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프리스트 6권 하이프리스트 ------------------------------------------by.흡혈성향 §차례§ 1장 네 번재 유물 2장 여자들의 마을 데킨 3장 비밀을...... 들켰다? 4장 데인을 사랑한 여인? 5장 하이프리스트 6장 다크프리스트 vs 하이프리스트 7장 무인도......? 8장 흑마법사의 도시 9장 행복의 요리? 10장 마법사의 탑 11장 통진의 동굴 12장 죽음의 미로 ------------------------------------------------------- [네 번째 유물] 심히 난감하다. 갑자기 다크프리스트의 유물이라는 단어가 왜 여기서 튀어 나오는지 심히 궁금하다. 도대체 왜, 왜, 왜! 마계에서 마왕을 무찌른 대가가 지급되 는 장면에서 이런 정체불명의 상황이 발생되는지 내 머리로 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말...... "이거 죄송합니다." "......?" 그때 갑자기 세르키스가 내게 다가오더니 곤란한 듯 말했 고, 그 말에 난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세르키스 왈, "......방금 세리킨 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허억!" "......?" "여, 여기는 마계인데 그 사기꾼 작자랑 연락이 돼?" "마스토키라는 아이탬이 있는데 어디에 있든 연락이 가 능한 통신 기구입니다." ......별게 다 있네. 한마디로 어느 차원에 있더라고 그것만 있으면 연락이 가 능하다는 뜻. 왠지 모르게, 가지고 싶다. 그나저나...... "왜 그 사기꾼 작자에게 연락이 온 거야?" "그게......" "......?" 뭐가 그리 곤란한지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세르키스. 왜 저러지? 그런 세르키스의 반응에 나는 서서히 온몸에 불길함을 느 끼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 사기꾼 작자가 연결되어 있는 일이라면 항상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나를 감싸 안는다. 그 인간과 엮여서 행복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난 최대한 마음을 다잡으면서 입을 열었다. "무, 무슨 일인데. 괘, 괜찮아." "......" 괜찮다고는 하지만, 나 떨고 있다. "......데린계가 아니랍니다." "......" "......" "저, 저기 세르키스.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데?" "다크프리스트의 유물이 있는 곳은 데린계가 아니랍니 다." "......" 다크프리스트의 유물이 있는 곳이 데린계가 아니다......? 분명 네 번째 유물을 찾으려면 데린계로 가라고 했는데, 그 데린계가 아니면? 무슨 이야기 라인? "마계라고 합니다." "......" "착각을 했답니다." "......" 도, 도대체 그게 착각할 일이란 말인가!! 엄청난 페널티를 안고 차원 이동을 하는 우리에게 그런 단 순한 착각에 의한 잘못된 정보를 가르쳐 주다니!! 그, 그러고 보니...... 피닉스의 삽질로 우리가 이 마계로 오지 않고 데린계로 갔 다면, 심하게 삽질 중이었을 거라는 얘기네? "역시 난 전설이었어." 그때 하늘을 바라보면서 개폼을 잡고 한마디 내던지는 피 닉스. 안 멋지다. "난 예상하고 있었지. 데린계가 아니라 마계라는 걸 말야." "......뭘?" "유물이 있는 곳." "......" "난 전설이잖아?" "......" "그 정도야 알 수 있지. 푸헤헤헤." 온갖 잘난 척을 해 대는 피닉스. 하지만 제지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피닉스가 마계로 이동시켜 주지 않았다면 우리 는 지금 데린계에서 그 사기꾼 작자의 농간에 의해 생고생 중 이었을 게 분명하니까. 분명히 말이다. "난 왜 이리 멋질까?" "......" "......" "......" "피닉스교나 창조할까?" 그딴 교 갖다 버리라고 권하고 싶다. 누가 피닉스교라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교단에 입단하겠는 가? 돈을 준대도 사양한다, 사양해. 그나저나...... "그럼 지금 저분이 내미신 아이탬은......?" "네, 아마도 다크프리스트의 네 번째 유물 아이탬으로 보입니다." 이럴 때 사용하는 말이 있다. 대. 략. 난. 감. -시르케스트(신급)- 다크프리스트만이 진화한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다크 힐. 진화한 스킬 사용 시 상대방의 상처 악화가 현재 속 도보다 약 다섯 배에 달하는 효능을 보인다. 다크 큐어. 진화한 스킬 사용 시 상대방에게 모든 질병과 상 태이상 열 개를 동시에 건다. 다크 배리어. 상대방의 생명력 50%의 힘을 끌어 와 엄청 강 력한 배리어를 시전한다. 다크 블레스. 다크 블레스의 효과를 기존 능력치의 두 배로 올려 준다. 프로코스. 상대방의 힘. 체력. 지능의 50%를 가져와 엄청난 능력치 상승을 가져다 준다. 라이프 블리지트. 상대방의 생명력 50%를 가져와. 강대한 파 괴력을 가진 힘을 무기에 담는다. 마혈천혈. 반경 100미터 이내 적으로 판단되는 모든 존재에 게 7초간의 강력한 스턴을 건다. 일루전 크레이전. 무기의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 7초간 열네 개의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 다크 스트림. 무기에 악령을 담는다. 이때 소환되는 악령은 가 장 강력하다고 알려진 플레케스진이다. 불멸의 일진. 일정한 확률로 강력한 폭발을 일으킨다. 약 세 배 이상의 데미지와 더불어 스턴, 빙결, 발화 중 한 개의 상태이 상을 건다. 다크 스트라이크. 반경 10미터 이내에 엄청난 구슬을 소환해 낸다. 이 구슬에는 엄청난 데미지가 깃들어 있다. 다크 케이전. 어둠의 정령을 불러낸다. 이때 소환되는 어둠의 정령은 최고의 정령이라 불리는 마코스로. 주변 모든 적을 묶어 버리고 그 상태에서 강력한 데미지를 준다. ...... 아무리 신급 아이탬이라 해도 그렇지 정말 너무한다. 분명 이 아이탬의 주인은 나다. 그런데 주인인 내가 이렇게 말할 정도로 너무나도 사기틱하다. 특히 별로 쓸모없어서 잊혔던 스킬들까지 완전 부활이다. 그리고 기존에 사용했던 주 스킬들은 완전히 미쳐 버렸고. -새로운 스킬이 세 개 추가되었습니다. 엥? 그때 들려오는 음성. 갑자기 새로운 스킬이라니?! -데라진이 추가되었습니다. -마타스가 추가되었습니다. -트레메인이 추가되었습니다. ......설마 이 아이탬을 가지면 자동으로 생성되는 스킬인 거냐?! 다크프리스트의 신급 스킬들은 분명 엄청나다. 그리고...... 신급 아이탬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아 니, 기대 이상이라고나 할까? 그나저나 새로운 스킬이라니? 확인해 볼까? -데라진- 레벨 1. 순간적으로 상대와의 거리를 좁힌다. 이때 평소 속도의 1,000%의 스피드를 더해 준다. 1,000%? 마, 말도 안 된다. 1,000%라니! 저쪽에 적이 있다. 그 적에게 다가갈 때 다크 헤이스트와 나의 스피드가 합쳐진 상태에서 데라진을 시전한다면? 거의 순간이동 필이 날 것이다. 확실하다. 아니, 어쩌면 순간이동보다 빠를지도. 그만큼 어마어마하다. 역시 다크프리스트의 스킬, 난 실명시키지 않는구나. 자, 다음 스킬...... -마타스- 레벨 1. 일정 지역의 공간을 비틀어 버린다. 그 공간에 휘말린 적은 그대로 소멸한다. ...... 이, 이것도 멋지다! 물론 적이 피해 낸다면 아무 소용 없지만, 만약에 직격된다 면 그대로 한 방에 보내 버릴 수 있는 기술? 우어억! 지, 진정하고 다음 기술을...... -트레메인- 레벨 1. 어둠의 구 마흔 개를 동시에 소환할 수 있다. 그 어둠의 구는 적을 상대로 자동으로 공격한다. 부딪칠 시 강력한 폭발로 적에게 데미지를 준다. 오오오오! 오오오! 오오!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도 아니고, 세 개도 아니고...... 무려 마흔 개다. 마흔 개. 한마디로, 내 주변에 파이어 볼과 비슷한 어둠의 구를 동시 에 마흔 개 소환해서 적에게 날려 보내는 기술. 만약 한 명의 적에게 시전하면 그 적은 마흔 대를 맞아야 할 것이고, 다 맞고 나면 무지무지 아플 것이다. 크하하하! 지금 내 상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완전 봉 잡았다. "오빠, 나도 가면 안 될까?" "......" "부탁할게. 응?" 나에게는 모토가 있다. 오는 미소녀 절대 막지 않고, 가는 미소녀 절대 막자라는 모토 말이다. 그리고 지금 은경이 나를 따라가고 싶다고 말하고 계신다. "안 됩니다, 마왕님!" 그때, 엘린이라고 불리는 마족이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반대하고 나섰다. "엘린 경, 저도 성에만 있는 게 지겨워요. 세상을...... 보고 돌아오면 안 될까요?" "......" "어차피 지금까지 모든 일을 엘린 경이 다 잘 처리하셨잖 아요." "......" "부탁드릴게요." 간절히 부탁하는 은경과 그런 그녀의 간절한 부탁에 고민 에 잠긴 엘린. 그리고 잠시 후...... "꼭 돌아오셔야 합니다." "물론이에요." 싱긋. 그 말과 함께 미소를 짓는 그녀. 아아아...... 이걸로 우리 파티에 두 명 추가인가? 한 명은 아름다운 미소녀이고, 다른 한 명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도 불가능한 마족 싱글벙글맨(?) 크라 스. 왠지 더욱 시끌시끌해질 것 같은데? "피닉스, 잘하긴 빈다." "날 믿어. 전설이잖아!" "믿을 놈이 아니니까 문제지." "......" "내 친히 여기서 미리 말해 두는데 이번에도 인간계가 아 닌 이상무리한 대로 이동하면 피닉스 구이를 해 먹을 테니 알 아서 하렴." "......" "왜 대답이 없니?" "무, 물론! 날 믿어 줘. 저번에는 실수였어, 실수!" "그래, 잘해 보렴. 피닉스 구이가 되기 싫으면." 삐질삐질. 내 말에 열심히 땀을 흘리는 피닉스. 이 정도는 해 놔야지 그나마 정신 차리고 제대로 하는 놈이 다. 지금까지 저 녀석과 함께 지내 본 결과, 좋은 말로 할 때는 일이 정말 잘 안 풀렸다. 꼭 이렇게 공갈협박을 동원해야만 그나마 일이 풀리곤 했던 것이다. "가, 간다!!" 그때 피닉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 가렴. "아아아아아." ......또다시 들려오는 19금 신음 소리. 저걸 듣는 느낌을 말하자면 정말 심오하다 못해 미묘하다. 미묘해. "휴우, 하아, 코오, 제오, 베이비." 진짜, 차원의 문을 여는 주문은 웬만해서는 절대 듣고 싶지 않다. "오, 베이비. 마이 베이비. 문 열려. 오, 베이비. 아이 러브 베이비 컴 온 컴 온. 이리 와. 사랑해. 하하하하하하!" 파지짓. 그 말과 함께 열리는 차원의 문. ......피닉스의 이상한 주문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자, 그럼 다시 인간계로 가볼까? [여자들의 마을 데킨] ...... 지금의 이 미묘한 상황을 만든 원인에 대해 직접적으로 듣 고 싶다. 간접적으로 말고 직접적으로 말이야, 피닉스 군. "하하하하. 이, 인간계는 맞잖아!" "그래. 인간계는 맞는 것 같은데......" "하하하......" 분명 인간계는 확실히 맞다. 하지만...... 하지만...... 내 주변을 가득 메운 검들. 한 개도 아니고 엄청난 수의 검이다. 그것도, 스치기만 해 도 중상을 입을 것처럼 엄청나게 날카로운 검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검을 들고 계신 님들. ......온통 여자다. 은빛 갑주를 멋들어지게 걸친 누님들. 그분들이 우리를 죽일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나와 세르키스, 크라스, 그리고 데인...... 이렇게 네 명을 찢어 죽일 듯 바라보고 계신다. "데킨 마을인가 보군요." "세르키스, 데킨 마을이라니?" "남자들을 죽도록 증오하는 마을입니다." "......" "......" "그거 참 간단한 설명이네." "딱히 할 말이 없거든요. 그녀들은 남자가 그 어떤 악마 보다도 더한 악마라고 생각하는 기사들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전멸시키죠." ...... 그때 불쑥 나타나 한 마디 내던지는 크라스. 이분 왠지 무섭다. '전멸시키죠' 하고 말하면서 분명 웃고 계셨다. 그것도 아 주 상큼하게 말이다. 그때, "흐으음. 여기서의 싸움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저희 쪽에 일행이 많은 관계로 잘못하다간 여자 분들도 다칠 수가 있거 든요." "......그럼?" "일단 순순히 잡혀 주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여자들은?" "같은 여자들은 안전하게 보호해 줄 겁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저희 남자들의 목숨이니까요." 흑. 흑흑. 흑흑흑. 난 흐느꼈다. 이럴 순 없다. 내가 전생에 무슨 짓을 했기에 저 하늘이 내 게 이런 잔혹한 시련을 주느냔 말이다. "신께서 저희를 강하게 키우시려는 겁니다." ...... "가르." "네?" "그 신이라는 작자, 면상 좀 보자." "왜, 왜 그러십니까?' "한 방 날리게." "시, 신성모독입니다!" 신성모독 운운하며 내게 훈계하는 리치 한 마리. 난 피식했다. "죽고 잡냐?" "......" "뼈를 갈아서 칼슘 주스를 만들어 버리기 전에 조용히 하 는 게 좋을 거야, 가르." "......" "왜 말이 없니." "아,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지하 감옥에 갇혀 혈압이 마구 상승 중인 나를 건드려 봤자 너희에게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사, 살려 줘!" "자, 잘못했어." "제발 살려 줘!!" "살려 주세요!!" 그때, 우리 외에 감옥에 갇힌 다른 남자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 비명이 얼마나 애절한지, 괜히 나까지 마음이 찐해질 정 도니 말 다했다. 그나저나...... "세르키스, 이 마을 여자들은 왜 남자를 악마보다 더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200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분명 평범한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여자 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이 반란을 일으켰고 마을은 순식간에 점령당했습니다. 그때부터 이곳은 남자들은 무조건 모조리 죽이는 곳이 되어 버렸다고 전해집니다." "......" 뭐, 뭐냐? 왜 죄 없는, 나 같은 순수한 남자들까지 도매금으로 넘어가 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 르겠지만 이건 아니다.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모조리 죽여 버리다니. 그런데...... 살짝 궁금해지는 게 있다. 그건...... "근데 어떻게 마을이 유지되는 거야?" "......?" "생명이 태어나려면 남자와 여자가 있어야 되잖아. 근데 어 떻게 여자만 있는 이 마을이 유지되고 있는 거지?" "그게 아마도 기계적으로 생명을 탄생시키게 하는 남자 가 있는 듯합니다." ......그 남자들, 복이 터졌다고 해야 하나 불쌍하다고 해야 하나. 참으로 애매하기 그지없구나. 허허허. "그런데 세르키스, 만약에 아이가 태어났는데 남자면?" "당연히......" "당연히?" "그대로 그 자리에서 기사가 죽여 버립니다." "......" 심히 난감하다. 그러니까, 태어난 아이가 남자라면 그냥 검을 휘둘러 갓 태 어난 아이를 죽여 버린다는 거냐? ......왠지 슬슬 기분이 안 좋아지는데? "끄아아악!!" "사, 살려 줘!! 으아악!!" 그 순간 들려오는 비명. 뭐, 뭐냐? "보고 올까요?" 그때 여유롭게 한 마디 던지는 크라스. 난 그런 크라스에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 보고 와 줘." "그럼 실례." 휘이익. 그 말과 함께 크라스는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왠지 멋지다, 멋져. 나도 저런 거 해 보고 싶다. "다녀왔어요∼." 휘이익. 그 말과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크라스. 거듭 말하지만 멋지다. 부러워. "휴우, 아주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때 아주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다고 말씀하시는 크라 스. 뭔 일인데 아주 흥미롭다니? 나는 얼른 말하라는 듯 크라스를 바라보았고, 그런 나의 눈 빛에 크라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칼로 자르더군요." "뭘?" "남자들의 신체를 말입니다." "......" "처음에는 팔, 그 다음에는 다리, 그 다음에는 어깨. 이렇게 하나하나 신체를 자르는 처형을 하고 있어요." ......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니고 그딴 식으로 잔인하게 죽이는 거 냐? 난 분명 여자들을 존중하는 스타일이다. 그렇다고 여자들이 그딴 식으로 나오는데 얌전히 당해 주 는 스타일도 아니어서 말이다. 물론 세르키스와 크라스, 이 세 명만으로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충분히 이 마을의 파멸을 가져올 정도의 힘 은 된다. "아, 참." "......?" "잊어버린 게 있습니다." "뭔데, 크라스?" "오다가 우연치 않게 보았는데요." "......?" "마스터의 여자들이 지금 모두 신녀로 추앙 받고 있습니 다." "신녀?" "네. 그녀들의 미모 때문에 신녀로 추앙 받게 됐답니다. 그 리고 참고로 저희는 그런 신녀를 더럽히려는 악마 중의 악마 플러스 악마 악마 악마 플러스랍니다." 악마 중의 악마 플러스 악마 악마 악마 플러스......는 뭐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우리가 더럽게 사악한 존재들이 되었다는 건 확실하다. "인질......이 잡혀 있는 상태인가?" "그렇습니다." "......" 젠장. 당장이라도 이 감옥 전체를 부숴 버리고 난동을 부리고 싶 은 게 내 마음이지만 여자들이 인질로 잡혀 있다. 물론 그쪽에서는 신녀라고 떠받들고 있다지만, 내가 보기 에는 훌륭한 인질일 뿐이다. 터벅터벅. 그 순간 들려오는 발소리...... 투박한 발소리다. 한 두세 명? "......악마 중의 악마 플러스 악마 악마 악마 플러스 악마 들." "......" "......" "......" "......" "......" "......" 갑자기 나타나 그렇게 말씀하시는 여기사. 그 말을 듣는 우리 입장으로서는 심히 난감하다. "너희는 절대 곱게 죽이지 않겠다!!" 대장으로 보이는 여자 기사가 이를 갈며 내게 말했을 때 나 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우리가 뭘 어쨌다고 저러는 거냐? 앙?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어." "......" "......" 그때 갑자기 그 여자에게 날아드는 피닉스 군. 녀석은 차분한 어조로 부리를 열었다. "난 남자가 아니야." ...... "......네놈은 분명 수컷이다." "아니, 난 암컷이야!" "......" "......" 피닉스야, 피닉스야. 비굴하게 왜 그러니. 네놈은 척 봐도 무조건 수컷이다. 암컷은 절대 될 수 없는 놈이란 말이다. 한편 자신의 거짓이 통하지 않는 듯싶자 피닉스는 얼른 말 을 바꾸었다. "......난 중성체." "처형 시 저 새부터 죽여라." "자, 잠깐!!" 터벅터벅. "거, 거기 서, 아가씨! 나랑 한잔 어때?" "......" "저, 저기......" 피닉스의 말을 생무시하고 걸어가는 여자 기사. 그리고 그런 그녀를 애타게 부르는 새 한 마리. 저놈이 우리 파티의 일원이라는 게 쪽팔린다. 일단 모든 일을 하기 전에 제일 중요한 건 여자들의 안전이 다, 안전. 그녀들이 안전해야 이 마을을 박살 내든가 말든가 할 테니 말이다. "휴우." 그때, 기척도 없이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크라스. 난 그런 크라스에게 물었다. "어때?" "곤란합니다, 곤란해요." "무슨 말이야?" "그녀들이 있는 방은 강력한 신성력의 힘으로 보호되어 있 습니다. 사악한 마음이나 힘을 가진 존재는 접근조차 불가능 해요." "......" "제가 이때까지 겪어 본 신성력 중 최고입니다." "......한마디로 우리같이 음침한(?) 애들에게는 최악의 상 황인 거야?" "그렇습니다, 마스터." "......" 크라스는 마족. 나는 다크프리스트. 피닉스는 사심 가득한 새. 가르는 해골계의 리치. 드래곤 로드 세르키스는 애매. 마지막으로...... 데인은......? "데인...... 너 천족 아니니?" "그런데." "신성력에 대한 거부감이 없겠다?" "당연하지." "......" 그런데 왠지 믿고 싶지 않은 이 마음. 데인이나 가르, 혹은 피닉스에게 여자들의 탈출 임무를 맡 기면 망할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넌 사심이 많아서 안 되겠다." "......?" 데인처럼 사심 많은 놈은 아무리 신성력에 적응했다 하더 라도 분명 튕겨 날 게 분명하다. 한 마디로 정말 엿 같은 상황 이네. 왜 우리 파티에는 다들 음침한 애들밖에 없는 거지? 보통 다른 파티는 이렇게 대인원이라면 한 명 정도는 맑디 맑은 존재가 있다. 그런데 우리 파티는 아무리 뒤져 봐도 맑 디맑은 애들은 없다. 암울...... "신성력은 너무 강합니다. 제가 어찌할 수 있는 범위가 아 니더군요. 못해도 최소 프리스트 1만 명 이상이 공을 들여 만 든 것 같습니다." 1만 명이래. 크라스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확실히 1만 명이다. 근데 그 1만 명은 얼마나 할 짓이 없으면 그런 신성력의 막 같은 걸 만들었을까? 그렇게 할 일이 없었던 거야? 그런 거야? 에휴우...... "묘책이 있어." "......패스." "무, 무슨 반응이 그래!!" "네놈 말을 들을 바에는 지나가던 바퀴벌레의 말을 듣겠 어." "나, 나 같은 전설적인 피닉스랑 바퀴벌레가 비교가 될 것 같아?" "응."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 차라리 지나가던 바퀴벌레 님이 더욱 나을 거라는 게 나의 생각. "나, 날 무시하다니! 내 작전을 들으면 감동할 거면서!!" 개뼈다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네놈 작전 듣고 고혈압으로 안 쓰러지면 그나마 다행이다. 웬 감동? 한 마디로 개뼈다귀 하이킥 하는 소리다. "마, 말한다!!" 그때 자진해서 말하겠다고 나서는 피닉스. 그래, 정 소원이라면 말만이라도 들어 주마. "내 별명 알아?" "새대가리." "그, 그런 야만적인 별명일 리가 없잖아!!" "왜? 난 네게 아주 딱 맞는 별명인 듯싶은데?" "잘 들어 둬. 내 별명은......" "......" "......" 아무도 피닉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또 개소리가 나올 게 분명하니까. 그리고 역시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도 않으신다. "모든 여자의 희망의 꽃, 피닉스!" ......미친 자식. 어째 시간이 갈수록 나아지기는커녕 더 미쳐 가냐? 누군가 그 문제를 속 시원하게 풀어 주면 정말 소원이 없겠다. 한편 자화자찬에 황홀한 표정을 짓던 피닉스가 말을 이었 다. "내가 윙크 한 번 날려 주면 모든 여자가 쓰러지는 거야." "......" "......" "......" "......" "......" 완전히 개념을 상실한 피닉스의 말에 우리는 녀석을 지그 시 바라보았다. 도대체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도 재주다, 재주. "그 기회를 틈타 기습하는 거지. 어때? 어때?" "......" "멋지지?" "......" "나만이 가능한 작전이야. 후헤헤." "......" "나는 왜 이리 잘난 걸까?" "......" "전설적이니까. 쿠헤헤헤."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단계에 돌입한 거냐? 꽤나 심각하 네. "2시간 뒤 나온답니다." "......!" 나는 크라스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2시간 뒤에 나온다고? 그 말은......? "아마도 저희의 처형 시간일 듯싶습니다." "흐으음......" 한마디로 우리의 처형 장면을 신녀라고 믿고 있는 그녀들 에게 보여 준다는 건가? 거참, 멋지군. "그럼 아주 간단해. 이번 임무는 나와 크라스가 맡겠어. 처 형장에 끌려가면 내가 난동을 피울 테니 세르키스가 저 이상 한 삼 형제를 데리고 여자들을 구해 줘." "알겠습니다." "왜 우리가 이상한 삼형제야!!" "맞습니다!!" "나같이 전설적인 피닉스를 저런 하찮은 애들이랑 묶어서 도매금으로 취급하지 마!!" "뭐, 뭐라고?" "말이 심합니다!!" "덤빌 거야? 난 전설의 피닉스다!!" "건방진 자식......" "저도 못 참겠습니다!!" "다 덤벼!!" ...... 그 모습을 본 나는 세르키스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저런 이상한 애들 맡겨서 정말 미안해." "괜......찮습니다." 말은 괜찮다고 하는데 썩 괜찮아 하는 표정이 아니다. 저것들...... 도움은커녕 방해가 될 것이 분명하다는 걸 세 르키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아아. 답답하다. 답답해. 주렁주렁. 우리는 굴비처럼 주렁주렁 묶인 채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단 말 인가? 나같이 전설적으로 순수...... ......허억! 오, 오염됐다. 피닉스 녀석의 영향이 분명하다. 나 같은 전설적...... ...... 으아아악!! 나는 절규했다. 나도 모르게 입에 붙어 버린 전설적이라는 단어. 피닉스 녀석이 하도 나불대는 바람에 귀에 완전히 딱지가 붙었나 보다. 조심해야 된다. 저런 미친 새를 닮아 버리면 내 인생은 끝 이다. "오빠!" "윤현아!" "오빠." "마에스트로 씨!" "......" 그때 너무나도 익숙한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 볼 것도 없이 그녀들이었다. 처음 목소리는 예은, 두 번재는 혜경, 세 번재는 은경, 네 번 째는 레니아, 다섯 번째는...... 말이 없는 걸로 봐서 에리아. 이 정도면 점쟁이 해도 되겠다. 크흐음. "오, 오빠를 풀어 주세요." "신녀님, 벌써 악마 중의 악마 플러스 악마 악마 악마 플러 스 악마들에게 오염되신 겁니까?" "무, 무슨 소리예요?" "이럴 수가. ......하지만 괜찮습니다. 머지않아 원래대로 돌아올 겁니다." 뭘 돌아와? 예은이는 무지 정상적인데 말이야. 내가 보기에 그쪽 분들이 심히 비정상적이시다. 그나저나, 이제 여자들이 다 보인다. 그렇다면...... 아주 멋지게 이 밧줄을 끊어 버리고!! ...... 안 끊어지네? "이런, 이런. 곤란합니다." "크라스...... 설마?" "네. 그 어마어마한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밧줄입니다." "......" "마스터는 물론 제 힘으로 푸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습니 다." "......" 나, 이렇게 공포스럽기는 처음이다. 우리를 나무에 묶어 둔 뒤 칼을 갈기 시작하는 여기사님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 밑에는 장작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저 장작은 어디에 사용하는 걸까요? 정답, 태우려고. 즉,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를 태울 거라는 뜻. ......게임에서 이런 어마어마한 경험을 하는 애는 나밖에 없을 거다. "너희는 온몸이 불타면서 갈기갈기 찢기는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 거참, 심히 무섭습니다. 아무리 게임이라 해도 그런 걸 당하면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폐해질 것 같다. "참 곤란합니다." "곤란한 거 치고는 즐거운 얼굴인데?" "글쎄요." "......" 곤란하다면서 웃어 대는 크라스. 저분은 지금 이 상황이 즐거운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미소 지을 상황은 아닌 듯싶네만. "불을 붙여라!!" "......" 진짜 붙이는 거야?! ...... 대장으로 보이는 기사의 한 마디에 불붙은 나무를 들고 천 천히 다가오시는 기사들. 그 모습을 본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거참, 이런 임펙트한 경험, 웬만해서는 겪고 싶지 않다. 나무에 묶인 채 화형에 처할 위기라니. "유, 윤현아!!" 혜경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온다. 그렇지만 대답해 줄 계제가 아니었다. ...... 우억! "자, 잠깐!!" 그때 한 마디 외치는 피닉스!! 순식간에 모든 시선이 피닉스를 향햇다. 그러자 피닉스 왈. "거듭 말하지만 난 중성체......" "저 새부터 불태워라!!" "네!!" "으아아악! 자, 잘못했어!!" 피닉스의 한 마디가 기사단장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순식 간에 제 1타로 지명되어 버렸다. 그나저나, 여기서 궁금한 점. 저 녀석이 여기서 죽을까, 살아남을까? 내 짐작이지만 바퀴벌레 1억 배 이상의 생명력을 가진 것으 로 추정되는 피닉스 군은 절대 죽지 않을 것 같다. 저래 봬도 불사조잖아. ...... "오, 오지 마!!" 터벅터벅. "오지 말라니까!!" 불을 든 여자들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잔뜩 겁먹은 채 애걸 하는 피닉스. 그 기분, 약간 이해는 간다면 왠지 비굴해 보인다. 한편, 그런 피닉스의 말은 무시한 채 불을 붙이러 오는 기 사들. 그 순간...... "에이!! 최후의 방법!! 슈퍼 피닉스 변신!!" 화르륵!! ...... 