차분히 답했다. "접근은.... 제가 아니라 당신 쪽에서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당신과 함께 하려는 목적은, 카이그라미온 님이 내린 저주의 늪에서 당신을 구해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일단 더 이상 물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을 듯 싶었기에 어깨를 움켜쥐었던 손을 놓으며 몸을 돌렸다. "저는 카이그라미온이라는 신을 모릅니다. 그러니, 그가 내렸다는 저주도 믿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설사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저는 당신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대가로 드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으나 오래지 않아 다시 세이피나에 의해 걸음이 막혔다. "저는 대가 같은 것을 원하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목적은 단지 카이그라미온 님의 명령을 충실히 행하는 것뿐입니다. 그분께서 저주를 당신에게 내리셨고, 이제 지금은 그분께서 당신이 바른 길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전 그분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종일 뿐으로 개인적인 목적은 없습니다." 그녀의 이 말에 란테르트는 더더욱 혼란에 빠졌다. 대가를 원치 않는다니.... 곧바로 세이피나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다만 제게 동행할 것을 허락하기만 하시면 됩니다." 그제서야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말린다고 따라오지 않을 것 같지도 않았고.... 특히, 점보는 실력이 상당한 듯 하니, 종종 어디로 향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을 때 꽤 도움이 될 듯 하였다. 가까운 예로, 당장 찾고 있는 파소 가의 에르테일을 어디가야 찾을 수 있는지 조차 모르지 않은가? 란테르트가 허락을 하자, 세이피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제 앞에 무릎을 꿇어 주십시오. 카이그라미온 님의 축복을 내려 드리겠습니다." 란테르트는 어차피 그녀의 필요성을 인정해 동료로 맞아들인 이상 그녀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두 무릎을 꿇는 것이 무슨 큰 손해도 아니니 말이다. 만약 테미시아 등의 다른 신에게 일말이라도 공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면, 이렇게 알 수 없는 종교의 신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적어도 란테르트는 아니었다. 세이피나는 란테르트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자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무어라 입속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란테르트로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에 잠자코 앉아 있었고, 오래지 않아 세이피나의 이 의식은 모두 끝났다. "이로서 저와 당신은 온전한 동료로써 카이그라미온 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제 일어나셔도 좋습니다."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뭐 축복을 받았는지 않았는지, 당장으로써는 알 수 없었고, 그다지 관심도 없었다. 세이피나의 동행을 허락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예지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저주 따위는 애당초 믿지 않았다.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알았다는 표시를 했고, 이내 동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세이피나 역시 란테르트의 반응에는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그의 뒤를 쫓았다. 마치.... 그녀 역시 저주 따위는 믿지 않는 듯 보였다. 17. 세이피나의 정체??? 피치토마을에서 노마티아-에노사 해협의 에노사측 항구인 세호항까지는, 에노사다운 넓고 평탄한 평야가 그저 펼쳐져만 있었다. 두 지점 사이의 거리는 거의 200휴하쯤 되었는데, 란테르트는 이 거리를 걸어 이동하면서 도대체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여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굉장한 궁금증을 느끼고 있었다. 비단, 그녀의 놀라운 예지능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이피나의 몸매는 보통의 여자들보다 약간 마른 편으로 아무리 보아도 체력이 뛰어나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200휴하라는 거리를 7일만에 걸어 움직였다. 란테르트는 평소 하루에 50휴하 정도 혹은 그 이상을 걸었는데, 아무래도 상대가 여자이고 하니 걸음걸이 속도를 많이 늦췄었다. 그렇지만, 그런 그의 걱정이 기우였다는 것은 단 하루만에 밝혀졌고, 지금은 거의 하루에 30휴하 정도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9시간 정도의 강행군이었다. 10월도 중순에 접어든 이 날, 이 두 사람은 세호항 서쪽 1휴하쯤 떨어진 곳을 걷고 있었다. 눈앞에는 세호항구가 그 활달한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는데, 이 항구는 규모 말고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그런 곳이었다. 짠 내가 두 사람의 코를 자극했다. 이 7일 동안, 란테르트는 이 세이피나라는 아가씨에 대해 알게 된 점이 단 한가지도 없었다. 겉보기로는 20세쯤으로 보였으나, 행동거지는 조그마한 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섬세했고, 또 조심스러웠다. 매우 조용한 아가씨로,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어떻게 그렇게 많은 말을 해 자신을 설득했는지 이해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하기를 꺼려하거나 해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보통의 유랑 신관과는 달리 움직임 하나 하나에 기품이라는 것이 스며 있었다. 신관이라는 것은 무엇을 감추기 위한 허울 같았고, 오히려 무슨 귀족 집의 큰아가씨쯤 되는 듯 보였다. 어깨 위의 새 역시, 그녀의 그런 신비로움을 한층 더 짙게 해 주었는데, 신기한 것이 아무런 물리적 속박이 없음에도 날아 달아나거나 하지 않는 점이었다. 종종, 혹은 쫑쫑 하는 귀여운 울음소리를 내는 이 새는 란테르트로서는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물론, 평소에 새들을 눈여겨봐 두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꼬리가 몸길이 만한 파란색의 새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은 단언할 수 있었다. 란테르트는 이 아가씨가 인간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치 않았다. 물론, 자신과 같이 특별한 종류의 인간 일수도 있었으나, 그럴 가능성은 그녀가 인간이 아닐 가능성보다 훨씬 희박했다. 엘프 같지는 않았다. 일단 귀가 길지 않았다. 모라이티나의 헤어밴드나, 키나의 티아라 같은 귀를 감추는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긴 연청색 생머리 사이로 살짝살짝 드러나는 귀의 모습은 인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란테르트가 알고 있는 한에서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닌 존재는 마족과 정령, 신족, 드래곤족뿐이었다. 하지만, 드래곤족이나 신족은 그 실존여부조차 확실치 않으니 일단 생각지 않기로 했다. 마족과 정령.... 란테르트는 이 아가씨가 이 둘중 어디에 속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세이피나는 기척을 완전히 감추어 느낌만으로는 보통 인간일 뿐이었고, 란테르트는 다만 이런 저런 조건만을 살펴 그녀의 정체를 추측해 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지금의 마음은 혹시 정령이 아닐까 하는 것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마족이라면 자신을 도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마족 같기도 했다. 마족은 자신을 도울 이유가 없었지만.... 이카르트라면.... 정령이라면, 머리칼의 색을 보아 수정령 계통이나 뇌령일 가능성이 높았다. 둘 모두 머리칼의 색이 파란색을 띄는 종류의 정령이다. 그리고 마족이라면.... 아마도 이카르트가 보낸 것이리라.... 란테르트의 추측은 현재 여기까지 이어져 있었으나, 더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사실 가능성은 정령일 쪽이 훨씬 높았다. 나크젤리온을 죽이겠다고 하는 존재.... 즉 자신을 지원해 그 목적을 이룬다면.... 정령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이익이 아닌가? 이런 저런 쓸모 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이 두 사람은 세호항에 접어들었다. 이미 해는 정남을 지나 이제 그림자의 길이를 늘리는 턴이 되었다. 두 사람은 곧바로 항구 안의 식당겸 주점으로 향했고, 이내 자리를 잡고 음식을 한가지씩 주문했다. "에르테일은 현재 어느 곳에 있습니까?" 란테르트는 그녀를 만난지 7일 만인 오늘 다시 한차례 이것을 물었다. 그 전에 물었을 때는 노마티아의 게미아 산맥 동편에 은거하고 있다는 대답을 들었었는데, 혹시 그 사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을 가능성이 있기에 이렇게 물은 것이다. "아직도 그곳에 있습니다." 세이피나는 얼굴에 표정하나 바뀌지 않은 채 담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와 같았다. 이른 새벽 엷은 안개가 살짝 덮인 호수면의 모습이랄까? 그러한 신비로움과 고요함, 적막함 따위를 함께 갖추고 있었다. 종종 엷은 분홍색의 입술을 달싹여 이야기를 할 때에도, 그녀는 동요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소리는 입을 통해서 보다는 어깨 위에 있는 새를 통해서가 더 많았다. 새는 그녀와 대조적으로 꽤 수다스러운 편이었는데, 무엇 때문에 계속해 울어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주점 안의 뭇 남성들중 절반 정도는 이 푸른 머리칼의 아가씨를 흘끔 흘끔 바라보고 있었다. 뭐,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었다. 비단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알 수 없는 탈속적 신비감까지 함께 가지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는 쪽이 남자로써 문제가 있는 것이다. 란테르트조차도 이 정도로 아름다운 아가씨는 거의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기껏해야, 에라브레나 트레시아 정도가 그녀와 비견할 만할 것이다. 셋 모두가 느낌이 완전히 다른 여자들이어서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각각 질문과 답변을 한차례씩 나눈 후, 란테르트도, 세이피나도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사이 음식이 나왔고, 이내 둘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한 손동작을 몇 차례 했다. 호기심.... 아무리 란테르트라 하더라도 이러한 감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극도로 억제해 입 밖으로 내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날은 왠지 이 눈앞의 여자에 대해 조금 더 많은 것이 알고 싶었다. 물론, 대화를 통해서는 전혀 알 수 있는 바가 없을 터였으나 그래도.... "카이.... 그라미온이라는 신.... 처음 들어봅니다." 때늦은 점심을 거의 마칠 무렵, 란테르트는 이렇게 물었고, 그의 이 물음에 세이피나는 담박한 푸른 눈동자를 들어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분은 전 세계의 창조주이시며 테미시아 님의 아버지이십니다. 세계의 시작이며, 또다시 끝이십니다. 혼돈과 허무, 존재와 부재, 유와 무 모든 것을 관장하고 계십니다." 그녀의 이러한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믿는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럴 듯 하다는 의미에서 였다. 어찌되었건, 란테르트 그가 살아온 세상에서는, 주신 테미시아 이하로 여러 신들이 각각의 부분을 맡아 조화를 이루고 있는 다라는 것을 믿고 있었고, 란테르트 역시 이러한 배경 속에 속한 존재였다. 아무리 그가 이단이니 어쩌니 해도, 이러한 기저사상만은 깨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분이라면.... 그분의 신전은 어디 있습니까? 전 한차례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란테르트가 다시 한차례 물었고, 세이피나는 예의 그 담박한 표정으로 계속해 입을 열었다. 안면 근육 전체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입술만이 달싹이는 모습이란.... 완벽히 인형이었다. "그분은 머무르지 않으십니다." 란테르트가 다시 물었다. "세이피나가 본명이십니까?" "존재에게 본명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란 원래부터 그 모양으로 존재할 뿐.... 이름이라는 것은 존재가 다른 존재와 만나기 시작하며, 각각의 존재에 붙이기 시작한 기호일 뿐입니다. 저의 본명은 저 자신입니다." 란테르트의 별 것 아닌 물음에 대한 세이피나의 대답은 약간 독특한 것이었기에, 란테르트는 잠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란테르트는 이쯤해서 더 이상 말을 빙빙 돌리는 것을 그만둔 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인간이 아닌 듯 보입니다만.... 정령이십니까?" 란테르트의 말에 세이피나는 여전 무덤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왜 인간이 아니라 생각하시는지요?" 세이피나는 오히려 이렇게 되물었고,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천천히 입을 열어 대꾸했다. "단지 느낌입니다. 게다가.... 체력 역시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고...." 란테르트의 이 말에 세이피나가 물었다. "당신은 인간이십니까?"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세이피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저도 인간입니다." 란테르트는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물을 말이 없었다. 전과 같은 조용한 분위기에서 나머지 식사를 마저 한 이 두 사람은 배편을 구하기 위해 부둣가로 나아갔다. 항구라는 곳은, 언제나 활기가 넘친다. 전쟁 중에는 군수물자 및 병사들의 수송으로, 그리고 평화시에는 여러 무역들로.... 전쟁으로 파괴된다 하더라도, 가장 먼저 가장 많은 예산이 투입되어 복구되는 곳이 이 항구이기에, 항구가 파괴되어 황폐해 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모는 대륙이 바다를 격한 채 서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위다, 소피카, 노마티아, 에노사, 마곡, 이 다섯 나라는 각자가 각자에게 선전포고를 한 상태였으나, 현재 전쟁중인 나라는 노마티아와 위다 이 두나라 뿐이었다. 바다를 격했다는 특이한 상황 덕분에,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의 원정은 몹시 조심스러웠다. 이 당시의 전쟁 유형은 상당히 독특한 편이었다. 일단 해전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일곱 대륙을 통틀어 해전이 일어난 역사는 근 200년 안에 10회 이내였다. 그 이유는 마법이라는 강력한 함포(?) 때문이었는데, 어느 쪽이던, 중급 이상의 마법에 배가 직격당하면 배는 침몰해 버린다. 수많은 물자와 사람을 한순간에 잃게 되는 것이다. 만약 둘중 한쪽만 마법사를 데리고 있다면, 해전은 실로 싱겁게 마법사가 있는 쪽에 승리를 선포한 채 끝나 버릴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는 양쪽 모두 데리고 있고, 한차례씩 마법을 서로에게 쏘아 보내고 나면 싸움은 끝이 나버린다. 지키는 쪽도, 공격하는 쪽도 거의 전멸로 나아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누가 해전을 하겠는가? 하지만, 꼭 이유가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법이 없었던 휴메시아시대 때도 함대 전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었다. 게다가 선박 제작기술도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요즘의 배들은 어지간한 마법 한두 방에 꿈적도 하지 않는다. 배 곳곳에 대 마법 결계를 쳐놓기도 하는 등으로도 마법은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 해전이 일어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모든 대륙 사이의 바다가 몹시 좁기 때문이었다. 가까운 곳은, 배가 한쪽 대륙의 항구를 떠난 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다른 대륙에 도착하기도 했다. 그러니, 미리 알고 바다에서 맞아 싸우고 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이러하니 전략상으로도 전술상으로도 커다란 이점이 없는 이러한 해전이 일어날 이유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공격은 오직 다른 대륙으로 상륙하여 그곳에서 새로 진을 짜고 진지를 구축해 공격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으며, 방어는 이런 이들을 막아내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공격하는 쪽이 심히 불리한 것이다. 형태는 전면전이 아닌 제한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지형은 이 일곱 대륙 안에서의 전쟁을 활성화시키기도, 또 억제시키기도 하였다. 그냥 땅으로 국경을 접해 있는 것 보다 전쟁이 격렬해 지기는 힘들었으나, 일곱 대륙 사이의 세력 균형비가 깨어지기가 힘들어 전쟁이 끝나는 것을 방해하기도 했다는 말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일곱 대륙 안의 독특한 전쟁양상의 원인들이다. 지금은 15년이나 전쟁을 끌어온 덕에 조금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있다. 부둣가는, 활기찼고 또 번잡했다. 수많은 장한 들이 어깨에 커다란 짐들을 짊어지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배에 오른다. 저쪽에서는 거중기를 이용해 거대한 짐들을 들어올리기도 한다. 한쪽에 거적때기 하나만을 펼쳐놓고 물건들을 파는 노점들도 눈에 띄고, 다시 한쪽에는 선원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요리점들이 눈에 띈다. 이곳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쯤으로 분류가 가능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일꾼들로, 선원, 그리고 장사꾼들 등 생업을 위해 항구에서 일하는 존재들이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그들의 옷은 꽤죄죄 했고,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그리고, 다른 부류는 이들과는 완전히 다른 계층에 속한 사람들로, 여행, 혹은 관광을 위해 항구에 들리는 사람들이었다. 옷차림은 천차만별이었으나, 깔끔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고, 표정은 몹시 밝았다. 노동자들의 길을 가로막아 그들의 동선을 늘인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부둣가에 서서는 바다를 향해 두 나래를 활짝 편다. 즐거운 모양이다. 마지막의 부류들은, 이런 위의 두 종류의 사람들 모두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로, 좀도둑들이었다. 상점의 물건을 훔치기도, 선원 혹은 여행객들의 주머니를 채 가기도 하는 이들은 재빠른 손놀림과 발 이 두 가지를 주무기로 이곳에서의 생활을 즐긴다. 복잡하면 할수록 그들에게는 유리하다. 아, 다시 살펴보니, 제 4의 무리가 있다. 그 무리의 성원은 겨우 두명으로, 둘 모두 푸른색의 머리칼을 하고 있다. 한 명은 청회색의, 그리고 다른 한명은 청백색의 머리칼인데, 이 둘의 공통점은 이런 떠들썩한 분위기의 항구에서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란테르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선박 조합으로 향했고, 세이피나는 조용히 그의 뒤를 쫓았다. 란테르트는 지난 7일 동안 길을 걷다가 문득 문득 뒤를 돌아보곤 했다. 이 존재감 없는 세이피나라는 아가씨가 아직도 그곳에 있는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란테르트를 한차례 올려다 볼 뿐이었다. 그것이 그 둘이 서로를 인식하는 하루중의 행위 전부였다. 지금도, 부둣가의 복잡한 길을 걷다가 고개를 한차례 뒤로 돌렸고, 그곳에는 어깨에 한 마리의 파란 새를 올려놓은 세이피나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란테르트는 그러려니 하며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고, 세이피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채 그의 뒤를 쫓는다. 배를 구하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돛대 두 개 짜리 범선으로 이름은 켈모니움이었다. 얼음의 신으로, 북쪽 지방인 이곳에서는 상당히 추앙 받고 있는 신이었다. 배는 해질녘에나 세호항을 벗어났다. 두 개의 선실을 얻은 란테르트와 세이피나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고, 이미 저녁까지 먹은 이들이 다시 서로의 얼굴을 볼 때는 이제 다음날 아침이나 될 것이다. 란테르트는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세 개의 짐, 망토와 가방, 그리고 검, 이것들을 풀고 또 접어 적당히 정리해 놓고는 좁다란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세이피나는.... 템플 오브 아르카이제에서의 야경은 그 낮의 풍경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쏟아질 듯 하다는 표현은 흔히들 별에 사용되는 것으로.... 아르카이제가 기거하는 방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이 말의 의미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마계에 별은 없다. 별이 있는 곳은 오직 인간들이 사는 물질계뿐이다. 지금 하늘에 반짝이는 것은, 마계 전체를 밝히는 '빛'의 동력원들이다. 차원간의 에너지 준위 차를 이용해 발전하는 그 시설들은 밤에는 휴식을 취하는 '빛'과는 달리 이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고 있다. 이카르트는 지금 자신의 방, 그것도 언제나 자신이 머무르는 기둥 바로 옆에 누워 있다. 두 다리는 방의 경계 밖으로 내 놓았고, 두 팔을 접어 머리를 받치고 있었다. 상급 마족들은 신에 가까운 존재들로 잠이 필요 없었다. 이렇게 일부로 밤을 만드는 것은 모두 하급마족을 위해서 였다. 이카르트는 상급 마족이었고, 당연히 잠이 필요 없었으나, 밤이 딱히 성가시거나 하지는 않았다. 고개를 밖으로 내어 아래를 살펴보아도, 이렇게 몸을 눕혀 하늘을 바라보아도, 반짝이는 수십 개의 조각들이 펼쳐져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기 때문이다. 그때, 이카르트의 곁의 공간이 흔들리며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아 분명 이카르트보다 하급의 마족이었다. 이카르트는 누워 있는 상태에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르페오네인가?" "예. 중간 보고를 위해 왔습니다." 이 말에 이카르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여전 두 다리는 밖으로 나가 위태위태하기 짝이 없어 보였으나, 높이에 대한 어떠한 느낌도 없는 그로써는 위태하다는 느낌 같은 것은 없었다. "이야기 해 보거라." 이카르트의 말에 아르페오네는 고개를 한차례 조아린 후 입을 열었다. "7일전 그분과 만난 이래로,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지금 막 노마티아로 향하는 배 위에 올랐습니다." 이카르트는 그녀의 말에 음, 하는 짧은 신음을 내뱉었고, 이내 이렇게 물었다. "너와 그와의 관계는?" 이카르트의 이 물음에 아르페오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란테르트 님은 세이피나라는 존재에 대해 큰 호기심을 느끼고 있으며, 아직은 경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저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져 오셨습니다." 이카르트가 다시 물었다. "그가 너라는 존재를 눈치 챌 가능성은?" "상당히 높습니다만.... 제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심증만 있을 뿐일 것입니다. 저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들으셨겠지만, 저를 직접 본 적은 없으시니까요." 아르페오네의 이 대답에 이카르트는 고개를 몇 차례 끄덕였고, 이내 다시 물었다. "그리고 그 점괘는.... 어떻게 된 것이지? 왜 그곳에서 그런 실수를 한 것이냐? 아무리 보아도.... 처음에는 어색하고 어설펐다." 그의 물음에 아르페오네는 낯빛을 약간 바꾸었다. "연극이 아니었습니다.... 진짜로.... 나크젤리온 님의 힘을 빌어 점을 보아 보았습니다.... 신계에 근원을 둔 점이라면.... 세 번째 땅의 일이라면 거의 맞출 수 있는데.... 정말 알 수 없다라는 점괘가 나왔습니다. 그것도.... 세 차례나 연속으로...." 아르페오네의 이 말에 이카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 리가.... 그가.... 아무리 그라고 하지만, 나크젤리온 님에게...." 사실 점괘는 '불가능하다'가 나왔어야 정상이다. 이카르트도, 아르페오네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크젤리온은 신의 땅에 속한 존재.... 이카르트나 다른 정령들과 비교해서는 곤란하다. 아르페오네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다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점괘가 틀린 것일 테니.... 우연이라는 것은 두려울 정도로 신비로울 때가 있으니까요...." 이카르트는 그녀의 말에 음, 하는 신음을 한차례 내뱉었다. 그후로 잠시동안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깃들었다. 멀리 엘비니움의 야경이 이카르트의 눈에 반사되어 빛을 낸다. 이윽고 이카르트가 몸을 돌려 아르페오네를 바라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자리에 언제나와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자신의 아이이며, 또한 자신의 피조물을.... 아르페오네는 이카르트가 지신을 향해 돌아앉는 것을 느끼며 약간 긴장을 풀었다. 이러한 이카르트의 자세의 변화는, 대화의 분위기 변화도 뜻하는 것이다. "카이그라미온.... 그건 또 뭐하는 신이지?" 이카르트는 돌연 이 이야기를 꺼냈다.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약간 섞여 있었고, 표정 역시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아르페오네는 이카르트의 이 이야기에 고개를 조아린 채로 귀를 살짝 붉혔다. 이카르트는 그런 아르페오네의 모습에 살짝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구나.... 카이그라미온이라...." 이카르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아마 어디서들은 이름인지를 생각해 내려는 모양이었다. 아르페오네는 이러한 상관의 유희를 방해치 않은 채 잠자코 기다렸다. "아, 맞다.... 네가 어렸을 적에 기르던 팬지의 이름이구나.... 노란 색 꽃잎이었던 것 같은데...." 아르페오네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카르트는 재미있다는 듯 살짝 웃었다. 후후거리는 웃음이 꽤 듣기 좋았다. "위대하신 카이그라미온 님을 받드는 사제 세이피나라...." 그러더니 돌연 이카르트의 미소가 사그러 들며 시선을 멀리 반짝이는 도시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매가 점점 침울하게 바뀌어 갔고, 이내 호, 하는 조그마한 한숨과 함께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가.... 그의 그러한 불행이.... 겨우 팬지꽃의 저주였다는 말인가.... 그렇게나.... 하찮은...." 아르페오네는 이카르트의 말에 대꾸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이카르트가 꺼낸 말 그 자체가....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감상에 젖은 그것이었기에 쓸모 없이 끼여들어 그의 사고를 방해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닐 듯 했다. 이카르트는 한참동안 침울히 앉아 있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아르페오네를 바라보았다. "아이야.... 너의 이 임무는.... 일단은 비밀이다. 아르트레스나 아르르망 그들도 잘 알지 못한다." 이카르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 지 못하여 아르페오네는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듣고만 있었고, 이카르트는 계속해 이야기를 이었다. "아르트레스.... 그 아이는 아마 앞으로 몇 차례 란테르트 그를 찾아 갈 것이다. 지난 5년간의 장기 임무를 맡아 그 사이 동안은 그를 만나지 못했지만.... 지금은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 눈치를 보아 틈만 나면 그에게로 달려갈 가능성이 크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 아르페오네는 이카르트가 하려는 말을 대강 알 수 있었다. 아마 아르트레스의 입을 알아서 잘 막으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아르페오네는 입을 열어 그의 말을 끊거나 하지 않았다. 이카르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 아이야.... 당연히 너의 모습을 알아 볼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의 입에서 너의 정체가 흘러나오게 해서는 안된다. 이 정도는 네가 알아서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예...." 이카르트의 말에 아르페오네는 조용하고 온화이 대답했고, 이카르트는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아르페오네는 이카르트에게 다시 한차례 고개를 조아리며 이렇게 말했고, 이카르트는 가볍게 고개를 한차례 끄덕거렸다. 그리고, 막 아르페오네가 공간 저편으로 사라지려는 무렵 돌연 한가지가 생각났다는 듯, 이카르트가 물었다. "그에 대한 너의 개인적인 느낌이 듣고 싶구나." 그의 물음에 아르페오네는 잠시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은.... 판단은 후일로 미루겠습니다. 그러면.... 부디 몸을 소중히 하소서...." 이카르트는 고개를 끄덕여 이러한 아르페오네의 말에 대꾸했고, 조용히, 물결 모양으로 간섭을 일으키는 공간을 잠시 바라보았다. "몸을 소중히 하라라...." 오랜 시간동안 멍하니 앉아있던 이카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몸을 뒤로 눕혔다. 기둥과, 방의 경계를 등뒤로 두었기에, 이카르트의 머리는 창 밖으로 내밀어 졌고, 그는 두 팔을 반쯤 접어 팔꿈치 부분을 머리와 함께 밖으로 내민 채로 방금전 즐기던 밤하늘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불어와 머리칼을 흔드는 밤바람은.... 청량하되 청량하지만은 않았다. 다음날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야 배는 에노사-노마티아 해협의 노마티아측 항구인 에토에 도착했다. 란테르트와 세이피나 이 두 사람은 아침을 먹을 무렵에만 잠시 서로의 얼굴을 보았을 뿐으로 각자의 방에 틀여박혀 버렸다. 그리고 다시 만난 때가 바로 하선할 때쯤이었다. 어느덧 8일째의 밤을 보냈건만, 이 둘은 여전 서로에게 서먹했다. 란테르트는 란테르트 나름대로, 그리고, 세이피나도 세이피나 나름대로 할 수 있는 한의 최대한의 벽을 서로의 사이에 새운 채 조금도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일단, 란테르트는 그러할 필요가 없었고, 세이피나 역시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간단히 점심 요기를 한 두 사람은 에토 항을 벗어났다. 에토항 역시 별다른 특징은 없는 거대한 항구였다. 본래가, 공업과 광업이 발달한 노마티아이고, 또 농업과 축산업이 발달한 에노사이기에 두 나라 사이에는 꽤 많은 양의 교역이 이루어 졌고, 그걸 그대로 반영하듯 에토항도, 그리고 전날 떠나왔던 세호항도 규모는 확실히 컸다. 전통적으로 노마티아와 에노사 사이에는 전쟁이 잦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친선 관계가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사학자들은 다만, 노마티아는 위다와, 그리고 에노사는 소피카와 국경을 접해 있고, 각각 그들 나라들에게 신경을 쓰느라 서로를 공격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을 그 원인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꽤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이전시대까지의 일곱 대륙 사이의 전쟁이라는 것은, 특별히 다른 나라를 점령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다만 외교적 이익을 위한, 혹은 경제적 이익을 위한 시위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이러한 것은 파모로아력 310년이래 350년이상 이어져온 수많은 분쟁중, 그 결과로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점령한 것이 단 한차례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통해 잘 드러나 있다. 뭐 복잡한 것은 이쯤 접어두고.... 이 두 사람은 에토 항을 벗어나 거칠기로 유명한 노마티아의 토노 평야로 접어들었다. 노마티아는 서저 동고형의 지형이다. 동쪽은 일곱 대륙 최대의 게미아 산맥이 턱하니 버티고 서서 역시 대륙 최고의 산인 하야얌을 받들고 있었고, 그러한 산맥이 서쪽으로 오면서 점차로 잦아지고 또 낮아져 이내 바닥과 맞닿게 되는 곳부터가 바로 토노 평야이다. 토노평야는 아라하시 100년 무렵까지도 거의 농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었다. 워낙 척박한데다가 기후 역시 일곱 대륙중 가장 춥기 때문이었다. 위도 상으로는 에노사와 별 차이가 없었으나, 이상하게도 노마티아 쪽의 기온이 더 낮았다.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에토 항을 벗어나 꽤 시간이 흘렀을 무렵.... 세이피나가 돌연 이렇게 말을 꺼냈고, 한 걸음쯤 앞서 걷던 란테르트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검과....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흡사.... 독백과도 같은 무감정한 목소리로 입을 여는 그녀에게, 그녀와 비견할 만큼 감정 없는 목소리로 란테르트가 대꾸했다. "어느 쪽입니까?" 완전히 시체들의 대화다. "서쪽으로.... 수도 하야 쪽인 것 같습니다." 세이피나의 이 대답에 란테르트는 음, 하는 신음을 한차례 내뱉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습니까?" 란테르트의 이 물음에 세이피나는 품에서 카드를 꺼내 들었다. 몇 차례 손을 놀려 뒤섞고는 연속으로 세장의 카드를 뒤집었다. 란테르트로서는 알아 볼 수 없는 괴상한 그림이 각각의 카드에 그려져 있었고, 역시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 카드 윗단과 아랫단에 쓰여져 있었다. "주인 아닌 자가 주인이 되다.... 아마도 도난을 당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검의 주인은 그것을 찾아 서쪽으로 향한 것이지요." 선 채로 간단히 세장의 카드를 뒤집어 점을 보는 방법은 란테르트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비록 란테르트는 스스로 점을 쳐 본적은 거의 없었지만, 어렸을 때 항구에서 일했을 때 점을 치는 모습은 몇 차례 보았었다. 원래 항구라는 곳은 배가 드나드는 곳이고, 그 배라는 것은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아침에 이곳을 출발한 배가 저녁때 저곳에 도착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으니 말이다. 그 때문에 선원들은 미신에 약하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점술가들은 항구를 즐겨 찾는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방법은 처음 보았다. 사실, 이렇게 카드를 세장 뒤집어 점을 보는 방법은 세이피나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다만, 그럴 듯해 보이기 위해 간단히 손동작으로 연출을 한 것이다. 세이피나는 평범한 사제일 뿐이지만.... 아르페오네는 마계와 정령계를 통틀어 가장 많은 정보를 소유하고 있는 존재이다. 점같은 것 없이도 어지간한 일은 그녀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않는다. 다시 몇 시간을 더 걷자, 해는 완전히 서편으로 기울어져 버렸다. 9월을 넘어서서 부터 급격히 낮아지기 시작한 태양 적분에, 해지는 시간이 점점 일러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무렵 에토 항에서 동쪽으로 10휴하(1휴하=약 1킬로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키피아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보다는 규모가 컸고, 도시보다는 작은 이 마을은 다행히 여관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본격적인 무역철은 아니어서인지 약간 한가한 이 마을에 도착한 두 사람은 곧바로 방을 두 개 얻어 각자의 방으로 헤어졌다. 건조하기 짝이 없는 일행이었다. 란테르트는 문득 침대에 걸터앉으며, 이렇게 까지 무미한 동료는 지금까지 한차례도 없었다, 라는 생각을 했다. 비록 자신에게 냉담했던 동료들은 꽤 됐었으나, 그런 사람들조차 자신의 동료가 하나쯤은 있어, 란테르트를 뺀 두사람이 조잘조잘 떠드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이건 홀로 여행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뭐 그쪽이 편할지도 몰랐지만.... 란테르트는 간단히 짐을 푼 후 침대에 몸을 눕혔다. 하루중 가장 많은 생각을 하는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이렇게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니 꼭 천장을 바라보지 않아도 좋았다. 그냥 침대에 누운 채 있으면 이런 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두 자매에 대한 생각이 날 때면 가슴 한쪽이 아리며 목에 걸고있는 펜던트로 자신도 모르게 손이 간다. 그리고 이카르트에 대한 것에 생각이 미칠 때면 만날 수 없음에 안타가운 마음이 절로 든다. 모라이티나나 트레시아에 관한 생각을 할 때면 미소가 배어 나오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과거에 관한 생각으로.... 보통은 마지막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어 버린다. 그리고, 현재.... 어떻게 해야 그 존재를.... 그 존재에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녀를.... 자신의, 그녀의, 그리고 그의 행복을 빼앗아간 그 존재를.... 그 존재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연 무엇이란 말인가? 집착.... 이것은 분명 집착일 것이다. 복수에 관한 집착.... 논리도 부족했고, 실현 가능성도 희박했으나, 란테르트 그 자신은 이 일에 집착하고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에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이렇게 한참을 이런 저런 생각들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몸은 언제나 축 처져 버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인지 모를 때에 잠이 들어버린다. 아무리 인간이 아니라는 소리를 듣는 그 이지만.... 잠이 드는 순간만은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이것 하나가.... 그가 인간이라는 증거이리라.... 싸늘할 만도 하건만.... 이미 10월도 열흘 이상 지났고.... 이러한 허름한 여관, 그리고 허름한 방이라면 새벽에 추울 만도 하건만, 란테르트는 따듯한 밤을 보냈다. 당연했다. 어찌 이런 여자가 가슴팍 꼭 기대어 잠들어 있는데 따! 듯!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란테르트는 다시 한차례 쓰게 웃었다. 이제는 아주 버릇이 된 모양이었다. "트레시아, 그만 일어나." 란테르트의 말에,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던 화려한 붉은 머리칼의 아가씨는 우웅, 하는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이전에 만났을 때와 비교했을 때, 트레시아의 표정은 꽤 밝아져 있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 그때쯤의 표정인 듯 보였다. "호호, 란테르트님~~" 트레시아는 이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탄력 있는 피부가 아침햇살에 건강한 붉은빛을 내고 있었다. 부끄럼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그녀의 도도한 가슴에, 란테르트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했다. "옷이나 입지...." 그런 란테르트의 모습에 트레시아는 살짝 미소지으며 몸 주위에 옷을 둘렀다. 물론, 언제나 처럼 주위의 원소들을 끌어들여 옷으로 형상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주름이 넓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붉은 색 스커트에, 푹신해 보이는 질감의 밝은 붉은 색의 폴라티셔츠를 위에 입었다. 가슴팍으로 흘러 내려온 동그랗고 몽실몽실한 붉은 색 솜방울이 꽤 귀여워 보이는 옷이었다. 하지만 이 옷을 입었음에도, 트레시아 그녀의 매력인 특유의 요염함은 조금도 사그러 들지 않았고, 란테르트는 이 모습을 보며, 어떻게 이렇게 귀여워 보이는 옷을 입고서도.... 요염할 수 있는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트레시아는 머리를 한차례 쓸어 다듬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를 향해 물었다. "오늘은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걸?" 란테르트의 말에 트레시아는 몸을 한차례 휘 돌려 곁에 있던 의자에 앉고는, 다리를 한차례 꼬으며 입을 열었다. "오호호호~~ 그래 보여요?" 확실히, 이 웃음 하나만으로도 그전과는 분위기가 다름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있어?" 란테르트의 물음에 트레시아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 했다. 꼬지 않고 바닥에 댄 다리의 발뒤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그녀는 의자의 등받이를 앞뒤로 까딱 까딱 하고 있었다. "물론이죠. 마계에 살고 있는 무서운 마귀할멈이 요새 눈에 안 띄어요. 언제나 이 인간세상으로 나오려 하면, '아르트레스님, 나크젤리온 님의 심기를 건드리지 마십시오. 나크젤리온 님이 분노를 터트리면, 그분에게 화가 미칩니다.' 하면서 방해를 하고, 내가 하려는 일은 사사건건 걸고넘어지며, 무모하다느니 하는 등의 말을 해대는데...." 트레시아는 여기까지 말하며 손으로 한차례 부채질을 했다. 생각만 해도 더운 모양이었다. "까장까장 해 가지고는.... 그러니까, 남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거야. 워낙 성격이 깔끔스러워서 그 아이 밑에는 버텨 낼 수 있는 부하가 없어요. 한 사나흘 정도 일을 하다가는 차라리 저를 소멸 시켜 버리십시오.... 하고 아르카이제 님에게 탄원을 올리니...." 란테르트는 그녀가 누구를 이야기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다시 한 번 물었다. "마귀할멈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거지?" 그의 물음에 트레시아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야 물론, 아르페오네 그 아이를 이야기하는 거죠. 내 동생 아르페오네. 란테르트 님이 잘 몰라서 그렇지, 그 아이 정말 무시무시해요. 한 번은...." 트레시아가 여기쯤 말할 때, 돌연 란테르트의 방문에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고, 트레시아가 곧바로 그 노크소리에 대꾸했다. 물론, 그녀의 방식대로 였다. "방해하지 말고 사라져라." 하지만, 그 노크를 한 존재는 그런 트레시아의 말에는 아랑곳 않은 채 문을 열었다. 바로 세이피나였다. 란테르트는 세이피나 그녀답지 않은 이 행동에 잠시 이상함을 느꼈다. 란테르트가 생각하기에 세이피나는 결코 이렇게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올 만한 여자는 아니었다. 란테르트가 막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트레시아는 발꿈치를 들어 의자 앞다리를 들고 있다가 그녀의 등장에 크게 놀라며, 균형을 잃고 뒤로 콰당 넘어졌다. 란테르트는 놀라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를 부축했고,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트레시아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며 세이피나를 바라보았다. 트레시아는 경악에 휩싸여 말까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 너는...." 그때, 트레시아의 머리 속에 세이피나, 아니 아르페오네의 전언이 들려왔다. [역시 단순하시군요....] 뜸금없이 내뱉은 아르페오네의 이 말에 트레시아는 발끈 했다. [무슨 소리야?] 아르페오네의 이 말은, 이카르트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한지 만 하루가 지나지 않아 보란 듯이 나타나는 트레시아를 비꼰 것이었다. 정말이지 언제나 철저히 행동패턴이 읽히는 아가씨였다. 아르페오네는 트레시아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은 채 이렇게 말했다. [임무 중입니다. 란테르트 님께, 저의 정체를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녀의 말에 트레시아는 란테르트의 팔에 기댄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 [무, 무슨 일인 거야?] 트레시아의 물음에 아르페오네가 그 특유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전언을 전해왔다. 전언까지 무감정한 그녀였다. [마족의 공적인 란테르트 님의 행동을 감시하는 것이.... 그것이 이번 저의 임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의 정체를 밝히지 않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트레시아는 음, 하는 신음을 잠시 내뱉었다. 란테르트는 트레시아의 표정이 수시로 바뀌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이내 두 아가씨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둘은 아는 사이인 듯 했다. 그때, 돌연 트레시아의 표정이 장난기 넘치는 그것으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세이피나와 대면한 이래로 약간은 진지한 채로 있던 그녀의 표정이 갑작스레 이렇게 바뀌자 란테르트는 그 둘 사이의 대화 내용이 몹시 궁금했으나, 전언으로 주고받으니 알 도리가 없었다. 한편 트레시아는 전언으로 한차레 오호호호~~하는 웃음을 웃었다. 전언으로 이런 것까지 가능하다는 점이 조금 놀라운 듯도 하다. [싫어. 내가 왜 너를 도와야 하지?] 트레시아의 이 말에 아르페오네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고, 트레시아는 활짝 웃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르페오네양! 지금까지 맡은 그 많은 임무의 성공률이 100퍼센트라는 경악할 만한 숫자를 기록하고 있는 최고의 마족.] 트레시아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돌연 아르페오네가 끼여들었다. [참고로 아르트레스 님의 임무 성공률은 37퍼센트이지요.] [읔....] 트레시아는 그녀의 말에 잠시 표정을 일그러뜨렸으나 이내 다시 장난기 넘치는 그것으로 바꾸었다. [그런 이야기를 왜 지금 꺼내는 거야? 아무튼, 난 너의 그 100퍼센트라는 숫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언제나 완벽 완벽. 너도 조금은 흔들릴 필요가 있어.] 트레시아는 이렇게 말하며 무릎을 꿇은 채 란테르트의 팔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란테르트에게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란테르트 님~~~ 여기 이 아이는...." 아르페오네의 표정이 약간 조급해지며 트레시아의 머릿속에 이러한 전언이 전해져 왔다. [아레스미온, 키르시티, 겐다르폰, 쥬멜리안, 베르세칸....] 그녀의 이 알 수 없는 몇 개의 단어에 돌연 트레시아의 낯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 그런....] 아르페오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슬라스트, 아이스레니카....] [그, 그만둬....] 트레시아는 경악 섞인 목소리로 외쳤고, 아르페오네는 아주 조그마한 미소를 살짝 지었다.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만.... 아마, 8년전 이 명단에 란테르트 님의 이름이 오를 뻔했지요?] 아르페오네의 목소리는 이런 말을 할 때까지도 무미건조했고, 트레시아는 이 얄미운 그녀의 목소리에 화가 솟구쳤다. [치사한 것!!] 트레시아의 말에 아르페오네는 더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란테르트는 곁에서, 트레시아의 표정이 돌연 화가 난 듯 하게 변하고, 세이피나의 표정에 미소가 어리자 이 둘의 관계를 대강 알 수 있을 듯 싶었다. 역시.... 세이피나는.... [란테르트 님께 알려 드린다 해도, 그분은 웃으시며 이해 하실 겁니다. 원래 마음이 넓은 분이시니.....] 아르페오네는 이렇게 쐐기를 박았고, 트레시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란테르트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모르는 일도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 분명, 미남자 수집이 취미라고 이야기했었으니.... 하지만, 왠지 그녀의 입을 통해 발설되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 같았다. 트레시아의 머리 속에는 지금 이러한 상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상상 속에서 트레시아는 무릎을 비껴 꿇고 한 손을 바닥에 댄 채, 다른 한쪽 손을 란테르트를 향해 뻗고 있었고, 란테르트는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을 얼굴 가득 띄며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펄럭이는 망토를 뒤로한 채 몸을 돌리고 있었다. "실망이야! 트레시아." "떠나지 마세요, 란테르트 님!!!" 트레시아의 얼굴위로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렸고, 그녀는 이내 부들부들 떨리는 음성으로 전언을 보냈다. [그.... 그만둬....] 이렇게 말하며 트레시아는 란테르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아이는 세이피나로.... 제가 이곳에서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습니다." 동시에 트레시아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세이피나에게 인사했다. "오래간 만이야 세이피나." 세이피나는 그런 트레시아를 향해 살짝 고개를 한차례 끄덕여 보였다. 란테르트는 잠시 더 두사람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트레시아처럼 표정이 확확 변해 가지고는 전언을 이용해 대화를 나누는 의미가 없다. 만약 세이피나가 트레시아만큼 단순했다면.... 두 사람의 대화는 전언으로 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란테르트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한가지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바로, 이 눈앞의 세이 피나라는 여자가.... 바로 그 아르페오네라는 사실을 말이다. 란테르트는 아르페오네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 이카르트의 입을 통해 들었었다. 간단한 생김새, 머리칼 색이 어떻다는 정도의 이야기와 언제나 아르에 라는 이름의 새를 어깨에 얹어 놓는다는 정도뿐이었지만, 그 정도면, 지금으로써는 충분했다. 일단, 아르트레스, 트레시아 그녀와 대등히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보아 마족이라면 적어도 그녀와 동급일 것이다. 그리고 아르트레스와 동급의 마족이라면, 아르르망과 아르페오네뿐이다. 아르르망은 남자이고, 남는 것은 이렇게 아르페오네 한 명이다. 란테르트는, 하지만 세이피나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전까지는 일단 먼저 이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세이피나양, 트레시아와 서로 아는 사이이신가 보군요." 란테르트의 말에 세이피나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예.... 예전에 한 번.... 곤란에 처한 트레시아 님을 제가 구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담담한 말에 아르트레스의 눈썹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뭐? 네가 날 구해 줘?] [....] 아르페오네는 전언으로는 답하지 않은 채 계속해 입을 열었다.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입고 만신창이가 된 채 도시 안 쓰레기 더미에 처박혀 있던 그녀를, 제가 구해서 치료해 준 적이 있습니다." 아르페오네도, 이 말괄량이 누이 앞에서는 약간의 장난기가 되살아 나는 모양이었다. 원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말에 트레시아의 표정은 조금 더 일그러졌고, 막 화를 터트리려는 순간, 세이피나의 조용한 얼굴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지요? 트레시아님....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트레시아는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들쳐 올라가는 것을 보며 흐음, 하는 신음을 한차례 내뱉고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비참했던 것은 아니고...." 트레시아는 대강 얼버무리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세이피나의 공격은 결코 느슨해지지 않았다. "부끄러워하실 것은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참!패!를 당하는 것이야 본디 비일비재한 법이니까요." 아르페오네의 목소리에도 억양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란테르트는 이날 처음 알았다. 분명 참패라는 이야기를 할 때에는 목소리의 템포가 조금 느려지며 약간의 엑센트를 주었으니 말이다. 트레시아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미칠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확 채찍을 꺼내들어 저 얄미운 아르페오네를 휘갈겨 주고 싶었으나.... 일단, 한다 하더라도 별다른 피해를 입힐 수 없을뿐더러.... 그랬다가는 자신의 미남자 컬렉션 리스트가 란테르트 앞에 공개되어 버릴 것이 뻔했다. 리스트만 공개된다면야 애교로 봐줄 수도 있지만.... 직접 데리고라도 온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호, 호, 호, 호.... 그때는 정말 고마웠어." 트레시아는 어느 누가 들어도 억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웃음을 한차례 흘리고는 세이피나에게 고개를 숙였고, 세이피나는 그런 트레시아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만 에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란테르트는 이 두 자매(?)의 싸움을 재미있게 지켜보다가, 이렇게 끝이 남과 동시에 멍청히 입가에 고여있던 미소를 지우며 입을 열었 다. "아, 이렇게 두분이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정말 잘된 일입니다." 이 란테르트의 말에 세이피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정말 잘 되었지요...." 라고 말했고, 트레시아는 이를 바드득 갈며 속으로, "비러먹게도 잘됐다...." 라고 중얼거렸다. 란테르트는 이내 세이피나를 향해 물었다. "그보다.... 무슨 일로 아침부터 제 방을 찾아 오셨습니까?" 확실히, 지금까지 이 두 사람은 란테르트가 언제나 방문을 두들겨 세이피나를 불러냈었다. 오늘처럼 이렇게 세이피나가 먼저 찾아온 적은 없었다. 트레시아는 란테르트와의 기분 좋은 만남을 파삭 하고 깨뜨려 버린 아르페오네에게 내심 불만을 품고 있다가, 란테르트의 이러한 말이 나오자 돌연 한가지에 생각이 미치었다. "어머, 세이피나. 여전히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구나." 트레시아의 이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에 란테르트는 무어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고, 트레시아는 입에 손을 가져가며 호호 한차레 웃은 후 말했다. "사제이면서 정숙하지 못하게.... 그런 취미가 있잖아. 전에도 함께 있던 남자 사제를 파문 당하게 만들고...." 트레시아의 이 말에 이번에는 세이피나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오호호호호~~~! 난 당하고는 못살아.] 아르페오네에게서 들려온 전언에 트레시아는 득의 만면한 얼굴로 이렇게 대꾸했고, 그녀의 이러한 대답에 아르페오네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전언으로 대꾸했다. [아레스미온 부터 소환하겠습니다.] 트레시아는 그녀가 이렇게 나올 줄을 알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대했다. [그건, 내가 네 정체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계약 물로 채택된 것이야. 설마 계약위반을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계약 위반은.... 우리들에게는 상당히 큰 죄야.] 이번에는 트레시아의 승리인 듯 했다. 세이피나는 얼굴에 수심을 드리우며 입을 열었다. "트레시아님,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농담? 글세.... 난 농담은 서툴러서...." 트레시아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이렇게 대꾸했고, 세이피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농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친숙함(??)을 보며 세이피나에 대한 자신의 심증을 더더욱 굳혔다. 세이피나는 점점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려 하자 어서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란테르트 님이 누군가 대화를 하고 있는 듯 하여 이상한 생각에 이렇게 실례를 무릅쓴 것입니다. 이제, 별 일이 없으니.... 전 제 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세이피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란테르트의 끄덕이는 고개를 보자 마자 몸을 돌려 란테르트의 방을 나섰고, 트레시아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통쾌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한마디했다. "란테르트 님은 넘보지 말아 주었으면 해. 그렇게 해주겠지? 사제 세이피나." 세이피나는 걸음조차 멈추지 않은 채 방으로 돌아갔다. 세이피나가 막 문 저편으로 사라지자 마자 트레시아는 침대에 몸을 던지며 엎드린 채 꺄하하 신나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처음의 패배는 그 단순하면서도 낙천적인 성격으로 잊은지 오래였고, 두 번째의 승리만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는 그녀였다.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엷은 미소를 지었고, 트레시아는 이내 몸을 반바퀴 ㄸ구르 굴려 침대 위에 누운 채로 란테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란테르트는 머리가 살짝 흐트러진 채로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이번에도 그냥 놀러 나온 거야?" 트레시아는 누워있는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요즈음은 그다지 할 일이 없거든요. 마계와 정령계 사이를 왔다갔다 거리며 설쳐대던 디아 놈들도 모두 쓸어버렸고...." 트레시아는 이렇게 말하다 돌연 몸을 일으켜 앉으며 입을 열었다. "아참! 란테르트 님.... 앞으로는 그런 무모한 일은 하지 마세요." 그녀의 이 뜸금없는 말에 란테르트는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디아의 봉인을 풀어 버리셨잖아요." 트레시아의 말에 란테르트는 아, 하는 나지막한 탄성을 내질렀고, 이내 곁에 있던 트레시아가 쓰러뜨린 의자를 세워 그곳에 걸터앉았다. "디아?.... 그 이상한 신전에 있던 하얀 괴물이 디아인가?" 란테르트의 물음에 트레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디아, 디멘션 아설레이셔너를 간단히 그렇게 불러요. 차원의 동요라고도 하는 녀석인데.... 우리 마족들이 신들과 같은 고위 정신 체들의 동요로 태어난다면, 그들은 무생물들의 동요로 태어나는 저급한 족속이에요. 한마디로 힘만 세고 머리는 텅텅 빈 그런 놈들이죠." 그때, 트레시아의 머리 속에 짤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렇군요....] 물론 세이피나의 말이었다. 아마도 방금전 트레시아에게 당한 것 때문에 아직까지도 반격의 기회를 찾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 그렇군요의 이 짧은 말은 물론 트레시아를 놀린 말이다. 힘만 세고 머리가 텅텅 비었다 라는 것은 소시적 아르페오네가 아르트레스를 놀릴 때 자주 쓰던 말이다. 트레시아는 그런 그녀의 말을 짐짓 무시한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일단 눈앞에 보이지 않는데다가, 그다지 길지 않을 것이 뻔한 란테르트와의 만남을 아르페오네와의 말싸움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디아는 우리들과는 달리, 다른 세계로 넘나들 수는 없어요. 정신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편이지만.... 그 무지막지한 물리력 때문에 상대하기 까다로운 편이죠. 란테르트 님이 깨운 그 녀석은 그중 굉장히 강한 편에 속하는 것으로, 신계의 디아를 제외하고는 최강 급의 디아입니다." 트레시아의 말에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이카르트가 직접 나선 것인가?...." 그의 말에 트레시아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고 계셨군요...."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트레시아는 이렇게 말하며 잠시 고개를 숙였고, 이내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얼굴에 미소가 그득했다.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미소를 한차례 지어주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이제 나는 출발해야 해.... 트레시아는?" 란테르트의 이러한 물음에 트레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약간 여유가 있어요. 따라가겠어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왠지 모를 모순에 약간 혼란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나크젤리온을 죽이려는 자신을....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대하는 것인가?.... 하지만, 란테르트는 이내 이 물음의 대답을 스스로 찾아냈다. 그것은.... 나크젤리온을 증오하는 자신이 이카르트를 보고 싶어하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트레시아와 세이피나, 이 두 사람과 함께 키피아 마을을 벗어난 란테르트는 약간 불쾌한 느낌을 받으며 오전 나절을 보냈다. 물론, 트레시아와 함께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즐거우면 즐거웠지 결코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게다가 세이피나.... 란테르트는 단지 이카르트의 세 아이중 하나라는 이유만으로 그녀에게 커다란 호감을 가졌고, 전날과는 훨씬 다른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것 역시 기분이 나빠질 수 없는 요인이었다. 문제는, 뒤를 졸졸 쫓아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굉장히 먼 곳에서 말을 탄 채, 모두 네 사람이 이들 셋을 따라오고 있었다. 그것도 세명과 한 명씩 두 무리였다. 전날 여관에 묶을 때부터, 여관 1층의 주점에서 흘끗 흘끗 세이피나를 바라보던 세 사람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들중 앞의 세 명은 그들일 것이다. 란테르트가 신경을 쓰는 것은 이 세사람 보다도 그 뒤를 쫓는 한사람이었다. 느껴지는 마법력이 보통을 넘는다. 이 두 무리중 앞의 세명은 지금 란테르트의 등뒤로 반휴하쯤 떨어진 곳에서 조심히 뒤를 쫓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다시 반휴하 떨어진 곳을 따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불쾌할 뿐, 위협은 되지 못하였다. 란테르트는 물론이거니와 세이피나와 트레시아조차 당해낼 수 없는 사람들 따위가 무슨 위협이 되겠는가? 다만 조금 신경이 쓰일 뿐이었다. 점심 무렵까지도 그 사람들은 란테르트의 뒤를 쫓았다. 그사이 일행은 20휴하에 가까운 거리를 걸었고, 키피아 마을의 북쪽에 있던 키페숲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이대로 쭉 동쪽으로 나가다 보면 토노 평야 중앙에 덩그러니 위치한 커다란 도시 트라금에 도달하게 된다. 거리는 약 100휴하 정도로 이 속도라면 이틀하고 반나절 정도면 충분했다. 워낙 척박한 곳이기에, 이 키페 숲이라는 곳도 성글성글한 것이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회백색의 표피를 가진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조그마한 잎사귀를 갈색으로 곱게 물들이고 있다. 이제 11월이 되면 바람의 손길에 녹아 이들 모두는 바닥으로 스스렁 스러지고 말 것이다. 전해에도.... 그리고 그 전전해 에도 그러했으니.... 아무튼, 숲이 공격하기 적당한 곳이라는 것에는, 나뭇잎들이 갈색으로 화장하여 서정적인 분위기를 풍기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일행이 막 숲에 들어설 무렵, 뒤를 쫓던 세명의 말을 탄 사람들은 말을 거칠게 몰기 시작했다. 빙 돌아 란테르트 등에게 그들이 접근하는데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고, 란테르트는 그제서야 자신을 짜증나게 했던 네사람중 세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마지막의 한사람은 천천히 일행에게 접근하며 이쪽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는데, 섣불리 공격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왠지 일전에 만난 용사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모두 세명이 세필의 말 위에 앉아 있었는데, 이들중 한 명은 나 흉악범이요, 하고 써 붙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머리칼은 짧게 짤라 범죄형의 얼굴을 더더욱 거칠게 만들었고, 이마와 뺨에 있는 상처가 역시 비슷한 효과를 내고 있었다. 손에는 모닝스타를 들고 있었는데, 철구에 박힌 쇠이빨이 무시무시한 검은 색을 내고 있었다. 다른 두명중 한 명 역시 결코 착해 보이지는 않은 인상 이였다. 무기는 한 쌍의 손도끼로, 두 개의 도끼의 자루 부분을 긴 쇠사슬로 연결해 장거리 공격도 할 수 있게 만들어 두었다. 생긴 것은 전의 사람보다는 훨씬 선해 보였으나, 눈매는 더더욱 악독했다. 마지막 사람은 유일하게 사람처럼 생긴 자로, 말쑥한 얼굴에 장검과 단검을 양손에 쥐고 있었다. 모두들 마상에 앉은 채로 란테르트 일행을 포위한 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기세가 자못 험상궂었다. "이놈! 어서 가진 것 다 내놓고, 그 여자들도 이쪽으로 넘겨라. 무릎 꿇고 싹싹 빈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란테르트는 식상해 버린 이 대사에 잠시 지루함을 느꼈다. 역시 흉악범처럼 생긴 녀석은 머리가 그다지 좋지 못한 모양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강도들 누구라면 써먹는 기호화되고 매너리즘에 빠진 이 한마디를 내뱉고는 그저 그 험한 모닝스타를 휘두를 뿐이니 말이다. 분명 다음에 할 만한 말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몸으로 직접 시위하는 것일 게다. 트레시아는 란테르트의 팔에 팔짱을 낀 채였고, 세이피나는 언제나와 같이 반보쯤 뒤에서 란테르트를 따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둘중 어느 아가씨도 이 무시무시한(?) 강도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흉악범에 이어 쌍도끼가 말했다. "우리는 현상금 2만 하르나 붙은 사람들이다. 꼴을 보아하니 검을 조금 익힌 듯 한데, 함부로 꺼내들고 설치다가는 크게 다칠 것이야. 순순히 저분의 말씀을 따라라." 그의 이 말에 란테르트는 순간, 겨우 내 50분의 1인 주제에.... 라는 생각이 떠올랐고, 왠지 재밌다는 생각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란테르트가 웃자, 이번에는 말쑥한 검사가 입을 열었다. "웃을 여유를 부리는 것을 보니 상당히 자신감에 넘치는 모양이군. 좋다. 네가 자초한 화이니 우리를 탓하지는 말아라!" 언제나 그렇듯 제한된 정보 하에서는 정확한 판단을 하기 어렵다. 만약 이들이 눈앞의 사내가 그 유명한 크림슨 아이즈로, 자신들 셋의 현상금보다 50배나 되는 현상금이 걸려 있는 남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결코 이러한 대사들을 내뱉지는 않았을 것이다. 란테르트는 잠시 이들을 보며 생각에 잠기었다. 자신의 허름한 복장이나, 세이피나의 사제복 등을 보았을 때는 결코 돈을 노리고 공격해 온 무리는 아닌 듯 했다. 그렇다면 목표는 뻔한 것.... 세이피나나 트레시아, 혹은 둘 모두였다. 하긴.... 저렇게 남자들끼리만 붙어 다니다 보면, 문득 문득 여자가 그리워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런 그들을 향해 트레시아가 한마디하려다가 란테르트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직.... 제게 무기를 휘두르기 전이니, 달아나시고자 한다면 지금 달아나십시오." 합리는 때로 감상적인 것보다 더더욱 비합리적으로 보일때가있으니.... 란테르트의 말에 세사람은 동시에 허허, 쿠하, 하하, 하는 웃음을 웃었다. 다르게 생긴 만큼 성대구조와 구강구조가 다를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렇기에 웃음소리도 약간씩은 달랐다. 하지만, 웃음소리가 의미하는 바는 같았는데, 대강 '미친놈 왠 헛소리냐?' 라는 말 같았다. 그들의 말에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동시에 그는 검을 뽑아들며 몸을 날려 정면에 서 있는 그 흉악범을 향해 휘둘렀다. 평소라면 상대가 검을 휘두를 때까지 결코 먼저 손을 쓰지는 않았을 터이나, 왠지 눈앞의 녀석들에게는 정이 가지 않았다. 스악, 하는 검이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말이 바닥에 쓰러졌다. 동시에 말 위에 타고 있던 사람의 앞가슴에 한줄기 혈흔이 맺히며 푸악 하는 소리와 함께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바닥에는 동강나버린 말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와 사람의 가슴에서 솟아난 피가 뒤섞여 온통 붉은 내를 이루었고, 란테르트는 피가 흐르는 검을 닦지도 않은 채 두 번째 사람을 향해 달렸다.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는 25세 가량의 사내가 한 명 있었다. 바로, 란테르트가 신경 쓰고 있었던 그로, 짙은 밤색 머리칼을 세련되게 다듬고 있었다. 뒷머리는 상당히 긴 편으로 중간에서 한차례 묶었는데, 갸름한 턱선과 함께 꽤나 날카로운 느낌을 주었다. 눈매 역시 상당히 날카로운 편이었고, 코는 살짝 앞으로 굽어 전체적으로 꽤나 냉막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란테르트나 세이피나에 비한다면.... "훗.... 역시 크림슨 아이즈.... 100만 하르라...." 막 이 말을 내뱉었을 때 두 번째 사람의 머리가 가로로 동강나 버렸다. 그 사내의 운이 나빴던 것인지, 란테르트가 의도한 일인지.... 아무튼 그는 섬뜩한 비명을 숲안에 남기며 바닥으로 털썩 쓰러졌다. 짙은 밤색 머리칼의 이 사내는 뒤이어 다시 한마디를 내뱉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라 해도..... 내 2만 하르를 두동강 내는 것은 조금 곤란한데.... 이래가지고는 이번 사냥은 허탕인걸.... 쯧쯧." 2만 하르를 운운하는 것을 보아, 이 사내는 란테르트가 아닌 저 세사람을 쫓아온 모양이었다. 그 역시 말에 타고 있었는데, 그의 마구에는 세자루의 검이 꽂혀 있었다. 단검, 소검, 대검의 세 개로 대검의 경우에는 오른편에, 그리고 다른 검들은 왼편에 빗겨 질러 있었다. 한편 허리에는 장검을 차고 있었는데, 상황에 따라 검을 바꾸는 모양이었다. 귀에는 조그마한 귀걸이가 달려 있었다. 검정색으로, 밀알만큼 조그마한 구슬이었는데, 아마도 마법과 관련 있는 장신구인 듯 했다. 란테르트가 느꼈듯 마법도 쓸 줄 알았으니 말이다. 막 이쯤, 란테르트에 의해 세 번째 사람이 바닥에 쓰러졌다. 이미 앞서 세상을 등진 두 사람이 흘린 피로 질펀해진 바닥에 떨어진 그는 철퍽 하는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피를 튀게 만들었으나, 그 모습에 트레시아도, 세이피나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아니, 세이피나는 의례적으로 미간을 살짝 좁혔으나 결단코 그것은 의례적인 반응이었다. 란테르트가 세 사람을 동강내는 모습을 지켜본 이 갈색 머리칼의 남자는 천천히 말을 돌렸다. 일단 란테르트 등에게 불안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왜냐하면.... "후후.... 100만 하르.... 한 번 도전해 볼까?" 그의 바운티 헌터로써의 승부 욕이 잠시 불끈 솟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머리를 끌쩍였다. "될 리가 없지.... 크림슨 아이즈인데...." 포기도 빠른 사내였다. 멀리 란테르트 등은 다시 걸음을 옮겨 세이피나가 보았던 데로 에르테일이 있을 노마티아의 수도 하야로 향했고, 이 갈색 머리칼의 현상금 사냥꾼은 천천히 말을 몰아 그들의 뒤를 쫓았다. 딱히 할 일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 반대였기에.... 그저 크림슨 아이즈라는 사내를 지켜보고 싶었다. 18. 란테르트 무투회에 참가(?)하다!!! 란테르트는 며칠간이나 자신들의 뒤를 따라오는 그 남자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을 귀찮게 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을 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그였다. 트라금 시를 지난지 2일.... 그 괴상한 강도 떼들을 세 번 검을 휘둘러 베어버린지도 3일이나 흐른 지금 일행은 드디어 게미아 산맥의 서단에 도착했다. 막 봉긋 봉긋 솟아난 산들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그 규모를 더해갔다. 방긋 솟던 것이 어느새 봉긋 솟아나고, 다시 불쑥 솟아나 결국에는 불끈불끈한 산들이 되어 있다. 아직 일행이 걷고 있는 곳은 봉긋 봉긋 산이 자라나 있는 곳으로, 꽤 규모 있는 언덕들이 열을 지어 서 있다. 길은 산과 산 사이의 계곡을 따라 나 있다. 능선을 가로지르고, 협곡 틈새를 비집으며, 흡사 뱀처럼 구불구불 나 있는 길은 눈앞에 있는 곳을 가면서도 꽤 긴 시간을 잡아먹어야 할 때가 비일비재했다. 그래도 길이라고 만들어 놓은 것은 꽤 넓은 편으로, 말 한 마리가 끄는 마차 두 대는 너끈히 지나갈 만 했다. 이제 슬슬 피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종종 만나는 사람들중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일행 곁을 시쳐 지나가며 노마티아 남부로는 가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현재 위다에서 바다를 건너 노마티아 공략을 위해 주둔하고 있는 2만의 위다 병사들이 닥치는 데로 약탈을 하고 있으니.... 평소의 군이라면 결코 이렇게 막무가내일 수 없다. 아마도, 위다 본국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 그것은 분명 세레티가 급작스레 본국으로 돌아간 일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군 기강이 흐트러졌으리라. 그리고 어떠한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보고 온 참상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수확을 눈앞에 앞둔 농장이 불에 휩싸이고.... 마을이 쑥대밭이 되어, 부녀자들은 납치를 당하고, 마을 안의 보화들은 모조리 약탈을 당하고, 등등 전형적인 이야기들이었다. 하긴, 전쟁이라는 것은.... 사람을 매너리즘에 빠지게 만든다.... 본능에 충실하게.... 죽이고, 또 파괴하고.... 이 두 가지만을 반복하는.... 란테르트는 이런 이야기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그리고, 아마 곁에 있는 두 아가씨들은 오히려 기쁠 것이다. 어찌되었건, 존재물의 악감정이라는 것은.... 이들에게는 에너지원이니 말이다. 하지만 간혹 란테르트의 호기심을 끌 만한 이야기가 있었으니.... "노마티아 왕실에서는 지금 무투회를 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뭐라나? 아무튼 무슨 전설의 명검을 걸고 하는데.... 위기에 빠진 노마티아를 구해줄 뛰어난 용사를 찾고 있답니다. 말을 빌려 수도로 빨리 달려간다면 아마도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검이다.... 그리고 무투회.... 그렇게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다. 과거 아라하시 때에는 상당히 많은 무투회가 열렸었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은 맹수와 노예, 혹은 노예와 노예의 싸움으로 귀족들의 즐기기 용이었었다. 하지만, 파모로아시대가 되며 노예가 사라짐에 따라 무투회는 약간 그 성격을 달리하였고, 또 그 횟수도 크게 줄었다. 무투회는 파모로아시대가 되면서, 유희용에서 무관 선발용으로 그 용도가 변하였다. 물론,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여전 유ㅎ거리일 테지만, 적어도 그곳에 임하는 사람들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참가했다. 종종 자신의 경지를 테스트해 보기 위해서 참가하기도, 그리고 순수하게 그저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얻기 위해 참여하기도 했으나, 어찌되었건 소모품인 노예를 보며 즐기기 위한 과거의 무투회와는 확연히 다르다. 검이 걸린 무투회.... 란테르트라면 당연히 참가할 만 하다. 그리고.... 이기지 못할 확률이라는 것은.... 구불구불 산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드러나기를 기십번 반복하는 길을 따라 온통 색깔을 제멋대로 물들인 산을 배경으로 여행하듯 거닐기를 여러 시간, 일행은 오후 무렵 한 도시에 도착했다. 입구의 푯말을 보니 이름은 우루스이다. 트라금시, 그리고 우루스시 이 둘은 란테르트는 이번에 두 번째로 밟아보는 곳이었다. 처음은 바로 이카르트와 모라이티나와 함께 에라브레의 뒤를 쫓을 때였다. 그때는 에라브레에게 온 신경을 빼앗겨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었지만, 이제와 다시 보니 이 우루스라는 이 도시, 굉장히 독특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일단, 우루스라는 도시는, 도시가 아니라 요새였다. 지금에 와서는 요새 주변의 마을이 비약적으로 성장을 하여 요새보다는 도시라는 인상을 짙게 풍기고 있어, 이곳의 영주의 직위도 요새방위사령관이 아닌 시장이 되어 있으나 어찌되었건 전시에는 요새가 될 것이다. 아무튼 요새이니만큼 전략, 전술적 요충지에 도시가 세워져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양쪽으로는 가파른, 절벽에 가까운 산이 서 있었고, 그 산 사이에 길을 따라 도시가 길쭉이 성장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도시가 중심 도로를 따라 길게 성장하는 것이 당연했으나, 이 우루스시의 경우에는 조금 그 정도가 심했다. 여기까지는 그냥, 협곡 사이에 도시가 들어서면 이런 모양을 이루겠구나.... 하고 예상이 가능하였으나, 이 우루스 시에는 조금 특별한 건물 양식이 그에 보태져 있었다. 다름 아닌, 절벽만큼이나 가파른 산중간에 건물을 짓는 것으로, 거의 6, 70도에 이르는 사면을 직각으로 깍아내어 그 위에 나무로 집을 짓는다. 회색빛 나는 무른 바위를 깍아내어 지어 놓은 흰색의 집들은 확실히 신비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집 앞에서 아래 도로로 뻗어 내려온 위태위태해 보이는 계단을 제외하고는, 꽤 살만할 것 같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도로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높이 솟아있는 도시의 전체적인 구조 때문에, 도로에 서 있다보면 쉽게 약간의 위축감을 느낄 수 있었다. 답답하다면 답답했고, 웅장하다면 웅장할 만 했으나, 후자보다는 전자를 느끼기가 훨씬 수월했다. 일행은 우루스시 입구 근처의 여관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뭐 조금 더 무리해 밤새도록 걷는다면 다음날 새벽까지 에르테일이 있는 노마티아의 수도 하야에 도착할 수 있겠으나, 그렇게 까지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장거리 달리기에서 전력 질주를 해 보았자 얻는 것은 지친 몸뚱이 뿐이다. 트레시아도, 세이피나도 이점 한가지에 있어서는 도저히 귀염성을 느낄 수 없는 여자들이었다. 이점이란 다름 아닌, 새로운 장소에 대한 호기심을 호들갑스럽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미 2600년을 넘게 살아온 존재들이기에 그다지 신기해하는 것이 없었다. 그 무덤덤한 란테르트조차도 주위를 한차례 휘 둘러보며 절벽 중간에 세워진 괴상한 집들을 향해 시선을 두었건만, 트레시아도 세이피나도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이 두 아가씨를 데리고 여관으로 들어온 란테르트는 방을 두 개 얻은 후, 이내 여관 일층의 퍼브에서 간단한 요기거리를 시켰다. 트레시아와 세이피나, 그리고 란테르트 이 세사람은 모두 식성들이 꽤 다른 사람들이었다. 하긴 그러고 보니, 먹어야할 이유를 가진 사람은 란테르트 한명 뿐이었다. 트레시아는 해산물 쪽을 즐겨 먹었고 세이피나는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 하지만 이 둘 모두 이 노마티아에서는 구하기 힘든 것으로, 적당한 것을 찾기 힘들었다. 대신, 이 노마티아에는 산이 많았고, 산에서 나는 음식은 상당했기에, 트레시아는 버섯요리를, 그리고 세이피나는 과일 파이를 시켰다. 노마티아의 특산물인 틸 열매로 만든 틸 파이였다. 란테르트는 그냥 틸 잼과 곁들여 먹는 밀빵을 한 조각 시켰을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지금 도대체 정확히 어디로 가고 있는거에요?" 따듯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야채를 곁들여 볶은 버섯 요리를 바라보며 두 손을 부드럽게 비비며 트레시아는 란테르트에게 이렇게 물었고,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세이피나를 향해 시선을 두었다. 세이피나의 앞에는 붉은 색의 틸 열매가 드문드문 보이는, 역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틸 파이가 놓여져 있었는데, 세이피나는 음식에는 그다지 커다란 관심이 없다는 듯, 란테르트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마자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의 새 아르에는 먹을 것에 관심이 꽤 있었다. 세이피나가 말하는 사이 그녀의 어깨에서 파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현재.... 에르테일도, 그리고 그 검의 주인인 파소 가의 사람도 노마티아의 수도인 하야 시에 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파소 가의 사람중 한 명이 이 도시에 있군요.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 세이피나의 말에 란테르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여관의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란테르트의 뒤를 쫓던 그 갈색 머리칼의 남자로, 그는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트레시아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녀석.... 란테르트님, 알고 계신가요?"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세사람과 싸운 그날 이후로.... 계속해 우리들 뒤를 밟고 있어." 곧바로 트레시아가 다시 물었다. "이유가 뭘까요?"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도저히 알 방법이 없었다. "그보다.... 무얼 하는 사람일까?" 란테르트는 트레시아를 향해 이렇게 물었고, 트레시아는 그의 물음에 곧바로 고개를 세이피나에게로 향했다. 뭐 어쩌니 저쩌니 해도, 이런 쪽에는 확실히 아르페오네가 자신보다 훨씬, 아니 조금 뛰어났다. 트레시아의 눈빛을 통한 물음에 세이피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운티 헌터입니다."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가 되물었다. "바운티 헌터? 현상금 사냥꾼 말인가?" 세이피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란테르트는 훗, 하는 헛웃음을 한차례 터트렸다. 바운티 헌터라니.... 그럼 지금 크림슨 아이즈라는 100만 하르 짜리 사냥감을 노리고 있는 것인가? "확실히.... 크림슨 아이즈라면 커다란 사냥감이지...." 란테르트는 이렇게 조그맣게 중얼거렸고, 이 말에 트레시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너무 커다래서, 저런 조그마한 아이가 잡을 수 없다는 것이 흠이지만요...." 그들이 이러한 말에 세이피나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아마.... 란테르트 님을 노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바운티 헌터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바로 자신의 분수이니까요. 지나치게 강한 상대를 노리고 달려들거나 하는 짓은 초보가 아니면 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말에 트레시아가 따지듯 물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우리들의 뒤를 졸졸 따라 다니는 것이지?" 세이피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트레시아는 세이피나의 이 무책임한 대답에 순간 할 말을 잊었다. 하긴.... 이점이 바로 아르트레스가 아르페오네를 높이 사는 점이었다. 아르트레스가 알고 있는 아르페오네라는 여자는.... 충분히 존경할 만한 존재였다. 모든 것이 확실한.... 결코 얼버무리는 일이 없는.... 트레시아는 한차례 놀려 주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 대신 그녀는 란테르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에르테일.... 과연 쓸만한 검일까요? 사실, 좋기로는 앱슈바르 쪽이 더 나았을 텐데.... 앱슈바르는 마계에서 봉인용으로 특별히 제작된 검으로.... 뭐 이제는 쓸모가 없어졌지만, 아무튼 대단히 뛰어난 검이에요." "앱슈바르.... 역시 마계의 검이었군...." 란테르트는 이렇게 중얼거렸고, 트레시아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마계의 검이죠.... 그 에르테일에 비한다면...." 트레시아가 막 이렇게 말할 무렵, 바로 옆에서 한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르테일이 어떻다는 거야? 얼마나 좋은 검인데!!" 그 목소리에 란테르트와 트레시아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붉은 색이 약간 섞인 검정색 머리칼의 15, 6세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란테르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소녀는 처음 주점에 들어올 때 함께 들어와 란테르트가 이곳에 자리를 잡을 때 바로 곁에 자리를 잡았던 것 같았다. 계속해 란테르트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알고 있었으나, 그냥 그러려니 하고 무시했었다. 그녀의 외모는 전체적으로 상당히 억세 보였다. 피부도 트레시아만큼이나 발그스레한 것이 건강한 빛을 띄었다. 물론, 몸매에 있어서는 아르페오네 쪽을 더 닮아 있었지만.... 붉은 색과 검정색이 3:7쯤으로 섞인 검붉은 머리칼을 어깨에 닿지 않을 만큼 길러 두 뺨을 살짝 덮고 있었다. 눈동자는 엷은 녹색에, 콧날이 상당히 오똑했고, 눈썹은 여자아이답지 않게 조금 두꺼운 편이었으나, 보기 싫지는 않았다. 눈은 상당히 큰 편이었다. 그녀의 옷차림은 경장갑옷이었는데, 그나마 빈약한 몸매를 갑옷으로 짓눌러 놓으니 완전히 소년이었다. 흰빛 나는 갑옷이 꽤 아름답게 그녀와 어울렸다. 그녀의 무기는 자루가 몹시 긴 검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도였다. 등뒤로 가로질러 꽂고 있었는데, 도의 자루길이가 거의 날의 길이 만큼 되어 보였다. 검막이는 흡사 풀 잎사귀처럼 살짝 굽은 금속이 몇 갈래 나와 있었고, 전체적인 장식의 형태가 상당히 아름다웠다. 그 모습에 세이피나가 조그맣게 말했다. "리틀 그라시아.... 파소 가의 여자들에게 전해 내려지는 창형 도입니다...." 아마도 그 소녀의 허리 뒤로 꽂혀있는 그 무기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파소가.... 에르테일의 파소가.... 란테르트는 세이피나의 말에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고는 이내 그 소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결코 에르테일을 폄하하려거나 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란테르트의 말에도 소녀는 눈가에 생긴 주름을 펴지 않았다. "그러시겠지." 그런 그녀의 대꾸에 란테르트는 약간 이상함을 느꼈다. 왠지, 에르테일을 욕한 것 때문에 그녀가 화를 내는 것 같지 않아서 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란테르트는 조심스렇게 이렇게 물었고, 동시에 소녀는 등뒤에서 도를 뽑아들었다. 란테르트는 그러한 행동을 하는 그녀의 눈에서 증오를 읽었다. 확실히.... 그녀는 어떤 특별한 이유 때문에 란테르트 등의 앞에 선 것이다. 그것도, 눈에 적개심을 드러낼 만한.... "문제라고 말하는 거야?" 그녀는 그 창형의 도를 검막이 부분과 긴 손잡이의 중간부분을 넓게 잡은 채 두 다리 역시 꽤 넓게 벌렸다. 창형 도이기 때문에 그 사용법이 일반의 도나 창과 확실히 다른 모양이었다. 란테르트는 그 모습을 꽤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처음 보는 병기술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이러한 방법은 꽤 독특했다. 그때, 지금까지 한쪽 구석에서 잠자코 있던 그 바운티 헌터라는 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물론, 그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주점 안에서 란테르트와 세이피나 정도였지만. 주점안 다른 사람들은 어쩌면 일어날지도 모르는 한편의 활극을 기대하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물론 이들과 가까이 앉아있던 사람들은 화를 피해 멀찌감치 물러났고, 그렇게 대충 둥그런 원을 두른 채 30명 남짓한 손님들이 이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녀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무기를 손에 든 채 란테르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쁜 놈! 우리 오빠를 죽여? 네가 그러고도 검사야? 검사가 다른 사람의 검을 훔쳐? 하긴, 도둑질이나 사사 받는 타락한 녀석 따위를 검사라고 한다면, 검사들을 무시하는 것이겠지." 그녀의 이 외치는 소리에 주점 안의 사람들은 잠시 웅성웅성했다. 대강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간다는 반응이었다. 물론, 란테르트 본인은 더더욱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일단, 그녀의 오빠를 죽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니.... 게다가 검을 훔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의 오빠를 죽인 것이 자신이 맞기는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란테르트는.... "그렇습니까?" 라고 대꾸할 뿐이었다. 그의 이러한 대꾸에 소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당신.... 제가 보기에는 그다지 실력이 뛰어나지 않은 듯 보입니다. 당신의 오빠 정도의 실력자도 저의 일 검을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란테르트는 그녀의 오빠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자신의 손에 죽은 것을 보아 자신의 일 검을 막아내지 못한 것으로 단정했다. 그의 일 검을 막아낸 사람중 란테르트 그가 죽인 사람은 지금까지 손에 꼽을 정도였으나, 파소 가의 사람은 분명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잘못 짚은 모양이었다. "무슨 헛소리야!" 그녀는 이렇게 외치며 순간 오열을 터트렸다. 리틀 그라시아를 쥐었던 한쪽 손을 풀어 입을 가리고는, 흑 하며 눈물을 삼켰다. 주르륵, 구슬퍼 보이는 눈물이 뺨을 따라 흘렀다. 란테르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소녀는 눈물 섞인 목소리로 란테르트를 향해 외쳤다. "악마. 어떻게 그렇게 태연한 거지? 반드시 내손으로 죽이겠어. 여기서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악마라고 하는 것을 보아.... 란테르트가 거의 확실한듯 하다.... "어떻게 검도 쓸 줄 모르는.... 평생 대장장이 일을 하며 순박하게 살아온 우리 오빠를 죽일 수 있는 거야!?" 그녀는 이렇게 외치며 손에 들고 있던 리틀 그라시아를 란테르트에게 휘둘렀다. 란테르트는 그녀의 마지막 말에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검도 쓸 줄 모른다니.... 자신이 그런 사람을 죽였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미 소녀의 검은 자신을 향해 날아왔고.... 언제나 스스로 마음에 품어왔던 데로.... 다시 일 검을 돌려줄 것이다.... 란테르트가 이런 생각을 하며 검을 뽑으려는 순간, 챙 하는 소리가 나며 누군가 소녀의 검을 막았다. 이 의외의 상황전개에, 란테르트도, 그 소녀도, 그리고 곁에서 잠자코 지켜만 보고 있던 트레시아와 세이피나도 그 소녀의 검을 막은 사람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다름 아닌 바운티 헌터라던 그 사내였다. 그는 지금까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이 두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소녀가 란테르트를 공격하려 하는 순간 이렇게 나서 소녀의 검을 막은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무모한 짓 그만 둬." 리틀 그라시아를 막으며, 갈색머리의 남자가 이렇게 외쳤고, 소녀는 그런 그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뭐야? 괜히 나서지 마. 이건 내 일이야!" 그런 그녀를 향해 갈색머리칼 남자가 한마디했다. "네 오해다. 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지 말고 이쯤 물러서." "네가 뭔데.... 오해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더 이상 나서면 너도 용서하지 않을 꺼야!" 소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갈색머리칼의 남자는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끌쩍였다. 그리고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크림슨 아이즈에 대해 알고 있나?" 소녀는 왜 갑자기 그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무, 물론이다." 이렇게 대답하는 순간, 소녀의 머리 속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 다시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청회색 머리칼과 오른쪽 뺨의 실낱같은 붉은 상처.... 그리고 그 붉은 눈.... "서, 설마?.... 그럴 리 없어...." 소녀는 순간 경악하여 이렇게 중얼거렸다. 주위의 사람들은 이들의 대화소리가 워낙 작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게 되자 더더욱 큰소리로 떠들며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차피 떠들어댈 뿐이다. 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말했다. "무슨 일로 그에게 검을 들이댔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아. 너도 크림슨 아이즈의 버릇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에게 검을 휘둘렀다가는...." 그의 말에 소녀는 순간 낯빛이 조금 변했고, 갈색 머리칼의 남자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게다가.... 옆에서 들어보니 모두 오해더군.... 만약 네 오빠가 정말 검을 쓸 줄 모른다면.... 그를 죽인 것은 결코 이 남자가 아닐 꺼 야. 그건 너도 잘 알겠지?" 소녀는 그의 말에 잠시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다.... 그가 정말 크림슨 아이즈라면.... 그렇다면.... 소녀는 돌연 다시 리틀 그라시아를 휘둘러 이제는 갈색 머리칼을 공격했다. "거짓말하지마! 너도 저 남자랑 같은 편이지? 크림슨 아이즈의 위명을 빌린다고 내가 무서워 할 줄 알아?" 소녀는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노마티아의 수도 하야에서 자신의 오빠를 죽인 사람을 쫓아 이곳까지 왔는데, 이곳에서 이렇게 물러설 수는 없었다. 여기서 놓치면 이제 어디서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한편, 그녀의 입에서 크림슨 아이즈라는 말이 터져나오자, 주점 안의 사람들은 모두 한마디씩 떠들며 슬슬 그곳을 빠져 나왔다. 무언가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일부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두려움을 표하며 뛰듯 달아났고, 다른 사람들은 부로 여유를 부리기도 했으나, 어찌되었건 달아난다는 점에서는 오십보 백보였다. 이내 주점 안에는 용기가 철철 넘치거나, 이미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10여명만이 남아 있었다. "바보 같은 짓 그만 둬라. 네 오빠를 죽였다는 남자는 내가 찾아줄테니." 소녀는 막 그 갈색머리칼의 남자를 향해 휘두르던 검을 멈추며 외쳤다. "네가? 네가 누군데? 정말 할 수 있는 거야?" 소녀의 말에 갈색 머리칼의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난 대륙 제일의.... 아니, 대륙 제 2의 바운티 헌터 이슐 겔티브라크이다." 그의 말에 주점 안 이곳 저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고, 소녀 역시 상당히 놀랐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란테르트가 크림슨 아이즈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비한다면 그저 그런 표정이었으나.... "겔티브라크가? 설마 그 베이클 겔티브라크의 가문?" 소녀의 외침에, 이슐 이라는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언제나 형의 이름뿐이군.... 맞다. 그 겔티브라크 가문이다." "대륙 제 1의 현상금 사냥꾼 베이클의 동생이라는 거야? 대단한걸...." 베이클이라는 이름은 란테르트도 한 번 들어본 적이 있는 듯 했다. 소녀는 잠시 아랫입술을 깨문 채 입을 생각에 잠기었고, 이슐 이라는 남자는 의자 두 개를 끌어 란테르트가 있는 곁에 놓은 후 자리에 앉았다. "이봐, 너도 앉아." 이슐의 말에 소녀는 아, 하는 짧은 탄성을 지른 후 의자에 앉았다. 얼굴은 아까 흘린 눈물로 지저분해져 있었으나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느라 신경 쓰지 않았다. 트레시아는 지금까지 잠자코 앉아 있다가 이윽고 한마디 꺼냈다. "이봐, 꼬마. 이름이 뭐야?" 그제서야 소녀는 정신을 퍼뜩 차리며 란테르트일행을 한차례씩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내가 오해를 했나봐요...." 소녀는 이렇게 사과를 했고, 뒤이어 모두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전.... 네이실라 파소 에요.... 그 단야사 집안인 파소 가의.... 이제는 무남독녀이지요...." 상당히 침울한 목소리로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 그녀를 향해 트레시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정을 좀 자세히 이야기 해 봐. 원 정신이 없어서...." 트레시아의 이 말에 네이실라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며칠 전의 일이에요.... 엄마 아빠는 제가 어렸을 때 돌아가시고.... 얼마 전까지, 할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저 이렇게 셋 이서 게미아 산맥의 어느 이름 없는 골짜기에 살고 있었어요.... 잘 모르실지도 모르지만, 저희 파소 가는 원래 소피카의 테일 시에 살았었지만, 100년쯤 전에 무슨 일로 이곳으로 이사 왔어요." 그녀의 말에 트레시아와 이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란테르트와 세이피나도 알고 있었으나, 그들은 그냥 잠자코 있었다. "그런데.... 그 날.... 돌연 한 사람이 집안으로 들어와서는.... 오빠를 죽이고 에르테일을 훔쳐갔어요." 소녀의 말에 란테르트와 트레시아, 그리고 이슐, 이 세사람은 아, 하는 짤막한 탄성을 내질렀다. 이제야 슬슬 이 일의 윤곽이 드러나는 듯 했다. 에르테일이 수도로 이동한 것도, 그리고 파소 가의 사람들이 그 검을 따라 움직인 것도 모두 이 일 때문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네이실라는 잠시 입을 다문 채 눈물을 한 방울 흘리고는 소매로 슥 눈가를 닦았다. "노마티아 왕실이 시킨 일이 분명해요. 이번에 왕실에서 열리는 무투회의 상품으로 바로 에르테일이 나왔어요." 그녀의 말에 이슐은 아, 하는 짧은 탄성을 질렀다. "그 검을 훔쳐간 사람이 도대체 누구야?" 이슐이 물었고, 네이실라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푸른 머리칼의 검사라는 것 말고는 몰라요.... 그리고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쪽으로 도망쳤다는 거예요. 사람들을 수소문해 간신히 이곳까지 찾아왔는데...." 그녀의 이 대답에 이슐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너도 어지간히 무모하구나. 겨우 그 정도 정보로 사람을 찾아?" 이슐의 책하는 소리에 소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그때 이슐이 돌연 몸을 일으켰고, 그의 그런 행동에 네이실라와 트레시아, 그리고 란테르트까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슐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한차례 미소를 지었다. "서둘러야 겠군. 아, 크림슨 아이즈씨...." "란테르트라고 부르십시오." 란테르트는 크림슨 아이즈라고 부르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고, 그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란테르트씨, 며칠간 당신의 뒤를 쫓은 점.... 사과 드리겠습니다. 그저.... 당신이라는 남자를 한차례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여 사과를 받아들였고, 이슐은 이어 한가지를 물었다. "이 노마티아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그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르테일을 찾아서...." 란테르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슐과 네이실라는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네이실라가 물었다. "에르테일을 찾아 왔다고요? 왜요?" "제게 쓸모 있는 물건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의 말에 네이실라는 그에 대한 소문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검을 찾고 있었군요...." 뒤이어 이슐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 네이실라라는 소녀와 함께 가면 되겠군요. 그렇다면 저는 그 푸른 머리칼의 강도를 찾아 떠나야 겠습니다." 뒤이어 네이실라를 향해 이야기했다. "네이실라. 대가로는, 파소 가의 검 한 자루다. 할아버지에게 이야기 해 두도록. 그럼...." 할 말을 모두 마친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주점 밖으로 나갔고, 푸후, 하는 말의 투레질 소리가 한차례 들리며 이내 또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는 사라져 갔다. 성격이 급한 건지.... 아니면 일 처리가 확실한 건지.... 아무튼 꽤나 이상한 인간이었다. 네이실라는 그가 사라지자 돌연 서먹서먹함을 느꼈고, 딱히 할 일도 없어 다시 고개 숙여 사과했다. "아까는.... 미안했어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뒤이어 트레시아가 물었다. "저녁은 먹은 거야?" 트레시아의 이 물음에 네이실라는 고개를 가로 저었고, 트레시아는 그녀의 대구에 쯧쯧 혀를 차더니 말했다. "먹고 싶은게 있으면 하나 시켜. 이 언니가 사줄테니." 트레시아의 말에 네이실라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헤 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고마워요. 않그래도 요 이틀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꽤 적응이 빠른 소녀였다. 하긴, 그러니 겨우 그 정도 실력으로 정체도 모르는 검사의 뒤를 쫓았겠지만 말이다.... 저녁을 간단히 마친 일행은 란테르트와, 그리고 다른 세 아가씨들이 각각의 방으로 들어갔다. 네이실라는 돈조차 가지고 오지 않았기에, 트레시아와 세이피나는 방을 침대 세 개 자리로 바꾸어 그녀와 한방에 묵었다. 네이실라는 당연하게도 피곤에 지쳐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고, 다른 두 마족들은 잘 필요가 없었으니 깨 있었다. 세이피나는 방안에 있는 탁자 위에 몇 가지 물건을 늘어놓고는 기도를 시작했다. 사람의 얼굴을 새겨 놓은 듯한 괴 조각상이 하나 있었고, 그 외에 조그마한 촛대가 두 개였다. 초에 불을 밝히자 어두운 방안이 꽤 환해졌다. 세이피나는 흡사 제단과도 같이 꾸며 놓은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고, 트레시아는 저 녀석 뭐하는거야 라는 표정을 한 채 침대에 앉아 바라보았다. "전능하신 신 카이그라미온이시여, 당신의 신실한 종 세이피나가 기도를 올리나이다...." 세이피나가 막 여기까지 중얼거렸을 때, 트레시아는 파하, 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세이피나가 전언으로 말을 걸어왔다. [조용히 해 주십시오.] [뭐하는 거야? 카이그라미온? 그거 네가 어렸을 때 기르던 팬지 아니야?] 트레시아는 세이피나의 말에 이렇게 되물었고, 세이피나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아르트레스 님께서 깔고 앉아 죽여버린 그 가여운 꽃입니다.] 그녀의 말에 트레시아가 윽, 하며 말했다. [의자 위에 올려놓으니 그렇지!] [의자가 아니라 책상 위였습니다.] 세이피나는 약간 톤이 높아진 음성으로 트레시아의 얼토당토않은 변명에 이렇게 대꾸했고, 트레시아는 지지 않고 전언을 보냈다. [그게 그거야. 내가 책상 위에 자주 걸터앉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곳에 논 네가 잘못이야.] 하지만 역시 그녀답게 논리는 부족했다. [잘못을 따지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세이피나는 이렇게 대화를 끝냈고, 트레시아는 음, 하는 짤막한 신음을 내뱉으며 물었다. [그런데 뭐하는거야?] [전 지금 카이그라미온 님의 사제입니다.... 그러니 아침저녁으로 제를 올리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이 모두가 저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노력입니다. 그러니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세이피나의 이 말에 트레시아는 한차례 웃었다. [오호~! 그런가? 좋아 방해는 않지. 계약했으니까. 그래, 그런데, 너의 그 납작하게 짜부러진 팬지 신께서는 무얼 하실 수 있지? 정말 궁금한걸?] 트레시아의 이번 도발에 세이피나는 고개를 휙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상당히 큰 동요로, 그만큼 자신의 꽃을 좋아했었던 모양이다. [아르트레스 님께서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귀여운 꽃을 짜부러트리신 장본인이니까요.] 트레시아는 그런 세이피나를 향해 한차례 눈웃음을 지었으나, 그 웃음은 세이피나의 다음 말에 의해 눈 녹듯(?) 사라졌다. [엉덩이에 살이 많아 감이 둔한가 보지요? 무언가 닿는 느낌이 드는데도 그대로 깔고 앉은 것을 보아....] [뭐, 뭐야? 말라깽이 장작 주제에. 난 절대 살이 많지 않아!] 트레시아의 이 말에 세이피나는 잘 지어 보이지 않는 미소를 살짝 지었다. [그런가요? 그렇다고 해 두지요.... 이제 저는 아르트레스 님께서 깔고 앉으셨던 저의 꽃에게 기도를 올려야 겠습니다.] 세이피나는 이렇게 대화를 끝냈고, 트레시아는 왠지 약간 밀린 듯한 이 말싸움에 기분이 상해, 흥 하며 팔짱을 끼었다. 역시 쌓인게 많은 두 사람인 모양이었다. 벌써 2600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가지고 아직도 태각거리니 말이다. 이 두사람의 무언중의 싸움은 말 그대로 무언이었고, 바로 곁에서의 스파크가 빠지직거리는 싸움에도 아랑곳 않은 채 네이실라는 조용히 잠이 들어 있었다. 오빠의 꿈이라도 꾸는 듯, 입가에는 미소가 배어 있다. 다음날 아침, 란테르트를 비롯한 트레시아, 세이피나, 네이실라 등의 네 사람은 우루스 시를 벗어나 수도 하야로 향했다. 여기서부터의 길이야말로, 게미아의 뱀이라고 불리우는 울렁울렁한 구불탕길이다. 길은 산의 사면을 따라 굽이굽이 돌기도, 산과 산 사이를 쫓아 휘청거리기도, 그리고 종종은 아찔한 운교 위를 지나기도 했으나, 한가지 한결 같은 것은 모두들 적어도 마차 한 대가 다닐만한 폭은 된다는 것이었다. 이 길은 말 그대로 교역로이다. 노마티아의 수도와 레냐, 에노사 등을 연결하는 한 나라의 중심도로인 것이다. 그렇기에 잘 닦여 있었고, 평탄했으며 또 넓었다. 네이실라의 걸음은 몹시 느렸으나, 일행의 속도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워~, 조심해." 라무라는 이름의 괴상한 가축을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가축은 노마티아 게미아 산맥 북쪽 지역에서 기르는 가축이다. 에노사에도, 소피카에도 게미아 산맥정도 높이의 산맥은 존재했으나, 이 라무는 노마티아 산맥에서만 살 수 있다. 주식이 키코타 열매이기 때문이다. 키코타 열매는 고도 2000휴리하 이상에서 자생하는데, 거기다 기온까지 낮아야 하기에, 에노사나 그 이하 남쪽의 산맥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라무의 생김새는 대략 양과 말의 중간이라고 생각하면 딱 알맞다. 구부정한 뒷다리와 망아지 만한 몸집에, 목은 말처럼 튼튼하고, 꼬리는 짧으며, 털이 복실복실 온몸을 뒤덮고 있다. 눈은 동글동글한 것이 머리부분의 털에 의해 반쯤 가리어져 있어 약간 멍해 보인다. 몸집은 약간 토실토실하고, 다리도 그다지 길지 않아 바라보고 있으면 꽤 귀여웠다. 걷는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으나, 지구력 하나는 굉장해, 겨우 이틀동안을 걸어 장장 60휴하에 이르는 게미아의 뱀을 통과했다. 그렇게 도착한 노마티아의 수도 하야는, 5년전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계곡 틈새를 비집고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상당히 어수선한 것이 무슨 축제라도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외성도 내성도 산의 사면과 사면 사이에 한 겹의 벽을 세워 놓은 이 도시의 외성 밖에는 다른 여느 성들이 그러하듯 많은 여관들이 세워져 있었다. 네이실라는 일행을 그녀가 묶고 있던 여관으로 안내했다. "할아버지!" 네이실라는 여관의 한 방으로 들어가자 마자 그 안에 있는 노인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노인은 평범해 보이는 인상이었으나, 다만 반쯤 걷어붙인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만은 무쇠처럼 단단해 보였다. 아마도 대장간 일을 평생 하다보니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이런!! 네이실라. 무사했구나. 원 녀석 바보 같기는.... 네 실력으로 무얼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무작정 그놈을 따라 가느냐?" 노인은 네이실라의 등을 다독이며 이렇게 말했다. 네이실라가 무사하여 다행이라는 듯한 안심하는 표정과 얼마전 손자를 잃은 씁쓸함이 동시에 얼굴에 배어있었다. 네이실라는 할아버지의 그런 다독임에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우앙.... 결국 못 찾았어요.... 그 나쁜 사람을...." "자, 자.... 울음을 그치거라.... 그보다 저 사람들은?...." 노인의 물음에 네이실라는 훌쩍거리기를 몇 차례하고는 눈가를 소매로 닦아내며 란테르트 일행을 소개했다. "우릴 도와주실 분들이에요.... 이 푸른 머리칼의 남자 분은.... 란테르트님 이시고, 다른 분들은 그분의 친구이신 트레시아 님과 세이피나님 이세요." 네이실라의 설명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전, 파소 가의 젤타라고 합니다. 검사 이시군요...." 란테르트와 다른 일행을 향해 이렇게 인사한 젤타라는 이름의 이 노인은 이 세사람에게 상당히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트레시아는 지금 허벅지 절반밖에 오지 않는 쫙 들러붙는 가죽 스커트에, 무릎까지 오는 굽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위에는 푹신해 보이는 붉은 색 털 스웨터를 입고 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무슨 수행을 한다거나 하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상당히 독특한 옷차림으로 이 나이 60먹은 노인으로써도 이런 그녀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이피나라는 여자는 바라보는 순간 머릿속에 얼음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머리칼은 흡사 정말 얼어버리기라도 한 듯 흰 파란색을 띄고 있었고, 눈동자 역시 얼음을 깎아 만든 듯한 맑은 푸른색을 띄었다. 입가에는 그 흔한 미소조차 고이지 않았고, 눈동자는 정지한 채 거의 흔들림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란테르트.... 비록 트레시아의 방문으로 꽤 여유가 생긴 모습 이였으나, 젤타 노인의 눈에는 세이피나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게다가 선득한 느낌을 주는 붉은 색 눈동자라니.... "크림슨 아이즈 세요." 그런 젤타 노인의 기색을 느꼈는지, 네이실라가 이렇게 말했고, 노인은 황당하다는 듯 잠시동안 멍해졌다. "어째서...." 네이실라는 놀라는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은 분들이에요. 소문과는 완전히 달라요." 사실 노마티아에서의 크림슨 아이즈의 악명은 다른 곳의 절반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법사 협회는 위다를 중심으로 조직된 것이고, 용병길드는 소피카를 중심으로 결성되어 있는데, 노마티아는 이 두 나라 모두와 반 적대, 혹은 적대관계에 놓여있다. 그러니, 그 나라들이 증오해 마지않는 크림슨 아이즈라는 사람을 정책적으로 적으로 돌릴 이유는 없었다. 젤타는 손녀딸의 말에 잠시 얼떨떨했으나 그다지 방황이 오래지는 않았다. "어쨌건.... 이제는 어차피 늦었단다...." "설마?...." 네이실라는 젤타 노인의 말에 이렇게 되물었고,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투회가 벌써 시작됐어요? 발표가 난지 이제 겨우 10일밖에 되지 않았잖아요. 나라 안에도 아직 다 소문이 안 퍼졌는데...." 네이실라의 뒤이은 물음에 젤타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마도 검의 기득권을 미리 인정받으려는 모양이야. 무투회는 앞으로 한 달간이나 계속된단다...." 네이실라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나쁜 놈들...." 지금까지 조용히 이 두 조손의 대화를 지켜만 보던 란테르트가 입을 열었다. 워낙 대화가 일사천리로 진행되다보니 도저히 중간에 끼여들 틈이 없었다. "지금.... 에르테일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 란테르트의 이 물음에 젤타노인은 그네들 세명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앉을 만한 곳도 없었지만.... "아.... 두시간쯤 전에 무투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검은 무투회 장에 있지요. 왕성 앞에 있는 헬타리온 광장에 높은 단을 세우고 그곳에서 무투를 벌이고 있지요...." 무투회가 그다지 많이 열리지 않는 만큼 무투회 장을 위한 경기장 같은 것은 당연히 없었고, 평상시 다용도로 사용되던 성 중앙광장을 무투회 장으로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젤타 노인의 말에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그대로 몸을 돌렸고, 트레시아와 세이피나는 인사도 않은 채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네이실라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할아버지, 가서 살펴보고 올께요...." 네이실라는 젤타노인에게 이 한마디를 남기고는 곧바로 란테르트 등을 따라갔다. 근 2일 동안의 여행으로 그들, 정확히는 트레시아와 말문 정도는 트인 사이라 그다지 부담은 없었다. 하지만 노인은 자신의 손녀딸이 크림슨 아이즈를 따라간다고 하자 걱정이 되어 짐을 챙겨들며 황급히 이렇게 말했다. "네이실라, 함께 가자...." 네이실라와 젤타 노인이 준비를 하는 사이, 란테르트 등의 세 사람은 외성 성문을 지나고, 시가지를 지나 헬타리온이라는 이름의 광장인 듯한 곳에 도착했다. 그 공터는 도시가 있는 곳과 왕궁 사이에 위치했는데 넓이는 가로 세로가 거의 200휴리하에 육박하는 말 그대로의 광장이었다. 그 헬타리온 광장 중앙에는 나무로 만든 가건물이 하나 위치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임시 무투회 장이었다. 임시치고는 상당히 건실하게 만든 것이, 왕실이 이번 무투회에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썼는지를 알 수 있었다. 오죽하면, 상품으로 쓸 물건까지 친히 훔쳤겠는가? 그 가건물 밖으로는 수많은 상점들이 즐비하고 있었다. 이런 대목을 어찌 놓치겠는가? 가장 많은 것은 뭐니뭐니해도 먹을 것을 파는 곳이었고, 그 외에 수많은 무기, 혹은 방어구상들도 요소요소 자리잡은 채 호객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트레시아는 팔짱을 엇지른 채 란테르트의 곁에 바짝 붙어 걷고 있었고, 세이피나는 트레시아와는 다른 쪽에 반보쯤 뒤로 떨어져 걷고 있었다. 아마, 아르페오네일 때 언제나 이카르트의 뒤쪽에서 걷던 것이 버릇이 되어 다른 사람과 함께 다닐 때에도 이러는 편이 편한 모양이었다. 막 이런 저런 노점들이 즐비한 곳을 지나자 무투회장의 입구가 눈에 띄었고, 그 무투회 장과 상점가를 명확하게 가로지르는 담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나무로 꽤 단단하게 지은 것으로, 화려한 장식들까지 조각되어 있었다. 도대체 어차피 경기가 끝나면 부숴 장작으로나 쓸 이따위 가건물에 이렇게나 많은 돈을 들이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금광을 가지고 있고, 국민이라는 은행을 가지고 있다지만.... 벽 중앙에 있는 대문은 지금 굳게 닫혀 있었다. 아마도 입장이 모두 끝난 모양이었다. 란테르트 등의 세 사람이 그곳으로 접근하자 네명의 병사가 창을 꼬나쥔채 다가왔다. "어이, 오늘 접수는 끝이야. 내일 와서 다시 접수해." 병사중 하나가 란테르트 등을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외쳤다. 공무원의 불친절은 고금이 일치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원래 창을 든 놈은 겁이 없는 법이다. 란테르트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공손히, 아주 공손히 입을 열었다. "에르테일을 가지러 왔습니다. 잠시 길을 비켜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물론, 말투는 공손했으나, 내용이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허, 참 이 녀석 보게나. 왕실의 물건을 가져가겠다고 그렇게 공공연히 떠들어?" 네명의 병사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다시 한차례 입을 열었다. "비켜 주시겠습니까?" 이번에는 말투까지 공손하지 못했고, 이에 네명의 가드들은 창을 들고 란테르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짝, 하는 소리가 네차례 들렸고, 이어 철그렁 하는 창이 바닥을 뒹구는 소리가 다시 네차례 울렸다. 가드들은 빈손으로 멍하니 한 사람을 바라보았고, 그들의 시선을 따르다 보면 그곳에 붉은 화려한 머리칼의 아가씨가 손에 길지 않은 채찍을 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세이피나는 나서지 않았다. 일단, 자신보다 훨씬 강한 란테르트 앞에서 함부로 손을 쓴다는 것은 그에 대한 실례밖에는 되지 않는데다가, 자신을 어느 정도 감춰야 할 의무까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트레시아는 아니었다. 세이피나만큼 생각이 깊지도 않았을 뿐더러 힘을 감추어야할 의무 같은 것은 더더욱 없었다. "다시 한 번 덤비면, 이번엔 눈이다. 오호호호." 트레시아는 웃었다. 그 웃음에 란테르트는 조용히 미소지었고, 세이피나는 빈깡통이 흔들리는 소리라고 느꼈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익살스러운 생각과는 전혀 동떨어진 생각을 그 네 가드들은 하고 있었다. 완전 숲속을 해메이다 괴물을 만나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뭐, 뭐야? 너희들...." 일단 한 명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모르는 사람과 만났으니, 이름을 묻는 것이 예가 아니겠는가? "뭐하는 녀석들이야?" 이렇게 직업을 묻는 것도 예의 한가지이다. "왜 온 것이냐?" 방문자에게 방문 목적을 묻는 것도 예에 벗어나는 말은 아니다. "겨우 그 정도 실력으로 왕궁 앞에서 소란을 피우다니. 죽고싶냐?" 하지만, 네 번째의 인간은 그다지 예에 밝지 못하였고, 이 말에 트레시아는 가느다란 붉은 색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며 다시 손을 까딱 움직였다. 마족들은 계약, 즉 약속만은 목숨을 걸고 지킨다. 아니, 그 자체가 목숨이다. 한차례라도 계약 이행을 고의로 하지 않으면 그 마족은 파문이다. 다른 세계로 달아나 모습을 숨기고 살아가거나, 자결하는 것 이 두 가지가 파문 당한 마족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다. 그러다 보니, 트레시아 역시 약속 하나만은 철통같이 지켰다. 다시 말해, 그 병사는 눈을 잃었단 말이다. "으아~악...." 병사는 피가 흐르는 눈을 부여잡은 채 바닥을 굴렀고, 트레시아는 피가 묻은 채찍을 한차례 딱 소리가 나게 털어 피를 닦아내고는 다른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세명의 가드들은 사실 전의 같은 것은 이미 잃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이렇게 길을 비켜주면 나중에 받을 문책은 어쩌란 말이냐? 그들은 간신히 용기를 내어 소리를 질렀다. "침입자다!" "무투회를 방해하고,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리려는 자들이 나타났다." 이렇게 외쳐대기 시작한 녀석 을을 잠시간 더 바라보던 란테르트는 곧바로 한 걸음을 앞으로 나서며 검을 휘둘러 한바퀴 호선을 그렸다. 일단, 한 걸음을 앞으로 디딘 것은 세명 모두를 사정거리 안에 넣으려는 행위였고, 검을 휘두른 것은 사정거리 안에 녀석들을 넣었기 때문이다. "으악!" 하는 비명은 세차례, 그리고 털썩하는 무언가가 둔탁하게 바닥으로 쓰러지는 소리 역시 세차례. 쾅, 하는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한차례 그리고, 뒤이어 어지럽게, 탁탁 투다닥 거리는 소리 한차례. 전자의 것은 세명의 목숨이 스러지는 소리이고, 뒤의 것은 란테르트 일행 앞을 가로막는 무투회 밖 울타리의 정문이 부서지는 소리이다. 나무문이었으니 이렇게 조용하게 끝났지, 조금 더 돈을 들여 쇠로 만들기라도 했다면 꽤나 요란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됐을 것이다. 아무튼, 어찌 되었건 왕궁은 왕궁이다. 그 세 사람이 소리를 지른 시간은 매우 짧았으나, 그 사이 꽤 많은 수의 병사들이 모여들었고, 그들 모두는 이 괴상한, 게다가 미친 듯한 새사람의 침입자를 향해 창을 겨누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는 마법병대들이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충 눈짐작 해보니, 병사 300에, 마법사가 20명쯤 되었다. 란테르트는 조용히 속으로 이번에는 무슨 마법을 사용해 볼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트레시아나 세이피나의 안전에 대한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일단 엔클레이브가 자신보다 몇 배는 강할 이 두 마족 아가씨가, 물리 마법 적으로 그다지 큰 타격을 입을 리가 없었다. 란테르트는 오래지 않아 이번에 써 볼 마법을 택했다. 그러고 보니 뇌격계 정령계 마법을 쓴지 꽤 오래된 듯 하였다. 수계 정령계도 꽤 되었지만, 여기서 사용했다가는 하야 성이 온통 물바다가 될 것이다. 자신에게 아무런 손해도 미치지 않은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그다지 쾌치 못한 일이다. 그러는 사이 마법사부대의 마법공격 제 1파가 일행을 향해 날아올랐다. 가장 흔한 것은 화염 계였으나, 일단 수도에 불을 낼 수는 없는 일이기에 그 다음으로 흔한 뇌격계 마법이 공중으로 솟았다. 마법병단이다 보니, 그들의 마법사용 방법은 병법을 따랐다. 일단 마법 병단들은 대부분 네, 다섯으로 조를 나누어 번갈아 마법을 사용한다. 일파에 이어 곧바로 2파가, 그리고 3파 이런 식으로 쉴새없이 마법을 구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종 일제공격을 하기도 하는데, 수십 명이 동시에 마법을 일으켜 하는 공격에는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다. 이번에는 사람수가 20명 정도밖에 되지 않기에 조를 둘로 나누었다. 이렇게 할 경우에는 마법과 마법 사이의 인터벌이 약 1분 정도로, 그 시간 사이의 마법사대는 방어력 0의 쓰레기 군집으로 변해 버린다. 마법 병대를 주로 상대하는 것은 기마병들로, 그 마법과 마법 사이의 틈을 기동력으로 제압해 들어가는 것이다. 뭐 이러한 것들은 용병학用兵學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것들이지만.... 눈앞의 인간들에게는 소용없는 일이다. 공중으로 솟아 오른 뇌구들은 30휴리하쯤의 상공에서 돌연 확, 하고 비산했다. 산탄 격으로, 불꽃을 쓸 때에는 산탄염, 이렇게 전뇌를 쓸 때에는 산탄섬 이라고 불렀는데, 대단위 군사를 상대할 때 쓰는 방법이었다. 아마도, 트레시아와 세이피나를 마법사로 판단, 실드마법의 틈새를 공격하기 위해 이런 방법을 사용한 듯 하다. 동시에, 란테르트의 머리 위 1휴리하쯤 되는 곳에 둥그런 차폐 막이 생겨났다. 색은 약간 파르스름한 빛을 띄었는데, 다름 아닌 고위 마법사용 전에 생기는 마법 실드였다. 그것을 잘 모르는 이 많은 창병들은 역시 실드마법을 사용하는군, 하고 속으로 외치며 우르르 달려들기 시작했다. 실드를 사용하는 사이 측면에서 직접적인 공격을 가하면 아무래도 상대의 마법 공격은 막을 수 있으니 말이다. 300대 3이라는 숫자가 보여주듯, 이 싸움은 사실 결과가 예상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300이 수도 수비대의 사람이고, 다른 세 명이 크림슨 아이즈와 아르트레스, 그리고 아르페오네라고 조금 더 상세히 그들에 대하여 서술한다면 역시 결과를 정확히 예상할 수 있다. 물론, 전자와 후자의 결과가 조금 다르기는 하겠지만.... "에클레어 스커드...." 여느 때와 같은 나지막한 목소리, 그리고, 란테르트의 몸 주위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는 전기의 방전. 하나하나 응결되어 수백 덩이의 뇌전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5초, 아직 마법사들의 인터벌이 채 끝나지도 않았을 때이다. 뇌구들은 그 모습을 갖추자 마자 한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나갔다. 질주하는 뇌격, 이름 그대로이다. 파르스름한 빛의 구가 닿는 곳은 여지없이 뇌전에 의한 폭발이 일어났고.... 그 닿는 곳이라는 것이 사람이니 만큼, 이 일대는 아주 엉망진창이 되었다. 바닥에는 후드득거리며 살점이 떨어졌고, 그나마도 새까맣게 그을려 그것이 인간의 구성성분이었다는 증거는 적어도 시각적으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가장 밖의 열에 있던 사람들은 이 모습에 벌벌 떨며 뒤도 않돌아본채 달아났다. 일단 그러는 편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럴 수 있었던 사람은 30명 내외, 그나마 절반 정도는 몸의 일부분을 대가로 바쳐야만 했다. 이상은 란테르트에게 덤벼들던 창병들의 결과이고.... 마법사들의 경우에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띄었다. 일단 그들은 마법이라는 것을 쓸 줄 알고, 마법 중에는 실드 마법이라는 것이 있다. 처음 그들은 실드 마법을 있는 힘껏 펼쳐 병사들을 보호했다. 하지만, 종이방패로 화살을 막는 편이 훨씬 더 큰 방어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란테르트의 마법에 대하여 그들의 실드는 무능력하기 짝이 없었다. 뭐, 여기까지가 그 다른 양상의 전부이다. 그리고는 창병들과 마찬가지로.... 란테르트는 이 모습을 잠시 담담히 바라보다가 마법을 거두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고, 트레시아는 흡사 자신이 하기라도 한 것처럼 도도한 눈길로 주위를 살펴본 후 란테르트의 뒤를 따랐다. 세이피나의 표정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300명에 20명의 마법사. 설마 이들이 3명의 침입자를 막지 못하지야 않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있는지 더 이상의 추가 파견 병은 없었고, 란테르트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무투회 장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의 네명을 상대한 시간이 다른 300명을 상대한 시간보다 오히려 길었던 듯 했다. 무투회장 안으로 들어가는 곳에는 란테르트가 부술 만한 문은 없었다. 그냥 건물과 건물 사이의 터널 같은 곳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막 란테르트일행이 걸음을 들여놓는 순간 와~~ 하는 함성이 온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아마도 막 한 사람이 승리를 한 모양이었다. 무투회장의 전체적인 모습은 위에서 보았을 때 정 사각형일 듯한 관람석과 그 중앙에 있는 대련장이었다. 대련장은 가로 세로 각각 20 휴리하쯤으로 보였다. 언제나 그렇듯 장외패도 인정 될 것이다. 대련장의 바닥은 단단한 돌을 깔아 놓았는데, 대회가 시작된지 하루밖에 안된 오늘 벌써 가로 세로 1휴리하쯤 되어 보이는 석판 석장이 금가 있었다. 관람석의 좌석은 10여열 정도로 이루어져 언뜻 보아 2000명 정도는 수용할 수 있을 듯 보였다. 실로 대단한 규모였다. 아직 예선이어서 인지 관람석은 4분의 1 정도만이 사람들로 차 있었다. 입구 정면 뒤로는 노마티아의 왕궁이 눈에 들어왔고, 그 바로 앞에는 가장 높은 관람석이 하나 있었다. 전쟁에서 사용하는 망루만큼이나 높은 이 단에는 아마도 왕이나 그 끄트머리쯤 앉아 있을 가능성이 상당했다. 예선전이니, 아마 대신이나 왕자, 혹은 공주쯤이 나와 있으리라.... 그리고 그 망루 최상층 사람이 있는 곳 바로 아래.... "저것이 에르테일인가 보지요?" 트레시아가 묻는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지는 못했지만 상황을 보아 그럴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그리고 그때 세이피나가 다시 이야기함으로써 일행의 추측은 사실이 되었다. 워낙 거리가 멀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에르테일은 크기가 조금 큰 편인 듯 보였다. 대검에는 못 미치지만 보통의 장검보다는 확실히 컸다. "그럼, 검을 가지러 가야겠지...."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몸을 공중에 띄웠다. 관람석을 통해 망루로 가 걸어서 반쯤 올라가면 검이 있지만, 차라리 날아가는 편이 빨랐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 그때, 순간 대회장 요소 요소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란테르트와 다른 두 여자의 존재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그쪽으로 발걸음을 놀렸다. 일단, 란테르트가 갑자기 공중에 솟아 오른 것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요지에 배치되었던 마법사들도 일제히 마법을 준비했다. 이런 뜻밖의 침입자들을 지키기 위한 그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란테르트는 인단 무시한 채 몸을 앞으로 살짝 숙이며 에르테일을 향해 날았다. 동시에 몇 명인지 알 수 없는 마법사들의 마법 공격이 일제히 쇄도했고, 그것들은 거의 동시에 란테르트의 몸에 닿으며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그러나.... 해서 되지 않는 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 란테르트는 그 폭발이 조금 잠잠해 지자 몸 주위에 수십갈레의 물의 또아리를 만들었고, 이내 수백갈레로 그것들을 나누어 마법이 날아온 방향으로 쏘아 보냈다. 일단, 수계 마법은 빠르고 깔끔했다. 탕,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자신을 공격했던 마법사중 실력이 있는 자들은 수압에 밀려 관람석에 그대로 처박혔고, 실력이 모자라는 자들은 몸에 물이 관통 당해 목숨을 잃었다. 란테르트는 이어 바람을 일으켜 트레시아와 세이피나에게로 달려가는 병사들을 향해 쏘아보냈다. 에르테일을 얻는다라는 극히 개인적인 일에 그녀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약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풍계 마법은 속도와 관통력이 최고였다. 쇄액 하는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수십 갈래의 바람은 노마티아의 병사들 사이를 갈랐고, 한차례 병사들을 통과한 바람은 병사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와 뒤섞여 붉게 변하였다. 촤ㄱ, 소리와 함께 바람이 바닥에 한차례 혈화를 그려낸다. 이러한 것을 더블스펠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다. 비행마법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다른 마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두 개의 공식을 한꺼번에 계산해야 하는 것이니 만큼 배나 힘들다. 그렇기에 마법 각각의 위력은 약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 란테르트가 사용하는 비행마법은 여섯 주신중 한 명인 프리시아의 브레스 패더라는 이름의 정령계 마법으로, 특별한 수행 없이 더블 스펠이 가능한 마법이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란테르트는 더블 스펠 정도는 언제나 입에 달고 다닌다. 그 이상을 동시에 사용해 본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세 개쯤 동시에 사용하고 나면, 천하의 란테르트도 상당한 두통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것의 난점을 깨달았기에 부적 술을 익힌 것이다. 란테르트가 거의 검에 다다랐을 무렵, 돌연 그의 정면에서 엄청난 마법이 날아왔다. 상당한 위력의 것으로, 란테르트는 상대방의 마법력이 심상치 않자 더 이상 무리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춘 채 그 자리에 섰다. 동시에, 거의 신전의 기둥 만한 마법의 불기둥이 란테르트를 덮쳐왔고, 란테르트는 자신의 엔클레이브를 통해 전해져 오는 후끈한 느낌에 순간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한차례 화염의 폭풍이 지나간 란테르트의 주위는 열에 의해 공간에 아지랑이가 피어있었고, 방금의 마법을 쏘아보낸 마법사는 망루 난간에 두 팔을 얹은 채 잠시 숨을 골랐다. 수염을 근사하게 기른 빠짝 마른 노인이었는데,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다. "누구 신가? 나는 노마티아 왕실의 수석마도사 미첼토라고 한다." 간신히 숨을 고른 노인은 노인답지 않은 우렁찬 목소리로 란테르트를 향해 이렇게 물었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앞으로 조금 움직여 검을 잡으려 했다. "멈춰라. 우선 내 물음에 답하라." 미첼토란 노인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란테르트를 저지하려 했으나, 실력 없는 큰소리는 보통 허언이라고 부르며 무시하기 마련이다. 가까이서 보니 에르테일은.... 굉장히 아름다웠다. 일단 동그란 투명한 연녹색 빛의 장식석이 사람의 혼을 빼앗을 만큼 아름다웠다. 검날은 검과 도의 중간쯤으로 정확히 무어라 이야기하기 힘들었다. 검날의 폭은 거의 손가락길이 하나 반 정도로 꽤 넓었고, 이에 따르는 지나친 무게를 줄이기 위해 검날 위에는 두 개의 흠이 파여져 있었다. 검날의 곡선은, 물론 사람을 베기 좋게 만들었겠지만, 굉장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역시 이 에르테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검막이 부분일 것이다. 에르테일의 검막이는 전체적으로 흡사 무슨 넝쿨을 보는 듯 했다. 몇 차례나 꼬인 세갈래의 금속제 검막이가 양쪽으로 각각 여섯 방향으로 뻗어 있는데 그 하나 하나의 곡선이 흡사 조각이라도 한 듯 자연스러우면서도 미려했다. 손잡이 역시 꽤나 섬세했고, 특히 검 끝부분인 폼멜의 장식이 근사했는데, 흡사 매의 부리처럼 살짝 굽어 뾰족이 갈무리되어 있었고, 그 부리의 턱부분에 보석이 하나 박혀 있었다. 란테르트는 검에서 은은히 뿜어져 나오는 대지령의 힘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미약하지만 자아도 느껴졌는데,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고집쟁이 아가씨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반면 검을 장식한 여러 무대장치라고는.... 망루는 노마티아 왕실의 상징인 상상의 동물 리온이 황금색으로 수 놓여진 깃발로 장식되어 있었고, 그 아래 있는 검을 두는 장소는 온통 흰색의 천으로 휘장을 둘러 두었다. 그리고 에르테일은 정교하게 조각한 돌 제단에 박혀 있었다. 정말 검을 좋아하는 사람이 본다면 통탄할 일이다. 저러다 검날이라도 상하면 어찌할 것인가? 그뿐 아니라 더더욱 최악인 것은 두툼한 쇠사슬로 검을 서너 차례나 감아 둔 것이다. 일전 앱슈바르야 봉인의 검이니 그런 식으로 해 두는 것이 당연했으나, 이건 도대체 무어냔 말이다. 게다가 자세히 살펴보니 쇠사슬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금이 가 있었다. 아마도 우승한 사람이 검을 바위에서 뽑아들면 쇠사슬이 후두둑 바닥에 떨어지도록 만든 모양이었다. 도대체가 만든 사람의 정신연령을 의심케 하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연출이다. 란테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 아름다운 검을 향해 손을 뻗었고, 동시에 위에서 다시 한차례 화염의 기둥이 폭사해 왔다. 혹자는 저 마법사 화염 마법밖에 쓸 줄 모르냐? 라고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사실 이런 저런 마법을 돌아가면서 쓰는 란테르트가 이상한 편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자신의 특기 마법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지금처럼 강한 적들과 싸울 때는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란테르트가 위급할 때마다 데스틴 더 비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한 번 실패한 마법이 두 번째라고 성공하라는 법은 없다. 괜한 짓으로 망루에 불만 옮겨 붙을 뿐.... 란테르트는 망루에 불이 붙건 말건 일단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망토 안으로 갈무리하여 쓸모 없는 상처를 막는 동시에 위로 조금 몸을 띄워 그 미첼토라는 마법사와 시선의 높이를 같게 했다. "전.... 란테르트라고 합니다. 보통 크림슨 아이즈라고 하지요. 그럼...." 동시에 란테르트는 몸을 뒤로 돌려 세이피나와 트레시아가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정체를 밝힌 이상.... 섣부른 추격 따위는 없을 것이다. 역시 성가신 것은 딱 질색이다. "할아버지 어서 어서요." 네이실라와 젤타 노인은 손을 맞잡은 채 시가지를 거의 벗어났다. 노인은 역시 나이가 나이니 만큼 걸음이 그다지 빠르지 못했고, 성밖의 여관에서 이곳 헬타리온 광장에 나오기까지 30여분이나 걸렸다. 사실 보통 사람의 걸음으로도 20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막 란테르트 등이 지났던 바로 그 노점상들의 군을 지나 무투회 장과 상점지구를 가르는 울타리에 도착했을 무렵.... 두 조손은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한 사람은 눈에 피를 흘리며 기절했는지 어쨌는지 바닥에 엎드려 미동도 하지 않았고, 다른 세 사람 역시 바닥을 그네들의 피로 흥건히 적신 채 널브러져 있었으니.... 항상 조용하고 소박한 것만을 알며 살아왔던 이 두 사람에게는 경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 이...." 네이실라는 단지 이 두마디를 내뱉었을 뿐이었고, 노인 역시 고개를 천천히 가로로 저었다. "사람을.... 죽이다니...." 젤타 노인의 말에 네이실라가 돌연 이를 악물며 외치듯 말했다. "아니요. 잘됐어요. 우리 오빠를 그렇게...." 손녀의 이러한 말에 젤타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다고....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 오는 것은 아니지 않니.... 이렇게 사람을 죽이면.... 슬퍼하는 사람만 더더욱 늘어날 뿐이야...." 그때, 세 사람이 대회장 밖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이 이 두 조손의 눈에 띄었다. 말할 것도 없이 란테르트와 트레시아, 그리고 세이피나였다. 이들이 나왔으니 다행이지.... 만약 이 두 조손이 안으로 들어가, 사람의 몸조각이 바닥을 뒹굴고, 팔다리가 여기 저기 흩어진 모습을 보았더라면 까무러쳤을 것이다. "란테르트님.... 성공 했나요?" 네이실라는 그의 모습에 활짝 웃으며 이렇게 물었고, 란테르트는 망토를 한차례 펄럭여 에르테일을 두 사람에게 보였다. 그 모습에 젤타 노인은 눈가에 눈물이 어리었고, 아직 소녀인 네이실라는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일단 성밖으로 가지요...."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두 조손과 트레시아, 세이피나 이렇게 네명을 이끌고 성밖의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에 도착한 란테르트는 일단 검에 마법을 걸어 보았다. 진작에 걸려 했으나, 적당한 시간이 없어 이제야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역시.... 무정한 검은 검정색의 마법을 거부했다. "실패로군요...." 트레시아는 곁에서 란테르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이렇게 중얼거렸고, 란테르트는 노골적으로 실망한 기색을 띄며 검을, 이 아름다운 검을 한차례 내려다보았다. 입안에 씁쓰레한 맛이 느껴졌다. "에르테일을 가지고.... 어디 다른 곳으로 달아나십시오. 노마티아는 위험합니다. 원하신다면 보호해 줄 사람을 소개해 드릴수도 있습니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에르테일을 방안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젤타 노인은 받지 않았다. "란테르트님.... 이라고 하셨습니까?" 노인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고, 젤타 노인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에르테일.... 저희 가문에서는 이 검을 불운의 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네이실라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자 의자를 그 세사람에게 가져다주었고, 모두들 자리에 앉아 노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에르테일은 지금으로부터 350여년전에 태어났습니다.... 아실 지 모르겠지만, 당시 파소 가는 위다의 나모니 가와 마곡의 사헬 가와 함께 롬님에게 대장장이 일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란테르트는 이미 알고 있는 일이기에 한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네이실라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는 할아버지의 이 이야기를 경청하기 위해 바로 곁에 앉아 젤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쓸쓸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망치소리가.... 쇠를 두들기는 오빠의 망치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세 분의 단야사들은.... 모두 열 자루의 검과 도를 만드셨습니다. 대륙 3대 명검과 7대륙 수호 검이 각각 그들이지요. 이 에르테일은 바로 그 3대 명검중 하나로.... 대지의 검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에르테일이라는 말 자체도.... 대륙을 일컫는 신화시대의 말로 알고 있습니다." 란테르트는 다시 한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트레시아는 별 관심 없다는 듯 란테르트의 곁에 바짝 앉아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고, 세이피나는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 였으나, 원래 내색을 안하는 아가씨이기에 잠자코 앉아 있었다. "이 에르테일은 그때 소피카의 한 명문 검가에 맡겨졌는데.... 그 가문에서 100년 가까이 머물다가 스스로의 심장을 깨뜨렸습니다." 그의 이 말에 네이실라가, 아 하는 짤막한 탄성을 질렀다. 벌써 수십 번이나 들어온 이야기이지만 이 부분에서는 언제나 탄성을 내지르는 그녀였다. "그 후, 파소 가는 스스로 주인을 버린 이 에르테일을 회수하였고, 50년동안이나 검의 심장 석을 찾아 다녔습니다. 심장석이란 바로 이 중앙의 장식 석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50년째 당시 우리 가문의 가주이셨던 키티노안공께서 당시 레카르도 가의 가주이시던 암공의 도움을 받아 결국 그 이 심장 석을 구했고.... 에르테일은 그때 다시 부활할 수 있었죠. 그리고는.... 200여 년 간 저희 가문에 머물렀습니다. 검이 검사의 손에 머물지 못한다는 것은.... 그 검에게는 보통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이 에르테일은 너무나도 자아가 강한 편이어서...." 젤타는 여기까지 말한 후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란테르트와 에르테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달쯤 전, 노마티아 본국에서 무투회에 상품으로 내 걸 테니.... 이 에르테일을 헌납하라고 했었습니다. 물론, 값은 후히 쳐준다고 했었지요. 하지만.... 에르테일 그녀가 스스로 거부했습니다. 당연히 저 역시 거절했지요. 이 에르테일은 무투회 같은 곳의 우승자에게 맡길 정도의 검은 결코 아닙니다." 노인은 이렇게 말하며 에르테일을 집어들었다. "에르테일을.... 당신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는 이 한마디를 위한, 이 한마디를 꾸미는 말들에 불과했다. 노인은 란테르트에게 검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부활한 후 200년간을 처녀로 지낸 이 검에게 새로운 주인을 찾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 적당한 사람이 나타났다. 게다가.... 그녀가 원하고 있다. 입을 열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젤타 노인은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필요 없습니다...." 노인은 란테르트의 말에 지지 않고 입을 열었다. "무슨 용도로 사용할 검을 찾으시는지.... 저로써는 알 수 없습니다만.... 에르테일은 절대적으로 뛰어난 검입니다."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테일이 뛰어난 검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다만.... 제게 소용되지 않는 물건이기에 받지 않으려는 것뿐입니다." 젤타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아마도 란테르트는 조금전 보였던 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검을 찾는 모양이었다. "크림슨 아이즈의 소문.... 익히 들었습니다. 평소 보통의 하르제 검을 사용한다고 하시던데.... 맞습니까?" 그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노인은 계속해 입을 열었다. "그럼에도 당신은 그 검으로 자르지 못하는 검이 거의 없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결코 그 정도로 만족하지 못할 어떤 이유가 있는 모양이군요." 란테르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고, 젤타는 잠시 생각을 정리해 이야기를 했다. "이 에르테일은.... 하르제 검에 비한다면 훨씬 뛰어납니다. 이 검을 거두어 주십시오. 칼이란 다 각자의 쓰임새가 있습니다. 이 에르테일이 쓰일만한 곳이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에르테일은 비록 마법 검은 아니지만, 상당히 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어 안에 잠들어 있는 혼과 마음이 통한다면 마법 증폭작용도 가능합니다. 혼을 가지고 있는 병기들의 장점이지요...." 란테르트는 노인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다른 것들은 다 그렇다 치고, 마지막의 말, 마법 증폭작용이라는 것이 꽤 마음이 동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잘은 모르지만,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이 녀석이 마음에 들었다. 아니, 이 아가씨인가? 란테르트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 대가는 무엇입니까?" 젤타 노인은 란테르트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대로 에르테일을 란테르트에게 건넸다. 동시에 네이실라는 웃으며 방 한쪽에 놓여있던 커다란 가방에서 가죽으로 된 검집을 꺼내들었다. 흰색과 연두색이 적당히 섞인 전체적인 색조가 에르테일과 비슷한 그것이었다. 검의 크기 때문에 검집에서 꺼낼 때의 편의성을 고려해서인지, 검날의 절반쯤만을 완전히 가릴수 있는 모양이었다. "자요. 에르테일의 검집이에요." 네이실라는 란테르트에게 검집을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다. 즐거운 듯 입가에 미소가 어리어 있었다. 란테르트는 왜 이 두 조손이 이렇게 검을 남에게 그냥 주면서 싱글벙글 거리 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응당, 달라고 해도 기를 쓰고 막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건만, 이들은 오히려 주면서도 즐거워하다니.... 트레시아도 약간은 그 점을 의아하게 생각했고, 호기심에 비해 인내심이 상당히 부족한 그녀는 이내 입을 열어 물었다. "왜 검을 주면서 그렇게 즐거워하는 거지? 게다가 왜 그렇게 기를 쓰고 란테르트 님께 검을 주려는 거야?" 경어 같은 것은 모르는 그녀이다. 그녀의 이 물음에 네이실라가 미소지으며 답했다. "왜 즐겁지 않겠어요? 드디어 에르테일이 제 주인을 찾았는데.... 200년 동안이나 찾아 헤맨 주인을 찾았잖아요." 젤타가 뒤이어 이야기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 검은 자신의 주인을 찾았을 때 가장 행복한 법입니다.... 에르테일은 저희 가문의 자랑거리이자, 저희 가문 사람 모두가 사랑하는 정신적 지주 같은 것으로.... 이 검이 자신의 주인을 찾았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노인의 말에 란테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다면.... 받기 힘듭니다." 다시 그가 거절하자 노인은 난처한 기색을 띄며 물었다. "왜입니까?" 그의 물음에 란테르트가 답했다. "크림슨 아이즈입니다.... 모르십니까? 저의 악명을...." 란테르트의 대답에 젤트 노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 소문 따위는 신용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저희 조손을 위해 일해주신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검을 소유할 충분한 자격을 갖추셨습니다." 란테르트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거절은 충분히 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에르테일을 허리 뒤에 찼다. 하르제 검은 풀어놓을 수 없으니 그것은 왼쪽 허리에 놓고, 에르테일은 뒤허리에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하여 두었다. 두자루의 검을 차는 것이 약간 이상한 듯도 했지만, 조금 지내다 보면 익숙해 질 것이다. 란테르트는 조용히 손을 뒤로 가져가 에르테일의 손잡이를 한번 잡아 보았다. 순간 에르테일이 살짝 몸을 떠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새 주인이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란테르트도 과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찌되었건.... 이름까지 가지고 있는 명검이 아닌가? 19. 과거.... 지나간 일들.... 시간이 늦었지만, 일행은 일단 수도를 벗어나 동쪽으로 향했다. 이 두 조손을 위해서였다. 수도에 남아 있을 경우, 10중 8, 9는 크림슨 아이즈 토벌대가 귀찮게 굴 것이 뻔했다. 물론, 그런 허접들을 쓸어버리는 데야, 시간도 걸리지 않겠지만, 쓸모 없이 국가 하나 날려버리는 일 따위는 란테르트의 취미가 아니다. 여전히 길은 험했으나, 네이실라 조손이 파티에 참여하자 시간이 조금 더 빨리 가는 듯 했다. 라무 두 마리에 각각 올라탄 젤타노인과 네이실라는 라무를 타고도 걸음속도를 간신히 맞출 수 있는 이 세명의 괴상한 사람들을 보면서 오히려 자신들이 이상한 것처럼 느껴졌다. 네이실라는 키가 그다지 크지 않았고, 라무 역시 등이 높지는 않아 라무를 탄 네이실라의 눈 높이는 간신히 세이피나와 비슷한 정도였다. "지금쯤이면 게미아 산맥의 고원지역에는 눈이 올꺼에요." 네이실라는 어둑어둑 찌푸린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별 의미 없는 말이었으나, 란테르트 곁에서 걷고 있던 트레시아는 그녀의 말에 나직이 중얼거렸다. "눈이라...." 가만히 생각해 보니, 란테르트와의 추억중 눈과 관련된 것이 하나도 없는 듯 했다. 그 흔해 빠진 연인들 사이의 소품인 눈에 관한 추억이 없다니.... 트레시아는 불쑥 입을 열어 버렸다. "란테르트님~~ 우리 눈 구경 가요." 하지만 이내 입을 손으로 막아 버렸다. 그리고는 조용히 눈을 들어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란테르트 역시 마침 트레시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트레시아는 그의 시선을 받아낼 자신이 없어 눈을 피해버렸다. 무슨 이러한 상황에 푼수 없는 말인가? 놀러 가자니.... "눈이라...." 란테르트는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트레시아를 잠시 더 바라보다 이내 앞으로 시선을 던졌다. 언제나.... 눈을 맞을 때면 두 눈을 살짝 감아보는 그였다. 그녀들과의 첫만남을.... 그 만남의 느낌을 기억해 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이내눈을 다시 뜬다. 눈이라는 이야기에 란테르트는 순간 자신의 이러한 버릇을 떠올렸고.... "다시 두달만 있으면.... 찾아가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오겠지...." 그는 트레시아의 말에 이렇게 중얼거려 답했다. 트레시아는 그의 그러한 모습에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네이실라의 활달한, 물론 약간 상황 파악은 하지 못한 말에 다시금 입을 열게 되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건가요? 저희는 집으로 가기 위해서 이쪽으로 가야 하지만.... 세분은 어디로 향하던 중인가요? 에르테일을 얻으러 이곳으로 왔다고 했잖아요." 그녀의 물음에 트레시아는 란테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거죠?" 란테르트는 생각해 보니 아직 행로를 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동시에.... 세이피나의 점을 떠올렸다. 후에 한 카이어쩌구 하는 신의 저주는 전혀 신빙성이 없었지만, 왠지 점에는 믿음이 갔기에 그녀의 말대로 남쪽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잠시동안 남쪽을 떠올리던 그는 이내 레카르도 가를 떠올렸다. 그네들의 검술도 탐이 났고, 루플루시카는 더더욱 그러했다. "마곡...." 란테르트는 트레시아의 물음에 내뱉듯 답했고, 트레시아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이실라가 물었다. "루플루시카 때문인가요?"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네이실라가 뒤이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루플루시카라고 해도.... 에르테일보다 뛰어나지는 않아요. 게다가 소검이기 때문에 위력도 그다지...." 사실 에르테일보다는 루플루시카가 조금 더 뛰어나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이 어린 아가씨는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높았기에,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상관없습니다.... 다만 확인을 해 볼 필요가 있기에...." 네이실라는 그런 그의 말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가 검을 찾아 돌아다닌다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였으나, 그 자세한 사정은 아무도 잘 알지 못하였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 라는 생각이 들자 네이실라는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었다. 어찌되었건.... 눈앞의 사내는 악마 크림슨 아이즈이다. 다시 하루를 더 걸어 일행은 노마티아의 수도 하야시 동쪽으로 50휴하 거리에 있는 비아그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보통의 상인들은 이 두 도시 사이를 3일거리로 계산 하지만, 이들은 하루하고 반나절만에 도착했다. 세사람은 차 처하고 두 조손이 이 속도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라무 덕분이다. 이 라무라는 가축은 지구력이 굉장해 50뮬(1뮬=약2키로)이나 되는 짐을 싣고도, 하루 종일 걸을 수 있다. 이곳에서 일행은 네이실라, 젤타, 이 두 사람과 헤어졌다. "저희는 잠시 집에 들려.... 꼭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다른 곳으로 떠나겠습니다...." 젤타노인은 간단히 자신들의 행로를 이렇게 밝혔고, 란테르트는 그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자신을 쫓는 추격자가 없으니.... 그다지 위험하지도 않을 듯 싶었고, 란테르트는 그저 한차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간, 네이실라는 오빠를 잃었다는 슬픔을, 약간이나마 잊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우울해 지고 하는 것은 여전했으나, 그래도 훨씬 밝아졌다. "정말 즐거웠어요. 란테르트님, 에르테일을 잘 부탁해요." 네이실라는 이러한 인사말로 일행과 작별을 고했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임으로, 트레시아는 네이실라의 머리를 한차례 흩으러 줌으로, 그리고 세이피나는 한차례 그녀를 바라봄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렇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걷던 일군의 사람들이, 일부는 동으로, 그리고 일부는 남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으로 향한 사람들이 어찌되었건, 란테르트와 트레시아, 세이피나 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행들은 마곡을 향해 남으로 행로를 정했다. 노마티아 동남 부의 평야는 거칠기 짝이 없다. 이름이 평야이긴 하지만, 평야라고 부르기 문제가 많다. 많아도 보통 많은 것이 아니다. 언덕들, 물론, 그것은 소피카에도 많다. 파도에 비견될 만큼 많다. 그리고 노마티아 동남부 역시 언덕이 많다. 이곳 역시 흔히 파도에 비교된다. 하지만 이 둘은 극명히 다르다. 소피카의 언덕은 나지막해 멀리서 보면 대지가 꿈틀거리며 울렁인다, 라는 느낌 이상은 주기 힘들지만, 노마티아의 것은 아니다. 다중파상구릉열이라는 듣기에도 우스운 학명을 가진 이곳의 언덕들은, 그 날카롭고 거칠기가 폭풍우에 미쳐버린 바다와 같다. 노마티아의 이 파도들은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모두가 열을 맞추어 길게 늘어서 있다는 점과, 위다 쪽이 경사가 급하고, 노마티아 쪽으로 경사가 완만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 이 두 가지이다. 이것 때문에 이 언덕들은 전술상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니 말이다. 이러한 군사적 이점은 노마티아사람들이 이곳을 아킬라이아(노마티아의 수호신)의 성이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 해 마지않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병사수가 절반 가량밖에 되지 않는 노마티아가 그간 위다에게 밀리지 않는 싸움을 해 온 것도, 모두 이 아킬라이아의 성채 덕분이었다. 사정이 어찌되었건, 이 일렬로 몇 겹이나 늘어서 있는 괴상한 언덕들은 그 나라의 국민들 이외에는 어떠한 사람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지 못한다. 환영을 받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모두들 수레는 물론이거니와 사람조차 이동하기 힘든 이 언덕에 대해 불만이 여간이 아니다. 하지만, 다행히 여기 이 세사람은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언덕에서건, 산 위에서건 이동속도가 비슷한 이 사람들로서는 이 높지도 않은 거칠기만 한 언덕이 장애, 라고 불리울 만한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마티아 동남 부의 평야를 2일 남짓 걸어 일행은 노마티아-위다 해협의 노마티아측 항구인 타이라에 도착했다. 이 100휴하(1휴하=약 1킬로미터) 남짓한 길을 걸어오며, 이들 세 사람은 많은 것을 보았다. 전흔이랄까?.... 거리에는 시체가 즐비했다. 다행히 10월도 20일경에 접어들어 기온이 낮았기에 지독한 썩은 내는 풍기지 않았지만, 잡새들과 벌레들이 달라붙어 있는 사람의 주검이라는 것이 주는 느낌은 결코 좋을 리가 없었다. 이러한 모습에.... 보통의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죽음을 관장하는 신 켈리시온에게 기도라도 한차례 올려 주련만.... 이 세 사람은 한차례 눈길마저 보내지 않는다. 팔이 잘려진 채 방치된 시신을 흡사 흔히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 보듯 하고, 품에 아이를 안은 채 숨을 거둔 아낙네를 그저 길가에 놓여있는 한 덩이의 바위 바라보듯 한다. 아니....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다. 시체에 경외 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이것이 신이 정해놓은 규율은 아닐 테니 말이다. 인간의 감성이 만들어낸 감상이 그렇게 느끼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감상이 없는 존재를.... 인간이라 부르기에 무리가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타이라 항은 그래도 상황이 조금 나은 편이었다. 물론, 배편이 평소의 10분의 1로 줄었고, 이 항을 이용하는 상인과 일반 시민들의 수 역시 그 이상으로 줄었으나, 어찌되었건 항구로서의 기능은 유지하고 있었다. 항구에는 위다의 병단을 실어온 포히레라는 범선이 15척이나 정박해 있었다. 이 포히레는 용병수송을 위해 만들어진 배로, 가장 큰 범선보다 약간 큰 정도였다. 보통은 한 개 함선에 한 개단(단=500명)의 용병을 태우고 보름 이상 항해를 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지금 이 포히레는 마스트 두 개에 앞의 것은 횡범, 그리고 뒤의 것은 종범을 달고 있었는데, 이러한 돛의 양식은 비교적 최근에 나온 것이었다. 이 커다란 포히레 외에 항구에는 수십 척의 배가 더 정박해 있었다. 일부는 근처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어선들이었고, 다시 일부는 노마티아와 위다 사이를 항해하는 상선과 여객선들이었으며, 다시 일부는 조금 더 멀리 다른 대륙으로 향하는 배였다. 평소였다면 이보다 서너배, 아니 10배는 되는 배가 항구에 정박해 있고, 선착장에 자리가 나기만을 기다리는 몇몇의 배들이 먼 바다에 떠 있는 모습이 보였을 터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항구는 이미 위다에 점령되어 우울한 색채를 띄고 있었다. 란테르트 등은 선박 조합에서 배편을 구했다. 전쟁 덕에 배편이 하루 1편 정도로 줄었는데, 다행히 이날의 배편에 늦지 않아 저녁 무렵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배에 올라, 란테르트는 잠시 방에서 휴식을 취하다 해가 진 후가 되어 갑판으로 올라왔다. 란테르트와 함께 있던 트레시아 역시 그를 따라 배 밖으로 나왔고,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세이피나까지 배 밖으로 나와 세 사람이 함께 밤바다의 풍경을 즐기게 되었다. 동쪽 하늘 어중간한 곳에, 반달과 보름달 사이의 어중간한 달이 떠 있었다. 트레시아는 이러한 바다를 바라보며 란테르트의 어깨에 조용히 그 탐스런 붉은 머리칼을 기대고 있었고, 세이피나는 그들과는 두걸음쯤 떨어진 곳에 서 먼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서정적인 풍경에도 불구하고.... [호호호, 내가 부럽다는 거냐?] [아르트레스 님의 수준으로 저를 낮추지는 말아 주십시오.] 두 사람은 싸우고 있다. [란테르트 님은 우리의 적입니다. 아르트레스님처럼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못하시는 분이 어떤 계략을 가슴에 품고 란테르트 님께 접근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순수하게 그분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마족에 대한 반역입니다.] [호호호. 부럽다는 말이구나.] 아마도, 트레시아가 란테르트와 다정히 서있는 모습에 세이피나가 무어라 한마디를 한 모양이었다. 트레시아는 왠지 지금 기분이 몹시 좋아 그러한 세이피나의 말을 반쯤 무시하고 있었다. [.... 후우.... 역시 말이 통하지는 않는군요.] 세이피나는 한숨을 내 쉬었고, 트레시아는 슬쩍 미소지었다. 서로 바라보지도 않는 상태에서 입조차 열지 않는 이러한 대화는 역시 이상하기 짝이 없으나, 마족들로서는 보통인 모양이다. 세이피나는 잠시 어깨에 앉아 있는 아르에의 턱을 한차례 쓰다듬어 주었고, 아르에는 그에 반응이라도 하듯 종, 하는 울음을 한차례 울었다. [그보다.... 저 얼마간 마계로 소환 당해 있을 듯 합니다. 나크젤리온 님의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세이피나의 말에 트레시아는 약간 놀라 고개를 그쪽으로 향했고, 란테르트는 이러한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역시 이상함을 느껴 세이피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이피나는 다만 먼바다를 향해 담담한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아르트레스님과 아르카이제님, 그리고 저만이 알고 있습니다. 물론, 나크젤리온님 께서도 알고 계시겠지요....] 트레시아는 그게 어쨌냐는 듯한 표정으로 세이피나를 잠시 바라보았고, 세이피나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 [아르트레스님은.... 언제쯤 마계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이렇게 오래 남아있는 것.... 저로서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그분께 누를 끼치게 됩니다. 그리고....] 세이피나는 그리고,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한참동안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성격 급한 트레시아는, [그리고, 뭐?]라고 곧바로 되물었다. [아르트레스님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이 일은.... 소멸을 당한다 하더라도....] 아마도, 트레시아를 걱정해 주는 듯한 이 발언을 입밖에 내기 싫어 한참동안 말을 끌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트레시아가 둔한 편이라 하지만, 이러한 사정 정도는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고.... [호, 웬일이야? 네가 내 걱정을 다 해주고. 아르카이제님 외에는 조금의 신경도, 관심도 쏟지 않는 얼음의 마녀 아르페오네 양께서?] [....] 트레시아의 말에 세이피나는 잠시 트레시아를 향해 시선을 주었으나 오래지 않아 먼 곳으로 보냈고, 트레시아 역시 그녀를 잠시 바라보고는 시선을 평행하게 했다. [바보.... 너는 모른다....] 트레시아는 대뜸 이렇게 말했고, 세이피나는 답하지 않았다. [나는.... 무한한 생명 같은 것에는 관심 없다. 이천 육백 육십.... 아무튼 그 정도를 살고도 아직도 더 살길 바라는 거냐? 하긴.... 네 녀석이야 아르카이제 님이 살아 계시는 한은 언제까지나 살길 바라겠지만.... 나는 아니다.] 트레시아의 이 상상외의 진지한 말투에, 세이피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즐거운 게 좋다. 행복한 게 좋고.... 네 말대로, 나는 두 가지를 동시에 생각하는 따위의 어려운 짓은 못한다. 나는 다만 란테르트 님과 함께 있는 것이 즐겁다. 이 행동이.... 이러한 행동이 내게 미칠 결과 따위를 생각하기에.... 후후....] 트레시아는 여기가지 말한 후 더더욱 란테르트의 몸에 자신을 밀착시켰다. [쓸모 없이 길기만 한 목숨을.... 하기 싫은 일까지 해가면서 연명하기보다는, 내일 당장 소멸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 세이피나는 그녀의 말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단순 무지하다고만 생각했던 자신의 누이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게다가.... 이 이야기는.... 언젠가 들어보았던....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었던.... 비슷한 논리의 말이다. [목숨을.... 던져서라도.... 하고 싶은 일이란 말입니까?....] 세이피나는 이렇게 조용히 물었고, 트레시아는 무응답의 긍정으로 그녀의 말에 대구했다. [제가 없는 동안.... 란테르트 님을 지켜 주십시오.] 세이피나는 이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선실로 향했다. 그리고, 트레시아는 그런 그녀에게, [물론이지~]라는 대답을 전했다. 하지만 역시 단순하긴 단순했다. 세이피나가 란테르트 님을 지켜 주십시오, 라고 한 말에서 조금의 이상한 점도 느끼지 못했으니 말이다. 한편.... 생각을 정리해 보겠다고 밖으로 나온 란테르트는.... 트레시아와 세이피나의 전언이 무얼까, 라는 생각에 잠시 골몰히 잠겨 있었던 덕에, 본래의 목적은 전혀 달성치 못하였다. 헛되이 뱃전을 두들기는 파도 소리만이 그의 귀를 어지럽혔을 뿐이다. 아침나절, 일행은 위다-노마티아 해협의 위다측 항구인 헤도콘에 도착했다. 헤도콘 항해 내려서자 마자 세이피나가 란테르트에게 말했다. "잠시.... 카이그라미온 님의 신탁을 받아.... 일을 행하고자 합니다. 며칠 안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이 말에 란테르트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르페오네.... 그녀가 스스로 정체를 밝히기 전까지는 모르는 척 하고 있기로 마음먹었기에, 란테르트는 가능한 한 그녀를 방해치 않기로 했다. 세이피나는 뒤이어 트레시아에게 눈인사를 했고, 트레시아는 그런 그녀에게 한차례 미소지으며 인사했다. "남자들 너무 울리지 말아. 사제 세이피나양. 그리고, 카이그라미온 님께, 깔려 짜부러지지 말라고 안부 전하고." 그녀의 말에 세이피나는 약간 안색이 변했으나, 이내 한마디했다. "수집품들이 난동이라도 부리면 골치 아픕니다.... 종종 돌보아 주십시오." 트레시아의 안색이 세이피나의 것에 비해 훨씬 크게 변했고, 잠시 고개를 돌려 란테르트의 눈치까지 살폈다. 그 모습에 란테르트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수집품? 난동? 무슨 생물을 수집하나 보지?" 그의 물음에 트레시아는 안색이 흙빛이 되었으나, 이내 침착과 냉정, 물론 아르트레스 그녀의 수준에서의 침착과 냉정이지만, 그것을 되찾으며 말했다. "아, 도, 동물이요. 멍멍 짖고.... 뭐 그런 거 있잖아요."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애완동물? 트레시아가 그런 것도 길러?" 트레시아는 고개를 응, 하며 끄덕였으나.... 세이피나의 반격은 치밀하고 또 잔인했으며, 그러면서도 꽤 교묘했다. "전에.... 말도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아, 그랬던가? 아, 맞아.... 말도 해.... 종종 그런 동물도 있잖아.... 하하...." 트레시아는 더듬거리며 이렇게 변명했고, 란테르트는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네가 사는 곳에는 별 신기한 것이 다 있구나...." 란테르트의 말에 트레시아는 어색히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동시에 세이피나에게 전언을 보냈다. [그만하고 어서 사라져 버려!] [그럼....] 세이피나는 이렇게 전언을 보낸 후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항구의 동편으로 걸어갔다. 오래지 않아 건물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고, 두 사람은 눈으로 그녀를 전송해 주었다. 이윽고 그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란테르트와 트레시아는 서로를 바라보았고, 란테르트는 한차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의외로 서정적인 면도 있는걸? 애완동물이라니.... 아, 그보다, 예전에.... 음.... 미남자 수집도 하고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의 물음에 트레시아는 심장이 헉, 하고 멈추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아.... 설마 그 농담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는 건가요? 호호호~" 라고 대강 얼버무려 버렸다.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잠시 미소를 짓고는 다시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왜, 미남자 수집과, 세이피나가 말한 수집품, 이 두 가지가 하나로 연결이 되지 않는지는, 테미시아 님에게나 물어야 할 것 같다. 위다 북부지방 역시 노마티아 동남부 평야만큼이나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날씨가 아니라 분위기가 그렇다는 말이다. 비록 전장 터는 노마티아 남부의 평야 였으나, 그 여파는 이곳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세율이 천장부지로 치솟고, 물가 역시 그것을 쫓는다. 하루에도 몇 차례나 군수품이 북쪽으로 옮겨지며, 수많은 병사들과 마법사들이 그것을 따라 마을 한복판을 지나다닌다. 이러한 상황이 몇 날 며칠, 그리고 몇 달을 계속되었으니, 멀쩡한 편이 비정상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게는 엔클레이브가 있다. 정신적, 물리적 단절과 함께.... 사회적 단절까지 안겨다 주는.... 완전히 독립된 존재들.... 완전히 괴리된, 단절된 존재.... 세이피나와 헤어진 후 늦은 저녁.... 오래간만의 노숙이다. 오늘 역시 막 60휴하의 강행군(?)을 한 후 이 두 남녀는 모닥불을 하나 피우고 나서 그 곁에 가만히 자리를 잡았다. 그나마 다른 일행이라도 있으면, 저녁 식사가 사람이 먹을 만한 것이 될 터이나.... 란테르트는 단지, 영양분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 양의 건량을 씹어 먹은 후, 차가운 물을 벌컥 몇 차례 들이마실 뿐이었다. 이런 쪽에는 이미 신경을 꺼버린지 오래이다.... 트레시아는 어찌 되었건 즐거웠다. 다만, 란테르트 그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 하나로 즐거웠다. 란테르트와 다시 만난지 며칠이 흘렀지만, 얼음의 마녀 때문에 오붓한 시간도 보내지 못했지 않았는가? 트레시아는 조용히 란테르트의 어깨에 기대어 앉았다. 란테르트는 아직 잠을 자기에는 이르고 해 하릴없이 멍하니 앉아 있다가 트레시아가 자신에게 기대어 오자 고개를 돌려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자신이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괜히 헛웃음이 튀어나온다. "후후.... 트레시아...." "예?" 트레시아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 란테르트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붉게 이글거리는 모닥불 빛에, 그렇지 않아도 건강한 붉은 빛을 띄던 얼굴이 더더욱 붉어져 있었다. "아침에...." 란테르트는 여기까지 말한 후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멈춰선 것은 할 말의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이쯤 세이피나의 정체를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르페오네가 한 말 사실이야?" 란테르트의 이 물음에 트레시아는 별 생각 없이 되물었다. "무슨 말이요?" 하지만, 다음순간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아르페오네라뇨?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 에요?" 역시.... 트레시아는 연기에 서툰 편이었다. 목소리의 억양이 약간 높아지고 말하는 속도가 약간 빨라진 것이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란테르트는 트레시아의 그런 모습을 미소와 함께 바라보았고, 트레시아는 란테르트에게서 시선을 약간 다른 쪽으로 돌린 채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른 끝에 트레시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세.... 짐작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하지만 그때는, 아르페오네 아니면, 다른 정령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너와 만난 순간 확 실히 알 수 있었지." 란테르트의 말에 트레시아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우후후, 거리는 웃음을 웃었다. "혼자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만.... 무슨 실수를 한 모양이지요?" 트레시아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약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던 데가가.... 결정적으로....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이런 것만으로는.... 세이피나가 아르페오네이다, 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지.... 인상착의도 잘 모르고 있었고.... 실제로 본적도 없으니...." 란테르트는 여기까지 말한 후 잠시 쉬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번 너와 만났던 날, 그날 확실히 알 수 있었어.... 아무리 보아도 서로 완전한 적대관계는 아닌 듯 하고.... 뭐, 그렇게 이런 저런 존재들을 지워 나가다 보니, 마족 아르페오네만 남더군...." 트레시아는 란테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지나치게 뜨듯 미지근한 반응이다. 지금까지 그녀가 세이피나, 즉 아르페오네와 해온 말싸움을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상황에 오호호~~하는 웃음을 한차례 울어 예른 후 아르페오네의 한심한 점을 크게 한바탕 늘어놓는 것이 적당할 듯 한데.... 트레시아의 입에서는 그렇군요, 한마디만이 흘러나왔다. "동생이라고 했지?" 란테르트가 물었고, 트레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동생.... 이제는 둘밖에 남지 않은...." 트레시아는 여기까지 말한 후 고개를 모닥불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부탁이니.... 아르페오네를 그냥 세이피나로 대해 주세요. 알고 있다는 것도 내색하지 말고요...." "그야 어렵지 않지만...."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말꼬리를 흐렸고, 트레시아는 그런 란테르트를 한차례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 모닥불로 시선을 옮겼다. 두 무릎을 가슴으로 끌어당겨 앉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완벽해야만 해요.... 결코.... 흔들려서는 안돼요.... 그러지 않고는.... 그녀 스스로가 버틸 수 없을 꺼에요." 이 뜸금 없는 이야기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의 아르페오네는.... 옛날과는 많아 달라졌어요." 이렇게 말한 후 트레시아는 고개를 돌려 란테르트를 향해 한차례 미소지으며 이야기를 했다. "트레시아야.... 원래 옛날부터 단순 했지만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낙천적이라고 해 두지...." "고마워요...." 트레시아는 말끝을 길게 늘였고, 이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실이에요. 우리 마족들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결정 지워져요. 그렇게 만들어지고.... 그렇게 키워지고.... 저같은 경우는,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흑염패, 즉 마계 제 1의 장군으로 정해져 있었어요. 단순하면서 용감하고 강하게.... 그게 제가 길러진 방향이에요. 반면 아르페오네, 그 아이는 대단한 두뇌를 소유하게 되었지요. 흑염무.... 아르카이제 님의 보필과 함께, 계략 및 책략 부분을 담당할 존재...." 란테르트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고, 트레시아는 턱을 무릎 사이에 올려 놓은 채 모닥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었다. "전 단순하게 태어났고, 그렇게 자라야만 했어요. 성격까지 그렇게 만들어져서인지.... 그쪽이 좋더군요. 그리고 아르페오네 역시 저와 같은 과정으로.... 지금의 그녀가 되었고요.... 각성 이전의 기억은 그다지 없어요. 다만.... 사람들처럼 어렸을 때가 있었고.... 이런 저런 경험들과 기술들을 이식 받았다는 기억 정도가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죠." 트레시아는 여기까지 말한 후 잠시 멍하니 불꽃을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돌연 피식 웃었다. "얼음의 마녀.... 원래 아르페오네는 그렇지 않았어요. 도도하고.... 저와 언제나 티격태격 다투고.... 지금까지도 절 언니라고 부르지 않잖아요. 언제나 비웃는 듯한 미소로 응대하고.... 누구에게 지는 것도 싫어하고.... 그리고.... 저와는 달리 실수가 없었지요. 모든 일을 척척 해냈어요. 실수 투성이의 저와는 달리.... 그러던 아이가...." 트레시아는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입가에 고요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이 순간만큼은.... 평소의, 미남자 수집이 취미인 아르트레스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입을 다물어 버렸어요. 저와는 그럭저럭 이야기를 하는 편이었지만.... 아르카이제 님과, 저 정도가.... 그녀가 업무상의 것이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존재 전부예요." 란테르트는 트레시아의 말에 고개를 묵묵히 끄덕였다. 듣고 있다는 표시였다. "아마.... 그분을 사랑하기 시작한 때가.... 후후후.... 바보 같은 아이.... 이룰 수 없는 사랑 따위를 하니.... 바보가 되어 버리지...." 트레시아는 이렇게 말하며, 괜히 곁에 쌓아 놓았던 장작개비를 하나 모닥불로 던져 넣었다. 아직 활활 잘 타고 있건만.... 화풀이인 모양이다. "그런 아이일수록.... 흔들리면 겉잡을 수 없어요. 그 아이는, 동요를 줄이기 위해 말을 줄였죠." 이렇게 말하며 트레시아는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란테르트 님도 그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데로.... 하게 해 주세요. 절대.... 그 아이에게.... 실패나 실수라는 감정을 안겨주지 말아 주세요.... 그러한 것은.... 그 아이에게 실패라는 것은.... 지금에 있어서는 죽음과도 마찬가지의 것이니까요...." 란테르트는 막 트레시아의 마지막 말이 끝날 무렵, 조용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좋은.... 언니구나.... 트레시아는...." 그런 란테르트의 말에 트레시아는 웃었다. "후후후.... 단순하다니까요.... 결코 그 아이가 걱정되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그 아이가 죽으면, 말싸움을 할 상대가 없어져 버리기에...." 란테르트는 정색을 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결코 그렇지 않아 보이는걸? 좋은 언니야.... 칭찬 받을 만 한...." 그의 이 말에 트레시아는 돌연 표정을 밝게 바꾸며 입을 열었다. "그려면 선물 하나 주실 레요?" 란테르트는 순간 무슨 말이 돌아올지 두려웠기에 약간 미묘하게 말을 돌렸다. "한번 말 해봐.... 내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이라면 뭐든지 들어줄게." 란테르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트레시아는 확 하고 란테르트를 덮쳤고, 이내 란테르트의 몸 위에 올라탔다. "오늘밤~~~ 즐!겁!게! 어때요?" 그녀의 그러한 말에 란테르트는 잠시 트레시아를 올려다보았다. 붉은 색의 곡모가 흐드러지게 자신을 향해 쏟아져 내려오는 모습에, 그리고 그녀의 붉은 색의 도톰한 입술이 달빛에 은은한 빛을 내뿜는 모습에.... 란테르트는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란테르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자신의 가슴팍에 올려져 있는 트레시아의 손을 잡았고, 트레시아는 그에 조용히 란테르트의 품에 몸을 기대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트레시아는 이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란테르트에게서 벗어났으며, 란테르트는 그런 트레시아의 모습에 아무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트레시아는 다시 원래 앉았던 곳에 앉으며, 두 무릎을 끌어안았다. "왜인지.... 란테르트 님은 남자로 품에 안을 수가 없어요...." 트레시아의 말에 란테르트는 그녀를 바라다보았다. 두 눈은 조용히 내려 깔려 있었고, 왠지 약간은 처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벽이랄까? 아니.... 어쩌면.... 뭐랄까.... 음.... 이런 말하기 조금은 무엇하지만...." 트레시아는 그녀답지 않게 한참동안이나 말을 더듬거렸고, 이윽고 입을 열었다. "경외심?.... 이런 감정은 잘 모르겠지만.... 아르카이제 님을 대할 때와 비슷한, 하지만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어떠한 느낌이 들어요. 유혹을 하려고 분위기를 잡을 때면.... 나도 모르게 거부감이 들며 결국에는 웃음이 터져나오고...." 이렇게 말하며 트레시아는 두 팔을 뻗어 기지개를 폈다. 몸을 쭉 뒤로 뻗고, 두 다리 역시 앞으로 뻗으며 그녀는 잠시동안 멀리 어둠에 가리어 보이지 않는 지평선 쪽을 바라보았고, 천천히 두 팔과 다리를 모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방금 과는 달리 꽤나 장난기가 있는 목소리였다. "정말 불행하지 않아요? 란테르트 님에게도.... 그리고 저에게도."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역시.... 그런 것인가? 자신 역시 트레시아의 그 아찔한 몸매에 어택킹을 당하면서도, 그다지 흔들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인간이었고, 그 때문에 오는 동요는 약간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자연스럽게 여자로 대할 수는 없었다. 흡사.... 동생? 그와는 조금 다르면서 비슷한 그러한 느낌을 언제나 트레시아에게서 느끼는 그였다. 뒤이어 트레시아가 입을 열었다. "게다가.... 이러다가는 아르카이제 님에게 혼날지도 몰라요. 소멸이라도 당하면.... 억울하잖아요." 역시 꽤나 장난기가 있는 말이었고, 그 말에 란테르트는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하지만, 란테르트는 이내 진지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나는 몇 년 안에.... 앞으로 2년.... 내가 30세가 되는 그 생일날까지.... 라브에의 복수를 하지 못한다면...." 이 란테르트의 말에 트레시아는 고개를 획 돌려 그를 바라보았고, 그곳에서 그녀는 쓸쓸한 눈매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란테르트를 발견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인간은.... 그냥 한차례 스쳐 지나간.... 그러한 것으로 생각해 둬.... 그쪽이.... 그편이 훨씬 좋을 꺼야...." "무슨 소리 에요?.... 그런 슬픈 말은 하지 말아요." 트레시아는 란테르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돌려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란테르트의 이 나지막한 한마디의 말은.... 말꼬리를 흐려 탁탁거리는 모닥불의 소리에 사그러 들었고, 트레시아도, 란테르트도 조용히 모닥불을 바라보며, 이날의 밤을 보냈다. 조금은.... 쓸쓸한 밤이었다. 미리아 호수는 일곱 대륙을 통틀어 가장 크다. 수심에 있어서나, 그 넓이에 있어서나 다른 두 호수에 비해 약간이지만 크다. 대륙에는 모두 세 개의 호수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 미리아이고, 그 다음의 것이 이제는 타락해버린 최고의 용병대 레드 미스트가 위치한 아그라 호수, 그리고 셋 중에서는 가장 그 크기가 작지만, 결코 작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카나쉬소 호수가 그것이다. 미리아 호수는 온통 주위가 숲으로 뒤덮여 있다. 숲의 이름은 미테리아로 이제는 숲에 마을이 많이 들어서 그다지 우거지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지난 4일 동안 이 두 사람은 200휴하나 걸었다. 말은 그다지 많지 않았었다. 트레시아는 란테르트의 곁에 가까이 붙어 걸었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채 묵묵히 걸음을 걸었다. 하지만.... 란테르트는 근래 들어 가장 정서가 안정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트레시아 역시 즐겁다면 즐거울 그러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것이 동료와 그 이상인 사람과의 차이라고나 할까?.... 미테이라 숲의 북단이 막 시작되는 곳에는 한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라자라는 이름의 마을로, 별다른 특징 없는 말 그대로의 마을이다. 아, 하나정도의 특징은 가지고 있다. 바로 괴상한 마도사의 전설이다. 100년전쯤.... 이 마을에 한 괴상한 마도사가 찾아 왔었다고 한다. 여러 일행이 함께 있었는데, 그중 한 아가씨가 독에 걸렸었다. 그런데 그 독의 해독약은 테에이산 정상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었고.... 이곳에서 테에이산 정상까지 빠른 걸음으로도 2일 이상 걸리니 왕복 5, 6일은 걸리는 거리였다. 하지만.... 그 마도사는 서너 시간만에 그곳에 다녀 와 그 독을 해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란테르트는 주점에 앉아 왠 허름한 옷차림의 음유시인이 이런 내용의 노래를 읊고 있는 것을 듣고 있었다. 술이 한잔 몸에 들어간 트레시아는 약간 취기가 올라, 물론 원한다면 취하지 않을 수 도 있었으나 그 반대도 가능하다, 얼굴이 더더욱 발그스래 해 졌다. 트레시아는 그 노래에 훗, 하는 웃음을 웃었다. "테에이산 정상이면 순식간에도 갔다 올 수 있겠다. 호호호호~~" 다행히 그녀의 목소리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약간 성가신 일이 일 법도 했다.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살짝 웃었다. "음.... 하루 정도면.... 가능하겠지만.... 서너 시간은 역시 무리겠지?" 란테르트의 말에 트레시아가 물었다. "데려다 드릴까요? 음..... 한명 정도는 데리고 워프 할 수 있을 꺼 에요...."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순간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되었건.... 테에이산 정상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 아닌가.... 그리고.... 그녀를.... 란테르트는 트레시아의 물음에 슬쩍 고개를 끄덕였고, 트레시아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란테르트의 손을 잡았다. "그럼 가요~~" 그리고는.... 주점 한가운데서 워프를 해버리는 트레시아였다. 사람들은 돌연 사라진 이 두 사람이 있던 공간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고, 이내 모두들 술기운을 탓하며 다시 하던 일을 계속 하였다. 트레시아는 술기운 덕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데리고 워프 하는 것이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어서인지, 중간에 세 번이나 엉뚱한 곳으로 워프 했었다. 만약 란테르트가 날 수 없었더라면 일이 났어도 진작에 났을 것이다. 그렇게 도착한 산의 정상.... 거의 11월이 다 된 덕인지, 테에이산 정상에는 한켜 눈이 쌓여 있었다. "와!! 눈...." 달빛에 눈이 반짝이고 있다. 이미 내린지 몇일이 지나 눈 사이에는 조금한 얼음 알갱이가 촘촘히 박혀 있었고, 그 얼음의 조그마한 결정은, 이제는 거의 보름달이 된 달빛에 흰색의 초롱초롱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테에이산의 정상부 서편에는 절벽과 너럭바위가, 그리고 동편에는 아래로 향하는 길이 있다. 전에..... 이카르트는 서편의 바위에 앉아 란테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란테르트는 에라브레 그녀와 함께.... "후우...." 란테르트는 한차례 한숨을 내 쉬며, 일전 이카르트가 앉아 있던 그 바위에 엉덩이를 걸쳤고, 트레시아도 그의 곁에 가만히 앉았다. 한참동안.... 란테르트는 입을 열지 않았고, 그에 따분함을 느낀 트레시아는 발밑에 있는 눈을, 선홍색의 하이힐로 툭툭 차 올렸다. 눈은 그녀의 발길질에 부스스 부스러져 확 하고 차가운 대기 속으로 흩어졌고, 순간마다 흰빛의 안개가 두 사람의 시야에 펼쳐졌다. "괜히 온 것 같아요...." 한참이 지나도록, 한차례 한숨을 내 쉰 것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란테르트를 보며, 트레시아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애꿎게 차올리던 눈도, 이제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대꾸치 않았다. 정말.... 그러한 지도 몰랐다. 전에 에라브레와 함께 산을 올랐을 때.... 그때는 조금이지만, 아니 상당히 즐거웠었다. 에라브레는.... 여전 마음을 열지 않은 채 퉁퉁거리기만 했었고.... 자신은 그런 에라브레의 투정에 어쩔 줄 몰라하고.... 하지만, 함께 있을 수 있었기에 즐거웠었다. 그리고.... 산 정상으로 오르면서.... 며칠이나 떨어져 있었던 친구와의 재회 역시 꽤나 기다려지는 일이었었다. 산 정상에서 기다리고 있을.... 보랏빛 머리칼의 친구.... 이 둘을 한꺼번에 잃은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어찌 보면.... 아니, 분명 저주받을 장소이다. 자신에게 있어서.... 지옥 같은 기억들 만을 안겨준 장소.... 하지만.... 왜인지 이곳은 싫어할 수 없었다. 입에서 내뿜는 김이 사라지는 저곳에는 눈 사이에서 탐스러운 붉은 꽃 이파리를 자랑하고 있는 조그마한 꽃이 있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버린, 아직도 잎이 푸른 나무가 몇 그루 서 있다. 이러한 것들이 왕궁의 일급 정원사들도 흉내낼 수 없는 솜씨로 배치되어 있는 이 장소는.... 증오하기에는 너무 아름답다. 게다가.... 그가 좋아하는 곳이 아닌가? 지금에 와서도 그러한지는 알 수 없지만.... "트레시아...." 란테르트가 입을 열었고, 약간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땅을 내려다보고 있던 트레시아는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예?...." "미안해...." 란테르트가 입을 열었고, 트레시아는 무슨 말인지 일순 이해가 되지 않아 잠자코 바라보고만 있었다. "괜한 곳에 함께 오자고 해서.... 기분만 망치고...." 란테르트의 이 말에 트레시아는 돌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는, 무릎 위를 살짝 덮고 있는 검붉은 색 스커트가 활짝 펼쳐지도록 빙그르 한바퀴 돌았다. "기분을 망치다니요? 나 아르트레스에게 그러한 일이 있을 것 같나요? 오호호호호~~~" 란테르트는 그 모습에 한차례 쿡, 하고 웃었으며, 트레시아는 그런 그의 앞에 서서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붉은 색과 흰색은.... 아주 잘 어울려." 란테르트는 눈을 배경으로 붉게 타오르는 그녀의 모습에 이렇게 말해 주었고, 트레시아는 바위에 앉아있는 란테르트에게 뛰듯 안겨들었다.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 덕에 뒤로 넘어졌고, 자연스레 트레시아는 란테르트의 몸 위에 ㄱ질러져 있었다. 그녀는 한 뼘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향기로운 향이 섞인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칭찬 고마워요." 하지만.... 이 한마디를 한 후, 트레시아는 몸을 반바퀴 돌려 란테르트와 나란히 누웠다. 유난히 맑은 밤하늘이 무수한 광점들로 어지러이 밝아 있었다. 바위 위에는 눈이 손가락 길이 만큼 쌓여 있었으나, 이 두 사람은 그다지 추위를 느끼지 못하였다. 트레시아야 원래 이 차원 안에서는 추위든 등을 느낄 수 없었고, 란테르트의 경우에는 등이 차갑기는 했으나, 그냥 견딜 만 했다. "혹시.... 이카르트가 왜 이곳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어?" 란테르트는 그저 시선을 앞으로, 밤하늘의 저 높은 곳으로 향한 채 이렇게 물었고, 트레시아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니요.... 정확한 것은.... 제가 각성한 그 때에도, 그분은 이곳을 좋아하셨다는 것이에요. 아마도 넷째가 실종된 그 일과 무슨 상관이 있는 듯 해요." "그런가?...."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한 후 조용히 생각에 잠기었다. 네 번째 아이.... 왜인지 이카르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언급되는 이름이었다. 모든 일의 시작이.... 마치 그 아이의 납치 였던 것처럼.... "그런데...." 트레시아가 운을 뗐다. "란테르트 님.... 정말.... 하시려는 건가요?" 트레시아의 이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물론....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유인데...." 그의 말에 트레시아는 고개를 돌려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럴지도 모르지...." 란테르트는 말에 트레시아는 외치듯 뒤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가 아니에요. 나크젤리온님.... 그분의 힘이라는 것은.... 마족들로서도 범접할 수 없는 것이에요. 신이니까요.... 마족 과 같은 불멸이 아닌.... 영원한 존재예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가 물었다. "불명과 영원이라.... 무엇이 다르지?" "음... 저도 잘은 몰라요.... 예전에, 아르페오네에게 물었었는데.... 그 아이는 이렇게 답해 주었지요. 불멸이란 죽지는 않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존재로.... 그 때문에 변화가 있는 반면, 영원한 존재는 변화가 없데요. 그 자체로 완벽한 것이지요. 그 외에, 신과 우리 마족들 사이의 차이로는, 몸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가 필요하냐 그렇지 않느냐를 들 수 있어요. 그리고.... 신들의 경우에는 우리보다 하나의 차원을 더 다룰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힘의 차이는 무한대에 가깝죠."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냥.... 포기하세요. 살아있는.... 우리들과.... 이전처럼 지네는 거예요.... 전.... 일생중, 란테르트 님과, 에라브레, 모라이티나와 함께 보냈던 그 때가.... 손에 꼽을 만큼 즐거운 나날이었어요. 다시 한번.... 그때로 돌아가는 거예요...." 란테르트는 트레시아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사실, 자신도 그러했다. 그때만큼.... 그때만큼 행복했던 날을 꼽으라면 겨우 두 자매와 함께 보냈던 그 시간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이전에도 나쁘지 않았다, 라는 느낌의 날들을 꽤 되었으나, 행복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크게 부족하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행복을 파괴하고.... 더 나아가.... 그녀를 죽인 나크젤리온에게.... 복수를 하지 않는다면?.... 에라브레를.... 맹목적으로 자신을 믿고 사랑해 주었던 한 아가씨의 동생이자, 두 번밖에 되지 않는 짧은 행복 모두에 관여된 그녀를 대할 면목이 없다. 불가능하면 어떠한가? 이미 그런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인간 따위의 힘으로 마왕을 죽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복수를 결심한 그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해 보고 싶었다. 철저하게.... 그리고 무능력하게.... 신이 던진 주사위를 따라 흘러만 온 자신이 싫어, 단 한 번이라도 그러한 신에게 도전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두 자매에게.... 목숨을 건 선물을 안겨주고 싶었다. 아무런 쓸모도 없는 자신이란 존재 때문에 목숨을 잃은 그녀들이다. 이렇게 라도 하지 않는다면.... 혼돈의 바다로 그녀들을 만나러 갈 면목이 없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트레시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르카이제 님도.... 그분도 원하고 계실 꺼 에요.... 차라리, 란테르트 님이.... 마족에 대한 적대감을 버리기를...." 란테르트는 그녀의 이 말에 고개를 돌려 트레시아를 바라보았다. 검게 물들어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눈가가 약간이지만 젖어 있었다. 란테르트는 그러한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하늘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과연 그럴까?...." "물론이죠. 지금 아르카이제 님이 란테르트 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잖아요." 트레시아는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이내 가로로 저어지는 란테르트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이유는 아니야.... 트레시아 너는 어떻게 나를 만나러 올 수 있는 거지? 아르카이제.... 이카르트가 올 수 없는 걸음을.... 너는 어째서 나에게 향할 수 있는 것이지? 너 역시도.... 굉장히 중요하며 높은 자리에 있는 마족이면서." "그.... 그게...." 란테르트의 물음에 트레시아는 잠시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입을 열었다. "전.... 란테르트 님을 사랑하잖아요. 이렇게.... 란테르트 님을 만나는 일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좋지 못한 일인지는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란테르트 님을 만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돌려 트레시아를 향해 한차례 쓸쓸한 미소를 지어주고는 입을 열었다. "이카르트는 어떨까?.... 그가 자신의 목숨을 아깝게 여겨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고는.... 잘 믿어지지 않아...." 트레시아는 란테르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전에도.... 아르페오네 그 아이가 죽어야만 할 죄를 지었을 때.... 그분이 친히 나크젤리온 님께 상소를 올려 구해 냈는걸요.... 나크젤리온 님의 뜻에 정면으로 맞서서...." "그럴 꺼야.... 그라면...." 란테르트는 트레시아의 말이 이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그가.... 나를 찾아오지 않는 이유는.... 내가 나크젤리온에게 복수를 결심했기 때문이.... 마족을 적으로 돌렸기 때문이 아니야...."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러한 것 같았기에, 트레시아는 이렇게 물었다. "그럼.... 어째서...." 란테르트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알 수 없었다. 왜 그가 자신을 만나려 하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란테르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고, 트레시아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언젠가.... 언젠가 만날 수 있겠지...." 란테르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언젠가.... 그리고 트레시아는 그런 말을 하는 그의 옆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날이.... 초췌해지고 쓸쓸해져가는 그의 모습을.... 다음날 아침에 해가 뜨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둘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산 아래로 내려왔다. 트레시아의 워프 능력은 란테르트까지 데리고 자유자재로 구사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듯 하여 그냥 둘은 걸어서 하산했다. 란테르트를 데리고 자유롭게 공간 도약을 하는 이카르트와는 힘의 차이가 확연했다. 산 중턱쯤 오니, 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전형적인 늦가을의 풍경으로, 붉고, 노랗고, 다시 푸른 이 세 가지 빛깔이 조각조각 뒤섞여 알 수 없는 무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 인지 숲에는 얇은 서리가 내려 있었고, 희디 뽀얀 서리가 내려서인지 이 색색의 잎들은 한층 선명했다. 란테르트는 산을 내려오면서 에르테일이 등뒤에서 덜썩 덜썩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새삼스레 그것의 존재를 인식했다. 아직까지는 자신의 것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검이었다. 란테르트가 이런 생각을 하며 잠시 손을 등뒤로 가져가 검을 잡아 보았고, 그 모습에 곁에서 걷고 있던 트레시아가 입을 열었다. "마곡.... 루플루시카를 찾아가는 거지요?"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트레시아 그의 대답에 다시 물었다. "만약.... 그것마저 실패한다면 어떻게 할건가요? 에르테일 소드.... 그리고 루플루시카.... 드라케 블레이드.... 셋 모두.... 인간이 만들 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것들이에요. 제가 알고 있기로는.... 이 일곱 대륙의 인간이 만든것중 그 세 가지 이상 가는 것은 없어요." 트레시아의 이 말에 란테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들 중 찾아보아야지...." 그의 말에 트레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신들의 병기는.... 이 땅에 얼마 남아있지 않아요. 게다가.... 모두들 소유자가 분명하고...." 그녀의 말에 잠시 묵묵히 있던 란테르트가 다시 말을 꺼냈다. "모라이티나.... 그녀가 가지고 있던 레이요니르 정도면 어떨까?...." 란테르트는 진작부터 이 물건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지만, 일단 찾아가기가 보통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미루고 있었다. 일단, 엘프들이 살고 있다는 중앙대륙이라는 곳 자체가 전설상에나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었으니, 가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란테르트의 말에 트레시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신이 만든 병기예요.... 하지만, 그 위력에 대해서는 알 수 없어요. 모라이티나 그 아이를 봐요.... 레이요니르로 그 정도 위력밖에는 낼 수 없잖아요." 란테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중앙 대륙 말고 또 어떠한 곳이 있지? 이카르트에게 듣기에는 먼 동쪽에도 대륙이 있다고 하던데...." "예. 먼 동쪽에.... 셀린타라는 이름의 거대제국이 있어요. 이곳 일곱 개의 대륙을 합친 것 보다 몇 배나 되는 거대한 곳이지요. 하지만, 오히려 역사는 이곳보다 짧아.... 이렇다할 굉장한 물건은 없어요. 마법조차 없는 땅인 걸요." 트레시아는 이렇게 답한 후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과거, 나크젤리온 님과 함께 살아 계셨던 차르마흔 님이 다스리던 곳으로.... 나크젤리온 님과 차르마흔 님이 계약으로 각 땅의 마족이 서로의 땅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래서.... 자세한 것은 저도 잘 몰라요. 게다가 흑룡 차르마흔 님은 소멸하셨고.... 휘하의 마족들도 거의...." 트레시아의 설명에 란테르트는 음, 하는 짧은 신음을 내뱉었고, 트레시아는 곧바로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그리고 남쪽 중앙대륙 아래에도 커다란 대륙이 하나 있는데....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 개의 대륙 중에는 가장 역사도 오래고.... 그러니, 이것저것 쓸만한 물건들이 꽤 있어요. 다프칸 연합국이라던가?.... 하지만, 그곳에는 드래곤들이 살고 있어요." "드래곤...." 란테르트는 돌연 이렇게 한마디 중얼거렸고, 트레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 땅에 살고 있는 존재치고는.... 아니 절대적으로 강한 존재들이에요. 보통의 성년이 된 용들의 힘이 저와 맞먹을 정도이니.... 용들의 왕은 아르카이제 님, 그분과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고요...." 그녀의 설명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프칸.... 그곳에 한 번 가 보아야 할 것인가?...." 트레시아가 대꾸했다. "글쎄요.... 그렇다고 해서, 그곳에 나크젤리온 님에게 해를 가할 수 있는 무기가 있다는 뜻은 아니에요. 언제나 인간이 만든 것치고는, 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하니까요." "그런가?...." 트레시아의 말에 란테르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두 사람은 미테이라 숲의 서단, 테에이산의 입구 근처에 도착했다. 꼭 입구랄 것도 없었지만, 아무튼, 이것저것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팻말 달린 말뚝하나 딱 하니 밖아 놓고 여기가 입구요 하니 그런가 보다 할밖에..... 그리고 그 입구 근처에 두 명의 존재들이 서 있었다. 생긴 것도, 복장도 인간과 같았지만, 굳이 존재라고 표현한 것은 그들이 분명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란테르트와 트레시아를 보자마자 아는 척을 하며 다가왔다. "란테르트 님이십니까?" 그에 란테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분명 어디선가 본 얼굴들이다. 한 명은 온통 파란색으로 도배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녹색으로 도배를 했는데.... 둘 모두 여자였고, 또 굉장히 아름다웠다. 뭐 당연한 일이지만.... 분명 정령들이다. 언젠가.... 로렌시아라고 하는 공주와 함께 있었던 자들.... 파란 물감을 온통 뒤집어 쓴 여자가 물의 령 시렌, 그리고, 녹색의 여자가 바람의 령 미디나이다. 란테르트가 정령을 직접 본 것은 그때 한 번 뿐으로,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다시는 정령들을 보지 못했다. 분명 아는 얼굴의 정령이라면 그들일 것이다. 두 명의 정령은 고개를 돌려 트레시아를 바라보았다. 노골적인 적대감은 드러내지 않았지만, 결코 반가워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것도 잠시.... 이내 다시 란테르트에게 고개를 돌린 이 둘은 그에게 입을 열었다. "로렌시아 님께서 란테르트 님을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둘의 말에 란테르트는 으음 하는 신음을 내뱉었다. 확실히 정령왕과 계약을 맺은 여자이니.... 자신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이야 일도 아닐 테고.... 이들 둘이 이렇게 돌연 눈앞에 온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이야 별 일 아니었으나.... 자신을 데리고 오라는 일에는 이렇게 나지막한 신음을 한차례 내뱉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다. 그녀의 일을 도와야 할 이유는 없지만.... 과거에 한 약속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란테르트 그는 평소 수많은 배신 속에 살아온 덕에 신의를 저버린다거나, 약속을 잊는 등의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조그마한 일, 분명 그에게는 조그마한 일이다, 그것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그다지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둘 모두 꺼져라." 그때 곁에 있던 트레시아가 담담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그다지 톤이 높지도 큰 목소리도 아니었지만, 상당히 선득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고, 두 정령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시렌이란 정령과 미디나라는 정령은, 정령왕의 사자 급으로, 사실 트레시아와 동급이었다. 하지만, 그 힘에 있어서는 약간 차이가 나, 일대 일로 상대해서는 결코 아르트레스를 이길 수 없다. 둘이 합쳐야 겨우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까? 수정령이나 바람의 정령 둘 모두 상당히 온화한 이들로, 트레시아의 이러한 도발에 잠시 눈썹만을 움찔거릴 뿐, 말려들지는 않았다. "일전의 약속을 잊으신 겁니까?" 시렌, 물의 정령이 이렇게 말했고, 그제서야 란테르트는 입을 열었다. "지금.... 어느 곳에 계십니까?" 그의 말에 미디나가 곧바로 답했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조그마한 성이 하나 있습니다. 이름은 레리시카로.... 보통 왕족들이 유폐되었을 때 가는 곳이지요...." 서남쪽이면 어차피 가는 방향이기도 했고, 란테르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기로 하겠습니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한 후 곧바로 트레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 란테르트의 표정에 트레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가는 곳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는 그녀였다. 20. 다시, 로렌시아와 아이실트.... 대략 서너 시간을 걸어, 물론, 이들의 걸음으로 서너 시간이라는 것이 통상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그들은 성에 도착했다. 위다 대륙의 정중앙에 떡하니 버티어 있는 산 테에이의 동쪽 끝자락 한 이름모를 산 중턱쯤 자리잡고 있는 레리시카 성은 유폐장소라기엔 너무나 아름다웠다. 10월 말순의 차가운 공기에, 그 잎이 곱게 물든 나무들이 살포시 회백색의 성채를 감쌌고 있었고, 유리창은 한낮의 햇살에 유난히도 반짝였다. 특별히 가꾸거나 한 정원이라고는, 가로 세로 20여 휴리하 정도의 조그마한 것뿐이었으나, 둘레를 감쌌고 있는 아름다운 숲이 그러한 것을 대신하고 있었고, 오히려 아름다웠다. 밤이 막 영글기 시작하는 밤나무하며, 상수리 나무등 조그마한 산짐승들을 끄는 것들이 꽤 있어서인지, 조그마한 다람쥐 무리가 가끔 나무 위에 서서는 이 아름다운 고성을 찾아드는 일행을 바라보고 있다. 성의 규모는 확실히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으나, 그 규모에 반비례하여 몹시 아름다웠다. 불행히, 성을 반쯤 가리우고 있는 담쟁이들의 나뭇잎이 갈색으로 변해, 약간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풍겼으나, 그것을 제외하고는 흠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란테르트는 성에 다가가면 갈수록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예전에는 잘 느낄 수 없었던 그러한 느낌이었다. 위압감이랄까? 하지만, 그다지 심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트레시아는 아닌 모양이었다. 안색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눈에 뜨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안에 일전에 만났던 그 라미에라인가 하는 정령왕이 있는 모양이었다. 트레시아가 이렇게 정신적으로 패닉상태를 느끼려면 그 정도 존재는 되어야 할 것이다. 란테르트는 조용히 자신의 엔클레이브를 조금 더 넓게 쳐 트레시아를 보호해 주었다. 넓이가 넓어져 농도가 약간 낮아졌고, 그 덕에 방금의 그 느낌이 조금 더 강하게 느껴졌으나, 말 그대로 조금 더 일뿐이었다. 하지만 여전 트레시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신력 하나 만을 놓고 따져보면, 란테르트 자신은 트레시아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펼칠 수 있는 엔클레이브의 강도 역시 비교를 불허할 정도이다. 트레시아의 표정이 변한 것은 아마도 다른 이유 때문인 듯 했다. 그러는 사이 이 한 사람과 한 마족은 두 정령의 뒤를 쫓아 성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한 젊은, 집사인 듯 한 인간이 문을 열어 주었다. 하지만 그뿐, 입을 열지 못하였다. 뭐,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러한 존재들 앞에서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시렌은 이렇게 말하며 안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고, 집사라는 인간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도대체 왜 자신이 이런 이상한 인간들 밑으로 배속되었는지.... 분명 마음속으로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내부 역시 성의 밖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잘 꾸며져 있었다. 문외한인 란테르트가 보기에도 꽤 근사해 보이는 그림이 몇 점 회랑 벽에 걸려 있었고, 활짝 젖혀진 커튼 사이로 배어 들어오는 햇살에 바닥의 붉은 카펫이 더더욱 선명한 빛을 띄었다. 곳곳이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는 이러한 성의 내부만 보아서는 결코 유폐된 왕족이 기거할 만한 곳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몇 층을 굽이굽이 돌아 도착한 곳은, 성 서편 끝의 유난히도 창문이 많은 방이었다. 하지만 그 창문 거의 대부분은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고, 그 덕에 방은 어두웠다. "오셨군요...." 방의 그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커다란 침대에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가벼운 옷차림의 여자였고, 다른 한 명은 그녀보다는 격식을 갖추었으나 별 차이 없는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여기서 사람이라고 이야기 한 것은, 겉모습만으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 쪽은, 두 눈을 조용히 감고 있었다. 옷은, 흰색의 하늘거리는 원피스로, 잠옷인 듯 보였다. 연한 파란색의, 세이피나의 그것보다 더더욱 흰빛을 띄는 파란색의 머리칼이 여린 곡선을 그러내며 어지러이 침대위로 흘러내려 있었고, 피부는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해서인지 하얗다 못해 창백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남자의 경우에는, 란테르트 이상으로 호리호리한 몸매를 귀족들이 입는 평상복으로 감싸고 있었는데, 그 옷차림이나 몸매를 보아서는 분명 남자였다. 하지만, 조용하고 부드러운 눈매나, 얇은 호선을 그리는 턱, 그리고 길게, 허리 가까이나 기른 주홍색 머리칼 등을 보아서는 결코 남자라 할 수 없었다. 여자도.... 상당히 아름다운 축에 드는 여자이다. 이 두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로렌시아와 아이실트이다. 모두들 5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에, 이전과는 그 겉모습이 많이 변했다. 로렌시아의 경우에는 약간이지만 조금 더 성숙했다라는 느낌이 초췌해 졌다는 느낌과 더불어 느껴졌고, 아이실트의 경우에는 더더욱 아름다워 졌다. 일전에 느꼈던 귀여운 소녀의 느낌이 아름다운 아가씨의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약간의 위엄도 갖추게 된 듯 하다. 로렌시아는 베개 두 개를 등에 댄 채 침대에 앉아 있었다. 몸이 많이 허약해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이실트는 그런 그녀의 옆, 침대에 걸터앉은 채 그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로렌시아에는 조그마한 미소가 배어 있었고, 아이실트의 얼굴 역시 그러했다. 그러다가, 돌연 이 네 사람의 방문을 받자 표정이 조금씩 미묘하게 변화하였다. 로렌시아의 경우에는 약간은 사교적인 더더욱 환한 미소를 지었고, 아이실트의 경우에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로렌시아가 두 손을 뻗어 머리칼을 살짝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오래간 만이에요.... 란테르트 님." 여전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존재 그대로를 느끼는지 단번에 란테르트를 알아보았다. 보통 눈이 멀면 아무리 소리로 방향을 가늠한다 해도 약간의 오차는 있는 법인데, 그녀는 흡사 보이기라도 하는 듯 보이지 않는 눈을 정면으로 란테르트에게 향하였다. 그녀의 인사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란테르트의 물음에 로렌시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약속.... 잊지 않으셨군요." 로렌시아의 이 말에 란테르트는 돌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레 생각한 한 아가씨 때문이었다. 자신 때문에.... 그 18년이라는 짧은 시간을 살아가면서 그중 3년을 불행 속에 보낸 아이.... "그것을 지킬지 말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 어떠한 조건을 붙였던 듯 싶은데요...." 란테르트의 말에 로렌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지요.... 분명.... 분명 그때.... 당신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 일일 경우 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 란테르트는 그렇다는 의미에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상대의 눈이 멀었다는 생각에 입을 열어 답했다. "그렇습니다." 란테르트의 대답에 로렌시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보다.... 소개해 드릴 분들이 있습니다. 시렌님, 그 두분을 이곳으로 모셔 다 주세요...." 로렌시아의 말에 푸른 머리칼을 짧게 쳐 올린 물의 령 시렌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란테르트는 그다지 상대가 궁금하지는 않았기에, 그저 가만히 선 채로 있었다. 반면, 트레시아는 이곳에 처음 올 때부터 왠지 약간 불안한 얼굴로 있었는데, 흡사 곧 무슨 일이라도 터질 듯한.... 아니 터졌다. 돌연 란테르트와 트레시아 두 사람이 서 있는 곳 뒤쪽의 공간이 일렁이며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로, 선홍빛의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란테르트는 그녀를 보자마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르카이제, 이카르트 그와 대등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란테르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 붉은 화려한 머리칼의 소유자.... 바로 화염 령의 왕 라미에라였다. 그녀가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모습을 드러내자 마자, 란테르트와 트레시아는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고, 바람의 령 미디나는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야.... 양초!" 트레시아는 그녀를 보자마자 이렇게 소리쳤다. 양초라니.... 란테르트는 잠시 무슨 말인가 생각에 잠기었으나, 라미에라의 모습을 다시 보자마자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라미에라의 전체적인 외양은 트레시아와 상당히 닮아 있었으나, 피부만은 굉장히 하ㅇ다. 게다가 내리면 허리쯤 올 듯한 머리칼을 공중으로 솟구쳐 올려놓았으니, 언뜻 멀리서 보면 양초에 불을 붙여 놓은 듯도 보일 듯 했다. "아르트레스~~~ 오래간 만이야~~" 양초라고 불리운 라미에라는 그다지 화도 내지 않은 채 이렇게 말했고, 이내 손을 뻗어 트레시아를 안으려 했다. 하지만, 트레시아는.... 란테르트로서는 트레시아의 이러한 표정을 처음으로 본 듯 했다. 두려워한다고 하면 적당할까? 이카르트에게 내보인 경외심 어린 두려움과는 분명 다른, 어떤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는데, 그녀는 라미에라가 내뻗은 손을 떨리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아.... 마지막의 그날 일이 조금 거칠었나보지? 그때는.... 미안했어~~~" 트레시아의 표정이 쉽사리 풀리지 않자 라미에라는 이런 뜻모를 말을 내뱉으며 살짝 윙크를 했으나, 트레시아는 그런 그녀의 말에 화를 냈다. "당연하지!! 그날 일만 생각하면.... 다신 보고 싶지 않아! 내가 사라지던지, 네가 사라지던지 하자구." 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라미에라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잠시 눈앞에서 모습을 감추었고, 이내 트레시아의 등뒤에서 나타났다. 트레시아가 그녀의 그러한 움직임을 채 읽기도 전에 라미에라는 뒤에서부터 그녀를 덥석 안았고, 두 팔로 트레시아의 허리를 꼭 움켜안았다. "후후, 귀여워 트레시아~~ 이 언니가 조금 거칠게 대했다고 삐치기는. 호호호." 도대체 주위의 사람들에게는 관심도 없는 이들이었다. 노골적(?)인 이러한 대사를 줄줄 읊고 있으니 말이다. 라미에라는 그 매혹적인 눈길로 트레시아의 목덜미를 훑고 있었고, 트레시아는 여전 뾰로통한 얼굴로, 하지만 조금전의 두려워하는 표정은 이미 사라진 채로 서 있었다. "이거 놔. 이제 너와는 상대 않 해!!" 트레시아는 자신의 허리를 안은 라미에라의 팔을 풀려하며 이렇게 말했고, 라미에라는 두 팔에 더더욱 힘을 주며 잠시 시선을 란테르트에게로 향했다. "호라~~~ 남자가 생겼다는 건가? 후후후.... 괜찮아, 괜찮아~~~ 이 언니는 그런 거 다 이해하니까. 그럼, 한 번 오래간 만에 놀아 볼까?" "시, 싫어!!...." 트레시아의 이 마지막 말은.... 공간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몸과 함께 점점 잦아들었고, 이 두 사람이 사라진 후 울렁이는 공간의 흔들림이 멈춤과 동시에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었다. 천하의 란테르트조차도, 이 두 정신없는 아가씨의 모습에는 입까지 약간 벌린 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고, 바람의 정령 미디나의 경우에는 안색이 파랗게 질린 채로 멍하니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흡사, 정령의 수치야.... 라고 이야기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러한 어색한(?) 분위기는 잠시 후 돌아온 시렌에 의해 깨어졌다. "무슨 일이야?" 시렌은 들어오자 마자 느껴진 이상한 방안 분위기에 미디나에게 이렇게 물었고, 미디나는 그런 그녀의 물음에 "아, 아니야" 라고 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모양이다. 란테르트도 그때쯤 제정신으로 돌아와, 흐음, 하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자, 안으로...." 시렌은 뭔가 굉장히 이상했으나, 일단 사람들을 소개하는 것이 먼저였기에 이렇게 자신이 데려온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고, 이내 붉은 머리칼의 아가씨와, 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라.... 란테르트...." 붉은 머리칼의 여자는 들어와 로렌시아에게 채 예를 차리지도 못한 채 소리를 지르며 입을 막았고, 갈색 머리칼의 남자는 그런 그녀의 모습과 란테르트를 한차례씩 바라보고는 황당하다는 듯한 웃음을 웃었다. 란테르트 역시 그녀를 알아보았다. "세레티양...." "어, 어째서?...." 붉은 머리칼의 아가씨는 이렇게 한차례 반문했으나, 곧바로 입을 다물며 시선을 로렌시아에게로 향했다. "신, 다르나시안 가의 세르테이나, 공주 님과, 태자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이른 아침에 인사를 드려야 했겠으나, 아직 침대에 머무르고 계신 듯 하여서...." 그런 그녀의 말에 로렌시아가 말했다. "예를 거두세요.... 이렇게 성에 머물며 저희를 돌보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로렌시아는 이렇게 말한 후 잠시 사이를 두었다 입을 열었다. "그보다.... 서로 아는 사이인가 보군요." 그녀의 말에 세레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얼마전 우연히 만났었습니다." 세레티는 이렇게 말하며 몇 차례나 란테르트를 곁눈질했다. 무언가 할 말이 많은 모양이었으나, 로렌시아와 아이실트의 앞이기에 입을 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로렌시아는 그러한 그녀를 눈으로 보기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 많은 모양이신데.... 말씀을 나누세요. 공무는, 잠시 후 상의하겠습니다." 로렌시아는 이렇게 말하며 손을 한차례 흔들었다. 그에, 란테르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각각의 예를 표하며 로렌시아의 방을 빠져나왔고, 시렌과 미디나의 경우에는 그냥 그대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갈색 머리칼의 남자는 다름 아닌 세레티의 마중을 나왔던 지그프리드였다. 그는 어찌 어찌하다가 세레티에게 이끌려 이곳에 그냥 머물게 되었다. 로렌시아나 아이실트에게는 그다지 큰 호감이 없었으나, 그래도 세레티의 얼굴을 보아 도와주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란테르트를 자신들이 사용하는 응접실로 안내하였다. 2층에 있는, 창밖으로 숲이 한눈에 들어오는 꽤 상쾌한 곳이었다. 조금 더 날씨가 따듯해 창을 모두 활짝 열어 놓을 수 있었다면 훨씬 좋았을 뻔했다. 란테르트야 그러한 일에 신경도 쓰지 않았으나.... 막상, 차를 한잔씩 앞에 놓고 앉자, 세레티는 입을 열지 못하였다. 애꿎은 찻잔만 들었다 놓았다 하며, 뜨거워 잘 마시지도 못하는 차를 조금씩 입안으로 흘려 넣을 뿐이었다. 그러기를 잠시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의외예요.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세레티는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를 향해 웃었으나,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의 말에 이렇다할 대꾸를 하지 않았다. 딱히 할 만한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예의상, 저도 의외입니다, 따위의 말을 할 수는 있으나, 이 남자와는 거리가 먼 대화법이었다. 세레티는 이렇게 란테르트에게서 아무런 대꾸가 없자, 한차례 픽 웃었다. 이제야 그를 만났다라는 실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여전하군요, 그 차가운 성격.... 그보다 우리 공주님과는 어떻게 알게 되신 건가요?" 세레티의 이 물음에 란테르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우연.... 입니다." 언젠가, 이시테가 물었던.... 어떻게 이카르트와 만났느냐는 물음에.... 그리고, 얼마 전 에노사 북부에서 만났던 오이니아라는 아이의 왜 이곳에 있느냐, 라는 물음에도.... 이렇게 답했던 것 같다. 왜인지.... 이것 말고는 자신의 살아온 길을 설명할 방법이 없는 듯 보였다. 란테르트의 이 대답에 세레티는 "우연...."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다 다시 말을 꺼냈다. 돌연 한가지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5년쯤 전에.... 저는 수도인 카타성의 마법 대학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었죠.... 그 덕에 저는 한 연회에 참가하게 되었었어요." 세레티는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추어 란테르트의 표정을 살폈으나, 별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기에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시.... 종종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셨던 아이실트 전하를 찾아냈던 용병들이 있었는데.... 로렌시아 님은 그들에게 감사를 하기 위해 연회를 여셨었죠. 원래 그러한 것에 그다지 취미가 없던 저는, 잠시 그곳에 참석하는 척 하다가, 한쪽 후미진 곳에 앉아 마법 서적을 뒤적거리고 있었어요. 최악의 매너죠...."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가을의 가녀린 햇살과 꽤 어울리는 미소였다. "처음.... 란테르트씨, 당신과 만났을 때, 저는 당신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생각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 크림슨 아이즈를 떠올리기는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날, 마지막에.... 로렌시아 님과 춤을 추던 한 남자...."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세레티 역시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요...." 세레티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란테르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꽤 인연이 있는 편이네요.... 우리도.... 벌써 세 번째이니...." 그런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잠시 조용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간단히....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세레티는 그런 그의 반응에 재미없는 남자....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 저은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에.... 아이실트 전하께서 유폐 당하셨다는 이야기 기억하세요?"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세레티 역시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아이실트 전하께서는 이곳으로 오시게 되었고.... 로렌시아 공주님도 이곳으로 온 것이에요. 저는 이 두 분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리고,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불순한 무리들을 막기 위해 이곳에 기거하고 있고.... 여기 지크 역시 비슷한 이유로 이곳에 있어요." 마지막 말에 지그프리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란테르트는 세레티의 말에 으음, 하는 신음을 내뱉었다. "혹시 저를 부른 이유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란테르트의 이 물음에 세레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요.... 이곳에 오신 줄도 몰랐는걸요...." 세레티의 이 말에 란테르트는 그대로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로렌시아 님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용건이 끝났으니.... 더 이상 그가 세레티와 함께 있을 이유는 없었 다. 하지만.... 세레티에게는 아직 용건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저.... 잠시만요...." 세레티의 말에 란테르트는 막 돌리려던 몸을 멈추며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그때 지그프리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대답도 나오기 전에 자리를 떠 버렸다. 세레티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흘끗 한차례 바라보고는 다시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란테르트는 선 채로 이렇게 답했고, 세레티는 그를 잠시 올려다보다가 말을 꺼냈다. "자리에 앉아요.... 그렇게 서 있으니까 이야기하기 불편하잖아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저.... 그게.... 벌써 우리가 헤어진지도....한달 가까이나 됐지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세레티는 잠시 더 뜸을 드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했었어요. 저에 대해.... 그리고.... 당신에 대해...." 이 말과 동시에 란테르트는 몸을 일으켰고, 세레티는 당황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란테르트는 곧바로 몸을 돌렸고, 그에 세레티는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요! 이렇게.... 사람을 무시해도 되는 거예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걸음을 멈춰선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을.... 무시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나란 인간에 대한 당신의 생각들은.... 잊어버리십시오. 나.... 이러한 것을 알아 보았자.... 당신에게는 그다지 이로울 것 없을 테니까요.... 그럼...."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로렌시아가 있던 방으로 향했고, 세레티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물이라는 것이 이러한 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는 했으나 그녀는 울지 않았다. 사실.... 뭐, 예상하고 있었던 결과이다. 다만, 란테르트의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차가웠기에 약간 당황했을 뿐이다. "잊으라고?....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겠지만...." 세레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잠시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다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남자용 문관복 차림에 달려있는 금속제 장신구들이 차르랑 부딪히며 거친 소리를 낸다. "그게 가능 할 리가 없잖아요?.... 당신이.... 그녀들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세레티는 마지막으로 한숨을 한차례 내 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때의 그 갈색머리 아가씨는.... 정말이지 아름다웠지...." "란테르트 님께서 해 주실 일이란.... 아주 간단합니다. 저와 아이실트 폐하를 제외한 모든 위다라는 성을 가진 존재를.... 죽여주십시오." "로렌시아 누님!...." 이제는 18세가 되었으나, 여전 아이실트의 목소리는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소년의 그것처럼 고왔다. 로렌시아의.... 표정하나 바뀌지 않은 채 내뱉는 이 말에 아이실트는 이렇게 한 번 그녀를 불렀고, 로렌시아는 살짝 아이실트를 향해 미소를 지어 주었다. "어차피 입니다.... 토벌군이.... 조직되었습니다. 제 1 왕위 계승자 자리에서 쫓아낸 것 정도로는 만족 못한 그들에 의해.... 우리 두 사람을 주살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어제 부로, 군무행료청에 통과되었고.... 2일 안에 토벌군이 이곳에 도착합니다. 지금.... 세르테이나 님이 모아주신 300명의 사설 용병대.... 그것이 우리의 모든 전력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로렌시아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아이실트를 끌어 당겨 품에 안았다. "아이실트님.... 약해지셔서는 안됩니다. 천하에 군림하실 분이.... 그렇게 약해서는 안됩니다. 피로 빵을 적셔 배를 채우고.... 시체를 쌓아 딛고 오르셔야 할 분입니다." "그냥.... 이대로 살면 안될까요? 저를 미워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없는 곳이잖아요. 누님과 단 둘이.... 이렇게 조용히 살 수 있다면, 전 황제 같은 것은 필요 없어요...." 아이실트는 힘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고, 그런 그의 뒷머리를, 길게 자란 뒷머리카락으로 뒤덮여 있는 머리를 몇차레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실트 님의 운명은.... 그렇게 평온하지만은 않답니다.... 그렇게.... 한가롭지는...." 이러한 두 사람을 잠시간 지켜보던 란테르트가 입을 열었다. 방안에는 이 세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정령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있는지 어쩐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과한 부탁 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찾아 모두 죽이라는 것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란테르트의 말에 로렌시아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눈이 아닌 마음으로.... "무슨 다른 생각이 있으신 듯 보이는군요.... 카타성을 통째로 녹여 버리기라도 하실 건가요?" 아마도 소피카에서의 일을 들은 모양이었다. 하긴 정령이 함께 있으니.... 란테르트 한 명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닐 것이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무덤덤히 답했고, 로렌시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건 곤란합니다. 아이실트 님이 살아야 할 곳이니까요...." 그리고는 뒤이어 아이실트를 한차례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위다 내성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를.... 인간이라 불리울 수 있는 모든 존재를.... 죽여주십시오. 이 정도 일.... 란테르트 님이라면 반나절 정도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로렌시아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끄덕임은 반나절이면 가능하다는 말에 대한 긍정일 뿐으로 결코 그녀의 말대로 하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겨우.... 그까짓 일에 대한 대가로는 너무 크군요.... 저도.... 사람을 죽이는 일이 즐겁기까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위해,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죽이다니...."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고, 로렌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당신의 말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곧바로 란테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당신의 그 정령들은.... 어째서 이용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들에게 부탁한다면, 저보다 훨씬 빨리, 정확하게 일을 해치울 수 있을텐데요.... 굳이 저를 이용해야만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런 그의 물음에 로렌시아는 살짝 미소지었다. "이용이라니요? 전 이전의 약속에 대한 계약 물을 받으려는 것뿐입니다. 이용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정령들에게 이러한 일을 부탁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동시에, 그녀가 몸을 반쯤 일으킨 채 앉아있는 침대 바로 곁 공간이 일렁이며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양초였다. "인간들을 함부로 죽이기에는 무리가 있거든.... 후후후...." 양초, 아니 라미에라는 이렇게 중얼거린 후 붉은 혓바닥을 내밀어 더더욱 붉은 입술을 한차례 핥았다. 흡사.... 맛있는 음식을 먹은 후, 입술을 닦는 듯한 행동이었다. 란테르트는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마자 물었다. "트레시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런 그의 물음에 라미에라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었다. "마계로 달아났다. 바보 같은 계집아이...." 라미에라는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 란테르트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너냐? 그 아이를 바보로 만든 사람이?" 란테르트는 답하지 않았고, 라미에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란테르트에게 접근했다. 하이힐을 신어 키가 거의 란테르트의 이마에 육박했다. "흠.... 그 아이 취향이긴 한데.... 난 너보다는 아레스미온이 더 마음에 들던데.... 단발로 깍은 은발에 녹색 눈동자가 압권인 아이지.... 300년전에 그 아이를 얻고는 얼마나 자랑을 해 대는지...." 라미에라는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보다 낮은 눈 높이로 란테르트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마족이 사랑이야.... 후후후.... 그따위 감정에 빠지다니.... 역시 아직 어려...." 여기까지 말하던 라미에라는 돌연 고개를 살짝 기우뚱하며 중얼거렸다. "하긴 그러고 보니, 루플루시아 그 바보 계집아이는 벌써 몇십억년이나 되는 시간을 살아왔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있구나.... 나이는 상관 없는 건가?" 그러더니 그녀는 다시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잠깐동안 이야기하면서도 상당히 표정변화가 다양한 아가씨였다. "아무튼.... 너! 내 트레시아에게 더 이상 마음을 주지 말도록 해. 얼마 안돼는 노리개중하나가 그렇게 망가져 버리다니...." 이건 완전히.... 누가 정령이고 누가 마족인지를 모를 모습이었다. 마족이 사랑에 빠지질 않나.... 그렇게 사랑에 빠진 마족을 멍청하다고 정령이 욕하지 않나.... 란테르트는 이 우스운 정령 아가씨(?)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후후.... 재미있군요...." 란테르트의 이 말에 라미에라는 눈썹을 잠시 움찔했으나 그냥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만 두지.... 그 사람이 화낼까 무서우니...."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그 사람이라는 것이 누구인지를 떠올렸다. "이카르트.... 말입니까?" 란테르트의 물음에 라미에라는 몸도 돌리지 않은 채 답했다. "뭐.... 그렇지.... 잘못했다간.... 정령계가 절반쯤 쑥밭이 나 버릴 수도 있으니...."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와 약간 거리가 생길 때까지 걷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자, 그럼 하던 이야기나 계속 해볼까? 정령은 이런 일은 도울 수 없다. 너도 알다시피, 정령은 인간에게 해되는 일을 해서 유리할 것이 없다는 것을.... 뭐, 한두명 쯤이야 별 일 아니지만.... 이런 대규모 적인 일에는 끼기에 조금 그렇거든.... 게다가.... 이 로렌시아 아가씨는, 더 이상 정령에게 계약 물로 내 놓을 것이 없어. 이미 혼까지 내 놓은 처지에.... 무엇이 남아 있겠나?" 팔짱을 낀 채 도도히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은 확실히 그만큼이나 강한 힘을 가진 존재다웠다. 그때 로렌시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씀 데로입니다. 그리고.... 이번 일을 도와주신다면.... 한가지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선물?...."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이렇게 물었고, 로렌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로렌시아는 이렇게 말한 후, 아이실트에게 무어라 속삭였고, 아이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누나의 품에서 빠져나와 곁에 있는 탁자 위에 놓여있던 한 상자를 열었다. "이것 말인가요?" 아이실트는 로렌시아를 향해 왠 두루말이 비슷한 것을 보였고, 로렌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것을 란테르트 님에게 전해 주시겠어요?" 그녀의 말에 아이실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란테르트에게 그 두루말이를 건넸고, 란테르트는 그 두루말이를 받아 들었다. 하지만, 아직 결정하지 않은 터라 섣불리 열어 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남쪽 대륙으로 갈 수 있는 워프 게이트가 있는 곳의 지도입니다. 다만.... 워프 게이트의 바로 밖에 거대한 드래곤이 한 마리 살고 있기에.... 그다지 권해 드릴 수는 없지만...."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몇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눈앞의 로렌시아라는 여자는 굉장한 여자였다. 자신이 남쪽에 있다는 그 대륙에 가려는 것까지 알고 있다니.... 란테르트는 조용히 그 지도를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는 로렌시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겠습니다. 다만....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는 않겠습니다. 저에게는 제가 가야만 할 길이 있으니까요. 계약의 내용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그의 말에 로렌시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란테르트 님." 그런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감사라.... 계약입니다...." 라는 말을 차게 한마디 내 뱉은 후 몸을 돌렸다. 세레티.... 지크.... 이 두 사람에게 작별 인사 같은 것을 할 이유는 없었다. 란테르트는 그대로 그 성을 빠져나와 위다의 수도 카타로 향했다. 레리시카성에서 수도 카타까지는 보통의 걸음으로 하루 반나절, 그리고.... 란테르트의 걸음으로는.... 반나절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란테르트가 레리시카성에 도착했던 때가 점심 무렵.... 그리고 그곳에서 잠시도 지체치 않은 채 곧바로 수도 카타로 출발했으니.... 해진 직후, 하지만 아직 성문은 닫히지 않은 시간에 카타 외성 안으로 걸음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위다의 주력은 이 카타성에서 남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이 카타성의 방위는 왕궁수비대 및 수도 경비대가 함께 하고 있었다. 수도 경비대의 경우에는 외성벽 바로 서쪽에 맞대어 진지를 꾸민 채 외성 안팎의 치안유지 및 비상시의 군사행동을 하고 있는 곳이었고, 왕궁수비대의 경우에는 근위대, 왕실 친위대 등의 이름으로 불리우며 주로 내성 안의 경비를 맡았다. 