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권  -JM-
은원(恩怨)의고리

1.당문 습격
2.쫓기는 소녀, 그를 만나다
3.고수를 보는 눈
4.네가 춘약을 먹어라
5.제2차 정사대전
6.사준환 그놈이 자결을?
7.은원(恩怨)의 고리


[지난 이야기]

패왕문으로 복귀한 영호면은 자신과 결혼해 패왕문을 맡아달라는 문주 풍소정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와 함께 하오문의 수련도 함께 부부의 연을 맺을 것임을 선언한다.
패왕문의 태상호법으로 임명된 영호면은 하나씩 조직을 정비해나간다.
그러나 외인이란 이유로 그의 명은 문도들에게 먹혀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무사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엄청난 기세를 보여주며 문도들을 휘어잡기 시작한다.
그는 많은 패왕문 무사들에게 뜨겁게 선언한다. 앞으로 패왕문은 끝없이 비상할 것이라고. 그의 선언에 무사들은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하는데...


1.당문습격

운남의 하늘은 무척이나 고즈넉했다. 그 한없이 푸른 하늘 아래로 밀림이 울창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비가 자주 내리는 열대우림지역이었다.
그러나 운남의 모든 지역이 밀림으로 뒤덮인 것은 아니다. 서쪽 귀주와 인접한곳에는 험준한 산악지형이 자리 잡고 있다. 질 좋은 구리와 철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기 때문에 이곳저곳에 광산이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그 광산 중 한 곳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오늘이면 중심부로 들어갈 수 있겠군."
나지막이 독백을 흘려내는 이는 독안의 중년인이었다. 만만치 않은 실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알려주듯 외눈에서 섬뜩한 정광이 흘러나왔다.
사내의 이름은 요백, 쇄비수란 무림명을 지닌 사파 계열의 무림인이다. 오 년 전 정사대전 당시 잠마련에 투신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덕분에 현재는 하나의 당을 맡고 있는 당주이기도 했다. 
그런 이력을 가진 요백이 긴장 어린 눈빛으로 동굴 안쪽을 쳐다보았다.
그가 있는 곳은 잠마련에서 극비리에 관리하고 있는 비처. 음차원의 기운이 몰려드는 마정지지인 것이다. 그동안 잠마련은 이곳에서 분출되는 혈마기를 이용해 강시를 강화시켜 왔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이곳은 다른 당의 관할 하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았다. 임무실패에 따른 책임을 지고 처형당한 것이다. 잠마련의 특급 비밀병기인 철마에 대한 관리가 소홀했다는 이유였다.
그 사실은 떠올린 요백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반드시 철마를 회수해야 해. 그래야만 승진할 수 있어."
철마는 풍부한 혈마기를 흡입하기 위해 이곳으로 보내졌었다. 그러나 대법에 투입된 이후 크나큰 사고가 발생했다. 철마를 옭아매어놓은 쇠사슬이 원인불명의 이유에 의해 끊어진 것이다. 
통제수단을 잃은 탓에 철마는 마정지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후 마정지지를 관리하던 무사들은 철마를 회수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처벌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끊임없이 음양강시를 안으로 들여보내 철마를 회수하려 했다.
이곳은 인간들의 접근이 금지된 장소. 흘러넘치는 혈마기가 심령을 침범하기 때문에 이곳에 들어온 인간은 금세 미쳐버린다. 오로지 사고능력이 없는 강시만이 마정지지의 중심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족족 실패로 돌아갔다. 들여보낸 음양강시들이 하나같이 빈손으로 돌아온 것이다. 결국 이 일은 잠마련의 총수 천기대제의 귀에 들어가고 만다.
"이런 버러지 같은 놈들."
최고의 비밀병기를 잃어다는 소식을 듣자 천기대제는 노발대발했다. 그리고 관리를 맡은 무사들은 모두 처형하란 명령을 내렸다.
명을 받은 집법전 무사들에 의해 요백의 선임자와 그 휘하 무사들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후 요백에게 이곳으로의 발령이 떨어졌다. 
그에게 내려진 명령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철마를 회수하는 것이었다.
'정말 긴장되는군.'
요백은 눈빛을 빛내며 동굴 안을 쳐다보았다. 동굴 안쪽, 마정지지의 중심부에는 잠마련 최고의 비밀병기인 철마가 들어가 있다. 
그것을 회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그의 운명의 좌우되는 것이다. 회수에 성공한다면 그 대가로 온갖 금은 보화와 미녀가 내려질 것이고 그러지 못한다면 선임자의 전철은 그대로 밟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요백의 얼굴은 비교적 밝은 편이었다. 그것은 바로 최근 들어 일어나고 있는 기이한 현상 때문이었다.
현재 마정지지의 혈마기가 눈에 띄게 사라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것이다. 요백은 그 이유를 철마가 혈마기를 흡수하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었다.
"이 추세로 진행된다면 오늘 오후 정도면 마정지지의 중심부에 들어갈 수 있어. 정말 고무되는 일이로군."
실례로 요백과 그 휘하 무사들이 서 있는 곳은 며칠 전만 하더라고 인간이 들어갈 수 없는 장소였다. 그런데 혈마기가 급속도로 사라지다 보니 이곳까지 들어올 수있게 된 것이다.
요백의 뒤에는 수십 명의 무사들이 바짝 긴장한 채 내부를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전만 하더라고 무위가 낮은 무사들은 주위에 가득 찬 혈마기 때문에 괴로워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혈마기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버티기가 나아졌다. 요백은 눈을 가늘게 뜨고 혈마기 농도를 가늠해 보았다.
"아까보다 월등히 희석되었군. 조금만 지나면 중심부로 들어갈 수 있겠어."
물론 그것은 무위가 절정 이상인 무사만이 가능했다. 제 아무리 희석되었더라도 혈마기는 인간인 좀처럼 감당하기 힘든 기운이다.
"반드시 철마를 회수해야 하는데..."
요백은 초조한 기색으로 연신 동굴 안쪽을 쳐다보았다. 어둠에 싸인 동굴, 꺾어진 저 너머에 잠마련 최대의 비밀병기인 철마가 있다. 철마의 회수 여부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니 요백은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조심해서 전진하라."
요백과 그 휘하무사들은 조바심 나는 마음을 달래며 마정지지의 중심부로 한 발짝씩 접근해갔다. 느린 속도로 움직이던 무사들이 마침내 꺾어진 길로 접어들었다.
요백의 눈빛이 순각적으로 빛났다.
"되었어. 여기만 지나가면..."
꺾어진 곳으로 들어가면 마정지지의 중심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철마를 회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에 요백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맺혔다.
그때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느닷없이 내부에서 굉음과 함꼐 엄청난 충격파가 뿜어져 나왔다.
콰콰쾅
바로 지적에서 터져 나왔기에 무사들은 미처 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충격파에 휘말리고 말았다.
"크억."
피를 토하면 뒤로 나가떨어지는 무사들. 요백 역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크게 뜨여진 눈에는 경악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무,무슨 일이지?"