순간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존재가 자신의 눈을 믿지 못했다. 왜냐고? 피닉스가 변신했으니까. ......그냥 피닉스로 변신한 것도 아니다. 전에 봤던 모습보다 약 1.5배 정도로 커진 피닉스 군. 그와 함께 온몸이 불타오르고 있다. ...... 지난번 변신한 모습은 분명 피닉스의 모습이긴 했지만 지 금처럼 온몸이 불타오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분명히 타오르고 있다. 그리고...... "......" 맥없이 소멸해 버리는 밧줄. 허억!! "사, 살았다." 밧줄이 끊어지자 피닉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냅다 도망가기 시작한다. "야!!" "......" "이 개자식아!! 너 혼자만 도망가냐!!" "......" "야! 풀어 주고 가!! 아......" ......황당하다 못해 어이 상실이다. 저만 살겠다고 그냥 튀어 버리다니. 이건 아니다. 정말 아니야, 이 개자식아!! "오, 오빠를 구해 주세요!!" "흐음......?" 그 모습을 본 예은이 한 마디 던지자 레니아 역시 입을 열 었다. "저, 전설적인 피닉스 님. 마에스트로 씨를......" "쿠헤헤헤! 그래, 난 전설이지?" "......네." "뭐, 친히 구해 주지!!" ......라면서 다시 돌아온다. 저 새 자식, 나중에 죽여 버리겠어! 여자들의 부탁으로 다행히 피닉스의 불길에 도움을 받아 풀려난 우리. 지금 내 솔직한 마음은 당장이라도 저 피닉스 자식을 묻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일단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내 주변을 가득 메운 여기사들을 처리하는 것이 다. "세르키스,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내 말과 동시에 세르키스와 가르, 데인, 피닉스의 모습이 사 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나는 여전히 내 뒤에서 웃고 계시는 크라스를 향해 말했다. "서서히 시작해 볼까, 크라스?" "네에, 마스터. 전멸시킬까요?" "오케이." 저쪽에서 잔혹하게 나오신다면 우리도 잔혹하게 나가 준다 이거야. ...... 지금 상황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크라스. 보통 무서운 마족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마왕조차도 두려워하는데다 '소멸의 크라스'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면 그의 과거가 얼마나 화려한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어찌 됐든, 소멸의 크라스라고 불리는 그분. ......말 그대로 진짜 소멸의 크라스였다. 단 5분 만에 마을 안에 있는 모든 기사들을 소멸시켰다. 나? 한 거 없다. 그냥 멍하니, 크라스의 손에 소멸해 가는 존재들을 바라보 는 일만 했을 뿐. ......정말 무섭다. "유후, 전멸시켰습니다." 방긋. ...... 내게 다가와 전멸시켰다고, 방긋 웃으면서 말하는 크라스. ......여기서 같이 웃어 줘야 하는 거야? 심히 햇갈린다. 역시 마족은 마족인가 보다. 미소를 지은 채 수많은 인간을 그렇게 전멸시켜 버리다니 말이다. "그나저나, 시간이 좀 걸렸네요." "......엥?" "5분이나 걸리다니. 요새 한동안 몸을 안 풀었더니 찌뿌드 드한가 봅니다. 5분이나......라니?! 그 많은 인간을 소멸시키기에 5분이라는 시간은 무지 짧다. 수천 명에 달하는 기사들을 소멸시키는 데 걸린 시간이라 면 말이다. 그런데 5분이나라니!! 도무지 이분, 무슨 생각을 하고 사시는지 궁금하다. 물론 피닉스 다음으로...... [비밀을...... 들켰다?] 아하. 정신적인 고통이란 게 바로 이런 건가 보다. 피닉스의 삽질 때문에 이상한 마을에 떨어져서 하마터면 화형당하면서 동시에 칼로 잘리는 끔찍한 경험을 할 뻔했 다. 그나저나, 피닉스의 슈퍼 변신...... 꽤나 파격적이었다. 우리같이 음침한 애들은 절대 풀지 못하는 신성력으로 만 들어진 밧줄을 그대로 태워 버리다니. 피닉스와 함께 다닌 이후, 처음으로 보게 된 멋진 모습이었 다. 툭툭. "뭔 생각을 그렇게 하냐?" 그때 내 어깨를 두드리는 영현이 녀석. 난 그에게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슬픈 생각." "......?" 네가 내 마음의 0.1%라도 이해할 리가 만무하지. 빤히. 순간 갑자기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영현이 녀석. 왜, 왜 이래? "흐으음." "뭐, 뭐냐? 난 남자 취미 없다." "흐으음." "왜, 왜?" 난 영현이 녀석의 이상한 눈초리에 기겁했다. 서, 설마 나를 좋아하는 게냐? "아무리 봐도 흡사해." "뭐, 뭐가?" "저번에...... 예은 양의 뮤직비디오에 나온 남자 놈이랑." "무,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냐!!" "닮았어." 뜨끔. 그 말에 나는 너무 뜨끔해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사실 지난번 예은과 출현했던 뮤직비디오에는 살짝 분장을 한 상태였다. 안 그랬다가는 그 뮤직비디오가 방영되고 언제 어디서 암살당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나저나 이 자식, 눈초리가 왜 이리 날카로운 거지? "뭐, 그럴 리가 없지. 예은이가 뭐하러 너 같은 놈이랑 뮤직 비디오를 찍겠어?" 빠직.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쁘다. 난 예은이랑 뮤직비디오 찍으면 안 되는 거냐? ...... 크윽. 그게 나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나저나, 방과 후에 가자." "......" 갑자기 웬 개소리냐? 어딜 가자고? "오늘 서울 데스파니에 차예은 양 오시잖아." "아......" "뭐냐, 그 반응은?" "아, 아니." 그러고 보니...... '오빠, 저 내일 데스파니에 가 봐야 해서 게임에는 늦게나 접속할 것 같아요.' ......라고 들은 것도 같다. "가자." "어딜......?" "당연히 데스파니지!!" "......" "왜 표정이 그러냐?" "내 표정의 왜?" "떨떠름한 표정이잖아." 그, 그랬나? ......나도 모르게 그런 표정을 지었나 보다. 내가 왜 이런 표정을 지었냐 하면...... 엄청나게 모여든 인 파가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데스파니. 음식점이다. 하지만 그냥 음식점이 아니다. 보기만 해도 억하고 숨이 넘어갈 정도의 어마어마한 크기와 완벽한 인테리어, 완벽한 음식, 완벽한 분위기까지...... 모든 걸 갖춘 곳이 데스파니 다. 크기가 크기인 만큼 전국에서 워낙 많은 사람이 모이는 턱 에 항상 붐비는 곳이다. 그런 곳에 예은이 나타나면? 정말 난리 날 게 분명하다. 분명 숨 쉴 틈도 없을 정도로 붐빌 테니까. 아...... 그 순간 내 머리를 번쩍 스쳐 가는 것 한 가지. "돈은?" "너, 돈 많은 거 알아." "......" "용곤 차곡차곡 쌓였잖아. 여자친구는커녕 아는 여동생조 차 없는 베스트 프랜드." "......" "난 여자친구랑 아는 여동생이 많아서 돈이 없고 말야." 아, 왠지 무지무지 열 받는다. 나도 아는 여동생쯤은 있다고!! 그것도 최괄고 불리는 아이돌 미소녀 말이다. 젠장. "꺄아악!!" "예은 언니!!" "예은이다!!" "꺄아! 나 어떡해!!" "실제로 볼 줄이야." 바글바글.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로 몰려든 사람들.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이것만으로도 그녀의 인기가 대충 얼마 만큼인지 실감이 난다. "미치겠다. 실제로 볼 수 있다니." 잘 미치렴. 난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영현이 녀석을 보고 그렇게 생 각했다. 참고로 나는 매일매일 보는 게 예은이의 얼굴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와 동급인 미소녀 혜경과 은경까지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전혀 난리 칠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 "나, 나 어떡하지?" "......" "미칠 것 같아." "......" 쯧쯧쯧. 저런 모습을 보는 나로서는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저, 저기 차예은 양이다!!" "꺄아악!!" "지, 진짜야!" "언니!!" "사랑해요, 누나!!" "아이 러브 유!!" "누누누누누누나나나나나!!" ......으아악!! 귀청 떨어지겠다. 음식점 안에 있는 중앙무대로 올라온 예은. 그녀는 무릎까지 오는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 보기만 해도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있었다. ......천사다. 천사. 물론 매일 게임 안에서 본다. 하지만 그녀는 게임 안에서 항상 후드를 걸치고 다닌다. 그런 그녀를 저렇게 꾸며 놓으니 정말 미칠 정도다. ...... "차예은!!" "차예은!!" "차예은!!" "차예은!!" "차예은!!" "차예은!!" "차예은!!" 음식점 안이 예은을 부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리고...... 어느새 나도 따라 외치고 있다. 아아...... 이 동화감. 대략 난감. 사랑이라는 건 왜 이리 달콤한 걸까요. 영혼이 되더라도 저는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그게 저니까 요. 사랑이라는 게 무엇이기에 제 마음을 이렇게나 아프게 하 는 걸까요? 나는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언제까지나. 그게 제가 이룰 수 없는 바람이라도요. 머, 멋지다.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천상의 음색. 그게 바로 예은의 목소리다. 어찌 신은 저렇게 아리따운 소녀에게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목소리까지 주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너무나도 착하기까 지...... 만화책에나 등장할 법한 소녀를 내 눈으로 직접 보는 이 순 간이 너무 행복하다. "언니!!" "누나!!" "사랑해요!!" "저는 누나 거예요!!" "언니! 저랑 결혼해요!!" ...... 다른 건 이해해 주겠는데, 마지막 '언니! 저랑 결혼해요!'라 니, 조금 위험한 수위의 대사다. 한편 예은은 환호성을 지르는 팬들을 향해 조심스럽게 고 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마워요." "꺄아악!!" "언니가 날 보고......!!" "누나아아!!" "예은아!!" "사랑해!!" 예은의 한 마디에 난리 블루스를 추는 사람들. 정말 목소리도 좋다. "허억! 저, 정말 예은 양이랑...... 한 마디만 해 봐도......" 그때, 그 난리 블루스에 끼어 있는 한 명, 내 친구이자 예은 이의 광팬인 영현이 녀석이다. 녀석은 마치 여신을 보듯 예은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모습 에 나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전문용어로 미친 듯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아아아아......" ......완전 돌았군. 뭐, 그 마음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나도 사실 예은을 살짝 좋아......한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말이다. 물론 예은뿐만 아니라 혜경도, 은경도. ......뭐, 뭐냐? 나 이렇게 저질이었냐? ......심히 난감하다. 난 일편단심 민들레가 되고 싶은데, 흐 으음.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 주변에 그렇게 아름다운 미소 녀가 세 분이나 있는데 다 호감이 가지 않다면 그건 남자도 아니다. 남자도...... ...... -나는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언제까지나, 그게 제 가 이룰 수 없는 바람이라도요. 그때 울리는 내 벨소리. 어, 어라? 예은이가 전화하면 울리는 벨소리인데? 난 예은이가 사라진 무대를 공허한 눈으로 바라보는 영현 이 녀석의 눈치를 보면서 은근슬쩍 휴대폰을 열었다. "여보세요." -오빠. "예은아, 무슨 일이야?" -그냥 전화해 봤어요. 마침 공연이 끝나서...... "응, 잘 봤어." -......에? "나 여기 데스파니거든." -오, 오빠 거기 계세요? "응, 친구 놈이 가자고 해서." -...... 그리고 잠깐 동안의 정적. 뭐, 뭐냐? -오빠. 영......화라도 보실래요? "응?" -이왕 나온 김에 오빠랑......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엄청 긴장한 목소리다. ......왜 그러는 거지? 근데, 영화라...... 절대 거절 안 한다. 누가 요청하는 건데 거절하겠는가?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거 절할 일은 없다. "그러자." -저, 정말요? "응." 묘하게 다시 목소리가 밝아진 예은이. 왜 갑자기 목소리가 순식간에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밝아졌으니 다행인가? "가자." "......난 요기에 용무가 있어서." "......" "뭐, 뭐냐?" "......" "왜, 왜?" "수상한 느낌이 들어서." 뜨끔. 영현의 말에 나는 뜨끔했다. 이 자식, 쓸데없는 데는 완전 신이라도 내린 듯한 행동을 보인다. 쓸데없는 일에만. "흐으음......" "왜?" "흐으음......" "......" 눈을 가늘게 뜬 채 턱을 치켜들고는 나를 바라보는 영현이 녀석. 찔리는 게 있는 나로서는 말을 흘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수상해." "하, 하나도 안 수상해......" "왜 여기에 남겠다는 거지?" "그, 그냥 뭐......" "왜? 왜? 왜? 왜? 왜?" "......" 나는 외면했다. 한 마디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는 뜻. 하지만 그런 나의 반응은 오히려 영현이 녀석의 의심만 중 폭시킬 행동이라는 걸 지금에야 알았다. "뭐, 좋아." "......?!" 그때 갑자기 손을 절레절레 저으며 순순히 말하는 영현. 뭐, 뭐냐? "뭐, 아무리 베스트 프랜드라지만 너에게도 사생활이란 게 있으니." "......" "그럼 나 먼저 간다." ......어, 어라? 그 말과 함께 손을 흔들고 사라지는 영현이 녀석. 그런 녀석의 행동에 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다. ......저 녀석이 왜 저러지? 평소라면 죽어라 집착을 보일 놈이다. 그런 녀서깅 저렇게 순순히 물러나다니, 이건 뭔가 아니다. 기분이 정말 찜찜하다. "내 착각이겠지, 뭐." 녀석이 예은을 봐서 기분이 좋아 저러는 걸 수도 있다. 괜 한 의심은 하고 싶지 않다. "예은아, 덥지?" "아니에요." "더워 보여. 여기는 아무도 없으니 모자 벗어." "네." 내 말에 예은이는 붉은색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그녀의 너무나도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스르륵 흘러 내렸다. 아...... 왜 모자를 벗는 모습조차도 저렇게 아름다운 걸까? 누군가 그 이유 좀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 "아, 땀 나네." 나는 예은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보고 주머니 에 있던 티슈를 꺼내 그녀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그러자 예은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고, 고마워요."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쑥스럽다는 듯 말하는 모습조차도 귀엽다. 아, 정말 눈에 꽁깍지 할아버지가 단단히 끼었구나, 끼었어. 그나저나...... "어떤 영화 볼까?" "그, 글쎄요." "예은이는 뭐 보고 싶어?" "저요?" "응." "저는......" 그 말과 함께 고민에 잠기는 예은. 그리고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는 나. 남들이 보면 100% 오해할 상황임에 분명하다. ......애인 사이로 말이다. 터억. "......!" 순간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곧바로 인기 척을 캐치해 냈다. 예은에게 넋이 빠져 있느냐 근처의 인기척 도 못 알아채다니! 나는 다급히 예은의 얼굴을 가리려고 했지만 뭔가를 떨어 뜨린 그 존재는 이미 봤나 보다. 그뿐만 아니라, "유, 윤현이...... 너." "......" 내가 아는 놈이다. 그것도 아주 잘. "내 눈이 보이는 저 아름다운 미소녀는 부, 분명 차예은이 고, 그리고 또 내 눈에 보이는 너는 분명 윤현인데." "......" 뭔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횡설수설해 대는 영현. 분명 엄청나게 충격 받은 모습이다. 오해하기 전에 어서 지금의 사정에 대해 설명해 줘야 한다. "여, 영현아. 잘 들어. 여기에는 아주 깊고 깊다 못해 심오 하고 아름답고 뷰티풀한 사정이 중첩되......" "끄아앆!! 예은이랑 윤현이 자식이랑!! 사귀는 사이였어!!" "야야!! 조용히 해!" "말도 안 돼!!" "다 들리잖아!!" "으아악!!" "조, 조용히 해!!" "으으읍!!" 나는 괴성을 지르는 영현이 녀석의 입을 막고는 그대로 예 은에게 눈빛을 보냈다. 어서 이 자리를 뜨자는 뜻의 눈빛. 갑작스러운 상황에 상당히 놀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 개를 끄덕였다. "흐흐흑......" ......뭐냐. 황당해서 도저히 말문이 떨어지지 않는다. 꼭 비운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흐느끼는 영현이 녀석. 지금 상황에서 저런 모습은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데 말이지. "왜! 왜!" "......" "......" 영현이 녀석이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예은을 보면서 묻는다. "도대체 윤현이, 저 이상한 정신세계를 가진 놈이 어디가 좋은 건가요?" "......" "......" 야, 다른 사람이 그런 말 하면 이해하겠는데, 네가 그런 말 하니 심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고 난 무지무지 올바른 정신세계를 가진 남자다. 무지무지 말이다. 녀석이 뭔가 오해하고 있다. "야, 내 말 좀 들어 봐." "짐승." "......" "변태." "......" "스토커 같은 자식." ......내가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걸.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난 예은이를 아는 죄밖에 없다고......!! 오해가 더욱 깊어지기 전에 풀어야 한다. "내 말 좀 들어 보라니까." "......" "예은이랑은 그냥 아는 오빠, 동생 사이야." "그냥...... 아는 오빠, 동생...... 사이." ......허억! 순간, 그 한 마디에 왠지 시무룩해지는 예은. 내, 내가 뭘 잘못했지? 뭐 이상한 말 했나? 아, 머리 아프다. 어쨌거나, 그런 나의 설명에 영현이 녀석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말했다. "어떻게 네놈 같은 평민과 예은 양 같은 천사가 아는 오빠, 동생 사이가 될 수 있지?" "게, 게임에서 만났어." "......게임?" "응, 게임." "게임에서 예은 양을 만났다고?" "그렇다니까." "정말이냐?" "정말이라니까!!" "예은 양, 정말인가요?" "네?" "그럼 저 자식이랑 게임에서 만난 거예요?" "아, 네." "......" 예은이의 한 마디에 금세 수긍하는 그 자식. 이거 은근히 기분 나쁘네. 나한테는 못 믿겠다는 듯 끊임없이 물어보더니 예은의 단 한 마디에는 금방 수긍해 버리다니. 이건 엄연히 남녀 차별이다, 남녀 차별. "그래도 도무지 수긍하기가 힘들어. 나라면 모를까, 네 놈 과 예은 양이 아는 오빠, 동생 사이라니." 거참, 웃긴 자식이네. 나라면 모를까라니?! 한 마디로 그 말은 저는 예은과 아는 사이 해도 되고 나는 안 된다는 뜻이냐?! 뭐 저런 피닉스 같은 자식이 다 있어! "그나저나, 예은 양!" "네?" 너무나도 격하게 말하는 영현의 부름에 예은이 깜짝 놀라 대답했다. 야, 예은이 놀라잖아. 한편 영현이 녀석은 눈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게임을 하신다면...... 에피리 월드?" "......네." "레벨 높으세요?" "아, 아뇨."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래 봬도 저는 레벨 200을 넘은 초고랩이니까요. 우카카카카!" "......" 아직 레벨 200밖에 안 되냐? 저렙이군. 한편, 그런 영현의 말에 예은은 살짝 부담된다는 듯 말했 다. "괘, 괜찮아요." "저는 아주 신성한 프리스트예요." "......" "보조라면 엄청나게 잘해 드릴 자신 있습니다." "......" "금방 키워 드릴게요, 예은 양!" "마, 마음만 받을게요. 저는 오빠랑 여행 다니는 게 좋아 서......" "아니, 저런 허약한 프리스트랑 다니면 항상 위험에 처하시 는 거 아니에요?" "아, 아뇨." "저 녀석 분명 프리스트 같은 거 못할 텐데." 빠득. 왜 나는 프리스트를 못할 거라고 단정 짓는 거냐? 사실 다른 일행을 보조해 주는 프리스트가 아니라 다크프 리스트라 할 말이 없긴 하다만. 그런 영현이 말에 예은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오빠, 강해요." "윤현이 자식이요?" "네." "프리스트인데?" "네?" "프리스트가 강하다니......? 전투프리스트?" 허억. 나는 아차 했다. 그녀는 내가 영현이 자식에게 아직 다크프리스트라고 밝히 지 않은 걸 모르고 있다. 난 다급히 그녀를 보고 온몸으로 긍 정해 달라는 뜻을 표현했다. 그러자 금세 눈치 챈 그녀가 영현에게 말했다. "......네. 전투......프리스트세요." 역시 거짓말하고는 담을 쌓아서 그런지 목소리가 떨린다. 하지만 예은의 말이라면 내일 지구가 붕괴된다고 해도 믿 을 놈이 영현이 녀석이기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흐으음. 역시, 보조적인 프리스트는 너랑 안 어울리는군. 그래서 나에게 안 보여 준 거고 말이야." "그, 그런 거야. 하하하." "그래도 네가 프리스트를 한다는 게 용하다, 용해." 그래, 거짓말은 아니다. 나는 실제로 프리스트다. '다크' 프리스트기는 하지만. 나와 예은의 오붓한 데이트는 한 광팬의 난입에 의해 처참 히 깨지고 말았다. 그 광팬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듯싶다. 영현이 그 죽인 놈. 또한, 영현이 놈의 엄청난 수다를 미소까지 지은 채 들어 준 예은 양에게 정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아, 젠장. [데인을 사랑한 여인?] "......드디어 행방을 찾았다고?" "네, 한동안 사라졌던 다크프리스트의 행방을 찾아냈습니 다." "크크크. 갑자기 사라져서 무지 곤란하던 참인데 잘됐군. 그자를 보내라." "알겠습니다." "다크프리스트...... 넌 끝이다. 크크크." 다른 존재에게는 모르겠지만, 어둠에 속하는 존재들에게는 무적이라 불리는 존재. 그건 바로 하이프리스트라고 불리는 클래스였다. ......누가 내 욕 하나?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지? 나는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면서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 다. "오빠." "응?" "왜 그래?" "아니야." 나는 친근하게 다가오면서 묻는 은경에게 아무것도 아니라 는 듯 대답했다. 그런 내 말에 은경은 마치 내가 뭔가 숨기는 것처럼 느꼈는지 볼을 부풀리며 물었다. "뭔데?"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 "저, 저기......" "가르쳐 줄 때까지 안 떨어질 거야." ......숨기는 거 없어도 안 가르쳐 주고 싶다. 절대 말이다. 은경은 어느새 내 팔에 매달려 있었다. 그와 더불어, 중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글래머인 가슴 의 감촉. 크아아악!! 미, 미쳐 버리겠다. "......" "......" "......" "저, 저기. 은경아." "응?" "조, 좀만 떨어지자." "왜?" "......" 왜긴, 이 근원을 알 수 없는 눈빛들이 느껴지지 않는 건가?! 사방에서 느껴지는 이 뜨거운 시선들. 원망과 원한이 가득한 눈빛과 함께 약간 괴이한 눈빛도 포 함되어 있다. 특히 크라스...... 저 녀석은 눈빛으로 이렇게 말 하는 것 같다. '역시 마스터는 전문가이십니다.'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게 느껴지는걸. "거기 두 분, 웬만하면 떨어지시죠?" "......" 순간, 웃으면서도 왠지 날카로운 어조로 말하는 혜경. 근데 왜 갑자기 존댓말을 할까? 게다가 안 떨어졌다가는 큰 일 날 것 같은 무언의 압박이 느껴진다.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은경을 내 팔에서 조심스레 떼 어 낸 뒤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분위기가 왜 이래. "앗, 여자다!!" "......" "......" "......" "......" 보통 마을을 발견하면 '앗, 마을이다!' 이렇게 외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우리 파티 중 모 새는 그 말 대신 저 대사를 먼저 친 다. '앗, 여자다!!' ......라는 대사를 말이다. 정말 난감한 새다. "어이, 거기 어여쁜 아가씨, 나랑 삼바 추지 않겠어?" "......" "내가 누구냐고?" "......" "전설 중의 전설, 새 중에서도 완벽하고 뷰티풀한 전설...... 피닉스 군이야." "......" 휘이익. "으아악!!" "정말...... 죄송합니다." "아, 아뇨." "차마 할 말이 없습니다." 난 지랄발광을 하던 피닉스를 손으로 낚아챈 뒤, 마을 근처 에서 고구마를 캐던 여자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재, 재미있는 새네요." "......" 그러면서 어색하게 웃는 그녀. 정말 마음씨 착하군. 별로 재미있지 않은데 말이다. "신을 믿습니까?" "바, 밟아 줘." "......" 그때 갑자기 등장하신 리치 한 마리와 변태 천족 검사. ......당황스럽다. 지금으로서는 이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도대체 이것들은 왜, 왜, 왜! 이런 짓밖에 못하는 거냐!! 세르키스나 크라스처럼 좀 멋진 행동도 해 보라고! 난 그렇게 푸념하면서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가르와 데인 을 낚아챘다. 그것도 엄청 능숙한 손놀림으로. 이런 건 능숙해지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저, 저기......" "......?" 순간 갑자기 우리를 부르는 소리. 이 목소리는 분명 꽤나 착해 보이던, 고구마를 캐던 소녀였 다. 어디 가도 약간은 인정받을 만한 외모와 누추한 옷에 가려 지기는 했지만 내 눈에는 분명 제법 하는 몸매다. ......나도 모르게 또 여자 평가 모드로 들어갔군. 나는 여자가 우리를 부른 의도를 대충 예상하고는 먼저 입 을 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아, 아뇨. 그런 뜻으로 부른 게......" "......?" "저, 저기......" "말씀하세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그러니까, 에......" "......" ......허어, 답답하다. 그냥 말하면 될 것을 뭘 저렇게 고민을 하는 걸까. 엄청나게 중대한 말이라도 할 예정인가?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녀. 드디어 말문이 열렸다. "여, 여자친구...... 있으신가요?" "......" 나는 경악했다. 왜냐고? 그녀가 그런 물음을 건넨 상대는 다름 아닌, 자신을 밟아 달라고 매달린 데인이었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을 밟아 달라고 말한 남자에게 고 백 비슷한 걸 하고 있었다. "......나에게 빠진 거야?" "......" 데인이 뻔뻔하게 터벅터벅 나서며 한 마디 던졌다. 그 말에 그녀는 얼굴을 붉힌 채 대답했다. "......네." ...... '아니요'도 아니고, '이 미친 자식아'도 아니고, '이게 미 쳤냐'도 아니고, '죽을래'도 아니고, '돌았구나'도 아닌 '네'?!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의심할 수밖에 없다. "훗, 나를 좋아하려면 조건이 있는데." "조건......요?" "그래, 조건." 어느새 그녀에게 다가가 조건 타령하는 데인 녀석. 나는 어이가 없었다. 데인 주제에 여자에게 고백 받은 것도 놀라워 죽겠는데 조건을 따지다니. 미쳤구나, 드디어...... "뭐, 뭐예요?" 그런 데인의 어이없는 요구에 고구마 소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허허, 이럴 수가.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조건? 간단해." "......" "나를 얼마나 잘 밟을 수 있냐는 거지." ...... 분명 난 이 부분에서 한 가지를 예상했다. 쫘악! 하는 소리 말이다. 한 마디로, 뺨 맞는 소리가 들릴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최, 최선을 다할게요." 