그 때문에 그네들은 내성벽 동쪽 바로 곁에 서있는 거대한 건물 서너 개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두 군을 합하면 9000명, 친위대 5천에 수도 경비대가 4천이다. 아무리 란테르트 라지만.... 이들 사이에 둘러싸인다면 시간이 꽤 걸린다. 게다가 이 위다라는 곳은 마법이 처음으로 부활된 곳, 전 대륙의 이름난 마도사중 절반 가량이 이곳에 터를 잡고 있다. 왕궁에만 해도 대현자가 두세명 정도에 현자는 10명 가까이나 될 터.... 물론, 이들 모두가 덤벼든다 해도 지지야 않겠지만.... 일단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과는 거리가 있다. 란테르트가 할 일은.... 다만.... 내성 안에 기거하고 있는 사람.... 그 모두를 죽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란테르트는 외성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중앙 대로를 따라 내성으로 향했다. 워낙 커다란 도시이기에, 란테르트만큼 이상한 인간들은 주위에 널려있다. 등허리에 검을 하나차고, 옆구리에 다시 한 자루의 검을 더 매고 있다고 해서 이상하게 볼 사람은 없다. 남자가 머리칼을 허벅지 절반까지 기르고, 허름한 망토를 둘렀다고 그에게 신경을 쓸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란테르트는 자연스럽게 걸어 내성 남문에 도착했고, 다시 자연스럽게 마법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연스럽게 마법력을 방출했는데.... "라미에레 브래스트...." 말을 마침과 동시에..... 란테르트가 서 있는 곳 바로 좌우의 땅에 가느다란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내성 성문은 위압적으로 란테르트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너같은.... 나의 5분의 1도 되지 않는 키를 가진 인간 따위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그의 몸주위에서 심상치 않은 붉은 기운이 일었을 때까지만 해도, 성문은 코웃음을 치며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자신의 어깨를 돌며 창대를 질질 끄는 인간들 역시 그런 그에게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좌우 땅이 균열을 일으키며, 그 균열로부터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올 때쯤 되었을 때, 약간 흥미가 느껴져 조금 더 신경을 써 그 파란 머리칼의 인간을 바라보았다. 일순, 퍼억 소리가 나며 자신의 키만큼이나 되는 불꽃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며, 성문은 조그맣게 읊조렸다. "호오~ 정령계 화염마법이로군." 이윽고 솟아난 불꽃은 각각 두 개로 갈리어 날개와도 같은 모습을 형성했고, 화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날개를 퍼득이며 성문의 좌우 벽을 따라 날갯짓을 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새의 날개 깃이 닿은 부분은 하나같이 큰불이 일었다. 라미에라 브래스트는 성문이 말한 그대로, 정령계 마법이다. 정령계인 만큼 위력이 그다지 엄청나지는 않지만, 물론 란테르트의 기준에서로 보통의 인간이 정령계 마법을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현자라 불리울 정도가 되는 것이다, 이럴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쓸모가 많다. 일단 한 번 일어난 불은, 탈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시전자가 원할 때까지 계속 타오른다. 물론 마법력이 뒷받침되어야 할 테지만.... 게다가, 그 불꽃의 열기라는 것이, 거의 대장간의 화로만큼은 되는 것이어서, 보통의 사람들은 그것을 끄려는 노력은커녕 다가서기조차 힘들다. 그러니, 성안에서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는 란테르트의 상황으로써는 이 마법이 쓸모가 많은 것이 당연하다. 만약, 같은 화염마법인 압그라온 버스트였다면.... 이런 상황에 성벽을 녹일 수도 있었을 터이나, 역시 신 급의 마법과 정령 급의 마법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또한 란테르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시전 했더라면, 결코 지금과 같은 위력은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법의 계급보다는 시전자의 마법력에 더더욱 큰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란테르트는 내성 둘레의 도로를 따라 솟아오르는 화염을 잠시 바라보았다. 얼굴에 불꽃의 그림자가 붉게 드리워져 있는 그의 모습은....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크림슨 아이즈라는 그 악명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그것이었다. ".... 붉은 색...." 란테르트는 이윽고 이 한마디를 남긴 후, 성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불꽃은, 그의 주위에는 맴돌지 않았다. 흡사, 사열해 있던 기사들이 자신의 주군을 맞이하기라도 하는 듯, 좌우로 갈려 란테르트를 향해 붉은 검을 높이 들어 보인다. 불꽃의 환호성은, 화염을 토해내는 듯 뜨겁다. 란테르트가 막 수도 내성 남문을 지날 무렵.... 레리시카 성은 약간 어수선한, 그러면서도 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 덕에 침울한 그러한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세레티는 병을 핑계로, 레리시카 성에 마련된 자신의 방에 틀여밖혀 버렸다. 친동생과도 같은 자신의 외사촌 지크조차도 만나주지 않았다. 아마도 란테르트 때문일 것이다. 25세나 되어 찾아온 첫사랑이니.... 로렌시아는 방문을 걸어 잠궜다. 아이실트 마저도 방안에 들여놓지 않았다. "내일 오전 무렵.... 우리를 죽이기 위한 군대가.... 미테이라 숲 남단에 도착할 것입니다. 아무리 늦어도 점심 무렵이면.... 양군이 격돌합니다. 저는 그때까지 조용히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로렌시아는 이렇게 말하며 아이실트를 자신의 방에서 내보냈고, 아이실트는 그런 누이 곁을 떠나며 이렇게 물었다. "진정.... 나는 이렇게 시끄러운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까?" 로렌시아는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실트는 한차례 더 눈먼 누이를 바라보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이실트의 방은 로렌시아의 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단촐했으며, 어두웠다. 모든 창문에는 두꺼운 짙은 보라색의 커튼이 처져있어, 밤이고 낮이고 방안에 빛이라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그러한 방안 한쪽에 앉아 있다. 의자도 침대도 있건만, 그는 왜인지 침대곁 창문과 사이에 있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두다리를 쭉 펴고 앉아 있다. 언제나 혼자 있을 때면 그렇게 앉아있다. 주홍빛 머리칼은 흡사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물줄기가 그러하듯 무질서하게 바닥으로 흩어져 있고, 두 팔과 다리는 줄 끊어진 마리오넷 처럼 힘이 없다. 고개 역시 축 처진채이다. 허벅지에 올려진 채 쉴 새 없이 조그마한 움직임을 나타내는 손을 제외하고는, 미동조차 않는다. 살아있는 것조차 이렇게 조용하니.... 지그프리드의 경우에는 이들 세사람과는 달리 조금 바쁜 오후를 보냈다. "이런.... 얼결에 세르테이나 님에게 이곳으로 끌려와서는.... 완전히 무료봉사중이군.... 않그래 디나?" 막 진을 짜고 있는 300명의 병사들의 뒷치닥 거리를 하고 돌아다니던 그는 일이 모두 끝나고 다시 레리시카 성으로 돌아올 무렵 돌연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고, 그런 그의 말에 답하기라도 하듯 그의 몸을 휘감는 한줄기 미풍이 일었다. 역시 정령술사 다웠다. 물론 아직은 바람의 령 디나와, 물의 령 루피 정도가 고작이었다. 디나와 루피 둘 모두, 세상에 그 개체의 수는 샐 수조차 없는 가장 하급의 정령들이다. 하지만 점점 더 정령 친화력을 높여 가면 그 이상의 정령과도 친분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인간으로써는 정령왕의 사자급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그의 이러한 투덜거림은 말 그대로였다. 토벌대에게 당해 가장 큰 손해를 볼 사람은 일단 아이실트 였으나, 그는 방안에 처박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열성적이던 세레티는 병을 핑계로 방에 처박혔다. 아침때만 해도 펄펄해 식사까지 손수 조리하던 그녀가 아프긴 뭐가 아프단 말인가? 그렇게 일을 떠넘겨 받은 지그프리드는 하지만 그다지 불평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역시 낙천적인 성격은 이럴 때 상당히 편한 것이다. 그는 그냥, 즐거운 마음에 흥얼거리며 지내다가 정령도 만나고 음유시인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그로써도 이번 싸움에는 꽤 신경이 쓰였다. 일단 300대 1000이라는 숫자.... 이것도 이편은 확실하지만, 저쪽의 것은 소문일 뿐이다.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잘못되면, 자신의 가문 전체가 완전히 수세에 몰린다. 현 트라미스 가의 가주인 자신의 아버지가 지그프리드 자신을 내논 자식이라고 발뺌하면.... 사실 반쯤 그렇기도 했다. 어느 귀족이 음유시인 일을 하는 아들을 좋아하겠는가?.... 아무튼, 그럴 경우 어떻게, 어떻게 가문의 명맥 정도는 유지할 수 있겠으나, 중앙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나는 것은 불 보듯 하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완전히 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터이지만.... 희박하다고나 할까? 그 낮에 들렸던, 괴상한 검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몰랐으나, 뭐 기껏해야 요인 암살 정도가 한계일 듯 보였다. 하긴.... 그것도 작은 일은 아니지만, 아무튼 대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다. 결국 300대 1000의 싸움에서 모든 것이 결판이 날 터인데.... 일단 이네들 1000명을 막고 나면.... 300대 1000의 싸움이라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이익을 가져다준다. 지금까지 중립을 표방해왔던 귀족들에게 이쪽 아이실트 파의 실력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 그들을 이쪽으로 끌어들이는데 도움이 될 것이고.... 그리고, 아이실트 반대파들이 아이실트 파에 현재 씌우려고 노력중인 반역이라는 죄목 역시 완전한 허위임을 만천하에 공고할 수 있다. 어느 바보가 300명으로 반란을 일으키겠는가? 무슨 촌장자리 쟁탈전도 아닌데.... 이렇게 되면 완벽한 역전 승이다.... 지그프리드는 이런 생각을 하며 지친 몸을 이끌고 자신의 방으로 향하다가 돌연 3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다시 한 층을 올라가면, 아이실트와 로렌시아의 방이 있다. 적어도.... 이 싸움의 지휘자인 아이실트에게 간단한 보고나마 올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 그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아이실트의 방으로 향하였다. 역시.... 어두웠다. "전하, 아직 침대에 눕지 않으셨습니까?" 지그프리드는 반쯤 열려있는 문안에다 이렇게 물었고, 아이실트는 그런 그의 물음에 조용히 답했다. "들어오십시오...."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지그프리드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지껏 환한 복도에서 하릴없이 빛나던 램프가 방안을 조금 밝히었다. "이 빛.... 신경 쓰이지 않으십니까?" 지그프리드는 일단 이렇게 물었고, 아이실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램프 빛에 의한 그림자가 그의 몸 후미진 곳을 예외 없이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다르나시안 가의 사병대 300명은 지금 막 병기점검 및 기타 장비정검을 마친 채 야영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말에 아이실트는 조용히 물었다. "그게 다 인가요?" 힘없이 내뱉는 그의 말에 지그프리드는 순간 울컥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따위.... 왕위서열법 따위의 명분을 위해 이따위 녀석을 따라야 한다니.... 그는 갑작스레 이런 마음이 들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다 입니다. 문제 있습니까?" 그의 이러한 대답에 아이실트는 돌연 쿡쿡 하는 웃음을 웃었다. 낮은, 예쁜, 하지만 섬뜩한 웃음이었다. "쿡쿡쿡...." 지그프리드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왔다. "죄송합니다.... 제 말투가 불손했습니다." 그의 말에 아이실트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잠시 한 번 그를 올려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뭐.... 어떻습니까? 이런 곳에 이런 모양으로 처박혀 있는 허울뿐인 왕자인데.... 후후후...." 그의 이러한 대꾸에, 지그프리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공손한 태도로 선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한참 후, 다시 아이실트가 입을 열었다. "저는.... 왕자고 뭐고 다 싫습니다.... 왕자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이익이 있을까요?.... 나이가 10살이나 많은.... 검술이 뛰어난 나의 이복형.... 20세나 위의 정치와 사교에 뛰어난 역시 이복형.... 15세 위의.... 다재다능한.... 로렌시아 누님의 친 오라버니....그들 모두.... 나보다 나이도 많고 능력도 뛰어납니다.... 겨우 본부인의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왜 나같이 어리고 능력도 없는 자에게 제 1 왕위 계승자라는 직위가 돌아왔을까요?...." 그의 이러한 말에 지그프리드는 답하지 않았다. 독백에 가까운 이야기로.... 꼭 답변을 바라는 듯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실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왜.... 불쌍하고 어린 나에게.... 그러한 무거운 짐을.... 나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지게하고는.... 왜 나를 미워하는 걸까요?.... 겉으로는 웃으며 나의 비위를 맞추고.... 뒤에서는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걸까요?.... 역시 왕이라는 자리 때문이겠지요?" 지그프리드가 끼여들었다. "왕자님!" 그는 이야기가 점점 이상한 쪽으로 흐르자 이렇게 아이실트를 한차례 불렀고, 아이실트는 다시 한차례 고개를 들어 지그프리드를 바라보았다. "역시.... 조용히.... 이렇게 살기는 힘들겠지요?" 그의 물음에 지그프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능합니다. 당장 내일의 일만 해도...." 아이실트는 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싫습니다.... 모든 것이.... 나는.... 나는 단지.... 유일하게 사심 없이 나를 바라 봐주는 로렌시아 누님과 함께 있고만 싶어요.... 요 며칠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는데...." 아이실트는 잠시 말 사이에 시간을 두었다. 구석에 몰렸다고나 할까? 지금의 아이실트는 몰릴 데로 몰려 있었다. 다른 세명의 이복 형들과는 달리 특별한 지지세력이 없던 그는, 몇몇 귀족들의 회의로 단번에 제 1왕위 계승자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다시 그들의 회의로 목숨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실권 없는 왕 휘하의 어린 왕자라는 것은, 귀족들의 눈에는 우스워 보일 따름이다. 게다가 이용해 먹을 수조차 없다면, 버리는 것 역시 당연하다. 지금의 아이실트는 그러한 전형적인 케이스이다. "역시.... 저보다는 누님이.... 더 정확히 상황을 읽고 있었군요.... 조용히.... 그리고 조용히 지내기만 하면.... 모두들 나를 그냥 놓아 둘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아무 일에도 관여 안한 채...." 아이실트는 이렇게 말하며 한차례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한숨을 내 쉬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더 이상.... 더 이상 조용히 지낼 수는 없다. "이것이.... 내가 하고자 하는 바였는데...." 여기까지 말하던 아이실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채 한참동안 큰 숨을 들이쉬었다 내 쉬었다를 반복했다. 꽤 생각할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이전과는 그 느낌이라는 것이 확연히 달랐다. "후후후.... 나의 뜻대로 할 수 없다면.... 누님의 뜻을 따라야 겠지요.... 역시.... 나는.... 황제가 되어야 할 운명인가 봐요." 나는 황제가 되어야 할 운명인가 봐요.... 이 마지막 말은 지그프리드의 귓전에 유난히도 깊이 와 닿았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단지 감상적인 한마디일 뿐인데.... 아이실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허리를 굽힘에 머리칼은 어깨를 따라 바닥으로 흘렀고, 가느다란 팔은 바닥을 짚으며, 그리고 무릎은 조용히 접히며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가 다시 지그프리드를 바라볼 무렵의 그의 주홍색 눈동자는.... "지그프리드 폰 트라미스. 당신.... 나의 부하입니까?" 그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활기라는 것이 돌았고, 지그프리드는.... 자신의 턱에 간신히 닿는, 1.73휴리하(1휴리하=약1미터) 짜리의 여린 소년에게서 위엄이라는 것을 느꼈다. ".... 그렇습니다." 지그프리드는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검을, 물론 마법사에 가까운 그에게는 의장용일 뿐이었지만, 한쪽에 풀어놓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이실트는 그런 그의 모습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첫 번째 기사인 것이다. 아이실트는 그런 그의 머리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이러한 예법은.... 파모로아 초기에 파모로아 황국이 있었을 때만 행해지던 것이다. 지금의 어깨에 검을 얹으며 맹약을 중얼거리는 것은 당시 공작 이하 귀족들이나 행하던 예법이다. 한마디로.... 이러한 것은 황제가 기사를 임명하는 방식인 것이다. "짐이 명하노라.... 성스러운 절대주인 테미시아 님의 축복으로 나의 장막 아래 발을 디딘 그대의 이름은.... 메티에르 나이트.... 첫 번째 기사이다." 메티에르는 신화시대의 말로, 첫 번째라는 뜻이다. 원래가 활달하고 거칠 것 없는 생활을 하던 지그프리드는 이러한 예법에 밝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어느 순간에 주군의 반지에 입을 맞추어야 할 지는 알 수 있었다. "당신께.... 영원한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나의 군주여...." 그의 입술이 아이실트의 오른손 중지에 꽂혀있는 위다 왕족의 반지에 닿았다. 이렇게 지그프리드는 아이실트의 기사가 된 것이다. 여기.... 허름한 성 한구석의 조그마한 방에서 이루어진 바로 이 기사 서임 식은 후에 레리시카성의 서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다. 이들은 당시로써는 별 것 아닌, 겨우 300명의 병사를 가지고 있는 폐태자와 이름 없는 풋내기 정령술사일 뿐이었으나, 불과 2, 3년 후에는 8만의 병력을 휘하에 둔 위다 제 1의 장군과 대륙 전체의 7분의 5를 집어삼킨 위대한 패왕이 된다. 이러한 두 사람의 만남이 레리시카 성 유폐당시의 이러한 초라한 상황에서 이루어 졌기 때문에, 이 레리시카의 서약은 더더욱 빛을 발했고.... 먼 훗날에 이르러서는 어려울 때 서로 만나 함께 성공한 사람들의 사이를 이렇게 부르게 된다. 지그프리드는 알 수 없는 위엄에 이끌려 그의 기사가 된 직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의 주군을 올려다보았다. 자신보다 2살 어린.... 게다가 생긴 것이 워낙 여리고 여자 같아 외모만으로는 결코 위엄을 느낄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에게서는 알 수 없는 어떠한 힘이 느껴졌다. "메티에르 나이트여.... 지크라고 불러도 상관없겠는가?" 아이실트는 조용히 입을 열어 이렇게 물었고, 지그프리드는 고개를 한차례 깊이 숙였다. "뜻대로 하소서...." 아이실트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크.... 짐과 짐의 첫 번째 기사의 첫 싸움이다.... 승리를 원하겠지?" 지크는 아이실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듯 했다. 지금까지 단 한차례도.... 아이실트의 입에서는 이러한 능동적인 말이 나온 적이 없었다. "물론입니다. 주군을 위해서도.... 그리고 이 나라의 국민을 위해서도....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국민을 위해서라.... 훗훗.... 우습구나.... 짐의 막하에 있을 장수들은, 그따위 입바른 소리는 해선 안된다. 모든 싸움은.... 짐을, 그 리고 짐의 누님 로렌시아 님을 위해서이다." 아이실트는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방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활짝 열어 젖혔다. 별빛이 방안으로 홀연히 쏟아져 들어왔다. 그림자라도 새길 기세였다. "당장, 300명의 군사를 소집하라. 그리고.... 무참히 밟는 것이다. 짐에게 반항하는 자들이 어떠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지를 똑똑히 보여주는 것이다." 지크는 그런 그의 말에 순간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라고 반문했으나, 더 이상의 생각은 멈춘 채 고개를 숙였다. "예." 그리고는 곧바로 일어나 당당히 걸어 방밖으로 나갔다. 아이실트는 그가 나간 후 한참동안이나 창 밖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로렌시아누님.... 이러한 것을 원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해 드리겠습니다.... 누님의 부탁에 따라.... 황제가 되겠습니다." 이윽고.... 그의 여린 입술이 달싹였고.... 이러한 몇 마디의 말들은 투명하디 맑은 창문에 부딪혀 조용히 아스러졌다. 아이실트는 평소와는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왕실에서 입던 정식 제 1 왕위 계승자의 복식을 정식으로 갖춰 입은 것이다. 이러한 옷을 입으니, 그런 데로 약간은 남자 같아 보였으나, 여전 멋있다 보다는 아름답다가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의 허리에는 소검이 한 자루 메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위다 왕실의 공주들에게 하사되는 것이었다. 아마 로렌시아의 검인 모양이다. 성 앞 공터에는 300명의 병사들이 열을 맞추어 사열해 있었고, 아이실트는 그들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서서 그네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지크는 그의 바로 옆에 격식을 갖춘 옷을 입은 채로 서 있었다. 이 300명의 병사들은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자신들의 지휘자들의 모습에 약간 의아함을 느끼며 멍히 서 있었다. 이윽고 아이실트가 입을 열었다. "백작, 다르나시안 가의 사병들이여!! 한가지만 묻겠다. 당신들은 누구를 위해 싸우려 하는 것인가? 만약 세르테이나를 위해서라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위다 왕실을 위해 싸우려 한다 해도, 당장 돌아가라! 이곳에 남을 자들은 오직 나를 위해 싸울 사람들 이여야 한다. 나의 이 말을 따를 수 없는 자는 당장 이곳에서 떠나라." 아이실트의 이 말에 사병들은 잠시동안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얼마 전 까지, 아니 방금 전 까지 보았던 그 여리던 왕자가 아니었다. 그때 병사들 중 누군가 외쳤다. "전 당신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는 창을 높이 들어 올렸고, 뒤이어 하나 둘, 창을 든 손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이내, 이 조그마한 마당은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으로 휩싸였고, 아이실트는 그런 그들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좋다!! 그럼, 앞으로 2일 동안은 모두들 내게 목숨을 맡기기 바란다." 아이실트의 이 말에 병사들은 큰소리로 환호성을 질렀다. 사실, 이 유폐된 왕자를 보살피기 위해 이곳으로 온 300명의 병사들은 내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자원해서 온 이들이었다. 다르나시안가 휘하의 2000에 가까운 병사들 중 세르테이나가 아이실트를 돕고 싶다는 사람들만을 뽑아 데려온 것이다. 즉 억지로 끌려와 어쩌구 하는 불만은 아닌 것이다. 이들의 불만은 아이실트에 대한 것으로, 그의 생김새에서 하는 짓까지 완전히 여자 같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동정심이 생길 정도로 하는 짓이 귀엽거나, 아니면 확실한 카리스마로 자신들을 휘어잡을 수 있거나 했다면 좋았을 것을, 이는 순 여리기만 한 계집애 같은 남자였다. 그러하니.... 뭐 그를 위해 싸울 마음이 일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오늘의 아이실트는 아니었다. 약간 멍했던 눈동자는 희미한 등불이 무색할 정도로 맑은 빛을 내고 있었고, 목소리는 역시 여렸으나, 당당하고 힘이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자신들이 좋아서 자원한 일, 상대가 이 정도로만 나와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게다가 나를 위해 목숨을 맡겨라.... 라는 이 말이 지금 이 순간에 유난히 마음에 와 닿는 이들이었다. 아이실트는 뒤이어 병사들을 다섯으로 나누었다. 한 개 병집을 60명씩 두었고, 그는 다시 이 병집을 10개의대로 나누었다. 1개단 300명 규모의 아이실트 친위대(?)를 60명 규모의 5개 병집, 그리고 6명 규모의 50개 병대로 편성하는 작업이 끝나자 마자 그는 5명의 병집 지휘관과 지크를 불러 작전회의를 시작했다. 세르테이나는 일단 몸이 좋지 않다고 하니 제외시켰다. 막상 작전회의가 시작되었으나 의견을 내 놓을 만큼 머리가 열려 있는 사람은 겨우 지크와 아이실트뿐이었다. 다른 5명의 지휘관들은 닳고닳은 용병들이었지만, 용병술用兵術에는 문외한이었다. 게다가 지크 역시 군사들을 지휘하는데 뛰어난 편은 못되었다. 아직 어린 탓도 있는데다가, 평소 정령 술과 마법, 그리고 여러 역사책, 로망(당시의 소설)을 읽는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 군사를 다루는 데에는 그다지 밝지 못하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휴메시아 시대 때의 역사책이나 로망을 많이 읽어둔 것으로, 마법이 없었던 시대이니 만큼 당시의 로망 등은 대규모 군사들의 싸움을 다루는 내용이 상당히 많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련된 작전을 세우거나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의외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아니.... 의외 정도가 아니라.... 잠시전 자신의 방에서의 몇 마디 독백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듯 했다. 여리여리했던 폐태자 아이실트 말이다. "작전은 내가 세운다. 군말 없이 따라 주길 바란다." 작전회의의 시작은 그의 이 한마디와 함께 하였다. 막 이 말만을 들었을 때는, 이 안의 여섯 사람들 모두가 가슴속에 일순 반발심이 이는 듯 했으나, 바로 그 다음 말에 의해 그러한 것은 모두 사라졌다. "나라고 그다지 잘하는 것은 아니다. 로렌시아 누님의 뜻에 따라 약간이 용병서를 읽어본 적이 있기에 졸안이나마 내 놓으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약해 빠진 군세로 적을 이기려면 상당히 모험적인 계획을 내 놓아야 하는데.... 나는 그것을 너희 모두에게 납득시킬 자신은 없다." 여기까지 말하고는 그 다섯 지휘관 및, 얼떨결에 총 사령관(?)이 된 지크를 한차례씩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재량권을 이용해 독단을 하려한다. 너희들 역시, 300대 1천의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전법 같은 것을 알고 있다면, 이야기하여도 좋다. 단, 나의 작전에 대해 반대하기만을 위한 말은 묵살하겠다. 그러한 논의는 시간만을 보낼 뿐이다." 이 말이 마침과 동시에 다섯 지휘관들은 고개를 한차례 숙이며 대답했다. "오직, 주군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호탕한 용병출신들 이기에, 이러한 아이실트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 의기투합하는 면이 있는 모양이다. 아이실트는 마지막으로 지크를 한차례 바라보았다. 그의 뜻을 묻는 듯 했다. 그의 그러한 시선에 지크는 군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무어라 입을 열어 구차한 뜻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 끄덕임은 다른 다섯 사람의 맹세보다 더더욱 듬직했다. "그럼 지금부터 작전을 이야기하겠다. 우선.... 전장터는 미리아호 서남 부의 미테이라 숲 일원으로 하겠다." 아이실트는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며, 약식으로 그린 일대의 지도를 단상 위에 펼쳤다. 레리시카성, 카타성, 그리고 테에이산의 발치, 미테이라숲 등등이 꽤 정확히 묘사되어 있었다. "일단....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들 1천 병사들을 꺾을 생각은 애당초 하지 않았다. 게다가.... 299명을 희생하여 얻는 승리 따위도 작전에서 제한다. 가능한 한 많은 군사들을 살리며 이겨야만 한다. 적의 공격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나라는 보장은 어느 곳에도 없다." 이렇게 말한 후, 아이실트는 로렌시아의 소검을 뽑아들어 지도상 숲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검을 도상으로 살짝 움직여 하나의 선을 만들어냈다. 물론, 지도를 찢거나 하는 멍청한 일은 하지 않았다. "이것이 예상되는 적의 움직임이다. 그들로서는 일이 길어져야 반대파들이 힘을 모을 시간을 줄뿐이니 속전속결을 하려 할 것이다. 미친 산짐승처럼 사납게 달려들겠지...." 그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실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가을.... 막 낙엽이 지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지 않은 지도 근 열흘.... 하늘은.... 이미 우리를 돕고 있다." 아이실트의 이 한마디에 모두의 얼굴에 놀라는 표정이 스쳤다. "불을 사용하시려고요?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이 미테이라 숲 전체를 태워먹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가을에는 바람의 방향이 제멋데로이기 때문에...." 지크는 아이실트의 말에 이렇게 물었고, 아이실트는 그런 그에게 한차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장수된 자는, 말을 꺼내기 전에 깊이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너는 지금 나에게 두 가지를 물어왔다. 불이 생각 이상으로 번지는 것을 어떻게 막아야 하느냐, 라는 것과 풍향의 불 예측성, 이 두 가지를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을 하기 전 생각을 한 흔적은 찾아보기가 힘들구나...." 아이실트의 말에 지크는 순간 약간 부끄러운 기색을 얼굴에 나타냈다. 사실, 그는 약간 산만한 편으로 어렸을 때부터 한가지 일을 진득이 하지 못하였다. 그 덕에 상당히 많은 일에 재능을 나타내기는 했지만, 진정으로 가장 잘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지크는 이렇게 사죄의 말을 했고, 아이실트는 한차례 미소와 함께 그의 말에 대꾸했다. "죄송할 것은 없다. 20년동안의 기질을 하루 한순간에 바꾸라고 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테니 말이다." 이 말에 지크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18년동안의 기질을 한순간에 바꾸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아이실트의 말이 이어졌다. "먼저 불이 번지는 것을 막을 방법은.... 우리에게는 뛰어난 정령술사가 한 명 있다." 그의 말에 지크가 곧바로 무언가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였으나, 아이실트가 방금 한 경고도 있고 해서 한차례 생각에 잠기었다. 사실 그가 처음에 하려던 말은 자신의 정령술로는 숲에 인 큰 불 같은 것은 진압할 수 없다, 였다. 아이실트가 이야기한 정령술사를 자신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차례 생각해 보니.... 정령왕을 친구로 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아.... 그렇군요. 그분의 실력이라면...." 아이실트는 지크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은 것이 흡족했는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렇게 미소를 지을 때면, 그의 이러한 말투는 어울리지 않는 듯 보였다. 흡사.... 어린 여자아이가 아빠의 흉내를 내는 것처럼.... "그리고 두 번째의 것은.... 메티에르 나이트, 그대가 대신 답하라." 아이실트의 말에 지크는 깊이 생각에 잠기었다. 설마 이번 것도 정령의 힘에 기대는 것인가? "혹시 정령의 힘을 이용하시려는 것입니까?" 그의 물음에 아이실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100만의 군사로 1만의 적을 치면 된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 할 때에는 10만의 군사로 1만을 쳐야 한다. 만약 수중에 1만의 병사밖에 없을 시에는, 산에게서 3만의 병사를, 숲에게서 2만을, 바람에게서 다시 2만을, 강에게서 1만을 빌려와라. 메티에르 나이트, 이 말뜻을 알겠는가?" 지크는 귀밑이 살짝 붉어졌다. 난생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무슨 뜻인지 알 듯도 하였다. 그렇게 사고의 길이 트이기 시작하자 이내 그 뜻을 잡을 수 있었다. "곡풍을 이용하는 것이군요!!" 그는 거의 외치듯 이렇게 말했고, 아이실트는 한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것이다. 한 낮, 산발치 에서는 산에서 평야로 부는 곡풍이, 다른 어떠한 바람보다 우세하다. 만약 여름이었다면, 숲의 우거짐 덕분에, 곡풍이 많이 약화될 터이나, 지금은 아니다. 앙상한 나무가 자라있는 숲은 평야나 마찬가지이다." 아이실트는 이렇게 말한 후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작전 설명에 들어간다. 우선, 메티에르 나이트, 너는 다르나시안 백작 가의 아가씨에게 일러, 5개대(1개대 6인. 보통은 5인이지만, 아이실트가 6인으로 편성했다. 대는 이 당시 군사 조직의 가장 하위 단위이다.)의 병사들을 이끌고 로렌시아 님을 테에이산으로 피신하라고 일러라. 지금 출발한다면, 내일 오전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꾀병을 부린다면 적의 미끼로 이용하겠다는 말도 한마디 보태라. 그리고, 각급 지휘관들 중 제란 병집 장은 미테이라 숲의 입구에서 적의 진행을 늦춰라. 너무 빨리 전장에 도착할 경우, 곡풍이 채 일기도 전에 그들과 맞닥뜨리는 경우가 생긴다. 세콜, 체티람, 퓰트, 세사람은 나와 함께 화공을 준비하고, 벨토크 너는 이 성을 지키는 척 하고 있어라." 아이실트는 이렇게 말한 후 모두의 반응을 잠시 기다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이야기 도중 도상의 해당 지점을 집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적은 분명 이 성을 공격할 것이다. 그럴 경우, 벨토크 너는 곧바로 성을 버린 후 북쪽으로 도망쳐라. 바로 이곳, 그들의 시체를 소각할 곳으로 말이다. 그리고, 세콜, 체티람, 이 둘은 각각 북쪽과 서쪽을 막고 있다가 그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즉시 불을 질러라. 벨토크는 적을 유인장소까지 데려온 후 곧바로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불을 피해 달아나오는 적병을 처리하라. 가능하다면 생포하라. 퓰트는 서쪽의 병사들 가장 남쪽에 진을 치고 있다가 불이 일면 곧바로 적의 남쪽 퇴로를 막아라. 세면이 막힌 적은 반드시 동쪽으로 달아날 것이다. 곡풍은 서풍이니.... 그들의 추격은 바람과 불이 대신 해 준다. 처음 남쪽에서 적들을 지연시킬 제란은 일을 마친 후 곧바로 다시 레리시카 성으로 돌아와 대기하고 있어라." 아이실트는 여기까지 말한 후, 제란과 벨토크, 퓰트, 이 세사람을 다시 한차례 바라보았다. "이번 작전에서, 모두들 힘들고 어렵겠으나, 제란, 벨토크, 퓰트 이 세 병집장들이 특히 위험하리라 예상된다. 부디 조심스럽게 행하여 내게, 그리고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총사령관 지크는 나와 함께 북쪽에서 대기하고 있겠다. 나의 경호도 겸할 것이다." 이 말에 다섯 병집장들과 지크는 작전회의장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소리쳐 대답했고, 아이실트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미소와 함께 바라보았다. 그가 처음 이야기한 것과는 달리, 이 작전은 다른 사람들의 반대를 사지 않았다. 일단, 다른 여섯 명이 이러한 쪽에는 문외한 이었는 데다가, 아이실트의 언변이 꽤 좋은 편 이어서 였다. 이 모든 작전중 한가지라도 틀어질 경우에는 완전히 혼란상태에 빠져 버릴 터인데도, 차후 작전 같은 것은 세우지도 않고 있었다. 하긴.... 한 번의 패배가 거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상황에 무슨 차후 작전이 있겠는가? 이렇게 아이실트는 천천히 자신의 발걸음을 앞으로 일보 움직였다. 루실리스와 아이실트 이 두 사람에 의해 앞으로 4년동안 전개될 역사는 화려하기 짝이 없었고.... 이 화려한 역사라는 것은 후세의 사가들이 이 시기를 영웅전쟁기라고 명명하는데 주저하지 않게 만들었다. 루실리스와 아이실트라는 두 왕에 의해, 대륙은 한차례 폭풍을 마지 하게 되는 것이다. 21. 베니아 나무가 서있는 언덕에서.... 란테르트가 아이실트의 카타성 환궁 소식을 들은 것은 그가 카타 내성 안의 남녀 노소 1600여명을 죽인지 2일쯤 흐른 후였다. 소문에 의하면, 아이실트를 공격해 갔던 반 아이실트 파의 '불순한'무리들은 아이실트의 뛰어난 작전에 걸려 절반이 몰살당하고, 나머지 절반은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란테르트는 그 소문에 약간 의아심을 표했으나, 그다지 관심 없는 분야이기에 잠자코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카타성의 일을 마친 다음날, 즉 어제는 기분이 썩 즐겁지 못한 하루였다. 아무리 그 라지만.... 겨우 2, 3살 먹은 어린아이부터, 이제는 나이도 샘하는 것도 그만두었을 국왕까지 그 모두를 손수 베어 넘겼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메이드복을 입은 소녀들의 하얀 앞치마가 피로 물들고, 왕궁내 경비를 돌던 은색 갑옷의 로얄 가드들의 갑옷 역시 붉게 변했다. 남자들은 검을 들고, 또 마법을 사용하며 극구 저항했으나,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저 눈앞에 보이면 베고, 또 벨뿐이었다. 사실 모든 사람을 죽였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왕궁이라는 곳이 원래 그렇든 수많은 비밀통로와 밀실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이상은 란테르트로써는 할 수 없었다. 아니, 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튼 대략 1000명 가까운 메이드들과 요리사, 집사등 등의 왕궁 일을 돌보는 사람들과, 객으로 있던 300여명의 귀족 및 왕족들, 그리고 300명 정도의 로얄 가드를 죽인 듯 하다. 도합 1600명.... 하루 저녁에 죽인 숫자로는 '꽤'많은 편이다. 이렇게 검으로 직접 사람을 베어 넘길 때의 느낌이란.... 역시 마법으로 몰살시킬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마법으로 죽일 때는 왜인지 장난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거리가 멀고, 또 피가 튀는 모습이 직접 시야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으로 벨 때에는 베임을 당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비명을 지르고, 또 그 베인 상대의 피가 자신을 향해 쏟아진다. 그렇게 우울한 하루를 수도 카타성에 머물며 지낸 란테르트는, 그 다음날, 즉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수도를 벗어났다. 전날의 그 불쾌했던 기분은 거의 사라진 후였다. 그리고 저녁 무렵에 수도 카타가 아이실트의 손으로 넘어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역시 왕성 근처여서 인지 소문이 빠르다. 란테르트는 그 소문에 문득 이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로렌시아.... 그 아이가 보낸 모양이군.... 콜록.... 흠.... 확실히 나는 너무 오래 살았어.... 쿨룩.... 쿠헉.... 나는 원래 아이실트 그 아이에게 이 자리를 넘겨주려 했네.... 다른 세 아이와는 다른.... 콜록.... 어떤 느낌이 그 아이에게는 있거든.... 쿡...." 심하게 기침을 하며 침상에 누운 채 이렇게 말하는 위다의 국왕의 모습을 란테르트는 무심한 표정으로 지켜보았었다. 오랜 나이에서 오는 지혜인 것일까? 아니면, 그의 딸 로렌시아와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의 예지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어느덧 해가 졌고, 란테르트는 시콧이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여기서 서남쪽으로 다시 하루쯤 걷고 나면, 에티콘 마을에 도착할 것이다. 그녀들이 잠들어 있는 그 조그마한 마을에.... 그리고, 다시 서남쪽으로 며칠을 향하면.... 크산트 항에 도착할 것이고.... 다시 며칠.... 그리고 며칠이면.... 란테르트는 잠시 앞일을 생각해 보다가 도시 안 아무 여관이나 무턱대고 들어가 방을 얻었다. 거의 11월이 다 되어 날씨가 은근히 쌀쌀했다. 그러고 보니, 다시 혼자가 되어 있었다. 트레시아는 그렇게 라미에라에게 끌려갔다 마계로 돌아간 후 소식이 없었고, 세이피나 역시 되돌아올 생각을 안하고 있었다. 하긴.... 그들과 함께 있다는 그것이.... 그 사실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란테르트는 이런 저런 정보도 모을 겸 주점의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술은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기에, 그의 바로 앞에는 처음 카운터에서 내 온 물이 반쯤 담겨 있는 컵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주인의 짜증스러운 시선이 나머지 절반을 채우고 있는 듯도 하다. 시시한 이야기들만 오가던 주점 안에, 란테르트의 흥미를 끄는 이야기가 하나 들려왔다. "글세 그렇다니까!" 왠 젊은 남자가 이렇게 중얼거렸고, 곁에 앉아 있던 상인차림의 사내가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허, 참.... 요즘 왜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지...." 다시 옆에, 용병차림의 사내가 상인의 말을 받았다. "그런 사람이 많다니?" 상인이 대꾸했다. "이런, 자네 머리가 그렇게 굳었나? 무기를 찾아다니는 사람 하면 그를 떠올려야지.... 쯧쯧...." 용병이 그런 상인의 말에 자신의 이마를 찰싹 한 대 때렸다. "아차!"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크림슨 아이즈를 말하는 건가?" 상인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고, 처음에 이야기를 꺼낸 젊은 사내 역시 으음, 하는 나지막한 신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야기는 그만 두기로 하고...." 상인은 이렇게 대충 크림슨 아이즈에 대한 이야기를 얼버무렸고, 이내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무튼, 자네 하던 이야기나 계속 해 보게.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됐나?" 뒤이어 용병이 젊은 사내를 독촉했다. "그래, 그러니까, 검 경매시장에 뛰어들어 세사람이나 베고 검을 가져간 후로 어찌 되었다는 건가?" 그들의 말에 젊은 사내는, 세상에서 그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듯한 약간 거만한, 하지만 결코 불쾌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 그런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 녹색 머리칼의 사내는, 주위에 서 있던 세명의 병사를 베어 넘기고는, 그 일노리안이라는 검을 가로챘네. 경매장이라는 곳이 언제나 그러하듯 많은 사람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네 만.... 모두들 그 녹색머리칼의 외팔이 검사의 일 검을 당해내지 못했네. 후.... 평생 난 그렇게 강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그때 용병이 그의 말에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있지 않나?" 성인이 그의 말을 묵살했다. "시끄러." 용병은 그런 상인의 말에 몇 마디를 투덜거렸고, 젊은 사내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 일 때문에 이 시콧 시는 불과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엉망이었네. 도시의 가드들은 그 녹색 머리칼의 외팔이 검사를 잡겠다고 도시 이곳 저곳은 미친개들처럼 뛰어다니고...." 상인이 그의 말에 술을 한잔 훌쩍 들이키며 말했다. "미친개들이라... 거참 적절한 비유일세. 아니, 차라리 미친 개새끼들이라고 하지." 나라에 쌓인 게 많은 사람인 모양이었다. 젊은 사내는 그런 상인의 말에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갔다. "어허! 자네 취했군. 목소리가 너무 커!" 여기까지 들었을 때, 란테르트가 돌연 몸을 일으켜 그들 세 사람에게 접근했다. 마침 관의 욕을 하고 있던 그들이기에 뜨끔해 붉은 눈의 괴검사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역시 용병이 그래도 가장 용기가 많았던지, 자신들의 앞에 선 란테르트를 향해 약간은 호기롭게 말했다. "뭐인가? 보아하니 검사 같은데, 우리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가?" 그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답하지 않은 채 그저 이야기를 하던 그 젊은 사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그 검사가 어디로 향했는지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이 세 사람은 란테르트의 태도가 의외로 공손 하자 크게 안도했고, 젊은 사내는 란테르트의 물음에 답하였다. "아, 그건 제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의 이 대답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젊은이는 흔쾌히 응하며 입을 열었다. "수이브렛마을입니다. 어제 그는 그 경매장을 빠져 나오자 마자, 마침 그곳에 서있던 저를 붙잡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소피카로 가는 도중에 있는 마을중 가장 가까운 곳이 어디에 있느냐고.... 그래서 저는 주저 않고 답했죠. 남서쪽으로 있는 10여개의 마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던 중 수이브렛 마을과 에티콘 마을을 이야기 해 주었는데.... 그러자, 그는 돌연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며 제 멱살을 강하게 움켜쥐었습니다. 그리고 되물었죠. 수이브렛? 하구요. 아마도 무언가 얽힌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저로써는 알 수 없었습니다." 말하기를 꽤 좋아하는 사내인 모양이었다. 란테르트가 묻지도 않은, 그의 행로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까지 줄줄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란테르트는 그런 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이브렛 마을.... 그러고 보니, 에티콘 마을에서 약간 동쪽으로 떨어진 곳에 사피엘라, 에라브레 자매의 고향인 수이브렛이 있었다.... 지금까지 한차례도 찾아가 본 적 없는 두 자매의 고향.... 란테르트는 그 녹색 머리칼의 외팔이 검사를 만나기도 할 겸 수이브렛가로 향하였다. 일노리안이라는 검이 어떠한 것인지는 잘 몰랐으나, 어쩌면 자신이 찾는 그러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결코 놓칠 수는 없다. 란테르트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감사하다는 말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고, 그냥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한 후 밖으로 나섰다. 그 녹색머리칼의 외팔이 검사라는 남자가 언제 어디로 사라져 버릴지 알 수 없기에 조금 서둘러야 했다. 이른 저녁에 마을을 출발해 다음날 새벽녘이 될 무렵, 란테르트는 수이브렛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본래 수이브렛 남작 가문의 영지인 이 수이브렛 마을은, 200여호 가량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그다지 크지 않은 마을이다. 별다른 특산품도 없는 조용한 곳일 뿐이다. 지금은 영주의 부재로 인해 서쪽으로 10휴하(1휴하=약 1킬로미터)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에티콘 마을의 영주인 칼슨에 의해 다스려 지고 있다. 이러한 마을이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주점 정도는 가지고 있었고, 주점은 이 늦은 시간, 아니 이 이른 시간이 되도록 불을 밝히고 있었다. 이 조그마한 마을에 무슨 그리 많은 손님이 있어 늦은 시간까지 흥청거리겠는가? 모두가 다 이 한사람 때문이었다. 35세 가량의 사내였다. 청록색의 길지 않은 머리칼을 뒤로 완전히 넘긴 이 남자의 오른쪽 팔은 어깨만 남은 채 소매가 펄럭이고 있었고, 그 덕에 왼팔로 술을 따르고 또 마시고 있었다. 그와 상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인 역시 카운터에 앉은 채 꾸벅 꾸벅 졸고만 있었고, 점원은 이미 퇴근한 후였다. 그는 오로지 술을 마시고, 마시고, 또 마셨다. 란테르트는 주점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한참동안이나 그 사내를 바라보았다. 짙은 녹색의 눈동자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그의 모습에.... 란테르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천천히 걸어 그에게 다가갔고, 그 바로 앞에 있는 의자를 뒤로 빼 그곳에 앉을 뿐이었다. 녹색 머리칼의 외팔이 검사는 살짝 풀린 눈동자를 치켜 뜨며, 이거 왠녀석이야? 하는 표정으로 란테르트를 바라보았고, 란테르트는 반쯤 차있는 술병을 들어 그의 빈 술잔에 채워 주었다. "뭐야?.... 너 나 알아?.... 후우...." 녹색 머리칼의 사내는 그 툭 튀어나온 광대뼈를 살짝 움직여 란테르트에게 이렇게 외쳤고, 란테르트는 묵묵히 곁의 탁자에 뒤집어져 있는 물 잔을 자신에 앞에 놓으며 그곳에 술을 반쯤 채웠다. 녹색 머리칼의 남자는 란테르트의 이러한 행동에 돌연 검을 뽑아들려 했으나, 검자루조차 잘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간신히 몇 차례 허우적거려 검자루를 잡기는 했으나, 뽑을 수는 없었다. 반쯤 뽑힌 검은 무엇에 걸렸는지 더 이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비러먹을! 이 더러운 검자식이 이 아왈트 님의 말을 않들어? 제길. 나와라 이 새끼야 단번에 분질러주마!!" 괜한 검에 한참을 화풀이하던 그는 다시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꺼져버려. 그렇지 않으면 이 어르신께서 널 두 동강 내 버릴 테니...." 아왈트.... 여전 입은 더러웠다. 안색은 약간 더 초췌해져 있었으나, 그다지 건강을 해친 듯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정신을 잃을 정도로 폭음을 한 모습이 꽤나 어울리는 것을 보아 술은 상당히 는 모양이었다. 란테르트는 조용히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이런 저런 이유로 술을 잘 마시지 않는 그였지만, 이렇게 아왈트의 모습을 눈앞에 놓고 보니 왜인지 한잔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아왈트는 란테르트가 그렇게 자신의 술을 한 모금 마시자 돌연 와하하하 하는 호탕한 웃음을 웃었다. "이 자식! 꽤 용기가 가상쿠나! 너 내가 누군 인지 아느냐? 이 아왈트 님을 아느냔 말이다? 그 잘난 크림슨 아이즈인가 뭔가 하는 녀석을 때려잡기 위해 검술을 연마하시는 어르신이단 말이다."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이에 주점주인은 잠에서 깨어났고, 이내 아왈트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곤란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발 나가 주십시오. 원, 저도 이제 내일 장사 준비를 해야 하고.... 이 주점 꼴을 보십시오. 아직 청소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곧 날이 샐 터인데...." 그리고는 란테르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또 누구십니까? 이 사람과 아는 분이시라면 제발 좀 데려가 주십시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말은 란테르트에게도, 아왈트에게도 대답을 듣지 못하였고, 그는 이내 투덜거리며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고개를 카운터에 푹 처박아 버렸다. 포기한 모양이었다. 아왈트는 주점 주인이 곁에서 주절거리는 동안에도 란테르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건방진 녀석. 아직 이 어르신에게 덤비기에는 이르다. 가서 한 10년간 더 검술을 익혀 돌아오너라!" 그런 그의 모습에 란테르트는 잠자코 있다가 한마디 입을 열었다. "크림슨 아이즈.... 그에게 팔을 잃은 복수를 하려는 것입니까?" 만약 맨 정신이라면, 이러한 란테르트의 말을 듣는 순간 그가 란테르트임을 알아 보았을 터이나.... 고주망태가 되어, 천장과 바닥의 구분도 잘 되지 않는 그로써는 란테르트의 이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 바로 그거다!! 그 머저리 우유부단 녀석은 내 팔을 빼앗아 갔지. 그뿐인 줄 아나? 후후후...." 여기까지 말한 아왈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는 줄 아나? 바로 마을 이름이 수이브렛이기 때문이야.... 수이브렛.... 그녀와 이름이 같은 마을.... 수이브렛.... 수이브렛양.... 후후후...." 이 아왈트의 말에 란테르트는 순간 머릿속이 텅 비는 듯 했다. 역시.... 아왈트는.... 에라브레를.... 아왈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나는 말이다.... 여자를 내 노리갯감 이상으로는 생각지 않아. 후후.... 그렇게 나도 노리갯감에게서 태어난 거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따위가 가지고 논 노리갯감에서 태어난 거야.... 하지만.... 하지만 말이지.... 수이브렛양은 달랐다. 너도 아나? 그런 느낌?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여자.... 후후후.... 내게도 그러한 여자가 생길 줄이야...." 이렇게 말하던 아왈트는 돌연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가 주점 안에 쩌렁쩌렁 울렸고, 엎드려 잠을 청하던 주점 주인은 경기를 일으키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비러먹을 개자식이 빼앗아 갔어. 내 팔도.... 그리고 그녀도.... 그 비러먹을 자식.... 지금쯤 어디서 잘먹고 잘 살고 있겠지?" 아왈트는 아마도 란테르트가 왜 크림슨 아이즈가 된 것인지 까지는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5년간 한차례도 만나지 못했으니.... 에라브레가 란테르트와 결혼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상상이었다. 란테르트는 그의 그러한 모습에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주먹을 쥐어 그의 얼굴을 정통으로 갈겼다. 아왈트는 이러한 란테르트의 주먹에 정면으로 얼굴을 맞고는 의자 채로 뒤로 벌렁 넘어갔고, 그대로 기절을 해 버렸다. 란테르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이 돌연스런 상황을 놀란 토끼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주점 주인에게 입을 열었다. "이 남자가 마신 술값이 모두 얼마입니까?" 란테르트의 물음에 주인은 아, 아, 라고 잠시동안 대답을 하지 못하다가 이윽고 57하르라고 답해주었다. 란테르트는 주머니에서 100하르 짜리 은화 하나를 내려놓고는 이내 바닥에 철퍽 뻗어있는 아왈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를 자신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란테르트보다 키는 작았으나, 덩치가 있어 몸무게는 더 나가는 편이었다. 어깨에 그를 올려놓은 란테르트는 그대로 주점을 빠져나왔고, 이내 걸음을 서편으로 옮겼다. 오래간만에.... 두 자매를 찾아서.... 해가 뜨고, 다시 그것이 하늘 높이 치솟을 쯤이 되어서야.... 두 개의 조그맣고 하얀 묘비가 서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뻗어있던 아왈트가 눈을 떴다. 그가 눈을 뜨자 마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높이 멍청하게 파랗기만 한 하늘과, 그 밑에 멍청한 붉은 색을 띄는 나뭇잎을 덕지덕지 매단 나무 한 그루였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하자, 시야에 한 청회색 머리칼의 사람이 한명 있었다. 뒷모습뿐이어서 누구인지 알 수 있었으나, 몸매를 보아 남자가 분명했다. 그 긴 머리칼에도 불구하고.... 아왈트는 정신이 들자마자 콧잔등이 시큰시큰한 느낌이 들었다. 이 비러먹을 코는 말썽도 많이 일으킨다. 5년전에는 부러져 버리지를 않나.... 이번에는 깨어나 보니 괜한 통증이 느껴지질 않나.... 콧잔등에 손을 얹은 채 몸을 일으킨 그는 고개를 두리번거려 주위를 살폈다. 왠 재수 없게 무덤이 두 개 덩그러니 눈앞에 들어왔고, 멀리 뒤쪽에는 저택이 하나 눈에 띄었다. 태어나서 처음 와본 곳인걸 보니.... 술김에 걸어서 온 것은 아닌 듯 하다. 무덤 바로 앞에는, 아왈트 그에게 등을 내보인 한 사내가 앉아 있었는데,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하염없이 무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왈트는 이 괴상한 풍경에 일순 자신이 죽기라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완전히 사후세계 아닌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보도듣도 못한 곳에 자신이 있고.... 짙은 회색의 망토를 두른 긴 청회색 머리칼의 사내가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다가.... 저 뒤로 보이는 평화로운 풍경의 마을과 저택.... "제길.... 난 되진 건가?" 죽어서까지(?) 말버릇이 더럽다. 란테르트는 그의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며 고개를 돌려 아왈트를 바라보았다. "일어났군...." 란테르트의 말에 아왈트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뭐냐? 너는...." 역시 시간이 많이 흘러서일까? 그는 란테르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는 란테르트에게 팔을 잃자마자 복수를 결심했다. 그 때문에 한편으로는 검술을 연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란테르트의 행방을 추적했다. 그렇게 하기를 4년째 되는 날에 이르러서야, 아왈트는 자신의 팔을 벤, 란테르트라는 이름의 검사가 지금 크림슨 아이즈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말에 사실 그는 약간 실의에 빠졌다. 소문으로 들려오는 크림슨 아이즈의 실력이라는 것이 자신과는 상대도 할 수 없는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를 할 수는 없어 계속해 검을 연마했고, 지금은 팔이 하나밖에 없다는 핸디를 거의 극복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어찌되었건, 그럼에도 그는 란테르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5년.... 그 동안 란테르트의 얼굴은 몰라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한 소녀가 란테르트와 아왈트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15세쯤 되어 보였는데, 제법 처녀티가 났다. 복장은 그냥 편한 일상복 차림으로, 긴소매를 가진 원피스 드레스였다. 이 소녀는 짙은 보라색의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고, 얼굴은 약간 날카롭게 생겼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에라브레와 아르트레스의 중간 정도? 눈도 그다지 크지 않았고, 턱선도 얇은 편이었다. "란테르트 삼촌. 엘라 아주머니가 와서 점심 드시래요. 그 손님도 함께요." 소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우물쭈물 란테르트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집안으로 돌아갔다. 상당히 란테르트를 어려워하는 듯한 눈치였다. 란테르트는 그렇게 그냥 가버리는 소녀의 뒷모습에 대고 입을 열었다. "알았다, 시나...." 아왈트는 란테르트라는 말에 돌연 몸을 벌떡 일으켰고, 알았다라는 란테르트의 말에 입을 열었다. "란테르트!" 아왈트의 부르는 소리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돌려 다시 아왈트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알아보시는 겁니까?" 란테르트의 말에 아왈트는 두말 않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 검이 새로 얻은 일노리안이라는 검인지, 아니면 원래 그가 쓰던 검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무튼 꽤 넓은 날을 가진 대검에 가까운 중검이다. "뽑아라. 애송이자식!" 아왈트는 외쳤고, 란테르트는 무덤덤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하냐? 어서 검을 뽑아라!!" 아왈트의 말에 란테르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두 무덤으로 시선을 던졌다. "여기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그런 그의 물음에 아왈트는 순간 이상한 느낌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설마.... 프넨티아?" 의외로 단순한 인간이었다. 란테르트는 그런 그의 대답에 후훗.... 하는 작고 나지막한 웃음을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전혀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아왈트에게 입을 열었다. "수이브렛 자매가....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아왈트는.... 란테르트의 말에 검을 놓쳤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는 뛰듯 달려 란테르트 바로 앞에 있는 무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발견했다. 에라브레.... 수이브렛.... 가엽고 아름다운 소녀.... 여기 묻히다.... 아왈트는 이 비문을 다 읽자 마자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돌연 란테르트를 노려보더니 그 단단한 주먹으로 란테르트의 턱을 휘갈겼다. 그러나 란테르트를 맞추기에는 역부족으로, 란테르트는 몸을 슬쩍 움직여 그의 주먹을 피했다. "이 자식!! 잘난 척은 혼자 다하더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왜.... 왜 수이브렛 양이 이렇게 된 것이냐?" 아왈트는 이렇게 말하며 폭풍처럼 두 주먹을 휘둘러 란테르트를 휘감았지만, 란테르트는 맞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공격은 란테르트의 주먹이 그의 복부에 꽂힘과 동시에 끝났다.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란테르트는 감정이 절제된, 하지만 절제하였다는 것이 너무나도 확연히 느껴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고, 아왈트는 마른기침을 몇 차례 컥컥 거리며 바닥에 쓰러져서는 바닥을 한참동안 내려다보았다. "어쩔 수 없다?.... 그따위 말 한마디로 끝날 일인 것이냐? 이 머절한 자식아.... 그렇게나 우유부단하니.... 네가 그렇게 우유부단하니 수이브렛 양이...." 아왈트는 두 팔을 바닥에 집고 두 무릎을 꿇은 채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마지막 말에 돌연 울컥 눈물을 쏟았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란테르트로써도 예상외의 것이었다. "비러먹을 자식....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안주하고 싶었던 여자인데.... 비러먹을 자식.... 넌 그 정도도 못지켜낸거냐? 너 따위것.... 너 따위것 때문에 수이브렛 양이.... 이렇게 된 거야!...." 란테르트는 그런 아왈트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정말.... 그런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자신이 이 두 자매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란테르트는 다시 무덤을 바라보았고, 아왈트는 잠시동안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소매로 눈가를 한차례 닦아냈고, 그는 조용히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검을 챙겼다. "란테르트.... 라고 불러도 되나?" 아왈트가 물었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후우.... 크림슨 아이즈가 된 것도 그녀 때문인가?" 아왈트가 다시 물었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아왈트는 이렇게 말하며 검을 휘둘러 바닥을 강하게 내려 쳤다. 동시에 챙강 소리가 나며 검이 두 동강 나 버렸고, 아왈트는 그 모습을 무덤덤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이제.... 너 따위에게 복수할 필요는 없어졌군.... 나 따위는 팔을 잃었고.... 너 따위는 그녀를 잃었으니...." 굉장히 이상한 말투였으나, 란테르트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아왈트는 잠시 고개를 돌려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아마도 이 풍경을 기억해 두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무덤 뒤에 서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저건 무언가?" "베니아 나무입니다." 란테르트의 말에 아왈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니아 나무는.... 봄이 되면 조그마한 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흡사 눈이라도 내린 듯.... 아니, 나무 전체가 아예 눈이 되어 버린 듯.... "꽤.... 쓸 만 하겠군.... 베니아 나무라.... 수이브렛양도 이곳을 좋아하겠지.... 나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상한 아가씨였으니까...." 아왈트는 이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떠나려 했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의 뒷모습에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도.... 그녀를 라브에라고 부를 정도의 권리는 있는 듯 보이는군요.... 그녀를 이렇게나 사랑하고 있으니...." 이것은 란테르트가 느낀 그대로였다. 차라리.... 그때 에라브레가 아왈트에게 갔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란테르트의 이 말에 아왈트는 걸음을 멈춘 채 입을 열었다. "시끄럽다, 멍청이.... 나같이 더러운 자식이 무슨 사랑은 얼어죽을 사랑이냐?.... ...라브에? 그 따위 이름은 모른다.... 수이브렛양은 내게 자신을 수이브렛 양이라고 부르라고 이야기했었다. 후후후.... 그녀가 내게 허락한.... 이름이 바로 수이브렛양 인 것이다...." 아왈트는 이렇게 말하며 언덕 아래로 걸음을 옮겼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의 뒤에다 다시 한차례 질문을 던졌다. 에라브레에 대한 추억을 공유한 사람이기 때문인지.... 아왈트에게 알 수 없는 동질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 그였다.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이 란테르트의 마지막 물음에 아왈트는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로?.... 글세....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이렇게 몇 마디 중얼거린 아왈트는 이내 발을 때었다. "그 따위것.... 나도 모른다...." 란테르트는 더 이상 그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 아왈트는 빈 검집을 달랑 허리에 찬 채로 터덜터덜 언덕을 걸어 내려갔다. 아쉬운 듯, 한참이나 떨어졌을 때 그는 한차례 뒤돌아 언덕 위를 바라보았으나, 끝끝내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란테르트는 아왈트가 그렇게 사라진 후로도 한참동안 무덤 가에 서 있다가 시나의 두 번째 독촉을 받았다. 이 진 보라색 단발머리의 아가씨는 란테르트의 앞에 와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당하고 또 사납게 생긴 외모와는 딴판으로 굉장히 조용한 행동이었다. "저.... 어서 점심을 드시러 오세요...." 흡사 트레시아가 이카르트 앞에서 다소곳(?)한 모습으로 있을 때와 같은 분위기이다. 란테르트는 그런 시나의 독촉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언제나 그렇듯 란테르트는 이 집에 오자마자 이곳에 들렸기에 아직 채 짐도 풀지 않은 채였다. 시나는 반보쯤 앞서 걸었고, 란테르트는 그녀의 대각선 뒤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쫓았다. 무덤이 있는 곳에서 에티콘 저택의 후원까지는 대략 50휴리하(1휴리하=약 1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시나는 지금 자신의 뒤를 걷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이 일곱 대륙 안에서 크림슨 아이즈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둘중 하나라고 볼 수 있었다. 하나는 너무 어려 설명을 해 주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귀머거리에 벙어리, 그리고 글자까지 몰라 아예 설명을 해 줄 수 없는 사람. 이 둘에 속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를 모르겠는가? 이러하니.... 시나가 그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편이 이상한 것이다. 그렇다고 란테르트가 특별히 시나를 다정히 대해 주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1년에 서너 차례쯤 들려 얼굴이나 잠시 보고 헤어지니 친해지려야 친해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시나는 란테르트와 두 수이브렛 자매에 대한 이야기를 알지 못하였다. 단지, 저 무덤의 주인이 집안에 걸려있는 초상화의 주인공이고, 그녀들과 란테르트가 매우 친한 사이였다는 것 정도가 그녀가 아는 모든 것이었다. 칼슨도 엘라도 두 자매에 대한 이야기는 잘 꺼내지 않았고, 집안의 다른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했던 데다가 함부로 이야기를 꺼낼 일도 아니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시나는 이렇게 앞서 걸으면서도 이 뒤에 있는 남자가 갑자기 자신을 죽이면 어쩌나 하는 마음까지 일고 있었다. 그렇게 몇 걸음을 옮기는 사이 란테르트가 입을 열었다. "8개월 만인가?...." 그의 말에 시나는 돌연 걸음을 멈추며 예? 하고 반문했다. 긴장해서인지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슬쩍 미소지으며 다시 말했다. "이곳에 들린지 8개월 만인 것 같구나...." 그의 말에 시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8개월 만이세요...." "그렇군...." 란테르트의 이 말을 끝으로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고, 시나는 다시 앞에서, 그리고 란테르트는 뒤에서 걸어 에티콘 저택에 도착했다. 식당에는 네명이 먹을만한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고, 각각의 자리에 칼슨 및 엘라, 그리고 시나와 란테르트가 자리를 잡았다. "아까 그 사람은 누구인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칼슨은 막 자리에 앉는 란테르트에게 이렇게 물었고, 란테르트는 그의 물음에 간단히 답했다. "전에 알았던 사람입니다.... 라브에와도...." 그의 말에 칼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엘라는 약간 놀랐다는 듯 란테르트를 멍히 바라보았다. "그렇군...." 칼슨은 이렇게 말한 후, 이내 란테르트에게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지난주에 있던 마을 수학제때, 우리 시나가 여왕의 자리에 등극했었다네. 하하하!!" 칼슨은 분위기 전환도 겸해 란테르트에게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그의 말에 시나를 한차례 바라보며 한마디 축하의 말을 해 주었다. "대단한걸...." 시나는 이러한 란테르트의 칭찬이 얼마나 예외적인 것인 줄은 잘 모른 채 역시 당신다운 칭찬이네요....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뒤이어 엘라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이번에도 역시 아무런 소득이 없었나요?" 그녀는 꽤나 동안으로 이제는 30대 후반이었으나, 여전 20대로 보였다. 그에 반해 칼슨은 40대 후반으로 이제는 부부라기 보다는 부녀라고 부를만할 정도가 되어있었다. 엘라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내 한가지를 떠올리며 등뒤에서 검을 하나 뽑아들었다. 바로 에르테일이었다. 화려하기로 대륙 3대 명검 중에 제일인 이 검을 꺼내드는 순간, 약간 위축되어 있었던 시나마저 와, 하는 감탄 성을 냈다. 란테르트는 검을 칼슨에게 건네 보였다. "에르테일 소드입니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검을 소개했고, 칼슨과 엘라의 얼굴에는 놀라는 표정이 가득 서렸다. 시나 역시 대륙 3대 명검에 대해서는 몇 차례 들어보았기에 식탁에서 일어나 칼슨 가까이로 다가와 검을 바라보았다. "정말 에르테일 소드예요?" 시나가 물었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슨은 한참동안 검을 이리 저리 돌려보다가 시나가 달라는 손짓에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조심해!" 워낙 날카로운 검이기에 칼슨은 이렇게 한 번 주위를 주었고, 시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에르테일은 대검에 가까운 중검으로 여자아이가 들기에는 꽤 버거운 것이었다. 칼슨은 그런 시나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란테르트에게 물었다. "이것으로도 불가능한 것인가?"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칼슨은 음, 하는 신음을 내뱉었다. "하긴.... 애당초 쉬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그래, 이 다음에는 어디로 갈 생각인가?" 칼슨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시나가 건네는 검을 받아들어 검집에 넣으며 대답했다. "마곡입니다. 루플루시카의 행방을 찾았습니다." 그의 말에 칼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군...." 이 네 사람은 이러저러한 대화를 계속 나누며 식사를 마쳤고, 란테르트는 식사를 마친 후 잠시동안 응접실에서 이야기를 더 나누다 몸을 일으켰다. 이미 행선지가 정해진 이상 그다지 오래 머무를 이유는 없다. 칼슨과 엘라, 그리고 시나 이 세사람은 현관 밖에까지 나와 란테르트를 전송했다. 칼슨, 엘라 이 두 사람과는 그럭저럭 8년간이나 친분을 쌓아왔다. 말투는 비록 딱딱했지만, 란테르트가 마음놓고 대할 수 있는 몇 안돼는 존재들 중에 하나이다. "이번에는 꼭 성공하길 바라네...." 사실, 칼슨의 마음 같아서는 그가 마왕에게 복수하는 일 따위는 그만두고, 그냥 자신의 집에나 머물렀으면 했으나, 그의 결심을 말릴 방법이 없기에 그냥 이렇게 인사했고, 엘라는, "몸 건강히 지내세요." 라고 인사했다. "건강하세요...." 시나는 그냥 엘라의 말을 따라 이렇게 인사했다. 아무리 보아도.... 란테르트라는 인간은 호감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란테르트는 이들 세명에게 의례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답례한 후 저택 뒤쪽으로 끝만 살짝 보이는 베니아 나무를 한차례 바라보며 에티콘 마을을 떠났다. 붉은 빛깔을 내는 베니아 나무의 잎들이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렇게 하루 밤이 지나면.... 두 자매의 무덤은 그 붉은 잎들로 살풋 뒤덮이리라.... 지난 8년 동안의 가을이 그러했듯이.... 아르페오네가 돌아오지 않자 란테르트는 슬슬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아르트레스야 뭐 라미에라가 무서워서 못 돌아온다 치면 그만이지만, 꼼꼼한 아르페오네라면 결코 쓸데없는 이유로는 늦게 돌아오지 않을 터인데.... 한편 그 아르페오네는.... 마계의 수도 엘비니움 중앙, 허공에 세워져 있는 하나의 탑. 그곳의 중간층쯤에는 아르페오네가 기거하는 곳이 있다. 물론, 자신의 그 방에 있는 시간보다는 이카르트의 곁에서 앉아있는 경우가 훨씬 길었지만 어찌되었건 자신의 방은 자신의 방이다. 방은 단조로웠다. 파란색을 꽤 좋아하는지, 벽지는 은은한 청색을 띄고 있었고, 가구의 전체적인 색조도 푸른색과 흰색을 병령시킨 것이었다. 하긴.... 침대와 장식 없는 책상, 그리고 그 위의 콘솔이 방안에 있는 가구의 전부였지만.... 막 샤워를 마친 그녀는 그대로 몸을 건조시킨 후 사제 복으로 몸을 감쌌다. 다시 란테르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이번 임무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단독으로 정령들의 땅으로 잠입하여 그곳으로 달아난 한 마족을 찾아 죽여야 하는 일이었는데....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 재수 없게도 정령들에게 들켜 한바탕 싸움을 치루어야 했다. 운이 좋아, 때마침 마계로 아르트레스가 돌아와 있어 별 일없이 끝날 수 있었지만.... 아르페오네가 샤워를 한 이유도 이것이었다. 그녀 급의 마족들은 목욕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물론, 아르트레스처럼 스스로가 좋아서 목욕을 한다면야 말릴 이유는 없었지만, 모든 몸의 상태를 완벽하게 유지할 수 있는 그들로서는 불필요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정령의 피와, 디아들의 체액.... 이것은 그러한 아르페오네마저도 더럽힐 수 있다. 아르페오네는 옷을 모두 갖춰 입은 후 탑의 최상층은 아르카이제의 방으로 공간이동을 했다. 그리고는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이제야 보고 드립니다.... 나크젤리온 님께서 내리신 명령,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도중 작은 문제가 일어났으나, 아르트레스님께서 도와주셔 간신히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이카르트는 언제나와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서쪽의 기둥에 앉아 있었다. 눈매는 고요했고, 표정은 차분했다. 아르페오네가 좋아하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수고가 많았구나...." 이카르트는 조용히 입을 열어 아르페오네에게 이 한마디를 해 주었고, 아르페오네는 그의 이 말에 귓볼까지 살짝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카르트 님께서 부탁하신 일에 대한보고 입니다. 란테르트 님은 에르테일이라는 뛰어난 검을 새로 얻으셨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별다른 일없는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몇 일전 로렌시아라는 위다의 공주와 만나 그녀가 부탁한 일을 한가지 해주신 듯 합니다. 대가로 무언가를 받은 것 같은데, 지금으로써는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녀의 보고에 이카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로렌시아라...." 그러고 보니.... 그 로렌시아라는 공주를 만난 그 날 저녁의 연회에서.... 이카르트는 옛생각에 잠시 잠겨 있다가 후훗, 하는 웃음을 웃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꽤 재미있는 추억이었다. 그 자리에 남아서 란테르트의 표정을 조금 더 살펴보았어야 했는데.... 무슨....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고.... 그리 급히.... 마계로 돌아 왔었는지.... 아르페오네의 보고는 이어졌다. "그리고.... 저의 정체는 이미 란테르트 님에게 눈치 채어진 것 같습니다. 예상외로 아르트레스님을 설득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그녀의 말에 이카르트는 잠시 고개를 돌려 아르페오네를 바라보았다. "그런가?.... 할 수 없지...." 아르페오네는 이카르트가 자신을 돌아다보자 고개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제 입으로 정체를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아르페오네의 이 말에 이카르트는 답하지 않은 채 자신을 향해 고개 숙인 아르페오네를 가만히 응시하였다. 아르페오네는 이카르트의 반응이 오늘은 약간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고,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얼굴에 근심이 드리워져 있는 듯 보였다. "아르카이제님...." 아르페오네는 이렇게 그를 불렀고, 이카르트는 시선을 그녀에게로 옮겼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르페오네가 물었고, 이카르트는 그녀의 물음에 한숨을 한차례 내 쉬었다. "글쎄다...." 이카르트는 이렇게 힘없이 답했고, 아르페오네는 그런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르카이제님.... 어떠한 일이라도.... 돕고 싶습니다." "후훗.... 건방지구나...." 아르페오네의 말에 이카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네가 도울 수는 없는 일이다. 몇 일전부터 이 생각이 떠오르더구나.... 만약.... 만약 란테르트 그가, 나크젤리온 님을 찾아 왔을 때....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네 생각은 어떻지? 아이야....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사실, 이카르트는 이렇게 물으면서 아르페오네가 할 대답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라면 당연히, '란테르트 님을 죽여야 합니다.', 혹은 조금 더 순화시켜, '란테르트 님을 그분의 앞에 나서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정도 선에서 대답을 할 것이다. 그리고 아르페오네의 대답은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분께서.... 나크젤리온 님께 갈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분을 보좌하는 아르카이제 님의 의무입니다." 그녀의 말에 이카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의무란 말인가?" 아르페오네는 그의 말에 고개를 조아리며 "예."라고 답했고, 이카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의무.... 그것이 나의 의무였지...." 아르페오네는 이카르트의 이러한 반응에 잠자코 고개를 조아린 채 있었고, 이카르트는 시선을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는.... 나에게 굉장히 소중한 사람이다....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나크젤리온 님 역시.... 그와는 다른 의 미에서 내게 의미 있는 분이시다.... 그분은 나의 아버지이시며.... 나의 신이시다." 이카르트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잠시 입을 다물었고, 뒤이어 짧은 한숨을 휴, 한차례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한 란테르트가.... 나크젤리온 님을 찾아 왔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냔 말이다...." 사실, 이카르트가 고민하는 것은, 결코 나크젤리온이 란테르트에게 어떻게 될것같다, 따위가 아니었다. 란테르트가 나크젤리온에게의 복수를 성공한다.... 그런 것 따위는, 나크젤리온도, 이카르트도, 아르페오네도, 그리고 란테르트 본인도 믿지 않고 있었다. 이카르트의 고민은 간단했다. 언젠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란테르트가 나크젤리온을 찾을 때의 일이다. 나크젤리온은 분명, 란테르트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강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보다 한발 앞서 란테르트를 만나야만 한다. 그것이 흑염의 기사, 자신의 의무인 것이다. 그리고 그때.... 자신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르페오네의 말대로 자신은 그 란테르트라는 인간을 죽여야만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실패할 경우에야 나크젤리온이 친히 강림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 반대로.... 고의로 그를 통과 시켜 준다면.... 그것은 그를 대놓고 돕는 일이다. 아무리 자신이 나크젤리온의 유일한 피조물이라고는 하지만.... 그리고, 마계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매우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에는.... 소멸되고 만다. 자신이 소멸되는 것 정도는 사실 별 것 아니다.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던.... 나크젤리온의 명령을 받고 고민하는 자신을 위해 잠시의 주저도 않고 스스로의 목을 검으로 그으려하던 그를 위해 죽는 일인데.... 뭐 그리 대수이겠는가? 다만.... 자신이 소멸할 경우에는.... 사실상 마계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나크젤리온이 아닌 아르카이제이다. 물론, 모든 마족중 가장 강한 것은 나크젤리온이지만, 그는 이 마계의 일에는 그다지 크게 관여할 수 없다. 현재 신계에서의 마신과 선신 사이의 세력 비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게 벌어져 있다. 중립신인 여섯 신들은 차처하고더라도, 기타의 선신 세력은 나크젤리온의 세력을 능가하고도 남았다. 나크젤리온이 9번째 땅의 일에 개입하게 되면 그들 역시 그렇게 할 것이고, 그렇게 될 경우에는.... 그 때문에 이 마계의 중추는 사실상 아르카이제였고, 그런 그가 소멸이라도 당하게 되면, 그의 세 아이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마족들 거의 모두가 함께 소멸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이카르트가 고민하는 점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란테르트를 죽일 수도.... 그렇다고 그를 도와 나크젤리온에게 검을 들 수도 없다. 전자의 것은 마음이 허락하지 않고, 후자의 것은 머리와, 자신의 피가 허락지 않는다.... 이 딜레마에 한 번 빠지자, 이카르트는 무기력증에 빠져 버렸고, 지금 또한 그러한 중이었다. "복잡하기 짝이 없구나...." 이카르트는 다시 한차례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중얼거렸고, 아르페오네는 그저 땅을 바라보며 잠자코 그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사실, 그녀의 입장에서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란테르트라는 인간이 어떻단 말인가? 그저.... 인간일 뿐.... 저대로 두어도 4, 50년 후에는 죽어버릴 그러한 존재 아닌가? 건강상태까지 감안해 본다면 2, 30년이 고작일 듯 보였다. 그녀는 인간 때문에 이렇게 까지 고민하는 이카르트의 심정을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었다. 이카르트는 잠시 이러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이내 아르페오네를 바라보았다. "아!.... 역시 괜한 이야기를 했구나.... 그럼, 어서 가 보거라...." 그의 말에 아르페오네는 고개를 들어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며 공간 저편으로 사라져갔고, 이카르트는 한참동안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밖으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복잡해.... 너무나...." 이카르트는 이 말을 중얼거리다 순간 어떠한 것에 생각이 미치었다. "후후후.... 복잡하다라.... 언젠가.... 예전에 그가 매일같이 하던 말인데...." 그러고 보니, 에라브레의 뒤를 쫓을 때, 란테르트가 입버릇처럼 내뱉던 말이었다. 이카르트는 그러한 것을 떠올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감상에 젖어 잠시동안 멍하니 있었다. "역시.... 네가 옳았던 모양이다.... 란테르트...." 이카르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반쯤 눈을 가리며 흘러내려온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럴 때 바람이라도 불어 주면, 마음이 풀리련만.... 엘비니움의 밤은 고요하기가 이를 데 없다.... 이곳까지 왔으니.... 한 번 들리지 않을 수 없다. 언제나 위다 남부지방을 지날 때마다, 란테르트는 두군데에 들리곤 했다. 한곳이 바로 사피엘라, 에라브레, 이 두 자매의 무덤이고, 다른 한곳이 바로 클라린스가 사는 그라난 마을이다. 지금처럼 마곡으로 향할 때는, 걸어야할 거리가 100휴하(1휴하=약 1킬로미터)에서 250휴하로 확 불어버리지만.... 그래도 얼마 되지 않는 자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 아닌가? 그라난 마을은 예나 지금이나 한적하고 조용하다. 무슨 잘난 무역로를 낀 것도 아니고, 사람 득시글대는 신전 곁에 위치하지도 않았다. 전형적인 위다 남부의 마을로, 다른 것을 굳이 들라고 한다면, 겨우 10휴하 정도 남쪽에 있는 바다 정도일 것이다. 종종 날씨 좋고 남풍이 불때면, 바람에 소금 내가 섞이기도 한다. 리오 노인은 결국 세운 모양이다. 그 하르의 기사 2 비석을.... 란테르트는 4년전 쯤 보이기 시작한 이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보면서, 늘 쓴웃음을 짓는다. 일단 그 하르의 기사 2 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유아적인 느낌이 그러했고, 왠지 멀쩡히 살아있는 자신을 위한 기념비라는 것이 더더욱 쓴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옹기종기와 띄엄띄엄의 중간쯤의 간격으로 서 있는 집들중, 마을회관 동쪽 끝에 있는 집이 바로 클라린스의 집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바겔 제울란이라는 남자의 집이었다. 11월도 2일이다. 이제부터의 계절은 허울뿐인 가을이다. 앞마당에는 아직까지도 소국이 조막조막한 머리를 올망졸망 서로 기대어 추위를 견디고 있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시간은 대략 아침과 점심 사이.... 10월 중순의 수확기가 끝나고 1년중 가장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터이다. 란테르트는.... 피로 더러워진 발의 먼지가 이 조용하고 아담한 짐 앞마당에 떨어질까 저어하며 조심히 발을 디뎠고, 그렇게 몇 걸음 지나지 않아 현관에 도착했다. 순간, 하하하, 하는 한 사내아이의 웃음소리와, 쿡쿡 거리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란테르트는 그러한 소리에 문을 두들기려던 손을 멈춘 채 잠시 안에 귀를 기울였고, 그때 약간은 거친 듯한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세, 그래서 말이지.... 다이즐은 멧돼지에게 쫓겨 미친 듯이 산 속을 달렸고, 우리들은 그 멧돼지를 쫓아 멧돼지만큼이나 미친 듯 달렸지 뭐야." 아마도 사냥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바겔은 본래 용병 출신으로, 종종 옛 생각이 날 때마다 사냥을 나가곤 했다. 아마, 사람의 피가 그리워.... 짐승의 피라도 대신 마셔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는 잘 참아내는 편이다. 보통의 은퇴 용병들은 술, 계집, 도박 이 셋중 하나에 미치거나 자살하기 마련인데.... 사실 용병이라는 존재들은.... 죽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었다. 살 수 있을 때까지, 그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담보로 돈을 벌고.... 죽는 동시에 그 죽음에 대한 보상금을 그 무언가 에게 보내주는 것으로 생을 마치는 법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로인이 성급히 물었다. 이제.... 아마 12살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곧 13살이 될 터이고.... 지난번.... 그러니까 8개월쯤 전에 들렸을 때, 한창 검을 배우기 시작한 듯 했었는데.... 바겔이라는 사람의 검솜씨도 꽤 쓸만하니.... 자기 몸 보호 정도는 할 수 있을 만큼 검을 익힐 수 있을 것이다. 로인의 말에 바겔이 큰 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그야 물론 그 녀석을 잡았지!! 동료중 한 명이 활을 쓸 줄 아는데.... 서너 시간을 달려 지친 멧돼지 녀석에게 활을 쏘았어. 다행히 뒷다리 힘줄에 맞았고, 그 녀석은 단번에 지치며 바닥에 쓰러졌지.... 하긴.... 그러고 보니 이번 사냥은 거의 그 녀석 혼자 했군.... 처음 멧돼지의 허리에 화살을 밖아 속도를 느리게 한 것도 그였는데...." 이 말에 로인은 다시 하하 하고 웃었다. 무엇이 우스운지는 몰랐지만, 우스운 모양이다. 란테르트는 잠시 이렇게 서서 세 사람의 대화를 듣다 보니.... 왠지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모두가 건강한 것을 확인한 이상.... 쓸모 없이.... 아니, 쓸모 없는 불청객이 불쑥 끼여들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란테르트는 이런 생각에 몸을 돌리려 했으나, 바겔이 용병이었다는 사실과, 그가 사냥 경험이 많다는 점을 간과했다. 그림자가 창가에 비침에, 바겔은 "누구십니까?" 라고 외쳤고, 란테르트는 이대로 그냥 떠나기도 무엇해 입을 열어 대답했다. "란테르트입니다...." 동시에 우당탕 하는 발소리가 여럿 들렸고, 바겔과 클라라, 로인이 세사람이 동시에 문을 열어 젖혔다. 물론, 문의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연 것은 바겔이었으나, 어찌되었건 세사람은 동시에 란테르트 앞에 섰다. 바겔은 조금 더 나이를 먹었으나, 아직 30대였다. 붉은 수염을 근사하게 기른 그는, 예전 처음 란테르트와 만났을 때에 비하면 훨씬 말쑥해져 있었다. 부시시하던 머리칼도 단정히 다듬어져 있고.... 역시 이것이 홀아비와 가정을 가진 남자와의 차이인 모양이다. 클라라의 몸에는 작은 변화가 있었다. 아니, 큰 변화였다. 배가 나왔다. 살이 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부지런한 그녀가 살이 찔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바겔의 아이를 밴 것이다. 이제 서른 세살인 그녀는 너무 나이가 많은 것이 아닌가, 라는 걱정을 조금 했으나, 그래도 새 남편에게 이 정도 선물은 해 주어야 할 것 같았기에.... 꼬마 로인은 이제 어엿한 소년이 되어있었다. 키도 전보다 훨씬 자라 란테르트의 가슴에 닿을 듯 했고, 밝은 금발과 녹색 빛의 눈동자는 이전보다 훨씬 빛이 나는 듯 했다. 아마도 아버지가 생긴 덕이 아닌가 싶다. 이 단란한 세 가족의 모습에 란테르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일생동안.... 그가 연출한 연극 중 비극이 아닌 것은 클라라 이야기 하나 정도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란테르트의 이 미소는, 로인의, "아, 란테르트 삼촌!!!"이라는 외침과, 바겔의, "어서 오게, 란테르트."라는 말, 그리고 클라라의 "란테르트...." 라는 중얼거림, 이 셋이 거의 동시에 터져나온 그 시점보다도 조금 빠르게 사라졌다. 미소짓는 자신에게 순간 몸이 떨릴 정도의 혐오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의 인사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여 대꾸했다. "오래간 만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달려들어 안긴 로인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으며 바겔과 클라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축하드립니다. 언제쯤 출산 예정인가요?" 란테르트의 말에 클라라는 얼굴을 살짝 붉히었고, 바겔은 허허, 웃으며 답했다. "4개월 후라네. 아, 그보다 어서 안으로 들어오게. 이번엔 하루쯤 묵어가게나.... 언제나 왔다가 식사 한끼도 제대로 않고 그냥 가버리니...." 그의 권유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곧 떠나야 합니다." 란테르트의 말에 세 사람은 대뜸 실망한 기색을 띄었다. "그런가?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지 그러나?...." 바겔은 다시 한차례 권했으나,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실, 그다지 바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바쁘다면 바쁘고.... 또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은 나날이 아닌가? 다만.... 만약 이대로 들어가 차를 마신다면.... 점심 권유를 거절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나면, 저녁 식사 권유를 뿌리치기 힘들 것 같았고.... 비단 클라라의 집뿐만이 아니었다. 에티콘에 있는 칼슨의 집도.... 그리고 이곳 그라난에 있는 클라라의 집도.... 란테르트에게는 너무나 편한 곳이었다. 하지만.... 두곳 모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지금 곧 가보아야 합니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잠시 4개월 후에 태어날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이 없나를 생각해 보다가 이내 한가지 물건을 떠올렸다. 언젠가 소피카 아드라르 성에서 전에 자신과 계약했던 사람이 선물로 준 물건이다. 란테르트는 가방을 뒤져 한 뼘이 채 못되는 조그마한 물건을 꺼내들었다. 적갈색 손잡이의 주머니칼이었다. 하얀 눈송이 문양이 유난히 튀는.... 란테르트는 그 칼을 바겔에게 건네주었다. "미리 주는 선물입니다.... 아이의 미래에.... 행운이 있기를...." 란테르트는 관용구대로, 아이의 미래에 데로드 님의 가호가 있기를, 이라고 말하려다 그냥 행운으로 말을 바꾸었다. 어찌되었건.... 그 데로드라는 신은 란테르트 자신을 싫어하는 듯 하고.... 자신이 그의 이름을 입에 달았다가는 무슨 재앙을 내릴지도 모르니 말이다. 바겔은 란테르트가 건네는 조그마한 주머니칼을 받아들었다. 확실히 디자인이나 정교함이 보통을 훨씬 넘는 물건이었다. "정말 고맙네!" 바겔은 란테르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이렇게 말했고, 클라라 역시 몹시 고마워하는 표정이었다. 이제 겨우 12살인 로인은 이러한 모습에 투정을 부릴 만도 하건만, 어려서의 고생 덕인지 생각이 깊은 편으로, 오히려 즐거워했다. 란테르트는 그래도 로인이 조금 걸렸는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다음에 들릴 때는.... 네게 맞는 검을 구해다 줄게." 로인은 란테르트의 이 말에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란테르트는 다시 한차례 더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하면 그에 따를 것 같은 몸이 걱정이 되어, 이쯤 인사를 건넸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혹시.... 살아서 다시 이곳을 지날 때면 꼭 들리겠습니다." 바겔도, 클라라도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단지, 섭섭한 기색만을 띌 뿐.... 크림슨 아이즈라는 악명이 높아져 감에 따라.... 그리고 그럼에 따라 점점 지쳐가고, 또 차가워져 가는 동생을 볼 때마다.... 클라라는 마음이 아파 왔으나, 그를 말리지 못했다. 세 사람의 서운해하는 모습을 보며, 란테르트는 몸을 돌렸다. "건강하거라...." 라는 클라라의 인사를 위시하여, 약간은 진부한 바겔의, "뜻한바 꼭 이루게...."라는 인사와, "꼭 다시 돌아오세요."라는 로인의 인사까지.... 세사람의 인사가 란테르트의 등뒤에 들렸다. 그 인사에 란테르트는 잠시 발걸음을 멈춰 그들을 돌아다보았다. 소담스런 집을 배경으로 서 있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란.... 란테르트는 그네들의 모습에 부러움을 느꼈다. 분명 부러움이었다. 가슴 한구석이 따듯해지며.... 자신의 곁에는 사피엘라가 서 있고.... 라브에.... 음.... 그녀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신의 집에 함께 살고.... 한명.... 혹은 두명 의 아이가 자신들의 집 앞마당에 뛰어 놀며.... 그가 원했던 것은.... 성을 녹일만한 힘도.... 마왕을 쓰러뜨릴 만한 검도 아니었다. 다만.... 다만.... 한 채의 조그마한 집과, 자신에게 안정을 줄 가정을 원했을 뿐인데.... 어느 누구나.... 꿈이 아닌 현실로써 당연히 받아들이는 그러한 것일 뿐인데.... 한차례 뒤틀리기 시작한 운명이라는 것은.... 란테르트는 모두를 향해 한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작별인사였다. 이번에 이렇게 떠나고 나면....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자신은.... 검을 찾는 순간.... 이내 란테르트는 몸을 돌렸다. 앞마당까지 쪼르르 달려나와 인사를 건네는 로인을 뒤로하고.... 그는 그대로 마을을 벗어났다. 클라라의 집을 벗어난지 3일.... 세이피나는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란테르트 일행(?)에 복귀했다. 그냥.... 크산트 항의 한 여관에서 하루 밤을 묵은 란테르트가 잠에서 깨어나 밖으로 나가려 할 무렵, 문을 똑똑 두들기는 누군가 있었고, 문을 열어보니 세이피나가 서 있었다. 그래놓고 한다는 소리는.... "카이그라미온 님의 신탁을 모두 행한 후, 점을 쳐보니.... 란테르트 님이 이곳에 계신다는 점괘가 나왔습니다." 였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럼, 위다의 북쪽 끝에서 남쪽인 이곳까지 직선거리가 거의 500휴하(1휴하=약 1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보름정도만에 이동해 온 것은 어떻게 설명되는 것인가? 란테르트는 어떻게 이런 엉성한 변명이 세이피나에게서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아무리 점에 대해 문외한인 자신이었지만, 엉터리 같이 점을 세차례나 치다니.... 그것도 겨우 그렇게 얻어낸 결과가 '알 수 없다'라.... 어느 누가 보아도 엉터리 점술가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는 따라오는 이유가.... 카이그라미온인가 하는 정체 불명의 신의 뜻이라니.... 게다가 무료봉사.... 엉터리도 이런 엉터리가 없 다. 그뿐인가? 하루 3, 40휴하를 넘게 걸어도 지친 기색 하나 안 내비친다. 한 15휴하쯤 걸으면 보통의 여자라면 슬슬 안색이 변하기 마련인데.... 이 아가씨는 전혀 그러한 것이 없다. 이 정도라면 그녀가 그냥 점술가가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눈치챌 수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무엇 하러 자신의 정체를 감추는 것인가?.... 하지만, 이것은 란테르트의 눈에서 본 것일 뿐이다. 처음 세이피나는 진짜로 한 번 점을 처 보았다. 그녀는 10번째 땅의 규칙으로 움직이는 점을 칠 수 있었고, 그러한 점은 세 번째 땅인 이곳의 일을 거의 모두 알아맞힐 수 있다. 물론,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70퍼센트 이상의 정확도를 가진다. 그럼에도 알 수 없다가 나왔다. 차라리 틀리기는 쉽지만, 이렇게 알 수 없다라는 점괘가 나온 것은 지금까지도 단 한차례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 번 밑보이기 시작했기에, 그 뒤의 이야기들이 억지가 되어갔을 뿐으로.... 이 점이 완벽하게 성공했더라면 란테르트는 그녀를 사제 세이피나로써 상당히 믿게 됐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루 40휴하를 걷는 모습에, 역시 신의 은총을 받은 존재로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고, 지금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홀연히 나타나는 모습 역시 조금은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을 것이다. 여러 신전의 사제들이 행하는 기적이라는 것은 그 대단한 마법마저도 따위로 만들기 일수니 말이다. 란테르트가 아무리 인간계의 율법과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어도, 자신의 세상의 세계관 마저 깨지는 못하고 있었고, 신관들의 기적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믿는 편이었다. 뭐, 어찌되었건, 지금의 란테르트는 그녀의 정체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트레시아의 함구해달라는 부탁도 받았으니, 그저 모르는 척 속아주면 되는 것이다. "그렇군요.... 그럼.... 마곡으로의 길을 서두르겠습니다." 란테르트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그녀에게 간단히 경과를 이야기 해 주었고, 세이피나는 그의 말에 이렇게 대꾸하며, 그와 함께 밖으로 향했다. 이 두사람은 크산트 항에서 배를 구해 타고 그 반대편 항인 이위에 도착했고, 그 후로 며칠간 세이아 지방을 여행했다. 란테르트도, 세이피나도 입을 여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은 아니었고, 그 덕에 둘은 일행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형세로 여행을 했다. 그나마 둘이 일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한 증거로는, 여관방을 잡을 때, 란테르트가 세이피나의 것까지 방을 두 개 잡는 것과, 여관을 나올 때, 문 입구에서 간단히 서로 아는 척을 한다는 것 정도 였다. 아, 그러고 보니.... 이러한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좋게 보아도 건달, 이라는 이름 이상으로는 부르기 힘든 사내가 세이피나의 곁에 다가와, "어이, 아가씨, 예쁜데...." 라는 상투적이고 무개성적인 말을 내뱉을 때, 그 대꾸를 란테르트가 대신, "상관하지 말아 주십시오..." 라고 하는 정도였다. 물론, 이럴 때는, 상대가, "너 뭐야?" 라고 응대했고, 다시 란테르트는 침묵으로 대했으며, 그리고 건달이 주먹을 뻗을 때, 그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그 인간의 팔이나 가슴 등을 베어버리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세이피나와 함께 다니며 이러한 일은 종종 일어났는데.... 란테르트는 그럴 때마다 꼭 같은 패턴으로 응대하고, 결국에는 검에 피를 묻혔다. 반면 세이피나는 무덤덤한 모습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하다가 마지막에, 피를 뿌리며 상대가 쓰러질 때에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살짝 짓는다. 그 미소의 상대가 란테르트인지, 그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따분하고(?) 한 일 없는(?) 시간이 며칠 흘렀고, 11월도 10일 정도 흐른 때에는 결국 마곡의 북부에 있는 항구 놈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란테르트는 트레시아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언제나 처럼 홀연히 나타나는 그녀이기에, 이번에도 갑작스레 일행 앞을 가로막았고.... 란테르트는 점점 자신이 이상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사람이 서로 만나는 것은 어차피 우연적으로 이루어진다. 길가다, 악~~~하는 비명소리에 달려가 구해주고 서로 아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님, 같은 목적으로 무언가를 하다 서로 외길에서 만나 친구가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우연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양가 부모들이 서로 알고 지내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연스럽게 만나는 것 역시, 그 집안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우연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들 두 자매와 만나는 것은 우연도 그 도가 지나치다. 한 명은 돌연 아침에 방밖에 서 있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하지를 않나.... 다른 한 명은, 뻔히 길을 가고 있는데, 그 앞을 가로막고는, "아~ 오래간 만이에요 란테르트니~~~임." 라고 애교를 떨지 않나.... 이건 흡사 다른 곳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달려오기라도 한 듯 하지 않는가? 사실 그러하기도 했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나타난 트레시아는 평소와는 다른 복장이었다. 왠지 담박하고 두툼하며, 노출이 적고, 게다가 바지였다. 그뿐 아니라, 모자를 쓰고, 모자 앞으로 베일을 흘리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녀의 그 몸매가 감추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그녀의 옷차림 덕에 란테르트는 처음에 그녀를 못 알아 볼 뻔했다. "옷차림이 왜이래?" 아무리 천하의 둔남 란테르트라 하더라도 그녀의 복장이 다른 때와는 달리 어색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란테르트의 물음에 트레시아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이게 다 그 양초 때문이죠, 뭐...." 그녀의 대답에 란테르트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성에서 사라지던 그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양초라고 하던 그 정령과 함께.... "그런데, 둘이 무슨 관계야? 친한 것 같던데...." 잠시간 함께 걷던 란테르트가 이렇게 물었고, 그 물음에 트레시아는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그, 그게, 그냥 아는 사이에요. 그 요녀는 정령인데 어떻게 저와 같이 착한 마족과 친할 수가 있겠어요?" 트레시아는 이렇게 말한 후, 어색한 귀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물론 엷은 베일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에 세이피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녀의 말을 채 시작되지도 않았으나, 트레시아는 미리부터 몸서리를 치며 전언을 보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둬!] [쓸데없는 소리라뇨? 제가 사실 이외의 말을 한 적이 있던가요?] 세이피나의 대꾸에 트레시아는 얼굴빛을 살짝 바꾸며 말했다. [그게 문제야! 때에 따라 적당히 거짓말도 하고 살아야지.... 안 그래?] 세이피나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글쎄요....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제가 제게 조금의 이익도 없는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지요?] 다시 ,트레시아.... [그럼, 또 이야기해서 네게 올 이익은 뭐지?] 그리고, 세이피나.... [후후후.... 잘 아실텐데요....] 또, 트레시아.... [그래.... 좋다, 뭘 원하지?] 이어, 세이피나.... [음.... 10일 후면.... 제미겔라임의 추모일 입니다. 그에게 진심 어린 사과의 말 한마디만 해 주십시오....] 세이피나의 이 진지한 말에, 트레시아는 낯빛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제미겔라임? 그거 혹시.... 카이그라미온이 죽은 후 기르던 튤립 아냐?] [그렇습니다.... 트레시아 님께서 밟아 죽인....] [핫.... 그거....] 트레시아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고, 세이피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 [트레시아 님께서 자주 앉으시는 책상도 아닌 창틀에 놓았었는데.... 창문으로 넘어 오시다가 떨어뜨리고, 창문에서 내려서시며 밟으셨습니다.] [읔.... 그거야.... 워낙 바빴으니까.... 핫핫.... 게다가.... 내가 창문으로 종종 넘어 다니는 것도 알고 있었잖아!!] 트레시아의 이 대답에 세이피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사실이 그랬으니 말이다. [.... 아무튼, 10일 후가 제미겔라임이 죽은지 2657년 되는 해입니다.] 그녀의 말에 트레시아는 잠시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이내 한가지에 생각이 미쳤고,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어리구나~~~ 세이피나는. 아직도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고. 오호호호~] 세이피나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2, 3년에 한 번 꼴이었습니다. 제라늄도, 백합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시가 무슨 힘을 써 볼까 하고 길러본 장미도....] 그녀의 이러한 말에 트레시아는 웃었다. [그러니까 나처럼 동물을 길러!! 밟히기 전에 도말갈꺼 아냐~~!] 도대체가 뻔뻔하기로는 당할 자가 없을 듯 했다. 동물이면 분명 그녀의 수집 품일 것이다. 세이피나는 그런 그녀의 말은 무시한 채로 입을 열었다. [그럼.... 참가하시는 것으로 알고, 라미에라 님의 일에는 입을 다물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트레시아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약점이 너무 많이 잡혀 있다. 트레시아는 이때 결심했다. 다시는 약점 잡힐 일을.... 안할 수도 없으니, 할ㄸ는 조심히 하자고.... 자신의 말에는 대답도 않고, 서로의 전언을 주고받기에 주력하고 있는 이 두 아가씨의 모습에.... 란테르트는 순간 소외감을 느꼈다. "후...." 웬일로 처량하게 들리는 그의 한숨소리이다. 22. 케이시스 레카르도. 마곡은 다른 여섯 대륙에 비해 그 위치한 곳이 훨씬 남쪽이었기에, 게다가, 삼면이 대양으로 둘러 쌓였기에,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드물다. 그리고 두 번째의 이유 때문에 습기가 꽤 많은 지역이다. 이러한 풍토 덕에, 마곡에는 수많은 특산물들이 있다. 대륙 양대 의가중 하나인 메아 가가 이곳에 있는 이유도 바로 특이한 기후상에서 자라나는 수많은 약초 때문이었고, 레냐의 절반밖에 되지 않고, 위다에 비해서는 6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이 조그마한 대륙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이유 또한 이러한 특산품들 때문이었다. 마곡은 차라리 농사에는 부적합했다. 기온이 높은데다가, 토질이 적절치 못해 밀농사는 그다지 잘 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농업 생산량은 자급자족이 빠듯할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 대신 이들은, 말 등을 길러 그것을 수출해 곡물을 수입하거나, 육식을 하거나 했는데, 오히려 이쪽이 이득이 많았다. 특히 말과 같은 경우는, 전 대륙의 말 생산량에서 20퍼센트 가까이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수를 기르고 있었다. 그렇게 흔한 것이 말인데도.... 이 세 사람은 걸어서 마몸산으로 향하고 있다. 뭐.... 말보다 지구력이 좋으니.... 손해볼 것은 없지만.... 이제 곧 겨울이다. 뭐, 오늘부터가 겨울이다, 라는 왕궁의 칙령이 내려오는 것도, 무슨 신탁이 내려지는 것도 아니지만, 사람들은 보통 12월의 첫날을 겨울로 삼아, 13월, 1월을 거쳐 2월의 마지막 날을 겨울의 끝으로 여긴다. 겨울이라는 시간은, 각 지방마다 다른 의미를 사람들에게 준다. 가장 북쪽의 노마티아에서는, 이 기나긴 혹한을 저주하고, 또 두려워하기에, 겨울을 모든 계절의 마지막에 둔다. 겨울을 관장하는 얼음의 신 켈모니움을 여섯 신들의 혼들중 가장 두려운 존재로 생각하기에, 켈모니움을 혼으로 가지고 있는 켈리시온의 신전수가 가장 많다. 마곡 바로 북쪽에 위치한 세이아는 지면이 수면보다 겨우 1, 2미터 정도 높은 대륙이다. 13월. 보름달의 크기가 가장 큰 이 달에는 대륙 전체의 3분의 1 정도가 바닷물에 잠긴다. 지금에 와서는 제방을 상당히 쌓아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농사라는 것조차 짓지 못하는 대륙이었다. 이 해일이 이는 13월의 2일, 3일 혹은 4일을 세이아 사람들은 정일淨日이라고 부른다. 깨끗이 한다는 뜻이다. 즉, 이들에게 겨울이란 정화를 뜻한다. 반면, 이 마곡에서의 겨울이라는 것은 그다지 위력적이지 못하다. 얼음이 얼지 않는 해가 어는 해보다 많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겨울은 모든 생물들이 휴식을 취하는 시기일 뿐이다. 이러한 마곡의 겨울이기에, 이 세사람은 마곡 북부평야, 구 레카르도 가의 영지를 지나며 그다지 겨울이 오고 있다 라는 느낌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노마티아 였다면, 때 이른 혹한에 한 번쯤 몸서리를 칠 만도 하건만.... 이틀 정도를 남쪽으로 걸어 란테르트와 세이피나 그리고 트레시아, 이 세 사람은 마몸산 북단 산 기스락에 도착했다. 마몸산은 북쪽은 험하고 남쪽은 완만해, 남사면에는 산 중턱에 까지 마을이 있을 정도였지만, 북쪽은 보통 사람은 오르기조차 불가능하다. 란테르트는 대충 눈짐작으로 오를 만한 길을 찾으며 세이피나에게 물었다. "루플루시카와.... 레카르도 가의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세이피나는 품에서 카드를 꺼내려다 그냥 그만 두었다. 이짓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 하다보니 약간 유치한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몸산 거의 정상부근 입니다." 트레시아는 어느사이엔가 산을 오르기에 적당한 옷을 입고 있었다. 바지는, 허벅지 부분은 펑퍼짐 해 활동성을 좋게 하고, 종아리 부분은 타이트 하게 만들어 이것 저것 잔 나뭇가지나 바위따위에 걸리지 않게 해 두었다. 그리고 웃옷은, 몸에 쫙 붙는 면옷 위에 주머니가 많은 조끼 비슷한 것을 걸치고 있었다. 베일은, 몇일 전, 필요 없을 것 같다면서 벗어 버렸다. 반면 세이피나는 그녀 그대로의 복장이었다. 앞 뒤 두 장으로 이루어진 천인지 치마인지 모를 그러한 하의에, 몸에 완전히 붙는 웃옷과 그 위로 몇 겹 걸친 여러 사제 복식들로, 언제나 처럼 흰색과 파란색이 적절히 배열되어 있었다. 란테르트는 이 두 아가씨를 이끌고 정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몸산의 북사면의 험하기는, 사람들이 등산을 할 시에, 걷는 다기보다는 거의 긴다라는 표현을 쓰게 만들었으나, 이 세 사람은 기어야 할 상황이 나오면 차라리 몸을 공중에 띄웠다. 마족으로써의 힘을 감춘 세이피나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날 수 없었기에, 트레시아가 안다시피 하여 공중으로 솟았고, 란테르트의 경우에야, 류마법으로도, 그리고 신계마법으로도 마음대로 날 수 있었으니 스스로의 힘으로 날았다. 일행은 정상에 오른 후 아래로 찾아 내려가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하는 쪽이 이동에 덜 방해받을 듯 싶었기 때문이었다. 걷다 날다를 반복하다 보니, 그 험하기로 소문난 마몸산의 정상까지 오르는데도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고, 이윽고 오래지 않아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험하기는 하나 높이는 대륙 전체의 유명한 산들 중 가장 낮았다. 세이피나가 가지고 있는 마계의 자료로는 해발 960미터 정도였고, 한편, 하야얌이 2500휴리하(1휴리하=약 1미터) 이상, 그리고 그래도 가장 낮은 편인 레냐의 위키 산도 1300여 휴리하나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험하다는 사실이 속도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이 세 사람에게는 오히려 다른 산들에 비해 오르는 대 걸리는 시간이 짧을 수밖에 없었다. 나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오르기 험하니 만큼, 곳곳마다 바위가 턱하니 버티고 있었기에, 나무가 자랄 틈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종종 잎이 뾰족한 나무들이 바위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간신히 그 생명을 이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으나, 어찌되었건 숲이라 부를 만큼 나무들이 모여 있는 곳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무지처럼 삭막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무가 없음에서 오는 단조로움은, 기괴한 바위들의 조형물들로 장식을 하니 말이다. 켜켜이 쌓여있는 바위에서, 아슬아슬 반공에 걸쳐있는 돌덩이까지, 그 다양함과 기묘함은 필설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험함에서 오는 이익이라고나 할까? 인간 따위의 다리를 수고롭게 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 수 있다면, 오히려 그쪽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마몸산의 정상은 여느 산의 정상과 비슷했다. 바위들이 몇 개 쌓여 있었고, 그 사이에 얼마나 오랜기간동안 쌓여있었는지는 모를 흙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흙에서는 조그마한 풀들, 나무들이 간신히 살아가고 있었다. "꺄~~ 너무 좋다~~!!" 마곡의 특징이니만큼 11월이 보름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첫눈조차 내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산 위에서의 경치라는 것은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멀리, 하늘과의 상견을 위해 아스라히 그 빛깔을 하늘의 것으로 바꾸고 있는 땅의 끝이 보인다. 900여 휴리하나 올라왔음에도, 하늘은 아득하다. 가을이어서 인지, 구름은 눈에 띄지 않았고, 그 때문에 더더욱 또렷이 주위가 보인다. 남쪽으로 조금 자리를 옮겨 바라보면, 산 발치에 꽤 규모 있는 도시가 보인다. 아마도 메키아인 모양이다. 과거, 이 마곡 6제후국의 맹주국이었던 메키아의 수도.... 트레시아는 뭐가 좋은지 소리를 한차례 지르고는 란테르트의 팔을 꼭 안았다. "우리 조금 더 여기서 놀다 가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태양의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아직 정오도 안되었다. 란테르트는 트레시아의 청에 세이피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세이피나님, 힘드실 테니 잠시 쉬도록 하지요...." 세이피나는 그의 말에 대꾸도 않은 채 근처에 앉을 만한 곳에 조심히 앉았다. 뒤이어 란테르트도 앉았고, 트레시아는 서쪽의 절벽이 있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절벽 밖으로 다리를 흔들며 멀리로 시선을 옮겼다. 정상부근의 땅은 반경이 5휴리하 정도밖에 되지 않는 둥근 공터였기에, 이렇게 각각 자리를 잡았지만, 서로의 거리는 4휴리하 안팎밖에는 되지 않았다. "역시 이렇게 사방으로 트인곳은 정말 좋아요." 트레시아는 잠시 주위를 살피다 상쾌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좋다라.... 란테르트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엇이 좋다는 것일까?.... 트레시아는 란테르트에게서 대답이 없자 세이피나에게 입을 열었다. "너도 이런 곳은 좋아하지? 그분이 계시.... 아니.... 아무튼 네가 지금 살고 있는 곳도 이런 곳과 비슷하잖아...." 트레시아는 순간, 그분이 계시는 곳과, 라고 말할뻔 했다. 이미 란테르트에게는 사실을 말해버렸기에, 무의식중에 말에 대한 금제를 풀어놓았던 것이다. 세이피나는 이 부주의한 자신의 누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전.... 특별히 어떠한 곳을 좋아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전언으로 특별히 무슨 주의를 주거나 하지 않는 것이, 이미 자신의 정체를 감추는 것에 대해서는 포기한 모양이었다. 세이피나의 말에 트레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녀야.... 그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좋아 할 것이다.... 그래도, 아르에는 즐거운 모양이다. 그 조그마한 부리를 좌우로 휙휙 움직이며 주위를 살피는 것을 보니.... 그때 트레시아가 공기를 폐부 가득 들이 마시며 입을 열었다. "난 답답한 건 질색이니까.... 무언가 사방에서 옭좨어올때는 미쳐버릴것만 같거든.... 그것이.... 적이건, 아님 다른 무엇이건 간에.... 난 이렇게 열린 곳이 좋아...." 트레시아는 이렇게 말하며 기지개를 높이 폈고, 이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 이제 다시 움직여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도 따라 몸을 일으켰고, 세이피나도 마찬가지였다. 란테르트는 그때까지도, 트레시아의 처음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좋다니.... 무엇이 말인가? 단지, 산의 정상일 뿐이 아닌가.... 그저.... 그렇게 밖에는 쌓일 수 없어 생긴, 산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조그마한 공터.... 무엇이.... 무엇이 좋은 걸까.... 란테르트는 한참동안이나 이곳의 좋은 점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알 수 없었다. 기껏 괜찮은 것을 들자면, 기온이 조석으로 확확 바뀔 것이니, 정신력 수련에 도움이 될 것이고.... 지대가 높아 공기가 희박하니, 검술 수련을 할시 폐의 활량이 급격히 좋아질 것이다. 바위들이 뾰족하고 기괴하여, 그 위를 뛰어 다니며 수련을 하면 균형감을 익히는데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과 트레시아가 이야기한 좋다, 와는 거리가 있는 듯 하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지금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 지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감성이라는 것이 완전히 마라 붙은 자신의 상황을.... 트레시아가 말한 것은 머리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그러니, 란테르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았자 떠올릴 수 없는 감정이다. 종종.... 그도 감상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것은 타성에 젖어버린 감정의 굴곡일 뿐이다. 눈이 내리면, 두 자매와 처음 만나던 순간을 떠올리고, 낯익은 풍경에 도착하면, 각각의 상황에 함께 있었던 동료들을 생각할 뿐이다. 종종 스스로 마음이 격해지기는 하지만, 그도 아주 잠시 뿐이다. 원인을 집어넣으면 자연스레 결과가 나오는 것일 뿐으로....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사람을 죽이면서도, 나무를 벨 때 이상의 감정을 가지지 못한다. 얼마전 위다의 카타성에서 16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손수 베어 죽이고서도.... 그는 단지 기분이 약간 나빠졌을 뿐이다. 오로지 한가지.... 그것 하나만을 위해.... 그것에 미쳐있는 자로써....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족보다.... 감정이 메말라 있는 존재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는 알 수 없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란테르트는 세이피나에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란테르트의 물음에 세이피나는 손을 뻗어 북쪽 아래를 가리켰고,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을 쫓아 걸음을 떼었다. 얼마간이나 걸었을까.... 점점 산은 깊어져만 갔고, 영 없을 것만 같았던 나무들이 조금씩 우거져 갔다. 그리기를 한참, 막 계곡을 돌아 들어가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바위틈에서 솟아난, 비록 빈약하지만 폭포가 절벽 틈새를 따라 부서져 내렸다. 수량은 많지 않아, 절벽 중반쯤 내려와 바위에 부딪혀 확, 사방으로 흩어져 버리지만 종내 에는 조그마한 샘을 만들어낸다. 그 샘에 고인 물들이 조용히 흐르는 곳은, 계곡과 계곡 사이의 넒은 공터였다. 어지간한 저택 하나가 들어설 만한 곳이었는데, 그곳에는 허름한 통나무집이 한 채 서 있었다. "이곳입니다." 세이피나는 이러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마자 이렇게 입을 열었고,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트레시아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빙 둘러보고는 이내 빙그레 웃었다. "꽤 좋은 곳에 살고 있네요." 아마도 마음에 든 모양이다. 사실, 세이피나가 트레시아에게는 결코 이길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싸움이었고, 또 다른 하나가 심미적 안목이었다. 확실히, 트레시아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 즐기고, 또 창조하는데 상당한 소질이 있었다. 기질이 꼼꼼하지 못해, 조각이나 회화 쪽에는 의외로 별로였으나, 곁에 사람을 한명 두고 작품을 만들면, 곧바로 마계 제일의 물건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것을 대표적으로 반영한 것이 그녀의 옷 입는 센스로, 거의 매일 다른 옷을 입는데도, 중복되는 주기가 1년이 넘는다. 400가지 이상의,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세이피나는 비록 성격은 꼼꼼했으나, 이런 쪽에는 의외로 소질이 없었다. 물론, 보통 정도는 되었으나, 결코 누구처럼, 어울리는 옷 400가지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언젠가 한 번, 트레시아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녀 자신이 살고 있는 잡 앞마당에 화단을 꾸며 놓았는데, 그것을 본 세이피나는 너무나 마음에 들어 화단을 통째로 옮겨가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라이벌로써의 자존심 덕에 그런 것을 내색하지는 못하였고.... 그저, 트레시아가 돌보지 않아 말라죽어 가는 꽃들을 보며 마음 아파 할 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하는 곳이라면,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세이피나는 그녀의 말에 잠시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란테르트가 걸음을 옮김에,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집에 가까이 다가가자, 이내 한 사람이 집밖으로 나왔다. 나이는 20세 가량으로, 생긴 것은 약간 거칠게 생겼고, 몸매 역시 상당히 덩치가 있는 편이었다. 몸에는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는데, 란테르트 등을 보고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머리칼은 짙은 녹색으로 짧게 깍은채였고, 눈매는 꽤 날카로운 것이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무엇하시는 분들입니까? 저희는 이곳에서 조용히 지내기를 원하는 사람들로, 외인들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거친 목소리로, 하지만 다분히 예의를 갖추며 그가 입을 열었고, 그의 말에 란테르트가 대표로 답했다. "이곳에 레카르도 가가 은거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란테르트의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가주 님께서는, 외인을 만나길 원치 않으십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란테르트는 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검끝을 바닥으로 향해, 섣불리 공격하지는 않겠다는 뜻을 명확히 밝히었다. "저의 길을 막지 말아 주십시오...." 란테르트의 이러한 행동에, 녹색 머리칼의 장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레카르도가 앞에서 검을 뽑다니.... 스스로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군요." 그는 이렇게 말하며 잠시 주저했다. 란테르트가 검을 든 모습을 보니, 자신이 싸워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듯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손님을 맞는 예가 아니어서 검조차 들고 오지 않았기에 더더욱 상대를 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 문을 열고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 밖으로 나왔다. 둘중 한 명은 두 자루의 도합 다섯 자루의 검을 들고차고 메고 있었다.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은 그의 검 같았고, 어깨에 매고 있는 것은 그 크기를 보아 녹색머리칼의 장한의 것 같았다. 그리고 나머지 세자루의 검중 둘은 장검이었고, 하나는 천에 쌓여져 있었는데, 이 셋 모두 그 소년과 함께 밖으로 나온 다른 사내의 것인 듯 했다. 검을 들고, 메고, 차고 있는 사내는 방금의 장한 과는 사뭇 그 분위기가 다른 소년으로, 몸매도 호리하고 키도 작았다. 물론, 나이도, 13세 쯤으로 훨씬 적었다. 생김새는 약간 평범한 듯 하면서도 귀엽게 생긴 편으로, 동글동글한 청색 눈동자와 하늘색의 머리칼이 꽤 잘 어우러졌다. 입가에 조심스러운 미소가 여려 있는 것이 성격도 온화할 듯 보였다. 그리고 소년과 함께 나온 사내는.... 나이는 27, 8세쯤으로, 란테르트와 비슷해 보였다. 머리칼의 색은 검정색이었으나, 햇빛에 반사될 때는 약간 녹색의 빛을 띄는 것이 무어라 한가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눈동자는 약간 큰 편이었으나, 결코 사람이 가벼워 보이지는 않았다. 입가에 조용하고도 온화한 미소가 어려 있었는데,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떤 알 수 없는 기품 같은 것이 느껴졌다. 옷차림은 가벼운 평상복이었는데, 역시 무장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컬크, 물러서거라." 그의 말에 그 녹색 머리칼의 장한은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나이는 20밖에 되지 않았으나, 행동에는 절도가 배어 있었다. 흑녹색 머리칼의 사내는 녹색머리칼의 남자에게 물러서라고 이야기 한 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레카르도 가의 사람을 찾아 오셨다고 하셨습니까?"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남자는 란테르트의 대답에 고개를 한차례 살짝 숙이며 말했다. "제가, 현 레카르도 가의 가주 케이시스 레카르도입니다." 그의 소개에 란테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 졌다. 확실히.... 그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당연히 그가 자신이 찾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을 익힌 자로써의 기품과 어떠한 깊이 같은 것이 몸 주위에 넘쳐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에디엘레 가의 가주 디미온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나, 눈앞의 이 사람에 비해서는 분명 손색이 있었다. 아무래도, 관리 일을 하고 있어서가 아닌가 싶다. 란테르트는 그런 그에게 자신들을 소개했다. "저는.... 란테르트 루렌드입니다. 그리고 이 두분은, 트레시아와 세이피나로, 제 동료입니다." 란테르트의 소개에 케이시스는 온화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세 사람을 향해 각각 인사를 했고, 뒤이어 다른 두 남자를 소개했다. "이쪽은 제 첫 번째 제자로.... 컬크 그라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소년은 치첼 피치텔로 제 두 번째 제자입니다." 컬크는 스승이 자신을 소개함에 란테르트 등에게, "방금 전의 실례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인사했고, 치첼은 약간 수줍은 기색을 띄며 고개를 숙이기만 했다. 그때, 다시 문이 빼곰히 열리며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색의 직모가 차분히 흘러내려 거의 허리에 다다랐는데, 수수한 흰색 드레스와 너무 잘 어울렸다. 눈동자는 엷은 청색으로 조용한 눈매와 함께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 조용하고 소박한,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공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을 뽑으라고 한다면 당연 그녀를 꼽을 것이다. 아르페오네도 상당히 어울릴 듯 하나, 그녀는 너무 차가웠다. 그 금발의 23세 가량의 아가씨는 앞으로 걸어 나와서는 케이시스 등보다 약간 뒤에 섰는데, 케이시스의 제자인지, 아니면 아내인지, 혹은 동생인지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제 아내입니다. 세실 레이니어로.... 레이니어가의 사람입니다." 케이시스는 그녀가 모습을 드러냄에 이렇게 그녀를 소개했고, 세실은 살짝 미소를 지어 일행에게 인사했다. "무엇 하러 나왔어? 안에서 쉬지...." 케이시스는 일행에게 아내를 소개한 후 이렇게 말했다. 얼굴이 약간 창백한 것이 어디 몸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아니에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집 밖 창문 곁에 놓여져 있는 투박한 의자에 몸을 앉혔고, 컬크는 빠른 걸음으로 집안으로 들어가 쿠션을 가지고 나왔다. "고마워요.... 컬크." 세실은 그의 그런 행동에 이렇게 감사를 표했고, 컬크는 거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귀밑을 붉게 물들이며 그녀 곁에서 물러나 케이시스의 뒤에 섰다. 란테르트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검과.... 검술을 빌리러 왔습니다." 확실히 그다운 말이었다. 군더더기는 삭 제외한 채 확실하고도 분명히 이곳에 온 목적을 밝혔으니 말이다. 하지만, 케이시스 역시 범인은 아니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조금이나마 표정의 변화가 있을 터인데.... 그는 온화이 입가에 머금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천천히 그의 말에 응대했다. "검이면.... 루플루시카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컬크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고, 치첼은 자신이 안고 있던 검중 작은 것을 움켜진 손에 힘을 더했다. 아마도 그 물건이 루플루시카인 듯 했다. 물론, 천으로 쌓여있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군요.... 그런데, 검술을 빌리다니요?" 케이시스가 다시 물었고, 란테르트는 그의 말에 대꾸했다. "레카르도 가의 검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뽑아 들었던 하르제 검을 검집에 넣었고, 케이시스는 그런 그의 행동이 싸울 뜻은 없음을 밝히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이 행동은 그를 더더욱 혼란케 만들었는데.... "이해할 수 없군요.... 설마 검을 가져가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닐텐데요.... 그것과 검술을 배우는 것.... 두 가지는 서로 배치되는 요구입니다." 케이시스는 그 온화한 미소에 흥미롭다라는 감정을 섞어 넣으며 이렇게 입을 열었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둘 모두 필요합니다." 란테르트의 이 대답에 케이시스는 한참동안 란테르트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입가에 다시 온화한 미소가 돌며 정당한 속도로 말을 꺼냈다. "좋습니다. 둘 모두를 드리겠습니다." 케이시스는 치첼이 가지고 있던 두 자루의 검중 천에 감겨있는 것을 받아들었다. "스승님!!" 컬크는 돌연한 스승의 선택에 이렇게 그를 외쳐 불렀고, 치첼 역시 약간 뾰루퉁한 것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케이시스는 검을 받아 천을 벗겨내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제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느껴 보거라.... 루플루시카의 반응을...." 그의 이 말에 컬크와 치첼은 무슨 말이냐는 듯 입을 다문 채 루플루시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이내 검이 조금씩 떨며 우웅, 하는 소리를 내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란테르트 역시 지금, 등뒤에 있는 에르테일이 조용히 공명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던 터라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케이시스가 입을 열었다. "루플루시카가 울고 있다.... 그녀가 반응하는 검은 이 세상에 단 둘 뿐이다. 에르테일 소드와 드라케 블레이드.... 란테르트씨의 등뒤에 있는 검.... 에르테일이다. 이 루플루시카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두 자루의 검중 하나." 이렇게 말하며 케이시스는 란테르트를 바라보았고, 란테르트는 그렇다는 의미에서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에르테일은.... 까다롭기로 유명한 검이다. 그런 에르테일을 가지고 있는 그가 검을 얻고자 하는 이유는, 단지 검을 원하기 때문만은 아닐 터.... 본래 검은 수단일 뿐으로, 필요한 사람에게 머무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며 그는 란테르트에게 루플루시카를 건넸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하며 검을 받아들었다. 천속에 숨어있던 검을 밖으로 뽑는 순간, 트레시아의 입에서, 호~ 하는 탄성이 튀어 나왔다. 검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푸른색이었다. 수정령의 검이니 만큼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아무튼 굉장히 잘 어울렸다. 검날의 길이는 세뼘 남짓으로 70쎄휴리하(1쎄휴리하=약 1센티미터)쯤 되어 보였다. 소검인 것이다. 하지만, 검날의 넓이가 겨우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로 얇았기에, 그다지 짧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검날의 색 역시 약간 파르스름한 빛을 띄는 듯 보였다. 검막이의 경우에는 파란색과 금색이 뒤섞여 장식되어 있었는데, 굉장히 화려한 편이었고, 특히나 검막이 중앙부에 달려있는 투명한 푸른색의 보석이 눈에 띄었다. 에르테일의 화려함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화려한 검이었는데, 두 자루를 놓고 보자면, 에르테일은 화사했고, 루플루시카는 섬세했다. 란테르트는 잠시동안 그 푸른색의 검을 바라보다가 검끝을 바닥으로 향하며 마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그가 건, 그의 손에서부터 퍼져 나오던 검정색의 마법은 검을 휘감자 마자 촤악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란테르트는 검정색의 마법이 주위로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차라리.... 편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마음은 편했다. 무어랄까....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산 정상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느끼는 느낌과 비슷하다고 할까? 이제 이 일곱 대륙 안에서는 오를 곳이 없는 것이다. 란테르트는 검을 케이시스에게 돌려주었다. 더 이상 루플루시카를 자신의 손안에 놓아둘 이유는 없었다. 케이시스는 처음부터 조용히 란테르트의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란테르트가 건네는 검을 받아들어 치첼에게 건넸다. 그가 보기에 란테르트는 확실히 묘한 구석이 있었다. 이러한 것은 그 뿐이 아니다. 란테르트에게 적대감을 느꼈던 사람도, 알 수 없는 친화감을 느꼈던 사람도 누구나 그의 이러한 행동에는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검술을 빌려드릴 차례인가요?" 케이시스는 검을 치첼에게 건넨 후 이렇게 입을 열었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시스는 뒤이어 두 제자들에게 말했다. "저기 두 여성분들께 앉아 쉴 만한 곳을 마련해 드리거라." 컬크와 치첼은 머릿속이 혼란했다. 스승도, 그리고 눈앞의 란테르트라는 사람도, 흡사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끊임없이 대화라도 하는 듯 행동이 척척 들어맞고 있었는데.... 이러한 마음이 서로 통하는 모습이 왠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스승의 명이 떨어진 이상 그 두 사람은 주저 않고 몸을 움직였다. 오래지 않아 집 쪽으로 의자가 두 개 놓였고, 트레시아와 세이피나는 그 두 사람의 안내에 따라 그곳에 앉았다. 트레시아는 검술도 꽤 좋아하는 편이기에 약간 들떠 있었고, 세이피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슨 생각할 것이 그렇게 많은지,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란테르트는 망토와 가방, 그리고 에르테일까지 모두 벗어 트레시아에게 맡겼고, 이내 하르제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케이시스 역시 치첼이 들고 있던 것중 역시 하르제 검을 받아 들었다. 케이시스는 검을 드는 순간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온화하던 눈매는 아예 감정이 배어 나오지 않는 짙은 갈색의 눈동자로 인해 싸늘한 빛을 띄었다. 조용히 두 다리를 벌린 채 서 있는 모습에서 허점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란테르트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이 두 사람은 닮은 곳이라고는 전혀 없었으나, 지금 이 순간, 그 분위기만큼은 상당히 유사했다. 란테르트는 눈앞에 서 있는 사내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 사내를 담담한, 하지만 눈가에 걱정이 서려있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한차례 흘끗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남편에 대한 자신감 같은 것이 드러나 있었다. 란테르트는 다시 케이시스를 바라보았다. 이카르트마저도, 검술로는 이길 수 있을지 어쩔지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한 남자.... 그런 자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겨우 서너 걸음.... 이윽고 케이시스가 입을 열었다. "저희 가문의 검술의 주는 형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레카르도 가의 검술이 비록 세상에 조금이나마 허명을 얻고는 있지만, 레카르도 가의 검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검을 쓰는 사람은 있되, 검식은 없는 것, 그것이 우리 가문의 검술의 실체이지요."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검식이라는 것은,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검의 흐름선 입니다. 때로는 상대의 행동을 유도하고, 또 읽고.... 그리고 그에 따라 응대하고.... 이러한 것들을 집대성해 놓은 것이 검식입니다." 케이시스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졌다. "맞습니다. 그렇기에 저희 가문에서도 검식 그 자체를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검식은 이미 실체화 된 것. 이미 형식으로 자리잡은 것입니다. 하지만, 검을 마주할 때의 상황이라는 것은 결코 실체화된 무엇으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정형화된 검식에 맞는 정형화된 상황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존재치 않으니까요." 뒤이어 란테르트가 응대했다. "그런 것 때문에 응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실재 상황이 그렇지 않더라도, 어떤 상황 사이의 공통점을 잡아내, 그것에 맞춰 자신이 알고 있는 검식을 응용하는 것.... 이러한 것 정도는 누구나 한두 차례의 실전으로 몸에 익힐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란테르트가 케이시스에게 검술을 배우려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통상적인 방법으로 자세를 교정 받고, 이론을 듣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과거 에디엘레 가의 검술을 배울 때는 그것이 가능했다. 왜냐하면, 에디엘레 가에는 에디엘레 가의 검술이라는 것이 존재했고, 란테르트는 그것을 배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레카르도 가의 검술은 완전히 달랐다. 방금 케이시스가 말했듯, 레카르도 가의 검술에는 검식이라는 것이 따로 없기에, 란테르트가 특별히 배우거나 할 것은 없었다. 다만.... 레카르도 가의 검술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기만 하면 된다. 그렇기에 케이시스가 란테르트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이 모습이, '가르치고 배운다'라기 보다는 '토론한다'라는 모습을 띄게 된 것이다. 케이시스가 란테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검식 그 자체는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검을 익히는 자는 검식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검식의 응용하는 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검식 그 자체를 흉내내는 것이 검을 익히는 것이 니라, 그 검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검을 익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케이시스는 란테르트를 향해 검을 쓸 준비를 하였다. "제가 이렇게 서 있습니다. 가장 자신 있는 검술로 저를 쳐보십시오." 란테르트는 그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일단, 케이시스가 자신을 테스트하려고 하는 것이니....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설사 상대를 상하게 하더라도 확실히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해야 케이시스가 자신에게 맞는 검술을 가르쳐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생각하며 검을 휘둘러 그의 왼쪽 허리를 쳐들어갔다. 그리고는 머릿속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그려보았다. 당연히, 허리를 노리면, 뒤로 몸을 빼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검에 허리를 다칠 것이고.... 허리를 다칠 경우에는 곧바로 패배로 이어진다. 그렇게 할 경우에는 상체가 약간 앞으로 숙여질 것이고, 그 순간을 노려 다시 위로 쳐 올리면 간단히 상대를 수세에 몰수 있다. 란테르트가 이런 생각을 하며 검을 휘두르는 순간.... 케이시스는 오히려 앞으로 치달려 나왔다. 란테르트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의 행동을 바라보았고, 일순 자신의 인후에 서늘한 무언가가 닿는 느낌에 검을 휘두르던 손을 멈추었다. 이러한 찰나, 세 사람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트레시아와 컬크, 그리고 치첼로, 트레시아는 몸을 의자에서 벌떡 일으켰고, 컬크와 치첼은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으며 앗, 하는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란테르트의 목에는 케이시스의 검이, 그리고 케이시스의 허리에는 란테르트의 검이 닿아 있었다. 잠시 후, 케이시스의 검끝에서 가느다란 선혈이 솟아 란테르트의 목을 따라 흘렀고, 케이시스의 허리에도 살짝 피가 배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도 잠시.... 둘은 동시에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씩 물러났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케이시스는 온화한 미소와 함께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완전한 저의 패배입니다....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사실, 란테르트의 말 그대로였다. 인후나 허리.... 둘 모두 상해서는 안될 곳이지만.... 막상 검으로 찔렸을 때의 상황은 크게 달랐다. 허리 같은 경우에야 물론, 그 이후 한참동안 제대로 검을 휘두를 수 없게 되어 전투력을 거의 완전히 상실하게 되지만, 목숨을 잃을 정도의 상처를 입기는 힘들다. 하지만, 인후는 아니다. 검이 목을 꿰뚫기는 아주 간단한 일로.... 케이시스 정도의 실력자라면, 팔의 힘만으로도 완전히 관통시킬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니.... 란테르트의 패배가 확연한 것이었다. 어찌되었건 검은 서로에게 무시할 만한 상처를 입혔고, 란테르트의 목도, 케이시스의 허리도 더 이상은 피가 배어 나오지 않게 되었다. "마검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실력이시군요.... 그럼, 이제부터 레카르도 가의 검술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가르쳐 드릴 검식 따위는 없습니다. 란테르트씨, 당신도 검식 따위를 바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케이시스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며 검을 검집에 넣었고, 란테르트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갈무리했다. "방금 전의 저의 일검.... 이것이 저희 레카르도 가의 검술 거의 모두입니다. 레카르도 검술의 시작은 잘 아시겠지만, 200여년전의 검사 암공 레카르도님 에게 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그분은 전까지 집안에 내려져 오던 레카르도 검술중 일부만을 익힌 채, 나라가 패망함에 다른 나라로 망명을 하셨고.... 그곳에서 당대 제 1 의 검사이자 용병이셨던 아이우드 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란테르트는 이 유명한 이야기를 익히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여 응대했고, 케이시스는 여전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이야기를 이었다. "아이우드 님의 검술을 기초로 암공께서는 자신만의 길을 여셨고, 그렇게 시작된 것이 우리 레카르도 가의 검술입니다. 단지, 빠르고, 강하고, 정확하게.... 이것 세 가지만을 전수할 뿐으로, 그 나머지는 스스로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 저희 가문의 검술의 특징입니다." 이를 시작으로 케이시스의 이야기는 한참이나 계속 되었다. 앉아있던 트레시아는 약간 지루한 듯 하품을 연달아 하였고, 컬크와 치첼은 스승의 말을 열심히 귀담아 두려 했으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적었다. 반면, 케이시스의 부인인 세실은 입가에 드리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남편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고, 세이피나는 무덤덤한 시선으로 한 번은 란테르트를, 그리고 한 번은 아르에를 번갈아 바라보며 시간을 흘리고 있었다. 케이시스가 이야기해준 대부분의 것은, 사실 란테르트가 이미 익히 깨닫고 있는 것들이었다. 사실, 란테르트 역시 케이시스와 비슷한 경지에 이르렀다. 두 사람의 차이라는 것은, 다만 한 명은 그것을 체계화 시켜 머릿속에 기억함과 동시에 몸에 완전히 익혀 놓았고, 다른 한사람은 단지 몸에만 익혀 두었을 뿐인, 이것 하나 정도밖에는 없었다. 란테르트는 케이시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알고있던 것, 그리고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하나로 연결시키다 보니, 확연히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까지 배웠던 모든 검술이 하나로 합쳐지는 듯 한 느낌이 들며, 입가에 미소가 살짝 배었다. "이제.... 완전히 깨달으신 모양이군요...." 케이시스는 란테르트가 미소를 지음에 이렇게 말을 마무리했고, 란테르트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대가로 드릴 것이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가 입을 열었다. "전.... 언제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때마다 이것을 대가로 내 놓습니다. 사실, 레카르도 가의 명성은 벌써 200년을 이어져 내려왔고.... 그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수도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일이므로.... 행여나 제게 부탁할 일이 생길 경우.... 주저 않고 들어드리겠습니다.... 단, 제가 하려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 일에 한해서입니다." 란테르트의 이 말에 케이시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선물, 감사히 받겠습니다. 오히려 과분하군요." 케이시스의 이러한 응대는 란테르트를 편안하게 하였고, 란테르트는 다시 한차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제 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란테르트는 예를 모두 마친 후 작별을 고했다. 할 일을 모두 마쳤으니, 더 이상 머물러야 할 이유는 없다.... 그의 말에 트레시아와 세이피나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쯤 되면, 케이시스가, 차라던가, 식사라던가 따위를 권하며 머무를 것을 종용 할만 하건만 그는 하지 않았다. 다만, 란테르트에게, "그럼.... 뜻하는 바 이루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 이곳을 지날 때면, 언제든지 들리셔도 좋습니다." 라고 인사할 뿐이었다. 사실, 그가 권한다 하더라도, 그러겠습니다, 하고 머무를 란테르트는 아니었다. 케이시스는 이 점을 꿰뚫어 본 것이다. 예의상 무어무어 하는 따위는 그의 기질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레카르도 가의 검술은 자유로움을 그 첫째 덕목으로 한다. 그러한 검술을 태어나서 걸어다닐 때부터 익힌 그이니, 당연 그의 성질 역시 그러한 쪽으로 흘렀다. 지금은 나이도 먹고 결혼도 하고 해 많이 점잖해 졌지만, 그의 아버지가 가주로 있을 때만 하더라도 언제나 이곳 저곳을 떠돌며 수행을 했었다. 그러한 그이니, 케이시스는 예의 상으로 란테르트에게 차를 권하기보다는, 깨끗하게 다음을 기약한 것이다. 란테르트는 그런 그의 마음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시간이.... 그리고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한 번 친구로 사귀는 것도 좋으련만.... 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남자였다. 란테르트는 그대로 작별을 고한 채 두 아가씨와 함께 레카르도 가의 은신처를 벗어났다. 왔을 때만큼이나.... 홀연히 사라지는 그네들이었다. 케이시스는 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이내 자신의 아내에게로 다가왔다. 조용히 허리를 굽혀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춘 케이시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날씨가 많이 차졌어.... 어서 들어가지." 이렇게 말하며 케이시스는 아내를 부축해 일으켰고, 이내 자신의 검을 치첼에게 건넸다. "너희들도 들어가자." 치첼과 컬크 이 두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차례도 끼여들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자신의 스승과 그 란테르트라는 사람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란테르트, 그가 들렸던 시간은 3, 4시간이나 되었건만, 느낌상으로는 시간이 거의 흐르지 않은 듯 했다. 통나무집 안은 단촐하고 초라했다. 전체적으로 거실을 중심으로 두부분으로 나뉘어, 치첼과 컬크가 기거하는 곳이 한곳, 그리고 케이시스 부부가 살고 있는 곳이 다른 한곳이었다. 케이시스는 세실을 부축하여 침대로 이끌었으나, 세실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응접실에 있는 쿠션 있는 의자에 앉았다. 사실, 그녀는 본래 건강이 나쁜 편이 아니었으나, 가벼운 감기에 걸려 약간 지쳐 있었다. 케이시스는 두 제자의 얼굴에 물어볼게 있어요,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세실의 곁에 앉으며 두 제자에게 앉으라는 눈짓을 했고, 컬크와 치첼은 곧바로 자리에 앉았다. 컬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스승님....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케이시스는 말해 보라는 듯 미소를 지어 주었고, 컬크는 자신보다 8살 많은 스승을 향해 공손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대체.... 어째서 루플루시카를 그렇게 간단히 그에게 넘겨준 것입니까?" 아까 케이시스가 해 준 설명이 이해가 가지 않은 모양이다. 컬크의 물음에 케이시스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컬크. 너는 왜 검술을 익히는 것이지?" 그의 물음에 컬크는 다시 생각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물론, 강해지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말에 세실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비록 자신보다 세 살 밖에 어리지 않았지만, 컬크는 순수하고 순진해 이야기하고 있으면 치첼나이 또래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덩치는 케이시스를 능가할 정도였지만.... 치첼 역시 어려서부터 이렇게 함께 산에서 살아 또래의 아이들보다 순진한 편이었다. 자신이 산으로 온 지도 언 6년이 지났다. 17살 때.... 태어났을 때부터 약혼되어 있던 케이시스에게로 시집을 온지 6년이다. 그때 치첼은 이제 7살의 아이였고, 컬크도 14살밖에 되지 않았었다. 그런 그네들이 이렇게나 장성해 이제는 치첼도 자신과 키가 비슷하니.... 세실은 돌연스레 떠오른 옛생각에 격세지감을 느꼈다. 컬크의 대답에 케이시스가 물었다. "네가 보기에 그 란테르트씨는 무엇을 위해 검을 익히는 것 같았지?" 물론 컬크는 답하지 못했고, 그에 케이시스가 이렇게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잘은 모른다.... 다만.... 그에게서는 무언지 모르지만.... 강한 집념 같은 것이 느껴진다.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자신의 목숨마저 가볍게 여기게 만드는 집념을...." 여기까지 말하던 케이시스의 손위에 세실이 조용히 손을 얹었고, 케이시스는 미소를 지으며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 사람이 원하는 검이다.... 사실 내게 루플루시카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단지 훌륭한 검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유하고 있는 다는 것은.... 너무나 추하지 않느냐?" 그의 말에 컬크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고, 그때 치첼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검술을 가르쳐 준 것도 그것 때문인가요? 그가 하고자 하는 그 일을 돕고 싶어서?" 그의 물음에 케이시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뒤이어 컬크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무례한 사람을.... 제가 보기엔 그다지 좋은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만...." "무례하다라...." 케이시스는 컬크의 말에 잠시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이내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무엇이 예의인 거지? 컬크." 컬크는 잠시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했다. 무슨 예법을 배운 것도 아니고.... 이러한 물음에는 당연히 답할 수 없었다. 그때 치첼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갑작스레 사람을 방문하고는.... 다짜고짜 스승님을 만나고자 하고, 게다가 검과 검술을 달라고 했잖아요. 그러한 것은 오랜 동안 친분을 쌓으며 다져도 그리 쉬운 것이 아닌데...." 케이시스는 어린 치첼의 이 말에 살짝 웃었다. "꼭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찾아와서는, 갖은 좋은 말 이것저것을 늘어놓는 것이 예의일까? 그처럼 단지 솔직하게 자신의 방문 목적을 밝히는 것은 예가 아닐까?" 케이시스의 말에 치첼은 순간 입을 다물었고, 그때 세실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린 아이 헷갈리게 하지 마세요...." 세실의 말에 케이시스는 빙그레 웃었고, 세실은 뒤이어 치첼과 컬크를 향해 말했다.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격식 같은 것을 갖춘 대화를 하는 것이 아무래도 좋겠지요. 또 그러한 격식을 예의라고 부르는 것이고요....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이런 첩첩 산중에 검사가 찾아 온 이유를....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 찾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나요? 아는 사람이라면, 단지 한가로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들렸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들은 아니잖아요." 세실의 말에 두 사람은 잠시 고개를 끄덕였고, 세실은 그들이 고개를 끄덕임에 맞춰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계속 하였다. "그런 그들이 어떠한 좋은 이야기를 둘러대어도, 우리로서는 그러한 것이 원래의 목적을 감추기 위한 눈가림일 뿐이라고 생각되어질 뿐이에요. 이러한 상황에서의 예라는 것은 오히려 상대를 불쾌하게 할 따름입니다." 치첼과 컬크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듣고 보니 그럴 듯도 했다. 아무리 좋은 말로 빙빙 돌려, 소위 예의라는 것을 갖추어 이야기 해 보았자 결국 할 말은 검과 검술을 달라는 것.... 그것뿐이다. 케이시스가 그들의 사고에 쐐기를 박았다. "난 무릇 검을 익히는 사람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가 옳다고 굳게 믿고 있다면, 어디서나 당당히 자신의 뜻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고...." 컬크와 치첼은 그제야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케이시스의 말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뒤이어 케이시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너희는 잘 모르겠지만, 란테르트씨의 검술은 결코 나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미 그 사람에게 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마검사이다. 마검사의 검술실력이 나와 비슷할 정도라면.... 이미 나는 패배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세실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하실 것 없어요.... 제가 보기에 그분의 실력은 이제 간신히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검술을 하나로 모으는 단계밖에는 되지 못했어요.... 아직 스스로의 길을 완전히 찾지 못했으니.... 당신보다 그리 크게 뛰어나지 못해요. 마검사라는 점에 있어서는 대단하다 할 만 하지만, 어차피 검술 하나만을 놓고 이야기한다면 결코 당신이 지지 않을꺼에요." 케이시스는 미소지었다. "세실, 고마워. 하지만, 그렇게 자만할 필요는 없어. 설사 그렇다 해도, 그가 나처럼 오직 검술만을 공부했다면, 결코 내가 따르지 못했을지도 모르잖아...." 이렇게 말하며 그는 다시 두 제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에도 그는 내게 검술을 배우러 왔다. 분명, 그는 검술을 배우러 왔다. 결코 나를 꺾어 세상에 이름을 날리겠다.... 따위의 이유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것 역시 검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원하는 어떠한 일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 것이다. 너희들도 잘 알겠지만, 검을 익히는 자들.... 아니, 어떠한 분야든 그곳을 깊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존심이 몹시 강하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다시 배운다니.... 그러한 말을 꺼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컬크와 치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자신들도.... 결코 자신과 실력이 비슷한 사람에게 검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마음 한쪽에는 레카르도 가의 검술이 아니면 배우지 않겠다는 생각까지 품고 있었다. 스승의 이러한 말에 두 사람은 홀연 부끄러운 마음이 일었다. 케이시스는 제자들의 이러한 마음을 꿰뚫어 보며 한차례 엄하게 충고를 했다. "스스로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버려라. 너희보다 약한 사람이라고, 그들이 너희보다 뒤떨어진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장단점이 있는 법이다. 자신의 장점과 다른 사람의 단점을 비교한다면 당연 스스로가 뛰어나 보이는 법이다." 컬크와 치첼은 스승의 이러한 이야기에 고개를 깊이 숙였고, 케이시스는 잠시 두 제자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 후,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내가.... 란테르트씨에게 검과 검술을 내어 준 것은.... 그의 이러한 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나.... 강하면서 조금의 오만한 눈빛도 띄지 않고 있는 사람.... 그리고, 구차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는 그러한 점.... 근래에 만난 사람중 가장 내 마음에 들었다." 케이시스의 이러한 말에 세실은 그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환히 미소를 지었다. 남편이 이렇게 들떠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본지도 꽤 오래된 듯 했기 때문이었다. 컬크와 치첼은 케이시스의 말에 다시 하난 란테르트라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러한 스승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이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느낌에 고개는 끄덕일 수 있었으나.... 란테르트, 그는 역시 이상한 사람이다. 케이시스를 위시한 사람들이 란테르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란테르트는 반대로 케이시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이야기의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트레시아였다. "아까 어떻게 된 거예요? 그 일검.... 목을 찔리다니, 란테르트님 답지 않아요." 케이시스의 집을 벗어나 산 정상 부를 넘어 남쪽으로의 걸음을 걷고 있는 동안 트레시아가 이렇게 물었고, 란테르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확실히 그 레카르도 가더군.... 난.... 그래도 스스로가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는데.... 단 일 검만에 패하다니...." 트레시아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다고 보기는 힘들잖아요. 어차피 검만을 익힌 사람과 마검사는...." "역시.... 그럴 수밖에 없는 건가?...."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고, 트레시아가 약간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란테르트를 위로했다. "마법까지 공부하느라 시간을 쪼개어 써서 그렇지, 만약 란테르트 님도 검만을 익혔더라면 그를 충분히 이길 수 있었을꺼에요." 그때 세이피나가 입을 열었다. "아마.... 그것은 불가능 할 겁니다." 그녀의 이러한 말에 트레시아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전언을 보냈다. [도대체 뭐가 불만인 거야?] 하지만, 세이피나는 그녀의 말에 대꾸치 않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레카르도가.... 레이니어가.... 에디엘레가.... 란트오트가.... 그리고 에투리아가.... 이 다섯 가문은, 신에게서 병기 술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부여받은 곳입니다. 그 때문에 마법을 배울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한 것입니다. 바꾸어 이야기한다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는.... 결코 그들보다 병기 술에 있어 뛰어날 수 없습니다." 란테르트는 언젠가 이카르트에게서 들은 듯한 이 이야기에 잠시 고개를 끄덕였으나, 트레시아는 지지 않고 말했다. "그럼, 에디엘레 가는 뭐야? 지난번에 보니.... 실력이 그저 그렇던데." 아마도 란테르트가 디미온에게 검술을 배우는 모습을 보고하는 이야기인 듯 했다. 디미온과 함께 다닐 때, 한 번 트레시아가 찾아 왔었으니 말이다. 세이피나가 대꾸했다. "그 다섯 가문 중.... 자신의 참 실력을 이끌어 내고 있는 사람은.... 레카르도 가의 사람뿐입니다. 다른 가문의 사람들은, 너무 다른 일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이 레카르도 가처럼 전문적으로 무기술만을 공부한다면, 결코 란테르트 님이 당해내실 수 없습니다."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음, 하는 신음을 내뱉었다. 그렇게 밖에는.... 확실히 신이라는 존재의 축복 앞에서는.... 철저하도록 무능력한 것이 인간인 모양이다. 세이피나의 잔인한, 하지만 가장 객관적인 이야기에 돌연 일행 사이에 말이 끊겼고, 마몸산 남사면의 중턱에 닿을 때까지 세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보다.... 중앙 대륙에는 어떻게 갈 건가요?"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일행은 마몸산 남쪽의 도시인 메키아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간단히 방을 잡은 세 사람은 저녁도 먹을 겸 퍼브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트레시아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가방 안에 있던 한 장의 두루말이 종이를 꺼냈다. 그곳에는 마곡의 남부 지방 지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어느 한 곳의 해안 절벽에 동굴이 그려져 있었다. 트레시아는 잠시 지도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내 저었다. "안돼요. 이 길은...." 그녀의 이러한 반응에 란테르트가 입을 열었다. "드래곤 때문에?" 트레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계셨군요.... 이 워프게이트의 반대쪽 출구는 바로 테미시아 님의 신전이에요. 황금용은 그곳을 지키는 존재이고요.... 잘못했다가는.... 아무리 란테르트 님이라 해도.... 그 드래곤만큼은...." "그렇다고 해서.... 몇 날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 항해를 할 수는 없어. 게다가.... 바다라고 해서 안전 하라는 법은 없고...." 트레시아는 그의 말에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중앙대륙은.... 숲의 결계 때문에.... 마족인 저로써는.... 공간 이동을 해 갈 수도 없는 곳이고...." 이래저래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란테르트는 자신을 걱정하는 트레시아를 향해 한차례 미소지었다. "만약, 그곳에서 죽을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잖아? 지금으로써는 다른 길이 없으니.... 무슨 중앙대륙이 실제로 어디 붙어있는지 아는 사람도 없고.... 그곳까지 갈 만한 배가 있을 리도 없고...." 이렇게 말하더니 란테르트는 세이피나와 트레시아를 번갈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중앙 대륙은 나 혼자 가겠어.... 트레시아는 마족이니.... 엘프의 땅에서 함부로 할 수 없을 테고.... 너무 위험한 것 같으니.... 세이피나 양을 데려 갈 수도 없고...." 그에 트레시아는 음.... 하는 신음을 내뱉었다. 함께 가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했다. 만약, 지금의 세이피나처럼 완전히 마족으로서의 힘을 감춘다면 아예 불가능하지도 않았으나.... 그래가지고는 짐밖에는 되지 못한다. 마법도 쓸 수 없는.... 다만 무한한 체력을 가진 여자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지금의 세이피나가 꼭 그 상태이다. 그때 세이피나의 전언이 들려왔다. [더 이상 마계를 비워두지 마십시오. 디아들의 움직임이 요즘 조금 이상합니다. 마족들중 배반을 일으키는 자들도 종종 생기고 있고.... 전 이것이 임무이니 계속 수행해야 하지만.... 아르트레스님께서는 이대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세이피나의 말 그대로였다. 지금 마계의 상황은 엉망이었다. 거의 모든 일의 원인은 이카르트의 동요 때문이었으나.... 꼭 그렇지 만도 않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방향을 향해 모두가 흘러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흐음.... 그건 그렇지만.... 란테르트 님 혼자 중앙대륙에 보내는 것은....] [저도 함께 갑니다.] 트레시아의 말에 세이피나가 이렇게 말했으나, 트레시아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래서 더 안심이 안돼.... 넌 원래 란테르트 님을 싫어하잖아.] 그녀의 말에 세이피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 공과 사 정도는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공적으로도.... 란테르트 님은 마족의 적이야.] 란테르트는 두 사람이 전언으로 대화를 나누는 듯 보이자 잠자코 그녀들의 결론을 기다렸다. 트레시아야 따라온다고 할 것이 거의 확실했고.... 세이피나 역시 무슨 임무를 수행중인 것 같으니 자신을 따라온다고 할 듯 했다. 란테르트는 이들 둘을 떼어놓을 방법을 구상 중이었으나, 그다지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전.... 그렇다면, 마곡 남단까지만 따라 갈께요...." 트레시아는 결국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확실히 마계를 완전히 버릴 수도 없었고.... 게다가, 중앙대륙에서 자신은 짐만 될 듯 하였다. 짐이 되는 것까지는 좋지만, 왠지 약세에 몰리는 것은 기질에 맞지 않았다. 자신의 위에 란테르트와 이카르트, 이 두 사람 이외에는 누군가 존재하는 것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그녀였다. "카이그라미온 님의 명령입니다.... 저는 함께 중앙대륙 까지 가야만 합니다. 위험하다고는 하지만.... 카이그라미온 님이 말씀해 주신 저의 운명은 결코 그곳에서 끝날 것은 아닙니다." 란테르트는 자신의 예상중 절반만이 들어맞음에, 그것도, 트레시아가 물러서고, 세이피나가 따라 가겠다고 이야기함에 약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할 말은 한가지였다.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그런 위험한 곳을...." 그때 트레시아가 란테르트의 곁에서 세이피나를 지지했다. "그녀와 함께 가세요.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 꺼 에요." 란테르트는 주저했다. "하지만...."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하긴.... 위험한 것은 그녀보다 오히려 자신이 더했다. 그녀에게는 이카르트.... 더 나아가 나크젤리온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으나, 자신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자신이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무시무시한 연줄을 가지고 있는 세이피나를 먹느니.... 자신을 잡아먹겠다. 란테르트는 이미 그녀들 사이에서 그렇게 결론이 나 버린 듯 하자, 그저 고개를 묵묵히 끄덕였다. 오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그녀가 따라오지 않을 리는 없지 않은가.... 란테르트의 승낙에 트레시아도, 세이피나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다만, 트레시아는 함께 갈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약간의 씁쓸한 마음이 입가에 미소로서 대신 나타났다. 23. 중앙대륙 마이다탄트. 메키아 시에서 그 지도상에 표시된 그 워프게이트가 위치한 동굴까지는 고작 90휴하(1휴하=약 1킬로미터). 란테르트의 걸음으로는 2일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그렇게 마곡 남부 해안절벽에 도착한 시간은 막 서편이 붉은 색으로 물들 무렵이었다. 다른 사람.... 행여나 감수성이 풍부하고, 눈물샘에 눈물이 언제나 가득 고여있는 아가씨였다면.... 험하기 그지없는, 게다가 알려진 것도 없는 대륙으로 떠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등에 한차례 눈물을 뿌리련만.... 아니.... 사실 트레시아 정도만 하더라도, 눈물은 몰라도, 약간 침울한 표정으로 인사를 할 만 하지만.... 트레시아와 세이피나가 함께 있을 경우에는 이 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마계 잘 부탁 드립니다.] 보통의 사소한 대화였으나 세이피나 스스로가 정체를 감추는 바람에 전언을 이용해야 했다. 뭐, 그렇다고 전언이 하기 힘들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물론이다! 네가 없는 곳이 잘 돌아가지 않을 리가 없지 않느냐!! 호호호.] 스스로도 논리가 박약하다고 느끼는 이 한마디를 내뱉은 트레시아는 란테르트를 바라보며 작별인사를 했다. "중앙 대륙, 마이다탄트에 있는 동안에는.... 란테르트 님과 만날 수 없어요. 다시 이 일곱 대륙으로 돌아오는 즉시, 제가하고 있는 일이 없다면 만나 뵈러 가겠어요." 트레시아는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의 목에 안겼고, 란테르트는 뻗뻗히 선 채 그녀의 포옹을 잠시 받아들이다가 품에서 벗어나며 대꾸했다. "얼마가 될지 몰라.... 신경 쓰지 말고, 트레시아 자신의 일에 충실하도록 해." 트레시아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겠지요. 뭐, 그렇지만, 어차피 저는 불멸의 존재. 몇 천년 정도는 기다려 줄 수 있으니까, 천천히 하고 돌아오세요." 그녀의 농기 어린 말에 란테르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후후.... 몇 천년...." 트레시아는 다시 세이피나에게 전언을 보냈다. [너.... 괜히 란테르트 님을 괴롭힌다거나 하지는 마!] 그녀의 말에 세이피나가 무덤덤한 음색으로 대꾸했다. [글쎄요.... 무슨 뜻인지....] 트레시아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중앙대륙의 밀림 안에서, 괜히 험한 곳만 골라서 돌아다닌 다던지.... 괜히 약한 척 하면서, 무거운 물건을 만들어 란테르트 님께 떠넘긴다 던지.... 그런 짓 하지 말라고.] 왠지 약간 유치한 발상이었으나, 세이피나는 순간 부쩍 흥미로운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상당히 유아스럽지만.... 재미있군요.... 한 번 고려해 보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고려해 보겠다니....] 트레시아는 세이피나의 말이 약간 이해가 가지 않았고, 이렇게 물었으나, 세이피나는 다시 답하지 않았다. 란테르트는 간단히 눈인사를 트레시아에게 건네며, 세이피나와 함께 빛에 휩싸이더니 사라졌다. 그 둘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한 해안동굴의 입구였다. 마곡의 남쪽 해안 가는 해안절벽이 많은 편이었는데, 이 동굴 역시 그러한 해안 절벽의 중간쯤 자리잡은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은 날 수 없는 세이피나를 데려 올 방법이 없어 공간이동을 펼친 것이다. 란테르트의 이러한 공간이동은, 워프나 텔레포트 따위는 아니다. 그러한 마법은 엄청난 마법력이 필요해 살아있는 존재가 시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카르트나 세이피나도, 간신히 마계 안에서나 그러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 란테르트의 이 마법은 다만 자신과 자신 주위의 공간 일부를 움직이는 것으로, 비행마법을 약간 응용한 것이다. 란테르트의 눈앞에는 지금 깊고 어두운 암혈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물론, 조금 더 나아가다 보면 워프 게이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소문조차 거의 없는 거대한 대륙.... 마이다탄트가.... 란테르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고, 세이피나는 조용히 그의 뒤를 쫓았다. 세이피나는 지금 사실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일단.... 자신은 마족이었다. 아무리 기척을 감추고는 있다지만.... 어느 정도 이상의 존재라면 자신이 마족이라는 것 정도는 단번에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엘프들의 숲의 결계 때문에 마계로의 탈출도 부자연스럽다. 굉장한 힘을 소모해야 간신히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보통의 엘프들이야 사실 걱정할 것도 없지만.... 보통의 드래곤만 만나도 상당히 고전하게 된다. 재수 없게.... 네 숲의 주인들이나.... 용왕 급의 드래곤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탈출조차 불가능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란테르트가 빛의 구슬을 만들어 동굴 안을 밝혔다. 일단, 입구에서는 게이트가 보이지 않았다. 란테르트는 세이피나를 한차례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거려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뜻을 밝혔고, 세이피나 역시 고개를 끄덕여 대꾸하며 그의 뒤를 쫓았다. ....이카르트.... 그분을 믿는 거다.... 세이피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물론, 마음속으로.... 워프게이트까지, 두 사람은 거의 두 시간 가까이 걸었다. 이네들의 걸음걸이로 이 정도 시간이면 보통사람이라면 거의 반나절은 걸릴 거리이다. 이것만으로도, 이 워프게이트는 충분히 다른 여느 사람들의 접근을 막을 수 있을 듯 보였다. 일단, 절벽 중간에 있어 접근이 힘든데다가, 10휴하(1휴하=약 1킬로미터)나 되는 긴 동굴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는 여린 존재에게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안겨줄테니 말이다. 그렇게 걷고 걸어 일행 앞에 드러난 게이트는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단지.... 이 워프게이트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말은 빛의 수면 정도가 아닐까 싶다. 세로 방향으로 통로 앞을 가로막은 채 서있는 빛의 수면.... 파르스름한 빛을 내는 이 빛의 수면은 흡사 적도 부근 무풍지대의 바다처럼 서서히 울렁거린다. 빛깔도, 엷은 푸른색에서 약간 색이 짙은 푸른색까지, 무의도적인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 내며 아른거리고 있다. 란테르트는 그 워프 게이트 앞에 잠시 멈추어 섰다. 아무리 란테르트라 하더라도, 처음 보는 이러한 모습에 호기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세이피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맑게 빛나되 여전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이러한 것쯤은 많이 보았다는 뜻에서인지.... 아니면, 단지 원래 어떠한 것에도 동요치 않을 정도로 마음이 안정되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세이피나의 현재 상황은 그와 정 반대였다. 세이피나의 지금 심경은 굉장히 복잡했다. 막상 트레시아에게 큰소리를 쳐 놓기는 했지만.... 은근한 두려움은 어쩔 수 없었다. 방금전 먹었던, 이카르트를 믿겠다라는 마음도 금새 흔들리기 시작해 이제는 또 다시 마음이 떨려왔다. 세이피나가 비록 마족이고, 정신 체이기는 했지만.... 그녀 역시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치고 죽음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없다. 존재가, 자신이라는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공포는 거의 본능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세이피나는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것에 대해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되어야만 하는 지금, 몸이 떨릴 정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란테르트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면 괜찮다. 그는 지금 자신이 가려하는 중앙 대륙이 어떠한 곳이지 잘 모른다.... 아니, 생각해 보면, 차라리 그가 자신보다는 덜 위험하다. 사실, 드래곤은 인간을 하찮게 보고, 엘프는 인간에게 십분 호감을 가진다. 먼저 인간을 공격해 죽이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두 존재 모두 마족은 싫어한다. 신들이 의도치 않았던 존재.... 만들고자 하지 않았음에, 너무도 강한 힘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 그러한 존재를 싫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보니, 자연 세이피나는 워프 게이트 따위에 신경을 쓸 정신이 아니었고, 그 때문에 표정은 무덤덤 했던 것이다. 이윽고, 란테르트가 게이트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다시 세이피나가 그 뒤를 따랐다. 란테르트는 게이트 안에 들어서면 무언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흡사 아무것도 통과하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을 뿐이고, 이내 게이트를 빠져 나왔다. 게이트를 통과했는지 그렇지 않은 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으며, 훨씬 덥고 습해졌다는 것만을 느낄 뿐이었다. 다시 한참동안을 앞으로 걸어 나갔다. 동서남북도 잘 구분이 안 가는지라, 남으로 향하고 있는지, 북으로 향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으나, 어찌되었건 외길이니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는 사이, 점점 지대가 높아지는 듯 느껴지며 이윽고 눈앞에 환한 빛이 들어왔다. 동굴의 입구인 모양이다. 란테르트는 일단 빛이 눈이 보이자 저으기 안심이 되며 걸음에 약간 속도를 더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자신의 뒤를 쫓아오던 세이피나와 거리가 벌어졌고, 란테르트는 걸음을 멈춰 세이피나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속도를 더한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무언가에 빠져 있었다. 물론, 그녀의 표정은 평소와 별다를 것이 없었다. 워낙 얼굴에 심리변화가 드러나지 않는 아가씨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왠지 평소보다 힘이 없었고, 약간 정신이 없는 듯 보였다. 란테르트가 이렇게 멈춰서 자신을 바라보는데도 란테르트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란테르트는 그녀의 이런 이상한 모습에 이렇게 물었고, 세이피나는 멍하니 란테르트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아.... 아닙니다." 란테르트는 잠시 더 그녀의 모습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도착 한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세이피나는 아, 하는 짤막한 탄성을 지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란테르트의 뒤쪽으로 시선을 향했고, 이내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란테르트는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그녀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세이피나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모든 신경을 쏟고 있었다. 이 중앙대륙과 훨씬 남쪽의 다프칸 대륙.... 이 두곳은 마족에게는 금단의 땅이다.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중앙대륙에 발을 한차례라도 디뎌본 적이 있는 존재는 이카르트뿐이었다. 당시 어떠한 일로 엘프에게 도움을 주었고, 그에 엘프들의 신인 가엘프 라피나가 그를 초대해 한차례 들린 적이 있었다. 아마도 1700년 전의 일인 듯 하다. 그 외의 마족들은.... 감히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다. 물론, 아르카이제라면, 그다지 큰 일도 아니다. 이 중앙대륙에서 그보다 강한 존재는 가엘프 한명 뿐이었으니, 이곳에 오는 것을 꺼려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쓸모 없는 분쟁을 피하기 위해 거의 발을 대지 않는 편이었지만.... 하지만, 세이피나는 아니었다. 세이피나는 왜 이렇게 자신이 흔들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 거의 흔들림이 없는 그녀였고.... 죽음을 특별히 두려워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느껴지는 두려움이라는 감정 역시, 강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까지 동요하는 것일까? 세이피나는 란테르트의 뒤를 쫓아 몇 걸음 더 걸어 막 동굴 밖을 빠져 나오자 마자,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자 마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주위의 풍경은 별 것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높이가 거의 사람 키의 20배는 될 듯한 거목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자신들의 나온 곳은 조그마한 흰색의 건물이었다. 지붕과 기둥, 그리고 아래로의 계단만이 있는 것으로, 동굴 입구를 장식하기 위한 건물이었다. 그리고.... 길인 듯 보이는 나무가 자리지 않은 땅이 있었다. 세이피나는 이런 것이 눈에 들어온 그 순간.... 자신이 두려워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이제는 혼자였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었다. 언제나 다른 곳에서 일을 할 때에는.... 힘들 때면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러 와 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존재가 아르카이제이다. 그는 자신이 어려울 때마다 친히 달려와 그 강대한 힘으로 자신을 어려움에서 구해주었다. 그의 곁을 떠나 임무를 수행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때각거리며 싸우지만, 아르트레스 그녀도 자신을 꽤 많이 도와주었었다. 전투력에 있어서 아르트레스는 자신의 거의 두배 이상이다. 아르르망의 성격은 꽤 꼼꼼한 편으로, 그 역시 자신이 힘들 때면 곧바로 달려와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 일단 세이피나 자신이 위험에 처한다 하더라도 곧바로 마계에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두려움의 이유는.... 고립이었다. 그것도.... 자신과 친숙하지 않은 곳에의 고립.... 물론, 그 두려움의 강도라는 것이 당장 몸을 떨 정도의 것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이렇게 평정에 가까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은근한 두려움이라는 것은 때에 따라 강렬한 공포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 란테르트는 이러한 자세한 사정은 전혀 알 수 없었으나, 어찌되었건 그녀의 심리 상에 어떠한 변화가 인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지 않으니 도울 방법이 없었다. 다만 곁에서 조용히 지켜볼 따름이었다. 이 두 사람은 일단, 이렇게 밖으로 나왔으나, 이제 무얼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막상, 모라이티나가 가지고 있던 레이요니르라는 활을 찾아 가엘프에게로 가야 할텐데.... 가엘프가 이 대륙 어느 구석에 붙어 있는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에 란테르트는 세이피나는 바라보았다. 당연 그녀라면 어떠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세이피나의 상태를 보니, 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란테르트의 머릿속에 스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테미시아의 신전으로.... 전에 아피안인가 하는 사제가 테미시아의 신전이라고 자신을 밝혔었다. 그럼.... 아마도 이곳에 살고 있을 터. 란테르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울창한 숲 사이로 흰색의 건물이 띄엄띄엄 눈에 들어왔다. "저쪽으로 가 보지요...." 란테르트는 세이피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세이피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쪽을 한차례 바라보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곳은.... 테미시아 님의 신전입니다. 골드 드래곤도 있고.... 위험합니다." 그때였다. 돌연 한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험하지 않아요. 어서 오세요. 테미시아 님의 신전에. 란테르트 님." 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란테르트와 세이피나가 서 있는 공간 바로 앞에 흰빛이 잠시 어리며 이내 한 여자가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스레하라고 해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에게 악수를 청했고, 란테르트는 이 의외의 상황에 그대로 리드 당해 멍청히 그녀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녀는 적갈색 머리칼을 어깨를 간신히 넘겨 자른 17세 가량의 여자였다. 눈동자는 시원시원했고, 눈썹이 약간 도톰해 바라보고 있으면 소년과 같은 쾌활함이 느껴졌다. 옷차림은 무릎에 채 닿지 않는 흰 망토로 어깨를 두르고 있었고, 언젠가 아피안이 했던 그 사제건과 비슷한 무늬와 디자인의 사제건을 가슴 앞으로 흘리고 있었다. 망토 사이로 보이는 옷차림은, 무릎에 채 닿지 않는 넓은 주름의 흰색 치마와 약간 풍성한 얇은 재질의 웃옷이었다. 옷의 전체적인 색감은 금색과 흰색이었다. 활달한 얼굴에 어울리는 소년 같은 몸매이다. 아스레하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는 이내 세이피나에게도 악수를 권했다. "어서 오세요. 테미시아 님의 신전에...." 하지만, 세이피나는 그녀의 악수를 받지 않았고, 그녀는 그런 상대의 응대에 그다지 개의치 않은 채 하하,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그보다.... 어떻게 제 이름을 아시고 계시는지...." 란테르트의 이 물음에 아스레하는 살짝 미소지으며 답했다. "아, 가엘프 님이 전해 주셨습니다. 자신을 찾아올 손님들이 오늘 도착할 테니, 그들에게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라고.... 란테르트 님의 이름도 그분 덕에 알게 되었습니다." "아...."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짤막한 탄성을 내질렀다. 하긴.... 신이라고 불리우는 존재이니.... 그 정도를 눈치 채는 것이야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아피안 님과도 한차례 만났던 모양이더군요. 그 말썽꾸러기 아가씨 덕분에." 아스레하는 놀라는 란테르트를 향해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썽꾸러기 아가씨라면.... 분명 모라이티나일 것이다. 이 아스레하라는 아가씨는 꽤나 수다스럽다. 란테르트의 끄덕임과 가로저음을 말상대로 한참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중얼거릴 수 있으니.... "아피안님 말씀으로 보통의 인간이라 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지셨다던데.... 지금은 어떤가요? 아! 이런 말 물어보는 것, 실례일까?.... 음.... 그보다, 가엘프 님께는 무슨 일로 찾아가시나요? 일곱 대륙의 인간이 엘프들의 어머니이신 가엘프 님을 아는 것도 신기한데.... 그분에게 용건까지 있다니...." 란테르트는 그녀의 첫 번째 물음에는 답하지 않았으나, 두 번째 물음에는 아주 간단히 대답했다. "레이요니르를 빌리기 위해서입니다." 혼자 수다스럽게 떠들던 아스레하는 란테르트의 이 한마디에 순간 입을 살짝 벌리며, "에?...." 라는 약간은 이상한 탄성과 함께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에, 쿡쿡쿡 하는 웃음을 잠시 웃었다. 무엇이 그리 유쾌한지 눈에 눈물까지 고이도록 웃었고, 이내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쿡쿡.... 그게 빌려 줄 수 있는 물건인가요? 레이요니르라는 것은 엘프들의 왕의 상징. 그러한 것을 인간에게 빌려주다니요. 아, 하긴 이러한 것을 모르니 그러한 생각을 할 수도 있겠군요." 어떠한 점이 그렇게 까지 우스운지.... 그녀의 말을 들은 란테르트는 도저히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반쯤 얼토당토않은 일인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남을 웃길만한 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웃어서 미안해요. 제가 조금 웃음이 헤프답니다." 그때, 돌연 란테르트는 이상한 느낌을 느끼며 바닥을 바라보았고, 이내 무언가 거대한 그림자가 스쳐 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고, 그곳에서 거대한 날아가는 검은 물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거대.... 그리고 위대.... 이 두 가지 정도면 그 존재에 대해 대강 설명이 된다. "드래곤...." 란테르트는 담담히 중얼거렸다. 그 검정색의 날개를 퍼덕이며 반공을 가르는 존재.... 그것은 드래곤이었다. 그의 놀라는 모습에 아스레하는 또다시 킥킥 웃었다. "킥.... 당신.... 그러고 보니 드래곤을 처음 보겠군요. 일곱 대륙에는 한 마리도 살고 있지 않으니.... 이 대륙에서는 종종 볼 수 있어요. 하루 종일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한 3, 40존재쯤? 방금 날아간 존재는 블랙 드래곤이에요. 드래곤들 중에서도 꽤 상위 급에 속하지요." 란테르트는 멀리 하늘 저편으로 숲에 가리워 보이지 않을 때까지 드래곤의 자취를 바라보다 이내 아스레하를 바라보았고, 아스레하는 란테르트가 자신을 바라보자 싱긋 웃어주었다. [그보다.... 곁에 있는 여자는 뭐예요?] 돌연, 아스레하가 란테르트에게 전언으로 말을 걸어왔고, 란테르트는 잠시 당황하여 어떻게 답해야 할 줄 머뭇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당황함은 세이피나 때문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그녀에게 답해야 할지를 몰라서였다. [아.... 전언 법은 쓸 줄 모르나 보군요. 다만, 강하게 생각하세요. 정신을 집중해, 내게 전하고 싶은 말을 떠올리면 되는 거예요.] 아스레하의 말에 란테르트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하라는 데로 말을 떠올렸다. [이렇게 말입니까?] 란테르트의 물음에 아스레하는 한차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천진한 듯, 쾌할 한 듯 한 그녀의 미소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흥겨워 지는 듯 하다. [잘하시네요. 그럼 제 질문에 답해 주세요. 옆에 달고 있는 여자 뭐예요?] 그녀의 말투에는 약간의 독기가 서려 있었고, 란테르트는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세이피나라는.... 저의 동료입니다.] [당신 속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나요?] 아스레하가 다시 물었고,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대강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감을 잡으며 되물었다. [무슨.... 속고 있다니요?] [저 여자.... 마족이에요.] 그녀는 란테르트의 말에 이렇게 답했고,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알고 있다고 답했다. 트레시아와는 달리, 생각하는 것이 거의 얼굴로 드러나지 않는 란테르트이기에, 세이피나는 그가 전언으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는 것은 가까스로 눈치를 채었으나, 그 내용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 그랬군요. 나는 또 속고 있는 줄 알았어요. 전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은 질색이거든요. 그보다, 저 아가씨.... 굉장히 동요하고 있는데....] 란테르트가 알고 있다고 하자, 아스레하는 대번에 말투가 변했다. 여자라고 하던 말투를 아가씨로 바꾸었으니 말이다.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잠시 세이피나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음.... 역시 마족이어서일꺼에요. 이 땅에 마족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거든요. 잘못해서 숲의 주인이나, 드래곤의 왕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란테르트는 이제서야 세이피나가 약간 이상해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렇군요....]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전에 아피안 님도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 때, 마족에 대해 이야기했었어요. 그때도 당신이 마족과 함께 있었다고 하셨는데.... 이 아가씨인가요?] 아스레하는 다시 물었고, 란테르트는 평소처럼 고개를 가로젓는 대신 [아닙니다], 라고 답했다. [뭐.... 그런 거야 어쨌던 상관없고.... 아무튼 각별히 조심해요. 이 아가씨, 그다지 강해 보이지는 않으니.... 당신네 일곱 대륙에서는 꽤 상당한 존재였는지는 모르지만, 이 중앙대륙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전언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신전 구경이나 한차례 하시겠어요? 아니면 곧바로 가엘프 님에게 찾아가시겠어요?" 란테르트는 아스레하의 물음에 언제나 새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묻던 이야기를 되물었다. "혹시.... 이곳에 이름난 무기나, 마법 아이템 같은 것이 있습니까?" "아뇨. 그런 게 있을 리 없죠. 아, 그럭저럭 쓸만한 건.... 테미시아 님의 지팡이가 있기는 한데.... 그건 아피안 님이 가지고 나가셨어요." 아스레하의 이 대답에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가엘프 님에게로 가겠습니다." 란테르트의 말에 아스레하는 약간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 조금 더 놀다 가면 좋은데.... 뭐 할 수 없죠. 그럼, 정 남쪽으로 향하세요. 조금만 가다 보면 당신을 마중하러 누군가 나올꺼에요." 아스레하는 이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남쪽으로 향했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며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 수풀 사이로 모습을 감추는 란테르트와 세이피나의 뒷모습을 보며 아스레하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휴.... 4년 반만에 처음으로 만난 사람인데.... 할 수 없지.... 재미없지만, 그래도 마이다티아님께나 가서...."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길게 기지개를 폈고, 이내 신전으로 향했다. 이 대륙 마이다탄트는 일곱 대륙에 비한다면 훨씬 남쪽에 있어 날씨가 더웠다. 그렇기에 수풀이 굉장히 우거졌고, 나무 또한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 그렇게 우거진 수풀 사이를 몇 차례 꺾어 들어가자 이내 신전이 자리잡은 커다란 공간에 도착했다. 신전의 모습은 흰색의 전체적인 색감에 쫙 뻗은 기둥, 멋지게 뒤틀린 처마선,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지붕 등등.... 모든 것이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러한 신전에 비해 배나 시선을 끄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신전에서 조금 떨어진 앞에 한 거대한 것이 누워 있었다. 단지 바닥에 가까이 낮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누워있다고 표현한 것이 아니라 실재로 누워 있었다. 배를 낮은 풀들이 넓게 자란 벌판에 깔고, 턱을 마침 있는 바위에 고인 채.... 길이가 거의 50휴리하쯤 되어 보이는 거대한 금색 생물(?)이 누워있다.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워 보이는 털이 목덜미 언저리에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언뜻 보아 10개는 될 듯한 뿔들이 머리에 솟은 채 그 생물은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한차례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할 때마다 그릉 그릉 하는 소리가 들렸고, 종종 꼬리를 들었다 놓기라도 하면 우두두 하는 커다란 소리가 숲안에 울려 퍼졌다. 드래곤이었다. 팔을 모아 가슴에 깔아놓고, 두 날개를 자연스럽게 바닥에 깐 채 잠이 들어 있는 이 존재는 드래곤이었다. "마이다티아님~~~!!! 그 사람이 왔다가 갔어요!!" 한가로운 낮잠을 즐기고 있던 이 황금색의 용은 아스레하의 부르는 소리에 서서히 눈을 떴다. [후우.... 무슨 일인가?] 마이다티아는 입도 열지 않은 채로 아스레하의 말에 대구했고, 아스레하는 살짝 미소지으며 답했다. "그 가엘프 님이 말씀하셨던 사람이 다녀갔어요!!" 아스레하의 말에 마이다티아는 몸을 살짝 일으켰다. 그러한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거센 바람이 일며 주위의 풀을 사방으로 넘어트렸으나, 아스레하의 주위에는 흡사 둥근 막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듯, 머리칼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 둥근 막은.... 엔클레이브였다. [그분이 다녀갔단 말이냐?] 아스레하의 말에 마이다티아가 소리치듯 이렇게 물었고, 아스레하는 잠시 의아해 했다. "그분이라니요? 마이다티아 님께서 존칭을 써야 할 만한 사람인가요? 그 란테르트라는 사람이?" [아.... 아니.... 그런 것은 아니다....] 마이다티아는 아스레하의 물음에 이렇게 얼버무리고는 다시 물었다. [그래.... 어떻더냐? 그분.... 아니 그가 얼마나 강하더냐?] 아스레하는 이 할배가 아직 잠이 덜 깼나? 하는 눈초리로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강했어요. 비록 마법력은 감추고 있어 알 수 없었지만, 정신력만은 충분히 강했어요. 전언 술을 방법을 가르쳐 주자마자 바로 사용했으니.... 게다가 왠 마족도 하나 데려 왔던 걸요?" 아스레하의 말에 마이다티아는 눈을 살짝 끔쩍였다. [음.... 마족.... 하긴.... 그렇기도 하겠구나....] 아스레하가 물었다. "왜요? 그렇기도 하다니요?" [아, 아니다.... 그냥 혼잣말이다.] 마이다티아는.... 아마도 무언가 알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아스레하가 알아서는 안될 일인 듯, 더 이상 이야기해 주지는 않았고, 아스레하는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잠깐, 아스레하는 특유의 활달한 미소를 지으며 외쳐 물었다. "그보다, 마이다티아님~~!! 언제쯤 다음대 수신사가 들어오나요? 아피안 님이 언제쯤 그 아이를 찾아오냔 말이에요? 심심해 죽겠어요." [휴우.... 넌 도대체 105살이나 먹은 아이가 아직도 철이 없느냐? 네 전전대 수신사였던, 베르몬디아 그 아이는 얼마나 과묵했는지 아느냐? 하긴.... 너와 만나기도 전에 죽었으니.... 알 수 없겠지만.... 하여튼, 그 아피안이라는 녀석 때문에.... 베르몬디아에게서 진지함이라고는 조금도 이어받지 못했으니....] 마이다티아의 꾸중 아닌 꾸중에 아스레하는 헤~ 하는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어차피 진지하건 하지 않건 이곳에서 180년을 보내야 하는 건 바뀌지 않잖아요? 즐겁게~~ 즐겁게~~ 늙지 않는 이 생을 즐기는 거예요~~ 호호호." 그녀의 일러한 반응에 마이다티아는 휴.... 하는 한숨을 한차례 더 내쉬었다. 하긴....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 전전대 수신사라는 베르몬디아처럼 과묵하고 묵묵하게 자신의 일만 하면서 180년을 보내나.... 아스레하처럼 까불며 보내나....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기만 한다.... 테미시아 그분의 뜻이니.... 말이다. 한편, 아스레하와 헤어진 란테르트와 세이피나는 남쪽으로 걸음을 옮기었다. 그리고.... 도중의 그 주위 풍경이라는 것은 란테르트 그 자신의 키가 10분의 1로 줄어든 듯한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 보통 20휴리하(1휴리하=약 1미터) 정도의 높이를 가졌던 일곱 대륙의 나무들은 이곳에서는 결코 나무라고 불리울 수 없다. 그것들은 풀이다. 조금 키가 큰 풀.... 이곳에서 나무라고 불리려면, 그러니까.... 그 가지 끝이 다른 나무들의 가지 끝과 비견할 만 하려면, 적어도 100휴리하는 되야 했다. 레냐 남부 평야에 있는 헥토리아수쯤은 되어야 이곳에서 나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듯 하다. 밑동의 지름이 거의 15휴리하쯤 될 듯한 이 거대한 나무들은 곧바로 뻗어 올라 저 까마득한 위쪽에 진 녹색의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러한 나무들은 보통 3, 40휴리하 정도의 간격으로 서 있었는데, 간격이 비록 그렇게 넓었으나, 나무 위쪽에 있는 가지들 역시 그만큼의 길이는 되어, 하늘은 온통 나뭇잎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 나무는 잎이 달려있는 가지가 꽤 높은 곳에서부터 자라기 시작해 나무의 끝부분에야 많은 수의 잎과 잔가지들이 매달려 있었다. 종종,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길게 뻗어져 들어온다. 은은한 금색의 햇빛은 어두침침한 바닥까지 일직선으로, 하지만 점차 흐려지며 흐르듯 내려오고, 그러한 빛의 기둥이 숲 곳곳에 내리꽂히고 있다. 흡사.... 구름 사이에 햇살이 비져나오는 듯 하다. 그러고 보니.... 숲은 구름인 듯 하늘을 가리우고 있었다. 햇살이 비쳐오는 곳에 서 란테르트는 잠시 잎의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정면으로 태양이 눈에 들어와 빛은 햇잎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확실히 모든 것이 신기한 곳이었다. 종종 나무사이를 날아다닌 동물도, 크고 억세게 생겼고, 눈앞을 스물 스물 기어가는 괴상한 괴물도 역시 크고 섬ㅉ하게 생겼다. 일곱 대륙의 것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란테르트는 종종 저런 것들과 싸우면 수련에 도움이 되겠지? 라는 생각을 떠올렸으나, 일단은 가엘프를 만나러 가야 했기에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세이피나는 여전 여유 있는 표정에 부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매사 철저히 계산을 한 후 움직이는 그녀였고, 그러한 자신의 계산을 거의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기에, 지금처럼 소멸 당할 확률이 그렇지 않을 확률을 크게 앞서는 상황하에서는 약간의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공포라는 감정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그녀였기에 느끼는 두려움은 보통의 존재들보다 조금은 심한 편이었다. 란테르트는 여전히 세이피나가 표정을 피지 않자 걸음을 멈추며 말을 걸었다. 언제나 정신없이 즐겁기만 한 아르에는 란테르트가 발을 멈춤과 동시에 종, 하고 울었다. "조금 덥지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세이피나를 향해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이 조금 우스웠으나, 란테르트는 일단 이렇게 물었고, 세이피나는 란테르트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이 정도면 인간이 충분히 덥다라고 느낄 수 있는 온도였다. "예...." 세이피나는 이렇게 답했고, 란테르트는 조그마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걱정이 있는 듯 보이는군요." 란테르트의 말에 세이피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고민이 있다한들.... 란테르트에게 이야기 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세이피나의 대답에 란테르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세이피나 님은 혹시 마법을 사용할 줄 아십니까? 공격계 마법이나.... 그러한 것을...." 란테르트의 이 돌연한 물음에 세이피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고, 란테르트는 다시 비슷한 질문을 했다. "그렇다면.... 특별히 익힌 무기술이라던가 그러한 것 있습니까?" 물론 있었다. 비록 아르트레스만큼 강하고 위력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검술 실력은 마계에서도 상당한 수준 급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검 역시 굉장한 물건이었다. 물론, 평소에는 어깨에 턱하니 걸터앉아 쫑쫑대기나 하고 있었으나.... 하지만.... 사제 세이피나는 검도 검술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세이피나는 란테르트의 물음에 이렇게 되물었고,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전투력은 거의 전무하군요. 아까 아스레하 님께서 제게 이곳이 몹시 위험하다고 말씀해 주셨기에 한 번 물어본것입니다." 란테르트의, 전투력이 전무하군요, 라는 말에 세이피나는 순간 발끈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표정하나 바뀌지 않았고, 란테르트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이미 동료로 인정한 이상, 버리고 달아난다거나 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번의 말은 더더욱 세이피나의 속을 긁었다. 겨우.... 비록 힘이 자신보다 강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겨우 인간인 주제에.... 아홉번째땅에 속한 자신을 보호하겠다니.... 세이피나는 속에서 울컥 하는 것이 치밀었다. 하지만, 함부로 대꾸할 수는 없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한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세이피나.... 아르페오네.... 란테르트는 이카르트의 아이인 그녀가 조카와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니.... 당연히 지켜줄 것이다. 자신이 죽기 직전까지.... 그녀를 지켜줄 것이다. 물론, 지키다 자신이 죽는 것은 약간 곤란하지만.... 란테르트가 이런 생각을 하며 남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멈춰선 채 잠시 지켜보던 세이피나는 다시 걸음을 걸어 그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방금전 까지 느껴졌던 두려움 비슷한 감정이 사라진 듯 했다. 명치 언저리에 무언가 얹힌 듯한 느낌.... 또 왠지 가슴이 싸늘하던 그러한 느낌은 완전히 사라졌고, 지금은 평소의 담박하던 자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흡사.... 란테르트의 보호해 주겠다는 말에 안도감이라도 느낀 듯.... 하지만 세이피나는 고개를 도리쳐 이러한 마음을 어서 잊었다. 이카르트 님이 사랑하는 존재....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란테르트는 세이피나가 증오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그녀가 란테르트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것 하나 뿐이었다. 란테르트는 어떻게 가엘프를 설득해야 할 지에 대해.... 그리고, 세이피나는 란테르트를 싫어하는 이유 조목조목을.... 이들은 각각 이러한 것을 생각하는데 몰두하며 조용히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한 덕에, 이 두 사람은 한 존재의 등장에 눈치를 채지 못하였다. 물론.... 제정신으로 있는다 해서.... 눈치챌 수 있는 존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무가 높으니, 가지도 높다. 그리고, 가지에 앉아 있는 사람 역시 높은 곳에 있다. 높은 곳에 있으니, 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낯선 숲이다. 긴장해 있고.... 모든 것에 신경이 쓰인다. 어떤 특정 기척에 정신을 쏟을 만큼 한가하지 못하다. 이러한 것들이, 란테르트가 자신의 눈앞에 뛰어 내려온 한 남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이유이다. 그 남자는 땅에 내려서자 마자 란테르트와 세이피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표정은 왠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그것이었다. 그는 몸매가 상당히 가는 편으로, 한쪽 손을 허리에 내고 다른 쪽 팔은 길게 늘어뜨린 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머리칼은 밝은 황금색의 직모로, 길게 한 가닥만을 앞으로 늘어뜨리고, 다른 머리칼은 뒤로 모두 묶었다. 눈동자는 맑은 물의 빛깔을 내고 있었는데, 전체적인 얼굴의 모습은 약간 쾌활한 듯 보였다. 나이는 20세 전후로 보인다. 반면, 입가에는 약간의 냉소적인 미소가 어려 있어 바라보고 있으면 꽤나 고고한 성격이 느껴졌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엘프가 아닌가. "너구나." 엘프는 란테르트를 보자마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허리에 얹었던 손을 옮겨 차고 있는 검막이에 얹었다. 란테르트는 현재의 목적이 목적이니 만큼 잠시 허리에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굉장히 선이 가는 장검으로, 은은한 녹색을 띄고 있었고, 바람의 정령의 느낌이 은근히 풍겨오고 있었다. 허리에 있는 에르테일이 그 위세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바람과 땅은 극성으로.... 아마도 에르테일 쪽의 자아가 눈앞의 남자의 검의 자아보다 힘이 약한 모양이다. 너구나, 라는 그의 말에 란테르트가 되물었다. "저를 아십니까?" 엘프는 란테르트의 물음에 후후 하는 낮은 웃음을 웃었다. "물론이다. 현재 이 세 번째 땅의 존재들중, 너에 대해 모르는 자가 몇이나 될까?" 엘프는 이렇게 말하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잘됐다. 안 그래도 요즘 따분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서 검을 뽑아봐라. 하르제검 말고, 그 에르테일을 말이다. 하르제 검은 나의 윈드 네메시스를 견디지 못할 테니...." 그는 다짜고짜 이렇게 란테르트에게 대결을 신청했고, 란테르트는 조금 당황하며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라는 존재의 힘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상상외로 강하다면, 수련에도 도움이 될 듯 하다. 물론, 자신을 죽이려 든다면, 문제가 달라지지만, 살의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생각하며 망토와 가방, 그리고 하르 검을 풀어 한쪽에 세워 놓으며 세이피나에게 비켜서 있으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세이피나의 표정이 약간 변해 있었다. 아마도 마족과 적대인 엘프와 마주쳤기 때문인 듯 했다. 란테르트는 그녀의 그러한 표정에 살짝 미소를 보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에서였다. 반면 세이피나는 그런 란테르트의 표정에 냉소 섞인 미소를 한차례 지은 후 고개를 돌렸다. 란테르트는 이 다루기 힘든 아가씨에게 쓴웃음을 한차례 지은 후 이내 그 금발의 엘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뒤 허리 쪽으로 손을 뻗어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확실히 에르테일을 쥐는 느낌은, 하르 검을 쥘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단지 손잡이의 모양이 다르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뭐랄까.... 안정감? 편안함? 검이 신체의 일부가 되는 듯한 느낌이다. 란테르트가 검을 뽑아듬에, 엘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번의 것은, 처음의 약간은 도도하고 냉소적인 미소가 아니라, 흥분에서 오는 미소였다. 싸우는 것은 꽤나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와라. 인간." 엘프는 검을 색 하는 소리와 함께 뽑아들었다. 검을 뽑는 속도가 상상 이상이었다. 란테르트는 그의 검에서 은은히 풍겨져 나오는 바람의 위세에 꽤나 놀라고 있었다. 단지 몸에서 풍겨 나오는 힘만으로도 자신이 위축되는 듯 했고, 서둘러 정신을 모아 엔클레이브의 농도를 높였다. 뒤이어 란테르트는 검에 대지계 케릭팅 마법을 걸었다. 어느 정도 검술이 손에 익은 이후로는 케릭팅 마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무리 에르테일이라도, 동강날 가능성이 충분한 듯 보였다. 에르테일은 대지 령의 혼이 깃들인 검이었고.... 그 검에 이렇게 대지계 마법을 걸자, 꽤나 큰 공명이 일었다. 검 주위에 은은한 금빛이 어리었고, 느낌만으로도 검의 힘이 상당히 강해진 것을 느꼈다. 눈앞의 엘프의 윈드 네메시스라는 검의 위세에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란테르트는 이내 검을 휘둘러 엘프에게 달려갔다. 레카르도 가의 검술.... 이제 그것을 공부해 보는 거다. 모든 검식을 잊고, 그것의 뜻만을 따라 검을 휘두르는 것이다.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빠르고, 강하고, 또 정확하게.... 상대는 그런 란테르트의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거의 자신에게 접근한 란테르트에게 검을 휘둘렀다. 캉, 하는 거북한 쇳소리가 나며, 에르테일과 그의 검이 정면으로 부딪혔다. 순간 란테르트는 손이 저려와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사실, 어느 정도 검이 손에 익으면, 검을 통해 전해져 오는 충격을 손과 손목, 그리소 팔을 통해 적절히 분산시키는 법을 익힌다. 그렇기 때문에, 검으로 도끼를 막아내고도 손목이 부러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 눈앞의 상대의 검은 오히려 거대한 전투용 도끼보다도 위력이 있었다. 세검이 말이다. 란테르트는 이 일 검에 자신과 상대 사이의 강약을 알 수 있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이 기회에 수련이나 하는 것이다. 상대에게서 살기는 느껴지지 않으니.... 이보다 적당한 수련 상대는 없을 것이다. 란테르트는 이런 생각을 하며 두 번째 검을 공격해 들어갔다. 정면으로 마주 치거나 하면, 검이 부러지던지, 자신의 손목이 부러지던지 할 것 같아, 이번에는 속도로 승부를 걸었다. 물론, 속도에 있어서도 자신이 떨어지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단, 무기 자체도 상대의 것은 세검이고 자신의 검은 중검이었다. 무게가 적어도 다섯배 이상은 차이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란테르트가 지금 쓰려는 검세는 단순한 쾌검이 아닌, 상대의 검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속도를 올린 보통의 검식이었다. 검식의 형식을 무시한 레카르도 가의 검술에서나 나올법한 검식이다. 란테르트가 이런 방법으로 나오자 상대 엘프의 입꼬리는 더더욱 위로 치켜 올라갔다. "후후. 제법 머리를 굴리는 구나." 비록 검을 휘두르는 속도는 엘프 쪽이 빨랐으나, 이상하게도 란테르트의 검과는 마주칠 수 없었고, 그에 엘프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오히려 검의 속도를 늦추었다. 그리고는 검을 들지 않은 왼손을 들어 란테르트에게로 향했다. 란테르트는 순간 상대의 몸에서 마법력이 느껴지자 검을 갈무리하며 마법에 대비했다. 상대가 엘프이니 만큼, 자신보다 정신력이 높을 가능성이 충분했고, 그러니 엔클레이브로는 아주 약한 마법조차 막아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란테르트의 생각은 적중했다. 상대의 손에서는 붉은 화염이 솟아났고, 그것은 란테르트의 엔클레이브에는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은 채 그의 정면으로 쳐왔다. 란테르트는 에르테일의 날에 살짝 각도를 주어 그의 마법을 받아냈고, 란테르트의 검에 튕겨나간 화염은 곧바로 공중으로 치솟아 가까이 있던 그 거대한 나무에 직격했다. 퍽 소리와 함께 나무에 불이 붙었다. 란테르트는 그 모습에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듣기에 엘프는 숲의 정령이었다. 그러하니, 자연스럽게 숲을 아낄 터이고.... 어찌 되었건 자신의 잘못으로 숲에 불이 옮겨 붙었으니.... 란테르트는 이러한 생각에 서둘러 수계 마법을 사용해 불이 붙은 나무쪽으로 날렸다. 서너갈레의 가느다란 물줄기가 힘있게 뻗어 금새 불을 껐다. 란테르트는 곧바로 다시 그 엘프를 바라보았다. 불이 꺼짐에 응당 조금은 기뻐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엘프가 숲에서 화염마법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약간 이상했다. 란테르트는 순간 상대가 엘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뾰족한 귀를 보니 엘프가 맞기는 한 것 같은데.... 하지만, 생각을 할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뒤이어 그 엘프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란테르트는 서둘러 검을 움직여 상대의 공격을 막아냈다. 검식의 완숙함과 오묘함, 그리고 검에 실린 힘, 속도, 타점의 정확성 어느 한가지도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란테르트는 상대의 이러한 힘에 도저히 반항을 할 수가 없었다. 란테르트는 이쯤 되자, 이제는 마법을 병용해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상대의 검의 속성이 바람이니 풍계 마법은 집어치우고, 상대가 화염계 마법을 쓸 줄 아니, 수계 마법이나 빙계를 사용하기로 했다. 동시에, 란테르트의 몸 주위에 엷은 청색의 기운이 돌며 빠르게 도는 물의 회오리가 생겨났고, 돌연한 그의 움직임에 엘프는 잠시 공격의 속도를 늦추었다. 물론, 엘프 앞에서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비웃음을 살 만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보다는 조금 더 상황이 호전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란테르트의 생각이었다. 란테르트는 잠시 머뭇거리는 엘프에게 몸을 날렸고, 동시에, 몸 주위에 형성되어 있던 물들이 몇 줄기씩 합쳐지며 함께 엘프에게로 날아갔다. 하지만, 이러한 마법은 엘프 주위에 둘러쳐져 있는 엔클레이브조차 뚫지 못한 채 사방으로 흩어졌고, 뒤이어 날아온 엘프의 검은 란테르트의 어깨에 그대로 직격했다. 퍼억 하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란테르트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상대는 검의 면으로 공격을 했고, 란테르트는 몸에 상처하나 남지 않은 채로 다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상대는 란테르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다시 한차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잠시 동안이지만 재미있었다."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정말이지.... 대단하시군요." "뭐....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명색이 숲의 주인인데...." 엘프는 이렇게 대꾸하며 그의 가느다란 검을 허리에 꽂았고, 란테르트는 검을 갈무리하며 되물었다. "숲의 주인?...." 엘프는 앞으로 흘러 내려온 한 가닥의 머리칼을 한차례 손으로 툭 쳐 자연스럽게 흘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서쪽 숲의 주인 엘라인이다. 인간계에서는, 엘라인 케이네스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지." 그의 소개에 란테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러고 보니.... 전에 만났던 북쪽 숲의 주인인 키나 역시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저는 란테르트 루렌드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쪽은 저의 동료인 사제 세이피나입니다." 란테르트는 상대가 자신을 소개하자 뒤이어 자신을 소개했고, 엘라인이라는 엘프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단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럼, 어서 가엘프 님께 가자." 엘라인은 대뜸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순간 그의 말에 의아함을 표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엘라인은 간단히 상황 설명을 해 주었다. "나는 지금 너를 마중 나온 것이다. 그 키나녀석이 인간세로 나가버려 이 북쪽 숲까지 내가 관리하고 있지. 그래서 이렇게 너를 마중하러 오게 된 것이고. 아주 귀찮게 되어 버렸어." 엘라인은 이렇게 한마디 한 후 다시 두 팔을 가슴께 에서 꼬았다. "그럼, 서둘지. 너의 걸음걸이로는 10일 이상 걸릴 테니...." 란테르트는 눈앞의 이 엘프를 보고는 잠시동안 멍하니 있었다. 분명.... 민담에서의 엘프는.... 고고, 고결, 고답, 고.... 아무튼, 고로 시작되는 모든 말들을 붙여 놓을 만한 존재였는데.... 모라이티나라는 엘프 아가씨와, 이 엘라인이라는 엘프 청년 이 두 사람에게는 그러한 단어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란테르트는 방금 바닥에 내려놓았던 짐들을 챙겨든 후 세이피나와 함께 엘라인의 뒤를 쫓았다. 세이피나의 안색은, 엘라인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약간 어두워져 있었다. 간신히 란테르트의 뒤를 쫓기는 했으 나.... 완전히 매에게 잡힌 쥐의 모습이었다. 막 몇 걸음을 옮기지 않아, 엘라인의 전언이 세이피나의 귀에 들려왔다. [꼬마야, 겁먹지 마라. 원.... 보기 않좋다.] 엘라인의 이 돌연한 말에, 세이피나는 순간 걸음을 멈추었고, 곁에서 걷고 있던 란테르트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란테르트의 물음에 세이피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엘라인에게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녀의 물음에 엘라인은 여전 한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 [내가 너같은 어린아이를 어떻게 하기라도 할 것 같아 그렇게 잔뜩 움츠러들고 있는 거냐?] 세이피나는 엘라인의 말에 묵묵히 생각에 잠기었다가 입을 열었다. [제 생명은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명분상은 란테르트 그의 동료이고, 그는 가엘프 님의 손님이다.] 그의 말에 세이피나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어느덧 그녀의 표정에서 그늘이 사라졌으나, 워낙 그 그늘이라는 것 자체도 아주 미미한 것이었기 때문에 겉으로 보아서는 거의 표정변화가 없었다. "손님입니까...." 뒤로 한참동안 말이 없었던 세이피나는 아주 조그맣게 이 한마디를 중얼거렸으나,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엘라인의 경우에는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11월도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으나.... 이곳 중앙대륙의 날씨는 결코 11월의 그것이 아니었다. 흡사 한 여름인 듯.... 아니, 일곱 대륙의 한여름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 더위가 일행을 짓누르고 있었다. 하긴.... 그렇다고 더위를 느끼고 땀을 흘리는 존재는 일행 셋중 아무도 없었지만.... 이 엘라인이라는 엘프는 꽤 활달할 것 같은 말투를 하고 있었지만, 예상외로 거의 말이 없었다. 란테르트가 말을 걸기라도 할 때에는 적당히 말을 많이 했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세이피나나 란테르트 못지 않게 과묵했다. 그러다 보니.... 꿀 먹은 벙어리 삼총사가 되어버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세사람이나 함께 걷고 있는데도 이렇게나 말이 없다니.... 확실히 연구대상이다. 그나마 말이 가장 많은 것은 란테르트였다. 어쩌다가 그가 가장 말이 많은 사람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언제나 말을 꺼내는 것은 그였다. 엘라인과 시간을 보낸지도 어느덧 6일이 흘렀다. 대화가 없었으니만큼 서로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얼마 되지 않은 대화를 통해 알아낸 것은, 엘프들의 신 가엘프는 거대한 숲의 중앙 신전에 살고 있고, 그 숲을 넷으로 나누어 네 숲의 주인들이 맡아 다스리고 있다는 것과, 테미시아신전에서 가엘프의 신전까지는 거리가 1500휴하(1휴하=약 1킬로미터)이상으로 아무리 란테르트 라지만 걸어서 한달 이상 걸린다는 것, 그리고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북쪽 숲의 주인이 기거하고 있는 노르우드라는 나무라는 것 정도였다. 그곳에는 가엘프의 신전으로 통하는 워프게이트가 있다 한다. 여전 숲은 거대하고 울창했다. 어떻게, 6일이나 걷는 동안, 손바닥만한 하늘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게 언제나 하늘을 가리고 있으니.... 바닥 부근에 풀들이 많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종종 아주 습한 곳에 잎이 괴상하게 생긴 식물들이 빽빽이 자라 있을 뿐, 이끼 말고는 식물이 거의 없었다. 조용히 걷고만 있던 중.... 돌연 엘라인이 입을 열었다. "여기부터는 사라한 부족의 땅이다. 북쪽 숲의 일곱 부족중 하나이지."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멀리 위쪽에 망루 비슷한 것이 보였고, 그곳에 인영이 몇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엘프일 것이다. 아마도 마을 입구를 지키는 파수꾼들인 모양이었다. 란테르트가 잠시 망루를 바라보고 있자, 엘라인이 간단히 설명을 해 주었다. "다프칸의 카오스 드래곤이나, 숲 속의 거대한 짐승들이 종종 마을을 공격하기도 하지. 물론, 마을의 결계를 깰 수 있는 존재가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그것을 깰 수 있는 존재라면 약간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의 설명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다고 그런 일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엘라인은 이렇게 말하며 두 팔을 머리 뒤로 가져가 깍지를 끼었고, 그때, 망루 위에 있던 두 사람이 엘라인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거리가 상당했지만, 그 두 망루 위에 있던 사람은 엘라인의 모습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엘라인은 그런 그들의 인사에 깍지꼈던 손을 풀어 한차례 흔들었다. 오래지 않아 일행은 마을이라고 불리우는곳 한복판까지 걸어갔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란테르트는 아주 조금이지만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일단.... 이곳이 어디를 보아서 마을인가? 나무 중간 가지 위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것이야 그렇다고 치자. 나뭇가지라고는 생각 할 수 없는 굵기의 나뭇가지 위에다, 나무 위의 집이라고는 역시 생각 할 수 없는 규모로 섬세하게 집을 지어 놓았으니, 집의 모양 자체만으로는 이곳을 마을이라 부르는데 무리가 없다. 하지만, 집과 집 사이의 거리라니.... 보통 나무 한 그루와 다른 한 그루 사이의 거리가 40휴리하(1휴리하=약 1미터) 가량 되었고....그러니 매 나무마다 집이 한 채씩 있어도 집과 집사이의 거리가 40휴리하가 되는 것인데.... 집은 가장 가까운 것이 한 나무를 사이에 두고 위치한 것이다. 즉 보통 80휴리하 간격에서, 조금 외진 곳에 있는 집의 경우는 가장 가까운 집까지의 거리가 무려 200휴리하가 넘었다. 란테르트가 당황해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물론, 란테르트답게 아주 조금씩이었지만 당황해 하는 모습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엘라인은 다시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란테르트와 엘라인의 이러한 모습이란.... 흡사 산간 벽지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자란 세상물정에 어두운 사람을 대리고, 5층 건물이 즐비한 수도의 번화가로 대려온 듯한 모습이다. "우리 엘프들은, 조용한 것을 좋아하지."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렇게 마을을 만들어 놓으니.... 확실히 조용하기는 했다. 하지만.... 인간들이 그렇게 따닥 따닥 모여 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결코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 이유가 없는 것은 없다. 인간들이 모여 사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방어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이다. 특히 생산이라는 것에 있어서는 그 생산의 대상물의 특성에 따라 마을의 모양이 크게 바뀐다. 밀과 같은 경우에는 단위면적당의 소출 열량, 즉 일정 크기의 땅에서 생산해 낸 밀의 총 에너지, 가 작은 편이어서 마을의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고, 꽤 넓은 범위를 마을 안에 포함시키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을단위에서 자족이 불가능하다. 마곡 남부의 극히 일부지역에서만 자라나는 벼 같은 경우에는 완전히 반대의 양상을 띈다. 목축, 임업, 어업 등등도 마찬가지로 각각의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의 마을을 만들어 낸다. 물론, 마을의 모습을 형성하는데 에는 이것 외에도 수많은 변인이 존재하나, 이것만큼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이 엘프들의 마을이란.... 방어 외에는 조금의 신경도 쓰지 않은 배치이다. 사실 방어 쪽도 꽤 허술한 편이다. 방어 역시 마을이 모여 있으면 모여 있을수록 유리한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고 보니.... 그 흔한 화전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과일과 산짐승들로 연명하는 것은 아닐 테고.... 이러한 약탈 경제는 집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란테르트는 이러한 복잡한 것까지는 알지 못했으나, 이 엘프들의 마을이 보통의 인간들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 약간 혼란스러워 했다. 하지만, 입을 열어 묻지는 않았다. 자신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었고.... 별로 관심도 없었다. 마을의 모양이 어떠하건 그게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겠는가? 그러는 사이 다시 이 세 사람은 그 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을 지나쳤다. 겨우 50호 가량의 집들이.... 거의 직경 4휴하(1휴하=약 1킬로미터) 가까운 공간에 펼쳐져 있었으니.... 이곳이 마을인지 아닌지는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할 듯 했다. 사실, 마을의 모양이 이러한 것은 당연했다. 일단, 엘라인의 말처럼 엘프들은 조용한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생산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먹을 필요가 없는 그들이 굳이 농사 따위를 지을 필요도 없었다. 의복류 같은 것을 마련하기 위한 작물 정도는 산으로 들로 헤매고 다녀 얻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얻을 수 있었다. 방어의 경우도, 사실 그들은 그다지 많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일단, 엘프들의 마을을 공격할 정도로 강한 개체가 거의 없었던 데다가, 그것들을 막기 위한 존재가 바로 네 숲의 주인이었다. 네 숲의 주인, 그리고 마을마다의 결계, 거기다 엘프들 자체의 전투력.... 이 삼중의 결계를 모두 뚫을 수 있는 존재라고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운에 의존하지 않고는 불가능에 가깝다. 다시 4일간, 세사람은 남쪽으로 계속해 걸음을 옮겨 1차 목적지인 북쪽 숲의 나무에 도착했다. 노르우드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이 나무.... 란테르트는 나무가 속한 공간, 공간이라 불릴 만큼 엄청난 곳에 발을 디디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된 것이, 이 중앙대륙이라는 곳은 황당한 것 투성이이다. 즐비한 나무들의 키가 100휴리하인 것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리고, 그 나무들의 잎들이 하늘을 가려 태양이 거의 보이지 않은 것 역시 며칠 지나다 보니 적응이 되었다. 엘프들.... 그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곳 역시 꽤나 이상스러웠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은 눈앞에 서있는 이 나무(?)에 비한다면.... 말할꺼리도 못되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곁에 서있는 엘라인이라는 엘프는 늘상 보아온 것이라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적어도 정상적인(?)크기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인간계에서 살던 란테르트의 눈에는.... 한 번 상상해 보라. 키가 200휴리하가 넘는 나무를. 밑동은 언뜻 보아도 지름이 30휴리하 남짓 해 보였다. 울퉁불퉁한 나무 피부의 구부러짐 하나 하나가 거의 보통의 나무 지름과 맞먹을 정도의 크기이다. 잎은 그다지 크지 않아 50휴리하나 위에 있는 가지에 매달려있는 잎들이 뿌연 녹색 구름처럼 보인다. 더 위에 있는 잎들은, 잎이 아닌, 다만 조금더 짙고, 옅은 녹색을 뒤섞어 흩어 논 듯 보인다. 전체적인 모양은 키가 작고(?) 폭이 넓었다. 줄기는 몹시 구불구불해 흡사 일부로 그렇게 조각이라도 한 듯 보인다. 잘라내 배를 만들면, 수십 척의 돛대 세 개 짜리 대형 범선을 만들 수 있을 듯 보였고, 장작으로 쓸 경우에는 한 나라 사람들이 몇 해 겨울을 날수도 있을 듯 보였다. 나무 근처의 반경 300휴리하 정도의 공간에는 다른 나무가 자라지 않았다. 그 덕에, 반경 200휴리하 정도 되는 나무의 줄기와 다른 나무들 사이에 공간이 생겨, 란테르트는 오래간 만에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지각한 시점은 한참동안이나 나무에 빼앗겼던 시선을 되찾은 후였다. 일단, 란테르트는 눈앞에 서있는, 갈색의 기둥에 녹색의 무언가가 잔뜩 매달려 있는 것을 나무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하는 편이 훨씬 마음이 놓였다. 그렇다. 저것은 노르우드. 북쪽 숲의 주인의 신전이다. 그냥 나무 모양으로 지어놓은 신전이다. 엘라인은 란테르트가 아무런 말도 못한 채 한참동안이나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꽤 흥미로운 감정을 느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왜 어떠한 존재이든 자신이 접해보지 못한 거대한 어떠한 것과 만날 때마다 저렇게 당황하며 경이스러워 하는 것일까? 특히 물질에 얽매여 있는 이 세 번째 땅의 하등한 존재들은 사물을 단지 크기로밖에는 볼 수 없는 치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경향이 더더욱 심하다. 존재의 값어치는 그 크기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인데.... 각자의 생각에 잠겨 세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란테르트는 눈앞의 나무에 정신을 빼앗겨, 그리고 엘라인은 그런 그의 모습을 비웃느라.... 마지막으로 세이피나는 이 중앙대륙에서의 자신의 처신에 대해 고민하기에.... 이 세사람 사이에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일단 란테르트라는 인간이 감정을 오래 끌지 않는 인간이었고, 그가 그렇게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다른 사람들 역시 사고에 종언을 고했다. "이곳에.... 워프게이트가 있는 것입니까?" 란테르트는 막 걸음을 옮기는 엘라인의 뒤를 따르며 이렇게 물었고, 엘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숲의 중앙에 있는 네 그루의 나무는 모두 숲이 중앙에 있는 가엘프 님의 신전에 이어져 있다. 워낙 숲이 넓다 보니.... 아무리 엘프들이라지만, 이동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만들어 둔 것이지." 란테르트는 엘라인의 말에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신전에 다가감에 따라 나무는 더더욱 거대하게 눈에 들어왔다. 가장 가장자리의 가지가 있는 곳을 지날 무렵에는 이미 나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점점 더 나무에로 다가감에 온통 눈안 가득 나무만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란테르트가 이 중앙대륙에 와서 본 것중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온통 나무에 관한 것뿐이었다. 그만큼 거대한 숲이고, 또한 인상적인 숲인 것이다. 나무에 가까워짐에, 란테르트의 생각은 나무의 크기나 모양에서, 그 워프게이트 라는 것으로 옮겨졌다. 사실, 워프라는 것은 일곱 대륙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공간이란 시간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200여년전 노마티아 대륙에 살았던 이름만이 전해지는 대 현자 제프카 크레알의 저서인 '공간도약의 가능성에 대한 고찰 - 시간과 공간의 상치성' 이라는 곳에 이러한 글이 보인다. 시간과 공간을 서로 완벽히 상치되어 있다. 공간을 시간으로 미분하면, 순간이라는 시간과 함께 존재하는 아주 작은 단위의 공간이 남게 된다.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건, 그렇지 않은 것이건, 그것들은 단 한순간도 정지해 있지 않다. 바람이 불고, 먼지가 날리며, 또한, 생물들은 숨을 쉬고, 운동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으로 미분한 그 짧은 시간동안의 공간 하나,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시간 하나하나에 따라 공간이 각각 하나씩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공간과 시간의 상치성이다. 하나의 시간은 하나의 공간을 가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은, 각각의 순서에 따른 시간에 해당하는 공간의 배치이다. 이러한 것을 토대로 신화시대나 아라하시 시대의 역사책에 종종 언급되는 워프라는 공간 도약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그것의 가능성을 약간이나마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중략.... 내가 생각하는 워프라는 것은, A라는 시간에 존재하는 공간의 한 부분을, 그 바로 다음 시간인 B라는 시간에 연관되어 있는 공간의 다른 부분에 연결시키는 것이다. 