마정지지의 중심부에서 느닷없이 충격파가 터져 나오다니... 아무런 대비가 없던 그들에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내상을 입었는지 요백의 코와 입에서 가늘게 핏줄기가 흘러 내렸다. 절정고수인 그가 그런 지경이니 다른 무사들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몇 명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까무러쳤고 나머지도 적지 않은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요백은 서둘러 나서서 수하들은 수습했다. 일단은 마정지지의 중심부에 무슨 현상이 일어났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설마 철마가 혈마기를 버티지 못하고 터져버린 것은 아니겠지?"
미간을 지그시 모은 요백은 주위의 혈마기를 가늠해 보았다. 찌푸려졌던 그의 얼굴이 환히 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적지않게 존재했던 혈마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되었어. 이제 마정지지의 중심부로 들어갈 수 있겠군."
요백은 정신을 차린 수하들을 이끌고 서둘러 몸을 날렸다. 일단 철마의 이상 유무를 판별하는 것이 그에겐 제일 시급한 문제였다.
꺾어진 길을 돌아선 요백이 급히 얼굴을 가렸다.
"헉."
난데없이 눈부신 빛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태양에서 뿜어지는 자연광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터라 무사들은 일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눈을 뜬 요백의 얼굴에 황당함이 서렸다. 그들이 있는 곳은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마정지지이다. 그런 곳에 어찌 햇빛이 내려쬔단 말인가. 다음 순간 요백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뭐,뭐야?"
그곳은 더 이상 마정지지가 아니었다. 만연해 있어야 할 혈마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바닥에 깔려 있어야 할 마정석도 사라진 상태였다.
불그스름하게 변색된 모습을 보니 한때 마정석이었던 것 같았지만 혈마기가 모조리 빠져나간 탓에 지금은 평범한 돌이 되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마정지지의 천장에 큼지막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곳을 통해 태양빛이 강렬하게 내려쬐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기에 요백은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어찌 이런 일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는 마정지지였다. 이곳의 경비 책임을 맡고 있던 요백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동안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천장에 뚫린 구멍은 무엇이며 혈마기는 대관절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요백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계제가 아니었다. 그는 급히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철마를 수색해라. 반드시 이 안에 있을 것이다."
명을 받은 수하들이 분분히 몸을 날렸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수십 명의 무사들이 샅샅이 수색했지만 철마는 없었다. 중심부가 그리 넓지 않았기에 여러 차례에 걸쳐 수색을 거듭했지만 철마의 흔적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보고를 받은 요백은 망연자실해했다.
"도,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입구를 철저히 지켰거늘..."
마정지지로 드나드는 입구는 철통같은 감시 하에 놓여 있다. 설사 초절정고수라도 자신들의 눈을 피해 철마를 빼돌릴 수 없다. 그런데 정작 마정지지안에 철마는 없다.
머리 빠지게 이유를 조명해 보았지만 해답은 도출되지 않았다. 생각을 거듭하던 요백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도대체 이 사실을 어찌 호법님에게 보고한단 말인가?"
운이 나쁠 경우 선임자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었기에 요백의 얼굴에서는 좀처럼 핏기가 돌아오지 않았다.
요백이 보고해야할 상관인 수석호법 곽천도는 현재 임무에 투입되어 있었다. 엄선된 무사들을 지휘하여 당문을 쓸어버리는 것이 그에게 내려진 임무였다.
원래 잠마련에서는 거의 몰락 위기에 놓인 패왕문을 이용해 당문과 상잔시키려는 계획을 꾸몄다. 패왕문의 실세들을 대거 포섭하는 데 성공했기에 사준환은 그 일이 실패하지 않은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느닷없이 의문의 초고수가 패왕문에 출연하여 계획은 그만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보고를 받은 사준환은 끝없이 탄식을 거듭했다고 한다.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기껏 포섭해 두었던 패왕문의 실세들은 모두 무공을 잃고 실각했다. 단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 치밀했던 계획이 어긋나버린 것이다. 그러나 당문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것이 잠마련의 입장이었다.
잠마련은 독을 이용해 휘하 무사들은 통제한다. 그러나 당문에는 잠마련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원천기술이 있다. 잠마련에서 독을 개발하던 독객과 흑법사가 모두 당문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당문을 쓸어버려야하는 것이 잠마련이 처한 상황이었다.
'반드시 당문을 쓸어버려야 해.'
사준환은 비밀리에 무사들을 뽑았다. 당문의 드러난 전력을 십분 감안해서 일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극히 신중할 수밖에 없다. 실력 있는 무사들을 대거 뽑은 사준환은 그 지휘를 흑면염란 곽천도에게 맡겼다.
'현재 당문에는 구파일방의 무사들이 파견되어 있다. 하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다. 무사들이 증원되기 전에 당문을 쳐서 멸문시켜라.'
그것이 곽천도가 무사들을 이끌고 당문으로 파견 나온 이유였다.
그는 상기된 눈빛으로 휘하 무사들을 쳐다보았다. 그가 데리고 온 무사들은 도합 백여 명, 거기에는 열다섯 명의 절정고수와 초절절고수가 포함되어 있다. 문파 하나를 치는 규모로는 실로 엄청난 전력이 아닐 수 없었다.
'당문에는 한 명의 초절절고수가 있지. 빈객 신분으로 머물러있는 냉유성, 그 외에는 이렇다 할 무사들이 없다. 기껏해야 무림맹에서 파견 나온 무사 삼십여명이 전부이지.'
정파의 일원이 된 이후 무림맹은 당문에 무사를 파견해 주었다. 아직까지 당문에는 잠마련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전력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당문이 잠마련의 독을 해독하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림맹에서 그 정도는 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파견된 무사들의 수가 충분하지 않았기에 무림맹에서는 무사들의 추가적인 파견을 검토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준환은 바로 그 틈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머지않아 정사대전이 벌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전에 당문을 멸문시켜야 한다.'
사준환의 준엄한 명령을 떠올린 곽천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태양이 서산 끄트머리에 반쯤 걸쳐 있었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지고 어스름이 깔릴 것이다.
곽천도는 지금 어두워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곽천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해가 지면 공격을 감행한다. 모두 준비하라."
무사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미 일단의 무사들이 당문의 경계초소 근처까지 접근해간 상태였다. 명령이 떨어지면 당문의 경계망을 그대로 와해될 것이다. 잠마련 무사들은 숨을 죽인 채 공격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곽천도는 알지 못했다. 누군가가 멀리서 그들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상당한 전력이로군."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이는 백발이 인상적인 중년인이었다. 그는 잠마련 무사들이 은신해 있는 곳을 정확히 쳐다보고 있었다. 꽤니 거리가 멀었지만 중년인의 눈에는 잠마련 무사들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초인이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중년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영호명이었다. 패왕문의 신임문주로 취임한 그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이다.
그의 뒤에는 이백여 명의 무사들이 어스름 속에 몸을 은신한 채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눈동자에 정광이 충만한 것을 보니 하나같이 충실히 훈련을 쌓은 무사들이었다.