이런 말도 안 되는 대답이 들려온다. 최선을 다한단다. .......한 마디로, 밟아 주겠다는 말과 일맥상통? 내 귀에는 그렇게밖에 들리지 않는데. 퍼억. "괘, 괜찮으세요?" "좋아. 이 느낌이야." "바, 밟을게요." "그려." 퍼억. "아하하." "......괘, 괜찮으세요?" "괜찮다니까. 밟아, 밟아." "......" "......" "......" "......" "......" 우리는 기묘한 광경을 보고 있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발로 조심스레 밟는다. 남자가 그 밟 음에 반응해 아하하 하는 이상한 소리를 지르면 여자가 깜짝 놀라 괜찮냐고 묻는다. 그러면 그 남자는 괜찮다고, 더 밟으라고 한다. ......이 무슨 복잡 미묘한 장면이냐? "아아아." "정말 괜찮아요?!" "괜찮다니까! 나를 좋아하면 밟아!!" "......" "왜 대답이 없지?" "최선을 다할게요." "좋아, 밟아. 하아하아." 아무리 데인에게 반했다고 해도 밟으란다고 진짜 밟는 저 여자도 그리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참으로 흥미로운 장면이군요." "크라스, 저게 흥미로워 보이니?" "네, 아주요." "......그래. 어떻게 보면 흥미롭기도 하겠다." 크라스 말대로 정말 어떻게 보면 흥미롭기도 할 것이었다. 하아...... 만약에 근처에 여자들이 있었더라면 나는 너무 곤란해서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근처에 마을이 있어서 세르 키스를 딸려 보내지 않았다면 차마...... 흐으음. "아아아앙." "......" "오오오옹." "......" "으에에에엥." ...... 차마 못 봐 주겠다. 저런 저질적인 걸 꼭 봐야 하는 거야? 하아. "......벌써 지친 거야?" "죄, 죄송해요." "뭐 어쩔 수 없지. 조금 쉬고 다시 밟아 줘." "......네." ...... 아, 참 아스트랄한 장면. 저 여자, 왜 저렇게 착한 거냐? 그리고 도대체 데인 저 자식의 어디가 좋은 거지?! 어디가!! "이건 뭔가 아니야." "......그렇긴 하다." "나 같은 전설보다 저런 변태를 선택하다니." ......그 점에 대해서는 차마 말 못하겠다. 또라이 새나 변태 천족 검사나 거기서 거기인 건 분명하니 까. "아,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내가 물어보겠어!!" "......" 그러면서 날아가는 피닉스. ......물어보면 뭐가 나오니? "사랑했던 남자를 닮았다네." "......나오네." "응?" "아니." 물어보면 금방 나오는구나. 저 여자, 왜 저렇게 착한지 모르겠다. 그런 천사 같은 여인 이 저런 변태에게 당하는 모습이 왜 이렇게 애처롭지?! "간단합니다." "엥?" 그때, 갑자기 한 마디 내던지는 크라스. 뭐가 간단한데? "저 여자에게 다른 남자의 매력을 보여 주는 겁니다." "네가?" "아뇨." "그럼?" "......" "설마......" 싱글벙글. 나를 쳐다보며 계속 웃는 크라스. 난 설마설마 하는 어조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미?" "그렇습니다." "내가 그런 짓을 왜 해!!" "방금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하, 하긴 했는데." "저렇게놔두면 금세 타락할 겁니다." "......" "자, 마스터의 선택만 남았습니다." 그러면서 나를 바라보는 크라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저 여인을 위해 내가 나설 것인가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나는 또다시 힘겨운 듯 데인을 밟으려는 여자를 보 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말했다. "하겠어!!" "현명한 선택입니다." ...... 하겠다고는 했는데 뭘 하겠다는 건지...... 의욕은 많다. 그런데 무슨 수로 저 여자 분을 설득해야 하지? ...... "아아아아." "......" "더 세게." "......" "좋아!" ......차마 더 이상 볼 수 없다. 순수했던 한 여인이 타락하는 모습을 말이다. 그래, 용기를 내자. 내가 힘을 내서 저 불쌍한 여인을 고통에서 탈출시키는 거 다!! "저기......" "......네에?" 한참 데인을 조심스럽게 밟던 그녀가 나의 부름에 돌아봤 다. 얼마나 힘든지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힌 상태 였다. 데인...... 정말 나쁜 놈이다. 보통 나쁜 놈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왜...... 그러세요?" 여인이 내게 조심스럽게 묻자, 나는 스마일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이야기라도...... 할까요?" "......" 다행히 거절당하지 않았다. 거절당했으면 무지무지 무안했을 터. 역시 내가 본 대로 착한 심성을 가진 분이다. "그나저나 무슨 이야기죠?" 그녀가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도 힘든 기색이 역력하다. 아, 저 연약한 몸으로 데인이라는 변태를 밟아야 했으니, 정 말 안타깝다 못해 슬프다. 난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결심했다. "왜...... 데인을 좋아하는 거죠?" "네?" "왜 데인의 무리한 요구를 아무 말도 없이 듣냐고요." "그, 그건...... 제가 좋아했던 오빠랑 너무나도 닮아 서......" "아뇨. 그것만으로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건 이해가 안 가 요. 뭔가 있는 거죠?" "......" "괜찮아요, 말해 보세요." "......" 나의 말에 머뭇거리는 그녀. 내가 생각해도 말 정말 잘한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멋진 캐릭터가 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푸하하하! ......이게 아니지. 나는 본래의 목적을 상기하고는 물었다. "저를 믿어 보지 않겠습니까?" ......라는 정말 멋진 대사를 한번 뿌려 봤다. 나 정말 감동이다. 감동이다 못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흐 흐흑. 이 게임 하면서 이런 멋진 대사를 치게 될 날이 올 줄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거다. 크하하하! ......푼수 같다. 쩝. 자중하자. 나의 이 멋진 대사가 정말 먹혀들었는지, 그녀가 살며시 입 을 열었다. 그녀가 한참을 말을 할까 말까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제가 좋아했던 오빠가...... 저 때문에 죽었어요." "......?!" "3개월 전이었어요. 한 기사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게 말이에 요." 기사라니......?! 갑자기 이야기가 복잡 미묘해지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 기사가 저를 첩으로 들이겠다고 했어요." ......왠지 싸가지 없는 모습이 연상된다. 물론 나뿐만 아니 라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런 제 앞을 막아 준 게...... 나루스 오빠였어요." "그분이 데인과 닮았나요?" "네, 너무나 똑같아요. 너무나도......" "......" "오빠는 평민이었으면서도 당당하게 말했어요. 저를 위 해...... 제가 가기를 원치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오빠는 그 기 사에게 말했어요." "......" "하지만 평민이 귀족에게 대든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죠. 귀족이라면 평민 하나 죽이는 일이야 아무렇지도 않으니까요." 이거, 이거...... 이 게임 좀 그러네. 물론 완벽한 현실감을 표현하기 위해서라지만, 평민과 귀 족의 그 미묘한 관계까지 구현해 놓다니. 뭐, 그렇게 안 했으면 더 이상했을 수도......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오빠는 그 기사의 칼에 목이 베여 죽었어요. 귀족 모독죄였죠. 그리고 그 기사는 기분이 잡쳤다며 그대로 자신 의 소속된 영주의 성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아하, 그렇게 된 거구나! 근데, 여기서 잠깐. 데인의 어이없는 부탁을 들어주는 건...... "......나루스라는 남자에게 미안해서 그런 겁니까?" "......" 맞다.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겹쳐 나루스와 흡사한 외모를 하고 있는 데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 이다. 듣고 보니 정말 슬픈 스토리인데. 난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내 말 잘 들어요." "......?" "물론 데인을 보고 나루스라는 사람을 떠올리는 게 나쁘다 는 말이 아니에요." "......" "하지만 말입니다. 나루스라는 분과 지금 저 데인은 외모만 흡사할 뿐 성격은 전혀 달라요." "......" "당신이 좋아하는 나루스라는 분처럼 기사에게도 용감하게 저항할 수 있는 그런 용기가 저 녀석에게는 없습니다." "......" "하나만 물을게요. 당신은 그의 외모만을 좋아한 건가요?" "아......뇨." "그래요. 당신은 나루스의 외모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걸 좋아한 거에요. 그와 흡사한 외모를 한 데인에게 애써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어요." "......"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그런...... 걸까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 내 말에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절대 사심은 없다. 절대 말이다. "......" "......" "......" "......" 한편, 마을에 들렀다 온 여자들은 어떤 장면을 보고 굳어 버렸다. 그건 바로 윤현이 여자를 위로해 준 뒤 안타까운 마음에 안 아 주는 장면이었다. 그것도 아주 절묘한 타이밍으로. "오......빠." "윤현이...... 너." "마에스트로 씨." "오빠!!" ...... 헉!! 나는 깜짝 놀랐다. 완전히 굳어 버린 예은과 잔뜩 화가 난 듯한 혜경과 은경, 그리고 레니아까지...... 나는 갑작스러운 그녀들의 반응을 보고 그만 당황했다. 그 순간, 깨달은 상황. 그건 바로 그 고구마 여인이 내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이었 다. ......! 나는 다급히 그녀를 내 품에서 조심스레 떨어뜨린 후 말했 다. "여기에는 아주 깊다깊은 사정이 있어." "......" "......" "......" "......" "믿어 줘. 정말이야, 정말." 불신이 가득한 눈빛. 내, 내가 이렇게 믿음이 없는 남자였단 말인가? 나는 지금까지 내가 신의(信義)의 대명사라고 생각했는데? 흐흑. 어찌 됐든, 그것보다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더 시 급하다. 안 그랬다가는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분위기다. "지, 지금부터 설명해 줄게!!" "......불쌍해요." "말도 안 돼!" "너무하네요." "너무해!!" 내 이야기를 들은 여자들은 하나같이 저런 반응을 보였다. 아아, 너무하기는 너무했지. 그 싸가지를 말아먹은 기사 말이다. "크라스." "네에." 내 말과 동시에 순식간에 등 뒤에 나타나는 크라스. 난 그에게 물었다. "어때?" "이름은 플로코스틴. 영주에게 꽤나 촉망 받는 기사인 듯싶 습니다. 그리고 싸움 실력도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라더군 요." "땡큐." "뭘요." 그러면서 방글방글. 역시 저분은 신기해. 게다가 3개월 전의 정보까지 입수해 오다니, 정말 대단하 다. 아니, 목격자가 많은 곳에서 목이 잘리는 충격적인 사건이 었으니 오히려 정보 모으기는 아주 쉬웠겠다. 그나저나, 내가 이렇게 크라스에게 정보를 물어 오라고 한 이유는...... "오랜만에 착한 일 해 볼까?" "에? 말도 안 돼! 오랜만이라니!! 처음이잖아!" "......" "거짓말쟁이." 난 피닉스의 외침에 뭐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 말대로...... 착한 일은 처음인 것 같았으니까. 나는 항상 납치, 파괴, 폭행...... 등등 왠지 범죄틱한 일만 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크흐음. 이런 사소한(?) 건 넘어가고, 오랜만에 한 건 해 보자. "세르키스, 크라스, 가자." "네." "네." 내 말에 내 뒤에 붙는 두 분. 나는 목을 좌우로 흔들며 푼 뒤 앞으로 나아갔다. 시작해 볼까? 1111 "누구냐!!" "누구냐!!"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토씨 하나 안 다르게 똑같이 소리 치는 경비병들. 나는 그들을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만나 보고 싶은 분이 있어서요." "이 성에 말인가?!" "네. 이름이 플로코스틴인가 뭔가라죠?" 휘이익!! 순간, 너무나도 느릿한 속도로 내 목을 향해 다가오는 창. 어차피 위협용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피할 이유조차도 느 끼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험악한 목소리. "감히 네놈 같은 평민이 플로코스틴 님의 이름을 입에 담 다니!! 그리고 말버릇이 그게 뭐냐! 죽고 싶나?!" "살고 싶은데요." "......" "어찌 됐든, 그 인간한테 용무가 있는데요." "저 자식을 당장 체포해라!!" "네!" 그 외침에 가만히 있던 다른 경비병이 재빨리 내게 다가왔 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오히려 웃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시면 곤란합니다, 곤란해요." "......" "......" 어느새 크라스는 한 손으로 경비병의 목에 칼을, 다른 한 손으로는 다른 경비병의 손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저희 마스터는 선량한 분이라 괜한 싸움은 좋아하지 않습 니다." 오...... 그거 멋진 말이다!! 크라스 말대로 나처럼 선량한 존재도 흔치 않지. ......왠지 무안해진다. 크흐흠. 눈 깜짝할 사이에 목숨을 위협 받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경비 병 1과 경비병 2과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정체가...... 뭐지?" "저, 정체가 뭐냐?" "나?" "......" "......" "프리스트. 정의를 사랑하는 존재라고 생각해 줘." ......뭐냐, 이 분위기는. "무슨 일이냐!!" "왜 이렇게 소란스럽냐!!" "무슨 일이라도 났나?!" "시끄럽게......!" 우르르. 그 순간 영주의 성 안에서 우르르 몰려나오는 병사들과 기 사들. 나는 그들을 향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한 놈 잡으러 왔어." "......" "......" "......" "......" "......" "......" 엥? 내 표현이 좀 버티풀했나?! 갑자기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이 적막감, 정말 예술이다. 흐 으음. '한 놈 잡으러 왔어'라는 이 화려한 한 마디. 조금 버티 풀했나 보군. 이런 나의 말에 기사와 병사들은 나를 미친놈 보듯 쳐다봤 다. "저 미친 자식!!"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죽고 싶어 환장했군!!" "당장 처형해라!!" 등등, 별의별 소리가 다 들려온다. 하지만 왠지 긴장되지가 않는다. 왜냐고? 바로 뒤에 버티고 계신 무지막지한 두 분 덕분에. 솔직히 말해, 저 두 분의 힘이면 이 성에 있는 모든 사람을 몰살하는 데는 10분도 채 안 걸릴 게 분명하다. 그들의 힘은 그만큼 강력했다. 그리고 내 능력도 한 차원 업그레이드 됐기에 저분들에게 그리 꿀리지 않는다. 나는 저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냥 비키면 살려 줄게." "......" "싫어?" "어디서 헛소리를!!" "죽여라!!" "우아아아!!" "우아아아!!" 그리고 동시에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병사들. 나는 가볍게 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곧 손을 내리면서, "살기 싫은가 봐? 세르키스, 크라스, 부탁한다." "네." "네." ...... 역시 무지막지한 분들. 단 몇십 초였다. 단 몇십 초 만에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던 수백 명의 기사들 과 병사들의 목숨이 깨끗이 사라졌다. 왠지 나 너무 사악해진 것 같다. 하지만 사실 난 평화를 원했다. 저들이 나의 선량한 마음을 몰라주고 우리를 죽이려고 달 려들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정당방위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 이다. 아아, 이런 내 마음을 몰라주다니. "......" "......" "......" "......" 저택 안에서 또다시 등장한, 힘 좀 쓰시는 분들은 적막에 휩싸인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 몰살당한 자들이 병사와 기사가 섞여 있었다면, 지 금 나온 자들은 모두 기사로 보인다. 한 마디로 2차 방어선? 표현이 좀 거시기 하군. 어쨌든 그런 역활을 하는 분들이 다. 그 정중앙에 기사단장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있었다. 50대 초반에 나이에 푸른색 갑옷을 걸치고 엄청난 기세를 내뿜는 남자. 키도 엄청 크다. 약 190센티미터? 한 마디로, 싸움을 제법 할 것 같은 분이다. 어쨌든 그런 분이 지금 잔뜩 움츠러들어 있다. 왜냐고? 당연히 순식간에 몰살당해 바닥에 쓰러진 수하들 때문이겠 지. "무, 무슨 용무...... 십니까?" 반말하려다가 뭔가 꺼림칙했는지 바로 존댓말로 나오는 기 사단장. 뭐, 난 반말을 하든 존댓말을 하든 별 신경 안 쓰는데 말이 지. "우리는 원해." "뭘...... 말씀이십니까?" "플로코스틴인가 개로코스틴인가 뭔가 하는 애 말이야." "프, 플로코스틴은 왜......?" 나의 말에 기사단장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 물음에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놈이 한 짓을 그대로 되갚아 주러 왔지롱." "하, 한 짓이라니요." "그런 것까지 아실 필요는 없고...... 어서 불러나 주시죠." "......" 내 말에 기사단장이 머뭇거렸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가만히 입을 열었다. "데라진." 파아앗!! 바람이었다. 다시 말해, 바람같이 빨랐다는 뜻이다. 그리고 어느새 기사단장의 바로 앞에 서 있는 나. 조금만 거리를 잘못 계산했어도 남자랑 키스하는 불상사가 일어났을 정도로 입술이 붙어 있다. 이거 심히 난감한데 말이야. 하지만 하던 것 마저 하자고. "저는 평화로운 게 좋답니다." "다, 당장 플로코스틴을 데려와라!!" "네!!" "네!!" "네!!" 기사단장의 말에 황급히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기사들. 그 모습을 본 나는 기사단장과의 거리를 벌리면서 말했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나 오늘 필 받았나? 내가 생각해도 열나게 멋지잖아!! 크흐음. 10분 뒤. 아까 들어갔던 기사 세 명과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푸른색 갑주를 걸친 남자. 붉은색의 머리카락이 잘 어울리는 자라고 말하고 싶은 마 음은 굴뚝 같은데, 사실은 더럽게 안 어울린다. 당장에라도 저 붉은색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고 싶은 마음 이 생길 정도? 그만큼 괴상할 정도로 안 어울린다. 뿐만 아니라 간사해 보이는 얼굴에 개폼은 있는 대로 다 잡 고 있다. 추측하건대, 아마도 저 녀석이 플로코스틴인가 뭔가일 테 다. 놈은 우리 일행을 기분 나쁜 눈초리로 한 번 훑어보더니 기 가단장을 보면서 말했다. "기사단장님, 무슨 일입니까?" "자, 자네를 찾는 분들이......" "저를 말입니까?" "그, 그래. 저분들이네." 그러면서 나를 가리키는 기사단장. 플로코스틴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놈은 약간 허름해 보이는 복장을 한 나를 보더니 이내 비웃 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평민이 무슨 일이지?" 그냥 간단하게 복장만으로 평민과 귀족을 가르는 거냐? 네 머리는 참 단순해서 좋구나. "프, 플로코스틴......" 기사단장이 당황해서 플로코스틴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 일행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조차 못하는 기사단 장으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플로코스틴은 그런 기사 단장의 반응을 가볍게 무시했다. "나같이 대단한 기사를 보자고 한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 겠지? 만약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당장 네놈의 목이 날아갈 것이다." "......" "말해 보거라, 하찮은 평민." 빠득빠득. 내 머리에 심히 스팀 돈다. 하지만 참자, 참아. 하아아. 아직은 질문을 해야 할 때니까. 난 스마일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나루스라는 사람 알아?" 스으윽!! 그 순간 순식간에 검집에서 뽑혀 나오는 검. 꽤 빠르다. ......근데 느리다. 무슨 말이냐고? 다른 사람의 눈에는 꽤 빠르게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무지 무지 느려 보인다는 심오한 뜻이 담긴 말이다. 어찌 됐든, 그 뽑힌 검은 어느새 내 목 앞에서 정지했다. 이거 방금 전 저 입구에서 마주친 상황이랑 똑같은데. 흐으음. "감히 평민 주제에...... 나에게 반말을 하다니!! 무슨 사정 이 있든 넌 죽은 목숨이다! 마지막으로 이야기 정도는 들어 주 마!" ...... 아, 정말 짜증 지대로다. 뭐 저따위 삐리리 같은 자식이 다 있어!! 내 고급스러운 입에서 'X'라는 말은 좀 그래서 '삐리리'로 언어순화를 했다. 어찌 됐든 저절로 욕이 나오는 놈인 건 확실하다. 참자, 참아. 일단은 존댓말을 해 주지. 네놈이 마지막으로 듣는 존댓말 일 게다. "3개월 전, 위대하시고 위대하신 기사님이 플렌 주점에서 목을 베어 죽인 평민 말입니다." "......흐으음?" 내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플로코스틴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죽였지? 그놈은 누구지? 하찮은 평민 놈들을 워낙 많이 죽여서 말이야." ...... 하하하. 어이없다. 이 자식...... 정말 어이없다. 한마디로, 이놈 하나 때문에 두 사람의 인생이 파멸해 버렸 다. 그런데 이놈은 나루스를 죽인 것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웃고 있다. 하하하. "그나저나, 용건이 그건가? 고작 그런 걸로 나를!!" "아니요." "......?" "용건은 그게 아닙니다." "......" "용건은 말입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당신의 목입니다." "......미친 자식!!" 순간 내 목을 관통하기 위해 날아드는 검.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왜냐고? 그분이 오셨으니까. 스윽. "이런, 위험하지 않습니까?" "......!!" 플로코스틴은 자신이 내지른 검을 두 손가락만으로 잡아 낸 크라스를 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 기사단장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방금 전 말대로...... 저 자식의 목숨을 가져가도 될까요?" "......" "왜 대답이 없나요?" "......" "흐으음."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기사단장. 나는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전멸을 원하시는 건가요? 우리의 힘은 이미 확 인하신 걸로 압니다만......" "......데려가게." "기, 기사단장님!!" 기사단장에게 버려진 플로코스틴이 다급히 외쳤다. "......" "단장님!!" 지금 상황이 보통 상황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느꼈나 보다. 참으로 둔하기 짝이 없구나. 기사단장은 그런 플로코스틴의 외침에 고개를 돌려 외면했 다. 나는 그런 그의 귓가에 한 마디 더했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 "크라스, 세르키스. 저 싸가지 밥 말아먹는 자식을 데려가 자고." "네." "네." 내 말에, 크라스와 세르키스가 순식간에 이동해 플로코스 틴의 양팔을 붙잡았다. 나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 말했다. "쉽게 죽이지는 않을 거야. 안심해도 좋아." "으아악! 사, 살려 줘!! 잘못했어!!" "풋." "......" 잘못했다고 외치는 놈 앞에서 풋 웃어 주자 그만 굳어 버리 고 말았다.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죽기 전에 네가 한 일을 생각해 보렴." "......!" "으아아악!!" "끄아아악!!" "크아악!!" 이게 바로 그 유명하다던 고통 3종 세트 비명 소리? 흠흠. 나는 크라스와 세르키스에게 녀석을 맡겼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라는 말과 함께. 새삼 말하는데, 저분들 드래곤 로드와 마족이다. 그리 선량 한 분들이 아닌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 이라고 했으니...... ......나 정말 사악하다. "잔인하네요." "레니아, 웬일이야?" "그냥 와 봤어요." 어느새 내 곁에 다가온 레니아. 그녀는 내가 앉아 있는 나무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뭐가?" "지금 저거요." "글쎄, 내가 심한 걸까?" "......" "레니아." "네?" "난 착한 놈이 아니야." "무슨 말씀이세요?" "하지만 말야, 최소한의 도는 지킨다고. 지금 저렇게 고통 을 당하는 저놈과는 달리 개념이라는 게 탑재되어 있단 말 야." "......" "전문용어여서 못 알아듣겠어?" "아, 아뇨." '개념 탑재'라는 게 조금 전문용어다 보니, 이곳에 사는 레 니아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단어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미 이해했나 보다. 역시 이해력도 빠르셔. "자자, 우리는 이만 가 보자." 그러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레니아에게 손을 내밀었 다. 레니아는 내 손을 잡고 일어나면서 약간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최고의 도둑이라는 말보다 한 남자의 여자라는 말을 들어 보고 싶어진 건 처음이에요." "그건 무슨 말?" "글쎄요. 알아맞혀 보세요." "......" "역시 둔하다니까요. 아, 라이벌도 너무 많아서 머리가 아 플 지경인데." "뭔 말인교." "힌트 줄까요?' "......?" 그리고는 다음 순간 빠르게 다가온다. 나조차도 놀랄 정도의 속도다. 역시 최고의 도둑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스피드였다. 아 참, 이게 아니라...... ...... 순간 내 입술에 닿은 무언가...... 이, 이건 분명 예전에 뮤직비디오에 출현했을 당시 느꼈던 감촉과 무지무지무지 흡사한데? 내 착각인가? ...... "이게 힌트예요. 헤에, 그럼 이만." "......" 그 말과 함께 사라지는 그녀. 허얼...... 서, 설마 키스!! "오빠, 왜 그래?" "......" "오빠!!" "......" "오빠아!!" "......" "오빠!!" 해벌쭉.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지만 왠지 대꾸하기 싫다. 이 둥둥 뜨는 기분. 왜 이럴까. 지난번 예은과의 입맞춤 때 느꼈던 기분과 아주 똑같다. "오빠, 자꾸 이럴 거야!!" "......" "뽀뽀해 버린다!" "......" 뭔 소린지 모르겠다. 뭘 해? 쪽. ...... 그 순간 내 뺨에 느껴지는 뭔가의 감촉. 허어억......!! "......으, 은경아!!" "......" "바, 방금 무슨......" "알면서 물어보다니...... 오빠, 심술쟁이." "......" 그러면서 홱 고개를 돌리는 그녀. 그래, 분명 알고 있다. 방금 그 느낌은 은경의 입술이 내 볼 에 닿았기 때문이다. 우어어억!! 이, 이거 무슨 일이란 말인가! 오늘 내가 착한 일을 해서 하늘이 감동했나 보다. 앞으로 착한 일 자주 하련다. 자주 말이다. ......냉. [하이프리스트] "......윤현아." "으응?" "내 입술에 뭐 묻었어?" "허억!" "아까부터 계속 내 입술만 보고 있잖아." "아, 아니!" 혜경의 말에 뜨끔한 나는 강력히 부인했다. 