순간이동이 아닌 공간의 왜곡을 이용한 미시이동이다. ... 중략.... 하지만 이러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몇 가지 난점을 해결해야만 한다. 바로, 미시공간 사이의 인과의 고리를 억지로 비틀어 의도하는 곳으로 연결해야 하는 것이 이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정말이지 막대한 어떠한 힘이 필요하다. ...하략.... 이 제프카 크레알이라는 현자는, 마법이 실전 되었던 휴메시아 세기 때에도 마법을 사용했다는 일설이 있는 사람으로, 신화시대 및 아라하시 시대의 신비학(마법이나 신들, 정령 등의 신비한 존재들을 다루는 학문. 휴메시아때 크게 흥했었고, 하나 둘 실재함이 밝혀지면서 마법학, 신학, 등으로 미분화된다.)에 대한 연구를 했던 사람이다. 아무튼 그의 이 학설에서도 밝혔듯이, 워프라는 기술은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니다. 아무리 정신력의 증폭작용인 마법이 있다 하더라도 무리다. 이러한 이유로 일곱 대륙 안에는 워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정령과 마족들이 행하는 워프와 비슷한 순간이동이 있을 뿐이다. 란테르트 역시 워프에 대해서는 말로만 들었을 뿐, 실재로 워프게이트를 통과한 것이 지난번 일곱 대륙에서 이곳으로 넘어올 때, 그때 한 번뿐이었다. 란테르트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수면과 같이 찰랑이는 푸른색의 공간의 단면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어디에 꼭꼭 감추어 놓았는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긴, 워낙 나무가 거대하다보니 어디 구석에 만들어 놓으면 찾으려야 찾을 수도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엘라인의 뒤를 쫓던 란테르트는 오래지 않아 그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엘라인은 나무 둥치가 있는 곳 가까이 까지 걸음을 걷더니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란테르트는 순간 이 엘프가 설마 게이트의 위치를 잊어 먹은 것은 아니야? 라는 생각을 했으나,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노르우드도 멀쩡한 것 같군. 으이구.... 그 키나...." 엘라인은 아마도 이 나무에 이상이 없는지를 살피기 위해 잠시 두리번거린 모양이었다. 투덜거리는 모양을 보니, 키나가 북쪽 숲까지 자신에게 떠맡긴 것이 꽤나 성가신 모양이었다. "두 숲이나 관리하고 있으려니.... 인간 세상에 놀러나갈 시간이 줄어들잖아.... 쳇...." 왠지 책임감이나, 의무감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 한마디를 내뱉은 엘라인은 이내 란테르트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자, 이것이 북쪽 숲의 중심에 위치한 북쪽의 나무, 노르우드이다. 가엘프 님이 친히 창조하신 나무이지." 이렇게 말하며 엘라인은 조용히 나무를 쓰다듬었다. 얼마나 오랜 나무인지는 모른다.... 흡사....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무언가처럼....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려 나무는 꿈틀거린다. 피부.... 오랜 나이를 말해주듯 거칠거칠한.... 그러나 결코 악독한 늙은이의 그것은 아니다. 깊게 패인 주름 하나하나에 미소를 담고 있는.... 조그마한, 자신의 100분의 1도 살지 못하는 미물들까지 어깨에 앉아 재잘거리는 것을 허용해주는 그러한 주름을 가지고 있다. 이 나무는.... 종종,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의 틈새를 비집고, 아직은 낮의 뜨거운 햇살이 흘러내린다. 그럴 때마다, 나무에 드리워진 그늘에는 환한 빛의 구멍이 뚫려 버리고.... 빛과 그림자라는 희고 검은 색에 의해, 나무의 주름은 더더욱 깊이 패인다. 이러한 모습을, 엘라인은 즐기듯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의.... 인간 세상에 '놀러' 나갈 수 없음에 투덜거리던 그의 모습 은.... 지금 이 순간만은 결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눈매는 조용한 빛을 띄고 있었고, 약간의 조소 섞인 미소가 어려있던 입가 역시 그러한 기색을 완전히 지웠다. 이윽고 엘라인이 입을 열었다. "이 나무 자체가 워프 게이트이며, 워프 게이트의 동력원이다." 란테르트는 그의 말에 약간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있던 곳에서 이곳으로 올 때에 보았던 것과는 다르군요...." 엘라인은 살짝 미소지었다. "당연하지 않느냐? 이 나무는 가엘프님꼐서 만든 것이고.... 그 게이트는 그분이 만드신 것이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것들의 위대한 왕인 시온 님께서.... 그분의 위프게이트야말로 궁극의 것. 공간을 뒤틀어 서로 연결시켜 놓은 것이다. 하지만, 이 게이트의 경우에는, 에너지를 모아 일순간 동안만 공간을 뒤틀 수 있을 뿐이다."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엘라인은 잠시 그 모습을 보다 뒤이어 세이피나에게 입을 열었다. "너희 땅의 워프게이트 역시 이 정도의 동력원은 필요하겠지?" 그의 이 말에 세이피나는 순간 당황했다. 돌발사태.... 왜 이 순간에 대화가 이 방향으로 튀어 나가는 것인가? 당황한 것은 란테르트도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는 숲의 주인인 그가 세이피나가 마족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는 가도 의아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 급한 불을 먼저 끄고 보아야 하니.... "저희 땅에는 워프게이트 같은 것은 없습니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동시에 전언을 보냈다. 그 신전의 사제가 자신의 전언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이 엘라인이라는 엘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 그녀가 마족이라는 것은.... 제게는 비밀입니다.] 엘라인은 란테르트의 전언을 들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일순 이해할 수 없었다. 알고 있으면서 비밀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엘라인이 물었고 란테르트는 약간 멋쩍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는 제게 마족이라는 것을 숨기고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제 친구의 수하인데, 아마도 그가 제게 붙여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사정상 정체를 감추고 있고.... 저도 그냥 모르는 척 있으니.... 엘라인 님께서도 그녀에 정체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 주십시오.] 엘라인은 란테르트의 이런 대답을 듣고는 잠시동안 대꾸가 없었다. 란테르트는 그에게서 대답이 업자 잠시 당황해 하며 그의 표정을 살폈으나, 결코 화가 나거나 한 듯은 보이지 않았다. 엘라인은 란테르트의 대답을 듣는 순간.... 웃음이 터져나왔다. 왠지, 이 두 사람의 관계가 굉장히 재미있게 느껴졌다. 물론, 지금까지 말이 없는 것도 그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서였다. 웃을 수는 없었다. 전언이라는 것은 남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웃어 버리면.... 일단, 스스로가 바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엘라인은 간신히 웃음을 참아낸 후 란테르트에게 전언을 보냈다. [아주 재미있는 놀이를 하고 있구나.... 나도 나중에 한 번 해 보아야 겠다. 아무튼.... 네 말대로 해주지.] 뒤이어 엘라인은 입으로 두 사람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럼, 워프게이트를 열겠다.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라." 엘라인은 이렇게 말하며 잠시 두 손을 모았다. 엘라인이 손으로 마법의 인을 만들고, 두 눈은 반쯤 감은 채 입속으로 나직이 몇 마디 주문을 외우자 돌연 나무 전체에서 은은한 청색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흡사, 사파이어를 곱게 갈아 햇빛에 잘 반사되는 각도로 흩뿌리기라도 하는 듯 한 모습이다. 뒤이어 바닥이 빛나기 시작했다. 나무를 포함한 나무의 가장 바깥쪽 가지가 위치하는 곳까지, 둥근 원모양의 공간 전체가 엷은 빛을 내뿜었다. "지금이다." 엘라인은 이렇게 말하며 잠시 언제나의 미소를 지었고, 이내 란테르트가 서 있던 곳과 세이피나가 서 있던 곳, 그리고 엘라인이 서 있던 곳 이 세군대의 바닥에서 조금도 눈이 부시지 않는 흰빛이 쏟아져 나오며 세 사람을 각각 휘감았다. 그리고는.... 흡사 하늘을 꿰뚫을 듯한 빛의 기둥이 솟아났다. 천장과 지저를 잇는 흰빛의 찬란한 기둥이.... 24. 가엘프 엘라피나. 그리고.... 13살, 17살, 25살!! "에구구.... 힘들어라...." 신전. 꽤나 거대한 곳이었다. 무릇 신전이라는 곳은 신을 모시는 곳으로.... 그 규모가 장대함은 필연적이다. 신성과 위엄은 크기에서 나오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이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신을 그럴 듯 하게 꾸미는데 이용하기 위한 수단이다. 좋게 말하면, 권위를 심는 작업이고, 나쁘게 말하면 상술이다. 하지만, 신전은 실재로도 거대할 필요가 있다. 그 신전에 실제로 신이 살기라도 할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일단, 신이라는 존재는, 필요이상으로 강한 존재이다. 만약 신이 신 스스로가 속한 세상에 존재할 경우에는, 인간이 이 세 번째 땅에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금의 문제도 생기지 않지만, 이 거대한 힘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가 자신이 속한 땅 이외의 곳에서 살려면 보통 큰 일이 아니다. 중력을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물론, 중력이라는 것은 아직 이 세계의 인간들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지만, 아무튼, 거대한 중력을 가진 존재가 있는 주위는 공간의 왜곡이 일어난다. 이와 비슷한 원리로,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 근처는 물리, 마법, 정신적으로 공간의 왜곡이 일어난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첫째가 바로, 스스로 힘을 감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그 힘을 막을 어떠한 공간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전자의 것은, 언제나 힘을 사용하고 있어야 하기에.... 또 다른 공간의 왜곡을 불러올 수 있어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신전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이를 차단하는 것이다. "세트, 일 다 끝났어?" 방금, 에구구 하는 힘들다는 탄성(?)을 내뱉은 소녀는 엘프였다. 나이는.... 일단 키로는 16, 7세쯤으로 보였지만, 몸매는 지지부진, 13, 4세가 고작이었다. 얼굴은 동글동글한 눈매와 더불어 전체적으로 귀엽다는 느낌이 강했으나, 결코 어려보이지는 않았고, 이 모두를 종합한 그녀의 추정연령은 18세!!정도면 적당할 듯 보였다. 물론 발육이 부족한 18세 이다. 화려한 빛을 내는 금발과 연한 녹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엉치까지 자란 머리칼을 어깨부분에서 한차례 묶고 있었다. 그 소녀는 세트라는 역시 소녀에게 이렇게 물었다. 세트는 연한 녹색 머리칼을 가진 역시 18세쯤 되어 보이는 소녀였는데, 방금의 귀엽고 발랄하게 생긴 금발의 소녀와는 달리 몹시 조용하고 차분하게 생긴 것이 그녀가 속한 종족다웠다. 이 두 소녀는 모두 엘프였다. 그리고 그녀들이 하는 일은.... 간편한 복장과 더불어 앞치마를 두른 채, 그리고 머리에는 삼각 수건을 질끈 동여맨 채.... 이러한 복장으로 할 일이라고는 손에 든 먼지떨이로 신전 내부를 청소하는 것 외에는 없을 것이다. 금발머리의 엘프 소녀의 물음에 세트라는 소녀는 살짝 웃으며 답했다. "예. 티나언니." 티나.... 티나라고 불리운 소녀는 세트의 대답에 두 팔을 좌우로 쫙 벌리며 기지개를 폈다. "우앙~~~ 내일은 누구지?" "제르밀라 차례 에요.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제르밀라가 언니를 도와 신전 청소를 하게 될 꺼 에요." 세트라는 소녀는 상냥한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고, 티나는 기지개를 다 편 후 약간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잉.... 그나저나.... 어째서 가엘프님은.... 분명 내 25번째 생일날 청소를 끝내게 해 주신다고 하구선.... 벌써 두 달이 넘게 지났는 데...." 그녀의 말에 세트는 킥킥 하고 한차례 웃었다. "하긴.... 벌써 5년 동안이나 하루도 쉬지 못한 채 청소를 했으니.... 지겹기도 하실 꺼 에요." 이렇게 말한 후 세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가엘프 님이 티나 언니의 생일때 말씀 하셨잖아요. 오늘 특별한 손님이 온다고.... 오늘이면 티나언니는 가엘프 님이 막아도 스스로 신전을 뛰쳐나갈 것이라고. 그래서 미리 벌을 주시는 거라던가?...." 세트의 말에 티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우씨.... 도대체 가엘프 님은 나 엘프그란가문의 장녀 모라이티나 엘 엘프그란을 왜 그렇게 못 믿으시는 걸까? 물론, 그 당시는 끓어오르는 혈기를 참지 못하고 가엘프 님의 레이요니르를 빌려.... 잠시 사악한 무리를 응징하고 돌아왔기에...." 모라이티나.... 역시 그녀였다. 몸매와 키, 그리고 얼굴의 부조화가 여전한.... 그리고, 인간 세상에 무단으로, 그것도 가엘프의 무기를 몰래 가지고 나간 죄로.... 5년간 신전청소라는 벌을 받은 가련한(?)소녀(??).... 아니, 아가씨. 모라이티나의 말을 끊으며 세트가 말했다. "사악한 무리를 응징해요? 레이요니르를 빌려요? 어 제가 들어온 이야기와는 다르네요~~ 레이요니르를 훔쳐 가지고 인간 세상에 나가서, 마물 몇 마리와 마족 한 존재를 죽이고는, 인간과 마족과 어울려 이곳 저곳을 놀러 다녔다던데~~!!" 세트는 이렇게 말하며 꺄르르 한차례 웃었고, 모라이티나는 발끈 성을 내며 세트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세트는 혀를 한차례 낼름 하고는 그대로 달아났고, 모라이티나는 "거기 서!"라는 전형적인 대사를 외치며 그런 그녀를 쫓았다. 사실, 모라이티나에게도, 그리고 세트에게도 이러한 행동은 늘상 있는 장난에 불과했다. 모라이티나는 5년전 집에 돌아와 그다지 혼 같은 것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 어른들로부터 칭찬까지 들었다. 용기가 가상하다,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하다니 대단하다, 등등을 말이다. 가엘프 역시 혼을 내지는 않았다. 다만 온화한 미소와 온화한 목소리로 신전청소를 벌로 내렸을 뿐이다. 신전청소는 그다지 가혹한 벌이 아니다. 일단, 20세가 되는 모든 엘프는 1년간 신전 안에서 봉사를 해야 하니.... 모라이티나가 받은 벌은 실재로는 이제 4년을 조금 넘겼을 뿐이다. 그러한 것을 떠나, 하루 서너 시간씩 신전에서 봉사를 하는 것은 비록 성가시긴 하지만, 힘들지 까지는 않았다. 만약, 모라이티나가 한 행동이 중죄에 해당하는 것이고, 또 그에 대해 진짜 벌을 받았더라면 아무리 세트라도 그 일로 그녀를 놀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장난 반으로 시작한 신전 안의 추격전은 탕탕 하는 발걸음소리를 내며 조용하던 신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어느 방향인지도 가늠하지 않은 채 무조건 치달리는 세트, 그리고 6살이나 위임에도 그런 그녀를 쫓아 정신없이 달리는 모라이티나.... 그러던 중, 돌연 세트가 걸음을 멈추었고, 그녀 뒤를 바짝 쫓던 모라이티나가 채 걸음을 멈추지 못한 채 세트와 충돌했다. 둘은 우당탕 바닥에 나뒹굴었고, 아야, 하는 비명을 내지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뭐야? 세트.... 그렇게 갑자기 멈추면 어떻게 해?" 모라이티나는 은근한 통증이 전해져 오는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책했고, 세트라는 엘프는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티나 언니.... 그보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세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잠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닌게 아니라 은은히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렇네...." 그녀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마법력을 움직여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려 했다. 세트는 그런 모라이티나의 모습을 눈 여겨 바라보았다. 그란 부족.... 아니, 보통 엘프 전체를 통틀어 20위안에 꼽힐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이 소녀 같은 언니의 모습을.... "앗~ 엘라인 오빠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엥? 마족? 이상하다.... 그리고.... 이.... 이 사람은?.... 서.... 설마?" 모라이티나는 놀라며 잠시 말을 멈추었고, 이내 정신을 더 집중해 마법을 운용했다. "하지만.... 이렇게 강할 리가.... 아니.... 맞아.... 분명 그야!" 세트는 이상하게 주절거리는 모라이티나의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멍하기로는 모라이티나의 표정이 한수 위였다. 두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 있던 그녀는 가능한 한의 멍한 표정을 잠시동안 짓고 있다가, 얼굴에 홍조를 띄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세트~~!! 뒷마무리를 부탁해!"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외치며 워프게이트가 있는 쪽으로 있는 힘껏 달렸고, 세트라는 엘프소녀는 잠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잠시 후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는데.... "에! 그러고 보니.... 뒷정리를 나 혼자 하게 되었잖아!! 우.... 티나언니.... 이건 분명.... 속임수야!!" 하지만, 이내 살짝 미소를 짓는 그녀였다. 가장 존경하는(?) 언니의 분부인데.... 따르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모라이티나는 달렸다. 신전 안에서 달리는 것이 불경인지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또한 그것을 진작부터 어긴 것이 그녀였다. 조용하던 엘프사회에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활기를 불어넣은 아이가 바로 모라이티나이다. 이미 4살 때, 가엘프의 신전에 찾아 들어가 라피나를 만났다. "언니, 언니는 누군데 여기 살아요?" 이것이 모라이티나가 처음으로 자신의 신을 만났을 때 물은 말이었다. 그리고 8살 때, 이미 네 숲의 주인을 모두 만났다. 물론, 북쪽 숲의 키나는 당시 인간 세상에 나가 있어 만날 수 없었지만, 북쪽 나무, 노르우드에는 이미 발을 들여놓았다. 아무튼 그때 이미 서쪽 숲의 주인인 엘라인은 모라이티나에게 오빠라고 불리웠고, 동쪽 숲의 주인인 메이헬은 까마득히 어린 그녀에게 언니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자상하고 또 조용한 남쪽 숲의 주인 레베로스 역시 오빠라 불리울 뻔했으나, 간신히 그것만은 피했다. 대신.... 아저씨라는 더더욱 가혹한 이름을 듣게 되었는데.... 이제는 다행히 레베로스님, 이라는 호칭으로 타협을 보았다. 그 후, 모라이티나가 9살 때는 2000휴하(1휴하=약 1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테미시아의 신전에 발을 들여놓았고, 10살 때는, 그렇게 가지 말라고 부단히 말렸던 수룡의 호수에까지 발을 들여놓았다. 그렇게 12살이 되자.... 모라이티나가 발을 대지 않은 엘프의 땅은 존재치 않게 되었고, 급기야 19살 되던 해에는 다른 대륙에까지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수명이 1500년이나 되는 이 엘프의 말괄량이 아가씨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할 지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모라이티나는 이윽고 그 세사람과 마주쳤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달려온 덕에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느라 잠시동안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서 있었다. 보였다.... 그가.... 모라이티나는 꽤 오랜 시간동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힘껏 달려 란테르트에게 달려들었다. 목을 꼭 껴안으며 그에게 매달렸다. "란테르트~~~~!!!" 란테르트는 자신의 눈앞에 모라이티나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덥석 자신에게 안기자, 반가운 마음과 더불어 당황스런 마음이 일어 잠시 어쩔지를 몰라했다.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목에 매달린 채, 그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고, 란테르트는 멍청히 선 채 그런 그녀의 행동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은 그녀를 안아 주는 것이었으나, 란테르트에게는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그는 단지 멍청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억지로 떼어놓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친하다. 그때 엘라인이 입을 열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그보다, 이 서쪽 숲의 주인보다 란테르트 이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거냐?" 모라이티나는 그런 그의 말에 란테르트의 목에 매달린 채로 혓바닥을 한차례 낼름거렸다. "핏!, 매일 매일 날 데리고 장난만 치면서요 뭘~" 이렇게 말하며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에게 말했다. "엘라인 오빠를 조심하세요. 매일 매일 심심하다면서 장난만 쳐요. 전에는 한 번, 황금 사과가 열리는 산에 데려간다면서, 산 속에서 나를 떼 놓고 어디로 숨어버려 반나절이나 헤매고 다녔었어요. 그리고는 한참 후에, 사과 몇 개를 따 가지고 와서는 내 앞에 내놓으면서 하는 말이, 어, 황금사과는 누가 다 따갔나 봐. 이거나 먹어. 하는 거 있죠?"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엘라인에게 혓바닥을 낼름 했고, 이내 란테르트의 목을 감았던 팔을 풀며 바닥에 폴짝 뛰어내렸다. "그보다 웬일이에요? 이곳까지? 역시 티나를 만나러 온 거죠? 엇, 그리고 이 얼굴의 상처는 뭐예요? 아~ 에라브레랑 부부싸움 했군요! 역시 대단한 사람들이야!! 검을 들고 부부싸움을!!"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의 뺨에 난 상처를 한차례 만져보았다. "쿡! 꽤 오래된 상처네요? 이건 이 티나도 치료 못해요. 그보다, 건강하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표정은 왜 이렇게 굳어 있어요? 아~! 이 브로치!! 아직도 가지고 있네요!! 역시 란테르트는 좋은 사람이에요!!" 모라이티나는 그 동안하고 싶은 말을 다 하려는 듯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마지막 말을 하면서 란테르트의 가방에 매달려 있는, 언젠가 자신이 선물했던(?) 나비모양 브로치를 잠시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들어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이카르트도 잘 있죠? 트레시아 아줌마야 원래 잘 있을 꺼고.... 별로 걱정도 안되지만.... 아, 그런데 왜 에라브레는 안 왔어요? 음.... 혹시 또 부부싸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음.... 음...." 모라이티나는 잠시 이렇게 중얼거리며 골똘히 생각을 했다. 란테르트의 표정을 통해 알아보려 했지만, 목석 같은 그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모라이티나는 잠시 란테르트의 예전과는 다른 얼굴빛에서 약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으나, 일단 생각하던 것을 마저 했다. "아!! 맞다!!" 모라이티나는 돌연 이렇게 외치며 요상한 표정을 지었다. 장난스러움이 가득 들어있는 표정이었다. "후! 후! 후!~~~ 알았다~~!! 임신한 거죠? 호호호~~!! 배나온 에라브레라~~ 호호호호~"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장난기 섞인 웃음을 웃었다. 하지만....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마지막 말에....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려 버렸다. 아무리 둔한 모라이티나 라지만, 이 순간까지 둔할 수는 없었다. "왜?.... 왜 그래요?.... 뭐.... 무슨일 있어요?" 란테르트는 잠시동안 눈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브에는.... 이제 없어...." 그의 이 짧은 한마디에 모라이티나는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하지만, 약간의 어색한 미소가 남아 있었고, 그것의 힘을 빌려 모라이티나는 다시 한차례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이~ 농담이죠? 란테르트의 농담실력도 많이 늘었네요. 이제는 이카르트 반쯤은 되겠어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대꾸치 않았고.... 모라이티나는 그나마 남아있던 미소를 완전히 지웠다. "그럴 수가.... 어떻게 그럴 수가...." 이 두 마디를 되내이던 모라이티나는 허물어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왜죠?.... 도대체....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란테르트가.... 란테르트가 그녀를 지켜내지 못할 정도의 일이.... 있을 리 없잖아요!"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다 돌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역시 거짓말이죠? 맞아.... 거짓말.... 그런 거죠?" 그녀는 다시 한 번 힘을 내 입가에 미소를 자아냈으나....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에게 미소로 화답하지 못했다. "모라이티나...." "이제 그만해요! 그런 거짓말 재미없어요!! 조금 더 참신한 것으로 해 봐요. 에라브레가 일곱 쌍둥이를 낳았다거나, 아니면, 이제 5살 먹은 란테르트의 아이가 벌써 마법을 쓸 줄 안다 거나.... 그런 재미있는거 있잖아요...."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으며 이렇게 중얼거렸고, 란테르트는 다시 한차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모라이티나...." 모라이티나는 다시 잠시동안 멍하니 있다가 란테르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더욱.... 재미있는 것.... 많잖아요.... 그런데....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런 거짓말을 가지고.... 온 거죠?.... 왜...." 이렇게 말하며, 모라이티나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의 뒷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미안해.... 모두 다 내 잘못이었어...."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품속에서 한참동안 흐느끼다가, 이내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리고.... 괜한 소리해서 미안해요...." 모라이티나는 약간 울먹이는 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이내 란테르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손등으로 슥 눈가에 묻어있는 눈물을 닦아냈고, 이내 다시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다시 만나서 너무 반가워요...."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그녀의 모습을 대견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대꾸했다. "나도...." 뒤이어 란테르트는 세이피나를 소개했다. "이쪽은 세이피나야. 사제이지." 그리고는 뒤이어 전언을 보냈다. [트레시아의 동생이야. 하지만, 마족이라는 것을 감추고 있으니까.... 너도 내색하지 말아 줘.] [전언도 쓸 줄 알아요? 역시 대단해요!! 그보다.... 트레시아의 동생이요?] 모라이티나의 대답에 란테르트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다시 전언을 보냈다. [내 부탁은 들어주겠지?] [물론이죠.]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아티나는 이렇게 답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모라이티나 엘 엘프그란이라고 해요. 가엘프 님의 신전을 돌보고 있는 그란 부족의 족장가문이죠." 세이피나는 그런 모라이티나의 인사를 언제 나와 같은 표정으로 받았다. "사제 세이피나라고 합니다." 모라이티나는 뒤이어 엘라인에게 정식으로 인사했다. "그란 부족의 모라이티나, 서쪽 숲의 주인께 인사드립니다." 머릿속이 차분해 지니, 더 이상 장난을 칠 기분이 아닌 모양이었다. 진지한 이러한 인사에 엘라인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뒤이어 엘라인이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우리는 가엘프 님을 알현하러 간다." 그의 말에 모라이티나가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가엘프라니.... 왜 갑자기 그분을.... "나도 함께 가겠어요." 잠시의 생각 끝에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했다. 엘라인은 모라이티나의 말에 약간 당혹스러운 기색을 띄었다. 그는 이 아가씨가 하겠다, 라고 말한 일에 대해서 지금까지 단 한차례 고개를 가로 저었었다. 하지만, 그것이 고개를 가로저음의 마지막이 되리라고는.... 당시에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엘라인이 '명분상' 이렇게 물었고,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엘프 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엘라인은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관심도 없었고, 함께 가보면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다. 모라이티나를 포함한 네 사람이 가엘프가 기거하는 곳에 도착한 때까지, 시간은 그다지 많이 흐르지 않았다. 일단, 신전이 거대하니, 엄청나니 어쩌고 해 보았자, 나무인 것 같은.... 아니 어쩌면 진짜 나무로 된 '건물'일 뿐이었다. 밖에서 보았을 때의 신전의 모습은 방금도 이야기했듯, 전체적인 느낌이 나무였다. 누가 숲의 정령이 아니라고 이야기 할까봐 걱정되어서 인지.... 온통 엘프는 나무와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나무인 것 같은 것인지... 진짜 나무인지는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건물이다. 새하얀, 너무나도 하얘 밤에도 빛을 낼 것만 같은.... 그러한 곳이다. 겉으로 보기에 삼층쯤 되어 보이는 건물이 한쪽으로 치우쳐 쌓아놓은 케이크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 벽면과 건물 사이사이를 흡사 덩굴과도 같은 나무 줄기가 휘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갈색과 흰빛의 조화란 가히 아름답다라는 수식어 외에는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아서는 결코 이 신전을 나무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흰 신전에 다만 담쟁이 같은 넝쿨이 감겨있는 것 같아 보이니 말이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아니다. 나무는 건물에서 자라고, 건물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단지, 건물을 넝쿨이 휘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넝쿨 자체가 건물과 한 몸이라는 말이다. 이러하니.... 이 신전이 나무인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워프 게이트는 신전 동, 서, 남, 북 네 방향에 각각 하나씩 위치하고 있었다. 아마 그 네 그루의 나무와 연결된 모양이다. 하지만, 그 키가 200여 휴리하나 되는 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워프게이트와 신전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방금전 모라이티나가 달려 온 길이 바로 이 복도였다. 신전 내부는 은은한 흰색을 띄고 있었고, 종종 나무줄기인 듯한 것이 창문 밖으로 늘어져 그 싱싱한 잎을 흔들거리고 있었다. 바람의 정령 디나의 도움을 받아서.... 가엘프의 방은 신전의 3층에 위치하고 있다. 수수한, 하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계단을 올라 막 3층에 오르면 정면에 거대한 빛의 문이 있다. 통상의 문과 같은 나무나 금속제로 된 문이 아닌, 빛의 주렴으로 이루어진 문으로, 눈이 부시지는 않았지만, 문으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하고 있었다. 다섯 사람, 마족, 엘프가 문 앞에 서자, 방안에서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들어오세요." 여성의 목소리였다. 온화하기는 봄의 산들바람 같았고, 부드럽기는 조용한 바람에 살며시 흔들리는 호수와 같았다. 그러한 목소리가 빛의 주렴 저편에서 들려오자 더없이 신비로웠고, 란테르트조차도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역시 이 정도는 되어야 신이 기거하는 곳이다. 모두들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곳은.... 상당히 넓은 방이었다. 반경이 10휴리하는 족히 될 듯한 원형으로 이루어진 이 방의 정 중앙에는 아주 푹신해 보이는 커다란 쿠션이 놓여 있었는데, 몇 개의 조그마한 쿠션과 더불어, 침대인지 소파인지 알 수 없는 모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 세 장소에 세 가지 물건이 놓여 있었다. 만약 가상의 삼각형을, 그 중앙의 소파 혹은 침대를 중심으로 그린다면, 세 가지의 물건은 그 각 꼭지점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란테르트 등이 서 있는 정면 양쪽으로 보이는 것중 오른쪽의 것은 이미 한차례 본 물건으로, 바로 레이요니르 였고, 왼쪽의 것은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경갑과 두 장의 천으로 된 스커트였다. 그리고 정면 뒤쪽으로 보이는 것은 머리장식처럼 보였다. 이것을 중심으로, 방에는 모두 63방향의 창문이 뚫려 있었다. 사방에 각각 16개씩 모두 64개가 뚫려야만 맞을 것 같았으나, 하나는 방금 들어온 빛의 주렴이 대신하고 있었다. 창문은 천장 가까운 곳에서 사람의 허리쯤 되는 곳까지 길게 나 있었는데, 그 사이로 이제는 저녁의 그것에 가까운 지친 햇살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이 긴 창문은 둘로 나뉘어 위쪽은 수수한 무늬의 스테인드 글래스, 그리고 아래쪽은 아무것도 없는 빈 창문이다. 가엘프.... 방금 전의 목소리의 주인공인 이 존재는.... 63개의 창문중 정동에 위치한 것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문이 정 남쪽에 있었으니, 가엘프가 서 있는 곳은 지금 일행의 오른쪽 앞인 것이다. 가엘프의 복장은 흡사 흰 천을 대강 몸에 감아놓은 듯 보였다. 하지만 결코 대강은 아니었는지, 밖으로 노출된 피부는 겨우 왼쪽의 어깨에서 팔, 그리고 오른쪽의 손목 이하, 덧붙여 목둘레에서 얼굴 정도였다. 발마저도 길게 흘러 내려온 흰빛의 천에 가려져 있었다. 드러난 피부는 티하나 없는 순백의 것이었다. 순백의 얼굴과 온화한 미소, 은발에 가까운 엷은 녹색의 머리칼 그리고 역시 엷은 녹색을 띄고 있는 눈동자.... 바라보고 있으면 이것 외에는 그다지 설명할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뭐라 할까.... 바라볼 수는 있되, 그것을 머리 속에 형상화 할 수 없다는 설명이 아마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녀는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자 창문 쪽으로 향하고 있던 고개를 돌려 일행을 바라보았다. "엘라인경....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돌아가 보셔도 됩니다." 먼저, 그녀는 엘라인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엘라인은 남아서 가엘프와 란테르트의 대화를 듣고 싶었으나, 이미 그녀의 입에서 이러한 말이 떨어졌으니,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 무릎을 꿇어 한차례 절을 한 후 나갔다. 물론, 이러한 인사를 잊지는 않았다. "주인의 명을 쫓는 것은, 기사의 도리입니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가엘프는 뒤이어 모라이티나에게 말했다. "오늘로서 모라이티나에게 내린 벌은 끝입니다. 집에 돌아가 두 사람의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십시오." 그녀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가엘프 님이 말씀하셨던 손님이 란테르트였던 것인가요? 그렇다면 저는 정말 가엘프 님이 허락하지 않으셔도 신전을 뛰쳐나갔을 꺼 에요. 아, 그것보다, 란테르트는 좋은 사람이니까 잘 대해 주세요." 모라이티나의 이러한 말에 가엘프는 온화한 미소로 대꾸했고, 모라이티나는 뒤이어 란테르트에게 말했다. "가엘프 님 말 들었죠? 가엘프 님과의 일을 마친 후 우리 집에 꼭 와요!" 이렇게 말하며 모라이티나는 뒤돌아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몇 걸음을 채 걷지 않아 다시 몸을 돌렸다. "아참.... 가엘프 님께 인사를 하지 않았군요. 그대의 뜻은 곧 우리 숲의 령들의 뜻입니다."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했고, 가엘프는 다시 한차례 미소지어 주었다. 이렇게 졸지에 두 사람을 보내고 나니, 란테르트는 약간 기분이 이상했다. 그때, 가엘프가 한쪽을 가리켰다. "앉으십시오. 두 분." 란테르트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어느 샌가 앉을만한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흡사 다른 벽과 바닥의 일부인 듯 바닥과 완전히 붙어있는 흰색의 의자였다. 그러고 보니.... 조금전 까지만 해도 의자 같은 것은 없는 듯 했었다.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을 쫓아 자리에 앉았다. 일단은 부탁을 하기 위해 왔으니.... 그녀의 말을 따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세이피나 역시 군말 않고 란테르트 곁에 위치한 의자 곁으로 다가갔다. 뒤이어 가엘프는 그 긴치마를 이끌고 란테르트를 향해 다가왔고, 이내 란테르트의 앞에 의자를 만들어 그곳에 잘짝 앉았고, 이내 탁자와 차주전자, 찻잔 등을 차례대로 만들어 냈다. 이러한 모든 창조는 극히 자연스러워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만 같았다. 란테르트는 이러한 모습에 눈이 어찔함을 느꼈다. 이것이 신이다.... 단지 강한 존재가 아닌.... 모든 것을 조화롭게 하며.... 그 틈바구니에서 존재를 이끌어내고, 그 틈바구니로 존재를 사라지게 하는 자.... "손님이 찾아 오셨으니, 차를 대접함이 당연하겠지요?" 가엘프는 이렇게 말하며 각 잔에 손수 차를 따랐다. 향긋한 풀내음이 방안 가득 퍼지는 느낌이었다. 이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는, 가엘프라고 불리는 존재로 이름은 엘라피나라고 합니다. 그저 라피나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란테르트 님과, 사제 세이피나 님이시지요?" 가엘프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고, 란테르트와 세이피나는 그저 멍하니 고개를 한 차례씩 끄덕였다. 아, 대답을 한 존재가 하나 있었으니.... 언제나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아르에 라는 새였다. "종~!!" 아르에는 흡사 자신을 잊은 것에 대해 책하기라도 하는 듯 이렇게 한차례 울었고, 엘라피나는 살짝 미소지으며 사과했다. "아, 미안합니다. 세이피나님 어깨 위의 새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그녀의 물음에 세이피나는 간신히, "아르에 라고 합니다...." 라고 답했다. 왜인지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위압감이랄까? 단지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느낌이었다. 이러한 것은 란테르트 역시 비슷했다. 단지 온화이 웃을 뿐인 그녀였지만, 함부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엘라피나는 아르에를 향해서도 한차례 미소를 지어 주었고, 아르에는 종, 하며 그녀의 눈인사를 받아 주었다. 세이피나는 순간 아르에가 정말 하급 마족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태연스러울 수 있는지.... 물론, 단지 둔하기 때문이겠지만.... "그럼.... 이제 본론을 이야기 해 볼까요?" 엘라피나는 이렇게 말하며 손을 약간 들어올렸다. 얇은, 하지만, 가늘다, 혹은 앙상하다 보다는 섬세하다 라는 느낌이 앞서는 손이었다. 그녀가 손을 들어올리자 마자 손위에 흰빛이 아른 거렸고, 이윽고 그녀의 손에 한가지 물건이 생겨났다. 길이가 1.5 휴리하나 되는 커다란 활이었다. 물론, 시위는 없다. 왜냐하면.... 레이요니르는 영혼의 시위로 영혼의 화살을 쏘아보내는 활이다. 엘라피나는 잠시 활을 바라보았다. 흡사.... 사연이 많은 듯.... 활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몹시 깊어 보였다. "그분께서.... 친히 내려주신 무기입니다. 가 엘핀라즈.... 그분의 기사들인 고결한 자들.... 엘핀라즈라는 존재들을 다스리는 존재.... 그 가 엘핀라즈라는 이름을 얻은 라피나에게 내린 빛, 레이요니르입니다." 엘.... 엘 이라는 말은 신화시대의 말로 고결한, 혹은 고결, 등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라 라는 것은 영혼, 혹은 영혼을 가진 존재 등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엘핀라즈라는 말은 엘, 피앙, 라즈(El, Fian, Laaze) 라는 각각의 단어를 합쳐 놓은 것으로, 영혼을 가진 존재들을 위한 고결 이라는 말로 직역할 수 있다. 엘프의 어원이기도 하다. 엘라피나의 엘 역시 그러한 의미로, 고결한 라피나라는 뜻이다. 엘라피나는 이렇게 한마디 한 후 뒤이어 란테르트에게 레이요니르를 건넸다. "그렇기 때문에.... 엘핀라즈가 아닌 존재들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엘라피나는 란테르트에게 한 번 시험해 보라는 표정을 지었고, 란테르트는 활을 가로로 놓은 채 전에 모라이티나가 했던 대로 시위가 있을 만한 장소에 손을 가져가 보다. 하지만, 빛의 시위는 생겨나지 않았다. 란테르트는 약간의 실망하는 표정을 지으며 활을 다시 엘라피나에게 건넸다. 이후 잠시동안.... 란테르트도, 엘라피나도, 세이피나도, 그리고 그 아르에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가장 먼저 그 정막을 깨뜨린 것은 란테르트였다. "한가지.... 한가지 묻겠습니다. 과연.... 제가 찾는 그러한 물건이 존재할까요?" 란테르트의 물음에 엘라피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 그녀의 표정으로는 그러한 것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다. "나크젤리온은 신입니다. 인간이 과연 그를 죽일 수 있을까요?" 이윽고 그녀의 입이 열렸고....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는 이러한 말이 나왔다. 절망이다.... 란테르트는 두 어깨에 힘이 빠짐을 느꼈다. "그렇다면.... 불가능한 것입니까?" 엘라피나가 되물었다. "당신은 인간입니까?"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인간이냐니? "물론입니다.... 저는.... 인간입니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엘라피나를 바라보았다. 여전 그녀는 미소짓고 있었다. 입가의 그 온화한 미소는 언제까지라도, 말 그대로 영원히 남아있기를 약속이라도 한 듯 했다. "인간.... 그렇습니다.... 당신은 인간입니다. 그리고 나크젤리온은 신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나크젤리온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단정적으로 입을 열었고,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란테르트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이렇게 물었으나.... 엘라피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뜸금없이 이러한 이야기를 했다. "흰 빛.... 그것은 허무의 색입니다. 허상을 이루는 모든 빛들이.... 다시 하나가 되며 이루어지는 색.... 그리고 검은 빛.... 그것은 혼돈의 색입니다. 현실을 이루는 모든 빛들이 모여 하나가 됨에 이루어지는 색...." 엘라피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며 잠시 말을 쉬었다 입을 열었다. "흰빛은.... 허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나, 입을 열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검은빛은 혼돈.... 어떠한 것이라도....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혼돈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혼돈.... 이라니요?" 엘라피나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혼돈의 아버지이신.... 엘디마이어의 천사들.... 지금은 테미시아 님으로부터 버림받은 타천사들.... 위대한 영원의 존재들, 델 라그나즈.... 우리 엘핀라즈와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존재들.... 그리고.... 지상으로 타하여 위대한 생물이 되었으니.... 델 라군...." "드래곤....." 엘라피나의 말에 이렇게 중얼거린 것은.... 다름 아닌 세이피나였다. 신화시대의 이야기, 신화시대의 말.... 본래는 모두들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로, 인간의 경우에는 거의 아는바가 없었지만, 세이피나는 아니었다. 델(Dell)은 신화시대의 말로 위대한 이다. 그리고, 그나(Gna)는 영원. 델 라그나즈는, 위대한 영원의 영혼들이라는 말이다. 드래곤의 어원도 바로 이 델 라그나즈이다. 엘핀라즈가 엘프의 어원인 것과 같은 이치였다. 세이피나는 이 사실까지 알고 있었기에, 엘라피나의 이 짧은 몇 마디 말로 드래곤을 떠올렸고, 그녀가 막 말을 마침에 자신도 모르게 그 존재의 이름을 이야기 한 것이었다. 란테르트는 세이피나의 드래곤이라는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어디로 가야 드래곤을 만날 수 있는지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는 이내, 테미시아의 신전에 있는 드래곤을 떠올렸다. "테미시아 님의 신전에 있는.... 그 골드 드래곤을 찾아가면 되겠습니까?" 란테르트가 물었고, 엘라피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여전 그녀의 입가는 미소를 잃은 채였다. "마이다티아.... 그는 엘핀라즈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 쉬며 이야기했다. "이 신전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수룡의 호수라는 이름의 호수가 있습니다. 그곳에.... 과거 델 라그나즈의 이대 천사장 중 한 명이 기거하고 있습니다." 엘라피나는 이렇게 말한 후, 예의 그 온화한 미소를 다시 지었다. "당신이 나가려 하는 길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원한다면, 지금 다시 일곱 대륙으로 돌려보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다면, 새로운 생이 열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 제가 제 힘으로 열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제가 비록 전능한 존재는 아니지만.... 당신 한 명의 행복 정도는 보장해 드릴 수 있습니다." 엘라피나는 의외의 시점에 의외의 제의를 했다. 란테르트는 순간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의아스러워 했다. 행복을 보장해 준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리고.... 복수를 포기하라니.... 어떻게 그것이 행복과 연결될 수 있는가? 기억을 지우기라도 하겠다는 이야기인가? 우습다.... 이제 와서? 왜.... 이제 와서....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의 제의에 고개를 가로 저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길을 가르쳐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란테르트가 인사를 할 때 세이피나도 함께 몸을 일으켰고, 엘라피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샌가 의자와 다른 이러한 것들은 모습을 감추었다. 엘라피나는 자신의 말에 따르지 않은 란테르트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이제 돌아 가셔도 좋습니다." 란테르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고, 세이피나 역시 엘라피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란테르트와 세이피나, 그리고 그녀 어깨의 아르에는 그대로 몸을 돌려 빛의 주렴을 통과했다. 엘라피나는 그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빛의 주렴에서 사라질 때쯤, 조용히 한숨을 내 쉬었고, 란테르트의 발걸음 소리가 아득히 멀어질 무렵, 천천히 가까이 있는 창가로 다가갔다. "가엾은 분.... 마지막 기회 마저도.... 팽개쳐 버리시는 군요...." 분.... 그녀는 란테르트에게 존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 신전에 있던 황금용 마이다티아 역시 그러했다. "혼돈의 왕의 파편.... 엘리엠이시여.... 지금.... 당신의 한 조각이.... 당신에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당신의 이러한 방법이.... 잔혹하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분은 단지 인간일 뿐입니다...." 그녀의 이 마지막 말은.... 조용한 방안에 쓸쓸히 울려 퍼졌다. 란테르트가 가엘프와 함께 있었던 시간은 고작 30여분밖에 되지 않았다. 겨우 이 30분 동안을 위해 몇천 휴하(1휴하=약 1킬로미터)나 떨어진 이곳까지 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허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나, 그 소득은 결코 작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원하고 있던 정보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가엘프.... 그녀는 신이다. 그런 그녀가 가능하다고 이야기 한 것은.... 분명 가능할 것이다. 드래곤을 찾아.... 그 수룡의 호수라는 곳에 간다면.... 확실히 자신이 원하는 그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사고가 이어지자 돌연 기쁜 마음이 들었다. 왜 기뻐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일이 자신과 가장 친한 이카르트라는 존재와의 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 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복수.... 5년전에 결심한 명분도, 가능성도 없던 그 복수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막 신전을 벗어나며 란테르트는 한차례 고개를 돌려 신전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신전의 모습을 이제서야 처음 보았다. 아름다운 신전의 모습에,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그였다. 반면.... 세이피나는.... 가능하다니.... 그런 건 있을 수 없다. 인간이.... 고작 세 번째 땅의.... 고작 세 번째 땅의 존재 따위가.... 10번째 땅의 법으로 이루어진 나크젤리온을....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위대한 영원의 존재.... 그들이 힘을 빌려준다면? 물론, 지금의 드래곤들의 능력으로는 나크젤리온을 어쩔 수 없다. 용신 카이젤 드라켄조차.... 나크젤리온을 이길 수는 없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거의 불가능 하지만.... 그렇지만.... 그들은 분명 나크젤리온보다 상위의 법으로 존재되어지고 또 움직여지는 존재들이다. 직접 할 수는 없어도.... 방법 정도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이피나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당장 마계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보고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이 중앙대륙의 숲을 벗어나야 하는데.... 당장으로써는 방법이 없다. 란테르트는 약간 들뜬 기분에 몇 걸음 신전 밖으로 나오다가 이러한 복잡한 세이피나의 표정을 발견했고, 이내 들뜬 기분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마족을 곁에 두고, 마족들의 신을 죽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은 지나치다. 그것도, 모르는 마족도 아닌.... 그의 아이가 아닌가? 두 사람이 각각 이러한 생각에 잠겨 신전 밖으로 나올 무렵, 모라이티나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신전 안에서 입고 있던 앞치마는 이미 벗어버렸고, 지금은 간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 벌써 나왔군요!" 모라이티나는 나무 위에서 뛰어 내렸는지, 공중에서 휙 떨어져 착 하고 바닥에 내려서며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을 잘 되었나요?" 모라이티나가 다시 물었고, 란테르트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한차례 슬쩍 끄덕였다. 란테르트의 대답에 모라이티나는 입가에 동그란 미소를 지으며 외치듯 "잘됐어요!" 라고 말했다. 두 손을 마주잡으며, "잘됐어요!" 라고 하는, 조금은 과장된 이런 행동을 다른 사람이 했더라면 다분히 의식적이고, 또 가식적으로까지 보였겠으나, 이 천진한 아가씨는 달랐다. 웃으면 즐거워 보였고, 울면 슬퍼 보였다. 모라이티나는 뒤이어 란테르트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 그럼 어서 집에 가서 저녁을 먹어요! 손님도 오고 해서 특별히 저녁을 만들었어요!" 란테르트는 아직도 약간은 철이 없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다시 한차례 미소를 지었고, 모라이티나는 그런 란테르트의 손을 놓으며 세이피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세이피나도 함께 가요." 세이피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묵묵히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을 뿐이다. 저녁.... 란테르트는 평생 이날 저녁의 식사를 잊지 못할 것이다. "맛있게 드세욧. 호호." 모라이티나의 그 이상한 말투를 전해준 여자.... 모라이티나와 같은 빛깔의 머리칼을 가진 모라이티나의 언니뻘밖에는 보이지 않는 여자.... 그리고.... 모라이티나에게 어머니라 불리우는 여자. 모라이티나와는 달리 귀엽다기 보다는 아름답다는 느낌을 주는 그녀는 지금 식탁 위에 이런 저런 음식들을 차려 놓은 채 란테르트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폭풍이 지난 후의 맑은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푸른 눈동자를 지는 그녀는 얼굴에 어서 먹고 칭찬해욧! 이라는 말을 가득 새겨놓고 란테르트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란테르트는 과연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셀파트씨, 그리고 벨크렛 부인." 란테르트는 식탁 한쪽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는, 20세 이상으로는 보기 힘든 한 남자와, 모라이티나의 어머니를 향해 이렇게 인사했다. 순간, 늙지 않는다는 것이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그다지 좋지 못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 보기에, 모라이티나는 그녀의 아버지인 셀파트와 동갑 정도?.... 그리고 벨크렛은 이 두 소년 소녀들보다 한 두살 쯤 많은 누이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모라이티나에게 동안을 물려준 셀파트는 란테르트의 인사에,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허허, 하는 웃음을 한차례 웃은 후 대꾸했다. "그래, 어서 먹게. 세이피나양도 드십시오." 셀파트는 란테르트에 대한 이야기를 평소 꽤 많이 들었고, 또 그가 모라이티나의 친구이기도 했기에 하대를 했으나, 세이피나의 경우에는 손님으로 대했다. 일단 여기까지는.... 평범한 가족, 물론, 이미 엘프라는 점에 있어서는 평범하지 않았으나, 아무튼 평범한 가족의 저녁식사에 초대받은 두 사람일뿐이었으나.... 란테르트는 눈앞에 있는 그릇에 담겨있는 음식들을 보며 어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흡사 풀을 갈아 놓은 듯한 짙은 풀색의 액체가 한 그릇 떡하니 그의 바로 앞에 놓여 있었고, 그 외에 몇 개의 그릇 위에는 나뭇잎인지 풀잎인지 알 수 없는 몇 가지 풀들이 놓여 있었다. 그나마 먹음직해 보이는 것은 과일 몇 개 정도로.... 란테르트는 우선 용기를 내어 그 과일들을 공략해 보았다. 사실, 이중 요리라고 부를 만한 것은 란테르트의 눈앞에 놓여있는 녹색의 액체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것까지도 어디선가 그냥 모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란테르트는 포크나 스푼조차 없는 이러한 식탁에서 손을 뻗어 눈앞에 놓여있는 바구니의 과일을 하나 들어 올렸다. 탐스러운 붉은빛의 이 말랑말랑한 이 과일은 꽤 맛있을 듯도 했다. 세이피나는 두 손을 모은 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눈앞에 이는 모든 음식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것들을 먹는다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처사이다. 이것들은.... 란테르트의 손이 움직임에 따라, 셀파트씨와 벨크렛 부인의 눈이 그의 손을 따랐다. 그의 반응이 몹시도 기다려지는 모양이었다. 모라이티나는 엄마에게 요리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란테르트의 마중을 나갔다가 돌아왔을 무렵, 차려진 식탁을 보고는 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이건.... 이것들은.... 그런 이유로 모라이티나는 지금 잠자코 고개를 숙인 채 무릎 위에 올려진 손에 불안한 마음을 담아 쉴새없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란테르트가 과일을 한입 베어 물었고.... 란테르트는 하마터면 입에 베어 문 과일을 뱉어낼 뻔했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 지독히 쓰고 또 신 것이, 이건 사람이 먹을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 초롱초롱한 두 남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어찌 이것을 뱉어 버릴 수 있겠는가? 게다가 뭐 무슨 독.... 일지도 모르지만, 아니 그런 것을 내놓을 리는 없으니.... 일단 먹어 두는 수밖에.... 란테르트는 이 쓰고 신 과일을 한입, 두입 베어 물며 안간힘을 다해 미소를 지었다. 최대한도로 맛있다는 표정을 지었고, 어째, 씨마저도 없는 이 과일을 모두 입속으로 삼켰다. 물론, 칭찬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참 독특한 맛의 과일이군요...." 란테르트의 이 말에 벨크렛 부인은 기쁜 표정을 지었고, 셀파트씨도 다행이라는 듯한 얼굴을 했다. "아, 정말 잘 됐어욧!"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군. 많이 들게. 여기 있는 음식 모두가 자네와 이 세이피나 양을 위한 것이네. 사실, 우리 엘프들은 음식은 거의 먹지 않는다네." 물론, 그들로써는 호감을 잔뜩 담은 말들이었으나.... 란테르트의 입장에서는 결코 그렇지 못했다. 음식을 남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세이피나에게 떠넘길 수도 없으니.... 결국은 자기 혼자 모두 처리해야 하지 않는가? 란테르트는 이미 과일에서 쓴맛(!)을 본 터라 이제는 두 번째로 맛있어 보이는 조그마한 꽃잎 같은 것을 몇 장 집어들었다. 침이 꿀꺽 넘어간다. 물론, 맛있을 거 같아서가 아니었다. 이것은.... 몸의 긴장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네 다섯장 정도가 손끝에 잡혔다. 입속에 털어 넣었고.... 입안에 솩 퍼지는 청량한 떫은맛에 식은땀이 한 방울 뺨을 타고 흐른다. 우그적 우그적.... 침을 내기 위해 몇 번 씹었다. 씹을수록 우러나는 그 쓴맛이란.... 그나마 향은 괜찮은 편이었으나.... 아무튼 입가에 고인 침과 더불어 꽃잎을 간신히 삼켰다. 속이 울렁거린다. 하지만.... "하.... 이 꽃잎의 맛도 독특하군요...." 뒤이어 셀파트씨와 벨크렛 부인.... "아, 그래욧?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에욧." "허허.... 그건 저 멀리 남쪽 숲의 경계 근처에 자라는 실나즈라는 꽃으로 몸에 아주 좋은 것이라네." 란테르트는 이제 다시 시선을 눈앞의 녹색 죽으로 돌렸다. 어차피.... 맛있어 보이는 것이 그 모양이니.... 이번에는 가장 끔찍한 것 을 한 번 시험해 보리라.... 의외의 맛이 나올 수도 있다. 스푼이 없었기에 란테르트는 그릇을 들고 그 풀색의 액체를 입안에 조금 흘려 넣었다. 한 모금쯤 입속에 흘러 들어왔을 무렵.... 란테르트는 눈에 빛이 번쩍임을 느꼈고, 동시에 모라이티나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만 먹어요!" 하지만, 이미 입속에 들어온 것을 어쩌랴.... 이 진 녹색의 액체는 그 맛이 과연 일품(?) 이었다. 굉장히 매운맛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란테르트 마저도 입을 다문 채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짜내듯 간신히, "물을.... 가져다.... 주세겠습니까?" 라고 말했고, 모라이티나는 그보다 한발 앞서 물을 가져다 그의 앞에 내어놓았다. 란테르트는 벌컥 벌컥 몇 모금 물을 마셨다. 그러나, 이미 한 번 닳아 오른 입속과 혓바닥은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고, 란테르트는 그래도, 매운맛보다는 쓴맛이 낫겠다 라는 생각에 과일을 하나 입안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어찌 된 것인지 두 음식은 입속에서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각자의 맛을 더더욱 강하게 내기 시작했고, 란테르트는 순간 후회를 하며 다시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 모습에 세이피나는 고개를 깊이 숙인 채 무릎 위의 냅킨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모두들 그녀가 왜 그러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그녀는 지금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하지만 어깨 위의 아르에는 진작부터 종종거리며 신나게 우지 짖고 있었다. 모라이티나는 반쯤 울상이 되어 서둘러 냅킨 몇 장을 더 란테르트에게 전해 주었고, 란테르트는 마음 같아서는 냅킨으로 입 속을 닦아 내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 없어 가능한 한의 느린 동작으로 입주위를 닦아 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모라이티나가 자신의 부모를 향해 외쳤다. "정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이런 것들을 저녁으로 내놓다니 너무했어욧!!" 모라이티나가 이렇게 소리치는 순간, 셀파트는 안색이 약간 굳어지며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았고, 벨크렛 부인은 모라이티나의 외침에 안색이 약간 일그러지며 말했다. 모라이티나는 지금까지 하려는 말을 가슴속에 꾹 쌓아놓고 있었다. 사실, 여기 있는 것들은 먹을 수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란테르트를 말리고 싶었지만.... 마음이 여리디 여린 엄마가 상처를 입을 까봐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란테르트는 몇 잎 먹다가 적당히 물러설 것이고, 그때 가서 자신이 사과를 하면 끝날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왜.... 그러는 거니?" "세상에 누가 저녁으로 약재들을 내와요? 엄마가 한 번 먹어봐욧!" 모라이티나가 다시 외쳤고, 벨크렛 부인은 더더욱 구겨진 얼굴을 하며 노골적인 슬픈 표정을 지었다. "티나야.... 지금 이 엄마한테 화내는 거니? 티나가 지금 엄마한테 화내는 거야?" 이런 그녀의 모습에 란테르트는 꽤나 당황스러웠고, 또 어떻게든 중재를 해야 할 것 같았으나, 입속에 느껴지는 쓰고 시고 떫고 매운맛들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때, 가장(?)인 셀파트가 나섰다. 그는 가장답지 않은 어린 얼굴로, 가장다운 위엄 있는 목소리를 내며, 이도 저도 아닌 이야기를 꺼냈다. "모두들 화내지 말고 차분히 이야기 해. 벨크렛, 슬퍼하지 마오! 이제 티나는 어린아이가 아니오. 이제는 한 개인으로써 우리에게 당당히 이야기 할 수 있다오. 그리고, 티나, 너무 화내지 말거라. 세상일은 결코 화를 낸다고 해결할 수 있지 않단다." 벨크렛은 그렇게 말하는 셀파트의 품에 안기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티나가.... 우리 티나가 이제는 다 컷나봐욧.... 이젠.... 자식을 둥지 밖으로 놔주어야 할 때가 온거에욧.... 흐흑...." 누나 같은 아내를 토닥이며 셀파트가 말했다. "그렇소, 벨크.... 아이가 크면, 둥지는 비좁아 지는 법.... 비록 슬프더라도...." 모라이티나는 그런 엄마 아빠의 모습에 손을 이마에 얹으며 외쳤다. "지금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욧!!!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면 끝날 것 같아요? 내가 이야기했잖아요. 사람들은 조금 더 향긋하고 달고 그러한 음식들을 좋아한다고!!" 그녀의 말에 벨크렛 부인은 남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역시 연기였는지.... 표정에서는 어느새 그늘이 사라져 있었다. "그래! 그래서 가장 쓴 음식들은 빼 놓았지 않니? 게다가, 단 음식들은 건강에 나쁘단다. 독이 있는 것들도 많고." 셀파트도 어느 샌가 그 위로해주는 듯한 표정을 얼굴에서 지운 채 입을 열었다. "티나. 너희 엄마는 지금까지 단 한차례도 인간 세상에 나가 본 적이 없다. 인간들의 음식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그의 말에 모라이티나가 막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이제 간신히 정상을 되찾은 란테르트가 그녀의 말을 막았다. "모라이티나, 그만 둬." 그리고는 이어 두 내외를 향해 말했다. "저녁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입맛에 맞지 않아 더는 먹지 못하겠습니다. 그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란테르트의 말에 벨크렛 부인은 상냥히 웃으며 말했다. "아뇨. 제가 더 죄송해욧. 맛있는 식사를 준비했어야 했는데...."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여자였다. 모라이티나가 왜 그렇게 알 수 없는 성격이 되어버렸는지.... 란테르트는 이 저녁 한때를 통해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가 대꾸했다. "아닙니다.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 왔으니.... 아무튼, 저녁 감사했습니다." 벨크렛은 한차례 미소를 지었고, 셀파트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내일 아침은 먹을 만한 것으로 준비하겠으니, 오늘 저녁의 실수는 용서하게." 아무리 보아도, 저 허허 하는 웃음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 란테르트보다 10살 가까이 어려 보이는 겉모습에 노인 같은 웃음이라니....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숙여 그의 말에 답했고, 이내 모라이티나는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란테르트와 세이피나를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세이피나 역시 자리에 일어서며 그 무표정한 얼굴로, 저녁 감사했습니다, 라고 인사했고, 벨크렛 부인은 입가에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위층으로 사라진 세 사람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네들이 사라질 무렵, 벨크렛과 셀파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재미있는 저녁이었죠?" 벨크렛은 자신의 의자를 바짝 셀파트의 곁에 붙여 놓으며 이렇게 말했고, 셀파트는 다시 허허, 하고 웃으며 대꾸했다. "맞아! 참 재미있는 저녁이었지. 내 평생 1300년중에 손에 꼽을만한 저녁이었지." 벨크렛이 그의 말에 미소지으며 대꾸했다. "저도 1000년 넘게 살아오면서 이렇게 유쾌한 저녁은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두 부부는 이렇게 말하며 서로를 잠시 응시했고, 이내 벨크렛이 자신보다 키가 작은 남편에게 기대며 물었다. "내일 아침은 뭘 내놓을까욧?" 벨크렛의 물음에 셀파트가 대꾸했다. "기회는 있을 때 있는 한껏 사용하는 거야. 맵고 쓰고, 떫은맛은 이미 한 번씩 사용했으니까.... 시고 짠맛으로 하지. 이번에는 요리 비슷하게 하고.... 어차피 우리 티나야 내일쯤 란테르트씨를 따라 집을 떠날 테니.... 그 아이가 화내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할 것 없어." 이렇게 말하며 셀파트는 잠시 미소를 지었고,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래간 만에 인간을 보니, 옛 생각이 나는걸?" 그의 말에 벨크렛이 미소를 지었다. "벌써 300년 전의 이야기 에요. 당신 아버님께서 아직 살아 계실 때에는 여기 저기 않돌아 다닌 곳이 없었는데...." 이렇게 말하며 서로에게 지어 보이는 미소는.... 몹시 다정했으나.... 어느 누군가 보았다면, 이렇게 사악할 수가.... 라는 말이 절로 나왔을 것이다. 그 어느 누군가에 해당하는 소녀는 지금 두 사람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워낙 나무가 커서 그 위에 올려져 있는 집들이 작아 보일 뿐으로, 엘프들의 집은 그렇게 작지 않았다. 아래층에는 방, 거실, 약재실(오늘과 같은 경우 부엌으로 쓰인다) 등이 있었고, 위층에는 모라이티나의 방과 넓은 테라스 겸의 옥상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모라이티나는 그 둘에게 자신의 방을 보여주었다. 사실, 엘프들에게 필요한 물건은 거의 없었고, 그렇기에 모라이티나의 방은 침대 하나와 이런 저런 용도로 쓰이는 책상 하나 그리고, 책들이 꽂혀 있는 책꽂이가 전부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인간세상에서 눈이 휘둥그래질 수밖에.... 모라이티나는 막상 그를 자신의 방에 대리고 왔으나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두 사람에게 의자에 앉을 것을 권한 후 잠시동안 멀뚱히 방안을 바라본 것으로 할 일이 모두 끝나버렸다. 란테르트가 조금 더 호들갑스러운 사람이었다면 집안의 장식에 대해 이러 저러한 말을 몇 마디 던지고, 책장 안에 무슨 책이 있나도 한 번 기웃 거려 보았겠으나, 이런 때에 있어서는 있으나 마나한 인간이었다. 세이피나는 어떠한가? 란테르트보다 한술 더뜬다. 그때, 모라이티나가 침대에 앉아 있다 폴짝 뛰어내리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숲의 바다 저편으로 해가 지는 모습 보실래요?" "이미 해가 지지 않았어?"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가 이렇게 되물었다. 이미 숲 안은 충분히 어두웠기 때문에 이미 해가 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자, 그럼 어서 위로 올라가요."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에게 이렇게 말하며 방 한쪽에 있는 커다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의 활달한 모습에 잠시 미소를 보이다가 세이피나를 한차례 바라보았다. 그녀의 의사를 묻는 것이었다. 세이피나는 란테르트의 시선에 함께 가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남의 방에 혼자 남아 있어 보았자 딱히 할 일도 없었으니.... 임무에나 충실하자는 생각이었다. 막 창문 밖으로 반쯤 몸을 내놓은 모라이티나를 향해 란테르트가 소리치듯 말했다. "세이피나 양을 도와줘." 모라이티나는 창문 밖에서, "네~"하고 답하고는 완전히 방을 빠져나간 후 몸을 돌렸다. 아마 나뭇가지 같은 밟을 만한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세이피나는 차림새가 워낙 축축 늘어지는 것이어서 조금 불편했으나, 모라이티나의 도움으로 방을 빠져나왔고, 란테르트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창밖으로 나갔다. 모라이티나의 방 바로 밖은 나뭇가지 하나가 가로로 걸쳐져 있는 허공이었다. 다행이 세이피나의 균형 잡는 능력이 그다지 떨어지는 편은 아니었기에, 이 세 사람은 별 부담 없이 걸음을 옮겨 커다란 나무 중간 가지가 갈려 나온 부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 모라이티나가 세이피나에게 물었다. "세이피나는 날 수 있나요?" 물론, 세이피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고, 모라이티나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만히 서 계세요."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잠시 눈을 감았고, 동시에 세이피나와 모라이티나 이 둘 주위에 투명한 연두색 막이 생겨났다. 이 모습에 세이피나는 자신도 모르게 "공간결계...."라고 중얼거렸고, 모라이티나는 그녀의 말에 살짝 미소지었다. "어머, 신성마법에 대해서도 알고 있네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세이피나는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성마법은 엘프만이 쓸 수 있는 마법으로, 인간인척 하고 있는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실수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모라이티나가 사용한 마법이 신성마법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편에 속하는 그러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공간결계는 시전 하기는 힘들지만, 그다지 효과가 화려한 마법은 아니었다. 다만 시전자가 원하는 크기의 결계를 공간에 만들어 내어, 공간을 흡사 물건 다루듯 하는 것이었다. 지금과 같은 경우에는, 모라이티나 자신이 서 있는 곳과 세이피나가 서 있는 곳에 결계를 만들어 공중에 떠올리려 했던 것이다. 아무튼, 효과가 어찌하건 간에 이 마법은 신성마법 중에서도 고위급에 속하는 마법으로, 보통의 엘프들은 2, 300세 이상은 되어야 간신히 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모라이티나는.... 세이피나가 알고 있는 모라이티나는 이제 겨우 25세로.... 각성기인 20세는 지났으나, 엘프사회에서 온전한 한 엘프로써 취급을 받는 100세의 4분의 1 을 살았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 정도면 마스터다. 두 사람이 서 있을 정도의 공간에 결계를 칠 수 있을 정도면 결코 간신히 해낸다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세이피나는 잠시 이런 생각을 하다가 말실수를 했고, 모라이티나가 곧바로 그 점을 지적함에 순간 당황했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죠. 일곱 대륙에 나가 있는 엘프가 한둘이 아닐 테니...." 모라이티나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은 채 이렇게 스스로 결론을 지어 버렸고, 세이피나는 굳이 변명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한편 란테르트는 그러한 모라이티나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확실히 이전의 어린아이 티는 벗어버린 듯 하다. 모라이티나는 다시 한차례 눈을 감으며 주문을 웅얼거렸다. 이내 세이피나와 자신을 감고 있는 공간 통째로 공중으로 솟아올랐고, 세이피나는 이 모라이티나의 깔끔한 마법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지 않아, 세 사람은 나무 가장 위쪽까지 올라왔고, 우수수, 두꺼운 풀잎의 층을 지나 결국 숲의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란테르트는 갑자기 펼쳐진 넓은 공간에 순간 마음이 시원해짐을 느꼈다. 모라이티나는 한 장소에 세이피나를 내려 주었다. 워낙 잔가지가 많고 잎들이 무성해 아무런 지지대도 없었으나 숲 위에 설 수 있었다. "조심해요. 아무 곳이나 밟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움직이면 별 문제 없을꺼에요." 모라이티나는 세이피나와 자신의 주위에 있던 결계를 풀며 세이피나를 향해 이렇게 충고했고, 세이피나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모라이티나는 이내 적당한 자리를 보아 바닥에 주저앉았고, 세이피나 역시 그녀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지만.... 다른 한 명의 사내는.... 그녀들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모라이티나에 비해 거의 두배.... 그리고 비교적 정상체구인 세이피나보다도 한배 반은 더 나가는 몸무게 때문에 벌써 몇 차례나 숲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었다. 몇 걸음 옮기지 않아 푹 하고 밑으로 떨어져 버리고는, 다시 날아 올라와 발을 디디고 몇 걸음 옮기지 않나 다시 밑으로 빠져버린다. 모라이티나는 그런 란테르트의 바보 같은 모습에 킥킥 몇 차례 웃음을 웃었고, 한참동안 이러한 행동을 한 끝에 란테르트는 결국 적당한 나뭇가지를 찾아 깃들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서쪽을 바라보며 앉았다. 그리고는.... 점차로 붉게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란테르트는 문득 옛 일을 떠올렸다. 언제인가.... 모라이티나가 이야기했던 숲의 바다를.... 그러고 보니 이곳이 바로 그러했다. 확실히 바다라고 불리기에 무리가 없는 모습이다. 세이피나 역시 이곳의 모습에 압도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마계에서 이러한 모습을 보기란 식은 죽 먹기다. 원한다면 임시로 조성할 수도 있고, 정신을 조작해 이 모습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보는 이 거대한 숲의 바다나, 직접 이렇게 보는 것이나, 시각적, 청각적, 그리고 촉각적, 후각 적으로 조금도 다름이 없다. 하지만.... 달랐다. 세이피나는 왜 그것이 다른 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마계의 수도 엘비니움에 아직까지도 나무가, 물론, 이 세상의 나무와는 다른 것이지만, 심어져 있는 것과 같다. 그녀는 문득 이카르트를 떠올렸다. 분명.... 분명 그분이라면 이곳을 좋아할 것이다....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후에 돌아가 이 모습을 그대로 설명해 주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천천히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이미지는 남을망정 이를 표현할 적절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노을에 황금빛을 내는 나뭇잎들이 미풍에 엎치락뒤치락하고.... 그러한 것이 모이고 또 모여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어 흡사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만.... 미풍이 잎 사이를 스치는, 사르락 하는 마찰음과, 높은 하늘 위를 마음껏 휘젓는 우웅, 하는 큰바람의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이것 외에는....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이러한 두 사람의 감상은 모라이티나의 목소리에 의해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뒤섞여 사라졌다. "에라브레도.... 함께 올 수 있었으면 좋았을 꺼 에요...."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을 꺼내며 멀지 않은 곳에 둥지를 틀고 있는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눈물에 일렁이고 있었다. 워낙 동그랗고 커다란 눈 이어서인지 더더욱 슬퍼 보였다. 비록 모라이티나가 이곳 저곳을 많이 돌아다녔다고는 하지만, 워낙 폐쇄적인 엘프사회이고 또 지난 5년 동안 신전에 발이 묶여 있었던 덕에 모라이티나는 그다지 많은 사람과 만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소중한 지도 몰랐다. 5년전.... 겨우 한두 달을 함께 지냈던 그 소녀가.... "이야기해 주겠어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미안해요.... 슬픈 일을 떠올리게 해서.... 하지만.... 하지만, 티나는 꼭 듣고 싶어요...." 모라이티나는 결국 한방을 눈물을 뺨으로 흘렸다.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잠시 그 커다란 녹색 빛 나는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붉게 타오르는 태양이 이미 수평선 아래로 절반쯤 침몰해 있었다. "글세....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란테르트는 이 말을 시작으로, 그날 테에이산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다 모라이티나에게 말해 주었다. 이래저래 이야기가 엉켜 말을 하다보니 모라이티나와 헤어진 이후에서 이카르트와 헤어진 직후까지의 이야기 거의 모두를 하게 되었다. 란테르트의 말을 모두 들은 두 아가씨 중 한 명은 여전 무덤한 표정을 한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바닥을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태양은 어느새 적색의 잔영만을 숲위에 넓게 드리운 채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게 된거군요...." 모라이티나는 깊게 숨을 들여 마시고는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는.... 세 사람 사이에 적막이 감돌았다. 모라이티나는 잠시 누구의 잘못인가? 라는 생각을 해 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구의 잘못인지 알 수 없었다. 모라이티나는 이런 저런 방향으로 머리를 굴려 보았고, 그때 순간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가엘프 님께는 왜 온건가요? 저를 만나러 온 것은 아니죠?" 모라이티나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요니르를...." 란테르트의 대답은 간단했으나, 그 말의 효과는 확실했다. 모라이티나의 표정은 황당하다는 것으로 바뀌었고, 이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순간 전에 자신이 레이요니르를 훔쳐 가지고 놀러 나갔던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모라이티나는 눈물로 엉망이 되었을 자신의 얼굴을 한차례 손등으로 훔친 후 란테르트를 향해 물었다. "복수를 위해서 인가요?" 누구나.... 앞의 상황과 뒤의 이야기를 끼워 맞추면 이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라이티나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모라이티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그런 건...."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한마디를 하고선 잠시 말을 하지 않았고, 란테르트는 그녀가 하려는 말을 미리 가로채어 답했다. 아마도....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려 할 것이다. "불가능할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방법이 생겨날지도 모르고.... 게다가.... 방법이 없더라도 하고 싶어." 하지만, 란테르트의 짐작은 틀렸다.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대답에 고개를 한차례 가로로 저었다. 뒤, 어깨근처에서 묶은 머리가 약간 흩어 졌다. "그런 건.... 상관없어요. 그보다.... 이카르트는 어떻게 되는 거죠? 마족은, 상관에게는 절대 거역할 수 없어요. 아무리 란테르트가 이카르트와 친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카르트는 란테르트의 편을 들 수 없을 꺼 에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순간 대답할 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 "어떻게 할꺼죠? 나중에.... 이카르트가 란테르트의 앞에 나서면.... 란테르트가 나크젤리온에게로 갈 때.... 그가 가로막는다면 어떻게 할거죠?" 모라이티나의 이 말에 세이피나는 자신도 모르게 앞을 응시하던 고개를 돌려 모라이티나를 한차례 바라보았고, 뒤이어 란테르트의 대답을 기다리려는 듯 그를 응시했다. 란테르트는 한참동안이나 멍 하니 있었다. 생각해 보지 않았다. 막연히.... 이카르트는 상관없으니까.... 라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끝내려 했었다. 하지만.... 모라이티나가 지적했듯 결코 그 말 한마디로 끝날 이야기는 아니었다.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에게서 대답이 없자 한차례 쓴웃음을 지었다. "여전하네요.... 그 무모한 성격...."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한마디 툭 내뱉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기지개를 한차례 길게 피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해가 모두 져 버렸네요. 에라브레도.... 꽤나 아쉬워하겠어요. 이러한 광경을 보지 못했으니.... 하지만.... 다시 두 개의 바다를 건너 면...." 이렇게 말하며 모라이티나는 아직도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 란테르트를 향해 한차례 미소를 보냈고, 자리에 앉으며 분위기 전환도 할 겸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보다.... 저녁 식사 미안했어요." 어스름에 별이 하나 둘 동편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이때.... 나무위.... 그것도 바다라 불리울 만큼 광활한 숲의 위.... 흔들리는 나뭇잎의 물결과 휘날리는 나뭇잎.... 게다가 저쪽에서 빼곰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달.... 어느 하나도 로맨틱하지 않은 것이 없건만....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쿡 하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세이피나 역시 다시 떠오른 그 음식들에 고개를 멀리 수평선으로 돌렸다. 란테르트는 방금 전까지의 어두운 표정을 어느 정도 떨쳐 버린 채 이야기했다. "괜찮아. 잘 모른다면 그럴 수도 있잖아. 하지만.... 정말 쓰던걸?"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말에 헤, 하고 약간은 바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분 다 나이가 많지 않아서 그래요. 엄마는 이제 겨우 100세이시고, 아빠도 130세 밖에는 되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두분 모두 이 숲밖으로는 나가보신 적이 없데요." "잘 어울리시는 두분 이야." 란테르트는 느낀 바대로 이렇게 말했고,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잘 어울려서 걱정이죠. 한 천년쯤 같이 산 것 처럼 하는 일에 손발이 척척 들어맞는 다니까요."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다시 이야기를 바꾸었다. 할 말이 많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 "그보다, 저 그 동안 공부 많이 했어요! 이제는 트레시아가 와도 무섭지 않아요. 물론, 힘에서야 어쩔 수 없겠지만.... 아무튼, 아는 것에 있어서는 지지 않을꺼에요. 그리고 마법 공부도 많이 했고.... 또, 정령 술도 거의 익혔어요. 아직 정령들의 왕을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아, 한 명 부를 수 있어요. 동쪽 수룡에 호수에 살고 있는데, 수정령의 왕이에요. 그 언니랑은 어렸을 때부터 친구거든요. 물론, 조금 이상한 언니라서.... 한 달에 한 번씩 찾아가도 저를 몰라봐요. 그렇다고 완전히 모르는 것 같지도 않으면서...." 모라이티나는 한꺼번에 꽤 많은 이야기를 했고, 란테르트는 그녀의 이러한 이야기에 한차례 미소를 지어 화답했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말에 란테르트는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수룡의 호수? 용이 살고 있다는 그곳?"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룡왕님이 살고 있어요. 수룡의 호수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죠. 원래 용들은 그 근거지를 다프칸에 두고 있대요. 용들의 왕, 용신 카이젤 드라켄 께서 그곳에 살고 계시거든요. 하지만, 용과 엘프들은 과거의 연분이 있어서 그냥 서로 간섭하지 않고 지낸 데요. 그래서, 다프칸에 사는 엘프들도, 그리고 용들 중 이 숲에 사는 이들도 상당수 돼요." 모라이티나는 이 이상은 알지 못했기에 이 정도 선에서 이야기를 마쳤고,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라이티나는 그의 표정이 입각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수룡의 호수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요?"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모라이티나가 다시 물었다. "그럼, 제가 그곳까지 안내해 드릴까요?"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급한 일이 없다면.... 부탁할게." 란테르트의 부탁에 모라이티나는 살짝 웃었다. "급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한가하기로는 겨우 드래곤 정도나 되어야 우리 엘프들과 어깨를 겨룰 만 하죠. 오죽하면 이런 말도 있겠어요? 엘프는 숲의 한량들이다."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순간 훗 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숲의 한량이라.... 누가 그런 말을 했지?" "엘라인 오빠요. 원래 조용한 것은 질색인 사람이라.... 어떻게 숲의 주인이라는 사람이, 화염계 마법을 주무기로 쓰고...."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전에 한차례 그 황당한 대련을 했을 때도.... 그는 화염계 마법을 사용했었다. 모라이티나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전에.... 언제던가.... 아마 제가 13살 때 였을 꺼 에요.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하기에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놀러 갔다가 엘라인 오빠를 만났었어요." 여기까지 말하던 모라이티나는 순간, 자신이 너무 자연스럽게 엘라인을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 앞이라면 상관없지만.... 란테르트의 앞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아참, 그것보다, 처음 엘라인 오빠와 만났을 때 어땠는지 알아요? 저는 서쪽 나무, 에스우드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몇 날 며칠을 걸어 그곳에 갔었어요. 그런데 거기 왠 엘프가 한 명 있지 뭐예요? 그래서 아저씨 누구 에요? 라고 물었더니,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란다~~ 해서 오빠라고 부르게 된 거예요."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잠시 란테르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란테르트는 별 느낌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라이티나는 다시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 아무튼 그때 그 날, 엘라인 오빠는 어떻게 하다가 이곳까지 쳐들어온 카오스 드래곤을 무찌르러 가던 중이였고, 나는 오빠를 따라갔어요. 물론, 그때 오빠는 위험해서 안된다고 했지만.... 울고불고 난리를 쳤었죠. 호호홋. 그리고 그곳에서 10여 마리의 카오스 드래곤과 싸움을 벌였는데.... 그 덕에 숲이 온통 불바다가 됐지 뭐예요. 그리고는 한다는 소리가 뭐였는지 알아요?" 모라이티나는 여기까지 말한 후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한쪽 팔을 반쯤 접어 허리에 얹었고, 다른 한쪽 팔은 길게 늘어뜨린 채 멀리 저쪽을 응시했다. 아마도 당시 엘라인이라는 엘프가 취했던 그대로의 동작인 모양이었다. "다 불타버려라~~ 하하하~" 모라이티나는 남자 목소리를 내 이렇게 한차례 호탕하게 웃어젖히더니 란테르트를 한차례 바라보았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하하, 하며 꽤나 유쾌히 웃었다.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그 웃는 모습에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에 이카르트도 말했지만, 역시 란테르트는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뭐예요?, 오늘 처음 이 티나를 봤을 때부터.... 순 벌레 씹은 얼굴을 한 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줘도 짓는 것 같지도 않은 미소나 내보이고." 모라이티나의 이 말에 란테르트는 쓴웃음을 지었고, 모라이티나는 그 모습에 손가락을 까딱 까딱 흔들며 말했다. "또! 또! 그런 이상한 미소!! 정말 많이 변했어요...."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점점 말끝을 흐렸고, 란테르트는 훗, 하고 한차례 웃으며 말했다. "변했지.... 모든 것이.... 모라이티나도 이렇게나 변한걸...."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자리에서 폴짝 뛰어 조금 떨어져 있는 그의 바로 곁에 내려 섰다. 워낙 가벼워서 인지, 란테르트로써는 그냥 서있기도 무리가 있는 나뭇가지 위를 뛰어다닐 수까지 있다.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바로 곁에 앉아서 조용히 그의 어깨에 기댔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편이 좋아요.... 언제까지나.... 이 티나가 좋아하던 란테르트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채로...." 모라이티나가 이렇게 말하며 조금 더 란테르트에게로 몸을 기대려던 무렵, 무언가가 허리에 탁 하고 걸렸다. 모라이티나는 자신과 란테르트 사이를 가로막는 방해물이 무언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고, 이내 아직 채 어두워지지 않은 서편의 빛에 화려하게 빛나는 한 물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앗! 이거 뭐예요?" 그제서야 란테르트는 다시금 자신의 새로 얻은 에르테일이라는 검에 인식이 미치었고, 검을 풀어 모라이티나에게 건네 보였다. "에르테일.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있는 대륙 3대 명검 중에 한 자루야." 모라이티나는 약간 무거운 듯 한 검을 받아들며 햐 하는 탄성을 한차례 내질렀다. 아름답기가.... 정말이지 감탄사 이외의 것으로는 제대로 설명조차 할 수 없었다. "어.... 에르트리아가 깃들어 있네?" 에르트리아는 대지계 정령의 가장 하급 령이었다. 역시 엘프였기에 모라이티나는 정령의 존재를 한 번에 눈치챘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한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아참, 모라이티나." 그는 이렇게 모라이티나를 불렀고,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잠시 검에서 떼며 대답했다. "왜요?" "혹시.... 나도 정령술 같은 것 배울 수 있을까? 정령 술은 정령과 친구가 되기만 하면 가능하다고 하던데.... 너는 숲의 정령이잖아. 그러니까...."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키킥 웃었다. "저요? 엘프와 계약을 해서 뭘 하려고요? 엘프로써의 제 힘이라 고야.... 아, 나무를 치유할 수 있고.... 나무의 성장을 빠르게 할 수도 있어요. 뭐 그런 힘이라면 언제든지!!"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약간 황당하다는 생각에 훗 하는 웃음을 웃었고, 모라이티나는 곧바로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런 힘이라 해도 저는 빌려줄 수 없어요. 전 정령이 아닌 걸요. 인간들이 요정이나 정령이나 뭐 등등을 뒤섞어 쓰기에 혼동된 것뿐이에요.... 정령 술은 정령과 친화력이 있어야만 쓸 수 있어요. 일단 친화력만 생겨나면, 그 정령 자체를 소환할 수도 있고.... 혹은 그 존재가 가지고 있는 속성의 힘만을 사용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란테르트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지 저로써는 알 수 없어요." "그런가?...."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이렇게 중얼거렸다. 한편.... 세이피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끊임없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일단 사고의 폭은 정해져 있었다. 아르카이제였다. 어느 한 장면을 보아도 아르카이제와 연결시켰고, 어떤 한가지 이야기를 들어도 그와 연관지어 생각했다. 그렇게 하다보니, 지금 이 순간에도 당연히 그에 대한 생각을 하였고....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무사히 숲을 빠져나가 아르카이제에게 지금까지의 경과를 보고할 것인가 뿐이었다. 요 몇일간 이 숲에서 그녀가 얻은 정보는 하나같이 대단한 것들뿐이었다. 게다가, 란테르트와 드래곤의 접촉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가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일단, 가엘프의 소개인 것도 그러했고, 드래곤이라는 종족의 힘 역시 두렵기 짝이 없었다. 이 일을 막아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내버려두어야 할지.... 그녀로써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종종 아르에가 우는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기도 했으나, 그녀의 생각은 거의 그것에 머물러 있었다. 다시 시간이 흘렀고.... 이 세 사람은 별이 가득한 하늘까지 즐기고 난 후에야 자리를 털었다. "란테르트, 피곤하지 않아요?" 모라이티나가 물었다. 하지만, 정작 피곤해 보이는 것은 모라이티나 그녀 자신이었다. 모라이티나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뒤이어 세이피나, 모라이티나가 차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사람은 올라왔던 그대로의 방법으로 아래로 내려갔다. 막, 다시 모라이티나의 방 창문을 앞에 도착하자, 누군가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름 아닌, 벨크렛 부인으로, 아마도 모라이티나가 걱정되어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세 사람이 창문으로 접근하자 벨크렛 부인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서 들어올 만한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녀는 막 방안으로 들어온 두 손님들을 향해 미소지으며 물었다. "숲위의 풍경, 아름답던가욧?" 벨크렛의 물음에 세이피나는 단지 간단히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고, 란테르트는 예, 라고 한마디 대답까지 했다. "그럼, 늦었으니 쉬세요. 란테르트씨는 아래 거실에서 주무세요. 춥지는 않을 테고.... 잠자리는 미리 준비해 두었답니다. 그리고, 세이피나양은 이곳에서 주무세욧." 벨크렛 부인은 이렇게 말하며 한쪽을 가리켰고, 그쪽에는 의자 몇 개를 붙여 잘만한 곳을 만들어 둔 것이 보였다. 약간 불편할 듯 보였으나, 그래도 임시 잠자리치고는 괜찮은 편이었다.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감사를 표하며 몸을 돌려 방밖으로 나가려 했고, 모라이티나는 그런 란테르트의 목에 매달리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굳나잇 키스.... 해도 괜찮지요?" 그리고는, 란테르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그의 뺨에 살짝 입술을 가져갔고, 란테르트는 미소로 그녀의 인사에 답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봐요!" 모라이티나가 란테르트의 목을 놓으며 이렇게 인사함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여 대꾸하며 방을 나섰다. 그리고 벨크렛 부인 역시 그런 딸의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다시 세이피나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했고, 모든 일이 끝난 후, 란테르트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25. 드래곤.... 혼돈의 어둠 속에 위치한 존재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세 사람이 그란 부족의 땅을 벗어났다. 한 명은 란테르트였고, 다른 두명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세이피나와 모라이티나였다. 이미 계획된 바대로.... 아침은 시고 짰다. 란테르트는 시고 짠 아침을 간신히 몇 술 떠넘기는 용기를 셀파트, 벨크렛이 두 엘프에게 보여주었고, 모라이티나는 또다시 한차례 중간에서 이쪽편도 저쪽편도 들지 못한 채 반쯤 울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세이피나는 란테르트의 모습에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하여 모든 신경을 아르에에게로 쏟아, 계속해 그(?)의 턱을 쓰다듬어 주었었다. 이러한 일을 겪고 떠나오는 아침이기에, 모라이티나는 엄마와 아빠에게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점심 무렵이 다 된 지금까지도 퉁퉁 부어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분명.... 자신 없으면 자신이 도와준다고 까지 했는데.... 또 그런 아침을 내 주다니.... 모라이티나는 어제 저녁때와는 달리 화가 조금 나 있었다. 그란 부족은 가엘프의 신전을 돌보는 임무를 띄고 있다. 그렇기에 엘프 전체중 가장 마을의 규모가 커서, 거의 70가구나 되는 엘프들이 살고 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이 혼자, 혹은 겨우 두사람 정도가 한 가구를 이루기 때문에 실제 살고 있는 엘프의 수는 100명 내외이기는 하지만, 어찌되었건 모든 마을중 최대 규모이다. 그렇기에, 일행이 이 마을을 벗어나는데 거의 두 시간이나 걸렸고, 정오가 조금 못되는 이때서야, 망루가 서 있는 마을 최외각에 도착했다. 막 망루를 등뒤로 돌리며 란테르트가 모라이티나에게 물었다. "수룡의 호수까지 얼마나 걸리지?" 란테르트의 물음에 모라이티나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가 입을 열었다. "전.... 6,7일이면 도착할 수 있어요. 최고 속도로 달리면 3일정도? 하지만, 란테르트도, 세이피나도 그렇게는 하지 못할 테니.... 보름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꺼에요. 정확히는 잘 모르겠어요. 아직도.... 그 휴하인지 휴리하인지 하는 단위가 낯설어서요." 란테르트는 근처에 있다고 하기에 가까울 줄 알았으나 생각보다 꽤 먼 곳에 위치하고 있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꽤 먼걸?.... 정말 급한 일은 없는 거지?" 란테르트의 물음에 모라이티나는 응, 하고 대답하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더라도.... 함께 가고 싶다고.... 모라이티나는 그렇게 란테르트에게 대답한 후 세이피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세이피나는 무슨 이유로 란테르트와 함께 다니는 거예요?"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물은 후, 순간 아차 했다. 물론, 상당히 자연스러운 물음이었지만.... 일단 이러 저러한 사정이 있었으니.... 왠지 물어서는 안될 일 같았다. 하지만, 이왕 내뱉은 말이니, 주워담을 수는 없는 법.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세이피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섬기는 신께서.... 함께 가보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올바른.... 길을 안내해 주라고...." 말 그대로였다. 세이피나가 섬기는 신.... 아르카이제의 명령을 따르고 있으니 말이다. 모라이티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몇 가지 묻고 싶은 일이 떠올랐지만, 모두들, 그녀가 마족이고, 또 그 사실을 감추고 있다는 점까지 감안한다면 묻기 조금 까다로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입을 그냥 다물고만 있는 것도 어색할 것 같아, 모라이티나는 세이피나의 곁에 붙어 걸으며 몇 가지를 묻기 시작했다. "란테르트와 언제 처음 만났어요?" 세이피나는 그녀의 물음에 조용히 날짜를 꼽아 보았다. 일곱 대륙의 역법으로.... 10월 10일경에 만났으니.... 11월 말경에 접어든 지금으로부터 한달 남짓 함께 다닌 것이다. "한달 남짓 되었습니다...." 세이피나는 동시에 머리 속에 꽤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감을 느꼈다. 그리고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뒤따라 걷고 있는 란테르트를 한차례 바라보았다. 란테르트는 세이피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슬쩍 미소를 지어주었고, 세이피나는 더더욱 얼굴을 차갑게 하며 앞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 세이피나는 지금 이 자신의 뒤에 걷고 있는 사람에 대한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처음.... 아르카이제에게 임무를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속에 란테르트라는 존재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아니 증오라기 보다는 혐오 정도가 어울릴 듯 했다. 한편으로의 질투와, 다른 한편으로의 우월감, 게다가 알 수 없는 열등감까지..... 이러한 감정은 단 한차례도 만난 적 없는 란테르트를 싫어하게 만들기 충분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처음 대면하는 순간 그러한 마음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오히려 알 수 없는 친근감....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 그러한 친근감 마저 느꼈었다. 물론, 그것이 호감이라는 뜻은 아니다. 친근감과 호감은 다른 것이다. 익숙한 느낌과, 좋은 느낌은 다른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요즘은.... 그 친근감이라는 것이 호감으로 조금씩 바뀌어 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이점이 바로 그녀가 딜레마를 느끼는 점이었다. 어째서....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결코 친할 수 없는 이 사람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던 도중 모라이티나가 물었다. "그 동안 심심했겠네요? 란테르트야 원래 그다지 수다스러운 사람이 아니니.... 단 둘이 여행을 했다면 굉장히 심심했을 꺼 에요. 아, 혹시 다른 사람도 함께 여행 했었나요?" 세이피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얼떨결에 사실대로 말해 버렸다. "트레시아 님도 함께...." 여기까지 말하다가 그녀는 말을 잠시 멈추었으나, 이 사실을 말하는 것과 자신이 마족임을 밝히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듯 하여 마저 말을 했다. "그분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모라이티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 트레시아도요? 그러고 보니.... 만난지 참 오래됐네요. 5년전에 헤어져서는 다시 못 만났으니.... 트레시아랑 함께 다녔으면 심심하지는 않았을 꺼에요." 세이피나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다. 그리고.... 란테르트와 함께 있는 것도 그다지 심심하지는 않다. 워낙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그녀로써는 오히려 말없는 란테르트와 함께 있는 편이 편하다. 어찌 되었건, 아무런 말없는 그에게, 자신이 마족임을 먼저 밝히는 바보짓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사실, 아르트레스만 없었어도, 자신이 아르페오네라는 것을 눈치채일 빌미는 거의 없었다. 모라이티나가 다시 다른 것을 물었다. "그보다, 어깨 위의 새는 이름이 뭐예요? 세이피나가 기르는 건가요?" 세이피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짤막히 답했다. "제가 기르는 새입니다. 이름은.... 아르에 이지요." 아르페오네가 기르는 새의 이름이 아르에 이라는 것은, 마계에서는 꽤 알려져 있는 일이지만, 어차피 이곳 사람들은 모른다. 그러므로.... 아르에 에게 굳이 가명을 지어줄 이유는 없었다. 세이피나의 대답에 모라이티나는 "아, 그렇군요!" 라고 대구하였고, 뒤이어 휘파람을 짧게 한차례 불어 아르에를 불렀다. "아르에~" 하지만, 아르에는 종, 하고 한차례 울뿐 모라이티나에게 오지 않았다. "말을 잘 듣나 봐요?" 모라이티나는 약간 서운한 듯 아르에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고, 세이피나는 그런 그녀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르에는 아르페오네의 말에는 절대복종이었다. 과거, 아르페오네의 성격이 훨씬 다정하고 활달했을 때.... 소멸직전에 있던 마족을 구해 주었었다. 그 마족은 그에 아르페오네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고, 그 이후로 이렇게 새가 되어 어깨에 매달려 사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어디 신화의 한구석을 차지할만한 조용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였으나.... 이 아르에 라는 녀석의 성격은 전혀 그렇지 못하였다. 그때의 그 소멸 당할 정도의 상처로 뇌를 다치기라도 했는지, 하는 짓이 조금 모자란 편이다. 그렇다고 완전 바보는 아니었지만, 분위기 파악이라는 것을 전혀 하지 못한다. 한 번은 이 아이를 어깨에 얹고 나크젤리온을 알현했는데.... 그때 아르에가 나크젤리온에게 날아 그의 머리 주위를 네바퀴나 돌았었다. 당연히 나크젤리온은 화를 냈고, 하마터면 그때 아르에는 소멸을 당할 뻔했다. 아니, 아르에 뿐만 아니라, 그를 데려간 아르페오네까지.... 뭐, 아르카이제가 벌을 대신 받음으로 일은 수습되었었지만 말이다. 세이피나가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이, 모라이티나는 다시 한차례 아르에를 불렀고, 아르에는 대번 모라이티나를 외면해 버렸다. 모라이티나가 손을 벌리고, "이리 와보렴 아르에~" 라고 말한 순간, 고개를 휙 반대쪽으로 돌려버린 것이다. 모라이티나는 이 모습에 조금 충격을 먹었고, 이내 세이피나를 바라보며 도움을 청했다. 두 번이나 거절을 당하자, 꼭 자신의 손위에 아르에를 올려놓고 싶어졌다. 세이피나는 모라이티나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르에 에게 전언을 보냈고, 그제서야 아르에는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새가 표정을 지어 보아야 겨우 눈썹부근을 조금 움직이고, 부리모양을 조금 바꿀 뿐이었지만, 아무튼, 아르에의 표정은 마지못해 한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르에는 세이피나의 왼쪽 어깨 위에 앉아 있다가 깡총 몇 차례 뛰어 오른쪽 어깨로 옮겨갔고, 뒤이어 모라이티나의 손으로 뛰어 내렸다. 날개를 몇 차례 퍼덕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르에가 약간 모자란 짓을 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깃털의 빛깔하며.... 온통 푸른 것이 바라보고 있으면 탄성이 절로 나왔다. 모라이티나는 조심스레 손위에 아르에를 올려 놓은 채 천진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세이피나는 그런 모라이티나의 모습을 잠시동안 바라보았다. 확실히.... 모라이티나는 세이피나가 보기에도 티없이 순수한 존재였다. 하는 행동 하나 하나에 가식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토록 자연스럽게 좋아하고.... 또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니.... 세이피나는 문득.... 이러한 생각을 떠올렸다. 지금의 여행이.... 조금은 재미있는 것 같다는....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결코 오래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자신은 어서 마계로 돌아가, 이 위험한 상황을 보고해야만 할 의무가 있다. 그러한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결코.... 그분을 위해. 모라이티나가 이야기했던 15일이 모두 흘렀다. 그리고, 아침. 아직 호수가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습한 안개가 자욱한 것이 근처에 호수가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숲의 구름 덕에 햇살 한점 들지 안는 숲에 물안개까지 피어오르자 10휴리하(1휴리하=약 1미터)앞도 잘 보이지 안는다. 지난 15일 동안 일행은 별다를 것 없는 시간을 보냈다. 세이피나나 란테르트야 그러한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모라이티나는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나.... 생각하고 또 기다리던 란테르트이다. 가엘프의 벌이 끝나는 순간 그녀는 곧바로 일곱 대륙으로 뛰쳐나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유치하게, 무슨 악마를 어쩌고 한다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다만.... 지금 자신의 곁을 담담한 미소와 함께 걷고 있는 한 남자를 찾아서.... 하지만, 막상 이렇게 옆에 있음에도,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편하고 또 기분이 즐겁다 정도였다.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것만 같았지만, 그러한 그녀의 기대는 아무런 보답도 받지 못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모라이티나의 기분은 최고조였다. 지금까지 수십 번이나 지나온 길이지만, 요 보름간의 이 걸음이 가장 재미있었고, 그 동안 수도 없이 지내왔던 숲의 밤과 낮이지만, 지금처럼 새롭고 아름다웠던 적도 없었다. 그와 함께 있다는 것.... 그것은 어떠한 마법보다도 더 신비로운 마법인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 역시, 이슬에 젖은 모포를 탁탁 털어 가방에 대강 챙겨 넣으며 모라이티나는 콧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란테르트와 함께 숲안을 걸으며 이런 저런 숲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으로 가면 어떠한 곳이 나오고.... 저곳에 서있는 저 나무에는 어떠한 전설이 전해져 오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의 말에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에게는 그것 외에는 그녀에게 해 줄 것이 없었다. 물론, 모라이티나로서는 그것으로 충분했지만.... 세이피나는, 한 걸음 뒤쳐져 걷고 있었다. 종종 모라이티나가 혼자 있는 그녀가 심심해 보여 뒤로 쪼르르 달려 이런 저런 말을 걸어 보았으나, 차라리, 숲의 메아리가 더더욱 커다란 목소리를 내는 터여서, 그것도 그만 두었다. 하지만, 세이피나는 세이피나 나름 데로, 이 두 사람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모라이티나라는 아가씨는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베어 나오는 엘프이다. 물론, 세이피나가 미소를 짓는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란테르트는 확실히 미소가 늘었다. 사실, 모라이티나와 함께 있으며 미소짓지 않을 수 있는 존재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아무리 란테르트이지만, 끊임없이 조잘거리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주는 모라이티나에게 어떻게 미소를 지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래지 않아.... 숲이 끝났다. 그 거대한 숲이.... 영원히 그 끝을 내보이지 않을 것만 같던 숲이 란테르트에게 그 마지막을 보여주었다. 물론, 완전한 끝은 아니었지만.... 드넓은 푸른 하늘을 보게 된 것만으로도, 란테르트는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란테르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호수? 아니.... 바다.... 였다. 보통, 호수라는 것은, 땅으로 둘러싸인 담수가 고여있는 곳을 말한다. 하지만.... 눈앞의 것은 분명 담수였다. 하지만, 땅으로 둘러싸여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거대? 그런 단어 정도로는 이 호수의 크기를 표현하기 부족하다. 이 워터드래곤의 호수는 짧은 너비가 200휴하, 그리고 긴 너비가 500휴하(1휴하=약 1킬로미터)에 이른다. 일곱 대륙에서 세 번째로 큰 호수인 카나쉬소 호수는 그 너비가 20휴하에 이른다. 실로 대단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수룡의 호수라는 곳은.... 그 카나쉬소 호수가 있는 에노사대륙 전체와 그 크기가 비슷하다. 이건 크다, 어떻다, 할만한 문제가 아니다. 란테르트가 바다라고 느낀 것이.... 과장은 아니다. 불어오는 바람에 파도도 치지 않는가?! 멀리 아마득한 곳에 섬이 하나 보였다. 꽤 먼 곳에 있는 듯, 아른 하게 보였으나, 분명 섬인 듯 했다. 그리고.... 수평선도 보였다. 수평선을 가진 호수.... 이다. 란테르트는 늘상 보아왔던 대륙의 호수를 생각하다, 막상 이러한 규모와 접하고 나자, 일순 입을 다물었다. 세이피나 역시 상당히 놀랐다. 자료로는 그 동안 익히 보아왔으나, 막상 이렇게 대하고 나자 대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숲도.... 호수도.... 그녀에게는 꽤 새로운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호수가 지금까지 그녀가 보아왔던 호수들중 최대는 아니었다. 정령계에 있는 수정령의 호수는.... 비록 차원간의 물질구성방식에 따른 차이는 있지만 어찌되었던 체감 상으로, 이 행성의 겉면적 전체와 맞먹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러한 생각에 넋을 잃고 있던 사람, 마족과, 오래간만에 찾은 이 호수의 모습에 약간 기분이 들뜬 한 엘프가 조용히 호수의 풍경을 살피던 사이.... 돌연, 숲에서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일행이 서 있는 곳, 왼쪽 뒤로, 바스락 하는 소리가 나는 동시에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그곳에 서 있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의 머리칼은 물색이었다. 말 그대로 물색이었다. 조금만 더 옅으면 하늘의 색이 됐을 터이고, 더 짙었더라면 파란색이 되었을 터이나, 그녀의 머리칼은 물색을 띄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물이 그녀의 머리칼의 색을 띄고 있는지도 몰랐다. 눈동자 역시 완벽한 물색이었다. 약간 눈꼬리가 쳐진 덕에 전체적인 인상은 온화해 보였다. 수수한 입술과 뽀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입을 살짝 벌리고 있어 약간은 멍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결코 멍청해 보인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앞머리는 턱까지 자라 있었고, 뒷머리는 자연스럽게 풀어 늘어뜨렸는데, 결이 고와 보이는 직모였다. 옷차림 역시 전체적으로 푸른색이었는데, 전체적인 인상이 세이피나와 비슷했으나 확연히 틀렸다. 세이피나 쪽이 얼음을 연상시키는 조용함이었다면, 상대는 만물에 삶을 불어 넣어주는 물의 고요함, 바로 그대로였다. 그녀는 천천히 수풀을 해치며 걸어나왔고, 이내 세 사람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지었다. 란테르트는 그녀의 얼굴에 악의가 없어 보이자 일단은 가만히 서 있었다. 등뒤에 있는 에르테일의 떨림이 살짝 전해져 왔다. 왜 그녀가 울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데는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이피나는 그녀의 등장에 바짝 긴장을 했고, 반면 모라이티나는 환히 웃으며 맑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루플루시아님!!" 모라이티나의 인사에 루플루시아라고 불리운 여자는 살짝 웃었다. 그리고는 되물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누구죠?" 모라이티나는 그런 그녀의 대꾸해 다시 한차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모라이티나 에요. 그란 부족 족장가문의 장녀 모라이티나!! 6년전에 만났었잖아요." "아! 그랬던가요? 아무튼, 만나서 반가워요." 루플루시아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으며 모라이티나의 인사를 받았고, 뒤이어 물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 누구시죠?" 그녀의 물음에 모라이티나가 나서 일행을 소개했다. "이쪽은, 란테르트이고, 이쪽은 세이피나라고 사제예요. 가엘프 님의 소개로, 수룡왕님을 만나러 왔어요." 이렇게 말하며, 모라이티나는 뒤이어 루플루시아를 일행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루플루시아님 이에요. 수정령들의 왕이시지요." 그녀의 소개에 란테르트와 세이피나는 인사를 했고, 루플루시아 역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인사가 끝나자 곧바로 모라이티나가 루플루시아에게 말했다. "우리를 수룡왕님의 레어에 대려다 주세요." 모라이티나의 청에 루플루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돼요. 지금 할 일이 있답니다." "할 일이요?" 모라이티나가 되물었고, 루플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분이 오시면, 동료가 되어 드려야 해요." "동료요?" 루플루시아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물었고, 루플루시아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두명의 동료가 이곳에 와 저와 우연히 만나, 악독한 용 라그아를 죽이러 가야 해요. 그러니까, 지금 아그라 님의 레어에 대려다 주기는 힘들겠네요."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그아는 또 뭐란 말인가? 그리고 악독한 용이라니.... 그런 존재가 이 중앙대륙의 숲에 있을 리 없었다. 갈수록 이상해지는 루플루시아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리고, 그런 일에 루플루시아 님이 친히 나서다니요?" 모라이티나가 이러하니.... 란테르트와 세이피나는 지금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가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루플루시아의 말 하나만 듣거나, 모라이티나의 말만을 들을 경우에는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었지만, 둘 모두의 말을 들으려니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다시 반대쪽 수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오, 냉혹한 파이터 르제베르여. 그대가 보기에는 이 길이 맞는 것 같소?" 왠 앳된 소녀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만으로는 15, 6세쯤 될 듯 했다. 그 소녀의 목소리에 대답한 것은, 약간 성숙한 여자의 목소리로 적게 잡아도 23세는 넘을 듯 했다. "위대한 드래곤 슬레이어 키티나님. 아마 맞을 겁니다." 하지만, 왠지 목소리가 딱딱한 것이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듯 보였다. 이 두 여자의 목소리에 루플루시아는 앗, 하는 조금 놀라는 목소리를 내며 살짝 미소를 짓고 있다가 돌연, 꺄악! 하는 소리를 지르며 그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꺄~~~ 살려줘요. 왠 괴한들이 위대한 마법사 루플루시아를 죽이려 해요~!!" 란테르트는 이 세사람의 말투에서 이상한 점을 느꼈다. 대화 내용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뭐란 말인가? 냉혹한 파이터? 위대한 드래곤 슬레이어? 위대한 마법사? 무슨 유치한 로망 주인공의 별명 같지 않은가?! 루플루시아가 소리를 지르며 숲쪽으로 달려가자, 저쪽에서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그 템포를 빨리 하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듯 보였다. 그리고는, 수풀 저편에서 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당신은 위대한 마법사 루플루시아가 아니오? 마룡 라그아를 잡으러 수룡의 호수로 향한다는 소문은 들었소 만....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소?" 소녀의 가는 목소리로 흡사 40쯤 된 남자의 말투로 이야기를 하자 꽤 우스웠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세 여자중 웃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진지했다. "앗! 혹시 당신은 위대한 드래곤 슬레이어 키티나님? 앗, 정말 잘 되었어요. 용신 델필라르 님의 은총을 받아, 타락한 드래곤들만은 무찌른다는 당신의 명성은 익히 들었답니다. 전 위대한 마법사 루플루시아라고 합니다." 그때였다. 그 소녀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책망하는 듯한 말을 했다. "루플루시아님! 스스로를 위대한 마법사라고 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그냥, 마법사 루플루시아라고 하셔야죠." 그리고 뒤이어 나이가 약간 많은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곧바로 들렸다. "바보. 넌 왜 언제나 그 모양이냐?" 두 사람의 말에 루플루시아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대구했다. "하지만, 위대한 마법사는 루플루시아의 별명이라고 했잖아요. 별명이라는 것도 이름이고, 그러니까 스스로 부른다 해도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은 마치 제가 수정령의 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것이나, 키티나님이 용신후 라고 불리우는 것과 같은 것이잖아요." 키티나라는 소녀는 듣고 보니 그것도 그런 것 같았던지, 음, 하는 신음을 잠시 내다가 대꾸했다. "좋아요. 그럼 일단 넘어가죠." 그리고는 다시 어른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내가 그 드래곤 슬레이어 키티나요. 용신께서 친히 내려주신 검, 엘티폴의 소유자요! 그대 위대한 마도사 루플루시아여! 곤란한 점이 있다면 내게 말해보시오. 이대륙의 뛰어난 무사, 냉혹한 파이터 르제베르 님과 함께 그대가 처한 어려움을 풀어 주겠소." 뒤이어 르제베르라는 그 여자가 대꾸했다. "비록 실력이 대단하지는 않지만, 저도 도와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역시 재미없다는 목소리였다. 란테르트 등의 세 사람은 지금 흡사 무슨 연극이라도 하는 듯한 세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있었다. 왠지.... 어린아이들의 소꿉장난 같기도 했고.... 아무튼 굉장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차라리 자신들이 바보가 된 듯 한 느낌이었다. 다시 루플루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정말 감사드려요. 사실은, 제가 수룡의 호수변에 서서 아무것도 안하다 있었는데, 왠 괴상한 사람 세명이 다가와 저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저를 도와 그들을 무찌르도록 해요." 그때, 다시 키티나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아니잖아요. 사람은 무슨 사람이에요? 원래는, 호수를 건널 방법이 없어 궁리하고 있었다, 잖아요." "하지만...." 루플루시아는 무어라 변명을 하려 했으나, 르제베르가 그녀의 말을 가로채 대신 답했다. "정말.... 세 사람이 있습니다." "에?" 키티나는 약간 의외라는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되물으며 숲 밖으로 튀어 나왔다. 그녀의 말에 확인을 해 보려는 모양이었다. 란테르트는 그때까지 목소리만을 듣고 있다가, 이제야 소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소녀의 나이는, 어림잡아 17, 8세쯤 보였다. 겉모습만으로는 모라이티나 또래쯤 되는 듯했다. 머리는 약간 이상한 느낌을 주는 붉은 색이었는데, 흡사 흰색 머리칼을 붉은 색으로 염색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한 느낌에 더더욱 박차를 가하게 하는 것은, 그녀의 앞이마 양쪽에 나있는 흰 머리칼이었다. 전체적인 느낌은, 발랄한 소녀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모라이티나보다는 아니었지만, 꽤 커다란 눈동자가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호수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듯 했다. 빛깔은 붉은 색이다. 하지만, 결코 란테르트의 것과 같은 선득한 피의 붉은 색이 아닌.... 맑은 적포도주의 빛깔을 내고 있었다. 키도, 몸매도 전형적인 17살 소녀의 모습이었다. 아니.... 몸매는 조금 모자라다고 해야 할까? 그다지 마르지는 않았지만, 가슴둘레는 평균치 이하로 보였다. 품이 넉넉한, 무릎까지 오는 연보라색 원피스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허리에는 여행자들이 종종 하고 다니는 조그마한 가방이 달린 허리띠를 하고 있었는데, 가방 문이 닫혀 있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뒤따라, 수풀을 뚫고 한 검정 머리칼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키가 꽤 큰 편으로 거의 트레시아만큼 될 듯 보였다. 방금 전의 키티나라는 소녀와는 달리, 굉장한(?) 몸매의 소유자였고, 머리칼도, 눈동자도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순수한 검은 색을 띄고 있었다. 눈매가 날카로운데다가, 헤어스타일 역시 상당히 날카로워, 보고 있으면 약간 무서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뒷머리는 남자처럼 짧게 깎아 올렸고, 반면 앞머리는 길게 길러 턱을 조금 넘고 있었다. 소매 없는 티에 반바지 차림이었는데, 팔과 다리 모두에 장식 없는 검정색 팔찌를 끼고 있었다. 르제베르라고 불리우던 그 검정머리칼의 여자는 란테르트 일행 세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경계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모라이티나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란 부족의 모라이티나로구나." 모라이티나는 르제베르의 말에 살짝 미소지었다. "아.... 르제베르언니. 정말 오래간만이에요." 그때, 루플루시아가 수풀을 해치고 밖으로 나왔는데.... 그녀가 나온 곳은 다른 두 사람과는 달리, 란테르트 등이 있는 곳 바로 뒤쪽 이였다. "앗.... 이상하다.... 왜 여기로 나왔지?" 아마도.... 굉장한 방향치인 모양이다. 겨우 10여걸음만 걸으면 나올 수 있는 곳을.... 르제베르는 그런 루플루시아의 모습에 고개를 잠시 흔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웬일이야? 모라이티나. 지난번처럼 놀러 온 거야?" 그녀의 물음에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요. 가엘프 님의 소개로, 여기 란테르트 님을 수룡왕님께 데려다 주려고요. 그런데, 루플루시아 님이 무얼 하느라 바쁘시다고 해서...." 르제베르는 손을 이마에 가져가며 루플루시아를 바라보았다. "저.... 바보.... 아! 그보다, 너 이분 처음 만나지." 르제베르는 키티나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고,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분은 용신 델필라르 님의 아내이신, 용신후 키티나님이셔." 그녀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앗, 하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저는, 가엘프 님의 종, 그란 부족 족장집안인 엘프그란가문의 장녀 모라이티나 엘 엘프그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일곱 대륙에서 온 란테르트님, 그리고 그곳의 사제 세이피나라고 합니다." 키티나는, 모라이티나의 소개에 일일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자신을 다시 소개했다. "저는, 용신후 키티나, 키티나 자이그랑이라고 합니다. 멀리 남쪽 대륙에 살고 있어요. 그란 부족 모라이티나라면.... 저도 몇 번 이름을 들은 듯 해요." 이렇게 말하며 키티나는 모라이티나에서 시선을 세이피나에게로 돌렸다. 물론.... 그녀가 마족인 것 정도는 한 번에 알 수 있었으나.... 일단 이곳의 주인인 아그라에서, 루플루시아, 그리고 르제베르가 아무 말도 않으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는 란테르트를 바라보며 약간 이상한 눈빛을 띄었다. 물론, 그것은.... 그녀 자신 외에는 아무도 눈치 챌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한 변화였다. 그러나.... 눈빛이 변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모두의 인사가 끝나자, 르제베르가 키티나에게 말했다. "드래곤 슬레이어 놀이.... 계속 하실 건가요?" 그녀의 말에 키티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 일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니...." 르제베르는 왜 그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지 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생각은 접어두고 루플루시아에게 외쳐 말했다. "루시! 어서 워터 게이트나 열어. 놀이는 이제 끝난 것 같으니...." 루플루시아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호숫가로 향했다. 그리고는 두 손을 아래로 모아 살짝 들어올리는 듯한 포즈를 취하자, 돌연 물이 사람키 두배 만큼이나 솟아올랐다. 하지만, 그 두께는 종이 한 장보다 훨씬 얇았다. 루플루시아는 게이트를 연 후 르제베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르제베르는 그녀의 신호에 고개를 끄덕여 답한 후 모라이티나에게 말했다. "손님들과 함께 저 안으로 들어가거라." 가장 앞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간 것은 루플루시아였고, 뒤이어 란테르트, 세이피나, 모라이티나, 그리고 키티나, 마지막으로 르제베르가 게이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의 막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심하게 울렁였으나, 여전히 그 얇은 막의 형태를 유지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르제베르가 완전히 안으로 걸음을 옮겨 놓는 순간, 막은 다시 물이 되어 수면으로 촤악 흩어졌고, 이렇게 순식간에 여섯 사람은 어느 곳으론가 사라져 버렸다. 수룡의 호수 중앙의 섬.... 반경이 5휴하쯤 되며, 호수 동편에 치우쳐져 있는 이 섬에는 드래곤이 하나 살고 있었다. 이름은 아그라.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용들의 주 서식지인 다프칸 대륙이 아닌 이 중앙대륙에 터전을 잡고 있었다. 종류는 수룡. 물론 수룡이라고 무슨 물갈퀴가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으나, 어찌되었건 수룡에, 계급은 용왕이었다. 한마디로 수룡 왕인 것이다. 드래곤은 전에 가엘프가 이야기했듯, 혼돈의 왕의 천사들이었다. 특히 이 수룡의 왕 아그라의 경우에는, 사실 용왕이 아닌 용신과 동급의 천사였으나, 무슨 일로 인해 강등 당해 지금은 용왕중 서열 4위인 수룡 왕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서열이 낮아 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고.... 다른 용왕들도, 그를 수룡 왕으로써 대하기보다는 과거 자신들의 상관이었던 대천사 아그라로써 대우해 주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꽤 넓은 공간이었는데, 그 한 귀퉁이에 몇몇 탁자와 의자 등등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더운 여름을 나기 위해 호숫가에 마련된 정원 비슷한 곳인 모양이었다. 지금 아그라는 용인의 모습을 한 채, 정원 한쪽에 놓여있는 등받이 있는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용인의 모습이란, 보통의 용들이 취할 수 있는 여려 모습중 하나이다. 보통 원래의 드래곤의 모습으로는, 작은(!) 일을 할 때 상당한 불편함을 겪었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책을 읽는다거나, 인간들이 만든 무슨 물건을 사용할 때 등등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때에 따라 적당한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보통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천계에 천사로서 살고 있었을 때의 모습과도 흡사하고 해서 꽤 편리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 상태에서는 전투력이 거의 전무했다. 보통의 인간보다 약간 더 나을 뿐이었다. 이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브레스도 불가능했고, 등등 여러 가지로 제약이 따른다. 그러한 이유로 만든 특별한 상태가 바로, 힘을 약간 개방한 용인체 라는 것이다. 일단, 귀가 엘프만큼이나 길어지고, 눈동자의 흰자가 사라진다. 그것 외에 외견상의 변화는 거의 없지만, 낼 수 있는 힘은, 거의 용일 때의 절반에 가깝다. 용인형인 아그라의 모습은 수룡인 만큼 이곳 저곳이 파란색을 띄고 있다. 일단 머리칼의 색이 그러했다. 어깨 부근에서 한차례 묶은 뒷 머리칼은 거의 허리 가까이 까지 기르고 있었고, 두 갈래로 나눈 앞머리는 굉장히 길게 길어 거의 가슴에 닿을 정도였다. 청색이었지만, 루플루시아의 그것보다는 훨씬 탁했다. 용인형 상태에서의 눈동자는 그 용을 상징하는 색 그대로를 띈다. 그렇기에 아그라의 지금 눈동자는 짙은 물빛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쪽 눈 뿐으로....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한쪽 눈동자는 거의 흰색에 가까운 엷은 푸른색이었다. 전체적인 몸매는 상당히 마른 편이었고, 앉아있어서 잘 알 수는 없었지만, 키는 거의 란테르트와 비슷할 듯 했다. 그는 잠시동안 등받이에 기댄 채 책을 읽다가 조금 떨어진 섬의 가장자리에 워터게이트가 열리자 책을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오셨군.... 휴우.... 벌써 나이가 100세가 넘으셨는데.... 아직도 이런 놀이를...." 이렇게 말하며 아그라는 잠시 눈을 감았다. 동시에 발밑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하더니, 이내 온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크게.... 점점 더 크게 그 물의 구체가 자라났고.... 이윽고 키가 거의 10휴리하쯤 되어 보이는 용의 모습으로 그 형체를 바꾸었다. 사실, 원래 그의 몸은 이보다 3배는 되었으나, 공간이 그다지 넓지 않았고, 또 그렇게 까지 클 필요가 없었기에, 그냥 이 정도 크기로 폴리모프를 했다. 하나, 둘 워터게이트를 통해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아그라는 사람수가 예정보다 조금 많자 약간 이상함을 느꼈으나, 그냥 대본대로 연기를 시작했다. "쿠아아아아~~~ 난 이곳을 지키는 강력한 드래곤 그라아이다!!!!" 그는 가능한 한의 리얼리티를 살려 몸을 뒤틀고 팔을 들었다 놓았다, 그리고 날개까지 퍼덕이며 이렇게 외쳤다. 물론, 현재 인간형으로 있는 키티나가 놀랄 것을 걱정해 소리 자체는 그다지 크게 지르지 않았다. 아그라는 한차례 소리를 지른 후, 스스로의 연기력에 감탄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시선은.... 완전히.... 이건 드래곤을 보는 모습이 아니라 서커스단의 곰을 보는 듯 하다. 아니.... 그것보다는 광대를 보는 모습이다. 잠시간, 이 한 마리의 용과 여섯 사람 사이에, 때아닌 서늘한 바람이 스쳤고.... 아그라는 이상함을 느끼며 하던 연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그때 키티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라아가 아니라.... 라그아 에요. 아그라님." 그녀의 말에 아그라는 순간 멍해졌고....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꼈다. 물론, 용이 얼굴이 빨개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아무튼, 확실히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당황해 하는 아그라의 모습에 루플루시아가 말했다. "괜찮아요. 아그라님. 사람은 살면서 언제나 실수를 할 수 있는 법이에요. 저만해도 종종, 할 일을 잊는 경우가 있답니다. 수정령들의 회의에 잊어먹고 나가지 않는 경우도 있고, 또.... 정령왕들간의 대표회의에 가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런 이 둘의 모습에 르제베르가 이마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바보. 어떻게 나는 이런 바보들과 살고 있는 거지?" 모라이티나는 꺄하, 웃음을 터트렸고, 키티나도 함께 까르르 웃었다. 아르에는 무엇이 즐거운지 종종거리며 울었고, 키티나의 허리부근에 있는 가방 속에서는 키킷! 하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동물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란테르트는 저 눈앞에 있는 수룡의 이러한 모습에.... 용족에 대한 환상이 깨어짐을 느꼈다. 무엇이 위대한 영원의 존재인가? 하긴.... 고결한이 붙은 모라이티나보다는, 위대한이 붙은 저 아그라라는 존재가 훨 어울릴 듯 했다. 아그라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며 다시 인간으로 폴리모프를 하였다. 이번에는 용인형이 아닌 인간으로 했는데, 어찌되었건 서열이 자신보다 위인 키티나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감히 용인형의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용인형이란 어디까지나 전투형이다. 아그라가 인간 모습으로 돌아옴에, 장내(?)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고, 이어, 이 섬의 안주인(?) 루플루시아의 안내로, 모두들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조금전 아그라가 책을 읽던 곳으로, 조그마한 탁자 주위에 놓여있는 세 개의 의자에, 각각 키티나, 모라이티나, 그리고 세이피나가 앉았고, 다른 사람들은 다른 적당한 자리에, 각각 안고 섰다. 잠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란테르트는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약간 망설였는데, 막상 무기를 달라, 라고 말하기는 상황이 적절치 않았다. 그가 그렇게 꿀 먹은 벙어리 모양으로 있자, 다른 사람들 역시 입을 열지 못했고, 약간 푼수끼 있는 아르에만이 종종, 울어 침묵을 깨뜨렸다. 키티나는 그때, 돌연 허리에 있는 가방을 열며 한 마리의 쥐를 꺼냈다. 연한 황색 털이 복실복실 자라있는 키티나의 주먹크기쯤 되는 녀석으로, 아까부터 계속해 나가고 싶다고 말(?)을 해 왔기에 열어준 것이다. 그와 동시에 루플루시아는 차를 내 오겠다며 자리를 떴고, 르제베르 역시 그녀를 따라 갔다. 키티나는 쥐를 손위에 올려 놓은 채 잠시 바라보았고, 모라이티나는 그 쥐의 모습에 화사한 미소를 피우며 말했다. "와! 귀여워요!! 이름이 뭐예요?" 그때 돌연 그 쥐가 입을 열었다. "르라프! 나, 르라프!" 쥐가.... 말을 했다. 당연하거니와, 모라이티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 진지하던 란테르트와, 조용하던 세이피나 마저도 잠시 넋을 잃고 쥐를 바라보았다. 반면.... 이 모습에 바짝 긴장한 한 존재가 있었으니.... 세이피나의 어깨 위에 앉아있던 아르에는 르라프라는 이름의 쥐가 그 모습을 드러내자 마자 돌연 두 눈을 날카롭게 뜨며 바라보았다. 고작.... 자신보다 작은 쥐 주제에.... 말도 하다니.... 아르에는 몹시 기분이 상했다. 한편, 르라프도 모라이티나의 물음에 대답을 한 이래로 줄곧 시선을 아르에 에게 두고 있었다. 동물.... 자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아닌 존재가, 도발적인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훗.... 저런 건 도전이다.... 르라프는 키티나의 손에서 폴짝 뛰어 탁자위로 올라갔고, 아르에 역시 세이피나의 어깨에서 뛰어 탁자로 내려왔다. 모든 사람들은 도대체 저것들이 뭘 하려는 거야? 라는 눈길로 쥐와 새를 보았고.... 그 쥐와 새는 서로를 노려보며 한참동안 정지하고 있었다. 먼저 움직여 약점을 잡혀서는 안된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패하는 일도 생기는 것이다. 한편, 아그라는 처음에는 무심히 바라보다가, 곧 그 둘의 싸움에 부쩍 흥미를 느꼈다. 일단, 어차피 심심하고 할 일 없던 차에 일어난 일이었고.... 왠지 생각해 보니.... 우스웠다. 아르에가 비록 중급 마족이었지만, 르라프 역시.... 강하다. 쥐 주제에.... 브레스도 쓸 줄 안다. 처음.... 용신 델필라르가 르라프의 몸을 브레스를 쓸 수 있도록 개조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아그라는 남몰래 한참이나 웃었었다. 그리고, 결국 키티나가 르라프를 가르쳐 브레스를 쓰게 만드는 그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물어 버린 그였다. 아그라는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돌연 후후 하는 웃음을 웃었다. "카이젤 드라켄과.... 카이버드의 싸움이라...." 카이젤 드라켄, 용신 델필라르와, 카이버드 알사다드, 이 두 존재 모두에게 쌓인 감정이 많은지.... 쥐와 새에게 이 둘을 비교하는 그였다. 지금, 장내는 긴장되어 있었다. 음료수를 담아 나오던 루플루시아와 르제베르도, 근처에 있는 또 다른 탁자 위에 음료들을 내려놓으며 곧바로 싸움구경(?)을 하러 왔다. 한편, 서로를 노려보며 빙빙 돌고만 있던 이 두 존재(?)는 어느 순간, 서로에게 접근했다. 크기에 있어서는 아르에가 한 수 위였다. 일단, 키가 한뼘 가량이나 되는 거대한(??)몸을 하고 있었으니, 겨우 손가락 하나 반 길이의 르라프에 비한다면 거의 두배 가까운 키였다. 하지만, 르라프의 브레스 공격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호르르~~ 하는 귀여운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거의 엄지손가락 굵기의 플레임 브레스 였는데, 아르에는 르라프의 공격이 올 때마다 급히 몸을 돌려 피했다. 아르에가 피한 자리에는 검은 그을음이 생겨난다. 아르에는 그 긴 꼬리를 바닥에 늘어뜨린 채 주로 부리를 사용해 공격했다. 종종 엔클레이브(!)를 펼쳐 르라프의 브레스를 정면으로 받아내며 하는 부리 반격 기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그러한 근 근접 전을 조금 치르던 그들은 오래잖아 완전히 막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르라프는 아르에의 날갯죽지를 물었고, 아르에는 르라프의 머리를 쪼았다. 총~총! 하는 아르에의 거친 울음소리와, 치칫, 하는 르라프의 고함소리가 장내(?)에 어지러이 퍼졌고.... 주인들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었다. 키티나도, 세이피나도 그네들을 떼어놓을 생각은 않은 채 구경만 할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즐기는 듯 보였다. 세이피나는 물론, 무표정인 채였지만, 속으로는 이 상황에 이미 웃고 있었다. 이 무슨 바보 같은 싸움이란 말인가? 키티나는 결코 세이피나처럼 자신의 심정을 숨기거나 할 수 없다. 두 괴수(?)들의 싸움을 얼굴까지 살짝 붉히며 지켜보고 있었다.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역시 용신후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었으니....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중도적 입장에서 이 둘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결코 자신이 기르는 쥐라고 해서 르라프를 편애하지도, 상대편의 새라고 해서 아르에를 미워하지도 않았다. 양쪽 모두에 격려의 눈길을 보내며 싸움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지금.... 일곱 명의 사람 모두가 이 싸움을 기켜보고 있었다. 용신후도, 용왕도.... 정령왕도.... 엘프도.... 마족도.... 그리고 인간도.... 역시 스포츠(?)는 모든 종족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훌륭한 외교수단인 모양이다!! 싸움은 점차로 치열해져 갔다. 르라프의 삼단 같던 머릿결(?)은 아르에의 쪼기 공격에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고, 아르에의 비단결 같던 깃들도 벌써 수십 개가 부러져 나갔다. 엔클레이브가 있기 망정이지.... 벌써 브레스에 날개가 구멍이 났어도 몇 차례나 났을 것이다. 더 이상 싸우다가는.... 둘 모두 죽지는 않겠지만, 큰 상처를 입을 것 같았고, 키티나는 르라프를, 그리고 세이피나는 아르에를 불렀다. 두 존재는 하지만, 지금 이성(?)을 잃은 상태였기에 쉽게 싸움을 그치지 않았고, 급기야 중재자 루플루시아가 나섰다. 그녀는 돌연 공중에 물방울을 만들어 냈고, 이내 두 존재 각각을 하나의 물방울 안에 가두었다. 돌연스런 이러한 일에 쥐도, 새도 당황해 하던 일을 멈추었고, 이어 키티나와 세이피나가 각각 자신의 동물을 받아 들었다. 결과는.... 아마도 무승부인 모양이었다. 처절한 접전은 모두 끝이 났다.흡사 장내는 경기가 끝난 경마장처럼 어수선한 분위기가 되었고....모두들 한마디씩 소감을 내뱉었다. "훗.... 재미있군." 이건 아그라의 반응이었다. 역시 위대와는 거리가 먼 존재이다.... "오호호 호호!" 르제베르는 그저 웃었다. 웃는 스스로까지 우스운지.... 그녀는 잠시동안 웃었다. "앞으로는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세요. 싸움은 서로를 상하게 하는 것.... 좋지 않아요." 루플루시아였다. 키티나와 세이피나는 당사자들이기에 적당한 할 말을 찾지 못했고, 모라이티나나 란테르트는 왜인지 끼여들 만한 자리가 아닌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렇게 한바탕 소동(?)이 일고 나자, 일행들 사이의 어색함은 많이 사그러 들었고, 그제서야 란테르트는 입을 열 수 있었다. "저...." 란테르트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아그라가 그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당신이 원하는 데로 해 주겠습니다."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원하는 데로라니.... 자신이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제가 원하는 것은.... 나크젤리온을 쓰러뜨리는 방법입니다...." 아그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놀라는 표정이 아닌 것을 보니,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용신후 님을 따라.... 용신에게 가십시오. 이미.... 준비는 끝나 있습니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준비는 무슨 준비인가? 도무지 중앙 대륙으로 들어온 후로는 모든 것이 이상했다. 어떻게 된 것이.... 모든 것이 원하는 데로 척척 돌아가고.... 모두들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가엘프 역시 무슨, 당신은 인간입니까? 라는 이상한 질문을 하고.... 또 내가 나아갈 길은 불행하니 하면서 이상한 말을 했고.... 여기 이 아그라라는 수룡 또한 무언가를 아는 듯한 분위기를 잔뜩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로써.... 이로써 복수를 할 수 있다면.... 복수를 할 수 있다면.... 족한 것이다. 란테르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용신후 키티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쥐와 새의 싸움을 볼 때와는 다른 눈빛을 하고 있던 그녀는.... 란테르트가 그녀 자신을 바라봄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이 일이니 만큼.... 이대로 돌아갈께요. 다음에 다시 놀러 오겠어요." 키티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렇게 말했고, 아그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플루시아와 르제베르는 끼여들 자리를 찾자 못하였고, 모라이티나나 세이피나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럼.... 델필라르 오빠의 성으로 향하는 워프 게이트를 열어 주세요." 키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아그라를 바라보았고, 아그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은 채 입속으로 조그맣게 주문을 외웠다. 용신 델필라르가 만들어 둔 것으로, 자신의 인간출신 아내 키티나가 종종 이 수룡의 호수에 놀러올때의 걸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 둔 것이었다. 이윽고 워프게이트가 열렸다. 가엘프의 워프 게이트와는 종류가 조금 다른 것으로, 일행들의 눈 앞 공간에 검은 색의 일렁이는 파면이 떠올랐다. 모라이티나는 진작 자리에서 일어나 란테르트 곁에 서 함께 따라갈 뜻을 밝혔고, 세이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란테르트의 근처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 아그라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남아라. 마족의 아이야." 그의 말에,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 그리고 세이피나 이 세사람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고, 아그라의 말은 천천히 이어졌다. "설마, 마족의 아이 주제에.... 나의 이 땅을 밟고 살아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겠지?" 세이피나의 얼굴은 대번에 흙빛이 되었고, 란테르트는 심히 곤란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처할 행동이라는 것은.... 그다지 폭이 넓지 않았다. 에르테일로는 무리다. 천천히 하르제 검을 뽑아드는 란테르트였다. 란테르트가 검을 뽑아 들자, 아그라의 눈빛에는 경멸이 비쳤다. 가소롭다라고나 할까? "마족 아이를 지키기 위해.... 검을 뽑은 것입니까?" 란테르트는 대답을 하는 대신, 세이피나의 앞에 섰고, 모라이티나는 그런 란테르트의 앞을 다시 막아서며 그에게 외치듯 말했다. "그만둬요!! 수룡왕님과.... 그분과 싸워서는 안돼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살짝 웃었다. "그의 아이야.... 지켜주지 않는다면.... 그를 만날 면목이 없게돼...." 그때 세이피나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주제 파악을 하시지요.... 당신 정도가....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도대체....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사람에게 주제파악을 하라니.... 하지만.... 모라이티나는 그런 그녀의 말에 화를 냈다. "무슨 소리에욧!! 지금 란테르트가 누구 때문에 검을 뽑아들었는데!!" 이렇게 외치며 모라이티나는 세이피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렇게나 조용하고.... 동요 없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쪽에는 그다지 민감하지 않은 모라이티나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의 세이피나는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란테르트.... 그에 대한 호감의 원인을.... 무관심, 그리고 약간의 질투심과 증오 따위가 어느사이엔가 호감으로 바뀌어 버린.... 그 이유를 이제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배려.... 그리고 말이 아닌 행동을 통한 다정함.... 이러한 것들.... 입은 다문 채 미소조차 잘 지어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언제나 세 이피나 자신을 배려해 주었었다. 아주 사소한 것까지.... 세이피나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란테르트를 지나, 그리고 모라이티나의 곁을 스쳐 아그라의 앞에 섰다. "글쎄요.... 확실히 혹시나 하는 마음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중앙대륙을 밟는 순간.... 언젠가 한 번쯤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습니다." 세이피나는 두 눈을 살짝 아래로 깔며 이렇게 말했다. 확실히 말 그대로였다. 중앙대륙.... 마족이 이곳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세이피나의 모습에 아그라가 입을 열었다. "알아들으니 다행이군.... 그럼.... 알아서 소멸해라." 그때, 다시 란테르트가 나섰다. "그만 두십시오, 아르페오네양! 당신이..... 이카르트의 아이가 제 눈앞에서 죽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제가 시간을 끌겠습니다. 당신이 도망칠 만한 시간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동시에 란테르트는 스스로를 무패로 만들어준 마법을 끌어 올렸다. 검정색의 기운이 검을 휘감으며 동시에 흑색의 거검이 하르제 검 주위를 감쌌다. 란테르트의 이 모습에 아그라의 눈썹이 살짝 치켜올려졌다. 기분이 조금 상한 모양이었다. "훗.... 정말이지.... 내 앞에서 그 마법을 사용하다니.... 고작 마리...." 그때, 키티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멈춰요!! 지금 절 무시하는 거예요?" 그녀의 화난 듯한 목소리에 아그라가 허리를 굽히며 입을 열었다. "감히 용신후의 뜻에 반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제 레어 안에서는 제 뜻이 곧 법입니다. 델필라르가 친히 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깨뜨릴 수는 없습니다. 이 땅에 내려선 후 4000년 이상이나 이어져 내려온 율법이니까요...." 그때, 키티나가 전언을 아그라에게 보냈다. [고작 마리.... 라니요. 설마 뒤에 이어질 말이 마리오넷은 아니겠지요?] 그녀의 말에 아그라가 답했다. [맞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가엾은 분에게.... 우리를 위해.... 우리를 위해 그러한 운명을 타고나신 분인데....] 우리를 위해라니.... 키티나의 이 말은.... 아그라는 그녀의 말에 잠시 대답을 하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 [.... 그렇다 하더라도.... 마족을 살려 돌려 보낼 수는 없습니다.] 아그라의 말에 키티나가 곧바로 쏘아붙였다. [겨우.... 저런 약한 마족을 상대로.... 분풀이인가요?] 이 말에는 아그라도 대꾸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그러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저 생각 없이.... 자신의 레어에 마족 따위가 발을 들여놓은 것이 기분 나빠 한 행동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왠지 강한 힘을 가진 자신이 약한 그녀를 핍박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저런 생각 끝에 아그라는 결국 결론을 내렸다. 작은 일에 용신후의 뜻에 반하기도 그러했고.... 게다가 핍박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용신후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아그라는 이렇게 대꾸하며 다시 세이피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떠나라.... 용신후의 뜻이다." 아그라의 말에 세이피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무슨.... 장난 같았다. 살아 있다가.... 죽음에 발을 반쯤 들여놓고.... 그리고 다시 살아났다. 그런데.... 모든 것들이.... 이 짧은 대화만으로 결정지어진 것들 들이라니.... 왠지 장난 같았다. 살아있는 것도.... 그리고 목숨을 구함받은것도.... 그녀는 용신후라는 소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마운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의 인사에 키티나가 입을 열었다. "아그라님 께서 결계를 열어 드릴 것입니다. 이제 마계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키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아그라를 바라보았고, 아그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섬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르제베르는 우물쭈물 하다가 그런 아그라를 따라 몸을 돌렸다. 하지만, 루플루시아는 그런 두 사람을 약간은 바보 같은 미소로 바라볼 뿐 따라가지 않았다. 용신후.... 그녀를 전송해야 하지 않는가? 세이피나는 그들의 대화를 반쯤 넋이 나간 채 듣고 있었다. 그리고는 뒤이어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마법을 거두고 검을 검집에 넣었다. 바보.... 그 바보가 자신을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란테르트는 세이피나가 자신을 바라보자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이미 알고 있었는데...." 세이피나는 그가 무슨 뜻으로 이런 사과를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조금 전 그가 아르페오네, 라고 불렀던 것을 떠올렸고, 그것을 사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란테르트 님이 알고 계시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습니까?.... 지금까지.... 바보 같은 짓을 했군요...." 란테르트의 말에 세이피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 동안 정체를 감추고 있어서.... 그분의 뜻이었습니다." 여전 무표정이었다. 화를 내고 있는지.... 아니면 별다른 뜻 없이 그저 사과를 하는 것인지 도저히 알 도리가 없었다. 란테르트는 그런 세이피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뒤이어 키티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용신후의.... 배려 정말 감사드립니다." 키티나는 란테르트의 인사를 어색한 미소와 함께 받았다. 정작 고마움을 표해야 할 것은.... 오히려 자신 같았다. 그러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천만 에요...." 키티나는 간신히 이렇게 답했고, 란테르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인 후 루플루시아를 바라보았다. "수룡왕님께는.... 대신해 사죄의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루플루시아는 그런 란테르트의 말에 미소지을 뿐이었다. 란테르트는 지금 약간 넋이 나가있는 세이피나를 대신해 이렇게 일을 수습한 후 다시 세이피나에게 말했다. "세이피나양.... 아니 아르페오네 양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르페오네.... 입니다." 란테르트의 말에 아르페오네는 이렇게 대꾸했다. 더 이상.... 그에게 속일 필요가 사라졌기 때문일까?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슬쩍 끄덕이며 말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길을 가르쳐 주신 덕분에.... 여행을 조금 더 빨리 할 수 있었습니다." 아르페오네는 그가 자신에게 감사를 하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한차례 가로 저었다. ".... 단지.... 임무였을 뿐입니다. 그럼...." 누가 언제나 내뱉던 말을, 누가 언제나 내뱉던 그 음정 그대로 중얼거리며.... 아르페오네는 곧 차원 너머로 사라져갔다. 키티나에게도, 루플루시아에게도 인사하지 않았다. 다만 모라이티나를 한 번 바라봄으로써 눈인사를 한차례 했을 뿐이었다. 모라이티나는 막 사라져가는 그녀를 향해 조금 톤이 높은 목소리로, "안녕히 가세요. 즐거웠어요. 그리고.... 이카르트하고, 트레시아에게 안부 전해줘요!!" 라고 외쳤으나, 그녀의 목소리가 아르페오네에게 전해졌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사라진 직후, 키티나가 란테르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함께 용신의 신전으로 가도록 해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모라이티나는 따라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할 수는 없어 일단 키티나에게 물었다. "저.... 용신후님. 저도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그녀의 물음에 키티나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물론.... 데려가는 것 자체는 그다지 큰 일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용들의 성지인 용신의 신전에 엘프가 간다는 것이 약간 어색했다. 용이 된지 100년밖에 되지 않아, 자신은 아직 용들의 관습이 어떠한지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으니.... 이러한 행동으로 남편인 델필라르를 난처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이렇게 망설이는 사이 루플루시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이젤 드라켄 님의 신전은 곧 키티나님의 신전이기도 합니다. 키티나님의 손님이라면 누구든 상관없답니다." 키티나는 루플루시아의 조언에 감사의 미소를 그녀에게 보내며 모라이티나에게 말했다. "좋아요. 란테르트 님의 친구라면...." 모라이티나는 그녀의 대답에 희색을 띄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용신후님." "그냥, 키티나라고 부르세요." 키티나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이렇게 대꾸했고, 이내 루플루시아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시간 나면 또 놀러올께요. 루플루시아님." 모라이티나가 뒤이어 루플루시아에게 인사했다. "저도 가볼께요. 루플루시아님. 나중에 또 절 모르는 척 하면 그때는 정말 화낼꺼에요!" 루플루시아는 인사하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좌우로 흔들며 미소지었다. 그 모습에 키티나의 허리에 있는 가방에서 쥐답지 않게 털로 뭉뚝해져 버린 코를 내밀어 "안녕~ 루플루시아. 안녕, 루플루시아." 라고 두 번 말(?)했고, 란테르트는 단지 고개를 한차례 끄덕여 작별을 고했다. 사람, 용, 엘프, 쥐.... 이 넷은 차례로 검정색의 파면으로 빨려들 듯 사라져 갔고, 루플루시아는 약간은 바보 같은 미소를 입가에 가득 띈 채 그네들이 사라질때가지 그곳에 서 있었다. 이윽고 워프게이트가 모습을 감추었고.... 그제서야 루플루시아는 입가에서 미소를 지웠다. 산들바람에 호수가 잔잔한 울렁임을 만들어내고.... 또 어린아이가 던진 조그마한 조약돌에 파면을 만들어내는 듯 하던 그녀의 미소가 사라진 그녀의 얼굴은 무풍의 호수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잠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천천히 한숨을 내 쉬었다. "후.... 마계와 정령계의 4000년간의 싸움이.... 이렇게나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군요...." 하지만, 이 한마디를 내뱉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한 멍한 표정으로 돌아와 아그라와 르제베르가 사라진 섬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녀였다. 26. 용신 델필라르.... 그리고.... 칠흑 빛의 조각. "그가 돌아오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짙은 흑색.... 가엘프가 말하기를.... 검정색은 혼돈의 빛이라고 했다. 모든 색들이 모여 돌아가는 곳.... 가장 순수한 검정색이란 어떠한 것일까? 단지 검다고 해서, 그 모두를 순수한 검은빛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혹자는 어두운 밤의 색이 흑색이라고 할 것이고, 혹자는 눈을 감았을 때 볼 수 있는 색을 검정이라고 할 것이다. 아량이 넓은 사람은, 잘 익은 포도의 진보랏빛을 흑색이라고 이야기 할 것이고.... 감상적인 사람은, 자신의 우울한 기분을 검정색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에 열한 모든 사람들이 만약 방금 말을 꺼낸 그 사람을 보았더라면 다양하던 이견들을 하나로 모을 어떠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검정색이란.... 자신이 본 어떠한 남자의 머리칼의 색, 바로 그것이라고. 이러한 검정색 머리칼을 가진 이 남자는 눈동자색 역시 검정색이다. 당연히 동공은 누구나 검정색이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 동공을 감쌌고 있는 홍채마저도 칠흑 색을 띄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바라보고 있으면 약간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상당히 날카로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것 일색은 아니어서, 어떠한 인자함 같은 것 역시 얼굴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지휘자로써의 그것이었다. 하긴.... 당연하다.... 200억년 이상이나.... 수많은 천군 들을 다스려온 그이니.... 델필라르.... 그의 이름이다. "그가 돌아오고 있습니다.... 당신의 혼이 깃든 인간이.... 그가 돌아오고 있습니다." 델필라르는 흑색의 신전 안에 꽂혀있는 한 자루의 검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델필라르가 막 이 말을 마치자, 돌연, 검 주위에 사람의 모습이 어리었다. 노인이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수많은 주름이 흡사 고목의 피부처럼 이마와 양쪽 뺨, 그리고 입주위에 잡혀 있었고, 두 눈조차 뜨기 힘겨운지 눈은 반쯤 감기워져 있었다. 눈썹도, 수염도, 그리고 긴 머리칼도 모두 한결같이 희게 세어버린 이 인자한 인상의 노인은 델필라르의 말에 으음.... 하는 신음을 한차례 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그의 모습에서 왠지 나른해 보이는 조각들을 제거한 채, 인자한 부분만을 사용한 듯 했다. 그것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런가?.... 그렇군...." 이 단 두 마디를 중얼거린 노인은 조용히 생각에 잠기었다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음....결국.... 돌아오는군...." 노인의 말에 델필라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충분히.... 그리고 충실히.... 만들어진 그가.... 돌아오고 있습니다." 델필라르는 벌써 돌아오고 있다, 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내였고, 노인은 그런 그의 모습에 음, 하는 신음을 한차례 더 내뱉은 후 입을 열었다. "후회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노인의 말에 델필라르는 서둘러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다만?...." "다만.... 지나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델필라르는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노인....용신이 무릎을 꿇고.... 또 고개를 숙여야만 하는 존재.... 노인은 델필라르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잠시동안 두 사람사이에 대화가 끊겼고, 노인은 흡사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신전내부 한쪽을 바라보았다. "글세.... 그런지도 모르겠구나.... 지나치다...." 노인의 이러한 말투에는 꽤나 상심이 어려 있었고, 델필라르는 그런 그의 모습에 황송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윽고 다시 노인이 이야기를 꺼냈다. "내 스스로를 이 검에 봉인한지도 꽤 시간이 흐른 듯 하구나...." 델필라르가 대꾸했다. "이곳의 시간개념으로.... 36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렇구나.... 후후후...." 노인은 웃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반쯤 투명한 그의 몸 아래로 보이는 한 자루의 검.... 그 검은 신전 중앙의 한 제단에 꽂혀져 있다. 자세히 바라보면 그 제단이 보통의 제단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용신의 신전 정 중앙에 위치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보통'은 아니었지만, 그 제질 역시 신비롭기 짝이 없었다. 제단은 투명한 빛깔의 어떠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종종 주위에 이는 조그마한 바람에 가벼운 파문이 이는 것을 보아 흡사 액체의 표면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검은, 그 투명한, 하지만, 온통 주위가 검정색이어서 검정색을 띄고있는 제단에 반쯤 꽂혀있다. 제단이라는 물건이 꽤 신기하기는 했으나, 역시 중요한 것은 검의 모습이었다. 검은 전체적으로 보통의 장검보다 조금 긴 검신에 중검에 가까운 검날 폭을 가지고 있었다. 손잡이는 엷은 금색을 띄고 있었는데, 결코 금과 같이 세속적인 빛은 아니었다. 차라리, 이른 아침의 미명에 금빛을 발하는 나뭇잎과 비슷할까? 이 검에서 가장 신비한 부분은 검날이었다. 양쪽으로 미려한 곡선을 그리며 뻗은 검날은 티하나 없이 투명했고, 그 중앙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바라보면 은은한 흑색이 검 중앙에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검.... 이것만 있으면...." 노인은 한참동안 검을 바라보다 이렇게 중얼거렸고, 델필라르는 고개를 반쯤 들어올린 채 그의 말에 눈빛을 약간 바꾸었다. "정말.... 긴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윽고 꺼낸 델필라르의 이 말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본체가 봉인 당한 직후로부터 시작한 일이었으니...." 노인은 말끝을 길게 늘여 잠시 회상에 잠기는 듯 있더니 다시 델필라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일어나 보거라.... 그리고.... 일의 결과에 대해 보고를 해 보아라." 델필라르는 그의 말에 몸을 일으켰고,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여섯 번째 시련 후.... 그는 이미 인간의 선을 뛰어넘었습니다. 일곱 번째 시련은 어찌 보면 필요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섯 번째 시련 이후의 능력만으로도.... 우리가 원하는 바는 이룰 수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델필라르의 말에 노인이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여전.... 너는 이 일을 못마땅히 여기는 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노인의 말에 델필라르는 당황했고, 노인은 쓴웃음을 슬쩍 미소로 바꾸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의 능력으로는.... 지금의 나의 능력으로는 이 이상은 무리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님께서 짜놓은 인과의 그물을 슬쩍 비트는 것 뿐...." 노인은 여기서 말을 잠시 멈추며 델필라르를 바라보았다. "인과라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것.... 나와 함께 태어난.... 그 역시.... 이것에 깊이 빠져 있었지.... 스스로를 무로 몰고 간.... 금단의 사상에...." 델필라르는 잠자코 노인의 말을 들었고, 노인은 한차례 한숨을 깊이 내쉬며 이야기를 이었다. "어떠한 존재이던.... 어머님의 첫 번째 두 피조물중 하나인 나나.... 그나.... 이 세 번째 땅의 여린 존재들이나.... 모두들 처음과 그 끝을 알고 싶어하지.... 강의 처음을 찾아.... 깊은 산중을 헤매이기도.... 바다의 끝을 찾아 너른 대양을 모험하기도.... 모두들 처음과 끝을 찾는 여행을 멈추지 않지.... " "엘리엠님...." 엘리엠.... 델필라르는 감상에 잠겨버린 노인을 이렇게 불렀고, 노인은 델필라르의 부르는 소리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너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겠지? 처음에 대해서.... 그리고 끝에 대해서...." 엘리엠이라는 노인의 물음에 델필라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은 이에 개의치 않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모든 것의 열쇠는.... 인과이다.... 적어도....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직전은 지금을 결정하고.... 지금은 직후를 결정한다..... 직전의 직전은 직전을.... 그리고, 그 직후는 직후의 직후를 결정하지.... 이렇게 과거로.... 과거로, 혹은 미래로.... 인과의 그물을 따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언젠가는 끝, 혹은 시작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가.... 그리고 내가 깨달은 것이다. 후후.... 부질없는 생각이었지만...." 노인은 다시 말을 멈추었다. 델필라르는 노인의 하려는 말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끼여들지 않고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는.... 이러한 그의 생각을 실험해 보기 위해 새로 세상을 하나 창조했지.... 하지만.... 오랜기간동안의 실험 끝에.... 한가지를 깨닫게 되었지.... 그것은... 바로 어떠한 존재도 전지全知 일 수 없다는 것이었어.... 그는 스스로를 전지에 가까운 존재로 만들기 위해 훨씬 낮은 차원의 세상에 존재 물들을 창조했으나.... 그럼에도 모두를 알 수는 없었지....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야.... 그렇기 때문에.... 후후후...." 노인은 시선을 델필라르의 눈에 맞추며 말을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네 말대로.... 이 일에 행함에 있어 조금 지나쳤는지도 모르지...." "....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델필라르는 노인의 말에 이렇게 입을 열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꼭 그에게 자아라는 것을 심어 줄 필요가 있었나.... 하는 점입니다. 아니.... 꼭 그를 창조할 필요가 있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차라리.... 제가 직접 일을 했던 것이.... 낫지 않았을까요?" 델필라르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너는.... 결코 나크젤리온.... 그 아이를 죽이지 못한다.... 지금 너는 이 세 번째 땅에 묶여있는 존재이다.... 네가 아무리 도발을 한다 하더라도.... 나크젤리온.... 그는 이 땅에 강림하지 않는다. 네가 과거 열덟장의 흑빛 날개를 가지고 있었을 때라면.... 그를 소멸시키는데 힘조차 들지 않았겠으나.... 지금은 다르지 않느냐? 고작 이 세 번째 땅에 앉아서.... 이 늙은이의 투정을 들어주는 것 외에는.... 무얼 할 수 있느냐?" 노인의 말에 델필라르는 급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 말.... 거두어 주십시오...." 아마도 늙은이의 투정이라는 말 때문인 모양이었다. 델필라르는 무릎을 꿇었고, 엘리엠 노인은 후후 하는 웃음을 한차례 웃었다. "일어나거라...." 노인의 말에 델필라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결코 엘리엠님께 불만이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가 아니면서 스스로인.... 주군을 부활시키기 위해.... 몸마저 검에 묶으신 분이십니다.... 전, 다만.... 그에게서.... 연민을 느꼈기에...." 델필라르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시 이었다. "차라리.... 그에게서 사고를 박탈하고.... 그저 생각 없는 도구로써 성장을 시켰더라면.... 그렇게 했더라면 고통 같은 것도 느끼지 못했을 터인데.... 굳이 사고와 감정이라는, 목표와는 필연적 연관이 없는 부분을 부여하여.... 그렇게 번민하고 괴로워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요?...." 노인은 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가.... 다른 종족이 아닌 인간으로 그를 만든 것은.... 모두가 나크젤리온.... 그가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후후.... 그러고 보니.... 나크젤리온 그가 자신과 함께 압그랑을 모시던 차르마흔을 소멸시킬 때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구나.... 이것도.... 인과인 것인가? 후후후후.... 아무튼.... 그러기 위해 택한 그이고.... 그러므로 완벽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크젤리온.... 그의 의심을 사서는.... 성공할 수 없는 일이니...." ".... 그렇다고는 하지만...." 델필라르는 말끝을 흐렸다. "잔정이 많아서는.... 큰 일에 망설이게 된다...." 노인은 델필라르의 말에 이렇게 중얼거렸다. 노인의 말 그대로였다. 이 용신이라는 존재는 유달리 정이 많았다. 물론, 겉으로는 위엄 있는 듯, 그리고 냉막한 듯 행동을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결코 그렇지 못하였다. 키티나라는 인간을 아내로 맞이한 대에도 이러한 그의 성격이 일익을 담당했다. 물론, 그런 면에 있어서는 좋다고 할 수 있겠으나.... 노인은 이렇게 한마디 한 후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이미.... 오래 전 시작된 일이다. 나의 본체가 산산이 찢기어진 그때....이미 일은 시작되었다.... 마족.... 어머님의 뜻과 상관없이 존재하게된 강한 존재.... 이들을 제거하는 것...." 노인은 이렇게 말하며 잠시 말을 멈추었고.... 한참동안이나 델필라르의 눈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님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풀어드리기 위해서.... 이보다 적당한 일은 없다...." 워프게이트는 멀리 신전이 눈에 들어오는 한 들판의 조그마한 사원과 연결되어 있었다. 흑색의 파면이 기둥과 지붕으로만 된 아담한 신전 중앙에 열리었고,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당연히 한사람과 엘프, 용 그리고 쥐였다. 멀리 보이는 신전은, 수많은 첨탑들이 빽빽이 솟아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중앙의 가장 높은 탑을 중심으로 가장자리로 갈수록 점점 낮아지는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탑과 그것을 장식하는 여러 조각들이 상당히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어서 멀리서 보아도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 사원으로부터 그곳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결코 가까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 사이는 약간 황량한 평야로 되어 있었는데, 가엘프의 숲 주위가 온통 나무로 되어 있는 것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게이트를 나와 사원을 벗어나자 마자 일행은 신전으로 그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호들갑스러운, 소녀 같은 아가씨 모라이티나는 놀랍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와~~!! 정말이지.... 가엘프 님의 신전에 비해서 엄청나게 크네요!!" 그런 그녀의 모습에 키티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고, 뒤이어 란테르트를 향해 시선을 옮기었다. 란테르트는 지금 모라이티나처럼 태연스레 놀라고 있을 수는 없었는지 약간 긴장하는 눈빛을 띄고 있었다. 키티나는 란테르트의 경직된 표정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저곳입니다.... 용신의 신전이...."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슬쩍 한차례 끄덕였고, 그때 모라이티나가 키티나에게 한가지를 물었다. "웅.... 그런데 굉장히 멀어요. 왜 이렇게 먼 곳에 워프게이트를 만들어 놓은 것이죠?" 그녀의 물음에 키티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모든 것은.... 엘리엠 덕분이었으나 그러한 것을 이야기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녀 자신도 확실히는 아는바가 없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키티나의 말에 모라이티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세요? 용신후잖아요. 용신후가 모르면 누가 알겠어요?"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순간 실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얼버무렸다. "아.... 죄송해요.... 모욕하려는 뜻은 아니었어요...." 모라이티나의 당황하는 표정에 키티나는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사실, 저 지금 헤츨링이에요. 델필라르 오빠와 결혼한지 100년밖에 흐르지 않았고.... 아직 드래곤으로 완전히 각성하지 못했어요. 게다가.... 아직 드래곤 사이의 풍습도 완전히 익히지 못했고.... 이래저래 모자란 것이 많아요." 키티나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더더욱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요? 잠깐.... 헤츨링이면.... 500살 이하의 드래곤인데.... 그럼 용신께서는 그렇게 어린 키티나님과 결혼을 한거게요?" 그녀의 말에 키티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뇨. 전 인간 이였어요." 키티나의 대답에 모라이티나와 란테르트 이 두 사람은 놀라 잠시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하긴.... 드래곤이라면 결코 드래곤 슬레이어 놀이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 모라이티나가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인간이었어요?" 키티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위대한 드래곤 슬레이어, 자이그랑 집안의 장녀, 키티나~! 그것이 제 이름이었죠. 지금은 용신후 키티나 이지만요. 호호." 모라이티나는 그녀의 말에 돌연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웃었다. 용을 사냥하는 드래곤 슬레이어 집안의 사람과 용들의 왕 용신이 부부라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드래곤 슬레이어.... 어떻게 용신 님과 만났죠? 설마, 용신 님을 잡겠다고 용신 님께 달려든 것은 아니겠죠?" 모라이티나는 잠시 웃다가 이렇게 물었고, 키티나는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크게 다르지 않아요." 키티나는 대화를 하면 할수록 눈앞의 이 어린 엘프가 마음에 들었다. 용신후가 된 이래로 그녀는 델필라르외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존재가 거의 없었다. 일단, 자신의 지위가 지위인 만큼, 용들은 모두 경의를 표할 뿐, 함께 놀아준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오히려 몇몇 용들은 자신이 인간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내심 무시하는 듯한 분위기를 내보이곤 했다. 하지만, 이 모라이티나라는 소녀는, 비록 말투는 굉장히 공경(?)하는 듯 하면서도 대화에 조금의 스스럼도 없어 함께 이야기하고 있으면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키티나가 심심할 때마다 아그라와 루플루시아, 그리고 르제베르 이 세 사람을 찾아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성격이 괴팍한 아그라도, 약간은 모자란 듯 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듯 한 루플루시아, 그리고 괄괄하면서도 냉소적이 르제베르까지.... 이 세 존재 모두 자신을 허물없이 대해 주었고, 그러한 느낌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키티나는 모라이티나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 오빠와 만난 이야기를 해 드릴까요?" 그녀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응, 하고 대답했고, 키티나는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가 이내 란테르트를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지금 자신이 할 일이 있었다. "신전 쪽으로 가면서 이야기를 해 드릴께요. 서둘러 간다면 반나절 정도면 신전에 도착할 수 있을꺼에요." 모라이티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고,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잠자코 걸음을 신전 쪽으로 옮겼다. 키티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처음 오빠랑 만난 건.... 이 용신의 신전에서 남쪽으로 2천 테트(2테트=약 1킬로미터. 2000테트=약1천 킬로미터).... 아, 테트 단위는 모르겠군요. 알칸사스지방의 거리 단위인데.... 음.... 아마.... 수룡의 호수에서 가엘프 님의 신전 정도 거리쯤 될꺼에요. 아무튼, 그곳에 알칸사스라는 커다란 분지평야가 있어요. 그곳에 있는 한 마을에서, 우연히 오빠를 만났죠. 그런데.... 전 오빠가 용신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고.... 호호 오빠 앞에서 저는 제가 드래곤 슬레이어라며 공공연히 떠들었죠. 재미있지 않아요?" 키티나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황당하다는 듯 몇 차례 웃었고, 그때 키티나가 약간 심각한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그때 까딱 잘못했으면 전 죽을 뻔했어요. 물론.... 델필라르 오빠가 워낙 마음씨가 좋아서 별 일은 없었겠지만.... 그래도 용신 앞에서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떠들었으니.... 아무튼, 그때, 오빠는 자신이 용신이라는 것을 감춘 채, 저와 함께 이곳 저곳 여행을 다녔죠. 함께 용사냥도 했었어요." 모라이티나가 외쳤다. "저런.... 설마 진짜로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키티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설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저만 빼놓고 한 연극이었어요. 가짜로 죽는 척 하고.... 아.... 창피해라.... 그때 제 실력이라고는.... 검의 날카로움에 의지해 간신히 드래곤의 비늘을 벨 수 있을 정도였지 뭐예요?" 키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한차례 툭 쳤다. 순백색에, 날이 아주 약간 굽은 아름다운 검이었다.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슬쩍 가로 저었다. "그래도 대단하죠. 용의 비늘이 얼마나 단단한데요. 바위나 쇠보다 훨씬 단단하잖아요." 키티나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미소를 한차례 지은 후 입을 열었다. "위로 고마워요. 하지만.... 정말 검의 날카로움에 의지한 거였어요. 이 검, 얼마나 좋은 물건인데요. 이 다프칸 대륙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검이래요. 물론 인간이 만든 것 중에서이지만요." 그녀의 이러한 말에 란테르트는 잠시 그녀의 허리 쪽을 바라보았다. "저.... 혹시 그 검.... 빌릴 수 있겠습니까?" 란테르트가 말했고, 그녀의 말에 키티나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당신께서는.... 이제 검을 찾아 돌아다니지 않아도 괜찮아요.... 당신을 위한 검이.... 신전 안에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의외라는 듯 신전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위한 검이 준비되어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하긴.... 가엘프가 알고 있는 사실을.... 카이젤 드라켄이라고 모를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을 돕는 것일까? 단지.... 단지 자신의 손을 빌어 나크젤리온을 죽이려 한다면.... 그렇다면 스스로 하면 될 것 아닌가? 아무리 자신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얼마 전 보았던 수룡왕인가 하는 드래곤보다도 약하고.... 용신에 비한다면.... 왠지.... 무슨 함정에 말려드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복수를 이룰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어차피.... 복수를 이룸과 동시에 죽어야 할 자신다....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더욱 극한의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함정에 빠진다 하더라도.... 그렇다 하더라도....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란테르트는 이러한 생각을 하다 돌연 얼마 전 모라이티나가 한 말을 떠올렸다. 이카르트는.... 그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자신이 나크젤리온에게 찾아가기 전.... 분명 한 번은 그와 마주칠 것이다. 친구가 아닌.... 적으로.... 하지만.... 자신은 벨 수 없다. 아니 베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보다 강하고 약하고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위해.... 그렇게나 많은 마음을 써 준 친구를.... 그를 어떻게.... 그렇다고.... 베지 않을 수도 없다. 무엇을 위한 5년이고....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그를 베지 않는다면.... 왜 지금까지 살아왔단 말인가? 란테르트는 한참동안이나 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종종 키티나와 모라이티나의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으나 그 내용은 들리지 않는다. 란테르트는 오랜 생각 끝에 결론을 내렸다. 베는 거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다면.... 그 역시.... 그리고.... 자신의 목숨으로 사죄하는 것이다. 자신과 함께 했던.... 그리고 자신 때문에 불행해야만 했던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그에게.... 그에게 자신의 목숨을 바침으로 사죄하는 것이다. 자신의 피로.... 그에게.... 제를 올리는 것이다. 란테르트는 여기까지 생각한 후 잠시 조그맣게 한숨을 내 쉬었다. 한심한 놈.... 그렇게나.... 남에게 배신당하는 것을 싫어하던 자신이.... 결국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를.... 자신의 손으로 배신하게 되다니.... 쓰레기다.... 형편없는.... 쓰레기....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왜.... "계획의 시작은.... 아마.... 아르카이제.... 가장 순수한 마족.... 어둠의 일족 중 첫 번째 존재인 그의 소멸이었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다시 엘리엠과 델필라르가 있는 곳.... 막 엘리엠 노인이 이렇게 말을 꺼냈고, 델필라르가 그의 말에 대꾸했다. "하지만, 그의 성격을 크게 뒤바꾸어 놓아 마족의 세력을 크게 떨어뜨려 놓았으니 반쯤은 성공입니다. 당시 저는 제 눈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겨우 아르헬이라는 각성도 못한 마족아이 하나를 납치해 온 것.... 그것 하나로 아르카이제라는 마족의 자아붕괴까지 유도할 수 있었다니.... 당시 그 여자만 아니었어도 완벽히 성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패의 원인은 바로.... 미래의 불확정성이다.... 모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시행착오인 것이지.... 나는 분명 아르카이제라는 마족이 자아붕괴에 이를 수 있도록 과거의 원인을 조작해 미래의 결과를 만들었었다. 하지만.... 예상외의 변수인 시에나 라는 인간 여자가 끼여들었고.... 나의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한 것이다. 전지하지 못한 자가 예측하는 미래의 한계인 것이지...." 노인의 말에 델필라르는 음, 하는 나지막한 신음을 한차례 내뱉을 뿐 대꾸하지 않았고, 노인은 뒤이어 입을 열었다. "나크젤리온.... 가장 음험한 마족.... 아니 신에 속하는 자이니 마신이라 불러주어야 할까?.... 그의 고립은 그때부터 시작했다. 그 녀석.... 의외로 자신의 본체이며 본체가 아닌.... 그리고 자신의 주군이며 동시에 주군이 아닌 존재.... 압그랑에 대해서는 상당한 믿음을 가지고 있더군.... 내가 종종 압그랑의 현신으로 그의 앞에 나타나 몇몇 가지 일을 지시할 때마다.... 완벽히 수행했으니...." 델필라르가 대꾸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 덕에 일은 더더욱 순조롭게 진행되었지요.... 저는 그가 차르마흔을 그렇게 간단히 소멸시켜 버리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인간을 이용해.... 그렇게나 간단히...."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차르마흔이 아닌 나크젤리온을 택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힘은 비록 차르마흔이 조금 더 강하지만.... 차르마흔은 결코 나크젤리온을 당해낼 수 없다...." 델필라르는 다시 으음, 하는 나지막한 신음을 냈다. 음, 하는 낮고 짧은 그의 이 신음은 그의 평소 버릇이기도 하다. "인간들.... 하지만 그들 역시 굉장한 존재들입니다. 신들의 모습을 본떠 만든 존재들.... 차르마흔의 제 1 수하.... 아르카이제와 동급의 마족인 흑룡기사 미르타이라를.... 죽이다니.... 아무리 나크젤리온이 빌려준 무기를 이용했다고 하지만...." 노인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음.... 다안이라고 했던가? 인간의 최대 약점이자 장점이.... 바로 그것이지.... 개체 사이의 서열이라는 것이 존재치 않고.... 다만 인간 하나 하나마다의 차이라는 것만이 존재한다.... 라는 것.... 왜 이 세상을 창조한 시온, 그가 인간들 사이에는 계급이나 서열을 두지 않았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구나...." 노인은 이렇게 말하더니 잠시 생각에 잠기었고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차르마흔이 소멸 한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구나...." 델필라르가 곧바로 답했다. "2100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마족은 동쪽 대륙에서 거의 세력을 떨치지 못하고 있고.... 그 때문에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에너지가 절반 가까이로 떨어져 버렸지요.... 즉.... 마족의 절반이 소멸한 것입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결과였지...." 그때 델필라르가 물었다. "그런데.... 왜 그 이후로 1800년 이상이나.... 침묵을 지키고 계셨었습니까? 다시 일을 시작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300여년전이니...." "글쎄다.... 딱히 할 일이 없었다고나 할까? 나크젤리온을 소멸시키기에 가장 적당한 도구가 인간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 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확신한 것은 바로 나크젤리온이 차르마흔을 죽였던 그 순간이었다. 물론.... 인간의 손을 빌려 스스로가 힘을 쓴 것이지만.... 어찌 되었건.... 인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형편없으면서도.... 자신감만은 신들과도 겨루겠다는 마음을 가질 만큼 넘쳐흐르는 자들.... 만약,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차르마흔에게 검을 들었더라면.... 차르마흔은 대번 의심을 했을 것이다. 인간을 제외한 어떠한 존재도.... 자신보다 강한 존재에게 막무가내로 덤벼들지는 않으니...." 노인의 말에 델필라르가 "무모함입니까?...." 라고 중얼거렸고,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지...." 이렇게 말하며 노인은 잠시 눈을 감았고, 이윽고 다시 눈을 뜨며 말을 이었다. "인간.... 나는 그들을 이용하리라 마음을 먹고.... 인간 세상에 하르의 사용법을 전파시켰다. 그들은 나를 로드 오브 메탈이라고 추앙하며.... 하르를 널리 사용하기 시작했지.... 하르를.... 나의 몸의 이곳.... 3차원적 파편인 하르를 말이다...." 델필라르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하르.... 인간들은 금속으로 알고 있더군요...." 엘리엠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내가 금속이라고 말했으니.... 그렇게 알고 있겠지.... 그리고 나는 하르를 매개로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공식을 하나 만들었다.... 지금은 봉인된 나 자신의 이름을 붙여.... 데스트라는 이름을...." 델필라르가 물었다. "그것 또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새로 마법을 만드신 것입니까?" "생각해 보거라...." 노인은 델필라르의 물음에 이렇게 대꾸했다. "나크젤리온과 똑같은 방법으로.... 이 일을 매듭지을 수는 없다.... 내가 직접 나서서 그를 죽이기에는.... 여러 가지로 곤란한 점이 있지 않느냐? 그렇기 때문에 만든 것이 이 검이고.... 마법을 만들어 엘디마이어의 수신사들에게 가르쳐 준 것은 그 마법의 효용성을 실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지.... 확실히.... 마법은 쓸만했고.... 하르와의 공명상태도 굉장히 양호했다. 즉.... 이 검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야.... 가장 순순한 하르의 결정인.... 이 하르의 혼, 소울 오브 하르를...." 델필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 스스로가 예상했던 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역시 그런 이유였던 것입니까?.... 하지만.... 저를 이용했다 하더라도.... 상관없지 않았을까요? 나크젤리온을 소멸시키는데 필요한 시간은 겨우 한순간입니다.... 그가 저의 기색을 눈치챘다 하더라도.... 이미 늦었을텐데요...." 노인은 델필라르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지만.... 네가 그의 손에 소멸 당하는 것도.... 한순간이면 족하다.... 만약 네가.... 이전의 너였더라면.... 성가시게 수많은 시간에 걸친 이러한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지금의 네가 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일이다." 델필라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었다. 지금 자신의 힘이라는 것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인간을 한명 만든 것이다.... 다만.... 그 그릇만은 충분히.... 어떠한 것이라도 해 낼 수 있도록 크게 만들어 놓은 것이지.... 나의 혼 일부를 이용했으니.... 그리고.... 그의 운명을 유도했다. 충분히 강해질 수 있도록.... 과거를 조금 바꾸어 두면.... 현재의 그는.... 보통의 인간으로써는 겪기 힘든 시련을 얻게 되고.... 결과 미래의 그는 강해진다. 아주 간단하고 직석전인.... 공식이었지.... 단.... 그가 죽어서는 곤란했기에.... 아주 이른 때에 자신을 충분히 지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을 부여한 것이고...." "그에게.... 마계마법을 가르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델필라르가 물었고,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적당한 때가 왔고,... 나는 그에게 마족들의 마법과.... 내가 창안해 낸.... 그 마법을 전해 주었다. 그 두 가지라면...." 노인의 말에 델필라르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엘리엠의 말대로.... 그는 극한 상황에 몰릴 때마다.... 그 마법을 이용해 살아나곤 했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이다...."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는 이 검을 다룰 수 있을 만큼 강해져서 돌아왔다.... 이제, 그에게 샤이튼을 가르쳐 준 후.... 이 검을 넘겨주는 것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이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을지는.... 나도 알 수 없구나...." 엘리엠 노인은 이렇게 말하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흡사.... 자신이 살아온 생의 먼 뒤안길을 바라보듯.... "이루어 질 것입니다...." 델필라르는 엘리엠의 말에 이렇게 대꾸했다. 그리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께서.... 스스로의 몸을 망쳐가면서 까지 하려는 일....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와~!!!!" 모라이티나의 입은 지금 아마 주먹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곧게 난 이빨은 분홍색의 얇상한 입술에 가리어져 있었고, 입 속 저 안쪽의 모습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모라이티나는 쉽사리 입을 다물려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동글동글한 커다란 두 눈은 까마득히 위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흡사, 중앙대륙의 거대 숲에 자라나고 있는 나무의 꼭대기를 바라보는 듯 힘겹게 꺾어진 목을 따라 눈은 하늘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보는 것은, 나무의 끝도, 하늘도 아니었다. 단지.... 문의 끝이었다. 거대한 문. 높이가 50휴리하(1휴리하=약 1미터)는 족히 될 듯한 이 문은 화려하지만, 워낙 거대하기에 단순해 보이는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드래곤의 모습일 때를 감안하여 만들어 둔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보라. 높이가 50휴리하나 되는 문이 달려있는 신전이.... 그 신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거대할지를.... 용신의 신전의 크기는 도시 하나와 맞먹을 정도였다. 란테르트는 하지만 오히려 놀라지 않았다. 이미.... 놀라는 것에 식상해 버렸다. 높이가 200휴리하 짜리 나무가 있는 이상.... 그 정도 높이의 신전이 있는 것이 뭐 이상할 것인가? 충분히(?) 가능하다.... "와~!! 정말.... 정말이지.... 커욧!!!" 한참동안 문을 바라다보던 모라이티나가 결국 내뱉은 말은 이것이었고, 키티나는 그녀의 말에 킥하고 한차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 신전에 드나드는, 용왕 급의 드래곤들은, 모두들 키가 60테리트(2테리트=약 1미터. 60테리트=약30미터).... 그러니까.... 이 문의 절반 이상이나 되는 걸요." 모라이티나는 아, 하는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드래곤들은 거대하군요...." 키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처음에 보고는 무서워 죽는 줄만 알았어요. 이제는 적응이 되었지만.... 델필라르 오빠는....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거의 이 문의 높이의 세배나 되어요. 가만히 서 있을 때의 높이가 이 문 높이 정도나 되니...." "히익? 그렇게나 커요??" 모라이티나는 놀라 이렇게 외쳤고, 키티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여 그래요, 라고 답했다. 뒤이어 키티나가 말했다. "자, 그럼 어서 들어가요." 키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를 한 번 바라보았다. 약간 냉막한 듯한, 그리고 긴장한 빛을 띄는 그의 얼굴을 보며, 키티나는 다시 한 번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란테르트가 어떠한 일을 위해 존재하게 된 인간이지를 알고 있었다. 비록 용신만큼 상세히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거의 대부분을 알고 있었고.... 쥐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말도 하게 만들 정도 감성이 풍부한 그녀이기에 란테르트에게 상당한 동정심을 느끼고 있는 터였다. 반면 란테르트는 이런 저런 생각에 골몰해 있는 터에 그녀의 시선은 눈치채지 못하였다. 복수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라는.... 거의 확실해진 상황 앞에서의 두근거림과.... 왠지 모를 허탈감.... 그리고.... 친구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딜레마.... 이러한 모든 것들이 머릿속을 어지러이 돌아다니는 터에 그는 더 이상 다른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키티나는 문 앞에다가 섰고, 손을 뻗어 문을 만졌다. 동시에 육중한 음성이 들리며 문이 약간 열렸다. 비록 약간 이었으나, 문의 크기가 크기이니만큼, 사람이 지나가기에는 충분히 여유 있는 틈이 생겼고, 모두들 그 틈으로 걸어 안으로 들어갔다. 신전 밖이 거대하니, 그 안도 거대한 것이 당연하다.... 안에 들어서자 마자 란테르트를 맞이한 것은, 거대한 홀이었다. 홀 중앙 위쪽 천장에는, 그곳에 있을 창문을 통해 색색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그 외에도 켜켜이 있는 여러 색의 창문을 통해 신전 내부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가엘프의 신전의 색조가 전체적으로 흰색이었던데 반해, 이 용신의 신전은 어두운 빛이 대부분이었다.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색색의 빛이 아니었으면 꽤나 답답할 뻔했다. 모라이티나도 그것을 느꼈는지, 대번 이렇게 말했다. "야~! 창문을 통해 비쳐 들어오는 빛의 색이 아름다워요. 가엘프 님의 신전과는 또 다른 아름다운 모습인데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키티나가 대번 얼굴에 홍조를 띄며 기뻐했다. "정말요? 마음에 드나요?" 그녀의 물음에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응, 하고 끄덕였다. "정말, 정말 마음에 들어요!" 키티나는 그런 모라이티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 고마워요. 지금까지 칭찬해 준 사람 한 명도 없었어요. 원래 신전의 창문은 모두 검정색의 코팅이 되어 있어.... 한 낮에도 약간 어두컴컴했었어요. 그래서 내가 일일이 마법으로 색을 입혀 놓았는데.... 오빠야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다른 용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어요. 무슨 방정맞다나?.... 마음에 든다니 정말 기뻐요." 키티나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도리어 발끈 했다. "저런!! 미적 감각이 꽝인 존재들이군요!!! 안 그래도 온통 검적색과 회색뿐인 신전 내부에 비쳐드는 빛까지 어두컴컴하면 사람의 마음까지 우울해지는 법인데!!! 키티나님!! 누가 무어라 해도 꿋꿋이 해나가는 거에욧!! 이 아름다운 유리창들을 반드시 지켜내는 거에욧!!!" 모라이티나의 외침에 키티나도 덩달아 흥분했다. "맞아요!! 역시 모라이티나 님은 무언가를 아시는 분이군요!! 이 모두가 침체된 드래곤 사회에 활기를 불어넣는 일!! 보수 드래곤들의 음모를 철저히 분쇄하며 앞으로 나아가겠어요!!" 이 두 발육부진(!) 아가씨들은 두 손을 마주잡은 채 이렇게 외쳐댔고, 어느 사이엔가 고개를(?) 빼꼼이 내민 르라프도 "혁명! 혁명!" 이라고 중얼거렸다. 잠시동안 이 정신 빠진 세 사람은 스스로에 도취대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아니 그녀들과 쥐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모라이티나와 키티나 이 두 사람은 정말 잘 어울리는 듯 했다. 그때 저쪽에서 일행을 향해 뚜벅, 뚜벅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고, 키티나와 모라이티나는 천천히 손을 놓으며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동시에 키티나의 얼굴에 홍조가 떠오르며 이내 그쪽으로 힘껏 달려갔다. 이 모습을 보니.... 상대가 누군지 알 만 했다. 키티나의 허리까지 오는 붉은 머리칼은 뒤로 휘날렸고, 이윽고 저쪽에서 걸어오던 검정색 장발의 한 청년의 시야를 온통 뒤덮었다. 폴짝 뛰어 안김에 남자의 허리가 살짝 뒤로 젖혀졌고, 키티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다녀왔어요~!" 라고 외치듯 말했다. 검정머리칼의 남자는 키티나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며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고, 키티나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다듬으며 그의 곁에 서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델필라르 오빠 에요. 카이젤 드라켄, 위대한 용들의 신이죠." 키티나가 이렇게 그 검정머리칼의 남자를 소개함에.... 모라이티나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위대한 드래곤들의 왕, 카이젤 드라켄 델필라르를, 고결한 숲의 엘프, 그란 부족의 모라이티나가 뵙습니다." 라고 인사했다. 한편, 란테르트는 상대를 잠시동안 유심히 바라보았다. 완벽한 검정색의 머리칼과 검정색 눈동자.... 알 수 없는 위압감.... 검정색이 주로인 품과 소매가 넉넉한 옷차림과 몇몇 장신구까지.... 용신이라 불리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상대의 모습에 란테르트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델필라르는 모라이티나의 인사에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환영합니다. 아름다운 숲의 엘프여. 몸을 일으키십시오." 라고 인사했고, 그제야 모라이티나는 몸을 일으켰다. 이어 델필라르는 란테르트 쪽을 바라보았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숙여 인사했다. "란테르트 님.... 이시군요." 델필라르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델필라르는 잠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 문제로.... 란테르트 그를 직접 볼 수는 없었다. 그는 막상 이렇게 눈앞에 란테르트를 놓고 보니 알 수 없는 감정이 솟아났다. 동정? 연민?.... 그런 것과 비슷한 듯도 했지만.... 분명 다른 것 같았다. 델필라르가 다시 말했다. "따라 오십시오.... 키티나, 모라이티나 양과 기다리고 있어." 델필라르의 말에 키티나는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모라이티나의 손을 잡아끌었고,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를 향해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며 델필라르의 뒤를 따랐다. 모라이티나는 그가 델필라르를 따라가서 겪을 일이 몹시도 궁금했지만, 따라가겠다고 우길만한 일이 아니어서 잠자코 키티나를 따랐다. "조금 있다 봐요. 란테르트!" 모라이티나는 조금 거리가 멀어진 란테르트를 향해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그녀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 주었다. 란테르트는 한참동안이나 델필라르를 따라 신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윽고 그들이 도달한 곳은 한 거대한 문이 있는 어떠한 곳이었다. 20여분 동안이나 걷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저 뚜벅뚜벅 울리는 발자국 소리의 메아리를 들을 뿐이었다. 델필라르는 입을 다문 채 조용히 문을 열었다. 둔중한 무언가가 구르는 소리가 잠시 신전 안에 울려 퍼졌으나, 결코 시끄럽다는 느낌을 주지는 못하였다. 란테르트는 문 사이로 흘끗 안을 들여다보았으나, 지금 서있는 곳, 키티나가 만들어 놓은 알록달록한 채광창 덕에 색색으로 빛나고 있는 그 곳에 비해 훨씬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델필라르는 한차례 란테르트를 바라본 후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란테르트 역시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온통 검정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결코 어둡지는 않았다. 물론, 환한 것도 아니었지만, 사물 모두를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으니, 어둡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심지어는 흔히 신전 벽에 덕지덕지 늘어붙어 있는 경우가 많은 이러 저러한 조각마저 없는 이 단조롭고 커다랗기만 한 방안에 발을 들여놓은 란테르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정면에 있는 검이었다. 이상한 느낌의 제단에 꽂혀 있는.... 검날이 투명한 검.... 델필라르의 뒤를 따라, 란테르트는 천천히 그 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섬에 검의 모습이 더더욱 확연히 들어왔다. 화려하지 않은 금빛의 손잡이와, 투명하디 맑은 검날, 그리고.... 검날의 중심에 새겨져 있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 란테르트는 멍하니 한참동안이나 검을 응시했다. 이윽고 검의 오른쪽에 선 델필라르가 입을 열었다. "소울 오브 하르.... 그리고.... 엘리엠.... 이 검의 이름입니다." 란테르트는 그의 말을 다시 한번 읊조렸다. "소울 오브 하르.... 엘리엠...." 다시 델필라르가 말을 꺼냈다. "당신을 위해 준비된 검입니다." 란테르트는 그의 말에 잠시 델필라르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다시 검을 바라보았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대단해 보이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잠시동안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끊겼다. 델필라르는 델필라르대로.... 그리고 란테르트는 란테르트대로.... 란테르트는 쫓기듯 달려온 요 며칠을 다시금 곰곰이 짚어보았다. 무언가.... 무언가가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소록소록 들었다. 가엘프, 아니 이미 테미시아 님의 신전인지 하는 곳에서부터....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곳까지 이끌어졌다. 게다가.... 종종 그 동안 만난 존재들이 내뱉은 알 수 없는 말들.... 용신후라는 막강한 지위에 있음에도 자신에게 극존칭을 사용하는 이상환 광경.... 물론, 이것의 경우에는 워낙 키티나라는 아가씨가 이상스러운 성격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무튼 간단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떠한 것이 감추어져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생각을 정리하던 란테르트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란테르트의 말에 델필라르는 미소지었다. 하지만 썩 맑지는 않은 웃음이었다. "말씀하십시오...." 델필라르의 대답에 란테르트는 그 동안 가슴에 쌓고 있던 의문점들을 묻기 시작했다. "먼저.... 저를 아십니까?" 란테르트가 물었다. 하지만, 이 물음이 단지 자신의 이름을 아느냐, 혹은 면식이 있느냐 정도의 물음이 아닌 것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알 수 있었다. "글쎄요.... 어느 정도는.... 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어느 정도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겠습니까?" 란테르트가 다시 물었고, 델필라르가 천천히 답했다. "과거.... 그리고 현재 정도? 아마 그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의 말은....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말로 들렸다. "제가.... 무슨 이유로 이곳을 찾았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계신 것 같군요.... 제가 무엇 때문에 복수를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까?" 란테르트의 물음은 아직까지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차분히.... 그리고 조용히.... 이 고요하고 어두운 공간에 꼭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에 답하는 델필라르의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 알고 있습니다." 란테르트는 그의 대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왜, 자신의 사적인 복수에.... "그렇다면.... 이 복수가 극히 사적이라는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이러한 일에.... 한 일족의 신이라는 분께서.... 이렇게 가볍게 개입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란테르트가 진정으로 묻고 싶은 것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의 이러한 질문은 조금의 소용도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자신이 복수를 할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이끌어 졌고.... 그리고 이곳까지 운명에 이끌리어 도착한 것 역시 다른 존재의 조작에 의한 것이니.... 오히려 그 존재의 일에 자신이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다.... 용신의 입장에서는.... 개입이 아닌 주도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내막을 모르는 이상에는 란테르트 자신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나서는 드래곤이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마족은.... 어차피 사라져야 할 존재들입니다. 당신의 힘을 빌리려는 것뿐입니다."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물론.... 언뜻 들으면 타당한 이야기였다. 자신의 손을 빌려 마왕 나크젤리온을 죽인다.... 하지만.... "전 미약한 존재입니다.... 용신 님, 당신은 물론이거니와 전에 보았던 수룡왕이라는 존재보다도.... 훨씬.... 제가 할 수 있다면, 당신들도 할 수 있을 것이고.... 제가 할 수 없다면, 저를 도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왜 굳이 제 손을 빌리려는 것입니까?" 그의 말에 델필라르는 마음속으로 쓰게 웃었다. 우리에게 인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답했으나.... 그 말을 차마 입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나름대로의 말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이것은.... 균형이라는 것 때문으로.... 저희가 끼여들기는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델필라르는 스스로에게 냉소를 터트렸다. 목숨이 아까워.... 도구를 이용하는 주제에.... 이러한 생각이 돌연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전면에 나섰다가는, 용들과 마족 사이의 큰 싸움이 벌어질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란테르트는 이제 다른 것을 물었다. "이 검.... 이것으로 나크젤리온과 싸울 수 있습니까?" 델필라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수한, 가장 정순한 하르만을 모아 만든 이 검.... 게다가 안에는 엘리엠이 깃들어 있다. 란테르트가 이미 익히고 있는 데스틴 더 비를, 샤이튼으로 증폭시켜 이 검과 공명시키기만 한다면.... 나크젤리온이 아니라 과거 나크젤리온 그를 포함한 다섯 혼을 거느리고 있던 압그랑마저도.... 그 마저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델필라르는 이렇게 말하며 두루말이를 하나 꺼내 란테르트에게 건넸고, 란테르트는 그에게서 두루말이 종이를 받아 펼쳐 보았다. 그곳에는 크지 않은 글자로 무언가가 써져 있었는데 몇 글자 읽지 않아 마법에 관한 글임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란테르트가 채 묻기도 전에 델필라르가 답했다. "샤이튼.... 엘디마이어 님의 마법입니다. 일순간동안, 마법력의 방출한도를 크게 높여 주지요.... 물론, 그에 반비례하여 지속 시간을 짧아지겠지만.... 이 마법과, 당신이 알고 있는 가장 강한 마법을 함께 사용한다면 순간동안이지만 엄청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이 검을 함께 사용한다면.... 상대가 신이라 하더라도...." 란테르트는 델필라르의 말에 눈을 반짝였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그것의 말뜻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미.... 계산은 끝나 있었고.... 자신의 능력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둘 마법까지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함정이 확실했다. 자신을 파멸시키려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순수히 자신을 도우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어떻다는 것인가? 이용해라. 기꺼이 이용당해 주겠다. 내 목표를 이룰 수 있게만 해 준다면.... 얼마든지.... 얼마든지 이용당해 주겠다. 그리고.... 죽으면 그뿐 아닌가? 란테르트는 조용히 두루말이를 한차례 읽어보았다. 데스틴 더 비와 운용방법이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오래지 않아 마법을 완전히 기억할 수 있었고, 적혀있는 운용 법에 따라 마법력을 움직여 보니 그리 힘들지 않게 마법이 일어났다. 물론, 증폭마법 이어서인지 느낌이 여느 마법과는 조금 달랐지만, 아무튼 이 느낌이 맞는 듯 하였다. 사실 마법이라는 것은 직접 발현되어 눈앞에 펼쳐지기 전까지는 느낌 외에는 전혀 그 성공여부를 알 수 없었다. 특히 이러한 증폭마법과같이,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변화가 없는 마법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란테르트는 이제 시선을 검으로 돌렸다. 한 걸음 두 걸음, 걸음을 옮겨 검이 박혀있는 이상한 느낌의 제단에 다가섰고, 이내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란테르트가 막 손을 대자, 검은 흡사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스르릉, 제단에서 뽑혀 나왔다. 란테르트는 그 검을 손에 든 채 잠시 살펴보았다. 날의 폭이 반 뼘쯤 되는 이 검은 길이 역시 보통의 장검 보다 약간 길었다. 그레이트 소드와 바스타드 소드의 중간 크기쯤 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검날이 투명하고, 전체적인 모습이 날렵해 그다지 크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는데다, 크기에 비해 무게가 많이 나가지는 않아 들기에 부담스럽지 않았다. 반신반의하던 일이 기정화 되었다. 란테르트는 검을 한참동안이나 응시하다가 잠시 델필라르를 바라보았고, 뒤이어 가방에서 여러 용도로 사용하던 천을 한 폭 꺼내 엘리엠이라는 이름의 검을 감쌌다. 그리고는 그것을 적당히 등뒤에 걸쳤고, 다시금 델필라르를 바라보았다. "검을.... 빌려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란테르트는 델필라르를 향해 이렇게 인사했고, 델필라르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답했다. "감사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저희 대신 손을 써 마족과 상대해 주시는 란테르트 님께, 오히려 제가 감사를 표해야 겠지요." 란테르트는 그다지 감동적이지 못한 인사를 한차례 주고받았고, 뒤이어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 델필라르가 말했다. "다시 돌아가려면.... 번거롭습니다. 원한다면 제 능력으로 공간도약을 시켜 드릴수도 있습니다만...."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다시 몸을 돌려 델필라르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러는 쪽이 훨씬 편할 듯 싶다. 모라이티나.... 그녀에게 인사를 해야 할까? 란테르트는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으나,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이대로 헤어지는 거다. 영원히.... 이제는 영원히 만나지 못할 그녀에게.... 지금 이 순간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감상.... 이제 와서 그런 것에 잠겨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란테르트는 동시에 목에 걸려있는 두 개의 펜던트에 신경이 갔다. 그녀들의 무덤에.... 마지막으로 들려야 하는 것인가? 아니.... 이것 또한 할 필요 없다. 곧 직접 만나러 갈 터인데.... 그러할 것인데 무어 굳이 그녀들의 무덤을 찾겠는가? 그냥 이대로.... 그러고 보니.... 그와는 한차례 더 만나겠군.... 란테르트는 이러한 생각들을 하며 다시 한 번 델필라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테에이산.... 그곳 정상으로 저를 날려 주십시오." 델필라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란테르트의 발 밑에서 검은 색의 빛이 뿜어져 나와 천장까지 치솟았다. 하나의 검정색 기둥은 잠시동안 힘찬 기세로 주위를 휘감다 이내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러한 모습은 흡사, 모래시계의 모래 알갱이가 모두 다 떨어지며 천천히 사그러드는 모습과도 같았다. 시간이 다 된 것인가?.... 그때 델필라르의 마음속에 전언이 들려왔다. [결국.... 이야기하지 않았구나....] 엘리엠 노인의 목소리였다. 그의 말에 델필라르는 천천히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28년 동안의 불행을 그에게 안겨주었으니.... 다시 28년동안 그에게 행복을 주지 않는다면.... 제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은 테미시아 님의 안배에 따라 일어나겠지만.... 제 힘 닿는데 까지라도.... 그를 돌보아 주고 싶습니다.] 엘리엠이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왠지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글쎄다.... 그러한 너의 바램이라는 것은....] 너의 바램이라는 것은.... 이렇게 급박하게 란테르트의 일이 이루어지는 동안.... 세이피나, 아니 아르페오네는 마계로 돌아와 아르카이제에게 보고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그간의 경과에 대한 보고를 말이다. "드래곤들이.... 움직입니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드래곤들이 란테르트 님을 돕고 나섰습니다." 아르페오네의 말에 아르카이제는 슬쩍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왠지 의욕 없는 표정.... 그답지 않게 지쳐있는 모습이었다. 아르페오네는 단번에 그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고, 보고고 무엇이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르페오네의 말에 아르카이제는 언제나와 같은 서쪽의 기둥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자신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아르페오네를 바라보았다. "글세.... 무슨 일이라...." 그는 잠시 말꼬리를 길게 늘여 말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이미 5년전에 일어나지 않았느냐...." 그의 말에 아르페오네는 대번, 아르카이제가 또 란테르르의 일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긴.... 그가 그 일 외에 무엇을 생각하겠는가?.... "그분.... 아직까지는 건강합니다." 아르페오네는 보고도 할 겸, 그리고 상관의 비유도 맞출 겸 이렇게 말했으나, 아르카이제는 심드렁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건강.... 그게 무슨 소용이지?.... 그보다.... 드래곤이 개입하다니?" 아르카이제의 물음에 아르페오네는 잠시 더 란테르트에 대해 생각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드래곤.... 중앙대륙에서의 일.... 저로써도 혼란스러울 정도로 이상하게 흘렀습니다. 흡사, 란테르트 님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모두가 그를 안내하고, 또 안내해.... 결국은 용신 님께 까지 찾아갔습니다. 도중.... 저는 돌려보내졌지만.... 용신후 님과 함께, 용신 님께 찾아간 것이 확실합니다." 아르페오네의 말에 아르카이제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가, 으음 하는 나지막한 신음을 내며 중얼거렸다. "음.... 왜 그들이...." 아르페오네가 말했다. "아마도.... 란테르트 님의 손을 빌려 나크젤리온 님을 해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녀의 말에 아르카이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소용없다.... 아무리 란테르트.... 그라고 해도.... 나크젤리온 님은 신이시다.... 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까지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신을 소멸시키는 것은 그 보다 상위 신만이 가능한 일이다." 아르페오네가 반문했다. "하지만.... 드래곤은 본래.... 고위신 출신이지 않습니까?" "물론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모두들 이 땅에 얽매여져 있는 존재들.... 아무리 그들이라 할지라도...." 아르카이제는 말꼬리를 흐리며 생각에 잠기었다. 평소 이렇다할 적대관계를 내보이지 않던 드래곤들이.... 왜 갑자기 이 순간 란테르트의 편을 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르페오네는 아르카이제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했다. 하지만, 영민 하기로 이름난 그녀로서도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윽고 아르카이제가 입을 열었다. "그는.... 나조차도.... 아니 너 조차도 완전히 소멸시킬 수는 없다.... 강약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지.... 그다지 걱정은 할 필요 없을 것이다.... 네가 직접 나크젤리온 님께 보고 정도는 해 두거라...." 아르페오네는 그의 말에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아르카이제는 잠시 창밖에 풍경을 살피다 입을 열었다. "그래.... 중앙대륙을 다녀온 소감은.... 어떠하지?" 아르카이제는 한층 풀어진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고, 그의 물음에 아르페오네는 잠시 중앙대륙에서의 여행을 떠올렸다. 그리고....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하르 검을 뽑아들고 자신의 앞에 섰던 란테르트의 모습이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는 수룡들의 왕이라는 자가 서 있었고.... 아르페오네는 잠시 그때의 일을 생각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숲.... 정말 거대한 숲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라이티나라는 아가씨와도 만났습니다. 그녀가.... 이카르트 님과 트레시아 님께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아르카이제는 아르페오네의 말에 유쾌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 꼬마.... 아직도 여전하던가?" "상당히 재미있는 아가씨였습니다." 아르카이제는 눈에 선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아르페오네는 잠시 그의 표정을 살피다 이야기를 이었다. "그녀와 함께.... 숲의 바다라는 것도 보았습니다. 숲의 위에서 숲을 바라보았는데.... 자료로 볼 때보다 훨씬 아름다웠었습니다." 아르페오네는 여기쯤 말하다 돌연, 아르트레스였다면, 훨씬 재미있게 이야기를 했을 텐데....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가엘프 님도 알현했습니다. 고결한.... 이라는 수식어가 조금도 과장이 아닌 분이셨습니다." 그녀의 말에 아르카이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확실히 그러하시지...." "숲의 주인 되는 분과.... 그리고 수룡왕 님도.... 만났었습니다." 아르카이제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다행히도.... 별일 없었구나!" "예.... 숲의 주인은.... 아마도 가엘프 님의 명령 때문에 저에게 상관치 않은 듯 싶습니다. 그리고.... 수룡왕 님의 레어에서는.... 란테르트 님과 용신후 님의 도움으로.... 아무일 없을 수 있었습니다." 아르카이제는 그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았구나.... 미안하다.... 하마터면.... 그런 위험한 일을 하도록 방치하다니.... 용왕까지 만날지는 생각도 못했었구나. 엘프들의 경우에는.... 호전적이지 않은데다.... 나와 일면 식이 있어 너를 어쩌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안심하고 있었는데...." 아르페오네는 아르카이제의 말투에 자신을 걱정하는 듯한 느낌이 가득 하자 가슴이 따듯해짐을 느꼈다. 그녀는 목소리에 가능한 한 동요를 적게 하여 아르카이제의 말에 답했다. "아르카이제 님을 위한 일입니다." 말은 간결했으나, 그녀의 아르카이제에 대한 마음이 한껏 담겨있었고, 아르카이제는 그녀의 말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는 곧 나크젤리온 님을 찾아 올 것이다. 드래곤들이 그를 찾았다면.... 분명 무언가를 준비해 두었을 터.... 그의 기나긴 여행도 마지막을 고했을 것이다." 아르카이제는 왜인지 미소지은 얼굴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르페오네는 일순 그가 왜 이러한 말을 하며 미소를 짓고 있나 의아해 했지만, 그러한 의문은 곧 풀리었다. 그가 찾아온다.... 그리고.... 아르카이제는 정식으로 그와 대면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아르페오네는 이점에 생각이 미치자 순간 숲의 바다에서 모라이티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카르트는 어떻게 되는 거죠?.... 막 이런 생각을 할 무렵 아르카이제가 입을 열었다. "그와 다시 만나기 전.... 일전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구나...." 이 말에 아르페오네는 순간 무슨? 이라는 생각을 하며 기억을 더듬었고, 오래지 않아 그 질문의 내용을 떠올렸다. 아마도.... 란테르트, 그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느낌.... 이것이었던 것 같다. "그에 대한.... 느낌...." 아르페오네는 이렇게 운을 떼며 한참동안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입을 열었을 때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른 대답이었다. 그때의 알 수 없다는 느낌은.... 객관적인 자료의 부족으로 인한 판단의 보류였으나.... 지금의 경우에는.... 란테르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좋아한다고 보기에는 싫어할 이유가 너무나 많았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대답에 아르카이제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아르카이제는 이렇게 말하며 다시 고개를 밖으로 돌렸다. 아르카이제도.... 그리고 아르페오네도 입을 열지 못하였다. 이제 곧 있을 란테르트와의 재회.... 그것이 이들에게 미칠 영향이라는 것이 결코 작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렇기에 이들은 입을 열 수 없었다. 단지....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하늘의 반짝이는 그것들을.... 별은 아니되 별의 빛을 내고 있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또 생각할 뿐이었다. "호오라~~ 대단한데~!!" 날카로운 음성. 하지만 가늘지는 않은 목소리. 절대적인 자신감.... 이 정도면, 마계에서는 유일무이다. 아르페오네가 직접 나크젤리온에게까지 보고를 끝낸 후의 한가한 오전시간. 아르페오네의 사무실 책상에 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앉아 있다. 아르트레스.... 붉은 색 제복에 허벅지에서 발목까지 길게 터진 치마를 입고있는 그녀는 머리칼을 위로 틀어올린채 바로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있는 아르페오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팔을 가슴근처에서 꼬았고, 다리 역시 한차례 꼬은 채 발목을 까딱 까딱 움직이고 있었다. "온통 머릿속에 아르카이제님 밖에 없던 네게 란테르트 님이 아주 조~~~금이지만 자리를 잡았다니!!" 그녀의 말에 조금은 간편한 복장을 한 채 의자에 단정히 앉아 있던 아르페오네가 대꾸했다. "그만해 주십시오.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 그때, 단촐하기 짝이 없는 아르페오네의 사무실 방문을 열며 아르르망이 모습을 드러냈다. 갈색의 머리칼이 조금은 평범해 보이는 이 남자는 방안에 들어서자 마자 두 누나(?)들을 향해 눈인사를 건넸다. 아르페오네가 그에게 앉을 것을 권했고, 아르르망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곧.... 이제 곧 란테르트 님께서 나크젤리온 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당연하거니와 아르카이제 님께서 그분을 막으러 떠날 것입니다." 아르페오네는 두 손을 허벅지 위에서 마주잡은 채 이렇게 말을 꺼냈다. 긴장해서인지 마주잡은 두 손에 필요이상으로 힘이 들어가 있다. 아르트레스가 그녀의 말에 답했다. "에이.... 뭐 별일 없을 꺼야. 란테르트 님이 아무리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이고.... 아무리 드래곤의 도움을 얻는다 해도.... 네가 언젠가 말했잖아. 소멸시키는 것까지는 불가능하다고!" 아르페오네가 대꾸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만약 아르카이제 님이.... 란테르트 님께 패하고.... 설사 소멸을 당하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후에 있을 나크젤리온 님의 분노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란테르트 님과의 싸움으로 잃게 될 힘은 어떻게 할 것이며.... 게다가.... 아르카이제 님이 손수 란테르트 님을 제거할 가능성이 큰데.... 그럴 경우에 그분이 겪게 될 정신적 혼돈상태라는 것은.... 그리고.... 만에 하나의 경우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전혀 불가능하지만은 않습니다." 아르페오네의 말에 아르르망은, 으음, 하는 신음을 내뱉었고, 아르트레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듣고 보니 꽤 골치 아프구나. 좋게 끝내는 방법은 없을까?" 아르페오네가 답답하다는 듯 되물었다. "좋게 라니요?" "그러니까.... 아무도 다치지 않고.... 다시 옛날처럼 친하게~" 돌연 아르페오네의 목소리가 신경질 적으로 바뀌었다. "지금에 와서도 농담이 나오는 겁니까?" 그녀의 높은 목소리에 아르트레스는 순간 두 눈을 크게 떴고, 아르르망 역시 놀랐다는 듯 아르페오네를 바라보았다. 아르페오네는 이 두 사람의 시선을 이기지 못한 채 고개를 밖으로 저쪽으로 돌려 버렸고, 아르트레스는 한참이나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일순간 정적이 감돌았으나.... "오호호호호~~!!" 아르트레스가 웃었다. 그리고는 아르페오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대단해!! 오오~!! 이 얼마만에 보는 우리 아르페오네양의 화난 얼굴이란 말인가~!!! 다시 한 번 해 봐. 이 언니가 영원히 기록으로 남겨 줄게!! 어서, 어서~~!" 아르페오네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얼굴에 싸늘한 노기를 띄며 잠시 아르트레스를 바라보았으나.... 오래지 않아 고개를 떨구었고, 이내 후훗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와는 관계없이 그녀의 무릎에는 한두 방울 물방울이 떨어졌다. "모르는 겁니까?.... 지금의 상황이 어떠한지?.... 아르카이제 님이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란테르트 님을 떠올리시며.... 그분이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그러한 분이 란테르트 님과 다투려 하시겠습니까? 반면.... 란테르트 님은 지금 복수에 미쳐 계십니다. 드래곤들의 힘을 빌린 이상.... 아르카이제 님이 그분을 당해내시지 못할 가능성도 상당합니다." 아르페오네의 목소리는 점점 더 격양되어 갔고.... 이제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습에 아르트레스는 천천히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고, 아르페오네는 자신의 바로 곁 책상 위에 앉아 있는 그녀의 허벅지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때 아르트레스가 입을 열었다.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도대체 우리가 무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르페오네는 아르트레스의 목소리에 잠시 울음을 멈추었다. 아르트레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우리.... 란테르트 님을 막을까?" 아르페오네는 머릿속이 멍해졌다. "무.... 무슨...." "죽이는 거야. 우리 손으로." 이윽고 아르트레스의 입이 열리었고.... 아르페오네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르트레스의 입가에는 미소가.... 언제나와 같은 화사한 미소가 있었고....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빛나고 있었다. "그.... 그게 무슨 말...." 아르페오네는 잘 알고 있다.... 아르트레스가 란테르트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지.... 이상하게도 서로에게 편한 이 두 사람이기에 상상이상으로 많은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그녀들이었다. 아르르망 역시 아르트레스가 결코 장난으로 란테르트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이러한 말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르트레스는 다시 한 번 살짝 미소를 지었다. "죽이는 거야. 그러면.... 란테르트 님은 나크젤리온 님께 복수를 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아르카이제 님과 서로 검을 마주하는 일도 없을 테고.... 아르카이제 님에게 충격이 꽤 크겠지만.... 그런 것이야 오래지 않아 극복할 수 있을 거고.... 뭐, 물론 우리들을 조금 싫어하게 되겠지만...." 아르페오네가 말을 더듬었다. "하.... 하지만.... 아르트레스님은...." "바보 같기는.... 이러한 의견은 네가 내고 내가 반대를 해야지.... 왜 반대인 거야?" 아르트레스는 여전 입가에 미소를 띈 채 이렇게 말했고, 아르페오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거다? 우리 셋의 힘을 합치면.... 적어도 예전의 란테르트 님은 상대할 수 있어. 뭐, 용들의 힘을 얻어 훨씬 강해졌을 테지만.... 내가 있는 이상 지지는 않을 꺼야. 그분은.... 정이 많아서.... 정이 많아서.... 정이 많아 나를.... 그리고 우리를 심하게 공격하시지는 못하실 테니까.... 약간의 속!임!수!를 쓰는 것도 무방하고...." 아르페오네는 계속해 아르트레스를 올려다보았다. 상상이상으로 담담한 눈동자.... 그리고 담담한 말투.... 미소.... "서.... 설마?...." 아르페오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벌떡 일으켰고, 아르트레스는 그런 그녀를 이제는 올려다보게 되었다. "그.... 그런 결심을 한 것은 아니겠지요?" 아르페오네의 외침에 아르트레스는 담담히 웃었다. "뭐.... 어차피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아르르망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외쳤다. "그건 안됩니다!! 왜.... 어째서 그런 결심을 하신 겁니까?" "시끄럽다 꼬마." 아르르망의 외침에 아르트레스는 이렇게 외쳤고, 이내 머리를 고정하던 핀을 뽑아 버렸다. 사르륵, 뭉쳐있던 머리칼이 폭발하는 불꽃처럼 흩어져 확 펼쳐진다. "역시 답답해...." 아르트레스는 이렇게 말하며 두 손으로 머리칼을 슬쩍 쓰다듬어 정리했다. 적당히 구부러진 결좋은 머리칼이 두 어깨를 가득 감싸 안는다. 아르페오네도 아르르망도 멍하니 아르트레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르트레스는 별 표정변화 없이 머리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언젠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난 영원히 사는 것 따위는 관심 없다고.... 내 혼.... 아마.... 개방해 폭주시켜 버리면 힘이 상당할걸?" 아르르망이 다시 외쳤다. "그.... 그만두세요. 그건.... 자살이잖아요!!" "맞아. 바로 그거야. 자! 살!" 아르트레스는 다시 한 번 웃으며 아르페오네를 바라보았다. 놀란 표정이 완전히 얼빠진 듯 해 보였다. "뭐야? 바보같이 그 표정. 넌 지금 즐거워 해야해. 너의 아르카이제 님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는데다가.... 연적 제거, 그리고 보기 싫은 나까지 사라지니, 오호라~ 일석 삼조라!!" 아르페오네가 그녀의 말에 곧바로 대꾸했다. "그.... 그렇게 까지 보기 싫지는 않습니다!" "그래? 아쉬운걸.... 일석이조로 줄어들었으니...." 아르트레스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책상에서 내려왔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한다. 나는 란테르트 님과 저 먼 곳으로의 웨딩투어를 하러 갈 테니까.... 너희 둘은 내 곁에서 일이 실패하지 않도록 도와주면 돼. 작전 회의 끝~~!! 그럼 가자~!" 아르트레스는 두 손을 머리 뒤로 가져갔다. 깍지를 끼고.... 휘파람을 부른다. 흥얼흥얼.... 기쁜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아르페오네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르르망도.... 말리고 싶었다. 그녀를 말리고 싶었다. 하지 만.... 할 수 없는....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결의가....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하다. 위엄.... 어쩌면 두 사람의 누나, 그리고 언니가 된 후 처음으로 보인 위엄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만 볼뿐이었다. 27. 비극의 그 마지막? 공간 도약.... 순간이동.... 워프.... 모두들 비슷비슷한 개념이다. 기껏해야 시전 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취향, 혹은 발현되는 모습, 이동거리 등등의 차이에 따라 제멋대로 부를 뿐이다. 정확한 이름은 공간왜곡을 이용한 미시간 초장거리 이동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미시간이다. 미시라는 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시간보다도 더 짧은 시간으로.... 영원히 영에 가까워지는 극한값만큼의 시간이라고 할까? 그러한 짧은 시간이지만, 란테르트는 많은 생각을 했다. 물론, 게이트가 열리고, 빛의 기둥이 생겨나며.... 워프가 가능한 형태로 몸이 재구성되고, 워프가 일어나고, 반대쪽에서 몸이 재구성되며 워프 아웃이 일어나는..... 이 모든 일을 다 계산에 넣으면 10여초 정도의 시간이 생겨난다. 하지만 역시 짧은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순간에 수많은 상념이 생겨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할 것이다. 