그중에는 영호명이 수하로 거둔 비사문과 팽각의 모습도 보였다. 영호명이 도대체 왜 다수의 무사들을 이끌고 당문의 지척으로 와 있을까?
놀랍게도 그것은 곽천도와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영호명은 당문을 치기 위해 무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온 것이다.
패왕문을 일차적으로 정비한 다음 영호명은 당주로 내정된 무사들을 대동한 채 폐관에 들어갔다. 그가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왔을 때 패왕문은 발칵 뒤집혔다.
영호명을 따라 들어간 무사들이 하나같이 절정의 벽을 깨트린 채 폐관수련장을 나섰기 때문이었다. 원래부터 절정이었던 팽각 당주는 무공이 한층 증진된 상태였다. 뜻밖의 사실에 패왕문 전체가 술렁였다.
"세상에 그게 가능한 일이야?"
"믿을 수가 없군 분명 절정과는 거리가 멀었던 무사들이었거늘..."
그러나 그들 앞에 닥친 현실이 그러했다. 영호명은 내공이 부족한 무사들에겐 벌모수세를 해 주고, 깨달음이 부족한 무사에겐 깨달음을 주어 그들을 절정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렸다.
그것은 영호명이 초인의 경지에 접어든 초고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폐관수련장을 나서 무사들은 즉각 새로 개편된 당의 당주로 임명되었다. 휘하 무사들은 거기에 아무런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마도 문파에서 힘은 곧 진리인 법.
절정의 벽을 돌파했다는 사실만으로 당주가 되기에 충분했다.
영호명이 그렇게 문은 정비해 나가는 사이 군사인 갈천성이 패왕문을 찾아 왔다.
그는 놀라운 사실을 들고 왔다.
"하오문의 지파로 청부가 들어왔습니다."
"어떤 청부인가?"
"현재 당문에 억류중인 과거 오독문과 독곡 출신 독객들로부터 들어온 청부입니다."
영호명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그들이 도대체 어떤 청부를?"
"자신들을 당문에서 빼내어달라고 하더군요."
갈천성이 설명한 속사정은 상당히 복잡했다. 원래 그들은 당문의 독객들과 함께 잠마련에 포로로 잡혀 있었다. 같은 처지이기 때문에 그들은 갇혀 있는 동안 동병상련을 느꼈다.
그랬다가 데이몬의 활약으로 인해 당문으로 빼돌려진다. 이후 그들의 운명은 판이하게 바뀌어버렸다. 같은 포로 처지였던 당문의 독객들이 이제 지배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독곡과 오독문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소속 문파가 사라져서 허공에 붕 떠버린 탓에 그들은 잠마련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당문에 억류되어 독을 만들어내야 하는 처지에 놓여버렸다. 단지 갇혀 있는 장소만 달라진 것이다.
처음에는 당문에서도 그들을 잘 대해주었다. 한때 같은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입장에 따라 바뀌는 것이 사람들의 태도인 법. 과거의 동료였던 당문도들은 이제 그들은 핍박하는 관리자가 되어버렸다.
무엇보다도 당문은 이제 정파에 적을 둔 문파. 그런 만큼은 사파 출신인 그들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어쨌거나 갈 곳이 없는 탓에 그들은 당문에 억류된 상태로 독에 대한 연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들 중 한 명이 우연히 하오문의 문도와 접촉하여 자신들을 구해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갈천성은 즉각 그 일을 영호명에게 보고했다.
"이것은 절호의 기회입니다. 당장이라도 당문에서 독객들은 빼내 와야 합니다."
"그건 또 어째서 그런가?"
갈천성이 심각한 표정으로 거기에 얽힌 제반 정황을 설명했다.
"현재 잠마련은 독으로써 휘하 무사들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독에 중독된 상황이기 때문에 잠마련 무사들은 감힘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없는 실정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당문에 억류되어 있는 독객들을 구해온다면 어떻겠습니까?"
눈치 빠른 영호명은 대번에 갈천성의 의도를 간파했다.
"잠마련 무사들을 회유할 수 있다는 뜻이로군. 그들의 중독상태를 풀어주어서 말이야."
"바로 그렇습니다. 그것이 당문에 갇혀 있는 독객들을 빼내어 와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실을 들은 영호명은 두 말 하지 않고 패왕문의 무사들을 동원했다. 함께 폐관수련에 들어갔던 당주들을 위시해 이백여 명의 무사들이 차출되었다. 비사문까지 동행했으니 그야말로 패왕문 전력의 대부분이 동원된 셈이었다.
"구태여 당문을 공격할 필요는 없다. 그저 이쪽으로 전력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보여 저들로 하여금 순순히 독객들을 내어놓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다."
영호명의 패왕문 무사들을 대거 이끌고 당문으로 온 이유는 바로 그러했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당문에 먼저 눈독을 들인 무리가 있었으니...
어둠속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영호면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바짝 긴장해 있는 갈천성의 모습이 있었다.
"군사, 저들이 대관절 누구인 것 같소."
그러나 갈천성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일천한 내공으로는 잠마련 무사들을 식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영호명이 무사들의 생김새를 설명해주고 나서야 갈천성은 바로소 그들의 정체를 추정해냈다.
"우두머리의 얼굴이 시커멓고 수염이 숭숭 났다면 흑면염라 곽천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잠마련 소속 무사들입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살을 엘 듯한 살기가 휘몰아쳤다. 잠마련이란 말에 분노한 영호명이 표출한 살기였다. 잠마련의 사준환으로 말미암아 활강시가 되었던 그 였기에 당연한 현상이었다. 영호명의 주먹이 자신도 모르게 단단히 움켜쥐어졌다.
"정말 잘 만났군. 빚의 일부를 갚아줄 기회가 찾아왔어."
갈천성이 급히 손을 휘저었다. 지금은 무턱대고 잠마련 무사들은 공격할 때가 아니었다.
"고정하십시오, 주군."
"내가 잠마련에서 무슨 꼴을 당했는지 그대도 잘 알지 않나? 그런데도 참으라고?"
"일단 저희들이 이곳에 온 목적은 당문에서 독객들은 빼내기위해서입니다. 대업을 생각하십시오, 주군."
그 말에 영호명이 끓어오르는 중오심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그렇다면 더더욱 저들을 공격해야 하지 않는가? 저들의 목적은 엄연히 당문의 말살 일진대..."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잠마련 무사들은 십중팔구 당문을 멸문시키려고 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대상은 당문에 머물러 있는 독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대부분의독이 개발된 상태에서 독객들을 다시 잡아들일 이유가 없다.
차라리 죽여서 입을 막는 것이 잠마련의 입장에선 훨씬 편했다.
갈천성이 심각한 표정으로 사실을 추론해 나갔다.
"주공께서 말씀하신 대로 백여 명의 무사 중 초절정이 두 명이고 절정급이 열이 넘는다면 당문으로서는 역부족입니다. 조사된 당문의 전력으로는 도저히 막아낼 수가 없지요. 무림맹에서 무사를 파견했다고는 하나 고작 이십여 명 안팎입니다.