사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약간 그랑상스(?)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나는 예은과 레니아에게는 키스를, 은경이에게는 볼에 뽀뽀를 받은 상태다. 하지만 에리아를 제외하고, 여자 일행 중 나와 입술을 접촉 하지 않은 분이 단 한 분 계셨으니 그건 바로 혜경. ......알고 있다. 이런 짐승 같은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걸. 하지만 말이다......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인다고!! 으아 악!! "변태 같으니." "......내가 왜 네놈한테 그딴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지 설 명해 줄래, 피닉스?" "이 자리에서?" "무슨 개소리냐?" "말해도 될까나?" "......" 순간 나를 엄습해 오는 불길한 느낌. 나는 그대로 피닉스를 낚아챈 뒤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 다. "뭐냐?" "우연치 않게 봤어." "......" "레니아와 키스한 후 은경이한테 뽀뽀 받는 장면을 말이 야." "......" "우연이었어, 우연. 쿠케케케케." 이 자식......!! 언제 본 거지? 분명 녀석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아니, 워낙 넋이 나가서 그런 거겠지만. "후후후." "......" "후후후후." "......" "후후후후후후." 졸래 재수 없다. 웃음소리 말이다. 내 살다 살다 저렇게 짜증 나는 새소리는 처음이다. 그나저 나 저 녀석, 분명 그냥 넘어갈 놈이 아니다. 절대로...... 나는 약간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원하는 게 뭐냐?" "100골드." "......" "그것만 주면 내 입은 영원히 봉인될지도......" "......" 어쩔 수 없다. 좀 평범한 요구라면 한번 타협해 보려고도 했지만, 녀석은 내게 어마어마한 걸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그건 바로, 지난번 하렫가 만 살조멸구(?).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 아마? "훗, 못된 생각을 하고 있군." "허억!" 마치 내 속마음을 읽었다는 듯 한 마디 내던지는 피닉스 녀 석. 이놈 뭐냐? 느낌이 평소랑 달라! 녀석이 여전히 느긋한 어조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누군지 잊어버린 거야?" "미친 새라는 건 잘 알고 있는데." "......" "왜?" "미친 새라니! 난 피닉스야!! 새들의 신이라고 불리는 피닉 스!!" 마음대로 생각해라. 안 말린다. 근데, 그거랑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관인지가 더 궁금한 데. 피닉스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만약에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다른 새들에게 이 얘기 를 퍼뜨리라고 했지." "뭘?" "방금 전의 얘기 말이야, 훗." "......" "후후후후후." 이 자식, 새 주제에!! 갑자기 왜 이렇게 똑똑해진 거냐!! 아니, 드디어 돌아 버린 게 분명하다. 평소의 녀석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을 지금 저렇게 하 고 있었으니까. 경악해서 힘이 빠져 버린 내 손을 벗어난 피 닉스가 귓가로 날아와 속삭였다. "현명한 선택을 하기를......" 스윽. "우억!" 다음 순간, 나의 손이 다시 녀석을 낚아챘다. 나는 웃었다. "......" 내 미소를 보고 굳어 버리는 피닉스 군. 나는 그런 녀석에게 더욱더 진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네가 간덩이가 부었구나? 감히 나를 협박해?" "나,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지금 당장이라도 내 부하들 이!!" "상관없어." "......" "내 옆에 누가 있는지 잊어버렸냐?" "......허억!!" "세르키스에게 한 마디 하면 새 정도는 한 방에 몰살이야, 몰살. 크라스도 있고 말이지. 훗." "아, 악마!!" "악마라니, 너무 심한 말인데?" "아, 악마잖아!! 몰살이라니!!" "훗, 나를 건들면 악마가 되는 거 이제 알았니?" "......" "자자, 나를 협박한 피닉스 군. 얘기라도 나눠 볼까?" "자, 잘못했어!! 요, 용서해 줘!!" 갑자기 비굴하게 나오는 피닉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협박할 대로 해 놓고 지금 와서 용서를 빌기에는 너무 멀리 까지 온 것 같다, 피닉스. "사랑한다, 피닉스." "으아악!!" 그렇게 새 한 마리의 절규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가던 길을 재촉했다. "앞으로 약 2킬로미터만 더 가면 제리진 마을이 보일 거 야." "제리진 마을?" "응." 혜경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제리진 마을이라...... 처음 듣는 마을인데? "별로 특이할 건 없는 마을이야. 그냥 평범한 마을 중 하나 야." "그렇구나." 그러니까 당연히 모르지. 그나저나...... 좀 막막하다. 다크프리스트의 다섯 번째 유물과 더불어 세르키스가 말한 2차 전직을 하기 위해 잡아야 된다는 기생충까지...... 그 유물과 2차 전직이란 것에 상당히 마음이 동한다. 다크프리스트 2차 전직이라니, 생각만 해도 황홀해진다. 지금도 거의 괴물 수준인데 2차 전직을 하면...... 상상을 초월하겠지, 아마도? 아...... 생각만 해도 아스트랄한 이 느낌...... 그렇게 2차 전직의 꿈을 안고 가고 있을 때였다. 흠칫.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 가르, 방금 무슨 기운 못 느꼈냐?"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 ......내 착각인가? 방금 뭔가 온몸을 강타하는 듯한 싸늘한 느낌이 분명 들었 는데...... "호, 혹시!!" 그 순간 갑자기 놀란 듯한 어조로 소리치는 가르. 나는 다급히 물었다. "너도 느꼈어?" "아뇨." ...... 그럼 방금 전의 그 반응은 뭐냐? 왜 놀란 거야!! 앙? 가르의 말이 이어졌다. "혹시 신내림?" 됐다. 때려 치워라. 네놈한테 무슨 말을 기댛나 내가 바보지. 뜬금없이 신내림 이라니. 어디서 그런 기발한 생각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크라스, 세르키스." "네." "네." "혹시 이상한 느낌 같은 거 없었어?" "흐으음, 전혀 없었습니다." "저도요." 내 착각인가? 세르키스와 크라스조차도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면 나 의 착각일 확률이 상당히 높다. 그만큼 저분들은 믿음직스러우니까. 파앗!! 살기!! 순간적으로 느껴진 엄청난 살기와 함께 엄청난 힘을 가진 무언가가 우리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제길!! 위험하다. 여러 개의 힘, 모두 네 개의 힘이 하나로 뭉친 듯, 좀처럼 파악하기 힘든 힘이 우리를 향해 매섭게 다가오고 있다. 나는 그대로 피닉스를 낚아채면서 외쳤다. "빌리자!!" "우어억!! 서, 설마!!" "너의 질긴 생명력만 믿는다." "제, 제발!! 나를 좀 지적인 일에 사용해 줘!!" 그런데 사용한 일이 없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겠니, 피닉스 군? 네놈이 제일 필요한 일은 바로 이런 거다. 그 끈질긴 생명력을 이용한 방어막 생성! 예전에도 검증되 었지만, 녀석의 생명력으로 생성한 방어막은 어떤 공격이라도 막아 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다. 그뿐만 아니라, 유물 덕분에 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다크 배 리어의 힘을 기대할 수도 있다. "다크 배리어!!" "우억!" 피닉스의 짧은 비명과 함께 내 앞에 펼쳐지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방어막. 보통 방어막은 당연히 아니다. 뭔가 찜찜한 색깔을 띤 방어막이다. 물론 지금 이 상황에서 색깔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지금 중요한 건 이 방어막이 얼마나 효과를 거두냐는 것! 그러나 그 점에서는 전혀 걱정할 게 없다. 피닉스의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으로 만들어 낸 방어막이 우리 앞에 짓쳐들어온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 주고 있었으니 까. 스으윽. 스으윽. 순간, 세르키스와 크라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 그와 동시에 내 앞으로 이동한 세르키스와 크라스가 어느 새 앞에 나타난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놈들...... 뭐냐? 갑자기 나타난, 여섯 개의 하얀색 날개를 가진 인간, 아니 천족...... 으로 보이는 존재.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무려 넷이나 되는 숫자가 세르키스 와 크라스 앞에 서 있었다. 아마 방금 전 그 무지막지한 공격을 한 주인공도 저분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니, 확실하겠지. 그들의 모습을 본 크라스가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이런, 이런. 4대 천사장 님들이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크라스." "소멸의 크라스......" "네놈이 여기에 있다니!" "무슨 목적이지?" 크라스의 말에 천사장이라고 불린 네 명의 천족이 일제히 흥분했다. 크라스...... 정말 대단하신 분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말이다. 한편 크라스가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제 마스터가 여기에 있으니까요." "네놈의 마스터라...... 하하하!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 "우리의 마스터가 여기에 행차하셨다." ......뭐, 뭐냐? 갑자기 이야기가 뭔가 애매모호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느낌 이 드는 이 시점은...... 순간, 내 앞에 천천히 나타나는 한 소년! 대략 나보다 한두 살 어려 보인다. 키는 약 1756센티미터. 아주 큰 키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잘생 긴 얼굴과 선한 미소가 충분히 호감을 갖게 할 만하다. 한 마디로 여자들에게, 특히 누님들에게 먹혀 들어갈 만한 외모다. 그는 보기만 해도 눈부신, 하얀색의 프리스트용 로브를 입 고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더니...... "......다크프리스트이신가 보죠?" "나를 아네? 선제공격을 한 거랑, 뭔가 이상한 걸 장치한 걸 보면 그리 좋은 의도를 가진 건 아니겠군." "정답입니다." "뭐냐, 네놈의 목적은?" "당신의 목숨입니다." "내 목숨? 설마...... 그 자식들에게 고용된 거냐?" "워낙 액수가 많아서 말이죠. 그리고 악에 물든 다크프리스 트를 처지하는 건 제 입장에서는 아주 좋거든요." "......" 이 녀석. 분명하다. 심심하면 나타난 나를 없애려는 그 이상한 단체에 고용된 놈이다. 어쨌든 보통 프리스트는 아니다. 내가 평범한 프리스트에게 당할 레벨은 아니라는 걸 저쪽 에서도 잘 알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녀석의 정체는 뭐지? 순간, 내 생각을 읽은 듯 녀석이 내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이프리스트......라고 소개하면 되겠습니까?" ......! 하이프리스트. 나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프리스트다. 강력한 힘보다는 강력한 서포트 능력을 가진 직업이다. 하지만 사악한 힘을 가진 존재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강하 다고 알려진 존재. 그것이 바로 하이프리스트라는 히든 클래 스의 직업이다. 나야 어떤 계열이든 상관없긴 하지만 하이프리스트는 조금 버겁다. 사실, 하이프리스트는 다른 존재에게는 그리 강력한 존재 가 아니다. 하지만 어둠의 힘을 사용하는 자, 즉 나 같은 다크프리스트 나 크라스 같은 마족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하이프리스트라는 직업이다. 제길. "여기에 뭔가 이상한 것을 설치한 것도 네놈이지?!" "악의 기운을 감소시킨 것뿐입니다." "......" 빌어먹을 녀석. 방금 전의 섬뜩한 느낌은 역시 나의 착각이 아니었다. 놈이 펼쳐 놓은 결계석이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한 것이다. 그나저나, 아주 세심하게 설치해 놓았나 보군. 다른 이들은 아무도 포착하지 못했으니까. 순간, 크라스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곤란하군요." "왜, 크라스?" "저 천사장 하나하나가 저 혹은 세르키스 님과 맞먹는 힘 을 지니고 있습니다." "......" "한 마디로, 두 명을 상대하는 게 한계입니다. 그럼 나머지 두 명은......" "......" 그거 참 미묘하군. 사실 우리 파티에서 동원 가능한 전력이라고 해 봤자 나와 세르키스, 크라스가 전부다. 여자들은 당연히 전력에서 제외되고 수컷인 가르, 데인, 피 닉스 녀석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장담하건대 저놈들, 저 천사장들에게 덤볐다가는 1초 만에 죽을 것이다. 아, 이렇게 되면 내가 저 천사장 두 명과 하이프리스트를 상대해야 된다는 거냐? 마왕과 동급으로 쳐 주는 천사장 두 명에, 마왕의 힘을 압 도하는 하이프리스트를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무슨 수로!! 도무지 승산 없는 싸움이다. 아무리 유물급 스킬을 난사한다 해도. 제길. 나는 긴장에 휩싸인 채 앞에 있는 적들을 바라보았다. 순간, "서, 설마!!" 천사장 중 하나가 누군가를 보며 외쳤다. 그의 손가락은 데인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 당연한가. 같은 천족이니까. 그런데 쟤네들, 천사장이라 고 하니 계급 좀 있는 거 아니야? 그런 애들이 어떻게 데인 같 은 변태 하급 천족을 알고 있지? "......데인." "......" "......" "......" "......" 뭐냐, 이 분위기는. 천사장의 한 마디에 나머지 천사장들의 시선이 데인을 향 했다. 그들은 마치 엄청난 존재를 보듯 데인을 바라보고 있었 다. 이, 이거 왜 이래? "데인, 왜 네가 여기에 있지?" "그건 왜 물어?" "묻는 게 당연하지! 네놈이 여기에 있으니까." "흐으음......" "천계에서 투신이라고 불리던 천사장인 네놈이 말이다." ...... 뭐? 투신?! 소의 신? "네놈이 왜 여기에 있냔 말이다!" 맨 앞에 있던 천사장이 화를 내면서 물었다. 언제 소환했는 지, 은빛으로 빛나는 검을 든 데인이 그들에게 다가가면서 말 했다. "알 거 없잖아?" "......" "그나저나, 너희가 나타났다면 마에스트로 혼자 힘으로는 안 될 테니 내가 널 상대해 주지." "데인!!" "......" 누가 지금 이 심오한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면 정말 고맙겠 다. 천계에서 투신이라고 불렸다고? 평소에 밟히면 아아아아...... 하는 소리나 내면서 좋아하던 녀석이 사실은 천사장에다가, 천계에서 투신이라고 불릴 정도 로 엄청난 존재...... 였다는 거냐?! ...... 믿을 수 없다. 순간, 데인의 말이 들려왔다. "가르, 너도 한 명 맡아 줘." "......싸움은 싫은데요." "어차피 적이야." "......그렇군요. 어쩔 수 없네요." 또다시 덮쳐 든 이 거시기한 상황은 뭐지? 데인의 대변신에 아직 적응 못한 나에게 날아든 또 한 차례의 거시기한 상황. 한 마디로, 어이없다. 가르, 설마 너도......? 스으윽. 그때 정말 오랜만에 머리를 뒤집어썼던 후드를 벗는 가르. 항상 후드를 푹 눌러쓰고 다니는 바람에 얼굴, 아니 뼈다귀 한 번 보기 힘든 가르의 얼굴이다. 그런 가르가 자발적으로 후드를 벗었다. 그리고 그런 가르는 뼈다귀 손을 허공에 젓더니. 파지짓! 파지짓! 하는 소리와 함께 이상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그것도 허공에. 스르르륵!! 그와 함께 허공에서 스며 나오는 지팡이 하나. 대략 1미터 길이에 겉보기에는 보통 지팡이와 다를 바가 없 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상상 초월의 힘이었다. 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돼 가는 거야? 한편 어느 새 그 지팡이를 잡은 가르. 그는 그대로 그 지팡이를 바닥에 찍더니, "디스펠." 파직!! ......깨졌다.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결계식이 깨지고 말았다. 하이프리스트가 우리의 힘을 약화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결계식. 사실 그리 강한 결계식은 아니었다. 나도 마음만 먹으면 쉽 게 깰 수 있을 정도의 결계식이다. 하지만 방금 전 가르가 했던 것처럼 단 한 마디만으로는 깰 수 없다. 나에게는 저런 기술이 없으니까. 왠지 비참하군. 어쨌든, 가르의 한 마디에 결계식은 산산조각 나 버렸고 뒤 이어 비명(?)들이 들려왔다. "가르!!" "가르!!" "마신의 대리자 가르!!"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가르가!!" ......천사장들의 비명이었다. ...... 아아아아. 쓰러질 것 같아. 솔직히 말해, 천사장들이 갑자기 나타나 우리를 급습했다 는 사실보다 갑자기 너무나도 충격적인 정체를 드러낸 가르 와 데인 때문에 더욱 머리가 아파 온다. 저놈들...... 사실 약한 게 아니었다. 힘을 쓰지 않았을 뿐, 절대 약한 놈들이 아니었던 거다. 그, 그렇다면 설마!! 나의 시선이 재빨리 피닉스를 향했다. 피닉스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왜 보는데?" "......" "뭔 볼일 있어?" "넌...... 뭐 감춰진 힘 같은 거 없냐?" "그게 뭔데?" "......" "원래 잘났는데 여기서 더 멋져지라고? 그건 좀 힘든 요구 인데." "......" "뭐, 최선을 다해 줄게. 난 전설이니까." 내가 미쳤지. 잠깐이지만 녀석이 뭔가 힘을 감추고 있을 거라 생각한 내 가 바보다. 녀석에게 그런 걸 바랄 바에야 차라리 지나가던 개미가 변 신해서 슈퍼맨이 된다는 말에 더 믿음이 간다. 뭐 어찌 됐든, 지금 상황이 다소 혼란스럽긴 하지만 우리에 게도 희망이 생겼다. 세르키스, 크라스, 가르, 데인이 천사장들을 한 명씩 상대해 주고 내가 저 하이프리스트를 상대하면 될 것이다. "최고로 어려운 싸움이 되겠는걸?" 나는 그 말과 함께 메이스를 꺼냈다. [다크프리스트 vs 하이프리스트] "다크 블레스." -모든 능력치가 880 상승했습니다. 그 말과 함께 내 몸을 감싸 안는 엄청난 힘. 역시 나의 '완소 스킬' 이다. 그리고 뒤이어......! "다크 헤이스트, 프로코스!!" 상대방의 스피드와 능력치를 빼앗아 오는 나의 주력 스킬! 어떤 의미에서는 다크 블레스보다 더 위력적일지도? 그런데!! -상대방에게는 시전되지 않습니다. ...... 뭐, 뭐시라? 난 경악했다. 시전이 되지 않는다고! 이 무슨 개뼈다귀 갉아 먹는 소리?! "설마 제 힘을 흡수하시려고 한 건가요?" 순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채 나에게 말하는 하이프리스 트. 그 물음에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녀석을 바라만 보았다. 하이프리스트가 말했다. "이거 유감스럽게도...... 제게는 특별한 힘이 있거든요." "......그거 참 좋은 힘이네." "그렇죠. 유물의 힘이니까요." "......" 유물의...... 힘이라 하면, 나처럼 그 사기적인 스킬을 가지 고 있다는 거냐? 제길. 머리가 더 아파 온다. 상대하기 어려운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짜로 이런 놈이 존재할 줄이야. "공격하세요." "......" 게다가 먼저 공격하라며 친절하게 양보까지 해 준다. 허허, 기분이 나쁘면서도 어이가 없다. 그래, 공격하라 이거지? 그럼 공격한다!! "트레메인!!" 순간 내 주위에 생성되는 어둠의 구. 그 어둠의 구들이 엄청난 속도로 하이프리스트를 향해 다 가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아앙! 콰아앙! 콰아앙! 연이어 폭발이 일어났다. 동시에 내 몸도 움직였다. 고작 이 한 방에 죽을 놈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데라진!!" 스으윽! 나는 거의 바람과 같은 속도로 하이프리스트를 향해 다가 갔다. 그런데...... 그 폭발 속에서 나는 보고 말았다. 유유자적하게 웃고 있는 녀석을. "......" "훗, 참고로 저는 전투를 못합니다." "......뭘 말하고 싶은 거냐?" "저는 전투프리스트가 아니에요. 하지만 말이죠, 당신의 부 하들과 싸우고 있는 천사장들의 힘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 "그리고 저는 여기서 방어막만 펼쳐 놓고 있으면 모든 게 끝이죠." "다크 스트림!!" 끼이익!! 나는 곧바로 어둠의 악령을 소환해서 녀석의 방어막을 갈 겨 버렸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제 클래스를 잊어버리신 건가요? 훗." "이렇게 재미없게 싸울 거냐?" "당연히 이렇게 싸워야죠. 생각해 보세요. 제 전투 실력으 로 싸움의 신이라고도 불리는 다크프리스트를 이길 수는 없 지 않습니까?" "......" "그럼...... 서서히 버프를 걸어 볼까요. 후훗." "......!" 그리고는 눈을 감는 하이프리스트. 다음 순간 그의 입이 열렸다. "라메리아진!!" ......! 하늘에서 무언가 범상치 않은 빛이 내려온다. 그리고 그 빛은 나의 동료들과 싸우고 있던 천사장들의 몸 을 휩쌌다. ......제길!! "스크라펠스." 이번에는 하얀색 마법진 같은 것이 천사장들의 발밑에 소 환되는가 싶더니 그대로 그 힘이 흡수되었다. 이 자식, 도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거야! "케리페이션." "......" "플페리시진." 계속해서 시전되는 버프 마법. 엄청나다. 이게 바로 버프의 신이라고 불리는 하이프리스 트의 진정한 능력인가? "이런......!" 그때 크라스의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하이프리스트의 녀석의 버프 마법이 걸린 지 1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들려온 비명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호각으로 싸우던 크라스가 비명을 토해 낸 것이다. "......재미없는 녀석." "장담하죠. 5분 안에 당신의 부하는 모두 쓰러집니다." "......" "저를 이길 방법은 단 한 가지, 이 방어막을 부수는 거예요. 하이프리스트인 저의 영혼이 담긴 이 방어막을 말입니다." "......" 해보자는 거냐? 그래, 좋다.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루비언!!" -모든 능력치가 8,800 상승했습니다. 단, 한 존재에게는 시전되 지 않았습니다. 그 단 한 존재란 아마도 바로 내 앞에 있는 저 녀석이겠지. 그나마 다행한 일은 내 루비언에 상대방 천사장들의 힘이 대폭 감소되었다는 것. 나의 유물급 스킬을 지켜본 하이프리스트가 살짝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유물 스킬입니까?" "바로 맞혔다." "......" "네가 이렇게 재미없게 놀면 철저히 부숴 주지. 너의 방어 막이란 걸 말이야." "그거 재미있는 말이군요." "그래, 재밌어 해라." 사실, 지금 나에겐 제약이 많다. 내 힘은 상대방의 힘을 흡수해 사용할 때 가장 위협적이다. 그런데 내 앞에 있는 저 하이프리스트 녀석은 유물급 스킬 로 그런 내 힘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한 마디로 내가 불리한 상황. 하지만 난 믿는다. 다크프리스트의 파괴력을...... "다크 스트림!! 일루전 크레이전!!" 끼이익!! 어둠의 악령과 함께 생성된 메이스의 그림자 잔재들. 나는 여전히 웃고 있는 녀석의 면상을 향해 그대로 메이스 를 갈겼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루비언의 시전으로 초인적인 힘을 갖게 된 내가 다크 스트 림에 일루전 크레이전, 게다가 쉴 새 없이 터지는 불멸의 일진 까지 시전하자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났다. 그 어떤 존재라도 다 부숴 버릴 만한 힘이었다. 하지만...... 부수지 못했다. 녀석의 방어막을. "이런, 방어막에 흠집이 생겨 버렸군요." ......라는 말이 전부다. 그리고 그 흠집조차, 언제 생겼냐는 듯 바로 복구됐다. 저 녀석, 정말 방어력이 얼마나 강한 거야! "당신은 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지랄 염병하네." "......" "난 이겨. 반드시!!" "무슨 수로 이 방어막을 부술 건가요?" 난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진짜 무슨 수로 저 방어막을 부술 수...... "제자, 너무 단순해도 재미없다고. 부수지 못하면 흡수하면 되지." "사기꾼 인간!" "허허, 오랜만에 만난 스승한테 사기꾼 인간이라니, 섭섭한 걸." 어느새 내 앞에 나타나 미소를 짓고 있는 세키린. 왠지 모르게, 지금 상황에 내 앞에 나타난 저 작자가 고마 워진다. 난 그에게 소리쳤다. "가만히만 있지 말고 저 방어막 좀 부숴 봐!" "난 무리야." "......" "알다시피 난 유물의 힘을 갖지 못했어. 하지만 넌 가졌지. 이미 내 힘을 뛰어넘은 너도 못 깨는 걸 나라고 깰 수 있겠어?" "......" "방금 전의 그 말, 잘 생각해 봐. 부수지 못하면 흡수하면 된다는 그 말. 그럼 이만." ......뭐, 뭐야? 저 인간!! 그 한마디만 내던지고 그대로 사라지는 사기꾼 작자. 나뿐만 아니라 내 앞에 있는 하이프리스트도 황당해 하는 표정이다. 그는 내게 말했다. "스승인가 보죠? 훗." "누가 스승이야? 난 저런 사기꾼 스승으로 둔 적 없어!" "흐으음......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죠. 1분 남았습니다." "......!" 난 재빨리 주변을 살펴보았다. 세르키스, 크라스, 가르, 데인까지 모두 멀쩡한 모습이 아니 다. 하이프리스트의 스킬이 얼마나 강했으면 모두 초주검이 되 어 있었다. "20초 남았습니다. 후후훗." "......" 얄밉게 시간을 말해 주는 녀석. 하지만 화낼 때가 아니다. 빨리 저 방어막을 부수지 않는다 면...... 하지만 조금 전 세키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 는다. 파괴하지 못하면 흡수하라니, 뭘? 안 그래도 흡수 능력이 들어먹지를 않아 곤란한 내게 말이 다. "10초 남았습니다." 재촉하지 마!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야! 그렇게 절규하던 나의 눈에 천사장의 칼에 배를 관통당할 위기에 놓인 데인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제길!!" 나는 그렇게 소리치며 하이프리스트 녀석을 무시한 채 그 대로 데인에게 달려갔다. "데라진!!" 나의 몸이 초고속으로 내달려 그와의 간격을 좁혔다. 나는 곧바로 천사장의 등을 점령한 뒤 공격하려 했다. 그 순간...... '부수지 못하면 흡수하면 되지.' 세키린의 한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데인을 공격하려는 천사장에게 다가가 중얼거렸다. "다크 헤이스트, 프로코스!!" 파아앗!! 순간 내 온몸에 감싸 안는 힘. 그렇다. 흡수된 것이다. 천사장에게는 내 기술이 통한다. 그렇다면!! 퍼억!! "크아악!!" 나는 데인을 공격하려던 천사장을 그대로 내팽개친 뒤, 활 기를 되찾은 얼굴을 하고 나머지 천사장들을 향해 달려갔다. "모두 내 밥이나 돼라!!" 흐흐흐...... 흐흐흐흐...... 흐흐흐흐흐...... 온몸을 휘감는 힘. 말로는 표현 불가다. 모두 네 명의 천사장의 힘을 흡수했다. 한 사람당 50%의 힘 을 흡수했으니, 네 명의 힘이라면 천사장 두 명의 힘을 갖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하하. "이런......" 내가 천사장들의 힘을 흡수하는 걸 본 하이프리스트의 얼 굴에는 곤란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웃었다. 그리고 외 쳤다. "다크 스트라이크!!" 내 머리 위에 어둠의 구가 생성되었다. 가로세로 10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의 구다. 게다가 그것에 담긴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왜냐고? 내가 가진 모든 힘과 천사장들에게서 슬쩍한 힘으 로 시전한 거니까. "어이, 하이프리스트 양반." "......" "내가 네 방어막을 못 부술 거라고 했지?" "......" "기대하라고. 금방 부숴 줄 테니!!" 나는 그 말과 함께 온몸의 힘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이 한 방이다. 이 한 방에 모든 걸 걸겠다. "자, 가라!!" 파아앗!! 내가 던진 검은색 구가 엄청난 속도로 하이프리스트를 향 해 날아갔다. 그리고 곧 터져 나오는 충돌음! 콰아아앙!! 어마어마하다. 하이프리스트가 만든 방어막과 내가 만들어 낸 어둠의 구 의 힘이 얼마나 강력했으면 순간 지진이 일어난 듯 느껴질 정 도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하이프리스트가 만들어 낸 방어막 주변 의 땅이 모두 부서졌다. "으으윽!!" 