자신이 죽어야할 시간이 오래 남지 않았다.... 5년간 헤어져 지내던 친구와도 다시 만난다.... 그리고.... 그녀의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쓸모 없이 약해지기 싫어 무덤에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소록소록 드는 후회감은?.... 프넨티아의 존재여부는 모른다. 저 멀리, 용신이 산다는 이상한 대륙에까지 가 보았으나, 프넨티아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죽은 후 그녀들을 만날 수 있을까?.... 혹자는 환생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람은 죽고 나면, 육신은 사라져 버리지만 정신은 남아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물론, 이생의 기억은 모두 잃어 버린 채.... 만약 그렇다면, 사피엘라도, 에라브레도 지금쯤 어디엔가 다시 태어났겠지.... 사피엘라는.... 아마 여덟살.... 그리고 에라브레는 다섯 살? 혹시 그곳에서 몇 년쯤 머물다 다시 태어날까? 그렇다면.... 지금 몇 살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여자는 다시 여자로 태어나는 것일까? 인간은 다시 인간으로? 죽은 후.... 아무것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모든 기억이 사라져 버리고.... 완전히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그건 곤란하다.... 사피엘라도.... 에라브레도.... 그리고 이카르트도.... 트레시아.... 모라이티나.... 세이피나.... 클라라.... 로인.... 칼슨.... 엘라.... 그리고.... 그 누구도 잊고 싶지 않다. 손꼽아 보니.... 꽤 많은 사람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어느덧 몸 주위를 휘감고 있던 검정색의 빛이 사라졌다. 돌연 눈 섞인 흰 바람이 미친 듯이 몸을 휘감는다. 순간 란테르트는 당황했다. 왠 눈? 생각해 보니.... 아직 12월이다. 날짜는 잘 모르겠으나, 중앙대륙에서 보낸 시간이 한 달이 채 되지 않았고.... 마곡을 떠난 때가 11월달이었으니.... 지금은 아직 한겨울, 12월달이다. 무더운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곧바로 한겨울의 대륙에 돌아와 보니.... 눈이 소담스레 산 정상에 쌓여있다. 란테르트는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았다. 정강이까지 오는 눈이 하나 가득 쌓여있는 산 정상은, 몇 달전 트레시아와 함께 왔을 때 보다 몇 배는 더 싸늘했다. 계절이 깊어졌으니.... 당연하다. 이제 막 저녁때가 다 되었다. 동지 근처이어서 인지 해가 일찍 진다. 분명 델필라르의 신전에 들어갈 때만 해도.... 태양이 높은 곳에 솟아 있었는데.... 시간이 흘러서가 아니라.... 아마도 워낙 먼 곳에 있기 때문인 듯 하다. 그때, 세 사람의 모습이 공간의 일렁임과 함께 드러났다. 란테르트는 계속해 불어오는 눈 섞인 바람에 시야를 조금 잃었으나, 상대가 누구인지 정도는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일단 공간을 뚫고 나오고 있다는 것에서.... 자신에게 미소를 짖고 있다는 것까지.... "트레시아.... 아르페오네님.... 아르르망님." 란테르트는 미소지었다. 잠시 후 있을.... 이들과의 싸움 전에 인사 정도는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트레시아는 란테르트의 부르는 목소리에 환히 웃었다. 가까이 다가가 목을 껴안았고,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행동했기에, 란테르트는 한순간에 제압(?)당해버렸다. "마지막 만남일텐데.... 이 정도는 괜찮죠?" 란테르트가 약간 어색해 하자 트레시아는 이렇게 물었고, 란테르트는 슬쩍 미소지어 주었다. 트레시아는 잠시 더 목을 껴안고 있다가 손을 풀며 물러섰고, 란테르트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아르페오네를 향해 목례했다. 아르페오네는 평소와는 다른 약간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란테르트의 목례에 우물쭈물 대구했고, 란테르트는 그녀의 당황하는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으로 아르르망에게 인사했다. 이전에 보았을 때는 굉장히 온화한 듯 보이는 남자였는데, 오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화가 난 듯 보였다. 란테르트의 인사에 고개를 살짝 돌려버린다. 란테르트는 모두에게 인사를 건넨 후 잠시 멍히 서 있었다. 이제 무얼 해야 하나.... 먼저 무기를 뽑아들기는 싫었다. 트레시아는 고개를 돌려 두 동생에게 한 번씩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손에 검을 만들었다. 언제나 그녀가 진지하게 싸울 때는 거대한 검을 꺼내 들었다. 자신의 몸 일부를 사용해 만드는 것으로, 보통의 여자가 들기에는 조금 무리인 크기의 검이다. 너비가 한 뼘이나 되고 세우면 거의 명치끝에 육박하는 길이니 말이다. 하지만, 흑염패에 붙은 패(覇)라는 글자가 말해주듯 그녀는 그만한 검을 자유 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아르르망도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무기는 길이가 거의 10휴리하(1휴리하=약 1미터)에 이르는 연검이다. 역시 자신의 몸으로 만들었기에 중간에서의 방향전환이 흡사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처럼 간단했다. 아르페오네의 검은 아르에가 변한 것으로, 상당히 선이 가는 검이다. 색깔은 대체적으로 하늘색을 띄었다. 세 남녀는 검을 꺼내든 채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오로지 아르르망.... 그에게서만 약간의 살기가 느껴질 뿐, 다른 두 여자에게서는 별다른 느낌을 발견할 수 없었다. 트레시아는 전언을 두 동생들에게 보냈다. [속전 속결이다.... 아르카이제 님이 도착하시기 전에 끝내는 거야.] 이렇게 말하며 트레시아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100년쯤 전에 이렇게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한 사람과 싸운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상황상 강한 마법은 사용할 수 없었음에도.... 오직 육박전만으로 자신들 셋과 몇 시간동안이나 싸운 인간.... 확실히.... 대단했었다. 트레시아가 보기에는 눈앞의 란테르트도 그에 못지 않은 실력을 지녔을 것 같다. 정상적으로 싸운다면.... 마법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아닌 란테르트를 이긴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로지.... 그의 호감을 이용한 공격 외에는 쓸모가 없다. "하앗~!" 트레시아는 소리를 지르며 공중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주위를 끌려는 심산이었다. 동시에 아르페오네와 아르르망 두 마족은 좌우로 흩어져 란테르트의 각각 왼쪽과 오른쪽으로 돌았다. 바닥에 쌓여있던 눈발이 걸음에 부서져 바람에 뒤섞인다. 란테르트는 하르제 검을 뽑아 데스틴 더 비를 걸었다. 어지간한 케릭팅 마법으로는 상처조차 입힐 수 없다. 일단 가장 가까운 곳까지 접근한 트레시아를 향해....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힘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트레시아는 검을 앞으로 뻗어 놓았을 뿐, 그녀의 공격에는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다. 란테르트의 검은 거의 허공을 치듯 그녀의 검을 쳤고, 트레시아는 그대로 몸을 돌려 란테르트의 몸 뒤로 향했다. 란테르트는 순간 등을 잡혔다는 느낌에 날다시피 바닥을 스쳐 앞으로 나갔으나, 오래지 않아 동시에 좌우 양쪽에서 감쌓오는 검에 길이 막혔다. 좌우, 그리고 뒤 삼면에서 포위 당한 것이다. 물론,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정 이상 강도의 마법을 일으키면.... 하지만, 그럴 경우 자칫하면 세 마족이 꽤 큰 상처를 입니다. 란테르트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 고민에 빠졌으나, 고민은 오래지 않았다. 이내 발 주위에서 바람이 일었다. 어차피 마족은 쉽사리 죽지 않는다. 게다가.... 복수에 방해가 된다면.... 그녀라도.... 그리고 그의 아이라도.... 그때였다. 돌연 등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껴안는 것을 느꼈다. 무모하다. 단지 껴안기만 하는 것은.... 정말이지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초 근접거리에서의 마법력이라는 것은.... 게다가, 자신의 검 역시 날카롭기 이를 데 없다. 언뜻 보면, 지금의 형세가 란테르트가 세 마족들에게 제압 당해 있는 것으로 보였으나, 실상은 아니었다. 란테르트가 등뒤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그가 소홀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가까이 까지 상대가 붙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일단, 지금 현재 엔클레이브의 밀도를 최고로 높여, 흡사 갑옷을 입고 있듯 몸에 휘감아 두었기에, 아무리 트레시아라고 하지만 단번에 뚫을 수는 없다. 이런 상태에서 란테르트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그의 마법에 정통으로 휘말려 크나큰 위험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일정이하의 마법은 주문 영창도 필요 없는 란테르트다. 아무리 트레시아가 마족이고 속도가 빠르다지만 란테르트의 마법을 피할 수는 없다. 이런 상황이기에 란테르트는 오히려 당황했다. 지금 당장 마법을 일으켜 트레시아를 공격한다면.... 단번에 그녀를 전투불능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뻔히 알면서 왜.... 왜 그녀는 자신에게 달려든 것일까? 그때 트레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란테르트 님.... 제 진심.... 아시죠?" 란테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 갑자기....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란테르트에게서 대답이 없었으나.... 트레시아는 나지막이 웃었다. "호호.... 그럼.... 함께 가는 거예요. 저와 함께...." 란테르트는 온 몸의 털이 쭈뼛 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 엄청난 힘의 응집이 등뒤에서 느껴졌다. 트레시아.... 이건 겨우 상급마족 트레시아의 힘이 아니다. 무언가 굉장한.... 충분히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그러한 힘이다. 란테르트가 외쳤다. "무.... 무엇 하려는 거야? 트레시아?" 아르페오네는 고개를 외면했다. 그리고 아르르망은 그런 트레시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르페오네.... 그녀의 눈가에 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르르망이 허물어진다. "함께.... 영원히.... 함께...." 트레시아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였다. 돌연 란테르트의 눈앞에 엄청난 힘이 강림했다. 하늘에서 내리 꽂히듯, 검정색의 기둥이 생겨나며, 동시에 엄청난 충격파가 일대를 휩쓸었다. 미친 바람이 불었고, 바닥에 한뼘 이상이나 쌓여있던 눈이 둥근 원을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르페오네도, 아르르망도, 그리고 란테르트의 등에 매달려 있던 아르트레스도, 그 힘에 휘말려 저쪽으로 날려 데굴데굴 몇 바퀴나 굴렀다. 란테르트는 이 엄청난 힘에 한 걸음 뒤로 밀렸다. 하지만 끝내 다른 세 마족처럼 날려 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마법을 이루고 있을 정도의 정신은 아니었고, 하르 검에 걸려있던 데스틴 더 비가 일순간에 풀려 버렸다. 트레시아의 계획은 실패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트레시아는 흑흑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아르페오네는 정신을 차리자 마자, 강림한 흑기에 무릎을 꿇었고, 아르르망은 아르트레스에게 다가가 그녀를 부축하며 아르페오네와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흑기가 서서히 걷혔고.... 안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담한 체구를 한 연보라색 머리칼의 마족이.... "이....카르트...." 란테르트는 그의 모습에 이렇게 중얼거렸다. 순간 머릿속이 텅 비는 듯 했다. 이카르트.... 트레시아의 자폭을 막기 위해 그녀를 저쪽으로 날려버린 그는 란테르트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 후 트레시아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옆으로 누워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의 앞에 서서는 한쪽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춰 조용히 그녀의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옆을 바라보며 옹크리듯 누워 있는 덕에, 귀밑머리가 얼굴위로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고, 이카르트는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듯 정리해 주었다. "어른들의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는 거야.... 그리고.... 아이들은 아이들이 할 일만을 하면 돼...." 트레시아는 그의 말에 몸을 동글게 말며 더더욱 서럽게 흐느껴 울었고, 이카르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아르르망에게 명령했다. "잘 보살펴 주어라.... 영원히...." 마지막의 영원히 라는 말은 워낙 작았기에, 아르르망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 이카르트는 다시 아르페오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한쪽 무릎을 바닥에 놓은 채 고개만을 조아리고 있는 그녀의 앞에 선 이카르트는 조용히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착한 아이다...." 오직 한마디.... 이 말을 남기며 이카르트는 몸을 돌렸고, 아르페오네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시선을 바닥에 고정했다. 이카르트는 이윽고 란테르트의 앞에 섰다. 돌연 주위에 바람이 멎었다. 방금 까지도 있던 세명의 마족도 보이지 않는다. 이카르트가 엔클레이브를 쳐버린 것이다. "오래간.... 만이야...."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란테르트였다. 그의 말에 이카르트도 미소를 지었다. "그렇구나...." 이렇게 말한 후.... 둘은 한참이나 대화가 끊겼다. 서로의 눈을 응시할 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에 수많은 단어가 오갔으나, 막상 어떠한 말을 입밖에 내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다시 란테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 동안.... 고마웠다..... 내.... 뒤를 돌보아 주어서." 란테르트의 말에 이카르트는 씁쓰레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런가?...." 다시 침묵.... 란테르트는 순간 이카르트의 차림새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검정색을 좋아하는 거야 여전했으나.... 등뒤에 있어야할 브세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브세리아는?.... 그날 현을 끊어 버린 후.... 그만 두었나 보지?" 이카르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볼 때마다.... 기분 나쁜 기억이 다시 떠올라 버려서...." 또다시 침묵.... "다시... 여기구나...." 란테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5년전의 그 일도.... 바로 이곳 테에이산 정상에서 일어났었다. 란테르트는 그저 막연히.... 막연히 나크젤리온을 다시 만나려면 이곳으로 와야 할 것 같아 델필라르에게 이곳으로 보내 달라고 했었다. 그의 말에 이카르트가 다시 한차례 쓴웃음을 지었다. 왜인지 그는 수동적으로 란테르트의 말에 힘없이 답하며 쓴웃음만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그렇구나.... 여기.... 테에이산의 정상...." "5년전.... 그때 이곳에서.... 너는 나를 죽이려 했고.... 나는.... 네게...." 란테르트의 말에 이카르트는 약간 표정이 변하며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의외로 란테르트의 표정에는 은은한 미소가 어리어 있었다. "차라리.... 그때 네가 나를 죽였더라면...." 돌연 이카르트가 외쳤다. "그런 소리 그만 둬!" 란테르트는 그때까지 멍하다시피 있던 이카르트의 이러한 폭발적인 대응에 약간 당황했다. "이 바보! 복수 따위는 왜 한다고 설치는 거야! 네 능력도 모르는 거야? 그냥.... 그냥.... 살아가면 되잖아! 우리들과.... 인연을 끊고 그냥 조용히 한 명의 인간으로 행복을 찾아 살아갔으면.... 내가 너와 이렇게 다시 만날 일도 없었잖아!" 이카르트가 외쳤고, 이번에는 란테르트 쪽이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 "글쎄가 아냐!! 뭐.... 뭐야 이 수척해진 얼굴! 복수를 한답시고 5년간 고생해 얻은게 도대체 뭐냔 말이야! 복수에 성공한다고 치자 그게 네게 무슨 득이지? 도대체..... 도대체...." 이카르트는 스스로 격양되어 말을 잊지 못했고.... 란테르트는 이러한 약간은 어린아이 같은 그의 투정에 잠시 할말을 잊었다. 기껏 지금까지 뒤에서 도와준 것은 뭐고.... 이제 와서 이런 말이라니.... 왠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때 순간 이카르트가 달려와 란테르트의 목을 감싸 안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도대체.... 너는.... 너를 걱정해 주는 존재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이카르트의 목소리는 점차로 잦아졌다. 대신.... 두꺼운 망토를 뚫고 전해져 오는 축축한 느낌에 란테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씁쓰레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역시.... 투정이었던 것인가? "이 무모한 녀석.... 네가 위험한 일을 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바보같이 디아의 봉인을 해제하지 않나.... 무슨 숲의 주인의 표적이 되질 않나.... 4주문 동시에 사용한다고 하다가.... 폭발할뻔을 하지 않나.... 그럴 때마다.... 그럴 때마다...." 그때, 란테르트가 검을 들고 있던 반대쪽 손을 들어올려 그의 뒷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미안하다.... 정말 네게는.... 언제나 미안하고.... 또 고마워하고 있다...." 란테르트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자, 이카르트는 잠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고 이내 몸이 살짝 풀리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보고.... 싶었어.... 정말로...." 란테르트는 이카르트를 보며 슬쩍 웃었다. 보고 싶었던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나도...." 그리고는 장난스럽게 한마디 보탰다. "날 사랑한다는 말이 다 듣고 싶었을 정도라니까." 이카르트는 그의 가슴에 기댄 채 그의 말에 쿠쿡 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쿠쿠쿡.... 얼마든지 해줄게.... 그런 말이라면...." 그의 말에 란테르트가 정색을 했다. "그런데.... 막상 만나고 나니.... 듣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렸어.... 역시.... 어색하잖아?" 이카르트는 란테르트의 말에 다시 몇 차례 웃음을 터트렸다. 란테르트는 이제 이카르트가 조금 진정된 것 같자 몸을 슬쩍 빼내려 했다. 그때 이카르트가 입을 열었다.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있게 해줄래?.... 이렇게 네 품을 떠나고 나면.... 이제 다시는.... 너와 이렇게 있을 수 없잖아.... 그러니까...."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했다.... 이렇게 그와 헤어지고 나면.... 이제 그와 자신.... 둘은 싸워야 하고.... 한 명은 분명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크젤리온과.... 자신도 죽는 것이다. 행여 지금의 싸움으로 이카르트가 죽지 않는다 해도.... 자신이 죽게 되면.... 역시 서로 만나지 못한다.... "어째서.... 이렇게 밖에는 되지 못한 걸까?...." 한참동안, 란테르트의 목에 가느다란 팔을 휘감은 채, 얼굴은 가슴에 묻은 채.... 그렇게 서 있던 이카르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란테르트는 답할 수 없었다. 모른다.... 그런 것....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돌연 이카르트가 란테르트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는 한 걸음, 다시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서 란테르트의 모습을 응시했다. 보라색의 투명한 눈동자가, 아직 흥건히 고여있는 눈물 덕에 더더욱 반짝인다. 뒤로 물러선 이카르트는 손에 한 자루의 검을 만들어 냈다. 언제나 그가 허리에 차고 다니던 평범한 모양의 검이었다. 아마 이 검 역시, 아르트레스나 아르르망이 그러하듯 몸을 이용해 만들어 내는 모양이었다. 그는 검을 오른쪽 땅으로 향하게 한 채 입을 열었다. "혹시.... 기억나?" 이카르트의 물음에 란테르트 자신의 하르제 검에 다시 한 번 마법을 걸며 되물었다. "무엇 말이야?" 이카르트가 그의 말에 대꾸했다. "계약...." 란테르트는 그의 말에 잠시 머뭇거렸다. 계약.... 기억하지 못할 리 있겠는가? 벌써 5년전의 일이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순간 란테르트의 미간이 살짝 찌푸러들었다. 계약.... 자신의.... 자신의 목숨을 내건.... 왜.... 왜 지금 그 계약을.... 들먹이는..... 왜 하필이면.... 지금 그 계약을 들먹이는 것인가? 설마.... 설마 그 계약을 빌미로.... 그 계약을 빌미로 자신을 막으려고? 그가.... 그가 원한다면.... 란테르트 자신은.... 당장.... 목숨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인할 수는 없다. "피의 계약 말인가?...." 목소리가 조금 굳었다. 하긴.... 이럴 때.... 이럴 때야말로 그 계약을 이용할 가장 적당한 시기가 아닌가? 이로서.... 복수는 실패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예상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변수에 의해 복수는 실패다. 란테르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이카르트를 바라보았다.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의 미소가 사악해 보였다. 이카르트는 이러한 란테르트의 복잡한 심경변화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기억하고 있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기억하고 있다니...." "고마울 것.... 없다." 란테르트는 심드렁히 대꾸했다. 허탈했고.... 허무했다. 왜.... 왜 어째서 이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니.... 이미 생각해 두었다.... 하지만.... 설마.... 이카르트가 이럴 때 그것을 이용해.... 그것을 이용해 자신을 옭아 맬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그때 이카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넌....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 그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순간 덜컥 했다. 죽는다.... 계약을 이용해 자신을 자결하게 만들 셈인가? 뭐.... 좋다.... 순간.... 란테르트의 머리 속에 또다시 배신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 동안.... 깊은 인간관계를 맺지 않아 겪을 수도 없었던.... 하지만, 어린 시절 수도 없이 겪고, 또 그에 스스로를 상처 입게 만든.... 이카르트는 몹시 태연자약했다. 란테르트는 그런 그의 모습에 기분이 몹시 상했다. 역시.... 마족인 것인가? 저렇게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죽음을 강요하다니.... "죽으면....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 연구한 바로는.... 정신, 그리고 이 물질계에 살고있는 존재들만이 가지고 있는 육체.... 이러한 것들은, 죽고 나면 완전히 흩어져 버리는데.... 이것들의 중심이 되는 혼만은 살아 육체, 또는 정신을 얻어 다시 태어나는 듯 하더군.... 환생이라고 이름 붙여진 하나의 조직체계이지.... 인간들은 무엇을 믿지? 아직도 프넨티아인가? 존재하지도 않는 환상環狀의 부유대륙...." 란테르트는 답하지 않았다. 하르제 검은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손을 등뒤로 가져가 에르테일 위쪽에 천으로 감겨있는 엘리엠이라고 불리우는 검을 뽑았다. 나크젤리온.... 그마저도 죽일 수 있다고 했으니.... 이카르트쯤이야.... 배신한.... 자신을 배신한 존재에게 정을 남길 필요는 없다. 그가 계약의 내용을 말하기 전에 죽이면.... 그렇게 한다면.... 란테르트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굉장한.... 어떠한 힘이 손을 통해 온몸에 전해짐을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이카르트는 란테르트가 무기를 바꿔쥐자 약간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상관하지 않은 채 말을 계속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란테르트가 꺼내든 무기를 자세히 살폈다. 투명한 검날에 신들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검날의 곡선, 손잡이 어느 하나 완벽하지 않은 곳이 없었고, 또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할 것 같기는 했지만.... 그다지 썩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혼이 깨어져 버리면.... 환생조차 하지 못해..... 그리고.... 나와 같은 불멸의 존재가 죽는 방법은.... 혼을 깨뜨리는 것 하나 뿐이지.... 물론, 너 같은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야.... 육체라는 형편없는 기관 때문에...." 이카르트의 마지막 말에 란테르트가 벌컥 소리를 질렀다. 친구.... 오매불망 5년이나 만나기를 기대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지금.... 그의 기분은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말이 많다!! 그래.... 형편없는 인간.... 그게 어떻다는 거지? 어서 검을 들어라! 이카르트.... 아니 아르카이제여!" 이카르트는 그가 돌연 화를 내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왜 화를 내는 거야? 란테르트...."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 어서.... 어서 끝을 내자. 어차피.... 끝을 내야 할 일.... 오래 끌어야...." 이카르트의 표정에 서운한 기색이 스쳤다. "변했구나.... 란테르트는.... 나는.... 조금 더 너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란테르트는 그의 이러한 위선적인 말에 다시 한 번 코웃음을 치며 냉소했다. "변했다.... 네가 변했는데, 나라고 변하지 않을 리 없지 않은가?" 이카르트는 란테르트가 이렇게 말하며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자 잠시 멍해졌다. 순간.... 울컥 슬픈 마음이 들었다. 분명.... 분명 그는.... 마음이 답답해 이렇게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일 것이다. 이제 곧 있을.... 거대한 싸움 앞에서 마음이 답답해.... 화를 내는.... 자신이 싫어져서가 아니다.... 다만 답답해서.... 이해한다.... 그런 마음.... 이카르트는 이러한 생각을 하며 울 듯 찡그렸던 얼굴 위에 다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래.... 네말이 맞아.... 모든 것이.... 모든 상황이.... 변했어...." 이카르트는 이내 검을 들었다. 란테르트에게서 다시 두 걸음을 더 떨어지며 란테르트의 가슴 근처 높이까지 검끝을 들어 올렸다. 란테르트는 드디어 그가 공격할 듯 하자 검을 두 손으로 강하게 움켜 쥔 채 상대의 허점을 살폈다. 동시에, 타하고 크게 외치며 이카르트를 향해 그 엘리엠이라는 검을 휘둘러 갔다. 완벽한 검에 완벽한 검술.... 비록 아직 마법을 걸지는 않았으나.... 자신에게서 느껴지는 힘이라면.... 아르카이제라는 마족 정도는.... 란테르트의 공격에 이카르트도 움직였다. 검끝으로 호선을 그리며.... 호선을 그리며.... 호선을.... 이카르트 자신에게 그리며.... 란테르트는 눈앞에 벌어진 괴상한 광경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휘두르던 검은 이카르트의 몸 주위에 쳐져있는 엔클레이브와 부딪혀 격렬한 불꽃을 내고 있었으나, 란테르트의 두 눈에는 그러한 광경 따위는 들어오지 않았다. 란테르트의 두 시선은.... 오직 이카르트에게로 향해 있었다. 특히.... 이카르트의 가슴에로.... 장검이.... 절반 이상이나 박힌 채.... 붉은 피를 흘리고 있는.... 가슴으로.... "이.... 이카르트...." 목이 매여왔다. 더 이상....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불과 두 걸음.... 두 걸음 떨어진 곳에서.... 두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가 자신의 가슴에 자신의 검을 밖은 채....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눈동자에 서서히.... 그 맑은 보라색을 띄던 눈동자에 빛이 사라져 가며.... 란테르트는 검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쓰러지던.... 친구를.... 부축했다. 두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쓰러지지 않도록 그를 잡았다. "이카르트!!!" 란테르트는 외쳤다. 스스로를 욕했다. 왜.... 왜 의심 같은 것을 해버린 것이냐? 이대로.... 열흘 밤낮동안 이야기를 하고, 다시 열흘 밤낮동안 이야기를 해도.... 그렇게 해도 부족할 것인데.... 왜 그를 의심하고 핍박해.... 결국은.... 결국은.... 란테르트는 자신에게 힘없이 기대오는 이카르트를 내려다 보다 돌연 하늘을 바라보며 괴성을 질렀다. 하지만 괴성도 오래지 못했다. 가슴에 쌓인 피가 목에 걸리며 공중으로 한차례 피보라를 내뱉었다. 이카르트는 심장부근에 자신의 칼을 꽂고 있었다. 맥박 같은 것이야 원래 없었으니.... 절명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돌연 그의 어깨가 불쑥거리며 한 쌍의 검정색 날개가 확 옷을 뚫고 솟아 나왔다. 언젠가 그가 말했다. 혼이 개방되어 몸이 자유를 얻어.... 날개가 솟는다.... 라고.... 혼의 개방.... 몸의 자유.... 혼.... 그것이.... 사라진.... 것일까? 란테르트는 왜 돌연 그의 등에서 날개가 솟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서서히 사라져 가는 그의 가슴에 있는 검을 바라보며 이카르트를 힘껏 껴안을 뿐이었다. 이카르트의 입술 가장자리로 너무나 붉은 피가 한줄기 흘러나오고 있다. "이카르트!!!" 세 번째 부름에.... 이카르트의 입술이 조그맣게 달싹였다. "란.... 테..... 르트...." "이카르트.... 이게.... 이게...." 란테르트는 목이 매여 말을 잊지 못하였고.... 이카르트는 점차 사라져 가는 자신의 감각에 란테르트를 느끼지 못하였다. "나와.... 나와 함께 있겠지?.... 들리지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아.... 서.... 설마 나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간 것은 아니겠지?" 이카르트는 힘겹게 입술을 움직여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더더욱 그를 꼭 안았다. "너와.... 지금 너와 함께 있다.... 너와 함께...." 란테르트의 말은.... 하지만 이카르트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란테르트.... 인간.... 란테르트여.... 너에게.... 계약의 내용을.... 말하겠다...." 이카르트는 란테르트가 듣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계속해 입술을 움직였다. "나.... 위대한 압그랑의 자손이며.... 강대한 검은 화염 나크젤리온의 제 1 기사.... 흑염의 기사 아르카이제가 그대와 피로 맺은 계약의 내용을.... 지금 말하겠다. 인간의 자손.... 루렌드 가의 란테르트여...." 이카르트의 말에 란테르트는 돌연 왈칵 눈물을 쏟았다. "뭐든지.... 뭐든지 말해 이카르트!!! 무엇이든지.... 무엇이던지 들어줄게...." 란테르트의 눈물이 이카르트의 어깨를 적신다.... 하지만 이카르트는 느끼지 못했다. 다만.... 힘겹게 입술을 달싹일 뿐이었다. "란테르트여.... 나의 명을 쫓을 의무를 가진 자여.... 내.... 그대에게.... 계약의 내용을 말하니...." 잠시동안.... 모든 것이 고요했다. 부드럽게 불던 바람도 잠시.... 멎는다. 아니 다만 그렇게 느끼는 지도 몰랐다. "살아라.... 결코.... 결코 스스로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살아.... 행복하게...." 란테르트는 이카르트의 말에 잠시 흘리던 눈물까지 멈추었다. 가슴이 답답해지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이카르트의 마음이다.... 그는 계약의 내용으로 이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란.... 나란 인간은.... 왜 이렇게 형편없는 것인가?.... 왜.... 왜 그를 의심한다는 말인가? 란테르트는 파리해진 이카르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한줄기 선혈이 붉게 적시었다. 란테르트는 조용히 자신의 입술을 그의 입술로 가져갔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그에게 해 줄 것은.... 이것뿐이다. 이미 초점을 잃은 눈동자를 어지럽게 흔들며 자신을 찾고 있는.... 죽어 가는 자신의 친구.... 아니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 해 줄 것은.... 이것.... 뿐이다.... 란테르트는 한참동안 그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에 맞추고 있었다. 서서히 흐려져 가는 그의 몸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이대로 놓아보내기에는.... 미안하다. 두 팔에 힘을 준다. 그리고.... 그가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두 동강이 나버린 보라색 검이 있다. 란테르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반짝이는 빛을 내며 공중에 떠있는 그 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카르트의 엔클레이브가 깨어진다.... 천장으로부터.... 유리비가 내린다. 찢어라.... 차라리.... 나의 몸을 찢어라.... 그가 사라진 지금.... 내게 아무런 고통이 없다는 것이.... 그것이 더더욱 고통스럽다. 하지만.... 유리파편의 비는.... 란테르트에게 상처를 주지 못하였다. 그저.... 이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사라지며 쏟아져 내릴 뿐이다. 이윽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엔클레이브가 깨어지는 경우는.... 둘 뿐이다.... 시전자가 거두거나.... 시전자가 소멸했을 때.... 아르페오네는.... 두 동강난 보라색 검을 발견하자마자 허물어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르트레스는 그런 아르페오네의 어깨에 손을 집은 채 눈에 눈물을 담았고.... 아르르망은 허탈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 란테르트 또한.... 두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때.... 자신의 곁에 누워있던 투명한 검을 발견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두 손으로 한차례 쓸어 닦은 후 검을 손에 들었다.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다.... 빠르고 늦을 뿐.... 어차피.... 이제 남은 것은 한가지뿐이다.... 복수를 마치고.... 복수를 마치고.... 그에게로.... 그리고 그녀들에게로 돌아가는 것.... 그런데.... 왜.... 하지만.... 살아야만 하지 않는가? 나쁜 녀석.... 마지막까지.... 이렇게 자신을.... 괴롭히다니.... 정말.... 나쁜.... 나쁜.... 란테르트는 검을 들고 몸을 일으키며 공중을 향해 미친 듯이 외쳤다. "나와라! 나크젤리온! 내가 돌아왔다. 나크젤리온!!!!" 나크젤리온의 강림은 너무나 조용했다. 단지 모습을 드러냈고, 다시 한 번 엔클레이브를 쳤다. 이카르트의 보라색 검은 엔클레이브 밖으로 밀려나 보이지 않는다. 검정색 머리칼을 뒤로 완전히 넘긴 날카롭게 생긴 청년의 모습을 한 나크젤리온은 란테르트를 잠시 조용히 바라보았다. "후훗.... 아르카이제 녀석.... 그렇게 되어 버렸나?" 란테르트가 외쳤다. "너.... 왜 그를 내게로 보냈나? 어차피 이 일은 너와 나 사이의 일이었다. 왜.... 왜 그를...." 그의 말에 나크젤리온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이런.... 벌써 잊었던가? 5년전.... 내가 그에게 벌을 내리겠다고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서... 설마?" "뭐.... 그 녀석이 너를 죽이면.... 그것이 벌이 될 것이었고.... 네가 그 녀석을 죽이면.... 또 그것이 벌이었겠지." 나크젤리온은 별다른 느낌 없이 이렇게 말했다. 란테르트는 분노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네 녀석의.... 네 녀석의 첫 번째 부하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크젤리온은 란테르트의 말에 웃었다. "후후후.... 사랑에 빠져.... 내 명령조차 받들 수 없는 녀석이.... 살아야 할 이유 같은 것은 없다. 마계에 모인 에너지도 적지 않다. 그런 녀석 하나쯤 다시 만드는 것.... 그다지 어렵지는 않지." 란테르트는 그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 그때 나크젤리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내 선물이 어떠하던가?" 순간 란테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물?" "그래.... 선물 말이다. 5년간의 생명.... 하하! 나도 상당히 마음이 넓은 마신 인걸? 인간 따위에게 선물도 주고. 뭐, 덕분에 네가 벌리고 다닌 난행으로 마족들에게는 꽤 도움이 되었지만 말야. 아하하!!" 란테르트는 그의 말에 순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안.... 이 5년동안 자신이 죽인 사람이 몇이며.... 파괴한 마을이 몇인가? 단 한사람에 의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었다면.... 마족으로써는 이보다 더 큰 이익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선물.... 인가?" "그래. 선물이다. 후후후...."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조그맣게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오! 이제 네 5년간의 성과를 볼 차례인가?" 나크젤리온은 여전 여유 있는 태도로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란테르트 역시 평온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의 번민은 없다. 단지.... 마법을 일으키면.... 그것으로 끝이다. 희미한 어둠의 흔들림이여, 모든 어둠의 주인이여, 신의 힘을 가진 위대한 그림자여, 어둠 속으로 흩어져버린 그대의 몸을, 그리고 힘을, 지금, 그대의 이름을 아는 자에게 맡겨라. 환영왕의 혼을 부르는 울음. 샤이튼.... 새로 익힌 샤이튼이라는 마법이다. 증폭마법.... 그리고.... 모든 존재에의 증오여, 별을 파괴하는 어두운 영혼이여, 흔들리는 어둠의 찢겨진 혼이여, 모든 것을 가를 수 있는 그대의 힘을, 지금 여기에 부여하라. 위대한 어둠의 검. 데스틴 더 비! 란테르트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이다. 검이 공명한다. 미친 듯이 검을 휘감으며, 흑색 기운이 솟아난다. 천장과 지저를 꿰뚫을 듯한 검정색의 기운이 미친 듯이 주위를 도륙한다. 갈래갈래, 그 거대한 흑색의 기둥에서 새어나온 검정색의 빛이 주위를 스칠 때마다 거대한 충돌과 함께 세상이 부서져 내린다. 나크젤리온의 엔클레이브마저.... 갈가리 찢긴다. 란테르트는 타들어 갈 듯한 몸의 통증을 느끼며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것으로 끝이다.... 미래가 어찌되건.... 과거는... 이것으로.... 끝이다. 에필로그 "도저히 막아 낼 수가 없어!!!" 아르트레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마족의 수도 엘비니움에 울려 퍼진다. 남문을 지키지 위해 온 몸에 피칠을 했지만, 몰려드는 정령계의 대군을 막아내기에는 힘이 턱없이 부족하다. 한쪽 눈을 가린 모노클 통신기를 통해 그녀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외쳤고, 모노클과 연결된 이어폰을 통해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의 전음을 사용하면 적에게 완전히 도청되어 버린다. 지금 그녀가 귀에 꽂고 있는 기계는 전음을 증폭하며 동시에 도청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도구이다. "잠시만.... 잠시만 막아 주십시오. 몇 가지 자료만 더 복사하면...." 동시에 치직 하는 기계 음이 들리며 전파가 끊겼다. "아르페오네!! 이런 제길!!" 아르트레스는 신경질적으로 내뱉으며 거대한 검으로 눈앞에 보이는 정령의 허리를 두 동강 내 버렸다. "아르르망! 그쪽은 어때?" "엉망입니다. 어서.... 어서 수도를 포기하고 달아나야 합니다!!" 수천만.... 어쩌면 수억쯤 될 듯한 정령들이 엘비니움의 상공에 진을 치고 있다. 그에 반해.... 이제 살아남은 마족의 수는 1만 이하.... 최악의 상황이다. 지금 도륙 당하는 속도로 보아 다시 반나절이면 전멸이다. "비러먹을.... 그분만 살아 계셨어도.... 한방에 절반쯤을 날려 버리실 수 있으셨을 텐데...." 아르트레스는 입술을 깨물며 이렇게 중얼거렸고, 이내 자신에게 접근하는 정령을 향해 일 검을 휘둘렀다. 이제는 지쳐서인지 검의 속도가 예전만 못했다. 그때, 돌연 그녀의 옆에 공간의 굴곡이 생기며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페오네! 성공인 거냐?" 아르트레스가 바쁜 와중에 짬을 내 외쳐 물었고, 아르페오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에는 아르에가 검으로 변한 채 들려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사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허리 근처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한가지 물건으로.... 천으로 쌓여 잘은 알아볼 수 없지만, 무슨 두 동강 검 같았다. 길이로 보아, 두께로 보아 그리고, 천 밖으로 드러난 모습을 보아, 거의 확실했다. 아르트레스는 뒤이어 아르르망에게 소리를 질렀다. 물론 통신기를 통해서다. "야, 어서 이리 와. 도망가자! 성공이다." 그리고는 동시에 마계의 마족들 모두에게 외쳤다. "수도를 포기한다. 모두들 도망쳐라. 일곱 번째 땅이건 세 번째 땅이건 아니면 이곳 아홉 번째 땅이건.... 어디로건 달아나 무조건 살아라!! 그리고.... 나중을 기약하자!!" 아르트레스는 이렇게 외치며 동시에 검을 들지 않은 왼손을 위로 뻗어 엄청난 힘을 방출했다. 거대한 흑색 기운이 파도처럼 방사되었고, 그곳에 있던 정령들중 절반 가까이가 그대로 소멸했다. "오호호호!! 감히 이 아르트레스님께 덤비다니!!!" 아르트레스는 이렇게 외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나, 둘씩 마족들이 사라져 간다. 일부는 목숨을 잃고.... 일부는 차원 너머 어디론가 달아나 버린다. 아르페오네 역시 아르트레스와 함께 힘을 방출하며 달아나는 마족들을 도왔다. 그런 그녀를 향해 아르트레스가 물었다. "도대체.... 그런데 네 방에서 무얼 한 거야? 혹시 지금 기르고 있는 백합을 챙겨 나왔나?" 아르트레스의 농섞인 물음에 아르페오네는 얼굴을 굳혔다. "지금으로써는.... 비밀입니다." "내 참, 비밀도 많은 계집아이다. 뭐, 어찌되었건 내가 하려는 것보다는 훨씬 중요한 일일 테니.... 먼저 달아나라!!" 아르페오네는 잠시 머뭇거렸다. 동료를 두고....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 홀로 달아나다니....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일이다. 이곳의 마족 모두가 소멸하더라도.... 심지어.... 자신의 좋은 누이 아르트레스와 아르르망.... 이 둘이 이곳에서 소멸하더라도.... 반드시 해 내야만 할.... 중요한 일이다. 아르페오네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매어져 있는 그 천에 감긴 물건을 손에 쥐며 중얼거렸다. "그럼....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아르트레스님.... 그리고 아르르망님.... 살아 주십시오...." 공간 너머로 사라지는 그녀였다. 아르트레스는 그녀의 모습에 후훗, 하고 웃었다. "나 따위보다는.... 네가 사는 편이 더 우리편에 유리하겠지. 란테르트 님이 사라지신 지금.... 내게 목숨의 미련 따위는 없다. 하지만...." 여기까지 중얼거리듯 말하던 아르트레스는 돌연 미친 듯이 외쳤다. "내가 너희 따위에게 쉽사리 목숨을 내줄 줄 아냐? 난 흑염패다. 마계 제일의 장군 흑염패란 말이다!!! 한 놈이라도 더 박살을 내 주마!" 마계는 복잡하다. 본래 마계라는 곳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곳.... 아홉 번째 땅은 원래 정령계이다. 그러한 곳에 마족이라는 새로운 존재들이 나타나 일부를점령한 것이다. 상황은 아무래도 좋았다. 적어도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만족할 만한 모습이니 말이다. "마족은.... 전멸 직전입니다. 전멸만은 피하겠으나.... 별 차이는 없습니다." 용들중 가장 지고한 존재.... 델필라르는 지금 무슨 실험실과도 비슷한 장소에 서 있다. 거대한 여러 개의 투명한 관에 가득찬 녹색의 액체, 그리고 붉은 색의 액체가 서로의 불협을 내보이고 있었고 그 외에 알 수 없는 기구들이 잔뜩 널려 있었다. 그의 말에 대답하는 이.... 그는 노인의 모습을 한 존재였다. "그런가?.... 잘 되었군...." 검이 실험실 한쪽에 고이 모셔져 있다. 알 수 없는 재질의, 흡사 수정과도 같은 결정체 속에 완전히 갇힌 채.... 엘리엠이라는 이름의 검이다. 노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어느 샌가 동그란 안경을 코에 걸친 델필라르가 그의 곁을 따라 걸으며 말했다. "아르카이제라는 마족.... 요행히 소멸하지 않았더군요. 아직도 혼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힘으로 부활시킬 수 있을까요? 적어도 10번째 땅 이상의 존재는 되어야.... 가능할 텐데...." 엘리엠 노인이 그의 말에 대꾸했다. "아마.... 불가능하겠지. 이제와 그들을 도울 신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부활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 나크젤리온이 소멸해 버린 지금, 마족의 세력은 완전히 꺾여 버렸으니...." 노인과 델필라르는 계속해 걸었다. 그리고는 어떠한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거대한 유리관이다. 알 수 없는 액체가 가득 차있었고.... 그 안에는 한 사내가 갇혀 있었다. 두눈은 꼭 감은 채.... 그 사내는 푸른색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긴 청회색 머리칼을.... 날카로운 인상에, 뺨에는 선홍색 상처가 있다. 란테르트이다. 그런데.... 엘리엠과 델필라르, 이 둘은 동시에 위를 올려다보았고, 델필라르가 처연히 입을 열었다.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불행히도.... 한쪽 팔을...." 유리관 안에 갖혀있던 란테르트는 오른쪽 어깨부근에서 팔까지가 없었다. 엘리엠이 중얼거렸다. "그 정도면....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러한 폭풍 속에서 팔 하나만을 잃다니.... 소멸 정도는? 재생할 수 있나?" 델필라르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허무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되돌릴 방법은 없습니다. 게다가.... 혼의 특수성 때문에 재생할 수조차 없습니다." 엘리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보통의 인간은 아니니.... 적어도 혼만은 나의 것.... 테미시아 님만이 그이 팔을 재생할 수 있을 것이다...." 엘리엠은 잠시 눈을 저쪽으로 돌렸다. 란테르트가 갇혀있는 유리관 반대편이다. 그곳에는 왠 15세 가량의 소년이 벌거벗겨진 채 있었다. 긴 칠흑색 머리칼이 올올이 흩어져 흡사 무슨 조각품이라도 되는 양 보였다. "이제.... 저 아이도 내보낼 때가 된 듯 하구나. 아르헬이라고 했던가?" 델필라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마족으로써는 내보내기가 곤란합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각성조차 하지 못한 마족이라면.... 소멸하기 딱 알맞습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하도록 해라...." 엘리엠은 다시 고개를 란테르트에게로 돌렸다. "문제는.... 이 아이로구나...." 델필라르는 고개를 조아렸다. "10년 후에 깨울 생각입니다. 앞으로 몇 년 안에 일곱 대륙은 평온을 되찾을 것이고.... 그때쯤이면.... 그는 조용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힘든 일도.... 괴로운 일도 없이.... 행운이 가득한 삶을...." 그런 델필라르의 말에 엘리엠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글세....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일까? 행복.... 그에게 행복이라...." 이윽고 꺼낸 엘리엠의 말이 묘한 울림을 내며 오랜여운을 남긴다.... 2부 完.... Derod & Deblan 3부 프롤로그.... "오이니아!! 멈춰! 함께 가자...." 깊은 숲이다. 에노사 대륙 북단에 위치한 이 숲은 그렇게 후미진 곳에 위치한 편도 아니었으나, 상당히 울창했다. 그곳에 울리는 한 남자의 목소리.... 목소리만으로는 대략 17, 8세쯤 되어 보인다. 그다지 우렁차지는 않은 것이, 체구가 큰 편은 아닌 모양이다. "켈파,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 다시 뒤이어 들려온 아가씨의 목소리. 아마도, 오이니아라는 이름의 아가씨인 모양이다. 역시 목소리만으로는 남자와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맑고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당찬 말투까지, 꽤나 발랄한 아가씨 같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서.... 피아텔이나 테리트론이 오거든 함께 가자. 우리 둘만으로는 무리야. 넌 전혀 검술을 배우지도 않았잖아!!" 숲 속에 가려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대화만으로 추정해 보건대, 무슨 위험한 일을 하기 위해 이 숲 안을 헤매 이는 모양이었다. "켈파! 너는 뭐가 다르니? 3년이나 검술을 배워놓고는 아직도 강습소 내에서 가장 실력 없는 사람으로 꼽히면서! 난 그래도, 우리 할아버지가 검을 쓰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어. 설마 우리 할아버지의 실력도 별 것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겠지?" 오이니아라는 이름의 여자는 숨을 조금 헐떡이며 이렇게 외쳤고, 켈파는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드라이토 할아버지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이 피치토 마을에서 단 한사람도 없어. 위대한 용병. 과거 위다의 최정예인 아반트 가르트에서 반년이나 살아 남은 엄청난 실력자! 물론, 검을 놓으신 지 10년 이상이나 되셨지만.... 지금도 영주 님의 친위대원들과 비슷하게 싸우실 수 있으실 걸?" 켈파는 평소 그 드라이토라는 노인을 존경하기라도 한 듯 오이니아의 말에 이렇게 대꾸했고, 오이니아는 그의 이러한 칭찬에 흐뭇해하며 말했다. "그렇게 높이 쳐준다니 오히려 고마운걸!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검을 휘두르는 게 뭐 그렇게 힘들다고? 그냥 이렇게 휙 휘두르고 베고 하면 되는 거지.... 게다가 너는 정식으로 검술을 배웠잖아. 비록 제대로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별것 아닌 괴물 몇 마리를 당해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잖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두 사람은 숲속 더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요 전날 마을 근처에서 사람을 한 명 해친 이름 모를 괴물을 잡기 위해서였다. 듣기에는 늑대 모양을 한 괴물이라고도 하고.... 그저 산짐승일 뿐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으나, 어찌 되었건 이 어린 아가씨의 호기심을 크게 자극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숲 사이를 뚫고 나온 두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켈파라는 남자는, 몸이 상당히 왜소했다. 키는 간신히 170쎄휴리하(1쎄휴리하=약 1센티미터)를 넘길 정도였다. 옷차림도 흡사 무슨 나무꾼이나 되는 양 그런 복장을 하고 있었다. 막 가을에 접어든 이 계절에도 웃옷은 반소매를 입고 있었고, 바지는 길고 약간 헐렁한 것을 걸치고 있었는데, 상하의 모두 낡고 이곳 저곳이 많이 닳아 헤어져 있었다. 한마디로 평민도 계급이 낮은 사람 이였던 것이다. 반면 여자 쪽은 귀티가 온몸에 흘렀다. 숲을 헤맬 것을 고려해서인지, 하의는 무릎정도 까지 오는 짧은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고, 그 안에 허벅지에 잘 들어맞는 반바지를 입었다. 웃옷은 역시 활동에 편한 헐렁한 옷을 걸쳤고, 그 위에 이제 슬슬 차가워지기 시작한 바람을 막을 겸, 정장 스타일의 옷을 하나 더 걸쳤다. 별다른 장신구는 하고 있지 않았으나, 귀에 매달려 있는 호박색 조그마한 귀걸이 정도만으로도 이 아가씨가 상당히 권세 있는 집안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옷차림뿐만 아니라 외모에 있어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는데, 켈파의 경우에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외모에 왜소한 체구를 가진 덕에, 아무리 보아도 대단하다는 느낌은 주지 못하였다. 대륙 전체에서 가장 흔한 짙은 갈색의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고, 눈동자의 색 역시 머리칼의 색을 쫓았다. 단, 어려서부터 꽤 힘든 일을 했는지, 근육은 상당히 발달한 편이었다. 물론, 워낙 조그마한 체구 덕에 두드러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군살은 전혀 없었다. 오이니아는 담갈색 머리칼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눈꼬리는 성격과는 대조적으로 살짝 아래로 쳐져 있었지만, 눈의 크기가 전체적으로 큰 편이어서 그다지 차분한 느낌은 주지 못하였다. 조그맣고 도톰한 입술과 전체적으로 약간 빈약한 몸매 등에서 귀엽다는 느낌을 주었으나, 자신감이 깃든 눈동자를 보아서는 어리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둘은 더더욱 깊은 숲속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깊다고 해 보았자 그렇게 까지 깊은 것도 아니었다. 이제 겨우 마을을 벗어난지 반나절밖에는 지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침 일찍 출발해 이제 겨우 점심이 조금 못된 시간이다. "더 이상은 위험해. 아버지와 함께 나무를 할 때에도 이 이상은 들어가지 않았어." 켈파가 외쳤고, 오이니아는 짐짓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척 더더욱 깊이 들어갔다. 켈파는 어깨를 으쓱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뒤를 쫓았다. 비록 검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그의 손은 바짝 경계하고 있는 지금, 옆구리에 걸려 있는 검위가 아니, 등허리에 꽂혀있는 두뼘 남짓 길이의 손도끼로 향해 있었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어쩔 수 없다. 다시 얼마간을 들어갔을 때, 두 사람은 숲 사이로 짙은 회색빛 망토가 반쯤 비어져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끝자락뿐이었으나, 모습으로 보아 분명 망토였고, 두 사람은 혹시 조난 당한 사람이라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쪽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수풀 사이의 조그마한 공터였다. 그곳에는 아니나 다를까 사람이 한명 널브러져 있었다. 오이니아, 여자인 그녀보다도 훨씬 긴 머리칼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트린 채 기절해 있는 그 25, 6세 가량으로 보이는 사내는 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온 몸은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오른쪽 팔은 어디서 잘렸는지 어깨까지 사라져 있었다. 망토도 갈가리 찢겨 있었고, 옷도 상의는 반쯤 완전히 날아가 있었다. 뺨이 약간 홀쭉하고 그나마 가느다란 상처까지 있어 더더욱 꼴이 말이 아니었는데, 주위에 검이 한 자루 떨어져 있는 것을 보니 무슨 검사나 유랑용병인 듯 보였다. 물론 옷차림을 보아서는 후자 쪽이 더 가까운 듯 보였지만.... 오이니아는 그를 보자마자 하마터면 구역질을 할 뻔했다. 피의 비린내도 비린내였던 데다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처참한 모습에서, 그 주위를 날아다니고 있는 기분 나쁜 벌레들까지.... 단지 마을 안에서 조용한 것만 보고자란 그녀로써는 비위가 상하는 편이 차라리 당연했다. 켈파는 지금까지 말하던 모습을 보아 오이니아보다 겁이 많은 듯 보였었지만, 오히려 이러한 상황에 처하자 차라리 냉정해 졌다. 나무꾼의 자식이다 보니 산 속에 살면서 흉한 모습을 많이 보아서 인지도 몰랐다. 산짐승에 찢긴 가축이나 사람을 켈파는 지금까지 꽤 보았다. 반쯤 얼이 빠져있는 오이니아의 눈을 가리며 켈파가 말했다. 오이니아보다 키가 겨우 손가락 하나 길이만큼 밖에 크지 않은 그는 그래도 이 담갈색 머리칼의 소녀를 보호해 줄 정도의 마음은 가진 모양이었다. "보지 마!" 켈파의 말에 오이니아는 넋을 빼 놓은 채 고개를 몇 차례 끄덕였고, 이내 몸을 돌려 숲속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피에 대한 공포는 극복할 수 있었고, 종종 흘끗 뒤를 돌아보는 그녀였다. 켈파는 이 눈앞에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 손가락을 코에 가져가 보았다. 미약하기는 하지만 숨을 쉬고 있었다. 팔 역시 잘린지 꽤 되었는지 스스로 어느 정도 회복되어 있었다. 다만,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리고도 살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켈파는 서둘러 남자를 등에 업으려 했다. 하지만, 쓰러져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가? 비록 켈파가 힘이 센 편이라고는 하지만 키가 작은 덕에 꽤 애를 먹게 되었고, 오이니아는 그런 그의 모습에 서둘러 손을 보탰다. 간신히 아둥바둥 이 긴 은빛 머리칼의 남자를 업은 켈파와, 푸른 머리칼의 남자의 소지품을 챙겨든 오이니아는 서둘러 숲을 빠져나왔다. 목숨에 관련된 일이라서 인지 둘 모두 진지했고, 조금 전처럼 쓸모 없는 이야기를 한다거나 하지는 않고 있었다. 오이니아는 그 남자 곁에 떨어져 있던 흰색의 커다란 검을 들고 켈파의 뒤를 쫓으며 그의 등에 업힌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키가 꽤 큰 편이어서 그 남자의 발이 거의 바닥에 닿으려 하고 있었다. 긴 백발도 거의 바닥에 닿을 듯 말 듯이다. 왠지 언젠가 한 번 본 듯 한 모습이었지만 당장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뒤이어 검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용병이었다 보니 그럭저럭 이런 쪽에 꽤 관심이 있었다. 물론, 직접 하는 것보다는 보는 편을 즐겼지만.... 검은 흰색과 금색에 가까운 황색, 그리고 연두색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이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은 흰색을 띄고 있었다. 검날 역시 거의 대부분인 흰색을 띄고 있어서 보고 있으면 아름답다라는 탄성이 절로 튀어나온다. 만약 대검이 아닌 여성용 소검이었다면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빼앗고 싶은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물론 그런 짓을 할 리는 없었지만.... 오이니아는 다시 한 번 남자를 바라보았다. 축 처진 채 켈파의 등에 업혀 있는 이 남자를.... 누구인지 모르는.... 하지만 낯설지 않은 이 남자를.... 1.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으.... 으음...." 침대에 누워있는 백발의 청년이 신음성을 내뱉으며 몸을 살짝 움직인다. "깨어나는 모양이다." 걸걸한 노인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어떻게.... 해야 하죠? 이제는?" 노인의 곁에 서 있던 오이니아가 물었다. 지금 이 세사람이 있는 곳은 한 방이었다. 비록 그다지 화려한 장식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이 집의 경제력을 충분히 대변할 만큼의 장식은 하고 있었다. 일단 서민들의 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도기 화병이 놓여 있다는 것에서, 일반 집안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2중 커튼까지 최고급은 아니었지만 상당 수준의 물건들이었다. 게다가 주인이 쓰는 방도 아닌 손님 접대용 방이 이 정도이니.... 이 노인이 집의 주인이라면 상당한 부호일 것이다. 창가의 침대에는 그 은발의 사내가 누워 있었고, 그 곁의 의자에는 노인이 앉아 그 남자를 돌보고 있었다. 노인 역시 은발이었지만.... 아무래도 그 느낌은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수염은 턱에 덥수룩이 자라있었고, 주름이 깊게 패인 눈에서 이 남자의 나이가 결코 적지 않음을 알게 해 주었다. 아마도 거의 60세쯤 될 것이다. 아니면 그보다 약간 더 젊거나.... 아마도 이 노인이 오이니아의 할아버지인 드라이토인 모양이었다. 오이니아의 물음에 노인이 답했다. "글세.... 이미 의사에게도 보였고.... 가서 벨라 아주머니께 환자가 먹을 만한 음식을 조금 해 달라고 하려무나." "네. 할아버지." 오이니아는 드라이토 노인의 말에 곧바로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고, 드라이토 노인은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그 은발의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낯이.... 익군.... 하지만.... 은발의 남자 같은 사람은.... 알지 못하는데...." 은발의 사내는 다시 한 번 으음 하는 신음을 내뱉었고, 그때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한 중년의 마른 사내가 뒤에서 조심스레 드라이토 노인을 불렀다. "저.... 주인님." 아마도 집사 비슷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의 부름에 드라이토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고, 집사는 그에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헬튼 영주 님께서 납시셨습니다." 드라이토는 집사의 말에 놀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영주 님께서 친히?" 그때 오이니아가 막 주방에서 돌아왔다. "영주 님이 오셨어요?" 드라이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이니아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었다. "오이니아. 잠시 이 남자를 돌보고 있거라. 깨어나면 될 수 있는 한 놀라지 않도록 하고. 쓸데없이 이런 저런 말을 걸거나 하지는 말거라." 드라이토 노인의 말에 소녀는 두 다리를 딱 붙이며 손을 가슴께 에서 강하게 쥐었다. 흡사 정규군들이 상관에게의 행하는 경례와 비슷한 그러한 행동이었다. "예! 할아버지!" 드라이토는 이런 손녀의 모습에 한차례 미소를 지으며 집사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고, 오이니아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미소지으며 잠시 더 바라보다가 방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았고, 신음만을 내뱉으며 깨어날 줄 모르는 남자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굉장히 안색이 초췌한데다가 뺨위의 상처까지.... 약간 무서운 느낌이 들었지만 상당히 잘생겼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는 없었다. 다만.... 덮고 있는 이불에서 원래는 팔이 있어야할 자리가 푹 꺼져 있는 모습이 왠지 보기 싫었다. 약간 징그럽다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 저어 이러한 생각을 지웠다. 같은 사람인데 팔 하나쯤 없다고 해서 무어가 문제될 것이 있겠는가? 오이니아는 뒤이어 고개를 돌려 이 남자의 검을 바라보았다. 분명 검을 보아서는 검사였다. 할아버지인 드라이토도 이 검이 굉장히 좋은 검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검을 들고 다닐 정도의 사람이라면, 용병이라기 보다는 검사일 것이라고 했다. 오이니아는 검을 보며 잠시 이러한 생각을 했다. 할아버지는 검집 고리가 달려있는 자리를 보아서 분명 이 남자가 오른손잡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오른팔을 잃은 것을 굉장히 안타깝게 이야기했다. 검사가 검을 쓰는 팔을 잃는다는 것은 거의 목숨을 잃는 것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그 은발의 청년을 바라보니 왠지 측은한 느낌이 들었다. 쓸모 없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던 오이니아는 어느덧 주위가 꽤 어둑어둑해 졌다는 것을 느꼈다. 아까 낮에 켈파와 함께 마을로 돌아온 시간이 이미 4시를 훨씬 넘겨 있었으니.... 이미 해가 졌을 것이다. 아까 의사는 이제 피가 완전히 멎어 더 이상 이 남자를 치료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다며 체력을 보충해 줄만한 약을 조금 지어준 후 그저 이 남자의 몸에 뭍은 피를 닦아주는 것으로 치료를 끝냈었다. 그리고는 생각보다 상당히 건강한 편이니 오래지 않아 깨어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었다. 오이니아는 왠지 마음이 복잡했다. 워낙 무섭고 흉한 모습을 보았기에 아직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 사람이 죽는 모습은커녕 죽은 모습도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양친을 어렸을 때 잃었다고는 하지만, 살아있는 모습과 무덤만을 보았을 뿐이다. 그때 돌연 남자의 눈이 번쩍 떠졌다. 오이니아는 원래 평소 이런 저런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라 종종 멍해지곤 했다. 지금 역시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에 멍하니 있다가 돌연 그의 눈이 떠지자 약간 놀라 어깨를 움찔 했다. "괜찮아요?" 오이니아는 이렇게 물었다. 그리고는 곧 후회했다. 그녀가 생각에 잠겨있던 여러 이야기 중에 이것도 끼어 있었다. 바로, 이 남자가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걸 말들로.... 역시 첫인상이라는 것은 중요한 것이니 조금이라도 더 멋진 말을 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레 상대가 눈을 떠 버려 엉겁결에 괜찮아요? 라는 흔하디 평범한 말을 물어 버렸다. 생각은 길었으나 시간을 짧았고, 눈을 뜬 사내는 잠시 눈동자를 움직여 주위를 돌아보았다. "여기가...."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 그가 생각에 잠기었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그의 물음에 오이니아가 대답했다. "피치토 마을이에요. 에노사 대륙 북단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지요. 헬튼 영주 님의 성이 있는 곳이기도 하죠." 가능한 한 예쁜 목소리로 란테르트에게 대꾸하는 오이니아였다. 물론, 평소의 목소리도 상당히 고운 편이었으나, 역시 첫인상은 중요한 법이다. 아참, 미소. 편안하게, 하지만 천해 보이지는 않게. 부드러운 미소를.... 반면 상대는 자신이 미소를 짓던 말던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가 중얼거렸다. "피치토...." "알고 있었어요?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마을인데.... 혹시 이 근처에 사시나요? 아참.... 할아버지가 말 걸지 말라고 하셨는데.... 아저씨는 안정을 취해야 한데요. 아.... 아저씨는 너무한가? 오빠라고 부를까요? 아.... 이것도 말을 거는 거잖아.... 헤헷." 오이니아는 혼자 들떠 이런 저런 말을 잔뜩 내뱉고는 혀를 낼름 한차례 내밀었다. 그리고는 다시 후회를 하며 조금 전에 지어 보였던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바꾸었다. 에잇, 조금 더 분위기 있고, 격조 있는 여성의 모습을 보이려 했는데....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그녀였다. 역시 천성은 어찌 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녀의 모습에 사내는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의 가슴 부근에서 차르랑 하는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목에 걸려있던 펜던트가 움직이며 낸 소리였다. 그는 그 소리에 한 쌍의 목걸이를 잠시 한 번 바라보다 천천히 중얼거렸다. "란테르트.... 라고 합니다...." 그의 말에 오이니아는 활짝 웃었다. "그럼 란테르트라고 부를께요." 백발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그리고는 오른 손을 뻗어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런데.... 머리가 쓸리지 않는다. 황급히 시선을 오른팔로 향했고.... "후훗.... 후후후...." 란테르트라는 이름의 백발은 웃었다. 오이니아는 순간 그런 그의 모습에 등골에 시린 느낌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왜.... 왜 자신의 팔이 없어진 것을 보며 웃는 것인가?.... 그것도 저렇게 기분 나쁜 웃음을.... 그러고 보니.... 눈동자가 붉었다. 완전히 핏빛이었다. 오이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려왔다. 순간 할아버지에게 들은 여러 무시무시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용병 중에는 사람의 눈을 뽑아 기념으로 가져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어떤 사람들은 꼭 사람을 죽일 때 잔인한 방법으로 죽인다고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면서 할아버지는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조심하라고 했었다. 또 다시 이런 공상에 잠겨 있는 사이 그 은발의 사내는 왼손으로 머리를 간단히 정리했고, 오이니아는 공상에서 깨어나며 그를 보았다. 몸을 일으켜 드러난 그의 상체는 한눈에 보아도 상당히 단련된 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울퉁불퉁한 근육을 가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붙은 근육에 군살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상처도 굉장히 많았다. 큰 것은 거의 한 뼘이 넘는 상처에서 짓이겨지고 찢어지고....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게다가 오른쪽 어깨부근까지 없으니.... 더더욱 보기 흉했다. 막 이런 생각을 할 무렵 남자가 물었다. "오늘이 몇 일입니까?" 오이니아는 흡사 비눗방울이 톡 하고 터지듯 생각의 방속에서 빠져나오며 답했다. "9월 12일요...." "가을.... 입니까?" 은발이 다시 물었고, 소녀는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 세 계절이.... 그 사이 흘렀군...." 은발은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 자신의 머리칼을 다시 한 번 왼손으로 쓸어 넘겼다. 그 순간.... 머리칼의 색이 이전과는 또다시 달라져 있음을 발견했다. "훗.... 이젠 아예 백발이 되어 버렸군...." 쓰디쓴 무언가가 담겨져 있는 목소리였고, 오이니아는 그런 그의 말투에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 상대의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쏘아온다. "올해가 666년입니까?" 오이니아가 잠시 멍해진다. 666년? 왠 666년? "예? 666년이요?" 그녀의 되물음에 은발은 잠시 당황한다. "작년이.... 665년이었으니까...." 오이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 저었다. "올해는 675년이에요. 벌써 대륙이 통일된지 6년이나 흘렀다고요." 은발은 잠시 멍해졌다. 이게....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자신이 그러면 10년이나 잠들어 있었단 말인가? 3개의 계절동안 잠들어 있었다고 해도 이상하기 짝이 없는데.... 10년이라니.... 잠시동안 멍 해 있는 그를 오이니아는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무슨 문제 있어요?" 그녀의 물음에 그때까지 멍해있던 은발이 고개를 슬쩍 가로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저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 당신입니까?" 그의 물음에 오이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확히는 친구 켈파와 함께요. 피치토 서편의 숲속에 쓰러져 있는 란테르트를 발견했어요. 아참, 제 이름은 오이니아 에요. 오이니아 자피토." 그녀의 말에 은발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고, 오이니아는 겸양을 하며 그의 말을 받았다. "천만 에요. 당연한 일을 한 걸요.... 그보다.... 상처는 좀 어때요?" 그녀의 말을 듣고 나니 상처가 조금 욱쑤셔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은발의 사내는 곧 왼손을 상처 부위로 가져갔다. 동시에 손에서 흰빛이 뿜어져 나왔고, 오이니아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마법? 마법사 에요? 검사 아니었어요? 저 검 란테르트의 것이 아닌가요?" 오이니아의 물음에 은발의 남자는 오이니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곳에는 에르테일이 반갑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검입니다." 오이니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마검사로군요! 하긴.... 두 분의 룬 나이트 분들도 마법을 사용하실 줄 아니까.... 아, 혹시 룬 나이트를 아세요?" 그녀의 물음에 은발은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혹시.... 소피카의 허트 가를 말하는 것입니까?" 오이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역시 아시는 군요. 하긴, 룬나이트들의 명성이야 원래 대륙 전체에 퍼지지 않은 곳이 없으니! 헤헤, 저 사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완전히 푹 빠져 버렸거든요. 이건 저뿐만이 아니에요. 우리 마을에 있는 제 친구들, 물론 여자친구들 말예요. 아무튼 친구들 중 절반 정도가 룬 나이트 분들을 동경해 마지않고 있어요." 그녀의 말에 은발은 슬쩍 미소를 지었고, 오이니아는 그가 웃자 얼굴을 살짝 붉혔다. 다큰 처녀, 할아버지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한다, 가 다른 남자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다니.... 약간 부끄럽다. 은발이 물었다. "룬 나이트.... 룬 나이트면 허트 가의 누구를 말하는 것이지요?" 오이니아가 흡사 무슨 이상한 물건을 보는 듯 잠시 은발을 바라보다가 대꾸했다. "룬 나이트들을 모르는 군요. 이상하다.... 어떻게 허트 가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들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거죠? 음.... 대통일 전쟁때 그들의 눈부신 활약이나.... 그 외에 젊었을 때와, 통일 후의 수많은 활약상들은 대륙 사람중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아무튼 제가 들려 드릴 테니 잘 들어보세요." 오이니아는 이렇게 말하며 몸을 자리에서 일으켰다. 앉아서 그분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경이다.... 라는 표정이었다. "룬 나이트들은 현재 허트 가의 두 소영주님들을 지칭하는 말이에요. 형인 밀튼이라는 분은 별명이 나이트 더 실버 룬으로 은월의 기사라고 불리우고 있고, 동생인 로멜 님은 나이트 더 이클립틱 룬, 흑월의 기사이시지요. 두분의 활약이라는 것은.... 말로 다 설명을 못해요. 은월의 기사 님은 소피카 통일전쟁시 소피카의 네 영웅중 한 분으로 회복계 마법을 공부하신 백마검사이세요. 그리고, 흑월의 기사 님은 비록 장군으로 전쟁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은월의 기사 님을 도와 수많은 공을 세움과 동시에, 대륙 곳곳을 떠돌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 주셨었어요." 오이니아는 여기까지 말한 후 은발의 사내의 기색을 살폈다. 왠지 약간 이상한 표정이었으나, 아마도, 감동한 것이겠지.... 하며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흑월의 기사 님은 흑마검사세요. 아직도 이분들을 모르시겠어요?" 오이니아가 물었고, 은발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오이니아는 순간 모른다는 뜻인지 알겠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표정에 별다른 동요가 없는 것을 보아 모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이니아는 상대의 반응이 이렇게 싱겁자 왠지 흥미가 반감되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왜 모를까?...." 오이니아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다가 순간 조금 전 그가 연도를 물은 것을 떠올렸다. 무슨 666년이나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가? "서.... 설마 665년에 기절해 이제야 깨어난 것은 아니겠죠?" 오이니아의 물음에 은발은 고개를 끄덕였고, 오이니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 그럴 리가? 어떻게 10년이나 기절해 있을 수가 있죠? 혹시 기억 상실증 같은 것 아니에요?" 란테르트는 깨어나자 마자 이런 저런 것을 물어오는 18세쯤 되어 보이는 담갈색 머리칼의 소녀를 향해 대강 대강 대꾸를 해 주었다. 한편으로는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머릿속에서 정리를 해나가고 있었다. 머리칼이 은발이 된 것이고, 어차피 이제는 쓸모도 없는 오른팔 따위가 잘려나가 병신이 된 것이고.... 일단은 추후에 생각할 문제였다. 675년이라니.... 그 사이 10년이 흘러 버렸단 말인가? 하긴....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했다. 그 동안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아니.... 죽었었길 원했는데.... 이비러먹을 신 녀석은, 자신을 죽게 내버려두지도 않는다. 세상에 무슨 인간이 마왕과 싸우고도 고작 팔 하나를 잃을 뿐이란 말인가? 정말 비러먹을이다. 이제.... 또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이카르트를.... 그를 죽인 주제에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염치가 있어서 살아간단 말인가? 주위에 불행만을 안겨주는 자신 따위가.... 하지만.... 죽을 수 또한 없지 않은가? 이카르트의 마지막 부탁을.... 저버릴 수도 없다. 그와의 계약내용에 따라.... 살아야 할 것 아닌가? 나크젤리온과 싸우다.... 그냥 스리슬쩍 이카르트의 청을 어겨 죽어 버리려 했는데....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몸에 치고 있던 엔클레이브마저 흩어 버렸는데.... 제길이다. 이제 38세인 것인가? 막 밀튼과 로멜.... 그 어린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오이니아를 란테르트는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낯도 익고 이름도 한 번쯤 들어본 적 있는 듯한 이 소녀는,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 굉장히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말 기억상실증 아니에요? 어떻게 사람이 10년동안이나기절을 해 있어요?" 자신을 향해 물어오는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기억상실증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오이니아가 이야기하는 10년 전이라는 '방금전'으로 부터 지금까지 란테르트, 그의 의식은 일직선을 그린다.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오이니아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10년간 기절해 있었다면.... 당연히 룬 나이트들은 모르겠군요. 10년전이면.... 란테르트는 겨우 15, 6세의 소년이었을 것이고.... 그분 들 역시 유명해지기 전이니...."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15, 6세? 도대체 지금의 자신이 몇 살로 보이기에.... "거울 좀.... 가져다주십시오...." 란테르트의 부탁에 오이니아는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방 한쪽에 걸려있던 손바닥 두 개를 붙여 놓은 만한 크기의 거울을 가져다주었다. 란테르트는 희미해진 태양의 빛에 의지하여 얼굴을 비쳐 보았고.... 이내 쓰게 미소를 지었다. 이건 또 뭐란 말인가? 왜 아직도 28세때의 얼굴 그대로란 말인가? 오이니아가 물었다. "무슨 문제 있어요?"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문제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문제가 문제될 일은 그다지 없다. "아닙니다. 다만 얼굴이 조금 어려 보이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요...." 란테르트는 심드렁히 중얼거렸고, 그의 말에 오이니아가 아, 하는 나지막한 탄성을 내지르며 물었다. "26세쯤으로 보이는데.... 아닌가보죠? 그럼.... 28살? 29살? 설마 30?" 오이니아의 말에 란테르트는 쓰게 웃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순간 오이니아는 입을 다물었다. 왜 처음 보는 남자의 나이는 묻고 있는가?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앞에서 유난히 말이 많은 듯 하다. 왠지 편안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는 느낌은 왜인지.... 들지 않았다. 그때 란테르트가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입을 옷 같은 것.... 없습니까? 돈은 지불하겠습니다." 란테르트의 말에 오이니아는 다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남자.... 입고 있는 옷이라곤 속옷뿐이지 않은가? 오이니아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침대 옆에 있던 탁자 위에 놓여있는 옷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조금 헐렁한 웃옷이었다. "우선.... 이걸 입으세요. 입고 있던 망토와 웃옷은 엉망이 되어 입을 수 없고.... 바지는 빨아서 지금 젖어 있어요.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입는 옷인데.... 조금 헐렁하겠지만.... 그리고, 돈은 필요 없어요." 오이니아가 막 이런 말을 하는 사이 란테르트는 옷을 걸쳤다. 왠지.... 팔이 하나 모자라니 입는 느낌부터 입은 후의 느낌까지.... 약간 이상했다. 아니, 많이 어색했다. 오이니아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배고프지 않아요?"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다지 배가 고픈지 어떤지 잘 모르겠다. 10년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뭐 굳이 이제 와서 배가 고플 건 또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오이니아는 몸을 돌려 벌써 밖으로 향했다. "그래도 먹어야 해요. 아마 란테르트가 먹을만한 음식, 거의 다 되었을 꺼에요. 곧 가져다줄께요." 그녀가 나간 후.... 란테르트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가 왼손을 뻗어 오른쪽, 과거 팔이 있었던 부분을 만져 보았다. 이미 완전히 아물어 있는 것이.... 과연 10년이 흐르기는 한 모양이었다. 허리를 살짝 비틀어 보았다. 왠지 약간 뻐근하다. 하지만 별 문제는 없는 듯 하였다. 다만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약간 나른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는 지난 10년간을 떠올렸다. 물론, 팔도, 다리도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꿈을 꾸는 듯 생각만을 하며 보낸 10년이었다. 느낌상으로는 한 보름? 아니, 단지 하루가 지난 듯도 느껴졌다. 하지만, 그 동안 한 많은 생각들을 다시 떠올려보니.... 시간이 꽤 흐른 듯도 했다. 꼭.... 죽었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눈앞이 번쩍하고, 기절했다 깨어나 보니,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 있다라고 생각하는 쪽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란테르트는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돌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단하다.... 란테르트라는 인간.... 참으로 대단하다.... 그렇게 많은 일을 겪고도.... 아직까지 살아있다니.... 하긴.... 나크젤리온과 싸우고도 살아난 인간이니.... 참 잘도 산다. 약혼녀.... 약혼녀의 동생, 가장 친한 친구.... 모두 자신 때문에 죽어갔는데.... 참 잘도 살아간다. 이제는 죽고 싶어도 스스로는 목숨을 끊지 못할 상황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러한 자신을.... 행운아라고 불러야 할까? 란테르트는 이런 생각에 다시 한 번 훗 하는 짧은 웃음을 터트려 본다. 그러는 사이 오이니아가 조그마한 쟁반에 몇 가지 음식을 챙겨 가지고 돌아왔다. 무엇인지 잘 모르겠으나, 김이 살짝 오르는 접시가 하나 있는 것으로 보아 수프나 그와 비슷한 무언가가 담겨져 있는듯 보였다. 오이니아는 주방에서 수프가 담긴 쟁반을 가지고 오며 돌아가 란테르트라는 남자에게 물을 몇 가지 일을 생각해 보았다. 할아버지가 비록 말을 걸지 말라고 했으나, 그럼, 말도 걸지 않고 무얼 한단 말인가? 멀뚱히 얼굴만 바라보라는 말인가? 게다가 란테르트라는 남자와의 대화는 상당히 신선했다. 룬의 기사에 대한 그의 반응도 그중 하나였다. 비록 자신이 룬의 기사들을 굉장히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언제나 룬의 기사가 어떻다! 라는 말을 하면 뒤이어 이런 저런 사람들이 수사만 바꾼 똑같은 말들을 되내인다. 하지만 란테르트의 경우에는 룬의 기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오히려 신선했다. 그들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다. 한편으로 오이니아는 이 란테르트라는 남자의 인상이 기억 어디인가에 남아있는 것 같다라는 느낌이 계속 들었다. 분명.... 10년간 기절해 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난 10년간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오이니아는 그를 만난 시점이 10년 전인지 아니면 10년전과 지금 사이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인상이 익은 것으로 보아서는.... 그렇게까지 오래 전 일리는 없다. 아무리 그가 지금 나이가 30정도, 겉으로 보기에는 26세 정도가 가장 적당한 듯 보였지만, 10년전이면 20세다. 인상이 비슷할 리가 없었다. 오이니아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란테르트의 방에 도착했고, 이내 그의 앞에 수프를 내 놓았다. "드세요. 따듯할 때." 오이니아의 이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며 스프접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간단히 "감사합니다." 라고 답했다. 오이니아는 그의 약간은 차가운 듯한 말투에 어느덧 익숙해져서인지 그의 이런 대답이 그다지 거슬리게 들리지 않았다. 란테르트는 묵묵히 수프를 몇 숟가락 입안에 떠 넣었다. 오이니아는 이 사람 환자 맞아? 라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한차례 떠 올렸다. 보통 들어온 환자라는 존재들은.... 분명.... 수프 한 수저를 입가로 가져가면서도 손을 덜덜 떨어야 하는 법인데.... 그러고 보니, 손의 움직임이 상당히 부자연 스러운듯도 보였다. 스푼을 쥐는 법도 괴상한데다가.... 종종 흘리기도 한다. 오이니아는 잠시 이 남자가 왜 이렇게 서투나에 대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다음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오른손잡이이다. 그렇다 보니.... 스푼마저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오이니아는 고개를 미세하게 가로 저어. 할아버지 말대로.... 이 남자는 이제 검을 쓸 수 없다. 물론, 왼손으로 다시 수련을 시작하면 되겠지만.... 꽤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한다. 게다가 이제는 양손을 사용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정밀한 검술을 사용하기는 틀린 것이다. 만약 손목의 유연함이나 손아귀의 힘이 상상 이상으로 좋다면야.... 한 손으로도 정밀한 검술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아무래도 양손의 미묘한 움직임을 이용하는 그 미세한 움직임에는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오이니아는 이러한 것들을 모두 할아버지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오이니아는 기분이 착 가라앉음을 느꼈다. 남의 불행에 함께 불행해 하며 눈물을 비오듯 쏟을 정도로 감수성이 예민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남의 불행에 기분이 가라앉을 정도는 되었다. 오이니아는 란테르트가 수프를 먹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표정이 거의 없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거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속으로는 상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섣불리 위로의 말을 꺼낼 수는 없다. "저.... 저 검, 이름이 뭐예요?" 오이니아가 물었고, 란테르트는 막 입가로 가져가던 수프를 계속 입가로 가져가며 오이니아가 가리킨 손을 따라 에르테일을 바라보았다. "에르테일입니다." 간단히 답했고, 오이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다음순간, 오이니아는 웃으며 놀랐다. 아니, 놀라고 웃었는지도 모르겠다. 놀란 것은 당연히 검의 이름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용병이다. 아니, 용병이 아니라도 검의 이름을 일부로 듣지 않는 다음에야 에르테일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벌써 300년 이상이나 대륙 3대 명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루플루시카도, 에르테일 소드도, 드라케 블레이드도.... 대륙에 사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중 하나라고 이야기하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웃은 것은 란테르트의 행동 때문이었다. 잠시 시선을 에르테일로 향하는 사이, 스푼은 그의 입이 아닌 뺨으로 수프를 날랐다. 당연히 뺨은 수프로 엉망이 되었고, 오이니아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이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려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서둘러 냅킨을 들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스푼대신 냅킨을 쥐어 란테르트는 뺨을 닦았고, 약간의 쓴웃음을 섞어 자조했다. "후훗.... 인간 아주 쓸모 없어져 버렸군...." 역시 왼손이 서툴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비록 눈을 감고 밥을 먹는다 하더라도 오른손이라면 이런 실수를 할 리 없다. 하지만 왼손, 간신히 음식을 떠 입가로 가져가는 이 왼손은 단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것만으로도 입이 아닌 뺨에 음식을 가져간다. 오이니아는 처음에는 그런 그의 모습이 재미있어 웃었지만, 그의 이 한마디를 들은 후로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직 상대의 성격을 딱히 파악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부른 위로를 할 수도 없었다. 란테르트는 얼굴을 닦은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수프를 먹었다. 오이니아가 보기에는 정말 아무 일도 없는 듯 보였다.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동작 역시 약간이나마 거칠어지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사실, 란테르트에게 팔을 잃는 정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신 그 자체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었던 사피엘라를 잃었고.... 단 한사람을 위해 3년을 살았건만 그 사람이 자신의 눈앞에서 죽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5년간 미친 듯이 사람을 죽이고.... 파괴하고.... 자신의 목표만을 위해 달려 목표를 이루었으나.... 결국 자신을 가장 아껴주던 친구가 죽는 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일생이 이럴 진데.... 팔 따위야....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 수 없었던 오이니아는 단지 신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란테르트가 그릇을 비웠다. 오이니아는 그의 손에서 그릇을 받아들어 쟁반에 올려놓은 후, 가까운 곳에 있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란테르트를 바라보며 방금전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 검.... 정말 에르테일이에요?" 그녀가 물었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3대 명검중 하나 에르테일 말하는 거죠?" 오이니아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다시 물었고,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져다.... 주시겠습니까? 제 가방도 함께...." 란테르트의 부탁에 오이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가졌던 이 남자에 대한 공포는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며 거의 사라져 있었기에, 그는 스스럼없이 검을 가져다 줄 수 있었다. 오이니아는 먼저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뒤이어 검을 두 손으로 들고 가지고 왔다. 란테르트는 왼손으로 검을 받아 쥐어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가방을 받아 들었다. 가방에 매달려 있는 조그마한 나비 브로치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헛웃음이 나왔다. 대단한 브로치다. 마왕과의 싸움와중에서도.... 멀쩡히 남아났으니.... 그리고.... 가방 끈에 묶여있는 하늘색 끈도 그대로이다. 이제는 많이 바래 회색 비슷한 하늘색을 내고 있었지만.... 여전히 귀여운 리본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란테르트는 이 두 가지 물건을 잠시 바라보다 손을 가방 안으로 넣었다. 오이니아는 무슨 대단한 물건을 꺼낼까 잠시 바라보았으나, 이내 그의 손에 하르동전 하나가 들려 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가왜 그것을 꺼내는지 고민하는 것도 잠시, 란테르트는 에르테일을 오이니아에게 건네주었다. "믿지 못하겠다면.... 한 번 시험해 보십시오. 더 이상 이런 저런 것을 묻지 말고...." 오이니아는 란테르트의 이 차가운 말에 약간 기분이 상했으나, 그 보다는 정말 이 검이 하르, 그 단단하기 짝이 없는 동전을 자를 수 있나에 더더욱 큰 관심이 쏠렸다. 검을 세워 무릎으로 단단히 고정하고, 두 손으로 조심히 동전을 들어 검날에 가져가 보았다. 슥슥 비비듯이 동전을 검에 비볐고, 오래지 않아 동전이 잘리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러한 것일까? 오이니아는 직전 자신의 손으로 동전을 자르고도 그 광경이 믿어지지 않아 반쯤 잘린 동전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이게.... 정말 에르테일인가 보군요. 대단해요. 어떻게 이런 검을 가지고 있는 거죠? 와!! 굉장한 검사였던 모양이군요!" 란테르트는 오이니아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였던, 이라는 과거형 말이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오이니아는 란테르트가 오른팔을 잘렸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마음에 염두해 두고 있었기에 이런 식으로 말해 버린 것이다. 란테르트는 수중에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오이니아를 바라보았다. "검은.... 아무 곳에나 치워 두십시오. 이제.... 조금 쉬고 싶습니다." 오이니아는 란테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에르테일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럼 푹 쉬세요." 오이니아는 이렇게 인사하며 방을 벗어났다. 그가 그렇게 말한 이상 더 이상 귀찮게 할 수는 없었다. 란테르트는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이제 태양은 완전히 지평선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하늘이 붉어져 있다. 10년전과 다를 것 없이 말이다.... 다음날, 란테르트는 오이니아와 함께 마을로 나갔다. 우선 옷을 사야 했고, 켈파인가 하는 사람에게 감사의 말이라도 한마디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은 없었지만.... 은원관계만은 확실히 하고 싶은 그였다. 빚 같은 것.... 지고 싶지 않다. 란테르트는 전에 입던 것과 비슷한 긴소매의 웃옷과 엷은 회색 망토를 샀다. 상점 안의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에르테일을 등 뒤, 과거와는 반대 방향으로 차고, 다시 가방까지 매고 나자 사라진 팔을 빼고는 이전과 같았다. 망토가 팔을 가려주니.... 그런 데로 보기 흉하기까지는 않았다. 오이니아는 그와 함께 마을 이곳 저곳을 다니며 곁에서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종종 물어볼 것이 생각나면 묻기도 했으나, 거의 대부분은 대화가 없었다. 아무리 활달한 성격의 오이니아라 하더라도.... 모르는 사람과 할 수 있는 대화의 양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란테르트는 오이니아를 따라 켈파의 집으로 향했다. "켈파는 나무꾼 집안의 아이 에요.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지요." 오이니아는 마을의 동쪽으로 란테르트를 안내했다. 마을 바로 밖 언덕 위의 숲속으로 10여분쯤을 걸어가자 이윽고 한 통나무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예요." 아직 이른 시간 이어서인지 집에 있는 모양이었다. 오이니아는 문으로 다가가 똑똑 노크를 한차례 했고, 뒤이어 한 남자가 문을 열었다. 평범한 인상의 갈색머리 남자, 바로 켈파였다. 소년이라기에는 나이가 많고, 청년이라기에는 조금 어린 듯한 켈파는 고개만 빼곰이 내밀다가 오이니아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온 켈파의 눈에 들어온 모습은, 전날 피투성이간 된 채 흡사 시체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사내와 오이니아였다. "아.... 당신.... 벌써 나 나은 것입니까?" 란테르트는 켈파의 물음에 슬쩍 고개를 끄덕였고, 오이니아가 보충 설명을 했다. "어제 네가 돌아간 후 의사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어. 하루 정도면 나을 상처였다고...." 켈파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으나, 이내 다시 란테르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큰 상처가 아니라니.... 다행입니다."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감사의 말을 건넸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다시 집의 문이 열리며 한 덩치큰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떡 벌어진 어깨에, 울퉁불퉁한 팔뚝. 다부져 보이는 어깨, 190ㅆ휴리하(1쎄휴리하=약1센티미터)를 조금 넘을 듯한 키.... 170쎄휴리하밖에 되지 않는 키에 덩치도 크지 않은 켈파와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누가 왔냐?" 그 덩치큰 사내가 물었고, 켈파는 약간 질린 듯한 표정으로 황급히 답했다. "어제 말씀드렸던 그 남자가요...." 켈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덩치 큰 사내는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키가 그다지 크지 않은 외팔이 검사를 약간의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보던 그 남자가 말했다. "난 다르크요. 켈파의 애비되는 사람올시다." 덩치만큼이나 거친 말투였으나, 란테르트는 개의치 않았다. "란테르트라고 합니다. 아드님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란테르트가 보기에 다르크라는 남자는 자기 나이 또래쯤 되어 보였다. 물론, 그가 보기에 자신은 그의 나이 또래가 결코 아니겠으나.... 란테르트의 감사에 다르크는 켈파의 어깨를 퍽 하고 한데 쳤다. 순간 켈파의 몸이 휘청 거렸다. "하핫! 내 아들이 원래 의리가 있는 편이오. 기사가 되기 위해 수행을 쌓고 있는 중이니 말이오. 아하핫!" 호탕한 웃음소리에 숲이 울린다. 켈파는 아버지의 그러한 말에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으나, 무어라 따져 말하지는 못했고, 오이니아는 재미있다는 듯 그 부자를 바라보았다. 란테르트는 다르크의 말에 켈파를 한차례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사라.... "기사 지망생 이셨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란테르트는 간단히 인사조로 그 사실에 관해 이렇게 말했고, 켈파는 더더욱 고개를 깊이 숙였으며, 다르크는 호쾌히 한차례 웃음을 터트렸다. "와하하핫~! 켈파는 곧 대륙 제일의 기사가 될 거요! 룬의 기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와하하!" 룬의 기사까지 끌고 나오자 오이니아는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이 다르크라는 남자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그저 웃으며 넘겨 버렸다. 켈파는 아버지의 말이 갈수록 지나쳐 지자 결국 한마디 참견을 했다. "아버지. 그만 하세요. 제 정도 실력으로...." 다르크는 그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하자 무섭게 노려보았고, 켈파는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언제나 작은 덩치 때문에 어려서부터 이런 저런 곳에서 눌려 살아왔기에 켈파의 성격은 약간 내성적이었다. 엄부밑에서의 내성적인 성격은.... 언제나 이렇게 휘둘리고 만다. 다르크가 말했다. "사나이가 한 번 길을 정했으면, 그 분야에서는 당연 최고가 되어야 한다! 최고의 기사가 될 것도 아니면서 왜 기사 수업을 받고 있는 거냐?" 다르크의 말에 켈파는 속으로. '아버지가 시키셨잖아요....' 라고 답했으나, 겉으로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때 란테르트가 끼여들었다. "저는 이만 가 볼 곳이 있습니다. 켈파씨. 혹시.... 언제라도 제가 필요로 할 때에는.... 말씀하십시오. 반드시 한가지 일을 해 드리겠습니다." 란테르트는 한때 남발(?)하고 다녔던 이 말을 했다. 단 이전처럼, 제 목표에 어쩌고 하는 것은 붙이지 않았다. 이제 목표고 무엇이고도 없지 않은가? 켈파는 란테르트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무슨 보답까지...." 다르크가 끼여들었다. "그래! 그게 바로 사나이의 태도이다! 겨우 사람의 목숨을 구한 것 가지고 보답을 받고.... 그건 사기꾼이나 도둑놈들만 하는 짓이야!" 란테르트는 이 순박한 다르크라는 사람을 보며 마음속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겨우란 말인가?.... 란테르트가 다시 말했다. "전 이미 말을 꺼냈습니다. 저에게 할 일을 말하고 하지 않고는 켈파 씨의 마음입니다. 위다의 에티콘 마을에 있는 에티콘 가에 이야기를 해 두면.... 저를 만나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켈파는 더 이상 란테르트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고, 란테르트는 다시 한차례 고개를 숙여 부자에게 인사를 한 후 그 집을 벗어났다. 오이니아도 서둘러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다르크 아저씨, 이제 돌아가 볼께요. 안녕히 계세요. 켈파도 잘 있어." 오이니아의 인사에 다르크는, 하핫 하는 웃음을 터트리며, "잘가게, 꼬마 아가씨!" 라고 인사했고, 켈파는, "조심해서 가 오이니아...." 라고 조금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오이니아는 켈파의 그런 인사에 미소로 화답한 후 몸을 돌려 란테르트와 함께 마을로 돌아갔다. 켈파의 통나무집에서 오이니아의 저택까지는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마을은 반원형의 언덕으로 한차례 감싸안아져 있었다. 조그마한 항구가 있는 전형적인 어촌 마을이었으나, 경치가 몹시도 빼어나, 남쪽으로 꽤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헬튼성의 영주의 저택이 이 마을에 위치하고 있을 정도였다. 켈파의 오두막집은 마을을 감싸고 있는 그 언덕 동편에 있는 숲에 위치하고 있었고, 오이니아의 저택은 그 반대편 해안가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덕에 켈파의 집에서 오이니아의 저택까지 이동하려면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야 했다. 란테르트와 오이니아는 오는 길에 해안의 길을 따라 걸었다. 바다가 북쪽으로 뻗어 있어, 무슨 낙조나 일출 같은 것을 감상하기에는 힘이 들었으나, 힘차게 부딪혀오는 북쪽 무한의 바다의 파도만으로도 마음은 시원해 졌다. 막 부둣가 근처를 지날 때였다. "어! 오이니아! 안녕?" 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오이니아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냈고, 이내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아! 테리트론. 안녕?" 란테르트는 오이니아가 인사를 건넨 테리트론이라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20세쯤으로 보이는 이 남자는, 조금 전에 보았던 켈파라는 남자와는 거의 정 반대의 얼굴이었다. 날카로운 눈매에. 녹색이 약간 섞인 검정 머리칼. 게다가 턱선마져 날카로워 약간 냉막한 인상을 하고 있었는데, 한쪽 입가가 살짝 올라간 모습이 흡사 비웃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복장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고, 스타일로 보아서는 무슨 험한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그는 오이니아를 바라보며 한마디했다. "아침부터 어딜 갔다 오냐? 게다가, 이 남자는 또 누구야?" 말투가 왠지 시비조였으나, 오이니아는 웃으며 대꾸했다. "아, 켈파의 집에. 자세한 이야기는 있다가 해 줄게. 아니면, 켈파에게 가서 듣던지. 이 분의 이름은 란테르트셔. 검사시지." 오이니아의 말에 테리트론은 잠시 란테르트를 훑듯 바라보았다. "검사? 마검사인가 보지? 마법력도 느껴지는데?" 테리트론의 말에 오이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란테르트를 향해 그를 소개했다. "제 친구 테리트론이에요. 얘는 원래 말투가 이러니까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아, 그리고 테리트론은 마법사예요. 수련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오이니아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테리트론은 잠시 란테르트를 바라보다 오이니아에게 입을 열었다. "난 마법사가 아니라 어부야. 쓸모 없는 소리는 하지 마. 마법사는 무슨 얼어죽을.... 그럼 난 간다. 마저 즐기다 집에 돌아가라." 테리트론은 이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고, 오이니아는 즐기다 라는 말에 대번 귀밑이 붉어지며 외치듯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얏!" 그녀의 외침에 테리트론은 몸도 돌리지 않은 채 그저 오른손을 공중에 들어 보였다. "치잇! 바보!" 오이니아는 그런 그의 뒷모습에 화를 내며 몸을 돌렸다. 그때, 저쪽 해안을 따라 누군가나 말을 타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간신히 말과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는 거리에서 상대는 금새 오이니아와 란테르트 두 사람이 있는 곳에까지 다가왔고, 말에 타고 있던 그 사람은 오이니아를 발견하자마자 말에서 내려섰다. "아, 오이니아. 안녕?" "아아! 피아텔. 오래간 만이야." 피아텔이라고 불리운 사람은, 오이니아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남자였다. 상당히 화려한 복장에, 그 복장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얼굴을 가지고 있는 이 남자는 칠흑색의 머리칼을 조금 길게 기르고 있었다. 약간 여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여자 같다기 보다는 섬세하다라는 편이 더 적당한 표현이었다. 눈매도 온화했는데, 흑색의 머리칼과는 약간 어울리지 않는 녹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피아텔은 오이니아의 인사에 빙그레 한차례 미소를 지었다. "테리와 이야기하고 있던 것 같던데.... 그새 가버렸나 보네." 오이니아는 볼을 살짝 부풀리며 뽀로통히 말했다. "또 이상한 말을 하고는 가버렸어. 치잇! 언젠가 복수해 줄 꺼야." 피아텔은 오이니아의 말에 하하, 한차례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오이니아 근처에 서 있는 낯선 사람을 발견했다. 란테르트가 오이니아와 상당히 떨어져 서 있던 덕에오이니아와 일행이라고 생각하기에 약간 힘들게 되어 버렸기에 피아텔은 그저 란테르트를 한차례 바라보았다. 오이니아는 그런 그의 시선을 발견하고는 란테르트를 소개했다. "란테르트라고 해. 검사시지." 뒤이어 오이니아는 피아텔을 소개했다. "헬튼 가의 소영주인 피아텔이에요. 자작 집안의 사람이에요." 오이니아의 소개에 란테르트는 피아텔에게 고개를 한차례 슬쩍 끄덕였고, 피아텔 역시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귀족인 그에게 란테르트가 허리를 굽히지 않았음에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일단 상대가 검사인 이상 그런 것을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오이니아가 그 피아텔이라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말을 타고 어디를 가는 거야?" 그녀의 물음에 피아텔은 다시 한 번 온화이 미소지으며 답했다. "요 며칠 헬튼에 가 있었거든. 처리할 일이 있어서. 오늘 아침에 피치토에 도착했어. 오래간만에 돌아와서인지 한 번 둘러보고 싶어서. 그리고.... 보고 싶은 사람도 있었으니까." 피아텔은 마지막 한마디를 하며 오이니아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오이니아는 금새 마지막 말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귀밑을 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입으로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테리트론은 저쪽으로 갔어. 어서 쫓아가 봐. 보아하니, 오늘 아버지를 따라 바다로 나갈 것 같던데. 그리고, 켈파도 오늘 산 속에 들어갈 것 같아. 한 며칠간 못 돌아 올 테니 어서 만나보고 와." 피아텔은 그녀의 말에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그때, 지나가던 마을의 사람들이 그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넸고, 피아텔은 가볍게 손을 들어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오이니아는 그런 모습을 살짝 외면하다가 마을 사람들이 지나가자 다시 말을 건넸다. "그럼 가볼게. 이 분을 집에 모시고 가야 하거든." 피아텔은 자못 아쉬운 눈치였으나, 내색하지는 않고 다시 말에 올라탔다. "그럼, 난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가 볼게." 피아텔은 이렇게 말하며 말을 오이니아가 온 방향, 테리트론이 사라진 쪽으로 몰았고, 오이니아는 그의 뒷모습을 흘끗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세명 모두 제 소꿉친구 에요. 제가 5살도 안되었을 때부터 친구들 이였죠." 오이니아의 말에 란테르트는 별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일단 원래가 무표정이다 보니 표정 변화가 오히려 없었다. 오이니아는 란테르트가 듣건 말건 그냥 이야기를 계속했다. 원래, 공상을 많이 하는데다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기에 비록 잘 모르는란테르트 앞이었으나 별 스스럼없이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켈파는 참 착해요. 조금 어렵게 말하면 순박하다고나 할까? 난 지금까지 켈파가 화내는 모습을 딱 한 번 봤어요. 화를 낸 이후에 보아서 왜 그가 화를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켈파가 화를 낸다는 것은.... 무어랄까.... 바다에 파도가 없는 것과 같이 어색해요. 그리고.... 테리트론은 아주 재미있어요. 매일같이 피아텔과 켈파랑 말싸움을 하지만.... 둘이 힘을 합쳐도 아마 테리트론을 이기기는 힘들걸요? 피아텔은, 약간 다른 사람들에게 오만한 듯 하지만 친구들에게는 잘 대해줘요. 검술실력도 상당하고...." 오이니아는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혼자 이야기하고 혼자 웃고 하면서 란테르트보다 반보쯤 앞서 걸었고,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멀리 바닷가를 바라보았다. 날씨가 맑아서 인지 프넨티아가 보였다. 멀리 바다 위에 흡사 대륙과 같은 무엇이 아련한 보라색으로 둥 떠있다. 하지만....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대륙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이카르트가....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존재하지 않는 대륙이라고.... 이카르트가.... 울컥 마음에 쓸쓸함이 배어난다. 모두가.... 모두가 사라진 지금.... 왜 살아가야만 하는가? "다왔어요!" 오이니아가 외쳤다. 넋이 나간 듯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는 란테르트의 귓가에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미치게 하려면 이렇게 외치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란테르트는 그녀의 외치는 목소리에 시선을 바다에서 오이니아가 살고 있는 저택의 정원으로 돌렸다. 때마침 드라이토 노인이 마당에 나와 있었고, 오이니아는 할아버지에게 달려갔다. "할아버지!!" 드라이토 노인은 현재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나이를 생각해서 인지 경갑을 입고 있었는데, 허리께 에는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던 중검을 차고 있었다. 풍채 좋은 노인이 갑옷을 완전히 갖춰 입자 확실히 근사해 보였다. 노장이랄까?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그 분위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오이니아는 정원 한쪽에 하인이 말을 손질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어디 가세요? 왠 갑옷은 입고 계시는 거예요?" 오이니아의 말에 드라이토 노인은 빙그레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 보아야 할 곳이 있구나. 영주 님의 부탁으로 어떤 물건을 좀 호송해야 할 것 같아서." 노인의 말에 오이니아가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왜 그런 위험한 일을 맡으신 거예요? 영주 님 휘하에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시키지 않고.... 기사들도 여러명 있잖아요." 드라이토는 손녀의 말에 다시 한 번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마침, 서쪽지방에 마적들이 출몰해, 마침 정규군과 기사단이 그곳으로 가버렸단다. 걱정 말거라. 영주님 휘하의 기사 한 명과 정규군 3개 대(1개대=5명)가 함께 호송해 주기로 했으니." 오이니아가 그래도 못미덥다는 듯 말했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오이니아는 정말 안심이 되지 않아요. 할아버지 이제 연세를 생각하셔야죠. 얼마 않있으면 60이에요." "허허! 이 할애비를 무시하는 것이냐? 이래봬도 한창때 아반트 가르트에서 일했었다. 아반트 가르트가 어떤 곳인지 아느냐?" 드라이토는 이 말을 하며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란테르트는 때마침 아반트 가르트라는 말에 안색이 조금 변했었는데, 노인이 자신을 바라보자 더더욱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 말을 하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인가? 오이니아는 그러한 것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채 할아버지의 허풍 같은 호기에 비위를 맞춰 주었다. "네~ 알아요, 알아~! 전 대륙 최강의 용병들만이 모여 있는 곳!" 드라이토는 손녀의 모습에 허허, 하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 할애비는 그러한 곳에서 6개월을 살았었다. 이미 전쟁도 끝나버려, 멍청이들만이 용병을 하는 지금과는 상황이 틀렸지.... 정말.... 그때는...." 드라이토는 이렇게 말하다 잠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의 추억이라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얼마나 있다가 돌아올꺼죠?" 오이니아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드라이토는 꿈에서 깨어난 듯한 표정으로 오이니아를 잠시 바라보다 대답했다. "노마티아란다. 적어도 한 달쯤은 걸릴 듯 싶구나." 드라이토의 대답에 오이니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고,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렇게나 오래요?" 드라이토는 약간 미안해하는 표정을 오이니아에게 지어 보였다. "미안하구나. 가능 한한 빨리 다녀오마." 오이니아는 드라이토의 이 말에 곧바로 얼굴에 환한기색을 띄었다. "괜찮아요. 대신, 무사히 다녀오셔야 해요." 드라이토는 오이니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막 조손간의 대화가 끝나자 마자,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란테르트가 그제야 끼여들 적당한 시기를 찾았다. "저는.... 이제 떠나겠습니다." 그의 말에 오이니아가 고개를 휙 돌렸고, 드라이토 역시 고개를 돌려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아.... 지금요?" 오이니아가 의외라는 듯 물었고, 란테르트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 당장 가보고 싶은 곳도 있었다. 란테르트의 대답에 오이니아는 순간 어떻게 상대에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말릴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예의 상이라도 만류해야 하는 것인가? 왠지 까다로운 상황이기에 오이니아는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알아서 해결해 달라는 눈빛을 보내면서.... 그때 란테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 보아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들렸다가 특별히 할 일이 생기지 않으면 꼭 이곳에 다시 들리겠습니다. 오이니아양. 방금전 켈파시의 집에서 제가했던 이야기 기억나십니까?" 오이니아는 란테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한가지 일을 들어주겠다는 그 이야기를 말하는 듯 했다. 오이니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란테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이니아양 역시 제게 한가지 일을 시키실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당신이 저의 목숨을 구해 주신 그 일에 보답하려고 합니다. 그것 외에는.... 해 드릴 것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들리겠습니다. 혹시 그때까지 제게 시키실 일이 생긴다면.... 그때 해드리겠고, 만약 그때까지도 아무런 일이 없다면 후에 일이 생길 때 저를 찾아 주십시오. 아마도.... 위다의 에티콘 마을의 영주에게 그 일이라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가장 빠를 것입니다." 오이니아는 그가 깨어난 이후로 가장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지금, 오히려 말이 많던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가 말을 다 끝낼 무렵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 목숨을 구해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전혀 고맙지도 않은 일에 감사를 한 란테르트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오이니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디선가 만난 듯한 이 담갈색 머리칼의 소녀를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오이니아란 이름도, 그리고 그녀의 얼굴도 어디서보고 들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란테르트는 마침 자신을 바라보는 두 조손을 향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후 그대로 동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10일 정도, 물론 란테르트 그의 걸음으로, 가면 위다의 에티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간 두 번이나 바다를 건너야 했고, 그곳에서 며칠이 더 지체된다면 보름, 길게는 20일까지 걸릴 수도 있으나,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길게 잡아도 열 이틀 정도면 도착할 것이다. 에티콘 마을.... 두 자매가 잠들어 있는 그곳에. 2. 10년 전의 사람들과 다시 만난 10년 후. 9월도 이제는 거의 끝나간다. 25일. 바람이 조금씩 선선해 져가고, 성격이 급한 나무들은 벌써 나뭇잎의 색을 조금씩 바꾸어 가고 있다. 란테르트는 에노사, 레냐, 그리고 위다 3개 대륙을 가로질러 에티콘 마을로 여행하고 있었다. 한가하기 짝이 없는 여행이다. 이제는 아무런 할 일도 없었다. 단지, 보고 싶은 사람과 가보고 싶은 장소 몇 곳을 들린 다음.... 피치토 마을에 다시 들려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면 그것으로 당장 해야 할 일은 끝이다. 란테르트는 피치토 마을의 그 어린 남녀들에게 그러한 것을 이야기하며 곧바로 다시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에티콘 마을, 그리고 클라린스 누님이 살고 있는 그라난 마을에까지 들렸다 다시 돌아간다면 넉넉잡아 한달 열흘쯤 걸릴 것이고.... 그 정도 시간이라면 분명 그들은 소원을 정해 두고 있을 것이다. 쫓기듯이 살았던 지난 5년, 물론 10년 전의 지난 5년이지만, 그때에 비한다면 미칠 듯이 한가했다. 그때도 하루에 50휴하(1휴하=약 1킬로미터)를 걸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정도 거리는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과의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걸으면서 단지 앞을 볼뿐이었지만, 지금은 주위에까지 약간이나마 시선이 갔다. 그렇다고 특별히 경치를 감상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란테르트는 이렇게 대륙을 한 번 가르고 나자 간신히 그 사이 10년이 흘렀다는 실감을 할 수 있었다. 사실 피치토 마을에서, 그리고 자피토 가문의 방에 처박혀 있었던 처음에는 10년이 흘렀다는 사실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처음 피치토 마을 안을 돌아다녀 보고서야 간신히 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변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렇게 대륙을 한차례 횡단하고 나니 판이해져 버린 대륙의 정세라는 것을 대강이나마 알 수 있었다. 일단.... 피내음이 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피로 절어있던 대지가 이제는 더 이상 피냄새를 풍기지 않았다. 무기를 휴대하는 사람의 수도 크게 줄었고.... 전에는 한 2, 3일에 한 번쯤은 꼭 만나던 도적 패들과 단 한차례도 마주치지 않았다. 마법사들의 수도 크게 줄어 있었다. 전쟁통에 죽어 버린 건지.... 아니면 전쟁이 끝난 후 연구실로 모두 틀여 박혀 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마법사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것은 란테르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지만.... 주점, 용병길드, 마법사 길드에 붙어있던 자신의 초상화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정확히는 크림슨 아이즈이지만.... 100만 하르의 상금이 걸린 마왕 크림슨 아이즈의 수배가 풀려버린 것이다. 란테르트가 처음 이 사실을 느낀 곳은 에노사-레냐 해협의 에노사측 항구에서 였다. 우연히 수배 포스터를 붙여 놓는 장소로 고개를 돌렸는데, 자신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 란테르트는 진하게 쓴웃음을 한차례 지었었다. 농토는 비옥했고, 사람들은 평화로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전쟁에서 누가 승리했는지 란테르트로서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오이니아에게 대강 들은 이야기를 껴 맞추어 본다면 소피카가 통일을 한 것 같았는데.... 각 대륙에는 여전히 각 나라의 국기가 걸려 있었다. 게다가 알 수 없는 모습의 국기 역시 걸려 있었는데, 황금색의 늑대 문양이었다. 늑대는 분명 소피카의 상징이지만.... 소피카의 상징은 황금색이 아닌 회색이다. 대강 유추해 보면 통일 후 황금색 늑대를 문양으로 채택한 것 같기는 했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다. 생각한 것은 많았으나, 정작 한 일은 없는 10일 가까이가 흘렀고, 란테르트는 어느덧 두 자매가 잠들어 있는 언덕을 시야에 잡았다. 그곳은.... 여전했다. 아담한 언덕.... 갈색 지붕의 3층 저택.... 그리고.... 잎이 귀여운 베니아 나무. 란테르트는 언덕이 잘 보이는 장소에 서서 한참동안이나 그곳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바닥에 낮게 드리워진 녹색의 언덕이 보기 좋다. 아니.... 설사 아름답지 않다 하더라도.... 아름다운 곳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자매가 잠들어 있는 곳이 아닌가? 구름이 흐른다. 아직 한낮이다. 몇 조각되지 않는 구름이 서에서 동으로 천천히 흐른다.이윽고 란테르트는 다시 발을 떼었다. 사실, 기억 상으로는, 두 자매의 무덤에 들린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듯 했으나, 10년이 지났다지 않는가? 어제 오후에 지났던, 에티콘까지의 길에 가장 큰 도시인 에티스 시에서 구입한 이름모를 흰 꽃은 아직 싱싱하다. 꽃을 들고 있자니,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길 팔이 하나 부족했다. 시야를 가린 긴 머리칼이 약간 성가셨다. 오래지 않아 란테르트는 언덕 위에 도착했다. 꽃을 묘 앞에 내려놓았다. 이미 누군가가 흰 국화 한 무더기를 앞에 쌓아 놓았으나, 란테르트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이 사 온 이름 모를 흰 꽃을 그 곁에 조심히 놓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검도 풀어 바닥에 두었다. 언제나와 같았다. 이곳에 들릴 때마다, 란테르트는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두 자매의 무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누군가, 거의 대부분은 엘라였다, 누군가가 자신을 부를 때까지.... 하염없이.... 란테르트는 무덤을 바라보며 두 자매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단 한차례도 본적 없는 사피엘라.... 그리고 직접 눈으로 본 에라브레.... 하지만 둘 모두 모습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이미지는 남아 있었으나, 떠올리려 할수록 희미해져 간다. 란테르트는 조용히 목에 있는 펜던트를 목에서 풀어 열어 보았다. 이제야 확연히 떠오른다. 두 자매의 모습이.... 담갈색 머리칼이 너무나 아름답던 두 자매의 모습이.... 란테르트는 잠시동안 왼손에 펜던트를 쥔 채 그것들을 내려다보았다. 어떤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슬프지도 않다. 아련히.... 쓸쓸한 느낌만이 마음을 가득 매울 뿐.... 눈물도 흐르지 않는다. 울보라고 놀림받았던 적도 있었는데.... 하긴.... 이제는 울어도.... 울보라고 놀릴 그가.... 그가 존재하지 않으니.... 꽤 오랜 시간 감상에 잠겨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닌지도 몰랐다. 태양은 아직도 중천이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가 란테르트의 등뒤로 접근했다. 란테르트는 그저 엘라나 다른 에티콘 영주 집안의 사람이려니 하고 신경을 쓰지 않았다.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단지 란테르트를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란테르트는 그 점이 약간 이상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 돌연 뒤에 서 있던 사람이 란테르트의 왼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란테르트는 순간 뒤에 있는 사람이 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느낌이 가벼운 것을 보아 분명 여자의 것이었다. 하지만 엘라라면 이렇게 란테르트의 어깨에 손을 얹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란테르트는 뒤돌아보기 전에 잠시 상대가 누구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처음에는 자신을 삼촌이라 부르던 시나를 떠올려 보았으나, 10년전에도 친하지 않았던 그녀가 이런 행동을 할 이유가 없었다. 란테르트는 더 이상 지체치 않고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뒤로 돌렸다. 엘프. 상대는 엘프였다. 키는 거의 170쎄휴리하에 육박했고, 굉장히 아름다웠다. 정말 어디 신화 한켠을 차지하고 있을 만큼 고아한 모습이었다. 몸매는 약간 빈약한 편이었으나, 오히려 그쪽이 좋았다. 언제나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그리는, 숲의 정령 엘프에게 어울리는 모습은 약간 마른 듯한 그리고 신비로운 미소를 가지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바로 눈앞의 이 엘프와 같이.... 그녀는 화려한 금발을 가지고 있었다. 긴 금발이 허리를 살짝 넘기는 곳까지 자라있었다. 눈동자는 녹색이었는데, 이른봄의 새순과 같은 엷은 빛이었다. 눈은 조금 큰 편으로 보기에 시원시원했다. 그 커다란 눈은 숨막힐 듯한 그녀의 미모를 한층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란테르트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이 엘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인지를 아는 데에는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안겨오는 엘프는.... 이 세상에 단 한명 뿐이니 말이다. "살아있다면.... 반드시 이곳으로 오리라 생각했어요...." 엘프는 란테르트의 가슴에 뛰어들며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하나밖에 없는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모라이티나...." 그 상태로.... 모라이티나도, 란테르트도 한참동안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한 명은 지금까지 10년이나 찾아 헤매었던 남자를 찾았다는 기쁨에.... 그리고, 다른 한 명은 혼란해 져 버린 마음을 기댈 만한 존재가 필요했기에.... 이 둘은 잠시동안 이러한 모습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모라이티나가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조심히 손을 뻗어 란테르트의 오른쪽 어깨를 쓰다듬었고,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팔을 잃은 것 정도는.... 당신에게 조그마한 슬픔도 되지 못하겠지요?" 자신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하는 모라이티나에게 란테르트는 슬쩍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녀의 말 그대로였다. 뒤이어 모라이티나가 말했다. "하지만.... 전 슬퍼요.... 당신이 팔을 잃었다는 사실이...." 자신의 사라겨 버린 팔이 있었던 곳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하는 모라이티나를 바라보며, 란테르트는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도저히.... 옛날의 그 모라이티나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하긴.... 10년이 흐르지 않았는가?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어깨를 쓰다듬던 손을 이제는 그의 얼굴로 가져갔다. 얼굴을 반쯤 뒤덮어 버린 앞 머리칼을 쓸어 올려 정리해 주며, 그녀는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이제는.... 백발이 되어 버렸네요.... 다음엔 무어죠? 청색에서, 청회색으로.... 그리고 이제는 백발...." 모라이티나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잦아들었고, 이윽고는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다. "보고 싶었어요.... 란테르트.... 정말 보고 싶었어요." 모라이티나의 눈동자가 조금씩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마음은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대변되고 남았다.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이러한 모습에 감격했다.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좋아해 주다니.... 처음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는.... 단지 어린아이의 철없는 사랑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와 함께 무덤 뒤편에 있는 나무에로 다가갔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앉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하이얀 묘비와, 멀리 저택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모라이티나는 어느새 눈물을 거둔 채 엷은 미소를 지었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를 약간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못 알아 볼 뻔했어...." 란테르트가 먼저 말을 꺼냈고, 모라이티나는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 그래요? 하긴.... 지난 10년간 키도 많이 자랐고.... 얼굴도 꽤 변했으니.... 하지만, 란테르트는 그대로네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어.... 어떻게 된 것인지.... 그날 이후.... 나는 단지 생각만을 하면서 10년을 보냈어.... 난 처음에 한 며칠 기절했다가 깨어났다고만 생각했었지.... 그런데 알고 보니 10년이더군." 모라이티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10년간.... 란테르트는 완전히 기척이 끊겼었어요. 원래부터, 정신력으로 스스로를 감추고 있어 먼 곳에서 당신의 존재를 눈치챌 수는 없지만...." 이렇게 말하며 모라이티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이전의 천진함을 그대로 간직한 미소였다. "그 동안 얼마나 찾아 다녔는지 알아요? 그렇게.... 아무런 작별 인사도 없이 카이젤 드라켄 님의 신전에서 어디론가 가버리다니...." "미안해.... 그때는.... 왜인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어."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사과의 말을 했고, 모라이티나는 그의 말에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요.... 전 처음에 당신이 죽었다고만 생각했었어요. 나크젤리온과 싸우러 갔으니.... 죽었을 거라는 생각 외에는 들지 않았었거든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 라도 살아 있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가엘프 님을 찾아 갔었죠. 그리고 그분의 입을 통해.... 당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때의 기쁨이란!...." 모라이티나는 활짝 웃었다. 흡사 당시 란테르트가 살아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같이.... 그녀는 활짝 웃었고,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를 담담한 미소와 함께 바라보았다. 아무리.... 모습이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역시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피어나는 그녀였다. 모라이티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가엘프 님은 당신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지 않으셨어요. 단지 모른다고 말씀 하셨는데.... 그분이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았었죠. 떼를 써보았으나.... 소용없었어요. 그래서 직접 찾아 나섰죠. 아무래도.... 당신이 살아 있다면 이 일곱 대륙에 찾아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 근처를 전전했어요. 하루는 위다에, 그리고 하루는 에노사에.... 그리고.... 에티콘, 이 마을 근처를 지날 때면 반드시 들렸어요." 모라이티나의 예상은 정확했고, 그 결과 이렇게 란테르트와 재회한 것이다. 그는 모라이티나의 생각대로 깨어나자 마자 이 마을로, 두 자매에게로 왔다. "저 국화.... 모라이티나가 가져다 놓은 것인가 보지?" 란테르트는 이렇게 물었다. 물론, 엘라나 칼슨이 했을 수도 있었으나, 모라이티나가 했을 가능성이 훨씬 컸다. 저렇게 큰 꽃다발은 15년이나.... 그리고 18년이나 전에 죽은 양녀를 위한 일 치고는 너무 새삼스럽고 또 어색하다.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에라브레를 위한 것이에요. 그리고.... 사피엘라라는 분을 위해서도.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당신이 그렇게나 못 잊어 하는 것을 보아.... 좋은 분일 테니.... 꽃다발을 받을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지요."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렇게나 주저 앉아있었던 덕에 주름이 넓은 연두색 짧은치마에 잔주름이 잡혔다. "일어나요. 지금.... 저 안에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들을 만나 보아야죠. 칼슨 씨도, 엘라부인도 란테르트 걱정을 많이 했어요." 몇 차례 이곳에 들락날락 거리는 사이, 모라이티나는 그들과 꽤 친해진 모양이다. 자연스럽게 그네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아....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부쩍 그네들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란테르트는 다시 한 번 두 자매의 무덤을 살펴보고는 모라이티나를 따라 에티콘 저택으로 향했다. 칼슨과 엘라는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25세가 되어 버린 15세의 소녀였던 시나 역시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란테르트를 향해 시선을 두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10년전과, 머리색을 제하고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10년만에 다시 나타났으니.... 칼슨은 이제 반백이다. 하긴.... 이제는 거의 60에 가깝지 않은가? 반면 이미 40을 훨씬 넘겼을 엘라는 여전 30대 중반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잘 늙지 않는 체질인 모양이었다. 점점 더 두 사람 사이의 겉보기 나이는 벌어져만 간다. 차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아침에 구워낸 쿠키의 향기와 차의 향긋한 내음이 뒤섞여 모두의 후각을 자극한다. 하지만.... 식어 가는 차의 후각적 외침에도 이곳 에티콘 저택의 응접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반응하지 않는다. 차는 이윽고 지쳐 더 이상 김을 피어내지 못하였고, 그때가 되어서야 사람들은 꿈에서 깨어나듯 침묵에서 빠져나왔다. 시나가 몸을 일으켰다. "차를 다시 내오겠어요." 보라색 머리가 예쁘게 자란, 약간은 콧대 높아 보이는 시나는 25세가 되었건만 아직 적당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칼슨과 엘라 이 두 사람과 함께 살고 있었다. 손놀림에 절도가 있는 것이 예전에 비해 훨씬 기품 있어 보였다. 그녀는 익숙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찻잔을 치워 부엌으로 가져갔고, 그제서야 칼슨이 입을 열었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우선.... 정말 반갑네. 10년만이야...." 그의 말에 란테르트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칼슨도 엘라도.... 이 란테르트라는 남자의 이러한 웃음에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그에게서 만나서 반갑다, 따위의 인사치레의 말을 들을 생각은 없다. 10년의 시간은.... 그 길었던 만큼의 어색함으로 일행을 짓눌렀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데는 그다지 큰 힘이 들지 않았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고, 몇 마디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상당히 부드러운 분위기가 되었다. 시나가 다시 내온 차가 절반 가까이로 줄어 있었다. 시나는 엘라의 곁에 다소곳이 앉아 란테르트와 칼슨, 그리고 엘라, 모라이티나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종종 끼여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적당한 자리를 찾지 못해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일곱 개 대륙은 통일되었네. 선 황제 루실리스 폐하에 의해서 였지. 아이실트 전하야말로 애석하기 짝이 없네.... 그렇게 갑작스레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오히려 패권은 그분께서 쥐셨을 텐데.... 아무튼 선황제께서는 이 일곱 대륙을 통일하며 새로 이름을 지으셨네. 그것이 바로 헵티슬이야. 일곱 개의 섬이라는 뜻이네." 막 칼슨은 최근 10년간의 대륙의 정세를 설명해 주었다. 란테르트는 칼슨의 마지막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 황제?.... 루실리스.... 그가 죽었습니까? 이제 겨우 25세쯤 되었을 텐데...." 란테르트의 말에 칼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3년쯤 전 붕어 하셨네. 지금은 그분의 매제 되시는 핌트로스 님께서 황위를 이으셨지." 칼슨의 말에 란테르트는 돌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핌트로스.... 그가 황제라.... 그렇게나 어디 얽혀 있는 것을 싫어해, 엄청난 실력으로 고작 경비병을 하고 있던 녀석이.... 황제라니.... 란테르트는 순간 이상한 점이 있어 물었다. "그런데.... 칼슨.... 어떻게 칼슨 씨는 아직도 귀족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위다의 귀족이면.... 헵티슬 황조에는 역적일텐데...." 란테르트의 말에 칼슨은 쓴웃음을 지었다. "모두 선 황제 덕이네. 그분은 다른 대륙을 점령하면서, 그곳의 귀족들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시켜 주겠다고 약속 하셨네. 그뿐만이 아니라.... 각 나라의 왕족들의 지위도 그대로 유지시켜 주기로 약조를 했네. 물론, 외교권 박탈, 사병수 제한 등등의 여러 제약이 따르지만.... 몰살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그 때문에 반 헵티슬 감정도 크게 일지 않았고.... 게다가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킬 만한 여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지금 없네. 평민들의 생활은 안정되었고.... 귀족들 역시 여전히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지." 란테르트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게 라도 하지 않는다면.... 통일은 영영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칼슨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그렇게 해서, 1황국, 5제후국 체제를 맞이하게 된 거네. 과거 소피카 대륙은 지금도 소피카로 불리지만, 그곳은 황제 직영지이지. 그리고, 다른 대륙들은 여전히, 위다, 레냐, 노마티아 등등의 성을 가진 왕족에 의해 다스려지지. 다만.... 위다만은 아이실트 님이 채 자손을 남기시지 못한 채로 돌아가셔서.... 왕실의 대가 끊겨 최후의 재상가문이었던 다르나시안 가의 장녀 세르테이나 님이 여왕 자리에 오르셨지. 세르테이나 님의 고모 되는 분이 아이실트 님의 어머님이셨으니 무리도 아니야.... 로렌시아 공주 님의 뜻에 따른 결정이었네." 란테르트는 순간 약간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입가에 배어 나오는 쓴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핌트로스가 황제이고.... 세레티가 여왕이란 말인가? 란테르트의 이상한 표정에 칼슨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유는 묻지 않은 채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과거 마곡을 다스리던 레이니어가가 소피카에 나라를 맡기고 사라져 버린 덕에, 마곡과 세이아는 한데 묶어 세이아의 왕이 다스리게 되었지. 자네도 알다시피 세이아에는 원래 왕이 없었지만, 이번에 란트오트 가의 가주가 왕에 봉해졌지. 키톨트 란트오트.... 헵티슬의 네 개국 공신중 한 명이지." 란테르트는 키톨트라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들어본 듯 했지만 기억은 나지 않았다. "헵티슬의 네 개국공신 이라고요?...." "아! 자네는 잘 모르겠군...." 란테르트가 물었고, 칼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헵티슬의 네 개국 공신.... 그 첫째가 바로 현 황제 폐하이시네. 전쟁 당시, 소피카 총 사령관직에 계시며.... 5개 대륙중 세 개를 손수 쳐 빼앗아 오셨지. 두 번째 개국공신이 바로 그 유명한 은월의 기사, 밀튼경이지. 20세 밖에 되지 않는 젊은 나이로 선 황제의 막하에 들어가 현 황제 못지 않은 공을 세웠지."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밀튼과 로멜이 그렇게 유명한 것도 이해가 갔다. 황국의 개국 공신이니.... "세 번째가 방금 이야기한 키톨트이네. 폐하와 은월의 기사 이 두 사람은 헵티슬 개국 3대 장군중 둘이고, 키톨트는 이들과는 달리 은밀한 곳에 숨어 일을 했지. 마지막 네 번째 사람은 아왈트라고 하는 외팔이인데...." 칼슨의 말에 란테르트는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아왈트가? 어째서 루실리스의 휘하로? 란테르트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칼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언젠가 자네가 데리고 온 그 녹색 머리칼의 남자.... 바로 그더군. 그 후로 단 한 번 에라브레의 무덤에 찾아 왔었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그곳에서 자네처럼 몇 시간이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우리 두 사람에게 무례를 사과하고는 돌아갔지." 란테르트가 물었다. "아왈트는.... 지금 무슨 자리에 있습니까?" 칼슨이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그는 죽었네. 가장 치열했던.... 소이스평야 전투에서.... 바로 아이실트 전하가 숨을 거두신 그 전투에서 그도 전사했네. 직위를 이야기하라면, 지금 명예 황실 사령관 직에 있고, 그리고 슬크라는 성은 공작가문의 성이 되어버렸지. 모두 죽은 후에 봉해진 것이지만...." 란테르트는 칼슨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 하긴.... 그가, 아니 그의 말대로 그 따위가 늙어 죽을 리는 없었다.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는 것이야말로 그에게는 가장 어울리는 최후이다. "이제.... 자네의 10년을 들려주겠나?" 막 말을 마친 칼슨이 란테르트에게 이렇게 물었고, 란테르트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때까지 잠자코 앉아만 있던 모라이티나도 눈에 빛을 내며 란테르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글쎄요.... 지난 10년.... 사실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려던 일을 성공한 것 같기는 한데.... 기절했다가 깨어나 보니.... 팔은 이렇게 되어 버렸고.... 10년이 흘러 버렸습니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어깨를 한차례 바라보았고, 모두들 그의 말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도 이 이상은 모르겠습니다." 의외로 싱거운 그의 이야기에 칼슨과 엘라, 시나, 그리고 모라이티나까지 모두 약간 맥이 풀려 버렸다. 엘라가 물었다. "그런데.... 정말 일을 성공한 것인가요?" 엘라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순간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모라이티나가 대신 대답했다. "나크젤리온은.... 소멸했습니다. 완전히 허무로 돌아가 버렸죠." 모라이티나의 말에 칼슨과 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라이티나가 몇 년전 칼슨과 엘라에게 자신이 엘프임을 밝혔기에둘은 그녀가 엘프임을 알고 있었다. 엘프가 하는 말이라면 사실일 것이다. 반면 시나는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크젤리온? 그게 무슨 말인가? 나크젤리온이 소멸하다니.... 그리고... 그것이 란테르트 삼촌과 무슨 상관인가?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시나를 향해 엘라가 다정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시나.... 지금까지 너에게 이 일은 비밀로 해 왔단다. 네가 너무 어렸고.... 그 때문에 네게 이야기를 했다가는 란테르트에게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슨 일이었기에.... 그랬나요?" 시나는 이 눈앞에 있는.... 이제는 자신의 또래처럼 보이는 삼촌이 과거 크림슨 아이즈라는 이름으로 불리운 엄청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미 10년이 흘렀고, 과거의 두려움은 이제는 그저 한차례 웃음이 터져나오는 추억으로 자리잡아 버렸다. 그렇게 기억에서 사라지려던 사람이 돌연 자신과 같은 나이또래로, 물론 겉으로 보기 만이지만, 다시 돌아왔으니.... 무섭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부쩍 호기심이 생겼다. 엘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차후에 한가할 때 자세히 이야기 해 주마. 아무튼.... 너의 란테르트 삼촌은.... 마왕 나크젤리온을 죽이기 위해 그 5년간 수행을 쌓았었단다. 그리고.... 결국 성공한 모양이구나. 그 덕에 한쪽 팔을 잃게 되었고...." 엘라는 팔을 잃게 되었다는 말을 하면서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위로를 얼굴에 한껏 담았고, 란테르트는 그런 엘라의 표정에 미소를 지어 감사를 표했다. 시나는 엘라의 말에 순간 머릿속이 텅 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 그런 황당한 일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인간이 마왕을 죽이다니.... 무슨 로망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이다. 그런 것이 현실세계에 이루어지다니.... 하긴.... 이미 엘프가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데.... 마왕을 죽이지 못하라는 법도 없다. 시나는 혼란스러움에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고, 엘라는 그런 그녀의 손을 조용히 잡아 주었다. 한편, 칼슨은 그런 자신의 양녀를 한차례 바라보고는 뒤이어 란테르트에게 물었다. "그보다.... 이제 팔은 괜찮은 건가? 하긴.... 10년전에 났던 상처이니 이미 아물었겠지...." 그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상처는 10년전에 난 것 같지 않았습니다. 기절해 있던 사이.... 무의식중에 스스로 마법을 걸어 스스로를 치료했는데.... 깨어나고 보니 아직도 완전히 치료가 끝나지 않았었습니다. 저를 구해준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때까지도 피가 완전히 마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칼슨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혹시 10년간 기억 상실증에라도 걸려 있던 것이 아닌가? 팔은.... 다른 곳에서 잃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란테르트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의식이.... 하나로 이어집니다. 게다가 팔을 잃던 순간의 기억은 가지고 있습니다." 칼슨은 더더욱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섯 사람은 이후로도 한참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헤어졌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할 이야기도 많았다. 란테르트는 이 긴 대화를 통해 현재 대륙의 상황을 대강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상당히 변해 버린 모라이티나의 성격 또한 알게 되었는데.... 이전 마지막으로 모라이티나를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그녀는 여전 약간 산만했었다. 비록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보이는 등 처음과 비교해서 상당히 성장해 있었지만, 지금 와서 보니 더더욱 성격이 침착해진 듯 했다. 대화 내내 거의 입을 열지 않았을 정도이니 말이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란테르트는 언제나 자신이 묶던 방으로 향했다. 엘라는 아직도 그 방은 란테르트 그 자신을 위해 청소되어 있으니 마음 편히 사용하라고 이야기했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의 말과 배려에 더더욱 고마움을 느꼈다. 방으로 향하는 도중.... 란테르트는 두 자매의 초상화 앞에 서서 그림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를 따라가던 모라이티나도 란테르트의 곁에서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에라브레는 장식이 수수한 의자에 앉아 귀엽게 미소짓고 있었고, 그 뒤에 에라브레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사피엘라의 미소는 부드러웠다. 란테르트는 한참동안 바라보다 호, 하고 한숨을 한차례 내쉬며 몸을 돌렸다.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들을 그리워하고 있나요?" 따라 걷던 모라이티나가 물었다. 란테르트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고, 모라이티나는 두 눈을 반짝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그렇다....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다. 만약 시간을 다스리는 절대신 테미시아가 자신에게 일생중 단 한순간으로 돌아갈 기회를 준다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지금에 비해.... 능력도 형편없고.... 눈도 멀었었지만....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란테르트의 대답에 모라이티나는 한차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당신이라는 사람은...." 모라이티나의 말에 그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란테르트는 이제는 낯설어져 버린 낯익은 복도를 걸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었고, 먼지 하나 없이 정리되어 있던 자신의 방에 들어가 검과 가방, 그리고 망토를 내려놓았다. 모라이티나는 방 한쪽에 있는 조그마한 테이블 곁의 의자에 앉았다. 망토를 벗어 젖힌 란테르트의 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역시 오른팔이었다. 모라이티나는 황황히 흔들리는 그의 오른 소매를 보며 다시 한번 마음이 쓰려옴을 느꼈다. 아까 식사때 보니, 왼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아직도 서툴러 보였다. 몇 번이나 음식을 식탁에 흘렸으니 말이다. 모라이티나가 물었다. "이제 검은 쓸 수 없게 되었나요?"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침대에 주저앉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검을 쓰는데는 문제가 없어.... 왼손이나 오른손이나.... 익숙해지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으니.... 마법을 사용하는데도 지장 없고.... 마법력은 오히려 조금 성장한 듯 해...." 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처연히 웃었다. "역시.... 그의.... 말대로 인간이 아니군요...." 모라이티나는 이 말을 하다 돌연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마도.... 이 말을 한 주인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이카르트도.... 실종되어 버렸더군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어.... 후우...." 란테르트는 한숨을 내 쉬었다. 울고 싶었으나,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마음만 쓰리고 아플 뿐.... "트레시아도.... 세이피나도 실종되었어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지난 10년간 모습이 보이지 않아요. 가엘프 님께 물어도.... 고개만 가로 저으시고...." "마계는? 어떻게 된 거지?" "마계.... 완전히 사라져 버렸어요. 원래 그 땅의 주인이었던 암흑 정령들이 차지했다나 봐요. 엘라인 오빠가 이야기 해 주었어요. 저는 잘 모르지만.... 엘라인 오빠는 알 수 있는 모양이에요." 모라이티나는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간신히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힘겹게.... "에이.... 란테르트 앞에서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벌써 두 번이나 울어 버렸네요...." 이렇게 말하며 모라이티나는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말을 멈추었다. "그런데.... 란테르트는 이제 무얼 할건가요?" 다시 모라이티나가 물었고, 란테르트는 그녀의 물음에 천천히 답했다. "우선.... 그라난 마을로 가야지.... 클라린스 누님에게 들려 보아야 하니까.... 그리고.... 나를 구해준 사람들에게 들리기로 했으니....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에노사로가 보아야 하고.... 그 이후의 일은 생각해 본 적 없어." 란테르트의 대답에 모라이티나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모라이티나는 잠시 말끝을 흐리다가 이내 란테르트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전 이제 란테르트와 함께 다닐꺼에요. 이제 란테르트 곁에는 저밖에 없잖아요. 즐겁게 해 드릴께요. 이제는....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행복하게 사는 거라....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어 놓고.... 행복하게 살라니.... 면목이 없다.... 하지만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면전에서 이러한 속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 반대로 하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기는 싫다. 란테르트는 지난 10년간 스스로에게 갇혀 생각만을 했다. 그 동안 가장 후회한 일은.... 역시 나크젤리온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설치던 그 5년이었다. 죽인 사람이 몇이며.... 게다가 이카르트까지.... 그가 죽기 전에 말했었다. 왜 그런 일을 해 가지고.... 자신을 가슴 졸이게 만들었냐고.... 살아야만 하는 생이다. 이카르트와 계약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살라고 이야기했다. 그렇기에 이제는 살아야 한다. 죽는 그날까지.... 죽을 수는 없다. 모라이티나.... 자신을 즐겁게 해 주겠다고 이야기하는 모라이티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다. 모라이티나뿐만이 아니다.... 자신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몇 안돼는 사람들 모두를....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에게서 대답이 없자 다시 물었다. "당신.... 저와 함께 다니는 것이 싫지는 않죠?"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천만에.... 모라이티나와 함께 있는 것을 싫어할 존재는 단 한 명도 없을 꺼야...."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말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고맙다니.... 천만에.... 그보다.... 이제 가서 자도록 해.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예정이니까."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싫어요. 조금 더 함께 있을래요. 겨우 하루정도 밤을 샌다고 큰일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란테르트는 어쩔지 몰라도.... 저는 지금 침대에 눕는다 하더라도 잠을 잘 수 없을 것만 같아요. 생각해 보세요.... 10년 동안 찾아 헤매던 사람을 만났어요. 란테르트라면 그런 사람을 두고 쉽사리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모라이티나의 투정에 란테르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냥 내보내려니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았고.... 그렇다고 한방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모라이티나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떻게 나크젤리온을.... 이겼나요? 인간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낸 거죠?"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간단히 답했다. "기억나? 10년전.... 카이젤 드라켄의 신전에서.... 나는 그 용신인가 하는 존재를 따라 갔었지...."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때 저는 키티나 언니와 다른 방으로 가 그녀의 수집품들을 보고 있었어요. 그녀는 검을 몹시 좋아해 이런 저런 검들을 여러개 모아 두었어요." "그때 나는 용신을 따라 어떠한 곳으로 갔었어. 그리고 그곳에서 한 자루의 검을 빌릴 수 있었지...."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순간 엘리엠은 어디로 갔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10년전에 사라져 버린 검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약간 신경이 쓰였다. 만약, 이제 갓 검을 익힌 풋내기가 그 검을 사용하더라도.... 란테르트는 그를 이겨낼 자신이 없다라고 생각되어질 정도로 위력이 엄청난 검이다. 란테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검 덕분이야. 증폭마법도 하나 배우기는 했는데.... 샤이튼이라고.... 그 마법은 순간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 마법의 힘을 거의 두배 가까이나 높여 주었지.... 그때를 생각하면...." 란테르트는 이렇게 설명하며 다시 그때를 떠올렸다.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마법의 폭풍에.... 몸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줄만 알았다. 팔 하나만 잃은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샤이튼이라는 말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샤이튼이라고요? 그런 마법.... 들어본 적 없는데.... 헵티슬의 마법에도.... 다프칸의 마법 중에서도 그러한 마법은 없었어요. 드래곤들의 마법인가?"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도 자세한 것은 몰라.... 다만 그들이 준비해 놓은 것을 가지고..... 하라는 대로만 했을 뿐이야."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순간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말 그대로.... 그들이 준비해 둔 대로.... 안배된 동작대로 움직였다. 아마.... 인형극에서 인형의 역할이 이와 비슷할 듯 하다. 인형사의 손놀림에 맞춰 팔을 들고.... 미소를 짓고.... 걸음을 걷고.... 모라이티나는 잠시 샤이튼이라는 마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나 그리 길지는 않았다. 눈앞에 란테르트가 있는데, 그따위 마법에 머리를 썩힐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지난 10년 동안 내가 무얼 했는지 알아요?" 모라이티나는 더 이상 란테르트에게 물을 것이 없자 이제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고,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글세...." 라고 대구했다. "처음.... 란테르트가 그렇게 떠나 버린 후...."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는 지난 10년간 겪었던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일들로 한 줄로 주욱 엮어갔다. 정말로 밤을 새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는 몹시 피곤한 얼굴을 한 채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자정을 넘겨서 부터는 모라이티나는 꾸벅 꾸벅 졸기 시작했다. 몇 마디 말을 하다 잠시 눈을 감고 한 10초동안 졸음에 굴복 당해 버리고는, 퍼뜩 깨어나며, 아,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라고 되묻는다.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한편으로는 재미를 느꼈고.... 한편으로는 조금 감동했다. 자신 따위를 그렇게나.... 억지로 잠을 쫓아가며 떨어지기 싫을 정도로 좋아해 주니 말이다. 그때, 란테르트가 돌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고, 모라이티나는 그의 그러한 움직임에 화들짝 놀라 덩달아 일어났다.란테르트는 몸을 일으켜 곧바로 문 쪽으로 향했고, 모라이티나는 나가라고 이야기 할까봐서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란테르트는 문을 벌컥 열었다. 동시에, 누군가 균형을 잃고 방안으로 넘어지듯 들어왔다. "시나!" 모라이티나는 바닥에 엎어질 듯 기우뚱거리는 진 보라색 머리칼의 여자를 부축하며 이렇게 외쳤고, 시나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모라이티나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이 늦은 시간에?" 모라이티나가 다시 물었고, 시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미안해요.....엿들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그냥....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무슨 이야기 소리가 들리기에.... 그냥.... 그래서...." 그녀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귀밑을 붉혔으나 곧바로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시나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란테르트의 눈치를 살폈다. 란테르트의 입가에는 미미한 미소가 어려 있었고, 시나는 그 모습에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저기.... 저도 이야기에 끼면 안될까요? 잠이 도통 오지 않아서요...." 시나의 말에 먼저 모라이티나가 답했다. "물론이지."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의자까지 끌어다 내어 주었다. 사실, 단 둘이 있는 편이 더 좋았으나.... 혼자 꾸벅 꾸벅 졸다가 쫓겨나느니 시나라도 끌어들여 밤을 꼬박 새고 싶은 것이 모라이티나의 마음이었다. 게다가, 그 동안 시나와 꽤 자주 만난 덕에 상당히 친해져 있기도 했다. 란테르트는 그 모습에 잠자코 다시 방금전 앉아 있던 침대에 걸터앉았다. 새로 사람이 끼어듬에 잠시 셋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깃들었으나, 시나가 먼저 입을 엶으로서 이야기가시작되었다. "그런데.... 삼촌....은 어떻게 10년 동안 조금도 늙지 않은 거예요? 이제는.... 삼촌이 아니라 오빠 같아요...."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다...." 확실히 그러했다. 전혀 알 수 없었다. 왜 자신이 기절하기 직전의 상태 바로 그대로 깨어났는지.... 한편 시나는 오늘 처음으로 란테르트가 자신에게 웃는 모습을 보았다. 물론, 그전에도 미소는 가끔 지어 주었으나, 모두 미미한 것들로.... 왠지 언뜻 보면 비웃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었다. 어렸을 때 란테르트를 싫어하고, 또 무서워했던 것에는 그가 무뚝뚝했던 것 역시 원인중 하나로 포함되었었다. 그가 자신을 향해 미소를 보이자 시나는 더더욱 용기가 생겼고, 곧바로 다른 것을 물었다. "칼슨 아저씨가 말씀하시길, 삼촌.... 삼촌의 마법력이 굉장하다던데.... 어느 정도지요? 현자인가요? 아니면.... 대현자?" 시나는 삼촌이라고 부를 때 약간 머뭇거렸다. 어색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말에 모라이티나가 호호, 하고 웃었고, 시나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왜 웃어요?" 모라이티나가 대꾸했다. "현자나 대현자 정도로 굉장하다고 이야기 할 리가 없잖아. 지금 칼슨 씨가 대현자의 지위까지 획득 하셨는데.... 그렇다면 스스로를 굉장하다고 칭찬하는 것이 되잖아." 그녀의 말에 시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그 이상이란 말예요? 하지만, 마도사 협회에서의 지위 계통으로는.... 대현자 위로는 초현자 한 명뿐인데.... 설마 그럼 초현자?" 다시 모라이티나가 답했다. 사실, 이러한 것은 란테르트가 스스로 답하기 곤란한 것으로, 그것을 생각한 모라이티나가 대신 대답해 준 것이다. "글쎄.... 사람들의 마법 구분으로는 초현자 정도가 최고이니.... 하지만 그 정도로는 결코 대단하다고 말할 수 없지. 란테르트는 모든 신계마법, 마계마법을 익혔어.... 수많은 류마법, 그리고.... 기타 부적술 등의 마법까지. 맞지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그저 고개를 한차례 끄덕여 그렇다고 답했다. 전에 숲에서 만났을 때 이야기 해 준 것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모라이티나의 기억력이 새삼 놀라웠으나, 엘프니까.... 라고 그냥 넘어가 버렸다. 반면 시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렇게 화려하다니.... 마계 마법은 금단의 마법이니 전혀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초현자 이면서 류마법 까지 익혔다는것 자체가 놀라웠다. 게다가.... 그러한 것들 모두를 겨우 28세의 나이에 완성하다니.... "그게.... 사람이 가능한 거예요?" 시나는 황당해하며 이렇게 물었고,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쓰게 웃으며 물었다. "시나도 마법 공부를 하는 모양이구나. 어디까지 익혔지?" 란테르트의 물음에 시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별거 아니에요.... 이제 겨우 수사를 면한 걸요...." "수사 다음이.... 매직 유저던가?" 란테르트가 다시 물었고,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매직 유저...." 그때, 모라이티나가 끼여들었다. "공부한지 이제 겨우 3년째예요. 꽤 속도가 빠른 편이지 않아요? 그 정도면...."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3년만에 정신계 마법 모두를 익힐 정도면 상당한 소질이지." 시나는 두 사람의 칭찬에 활짝 웃었다. 시나의 외모는 약간 도도한 듯 했는데, 눈 밑에 난 보일 듯 말 듯 한 점 덕분에 더더욱 그러해 보였다. 하지만, 성격은 도도하다기 보다는 말괄량이 쪽에 가까웠다. 물론, 분위기 파악 정도는 할 줄 알기에, 거의 그런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활짝 웃자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비록 나이가 25세로, 평균 20세 정도에 결혼을 하는 이 당시의 여자로써는 조금 나이가 많은 편이었으나, 전적으로 인연이 없어서 였지, 그녀에게 어떤 결함이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뭐 굳이 단점을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눈이 조금 높고, 성격이 지는 것을 싫어해 다소곳한 맛이 모자라다는 것 정도였다. 세 사람은 이후로도 한참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나 한 명이 더 끼여듦으로써 대화는 활기를 띄었고, 그렇게 결국 세 사람은 밤을 새어 버렸다. 시나는 이날 밤의 대화로, 란테르트 삼촌에 대한 인식을 새로 했다. 그전까지 왠지 어렵고 무섭던 그가 조금은 편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모라이티나 덕이었지만 말이다. 이른 새벽, 해가 뜰 무렵이 되자, 두 아가씨들은 졸음에 겨워 고개를 꾸벅거리기 시작했다. "자, 그럼 가서 조금 자 두도록 해. 이렇게 꾸벅꾸벅 졸지 말고. 점심때쯤 깨워 줄 테니까." 란테르트의 말에 둘은 한결같이 옹알거리는 목소리로.... "괜찮아요~~" 라고 답했으나, 란테르트는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재촉했고, 그제야 둘 모두 몸을 일으켰다. 란테르트는 약간 비칠거리는 걸음으로 자신의 방을 나서는 두 아가씨의 뒷모습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완전히 두 여자가 방밖으로 나가고 나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창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처음 칼슨과 엘라 두 사람이 그에게 방을 줄 때, 한가지를 배려해 주었다.... 그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면, 그대로 두 자매의 묘와 베니아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흡사, 캠버스처럼, 액자처럼.... 창틀을 사이로 뒤 언덕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란테르트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래간 만에 보는 모습 같았다. 언덕은 건물의 서쪽에 있었기에, 동편에서 해가 떠오를 무렵이면 언덕은 그 빛을 정면으로 맞이한다. "다시.... 아침이 왔군...." 한숨을 섞어 란테르트는 중얼거렸다. 다시 아침이.... 또 다른 하루가 온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이 부담인 그에게.... 이 해가 뜨는 아침이야말로 가장 부담스러울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는 그에게는 말이다. "저도 함께 가겠어요!" 부득불 하룻밤을 더 칼슨의 집에서 보낸 후, 란테르트는 그 다음날 아침 이른 시간에 에티콘 영주의 집을 벗어났다. 시나는 무릎에 약간 못 미치는 길이의 연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채 란테르트를 따라 가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란테르트의 입가에 쓴웃음을, 그리고 모라이티나의 입가에는 당황스러운 미소를, 그리고 칼슨 엘라 이 노부부에게는 당혹스러운 미소를 짓게 만들었는데.... 일단 무슨 야유회에 나가는 것 같은 복장이 그러했고, 손에 든 수화물이 그러했다. 그런 옷차림으로 도대체 몇 일을 밖에서 보낼 수 있다는 말인가? 비록 모라이티나의 복장도 여행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엘프이고 또 여행 경험도 많은 편이다. 결코 시나의 이러한 모습과는 같지 않다. 게다가, 갑자기 동행이라니.... 칼슨과 엘라는 말리지 않았다. 아직까지 그녀에게 적당한 결혼 상대자를 찾아주지 못한 것에 대해 상당히 미안해하고 있던 터라 이렇게 란테르트와 함께 여행을 다님으로 혹시 적당한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란테르트도, 모라이티나도 그다지 말리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한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그만큼 즐거워지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이것은 달라질 수도 있는 이야기이지만, 어찌되었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복장이 걸렸는데.... 모라이티나는 그런 시나를 이끌고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옷가지를 챙기고, 옷을 갈아 입히고, 몇 가지 손을 보고 다시 그녀를 데리고 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완전히 떠버린 이후였다. 다시 모라이티나의 손에 끌려 나온 그녀의 모습은 이전과 크게 달라져 있지는 않았다. 다만 굽높은 구두를 편한 부츠로 갈아 신었고, 연보라색 원피스 안에 검정색의 무릎까지 오는 바지를 입었다. 하지만 그 정도면 조금 전보다는 훨씬 낫다고 할 수 있었다. 챙이 넓은 붉은 리본이 매어져있는 모자는 죽어도 포기 못한다고 해서 그대로 쓰고 있었는데, 그것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까지 이상한 점은 없었다. 칼슨은 조용히 하인에게 일러 말을 세 마리 끌고 오도록 이야기했고, 오래지 않아 일행 앞에 세필의 말이 놓여졌다. "시나는.... 워낙 고생을 하지 않아 처음에 데리고 다니기 힘들 것이네. 말을 타는 편이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편할 것이야." 말은 귀족들에게 있어서는 필수 교양과목에 속하는 것이었기에, 시나는 말을 탈줄 알았었다. 모라이티나도 그 동안 10년간 인간 세상에 머물며 말을 타는 법을 배웠고, 란테르트 역시 말을 탈 줄 알았기에 이들은 별 부담 없이 말에 몸을 실었다. 다만.... 모라이티나는 다시 시나의 손을 끌어 집안으로 들어갔는데.... 아무리 속에 바지를 입었다 그래도 치마를 입고 말을 탈수는 없는 법이었다. 시나는 허벅지 부분이 품이 넓은 검정색 가죽 바지로 갈아입었고, 모라이티나도 주름이 넓은 치마를 몸에 잘 맞는 흰색의 바지로 바꿔 입었다. 이런 저런 일로 예정보다 한시간 가량이나 늦게 일행은 에티콘 마을을 벗어났다. 행로는 이미 정해둔 대로 그라난 마을이었다. 란테르트는 10년만에 찾아가는 길이기에 자못 설레이는 마음이 드는 듯도 했다. 로인은 이제 22살이 되어 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는 몹시 귀여웠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변해 있을지 기대가 된다. 게다가 클라린스는 당시 임신 중이었으니.... 지금쯤이면 그 아이가 10살쯤 되어 있을 것이다. 다행히 시나의 말 타는 솜씨는 수준 급이었고, 일행은 하루 30여 휴리하 정도씩 천천히 움직여 7일쯤 걸려 그라난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란테르트는 중간에 도시에 들려 검을 한 자루 구입했다. 마지막으로 로인과 만났을 때, 그의 나이에 맞는 검을 사다 준다고 했으니 말이다. 수중에 돈은 아직도 넉넉했다. 언젠가 몇백만 하르씩을 짊어지고 다녔을 때와는 분명 차이가 있었으나, 지금도 결코 돈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란테르트는 막 마을입구에 도착해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두 가지를 느꼈다. 그중 하나가.... 이 마을은 도통 성장이라는 것을 모른다.... 였고, 다른 하나가 바로, 언제 보아도 저 조각상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였다. 바로 하르의 기사 2 기념비 말이다. 그때곁에서 모라이티나가 말했다. "클라라 님은 아직도 그곳에 살고 계세요. 로인도, 란티에도, 바겔 씨도 모두 건강하고요."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를 찾아 이 일곱 대륙을 헤매일 당시, 이 클라라에게도 꽤 자주 들렸었다. 란테르트라면 반드시 들릴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나는 말에서 내려서는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를 보며 자신도 말에서 내렸다. 날랜 솜씨로 탁 하고 땅에 내려서서는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폈다. "햐~! 에티콘보다 작은 마을도 있긴 있었네요!" 그리고는 하는 말이 이것이었다. 란테르트는 종종 엉뚱한 말을 내뱉는 이 시나 때문에 그 동안 적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셋은 고삐를 쥔 채 마을 한복판을 질러 지나갔다. 종종 이 낯선 이방인들에게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으나, 모라이티나의 모 습을 발견하고는 모두들 경계를 풀었다. 마을을 거의 벗어나 클라라의 집에 도착할 무렵, 모라이티나가 입을 열었다. "이 마을의 촌장.... 아직도 리오 할아버지예요. 여전 건강해 곰도 때려 잡을 수 있다고 큰소리치고 다녀요." 그때 곁에서 시나가 한마디했다. "허풍센 노인은 질색이야.... 에티콘에도 그런 노인이 한 명 살고 있어요. 한번은...." 그때,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의 걸음이 멈추었고, 막 말을 하며 지나치려던 시나 역시 서둘러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 집을 바라보았고, 꺼내려던 말은 완전히 잊어버린 채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야! 참 예쁘게 꾸며 놓았어요." 마당 울타리를 따라서, 그리고 창틀에, 마당에.... 터터 곳곳마다 꽃들이 심어져 있는 이 집을 보며 시나는 이렇게 외치듯 말했다. 썩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때 뒤쪽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이는 한 20세쯤 되었을까? 보통 남자들보다 약간 가늘어 귀여운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다. 란테르트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일지 충분히 예상이 갔고, 몸을 돌려 그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수수한 금발에 엷은 녹색의 눈동자. 커다란 눈매에 얇은 턱선 까지.... 비록 나이는 20세쯤 되어 보였으나, 결코 억센 남자와 같은 외모는 아니었다. 언뜻 보면 평범한 듯도 보였지만, 상당히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란테르트는 그 청년을 잠시 응시했다. 청년은 먼저 모라이티나를 발견했고, 이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모라이티나 누나 왔군요.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두 분은 친구 분인가 보지요? 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답하지 않은 채 담담히 미소를 지었고, 금발의 남자는 뒤이어 시나와 란테르트를 번갈아 보았다. 시나를 볼 때에는 단지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 더 이상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으나.... 그의 시선은 란테르트에게 닿는 순간 한참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삼.... 촌?" 금발의 청년은 이 한마디를 내뱉고 한참동안 란테르트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몸을 날려 그의 가슴을 꼭 안았다. "삼촌!!" 란테르트는 로인이 달려드는 힘에 허리가 살짝 뒤로 젖혀졌다. 옛날에는 목에 대롱대롱 매달려도 괜찮았으나, 지금은 겨우 가슴에 달려드는 것만으로도 몸이 휘청거린다. "로인.... 건강해 보이는구나." 란테르트는 하나밖에 없는 팔로 로인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었다. 로인의 키는 그다지 크지 않아 겨우 란테르트의 눈에 닿을 정도였기에 머리를 쓰다듬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로인은 란테르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다시 한 번, 란테르트 삼촌, 이라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엄마도 종종 삼촌 생각을 하며 우울해지곤 하셨어요. 이렇게.... 이런 날이 다시 찾아오다니!! 정말이지...." 로인은 스스로 격양되어 잠시 말을 잇지 못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일은 성공 하셨나요?" 로인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로인은 활짝 웃었다. "정말....잘 되었어요. 축하드려요...." 로인은 이렇게 말하다 순간 란테르트에게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기에, 그의 몸을 안았던 손을 풀고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역시나.... "사.... 삼촌.... 오른쪽 팔이...." 로인은 크게 놀라며 이렇게 외쳤고, 란테르트는 쓴웃음을 한차례 지어 보였다. "사라졌다." 로인은 잠시 놀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잊었고, 란테르트는 그가 몹시 놀라하자 처연히 웃으며 물었다. "보기 싫으니?" 란테르트의 말에 로인은 강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란테르트 삼촌인 걸요. 팔이 없더라도.... 란테르트 삼촌은우리 가족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이에요. 아니, 오히려 자랑스럽죠! 마왕과 싸우다 입은 상처인데요!" 로인은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의 왼손을 잡아 집안으로 끌어당겼다. "어서 들어가요. 엄마가 기다리고 있어요. 아참, 란티에랑 아직 만나지 못했죠. 여동생이에요. 삼촌의 이름을 따 란티에라고 지었어요." 로인의 말에 란테르트는 잠시 멍했다. 란티에.... 조금 전 모라이티나의 입을 통해 들었을 때는 무심히 넘겼으나, 이제 들어보니 확실히 자신의 이름에서 딴 이름이었다. 순간 코끝이 찡 했다.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는 자신에게.... 자신을 그렇게나 소중히 생각해 주다니.... 로인은 잠시 더 란테르트의 손을 잡아끌다가 순간 다른 손님들에 생각이 미치었고, 이내 집안에 소리를 질렀다. "엄마!! 엄마 빨리 나와 보세요! 어서 나와 누가 왔나 한 번 보세요." 로인은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의 손을 놓았고, 이내 모라이티나와 시나, 그리고 란테르트가 타고 온 말의 고삐를 근처에 있는 기둥에 적당히 묶어 놓았다. 과거의 일로 그라난 마을에는 적지 않은 말들이 있었기에, 집집마다 말고삐를 묶어둘 기둥을 마련해 두었다. "모라이티나 누나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로인은 먼저 모라이티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고, 뒤이어 시나를 바라보았다. 이름을 몰라 순간 머뭇거렸고, 그때 시나가 입을 열어 자신을 소개했다. "시나, 시나 크리미아라고 해." "로인 팔 제울란입니다." 팔은 지금은 죽은 생부의 성이고, 그리고 제울란은 바겔의 성이다. 원래는 로인 팔 이었지만 클라라가 재혼한 후, 팔 제울란이라는 긴 성을 가지게 되었다. 로인의 소개에 시나는 싱긋 웃었고, 로인은 그런 그녀의 미소에 귀가 살짝 붉어졌다. 시나는 상당히 매혹적인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7살 때 이후로 이 그라난 마을에서만 자란 로인으로써는 이렇게까지 미색이 뛰어난 여자는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모라이티나 정도? 그때 문이 열리며 한 중년의 부인과 10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소란스럽니. 손님이 오신 모양이구나." "오빠. 왜? 누가 왔는데?" 두 모녀는 문을 열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클라라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이 백발의 남자.... 누구인지 모를 리가 있겠는가? 한참동안 멍하니 란테르트를 바라보던 그녀는 순간 뺨으로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오! 데로드 님.... 네가 정말 란테르트인 거니?...." "엄마. 누구야? 왜 울어요?" 밑에서 클라라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며 란티에가 물었고, 그런 그녀를 로인이 번쩍 들어 안았다. "까르르... 오빠 간지러워." 란티에는 허리를 잡아 자신을 들어올리는 로인을 향해 이렇게 외쳤고, 로인은 그런 그녀의 귀에 조그맣게 네 삼촌이란다, 라고 답해주었다. 란테르트는 한참동안이나 클라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많이 늙었다. 거친 금발 사이로 하나 둘 흰머리가 보인다. 입가에도 눈가에도 잔주름이 자글자글 했다. 하긴.... 이제는 41살이다. 자신보다 세 살 많은 누나.... "클라라 누님...." 클라라는 잠시 더 란테르트를 바라보다가 서둘러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살아 있었구나.... 정말이지.... 살아 있었구나.... 아참, 내 정신 좀 봐.... 란티에 어서 삼촌에게 인사하렴. 란테르트, 네 또 다른 조카란다. 란티에. 네 이름을 따서 지었어." 로인은 란티에를 바닥에내려놓았고, 란티에는 잠시 란테르트를 올려 보았다. "삼촌.... 이예요?" 주홍색 머리칼을 단발로 쳐 올린 귀여운 소녀 란티에는 녹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 채 란테르트를 올려다보며 이렇게 물었다. 클라라는 응당 란테르트가 란티에를 안아 올릴 줄 알았으나,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자 의아해 하며 란테르트를 살펴보았다. 오래지 않아 망토안 오른쪽 어깨가 푹 내려앉은 모습을 발견했고, 크게 놀라며 그에게 두 걸음 다가섰다. "어떻게 된 거니? 란테르트.... 오른팔이?...." "영영 잃어버렸습니다." 클라라는 란테르트의 말에 다시 한 번 흐느껴 울었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등을 두들겨 주었다. "그만 우세요.... 이렇게 돌아 왔지 않습니까? 그까짓 팔 하나가 대수입니까?" 란테르트의 가슴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던 클라라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도대체.... 너는 평생에 얼마나 더 불행을 겪어야 하는 거니?...." 란티에는 엄마의 우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클라라의 치맛자락을 잡아 당겼다. "울지 말아요." 란티에의 말에 클라라는 그제서야 진정을 하며 다시 한 번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미안하구나, 란티에.... 엄마 울지 않을게...." 클라라는 딸아이를 향해 한차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안아 올렸다. 란테르트와 딸아이의 시선을 맞춰 주었고, 다시 한 번 란테르트를 그녀에게 소개했다. "란티에. 란테르트 삼촌이란다. 너의 좋은 삼촌. 네 이름이 란티에인 것도 이 란테르트 삼촌의 덕분이란다." 란티에는 눈물로 아롱거리는 눈을 들어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동글동글한 눈이 울렁거리는 눈물 때문에 한층 귀여워 보였다. "란테르트 삼촌!" 란티에의 말에 란테르트는 살짝 미소를 지었고, 란티에는 뭐가 즐거운지 미소를 환히 지었다. 그때 클라라가 입을 열었다. "어서.... 안으로 들어오너라. 이런, 모라이티나도 와 있었군요. 어서 안으로 들어와요. 다른 한 분은 누구시죠?" 로인이 곁에서 대신 대꾸했다. "시나 크리미아 양이에요." "아, 크리미아양.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클라라의 재촉에 일행은 안으로 장소를 옮겼다. 저녁 무렵 돌아온 바겔은 란테르트를 한 번 단단히 안아줌으로써 10년만의 귀환을 환영했다. 모두들 그가 28살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지 기억 속에서의 그의 모습과 지금의 그의 모습이 일치함에 별다른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고.... 나중에는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왕을 죽인 사람이 늙지 않는다고 해서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다. 란티에는 사람이 많아서 인지 약간 어색해 했다. 동그란 눈을 연신 두리번거리며 갑자기 찾아온 세 손님들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란테르트는 재미있다는 듯 잠시 바라보다가 바겔에게 물었다. "그 사이, 큰 일은 없었습니까?" 안부.... 아마 이러한 것을 안부 인사라 부를 것이다. 란테르트로서는 극히 드문 일이다. 바겔은 란테르트의 물음에 웃었다. "하하. 큰 일이 없었을 리 있나? 란티에가 태어났고, 로인이 성인이 된데다가, 자네가 실종되지 않았었나? 앞의 둘은 경사였고, 뒤의 하나는 불행한 일이었으나, 이렇게 좋게 해결되었으니 역시 경사라 할 수 있지." 그의 호기로운 웃음에 란테르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바겔.... 아마 란테르트가 깨어난 후로 만난 사람 중 팔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은 그 뿐이었다. 아마도 용병출신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워낙 험한 인생을 살아왔기에, 사람이 팔다리 하나쯤 잘리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란테르트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한 그 이기에 굳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기도 했다. "그렇겠군요." 란테르트는 바겔의 말에 이렇게 대꾸하며 로인을 바라보았다. "이제 22살이겠구나. 생일은 지났니?" 란테르트의 물음에 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났어요. 이제 완전히 22살이에요." "그렇구나.... 아참." 란테르트는 돌연 전에 마을에서 구입한 검에 생각이 미치었고, 잠시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의 걸쇠를 풀었다. 한 팔이라는 것이..... 약간은 짜증스러운 순간이다. 란테르트는 로인에게 장검을 건넸다. 거의 특상 품의 하르제 검이었다. 란테르트가 언제나 가지고 다니던 것에 비해서, 세공 상태라든지, 검날의 경도 같은 것이 한층 뛰어나다. "로인.... 네게 주는 선물이다. 그 동안.... 틈틈이 공부는 해 두었겠지?" 로인은 란테르트의 이 돌연한 선물에 얼굴에 희색을 띄었다. 10년전.... 란테르트는 로인에게 검을 하나 사 주기로 약속을 했다. 그것이.... 란테르트에게는 고작 반년전의 기억이었으나, 로인에게는 10년전의 기억이니.... 로인은 당연히 기억해내지 못하였다. "고마워요.... 삼촌." 로인은 기쁜 얼굴로 검을 받아 쥐었다. 안 그래도 요즘 전에 사용하던 검이 낡아 하나 구입할 참이었었다. 란티에가 검을 보더니 말했다. "삼촌, 오빠는 검술이 아주 뛰어나요." 란티에는 이렇게 말하며 팔을 들어올렸다. "이 정도 굵기나 하는 나무를 단번에 자르는 걸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고, 로인은 동생의 머리를 툭 한 번 건드리며 말했다. "그런 정도로는 뛰어나다고 이야기 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데이미 언니가 그랬어. 로인오빠는 검술이 뛰어나다고. 장래 마을에 위험한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믿음직스럽다고." 란티에의 말에 로인은 귀밑을 살짝 붉혔다. "란티에!" 로인은 란티에의 이름을 한차례 불렀고, 란티에는 혀를 귀엽게 한 번 낼름 했다. "왜 귀는 빨개지고 그래?" 그런 그녀의 모습에 로인은 볼까지 빨개졌고, 란테르트와 바겔 클라라 등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바겔이 란테르트에게 말했다. "자네에게 부탁할 것이 하나 있네." 바겔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그에게 돌렸고, 바겔은 잠시 한 번 로인을 바라보고 말을 꺼냈다. "로인은 검술에 상당한 소질을 가지고 있네. 하지만, 내 실력이 워낙 일천하다보니.... 로인의 검술의 성장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네. 지켜보는 입장에서 안타까울 뿐이야."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인을 위해 검술 지도 정도는 해 줄 수 있습니다." 바겔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하지만 검술만이 아니야. 함께 데리고 다니며 세상 구경을 조금 시켜주게. 전쟁도 모두 끝난 이 판에 검술에 뛰어나 보았자, 잘돼야 정규군의 사령관을 할뿐이고, 못되면 도적이나 잡으러 다니는 한심한 용병이 될 뿐이네. 검술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정도로만 익히면 충분하지만, 세상을 보는 눈은 넓어야만 하지 않은가?" 바겔의 말에 란테르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럼.... 제가 함께 몇 년정도 데리고 다니겠습니다." 란테르트는 바겔에게 이렇게 말하며 클라라를 바라보았다. "괜찮겠지요? 클라라 누님?" 클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로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데, 왜 내가 마다하겠니? 게다가, 로인도 너와 함께라면 즐거워 할거야." 그때 란티에가 끼여들었다. "오빠는 가지 않을 꺼 에요." 그녀의 말에 모두들 이 어린 아가씨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란티에는 당당하게 모두의 시선을 받아들이며 조그마한 입술을 달싹여 말했다. "데이미 언니가 안 보내 줄걸요? 로인오빠도 데이미 언니와는 떨어지기 싫을꺼고. 그렇지 오빠?" 로인은 다시 얼굴을 붉혔고, 바겔은 하하 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로인이 입을 열었다. "따라 가겠어요. 삼촌과 함께...." 로인의 결정에 바겔이 마음이 흡족하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 가정은 그런 후에 꾸미는 것이 더 좋다. 이제 겨우 22살이니, 한 2, 3년정도 세상을 돌아보고 나면 훨씬 근사한 남자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클라라도 찬성했다. "네 아버지 말이 옳단다. 비록 한 두 해 네 귀여운 아가씨를 보지 못해 마음이 답답하겠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겠지?" 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데이미와의 사이에 대해 부인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친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로인은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를 바라보았고, 란테르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즐거운 저녁 한때는 조용히 흘러갔다. 란테르트는 일을 이룬 이후이어서 인지 이전에 비해 훨씬 여유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여유라는 것은 사람에게 반드시 좋지만은 않다.... 특히.... 란테르트처럼 미친 듯이 달려만 오던 사람에게는.... 아직 그는 이것을 느끼지 못하였다. 약간은 노곤하고 나른한, 그러면서 삶에의 의욕이 점점 줄어드는 자신의 모습을, 단지 새로워져 버린 것들에 지쳤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로인은 데이미라는 아가씨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20세 가량의 차분한 하늘색 머리칼을 가진 여자로, 꽤 아름다운 편이었다. 물론, 완벽에 가까운 모라이티나나, 화려한 시나에 비한다면 손색이 있었으나, 상당히 귀염성 있는 아가씨였다. 그녀는 란테르트를 소개하는 로인의 인사에 가볍게 놀랐다. 그 유명한 하르의 기사 2, 물론, 란테르트 본인은 이 별명을 싫어했으나 마을사람 모두가 이렇게 부르니 할 수 없다, 그 사람을 바로 앞에서 보니 굉장히 신기한 모양이었다. "빨리 돌아와야 해! 그리고..... 나 잊으면 안돼." 데이미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로인에게 이렇게 인사했고, 로인은 크게 용기를 내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물론 직후에 얼굴이 빨게 지는 것 역시 잊지는 않았다. 곧바로 로인은 집에 돌아와 식구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잘 다녀 오거라...." 클라라는 단지 이렇게 말하며 아들의 뺨에 입을 맞추어 주었고, 바겔은 그 억센 팔로 여려보이는 로인의 몸을 덥석 안아 등을 몇 차례 두들겨 주었다. "한시라도 너를 내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몸조심하거라." 마지막으로 란티에는 로인의 두 팔에 안겨 오빠의 뺨에 키스했다. "조심해야해. 그리고 올 때 선물 잊지마!" 란테르트, 모라이티나, 그리고 시나까지 각각 작별인사를 나눈 후, 일행은 다시 말에 올랐다. 로인 역시 말 정도는 탈 줄 알았기에 모두는 부담 없이 말에 올라타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3. 발단.... 로인까지 모두 네 명으로 늘어나 버린 일행은 에노사로 향했다. 시나는 단지 함께 여행을 하고 싶었으니 행방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로인 역시 수련을 하는 입장이라 딱히 갈 곳은 없었다. 모라이티나는 오직 란테르트를 따를 뿐이었으니.... 결국은 란테르트가 다시 한 번 들려 일을 마무리 지으려 했던 에노사 북부의 피치토 마을로 향하게 된 것이다. 몇 일 밤낮을 함께 지내는 사이 일행은 서먹서먹함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있었다. 시나는 이제 란테르트를 더 이상 어려워하지 않았다. 아예 농을 건넬 정도였다. 일단 나이야 어찌되었건 생긴 것이 자신과 비슷해 보이니 훨씬 대하기 편한 모양이었다. 로인의 경우에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한편, 그렇다고 숫기가 없지는 않아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다. 어느덧 위다 대륙을 벗어나 일행은 위다에서 레냐 대륙으로 향하는 배 위에 올라 있었다. 말 덕분에 두 배 가까운 뱃삯을 지불했으나, 로인과 시나 덕에 말을 팔아버릴 수 도 없었다. 게다가 일행 중 어느 누구도 돈이 부족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배위에서.... 란테르트, 모라이티나, 로인, 시나 이 네 사람은 배의 선미루, 스턴 캐슬의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대륙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그리고 바다에 흰색으로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며.... 란테르트는 조용히바다만을 바라보았다. 이미 수도 없이 건너본 바다였다. 어려서 항구에서 일했을 적에는 언제나 바다와 함께 있었고, 그 후로도 바다와는 상당히 인연이 있는 편이었다. 지금도 종종 배에 탈 때에는 사피엘라의 생각이 났다. 기억만으로도 8년.... 그리고 실재로는 18년이나 전에 해어진 그녀가.... 배타는 것을 상당히 싫어했던 모습이 기억에 선했기 때문이다. 하긴.... 그러고 보면 모라이티나의 15년전 모습 역시 생각난다. 당시 그....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그와 함께, 그리고 모라이티나와 함께 배를 탔고.... 그곳에서 에라브레.... 아왈트와 함께 벌였던 해프닝들.... 당시에 있던 사람 중.... 이제는 모라이티나와 자신만이 살아 남은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살아야만 하는 이유.... 아직도 잘은 모르겠다. 그의 곁에는 지금 모라이티나가 서 있었다. 같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건만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과거에 묻혀 추억을 떠올리는 그와는 달리, 모라이티나는 지금 어떻게 해야만 란테르트에게 활기를 불어너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를 즐겁게 해 주는 방법을 말이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 로인의 경우에는 바다에 꽤 자주 가 보았다. 그라난 마을에서 남쪽으로 걸어서 이틀 정도만 내려가면 바닷가에 도착할 수 있으니, 그다지 바다에 가기 어렵지는 않았었고, 1년에 한 두 차례쯤 온 가족이 휴양차 바닷가에 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범선을 탄 것은 거의 15년 만이었다. 어려서, 소피카에서 이곳 위다로 이사를 올 때, 그때 이후로는 배를 한 번도 타보지 못한 것이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몰랐었는데, 배를 타는 것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시나의 경우에는 아예 처음이었다. 워낙 에티콘 가가 내륙에 위치해 바닷가에 가 본적이 지금까지 단 두 번이었다. 그러다 보니.... "와! 배란 이런 느낌이군요! 책으로만 봤었는데!" 시나는 선미에서 얼굴 하나 가득 부딪혀 오는 바람을 맞으며 이렇게 외쳤다. 뭐가 그리 좋은지 집을 떠날 때부터 쓰고 있던 챙이 넓은 모자를 한 손으로 꾹 누른 채 그녀는 배를 처음 탄다는 것을 광고하고 있었고, 로인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약간 부끄러움을 느꼈으나, 그의 마음 역시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무어라 책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점잖게.... "크리미아양.... 조금 조용히 해요.... 창피하게...." 라고 권하듯 말할 뿐이었다. 하지만, 크리미아는 지금까지 로인이 접해 보았던 그런 여자들과는 완전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봐 로인. 아직도 크리미아 양이야? 얘기했잖아. 그냥 시나라고 부르라고. 그리고, 창피하긴 뭐가 창피해? 배를 처음 타봐서 그런 건데. 배를 처음 타는 게 부끄러워 할 일인 거야?" 그녀의 말에 로인은 대꾸할 적당한 말이 없었다. 시나는 로인의 입을한마디 말로 다물게 하고는 뒤이어 란테르트에게 물었다. "삼촌, 그런데, 지금 이 바다 얼마나 깊은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잠시 생각에서 빠져 나오며 답했다. "글세.... 굉장히 깊다는 것 말고는...." 이 불만족스러운 대답에 시나가 곧바로 물었다. "소에테강보다 깊겠죠?" 그때 로인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아무래도 바다에 경험이 많은 편인 그로서는 이런 시나의 물음이 바보 같고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당연하지. 강이 바다보다 깊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시나는 결코 말싸움에서는 지지 않는다. "해안가가 바다야?" 그녀는 갑자기 이상한 것을 물었고, 로인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땅에 가까운 바다지만.... 분명 바다지...." 시나가 웃었다. "그래? 그럼, 그 바다는 강보다 깊어?" 로인은 그제야 그녀가 하려는 말을 알았고, 입을 다물었다. 조용한 마을에서 자란 로인은 시나와 말싸움을 벌여 이길 수 없다. 전에 한 번 몇 마디 더 우겨 보았다가 완패를 당한 적이 한 번 있어, 이제는 그녀와 말싸움을 피하는 쪽으로 정책을변경했다. 시나는 다시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떠 있었다. "얼마나 걸리죠? 레냐대륙까지. 눈에 보이잖아요." 벌써 위다의 카에즈항을 떠나온지 반나절이나 되었고, 레냐대륙이 이제는 어렴풋이 수평선을 따라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시나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조용히 대꾸했다.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도착할 꺼야...." 왜인지, 로인도 시나도 나이보다 하는 행동이 조금 어린 듯 했다. 로인의 경우에는 어리다기 보다는 순박하다라는 말이 어울렸으나, 이 스물 다섯살이나 먹은 처녀 시나는 나이를 무색케 할만한 말투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와 함께 여행을 한다는 생각에서 어리광을 부리는 지도 몰랐지만.... "모라이티나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몰히 해요?" 시나는 이번에는 모라이티나를 향해 물었다. 그녀는 예전의 모라이티나와는 다른 의미에서 함께 있으면 결코 심심하지 않을 여자였다. 시나의 물음에 모라이티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귀여움의 태를 벗은 모라이티나의 이 미소에 약간의 그늘이 눈에 띄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이런 저런 생각들을.... 시나는 배를 처음으로 탄다고?" "그래요. 내륙출신이거든요. 게다가 칼슨 아저씨의 에티콘 가문도 바다와는 동떨어져 있고.... 다른 대륙에 아는 사람이 사는 것도 아니니, 저야 배를 탈 일이 없었죠." "그렇구나.... 하긴, 나도 이 일곱 대륙으로 나오기 전에는 배를 탄 적이 없었어." 모라이티나는 별 의미 없는 이러한 말을 내뱉으며, 란테르트를 향해 물었다. "혹시, 이 레냐에 특별히 가고 싶다거나 한 곳 있어요?" 란테르트의 기분을 띄워주기 위한 모라이티나의 이 물음에 란테르트는 오히려 되물었다. "모라이티나는?" 그의 물음에 모라이티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 없어요." 모라이티나의 대답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그럼, 그냥 지나가도록 하지. 어서 일을 마치고 싶으니까...." 말 그대로였다. 지금의 란테르트는 그저 한가지 남은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었다. 아직까지도 그 후의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막상 오이니아란 아가씨와 켈파라는 청년, 이 둘의 일을 끝내지 않고서는.... 영영 그 다음의 일이라는것이 떠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배는 레냐의 항구 레넨트에 도착했다. 곶 끝에 있는 만형의 항구가 특히 아름다운 이 항구 도시에서 일행은 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다시 서북으로 행로를 잡았다. 딱히 할 일은 없었다. 틈이 나는 데로 로인에게 검술을 가르쳤고, 종종 시나의 부탁으로 그녀 수준에 맞는 이런 저런 마법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한가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이 일행은 어느덧 레냐 대륙도 거의 벗어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붉은 머리칼이 너무나 화려한.... 그녀를.... 일곱 번째 땅의 한 황폐한 곳, 그녀는 그곳에 숨어 있었다. 마계와 정령계가 사이의 최후의 전쟁.... 그곳에서 그녀는 간신히 살아남았다. 모든 마족들이 수도를 벗어나 뿔뿔이 흩어진 후.... 아르트레스는 자폭을 위한 혼의 개방을 시작했다. 그녀는 당시 자포자기 상태로.... 그렇게 해서라도 정령들의 세력을 조금이나마 줄여 보겠다는 마음이었다. 순간.... 아르르망이 선수를 쳤다. 혼의 절반 가량을 완전 폭주시켜 버렸고.... 그는 몸의 절반을 잃은 채 폭팔 와중의 혼란을 틈타 아르트레스를 데리고 차원을 넘어 버렸다. 당시의 상황은 말로 한두 마디 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계를 공격한 총 3억 7천 8백여 만의 정령군중 10퍼센트 가량이 소멸 직전까지 몰렸었다. 그리고, 그 폭발에 직격 당한 50만 가까운 정령들이 그 자리에서 완전히 허무로 증발해 버렸다. 물론 덕분에 아르르망은 차원을 넘어 아르트레스와 함께 이곳 일곱 번째 땅의 변경지역으로 도망 온 순간 기절을 해 버렸고, 아르트레스는 완전히 넋이 나간 채 그의 이름만을 불러댔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공평한(?) 절대신 테미시아에 의해 관장되어지는 시간은 어떠한 땅에서나 같은 속도로 흐른다. 어둠과 빛이 그 세력을 교환하는 시간의 주기는 모든 곳이 일치하지 않지만, 절대시간은 어느 곳에서나 일치한다. 마계의 재건.... 그런 건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무엇이 남았다고.... 일곱 번째 땅의 변경지역이 그나마 가장 많은 마족들이 모습을 숨기고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개체수가 100이하이다. 이 이상 모여 있을 경우.... 발각되고 만다. 그나마 이곳은 차원 버그들이 굉장히 극성을 부리는 곳이라 마족의 존재 흔적이 감추어져 이렇게 숨어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10년.... 아르트레스는 우선 남아있는 개체의 숫자라도 유지 시켜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생산시설, 에너지 집약시설등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이 사라진 지금, 모든 마족은 현존 최고위 마인 아르트레스와 아르르망에게 완전히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만만하던 디아조차도.... 이렇게 되어버린 마족들에게는 힘겹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뿔뿔이 흩어져 버린 마족들은 하나하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그렇게 한 차원씩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게 되었다. 차원이 낮아지면, 아무래도 그곳에 살고 있을 차원버그, 디아들의 힘이 약해지므로 살아남기에 유리했다. 아르트레스는 이런 답답함 속에서도 잘 버텨내고 있었다. 천성이 천성이니만큼 종종 한껏 신경질을 부리곤 했으나,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남아있는 마족들의 목숨을 생각해서인지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무료하고 권태롭고.... 게다가 비참하기 까지한 나날을 보내는 도중.... 아르트레스의 마음에.... 한줄기의 공명음이 일었다. 특정인간의.... 인간의 파장을 잡은 것이다. 언제나 마음에 생각하고 있던.... 이제는 슬슬 현실에서 추억으로 넘어 가려던 그 사람의 파장이.... 점점 더 또렷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앞에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다. 란테르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트레시아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레냐 북부 평야.... 그곳의 한 도시인 레모노시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트레시아는 란테르트를 한차례 바라보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상당히 노출이 심한 가죽 갑옷과 붉은 망토 차림인 그녀의 발그스레한 피부는 곳곳에 큰 상처를 입고 있었는데, 상처에서는 검정색 기운이 흡사 물에 잉크가 퍼지듯 대기 중으로 흩어져 나가고 있었다. 란테르트도, 모라이티나도 동시에 말에서 뛰어내렸고, 로인과 시나는 이 돌연스러운 일에 당황하며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는 동시에 트레시아를 부축했다. 모라이티나는 그녀를 안 듯이 자신의 무릎에 기대게 하였으나, 회복마법을 걸어 줄 수는 없었다. 다만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이었다. 반면 란테르트는 달랐다. 잠시 트레시아를 바라보다 곧바로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검에 수계 마법을 걸었다. 검에 푸른 물색의 기운이 어른거린다. 동시에, 주위의 공간이 살짝 일그러지며 14명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체적인 느낌은 빛이었다. 흰색의 옷과 흰색의 머리칼로 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중 가장 앞에 선 자가 이들 무리를 통솔하는 자 같았다. 대장인 듯한 이 빛의 정령은 턱선이 날카로운 미청년이었다.한뼘 가량이나 되는 흰색 머리칼을 하늘로 뾰족이 세웠고, 흰색의 긴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는 다른 정령들을 대표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를 넘겨주십시오."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 번 가로 저었다. "돌아가십시오. 당신들에게 그녀를 넘겨주지는 않습니다." 란테르트의 이 조용한 목소리에 뒤에서 한 정령이 비웃으며 말했다. "막겠다는 거냐? 우습군." 그때 모라이티나가 입을 열었다. "그냥 이대로 돌아가세요." 그녀의 말에 대장인 듯 보이는 정령은 고개를 돌려 모라이티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숲의 령이.... 숲의 령이 어째서 마족을 감싸는 겁니까?" 마족이라는 말에 시나와 로인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예상외의 상황이다.... 역시.... 크림슨 아이즈라는, 악마라는 이름은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마족을 감싸주다니.... 그때 란테르트가 입을 열었다. "한가지만.... 묻겠습니다." 그의 말에 빛의 정령들이 시선이 모라이티나에게서 란테르트에게로 옮겨졌다. "트레시아를.... 아르트레스를 저렇게 만든 것이 당신들입니까?" 란테르트의 물음에 대장이 고개를 끄덕였고, 조금 전 막겠다는 거냐? 라고 외쳤던 정령이 다시 한 번 나섰다. "휘령계輝靈界(빛의정령)의 정령들 중 왕이신 레이요나 님을 제외하고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신 브리테 님께서 친히 나서셨다. 아무리 마계의 흑염패...." 그의 말에 그 대장인 듯 보이는 남자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고, 이어 브리테라 불리운 대장이 입을 열었다. "인간.... 당신은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아시는 겁니까?" 브리테의 말에 란테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당신들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브리테는 란테르트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부인했어야만 했다. 란테르트는 주위를 한차례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그렇습니까?...." 동시에 그의 몸 주위에서 격렬한 검은 색의 기운이 일었다. 어둠. 마족들의 검은 색 기운과는 다른, 말 그대로 어둠의 힘이었다. 눈앞의 빛의 정령들과는 정 반대되는 속성을 가진 암흑계 정령의 힘이다. 란테르트는 어둠을 일으켜 빛에게로 쏘아보냈다. 수십 갈래로 나뉜 검정색의 빛은 열 네 명의 정령들에게로 폭사되어 갔다. 정령들은 란테르트가 마법을 일으키는 순간 몸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란테르트의 마법의 속도는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열 네명중 브리테라는 정령을 제외한 열 셋은 그대로 검정색 기운 수 갈래가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했고, 모두들 비명한번 지르지 못한 채 사라져 갔다. 조금 전 건방지게 설치던 정령도 모습을 감추었다. 브리테는 두 손바닥을 펼쳐 란테르트의 힘을 간신히 막아내고는 얼굴에 경악이 스치었다. "이.... 그럴 리가.... 7명 소멸?.... 소멸...." 브리테는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란테르트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야?.... 인간은 결코 정령을 소멸시킬 수 없어.... 정령보다 강한 인간은 존재할 수 있어도.... 정령을 죽일 수 있는 인간은 없단 말이야!" 그때, 모라이티나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흑염을 죽인 장본인이에요.... 정령 정도는...." 모라이티나의 말은 그다지 크지도 톤이 높지도 않았다. 흡사 누구에게 속삭이듯 트레시아의 상세를 살피며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브리테는 그 한마디에 낯빛이 흙빛이 되었다. 빛의 정령이 대지의 정령이 되버린 듯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그.... 당신이 바로.... 그...." 그때 란테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그녀를 넘겨주지 않습니다." 조금전과는 달랐다. 목소리는 비록 란테르트의 것이고, 낮고, 또 조용한 것이 방금 전에 했던 말과 다름이 없었으나.... 이번의 말에는 브리테가 감히 저항할 수 없는 권위가 실려 있었다. 브리테는 더 이상 란테르트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널브러져 있는 아르트레스를 바라보며 한숨을 한차례 내쉬고는 그대로 공간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란테르트는 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후 다시 트레시아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트레시아는 한참이 되어도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나와 로인도 말에서 내려 어느 사이엔가 트레시아 근처로 다가왔다. 트레시아, 상처를 입고, 옷이 이곳 저곳 찢어진 채 모라이티나의 품에 안겨있는 트레시아의 모습을 보며 시나가 처음 외친 말은 "이렇게...." 였다. 몸매에서 미모까지.... 그전까지 시나가 알고 있던 마족이라는 것의 개념과는 완벽히 다른, 그러한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로인이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얼굴을 붉히는 것이었다. 워낙 야한 곳을 입고 있었는데, 그나마 그러한 옷이 군데군데 찢어져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이다. 거의 몸은 스스로 복구가 되어, 더 이상 검은 기운이 풀려 나온다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트레시아는 거의 반시간이 흐르도록 깨어나지 않았고, 란테르트는 약간 초조해져 모라이티나에게서 그녀를 받아 살짝 흔들어 보았다. "트레시아!" 이름을 불렀음에도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란테르트는 더더욱 초조해져 모라이티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하지? 어떻게 해야 그녀가 깨어나지?" 모라이티나 역시 마음이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족을 깨우는 법 같은 것은 알지 못한다. 회복마법이니, 치료마법이니, 그밖에 기절한 사람에게 충격을 주어 억지로 깨어나게 하는 마법 따위를 여럿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이 마족인 트레시아에게 먹혀들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는 사이에 서서히 해가 서편으로 기울었고, 일행은 할 수 없이 이곳에서 노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정신이 산만해진 란테르트는 제쳐두고, 모라이티나의 지휘하에 시나와 로인은 차곡차곡 노숙 준비를 했다. 요리는 모라이티나의 몫이었다. 워낙 맛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품인데다가, 오랜 노숙을 통한 숙련된 솜씨 덕에 이제는 거의 일류 요리사 급이었다. 대륙 각지의 수백 종이나 되는 요리중 할 줄 아는 것이 절반 가까이나 되니 말이다. 로인은 장작을 모으고 시나는 모라이티나를 도왔다. 모두들 거의 10일 이상이나 해온 이러한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고, 맡은 일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모두 해 냈다. 시나는 약간의 도도하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도, 노숙을 싫어한다거나, 힘든 여행에 투정을 부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질 수 없다는 오기 때문인지.... 아니면 천성이 오히려 낙천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맡은 일만은 아주 잘 해내고 있었다. 로인 역시 수행을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묵묵히 잘 참아내고 있었다. 둘 모두 처음 하는 여행치고는 굉장한 숙련 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라는 숙련자의 도움이 컸지만.... 그러는 사이에 란테르트는 트레시아를 돌보고 있었다. 처음 모라이티나가 노숙 준비를 시작할 때 란테르트도 함께 하려 했으나, 모두가 그냥 트레시아를 돌봐 주라고 극구 권해 란테르트는 그냥 그녀를 돌보고 있었다. 로인과 시나의 모포를 바닥에 깔고 그녀를 눕힌 후 다시 모라이티나의 모포를 덮어주었다. 이마의 온도가 조금 높은 것 같아 물에 적신 수건을 올려놓았는데, 그것을 막상 한 란테르트도, 모라이티나도 전혀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에 한 번 해본 행동이었다. 저녁마저 모두 먹은 후, 동편에서부터 별이 하나 둘 반짝이기 시작할 때까지도 트레시아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시나와 로인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평소 이렇게 단둘이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나, 지금은 대화내용이 내용이니만큼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삼촌은 어떻게 마족을 알고 있는 거지?" 시나의 물음에 로인은 슬쩍 고개를 가로 저었다. 처음에는 잘 몰랐으나 한참 보고 나니, 15년전쯤 그러니까 자신이 일곱 살 때 한 번인가 본 기억이 있는 여자였다. "15년전부터 알고 있었어.... 어쩌면 더 오래됐을지도 모르고...." "그, 그런...." 시나는 놀랐다는 듯 잠시 말을 더듬거렸다. 그리고는 잠시 후 호 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에는 로인이 흘끔 흘끔 트레시아와 란테르트가 있는 곳을 보고 있는 것이 보였고, 시나는 그런 로인의 모습에 한마디 톡 쏘았다. "다시 한 번 보고 싶은가 보지?" 로인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를?" 시나가 말했다. "트레시아 말이야. 하긴, 어떤 남자라도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라면.... 푸훗, 고향에 두고 온 데.... 그 아가씨가 가여워서 어쩌지?" 시나의 말에 로인은 귀밑을 살짝 붉혔다. "무슨 소리야! 그냥 나는 단지 궁금해서...." 시나는 로인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웃을 때 그 미모가 절정기를 드러내는 듯 했다. 평소에는 약간 도도해 보이는 얼굴 덕분에 접근하기에 조금 부담감을 느꼈으나, 웃을 때만큼은 아니었다. "삼촌과 꽤 친해 보이지 않아?" 시나는 대화 내용을 전환했고, 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마 꽤 친할 꺼야.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친한 사이인 것을 보면...." 시나가 다시 물었다. "모라이티나 언니는?" 시나는 행여 모라이티나가 들을까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춰 이렇게 물었고, 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라이티나 누나와 알게 된 것도 벌써 15년 전이야.... 그때는 엘프인 것을 몰랐지만.... 그때 삼촌은 세명의 여자와 함께 집을 찾아왔었어." 시나는 로인의 말에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야! 역시 삼촌은 대단해. 여자를 세명이나 데리고 다니다니.... 꽤 헤픈 편인걸?" 시나의 말에 로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 저었다. "그런 건 결코 아니야." 로인이 강력히 부정을 하자 시나는 돌연 오기가 발동했다. "어째서지?" 시나의 물음에 로인은 잠시 모라이티나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지금 트레시아의 곁에 앉아 그녀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안색이 어두운 것이 여전 트레시아의 상태에 호전기미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로인은 다시 시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언젠가 모라이티나 누나가 이야기 해 주었었어.... 내가 물었었지. 왜 누나는 우리 삼촌을 그렇게 못 잊어 하느냐고?.... 그때 누나의 대답....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만약.... 그를 간단히 잊는다면.... 나는 그를 좋아할 자격이 없다.... 누나는 그때 이렇게 답했었어.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어 나는 다시 물었고, 누나는 다시 한 번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지. 자신을 삼촌을 ....사랑.... 하고 있지만 삼촌은 자신을 친구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란테르트 삼촌에게는 아직도 깊이 사랑하고 있는 한 여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시나는 로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랑하고 있는 여자? 왜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을까? 아니, 심지어는 들은 적조차도 없었다. "그게 누군데?" 시나의 물음에 로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사.... 사피엘라라고 했어." 시나는 놀라 앗, 하는 큰 목소리를 냈다.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는 그녀의 탄성에 무슨 일인가 잠시 고개를 이쪽으로 향했고, 시나는 그 두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로인이 그녀의 놀라는 모습에 물었다. "왜? 아는 사람이야?" 로인의 물음에 오히려 시나가 물었다. "내가 왜 란테르트 삼촌을 삼촌이라고 부르는지 알아?" 로인은 그 점을 진작부터 궁금해했었으나, 시나라는 아가씨는 사실 말을 걸기 약간 부담스러운 여자이기에 묻지 못하고 있었다. "왜?" 로인의 되물었고, 시나가 대꾸했다. "내 양아버지가 란테르트 삼촌과 형제와 같이 친한 사이이기 때문이야. 두 사람의 나이차이가 거의 20년 가까이 나지만, 그래도 굉장히 친해. 사실, 칼슨 아저씨와 란테르트 삼촌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삼촌을 오빠라고 부르는 편이 적당하겠지만.... 왠지 어렸을 때는 무서워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거든." 로인은 그녀의 말을 차분히 머릿속에 정리해 보았다. 칼슨과 란테르트의 관계를 보아서는 시나가 란테르트를 오빠라고 불러야 한다.... 무슨 논리학 같아 처음에는 약간 혼란스러웠으나,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기에 로인은 금방 서로의 관계를 집어냈다. "칼슨 씨의 딸과 란테르트 삼촌이 결혼했던 모양이구나."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은 아니지만 약혼한 사이였데." 로인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네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 사피엘라.... 숙모의 무덤이 있는 곳이구나.... 그렇다면.... 에라브레.... 누나도?"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분 모두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림으로는 익히 보아왔어." 로인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기억에 의하면 에라브레 역시 그때 자신의 집에 찾아온 세 여자 중에 끼어 있었다. 하지만, 이미지만 잡힐 뿐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다. 한편 시나는 다시 한 번 란테르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악마.... 그녀가 알고 있던 악마의 모습이라는 것이.... 18년전 죽은 연인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순정적인 남자였다니.... 시나는 사실 종종 무덤에 그가 찾아오는 모습을 보았었다. 하지만 워낙 오래간만에 모습을 나타내는데다가, 와서 몇 시간을 머물다 그냥 떠나가 버리니, 단지 예의상 종종 들리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아무도, 란테르트와 사피엘라, 그리고 에라브레에 얽힌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고, 몇 년 지나자 스스로도 흥미를 잃어버려 아직까지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슬슬 그 윤곽이 잡혀간다. 흘끗 접하고 나자 더더욱 구미가 당겼고, 그녀는 다시로인에게 물었다. "에라브레 님과 삼촌의 관계는?" 그녀의 물음에 로인이 대꾸했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엄....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사피엘라 숙모가 없던 당시 가장 사랑하던 여자가 바로 그녀였데. 그 이상은 나도 잘 몰라. 그리고.... 삼촌이 크림슨 아이즈가 된 이유가 바로 그 에라브레라는 여자 때문이었데." 시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에라브레 님이 어째서?" 로인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도 확실히는 몰라.... 듣기에는 나크젤리온이 그녀를.... 상하게 했던 모양이야." 시나는 순간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마왕을 죽인 이유가.... 그러기 위해 스스로 악마라고 불리울 정도로 세상을 휘젓고 다닌 이유가.... 겨우 자신의 뒤뜰에 잠들어 있는 한 아가씨 때문이라니.... 그때였다. 으음, 하는 한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려왔고, 동시에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가, "트레시아!"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인과 시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몸을 일으켜 그쪽으로 다가갔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트레시아는 전면을 한참동안 응시했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후 눈동자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적포도주 빛을 내는 붉은 눈동자는 가장 먼저 란테르트에게로 향했다. 따듯한 눈길.... 정이 담뿍 담긴 눈길이었다. "살아.... 살아 계셨군요...." 이윽고 트레시아가 입을 열었다. 10년간의 아픔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듯, 그녀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살짝 미소지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한차례 쓰다듬어 주었고, 트레시아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살아 계셨어요...." 란테르트는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고, 트레시아는 잠시동안 더 란테르트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물은 길지 않았다. 팔등으로 한차례 눈가를 닦아 버렸고, 이내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았다. 먼저 엉망이 되어버린 자신의 옷을 정상으로 되돌렸다. 전투용의 가죽갑옷이 아닌 붉은 색 계열의 투피스 드레스로 갈아입고는 이내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앗!" 트레시아는 외마디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모라이티나는 빙그레 한차례 미소를 지었다. "오래간 만이에요. 아줌마!" 트레시아는 모라이티나의 부르는 소리에 한차례 미소를 지었다. "너도 아직 살아 있었냐? 꼬마! 이제는 많이 컸구나. 꼬마라 부르기 힘들겠는데...." 트레시아는 뒤이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눈치만을 살피고 있는 두 남녀를 발견하였다. "시나와 로인. 조카들이야." 트레시아가 막 그 두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자 란테르트는 이렇게 두 사람을 소개했고, 트레시아는 미소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트레시아다." 란테르트가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까 그 정령들은 뭐고?" 란테르트의 물음에 트레시아는 얼굴에 약간 그늘이 생겼다. "마계.... 완전히 망해 버렸어요. 그분께서.... 그렇게 돌아가신 후...." 트레시아는 이렇게 말하며 조심히 란테르트의 얼굴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란테르트의 입가에는 쓰디쓴 미소가 배어져 있었다. 트레시아는 이야기를 이었다. "아르페오네.... 그 아이는 지금 어디론가 잠적해 버렸고.... 아르르망과 저는 얼마 되지 않는 마족들을 데리고 차원의 변경지역에 숨어 있어요. 란테르트 님의 기척도 끊어져 버리고....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지금까지 살아 온 거죠...."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억양의 굴곡이 잦아져 갔다. 몸에 힘이 빠져서 인지 굉장히 피곤한 목소리였다. "그러던 중.... 돌연 되살아난 란테르트 님의 기척을 쫓아 이곳으로 온 거예요.... 그리고, 도중 정령들에게 걸려 한차례 추격전을 버렸죠." 트레시아는 이렇게 말하며 처연히 웃었다. "죽더라도.... 란테르트님 앞에서 죽고 싶었어요. 그래야.... 한 번이라도 더 껴안아 주시고.... 또, 입을 맞춰 주실 테니까요. 호홋...." 란테르트는 트레시아의 장난 섞인 마지막 말에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소리는 그만 둬...." 트레시아는 란테르트의 미소를 잠시 바라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순히 물러난 모양이네요...." 트레시아의 말에 모라이티나가 대꾸했다. "란테르트의 능력을 모르는 거예요? 겨우 그 정도의 정령들이...." 한편, 로인과 시나는 얼굴에 질문 있어요! 라는 말을 가득 써놓고 이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적당히 끼여들 만한 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잠시동안 트레시아와 모라이티나, 그리고 란테르트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트레시아가 란테르트에게 물은 것들은 요 최근에 만난 여러 사람들이 물었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모라이티나와 란테르트가 트레시아에게 물은 것 역시 그녀의 근황 정도에 그쳤다. 트레시아는 이야기를 하는 사이 서서히 기운을 차려갔다. 언제나 스스로가 전 차원계 제일 이라고 외치는 두 가지 것이 바로 이 체력과 미모인 만큼, 체력은 굉장히 뛰어난 편이었다. 물론, 마족이니 만큼 체력이라는 말은 적당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한참동안 듣고만 있던 시나가 결국 끼여들었다. "그런데.... 트레시아 님은 란테르트 삼촌과 어떻게 만났나요?"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시나의 반대편에 앉아있던 트레시아는 시나의 이 물음에는 답하지 않은 채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트레시아 님이 아니다! 숙모라고 부르렴." 그때 모라이티나가 한마디했다. "아직도 꿈을 버리지 못한 거예요? 그 끈질김 하나만은 높이 사 줄만 하네요!" 입가에 미소가 가득한 것이, 모라이티나의 말투에는 장난기가 다분했고, 트레시아는 그런 그녀의 말에 곧바로 쏘아붙였다. "꼬마, 너는 어떻지? 좋다고, 해어지기 싫다고 울고불고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포기한 거냐?" 그녀의 말에 모라이티나의 뺨을 발그레하게 변했다. 워낙 하얀 피부이기에 조그마한 변화이지만 확연히 드러났다. 트레시아는 그녀의 모습에 한차례 짓궂은 미소를 짖고는 이내 시나의 물음에 답했다. "어떻게 만났느냐고? 정말 운명적인 만남이었지.... 해변.... 파도가 치던 그곳에.... 검푸른 머리칼을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미풍에 맡긴 채.... 한 눈이 먼 검사가 있었지....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나는 그에게 서서히 접근했고...." 모라이티나는 듣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끼여들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추측컨대.... 발견하자마자 채찍을 휘두르며, 내 애인이 되랏! 오호호홋! 그랬을 꺼에요! 그치요?" 트레시아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꼈다. 종종 모라이티나 그녀는 놀라운 능력을 내보이곤 한다. 란테르트가 미소지었다. "비슷한걸." 란테르트의 이 한마디에 시나는 쿠쿡 웃음을 터트렸고, 모라이티나도 한차례 가벼이 웃었다. 트레시아가 그런 모라이티나를 향해 날카롭게 외쳤다. "그런 너는? 뭐가 다르지?" 트레시아가 외쳤고, 시나가 그 말에 모라이티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모라이티나언니는 삼촌과 어떻게 만났는데요?" 그녀의 물음에 모라이티나는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 레이요니르를 들고.... 왠지 바보 같은 기억이었다. "우연히.... 그냥 숲속에서 만났어...." 모라이티나는 말하기 쑥스러워 그냥 이렇게 얼버무리려 했으나, 가만있을 트레시아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마족을 몰아내겠다고 까불대면서 아르카이제 님과 란테르트 님에게 덤벼들었었지 아마?" 트레시아의 외침에 모라이티나는, "어.... 어렸었잖아욧!" 이라고 대응했고, 트레시아는 슬쩍 비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셔? 아마.... 19살 때였지? 아무리 어렸다고는 하지만.... 용사놀이를 하기에는 나이가 많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존재는 100세가 넘은 지금까지도 드래곤 슬레이어 놀이를 하고 있단 말예요." 모라이티나는 할 말이 궁해지자 벌써 10년째 교분을 이어온 키티나를 끌어들였고, 트레시아는 훗, 하고 한차례 웃으며 모라이티나의 말에 대꾸했다. "전 차원 계를 통틀어 단 두 명! 확실히, 덜떨어진 존재는 그 정도로도 많은 편이지." 듣고 보니 그러했다. 모라이티나는 대꾸할 말이 궁해졌고, 잠시동안 트레시아의 얼굴을 바보같이 바라보기만 했다. 10년.... 아니 15년간의 공부가 물거품이 되버리는 순간이었다. 왜 그렇게 많이 공부를 했는데도.... 이 조금 모자라 보이는 트레시아의 말을 왜 당해낼 수 없단 말인가! 트레시아는 모라이티나에 대한 공격방식을 직접적인 것에서 간접적인 것으로 돌렸다. 시나를 향해, 그리고 로인을 향해 이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라이티나, 이 꼬마가 어땠는지 알아? 아, 로인은 그때 한 번 만나 보았겠구나. 한차례 찾아 간 적이 있으니까. 그때 모라이티나는 완전 바보 그 자체였지. 언제였더라.... 한 번은 어느 마을에서...." 모라이티나는 "그만둬욧!" 이라고 외쳐 트레시아의 말을 막았다. 하지만 트레시아는 당연히 그녀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이에 모라이티나는 손에 빛의 화살을 만들어 트레시아에게로 쏘아보냈다. 트레시아는 15년전의 모라이티나를 생각하며 그녀의 마법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단지 엷게 엔클레이브를 전개하여 전면을 방어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빛은 그대로 트레시아의 엔클레이브를 찢었다. 탕,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고, 트레시아는 황급히 고개를 살짝 피했다. 빛이 지나간 자리에 가는 바람이 일어 그녀의 붉고 풍성한 머리칼을 한차례 흔들었다. 트레시아의 날카롭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조금 전 하려던 이야기는 완전히 잊어 버린 채 모라이티나의 빛이 흐른 자신의 왼쪽 뺨에 손을 가져갔다. 비록 피해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으나, 굉장히 놀랐다. "이럴 리가...." 트레시아는 황당하다는 듯 잠시 말을 잊지 못했고, 모라이티나는 자랑스럽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오호호~! 이런 간단한 마법도 막지 못하는 거예요?" 모라이티나의 도발에 트레시아는 잠시 얼떨떨해 있다가 말했다. "무.... 무슨 소리야? 봐준 거야! 지난 15년간 열심히 공부한 것이 단번에 막혀버리면 네가 슬퍼할까 봐 그냥 봐준 거야!" "그래요? 그럼 이번에는 한 번 봐주지 말아봐요." 모라이티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고, 트레시아는 잠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란테르트 품으로 쓰러져 버렸다. "아~! 아까 너무 많은 힘을 써서인지.... 아직 피곤해요...." 모라이티나가 웃었다. "도망치는 거예요?" 그때, 란테르트가 모라이티나를 말렸다. "그만 둬. 모라이티나. 아직 트레시아는 완쾌되지 않았잖아." 트레시아는 란테르트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감격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란테르트에게 더더욱 매달렸다. "아! 란테르트 님은 지난 10년간 이 트레시아를 잊지 않으셨군요. 이제 걱정 마세요. 제가 돌아왔으니까. 제가 란테르트 님의 오른팔이 되어 드릴께요. 오른팔을 잃어버린 것, 어떻게 보면 테미시아 님의 배려였던 모양이에요. 이 트레시아로 하여금 란테르트 님의 오른팔이되어 드리라는...." "흥! 트레시아처럼 덜렁거리는 사람이 어떻게 란테르트를 돌봐 주겠어요?" 모라이티나가 한마디했고, 트레시아는 오호호~ 한차례 날카로운 웃음을 웃었다. "그럼 넌 된다는 거냐? 너야말로 칠칠치 못하기는 나 못지 않을텐데. 약간 얼빠진 듯 했던 데다가, 농담과 진담도 구분 못하고...." "지금은 아니에욧! 15년의 시간이 흘렀단 말이에욧!" 모라이티나는 약간 흥분을 했는지, 그녀의 어머니의 말투를 흉내내기 시작했고, 란테르트는 그런 모라이티나의 모습에 그녀의 엄마를 떠올렸다. 비록 10년 전의 일이지만, 란테르트의 기억 속에서는 겨우 한두 달쯤 흐른 것으로 남아 있었기에, 더더욱 생생히 느껴졌다. 란테르트는 잠시 이런 생각을 하다 트레시아를 바라보았다. 모라이티나의 말에 곧바로 대꾸할 것만 같았던 트레시아의 대답이 너무 늦었기 때문이었다. 트레시아는 란테르트에게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차분하고, 쓸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도.... 10년의 시간을 흘려보냈어...." 트레시아는 앉은 채로 무릎을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란테르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10년이에요.... 왜 아직도 전 란테르트 님을 사랑하는 거죠?" 트레시아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의 신을 죽이고.... 나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왜 나는 아직도 사랑하는 걸까요?" 란테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트레시아를 바라보지 못한 채 시선을 모닥불로 향했다. "전.... 란테르트 님과는 다른 의미로 아르카이제 님을 사랑했어요.... 몹시.... 란테르트 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비교할 수 있을 만큼 그분을 사랑했어요.... 그런데.... 후훗.... 이렇게 되어 버린 거예요...." 트레시아는 낮은, 그리고, 그녀의 슬픔이 한껏 담겨있는 웃음을 한차례 웃었다. "미안해...." 란테르트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그다지 적당하지 않은 이 한마디를 내뱉었고, 트레시아는 고개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로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란테르트 님이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아니...." 란테르트는 트레시아의 말을 끊었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이야.... 모든 불행이.... 진정.... 모든 불행의 원인은 바로 나였어.... 차라리 복수를 포기했더라면.... 아니, 차라리 그 5년.... 15년 전에 내가 나크젤리온에게 조용히 죽었더라면....18년전 에카 숲에서 나의 스승이었던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더라면.... 어느 누구도 나 때문에 불행해 지지 않았을 꺼야...." 란테르트의 말에 트레시아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란테르트 님의 말대로.... 하지만.... 글쎄요.... 그 가정 안에서 저만은 빼 주세요. 전 후회하지 않아요. 란테르트 님을 만난 것을.... 그리고 란테르트 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것도.... 전 어느 것도 후회하거나 원망하지 않아요...." 트레시아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동자는 살짝 내리깔려 모닥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트레시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전 단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그 상황 자체를 슬퍼하는 것뿐이에요. 이건 란테르트 님에 대한 것이 아닌 상황 그 자체에 대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자책 같은 것은 하지 말아요." 트레시아는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란테르트를 바라보았고, 싱긋 한차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이야기는 그만 둬요.... 즐겁게.... 그게 이 트레시아와는 어울리잖아요?" 란테르트는 그런 트레시아를 향해 쓰게 한차례 웃어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그때 트레시아가 길게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이제 자야죠." 그녀의 말에 모두들 밤이 늦었다는 것을 인식했고, 로인과 시나가 먼저 인사를 하며 조금 떨어진 곳에 마련되어 있는 자신들의 잠자리로 향했다. 트레시아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모라이티나를 향해 말했다. "꼬마야, 넌 저쪽에서 아이들과 함께 자라. 난 여기서 란테르트 님과 함께! 밤을 보낼 테니까. 호홋! 이렇게 되면 꼬마는 보모가 되는 건가?" 그녀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 님의 조카들 앞에서 이상한 짓 하지 말고 그냥 얌전히 있어요." 