이대로 놔눈다면 당문은 반드시 멸문하고야 말 것입니다."
"하지만 당문에는 데이몬이란 놈이 있다. 그렇게 순순히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무림에서 데이몬의 실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가 영호명이었다.
"현재 당문에는 벽안독성이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첩자들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외부에 나가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조금 곤란하겠군."
그 말을 들은 갈천성의 눈이 빛났다.
"그 틈을 이용하자는 것이 제 계획입니다. 일단은 당문에 습격 사실을 알려 저들이 대비하게 한 뒤..."
갈천성의 계획을 들은 영호명이 그럴 듯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계획이로군. 그렇게 시행하는 것도 괜찮겠어."
긍정적인 답변을 듣자 갈청성의 안색이 환해졌다.
"그럼 즉시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즉시 사람을 보내..."
그때 영호명의 손을 내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당문에 경고를 해 주는 것은 지극히 간단한 일이야."
말을 마친 영호명이 기세를 발출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살기였다.
칼날같이 날이 선 살기가 한쪽으로 집중되었다. 그곳은 당문의 주요 인물들이 거처하는 장소였다.
현 당문 최고의 고수인 냉유성은 거처에서 운기조식에 몰두해 있었다. 호흡을 거듭함에 따라 외부에서 빨아들인 대자연의 기가 차곡차곡 단전으로 저장되었다.
잠시 후 눈을 뜬 냉유성의 눈동자에서 칼날 같은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정광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동자 깊숙이 갈무리되었다. 운기조식을 마친 냉유성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공은 도대체 어디에 계실까?"
주공인 데이몬은 벌써 몇 달 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러니 냉유성으로서는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의 안색이 돌변했다. 멀리서 풍겨오는 괴상한 기운을 감지한 것이다.
"이,이 기운은..."
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가 느낀 것은 다름 아닌 살기였다. 냉유성은 머뭇거림없이 고함을 내질렀다.
"기습이다. 누군가가 당문을 노리고 있다."
그 한 마디로 인해 당문은 발칵 뒤집혔다. 언제 잠마련에서 공격해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상황이다. 그런데 문파 내에 머물고 있는 최고수가 경고를 해 왔으니 부산해질 수밖에 없었다.
삐이이익
비상사태임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와 함께 전각에서 무사들이 뛰어나왔다. 각 전각에서 연구에 몰두하던 독객들은 주요 식솔들과 함께 급히 지하실로 대피했다.
병장기를 꼬나 쥔 무사들이 곳곳에서 뛰어나와 상기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문의 문주인 당문수가 의아한 눈빛으로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아무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냉유성의 얼굴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당문을 향해 살기를 쏘아 보냈습니다. 기세의 규모를 추정해 보니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고수입니다."
그 말에 당문수의 안색도 돌변했다. 초절정고수인 냉유성이 상상조차 할 수 없다면 그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옆에 서 있던 당청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유성 가가(哥哥)보다 강하단 말인가요?
냉유성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로서는 감히 범접도 하기 힘든 수준이야. 살기를 그 정도로 갈무리해서 쏘아 보내는 것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하지."
냉유성의 말에 모두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이런."
뜻밖의 변고에 곽천도가 입술을 깨물었다. 전혀 방비가 되지 않은 틈을 노려 습격을 가하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당문에서 습격을 눈친 챈 것이다.
당문의 무사들이 모조리 달려 나와 주위를 경계했고 외부의 보초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만큼 몰래 습격하는것은 물 건너간 것이 다름없었다.
"빌어먹을... 어떤 멍청한 놈이 살기를 흘린 모양이로군."
곽천도는 설마 제3자가 살기를 흘려보내 당문의 주의를 환기 시켰으리라곤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는 할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어쩔 수 없다. 정면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수밖에..."
데리고 온 전력을 감안하면 정면으로 공격해도 충분히 당문을 쓸어버릴 수 있다. 발각된 마당에 걸릴 것이 없었기에 그가 머뭇거림 없이 무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정면으로 치고 들어간다."
엄폐하고 있던 무사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마치 밀물 같은 기세로 당문의 정문을 향해 치고 들어갔다.
"적이다."
외마디 경고성과 함께 당문 무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정문으로 향했다. 다음 순간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시커먼 야행의를 걸친 다수의 무사들이 정문을 통해 난입하는 모습을.
"으악악."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핏줄기가 쭉 뿜어졌다. 정문을 담당하던 무사들은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습격자들의 무공이 월등히 강했기 때문이다.
순순히 당할 수 없다는 듯 무사들이 암기를 발사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침입자들은 가볍게 검을 휘둘러 암기를 막거나 퉁겨냈다. 그것민 보아도 침입자들의 무공수준을 익히 알 수 있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당문수가 급히 무사들을 뒤로 물렸다.
"후,후퇴하라."
당문 무사들은 즐비한 시신을 남겨두고 뒤로 물러났다. 침입자들은 본전 앞까지 밀린 당문 무사들을 노려보면 한 발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무려 일백이 넘는 규코에 당문 사람들의 낯빛이 암담해졌다. 당문수가 앞으로 나가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당신들은 누구요? 어찌하여..."
돌연 당문수의 말문이 막혔다. 제일 앞에 서 있는 흑면의 중년인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다,당신은 흑면염라 곽천도?"
"흐흐흐. 잘도 알아보았군.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그 말에 당문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잠마련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곤 예상했지만 이토록 빨리 난입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무려 백 명이 넘는 대 인원을 이끌고.
곽천도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길게 얘기할 필요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감히 본련에서 독객들을 빼돌렸으니 각오는 단단히 하고 있었겠지?"
"이런 간악한 작작들."
듣고 있던 당문 사람들이 치를 떨었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습격자들의 규모나 무공은 당문으로서는 당적하기 힘든 수준이다. 공격이 시작되면 상황은 그대로 끝이었다.
무사들이 모조리 싸늘한 시신이 되고 나 다음에는 식솔들과 독객들의 목이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철석같이 믿고 있는 데이몬은 현재 당문에 머물러 있지않았다.
그때 냉유성이 무사들 사이로 불쑥 몸을 내밀었다. 그가 곽천도를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살기로 경고한 것이 당신이오?"
"....."
"이해할 수가 없구려. 습격하러 왔으면서 어찌하여 기세로써 나에게 습격 사실을 알려준 것이오."
곽천도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살기로서 경고를 하다니?"
그 말을 들은 냉유성의 이맛살이 지그시 모아졌다.
"그럼 경고를 한 것이 당신이 아니란 말이오?"
대답은 잠마련 무사들 뒤에서 들려왔다.
"경고는 그들이 아니라 내가 한 것이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잠마련 무사들의 눈이 툭 불거졌다.
"뭐,뭐야?"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후미에서 수백여 명의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일견해도 두 눈에 정광이 가득한 것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무사들이었다.
그들 앞에는 백발의 중년인이 서 있었다. 그가 느긋하게 팔짱을 낀 채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뜻밖의 상황에 양측 무사들은 바짝 긴장했다. 저들이 적인지 아군인지 몰랐기 때문에 당문 무사들은 곤혹스러운 눈빛으로 새로이 나타난 패거리들을 지켜보았다.