하이프리스트의 신음이 들려왔다. 나는 다시 외쳤다. "가라고!!" 그 순간, 빠직!! 내가 시전한 어둠의 구가 하이프리스트의 방어막을 부숴 버렸다. 그와 함께. 콰아아앙!! 그날...... 그 폭발은 전설이 되어 버렸다. "도무지 누가 싸웠는지 예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온통 난리였다. 제리진 마을로 향한 길목에서 일어난 엄청난 폭발. 지름 30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구덩이를 중심으로 족히 반 경 1킬로미터는 여기저기 파괴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도대체 어떤 힘이 작용해서 이 정도의 구멍을 만들었는지 미스터리였다. "랭킹 1위랑 2위가 싸웠다 치더라도 저 정도의 구덩이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게임에 저희가 모르는 미지의 존재 들이 있는 걸까요? 그 누군가......" 띠잉. 나는 '에피리 월드'에 대한 특집을 방여하는 텔레비전을 꺼 버렸다. 왜냐고? ......좀 그랬으니까. 저 구멍을 만든 존재는 나다. 유물급 스킬로 무장하고 천사장 두 명의 힘을 흡수한 내가 만들어 낸 구멍. 사실 평범한 존재는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 없는 크기의 구 멍이긴 하다. 아, 좀 무안하네. 복면을 뒤집어쓴 두 명의 남자가 약간 침체된 분위기로 마 주 보고 있었다. "또 실패인가?" "죄송합니다." "......아니다. 역시 다크프리스트. 이렇게 된 이상 최소한 의 인원만 남기고 다크프리스트 건에서 손을 뗀다." "그, 그 말씀은......?" "그래, 위험성이 있긴 하지만 주신과 마신을 잠재운 그 존 재를 깨우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하, 하지만 다크프리스트가 있다면......" "아니, 상관없을 것이다. 주신과 마신을 잠재운 그 존재의 힘을 믿는다. 그리고 다크프리스트가 유물을 다 찾기 전에 부 활시킨다." "모험입니까?" "그렇다." 그 말을 끝으로 두 남자 사이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무인도......?] 무인도. 아무도 없는 섬이다. 그리고 바다 한복판에 외롭게 떠 있는 섬이기도 하다. 무인도...... 이 곳은 생존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곳이다. 물도 식량 도 부족하고, 잠자리도 아늑하지 않다. 게다가 별의별 게 다 튀어나오는 게 무인도다. 여기서 궁금할 것이다. 왜 뜬금없이 무인도에 대해 얘기하는지 말이다. ...... "피닉스!! 이 개자식!!" "우어억! 혀, 형제여! 진정하십시오!" "진정해!"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저 자식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된 거잖아!" "......" "......" "저 새끼를 삶아 먹어 버리겠어!!" 30분 전이었나? 우린 분명 육지에 있었다. 게리메일이라는 마을에 도착한 뒤였다.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여자들은 즐거워하면서 먼저 마을 로 들어갔고 크라스와 세르키스도 그런 그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따라갔다. 남은 건 나와 가르와 데인과 피닉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당당한 걸음으로 그녀들을 따라가려고 마을에 들어가려는 순간! 피닉스 녀석이 뭔가를 주워 왔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이곳에 와 있게 된 원인...... 정체 불명의 종이였다.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그냥 그 종이를 쳐다봤을 뿐인데, 빛 이 번쩍하더니 어느새 이런 곳에 와 있었다. 이유조차도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 하지만 단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피닉스가 길바닥에서 아무어간 주워 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절대 발생하지 않 았을 거라는 것. "그나저나 우, 우리 어떡해?" 데인이 잔뜩 겁먹은 어조로 물었다. 나는 그런 데인의 말에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일단 여자들에게 말해 놨으니 찾아 주겠지." "무슨 수로?" "......그걸 알면 빠져나가지." "서, 설마 우리 해골뼈다귀가 될 때까지 여기 있어야 되는 거야?" "부, 불길한 소리 하지 마!!" "하,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없어!" 나는 데인의 말에 그렇게 소리쳤다. 해골뼈다귀라니...... 게임 안에서 갑자기 이상한 데로 떨어지더니 결국 굶어 죽 어서 해골뼈다귀가 되는 시나리오는 전혀 재미없다. 맞다!! "가르!!" "네, 형제여." "텔레포트!!" "안 됩니다." "내가 말하는 건 렌덤 텔레포트야. 너한테 뭘 기대하겠니?" 가르가 아무리 강한 녀석이라 해도 역시 텔레포트 좌표도 제대로 못 잡는 바보 리치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가르가 말했다. "렌덤 텔레포트가 안 된다는 건데요." "왜?" "뭔가 방해장이 느껴집니다." "그럼, 지난번처럼 멋지게 디스펠 한 다음에 가는 건?" "마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뭔데?" "모릅니다." "......" "......" "......" 우리 사이에 심오한 정적이 흘렀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야. 왜 잘 나가다가 이런 김밥 옆구리 터지는 상황이 연출된단 말인가! 하지만 또다시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 "데인, 날개!!" "갑자기 무슨 소리?" "너 전직 천사장이라면서!" "응, 그런데?" "그러니까 지난번 천사장들처럼 날개를......" "나 천사장 박탈당했어." "그, 그래도 천족이잖아. 기본적으로 날개는......" "그런 거 안 키우는데." "......" "......" 2시간 후. ......덥다. 이상하게 덥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뜨거운 태양, 상당히 덥 다...... 번쩍.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묘안. "그래! 일행이 우리를 찾을 때까지 로그아웃을 하면 되는 거야!!" 그랬다. 아주 간단한 방법. 지금 이 상황은 현실이 아니다. 게임이므로 로그아웃하면 끝이다. 순간 갑자기 내게 우르르 몰려드는 삼인방. 그러더니 엉겨 붙기 시작했다. "저희를 버리고 가지 말아 주세요!!" "배신하지 마!!" "같이 죽고 같이 살아야지!!" 내가 왜 네놈들과 같이 죽고 같이 살아야 되는 거냐? 나 혼자 살련다. 크하하하! ......크흐으음. 좀 무안하군. 어찌 됐든 가볍게 로그아웃을......! "로그아웃!!" "우어억!!" "안 됩니다!!" "배신자!!" 가지각색의 비명이 들려왔지만 상관없다. 크하하하! 이제 나는 현실로...... -이곳에 들어온 이상 20시간이 지나야지만 로그아웃이 가능합니 다. ...... 뭐, 뭐냐?!! 이 이상한 소리는! 20시간이 지나야 로그아웃이 가능하다고? 마, 말도 안 돼!! 이 게임에서 내 의지로 로그아웃이 안 된 건 이번이 두 번 째였다. 지난번 인형으로 변해서 못했던 게 첫 번째. 그리고 지금 이 정체불명의 섬에 떨어져 로그아웃이 불가능해진 게 두 번 째. ...... 으아악! "풋." "풋." "벌 받은 겁니다." "죽고 잡냐?" "......" "......" "......" 나는 나를 보고 비웃는 삼인방을 향해 눈을 번뜩이면서 한 마디 던졌다. 안 그래도 로그아웃이 안 돼서 혈압 상승 중인데 저것들 이...... 제길, 하필 재앙 중에도 이런 거지 같은 재앙이냐! 왜! 왜! 왜! 하필 무인도야!! 3시간이 지났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 덥다. 뿐만 아니라 목을 축일 게 필요하다. 한 마디로, 목마르다 는 소리. "더, 더워!!" 피닉스의 외침이 들려왔다. 근데 네놈이 왜 더운 건데? "넌 불새잖아." "불새라고 덥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그건 그런데...... 왜 불새가 더위를 느끼는 거지? 참으로 아리송한 미스터리다. 하지만 뭐, 그런 사소한(?) 것에 궁금해 하기보다는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불새인 피닉스가 왜 더위를 느끼는지, 왜 갑자기 이런 상황 이 연출되었는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일단 살고 봐야 할 것 아 닌가? 생각도 살아야지 할 수 있는 거니까. "일단, 마실 걸 찾자." 이곳은 무인도다. 그렇다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주변에 가득한 물. 하지만 그 물은 식수가 될 수 없다. 바닷물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마음 놓고 마실 수 있는 물을 구해야 하는데, 이 런 무인도에서는 식수를 찾기가 쉽지 않다. "앗, 야자수다!" 순간 데인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나는 눈을 번쩍이면서 데인이 가리키는 방햐응로 고개를 돌렸다. 대략 3미터 정도 떨어진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야자열매 하나. ...... 무한의 정적이 흐른다. 나와 데인, 피닉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가르는 별 관심 없어 보인다. 우리 사이에 갑자기 내려앉은 정적. 나는 대충 알 수 있다. "......노리는 거냐?" "물론." 나의 말에 데인이 상큼한 어조로 대답했다. 만약, 만약에 데인이 변신해서 본래의 전투력을 갖게 된다 면 이 섬은 분명 파괴된다. 솔직히 내가 데인에게 질 리는 없 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다. 평소라면 얌전히 맞을 녀석이지만 이렇게 목숨이 걸린 쟁 탈전에서까지 가만히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한마디로, 우리가 붙으면 승자는 결국 내가 되겠지만 이 섬 은 파괴될 거라는 것. ...... "타협하자." "좋아." "나도." 그때 갑자기 끼어드는 피닉스. 나는 피식 웃었다. "네놈은 왜?" "왜냐니? 당연히 나도 끼워 줘야지!" "너는 타협할 가치도 없어." "......" "그냥 묻어 버리면 되거든." "아, 악마!!" "훗." "데인, 저 악마한테 뭐라고 좀 해 봐!" 피닉스가 데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데인은 냉정히 말한다. "같이 묻자." "이, 이 배신자들!! 나 혼자 가 버릴 거야!" 피닉스는 그 한 마디를 던진 뒤 펄럭펄럭 하늘로 날아올랐 다. ......! 혼자만 가는 거냐? 이 배신자......라고 하려 했는데. 퍼억! 뭔가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가 부딪치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하늘에서 추락하는 새 한 마리. 그 이름 하여 피닉 스. 피닉스는 한동안 해롱거리더니 곧바로 기절해 버렸다. 심히 난감하다. "하늘도 막혔나 보군요, 형제여." "그런가 보다." 가르의 말에 나는 약간 힘이 빠진 어조로 답했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완전 무인도라는 거냐? 텔레포트도 안 되고, 하늘로도 못 날아가고, 심지어 헤엄쳐 서 갈 수도 없고. 이런 제길. 다다닥. 일단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목을 축이는 게 더 중요하다. 나는 3미터 정도의 나무에 가볍게 올라가 그대로 야자열매 를 낚아챘다. 그리고 우아하게 착지. 내 생각에 100점 만점에 100점이다. 캬아∼! "야자열매! 야자열매!" 내가 따 온 야자열매를 보고 열광하는 데인. 그리고 그 뒤 로 침울해 있는 피닉스가 보였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의 피닉스를 본 나는 약간 미안해져서 말했다. "줄 테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알아." "......" "난 전설이잖아." "......" 아, 갑자기 주기 싫어진다. 내 한 마디에 언제 침울해 있었냐는 듯 태도가 싹 달라지는 피닉스 녀석. 평소에는 머리 나쁜 새대가리인 주제에 이런 쪽으로는 머 리가 빠르다. 그것보다 빨리 이 단단한 야자열매를 쪼개야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메이스를 치 켜들었다. 설마 이 신급 무기에 달하는 메이스가 야자수 쪼개 는 데 사용될 줄은 몰랐다. 나는 아주아주 느린 속도에 아주아주 작은 힘으로 야자열 매를 타격했다. 그런데! 푸욱. ...... "안 돼!!" "안 돼!!" 절규가 들려온다. 털썩. 나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마, 말도 안 돼!! 우리는 모두 주저앉았다. 이미 야자열매의 형상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고, 즙(?)만이 남아 있었다. 아니, 즙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다. 내 메이스에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으니까. ...... 8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일어설 힘도 없다. 여기는 왜 이렇게 유독 어두운 걸까? 여기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분명 그냥 평범한 날씨였다. 근데 여기는 아니다. 거의 40도 가까이 되는 것 같다. 30도만 넘어도 미칠 지경인데 40도라니...... 목이 너무 말라서 온몸이 물 달라고 아우성이다. 그나마 눈 앞에 있는 바다에 몸을 담그고 있지 않다면 진작 말라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이 바닷물도 점점 뜨거워진다? ...... "없어! 없어!! 없어!!" 물을 찾으러 갔던 데인이 절규와 함께 돌아왔다. ......진짜 없냐? "데인! 지하수라든가 동굴이라든가 뭐 그런 건!" "동굴이 하나 있기는 한데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보다 나 타 죽겠어!" 첨벙! 그렇게 외치면서 물속으로 뛰어드는 데인. 하지만 곧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앗! 물이 왜 이리 뜨거워!!" "저 태양을 봐라." "......" "......" "저, 저기. 마에스트로." "왜?" "우리 정말 무인도에서 말라 죽는 거야?" "재,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나머지 일행이 최선을 다해 찾고 있다고 그랬어." "하,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 데인의 말에 나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지금 예은과 메시지를 주고받고는 있지만 그쪽에서 도 영문을 모르겠단다. 크라스와 세르키스조차도 우리의 기운 자체를 잡지 못하고 있다니, 할 말 다했다. 이게 도대체,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일단 태양을 피하자.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 죽는다." "응응, 그러자." "알았어. 피닉스 죽네, 죽어!!" 내 말에 데인과 피닉스가 다급히 따라나섰다. 그런데 한 존 재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가르?" "네, 형제여." "넌 안 오냐?" "전 잠깐만......" "뭐. 너는 해골이어서 안 더운가 보구나. 부럽다. 그럼 천천 히 오렴." 나는 그 말과 함께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순간, 내 머리를 강타하는 어떤 감각. 뭔가 미묘한 느낌이다. "모두 배가 고프실 겁니다. 제가 물고기를 잡아가면 모두 감동하시겠죠." 가르는 생각했다. 그로서는 물고기를 잡아 모두에게 식량을 가져다 줄 순수 한 의도였다. 가르의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왔다. "화염 속에 불타는 운석이여. 영혼조차 부숴 버리는 그대의 강력함으로 내 앞에 있는 존재에게 운석을 내리노니, 메테오 스트라이크!!" 아, 맞다!! 나는 깜빡했다. 식수만 생각하느라 다른 걸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바로 식량. 중요도에서는 식수와 쌍벽을 이루는 식량이다. 식랴엥 그리 신경을 쓰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있 는 무인도 앞바다에 수없이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들. 그걸 잡으면 식량 걱정은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수풀 속으로 들어가는 이상 물고기를 좀 잡아야 할 것 같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그렇게 되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파지짓! ...... "데인." "응?" "저거 뭐냐?" "어디, 어디?" "저거 공간이 열렸잖아." "어라? 그러네?" 그렇다. 허공에 생성된 검은색의 어마어마한 공간의 문. 마 치 운석이라도 떨어질 듯한 느낌. 서, 설마!! 나는 빛의 속도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빠르게 해안으로 되돌아갔다. 거기에는 마침 운석이 낙하 중에 있었고, 다급히 달려온 나 를 보고 기분 좋은 목소리를 내는 가르가 있었다. "형제여! 제가 식량을 구했습니다!" "안......돼!!" 콰아앙! 그 순간 물고기는 전멸. 즉, 식량마저 고갈되었다. 퍼퍼퍽! 퍼퍼퍽! "으아악!!" "이 개자식아!!" "혀, 형제여!!" "넌 안 처먹어도 된다고 일부러 그런 거지!!" "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구라 치지 마!!" "저, 정말입니다!!" "마에스트로, 진정해!!" "진정하게 생겼냐, 데인? 저 자식이 메테오 스트라이크로 바다를 통째로 날려 버렸다고!!" "부, 분명 좋은 의도였을 거야." "......어떤 의미에서?" "......" "넌 물고기 잡는 데 메테오 날리는 게 좋은 의도로 보여?" "아, 아니......" "저, 전 정말 억울합니다. 이왕이면 많이 잡으려고......" "......" 아...... 쓰러질 것 같다. ......많이 잡으려고 메테오를 날려? 그럼 조금 잡으려면 뭘 날려야 하니? 어이가 없다. 아니, 10시간이 넘도록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온몸이 후 들거린다. 그와 함께 살인적인 더위. ......이건 아니다. 털썩. 나는 근처에 있는 나무에 힘없이 몸을 기댔다. 계속 패 봤자 나만 기운 없어진다. 그나저나, 역시 숲 속이어서 그런지 훨씬 시원하다. 물론 직사광선이 쏟아지는 저 해안에 비하면 시원하다는 얘기다. 으아악, 더워! "더워 죽겠다. 이러다가 전설적인 나까지 어떻게 되는 거 아냐?" "......" "다른 애들은 죽어도 난 살아야......" 스으윽. 순간 내 손이 재잘거리던 피닉스의 몸을 낚아챘다. 그리고 녀석을 지그시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배고픈데 이거나 먹을까?" "무, 무슨 소리야!!" "그게, 꽤 괜찮을지도......?" "데, 데인까지 무슨 소리야!" "비상식량 피닉스라...... 괜찮군." 씨익. 나는 그 말과 함께 씨익 웃었다. 그러자 오들오들 떠는 피닉스. "이건 야만인이나 할 짓이야!!" "그냥 야만인 할래." "......" "데인, 끓여 먹을래, 회쳐서 먹을래, 구워 먹을래?" "흐으음. 셋 댜?" "그럼 삼등분......" "이 야만인들! 나한테 이러면 안 돼!!" 피닉스가 절규했다. 나는 그런 녀석의 반응을 보고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농담이다." "......" "뭘 그렇게 과민하게 반응하냐? 네놈 먹어 봤자 배도 안 찬 다." 순간 데인이 실망한 표정으로 물었다. "농담이었어?" ......진담이었겠니? 그나저나, 앞으로 어떡하나. 흐흐흑. 14시간 경과. 흐흐흑.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인도에 조난된 지 14시간이 지났다. 단순히 거동이 부자유스럽다는 이유로 이러는 건 아니다. 식량도 없고, 식수도 없고, 날은 찜통이고...... 괴롭다 못해 정말 괴롭다. 아, 이제는 생각도 꼬여. "기도합시다." "......" "......" "......" "저, 저기......" "......" "......" "......" "혀, 형제들?" "......" "......" "......" 가르가 불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왜냐고? 대꾸할 힘도 없다. 그저 무사히 이 악몽의 시간이 지나가기만 바랄 뿐이다. 사실 지금 우리 일행 중 말짱한 놈 은 가르밖에 없다. 역시 해골뼈다귀여서 그런지 더워하지도 않고 배고파 하지 도 않고 목말라 하지도 않는다. 이럴 때는 저런 몸이 꽤나 부러울 뿐이다. "모, 모두 기도합시다. 할렐루야!!" 너 혼자 많이 하렴. ......제발 무사히 살아 나가게만 해 주세요, 흑. 17시간 경과. 이미 살아 있는 존재는 없어 보인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와 데인, 피닉스. 모두 다 말라 가고 있다. 사실 지금 괴로운 건 굶주림보다 갈증이다. 배고픔은 참을 만한데 갈증은 정말 참기 힘들다. 당한 자만이 안다고, 허기보다 갈증의 고통이 훨 심하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렇다. "내가...... 죽......으면......" "노래......하지 마, 이 자식아......" "흐흐흑. 우리 말라 죽는 거야?" "......" 데인의 오두방정에 한 마디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 힘이 없다. 진짜 죽을 것 같다. 아주 옛날에 톰 존슨인간 톰 크루슨인가? 모르겠다. 어찌됐 던 톰 아저씨는 이 곳 무인도에서 잘만 살았다고 하는데 우리 는 단 하루만에 초토화됐다. 물론 이렇게 된 건 순전히 가르 덕분이다. 가르가 메테오만 날리지 않았다면 이런 일까지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 급하면 바닷물이라도 마시고, 바닷속을 헤엄쳐 다니는 엄청난 물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 온몸을 녹여 버릴 듯한 후끈한 열기도 바다만 있 었다면...... 으아악!! 바다야, 돌아오렴!! 흐흐흑. ......물론 이렇게 절규해 봤자, 가르의 메테오 스트라이크 에 완전히 날아간 바다가 돌아올 리 만무했다. 하지만 미래조차 없는 이 상황, 정말 막막하기만 하다. "......근데 가르는 어디 간겨?" "엥?" 그때 죽을 듯 뻗어 있던 피닉스가 힘겹게 일어나더니 내게 물었다. 그 물음에 나는 힘들게 고개를 돌려 가르의 모습을 찾았다. 그런데...... 가르가 없다? ...... "이 자식, 어디 간 거야!!"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놈이 사라졌다. 으아악!! 나는 알 수 없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그 순간, 저쪽에서 가 르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다. "혀, 형제여!" "너 뭐여! 어디 있다가......!" "발견했습니다!!" "......?" "이상한 집을 발견했어요!!" "......집?" "네." 무인도......에 집이 있어? ...... 난 내 앞에 있는 표지판을 보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정 힘들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세요. ......라고 집 앞 표지판에 친절하게도 써 있었다. 집은 아담한 오두막으로, 문을 열자 엄청나게 시원한 것은 물론, 많은 먹을거리가 있었다. 이건 뭐냐? "사, 살았다!!" "전설적인 나, 살았어!!" 그걸 본 데인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집 안으로 뛰어 들 어갔다. 그런 그의 뒤를 이어 피닉스도 얼른 날아 들어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20시간 초과. 드디어 로그아웃이 가능한 20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로그아웃으로 마음의 안정을...... 파우욱!! "으아악!!" 순간 내 몸이 이동되는 느낌이 들더니 순식간에 장소가 바 뀌었다. ...... 이번에는 어딘가의 가게 같다. 사람이 꽤나 몰려 있었고, 접수대로 보이는 곳에는 여러 명 의 여자가 숨 가쁘게 업무를 처리하게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무인도 체험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셨 군요." "......" "......" "......" "다들 왜 그러십니까?" 우리 앞에 나타나 무인도 체험이라고 말해 주는 아저씨.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무인도 체험......?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 "에?" "으아아악!!" "왜, 왜 그러십니까, 손님?" "그딴 거 만든 놈 죽여 버리겠어!" "소, 손님 진정......!" 그날 난 그 건물을 다 부숴 먹을 뻔했다. [흑마법사의 도시] 아아아. 아아아아. 아아아아아. ......이렇게 가만히 죽쳐서 노는 것도 지겹다. 벌써 한 3주는 되어 가는 것 같다. 목적을 잃은 채 방황하 는 양이 된 지 말이다.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냐 하면...... 2차 전직을 한다든가 다섯 번째 유물을 찾는다든가 하는 일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 고 있기 때문이다. 세키린이라는 작자는 지난번 하이프리스트와의 전투 때 나 타난 이후 잠수를 타 버렸고, 세르키스는 아직도 그 기생충인 가 뭔가의 기운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할 일은 없었고, 자연스럽게 방황하 는 양 역할밖에 할 짓이 없는 것이다. "아아아, 주여!!" 그때 너무나도 애타는 목소리로 신을 찾는 가르. 이제 저 모습은 너무도 친숙하다 못해 감동적이기까지 하 다. 솔직히, 기도하는 리치를 언제 어디서 보겠는가? 이 장면에 는 엽기쇼를 뛰어넘은 무언가가 있다. "아, 주여!!" 그때 가르의 옆에서 주를 찾는 새 한 마리. ...... 뭐냐? 넌 뭐니? "아아아, 제발 저에게 여자들이 무지, 무지, 무지, 무지, 많 이, 많이, 많이, 많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역시 피닉스의 녀석의 기도에는 저렇게 불순한 의도가 가득 하다. 그나저나, 가르 녀석 용케도 피닉스를 꾀었군. 아니, 피닉스 녀석이 워낙 단순하다 보니 꾀기는 쉽겠다. 둘 사이에 오간 대화를 대충 짐작해 보면...... '피닉스 님, 기도하면 여자들이 많이 올 겁니다.' '앗, 그래?' '확실합니다!! 기도야말로 아름다운 것!!' '오케바리!! 기도하겠어!!' 이런 스토리겠지, 뭐. 워낙 단순한 새니까. "앗!!" "뭐냐, 가르?" 나는, 갑작스럽게 기도하다 말고 앗 하고 소리치는 가르를 향해 무덤덤한 어조로 물었다. 가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다섯 번째 유물이 있는 곳이......" "뭐, 뭐라고?" 가르의 한 마디에 나는 갑자기 흥분해서 그의 곁으로 다가 갔다. 가르가 그런 나를 향해 엄청난 한 마디를 던졌다. "방금 생각났습니다." "......" 내가 가르를 만난 지 꽤 된 것 같다. 게임 처음 시작하자 만난 게 가르였으니까. 그만큼 우리는 오래 알고 지냈다. 그런데...... 그런데...... "이 돌대가리야!!" "우어억! 혀, 형제여!!" "아무리 바보라도 그렇지, 어떻게 유물이 있는 곳을 알고 있었으면서 지금까지 그걸 기억 못할 수가 있냐!" "......" "도무지 말도 안 되잖아!" "죄, 죄송합니다." 하아...... 진정하자, 진정해. 물론 가르가 보통 바보가 아닌 줄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일 줄은...... 아니, 물고기 잡는다고 메테오 날릴 때부터 짐작했다. 녀석 은 생각보다 더욱 바보라는 걸. 하지만...... 마신의 대리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으면서 다 크프리스트의 유물에 대한 걸 지금 기억해 내는 건 좀 아니잖 아? 그래,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자. 지금 중요한 건 유물의 행방이니까. "그래, 가르. 괜찮아. 이해할게." "......" "근데, 어디에 있니?" "흑마법사의 도시 바루스......라고 들은 것 같습니다." 흑마법사의 도시 바루스? 거긴 어디에 붙어 있는 데야? 크라스와 세르키스를 쳐다보자 그런 내 눈빛에 둘은 동시 에 말했다. "처음 듣는데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크라스는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드래곤 로드 세르키스가 모르다니!! 뭔가 느낌이 이 상하다. 