라고 말하며 각자의 잠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호호호~! 10년만의 감동적인 해후다. 감동적인 해후에는 역시 감동적인 잠자리! 가 있어야 하는 법이지. 오호호~!" 이 트레시아의 말을 시작으로 그녀와 모라이티나 사이의 말싸움은 거의 반시간 가량이나 이어졌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잠을 청하던 로인과 시나는 모포로 얼굴을 폭 뒤집어 쓴 채 얼굴만을 붉히고 있었다. 다음날. 간단히 아침을 먹은 일행은 짐을 챙긴 후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 그 시점.... 트레시아가 돌연 란테르트에게 작별을 고했다. "전.... 이만 돌아가 보아야 해요." 란테르트는 순간 할 말을 잊었고, 모라이티나 역시 약간 당황했다. "왜 벌써 돌아가려는 거예요?" 모라이티나가 물었고, 트레시아는 그녀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예전처럼 한가하지 않아.... 어제도.... 사실 무리해서 이곳에 온 거야...." 트레시아는 이렇게 말하며 한차례 빙그레 웃었다. "졸지에 모든 마족들의 어머니가 되어 버렸지 뭐야.... 후후." 트레시아는 잠시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 있다가 란테르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란테르트 님.... 곧 돌아오겠어요. 아예 이곳 세 번째 땅을 터전으로 삼을래요.... 비록 힘의 제약이 많아지겠지만.... 이곳만큼 차원의 구조가 복잡한 곳도 드물거든요. 게다가 란테르트 님도 있고요.... 당분간은 굉장히 바쁘겠지만.... 그래도 틈틈이 들릴께요." 트레시아는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의 목에 안겨 그에게 입을 맞추었고, 란테르트는 트레시아에게 느끼는 미안함과, 동정심 등으로 그녀의 허리를 살짝 안아 주었다. 트레시아는 잠시동안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키스를 란테르트에게 퍼붓고는 모라이티나에게 몸을 돌렸다. 지금은 감춘 긴 귓가로 입을 가져갔고, 속삭이듯 말했다. "꼬마야....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네가 할 일은 단 한가지 뿐이야. 란테르트 님의 입가에.... 미소를 피어나게 하는 것. 알고 있겠지?" 그녀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살짝 웃었다. "여전하네요.... 트레시아는. 이런 말을 할 입장은 되지 못하지만.... 건강히 지네요." 이런 말을 할 입장.... 확실히 엘프가 마족에게 할만한 말은 아니었지만, 모라이티나는 트레시아에게 축원을 빌었고, 트레시아는 그녀의 인사에 손을 들어 모라이티나의 머리를 한차례 비비작 거렸다. 모라이티나가 어렸을 때 자주 했던 행동이었는데.... 이제는 키가 많이 자라 하기 쉽지 않았다. 트레시아는 마지막으로 시나와 로인을 한차례 바라봄으로서 인사를 대신했다. 아이들이 조금 더 어렸더라면 조금 장난(!)을 쳤겠으나, 그러기에는 너무 자라있었다. 로인과 시나 역시 트레시아에게 단지 눈으로 인사를 했을 뿐이다. 일단, 마족이라는 사실이 모두를 서먹하게 만들었고, 약간의 두려움도 안겨 주었다. 트레시아는 마지막으로 란테르트를 한 번 더 바라보았고, 란테르트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미안해.... 그리고 힘내." 란테르트의 말에 트레시아는 웃었다. "그럴꺼에요. 쓰레기 정령들에게 우리 마족들의 힘을 보여 주는거에요. 아르페오네 그 아이가 잠적했어요. 분명, 엄청난 일을 해내고 말꺼에요. 아르페오네는 저와는 다른 아이니까요. 전 그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단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우리 종족을 지키기만 하면 돼요. 그럼 전 가볼께요...." 트레시아는 마지막으로 모라이티나를 한 번 흘끗 바라보며 윙크를 했고, 다시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더 그의 모습을 시선에 담아두려는 듯.... 사라져가면서 까지 그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윽고, 공간의 파면이 서서히 멎었다. 둥근, 왜곡의 동심원은 점차로 잦아져 갔고, 그리고 점차 희미해져 갔다. 이윽고 공간의 흔들림이 완전히 멎은 그 시점, 일행 네명은 흡사 잠시동안의 꿈에서 깨어난 듯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란테르트, 모라이티나, 그리고 시나와 로인. 이 네 사람은 조용히 말에 몸을 실었다. 말의 투레질 소리만이 울렸다. 모두들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시나와 로인의 경우에는 조용히 있기보다는 차라리 입을 열어 이런 저런 것들을 묻고 싶었다. 사실, 평범하게 나이를 먹어온 이 두 사람에게는 지금까지 정령이나 마족은커녕, 마물조차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이 당시로써는 그 흔한 장면도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런 그들이다 보니, 마족이 나타나고, 다시 정령이 나타나던 어제의 그 모습에 관한 궁금증들은 거의 무한대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물을 수가 없었다. 앞에서 말을 몰아 천천히 걷고 있는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가 무언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오전이 지났다. 태양은 구름 없는 반공으로 힘차게 솟았으나, 10월이 26일이나 흐른 만큼 날씨가 꽤 쌀쌀했다. 종종 길과 함께 뒤로 흐르는 나무들은 봄과 여름 동안의 고집을 버려 잎의 색을 변화시키기 한창이었고, 추수가 거의 끝나 가는 들판은 나그네에게 한가함과 허무감을 동시에 안겨주고 있다. 가까운 마을에서 점심을 사 먹고 일행은 다시 북으로의 여행을 계속했다. 어느덧, 란테르트의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 지자, 시나는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말을 걸었다. "트레시아.... 라는 분 마족 맞지요?" 시나는 비록 란테르트의 표정이 비교적 부드러워 졌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어 이렇게 조심스레 물었다. 란테르트는 자신의 곁으로 다가와 이렇게 묻는 조카(?)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시나는 그의 대답에 조심스럽게 다시 말했다. "그런데.... 그런데...." 하지만 말을 잇지 못하였고, 란테르트는 그런 모습에 다시 한 번 미소지었다. "주저 말고 물어 봐라." 시나는 란테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분과 친한 가요?" 시나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고, 시나는 다시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것이 있어요. 왜 마족인 그녀와 친하면서.... 나크젤리온을 죽인 거죠?.... 아니, 나크젤리온을 증오하면서 어떻게 마족인 그녀와 친할 수 있는 거죠?" 그녀가 정작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었다. 그 동안의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이상, 그녀의 이러한 궁금증은 당연한 것이다. 시나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사실.... 이러한 질문 별다를 것 없는 것이다. 대답도 간단하다. 나크젤리온은 에라브레를 죽였지만, 트레시아는 그렇지 않았다. 트레시아와는 일찍부터 친분을 다져 왔으나, 나크젤리온에게는 원한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란테르트는 생각에 잠기었다. 뭐라 할까.... 느낌이 다르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10년전.... 그때의 일이 있은 이전과는 분명 느낌이 달랐다. "글쎄...." 시나는 란테르트의 이 대답이 불만족스러웠으나 감히 다시 묻지는 못하였다. 다행히 란테르트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트레시아와는.... 아주 오래 전부터 친구였어.... 나크젤리온이라는 존재와 알기 이전부터.... 그래서 친구가 될 수 있었지. 그리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나크젤리온과 원한을 맺은 거야...." 예상 가능한 범주의 대답에 시나는 단지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시나의 머리 속에는 이후로도 몇 가지 질문할 것이 더 스쳐 지나갔으나, 그저 고개를 한차례 가로로 내 저었다. 왜인지.... 물어서는 안될 일만 같았다. 조용히 말의 고삐를 느슨히 하여 로인과 어깨를 맞추는 그녀였다. 다시 하나의 바다를 건넜다. 이윽고 에노사 대륙에 도착했고, 에노사 북부 평야인 휴에를 가로지르며 피치토 마을로의 한가한 여행을 계속했다. 란테르트로써는 미칠 듯 한가했다. 전쟁이 그치고, 무기 없이도 대륙을 여행할 수 있는 시절이 찾아왔다. 하지만 란테르트를 지루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해야 할 일도.... 그리고 할 일도 없었다. 물론, 피치토 마을의 두 남녀가 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아주 작은 일일뿐이다. 설사 그들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싶다, 라는 약간은 유치하지만, 누구나 마음에 품어 봄직한 소원을 란테르트에게 말한다 하더라도.... 이루는데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는다. 나라 하나를 스스로가 쳐 굴복시키는데 필요한 시간은 아무리 길게 잡아야서너달. 그의 무력이라는 것이 거의 절대적이니 만큼 그다지 힘든 일도 아니다. 샤이튼을 익히기 전 조그마한 성 하나를 녹일 수 있는 마법력을 가지고 있던 그이다. 샤이튼과 병용해 그와 비슷한 마법을 사용한다면, 성뿐이 아니라, 외성밖에 있는 마을까지 흔적도 없이 녹일 수 있다. 각 국의 수도에서 그 마법을 한 번씩만 사용한다 하더라도.... 하지만.... 그 일을 한 후에는 무얼 한다는 말인가? 사실 란테르트의 이런 고민은 보통의 사람들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어느 누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움직이는가?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그곳으로 달려가는 사람이 과연 이 일곱 대륙을 통틀어 몇 명이나 될 것인가? 모두들 단지 살아갈 뿐이다. 흘끗 옆을 둘러보고 다른 이들의 행동을 살피며 그들을 쫓아.... 단지 살아갈 뿐이다. 아버지가 해 왔던 데로.... 그리고 할아버지가 해 왔던 데로.... 마을의 사람들이 해 나가는 데로.... 그리고 온 나라의 사람들이 해 나가는 데로.... 란테르트 역시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목표가 없다면 단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아가면 그만인 것이다. 아내를 얻고,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고.... 돈을 벌어 끼니를 때우고.... 그렇지만.... 평생을 통틀어 단 한차례도 '정상'이라고 불리울 만한 삶을 살아본 적도.... 그리고 정상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본 적도 없는 그로써는.... 결코 그러한 삶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악마라 불리울만한 사람이 되는 법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이 란테르트라는 악마가 보통의 사람들이 되는 법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한가로움과 권태.... 란테르트는 끊임없이 이것을 벗어나기를 갈구하고 있었지만....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몰히 해요?"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말을 몰고 있던 엘프, 모라이티나가 물었다. 종종 두세 시간씩이나 약간 풀려버린 눈으로 말에 몸을 맡기는 란테르트를 보며, 모라이티나는 왜인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가 정확히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설사 모른다 해도 알 것만 같은 마음이 드는 모라이티나였다.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물음에 어어, 하는소리를 내며 깊은 사고의 골에서 빠져 나왔고, 이내 고개를 돌려 모라이티나를 바라보았다. "별 것 아니야....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았어." "무엇을 해야 할지를요?.... 그렇군요.... 딱히 할 일은 없지요?"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말을 이렇게 받았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라이티나가 활짝 웃었다. "그럼, 저와 함께 여행이나 다녀요. 이 일곱 대륙뿐이 아니라, 제가 살고있는 중앙대륙, 그리고 더 멀리 남쪽의 다프칸. 주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다프칸은 이곳 헵티슬보다 훨씬 시끌벅적 하데요. 드래곤들 덕분에 사람들이 사는 땅은 잘게 나뉘어져 큰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마법도 이곳보다 훨씬 번영했어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하겠다는 뜻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돌연 란테르트의 코에 낯익은 냄새가 느껴졌다. 바로.... 피 냄새였다. 란테르트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한차례 살펴보았고, 모라이티나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함께 주위를 바라보았다. 시나와 로인은 앞서 가고 있던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가 돌연 말을 멈춘 채 주위를 살피자 덩달아 말을 멈춰 주위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꺾인 깃발이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고, 무언지 모를 덩어리 몇이 바닥에 뒹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기다려." 모라이티나가 뒤에 있는 둘에게 이렇게 말한 후 다시 란테르트를 향해 말했다. "한번 가 봐요. 아무래도.... 시체인 것 같은데...."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동시에 말을 몰아 그쪽으로 향했다. "로인 가보자." 두 사람이 떠난 직후, 시나는 로인에게 이렇게 말하며 고삐를 당겼고, 로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의 뒤를 쫓으며 말했다. "모라이티나 누나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시끄러. 무슨 남자가 그렇게 겁이 많아?" "그런 건 아니야." 시나의 말에 로인은 이렇게 말하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결코 무섭다거나 하는 이유로 모라이티나의 말을 듣는 것은 아니었다.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를 굉장히 존경하고 또 존중하고 있었기에, 로인은 그 둘의 말이라면 결코 어기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시나와 로인이 천천히 말을 몰아 그 거뭇거뭇한 덩어리가 있는 곳까지 다가갔을 무렵,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는 말에서 내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살피고 있었다. 잔혹한 모습이었다. 어느 마을의 영주와 무슨 관계가 있는 듯, 시체들 근처에는 영주의 깃발이 꺾여 버린 채 나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깃발만 보고는 어느 지방의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시체는 팔다리가 어디론가 떨어져 나간 것은 기본이요, 어깨 깊숙이 도끼가 박힌 자국이 있는 것은 물론, 무언가 몽둥이 같은 것에 맞아 아예 어디 한군데가 으스러진 경우도 있었다. 란테르트는 그런 시체를 발로 툭 차 뒤집어 보며 상처를 한차례 살폈고, 모라이티나는 그 곁에서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란테르트의 경우야.... 자신의 손으로 이보다 훨씬 잔혹한 짓도 했으니 별다른 느낌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모라이티나는 역시 전쟁이라는 시간을 겪으며 살아왔기에 이 정도의 모습에는 그렇게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단지 눈살을 약간 찌푸릴 뿐이었다. 반면.... 로인은 입을 틀어막았다. 입뿐만이 아니라 코도.... 은은히 풍겨오는 시체 냄새와 피의 비린내가 꽤 심했기 때문이다. 미간에는 주름이 잡혔고, 시체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 채 곁눈질을 할뿐이었다. 그리고.... 시나의 경우에는.... 약간 의외였다. 그 괄괄하던 그녀에게는.... 시나는 시체의 모습이 조금씩 뚜렷해짐에 따라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피 냄새가 점점 짙어져 감에 머리가 조금씩 어지러워져 갔고, 이윽고 시체 곁에 도착해 그 모습을 보자, 그녀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피 냄새에 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그대로 말 등에 엎드려 쓰러져 버린 것이다. 로인은 그 모습에 놀라며 말에서 내려 막 말 등에서 미끌어 떨어지려던 시나를 부축했고, 모라이티나와 란테르트도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모라이티나는 시나를 안아 다시 말 등에 천천히 올렸다. 말고삐를 손에 쥐고 시체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려 갔고, 일행은 하는 수 없이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기 위한 준비를 했다. 시나가 깨어난 것은 동편에 어렴풋이 별들이 빛을 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녀는 으음,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천천히 눈을 떴고, 이내 주위를 두리번 살폈다. 그녀의 시선에 모라이티나가 들어오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로인과 란테르트가 한 명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무덤덤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나는 얼굴을 붉혔다. 기절해 버린 것이 몹시 부끄러웠다. 기절할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다. 참혹한 모습.... 그 모습에 그녀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으나,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피.... 그 검붉은 색의 액체가 눈에 들어오고.... 그 비린 냄새가 콧속을 진동하자 자신도 모르게 의식의 끈을 놓쳐버렸다. 결코 자신의잘못이 아니다. 마음이 여리거나 하는 바보이기 때문이 아니다. "현.... 현기증이 조금 났었어요. 빈혈인가 봐요...." 시나는 서둘러 궁색한 변명을 했다. 란테르트는 상관없다는 듯 한차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제 괜찮아?"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뒤이어 로인이 말했다. "깜짝 놀랐어.... 시체들을 보고 기절해 버려서...." 그의 말에 시나는 약간 신경질 적으로 대꾸했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단지.... 빈혈일 뿐이야. 시체와는 전혀 상관없어." 그녀가 돌연 화를 내자 로인은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했고, 그때 모라이티나가 미소지으며 시나를 다시 자리에 눕혔다. "알았으니까, 조금 더 누워있어." 시나는 마음 같아서는 벌떡 몸을 일으켜 건강을 과시하고 싶었으나, 아직도 머릿속이 약간 어질어질 한 것이 약간 무리일 것 같아 못이기는 척 다시 누웠다. 그때 란테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까?...." 모라이티나가 대꾸했다. "모르겠어요. 아무리 보아도.... 이 근방 영주의 병사들 같은데...." 다시 란테르트가 말했다. "상처를 보니, 여러 사람들에게 당한 것 같아. 도끼, 메이스, 검.... 상처의 종류가 다양해. 뭐 한사람이 사용했을 수도 있지만...." 로인이 끼여들었다.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순간 왜? 라고 반문하려 했다. 영주의 병사들이 죽고 다치건.... 혹은 그 반대편이 죽고 다치건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다음 순간, 란테르트는 지금 클라라와 바겔의 부탁으로 로인을 보살피고 있다, 라는 점에 생각이 미치었다. 비록 자신이야 성격이 비뚤어졌으나, 로인까지 그렇게 기를 수는 없다. 란테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를 보니.... 오늘 오전 중에 당한 것 같아. 우리가 도착하기 한 일곱 시간 전쯤? 말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 양쪽 모두 말을 가지고 있지 않은 모양이구나. 서둔다면 이틀 안에 따라잡을 수 있을 꺼야." 란테르트의 말에 로인이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요?" "북서쪽. 시체들의 방향을 보니 대강 그러한 것 같다." 누워서 모라이티나의 간호를 받던 시나가 중얼거렸다. "마침 우리가 가려던 방향이네요." 그녀는 낮에 기절했던 것은 이미 잊은 듯, 이 알 수 없는 일에 대한 호기심이 부쩍 당겼다.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앞으로 3일 정도면 피치토 마을에 도착한다. 대강, 이 무리를 따라잡을 무렵이면 피치토 마을의 근교가 될 것 같다. 란테르트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낮의 그 깃발 한차례 본 적이 있는 듯도 했다. 그 피치토 마을에서.... 4. 바라는 것. 피를 따라....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 그리고 시나와 로인, 이 네 사람이 여행을 한 끝에 도착한 곳은 란테르트가 예상했던 바로 그곳, 피치토 마을이었다. 어느덧 날이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한 이때, 마을 남동쪽으로 10휴하(1휴하=약 1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한창 싸움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일행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란테르트 등은 그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서둘러 말을 몰았다. 싸우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7명쯤 되는 무장을 한 자들이었다. 마법사는 눈에 띄지 않았고, 대강 형세를 살펴보니, 5대 2로 정규군인 듯한 병사 쪽이 열위에 놓여 있었다. 막 란테르트가 말에서 내려서며 검을 뽑아드는 사이, 정규군쪽 병시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그 때문에 그 병사와 같은 편이었던 나이든 노인의 정신이 크게 흐트러져 틈을 보였다. 때를 놓치지 않고, 그 노인과 싸우고 있던 한 사내가 들고있던 에스토크를 강하게 찔렀다. 그리고, 노인은 복부 정 중앙에 푹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구멍이 뚫리었다. 란테르트는 속으로, 제길 이라고 외쳤다. 그는 처음 이 사람들을 보자 마자 말에서 뛰어내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방금 검을 맞은 그 노인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란테르트는 몸을 달려 검을 한차례 가로로 휙 그었다. 동시에푸억 하는 소리가 나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사내의 몸에 붉은 선이 그어졌고, 그대로 땅에 쓰러져 버렸다. 다시 한 번, 그리고 한 번. 세 번 검을 휘둘러 다섯을 베어 버린 것이다. 란테르트는 곧바로 검을 바닥에 꽂으며 그 노인을 부축했다. "정신 차리십시오." 배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노인을 향해 회복마법을 걸며 란테르트가 외쳤다. 하지만, 노인은 몸을 부르르 떨며 간신히 눈을 가늘게 뜰 뿐 더 이상의 차도가 없었다. 나이.... 이미 60에 가까운 그였기에 란테르트의 치료마법도 그 노인을 살리지는 못하였다. 한편,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서두는 모습에 약간 의외라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그에게로 접근했다. 이미 상황은 끝이 나 있었고, 시나와 로인을 향해 다가오지 말라는 당부를 다시 한차례 한 후 란테르트의 곁으로 서서히 접근했다. "자피토씨. 정신 차리십시오." 란테르트는 다시 한 번 외쳤다. 자피토.... 전에 자신을 드라이토라고 소개한 이 노인의 성이다. 바로 오이니아의 할아버지인 것이다. 란테르트의 부름에 드라이토는 천천히 눈을 떴다. "란테르트.... 당신이군...." 간신히 이 한마디를 내뱉은 노인은 안도의 한숨을 미소와 함께 내비쳤다. "쿨럭.... 나도 이제 늙었군.... 겨우 그까짓 에스토크 따위에.... 상처를 입었다고...." 그때 곁에 가까이 다가왔던 모라이티나가 한쪽 무릎을 꿇고 노인의 상처를 살피며 말했다. "말을 많이 하지 마세요. 상처가 악화돼요." 노인은 모라이티나의 말에 미소지었다. "난 이미 늦었어...." 그리고는 다시 란테르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나?" 이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드라이토씨가 아닙니까? 오이니아양의 할아버지 되시는...." 노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잊는 게 당연하겠지.... 15년전에 잠시 스쳤을 뿐인데...." 노인의 말에 란테르트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결코 떠오르지 않았다. "란테르트.... 아니.... 피엘트.... 아반트 가르트에서 함께 일했던 드라이토라는 사람이 생각나지 않나?" 란테르트는 피엘트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듯 했다. 한때, 수배되어 있던 자신이 아반트 가르트에 들어가기 위해 사용했던 가명을 이곳에서 지금 듣다니.... 그리고.... 이름을 듣는 동시에 떠올랐다. 이 남자가 누구인지.... "기억 납니다." 란테르트의 대답에 드라이토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기억 날것이야.... 세달 이상이나 함께 있었는데.... 후후후...." 노인은 웃었다. 눈을 잠시 감고.... 흡사 추억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노인은 잠시 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며 말했다. "그리고 크림슨 아이즈.... 자네가 후에 얻은 별명.... 처음 크림슨 아이즈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네.... 자네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드라이토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역시 그랬군.... 하하하하! 그 유명한 크림슨 아이즈.... 역시 자네였어...." 드라이토 노인은 웃었다. 무엇이 즐거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웃었다. "한가지.... 부탁을 들어주겠나?" 드라이토는 한차례 웃음을 터트린 후 콜록거리는 피섞인 기침을 뱉으며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 터.... 그의 부탁에 따라 한가지 일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 싶었다. "고맙네.... 부탁할 것이란.... 아주 간단하네.... 오이니아를.... 그 아이를 돌보아 주게.... 적어도.... 안정된 가정을 가질 때까지 만이라도.... 그때까지 만이라도...." 그의 부탁에 란테르트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일들 중 하나였다. 사람을 돌보아 달라니.... 하지만, 이미 해 주겠다고 답했으니 할 수 없다. 게다가.... 이렇게 노인의 시체를 데리고 마을로 돌아가면.... 오이니아는 분명 어떠한 일을 부탁할 것이 당연하다.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도 자신에게 부탁할 아무런 일이 없을 리 없다. 그 일을 하며 조금 더 신경을 쓰면 된다....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다시 한 번 빙그레 미소를 지었고.... 이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란테르트는 잠시동안 더 노인을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검을 들어 등뒤에 찼고, 하나뿐인 팔로 노인의 등덜미를 들어 자신의 말 등에 올렸다. 란테르트는 곧바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는 몰랐지만, 상당히 격렬한 싸움이 있었는지, 주위에는 10여구의 주검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늦가을의 금색 초원은 때아닌 황혼에 핏빛을 띄고 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란테르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시나와 로인을 바라보았다. 시나는 또다시 기절해 버렸다. 아마도 피를 보면 기절하는 체질, 그런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체질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로인의 경우에는 기절해 바닥에 누워있는 시나 곁에서 란테르트와 다른 시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이.... 세상이란 곳의 모습이다...." 약간 긴장되고, 또 놀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로인을 향해 란테르트는 이렇게 한마디 내뱉었고, 로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모라이티나가 곁에서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건가요?"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미는 전달되었다. 의사를 전달하는데 말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소녀는 오열했다. 담갈색 머리칼을 흩트리며.... 두 무릎을 허물어뜨리듯 꺾으며.... 볼을 따라 눈물이 쉴 사이 없이 흘렀고, 입을 가린 손 사이로 흐느낌이 쉴 사이 없이 새어나왔다. 드라이토 노인의 시신은 자피토 가의 저택 1층에 마련된 한 조용한 방에 놓여졌다. 테이블을 놓고 흰색의 천을 씌운 후, 그 위에 급히 구한 흰색 꽃을 함께 장식하였다. 노인은 지금 그러한 곳에 누워있다. 오후에서 늦은 저녁까지, 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그중 가장 의미 있는 사람은 아마도 헬튼 영주가 아닐까? 이 노인의 죽음에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제공한 헬튼 영주는 젊다고 하기에는 어리고, 어리다고 하기에는 나이가 많은 오이니아의 흔들리는 어깨를 한참이나 두드려 주었었다. 그리고, 늦은 밤.... 오이니아가 조용히 흐느껴 울고 있는 방밖에 일군의 사람들이 서 있다. 네명은, 란테르트의 일행이었다. 란테르트의 경우에는 오이니아를 돌보아 달라는 부탁을 들었기에, 그리고 다른 세 사람은 란테르트를 따라 서 있었다. 그리고 세명이 더 있었는데.... 란테르트와 이미 한 차례쯤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는 오이니아의 세 소꿉친구들이었다. 적당히 앉고 서며 자리를 잡은 이들은 오이니아의 흐느낌을 들으며숙연한 마음으로 입조차 열지 않은 채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헬튼 가의 소영주 피아텔이 물었다. 올해 19살이 된 이 흑색 머리칼의 젊은이는 처음 란테르트 일행과 얼굴을 마주했을 때 부터 지금까지 단 한차례도 말을 건네 오지 않았었다. 눈 아래로 본다.... 아마도 이것이 가장 정확한 그의 태도일 것이다. 하긴, 외팔이 검사와 젊은 여자 한 명. 그리고 풋내 펄펄 나는 남녀가 대단해 보일 아무런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의 물음은 공손했으나, 공경하는 마음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란테르트가 대꾸했다.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단지, 드라이토 님께서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았을 뿐입니다." 곧바로 흑녹색 머리칼의 남자가 내뱉듯 말했다. "쳇.... 재수도 없구나. 오이니아는...." 전에 오이니아는 이 남자를 테리트론이라고 소개했었다. 나이는 20세였고, 날카로운 인상에 키도 란테르트 이상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오이니아를 위해 무얼 해주어야 하는 거야?...." 켈파라는 이름의, 오이니아와 함께 란테르트를 발견했던 갈색 머리칼의 남자는 웅크리듯 바닥에 앉아 이렇게 중얼거렸다. 모라이티나는 단지 란테르트의 곁에 서 있을 뿐이었고, 시나와 로인은 모라이티나에게서 두 걸음쯤 떨어진 곳에 나란히 서 벽에 등을 기대었다. 모두들 이런 상황에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돌연 오이니아의 흐느낌이 그쳤다. 거친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이내 방밖으로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이니아는 방 밖으로 나와 란테르트의 앞에 섰다. 그리고는 힘없는 목소리로 날카롭게 말했다. "얘기해 줘요. 할아버지의 유언 같은 것 없었어요?" 격양된 높은음의 목소리였지만 그다지 듣기 싫지는 않았다. "제게.... 오이니아 양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란테르트의 말에 오이니아를 비롯한 오이니아의 친구들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난생 처음, 물론 한차례 면식은 있으나, 처음으로 만난 남자에게 손녀의 미래를 맡기다니.... 왠지 믿음직스럽지 못한 대답이다. "정말입니까?" 피아텔 소영주가 물었고, 란테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런...." 오이니아는 잠시 말을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기었다. 그 사이, 테리트론이 한차례 꼬았던 팔을 풀어 반대로 팔짱을 끼며 란테르트에게 물었다. "돌보다니. 무슨 의미죠?" 그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그쪽으로 돌려 바라보았다. "드라이토.... 그와는 15년전 일면식이 있었습니다. 같은 용병 단에서 일했었지요." 란테르트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테리트론과 피아텔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테리트론의 경우에는 파하하 하는 비웃는 듯한 웃음을 터트렸고, 피아텔은 쳇, 하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웃음을 웃었다. 테리트론은 잠시동안 웃다 이렇게 비꼬았다. "대단하군. 고작 10살 때 아반트 가르트에 있었다니. 하긴 지금의 황제인지 뭔지 하는 인간도 그 나이때 수행을 떠났다고 하니.... 당신도 노력하면 황제자리 하나쯤 차지할 수 있겠군요." 테리트론의 말에 란테르트도, 모라이티나도, 로인도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곧바로 받아칠 정도로 괄괄한 성격은 시나만이 가지고 있었다. "닥쳐. 건방진 꼬마녀석." 시나는 신경질 적으로 테리트론의 말에 이렇게 톡 쏘았다. "아줌마는 말버릇이 조금 고운 편이 보기 좋죠." 테리트론이 받아쳤고, 시나는 그런 그의 말에 오히려 냉정해 지며 차게 웃었다. "훗. 꼬마라는 것을 인정하는 모양이구나. 나를 아줌마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그래, 꼬마 너에게는 특별히 앞으로도 아줌마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해 주마." 테리트론은 시나의 말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한방 먹은 것이다. 그때 모라이티나가 곁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란테르트는.... 올해로 38살이에요. 결코 겉모습으로 그를 판단해서는 안돼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모두들 다시 한차례 탄성을 내질렀다. 어딜 보아서 이 눈앞의 남자의 나이가 38이란 말인가? "그.... 그런...." 오이니아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그에게 거울을 가져다주었을 때, 그가 지나치게 어려 보이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오이니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이전에 제게 했던 말 기억하세요? 제 부탁.... 무엇이던지 한가지 들어주겠다던...."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잊었다면 왜 이곳에 다시 찾아 왔겠는가? 오이니아는 란테르트의 응답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물었다. "할아버지는....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죠?" 란테르트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오이니아는 돌연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제 복수를 도와주세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고, 그 모습에 오이니아는 곧바로 외치듯 말했다. "어떠한 일이라도 들어준다고 했잖아요!" 오이니아의 흥분한 모습에 란테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해 드리지 않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럼 들어주실 건가요?" 란테르트의 대답에 오이니아가 성급히 되물었고, 란테르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미.... 드라이토씨를 해한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란테르트의 말에 오이니아는 잠시 멍해졌다. "죽어요?.... 누구 에게요?" 오이니아가 물었고, 란테르트가 답했다. "제가.... 죽였습니다." 오늘 따라 란테르트의 개그센스가 가일층 된 모양이다. 한마디씩 툭툭 내뱉을 때마다 사람들의 웃음세례를 받으니 말이다. 이번에도 웃은 것은 테리트론과 피아텔이었다. 그리고 웃음의 유형도 이전과 비슷했다. 테리트론의 경우에는 비웃음이 한껏 섞인 커다란 웃음을, 그리고 피아텔의 경우에는 냉소 섞인 조용한 웃음을. 피아텔이 말했다. "드라이토 님의 곁에는.... 저의 헬튼 가에 속해있는 네명의 뛰어난 기사중 한 명이 함께 있었습니다. 게다가 드라이토 님의 실력은, 비록 그분의 나이가 60 가까이 되셨다지만, 이 근방 최고십니다. 10여명의 병사와 기사, 그리고 드라이토 님까지.... 10명 남짓의 굉장한 실력자들이 몰살을 당한 그 상대를.... 당신이 죽였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테리트론이 한마디 보탰다. "이봐요. 농담일랑 다른 자리에 가서 해요. 드라이토 영감님은, 당신의 팔이 지금보다 세 개쯤 더 있었다 하더라도 당신의 상대가 아니에요." 초라한 망토를 걸친 외팔이 검사.... 홀쭉한 뺨. 가느다란 몸매. 얇은 팔뚝.... 도대체 어딜 봐서 이 눈앞의 남자가 대단해 보인다는 말인가? 게다가.... 마검사 아닌가? 보통 마검사라는 사람은, 검사에 비해 검술 실력이 떨어지고, 마법사에 비해 마법실력이 달린다. 차라리, 검이나 마법 둘중 한가지를 제대로 익히는 것 만 못하다는 말이다. 그런 란테르트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람들 중 최고의 실력자 10여명을 전멸시킨, 전멸이라는 것은 단지 '이겼다' 라는 것과는 그 시사하는 바가 다르다, 그 상대들을 죽였다니.... 그때, 바닥에 앉아 있던 켈파가 몸을 일으키며 두 친구들을 향해 말했다. "그만 둬. 너무하잖아." 동시에 그는 란테르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모두들 날카로워져 있어요." 란테르트는 그런 켈파를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 개의치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때, 다시 시나가 나섰다. "흥. 너 꼬마와 여기 꼬마 친구들 모두가 덤빈다 하더라도, 삼촌의 발끝에도 못 미칠걸?" 이번에는 로인이 말렸다. "시나. 그만 둬. 괜한 소란 일으키지 말고." 시나의 화살이 로인에게로 향했다. "넌 화나지도 않아? 삼촌이 저런 소리를 듣는데." "그건 그렇지만.... 삼촌이 가만히 계시는데.... 우리가 나서는 것도 이상하잖아. 게다가.... 이미 사과도 받았고." 로인의 말에 테리트론이 맞장구 쳤다. "당신 말이 맞아. 원래 이곳 저곳 끼여들기 좋아하는 아줌마나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거지." 테리트론의 말에 막 시나가 한마디하려는 순간 로인이 그녀를 말렸다. 대신 이번에는 로인이 한마디했다. "전 당신이 옳다는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방금의 말은 시나를 모욕한 것으로 들리는 군요. 사과해 주셨으면 합니다." 테리트론은 로인의 말에 잠시 무어라 한마디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일단, 이런 식의 유치한 말싸움은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다가, 지나치게 자신이 과민반응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피아텔이 오이니아에게 말했다. "은월의 기사 님이나 흑월의 기사 님께 부탁드려 보자.... 그분들이라면 너의 부탁을 들어 줄 꺼야." 오이니아는 피아텔의 말에 머리 속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 그러면 되겠구나.... 그분들이라면.... 반드시 내 부탁을 들어 주실 꺼야...." 오이니아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저를.... 황국의 수도 마기아까지 데려다 주세요. 더 이상은 바라지 않아요." 그때 모라이티나가 오이니아를 향해 차분히 말했다. "아가씨. 정말로 란테르트가 그 사람들을 죽였어요.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란테르트의 실력은 정말 대단해요. 당신은 복수 같은 것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오이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됐어요.... 위로할 필요도.... 나를 속일 필요도 없어요. 전, 당신들이 생각하는 만큼 약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오이니아는 뒤이어 세 친구들에게 입을 열었다. "이만 집에 돌아가....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오늘 너무 고마웠어." 오이니아의 말에 피아텔과 테리트론, 그리고 켈파는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오이니아가 눈빛으로 그들의 말을 막았다. 오이니아는 다시 란테르트와 그의 일행을 향해 말했다. "할아버지의 시신을 이곳으로 모시고 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그리고.... 오늘 저를 도와 주신 것도 감사드리고요. 집사가 방을 안내해 드릴 겁니다. 오늘 저희 저택에서 묵으시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도록 해요." 오이니아는 모두에게 이렇게 말한 후 몸을 돌렸다. 비틀비틀, 벽에 손을 대며 비칠거리는 걸음을 옮겨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모두는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바라보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이후에야 각자의 가야 할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이니아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정오가 다되어서 였다. 그녀가 나온 곳은 밤에 향했던 그녀의 방이 아니었다. 바로 노인의 시신이 안치된 곳으로, 자피토 가의 집사는 점심 무렵 갑자기 열리는 시체실의 문을 보며 한차례 심장을 움켜쥐어야만 했다. 오이니아는 곧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물 잔에 차가운 물을 담아 벌컥 마셔 버리고는 한참동안 부엌에 조용히 있었다. 정작 이럴 때 필요한 엄마도, 그리고 아빠라는 사람도 이미 죽어 없어진지 오래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온전한 의미에서의 고아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고아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다지 비참할 것은 없었다. 할아버지의 재산이라는 것이 결코 적다고는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었고, 게다가 친구중 영주의 아들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스스로가 한없이 처량해 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는.... 가족이라는 것이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전날.... 오이니아는 할아버지의 시체에 엎드려 하염없이 울다가 돌연 마음속에 분노가 읾을 느꼈었다. 할아버지를 죽인 그 사람, 혹은 사람들에 대한 분노였다. 돌연 그 상대가 엄마, 아빠를 죽인 알지 못하는 사람과 하나로 겹쳐졌고, 더더욱 분노가 가중되며 결국은 복수를 결심했다. 그렇게 한 번 결정하고 나자, 이제는 마음이 거의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다. 오이니아는 부엌 한 쪽에 있는 의자에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기었다. 어떻게 복수를 할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룬의 기사.... 그들에게 부탁하는 것.... 그것은 이미 전날 결정한 것이었다. 일단 자신의 실력을 길러 복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검 한차례 쥐어 본 적 없는 자신이 무슨 수로 할아버지보다 강해지겠는가?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는 것이다. 오이니아는 룬의 기사 쪽에서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었다. 흔히들.... 사람들은 자신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상대에 대해서는, 그 상대 역시 자신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곤 한다. 예를 들어, 아주 유명한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익히 들어왔고, 또한 그에 관한 글을 많이 읽어볼 경우.... 나중에 가서는 그가 자신을 알고 있고, 또 상당히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착각이지만.... 한편....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즘....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방에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복수를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건가요?" 란테르트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고, 모라이티나는 그의 등뒤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란테르트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에게서 한참이 지나도록 대답이 없자 다시 한 번 물었다. "벌써.... 죽였잖아요. 죽은 사람을 상대로 무슨 복수를 하겠다는 거예요? 게다가.... 어제 영주의 말에 의하면, 상대는 단순한 도적일 뿐인 것 같던데.... 그가 말했잖아요. 드라이토씨가 가지고 돌아오던 그 서류는 굉장한 값어치를 가진 보물의 위치가 적혀있는 지도 였다고.... 지도는 드라이토씨의 가방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으니.... 아마도 더 이상의 적은 없다고 보아도 되지 않나요?" 그때까지도 란테르트는 아무런 대구를 하지 않았다. "란테르트!"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이름을 한차례 불렀다. 그리고, 그제야 란테르트는 아, 하는 찬성을 내지르며 몸을 돌렸다. "이제야 기억났어!" 란테르트는 몸을 돌려 이렇게 외쳐 말했고, 모라이티나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모라이티나. 막 이 생각이 떠오르려고 해서 대답을 하지 않았어."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살짝 미소지었다.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무엇인데요?" "오이니아.... 어디선가 그녀를 본 듯한 기억이 있었거든.... 분명 어디선가." 모라이티나의 물음에 란테르트가 답했고, 모라이티나는 부쩍 호기심이 당긴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디서 만났었는데요?" 모라이티나의 물음에 란테르트가 답했다. "바로 이 마을에서야. 저 서쪽 언덕 건너편의 해안 가에서. 그때 오이니아는 8살이었고.... 단지 한 번 스쳐지나갔을 뿐이어서 기억이 나지 않았었는데...." "대단해요. 어떻게 10년전 잠시동안 한 번 만난 사람을 기억할 수 있는 거죠?" 모라이티나가 놀랍다는 듯 말했고,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의 대화가 굉장히 기억에 남는 것이었어.... 오이니아는 나이에 비해 굉장히 조숙한 아이였었지...." 란테르트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당시.... 그는 두 자매와 함께 들렸었던 그 해안 가에서 그녀들에 대한 감상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그때오이니아를 만난 것이다. 아니.... 이상하다.... 무언가 이상하다.... 란테르트는 순간 기억에 혼동이 오기 시작했다. "잠깐.... 그때가 아닌가?...."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이러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무엇이 잘못 되었나요?"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어.... 그때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죠.... 언제 어디선가 우연히 만났을 수도 있으니...."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 어쩌면 그녀의 머리칼의 색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고, 란테르트는 그런 모라이티나의 표정에 미소를 지었다. "담갈색 머리칼이라는 것이.... 흔하지는 않잖아?" 란테르트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모라이티나는 조용히 그런 란테르트의 옆모습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란테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가 원하는 그 일.... 밀튼이나 로멜, 그들에게 그녀를 데려다 주고보는 거야.... 뭐 복수를 하고 하지 않고는 그때 가서 정할 일.... 정 복수가 하고 싶다고 한다면, 어디 아무 곳에 있는 아무나 몇 명 때려죽이면 그것으로 끝인 거고...."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란테르트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라이티나의 앞머리칼을 한차례 쓸어 정리해 주며 웃었다. "물론....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드라이토가 원하는 것이 아니겠지? 모라이티나.... 네가 할 일이 많아지겠어.... 그녀가 정상적인 인간이 되도록 도와줘.... 나는.... 내가 그런 것을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란테르트의 대답에 모라이티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15년전의 당신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 그 이상하던 10년전의 당신에서....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처럼...." "글쎄...." 란테르트는 말꼬리를 흐리며 서서히 미소를 지워갔다. 다시 피아텔, 테리트론, 그리고 켈파가 오이니아를 찾아왔을 때는 이미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그때, 로인과 시나, 그리고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 이 네 사람은 이미 오이니아와 함께 응접실에서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새로 도착한 세 사람은 오이니아와 다른 네 사람에게 인사를 건넨 후, 적당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세 친구들을 향해 오이니아가 말했다. "나 내일 소피카로 떠날 꺼야." 오이니아의 말에 세 사람은 약간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할아버지를 무덤에 안장시키고.... 내일 곧바로 떠나겠어." 오이니아는 흡사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려는 듯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했고, 다른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물론, 어제 그녀의 말을 들어 그녀가 조만간 소피카로 두 룬의 기사를 찾아 갈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까지 서둘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때, 켈파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저.... 오이니아...." 그의 말에 오이니아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말리는 말이라면 그만 두어. 난 꼭 해내고 말겠어.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불행해 지고 싶지는 않아." 오이니아의 말에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던 란테르트가 훗, 하는 헛웃음을 터트렸으나, 켈파의 말에 묻혀 다른 사람의 귀에 들리지는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야. 난 단지.... 요즘에는 일거리도 별로 없고.... 게다가 아버지는 내가 수행을 나간다고 하면 오히려 돈까지 쥐어주며 보내 주실 꺼야. 그러니까.... 나도 함께 가 줄게." 켈파의 말에 오이니아는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켈파! 정말 고마워." 그때, 피아텔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 "나도 함께 가 줄게. 나도 요즘 꽤 한가한 편이니까." 켈파가 곁에서 찬성했다. "피아텔이 함께 간다면.... 나보다 훨씬 도움이 될 꺼야. 검술 솜씨도 나보다 훨씬 뛰어나고.... 게다가 세상 경험도 꽤 있는 편이고...." 켈파의 말에 피아텔은 살짝 웃었다. 하지만 겸손의 말을 하지 않았다. 워낙 친한 사이여서 그런 것을 생략하고 있는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이렇게 되어 버리자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레 테리트론에게로 향했다. 테리트론은 그때까지 다리를 꼬고 두 팔을 엇지른 채 의자에 푹 파묻혀 앉아 있다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한차례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칫.... 어부의 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인 줄 알아? 켈파, 이 멍청아. 일거리가 없기는 왜 없어? 이제 곧 겨울이다. 나무꾼이 지금 이 계절에 할 일이 없다면 언제 일이 있다는 거냐? 피아텔, 이 빌어먹을 녀석. 네 녀석은 한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의 아들이라는 놈이 막 추수철이 끝나 할 일이 태산같은 이때에 여자 꽁무니를 쫓아 빈둥거리겠다는 거냐?" 이윽고 터져나온 테리트론의 말은 모두에게 의외였다. 오이니아는 놀라 입을 살짝 벌렸고, 피아텔은 안색이 약간 붉어졌으며, 켈파는 고개를 푹 숙였다. 뒤이어 테리트론이 입을 열었다. "좀 그럴싸한 핑계를 좀 대봐라. 그냥, 오이니아, 넌 우리의 친한 친구니까, 네가 하려는 일은 우리의 일이야. 그러니까 할일 제쳐두고 도와줄게. 이렇게 말이다. 오이니아. 나도 함께 간다." 이 테리트론의 마지막 말에 오이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고, 곁에서 바라보던 시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피아텔은 약간 구겨져 버린 자신의 체면을 피기 위해 헛기침을 한차례하며 오이니아를 향해 미소지었다. "테리트론의 말 그대로야." 켈파도 뒤따라 말했다. "나도...." 모두의 말에 오이니아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좋아.... 그러면, 어서 너희들 부모님께 허락을 맡으러 가자." 이렇게 말하며 오이니아는 일행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기다려 주세요. 모두들 집이 가까우니 한 두 시간 내에 돌아볼 수 있을꺼에요.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집사를 불러 주시고요." 일행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흡사 물이 빠져나가듯, 네 사람이 동시에 밖으로 나가 버리자, 응접실은 순간 싸늘한 바람이 불기라도 하는 듯 조용해 졌다. 그때 모라이티나가 웃으며 란테르트를 향해 말했다. "서두는 모습까지 10년전의 당신과 똑같군요...."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의 말에 쓰게 웃을 뿐이었다. 용병의 손녀 오이니아와, 소영주 피아텔, 어부 테리트론, 그리고 나무꾼 켈파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헬튼 성으로 향했다. 헬튼 성은 해안 언덕 위에 놓여있는 자피토 가의 저택보다 조금 떨어진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경치가 빼어나기로 이름난 이곳은, 종종 헬튼 자작가문이 속해있는 대 영주인 에디엘레 공작 가의 사람들이 휴양차 들리는 경우까지 있었다. 헬튼 영주는 아들의 청을 그 자리에서 수락해 주었다. 그뿐 아니라 이들 일행에게 말을 제공해 주고, 모든 여행경비를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까지 이야기했다. 워낙에 오이니아의 할아버지와 친하게 지냈던 데다가.... 이번 일의 책임이 자신에게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이니아는 영주의 호의에 눈물을 한차례 쏟았다. 고맙다는 말은 수십 차례나 되내였고, 영주는 계속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위로해 주느라 진땀을 뺐다. 영주의 성을 벗어나 이번에는 해안가로 향했다. 테리트론의 집은 부둣가에 있었는데, 허름한 판잣집에 문 앞에 그물이 치렁치렁 널어져 있는 것이 확실히 어부의 집이었다. 이곳에서 테리트론을 제외한 다른 세 사람은 몸둘 바를 모를 정도였는데.... "비러먹을. 이 노인네가 왜 헛소리야? 60도 안돼서 벌써 노망이야?" 이건 테리트론의 외침이었다. "노망? 이 싸가지 없는 자식! 그게 애비한테할 소리냐? 건방진 자식아. 내가 좋은 말로, 수행 잘 다녀 오거라, 라고 말하지 않았냐?" 이것은 테리트론의 아버지가 내뱉는 말이다. "이봐 노인네. 아직도 그 망상을 버리지 못한 거야? 인간이 좀 성실하게 살아." "그게 왜 망상이냐? 네 녀석의 그 혓바닥 굴러가는 꼬락서니를 봐라. 그렇게 술술 돌아가는 혓바닥을 조금 다른 곳에 사용해 마법을 익히라는데 뭐가 망상이냐? 망상은!" "우리 집 돈 많아? 비러먹을! 마법 학교에 입학하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알기는 하는 거야? 마법이라는 것이 주문만 주워 듣는다고 그냥 익힐 수 있는 줄 알아? 모르면 잠자코나 있어." "내가 뭐 너 잘못되라고 이런 말 하는 거냐?" "시끄러. 그딴 말 들어서 내가 잘될 건 또 뭐야? 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봐. 내가 마법사가 된다고 까불대면 뜯어 말려야 하는 게 아버지라는 인간이 할 일인데, 어떻게 이 사람은 배에 헛 바람만 잔뜩 들어서." "이 얼어죽을 놈!" "아, 됐어. 시끄러. 난 아무튼 한 몇 달 나갔다 올 테니까, 집이나 잘 지키고 있어. 쓸데없이 노름이나 계집질 같은 거 해서 돈 날려먹지 말고." "내가 언제 그런 적이 있냐?" "벌써 잊었어? 반년도 안된 일이구만. 작년에...." "알았다.... 비러먹을 녀석. 그만 둬라. 제길.... 이건 아들 자식놈 하나 키워놨더니.... 조금 컸다고 바락바락 대들기나 하고....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딸년이나 키우는 건데...." "쳇. 술집에 그 레이나 년인지 하는 년을 딸로 입양하지 그래? 꽤 친해 보이던데. 뭐 좋겠네. 매일매일 집에서 같이 술을 마실 수도 있고. 헤헤해." "당장 꺼져버려! 꼴도 보기 싫다. 차라리 나가서 칵 돼져버려라." "핫핫. 나도 바라는 바이네요. 그럼 갔다 올게." 뭐, 대강의 대화 내용이다. 굳이 동작이나 표정을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이러한 상황을 곁에서 지켜보는 테리트론의 세 친구들의 심정이라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이니아 피아텔, 그리고 켈파는 두 사람의 싸움 와중에 슬쩍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막 밖으로 나오는 테리트론을 향해 이렇게 한마디씩 했다. ".... 지난번 보다 훨씬 화려하군." 이건 피아텔의 말이었고, "그.... 그럼 허락은 맡은 건가?" 이건 켈파의 말이었다. 그리고 오이니아는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그마한 한숨을 한차례 내쉬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그때 집안에서 테리트론의 나이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이니아 아가씨. 드라이토씨의 죽음에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이를 먹으면 헤어지는 것이 당연하답니다." 오이니아는 그의 말에 감사를 표했다. "위로 감사드려요.... 제가 테리트론을 잘 설득해 꼭 훌륭한 마법사가 되도록 하겠어요." 오이니아의 말에 테리트론은 "쳇...." 하면서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켈파가 말리는 통에 입을 다물었다. 일행은 마지막으로 켈파의 집으로 찾아갔다. 켈파의 아버지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터프한 사내였다. 하지만, 오이니아에게 있어서는 꽤 다정한 편으로.... "드라이토씨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네. 쯧쯧.... 마을의 훌륭한 어르신이었는데...." 라고 오이니아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오이니아는 그의 말에 감사를 표한 후, 자신들이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켈파의 아버지 다르크는 오이니아의 말에 하하, 하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며 켈파의 어깨를 강하게 내리쳤다. 조그마한 몸집의 켈파는 그 매서운 손놀림에 한차례 휘청 했으나, 아프다는 소리 한차례 하지 못하였다. "하하핫! 그래 잘 생각했다. 암! 그래야 사내지. 그래, 가서 수행 열심히 쌓고 오너라. 너희들 모두 열심히 수련을 쌓아서, 당대 최고의 용사들이 되는 거야. 피아텔 너는, 대륙 최강의 검사가 되고, 테리트론 너는 대륙 최고의 마법사가 되고, 내 아들은 대륙 제일의 기사가 되고, 그리고 오이니아는.... 오이니아는...." 그러고 보니, 오이니아는 할 줄 아는 것도 없었고, 무얼 하고 싶어하는지도 몰랐다. 다르크는 잠시 고민에 빠졌고, 그때 테리트론이 입을 열었다. "대륙 제일의 음유시인." 다르크는 테리트론의 말에 다시 한차례 하핫 하고 웃었다. "맞아. 오이니아는 대륙 제일의 음유시인이 되는 거야. 하하하! 음유시인!" 켈파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과연 음유시인이 무얼 하는 사람인지는 알고 있는지.... 그것조차 불분명하다. 모두들 다르크에게 작별인사를 한 것은, 거의 30여분에 이르는 다르크의 장광설을 들은 후였다.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그렇게 한참동안 떠든 후, 조용히 돌이켜 그가 한 말을 정리해 보면, 아주 간단했다. 수행을 해서 대륙 최고가 되거라.... 모든 일을 마치고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던 도중, 오이니아는 돌연 한가지 사실에 생각이 미치었다. "테리트론. 왜 내가 음유시인이야?" 테리트론이 당시 그런 말을 했을 때, 오이니아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었으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노래를 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다지 썩 빼어난 편은 아니었고.... 게다가 악기라고는 간신히 다룬다, 라고 밖에는 이야기 할 수 없었다. 가장 자신 있는 것은 요리였으나, 그건 음유시인과는 상관없는 능력이다. 그녀의 물음에 테리트론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니까. 어차피 음유시인 녀석들이나 너나, 싸움이 나면 구석에 숨어 눈을 데굴데굴 굴려 싸우는 모습을 기억하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잖아?" "...." 오이니아는 순간 내가 왜 이 괴물에게 이것을 물었을까 하고 후회하는 찰나, 피아텔과 켈파라는 훌륭한 원군(?)이 곁에서 한마디씩 했다. "오이니아는 목소리가 곱잖아.... 그러니까...." 언제나 말끝을 흐리는 켈파가 이렇게 말했고, 뒤이어 피아텔이 한마디 보탰다. "게다가 마법을 조금 더 공부하면, 주가라는 것을 익힐 수도 있다고 들었어. 주문을 노래 형식으로 만들어 노래를 통해 마법력을 이끌어 내는 것인데.... 비록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오이니아는 이 두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임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돌연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치밂을 느꼈다. 이런 친구들이 곁에서 도와준다면....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노력한다면.... 과거 그 유명했던 마왕 크림슨 아이즈라 하더라도 무찌를 수 있을 꺼야!" 오이니아의 이 외침에 모두들 환히 웃었다. 일행은 늦가을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마왕 크림슨 아이즈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질녘, 드라이토 노인의 무덤이 완성되었다. 오이니아가 집에 돌아오자 마자 자피토 가문의 건장한 하인들 몇몇이 힘을 합쳐 땅을 파냈고, 전날부터 제작해 아침나절에 완성된 나무 관을 드라이토의 집으로 삼았다. 비석을 세우고, 글자를 파고.... 위대한 용병이자, 마을의 훌륭한 지도자. 이것이 드라이토의 주검에 부여된 수식어이다. 첫눈이 내려도 이상치 않을 11월 중순에 막 접어든 이 때 이 날의 저녁. 오이니아는 다시 한차례 눈물을 쏟았다. 왜 슬픈 지도 모르겠다. 단지.... 두달 전과 마찬가지로, 단지 헤어졌을 뿐인데.... 드라이토 노인이 영주의 일을 맡아 마을을 떠났을 그때와 마찬가지로 단지 헤어졌을 뿐인데.... 그때는 지금처럼 하염없는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었는데.... 오이니아는 울다 지쳐 실신해 버렸고, 그런 그녀를, 모라이티나가 부축해 안으로 옮겼다. 모두들 이렇게 침울하고 우울한 하루 저녁을 보냈고, 다음날 오후나 되어서야 어느 정도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았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정상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이날 출발하겠다는 당초의 계획은 완전히 어긋나 버렸다. 일단, 시간이 이미 늦어버린 데다가, 이런 저런 챙겨야 할 짐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모두들 마을을 벗어날 준비를 완전히 끝냈다. 란테르트를 포함한 네 사람이야 이미 여행 중이였으니, 건량을 약간 구입하고 몇몇 소모품을 사들인 것을 제외하고는 이 피치토 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대로였다. 다른 네 사람은 상점에서 구입하고, 집에서 챙겨오는등 이런 저런 물건들을 헬튼 영주가 빌려준 말 위에 실었다. 이 네 풋내기들 중 그래도 가장 필요한 물건들을 제대로 챙겨온 사람은 켈파였다. 아무래도, 아버지를 따라 깊은 산 속에서 며칠을 보내기도 했던 그였기에 노숙에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꽤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오이니아의 경우에는, 모라이티나가 세심히 이런 저런 물건들을 챙겨 주었다. 오이니아는 이 상냥하고 아름다운 언니와 이미 상당히 친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물건들을 챙기며 그녀의 섬세함에 상당히 감탄하고 있었다. 피아텔의 경우에는 성안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물건들을 챙겨왔다. 말도 일행 중 가장 화려했고, 검도, 갑옷도, 망토도, 가방도, 그리고 담요까지도 일행 중 가장 깔끔했다. 게다가 모두 새로 장만한 것이라 번쩍번쩍 했다. 문제는 테리트론이었다. 이 황당한 인간은, 단 두 가지 물건을 챙겨왔다. 하나는 낚시도구요, 다른 하나는 담요였다. 물론 몇 가지 갈아입을 옷가지를 가져오기도 했으나,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것들로 힘든 노숙생활을 견디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모습에 켈파가 조심스레 물었다. "테리트론.... 그것만으로 괜찮겠어?...." 테리트론이 오히려 되물었다. "뭐가 또 필요하지? 먹고 잠을 잘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그만 아닌가?" 피아텔이 한마디했다. "하다못해 호신용 단검이라도 준비해야지. 그리고.... 넌 마법을 공부했으니까, 마법 지팡이 하나라도 준비한다거나.... 게다가, 곧 겨울이 닥칠텐데.... 그 얇은 담요 한 장으로 괜찮겠어? 식기도 없고." 피아텔의 말에 테리트론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쟁도 끝났고, 산적들도 크게 줄었다. 상업로만을 따라 여행한다면 단 한차례도 싸울 일이 없을 텐데 무기는 무슨 무기야? 게다가 내가 단검을 든다고 뭐가 달라지지? 마법 지팡이? 겨우 화염구 하나 할 줄 아는 마법사 따위가 지팡이가 있다고 뭐가 달라져? 추위? 뭐, 추우면 켈파나 너를 껴안고 자면 될꺼고.... 밥그릇이야 네 녀석 꼴을 보니까 남는 것 한 두개쯤 있을 것도 같은데?" 그의 말에 피아텔은 더 이상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했고, 그때 시나가 한차례 웃었다. "오호호. 정말 계획 없이 사는 꼬마로구나." 그녀의 말에 일행 모두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정작 본인은 별 표정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지...." 모두 여덟 기의 말이 마을을 벗어났다. 피아텔을 따라 오겠다던 2명의 기사를 마을 입구에서 억지로 떼어 놓은 지도 어느덧 한시간 가까이 흘렀다. 이 정도면 완벽한 오합지졸이었다. 란테르트는 가장 뒤에서 모라이티나와 함께 천천히 말을 몰며 일행 모두를 돌아다보았다. 하나같이.... 풋내기들이었다. 시나와 로인 같은 초행자들이 오히려 숙련자처럼 보일 정도로.... 란테르트는 순간 이러한 느낌을 받았다. "후훗.... 꼬마들 소풍가는 모습이군...." 곁에서 모라이티나가 가벼이 웃었다. "호호, 우리는 인솔교사 인가요?" 란테르트는 쓴웃음으로 그녀의 말에 응대했다. 마을을 떠나온 지도 어느덧 2일. 사람이 많으니 시끌벅적 했다. 대강의 관계를 추려보면.... 인솔교사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 이들은 가장 뒤에 서서 모두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최 연장자 시나. 그녀는 테리트론과의 말싸움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테리트론도, 시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즉각 해서 입을 여는 성격인데다가, 말싸움에서 상대에게 지는 것을 상당히 싫어하는 터라 둘 사이의 말싸움은 그치지를 않고 있었다. 로인은 켈파와 함께 거의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성격이 비슷한 점이 많은 이 두 사람은 말을 해야 할 때가 아니면 결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오이니아는 조금 혼란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는 것이 조금 종잡을 수가 없었는데.... 아마도, 여행이라는 것에서 오는 흥분과 기대감, 그리고 막연한 두려움이, 할아버지를 잃었다는 슬픔과 절망감 등과 뒤섞여 정서가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딱히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피아텔의 경우에는, 흡사 자신이 일행의 리더라도 되는 양 행동하고 있었다. 하긴.... 그럴 만한 리더십 정도는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언제나 쉬어야 할 곳을 그가 결정했는데, 그 쉬어야 할 시기나 장소 등등이 그럭저럭 적절한 것이기에 란테르트는 잠자코 그가 하자는 데로 해 주었다. 오이니아, 피아텔 그리고 켈파 이 세 사람은 지금 가장 앞에서 말에 몸을 실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복수는 우리의 손으로 직접 해야 해." 오이니아의 말이었다. 그녀의 말에 피아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아, 오이니아. 룬의 기사 님들.... 그분들에게 도움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적어도 우리가 주축이 되어 일을 해야만 해." 켈파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고, 오이니아는 그런 그의 태도가 약간 불만스러워 다그쳐 물었다. "켈파의 생각은 어때?" 오이니아의 물음에 켈파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런 게.... 옳은 걸까?" 오이니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그 모습에 켈파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드라이토 님은.... 훌륭하신 분이야.... 나도 그분이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신 사실이 몹시 마음 아파.... 하지만.... 꼭 오이니아 네가 이런 식으로 해야만 하는...." 오이니아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런 말은 그만 둬. 원치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마을로 돌아가." 켈파가 성급히 말했다. "아니야.... 난.... 너를 도울 꺼야.... 하지만...." 다시 오이니아가 말을 끊었다. "내 마음을 알기나 해? 난.... 엄마 아빠도 여렸을 때 잃었어.... 그것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이름모를 누군가에게.... 그리고 지금 다시 할아버지를 잃었어.... 난 복수하고 말 꺼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힘들더라도.... 왜 언제나 나는 사랑하는 사 람들을 잃어야 하고.... 상대는 멀쩡히 살아 있어야 하지? 그런 건 용서할 수 없어!" 곁에서 피아텔이 한마디 보탰다. "켈파. 오이니아의 심정을 이해 해야해. 물론 힘든 길이겠지만, 우리는 그녀의 좋은 친구잖아? 이럴 때 돕지 않는다면, 더 이상 친구라고도 할 수 없지." 켈파가 황급히 대꾸했다. "돕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야.... 다만...." 오이니아가 다시 그의 말을 끊었다. "됐어.... 그만 둬...." 오이니아는 더 이상 켈파가 있는 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평소에도 그랬다. 켈파 그는 언제나 자신이 무슨 일을 하려고만 하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말렸었다. 한편, 이들의 이런 냉기류와는 상관없이.... "꼬마야. 그러니까 마법이라도 공부해 두어야 할거 아냐?" "아줌마, 사람은 분수를 알아야 해 게다가, 아버지가 바라는 것이라면 무조건 싫어. 그런 한심한 인간...." 시나와 테리트론은 한창 말싸움 중이었다. "그건 그다지 논리적인 태도가 아니야. 비록 화자에게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그 사람의 말에까지 확대시켜서는 안돼." "그런 어려운 말은 난 무식해서 몰라. 어찌되었건, 난 마법 같은 건 익히고 싶지 않아. 게다가 마법이 무슨 소용이지?" "무슨 소용이냐니?" "생각해 봐. 지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무사들을. 그중 누가 마법사지? 없잖아. 4대 개국 공신들도 모두 검사들이야. 물론, 마검사도 있지만, 아무튼 검이 주축이지." 테리트론의 내뱉듯이 하는 말에 시나가 다시 말했다. "위다의 현 왕이신 세르테이나 님도 훌륭한 마법사야. 한때, 성녀라고 불리우셨을 정도로 회복마법에 뛰어나시지. 게다가, 마법을 열심히 익히면 적어도 어부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수 있어." "마법을 익혀서 소피카에게 묵사발 났군. 게다가 어부는 또 어때서?" 테리트론의 대꾸에 시나는 돌연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었다. "넌.... 어부일을 하는 게 정말 좋은 거야?" 돌연 그녀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자 테리트론은 잠시 머뭇거렸다. "몰라.... 하지만.... 난 말이지.... 헛된 꿈을 쫓아 단지 높은 곳을 향해 부나방처럼 몰려가는 인간을 증오해. 어부 일이 특별히 좋다기 보다는.... 단지 그런 인간이 되고 싶지 않을 뿐이지." 시나가 다그치듯 물었다. "뭘하고 싶은지는 생각하고 있는 거야? 단지 이것이 싫어 저것을 한다, 따위로 앞일을 미리 결정해 버린 거야?" 테리트론은 순간 무어라 대답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고, 시나는 훗 하고 한차례 웃었다. "완전 단순 바보 아냐." "그게 무슨 말이야?" 한편 로인은 시나 곁에 조용히 있었다. 시나와 테리트론의 유치한, 물론 종종 상상 이상으로 수준 높은 대화가 오가기도 하지만, 그런 대화에 끼여들 수 도, 그렇다고 친하지도 않은 앞의 세사람 사이에 끼기도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 둘 사이에 간섭해 방해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두 사람의 말싸움을 들으며 종종 웃고, 또 생각하며 길을 갈 뿐이었다. 어느덧, 피아텔의 가문인 헬튼 가의 실 수도인 헬튼시에 도착했다. 피치토 마을에서 40휴하쯤 남쪽으로 떨어져 있는 이 도시는 전쟁이 끝난 후에 상당히 번창해 10년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곳이 헬튼이구나...." 도시에 들어서며 가장 앞열에 있던 켈파가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18살이나 되도록 고향인 피치토를 단 한차례도 벗어난 적이 없는 그로써는 이렇게 커다란 도시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한 마을에 눌러 살기에는 테리트론도 마찬가지 였으나, 성격이 성격이니 만큼 그다지 겉으로 드러내 놓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고, 그 모습에 시나가 한마디 내뱉었다. "촌스럽기는. 겨우 이 정도 도시에 눈이 휘둥그래 지는 거야?" 테리트론은 왠지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바로 쏘아붙였다. "그런 건 아니야. 다만.... 우리 마을과 어떻게 다른가를 한차례 살필 뿐이지." "그게 그거잖아." 시나는 곧바로 되받아 쳤고, 테리트론은 전적에 또다시 패를 하나 더 쌓았다. 도시에 들어서자 마자 피아텔은 오이니아에게 이곳 저곳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헬튼은, 피아텔의 집이 위치하고 있는 피치토 다음으로 그가 오래 머물렀던 곳이기에 지리에 훤했다. "여기가 바로 중앙로야. 헬튼 애비뉴라고 부르지. 저 건물이 시청이고, 저건 이 마을에서 태어난 유명한 무장 샤르망스의 동상이고, 동상 근처의 공원은 샤르망스 공원이라고 부르는데, 낙엽이 지는 지금이 가장 아름다울 때야." 피아텔의 말대로, 공원은 온통 금색과 홍색의 나뭇잎으로 뒤덮여 있었고, 오이니아는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피아텔의 소개에 따라 근처를 바라보았다. "피아텔은 좋겠다.... 이런 훌륭한 도시의 주인이라니...." 오이니아는 감탄 어린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녀 역시 피치토 마을은 거의 벗어난 적이 없었고, 그 점에 있어서는 켈파나 테리트론에 비해 조금도 나은 바가 없다. 로인의 경우에는, 근 한달 정도의 시간 동안 적지 않은 대도시를 거쳐왔기에 이 정도의 도시에는 그다지 동요가 없었고, 시나의 경우에는 대륙 전체에서 가장 큰 도시인 위다의 수도 카타에까지 몇 차례 들려본 만큼 이런 도시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런 조그마한 도시에 무슨 잘난 척이 그렇게 심해?" 시나는 앞에서 주저리주저리 하수도 하나 까지 설명해 대고 있는 피아텔의 뒤통수에 내뱉듯 이렇게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피아텔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그마한 도시? 사람이 2만명 가까이나 모여 사는 이 도시가 작다고?" 오이니아가 한마디 보탰다. "맞아. 우리 피치토 마을은 겨우 500명 남짓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 뿐이야." 두 사람의 말에 시나는 한차례 웃음을 터트렸다. "후훗. 그러니까 거기는 마을이고 여기는 도시지. 카타성은 이제 인구가 거의 20만에 육박해. 하다못해,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빅팀 시만 해도 인구가 거의 10만에 달하잖아?" 로인은 곁에서 또 시작이군.... 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시나와 피아텔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로인은 저 앞에 있는 피아텔인지 하는 남자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일전에, 로인의 우상인 란테르트를 나쁘게 말하는 것도 그렇고, 그 이후로의 행동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시나가 그와 말다툼을 벌일 때면 은근히 통쾌한 느낌이 들었다. 시나가 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니 말이다. 시나는 보기보다 아는 것이 굉장히 많은 편이다. 물론 의외의 것을 모르는 경우가 종종 생기기는 하지만.... 피아텔은 시나의말에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그런 대도시에 비교한다면 그렇지만.... 중소 도시 중에 이 정도 규모면 그다지 작은 편은 아니야." "바보 같은 소리하고 있네. 소도시라면 몰라도, 중형 도시까지 집어넣으면 이런 건 마을이라 불려도 할말없어." 그때, 켈파가 조용한 목소리로 앞에서 한마디했다. "그만 둬요. 피아텔은 이곳 헬튼을 몹시 좋아하고 있어요. 좋아하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야 당연하잖아요...." 켈파의 말에 시나는 더 이상 피아텔을 괴롭히지 않았다. 로인은 이 모습 또한 언제나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저 켈파라는 남자.... 순하고 약간은 내성적인 것이 그다지 말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시나는 그의 말이라면 왜인지 순순히 물러나 버린다. 언제나 툭툭 내뱉으며 말하기를 좋아하는 테리트론에게도, 아는 것이 많아서인지 유창하게 이런 저런 말을 해대는 피아텔에게도 결코 지지 않는 시나의 말솜씨도 켈파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피아텔은 테리트론을 이기지 못하고, 테리트론은 시나를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시나는 켈파에게 약하지만, 켈파는 오이니아를 비롯한 자신의 친구들 어느 누구와 비교해서도 말솜씨가 떨어진다. 이런 것을 한차례 정리해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를 짓는 로인이었다. 헬튼시에서 일행은 여관을 잡은 후, 여관 1층에 있는 식당겸 주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피치토 마을에서 이곳 헬튼까지는 변변한 마을이 없다. 그 덕에 일행은 마을을 벗어난 이래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음식과 잠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수행에 여덟 명이라면 확실히 많은 수이다. 물론, 때에 따라서,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는 이 이상의 인원이 함께 다니는 경우도 많으나, 지금처럼 단지 에노사의 북부에서 소피카의 남부까지 단지 이동하기만 하는 이러한 여행치고는 많은 인원이다. 게다가.... 이건 하나의 파티도 아니었다. 오이니아와 켈파, 그리고 피아텔, 테리트론, 이 네 사람이 이루고 있는 하나의 집단과,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 시나, 로인의 네 사람으로 이루어진 다른 하나의 집단, 이렇게 둘로 나뉘어 있는 것이다. 이럴 때는 한 명 확실한 리더가 나와 주어야 하는데.... 피아텔은 로인과 시나가 인정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란테르트는 물론 '상관없다' 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를 리더로 인정할 만한 이유는 단 한가지도 없었다. 란테르트의 경우에는 반대쪽에서 인정하지 않는다.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늙은(?) 마검사 따위가 무슨 권리로 자신들을 통솔하겠는가? 약간은 위태위태한 파티지만.... 상관은 없다. 산적 만나기가.... 그리고 마물을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운 이 시절에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종종 전후에 할 일이 없어져 버린 용병들이 말썽을 부리기도 했으나, 그것도 요 3년 사이에는 거의 없어져 버렸다. 일행이 자리를 잡고 몸을 편하게 하는 사이 웨이트레스가 깔끔한 메이드 복을 입고 다가와 메뉴 판을 내려놓았다. 아마도 이것 정도가 도시와 마을의 주점에서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조그마한 마을에 종종 눈에 띄는 이런 펍에서는 왠 우락부락한 장정이 바를 지키며 걸걸한 목소리로, 무얼 드시겠소? 라고 물어온다. 하지만, 도시라면 상황이 다르다. "무엇을 주문하시겠어요?" 예쁜 웨이트레스가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행은 각자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문했다. 개중 술을 주문한 사람도 있었는데.... "독한 놈으로 아무거나. 한잔." 테리트론이었다. 그는 술을 한잔 주문한 후 고개를 돌려 로인과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애들은 떼어놓고, 한잔씩 어때요?" 그 말에 로인은 잠시 란테르트의 눈치를 살폈다. 마시고 마시지 않고를 떠나 삼촌의 의향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이 결정을 한다는 것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로인은 테리트론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을 했다. "전 그냥 맥주로 하겠어요." 란테르트 역시 같은 것을 시켰고, 모라이티나는 북부지방에서 꽤 유명한 틸 열매로 만든 과일 주를 한잔 주문했다. 그때, 다시 테리트론이 한 사람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줌마는?" 그의 물음에 시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지금까지 단 한차례도 마셔본적 없다. 아니.... 한 번 있었다. 언젠가 파티 장에서 적포도주 한잔을 마셨는데.... 그 후로 기억이 없다. "어라? 안 마시려고? 술을 못하는 모양이군! 역시 아줌마는 세련이나 엘레강스와는 거리가 멀다인가?" 테리트론의 도발에 시나는 발끈했다. 하지만.... 흥분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우아한 것과 술과 무슨 상관이야?" "글쎄.... 물론, 술을 마신다고 우아해 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아한 귀부인이 술을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어? 봐, 여기 너보다 한 두배쯤 우아해 보이고 아름다우신 모라이티나 님께서는 그 우아함과 어울리는 붉은 과일 주를 시키셨잖아?" 전혀 논리가 부족한 말이지만.... 시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충분했다. "흥. 저도 틸 주 한잔이요!" 웨이트레스는 웃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이윽고 주문했던 음식들이 각자의 앞에 자리를 잡았고, 일행은 저녁을 들기 시작했다. 식사를 거의 끝낼 무렵이었다. 돌연 옆자리에 있던 한 사내가 몸을 반쯤 돌려 팔을 의자 등받이에 걸친 채 이쪽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여행자들 같은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소." 사내는 대뜸 이렇게 말을 했다. 약간 무례한 듯도 하지만, 원래 주점이라는 곳이 그런 곳이니 만큼 모두들 개의치 않고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에 란테르트가 한마디했다. "상관하지 말아 주십시오." 사내는 얼음장같은 그의 목소리에 순간 몸이 떨려옴을 느꼈다. 목소리의 주인공에 대한 호기심에 란테르트를 바라보았고, 그 붉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다시 한 번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 그럼.... 그만 두기로 하지요...." 그는 말까지 더듬으며 이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테리트론이 그를 만류했다. "뭐예요? 한 번 이야기나 해 봐요."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가 하려는 말에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고, 란테르트는 더 이상 그에게 무어라 하지 않은 채 잠자코 그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사내는 커다란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으흠.... 헬튼에서 서남쪽으로 15휴하쯤 내려가면, 던젼이 하나 있습니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그의 물음에 모두들 고개를 가로 저었고, 피아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글쎄요.... 그곳은 헬튼 영지 밖이니...." 그들의 말에 그 사내는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던젼은 오래 전에 완전히 탐사가 끝난 폐 던젼입니다. 하지만, 저희 상사에서 갖은 노력 끝에 훌륭한 던젼 탐사 장으로 개조를 마쳤습니다. 아마추어 모험가, 그리고 초보 수행자들, 아! 물론 중급 수행자들을 위한 코스도 있습니다." 사내의 말에 란테르튼 안 그래도 아직 어색한 왼손으로 쥔 포크를 접시 위에 떨어뜨렸다. "던젼 탐사장?" 란테르트가 되물었고, 곁에서 모라이티나가 살짝 미소 지으며 대꾸해 주었다. "전후에 생겨난 사업이에요. 폐 던젼이나 폐광 따위를 개조해 탐사장으로 만드는 거지요. 곳곳에 안전을 관리하는 솜씨 좋은 용병들이 대기하고 있고.... 그 안에 살고 있는 괴물의 수와 종류 등을 관리 하는 것이죠. 초급자들이 수련을 쌓기에는 상당히 좋아요." 모라이티나의 설명에 란테르트는 잠시동안 멍하니 있었다. 무슨 이런 멍청한 물건이 다 있다는 말인가? 사내의 말은 계속되었다. "게다가, 지금은 개업 1주년 기념으로 가장 아래층까지 도착하는 손님들께 특별 선물도 드리고 있어요. 에노사의 명장 케롯 가문의 검이나, 에노사의 유명한 마법사 가문인 디도가의 마법사 지팡이, 이외에도 몇 가지가 있는데.... 이것들 중 택 1입니다." 테리트론이 물었다. "그래서, 1인당 얼마죠?" 사내가 테리트론의 말에 웃으며 말했다. "예. 1인당 500하르. 이벤트에 참가하시겠다면, 20하르 추가입니다." 테리트론의 목소리가 날카로워 졌다. "500? 장난쳐? 500이면 우리 집 반달치 수입이야!" 사내는 조그마한 녀석이 시비조로 나오자 순간 발끈 했으나, 저쪽에 앉아있는 백발의 남자의 시선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리고, 손님을 끌어야 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기에 잠자코 미소를 지었다. "단체 할인도 됩니다. 4인이상 참가 시에는 1인당 50하르씩 깎아드립니다. 여기 여덟 분이면.... 3600하르. 이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3일 동안 굉장한 수련을 쌓으실 수 있습니다." 그의 말에 일행은 잠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란테르트가 보니, 모두들 굉장히 하고싶은 눈치였다. 그때, 피아텔이 오이니아에게 물었다. "오이니아. 네 생각은 어때? 몇 일 이곳에서 수행을 쌓는 것에 대해?" 오이니아는 머뭇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이대로 어서 두 룬의 기사들에게 가고 싶었다. 하지만.... 몇 일전 피아텔과 이야기 한 대로, 복수는 자신의 손으로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행이 필요하다. 오이니아는 피아텔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스스로 리더라고 생각하고 있는 피아텔이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하겠습니다. 내일 아침 그쪽으로 가겠으니, 길 안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선택 잘하셨습니다! 결코 500하르라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5. 던젼 탐사(?) 다음날 일행은 어제 주점에서 본 그 사내를 따라 서남쪽으로 말을 몰았다. 언제나 처럼 대지는 한가로웠고, 하늘은 푸르렀다. 이제 이 북쪽지방은 날씨가 상당히 싸늘했다. 멀리 보이는 에아산맥의 정상부근이 희끗한 것이 그곳에는 이미 첫눈이 내린 모양이었다. "보면.... 볼수록 닮았어...." 아침에 출발해 어느새 점심이 지나 오후였다. 한참 말을 몰던 란테르트는 돌연 이렇게 중얼거렸고, 언제나 처럼 그의 곁에 붙어 말을 몰던 모라이티나가 그런 란테르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닮다니요? 뭐가요?" "오이니아 말이야...."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오이니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담갈색 머리칼을 한차례 높이 묶어 말의 발걸음에 따라 좌우로 살랑거리고 있었다. "그녀들과 말인가요?" 모라이티나가 물었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혀 닮지 않은 걸요. 사피엘라는.... 그녀보다 훨씬 조용한 분위기의 분이세요. 그리고 에라브레의 경우에는 그녀와는 달리 얼굴에 약간의 그늘이 느껴지고.... 제가 보기 닮은 곳이라고는 머리칼의 색과 눈동자 색 뿐인 걸요." 모라이티나가 다시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종종 오이니아가 사피엘라 같은 느낌이 들어서 펜던트를 열어 볼 때면.... 그녀와 완전히 다른 모습의 사피엘라가 미소짓고 있어. 하지만, 펜던트를 닫아 버리면.... 다시 오이니아가 그녀처럼 느껴져."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모라이티나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모라이티나는 그의 미소를 따라 미소지을 수 없었다. "지나치게 예민해 지셔서 그래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여행한 적도 없잖아요. 신경 쓸 일이 많으니...."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란테르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막 그때, 오이니아는 밝은 웃음을 웃고 있다. 란테르트는 다시고개를 돌려 모라이티나를 바라보았다. "그보다.... 그 던젼인가 하는 곳.... 안전하겠지? 난.... 지금 세명이나 지켜주어야 하잖아."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란테르트가 지키지 못할 리가 없잖아요. 원래 이 던젼 탐사장은 초보자나 경험 미숙자들을 위한 곳이에요. 일종의 공원 비슷한 것으로.... 전혀 걱정 같은 것은 할 필요가 없어요." 란테르트는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어떤 곳인지에 관해서는 대강 감이 잡혔으나.... 이러한 것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란테르트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모라이티나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간단하게 생각하세요. 견습기사나 견습 용병들을 위한 훈련소가 있잖아요? 그것을 던젼 형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에요. 상대가 숙련된 기사나 용병이 아닌 진짜 마물이나 괴물들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죠. 그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약간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는 것이고요." "모라이티나도 들려 봤어?" 란테르트가 물었고, 모라이티나는 볼을 살짝 붉혔다. "예.... 한 번이요." 란테르트는 돌연 모라이티나가 볼을 붉히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볼이 빨개지는 거지?" 란테르트의 물음에 모라이티나는 한 손으로 발그레해진 볼을 감쌓며 답했다. "아!.... 그 안.... 완전히 어린아이들 놀이터 같아요. 초급 코스 같은 경우는.... 로인이나 시나 정도 실력이면 충분하고.... 중급 코스나 고급 코스라도.... 그냥, 왠지 그런 곳에 갔다 왔다고 생각하니.... 창피한 생각이 들어서요." "그 정도야?" 란테르트가 물었고, 모라이티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일단, 그 안에 마물을 잡아넣어야 하는데.... 보통의 용병들이 산채로 잡아올 수 있는 몬스터의 수준이라는 것이 한계가 있으니까요." 란테르트도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죽이는 것과 사로잡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수준의 차 라는 것이 존재하니 말이다. 그럭저럭 그 던젼 탐사 장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만들어진지 1년밖에 안되어서인지 시설은 아직 깨끗해 보였다. 던젼 탐사장이라고 크게 써 붙인 푯말이 하나 있고, 그 뒤로 검은 입을 크게 벌린 인공 동굴의 입구가 눈에 띄었다. 근처에는 사람들이 묶을만한 여관 비슷한 것과, 흡사 무슨 특별 이벤트가 있는 마을처럼 수많은 노점상들이 즐비했다.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모두들 무기를 한 개쯤 몸에 지니고 있는 모습이 용병이나 검사, 혹은 기사, 전사 같은 사람인 듯 했다. 마법사도 종종 눈에 띄었는데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란테르트는 그 모습에 모라이티나에게 물었다. "마법사가.... 많이 줄었는데?" "그래요? 하긴.... 나라에서 은근히 마법이라는 것에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어요. 마법사의 지휘도 점차로 격하되어 가고 있고.... 하지만 그건 검사들에게도 마찬가지 에요. 국가 전체가 무력이라는 것에 알게 모르게 제재를 가하고 있어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전쟁이 끝난 이상 무력이라는 것은 통치자에게는 방해물일 뿐이다.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또다시 이곳 저곳을 구경하느라 바쁘다. 한구석에서만 편벽 되이 자라나 경험이 모자란 그들에게는 당연한 행동이었으나, 어쨌건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기에는 딱 알맞다. 처음 일행을 헬튼시에서부터 안내해온 사람은 조금 큰 목소리로 일행에게 이 던젼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 던젼의 이름은 그레즈!! 만들어진지 몇 백년이나 지난 것으로 그 규모가 이 에노사 대륙에서 두 번째로 큰 곳입니다. 총 연장길이가 50휴하(1휴하=약 1킬로미터)나되고, 중간 중간 목숨을 위협하는 트랩과 괴물들이 수도 없이 있습니다. 모두 7개의 입구를 가지고 있고, 출구 또한 4곳이나 되며, 전체적인 구조는, 지하 1층의 초심자용 코스와 지하 2층의 중급자용, 그리고 지하 3층의 고난이도 코스가 있습니다. 각 코스의 요소요소에는 여러분의 안전을 책임질 경험 많은 용병들이 지키고 있으니 그다지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난이도 코스를 제외한 다른 곳에는 독 따위를 가진 생물이나 트랩 따위는 없으니 그 점에 대해서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여섯 사람이 꽤 진지한 태도로 이런 이야기를 듣는 반면에,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는 서로 마주보며 쓴웃음을 짓기 바빴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럼, 내일 아침 일찍 입구에 데려다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그 전까지 이곳 여관에서 휴식을 취하시거나, 근처에 있는 상점에서 도구를 구입하거나 그건 여러분들의 자유입니다." 상대는 꽤나 달변으로 이렇게 읊었다. 하지만.... "자유? 비러먹을.... 누가 그런걸 몰라? 돈이 들어서 문제지...." 테리트론의 이 중얼거림과, "분명, 여관비는 따로 계산하겠죠? 역시 이런 곳에서 상도덕을 찾는다는 건 무리니까...." 시나의 이 물음으로 얼굴을 흙빛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럼 내일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 사내는 멋쩍은 표정으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마 또 다시 다른 손님을 끌러 가려는 것이리라. 하룻밤을 여관에서 보낸 후, 일행은 곧바로 그 던젼으로 향했다. 대금을 전날 지불하며 예약을 했기에 일행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돈은 충분했고, 모두들 재미 삼아 1주년 이벤트에까지 참가하기로 했다. 1주년 이벤트라는 것은, 이 던젼의 지하 3층에 있는 일정 표식을 가지고 나오는 것으로, 그것에 성공하면 여러 상품들 중 하나를 택할 수 있었다. 던젼 밖에서 그렇게 여유롭던 이들은 막 던젼 안에 발을 들여놓고, 어둠이 몸 주위를 휘감음에 돌연 입을 꼭 다물어 버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복도에 10여 휴리하(1휴리하=약1미터)마다 하나씩 희미하게 켜져있는 횃불만이 빛의 모두였으니, 순간 두려운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장 앞서 걷고 있는 것은 피아텔이었다. 확실히 어느 정도의 용기는 갖추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켈파였는데, 그는 한 손은 허리춤에 있는 검 위에, 그리고 다른 한 손은 등 부분에 있는 손도끼로 가져갔다. 그 다음은 오이니아였다. 사실 그녀는 전투력이라는 것이 전무했다. 비록 집에서여성용 소검을 하나 가지고 오기는 했으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검을 잡아본 적이 없다. 물론, 어렸을 때 할아버지에게서 아주 기본적인 몇 동작을 배우기는 했으나, 이제는 거의 잊어버린 상태였다. 그렇다고 마법을 배운 것도 아니니.... 테리트론의 경우에는 앞의 세 사람에 비해서는 그다지 진지하지 않았다. 물론, 말수는 크게 줄어들었으나, 언제나 처럼 두 팔을 엇갈려 팔짱을 꼬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바로 뒤로는 로인 이였다. 아마 란테르트나 모라이티나를 제외하고는 그래도 가장 실력 있는 사람이 바로 로인일 것이다. 어려서부터 양아버지인 바겔에게 착실한 수업을 배운 데다가.... 그에게는 확실한 목표도 있었다. 란테르트 말이다. 그만큼.... 아니 그의 마음에 들만큼이라도 솜씨를 키워 놓자.... 라는 것이 그의 목표였고, 그 덕에 상당히 성실히 검을 공부해 왔다. 시나는 로인의 뒤에 바짝 붙어 걷고 있었다. 이 아가씨는 의외의 곳에 겁이 많다. 피 냄새를 맡으면 기절을 해 버리고....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는 불안에 이빨을 덜덜 떠니 말이다. 모라이티나와 란테르트는 가장 뒤에서 걷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의 지금 심정이야말로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흡사.... 학교를 졸업한 후, 그 학교의 초급학년에 다시 입학할 때의 느낌이 이렇지 않을까? 10여분이 흐르자, 사람들 사이의 긴장은 점차로 느슨해져 갔다.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눈에 띄지 않았던 데다가, 테리트론과 시나가 입을 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얼 믿고 이벤트에는 참가 한 거야?" 이야기의 시작은 시나의 이 말이었다. 어느 사이엔가 로인과 자리를 바꿔 테리트론의 뒤를 걷던 시나가 이렇게 물었다. 다분히 앞의 네 사람을 무시하는 말투였고, 테리트론은 당연히 그에 대꾸했다. 물론, 그가 곱게 좋은 말로 답할 리는 없다. "그런 아줌마는 무얼 믿고 여기까지 따라 들어온 거야?" "당연히 란테르트 삼촌과 모라이티나 언니지." 시나가 답했고, 테리트론은 후훗 한차례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우리의 실력을 믿고.... 다. 나야 뭐 엉망이지만, 저 앞에 걷는 두 녀석은 그럭저럭 쓸만한 실력이니까. 그보다.... 역시 네 자신의 실력은 영 못 미덥나보군? 그 나이 먹도록 삼촌이나 언니에게 의지하다니." "수사 따위가 건방지다. 난 이래 보여도 매직유저야." "설마. 아줌마가 매직유저라고? 하긴.... 그 나이에 그 정도 하는 거야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긴 하지만...." 테리트론은 약간 의외라는 듯 이렇게 대꾸했고, 곧바로 시나가 그의 말을 받았다. "난 이제 마법을 공부한지 3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보다, 꼬마 넌 몇 년이나 배운 거냐?" 테리트론은 순간 대꾸하지 못하였다. 그러고 보니.... 해수로는 꼭 3년째 되는 것 같았다. 물론, 제대로 배우지 않아 실력은 지지부진.... 어찌되었건.... 같은 3년을 배웠는데.... 누구는 수사요 누구는 매직유저라니.... 자존심이 상한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였다. 드디어 일행 앞에 복도가 아닌 곳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좌우 폭도 굉장히 넓어져 생겨난 이 공간은 천연동굴인 듯 곳곳에 괴석들이 위로, 아래로 솟아 있었다. 반면 바닥은 모래였는데, 밟는 느낌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저 위쪽에 구멍이 몇 개 뚫려 있어 그 사이로 햇살이 뻗쳐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돌연 땅바닥에서 부스스 먼지가 솟아올랐다. 아마도 땅속에 숨어있는 무언가가 숨을 쉬는 모양이었다. 가장 앞열에 있는 피아텔과 켈파는 온 정신을 집중했고, 로인은 시나와 테리트론을 제치고 앞 열로 나갔다. 오이니아는 모라이티나의 손에 이끌려 뒤로 왔으며, 시나와 테리트론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마법을 준비했다. 이윽고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괴물의 크기는 대략 사람이 엎드린 정도만 했으며, 조그마한 머리와 긴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키기긱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는 이 괴물은 일행의 모습이 보이자 마자 몸에 비해 약간 커다란 뒷다리로 높이 도약을 해 막무가내로 덮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동작사이의 틈새가 커 그 움직임의 방향이라는 것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그닐그레즈...." 란테르트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초급자용이긴 한 모양이다. 란테르트는 이 그닐그레즈라는 이름의 괴물을 잘 알고 있었다. 마물이라 부르기도 못한 말 그대로의 괴물로.... 바위산이 아닌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워낙 약하고 행동이 굼뜬데다가, 한 번 땅속에 몸을 숨기고 잠이 들면 그 위로 말이 밟고 지나가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녀석이다. 오죽하면 밭가는 농부의 괭이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인가? 단 저렇게 땅속에 모습을 숨기고 있다가 튀어나와 갑작스레 몸을 날려 들어오는 공격은 상상 이상으로 힘이 있어 종종 사람을 상하게 하기도 한다. 대략 15마리 가량의 그닐그레즈가 모습을 드러냈으나, 몇 차례 폴짝 폴짝 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흥건한 붉은 체액을 쏟으며 쓰러져 버렸다. 로인과 피아텔, 그리고 켈파 이 세 사람의 검술솜씨는 확실히 이런 괴물을 상대하기에는 수준이 높았고, 시나의 마법력 역시 상당한 편이었다. 맨 처음 공중으로 솟은 그닐그레즈를 일 검으로 두 동강 내버린 로인은 바겔이 가르쳐준 용병검술을 사용해 차분히 하나 둘을 베어갔다. 용병검술은 완벽한 실전검술로, 사실 멋은 그다지 없는 편이지만 효과는 확실하다. 피아텔의 경우에는 확실히 그의 친구들이 칭찬할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화려한 검술은 자세가 바로잡혔고, 힘이 있는 것이 상당히 위력적이었다. 물론, 초보자치고는 말이다. 진짜로 이야기한다면, 로인보다 조금 아래라고 할까? 켈파의 경우에는 약간 움직임이 둔했다. 지나친 근력이 스피드를 갉아먹은 모양이다. 하지만.... 나무꾼의 힘이라는 것은 확실히 대단한 것이었다. 종종 검술이 정련되지 못하여 검날의 각이 흐트러지는 경우에는.... 괴물을 베는 것이 아니라, 부숴 버린다. 그 얇은 팔뚝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시나는 그저 매직유저가 가져야 할 능력 그대로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마법력이 그녀의 성격을 닮아 충만한 것이 그녀의 마법이 닿는 곳곳마다 화려한 얼음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지금 빙계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테리트론은 지금 화염계 마법을 사용하여 그닐그레즈를 공격하고 있었다. 확실히 일행 중 가장 의외의 인물이 바로 그였는데, 언제나 마법사가 되기 싫다, 라고 중얼거리는 주제에 마법력은 의외로 높았다. 결코 수사의 능력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매직유저인 시나와 거의 맞먹는 듯 보였다.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는 가장 뒷열에서 조용히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자신들의 도움이 필요로 할 것 같지 않았다. 농부의 괭이에 종종 맞아죽는 몬스터를 처치하는 데에도 도움이 필요할 정도면, 당장 던젼에서 끌어내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바닥이 붉어졌다. 그리고 일행은 비릿한 체액의 냄새를 뒤로한 채 이 넓은 공간 저편의 좁은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일행을 휘감고 있다. 흥분. 단 한마디로 설명하라면 이것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질펀히 쏟아지는 괴물들의 체액을 보며 자못 두려운 느낌과 섬뜩한 감정을 느꼈을 테지만, 그와 함께 파괴본능을 채운 데서 오는 쾌락과 같은 것도 느꼈을 것이다. 사실, 살생이라는 것은 그다지 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벌레 한 마리를 죽일 때에도 약간 기분이 찜찜해지는데, 이렇게 큰 동물(?)을 죽일 때야.... 하지만, 이러한 것을 극복한 후에는 그다지 힘든 일도 아니다. 한 번 했다, 라는 기억은 다시 할 수 있다, 라는 자신감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무언가를 파괴하는데서 오는 쾌락.... 이것은 상대의 죽음을 확인하는 순간 그 절정에 이르니.... 이들의 기분은 지금 최고조이다. 세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는 당연하거니와 동요가 거의 없었고.... 오이니아의 경우에는 지금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그녀는 가장 앞 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음을 옮기고 있는 피아텔과 켈파, 그리고 로인이 있는 곳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 채 시나와 테리트론보다도 뒤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시금 모두들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번에는 지난번과는 다른 침묵이다. 처음의 것이 미지에서 오는 침묵이라면, 지금의 것은 기대감에서 오는 침묵이다. 그리고 다음 동굴.... 이번에도 같은 종류의 괴물들이었다. 단 숫자가 조금전의 거의 두배 가까웠다. 로인은 단촐하면서도 확실한 검술로, 피아텔은 약간 기교가 심한 화려한 검술로, 그리고 켈파는 점점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을 띄어 가는 검술로.... 모두들 500하르라는 돈을 소비하고 있었다. 시나와 테리트론, 이 두 사람도.... 오이니아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위의 다섯 사람과는 본래부터 처한 환경이 달랐다. 켈파의 경우에는 숲속에서 수많은 짐승들을 사냥해 보았다. 죽인다, 라는 느낌에 친숙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피아텔의 경우에는 솜씨 좋은 기사들과 꽤 오랜 수행을 다녔다. 그 역시 살생을 경험해 보았다. 로인의 경우도 양아버지인 바겔과의 사냥을 통해 그 느낌을 배웠고, 이미 여러 차례 느껴 보았다. 시나는 사실 그런 경험이 없다는 면에서는 오이니아와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마법사이다. 마법이라는 것은 간접적인 공격이고, 그 때문에 직접 죽이는 것과는그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표적을 공격할 때와 다른 생명체를 공격할 때와 다른 점은 단지 죄책감 하나 뿐인데.... 지금의 상황이라는 것이 극히 합법적이고,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 역시 같은 행동을 하고 있음에 그러한 죄책감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오이니아가 하지 못하는 것을 그녀는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테리트론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오이니아는 달랐다. 다시 바닥은 흥건히.... 오이니아는 두 주먹을 꼭 쥔 채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소리가 들린다. 날카롭고 거친.... 그때, 바로 뒤에 있던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오이니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짝 미소짓고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뒤이어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란테르트 곁에 있던 모라이티나이다. "오이니아양.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말아요. 역시.... 오지 않았어야 했나봐요. 저와 함께 돌아갈까요?" 모라이티나의 물음에 오이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지금까지 완전히 잊고 있던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전.... 수행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거예요.... 할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워낙 정신없던 터에 이 사실을 잊고 있었다. 오이니아는 몸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마음을 달리 먹으니, 조금 전까지 그렇게나 무섭던 광경도 그냥 참을 만 했다. 허리에 차고 있던 소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막 앞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오이니아는 자신의 손목을 붙잡는 고운 손길을 느꼈다. 모라이티나의 손이었다. "말리지 말아요." 오이니아는 모라이티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으나, 모라이티나는 손을 놓지 않았다. "복수가.... 그렇게 하고 싶나요?" 오이니아는 주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퀘에엑, 하는 거친 비명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피아텔과 로인 등의 해치웠다!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이니아는 손을 털어 모라이티나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리고는 가장 앞 열로 다시 나갔다. 피아텔과 로인 그리고 켈파가 있는 곳 바로 뒤, 처음 그녀가 출발할 때 서 있던 위치로. 다시 하나의 복도를 지나자 돌연 주위가 환해졌다.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자자. 이제 막 기초코스를 지나오셨습니다." 한 대머리에 배가 나온 사내가 막 복도를 벗어난 일행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좌우 양쪽으로 뚫린 동굴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초심자용 코스입니다. 비록 초심자 코스라고는 하지만, 결코 만만한 곳은 아니니, 자신 없다면 이쯤 돌아가십시오. 이곳에서는 회복약과 기타 여러 물품들을 팔고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말씀하십시오." 하지만, 그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행은 오른쪽으로 뚫려있는 동굴로 걸음을 옮겼다. 던젼의 구조는 반복적이었다. 하나의 복도가 있고, 그 복도의 끝에는 넓은 광장이 나온다. 그곳에는 예외 없이 이런 저런 괴물들이 기다리고 있고, 그 뒤로 다시 복도가 있다. 그렇게 세 개쯤의 복도와 홀을 지나고 나자 어느덧 일행은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그 세 개의 홀을 지나오는 동안 한 사람당 죽인 괴물의 수는 어림잡아 12마리 가량. 로인이 17마리 정도로 가장 많았고, 피아텔이 15, 켈파는 13마리를 잡았다. 반면 시나와 테리트론은 서로 언제나 상반된 마법을 사용하다, 서로의 마법이 간섭을 일으켜 사라지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그 때문에 각각 아홉 마리씩의 몬스터를 처치하는데 그쳤다. 오이니아는 비록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기는 했지만, 단 한 마리도 죽이지 못했다. 실력도 안되는데다가 마음까지 여리니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는 이런 '놀이'에는 끼지 않았다. 챙겨온 음식으로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일행은 다시 전진을 계속했다. 아직 초급자 코스여서 인지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고, 모두의 실력이 아주 엉망은 아니어서 그럭저럭 버텨나가고 있었다. 하는 모습을 보아, 중급자용 코스까지는 그냥 저냥 버틸 만 할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원래 한 명, 혹은 두세 명이 함께 모험하는 곳이다. 여덟 명, 참가하지 않는 세 사람을 제하더라도 5명이나 함께 전진하고 있으니.... 극도로 단순해져.... 이 생명을 가지고 노는 놀이를 즐기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오이니아는 하나의 홀과 복도를 지남에 따라 점점더 마음이 복잡해져 갔다. 다름 아닌 모라이티나 때문이었다. 종종 툭툭 내뱉는 질문들.... 오이니아는 그런 그녀의 질문에 점점 혼란해져 갔다. 초급자 코스도 거의 마지막이여서인지.... 또다시 새로운 몬스터가 일행 앞을 가로막았다. 케이실라디라는 이름의 이 괴물은 도마뱀 같은 몸통에 긴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앞다리는 한 개의 발톱만이 비약적으로 자라나 흡사 낫과 같이 구부러져 있었고, 뒷다리는 상당히 튼튼해 두발로 걸어다닐 수 있었다. 해골 같은 얼굴은 아래턱이 유난히 컸는데, 입 아랫 부분에서 녹색의 산성 액체를 쏘아댔다. 하지만, 그다지 위력적이지는 않아, 갑옷도 제대로 녹여내지 못하였다. 여섯 마리나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낸 처음 앞서 가던 다섯 명은 크게 놀라 잠시 당황했었으나, 몇 차례 격돌한 이후 상대의 전력을 거의 파악해 비교적 잘 대처해 가고 있었다. 오이니아는 뒤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을 들고, 찌르고, 다시 빠지고.... 멋진 모습들이다. 즐겨 읽던 로망소설에 나오는 용사의 모습처럼.... 언제나 전해듣던 두 룬의 기사들을 보는 것처럼.... 마법.... 소문으로 듣던 만큼은 아니지만 정말 대단한 힘이다. 손에서 솟아난 화염, 얼음, 바람, 번개.... 화려한 빛을 내며 상대를 휘감아 간다. 그녀 자신 역시 손에 검을 들고 있다. 여성용 소검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값비싼 것으로 아마 굉장히 날카로울 것이다. 들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서본다. 하지만.... 그때, 바로 뒤에서 모라이티나가 다시 물어온다. "복수를 해서 당신이 얻는 것이 무언가요?" 오이니아는 답했다. "얻는 것은.... 마음의 만족이에요. 제가 복수를 하려는 이유는.... 제 마음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 에요.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사람들이 편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요." 모라이티나가 다시 물었다. "생명을 죽인다는 것.... 그것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아나요? 오이니아.... 당신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거에요?" 그녀의 말에 오이니아가 오히려 물어왔다. "저들은요? 제 친구이고.... 저와 나이가 비슷한 보통 사람들이에요. 저들은 되는데, 왜 나는 안된다는 거예요?"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들은.... 당신과는 달라요...." "무엇이 다르죠?" "저들은 지금 자신들이 하는 일을 원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공부를 해 왔죠.... 하지만 당신은 아니지 않나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오이니아는 크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원해요. 원해왔고, 지금도 원하고 있어요!" "아니요.... 지금도.... 과거에도 당신은 생명을 죽이는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고, 또 없어요. 당신의 할아버지는 훌륭한 용병이었죠?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 역시 그런 쪽 일에 종사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지금까지 검술을 배우지 않았어요. 그것이 원하지 않았다는 증거 아닐까요?" 비명소리가 들린다. 거친 숨소리.... 날카로운 금속성 반향. 동굴의 벽에 퉁겨져 나오는 존재들의 높은 외침.... 오이니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지금은 원해요. 전 복수를 할 꺼 에요." 모라이티나가 조용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들은.... 그들은 이미 죽었어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오이니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거짓말...." "저를 믿어요. 정말로 그들은 죽었어요." "거짓말! 내가 왜 당신을 믿어야 하죠? 전 당신을 몰라요. 이름이 모라이티나라는 것 이외에 제가 당신에 대해 무얼 알죠?" 오이니아의 물음에 모라이티나는 대답이 궁해졌다. 다시 괴물의 거친 비명이 울린다. 그리고, 야호! 하는 외침이 들린다. 그들은 즐거워하고 있다. 오이니아는 다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중급자 코스예요!" 로인이 기쁘다는 듯, 자랑스럽다는 듯 란테르트에게 말했다. 란테르트는 빙그래 웃으며 그를 향해 격려의 말을 한마디 해 주었다. "그 동안 열심히 한 모양이더구나. 다만, 오른손에 너무 힘이 들어가 검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더구나. 어깨에도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고. 처음이라 긴장되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다지 좋은 버릇은 아니다. 두 팔과 어깨는 자연스럽게, 힘은 허리에서부터. 이걸 명심해라." 로인은 란테르트의 충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란테르트는 뒤이어 곁에서땀을 닦고 있는 시나에게 충고와 격려의 말을 해 주었다. "칼슨의 말대로, 배운지 3년밖에 되지 않는 실력치고는 상당하구나. 다만, 마법을 방출하기 직전 정신이 약간 흐트러져서인지 힘의 손실이 많다. 게다가 마법을 쏘아보낸 후의 공백이 너무 길고, 지나치게 전에 쏘아보낸 마법에 정신을 쏟다보니, 바로 다음에 내보내는 마법이 상당히 불안하더구나. 내가 보기에.... 현자가 될 생각이 아니라면 빙계 마법을 익혔으면 한다. 너와 가장 상성이 맞는 듯 하다." 시나는 빙그레 웃었다. "고마워요, 삼촌." 로인과 시나가 란테르트에게 자세한 지도를 받는 사이, 다른 네 사람은 한자리에 모여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거 재미있는데." 테리트론은 팔짱을 낀 팔의 위아래를 계속해 바꾸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정말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뒤이어 피아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야. 지금까지의 수행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아서." 켈파가 신중론을 폈다. "이제 겨우 초급자 코스야. 게다가, 고급자 코스를 완전히 깬다 하더라도 그다지 대단할 것은 없을 것 같아." 그의 말에 잠시 멍하니 있던 오이니아가 물었다. "왜?" 켈파가 답했다. "이곳의 괴물들.... 우리가 하듯 모든 사람들이 전멸시키면서 한바퀴 돌고나면.... 뭐가 남지? 아마 사람들이 다시 잡아 놓을 꺼야." 피아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요즘 용병들 사이에서 꽤 인기 있는 일거리이지. 몬스터 생포." 피아텔의 끄덕임에 켈파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봐. 그렇다면 최하층인 고급자 코스에 있는 몬스터들도.... 누군가가 잡아온것일거 아니야? 그렇다면.... 그곳을 깬다 하더라도...." 그때테리트론이 혀를 찼다. "쯧쯧.... 바보 같기는. 숫자를 생각해야지, 숫자를! 몬스터 한 마리를 생포해 집어넣고, 다시 한 마리를 생포해 집어넣고.... 그렇게 100마리 정도를 던젼 안에 쑤셔 박았다고 쳐봐. 그 몬스터를 잡아넣은 사람이 그들 모두를 다시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어림도 없지." 켈파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켈파의 어리숙한 표정에 오이니아는 살짝 미소를 지었고, 테리트론과 피아텔도 약간 여유 있는 웃음을 웃었다. 그때, 로인과 시나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네?" 시나가 물었고, 켈파와 테리트론이 옆으로 조금씩 움직여 그들이 앉을만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한나절의 싸움을 통해 서로의 실력을 확인했고, 그에 상당한 친근감을 느끼는 그들이었다. "아니요.... 조금전의 싸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켈파가 답했고, 그런 그의 대답에 시나가 돌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요는 무슨 요. 나이차도 별로 나지 않으니, 그냥 평어를 쓰도록 해. 동료사이인데 불편하잖아." 시나의 이 말에 켈파는 귀밑을 조금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로인이 모두에게 말했다. "모두들 란테르트 삼촌에게 조언을 받도록 해요. 정말 많은 도움이 될꺼에요." 하지만, 오이니아 일행은 서로 눈치만을 살필 뿐 로인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란테르트를 그다지 높이 사지 않았다. 아직 실력을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 그저 겉으로 보이는, 외팔이 마검사일 뿐이다. 피아텔이 말을 돌렸다. "그보다, 로인. 정말 대단한 실력이던걸? 비록 검술이 제대로 된 것은 아니었지만, 실력하나는 대단했어." 피아텔의 말에 로인은 약간 기분이 상했으나, 그의 말이 사실이기에 잠자코 미소를 지었다. 용병검술.... 그가 배운 이 검술은 피아텔의 말대로 제대로 된 검술이 아니다. 수만 명의 용병들이 스스로의 경험을 쌓아 이루어낸 수만 종류의 검술이다. 지금 로인의 검술은 바겔의 검술인 것이다. "피아텔, 너도 대단한 실력이야." 로인은 인사차 이렇게 칭찬했다. 하지만 정말 대단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바겔도, 란테르트도, 모라이티나도, 어느 누구도 그보다 대단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대단해 보일 이유는 또 무어란 말인가? 피아텔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글쎄, 그렇게 대단한 편은 아니야. 10살 때부터 검을 익혀 겨우 이 정도인걸. 한 9년 되었구나.... 사실, 영주의 아들이라는 자리가 할 일이 많거든. 한가하게 검술만을 익힐 수는 없잖아." 그때, 곁에서 시나가 한마디했다. "9년이나 익힌 검술이었구나. 어쩐지 대단하더군." 목소리는 약간 비비 꼬였고, 말투 역시 냉소적이었으나, 그 변화가 아주 미묘해 모두들 감탄의 소리로 들었다. 단 한 사람 테리트론만을 제외하고. 테리트론은 평소 피아텔의 잘난 척 하는 버릇만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아 했다. "역시 내 친구는 대단해. 9년이라....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한가지 일을 할 수 있지? 돈이 되는 일도 아닌데...." 시나의 말은 단지 반어법이었다. 그리고 테리트론의 말은, 돈도 안돼는 일을 9년동안 매달린 주제에 그것밖에 안되냐? 라는 뜻의 말이었다. 하지만.... "하핫. 뭐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야." 피아텔은 순진하게 겸양의 말을 했다. 켈파가 곁에서 대화를 전환했다. "그보다.... 저녁때가 다 된 것 같은데....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자...." 그의 말을 빼앗듯이 피아텔이 입을 열었다. "그래. 이곳은 야영하기도 적당한 것 같아. 공간도 충분하고.... 양쪽 입구도 눈에 잘 띄어 망을 보기도 편하고." 켈파는 피아텔에게 말을 가로 채여진것에는 개의치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오이니아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오이니아.... 무슨 일 있어?" 켈파는 조용히 오이니아를 향해 이렇게 물었다. 사실, 오이니아는 지금 약간의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모두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하였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아니야...." 오이니아는 힘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 켈파는 분명 오이니아에게 무슨 변화가 있음을 느꼈으나,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이 피아텔이 오이니아에게 말을 건넸다. "무슨 문제 있어? 안색이 안 좋아 보여." 오이니아는 이럴 때 가장 쓸만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냥.... 조금 피곤해서." 피아텔이 곧바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쉴만한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까. 그리고, 조금 피곤하더라도 참고 견뎌. 우리 세 사람은 모두 너를 위해 수련하고 있는 거야." 피아텔의 배려에 오이니아는 입가에 미소를 빙그레 띄웠다. "고마워...." 피아텔은 자신의 모포와 오이니아의 모포를 이용해 기댈만한 곳을 만들어 주었고, 오이니아는 자연스럽게 등을 기대 조금 더 편한 자세로 앉을 수 있었다. 그 모습에 시나가 한마디했다. "완전 공주님이군." 테리트론이 대구했다. "평소 마음씨를 곱게 써. 그럼 자연히 공주 님이될 테니까." "내가 또 곱지 못할 건 뭐야? 너같이 바락 바락 덤벼드는 꼬마만 없으면 내가 얼마나 우아한 아가씨로 있을 수 있는데." "푸하하하하! 비웃어 주지." 테리트론은 시나의 말에 이렇게 웃었고, 시나는 그대로 주먹을 뻗어 테리트론의 얼굴을 날렸다. 하지만, 시나의 느린 주먹으로 테리트론을 맞추기는 무리이다. "늙으니 운동신경이 둔해지지." "시끄러." 오래간만에 테리트론이 승기를 잡은 채 둘의 말싸움은 일단락 지어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란테르트가 그 모습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그 라지만, 시나와 테리트론의 말싸움에는 절로 미소가 피어난다. 모라이티나가 그의 곁에서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물었다. "저 두 사람 잘 어울리지 않아요?" 란테르트는 그녀의 물음에 잠시 고개를 돌려 모라이티나를 바라보았다. "어울려? 매일같이 싸우는데?" 그의 말에 모라이티나가 웃었다. "후훗.... 여전 그런 쪽에는 둔하군요." 란테르트는 쓰게 웃으며 다시 고개를 시나가 있는 쪽으로 향하였다. 아줌마.... 꼬마.... 란테르트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피어난다. "즐거운가보지요? 란테르트가 이렇게 자주 미소짓는 것 오래간만이에요." 모라이티나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입가의 미소를 서서히 쓴웃음으로 바꾸어갔다. "글쎄.... 모르겠는걸.... 즐거움이라는 것이 무언지.... 슬픔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행복이라는 것.... 불행이라는 것.... 점점 모호해져가. 슬퍼도 눈물이 나오지 않고.... 즐거워도 웃음이 나오지 않는걸.... 단지 미소를 짓고 쓴웃음을 지을 뿐." 꺼져가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모라이티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왜 그렇게 힘이 없나요? 천하의 란테르트께서? 신조차도 죽인 당신이잖아요." 란테르트는 한차례 처연한 웃음을 웃었다. "후후후.... 그런가? 그렇지.... 난 마왕을 때려잡은 대단한 사람이야.... 후후후...." "당신은 모르겠지만.... 전 확연히 느껴져요. 갈수록 힘이 없어져 가는 당신의 모습...." 모라이티나가 쓸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그 말에 란테르트는 미소를 빙그레 지었다. "무슨 소리야? 내 마법력은 그대로야. 비록 팔이 하나 없다고는 하지만, 검을 쓰는데도 문제없어. 에디엘레 가의 가주 디미온, 그와 싸워도 지지 않을 자신 있어. 어차피 나는 한손 검술을 주로 사용했었으니까."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대답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란테르트는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라이티나를 잠시동안 내려다보았다. 돌연 그런 그녀가 굉장히 사랑스러웠고, 자신도 모르게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꼬마 아가씨. 슬퍼하지 마. 난 조금도 힘이 줄어들지 않았어. 원한다면 지금 당장 이 던젼 천장에 구멍을 뚫어 모라이티나에게 별을 보여줄 수도 있어. 한 번 해볼까?" 란테르트의 호기로운 말에 모라이티나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썩 환한 웃음은 아니었다. "그만 둬요. 어린아이같이.... 그리고 난 꼬마가 아니에요. 이제 34살인 걸요." "천하 제일의 마물사냥꾼께서?" "놀리지 말아욧."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부로 말투를 엄마의 것으로 바꾸었고, 란테르트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한가지만은 사실이야.... 10년전에 비해 정말 한가로와.... 약간 지루할 정도로...." 모라이티나는 다시 고개를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좋잖아요.... 란테르트는 너무 바쁜 삶을 살아왔어요. 이렇게 조용한 것이.... 좋잖아요...." "그렇겠지?...."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 힘이 없었다. 중급자 코스는 입구부터 두 갈래로 나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작은 문제가 발생했다. "왼쪽!" "오른쪽!" 문제는 피아텔과 시나 사이에서였다. 피아텔은 처음 초급코스에서와 같이 일행에게 아무런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그대로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에 시나가 불만을 터트리며 오른쪽으로 가겠다고 이야기했고, 서로간의 의견 차는 결코 좁혀지지 않았다. "왼쪽." "흥. 차라리 따로 가지." 시나는 더 이상 실랑이를 벌이지 않은 채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피아텔은 시나의 그런 행동에 잠시 당황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양쪽으로 나뉘어 앞으로 나가는 거야. 언젠가 다시 한곳에서 만나게 될 테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니 오히려 시나의 그런 고집을 하나의 의견으로 받아들이는 아량을 보이며 피아텔은 이렇게 말했고, 시나는 흥, 하고 다시 콧웃음을 쳤다. "오이니아. 나와 함께 가자. 내가 꼭 지켜줄게." 피아텔은 가장 먼저 오이니아에게 이렇게 말을 걸었고, 오이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오이니아의 행방이 정해지자, 켈파는 당연히 그쪽으로 향했고, 테리트론은 자신의 친구 모두가 왼쪽을 택하자 묵묵히 따랐다. 아니 따르려 했다. 그때 시나가 테리트론의 귀를 붙잡았다. 물론, 시나의 키는 테리트론보다 훨씬 작다. 테리트론은 일행 모두 중에 가장 키가 커 190쎄휴리하(1쎄휴리하=약1센티미터)에 이른다. 시나가 비록 여자 중에는 키가 큰 편이라지만 고작 테리트론의 코끝에 닿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귀를 잡아챘다. "꼬마 넌 이쪽으로 가는 거야. 네가 없으면 심심할 테니까." "이 손 놔. 아줌마. 내 친구들은 어쩌고? 마법사가 한 명 모자라잖아." "호! 그래도 나와 함께 갈 마음은 있는 모양이구나. 그럼 됐어. 자 가자. 로인 너도 함께 가겠지?" 시나는 테리트론의 귀를 잡아끌며 오른쪽으로 다시 몇 걸음을 옮겼고, 로인은 할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때, 모라이티나가 테리트론을 향해 말했다. "저쪽 일행은 내게 맡겨요. 이래 보여도 마법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니까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테리트론은, "앗! 누님께서는 저쪽으로 가시려고요? 아줌마! 어서 손 놔. 난 당신보다 저 아름다운 누님을 따라가고 싶어." 라고 외쳤다. 모두들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고, 시나는 얼굴이 살짝 붉어져 그의 귀를 놓았다. "꼬마야! 모라이티나 언니의 나이가 몇인데 누님이야? 나보다 10살 가까이나 많아." 시나의 말에 모두들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아무리 많게 잡아도 21, 2세.... 어떻게 보면 겨우 오이니아 또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가 30세가 넘었다니.... 하긴, 26세쯤으로 보이는 38살 먹은 남자도 있으니.... 시나는 이렇게 말하며 그대로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테리트론은 훗 하고 헛웃음을 한차례 터트리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 역시 그녀가 없으면 훨씬 심심할 듯 했기 때문이다. 란테르트는 로인과 함께 오른쪽으로 향했다. "모라이티나. 아이들을 잘 부탁해." 모라이티나를 향해 이 한마디를 한 후, 란테르트는 오이니아를 한차례 바라보았다. 란테르트는 지금 오이니아에게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오이니아에게서 느낀 한명은, 바로 자신이었다. 15년전의 자신.... 막무가내로 복수를 하겠다던.... 바로 자신.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사피엘라였다. 생긴 모습은 완전히 달랐지만.... 왜인지 그녀의 느낌이 오이니아에게서 났다. 성격에 있어서는 차라리 에라브레와 비슷했고, 생긴 것 역시 사피엘라에 비해서는 에라브레와 비슷했으나, 알 수 없는 감이라는 것은 그녀에게서 종종 사피엘라의 향기를 느끼게 했다. 그때 오이니아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란테르트를 향해 한마디했다. "테리트론을 잘 부탁해요...." 란테르트는 순간 느꼈다. 어떤 점에서 사피엘라를 느꼈는지.... 바로 목소리였다. 음색이 거의 비슷했다. 차분하고 조용한.... 그리고 상냥한.... 당시 사피엘라는 란테르트에게 오직 목소리만이 존재했었고, 그 때문에 그녀에 관한 기억은 거의 모두 청각적인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녀에 대한 기억은 모두 추억으로 바뀌었고.... 그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를 기억해 내는데 이렇게나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지금 이렇게 듣고 보니.... 오이니아의 목소리는 사피엘라의 그것과 상당히 비슷한 듯 했다. 란테르트는 오이니아를 향해 한차례 미소를 지으며 테리트론의 뒤를 쫓았다. 마지막으로 모라이티나를 향해 눈웃음을 지어 주는 것 역시 잊지는 않았다. 시나와 테리트론은 벌써 시작이었다. "왜 날 따라 온 거야? 모라이티나 누님이 더 좋다며?" "착각은 자유. 널 따라온 것이 아니라, 단지 양쪽에 사람 수를 맞추기 위해 이쪽으로 온 거야. 4명, 그리고 4명. 정확하잖아?" "흥. 네가 저쪽으로 가면, 모라이티나 언니는 당연히 이쪽으로 왔을 꺼야. 그럼 4명 대 4명. 됐잖아?" "아! 그렇구나. 에이....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테리트론은 그냥 이렇게 말을 슬쩍 돌려버렸고, 시나는 그런 그의 말에 진보랏빛 머리칼을 한차례 쓸어 넘기며 웃음을 터트렸다. "쿠쿡.... 제법이야. 꽤 귀여운 말도 할 줄 알고." 테리트론도 미소를 지었다. "아줌마도 웃으니까 제법 봐줄 만한데? 그 보다 큰일인걸." 테리트론의 말에 시나가 되물었다. "왜? 뭐가 큰일이야?" "이쪽 전력 말이야.... 마법사 둘에 검사 하나 뿐이잖아. 물론, 란테르트씨도 있지만.... 저쪽보다 약간...." 테리트론의 말에 시나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쿠쿡.... 지금 우리 따위를 전력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야??" 시나의 말에 테리트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따위?" 시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란테르트와 로인이 조금 먼 곳에서 천천히 자신들 둘을 따라오고 있었다. "삼촌에 비한다면, 너나 나 따위는 마법사도 아니야. 그리고 삼촌에 비한다면 로인이나 그 잘난 척 심한 피아텔 따위도 검을 쓸 줄 안다고 이야기 할 수 없고. 아니, 너희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룬의 기사인지 뭔지도 검술로 상대가 안될걸?" 테리트론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시나의 표정이 돌연 진지해졌다. "진담이야." 테리트론은 고개를 돌려 란테르트를 한차례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전 그는 외팔이 마검사일 뿐이었다. 어느덧 두 개의 홀을 통과해 세 번째의 복도 끝이었다. 앞의 두 곳은 케이실라디가 숨어 있었다. 다만 상대의 숫자가 많아진데다가, 일행의 수가 반으로 줄어 훨씬 버거운 싸움을 했다. 그리고 세번째 홀....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진정한 중급자 코스인 모양이었다. 로인은 하마터면 큰 상처를 입을 뻔했다. 막 입구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바닥으로부터 뾰족한 무언가가 솟아 나왔기 때문이다. 로인은 화들짝 놀라며 뒤로 한 걸음을 피했으나, 발을 내려놓는 곳에서 다시 가시 같은 것이 솟아났다. 그렇게 네 걸음을 뒤로 피한 후에야 로인은 간신히 그 괴상한 것으로부터 벗어났고, 그 후로는 다시는 성급히 앞으로 걸음을 옮기지 못하였다. "뭐.... 뭐예요?" 로인은 고개를 돌려 란테르트를 바라보며 물었고, 란테르트는 로인을 향해 엷게 미소지으며 답했다. "레크렐이야. 땅속에 모습을 감춘 채, 길고 끝이 뾰족한 촉수를 이용해 상대를 공격하지." 란테르트의 말에 로인은 잠시 고민을 했다. 다행히 레크렐의 공격은 계속되지 않았고, 로인은 생각을 할 시간을 얻었다. "음.... 잘 모르겠어요.... 촉수의 길이는 얼마나 하죠? 아주 높은 곳에 있어도 공격할 수 있나요? 게다가.... 땅 속에 숨어 있으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로인이 이렇게 말했고, 테리트론과 시나도 팔짱만을낀 채 의견을 내놓지 못했다. 모든 곳을 다 공격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로인의 말에 란테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법은 두 가지야. 하나는 강공이고, 다른 하나는 협공인데.... 강공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 이상의 실력을 갖춰야만 하지. 잘 봐라."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등뒤에서 에르테일을 뽑았다. 그 검을 거꾸로 든 채 란테르트는 잠시 무어라 주문을 외웠고, 동시에 바닥에 힘차게 꽂았다. 돌연 검 주위로 둥근 원을 따라 땅이 흔들거렸다. 충격파가 로인의 발밑을 지나갈 때, 로인은 하마터면 자리에 주저 앉을 뻔했고, 시나는 중심을 잃고 테리트론에게로 쓰러졌다. 충격파는 원을 그리며 멀어져 갔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딱 멈추었다. 동시에 푸억, 하는 무언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땅 위 한 지점에서 붉은 핏줄기가 울컥 솟아 나왔다. "이런 식으로, 퀘이크 계열의 마법을 사용한다거나 하면, 땅속에 숨은 녀석들은 간단히 처리할 수 있어. 하지만, 상당히 고난이도의 마법이니 보통 사람이 하기는 힘들겠지...." 란테르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검을 한차례 닦아 먼지를 털어 내고는 다시 등뒤로 넣었다. 로인은 란테르트의 말을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경청했고, 시나의 경우에는 놀랍다는 듯 와, 하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테리트론은 경악했다. 퀘이크.... 류마법에서도 상당히 고난이도의 마법이고.... 신계마법에서도 정념계 범위마법이다. 비록 정념계이지만, 범위마법이기에 그 익히기의 까다로운 정도가 거의 정령계와 맞먹는다. 그런 것을 이렇게나 간단히 사용하다니.... 란테르트의 말이 이어졌다. "일단, 한 명 발이 빠른 사람이 저 녀석들의 눈을 속이는 거야. 저들은 땅의 울림을 느껴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지. 한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큰 발걸음 소리를 내어 저들을 교란하고, 다른 한사람이 그 틈을 노려 직접 몸을 공격하는 거야. 잘 봐, 저곳을. 다른 곳과 색이 약간 다른 지점이 보이지? 바로 그곳이 그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곳이지. 갑옷이 두껍고, 땅속에 몸을 숨기고 있기에, 어지간히 강한 마법력이 아니라면, 근접사격을 해야 효과를 볼 수 있을 거야." 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테리트론과 시나를 향해 말했다. "내가 유인하도록 할게. 남은 건 모두 세 마리. 동시에 나를 공격하게 되면, 약간 힘들어 질 것 같고.... 아무튼 난 무작정 달리기만 할 테니, 나머지는 부탁해." 테리트론과 시나는 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셋!" 셋을 셈과 동시에 로인은 달렸다. 기다렸다는 듯 아래로 부터 가시와 같은 무엇이 솟아 나왔고, 로인은 지그재그로 그것들을 피하며 멀리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돌았다. 동시에, 시나와 테리트론도 달렸다. 두손 가득 마법의 기운을 머금은 채 그들은 가능한 한의 최고의 속도로 땅위를 달렸고, 이내 동시에 첫 번째 레크렐을 공격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땅위로 피가 배어 나온다. 그리고 로인을 쫓던 촉수의 수가 하나 줄어들었다. "성공이닷!" 로인은 멀리서 그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신나 소리를 질렀다. 물론, 두 다리는 재빠르게 놀리면서 말이다. 시나와 테리트론은 흡사 사전에 연습이라도 한 듯 동작을 맞춰 다른 두 마리의 레크렐을 죽였다. 바닥에는 이제 네 개의 혈흔만이 보일 뿐이다. 세 남녀는 스스로가 한 이 일에 자랑스러움을 느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해냈다!" 시나가 예쁜, 그리고 약간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고, 모두들 미소를 지었다. 란테르트는 뒤에서 밝은 미소를 지으며 이들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처음 검술을 익힐 때 저러했다. 물론, 당시 상당한 마법력을 가지고 있던 때여서.... 이들만큼 풋내기는 아니었지만.... 한편, 모라이티나와 피아텔, 켈파 그리고 오이니아 역시 비슷한 곳에서 길이 막혔다. "레크렐...." 모라이티나는 바닥에서 솟아나는 날카로운 가시를 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한창 가장 앞서 걷던 피아텔이 세 걸음을 성큼 성큼 피해 레크렐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직후였다. 켈파와 피아텔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두 사람.... 비록 모라이티나의 마법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 두 사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서로 얼굴만 마주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오이니아가 모라이티나를 향해 물었다. "레크렐이라고 했나요? 어떻게 해야 물리칠 수 있지요?" 오이니아는 방금 전 모라이티나가 눈앞의 몬스터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고, 이름을 알고 있다면 습성 같은 것도 대강 알 것이라 예상했다. 오이니아의 물음에 피아텔과 켈파의 시선이 모라이티나에게 모아졌고, 모라이티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답했다. "레크렐은 언제나 몸은 땅속에 숨겨놓고 있지요. 그리고, 길고 날카로운 촉수를 이용해 땅위의 움직이는 것들을 공격하는데.... 레크렐의 약점은, 일단 촉수의 공격속도가 약간 느린 편이라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물체에 관해서는 그곳에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이에요. 땅에 발을 대지 않으면 역시 상대를 찾아내지 못하지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오이니아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피아텔과 켈파도 동시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라이티나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까다롭다고는 하지만, 아주 간단하게 무찌를 수도 있어요. 바로 비행마법이지요. 날아서 다가가면 전혀 알아채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저를 제외하고는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는 듯 하니 이 방법은 그만 두기로 하고.... 대신,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요. 일단 한 사람이 빨리 달려 저들의 관심을 끄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이 다른 사람이 접근해 상대의 몸통을 공격해요." 모라이티나가 내 놓은 방법은 란테르트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했다. 사실 어느 정도 이상의 실력을 가진 검사라면 이런 복잡한 방법이 아닌, 치고 빠지는 전법을 사용할 수도 있으나, 일단 이들에게는 무리이다. 모라이티나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각자의 행동을 정했다. 먼저 자세히 주위를 살펴 레크렐인지 하는 괴물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 다음으로 각자의 행동을 정했다. 오이니아는 원래 있던 곳에 남아 있었고, 모라이티나는 그녀의 곁에서 마법을 준비했다. 여차하면 네 마리의 레크렐을 한방에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달리는 역할은 켈파가 했다. 그리고 피아텔은 그 틈을 타 레크렐을 공격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네 마리 모두의 몸에 검을 꽂을 수 있었다. 막 네 번째 레크렐의 몸에 검을 꽂는 순간 피아텔은 오이니아를 향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고, 켈파는 간신히 한숨을 내 쉬었다. 오이니아는 자신을 향해 웃는 피아텔을 향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곁에 있던 모라이티나도 긴장을 풀었다. "자! 그럼 다음으로 가야지!" 피아텔은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켈파의 어깨를 한차례 두드렸다. 그리고, 켈파는 그런 그를 향해 한차례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왠지 모를 뿌듯한 감정이 느껴졌다. 힘든 일을 해냈다는 것에서 오는 보람일까? 한편 모라이티나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데리고 있는 아이들에 실력에 비해 상대가 너무 강했다. 물론, 자신이 직접 손을 쓰기 시작한다면야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지만, 어디까지나 지금의 이 던젼탐사는 이들의 수련이고,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네 사람은 어느덧 다음 홀에 도착했다. 그리고.... 모라이티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건?.... 럴리피드? 이럴 수가.... 이게 어째서 중급자 코스에?" 상황은 란테르트 쪽도 비슷했다. "모두들 피해! 너희들이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야. 로인, 시나, 테리트론, 모두들 홀의 가운데로 모여!" 란테르트는 모두를 향해 외쳤다. 동시에, 그가 서있는 곳에서 불과 두뺨쯤 떨어져 있는 곳의 벽을 뚫고 한 거대한 물체가 솟아났다. 그 물체는 란테르트에게 달려들었으나, 란테르트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엔클레이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거대한 괴물은 란테르트의 엔클레이브에 충돌해 방향이 확 꺾인 채 격렬한 불꽃을 내며 위로 솟구쳤고, 이내 바위벽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란테르트는 곧바로 로인 등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예요?.... 방금 그건...." 시나가 놀라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록웜이야.... 어째서 저런 게 이곳에 있는 거지?...." 테리트론이 곧바로 물어왔다. "록웜이라니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주로 바위 동굴 속에 서식하지.... 하지만, 이런 곳에 나타날 리가 없는데...." 란테르트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사이, 두 마리의 록웜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바위 비늘이 촘촘히 밖혀있는 록웜은 란테르트가 서있는 곳으로 곧바로 날아왔고, 란테르트를 제외한 다른 세 사람은 깜짝 놀라 팔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쿠쾅하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두 마리의 록웜은 한차례 엄청난 진동만을 남기며 다시 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테리트론과 다른 두 사람은 방금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테리트론이 물었다. "실드인가요?"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고, 이내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모두들 내 뒤에만 서 있어. 결코 따로 떨어져서는 안돼. 지금 세 마리의 록웜이 주위를 배회하고 있어. 그다지 어려울 것은 없지만.... 너희들까지 지키면서 싸우기는 꽤 힘든 편이니까. 게다가, 지나치게 강한 마법은 자칫하면 이 던젼 전체를 무너뜨리는 수도 있어."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는 온 신경을 주위에 두고 있었다. 그때, 돌연 지면에서 무언가가 불쑥 솟았다. 이번에는 바닥을 노린 것이다. 란테르트는 훗, 한차례 웃으며 뒤로 조금 물러섰다. 동시에 세 사람 역시 뒤로 물러섰고, 록웜은 공격 점을 잃은 채 그저 허공으로 솟구치기만 했다. 그때, 란테르트가 검을 뽑아 록웜의 배에 그대로 꽂았다. 스릉, 하는 소리와 함께 록웜의 복부에 에르테일이 박혔으나, 록웜은 위로 향하던 힘을 계속 유지한 채 3휴리하(1휴리하=약 1미터) 가량을 더 솟구쳤다. 그 덕에 상처만 더 커졌을 뿐이지만. 란테르트는 동시에 검에 마법을 불어넣었다. 화염.... 얼마나 온도가 높은지는 알 수 없지만, 록-웜의 몸은 삽시간에 재로 화하였다. 시나와 로인, 그리고 테리트론은 몸길이가 10여 휴리하나 되는, 그것도 밖에 나온 것만, 괴물이 타는 모습을 보며 몸에 소름이 끼침을 느꼈다. 바위처럼 단단한 비늘을 가진 저런 괴물을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하지만, 란테르트에게 이런 일이라는 것은 가벼운 놀이꺼리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둘 남았나?...." 란테르트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럴리피드.... 이건...." 모라이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약간 긴장을 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물론, 상대가 두렵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엘프 중에서도 10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강한 자신이다. 겨우 저런 괴물 따위에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아이들이다. 전투력 전무의 오이니아나 풋내기 피아텔, 켈파 등을 돌보면서 싸우기는 약간 걱정스럽다. 피아텔은 그 럴리피드라는 괴물의 모습에 잠시 주춤거렸다. 크기는 거의 황소만 했고, 전체적인 모습은 흡사 전갈 같았다. 뒤쪽을 살펴보니 긴 꼬리가 공중으로 솟아 있었고, 여섯 개의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으며, 두 개의 앞다리에는 흡사 게와 같은 집게가 달려 있었다. 특히, 붉은 빛을 내는 눈동자가 위협적이다. 오이니아 등은 자신도모르에 모라이티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레크렐인가 하는 처음 보는 괴물과 싸울 때도 그녀가 조언을 해 주지 않았던가? 그들의 시선에 모라이티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럴리피드.... 지저의 악몽이라 불리는 록웜을 제외하고는 땅속 몬스터 중 최강의 생물이에요. 당신들의 실력으로는 상대할 수 없답니다. 제 뒤에 숨어 스스로를 지키는데 최선을 다하세요." 그녀의 말에 피아텔은 순간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자신들을 그렇게 무시하다니.... 그는 이 모라이티나라는 젊은 여자를 단지, 경험 많은 여행자 정도로만 여겼다. 마법력이 꽤 대단할지는 모르지만, 젊은데다가 여자였으니, 그 실력이라는 것이 한계가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자신과 켈파, 이 둘이 힘을 합친 것보다 강하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켈파. 나가자. 모습을 보니, 꼬리와 집게의 공격이 위험할 것 같다. 그것만 피한다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아." 피아텔은 이렇게 말하며 앞으로 달려나가려고 했고, 켈파는 잠시 머뭇거리다 할 수 없다는 듯 그의 뒤를 따랐다. 그때, 모라이티나가 다시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만 둬요. 당신들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당신의 실력이라면 된다는 말입니까? 중급 코스 에요. 게다가 근처에 실력 있는 용병들이 대기하고 있을 텐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피아텔은 자신을 가로막는 모라이티나를 향해 이렇게 쏘아붙였고, 모라이티나는 그의 이러한 말투에 기분이 크게 상하였다. 순간, 네 마음 데로 해라.... 라는 마음이 일며 길을 내주려 했으나, 오이니아를 생각하고는 다시 한 번 그 둘을 만류했다. "결코 이건 중급 코스에 있을 만한 몬스터가 아니에요. 이럴리피드를 생포할 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은 이 대륙 안에서 겨우 한 두명 정도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이 녀석은 강해요. 이건 결코 던젼 탐사장 관리소에서 사들인 몬스터가 아닐꺼에요." 피아텔은, 하지만 모라이티나의 마지막 조언까지도 무시했다. 어디 출신인지도 모를 여행자의 말을 들을 정도로 피아텔은 마음이 열려있지는 못한 인간이다. 그때, 켈파가 입을 열었다. "피아텔. 모라이티나 님의 말을 듣도록 하자. 솔직히.... 나는 자신 없어. 너와 나, 그리고 테리트론까지 가세한다 하더라도 이기기 힘들 꺼야...." 모라이티나가 한마디 보탰다. "게다가, 저 몬스터는 독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그 독은 마법으로도 치료할 수 없지요. 만약 중독 되기라도 한다면, 저로써는 당장 손 쓸 방법조차 없어요." 피아텔이 그 둘의 만류에 비웃음을 터트렸다. "훗. 모두들 자신 없다면, 나 혼자 가겠습니다." 피아텔은 이렇게 말하며 모라이티나의 몸을 돌아 복도를 벗어났고, 켈파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갔다. 그는 도중 고개를 돌려 모라이티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이니아를.... 잘 부탁드려요...." 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더 이상 말릴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피아텔은 럴리피드라는 몬스터 앞에 서서 검을 잡은 두 손에 힘을 가했다. "얼마나 강한지 한 번 볼까?"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럴리피드를 향해 달려갔고, 럴리피드는 케에엑,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돌연 꼬리로 피아텔의 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켈파는 럴리피드의 옆구리 쪽으로 접근해 검을 강하게 휘둘렀고, 그의 검은 사정없이럴리피드를 강타했다. 하지만, 캉 하는 날카로운 금속성 소음과 함께, 켈파의 검은 그대로 튕겨져 나왔다. 피부가 바위처럼 단단해 검조차 박히지 않는 것이다. 한편 피아텔은 자신을 덮쳐오는 꼬리를 황급히 피해내며 켈파가 있는 곳의 반대쪽 허리로 접근해 갔다. 럴리피드는 양쪽 모두에 적이 있다는 것을 감지해 내고는 서둘러 뒤로 빠져나갔다. 여섯 개의 다리를 일사분란히 움직이기를 잠시, 이미 그 괴물은 두 사람의 포위망을 벗어나 버렸다. 모라이티나는 이 둘의 싸우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도무지 싸움이 되지 않는다. 힘과 스피드, 게다가 싸움을 풀어 가는 어떠한 기술, 어느 한가지도 상대보다 나은 점이 없다. 모라이티나는 복도에서 벗어나 한창 세 존재가 어우러져 싸움을 벌이고 있는 홀로 나왔다. 허리에 언제나 차고 다니던 소검을 뽑아들었고, 이내 두 사람을 향해 외쳤다. "모두들 이쪽으로 와요. 제가 상대하겠어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피아텔이 외치듯 대꾸했다. "멀리서 마법 지원이나 해주십시오!" 그의 외치는 말에 모라이티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으며 손을 어깨와 같은 높이로 들어올렸다. 손의 모양은 네 손가락은 앞으로, 그리고 엄지는 살짝 아래로 늘어뜨린 채였는데, 동시에 다섯 손가락 사이에서 금색의 빛이 솟아 나왔다. 한줄기의 빛. 모라이티나의 손에 서 뻗어 나온 하나의 빛은 화살이 되어 럴리피드를 향해 날아갔다. 쌕 하는 파공음. 빛은 럴리피드의 등위를 스치듯 흘렀다. 동시에 퍼억, 하는 소리가 나며 럴리피드의 등갑 일부가 부서지며 산산이 흩어졌고, 럴리피드는 케켁, 하는 비명을 질렀다. 곧바로 그는 눈동자를 움직여 자신을 공격한 상대를 찾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땅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다리를 사사삭 움직여 능숙하게 땅을 파내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조금 더 강한 걸로 할걸 그랬나?.... 생각보다 튼튼한데?...." 모라이티나는 그 모습에 이렇게 중얼거렸다. 사실 방금 그녀가 시전한 마법은 엘프들만의 마법인 신성마법 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공격술법이었다. 피아텔과 켈파는 돌연 자신들의 앞에 있던 적이 사라지자 마음을 놓았다. 적이 도망쳐 버린 것이다. 비록 죽이지는 못했지만,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들의 승리에 오이니아는 활짝 웃음을 지으며 홀 안으로 뛰어들었다. 켈파와 피아텔이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오이니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이 정말 이겼다, 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반면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이대로 물러날 녀석이 아니다. 록웜보다, 끈질기다는 점 하나만은 높이 치는 몬스터이다. "오이니아. 더 이상 오지 마." 모라이티나가 오이니아를 향해 외쳤다. 그녀가 막 터널을 벗어나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늦었다. 터널 입구에서 돌연 불쑥 솟아나는 회색의 그림자가 있었고, 이내 그 회색의 그림자에게서 붉은 눈동자가 생겨났다. 피아텔과 켈파는 크게 놀라 럴리피드를 향해 달려갔고, 오이니아는 자신의 앞에 갑자기 솟아난 상대의 모습에 기절할 듯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다행히 럴리피드는 오이니아가 아닌 자신에게 접근한 다른 두 사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꼬리와 두 집게를 이용해 자유 자재로 공격을 했는데, 상황이 조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모라이티나는 왜 하필이면 럴리피드가 그곳으로 솟아 나왔을까를 생각하며 다시 마법을 준비했다. 순간.... 모라이티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으음, 하는 신음을 내뱉었다. 오이니아.... 잘못 마법을 사용했다가 럴리피드가 피하기라도 할 경우에, 마법은 오이니아의 몸에 맞는다. 아마도 상대가 노린 것이 바로 이것인 모양이었다. 그 사이, 켈파와 피아텔은 적절한 협공으로 점점 방향을 틀어 결국 오이니아의 앞을 가로막게 되었다. 하지만, 그 덕에 모라이티나는 더더욱 마법을 사용하기 곤란하게 되어 버렸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제어능력을 믿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모라이티나는 하는 수 없이 다시 검을 뽑아들었다. 육박전밖에는 없지 않은가? 그녀는 소검술에도 자신이 있었다. 서쪽 숲의 주인인 엘라인을 조르고 졸라 배운 검술이다. 피아텔과 켈파는 비좁은 통로 입구에서 간신히 상대의 공세를 받아치고 있었다. 럴리피드의 집게발은 강한데다가 상당히 유연해 상대하기가 몹시 까다로웠다. 게다가 종종 꼬리까지 공격에 가세하니, 벌써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넘겼다. 그럼에도 상대를 물리칠 가능성은 전혀눈에 띄지 않았다. 실력차 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완전히 깨닫게 해 주는 싸움이다. 피아텔은 슬슬 몸이 지쳐 감을 느꼈다. 나무꾼 출신인 켈파에 비해서는 체력이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는 돌연 몸을 돌리더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오이니아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복도 깊은 곳으로 몸을 던졌다. "켈파, 잠시만 적을 막아 줘. 내가 오이니아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줄게!" 그의 행동은 갑작스러웠고, 켈파는 한 명의 공백을 혼자의 힘으로 막아내느라 대답할겨를도 없었다. 간신히 짜내듯 "알았어!" 라고 켈파는 대꾸했고, 그 순간 그는 상대의 양쪽 집게발이 자신을 공격해 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황급히 뒤로 뛰어 피했고,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피해낼 수 있었다. 한편 오이니아를 안은 채 피아텔은 복도 깊은 곳으로 달려갔다. "어서 내려놔!" 그때 오이니아가 외쳤다. "잠시만 참아. 안전한 곳에 대려다 줄게." 피아텔이 그녀의 말에 이렇게 대꾸했고, 오이니아는 그런 그의 말에 차갑게 대꾸했다. "그만 둬.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 어서 다시 켈파에게로 돌아가! 혼자 위험하잖아!" 그제서야 피아텔은 오이니아를 내려놓았다. "난 너를 지켜야돼. 그러니까 여기서 얌전히 있어." "필요 없어.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으니까, 어서 켈파에게로 돌아가! 위험해.... 둘이서도 상대하지 못했던 그 괴물을 혼자 어떻게 막으라는 거야?" 오이니아는 점점 더 다급해져 피아텔을 향해 이렇게 외치며 켈파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려 했고, 피아텔은 그런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달래듯 말했다. "그곳에는 모라이티나도 있잖아. 켈파와 그녀 둘이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진짜로 위험한 것은 바로 너야." 오이니아는 피아텔이 잡은 자신의 손목을 떨쳐내며 곧바로 켈파를 향해 달려갔다. "무서운 모양이구나! 나 혼자라도 돌아가겠어!" 오이니아는 조금전의 순간을 완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몸을 돌려 자신을 안고 도망을 쳐버린 피아텔의 모습을 말이다. 처음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다음순간 피아텔이 도망을 친 것이라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런 건 아니야! 다만, 널 지키고 싶을 뿐이야!" 피아텔은 어둠 속으로 달려나가는 오이니아를 향해 이렇게 외쳤으나, 오이니아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피아텔은 잠시 멍청히 있다가 이내 오이니아의 뒤를 쫓아 달렸다. 오이니아는 오래지 않아 다시 처음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켈파는 혼자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어느새 가세한 모라이티나가 벌써 다리를 세 개나 베어 버렸다. 확실히, 모라이티나가 끼여들자 켈파는 훨씬 편안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힘들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때였다. 돌연 럴리피드가 두 개의 앞다리 모두를 들어 쓸 듯이 켈파를 공격했다. 켈파는 온 힘을 다해 검으로 그의 공격을 막았으나, 둘 사이에는 힘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몸이 붕 뜨며 벽에 쾅 하고 처박혀 버렸다. "켈파!!" 오이니아는 놀라 켈파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대답이 없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 순간에 일어났다. 오이니아와 럴리피드 사이에 아무런 존재도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모라이티나는 화들짝 놀라며 마법력을 일으켜 럴리피드를 공격했고, 동시에 럴리피드는 꼬리를 앞으로 내밀며 독액을 오이니아에게 쏘아 보냈다. 오이니아는 그렇게 갑작스레 럴리피드가 상황을 변화시키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런 일이 생겨버리자 너무 당황했다. 멍청히 서 있다가 몸을 살짝 피했으나, 이미 몸의 절반이 붉게 물든 후였다. 럴리피드의 독액은 색이 피처럼 붉었다. 럴리피드는 독액을 채 절반도 뿜어내지 못한 채 모라이티나의 마법에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하지만 이 정도라도.... 오이니아는 붉은 액체에 맞은 부분이 화끈 닳아 오름을 느꼈다. 그 액에서 피어오르는 은은한 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웠고, 다리에 힘이 빠지며 서서히 몸이 가라앉음을 느꼈다. "오이니아!" 두 사람이 외침이 동시에 들렸다. 하나는 모라이티나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막 이곳에 도착한 피아펠의 것이었다. 오이니아는 그 소리를 들으며 의식의 끊을 놓쳐버렸다. 켈파 역시 기절을 해 버렸다. 오른쪽 어깨가 탈골되었고, 늑골이 몇 대 부러졌으며, 몸 이곳 저곳이 긁히고 찢어진 것이 한 군대도 성한 곳이 없다. 하지만, 목숨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모라이티나는 우선 오이니아의 몸에 더 이상 독이 퍼지지 않도록 마법을 건 후, 다시 마법으로 몸에 묻은 독액을 제거하여 편안히 눕혀 놓았다. 그리고, 피아텔은 기절해 있는 오이니아의 곁에서 계속해 이건 내 잘못이야.... 를 되내이고 있었다. 그는 지금 넋이 나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모라이티나는 그런 그에게는 상관하지 않은 채 그녀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의 오이니아의 치료를 마쳤고, 뒤이어 켈파에게 다가갔다. 마법으로 켈파의 부러진 뼈를 연결하고, 그가 몸에 입은 여러 찰과상들을 치료했다. 워낙 신성마법의 치료마법이 뛰어난 편이어서 켈파의 상처는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다 나은 듯 했다. 하지만, 부러진 뼈 같은 경우는 비록 마법으로 붙였다고는 하지만, 앞으로 하루 정도는 움직일 수 없다. 모라이티나는 일부로 켈파의 의식을 회복시키지 않았다. 차라리 기절해 있는 편이 정신적 충격을 적게 받을 테니 말이다. 모라이티나 등이 있던 곳에서, 한창 켈파가 럴리피드와 사투를 벌이고 있던 그때, 란테르트의 엔클레이브 안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던 로인, 시나, 테리트론의 이 세 사람은 마지막 록웜이 재로 화하는 모습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야호! 정말 멋있어요, 삼촌!" 시나는 란테르트의 화려한 기술들에 갈채를 보냈고, 로인도 자랑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테리트론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도무지가 사람의 실력 같지가 않았다. 검에 뇌격계 마법을 걸어 그 거대한 녀석을 감전시켜 죽여 버리지를 않나.... 아무런 마법도 걸지 않은 채 팔 힘만으로 두 동강을 내버리지 않나.... 사실, 록웜은 적어도 서너명 이상의 숙련된 용병이 있어야 간신히 무찌를 수 있는 존재였다. 두 명이 유인을 하고, 다른 두명 정도가 가장 연한 비늘의 아래를 재빠르게 공격함으로써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이론상일 뿐, 실재로 싸우려면 10명 이상은 필요하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이런 록웜 세 마리를 단 5분만에 해치워 버리다니.... 테리트론은 이런 자세한 것은 몰랐지만, 적어도 눈앞의 사내가 자신이 상상했던 것 이상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대.... 대단해...." 테리트론은 한참 후에 간신히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때 시나가 곁에서 한마디했다. "당연하지! 10년전에 크림슨 아이즈라고 불리셨던 분이야. 이 따위 괴물들이 무얼 어쩌겠어?" 란테르트는 그런 시나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한편 이 이야기를 들은 테리트론은 입을 쩍 벌려버렸다. "크림슨 아이즈? 서.... 설마 그 악마?" "뭐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악마라고도 했지. 하지만, 내가 아는 삼촌은 그다지 악마라 불리울 만한 사람은 아니야." 시나는 근처에 다가서는 것 마저 무서워했던 옛날의 자신은 깡그리 잊은 채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를 향해 환히 미소지었고, 란테르트는 그런 조카를 향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했다. "그런 이야기는.... 하고 다니지 말아라. 잘못하면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테니...." 란테르트의 말에 시나는 앗, 하면서 입을 막았다. "죄송해요." 그때 테리트론이 물었다. "당신이.... 정말 그 10년전의 크림슨 아이즈입니까?"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테리트론은 잠시 멍해졌다. "그럴 수가.... 보통사람들은 입에 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그 악마가.... 당신이었다니.... 다.... 당신 무슨 이유로 우리와 함께 있는 겁니까?" 테리트론의 물음에 란테르트가 천천히 답했다. "이야기하지 않았던가요? 드라이토씨가 유연을 남겼습니다. 자신의 손녀딸을 부탁한다고.... 게다가, 오이니아양의 소원도 들어주어야 하고.... 켈파 씨의 부탁도 한가지 들어 드려야만 합니다." "그런 별 것 아닌 이유로.... 우리와.... 함께 다닌다고요?" 란테르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내 걸음을 옮겨 한쪽 벽으로 다가섰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구나. 모라이티나 쪽도 위험하겠어. 어서 가보자." 란테르트는 누구에게 말하는지 불분명한 이 한마디를 내뱉은 후, 한쪽 벽 앞에 섰다. 한 손을 앞으로 뻗었고, 네 개의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들어 손바닥을 앞으로 향했다. "차르마 브레스...." 그는 나지막이 주문을 외웠다. 동시에 손 앞에 둥근 흑색의 구체가 생성되었고, 그 구체 앞 한 지점에서 검정색의 빛의 기둥이 솟아나며 벽을 향해 폭사되어갔다. 란테르트의 검은 마법이 닿는 곳의 벽은 부스스, 먼지로 화했고,한차례 주위에는 마법력의 응집에 의한 커다란 바람이 일었다. 흔히들 마법의 폭풍이라 불리는 것으로, 일정이상 강력한 힘이 한곳에 집중되면 그 주위로 힘이 모여듦에 바람이 일게 된다. 오래지 않아 벽에 구멍이 뚫리었고, 란테르트가 두 조카와 테리트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서 가자. 저쪽에도 이곳처럼 록웜 세 마리가 나타났다거나 할 경우 상당히 애를 먹을 테니까...."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곧바로 구멍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로인과 시나, 그리고 테리트론 세 사람은 잠자코 그를 따라안으로 들어갔다. 두 일행이 있던 던젼은 서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란테르트가 마법으로 뚫어버린 터널은 겨우 30여 휴리하(1휴리하=약1미터)정도 길이 밖에는 되지 않았다. 테리트론은 그 터널을 따라 걸으며 한층 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비단 그뿐이 아니라 시나와 로인 역시 란테르트가 만든 이 터널의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단단한 바위였다. 그 단단하기 그지없는 바위를, 흡사 원래부터 그런 모양이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으로 구멍을 뚫어 버린 것이다. 잘려진 면은 반들반들한 것이 이름난 조각가가 공들여 다듬어 놓은 듯 했다. 시나가 물었다. "삼촌.... 그 마법은 뭐죠? 어떻게 바위가 이렇게...." "차르마 브레스.... 마계 최강마법인 압그라온 버스트를 제외하고 가장 강한 다섯 마법중 하나야. 흑염 나크젤리온과 동급의 마.... 흑룡 차르마흔의 마법이지." 란테르트의 대답에 시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마법이군요.... 정말 굉장한 위력이에요...." "확실히 꽤 쓸만한 편이지...."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중얼거렸고,막 그때, 터널의 출구가 이행의 눈에 들어왔다. 시나는 곧바로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런데.... 마계마법은 어디서 배웠죠? 지금 헵티슬 황국 안에 마계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데...." 란테르트는 막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기며 간단히 답했다. "우연히....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게서...." "란테르트!" 그때, 모라이티나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켈파의 치료를 간단히 끝낸 그녀는 돌연 홀 한쪽이 무너지는 모습에 잠시 긴장을 했었으나, 그 안에서 란테르트가 나타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를 불렀다. 란테르트는 네 사람의 모습을 보자마자 대강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바닥에 누워있고, 한사람이 무릎을 꿇은 채 무어라 중얼거린다.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한숨을 한차례 내쉬며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시나와 로인은 그의 뒤를 곧바로 쫓았고, 반면 테리트론은 자신의 친구들에게 서둘려 달려갔다. 오이니아도, 켈파도 기절해 있다. 테리트론은 무릎을 꿇은 채 망연히 앉아 있는 피아텔의 어깨를 잡아챘다. "뭐야? 무슨 일이야?" 하지만 피아텔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을 뿐 아무런 대답도없었다. 그때, 란테르트가 모라이티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모라이티나는 오이니아를 반쯤 안아 올린 채 란테르트를 바라보며 천천히 대꾸했다. "럴리피드였어요. 방심하는 사이에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란테르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럴리피드.... 그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보다.... 어떻게 된 거야? 두 사람...." "켈파는.... 별 문제 없어요. 하루 정도만 누워 있으면 전혀 문제가 없을꺼에요. 하지만.... 오이니아의 경우에는.... 어서 서둘러 의사에게 데려가 보아야 할 것 같아요. 럴리피드의 독액에 맞았어요." 모라이티나는 걱정된다는 듯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럴리피드의 독은.... 마법으로 치료가 안되니까.... 그럼, 모라이티나가 다녀오도록 해. 다른 사람들은.... 내가 돌보고 있을 게."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짐을 풀어 몸을 가볍게 하고, 오이니아의 몸 주위에 마법을 걸어 무게를 한층 가볍게 했다. 그때, 란테르트가 가방에서 한가지 물건을 꺼내들었다. 붉은 색의 종이처럼 얇은 보석이었는데.... 투명한 보석에 알 수 없는 글자와 그림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그건?...." 모라이티나가 물었고, 시나와 로인, 그리고 켈파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테리트론까지도 호기심에 고개를 돌렸다. "부적이야.... 스크롤과 비슷한 것인데.... 가다가 가로막는 것이 있으면 사용해. 오이니아에게 건 경량화 마법과, 비행마법을 함께 사용하는 상태에서 공격마법까지 사용하기에는.... 아무리 모라이티나 라지만 쉽지 않을 테니까. 블레이즈 크리스탈이야. 마법의 이름을 말하며 상대를향해 던지기만 하면 돼." 모라이티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블레이즈 크리스탈. 정령계군요. 고마워요. 많은 도움이 될꺼에요." 이어 모라이티나는 오이니아를 한쪽 팔로 들어 올렸고, 란테르트가 건넨 세장의 부적을 품에 갈무리한 채 흰빛의 흔적만을 남기며 앞으로 뻗어나갔다. 굉장히 빨랐다. 란테르트조차도 약간 놀라, "호.... 상당히 빠른걸...." 이라고 중얼거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때, 켈파가 깨어났다. 그는 정신이 돌아오자 마자 눈을 떠 주위를 한차례 살폈고, 곧바로, "오이니아는?" 이라고 외쳤다. 란테르트는 그 모습을 슬쩍 한차례보고는 슬리핑 마법을 걸어버렸다. 켈파는 다시 잠이 들었고, 그 모습에 그때까지 멍하니 있던 피아텔이 외쳤다. "당신.... 내 친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지금 그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슬리핑 마법조차 못 알아보았을 정도이니 말이다. "지금 섣불리 움직이다가는.... 부러진 뼈가 어긋나 버립니다. 잘못하면 평생 불구로 지내는 수도 있습니다...." 란테르트는 조용히 이렇게 대꾸했고, 피아텔은 란테르트의 말에 다시 멍해졌다. 한편, 테리트론은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고, 혼자 조용히 상황을 정리하다가 고개를 돌려 란테르트에게 물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테리트론의 이 물음에 란테르트가 답했다. "록웜.... 럴리피드.... 모두들, 이곳에 있기에는 턱없이 강한 몬스터들입니다. 아마도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찾아 온 것이겠지요...." 란테르트의 대답에 테리트론은 잠시동안 멍하니 있다가 내뱉듯 중얼거렸다. "비러먹을.... 관리자들이 문제였군.... 나가서 모조리 날려주마...." 테리트론의 이 말에 시나가 웃으며 끼여들었다. "날려 줘? 실력이 되어야 말이지. 네 정도 실력으로야, 저 초심자 층에 대기하고 있는 용병도 무리일걸?" 시나의 말에 테리트론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다. "쳇...." 그때, 로인이 돌연 외치듯 입을 열었다. "잠깐.... 그럼 중급자 코스를 관리하던 용병들은....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록웜 세 마리를 상대하려면.... 적어도 30명 정도의 용병들이 필요해.... 물론, 상당한 실력자라면, 일고 여덟명 정도로도 충분하겠지만.... 그래도 승패는 장담 못하지. 럴리피드 정도야 별 문제 없지만, 록웜은 보통 사람들이 상대하기는 벅찬 편이야...." 테리트론과 시나, 로인, 이 세 사람은 란테르트의 말에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런 록웜 세 마리를 당신은 혼자서 장난치듯 가지고 놀았군요.... 라고.... 모라이티나는 경량화 마법이 걸려 가벼워진 오이니아를 옆허리에 낀 채 앞으로 날아갔다. 하나의 복도를 지나자 또다시 커다란 홀이 나타났는데.... 모라이티나는 그곳에서 사람들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언가 에게 진액을 완전히 빨려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그 홀 안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땅속에 숨어 있던 레크렐이나 다른 괴물들은 럴리피드에게 잡아 먹혔을 것이다. 다시 하나의 복도를 지났고, 막 그 다음 홀로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돌연 땅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솟았다. 그 모습에 모라이티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는데.... "록웜...." 모라이티나는 중얼거리듯 이 한마디를 하고는 곧바로 품에서 란테르트가 건네준 부적을 꺼내들었다. 블레이즈 크리스탈이라고, 나지막하고도 고운 목소리로 외쳤고, 이내 부적은 수십갈레의 불꽃이 되어 록웜의 몸을 꿰뚫어 버렸다. 수십 개의 화염의 창에 꿰인 록웜은 괴성을 지르며 땅에 널브러져 버렸고, 모라이티나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앞으로 날아갔다. 이윽고, 중급자 코스의 끝에 도착했다. 그곳 역시 하나의 홀이었는데.... 각 코스의 끝부분에는 던젼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존재했다. 모라이티나는 그곳을 통해 위로 날아올랐고, 이내 빛이 보이는 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찬란한 빛.... 밖은 지금 한낮이었다. 주저 않고 의무실로 날아가기 시작한 모라이티나는 오래지 않아 오이니아를 의사에게 데려갈 수 있었다. 의사는 오이니아의 모습에 크게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럴리피드의 독이라니.... 어째서 그런 것에 걸려 버린 것인가? "럴리피드라니.... 그 괴물이 어디서 나타났습니까?" 다행히 비축되어 있던 해독약이 있었고, 의사는 오이니아의 몸 안에 약을 주입시키며 이렇게 물었다. 그의 물음에 모라이티나는 조용히 대꾸했다. "던젼 안에 지금 있어요. 록웜도.... 중급자 이하코스에 있는 용병들은 아마도 전멸한 것 같아요." 모라이티나의 물음에 의사는 더더욱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떻게.... 아니, 그 보다 어떻게 그런 곳에서 무사할 수 있었죠?" 의사는 그런 괴물들이 숨어들었다는 점 보다, 모라이티나같이 가녀린 여자가 그런 사지에서 살아 나올 수 있었다는 점에 더 놀란 모양이었다. 그의 물음에 모라이티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일행 중.... 엄청난 실력자가 한 명 있으니까요." 엄청난 실력자는 지금 일행을 지휘하여 야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차피 켈파 때문에 하루 정도는 발이 묶여야 할 것 같았고, 더 이상 무리해 전진할 만한 여건도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암담한 상황이었다. 완전 풋내기.... 경험이라고는 이 던젼에서의 것이 전부인 이 신출내기들이 당면한 상황치고는 거의 치명적인 것이다. 록웜, 럴리피드 같은 몬스터 중에서도 가장 강한 것들이 도처에 득실거리고.... 동료 한 명은 지금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으며, 다른 한 명은 지금 가벼운 자폐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란테르트가 있으니 말이다. 어느 정도 주위가 정돈되고 나자, 모두들 마음에 안정을 되찾았다. 피아텔은 어느새 잠이 들었고, 테리트론은 그 가엾은 친구의 몸에 모포를 한 장 덮어 주었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명이 그렇게 큰 부상을 당한 것으로 보아, 작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장작은 곳곳에 비축되어 있었다. 복도 중간에, 홀 한쪽에 마른 나뭇가지가 한 무더기씩 쌓여 있었고, 일행은 그곳에서 나무를 한아름 가지고 와 모닥불을 피웠다. 주위가 환해지고, 따듯한 바람이 불자 더더욱 마음이 안정되어 갔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생겨버렸다. "네가 해봐!" 시나의 목소리였다. "난 못해.... 우리 집에서는 엄마가 모두 해 줬었어...." 로인이 답했다. "바보.... 그런 것도 못해? 그럼, 네가 해." 다시 시나의 목소리. 그리고 그에 대꾸하는 테리트론. "난 생선류 아니면 전혀 몰라." "으이그 멍청이!.... 누가 어부 아니랄까봐...." 시나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투덜거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을 했다. 그때, 모두의 시선은 란테르트에게로 향했고.... 시나가 말했다. "삼촌~~~ 삼촌은 할 줄 아세요?" 그녀의 물음은 애교가 섞이어서인지 꽤 귀엽게 들렸다. "몰라." 하지만 그런 시나의 사랑스런 목소리에 대꾸하는 란테르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거의 섞이지 않았고.... 모두들 절망. 문제는 아주 간단한 곳에서 생겼다. 일행 중 요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세 사람뿐이었다. 오이니아. 그녀는 어려서부터 요리를 꽤 즐겼던 편으로 지금은 상당한 실력자이다. 그리고 모라이티나. 오랜 독신 노숙생활로 닳고닳은 요리실력의 소유자였다. 마지막으로 켈파. 아버지와의 산중생활이 길어질 경우, 어머니의 도움 없이 끼니를 해결해야 했기에, 요리실력은 수준 급이었다. 그런데.... 한 명은 부상을 입었고, 다른 두 명은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지금 눈앞에는 야채와 마른 고기, 그리고 몇몇 향신료가 데굴데굴 구르며 일행을 올려다보고 있다. 흡사, '해봐! 해봐! 후하하하~ 그 맛은 보장 못하지!' 라고 놀리는 투였다. "좋아! 그럼 한 번 해 보는 거야!" 도무지 해결 방도가 업자, 시나는 드디어 친히 하겠다라는 엄청나나 생각을 해 버렸다. 팔목까지 뒤덮었던 소매를 활짝 걷어 붙치고, 조그마한 단도를 꺼내 재료들을 다듬기 시작했고, 동시에 로인과 테리트론은 그녀의 충실한 보조로 변해 함께 손을 맞췄다. 난도질.... 란테르트는 재료를 다듬는 시나의 모습을 이렇게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언제나 가지고 다니던 건량을 꺼내 오도독 씹어 먹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돌아올 시나의 질책이 두렵기만 하다. 시체(?)에 난도질(?)을 하던 시나가 두 조수에게 명령했다. "로인! 그것 좀 볶고 있어봐. 잘 뒤적거려서 타지 않게. 그리고 테리트론, 넌 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냐? 가서 물이나 가지고 와." 두 조수는 치프의 신경질 적인 태도에 불만이 있었지만.... 그래도 할 수 없었다. 여자니까.... 그래도 요리에 조금은 소질이 있겠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럭저럭 냄새는 쓸 만 했다. 하지만, 모양이 갈수록 기괴해 지는 것은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로인이 물었다. "그런데.... 무얼 만드는 거야?" 그의 물음에 시나는 한참 젓던 무슨 국물 비슷한 것을 내려다보며 답했다. "스튜...." 곁에서 테리트론이 비아냥거렸다. "수프 아니었어?" 시나는 그의 말에 순간 발끈했으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작품을 한 번 흘끗 내려다보니, 확실히 스튜라기 보다는 수프에 가까웠다. "시끄러...." 시나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 그럭저럭 요리가 완성됐다. 수프와 스튜의 그 중간 어디쯤처럼 보이는 음식을 한 국자씩 철푸덕 떠서 일행 모두에게 돌린 후.... 시나는 모두의 반응을 조심스레 기다렸다. 가장 먼저 용기를 낸 것은 란테르트였다. 경험이 많은 만큼, 어지간한 큰 일(?)에는 눈 하나 꿈쩍 않는 그였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이윽고 란테르트의 입이 떨어졌고, 시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정말이요?" 시나는 이렇게 물으며 자신의 그릇에 있는 음식을 한 수저 입에 떠 넣었다. 확실히.... 미묘한 맛의 차이는 있을 망정, 배가 고픈 지금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로인도 테리트론도 묵묵히 먹었다. "야! 처음 한 것치고는 꽤 괜찮죠?" 시나는 잠시동안 먹는데 열중하다가 모두를 향해 이렇게 물었고, 세 남자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처음 한 것치고야 당연히 괜찮지 않은가? 그럭저럭 점심겸 저녁도 대강 챙겨 먹었다. 막상 할 일이 없어진 일행은 가만히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이런 저런 쓸모 없는 대화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란테르트는 웃고 떠드는 세 남녀를 보며 고요히 미소짓고 있었다. 그리고는 문득 떠올렸다. 자신에게도 저러한 때가 있었나.... 라는 생각을.... 언제나 무언가에 미쳐있었다. 철이 든 후에는.... 스스로가 스스로의 생계를 이어야만 했다. 일에 미쳤고, 생활에 미쳐있었다. 12살 때 말이다.... 감옥.... 차라리 한가했다. 아니.... 그 미치광이 노인 때문에 감옥에서도 반쯤 미칠 듯한 생활을 했다. 마법대전 때의 대현자라고 스스로 우기던 그 노인은.... 언제나 큰소리로 마계마법의 운용법과 주문을 떠들어댔다. 단 하루도 빼지 않고.... 그 소리를 들으며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한 달도 못되어 모든 주문을 외울 수밖에 없었고.... 다시 반년이 지나기도 전에 모든 주문의 운용법을 깨우칠 수밖에 없었다. 다시 감옥에서 나와서.... 그때는 싸움에 미쳐있었다. 그리고 한 여자에게 미쳐있었다. 스승이라는 존재를 만난 후로는, 검과 마법에 미쳐있었고.... 두 자매를 만난 후에는 두 자매에게 미쳐있었다. 그리고.... 지난 5년간은.... 지금은.... 무엇에 미쳐 있는 걸까? 없다.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하는 일도.... 아니.... 있는 것인가? 하긴.... 할 일은 있다. 오이니아.... 그녀의 뒤를 돌보아 준다.... 그것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란테르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드라이토 노인의 유언을 떠올렸다. 돌보아 달라.... 적어도 이 아이가.... 안정된 가정을 가질 때까지 만이라도.... 안정된 가정.... 자신도 가져 보지 못한 것.... 란테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상념을 털어 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때, 시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멍청하긴. 그닐그레즈잖아! 하루밖에 안됐는데 벌써 까먹은 거야?" "그.... 그럴 수도 있지. 넌 어제 있던 일을 모두 기억할 수 있어?" 테리트론이 더듬거리며 대꾸하는 것을 보아, 방금 전의 질책은 그를 향한 것인 듯 했다. "적어도 너처럼 완전히 잊어먹지는 않아." 그러고 보니, 어느덧 둘의 호칭이 아줌마나 꼬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을 느낀 사람은 겨우 로인 한 명 정도였지만. 지금 로인은 그 두 사람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조용히 미소 지으며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 봐도 재미있단 말야.... 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이니아가 깨어난 시간은 꽤 늦은 밤이었다. 그녀는 깨어나자 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이내 모라이티나가 미소 지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누워 있어요. 아직 몸이 나른 할꺼에요." 오이니아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자리에 누웠다. 잠시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보았고, 이내 자신이 던젼 안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는 어디죠?.... 아참! 켈파는요? 럴리피드라는 괴물은 무찌른 건가요?" "켈파는 아마 괜찮을 꺼 에요. 괴물에 대한 걱정도 하지 말고. 오이니아가 가장 위험했어요. 럴리피드의 독은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사람의 체력을 점점 고갈시켜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만들어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오이니아는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제가 그렇게 멍청히 굴지만 않았어도...." 모라이티나는 천만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무슨 소리 에요. 이곳 관리자들의 책임이에요. 럴리피드가 중급 자용 던젼 안을 돌아다니다니." "그래도...." 여전 울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이니아의 이마에 가느다란 손을 얹으며 모라이티나는 환히 미소지어 주었다. "자책할 것 없어요. 그냥 마음 편히 가지고 쉬어요." 그제야 오이니아는 표정을 조금 부드럽게 했다. 하지면 여전 얼굴에 그늘이 있었다. "휴.... 켈파가 저 때문에 그렇게 됐어요.... 피아텔은.... 왜 그때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둘이 함께 막았더라면.... 켈파가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모라이티나는 천천히 누워있는 그녀의 앞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대꾸했다. "당신을 걱정했기 때문이겠지요. 켈파도, 피아텔도...." "그럴까요?...." 오이니아는 이렇게 말하다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말 놓으세요....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 데...." 그녀는 목숨을 구함 받았다는 생각에 갑자기 모라이티나에게 친근감을 느꼈고, 이렇게 이야기함으로써 그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모라이티나는 오이니아의 말에 담담히 미소지었다. "그렇게 할게...." 오이니아는 잠시동안 모라이티나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천장으로 향했다. "후.... 난 왜 이렇게 무능력할까요? 이래가지고는.... 할아버지의 복수도 할 수 없잖아요." 모라이티나는 이 고집불통 아가씨의 마음을 어떻게 해야 돌릴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직도 우리말을 믿지 못하는 거야? 정말, 자피토 씨를 죽인 그들을 란테르트가 죽였어." 모라이티나의 말에 오이니아는 잠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런 배려....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전 괜찮아요. 비록 험한길이라도.... 할아버지의 복수를 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괜찮아요. 아마 할아버지가 유언 하셨을 꺼 에요.... 절 평범하게 키워 달라고.... 그렇지만.... 이대로 물러서고 싶지는 않아요." 모라이티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복수 같은 건.... 그만 두어. 복수는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야." 오이니아가 처연히 웃었다. "더 이상.... 불행해 질 것도 없어요...." 돌연, 모라이티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오이니아는 그녀의 웃음이 왠지 조소처럼 느껴졌고, 약간 기분이 상해 따지듯 물었다. "왜 웃는 거죠?" 모라이티나는 몸을 일으켜 오이니아가 누워있는 침대 곁에 있는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창문을 통해 별이 쏟아진다. "더 이상 불행해 질 것이 없다고?....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모라이티나의 이 던지듯 물어온 말에 오이니아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긴....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가족을 잃는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 그건 불행한 것이니까. 하지만 말이야...." 모라이티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오이니아는 계속해 그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고, 오래지 않아 그녀의 다음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너에게는 친구들이 있잖아? 하던 일을.... 그리고 해야 할 일을 팽개치고.... 너를 위해 몇백 휴하나 되는 먼 거리를 함께 여행해 주는 친구들이.... 이래도.... 너는 불행한 걸까?.... 이별.... 물론 슬픈 일이지만.... 그것만으로 불행하다고 이야기 하기는 힘들지.... 그건 단지 필연적인 일일 뿐이야. 만남과 함께 따라 다니는...." 오이니아는 눈만을 깜빡이며 모라이티나를 바라보았고, 모라이티나는 창문에 비춰진 오이니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의 너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건.... 너 자신이야.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그리고, 그런 마음 때문에 행복을 외면하고 있는...." "그런 건 아니에요...." 오이니아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당신이.... 저에 대해 무엇을 알지요? 아주 어려서.... 부모님을 잃었어요.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것만으로도 전 불행...." 모라이티나가 말을 끊었다. "적어도, 네 미소에 그늘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어." 오이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미소에 그늘이 없다니.... "그래....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지. 그래서 불행했어? 그렇다면, 너의 할아버지가 네게 보인 사랑과, 그것에 안주하여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낸 너는 무엇이지? 그게 불행인 거야?" 모라이티나의 말에 오이니아는 순간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네 미소에는 그늘이 없어.... 그건.... 네가 아직 진정한 슬픔도.... 진정한 불행도 모르고 자랐다는 증거야.... 보통.... 누구나 겪는 슬픔과 불행.... 그런 것만을 알고 있을 뿐이지." 오이니아는 생각에 잠기었다.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라는 존재를 몇 년 전 잃은 테리트론.... 그 역시 소중한 존재를 잃었지만.... 그 당시 그는 독한 술을 한 병 마시고는 다음날 곧바로 미소를 지었다. 하긴.... 원래 정상은 아닌 인간이지만.... 오이니아는 그가 자신의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알고 있다. 켈파 역시 5년쯤 전, 그의 형을 잃었다. 아버지와 함께 나무를 하러 산에 들어갔다가, 산짐승에게 해를 입은 것이다. 켈파는 그 형을 몹시 따르고 있었고, 켈파의 아버지 역시 형을 몹시 아끼고 있었다. 켈파는.... 당시 몹시 슬퍼했으나.... 그일 때문에 불행하다는 이야기는 결코 하지 않는다. 자신도.... 그렇게 사랑하는 한 사람을 잃었을 뿐이다. 다시 모라이티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들 때.... 너의 손을 잡아줄 존재가 있는 한.... 넌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야. 깊은 슬픔은.... 누구나 몇 차례쯤 겪게 되는 것이지 만.... 그것이 모두 불행으로이어지는 것은 아니지...." "하지만.... 복수를 포기할 수는 없어요." 오이니아는 애써 강변했다. 허물어져 가는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 모라이티나는 다시 몸을 돌려 오이니아를 바라보았다. 다시 그녀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았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복수.... 어느 복수에 미친 사람의 이야기를 해 줄까?" 오이니아는 모라이티나의 이야기에 잠시 머뭇거렸고, 모라이티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조용히 미소지었다. "복수에 미쳤던.... 이 적당하겠구나.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후.... 복잡해서 이야기하기도 힘들구나. 그 역시.... 너와 마찬가지로 소중한 사람을 잃었었단다. 당시.... 가장 사랑하던 사람을.... 다른 누군가의 손에 잃었고.... 그는 복수를 결심했지. 사실.... 그는 이런 일을 그때 처음 겪은 것이 아니었어. 그 전에도.... 몇 차례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했었지...." 오이니아는 그녀의 말에 아, 하는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모라이티나는 그 모습에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고, 계속해 말을 이었다. "불행.... 그 사람은 이 말을 입에 잘 담지 않아.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 만큼 불행한 사람도 없지.... 그는 그런 불행한 삶을 살다.... 결국은 복수를 결심하게 된 것이야. 얼마 전.... 그가 내게 이야기했었어.... 자신이 진정 복수를 하고 싶었던 대상은.... 자신의 불운했던 삶 그 전체였던 것 같다고...." 모라이티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시선은 비록 오이니아에게로 향하고 있었으나,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시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아무튼.... 그는 복수를 결심했어. 상대는.... 하지만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속해있는.... 가문의 사람이었지. 결국 복수는 성공했지. 하지만, 그가 복수를 하는 사이.... 그의 가장 친한 친구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게 되었어. 반쯤.... 그의 책임이야." 오이니아는 다시 한 번 아, 하는 탄성을 질렀다. "너와는.... 상황이 틀려. 네가 복수하려는 사람이 친한 친구의 가문의 사람도 아니고.... 하지만.... 그가 후에 말했지.... 왜.... 왜 5년 동안 그렇게 달리기만 했는지 모르겠다고.... 결국은 이렇게 되어버릴 것을...." 오이니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살아 있나요?" 아마도 란테르트의 이야기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오이니아가 다시 물었다. "지금은 어떻죠? 행복.... 한가요?" 모라이티나는 쓸쓸히 웃었다. "글쎄.... 아직은 모르겠어. 지난 일에.... 얽매이는 타입의 사람이어서...." 오이니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모라이티나는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복수는.... 네게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않아. 그건.... 확실해. 게다가.... 네가 언제인가 말했던 것과 같은.... 마음의 만족을 가져다주기도 힘들지.... 생각해 봐.... 복수를 한 후의 너의 모습을.... 복수를 한 후에는 무엇을 할거지?" 이 순간, 모라이티나도 오이니아도 생각에 잠기었다. 오이니아는 당연 모라이티나의 말에 관해 생각하기 위해서였고.... 모라이티나는 머릿속이 번쩍임을 느꼈다. 무엇을 할거지?.... 자신이 내뱉은 이 말이 갑자기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란테르트.... 그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 아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때, 오이니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요.... 더 이상.... 하지만.... 그래도 그만두고 싶지는 않아요.... 절대 모라이티나의 말을 무시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모라이티나는 그런 그녀의 말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이마에 손을 얹어 주었다. "알았어....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 일단 지금은 쉬어." 어느덧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물론, 지하로 수 휴리하(1휴리하=약 1미터)나 내려온 이곳에서 아침이라는 것을 알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지만.... 피아텔도, 켈파도 잠에서 깨어났다. 물론, 둘 모두 잠이라기 보다는 기절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아침은.... 시나가 하겠다는 것을 대강 떼어 말리며 건량으로 배를 채웠다. 어제의 저녁, 맛이 없지는 않았지만 왠지 재료가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켈파는 서서히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마법, 그것도 엘프의 마법이라고는 하지만, 하루만에 부러진 뼈가 붙어 완쾌된다는 것은 조금 무리다. 그래도, 움직일 수 있는 것을 보아 거의 다 나은 모양이다. 피아텔은 평소와는 달리 조금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사실, 어제 오이니아가 그렇게 되고, 또 켈파가 다친 것.... 그 모든 것이 자신의 경거망동 때문이 아니었던가? 깨어난 켈파를 향해 테리트론이 물었다. "역시 나무꾼답다. 몸은 괜찮아?" "어?.... 응.... 그보다, 오이니아는?" 켈파가 물었고, 테리트론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어. 독에 당해 모라이티나 누님이 데리고 갔는데...." 그때 란테르튼가 곁에서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당시, 그녀는 럴리피드의 독이 채 피부 안으로 침투하지 않았었습니다." 켈파가 황급히 말했다. "하지만.... 기절까지 했었습니다." "럴리피드의 독은 두 가지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절과 체력고갈인데.... 기절은 효과가 금새 나타나지만, 체력을 고갈시키는 성분이 피부 안으로 완전히 침투하는데 까지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란테르트의 대답에 켈파는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피아텔은 무사하겠지요?" 켈파는 곧바로 이렇게 물었다. 피아텔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피아텔이 입을 열었다. "괜.... 찬아...."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었다. 켈파는 이점을 이상하게 생각했고,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피아텔은 두 무릎을 당겨 끌어안고 있었다. "왜 그래? 아.... 오이니아가 걱정되어서 그렇구나.... 오이니아는 괜찮을 꺼야...." 켈파의 말에 피아텔은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며, 으응, 하는 소리를 냈다. 켈파는 여전 그의 태도에 힘이 없자 다시 한 번 물었다. "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힘없이 앉아있어?.... 너답지 않잖아." 켈파의 말에 피아텔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모두....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나 때문에.... 난 리더로서 실격이야...." 그때, 돌연 시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리더? 파하하핫. 누가 너 따위에게 리더자리를 넘겨줬지?" 그녀의 말에 피아텔은 잠시 발끈해 고개를 돌렸으나, 힘없이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향했다. 어제의 일이 보통 충격이 아닌 모양이었다. 켈파는 잠시 시나라는 여자를 책하는 눈길로 바라보다 피아텔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의 선택은, 네가 옳았어....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오이니아도 해를 입었을지 몰라...." 켈파는 언제나와 같은 약간 자신감이 결여된 목소리로 이렇게 피아텔을 위로했으나, 피아텔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난 처음부터 잘못한 것 같아.... 모라이티나.... 그녀의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그냥.... 조용히 뒤에 숨어 오이니아를 지 키고 있기만 했어야 하는데...." 켈파가 다시 위로했다. "그렇지 않아. 괴물이 너무 강했을 뿐이야.... 우리가 돕지 않았더라면.... 모라이티나님 혼자서는 막기 힘들었을 꺼야." 켈파의 이 말에 시나가 다시 한마디 하려했다. 그녀가 아는 모라이티나는 겨우 그 정도 괴물에 질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막 시나가 켈파의 말을 반박하려 할 때, 곁에서 로인이 그녀를 말렸다. 로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관하지 말자...." 시나는 로인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시나는 말괄량이에 끼여드는 것을 좋아하고, 생각을 거침없이 내뱉는 여자였지만, 그렇다고 속이 없지는 않았다. 켈파의 말에 피아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 그랬을까?" 그의 물음에 켈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아텔은 잠시 더 생각에 잠겨있다 이내 미소를 띄웠다. "맞아! 그랬을 꺼야. 하긴.... 그런 무지막지한 괴물은 여자 혼자 막기는 무리지. 우리가 돕지 않았더라면, 큰 위험을 당했을 꺼야. 그렇다면.... 내 선택은 최선의 것이었구나." 그 모습에 켈파는 담담히 웃었다. 역시.... 이쪽이 보기 좋아, 라고 생각하며. 한편 테리트론은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다 피아텔의 말에 냉소를 터트렸다. 하지만, 끝내 입을 열어 그를 책하지는 않았다. 자기 자신도.... 지금 마음이 복잡하다. 테리트론은 지금 두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크림슨 아이즈, 아니 란테르트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강해지고 싶다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는 힘이라는 것이 거의 필요치 않았다. 마적들이 쳐들어오면, 마을 경비대가 알아서 막아주고.... 몬스터들이 마을을 습격해도, 경비대가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저 생업에 종사하며 세금을 내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와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눈앞의 남자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나니, 더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제의 싸움은 테리트론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그러는 사이 점심때가 지났다. 켈파는 어느덧 자리에 앉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 있었고, 피아텔 역시 본래의 모습을 거의 찾아가고 있었다. 물론, 그 모습에, 시나는, "방금 전 고개를 무릎에 박고 있을 때가 좋았지...." 라고 중얼거렸지만.... 오래지 않아, 모라이티나와 오이니아가 돌아왔다. 럴리피드의 독은 꽤 위험한 것이었고, 그 때문에 거의 모든 의료 소에서 그 해독약을 비축하고 있었다. 덕분에 오이니아는 하루만에 완쾌가 되었고, 몸이 약간 나른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정상이었다. 그녀는 깨어나자 마자 모라이티나에게 어서 친구들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모라이티나는 웃으며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도착한 시간이 점심때를 막 넘겼을 때였다. 한창, 시나는 두 조수를 데리고 점심을 만들고 있었다. 모두들 마음이 복잡했다. 말리고 싶었으나, 배가 고팠고.... 놔두자니 결과물이 두려웠다. 고민 끝에 결국은 시나에게 요리를 맡겼고, 모라이티나가 돌아올 무렵에는 요리가 거의 끝나있었다. 모두들, 전날에 비해서는 훨씬 밝은 모습을 하고 있자, 모라이티나와 오이니아는 다행이라는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란테르트는 두 사람이 던젼 저쪽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몸을 일으켰다. "돌아왔군...." 모라이티나를 향해 이렇게 인사했고, 모라이티나는 그의 목소리에 환히 웃었다. "다녀왔어요." 그때.... 란테르트의 안색이 이상하게 변했다. 아직 모라이티나와 오이니아는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그녀들이 똑똑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란테르트의 안색은 크게 나빠져 있었다. 모라이티나가 달려오며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하지만 란테르트는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갑자기 한쪽 무릎이 푹 꺾이었고, 고개를 숙이며 피를 한차례 토해냈다. 눈을 크게 뜬 채, 란테르트는 하나밖에 없는 손을 바닥에 댔다. 깨어난 이래로.... 이런 엄청난 통증은 처음이었다. 그는 두 차례쯤 더 바다에 피를 쏟았다. 그가 뱉어 논 피로 주위가 붉게 물들었다. 모래질의 바닥으로 피가 스며든다. 모라이티나는 황급히 그에게 회복마법을 걸어 주었다. 무슨 일인지 전혀 알 수 없었기에, 단지 체력을 보조해주는 마법을 그의 몸에 걸며, 모라이티나는 황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도대체.... 왜 그래요?' 란테르트는 통증을 참는 듯 잠시 그 상태로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로인도 달려와 삼촌을 부축해 주었다. "괜찮아요? 삼촌?" 로인이 물었고, 란테르트는 가볍게 웃어 보임으로 그의 말에 대꾸했다. 시나는 하던 요리까지 멈춘 채 멍청히 란테르트를, 그리고 그가 흘린 피를 바라보았고, 다른 일행들 역시 란테르트의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란테르트는 소매로 입가를 대강 닦으며 몸을 벽에 기대었다. 모라이티나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으나,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소매 끝을 쥐고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줄 뿐이었다. "괜찮은 거예요? 갑자기 왜 그래요?" 모라이티나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꾸했다. "괜찮을 꺼야.... 옛 상처가 도진 것 같아...." 란테르트는 뒤이어 자신의 곁에서 걱정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로인의 향해 웃었다. "나는 괜찮아. 어서 가서 시나의 요리를 도와주렴." 로인은 그래도 안심이 안된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모라이티나를 한차례 흘끗 보며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자신이 남아 있어 보았자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차라리 모라이티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였다. 주위에 사람이 없자, 모라이티나가 다시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녀는 목소리를 낮췄다. "무슨 일이죠?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잖아요." 란테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전에 알던 한 사람이 이야기 해 줬었어.... 내 몸은.... 정신력과의 불균형으로 무너져 가고 있다고.... 절대 강한 마법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나크젤리온과의 싸움으로, 건강이 한층 악화되었나봐. 게다가 어제 록웜과의 싸움도 쉬운 것은 아니었고...." 모라이티나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 아닌가.... 말을 하는 사이에도 란테르트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아마도 통증이 계속되는 모양이었다. 식은땀이 끊임없이 얼굴 가를 따라 흐른다. 모라이티나는 계속해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많이 아픈가요?" 모라이티나가 물었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의 물음에 다시 한차례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는.... 상당한걸." "마법은 소용없어요?" 모라이티나가 물었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마법 때문에 얻은 병인데.... 마법으로 치료가 될 리 없잖아." 란테르트의 대답에 모라이티나는 잠시 멍청히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한차례 내 쉬었다. "후.... 당신이라는 사람은...." 그때, 시나가 외치듯 란테르트에게 말했다. "식사가 다 되었어요. 제가 만든 특제 스튜를 먹고 힘내세요." 그녀의 외침에 모라이티나는 몸을 일으켜 시나에게서 두 그릇의 스튜를 얻어왔다. 아마도 그녀가 할 줄 아는 요리는 이것 한가지뿐인 모양이었다. 모라이티나는 두 그릇의 음식을 받아 들어 란테르트에게 돌아올 때까지, 온통 정신을 란테르트에게 두고 있었다. 한 그릇을 그에게 건네주었고, 다시 한 그릇을 자신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그릇 안을 바라보았다. 이게 왜 스튜란 말인가? 그릇을 바라보며 약간 황당해하는 표정을 짓는 모라이티나를 보며 란테르트가 가벼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어느 정도 통증이 가셔졌다. "이번이 두 번째로 요리라는 것을 해 보는걸 꺼야...." 란테르트가 부연 설명을 했고, 모라이티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국물을 떠 입안에 넣어 보았다. 먹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미식가라 부를 수 있는 모라이티나의 입맛에 맞는 맛은 결코 아니었다. 모라이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찡그렸고, 이내 고개를 돌려 시나를 바라보았다. 모두들 한 그릇씩 받아든 채 먹고 있다. 시나도 자신이 만든 음식을 조용히 입안에 떠 넣고 있다. 모라이티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공부를 좀 시켜야 겠어요.... 저 말괄량이 아가씨에게...." 란테르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직 가슴에 약간의 통증이 남아 있어, 란테르트는 손을 가슴 언저리에 올려놓고 있었다. "불편하면 제가 먹여드릴까요?"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가 손을 가슴에 대고 있자 이렇게 물었고, 란테르트는 한차례 헛기침을 해 속을 정리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괜찮아...." 이제는 어느정도 왼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도 손에 익었다. 모라이티나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자신의 음식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입, 두입 음식을 입에 떠 넣었고, 다시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이제.... 좀 자신의 몸을 아끼세요. 힘든 일은 제가하겠어요. 록웜 한 두마리 정도는 저도 해치울 수 있어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대꾸치 않았다. 다만, 요즘 들어 잦아진, 그 잔잔한 미소를 모라이티나에게 내보일 뿐이었다. "고집불통...."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표정은 곧바로 얼굴을 뒤덮는 쓸쓸한 미소에 아스라히 사라져갔다. 일행이 다시 던젼 밖으로 나올 무렵, 어느덧 태양은 서편으로 서서히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일행은 한층 더 내려가는 것을 포기한 채, 그대로 중급자 코스와 고급자 코스 사이에 있는 출구로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마자, 이들은 곧바로 이 던젼을 관리하는 곳으로 찾아갔다. 테리트론은 그곳에 있는 책임자의 멱살을 움켜쥐었고, 시나는 팔짱을 낀 채 그들에게 독설을 내뱉고 있었다. "아.... 그게 말이 됩니까?" 책임자는 이렇게 강변했다. 믿었던 네 명의 용병이 저쪽에 있는 백발의 외팔이 검사에 의해 한방에 나가떨어진 후, 그의 태도는 급격히 자신감을 잃어갔으나, 그래도 이들 일행의 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테리트론이 말했다. "함께 들어가 볼까? 과연 지하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시나가 한마디 보탰다. "자신 있으면 한 번 혼자 들어가 보지 그래요? 하는 짓을 보니, 도망하나는 잘 칠 것 같은데. 지하에 있는 당신이 고용한 그 잘난 용병들과 함께, 당신이 만든 던젼을 탐사해 보라고요." 책임자는 테리트론이 멱살을 쥔 손을 몇 차례 흔들자 데롱데롱 매달려 어쩔 줄을 몰라했다. 테리트론의 몸이 말랐다고는 하지만, 날마다 그물을 끌어올리던 팔이다. 자신보다 작고 마른 남자를 들고 흔들어 대는 정도야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돈을 돌려주겠소. 그러니, 그냥 이대로 조용히 떠나주시오." 그의 말에 모라이티나가 끼여들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록웜입니다. 이런 던젼을 개방하는 건.... 너무 위험해요. 지하를 지키던 용병들이 전멸했어요. 저희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책임자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터무니없는 말이요.... 게다가.... 그렇다면 당신들은 어떻게 살아 돌아왔소? 지하에는 솜씨 좋은 용병이 100명 넘게 대기하고 있소이다." 시나가 그의 말데 대꾸했다. "우리 삼촌은 용병 100명이 아니라, 1만 명이라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아요. 그런 헛소릴랑은 집어치우고, 정 못 믿겠으면 안으로 한 번 들어가 보자니 까요." 일행의 질책은 이후로도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정작 피해를 본 오이니아와 켈파는 오히려 조용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렇게 한시간 가량이 흘렀다. 그리고.... 일행은 돈이든 자루를 하나 들고 밖으로 나왔다. 원래 지불한 돈 3700여 하르와, 보상금 명목으로 지불된 3000하르를 더해 모두 6800하르에 가까운 돈이었다. 이 정도면 만족이다. 테리트론은 그 금액을 이야기하자마자 멱살을 쥐었던 손을 놓았다. 물론 그 후로도 던젼을 폐쇄해야 한다는 장광설을 한차례 늘어놓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돈과, 던젼 안을 한 번 순찰해 보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일행은 그대로 사무실을 나와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은 모두들 피로에 지쳐 깊은 잠에 빠졌고, 다음날 늦게나 일어나 이 던젼 탐사장을 떠나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제 무슨 수행을 쌓지?" 언제나 처럼 가장 앞 열에는 켈파와 오이니아, 그리고 피아텔이 가고 있다. 켈파가 이렇게 내던지듯 물었고, 그의 물음에 피아텔이 잠시 날짜를 꼽아보다 손뼉을 딱 부딪혔다. "다행히 참가할 수 있다!" 오이니아가 물었다. "참가? 무슨 행사라도 있어?" 피아텔이 그녀의 물음에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무투회. 에디엘레 가에서 열리는 거야." "무투회?" 둘은 동시에 되물었고, 피아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투회에 참가하는 거야. 이대로 간다면 대충 시간을 맞출 수 있겠는걸? 올해는 참가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피아텔의 말에 다른 두 사람은 얼굴을 서로 마주볼 뿐이었다. 6. 란테르트 또 다시 무투회에 참가하다? 던젼을 벗어난지 2일째 되는 날인 11월 17일. 일행은 에디엘레 영지에 들어섰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피치토 마을에 있을 때부터 에디엘레 가의 영지였지만.... 에디엘레 가는 현재 일곱 대륙 안에 있는 20명이 채 안돼는 공작 가문중 하나이다. 레이니어, 레카르도 등의 구 마곡 육개 공국의 피를 이어받은 자를 제외하고 현재 공작 가문에 봉해진 가문은 10개 내외. 그중 소피카 출신이 4, 다른 대륙이 5명이다. 원래 공작가문은, 이 대륙 안에 마곡의 여섯 공작가문을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공작이라는 작위가 황제만이 내릴 수 있는 작위였기 때문이다. 파모로아 황국이 망한 이래로 어느 누구도 감히 황제를 칭하지는 못했고, 게다가, 지금의 왕족들이 원래 공작 가문 출신이었기에, 더더욱 공작이라는 작위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아이실트와 루실리스, 이 두 사람이 황제를 칭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아이실트는 자신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던 메티에르 나이트, 지그프리드의 트라미스가 시작으로, 세르테이나의 다르나시안 가문 등 자신의 추종자들을 공작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이에 자극 받아 루실리스도 자신의 심복들에게 공작가문을 하사했는데, 우선, 밀튼과 로멜의 허트가, 그리고, 전통적으로 친 소피카 본국 세력이었던 아드라르가, 세이아의 망명 귀족인 키톨트의 란트오트가, 핌트로스의 로이케트가, 아왈트의 슬크가 등이 그에 해당되었다. 통일 후, 루실리스는 기존 귀족들의 작위를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출신 국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뿐 아니라 왕족들의 지위 역시 종전과 다름이 없도록 배려했다. 그 후 그는 각 나라마다 하나의 공작 가문을 선발했다. 물론, 그 나라의 국왕의 추천을 받아서 였다. 공작의 지위는 왕보다는 물론 낮았으나, 어떠한 귀족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것이었다. 어찌 되었건, 그 덕에 에디엘레 가는 공작 가문으로 임명되었다. 그외에, 위다의 경우에는 트라미스 가가 공작 가문으로 인정되었고, 기타 나라들도 하나씩 공작 가문을 새로 가지게 되었다. 당연하지만, 이들은 모두 전쟁 당시 가장 큰공을 세운 귀족들이나 각 나라의 왕과 친분이 있는 귀족들로 정해졌다. 공작 가가 된 에디엘레 가의 영지는, 에노사의 거의 3분의 1이었다. 수도 고아 동북쪽으로 100휴하(1휴하=약 1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에디엘레 성을 중심으로, 에노사의 동북방 거의 대부분의 땅이 에디엘레 가의 영지가 되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땅에 원 주인이 있었기에, 직영지 자체는 예전 거의 그대로였으나, 각 영지로부터의 세금이 국왕이 아닌 에디엘레가로 들어가게 되니, 세입의 차이는 그 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일행은 지금 에디엘레 가의 직영지인 에이소 숲 일대를 여행하고 있었다. 숲이라고는 하지만 근처에 마을이 많아 그다지 울창하지 않았고, 일행은 말을 탄 채로 그곳을 통과할 수 있었다. 몇 일 전의 던젼탐사(?)는 일행에게 적지 않은 변화를 안겨 주었다. 모두들 스스로의 힘에 대한 어느 정도의 객관적인 판단 기준을 얻었고, 그 때문에 요즘 들어 각자 수련에 꽤 열심히 들이다. 로인과 시나의 경우에는 삼촌과 누나 혹은 언니라는 훌륭한 조언자들이 있었기에 그들에게 달라붙어 마법이나 검술을 배웠고, 다른 네 사람은 마을에서 배워왔던 것을 토대로 스스로 익혔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도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에게 지도를 받고 싶었으나, 아직은 조금 서먹서먹한 사이였다. 또 다른 변화는 바로, 란테르트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다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직접 힘을 경험한 테리트론의 경우에는 란테르트를 어느 정도 경외심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고, 다른 사람들도, 더 이상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를 평범한 여행자 정도로 보지는 않았다. "이제 하루 정도면 에디엘레성에 도착할 수 있겠지?" 피아텔이 혼잣말 조로 중얼거렸다. 에노사 북부에서 소피카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에노사의 3대 교역로중 남로였다. 하지만 에디엘레성은 북로 상에 위치하는 도시였고, 이렇게 갈 경우 하루나 이틀 정도 손해를 보게 된다. 그럼에도 에디엘레 가를 경유해서 가는 이유는 바로 무투회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 본선에는 입상할 수 있을까?...." 켈파가 피아텔의 말에 이렇게 물었고, 켈파와 피아텔 사이에서 말을 몰던 오이니아가 켈파의 말에 덧붙여 물었다. "그런데.... 우리같이 이름 없는 사람도 참가 시켜 주는 거야?" 두 사람의 물음에 피아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디엘레 가의 무투회는 엄청난 실력자들이 참가하는 경기는 아니야. 원래는 에디엘레 가문에서 검술을 배우는 제자들끼리 대련을 하던 경기인데, 요즘 들어, 문하생들이 경험을 쌓을 수있도록 외부인들 까지 경기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해 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상금도 많지 않고, 규칙도 복잡해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오히려 참가를 하지 않아." "그렇구나...." 오이니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피아텔은 자신감에 넘치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나는 지금 4강을 노리고 있는걸. 작년에는 아쉽게 8강 경기에서 떨어졌었어." 피아텔의 말에 오이니아는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작년에도 참가했었어? 그런데 왜 이야기 안했었어?" 피아텔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8강이 무슨 자랑거리라고...." 오이니아는 피아텔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켈파를 향해 말했다. "그럼, 켈파도 충분히 본선에는 들 수 있겠다. 피아텔에 비해 실력이 많이 떨어지지 않으니까." 켈파는 오이니아의 말에 귀밑을 살짝 붉혔다. "무슨 소리야.... 나 같은 녀석이 무슨...." 오이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약한 소리는 하지 마. 지난번 던젼을 떠올려봐. 피아텔과 거의 비슷한 숫자의 괴물을 무찔렀잖아." "그렇지만...." 켈파는 다시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오이니아는 싱긋 웃으며 그의말을 막았다. "자꾸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하니까 실력이 늘지 않는 거야.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 봐. 피아텔처럼." 피아텔은 오이니아의 말에 고개를 돌려 오이니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이니아는 여전 켈파를 응시하고 있었다. 머뭇거리며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켈파를.... 한편, 테리트론은 시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이야기라기 보다는 말싸움에 가까웠지만.... "아무래도 마법사가 더 유리하지 않을까?" 테리트론의 목소리였고, 뒤이어 시나가 말했다. "아니. 같은 실력이면 전사 쪽이 더 유리할 꺼야. 전사는 마법을 피할 민첩성을 갖추고 있지만, 마법사는 무기를 피할 민첩성 같은 것은 없잖아? 마법 일파를 피하고 난 후, 다음 마법을 사용할 때까지의 시간동안, 마법사는 멍청이가 되어버리잖아." 테리트론이 반박했다. "전사가 피할 수 있는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가 어째서 전사와 같은 능력이라는 거야? 그렇게 되면 전사 쪽이 더 강하다고 이야기해야 옳지." "하지만.... 마법을 피할 수 없는 전사라면, 마법사와 실력이 같다고 이야기 할 수 없잖아.... 어째 약간 이상하다.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은 역시 무리인 모양이야." 시나는 왠지 논리가 어그러지자 이렇게 결론을 내 버렸고, 테리트론은 두말 않고 그의 판단에 승복했다. 그 역시 그녀와 똑같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인은 그 둘의 싸움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삐를 늦추어 조금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란테르트와 발을 맞췄다.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는 막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로인이 다가오자 그를 바라보았다. "삼촌." 로인의 부르는 소리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여 이야기 해 보라는 뜻을 밝혔고, 로인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제가 무투회에 참가할 실력은 되는 걸까요?" 비록 입가에는 미소가 있었으나, 로인은 은근히 걱정되는 표정이었다. 란테르트는 로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여기 있는 피아텔, 켈파, 테리트론, 그리고 시나, 로인 등이 약하기는 했으나, 그들 나이의 사람치고는 상당한 실력들이었다. 다만 경험이 너무 없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일 뿐으로, 같은 나이 또래의 정규군들보다는 오히려 능력이 나은 편이었다.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용병들과 비슷한 실력이라고 할까? "정말이요?" 로인은 란테르트에게 되물었고, 란테르트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모라이티나는 이 무뚝뚝한 남자 대신 로인에게 격려의 말을 해 주었다.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을 가져도 좋아. 레크렐을 간단히 해치웠을 정도면, 그다지 실력이 없는 축에 속하지는 않으니까. 조금 더 경험을 쌓고, 더더욱 열심히 공부를 한다면, 머지않아 상당한 실력을 갖추게 될 꺼야." 로인은 그제야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그늘을 지웠다. "그러면 다행이에요.... 전 또.... 제 실력이 아무것도 아닌 줄 알고.... 록웜은 정말 무서웠었거든요...." 모라이티나가 로인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록웜은 사실 나도 무서워. 두 마리가 동시에 덤벼들면 어떻게 될지 장담 못해. 란테르트처럼 세 마리를 동시에 어떻게 할 수는 없어." "그렇군요...." 로인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저런 일로 시간을 보내던 일행은, 밤늦게 드디어 에디엘레 성에 도착했다. 이미 성문은 굳게 닫히었고, 일행은 할 수 없이 성밖의 여관에 행랑을 풀고 하룻밤을 그곳에서 보냈다. 참가 신청은 아주 간단했다. 혹시 모를 부상에 대비해, 일정금액의 보험금 및, 선불 의료비를 제출하고, 이름만을 간단히 적어 내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참가 비는 1인당 10하르, 이번에는 테리트론도 군소리 않고 찬성했다. 물론, 모라이티나와 란테르트는 참가하지 않았다. 오이니아도, 비록 요 며칠간 검을 조금 휘둘러보았으나, 무투회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겨우 며칠간 검술을 연습해 참가할 수 있는 무투회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날이 참가신청 마지막 날이었다. 오후에 발표된 참가 명단에 의하면, 총 인원은 157명이었고, 이들을 모두 세조로 나누어 예선전을 치를 모양이었다. 경기장은 평소 에디엘레 가가 검술을 가르치는 강습소에 마련되었다. 무투회 덕분에, 성안은 꽤나 소란스러웠다. 에디엘레성은 이 1년에 한 번 있는 이 날을 거의 축제일로 삼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무투회에 참가하고, 또 구경하기 위해 찾아오니, 이 기회를 틈타 이익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 덕에 성안의 사람들은 이날 거의 대부분 물건들을 구입해 와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장사를 하고, 이런 저런 놀이판을 벌여 놓기도 한다.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를 제외한 여섯 사람은 이날 오후, 대진표를 보기도 할 겸 축제준비로 시끌벅적해진 에디엘레 성안을 산책하고 있었다. 여섯사람 중, 테리트론, 시나, 로인, 이 세 사람은 1조에 속했고, 켈파는 2조, 그리고 피아텔은 3조에 속해 있었다. 일행이 막 에디엘레 가의 남문과 연결된 넓은 도로상을 걷고 있을 때였다. 평소 마차 네 대는 나란히 움직일 만 하던 이 넓은 도로는 길가에 늘어선 노점상들 덕분에 마차 두 대가 간신히 지날 만 할 정도로 좁아져 있었다. 사람들은 보통 이 도로를 하넷 애비뉴라고 불렀다. 에디엘레 가문을 백작가문으로 만든 장본인으로 200여 년 전의 에노사 통일 전쟁 때 굉장한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모두들 이 하넷 애비뉴를 걷고 있을 때, 일행은 자신들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대의 마차를 보았다. 암갈색의 고풍스러운 마차로, 커튼이 반쯤 드리워진 창을 통해 안을 바라보니 왠 에메랄드 빛 머리칼을 가진 여자가 한 명 앉아 있었다. 마차의 옆에는 흰색 사각형 바탕에 검정색으로 잎이 가느다란 꽃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문양의 아름다움이 결코 살아있는 꽃에 못지 않았다. 피아텔이 그 모습을 보며 찬탄하듯 중얼거렸다. "아! 에디엘레 가의 마차다." 다른 다섯 사람은 피아텔의 말에 마차를 바라보았다. 마부석, 마부 보조석, 그리고 뒤의 시종까지 모두 네 명이 매달려 있는 이 마차는, 네 마리의 백마에 의해 끌려가고 있었는데, 그 크기가 언뜻 보아도 보통의 마차 한배 반은 되어 보였다. "대단하구나.... 역시 공작가문이라는 건...." 오이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고, 시나도 약간 놀랐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위다에서도, 저 정도로 큰 마차는 흔치 않았다. 막 일행을 스쳐 지나가며, 그 에메랄드 색의 머리칼을 가진 20세 가량의 여자는 고개를 돌려 일행을한 번 흘끗 바라보았다. 큼지막하면서도 부드러운 눈매와 오똑한 코를 가진 굉장히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입가에 미소가 없는 것이 조그마한 흠이었으나, 누가 보아도 탄성을 내지를 만한 미인임에는 틀림없었다. 마차는 그렇게 일행 곁을 스쳐 지나갔으나, 일행의 시선은 잠시동안 마차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 사람들도 무투회에 참가하겠지?] 마차에 타고 있던 연녹색 머리칼의 그 여자는 막 밖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거두며, 손가락을 이용해 옆에 앉아있는 15세 가량의 소녀의 손바닥에 이러한 글을 썼고,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홍색 머리칼을 단발로 자른 이 소녀는 볼 위에 주근깨가 있어 활달한 인상을 주었다. "그렇겠지요, 아가씨." 소녀는 주홍색 눈동자로 연두색 머리칼의 여자를 향해 이렇게 대꾸했고, 연두색 머리칼의 여자는 다시 한 번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 난 이때가 정말 싫어....] "왜요? 난 즐겁기만 하던데. 웃고 떠들고 즐길 수 있잖아요." 소녀는 이렇게 말하며 입을 벌리며 미소지었다. 앞니 하나가 약간 뻐드러져 나온 것이 꽤 귀여워 보인다. [하지만.... 난 웃고 떠들며 즐길 수 없는걸.... 또 가기도 싫은 무투회 장에서 억지 미소를 지어 보여야 하고....] 연두색 머리칼의 여자는 이렇게 글자를 적었고, 주홍색 머리칼의 소녀는 아, 하는 조그마한 소리를 내었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연두색 머리칼이 소녀의 말에 미소지었다. [아니야. 이런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쓰지 마. 켈리, 넌 내 소중한 친구이자 동생 같은 아이야. 너와 이렇게 함께 다닌지 벌써 5년째잖아.] 아마도 주홍색 머리칼의 소녀의 이름이 켈리인 모양이었다. "아가씨도.... 그보다, 이게 얼마만에 집에 돌아오는 거죠? 9월.... 10월.... 11월.... 오늘이 18일이니까.... 야! 거의 석 달이 다 되어가요." 켈리는 손가락까지 꼽아보며 이렇게 중얼거렸고, 그런 그녀의 호들갑스러운 행동에 연두색 머리칼의 아가씨는 미소를 지었다. [가을 학기는 조금 바빴잖아.... 이제 한 세 달쯤 쉬었다가, 다시 봄 학기 공부를 하러 가야지.] 켈리가 방긋 웃었다. "아무튼 아가씨는 정말 대단해요! 천재 라니까요. 천재! 남들은 나이 30이 되어서도 입학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에노사 국립대학을 월반까지 해 다음 학기면 졸업이라니~!" [천재는 무슨....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 그렇지 뭐.... 다른 아이들처럼 이런 저런 일들을 하면서 공부했더라면 결코 이렇게 되지 못했을 꺼야. 게다가 켈리의 도움이 있었으니까 가능했잖아? 내 입이 되어 주었으니까....] 연두색 머리칼의 여자는 이렇게 글자를 적은 후 켈리의 손을 꼭 쥐어주었고, 켈리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와! 다 온 모양이에요. 내릴 준비를 해야 겠네요." 연두색 머리칼의 여자와 켈리는 그 성격이 거의 반대인 듯 보였다. 한 명은 활달하고 수다스러운 반면, 다른 한 명은 표정에 약간의 그늘이 있고, 아예 말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의외로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었다. 마차 뒤에 매달려 왔던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연두색 머리칼의 여자는 사뿐히 바닥에 내려섰다. 그녀의 아버지는 에디엘레 가의 가주로, 전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검사였으나, 그녀는 검술은 전혀 공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타고난 피는 어쩔 수 없는지, 운동신경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 뒤이어 켈리가 바닥에 내려섰고, 이내 연두색 머리칼의 여자의 손을 잡은 채 그녀와 나란히 성안으로 들어갔다. 내성 안 입구에는, 어느새 두 사람의 남녀가 나와 있었다. 40을 조금 넘긴 듯한 이 두 사람은 부부인 듯 보였다. 한 명은 길지 않은 금발의 중년 이였고, 다른 한 명은 마차에서 내린 아가씨와 같은 색의 머리칼을 가진 부인이었다. 연두색 머리칼의 여자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굉장히 예의를 갖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다시 고개를 든 그녀는 뛰듯 두 사람에게 다가가 매달리듯 부부에게 안겼다. 이 세 사람은 다름 아닌, 디미온, 제레미아 부부와 이시테였다. 어느덧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이시테는 10살 자리의 꼬마에서20살의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오! 이시테야. 돌아 왔구나. 그래 이번 학기의 공부는 어떠했니? 아니지.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 구나." 디미온은 딸의 귀환에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번 해의 봄학기에도, 지난해의 가을학기에도 이시테는 에노사의 수도인 고아성에 가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번 학기에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집에 돌아왔다. 원래는 10월말에 학기가끝나고, 11월 5일이나 6일쯤 집에 돌아오곤 했었으나, 이번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10일 이상이나 늦은 것이다. 제레미아도 희색을 띄며 이시테의 머리칼을 잠시 쓰다듬다가 이내 뒤에 서있는 켈리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언제나 수고가 많구나." 제레미아는 예전의 처녀같이 활달하던 성격에서 이제는 나이에 걸맞은 모습을 갖추게 된 모양이다. 그녀의 칭찬에 켈리는 무릎을 살짝 굽히며 치마 끝을 살짝 들어올렸다. 네 사람은 어느덧 자리를 옮겼다. 공작 가문이다. 제 3인자가 없는 에노사의 2인자이다. 1500에 가까운정병을 사병으로 거느릴 수 있다. 사병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한 경비대를 제한 숫자이다. 국왕이 거느릴 수 있는 한계가 3000임에 비한다면 파격적인 숫자이다. 게다가 지을 수 있는 성의 크기도, 사용하는용어, 입을 수 있는 옷, 타고 다닐 수 있는 마차의 크기 등등.... 후작이나 백작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런 공작가문의 응접실이니 만큼 으리으리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만약 디미온이 조금 더 사치스러운 것을 즐겼더라면, 아마 이곳은 금붙이나 보석으로 덕지덕지 도배를 했겠으나, 다행히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조금 화려한 장식들과 화려한 색으로 치장했을 뿐이다. "그래. 이번 학기의 공부는 어땠니?" 제레미아가 테이블을 마주한 채 켈리의 손을 잡고 앉아있는 이시테에게 물었고, 이시테는 그녀의 말에 켈리의 손에 글자를 써 대꾸했다. 물론, 말은 켈리가 했다. "이시테 아가씨는, 괜찮았어요, 어머님, 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마님." 이시테가 한 말보다 더 많은 말을 덧붙여 켈리가 답했고, 제레미아는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구나. 그런데 왜 이번에는 이렇게 늦은 거니?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단다." 제레미아가 다시 물었다. 이시테는 켈리의 손에 글자를 적었고, 켈리는 입을 열어 이시테의 말을 전했다. "이시테 아가씨가 대답하시길, 이번 학기는 조금 바빴어요. 할 일이 조금 남아 늦었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님." 그때, 제레미아가 얼굴을 찡긋 하며 켈리를 향해 말했다. "켈리 장난하지 마렴. 무슨 말이 그렇게 복잡하니?" 그녀의 말에 켈리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감히 소녀 켈리가 마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학기에이시테 아가씨께서는 고대의 예법을 공부하셨습니다. 비록 소녀 켈리가 어리석지만 그곳에서 들은바가 적지 않습니다. 종으로써 주인에게 예의를 다해 말하고 싶습니다." 켈리는 이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었고, 제레미아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내가졌다. 켈리, 이 깜찍한 꼬마 계집아이야." 제레미아의 말에 켈리는 헤헤 웃었다. "마님. 정말 고대의 예법은 재미있지 않나요?" "재미있지. 하지만 이제 와서 그렇게 하려면, 혀가 견뎌 내지를 못할 것이야." 제레미아는 켈리의 말에 이렇게 대꾸하며 다시 이시테를 향해 물었다. "그래, 예정대로 내년 봄 학기를 마지막으로 졸업하게 되는 거니?" 제레미아의 물음에 이시테는 손가락을 움직이고, 켈리가 답했다. "내년 4월말에 졸업할 수 있으시데요. 마님,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아마 에노사 국립대학이 생긴 이래로 스물 한 살에 졸업을 하는 분은 우리 아가씨 한분 뿐이실꺼에요." 그녀의 말에 이시테는 곧바로 [그만 하렴 켈리.] 라고 말했고, 켈리는 짐짓 듣지 못한 척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가씨의 전공인 역사학과의 교수가 이렇게말했었어요. 내가 지금까지 100명이 넘는 학생을 가르쳐 보았지만, 우리 아가씨만큼 이해력이 좋은 학생은 없었다, 라고." 