반면 잠마련 무사들은 서둘러 대응태세를 갖추었다. 냉유성의 시선이 선두에 선 백발 중년인에게로 향했다.
"당신이 나에게 경고를 해 준 것이오?"
"그렇다."
영호명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조금 전 말을 건넨 청년의 경지를 눈치 챈 것이다.
'대단하군. 삼십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데 벌써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서다니...'
귓전으로 냉유성의 음성이 계속 파고들었다.
"일단 경고를 해 주신 데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하겠소. 혹시 본문에 무슨 일로 오셨는지 알 수 있겠소?"
영호면이 머뭇거림 없이 손가락을 들어 잠마련 무사들을 가리켰다.
"저들과 비슷할 것이다. 만약 저놈들이 없었다면 그 자리를 본문 무사들이 차지하고 있었을 테니."
순간 냉유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저들 역시 당문에 좋지 않은 뜻을 품고 온 자들인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떤 세력에서 당문을 치기 위해 무사들을 보냈을까.
"혹시 어디 소속인지 알 수 있겠소?"
냉유성의 질문에 영호명은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우린 패왕문 무사들이다."
그 말을 들은 곽천도가 미간을 지그시 모았다. 패왕문에서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이다. 그런데 패왕문의 무사들이 무슨 일로 당문을 방문한 것인가? 당문 사람들 역시 뜻밖이긴 마찬가지였다.
"패왕문? 패왕문이 우리와 무슨 은원관계가 있다고?"
"물론 은원관계야 없지. 하지만 볼일이 있어 찾아왔다."
당문수가 조심스럽게 말을 받았다.
"혹시 무슨 볼일인지 알 수 있겠소?"
"우린 너희들이 억류중인 독객들을 구출하기 위해 왔다. 그들이 하오문 지부를 통해 자신들을 구해달라는 청부를 넣었기 때문이지."
뜻밖의 말에 당문수의 눈이 커졌다. 저들의 목적이 설마 당문에서 보호 중인 독객들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당면한 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저들의 목적이 정녕 독객들의 구출이라면 그나마 협상의 여지가 있다. 당문의 완전한 말살을 위해 말살을 위해온 잠마련 무사들과는 사정이 다른 것이다.
그 짧은 시간동안 당문수의 머리가 정신없이 돌아갔다.
사실 당문은 사파 출신 독객들에게 그리 큰 미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독에 대한 연구는 당가 출신 식솔들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게다가 사파 출신 독객들을 문도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한 마디로 계륵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 사실을 떠올린 당문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파 출신 독객들을 내어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소. 하지만 저들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텐데..."
당문수의 시선이 머문 곳은 잠마련의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뜻밖의 상황에 당혹해하면서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영호명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저들은 우리 패왕문에서 처리해 주겠다. 단 독객들을 확실히 넘겨준다는 약조를 하면 말이다."
그 말에 발끈하고 나선 것은 흑면염란 곽천도였다.
"이런 빌어먹을 경우가 있나? 고작해야 패왕문 따위가 감히 우리 잠마련 무사들을 막아서겠다는 건가?"
그 뒤를 영호명의 느물느물한 대꾸가 이어졌다.
"살다 보면 빌어먹을 경우가 있을 수도 있는 법이지. 좌우지간 네놈을은 당문과의 일이 마무리되면 차근차근 정리해 줄 테니 잠자코 입 닥치고 있도록."
곽천도의 검은 얼굴이 분노로 인해 시뻘겋게 물들었다. 잠마련의 수석호법인 그가 어찌 이런 경우를 당해 보았겠는가?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다는 듯 자모건곤권을 뽑아들고 몸을 날렸다.
"도저히 못 봐주겠군. 우선 네놈의 목을 따서 광오함에 대한 응징을 하겠다."
초절정고수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의 몸에서 광폭한 기세가 쭉 뿜어져 나왔다. 물론 그 대상은 전면에 나와 있는 영호명이었다.
파파파팟
양손으로 움켜쥔 자모건곤권이 눈부시게 빛났다. 한 쌍의 자모건곤권이 노리는 곳은 영호명의 목과 가슴이었다.
그러나 영호명은 미동도 하지 않고 다가오는 곽천도를 물끄러미 노려볼 뿐이었다.
그때 그의 뒤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지존에게 감히."
영호명의 뒤에서 한 줄기 인영이 떠오르더니 곽천도를 맞받아쳐갔다. 영호명의 충실한 수하를 자처하는 비사문이었다. 뽑아든 장도에서 시퍼런 강기가 쭉 뿜어져 나왔다. 이어 한 쌍의 자모자곤권과 장도가 거세게 충돌했다.
콰쾅
엄청난 충격파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놀랍게도 곽천도의 공격은 중간에서 가로막혔다. 뒤로 두 걸음 물러선 곽천도가 놀라 눈빛으로 자신의 공격을 가로막은 상대를 쳐다보았다.
비사문은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상체를 마구 흔들며 뒤로 다섯걸음 물러선 상태였다.
한 번의 격돌로 서로간의 우열이 드러났지만 곽천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신의 공격을 막아냈다면 상대가 의심할 나위없는 초절정이란 뜻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
"놀랍군. 패왕문에 화경의 고수가 있었나?"
비사문은 이를 앙다물고 다시 장도를 꼬나 쥐었다. 비록 자신이 마의 벽을 깨뜨렸지만 벌써 한참 전에 화경에 걸음을 디딘 곽천도를 당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는 추호도 굴하지 않고 곽천도의 시선을 맞받았다. 서로가 뿜어내는 살기로 인해 대기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바로 옆에서 소란이 일어났지만 영호명은 태평했다. 도리어 그는 시선을 돌려 당문수를 쳐다보기까지 했다.
"어떻게 할 작정이오? 빨리 결정하기 바라오."
당문수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억류중인 사파의 독객들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당문은 오늘 험한 꼴을 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어차피 계륵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니만큼 길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좋소. 희망자에 한해 패왕문에 넘겨주도록 하겠소. 대신 저들을 확실하게 격퇴해주셔야 하오."
그 말을 들은 영호명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두 말 하면 잔소리겠지?"
허리에 찬 중도의 손잡이를 움켜쥔 영호명이 몸을 돌렸다. 그때까지 곽천도와 비사문은 팽팽하게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비사문의 귓전으로 착 가라앉은 음성이 파고들었다.
"물러나라, 비사문."
지존의 명령에 비사문은 두 말 하지 않고 뒤로 빠졌다.
"알겠습니다, 지존."
비사문이 머뭇거림 없이 명을 받들자 곽천도가 눈을 가늘게떴다. 한 번 격돌해 본결과 상대는 의심할 나위없는 화경의 고수. 그런 고수를 명령 한 마디로 통제한다면 지존이란 자는 그보다 더욱 강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영호명을 쳐다본 곽천도의 눈빛이 곤혹스러워졌다.
'이상하군. 분명 어디선가 본 듯도 한데...'