나는 다급히 여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흑마법사의 도시 바루스라는 곳을 아시는 분?" "......" "......" "......" "......" 침묵만이 가득하다. 한 마디로 전원 모른다는 뜻? "흑마법사의 도시라는 건 처음 들어 보는데." 혜경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레니아가 그런 그녀의 말 을 거들었다. "저도 대부분의 마을을 돌아다녀 봤지만 그런 곳이 있다는 건 처음 들었어요." 이쯤 되자, 나의 시선은 자연스레 가르에게 돌아갔다. 왜냐고? "거짓 정보냐?" "아, 아닙니다!! 확실합니다!!" "근데 왜 아무도 모를까......?" "그, 그건......" "확실한 정보인데 왜 흑마법사의 도시가 있다는 걸 들어 본 사람이 한 명도 없지?" "그, 그거야 잘 모르겠습니다, 형제여." "그럼 너라도 알아야 되는 거 아니니?" "저야......" "저야?" "당연히 모르죠." "......" 모른다는 말을 저렇게 당당하게 할 수 있다니, 멋진걸? ...... "한 마디로 구라 정보잖아!!" "저, 정말입니다! 믿어 주세요!!" "넌 믿을 만한 대상에 속하지 않아!!" "......" "감히 나를 능멸(?)하다니!!" "정말인데......." "닥쳐! 죽었어!!" "리치 살려!!" 내가 엄청난 속도로 도망치는 가르 녀석을 잡기 위해 움직 이려 할 때였다. "마에스트로 님." "왜, 세르키스?" "흑마법의 도시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 있습니다." "허억, 정말?" "네. 그 마을 이름이 바루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흑마 법사들만 사는 마을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봤습니다." "그럼...... 거짓말이 아닌 건가?" "네, 아마도요." 가르가 거짓말한 게 아니구나. 흐으음. 약간 무안해지는군. 그나저나, "혹시 그 마을에 관해 알고 있는 게 있어?"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실 흑마법사만 살고 있는 도시라는 사실은 꽤 생소합니다." "흐으음." "하지만 그곳을 찾아가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곳이라니?" "마탑 말입니다." "설마...... 마법사의 탑?" "네. 그들이라면 흑마법사들에 대해 제법 알고 있겠죠." ......그렇겠군. 마법사의 탑에 속한 마법사들이라면 흑마법사들과 꽤 잘 아는 사이일 수도 있다. 물론 사이가 좋다는 뜻은 아니고, 속 된 말로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 난 사이라고나 할까? [행복의 요리?] "앗!" "뭐냐?"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피닉스 군. 쟤 왜 저래? "에, 에리아가......" "에리아가 왜?" 에리아라는 말에 나는 기겁해서 황급히 그녀가 있는 쪽으 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내 모습에, 피닉스가 카운트 펀치 한 방을 날렸다. "날 좋아하나 봐." "......" "어, 어떡하지? 나의 이 인기." "이게 무슨 슈퍼 거지 같은 소리냐?" "봐!!" "뭘?" "저 에리아의 사랑에 빠진 눈빛을 보란 말야." 그 말에 나는 에리아를 바라보았다. 저게 어딜 봐서 사랑에 빠진 눈빛이라는 거냐? 내 눈에는 네놈의 헛소리에 공포에 젖은 눈빛으로 보일 뿐 이다. "어이, 꼬마 아가씨, 내 어디가 마음에 들어?" "......" "뭐? 다 멋지다고?" "......" "미치겠군." '미치겠군'이 아니라 넌 벌써 미쳤다. 에리아는 분명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 혼자 미친놈처럼 수긍해 버리는 피닉스 녀석. 확 실히 미쳤다. "이리 와. 내가 특별히 뽀뽀해 줄게." 파닥파닥. 그러면서 에리아를 향해 날아가는 피닉스 녀석. 그런 피닉스를 본 에리아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마침내...... "우아아앙!" "에, 에리아?" "우, 울지 마.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언니들이 있잖아." 에리아가 울자 여자들이 그런 그녀를 달래 주었다. 에리아의 울음에 피닉스는 오히려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감동해서 울 것까지는 없는데 말이야." "......" "역시 난 멋쟁이." 덥석. 나도 모르게 피닉스 녀석을 잡았다. 그리고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눈에는 저게 감동해서 우는 걸로 보이니?" "응." "......" 차마 할 말 없게 만드는 답변이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거냐? "아니야!" 그때 갑자기 나타나서 태클을 거는 데인. 오호......? 데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녀는......!" 그녀는 뭐? "나를 밟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는 거냐!" "......" "자, 어서 밟아!" 그러면서 울고 있는 에리아 앞에 벌렁 드러눕는 데인. 얼굴 에 은근히 홍조를 띠는 것도 모자라...... "강강강이 좋아." ...... 강강강? 그건 뭐 하는 거니? 세게 세게 세게라는 말이냐? 아 참, 이 게 아니라......! "이 변태 자식!!" "우어억!!" 나는 벌렁 드러누워 있는 데인을 그대로 밟았다. 그와 동시에, 퍼퍼퍼퍽! "크아아악!!" "내가 밟아 주마!!" "너, 너무 아파!!" "닥쳐! 이 변태!!" "아아아아! 으아악!!" "도무지 개념이 있는 거냐? 10살밖에 안 된 소녀에게 변태 적인 일을 강요하다니!! 이 미친 자식!!" "으아악, 그만!!" "닥치거라!!" 퍼퍼퍽! "꾸에엑!!" 나는 그렇게 한참을 밟았다. 이윽고 거의 실신 지경에 돌입한 데인. 그 모습을 본 나는 살며시 숨을 가다듬고는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형제여! 신입니다." "......" "신을 믿어요, 베이비!" "......" ......우어억!! 그날 난 폭발하고 말았다. "푸, 풀어 주세요, 형제여!!" "뭐, 뭐 하는 거야!" "전설적인 날 이곳에 묶어 두다니!!" 난 나무에 묶인 채 지랄 발광을 해 대는 삼인방을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네놈들의 죄를 모르는 거냐?" "전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신을 찬양했을 뿐입니다." "마, 맞아! 나도 그저 순수한 마음에 밟아 달라고......!" "응, 응! 에리아가 나한테 반해서 그러는데 나보고 어쩌라 고!" 저 자식들...... 반성의 기미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흠. 뭐, 알겠다. 그럼 본격적으로 '고문' 해 주지. "가르." "네!" "넌 면제다." "저, 정말입니까?!" "그래, 다른 두 놈에 비해 순수함이 느껴졌으니까."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나를 도와야 할 거야." "......?" "차, 차별하지 마!" "이건 아니야!!" 나는 발작을 해 대는 피닉스와 데인을 쌩 무시한 채 냉소적 인 미소를 띠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가져오라는 것 가져 오도록." 내 앞에 펼쳐진 수많은 요리 재료들. ......별게 다 있다. 겨자, 고추장, 간장, 양파, 쇠고기, 생선, 마가린, 청량고추, 초장, 기타 등등. 거의 모든 재료가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니다. "무, 무슨 짓을......?" "서, 설마?!" 내 앞에 펼쳐진 재료들을 본 데인과 피닉스가 뭔가를 짐작 한 듯 말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씨익 웃으며 말해 주었다. "특별 요리야." "......" "......" "뭐, 몸에 좋은 거지." "제, 제발 그냥 때려 줘!!" "그냥 맞을게!!" 지난번 실험 대상이 된 적이 있는 그들이다. 그때 상당히 괴로웠던 일이 새삼스럽게 다시 떠오르는지 그들이 애절하게 외쳐 댔지만 당연히 기각이다. 그리고 그건 요리대회를 위해 연습한 거지만 이번에는 아 니다. 엄연히 '고의'로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순전히 고의로 말 이다. "걱정 마. 맛있게 만들어 줄 테니까. 크크크." "......" "......" "그럼 시작해 볼까?" 나는 그 말과 함께 물이 가득 든 냄비에 쇠고기를 잔뜩 집 어넣었다. 여기까지는 별다를 게 없다. 육수 대신 맹물일 뿐, 왠지 샤브샤브 느낌이 나니까 말이다. 하지만 평범한 건 여기 까지다. "가르, 겨자." "......네." 가르가 겨자통을 건네주었다. 난 숟가락으로 겨자를 듬뿍 펴서 냄비 속에 다이빙시켰다. 그 모습을 보고 침묵에 잠기는 데인과 피닉스. 나는 그들을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 일부분뿐이야. 크크크." 그리고는 또다시 마구 집어넣기 시작했다. 간장, 소금, 청량고추, 고추장, 마가린, 초장, 올리브유, 생 선, 양파, 핫소스, 참기름, 기타 등등 모든 재료가 들어갔다. 나는 곧바로 냄비 뚜껑을 닫아 버렸다. 바들바들. 그 모습을 보고 공포에 떠는 새 한 마리와 데인. 난 걱정 말 라는 듯 말했다. "이것만 먹으면 돼. 걱정 마." "사, 살려 줘!!" "이건 아냐!!" 발악해 봤자 소용없다. 너희는 어차피 강제로 먹게 될 테니 말이야. 크하하하! 10분 후. 요리가 대충 끝났다. 이제 이거만 먹이면 되는 일이다. 크하하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곧바로 냄비 뚜껑을 오픈 했다. 그런 데...... ...... "......쿠어억!!" 나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 이건...... 냄새만으로도 거의 생체병기 수준이다. 어, 어떻게 된 음식이......! 나는 다급히 한 손으로 코를 막고 다시 뚜껑을 닫았다. 그 리고 거칠게 심호흡을 했다. 냄새만 맡고 저 세상 갈 뻔했다. 흐으음, 조금 그렇군. 이런 음식을 저들에게 먹여야 하는 건가? 좀 미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다 에리아를 위해서다. 저들을 개과천선시키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을 듯싶 다. "나를 원망하지 마." "사, 살려 줘!!" "피닉스 살려! 음식으로 죽이려고 한다!!" 나는 그들의 발작을 보며넛 마스크를 쓴 뒤 조심스럽게 그 음식을 그들에게 천천히 들고 갔다. 아마 행복할 거야. "......" "......" 현재, 데인과 피닉스는 의식이 불명한 상태다. 사실, 먹이지도 않았다. 그냥 가까이서 냄새만 맡게 했을 뿐인데, 그냥 기절해 버렸다. 그것만으로도 이 음식의 효과는 충분히 증명된 것 같다만. [마법사의 탑] 마법사의 탑. 마법사들의 고향이다. 뭔가 설명이 좀 성의가 없긴 한데, 한마디로 마법사들이 제 일 많이 찾는 곳이다. 이 세계의 모든 마법사가 모인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어마어마한 수의 마법사들이 모이는 곳 이다. 게다가 마법사의 탑에는 엄청나게 강한 마법사들이 포진해 있다. 그들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오직 마법에만 전념하는 마 법사들로 그 하나하나가 7서클, 혹은 8서클에 달할 정도다. 운이 좋아 마법사의 탑 안에 있는 고위 마법사의 제자로 들 어가면, 그 유저는 팔자가 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웬만한 마법은 이곳에서 배울 수 있다. 돈만 내면 7 서클 마법까지도 가르쳐 주는 곳이 바로 이 마법사의 탑. 물론 7서클 마법 같은 경우는 상당히 비싸서 차라리 사냥을 통해 얻는 게 훨씬 낫다는 유저들이 있을 정도였다. 대략 마법 하나당 400∼500골드 정도 하나? 그러고 보면 참으로 마법사라는 직업도 돈이 많이 들어간 다. 내가 엄청 힘들게 모은 것도 620골드인데...... 하지만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건. "가르쳐 달란다고 가르쳐 줄까?" "......아마도 무리일 듯싶습니다." 그렇다. 세르키스 말대로 무리일 것 같다. 원한 관계에 있는 자에 대한 정보를 물었을 때 과연 그들이 순순히, 친절하게 가르쳐 주겠는가? 하아. 새삼 머리가 아파진다. "한 가지 방법은 있죠." 여태까지 잠자코 있던 크라스가 검지를 치켜세우며 말했 다. "응? 한 가지 방법이라니?" 나의 물음에 크라스가 웃으면서 답했다. "마법사의 탑에 잠입하는 겁니다." "아......" "마법사의 탑 안에서 흑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거 죠." "그, 그거 좋은 방법이다!!" 크라스의 말에 나는 눈을 번쩍였다. 역시 크라스다. 이런 상황에서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우리의 크라스 군. 우 리 파티의 꽃이다, 꽃. 그런데...... "어떻게 들어가는데?" "글쎄요." "......" 발상은 좋았지만 어떻게 들어가느냐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들어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조금 전에는 언급했다시피 마법사의 탑에 속한 고위 마법사의 제자로 들어가 마법을 배 우는 것. 이 경우 마법사의 탑 안에 거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 법도 배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방법이다. 난 마법과는 아예 인연이 없는 몸이기에. ...... "윤현아, 내가 마스터에게 한번 물어볼까?" 그때 내게 조심스레 다가와 말을 건네는 혜경! "......!" 그렇다. 잊고 있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말이다. 그녀는 정보를 다루는 직업을 가진, 뿐만 아니라 도깨비 같 은 그 인간과도 연락이 되는 몸이시다. 그렇다면! "부탁해, 혜경아!" ...... "다시 한 번 말해 줄래, 혜경아?" "응. 지금 마법사의 탑에서 실험을 도와 줄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하고 있대. 하루에 지급되는 돈은 약 3골드." "......" 한 마디로...... 실험용? "그것 말고는......?" "없대." 혜경의 말에 나는 절규했다. 한 마디로, 지금 마법사의 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실험체, 즉 마루타가 되는 아르바이트에 지원해야만 한다는 얘기다. 혜경의 말이 이어졌다. "절대로 목숨에는 지장이 없대. 다만 여러 가지 마법을 실 험하다 보니 몸과 정신이 조금 피곤해지는......" "그것 참." "어떡할 거야?" "그러게...... 어떻게 해야 되나?" 흑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모으려면 마법사의 탑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란 지금으로서는 단 한 가지. 마루타가 되는 것. 아아아아. 이건 아니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들어가기로...... 도대체 어떤 실험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흑마법 사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는 들어가야 했다. 그럼 여기서 잠깐. 나 혼자 들어가나? 그건 아니다. 같이 들어갈 놈을 모집해야 한다. "같이 들어갈 사람?" "앗, 갑자기 몸이 아픕니다." "앗, 두통이......" "전설적인 난 그런 저급한 일 안 하는 거 알지?" 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응을 보이는 삼인방. 어떤 의미에서는 참 신속한 반응이다. "데인 당첨." "왜, 왜?!" 내 말에 데인이 기겁했다. 나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너 맞는 거 좋아하잖아." "이, 이건 맞는 게 아니잖아!" "그거랑 같은 맥락." "아냐!! 신성하게 맞는 거랑 그런 저질스러운 짓은 엄연히 달라!" "뭐가?" "미묘한 뭔가가......!" 뭐가 다른데? 발길질에 아아아아 하는 신음 소리 내는 것은 신성하고, 실 험용 마루타로 지원하는 건 저질스러운 일이냐? 도무지 이해 가 안 가는구나. 그나저나 그 다음에는...... "피닉스 당첨!!" "난 그런 저급한 일 안 하는 거 알잖아?!" "닥쳐." "......" "조용히 하셔." "포, 폭력 사절." "저기...... 윤현아." "응?" 그런 피닉스와 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혜경이 곤란한 듯 나 를 불렀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 새는 안 된다고......" "......!" "동물류는 안 된대." "커억!" "키키키." 피닉스의 얄미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악! 왜 안 되는 건데!! 동물에게는 실험에 지원할 권리가 있더늘! 순간 크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가도록 하죠." "크라스 네가?" "네에. 그런 거 꼭 해 보고 싶었거든요." "......너도 그 계열이냐?"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다." 잠깐이지만 혹 크라스도 데인과 같은 계열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뭐, '그 계열'이란 게 뭔지는 모두 알 테니 설 명은 패스. 바글바글. 생각 외로 많다. 실험 아르바이트를 지원하려는 사람은 예상외로 꽤나 많았 다. 마법사의 탑 앞, '실험을 도와주실 분'이라는 문구가 적힌 이곳에 이렇게 몰려 있는 것을 보니 말이다. 뭐, 사실 3골드...... 적은 돈은 아니다. 열흘만 하면 30골드, 한 달을 하면 100골드에 육박하는 엄 청난 금액인 것이다. 저렙 유저에게는 엄청난 액수. 아니, 고랩 유저들에게는 엄청난 액수인 게 분명한 돈이다. 물론 난 돈보다는 정보가 목적이었지만. "자, 다음 분." 어느새 내 차례가 왔다. 나는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 방햐응로 향했다. 거기에 는 2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미인이라는 소리를 제법 들어 봤을 만한 에메랄들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접수를 받고 있었다. "몇 가지만 질문할게요." "네, 그러세요." "이름은?" "마에스트로." "레벨은?" "......30요." "흐으음. 직업은 뭐예요?" "무직." "그래요? 끝났어요." 간단한 질문은 그렇게 끝이 났다. 레벨이나 직업은 당연히 속여야 하니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좀 심하게 속인 것 같긴 하다. 자자, 그럼 마법사의 탑으로 가 볼까나? 마루타가 되어야 한다는 게 좀 거시기하지만. 아, 이 심오한 분위기. 마법사의 탑에 들어서자마자 느낀 기분이다. ......너무나도 심오해. "크악!" "아, 안 할래!!" "으악!!" "케엑!!" ...... 방 앞을 지나갈 때마다 안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비명 소리. 그 비명 소리에 나를 안내해 주던 20대 중반 정도의 여성이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 저기......아무것도 아닌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저 방 안에 메아리치는 비명 소리가 어딜 봐서 아무것도 아 니라는 건지. "쿠억!!" "그, 그만!!" "에엑!!" 비명은 끊이지 않았다. 방 앞을 지나갈 때마다 꼭 한 줄기의 비명 소리는 필수라는 듯 들려왔다. 참으로 심오한 비명 소리다. "절대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 마세요." 그때, 또다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 번 더 말해 주시는 안 내원. 그냥 가만히 있으면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지도 않겠거늘. 극구 아무것도 아니라고 변명하면 없던 불안감마저 생기겠 다. 아무리 정보 수집을 위해서라지만 마법사의 탑에서 실험 체가 되어야 하는 내 처지가 참으로 복잡 미묘하다. 흐으음. "또 만나네요." "......그러네요." 나에게 할당된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이미 이곳 마 법사의 탑에서 본 사람이었다. 조금 전 등록한 뒤 이리로 끌 려오기(?) 전에 봤던 사람. 단 한 명밖에 없다.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을 가진 20대 초반의 미녀. 아까 나에게 이름과 직업, 레벨을 물어보던 그녀였다. 그녀가 나를 보고 웃더니 말했다. "그쪽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 그것 참,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어째야 하는 건지 참 미묘 하다. "그리고 제게 오신 걸 고마워하셔야 할 거예요." "무슨 말이죠?" "다른 데 보다는 훨씬(?) 쉬운 일이거든요." "무슨...... 일인데요?" "먹는 거예요, 먹는 거." "......?" 엥? 먹는 거라니? 이건 무슨 소리? "커어억!!" "맛이 없나 보죠?" "......심하게요." "흐으음, 실패인가 보네요." "......" "그럼 다음......" "잠깐, 좀 쉬면 안 될까요?" "그러세요." 방긋.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웃어 보이는 미녀 마법사. 하지만 그 미소가 내 눈에는 그리 좋게만 비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가 먹은 그 이상한 물약들은 모두 그 녀가 건네준 것이었으니까. 내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다. ......그녀가 분명 쉽다고 한 일. 하지만 쉽기는커녕 거의 고문에 가까운 실험이었다. 그건 바로 물약의 맛을 개선하는 것! 마법사의 탑에서는 힘을 끌어올려 주는 물약이나 민첩성, 혹은 지능, 체력을 올려 주는 물약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팔 수는 없었다. 왜냐고? 성능은 분명 확실하다. 그것들을 먹는 순간 힘이 불끈불끈 솟았으니까.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 물약의 맛이 엄 청 지독하다는 것. 도저히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맛이 아니다. 능력치를 조금 상승시켜 준다고 그 누가 이 정도로 고통스러운 맛의 물약을 먹을까?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미녀 마법사가 하려는 일은 물약의 맛을 개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맛 개선을 위해 투입된 게 바로 나다. "자, 앞으로 40번만 더 먹으면 되니 힘내요." "......" 헉헉.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오, 온몸이 흐물흐물해지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 "마스터, 왜 그러시나요?" 그런 내게 다가오며 의아한 듯 묻는 크라스. 그의 물음에 나는 대답했다. "오늘 실험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마스터도 그러셨나요? 저도 즐거웠습니다." "......"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란 말이다!! 그리고 즐거웠다니!! 마루타, 즉 실험을 위해 한 몸을 바치는 일이 즐거웠다는 네 놈...... 정말 데인과 같은 과냐!! "나 왔어!!" 그때 모든 실험을 마치고 만나기로 한 장소에 제일 마지막 으로 모습을 드러낸 데인. 그의 얼굴은 너무나도 환했다. ...... "이렇게 행복한 일이 있다니...... 정말 멋져." "......" "마에스트로, 나 감동 먹었다니까!" 미친 자식. 감동 먹을 게 그리 없단 말인가? 실험용 마루타가 되는 게 감동이었다는 그 생각, 참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히는구나. "나 이 일만 하고 싶어!!" 그러면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녀석. 미안하지만 그 제안은 절대 기각이다. "난 안 해. 아니, 못해." 더 이상 했다가는 정보를 모으기도 전에 나의 목숨이 위험 해지겠다. "그, 그럼 정보를 못 모으잖아!" 데인이 당황하며 외치자 나는 방긋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작전 변경이다." "작전 변경이라니?" "마법사의 탑의 마스터를 납치한다." "......!" 그렇다. 작전 변경이다. 그 고통스러운 맛의 물약을 먹는 것에 비하면 차라리 이곳 의 마스터를 납치해서 차근차근 물어보는 게 더 쉬운 일일 것 같다. 물론 이곳의 마스터라 하면 최소 9서클에 달할 정도로 무지 막지한 분이실 게 분명하다. 하지만 9서클이라고 해 봤자 나에게는 별 감흥이 없다. 나나 크라스나 데인이나 9서클 마법사와 1:1로 싸워도 충분 히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건 전문용어로 게임 오버다. "그, 그건 범죄잖아!!" 그때 범죄라면서 태클을 거는 데인. 난 그 말에 허공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범죄는 아니야." "......" "아름다운 행위지." "......" ...... 내가 말하고도 정말 무안하다. 언제부터였을까? 순수계의 유일한 꿈나무였던 내가 이런 범죄탁한 발언을 아주 쉽게 해 버리게 된 게 말이다. 사실 모든 존재가 타락에 젖어도 나의 순수함은 끝까지 살아남을 줄 알았다. 하지만 살다 보니, 나의 순수했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져 버 린 후였다. 이건 분명 저 변태 삼인방에 의한 타락이다. 아 참,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자자, 여기에서 마스터가 있는 곳을 알아보자고, 그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을 테니 말이야." "불어." "......" "더 이상 타락하기는 싫어." "......" "불기 싫어?" "마, 말할 게요!!" 난 지나가던 한 남자를 붙잡아 한적한 곳으로 끌고 가서 협 박하기 시작했다. 사실 마법사의 탑에 속한 마법사를 협박한다고 그가 순순 히 말해 줄 확률은 적다. 하지만 마법사의 제자로 들어온 유 저들의 경우 이렇게 조금만 협박해도 겁을 먹고 알아서 슬슬 불어 준다. ...... 그런데 이건 뭔가 아니다. 납치도 모자라 협박이라니. 흐으음. 그렇게 우리는 약간(?) 불법적인 수단을 써서 이곳, 즉 마법 사의 탑 길드 마스터가 있는 곳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곳은 바로 이곳 제일 상층, 즉 꼭대기란다. 난 전부터 항상 궁금한 게 있었다. 왜 한 단체의 대장이나 마스터는 항상 맨 꼭대기에 있어야 하는 걸까? 그냥 중간 층이나 아래층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걸까? 뭐, 상관없나? 어쨌거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문 뒤에 이곳 마스터가 있 다는 거지? 내 앞에 펼쳐진 가로세로 3미터 정도에 달하는 문. 꽤나 크다. 건물 안에 있는 문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큼직한 문. 역시 곧 죽어도 마탑의 마스터라는 건가? 피식. 난 그런 생각과 함께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파직. "......" "락 마법이 걸려 있나 보군요." "빙고, 크라스." 말 그대로 문에는 엄청 강력하게 느껴지는 락 마법이 걸려 있었다. 아무래도 9서클 마법사가 걸어 놓은 락이다 보니 엄 청 강력한 건 당연한 건가? 그것보다 지금 중요한 건, "무슨 방법으로 파훼하지?" "부숴 버리죠." "......" "락 마법이 걸렸다고 하더라도 그 한계점의 데미지를 넘는 다면 부숴 버릴 수 있습니다." "오호?" 한마디로 파괴력만 강하다면 락 마법은 생각 외로 쉽게 파 훼할 수 있다는 거구나. 그런데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날 일은?" "흐으음. 그 점에 대해서는......" "......" "뭐, 저와 데인 님이 막겠습니다. 마스터는 얼른 납치만 해 오세요." "마땅히 다른 방법이 없으니......." 나는 그 말과 함께 메이스를 집어 들었다. 꽤나 무식한 방법이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무식한 방법도 제일 현명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다크 블레스." -모든 능력치가 950 상승했습니다. "트레메인!" 외침과 동시에 순식간에 파이어 볼 비슷한 어둠의 구가 내 주위에 마흔 개가 소환되었다. 그리고...... "다크 스트림." 끼이익!! 무기에 악령까지 깃들었다. 모든 준비 완료다. 나는 소환된 어둠의 구를 한곳에 집중시켰다. 그건 바로 문손잡이가 있는 곳! 마흔 개의 구를 동시에 집중한 뒤 조금 데미지를 입었다 싶 으면 메이스를 휘둘러 완전히 파괴해 버릴 작정이다. "시작해 볼까?" 나는 그렇게 말한 뒤, 어둠의 구를 문손잡이를 향해 날렸 다. 퍼퍼펑! 퍼어엉! 콰아아앙!! 여러 번의 폭발음과 함께 락 마법이 걸린 문이 흔들렸다. 그것만으로도 락 마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뜻! 나는 있는 힘껏 메이스를 휘둘렀다. "부서져라!!" 콰아아아아앙!! 