켈리의 말에 제레미아와 디미온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한 소년이 응접실로 뛰어 들어와서는 곧바로 이시테에게 달려들었다. 나이는 8, 9세쯤으로 보였는데, 색이 하도 엷어 연두색처럼 보이는 금발을 가지고 있었다. 동글동글한 눈매에 파란색의 눈동자가 너무나 귀여운 소년이었다. "누나~~~~!" "셸론 도련님!" 소년은 달려들며 이시테를 누나라고 불렀고, 켈리가 곁에서 이시테를 대신해(?) 그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누나 오래간 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 셸론은 이렇게 외치며 이시테의 무릎에 대롱대롱 매달렸고, 이시테는 그런 그의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반갑다는 표시는, 이 환한 미소와 부드러운 손길 그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 "도련님. 저는 아는 척도 안하기예요?" 켈리는 이 두 남매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흐뭇해졌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셸론은 그녀의 말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 미안, 켈리. 켈리도 잘 지냈지?" 셸론은 이제 더 이상 이시테에게 어리광을 피우지 않았다. 나이답지 않게, 조금은 점잖은 표정을 지었고, 가만히 이시테 곁에 자리를 잡았다. 2인용 의자였고, 이시테와 켈리가 이미 앉아 있었으나, 워낙 몸집들이 작아 셸론이 앉아도 오히려 자리가 남았다. 셸론까지 끼여들어 모두 다섯 명은 한참동안 이야기를 했다. 켈리의 손과 입을 통해 말해야 했기에, 이시테의 이야기는 조금 더디게진행되었으나, 모두들 익숙해져 별 문제는 없었다. 게다가, 켈리는 이제 이시테와 호흡이 척척 맞아, 글자를 채 다 쓰기도 전에 그녀가 할 말을 눈치채 말을 할 정도였고, 그 덕에 대화는 조금 더 수월히 이루어 졌다. 켈리, 이 주홍색 머리칼의 소녀는 전쟁 고아이다. 성은 멜린스키. 켈리 멜린스키인 것이다. 평민 출신으로.... 그녀가 이시테와 함께 지내게 된 사연을 소개하자면, 부득이 영웅전쟁기의 이야기를 잠시 꺼내야만 할 것 같다. 영웅전쟁기, 파모로아력 660년에서 669년까지의 이 기간 중전반부의 절반은 싱겁기 그지없었다. 모든 나라들은 겨우 '조금 더' 자주 전쟁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후반부는 달랐다. 666년.... 루실리스와 아이실트 이 두 사람이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고 향후 3년간 이 두 나라는 엄청나다 할만한 전쟁을 전 대륙에 걸쳐 펼쳤다. 초기에 승기를 잡은 것은 아이실트였다. 아니, 초기뿐만이 아니었다. 대륙의 전쟁은 시종일관 위다의 승리로 일관되었다. 노마티아가 복속되고, 에노사가 위다의 깃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이미 점령한 레냐, 세이아와 함께, 위다는 7개의 대륙 중 5개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소피카는 너무 조용했다. 형마저 죽여가며, 물론 이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나, 왕위를 빼앗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기 까지 한 루실리스는 위다가 노마티아를 공격하고 에노사를 공격해 점령할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찾아온 아이실트의 마지막 싸움.... 위다는 결국 세이아를 통해 소피카 대륙을 공격했다. 그 공격 직전 마곡의 왕가인 레이니어가의 가주가 마곡을 소피카에 넘겨 버린 일을 제외하고는, 위다에게 조금도 불리할 것이 없는 싸움이었다. 어찌되었건 전쟁의 신 사에이시온은 소피카의 편을 들었다. 아이실트는 전사했고, 그의 첫 번째 기사 지크는 간신히 완패만은 면한 채 군사를 이끌고 위다로 돌아왔다. 하지만.... 위다 군에 있어서 아이실트의 위치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천재라고 밖에는 이야기 할 수 없는 전술로 전 대륙을 재패할뻔 했던 그가 사라진 위다 군은 오합지졸 이상의 의미는 주지 못하였고, 3년에 걸쳐 얻은 땅을 6개월만에 모두 소피카에게 빼앗겼다. 이런 전쟁 와중.... 에노사는 위다에 멸망했다. 하지만, 에노사의 왕은 죽지 않았다. 모든 귀족들이 아이실트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목숨을 구걸하는 동안, 이 에디엘레 가는 자신의 주군과 함께 에아산맥으로 몸을 숨겼다. 모든 귀족들이 위다의 발 밑에서 이전의 지위를 유지하며 여전 편안한 생활을 하는 동안, 이들은 고달픈 도피생활을 해야만 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왕이 무능력하지 않았다는 것과, 위다의 추격이 심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에디엘레 가는 공작 가문에 봉해졌고.... 보답은 받았다고 이야기 할 만 하다. 켈리를 만난 것은 그 도피생활 중이었다. 우연히, 산맥 안 폐허가 된 마을에서 그녀를 발견한 것이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고작 8살이었고, 병사들은 모두 그녀를 데려가는 것에 반대했으나, 제레미아와 이시테가 여성 특유의 모성애를 발휘해 그녀를 함께 데리고 도망쳤다. 그 후, 대륙은 통일되었다. 에디엘레 가는 공작 가문에 봉해졌고, 켈리는 에디엘레 가에 남아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생활에 안정을 찾게 되자, 그녀는 무언가 할 일을 원했고, 결국 이시테의 수발을 들게 된 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마친 후, 이시테는 자신의 방으로향했다. 현관에서 곧바로 응접실로 끌려가 한참동안 이야기를 했다. 즐겁지만, 피곤한 것도 사실이다. 켈리는 이시테의 뒤를 졸졸 쫓아 따라갔다. 켈리의 방은 이시테의 바로 옆방이다. 게다가, 종종 둘은 한 침대에서 잠이 든다. 어려서부터 외로움을 많이 타던 이시테는 이 활달한 켈리라는 꼬마, 처음 만났을 때는 분명 꼬마였다, 에게 급속도로 끌려 들어갔고, 지금은 친구처럼 자매처럼 지내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켈리가 주종의 신분을 망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이시테 쪽에서 더 신경 쓰지 않았다. [피곤해.... 이대로 자고 싶어....] 이시테가 말했고, 켈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주무세요. 식사 때가 되면 깨워 드릴께요." 늦은 가을이어서 해가 일찍 진다. 아직 여섯 시도 되지 않았는데, 어느덧 동편에 하나 둘 별이 반짝인다. [그래 줄래?] 이시테는 이렇게 말하며 조용히 침대에 쓰러졌다. 연둣빛 머리칼은 탐스럽게 펼쳐졌고, 켈리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이내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물론이죠, 아가씨. 누구의 부탁인데...." 이미 잠들어 버린 이시테를 향해 켈리는 상냥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한편 같은 시간, 내성 벽을 격한 저 밖. 여관. 물론, 한 영지의 수도에 있는 만큼의 규모와 질을 자랑하는 곳이지만, 지은지 오래되어서인지 그다지 세련된 모습은 아니다. 이름은 분노의 토끼. 왜 이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조금 전 테리트론이 여관의 주인에게 물었으나, 자신의 전 주인이 지어놓은 이름이라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이길, "멋지지 않습니까?".... 테리트론은 한마디하려다 억지로 미소지어 주었다. "센스 한 번 끝내 주시네요...." 라는 말은 물론 잊지 않았다. 저녁을 먹은 후의 이 시간에.... 모라이티나는 언제나 란테르트의 방에 있다. 늦은 시간, 졸음이 몰려올 때나 되어야 모라이티나는 시나와 함께 묶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반대로 이 시간에 로인은 시나의 방으로 가 있다. 란테르트와 한방을 쓰지만, 모라이티나가 찾아오기에 자리를 피해주는 것이다. 로인은 모라이티나를 좋아한다. 물론, 남녀간의 그런 것이 아닌, 정말 누나로 생각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숙모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로인은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가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시나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으음.... 삼촌은 왜 그렇게 우유부단 한 걸까.... 으음...." 시나는 팔짱을 낀 채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시나의 이 말에 로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삼촌도 모라이티나 누나를 싫어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아니, 꽤 좋아하고 있는 듯 보였어." 다시 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삼촌은 모라이티나 언니를 아주 좋아하고 있지. 너도 느꼈는지 모르지만, 누나가 곁에 있을 때에는 얼굴에 화색이 다 돌아." "그런데.... 왜 결혼은 하지 않을까? 아무리.... 사피엘라.... 숙모를 사랑하고 있다지만,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설사 결혼을 했었다 해도, 재혼을 하는 게 나쁜 것도 아니잖아. 우리 엄마도 양아버지와 재혼하셨는데, 란테르트 삼촌은 전혀 반대하지 않으셨었어." 로인의 말에 시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혹시 서로 종족이 달라서일까? 모라이티나 언니는 엘프잖아." 시나의 이 말이 꽤 설득력이 있게 들렸기에 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겠는걸.... 하지만 뭐 어때? 종족이 다르다고 결혼을 할 수 없다는 법은 없잖아. 서로 좋아하면 그만이지." "꼬마, 꽤 마음에 드는 말을 하는걸. 음.... 아마 란테르트 삼촌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꺼야.... 생각이 꽉 막힌 사람은 아니니까." 둘의 이런 논의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사실, 모라이티나 덕에 쫓겨온 로인과, 그런 그를 바라보는 시나가 모였을 때, 그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이런 이야기를 하던 시나는 돌연, 밤하늘의 빛만큼이나 어두운 보라색 머리칼을 한차례 쓸어 올리며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훗.... 지금 남 걱정할 때는 아니지.... 그 보다, 로인." 로인은 막 시나의 남 걱정할 때가 아니지, 라는 말에 쓴웃음을 짓다가 시나의 말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무투회에서 나와 만나게 되더라도 결코 져주거나 해서는 안돼. 알았지?" 로인은 순간 머리를 굴렸다. 지금 이 아가씨의 말이 반어법이야.... 아니면 사실대로 말하는 거야?....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말이야. 난 내 실력을 한 번 테스트 해 보고 싶어. 아예 이참에 마도사의 길로 접어들어 볼까 하고 말이야." 로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도사? 직업을 그쪽으로 택하려고?" 시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난 귀족이잖아. 직업 같은 건 그다지 필요 없어. 지금 우리 크리미아가문의 영지에서 내게 들어오는 수입만 해도 꽤 될걸?" 로인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지? 아.... 그렇구나. 그런데 왜 에티콘 가에 머물고 있어?" 시나는 돌연 밖을 내다보던 몸을 돌려 로인을 바라보았다. "그야, 칼슨 아저씨와 엘라 아주머니가 좋으니까. 어려서 고아가 된 나를 친자식처럼 돌보아 주셨잖아. 난 오히려 친부모 밑에서 있었을 때 보다, 두분 밑에 있었을 때가 더 즐거웠던 것 같아. 내가 떠나면 두 분은 꽤 쓸쓸해 하실 꺼야." 로인은 그녀의 말에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 왠지 약간 나이에 비해 철이 없어 보이는데다가, 괄괄한 성격 덕분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인은 이런 생각을 하며 시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원래 로인은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성격이었다. 생각하는 것이 얼굴에 그대로 표정으로 나타난다. 시나가 그 모습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의외인가 보지? 왜, 난 그렇게 착한 생각하면 안돼?" 로인은 그녀에게 생각을 들키자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아.... 아니...." 시나는 로인의 모습에 활짝 웃었다. "로인은 정말 귀엽다니까. 내가 다섯 살만 어렸어도, 그 데이나인가 하는 아가씨로부터 빼앗아 오는 건데. 후훗." 로인의 얼굴은 더더욱 빨개졌다. 한편, 오이니아와 다른 세 사람 역시 한 방에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대화의 초점은 당연히 내일 있을 무투회였다. "우리 중 우승자가 나오기는 힘들겠지?" 오이니아는 언제나와 같은 환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를 잃은 데서 오는 슬픔은 이제 간신히 잊은 듯 했다. 종종 밤사이 베개를 눈물로 적시곤 했으나, 낮에 할아버지 때문에 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이니아의 말에 피아텔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에디엘레 가의 문하생들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데.... 사실 내 실력으로 4강 안에 들 수 있을지도 미지수야. 운이 조금 따라 줘야 하지." "그렇구나.... 하긴, 에디엘레 가는 굉장히 유명하니까." 돌연 켈파가 멍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라이티나 님이나.... 란테르트 님이라면 충분히 우승을 할 수 있겠지?...." 단지 이야기 끝에 나온 별 의미 없는 이야기였으나, 일행은 순간 침묵에 잠기었다. 처음으로 말을 꺼낸 것은 피아텔이었다. "글쎄.... 장담할 수 없을걸? 우리보다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켈파가 곧바로 반박했다. "너도 봤잖아. 그때, 던젼 밖으로 나와 그 사무실에서.... 네명의 용병을 한 주먹에 쓰러뜨린 것을.... 검을 뽑지도 않은 채 주먹으로...." 피아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물론 그렇지만, 그들은 용병이었잖아. 게다가 방심하고 있었고. 뛰어난검사와 평범한 용병 사이의 실력차이는 하늘과 땅이야. 아마, 에디엘레 가에서 검술을 배우고 있는 첫 번째 제자 정도면, 네 명이 아니라 여덟 명이라도 한 주먹에 쓰러뜨릴 수 있을걸? 아무리 란테르트 그가 강하다 하더라도, 검사들을 이기기에는 무리야." 그때, 테리트론이 한마디했다. "헛소리. 네가 그의 강함을 직접 보지 못했으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피아텔이 곧바로 반박했다. "테리트론 네가 검술에 대해 무얼 안다고 그래? 그는 외팔이야. 마검사는 결코 검사보다 검술이 뛰어날수 없어. 밀튼 님과 로멜 님 같이 타고난 재능이 없는 한은, 결코 검술에 정통할 수 없지. 그런 상태에서 팔까지 잃었으니, 그의 검술실력이야 보나 마나지. 게다가 마검사이니, 마법 실력도...." 테리트론이 그의 말을 막았다. "넌 두 팔이 다 있어서 검술실력이 그 모양이냐?" "뭐?!" 점점 둘 사이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오이니아가 나서서 중재를 했다. "그만들 둬. 피아텔, 테리트론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해 줘." 피아텔은 오이니아의 말에 단번에 화난 기색을 풀었고, 입가에 미소까지 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물론, 테리트론은 그런 그의 모습에 냉소를 터트릴 뿐이었지만. "한 손 검술은 원래 방패를 염두에 둔 것이야. 한 손으로 검을 들어 공격을 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방패를 들어 방어를 하는 것이지. 하지만, 그런 방식은 아주 오래 전에 사라졌어. 바로, 양손검술이 나온 이후부터야." 오이니아가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왜지? 그리고.... 왜 그 이전에는 양손검술이 없었던 거야?" "양손 검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야. 다만, 과거에는 양손검술을 한 손으로 들 수 없는 검에만 사용했었지. 지금과 같은 양손검술은 아니었던 거야. 그리고, 양손검술이 나타나면서 방패가 사라진 것은 아주 간단한 이유에서야. 한 손 검술에 비해 양손 검술은 그 움직임이 굉장히 화려하고, 변화가 굉장히 다양해졌어. 두 손을 이용해 검의 방향을 전환하기 때문에, 과거 한 손으로만 검을 다룰 때 보다 훨씬 다양한 검술이 세상에 나온 것이지. 그 때문에 방패로 상대의 검을 막기가 더더욱 힘들어 지게 된 거야. 게다가, 상대는 방패가 없어 몸이 가벼워 졌고, 두 손으로 검을 휘두르니 위력이 배가되어 얇은 방패는 단번에 관통할 수 있게 되었지. 아무튼 이런 이유로 방패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지금은 양손검술이 방패를 든 한 손 검술을 대신하게 된 거야." 오이니아, 켈파 이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피아텔이 이야기를 이었다. "하르라는 금속 또한 한몫 단단히 했지. 처음 하르 금속의 사용법이 이 세상에 알려졌을 무렵, 전 대륙에는 하르 검이 엄청나게 유행하게 됐었어. 제련기술이 뛰어나지 못했던 당시에는, 검을 이루는 금속이 그 검의 성능을 좌우했고, 결과적으로 가장 뛰어난 금속인 하르로 만든 검의 성능이 당대에는 최고였던 거야. 그런데.... 하르제 방패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 "왜? 오이니아가 다시 끼여들어 물었고, 피아텔은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르제 방패는 큰 충격에는 깨져 버리거든. 하르 금속은 잘 휘지 않아. 보통 강한 힘을 받으면 깨져 버리지. 물론, 그 강한 힘이라는 것이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이기는 하지만, 도끼나 메이스 같은 때리는 병기에는 전혀 맥을 못 춰. 차라리, 철제나 구리제 방패가 방어력은 더 뛰어난 편이지." "아.... 그렇구나." 오이니아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이런 쪽의 이야기를 굉장히 좋아한다. 피아텔은 오이니아가 자신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자 덩달아 즐거워 계속 이야기를 해나갔다. "아무튼, 그것이 한 손 검술과 양손검술의 차이야. 즉 한 손 검술은 양손검술에 비해 굉장히 단순하지. 그러니까.... 외팔이인 그는 결코 양손이 다 있는 검사를 상대로 이길 수 없어. 비록 마법의 힘이 있다고는 하지만, 마검사의 마법이 검사들을 상대로 통할 리가 없잖아? 상대는 보통의 사람이 아닌 검사야." 피아텔은 이렇게 말하며 테리트론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흡사, 반박할 말 있어? 라고 묻는 듯 했다. 테리트론은 사실 그렇게 자세하게까지 그런 것들을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란테르트라는 남자가 록웜 세 마리를 한 손으로 슥슥 베어버린 모습만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도 검사일 수 있잖아. 그것도.... 한 손 검만을 전문으로 사용하는...." 테리트론은 약간 자신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 후, 곧바로 말했다. "뭐, 난 자세한 건 잘 모른다. 하지만, 그는 굉장히 강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정도가 아니야. 너희들이 좋아하는 그 잘난 룬의 기사들보다 강할지도 몰라." 테리트론의 이 말은, 그 나름대로의 자신감에 차 있었으나.... 모두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룬의 기사보다 강하다니.... 결코 그럴 리 없다. 그 둘 모두 마검사이지만, 검술실력이 일류급이다. 아니,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대륙 전체에서 10손가락 안에 꼽힐 만 하다고 한다. 테리트론은 모두들 자신의 이야기를 곧이 듣지 않자 조금 답답했다. 순간, 그의 정체, 크림슨 아이즈라는 그의 정체를 밝혀 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신도 확신을 못하고 있는데다가.... 다른 아이들이 믿을 리도 없었고, 란테르트 그도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을 원치 않는 듯 했다. "믿기 싫다면 그만 둬라. 뭐 어차피 상관없으니까...." 테리트론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침대에 몸을 길게 눕혔고, 다른 일행들은 왜 그가 란테르트 그를 그렇게 감싸고도는지 이해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하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무투회 당일 아침. 이시테는 무투회 개막식에 참가하기 위해 한창 몸단장을 하고 있었다. 켈리와, 그 밖의 몇몇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그녀는 꽤 화려하면서도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고, 켈리는 곁에서 연신 그녀의 미모를 칭찬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켈리 역시 오늘은 상당히 치장이 많은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옷을 완벽히 갖춰 입은 이시테와, 그녀 못지 않게 치장을 한 켈리 이 두 사람은 본성 동쪽으로 나 있는 소로를 따라 무투회 장으로 향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검술 강습소에 가까워 질 때마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또렷이 귀에 들어왔다. "야~! 올해도 시작이군요!" 켈리는 자신도 모르게 들떠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고 이시테를 보았다. 담담한 표정이 역시 그다지 즐거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아가씨는 왜 무투회를 그렇게 싫어하세요? 주인님이 검사 시고, 우리 가문은 대대로 무가였다면서요? 게다가, 아가씨가 싸우는 것 그 자체를 아주 싫어하는 것도 아니 시잖아요." 켈리의 물음에 이시테는 가볍게 손가락을 놀렸다. [난.... 싸우는 게 싫어.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난 아주 어렸을 때부터 무서운 모습을 많이 봤었단다. 그래서, 그런 흉악한 것을 보는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켈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주인님이 검술 수련을 하는 모습은 자주 구경가시잖아요." [그건 싸우는 건 아니잖아? 게다가....] 이시테는 켈리의 말에 이렇게 대꾸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게다가' 를 쓰고는 한참동안 머뭇거리는 것이 말을 할지 안할지를 고민하는 듯 보였다. "게다가 라니요?" 켈리가 재촉했다. [게다가.... 사실, 난 이런 경기들이 유치해 보여. 그분의 실력에 비한다면....] 이시테는 이윽고 답했고, 켈리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 아가씨가 언제나 말씀하시는 그분이요? 하긴.... 아가씨 말 데로, 성을 통째로 녹여 버렸을 정도라면.... 뭐 그 정도라면 당연히 무투회야 유치해 보이겠죠." 켈리의 말에 이시테가 대꾸했다. [그래.... 전에도 말했지만.... 내게 있어서 친구는 단 둘 뿐이야. 너하고.... 그분. ....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실까? 지난 10년간.... 그의 이름을 들은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이시테는 한숨까지 내쉬며 이렇게 말하며 조금 울적한 표정을 지었고, 켈리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잠시 살피다 말을 돌렸다. "올해도 역시 미셸튼 님이 우승을 하겠지요? 역시 주인님의 수제자다우시다니 까요. 그분, 작년에 3년마다 열리는 에노사 왕립 무투회에서 4강 안에 드셨었죠. 나이도 아직 23세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시테는 켈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아버지도 그에 대한 칭찬을 종종 하시곤 해. 너무 늦게 배우기 시작한 것이 안타깝다고 언제나 말씀하셨지.] 켈리가 돌연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분이 아가씨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켈리의 말에 이시테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동시에, 그녀들 뒤로 잔잔히 흐르던 에디엘레 가의 동쪽 정원이 그 흐름을멈추었다. 늦은 가을, 어쩌면 초가을인 이 계절의 을씨년스러운 정원이다. 이내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고, 정원도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글쎄.... 그렇지만, 결코 나를 아내로 맞이할 생각은 없을걸? 난 벙어리야.... 세상에 벙어리를 아내로 맞고 싶어하는 남자는 없어. 혹시, 공작 가문의 사위 자리를 원한다면 모를까....] "하지만, 아가씨는 아름다운 걸요." 켈리는 이시테의 냉소적인 말투에 이렇게 대꾸했고, 이시테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바보 같은 소리. 헛소리는 그만 두고, 어서 가 보자. 이러다 개막식에 늦겠어.] 이시테의 말에 켈리는 혀를 한차례 넬름 하고는 잠자코 이시테의 곁을 따라 걸었다. 이윽고 정원이 끝났고, 조그마한 문이 두 사람 앞을 가로막았다. 내성과 검술 강습소를 연결하는 곳이다. 두 사람의 할버드를 든 병사가 문 앞에 서 있다가 이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예의를 표했다. 곧바로 문이 열렸고, 이시테와 켈리는 두 병사를 향해 한차례 미소를 던져주고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아.... 난 사람이많은 건 정말 싫어....] 이시테는 점점 더 긴장의 정도가 심해져 갔고, 켈리는 그런 아가씨를 안심시키기 위해 계속해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왜요? 모두들 아가씨의 미모를 칭송할텐데.... 호홋." [자꾸 놀리지 마. 안 그러면 화낼 꺼야.] 이시테는 이렇게 글자를 쓰고는 잠시 쉬었다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난 사람이 많은 곳은 질색이야.... 숨이 막혀.... 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야. 모두들 모여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멍하니 서 있어야만 하고.... 솔직히 너를 통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상대편 입장에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겠지. 게다가 기분도 나쁠 거고.... 아마 내가 공작 집안의 딸이 아니었다면, 나와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조차 없을 꺼야....] "그렇지 않아요, 아가씨!" 켈리는 이시테의 말에 곧바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반드시 아니라고만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켈리 스스로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켈리는 이시테와 거의 한 몸처럼 지냈다. 그 때문에, 이시테 그녀가 무도회장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그 밖의 모임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가씨.... 그런 생각은 그만 두고, 어서 가봐요. 주인님과 주인마님께서 기다리시겠어요." 켈리는 왠지 의기소침해진 아가씨의 손을 잡아끌었다. 막상 경기가 시작되고 나면 볼거리라도 생기니 그녀의 기분이 조금 나아질까 싶어서 였다. 개막식이 모두 끝났다. 개막경기가 한차례 열렸고, 곧 1조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선수들은 관람석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선수 대기 석에 모여 있었다. 1조 50여명의 남녀가 모여 각자 준비를 하고 있어 상당히 어수선했다. 원래 에디엘레 가의 검술 강습소는 굉장히 넓은 공터일 뿐이다. 그런 곳에, 이 경기를 위해 가건물로 관람석을 간단하게 지어 놓은 것이다. 500명 정도의 관람객을 유치할 수 있는 앉을 만한 자리를 나무로 지어 놓았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명색이 공작 가문에서 주최하는 것이기에 허술할 수는 없었다. 근사하게 지어놓은 가건물들이다. 경기를 하는 곳은 모두 세 군데로 나뉘어 있었다. 가로 5휴리하(1휴리하=약 1미터) 세로 10휴리하쯤의 장방형 경기장이 모두 세 개 있었는데, 빠른 경기 진행을 위해서였다. 란테르트 일행은 지금 선수 대기실에 모여 있었다. 1조에 속한 사람은 로인과 시나, 테리트론이었다. 로인은 곧 돌아올 자신의 경기에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고, 시나도 약간 긴장된 모습이었다. 반면 테리트론은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어떻게 넌 그렇게 태연할 수 있어?...." 시나가 그 모습에 이렇게 물었고, 테리트론은 시나의 말에 슬쩍 웃었다. "글쎄.... 이길 마음도 없는데 떨릴 건 또 뭐야? 나보다 강하면 도망치면 끝이고, 약하면 이겨버리면 그만 아니야?" 그 모습에 곁에 있던 모라이티나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테리트론에게 말했다. "정말 대단하네요. 그렇게 승패에 초연하다니. 선물로 제가 기술 하나 가르쳐 드릴까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테리트론은 돌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님이 가르쳐 주신다면, 감사히 배우겠습니다." 테리트론은 비록 이렇게 장난스럽게 응대했으나, 내심으로는 조금 긴장이 되었다. 란테르트를 통해 보건대.... 모라이티나 역시 결코 평범한 마법사는 아닐 것이다.... "마법 연사連射 할 수 있어요?" 모라이티나가 물었고, 테리트론은 당연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제가 연사 기술을 가르쳐 드릴께요. 시나, 시나도 할 줄 모르지? 함께 배워." 테리트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은 놓으세요. 전 시나보다 다! 섯! 살! 이나 어린 걸요." 테리트론이 말한 다섯 살이라는 말은 스타카토를 넘어서 스타카티시모의 경지였고, 시나는 발끈하여 테리트론을 향해 무어라 말하려 했다. 하지만, 모라이티나는 미소를 지으며 시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말다툼은 나중에 해. 시나. 지금은 할 일이 있으니까."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두 사람에게 연사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연사란 마법의 응용 중에 하나이다. 특별히 높은 마법력이 필요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실전기술에 속하는 것이었다. 마법은 원래 고도의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여러 개의 마법을 한꺼번에 사용하려면 그만큼 많은 정신력을 필요로 한다. 란테르트조차도, 정령계 이상의 마법 두 개를 한꺼번에 사용하는 것은 꽤 힘든 일이다. 그 때문에 더블스펠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실전에서는 차라리 연사를 한다. 하나의 마법을 쓴 후, 중간에 다음 마법을 쓰기 위해, 제어를 풀어 버린다. 전에 사용한 마법은 덕분에 폭주하게 되겠지만, 관성이라는 것 때문에, 나가던 방향으로 일직선을 그리게 된다. 이미 형상화되어진 마법은 물리의 법칙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마법을 사용한다. 이렇게 할 경우, 마법의 정밀도는 크게 떨어지지만, 마법과 마법사이의 시간차는 상당히 줄일 수 있다. 테리트론도 시나도 바보는 아니었다. 반시간쯤 강론을 듣고 나자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고, 조금 더 질문과 대답이 오간 후에는 두 모두 할 수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다지 익히기 어려운 기술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모라이티나가 당일이 되어서야 가르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제일 먼저 시나의 차례가 왔다.상대는 창을 쓰는 남자였다. C경기장에서 열리는 시나의 경기를 보기 위해 일행은 조금 장소를 옮기었고, 시나는 떨리는지 가슴 위에 손을 얹은 채 몇 차례 심호흡을 하다가 경기장 위로 올라갔다. 이윽고 흰색 기가 올랐고, 두 사람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상대는 그다지 강한 편은 못되었다. 창을 어느 정도 쓸 줄은 알았으나, 제대로 공부했다고는 보기 힘들었다. 나이는 20을 조금 넘긴 듯 보였는데, 시종 평범을 넘어서지 못했다. 반면 시나는 방금 배운 연사기술을 이용해 이런 저런 마법을 펑펑 쏟아냈다. 모든 정신계 마법을 할 줄 아는 그녀이기에 화려해 보일 정도였다. 상대는 창을 휘두르며 계속 마법을 피하다 종내 에는 장외에 발을 내려놓았고, 결국 시나의 장외 승이 인정되었다. "야홋~! 1차 전 승리다!" 시나는 경기장에서 내려오며 신난다는 듯 이렇게 외쳤고, 일행은 모두들 잘했다는 말을 한마디씩 던져 주었다. 테리트론과 로인의 경기까지는 시간여유가 있었고, 일행은 다시 선수 대기장소로 돌아갔다. 그 사이 모라이티나는 시나의 단점 몇 가지를 지적해 주었고, 시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 막 선수 대기실에 일행이 자리를 잡을 무렵, 바로 곁에서 두 명의 무사들이 나누는 대화가 일행의 귓가에 들렸다. 한 명은 긴 검을 등뒤로 찬 남자였고, 다른 한 명은 도끼를 바닥에 내려놓은 채 자루를 쥐고 있는 남자였다. 둘 모두 20대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경기에 참가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20대 혹은 그 이하의 나이였다. "쳇.... 재수도 없지." 검을 찬 사내가 이렇게 중얼거렸고, 도끼를 든 남자가 맞장구 쳤다. "누가 아니래?.... 왜 미셸튼이 예선전에 나오는 거지? 작년에는 우승을 못한 거야?" 도끼를 든 사내의 투덜거림에 검을 찬 사내가 답했다. "작년에는 에노사 왕립 무투회에 참가하러 갔었잖아. 준우승 전에서 패했다던가? 정말 대단해. 이제 겨우 스물 셋인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오이니아가 곁에 있던 피아텔에게 물었다. "미셸튼이 누구야?" "미셸튼.... 미셸튼 가이. 에디엘레 가의 주재자야. 15살 때 검술을 배우기 시작해 올해로 8년 되었는데.... 벌써 이 대회에서 3회나 우승했어. 젊은 검사들 중 손꼽히는 사람 중 하나야." 피아텔의 말에 오이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기기 힘들겠네?" "그래. 2차전 이전에 만나지 않기를 바래야지." 한편, 모라이티나는 조금 느긋한 심정으로 경기장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역시 개막식이라서 그런지, 예선전인데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왔네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가 고개를 끄덕였고, 곁에 있던 로인이 한마디했다. "에디엘레 가의 사람들까지 모두 나왔을 정도잖아요." 그의 말에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 이 두 사람은 고개를 들어 멀리 망루 비슷한 쪽을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들의 관람석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한 특별석에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라이티나가 잠시 바라보다 란테르트에게 한마디했다. "그들이겠지요? 당신이 전에 만났다던...." "글쎄.... 그렇겠지." 란테르트가 답했고, 로인이 물었다. "삼촌, 에디엘레 가의 사람들과 알고 있어요?" 로인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잠시 함께 있었던 적이 있다. 지금도.... 디미온씨, 그가 가주인 것 같구나. 그에게 검술을 배웠었지." "에디엘레 가의 검술을요?" 로인이 놀랍다는 듯 이렇게 되물었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보여주세요." 로인이 이렇게 청하자 란테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고개를 끄덕였다. 해주지 못할 것도 없다. 란테르트는 고개를 돌려 모라이티나에게 소검을 빌렸다. "에디엘레 가의 검술은 빠르고 가벼워. 에르테일에는 적당하지 않지...."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왼손으로 모라이티나의 검을 움켜쥐었다. 몇 번 허공에 움직이다가 로인을 향해 말했다. "한번 막아보렴." 이때, 일행 모두의 시선은 이 두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막 다른 참가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켈파와 오이니아, 피아텔, 이 세 사람과, 테리트론과 시나, 모라이티나까지 하던 일을 잠시 멈춘 채 란테르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뿐 아니라 근처에 있던 몇몇 사람들도 무얼 하려는 거야? 라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로인 두 손으로 검을 꽉 움켜쥔 채 삼촌의 검끝을 바라보았다. 돌연,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온 정신을 란테르트의 검에 모았다. 하지만.... 무언가 번쩍 했다. 란테르트의 검은 어느 사이엔가 원래 있던 곳에 없었고, 로인이 잠시 검의 위치를 찾는 사이 무언가 강력한 힘이 자신의 검을 때리는 느낌을 받았다. 두 손에 힘이 빠졌고, 자신도 모르게 검을 놓쳤다. 검은 로인의 오른쪽으로 날아 바닥에 푹 처박혀 버렸다. 동시에 몇몇 사람들의 탄성이 터져나왔고, 다시 몇몇 사람들은, "저건, 에디엘레 가의 검술이야!" 라는 말을 외쳤다. 로인은 한참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사실, 그는 지금까지 란테르트와 검을 마주해 본 적이 단 한차례도 없었다. 다만 곁에서만 바라볼 뿐이었고,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배어져 나왔다. 란테르트는 어느 사이 소검을 모라이티나에게 돌려주고는 로인에게 다가와 머리를 한차례 비벼주었다. "이런 정도로 놀라면 안되지. 지금 정도의 속도와 기술은 검사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추고 있는 것이야." 사실 누구 나는 아니었다. 란테르트가 이야기한 검사, 라는 말은 적어도 디미온이나 밀튼, 로멜 정도의 실력을 갖춘 사람들을 이야기 한 것이었다. 로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빙그레 웃었다. "정말 대단해요...." 이렇게 말하며 로인은 자신의 검을 집어 돌아왔고, 란테르트는 간단히 설명을 해 주었다. "에디엘레 가의 검술의 특징이 바로 이것이란다. 굉장한 속도와 힘을 동시에 갖춘 검술이지. 처음에는 가볍게 움직여 상대의 눈을 속이고, 나중에 가서는 터져나오는 듯한 강력한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거야." 란테르트의 설명에 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사람들 사이를 해치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행은 그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자 조금 긴장했다. 그는 오이니아 등을 지나쳐서 란테르트에게 다가왔다. 란테르트가 보니, 상대의 나이는 20대 초반쯤으로 보였고, 청록색 머리칼과 옅은 녹색의 눈동자를 가진 상당히 준수한 미남자였다. 그가 입은 옷은 흰색계통의 것이었는데, 가슴에는 선명한 검정색 꽃이 한 송이 수놓아져 있었다. 허리에 검을 찬 것을 보아 검사인 듯 보였다. 그의 모습에 주위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미셸튼이야." "틀림없다. 그야!" 그때, 그 청록색 머리칼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에디엘레 가의 검술이더군요. 그것도.... 본가에만 전해져 오는 고급검술...."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에디엘레의 성을 이어받는 자들이나 수재자들에게만 전수되는 검술입니다." 다시 청록색의 남자가 말했다. "당신의 성이 에디엘레입니까?" 란테르트가 대꾸했다. "아닙니다." 상대는 잠시 머뭇거렸다. 생각을 정리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디서 그 검술을 배웠습니까? 설마 훔친 것은 아니겠지요?" 그 청록색 머리칼의 남자의 말에, 시나가 곁에서 발끈했다. "이봐요! 우리 삼촌을 도둑 취급하는 거예요?" 시나의 외침에 그 남자는 시선을 잠시 시나에게 향했다. 시나는 그의 눈동자와 한차례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덜컥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입도 떨어지지 않았고.... 다리에도 힘이 쑥 빠졌다. 그 모습에 돌연 모라이티나가 냉소를 터트렸다. "흥. 여자에게 살기를 보이다니.... 상냥하지 못한데다 경솔하기까지 하군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그 남자는 조금 부끄러운 기색을 띄며, 이내 시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시나는 지금 넋이 다 나가 그의 사과에 대꾸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때, 란테르트가 그에게 말했다. "에디엘레 가의 검술은.... 디미온 씨에게 배운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란테르트의 말에 청록색 머리칼의 남자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고는, 이내 고개를 숙여 란테르트에게 사죄했다. "난데없이 끼여든 점, 무례한 말을 했던 점 사과 드립니다. 기분이 나쁘시다면, 저를 찾아오십시오. 미셸튼이라고 합니다. 그럼.... 경기에서 뵙길 기대하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 후, 그대로 몸을 돌려 다시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시나는 그의 뒤에 욕을 하기 시작했다. "잘났어, 정말! 조그만 녀석이 건방지게.... 저게 뭐야." 하지만, 시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모라이티나만이 란테르트 곁으로 다가와 한마디 내뱉듯 꺼냈을 뿐이다. "대단해요. 나이도 많아 보이지 않았는데.... 벌써 살기로 사람의 넋을 빼놓다니...." 란테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래가 촉망되는걸.... 하지만, 아직 어려." 란테르트의 어리다는 말은 상당히 다의적 표현이었다. 어리다는 것은 비단 나이뿐만이아닌 듯 보였으니 말이다. 그러는 사이, 일행의 관심은 다시 무투회 장으로 향했고, 모두들 계속해 경기장의 모습을 관람하고 있었다. 오늘 1차 전의 싸움은, 로인과 테리트론 모두 간단히 승리를 거두었다. 상대가 약하기도 했지만, 이 둘 모두 어느 정도의 실력은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몇일 후의 2차 전에서 승리할 경우 본선에는 충분히 진출할 수 있다. 만약, 2차 전에서 패한다 하더라도 패자전에서 승리할 경우 본선진출이 가능하다. 모두들 조금 흥분된 상태에서 하루를 보냈고,다시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7. 재회. 그리고.... 저녁 무렵, 에디엘레 가를 찾아온 한 남자가 있었다. 청록색 머리칼에 물빛 눈동자를 가진 젊은 남자로, 낮에 란테르트와 만났던 그 미셸튼이라는 남자였다. 미셸튼은 검을 문 밖에 풀어 맡겨 놓은 채 디미온의 집무실로 안내되었다. "오, 미셸튼. 낮의 경기 잘 보았다." 디미온은 미셸튼이 자신을 방문하자 반갑게 맞아 주었고, 미셸튼은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으며 디미온에게 인사했다. "스승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디미온은 그런 그의 손을 잡아 몸을 일으켰다. "아니다. 그보다, 무슨 일이지?" "긴히 상의 드릴 말이 있어서...." 미셸튼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이렇게 말했고, 디미온은 그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 보이자 얼굴을 약간 굳혔다. "무슨 큰일이라도 있느냐? 아니, 그보다 우선 자리에 않거라." 디미온은 미셸튼에게 앉을 것을 권했고,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미셸튼은 디미온이 자리에 앉은 후에야 그가 지정해준 곳에 조심스레 앉았다. "그게.... 오늘 예선전 때, 한 사내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은색의 장발에, 팔이 하나뿐인 검사인데.... 에디엘레 가의 검술을 알고 있었습니다." 미셸튼의 말에 디미온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게 어쨌다는 건가? 에디엘레 가의 검술이야 전 대륙에 널리 퍼졌는데, 무엇이 새삼스럽다고. 자네 괜한 핑계로 우리 이시테를 보러 왔나보군. 잠시 기다리게 이시테를 불러 줄 테니." 미셸튼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본가의 검술입니다. 그것도.... 강습소의 수재자나, 에디엘레 가문을 이어 받는 사람들에게만 가르쳐 주는...." 디미온은 그의 말에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그럴 리가.... 그게 정말인가?" 그의 물음에 미셸튼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제가 그 검술을 전수 받지 않았습니까?" 디미온은 그의 말에 으음, 하는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돌연 다시 물었다. "팔이 하나 밖에 없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에디엘레 가의 검술은 거의 대부분 양손검법이고.... 그 검술도 양손검술인데 어떻게 한 손으로 가능한가?" 미셸튼은 그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습니다만.... 그는 해냈습니다. 한 손으로 그 검술을...." 디미온은 그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불가능...." 돌연 디미온의 머릿속을 반짝 스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 사람의 인상착의가 어떠하던가?" 미셸튼은 스승이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물어오자 덩달아 당황했다. "몸은 마른 편이었고, 키는 아마 저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 오른쪽 뺨에 붉은 색의 상처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다지 눈에 띄는 상처는 아니지만.... 눈동자는 붉은 색에...." 디미온은 미셸튼의 설명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서.... 설마 그가?" 미셸튼은 지금까지 디미온이 저렇게 까지 놀라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밑에서 이미 8년간을 있었건만, 스승은 시종 침착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라니요?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미셸튼이 물었으나, 디미온은 생각에 잠겨있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맞아.... 그라면.... 그는 한 손으로 에디엘레 가의 검술을 펼칠 수 있지. 내가 직접 보았으니까.... 다른 손으로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모든 양손검술을 한 손으로 익혀 내고야 마는 그런 남자야...." 디미온은 혼잣말을 하듯 이렇게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미셸튼은 두 눈을 멀뚱히 뜬 채 스승을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그가 지금 어디에 묶고 있나?" 디미온이 물었고, 미셸튼은 엉겁결에 대답했다. "아.... 성밖에 있는 여관에 있습니다. 불타는 토끼던가? 아니, 분노의 토끼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디미온은 서둘러 겉옷을 걸치며 말했다. "당장 가보아야 겠네." 미셸튼은 그의 말에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머릿속이 혼란해 지는 듯 싶었다. 디미온의 표정을 보니 입가에 미소가 있고 약간 흥분한 듯 한 것이 결코 적을 만나러 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친구라면 왜 먼저 에디엘레 가를 찾아오지 않는가? "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좋아. 대신, 결코 그의 화를 돋구지 말게나. 이 에디엘레 성을잃고 싶지 않으니...." 디미온은 미소를 지으며 농담조로 이렇게 말했고, 미셸튼은 그의 말에 하하, 한차례 웃었다. 디미온은 반쯤 진지하게 말한 것이지만, 미셸튼은 완전 농담으로 들은 것이다. 미셸튼은 밖으로 나가며 디미온에게 물었다. "그런데.... 누구이기에 이렇게 서두르시는 것입니까?" 그의 물음에 디미온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글쎄, 누군지 알면 자네는 까무러칠걸? 나는 10년 전 그와 잠시 함께 있었을 뿐이지만.... 아직도 그를 생각할 때마다, 절반쯤의 두려움과 절반쯤의 경외 심을 품고 있네." 미셸튼은 그의 말에 놀라며 아, 하는 탄성을 질렀다. "그럴 수가.... 하지만 10년전이라니요? 제가 보기에 그는 아무리 나이를 많게 잡아도 28세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 말에 디미온이 걸음을 딱 멈추었다. "28세? 그럴 리가.... 서른 여덟이 아니고?" 미셸튼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요. 28세.... 26, 7세쯤으로 보였습니다. 혹시 다른 사람이 아닐까요?" 디미온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른쪽 뺨에 흉터가 있고.... 붉은 눈에, 거기다 에디엘레 가의 검술을 익히고 있다면 그가 거의 확실할 텐데...." 두 사람은 아직 내성도 채 벗어나지 못한 곳에서 잠시 서 있다가 이대 다시 성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가서 한 번 만나나 보세." 미셸튼이 말했다. "차라리, 내일 그가 경기장에 나오면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어떨까요? 괜히 아니기라도 하면 스승님만 헛걸음을 한 것이 되니...." 디미온이 물었다. "하지만, 벌써 떠났을지도 모르지 않나?" "경기에 참가하는 듯 보였습니다." 미셸튼의 대답에 디미온이 되물었다. "경기에 참가? 그가? 그가 이런 작은 규모의 무투회에 참가했단 말인가?" "본인이 참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카인 듯한 아이들은 분명 경기에 참가했습니다." 디미온은 더더욱 이상한 듯 하여 다시 걸음을 멈추고는 생각에 잠기었다. "그에게 조카가 있다고?.... 왠지 이상한걸?.... 아까 은발이라고 했나? 혹시 청회색 머리칼이 아니던가?" 미셸튼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회색이 조금 섞인 흰색 머리칼이었습니다." 디미온은 그의 말에 걸음을 좌우로 옮기며 잠시 더 생각을 정리했다. "스물 일곱에.... 백발.... 외팔이라.... 그가 아닌 듯 싶군.... 하긴 지난 10년간 감쪽같이 모습이 사라졌었으니.... 이제와 이런 곳에 나타날 리도 없지." 디미온은 약간 실망한 듯 이렇게 말하며 다시 성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모습에, 미셸튼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디미온의 뒤를 따라가며 질문을 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그라니요.... 도대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의 물음에 디미온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걸음은 어느덧 느긋해 졌고, 이제는 갓 떠오르기 시작한 달을 즐기며 정원을 산책하겠다는 듯한 걸음걸이로 바뀌어 버렸다. "자네 혹시 핏빛 눈의 미친 마검사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나?" 디미온의 물음에 미셸튼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아, 하는 탄성을 내지르며 답했다. "혹시 크림슨 아이즈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맞아. 당시 그는 그런 별명으로 불렸었지.... 그게 벌써 10년 전의 일이야...." 디미온의 말에 미셸튼의 눈이 커졌다. "설마.... 스승님이 말씀하시는그, 라는 사람이 바로 그 입니까?" 디미온은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째서.... 어떻게 그런 악마와 알고 계십니까?.... 혹시 원한을 맺었습니까?" 미셸튼은 놀라 말까지 약간 더듬거렸다. 디미온은 그런 그의 모습에 미소를 한차례 지었다. "원한?.... 아니 오히려 은혜를 입었지.... 그는 우리 일가의 목숨을 구해주었네. 그것도 몇 차례나.... 대가로 그에게 우리 가문의 검술을 가르쳐 주기는 했으나.... 은혜를 갚기에는 턱없는 것이지...." 미셸튼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제가 듣기로 그는 미친 듯이 살인을 일삼고 다니는.... 말 그대로의 광 마검사 였다던데...." "맞아. 확실히 그는 정상은 아니었지. 하지만, 미친 듯이 살인을 하고 다닌 것....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네. 사람을 죽인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미친 짓이지...." 디미온은 말하는 내용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쾌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고, 미셸튼은 순간 괴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자신도.... 전쟁을 겪었다. 비록 조금 어린 나이였으나, 15세면 알 것은 다 안다. 확실히 당시 사람들 중.... 사람을 죽여보지 않은 검사, 그리고 마법사가 얼마나 되었을 것인가? 디미온은 그 후로 잠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미셸튼 역시, 조용히 그런 스승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 감히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였다. 잠시동안 산책하듯 정원을 거닐던 중, 집안에서 20세쯤 되어 보이는 메이드 차림의 여자가 나와 디미온에게 인사를 했다. "주인님. 마님께서 저녁을 드시러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미셸트님의 것도 준비되었으니, 함께 오십시오." 디미온은 웃으며 손을 들어 그녀에게들어가 보라고 알렸고, 고개를 돌려 미셸튼에게 말했다. "자, 함께 들어가지. 이시테도 오래간 만에 집에 돌아왔고.... 간만에 즐거운 저녁식사가 되겠군." 미셸튼은 디미온의 말에 고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한차례 숙여 보였다. 이틀째는 2조와 3조의 경기 1차 전이 모두 끝났다. 모두 157명 참가에 그 절반 가량이 탈락했고, 제 3일째부터는 1, 2, 3조의 2차 전 경기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켈파도 피아텔도 1차 전은 간단히통과했다. 대전 운이 좋은 편이어서, 1차 전부터 강한 상대와 맞붙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경기에 참가하지 않은 오이니아와, 란테르트 및 모라이티나 이 세 사람은 선수 대기 석에서 켈파와 피아텔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피아텔의 경우에는 결코 약하지 않은 검술실력으로 간단히 상대를 제압했고, 켈파의 경우에는 상대가 마법사였기에 조금 고전했으나, 워낙 무지막지한 체력과 근력을 소유했기에 그럭저럭 잘 버텨 간신히 승리를 따냈다. 그리고 3일째. 어느덧 11월도 20일을 갓 넘겼다. 세습적으로 12월과 13월, 1, 2월을 겨울로 여기고 있었으나, 이미 날씨는 겨울의 그것이었다. 점점 더 추워져가는 날씨에 일행은 하루하루 하나씩 옷을 더 끼어 입었다. 물론, 란테르트의 경우에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그 길고 낡은 망토를 겉에 한차례 걸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지만.... 구름이 짙은 회색 빛을 띄고 있었다. 날씨를 보아 비가 올 것도 싶고, 눈이 올 것도 싶은 날이었다. 2차전.... 이미 1차 전에서 약자들은 잘려져 나간 상태이니만큼, 2차 전은 배나 힘들 것이 당연했고, 일행은 1차 전 때 이상으로 긴장한 채 선수 대기실에 서 있었다. 특히.... 로인은 지금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쯧쯧.... 불쌍한 우리 꼬마. 이 누나가 위로해 줄 테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 시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로인을 놀렸고, 로인은 그 모습에 쓴웃음을 한차례 지었다. "확실히.... 운이 나쁘구나...." 켈파가 곁에서 한마디 보탰고, 로인은 더더욱 쓴웃음을 지었다. 란테르트는 그런 로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다지 걱정하지 마렴. 어차피 너는 공부를 하기 위해 이 무투회에 참가한 것이지않니?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모라이티나도 로인을 위로했다. "게다가, 미셸튼인가 하는 그 사람 꽤 유명한 검사인 모양인데, 지더라도 부끄러울 것 없잖아. 게다가, 패자 부활전도 있다고 하던데." 미셸튼.... 로인의 2차 전 상대가 그로 점지워진 것이다. 피아텔이 곁에서 로인에게 위로의(?) 말을 했다. "어차피 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니까, 가능 한한 덜 비참하게 패하도록 해. 요 전날처럼 바보같이 일 검에 검을 놓치거나 하지 말고." 피아텔이 말한 요 전날이라는것은, 바로 란테르트가 소검으로 로인의 검을 날려버린 그날을 말한다. 피아텔은 그때, 란테르트에게 감탄을 하기보다는 로인을 경시하게 되어 버렸다. 그 전부터 로인의 검술은 정통의 것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그이기에, 그렇게 검을 놓쳐버리는 모습에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과연 란테르트의 그 공격에 검을 놓치지 않을 검사가 대륙 안에 몇이나 될 것인가?.... 결국 시간이 되었고, 로인은 축 늘어진 어깨로 몸을 일으켰다. 그때 란테르트가 말했다. "어깨를 펴, 로인. 왜 마음속으로부터 포기를 하는 것이지?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싸움에 임해라. 그런 약한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 하지만, 몇 일 전 본 미셸튼 라는 남자의 위력을 생각해 보면, 로인은 결코 자신감이라는 것을 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힘없이 몇 걸음을 내 딛다가 잠시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왜인지 조금 화가 난 듯 했고, 로인은 멍하니 삼촌의 모습을 응시했다. 분명.... 화가 나 있다. 로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왜 화가 났을까?.... 라는 질문을 자신도 모르게 던졌고, 곧바로 어깨를 폈다.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삼촌의 말을 왜 이해하지 못한 걸까.... 지면 또 어떤가? 그리고 이기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단지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기다리면 그만이다. 후에, 자신의 결점을 찾아 다시 수련을 쌓으면 된다. 로인은 검집에 꽂혀있는 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한차례 움켜쥐었다. 삼촌이 사준 하르제 검이다. 로인은 1휴리하 높이의 단 위로 올라가 상대를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키가 꽤 큰 그를 보고 있자니, 더더욱 위축감이 들었다.야유 소리도 들렸다. "어서 내려가라.", "너 따위가 감히 미셸튼 님의 상대가 될 것 같으냐?" 따위의 목소리이다. 로인은 순간 오기가 솟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의 나약한 마음은 검을 뽑아들며 모두 날려 버렸고, 개전의 깃발이 잿빛 하늘을 가리는 순간, 머릿속을 비우며 몸을 앞으로 날렸다. 그 시간, 이시테는 멀리 망루에서 그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원래 당초 계획상, 이시테는 개막식 때와 본선 첫 경기때, 그리고 결승전 이 세 번만 무투회의 참관인을 하면 되었다. 하지만,제레미아는 미셸튼의 경기가 있는 날은 꼭 참가하도록 이시테를 설득했고, 이시테는 하는 수 없이 그녀의 어머니의 말을 따랐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의 말을 어기면서까지 피할 만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따분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가장 강한 존재로 인식되어 있는 사람은 당연히 란테르트였다. 성을 녹였다. 자신을 무등태운 채로 몇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싸우다, 결국 그들이 머물고 있던 성을 녹여버렸다. 게다가 검술도 대단하다. 검술로 둘째, 셋째 꼽히는 아버지조차, 그에 비해 검술 실력이 떨어질 정도이니 말이다. 그런 사람이 마음속 깊이 각인 되어 있는 이시테에게, 보통 사람들의 싸움이란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몇 차례의 경기가 끝나고 이윽고, 미셸튼과 로인의 싸움이 찾아왔다. 망루에서 그 두 사람의 경기가 열리는 곳까지는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미셸튼의 표정까지 살필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곁에서 켈리가 말했다. "미셸튼님 정말 늠름하지 않아요? 1차 전 때는 글쎄, 단 한 번 검을 휘둘러 상대의 무기를 하늘로 날려버렸어요. 이번에저 사람은 얼마나 버틸까?" [글쎄.... 난 차라리 저 사람이 미셸튼을 꺾었으면 좋겠어.] 이시테는 의외의 말을 했고, 켈리는 조금 놀라며 이시테를 바라보았다. 미소가 조금 짓궂은 것이 무슨 말이 나올지 자못 궁금했다. "왜요?" 이시테가 곧바로 답했다. [미셸튼은 너무 도도해. 우리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공손하지 않아. 물론, 우리 어머니에게도 공손하고 내게도 공손하지만....] "에이. 미셸튼 님은 도도한 게 아니라 자긍심이 있는 것이에요. 오히려 예의가 바르고 겸손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걸요. 아가씨가 색안경을 끼고 보셔서 그래요." 켈리가 반론을 폈고, 이시테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가 몰라서 그래. 저번에 우리 성의 경비 책임자인 셀트 앞에서 셀트, 그를 무시하는 말을 했단 말이야. 그때 왜 있잖아. 아버지가 아끼는 그림을 한점 잃어버린 그때 말이야.] "아.... 도둑이 '에아의 저녁' 이라는 그림을 훔쳐 갔을 때요?" [그래. 그때. 셀트는 벌써 우리 가문에 15년 이상이나 충성을 다한 충직한 기사야. 그런 그를 부하들 앞에서 무능력하다고 질책하다니.... 흥, 자기가 무슨 뭐라도 된다고....] 이시테의 말에 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때 미셸튼 님은 조금 심하게 흥분 하셨었지요.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그 그림은 바로 미셸튼 님이 주인님께 선물한 것이니.... 아! 경기 시작이에요. 우리 구경이나 해요." 이시테는 켈리가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경기장 쪽으로 돌리자 하는 수 없이 미셸튼과 로인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역시 성에 차지 않았고, 그녀는 다른 무슨 재미있는 것 없나 주위를 돌아보았다. 로인은 처음 미셸튼의 공격에 손이 약간 저려옴을 느꼈다. 그의 공격은 확실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고, 또 강했다. 하지만.... 란테르트의 그것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라거나, 단번에 검을 놓쳐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요 전날 한 번 뵈었던 분이군요." 미셸튼은 싸움을 시작한지 오래지 않아 이 한마디를 던졌으나, 로인은 답할 여유가 없었다. 종횡으로 빠르게 쳐들어오는 상대의 검을 막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미셸튼의 검은 한 번은 어깨를, 다시 한 번은 목을, 복부를, 다리를.... 쉴새없이 방향을 바꾸어 찔러 들어오며 로인을 괴롭혔고, 로인은 그런 그의 공격에 간신히 검을 휘둘러 상처 입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실력이 보통은 넘는군요.... 그런데 어째서 그날은 그렇게 힘없이 검을 놓쳤었습니까?" 미셸튼은 계속해 검을 세 번 찔러오며 이렇게 물었고, 로인은 간신히 하나 하나를 쳐내 막은 후 뒤로 두 걸음을 물러서서야 균형을 잡았다. "당연히.... 막을 수 없었으니까요." 로인은 짬을 내어 이렇게 답한 후, 다시 미셸튼을 향해 덤벼들었다. 훨씬 강한 상대.... 그와 싸우다 보니 로인은 깨닫는 것이 굉장히 많았다. 양아버지에게 들었던 피상적인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하나, 하나 몸 안으로 녹아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상대의 검을 들고있는 어깨의 움직임에 따라 검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하는 것이라든지.... 상대의 허점을 이용해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라든지.... 또는 이런 것도 있다. 아슬아슬하게 검을 피해 빠른 속도로 반격해 들어가는 것.... 그리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몸에 상대의 검이 박히게 한 후, 상대의 검이 멈춘 그 순간을 이용해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것.... 처음 5분 여 동안 로인은 완전히 밀리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5분이 흐르고 난 후에는 오히려 간혹 반격을 할 수 있게 될 정도가 되었다. "제 검을 10분이나 막아내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미셸튼은 여유를 부렸다. 사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는 시종 로인을 압도하고 있었다. 물론, 단 일 검을 휘둘러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지만, 앞으로 3분 안에 승리를 거둘 자신이 있었다. 이미 로인의 검술에서의 허점을 거의 다 파악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처음 야유를 퍼붓던 사람들은 이 이름 없는 검사의 실력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미셸튼을 상대로 10분이나 버티다니.... 믿을 수 없었다. 키도 작고, 나이도 미셸튼보다 서너 살쯤 어려 보이는데.... 순간, 창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인은 손에서 검이 빠져나감을 느꼈고, 동시에 공중으로 치솟는 회황색 검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동시에 미셸튼의 검이 로인의 목을 겨누었고, 로인은 깨끗이 패배를 선언했다. "역시, 대단합니다." 로인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탄복의 말을 던졌고, 미셸튼은 고개를 한차례 숙임으로 그의 칭찬에 답례했다. "당신 역시. 전 처음 당신을 경시했었습니다만.... 지금은 그런 마음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습니다." 미셸튼은 꽤 솔직한 성품의 남자인 모양이었다. 경시했었다는 말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다니.... 로인은 그의 말이 뼈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정말 칭찬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잠시 고민해야만 했다. 로인은 다시 한 번 그에게 인사를 건넨 후, 검을 주워들고 단을 내려왔다. "잘했다, 로인. 생각보다 잘 싸워 주었다." 란테르트는 경기장에서 내려오는 그의 등을 몇차례 두드려 주며 이렇게 말했고, 로인은 란테르트에게 약간은 서운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순간 망루에서 조그마한 소동이 일어났다. 바로 이시테와 에디엘레 가의 사람들이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안되셨네요, 아가씨. 미셸튼 님의 승리입니다. 호호." 창하는 소리와 함께 로인의 검은 공중으로 솟아올랐고, 동시에 켈리가 이시테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시테도 막 딴 곳을 바라보고 있다 날카로운 소리에 막 경기장으로 눈을 돌리던 참이었다. [음.... 져버렸구나.] 로인이미셸튼과 몇 마디 나누며 몸을 돌리는 모습이 이시테의 눈에 들어왔다.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딱히 누가 이기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시테는 로인의 뒷모습을 보았고.... 그때, 그녀의 눈에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이다. 이시테의 가슴은 그녀 자신에게 말했다. 그 분이다. 몸까지 앞으로 내밀어 그 흰 머리칼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였다. 아니, 어쩌면 아닌지도 몰랐다. 꽤 떨어져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대체적인 이미지 정도만을 잡을 수 있는 저 사람이 10년 전에 잠시 만났던 그와 같은 인물인지는,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왜인지 그 일 것만 같았다. [나 잠깐 아래로 내려가 보아야 겠어. 아버지, 어머니께 말씀드려.] "무슨 일인데요?" 하지만, 켈리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시테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망루 뒤쪽에 있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디미온과 제레미아는 돌연 그녀가 그렇게 떠나려 하자 놀라 물었다. "어딜 가려는 것이니? 이시테야." 제레미아가 물었고, 켈리가 대신 답했다. "잠시 아래로 내려가 보아야 하겠데요." 디미온이 몸을 일으키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이시테. 위험하다. 저 아래 모인 사람 중에는 좋은 사람도 있지만 나쁜 사람도 많이 있단다." 이시테는 아버지가 손을 잡자 다시 몸을 돌리더니 망루 밖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은발의 그가 그곳에 서 있다. 이시테는 손을 들어 그곳을 가리켰고, 디미온은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이시테는 디미온의 손에 글자를 새겼다. [저 백발의 사내가 보이지요? 아버지가 보기에는 누구 같나요?] 딸의 물음에 디미온은 눈에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조금 멀어서인지 알 수 없었으나 왠지 낯익은 모습이었다. "누구지? 왠지 낯이 익기는 한데...." [왜 기억을 하지 못하시나요? 우리 가족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벌써 잊으신 건가요?] 이시테의 말에 디미온은 으음, 하는 신음을 내뱉었다. "아마 아닐 것이야.... 몇 일전 미셸튼이 저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내게 해 주었었단다. 비록 모습이 상당히 닮긴 하지만, 그가 아니란다." 이시테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요. 맞아요. 그가 확실해요. 가서 확인해 보겠어요.] 그때, 제레미아가 다가와 이들 부녀의 반쪽 짜리 대화에 끼여들었다. "그라니요? 도대체 누굴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디미온이 손을 뻗어 란테르트를 가리켰다. "저 흰 머리칼의 남자.... 제레미아, 당신은 알아볼 수 있겠소?" 그의 물음에 제레미아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곧바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은.... 그.... 악마!...." 제레미아는 사교계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간단히 잊어버리면 사교에 실패하기 쉽다. 덕분에 그녀의 사람의 신상에 대한 기억력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고, 이런 능력 때문에 란테르트의 모습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사이에 10년이라는 시간이 있지만, 한 번 흘끗 보고 통성명만 한 사람과 한 달의 사이를 두고 다시 만나도 이름을 기억해 낼 정도인 제레미아가, 어떻게 란테르트의 모습을 잊겠는가? 이시테는 자신의 어머니 마저 이렇게 말하자 그대로 몸을 돌려 아래로 향했다. 이.... 10년간, 그렇게나 다시 만나고 싶었던 그 이다. 10년.... 사실 긴 시간이다. 이 정도 시간이면.... 애인사이라 하더라도 지속되기 힘들다. 하지만.... 이시테는 달랐다. 만약 그 오랜 시간동안 이시테가 많은 친구를 사귀고, 또 애인을 만들었었더라면, 란테르트를 거의 잊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과거 한때 만났던 사람.... 이시테에게 그 정도 이상의 의미는 주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시테는 여전 외톨이였다. 켈리라는 좋은 친구를 한 명 만들었으나, 란테르트에 대한 동경의 마음은 시시각각 커져만 갔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에 대한 동경은 어느새 막연한 짝사랑이 되어갔으나, 그의 이름은 점차로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져 갔다. 아무도 크림슨 아이즈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없었고,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한때는, 그를 죽였다는 용사들도 몇 모습을 드러냈었다. 마법사 길드와 용병 길드에서 최고의 실력자들을 각각 세 명씩 뽑아 그를 무찔렀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증거를 내놓지 못해 결국은 흐지부지 끝나 버렸지만.... 하지만, 이시테는 그가 죽었다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누가 그를 죽이겠는가? 많은 생각에 잠기다 보니, 걸음이 더디기 짝이 없었다. 얼마 높지도 않은 망루임에도 오랜 시간동안 걸음을 옮기고 나서야 바닥에 내려설 수 있었다. 곧바로 뒤에서는 켈리가 따라왔고, 뒤이어 디미온이 걸음을 옮겼다. 제레미아는 계속해 그 백발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다.... 만약 그가 아니라면, 그것은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신이 장난을 친 것이다. 그와 이렇게 까지 비슷한 남자를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한 장난을.... 이시테는 치렁치렁한 예식용 치마 덕분에 빨리 걷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만약 지금 만나지 못하면 앞으로도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아가씨~~~!! 가지 말아요!" 뒤에서 켈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이시테는 무시한 채 앞으로만 치달렸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경기장 옆을 지나 선수 대기 석에까지 도착했다. 관중들은 에디엘레 가의 아가씨가 돌연 망루 아래로 내려와 저렇게 경기장을 가로지르자 웅성웅성 대기 시작했다. 재미있다고 손뼉을 치는 인간에서, 휘파람을 불어대는 인간, 혹은 경솔함과 조숙하지 못함을 책망하는 사람, 모두가 하나로 뒤엉켜 경기장 안에는 경기를 할 때보다 훨씬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셸튼은 순간 이시테가 자신에게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에 잠겨 보았으나, 오래지 않아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경기장 위로는 올라오지 않은 채 그대로 대기 석으로 향했고, 미셸튼은 그녀가 저 우락부락한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는 것을 방치할 수 없어 서둘러 따라 갔다. 이시테는 지금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모여있는지 상관치 않았다. 단지,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춘 그 은색 머리칼의 남자를 찾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한사람, 두 사람을 채치며 더욱 안으로 들어갔고, 이내 몇몇 사람들과 함께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숨을 골랐고, 상대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그.... 확실히 그 이다.... 10년전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바로 그다. 이시테는 왈칵 눈물이 솟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비록 눈물에 시야가 흐릿해 졌지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기쁘다.... 기쁜데 왜 울어야 하는가? 이시테가 돌연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 자신들 앞에 서자,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조금 전 경기가 끝날 무렵 망루에서 자그마한 소란이 이는 것을 알았으나, 일행은 상관치 않은 채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모두들 로인이 생각 외로 분전한 것에 칭찬의 말을 한마디씩 했다. 물론, 로인 스스로는 그다지 잘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쨌건 경험 하나 없는, 그것도 전문적으로 검을 익히지 않은 로인이 명문 검가에서 오랜 시간동안 검술을 배운 미셸튼과 그렇게 오래 싸운 것은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 잠시동안 소란이 이어졌지만, 일행은 자축에 신경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에메랄드 빛 머리칼을 가진 여자가 사람들 사이를 뚫고 자신들 앞에 서서, 가슴위로 한쪽 주먹을 쥔 채 숨을 고르는 모습을 보면서까지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디미온과 켈리가 도착했고, 미셸튼도 다가왔다. 란테르트는 그런 이시테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저 모르는 척 지나가려 했건만.... 결국 이렇게 만나버렸다. 딱히 만나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마음이 복잡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기피하고 있는 터였기에, 그리고 지금은 조용한 것이 왠지 좋았기에 굳이 에디엘레 가에 들리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게다가, 1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까? 라는 질문에도 해답을 얻지 못했었다. 모라이티나가 곁에서 말했다. "당신의 어린 친구가 결국 당신을 찾아냈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으나, 주위가 워낙 조용해 이시테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이시테는 란테르트를 향해 달렸다. 간신히 참고 있던 눈물이 확 뒤로 흩어졌다. 그의 가슴에 몸을 던지듯 안겼고, 란테르트는 어색한 듯 그녀의 포옹을 받아들였다. 매정하게 뿌리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이시테는 말을 하지 못한다. 지금 하고 싶은 말은 수도 없었으나, 단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란테르트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안부를 묻고 싶었고, 그 동안 그를 수도 없이 생각했다고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도 싶었다. 하지만.... 말을 잃은 후, 지금까지 이렇게 까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답답한 적은 없었다. 켈리는 뒤에서 그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 동안 이시테에게서 눈앞에 있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그런 켈리였고, 이시테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디미온도 그런 이시테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속으로는, "원 녀석.... 10년이나 그를 마음에 간직한 것이냐?...." 라고 중얼거렸으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란테르트는 조용히 팔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 주고는 입을 열었다. "이시테양. 이런 곳에서 저에게 안겼다가는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릅니다." 이시테는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그의 품에 기대어 있다가 란테르트의 말을 들었다.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 열살 때.... 그 꼬마였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하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로 저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자신에게 진심으로 대해 주는 사람들도 아니다. 이 모습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더라도 그건 이시테 자신에게 향하는 손가락이 아닌 공작 가문의 딸에게 향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관심과 배려들이 역시 그러했듯.... 어느새 디미온이 란테르트 근처로 다가왔다. "오래간 만입니다." 디미온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 역시 한차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번거롭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 연락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디미온은 이렇게 말하다 미셸튼의 말이 떠올랐다. 외팔이 검사.... 자세히 살펴보니 망토 오른쪽 어깨가 푹 꺼져 있었다. "어떻게 하다가.... 팔을 잃으셨습니까? 하시려던 일은 이루셨습니까?" 이 두 물음에 란테르트에게 기대어있던 이시테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란테르트를바라보았다. 팔이....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열 수 없었다. 평소 수도 없이 움직여 글자를 쓰던 손가락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란테르트가 답했다. "일은.... 이루었습니다. 팔은 그때 잃은 것이지요...." 디미온이 위로의 말을 했다. "그렇군요.... 아, 일단 저희 가문으로 돌아가시지요." 디미온은 란테르트에게 이렇게 권했으나, 란테르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 이시테가 란테르트의 손을 잡아끌었다. 함께 가자는 뜻이었다. 란테르트는 잠시 더 머뭇거렸으나, 그를 대신해 모라이티나가 대답을 해 버렸다. "초대에 응하는 것이 예의겠지요?" 디미온은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모라이티나를 바라보았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비록 자신의 딸이 아름다운 편이기는 했으나, 눈앞의 금발의 여자에 비한다면 오히려 조금 부족함이 있을 듯 싶었다. 모라이티나는 그가 자신을 바라보자 스스로를 소개했다. "모라이티나라고 합니다. 란테르트의 오랜 친구지요." 그녀의 말에 디미온이 답례했다. "전 디미온이라고 합니다. 이 에디엘레 성의 주인이지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 우선.... 함께 가시지요." 디미온은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 일행 모두를 성으로 초대했고, 이시테는 란테르트의 곁에 바짝 붙어서, 그리고 켈리는 그녀의 바로 곁에서 일행과 함께 성으로 돌아갔다. 이날의 무투회 오후일정은 모두 취소되어 버렸고, 경기는 내일로 미루어 져 버렸다. 모두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미셸튼은 알 수 없는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그자가 무엇이기에 수제자인 자신조차 잊은 채.... 저런 극진한 대우를 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던 미셸튼은 돌연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을 받았다. "크림슨 아이즈?...." 상황을 살펴보니.... 이것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저 남자가 10년 전의 그 악마란 말인가?...." 미셸튼은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역시 조용히 일행의 뒤를 쫓아 에디엘레가로 향했다. 응접실, 원래는 충분히 넓은 곳이었으나, 지금은 사람들로 인해 약간 비좁은 듯 느껴졌다. 그것도 그럴 것이, 원래 란테르트와 함께 있던 7명에, 디미온 일가 5명, 그리고 미셸튼까지 모두 13명이 한 장소에 모여 있었으니 말이다. 상견례가 이루어 졌다. 란테르트 측에서는, 란테르트가 일행 모두를 간단히 소개했고, 디미온이 뒤이어 자신의 가족과 미셸튼을 소개했다. 이것만으로도 상당히 번거로운 일이었다. 잠시동안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일단, 디미온 일행 측이 오이니아의 일행과는 전혀 면식이 없었고, 그 밖에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는 덕에 화제로 삼을만한 적당한 이야기가 없었다. 그런 어색한 분위기를 느낀 켈파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란테르트님, 모라이티나님, 시나, 로인 그럼 내일 보기로 해요." 켈파는 이렇게 말하며 오이니아를 한차례 바라보았고, 오이니아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자신들이 끼여들 만한 자리가 아닌 것 정도는 일행 네 명 모두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다만, 란테르트와 에디엘레가 사이의 관계나 그러한 것들에 궁금증이 일었기 때문에 남아서 지켜보려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들 때문에 대화마저 이루어지지 않고 있자, 슬그머니 이렇게 빠져 버린 것이다. 디미온은 집사를 불러 일행을 영접하게 했고, 란테르트 등의 네 명은 떠나는 네 사람을 향해 간단히 인사말을 건넸다. 그들이 그렇게 떠나간 후, 응접실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자리를 잡았다. 디미온은 주인 석에, 제레미아는 부주인석에 앉았고, 미셸튼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디미온이 앉은 반대편에는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가 함께 앉았고, 그 옆에 있는 의자에는 시나와 로인이 있었다. 이시테와 켈리는 제레미아의 곁에 앉았다.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디미온이었다. "정말.... 당신이었군요. 란테르트씨.... 설마 했었는데...."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디미온은 약간 어색함을 느꼈다. 하지만 무엇이 이상한지를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표정이.... 많이 밝아 지셨습니다." 디미온은 다시 한차례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다시 한차례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 조금도 늙지 않았군요.... 정말 당신의 능력이란.... 사람들을 놀라게 할뿐입니다." 뒤이어 제레미아가 말했다. "그런데.... 이곳에는 무슨 일입니까?" 목소리는 아직도 안정이 되지 않는다는 듯 약간 떨렸다. 아마도 불안한 모양이었다. 원래부터 란테르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데다가, 이제 더더욱 무서운 몰골로, 사실 백발이나 외팔이 이러한 것들은 보통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안겨주기 쉽다, 찾아 왔으니.... "제 일행이 에디엘레 가에서 개최하는 무투회에 참가하기에.... 그저 따라온 것뿐입니다." 란테르트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로인과 시나에게로 쏠렸다. 디미온이 시나와 로인에게 물었다. "란테르트씨의 조카 분들이라고요?"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고, 디미온은 뒤이어 로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무래도 검을 쓰기 때문에 관심이 더 많이 가는 모양이었다. "아까 제 제자와 싸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디미온의 말에 로인이 조용히 대꾸했다. "말 낮추십시오." 그의 말에 디미온은 한차례 미소를 지었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럼, 그렇게 하지. 실력이 보통은 넘더군. 에디엘레 강습소 안에서도, 미셸튼의 검을 10분 이상이나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이 5명이 채 되지 않는데...." "부끄럽습니다. 단지 시간 나는 데로 아버지를 따라 몇 번 휘둘러보았을 뿐입니다." 로인은 겸손의 말을 했고, 디미온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겸양할 필요 없네. 사실, 자네의 검술은 썩 뛰어난 편은 못되지. 삼촌인 란테르트씨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고.... 겨우 자네보다 한 살 더 많은 미셸튼에 비해서도 한참 떨어지니...." 로인은 순간 약간 기분이 이상했다. 방금 전에는 칭찬을 하고, 이제 와서는 다시 이렇게 깍아내리니.... 도대체 상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디미온이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그다지 오랫동안 검술을 익히지는 않은 듯 싶군. 아니면 오래 익혔더라도, 검술만을 익히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의 말에 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집안은 농사를 짓습니다.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 틈틈이 검술을 익힌 것입니다." 디미온은 자신의 예상이 맞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역시 그래.... 자네에게는 재능이 있네. 응용력도 좋고, 임기응변에도 재빠르지. 하지만, 익힌 날짜가 적어 실력이 이 정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야." 디미온은 여기까지 말하다 잠시 말 사이에 시간을 두었다가 로인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검사가 되게나. 충분한 소질을 가지고 있어. 란테르트씨, 왜 이 아이에게 당신의 검술을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글쎄요...." 디미온이 곧바로 이야기했다. "전 오랜 시간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검술을 가르쳐 왔습니다. 비록 당신보다 검술 그 자체는 뛰어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검술에 대한 소질을 알아보는 눈에는 자신 있습니다." 디미온은 뒤이어 로인에게 말했다. "혹시, 란테르트씨에게 사정이 있어 자네에게 검술을 가르쳐 줄 수 없다면, 내게 찾아오게. 자네를 대륙 안에서 손꼽힐 만한 검사로 만들어 주겠네." 제레미아는 곁에서 디미온의 말을 들으며 눈으로는 계속해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10년 전의 기억이 하나 둘 떠오르고 있었다. 사람을.... 참혹하게 죽이고서는.... 시체의 모습을 살펴 자신의 검술의 완성 도를 살피는 자.... 단지.... 우연히 만난 노인 한 명을 죽였다고 성 하나를 통째로 녹여버리는 자....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9살 짜리 아들의 몸을 살짝 껴안았다. 사실, 제레미아의 이런 두려움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앞의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단지 살인자를 눈앞에 놓고서도 다리가 풀려버리는 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디미온의 경우는 무인이었고, 그렇기에 그러한 점들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렇기에, 제레미아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란테르트와 그의 조카들에게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로인은 디미온의 권유에 고개를 들어 란테르트를 바라보았고, 란테르트는 로인 대신 디미온에게 말했다. "검술은 제가 가르치겠습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저희 누님 내외의 부탁 때문에.... 하지만, 사정이 생겨 제가 가르칠 수 없을 때는, 이곳에 맡기겠습니다. 아마, 이 아이의 부모님들도 반대치 않을 것입니다." 디미온은 란테르트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던 미셸튼을 향해 말했다. "축하하네. 자네에게 훌륭한 사제가 생긴 것을." 그의 말에 미셸튼은 고개를 끄덕이며 로인을 한차례 바라보았다. 미셸튼은 뒤이어 란테르트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도대체.... 왜 이렇게 스승은 그를 높이 사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상황을 유추해 보았을 때, 분명 그는 강하다. 하지만, 팔이 하나 뿐이라는 한계가 있으니.... 외팔이라는 것은 검술에 있어서 굉장한 결함이다. 미셸튼은 다시 이시테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미소가 피어있다. 미셸튼은 지금까지 죽 그녀를 보아오면서, 그녀가 이렇게 까지 밝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사실, 이시테는 잘 웃지 않는 편이었다. 켈리와 단둘이 있을 때나,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녀의 미소를 자주 볼 수 있었지만, 이렇게 손님이 찾아오거나 할 때에는 시종 의례적인 미소를 입가에 띄울 뿐이었다. 질투.... 아마 미셸튼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이러한 것이리라. 존경하는 스승도, 사모하는 이시테도, 모두 란테르트에게 빠져 즐거워하고 있다. 그때, 켈리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모라이티나 님은 란테르트 님과 무슨 관계이신 가요?" 켈리는 그 누구보다도 이시테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물음은 비록, 이시테가 자신의 손에 적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시테가 하고 싶어하는 말이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켈리가 이렇게 말하자,이시테는 그녀의 손을 살짝 꼬집어 그녀를 책망했으나, 켈리는 그런 이시테에게는 상관도 하지 않고 똑바로 모라이티나를 응시했다. 모라이티나는 이 당돌한 꼬마아가씨를 향해 한차례 미소를 지어주었다. "친구랍니다. 켈리양." 하지만 켈리는 승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친해 보이시는 걸요? 혹시 애인 아닌가요?" 켈리는 이시테의 하녀이다. 적어도 신분상으로는 그렇고, 그 때문에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이시테를 위해서 였고, 그렇기 때문에 제레미아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였다. 켈리의 말에 돌연 모라이티나의 눈가에 쓸쓸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입가에 미소는 힘이 없었다. "글쎄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의 애인이 되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곁에서 듣고 있던 란테르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힘없는 목소리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란테르트가 입을 열었다. "15년이나 사귄 좋은 친구입니다." 그의 말에 이시테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15년이라니.... 그녀는 란테르트를 바라보던 눈을 모라이티나에게로 옮겼다. 정말 아름답다.... 도저히 인간이 아닌 듯 하다.... 이시테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던 중, 그의 가방에 매어져 있는 하나의 하늘색 리본이 눈이 들어왔다. 비록, 더러워지고, 색도 이상하게 변했지만.... 분명 그 물건이었다. 다시 기분이 좋아져 입가에 미소가 다시 피어났다. 약간 이상해진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디미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시나에게 물었다. "마법사라고?" 시나는 그의 물음에 조용히 답했다. "그렇습니다." 괄괄하던 시나는 사라졌다. 원래 그녀는 외동딸로 자라나 성격이 굉장히 자유분방했었으나, 엘라의 교육 덕분에 예절이 몸에 배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상황에 따라 이 두 가지 행동유형을 다 내보일 수 있다. 지금은 기품 있어 보일 때이다. "누구에게 마법을 배웠지?" "위다의 네 대현자 중 한 분이신 칼슨 에티콘 님입니다. 저의 양아버지이시기도 하지요." 그녀의 말에 디미온은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위다의 네 대현자라면, 그 이름이 전 마법사들 중에서도 최고였다. 전쟁 전 열 명을 조금 넘던 대현자들 중 3명이 전쟁 중 목숨을 잃고, 이제는 8명이 남아 있었다. 그중 절반이 위다에 남아 있던 것이다. 디미온이 다시 물었다. "시나양의 지금 등위는 무엇이지?" 그의 말에 시나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매직유저입니다. 사실, 저는 마법을 배울 생각이 없기에, 시간 나는 데로 취미로 익혔을 뿐입니다." "아, 그렇군. 하긴, 우리 이시테만 하더라도, 검사 아버지를 두었음에도, 검술은 조금도 모르지." 디미온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잠시 이시테에게로 향했고, 이시테는 갑작스러운 모두의 시선에 잠시 당황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때, 미셸튼이 입을 열었다. "란테르트씨, 당신의 검술을 한차례 보았으면 합니다." 대련 신청이었다. 사실, 그의 스승인 디미온이 란테르트에게 씨라는 말을 붙이며 존칭으로 대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그는 란테르트에게 님, 이라는 존칭어를 붙여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란테르트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는데다가, 어느 정도 질투를 느끼고 있어 씨, 라는 말을 붙이게 된 것이다. 그 말에, 란테르트는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으나, 디미온은 희색을 띄며 이야기했다. "그래, 좋은 생각이다. 아마 네게도 큰 공부가 될 것이니까. 란테르트씨, 제 제자와 한 번 겨루어 주십시오." 란테르트가 보니, 로인과 시나도 한 번 보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모라이티나의 경우에는 단지 미소만을 지었고, 이시테의 경우에는 이런 저런 다른 복잡한 생각들 때문에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란테르트는 분위기가 이러 하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스스로가 우스워지는 느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로인에게도 많은 공부가 될 것도 같았다. 미셸튼은 감사를 표하며 먼저 밖으로 나갔다. 장소는 에디엘레 가의 뒤뜰로 정해졌고 일행 모두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 미셸튼의 모습이 사라진 순간, 디미온이 란테르트에게 접근했다. "저 아이에게.... 제가 한가지 가르칠 수 없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디미온을 바라보았고, 디미온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패배감.... 입니다. 그는 나이에 비해 상당한 검술을 익혔습니다. 배운 날짜가 적어 대단하다고 까지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갈고 닦기에 따라, 당금 제일이라는 두 룬의 기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도 있을 정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란테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자신이 보기에도 상당했으니 말이다. 디미온이 다시 말했다. "두 룬의 기사들.... 란테르트씨도 이미 면식이 있는 그들과 저는 그 동안 상당한 교류가 있었습니다. 란테르트씨와 만났던 그때 이후로 싹튼 교분이지요. 그 덕에 그 두 젊은 기사들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여기까지 말한 디미온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왠지, 개구쟁이 같은 짓궂은 미소였다.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까지 강해질 수 있었는지 아십니까?" 이 갑작스런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고, 디미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들 마음속에 한 남자의 모습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스승은 바로 그 남자였습니다. 그 만큼 강해지고 싶다....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라는 염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강해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패배감이기도 하지요. 저 사람만은 절대 이길 수 없다.... 라는 마음. 아니, 어쩌면.... 라이벌 의식과도비슷하다 할 수 있을까요? 정확히는 우상이라고 이야기하는 편이 옳겠지만 말입니다." 디미온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자신이 이렇게 강해질 수 있었던 것도, 나크젤리온이라는 절대적인 상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란테르트는 디미온이 말하는 그 남자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디미온이 다시 말했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디미온의 말에 란테르트는 어깨를 한차례 으쓱해 보였다. 순간 핌트로스일까? 아니면, 디미온? 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으나, 디미온 자신이 이야기를 꺼낸 것을 보아 디미온은 아닐 듯 싶었고, 핌트로스라고 해 보았자, 그 두 형제 중 밀튼이라는 첫째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이니 해당이 되지 않을 듯 싶었다. "모르겠습니다." 디미온이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 두 형제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강한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란테르트는 그의 말에 이제야 눈치를 챘다. "저 말입니까?" 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가장 뒤쳐져 걷던 란테르트와 디미온, 이 두 사람이 에디엘레 본성의 뒷마당에 발을 들여놓았다. 란테르트는 밖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한차례 빙 둘러본 후 디미온의 말에 대꾸했다. "재미있군요.... 그들이 저에게 그런 마음을 품게 되었다니...." 그 말에 디미온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대꾸하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그들 형제뿐이 아니라.... 자신 역시 그렇다고.... 다시 한 걸음, 정원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디미온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란테르트에게 입을 열었다. "아무쪼록.... 부탁드립니다." 미셸튼은 조용히 서 있었다. 그리고는 눈앞의 상대를 눈 여겨 바라보았다. 그는 하나뿐인 왼팔을 뒤로 가져가더니 흰색 빛 나는 커다란 검을 뽑아들었다. 미셸튼 자신도 허리로 손을 가져가 검을 뽑아들었다. 디미온은 란테르트가 검을 뽑아들자 그 검을 유심히 살폈다. 아무리 보아도 보통의 검은 아닌 듯 보였다. 10년 전에 보았을 때는, 단지 평범한 하르제 검을 가지고 다닐 뿐이었는데.... 디미온이 물었다. "그 검...." 그 말에 란테르트가 간단히 답했다. "에르테일입니다." 그의 말에 디미온과 미셸튼, 이 두 사람이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입을 연 것은 디미온 혼자 뿐이었다. "파소 가와 만났었군요...." 란테르트는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 검을 뒤쪽에 서있는 로인에게 건네주었다. ".... 로인, 네 검을 잠시 빌리마." 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에르테일을 받아들었고, 이어 란테르트가 선물한 자신의 검을 주었다. "힘내세요." 로인은 검을 주며 이렇게 말했다. 로인의 경험상, 란테르트의 능력은 눈앞에 있는 미셸튼이라는 남자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 있던 무투회에서 느낀 미셸튼이라는 남자의 실력은 대단하다, 정도였다. 하지만, 란테르트는.... 무슨 요술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란테르트는 하르제 검을 왼손에 들고 힘을 조금 주었다. 검의 균형이라는 것이 상당히 잘 잡혀 있는 편이었다. 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 싸구려 하르 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란테르트는 잠시동안 검을 내려다보았다. 하르검.... 그러고 보니 상당히 많은 추억이 어려있기도 하다. 스승을 죽인 검도.... 그리고 두 자매에게 선물을 받은 검도.... 에라브레를 다치게 한 검도.... 자신이 미쳐버린 5년을 보낸 동안 사용한 검도.... 잠시동안 감상에 잠겨 있다가 란테르트는 고개를 들어 미셸튼을 바라보았다. "먼저.... 공격하십시오." 미셸튼은 잠시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자세가 약간 이상했다. 그냥 엉성히 서 있는 듯도 보였지만, 결국은 검을 들어 공격할 수 있는 형세였다. 두 손으로 검을 잡은 채, 미셸튼은 한참동안 란테르트를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타, 하는 소리를 지르며 몸을 앞으로 날렸다. 미셸튼의 마음은 조금 복잡했다. 왜 모두들 이 눈앞의 남자를 대단하게만 보는가.... 디미온도.... 제레미아도.... 게다가 이시테마저도.... 단지.... 팔이 하나 뿐인 마검사일 뿐인데.... 크림슨 아이즈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마법이 대단할지는 모르지만, 검술마저 꼭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며 미셸튼은 검을 크게 휘둘렀다. 초반부터 강공으로 기선을 제압하려 했던 것이다. 검은 하늘에서부터 란테르트의 머리로 굉장한 기세로 내리찍어왔고, 란테르트는 그 모습을 멍하니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막란테르트의 머리에 검이 닿으려는 순간까지도 란테르트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란테르트는 한 걸음 뒤로 살짝 물러서며 검을 들어 미셸튼의 검을 막았다. 워낙 내리 찍어오는 기세가 엄청났기에 란테르트의 검이 조금 물러섰으나 그것도 잠시, 곧바로 미셸튼의 검을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미셸튼은 바닥에 내려서며 두 다리를 조금 벌렸다. 두 손으로 란테르트의 검에 밀리는 자신의 검을 힘껏 지탱했으나, 상대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검은 자신에게로 다가왔고, 미셸튼은 점점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순간이었다. 란테르트의 검과 맞닿은 채 조금씩 밀리던 미셸튼의 검이 돌연 두 동강이 나 버렸다. 그 모습에, 미셸튼과 로인, 이 두 사람은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사실, 검으로 다른 검을 두 동강 내는 것은 검사에게는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다. 특히 상대의 검보다 더 좋은 검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더더욱 간단하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지금, 미셸튼의 검과 란테르트의 검은 마주 닿아 있었다. 그런 상태로 서로 힘 겨루기를 하고 있었는데.... 보통 이럴 때에는 검이 잘 부러지지 않는다. 상대의 검을 자르려면 위에서부터 강한 힘으로 내려쳐야 간신히 해 낼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게다가 미셸튼의 검은 굉장히 유명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뛰어난 물건이었다. 결코 하르 검에 간단히 잘리어질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상대의 검을 두 동강 낸 란테르트의 검은 계속해 앞으로 나아갔고, 미셸튼은 그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검은 그의 코 바로 앞에서 멈추었고, 미셸튼은 조용히 눈을 떠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미셸튼은 왜 방금 검이 두 동강 났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원리는 아주 간단했다. 조금 전 검을 맞댄 채 있던 도중, 란테르트가 아주 짧은 시간동안 그의 검을 뒤로 조금 뺐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란테르트의 검과 미셸튼의 검 사이에 공간이 생겼고, 미셸튼은 당시 온 힘을 다해 자신의 검을 란테르트에게 밀고 있었기에, 그 조그마한 공간이 갑작스레 생겨나자 순간 검을 제어할 힘을 잃고 강하게 앞으로 뻗었다. 그때 바로 란테르트의 검이 다시 미셸튼의 검을 내려친 것이다. 간단히 이야기해,란테르트가 검을 내려치는 순간에 맞춰 미셸튼 역시 검을 올려친 것이다. 물론, 그 시간이 굉장히 짧아 실력이 떨어지는 로인의 경우에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직접 겨루고 있던 미셸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잠시동안 란테르트를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무릎을 허물어 뜨렷다. 차라리.... 자신보다 조금 더 강했더라면.... 이렇게 까지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 란테르트가 입을 열었다. "경솔 하시군요...." 처음에, 란테르트는 그가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를 때, 일부로 가만히 서 있었다. 자신이 반격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을 경우 미셸튼이 어떻게 나올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미셸튼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란테르트의 머리를 향해 검을 내리쳤었다. 만약 란테르트의 실력이 미셸튼에게 못 미쳤더라면 그때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미셸튼은 란테르트의 말에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때, 디미온이 미셸튼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어서 일어나거라...." 미셸튼은 스승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들어 디미온을 올려다보았다. 디미온을 바라보는 미셸튼의 얼굴에는 절반쯤의 허탈감과, 절반쯤의 부끄러움이 가득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 같기도 했다. 복잡하기 이를 때 없는 표정으로 디미온을 바라보던 미셸튼은 한참 후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했다. "제.... 제가.... 이 정도밖에는 안되는 사람이었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이곳에 서 있는 모두의 귓가에 또렷이 들어박혔다. 워낙 조용한 저녁때여서 이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그의 자신감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인상깊었기 때문이다. 순간, 디미온이 크게 웃었다. "하하! 우습구나." 미셸튼은 그가 이렇게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자 순간 당황했다. "란테르트씨는, 네가 검술을 익히기도 전에 이미 대륙에서 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겨우 네 정도 실력으로 그에게 도전해 놓고, 패하고 나서는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냐?" 디미온은 이런 저런 이유로 자신의 애제자에게 조금은 잔혹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미셸튼은 디미온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 사실, 크림슨 아이즈의 명성은 요 10년간 많이 쇄락했다. 보통 시간이 흐를수록, 영웅의 무위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그 반대되는 종류의 인간들에 대한 평은 형편없어지기 마련이다. 물론, 평민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그를 악마로 취급하고 있었다. 하지만 검사, 용병, 마법사들 중에서는, 지금 크림슨 아이즈가 다시 나타난다면 자신들의 손으로 꺾어 보이겠다고 공공연히 큰소리 치고 다니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디미온의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미셸튼은 망연히 스승의 말을 들었다. "자만은 금물이다.... 내가 네게 이 말을 몇 차례나 들려주었을까?.... 하지만.... 특히 이런 충고는 보통 마음속으로부터 수긍하기가 힘들다. 그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까지 네게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날 수 있는 어떤 기회라는 것을 만들어 주지 못했었다. 지난 해, 나는 너의 시야를 조금이라도 넓혀주기 위해 에노사 왕립 무투회에 참가시켰었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고.... 실력 있는 자들은 죽거나 숨어버렸더구나.... 네 정도 실력으로 준결승까지 진출하다니...." 디미온은 여기까지 말하고 말 사이에 간격을 두었다. 표정을 온화이 바꾸고, 아직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미셸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미셸튼. 이제 너의 위치를 알 수 있겠느냐? 넌 결코 자만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자, 어서 일어나거라. 그리고 란테르트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여라." 미셸튼은 그 짧은 시간동안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결론을 얻었다. 얼굴에 다시 미소가 돌았다. 힘차게 몸을 일으켰고, 부러진 검을 잘 챙겨들었다. 미셸튼은 뒤이어 란테르트의 앞에 섰다. 고개를 깊이 숙였고, 이렇게 말했다. "란테르트님. 오늘의 대련, 제 평생에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 검, 언제나 지니고 다니며 결코 오늘의 교훈을 망각치 않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란테르트는 자신에게 감사를 표하는 미셸튼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답례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했다. "제가 당신의 나이였을 때.... 결코.... 결코.... 결코...." 그때였다. 란테르트는 미셸튼에게 격려의 말을 하던 도중, 결코 라는 말을 세 번이나 대내였다. 목소리가 착 잠긴 것이 간신히 짜내듯이 발음을 했는데.... 안색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에게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가장먼저 알아챈 사람은 모라이티나였다. 그의 모습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라이티나는 당황하며 란테르트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채 세 걸음도 다가서기 전에 란테르트가 피를 토했다. 커헉 하는 거친 소리와 함께, 그는 무릎을 푹 꺾었고, 바닥에 손을 댄 채 피를 쏟아냈다. 모라이티나는 그런 그를 서둘러 부축했다. 로인이 달려왔고, 시나, 이시테, 그리고 디미온까지 란테르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란테르트는 다시 한차례 피를 토해내고는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자신이 토한 피 위로 힘없이 쓰러져 버린 것이다. "로인, 어서 부축하렴." 모라이티나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쓰러져 버린 란테르트를 어떻게 하기 힘들었기에 로인에게 이렇게 말했고, 로인은 모라이티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란테르트를 부축했다. 몸이 축 늘어진 것이 기절해 버린 모양이었다. 이시테는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었고, 디미온이나 제레미아, 그리고 미셸튼, 켈리의 경우에는 당황스런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다. 모라이티나가 디미온에게 말했다. "쉴 만한 곳을 마련해 주시겠어요? 여관까지 가기에는 무리일 것 같아요...." 디미온은 그녀의 말에 당황하던 표정을 지우며 자신이 친히 란테르트가 쉴 만한 방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모라이티나는 로인에게 거의 끌려가다 시피 가고 있는 란테르트의 곁에 서서 자신의 정인을 바라보았다. 벌써 두 번째다.... 아무래도 큰 힘을 쓰고 날 때마다 몸에 무리가 가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단지 몸이 극도로 나빠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윽고 란테르트를 한 침대에 눕혔고, 모두들 그의 초췌한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디미온이 언뜻 보기에도, 란테르트는 10년 전보다 훨씬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일어나 돌아다닐 때에는 그 점을 잘 느끼지 못했지만, 이렇게 보니 확연히 차이가 났다. 아니.... 어쩌면 단지 느낌일 뿐일지도 모른다. 10년전에 이 사람이 어땠는지 정확히 기억해 낼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오래지 않아 디미온과 제레미아, 그리고 미셸튼은 방에서 빠져나왔다. 언제까지 그를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한참동안 무거운 침묵이 일행을 감쌌고.... 간신히 모라이티나가 이렇게 한숨 섞인 한마디를 할뿐이었다. "후우.... 무엇이 잘못된것인가요?.... 당신같이.... 당신 같은 사람이...." 여관으로 돌아온 오이니아 및 켈파, 테리트론, 피아텔, 이 네 사람은 한 방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의 한가한 시간이다. 대화 내용은 자연스레 란테르트와 에디엘레 가의 관계로 이어졌다. 사실 이 네 사람은 낮에 상당히 놀랐었다. 에디엘레 가의 장녀인 이시테가 그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란테르트의 품에 달려들다니.... "두 사람.... 혹시 약혼한 것이 아닐까?" 켈파가 조심스럽게 말했고, 곧바로 피아텔이 고개를가로 저었다. "아니. 에디엘레 가의 이시테 님이 약혼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 뒤이어 오이니아가 말했다. "게다가.... 란테르트, 그는 지난 10년간 기억이 없다고 했잖아.... 그럼에도 이시테 님을 알아보는 것을 보면 그 이전에 만난 사이일텐데.... 지금 이시테 님을 보아 10살 이전의 이야기잖아." 피아텔이 다시 한마디 보탰다. "그뿐 아니라.... 10년 전이라 해도.... 에디엘레 가는 백작 가문이었어. 뭐가 아쉬워서 이시테 님을 그런 낭인과 약혼시키겠어?" 그때, 테리트론이 피아텔의 말을 걸고 넘어졌다. "그까짓 백작가...." 그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돌려 테리트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테리트론은 여유 작작한 표정으로 모두의 시선을 받아들이며 말했다. "겨우 백작 가의 여자라니.... 공작 가의 여자라 하더라도 그의 명성에 비한다면 별 것 아니라 할 수 있을 테니...." "명성?" 켈파가 되물었고, 테리트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10년 전의 크림슨 아이즈의 명성이라는 것은.... 피아텔이 냉소를 터트렸다. "던젼에서 나온 이후로 계속해 이상한 말만 하는군. 테리트론, 도대체 너의 헛소리는 그 끝이 어디야?" 그의 말에 테리트론은 눈을 가늘게 떴다. "너야말로 던젼에서 그 창피를 당해놓고.... 도대체 너의 잘난 척은 그 끝이 어디야?" 피아텔이 외쳤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테리트론이 슬쩍 웃었다. "이제는 귀까지 먹은 거냐?" 켈파가 끼여들었다. "둘 모두 그만 둬...." 하지만, 피아텔과 테리트론의 지금 모습은 몇 마디 말로 해결될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피아텔이 큰소리로 외쳤다. "넌 왜 매사 그런식인거지? 우리가 무언가를 하면 언제나 냉소적으로 한마디씩 툭툭 내뱉고!" 테리트론이 그의 말을 끊었다. "우리가 아니라 나, 겠지." 피아텔은 안색까지 바뀌었다. "도대체 뭐가 불만이야? 15년이나 사귄 우리들을 깎아 내리면서 란테르트를 높이 사는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은 거냐?" 테리트론이 냉소했다. "흥. 너희를 깍아내려? 내가 언제? 켈파, 피아텔, 너희 둘 모두 나보다 굉장해. 됐어? 나는 너희를 깎아 내린 적은 없어. 그것과 상관없이 란테르트 님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야." 테리트론은 여기서 잠시 말을 쉬었다가 다시 이야기했다. "넌 무엇 때문에 그분을 그렇게 무시하는 거지? 그의 실력을 단 한차례라도 본적이 있어? 내가 말해줄까? 너는 단지 너 자신을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눈 아래로 보는 거야. 상대가 너보다 강하면 이런 저런 다른 점들을 들어 그를 깍아내리지." 피아텔이 강변했다. "내가 이야기했잖아. 그의 실력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난 나보다 그가 못하다고 이야기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다만, 다른 뛰어난 무사들에 비한다면...." 테리트론이 말을 끊었다. "10년전, 그보다 뛰어난 무사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어!" 그의 외침은, 목소리의 크기보다 그 내용의 때문에 모두의 입을 막았다. 저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테리트론은 순간 그의 정체를 말해 버릴까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길! 나 잠시 산책 좀 하고 올게." 괜한 말을 해버렸다는 생각에 테리트론은 이렇게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고, 모두들 그가 방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후, 오이니아가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10년 전에.... 그 보다 뛰어난 무사가 없었다니.... 그렇다면, 10년 전에는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했었다는 이야기야?" 오이니아의 말에 피아텔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헛소리일 꺼야.... 단지 화가 나서 내뱉은.... 테리트론은 원래 그렇잖아. 스스로 한 말이 부끄러워 이렇게 밖으로 나간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잖아?" 피아텔의 말에 켈파와 오이니아는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평소 테리트론의 성격으로 보아 맞는 말인 듯 하니 말이다. 보통 테리트론은 이런 식으로 화를 내고 나가버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말싸움은 말싸움으로 끝낸다는 것이 그의 생활신조(?)였기 때문이다. 오이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하긴 테리트론은 원래 조금 이상했어.... 어렸을 때도 다들 무서워하는 크림슨 아이즈가 좋다고 하지를 않나...." 켈파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맞아.... 그때.... 무엇 때문에 좋아한다고 했더라?.... 용사가 못죽이는 마왕이라면, 마왕 쪽이 더 멋있다던가?" 켈파의 말에 모두는 옛 일을 떠올렸고, 한차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오이니아가 갑자기 냉각되어 버린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보다, 켈파, 내일 2차 전에 나가지?" 오이니아의 물음에 켈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오후의 일로 중단된 1조 2차 전 경기는 내일 오전으로 미루어 졌고, 켈파의 2조 경기 역시 덕분에 오후로 조금 늦춰졌다. 오이니아가 다시 물었다. "2차 전 자신 있어?" 켈파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 실력 잘 알잖아...." 켈파의 자신 없는 목소리에 오이니아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무슨 소리~! 켈파는 대단해! 1차전 때도 간단히 상대를 이겼잖아." 켈파는 다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간단히 라니...." 피아텔에 끼여들었다. "사실, 너의 검술은 정통은 아니지만 그런 데로 쓸모는 있어. 로인의 검술과 마찬가지로." 켈파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오이니아를 향해 말했다. "피아텔의 말 들었지? 나의 검술은 정통이 아니야. 강습소에 자주 나가지도 못하잖아.... 그러니까...." 언제나 처럼 자신감이 조금 부족한 듯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켈파의 말을 끊으며 오이니아가 말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나는 많은 이야기를 그분으로부터 들었어. 유명한 검사들의 이야기.... 뛰어난 용병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름난 검들.... 그리고 검술에 대한 이야기...." 오이니아의 이 말에 켈파와 피아텔은 조금 놀랐다. 드라이토 노인이 죽은 후,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된 것이다. 물론,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하는 경우는 있지만.... 이런 식으로 추억을 되새김하는 경우는 단 한차례도 없었다. 상처가 거의 아물었다는 증거일까? 한편 오이니아는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감쪽같이 잊고 있었던 것으로.... 이름난 검, 이라는 말을 하며 떠올린 것이다. 바로, 란테르트의 검 말이다. 에르테일.... 할아버지가 언제나 칭찬해 마지않던 세 자루의 명검인 루플루시카, 드라케 블레이드, 그리고 에르테일 소드 중의 하나. 당시 그의 말에 따라 오이니아는 하르 동전을 검으로 잘라 보았다. 그리고 나중에 할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아마 그 검이 맞을 것이라고 단정 지었었다. 오이니아는 곧바로 테리트론의 이상한 태도와 그것을 연결 시켜 보았다. 대륙 안에서 세손가락 안에 꼽히는 검의 주인.... 어쩌면 테리트론이 말한 데로 대단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켈파와 피아텔은 오이니아가 생각에 잠긴 채 멍히 있는 모습에 약간 의아함을 느꼈으나,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에 잠겨있는거겠지.... 라는 생각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오이니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 잠시 다른 생각을 했어.... 아무튼, 할아버지가 검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실 때.... 꼭 정통 검술을 익힌다고 해서 뛰어난 검사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었어. 사실 검술에 정통이라는 것은 없는 거니까. 할아버지의 말씀으로는.... 검술이라는 것은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어떠한 모습이라도 좋대. 그러니까.... 상대를 다치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검을 움직이면 되고.... 아군을 지키고 싶다면 그에 맞춰 움직이면 된다는 거지." 그녀의 말에 피아텔이 곧바로 대꾸했다. "오이니아의 말이 맞아.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기본은 있다는 것이지. 예를 들어, 대륙 전체에서 가장 자유분방한 레카르도 가의 검술도 처음의 몇 년간은 기본 검술을 익히는데 온 힘을 쏟아 붓거든." 그의 말에 오이니아는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고, 켈파는 그런 말들을 열심히 귀에 담았다. 사실, 그는 지금까지 검술을 익히는데 조금도 열성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다지 하고 싶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번 오이니아를 지키지 못한 그 사건 이후로 그는 지난날들에 대한 후회를 조금씩 하기 시작했고, 지금이라도 열심히 해 보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켈파를 향해 오이니아가 말했다. "켈파. 그럼 지금부터라도 기초 검술을 익혀. 넌 힘이 세고 운동신경이 좋으니까 금새 검을 잘 다룰 수 있게 될 꺼야." 오이니아의 말에 켈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다만.... 나를 가르쳐줄 사람이 없잖아.... 그렇다고 어느 도시에 정착해 강습소에 등록할 수도 없고...." 오이니아가 곧바로 말했다. "란테르트씨가 있잖아. 게다가 넌 그에게 한가지 원하는 것을 부탁할 수도 있고." 그때 피아텔이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끼여들었다. "차라리 내가 가르쳐 줄게. 비록 나도 대단한 실력은 아니지만, 기초 검술 정도는 익히 알고 있어. 괜히 그런 사람에게 배웠다가 잘못 익히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라고?" 그의 말에 곧바로 오이니아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친구끼리는 그런 것을 가르쳐 주기가 조금 어색해. 서로 불편하잖아. 게다가, 란테르트씨의 실력이 너보다 나은 것도 사실이고.... 그가 익힌 것이 네가 말하는 전통 검술이 아니더라도 그 나름대로 쌓아온 것은 있을 테니까. 지난번에 봤잖아. 로인의 검을 단번에 날려 버리는 모습." 피아텔은 그녀의 말에 잠시 머뭇거렸고, 켈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그럼.... 그에게 한 번 부탁해 보아야 겠다...." 오이니아는 켈파가 자신의 말을 따르자 기쁜 기색을 띄었다. "고마워 켈파. 내 의견에 따라 주어서." 켈파는 오이니아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피아텔이라면 이런 순간에 몇 마디 오이니아의 기분을 맞춰주는 이야기를 했을 터이나, 켈파는 그런 것에는 소질이 없었다. 던젼에서의 그 날 이후, 오이니아는 항시 켈파에게어느 정도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리하다가 켈파가 다쳤으니, 그런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켈파는 이 점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나 피아텔은 그보다는 훨씬 세심한 편이었다. 오이니아와 켈파의 대화를 들으며 그는 약간 입맛이 씁쓰레해짐을 느꼈다. 이 무렵까지도, 란테르트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가 누워있는 방안에는 지금 모라이티나와 로인, 시나, 그리고 이시테, 켈리 이렇게 다섯 사람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상념에 잠겨 이렇다할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시나가 이시테를 향해 말을 꺼냈다. 안절부절못하는 이시테의 모습이 왠지 거슬렸다. "우리 란테르트 삼촌과는 어떤 관계죠? 이시테 님." 워낙 조용하던 곳이기에, 시나의 목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고, 다른 네 사람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모두의 시선은 시나에게서 곧바로 이시테에게로 옮겨졌고, 이시테는 그때까지 멍하니 란테르트를 바라보고 있다가 그런 질문에 약간 당황했다. 그녀는 켈리의 손위에 올려져 있는 손가락을 움직였고, 대답은 켈리의 입을 통해 모두에게 전달되었다. "10년 전.... 란테르트 님께서 이시테 님의 가족의 목숨을 구해 주셨었습니다." 시나가 곧바로 말했다. "상당히 친해 보이시던 데요? 물론, 일방적인 듯 하지만...." 시나의 말에 이시테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일방적.... 이라는 말이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그때, 모라이티나가 시나를 향해 말했다. "그만 둬.... 지금 우리는 손님으로 이곳에 와 있는 거야. 그보다, 다른 일행들에게 가서 알려줘. 란테르트와 나는 오늘 이곳에서 밤을 보낼 꺼야. 로인, 시나 너희 둘은 여관에서 자도록 해. 다른 일행들에 대한 예의니까...." 모라이티나의 말에 로인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고, 시나는 조금 더 있고 싶다는 눈치였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모라이티나의 말을 따랐다. 시나와 로인은 몇 가지 자신들의 물건을 챙겼고, 이시테가 부른 하녀의 안내를 받아 집밖으로 안내되었다. 로인과 시나 이 두 사람이 떠난 후, 모라이티나는 이시테에게 말했다. "이시테양도 이제 돌아가세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이시테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으며 켈리의 손에 글자를 새겼다. "아가씨는 조금 더 계시고 싶으시답니다." 켈리가 그녀를 대신해 답했으나, 모라이티나는 그녀의 말에 찬성하지 않았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이시테는 곧바로 다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모습에 모라이티나는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한마디했다. "어렸을 때 한 번 스쳤을 뿐인데.... 참 대단하군요...." 언뜻 들으면 비꼬는 듯도 싶은 말이었으나, 그 말이 모라이티나의 입을 통해 나오자 그런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모라이티나의 말에 이시테는 눈가를 살짝 붉혔다. 그때, 켈리가 이시테에게 물었다. "아가씨가 말씀하시던 그분이지요?" 분위기로 보아서는 당연히 그런 것 같았으나,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어 켈리가 물은 것이다. 이시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켈리가 모라이티나에게 물었다. "란테르트 님.... 왜 이런 건가요?"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녀 역시 모른다. 전에 란테르트가 말하기는 정신과 육체 사이의 괴리 때문이라 지만.... 단지 그것 만이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만약, 그가 큰 싸움을 벌인 후 이렇게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면.... 차라리 이해가 간다. 물론, 지난번 피를 토했을 때, 그때는 록웜과 한바탕 다툰 후였다. 그리고 지금도 미셸튼과 싸운 후였다.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겨우 그 정도로.... 모라이티나는 그의 건강이 왜 그렇게 나빠져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번의 각혈은 지난번 보다 훨씬 격렬했다. 쏟아놓은 피의 양도 훨씬 많다. 이것은 분명 건강이 나빠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미 나빠진 것이 아닌.... 켈리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지난 10년간.... 어디에 계셨던 거예요? 전쟁이 끝난 후, 에디엘레 가에서는 종종 란테르트 님을 찾았었는데...." 사실 켈리는 이러한 것들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호기심은 있었으나 질문을 해서까지 알고 싶다는 마음은 거의 일지 않았다. 이 모두는 바로 이시테를 위해서였다. 그녀의 물음에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완전히.... 실종되었었어요. 그 자신조차 어디 있었는지 모른다더군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켈리와 이시테는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자신조차 몰랐었다고요?" 켈리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되물었고,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한차례 슬쩍 끄덕여 대답했다. "그 자신조차.... 지난 10년을 잊고 있으니까요...." 모라이티나의 목소리에는 유난히 힘이 없었다. 에디엘레 내성 밖으로 발을 내놓는 순간 시나와 로인은 자신들을 안내하던 하녀에게 작별을 고하며 시가지로 발을 들여놓았다. 여관은 외성밖에 있었고, 내성 성문인 이곳에서 여관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다. 어느덧 해는 서편으로 완전히 져 버렸고, 땅거미가 더더욱 짙어져 가고 있었다. 로인과 시나는 한가로운 걸음을 남쪽으로 옮겼다. "대단한 미인이었지?" 시나가 로인을 향해 내뱉듯 물었고, 그녀의 말에 로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나가 다시 말했다. "게다가, 삼촌을 굉장히 좋아하는 눈치였어." 로인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삼촌은 지금까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로인의 말에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짝사랑인 모양이지..." 로인이 뒤이어 말했다. "그런데, 말을 못하다니.... 의외였어." "아.... 너는 몰랐구나. 에디엘레 가의 첫째 아가씨가 벙어리라는 것은 귀족사회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열 다섯 곳도 안되는 공작 가의 일이니까...." 시나의 말에 로인은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두 사람의 눈에 낯익은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시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을 정도의 키에 깡마른 몸매. 평범한 갈색머리칼을 가진 그 남자는, 호주머니에 두 손을 꽂은 채 슬렁슬렁 어두워진 성안 거리를 쏘다니고 있었다. "테리트론!" 시나는 그의 모습을 발견하자 이렇게 외쳤고, 테리트론 역시 그 둘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뭐야? 벌써 나온 거야?" 테리트론은 두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했고, 로인이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모라이티나 누나가 너희들과 함께 있으라고 이야기해서...." 그의 말에 테리트론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건가?" 그의 짓궂은 말에 시나가 한차례 비웃었다. "바보 같기는...." 로인이 말했다. "란테르트 삼촌이.... 또 다시 피를 토하고 기절해 버렸거든...." 둘의 말에 테리트론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괜찮겠지?" 그 답지 않게 남을 걱정하는 말을 하자, 시나가 한마디 톡 쏘았다. "너도 남 걱정을 할 줄 아는 거야?" 그녀의 말에 테리트론은 무어라 한마디하려다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다른 말을 꺼냈다. "할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술이나 한잔하러 가자."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시나와 로인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테리트론이 다시 한 번 재촉하자 할 수 없다는 듯 그를 따라 갔다. 모두는 걸음을 옮겨 외성밖에 있는 한 주점으로 갔다. 굳이 다시 외성 밖으로 나온 것은, 시간이 늦어져 성문이 닫히면 성밖에 있는 여관으로 나올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은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각기 마실만한 것을 시켰고, 시나의 말을 기점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네 친구들은 어쩌고?" 시나의 물음에 테리트론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후우.... 조금 마음이 복잡해서...." "단순일자무식이 복잡할 게 뭐가 있지?" 테리트론의 진지한 표정에 시나는 이렇게 한마디 톡 쏘았으나, 평소와는 달리 테리트론은 단지 고개만을 가로 저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시나는 장난할 분위기가 아닌 듯 하자 다시 말을 했다. "뭐가 문제야? 이 누나한테 털어 놔 봐." 그 말에 테리트론은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이런 저런.... 벌써 집을 떠나온지 보름 이상이나 흘렀잖아...." 시나는 왠지 이상하게 분위기를 잡는 테리트론을 보며 의아함을 느꼈으나, 이렇다할 물을 말을 찾지 못했다. 테리트론은 연거푸 두 잔의 술을 들이킨 후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분이 정말 ....크림슨 아이즈인 거야?" "믿지 못하겠다는 거야?" 테리트론의 물음에 시나가되물었다. 테리트론은 그녀의 대답에 잠시 시나의 눈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다만.... 놀랍잖아." 테리트론은 여기까지 말한 후 잠시 이야기를 멈추었다가 이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10년 전.... 난 열 살이었지. 당시 크림슨 아이즈는.... 나이든 어른들조차 입밖에 내기를 쉬쉬하는 사람이었어...."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때 나도 삼촌을 무서워 했었으니까...." 시나의 말에 테리트론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돌려 시나를 잠시 바라보았고, 시나는 그런 그를 향해 싱긋 미소를 한차례 지었다. 테리트론은 훗 하는 헛웃음을 한차례 터트리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의 크림슨 아이즈는 이미 전설이지.... 과거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 정도?" 테리트론은 다시 이렇게 말을 꺼냈고, 시나는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에 수긍하는 뜻을 보였다. "맞아.... 전설이지.... 악마라는 말 앞에 전대라는 수식어가 보태졌으니...." 시나는 문득, 테리트론이 왜 이런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마.... 오이니아의 할아버지를 죽인 사람은.... 이미 그분에 의해 죽임을 당했겠지?" 테리트론이 다시 말했고, 시나는 잠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테리트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내 눈으로 직접 봤었으니까.... 세 번 검을 휘둘러 다섯 사람을 베는 모습을...." 테리트론은 시나의 대답에 쓴웃음을 지었다. "우습구나.... 우리 모습이.... 복수는 무슨 얼어죽을...." 시나는 분위기를 잡고 있는 테리트론의 모습에 시간이 갈수록 적응이 되지 않음을 느꼈다. 이런 녀석이 아닌데.... 하고 말이다. 테리트론은 다시 한잔의 술을 벌컥 들이켰고,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그분은 우리.... 아니 오이니아의 복수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지? 이미 끝났잖아.... 그런 일을 어떻게 도와준다고...." 그의 말에 시나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나도.... 그건 이해가 가지 않아. 문제는 너희야. 삼촌의 말을 믿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잖아?" 테리트론이 말했다. "무시해도 괜찮잖아.... 우리 같은 아무것도 아닌 어린아이들의 투정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피아텔이 귀족이라서? 오이니아가 지방의 명망 있는 인사의 손녀딸이라서? 그런 건 아니잖아...." "그야.... 오이니아와 켈파가 삼촌의 생명을 구했다잖아...." 테리트론의 말에 시나가 이렇게 대꾸했으나, 테리트론은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구해준 것도 아니야.... 의사의 말로는.... 몸은 거의 정상이었데. 다시 하루가 지난다면.... 가만히 놔두었어도 의식을 차렸을 거래...." "그래도.... 아무튼, 이미 약속을 했잖아. 무엇이든지 한가지 일을 들어주기로...." 시나가 다시 말했고, 테리트론은 다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가 이해 할 수 없는 점이 바로 그 점이야.... 자신의 몸 상태는.... 그 정도의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었을 꺼야. 오이니아와 켈파가 구해주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그런데, 겨우 그런 구두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런 초보자들을 데리고 여행을 하다니..." 그때, 곁에서 잠자코 앉아있던 로인이 입을 열었다. 그가 들고 있는 술잔은 채 절반도 비워져 있지 않았다. "삼촌에게 있어서.... 약속이란 결코 겨우가 아니야. 그분은.... 어떤 종류의 약속이든지.... 반드시 지키시지." 둘은 로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고개를 돌려 로인을 바라보았고, 로인은 자신의 허리에 매어져 있는 장검을 내려다보았다. "이 검.... 얼마 전 삼촌이 사 주신 것이야. 난 처음, 단지 오래간만에 만나기 때문에 선물한 것인 줄로만 알았어. 하지만.... 막 집을 떠나오면서 생각해 냈지. 10년 전.... 삼촌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동생 란티에에게 주머니칼을 하나 선물해 주셨었어.... 그러면서 내게 말씀 하셨어.... 다음에 찾아올 때는 너에게 맞는 검을 한 자루 선물해 주겠다고.... 나조차 잊어버린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검을 한 자루 사 오신 것이야...." 로인의 말에 두 사람은 자신들도 모르게 로인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테리트론이 한숨을 한차례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의외인걸.... 크림슨 아이즈가 그런 인물이었다니.... 하긴, 지금까지로도 충분히 생각 밖이긴 했지만...." 시나가 이어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삼촌을 무서워했었는지도 모르겠다니까...." 이후로 잠시동안 세 사람 사이에 대화가 끊겼다. 그 잠시 사이, 테리트론은 다시 한잔의 술을 더 들이켰고, 시나는 간신히 반잔의 술잔을 비웠으며, 로인은 술잔을 두 번째의 것으로 바꾸었다. 주량의 차이라고나 할까? 시나와 테리트론은 반잔과 여섯 잔의 차이를 가지고 있었으나, 표정이나 몸의 흐트러짐 정도는 거의 비슷해져 있었다. 로인만이 단정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너 내일 아침에 시합 있지?" 시나가 테리트론에게 물었고, 테리트론은 살짝 흐트러진 발음으로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내일 아침에.... 있지. 그건 댁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는데...." "설마 내 상대가 너는 아니겠지?" 시나가 말했고, 테리트론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십시오. 아가씨. 아가씨가 상대라면 져 드릴 테니...." 시나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상대가 나라면 절대 지지 않으려고 할 것 같았는데.... 아닌가?" 테리트론이 웃었다. "하하! 맞아. 질 수 없겠구나.... 졌다가는.... 죽을 때까지 조롱을 당할 테니...." 시나가 그의 장난기 어린 말에 톡 쏘아붙였다. "내가 네까짓 인간이랑 죽을 때까지 만나기나 할 것 같아?" 이 말을 내뱉는 순간 테리트론과, 말을 꺼낸 시나, 이 둘 모두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둘은 오래지 않아 평소의 표정을 되찾았다. "하긴, 소피카의 수도에 도착하고 나면 헤어질 테니...." 테리트론이 내뱉듯 중얼거렸고,시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수긍했다. "그렇겠지.... 너야 네 친구들을 따라 복수인지 뭐인지를 할거고.... 나야 삼촌과 함께 여행을 다닐꺼니까...." 이러한 말을 하며, 이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네가 없으면.... 여행이 두 배는 재미없어 질 꺼야.... 라고.... 하지만 결코 입 밖으로 이런 말을 내놓지는 않았다. 애꿎은 술잔만 들었다 놓았다 할 뿐.... 늦은 저녁,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에게 슬리핑 마법을 한차례 걸어 그가 푹 쉬도록 배려한 후, 침대 곁에 쓰려져 잠이들었다. 그보다 조금 이른 시간, 이시테와 켈리는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꾸벅 꾸벅 졸기 시작했고, 모라이티나는 그 둘을 그녀들의 방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모라이티나는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듯한 느낌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 일어났군요...." 가벼운 옷차림으로 침대에 앉아있던 란테르트는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에 엎드려있던 모라이티나의 뒷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다가, 그녀가 몸을 일으킴에 한차례 미소를 지었다. "번번이.... 모라이티나를 귀찮게 만드는군...." "그런 말은 그만 두어요."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대꾸했고, 란테르트는 쓰게 한차례 미소를 지었다. 모라이티나가 그런 그를 향해 물었다. "이번에도....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곧바로 모라이티나가 다시 물었다. "혹시.... 미셸튼과의 싸움 때문에 이런 것 아니에요?"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조금도 무리하지 않았어.... 미셸튼의 실력도 내 실력도 잘 알잖아...." 모라이티나가 다그치듯 물었다. "그럼 도대체 왜 이런 것이에요?" 란테르트는 또다시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자기 자신도 모른다. "너무 걱정하지 마. 별 것 아니니까.... 옛날에도 피는 자주 토하는 편이었잖아. 모라이티나와 처음 만났을 때도.... 몇 차례나 각혈했던 것 같은데...." "달라요. 그때와는.... 그대의 란테르트는 폐에 상처를 입었었을 뿐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모라이티나는 거의 울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모라이티나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가볍게 그녀의 금발을 헝클었고,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괜찮을 꺼야. 너무 걱정하지 마."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꽤 오랜 시간 잠을 잤더니 몸이 찌뿌둥 했다. 적당히 몸을 풀어주며 곁에 놓여있는 자신의 짐들을 하나 둘 챙기기 시작했다. "무투회.... 시작했을까?" 란테르트의 물음에 모라이티나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며 답했다. "아직이요.... 지금 나가려고요?"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있어 보았자 딱히 할 일도 없잖아." 모라이티나가 그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돼요! 오전에는 그냥 이곳에서 쉬어요. 아이들은 제가 대신 돌보겠어요." "괜찮다니까. 겨우 그런 정도로 어떻게 되지는 않아." 란테르트의 여유 만만한 목소리에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크게 가로 저었다. "무슨 소리에욧! 겨우 라니.... 피를 토하고 기절하는 것이 겨우란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대답할 말이 궁해 잠시 말하기를 머뭇거렸고, 모라이티나는 애원 조로 그에게 말했다. "오늘 하루, 아니 오전까지 만이라도 조금 쉬어요. 더 이상 건강을 악화 시킬 수는 없어요. 지난번에는.... 피를 토했을 뿐이지만, 이번에는 기절을 했어요. 다음 번에는.... 어떻게 될지 몰라요...."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모라이티나의 말을 듣도록 할게." 모라이티나는 그의 말에 희색을 띄었다. "고마워요." "무슨.... 오히려 내가 고맙지...."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이렇게 대꾸하며 가방과, 검, 그리고 망토를 풀어내려 놓았다. "으음.... 그런데.... 무얼 하고 있지?" 란테르트는 다시 침대에 걸터앉으며 이렇게 말했고, 모라이티나는 순간 대꾸할 말이 없음을 상기해냈다. 원래 계획은 자신이 함께 있어 주겠다.... 라는 것이었는데.... 말하던 도중 자신은 무투회에 참관하러 가겠다고 이야기 해 버렸으니.... 모라이티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슬리핑 마법을 걸어 드릴까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사양하겠어."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죠?" 모라이티나가 물었고, 또랑또랑한 소녀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이시테 아가씨입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켈리였다. 모라이티나는 이시테가 찾아 왔다는 말에 무심코 고개를 돌려 란테르트를 바라보았고, 의미모를 짖꿎은 미소를 빙그레 지었다. 모라이티나는 뒤이어 문 쪽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고, 켈리와 이시테는 각각 모라이티나를 향해 인사를 했다. "일어나신 것 같아 이른 시간임에도 찾아 왔습니다." 켈리의 이 말에 모라이티나는 살짝 웃었다. "병문안 오신 모양이군요." 그녀의 말에 이시테는 고개를 한차례 살짝 끄덕였고, 모라이티나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이걸 어쩌죠? 환자가 팔팔하니.... 문병 온 의미가 없겠는걸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이시테는 화색을 띄었다. 란테르트가 건강하다는 말 때문인 듯 하다. 모라이티나는 말을 하며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고, 켈리와 이시테는 다시 한차례 란테르트를 향해 인사했다. 신분은 평민과 공작집안 이었으나, 오히려 공작집안의 사람들이 평민에게 더 공손했다. 꽤나 우스운 풍경이다. 켈리는 이시테보다 한 걸음 앞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약간 크기가 큰 의자를 란테르트의 침대 근처에 가져다 놓았고, 그 의자에 쿠션을 놓고 천으로 등받이를 덮었다. 아마 이시테가 앉을 자리를 마련하려는 모양이었다. "아가씨 이곳에 앉으세요." 그녀의 말에 이시테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며 모라이티나를 바라보았다. 마침 모라이티나도 이시테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디엘레 아가씨, 그럼, 란테르트를 부탁드릴께요. 다만 한두 시간이라도 말동무를 해 주세요." 모라이티나는 안심이라는 표정으로 이시테에게 이렇게 말했으나, 이시테는 잠시 당황했다. 물론 모라이티나의 말 데로 할 생각이었으나.... 모라이티나의 입을 통해 그런 말이 나오니 왠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라이티나는 곧바로 몸을 돌려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럼, 어린 아가씨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요. 전 무투회장에 나가 볼께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여전 침대에 걸터 앉은 채 손을 들어 인사했고, 모라이티나는 미소를 한차례 지어 보이며 밖으로 나갔다. 이시테는 잠시동안 그런 모라이티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린 아가씨? 기껏해야 자기나이 또래로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그런 말을 듣자 약간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런 느낌을 떨쳐버리며 이시테는 켈리가 마련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 보니, 만난지 거의 만 하루가 다 되어서야 단 둘이 마주볼 수 있게 되었다. "아가씨, 이것을 덮으세요. 아직 날씨가 추워요." 아참, 단 둘은 아니었다. 이시테는 켈리가 건네주는 얇은 모포로 무릎을 덮었다. 켈리는 조그마한 의자를 끌고 와 이시테의 곁에 자리잡고 앉았다. 버릇처럼 자연스럽게 이시테의 오른손을 잡았고, 이시테가 할 말을 기다렸다. "이제 말하기가 한층 편해 지셨군요." 란테르트는 침대에 걸터 앉은채 이시테와 켈리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했고, 이시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켈리의 손에 글자를 써넣었다. 마음 같아서는 란테르트의 손에 직접 쓰고 싶었지만.... 그 사이에는 10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아가씨가 말씀하시길 모두 켈리 덕분이라고 합니다." 란테르트는 곧바로 켈리를 바라보았다. "켈리라고 했지요?" 란테르트의 물음에 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켈리 멜린스키입니다." 그때, 이시테가 다시 켈리의 손에 글자를 썼고, 켈리가 입을 열었다. ".... 켈리는 이시테 아가씨의 좋은.... 친구라고 합니다." 켈리는 이야기가 자신 쪽으로 이어지자 상당히 말하기가 어색했다. 자기 입으로 자기를 칭찬하는 꼴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난 5년간 이시테의 입이 되어 있던 사이 그런 어색함은 거의 극복한 상태였다. 그 말에 란테르트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때 다시 이시테가 물었다. 물론 켈리의 입을 통해서.... "이시테 아가씨가, 하시던 일은 성공 하셨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란테르트의 대답에 이시테는 약간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곧바로 다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사실, 이시테는 란테르트를 다시 만나 몇 마디 나누지 않아 그가 원하는 일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소.... 전에는 한달 여를 함께 지내며 고작 몇 번을 보았던 그의 미소를 이제는 하루 종일 마음껏 바라볼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아 이렇게 한 번 물어본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잠시동안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사실 란테르트의 입장에서는 할 말이 거의 없었다. 이시테에게 평소 특별한 감정을 품어 왔던 것도 아닌데다가.... 혹시 그렇다 하더라도 그다지 말하는 것을 즐기지는 않는 편이었기에 그는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이시테의 경우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막상 손으로 꼽아보면 그것도 몇 안될지 모르겠으나, 마음속은 묻고 싶은 말과 하고 싶은 말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왠지 켈리 앞에서는 말문이 트이지 않았다. 켈리는 이런 점을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이시테의 표정 하나 하나를 완전히 파악하고있는 그녀이기에, 왜 이시테가 더 이상 손가락을 움직여 자신의 손바닥에 글을 쓰지 않는지 정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자리를 뜨기에는 약간 걸리는 바가 있었다. 이런 낭인과 아가씨를 단 둘이 두다니.... 후에 돌아올 마님의 질책은 차처하고서라도 스스로가 안심이 되지 않았다. 각자 이런 생각에 잠겨 있기를 잠시.... 결국 켈리가 몸을 일으켰다. 저 백발의 남자가 설사 불칙한 마음을 품고 있더라도.... 감히 이곳에서 무엇을 어쩌지는 못하겠지.... 라는 생각을 한데다가.... 아가씨의 마음을 생각해 보건대.... 켈리는 이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그렇게 갑자기 자리를 털자 이시테는 약간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켈리를 올려다보았다. "아가씨. 아침을 준비해 오겠어요. 잠시만 이곳에 계세요. 곧 돌아올 테니." 그러고 보니 아직 아침도 먹지 않았다. 켈리의 말에 이시테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란테르트와 단 둘이 방안에 있다는 것.... 사실 어쩌면 원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그런 기회가 닥치고 나니.... 망설여 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시테가 입술을 뻥긋거려 켈리에게 무어라 말을 했다. 이것은 구화법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입술의 모양을 통해 말을 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교육받은 사람이 아니면 알아듣기가 힘들었으나, 켈리의 경우에는 이시테를 위해 공부했었다. [그런 건....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되잖아....] 이시테의 이 말에 켈리는 미소를 빙그레 지으며 역시 구화법으로 대꾸했다. [금방 돌아오겠어요. 그럼 이야기 나누고 계세요.] 켈리는 이렇게 말하며 뒤도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켈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고, 이제 방안에는 단 둘이 되었다. 하지만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사실, 대화가 끊긴 지는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체감 상으로는 몇 시간쯤 흐른 듯 느껴졌다. 이윽고, 이시테가 용기를 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간단하게 해 냈던 일인데.... 나이를 먹고 나니, 그의 곁에 앉아 그의 손을 잡는 것이 힘들었다. 이시테는 자리에서 일어나 란테르트의 곁에 앉았고, 이내 그의 하나 남은 손을 자신의 손으로 잡았다. 예전에 비해 그의 손이 작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이시테의 손이 자랐기 때문은 아닌 듯 하다.... 이시테의 손이 움직였다. [.... 어색해요.... 이렇게 란테르트의 손을 잡는 것이....]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한차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어엿한 아가씨가 되셨으니까요." 이시테는 그의 말에 귀밑을 살짝 붉혔다. 왜 그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에디엘레 가에 왔으면서.... 왜 우리 집에 들리지 않았나요? 조금 서운했어요....] 이시테는 뒤이어, 제가 당신에게 그 정도밖에는 되지 않나요? 라고 묻고싶었지만.... 감히 손가락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글쎄요.... 1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저를 기억해 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란.... 언제나 잊기 마련이니까요...." [잊지 않았어요. 란테르트를....] 이시테는 란테르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렇게 썼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의 대답에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이시테는 란테르트에게서 대답이 없자 고개를 돌려 가방을, 그리고 빛 바랜 리본을 바라보았다. [란테르트도 이시테를 잊지 않았잖아요. 저 리본.... 아직도 가방에 매어져 있으니까....]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돌려 가방을 바라보았다. 거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모습의 나비 브로치.... 그리고 빛 바랜 리본.... 각각 10년 전과 15년 전의 추억을 간직한 채 고스란히 살아 남아 있었다. "그렇군요.... 아직도...." 란테르트는 쓸쓸히 이렇게 중얼거리며 가슴께로 손을 가져갔다. 펜던트.... 아직도.... 이시테가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정말.... 기뻤어요. 란테르트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이.... 아버지도 즐거우신 모양이에요. 어머니는 아직도란테르트를 싫어하지만....]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보다, 공작 가문이 되셨더군요. 축하드립니다." 이시테는 그의 말에 미소를 지었으나, 그다지 축하 받을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고마워요. 하지만.... 오히려 성가셔 진 걸요. 부모님들은 더더욱 바빠졌고.... 차라리, 에노사 국왕 전하를 모시고 망명길에 올랐던 때가 더 즐거웠던 것 같아요.] "후훗. 그 성격도 여전 하시군요." 이시테는 란테르트의 말에 동그랗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 경어.... 그만둘 수는 없는 건가요? 왜 그 모라이티나라는 아가씨에게는 평어를 사용하면서.... 두 조카 분들에게도 말을 낮추잖아요. 전 그 두 조카 분들보다 나이가 적어요. 이제 갓20살인 걸요.] 이시테의 말에 란테르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군요.... 생일이 9월이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정작 경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치 않았고, 이시테는 약간 실망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그냥.... 편하게 대해 주세요. 그렇게 해 주실 거죠?] "그럴 수는 없습니다. 두 조카는 조카이기에 하대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라이티나의 경우에는 제 오랜 친구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하던 버릇대로 그녀를 대하는 것입니다." 이시테는 조금 더 밀어 붙여 볼까 하다가 이내 조그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데.... 오랜 친구라니요? 저보다 오래 되었나요? 혹시 전에 이야기하던 그 마족 친구인가요?] 이시테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전환했다.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마족 친구는....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는 급속도로 힘을 잃었고, 이시테는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그녀가 채 묻기도 전에 란테르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모라이티나와 만난 지는 15년 남짓 됐습니다." 이시테는 란테르트의 대답에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15년이요? 그녀의 나이가 몇이죠? 제 또래쯤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이시테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미소를 지었다. "서른 네 살?.... 처음 만났을 때 19살이라고 했던 것 같으니.... 아마 그쯤 되었을 것입니다." 이시테는 더더욱 놀랍다는 듯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그 모습에 란테르트는 다시 한차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어느덧 이시테는 란테르트와의 대화가 익숙해져 갔다. 흡사....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듯도 느껴졌고.... 왠지 모를 즐거움에 마음이 편했다. 게다가.... 기억 속의 란테르트에 비해, 지금의 란테르트는 한층 대화하기가 즐거웠다. 예전의 란테르트는 10가지를 물어야 간신히 한 두 가지 대답해 주었는데, 지금의 란테르트는 훨씬 밝아 묻는 것마다 미소와 함께 대답을 들려주었다. 가끔은 농담조의 말까지 한다. [그거 알아요?] 그런 란테르트를 향해 이시테는 미소지으며 이렇게 물었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을 말씀이신 가요?" 이시테는 더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란테르트, 정말 밝아졌어요. 다행이에요, 행복해 보여서.... 사실, 처음 란테르트가 팔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는.... 예전보다 더더욱 불행해져 있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 많이 했었어요. 하지만 웬걸요. 지금의 란테르트는 잘 웃어요. 얼굴에 그늘도 없고.... 옛날처럼 초조해 하지도 않고.... 보고있는 저 마저도 덩달아 즐거워질 정도라니 까요.] 이시테는 혼자 이렇게 많은 글자를 란테르트의 손에 적었다. 그리고 막 글을 다 적은 순간 고개를 들어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응당 미소로 자신을 맞아 주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이시테는 란테르트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멍해졌다. 란테르트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흡사 미소를 지우는 마법이라도 알고 있는 듯.... 란테르트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 버렸다. [왜.... 왜 그래요?] 이시테는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란테르트에게 이렇게 물었으나, 란테르트는 그녀가 자신의 손바닥에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마저 느끼지 못한 듯 멍하니 있었다. 행복해 보인다.... 의외의 곳에서 의외의 인물에게 들은 이 한마디는 지금 란테르트의 사고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행복한 것인가?..... 아니면 불행한 것인가?.... 란테르트는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잊은지 오래였다.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의 저변에는 분명 자신은 불행하다.... 라는 생각을 깔고 있었다.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단정지은 것이다. 그런데.... 행복해 보인다니.... 이시테가 다시 물었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잘못은 자신에게 있다.... 무슨.... 무슨 명분으로 행복 같은 것을 누리고 있는 것인가? 이시테, 그녀의 말 데로.... 왜 그렇게 미소를 헤프이 짓고.... 별 것 아닌 것에 웃음을 터트리는가?.... 도대체.... 이카르트, 그를 죽게 만든 것이 즐거운가?.... 이제 모두를 잃고.... 자신의 곁에 남아있는 존재라고는 고작 모라이티나 하나 정도인데.... 그것이 행복한가? 하지만.... 이런 것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자신은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인가?.... 설마 그들을.... 자신의 손을 거쳐 불행하게된 그 많은 사람들을 이미 잊었단 말인가?.... 그를 죽인지.... 적어도 란테르트 자신의 기억으로는 1년이 채 흐르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그를 잊었단 말인가? 한 번 떠오르기 시작한 생각들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갔다. 10년전, 15년전, 18년전을 미친 듯이 오갔다. 지금의 자신.... 비록 겉으로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며 힘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지금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묻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과거는 잊지 않았으되.... 더 이상 떠올리지 않았다. 절대.... 자신은 지금 행복해서는 안된다. "제가.... 정말 행복해 보입니까? 즐거워 보입니까?" 이윽고 란테르트가 입을 열었고, 이시테는 그의 말에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란테르트는 그녀의 대답에 망연자실해 졌다. 행복과 불행 사이에 애당초 차이란 없는 것인가?.... 충분히 불행해야 할 자신이 지금 행복한 이유는 무엇이고.... 지금에 비해 불행할 것 없는 과거가 더더욱 불행히 느껴지는 것은 도대체 왜인가? 란테르트는 머리가 어지러워짐을 느꼈다. 사실 보통 사람들로써는 이런 그의 생각들이라는 것은 한차례 웃음과 함께 넘겨 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란테르트의 입장에서는 아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지금 몇 가지 응어리가 남아 있다. 그중 첫 번째가 바로 이카르트의 일로.... 비록 직접 손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를 핍박해 자살하게 만든 것은 결국 자신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를 자신의 손으로 죽게 만든 것이다. 그는 죽으면서 자신에게 살 것을 부탁했다. 계약.... 예전에 했던 계약이라는 틀을 빌려 자신에게 부탁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응어리이다. 죽으려 했다. 두 자매를 잃고 나서 5년이나 살아온 것은.... 단지 복수를 위해서였다. 그것을 마친 후 자신은 조용히 생을 마감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카르트, 그의 부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지금 란테르트는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원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다만 살아갈 뿐이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두 개의 응어리를 가슴에 품은 채로.... 그런데.... 어떻게 행복해 보일 수가 있단 말인가? 하루하루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자신은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그는 이 점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었다. 전혀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시테의 입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행복해 보인 다라.... 내가.... 내가 행복해 보인다.... 후후...." 란테르트는 왠지 화가 치밂을 느꼈다. 물론 자기 자신에게 말이다. 갑자기 스스로에게 혐오감이 느껴졌다. 자신 때문에 죽어간 모든 사람들을 배신한 듯한 기분이었다. 이시테는 지금의 란테르트에게서 예전의 느낌을 느꼈다. 언젠가.... 성을 녹였을 때 그의 등뒤에서 느꼈던 느낌.... 이시테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자신이 곁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두 손으로 온힘을 다해 손을 꽉 쥐었다. 란테르트는 이시테가 자신의 손을 잡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이시테를 발견했고, 란테르트는 머릿속이 완전히 텅 비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인지도 몰랐다.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아니 앞으로도.... 그때 이시테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요. 옛날의 란테르트로 돌아가지 말아요.] 란테르트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잘못하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그리고.... 란테르트에게 무슨 과거의 란테르트가 있고 현재의 란테르트가 있단 말인가? 란테르트는 두 눈을 감았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지 위해서였다. 속이 매스꺼워진다. 어제 저녁 이후로 먹은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가슴속에 무언가가 가득 차 오른다. 입가에 비릿한 향이 풍기고.... 또 다시 목구멍을 넘어 한줄기 뜨거운 피가 솟아난다. 다시 가슴속으로 들이 밀어보려 했으나, 결국은 한차례 피를 쏟고 말았다. 이시테는 그런 란테르트의 모습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고는 서둘러 가까이에 있는 수건을 들어 그의 가슴팍을 닦아주었다. 다행히 기절은 하지 않았지만, 란테르트는 지금 하나뿐이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끊임없이 마른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이시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흰색 수건이, 그리고 자신의 연두색 원피스가 붉은 얼룩으로 엉망이 되었건만.... 계속해 그가 흘리는 피를 닦아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각혈은 오래지 않아 멈추었다. 지친 듯 조용히 몸을 침대 아래로 미끄러트렸고, 침대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는 웃었다. "후후후...." 오랫동안 낮은 웃음소리를 계속해서 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웃음을 멈추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전.... 행복해서는 안됩니다.... 늦었습니다.... 행복하기를 원했다면.... 18년 전 나의 피엘을 잃지 말았어야 했고.... 15년 전 라브에를죽게 놔두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카르트.... 그가 죽는 모습을 지켜만 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이제 와서 행복이라니...." 란테르트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 것 같습니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고, 천천히 검과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망토를 들어올리며 이시테에게 말했다. "그럼, 전 무투회 장에 나가보겠습니다." 란테르트는 혼란해진 머리를 식힐 겸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곧바로 이시테에게 손목을 붙잡혔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시테는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얼굴에도 피가 몇 방울 튀어 있었으나, 그녀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은 채 란테르트의 손바닥에 글자들을 써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힘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전.... 사실 아무것도 몰라요. 란테르트가 어떤 생을 살아왔는지.... 무엇 때문에 불행해 하는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에 평생 얽매여 살수는 없잖아요. 사람이라면.... 불행한 것을 싫어하고 행복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에요. 불행한 것을 피해 행복에 안주했다고 해서 그것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어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두의 불행은 저로 인한 것입니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이시테의 손에서 팔목을 천천히 잡아 뺐다. 하지만, 이시테는 놓아주지 않았다. [보내지 않아요. 지금은.... 보낼 수 없어요. 또 다시 피를 토했잖아요. 모라이티나 님이.... 그녀가 말했어요. 오전동안 휴식을 취하도록 하라고. 아직 아침도 먹지 않았잖아요. 조금 있으면 켈리가 돌아 올꺼에요.] 약간 횡설수설하며 이시테는 란테르트를 막았다. 이대로 그냥 보내기에 마음이 편치 않기도 했거니와, 그의 건강이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란테르트는 이시테와 옥신각신 하는 사이에 정신이 많이 맑아졌다. 피를 토해 방을 더럽힌 것도 약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고,이시테의 청도 있고 해 그는 다시 망토와 짐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차피 지금 밖으로 나가 보았자, 이시테에게 미안하고, 모라이티나에게 걱정을 끼칠 뿐이다. 이시테는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란테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십시오. 남들이 보면, 싸움이라도 벌인 줄 알겠습니다." 이시테는 그제야 자신의 옷이 엉망이 된 것을 상기했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란테르트는 그 모습에, 참 부끄러울 것도 많다....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시테는 란테르트의 손에, [란테르트가 갈아입을 만한 옷도 가져오겠어요....] 라고 적은 후 밖으로 나갔고, 란테르트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피는 바닥에 쏟았고, 다행히 침대보는 그다지 더러워지지 않았다. "건강이.... 나빠진 것인가?...." 란테르트는 바닥에 그려진 검붉은 색의 혈화 무더기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몸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어느 한곳 아프지도 않고.... 마법으로 이상한 곳을 찾아보아도 한곳 걸리는 곳이 없었다. 란테르트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가 뒤로 누웠다.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으나,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그의 신경이 온통 다른 곳으로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행복에.... 죄책감이라...." 란테르트는 이렇게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은 행복하지 않다고.... 약속한 오전이 모두 흘렀다. 켈리와 이시테는 란테르트와 함께 방에서 오전시간을 보냈다. 대부분의 대화는 켈리와 이시테가 지난 10년간의 여러 이야기를 란테르트에게 들려주었고, 가끔가다 란테르트가 두 사람의 질문에 대꾸해 주었다. 점심을 먹은 후, 란테르트는 오후 경기가 열릴 무투회 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시테와 켈리 역시 란테르트를 따라 갔고, 그렇게 무투회 장에서 일행과 합류할 수 있었다. 이시테가 무투회장의 경기자 대기석에 나타나자, 일대는 벌집을 쑤셔 놓은 듯 했다. 에디엘레가 측에서는 서둘러 근위기사대 10명이 투입돼 주위를 지켰고, 미셸튼마저 자리를 일행이 있는 곳을 옮겼다. 일행 중 가장 동요가 심한 것은 피아텔이었다. 자신이 속한 영지 영주의 딸이 바로 곁에 있으니.... "이시테 양도 왔군요." 모라이티나는 이시테가 란테르트를 따라 대기자석에 나타나자 이렇게 말하며 한차례 미소를 지었고, 이시테는 그런 그녀의 미소에 어색한 미소로 대꾸했다. 어쩌면.... 연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아가씨였다. 아직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기는 힘들다. 모라이티나는 뒤이어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한차례 한숨을 내 쉬었다. "또 피를 토했군요...." 아침에 비해 바지에 묻어있는 혈흔의 양이 훨씬 많았기에, 모라이티나는 단번에 그 모습을 알아보았고, 그런 모라이티나의 표정에 란테르트는 한차례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덧 어수선하던 주위가 정돈되었고, 모두들 에디엘레가 측에서 마련한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시테가 앉을 자리는 켈리가 준비해 온 쿠션과 천으로 장식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저 아무 곳에나 대강 자리를 잡았다. 란테르트의 곁에는 모라이티나가 앉았다. "아침 경기는 어떻게 되었지?" 란테르트가 물었고, 그의 물음에 모라이티나가 답했다. "시나는 2차전에서 승리했고.... 테리트론은떨어졌어요." 모라이티나의 대답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시나는 삼촌이 자신을 돌아다보자 손을 들어 브이자를 만들어 보였고, 테리트론은 별 것 아니라는 담담한 표정으로 란테르트의 시선을 받아냈다. 그때, 오이니아와 켈파, 그리고 피아텔이 란테르트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켈파가 머뭇거리며 이야기를 꺼냈다. "저.... 란테르트 님...." 란테르트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고, 켈파는 오이니아의 무언중의 재촉을 받으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혹시.... 저에게 했던 약속 아직 잊지 않고 계십니까?"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한가지 부탁하시는 것을 들어주겠다는 이야기.... 아직도 유효합니다. 혹시 부탁하고 싶은 일이라도 생각 나셨습니까?" 란테르트가 물었고, 켈파는 조용히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예...." "말씀해 보십시오." 란테르트의 말에 켈파는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검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곁에 있던 모라이티나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끼여들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죠?" 모라이티나의 말에 피아텔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우리 가운데서는 실력이 가장 뛰어난 편이니까요. 켈파에게 기초 정도는 가르쳐 주실 수 있겠다 싶어서 입니다." 피아텔의 말에 란테르트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기초라.... 좋습니다. 아니, 당연히 해 드려야지요." 란테르트의 대답에 켈파는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였다. 그때, 그 모습을 곁에서 보고 있던 미셸튼이 입을 열었다. 그는 이시테에게도, 란테르트에게도 볼일이 있었기에 지금 일행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왜 스승에게 행하는 예를 올리지 않습니까?" 미셸튼의 말은 공손했다. 어제의 일 이후로, 약간 오만한 빛을 띄던 눈빛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켈파를 바라보았고, 그때 피아텔이 끼여들었다. "스승이라고요? 단지 검술을 지도 받으려는 것이지 결코 스승으로 삼거나 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피아텔의 말에 미셸튼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에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켈파씨, 어째서 그분을 스승으로 삼지 않으십니까? 대륙 제일.... 일류급의 검술을 전수 받을 수 있을 텐데...." 미셸튼은 말을 하던 도중 대륙 제일이라는 말을 일류급으로 바꾸었다. 제일이라고 한다면, 에디엘레 가의 검술 마저도 아래로 놓는 것인데.... 스승까지 깔보면서 란테르트를 높이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미셸튼의 말에 오이니아와 켈파, 그리고 피아텔, 이 세 사람은 동시에 미셸튼을 바라보았다. 그뿐 아니라, 테리트론과 로인, 시나 이 세 사람도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로인과 시나의 경우에는 어제의 싸움을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피아텔은 미셸튼이 자신들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혀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로써는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가장 정확했다. "그런 농담은 썩 유쾌치 않습니다." 피아텔의 대꾸에 미셸튼은 눈썹을 살짝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되찾았다. 바로 전날만 하더라도, 자신 역시 피아텔과 마찬가지로 란테르트를 눈 아래로 보지 않았던가.... 그때 켈파가 란테르트를 향해 언제나의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 검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조금이라도 배워 두어야...." 그의 말에 란테르트가 웃으며 대꾸했다. "저도 다른 사람의 스승 같은 것이 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앞으로 시간이 나는 데로 기초검술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란테르트의 말에 켈파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고, 오이니아도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비록, 란테르트의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요구하는, 이미 한 계약에 따른 부탁이기에 감사를 표할 필요는 전혀 없었지만, 그들은 감사를 표했다. 이제 막 오후 경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오늘 오후에는 켈파가 속한 2조의 2차전 경기가 치러질 예정이었다. 예정보다 반나절 정도 늦어졌으나, 그것이 주는 의미는 아무것도 없다. 란테르트는 벌써 켈파에게 이런 저런 점을 지적해 주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가 싸우는 모습은 몇 차례 보았기에 어떠한 단점을 가지고 있다,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당신의 모든 문제는, 검을 익힌 시간이 너무 짧다는데 있습니다. 이 점은, 하루 이틀에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다만, 원래 하던 일 덕분에 힘을 쓰는 법 정도는 확실히 터득하고 있어 어느 정도 검술을 익히는데 유리할 것입니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고, 켈파, 그리고 로인, 미셸튼, 이 세 사람은 란테르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당신의 직업이 직업인만큼, 타점에 힘을 집중하는 법은 충분히 알고 있지요. 그리고 검날의 면과 힘을 일치시키는 것 역시 그다지 힘들지 않게 익힐 수 있을 것입니다." 란테르트의 말에 켈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지금가지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사실, 도끼로 나무를 쪼개는 것이나 검으로 후려치는 것이나,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힘을 쓰는 법이나 휘두르는 격식 등은 완전히 다르지만, 적어도 휘두르는 방향과 날을 일치시켜 적절한 힘을 사용한다, 라는 점에서는 어차피 마찬가지이다. 켈파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미셸튼은 계속 그 이야기를 듣다가 로인에게 조용히 물었다. "켈파라는 사람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그의 물음에 로인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나무꾼입니다." 미셸튼은 약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곧 고개를 한차례 가로 저으며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란테르트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그 감각을 그대로 검으로 옮겨오기만 하면, 기초는 이미 끝났다고 보아도 됩니다." 켈파는 란테르트의 이야기를 들은 후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어렴풋이 무언가 잡히는 것이 있었다. 사실 그는 지금까지 검은 검대로, 도끼는 도끼대로 써왔다. 검술은 강습소에서, 그리고 도끼는 숲에서 사용할 뿐 이 두 가지를 연관짓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켈파가 조심히 물었다. "그런데.... 검과 도끼는 무게의 균형이 완전히 다릅니다...."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 때문에 연습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제가 감각을 옮겨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것이 그 이야기입니다." 켈파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돌연, 당장 검을 휘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연습을 하면 무언가 달라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장소는 결코 아니었고, 켈파는 머릿속으로만 부지런히 그 느낌을 떠올려 보았다. 기회는 오래지 않아 찾아왔다. 켈파가 출전한 차례가 온 것이다. 켈파는 한차례 심호흡을 한 후 검집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한차례 연습 삼아 휘둘러보았다. 도끼를 휘두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휘두르자 검이 너무 가볍게 느껴졌고, 다시 서너 차례쯤 휘둘러 그 어색한 느낌을 줄여갔다. 그 모습에 곁에서 란테르트가 한마디했다.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급한 마음은 가지지 마십시오." 란테르트의 말에 켈파는 부끄러움에 귀밑이 빨개졌고, 서둘러 대 위로 올라갔다. 그가 올라가자, 오이니아와 피아텔, 그리고 테리트론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시나와 로인도 따라 대련장 근처로 다가갔다. 그들이 모두 떠나고 나자 미셸튼이 향해 탄복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도끼를 쓰는 법을 검으로 응용하도록 하다니.... 보통 사람들은 그 둘의 공통점을 찾지 못할텐데...." 미셸튼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전 대륙에서 가장 검을 잘 쓰는 사람에게 배웠습니다." 미셸튼은 란테르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케이시스.... 레카르도...."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그렇군요.... 스승님도 그분을 언제나 칭찬하시곤 하십니다." 미셸튼은 란테르트의 대답에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레카르도 가의 검술은.... 사람의 재능에 너무 의존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륙 제일의 검술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다시 말을 이었다. 에디엘레 가의 대제자 앞에서 다른 가문의 검술을 칭찬한다는 것이 약간 지나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작 미셸튼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지만.... "하지만, 그 단점.... 재능에 의존한다는 점이 문제이지요. 검술을 오랫동안 익혀, 나름대로 한가지를 깨달은 사람이나, 원래 그런 쪽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기 전에는, 레카르도 가의 검술은 평생 공부해 보았자 평범을 넘기 힘듭니다." 그의 말에 미셸튼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란테르트는 설명을 계속했다. "그곳의 검술은 기초와 초 상급단계, 이 두 가지만이 존재합니다. 검을 손에 익게 하는 기초단계.... 보통의 사람들이라도 한 5, 6년만 꾸준히 연습한다면 이를 수 있는 이 단계에 이르는 순간부터, 그들은 깨달음만을 쫓습니다. 단 하나의 검식도 없는 검술이 레카르도 가의 검술입니다. 물론, 다른 유명한 기본적인 검식은 기초단계에 모두 배우지만...." 미셸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는 들어보았습니다. 아.... 그렇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군요." 란테르트는 그의 말에 미소를 지어 그렇다는 뜻을 표시했고, 미셸튼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편 켈파의 싸움은 막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상대는 흡사 켈파를 조롱이라도 하려는 듯 거대한 도끼를 들고 나온 전사였는데, 그다지 정련된 솜씨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아마도 1차전 상대가 굉장히 약했던 모양이다. 하다못해 로인 정도만 됐어도, 결코 2차전 까지 올라올 수 없었을 텐데.... 켈파에게는 그렇게 까지 쉬운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런 데로 이길 수는 있을 듯 싶었다. 세 친구들과 로인, 시나 이 다섯 명은 숨을 죽여가며 켈파의 움직임과 상대의 움직임을 살폈는데, 아슬아슬한 것이 누가 이길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이전의 켈파였다면 오히려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상대의 도끼가 위력적이기는 했지만, 켈파의 몸놀림은 그 이상으로 재빨랐다. 워낙 키가 작고 몸매도 왜소한 편인데다가 숲속을 자주 돌아다니며 사냥을 꽤 즐겼던 편이기 때문에 민첩성은 아주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 켈파는 조금 전 란테르트에게 들은 그 감각이라는 것을 찾기 위해 조금은 무리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 덕에 그의 검술은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눈에 띄게 좋아져 가고 있었다. 사실, 그가 연습을 적게 했다고는 하지만, 이미 기초는 완성했을 정도의 양을 연습해 왔다. 다만 검을 익히는 데 열의가 없어 다른 사람들 보다 진도가 무척 더뎠을 뿐이다. 운동신경은 상당했고, 연습한 햇수도 결코 적지만은 않아 란테르트가 이야기 한 것을 금새 깨달을 수 있었고, 그것을 점점 실제 검을 사용하는 곳에 적용해 나가자 눈에 띌 정도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오래지 않아 창하는 소리가 들렸고, 승부가 결정 지워졌다. 켈파의 검은 상대의 도끼 자루를 잘랐고, 쾅,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전투용 도끼의 머리 부분이 땅에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켈파의 승리인 것이다. 다섯 남녀는 그 모습에 환호성을 지르며 자신들의 친구의 승리를 축하해 주었고, 켈파는 멋쩍은 듯 머리를 끌쩍이며 상대와 인사를 나눈 후 대련 장에서 내려왔다. 친구들의 축하를 건성으로 넘기며 켈파는 서둘러 란테르트에게 돌아왔다. 묻고 싶은 것이 태산 같았다. 지금 묻지 않았다가는 완전히 잊어먹을 것 같았기에, 그는 서둘러 란테르트에게 다가와 이런 저런 것들을 묻기 시작했고, 란테르트는 그가 그렇게 열성적으로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흥이나 꽤 많은 것들을 설명해 주었다. 모라이티나와 이시테, 이 두 사람은 각각 다른 곳에서 그러한 란테르트의 모습을 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같은 표정을 내보였다. 란테르트의 얼굴에서 화색이 돌자, 그녀들 역시 표정이 밝았다. 이 점을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켈리였다. 켈리는 지금까지 모라이티나를 조금 신경 써 주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아가씨와 라이벌(?)인 여자가 아닌가? 켈리는 요즘 굉장히 많이 놀라고 있었다. 지금의 이시테는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언제나 약간 힘없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조금은 무료하고 감정의 기복도 그다지 많지 않은 그런 시간을 보내던 그녀가, 웃기도, 울기도 잘한다. 요 3년간 켈리는 이시테가 우는 모습을 단 한차례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에 몇 번이나 눈물을 흘린 것이다. 사실 이시테 본인도, 그리고 다른 주위사람들도 이러한 점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언제나 그녀 곁에 있던 켈리는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더 이상 생각해 볼 것도 없다. 바로 란테르트 때문이다. 란테르트란 존재는 이시테의 생활 그 자체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정도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알게된 켈리로써는, 어떻게든지 이시테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라이티나와의 어떤 갈등은 피할 수 없게 된다. 그 때문에 켈리는 언제나 모라이티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켈리는 이시테와 똑같이 변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한편으로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미모에 있어서나, 현재의 친밀도에 있어서나, 모든 면에 있어서 모라이티나는 이시테보다 우위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이시테는.... 벙어리라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지 않은가?.... 켈리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이 헝클어져 고개를 살짝 좌우로 흔들었고, 바로 곁에 있던 이시테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손가락을 움직여 무슨 문제 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켈리는 살짝 웃으며 맑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요. 별일 아니에요." 한편 모라이티나는 그런 켈리와 이시테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모라이티나는 켈리나 이시테와는 달리 라이벌 의식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란테르트가 그녀에게 마음이 기울어질 이유가 전혀 없는데 무슨 걱정이 되겠는가?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를 잘 알고 있다. 물론, 그와 함께 보낸 기간은 채 1년이 못되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를 알 수 있었다. 모라이티나는 곧바로그 두 아가씨로부터 시선을 떼어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바로 곁에 앉아 있는 이 백발의 남자는 지금 가르친다는 것에 꽤 흥미를 느끼고 있는 듯 보였다. 모라이티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기원했다. 이런 그의 즐거움이 언제까지나 계속 되게 해 달라고.... 8. 풋내기들의 싸움. 11월 25일. 드디어 본선 경기의 시작이다. 19, 20, 21일 3일간에 걸친 예선경기와, 22,23, 양일간에 걸친 예선 2차전 및 패자전 등을 치르고, 24일 하루동안의 휴식기간을 둔 후, 그 다음날인 25일이 바로 본선 첫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피아텔은 예선 2차전에서 에디엘레 가의 제자 한 명을 누르고 가볍게 본선에 진출했다. 다행히 로인은 패자전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테리트론은 패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사람의 승과 패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한마디로 패자전의 로인의 상대가 테리트론이었고, 테리트론의 상대가 로인이었다는 말이다. 테리트론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고, 로인은 약간 미안해하는 모습이었으나, 그 경기는 한쪽은 이겼고, 다른 한쪽은 패했다, 이상의 의미를 이 두 사람에게 주지 못하고 있었다. 워낙 테리트론이 승패에 초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테리트론은 맥없이 져버린 것에 약간 후회를 하고 있었다. "바보. 그렇게 멍청하게 져버리냐?" 라는 시나의 핀잔을 들은 후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렇게 해서, 일행의 참가자 다섯 명중 본선에 오른 사람은 테리트론을 제외한 네 사람이었다. 사실 이 다섯 사람의 실력은 형편없다고 할 만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란테르트나 디미온 같은 초 1류급, 혹은 미셸튼 같은 1류급에 비교해서 였다. 보통의 무사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중간에 가까운 위치에는 있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피아텔이나 로인의 경우에는 상당하다고 까지 이야기 할 수 있는 위인들이었다. 예선전은 그저 조별로 무작위 추첨에 의한 경기를 벌였었기에, 사람들은 다음 차례가 자신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었다. 하지만, 본선은 대전표가 일찍이 발표되었다. 본선 참가자는 예선에서 올라온 60명의 사람과 전년도 이 경기 4강안에 들었던 4사람으로 모두 64명이었다. 예선을 거쳤으니 만큼 모두다 나름대로의 실력은 갖추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본선경기는 토너먼트 전으로 1조와 2조에서 각각 한 명씩을 뽑아 결승전에 내 보내는 방식이었다. 작년에 피아텔이 들었다던 8강에 오르기 위해서는 3번 승리를 거두어야 했다. 로인은 대전표가 나오자 마자 미셸튼의 이름을 찾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셸튼은 자신과 다른 조에 속해 있었다. 그때, 곁에 있던 피아텔이 로인에게 말했다. "1차전에서 승리하면 2차전에서 나와 싸우겠구나." 피아텔의 말에로인은 고개를 들어 편성표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1차전에서 둘 모두 승리하면 2차전에서 맞붙게 조가 편성되었다. 시나와 켈파는 미셸튼이 속한 조로 이들 둘과는 다른 곳이었다. "그렇구나...." 로인은 이렇게 말하며 말끝을 흐렸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로인의 머리 속은 저 이시테 곁에 서 있는 청록색 머리칼의 검사로 가득했다. 비록 예선 2차전에서는 패배의 잔을 마셨지만.... 왠지 다시 한 번 겨루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이기리라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지만.... 본선 경기이니 만큼 관객의 양도 상당히 많아졌다. 개막식 때 이상으로 붐비는 듯 했다. 24일 하루 경기가 없는 사이, 대련 장은 여러 모로 손이 봐져 있었다. 일단 바닥에 깔았던 석판이 모두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고, 예선전과는 달리 석판들이 가로 세로 각각 10휴리하씩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놓여졌다. 1조 2조의 경기는 동시에 치러졌는데, 두 개의 대련장 중 하나에서는 1조의 경기가, 그리고 다른 하나에서는 2조의 경기가 치러지는 것이다. 선수 대기석은 이전과 다름없이 꾸며졌다. 어차피 예전에 각 조 50명이 대기하고 있을 때 보다 더 많은 수인 64명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더 이상 손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본선 경기마다 대강의 시간과 날짜가 적혀 있으니, 여관에서 휴식을 취하다 자신의 경기에 맞춰 경기장에 나타나기만 하면 되었지만, 모두들 상대의 실력을 정탐해 보기 위해 대기 석에 나와 있었다. 이윽고 개막 경기가 시작되었다. 본선 개막식 경기의 참가자는 두 사람 모두 에디엘레 가의 제자였다. 두 사람은 똑같이 생긴 검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날이 약간 얇은 장검이었다. 바로 에디엘레 가의 검술에 가장 알맞게 생긴 모양으로 특별 제작한 것으로, 에디엘레형 검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검뿐만 아니라 복식도 비슷했다. 흰색의 코트 비슷한 장옷을 겉에 걸치고 있었고, 그 장옷의 가슴에는 검정색의 꽃이 하나 수놓아져 있었다. 바로 그 꽃이 하프화花였다. 에디엘레 가의 상징이며, 지금은 정치세력이 되어버린 전대의 종교 에아교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 두 사람을 보며 미셸튼이 일행, 정확히는 란테르트와 이시테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오른쪽은 게일로, 저보다 1살 어린 사제입니다. 실력은 상당한 편으로, 여기 계시는 로인 님보다 조금 떨어지는 정도지요. 그리고 왼쪽은 데미로드로 나이는 비록 저보다 다섯 살이나 많지만 검술을 배운 지는 그다지 오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설명에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미셸튼의 말에 따르면 게일이 이길 것이 불을 보듯했고, 모두는 그 미셸튼의 예상이 적중할 지에 약간 신경을 쓰며 대련을 구경했다. 란테르트 역시 조용히 경기를 관람하다가 문득 시야에 들어오는 담갈색 머리칼의 소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이니아는 던젼에서와는 달리 대련을 구경하는 것을 즐겼다. 역시 할아버지가 용병 출신 이어서인지, 죽인다는 행위에는 거부감이 있어도 싸움 그 자체는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란테르트는 곁에 있는 피아텔과 켈파 등과 즐겁게 떠들며 경기를 관전하고 있는 그 아가씨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기었다. 안정된 생활을 할 때까지.... 그녀의 뒤를 돌보아 주어야 한다.... 지금의 오이니아를 보면, 아직도 복수를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의 눈은, 란테르트가 보기에 복수를 하고 싶어하는 눈은 아니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복수에 미쳐있는 자의 눈은 탁하기 이를 때 없고.... 시야 또한 극도로 좁아진다. 하지만 오이니아에게서는 그런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하긴.... 처음부터 그녀의 그런 이야기들은 투정에 불과했다. 그저 단지.... 할아버지를 잃은 슬픔에서 오는 극도의 심리적 흔들림 덕분에 부렸던 투정.... 게다가 란테르트는 그녀의 복수를 완전히 포기하게 할 방법도 이미 찾아냈다. 전에 디미온의 말로는.... 밀튼과 로멜 그 두 소년, 아니 청년이 아직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두 룬의 기사, 당금 대륙 제일의 명성을 지니고 있는 그 둘이 말이다. 이 어린 남녀들도 그들을 존경하는 듯 보이니.... 자신이 그들의 입을 통해 복수를 포기하도록 설득한다면.... 그리고, 자신이 이미 그 복수의 대상을 제거했다는 것을 납득시킨다면.... 그녀는, 그리고 그들은 아마 조용히 그 말에 따를 것이다. 란테르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남과 관계를 맺기 싫어하던 자신이.... 소녀를 위해 부탁이라는 행위를 하다니.... 그녀와 닮았기 때문인가?.... 란테르트는 잠시 이런 생각을 하다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리고는 하던 생각을 계속 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이다. 복수를 포기한 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안정된 가정.... 그것을 이룰 때까지 그녀를 돌보아 주어야 한다.... 안정된 가정을 이룰 때까지.... 란테르트는 이런 생각을 하며 그녀 주위의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테리트론은.... 아무리 보아도 오이니아에게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켈파와 피아텔, 이 두 사람으로 좁혀 지는데.... 란테르트는 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고민을 해야만 했다. 피아텔은 약간 경망한 구석이 있고, 세상물정을 잘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오이니아에게는 극진한데다, 귀족이다. 란테르트 자신처럼 약간 이상한 사람이라면 배우자를 고르는데 귀족이니 뭐니 따위는 전혀 생각도 않겠으나,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이야기가 다르다. 신분 상승의 기회가 아닌가? 켈파. 사람이 성실하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왠지 약간 자신감이 부족하고.... 집안도 가난하다. 오이니아에게 신실하다는 점에서는 피아텔과 같았으나, 그 신실함을 표시하는 방법에는 굉장히 서툴다. 게다가 오이니아에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그다지 많지 않을 듯 하다. 란테르트는 조용히 이 두 사람을 저울질 해 보았다. 인간적으로는 켈파에게 호감이 갔으나.... 남편 감으로 더 뛰어난 쪽은 딱 집어 이야기하기 힘든 듯 했다. 이렇게 되자 결론은 하나로 지어졌다. 또 다른 남자가 오이니아 앞에 나타나지 않는 한.... 그녀의 마음이 기우는 쪽으로 선택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란테르트가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어느덧 본선 1차전 경기도 몇 경기가 끝났다. "삼촌, 이제 다음에 제 차례예요." 로인은 이렇게 말하며 검을 뽑아든 채 경기장 위로 오르려 했고, 란테르트는 그 모습에 서둘러 미소를 지으며 격려의 말을 해 주었다. "큰 부담은 가지지 말고, 원래 가지고 있던 실력을 십분 발휘하거라." 란테르트의 말에 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미셸튼이 곁에서 말했다. "게일, 그만 이길 수 있다면, 결승전에서 저와 만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다시 한 번 겨루어 보고 싶으니, 꼭 올라오십시오." 로인은 그의 말에 두 어깨가 가벼워짐을 느꼈다. 그 역시 자신과 다시 한 번 겨루어 보고 싶었다니.... 왠지 약간 놀라웠으며, 또한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로인은 고개를 한차례 끄덕인 후 경기장 위로 올라갔다. 상대는 평범한 장검을 쓰는 20대 초반의 남자였다. 옷차림도 수수했고, 갑옷 역시 약간 낡은 것이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실력은 아니었다. 로인은 검을 부딪히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듦을 느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던 상대의 장검이 자신의 것과 부딪히자 마자 로인은 손이 저려옮을 느꼈고, 곧바로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을 완전히 버렸다. 상대는 만면에 미소를 띄고 있었다. 여유에서 오는 웃음인지, 아니면 원래 웃는 것을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본선 경기에서는 혼란을 막기 위해, 경기 참가자 외에는 경기장 근처로 다가서는 것이 금지되었고, 그 때문에, 일행은 대기 석에 자리 잡은 채 로인의 싸움을 지켜보아야 했다. 피아텔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상대에게 밀리고 있는 로인을 보며 "도대체 왜 저런 녀석에게 밀리고 있는 거야?...." 라고 중얼거리고 있었고, 시나 등의 다른 사람들은 그저 로인이 이기기를 바라며 싸움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반면 란테르트는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건 모라이티나도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미셸튼은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는데....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하며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라는 것은.... "상대가 꽤 훌륭하군...." 이 란테르트의 중얼거림으로 요약될 만 했다.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가 대꾸했다. "로인에게는 아주 적절한 상대예요. 미셸튼 님처럼 지나치게 강한 상대에게 배울 것은 많지 않지만, 저렇게 자신과 비슷한 상대에게서는 배울 것이 무궁 무진 할 테니까요." 란테르트는 곧바로 켈파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검술을 가르쳐 주기로 한 이상,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저 두 사람을 잘 보십시오. 배울 것이 많은 경기를 하고 있습니다." 란테르트가 이렇게 말하자 켈파는 고개를 끄덕이며 로인과 그 이름모를 남자의 싸움을 더더욱 세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둘 모두 용병검술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로인은 그저 용병검술을 배웠을 뿐이지만, 저 남자는 스스로 어느 정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경험의 차이이지요. 비록 누군가에게 체계적으로 배우지는 못했지만, 저 남자의 경험은 나이에 비해 굉장히 풍부한 편입니다. 적어도 1년 이상을 정규 용병 단에서 보낸 듯 보이는군요." 켈파는 란테르트의 말을 들으며 약간 의아함을 느꼈다. 자신이 보기에는 로인이나 상대나 별 차이를 못 느끼겠건만.... 어떻게 저렇게 싸우는 것만을 보고 상대의 검술이 어떠하니, 상대가 어떠하니를 알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켈파는 곧바로 상념을 털어 버리고 다시 경기를 살피는데 집중했다. 오래지 않아 슬슬 승패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상대는 경험이 풍부했으나, 정식으로 배우지 못해,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스스로 터득한 검술에는 허점이 많기 마련이고, 로인은 집요하게 그런 곳들을 파고 들어갔다. 다시 10여분간을 싸운 후, 탕 소리가 나며 상대가 검을 놓쳤다. 로인은 간신히 이겼다, 라는 마음에 한숨을 한차례 내 쉬었고, 상대는 그때까지도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로인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정말 대단합니다." 로인이 곧바로 그의 말에 대꾸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굉장한 실력 이시군요." 각각 이렇게 겸양의 말을 한 후, 악수를 나누었고, 단 아래로 내려왔다. 상당히 깔끔한 승부였다. 예선전에서 종종 어떤 사람들은 졌다는 사실에 승복치 않고 난리를 치기도 했었다.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이 보인 실력과, 깔끔한 뒷모습에 요란한 환호성을 보냈다. 게다가 로인은 지금 성안에서 상당히 유명해져 있었다. 미셸튼을 맞아 10분이나 싸운 젊은 검사로 말이다. 그렇게 돌아온 로인을 향해 모두들 칭찬의 말을 한마디씩 한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곧바로 시나의 차례가 돌아왔다. 모라이티나는 시나의 어깨를 한차례 잡아 주었다. 약간 긴장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시나는 모라이티나의 격려에 약간 힘을 얻은 듯 얼굴에 생기를 되찾았다. 그때, 테리트론이 입을 열었다. "지고 돌아오면 평생 놀려 드리지요. 후후후." 시나는 테리트론이 로인에게 진 이후로 지금까지 자신이 그를 어떻게 대했나를 한차례 생각해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그러면서 반드시 이겨야 겠다는 생각을 하는 그녀였다. 이윽고 시나는 그녀가 속한 2조의 경기장으로 향했고, 일행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녀에게로 이어졌다. 단 한사람, 이시테를 제외하 고.... 이시테는 경기가 시작된 이래로 줄곧 란테르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종 란테르트의 표정에 놀라움이 스치거나 할 때에는 그의 시선을 쫓아 경기장 쪽을 바라보기도 했으나, 거의 대부분 시선은 란테르트에게 향해 있었다. 가끔 란테르트는 이시테를 바라보았다. 별 의미 없이 시선을 옮기다 그를 바라보는 이시테의 시선을 발견하고는 한차례 미소를 지어 주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시테는 짐짓 시선을 피했고, 란테르트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 그리고, 이시테는 그의 시선이 떠나는 것을 아쉬운 듯 쫓는다. 곁에서 켈리는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다가올 때면 피하고, 물러설 때면 쫓는 그 모습에 켈리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재미있는 장면을 연관지어 냈다. 몇 해 전, 처음 바닷가에 가 보았을 때의 자신을 말이다. 파도가 밀려올 때면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고.... 그런 파도가 해변 가를 스쳐 물러설 때면 아쉬운 듯 쫓아간다. 켈리는 이 두 장면이 왜 하나로 이어지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아리송해졌지만 재미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런 이시테의 모습을 줄곧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미셸튼으로, 그는 시선의 절반은 경기에,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이시테에게 쏟고 있었다. 하지만 이시테는 란테르트를 바라보고 있었고, 미셸튼은 그 모습에 입맛이 약간 씁쓰레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상대가 란테르트임에야.... 시나의 본선 첫 상대는 마법사로, 20대 중반의 날카로운 외모의 남자였다. 란테르트는 상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마자 시나가 패배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법의 경우에는 검술보다 더더욱 확실히 고저 차가 드러난다. 두 사람이 맞붙기 이전 이미 그 결과를 점칠 수 있는 것이다. 상대는 비록 나이는 시나와 비슷했으나, 적어도 술법사 급은 되는 듯 보였다. 매직유저와 아크 메이지와의 실력 차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술법사는 정령계까지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다. 모라이티나는 상대가 이렇고 보니 시나의 부상이 약간 걱정되었다. 물론, 자신이나 란테르트 모두 죽지 않는 한은 상처를 왠쾌시킬 수 있는 마법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정신적 충격만은 어쩔 수 없으니 말이다. 한편 시나는 상대가 마법사이자 약간 긴장했다. 그러고 보니 마법사와 싸우는 것은 마법을 익힌 이래로 처음인 듯 했다. 이윽고 개전의 흰 기가 펄럭였고, 시나는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검사도 마찬가지겠지만, 마법사는 특히 정신을 잘 다스려야 한다. 하지만, 채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상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것도 정념계로 말이다. 정념계 마법이 날아오는 이상, 자신이 할 줄 아는 정신계 실드는 소용없다. 한 단계 위의 공격마법이 아무리 약하다 하더라도, 한 단계 아래의 방어 마법은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시나는 서둘러 몸을 왼쪽으로 뛰어 피했다. 붉은 색의 커다란 화염 덩어리는 화끈한 바람만을 시나의 몸에 휘감은 채 멀리 경기장 바닥에 처박혀 버렸고, 팍 소리와 함께 바닥에 깔려있던 석판의 한귀퉁이가 날아갔다. 법사들끼리의 경기가 있을 때에는 그 제어가 상당히 힘들다. 운이 나빠 마법이 경기장 밖으로 날아가기라도 하면 관람석 등지에 피해가 예상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법사들이 경기할 때는 특별히 실력 좋은 마법서 4명이 경기장의 네 귀퉁이에 대기를 하고 있다. 그 밖에 경기장 관람석 곳곳에도 마법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지금 시나의 상대가 쓴 화염 마법 역시 경기장 구석의 바닥을 때리며 일부가 퉁겨 경기장 밖으로 나가려 했으나, 근처에 있던 마법사가 곧바로 실드 마법을 일대에 쳐 막아버렸다. 경기장을 지키는 사람들은 모두 방어마법을 정령계까지 익힌 프리시아계 술법사들이었다. 시나는 몸을 피하면서 한편으로 정신을 집중해 간신히 마법을 하나 완성시켰다. 뭐 어차피 할 줄 아는 것이야 정신계 마법밖에 없었기에 위력을 그다지 대단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상대방에게 직격시킬 경우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손끝에서 불꽃의 형상이 이루어 졌고, 곧바로 긴 꼬리를 그리며 한 덩이의 화염이 상대를 향해 날아갔다. 시나는 그 순간 전에 모라이티나가 가르쳐준 연사를 떠올리며 마법의 제어를 풀었다. 화염 구는 겉으로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었으나, 이제는 그저 똑바로 날아가는 불꽃의 덩어리일 뿐이었다. 시나는 곧바로 다시 마법을 이루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사 같은 기본적인 기술을 상대가 모를 리 없었다. 시나의 상대는 시나가 채 두 번째 마법을 날리기도 전에 두 번째 마법을 쏘아왔다. 파르스름한 덩어리가 방전을 일으키며 곧바로 쏘아져 오는 모습이 아무래도 전격계 같았고, 시나는 그녀의 마법을 채 일으키기도 전에 또다시 황급히 몸을 피해야만 했다. 옆으로 피하기는 이미 늦었기에, 그녀는 볼썽사납게 바닥에 납짝 엎드렸다. 속으로 수치감이 읾을 느꼈으나, 그렇다고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내 놓을 수는 없다. 상대의 마법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바닥에 엎드려 있는 시나의 등위로 수계 마법을 일으켰다. 아마 기절시킬 생각인 듯 했다. 시나는 마법력이 등뒤에서 읾을 느끼며 곁으로 몸을 굴려 피했고, 물의 기둥은 시나가 피해버린 그 바닥에 퍽 하는 소리를 내며 처박혔다. 석판 세 장에 가느다란 금이 갔다. 시나는 몸을 털고 일어나며 그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물의 기둥이 바닥에 부딪혀 흩어지며 시나의 몸을 절반이나 적셨으나, 시나는 그것에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저런걸 제대로 맞았다가는 어디 한군데 부러져도 단단히 부러질 것 같았다. 한편 란테르트 등의 일행은 밖에서 그 모습을 보며 걱정을 하고 있었다. 상대가 저렇게 강한 마법사이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모라이티나나 란테르트가 보기에 그런 마법은 장난이었다. 방금의 그 수계 마법을 란테르트가 사용했다면, 겨우 바닥에 금이 가는 정도가 아닌, 일대의 석판을 가루로 만들 수 있을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벌 것 아닌(?) 마법사라도 시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고.... 슬슬 시나의 부상이 염려되기 시작했다. 그때, 미셸튼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확실히 전년도 우승자답군...." 그의 말에 테리트론이 물었다. "저 마법사가 전년도 이 경기의 우승자입니까?" 미셸튼은 테리트론이 갑작스럽게 그렇게 물어오자 조금 당황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단 한마디의 말도 걸어오지 않았던 그가, 자신이 중얼거린 말에 대해 불쑥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제디알 디도로.... 에디엘레 영지 안에 있는 디도 가의 소영주입니다. 저와는 몇 차례 면식이 있을 뿐, 실제로 맞붙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의 대답에 테리트론은 약간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었고, 미셸튼이 그 모습에 물었다. "걱정되십니까? 그녀가? 하지만, 그다지 걱정하실 필요 없을 것입니다. 마법사들의 대결은 검사들의 대결 때보다는 부상이 일어날 확률이 적으니까요. 지금처럼 실력 차가 크게 날 경우는 특히...." 미셸튼의 말에 테리트론이 우물우물 중얼거렸다. "뭐.... 걱정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모라이티나 님이 치료를 해 주실 테니...." 테리트론의 말에 미셸튼은 그와 시나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하긴.... 끊임없이 말다툼을 하는 것을 보니 걱정해 주고 할 사이는 아닌 듯 했다. 미셸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이런 여유 작작(?)한 대화가 오가는 동안에도 시나는 진땀을 빼고 있었다. 처음에는 상대가 자신보다 조금 강해 보였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희롱을 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패를 인정하고 걸어 나가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이대로 버티자니 더더욱 우스운 꼴이 될 것 같았다. 막 이런 생각을 하는 도중.... 돌연 눈앞에 엄청난 힘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눈을 들어 앞을 보았고, 그때 시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수십갈레의 불꽃의 화살이었다. 거의 어른의 팔뚝만한 불꽃 수십갈레가 각각의 궤적을 그리며 자신에게 날아오는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으나,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저건 분명.... 정령계 화염마법인 블레이즈 크리스탈이다. 제대로 맞았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할 수도 없었다. 블레이즈 크리스탈은 그 수많은 불꽃의 갈래로 시나의 몸을 사방에서 조여오고 있었고, 그 때문에 어디로 몸을 빼쳐 달아날 수도 없었다. 시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두 눈을 감으며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마법은 그녀의 몸에 닿지 않았다. 시나가 조용히 눈을 떠 앞을 살피자 조금 전까지 자신의 몸을 꿰뚫을 듯 날아오던 마법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심판의 붉은 기가 하늘에 흔들렸다. 승패가 결정되었음을 알리는 깃발이었다. "제디알 승리!" 심판은 이렇게 외쳤고, 제디알이라는 사람은 시나를 향해 한차례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단을 내려갔다. 시나는 그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자 엉겁결에 같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은 후, 멍청히 몸을 돌려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져버렸어...." 시나는 돌아오자 마자 고개를 푹 숙이며 이렇게 중얼거렸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모라이티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신경 쓰지 마. 상대가 강했을 뿐이야." 모라이티나의 말에 시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테리트론을 바라보았다. 휴.... 한숨이 나온다. 이제 저 녀석에게 놀림을 당할 일을 생각하니.... 시나는 테리트론을 바라보며, 저 녀석이 뭐라고 놀리려나?....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테리트론은 시나가 자신을 바라보자 시선을 옆으로 피해 버렸다. 시나는 그 모습이 의아스럽게 생각되었으나, 물어볼 기분이 아니었기에 그냥 자신의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오전에 이어 오후에도 계속해 경기가 펼쳐졌다.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각양 각색의 병기를 사용해 각양 각색의 기술로 대련을 펼치는 모습을 정말이지 볼만했다. 왜 무투회가 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좋은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본선 1차전 32개의 경기는 각각 오전과 오후 10개의 경기가 치러지도록 되어 이었다. 대련장이 2개였으므로, 한 경기장에서 5경기씩 치러지는 꼴이었고, 한 경기당 30분 남짓 주워졌다. 40분 이상 시합이 이어지면 심판들의 판정으로 승부를 가리는데,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높이 망루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 이였다. 지금 망루 위에는 디미온과 몇몇 근처 도시의 영주들이 모여 있었다. 원래는 제레미아도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란테르트가 돌아온 후로는 병을 핑계로 거의 모든 행사를 접어두고 있었다. 마음이 약간 복잡한 모양이었다. 막 제 1 경기장과 제 2 경기장에서 첫 번째 시합이 끝났다. 그리고 두 번째 시합에 켈파와 피아텔이 각각 1조와 2조의 경기장으로 향했다. 피아텔의 상대는 검을 사용하는 30세 가량의 남자였다. 피아텔의 키는 조금 큰 편으로 거의 란테르트와 비슷했으나, 그런 피아텔보다도 훨씬 커 언뜻 보기에도 200쎄휴리하(1쎄휴리하=약 1센티미터) 가량 되어 보였다. 다부진 근육에 어깨도 상당히 넓어, 들고있는 중검이 장검처럼 보이는 그 사내는 경기장에 올라오자 마자 검을 몇 차례 휘둘러 힘을 과시했다. 하지만, 란테르트나 미셸튼이 보기에는 완전 멍청이였다.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피아텔은커녕 켈파만도 못한 듯 싶었기 때문이다. 한편 켈파는 에디엘레 가의 제자와 검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다지 특징 있는 몸을 가지지는 않았으나, 자세가 바로 잡혀 있었고 시선이 안정된 것이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인 듯 보였다. 나이는 20세 가량으로 금발을 길게 길러 뒤로 묶고 있었다. 그 모습에 미셸튼이 란테르트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켈파 씨의 상대는 히시아블입니다. 저희 강습소 안에서 저를 제외하고는 최고로 꼽히는 남자입니다. 켈파 씨가 이기기는 힘들 것입니다." 미셸튼의 말에 란테르트는 미세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때 곁에서 듣고 있던 오이니아가 켈파의 편을 들었다. "켈파를 너무 무시하지 말아요." 미셸튼은 오이니아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사과의 말을 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딱히 켈파 씨를 폄하하려거나 한 것은 아니랍니다. 다만 히시아블은 저조차도 쉽게 상대할 수 없는 뛰어난 검사이기에, 그렇게 말씀 드린 것입니다." 이런 대화가 오가는 사이, 어느덧 양 경기장에 동시에 흰색 깃발이 흔들리며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났다. 양쪽 경기장 모두 단지 검을 서너번 휘두를 만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경기가 끝나고 말았다. 창창, 두 차례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고, 두 자루의 검이 각각의 경기장에서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하나의 검은 안타깝게도 켈파의 것이었다. 히시아블과의 실력 차는 미셸튼이 순화시켜 이야기한 그것보다도 훨씬 컸고, 채 세 번도 검을 부딪혀 보기 전에 검을 놓치고 말았다. 한편, 다른 경기장에서 검을 잃은 것은 그 덩치였다. 힘에 있어서는 감히 피아텔이 상대할 수 없는 자였으나, 기술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피아텔이 세 번 검을 휘둘러 그이 발을 어지럽게 한 후, 강한 힘으로 검을 후려치자 단번에 검을 놓쳐 버렸다. 커다란 덩치는 얼굴이 씨뻘게 져 가지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고, 피아텔은 경기장 위에서 그 모습을 잠시 즐기듯 바라보다가 관중을 향해 승리자로써의 예를 표한 후 아래로 내려왔다. 켈파 역시 경기장 아래로 내려왔는데, 피아텔의 여유 있는 모습과는 달리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고, 일행은 그 둘의 모습에 얼굴을 마주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피아텔을 생각해 축하하며 들뜨기에는 켈파에게 미안하고, 그렇다고 켈파의 기분을 맞춰 주기에는 피아텔에게 어색했다. 그러다 보니, 어정쩡한 분위기에서 격려의 말과 칭찬의 말을 동시에 해야 했다. 다행히 켈파는 그다지 패한 것을 오래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곧바로 란테르트에게 다가갔고, 대결에 대한 조언을 청했다. 오이니아는 그런 켈파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곁에서 한마디 격려의 말을 보탰다. "비록 졌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말아. 앞으로 꾸준히 배운다면 언젠가 훌륭한 검사가 될 수 있을 꺼야. 미셸튼 씨가 그러시는데, 너의 상대는 에디엘레 강습소에서 두 번째 가는 사람이었데." 켈파는 그녀의 말에 조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숲속에서 오랜 기간 살아와서인지, 그는 나이에 비해 순진한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켈파는 그 이후로도 몇몇 일행들에게 이런 저런 격려의 말을 들었고, 그럴 때마다 그는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한편 피아텔에게 칭찬의 말을 한 사람은 켈파에게 격려의 말을 한 사람에 비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시나와, 아직도 지난번의 싸움으로 껄끄러운 상태에 있는 테리트론은 입을 다물고 있었고, 미셸튼과 이시테, 켈리 등도 친하지 않음을 핑계대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다만 로인과 란테르트, 모라이티나 등이 의례적인 칭찬의 말을 했고, 켈파와 오이니아가 친구로써 함께 기뻐 해주었을 뿐이었다. 피아텔은 그에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오이니아의 칭찬 하나만으로도 족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는 사이 또 다시 하나의 경기가 끝났고, 막 경기가 끝났다는 붉은 깃발이 공중에 휘날리는 순간 미셸튼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셸튼은 란테르트에게, "제 경기차례가 돌아왔습니다." 라고 말했고, 그 모습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슬쩍 한차례 끄덕였다. 잘해라 등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미셸튼의 실력을 보건대, 아까 그 히시아블 정도나 되어야 잘하고 못하고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셸튼은 모라이티나와 로인 등을 향해 한차례 눈인사를 건넨 후 이시테를 바라보았다. 이시테는 마침 몸을 일으켜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미셸튼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대로 시선이 마주쳐 버렸다. 미셸튼은 조용히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귀하시고 아름다운 분이시여. 당신을 위해 검을 들고 싶습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과 말에 이시테는 조금 당황했다. 종종, 이 시대의 검사나 기사들이 결투를 하기 전에 한 사람의 귀부인의 이름을 내거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자신은 그 귀부인에게 속한 기사이다, 라는 뜻이었다. 이시테는 그러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웠기에 당황했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그가 자신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고는 이시테로서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내밀고 있는 미셸튼을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다. 이대로 청을 거절하기에는.... 미셸튼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었다. 이 많은 사람 앞에서 그를 모욕하는 것이다. 하지만.... 받아들이자니.... 사실, 단지 자신의 기사가 되겠다는 것 자체는 그다지 심각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개인 기사가 되는 것일 뿐이니 말이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다. 이시테가 마음을 열지 않으면 단지 주종의 관계만을 유지할 뿐이다. 그때 켈리가 이시테의 귀에 조그맣게 말했다. "심각하게 생각하실 것 없어요. 그냥 받아들이세요." 이시테는 그녀의 말에 손가락을 움직여 말했다. [하지만....] 켈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제 아가씨는 성인이세요. 귀부인들이 서너 명의 기사를 거느리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는 곧바로 이시테를 대신해 미셸튼에게 대답했다. "아가씨는 청을 받아들이시겠답니다." 이시테는 켈리가 이렇게 말해 버리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끼고 있던 하얀 장갑을 벗으며 오른손을 내밀었고, 미셸튼은 그녀의 희고 섬세한 손등에 입을 맞춘 후 몸을 일으켰다. "감사드립니다." 미셸튼은 곧바로 몸을 돌려 경기장 위로 올라갔다. 발걸음이 조금이지만 가벼워 진 듯 보였다. 한편 이시테는 그의 청을 받아들인 후 잠시동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곧바로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모라이티나와 함께 미소를 지으며 이시테를 바라보고 있었고, 이시테는 자신도 모르게 볼을 붉히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란테르트는 로인, 켈파 등과 함께 미셸튼의 경기로 시선을 향했다. 미셸튼이야말로 정말 제대로 검술을 배운 남자였다. 물론 자신도 처음 4년 동안은 스승에게서 제대로 검을 배웠으나 그 이후로는 완전히 혼자 검술을 익혔다. 순수함은 그다지 지키자 못한 편이었다. 켈파나 로인같이 검술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검술보다는 미셸튼의 검술에서 더더욱 배울 것이 많다. 하지만, 시합은 무엇을 배우기도 전에 끝나 버렸다. 단지 한 번, 강하게 검을 휘두름으로써 상대의 무기를 두 동강 내 버린 것이다. 그 모습에 란테르트는 단지 이것 한가지를 로인과 켈파 두 사람에게 가르쳐 줄 수 있었을 뿐이다. "힘을 타점에 완벽히 집중시킬 수 있다면, 상대의 무기가 자신의 것보다 좋다 하더라도 깨뜨릴 수 있다." 로인과 켈파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것을 이들 같은 초보가 할 수 있을 리는 없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다시 하루가 흘렀다. 11월 26일. 어제에 이어 본선 1차전 경기가 있었으나, 일행 모두 이미 경기를 치렀기에 굳이 경기장에 찾아가지 않았다. 다만, 켈파와 피아텔, 그리고 오이니아 이 세 사람은 상대방의 전력을 미리 탐방해 본다며 경기장으로 찾아갔다. 이시테와 켈리는 에디엘레 본성에서 나오지 않았다. 요즘 들어 너무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냐는 제레미아의 말 때문이었다. 미셸튼은 이런 저런 일을 상의할 것이 있다며 디미온에게 찾아갔고, 이렇게 여관에 남아 있는 사람은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 그리고 로인, 시나, 테리트론의 다섯 사람이었다. 아침을 간단히 먹은 후 한가한 오전시간에, 모라이티나가 란테르트에게 말했다. "우리 데이트나 하러 가요." 란테르트는 이 말에 약간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라이티나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대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더 생각해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15년 전의 모라이티나를 생각해 보니.... 오히려 이건 놀랄 거리도 못된다. 란테르트는 생각이 이곳에 미치자 모라이티나에게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난 10년간이 그녀를 얼마나 바꾸어 놓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코끝이 찡하다.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조용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여관 밖으로 나갔다. 도중 옆방에 있는 시나와 로인, 그리고 테리트론에게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말을 건넸고, 로인과 시나는 환한 표정으로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 두 사람을 바라보며 인사했다. 두 사람은 여관 밖으로 나와 성에서 멀리 떨어진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디엘레성은 에이소숲 중간에 서 있었기에, 여름에는 상당히 아름다웠으나, 낙엽도 모두 져버린 11월말에는 약간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풍겼다. 하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멀리 에아산맥이 희끗이 눈에 뒤덮인 모습도, 그리고 듬성히 자라고 있는 침엽수의 모습도.... 차라리 이러한 것들은 이 계절에만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성에 머무른 지도 꽤 되었네요." 모라이티나가 두 팔을 깍지껴 앞으로 쭉 뻗으며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7, 8일쯤 된 것 같은데...."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돌려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런 것도 생각하면서 사는 모양이네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이지?" 모라이티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왠지 지쳐 보여서요. 그나마 요즘은 켈파와 로인에게 검술 지도를 해 주면서 활력을 찾아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런가?...." 란테르트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는 몇 발자국 떼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그때, 동시에 모라이티나도, "저기...." 라고 말했고, 둘은 하려던 말을 멈추며 잠시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는 다시 동시에, "그...." 와 "저...." 라는 말을 했다. 이런 상황에 란테르트는 후훗, 하는 짧고 낮은 웃음을 터트렸고, 모라이티나는 깊게 미소를 흘렸다. "먼저 말해 보세요." 모라이티나가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숨을 한차례 내 쉬었다. "후.... 한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란테르트의 물음에 모라이티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해 보라는 뜻이었고,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이니아 때문인데...."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명의 남자가 있는데, 한 명은 착하지만 무능력하고, 다른 한 명은 인간성에는 문제가 있지만, 해줄 수 있는 것이 많다, 인가요?"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입을 살짝 벌리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느냐는 표정이었고, 모라이티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 당신은 오이니아와 그 두 남자들 사이를 자주 번갈아 보고 있어요. 그리고는 조용히 생각에 잠기었다가는, 다시 오이니아와 켈파, 오이니아와 피아텔, 이렇게 바라보지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픽 웃어버렸다. "역시 난 단순한 인간인 모양이군...." 모라이티나가 새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티나의 눈썰미가 뛰어난 편이라고 칭찬해 주면 안돼요?"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기꺼이, 라는 표정을 지었다. "맞아. 정말 놀랐는걸. 독심술이라도 익힌 줄 알았어." "엉터리 같은 사람...."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잠시 미소를 짓다가 오히려 란테르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착하지만 가진 것이 없는 사람과, 인간성에는 약간 문제가 있지만 가진 것이 많은 사람. 물론, 그 둘 모두 란테르트를 사랑해 주고 있다면요." 란테르트는 잠시도 생각하지 않고 답했다. "물론, 난 전자가 좋아. 하지만.... 오이니아는.... 어느 쪽이 더 오이니아를 행복하게 해 줄지는...." 란테르트의 말을 끊으며 모라이티나가 말했다. "다르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건 오이니아에게도 마찬가지 에요." "그럴까?...." 란테르트는 이렇게 중얼거리듯 말하다 말 사이에 잠시 간격을 두었다 말했다. "하지만.... 나는 원래 조금.... 이상하잖아.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생각하리라고는 약간 상상하기 힘들어서...." 모라이티나가 웃었다. "호호, 그래도 알기는 하는 모양이네요. 스스로가 이상하다는 것을." 란테르트는 어색히 웃었고, 모라이티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요. 그리고.... 그 일에 그렇게 부담감을 가지지도 말고요. 드라이토 노인의 이야기가 꼭 오이니아를 결혼시키라는 뜻은 아니었어요. 안정된 가정이라는 것이 결혼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결혼할 나이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가 원하는지도 모르잖아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머리를 몇 차례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너무 생각을 한쪽으로 몰아가고 있었던 듯 했다. 아무 말 없이 몇 걸음을 더 걷다, 란테르트가 갑자기 생각나는 듯 모라이티나에게 물었다. "아참, 아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모라이티나는 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란테르트가 재촉했고, 모라이티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진 것이 약간 심각한 이야기인 듯 했다. "당신의 꼬마 아가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죠?" "이시테 말이야?" 란테르트가 되물었고, 모라이티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모라이티나가 천천히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원한다면.... 계속 에디엘레 가에 머무는 것도 좋을 꺼 에요. 우선.... 공작 가문이잖아요. 게다가 이시테는 란테르트를 굉장히 좋아하는 듯 보였고.... 란테르트도 종종 이야기했잖아요. 그런 조용한 삶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고." 모라이티나의 이 말에 란테르트는 걸음을 멈추며 모라이티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모라이티나는 그런 란테르트에게 신경 쓰지 않은 채 계속 앞으로 걸어나갔고, 란테르트는 다시 걸음을 옮겨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짖꿎은 농담이야." 란테르트가 말했고, 모라이티나는 픽 한차례 웃었다. "진담이었어요."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만약, 지금 누군가와 가정을 꾸민다면.... 트레시아나 모라이티나가 적당하겠지...." 이 란테르트의 말에 이번에는 모라이티나가 걸음을 멈추었고, 란테르트는 복수라도 하는 듯 그런 모라이티나를 무시한 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모라이티나가 바삐 걸음을 놀려 란테르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프로포즈 에요?" 모라이티나가 물었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어.... 난 지금.... 그럴 정도로 한가하지 않아." 모라이티나가 웃었다. "할 일도 없는 주제에."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맞아.... 할 일도 없는 주제에.... 하지만, 마음은 복잡해.... 게다가, 난 모라이티나도 트레시아도 잃고 싶지 않은걸?" "욕심꾸러기."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말에 곧바로 이렇게 대꾸했고, 뒤이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뿐이 아니겠지요.... 당신은 사피엘라도, 에라브레도.... 그리고 이카르트도 잃고 싶지 않겠지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그런지도...." "언제나 당신은 과거에 부담을 가지고 계시는 군요." 모라이티나가 다시 말했고, 란테르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지도...." 