하지만 그는 영호명의 정체를 바로 눈치 채지 못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중갑주를 걸치고 있던 영호명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영호명의 머리색이 백발이 아니었다.
머리칼에 기름을 발라 곱게 빗어 넘기고 청의 장삼을 잘 차려입은 지금의 모습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곽천도를 향해 영호명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도 시작하도록 할까?"
영호명이 중도를 뽑아들었다. 거무튀튀한 도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광경을 본 곽천도는 바짝 긴장했다. 자모건곤권을 움켜쥔 손아귀에서 자신도모르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도를 뽑아들고 걸어오는 영호명의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만만치 않은 놈이로군. 어디서 이런 놈이?'
이제 그도 상대의 정체를 알아채고 있었다. 패왕문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초고수.
바로 저놈으로 인해 패왕문을 장악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어버렸던 것이다. 보고에 따르면 상대는 거의 초절정의 극에 이른 고수라고 했다.
'하지만 나도 순순히 당하지는 않아. 이미 십 년 전에 화경을 개척한 내가 아니던가? 정 안되면 성인극이 한손 거들 테니...'
성인극은 당문을 치기 위해 함께 파견된 고수였다. 보기 드물게 마의 벽을 돌파한 무사로서 과거 비룡방이라는 문파의 방주이기도 했다. 이 자리에 끌고 온 무사들 태반이 비룡방 출신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준환의 협박에 굴해 잠마련의 일원이 된 비운의 문파이기도 했다.
문제는 저쪽에도 초절정고수가 없지 않다는 점이다. 곽천도는 상기된 눈빛으로 비사문을 쳐다보았다. 만약 성인극이 뛰어들면 저자 역시 뛰어들 것이다. 마른침을꿀꺽 삼키는 곽천도의 귓전으로 전음이 파고들었다.
-생각보다 빨리 빚을 갚게 되는군. 잠마련에서 받은 대우가 너무도 인상적이었어.
곽천도가 깜짝 놀라 영호명을 쳐다보았다. 영호명은 살기어린 눈빛으로 곽천도를 쳐다보고 있었다.
-감히 날 활강시로 만들다니. 일단은 네놈의 목숨을 담보로 빚을 조금이나마 받아내겠다.
곽천도의 눈이 커졌다. 비로소 상대의 진짜 정체를 눈치 챈 것이다.
"서,설마...당신은?"
영호명은 그 말을 듣지도 않고 몸을 날렸다.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그도 원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무튀튀한 중도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솟구쳤다.
콰콰콰콰
강기가 서린 장도가 일직선으로 곽천도의 몸을 쪼개어갔다.
"헛."
경악성을 내뱉은 곽천도가 급히 자모건곤권에 강기를 응축시켰다. 불시에 가해진 상대의 공격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그러나 도에 서린 기운은 평범한 강기가 아니었다. 한없이 응축되고 중첩된 강기.
그것을 증명하듯 격돌하는 순간 곽천도의 자모건곤권이 마치 모래처럼 부서져 내렸다.
"이, 이런."
안색이 돌변한 곽천도가 급히 몸을 날렸지만 이미 영호명은 상대의 회피범위를 모두 계산해 놓은 상태였다. 영호명 정도 수준의 고수라면 능히 서너 수 앞을 예측할 수 있는 법이다.
사력을 다해 회피하는 곽천도의 앞가슴을 눈부신 빛이 갈라갔다. 뻔히 눈을 뜨고 쳐다보면서도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허공에 붉은 피가 쭉 뿜어졌다. 앞가슴이 완전히 갈라진 곽천도의 몸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눈동자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빛이 서려 있었다. 가래 끓는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이, 이렇게 강하다니..."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냉랭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잘 가거라. 저승에서 기다리면 머지않아 네놈의 주군도 도착할 것이다."
번쩍 하는 섬광과 함께 곽천도의 의식은 한없는 암연으로 곤두박질쳤다. 영호명이 장도를 휘둘러 곽천도의 허리를 양단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곽천도의 상체가 피분수를 내뿜으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촤아아악
뒤이어 정확히 허리를 중심으로 끊어져나간 하체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천기대제 사준환 최고의 흑면염라 곽천도의 너무도 비참한 최후였다.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누구 하나 입을 열 엄두를 내지못했다. 흑면염라 곽천도라면 잠마련을 대표하는 고수 중 하나이다. 그런 고수가 이토록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다니...
눈이 툭 불거져 나온 당문 무사들은 물론이었고 잠마련 무사들의 얼굴에도 경악의 빛이 서려 있었다. 곽천도가 이토록 허무하게 당하리라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세, 세상에..."
반면 패왕문 무사들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떠올라 있었다. 자신들을 이끄는 지존의 무위가 저토록 강한데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역시 지존이시군.'
'소문이 자자한 잠마련의 간판고수 흑면염라를 단 두 합 만에 처치하시다니...'
잠마련의 무사들의 낯빛은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앞에는 당문 무사들이, 뒤에는 두 배가 넘는 패왕문 무사들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지휘관이 허무하게 죽어버렸으니 도저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몸을 빼는 것도 여의치 않는 상황이었기에 몇 몇 무사들의 얼굴에는 체념의 빛이 어렸다. 진천마겸 성인극의 얼굴역시 어둡기 짝이 없었다.
'오늘은 길보다 흉이 많은 날이로군.'
곽천도가 죽어버렸으니 이제 남은 무사들은 자신이 책임져야한다. 더욱이 무사들 중 태반이 자신의 문도였던 비룡방 출신 아니던가? 등에 메고 있던 쌍겸을 뽑아든 성인극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독에 중독된 상태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물론 승산은 없다. 곽천도는 자신보다 수준이 높은 고수였다. 그런 고수를 단 두 합 만에 처치해버린 상대에게 어찌 승산을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떨리는 시선이 영호명에게 가서 멎었다. 상대는 무표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으음."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것을 느낀 성인극은 마른친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상대는 자신을 공격하지 않았다. 바짝 긴장한 성인극의 귓전으로 차분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그대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
뜻밖의 말에 성인극이 눈을 크게 떴다.
"무, 무슨 말씀이시오?"
"한 길을 걷는 마도의 무사로서 더 이상 피를 흘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어차피 패왕문도 사파의 일원일진대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있을까?"
"....."
"복종을 맹세한다면 휘하로 거둬들이겠다."
성인극의 눈가에 잔 경련이 일어났다. 상대는 감히 추측조차하기 힘든 초고수이다. 싸워봐야 승산이 있을 턱이 없었기에 고민하는 것이다.
만약 상대가 정파의 고수였다면 성인극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맞서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마도의 전통 있는 문파인 패왕문의 문주였다. 그렇기에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영호명이 손가락을 뻗어 토막 난 채 널브러진 곽천도의 시신을 가리켰다.
"본좌는 잠마련 수뇌부와 크나큰 원한이 있다. 본문의 호법들을 포섭해서 패왕문을 뒤집으려는 시도를 했으니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지. 하지만 그대들은 입장이 다르다."