불멸의 일진이 동시에 터지면서 그 강력한 폭발에 의해 락 마법이 걸린 문이 완전히 산산조각 나 버렸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소란?!" "마스터의 방이다!!" "무슨 일이지!!" 그 순간, 순식간에 모여드는 마법사들. 그들을 본 나는 크라스와 데인에게 말했다. "뒷일을 부탁할게." "먼저 들어가세요, 마스터." "나만 믿어!" 솔직히 데인 녀석을 믿고 싶은 마음은 그다지 없지만, 옆에 크라스가 있으니 안심이다. 저 녀석, 혼자 있으면 분명 홍조를 띤 채 '아아아아, 밟아 줘' 하며 매달릴 게 분명하니까. 자자, 이곳 마스터라는 분의 면상이나 한번 보러 가 볼까? "나같이 잘난 자의 방문을 부수는 미련한 존재는 누구지?" "......" "너냐?" "......" "나같이 전설적인 분의 방문을 부수다니. 쯧." 나는 반신반의했다. 내 앞에서 온갖 잘난 체를 하는 '새'를 보고 말이다. 분명 새다. 그것도 앵무새. 게다가 저 완벽한 잘난 척, 그뿐만 아니라 거의 매일 듣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전설적인'이라는 말. 우리 파티에도 저런 놈이 하나 있지. 새 주제에 지가 전설이라고 우기는 건방진 새가 말이다. 난 물었다. "......너 피닉스랑 뭔 사이냐?" 설마설마 하는 마음에 물었지만 이내 들려온 대답은 의외 였다. "아니, 그 건방진 피닉스 자식을 어떻게 알아?!" "......" "나 같은 전설적인 앵무새를 놔두고 저 잘났다고 떠들고 다니는 그런 하찮은 피닉스 자식!!" "......" "재수 없어!!" 허얼...... 진정 피닉스랑 아는 사이? 물론 좋은 사이로는 안 보인다. ...... 그 앵무새는 얼마나 흥분했는지 얼굴까지 붉히면서 재차 소리쳤다. "이 전설적인 몸을 빨리 그 미련한 피닉스 녀석에게로 안 내하도록!" "......" "오늘은 담판을 짓겠어!! 누가 더 전설적인지 말야!!" "......" "어서!!" "하나만 묻고." "......?" "너 혹시 여기 마스터냐? 마법사의 탑의 길드 마스터." "빙고!! 난 잘났으니까. "......" "표정이 왜 그래?" "아니...... 너무 참신해서." "풋, 다들 그런 반응이지.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 알면 말이 야." 그건...... 착각인 듯싶네만. 앵무새가 마탑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에 너무 어이가 없을 뿐인데, 녀석은 내가 지가 너무 잘나서 놀란 걸로 착각하고 있 다. "너도 전설적인 나를 봐서 영광일 거야." "......" "자, 그것보다...... 오늘은 피닉스 그 재수 없는 놈을 끝내 주겠어!!" 이렇게 되면 이건 엄밀히 말해 납치가 아니다. 녀석이 자진해서 가 주겠다는 말하고 있으니. 그나저나, 참 미묘하군. 마탑의 주인이 앵무새인 데다가 피닉스 녀석과 비슷한 녀 석이라. 참으로 신기한 일이네, 흐으음. "앗! 나보다 못한 피닉스 자식!!" "앗! 나보다 못한 앵무새 자식!!" ...... 어째 반응이 똑같은 걸까? 한 글자도 다르지 않은 저 완벽한 대사. 상대방을 깔보는 시선. 날개를 힘껏 뻗어 상대를 날카롭게 가리키고 있는 모습까 지 완전 똑같다. 혹시 둘이 쌍둥이 아닐까? "나 같은 전설적인 앵무새를 사칭하는 이 사칭범!"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이 변태야!!" "뭐, 변태?!" "그래, 변태야!!" "커억!! 이런 새대가리 자식이!!" "이런 미친 새대가리 앵무새야! 닥쳐!" "커억!! 저 피닉스 자식을!" "덤벼! 덤벼!" ...... 정말 유치해서 못 봐 주겠다. 둘의 싸움 말이다. 내 눈에는 그놈이 그놈 같아 보이는데 서로 자기가 더 잘났 다고 우기는 피닉스와 앵무새. 흐으음, 참 흥미롭기도 하고 아 닌 것 같기도 하고, 좀 그렇군. "감히 나를 모독했어!!" 자신을 모독했다고 성화하는 앵무새의 주변으로 마나가 모 이기 시작했다. 설마? "피닉스, 널 피닉스 구이로 만들어 버리겠어!! 플레이 스트 라......" 이런, 이런. 여기에는 여자들도 있다. 너만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다. 혹시라도 여자들에게 피해가 갈 것을 방지하는 게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인 듯싶다. 스으윽. "허억!!" 주문을 외우던 중 누군가 자신의 몸을 낚아채자 앵무새가 놀라서 헛바람을 토했다. 나는 그런 녀석을 보고 미소를 지으 며 말했다. "이런 데서 마법을 쓰면 곤란하거든?" "나, 나 같은 전설적인 앵무새의 몸을 잡다니, 죽고 싶어?" "......" "지금이라도 놓는다면 선처해서 죽이지는 않으마." 이 자식, 왠지 피닉스보다 더 개념이 없어 보인다. 피닉스 녀석은 좀 건방지기는 하지만 죽인다는 등의 위협 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건방진 앵무새는 내게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어서 놓으라니까!! 나 같은 전설적인 몸을 잡......" 휘이익. "으아악!!" 나는 그 앵무새 녀석을 그대로 크라스에게 집어던졌다. 스으윽. 이내 나타난 크라스가 앵무새를 낚아채자 나는 그대로 미 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놈 데리고 따라와." "네, 마스터." "너, 너희는 뭐냐?! 마탑의 주인이자 9서클 대마법사인 나 를 이렇게 모욕하다니!!" "닥쳐라, 새야." "......" "한 마디만 더 하면 더 즐거워질 거야. 크크크크......하하 하하." "......" 내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무는 앵무새. 지금 앵무새의 모습을 설명하자면 간단하다. 나무에 밧줄로 온몸을 결박당한 상태. 그리고 그 주변을 우 리 일행이 포위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자. "흑마법사들이 있는 곳 불어 볼래?" "너 미쳤구나?" "......" "감히 마탑의 주인인 나에게 흑마법사의 거처를 물어보다 니!!" 그래, 순순히 불지 않을 줄 알았다. 하아. 왜 이 세상은 평범함이 통하지 않는 걸까? 참으로 씁쓸하다, 씁쓸해. 나는 터벅터벅 걸어가 근처에 있는 바위에 엉덩이를 걸터 앉고는 그대로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가 내렸다. "알겠습니다." "네." "알았어!! 오케바리!!" "크크크. 하찮은 앵무새, 넌 죽었어!!" "혀, 형제여. 이건 아닙니다." 그때 가르가 떨면서 말했다. 난 그런 가르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가르, 넌 디스펠이나 열심히 하셈." "......" "물론 저 새와 똑같은 신세가 되고 싶으면 안 해도 돼." "......열심히 하겠습니다, 형제여." "좋은 생각!" "......" 자자, 그럼 이제 시작해 보자고. 약간(?) 무식한 작업을 말이다. 어차피 녀석이 마법을 쓴다 해도 가르가 디스펠을 걸면 끝 이다. 한마디로, 지금 저 녀석은 그저 무력한 앵무새일 뿐이 다. 크크크. "으아악!! 마, 마탑의 주인인 나를......!" "크캬캬캬!" "닥쵸! 하찮은 새!!" ...... 아, 이 비명. 참 오랜만에 들어 본다. 솔직히 말하겠다. 난 정말 이런 비명을 원치 않았다. 내 별 명이 순수계의 별인 만큼(언제부터?) 난 무조건 대화로 풀고 싶었다. 하지만 왜 말로는 통하지 않는 걸까? 왜 꼭 주먹이 왔다 갔다 해야지만 대화가 되는 걸까? 개인적으로 nasa에 문의하고 싶다. "으아악!!" "......" "끄아악!!" "......" "케에엑!!" 앵무새의 다양한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정말 심하게 족치는구나. 저렇게 잔혹할 수가. 흐으음. 크라스와 세르키스는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 데인과 피닉 스 군만 정말 신났다. 한 마디로, 미친 듯이 앵무새를 패고 있는 것이다. ...... "불어! 불어!! 흐하하하!" "불어! 이 하찮은 앵무새!!" 이제는 시키지도 않은 심문까지 하며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앵무새를 닦달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야. ...... "마, 말할게!!" 그 순간 터져 나온 앵무새의 외침! 데인과 피닉스의 얼굴에 아쉬움이 어렸다. 너희, 변태냐? 왜 여기서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짓는 거냐? 뭐, 그것보다...... 나는 서서히 일어나 그 앵무새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차마 보기 민망할 정도로 부어 버린 앵 무새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움찔. 앵무새가 온몸을 움찔거렸다. 참, 내가 정말 악당이라도 된 것 같구나. 크흐으음. 일단 그 점에 대해서는 넘어가고, 나는 천천히 앵무새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가 속삭였다. "어디니?" "......" "말 안 할 거야?" "......" "아, 어쩔 수 없나? 데인, 피닉스. 다시......" "마, 말할게!!" "진작 이렇게 나왔으면 좋잖아. 안 그래?" "......" 나는 그 말과 함께 앵무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드디어, 드디어 흑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는 순간이 다. "토, 통진의 동굴 안에 가는 길이 있어!" "......" 통진......의 동굴? ......거기가 어디지?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듯싶은 데. 난 고민에 잠겼다. 분명 들어 본 듯한 기분이 드는 이름이다. 분명...... "아!!" 순간 내 머리를 번쩍 스쳐 지나가는 한 생각. 설마...... 거기냐? "가르." "네." "너랑 내가 만난 동굴이 어디였더라?" "모르는데요." "......" "......" "아니, 분명 네가 있던 곳 이름을......" "모릅니다. 저는 그냥 거기에 있었을 뿐입니다." 쓰러질 것 같다. 자신의 서식지(?)의 이름조차도 기억 못한단 말인가? 아무 리 바보라도 자기 집은 안다. 근데 녀석은 자기 집이었던 곳도 모르고 있다. 진정하자, 진정해. 저 녀석에게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나는 그렇게 한숨을 내쉰 뒤 가르를 향해 재차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놈이 있던 동굴이 통진의 동굴, 아니었냐?"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요, 형제여." "......" "그랬을까요?" "......" "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제야 생각이 났는지 가르의 목소리가 활기를 띠었다. 참 오래 걸린다. 하아. 어찌 됐든, 그렇다. 가르와 내가 처음 만난 장소이자 정체 불명의 어쌔신 단체에 쫓겨 들어간 곳. 거기서 오우거를 만나 기도 했지. 뭐, 운 좋게 오우거를 잡기는 했지만. 어찌 됐든 참으로 많은 추억이 얽힌 동굴이다. 그런데 그 동굴 안에 마법사들의 마을로 가는 길이 있다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탑의 마스터이자 미친 앵무새인 녀석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이라도 거짓말이면 곧바로 구이가 될 테니 잘 각오하 렴." "지, 진짜야!!" "진짜이기를 믿지." "이, 이제 일이 끝났으면 날 풀어 줘." "훗." 앵무새의 제안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풀어 달라고? 뭘 믿고 풀어 주냐? 난 당당히 풀어 달라고 요구하는 앵무새 군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네가 말한 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지도 않았는데 어떻 게 너를 풀어 주냐?" "허억!! 그, 그 말은?!" "그래, 너도 같이 가야지." "......" "그래서 만약 아니라면 그대로 끓는 물 속으로 들어가는 거다. 크크크." "......" "잘 지내 보자고." 난 굳어 버린 앵무새에게 다가가 친근한 미소를 지어 주었 다. [통진의 동굴] "파티원 구합니다!!" "프리스트 우대합니다!!" "뎀질 모집합니다!!" "7인 파티로 오우거 잡으실 분!!" "탱크 모집합니다!!" "레벨 130 이상인 분 아무나!!" 시끌벅적. 통진의 동굴 앞의 풍경이다. 유저들이 상당히 많다. 유저가 파티 사냥으로 레벨 업 하기 좋다는 통진의 동굴. 레벨 200대의 몬스터가 출몰하므로 대체적으로 레벨 150에서 200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뭐, 난 레벨 22에 졸업했다만. "마법사들이신가요?" "레벨은? 데미지는 얼마 정도예요?" "저희 파티에 들어오세요!! 프리스트도 대기 중입니다!!" 그때, 지나가던 우리를 붙잡는 파티들. 흐으음...... 우리 파티가 약간 그래 보이긴 한다. 마법 전문 파티로 보일 것이다. 대부분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탓이겠지. "전투프리스트세요?" 그때 내 허리춤에 달려 있는 메이스를 본 한 여자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대략 1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로, 미모는 10점 만점에 7점! 붉은색의 머리카락이 유난히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몸 매는...... 흐으음, 좋아. 여자가 내게 궁금한 듯 묻자 나는 방긋 웃으면서 답했다. "아뇨." "그럼 그냥 프리스트?" "아뇨." "......그럼 프리스트가 아닌가요?" "프리스트는 맞아요." "......" "좀 미묘한 프리스트라고 할까요? 하하하." "그, 그래요?" 내 말에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 그녀. 당연한 반응이다. 그나저나...... "무슨 용건이세요?" "아, 통진의 동굴에 들어가려는데 지금 프리스트가 없거든 요." "흐으음." "혹시 힐이라도 사용 가능하시면......" "가능은 한데요." "......" "뒈져요." "......?" 정말이다. 나는 지난번 이후 파티 사냥을 하지 않았다. 아주 순수한 마법으로 힐을 걸어 주었는데 엄청난 속도로 상처가 악화돼서 죽어 버린 파티원을 본 이후로. 그 일로 나와 보조 거는 일은 극과 극이라는 걸 깨달은 것 이다. 한편, 여자가 당혹해 하면서 재차 물었다. "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저희 파티에 오 실래요?" "......?" "레벨은 굳이 안 높아도 되요. 그냥 모두 모여서 잡는 파티 거든요." "흐으음." "길은 잘 알고 있어요." "당장 가죠." 길을 잘 알고 있다는 말에 나는 눈을 번쩍였다. 마탑 마스터의 말에 따르면, 통진의 동굴 내부에 흑마법사 의 도시 바루스로 가는 길이 있다고 한다. 본인도 가 본 적이 없다고 하니까 안내원이 필요하긴 하다. "그, 근데 사람을 좀 더 모아서 가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요?" 우리의 레벨이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지 그녀가 걱정스러 운 듯 그렇게 말했다. 난 그녀의 말에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 마세요. 무적의 파티니까요." "......" 말 그대로 무적의 파티다. 9서클 마법사 두 명(가르, 앵무새)과 마왕의 힘을 뛰어넘는 마족 크라스, 드래곤의 수장 세르키스, 전직 천사장으로 투신 이라고 불렸던 데인, 그리고 온갖 역경을 헤치고 살아남은 나 까지. ......완벽한 무적 파티다. 흐으음. "크아악!!" "닥쳐 줄래?" "......" 괴성을 지르며 위협하는 오우거의 근처로 다가가 그렇게 속삭이자, 녀석은 곧바로 침묵을 지켰다. 예전에는 무지무지 강한 몬스터였지만 지금은 그냥 살짝만 건드려도 죽어 버릴 정도로 허약한 몬스터가 되었다. "크아악!!" 그때 또다시 괴성을 지르는 오우거. 나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닥쳐 달라고!" 퍼억!! "크아악!!" 한 방이었다. 내 메이스 한 방에 그대로 날아가 버리더니 즉사하시는 오 우거. 잠깐,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 우리와 같이 온 그 여자 분은 입을 떡 벌린 채 그저 나를 바 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 었다. "래, 랭킹 유저?" "랭킹에 등록한 적은 없어요." "그, 그럼 그 유명하다는 비공식 랭킹 중 한 명이세요?" "글쎄요......" "그, 그럼 이분들은?" 여자가 나머지 일행을 가리키면서 묻자 나는 어깨를 으쓱 하면서 답했다. "그냥 좀 하는 애들이죠." "......" "하하하."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어, 엄청난 고랩 분들이 여기는 무슨 일로......" "아, 볼일이 있거든요. 여기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정보를 습득해서요." "비밀통로요?" "네. 혹시 들어 본 적 없어요?" 도리도리. 내 말에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젓는 그녀. 뭐, 대충 감은 잡았다. "구석구석, 안내 좀 부탁해도 될까요?" "......" "안 되나요?" "아, 아니요. 너무 놀라서......" "하아,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아, 아니에요." "......" "......" "......" "......" 예은과 혜경, 그리고 레니아와 은경은 말없이 윤현을 바라 보았다. 저 사람은 다른 때는 모르겠지만 곤란에 처한 여자한 테는 정말 잘해 준다. 괜히 질투가 날 정도로 말이다. 뜨끔. 뭐, 뭐지? 이 시선들은? 난 사방에서 날아오는 시선의 방향을 잡아 냈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모습을 드러내는 네 분. 우리 파티에서 어린 에리아를 제외하고 초절정 미소녀를 담당하고 계신 네 분이다. "왜, 왜 그래? 하하하."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묻자 혜경의 날카로운 한 마디가 날아왔다. "어라? 우리한테 말할 시간은 있었나 봐?" "......" "난 또 저 여자 분한테 빠졌는 줄 알았지." "무, 무슨 말인지......" "그냥. 윤현이는 여자만 보면 무조건 잘해 주더라?" "......" "지난번에도 그랬고 말야." 지난번이라 하면 내가 데인에게서 한 여인을 구해 준 걸 말 하는 듯했다. 나로서는 분명 지극히 순수한 마음으로 껴안아 줬던 것을 아직 마음에 두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난 다급히 손을 저으면서 말했다. "절대 오해야." "매일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 그렇지는 않아!" "난 매일 듣는걸." ...... 그랬나? 내가 매일 그런 말을 했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흐으음. 그나저나 혜경이 왜 질투 비슷한 걸...... 서, 설마 나를 좋아하는 건가?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다. 혜경이가 정말로...... 나는 약간 토라진 듯한 혜경의 옆으로 조심스레 다가가 살 며시 속삭였다. "혜경 양." "......?" "질투야?" "무, 무슨 소리야!!" "......" "지, 질투라니!! 말도 안 돼!!" "......" "그런 일은 절대 없어." 허얼...... 그 말이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해야 할 정도의 말이었던 거 야? 흐흐흑. 왠지 슬퍼진다. 역시 괜한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 두근두근. 혜경은 계속해서 뛰는 심장은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 다. 윤현의 '질투'라는 말에 그녀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요 동치고 있었다. 사실 질투가 맞다. 윤현이 다른 여자에게 잘해 주면 잘해 줄수록 자신도 모르 게 질투가 일어난다. 이건 남자나 여자나, 좋아하는 사람이 이 성에게 잘해 주는 걸 볼 때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 하지만 그녀는 무엇보다 그 말에 수긍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을 긍정하는 이상 자신이 윤현을 좋아한다는 걸 인정 하는 거니까. 아무 감정이 없는 남자에게 '질투'라는 감정을 느낄 리가 없기에. ......왠지 조금 섭섭하기는 하다. 아니, 좀 많이 섭섭하다. 흐흐흑. 그냥 아니라고 하면 될 것을, 그렇게 광분(?)해서 부인할 필 요는 없는데 말이다. 어찌 됐든 지금은 그런 일보다는 이곳에서 흑마법사의 마 을로 가는 비밀통로를 찾는 일이 더 중요하다. "앞으로 300미터 정도만 더 가면 통진의 얼굴의 끝이에요." "끝이라 하면, 가로막혔다는 건가요?" "네. 그리고 그 끝에 보스급 몬스터인 데스나이트가 있어 요. 물론 자주 리젠되는 건 아니고 대략 일주일에 한 번 정 오?" "흐으음, 있을 확률은 거의 없겠네요?" "그렇죠. 하지만 혹시라도 리젠된다면......" "......?" "저희는 전멸할지도 몰라요. 물론 그쪽 분들이 강한 것은 알겠지만 데스나이트는 보스급 몬스터 중에서도 상당히 강한 몬스터예요." "흐으음." "뭐, 웬만해서는 나타날 일이 없겠지만요." 싱긋. 여자는 그 말과 함께 웃었고, 나는 그녀의 친절함에 진정 감동했다. 모르는 사이인데도 이렇게 친절하게 안내해 주다니, 너무 너무 감동이다. 역시 세상은 삭막하지만은 않나 보다. 이렇게 친절한 분들도 있다니. "......" "이, 이럴 수가!!" 순간 우리를 안내해 주던 여자가 '이럴 수가!'라는 단 한 마디와 함께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저분이 왜 갑자기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걸까? 바로 통진의 동굴의 끝 지점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그곳에는 거의 수십 명에 달하는 유저가 싸늘한 시체가 되 어서 바닥에 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속된 말로 다 뒈졌다고 묘사할 수 있는 상황. "어, 어떻게......!" "......" "데스나이트가!!" 눈을 번쩍이면서 우리를 바라보는, 검은색 갑주를 걸치고 검은색의 멋들어진 장검을 든 데스나이트를 본 여자는 연신 그 말만 뱉어 냈다. 흐으음. 그런데 난 왜 보스급 몬스터가 눈앞에 나타나도 아무런 감 흥이 없는 걸까? 좀 더 두근두근 했으면 하는데 말이다. "도, 도망쳐요!" 여자가 그렇게 말하면서 내 팔을 끌어당겼다. 나는 그런 그 녀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 "충분히 상대할 만하거든요." "......" "그전에 몰래 지켜보는 박쥐 같은 놈을 잡아야 할 것 같습 니다." "......?" 내 말에 크라스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와 함께, 어느새 허공에서 예전에 본 희귀한 지팡이를 꺼내 드는 가르. 그리고 동시에 들려오는 소리. 푸직!! "디스펠!!" 쿠웅!! 데스나이트가 쓰러진다. 가르의 디스펠에 동굴 안에 걸린 마법은 순식간에 모두 해 제되었고, 다음 순간 내 몸도 움직였다. 내가 향하는 곳은 바로 데스나이트의 바로 뒤였다. 덥석. "......" "안녕?" "......" 나는 내 손에 팔을 붙잡힌 한 후드맨을 보고 웃었다. 딱 봐도 누구인지 알겠다. 우리가 열심히 찾고 있는 흑마법사 중 한 명일 것이다. "내 생명을 바쳐...... 어둠의 마족을 소환한다!" 푸직! 흑마법사가 어느새 꺼내 든 단검으로 자신의 배를 찔러 버 리며 외쳤다. 나는 당황했다. 가,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냐! 흑마법사의 몸이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그가 있던 자리에 붉은색의 마법진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보는 마법진이었다. 붉은색으로 그려진, 도무지 무슨 모양인지 알 수 없는 이상 한 마법진이다. 파지짓!! 다음 순간, 그 마법진을 통해 한 존재가 소환되기 시작했 다. 분명 익숙한 분이다. 지난번에도 봤고 우리 파티에도 있는 분. 그건 바로 마족이었다. ......엥? "크크크, 나 정도의 엄청난 마족을 불러내다니. 흑마법사 자식, 네놈의 목숨을 대가로 여기 인간계를 피로 물들여 주겠 다!" 누구 맘대로? 갑자기 나타난 한 마리 마족은 심한 왕자병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대략 '피닉스병' 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불치병. 어떤 병보다도 무섭다는, 제일 고치기 힘든 피닉스병에 걸 린 마족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피닉스병에 걸려 웃어 대던 마족이 순간 굳 어 버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저건 또 무슨 괴상망측한 스토리? "크, 크라스 님......" "어라? 저 아는 사인가 보네요." "다, 당연합니다. 마족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크라스 님을 모른다면 그건 마족이 아닙니다." 마족은 벌벌 떨기까지 하고 있었다. 역시 크라스. 꽤나 화려한 전적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나저나...... 나는 죽어 버린 데스나이트 곁으로 가서 푸른색으로 빛나 는 목걸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성 유저에 게 천천히 다가가 목걸이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건 선물이에요." "네?" "여기까지 안내해 준 것에 대한 선물요." "......" "받으세요." "너, 너무 커요!" "아니요. 어차피 유니크 정도잖아요." "유, 유니크 정도......?" "흐으음. 뭐 어쨌든, 받으세요." 나는 받지 않으려는 그녀의 손을 잡아 목걸이를 건네주었 다. 나에게 해를 끼치려는 놈에게는 누구보다도 악독하지만, 바로 내 앞에 있는 여자처럼 친절을 베푸는 자에게는 무지무 지 선량한 존재가 바로 나다. ...... 우리를 안내해 준 여자는 다시 동굴 밖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이제부터는 우리의 용건만이 남아 있었다. 이곳에는 분명 흑마법사가 있다. 그게 뜻하는 바는, 이 근처에 흑마법사들이 사는 바루스라 는 마을로 통하는 통로가 있다는 것! 아까 소환된 마족까지 포함하면 대략 열 명이 넘는 대인원 이다. 이 정도의 인원이라면 통로를 찾는 것도 시간문제! "자자, 모두 비밀통로를 찾아보자!" "네." "네." 내 말에 모두 대답하는 일행. 하지만 두 존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앗! 나 같은 전설적인 피닉스에게 이런 하찮은 일을 하라 고?" "앗! 나 같은 전설적인 앵무새에게 이런 하찮은 일을 하라 고?" ...... 니들 무슨 쌍둥이 놀이 하니? 자신들이 똑같은 대사를 날렸다는 걸 알아차린 두 마리의 새가 또다시 동시에 소리쳤다. "뭐야?! 이 변태 앵무새야!!" "뭐냐?! 이 변태 피닉스야!!" "......" "따라 하지 마!!" "따라 하지 마!!" "......" "우씨!! 이 앵무새 자식이!!" "우씨!! 이 앵무새 자식이!!" "......" "닥쳐!!" "닥쳐!!" 저렇게 하고 싶어도 못하겠다. 그런데 저 녀석들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심지어 타이밍 도 틀리지 않고 똑같이 재잘거린다. 이거 텔레비전에 '신기한 새'라는 타이틀로 내보내면 꽤나 관심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이씨!! 오늘이야말로 결판이다!!" "바라던 바다!" 그렇게 또다시 티격태격하는 피닉스와 앵무새. 참으로 골치 아프군. 나는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녀석들의 몸을 두 손가락으로 잡으면서 해맑게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말했다. "쓸데없는 짓하지 말고 어서 찾기나 하렴." "......" "......" "싫어?" "아, 아니." "아, 알았어." 나의 미소에 친절하게 대답하는 두 마리의 새. 꼭 이렇게 미소를 한 방 날려야 얘기가 통한다니까. 1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는 비밀통로를 찾기 위해 약 1시간 동안 벽이나 바닥, 심지어 천장에까지 스파이더맨처럼 달라붙으면서 최선을 다 했다. 그런데 통로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동굴 끝에 도착해 그런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된 유저들 의 이상한 눈초리를 받은 건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자. "왜 안 보이지?" 내가 일행에게 물었다. "없는 게 아닐까요?" "흐으음." 나는 예은의 말에 깊은 고민에 잠겼다. 아니, 깊게 잠길 필요도 없다. 예은의 말대로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덥석. "으아악! 왜, 왜 그래?" 이 자식이 감히 내게 구라를 까? "야, 앵무새! 구라 치면 끓는 물 속에 들어갈 거라고 경고한 것 같은데?" "구, 구라라니! 진짜야!!" "근데 왜 없어?" "그, 그야 나도 모르지." "그렇게 무책임하게 대답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저, 정말이야! 여기에 있는 건 확실하다고! 