그의 말에 모라이티나가 쓸쓸히 웃었다. "여전 바보 같네요.... 당신도.... 그리고 나도...." "그런지도...." 란테르트의 중얼거리는 말은 유난히 힘이 없었다. 모라이티나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힘차게 말했다. "아무튼, 그럼 이시테는 어떻게 할 꺼 에요?"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하다니? 무슨 뜻이야?" "몰라서 묻는거에요?" 모라이티나가 오히려 되묻자 란테르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얼 말이야?" 모라이티나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 쉬었다. "이봐요, 란테르트씨. 당신의 그 어린 아가씨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실 거냔 말입니다." "사랑?" 란테르트가 되물었고, 모라이티나는 엄지와 검지를 이마에 댄 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일곱 대륙 제일의 마검사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둔한 남자."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한 후 다시 란테르트에게 말했다. "10년 전 한달 정도 지냈던 10살 짜리 꼬마가 20세가 되어서까지 당신을 잊지 못하고 있었어요. 당신은 이런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단 말이에요?" 란테르트가 되물었다. "모라이티나 말대로, 10년전 단지 며칠을 함께 보냈을 뿐이야. 그런데.... 사랑이라니.... 그때 이시테는 겨우 10살이었어. 그게 가능 한 거야?" 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시테는 약간 성격이 외골수인 것 같았어요. 어느 한가지에 몰입하고 나면 주위를 보지 않는 그런 성격 말이에요." "그런가?...." 란테르트가 이렇게 중얼거렸고, 모라이티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 주는 것이 그녀를 위해서도 좋아요. 잘못하면 또 다시 상처를 입을지도 모르니까....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한 아가씨 같던데.... 그런 사람일수록 대인관계에 민감한 편이에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렇게 하는 편이 좋을 듯 했다. 잠시간 더 걸은 후, 이 두 사람은 앉을 만한 바위가 듬성듬성 있는 한 장소를 발견했고, 나란히 앉았다. 잠시 동안 주위를 둘러보던 두 사람 중 란테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난 모라이티나가 더 걱정인걸." 곧바로 그녀가 물었다. "왜요?" "내가 죽은 후에는 어떻게 할거지?" 란테르트의 돌연스러운 말에 모라이티나는 잠시 움찔 거렸다. "무슨 소리 에요?" "난 인간이야.... 인간은 길어야 100년 남짓을 살뿐이잖아? 난 벌써 38년을 살았고.... 이제 30년 정도 더 산후에는...." "그런 소리는 그만 두어요." 모라이티나가 란테르트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가 입을 열었다. "훨씬 더 근사한 남자를 찾죠 뭐. 아니면, 트레시아처럼 멋진 남자들을 수집한다거나. 나 위대한 엘프 그란 가문의 모라이티나가 겨우 란테르트 정도에 만족할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웃었다. "후훗. 전혀 모라이티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데?" 모라이티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혹시 알아요? 당신은 인간 같지 않으니까.... 영원히 살지.... 봐요, 10년 동안 하나도 늙지 않았잖아요. 우리 엘프들처럼...." "글쎄.... 하지만...."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건 내가 원하지 않는걸.... 영원히 사는 것 따위.... 괴롭기만 할뿐이지...." 모라이티나는 그의 쓸쓸한 표정에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음을 느꼈다. 모라이티나와 란테르트가 데이트(?)를 떠난 후, 여관에는 시나와 로인, 그리고 테리트론, 이 세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테리트론은 몇일전 피아텔과 껄끄러운 일이 있은 이후로, 오히려 시나 등과 어울리게 되었다. 워낙 시나와 테리트론은 훌륭한 말벗(?)이었기에 만나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으나 10년을 함께 한 것처럼 어색함이 없었다. 로인은 어느 곳에나 어울릴 수 있는 존재였다. 말이 없어 언뜻 보기에 존재 감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없으면 오히려 어색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시나는 어제부터 줄곧 한가지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바로 다름 아닌.... "야. 테리트론, 도대체 왜 아무말도 없는 거야?" 시나가 물었고, 테리트론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말이 없어? 난 입이 밥을 먹는 일 따위보다는 말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내가 왜 말이 없어?" 물론, 테리트론은 어제와 오늘에 걸쳐, 평소에 비해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양의 말을 하고 있었다. 시나가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말이 아니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왜 안 놀리는 거야? 어제, 시합에서 지고 돌아오면 평생 놀린다고 했잖아. 그런데...." 테리트론이 물었다. "놀려줄까?" 시나는 멍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뭐라고?" "내가 놀렸으면 좋겠어?" 테리트론의 말에 시나는 자신이 완전히 바보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당연히.... 좋지는 않지만...." "그러면 됐잖아." 돌연 시나가 테리트론의 멱살을 움켜쥐며 외치듯 말했다. "너.... 넌 테리트론이 아니야!" 테리트론은 의자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기습을 당하자 손 한번 못써보고 시나에게 멱살을 잡혀 버렸다. 마법에 있어서는 시나가 조금 위였으나, 테리트론은 날마다 그물질로 다져진 몸이었다. 힘에 있어서 결코 시나에게 멱살을 잡힌다거나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제압을 당해 버렸고.... "켁켁.... 이거 놔. 아줌마 어디 아파?" "너야말로 어디 아픈 거 아냐? 만약 정상적인 너라면.... 어제부터 오늘까지 쉬지 않고 나를 놀렸어야 해. 그런데.... 왜 가만히 있는 거지?" 테리트론은 시나의 팔목을 잡아 약간 목을 느슨하게 하며 중얼거렸다. "제길.... 이건 잘해 줘 놓고 오히려 욕을 먹는군...." 테리트론의 말에 시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옷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잘해 줘?...." 시나가 물었고, 테리트론은 시선을 외면했다. "잘해 준거야? 네가? 나한테?" 시나는 몇 차례 묻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어울리지 않는 짓은 하지 말아라." "쳇...." 테리트론은 코웃음을 쳤고, 시나는 잠시 테리트론을 바라보다가 이내 로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로인은 흡사, 바보는 바보끼리 놀아라.... 라는 표정으로 어제부터인가 읽기 시작한 책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그저께 휴일에 근처에 있는 서점에서 구입한 것으로 약간 가벼운 내용의 책이었다. "로인. 너도 들었니? 테리트론 님께서 이 시나 님에게 배려라는 것을 해 주셨단다." 그녀의 말에 로인이 대꾸했다. "그만 둬. 테리트론이 무안해 하잖아. 다 시나를 생각해 줘서 한 일인데.... 사실, 어제 꽤 의기소침해 했었잖아." 그의 말에 시나가 곧바로 대꾸했다. "바보야. 테리트론이 내게 배려라는 짓을 했다니까. 이상하지 않아?" 그때 테리트론이 갑자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 잠시 나갔다 올게." 이렇게 말하고는, 테리트론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갔고, 시나와 로인은 잠시 멍하니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막 문이 닫힐 무렵, 로인이 시나에게 말했다. "화난 모양이야. 어서 따라가 봐." 시나는 엉겁결에 몸을 일으켰고, 언제나 쓰고 다니던 챙이 넓은 모자를 집어들며 로인의 말대로 테리트론의 뒤를 쫓았다. 지금까지 테리트론은 화를 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 보니.... 시나는 약간 미안한 감도 들었고, 한편으로는 조금 무섭기도 했다. 그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무엇 때문에 생겨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관 입구에서 시나는 테리트론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 서둘러 그와 어깨를 나란히 했고, 잠시동안 조용히 그와 걸음을 맞추었다. 테리트론은 키가 큰 만큼 보폭도 길었고, 시나는 숨이 점점 차 오름을 느꼈다. "테리트론!" 결국 시나는 테리트론을 불렀고, 테리트론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걸음을 딱 멈추었다. "화난 거야?" 시나가 물었고, 테리트론은 잠시 시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한차례 코웃음을 쳤다. "쳇, 그까짓 일로 화를 낼 테리트론 님이 아니시다." "멍청이." 시나는 그런 그의 허풍에 곧바로 이렇게 맞받아 쳤고, 테리트론은 슬쩍 웃으며 말했다. "댁도 만만치 않네요." "내가 뭘?" 시나가 되묻자 테리트론은 시나의 몸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한차례 훑어보았다. "모자와 옷의 완벽한 언밸런스." 테리트론은 간단히 시나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시나의 모자는 챙이 거의 한 뼘이나 되는, 야유회용 모자였다. 이런 모자에 어울리는 옷은 하늘거리는 롱스커트나 바지라도 약간은 활동하기 편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나의 복장은, 짧은치마 속에 몸에 쫙 붙는 바지를 입고 있었고, 웃옷으로는 넓고 풍성한 면옷이었다. 시나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럴 것 갖자 서둘러 모자를 벗어 손에 들었다. 덕분에 어깨를 조금 넘겨 자란 진 보라색 머리칼이 약간 흐트러졌다. 시나는 손을 들어 머리를 정리했고, 테리트론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시나는 잠시 머리를 정리하다 테리트론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차갑게 말했다. "또 무슨 놀릴 말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녀의 말에 테리트론은 쓴웃음을 지었고, 이내 입을 열었다. "머리가 길면 관리하기 귀찮겠지?" 시나는 별 쓰잘떼기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네....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물었다. "왜? 길러보려고? 웬만하면 그러지 말아라. 안 그래도 추한 얼굴 완전히 망쳐질라...." 사실 테리트론은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썩 잘났다고도 이야기하기 힘들었으나, 약간 차가워 보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문제없었다. 시나도 그런 것을 알고 있었으나, 테리트론과 말하던 버릇이 있어 그냥 이렇게 내뱉었다. 시나의 말에 테리트론은 한차례 웃었다. "다행이네. 지난해까지만 해도, 꽤 머리가 길었었는데.... 앞머리가 턱에까지 닿았었지." "다행은 뭐가 다행이야? 아깝다.... 차라리 지금도 머리가 길었으면, 놀려줄 거리가 하나 더 늘었을 텐데...." 시나는 테리트론의 말에 이렇게 대꾸했고, 테리트론은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런데, 왜 그 모자는 언제나 쓰고 다니는 거야? 그다지 어울리지도 않는데.... 원래 그런 모자는 약간 청초하고, 얼굴도 하얀 아가씨가 써야 어울리는 거야. 너처럼 괄괄하고, 사나운 여자는 그런 것보다는, 가죽끈 같은 것으로 머리를 한차례 묶는 것이 더 어울리지." 테리트론의 말에 시나는 한차례 미소를 지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이번에는 시나가 오히려 조용해 졌고, 테리트론은 무언가 실수한 것 같았기에 사과를 했다. "미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모양이군...." 그가 사과를 하자 시나는 또다시 이상한 눈으로 테리트론은 바라보았다. "너.... 정말 테리트론 맞아?" 그녀의 물음에 테리트론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러니까.... 조금 전처럼 멱살을 움켜쥐거나 하는 것은 삼가 해 줘." 테리트론의 말에 시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조용히 앞으로 향했다. "왜 언제나 쓰고 다니냐고?" 잠시동안 말없이 걷던 시나가 이렇게 되물었고, 테리트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나는 그런 그의 시선에 상관치 않은 채 죽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모자.... 엄마.... 아니 어머니의 얼마 안돼는 유품 중 하나야. 평소 어머니는 이 모자를 굉장히 아끼셨는데.... 아버지가 결혼 10주년 기념 선물로 사 주신 것이라나 봐." 시나의 말에 테리트론은 무어라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결국 이렇게 말해버렸다. "이럴 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그런 테리트론의 얼빠진 말에 시나는 쿡 웃음을 터트렸다. "방금 네가 한 말을 빼고 어떤 말도 괜찮다네. 얼빠진 멍청이씨." 시나의 말에 테리트론은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점심무렵까지 로인은 방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었다. 거의 정오에 가까울 무렵,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가 여관으로 돌아왔다. 모라이티나는 로인 혼자 여관방을 지키고 앉아 있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로인.... 시나와 테리트론은 어디 갔지?" 모라이티나의 물음에 로인은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꾸했다. "데이트요." 9. 다시 소피카로. 본선 2차전 경기가 시작되었다. 대전표에 적혀있던 1차전 참가자의 사람 중 절반은 그 이름이 지워졌고, 나머지 절반의 이름 곁에는 짙은 붉은 색의 줄이 한 단계 위에까지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선은 2차전의 상대의 붉은 선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조용히 대치하고 있었다. 2차전 경기라고 해서, 특별히 1차전보다 치열하다거나, 경기의 수준이 높아졌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약자들이 예선과 본선 1차전을 통해 떨어져 나갔으나, 워낙 참가자들의 실력이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비슷비슷 했던 데다가, 지독히 대전 운이 좋은 약자들이 이곳까지 올라오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피아텔과 로인, 이 두 사람이 맞붙는, 일행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의미 있는 이 경기는 오후에 있었다. 그렇지만, 알 수 없는 신경전은 꽤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둘 모두 상대를 반드시 꺾어야겠다! 라고 외치며 호승심을 불태우지는 않았으나, 신경이 쓰이는 것만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승부에 특별히 신경을 쓰는데 에는, 로인은 로인 나름대로, 그리고, 피아텔은 피아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로인의 경우에는, 결승까지 나아가 다시 한번 미셸튼과 겨루어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기에, 피아텔을 반드시 꺾어야 했다. 그리고 피아텔의 경우에는.... 평서 정통 검술이 아니라고 하면서 약간 깎아 내렸던 로인이 자신을 이기기라도 하는 경우에는 일이 보통 심각해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겨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오전 경기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오전에는 미셸튼의 2차전 경기가 있었는데.... 그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이시테의 손등에 한차례 입을 맞춘 후 경기장에 나갔다. 그리고는 어제와 똑 같은 방법으로 상대의 병기를 두 동강 내고는, 단 2초만에 승부를 내 경기장에서 내려왔다. 관람석은 미셸튼에 대한 칭송의 목소리로 가득 차 버렸고, 멀리 망루 위에서 지켜보던 몇몇 내빈들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미셸튼의 모습을 눈에 담아두려 노력했다. 사실, 요 며칠동안의 미셸튼은 그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게 열심이었다. 예전에는 약간 약한 상대와 마주치면 가지고 놀 듯 빙빙 돌리다 시합을 마치곤 했었는데, 지금은 매 경기마다 최선을 다하는 듯 보였다. 아마도 그러한 변화는 란테르트 덕분일 것이다. 시합 시간에 가까워짐에.... 로인과 피아텔은 눈에 띌 정도로 말수가 줄어갔다. 사실, 그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상대와 자신보다 누가 더 나은 실력을 가졌는지 알 수 없었기에, 함부로 여유를 보인다거나 할 처지가 못되었던 것이다. 그 두 사람의 분위기가 이러함에 시나나 테리트론, 켈파, 오이니아 이 네 사람 역시 점차로 분위기가 가라앉아 갔다. 시나의 경우는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로인 편이었고, 테리트론은 약간 어정쩡한 입장이었으며, 오이니아는 피아텔 편, 그리고 켈파의 경우에는 겉으로는 중립을 지키려 했으나, 은근히 피아텔의 편을 들고 있었다. 어느덧 점심때가 찾아왔다. "자! 오늘은 도시락이에요." 오늘은 특별히 모라이티나와 오이니아가 함께 도시락을 만들었다. 모라이티나는 미식가이다. 많이 먹지는 않지만, 맛있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 덕에, 그녀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경우, 절대 열흘 안에 같은 요리를 먹는 경우가 없었다. 이곳에서 머문 근 10일 동안 일행은 대로상에 있는 커다란 펍에서, 골목 깊은 곳에 있는 허름한 식당까지 들려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특히 란테르트의 경우에는 간식 시간에까지 모라이티나에게 끌려 다녔다. 하지만, 에디엘레 성은 성 그 자체로써는 그다지 크지 않았고, 그렇기에 들어서 있는 요릿집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모든 식당의 자랑하는 요리를 모두 먹어 버렸고.... 이렇게 어쩔 수 없이 도시락을 만들게 된 것이다. 하지만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모라이티나의 요리솜씨는, 사실 어지간한 식당의 그것보다는 훨씬 좋았다. 아니, 정확히는 1류 급이었다. 즐거운 점심시간도 잠시.... 이윽고 피아텔과 로인의 시합시간이 다가왔다. 시합을 관리하는 사람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로인과 피아텔의 이름을 외치는 목소리였다. 로인은 지금 적지 않게 유명해져 있었고, 피아텔의 경우도 전년도 8강 진출자이며, 본선 1차전을 단지 세 번 검을 휘둘러 승리한 사람으로 꽤 이름이 알려져 있었기에, 관중의 시선은 단번에 이 두 사람의 경기장으로 쏠리었다. 사실, 이 두 사람이 전부터 서로 한 번 겨루어 보고 싶었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이도, 실력도 비슷 비슷하니, 사실 이보다 훌륭한 라이벌은 없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뒤흔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개전의 흰 기가 펄럭임과 동시에 흩어지듯 사라졌고.... 두 사람은 마음을 텅 비운 채 검 끝에 모든 정신을 쏟았다. 로인과 피아텔 두 사람의 발이 지면을 차며 떠오른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로인은 아래에서 위로, 그리고 피아텔은 위에서 아래로 최초의 일격을 쏘아보냈고, 두 사람의 검은 허공에 얽히어 차작 하는 불꽃을 내뿜었다. 처음의 선택에 있어서는 로인 쪽이 옳은 것이었다. 내려치는 기술은 위력이 월등하지만, 거두어들이기가 그만큼 힘들다. 로인은 한차례 검을 부딪힌 후, 슬쩍 검을 빼내어 두 번째 공격을 시작했고, 피아텔은 그 보다 반 박자 늦게 수비 자세로 들어갔다. 하지만 역시 늦었다. 피아텔은 도저히 로인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고, 결국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로인은 첫 공격이 성공하자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었다. 계속해 세 차례에 걸쳐 재빠르게 검을 휘둘렀고, 피아텔은 그런 그의 공격을 하나 하나 차분히 막아 나갔지만, 한 번 수세에 몰리고 나자 반격 같은 것은 거의 할 수 없었다. 로인의 검술에는 허점이 많기는 했으나, 피아텔이 치고 들어갈 만큼 허술한 곳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경기장 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행은, 로인이 처음부터 공세를 잡고 계속해 피아텔을 핍박해 나가자 희비가 엇갈리기 시작했다. 시나의 경우에는 손까지 흔들어대며 "잘한다 로인~!" 이라고 외쳐대고 있었고, 테리트론도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기 시작했다. 15년을 사귀어온 피아텔 따위보다는, 로인이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반면 오이니아는 약간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는데, 이들은 딱히 피아텔이 패배한다는 것을 마음에 두기보다는, 피아텔의 부상과, 그가 입을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다. 원래 어려서부터 귀족 가문의 외동아들로 자라온 그이기에 자존심이 무척 센 편이었다. 한편 켈파는 란테르트 곁에 앉아 강론을 듣고 있었다. 워낙 로인의 성격이 착하고 순하다 보니, 켈파는 마음속으로 그에게 상당한 호감을 느끼고 있었고, 때문에 그가 지는 것도, 피아텔이 지는 것도 그다지 마음 편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켈파는 차라리 그들에게서 한가지라도 더 배울 점을 찾으려 했다. "피아텔의 경우에는.... 검에 너무 자신감이 넘칩니다. 사실, 그의 실력은 로인보다 약간 아래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를 로인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것이 그의 검 끝을 둔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입니다." 켈파에게 가장 먼저 란테르트가 들려준 말은 이것이었고, 켈파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되물었다. "하지만.... 피아텔의 말로는 로인의 검술이 용병 검술로 정통 검술은 아니라고 하던데요.... 그런 것 때문에 오는 불리한 점 같은 것은 없습니까?" 켈파의 말에 란테르트는 미소를 지었다. "피아텔의 검술은 북방계 검술로, 가장 대표적인 검가는 가라리스가 입니다. 하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북방계 검술은 용병검술의 한 흐름이었을 뿐이지요." 켈파는 란테르트의 말에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을 지었고, 란테르트는 계속해 이야기를 했다. "제가 지금까지 검술을 겨루어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던 사람이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레카르도 가의 가주이신 케이시스 님으로.... 그분이 익힌 검술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레카르도 가의 검술입니다. 레카르도 가의 검술 역시 시작은 용병검술 이었습니다. 에디엘레 가의 검술과 위다 지방의 검술인 라플티 가의 검술, 이들은 처음부터 검가에 의해 일가를 이룬 것들이지만, 그 근원이 반드시 있습니다. 즉 당대에는 이름 없는, 말 그대로 정통이 아닌 검술이었던 것이죠." 켈파는 란테르트의 말에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란테르트는 다시 설명을 해 주었다. "검술에 있어서 정통이고 그렇지 않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에디엘레 가의 검술을 공부하건.... 아니면 저처럼 이름 없는 검술들을 공부하건.... 스스로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검술 그 자체가 무엇을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켈파는 그의 말에 머리 속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곧바로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약간의 선입관들을 완전히 생각 속에서 떨쳐 버릴 수 있었다. "지금 로인이 우세를 점하고 있는 것이지요?" 란테르트는 켈파의 물음에 한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검을 부딪혔을 때 승패는 이미 갈렸습니다. 로인은 탐색전을 빌린 조심스러운 공격을, 그리고 피아텔은 강공을 펼쳤습니다. 피아텔 같은 초반 공격은 상대의 실력보다 자신이 월등히 뛰어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행하는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거의 최악의 선택이라 할 수 있었지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처음 상대를 알지 못할 때는 무조건 탐색전을 펴야 합니까?" 켈파가 물었고,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무조건 이라는 말은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상황이란 무한한 것이고.... 딱히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으니까요." 막 이런 이야기를 하는 순간, 창하는 커다란 소리가 경기장 위에 울려 퍼졌고, 일행은 일제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경기장 위의 상황은 조금전과 그다지 다름이 없었다. 피아텔은 완전한 수세에서 약간 벗어나 10에 한둘쯤 반격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로인의 경우에는 더더욱 집중해 피아텔에게 날카로운 공격을 해 나가고 있었지만, 한쪽이 수세이고, 다른 한쪽이 공세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둘 모두 신출내기였다. 로인의 경우에는 거의 10년, 그리고 피아텔도 9년이나 검을 손에 잡았지만, 일종의 여가생활 정도 이상의 의미를 둘 수 없었기에, 둘의 실력 모두 평범을 조금 상회할 뿐이었다. 경험도 거의 전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일반 관객들이 보기에 이들의 싸움은 눈이 다 핑핑 돌 지경이었다. 아슬아슬한 장면은 흡사 훌륭히 연출된 연극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고, 사람들은 두 사람의 검이 부딪혀 챙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날 때마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탄성을 내질러 댔다. 피아텔은 지금 마음이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시종 평범해 보였던 로인의 검술 그 어느 구석에 이런 까다로운 검술이 숨어 있었는지, 지금 피아텔은 진땀을 빼고 있었다. 막상 로인과 겨루기 전에는 15분 안에 승부를 낼 자신이 있었다. 미셸튼이 10분 남짓 걸려 로인을 이겼으니, 자신은 그보다 조금 더 걸려 15분쯤이면 이기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완벽한 착각이었다. 로인의 검술은 곁에서 보았을 때의 평범함 이상의 것이 그 안에 숨겨져 있었고, 피아텔은 온힘을 다 쏟아야 간신히 그와 평수를 이룰 수 있었다. 종종 휘몰아쳐 오는 날카로운 공격에는 눈앞이 다 어찔할 정도였다. 한편, 로인 역시 피아텔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록 자신이 승기를 잡고, 또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한 순간도 긴장을 풀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피아텔의 검술은 기초가 약간 부실하고, 평소의 연습 량이 많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 로인의 것보다 수준이 높은 편에 속했다. 각도의 변화가 예리하면서 검에 힘이 가득한 것이 북방계 검술의 모습 그대로였다. 로인이 결정적으로 승기를 잡기 시작한 것은, 시합이 시작된지 20여분이 흐른 후였다. 두 사람의 동작은 눈에 띄게 느려졌고, 쌀쌀한 11월 하순의 날씨에도 얼굴엔 땀으로 가득했다. 이런 열악한 상황이 두 사람에게 찾아오자, 피아텔과 로인의 낯빛은 눈에 띌 정도로 달라졌다. 체력에 있어서는 로인 쪽이 훨씬 뛰어났고, 피아텔은 지친 기색이 얼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때쯤, 로인은 이때를 놓치면 무승부로 판정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승부를 가려야 겠다는 마음에 적극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비록, 지쳐 검 끝의 움직임이 무뎌지고, 힘도 처음만 못했으나, 역시 지쳐 몸이 굼떠진 피아텔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인 것이었다. 돌변한 상황에 피아텔은 간신히 검을 들어 지탱할 뿐, 반격 같은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탕탕,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연이어 경기장에 울려 퍼졌고, 피아텔은 어지러워진 발걸음과, 심하게 흔들리는 검으로 로인의 공격을 힘겨히 받아내고 있었다. 몸이 지치는 것 이상으로 마음이 지치기 시작했고, 뒤로 한 걸음 한 걸음 물러섬에 자존의 탑 역시 한 층씩 무너져 내림을 느꼈다. 져버린 것이다.... 철그렁.... 로인의 매서운 공격에 피아텔은 검을 놓쳤다. 져버린 것이다.... 검은 주인의 손을 떠나 바닥에 떨어졌다. 두 차례 퉁겨 오르더니 바닥에 착 엎드렸다. 피아텔은 그렇게 떨어져 버린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며 망연해졌다. 로인 정도에게 패해 버리다니.... 목표였던 4강은 32강전에서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피아텔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림을 느꼈다. 눈앞이 노랬고, 수치감이 온 몸을 가득 휘감고 있는 듯 느껴졌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신을 비웃고 있는 듯 느껴졌다. 모두의 목소리가 자신을 깎아 내리고 있는 듯 귓가에 윙윙거렸다. 20여분의 격전으로 몸은 지칠 대로 지친 대다, 마음까지 이렇게 흔들리니.... 그는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었다. 피아텔은 앞뒤로 몸을 몇 차례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로인은 바로 그의 앞에 서 있다 그가 그렇게 쓰러지자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 붉은 기가 펄럭였고, 심판은 로인의 승리를 외쳤다. 하지만 로인은 그런 것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피아텔을 부축해 경기장 아래로 내려갔다. 멀리서 황급히 달려온 켈파는 로인을 도와 피아텔을 부축했고, 오이니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경기장 위에 내버려둔 피아텔의 검을 챙겨 들었다. 이 작은 소동에 경기장에는 조그마한 소란이 일었으나, 이내 장내가 정돈되었고, 다음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낮고 웅장한 소리가 경기장 안에 울려 퍼졌다. 로인과 켈파는 부축해온 피아텔을 의자 몇 개를 붙여 만든 임시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곁에서 모라이티나는 간단한 체력 보조 마법과 기절 상태에서 깨어나게 만드는 마법을 동시에 걸어 주었다. 피아텔은 곧바로 눈을 떴고, 잠시 멍청히 누워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의 모습에 켈파가 물었다. "몸은 괜찮아? 어디 아픈 곳은 없어?" 켈파의 물음에 피아텔은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고, 켈파는 계속해 그의 안위를 걱정했다. "혹시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 아니야? 기절을 하다니.... 이번 시합 무리였던 모양이야.... 여관으로 돌아갈까?" 그의 말에 피아텔이 외쳤다. "너 마저 날 놀리는 것이냐?" 켈파는 그가 외치는 소리에 약간 당황하는 기색을 나타냈다. "미안해.... 아니.... 난...." 피아텔은 당황해 약간 말을 횡설수설하는 켈파를 신경질 적으로 한차례 바라본 후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혼자 있게 해 줘...." 피아텔은 이렇게 말한 후 곧바로 몸을 일으켜 경기장 밖으로 향했고, 일행은 그런 그의 모습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켈파는 잠시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의 뒤를 쫓았고, 오이니아는 피아텔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켈파와 함께 그를 따라갔다. 그가 막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자 테리트론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으며 중얼거렸다. "멍청한 녀석. 골통 속에 자존심만 그득 해 가지고...." 곁에서 시나가 맞장구 쳤다. "그 말 멋진데?" 로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모라이티나는 점잖은 말로 타이르며, 로인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너무 심하게 말하지는 말아. 그보다, 로인은 기쁘겠네?" 모라이티나의 말에 로인은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뭘요. 피아텔이 방심했을 뿐이에요." "사실, 피아텔 씨 쪽 보다는 로인 씨가 더 뛰어나지요." 미셸튼이 곁에서 한마디했고, 로인은 다시 겸양의 말을 했다. "얼마나 힘들었는걸요. 운이 좋아 약간 앞섰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로인은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긴장이 풀려서 인지 몸이 나른했다. 피아텔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노골적으로 기쁜 표정을 짓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로인은 지금 상당히 마음이 들떠 있었다. 은근히 그에게 무시를 당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승리를 거두니 통쾌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막 자리에 앉은 로인의 곁에 시나와 테리트론이 나란히 앉으며 역시 한마디씩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 녀석, 자존심이 약간은 낮아 졌을 꺼야. 아무리 오랫동안 알던 사이 라지만.... 정말 봐주기 힘들거든...." 테리트론은 축사라기 보다는 평소 피아텔에게 품고 있던 불만을 토로하는 듯한 말을 로인에게 했고, 뒤이어, 시나는, "잘했다 로인! 이 누나가 뽀뽀해줄까?" 라고 말하며 진짜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 로인은 당황하며 몸을 뒤로 뺐고, 그러다가 의자에서 미끄러져 뒤로 벌렁 넘어갈 뻔했다. 란테르트는 그런 조카들의 모습에 잠시 미소를 짓다가 약간 엄한 목소리로 로인에게 말했다. 칭찬은 충분히 들었으니, 이제는 조금 엄한 소리도 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로인, 만약 피아텔이 마음을 놓지 않았더라면, 네가 이겼을지 혹은 졌을지 알 수 없었단다. 아직 네 검술은 바겔 씨의 검술을 흉내내는 수준으로, 결코 자만하거나,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정도는 아니란다. 그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돼. 만약, 그러한 것을 망각하고 자만에 빠져버린다면, 오늘의 승리는 차라리 없었던 만도 못하다." 로인은 삼촌의 충고에 방긋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세요 삼촌. 삼촌의 공격에 검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실력이 될 때까지는 결코 조금도 자만하지 않을꺼에요." 란테르트는 로인의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이러한 태도가 로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장점이 아닌가 싶다. 겸손하면서도, 켈파처럼 지나치게 자신감 없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편안한 사람이었다. 로인은 잠시동안 휴식을 취했다. 20분 동안이나 전력을 다해 피아텔이라는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상대와 검을 겨루었으니, 피곤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침, 점심때 먹다 남은 샌드위치가 약간 있었기에, 모라이티나는 그것을 로인에게 건네주었다. "앞으로 조금만 오르면 8강도 가능할 꺼야. 어쩌면 4강이나 결승에 오를지도 모르잖아? 클라라 님에게도, 바겔 님에게도, 동생 란티에에게도, 그리고 너의 데이나 에게도 좋은 자랑거리가 될 꺼야. 그러니까, 분발해." 모라이티나는 방금 란테르트에게 엄한 충고를 들은 로인에게 곧바로 이렇게 부드러운 말로 격려를 해 주었고, 로인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모라이티나의 말대로, 결승, 아니 하다못해 8강에만 진출해도.... 충분히 고향에서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로인은 샌드위치를 받아든 채 미셸튼을 흘끗 바라보았다. 이시테를 향해 이런 저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로인은 속으로 다시 한번 전의를 다졌다. 로인이 어느 정도 체력을 보충했을 무렵, 본선 2차전 경기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로인은 몸에 힘이 조금씩 돌기 시작할 무렵부터 란테르트에게 피아텔과 자신의 싸움에 대한 조언을 구했고, 그때 이래로, 경기를 관전하기도 하며 계속해 검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시나와 테리트론 역시 모라이티나에게 몇 가지 마법 기술을 배웠다. 배움에 대한 열의는 켈파나 로인에 비해 크게 못 미쳤으나, 꽤 열심히 강의를 듣고 있었다. 이시테와 켈리는 란테르트가 잘 보이는 곳에 앉아 그가 로인을 가르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종 미셸튼이 단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기에 대해 설명을 하고, 그와 연관되어 떠오르는 몇몇 이야기를 이시테에게 들려주었으나, 이시테는 그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이야기를 들을 뿐 큰 흥미를 나타내지 않았다. 지금 까지도 그녀의 관심은 온통 란테르트의 주위에 쏠려 있었던 것이다. 켈리는 그런 이시테의 모습을 보며 지금 부지런히 머리 속에서 저울질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저울질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란테르트가 나타나기 전, 미셸튼은 이시테에게 공적인 이야기 외에는 말조차 거의 걸지 않았었다. 마음속으로는 상당한 호감을 품었으되, 여러 가지 제약점으로 인해 함부로 접근치 않은 모양이었다. 이시테의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도 미셸튼의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여러 가지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던 것이 란테르트가 등장하면서 크게 바뀌었다. 우선 이시테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변화했고, 표정 역시 굉장히 풍부해져, 그 동안 지레 겁을 먹고 있던 미셸튼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미셸튼은 본격적으로 이시테에게 마음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어제 그녀의 기사가 되기를 자청해 왔다. 이렇게 되자, 그전까지, 이시테의 란테르트에 대한 짝사랑이라는 단선적 구조가, 미셸튼의 이시테에 대한 마음, 이라는 하나의 변수를 더함으로써 약간 복잡해 졌고, 그 때문에 켈리는 자신의 조그마한 머리가 그러한 것들로 빠듯해 짐을 느꼈다. 이시테가 좋아하는 남자와, 이시테를 좋아해 주는 남자.... 전자와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이시테는 그를 쉽게 잊지 않을 듯 했다. 켈리는 잠시 이런 생각을 하다가 이시테를 향해 조그맣게 속삭였다. 미셸튼은 지금까지 이시테의 곁에 있다가 잠시 디미온의 부름을 받고 망루로 향했고, 지금 이시테와 켈리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네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란테르트와 다른 사람들이 있었으나, 이렇게 조그맣게 이야기한다면 전혀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아가씨. 지금 켈리는 정말 신경 쓰이는 일이 한가지 있어요." 이시테는 그녀가 갑자기 그렇게 물어오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이야기야?] 이시테의 물음에 켈리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미셸튼 님 말이에요." [그가 왜?] "아가씨는 모르시겠지만.... 미셸튼 님은 아가씨를 상당히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켈리는 이시테에게 말할 때 상당히 그 어투가 직선적이었다.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을, 켈리도 이시테도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시테는 그녀의 이런 말에 순간 볼을 붉혔다. [그게 무슨 말이야?] 켈리가 곧바로 말했다. "요 며칠간 미셸튼 님이 이시테 아가씨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모르시겠어요? 매일같이 근처에 앉아 아가씨에게 이런 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게다가 어제는 기사가 되고 싶다고 자청까지 하셨잖아요." 켈리의 말에 이시테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난 그의 이야기가 하나도 재미없었는걸.... 그냥 자기 잘난 척 하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아.] "그야 미셸튼 님이 이시테 아가씨의 취향을 모르니까 그렇지요." 켈리의 말에 이시테는 조용히 생각에 잠기었다. 하긴.... 그러고 보니, 요 몇일 사이 미셸튼의 자신에 대한 태도가 그 전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이시테, 그녀 자신이 온통 신경을 란테르트에게 쏟고 있어 눈치채지 못했을 뿐, 누가 보아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 이시테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고, 이내 켈리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던 손가락을 몇 차례 움직였다. [.... 왜 갑자기 그러는 것이지?....] "제가 전에 이야기 했었잖아요. 미셸튼 님이 아가씨를 좋아하는 눈치라고." [그게 어떻다는 것이야? 난.... 그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아. 저번에 켈리도 봤잖아. 단 한 번 검을 부딪혀 란테르트에게 검을 잃는 모습을. 그런 형편없는 실력으로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켈리는 이시테의 말에 고개를 속으로 한숨을 내 쉬었다. 도대체 얼마나 눈밖에 날 짓을 많이 했길레.... 이렇게 까지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일까?.... "그 날 이후, 미셸튼 님은 태도가 많이 바뀌셨어요. 아가씨가 조금만 신경 써서 보시면 금방 아실 수 있을 꺼 에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이시테는 켈리가 자꾸 미셸튼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약간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켈리는 역효과가 나는 듯 하자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아가씨의 기사잖아요. 그것도 첫 번째 기사인데.... 그런 정도의 신경도 쓰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 켈리의 말에 이시테는 하마터면, 네가 맘대로 결정해 버렸잖아, 라고 말할 뻔했으나, 손을 멈추었다.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묵인했다면, 그것은 승낙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켈리는 이시테가 가만히 있자 조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켈리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전 아가씨가 행복해 질 수 있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으면 해요. 오직 그것만을 바랄 뿐이에요." 이시테는 켈리의 말에 조용히 생각에 잠시였다. 자신이 행복해 질 수 있는 쪽이라니.... 하지만 결론은 오래지 않아 나왔다. 아직 미셸튼이라는 남자는.... 이시테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한다. 오후 시합이 모두 끝난 후, 이시테와 켈리, 그리고 미셸튼은 에디엘레 본성으로, 나머지 일행은 여관으로 향했다. 피아텔과 오이니아, 그리고 켈파는 이미 여관에 돌아와 있었다. 피아텔은 일행이 돌아오자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애써 내보이며 로인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아까는.... 약간 어지러워서 실례되는 행동을 했다. 아무튼, 훌륭한 승부였고, 너의 승리를 축하한다." 피아텔의 말에 로인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운이 좋았을 뿐이야." 오이니아와 켈파가 그 동안 피아텔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꽤 엄청난 노력을 들였다는 것은, 이것 한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듯 하였고, 모라이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오이니아와 켈파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녁, 밤, 그리고 아침. 이제는 본선 3차전 경기이다. 이곳까지 올라온 사람들은 모두 16명. 8개의 경기이기에, 오전에는 일정이 비어 있었다. 오후에만 경기가 있었기에, 아침나절 일행은 약간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오후. 미셸튼의 이날 상대는 전에 시나를 가지고 놀 듯 하던 제디알이라는 이름의 마법사였고, 로인의 상대는 본선 개막식 경기 때 훌륭한 솜씨를 내보이던 게일이라는 에디엘레 가의 제자였다. 둘 모두 까다로운 상대와 겨루게 되었으나, 승리를 거두는 일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게일이라는 에디엘레 가의 제자의 실력은 상당한 편이었으나 피아텔보다 약간 아래였으니 로인은 피아텔과 싸울 때 보다 훨씬 편안히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제디알 역시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였으나, 미셸튼보다는 훨씬 아래에 놓이는 수준이었다. 로인은 8강 안에 들게 되자 이날 저녁 내내 들떠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 로인이 속한 조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전년도 우승자를 포함한 4강 중 3명이 미셸튼의 조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인의 조에 속한 4강의 4번째 사람이 바로 게일이었는데, 그는 이미 로인이 이겼으니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은 결승까지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2일이 흘렀다. 로인은 8강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었고, 4강전 역시 무사히 끝냈다. 결승.... 첫 출전에 결승까지 진출한 것이다. 이것은 로인의 실력이 보통은 넘는 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 무투회의 수준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대전운 역시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달이 바뀌어 12월 첫날. 열흘 남짓이나 계속 이어진 무투회의 결승이 드디어 이날 개최되었다.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아, 경기장의 좌석은 만원을 이루었고,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에 귀가 다 먹먹할 정도였다. 깔끔하게 정돈된 경기장에는 수많은 깃발이 세워졌고, 에디엘레 가의 근위병들이 경기장 주위에 사열해 서 있었다. 결승전이니 만큼 한군데도 소홀한 곳이 없었다. 사실, 우승자는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질적인 결승전이라고 불리웠던 준결승전에서, 미셸튼은 자신의 사제이자 친구인 히시아블을 맞아 30분이나 열띤 경기를 펼쳤고, 결국 간신히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아마도, 올해 에디엘레 가가 개최한 무투회 경기 중 가장 볼만한 승부가 아니었나 싶다. 로인은 막 경기장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크게 달라진 분위기에 순간 움찔 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수많은 참가 대기자들로 약간 어수선했던 경기장 주위가 깨끗이 정리되었고, 전에 없던 근위병들의 사열도 눈에 띄었다. 에디엘레 가를 상징하는 검정색 하프화가 그려져 있는 흰색 깃발 수십 기가 경기장 곳곳에서 이맘때쯤 불기 시작하는 북풍에 힘껏 휘날리고 있었고, 관람석 앞 벽면 역시 흰색 깃발로 뒤덮여 있었다. 평범한 옷차림의 자신이 왠지 어울리지 않는 자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셸튼은 미리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언제나 입고 다니던 흰색과 회색이 어우러진 장옷을 입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몇 배는 위엄 있어 보였다. 대기석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졌기에, 란테르트 일행은 관람석 가장 앞열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이시테와 켈리는 귀빈석으로 안내되었는데, 디미온은 란테르트 역시 귀빈석으로 부르고 싶었으나, 그의 성격에 거절할 것이 불을 보듯 했기에 그냥 그대로 두었다. 아마 경기장을 내려다보며 가장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피아텔일 것이다. 그의 실력으로 보건대, 그리고 대전표를 보건대, 로인을 이겼다면 저곳에 서 있을 사람은 피아텔 바로 그 였다. 피아텔은 이런 생각을 하자 입맛이 써졌다. 그때, 조금만 더 신중할걸.... 하는 생각도 들었고, 분명 무언가 잘못된 시합이었다 라는 생각도 울컥울컥 치밀어 올랐다. 아직도 승복하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는 사이, 결승전 시합이 시작 됐다. 로인은 천천히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고, 미셸튼 역시 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을 꺼냈다. 로인의 것은 가장 널리 쓰이는 모양의 평범한 장검이었고, 미셸튼의 것은 에디엘레형 검으로 검날이 약간 가는 편이었다. 장엄한 뿔피리 소리가 장내에 울렸고, 개전을 알리는 순백색의 깃발이 초겨울의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휘감았다. 로인과 미셸튼은 타, 하는 짧은 기합을 내지르며 동시에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이미 한차례 싸워본 이들은 상대의 장단점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고, 그 덕에 처음부터 싸움을 치열했다. 사실, 개전 초기에는 탐색전 형식을 빈 소극적인 공격을 하는 것이 정상적이었으나, 그런 것이 필요 없는 지금 온 힘을 다해 공격하고, 또 수비에 힘을 쓸 뿐이다. 가끔은 두 자루의 검이 정면으로 부딪혀 카칵 하는 거친 쇳소리를 내기도 했고, 가끔은 스치듯 부딪히며 촤악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기도 한다. 끊임없이 기합을 내지르고, 자세를 다잡고, 흘러내려 눈가를 어지럽히는 땀을 닦고, 땀에 흥건해져 몸에 감기는 옷을 틈을 보아 정리하고, 춤을 추듯 석판 위 이곳 저곳을 디디고, 또 떨어지고.... 미셸튼도, 로인도 지난 예선전 때와는 전혀 다른 몸놀림을 서로에게 보이고 있었다. 란테르트가 보기에도 둘 모두 조금씩이나마 성장한 듯 보였다. 미셸튼의 경우에는 요 며칠사이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종종 란테르트와 검술에 관한 짧은 토론을 벌일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시야는 훨씬 더 넓어져 갔다. 사실, 넓은 것만으로 이야기한다면 란테르트 이상 가는 사람이 이 대륙 안에는 드물 것이다. 라플티가, 에디엘레가, 레카르도가, 이 세 가문의 검술 거의 대부분을 익힌 데다가, 이런 저런 수많은 검술을 완전히 소화해 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로인 역시 지금까지 굉장히 부족했던 실전경험을 차곡차곡 쌓아 가면서 적지 않은 양의 이론은 몸에 서서히 녹여가고 있었다. 특히 지금까지 대결한 사람들이 자신과 거의 비슷하거나 강한 사람뿐이어서 그 효과는 훨씬 컸다. 미셸튼은 이전처럼 싸우는 도중 말을 건다 거나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짓을 할 여유는 충분했다. 로인은 여전 그에 비교할 수 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조롱하며 싸운다 하더라도 충분히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상대가 로인이니만큼 그런 짓은 더더욱 할 수 없다. 10분이 이미 지났건만, 두 사람 모두 지칠 줄을 몰랐다. 비록, 헉헉거리는 거친 숨을 내 쉬었으나, 두 눈은 여전 맑았고, 몸놀림도 크게 둔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5분이 지나자, 점차로 로인 쪽의 검 끝에 흔들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발걸음도 조금씩 흐트러졌고, 휘두르는 검의 날카로움도 크게 꺾이었다. 그 순간, 미셸튼이 검을 크게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고, 로인은 아차, 하는 마음에 몸을 뒤로 뺐으나, 이미 늦어 있었다. 손에 힘이 쑥 빠졌고, 검은 팽그르르 돌며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로인은 날아가는 자신의 검을 바라보기보다는 미셸튼을 바라보았다.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미셸튼 역시 로인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 단 한가지 표정만으로도 이 두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리라.... 그렇게 경기는 끝났다. 우승자는 미셸튼이었고, 로인은 그 자신이 이야기 한데로, 운이 좋아 준우승을 했다. 시상식, 폐회식 따위의 자질구레한 의식이 모두 끝난 후, 로인과 미셸튼은 화려하게 장식된 지붕 없는 마차에 타고 에디엘레성의 시가지를 한바퀴 돌았다. 로인은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띄운 채 들뜬 표정을 지었고, 미셸튼은 그런 로인 곁에서 담담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인사에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있었다. 그런 로인의 모습을 보며, 일행의 일부는 시기심을, 일부는 부러움을, 일부는 대견함을 느꼈을 것이다. 란테르트는 마차를 타고 자신의 앞을 지나는 로인은 향해 미소를 한차례 지어 보인 후, 모라이티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투회는.... 언제나 저런 유치한 짓을 해야 하는 거야?" 란테르트는 지금 예전에 언젠가 에르테일을 가져왔을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에르테일을 장식하고 있던 괴상한 사슬 따위를 기억해 냈고, 자연스럽게 이렇게 물은 것이다. 모라이티나는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누가 이 이상한 남자의 이러한 물음에 대꾸할 수 있을 것인가?.... 바쁜 오후 시간이 흘렀고, 늦은 저녁때에는 에디엘레 가에서 연회가 열렸다. 4강 진출자 4명과 란테르트 일행, 그리고 참관인 자격으로 성에 찾아왔던 십 수명의 귀족들이 참가한 그다지 크지 않은 연회였다. 하지만, 공작 가문에서 하는 것이니 만큼 화려함은 극을 달렸다. 12월 첫날, 날씨가 추웠기에 불행히 야외에서 연회를 열 수는 없었으나, 실내에서 한다고 해서 그 분위기가 덜하다거나 한 일은 결코 없었다. 연회는 에디엘레 본성 동쪽에 마련된 커다란 홀에 준비되어 있었다. 수많은 유리창을 통해 별빛이 쏟아질 듯한 이 홀의 천장에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수많은 촛불의 빛을 반사하고 있었고, 한쪽에 있는 긴 테이블에는 수많은 음식들이 각각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홀 안 곳곳에 있는 커다란 화병에는 이맘때쯤 보기 힘든 몇몇 화초들이 진한 꽃내음을 내뿜었으며, 10여명의 악사들은 잔잔하고 조용한 음악을 화향花香에 섞어 홀안의 분위기를 한층 북돋고 있었다. 란테르트 일행은 에디엘레 가에서 제공한 옷을 입고 있었다. 모라이티나의 경우에는 순백의 담백한 드레스와 투명한 보석 장신구 한 세트가 전해졌고, 란테르트에게는 보라색 계열의 고급 정장을 빌려주었다. 그밖에 시나와 로인, 그리고 다른 일행들에게도 모두 복장이 주워졌고, 각각 그 옷으로 갈아입은 채 연회장에 참가했다. 이날은 란테르트도 옷을 갈아입었다. 언젠가 위다의 수도에서 열렸던 연회 때와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바로 디미온 때문이었다. 사실, 란테르트는 디미온이 1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자신에게 이렇게 성심껏 대해 주는 것에 약간 감동하고 있었다. 물론, 이시테, 그녀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그 두 사람의 체면을 자신의 손으로 구길 수는 없기에 이렇게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확실히.... 옷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장신구중 하나이다. 오랜 옛날에 무슨 이유로 처음 옷을 입기 시작했건.... 지금에 와서는 꾸미기 위해 입는다는 측면을 무시하고는 결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란테르트는.... 여러 사람의 넋을 빼 놓았다. 이시테는 란테르트가 진 보라색의 정장을 걸치고 나오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고, 켈리 역시 순간 입을 다물었다. 오죽하면 조카인 시나마저도 란테르트에게 칭찬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겠는가? 비록 오랜 고생으로 몸이 마른 편이고 얼굴 역시 그러했으나, 그렇다고 원래의 얼굴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단 한차례도 편안한 생활을 한 적이 없기에 온 몸에 군살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어깨도 넓은 편이었기에, 비록 팔이 하나 없었으나 옷의 라인이 확연히 살아났고, 은색의 긴 머리칼은 그런 그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지금 홀 안에의 사람 중 절반 정도가 여자였는데, 란테르트와 나란히 서 담담히 미소짓고 있는 모라이티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지금 란테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남자들의 시선을 빼앗은 것은 모라이티나였다. 엘프다. 약간은 마른 듯한 몸매에, 보통 사람보다 조금 큰 눈매.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완벽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녀의 모습에, 아내가 곁에 서있는 남자나, 젊은 남자, 늙은 남자 할 것 없이 멍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부신 눈빛의 드레스와 반짝이는 장신구들은 그녀를 위해 세상에 존재하게 된 듯한 모습으로 그녀의 미모를 북돋아 주었고, 이 두 남녀는 단번에 연회장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버렸다. 란테르트는 생각해 보니 이런 격식 있는 복장을 입어본 것이 처음인 듯한 생각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단 한순간도 이런 연회 같은 곳에 참여할 이유가 없었으니.... 아니, 철이 든 이후로는 끼니를 때운다는 것에 신경을 쓰며 살아야 했으니.... 이런 옷을 입을 기회가 있었을 리가 없었다. 그 덕에 이러한 옷이 왠지.... 불편한 듯 했으나, 이왕 하기로 한 것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모라이티나는 이 촌스러운 남자의 왼팔에 팔짱을 끼고 이시테와 디미온 등의 에디엘레 일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시테는 에메랄드 빛 머리칼과 너무 잘 어울리는 붉은 색 계통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켈리는 주홍색의 단촐한 드레스를, 그리고 제레미아의 경우에는 연한 청색의 기품 있어 보이는 드레스로 몸을 치장하고 있었다. 어린 셸론은 청색의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꽤 귀여운 모습이었다. 디미온은 흰색의 정장 차림이었고, 가슴 부분에 하프화가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무슨 의례용 복장인 듯 했다. 4강 안에 든 에디엘레 가의 제자인 히시아블과 미셸튼 역시 디미온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런 연회에 초대해 주시고, 아울러 이렇게 아름다운 옷과 장신구를 내려 주신 점, 일행을 대표해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모라이티나는 디미온에게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란테르트는 그런 모라이티나의 모습에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왔고, 한편으로는 놀랍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전에 함께 파티 장에 갔을 때는.... 음식만을 주워 먹고.... 이카르트.... 그와 떠들어대는 등.... 주위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만을 골라서 했는데.... 란테르트는 순간 그때 연회에서 있던 일을 생각하느라 멍해졌다. 이카르트가 자신에게 했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게다가.... 그날의 에라브레.... 정말 아름다웠다. 자신의 어설픈 춤 솜씨로.... 그녀와.... 그때, 모라이티나가 란테르트의 옆구리를 살짝 쳤다. 란테르트는 생각에서 깨어나며 모라이티나를 바라보았고, 모라이티나는 눈을 살짝 찡긋 해 보였다.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디미온 일가의 표정을 보며 모라이티나가 하려는 말을 금방 알아차렸다. "아.... 정말 감사드립니다. 디미온씨. 그리고, 제레미아 부인." 란테르트의 인사에 디미온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란테르트씨에게 입은 은혜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말하며 어깨에 손을 얹었고, 제레미아는, "천만의 말씀입니다." 라는 의례적인 인사로 대꾸했다. 제레미아는 인사를 한 후 다시 한 번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차려 입으니.... 10년 전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비단 옷차림 때문이 아니라, 표정에서 행동 하나 하나까지, 10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제레미아는 란테르트의 이런 모습에 그에 대한 반감은 조금씩 수그러들고 있음을 느꼈다. 제레미아가 란테르트를 싫어했던 가장 큰 이유는, 란테르트가 제레미아에게 조금의 따듯함도 보이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정 같은 것이 아닌, 다만 아는 사람에게 보이는 그러한 따듯한 마저도 당시의 란테르트는 전혀 내보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는 쪽이 이상한 것이다. 하나, 둘 참가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아직 채 오지 않았던 사람들이 도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처 성의 영주들, 에디엘레성의 세력가들, 큰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중소 귀족들 등등의 사람들이 하나 둘 도착했고, 파티장안의 사람들은 막 30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시나와 로인, 그리고 오이니아와 켈파, 테리트론, 피아텔 등은 모두 디미온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고, 디미온은 일일이 그들의 인사에 대꾸해 주었다. 특히 로인에게 큰 관심을 보였는데, 그의 재능이 정말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파티가 무르익어 감에, 안의 사람들은 점차 무리를 짓기 시작했다.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 미셸튼, 히시아블, 이 네 사람은 이시테 근처에 자리를 잡았고, 로인과 시나, 테리트론, 오이니아, 켈파, 피아텔 등은 란테르트 등이 있는 곳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나름대로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로인은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 있었다. 사실, 그가 평생 언제 한 번 이런 화려한 연회에 참가해 보았겠는가? 고생과 가난으로 가득한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낸 로인은 철이 들어서는 소박한 농촌 생활을 해왔다. 물론,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했으나 그래도 이러한 곳이 놀랍고 또, 부러운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한 번 와 보고 싶어...." 로인은 한참 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이렇게 말했다. 시나는 두 차례 위다 왕립 무도회에도 참가해 보았기에, 이 정도로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칼슨의 에티콘 가문은 비록 자작에 불과했으나, 대현자라는 직위 덕분에 왕실에서 크게 후대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세르테이나라는 현 여왕과의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고, 왕으로 격하되버린 전 황제 아이실트 지지파였기에, 전후 작위는 오르지 않았으나 실질적 신분은 크게 올랐다. 작위가 오르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칼슨의 뜻이었다. 영지가 넓어지면 할 일이 많아지고, 그러다 보면 마법사로써의 자신에 충실해 질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로인의 말에 시나가 쓸쓸히 미소지었다. "어머니라...." 켈파와 테리트론, 그리고 오이니아는 매년 거르지 않고 몇 차례씩 피아텔의 집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가해 왔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비록 피아텔의 헬튼 가문의 연회가 지금처럼 화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당한 것이었다. 오이니아가 켈파의 옷차림을 다듬어 주며 말했다. "대단한데. 켈파. 이렇게 차려 입으니까 못 알아보겠어. 가만 있어봐, 칼라가 비뚤어 졌잖아." 켈파는 오이니아의 손길에 어색해하며 말했다. "아.... 괜찮아. 어차피 조금 있으면 다시 흐트러질텐데...." 피아텔은 이런 곳에 경험이 많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한 행동을 곳곳에서 보였다. 어깨를 스칠 때마다 하는 제스춰라던지, 시선을 마주 쳤을 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고개를 숙이는 동작 따위를 말이다. 하지만, 그에 신경 쓰고 그 점을 칭찬해 주는 사람은, 당연하거니와 없었다. 요즘 들어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끼는 그였다. 테리트론은 일찍부터 음식들이 놓여있는 테이블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벌써 적포도주를 네 잔이나 비워낸 그는 양손에 한잔씩을 들고 로인과 시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음.... 나도 귀족이나 되어 볼까? 꽤 맘에 드는 분위기인데?" 그의 말에 시나가 포도주 잔을 받아들며 톡 쏘았다. "어부가 좋다면서?" 테리트론은 미소를 지었다. "귀족 어부, 아니면 어부 귀족을 하면 되지." "멍청이. 바보 같은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찼구나." 시나의 말에 테리트론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렇게 아름답게 꾸미고, 그런 험한 말을 하면 안되지~!" 시나가 활짝 웃었다. "그래도 눈을 달렸구나. 아름답다는 것도 알아보고." 한편, 란테르트는 슬슬 분위기에 몸이 지쳐 감을 느꼈다. 사실 그의 체력이야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것이다 보니, 서있는 것만으로는 결코 지칠 이유가 없었으나, 종종 말을 걸어오는 사람에게 그가 평소에는 결코 하지 않는 사교적인 말, 그래 보았자, "아닙니다.", 와 "그렇습니다" 가 전부였지만.... 그러한 말들을 하다 보니 왠지 몸에 피로가 조금씩 누적되고 있었다. 미셸튼과 히시아블은 이시테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켈리를 통해서 말이다. 에디엘레 검술 강습소의 자칭, 타칭 2인자인 히시아블은 금발을 뒤로 묶은 건장한 남자였는데, 턱이 약간 네모진 것이 남자답게 생겼다. 그렇다고 우락부락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있어야 할 곳에 적절한 근육이 있는 정도였다. 사실 검을 쓰는데 두꺼운 근육은 오히려 방해물이다. 속도를 떨어뜨리니 말이다. 몸이 너무 왜소하면 힘을 낼 수가 없고, 비대하면 스피드를 내는데 불리하니, 검을 익히는 사람은 보통 몸이 자연스러울 정도의 근육만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시테는 요 근래 들어 가장 재미있는 연회를 치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란테르트 때문이 아닌 미셸튼과 히시아블 덕분이었다. 사실 연회라는 것은 들뜨기 쉬운 분위기이다. 화려한 옷차림에 알코올, 음악, 춤을 추는 사람, 웅성거림, 이 어느 하나도 사람의 기분을 띄우지 않는 것이 없다. 이시테 역시 사람이다 보니, 연회장에서는 어느 정도 기분이 들뜨기 마련이었고, 이렇게 두 명의 남자가 곁에서 계속해 이야기를 하고, 또 질문을 던지니 꽤 흥겨운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웬일인지 오늘 미셸튼은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시테의 기호에 맞는 이야기들을 말이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켈리는 이시테가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띄우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켈리는 몇 일전 미셸튼에게 찾아가 이시테가 좋아하는 것들의 리스트를 줄줄 불어주고 왔다. 물론, 이야기를 하던 끝에 우연을 빙자하여 말이다. 켈리의 영악함은 순수한 이시테 정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사실, 켈리는 란테르트가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느 정도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여러 모로 살펴본 결과 아가씨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라는 결론을 얻었다. 하나가 아니면 다른 하나에게 매달려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란테르트씨와 스승님은 어떤 관계지?" 이야기를 하던 끝에, 히시아블이 미셸튼에게 물었다. 함께 검을 공부하는 동료이기에 두 사람은 꽤 친한 친구였다. 아까부터 히시아블은 이것을 묻고 싶었는데, 왠지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가 있는 곳에서는 이야기하기가 거북스러웠다. 마침, 두 사람이 음식이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기에 틈을 타 이렇게 물은 것이다. 그의 말에 미셸튼이 대꾸했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더군. 란테르트 님도 검사야. 그것도 굉장한 실력의." 있는 그대로를 말하기는 무엇한 점이 있어 적당히 둘러댔고, 히시아블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미셸튼은 다른 사람을 크게 칭찬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히시아블은 이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굉장하다고 이야기한 란테르트라는 남자를 한 번 흘끔 바라보았다. 하지만 히시아블이 보기에 굉장한 쪽은 오히려 모라이티나였다. "모라이티나양, 대단한 미인이지?" 히시아블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고, 이내 이시테를 의식하며 말했다. "이시테 님과 누가 더 아름다운지 이야기하기가 힘들 정도야." 그의 말에 이시테가 미소를 지으며 켈리의 손에 글자를 썼고, 켈리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가 말씀하시길, 모라이티나 님은 이시테 님이 보기에도 굉장히 아름다운 분이라고 합니다." 이시테의 말에 히시아블은 멋쩍은 듯 뒤통수를 끌쩍였고, 미셸튼이 그런 그에게 말했다. "넌 여자의 외면적 아름다움만을 보는 것이냐? 네가 모라이티나 님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일텐데.... 몇 해 동안이나 보아온 이시테 님과 비교를 하다니...." 히시아블은 그런 미셸튼의 말에 훗 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 그런 소리냐? 어리기는." 미셸튼은 웃기만 할뿐 그의 말에 더 이상 응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보니 평소 연애관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듯 했다. 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음식 테이블에 다가간 모라이티나는 조그마한 접시를 하나 들고, 포크를 잡은 채 맛있어 보이는 음식 몇몇 가지를 담았다. 한가지 음식당 결코 한입거리 이상은 담지 않았고, 그렇게 서너 종류의 음식을 서로 닿지 않게 담자 그릇이 거의 다 차버렸다. 반면 란테르트는 평소 좋아하던 것을 반 접시쯤 담아 조용히 모라이티나와 함께 먹기 시작했다. "아! 에디엘레 가의 요리사 실력이 대단한데요. 이 미트볼은 소스가 달콤하면서도 느끼함이 없고.... 이 샐러드는, 재료의 맛 하나 하나가 모두 살아있으면서도 드레싱 소스에 의해 하나로 잘 조회되어 있어요! 이건 보통 조리사의 솜씨가 아니에요." 모라이티나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음식들을 조금씩 음미했고, 란테르트는 그저 툭툭 입안에 떠 넣으며 그런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그런가? 뭐 맛있는 것 같기는 하네...." 그런 란테르트의 모습에 모라이티나가 미소를 지었다. "란테르트는 매일 건량만 씹어 먹으니 혀가 굳어버린 거라고요." "그럴지도 모르지...." 모라이티나의 질책 아닌 질책에 란테르트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왠 화려한 옷차림의 남자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여들었다. 목에 필요 이상의 힘이 들어간 것을 보아, 모라이티나를 어찌 해보려고 접근하는 모양이었다. "음식에 일가견이 있으시군요. 사실, 아름다운 음식이야말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더할 나위 없는 활력소이지요." 모라이티나가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눈매가 약간 가늘었지만, 상당한 미남이었고, 나이는 30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키는 약간 작은 편이었지만, 모라이티나 역시 큰 편은 아니어서 시선은 약간 높이 두어야 했다. 모라이티나는 그를 한차례 바라볼 뿐 입을 열지 않았고, 상대는 다시 한 번 유들 거리는 혀를 놀렸다. "으음.... 여기 있는 버섯 요리는 쿠와샹스식 소스를 곁들였군요. 버섯 특유의 화한 향기와 은은한 소스의 맛이 어우러지니 이런 맛이 나다니!! 이건 기억해 두어야 겠습니다. 제 영지의 요리사에게 이야기해야 할 것 같으니.... 오! 이 음식은...." 그때, 모라이티나가 그 남자의 말을 끊었다. "당신의 음식 강론 같은 것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어요. 전 여기 이분과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자리를 비켜 주시겠어요?" 그녀의 말에 남자는 순간 낯빛이 푸른색으로 변했고, 이내 란테르트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눈이 무섭기로야.... 어찌 감히 란테르트를 당해 내겠는가? 란테르트가 성가시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한차례 슥 노려보자, 상대는 등뒤로 식은땀까지 흘리며 조용히 물러났다. "고마워요. 쫓아줘서. 조금 더 무섭게 노려보지 그랬어요? 그럼 아예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을 텐데. 호호호." 그런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나 같은 목석보다는 저런 녀석이랑 같이 있는 게 재미있지 않아?"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목석이 낫죠. 저런 느끼한 족속과 음식을 먹으면 속이 느글느글 거릴 테니까요. 란테르트처럼 담백한 사람과 있으면 음식 맛이 열 배는 좋아지는 법이에요. 물은 아무런 맛도 없지만, 저는 그 물을 가장 훌륭한 음료수라고 생각한답니다."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후훗, 하고 낮은 웃음을 웃으며 대화를 전환했다. "그보다.... 모두들 즐거워 보여 다행인걸.... 로인과 시나도 저들과 잘 어울리고 있고...."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로인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고, 잠시 일행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오이니아에게로 향했다. 담갈색의 머리칼.... 이 흔치않은 색의 머리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려온다....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시선이 오이니아에게 향한 모습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뻔하다.... 누구를 생각하는지.... 그녀는 일부로 목소리를 밝게 해 말했다. "맞아요. 게다가, 시나도, 오이니아도, 이시테도 모두 아름다운 걸요. 시나는 건강미가 넘치고, 이시테는 말 그대로 아름답고.... 오이니아는 밝은 미소가 청순해 보이고."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가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 것으로야 누가 모라이티나를 따라오겠어?"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순간 귀밑을 붉혔다. "당신도 그런 말을 할 줄 아는군요." 모라이티나는 살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 그 남자에게 배웠지. 유들유들한 말투 말이야."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말에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당신의 그 느끼한 말투 듣고 싶지 않으니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라고 조금전의 말을 약간 손봐 이야기했고, 말을 마치자 마자 란테르트와 함께 몇 차례 가벼이 웃음을 터트렸다. 연회는 늦은 밤까지 계속 되었고, 란테르트 일행은 경기의 준우승자인 로인 때문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다지 지루함 같은 것은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다음날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연회가 모두 끝났고, 일행은 에디엘레 가에서 마련해 준 방에 지친 몸을 뉘어 새벽잠을 청했다. 무투회는 끝났다. 그리고 일행은 무투회에 참가하기 위해 이 에디엘레 성에 찾아왔다. 그러므로 무투회가 끝난 지금 일행이 성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다. 12월 3일. 결승전이 끝난지 2일째 되는 날, 일행은 에디엘레 가에 떠나겠다는 뜻을 비추었다. 디미온은 섭섭한 표정을 지었으나, 말리지 않았다. 할 일도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말릴 수는 없지 않은가? 제레미아는 별 느낌 없는 표정이었으나, 다행이다, 라는 표정이 조금 더 강했다. 미셸튼의 경우에도 아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들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이시테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을 하느라 아무런 표정조차 내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음은 지금 그를 따라 가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10년간이나 마음에 간직해온 남자.... 10년 동안 기다려 왔던 남자.... 지금 헤어지면 다시 얼마나 지난 후에 다시 만날지 알 수 없는 남자.... 그리고, 이대로 이렇게 보내면 얼마나 많은 후회를 할지 알 수 없는.... 그.... 하지만.... 도대체.... 자신이 따라 간다고 해서 무얼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요 며칠동안, 이시테는 낮의 시간 거의 대부분을 란테르트와 보냈다. 그리고 결론을 얻었다. 자신이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적어도 지금의 자신이 란테르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도 없었다. 상냥하고 따듯하게 그의 마음을 감싸준다.... 사실은 이런 것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있어서는 결코 모라이티나를 따라갈 수 없었다. 훨씬 어른스럽고.... 훨씬 다정하고.... 게다가 란테르트에 대해서도 자신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다. 그런 그녀 이상으로 란테르트를 위로해 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외부로부터 그를 지켜 줄 수도 없다. 대학까지 다녀 지식은 상당한 편이지만, 지금 그에게 도움이 될만한 지식은 한가지도 없다. 고대 문자가 어쨌건, 파모로아 황국의 예법이 어쨌건, 아라하시의 역사가 어쨌건.... 지금 란테르트에게 무슨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이시테는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를 따라 가고 싶었지만.... 명분도, 이유도 없다. 떼를 쓰고 따라간다고 이야기 해 보았자 엄마의 반대가 불을 보듯 하다. 몰래 따라간다 하더라도, 금새 붙잡혀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란테르트를 따라간다는 것은 스스로도 원하는 바가 아니다.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오갔다. 도대체.... 자신이 어떻게 하면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것인가? 순간 이시테의 머릿속에 퍼뜩 한가지 생각이 스쳤다. 란테르트의 건강, 이라는 것에 생각이 닿았고, 이내 리브르 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의술. 그것을 배우는 것이다. 막 이시테가 이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려 란테르트 일행을 바라본 순간, 에디엘레 가의 본성 앞의 공터에서, 일행은 디미온 등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이곳에 들려주겠나?" 디미온은 여러 조카들과 란테르트, 모라이티나에게 잘 지내라는 인사를 한 후, 이렇게 물었고, 란테르트는 그의 말에 슬쩍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글쎄요.... 이 근처에 지날 일이 생긴다면, 들리겠습니다." 란테르트의 말에 디미온은 웃으며 왼손을 앞으로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란테르트는 그의 악수를 받아들였다. 그때, 이시테가 켈리의 손바닥에 무어라 몇 자의 글자를 새겼고, 켈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시테를 향해 외쳤다. "그건 안돼요!" 켈리의 돌연한 말에, 일행 모두는 고개를 돌려 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안된다니.... 이시테는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자 볼을 살짝 붉혔다. 하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켈리의 손바닥에 다시 글자를 새겼다. [난 지금 란테르트와 함께 리브르가로 가겠어. 의술을 배울 꺼야. 모두에게 그렇게 이야기 해.] 켈리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디미온에게 말했다. "이시테 아가씨께서.... 리브르가로 가 의술을 배우고 싶으시답니다. 지금 란테르트 님을 따라 당장 이요...." 켈리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리브르 가를 경유해 가시게 되겠지요? 소피카로 가려면...." 이시테의 폭탄선언에 제레미아는 얼굴이 하얘졌고, 디미온도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미셸튼도 썩 편치는 않은 얼굴 표정을 했고, 이시테의 동생 셸론은 엄마의 손을 잡고는 자신의 말 못하는 누이를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제레미아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얘야. 이시테.... 그게 무슨 소리니? 왜 갑자기 의술을.... 넌 역사가 좋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시테가 켈리를 통해 답했다. "아가씨는.... 갑자기 의술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드셨대요.... 당장 떠날 테니, 어서 준비를 해 달라고 하십니다." 제레미아는 고집스런 표정을 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딸을 어찌할 바 모르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뒤이어 디미온이 말했다. "얘야.... 내년이면 대학을 졸업하지 않느냐? 그것은 어떻게 할거지? 게다가.... 집에 온지 이제 겨우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다. 뭘 그리 서두르느냐? 의술을 배우고 싶다면, 대학을 마친 후 시작해도 좋고.... 게다가, 이 에디엘레 성안에도 훌륭한 의사 분들이 여럿 계시다. 그들에게 어느 정도 기초를 배운 후 리브르가나, 메아가로 유학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디미온의 말에 이시테는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켈리의 손에 글자를 적었다. "꼭 지금 해야 하시겠답니다." 디미온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때.... 모라이티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 이시테의 손목을 잡았다. "저와 잠시 이야기를 하시겠어요?" 이시테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곧 생각을 고쳐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게 해 두고 싶어서였다. 모라이티나를 말로 승복시킬 수 있다면 일단 란테르트 일행 모두를 납득시키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으니 말이다. 모라이티나와 이시테는 함께 일행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갔다. 모라이티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오른손을 다정히 쥐었다. 이시테는 따듯한 그녀의 손에 자신의 손이 잡히자 순간 마음이 이상하게도 편안해 지는 듯 했다. "란테르트를 위해 의술을 배우려는 것이지요?" 모라이티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물었고, 이시테는 약간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이시테는.... 그렇게 까지 란테르트를 위해 마음을 써 준다니...." 모라이티나의 말에 이시테는 귀를 붉게 물들였다. 직선적으로 칭찬을 하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말이에요.... 소용없는 일이랍니다. 당신이 리브르 가와 메아가 모두의 의술에 정통하게 된다 하더라도.... 란테르트의 병을 치료할 수는 없어요...." 이시테는 모라이티나의 약간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새겼다. [그런 말로 저를 떼어놓으려 하지 마세요. 전 반드시 하겠어요....]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사람들이 없는 쪽의 귀 근처로 가져갔다. 귀를 머릿속으로 고정해 놓은 장신구를 풀었고, 그녀의 한 뼘 가까이나 되는 긴 귀가 금발 사이에서 불쑥 솟아났다. 이시테는 그 모습을 멍청히 바라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 엘프랍니다. 인간이 아니에요. 우리 엘프들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학문체계를 갖추었고.... 의술에 있어서는 특히 뛰어난 성과를 이루었답니다. 숲속에는 이런 저런 알 수 없는 질병들이 많이 생겨나기에, 그런 것들과 싸우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지요." 이시테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엘프라니.... 신화 속에 등장하는.... 그 전설상의 종족이라니.... [저.... 정말 엘프인가요?] 이시테는 잘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움직여 이렇게 물었고, 모라이티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왜 속이겠어요? 저도 이시테와 마찬가지로, 저 둔하고 꽉 막힌 남자를 좋아하고 있어요. 아니, 사랑하고 있어요. 15년 전부터 죽.... 그의 불행을 함께 지켜 보아왔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가 아파하는 모습이 마음 아파요."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이시테에게 쓸쓸한 미소를 내 보였다. 이시테는 그런 모라이티나의 모습에 코끝이 찡 해왔다. 지금 이시테 앞에는 그녀가 보아왔던 밝고 명랑한 아가씨였던 모라이티나 대신, 누군가를 몹시 사랑하고 있는 슬픈 눈을 하고 있는 모라이티나가 서 있었고, 그 모습에 이시테 마저도 덩달아 마음이 무거워 짐을 느꼈다. "이시테는 모르겠지만.... 지금 란테르트의 마법력으로는 치료 못하는 상처가 거의 없어요. 마법으로 병은 치료할 수 없지만, 어떤 병이 있다는 것 정도는 쉽게 눈치챌 수 있지요. 그런 마법력을 가진 란테르트가 찾아내지 못하는 병이라면.... 어떤 의사도 찾아내거나 고칠 수 없어요. 엘프인 저로써도.... 그가 왜 피를 토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답니다." 이시테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낙심했다. 불가능하다니.... 정말.... 불가능하단 말인가?.... 막 이시테가 이런 생각을 할 무렵, 모라이티나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이시테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맑은 초록색 눈을 바라보았고, 모라이티나는 이시테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한가지 약속을 하지요. 여기서 마기아까지, 길어야 20일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꺼 에요.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다시 그곳에서 저들 네 명의 고향에 가고 나면 모두 합쳐 50일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한 달하고 20일 정도.... 내년 2월이 되기 전 꼭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겠어요. 물론, 란테르트와 함께요. 그 정도 시간, 기다려 줄 수 있겠어요? 그때는 꼭 오랜 시간을 이곳 에디엘레 성에서 머물겠어요. 로인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라고 한다면, 란테르트도 반대하지 않을꺼에요." 모라이티나는 이시테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사실.... 이대로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었으나.... 엄마도, 아빠도, 동생도, 그리고 켈리도 원치 않는다. 그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란테르트를 따라가 보았자.... 자신은 짐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그에게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한달 남짓한 그 시간동안.... 그를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모라이티나는 조용히 미소 지은 채 이시테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시테는 조용히 눈을 들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상태로 잠시동안의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오갔고.... 이시테는 이윽고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모라이티나는 이시테의 결정에 환히 웃었다. "고마워요. 제 말에 따라주어서."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귀를 다시 장신구로 고정해 머리 속으로 감추었고, 이시테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라이티나가 막 몸을 돌려 란테르트 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 할 때, 이시테가 그녀의 손을 잡아 그곳에 글자를 썼다. [언니도.... 좋은 사람 같아요. 다음에 성에 들렸을 때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어요.] 이시테는 이렇게 말한 후 막 자신을 바라보는 모라이티나를 향해 빙그레 미소지었고, 모라이티나는 이시테의 손을 다시 한 번 다정히 잡아주며 란테르트에게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이시테는 켈리에게 가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이시테의 이 말에 켈리는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으로 디미온 일가에게 그 사실을 전했다. "잘 생각했구나." 디미온은 이시테에게 이렇게 말하며 다시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고, 이내 일행 모두와 함께 성을 나섰다. 디미온 일가와 미셸튼은 본성 앞에서 그런 그들을 전송했다. 이시테는 마음 같아서는 성밖에까지 배웅을 하고 싶었으나,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아쉽지만 란테르트의 뒷모습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란테르트와 일행은 외성 밖의 여관에 있는 말을 가지러 남문 쪽으로 향했다. 도중,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가 어떻게 이시테의 마음을 돌렸는지 갑자기 궁금해졌고, 고개를 돌려 곁에 걷고 있는 모라이티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시테양의 마음을 돌린 거야?" 란테르트의 물음에 모라이티나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비밀이에요." 그 모습에 란테르트는 머리를 한차례 끌쩍였다. 10. 불꽃이 쏟아지는 밤과 눈이 내리는 밤의 연인(?)들. 에디엘레 가를 벗어난지 3일. 일행은 에노사의 세 교역로 중 중로를 따라 서서히 서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막 4일 째 되는 날 오전에 에노사의 수도 고아성에 도착했다. 고아성의 규모는 일곱 대륙의 수도 중에서도 상당한 편에 속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성곽의 크기만으로는 위다의 수도 카타 이상일 것이다. 한 변이 3휴하(1휴하=약 1킬로미터)나 되는 정사각형 모양의 이 성 안에는 수백 채나 되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애초의 계획은 무시한 채 무질서히 분포되어 있었고, 도로는 고아 본성과 연결된 중앙로와 몇몇 중심로를 제외하고는 완전 미로화 되어 있었다. 일행은, 하지만 이 커다란 도시 안에 들어가 보고자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고, 그저 고아성의 고풍스러운 화강암 성벽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며 스쳐 지나려 하고 있었다. 그때, 피아텔이, 자신에게서 리더 자리를 빼앗아간 란테르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성에 잠시 다녀올 일이 있습니다." 피아텔은, 그 무투회에서의 패배 이후로 약간은 의기소침한 듯 보였으나, 평소에는 거의 그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패배를 전혀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은 듯 했다. 피아텔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오이니아가 곁에서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오이니아의 물음에 피아텔의 얼굴에 잠시 당황하는 빛이 스쳤으나, 이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켈파와 함께 하기로 한일이 있거든. 수도에 오면 하기로 예전부터 약속했어." 피아텔이 이렇게 말하며 켈파를 바라보자 켈파는 어엉, 하는 보기에도 어색한 대꾸를 했다. 이 둘의 이러한 모습에 오이니아는 더더욱 궁금해하며 다그쳤다. "뭐야? 나는 알면 안되는 거야? 설마 성에 나를 빼놓고 단 둘이 가지는 않겠지?" 오이니아의 말에 피아텔은 심히 곤란한 표정을 지며 우선 란테르트에게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오이니아에게 말했다. "미안해. 너를 데려가기는 조금 곤란해.... 가자 켈파." 켈파는 오이니아의 눈치를 살피다 피아텔의 부름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말머리를 나란히 해 쫓아갔다. 오이니아는 약간 서운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이내 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시나가 테리트론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시나는 아무래도 테리트론이 저들의 친구이고 하니, 그에게 이렇게 물었고, 테리트론은 시나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테리트론이 무언가 생각해 낸 듯 보이자,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오이니아까지 그에게 다가왔다. "뭔데 테리트론?" 오이니아가 물었고, 테리트론은 슬쩍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여자! 저 녀석들 분명 수도에 오면 이름난 요상한 술집에 함께 가자고 약속 했을 꺼야. 치사한 놈들. 나만 떼어놓고.... 우리 아버지도 내가 어렸을 때 그랬지. 엄마한테는 일을 나간다고 이야기하고는 나를 데리고 술집에 가서는.... 나만 떼 놓고 혼자 들어갔었어. 치사스런 인간." 테리트론의 말에 그 이야기를 들은 시나와 로인, 그리고 오이니아 이 세 사람의 표정이 촤자작, 하는 소리와 함께 얼어붙었다. 특히 오이니아의 경우에는 낯빛도 살짝 바뀐 듯 했다. 그때, 시나가 손을 들어 테리트론의 뒤통수를 한데 탁 하고 때리며 말했다. "도움이 안돼." 오이니아는 짧게 한숨을 쉬며 자리를 약간 옮겼고, 로인은 어제 읽다 남은 책을 꺼내 페이지를 조용히 넘겼다. "농담이었어." 테리트론은 오이니아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자 이렇게 말했고, 시나는 다시 눈을 반짝였다. "그럼 이유를 알고 있어?" 테리트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오이니아를 향해 약간 큰소리로 말했다. "오이니아!" 테리트론의 부름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테리트론은 손을 살짝 흔들었다. "너 내일 생일이지? 미리 축하한다. 내일 되면 까먹을지도 모르니까." 테리트론의 말에 오이니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역시 테리트론은 기억력이 뛰어나." "뭐, 내 기억력이야...." 테리트론은 이렇게 말하며 시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시나는 테리트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어떻게 알았어?" 테리트론이 말했다. "저 쪼다 녀석들이 감히 오이니아 님을 떼 놓고 성안으로 간다는 것이 가능 할 것 같아? 이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 말이야." 그의 말에 시나는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화장실 갈 때와 목욕할 때를 빼놓고는 단 한시도 그녀와 떨어져 있기를 싫어하는 그 두 남자가 그녀를 떼 놓고 성안으로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눈치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 란테르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 모라이티나가 일행을 향해 말했다. "여기서 잠시 쉬자. 저들이 돌아오려면 짧게 잡아도 서너 시간은 걸릴 테니까. 점심 준비도 해야 하고." 그녀의 말에 일제히 일행은 말에서 내려섰다. 피아텔과 켈파가 돌아온 것은,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였다. 오이니아는 처음에는 별 느낌 없이 두 남자가 없는 시간을 보내다가, 이렇게 시간이 점점 흐름에 따라 호기심과 서운함이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두 사람이 멀리서 조그마한 점으로 나타날 때가 되어서야 이런 생각이 퍼뜩 들었다. 단지 반나절 동안 헤어졌을 뿐인데.... 그 시간이 이렇게나 길고, 또 어색하게 느껴지다니.... 라는 생각 말이다. 피아텔과 켈파가 돌아오자 마자 오이니아는 그 두 사람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성안에 무슨 일로 간 거야?" 라는 물음이 그 몇 가지 물음의 주된 내용이었으나, 피아텔과 켈파는 계속해 말을 빙빙 돌릴 뿐 꼭 집어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오이니아는 결국 토라져 버렸고, 피아텔과 켈파는 그런 그녀에게 쩔쩔 매었으나, 성안에 간 이유를 이야기하지는 못하였다. 점심을 챙겨 먹고, 일행은 계속해 소피카로의 여행을 계속했다. 일행이 걷고 있는 길은 무역로였다. 10월 중순과 하순의 추수기가 끝난 후, 11월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무역은, 12월 초순인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잘 다듬어진 도로 위로는 곡물을 하나 가득 실은 수레가 길게는 10여대나 줄지어 지나갔다. 그럴 때는 또각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드르럭, 삐그덕 거리는 바퀴의 마찰음이 한참동안이나 이어지곤 한다. 신경 써 바라보면 재미있는 광경이다. 물론, 졸음에 겨워 꾸벅 꾸벅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마부의 입장에서는 조금도 즐겁지 않은 일이겠지만 말이다. 다시 저녁때가 되었다. 일행은 지금 서남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그 덕에 낙조를 눈앞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대륙에서 가장 곡물 소출량이 많다는 헤아 평야 저편으로 지는 태양은, 비록 겨울의 것이었지만, 가을의 것 이상으로 풍성한 붉은빛의 내고 있었다. 오이니아는 어느덧 화를 풀고 피아텔과 켈파 이 두 사람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는 별개로, 시나와 테리트론, 이 두 사람은 이런 저런 쓸모 없는 말싸움과 대화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로인은 이 두 사람 곁에서 이야기를 듣는 듯 마는 듯 말을 몰고 있었다. 이들 일행의 배열은 언제나 이러했다. 가장 앞열에 피아텔등 3인, 그리고 그 다음 열에 시나들 3인, 다시 그 뒤에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가 말을 몰며 느긋이 이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내일이 오이니아의 생일이라는데, 어떻게 할건가요?" 막 즐겁게 웃고 있는 오이니아를 바라보며 모라이티나가 란테르트에게 물었고, 란테르트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한차례 슬쩍 가로 저었다. "그런 쪽이야 모라이티나가 나보다 나을 테니.... 알아서 해."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자기 생일도 모를 남자." 란테르트는 쓰게 미소를 지었다. "알고는 있어.... 언제 다시 찾아올지.... 기다리다 지쳐 종종 잊어버리기는 하지만...." "호호. 13월 6일이라고 했지요? 3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생일이라.... 왠지 멋있어 보이지 않아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대답에 미소를 짓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내 생일은 알고 있어요?"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대답하지 못하였다. 다시 한 번 이 엘프 아가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 자신이 생일을 이야기했던 때가.... 15년전 이카르트와 함께 여행했을 때일 것이다. 그런.... 그때 한 번 이야기한 생일을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데.... 자신은 단 한차례도 그녀에게 생일을 물어본 적조차 없다니.... "이곳 역법으로 9월 9일 이에요. 잊어버리면 안돼요! 내년에는 당신이 사 준 선물을 꼭 받고 싶으니까."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잊지 않도록 노력할게. 아, 팔에 문신이라도 새겨 놓을까? 티나의 생일, 9월 9일. 하고...."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고삐를 잡고 있던 팔을 슬쩍 들어 올렸고, 티나는 서둘러 그를 말렸다. "그만 둬요. 무슨.... 그런 짓까지 해서 기억할 것 없어요. 그냥 내가 내년 9월쯤 다시 가르쳐 드릴께요."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당황하는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다음날. 모라이티나는 켈파와 피아텔을 통해 오이니아가 좋아하는 음식들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얻어 근처 마을의 시장에 들려 재료를 구입해 왔다. 그리고는, 점심때를 조금 넘긴 시간부터 오이니아와 함께 오이니아의 생일 파티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모라이티나는 오이니아에게, "생일인 만큼 쉬어", 라고 이야기했으나 이제 19살이 된 이 담갈색 머리칼의 아가씨는 말을 듣지 않았다. 피아텔과 켈파는 아침을 먹으며 생일 축하해, 라고 오이니아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오이니아는 마음속으로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었다, 라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이야기했으나.... 단지 그 한마디만으로 자신의 생일을 넘기려 하는 이 두 남자에게 굉장히 서운한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가장 먼저 생일 축하해 라고 이야기 한 것도 아니다. 테리트론과 시나, 로인 등이 축하한다는 말을 한 후에나 이제야 생각난다는 듯 무성의하게 축하해, 라고 이야기했다. 하다못해, 만난지 한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모라이티나 마저도 자신을 위해 여러 음식들을 준비하고 있는데.... 10년 이상이나 사귀어온 이 두 남자가 자신을 이렇게 대하다니.... 오이니아는 이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섭섭한 마음이 커져갔다. 요리 준비가 모두 끝난 것은 이미 태양이 서편으로 뉘엿 뉘엿 져 가는 시간이었다. 미리 준비한 두 개의 모닥불에 불을 붙여 막 바닥을 잠식하던 땅거미를 약간이나마 지웠고, 하나, 둘 오이니아를 위한 파티의 준비가 끝나가고 있었다. 바닥에 흰색의 천을 깔고, 요리를 하나 둘, 그곳에 차려 놓고 나니, 비록 야외였으나, 꽤 화려한 연회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12월의 차가운 공기 마저도 이들의 분위기를 식히지는 못하였다. 오이니아는 자신의 생일 상을 자신을 차리던 도중 고개를 돌려 피아텔과 켈파 이 무정한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오이니아는 처음에는 그저 볼일을 보러 갔으려니....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두 번, 그리고 세 번째 볼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자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두리번거려 그들의 행방을 찾았고, 오래지 않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이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차라리, 자신을 도와 파티 준비나 할 것이지.... 피아텔과 시나, 로인 마저도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하고 있는데.... 저런 곳에서 단 둘이 노닥거리고 있다니.... 어느덧 모든 준비가 끝났다. 두 개의 모닥불에 더해 다시 두 개의 나무더미에 불을 붙이니 주위는 상당히 환해졌고, 겨울밤의 차가운 바람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사실, 시간은 아직 저녁을 먹을 때도 되지 않았으나, 겨울에는 일찍 해가 져 이미 한밤중과 같이 캄캄하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한창 하현달이 뜰 시기여서 하늘에는 무능력한 별만이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하현달은 새벽이나 되어서야 무성의하게 빼곰히 동쪽 하늘에 고개를 내민다. 막 다른 사람들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을 무렵이나 되어서야, 피아텔과 켈파가 자리에 돌아왔다. 오이니아는 고의로 이 두 사람의 시선을 외면했으나, 피아텔과 켈파는 짐짓 신경 쓰지 않는 척 하며 오이니아의 곁에 마련된 자신들의 자리에 앉았다. 미리 마을에서 구워온 케이크가 한 가운데 놓였고, 오이니아와 모라이티나가 특별히 만든 몇몇 요리들이 주위에서 향기로운 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모두들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했다. 모라이티나의 경우에는 아까 마을에 갔다가 마음에 들어 사 온 조그마한 봉제 인형을 오이니아에게 주며 이렇게 말했다. "너무 귀여워서 샀어. 인형을 가지고 놀 나이는 지났지만.... 그냥 받아 둬." 오이니아는 너무나 기쁘게 그 인형을 받았다. "정말 고마워요. 정말." 테리트론이나 시나, 로인은 선물을 주지는 못했으나, 오이니아는 그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축하의 말에 꼬박 꼬박 고맙다는 인사로 답례했다. 란테르트는 평소의, 약간은 무감정한 목소리로 오이니아의 생일을 축하했다. 그리고 오이니아는 그런 그의 축하에 방긋 미소지으며 고맙다는 대답을 했다. 그렇게 피아텔과 켈파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축하 인사가 끝났고.... 이윽고 문제의 이 두 사람 차례가 돌아왔다. 오이니아는 화가 났다는 표시로 입가에 미소를 지운 채 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피아텔과 켈파는 그녀와는 정 반대로 얼굴이 싱글벙글 했는데, 오이니아는 이 둘이 너무나 밝은 표정을 짓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피아텔이 오이니아 앞에 손을 불쑥 내밀었다. 주먹을 꼭 쥐고 있었는데, 오이니아는 아무리 보아도 그의 손에 별다른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축하해 오이니아. 그리고, 이건 선물이야. 켈파와 함께 준비한 거야." 피아텔은 이렇게 말하며 오이니아의 손에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오이니아는 그에게서 그 물건을 받아 쥐며 어리둥절해 했다. 피아텔이 준 것은 하나의 실이었다. 보통 실은 아닌 듯 한 것이, 약간 거칠거칠하고 두께도 굉장히 두꺼웠다. 거무튁튁한 색이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오이니아는 실이 꽤 긴 듯 느껴져 조금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실은 바닥을 따라 어둠 속으로 죽 이어져 있었다. 이 황당한 선물에 오이니아는 어안이 벙벙해져 무어라 이야기해야 할지 순간 망설였다. 그때, 켈파가 모닥불에서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하나 들어올려 오이니아에게 주었다. "도화선이야.... 불을 붙여 봐...." 켈파의 말에 일행은 이제야 모든 것을 깨닫고는, 아, 하는 탄성을 일제히 질렀다. 오이니아의 입가에는 어느 사이엔가 미소가, 그것도 감격의 미소가 돌아와 있었고, 켈파가 건네는 불을 받아 그 거무튁튁한 선에 가져다 대었다.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붙었다. 불꽃은 바닥을 따라 한 줄로 치치직 소리를 내며 나아갔고, 이윽고는 잘 보이지 않는 곳까지 도화선을 태워갔다. 어느 순간엔가 불꽃이 십 수 갈래로 나뉘었다. 그리고.... 파아학, 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뭇한 덩어리 아래로 화려한 불꽃이 솟아났고, 피이잉 하는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펑. 이윽고는 꽃을 그렸다. 다시, 불꽃 하나가, 흡사 유성인양 하늘 높은 곳으로 솟았고, 파학,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붉고 노란빛을 퍼트렸다. 불꽃은 일행의 얼굴에 환한 빛을 비추었고, 오이니아는 너무 기쁜 나머지 눈가가 흥건히 젖어 버렸다. 감격하는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고, 막 네 번째 불꽃이 공중에 솟아올랐을 때, 두 남자의 볼에 감사의 키스를 한 번씩 해 주었다. 불꽃은 25번이나 공중으로 솟았다. 그때마다, 녹색, 파란색, 금색, 흰색, 붉은 색, 보라색.... 수많은 색의 꽃을 하늘에 그려냈고, 한 번 불의 꽃을 피워낼 때마다 일행은 와, 하는 탄성을 질렀다. 켈파가 불꽃을 배경으로 오이니아에게 말했다. "몇 해 전, 마을 축제 때 불꽃놀이를 했었잖아. 그때, 오이니아가 너무 즐거워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어제 고아성에서 사온 거야. 피아텔이 그러는데.... 폭죽을 파는 상점은, 이 에노사 안에서도 몇 군데 없데.... 미안해, 지금까지 속이고 있어서...." 오이니아는 그의 말에 힘차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무슨 소리야! 이런 거짓말이라면.... 얼마든지 해도 괜찮아.... 나 지금 너무 기뻐. 정말 기뻐...." 오이니아는 이렇게 말하며 켈파와 피아텔을 한 번씩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편 테리트론은 시나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하늘을 바라보다가 둑 내뱉듯 중얼거렸다. "쳇, 무리했군. 폭죽.... 굉장히 비쌀 텐데...." 그의 말에 시나가 웃으며 말했다. "몇 해 전에, 칼슨 아저씨 댁에서도 불꽃놀이를 한 번 했는데.... 한 번 하고는 아저씨가 고개를 좌우로 내젓더라.... 불꽃이 터져 화려히 반짝일 때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낭만이 싹트는 듯 하는데.... 삭으러 들며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는, 아이고! 500하르가....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고...." "하하핫, 재미있으신 분이구나." 시나는 테리트론이 이렇게 말하자 빙그레 웃었다. "그래. 참 소탈하신 분이지." "음.... 그 보나, 네 생일은 언제야?" 테리트론이 물었고, 사나가 웃으며 대꾸했다. "훗, 네까짓 것한테 가르쳐 줄 것 같아? 게다가, 가르쳐 준다 하더라도 아무런 보람이 없을 텐데, 뭐 하러 가르쳐 주지?" 테리트론이 곧바로 물었다. "왜 보람이 없어?" "흥. 그야 너 같은 구두쇠로부터 선물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시나의 대답에 테리트론은, 쳇, 하는 소리를 한차례 내뱉고는 하늘로 시선을 돌려버렸고, 그때, 귓가에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5월 13일이야." 테리트론은 시나의 말에 고개를 돌려 시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고, 마침 하늘을 빛내고 있던 불꽃이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고 있었다. 테리트론은 문득.... 그녀의 옆모습이 굉장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으며 툭 내뱉듯 입을 열었다. "5월? 쳇. 12월이면 몰라도.... 그때까지 되면 날짜를 잊어 먹겠군. 한 3월쯤 가면, 생일이 5월인지 조차 기억 못하겠다." 테리트론의 말에 시나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 "호~ 그러셔? 어차피 기대도 안하네요." 짙은, 숱 많은 보라색 머리는 자연스럽게 어깨 뒤로 흩어져 있었다. 도톰한 입술을 달싹여 말하는 그녀 모습을, 테리트론은 더 이상 바라볼 용기가 없어 조용히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한편, 그 모습을 바라보며, 모라이티나는 조용히 란테르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고, 로인은 두 팔을 뒤로 빼 몸을 기댄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 돈을 많이 벌어, 그라난 마을에서 불꽃놀이를 한 번 했으면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엄마에게도, 동생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데이나 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팟. 마지막인 듯한 불꽃이 하늘에 꽃을 수놓았다. 그 후로 잠시동안 더 이상 불꽃이 솟아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피아텔이 오이니아의 손을 슬쩍 잡았다. 오이니아는 피아텔이 갑자기 자신의 손을 잡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고, 피아텔은 미소를 지으며 다른 손을 그녀의 손바닥 위에 잠시 대었다 땠다. 오이니아는 묵직한 감촉에 시선을 손바닥으로 옮겼고, 그곳에 놓여있는 화려한 반지를 발견했다.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간직해 온 거야. 원래 이번 생일에 너에게 선물로 주려고 했던 거였어. 이 불꽃들과 함께 말이지." 오이니아는 잠시 멍하니 피아텔이 건네준 반지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피아텔은 오이니아의 손을 잡은 채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이게 나의 두 번째 선물이야. 좋아해.... 어렸을 때부터.... 모든 일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 정식으로 아버지께 말씀 드릴 꺼야. 너를 신부로 맞이하고 싶다고." 오이니아는 순간 멍해졌다. 이제야 하나의 불꽃에 불이 붙어 공중으로 치솟는다. 하지만, 불량품인 듯 그다지 밝은 폭발을 일으키지는 못했고, 오이니아의 얼굴 반쯤에 빛의 그림자를 드리웠을 뿐이었다. 늦은 밤.... 오이니아는 삭으러 들어가는 모닥불에 왼손 손등을 비추어 보았다. 투명한, 거의 새끼손톱 만한 크기의 보석이 박혀있는 반지는 세공이 굉장히 훌륭했다. 반지라기 보다는 무슨 조각품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네 번째 손가락에 꽂혀있는 그 반지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멀리서 테리트론이 미미하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그녀의 귓가에만 머무를 뿐 들리지는 않았다. 멍하니 있는 사이, 피아텔이 반지를 손가락에 꽂았다. 오이니아는 마음이 혼란했기에, 멍하니 그가 하는 데로 놔두었다. 받고 싶은지, 그렇지 않은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결혼.... 피아텔과 결혼이라니.... 오이니아는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결혼이라는 것 자체는 소녀의 낭만으로써 몇 차례나 머리 속에 그려보고, 또 그려보았었다. 결혼 상대자로 이미 결혼을 한 두 룬의 기사들을 슬쩍 넣어 보기도 하고.... 피아텔과 켈파를 넣어 본적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머릿속에서였다. 사실 피아텔이라는 남자.... 마을 안에서 상당히 인기가 좋다. 지방 영주의 아들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준수한 미모에 매너도 좋은 편이다. 오이니아도 그렇게 생각해 왔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녀는 그에게서 적지 않은 실망을 느끼고 있었다. 던젼에서도.... 그리고 무투회에서도.... 그녀가 평소 보아왔던 피아텔과는 너무 다른 모습을 자신 앞에서 드러내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것들, 이해는 한다. 던젼에서의 일은, 켈파와 모라이티나가 몇 차례나 이야기했듯, 당시 상황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투회에서 그의 모습은.... 다시 생각해 보아도 한심했다. 이런 생각을 하다.... 오이니아는 오른손을 들어 조용히 왼손으로 가져갔다. 반지를 잡았고, 슬쩍 힘을 주어 손에서 빼 내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안 자는 거야?" 켈파였다. 오이니아는 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반지에 가져갔던 손을 떼었다. "아.... 어.... 켈파도 아직 않자고 있었어?" "잠이 안 와서...." 켈파는 언제나와 같은 자신감이 결여된 목소리로 그녀의 말에 대꾸했고, 그 뒤로 잠시동안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끊겼다. "잠시.... 나와 함께 산책 해 줄래?" 잠시 후 오이니아가 켈파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실, 산책을 할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이미 자정을 넘어선 시간이니 말이다. 켈파는 묵묵히 그녀의 말에 따랐다. 검을 챙겨 들었고, 쏘시개로 모닥불을 한차례 정리하고 나무 몇 개를 더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 사이 오이니아는 겉옷을 몸 위에 한 겹 더 두르며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켈파의 손에 들린 횃불의 밝기가 등 뒤 일행들 사이에 지펴져 있던 모닥불의 밝기보다 더 밝아질 무렵, 오이니아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이야기하자." 켈파는 오이니아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후, 근처에 있는 마른 나뭇가지를 한웅큼 가져와 불을 지폈다. 날씨가 쌀쌀해 오이니아 같은 경우는 버티기 힘들 것이다. 불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지만, 두 남녀를 따듯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오이니아도, 켈파도, 서로 마주 앉은 채 불만을 응시할 뿐 한참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오이니아는 어색한 침묵 속에 수많은 상념에 잠겨 있다가 두 손을 깍지껴 앞으로 내밀며 기지개를 켰다. "첫눈이 늦는구나...." "어.... 그래.... 11월 말경에 이미 한차례쯤 내렸어야 했는데.... 사냥이 힘들겠는걸...." 켈파의 말에 오이니아가 물었다. "사냥?" 켈파는 조용히 몇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겨울에 눈이 많이 와야.... 짐승의 발자국이 남아 추적하기 쉽거든.... 지나다니는 길목에 덫을 놓을 수도 있고...." "그렇구나...." 오이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켈파는 잠시 오이니아의 손을 바라보다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 약혼 축하해. 아까는 축하의 말도 제대로 못했구나...." 오이니아는 켈파의 말을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반지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켈파는.... 넋을 잃은 채 자신과 피아텔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 점에 있어서는 비슷하지만.... 유달리 켈파는 심했던 것 같았다. "약혼은 무슨...." 오이니아는 반지를 오른손으로 쥐며 이렇게 말했고, 켈파는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피아텔의 반지를 받았잖아. 그러니까.... 반지는 약혼 반지였고.... 너는 그냥 아무말 없이 그의 반지를 받았으니까.... 그러니까, 약혼...." 켈파는 두 눈을 곧바로 모닥불로 향한 채 이렇게 말했다. 했던 말을 계속 되내이는 것이 보통 마음이 흔들린 것이 아닌 모양이다. 계속해 모닥불 빛을 쏘아보듯 바라보고 있으니, 흰자에 핏줄이 서며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오이니아가 켈파의 말을 끊었다. "난.... 승낙 같은 것 하지 않았어...." 켈파는 그녀의 말에 정신이 퍼뜩 드는 듯 했다. 오이니아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 가만히 있었지만.... 난 아직 결혼 같은 건 생각해 보지 않았어." 그런 그녀의 말에 켈파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두 손을 끊임없이 놓았다 풀었다 하는 것이 조금 불안정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피아텔은.... 좋은 녀석이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많이 도와주었고.... 너도 알잖아.... 내가 괴롭힘을 당하면 피아텔이 와서 구해주고.... 자신감이 조금 지나친 면은 있지만.... 그것만을 빼고는 아주 좋은 녀석이야.... 게다가 귀족이고.... 두 개 마을과 한 개의 도시가 그의 소유니까.... 나.... 나도 피아텔이라면 오이니아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어...." 켈파의 자신 없이 머뭇거리는 말투로 하는 말을 끊으며 오이니아가 물었다. "정말이야?" 켈파는 조물락 거리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짜내듯 답했다. "으...응. 그래. 피아텔이라면.... 오이니아랑 잘 어울릴 꺼야. 키도 크고.... 잘생겼잖아." "도대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오이니아가 돌연 약간 화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평소, 엄부 밑에서 짓눌리듯 자란 켈파는 자신감이 몹시 부족했다. 특히 이렇게 긴장하고 있을 때는 그런 성격이 더 심하게 드러났고, 오이니아는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 그런 켈파에게 약간 짜증을 냈다. 켈파는 오이니아가 화를 내자 약간 놀라며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소 켈파는 오이니아가 화를 내는 모습을 단 한차례도 본 적이 없었다. 잘 울지도 않을 뿐더러 화도 거의 내지 않는 그녀였다. 언제나 잘 웃고, 명랑하다. "미안해.... 괜한 이야기를 해서...." 켈파는 사과했다. 오이니아가 자신 때문에 화가 났다면.... 응당 사과를 해야 할 것이다. 보통 때의 오이니아라면, 오히려 켈파에게 사과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왜 넌 매사에 그런 식이야? 제발 좀.... 네 뜻을 확실히 밝혀 줘.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고. 정말로 너는 내가 피아텔과 결혼해도 상관없어? 진짜 그런 거야? 날 조금도 좋아하지 않아? 그렇지도 않으면서 그냥 피아텔과, 테리트론과 함께 쓸려 다닌 거야? 넌...." 켈파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켈파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조금 큰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고, 오이니아는 깜짝 놀라며 하던 말을 멈췄다. "그럴.... 그럴 리가 없잖아.... 나도 오이니아가 좋아.... 하지만...." "하지만 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확실히 해. 그렇지 않는다면.... 난 그냥 이대로 반지를 손에 끼고 있을 꺼야." 그녀의 말에 켈파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몸을 일으켰고, 손을 뻗어 오이니아에게 내밀었다. "가서 자자.... 그리고.... 반지는 그대로 끼고 있는 편이 좋을 꺼야." 오이니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싫어! 네가 나를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을 꺼야." 켈파는 오이니아를 내려다보았다. "어리구나.... 오이니아는.... 그런 투정이나 부리고.... 그럼, 혼자 이곳에 있도록 해. 난 돌아가 자야겠어." 이렇게 말하며 몸을 돌리는 켈파를 바라보며 오이니아가 외쳤다. "이대로 산짐승에게 잡혀가도 난 몰라. 소리쳐 도움을 청하지 않을 꺼야. 나쁜 사람들이 유괴해 가려해도 반항하지 않을 꺼야." 그녀의 말에 켈파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몸을 돌렸다. "나에게 어떻게 하라는 말이야? 너야말로 날 어지럽게 하지 마! 만약 내가 청혼한다면 넌 받아 줄 꺼야? 아무렇지도 않게.... 너를 좋아하는 피아텔을 내버려 둔 채 내 청혼을 받아 줄 꺼야? 그럴 수 없잖아.... 난 아직 너도 피아텔도 잃고 싶지 않아. 그냥.... 친구로 있는 다 하더라도.... 난 이렇게 너희 둘과 여행하는 것이 좋아." 켈파답지 않았다. 자신감 없이 웅얼거리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게다가 오이니아를 향해 커다란 목소리를 내었다. 오이니아는 그런 켈파의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켈파는 들고있던 검을 검집 채로 바닥에 푹 꽂았다. 바닥이 얼어있었음에도 한 뼘이나 칼집이 바닥을 파고 들어갔다. "만약 너희 둘이 결혼한다면.... 난 너희 둘 모두를 친구로 둘 수 있어.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피아텔을 영영 잃어버릴지도 몰라. 난 그것이 두려워. 어렸을 때부터.... 모자랐던 나와 놀아준 유일한 친구야. 오이니아 너와 만나기도 전에.... 테리트론을 알기 전에.... 유일하게 나와 놀아준 친구야. 난.... 잃고 싶지 않아." "켈파...." 오이니아는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고, 켈파는 고개를 좌우로 거칠게 흔들었다. "반지는 벗지 마...." 켈파의 말에 오이니아가 곧바로 말했다. "싫어." "내 말 들어. 그렇게 하는 편이 너에게는 훨씬 행복할 꺼야." "아니." 오이니아는 이렇게 말하며 반지를 쥐고 있던 오른손을 잡아 당겼다. 아직 몸의 일부가 되지 않은 듯 반지는 쉽게 빠져 나왔고, 오이니아는 반지를 호주머니에 잘 챙겨 넣었다. "아직 결혼 같은건 하고 싶지 않아. 약혼도.... 그 어떤 것도 아직은 싫어." 이렇게 말하며 오이니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많이 기운이 약해진 모닥불을 발로 차 흩어 버렸고, 그 덕에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 졌다. 켈파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고개를 돌려 오이니아를 바라보았다. 비록 모닥불은 사라졌으나, 그녀의 담갈색 눈동자는 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오이니아는 켈파에게 다가왔고,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켈파는.... 마음이 착해. 바보처럼." 그녀의 말에 켈파는 발끈하여 말했다. "그래.... 난 바보...." 하지만 그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하였다. 흡사 아버지의 된 손으로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았을 때처럼 머릿속이 핑 돌았다. 그의 입술을 가린 오이니아의 입술 때문이었다. 오이니아는 곧바로 켈파에게서 떨어졌다. "너는 좋은 사람이고, 훌륭한 남자야.... 나 먼저 돌아갈게...." 이번에는 오히려 오이니아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었다. 그대로 몸을 돌렸고, 어느 사이엔가 일행들이 잠들어 있는 그곳으로 돌아갔다. 켈파는 그때까지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한참 후에나 천천히 바닥에 꽂혀있던 검을 뽑아들었고,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한차례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차 생각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머릿속이 아른거렸다. 술을 세잔 들이키고, 다시 세 잔을 들이켰을 때의 느낌이 이와 비슷하지나 않을까 싶다. 그는 흡사 비틀거릴 것 같은 걸음으로 천천히 자리로 돌아왔다. 오이니아는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어쓰고 있었는데, 잠이 들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켈파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고, 불이 꺼지지 않도록 모닥불을 보살핀 후 조용히 몸을 뉘었다. 하지만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아직 결혼 같은 것을 할 생각이 없어. 미안해. 게다가.... 우리에게는 지금 다른 목적이 있잖아.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마칠 때까지.... 다른 것에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오이니아는 이렇게 말하며 반지를 피아텔에게 돌려주었고, 피아텔은 약간 입맛이 씁쓰레함을 느끼며 오이니아의 반지를 돌려 받았다. "그래?.... 할 수 없지.... 대신, 일을 모두 마친 후에는 내 반지를 받아 주는 거야. 약속 해 줘." "만약 그때까지 네가 훌륭한 남자가 되어 있다면." 오이니아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의 말에 대꾸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며 반지를 돌려준 때는, 모두가 일어나기도 전인 이른 아침이었다. 오이니아는 막 잠에서 깨어난 피아텔에게 반지를 되돌려 주었고, 피아텔은 하룻밤의 기분 좋았던 느낌을 접어버리며 멍하니 반지를 다시 품속에 챙겨 넣었다. 오이니아가 이 시간대를 택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였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돌려줄 경우, 자존심 강한 피아텔이 어떻게 반응할지 약간 두려운 느낌마저 들었다. 예전에는 그의 자신감을 좋아했으나, 지금은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나 둘, 잠에서 깨어났고, 모두들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새로운 하루를 준비했다. 오이니아는 모두에게, "반지의 문제는 조금 더 미루기로 피아텔과 결정했어요." 라고 발표하며 반지가 사라진 왼손을 들어올렸고, 일행 모두는 별다른 느낌 없이 그녀의 결정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 켈파만은 어제 밤의 일을 떠올리며 남몰래 귀밑을 붉히고 있었다. 그렇게 일행은 남서로로 말을 재촉했다. 에노사 3대 교역로 중, 수도 고아 성을 통과하는 중로는 이대로 카나쉬소 호수의 남편을 거쳐 리브르성과 소코 숲을 경유하게 된다. 일행은 일단 이 무역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길도 평탄하고, 도적패 같은 이상한 무리들과 마주칠 확률도 훨씬 적었다. 피아텔은 더 이상 수련을 하자 느니 하면서 떠들어대지 않았다. 다만 묵묵히 아침저녁으로 매일 하던 정도의 검술 연습만을 할뿐이었다. 반면 로인과 켈파는 란테르트에게 하나 둘, 차곡차곡 검술을 배워 나갔다. 원래 기초 정도는 완전히 몸에 베어있던 로인은 하루하루 약간씩 고등 검술을 공부해 나갔고, 켈파의 경우에는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반면 시나와 테리트론은 무사 태평이었다. 시나는 모라이티나의 권유로 요리를 조금씩 배워 나가기 시작했고, 테리트론은 그런 그녀들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가 맛을 봐주는 아주 어려운(?) 일을 해 주고 있었다. 오이니아는 이제 스스로 복수를 하겠다, 라는 생각은 감히 안하고 있었다. 동굴에서 받은 충격도 적지 않았던 데다가, 무투회를 한차례 구경하고 나니, 더더욱 자신감이 사라졌다. 어서 빨리 두 룬의 기사를 만나 부탁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완전히 복수를 포기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러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일행은 점점 소피카 대륙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6년전 대륙을 통일한 헵티슬 황국의 수도 마기아가 있는 소피카 대륙으로.... 12월도 열 이틀이 흘렀다. 오이니아의 생일파티가 있었던 것은 4일전의 일로, 일행은 이날 오후쯤 드디어 에노사 남부의 소코 숲을 배경으로 서 있는 고풍스러운 한 성에 도착했다. 의술에 있어 대륙 제일로 꼽히는 두 가문중 하나인 리브르 가의 성이었다. 리브르성은 특별히 교역 철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이 굉장히 붐비는 편이다. 그런 것이 이렇게 교역 철과 겹치고 나니.... 일행은 도저히 성안으로 말을 몰고 들어갈 재주가 없었다. 우선 성밖의 여관에 방을 잡은 후, 말을 매어둔 채 일행은 성안을 구경하기로 했다. 사실, 이 리브르 가는 굳이 머물러 하루를 보낼 이유는 없는 곳이었다. 이렇게 머무는 것은 모두 다 란테르트 때문이었다.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에게 속는 샘 치고 진찰이나 한 번 받아보라고 강권했다. 물론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막상 이렇게 리브르가 곁을 지나자 이렇게 해야 마음이 놓일 듯 했다. "복잡하니, 둘이 갔다 올게. 곧 돌아오겠어." 모라이티나는 여관을 나서며 따라 오겠다는 시나와 로인을 향해 이렇게 말했고, 시나와 로인은 고개를 끄덕여 찬성했다. "어쩔 수 없죠. 저렇게 복잡한 곳에 들어가면.... 내 모자가 망가져 버릴 꺼 에요." 시나는 이렇게 말하며 두 사람에게 다녀오라는 인사를 했고, 로인은,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라며 두 사람을 여관 정문까지 배웅했다. 모라이티나와 란테르트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성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말 성안은 말 그대로 사람들로 가득했다. 어깨를 부딪히는 것은 예삿일이요, 상점 앞이라도 지날 때는, 어깨를 옆으로 틀어야 간신히 지나갈 길을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러다 보니, 가장 즐거운 사람들은 도둑 길드의 조합원이 아닐까 싶다. 이곳 저곳에서, '도둑이야!','소매치기야!' 라는 외침이 들려온다. 모라이티나는 아무래도 여자였고, 사람들을 뚫고 다니기에 어려운 점이 많았다. 란테르트는 필사적으로 모라이티나에게 공간을 만들어 주려 했으나, 란테르트가 제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십수명이 사방에서 밀어대는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후.... 엔클레이브로 주위에 벽을 쳐버릴까?...." 사람들 사이에 시달리느라 얼굴이 빨개져 버린 모라이티나를 보며 란테르트가 이렇게 물었고, 모라이티나는 가쁜 한숨을 몇 차례 내쉬다 대꾸했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에노사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생각이에요?" 란테르트는 웃었다. "그것도 재미있겠는데?" 하지만, 란테르트의 웃음을 그다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농담....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 자신이 농담 따위를 하다니.... 이러한 생각을 하자 더 이상 웃음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나중 표정은 살피지 못한 채 그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을 것 같더라도 좀 참아주세요. 그건 그렇고, 본성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네요." "그런데.... 무슨 예약 제도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던데...." 란테르트가 말했고 모라이티나가 되물었다. "예약이라고요?"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8년전.... 아니지, 18년전.... 리브르 가와 메아가 모두 들렸었는데, 예약이 필요했었어...."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말에 고개를 좌우로 내 저었다. "생각지도 못했는걸요.... 이를 어쩐다...." 모라이티나의 고민에 란테르트가 미소를 지었다. "뭐.... 새치기를 좀 하지 뭐. 오래 걸리지도 않을텐데...." 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이윽고 리브르 본성에 도착했다. "무슨 일이시오?" 옷차림이 허름한 경우, 경비병은 이런 식으로 묻는다. 그 반대의 경우에, 무슨 일이십니까? 라고 깍듯이 물어 오는 것과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진찰을 좀 받고 싶습니다." 란테르트가 답했고, 두 사람의 창을 든 경비병중 한 사람이 란테르트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한차례 스윽 훑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돈이 있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리브르 가의 가장 엄한 가칙이, 환자는 반드시 문안까지 안내한다, 였기에 조용히 문을 열었다. "들어오시오. 아마 조금 기다려야 할 꺼요. 한 3일쯤 걸릴 것 같으니, 성안의 환자 대기실에서 기다리시오." 란테르트가 그 경비병의 말에 이렇게 대꾸했다. "몹시 바쁩니다. 진찰에 그다지 오랜 시간도 걸리지 않을 것 같으니.... 그냥 잠시 들여보내 주십시오." 경비병은 완강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식으로 해선 안되오. 그냥 기다리도록 하시오." "성에 그리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일행이 밖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재차 란테르트가 부탁했으나, 경비병은 그 육중한 몸매를 곧추 세운 채 권위적으로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절대 안되오!" "무슨 일인가?"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만으로는 나이가 50세쯤 될 듯 느껴졌는데, 란테르트가 바라보니 갈색의 머리칼이 반쯤 새어 있는 중후하게 생긴 중년이었다. 그 남자의 물음에 경비병은 자세를 바로 하고 두 눈으로 하늘을 슬쩍 바라보며 경직된 목소리로 답했다. "예! 이 사람들이 먼저 진료를 받아야 하겠다며 생떼를 쓰고 있어 말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의 말에 50대의 반백의 사내가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외팔이에 검사인 듯한 옷차림새였고, 여자의 경우는 그다지 화려한 옷을 걸친 것도 아니건만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생명은 다 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지금 진료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모두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환자들입니다." 그의 말에 란테르트가 막 대꾸하려는 순간 모라이티나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긴 시간을 빼앗지는 않겠어요. 단지.... 이 사람이 종종 이유 없이 피를 토하곤 하는데, 왜 그런지 혹시 알 수 있을지 궁금해서요. 내장에 손상을 입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폐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종종 피를 큰그릇으로 하나 만큼이나 쏟곤 해요." 모라이티나의 설명에 반백의 중년은 눈에 호기심 어린 눈빛을 띄었다. 란테르트의 증상에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사실 모라이티나가 란테르트의 증상을 이렇게 상세히 설명한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보통 의사라는 사람들은 특별한 병이나 상처 따위에 관심이 많기 마련이었다. 흡사, 마법사가 새로운 마법에 흥미를 가지고, 검사가 새로운 검식에 욕심을 내는 것과 같았다. "아, 아직 소개도 하지 않았군요. 저는 이 리브르 가의 가주인 헤론이라고 합니다." 모라이티나가 웃으며 말했다. "전 모라이티나라고 하고, 이쪽은 란테르트입니다." 모라이티나와 란테르트는 의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약재냄새가 코를 찔렀으나, 고풍스러운 내부장식과 깔끔하게 정돈된 실내의 모습에 어수선하다는 느낌은 전혀 받을 수 없었다. 헤론이라는 남자는 자신의 진료실까지 두 사람을 데려간 후 란테르트에게 자리에 앉아 보라고 권했다. 란테르트는 망토와 짐들을 모라이티나에게 맡긴 후 그가 앉으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고, 모라이티나는 뒤로 조금 떨어진 의자에 짐들을 다소곳이 들고는 앉았다. 란테르트는 이곳이 이미 두 번째였다. 두 자매와 한차례 와 보았었다. 눈이 보이지 않았을 때.... "각혈이 심하시다구요?" 그때, 헤론이 물었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혹시 전에 폐에 상처를 입었다거나 한 적 있습니까?" 란테르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검에 두 차례나 폐를 관통 당했었습니다." 헤론은 그의 말에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처는 완전히 나았습니까?" 헤론은 이렇게 물으며 란테르트에게 접근했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헤론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아마 의사란 족속은 질문하는데 굉장한 소질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란테르트의 대답이 끝나면 끝나기가 무섭게 또 다른 질문을 해대니 말이다. "마법으로 치료한 것입니까?" 란테르트는 그렇다고 답했고, 헤론은 그의 대답에, "상처를 보여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윗통을 반쯤 들어올렸고.... 헤론은 그의 몸을 보자마자 약간 당황해 하며 물었다. ".... 어느 상처가 폐를 관통한 것입니까?" 확실히.... 큰 것만도 십 수개나 되고, 작은 것까지 합치면 100개쯤 되 보이는 상처 중 폐를 관통한 상처를 찾기란.... "심장 부근의 조그마한 검상과 큰 검상입니다." 란테르트의 말에 헤론은 금새 상처를 찾아내었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미 완전히 아물었군요. 상처를 입은 것이 구체적으로 언제입니까?" "15년쯤 되었습니다." 란테르트의 대답에 헤론은 음, 하는 신음을 내뱉었다. "각혈이 15년 동안 계속 되었습니까?"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요즘 들어 있는 일입니다." "팔을 잃은 것은 언제입니까?" 헤론이 물었고, 란테르트가 답했다.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기억으로는 10년 전의 일인데.... 깨어나 보니 바로 몇 달 전의 일이더군요." 란테르트의 말에 헤론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상처를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헤론에게 보였다. 상처는 완전히 아물었지만, 굉장히 보기 흉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헤론은 이보다 심한 모습도 여러 차례 보아왔기에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은 채 란테르트의 상처를 이리 저리 살펴보았다. "상처가 아문지 오래지 않았군요. 아직 중앙부분은 재생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걸 보니.... 마법을 이용해 급속히 치료한 것 같군요. 상처에는 조금도 문제가 없습니다.... 으음.... 더더욱 알 수 없군요...." 란테르트는 그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다시 어깨를 감추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집히는 곳이 있습니까? 더 이상 진료할 것이 없다면.... 그냥 이대로 돌아갔으면 합니다만...." 란테르트의 말에 헤론은 약간 당황하며 몸을 일으켰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대로 돌려 보낼 수는 없습니다. 음.... 아, 차라리 제가 다른 사람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몸의 병은 아닌 듯 싶으니.... 정신이나 마법 등의 문제로 병을 얻은 사람이 조언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습니다. 다만.... 워낙 지체가 높으신 분이라 만나기는 힘들겠으나, 다행히 저와 일면 식이 있으니 추천장을 써 드리겠습니다." 헤론의 이야기에 란테르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레티.... 아니 세르테이나 님을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헤론은 란테르트의 말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한 대륙의 왕의 이름을 마음대로 부르다니.... "예.... 맞습니다." 란테르트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그녀의 말로는.... 정신력과 육체의 괴리 때문에 몸에 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법의 사용을 자제하라고 이야기했는데.... 전 근래에 그다지 강한 마법을 사용한 적이 없지요. 아마.... 그녀라 하더라도 저를 치료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한 후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모라이티나에게서 가방과 검을 받아 들었고, 망토를 몸에 둘렀다. 헤론은 더 이상 란테르트를 머무르게 할 힘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도대체 저 남자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안색도 약간 초췌한 것만을 제외하고는 문제가 거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알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몸보다는, 마음이나 정신 쪽의 어떤 문제 때문인 것 같은데.... 지금의 저로써 해 드릴 말은, 마음의 동요를 받을 만한 일을 하지 마시고.... 될 수 있는 한 안정을 찾아라.... 밖에는 없을 것 같군요. 혹시, 제가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연락을 해 드릴 테니.... 연락처를 가르쳐 주십시오." 헤론의 물음에 모라이티나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미안한 마음 가지실 것 없습니다. 저희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와 본 것이니까요. 연락처는.... 앞으로 몇 달 안이라면 에디엘레 가에 연락을 해 두는 것이 가장 빠를 꺼 에요. 그리고 오랜 후라면 위다의 에티콘 가문에 기별을 주세요." 헤론은 모라이티나의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점이 약간 자존심 상하는 모양이었다. 란테르트는 그런 그의 심정과는 상관없이 간단히 인사의 말을 건넨 후 모라이티나와 함께 리브르 가를 빠져 나왔다. 아까의 그 경비병은 여전 란테르트에게 불만이 있는 표정이었으나, 그저 표정만을 지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금 눈앞에 펼쳐진 사람들의 홍수 앞에 섰다. 꽤 긴 그 거리를 뚫고 지나갈 것을 생각하니.... 모라이티나는 벌써부터 몸이 피곤해 지는 듯 느껴졌다. "날아서 나갈까?" 란테르트가 물었고, 모라이티나는 픽, 웃음을 한차례 터트렸다. "싫어요. 괜히 그러다가.... 성안을 지키는 마법사들에게 공격이라도 받으면 어쩌려구요?" "그럼 다 죽여버리면 되지." 란테르트가 웃으며 대꾸했고, 모라이티나는 그런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치며 말했다. "그런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요?" 이렇게 말하며 모라이티나는 사람들 속으로 걸음을 옮겼고, 란테르트도 그녀를 따라 다시 성밖으로 향했다. 여관에 돌아와 보니, 방에는 로인과 시나, 그리고 테리트론, 이 세 사람이 테이블에 모여 앉아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다른 세 사람은 아마도 다른 방에 모여 있는 듯 했다. "정말 빨리도 돌아 왔네요." 시나는 성에 들어간지 두 시간도 채 흐르지 않아 돌아온 모라이티나와 란테르트를 향해 이렇게 말했고, 두 사람은 한차례 미소를 지었다. 뒤이어 로인이 물었다. "리브르 가에는 들려 보았나요?" 모라이티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로인의 물음에 대꾸했다. "그래. 하지만 역시 모르겠다더구나." 로인과 시나는 약간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에 모라이티나는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안심시켰다. "반대로 생각하면 몸에 병은 없다는 뜻이니 다행인 거야. 무슨 그런 힘없는 표정을 짓고 그러니?" 이렇게 말한 후 모라이티나는 의자의 앞발을 들어 뒤로 약간 젖힌 채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있는 테리트론을 향해 물었다. "다른 세 사람은 무엇하고 있지?" "몰라요. 무슨 앞날에 대한 논의를 한다던가.... 카드 게임이나 함께 하자고 하니까.... 바빠서 안되겠다더군요." 테리트론의 대답에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인 후 모두에게 말했다. "그럼 저녁이나 먹으로 갈까? 이 리브르 성에는, 남쪽 소코 숲에서 자생하는 여려 과일들로 만든 파이가 유명한데. 어때?" 모라이티나의 물음에 로인과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테리트론은, "먹을 것에 관한 누님의 선택은 무조건 옳습니다." 라고 대꾸하며 테이블 위에 흐트러져 있던 카드들을 모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일찍 일행은 말에 몸을 싣고 남쪽으로 향했다. 리브르 가에서 란테르트의 병에 대한 어떠한 해답도 얻지 못한 것이 약간 마음에 걸렸으나, 그렇다고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제 3일 가량만 더 남쪽으로 가면, 에노사-소피카 해협의 에노사측 항구인 겔버스턴에 도착하게 된다. 수도로의 여정 중 절반 가량이 끝나는 것이다. 이날 하루동안 일행은 약간 걸음을 재촉해 소코 숲을 통과했다. 본래 소코 숲은 마물이 많은 곳이었다. 숲이 울창하고 워낙 면적이 넓어 숲의 한가운데는 거의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았고, 그 덕에 마물이 엄청난 수로 번식해 왕실에서도 더 이상 어떻게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 덕에 소코 숲을 통과하던 10개의 길 중 단 3개만을 개방한 채 나머지는 폐쇄해 버렸고, 인근 도시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병사들을 주둔시켜 두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 10년전부터 마물의 수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마을에 출몰하는 마물의 수가 절반이하로 뚝 떨어졌고, 숲을 지날 때 습격을 받는 상인들의 수도 크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소코 숲은 소코 숲이었기에, 일행은 위험하게 그 안에서 노숙을 하느니 숲을 벗어나 인근 마을에서 방을 얻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했다. 물론, 이런 피아텔의 "이곳에서 수련을 쌓자." 라는 의견도 있었으나, 그것은 테리트론의 "지랄하네." 라는 일언지하에 묵살되어 버렸다. 숲을 벗어나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다시 하루가 지나 일행은 에노사 남부의 커다란 상업도시 바임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일박을 거치고 다시 2일 동안 더 남쪽으로 내려와 일행은 이윽고 겔버스턴 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에노사의 최북단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물론 중간에 이곳 저곳을 들려 많은 날을 체류했지만, 꼬박 한 달하고도 보름이 걸린 것이다. 란테르트는 겔버스턴에 발을 들여놓으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걸어서 왔다면.... 피치토 마을에서 이곳까지 12일이면 도착했을 텐데.... 겔버스턴 항은 항구를 감싸고 있는 하얀 절벽이 인상적인 곳이다. 산이 절반쯤 잘려 나가고는 그 하얀 속살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모습은 이곳에 터를 박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편안함을, 그리고 여행자들에게는 눈의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12월도 16일이나 흘렀고, 날씨는 쌀쌀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오이니아의 일행은 지금 상당히 들뜬 모습이었다. 고향이 바닷가에 위치해 있었기에 바다를 바라본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즐거운 기분이 드는 모양이었다. 날씨는 아침 무렵부터 찌뿌둥 했고, 잿빛의 하늘 덕분에 바다 역시 우중충한 색을 띄고 있었다. 테리트론은 그런 부둣가에 서서 폐 속 가득 바닷바람을 들이 마셨고, 심호흡을 마친 후 한마디 중얼거렸다. "눈이 오겠군...." 곁에서 보고있던 시나가 물었다. "어떻게 알아? 흐리기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 눈이 내릴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 테리트론이 대꾸했다. "후후. 일기예보에 관해서는 어부를 따라올 사람이 없지." "별개 다 자랑이군." "당~연하지." 한편 테리트론 바로 곁에 서있는 켈파는 멀리 보일 듯 말 듯 한 대륙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다지 크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소피카로구나...." "응....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두 룬의 기사 님을 만날 수 있어." 오이니아가 그런 그의 말에 대꾸했다. 곁에 있던 피아텔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멀리 바다를 보다가 오이니아에게 물었다. "바다는 언제나 보면서도 질리지 않는 모양이구나." 오이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어렸을 때부터 보아오면서 자란걸. 오히려 편해.... 바다 전체가 고향 같다는 바보 같은 느낌마저 든다니까." "결코 바보 같지 않아. 오이니아는 감수성이 풍부해서 그런 거야." 피아텔의 말에 오이니아는 살짝 미소지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닷바람에 그녀의 긴 담갈색 머리칼이 머리 뒤로 흩날렸다. "이곳에서도 바람은 부는구나...." 오이니아는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휘날리는 머리칼을 몇 차례 손으로 쓸어 모으다가 잠시 후 손을 놓은 채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곁에서 듣고있던 켈파도 피아텔도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전혀 이해할 수 업었다. 한편 이 순간 이 아이들의 보모와 인솔교사는 선박조합에서 배를 구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로, 무역은 급격히 증가했고, 선박편수도 그에 비례하여 증가하였기에 배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일행은 오후 늦게 배에 올랐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그 무렵, 테리트론이 이야기 했던 데로 눈발이 하나 둘 날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올 겨울 첫 눈인 듯 싶었다. 보통 때에 비해 거의 20일 가량이나 늦게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인지 울컥 반가운 마음이 이는 듯 했다. 날씨가 포근했기에 눈발은 큼지막했다. 하지만, 가벼운지, 갑판 위에 쌓이며 조그마한 소리도 내지 않았다. 시나가 선실 안에 있다가 바람을 쐬러 나온 사이 복사뼈에 닿을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 물론, 수부들이 제때, 제때 눈을 치워 눈이 쌓여 있는 곳은 구석구석 사람 손이 닿기 힘든 곳뿐이었지만.... 하늘은 어두웠고, 잿빛의 구름만이 평소의 새까맣던 하늘을 대신하고 있었다. 해가 졌는지 아닌지는 당장으로써는 알 수 없었다. 배 곳곳에 밝힌 기름 등은 희뿌연 노란빛을 내고 있었다. 기름등 주위로 눈이 스쳐 지날 때마다 눈은 실루엣 처리가 되어 버렸고, 오히려 빛 앞이면서도 눈의 색은 검정색으로 변해 버린다. 하지만, 기름등에서 조금 떨어진 눈은 곧 순백의 몸을 되찾고, 이윽고는 어떤 힘에 이끌려 바다, 혹은 갑판 위에 조용히 쌓였다. 시나는 갑판의 중간쯤 서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다 호, 하고 한숨을 한차례 쉬었다. 하얀 김이 입가에 살짝 서리다 곧 차가운 대기로 흩어진다. 특별히 의미 있는 한숨은 아니었다. 다만 집중을 마친 직후,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그런 것이었다. 눈이 내려서인지 갑판 위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보통 이러한 여객선의 경우에는, 이 저녁 무렵 낙조를 구경하거나 저녁 바다를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배 위로 나와 있는데, 눈이 내려 갑판 위가 미끄럽기에 어지간하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잘못해 미끄러져 바다로 빠져 버리기라도 하면 어찌하겠는가? 시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선미 쪽과 선두 쪽에 각각 사람이 몇몇씩 모여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선미 쪽의 사람들은 지금 막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파도 속에 그 목소리가 묻혀 잘 들리지 않았으나 아는 사람은 아닌 듯 했다. 그리고 그 반대쪽 선두에는 자세히 살펴보니 사람은 오직 한 명이었다. 허리를 살짝 구부려 난간에 팔을 기대고 있었는데, 희미한 기름등 사이로 비치는 모습을 보니 테리트론인 것 같았다. 시나는 저 녀석, 아까 슬쩍 사라져 버리더니 지금 여기서 혼자 무슨 청승을 떨고 있는 거야? 라는 생각에 조용히 그쪽으로 접근했다. 조용히 난간에 기댄 채, 한뼘 가량 되는 흑녹색 머리칼을 뱃전에 부는 바람에 맡긴 채.... 그는 조용히 이미 흑색으로 바뀌어버린 바다로 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시나는 바로 그의 곁에까지 접근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몰히 하는지 그녀의 접근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그다지 두껍지 않은 그의 외투의 어깨에 어느덧 눈이 상당히 쌓여 있었다. "야! 뭐하냐?" 시나는 자신이 바로 곁에까지 접근하도록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그에게 이렇게 외쳤고, 테리트론은 살짝 놀라며 고개를 시나의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돌렸다. 그는 시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바보 왔구나." "멍청이. 보자마자 대뜸 무슨 헛소리야?" 시나는 발끈해 외쳤고, 시나의 말에 테리트론은 웃으며 몸을 곧추 세웠다. 한참동안 구부정한 자세로 있었더니 허리가 욱신거렸다. 어깨에 쌓여있던 눈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뭐하러 나온 거야? 위험하게시리." 테리트론이 물었고, 그의 물음에 시나는 뱃전의 난간에 손을 얹으며 되물었다. "그러는 너는 왜 나와 있는 거야? 운동신경도 둔하면서.... 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테리트론이 웃었다. "어부가 물에 빠지면 어떻게 될 것 같냐?" 당연히 어부라면 물에 빠진다 하더라도 걱정 없을 것이다. 어부가 수영을 칠 줄 모른다면 그 누가 수영을 칠 줄 알겠는가? 그의 말에 시나는 잠시 생각하다 할 말이 없자 다른 것에 트집을 잡았다. "그놈의 어부 소리 좀 작작 해라. 그렇게 자랑이냐?" 테리트론이 되물었다. "내가 어부인 것이 싫어?" "흥. 네가 어부 질을 하건 무얼 하건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싫고 좋고 가 있어?" 테리트론이 웃었다. "그럼 됐네." 시나는 테리트론이 이렇게 말하자 할 말이 없어졌고, 잠시동안 조용히 바다만을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었어?"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것 같은데." 테리트론은 대답을 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고, 시나는 그의 말에 기지개를 한차례 폈다. 두꺼운 그녀의 붉은 색 외투에도 어느덧 꽤 많은 눈이 쌓였고, 그녀가 그렇게 몸을 움직이자 부스스 부서져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냥.... 선실에 있으니까 답답하기도 하고.... 뱃멀미도 조금 나는 것 같고.... 자, 답했으니까 네 차례야." "나도 별건 아니야. 그냥....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소리를 들으니.... 고향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또 마음속에 고민이 하나 있기도 하고.... 그래서...." "고향이라.... 집에 두고 온 가족들이 걱정되는 모양이지?" 시나가 물었으나, 테리트론은 오히려 그녀의 물음에 쳇, 하고 코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인간 한 개도 걱정 안돼. 휴.... 집에 돌아가면 집안 꼴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그 동안 저금해 둔 돈이 꽤 되는데.... 그냥 모두 다 챙겨 나올걸 그랬나?.... 쳇, 그래봤자 빚을 얻어서라도 헛짓을 할 테니.... 소용없지.... 소용없어...." 시나는 테리트론의 반응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그런 인간이라니?" "뭐, 일단은 아버지라고 해 두지." 그런 그의 말에 시나가 책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를 나쁘게 말하면 못써." 테리트론이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를 좋아했던 모양이지?" 시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어.... 아니.... 당시에는 그다지.... 우리 부모님은 굉장히 사교적인 분들이셨어. 그래서인지.... 내 곁에 있을 때가 거의 없었지. 차라리.... 후훗.... 돌아가신 후, 그분들의 영결식을 할 때.... 그때 그분들과 함께 있던 시간이 다른 날 함께 있던 시간보다 길었었지." 그녀의 말에 테리트론은 아, 하는 나지막한 탄성을 질렀고, 시나는 그런 그에게 쓸쓸한 미소를 한차례 지어 보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사실 두분 다 미웠어. 평소에.... 아무것도 해 준 것 없는 주제에.... 이렇게 나를 고아로 만들어 버리다니.... 하고. 하지만.... 나이를 먹다 보면.... 그래도 그리운 것이 가족이더라." "글쎄.... 내 아버지가 죽은 후라...." 테리트로는 시나의 말에 이렇게 중얼거렸고, 시나는 그런 그를 향해 물었다. "아버지가 굉장히 무능력한가 보지?" 테리트론은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무능력? 글쎄.... 꼭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 게다가.... 난 무능력하다는 이유 따위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건 아니니까.... 어부.... 네가 싫어하지만, 어부라는 직업...." 테리트론의 말을 시나가 끊었다. "난 어부가 싫다고 이야기 한 적은 없어." 그녀의 말에 테리트론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고, 시나는 왜 자신이 그런 말을 했는지.... 라는 생각에 괜히 볼이 화끈거림을 느꼈다. "아무튼.... 어부는 어차피 철저히 바다와 하늘에 기대어 살 수 밖에 없는 직업이라.... 때로는 무능력했다가.... 때로는 그 반대가 되기도 하는 것이 도대체가 종잡을 수가 없거든." "그렇겠구나...." "내가 그 사람을 싫어하는 건.... 도무지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는지를 알 수 없다는 거야.... 나의 어머니.... 그분이 살아 계실 때도, 한 마을 안에 있는 다른 여자들에게 찝쩍대고.... 도박에 술, 언제나 그런 것으로 종종 들어오는 수입을 완전히 탕진해 버렸지. 도대체가 어린 나의 눈으로도 한심해 보였을 정도이니.... 말 다한 것 아니야?" 테리트론은 담담한 말투로 이렇게 중얼거렸고, 시나는 그의 말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상당히 힘들었나 보구나.... 그런 것들이...." "글쎄.... 나 자신이 힘든 것은.... 그다지 별 느낌이 들지 않았었어. 어차피 어렸으니까. 하지만, 그런 나의 눈에 비친 어머니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아마도 그것이 아버지를 증오하게된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싶어." 테리트론의 말에 시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지금도 살아 계셔?" 시나가 물었고, 그녀의 말에 테리트론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돌아가셨어. 과로로.... 3년전 내일." "아...." 시나는 조용히 탄성을 질렀다. "항상 이맘때면.... 언제나 집에서 그분의 무덤을 지켜 드렸었는데.... 올해는 못하게 되어버렸네.... 그 인간이 어머니 무덤 위에 쌓인 눈이나 치워 줄지 모르겠군...." 시나가 물었다. "그런.... 중요한 일이 있는데 집을 나서 오이니아를 도와 주는 거야? 켈파는 몰라도.... 피아텔과는 그다지 친하지도 않아 보이던데.... 오이니아와도 굉장히 친한 것 같지는 않고...." 그녀의 물음에 테리트론이 슬쩍 웃었다. "우리 어머니는 오이니아의 저택에서 일을 하셨었어.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나 돌아오시곤 하셨지. 그 덕에 나도 그곳에서 지냈었어. 오이니아 등과 알게 된 것도 그 덕이었고. 그때, 나는 잘 모르지만.... 자피토 가에서는 우리 어머니를 가엽게 여겨 보수를 상당히 후하게 쳐주었던 모양이야. 아버지가 지는 빚도 종종 얼마씩 갚아주고.... 뭐, 은혜를 갚는다고나 할까?" "복잡하구나...." 시나는 돌연 이렇게 말했고, 테리트론은 그 복잡하다는 것의 대상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해 물었다. "뭐가?" "그냥.... 이것저것이...." "싱겁기는...." 시나의 말에 테리트론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때, 두 사람 뒤로 접근하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고, 시나와 테리트론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언제나와 같이 얇은 망토만을 한겹 두르고 있는 란테르트와 흰색의 두꺼운 반쪽짜리 망토를 두르고 있는 모라이티나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라이티나는 시나와 테리트론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너희도 데이트 중이구나." 라고 말했고, 시나는 그녀의 말에 펄쩍 뛰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왜 이런 녀석과...." 라고 외쳤다. 하지만 모라이티나는 담담히 미소 지으며 시나의 눈을 조용히 응시했고, 시나는 그런 모라이티나의 시선을 이겨내지 못한 채, 볼이 빨개지며 멀리 바다로 시선을 던져 버렸다. 테리트론은 곁에서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만 끌쩍일 뿐이었다. 11. 레드 미스트. 배는 다음날 아침 무렵 모로스 항에 도착했다. 모라이티나와 란테르트, 그리고 다른 사람들까지 일행은 모두 선두루에 나와 항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라이티나는 그 동안 적지 않게 겔버스턴과 모로스 사이를 오갔었지만, 포케슬에 서서 바라보는 모로스항의 모습이 이날만큼 아름다웠던 적도 드문 듯 했다. 눈발은 그쳤으나, 아직 하늘은 엷은 회색을 띄고 있었는데, 항구의 모습은 순백 그 자체였다. 눈은 건물의 옥상마다 희색의 두꺼운 선을 그려냈고, 그렇게 온 도시는 흰색으로 완전히 뒤덮여 버렸다. 이 눈 내린 아침은 바람마저 거의 불지 않아 파도까지 잠잠했고, 유달리 조용한 그 모습에 일행은 오히려 계속해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윽고 배의 좌현이 선창에 맞닿았다. 배는 언제나 좌현을 부두가로 가져가는데, 좌현을 포트 사이드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곳에 있었다. 이는, 과거 범선이 아직 미 발달되었을 때, 배의 방향을 조정하는 타가 오른쪽 측면에 붙어 있었던 것에 기인한다. 오른쪽에 타가 있었기에 배는 자연히 왼쪽으로 접안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지금은 타의 위치가 선미로 옮겨져 그러한 제약은 없었으나, 이미 관습으로 굳어버린 모양이었다. 일행은 짐과 말을 모두 내린 후, 그대로 항구를 벗어났다. 눈이 많이 내려 도시 뒤쪽 언덕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약간 고생을 했으나 별 사고 없이 모로스항의 남단 가장 높은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행은 다시 한번 눈에 포근히 감싸있는 이 계단식의 도시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후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로스 항에서 수도 마기아로 가기 위해서는 북로와 남로가 있었는데, 여행자에게는 북로가, 상인들에게는 남로가 더 자주 이용되었다. 북로의 경우에는 길이 약간 험해 짐을 가득 실은 수레바퀴에 상당히 무리를 주었다. 하지만 직선거리는 북로가 훨씬 짧았고, 그 때문에 걷거나 말을 타는 무리들은 북쪽으로, 그리고 수레가 있는 사람들은 남쪽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북로와 남로로 갈리는 기점은 바로 그 유명한 아드라르 성이었다. 과거 혼란했던 450년대에 아버지를 도와 소피카왕국을 재통일하는데 큰 역할을 한 유명했던 세 자매의 성姓이 바로 아드라르로, 지금은 일곱 대륙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도시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모로스 항에서 그곳까지는 거의 100휴하(1휴하=약 1킬로미터) 가량으로 말을 타고 3일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일행이 이 거대한 도시 아드라르에 도착한 날은 12월 20일이었다. 일행이 지나면서 본 모습은, 12월의 형편없는 햇살에 반쯤 녹아버린 눈을 뒤덮고 있는 소피카의 언덕들과 눈이 단단히 뭉쳐져 얼음판처럼 되어버린 교역로를 따라 부지런히 마차를 재촉하고 사람들뿐이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만으로도 지루함은 충분히 면할 수 있었다. 아드라르 가에서는 단 하루도 지체하지 않았다. 아침에 도착해 몇 가지 식료품과 여행에 필요한 장비들을 구입하고는 그대로 동쪽으로 난 길로 접어들었다. 바로 소피카의 북로를 택한 것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수도에 도착하고 싶었고, 게다가 두 룬의 기사의 고향인 허트성 역시 북로 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물론, 두 룬의 기사 중 은월의 기사는 지금 수도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고, 흑월의 기사는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으나, 행여나 허트 가에 돌아와 있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소문을 들을 겸 들려 보려는 것이었다. 아드라르 가를 경유한지 만 2일째 되는 날 오전, 일행은 허트 시에 도착했다. 허트 시는 허트성과는 불과 10휴하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허트 성이 허트가 영지의 행정수도라면, 이곳 허트 시는 경제수도였다. 교역로상에 위치한 덕에 인구는 10만에 육박했고, 모든 산업이 골고루 발전해 있다. 허트 가는 전쟁 중에 새로 공작으로 작위가 오르면서, 영지가 크게 늘어났다. 소피카 대륙 중앙을 달리고 있는 미소우 산맥의 북쪽 대부분이 허트 가에 속하게 됐는데, 과거 소코 령의 영지였던 곳이다. 그 덕에, 허트성은 과거 영지의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가 북쪽 변두리로 밀려 버리는 꼴이 되어 버렸다. 허트성과 허트 시는 지금 허트 영지의 북쪽 귀퉁이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불편한 점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에 굳이 수도를 옮기지 않았고, 성은 아직 그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일행은 허트 시에 들려 두 룬의 기사의 행방에 대한 소문을 들어보았다.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본 결과, 지금 성에는 현 가주인 로트로만이 있을 뿐 두 룬의 기사는 수도에 있는 듯 했다. 다행히 흑월의 기사 역시 수도에 형을 만나러 온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자 일행은 더 이상 허트성에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그대로 남쪽으로 말을 몰았고, 큐니숲의 동편을 지나 몇 개의 마을을 지나 허트 가의 영지도 3분의 1 가량을 지나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유난히 조용한 나날이 계속 되었다. 사실, 소피카는 치안이 훌륭하기로 이름난 곳이다. 아드라르 가와 허트가, 이 둘 모두 전통적으로 군사력이 강한 편이었기에 영지에 대한 지배력이 강했고, 지금은 헵티슬 황국의 수도가 위치한 대륙이니 만큼 도적단 따위는 만나기가 굉장히 힘든 편이었다. 물론 미소우 산맥에 터전을 잡은 도적 단이 몇몇 있기는 했으나, 다른 대륙의 도적들에 비한다면 불쌍하다 할 지경이었다. 12월도 이제 겨우 7일만을 남겨 놓았다. 이제 곧 13월이 찾아올 것이고, 대륙에서는 한바탕 축제가 벌어진다. 이 '13월의 달' 축제는, 13월 3, 4일에 걸친 보름달을 기리는 것으로, 테미시아절, 추수감사제와 함께 대륙 3대 명절중 하나였다. 새로 제정한 헵티슬의 법에 의하면 5일밖에 되지 않는 이 13월 한달 동안에는 노동을 금하고 있다. 그러한 12월을 7일정도 남겨둔 이때, 일행은 멀리 그다지 크지 않은 산이 보이는 곳을 지나고 있었다. 소피카에는 언덕은 많았으나, 산은 미소우산 산맥 일원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지평선 위로 뿔뚝 솟은 그 산은 그다지 높지도 않았으나, 유달라 보였다. 로인이 란테르트에게 물었다. "저 산.... 혹시 이름을 아세요?" 란테르트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트 산이야." 란테르트의 대답에 일행 모두는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과거 대륙 제일의 용병집단으로 불리며, 거의 독립적인 하나의 국가를 이루었던 그곳이 바로 저곳이라니.... 그때, 일행을 막는 일군의 사람들이 있었다. 일행은 이들의 등장에 바짝 긴장하며 말고삐를 늦췄고, 가만히 그들의 모습을 살폈다. 줄잡아 50명은 될 듯 보였다. 그들은 깃발을 세우고, 모두가 똑같은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나이는 20대 초반에서 30대 후반까지 하나로 집어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들의 깃발은 진홍색이었다. 핏빛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장미의 빛이라고 해야 할지 언뜻 구분은 가지 않았으나, 그들의 갑옷이 피의 색을 하고 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듯 하였다. 그들의 갑옷은 상당히 두툼한 것으로, 어지간한 화살 같은 것은 단번에 퉁겨낼 듯 보였다. 허리에는 대부분 검을 차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후열의 사람들은 갑옷이 아닌 붉은 색 마법사 복장을, 그리고 검 대신 마법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이들은 가장 앞에 서 있는 붉은 갑옷을 입은 사내의 신호에 맞춰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란테르트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란테르트는 일행을 멈추게 한 채로 앞으로 말을 한 발짝 몰아 그들을 바라보았고, 가장 앞 열에 있던 남자는 그런 란테르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길은.... 오늘 하루동안 폐쇄된다. 돌아가라." 그 남자는 190쎄휴리하 가량의 키에 어깨는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등뒤로 검을 빗겨 차고 있었으며, 나이는 32세 가량으로, 붉은 색의 어깨 가량 오는 머리칼을 뒤로 넘겨 한차례 묶었다. 눈동자 역시 붉은 색이었는데, 피를 떠올리는 란테르트의 것과는 달리 불꽃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눈매가 싸늘하면서도 오만한 것이 한눈에도 상당한 실력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란테르트는 그 남자의 왼쪽 가슴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너무나도 분명히 황금색의 용이 새겨져 있었다. 란테르트는 다시 남자의 검으로 시선을 옮겼다. 손잡이가 용의 머리모양을 닮아 있었는데.... 순간 란테르트는 자신의 등뒤에서 에르테일이 가느다랗게 공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란테르트는 그대로 말에서 내려섰다. "레드 미스트의.... 단장입니까?" 란테르트의 물음에 상대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모라이티나 등은 상대의 대답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레드 미스트의 단장이라니.... 불패의 명성은, 비록 쇄락해 지금에 와서는 단지 강한 용병 단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최상급이었다. 그런 곳의 단장이라니.... 그 붉은 머리칼의 남자는 다시 한마디 보탰다. "정확히는.... 전대 단장이지."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드라케 블레이드는.... 단장의 신물로 알고 있습니다만...." 란테르트의 말에 그 남자는 두 눈썹을 움찔 했다. "어떻게 한눈에 알아보았지? 용형 검은.... 꽤 흔한 편인데...."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슬쩍 미소지었다. "제 검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상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고개를 한차례 가로저으며 말했다. "으음.... 그보다, 길은 폐쇄되었다. 돌아서 가라." 그때, 피아텔이 말에서 내려와 그에게 다가왔고, 이내 따지듯 말했다. "당신들이 무언데 길을 막고 행패입니까? 일개 용병단 주제에 힘만을 믿고 이렇게 굴다니.... 황국의 법이 두렵지 않습니까?" 피아텔은 이렇게 말한 후 오이니아를 흘끔 보았다. 아마도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 용기를 내어 말할 수 있다, 라는 것을 오이니아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넌 뭐야? 닥쳐라 애송이." 그 붉은 머리칼의 남자는 이렇게 말한 후 더 이상 피아텔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피아텔은 그 모습에 화가 났으나, 실력이 없는 용기라는 것은 없는 만도 못할 때가 많다. 그때, 란테르트가 그에게 말했다. "저도 그다지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란테르트의 말에 붉은 머리칼이 냉소했다. "겨우 저런 애송이들로.... 우리 50명을 뚫고 지나가겠다는 말인가?" 그의 말에 란테르트가 조용히 그의 말에 대꾸했다. "겨우 50명으로.... 저를 막겠다는 말입니까?" 란테르트의 말에 뒤에 서있던 50명 가까운 남자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고, 가장 앞에 있던 남자도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후훗. 재미있는 녀석이군.... 좋아. 마음에 들었어.... 사실, 오늘 우리는 전쟁을 치른다. 위험하니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야...." 란테르트가 되물었다. "전쟁이라니요?" 그 남자가 대꾸했다. "전쟁이다. 더러운 환영을 맑은 환영으로 바꾸기 위한 전쟁. 썩어버린 붉은 환영을 진홍의 환영으로 다시 채우기 위한 전쟁." 환영.... 미스트.... 란테르트는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었으나, 그의 사고는 붉은 머리칼의 남자에 의해 중간에 끊겨버렸다. "자, 그럼 우리는 더 이상 이곳에 지체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너희를 보지 못했으면 모르되 본 이상 우리들만의 싸움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돌아서 가라." 그의 말에 란테르트가 말했다. "우리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우리는 가보겠습니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말에게로 몸을 돌렸고, 그 모습에 붉은 머리가 외쳤다. "정말 말을 듣지 않는 젊은이로군." 란테르트는 이 말이 순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여섯 살은 어려 보이는 남자가 자신에게 젊은이라고 하다니.... 하지만 어쩌랴.... 자신이 겉모습이 그러하니.... "어떻게 하면 이대로 통과시켜 주시겠습니까?" 사실, 돌아간다 하더라도 겨우 2일을 더 지체할 뿐이었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돌아간다는 것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란테르트는 그 남자에게 이렇게 말했고,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용히 검을 뽑아들었다. 사르륵 하는 미세한 마찰음과 함께, 날이 살짝 굽은 커다란 검이 등뒤에서 뽑혀 나왔다. 바로 드라케 블레이드였다. 드라케 블레이드는 날이 하나 뿐이었다. 검날은 살짝 굽어 있었는데 곡도가 크지는 않았다. 언뜻 보아서는 직선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검날은 약간 푸르스름한 듯도 보였는데 길이가 거의 1.2휴리하(1휴리하=약 1미터)쯤 되어 보였다. 검막이와 손잡이 부분은 드래곤의 머리와 날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란테르트는 등뒤로 손을 가져가 에르테일 소드를 꺼내 들었다. 드라케 블레이드의 전체적인 색조가 붉은 색 계통인 반면 에르테일은 흰색이었다. 두 자루가 각각 검집 밖으로 빠져 나오자, 돌연 우웅, 하는 나지막한 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졌고, 붉은 머리칼의 남자는 놀랍다는 듯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에르테일이군.... 대단해.... 대단해.... 하지만 애석하게도 팔이 하나뿐이니...." 그의 말에 란테르트가 대꾸했다. "전 한 손 검술을 사용합니다." 붉은 머리는 놀랍다는 듯 말했다. "오, 그런가? 좋아, 그럼 나와 상대할 만 하겠군. 한차례 살육전을 벌이지 전에 몸을 풀어 볼까? 나를 꺾을 정도의 실력이라면, 저 일행을 데리고 무사히 이곳을 지날 수 있겠지." 드라케 블레이드의 주인은 말을 마친 후 이렇게 외쳤다. "와라!"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뒤로 살짝 당겼고, 붉은 색 머리칼의 남자는 검을 든 팔을 뒤로 한껏 빼며 약간은 이상한 자세를 취했다. 그 역시 란테르트와 마찬가지로 검을 한 손으로 쥐었다. 켈파와 피아텔, 그리고 오이니아 이 세 사람은 오늘 처음으로 란테르트가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시선만을 마주친 채 대치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약간 긴장이 되는 듯 했다. 이윽고, 붉은 머리칼의 사내가 짧은 기합을 내지르며 란테르트에게 다가왔다. 기다란 용형의 검을 크게 휘둘러 란테르트를 향해 도륙해 왔고, 란테르트는 곧바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상대의 검을 정면으로 맞받아 쳤다. 카각, 하는 거친 쇳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검은 공중에서 얽혔고, 란테르트가 슬쩍 걸음을 뒤로 빼며 다시 두 번째 공격을 준비할 때까지 상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막 란테르트가 두 번째 공격을 들어가려 할 때, 상대는 검을 거두어 버렸다. "그만 두도록 하지. 여기서 힘을 뺄 만큼 한가하지 않아." 상대가 조용히 물러서자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인 후 검을 검집에 넣었다. "후.... 통성명이나 하지. 난 헤인이라고 하네. 헤인 그 레이. 그쪽은?" 상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짤막히, "란테르트." 라고 답했고, 헤인이라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나이도 얼마 안 많아 보이는데...." 그의 말에 란테르트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서른 여덟살 입니다." 순간 상대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38? 이런.... 실수했군." 이렇게 말하고는 머리를 한차례 끌쩍이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네 잘못이야. 그런 동안을 하고 있다니...." 란테르트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뭐.... 이제 지나간다 해도 굳이 말리지는 않겠네.... 다만, 미스트산 근처로는 접근하지 말아 줘. 성가시니까. 게다가.... 아무리 당신이 강하다 해도.... 우리들이 치르는 전쟁터 한 가운데서 무사하기란 조금 힘들 꺼야."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다. 물론, 불가능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위험을 자초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헤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검을 들어 검집에 넣었고, 이내 주먹을 심장 근처에서 강하게 한 번 쥐었다. 용병들의 인사법이었다. "다시 한 번 만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 그는 이렇게 말하며 몸을 돌리려 했다. "다크 미스트...." 그런데, 그때 란테르트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 그가 말을 먼저 꺼내는 일은 흔치 않은 것이었고, 일행은 이상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 말은 일행보다는 헤인이라는 남자에게 더 큰 의미가 있는 듯 했다. 란테르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헤인은 몸을 돌렸고, 표정은 조금전의 여유 있던 것에서 흡사 결코 꺼내서는 안될 말을 꺼내기라도 한 듯 심각하게 변해 있었다. "다크 미스트를 알고 있나?" 헤인이 물었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친구인가 적인가?" 상대가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묻자 란테르트는 잠시 머뭇거렸다. "친구라면 어떻고, 적이라면 또 어떻단 말입니까?" 란테르트의 말에 헤인은 잠시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친구라면 역시 나의 친구일 것이고.... 적이라면 또한 나의 적이겠지. 다크 미스트의 적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 주어야 겠다." 헤인은 이렇게 말하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검을 뽑아 들었고, 팔을 들어 뒤쪽에 있는 50명에게 공격 준비인 듯한 신호를 보냈다. 그들의 행동에 란테르트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손을 들어 모라이티나에게 피하라는 표시를 했고, 이내 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다크 미스트는.... 적입니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상대를 살폈다. 하지만, 헤인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검을 등뒤로 꽂았다. 다시 한 번 손을 들었고, 뒤에 서 있는 레드 미스트의 단원들은 표정을 약간이지만 편안히 바꾸었다. "하핫. 시험해서 미안하네. 다크 미스트.... 그런 쓰레기들과 우리가 친구일 이유가 없지. 하하핫. 다행이야. 당신 같은 사람을 적으로 두면, 우리로써는 꽤 골치가 아프거든." 란테르트는 그의 말에 다시 검을 검집에 넣었다. 오늘따라 왠지 손을 헤프게 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워낙 상대의 페이스에 말려들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 버렸다. "다크 미스트.... 무슨 용병 단에 그런 쓰레기 같은 암살자가 필요해. 쳇. 미친것들. 레드 미스트는 순수하게 강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창시자 아이우드 님은 무슨 암살자 따위도 없었고, 휘하의 병사도 고작 500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무적이라고 불리우셨었다. 지금의 레드 미스트는 휘하에 1500명의 용병과 마법사, 그리고 암살자 까지 데리고 있지만, 멍청이, 어중이, 떠중이, 등신들만 모여있지." 헤인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몸을 다시 돌렸다. "그리고, 오늘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 이, 25대 단장 헤인 그 레이에 의해서." 그는 말을 마친 후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며 하늘로 들어 올렸고, 뒤에 있던 50명의 용병들은 한차례 환호성을 내질렀다. 깃발은 하늘로, 망토는 땅으로 힘차게 휘날렸다. 란테르트는 그 모습에 입맛이 씁쓸해짐을 느꼈다. 다크 미스트라.... "그럼 하시는 일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란테르트는 자신의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는 헤인의 뒷모습에 이렇게 한마디 한 후 몸을 돌려 말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려 했다. 그때 곧바로 헤인이 몸을 돌려 란테르트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가지 않겠나? 다크 미스트를 쓸어버리러. 그리고 썩은 레드 미스트를 쓸어버리러. 다크 미스트의 적이라면, 곧 우리와는 친구다." 란테르트는 그의 말에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모라이티나를 바라보았다. 모라이티나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당신의 뜻대로 하세요.... 그녀는 비록 입을 열지 않았지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란테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하지만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해야만 할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는 곧바로 말에 올라탔고, 헤인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 "할 수 없지. 그럼, 여행 조심하게."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여 그의 인사에 대꾸한 후 말을 몰아 가던 길을 계속 나갔다. 레드 미스트의 단원들은 비켜서서 란테르트와 일행이 지나갈 만한 길을 만들어 주었고, 란테르트는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로 말을 몰아 그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한참 동안 란테르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레드미스트 일행과 헤어진지도 한 시간 가까이 흘렀다. "대단하지 않아?" 가장 뒷열에서 말을 몰던 오이니아가 이렇게 말했고, 켈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레드 미스트의 단장과.... 비슷한 실력이라니.... 게다가 그 검이.... 그 유명한 에르테일이라니...." 오이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을 몰고 있는 란테르트의 등을 바라보았다. 한쪽 어깨가 없었지만, 워낙 어깨 자체가 넓은 편이어서 상당히 등이 넓어 보였다. 그때 피아텔이 켈파의 말에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런 건 아니야. 비슷한 실력은 결코 아니었지. 다만, 레드 미스트의 단장은, 싸움을 오래 끌어 피로가 쌓이면 자신이 하는 일에 방해될까봐 그냥 싸움을 끝낸 것이야." "그럴 수도 있겠구나...." 켈파는 이렇게 말했으나, 오이니아는 승복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오래 끌 정도면 실력차이는 비등한 것이잖아?" 피아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크게 보아서는 비슷하겠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레드 미스트는 지금에 와서는 별 것 아닌 용병 단이야. 차라리, 너희 할아버지가 계셨던 아반트 가르트의 실력이 한 수 위이지. 게다가 용병은 아무래도 검사들보다는 실력이 처지게 마련이거든...." 그가 이렇게 헤인의 실력마저 깎아 내리자 오이니아와 켈파는 어리둥절해 졌다. 사실, 이런 쪽에 대한 두 사람의 지식은 피아텔에 비해서는 형편없는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가장 앞에서 말을 몰고 있는 모라이티나는 곁에 있는 란테르트의 눈치를 끊임없이 살피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건네야 할 것 같은데.... 이 남자는 도저히 틈을 주지 않았다. "당신...." 이윽고 모라이티나가 입을 열었고, 란테르트는 조금 지나치다시피 민감히 반응하며 모라이티나를 바라보았다. "그녀 생각을 하는군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굳이 답하지 않았다. "가세요...." 모라이티나가 말했고, 란테르트는 잠시 모라이티나의 얼굴을 응시했 다. "원한다면.... 가세요. 그 동안, 저들은 제가 돌보고 있을께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가 한숨을 한차례 내 쉬었다. "휴.... 왜 이제 와서?.... 아마 그때의 그들은 이미 은퇴를 했을 꺼야. 당시 나이 20세였다 해도.... 지금은 38이고.... 세상 어느 누구도 18년이나 용병생활을 하지는 않아." 모라이티나가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 고민이세요? 조금 전 당신.... 분명 가고 싶어하는 눈치였어요." "내가?" 란테르트가 되물었고,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 헤인의 말을 듣고 나를 바라보던 당신의 눈동자는.... 아주 잠깐이었지만 몹시 흔들렸었어요. 그건....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는 증거예요. 그들을 따라 가고 싶었었다는 마음의 표시였고요." "모르겠어...."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이렇게 한마디 중얼거리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18년전.... 그녀를 잃은 후.... 난 복수를 마음먹기보다는.... 라브에를 위해 살기로 마음을 먹었지.... 그건.... 그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다크 미스트라는 그 사람들보다는.... 나 자신에게 있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야.... 사실 그랬고.... 나는 당시 도망자 입장이었어.... 그렇게 여유 있게 다른 사람을 내 곁에 두어서는 결코 안되었었지.... 처음에는.... 내가 수배중이라는 것을 몰랐었다지만.... 그것을 아는 순간 그녀들을 내 곁에서 떠나 보냈어야 했었어...." 모라이티나는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고,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에게 향하던 시선을 앞으로 옮기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욕심이었어. 그녀들을 내 곁에 둔 것은.... 나의 욕심 때문이었어. 너무나 사랑했으면서도.... 정작 나의 욕심 때문에 그녀들에게 해 주었어야 할 일을 해 주지 못했던 거야.... 맞아....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어...." "란테르트...." 모라이티나는 조심히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란테르트는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을 뿐이었다. "내 잘못이었어.... 피엘을.... 눈앞에서 잃은 것도.... 라브에가 내 등뒤에서 죽을 수밖에 없게 만든 것도.... 이카르트가 내 눈앞에서 자살한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내 잘못이야...." "그만 둬요. 자책 같은 것은.... 그만 둬요."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란테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다크 미스트.... 지금 와서 그들을 죽인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후훗.... 그러면서도 그들을 죽이고 싶어하는 내 마음은 무엇일까?...." 란테르트의 중얼거림에 모라이티나가 말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깊이 파고들지도 말고.... 당신은 신이 아니잖아요. 어차피 인간은 그 밖은 알 수 없어요. 그렇다면.... 그 안에서 안주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찾을 수 없는 진지眞智를 찾아 헤매 이는 것보다는.... 찾을 수 있는 행복 속에 안주하는 거예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란테르트가 되물었고,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마음 내키는 데로 하세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당신의 마음이 시키는 데로...."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가 물었다. "내가.... 또 다시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잘하는 것일까?"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앞의 말과 뒤의 말이 이어지지 않는 것을 보아 도중에 말을 바꾼 듯 했으나, 모라이티나는 사라져 버린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말에 대꾸할 말을 찾기에도 마음은 복잡하기 이를 대 없었다.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물음에 생각에 잠기었다. 저들과 함께 검을 들면.... 줄잡아 그의 말대로 수백 명의 사람을 죽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잘하는 것일까? 모라이티나는 자비심이 넘치는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오직 란테르트의 안위만을 걱정했으며, 그를 위해서는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자였다. 어쩌면 이카르트나 란테르트의 영향인지도 몰랐다. 사랑하는 한 사람의 목숨을, 알지 못하는 수백, 수천 명의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그들의 사상의 영향일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전쟁을 겪으며 그녀 스스로 정리한 생각들인지도 몰랐다. 어디서 기인했건, 그녀의 사고는 철저히 란테르트를 중심으로 움직였고.... 이윽고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런 행동을 해.... 란테르트가 즐거워지고, 그의 마음속의 고통과 번뇌가 줄어들 수 있다면.... 이 세상 사람 모두가 죽는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전.... 당신이 백 명의 사람을 죽인다면.... 100가지의 이유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살인에는 흥미가 없지만.... 그것이 당신의 손을 통한 것이라면.... 전 당신을 믿고.... 끝까지 당신의 편이 되어 드릴 꺼 에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앞으로 향하던 시선을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하나뿐인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고, 이내 보드랍고 가는 손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손에 입을 맞추고 고개를 한차례 끄덕여 보였다. 가겠다는 뜻이었다. 아직도 매듭 짖지 못한 사피엘라와의 일을 마치기 위해.... 모라이티나가 그런 그에게 입을 열었다. "결코 무리하지 마세요. 피를 토하고 기절한다 해도.... 저는 곁에 있어주지 못할꺼에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미소를 지었다. "지난 5년간.... 난 단지 한차례 기절했을 뿐이야. 그것도.... 독을 당했기 때문이었지.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한가히 기절 따위 하지 않아." 란테르트는 이 말 한마디를 마치고는 곧바로 일행의 진행방향과는 반대방향으로 질풍처럼 말을 몰아갔다. 그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한 일행은 그의 이러한 행동에 당황하며 고개를 뒤로 돌렸고, 모라이티나가 모두에게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 레드 미스트의 사람들을 돕기로 했어...." 이러한 말을 하는 모라이티나의 목소리는 점차로 잦아지며 어느 순간부터 울먹이는 듯 보였고, 로인과 시나, 테리트론은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모라이티나는 시선을 피했고, 오른손으로 입가를 조용히 가리는 뒷모습만을 일행에게 내보였을 뿐이었다. 밤이 찾아왔다. 란테르트가 없는 밤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일행에게 큰 두려움을 준다는 점에 일행 모두는 가볍게 놀라고 있었다. 평소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마른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마저 일행의 귓가에 몹시 거슬렸고, 발자국 소리 비슷한 것이라도 들리면, 일제히 무기로 손을 가져갔다. 그것은 피아텔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음속으로는 끝없이, 그가 있건 없건.... 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으나, 몸은 평소보다 배는 긴장해 있었다. 모라이티나는 입가에 미소를 잃었다. 일행 어느 누구도 그녀가 왜 그렇게 까지 힘없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다크 미스트와 란테르트가 어떤 관계인지 조차 모르는 그들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차라리 당연했다. 어쩌면 모라이티나 자신도 왜 자신이 이렇게 번민하고 있는지 모르는지도 몰랐다. 원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가 막 자신의 손에 키스하고 말을 돌리는 순간 알 수 없는 슬픔에 정신이 아뜩할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사피엘라에 대한 질투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단지.... 란테르트 그에게 결코 옳지 않은 길을 가르쳐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에게 대답을 해 줄 때.... 순간적으로 란테르트의 가장 좋은 조언자를 떠올렸다. 연보랏빛 머리칼의 그 남자를 말이다.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만약 그였다면.... 과연 란테르트를 보냈을까, 아니면 바보 같은 짓 그만 두라며 말렸을까.... 모라이티나는 이카르트의 사고를 빌려 란테르트를 가도록 했다. 하지만 막상 그가 떠나려 하자 이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라는 후회가 밀려왔다. 자신의 이 선택이 그의 평생을 망치는 것은 아닐까? 간신히 되찾은 미소를 영영 잃어버리게 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모라이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이제는 어느 정도 감정의 정리가 이루어 졌다. 천성이 낙천적이어서 일까? 모라이티나는 좋은 쪽으로 생각을 몰아갔다. 그가 원하던 것이다.... 어쩌면 이로써 마음속에 남아있는 사피엘라, 그리고 더 나아가 에라브레에 대한 앙금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에서 벗어나 더더욱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오이니아가 모라이티나에게 다가왔다. 불쑥 그릇을 하나 내밀었는데, 그곳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스며 나오는 수프가 반쯤 담겨 있었다. "드세요." 모라이티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녁 준비마저 하지 않은 것이다. "아.... 미안해...." 오이니아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괜찮아요. 모라이티나 언니는 매일같이 식사 준비를 하잖아요. 하루쯤 쉬어도 좋아요." 그녀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여전 힘은 없어 보였다.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오이니아를 제외한 다섯 명은 모라이티나가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모여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웅성웅성,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어 목소리가 또렷이 들리지는 않았다. 모라이티나는 수프그릇을 받아들며 오이니아에게 말했다. "오이니아는 착하구나...." 오이니아는 그런 그녀의 말에 살짝 웃었다. "그렇지도 않아요. 투정도 많이 부리고.... 거짓말도 많이 하는 걸요." 모라이티나가 물었다. "예를 들면?" 오이니아는 모라이티나의 곁에 앉으며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으음.... 옛날, 아직 엄마 아빠가 살아 계실 때였어요. 그때.... 전 숲속에서 나비를 쫓아다니다 너무 늦도록 집에 돌아가지 않았고, 엄마 아빠는 그런 저를 찾아 숲속까지 들어오셨었어요. 사실 저희 아버지는 조금 엄하신 편이었고.... 해가 진 후에 집에 돌아오면 막 혼내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저는 일부로 옷을 막 더럽히고.... 그리고는 나무 등걸 사이에서 우는 흉내를 내고 있었죠. 길을 잃어 버렸다고 거짓말을 한 거예요." 모라이티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짓말에 어른들은 속지 않아." 오이니아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랬을 꺼 에요. 하지만.... 아빠는 조용히 저를 안아 어깨에 올리고는.... 엄한 목소리로 한마디 하셨었죠. 다시는 숲속 깊은 곳으로 들어오지 말아라. 하고 말이에요. 하지만 집은 그곳에서 겨우 수풀 세 개를 해치면 눈에 보이는 곳에 있었었죠...." 오이니아는 이렇게 말하며 이번에는 모라이티나에게 물었다. "이제 모라이티나 언니 차례예요. 언니는 어떤 거짓말을 했었죠?" 그녀의 물음에 모라이티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나는.... 너무 거짓말을 많이 해서.... 지금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걸." 사실 모라이티나의 말은 말 그대로였다. 귀를 감추고 인간인 듯 행동하는 것.... 이것도 거짓말이니 말이다. 하지만 오이니아는 그런 그녀의 말을 곧이 듣지는 않았다. 그저 이야기하고 싶지 않구나.... 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돌연, 저벅거리는, 분명 사람의 것인 듯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고, 모라이티나는 바짝 긴장을 했다. "오이니아. 켈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모라이티나는 오이니아에게 이렇게 말했고, 오이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발걸음의 주인공이 어둠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고, 그는 일행을 발견하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했다. "하핫. 맛있는 냄새로군. 좀 나눠줄 수는 없을까?" 모라이티나는 순간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무슨 이런 뻔뻔한 사람이 다 있지.... 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불꽃이 높이 솟아올랐다. 열 명의 마법사들 손에서 방출돼 공중으로 솟아오른 플레임 스피어는 하늘 높은 곳에서 펑 하는 폭팔 소리와 함께 수십, 수백 갈래로 나뉘어졌고, 이윽고 수십 채나 되는 건물들 사이로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한 겨울, 몇 일전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불의 비가 내림에야.... 마을인 듯도 보이는 이곳에 큰불이 일어났다. "돌격하라. 그리고 죽여라. 한 녀석도 살려두지 말아라!" 번뜩이는 화광을 얼굴에 맞으며 붉은 머리칼의 사내는 이렇게 외쳤다. 붉은 중갑을 걸친 수십 명의 사내들은 그의 외침에 맞춰 동시에 검을 뽑아들었고, 갑작스러운 화염에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 그 붉은 머리칼의 남자는 자신의 수하들이 적들 사이로 뛰어들자마자 커다란 용형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바로 곁에 서 있는 백발의 외팔이에게 말했다. "다크 미스트의 본진은 아그라하트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지. 저기 멀리 보이는 3층짜리 건물 말이다. 이곳 아그라하트에서 검정색 갑옷을 입을 수 있는 존재는 그들 뿐이야." 낮에 헤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란테르트에게 이렇게 간단히 몇 마디 말을 건넸고, 란테르트는 그의 말에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그리고는 허리에서 에르테일을 뽑아들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럼, 건투를 비네. 다크 미스트는 현 레드 미스트의 최정예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썩어버린 것들 중의 정예일 뿐이야. 당신 정도면 충분할 꺼야." 란테르트는 그렇게 말하는 헤인을 한차례 바라본 후 다시 다크미스트의 본진이라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레드 미스트의 본진이 위치하고 있는 이곳 아그라하트는 지금 완전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헤인이 레드 미스트의 전대 단장이다 보니, 경비병이 있는 장소에서 교대시간, 각 건물의 위치와 병력의 배치 따위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고, 그 덕에 미스트산 입구에서 이곳 아그라 하트까지 단 한 명의 병력도 손실하지 않고 100명 가까운 보초병들을 죽일 수 있었다. 물론, 연락도 취해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10발의 산탄 염을 그대로 맞을 리 없지 않은가? 후방에 남은 10명의 마법사들 중 절반은 자신들 주위에 공격마법을 일으켜 적의 접근을 막았고, 다른 5명은 주요 건물을 파괴하며, 동시에 끊임없이 먼 하늘로 빛의 구슬을 쏘아 올려 자신들의 편에게는 그림자를, 그리고 적에게는 빛을 선사했다. 이미 난전이 되어 마법이 자칫하면 아군에게 손상을 입힐 가능성이 있었기에, 아군에게 단지 도움을 주는 보조 마법을 중심으로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헤인의 50명의 병사들과는 별개로, 란테르트는 적진 사이를 여유로운 모습으로 걷고 있었다. 헤인과 50명의 레드 미스트들은 이미 란테르트의 얼굴을 익혀 놓았었기에 그에게 덤벼들지 않았으나, 상대측 레드 미스트 단원들은 이 낯선 침입자중의 한 명을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하지만 란테르트는 그럼에도 여유롭게 걸어 한 걸음 한 걸음 다크 미스트의 본진으로 향하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의 검에 쓰러지는 붉은 갑옷의 용병들은 속속 늘어만 갔으나, 그의 생각은 지금 전혀 다른 곳을 달리고 있었다. 한 명이 검을 높이 든 채 자신을 내려치려 하자, 란테르트는 검을 똑바로 뻗어 그의 심장에 찍었다. 공격 자세를 취한 시간은 상대가 빨랐으나, 비명을 지른 것도 상대가 빨랐다. 란테르트의 검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적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고, 그의 앞을 막아선 사람은 반드시 피를 토하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란테르트는 그런 모습을 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라이티나와 짧은 대화를 나눈 후, 란테르트는 말을 몰아 헤인이라는 남자를 찾았다. 다행히 헤인 쪽은 중갑을 입은 보병이었다. 란테르트는 말을 타고 있었기에 오래지 않아 그를 찾아낼 수 있었고, 그들과 합류하여 이렇게 함께 레드 미스트의 본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비록 상대의 수가 많았으나, 이쪽은 정예였고, 또 기습이었기에 공격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적들은 아직까지도 대열을 정비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며 선혈을 뿌리며 쓰러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란테르트는 지금 벌써 줄잡아 6, 70명의 사람을 죽였다. 그의 검은 무정했다. 사람의 피부를 꿰뚫고 살을 찢으며 뼈를 부수면서까지 그의 검은 냉정을 잃지 않았다. 나무를 베듯, 풀을 베듯, 그는 그렇게 사람을 죽였다. 역시....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다크 미스트.... 18년전의 다크 미스트가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이제 와서야 묻는다니.... 당시의 50명중.... 지금까지 살아 남은 사람이 몇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당시 자신을 핍박하러 온 사람의 수라고는 10명이 안됐었다. 18년전 사피엘라를 죽인 몇 명 때문에.... 18년이나 지난 지금 이들에게 복수를 한다니.... 어불성설도 이 정도면 도가 지나치다. 푸학.... 자신의 검에 양단되어 누군가가 쓰러져 간다. 누굴까?.... 알 수 없다. 뒤에 접근하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마법을 일으켰다. 파학, 하는 소리와 함께 쫙.... 바닥에 액체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누굴까?.... 알 수 없다. 지금까지 그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방금 죽은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얼굴조차 단 한차레도 본 적 없는 사람만 하더라도.... 어린아이나 늙은이라고 손속에 정을 둔 적은 없다. 그저.... 죽여야 할 이유가 있느면 죽였고, 살려야 했으면 살렸다. 하지만, 지금처럼 수많은 생각을 하며 사람을 죽인적도 드물었던 것 같다. 웃음이 나왔다. 몇 달전.... 10년의 잠에서 깨어난 이후 단 한 차례도 살고 싶다는 마음 같은 것은 가져본 적 없는 자신이.... 언제나 죽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는 자신이.... 살고 싶어하는 살아있는 사람을 죽이다니.... 이런 것에 생각이 미치자 웃음이 나왔다. "죽는 쪽이.... 행복하답니다...." 란테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무심코 중얼거릴 뿐이었는데.... 돌연 코끝이 찡해질 정도로 그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아직도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은 얻지 못하였다. 주위의....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기만 하는 자신 따위가 살아야할 이유 같은 것은.... 애당초 없는지도 몰랐다. 다만.... 그와의 약속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 "죽는 쪽이.... 행복하답니다...." 그는 다시 한사람의 심장에 긴 검상을 입히며 이렇게 말했다. 상대는 이 말을 들었을까?.... 사피엘라는 자신이 죽인 것이다. 응당 그렇다면, 그녀를 위해 목숨을 버렸어야 한다. 하지만 에라브레.... 그녀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그렇기에 3년이라는 시간을 더 살았었다. 3년.... 어느덧, 다크 미스트의 본진이라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싸움이 시작된지도 시간이 상당히 흘렀고, 다른 이들과 달리 다크 미스트의 단원들은 그들의 복식을 완전히 갖춰 입은 상태였다. 흑색의 경갑에 흑색의 망토, 그리고 흑색의 두건.... 어두워서인지 더더욱 잘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란테르트에게 그러한 것은 상관없었다. 가장 앞으로 나와 있는 남자의 목을 몸에서 분리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사피엘라를 위한 때늦은 복수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머릿속은 끊임없이 이런 저런 생각들로 뒤죽박죽 되어갔다. "죽는 쪽이 행복하답니다...." 열 네명째를 죽이며 란테르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동시에 에라브레를 위해 살았던 지난 3년을 떠올렸다. 목숨을 담보로 푼돈이나 벌어보겠다고.... 용병들이 부나방처럼 몰려드는 아반트 가르트에서의 3년.... 초기에는 그 역시 굉장히 애를 먹었다. 당시의 그의 실력이라는 것은 확실히 상급의 검사였지만, 15년전의 엄청난 경지나, 지금의 초인적인 능력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곳에서 3년을 보냈고.... 결국은 에라브레를 다시 자신의 품안에 들일 수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었다. 시간만 지나면.... 에라브레는 슬픔을 잊고.... 자신은 사피엘라에 대한 모든 책임을 다 할 수 있다.... 당시 그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아니.... 그러나.... 란테르트는 지금 비록 팔이 하나 뿐이었으나, 불편함 같은 것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검을 힘껏 휘두를 때 몸의 균형이 살짝 흐트러지는 듯 했으나, 이제 와서는 감각을 완전히 찾았다. 상대의 가슴을 베었다. 혈관만이 베어진 덕에 상대의 몸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란테르트는 핏방울이 얼굴에라도 튀어 시야를 가릴까 저어하여 상대의 몸에 검을 한차례 더 휘둘렀다. 이번에는 날이 아닌 검 면으로 허리를 내리쳤고, 우두둑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며 시체가 저만치 날아갔다. 검은 이미 피로 엉망이 되었으나, 결코 더럽혀 지지 않았다. 송글송글 표면에 맺힐 뿐이었다. 명검이란.... 이런 곳에 있어서도 보통의 검과 다른 모양이다. "죽는 쪽이.... 행복하답니다." 란테르트는 지금까지 자신이 이 말을 몇 번이나 되내였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끊임없이 웅얼거렸다. 나중에는 자신이 말하고 있는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모두 다 알고 있는 말이지만 그 의미가 잡히지 않았다. 너무 생각에 골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라브레는 15년전 죽었다. 나크젤리온이라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엄청난 존재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는 지금까지도 왜 나크젤리온이 자신을 경계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와 조용히 돌이켜 보니.... 결국 자신은 나크젤리온을 죽였다. 충분히 경계했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왜 복수를 마음먹었을까? 다크 미스트에게 사피엘라가 목숨을 잃었을 때는 자책하며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 돌렸을 뿐인데.... 어째서 나크젤리온에게는 복수를 결심했을까? 모르겠다.... 단지.... 두 번씩이나 사랑하는 존재를 눈앞에서 잃다보니.... 흥분의 폭이 훨씬 더 컸었던 것만 같다. 당시 무어라고 이런 저런 핑계를 스스로 만들었던 것 같지만.... 이카르트.... 그 마저 잃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자신은 단지 흥분해 날뛰었을 뿐이었던 것 같다. 미쳤었던 것이다.... 눈앞에 있는 검정색 갑옷과 망토를 입은 사람들의 수가 크게 줄어들어 있었다. 이제 슬슬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란테르트는 돌연 검을 바닥에 푹 꽂았다. 동시에 한쪽 손을 가슴 앞에 당겨 마법의 인을 만들었다. 발밑에서 부터 마법의 기운이 솟아오르며 흡사 바람처럼 망토를 위로 흩날리게 만들었다. 마음속으로 마법의 공식을 계산했다. 이 공식이라는 것은 단지 느낌이다. 장님이 물을 만졌을 때 보는 맑게 빛나는 물과 같은, 귀머거리가 대지에 작렬하는 화려한 섬전을 바라보며 듣는 천둥의 소리와 같은, 벙어리가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와 같은.... 란테르트를 중심으로 반경 30휴리하(1휴리하=약1미터)짜리의 원이 그려졌다. 그 원을 이루고 있는 선은 점차로 넓어졌고, 두뼘 가량의 넓이가 되었을 때 돌연 창하는 유리가 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그곳에 글자가 새겨졌다. 파르스름한 선 위의 선명한 검정색의 글자였다. 파스스, 파랗게 반짝이는 유리가루가 살짝 공중으로 솟아올랐고, 란테르트는 순간, 손으로 만들었던 마법의 인을 풀었다. 순간, 원을 따라 검정색의 방전이 일어났다. 흡사 구름이 있는 듯, 끊임없이 번개의 방전이 일어났고, 란테르트를 중심으로 한 그 공간이 그 뇌전의 벽에 의해 외부와 차단되어 버렸다. 다크 미스트의 사람들은 막 란테르트에게서 벗어나 달아나려다가 그 번개의 벽에 막혀 그 자리에 멈춰서야만 했다. 란테르트는 마법을 이용해 공격하지는 않았다. 단지 벽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지금의 마법은, 마왕 압그랑의 다섯 혼의 마법중 하나인 에클라 라이트닝을 약간 응용한 것이었다. 그들의 죽음이라는 것은.... 마법이 아닌 검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10명 남짓 남은 다크 미스트의 사람들은 40명이나 되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자신의 동료들의 시체를 한차례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고,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검을 꼬나 쥔 채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상당수는 마법도 쓸 줄 알았다. 하지만, 저 뇌전의 벽을 보건대.... 자신들의 마법 따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란테르트는 파르르 떨리는 검을 자신에게 겨누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죽는 쪽이.... 행복.... 하답니다...." 란테르트는 조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마법을 쓰느라 바닥에 잠시 꽂아 놓았던 검을 뽑아 들었다. 정말.... 그런지도 몰랐다. 정말.... 자신의 경우에는.... 죽는 쪽이 행복했는지도 몰랐다. 만약....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더라면, 어머니의 슬픈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를 증오하지 않을 수 있었고.... 친구에게 배신당하지도, 첫사랑으로부터 버려지지도, 스승에게 이용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세 명의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고.... 마법을 거두었다. 이제 더 이상 가두어 둘 사람이 없다. 바닥은.... 단단히 얼어붙은 한겨울의 대지는 붉게 물든 채 모락모락.... 사람 몸과도 같은 김을 내뿜고 있었다. 란테르트는 그 모습을 보면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죽는 쪽이.... 정말 행복했을까요?...." "배가 고파서 그래. 집을.... 나오면서 돈을 안 가져 왔지 뭐야? 그래서, 큰 도시로 가 용병 일을 하려고 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오래 걸려 내일이나 허트 시에 도착할 것 같잖아. 한끼 정도면 괜찮지 않아?" 모라이티나 일행이 있는 곳에 불쑥 찾아온 남자는 아무리 나이를 적게 잡아도 25세 이하로 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장난기가 어려있어 단지 느낌만으로 이야기한다면 오히려 조용조용한 로인이나 켈파보다 더 어린 듯도 느껴졌다. 머리칼은 파란색이었다. 하늘이 빛이라 그래도, 물의 색이라고 이야기해도 좋을 파란색이었다. 그의 머리칼은 모닥불 빛에 엷은 보라색을 반사하고 있었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약간 평범한 듯도 느껴졌으나, 상당히 잘생긴 편이었다. 몸은 운동을 오래한 듯 했지만, 워낙 체구가 큰 편이 아니고 어깨 또한 그렇게 넓이 않아 건장해 보이지는 않았다. 로인이나 켈파와 비슷한 느낌의 남자였다. 물론 키는 조금 더 컸지만. 모라이티나는 지금 이 남자에게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다. 강했다.... 그의 눈을 보는 순간 느낀 느낌은 그가 보통은 훨씬 넘는 인물이다.... 였다. 지금까지 보아온 존재중 디미온보다 약간 아래라고 할까? 마법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모라이티나는 이 남자를 두려워하지는 않고 있었다. 일단.... 자신의 마법력이라는 것이 인간의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했기에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다지 문제는 없었다. 다만.... 이 남자가 갑자기 미쳐 날뛰기라도 한다면.... 일행 모두를 지켜낼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모라이티나는 오래지 않아 그러한 긴장을 풀었다. 눈의 날카로움에 비해 미소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모라이티나가 기억하기에, 이러한 눈매와 미소를 가진 사람은 결코 악한 짓은 하지 않는다. 란테르트가 그러하듯.... "오이니아, 수프를 한 그릇 떠 드려." 모라이티나의 말에 그 파란 머리칼의 검사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핫. 이거 어떻게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그럼 맛있게 먹는 것으로 답례하겠어." 일행은 처음 보는 주제에 대뜸 반말을 하는 이 남자를 보며 각자 생각에 잠겼다. 켈파의 경우에는 상대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임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고, 시나와 테리트론은 별 웃낀녀석 다 있군, 이라고 생각했으며, 피아텔의 경우에는 이 무례한 녀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로인이 모라이티나를 평대하고 있는 그 남자에게 말했다. "저, 모라이티나 누나는 지금 서른 살을 훨씬 넘기셨답니다. 저희에게는 평어를 사용해도 상관없지만.... 누나에게는 경어를 사용해 주세요." 로인의 말에 파란 머리칼의 남자는 수프를 한 스푼 입안에 떠 넣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표정이 굉장히 풍부한 남자였기에, 이렇게 눈의 움직임만으로도 그가 놀랐다는 것을 충분히 어필할 수 있었다. "오! 대단하군. 결코 스무살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아.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비법이 있다면 조금 가르쳐 주겠어? 우리 티에 에게 가르쳐 주게. 아참, 그리고 참고로 이야기하는데, 나는 내 나이보다 두배 이상 되기 전에는 경어 같은 것은 사용하지 않아." 그의 말에 테리트론과 시나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우끼는 아저씨일세." 테리트론이 말했고, 시나가 뒤이어 그에게 말했다. "아저씨. 그럼 우리도 아저씨에게 경어 같은 것은 쓰지 않을 꺼야." 시나의 말에 파란 머리칼의 남자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맘대로 해. 난 신경 쓰지 않으니까. 아참, 단 그 아저씨라는 말은 빼 줘." 시나가 곧바로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불러 드릴까?" "으음.... 그냥, 지나가는 검객 어때?" 파란머리의 말에 시나와 테리트론은, 파하핫, 크게 웃었다. "너무 길지 않아?" 테리트론이 물었고, 그의 말에 지나가는 검객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음.... 그럼.... 음...." 아마도 멋지면서도 짧은 이름을 생각해 내려는지 그는 수프 그릇을 곁에 놓아둔 채 두 손가락으로 턱을 감쌌다. 그때 시나가 끼여들었다. "철면피 어때? 아니면 참견 장이?" 그녀의 말에 일행 모두는 쿠쿡, 웃음을 터트렸고, 그 남자 역시 재밌다는 듯 웃었다. "하핫, 그거 괜찮은걸. 하지만.... 아무래도 나를 욕하는 말이니, 이름으로 쓰기는 좋지 않겠어." 모라이티나는 일행이 더 이상 그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시나에게 타이르듯 이야기했다. "손님에게 무례야.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장난을 걸다니." 시나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저 지나가는 검객 씨도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모라이티나는 그런 시나를 향해 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고, 시나는 혓바닥을 한차례 넬름 해 보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에 따르겠다는 뜻이었다. "그냥, 로스라고 불러. 가장 무난하겠군." 그의 말에 테리트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지요. 로스양." 파란 머리칼의 남자는 테리트론의 말에 눈썹이 살짝 움찔 거렸으나.... 확실히 그의 말대로 로스라는 이름은.... 여자의 것이었다. "아.... 거참.... 복잡하네.... 그럼 그냥 내 이름을 불러. 내 이름은 핌트로스다." 그의 말에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로인이 간단히 일행의 이름을 그 남자에게 소개했다. 한편, 시나는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한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고, 손바닥을 마주치며 그 이름을 떠올렸다. "아! 현 황제폐하랑 이름이 같군요." 시나의 말에 파란 머리칼의 그 남자는 아주 약간이지만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하핫 하는 듣기에도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핫, 대륙전체에 핌트로스만 천명은 될걸?" 그렇게 말하는 그를 향해 시나가 톡 쏘았다. 모라이티나의 충고는 이미 잊은 모양이다. "누가 당신보고 황제폐하라고 했나요? 그냥 이름이 같다는 이야기지." 시나의 파란 머리칼의 남자는 다시 한차례 웃었고, 시나는 별 싱거운 인간 다 보겠네.... 라는 표정을 지었다. 일행은 다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릇에 담겨있던 수프는 약간 식은 듯 했으나, 아직은 꽤 먹을 만 했다. 핌트로스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정말 맛있는걸. 이 수프를 만든 사람이 누구지?" 그의 말에 피아텔이 약간 상대를 무시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여기 있는 이 담갈색 머리칼의 아가씨다. 요리솜씨가 아주 좋지." 핌트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요리솜씨는 좋군. 아가씨를 신부로 맞이하는 남자는 운이 좋은 거야. 우리 티에는 요리는 전혀.... 하긴, 손에 물을 묻힐 필요가 없는 여자이니.... 요리를 못하는 거야 당연하겠지...." 테리트론이 물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티에, 티에, 하는데 혹시 애인인가?" 그의 물음에 핌트로스가 대꾸했다. "아니. 아내야." "하핫. 공처가로군. 이렇게 나와서 까지 아내의 이름을 입에 달고 있는 것을 보니." 테리트론이 비웃었으나, 핌트로스는 정색을 했다. "애처가라고 해주길 바래." 핌트로스는 이렇게 말하며 수프를 한 그릇 완전히 비웠고, 오이니아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저, 한 그릇 더 주겠어?" 일행은 이 핌트로스라는 남자와의 대화가 즐겁다고 느끼고 있었다. 물론, 모라이티나의 경우에는 담담히 미소만을 짓고 있었고, 피아텔의 경우에는 무례하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 두 사람을 제외한 일행은, 이 소탈하고 말솜씨 좋은 남자와 어울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두 그릇의 수프를 비운 핌트로스는 그제서야 자세를 약간 풀었다. 배가 부르니 좀 살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하고 있는 거야?" 핌트로스가 일행에게 물었고, 테리트론이 대꾸했다. "다른 일행을 기다리고 있어." "그런가? 하지만, 장소가 좋지 않군. 여기는 레드 미스트의 본진에서 멀지 않은 곳이야. 자칫하면 그들과 시비가 붙을 수 있어." 시나가 물었다. "시비?" "그래 시비. 사람들 사이에 흔히 붙는.... 원래 용병이라는 사람들이 좀 그런 편이니까." 그의 대답에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구나....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왜지?" 핌트로스가 되물었고, 시나가 웃으며 답했다. "우리 삼촌이 지금 레드 미스트를 박살내러 갔거든." 시나는 여자치고는 좀 과격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고, 핌트로스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핫. 레드 미스트를 박살내러 가? 정규 용병만 1500명이야. 견습 용병에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까지 합하면 지금 레드 미스트에 소속된 인간들은 3000에 가까워. 그중 마법사도 100명 가량이나 있고. 물론 그들이 지금 모두 본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건, 거의 길드에 가까운 수준인데.... 이 나라 안에서 전쟁이라도 일으킬 생각이 아니고서는.... 그 녀석들을 네 말대로 박살 낸다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아?" 시나가 핌트로스의 말을 끊으며 외치듯 말했다. "삼촌이라면 할 수 있어! 삼촌이라면, 레드 미스트가 아니라 황실을 상대로라도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칼슨 아저씨가 이야기 하졌었지." 그녀의 말에 핌트로스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삼촌? 네 삼촌이 누구지?" 시나가 코웃음 쳤다. "이야기하면 까무러칠걸?" 그때, 모라이티나가 시나의 말을 끊었다. "시나. 그만 둬. 죄송합니다. 아직 세상 경험이 모자라서.... 방금의 이야기는 듣지 않은 걸로 해 주십시오." 모라이티나는 곧바로 핌트로스에게 이렇게 사과했고, 핌트로스는 모라이티나를 향해 한차례 미소를 지었다.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테리트론이 끼여들었다. "내일쯤이면.... 시나의 삼촌과 만날 수 있을 거야.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일행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 이니까." 그의 말에 핌트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런가?.... 곧 떠나려고 했더니.... 하루를 여기서 보내야 겠군.... 하긴, 뭐, 그 녀석들도 멀리 따돌렸으니까...." 핌트로스는 중얼거리듯 이렇게 말했고, 시나가 곧바로 물었다. "그 녀석들?" 핌트로스는 시나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무시하라는 뜻이었다. 시나는 그가 말하는 그 녀석들이 누구인지 궁금했으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피아텔은 처음부터 이 핌트로스라는 남자를 마음에 들지 않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어디 출신인지도 모르는 방랑 검사가 이렇게 불쑥 끼여들어서는 그것도 반말로 아무렇게나 말을 해 대는 모습에 기분이 상했던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보니, 그에 대한 말투가 상당히 오만해져 있었다. "검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검사인 모양인데, 어디 출신이지?" 피아텔의 물음에 핌트로스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대꾸했다. "출신이라.... 글쎄, 난 어려서부터 혼자 검을 익혀서.... 9살 때 이전에는 소피카의 한 유명한 기사로부터 검술을 좀 배우기도 했었지." 피아텔이 그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한마디로, 제대로 배운 적은 없다는 이야기로군." 핌트로스의 눈썹이 살짝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러한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제대로 배운다라.... 뭐 난 배우기보다는 익히는 편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버릇없는 네 녀석은 그럼 어디서 검술을 배웠지?" 이번에는 피아텔의 안색이 변했다. 버릇없는.... 그건 오히려 피아텔이 핌트로스,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다. 피아텔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핌트로스라는 사내에게 외치듯 말했다. "귀족에게 그런 무례한 말투를 사용하다니. 검을 뽑아라. 네 녀석이 귀족이라면, 귀족의 법에 따라 정당한 결투를 하게 될 것이고, 평민이라면 비참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의 말에 핌트로스는 잠시 황당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다가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웃었고, 모라이티나는 크게 당황해 피아텔을 향해 외쳤다. "그만 둬요.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 피아텔은 모라이티나의 말을 무시한 채 핌트로스라는 남자에게 물었다. "귀족인가?" 핌트로스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답했다. "후훗, 예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지...." "그런가? 좋다, 그럼 그대를 검사로써 대우해 주겠다. 어서 검을 뽑아라." 피아텔은 지금 분노에 얼굴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작위도 박탈당한 귀족 주제에 그렇게 무례하게 굴다니.... 오이니아와 켈파 등은 그런 피아텔을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정식으로 이렇게 상대에게 결투를 청했으니.... 곁에서 무어라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렸다. 반면, 정작 핌트로스라는 남자는 그 피아텔을 무시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 몸을 살짝 뒤로 기울인 채 편하디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피아텔 정도는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어서 검을 뽑아라!" 피아텔은 다시 한 번 외쳤다. 하지만 핌트로스는 여전 그를 상대치 않았다. 오히려 신경을 다른 곳에 쓰고 있는 듯 보였다. 이러한 대치 상태가 잠시 이어진 후, 핌트로스는 모라이티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나도 느꼈겠지?" 그의 난데없는 말에 일행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모라이티나는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모라이티나는 핌트로스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그 정도라니.... 믿어도 되겠지요?" 핌트로스는 웃었다. "누나도 사람 이용해 먹는데 어지간한 솜씨는 가졌는데? 좋아, 두 그릇의 수프를 얻어먹었으니.... 보답을 해 주어야지. 아참, 그 말했던 엄청난 일행이 돌아오려면 아직 먼 거야?" 모라이티나가 빙글빙글 웃으며 되물었다. "혼자서는 자신 없는 건가요?" 핌트로스는 그녀의 말에 더더욱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난 상관없는데.... 이 풋내기들까지 지키면서 싸우기는 벅찰 것 같아서. 20명의 일류급 용병은 확실히.... 혼자 상대하기는 힘든 편이니까. 게다가 그 남자의 실력이라는 것도 보고 싶고." "걱정 마세요. 이곳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마법 정도는 사용 할 줄 아니까요. 그리고 이 아이들도 자신들 정도는 지킬 수 있어요." 그녀의 말에 핌트로스는 피아텔을 슬쩍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 녀석을 보아하니.... 그건 잘 모르겠는데? 뭐, 어쨌건 이 근처에서 벗어나지나 말아 줘. 한 시간 안에 돌아 올 테니까. 아참, 그리고, 그 동안 내 짐 좀 맡아 줘." 모라이티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고, 핌트로스는 그대로 퉁기듯 몸을 일으키더니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은 그 모양이 조금 독특했다. 검날이 상당히 가는 편으로 전체적인 색조가 검정색이었다. 일행은 그의 검이 검집에서 나오자 마자 약속이나 한 듯 탄성을 내질렀다. 잘 모르는 그들이 보기에도 핌트로스의 그 검이 보통의 것이 아닌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핌트로스라는 사내는 검을 한 손에 쥔 채 허리와 발목, 손목의 관절을 살짝 풀었다. 두둑, 두둑 관절에서 소리가 난다. "에구.... 요즘 좀 게을러져 있었더니 몸이 말이 아니군.... 아참, 애송이. 이름이 뭐라고 했지?" 핌트로스는 몸을 다 푼 후 피아텔에게 이렇게 물었고, 피아텔은 그의 말에 소리치듯 말했다. 화가 몹시 난 모양이었다. "뭐? 애송이? 무례한 녀석!" 하지만, 핌트로스는 그런 그의 모습에 한차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무례한 녀석이라.... 이름이 무례한 녀석이라고? 거참.... 너의 부모님이 너를 꽤 싫어한 모양이로구나. 하지만 선견지명은 있는걸. 자식이 무례해 질줄 미리 알고 있었다니...." 핌트로스의 이러한 대꾸에 시나와 테리트론은 웃음을 터트렸고, 오이니아와 켈파도 나지막하게 몇 차례 웃었다. 피아텔은 이제 얼굴이 하얗다 못해 파란색을 띄고 있었고, 눈매에는 살기마저 어렸다. 하지만, 핌트로스는 그런 그에게 한차례 냉소를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훗,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해라!" 핌트로스는 이 한마디를 한 후, 두 걸음 바닥을 차며 피아텔에게 접근했다. 그의 발걸음은 가볍기가 이를 때 없어 아예 걸음을 땅에 대지 않은 듯 보였고, 피아텔은 그가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으나, 검을 쥔 손에 커다란 통증을 느꼈다. 철그렁.... 무슨 금속제의 물건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무례한 녀석, 결투는 받아 들인 거다. 더 이상 귀찮게 굴지 말도록." 핌트로스는 이 말을 남기며 일행에게서 멀어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 한마디는 상당히 먼 곳에서 들려왔고, 피아텔은 멍하니 그의 목소리를 듣다가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검은 절반만이 손에 들려 있다. 핌트로스가 피아텔의 곁을 스쳐 지나간 그 짧은 순간.... 피아텔의 검은 두동강이 나 버렸고, 검을 쥔 손에서는 선혈이 한줄기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핌트로스가 달리던 도중 검을 한차례 휘둘러 피아텔의 검을 두 동강 내 버린 것이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피아텔은 반격은 커녕 그가 어떻게 자신을 공격했는지도 볼 수 없었다. 피가 흐르는 손으로 멍하니 서있는 그의 곁에 오이니아가 조용히 접근했다. 검을 받아들며 그의 손에 흰색의 천을 정성스럽게 감아 주었다. 하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없었다. 약간은 책망하는 듯한 눈길로 피아텔을 바라보며 그의 상처를 싸매 주었고, 모든 치료를 마친 후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말투로, "앞으로는.... 그렇게 함부로 나서지 마." 라는 한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피아텔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런 그녀의 말을 멍하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핌트로스에게 검을 잃은 것 이상으로, 오이니아의 차가운 목소리에 놀란 모양이었다. 한편, 시나는 조금 전 핌트로스와 모라이티나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대강은 알 수 있었으나, 확실히 하고 싶어 모라이티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모라이티나 언니,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20명의 용병이라니.... 지금 누가 우리를 노리고 있기라도 하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모라이티나가 굳이 답할 필요도 없었다. 어둠 저편에서 창, 하는 검이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곧바로 으악, 하는 걸걸한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모라이티나가 일행 모두에게 말했다. "이 모닥불 근처에서 벗어나지 말도록 해. 반시간쯤 전부터 이 근처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점점 이곳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아, 우리들을 노리고 있었던 것 같아." 모라이티나가 막 이 말을 마쳤을 무렵 다시 한 번 아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일행은 모라이티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모닥불 주위에 몰려 앉았다. 꼭 두려운 마음만 이는 것은 아니었다. 나가서 핌트로스를 도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더더욱 컸으나, 모라이티나가 저렇게 이야기하는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니.... 조용히 그녀의 말에 따랐다. 피아텔이라면 이쯤, 나가 싸우겠다고 외칠 만도 하건만.... 방금 전의 일로 표정이 말이 아니다. 로인이 그때 모라이티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그 혼자서 괜찮을까요? 도와주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모라이티나가 로인의 말에 웃으며 대꾸했다. "만약, 란테르트가 지금처럼 싸우고 있다면, 넌 도우러 가겠니?" 로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걸리적거리기만 할 꺼 에요. 제 실력 정도로는...." 모라이티나는 다시 한차례 웃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란다. 저 핌트로스라는 남자의 검술실력은 너의 삼촌과도 비교할 만 한 것이야." 일행 모두는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물론, 오이니아나 켈파는 란테르트의 진짜 실력을 잘 모르고 있었으니, 그 놀라는 정도가 작았으나, 로인이나 시나 같은 경우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까지 지었다. 모라이티나가 그런 일행을 향해 조용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궁금한 건.... 왜 그가 지금 이 시간에 이러한 곳을 해메고 있느냐는 거야.... 란테르트에게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참 제멋 대로인 사람이구나...." 일행은 모라이티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12. 다시 만난 사람들. 모라이티나 등이 핌트로스와 만나고 있던 그 시간.... 