말을 마친 영호명이 고개를 돌려 잠마련 무사들을 쳐다보았다. 뜻밖의 제안에 그들은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본인 역시 잠마련과 마찬가지로 패도를 추구한다. 잠마련을 넘어 마도의 제일 문파로 도약하려는 것이 패왕문의 목표이다. 하지만 본문은 한 가지 만큼은 잠마련과 다르다고 자부한다."
영호명의 눈동자에서 강렬한 안광이 솟구쳤다.
"본문이 추구하는 것은 지배가 아닌 군림이다. 전 마도의 종주로서 과거 패왕문의 영광을 고스란히 되찾겠다는 뜻이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패왕문 무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패왕문이여 영원하라!"
"문주님 만세."
잠마련 무사들도 다소나마 충격을 받은 눈빛이었다. 물론 그들은 잠마련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명실상부하게 당금 무림을 지배하는 최강의 세력 아니던가?
하지만 패왕문주의 광오한 패기가 영 엉터리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물론 패왕문주의 강력한 무공을 견식했기 때문이었다. 침묵을 지키던 성인극이 입을 열었다.
"지배가 아닌 군림을 목표로 한다고 하셨습니까?"
영호명이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성인극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어, 어쩌면..."
잠마련은 휘하 문파들을 철저히 지배, 관리하는 구조이다 그 때문에 잠마련에 복속을 결정한 순간 즉각 해체되는 것이 문파의 운명이다.
성인극의 비룡방 역시 그러했다. 비룡방 출신의 무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여러 당에 배속되었다. 심혈을 기울여 키운 방파가 공중 분해되는 것을 본 성인극의 심기가 대관절 어떠했을것인가?
하지만 군림을 목표로 하는 패왕문 휘하에 들어간다면 사정이 다르다. 군림이란 복종하기는 하되 휘하 조직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지배형태였다. 또한 지금껏 마도의 종주를 자부하는 문파들이 즐겨 행하던 방법이기도 했다.
'하, 하지만.'
고민하던 성인극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자신을 비롯한 비룡방 출신 무사들이 모두 독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그때 갈천성이 앞으로 나섰다. 눈치 빠른 그는 이미 성인극의 고민거리를 눈치 채고 있었다.
"중독 때문에 걱정하시나본데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오. 우린 사파 출신 독객들을 당문에서 구출하기 위해 이곳에 왔소. 그들의 능력이라면 당신들의 중독을 능히 해독할 수 있소."
성인극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추정하기조차 힘든 강자가 아니던가? 그가 떨리는 음성을 흘려냈다.
"그렇다면 앞으로 비룡방의 존속을 허락하시겠습니까?"
"비룡방?"
제반 사정을 모르는 영호명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갈천성이 다가가 제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원래 성인극이 만들어낸 문파였지만 잠마련에 들어가며 해체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영호명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패왕문을 사파의 종주로 인정한다면 비룡방을 다시 창설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때서야 성인극은 머뭇거림 없이 영호명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희들을 받아주십시오. 앞으로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그러자 과거 비룡방 출신 무사들도 일제히 병장기를 내려놓고 부복했다. 과거의 문주가 굴복했는데 휘하 무사들이 고집을 부릴 순 없는 노릇이다.
"지존을 뵙습니다."
영호명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나머지 잠마련 무사들도 하나둘씩 부복하기 시작했다. 이미 절반이 넘는 무사들이 추항한 상황이었기에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게다가 투항하면 독을 해독할 수 있다고 하니 깊이 고민할 이유가 없다. 그들 대부분은 독으로써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잠마련에 알게 모르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상황이다.
마침내 잠마련 무사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영호명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영호명이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쳐다 보았다.
상황은 생각 밖으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패왕문주 영호명의 가공할 무위 앞에 곽천도가 비명횡사하고 난 뒤 나머지 잠마련 무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그들을 거둬들인 영호명은 정식으로 당문에 독객들의 신병인도를 요청했다.
"이제 그대들이 독객을 내놓을 차례요."
당문으로서는 거절할 명분이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당문수는 억류하고 있던 독객들을 모두 데리고 나왔고 대다수는 패왕문으로 가겠다는 선택을 했다.
독객들을 모두 구출하자 패왕문 무사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당문을 나섰다. 그 뒤를 잠마련에서 투항한 백여 명의 무사가 뒤따랐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패왕문 문도들을 당문과 무림맹에서 파견 나온 무사들이 긴장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들은 패왕문 무사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패왕문은 이미 유명무실하게 되었다고 들었는데 놀랍군. 패왕문주의 무공이 저토록 고강할 줄은 몰랐소."
"잠마련의 대표고수인 흑면염라를 단 두 합 만에 베어 넘길 수 있다면 도데체..."
미간을 지그시 모으고 있던 당문수가 청색 도포를 입은 중년인을 쳐다보았다. 그는 당문에 파견되 무림맹 무사들을 통솔하는 자였다. 청라검 허정이 그의 이름이었다.
"허정 대협,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소. 무림맹에서 무사들을 더 보내주어야 할 것 같소."
그 말에 동의하는지 허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려. 만약 패왕문이 아니었다면 당문은 오늘 매우 힘든 일을 겪어야 했을 것이오. 내 지급으로 보고하도록 하리다. 빠른 시일 내에 무사들을 보내달라고 말이오."
말을 마친 허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휴, 걱정이구려. 사파의 세력이 저토록 강해지다니..."
그때 당청이 끼어들었다.
"너무 걱정할 것은 없을 것 같아요. 상황을 보아하니 저들은 잠마련과 다른 노선을 걷고 있어요. 지배가 아닌 군림이라면 잠마련과 정명으로 충돌을 빚을 것이 틀림없어요."
당문수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으면 좋으련만..."

2.쫓기는 소녀, 그를 만나다

장강은 예로부터 중원을 대표하는 강이다. 이 강을 통해 주변의 농민들은 농사지을 물을 얻는다.
장강의 효용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장강은 예로부터 물류가 이동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리고 강남과 강북의 교통연결을 저해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워낙 강폭이 넓어 다리를 놓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장강 곳곳에는 나루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삯을 받고 사람이나 물자를 건네주는 나룻배들이 곳곳에 성업 중이었다. 지금도 조그마한 크기의 나룻배 한 척이 강기슭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휴, 오늘은 손님이 없군."
하루 종일 삿대를 저어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아삼이 손을 들어 이마의 땀을 훔쳤다. 구리빛으로 그을린 얼굴이 영락없는 뱃사람이었다. 그의 배 안에는 십여 명의사람들이 앉아 배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추레한 상인 차림의 중년인이 채근을 해 왔다.
"이보쇼, 사공. 더 올 것 같지도 않은데 이만 출발하는게 어떻소?"
"예. 일 각만 기다려 보고 출발하겠습니다."
아삼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손님이 더 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손님이로군."