우리도 그 흑마 법사 놈들의 확실한 본거지를 찾지 못했어! 생각해 봐. 우리가 흑마법사의 본거지를 찾았다면 벌써 공격하지 않았겠어?" "......" 흐으음. 그러고 보니 그렇다. 마탑에서 정확한 장소를 알았다면 자신들이 그렇게 싫어하 는 흑마법사들을 진작에 습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봤을 때, 이곳 통진 의 동굴에 그 통로가 있다는 단서만 갖고 있을 뿐 정확한 장 소를 모른다는 뜻이겠지? 그나저나...... "그럼 어떻게 하지?" 말 그대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기 계속 죽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법.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유물이 걸려 있는 중대한 사항이니까. 그때, 내 눈에 보이는 한 분. 유난히 열심이다. 레니아. 레니아는 이런 일에서는 천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 의 클래스는 도둑. 도둑이라 하면 물건을 잘 찾거나 함정을 파훼하거나 혹은 비밀통로를 찾아내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 휘하는 클래스다. 그런데도 비밀통로를 찾아내지 못하니 그녀로서는 약간 자 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그녀의 반응으로 보아, 여기에 비밀통로가 없다는 게 사실 이 아닌 듯싶다. 최고의 도둑인 레니아 찾지 못하는 비밀통로라, 차라리 없다는 말이 더욱 신빙성 있겠다. 하아. 그나저나 이야기는 다시 원점...... "찾았어요!!" "......!" "......!" "......!" "......!" 그때 들려온 레니아의 한 마디에 우리의 시선은 곧바로 그 녀 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밝게 웃고 있는 레니아가 있었다. "드디어 찾았어요!" "어디야?!" "여기요!" 그러면서 바닥에 한 부분을 가리키는 레니아. 그녀의 말에 나는 다급히 그쪽으로 다가가 레니아가 가리 키는 바닥을 바라보았다. "......어디?" "여기요." "저, 저기. 레니아......" "......?" "내 눈에는 그냥 바닥으로만 보이는데." "아, 잠깐만요." 레니아가 어디선가 하얀색 밧줄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 다. 파지짓!! "......" 곧바로 불꽃이 튀겼다. 푸른 불꽃이 튀었다. 곧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지하로 통하는 초록색의 문. "세미테이전 플리어." "그게 뭐야?" "특수한 트랩이에요. 평소에는 밟아도 아무 이상 없지만 이 런 특수한 밧줄에는 반응을 보이는 이상한 트랩이죠." "......" 별 요상한 게 다 있네. 역시 세상은 요지경이야. "그나저나 이게 설치되어 있다니 의외네요." "무슨 말이야?" "세미테이전 플리어. 해체하는 건 어찌 보면 간단하지만 설 치하는 건 정말 힘들어요. 웬만해서는 건드릴 수 없는 난이도 의 트랩. 제가 알기로 이 트랩을 설치할 수 있는 존재는 단둘 뿐이에요." "허얼." "아마도 제 예상이 맞다면 그 두 명 중 한 명이 설치했겠 죠." "레니아." "네?" "레니아도 설치할 줄 알아?" "......네." 내 물음에 약간 쑥스럽다는 듯 답하는 레니아. 역시 레니아다. 이런 별 희한한 트랩도 설치할 줄 알다니. 여기가 바로 흑마법사의 도시 바루스로 가는 길이냐? 발견 하기 전까지 참으로 힘들었다. 자자, 그럼 이제 흑마법사들을 만나러 가 볼까? 그렇게 내가 솔선수범해서 초록색의 문을 통해 내려가려고 할 때였다. 파직. "으아악!" "이중 트랩!!" "우어억!!" "마에스트로 씨!!" "오빠!!" "윤현아!!" 여자들의 비명이 들려온다. 그리고 방금 전 레니아가 외친 말...... 이중 트랩? 그건 뭐 하는 트랩? "어, 언니. 어떻게 된 거예요?" 예은이 다급하게 묻자, 레니아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중 트랩이야." "이중 트랩이라니요?" "트랩 밑에 또다시 숨겨 놓은 트랩." "아......" "이중 트랩은 설치부터가 어려워. 세미테이전 플리어 밑에 이중 트랩을 설치하다니, 말도 안 돼!" "어, 언니도 불가능한 일인가요?" 끄덕. 예은의 물음에 레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말했 다. "방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이중 트랩은 엄청나게 고난이도 의 트랩이야. 평범한 트랩 밑에 또 다른 트랩을 까는 것도 힘 든데, 이번에는 평범한 트랩도 아니야. 트랩 중 최고라고 불리 는 세미테이전 플리어에 이중 트랩을 깔다니, 있을 수 없는 일 이야." "그. 그럼 오빠는......?" "모르겠어. 지금 무슨 트랩이 발동됐는지. 하지만 세미테이 전 플리어와 함께 깔아 놓을 정도라면 평범한 트랩은 아니 야." "어, 언니." 예은은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레니아가 묵무깋 서 있는 일행을 향해 말했다. "이 트랩이 깔려 있다는 건 분명 이 근처에 진짜로 통하는 문이 있다는 뜻이에요.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어 요." "이 트랩을 강제로 해제하는 방법은 없나요?" 크라스의 물음에 레니아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 트랩 자체가 한 번 사용하면 그대로 사라지는 거예요." "이런, 곤란하군요." "그러니 어서 빨리 들어가서 이 트랩이 연결된 장소를 찾 아야 돼요!" "그럴 수밖에 없겠군요." 모든 일행이 입구를 찾기 위해 눈을 번쩍이는 순간, 한 존 재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 존재는 다름 아닌...... "으아악! 저, 전설적인 피닉스 살려!" ......그렇다. 방금 전 윤현이 빠져나간 이상한 공간에 틈이 생기면서 피 닉스를 빨아들인 것이다. 이것을 설치한 흑마법사들도 예상치 못한 오류였다. [죽음의 미로] 어쩐지 미묘하게 일이 잘 풀린다 했다. 아아아. 왜 난 항상 이런 일만 겪어야 할까? 누군가 좀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 지금 내가 있는 곳. 그곳은 말 그대로 미로다.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혀 있고, 앞이나 뒤로만 길이 나 있는 미로. 아아아, 쓰러질 것 같아. 이건 뭔가 좀 이상하다. 조금 전부터 다른 일행과는 연락이 되지 않고 어딘지도 모 르겠다. 아니, 짐작가지도 않는다. 미로라는 것밖에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아, 머리 아프다." 난 그 말과 함께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미로라니. 차라리 몬스터가 대기 중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뭐, 미로도 상관없나? 미로라는 건 상다히 빠져나가기 어렵다. 까딱하면 길만 헤 매다가 죽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미로를 간단히 파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내 양옆을 가로막은 벽을 부수고 일직선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럴 경우 힘은 조금 들지만 밖으로는 빠져나갈 수 있을 것 이다. 크크크. 난 너무 멋져! 크흐으음, 조금 무안하군. 자자, 그럼 시작해 볼까나? 꼬르륵. 순간 내 배에서 나는 소리. "흐으음...... 끼니라도 간단히 때우고 시작해야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사 갖고 온 육포를 꺼내 들었다. 역시 항상 철저히 준비해야 하는 시 대라니까. 콰아앙! 콰아앙! 콰아앙! 콰아앙! 콰아앙! 육포를 먹은 나는 메이스로 내 앞으로 가로막은 벽을 부수면 서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벽을 부수며 앞으로 나아갈수록 내 마음은 더욱 불 안해졌다. 부순 벽만 해도 벌써 육십 개가 넘는데 어찌 된 게 끝이 안 보인다. ......이 미로가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커서 그런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나는 다시 말없이 벽을 부숴 나갔다. 그런데...... "여기는 분명......" 익숙한 장소. 분명 여기는...... "출발한 장소?" 그러핟. 조금 전 육포를 먹고 출발한 장소다. 저 육포 쪼가리. 분명 내가 먹었던 건데? ...... "뭐, 뭐냐?" 진짜 뭐냐, 이 괴이한 상황은? 나는 분명 일직선으로 부수고 나아갔다. 그런데 원점으로 되돌아오다니. 이런 미로는 보기는커녕 들어 보지도 못했다.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 한 마디. 엿 됐다. ...... 또 되돌아왔네? 나는 설마설마 하면서 또다시 벽을 부숴 나갔다. 그런데 아까와 마찬가지로 제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심히 난감하다. "이건 뭔가 이상한데." 정말로 뭔가 있는 것 같다. 아니, 이상한 정도를 넘어 뭔가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사차 원적인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이럴 때 실이라도 있으면 그걸 질질 끌면 되는데 지금 내게 는 실이...... ......!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실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실은 아니고 실로 짠 스웨터가 있다. 혹 추운 지역에 갔을 때 입으려고 들도 다니던 건데. 지금 상황에서는 절대 가방에서 스웨터를 꺼내 실을 풀기 시작 했다. 이 정체불명의 미궁. 이제 끝났어!! ......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냐고? 어딘가 한곳에서 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 마디로, 내 앞에 펼쳐진 어떤 공간을 기점으로 다시 원 점으로 되돌리는 장치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시공이 뒤틀린 흔적은 느껴지지도 않는데 말이다. "으아악!!" 나는 절망했다. 이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많이 아니다!! 우어억!! 그렇게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나. 순간 어디선가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악!! 마에스트로다!! 나 살았어!!" "......피닉스!!" 이렇게 반갑기는 처음이다. 피닉스가 이렇게 반가울 날이 올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 다. 이런 미궁 속에서 피닉스를 만나다니, 너무나도 반가워 눈 물이 날 것 같다. 흐흐흑.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어!! 나도 갑자기 여기로 끌려왔어." "......" "......" ......한 마디로, 네놈 혼자라는 거냐? 사실 '피닉스이기에' 반가웠던 게 아니다. 녀석 옆에 다른 일행이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피닉스 혼자만 있다는 이 상황이 나를 좌절하게 만 들었다. 으윽. "표정이 왜 그래? 이런 데서 전설을 만나서 감동 먹은 거 야?" "......네 눈은 참 특이하구나. 지금 내 표정이 감동 먹은 표 정 같니?" "응. 무지무지." "......" "너무나도 감격해서 울 것 같은 표정 같아." 저 자식. 눈이 삐리리 하구나. 말이 좀 험악해서 삐리리로 처리했다. 순수한 나로서는 차 마 그런 야만적인 말은 직접적으로 입에 담지 못하겠다. 그나저나, 감격에 찬 표정이라...... 내가 생각하기에 분명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얼굴을 했 을 텐데 말야. 흐흑. ......암울해지고 있다. 그 많은 일행 중 왜 하필 피닉스란 말인가!! 차라리 데인이나 가르였다면 그나마 나았을지도......라고 말하고 싶지만, 모르겠다. 그놈이 그놈인지라. 흐으음. 다시 생각해 보니 피닉스나 데인이나 가르나 그놈이 그놈 이었을 것이다. 아 참,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피닉스, 우리 어떡하지?" "글쎄." "......" "잘난 내가 이런 위기에 처하다니, 희한하네." "......" "미치겠어." "미치렴." "......" 저 녀석은 지금 상황이 전혀 긴장되지도 않는단 말인가? 우리는 지금 뭔지도 알지 못하는 괴상망측한 미로에 갇혀 있다. 한 마디로, 지난번 무인도에 갇혔을 때와 같은 상황. 그때는 주변에 먹을 거라도 있었지만 여기는 하나도 없다. 아니, 하나는 있네. "무, 무슨 눈빛이야!" "그냥 바라만 봤어." "부, 불순한 생각 했지?"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 "걱정 마, 피닉스 군." "......" "절대 불순한 생각은 안 했으니까. 으하하하." "......" 피닉스 녀석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눈치도 빠르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굿 아이디어! "피닉스!" "......?" "날아서 이 미로를 눈으로 확인해 봐!!" "오케바리!!" 펄럭펄럭. 그 말과 함께 피닉스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런데...... 벽도 같이 치솟는다? ...... "신기한 벽이군." 나는 중얼거렸다. 이렇게 신기한 벽이 있을 줄이야. 정말 예상 밖이다. "헉헉헉." 열심히 날아 올라가던 피닉스는 약 40미터 정도 올라간 위 치에서 지친 기색으로 다시 내려왔다. 그리고는 열심히 헐떡 거리며 내게 날아왔다. "수고했어." "왠지 열 받네." "열 받으면 계속해서 올라가 보든가." "......" "말리지는 않을게." "......" 내 말에 고민에 잠기는 피닉스 군. 그렇게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말한다. "안 할래." "그러렴." "근데 오늘따라 마에스트로 이상해." "응? 내가?" "왠지 뭔가 초탈한 느낌?" "......" 흐으음, 그러고 보니 나도 그런 느낌이 드는걸. 하도 이상 한 일만 겪다 보니 어느새 초탈했는디고 모르겠다. 옛날 같으면 어이가 없고 화가 나고 짜증도 나는데 지금은 글쎄......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 ......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마에스트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피닉스가 내게 물었다. 그 물음에 나는 한쪽을 가리켰다. 손가락으로. 그러자...... "으아악!!" 피닉스 군이 비명을 질렀다. 난 그런 피닉스에게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저렇게 될지도." "해, 해골이잖아!!" "빙고!" "......" 그렇다. 내가 가리킨 곳에는 사람의 해골이 있었다. 추측하건대, 이 곳에 갇혀 굶어 죽은 사람의 해골 같아 보인다. 우리도 저 꼴이 날 것이다. 물론 난 부활하겠지만. "굶어 죽기는 싫어!! 우어억!!" 피닉스는 그렇게 외치면서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난 마음속으로 말해 주었다. 삽질이야. "헉헉헉." 쯧쯧. 역시 내 예상이 맞다. 피닉스가 한 것은 그저 삽질일 뿐이 란 걸. 나름대로는 열심히 빠져나가려고 한 것 같다만, 미로의 벽 은 정말 대단했다. 대략 100미터 정도를 날아 올라간 피닉스 를 쫓아 올라가는 미로의 벽.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는 마의 벽이다. "이, 이럴 수가. 전설적인 내가......" 벽한테 졌다는 사실이 슬펐는지, 피닉스가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보는 내가 안타깝다. "힘내." 나는 그런 피닉스 군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다독여 주었다. 그나저나...... 정말 이대로 아무것도 못한 채 이런 이상한 미로 속에서 죽어야 하는 거야? ......스몰스몰(?)한데. "꺄악!" "......!" 그 순간 들려오는 비명 소리. 분명...... 익숙한 목소리다. 너무나도 익숙한 비명! "제길!!" 나는 짧게 욕설을 내뱉고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내 달렸다. 내 짐작이 맞다면 이 목소리의 주인은 에리아다. "꺄아악!!" "비켜, 이 괴물 자식아!!" 퍼억!! "크아악!!" 나는 에리아를 발로 밟으려는 자이언트 오우거를 메이스를 휘둘러 그대로 날려 버렸다. 오우거의 형님뻘 되는 자이언트 오우거라 해도 나의 한 방 을 견디지 못하고 날아가 버린다. 역시 평범한 이미지로는 나갈 수 없겠군. "에리아! 괜찮아?!" 나는 후드가 벗겨진 채 울먹이는 에리아를 향해 다급하게 물었다. 그리고, "우에에엥!!" "......" 에리아가 내 품에 안겨서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런 에리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계속해서 울기만 한다. "으아아앙!!" "자, 에리아, 그만 울어......" "흐흐흑......" 내 말에 애써 울음을 참으려는 에리아. 그 모습이...... 정말 귀엽다! 정말 미치도록 귀엽다. "......" 으아악!! 아, 아니다! 방금 내가 한 말에는 절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냥 순수한 생각, 말 그대로 100% 오랜지 주스와 같이 순수 한 내 생각을 피력한 것뿐이다. 나는 절대로 로리타 콤플렉스가 아니다. "허억! 마에스트로, 너도 로리타?" "무슨 개소리냐!!" "왜 흥분하고 그래?" "......" "오호, 수상한데?" "......" "너도 이제 로리타의 참 맛을 안 거야?" 피닉스의 날카로운 물음에 나는 대꾸할 수가 없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아주 아주 아주 조금이지만 너무 귀엽다 는 생각에...... 으아악! 아니야! 나는! 나는 순진하단 말이다! 그저 에리아가 너무 귀여워 서...... 으아악!! 헉헉헉!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 몰려드는 자괴감. 정말 미칠 것 같군. 하지만 아주 잠깐 느꼈을 뿐이다. 애써 울음을 멈추려는 그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서 나도 모 르게 남자의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한 0.1초 정도 이상한 생 각을 했다. 생각해 보라. 나뿐만 아니라 어떤 남자라도 에리아처럼 귀여운 여자아이 가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0.1초 정도는 사심이 생길 수도 있 다. 없다고? ......그럴 리 없다. 분명 있다!! 으윽, 내 자신이 초라해지는구나. 그나저나...... "에리아, 왜 여기 혼자 있어?" "갑자기 문이......" "......" 갑자기 문이? 뭔 말인교? 나는 에리아를 마주 보며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천천히 얘기해." "갑자기 바닥이 열리면서...... 언니랑...... 모두 떨어졌어 요." 한마디로, 갑자기 바닥이 열리면서 그쪽으로 떨어졌다는 얘기? 바닥이 왜 열리는 건데? 그리고 다른 일행은? "에리아, 다른 사람들은?" 도리도리. 에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는 뜻이다. 근데 에리아, 오늘따라 유난히 귀엽다. 왜 이리 귀엽지? 크면 정말 미녀가 되겠다. "마에스트로, 너도 우리 파에 들어와라." 그때 내게 다가와 귓속말을 하는 피닉스 녀석. "......갑자기 뭔 새소리냐?" 우리 파라니? "로사모." "......" "로리타를 사랑하는 모임." "......" "궁극적인 목표는 로리타 소녀를 잘 키우는 거지." "저기, 피닉스 군 ......그 파 당장 해상해라." "......" "안 그랬다가는 알지?" 씨익. 그 말과 함께 씨익 웃어 보이자 피닉스 녀석은 땀을 삐질삐 질 흘리면서 답했다. "아, 알았어." 이 녀석들, 언제 그런 불건전한 조직을 만들었단 말인가. 하여간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놈들이다. 스윽. 그때 내 옷깃을 잡아당기는 자그마한 손이 있었다. 에리아다. "왜 그래, 에리아?" "언니들......" "아." 그렇다. 만약 다른 일행이 에리아처럼 혼자가 되었다면...... 생각하기도 싫군. 남자 놈들이야 워낙 살벌한 존재들이라 오히려 몬스터 쪽 을 걱정해야 하지만 여자들은 아니다. 그분들은 잘못했다 간...... "어서 언니들을 찾으러 가자." 나는 그 말과 함께 알 수 없는 미로 속을 걸어가기 시작했 다. 젠장, 다크프리스트의 유물 때문에 흑마법사들의 본거지를 찾아온 건데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일이냐? 이런 정체불명의 미로...... [외전: 피닉스와 앵무새] "재수 없는 자식." 앵무새가 중얼거렸다. 자신의 라이벌이자 자신을 따라 하기만(?) 하는 피닉스 녀 석을 향한 원망이었다. 항상 그래 왔다. 자신같이 잘난 전설적인 앵무새에게 못났다고 지껄일 뿐만 아니라 자기가 제 입으로 전설적이라고 자랑한다. ......재수 없기 그지없는 피닉스 녀석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디서 괴수 같은 일행을 끌고 와 구타와 폭행으로 자신을 협박했다. 자신은 9서클 마법사로 어디 가도 꿀리지 않은 능력을 가지 고 있었다. 그런데 그 괴물들은 자신의 능력으로도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특히 메이스를 휘두르는 그 초괴물은 무지막지한 존재. "하아,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됐을까?" 자신처럼 완벽하고 멋지고 뷰티풀하다 못해 눈물이 날 정 도인 전설적인 앵무새이자 마탑의 주인이 자신이 웬 폭력배 (?)들에게 붙잡혀 강제로 흑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연행되어야 하다니. 정말 슬픈 현실이다. "어이, 못난 앵무새!" 그렇게 푸념을 하던 앵무새를 향해 피닉스가 한 마디 던졌 다. 그에, 앵무새가 발끈해서 말했다. "이런 하찮은 피닉스 자식이 누구 보고!!" 발끈. 한편 하찮은 피닉스라는 말에 피닉스도 발끈했다. "뭐야, 하찮은 앵무새 주제에 전설의 영물인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다니!!" "흥! 전설 좋아하네." "너, 바보야?" "바, 바보라니!!" "전설적인 피닉스 몰라?" "......" "절대적인 생명력을 가진 피닉스, 그게 나야. 너무나도 전 설적이어서 눈물이 날 정도의 전설이지." "미친 자식." "뭐, 뭐라고?!" "미친 자식이라고 했다." "......이 미친 앵무새가!!" "이 미친 피닉스가!!" 처음에는 분명 말로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새 주먹다짐, 아니 날개로 격투기를 시작하는 두 마리의 새.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을 보던 윤현이 입을 열었다. "참, 재미있는 놈들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그의 말에 동조하는 크라스. "그래, 누가 더 잘났는지 겨뤄 보자!" "그래! 내가 원하던 바다!!" 순간 갑자기 대결 구도로 들어간 피닉스와 앵무새 군이었 다. 참 가지가지 한다. 내가 보기에는 그놈이 그놈 같아 보이는데 말이다. 둘 다 잘난 것도 없으면서 극도로 잘난 체를 하며 크레이지 모드로 돌입하고 있었다. 두 마리의 새가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나에게 뭘 요구하는 거냐? "여기서 누가 잘났는지 시험해 줘!" 피닉스 녀석이 소리쳤다. 시험이라...... 뭘 실험하는 건데? 앵무새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난 완벽하니 어떤 시험이든 자신 있어!" 진짜냐? 어떤 시험이든 자신 있다는 그 말. 뭐, 그렇다면...... "좋아. 지금부터 내가 누가 더 잘났는지 평가해 주마." "좋아!" "좋아!" 나의 말에 피닉스와 앵무새가 입을, 아니 부리를 꽉 다물었 다. 난 근처에 있는 나뭇가지를 주워 다른 손으로 그것을 가리 키며 말했다. "이 미션은 엄청 어려워." "꿀꺽." "꿀꺽." 내 말에 피닉스와 앵무새가 동시에 침을 삼켰다. 나는 그들을 보고 나뭇가지를 흔들며 말했다. "전문용어로, 나 잡아 봐라 미션!" "......" "......" "룰은 간단해. 일단 내가 이 나뭇가지를 던지면 너희 둘이 날아서 물어 오는 거다. 누가 더 빨리 물어 오느냐에 승패가 달려 있는 고도의 미션이야." "......!" "......!" 나의 말에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바보 새들. ......정말 새대가리군.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은 사람들이 개를 훈련시킬 때 하는 아 주 기본적인 훈련이다. 원반이나 공을 던져 물어 오게 하는 훈련. 그게 어느새 엄 청난 미션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하지만 저것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정말 새대가리의 표본들이다. "좋아!! 결판이다!!" "그래!!" 말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출발 지점에 와서 서는 피닉스 와 앵무새. 그런 그들의 모습에 나는 정말 감탄했다. 정말 미쳤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에. "자, 시작한다." 어찌 됐든 시험은 해야 했으므로 나는 그 말과 함께 나뭇가 지를 힘차게 던졌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날아가는 두 마리의 새. 물론 그냥 날아갈 리는 없다. 퍼억!! "크악!!" 피닉스의 하이킥이 앵무새의 얼굴에 작열했다. 앵무새가 저만치 날아가자 피닉스가 사악한 웃음을 터뜨렸다. "쿠케케케!" 그러면서 여유롭게 나뭇가지를 입에 물었다. 정말 이쪽 방면에서는 네가 한 수 위구나, 피닉스. 다른 건 몰라도 저런 반칙이나 비굴, 비겁에 관련된 일에는 피닉스를 따라올 자가 없다. "바, 반칙이야!!" 앵무새의 외침에 피닉스가 거만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패자의 변명이지." "바, 방금 네놈이 발로 때렸잖아!" "내가 언제?" "......" "증거 있어?" "즈, 증인은 있어!!" "노노. 증인이랑 네놈이랑 짤 수도 있잖아. 확실한 물증을 대 봐." "......" 저런 비상한 잔머리 같으니. 다른 쪽으로는 머리가 돌인데 이런 방향으로는 정말 천재 다. 각각 용도가 다른 두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녀석이라고 나 할까? "다, 다시 해!!" "훗, 비굴한 것 같으니." "......" "다시 해 줄까?" "다, 다시 해!!" "좋아. 전설적인 나니까 얼마든지 받아들여 주마." 어, 어라? 왠일인지 거절하지 않고 수긍하는 피닉스 군. 뭔가 이상한데. "마에스트로, 부탁해." 그렇게 말하며서 내게 나뭇가지를 돌려주었다. 그 말에 나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고 말았다. "어, 어. 그래." "완전히 파멸시켜 주겠어. 케케케." ...... 역시 순수한 마음으로 도전을 받아 준 건 아니구나. 피닉스가 원하는 건 앵무새의 완벽한 파멸. 정말 지독한 놈이다. "이번에는 당하고만 있지 않겠어!!" 피닉스의 반칙에 앵무새는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피닉스가 피식 웃었다. 저 녀석,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두 마리의 새가 다시 출발지점에 섰다. 나는 그들을 한 번 본 뒤 나뭇가지를 힘차게 던지면서 외쳤 다. "고(Go)!" "플레임 스트라이크!!" ...... 그때, 앵무새의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왔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상대의 발밑에 불꽃을 일으켜 공격하는 마법이다. 그런 공격 마법이 지금 여기서 발동되다니 미묘하군. "훗." 하지만 이미 예상했다는 듯 피해 내는 피닉스 녀석. 역시 잔머리의 지존이다. "에잇!! 파이어 볼!! 아이스 에로우!! 윈드 커턴!! 플레임 인 젝터!! 헬 파이어!!" ......이런 미친!! 앞의 것까지는 용납해 준다. 저런 미친 새를 봤나. 나는 여자들에게까지 피해가 갈 것을 고려해 다급히 그녀 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세르키스에게 말했다. "세르키스, 베리어!" "네!" 나의 말에 즉각 생성되는 베리어. 다음 순간, 헬 파이어의 후폭풍이 우리를 덮쳐 왔다. "꺄악!" "꺄악!!" "꺅!!" "으아앙!!" 여자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빌어먹을! 저 미친 앵무새 자식이!! 헬 파이어의 후폭풍이 가라앉자 나의 몸은 어느새, 헬 파이 어를 시전한 앵무새 곁으로 가 있었다. 나는 앵무새를 바라보며 외쳤다. "죽었어!!" "으아악!!" 그날, 폭주해서 미친 듯 마법을 난사한 앵무새에 대한 안타 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피닉스의 마지막 웃음이 마음에 걸린다. 설마 이런 상황을 예측했던 건 아니겠지? <『다크프리스트』제7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