일행이 있는 곳으로부터 거의 20휴하(1휴하=약1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란테르트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눈앞에는 팔다리가 잘린 시체가 뒹굴고 있었건만, 그는 검을 자신의 앞에 꽂아 놓은 채 한 건물의 계단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건물은 바로 다크 미스트의 본진이었다. 입가에 서린 김은 잠시를 지탱하지 못하고 늦은 밤의 차가운 대기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싸움은 이제 거의 끝난 모양이었다. 비명소리가 끊어진지도 반시간이나 흘렀다. 건물들에 붙었던 불이 아직 채 꺼지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이긴 쪽은 황당하게도 50명의 레드 미스트였다. 하긴.... 공격한지 반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현 단장이 레드 미스트의 본체에서 기어 나왔으니.... 그것도, 술에 곤두래 만두래 취해서 말이다. 란테르트는 하지만, 이러한 것과는 상관없이 멍하니 다크 미스트의 건물 앞에 앉아 있었다. 죽어 넘어진, 정확히는 자신이 죽인 다크 미스트의 대원들을 바라보며.... 실로 만감이 교차했다. 18년 전의 응어리가 풀어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괜한 짓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일기도 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지쳐 보였다. 눈두덩이가 약간 파르스름한 빛을 띄고, 평소보다 안색이 더 초췌한 것이 지쳐 보였다. 두 몸을 편히 계단에 앉힌 채 그는 하나뿐인 손으로 망토자락을 끌어당겨 검을 닦았다. 더 이상 방치해 둘 경우 검이 더러워 질 것이다. 시체 앞에서 검을 닦는 모습.... 이보다 살풍경한 모습이 몇이나 있을까? 하지만, 란테르트의 표정은 무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무표정이 검을 닦던 란테르트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이지만 반짝였다. 고개를 들어 한쪽을 응시했고, 이내 고개를 다시 검으로 돌렸다. 곧바로, 란테르트가 바라보았던 곳으로부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란테르트가 반응을 보인 것은 그 사람 때문인 듯 하다. 마법사들의 노력으로 서서히 잡혀가는 불길 사이에서 나타난 사람은 란테르트를 이곳에까지 오도록 만든 그 장본인이었다. 헤인 그 레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레드 미스트의 전대 단장. 그는 검을 뽑아 어깨에 턱 걸친 채 터덜터덜 란테르트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바닥에 널려있는 시체를 한 번은 밟고, 한 번은 피해가면서 란테르트에게 걸어오고 있는 그는 란테르트와는 달리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요란하네...." 헤인이라는 남자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는 검을 등뒤로 꽂았다. 들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낀 모양이다. "좀 도와줄까 하고 왔더니.... 국물만 남았군."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가 앉아 있는 계단 바로 곁으로 다가왔고, 그대로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12월말의 차가운 대지에 불과 반 시간 전에 흩뿌려진 피는 이미 빙령의 입김에 반쯤 얼어붙어 있었다. 서릿발같은 은색의 결정체가 검붉은 색의 대지 사이에 희끗희끗 보인다. 헤인은 잠시 란테르트가 벌려놓은 광경을 즐기듯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에르테일로 돌렸다. "확실히 화려해. 듣기에, 아름답기로는 루플루시카가, 화려하기로는 에르테일 소드가, 그리고 강인하기로는 드라케 블레이드가 최고라고 하더니...." 헤인은 이렇게 내리 세 마디나 하도록 란테르트에게서 아무런 대꾸가 없자, 피식하는 헛웃음 소리를 내었다. 그가 말이 많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막상 대답 없는 말을 세 차례나 하고 나자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헤인은 곧바로 망토 안쪽에서 무슨 가죽처럼 보이는 재료로 만든 네모진 병을 꺼내들었다. 그는 그것을 란테르트의 눈앞에 불쑥 들이밀었고, 내뱉듯이 말했다. "한 잔 하겠나?" 란테르트는 그의 청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술병을 받아들고 한 모금 입안으로 술을 들이킨 후 술병을 돌려주었다. 헤인은 그 모습에 한차례 미소를 지은 후 술로 목을 축였다. "이 술 비싼 놈이야. 난 평생 두 가지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지. 하나는 무기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이 녀석이야.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니까." 그는 이렇게 말한 후 다시 한 모금을 벌컥 마셨다. "살아가는.... 이유 말입니까?...." 돌연 란테르트가 이렇게 말을 꺼냈고, 헤인은 그가 말을 하자, 흡사 벙어리가 목소리를 되찾기라도 한 듯 얼굴에 희색을 띄었다. "쳇, 내 이 비싼 꼬마를 한 모금을 헌납해야 댁의 그 고귀하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모양이군. 하긴, 몇천 하르나 처박아도 코빼기 하나 안내보이는 신들보다야 백배 낫지." "후후후...." 헤인의 말에 란테르트는 낮은 웃음소리를 냈고, 헤인은 그런 그에게 다시 한차례 술을 건넸다. "그나저나, 자네 도대체 누군가? 이 정도 실력이라니.... 몸에 상처.... 아니 망토 한 자락 안 베이고 다크 미스트 50명을 한자리에서 몰살시킨다는 것이...." 란테르트는 헤인의 말을 들으며 술을 한 모금 더 입안으로 쏟아 부었다. 굉장히 독한 술인 듯 단 두 모금만에 머리 속이 핑 도는 듯 했다. 식도가 화끈거린다. "제가 누구냐고요?.... 글쎄요.... 이름은 란테르트라고 합니다." 헤인이 웃었다. "후훗,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뭐 됐네. 과거 같은 것....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되." 헤인은 이렇게 말하며 술을 다시 한 모금 마셨고, 이내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야? 자네가 만들어 놓은 작품 감상 중인가?" 란테르트는 그가 이렇게 묻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고, 헤인은 란테르트가 자신을 바라보자 시선을 시체들로 살짝 돌렸다. 아마도 그가 이야기한 작품이라는 것이 그것들을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그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취미는 없습니다." 헤인은 웃었다. "취미라.... 재미있는 말이군." 이를 마지막으로 둘 사이의 대화가 끊겼다. 잠시동안 말 대신 술병이 오갔고, 다시 헤인이 말을 꺼낼 때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팔은 어디서 잃었나? 혹시 다크 미스트와의 원한이 그 오른팔과 관계 있는 건가?" 그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한차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글쎄요.... 팔은 10년전 마왕과 싸우다 잃었습니다. 다크 미스트와의 원한은.... 훨씬 전의 일입니다." 헤인이 약간 놀라며 되물었다. "마왕? 10년전?"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는 것으로 그의 말에 대꾸했고, 헤인은 감탄하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호! 대단한걸. 그럼 자네가 그 크림슨 아이즈를 무찌른 남자란 말인가? 10년전 갑자기 사라져 버린 마왕의 행방에 대해 말들이 많았는데.... 하긴, 댁 정도면.... 크림슨 아이즈라 하더라도...." "후후후훗...." 그때, 헤인의 말을 끊으며 란테르트가 웃었다. 웃음은 잠시동안 나지막이 이 피 섞인 땅위로 울려 퍼졌고, 헤인은 이 남자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라는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크림슨 아이즈라...." 란테르트는 웃음을 그치며 이렇게 한마디 내뱉었고, 이내 중얼거리듯 말했다. "크림슨 아이즈.... 피빛눈의 미친 마검사.... 아.... 이런 별명으로 부른 사람도 있었습니다. 라비네 나이트던가?.... 눈꽃의 기사.... 후 후후...." 헤인은 점점 더 란테르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동안 란테르트를 바라보았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돌려 헤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 눈의 색이 무엇입니까?" 헤인은 그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피의 색과도 같은 그의 눈동자를.... "서.... 설마 그렇다면?" 성격이 대범하기 짝이 없던 헤인 마저도 이때만은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렇게 물은 후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고, 란테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10년 전에는 저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크림슨 아이즈라고...." 란테르트의 말에 헤인은 연거푸 두 모금의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핫, 정말 재미있군. 크림슨 아이즈와 손을 잡고 일을 하다니. 정말 재밌어.... 이래서 세상 살 맛난다니까. 자, 한 모금 더 마시게." 란테르트는 자신의 정체를 밝힌 후에도 그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자신을 대하는 그가 왠지 마음에 들었고, 거리낌없이 그의 술병을 받아들었다. 한 모금 입안으로 독한 술을 받아들였고, 다시 술을 헤인에게 돌려주며 물었다. "상관없습니까? 제가 크림슨 아이즈라 하더라도?" 왠지 궁금했다. 어떻게 전대의 마왕이라는 사람을 앞에 두고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란테르트의 말에 헤인은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는 듯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쳇, 크림슨 아이즈가 아니라 크림슨 아이즈의 할아버지라 하더라도 상관없지. 어차피 그래 봤자, 당신은 란테르트일 뿐인데." "그렇군요.... 어차피 전 란테르트일 뿐이니까요...." 그의 대답에 란테르트는 이렇게 중얼거렸고, 헤인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 따위 것에는 신경 쓰지 말고, 한잔하러 가지 않겠나? 이런 곳에 앉아 이렇게 있지 말고.... 이 아그라하트 안에는 없는 것이 없어. 방앗간, 무기상점, 대장간, 술집. 와하핫, 게다가 유곽까지 있지. 난리 통에 다 도망갔겠지만, 한둘쯤 남아 있을지도 몰라. 썩어버린 레드 미스트여 영원 하라! 훗, 그 자식들 왜 궁전은 짓지 않았나 모르겠군. 레드 미스트의 25대 국왕. 헤인 그 레이라. 하핫, 꽤 멋진걸?" 술이 조금 들어가서인지 헤인은 말이 조금 많았다. 약간 들뜬 듯 큰 음성으로 이야기하는 헤인을 향해 란테르트는 한차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해 두지요. 일행이 조금 걱정되는군요." "그런가?.... 그럼 할 수 없군." 헤인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고, 란테르트는 다시 예전의 빛을 찾은 에르테일을 등뒤로 꽂으며 몸을 일으켰다. 헤인도 따라 몸을 일으켰는데, 독한 술을 많이 마셔서인지 순간 약간 비틀거렸다. 운동(?)을 한 후라 취기가 더 빨리 오르는 모양이다. "그럼, 나중에 꼭 다시 보세. 언제 이곳을 지날 때면 꼭 들리게나. 그때는, 이 헤인 님이 진정한 레드 미스트의 모습을 보여 줄 테니. 미스트 산의 붉은 안개가 호면을 흐르니, 흰빛의 아름다움이 수면 위를 노닌다. 와하하하." 그는 뭐가 그렇게 기쁜지 이렇게 한마디 내뱉고는 웃음을 터트렸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를 향해, "일을 성공한 것, 축하 드립니다." 라고 한마디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란테르트는 곧바로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 아직도 완전히 진화되지 않은 레드 미스트 본진에 붙은 불 덕분에 그의 그림자는 앞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란테르트는 본진의 건물의 배치를 보아 방향을 어림짐작해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지금 모라이티나 등이 어디에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으나.... 말까지 있으니,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대 여섯 시간 안에 찾는 것이야 문제가 없을 듯 했다. 핌트로스가 다시 모라이티나 등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시간은 그가 이야기했던 한시간보다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그는 처음 일행에게 접근했었을 때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돌아왔다. 그냥, 검을 허리의 검집에 다시 꽂은 채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모닥불 곁으로 걸어오면서, "일 다 끝내고 돌아왔어." 라고 밝게 한마디했을 뿐이다. 일행 모두는 황당하다는 듯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일을 다 끝내다니.... 계속해 들려온 병기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소리로 유추해 보건대.... 아마도 적지 않은, 그가 이야기 한데로 20명 정도의 사람을 죽인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천연덕스러울 수 있는 것인가? 그때 모라이티나가 그에게 물었다. "누구 였나요? 혹시 핌트로스 님을 쫓고 있다던 그 사람들인가요?" 모라이티나의 물음에 핌트로스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레드 미스트의 녀석들이었어. 녀석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본진이 공격받고 있다더군. 그 일 때문에 본진으로 돌아가던 도중, 우리들을 발견하고는, 뭐 돈도 있겠다, 아리따운 아가씨들도 있겠다.... 나쁜 마음을 먹고 공격하려던 모양이야." 핌트로스의 말에 일행은 일제히 낯빛이 변했다. 물론 모라이티나는 여전 태연한 표정이었지만.... "레드 미스트라고요.... 핌트로스 님이 없었더라면 조금 고생을 했었겠어요." 핌트로스는 막 자리에 앉으며 검을 풀다 모라이티나의 말에 웃으며 대꾸했다. "뭐, 누나 정도면 걱정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은은히 느껴지는 마법력만 해도.... 궁정의 대현자들 이상이야." 모라이티나는 그런 그의 말에 담담히 웃을 뿐 대꾸하지 않았고, 핌트로스 역시 무슨 대답을 바라고 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듯 하던 일을 계속 했다. 로인과 시나, 테리트론 등은 핌트로스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만난지 겨우 서너 시간 정도밖에는 지나지 않은 그에게 물어봐도 괜찮을 듯한 이야기들이 아니었기에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동안 핌트로스 그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일행들끼리 이런 저런 한담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물론, 피아텔의 경우에는 시선을 외면한 채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그런 창피를 당해 놓고도 떠들어 댈 수 있는 용기(?)는 가지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꽤 늦어졌고, 일행은 모닥불 곁에 모여 잠을 청했다. 핌트로스는 그런 일행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자신의 모포를 깔고 또 덮은 채 누웠다. 로인이 자신들의 곁으로 올 것을 그에게 한차례 권했으나, 핌트로스는 "난 춥더라도 넓은 게 좋아." 라고 말하며 사양했다. 그렇게 밤은 흘러갔다. 지겹도록 별이 반짝이고 있는 이날 밤만 해도, 일행은 다음날 연이어 벌어질 황당한 일들에 대해 조금도 상상할 수 없었다. 할 수 있었다면.... 그쪽이 이상한 것일 테지만 말이다. 다음날 새벽. 모닥불은 이날 따라 유난히 일찍 꺼졌고, 일행은 아직 겨울의 안개가 자욱히 내려앉아 있는 숲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은 부지런한 어부 테리트론이었고, 그의 기척에 바로 곁에 잠들어 있던 로인과 켈파, 그리고 뒤이어 모라이티나와 피아텔이 잠에서 깨어났다. 뒤이어 오이니아, 시나 등이 일어난 시간 역시 다른 사람들과 그다지 큰 차이는 없었다. 12월. 동지도 지난 이때 태양은 유달리 늦게 떠올랐다. 일행이 다시 나무에 불을 지피고, 아침을 준비해 막 먹으려고 할 때나 되어서야 동편이 뿌옇게 밝기 시작했다. 이날 새벽의 미명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막 아침을 먹으려는 순간이었다. 여전 핌트로스는 일행에게 기생하여 아침을 얻어먹고 있었는데.... 수프를 채 한 수저도 뜨기 전 핌트로스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일행은 각자 자신들의 식사에 몰두하고 있던 터라 그의 표정을 일찍이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시나가 우연히 그를 바라보다 그의 안색이 약간 굳어있는 것을 발견했고,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무슨 문제 있어?" 핌트로스는 시나의 물음에 한차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수프를 한 수저 푹 퍼 입안에 넣었다. 싸늘한 날씨 때문에, 수프는 벌써 식어 있었고, 이렇게 입안에 넣었는데도 그저 미지근할 뿐이었다. "잡혀버렸네. 쳇...." 핌트로스는 수프를 한입 삼킨 후 시나의 말에 이렇게 대꾸했고, 일행 모두는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제 말하던 핌트로스를 쫓는 사람들에게 말이야?" 시나가 다시 물었고, 핌트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휴.... 이렇게 빠를 줄이야. 그냥 어제 곧바로 떠났어야 하는데.... 아참, 그 일행이라는 남자 언제 돌아오는 거야? 그 사람도 못보고 잡혀가면 억울해 며칠동안 잠도 못 잘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모라이티나가 가벼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곧 돌아 올꺼에요. 게다가.... 오늘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몇 일 내에 볼 수 있을꺼에요. 우리 일행은 지금 마기아로 가는 중이니까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핌트로스는 뒤통수를 몇 차례 끌쩍였다. "누나는 정말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아. 혹시 신이나 뭐 그런 사람 아니야?" 핌트로스의 활달한 말투에 모라이티나는 다시 한차례 미소를 지었고, 핌트로스는 그런 모라이티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수프로 시선을 옮겼다. "오이니아양, 수프 정말 맛있어. 이렇게 맛있는 수프를 두끼밖에 먹지 못하다니.... 약간 아쉬운걸?" 그의 칭찬에 오이니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뭘요. 모라이티나 언니가 많이 도와 주셨어요." 핌트로스는 그녀의 말에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시나를 비롯한 일행은 어제부터 도무지 핌트로스와 모라이티나 사이의 대화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띄엄띄엄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둘만의 암호를 사용하기라도 하는 듯 그 의미가 정확한 것이 한 가지도 없었다. 그렇다고 물어 볼만한 분위기도 아닌 것이 영 답답하기만 했다. 핌트로스는 일행 모두의 의혹 어린 시선을 무시한 채 묵묵히 수프 한 그릇과 그 수프에 적신 빵 몇 조각을 다 먹었고, 그제야 자리를 털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저쪽에서 은은히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사람들이 웅성웅성 하는 소리가 들렸고, 아직 안개도 걷히지 않은 앙상한 숲 사이로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 둘 눈에 들어왔다. 부산한 아침,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한 일행은 이번에는 또 뭐지? 라는 표정으로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모두들 입을 살짝 벌리고 두 눈을 크게 뜬 채 숲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은색의 중갑을 헬름(헬멧)에서 슈즈까지 완벽히 갖춰 입은 열명 가량의 기사들이었다. 모두의 나이는 20세 중반쯤으로 보였는데, 하나같이 표정이 온화하고 자세가 늠름한 것을 보아 보통은 넘는 무사들이었다. 하긴.... 표정이나 자세 따위를 살필 필요조차 없었다. 그저 그들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문장만으로도.... 시나와 피아텔이 거의 동시에 놀라며 외쳤다. "황실 기사단!" 켈파나 오이니아, 로인, 테리트론이 비록 귀족 사회에 대해서는 견문이 없었으나, 은색의 늑대가 황실의 상징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고, 시나와 피아텔이 그 이름을 외치기도 전에 이미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들 일행은 곧바로 시선을 핌트로스에게 향했다. 이렇게 되면.... 그의 정체라는 것은.... 말을 타고 온 10명의 기사들은 일제히 말에서 내려섰다. 하나같이 핌트로스를 향해 무릎을 꿇었고,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그중 한 명이 고개를 반쯤 들며 핌트로스에게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황실 근위대 제 27대, 28대의 대장과 대원들, 폐하께 고개를 조아립니다." 그들의 외침과 동시에 시나, 로인 등의 일행 여섯 명의 탄성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핌트로스....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가 황제 핌트로스 였던 것이다. 다만 모라이티나만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핌트로스는 그 열 명의 기사를 향해 귀찮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손한 척 할 것 없어. 속으로는 지금 내 욕을 하고 있겠지? 이 멍청한 황제놈, 쓸때없이 황궁은 빠져나가서 잠도 못 잔 채 연 3일 동안이나 찾아 해메고 다니게 만들었다고." 핌트로스의 말에 모라이티나가 푸후훗, 작은 웃음을 터트렸으나 10명의 기사는 고개를 조아릴 뿐 감히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핌트로스가 다시 말했다.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정말인 모양이군." 그때, 처음 이야기했던 그 기사가 입을 열었다. "신 황실 기사단 27대 대장, 게르바흐가 감히 말씀 드리옵니다. 신들은 추호도 그러한 마음을 품지 않았었습니다. 다만 그 동안 폐하의 안위만을 걱정했을 뿐이옵니다." 뒤이어 다른 기사가 입을 열었다. "신 황실 기사단 28대 대장, 케이아트가 감히 말씀 드리옵니다. 황후마마의 근심이 이만 저만이 아니십니다. 나이트, 더 실버 룬 각하와 나이트, 더 이클립틱 룬 각하까지 대동하시고 지금 이곳으로 오시고 계십니다." "밀튼이랑 로멜까지? 하여간 티에의 호들갑은 알아 줘야 한다니까.... 그건 그렇고 이미 포위된 것 같은데? 무슨 도적을 잡는 것도 아니고, 숲을 빙 둘러 포위망을 치다니...." 기사들은 핌트로스의 말에 더더욱 쩔쩔매며 고개를 조아렸다. 27대 대장이라는 남자가 다시 말했다. "그러한 것은 아니옵니다. 다만.... 폐하의 능력이 너무 뛰어나기에 나이트, 더 실버 룬 각하께서 친히 이렇게 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핌트로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쳇, 밀튼녀석.... 전쟁터에서 적들에게나 써먹던 방법을 나에게 사용하다니...." 한편 이들의 대화를 바라보며 일행은 완전히 굳어 버렸다. 모라이티나를 제외하고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황제라니.... 8만 황국 군과 7개의 크고 작은 대륙을 소유한 모든 인간들의 위에 군림하는 자가.... 바로 눈앞의 이 남자라니. 바로 전날 밤.... 농담 따먹기를 하고.... 웃으며 함께 수프를 먹은 남자가 바로 황제라니.... 가장 말을 막 해댔던 시나와 테리트론은 이거 우리 죽는 거 아냐? 라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서로를 바라보았고, 피아텔은 사색이 되어서 입조차 뻥끗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에게 저지른 행동.... 이 자리에서 일도 양단 된다 하더라도....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헬튼가 전체를 몰살시킨다 하더라도.... 반항조차 할 수 없게 된다. 로인이 조심스럽게 모라이티나에게 물었다. 혼자 태연히 있는 모습이 의아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누나는.... 알고 있었나요?" 그의 물음에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로인은 잠시 멍해졌다. 비록 시골의 한적한 마을에 살아온 그였고, 또 그 때문에 평소 황제니 왕이니 하는 것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었으나, 이렇게 막상 대면하고 나니.... 자신도 모르게 몸이 위축되는 듯 느껴졌다. 일행은 핌트로스의 대화 속에 들어있는 두 사람의 이름 때문에도 지금 크게 놀라고 있었다. 두 룬의 기사 말이다. 그들이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이다. 얼마간 동안 핌트로스와 10명의 기사들 사이에 이야기가 오갔고, 이내 멀리서 다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이번 역시 상당히 많은 수의 말이 내는 발굽 소리 였는데.... 덜그럭, 무슨 바퀴 소리도 함께 나는 것을 보아 마차도 함께 오는 모양이었다. 오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낸 마차는.... 실로 그 규모가 으리으리했다. 8마리나 되는 말들이 두 줄로 늘어서 마차를 끌고 있었고, 마차의 몸체는 전체가 흰색을 띄고 있었다. 군데군데 장식된 금색과 은색의 테가 굉장히 아름답게 느껴졌다. 서서히 걷혀 가는 안개 사이로 비춰드는 햇빛에 마차 표면이 눈부시게 반짝인다. 마차의 문에는 기사들의 가슴에와 마찬가지로 은색의 늑대가 정교히 새겨져 있었다. 황실의 마차인 것이다. 마차의 크기는 보통의 마차 두 배 이상은 될 듯 했고, 마부와 마부 보조, 시종까지 모두 여섯 명이나 마차밖에 매달려 있었다. 마차 근처에는 몇 기의 말과 기사들이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기사들의 복식은 눈앞에 무릎꿇고 있는 그 기사들과 같은 것이었는데, 단 세명의 남녀만은 그 복장이 완전히 달랐다. 일행의 시선은 처음에는 마차로, 그리고 다음에는 호위하는 기사들에게로, 그리고 다시 그 두 사람의 남자와 한 여자로 쏠렸다. 두 명의 남자는 표정에서 옷차림, 그리고 머리칼의 색까지 단 한가지도 비슷한 점이 없었다.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었는데, 그중 왼쪽의 남자는 나이가 28세쯤 되어 보였다. 화려한 금발에 약간 얼굴이 긴 편이었으나, 오히려 그쪽이 더 어울릴 듯한 인상이었다. 상당한 미남으로, 온 몸을 휘감고 있는 은백색의 갑옷이 너무나 그에게 잘 어울리는 듯 했다. 한편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은 은색 갑옷의 기사와는 달리 흑색의 머리칼을 가진 남자였는데 나이는 그 금발보다 두세 살쯤 어려 보였다. 키도 약간 작은 듯 금발보다 어깨가 약간 낮았다. 금발이 온화하고 위엄 있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 이 흑발의 사내는 약간은 조용하면서도 싸늘한 눈빛을 띄고 있었는데 날카로운 턱선 덕분에 그러한 느낌이 한층 더했다. 둘 모두 흉갑만이 있는 경갑을 한 채, 등뒤로는 흰색과 흑색의 망토 자락을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말마저도 백마와 흑마였다. 흡사 무슨 흰색과 흑색에 특별한 감정이라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흑발의 남자 곁에는 20세 안팎으로 보이는 여자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주홍색 머리칼을 좌우 두 갈래로 땄는데 그 때문인지 나이에 비해 인상이 조금 어려보였다. 썩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상당히 매력 있는 아가씨였다. 커다란 눈동자 그대로의 성격이라면 아마도 상당히 활달할 듯 했다. 그들은 핌트로스와 모라이티나 등이 있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말에서 내려섰고, 핌트로스는 그런 그들을 향해 손을 한차례 들어 보이며 조금 큰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이야기했다. "훌륭한 황제를 둔덕에 공작 집안의 기사 님들까지 이렇게 친히 말을 달리게 만들었구나.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 그런 핌트로스의 말에 두 사람은 담담히 미소를 한차례 지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이런 아무렇지도 않은 대화는, 일행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충격을 안겨 주었다. 공작집안의 기사.... 이 소피카 안에서 황실의 마차를 경호할만한 공작 집안의 기사는.... 아마도.... 그때, 마차에서 네 명의 여자가 밖으로 나왔다. 좀더 정확히는 두 명의 귀부인이 두 명의 시녀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핌트로스는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밀레나 아가씨도 오셨나?" 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 여자들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귀부인 모두 기품 있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나이는 2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부인이라기 보다는 아가씨라 불리는 편이 적당할 것이다. 그중 한 명은, 은회색의 머리칼을 적당한 길이로 길렀는데, 다른 귀부인이 그녀에게 대하는 모습을 보건대 훨씬 지체가 높은 듯 보였다. 오똑한 콧날에 약간 치켜 올라간 눈썹 등에서 결코 순종적인 성격은 아니라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다른 한 명의 아가씨는 화사한 하늘색 머리칼이 살짝 어깨를 감싸고 있는 기품 있어 보이는 여자였는데, 온화한 미소가 특히 아름다웠다. 두 여자는 각각 마차에서 내려선 후 서로 걸음을 달리했다. 하늘색 머리칼의 여자는 시녀를 대동한 채 결코 서두르지 않는 걸음을 여유 있게 옮겨 금발의 기사에게로 다가간 반면, 은발의 여자는 시녀는 저 멀리로 때어둔 채 핌트로스에게로 달리듯 다가왔다. "티에. 여기까지 나온 거야?" 핌트로스는 그 은발의 아가씨가 자신의 앞에 서자 이렇게 물었고, 은발의 아가씨는 달리느라 약간 가빠진 숨을 한차례 고른 후 고개를 끄덕였다. 핌트로스는 그런 그녀의 두 손을 다정히 붙잡았다. 하지만, 티에 라는 여자는 그런 핌트로스를 향해 투정하듯 말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렇게 말없이 사라져 버려서!" 핌트로스가 그런 그녀의 투정을 웃으며 받아주었다. "평소에도 자주 그랬잖아. 뭘 새삼스럽게." "하지만, 지금까지 황성을 빠져 나간 적은 없잖아." 티에가 다시 따지듯 말했고, 핌트로스는 그저 얼굴에 웃음을 보태며 그녀의 손을 어루만져 주었다. "미안해. 하지만.... 좀 머리를 식히고 싶었어. 자, 그럼 이제 돌아가도록 하자." 핌트로스의 말에 티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당장 떠나자." 티에는 이렇게 말하며 핌트로스의 손을 잡아당기려 했으나, 핌트로스는 그런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잠깐.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어." "만나 보아야 할 사람?" "그래. 그러니까, 잠시만 기다리도록 하자." 핌트로스는 이렇게 말한 후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두 기사를 향해 손짓했다. "밀튼, 로멜, 오래간 만이야." 핌트로스의 말에 금발과 흰 갑옷의 기사 밀튼이 웃으며 대꾸했다. "4일 전에도 한 번 뵈었었습니다. 폐하." 뒤이어 온통 몸을 검정색으로 치장한 로멜이 웃으며 말했다. "형은 여전하군요." 핌트로스는 그런 로멜을 향해 한마디했다. "흑월의 기사 님께서는 그 동안 무슨 바쁜 일이 있으셔서 요 1년간 수도에 한차례 들리지도 않으셨나? 그건 그렇고, 밀레나 양과 케니양은 또 무슨 일이야? 무슨 부부동반 소풍이라도 나온 건가?" 핌트로스의 말에 로멜 곁에 서 있던 주홍색 머리칼의 아가씨가 웃으며 대꾸했다. "폐하께서 잠행하시는 모습을 친히 보고 싶어 이렇게 로멜 님을 따라 왔습니다." "그런가? 하핫, 실망이 크겠는걸?" 핌트로스의 활달한 목소리에 주홍색 머리칼의 아가씨는 고개를 한차례 조심스럽게 조아리며 대꾸했다. "아니요. 생각보다 재미있는 걸요." "케니, 그런 건 그렇게 공손한 척 하면서 할 말이 아닌 것 같아." 주홍색 머리칼의 여자는 핌트로스의 말에 한차례 쿠쿡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밀튼이 핌트로스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만나볼 사람이라니요. 새로 친구라도 사귀었습니까? 아, 그리고 뒤쪽의 분들은 누구 신지...." 밀튼의 물음에 핌트로스가 아, 하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냥 호기심이 생겨서." 그때, 모라이티나가 웃으며 핌트로스의 말을 끊었다. "아니요. 핌트로스 씨도, 여기 계시는 밀튼씨, 로멜 씨도 잘 알고 계시는 사람입니다. 쥬에티양도 아마 기억해 내실 수 있으실 지도 모르겠네요." 모라이티나가 이야기하는 동안 핌트로스 등은 몇 차례나 거듭 놀랐다. 우선, 모라이티나가 자신들의 신분을 알게 되었음에도 이름을 마구 부르는 것에 놀랐고, 티에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역시 놀랐으며, 또한 그녀의 말의 내용에 놀랐다. 모라이티나를 처음 보는 밀튼과 로멜 등의 기사들과 세 명의 여자들은 그녀의 미모에도 상당히 감탄하는 기색을 띄었다. 그때, 돌연 쥬에티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핌! 설마 저 여자 때문에 황성을 빠져 나온 건 아니겠지?" 쥬에티의 말에 핌트로스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무슨 소리야, 티에. 모라이티나 양과는 어제 저녁 태어나서 처음 만났어." 하지만 쥬에티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핌트로스의 손에서 자신의 조그마한 손을 빼내려고 했고, 그때, 핌트로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내 손을 놓으면, 다시는 잡지 못할 꺼야." 핌트로스의 이 짧은 말에 쥬에티는 빼내려던 손을 움찔 하며 멈추었다. 그 모습에 모라이티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결혼 전에는 쥬에티 양에게 핌트로스 씨가 잡혀 있었다던데.... 어떻게 상황이 역전되어 버렸네요." 핌트로스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고개를 절래 절래 내 저었다. "정말 누나 정체가 뭐야?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는 건지?" 모라이티나는 그의 말에 담담히 웃었다. "잠시 후, 그가 돌아오면 알 수 있을꺼에요. 사실 저도 그에게 단지 들었을 뿐이니까요." 막 모라이티나가 이 말을 마칠 무렵이었다. 돌연 숲 한쪽에서 거친 말발굽 소리가 들리며 한 명의 은색 갑옷을 입은 기사가 미친 듯이 말을 몰아 핌트로스 등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말에서 굴러 떨어지듯 내려와서는 핌트로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큰일입니다. 한 미친 마검사가.... 황실 기사단이 쳐놓은 방어진을 뚫고 이곳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방어진? 포위진이겠지." 핌트로스는 별 느낌 없이 이렇게 대꾸했다. 기사 몇 명이 어떻게 됐다는 것보다는 지금의 관심은 그 마검사에게로 쏠려 있었다. 모라이티나들이 이야기한 그 남자일 것이 뻔하니 말이다. 하지만, 밀튼의 안색은 파랗게 변했다. "설마.... 정말 방어진이 뚫렸단 말이냐? 상대의 군세는 얼마나 되지?" 밀튼의 물음에 그 기사는 뺨을 타고 흐르는 핏줄기를 팔 등으로 슥 닦아내며 말했다. "한 명.... 단지 한 명입니다. 벌써 250명의 북방 방어진중 절반이 전투 불능에 빠졌습니다." "250?" 돌연 핌트로스가 이렇게 소리치며 밀튼에게 물었다. "도대체 몇 명이나 끌고 온 거야?" "황실 근위대 2개단 1000명입니다. 지금 이 숲 안으로 들어오려면.... 적어도 2000명 이상의 병력은 가지고 있어야...." 은색 갑옷의 기사가 다시 말했다. "굉장합니다....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저희는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밀튼이 고개를 설래 설래 내 저었다. "이런 건.... 도대체가...." 핌트로스도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아니 있다!" 핌트로스가 돌연 외치며 밀튼을 바라보았고, 밀튼 역시 핌트로스를 바라보았다. 그뿐 아니라 로멜 또한 그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 세 사람은 서로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치자 마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핌트로스는 곧바로 모라이티나를 향해 물었다. "그 입니까?"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차례 미소지었다. "이제야 눈치챈 모양이군요." 핌트로스도, 밀튼도, 로멜도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있었다. 고개를 돌려 근위기사가 말을 달려온 방향을 바라보았고, 한참 후에나 로멜이 간신히 한마디 나직이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그분이.... 그분이 돌아오셨다...." 란테르트는 마법으로 모라이티나의 느낌을 찾았다. 일단 모라이티나가 인간이 아니었던 데다가, 그녀의 마법력 역시 기이할 정도로 높아 란테르트는 새벽 무렵에는 그녀의 기척을 희미하게나마 찾아낼 수 있었다. 란테르트는 그녀의 느낌을 해뜨는 쪽의 지평선 언저리에서 찾아낸 후 서둘러 말을 몰아 일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막 핌트로스의 아내이며 이 헵티슬 황국의 황비인 쥬에티가 핌트로스를 찾아냈을 때 쯤 일행이 쉬고있는 숲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숲이라기에는 굉장히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 있는 곳이었다. 란테르트는 이러한 성근 나무들 사이로 왠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을 발견했으나, 그냥 무시한 채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지금 이 기사들의 임무 중 절반이 바로 란테르트와 같은 불청객을 막는 것이 아닌가? "멈추십시오. 이곳은 지금 일반인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조금 성가시더라도 이 숲을 돌아서 가 주십시오." 말투는 공손했다. 은색갑옷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기사였다. 란테르트는 천천히 말에서 내려서며 그에게 말했다. "안에 일행이 있습니다." 기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란테르트가 다시 말했다. "일행이 숲 안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사는 다시 한 번 굳게 고개를 가로 저었을 뿐이고, 그에 란테르트는 조용히 검을 뽑아들었다. 이런 기사들이 모라이티나 등의 일행을 포위하고 있는 것도 가뜩이나 이상한 판인데.... 이렇게 길마저 막고 들여보내 주지 않다니.... 란테르트는 지금 조금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몸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어제 저녁과 밤사이의 싸움.... 아무리 그 라지만 체력 소모가 전혀 없었다고는 말못할 것이다. 특히 마음의 동요가 심한 상태에서 싸웠기에 다른 때보다는 피로도가 심했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단 한시간도 잠을 자지 않은 채 겨울의 건조하고 차가운 대기를 숨쉬며 이렇게 달려온 것이다. 비록 말을 타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겨우(!) 250명의 1류급 기사들이 그를 막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처음 란테르트와 이야기했던 기사는 란테르트가 검을 뽑는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자신들의 심장 위에 아로새겨진 회색의 늑대 문양을 뻔히 보면서도 싸움을 걸다니.... 그것도 250명에게 말이다. 하지만 단 1검만에 자신의 갑옷이 깨지며 가슴이 절반쯤 드러나는 모습에 기겁을 하며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검이 훌륭하고 갑옷이 뛰어났기에 목숨을 건졌지.... 그 두 가지 중 하나만이라도 형편없었더라면 방금의 일격에 그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사실 지금 란테르트의 목표는 단지 이들의 포위망을 뚫고 일행에게 돌아가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상대의 목숨을 앗기보다는 그저 돌파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마법을 남발했고, 검을 평소보다 조금 바삐 휘둘렀다. 사실 이 250명의 황실 근위기사단은 그 실력에 있어 레드 미스트 정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한 명 한 명의 실력이 전에 에디엘레 가에서 만난 미셸튼에게는 못 미치지만 그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이 250명을 통솔하고 있는 단장 급 정도면 미셸튼이나 히시아블과 비교정도는 할 수 있는 실력자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상대가 란테르트라는 것이다. 그들의 포위를 반쯤 돌파했을 때, 이미 기사단의 절반쯤이 몸에 꽤 커다란 상처를 입거나, 무기를 잃거나 하여 더 이상은 전투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더러는 죽은 사람도 꽤 되었다. 처음 란테르트의 일 검에 갑옷의 절반을 잃었던 남자는 이 250명을 통솔하는 단장이었다. 그는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도저히 기사들에게 퇴각명령은 내릴 수 없었다. 근위대라는 것은.... 그리고 그들의 목숨이라는 것은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닌 황제의 것이다. "원군을 청하러 한 명의 기사가 달려갔다. 우리들은 이곳에 피를 뿌려 저자의 발을 옭아매는 것이다. 두 룬의 기사 님들도 오셨다. 시간을, 시간을 끌기만 하면 우리는 우리의 주군을 지켜낼 수 있다." 단장은 목청을 돋구어 모두에게 이렇게 외쳤다. 가장 앞열에 서서 란테르트의 검을 힘겹게 받아내면서도 그는 전 군을 독려했고, 기사들은 비록 지금 밀리는 싸움을 하고 있었지만 그 사기만은 꺾이지 않았다. 전쟁에 사기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아무리 훈련도가 좋은 군사라 하더라도.... 개인으로 치면 용기라고도 부를 수 있는 사기가 상대보다 떨어지면 결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기만으로 기적을 이루어 낼 수는 없다. 펑 하는 굉음이 기사들의 귓전에 울렸다. 그들이 감싸고 있는 흰색 머리칼의 남자 주위에서 커다란 화염의 폭발이 일어났고, 기사들은 그 불꽃에 휘말려 자신들의 몸이 공중에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은 불행히도 나는 법을 몸에 익히지는 못하였다. 곧바로 땅으로 곤두박질 쳤고, 몸에 심한 충격을 받아 일부는 기절을 해버렸고, 일부는 끙끙거리는 신음을 내며 쓰러져 버렸다. 란테르트는 어제 좀 지나치다시피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아주 조금이나마 들었기에 오늘은 손을 좀 부드럽게(?) 놀렸고, 방금의 폭발을 일으키면서도 적당한 정도의 마법력만을 사용했다. 그렇다고 죽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은 란테르트의 관심 밖의 일이다. 포위망은 이 마지막의 마법으로 풀렸고, 란테르트는 조용히 검을 등뒤로 갈무리하며 말고삐를 다시 쥐었다. 이 난리 통에도 란테르트의 말은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지 않았다. 란테르트는 말에 다시 올라타고는 일행을 향해 말을 달렸다. 그의 기마술은 그렇게 정련된 편은 아니었기에, 숲속을 그렇게까지 빠른 속도로 달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란테르트 자신이 달리는 속도보다는 그쪽이 빨랐기에, 그리고 적이 어느 곳에 숨어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날아갈 수는 없었기에 그는 이렇게 말을 달렸다. 오래지 않아 그는 일행을 시야에 잡을 수 있었다. 곁에 커다란 마차가 있었고, 10여명의 기사들이 있었으며 화려한 의장을 한 여자들이 있었으나 란테르트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모라이티나와 시나, 로인, 오이니아, 켈파, 테리트론, 피아텔, 이들 일곱 명이 있는 곳으로 란테르트는 말을 몰았고, 이내 말에서 내려서며 모라이티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저 밖의 기사들은 누구이고? 또 이들은 뭐야?" 란테르트 답지 않게 연달아 세 차례나 물음을 던지는 이 모습에 모라이티나는 담담히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핌트로스 등을 바라보았고, 란테르트 역시 모라이티나의 시선을 따라 핌트로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란테르트와 핌트로스 사이의 거리는 불과 대여섯 걸음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밀튼과 로멜도 함께 서 있었다. 란테르트는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10년전의 그들임을 알아볼 수 있었고, 안도의 미소를 한차례 지었다. 밀튼과 로멜.... 처음 피치토 마을을 떠나 온 이유가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닌가? 핌트로스 역시 란테르트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하핫. 란테르트형, 정말 오래간만이야! 10년 만인가?" 핌트로스의 말에 란테르트는 다시 한차례 미소를 지었다. "여전 하시군요. 황제가 되셨다고 하던데...." "뭐 그렇지. 루실리스 녀석.... 아니지, 선 황제가 나한테 물려줬어. 살아있을때도 날 그렇게 이용해 먹더니.... 죽어서, 아니 붕어해서까지 이 모양이지 뭐." 그때, 쥬에티가 그의 말에 따지는 듯한 말투로 끼여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핌! 오라버니는 다 핌을 위해서 그런 거야. 황제의 인을 아무에게나 넘겨주겠어?" 핌트로스는 쥬에티의 말에 뒤통수만 끌쩍일 뿐이었다. 이들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가는 사이, 밀튼과 로멜은 단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않은 채 묵묵히 란테르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록.... 팔을 하나 잃고, 머리칼의 색도 회청색에서 은백색으로 바뀌었으나.... 바로 그였다. 그들의 마음속의 스승인.... 밀튼과 로멜은 걸음을 옮겨 란테르트에게로 다가왔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는 그들의 표정은 근엄하기가 신을 대하는 신관과 같았고, 자세의 단정하기는 황제를 알현하는 것과도 같았다. 이윽고 란테르트 앞에 섰고, 두 사람은 동시에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었다. "라비네 나이트님...." 그들의 목소리는 아주 조금이지만 떨리고 있었다. 얼굴은 엄숙하기 짝이 없었으나, 눈동자만은 모든 감정을 담아내며 맑게 빛나고 있었다. 란테르트는 디미온으로부터 이들 형제가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저는.... 당신들에게 이러한 인사를 받을만한 일을 단 한차례도 하지 않았습니다." 은월의 기사 밀튼이 란테르트의 말에 고개를 살짝 들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란테르트님.... 당신은 우리 두 형제의 생명의 은인이자 마음속의 스승이었습니다. 순수한 강함과 위선이 아닌 의로움.... 이 두 가지를 저희에게 가르쳐 주셨지요."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전.... 미친 마검사일 뿐입니다...." 핌트로스가 곁에서 끼여들었다. "자, 그런 말들은 궁에 돌아가서 하도록 하자!" 핌트로스가 이 시점에 밀튼의 말을 끊으며 끼여든 것은 결코 밀튼을 무시해서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여기서 오래 대화를 끌었다가는 란테르트를 수도까지 데려갈 수 없을 것이 불을 보듯했기 때문이었다. 핌트로스 역시 밀튼과 로멜 못지 않게 란테르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단 며칠만이라도 함께 있었으면 하는 게 이들의 공통적인 마음이었다. 밀튼 역시 이렇게 숲속에서 그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는 조금 더 격식을 차례 그를 대하는 것이 더욱 좋겠다 싶어 핌트로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란테르트는 어차피 그들을 만나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그리고 어차피 마기아에로 향하던 걸음이었기에 그들의 뜻에 따랐다. 밀튼이 곁에 있던 기사들에게 1000명의, 이제는 얼마간 줄어 있겠지만, 근위대에게 환궁하라는 명령을 전하도록 했고, 그러는 사이 로멜은 자신의 형수와 부인을 란테르트에게 소개했다. 아울러 쥬에티 역시 란테르트에게 간단한 인사말을 건넸다. 그녀는 란테르트에게 별다른 관심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단지 과거에 한차례 스쳐 지나간 사람 정도인 것이다. 란테르트가 분주히 그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모라이티나를 제외한 일행은 지금 머릿속이 핑핑 도는 듯 했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함께 여행했던 남자가.... 황제가 형이라고 부르고, 두 룬의 기사가 고개를 숙여야 하는 남자였다니....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광경이 현실로 나타나 버린 것이다. 로인과 시나는 놀라움이 절반에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이 나머지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 하고 있던 모라이티나를 너무했다는 눈으로 한차례 쳐다보기도 했고, 왠지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피아텔과 오이니아를 바라보기도 했다. 테리트론은 아마 모라이티나를 제외하고는 일행 중 가장 심정의 변화가 적은 듯 했다. 이미 란테르트가 크림슨 아이즈라는 것을 알았던 그때, 지금 놀랄 것까지 모두 놀라버린 듯 했다. 하지만, 오이니아와 켈파, 그리고 피아텔의 반응은.... 이들의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이니아는 입을 살짝 벌린 채 두 룬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란테르트를 바라보기를 번갈아 했다. 처음, 두 룬의 기사.... 마음속의 우상이었던 그들이 오이니아일행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오이니아는 당장이라도 그들에게 뛰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했었다. 하지만.... 황제, 비록 황제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지만, 아무튼 황제의 앞이라는 어떤 위축감 때문에 감히 그러지 못했었다. 그저 말로만 들어왔던 그 멋진 기사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해지는 듯 했다. 그리고 뒤이어 오간 모라이티나와 핌트로스의 대화에 오이니아는 적지 않은 혼란을 느꼈다. 란테르트가.... 그가 이미 두 룬의 기사와 알고 있다니.... 처음에는 분명 모른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결국 그 란테르트 당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라이티나의 말 그대로.... 두 룬의 기사는 란테르트를 알고 있었다. 아니.... 비단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깊이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말했다. 마음의 스승이라고.... 오이니아는 이제야.... 이러한 모습을 보고 나서야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란테르트가 이야기했던 모든 이야기는.... 사실이었다고. 자신의 할아버지를 죽은 사람은.... 분명 그가 대신 복수를 해 주었을 것이고.... 할아버지와는 아반트 가르트에서 함께 일했었고.... 할아버지의 말 그대로.... 자신을 돌보아 주기 위해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 했던 것이라는 것을.... 감사를.... 했어야 할 일 아닌가?.... 켈파 역시 오이니아만큼은 아니지만 굉장히 놀라고 있었다. 사실, 평소에 기사가 되고 싶다느니 하는 생각은 전혀 해 보지 않아 두 룬의 기사가 어쨌건 그다지 신경은 쓰지 않았었으나, 오이니아도, 피아텔도, 그리고 종종 수업을 받는 검술 강습소의 아이들도 모두 두 룬의 기사에 대한 칭찬을 입에 달고 살다 시피 했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켈파의 머릿속에 그려진 두 룬의 기사는 보통의 기사들과는 다른 어떤 성스러운 모습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런 룬의 기사들이 란테르트에게 저렇게나 공손하다니.... 하지만 이들의 심정은 차라리 이 남자에 비한다면.... 별 것 아니라 할 만 했다. 피아텔은 너무 놀라 눈동자가 다 풀릴 정도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에 올려놓은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고, 온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조용히 과거를 돌아다보았다. 란테르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시하는 마음 일변도였다. 비록 노골적으로 그를 무시한 적은 거의 없었으나.... 은연중 그런 태도를 보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사실 피아텔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칭송과 존중, 이 두 가지만을 받아온 그는 세상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기까지 하여 약간은 스스로 안에 갇혀 지내는 터였다. 태어나 만난 가장 훌륭한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였고, 가장 강한 사람은 자신에게 검을 가르친 헬튼가문에 봉사하는 기사였다. 마을 최고의 용병으로 칭송 받는 오이니아의 할아버지도 그 기사보다는 약간 아래의 실력을 가졌다는 것이 기사들 사이의 생각이었다. 가장 존경하는 기사들인 밀튼과 로멜에 대해서는 소문만을 들었을 뿐 실재로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겨우 이런 정도의 경험으로 세상을 대하다 보니, 피아텔의 시선이 편벽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외아들로 떠받들어져만 자라 왔기에 성격 역시 약간은 건방진 면도 있었기에, 그가 란테르트라는 외팔이를 무시한 것은 당연하다 못해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그는 란테르트뿐만이 아닌.... 핌트로스마저도 마구 대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이제 와서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을 대할 자신은 없었다. 친구들이 듣는 곳에서 했던 그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말들에 대해서는.... 이제 어떻게 해명해야 하는가?.... 피아텔은 참담한 얼굴로 잠시 두 룬의 기사, 핌트로스, 그리고 란테르트를 한차례씩 바라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그때 그의 그러한 표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테리트론이 곁에서 한마디했다. "다시 한 번 말씀해 보시지? 그래, 이제 이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꺼지? 네 그 알량한 논리로 둘러대 봐라." 피아텔의 고개는 더더욱 아래로 떨어졌고, 테리트론은 이제야 한방 먹여줄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때, 일행 사이에 잠겨있던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모라이티나가 입을 열었다. "자, 모두들 마기아로 갈 준비를 해야지.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그제서야 꿈에서 깨어난 듯한 표정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일행이었다. 미스트산 근처의 그 숲에서 수도까지는 60휴하 정도로, 말을 타고 있는 일행에게 이틀거리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도중, 마차대신 말 위에 몸을 실은 핌트로스는 밀튼, 로멜과 더불어 란테르트와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란테르트와 만난 바로 그 날 오전은 란테르트에게 몹시 번잡한 한때였다. 밀튼과 로멜, 그리고 핌트로스 이 세 사람이 쉬지 않고 질문을 해댔기 때문이다. 질문의 내용은 전에 만났던 칼슨이나 클라라.... 디미온, 이시테 등의 사람들과 대동소이했다. 가장 처음 물은 것은 10년간 어디 있었느냐? 였고, 뒤이어 팔은 왜 잃었느냐?, 그리고 하려던 일은 성공하였는가? 의 차례로 세 사람이 번갈아 질문을 해왔다. 란테르트는 벌써 몇 차례나 이러한 질문에 대답해 왔기에 약간의 권태로움을 느꼈으나, 한편으로는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순서까지 똑같이 이러한 것들을 물어 오는 걸까? 이러한 대화 도중, 핌트로스가 모라이티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말 어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누나가 정말 신비스럽게 느껴졌었다니까. 하하! 어떻게 나에 대한 개인적인 것까지 알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거든. 란테르트형에게 들었나보지?"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때 밀튼이 모라이티나에게 곧바로 물었다. "란테르트 님과는 어떤 관계이십니까? 보통의 동료처럼은 보이지 않습니다." "친구 에요. 오래 전부터 사귄...." 모라이티나가 답했고, 그때 핌트로스가 란테르트에게 짖꿎은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형, 그 트레시아라는 누님은 어떻게 된 거야?" 핌트로스는 비록 10년 전에 잠시 만난 여자였지만,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족.... 태어나서 처음 만난 마족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핌트로스는 트레시아를 떠올리고 곧바로 이카르트를 떠올렸다. 란테르트의 뒤를 돌보아주던 그 보라색 머리칼의 마족을.... 막 그가 그런 생각을 할 무렵 란테르트가 슬쩍 미소 지으며 답했다. "트레시아는.... 지금 자신의 일이 바빠서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라이티나가 뒤이어 핌트로스에게 물었다. "트레시아도 만났었나보죠?" 핌트로스가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누나도 알고 있었어?" "네. 한달 남짓 전에도 만났는걸요." 핌트로스는 모라이티나와 트레시아의 사이가 란테르트를 사이에 둔 삼각관계쯤 될 줄 알았는데, 모라이티나가 트레시아에 대해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하자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 란테르트에게 조금 전 떠올렸던 보라색 머리칼의 마족에 대해 물었다. "아.... 근데.... 그 누구더라? 형의 뒤를 봐주던.... 그 남자.... 그와는 다시 만났어?" 핌트로스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씁쓸한 미소를 내보이며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모라이티나는 핌트로스의 말에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밀튼 님과 로멜 님은 란테르트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10년 전의 란테르트는.... 그다지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을텐데요...." 로멜이 곧바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모라이티나가 다시 물었다. "강함에 대한 무인으로써의 존경인가요?" 밀튼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모라이티나의 이야기에 대꾸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것 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란테르트 님과 며칠 생활하는 사이.... 결코 악마라고 불리울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손속이 잔인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어차피 사람을 죽인다는 면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로멜이 뒤이어 말했다. "전 지난 8년 동안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었어요. 케니도 그때 만났죠." 이렇게 말하며 로멜은 바로 곁에서 말을 몰고 있는 주홍색 머리칼의 아가씨를 한차례 바라보았고, 케니라는 그 여자는 방긋, 활달한 미소를 한차례 지었다. 로멜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크림슨 아이즈에 대한 소문도 많이 들었습니다. 검사들.... 용병들....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말 그대로 악마로 통했습니다. 그리고, 란테르트 님의 모습을 단 한차례도 보지 못한 사람들의 입에서도 크림슨 아이즈라는 이름은 악마로 통용되었지요.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란테르트 님의 도움을 받은 사람도 부지기수 였습니다." 란테르트가 그런 로멜의 말을 끊었다. "사람을.... 도와준 적은 없습니다. 다만 필요하기에.... 이용했던 것뿐이지요." 로멜이 웃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만.... 막상 도움을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전 믿지 않겠습니다. 친히 목격한 것만 해도 두 번입니다. 에디엘레 가를 도와주던 모습을 보았고, 이름 모를 대장장이가 하던 이야기를 들었었습니다." 밀튼이 뒤이어 말했다. "사실.... 저는 란테르트 님의 잔인한 손속과.... 수단을 가리지 않는 그러한 행동 같은 것에는 전적으로 찬성 하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부분을 뺀 란테르트 님은, 스승이라 불리우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밀튼의 이 말에 로멜은 약간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란테르트에게 말했다. "실제로 사람들과 만나고 또 그들을 돕다 보면, 올바른 수단으로는 그들을 도와줄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점을 생각한다면.... 어찌되었건 전 란테르트의 그러한 행동들이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형제는 각각 이렇게 말한 후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서로 의견 충돌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어떤 논리는 펴지 않았다. 서로의 차이를 이제는 인정해 버리는 모양이었다. 란테르트는 이 두 형제의 이야기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왠지.... 느낌이 이상했다. 자신을 존경하는 사람이라니.... 물론, 그의 강함을 숭상하는 사람은 여럿 되었다. 하지만.... 인간적인 존경 같은 것은 받아본 적이 거의 없는 듯 했다. 악마.... 차라리 그쪽이 자신에게는 어울릴 것이다. 그때 처음 질문을 꺼낸 모라이티나가 웃으며 란테르트에게 말했다. "좋은 일을 많이 했었나보죠? 왜 그런 얘기는 나한테 해주지 않았나요?" 란테르트는 그녀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것.... 내가 했을 리 없잖아?.... 난 크림슨 아이즈였는걸...." 밀튼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요. 라비네 나이트셨습니다. 약속과 신의를 생명처럼 여기고, 결코 약한 자들에게는 검을 들지 않으신, 기사다운 기사셨습니다." 핌트로스가 맞장구 쳤다. "밀튼 말이 맞아. 입만 번지르르, 정의니 신의니, 충의니, 이따위 것을 외치는 멍청이들과는 완전히 격이 다른, 정말 기사라 불릴 만한 얼마 안돼는 사람중 한 명이야." 모라이티나는 그들의 말에 호호, 한차례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축하드려요! 란테르트씨! 헵티슬의 황제폐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기사라고. 이제는 악마의 딱지를 떼고 기사가 되는 거예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훗, 하는 헛웃음을 터트렸고, 밀튼과 로멜, 그리고 핌트로스도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한편, 란테르트가, 황제, 그리고 두 룬의 기사와 더불어 한담을 나누고 있을 무렵, 시나들은 조금 뒤에서 천천히 말을 몰며 란테르트의 뒤를 쫓았다. 아침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오이니아와 켈파, 그리고 피아텔은 몹시 복잡한 표정이었다. 반면 테리트론과 시나, 로인은 새로 이야기 할 거리가 생겨 신난다는 듯 평소보다 훨씬 활발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멋진걸? 황제라...." 테리트론은 흰색의 커다란 마차를 한참동안 응시하다 이렇게 중얼거렸고, 그의 말에 시나가 손가락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가며 말했다. "쉿! 함부로 이야기하지마. 그러다 잘못되면.... 꼭 폐하라는 말을 붙이도록 해." 테리트론은 시나의 말에 머쓱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란테르트 님의 인맥은 도대체 어디에까지 이어져 있는 거야? 황제.... 폐하까지 알고 있다니.... 게다가 두 룬의 기사들도...." 테리트론의 말에 시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도 모르겠어.... 이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거든.... 삼촌은 마족과도 친구야. 그리고.... 아, 맞다. 위다의 세르테이나 여왕전하와.... 지금은 어디론가 잠적해 버린 위다 유일의 공작가문 트라미스의 메티에르 나이트, 지그프리드 님과도 아는 사이라고 들었어." "햐, 대단하구나. 하긴.... 저 정도의 실력이면....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지. 게다가, 10년 전이면 란테르트 님이 훨씬 유명했었으니까." 테리트론은 시나의 말에 이렇게 중얼거렸고, 그때, 곁에서 말을 몰던 켈파가 물었다. "10년 전에.... 란테르트 님이 도대체 누구였기에.... 예전에도 테리트론 네가 지금과 비슷한말을 했었던 것 같은데...." 켈파의 물음에 테리트론이 살짝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10년 전 가장 유명한 사람이 누구였을까?" 테리트론은 오히려 켈파에게 질문을 던졌고, 켈파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하지만 대답은 오이니아가 더 빨랐다. "크림슨.... 아이즈...." 그녀의 말에 테리트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켈파와 오이니아는 아, 하는 나지막한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피아텔은 그 대화에, 크림슨 아이즈?.... 라고 조그맣게 한차례 중얼거릴 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오이니아가 약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테리트론의 말이 맞았었구나.... 백작가문의 여자라도.... 란테르트 님의 명성에 비한다면...." 테리트론이 웃으며 말했다. "내 말은 언제나 진실이라니까!" 하지만, 이 말은 말한 그 자신조차도 믿지 않는 듯 그저 한차례 웃음으로 모두의 귓가에서 날려버렸다. 그때, 로인이 끼여들었다. "이제 어떻게 할 꺼야?" 켈파와 오이니아 두 사람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고, 켈파는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얼?" "이제.... 복수 같은 것 안해도 되잖아. 아직도 삼촌의 말을 믿지 못하는 거야?" 로인의 말에 오이니아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믿어.... 란테르트 님에게 부끄럽고.... 또 미안할 뿐이야. 고맙기도 하고.... 이제....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언제까지나 떠나있을 수는 없으니까." 로인은 그녀의 말에 기분 좋은 미소를 내보였다. "그렇게 이야기 하니.... 정말 다행이야." 오이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런 말이 오가는 사이, 테리트론은 손을 깍지끼며 머리 뒤로 들어 올렸다. 이제는 말 타는 것에 완전히 익숙해 졌는지, 두 손을 모두 고삐에서 놓고도 곧잘 말 등에 앉아 있었다. "햐~! 이렇게 여행도 끝나 버렸구나. 참 많은 일이 있었지?...." 그의 말에 시나를 비롯한 일행들은 조용히 지난 일을 하나 둘씩 떠올렸다. 그다지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건만.... 꽤 많은 일을 겪은 듯 했다. "재미있었어.... 정말." 오이니아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려 켈파를 바라보았다. 마침 오이니아를 바라보던 켈파를 향해 싱긋 한차례 미소를 지었고, 켈파는 그런 그녀의 시선에 귀를 붉히며 서둘러 앞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다시 오이니아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함께 미소를 지어주는 켈파였다. 이런 저런 대화들을 각자 나누며, 일행은 만 하루하고도 한 나절이 지난 12월 26일 저녁 늦게 소피카의 수도인 마기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날은 그간의 여독을 풀기 위해 별다른 모임은 갖지 않았다. 밀튼과 로멜, 이 두 사람은 소피카에 마련된 밀튼의 관사, 정식명칭은 헵티슬군 총 사령관저이다, 로 향했고,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 등의 일행은 핌트로스의 강권으로 황궁안의 영빈관에서 묵게 되었다. 황궁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소피카 왕실이 쓰던 왕궁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루실리스도, 핌트로스도 사치와는 극히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황궁에 관해서는 계획조차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부분적으로 증개축이 이루어져 예전에 란테르트가 들렸을 때와는 그 모습이 사뭇 달랐다. 영빈관은.... 이전에 묵었던 어떠한 곳보다도 으리으리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이곳은 소피카의 3대왕이었던 제리아클의 이름을 붙여 제리아클궁 이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이 제리아클이라는 왕은 손님을 들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해, 일부 비판적인 귀족들에게는 소피카 여관의 왕이라고 불리기도 했었다고 한다. 일행이 처음 시녀들의 안내를 받아 영빈관 안에 걸음을 들여놓았을 때, 순간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이 방에서 모두 함께 지내라는 이야기인가? 하고 말이다. 그 정도로 방의 크기가 컸던 것이다. 로인이 살던 집 정도는 정원까지 쏙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한 방 안에 다섯 사람은 족히 누울만한 침대 하나와 연갈색의 가죽이 부드러운 빛을 내는 소파 한 세트, 그리고 여성용 화장대와 옷장 따위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방안 한쪽에서는 커다란 벽난로가 하나 있었는데, 그 외에도 벽 한쪽의 환기구를 통해 온화한 바람이 스미는 것을 보아 외부에 난로가 하나 더 있는 모양이었다. 일행을 위해 미리 방을 대워놓은 것인지, 언제나 난방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 큰방을 태우려면 연료가 굉장히 많이 필요할 것이다. 일반 가정에서는 축제 때만 사용하는 촛대도 수십 개나 빛을 발하고 있었다. 메이드는 일행에게 방의 문을 열어 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 복도에는 8개의 방이 있답니다. 원하시는 수만큼 사용하세요. 복도 오른쪽의 네 방에는 침대가 두 개씩, 그리고 이쪽에는 하나씩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 개만 사용하겠습니다. 침대가 두 개씩 있는 방으로요." 메이드는 란테르트의 말에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다시 이렇게 말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침대 곁에 있는 붉은 줄을 잡아당겨 주십시오. 혹시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란테르트는 메이드의 말에 일행 중 혹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까 하고 한차례 그들을 바라보았으나, 모라이티나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이 커다란 방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란테르트는 그들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메이드에게 말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메이드는 다시 한차례 허리를 굽혀 인사했고, 이내 기품 있는 발걸음으로 몸을 돌려 복도를 저편으로 사라졌다. 란테르트는 잠시 그 메이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모라이티나는 그런 란테르트의 모습에 웃으며 말했다. "왜? 마음에 들어요? 예쁘죠?"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짓궂은 물음에 한차례 미소를 짓고는 대꾸했다. "그냥.... 시녀치고는 굉장히 기품 있어 보여서...." "그렇겠죠. 황궁의 시녀를 아무나 하는 줄 알아요? 아마 어느 귀족가문의 아가씨일걸요? 물론, 하급귀족이겠지만...." 모라이티나의 대답에 란테르트는 아, 하는 조그마한 탄성을 내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모두들 우선 짐을 풀도록 해. 오늘은 조금 일찍 자야지. 내일은 정식으로 핌트로스씨.... 아니지, 황제폐하를 알현하고, 또 두 룬의 기사 님들과도 정식으로 인사를 해야 할 테니까." 모라이티나의 말에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언제나 여관에서 묵던 대로 각자의 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란테르트는 로인과 한 방을, 시나와 오이니아는 모라이티나와 함께, 그리고, 테리트론, 켈파, 피아텔이 함께 한 방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러한 배치는 짐을 풀어놓자 마자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다. 모라이티나는 곧바로 란테르트의 방에 찾아들고, 로인은 시나가 있는 곳으로 쫓겨온다. 그리고 오이니아는 친구들이 있는 방으로, 테리트론은 오히려 시나와 로인이 있는 곳으로 찾아오고.... 자정이 될 때까지는 보통 이러한 식으로 각자의 방에 머물게 된다. 확실히 약간은 우스운 모습이지만.... 어쩔 수 없다. 시나는 지금 막 자신의 방의 침대에 걸터앉아 방안을 휘휘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테리트론은, "촌스럽기는." 이라고 한마디했으나.... "촌스럽기로 따지면 네 쪽이 더하지 않을까? 넌 아예 이 방이 왜 아름다운지도 모르잖아!" 시나의 말이 조금 더 신빙성이 있었다. 테리트론은 그런 그녀의 말에, "쳇, 남자들은 그런 건 몰라도 돼." 라고 대꾸고, 시나는 곧바로, "너같이 센스 없는 남자들이나 그렇게 생각하지." 라고 맞받아 쳤다. 로인은 그 둘의 모습에 빙그레 미소만을 짓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우리들끼리만 있는 것도 오래간 만이구나...." "그게 뭐 어떻다고?" 시나가 물었고, 로인은 고개를 한차례 가로 저었다. "뭐 딱히 어떻다기 보다는.... 그냥 며칠동안, 황제폐하와.... 두 공작전하와 함께 있다보니 왠지 위축되었었던 같은 느낌이 들어서.... 하고 싶은 말도 거의 하지 못했었잖아." 시나가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였었는데?" 로인이 대꾸했다. "그냥.... 황제폐하는 참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라는 이야기도 함부로 할 수 없었고.... 두 룬의 기사 님들이 어쩌니 하는 얘기도...." 테리트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건 그래. 피아텔 녀석을 조금 더 밟아놨어야 하는데.... 이번 기회에 아예 잘난 척이라는 것을 못하게 만들어야지." "그것도 그렇구나." 테리트론의 말에 시나는 전적으로 찬성한다는 듯 이렇게 말하며 한차례 웃음을 터트렸다. 한편, 테리트론이 이야기한 그 당사자는, 지금까지도 풀이 팍 죽어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이제 우리 헬튼가문은 어떻게 되는 걸까?...." 바닥에 앉아 침대에 등을 기대고 있던 피아텔이 무심코 이렇게 중얼거렸다. 곁에서 오이니아와 켈파는 요 며칠 사이에 일어난 황당한 일들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고, 지금 까지 피아텔은 입을 꼭 다문 채로 있었다. 피아텔의 이 기운 없는 말에 켈파가 말했다. "걱정하지마. 별 일 없을 꺼야." 피아텔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가.... 내가 폐하께 한 일을.... 너도 잘 알고 있을 꺼야.... 가문 전체가 몰살을 당한다 하더라도 어디 하소연 할 곳도 없어...." 피아텔은 이런 말을 하며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는데 몹시 자포자기한 듯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피아텔...." 켈파는 조용히 피아텔을 불렀으나 그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계속 힘없이 중얼거렸다. "게다가.... 란테르트.... 내가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 아.... 그가 그렇게 황제 폐하와 친하니.... 분명 나를 파면시키도록 이야기 할 꺼야...." 그때, 그런 그의 말을 끊으며 오이니아가 말했다. "피아텔! 넌 지금에 와서도 그렇게 바보 같은 생각밖에는 할 수 없는 거야?" 오이니아의 목소리는 책망하는 듯한 분위기가 가득했고, 피아텔은 그런 그녀를 멍한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넌.... 나날이 내게 실망만 안겨 주는구나." 오이니아는 피아텔에게서 시선까지 피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때 켈파가 오이니아의 말을 끊었다. "그만 둬, 오이니아. 피아텔은 지금 힘들어하고 있잖아." 켈파는 다시 피아텔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무 걱정하지 마. 란테르트 님은 결코 그런 사소한 일로 너를 험담할 사람은 아니야. 만약 네가 마음에 않들었다면 차라리, 우리와 함께 여행 같은 것을 하지 않고 말았겠지. 그리고,.... 황제 폐하의 일도, 걱정할 것 없어. 피아텔 네가 대련을 신청했던 상대는 황제 폐하가 아닌 핌트로스라는 지나가는 검사였잖아. 사실, 정체를 밝히지 않은 황제 폐하가 잘못이었지." 켈파는 피아텔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오히려 황제를 헐뜯었고, 오이니아는 그 말을 곁에서 듣고 있다가 끼여들며 제지했다. "켈파, 그게 무슨 말이야. 황궁안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사실이잖아.... 만약 그때의 일로 피아텔을 책망한다면.... 폐하의 앞이라 하더라도 꼭 이 이야기를 할 꺼야." "바보 같은 말이야." 오이니아가 켈파의 말에 곧바로 이렇게 말했으나, 켈파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휴.... 켈파는 어쩔 수 없는 남자로구나...." 오이니아는 중얼거리듯 이렇게 말한 후, 앉아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켈파가 물었다. "어디 가려고?" 오이니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켈파도 따라 몸을 일으키려 했다. "혼자 어딜 가려고? 함께 나가자." 오이니아는 켈파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됐어." "화난 거야?" 켈파가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고, 오이니아는 살짝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그냥 란테르트 님께 가 보려고 그래. 그 동안의 일에 감사도 드리고 싶고.... 따로 드릴 말도 있고 해서. 켈파는 피아텔과 함께 있어." 그녀의 말에 켈파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그래?.... 함께 가고 싶지 않다면 좋도록 해. 나도 나중에 찾아뵐 생각이었는데...." "그때도 함께 가 줄게." 오이니아가 말했고, 켈파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나눌 무렵, 모라이티나와 란테르트는 침대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모라이티나는 두 손을 침대 위에 올려 놓은 채 방을 휘휘 둘러보았는데, 마음에 몹시 드는 모양이었다. "정말 대단해요. 위다의 왕궁에서 머물 때 있었던 방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위다?"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가 물었고, 모라이티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세르테이나 양을 만나러 갔었거든요. 당신이 전에 말했었잖아요. 그녀와도 한차례 만났었다고.... 10년전 란테르트가 이야기했던 그 사람들과 가능 한한 거의 다 만나려고 했어요. 핌트로스 씨나 밀튼, 로멜 씨는 워낙 지체가 높으신 분들이라 만나기 힘들었지만.... 세르테이나양은 칼슨 씨를 통해 만날 기회가 있었거든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후훗, 나같이 쓸모 없는 녀석을 다시 만나기 위해.... 그렇게까지 했던 거야?" 모라이티나도 따라 웃었다. "그래요. 란테르트같이 쓸모 없는 남자를 만나기 위해."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방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조그마한 장식까지도 섬세하기 짝이 없었다. "햐.... 욕실도 있는 모양이네요. 같이 목욕이나 할까요?" 대강 한차례 휘 둘러본 모라이티나는 가벼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고,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못하는 소리가 없네." 라고 한마디 핀잔을 주었다. 그런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흥, 내가 어른이 된지도 14년이 흘렀어요." 라고 대꾸했고, 란테르트는 그저 미소만을 지을 뿐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모라이티나도 농담으로 한 이야기 였기에 더 이상 이야기를 전개시키지 않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약간 차분해진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를?" "레드 미스트에서의 일.... 말이에요." 모라이티나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란테르트는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냥 별거 아니었어. 그 헤인이라는 사람 정말 대단한 듯 하던데? 검술뿐이 아니라, 용병 법에도 굉장히 밝은 듯 했어. 병사들을 쓰는 법이라든지.... 뭐, 등등 말이야." 그렇게 이야기하는 란테르트를 바라보며 모라이티나가 말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란테르트의.... 란테르트는 어땠죠?"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말투가 이상하게 어둡자 더더욱 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대의 마왕 크림슨 아이즈를 무시하는 거야? 한 2, 300쯤 죽인 거 같은데?" 란테르트의 이러한 이야기에 모라이티나는 조금전의 우울하던 표정을 풀었다. "다행이에요...." "사람을 죽인게?" 란테르트는 장난스럽게 되물었고, 모라이티나는 그런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살짝 밀며 말했다. "장난치지 말아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뭐가 그렇게 문제야? 천하에 태평한 모라이티나 양께서? 황제 앞에서도 맘대로 황제의 이름을 부를 정도로 무서운 게 없으면서 말이야." 모라이티나는 이제야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 "흥. 란테르트가 있는데 뭐가 무섭겠어요? 황제가 황군 8만을 다 끌고 와 봤자 란테르트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란테르트가 그런 모라이티나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후훗. 8만 명은 무리야. 아무리 나라지만...."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게다가, 이기지는 못할지도 모르지만 지지는 않을 수 있잖아요." 란테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방어만 하고 있다면.... 8만이 아니라 그 열 배가 온다 하더라도 란테르트의 털끝조차 건드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인간이 그에게 물리적, 혹은 정신적 타격을 입힌다는 것은 불가능 하니 말이다. 란테르트가 막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모라이티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정말 걱정 많이 했어요. 울음을 터트렸을 정도로 걱정했었어요." 모라이티나는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바보 같기는. 얘기했잖아. 나는 할 일이 있을 때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고. 나, 피를 토하지도 않았어. 지금도 멀쩡하고." 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다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제가 걱정한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어요. 란테르트의 마음.... 전.... 처음에 단지 한가지만을 생각했었어요. 란테르트가 그들을 죽이고 나면.... 사피엘라.... 그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 버릴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 말이에요. 하지만.... 란테르트가 제게 등을 돌리며 지평선 쪽으로 달리는 모습을 보자 마자....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왜 그런지는 전혀 모르겠어요. 그냥.... 마음이 복잡한 것이...." 그런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말.... 그대로였다. 죄책감 같은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저 지난 일을 떠올리며 미친 듯 칼질을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란테르트는 입가에서 곧바로 쓴웃음을 지웠다. 그리고는, 밝고 경쾌한 목소리를 짜내듯 입가로 가져가 이렇게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난 지금 후련한 기분이야. 18년전의 체증이 확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거든. 게다가.... 오래간 만에 마음 내키는 대로 검을 휘둘렀더니 왠지 마음이 탁 트이는 느낌도 들었고."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그럼.... 전 실수 같은 것, 하지 않은 것이지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속으로.... 실수는.... 내가 한 거야.... 라고 중얼거리며 겉으로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어련하시겠어? 모라이티나 님이 실수 같은 것을 할 리 없잖아. 종종 자신의 신의 물건을 훔쳐 가지고 다른 대륙으로 도망 나오거나 하는 행동은 해도 말이야."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기분을 북돋워 주기 위해 옛 일까지 들먹였고, 란테르트의 의도대로 모라이티나는 헤헷, 어리숙한 웃음을 웃으며 란테르트의 말에 대꾸했다. "치사해요. 아직도 그 일을 들먹이다니." 그 때 똑똑, 하는 누군가 그 두 사람이 묶고 있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죠?" 모라이티나가 물었고, "오이니아 에요." 하는 소리가 문 너머로부터 들려왔다. "아, 들어와."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 사이 오이니아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방해해서 죄송해요." 모라이티나는 오이니아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녀가 반쯤 연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천만에. 어서 들어와." 오이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이니아는 방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방안의 풍경을 슬쩍 살펴보았다. 란테르트는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오이니아를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쪽 팔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고, 소매뿐인 다른 쪽은 자연스럽게 몸 옆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이니아는 뒤이어 모라이티나를 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밝고 상냥한 미소를 가진 그녀를 보며 오이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모라이티나에게 굉장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함께 요리를 하며 쌓아온 정이 만만치 않은 데다가, 이전 던젼에서의 그 조언 역시 모라이티나에 대한 호감을 높여주는데 일조를 했다. 지금도 종종 그 모라이티나의 이야기들을 곱씹으며 자신을 다스리고 있으니 말이다. 모라이티나는 오이니아의 손을 잡아끌며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여기 앉아." 오이니아는 모라이티나의 손에 이끌려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가 앉아있는 침대 건너편에 있는 침대에 몸을 앉혔다. 저쪽에 소파가 연갈색 얼굴을 내밀며, 전 사람이 앉으라고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라고 외치고 있었으나, 이들은 입도 없는 소파의 외침 따위에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모라이티나가 오이니아에게 물었고, 오이니아는 그런 모라이티나를 잠시 바라보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저.... 우선은.... 란테르트 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어요." 오이니아의 말에 란테르트는 어깨를 한차례 으쓱하며 물었다. "뭐를 말씀이십니까?" 란테르트의 말에 오이니아는 약간 위축감을 느꼈다. 저 경어는 언제 들어도 부담스럽다. 그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막는 어떤 벽과 같은 느낌이다. "경어는.... 그만둬 주세요. 그냥, 시나나 로인처럼.... 조카 분들처럼 대해 주세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막 고개를 가로 저으려 했으나, 모라이티나가 대신 대답해 버렸다. "그렇게 하는 편이 오이니아에게도 편하겠지? 이 란테르트라는 남자는 원래 조금 성격이 괴팍해서 경어를 쓰는걸 좋아하지만.... 오이니아가 그렇게 부탁하면 들어줄 꺼야. 그렇죠 란테르트?"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지." 오이니아는 모라이티나와 란테르트의 그러한 대화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감사드려요. 할아버지의.... 잘 알지도 못하는 할아버지의 유언 때문에 지금까지 저를 돌보아 주신 것 말이에요." 오이니아는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를 바라보았고,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답했다. "고마워 할 것은 없어. 드라이토씨의 부탁도 부탁이지만.... 너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오이니아는 란테르트의 이러한 대구에 마음이 한층 편해짐을 느꼈다. "고마워요.... 그리고 죄송해요. 처음에.... 투정 부리고.... 그리고 무시했던 것도.... 사실이고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워요. 그런 자신이...." 란테르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꺼야. 그런 것....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 모라이티나가 끼여들었다. "나도 처음 란테르트를 만났을 때, 얼마나 란테르트 속을 썩였는데. 지금은 반대지만." 란테르트가 모라이티나의 말에 웃었다. "반대라고? 글쎄?" "내가 그렇다면 그런거에요. 감히 나에게 맞서겠다는 거에욧?" 란테르트는 담담히 미소지으며 더 이상 응대하지 않았고, 모라이티나는, "음, 그래야 착한 어린이죠." 라고 말하며 란테르트의 머리를 통통 두 번 두드렸다. 앉은키가 겨우 란테르트의 귀밑에밖에 닿지 않는 모라이티나가 한참이나 위에 있는 란테르트의 머리를 만지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어울리면서도 어색했다. 오이니아는 이 둘의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쿠쿡.... 두분, 너무 재미있어요." 그 모습에 모라이티나가 방긋 웃었다. "그래. 그렇게 웃는 거야. 무슨 감사고 죄송이고 신경 쓰지 마. 겨우 너희들이 무시한 것 정도로 기분 나빠할 란테르트가 아니야. 란테르트는 작은 것에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좋게 말하면 대범하고, 나쁘게 말하면 둔한 남자지. 그렇죠 란테르트?" "칭찬으로 들어둘게." 오이니아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그렇게 웃는 거야.... 자신이 웃게 만들기 위해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란 말인가?.... 이런 것에 생각이 미치자 모라이티나는 이 두 남녀에게 느낀 고마운 감정이 한층 더해짐을 느꼈다. 그때, 모라이티나가 다시 오이니아에게 물었다. "그래. 그렇게 사모해 마지않는 두 룬의 기사 님들을 만난 소감은 어때?" 오이니아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났다. 하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실감을 둘째치고.... 너무나 혼란한 며칠이기에....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모르겠어요. 황제폐하 앞이라.... 너무 긴장하고 있어서...." 모라이티나는 그런 오이니아의 말에 한차례 웃음을 터트렸다. "호홋. 원래 핌트로스는 그런 사람이래. 그렇죠 란테르트?"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10년 전에 만났을 때도.... 만난지 한시간밖에 되지 않은 나를 형이라고 부르며 스스럼없이 대해왔지. 당시 그는 이 마기아 성의 경비병이었는데...." 란테르트가 이 부분을 이야기 할 때, 오이니아는 놀라며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보탰다. "얽매이는 것이 싫어 아무런 책임질 일이 없는 경비병을 하고 있었데. 아무튼.... 당시에도 그의 성격은 굉장히 활달했지...." 오이니아는 란테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두 룬의 기사 님들도 그때 만났나보죠? 그런데 왜 예전에 제가 물었을 때.... 전혀 모른다고 하셨었어요?" "그때는 정말 몰랐었어. 내가 아는 밀튼과 로멜은.... 이제 간신히 검사라고 불릴 만한 수준에 오른 사람에 불과했으니까. 전에 에디엘레성에서 만난 미셸튼이 당시의 밀튼보다 약간 아래였지 않을까?.... 로멜보다는 분명 위였지만. 10년 전에는.... 둘 모두 경험 없는 초보검사들일 뿐이었는데...." "그랬군요...." 오이니아는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그가 우러러 보여지는 것은, 비단 란테르트의 키가 오이니아보다 컸기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오이니아가 다시 생각나는 듯 말했다. "아.... 그런데 란테르트 님이 크림슨 아이즈.... 라고 하던데.... 정말이신 가요?" 그녀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오이니아는 잠시 멍하니 그의 모습을 살폈다. "무서워?" 모라이티나가 그때 곁에서 물었고, 오이니아는 그녀의 말에 한차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무서울 리가 없잖아요.... 란테르트 님은.... 좋은 분인 걸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약간 쑥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모라이티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럼. 좋은 사람이지."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다 돌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까지 몇 차례나 이야기하려 했으나 때를 놓치고, 또 까맣게 잊어먹기를 반복해 아직도 이야기하지 못한 이야기 였다. "아참, 오이니아. 그거 알아?" 모라이티나의 말에 오이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10년 전, 란테르트는 오이니아와 한차례 만났었어." 모라이티나의 말에 오이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란테르트를 바라보았고, 란테르트는 한차례 가벼이 고개를 끄덕여 모라이티나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오이니아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10년 전의 일 중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2년전 잃은 부모님의 기억을 여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였었다는 것과, 종종 피치토 마을 서편의 해변으로 도시락을 싸들고 프넨티아를 구경하러 갔다는 것.... 그리고 켈파, 피아텔, 테리트론 등의 친구들과 여기 저기 놀러 다녔던 그러한 것들뿐이었다. 그것도, 7살 때의 일인지.... 8살 때의 일인지, 아니면 9살 때의 일인지 얽히고 ㅅ히어 잘 구분 지어지지도 않았다. 란테르트가 그런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마 기억나지 않을 꺼야. 한시간도 채 함께 있지 않았었으니까. 당시 오이니아는 망원경을 가지고 싶어했어.... 프넨티아를 살펴 볼 수 있는 망원경을...." 란테르트의 말에 오이니아는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란테르트의 말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신기해요...." 오이니아는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전에 이야기했지? 난 10년 전이 바로 1년 전과 같다고.... 오이니아에게는 10년 전의 기억일지 모르지만.... 난 겨우 몇 달 전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 오이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어쩐지.... 저도 사실 처음 란테르트 님을 보았을 때, 처음은 아닌 듯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왠지 오래 전 알던 사이 같은 그런 느낌 말이에요. 헤헷. 정말 재미있는 것을 알게 되었네요." 오이니아는 여기까지 말하다 잠시 대화를 전환했다. "아참.... 감사하다는 말 외에 다른 할 말이 있었는데.... 저.... 피아텔 말인데요...." 오이니아의 말에 모라이티나와 란테르트는 내심 약간 긴장했다. 오이니아의 장래 문제와 관련된 이야기 인가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의 생각이 오해였다는 것은 곧바로 이어진 오이니아의 말로 인해 밝혀졌다. "피아텔이 지금 몹시 힘들어하고 있어요. 몇 일전.... 황제폐하께 큰 실례를 범했거든요...." 오이니아의 말에 란테르트가 한차례 미소를 지어주었다. "핌트로스는 그런 사소한 일로 사람을 탓할 인간은 아니야. 정 마음에 걸린다면, 내일쯤 정식으로 만나기로 했으니까, 그 자리를 빌어 간단히 사과의 말 정도만 하면.... 간단히 넘어갈 수 있을 꺼야. 무시해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고." 오이니아는 란테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라고 말했다. 오이니아는 이제 할 말을 거의 다 했고, 더 이상 이 두 나이든(?) 연인(?)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기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 그럼 이제 돌아가 볼께요. 지금 란테르트 님이 해 준 이야기, 그대로 피아텔에게 해 줄겠어요. 즐거운 저녁 보내세요." 오이니아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대꾸했고, 모라이티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도 이제 갈께요. 오이니아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아.... 그럼 잘 자."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이렇게 대꾸했고, 모라이티나는 허리를 굽혀 그의 이마에 한차례 입을 맞추며 말했다. "이럴 때는 좀 이렇게 키스도 해주고 하세욧. 재미없는 남자." 란테르트는 쓴웃음을 지었고, 모라이티나는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오이니아의 손을 잡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모라이티나는 문을 나서기 전 다시 한 번 란테르트를 바라보았고, 문을 닫으며 한차례 윙크를 했다.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후, 한차례 나지막한 한숨을 쉬었다. 입가에서 미소가 사르르 잦아 들어갔고, 이내 약간 지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차례 한숨을 지었다. 몸을 아무렇게나 뒤로 눕혔다. 유난히 높고 넓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오이니아.... 많이 행복해진 모양이구나...."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한 후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내가 할 일을 다하게 되는 건가?.... 왠지 피곤한걸...." 이렇게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란테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잠에 스르륵 빠져들었다. 흡사 거짓말처럼.... 눈을 감자 마자 잠이 들어 버린 것이다. 낮고 고른 숨소리가 아무도 없는 커다란 방에 조용히 울린다. 13. 귀향. "처음이에요. 삼촌의 늦잠 자는 모습." 로인은 자신의 침대를 정리하고 뒤이어 란테르트가 자고 일어난 침대를 정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날 아침에 로인은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잠에서 깨어났다. 언제나 이쯤 일어나면, 침대에 걸터앉아 있거나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란테르트가 "일어났구나, 로인." 이렇게 이야기하며 한차례 미소를 지어주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무슨 일인지 로인보다 늦게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좀 피곤했던 모양이야...." 란테르트는 로인 이상으로 지금 이상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얘 기절을 했다면야, 늦잠이 아니라 낮잠을 자도 이상할 것이 하나 없었으나.... 이렇게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경우는 지난 5년, 아니 15년 동안 단 한차례도 없었다. 마법에도, 검에도 수련이 깊은 그였기에 일어나는 시간 정도는 스스로 완벽히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많이 해이해진 모양이었다. 하긴, 이제는 하나 남은 긴장이었던, 오이니아의 행복을 이루어준다, 라는 것의 끝이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 그것마저 이루고 나면, 이제 란테르트를 속박하고 있는 것은 켈파에게 검술을 가르친다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 지금으로 봐서는 흐지부지 끝날 가능성이 짙었다. 켈파가 검술을 배우려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오이니아의 복수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흔들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늦잠을 잤다는 것이 약간 어색하기도 했으나 크게 마음에 담아 둘 일은 아니니 말이다. 핌트로스와 밀튼 로멜 등을 만나러 간 것은 거의 점심때가 다 되어서였다. 핌트로스는 란테르트가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것을 잘 알았기에 웅장한 홀인 알현실이 아닌 자신의 집무실로 일행을 초대했다. 시끄러운 것은 그 자신도 싫어하니 말이다. 일행은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깔끔한 것으로 챙겨 입고 이 일곱 대륙의 주인을 만나러 갔다. 며칠동안 함께 있었으나, 당시는 황제라기 보다는 검사 핌트로스와 만났다는 느낌이 강했고, 이번에야말로 정식으로 알현을 하는 것이다. 물론 란테르트야.... 몇일전의 싸움으로 핏방울이 얼룩진 망토를 차가운 겨울의 대기 속에 탁탁 두 번 턴 후 그대로 걸친 채였지만.... 황궁의 복도 안을 한 명의 문관과 두 명의 무관의 안내를 받아 지나면서, 그 말많던 시나와 테리트론마저도 입을 열지 않았다. 모두들 긴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라이티나와 란테르트는 전혀 긴장 비슷한 것도 느끼지 못했는지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이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밀튼 씨와 로멜 씨도 와 있겠죠?" 걷는 도중 모라이티나는 문득 란테르트에게 이렇게 물었고,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핌트로스가 부른다고 했었으니 까...."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가 주고받은 이 짧은 대화는, 앞서 걷는 한 명의 문관의 등뒤에 식은땀을 배게 만들고,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두 무장의 걸음을 한차례 흐트러뜨렸다. 황제와 두 공작의 이름을 저렇게 함부로 부르다니.... 황제가 친히, 귀빈들이니 신경 써서 모셔라, 라고 명령하지만 않았다면 당장 일행 모두를 일도 양단 내버려도 상관없을 만한 사건이었다. 몇 개의 회랑과 홀을 지나 일행은 이윽고 핌트로스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란테르트는 문의 모습이 상당히 낯이 익다는 것을 느꼈고, 모라이티나에게 조용히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이곳에서 루실리스와 만났었어."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문관과 무관은 다시 한차례 경기를 일으켰다. 이윽고 집무실의 문이 열렸고, 문관과 무관은 깊숙이 허리를 숙인 채 감히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 그리고 천하의 테리트론을 제외한 다른 일행 역시 엉겁결에 고개를 숙였다가 천천히 다시 들며 란테르트를 따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무실은 상당히 넓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여느 귀족의 그것과 그다지 큰 차이는 없었다. 중앙에 책상이 있고, 한쪽으로 책꽂이와 책들이 있으며 다시 다른 쪽에 쿠션 있는 의자 등등이 놓여 있다. 물론, 각 점의 가구들이 굉장히 비싸 보인다는 점과 그 외의 여러 수많은 장식들 하나 하나가 몹시 정교하고 섬세해 보인다는 것 정도가 다르다면 다를까? 하지만 일행의 시선을 잡은 것은 바닥에 깔려있는 진홍색의 양탄자도, 흑갈색 빛을 내는 비싸 보이는 책상도 아니었다. 책상 주위에 몰려있는 세 명의 남자, 핌트로스와 밀튼, 그리고 로멜을 향해 일행의 시선을 일제히 집중되었고, 그 세 사람은 막 무슨 대화를 나누다 그것을 멈추며 역시 일행을 바라보았다. "아, 이제들 왔구나." 핌트로스는 이렇게 말하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흰색의 의장용 정장과 몸에 꽉 끼는 부드러운 재질의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웃옷이 흡사 스커트처럼 허벅지 중간쯤까지 내려와 있었다. 이런 저런 금색의 장신구가 웃옷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황제의 평상시 복장인 모양이었다. 밀튼과 로멜도 어제의 무거운 갑옷은 벗어버린 채 활동하기 편하면서도 어느 정도 격식을 갖춘 그런 옷을 입고 있었다. 이미 상견례는 끝난 상태였으나, 당시에는 워낙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고, 게다가 정식 인사를 한 것도 아니었기에 일행은 이 기회에 다시 한차례 서로를 소개했다. 핌트로스와 밀튼, 그리고 로멜은 란테르트와 함께 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일행에게 약간의 관심을 나타냈고, 특히 로인과 시나의 경우에는 란테르트라는 조카라는 이유로 조금 더 관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번잡한 시간도 잠시, 일행은 자리를 옮겨 오찬을 즐기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점심 시간도 되었고, 멀뚱히 서로를 바라보며 있는 것보다는 식사라도 하는 편이 분위기가 더 좋을 듯 했기 때문이었다. 요리는.... 황궁의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화려했다. 색상, 향기, 장식 어느 하나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어, 그저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 못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금테를 두른 은제 접시와 얇은 금사로 장식된 흰색 도기그릇, 그리고 식탁 중앙에 놓여있는 꽃이 가득한 황금 꽃꽂이는 필설로 설명하기가 벅찰 정도였다. 그뿐 아니라, 단 부분을 엷은 연두색으로 빽빽이 수놓은 테이블보도, 굵은 실로 뜨개질하여 화려한 무늬를 만들어 놓은 그릇받침들도, 하다못해, 무릎 위에 올려놓은 냅킨도 어느 하나 황홀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가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가장 수수한 냅킨 마저도 얼마나 그 모양새가 탐스러웠던지, 일행은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 냅킨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집에 가져가고 싶다.... 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스푼과 포크 따위의 물건들 역시 은제에 금색으로 장식이 되어 있었는데, 눈 씻고 찾아봐도 조그마한 흠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얼마나 정성스럽게 닦았는지.... 창문으로 비쳐드는 햇살에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나마, 몇 일전 에디엘레 가의 연회에 참가해 고위 귀족의 삶이라는 것이 어떠한가를 조금이나마 경험하지 못했더라면, 아마 이 자리에서 테리트론이나 켈파는 입을 멍하니 벌린 채 두리번거렸을 것이다. 그것이 실례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테이블은 굉장히 길었다. 의자와 의자 사이에 하나의 의자를 더 놓을 수 있을 정도의 틈이 있음에도 줄지어 10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으니 말이다. 반대쪽의 부 주인석, 즉 황후의 자리와 지금 핌트로스가 앉아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어림잡아 15휴리하(1휴리하=약1미터)나 되었다. 지금 이곳에는 모두 22명의 사람이 있었다. 11명은 물론, 핌트로스와 밀튼 로멜, 그리고 란테르트일행 등이다. 그리고, 다른 11명은 흑백의 유니폼을 근사하게 차려입은 하인들이었다. 나이는 모두 30대 중반쯤이었는데, 한쪽 팔 위에는 흰색의 냅킨이, 그리고 양손에는 조금 긴 포크와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처음 일행은 이 사람들이 무엇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었으나, 오래지 않아 자신들을 대신에 요리를 집어오고 또 적당한 크기로 썰어주는 일을 하는 하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무렵 모라이티나가 웃으며 핌트로스에게 말했다. "황제란 건 대단한거군요. 왕들의 식사도 이 정도는 아닌데." 모라이티나의 말에 핌트로스는 한차례 활달한 웃음을 웃었다. "하핫. 그런가? 난 모르겠는데? 귀찮을 뿐이야." 모라이티나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소리 국민들이 들으면 화내요. 한끼 식사를 위해 일년을 고생하는 그들은 평생 일을 해 보았자 여기 있는 냅킨 하나를 사들일 만한 돈도 구하지 못하는 걸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핌트로스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훌륭한 조언이었습니다. 모라이티나 대신." 모라이티나는 그런 익살스러운 그의 행동에 입을 가리며 가볍게 웃었고, 란테르트가 뒤이어 말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하다가 황제가 되신 겁니까? 전에 만났을 때는 하급귀족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핌트로스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다 그 루실.... 아니 선황제 녀석 때문이지. 쳇 그렇게 일찍 죽어버리다니....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 녀석이...." 은월의 기사 밀튼이 그런 그의 말에 뒤이어 란테르트에게 말했다. "선제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현 황제폐하는 국정 전반에 있어 몹시 현명한 판단을 거듭 내리시어 헵티슬 황조는 통일한지 몇 해 되지 않아 금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핌트로스가 그의 말을 끊었다. "바보 같은 소리는 그만 둬. 내가 한거라고야.... 선황제가 만들어 놓은 틀에 따라 나라를 운영한 것 뿐이야. 하여튼.... 그 녀석은.... 정말 천재야. 이런 쪽에 있어서는...." 뒤이어 밀튼의 동생인 로멜이 핌트로스의 말에 한마디했다. "하여간, 형에게 황제자리가 어울리지 않는 것만은 사실 같네요. 우리들끼리도 아니고, 이렇게 손님들도 계신데, 그렇게 말을 막하다니...." 핌트로스가 그런 로멜의 말에 웃었다. "하핫, 내 말이 그거라니까. 그냥 네 형에게 물려줘 버릴까? 인간이 성실한 것이 나보다는 일을 잘 할 것 같은데." 밀튼이 그의 말을 제지했다. "폐하. 말을 삼가십시오." 핌트로스가 그런 그를 가리키며 로멜에게 말했다. "이것 봐. 옛날에 함께 말을 타고 전쟁을 할 때에는 날 핌트로스, 핌트로스하고 부르더니, 내가 감투 하나 썼다고 말끝마다 존칭에 폐하, 폐하를 붙이지. 이러니 재미있을 리가 있어?" 핌트로스가 이렇게 말하자 밀튼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핌트로스에게 말했다. "폐하. 상황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곧바로 밀튼은 고개를 돌려 오이니아 일행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 그보다, 듣기에 오이니아 양께서 저희 두 형제를 찾아 먼 북쪽에서 오셨다고 하던데.... 이야기를 해 보십시오." 오이니아는 황제와 두 룬의 기사의 말싸움(?)을 재미있게, 하지만 긴장된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다가 돌연 그렇게 물어오자 살짝 놀라 어깨를 움찔 거렸다. "아.... 그게.... 저.... 그러니까.... 이제는 필요 없게 되었어요...." 오이니아는 몇 차례나 말을 더듬거리다가 이렇게 말했고, 밀튼은 그녀의 말에 한차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긴, 란테르트 님이 계시니 저희 형제 정도로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밀튼의 말에 모라이티나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끼여들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밀튼 님은, 당금 헵티슬 황국군의 총사령관으로, 한차례 호령만 하면 8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명령을 받들텐데요? 그리고 로멜 님은 일곱 대륙에서 가장 의로운 기사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고, 로멜 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사람만 하더라도 수천을 헤아릴 꺼 에요. 사실 란테르트보다야 훨씬 대단한 명성을 지니고 있죠."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를 한차례 바라보았고,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훗, 하고 한차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모라이티나의 말에 밀튼과 로멜은 정색을 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지만,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는데, 모라이티나의 말을 인정한다기 보다는, 모라이티나의 말이 농담조였기 때문이었다. 농담에 민감히 반응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행동이 어디 있을까? 그때 오이니아가 간신히 틈새를 비집고 입을 열었다. 전날 밤, 침대에 누워 내일 두 룬의 기사를 만났을 때 할 말을 떠올렸었다. 우상을 만나 말 한마디도 못해보고 해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저.... 밀튼 공작 각하...." 오이니아의 말에 밀튼은, "공작 각하 같은 말은 빼도 괜찮습니다." 이라고 말했고, 오이니아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아무튼.... 밀튼 님은 몇 살 때부터 검술을 배우셨나요?" "아홉 살 때인가 처음 시작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밀튼이 대답했고, 오이니아가 다시 물었다. "마법도 그때 공부하기 시작했나요?" "그렇습니다." 그때, 테리트론이 아직 입 속에 있는 음식을 완전히 목으로 넘기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다행이 음식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는 않았지만, 목소리가 약간 변했다. "듣기에 핌트로스님, 아니지 황제폐하는 9살 때 수련을 떠났다고 하던데 정말입니까?" 역시 천하에 무서울 것 없는 테리트론이었다. 그의 이런 담대한 발언에 피아텔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려 핌트로스의 표정을 살폈고, 테리트론의 곁에서 음식을 썰던 하인은 이유 없이 긴장해 손을 헛놀리며 달그락 하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정작 핌트로스는 오히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하핫. 그래 그랬지. 9살 때 처음으로 집을 나섰었어. 난 밀튼녀석 보다 4년 일찍 검을 손에 잡았거든." 테리트론이 다시 물었다. "5살 때부터라.... 대단하네요. 그 나이면 달리기도 제대로 못해 달리다 픽픽 쓰러질 때일텐데...." "난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었어." 테리트론의 말에 핌트로스는 이렇게 대꾸했다. 막 무어라 또 이야기를 하려던 테리트론을 막으며 시나가 돌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처음 테리트론이 입을 열 때부터 약간 불안해하는 눈치였으나, 워낙 대화가 일사천리로 진행돼 테리트론의 말을 이제야 막은 것이다. "폐하. 테리트론의 무례한 말투를 용서해 주십시오. 워낙 구석진 곳에 자라 아는 것이 없어 그러합니다." 하지만, 시나의 이런 말은 전혀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꺼낸 테리트론도, 그리고 말을 들은 핌트로스 당사자도 말투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핌트로스가 손을 한차례 가로로 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난 그런 거 신경 않쓰니까. 아참, 시나양은 귀족이라고 했지?" 그의 물음에 시나는, "예, 폐하." 라고 공손히 대꾸했다. 그 모습에 테리트론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내뱉듯이, "역시 상황에 따라 확확 변하는구나 그 말투." 라고 중얼거렸다. 테리트론의 말에 핌트로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몇 일전 숲속에서의 시나양은 참 대단했지.... 뭐라더라? 날더러 철면피라 그랬던가?" 시나의 낯빛은 흙빛이 되었고, 테리트론과 핌트로스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동시에 하핫, 웃음을 터트렸다. 핌트로스는 잠시동안 시나와 테리트론에게 시선을 머물다가 고개를 돌려 다시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아참, 그런데 형, 얼마나 수도에 머물 예정이야? 13월 축제는 즐기고 떠나지 그래? 아예 눌러 살겠다고 이야기하면 저택을 하나 마련해 줄 수도 있지만.... 그럴 위인은 아니고...." 핌트로스의 말에 란테르트는 일행을 한차례 돌아보았다. 왠지 날이 갈수록 스스로 무엇을 판단하는 것이 귀찮아져 갔고, 이제는 그저 일행의 의견을 수렴할 뿐이었다. 15년전의 능동적이던 그와는 거의 반대되는 모습이다. 당연하거니와 일행의 눈은 호기심에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고, 그들의 얼굴에는 빽빽이, 놀다 가요! 라고 적혀 있었다. 황국의 수도의 축제, 그것도 황실의 축제를 볼 수 있는 이러한 기회를 차버릴 이유가 단 한가지도 없지 않은가? "몇 일 천천히 쉬며 이곳 저곳을 돌아다녀요. 나도 마기아는 몇 번 못 와봤어요." 막 란테르트의 시선이 모라이티나와 마주쳤을 때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그에 확실히 결정을 내렸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겠습니다." 핌트로스는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방은 계속 제리아클궁을 사용하도록 해. 식사는 나가서 먹든지, 요리사에게 이야기해 궁안에서 먹든 마음대로 하고. 혹시 경비가 모자라거나 하면 얼마든지 이야기하고. 원래 황제란 자리가 수입은 많은 편이니까."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방이 지나치게 호사스러운 점이 약간 걸렸으나, 그렇다고 거절하고 여관으로 옮기는 것도 이상했기에 그냥 허락한 것이다. 식사는 이후로도 한시간 이상이나 이어졌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심심지 않게 오갔고, 일행은 이 재미있는 황제와 두 룬의 기사들과 더불어 꽤 즐거운 점심 한때를 보낼 수 있었다. 한편, 어제 밤부터 끙끙 앓던 피아텔은 황제가 그 일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자 마음을 놓으며 간신히 평소의 표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날 오후, 핌트로스는 몇 일의 휴가(?)를 즐기는 사이 밀린 황제의 업무를 보기 위해 집무실에 머물러 있었고, 밀튼 역시 그와 함께 이런 저런 일을 처리하느라 성안에 머물렀다. 불행한 것은 로멜이었다. 무슨 관리도 아무것도 아니건만.... 형을 잘못둔 죄(?)로 밀튼의 일을 함께 해야만 했다. 원래 연말이라는 시간이 왕실에 있어서는 가장 바쁜 때이니 말이다. 일행은 이렇게 되어 버리자 그들과는 별개로 행동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 여섯 명은 모두 함께 성안을 산책하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열 세 번째 달 축제에 입을만한 옷 같은 것도 살 겸 나가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황궁의 정원이나 구경해요."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와 단 둘이 남게 되자 란테르트에게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여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란테르트야 황궁의 정원이 어떻게 생겼건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나, 모라이티나가 원하니 그냥 따르는 것이다. 란테르트는 막 방을 벗어나 복도를 따라 걷다가 돌연 한가지에 생각이 미치었고, 고개를 돌려 모라이티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런데 지금 겨울 아니야? 정원에 뭐가 있다고...."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황제를 무시하는 군요." 란테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모라이티나는 다시 한차례 웃으며 말했다. "겨울 정원도 있어요. 추운 곳에서만 피는 꽃들과 겨울에도 푸르른 나무들을 가꾸어 논 곳이죠. 저도 말로만 들었을 뿐 정말로 본 적은 없어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한 번 보려는 것이에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아, 하는 나지막한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두 사람은 몇 개의 복도와 홀을 지나 이윽고 정원에 도착했다. 황궁의 정원은 각각, 봄의 정원, 여름의 정원, 가을의 정원, 그리고 겨울의 정원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본성의 동쪽에 봄과 여름의, 그리고 서쪽에 가을과 겨울의 정원이 있었다. 모라이티나와 란테르트는 겨울의 정원에 들어서며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사실 모라이티나는 겨울 정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무래도 겨울의 정원이기에 그 아름다움이 덜 하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정원의 모습이란.... 사실 추운 곳에서 피는 꽃이라는 것이 그다지 종류가 많지는 않았다. 게다가 세균조차 잘 번식하지 않는 정결한 곳에 사는 것들인지라 다른 곳으로 옮겨오면 금새 죽곤 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거의 10여종에 이르는 겨울 꽃이 수천 송이나 모여 있었다. 그 유명한 하프에서 설염 라이 등 유명한 고산지대의 꽃에서 이름모를 것까지.... 색도 생김새도 천차만별이었는데, 정원사는 이러한 꽃들을 그야말로 화가들이 화폭에 그림을 그리듯 흙빛의 정원 위에 옮겨 놓은 것이다. 꽃도 꽃이었으나, 나무들 역시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특히 인상깊은 모습은 잎이 무성한 상록수를 사슴 등의 동물 모양으로 다듬어 놓은 것이었는데, 정말 녹색의 사슴이 그곳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봐요. 라이에요. 예쁘지 않아요?" 모라이티나는 빨간 색의 꽃잎을 가진 조그마한 꽃을 가리키며 이렇게 호들갑을 떨었다. 사실, 겨울의 꽃은 아무래도 봄이나 여름에 피는 것에 비해 수수하기 짝이 없었다. 그 유명하나 하프 화도 그저 새끼 손가락 반 만한 흰색의 가느다란 꽃잎 다섯 장이 가냘프게 뻗어 있을 뿐으로 하나 하나 놓고 보면 그다지 아름답다는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겨울에 꽃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라이티나는 즐거운 모양이었다. "라이?" 란테르트가 대꾸했고, 모라이티나는 웃으며 그 꽃에 대해 설명했다. "눈 속의 불꽃, 설염이라고 불리우는 고산지대의 꽃이에요. 이 라이는 특히 귀한 편인데.... 약재로도 쓰여요. 암흑나리의 해독약을 만드는 주재료지요. 어머, 이건...." 모라이티나가 밝은 표정으로 이런 저런 꽃들을 살피고 있을 때, 정원 저편에서 웅성거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란테르트는 목소리에 그다지 상관치 않고 모라이티나가 꽃을 즐기는 모습을 바라보았고, 모라이티나는 막 꽃을 보고 있다가 허리를 펴 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관심을 옮겼다. "아마 쥬에티양 일꺼에요." "어떻게 알지?" 란테르트가 되물었고,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말이 한쪽 눈을 찡끗 감아 보였다. "황궁의 정원은 황후의 것이에요. 황후의 허락 없이 들어올 경우 그 자리에서 사형이지요."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런데 이렇게 들어온 거야?" 모라이티나는 웃었다. "갑자기 무서워 졌나보지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이 어느덧 쥬에티가 일행이 있는 곳으로 접근했다. 쥬에티 외에도 다섯 명의 여자가 더 있었는데, 두 명은 밀레나와 케니, 밀튼과 로멜의 두 아내였고, 다른 세 사람은 수수한 옷차림의 여자들이었다. 아마도 이들의 하녀나 혹은 이들을 보호하는 경호원일 것이다. 모라이티나는 그 세 사람을 보자마자 환한 미소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모라이티나의 인사에 대한 쥬에티와 밀레나, 케니, 이 세 여자의 반응은 제각각 이었다. 쥬에티의 경우에는 이제는 10년 전의 아이는 아니었다. 물론 몇 일전 핌트로스와 만났을 때는 여전 어리광 많은 아가씨의 모습이었으나, 이렇게 외출복을 입고 선 채 모라이티나의 인사에 은은한 미소로 대꾸하는 행동으로는 국모로써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한편 밀레나는 굉장히 다소곳하면서도 조용한 여자였다. 모라이티나의 인사에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임으로써 인사를 대신했고, 시선을 약간 아래로 떨어뜨린 채 더 이상 모라이티나를 바라보지 못했다. 케니의 성격은 활달해 보이는 얼굴 그대로였다. 오늘은 전과는 달리 약간 거친 듯한 주홍색 머리칼을 자연스럽게 풀었는데, 미소가 천진하면서도 밝았다. 모라이티나의 인사에 손까지 들며, "안녕하세요?" 라고 함께 인사한다. 곧바로 쥬에티가 모라이티나에게 물었다. "제 정원이 어떤가요?" "정말 아름다워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겨울 정원인데.... 이렇게 아름다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모라이티나는 약간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쥬에티의 정원을 칭찬했고, 쥬에티는 기꺼운 표정을 지으며 흐뭇이 웃었다. "칭찬해주니 고마워요." 모라이티나는 쥬에티의 말에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천만예요. 그럼, 천천히 즐기세요. 저희는 이만 가 볼께요." "제가 때를 잘못 맞춰 나온 모양이네요." 쥬에티는 모라이티나가 자신들 때문에 정원을 감상하는 것을 그만두고 밖으로 나간다고 이야기하자 약간 미안해하며 이렇게 말했으나, 모라이티나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요. 쥬에티양의 정원을 이렇게나마 한 번 본 것만으로도 굉장히 기뻐요. 그럼 이만 가 볼께요."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의 팔을 끌어 밖으로 나갔고, 란테르트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여 세 귀부인들에게 인사한 후 모라이티나를 따라 나섰다. 막 정원을 벗어날 ㄸ 란테르트가 모라이티나에게 물었다. "모라이티나답지 않게, 뭘 그렇게 서두르는 거야? 아직 절반도 채 보지 않았잖아?"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지체 높은 귀부인들이 정원에 올 때는 따로 할 이야기가 있을때에요. 귀족 남자들의 접대실 같은 곳이 바로 정원인 거죠."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들을 들었어?" "그냥 이곳 저곳에서요. 으음.... 그보다 이제 정원구경은 틀렸으니 성 안 구경이나 가요. 축제가 얼마 안 남아 꽤 볼거리가 많을 테니까요."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의 손을 잡아끌었고, 란테르트는 조용히 그녀를 따라 내성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라이티나의 말대로 성밖은 활기에 넘쳤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모라이티나는 한차례 조그마한 기지개를 켰다. "모두들 바쁜 모양이네요. 하긴, 13월 축제는 추수감사절 이상으로 성대히 열리니까...."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바로 모라이티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작년 이맘때는 정말 재미없게 보냈는데.... 한창 노마티아의 게미아 산맥 안을 헤매고 다녔거든요. 어디더라? 돌풍의 계곡이던가? 그곳 생각나요? 12월 말 무렵이면 사람조차 날려갈 정도로 바람이 분다는 곳이요."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그곳에서 수련을 쌓은 적도 있었으니까...." 란테르트의 대답에 모라이티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요. 그런 소문을 들어서 한 번 찾아가 본 거예요. 혹시 란테르트가 그곳에 있지나 않을까.... 하고. 근데.... 바람은 정말 많이 불던데요?" 란테르트가 웃었다. "후훗, 모라이티나는 가벼우니까 정말 날려갔을지도 모르겠는걸?" 모라이티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런 란테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을 걸지 않은 상태로 계곡 안에 걸음을 들여놓다가 정말 날려갈뻔 했어요. 몸이 살짝 뜨려는 순간 급히 마법을 걸어 주위 공간에 결계를 쳐 간신히 버틸 수 있었지 뭐예요?" "난 그곳에서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지냈었어. 다리 힘과 허리힘을 기르는 수련을 쌓았었지.... 뭐 보름만에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 나와 버렸지만...." "괴물." 모라이티나는 혀를 낼름거리며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후훗, 가벼운 웃음을 한차례 웃었다. 그렇게 몇 걸음을 옮기는 사이, 두 사람은 마기아 성의 한 광장에 도착했다. 별다를 것 없는 건물들 사이의 광장이었는데, 광장 중앙에 유달리 눈에 띄는 하나의 조형 물이 있었다. 사람키의 세배쯤 되는 오벨리스크였다. 그 사각형의 석제 기둥의 각 면에는 글자인지 그림인지 모를 것으로 빽빽이 새겨져 있었다. 란테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모라이티나는 그런 그의 곁을 잠자코 걷다가 그 오벨리스크 바로 앞의 조그마한 비석이 눈에 들어올 때쯤 란테르트에게 말했다. "아왈트의 묘비와 기념비예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아왈트?.... 그의 기념비?" 모라이티나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국의 4대 개국공신중 하나 에요. 명예 황궁 사령관이고요. 이 기념비는 그의 살아있을때의 공적을 적어 놓은 것이에요." 란테르트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의 기념비를 바라보았다. 몇 년 몇 월에 어느 곳으로 출전했고, 어디서 어떻게 승리를 거두었으며, 적을 몇이나 베고.... 따위가 적혀 있었고, 란테르트는 몇 줄 읽어보다 고개를 내려 아왈트의 묘비를 바라보았다. "대륙을 휩쓴 맹장 아왈트라.... 밀튼 근립?" 란테르트는 묘비를 이렇게 한차례 읽었고, 모라이티나가 그의 말에 대꾸하듯 이야기했다. "묘비는 밀튼 씨가 세운 거예요. 아왈트에게는 한 사람의 연고자도 없었거든요. 뭐, 죽은 후에는.... 미망인을 자처하는 여자가 수십 명이나 황궁을 찾아 왔었지만...."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후, 하고 한차례 한숨을 쉬었다. "정말 미망인들이었는지도 모르지.... 젊었을 때의 아왈트는 꽤나 방탕한 생활을 했었으니까...."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왈트는 그녀도 15년전 몇 차례 만나보았었으니 말이다. 그때 란테르트가 모라이티나에게 말했다. "무슨 선물이라도 하나 하고 싶은데?.... 그에게 말이야...." 모라이티나는 미소 지으며 주위를 휘 둘러 보았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꽃을 파는 곳이 있었다. 겨울이라 종류가 많지는 않고, 값도 비싸겠지만, 무덤에 놓을 만한 꽃을 사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저쪽에 꽃집이 있네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가 꽃 같은 것을 좋아할 리 없지."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는 약간 분위기가 어두워 보이는 골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라이티나는 이 남자가 도대체 무엇을 사려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며 란테르트의 뒤를 쫓았고, 이내 한 주점 안으로 그를 따라 들어갔다. 란테르트는 주점에 들어가 바텐더에게 가장 독한 술 한 병을 달라고 이야기했고, 잠시 후 바텐더가 가지고 나온 진한 갈색 병을 받아 들었다. 주점 밖으로 나오며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꽃보단 술을.... 그는 더 좋아할 꺼야." 모라이티나는 그런 란테르트의 말에 고개를 몇 차례나 끄덕였다. "정말 그럴꺼에요...." 두 사람은 다시 아왈트의 묘비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란테르트는 병의 주둥이를 막고 있는 콜크 마개를 손으로 잡아 뺐다. 딱, 진공상태가 풀리며 가벼운 파열음을 냈고, 란테르트는 술의 향기를 한차례 맡아본 후 그대로 아왈트의 묘비에 부었다. 지나던 사람 몇몇이 이 신기한 광경에 걸음을 멈추고 백발의 괴 검객을 잠시 지켜보았으나, 큰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은 없었다. 성안 경비병들은 이쯤 란테르트의 행동에 시비를 걸만도 하건만, 어제부로 전달된, 은색 머리칼의 외팔이 검사와 그 일행의 행동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마라! 라는 상부의 명령 때문에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병에서 쏟아진 호박색의 술은 또르르 비석과 부딪히며 사방으로 튀었다. 이윽고 묘비의 절반쯤이 흥건히 젖었고, 란테르트는 그 모습을 보며 한차례 낮은 웃음을 웃었다. "비웃는 것입니까?.... 후후훗.... 당신이 비웃는 대로.... 저도 오른쪽 팔을 잃어 버렸습니다. 참 재미있는 세상 아닌가요?...." 모라이티나는 곁에서 이런 란테르트의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짐을 느꼈다. 아왈트에게는 조금의 호감도 없으니 결코 그의 죽음을 슬퍼한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씁쓰레한 미소와 함께 나직이 중얼거리는 란테르트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마음속에 울렸기 때문이었다. 란테르트는 술병을 반쯤 비우고는 한 모금 자신의 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나머지 술을 모두 다 묘비에 쏟아 부었다. "라브에의 일은.... 이것으로 사죄 드리겠습니다. 충분하지 않더라도.... 저로써는 이 이상의 일은 해 드릴 수 없습니다...."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한 후 잠시 더 그의 비를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가자 모라이티나...."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란테르트의 곁을 따라 걸었고, 란테르트는 잠시 묵묵히 걸음을 옮기다 모라이티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왈트는 어떻게 하다가 소피카 군에 들어간 거야?"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잘은 모르겠어요. 듣기에는 밀튼 씨에게 목숨을 구해 받고 그것에 대한 보답을 하기 위해서라고 하던데.... 확실한 것은 모르겠어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조금 전 묘비에서 발견한 밀튼 근립 이라는 글을 떠올렸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 왠지 이상하군.... 사령관 아왈트라.... 그나 나나 낭인 쪽이 더 어울리는 사람들인데...."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세상일은 모른다고 하나봐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몇 차례나 끄덕였다. "맞아.... 뜻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지...."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이 힘없는 말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으나, 란테르트는 먼 곳으로 향하고 있는 시선을 조금도 모라이티나 쪽으로 옮기지 않았다. 축제는 언제나 사람들을 들뜨게 한다. 거리 이곳 저곳에서는 끊임없이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자정이 넘어서까지 거리가 사람들로 들끓었다. 조용한 것을 즐기는 사람이야 집안에 틀어박혀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에 저주를 퍼붓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흥겨운 시간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며 먹고 또 마시고, 지껄이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기아성은 원체 성 자체의 규모도 상당한데다가, 통일 후 황국의 수도가 되며 급속도로 성장했다. 도로를 따라 5층이나 되는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게 되었고, 내성 안의 몇몇 건물들의 개축이 일어나며 이제는 총 도시인구가 25만을 넘어서게 되었다. 통일 전 위다의 수도 카타의 인구가 15만 남짓이었던 점을 가만하면, 역사상 유례없는 거대도시인 샘이다. 이러한 도시가 축제를 벌이니.... 그 화려함이나 장대함에 대한 묘사 없이도 그 규모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연일 거리행진이 이어지고.... 사람들은 여러 상상의 종족이나 마녀 따위의 복장을 만들어 입은 채 거리를 활보했다. 마기아의 중앙도로인 쥬노(아라하시 시대 때의 소피카 대륙의 이름)가는 말 그대로 북새통을 이루었으며, 그곳에 위치한 거의 모든 상점과 주점들은 동그라니 떠오른 달이 서편으로 기울 때까지도 문을 닫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축제의 이벤트 역시 그때가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종종 거리 한가운데에서 가면 무도회가 벌어지기도 하고, 수십 명의 남녀들이 얽혀 민속춤을 추기도 했다. 행여 시비가 붙어 싸움이라도 일어나면 축제는 더더욱 흥겨워진다. 두 사람 사이의 사소한 말다툼은 친구로, 그리고 동료로, 다시 근처에 있는 모르는 사람까지 정신없이 번져나가 모두가 지칠 때까지 이어졌고,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까르르, 정신없이 웃음을 터트린다. 축제가 절정에 이르는 13월 3일. 이 날이야 말로 축제 당일이었고.... 이러한 혼란, 아니 자유분방함은 그 극에 달하였다. 막 쥬노 가의 동쪽 거의 끝 부분에서 20여명이 어우러진 패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서쪽 끝에서는 4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고 있다. 거리를 산책하며 사람들을 구경하는 사람들로 중앙로인 쥬노 가는 물론이거니와 기타 주요 도로들이 가득 차 버렸다. 갓 걸음마를 뗀 듯 아장거리는 아이를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가 있는가 하면, 걸음을 옮기는 것 마저 힘들어하는 남편을 부축하며 젊은 시절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노파도 있었다. 예닐곱이나 되는 남매들을 통솔하는 것에 온 신경을 빼앗기고 있는 중년의 부부들도 눈에 띄었고, 다정스레 팔짱을 낀 채 서로의 눈으로부터 시선을 때지 않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듯한 어린 남녀도 이 사람들의 행렬 사이에 끼어 있었다. 종종 왕실의 경비로 폭죽을 터트리기도 했다. 전에 피아텔과 켈파가 구해 오이니아에게 보여주었던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아름다운 빛을 내는 불꽃이 한시간 간격으로 수백 발씩 공중에 빛의 수를 놓았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불꽃의 그림자를 얼굴에 한껏 받으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소피카 내성, 즉 헵티슬 황궁안의 모습 역시 이들과 크게는 다르지 않았다. 물론 황궁의 축제이니만큼.... 밖의 사람들에 비해 입는 옷도 먹는 음식도 마시는 술도 값비싼 것 일색이었다. 하지만, 웃고 떠들며 순간을 즐긴다는 점에 있어서는, 한 병에 수백하르짜리의 포도주를 기울이건 두 잔에 1하르 하는 흑맥주를 마시거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비록 13월 3일. 한창 추울 때였으나, 연회는 야외에서 열렸다. 어차피 13월 3일의 축제는 달을 즐기는 날이다. 달을 보려면 하늘을 봐야 하고, 하늘을 보려면 천장이 열려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추위를 막기 위해 사방에서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모닥불도 황궁의 모닥불이다. 여행자들의 그것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불은 금속제의 정교한 무늬가 아로새겨진 가느다란 기둥 위에 놓여있는 금속제의 받침대 비슷한 곳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한 것이 수십 개나 연회장 주위에서 타오르고 있었는데, 어떻게 처리했는지 연기가 거의 나지 않았고, 오히려, 은은한 향나무의 향기를 주위로 살며시 풍기고 있었다. 정방형으로 배치된 모닥불 밖으로는, 천으로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것 역시 찬바람을 막기 위한 것으로, 사람 키보다 조금 높은 천이 상당히 넓은 범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효과가 대단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 덕분인지 사람들은 추위를 상당히 몰아낼 수 있었다. 이러한 방한 장치들 사이에 연회장은 준비되어 있었다. 중앙에 놓여있는 긴 테이블 위에는 백 수십 종의 음식과, 십 수가지의 주류들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릇에 흡사 장인의 세공품이나 되는 양 담겨 있었다. 함부로 집어먹기가 저어될 정도의 풍경이었다. 물론, 악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연회장의 한쪽에 마련된 단 위에 열을 맞추어 자리잡고 있었는데, 아마 이 연회장에서 가장 힘든 사람들이 이들이 아닐까 싶다. 가뜩이나 어두운데다가 추워 손마저 얼어 붙었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음악소리는 교교하고, 웅장하며, 아름답고, 흥겨웠다. 이 연회에 참가한 사람은 줄잡아 100명은 될 듯 하였다. 하인이나 그 밖의 사람을 제한 숫자가 말이다. 란테르트 일행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백작가 이상의 귀족들이었다. 한차례 댄스파티가 열린 후여서, 몇몇 귀족들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수건으로 조용히 이마를 닦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귀부인들은 겨울임에도 조그마한 쥘부채를 쥔 채 삼삼오오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무인들은 무인들끼리, 문관들은 문관들끼리 각자의 이야기에 빠져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이 연회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핌트로스와 밀튼, 로멜, 그리고 쥬에티 였다. 한 명은 황제 부부였으니 당연한 것이었고, 다른 두 사람 중 한 명은 황조의 개국공신이요, 다른 한 명은 대중적으로 굉장한 인기를 가지고 있는 흑월의 기사이다. 여러 귀족들이 웅성웅성 모여들어 쓸모 없는 이런 저런 말을 건네는 것이 당연하다. 란테르트 일행은 조금 떨어진 곳에 모여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자신들끼리 말고는 거의 어울릴만한 사람이 없으니, 당연할 결과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러한 것에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지난번 에디엘레 가에서의 연회 때와 마찬가지로 일행에게 이런 저런 옷들이 보내졌다. 일행은 모두 황실에서 보내진 옷을 입은 채 이 연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즐거워 보여." 시나 등의 여섯 명이 서 있는 곳과 조금 떨어진, 음식들이 놓여있는 테이블 근처에서 조용히 식도락에 빠져있는 모라이티나를 바라보며 란테르트가 이렇게 말했고, 모라이티나는 냅킨으로 조그만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란테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즐겁죠. 노판달라사의 해산물에서 소우판달라사의 해산물까지 두루 갖춰진 이러한 연회에 참가하기가 쉬운 줄 알아요?" 모라이티나의 장난기 어린 이 말에 란테르트는 한차례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도 즐거워 보이고...." 란테르트는 잠시 시나 등의 여섯 명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아텔의 웃음이 약간 어색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재밌어하는 듯 했다. 모라이티나 역시 그를 따라 아이들을 한차례 바라보았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겠지요. 황궁의 연회인데, 즐겁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아!" 모라이티나는 말하던 도중 고개를 돌려 시선을 다른 쪽으로 향하였다.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고, 손을 뻗어 그 방향을 가리켰다. 그녀의 그런 돌연한 행동에 란테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그쪽을 바라보았는데, 그곳에서는 한창 왠 광대복장을 한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이런 저런 재주를 선보이고 있었다. "저런 것 처음 보죠?"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잠시 그쪽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다시 모라이티나에게로 옮겼다. "저런 것도 좋아했었어?" 란테르트가 물었고, 모라이티나는 잠시동안 더 광대를 바라보다가 란테르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재미있잖아요."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살짝 웃었다. "그렇구나. 난 또 먹는 것 외에는 아무것에도 흥미가 없는 줄 알았는데." "너무해욧." 모라이티나는 볼을 볼록히 만들었으나, 이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티나는 싫어하는 것이 거의 없어요. 전 인간들이 사는 모습 그 자체가 좋은 걸요. 우리 엘프들의 숲과는 달리....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잖아요."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를 향해 방긋 미소를 지었다. "살아 있다라...."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고, 모라이티나는 그런 그의 말에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살아있다는 느낌. 내일을 위해 나아 간다 고나 할까? 우리 엘프들은 시간의 강에 몸을 맡긴 채 주위를 바라볼 뿐이지만, 인간들은 '노'라는 물건을 가지고 끊임없이 배를 저어요." "그런가?...." "그래요. 아니, 적어도 제가 느끼기에는 그랬어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고개를 시나 등의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렸다. 특히 오이니아에게로.... "노라...." 란테르트의 이렇게 중얼거리는 말에 모라이티나는 그의 시선을 쫓아 오이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요 몇 달간 란테르트의 노는 오이니아 였어요. 그리고 로인과, 시나 역시.... 테리트론이나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이구요." "그랬던가?...." 란테르트는 이미 모라이티나의 말을 이미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아마도 스스로에게 묻는 모양이었다. "후훗.... 그러고 보니.... 내게 노를 떠밀어 강제로 맡겨 버린 녀석이 하나 있었지...." 란테르트는 문득 이렇게 중얼거렸고, 모라이티나는 감상에 잠겨 살며시 눈을 감는 란테르트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정말 좋은 사람.... 이에요. 마지막까지.... 란테르트만을 위해서...."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데도.... 나란 녀석은.... 그를 완전히 믿지 않았었지.... 그의 사랑을 받을 자격.... 어쩌면 나한테 그런 자격은 없는지도 몰라." 그의 힘없는 말에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강하게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단지, 당시 란테르트는 너무.... 뭐랄까 조급해져 있어서 주위를 잘 보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언제나 그렇지...."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말을 막으며 이렇게 중얼거렸고, 모라이티나는 힘없는 말을 내뱉는 그의 손을 더더욱 꼭 잡아주었다. "그런 말은 그만 두어요. 당신은.... 단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었을 뿐이에요. 운명을 탓해요. 당신의 잘못은 결코 아니었었어요." "운명?" 란테르트가 되물었고,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한차례 살짝 끄덕였다. "그래요. 운명. 신이 정해놓은.... 운명." "운명이라.... 신이 정해놓은 운명이라.... 그런 게 있는 걸까?"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엘프 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존재는.... 결코 모두의 어머니이신 그분이 짜 놓은 그물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고...."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신이 정해놓은 운명이라.... 하지만 그의 생각은 길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강하게 가로 저어지는 고개와 함께 그의 머리 속에서 사라져 버렸고, 란테르트는 쓰디쓴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모라이티나를 향해 말했다. "난.... 그런 이야기 믿을 수 없어.... 만약 신이 모든 존재의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왜 마족이 생겨났겠어?" "하지만...." 모라이티나는 자신의 신의 이야기가 란테르트에게 정면으로 부정 당하자 일순 이상한 기분이 들었고, 이렇게 반박했다. "하지만, 가엘프 님의 말씀은.... 무조건 옳아요."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천천히 가로 저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아니다.... 운명 따위는 아니다. 원인.... 그것은 차라리 자신일 것이다. "모르겠어...." 란테르트의 중얼거림에 모라이티나는 조용히 그의 손을 쓰다듬었다. "제가.... 얘기 했었잖아요.... 그냥 잊으세요. 과거가 어떠하건.... 그저 추억으로 넘겨 버리세요. 그리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저는.... 이카르트와 같은 훌륭한 조언자가 되어 줄 수는 없어요. 하지만.... 적어도 과거에 얽매이는 한 란테르트가 행복해 질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어요. 아무리 어리숙하고 바보 같은 티나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어요." 란테르트는 조용히 모라이티나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청록색의 커다란 눈동자가 조용히 떨리고 있었다. "과거에.... 얽매이는 한?...."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이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려 오이니아를 바라보았다. "과거를 잊는 다라...." 란테르트는 다시 한 번 이렇게 뇌까렸다. 과거.... 오이니아가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과거를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란 말인가? 얼마 전.... 하나 남은 가족을 잃었음에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파티에 어울릴 수 있는 것이.... 그녀의 할아버지를 추억으로 넘겨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란 말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란 동물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런 것이 가능할 리 없잖아...." 란테르트가 힘없이 내뱉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그는 조용히 시선을 오이니아에게서 먼 성밖의 하늘로 옮겼다. "그런 것이.... 가능할 리 없잖아." 강조라도 하듯, 란테르트는 다시 한차례 이렇게 말했고, 그때 모라이티나가 란테르트의 손을 놓고는 그의 앞으로 자리를 옮겨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얼마 전 레드 미스트의 일을 떠올려 보세요. 란테르트가 말했잖아요. 그 일을 한 후 마음이 조금은 후련해 졌다고. 그런 식으로 하나씩, 하나씩, 슬픈 과거를 추억으로...." 모라이티나는 이야기를 하는 도중 이상한 기색을 느끼며 말을 멈추었다. 란테르트의 표정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흡사, 유성이 갑작스러운 빛을 내며 타오르기 시작하듯.... 모라이티나의 말 그 자체를 부정하는 딱딱한 표정을 지었었고, 이내 유성이 꼬리를 감추듯 그러한 표정을 얼굴에서 지웠다. 찰나간의 표정이었다. 하지만, 모라이티나는 분명 그 표정을 보았고.... 그러한 그의 표정에 순간 깨닫는 바가 있어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서.... 설마...." 모라이티나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중얼거렸고, 란테르트는 그녀의 기색이 이상하자 시선을 하늘에서 그녀에게로 옮겼다. "당신.... 저에게 거짓말을 했군요." "무슨 소리야?"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모라이티나는 방금 전 그의 얼굴에서 본 그 표정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는지, 그를 다그쳤다. "속였어요.... 저를 속였어요. 그렇죠?"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란테르트가 태연한 척 다시 물었으나, 모라이티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분명.... 이야기했잖아요. 레드 미스트에서.... 그 일을 마친 후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고.... 하지만.... 거짓말이었어요. 그렇죠?" "아니...."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고개를 강하게 가로 저으며 이렇게 말했으나, 모라이티나는 그의 말을 끝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역시.... 제가 잘못 했던거군요...."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힘없는 표정을 지었고, 그때, 란테르트가 그런 그녀의 뺨을 하나뿐인 손으로 감쌌다. 그의 입가에서.... 반쯤 억지로 지어 보이던 미소가 살며시 사라진 것은 아마 그쯤이리라.... ".... 네 잘못은 아니야...." 란테르트는 이렇게 말한 후, 잠시동안 멍하니 모라이티나를 응시했고, 잠시 후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모라이티나의 말대로.... 레드 미스트에서의 일은....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어.... 하지만.... 그 일에 네가 책임감을 느낄 이유는 없잖아? 넌 단지.... 내게 조언을 해 주었을 뿐이고.... 선택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나였으니까."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말에 점차로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어느덧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동자가 그렁거리기 시작하자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했다. 란테르트는 뺨을 감싸고 있는 손의 엄지를 움직여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약간 굳어있는 얼굴을 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입가에 머금은 그의 미소가 유난히 부드럽다. "신경 쓰지 마.... 난 원래 그런 녀석이잖아.... 18년 전에 죽은.... 약혼녀의 복수를 한답시고 수백 명이나 죽이는.... 그런 녀석이잖아. 우유부단하고.... 몇 년이나 지난 일을 마음에 담아 놓은 채.... 혼자 괴로워 할 줄밖에 모르고...." "란테르트...." 모라이티나는 결국 눈물을 흘렸고,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바보같이 울지 마.... 모라이티나 말대로 할게.... 잊도록 노력하면 되는 거잖아. 오이니아도 행복하게 해 주었는데, 설마 내가 내 자신을 그렇게 못하겠어?"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니까.... 불가능한 거예요...." 이 말에 란테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잊지 못한다.... 잊을 수 없다. 아니.... 잊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란테르트는 이런 기색은 전혀 내보이지 않은 채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럼 모라이티나가 도와주면 되잖아." 라고 말했고, 그런 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멍하니 란테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란테르트는 그런 그녀에게 익살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고, 모라이티나는 한참동안이나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후훗.... 정말 바보 같은 남자예요....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이마를 란테르트의 가슴에 기대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란테르트는.... 이 모라이티나가 반드시 행복하게 해 줄 꺼 에요. 그러니까, 이 티나의 말을 잘 들어야 해요! 알았죠?" 주위의 웅성거리는 소리와, 때마침 하늘을 수놓는 폭죽소리에 묻혀 모라이티나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으나, 란테르트는 조용히 그녀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 모라이티나는 비록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렸었지만, 지금 기분이 몹시 편안했다. 이대로 영원히 그의 가슴에 기댄 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본래 즐거운 시간은 오래 이어지지 못하는 법이다. 돌연 란테르트의 바로 뒤쪽에서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햐! 역시 그냥 친구는 아니었어." 란테르트는 이 낯익은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고소를 지었고,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가슴에서 이마를 떼며 고개를 빼곰히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세 명의 남자가 서 있었는데, 바로 핌트로스와 밀튼, 로멜이었다. "물론이죠." 모라이티나는 핌트로스가 방금 한 말에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하지만 이내 방금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려 눈가를 매만졌다. 눈물 얼룩이 얼굴에 남아있는 모습이 아름다울 리는 없으니 말이다. 핌트로스와 밀튼, 로멜, 이 세 사람은 한 손에 각자의 술잔을 들고, 다른 쪽에는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의 술잔을 든 채 이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왔고,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는 밀튼과 로멜의 손에서 술잔을 받아들며 미소로 그들을 반겼다. 핌트로스는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 앞에 서자마자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본 후 란테르트에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 형.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해서." 그의 말에 란테르트는 슬쩍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고, 모라이티나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한참 분위기 좋았는데 왜 방해를 하는 거죠? 황제폐하라고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되는 건가요?" 라고 대꾸했다. 그런 그녀의 말에 핌트로스는 점잖은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살짝 굽혔다. "아, 실례되었다면 정식으로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부인." "부인이라구욧?" 핌트로스의 그러한 사과에, 모라이티나는 짐짓 언짢아하는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고, 핌트로스는 다시 한차례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아, 저의 이 형편없는 눈을 탓해 주십시오, 레이디." 라고 말했다. 그제야 표정을 풀며 미소를 짓는 모라이티나였다. "좋아요. 용서해 주겠어요." 그때, 곁에서 흑월의 기사 로멜이 란테르트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밀튼형이랑 핌트로스형이 워낙 바쁘신 몸들이라." 핌트로스가 그런 로멜의 말에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훗. 가장 많은 귀부인들 사이에 둘러싸여 케니의 눈총도 눈치 못 채고 헬렐레 거린 것이 누군데 그래? 바쁜 걸로 치면 흑월공이 우리 중 최고가 아니었는지...." "누가 헬렐레 했다는 거예요?" 로멜이 반박했고, 핌트로스가 다시 말했다. "아까 그 제이슨 가의 미망인이 아름답기는 했지.... 제이슨가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겠지? 언제 한 번 찾아가 봐. 그 아가씨도 너를 바라보는 눈이 예사롭지는 않았어. 그리 부담 갖지 말고. 이제 나이도 22밖에 되지 않았어.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급살 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만 해요. 안 그랬다가는 쥬에티 님께 아까 핌트로스형이 다른 귀부인들과 어울려 하던 짓을 다 이야기 할 꺼 에요." "훗. 감히 지엄하신 황제폐하를 협박하겠다는 건가? 대 헵티슬 황국군의 총사령관인 밀튼공. 여기 이 건방진 로멜이라는 녀석을 잡아들여라. 그리고, 벌로 독한 술 넉 잔을 내리 입 속에 퍼붓도록 하라." 핌트로스의 말에 로멜은 흥, 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감히 흑월의 기사 로멜을 잡겠다구요? 게다가 밀튼은 황국군 총사령관이기 이전에 내 형이에요. 핌트로스형의 말을 들을 것 같아요?" 막 대화가 여기까지 진행되었을 때, 그때까지 조용히 그 둘을 바라보고 있던 밀튼이, 그의 별명과도 같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로멜 그만 두거라.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누가 듣기라도 하는 날이면, 쓸모 없는 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다." 뒤이어 밀튼이 핌트로스에게 말했다. "폐하. 황국의 다른 신하들이 있을 때만은 농담을 삼가 주십시오." 밀튼의 말에 그제야 쓸모 없는 말싸움을 그치는 두 사람이었고, 이런 실없는 말싸움으로 시간을 보내는 그 두 사람의 모습에 모라이티나와 란테르트는 몇 차례나 웃음을 터트렸다. 핌트로스는 고개를 란테르트에게로 돌렸다. "그래, 황궁의 연회가 어때?" 그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시끄럽기는 하군요...." 핌트로스도 따라 웃었다. "하핫. 형다운 말이다. 시끄럽다라.... 하지만 사람들은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니까. 아!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자정이구나." 모라이티나가 물었다. "연회는 내일 해가 뜰 때까지 계속 되는 게 아니었나요?" 그녀의 물음에 핌트로스는 고개를 끄덕여 그렇다고 답했고, 곧바로 모라이티나가 되물었다. "그런데 왜 자정이 되는 것이 신경을 쓰죠?" "불꽃놀이 때문입니다." 밀튼이 핌트로스 대신 답했다. "불꽃놀이? 하지만 1시간 간격으로 하고 있잖아요. 조금 전에도 한차례 있었던 것 같은데...." 모라이티나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이렇게 말했고, 밀튼은 그런 그녀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자정에 있는 불꽃놀이는 어느 때의 것보다 훨씬 성대하답니다. 오늘 하루동안 황실 재정의 2퍼센트 가량을 소비하는데.... 그중 절반이 이 자정의 불꽃놀이를 위해 사용되니까요." 밀튼의 설명에 모라이티나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정도란 말이에요?" 핌트로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티에가 워낙 좋아하니까. 평소 재정을 헤프게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이럴 때라도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게 해 줘야지." 핌트로스는 이렇게 말하며 목을 빼 저 먼 곳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흰색의 눈부신 드레스를 입은 한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 역시 누군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핌트로스는 손을 높이 들어 그녀를 향해 흔들었고, 그 여자는 그의 손을 발견한 듯 손을 한차례 들어 보이며 바로 곁에 있던 몇 명의 여자들과 함께 사람들 사이를 지나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은 그런 핌트로스의 행동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순간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핌트로스가 일행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불꽃놀이만큼은, 티에랑 함께 봐야 하니까...." 그런 그의 대답에 훗, 헛웃음을 터트리는 모두였다. 찬란, 화려, 다채, 호화 무어라도 좋을 것이다. 자정 무렵, 반공에 걸린 파르스름한 은빛의 달을 배경으로 빛의 꽃이 수놓아지기 시작했다.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수식어를 모아 놓아도 오히려 약간 모자랄 듯한 불꽃이 어둠을 배경으로 펼쳐졌고, 그 시끄럽던 황실의 연회도, 거리의 축제도, 이 순간만은 정적에 휩싸인 채 하늘에 시선을 모았다. 불꽃놀이가 성행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고작 100여년 전부터 였다. 바로 화약 때문이었다. 그 전까지의 화약으로는 지금과 같은 폭발력이나 부상력을 얻을 수가 없었기에 불꽃놀이라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했다. 종종, 도화선에 불을 붙인 화약 덩어리를 기계장치로 공중에 쏘아 올려 보내는 경우가 있었지만, 썩 아름답지는 않았기에, 장거리 연락 등의 실용적인 측면 외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00년전 대 학자 크란트에 의해 흑색화약이 개발되면서 불꽃놀이라는 것이 시작 된 것이다. "정말...." 얼마나 많은 불꽃이 허공에서 빛을 발했을까? 순간 오이니아가 이 한마디를 중얼거렸고, 바로 곁에 서 있던 켈파가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오이니아를 바라보았다. 붉고 푸른빛들이 그녀의 얼굴을 끊임없이 물들이고 있었고, 오이니아는 더할 나위 없는 즐거운 표정으로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켈파는 오이니아가 한 정말, 이라는 말이 별 의미 없는 감탄사임을 알고는 다시 하늘로 시선을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다시 하늘로 시선을 향한지 채 10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오이니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부신 불꽃으로 화려하게 단장한 밤하늘이라는 검은 휘장보다는 그녀의 옆모습이 켈파에게는 더더욱 아름답게 비춰진 것일까? 그는 한참동안 오이니아의 옆모습만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오이니아의 하얀 손이 눈에 들어왔고....켈파는 행여 눈치채여질까 저어하며 조용히 자신의 거친 손을 그녀의 손으로 가져갔다. 순간, 오이니아의 시선이 하늘에서 켈파에게로 향했고, 켈파는 화들짝 놀라며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바보...." 오이니아는 그런 켈파의 모습에 웃으며 이렇게 말했고, 이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이게 그렇게 힘든 거야?" 그녀의 말에 켈파는 귀밑을 붉혔다. 그때, 오이니아의 옆에 서 있던 피아텔이 고개를 돌려 켈파와 오이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오이니아와 켈파 이 두 사람을 한차례씩 번갈아 보며 이렇게 물었다. "뭐가 힘들다는 거야?" 피아텔이 물었고, 순간 오이니아가 당황하며 켈파의 손을 놓았다. 약간 어설픈 억양으로, "아.... 아니, 불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힘들다고 해서...." 라고 대꾸하며 이번에는 그녀가 귀밑을 붉혔고, 피아텔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별다른 반응을 나타내지 않은 채 웃으며 켈파에게 말했다. "힘들면 저쪽에 준비된 의자에 잠시 앉아서 쉬도록 해. 원한다면 함께 가 줄께." 그의 배려(?)에 켈파는 고개를 한차례 가로 저으며, "괜찮아...." 라고 답했고, 피아텔은 미소를 한차례 지으며 다시 공중으로 시선을 옮겼다. 켈파는 그런 그의 모습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라 딱히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피아텔의 지금과 같은 말투, 전에는 볼 수 없었다. 요 며칠간의 고민이 그의 성격을 조금이나마 변화시킨 모양이었다. 한편 테리트론과 시나, 로인, 이 세 사람은 오이니아 등이 있는 곳으로부터 서너 걸음쯤 떨어진 곳에 서서 하늘 높은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세 사람 역시 이토록 이나 화려한 불꽃에 한참이나 시선을 빼앗겼다. 로인은 기분이 좋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불꽃을 보는 것이 즐거운 듯,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어려있었고, 두 팔은 자연스럽게 가슴 앞에서 엇갈려 놓았다. 종종, 아, 하는 나지막한 탄성을 내지르기도 했다. 반면 테리트론과 시나는 불꽃 그 자체보다는 서로의 대화를 즐기는 듯 보였다. 물론 시선은 저 위쪽으로 향하고 있었으나, 입을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돌연 테리트론의 안색이 약간 굳었다. "나....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테리트론이 진지한 말투로 이렇게 말을 꺼냈고, 시나가 곧바로 맞받아졌다. "생각이라는 것도 하면서 사는 거냐?" "나 지금 진지해." 시나의 말에 테리트론이 진지하다는 것을 시위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로 이 한마디를 내뱉었고, 시나는 잠시 하늘로 향해있던 시선을 그에게로 옮겼다. 하지만 테리트론의 두 눈동자는 여전 하늘로 향해 있었고, 시나는 잠시 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뭘 생각해 봤다는 거야?" "내 미래." "미래?" 시나는 테리트론의 갑작스러운 말에 다시 시선을 그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테리트론은 곧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미래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뜸을 들이는 테리트론을 향해 시나가 다시 한 번 재촉하듯 물었고, 테리트론은 잠시 더 머뭇거리다 이윽고 말을 꺼냈다. "나.... 조금 더 여행을 하고 싶어." "여행?.... 근데, 겨우 그까짓 말을 하는데 이렇게나 뜸을...." 시나는 테리트론의 별 내용 없는 이러한 대답에 별 싱거운 녀석.... 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테리트론이 돌연 하늘로 향해있던 고개를 돌려 시나를 바라보며 한 한마디 말 때문이었다. "너와 함께." 그의 말에 시나는 입을 딱 다물었고, 테리트론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어색한지, 머뭇거리며 몇 마디 더 보태기 시작했다. "뭐 딱히 너 하나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야. 란테르트 님과 모라이티나 누님, 그리고 로인도 함께 할거잖아? 그냥, 마도사로써의 수련을 쌓고 싶기도 하고...." "잠깐, 잠깐...." 시나가 테리트론의 갈팡질팡하는 말을 막았다. "확실히 이야기 해." "확실히 라니?" 테리트론이 물었고, 시나가 다시 한 번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확실하게 이야기 해. 함께 여행하고 싶은 게 나야? 아니면 우리 일행이야?" "그야 당연히...." "그야 당연히?" 테리트론은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우물쭈물 거렸다. "당연히...." 시나는 테리트론의 머뭇거리는 태도에 약간 짜증을 냈다. "바보 같은 녀석. 똑바로 이야기 해." 그녀의 말에 테리트론은 잠시 입을 다문 채 시나의 눈을 응시하다가 조그맣게 한숨을 내 쉬었다. "이렇게 더듬거리는걸 보면 모르겠냐?" "몰라. 확실하게 이야기하기 전에는. 난 정의 내려지지 않은 어떠한 것도 좋아하지 않아." 테리트론은 그녀의 말에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그럼 손을 빌려줘." 시나는 그의 말에 오른손을 내밀었고, 테리트론은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그리고 입가로 가져가 손등에 키스를 했다. 썩 근사한 키스는 아니었으나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시나는 귀밑이 붉어지는 듯 했다. 막 키스를 마친 테리트론이 말했다. "됐지?" 시나는 그게 뭐냐는 표정을 지으며 테리트론을 바라보았다. "뭐가?" 사실, 시나는 처음 테리트론이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분위기가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테리트론이 머뭇머뭇 거리는 모습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자 괜스레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 손등에 그가 입을 맞추었을 때, 귀밑이 빨개질 정도의 부끄러움과 그에 비례한 만큼의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시나는 이 남자가 쑥스러워 하는 모습이 재미있어 계속해 태연한 척 연기를 하고 있었다. 뭐가? 라는 시나의 반문에 테리트론은 순간 머리 속이 텅 비었다. 평소 시나가 다른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이건 무언가 이상했다. "정말 모르는 거야?" 테리트론이 물었고, 시나가 다시 물었다. "뭐가 말이야? 왜 대답은 안하고 엉뚱한 짓만 하는 거야? 도대체, 일행과 함께 다니고 싶다는 거야? 아니면, 나와 함께 다니고 싶다는 거야?" 대화가 여기까지 이어짐에, 어느덧 로인도 시선을 하늘에서 그 두 사람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시나의 손을 잡은 테리트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로인은 그 둘의 그러한 대화에 짖꿎은 미소를 지었다. 로인이 보기에도 시나가 테리트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테리트론은 로인의 시선마저 보태지자 더더욱 표정에 자신감이 없어졌다. ".... 너다.... 너." 하지만 용기를 내어 결국 이 한마디를 내뱉었고, 이내 그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시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웃음을 한차례 터트렸다. "푸후훗. 그 말이 그렇게 힘든 거야?" 시나의 짓궂은 물음에 테리트론은 쳇, 한차례 코웃음을 쳤고, 시나가 다시 물었다. "프로포즈 였나보지? 단지 함께 여행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하는 거라면, 그렇게 힘들 것도 없잖아?" 시나의 말에 테리트론은 결국 귀밑을 붉혔다. "쳇, 무슨 여자가 그렇게 뻔뻔해?" "흥, 무슨 남자가 그렇게 부끄럼이 많아?" 시나의 말에 테리트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프로포즈 같은 건 아냐. 그냥 단지...." "단지 동료?" 시나가 재촉하듯 되물었고, 그때 갑자기 로인이 끼여들었다. "단지 동료라면, 시나와 함께 여행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하지 않았겠지. 나도 동료고, 란테르트 삼촌이나 모라이티나 누나도 동료니까." 로인의 말에 테리트론은 더더욱 궁지에 몰렸다. "로인! 너 까지야?" 테리트론은 답답한 마음에 조금 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고, 로인은 한차례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후훗. 그럼 난 빠져줄게." 라고 말하며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시나가 다시 말했다. "확실하게 이야기 해 봐. 도대체 무얼 하고 싶다는 거야? 아참, 그리고 이 손은 언제까지 잡고 있을 꺼야? 내 손이야." 테리트론은 그제야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았다. 하지만, 손이 채 시나에게로 돌아가기 전에 다시 잡았다. "난.... 단지.... 함께 있고 싶을 뿐이야. 무슨 프로포즈 같은 것은.... 내겐 어울리지 않아. 그냥...." 테리트론은 여전 머뭇거렸고, 시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다시 한차례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의외로 부끄럼이 많구나. 이런 쪽에 있어서는 켈파 못지 않은걸?" 시나는 이렇게 말하며 테리트론의 손에 잡혀 있던 자신의 손을 풀었다. 그리고는 오히려 그의 손을 잡았다. 시나의 손은 테리트론의 것에 비해 훨씬 작아 겨우 손가락 세 개를 잡을 수 있을 뿐이었다. 테리트론은 시나가 자신의 손을 잡자 조금 놀라며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고, 시나는 그런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좋아. 너와 함께 여행하면 훨씬 즐거울 테니까. 하지만, 난 그다지 오래 여행 같은 것을 할 처지는 못돼. 두 양부모 님도 계시고.... 어차피 내가 칼슨 아저씨가 계시는 곳으로 돌아갈 때가 되면 다시 헤어질 꺼야." 시나는 이렇게 말하며 테리트론의 손을 꼭 쥐었다. "바보씨.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 가. 고향까지는 함께 가 줄게. 어차피 삼촌도 너희들을 고향에까지는 데려다 줄 생각인 것 같으니." 테리트론에게서 별다른 대답이 없자 시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내가 말했었지? 난 확실하지 않은 것은 싫다고. 그냥 몇 일 더 만나고 헤어질 생각이라면 차라리 지금 헤어지는 게 더 나아. 물론, 한 두 달쯤 후의 이야기이겠지만." 막 시나가 이야기가 끝날 무렵, 테리트론이 입을 열었다. "난.... 하지만, 너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데?.... 게다가.... 너와 계속 함께 있고 싶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시나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후훗. 이렇게 까지 이야기하는데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는 거야? 그리고, 계속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도 있잖아...." 테리트론은 그녀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 잠시동안 시나의 진보랏빛 눈동자를 응시하던 그는 한차례 조그마한 한숨을 내 쉬었다. ".... 나는.... 가정 같은 건 이루고 싶지 않아." 그의 말에 시나의 어깨가 아주 조금이지만 움찔거렸고, 테리트론은 그런 그녀의 움직임을 느꼈는지 설명을 조금 더 보탰다. "가정.... 글쎄.... 조금 두려워. 내가 과연.... 그런 것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을지.... 내 아버지와 같아지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게다가, 너는 귀족이잖아? 나 같은 녀석이랑 결혼해 봤자.... 난 전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능력도 없고.... 재산도 없잖아." 시나는 그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가 이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내가 프로포즈를 할게. 넌 그저.... 내가 좋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아니면 고개를 가로 저으면 되는 거야. 내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까, 모든 책임은 내가 지면 될 꺼고...." 시나는 이렇게 말한 후,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렇게 말했다. "나와 함께 내 영지로 가자." 그런 그녀의 말에 테리트론은 순간 멍해졌다. 황당했다. 여자가 먼저 프로포즈를 한다니....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테리트론은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있다가 돌연 한차례 하하핫, 재미있다는 듯한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너 답다...." 연회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자정을 넘기고, 미명이 가까워져 옴에 사람들은 하나 둘 각자의 침실로 향했고, 남아있는 사람들의 표정에도 피로가 완연해지기 시작했다. 기분 탓일까? 악사들의 음악소리도 점차로 쳐지는 듯 했다. 왈츠마저 자장가로 들린다. 어느덧 서편으로 보름달이 완전히 져 버리며 동편이 어스름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멀리 동쪽의 지평선 언저리에 가느다란 금색의 빛이 퍼져왔고, 점차로 하늘의 푸른색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이렇게 13월의 달 축제가 끝이 나버린 것이다. 물론, 축제 그 자체는 명년 1월 1일까지 이어지지만, 13월 3일 이후의 축제는 13월의 달 축제라기 보다는 새해 맞이 축제의 성격이 더욱 짙었다. 차분히 새해를 준비하는 기간으로 어제와 같은 화려한 연회는 더 이상 없다. 일행은 사실 이곳에 13월의 달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축제가 끝난 후 곧바로 떠나는 것도 어색하고 해서 몇 일 더 머물러 1월 2일이 되서야 핌트로스에게 떠나겠다는 뜻을 비췄다. 핌트로스는 꽤나 아쉬워하는 표정이었으나 굳이 말리지 않았다. 란테르트의 성격이 어떠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어디로 가려는 거지?" 핌트로스는 모라이티나와 함께 집무실에 찾아와 떠나겠다고 말하는 란테르트를 향해 이렇게 물었고, 그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가로 저었다. "글쎄요.... 당장은 일행을 고향에까지 데려다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후에 어디로 갈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란테르트의 말에 핌트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뭐 이런 평화로운 시대에 딱히 할 일이 있을 리도 없으니...." 핌트로스는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 곁에 서 있는 모라이티나를 바라보았다. "누나와 함께 여행이나 다녀. 란테르트형에게는 그게 가장 잘 어울릴 듯 하니까." 핌트로스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웃으며, "핌트로스 씨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라고 말했고, 란테르트는 그저 담담히 미소를 지을 뿐 이렇다할 대답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막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밀튼과 로멜이 핌트로스를 찾아왔고,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가 있는 것을 발견한 그 둘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반갑게 인사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로멜이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핌트로스형을 찾아 오셨나요?" "이제 이곳을 떠나려 합니다." "어디로 가시려고요?" 란테르트의 대답에 로멜이 곧바로 되물었고, 란테르트는 조금 전 핌트로스에게 해준 말과 거의 똑같은 말을 로멜이게 들려줬다. "일단은 일행들의 고향으로 가려 합니다. 그 후의 일은 정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머무르실 수는 없겠습니까?" 밀튼이 란테르트를 한 번 말려 보았다. 하지만 란테르트는 그런 밀튼의 말에 한차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충분히 오래 머물렀습니다." 그때 로멜이 란테르트를 향해 말했다. "저도 따라 가겠어요. 어차피 당장 할 일도 없으니.... 저야 뭐 어디 관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처럼 황제나 왕 같은 사람도 아니잖아요." 로멜은 이렇게 말하며 핌트로스와 밀튼은 한차례씩 바라보았다. 그에, 핌트로스는 부럽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셨고, 밀튼은 온화한 미소를 세 살 어린 자신의 동생에게 지어 보였다. 로멜이 다시 란테르트에게 말했다. "함께 가도 괜찮겠죠?" 로멜의 말에 란테르트는 한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말릴 일도 아니거니와....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언제 출발 할거죠?" 로멜이 다시 물었고, 란테르트는 짤막히, "내일쯤입니다." 라고 대꾸했다. 핌트로스와 밀튼, 이 두 사람 역시 로멜과 마찬가지로 란테르트를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자신들의 자리가 자리인 만큼 그럴 수는 없었다. 연말과 연초이니 만큼 국정의 일은 빡빡하기 짝이 없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란테르트는 자신이 할 말이 모두 다 끝났다는 생각에 이렇게 인사를 했고, 핌트로스와 밀튼, 그리고 로멜은 곧바로 그와 모라이티나에게 인사의 말을 건넸다. 알현실을 벗어난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 이 두 사람은 웅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적한 왕궁의 회랑을 걸어 일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곳과도 이제 안녕이군요. 요 몇일동안 정말 즐거웠었어요." 모라이티나는 두 손을 깍지껴 앞으로 뻗으며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곁에서 그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 것은 즐거웠어요, 라는 대목에서가 아닌 안녕이군요, 라는 말 때문이었다. 그는 수도에서의 요 몇 일을 별다른 느낌 없이 보냈었다. 종종 옛일을 떠올리기도 하고, 앞일에 관해 생각하기도 하며 조용하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을 뿐이다. 물론, 어느 정도는 즐거웠는지도 모른다. 웃기도 꽤 많이 웃었고, 이런 저런 곳을 돌아다니며 왁자지껄 떠들던 그 시간들은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감정이란.... 굉장히 휘발성이 강한 어떠한 느낌일 뿐이었다. 즐거움도.... 슬픔도.... 분노도.... 아픔도.... 이제는 순간 순간의 기분을 지배 할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그에게 주지 못했다. 기쁨에 한차례 미소를 지을 뿐이고, 슬픔에 코끝이 찡해질 뿐이다. 그리곤 잊는다. 상실감과 죄책감이라는 거대한 감정에 다른 감정들은 묻혀버린다. 과거를 떠올릴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것에 슬픔을 느꼈고, 그들과의 즐거운 추억에 즐거움을 느끼지만.... 결코 그러한 감정을 오래 가지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곧바로 배어져 나오는 쓰디쓴 입맛에 씁쓰레한 미소를 입가에 지으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문득 란테르트를 바라본 모라이티나가 그의 표정이 약간 굳어 있는 듯 하자 이렇게 물었고, 란테르트는 흡사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하는 듯 눈동자에 빛이 돌며 그녀의 물음에 대꾸했다. "아니.... 그냥.... 깨어난 이후로.... 한 곳에 이렇게 오래 머문 적도 없는 것 같아서...." 모라이티나가 그의 대답에 웃었다. "호홋, 바보. 기억력이 어떻게 된 것 아니에요? 에디엘레 가에서 보름 이상이나 머물러 있었잖아요. 황궁에 온지 이제 12일 됐을 뿐이에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랬던가?...." 모라이티나가 다시 웃었다. "호호호. 하긴, 란테르트야 이 티나 님의 기분을 맞춰 주느라 가고 싶지도 않은 곳들만 돌아 다녔으나, 지루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네요." "지루하지는 않았어.... 단지 그냥 굉장히 오래 머물렀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야." 란테르트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이렇게 대꾸했고, 모라이티나는 그런 그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게 지루한 거예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다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라이티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담담히 미소를 지을 뿐 더 이상 이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건 아무래도 좋아요. 그럼 이제 무얼 할 생각이에요?" "모르겠어.... 우선.... 로인이나 시나도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할 테고.... 로인도 이 정도면 꽤 많은 경험을 얻었다고 할 수 있어.... 내가 검술 같은 것을 가르칠 것이라면 모르지만.... 더 이상 이렇게 데리고 다닐 이유는 없으니까.... 시나 같은 경우에도.... 이 정도면 충분히 긴 여행을 즐겼고."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가 되물었다. "귀찮은가요?" "그런 것은 아니야." 란테르트는 곧바로 이렇게 대꾸한 후 잠시 말 사이에 시간을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그 두 아이는.... 방랑 같은 것을 할 사람들이 아니야. 어서 다시 자신의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좋을 것 같아." 란테르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다. 고향이 있고.... 가정이 있는 사람들에게 방랑은 어울리지 않는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겠네요.... 그럼 오이니아와 켈파, 피아텔, 테리트론, 이 네 명을 고향에 데려다 준 후에.... 곧바로 위다로 떠나요." 란테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해야 겠지...." 다시 모라이티나가 물었다. "그 후에는 무얼 할거죠? 정말 나와 함께 여행을 다닐래요? 우리 숲에도 볼 곳이 굉장히 많아요. 더 남쪽에 있는 드래곤들의 대륙을 구경하는 것도 좋고요. 그 대륙은 이곳 헵티슬보다 넓이도 훨씬 넓은데다가, 드래곤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지방마다 그 분위기가 크게 다르데요. 사람들의 피부색도 천차만별이고.... 가장 북쪽에 있는 다노드 사막의 사람들은 살빛이 짙은 갈색인데 힘도 굉장히 강하고 주술력도 뛰어나다더군요."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며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란테르트의 표정에서는 조금의 호기심도 읽을 수 없었고, 모라이티나는 약간 볼을 뽈록하게 하며 물었다. "이봐요, 아저씨. 도대체 란테르트가 하고 싶은 일은 뭐예요?" 모라이티나의 물음에 란테르트는 생각에 잠기었다. 진정 하고 싶은 일이라.... 결론은 오래지 않아 나왔다. 그가 원했던 일.... 그것은.... 18년 전에도.... 15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영원한 고요.... 그리고 그것을 통한 속죄.... 지금의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하지만 모라이티나에게 그렇게 답할 수는 없다. "모르겠어...." 그의 대답에 모라이티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람.... 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그냥 내 말대로 해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한참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바라만 볼 뿐....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란테르트였다. 다음날 일행은 성을 떠났다. 로멜과 케니, 이 두 사람이 늘었으나, 일행 전체의 분위기는 처음에 비해서 훨씬 차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달전 피치토 마을을 벗어날 때만 해도, 몇 가지 풀리지 않은 일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여정이 완전히 정해져 있는 길을 말 그대로 단지 이동만 하면 되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즐겁지 않을 것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라는 든든한 두 보호자가 여전히 뒤에 버티고 있었고, 일행들이 경애해 마지않는 로멜경과 그의 아내가 일행에 참가했다. 시나와 테리트론의 말싸움은 여전하며, 오이니아와 피아텔, 그리고 켈파 이 세 사람의 사이 역시 이전과 별 다를 것 없이 다정했다. 로인의 경우에도 예의 온화한 미소를 아직도 잃지 않고 있었다. 모두의 표정은 밝았다. 단 한사람을 제외하고.... "몹시.... 지치는군...." 란테르트가 말에 타며 중얼거리는 이 말에 곁에서 모라이티나가 물었다. "피곤해요? 어제 늦게 잤나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몸이 아니라 마음이 피곤해...." 모라이티나가 웃었다. "아마 긴장이 풀려서 그럴 꺼 에요. 이제 할 일이 없잖아요. 우리들도 종종 그런 기분이 들어요. 숲에서만 생활하다 보면 몹시 권태롭거든요. 그럴 때마다 어떤 이들은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나오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저 먼 모래의 바다로 모험을 떠나기도 해요."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그럴 듯 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준비가 끝난 듯 하자 그는 내성 입구에까지 배웅을 나온 핌트로스와 밀튼, 그리고 쥬에티와 밀레나에게 작별의 인사를 했고, 뒤이어 일행 모가 한두 마디씩 황제와 밀튼경 등의 사람들에게 인사의 말을 건넸다. 란테르트와 일행의 인사가 모두 끝난 후 핌트로스는 쥬에티를 흘끗 한차례 바라본 후, "나도 따라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어. 모두들 건강하기를 빌겠어." 라고 답했고, 그의 아내이자 황비인 쥬에티는 남편을 한차례 예쁘게 흘긴 후 일행 모두, 특히 로멜과 키나를 향해 건강 하라는 인사를 건넸다. 밀튼은 언제나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히 가십시오. 그리고 꼭 다시 한 번 이곳에 들려주세요." 라고 말했고, 그의 아내인 밀레나는 그저 고개를 한차례 숙여 보임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일행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이 네 사람에게 인사했다. 그리고는 고삐를 늦춰 말에게 앞으로 나아가라는 뜻을 내비쳤다. 모두 열 기의 말은 각자의 주인의 신호에 뜨거운 콧김을 1월의 찬 대기에 내뿜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그렇게 일행은 어느 사이 성을 벗어나 북쪽으로의 여로를 밟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지 7년째 되는 676년, 바람이 한창 매서운 1월 아침의 일이었다. 14. 안녕.... 영원히.... 마을을 살풋이 감싸고 있는 것은 엷은 녹색이었다. 아직 숲의 나무들도, 언덕의 풀들도 치기 어린 연둣빛을 완전히 벗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성급한 꽃들이 망우리를 터트리고, 따듯한 남풍이 매서운 북풍의 기세를 누르기 시작하는 이 계절 마을은 조금씩 활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마을에서 가장 바쁜곳은 아마 영주의 성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분주히 성 안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고 있었고, 성 안 너른 공터에는 지금 꽃과 여러 나무 구조물로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밝은 것을 보니 무슨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다. 그 성안에 위치한 한 방. 시나와 로인, 그리고 테리트론은 지금 한 곳에 모여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피아텔과 켈파, 그리고 오이니아로, 켈파와 피아텔의 경우에는 근사한 신사용 정장을, 그리고 오이니아는 눈처럼 흰, 장식이 풍성한 드레스를 걸친 채였다. 흰 드레스를 입은 오이니아는 지금 몇몇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있었고, 켈파와 피아텔은 곁에서 그런 그녀를 향해 쉬지 않고 칭찬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시나가 입을 열었다. "결국.... 저렇게 되었구나." 테리트론이 뒤이어 말했다. "어차피.... 저 둘이야 굉장히 친했었어. 당장 결혼한다 해도 어색할 것 없는 사이였지." 로인이 다시 말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단지 확인을 했을 뿐이라는 말인가?" 테리트론은 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시나를 바라보았다. "네게도 어울릴 꺼야, 흰 드레스." 시나가 웃었다. "하지만, 그 말은 네게 안 어울리는데?" 그 두 사람은 한차례 미소를 지었고, 시나가 곧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의외야. 피아텔이 켈파와 오이니아 사이를 이어주다니.... 난 오히려 훼방을 놓을 줄 알았는데." 테리트론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 녀석은 자기가 기사인줄 착각하는 멍청이라서.... 그런 짓은 안 해." 시나가 웃으며 말했다. "기사랑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야? 원래 파모로아 때의 기사들은 여자 때문에 종종 결투를 하곤 했었어." "그런가?...." 테리트론은 시나의 말에 이렇게 중얼거린 후 다시 말했다. "아무튼.... 피아텔은 자기 잘난 맛에 산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꽤 쓸만한 놈이야. 이제는 그 병도 꽤 고쳐진 것 같던데...." 그의 말에 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에서의 일이.... 작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시 테리트론이 말했다. "아무튼.... 내가 신기해하는 점은.... 언제 오이니아가 켈파에게 돌아섰느냐 하는 거야. 원래 오이니아는 켈파보다는 피아텔을 더 좋아하는 눈치였거든. 원래 켈파야 약간 어눌한 것이 여자들이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시나가 그의 말에 대꾸했다. "글쎄.... 꽤 된 것 같은데? 에디엘레 가에서도 이미...." "그래? 난 전혀 몰랐는데...." 테리트론은 시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렇게 말했고, 시나는 한차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너야 원래 둔하니까." 시나는 이렇게 말하며 시선을 오이니아에게로 향했다. 막 베일을 내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베일을 내린다." 시나의 말에 로인과 테리트론은 고개를 돌려 오이니아를 바라보았다. 헬튼 가의 시녀의 도움을 받아 오이니아의 얼굴위로 새하얀 면사포가 드리워 졌고, 동시에 켈파와 피아텔이 그녀 곁에서 떠나 어디론가 향했다. 그 모습에 시나가 입을 열었다. "면사포를 내린 신부의 얼굴을 신랑이 함부로 봐서는 안돼.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고. 자, 다른 곳으로 가자." 시나의 말에 로인과 테리트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막, 임시로 마련된 신부 대기실을 벗어나며 로인이 다른 두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보다, 나는 오이니아가 신부 아버지 대행을.... 삼촌에게 부탁한 것이 더 의외인걸? 그 덕에 에디엘레 가에서 이렇게 급히 돌아오게 되었잖아." 테리트론이 수긍하는 뜻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오이니아, 처음 만났을 때는 란테르트 님을 썩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는데.... 양아버지로 모신다니...." 시나가 테리트론의 말에 대꾸했다. "삼촌을 모르는 사람은 삼촌을 무서워하고 싫어하지만, 알게 된 후로는.... 결코 싫어할 수 없는 사람이 또한 우리 삼촌이니까. 나 또한 그러했듯...."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세 사람의 귀에 뚜벅, 뚜벅 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것이었는데, 하나는 가볍고 하나는 무거운 것이 남자와 여자인 듯 했다. 모퉁이를 돌아 이윽고 그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고, 시나등 세 사람은 일제히 아, 하는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삼촌. 모라이티나 언니." 시나는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자 마자 보폭을 크게 하고 걸음을 빨리 해 그 두 사람에게 다가갔고,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는 그런 시나에게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라이티나의 손에는 커다란 화환이 들려 있었다. 갓 피어난 흰 꽃으로 만든 이 아름다운 꽃다발은, 흰색의 긴 천으로 감싸 더더욱 보기 좋았다. "부케 인가 보죠?" 여자답게, 시나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모라이티나의 손에 들려있는 꽃다발을 유심히 살폈고, 시나의 물음에 모라이티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시나는 란테르트의 모습을 살폈다. 꽤 깔끔한 정장을 몸에 걸친 그는, 약간 피곤한 기색을 얼굴에 나타내고 있었다. "삼촌, 그 옷 보기 좋아요. 그런데, 조금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피곤해 보여요. 로인이 그러는데.... 요즘은 자고 일어나는 시간도 불규칙하고.... 술도 너무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시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가벼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게 하마.... 고맙다. 시나." 모라이티나가 뒤에 서있는 로인에게 물었다. "오이니아는 아직 대기실에 있지?" 그녀의 물음에 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희들은 나가서 로멜 씨와 이시테 양과 함께 있거라. 지금 헬튼 영주 님과 함께 있단다." 모라이티나는 다시 한차례 로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따랐다. 시나들이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돌려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시나의 말대로, 요즘 부쩍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는 란테르트였다.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은 거예요? 천하의 란테르트께서, 겨우 5, 6일 말을 타고 달려왔다고 피로를 느끼는 건가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미소를 지었다. "무슨 소리야? 단지 어제 늦게까지 로멜과 먹은 술의 숙취 때문에 그래." 모라이티나가 곧바로 말했다. "그것도 문제예요. 요즘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셔요? 난 란테르트가 취한 모습을 본 것이.... 어제가 처음이었어요. 고민이라도 있는거에요?"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고민이라...." 모라이티나가 다그쳤다. "뭐가 있는가보군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가 천천히 대꾸했다. "글쎄.... 그냥.... 내가 누군가의 아버지 노릇을 할 자격이 있나 해서.... 살인마.... 따위가 이제 곧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여자의...." 모라이티나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무슨 소리에욧. 당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어요. 오이니아의 행복은 당신이 되찾아 준 것이니까요. 살인마건 아니건.... 오이니아에게 훌륭한 아버지이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난 거절하고 싶은데?...." 란테르트가 중얼거렸고, 모라이티나가 곧바로 물었다. "그녀의 행복을 짓밟을 건가요?" 모라이티나의 말에 란테르트는 입을 다물었고,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가 약간 기분이 언짢아 진 듯 보이자 웃으며 말했다. "게다가, 당신, 내년이면 사십이에요. 40. 오이니아 만한 딸이 있어도 무리가 아니잖아요?" 그녀의 말에 란테르트는 잠시 멍해졌다. 하긴.... 그러고 보니 이제 자신의 나이는 40살이다. 물론, 느낌만으로는 이제 30살이 된 듯 했으나, 어찌 되었건 자신과 나이가 같았던 사람들이 내년에 40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되니, 자신 역시 40살인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올해 란테르트 나이가 39세군요." 멍하니 있는 란테르트를 향해 모라이티나가 이렇게 말했고, 란테르트는 그게 어쨌냐는 듯 모라이티나를 바라보았다. 모라이티나는 그런 란테르트를 향해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올해는 윤년이에요. 13월 6일이 있는...." 라고 말했고, 그제서야 란테르트의 입가에 웃음이 돌아왔다. "후훗.... 생일 말인가?...." "그래요. 생일. 3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생일." 이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이 두 사람은 오이니아가 있는 방에 도착했다. 마침, 그녀의 곁을 돌보아 주고 있던 두 명의 시녀도 어디론가 가 버렸고, 방안에는 베일을 쓴 오이니아 혼자만이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이니아." 모라이티나는 오도카니 앉아있는 오이니아의 이름을 한차례 불렀고, 모라이티나의 목소리에 흡사 옅은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하는 듯 어깨를 움찔거리며 오이니아가 고개를 돌려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를 바라보았다. "아.... 모라이티나 언니.... 그리고.... 란테르트 아저씨." 당시에는 보통 양아버지를 아저씨로 대신 부르곤 했다. 특히 철이 든 후에 양아버지를 얻을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 이런 식으로 호칭했는데, 시나나 옛날 사피엘라와 에라브레가 칼슨을 아저씨라고 부른 것과 같은 이치에서이다. 모라이티나는 오이니아의 말에 미소를 지었고, 란테르트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하나뿐인 팔로 허리까지나 내려오는 머리칼을 한차례 쓸어 정리했다. 오이니아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정말 감사드려요.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아니야.... 그보다는.... 오히려 내게 자격이 있는지 걱정인걸...." 란테르트는 자신의 심정을 그대로 오이니아에게 이야기했고, 오이니아는 그런 그의 말에 고개를 크게 가로 저으며 말했다. "충분하세요. 제가 가장 힘들었을 때.... 제 뒤를 돌보아 주신 걸요. 게다가, 처음 뵈었을 때부터 왠지 저와는 인연이 있는 듯 했어요. 아저씨가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어요?" 란테르트는 그녀의 말에 멋쩍은 미소를 지었고, 모라이티나는 곁에서 온화한 미소와 함께 이 두 부녀(?)를 바라보다 오이니아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자, 네 부케야. 꽃이 제법 많이 피었더라. 나와 란테르트가 직접 따 왔단다." 오이니아는 베일 너머에서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모라이티나가 건네는 꽃을 받아들었다. 향기로운 내음이 물씬 풍겼다. 오이니아는 조용히 손을 들어 꽃을 한차례 쓰다듬어 보았다. 서늘하면서도 상쾌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나요." 오이니아는 꽃의 향기를 한차례 폐속으로 깊이 들이마시며 이렇게 말했고, 모라이티나는 그런 그녀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뭐랄까.... 왠지.... 딱히 무어라 이야기 하기는 힘들지만.... 왠지 들뜨고.... 또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고.... 워낙 친하게 지내던 친구라.... 그런 친구가 남편이 된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약간 이상하고 또 어색하고.... 물론.... 요즘에는 애인처럼 지내기는 하지만.... 아직 도 친구 같을 때가 더 많거든요...." 오이니아는 약간 두서없이 이 몇 마디를 하고는 모라이티나와 란테르트를 번갈아 바라보았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모라이티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고민은 반지를 손가락에 꽂는 순간 없어진단다. 그냥 마음 편이 있어." 이렇게 말하며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란테르트, 당신도 무어라 한마디 해 줘요." "아.... 음.... 행복하길 바란다. 켈파는 성실한 아이니까, 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꺼야...." 오이니아는 란테르트의 말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직선적인 말투, 언제 들어도 재미있었다. 편하고, 가식이 없어 좋았다. 하지만 모라이티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게 뭐예요? 좀 더 멋있게 해 줄 것이지." 책하는 듯한 목소리로, 하지만 미소와 함께 란테르트에게 이렇게 한마디 한 모라이티나는 뒤이어 오이니아에게 말했다. "그럼, 기다리고 있어. 할 일이 조금 남아있으니, 그것들을 끝내고는 곧바로 돌아올게. 식장까지는 란테르트가 에스코트 해 줄 꺼야." 오이니아는 모라이티나의 말에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고, 모라이티나와 란테르트 이 두 사람은 미소로 그녀에게 인사한 후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막 란테르트와 모라이티나가 문을 나서려는 순간, 오니이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라이티나 언니." 모라이티나는 오이니아의 부르는 소리에 곧바로 몸을 돌렸고, 란테르트 역시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이니아는 모라이티나를 향해 부케를 들어 보였다. "이 부케. 언니에게 던질 꺼 에요. 꼭 받아요. 그리고, 란테르트 아저씨와 결혼하세요." 오이니아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귀밑을 살짝 붉혔으나, 입가에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돌려 란테르트를 바라보았고, 이내 짖꿎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었죠? 설마 하나뿐인 딸의 첫 번째 부탁을 무시하지는 않겠죠?" 란테르트는 그런 모라이티나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가자. 로멜과 이시테 양이 기다리고 있을 꺼야." 그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혓바닥을 한차례 낼름 해 보였고, 오이니아는 뒤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부끄러워서 저러는 거겠지.... 라고 양아버지의 심중을 맘대로 판단해 버린 그녀였다. 어느덧 식이 시작되었다. 신부의 들러리는 시나라는 이름의 보랏빛 머리칼의 아가씨였고, 그 신부의 손을 잡고 장내까지 그녀를 안내해온 사람은 란테르트라는 이름의 팔이 하나뿐인 장년의 사내였다. 결혼식장은 헬튼 가의 성 뒤쪽에 있는 정원에 마련되었다. 열을 맞추어 놓여진 흰색의 의자들에는 30명 남짓의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는데,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의외의 손님들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 의외의 손님이란 다름 아닌, 로멜과 그의 아내, 그리고 이시테 였다. 두 공작 가문의 사람들이.... 겨우 지방의 두 평민의 결혼식에 참관하러 오다니.... 이시테의 곁에는 그녀의 하녀인 켈리가 앉아 반짝이는 눈동자로 결혼식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고, 이시테의 뒤에는 이시테의 개인 기사로, 이곳까지 그녀를 경호하러 온 미셸튼이 란테르트와 오이니아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켈리의 반대쪽 이시테의 곁에는 로멜의 아내인 케니가, 그리고 케니의 옆에는 로멜이 앉아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손을 꼭 마주잡은 채 결혼식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결혼한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신혼부부인 그들은 결혼식의 여흥이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테리트론과 피아텔도 모두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두 친구의 결혼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식장 한쪽에는 악사들과 합창단이 한창 아름다운 축가를 연주하며, 또 부르고 있었다. 성대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평민의 것치고는 상당히 호화로운 결혼식이었는데, 아무래도 켈파나 오이니아 모두가 이 마을의 소영주인 피아텔의 친구인 덕이 컸다. 테리트론은 오이니아보다는 그녀의 들러리를 서고 있는 시나의 모습을 눈여겨보고 있다가, 잠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마침 합창단이 눈에 들어왔는데, 모두들 15세 이하의 소녀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입술의 모양이 재미있어 잠시동안 바라보던 테리트론은 이내 바로 곁에 앉아있는 피아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 합창단 뭐냐? 우리 마을 아이들은 아닌데...." 그의 물음에 피아텔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헬튼시의 소녀합창단이야. 아버지께서 직접 설립하신 헬튼 예술원 소속이지." 피아텔의 말에 테리트론이 짖꿎은 미소를 지었다. "너의 아버지 취미도 어지간하시구나. 소녀 합창단이라...." 그의 말에 피아텔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네 허튼 소리도 여전하구나. 요 한 달간 우리와 떨어져 있던 사이 좀 나아졌나 했더니...." 테리트론이 웃었다. "내 버릇 어디 가겠냐? 그보다, 지금 기분이 어떠셔?" 그의 말에 피아텔은 쓴웃음을 지었다. "휴.... 친구마저 잃을 수는 없잖아?.... 전과 달라질 것은 없어. 전에도 이 피아텔에게는 오이니아와 켈파라는 친구가 있었고.... 지금도 그럴 뿐이야." "꽤 멋져 졌는데? 걱정 마라, 이 정도면 예쁜 귀족 아가씨들이 줄을 설 테니.... 게다가 좋은 소식도 있는 듯 하던데." 테리트론이 위로(?)조로 말했고, 피아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황실에서 견습기사로 나를 불렀어.... 휴.... 하지만 걱정이야. 황제폐하께서 무슨 생각으로.... 나를 부르셨는지...." "걱정 마라. 황제, 그 사람 꽤 좋은 사람 같더라. 아, 이제 란테르트님 역할은 끝이다. 너희 아버지의 주례가 시작될 모양인데?" 테리트론의 말에 피아텔이 시선을 오이니아와 켈파가 있는 곳으로 돌리니, 지금 막, 란테르트와 켈파의 아버지가 맞인사를 한 후였다. 켈파의 아버지 역시 정장을 입었는데, 터질 듯한 근육 덕에 몸에 꼭 들어맞아 불편해 보였다. 란테르트는 조용히 자리로 돌아왔고, 어느덧 피아텔의 아버지의 주례사가 시작되었다. "위대한 주신 테미시아 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연인들의 신 아리시아 님의 이름으로, 또한 이 에노사의 신 팔라이아의 이름으로, 지금 성스러운 의식을 시작하려 합니다...." 이러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헬튼 영주의 주례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테리트론 같은 사람들은 연신 하품을 해 댔고, 로인 같은 경우에는 담담한 미소와 함께 주례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란테르트의 경우에는.... 오이니아의 손을 잡고 장내로 들어온 그는, 막 오이니아의 손을 켈파에게 건네주며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사실 오이니아와 그다지 많은 정을 쌓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아버지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을 때.... 기쁨보다는 당황, 그리고 황당한 느낌을 받은 그였다. 오이니아가 자신을 그렇게 친숙히 느끼고 있다는 것에서 꽤 놀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결혼식을 지켜보던 그는 그런 자신의 걱정과는 달리 오이니아에게 친숙함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오이니아의 손을 켈파에게 넘겨주며 느꼈던 알 수 없는 아쉬움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행복해 보였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끊임없이 곁눈질로 켈파를 바라보며 미소짓는 오이니아의 모습은, 모든 다른 신부들과 같이 행복해 보였다. 그런 모습에 란테르트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자신이 행복하게 해 준 얼마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기껏해야.... 클라린스 누님 정도가 그 안에 꼽힐 터이나.... 그녀의 불행 자체가 자신의 아버지가 가져다 준 것이니, 그 안에 넣기가 조금 힘들었다. 란테르트는 담갈색 머리칼을 가진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새삼스레 감회에 잠겼다. 어쩌면.... 그렇게 까지 그녀를 위해 마음을 썼던 것이.... 어쩌면 그녀와 머리칼의 색이 같은 두 자매 때문은 아니었을까? 단 한차례도 눈으로 본 적 없는 자신의 약혼녀와 왠지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오이니아를 돌보아 줌으로써.... 18년, 그리고 15년 전 자신이 못 다한 어떠한 일을 해 보려 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지금 이렇게 마음이 편한 것일까? 대리만족.... 그런지도.... 그녀에게 두 자매의 모습을 투영시켜....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줌으로써 두 자매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달래 보려 한 것인지도.... 몰랐다. "서로의 손가락에 그 약속의 징표로 반지를 끼우십시오." 사고의 벽을 뚫고 헬튼 영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란테르트는 고개를 들어 켈파와 오이니아가 반지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았고, 이내 다시 생각에 잠기었다. 반지.... 어머니의 반지.... 지금은 에라브레의 무덤에 그녀와 함께 묻혀있는.... 반지의 주인은 원래 어머니였다. 금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그리고 그곳에 박혀있는 장식석이 진짜 보석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그 반지는.... 자신의 손을 거쳐 약혼자의 손으로 들어갔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오래 머물지 못했다. 후에.... 에라브레가 언니에게 전해 준다며.... 조용히 손에 쥐었었다. 아마도.... 그녀라면 약속을 지켰으리라.... "이렇게 두 남녀가 서로 하나됨을 인정하였으니, 주신 테미시아 님과, 연인의 신 아리시아 님의 이름으로 입맞춤을 허락합니다." 다시 헬튼 영주의 목소리가 란테르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란테르트의 눈에 켈파가 오이니아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포를 들어올리는 모습이 들어왔고, 이내 부끄러운 듯 살짝 입을 맞추고 곧바로 입술을 떼는 켈파의 모습이 보였다. 그 두 사람의 행동에 란테르트는 미소를 지었다. 알 수 없는 편안함과.... 더불어 과거에 대한 아린 기억이 동시에 물밀 듯 밀려왔다. 결혼식이 이로서 모두 끝났다. 이제는 신랑과 신부 측의 친구들이 모여 하는 이런 저런 간단한 장난만이 남아있다. 신랑을 들어 공중으로 집어던진다거나, 신부가 던진 부케를 처녀들이 받는다거나 따위 말이다. 그리고, 연회장에서 간단한 회식을 거친 후, 새로 태어난 부부는 밀월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다. 전형적인 결혼식의 모습이다. 나이든 사람들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 저쪽에 마련된 연회장으로 향했고,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오이니아와 켈파의 친구들이다, 신랑 신부에게로 몰려들었다. 왁자지껄 떠들어댔고, 모두들 즐거운 듯 소리를 질렀다. 이시테는 켈리의 손에 이끌려, 로멜은 케니의 손에 이끌려 오이니아 근처로 다가갔다. 몇몇 짖꿎은 친구들이 거품 포도주 병을 흔들어 켈파와 오이니아의 몸에 뿌려대기도 했고, 이런 저런 곡물들을 켈파의 머리에 와르르 쏟아놓기도 했다. 모두들 두 부부의 축원을 비는 의식이었다.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며 란테르트는 아직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일어서서 연회장에 가기도.... 모라이티나들이 있는 오이니아와 켈파 근처로 가기에도.... 왠지 스스로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 싶었다. "행복해.... 보이는군.... 모두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란테르트는 조용히 자신의 자리, 오이니아의 아버지로써의, 자신의 자리에 앉아 이렇게 중얼거렸다. 주위의 떠들어대는 소리에 자신이 중얼거린 이 한마디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행복이라...." 란테르트는 다시 이렇게 내뱉었다. 정말이지.... 알 수 없었다. 행복.... 그리고 불행.... 나는 이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 과연.... 과연 나라는 인간은.... 행복했던 것인가?.... 아니면 불행했던 것인가? 아니.... 물론 불행하다. 약혼녀를 잃었고, 사랑하던, 그녀의 동생을 잃어야만 했다. 가장 좋은 친구마저.... 하지만.... 그렇다면 피엘, 그리고 라브에와의 즐거웠던 한때는.... 그것마저도 불행인가? 피엘이 죽은 후.... 라브에와의 추억은? 이카르트.... 가장 좋은 친구인 그와, 그리고 모라이티나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지금 와 돌이켜 보면.... 단언할 수 있다. 행복했었다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분명 난 불행을 느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는?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클라라 누님에게 안정을 찾았을 때는?.... 나의 스승.... 아니.... 내게 검술을 가르쳐 준 사람.... 아니, 나의 스승.... 그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하지만, 배신을 당하기 전과.... 또 그 직후에 있었던 두 자매와의 만남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어쩌면.... 행복이니 불행 따위는 따로 나누어 부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단지 순간 순간의 어떠한 감정.... 그런 것인지도.... 그렇다면 지금은?.... 지금의 나는?.... 행복한 것일까? 그런 것 같다. 모라이티나와 보내는.... 이 한가롭고 조용한 시간들이.... 즐겁다. 행복한 것이리라.... 불행한 것일까? 그런지도 모르겠다. 모든 과거에의 죄책감이.... 쉴새없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나를 번뇌케 한다.... 적어도.... 행복하지만은 아닌 것이 사실인 듯 하다.... "휴우...." 한숨이.... 폐속 깊은 곳으로부터 한숨이 흘러나온다. 무어라 딱히 정의할 수 없는 기분이 내 몸을 축 처지게 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내게는 불행도 행복도.... 극단적으로 찾아오는 것일까? 아무리.... 나 자신이 검사이고, 또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그리고 그것 때문에 언제나 위험 속에서 살아간다고는 하지만.... 어째서 세 번씩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잃어야만 했을까?.... 모라이티나.... 그녀는 운명이라고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일까?.... 배신.... 많지 않은 나이에.... 믿었던 사람으로부터의 배신.... 어디까지나 어리숙한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 상대의 본심도 모르면서.... 절대적으로 그들을 믿기만 한 나 자신에게.... 아니, 어쩌면 운이 나빴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자매.... 분명한 것은.... 이 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운명으로 돌려 버릴 수도 있다. 하필이면.... 그곳에서 그들과 맞딱드렸을까? 한 두 시간만 일찍 그곳을 지났더라면.... 어쩌면 에티콘 가문에 무사히 도착했을 터이고.... 피엘이 그렇게 비참한 일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안일하면서도 책임 회피적인 생각인지는.... 나 스스로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위험한 상황에 그녀를 방치해둔 나에게 그 책임이 있다. 라브에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는 도대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사랑했다면, 어째서 강제로라도 그녀를 나의 울타리 안에 두지 않았고.... 만약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그녀에게 집착했던 것일까?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조금 더 태도를 확실히 했더라면.... 일찍이 그녀에게 안정을 찾아줄 수 있었을 텐데.... 게다가.... 그랬더라면 내가 그렇게 강해지지도, 그리고 그로 인해 마족들에게 위협적인 세력으로 낙인찍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시 한 명의.... 남자.... 아니, 마족. 나는 지금도....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지금까지.... 나를.... 그렇게 까지 내게 헌신적이었던 사람이 있었을까? 피엘도, 라브에도.... 내가 내 이 쓸모 없는 목숨을 내 던져도 좋을 정도로 내게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카르트, 그 만큼 내게 큰 힘이 돼 준 존재는.... 없다. 아마도 능력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그와의 만남.... 우연이었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그는 이미 나란 인간을 알고 있었으니까.... 시간.... 그 시간에 그와 마주친 것은 우연인지도 모르지만.... 만남 그 자체는.... 언젠가는 이루어 졌을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몇 개월의 시간. 나는.... 마음놓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정도로 안정을 되찾아 갔었다. 하지만.... 결국.... 그 또한 잃었다. 나는 왜 나크젤리온에게의 복수를 결심했을까?.... 그를 소멸시킨다 하더라도.... 라브에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닌데.... 어째서 나의 가장 좋은 친구를 적으로 돌리면서 까지.... 그에게의 복수를 마음먹었을까?.... 후회스럽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한 자신이 원망스럽다.... 이 모든 불행들.... 운명으로 돌리기엔.... 너무나 스스로의 잘못이 크다. 자신에게 헌신적인 트레시아도.... 그녀의 불행도 따지고 보면.... 문득 가슴의 펜던트가 느껴진다. 두 자매의 것.... 그리고.... 지금 나의 목에 매어져 있는 목걸이에는 두 개의 펜던트 외에도 조그마한 나비 브로치가 하나 꿰어져 있다. 얼마전 모라이티나의 농담끼 섞인 한마디 덕분에.... 전에 꽂혀 있던 가죽 가방에서 목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브로치의 주인.... 모라이티나 그녀 역시.... 그렇다.... 모든 것의 잘못은.... 나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다. 자책....? 아니다. 자책 따위가....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실이다. 조용히.... 나의 과거를.... 그리고 나를 돌이켜보아 얻어낸.... 결론. 그리고 사실. 더 이상.... 이제는.... 더 이상.... 어느 누구도 불행하게 하고 싶지 않다. "하나, 둘, 셋!" 돌연, 오이니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이지 피엘의 그것과 닮았다. 18년 전.... 아니 8년 전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 물론, 그렇다고 그녀의 목소리가 기억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몸은 느끼고 있었다. 오이니아의 목소리는.... 내 마음을 편하게 한다. 그녀의 목소리에 시선을 그녀 쪽으로 향하였다. 뒤돌아 서 등을 보이며, 그녀는 부케를 뒤쪽으로 높이 던져 올렸다. 나의 시선은.... 그녀의 손에서 던져 올려진 부케를 잠시 쫓았다. 하지만.... 왜일까....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부케가 호선을 따라 점점 높은 곳으로 날아 올라갔으나.... 나의 고개는 점차 아래로 떨어져갔다. 빛이.... 눈을 통해 들어오던 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져 갔고.... 이제는 눈앞의 물건도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어 져 갔다. 나른하다.... 숙여진 고개, 그 덕에 머리칼이 앞으로 어지럽게 쏟아진다. 하지만, 나의 하나뿐인 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겨 가다듬고 싶었으나.... 이미 팔은 나의 제어를 벗어나 축.... 늘어져 버렸다. 그리고.... 나 자신도.... 피곤하다. 잘 보이지 않는 눈을.... 가만히 감았다. 그냥.... 이대로 쉬고 싶다. 영원히.... "이카르트.... 그와의... 약속은...." "받아요. 하나, 둘, 셋!" 오이니아의 기쁨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몸을 뒤로 돌린 채, 자신의 뒤쪽에 서 있는 몇몇 아가씨들을 향해 부케를 던졌다. 물론, 던지기 직전 흘끗 뒤를 보아, 모라이티나가 있는 위치를 가늠했고, 그 덕에 부케는 커다란 호선을 공중에 그리며 모라이티나를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 "와! 언니가 받았군요!" 시나가 그 모습에 외쳤고, 뒤이어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혼할 남자는 있습니까?" "없다면 저는 어떻습니까?" 둘 모두 남자의 목소리였다. 아마 마을의 청년이건, 헬튼 가의 기사들일 것이다. 그들의 이 말에 몇몇 사람들이 키킥 웃음을 터트렸고, 모라이티나는 담담히 미소만을 지을 뿐 대꾸치 않았다. 오이니아는 부케를 던져 올린 후, 곧바로 몸을 돌려 모라이티나에게로 다가왔다. 부케를 쥔 모라이티나의 손을 따듯하게 감싸 쥐었고, 경쾌한 목소리로 외치듯 이야기했다. "언니! 그거 알지요? 부케를 받은지 1년이 지나도록 결혼을 하지 못하면, 평생 혼자 살아야 한다는 것!" 오이니아의 말에 모라이티나가 곧바로 되물었다. "3년 아니었어? 내가 본 소피카의 어떤 결혼식에서는...." 오이니아는 고개를 가로 저어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건 남쪽지방의 부케일 때이고요. 이곳 에노사에서는 1년이에요 1년! 그러니까, 꼭 아버지하고 결혼하세요." 곁에서 시나와 로인이 부추겼다. "그래요. 모라이티나 누나. 삼촌도 누나를 좋아해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대한다면, 분명 마음을 결정하실 꺼 에요. 둘 모두 겉모습으로는 20대시니까, 결혼식을 해도 부끄럽지 않을꺼구요." "나와 테리트론의 결혼식과 합동으로 하는 것은 어때요? 조금 이상 하려나?" 이 두 사람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란테르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 정도는.... 그녀 자신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과 결혼은 완전히 별개라는 것이다. 주위 사람 중 이시테의 표정만이 약간 복잡할 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모라이티나의 결심을 부추기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모라이티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란테르트에게 이렇게 말할 꺼야. 나와 결혼해 주지 않으면, 난 콱.... 좀 심한가?" 시나가 외치듯 말했다. "아뇨. 삼촌의 마음을 돌리려면 그쯤은 되어야 해요. 아, 그런데 삼촌은 어디 있는 거지? 저쪽 연회석이 있나?" 시나의 말에 란테르트를 알고 있는 일행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는 오래지 않아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삼촌 혼자 저곳에 앉아 뭐하고 있는 거지?" 시나는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했고, 모라이티나는 그런 시나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으며 말했다. "흥분했구나. 말투가 곱지 않아. 삼촌에게 누가 그런 식으로 말하니?" 모라이티나의 책에 시나는 혓바닥을 한차례 낼름거렸다. "아.... 죄송해요. 그럼 어서 가보세요." 시나는 이렇게 말하며 모라이티나의 등을 떠밀었고, 모라이티나는 반쯤은 자의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타의로 란테르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지 않았다. 모라이티나는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흥. 이야기를 들었군요. 그렇게 모르는 척 한다고 그냥 넘어갈 줄 아나요? 들었다면 이야기는 간단하네요. 나와 결혼해 줄꺼죠? 설마 이 티나가 자살하겠다고 협박하는데도 결혼해주지 않을 꺼 에요?" 하지만 여전히 란테르트에게서는 대답이 없었고, 모라이티나는 그의 이러한 장난에 더더욱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이윽고 그의 바로 앞에 선 모라이티나는.... 하지만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란.... 테르트?" 모라이티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조용히. 대답에 없다. 부케를 든손에 힘이 빠졌다. 툭. 꽃다발은 이 자그마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고, 모라이티나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들어 가만히 이 눈앞의 남자의 얼굴로 가져갔다. 움직이지 않는다.... 그가.... 그의 몸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모라이티나는 그의 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마법력도.... 그리고 그의 정신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란테르트...." 모라이티나가 두 번째로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들 걸음을 멈춰선 채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조용히, 모라이티나와 란테르트.... 선 채 손을 뻗어 앉아있는 남자의 볼을 어루만지고 있는 여자와, 그러한 여자의 동작에 조그마한 반응도 내보이지 않는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모라이티나는 란테르트의 뺨에 손을 댄 채....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있었다. 그의 체온은 아직도 식지 않았다. 그는.... 그의 몸에 있는 피는 아직도 따듯하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혈관을 따라 약동하지 않았다. 모라이티나는 그의 뺨에 대었던 손을 때었다. 입가로 가져갔고, 흐흑, 오열을 터트렸다. 절제된 울음. 소리는 목안에서, 입안에서 맴돌 뿐 입을 가린 손밖으로는 터져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눈물은 쉴 사이 없이 흘러내렸다. 뺨을 따라, 턱을 지나... "오.... 란테르트...." 모라이티나는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두 팔로 그의 머리를 감싸안았고, 흰색의 머리칼로 뒤덮인 그의 머리에 턱을 댄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 명.... 이시테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오이니아가, 시나가.... 그리고 로인이.... 이시테는 켈리의 부축을 받아가며 간신히 자리에 서 있었고, 오이니아는 켈파의 어깨를, 그리고 시나는 테리트론의 가슴팍을 눈물로 적셨다. 그때.... 모두의 귀에 모라이티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이것이었군요.... 당신이 원하는.... 당신이 원했던 미래라는 것이...." 모라이티나는 조금씩 차가워져 가는 란테르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원하는 데로 해 드릴께요. 두 자매.... 그녀들이 묻혀 있는 곳에.... 그곳에 당신을 묻어 드리겠어요. 그리고.... 묘비는 제가 적어 드릴께요.... 그 정도는 허락해 주시겠지요?" 모라이티나는 다시 한차례 그의 머리를 힘껏 감싸안았다. "티나는.... 슬프지만.... 죽고 싶을 정도로 슬프지만.... 반대하지는 않을 꺼 에요.... 란테르트를.... 그리고 란테르트의 선택이 옳다는 것을.... 옳다는 것을.... 옳다는.... 것을...." 모라이티나는 마지막 말을 세 번이나 되내였다. 목이 매여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문득, 그의 가슴팍 밖으로 비어져 나온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곳에 두 자매의 펜던트와 함께 꿰어져 있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나비브로치를 발견했다. 본래의 금색을 완전히 잃은 황동색의, 이제는 겨우 푸른색 보석 한 개만이 박혀있는 이 나비 브로치는.... 하지만 모라이티나에게 마지막 말을 조그마한 미소와 함께 마칠 수 있는 용기를 안겨주기에 충분한 아름다움을, 그리고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믿고 있으니까요." 조용한, 그리고 그렇기에 쓸쓸해 보이는 미소와 함께.... 모라이티나는 조용히 손을 뻗어 자신의 나비 브로치를 한차례 어루만졌다. 에필로그.... 란테르트.... 그의 무덤은 모라이티나가 약속한대로, 에티콘 가의 뒤쪽 언덕, 두 자매가 묻혀 있는 그곳 바로 옆으로 정해졌다. 흰 꽃이 소담스레 피는 베니아 나무는 아직 채 꽃망울을 터트리지 않은 채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봄비를 맞고 있었다. 아마도.... 이 비가 그친 후면 피어나지 않을까?.... 흰 대리석 무덤과 묘비는 비에 젖을 때로 젖어 더더욱 선명한 빛을 내고 있었다. 탁탁, 종종 커다란 물방울이 무덤에 부딪히며 조금 큰 소리를 냈으나,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두 눈동자는 그저 무심할 뿐이었다. 순간, 그 금발의 여인이 서 있는 곳 바로 곁의 공간에 일렁임이 생겼다. 하지만 그 여인은 여전히 다른 것에는 조금의 관심도 나타내지 않았다. 우산조차 쓰지 않아, 그녀의 몸은 완전히 젖어 있었다. 입술이 파르스름하게 변한 것이 꽤 추운 모양이었으나, 그것 역시 그녀에게는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했다. 이 넋이 나간 듯한 여자 바로 곁의 일렁이던 공간 사이에서, 돌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 비를 맞고 서 있는 여자보다 조금 더 키가 큰 여자였다. 붉게 웨이브진 머리칼이 탐스럽다. 그녀는 모습을 드러내자 마자 우산을 펼쳐 자신과, 그리고 바로 곁에 있는 그 넋나간 아가씨 위로 들어올렸다. "엘프 따위는.... 이러한 비에도 감기 걸릴 수 있다. 들어가서 몸이나 말리자." 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이렇게 말했으나, 바로 곁에 있는 금발의 여자는 고개를 가로 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 들어라. 꼬마야...." 붉은 머리칼의 여자는 다시 한차례 이렇게 말했고, 그제서야 금발의 실성한 듯한 여자가 입을 열었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거야?.... 트레시아." 금발의 엘프.... 모라이티나의 물음에 붉은 머리칼의 마족.... 트레시아가 쓸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물을게.... 뭐가 있을까?.... 이렇게 눈앞에 모든 것이 보이는데...." 그녀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조용히 잠들었어.... 흡사.... 기름이 다한 등잔의 불이 꺼지듯.... 다 타버린 초가 꺼지듯...." 그녀의 말에 트레시아가 한탄하듯 말했다. "조용하다라.... 그분이 언제나 바라면서도.... 결국은 얻지 못한...." "하지만 이제는...." 트레시아와 모라이티나는 한마디씩 이렇게 주고받았다. 두 시선은 평행이 앞으로 뻗어 란테르트의 무덤과 묘비로 향해 있는 채, 서로를 바라보지는 않았으나, 대화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휴.... 난.... 그분의 마지막도 지켜보지 못했구나...." 트레시아의 말에 모라이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걸.... 그가.... 조용히 숨을 거두는 순간.... 다른 사람들이랑 어울려 놀았으니...." 트레시아의 말에 대꾸하는 모라이티나의 목소리는 추위 때문인지 조그맣게 떨리고 있었고, 트레시아는 그런 그녀를 한차례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춥지 않아? 들어가서 옷이나 갈아입지 그래?"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옷을 갈아입는다고.... 추위가 가시지는 않을 꺼야.... 그보다.... 꽤 늦게 왔어. 그가.... 숨을 거둔지 벌써 보름 이상이나 지났는데...." "내가 이야기했잖아....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고.... 이런 저런 곳에 신경을 쓰다 보니.... 그분의 기척이 끊긴 것을 오늘에야 알게 되었어." 트레시아는 쓰디쓴 미소와 함께 이렇게 말했고, 모라이티나는 그저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는 대답이었다. 트레시아의 성격으로 보아, 만약 란테르트의 죽음을 알았더라면, 그 순간 그 어떠한 일이라도 집어치우고 당장에 달려왔을 그녀일 테니 말이다. "그보다.... 이제는 어쩔 꺼야? 숲으로 돌아갈 건가?" 트레시아가 물었으나, 모라이티나는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르겠어.... 그가.... 그가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모라이티나는 이렇게 말하는 도중 마지막 몇 마디에서 심하게 목소리가 떨렸다. 막 허물어지려는 그때, 돌연 트레시아의 손이 자신의 어깨 위에 얹어지는 것을 느꼈고,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댈 곳이 필요하면.... 당분간 내가 빌려줄게." 트레시아는 모라이티나를 향해 미소를 한차례 지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고, 모라이티나는 그녀의 다정한 말에 갑작스레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치 못한 채 울음을 터트렸다. 트레시아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녀의 가슴이 흠뻑 젖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나....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모라이티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고, 트레시아는 우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냥 지금은 울어. 울고 싶은 만큼 펑펑.... 그러고 나면 길이 보일 꺼야. 너무 조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봐, 이 트레시아 님을." 트레시아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소가....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미소가 활짝 피어 있었다. "바보.... 강한 척 하는 건 여전하구나...." 모라이티나는 트레시아의 억지 미소에 이렇게 중얼거렸고,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강한 척 마저 못하는 나보다는 네가 더 뛰어난 거겠지?" 트레시아가 웃었다. "후훗. 2600년의 세월을 무시하지 마라." 그녀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간신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트레시아의 목을 감았던 팔을 풀었다. 천천히 몸을 돌렸고, 이내 다시 시야에 란테르트의 무덤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트레시아의 가슴에 등을 기댄 채 가만히 무덤을 내려다보았다. 트레시아는 그런 모라이티나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로 나지막이 비문을 읊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남자 여기 묻히다.... 이거 네가 적은 거야?" 트레시아는 비문을 읽다 모라이티나를 향해 이렇게 물었고, 모라이티나는 그녀의 물음에 귀밑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치.... 하지?" 모라이티나의 물음에 트레시아는 단순 명료하게 답했다. "응." 모라이티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온통 화끈거리는 듯 했다. "하지만...." 곧바로 트레시아가 이렇게 말을 이었고.... 그녀의 말에 모라이티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트레시아는 하지만, 이라는 이 한마디를 한 후, 한참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모라이티나도 재촉하지는 않았다. 두 금발과 홍발의 여자는 그렇게 서로에게 기댄 채 한참동안 서 있었고, 이윽고 트레시아가 하려던 말을 마저 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이보다 정확한 평은.... 아마도 없을 꺼야." 이 한마디를 내뱉고는 씁쓰레한 미소를 짓는 트레시아였다. 그저.... 우산에 그리고 서로에게 의지해 서 있기만 하는 이 두 사람 주위로.... 비는 하염없이, 하염없이 바닥을 적시었다. Derod & Deblan.... 3부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