나루터를 향해 바삐 달려오는 왜소한 인영을 본 것이다. 그는 삿대를 놓고 손님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조그마한 봇짐을 품에 안고 달려오는 이는 남루한 옷을 걸친 소녀였다. 언뜻 보기에는 흔히 보이는 시골처녀와 다름없는 차림새. 그러나 소녀의 미모는 대단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 같은 큰 눈과 오똑한 코, 손을 대면 묻어나올 듯한 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미녀. 그러나 얼굴을 가득 뒤덮은 먼지가 그 미모를 가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소녀가 나루터에 올라섰다.
"어서 오십시오."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펴본 소녀가 아삼을 쳐다보았다.
"뱃삯이 얼마죠?"
"닷 냥입니다."
손을 비비며 대답하는 아삼의 말에 소녀는 머뭇거림 없이 품속에서 돈을 꺼내 뱃삯을 치렀다.
"언제 출발하나요?"
"지금 바로 출발할 것입니다. 진작 출발했어야 하는데 소저가 달려오는 모습을 봐서 기다렸습죠. 헤헤."
소녀는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배에 올랐다. 그녀를 태우자 나룻배가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바로 강북으로 건너가는 건가요?"
소녀의 질문에 아삼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하류에 있는 포구 한 군데를 더 들러서 승객을 몇명 더 태운 다음 강을 건너갑니다."
사공의 말에 소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상황을 보니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 같았다.
'그럼 곤란한데.'
소녀는 불안해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쩔 수 없지.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만 해도 어딘데.'
생각을 거듭하던 소녀가 얼굴을 찡그리며 허리를 움켜잡았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허리에서 미미하게 피가 배어나왔다.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정말 운이 좋았지. 이 정도 상처로 모용세가의 추격을 피해낼 수 있었다면..."
소녀는 구석진 자리에 가 앉았다. 그녀를 힐끔 쳐다본 사공이 배를 출발시켰다.
삐걱
낡을 대로 낡은 나룻배가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녀는 배가 나루터를 떠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을 건너간다면 자신을 쫓는 무사들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긴장이 풀리자 몸이 나른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정신을 추슬렸다.
'지금은 긴장을 풀 때가 아니야. 본가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십분 조심해야 해.'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함께 동행 했던 무사들은 태반이 죽거나 적의 포로가 되었다. 이제 갓 방년을 넘긴 처녀에게는 이만저만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팔딱팔딱 살아 숨 쉬던 무사들이 피를 뿜으며 숨을 거두는 모습을 바로 지척에서 보았으니 소름이 돋지 않을 도리가 없다.
소녀의 이름은 황보경, 황보세가의 일원이었다. 그것도 가주의 셋째 딸이었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황보세가 가주의 딸이 어찌해서 이런 몰골로 쫓기고 있을까?
황보경은 한숨을 내쉬며 조금 전에 겪은 일을 떠올려 보았다.
황보세가는 자타가 공인하는 섬서의 명문 무림세가다. 한때는 오대세가로 인정되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사대전 당시 본가가 쓸린 데가 다수의 고수들을 잃어 지금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가문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현 가주 황보천이 불철주야 뛰어다녔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문의 몰락을 틈타 모용세가가 대부분의 사업장을 빼앗아갔기 때문이었다.
거기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으로 모용세가는 끝없는 번영의 길을 걷고 있었고, 두 세가 사이의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벌어져만 갔다. 그 차이는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었다.
그랬던 상황에서 뜻밖의 사건이 벌어진다. 묵회의 습격으로인해 모용세가의 본가가 쓸려버린 것이다. 가문의 부흥을 꿈꾸던 황보세가로서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가주인 황보천은 가문의 역량을 모조리 끌어내어 모용세가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기로 결정한다. 그는 우선 정략결혼을 통해 다수의 돈줄을 끌어 모았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않던 인근의 지주들과 혼인관계를 맺어 재정적인 지원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돈을 끌어 모은 끝에 황보세가는 다수의 낭인들을 고용하는데 성공했다.
보유한 무사들만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으니 낭인들이라고 끌어들여야 승산을 논할 수 있는 것이 황보세가가 처한 상황이었다. 이미 황보세가는 이번 일에 가문의 운명을 건 상태였다.
"이번 기회에 사업장을 되찾아오지 못한다면 세가의 이름을 내려야 한다."
황보천은 이런 절박함으로 인해 일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낭인들을 고용했어도 승산이 부쩍 높아지지는 않았다. 머릿수는 비슷해졌지만 무사들의 수준차이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모용세가에는 아직까지 막강한 무사진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황보천은 갖가지 계책을 마련해 냈다. 그중 가낭 중점적으로 추진한 것은 성동격서의 전략이었다.
모용세가는 섬서의 두 군데에 거점을 두어 사업장을 관리하고 있다. 황보세가에서는 따로 조직한 기습조를 이용해 거점 중 하나를 치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모용세가의 무사들이 그곳으로 몰렸을 때 다른 거점에다 세가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함락시키는 계략을 세웠다.
거점만 점령한다면 다수의 사업장을 되찾아올 수있었기 때문에 황보세가로서는 이번 작전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황보천은 낭인들을 주축으로 기습조를 구축하여 남쪽의 모용세가 거점을 치게 했다. 물로 낭인들만 보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다면 자신들이 미끼인 것을 알아차리고 항명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그래서 황보천은 기습조에 가문의 주요 식솔 몇 명을 대동시켰다. 그래야만 낭인들이 군말 없이 명령에 받들 터였다. 황보경은 바로 거기에 끼여 성동격서 작전에 참가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임무를 완수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거점에 머무르던 모용세가 무사들 다수가 지원을 위해 이곳으로 달려왔으니 말이다. 허나 그 대가는 처철했다.
달려온 모용세가 무사들의 수준과 숫자는 기습조가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기습작전에 나섰던 무사들 태반이 사망했고 몇몇은 포로로 잡혔다. 액운은 황보세가의 식솔이라고 빗겨가지 않았다.
작전에 투입된 식솔들은 모조리 싸늘한 시체가 되어 대지에 몸을 눕혔고 오로지 황보경만이 살아남아 간신히 활로를 빠져나왔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습격조에 포함된 유일한 여인이었다.
"쓸만한 계집이로군."
황보경의 미모에 눈독을 들인 모용세가 무사들은 그녀를 죽이지 않고 사로잡으려고 했다. 그래서 포위망이 느슨하게 짜여졌고 황보경은 악전고투 끝에 포위망을 빠져나와 이곳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
'거점 공격작전은 성공했을까?'
임무에는 성공했지만 황보경의 얼굴에는 짙은 회한이 서려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아무 거리낌 없이 사지로 보낸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 때문이었다.
물론 습격조에는 가문을 이어나갈 만한 후기지수가 단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죽어도 그다지 섭섭하지 않을 만한 이들로만 이루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인 황보천은 그녀에게 임무의 위험성에 대해서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를 제외한 식솔들이 전멸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사실을 떠올려 본 황보경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 따위는 죽어도 된다는 뜻인가요?'
서운함 때문에 호수 같은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가문 내에서 자신의 입지에 대해 생각하던 황보경은 슬며시 눈물을 훔쳤다.
보편적으로 무림세가의 가주에게는 여러 명의 부인이 있다. 처첩제가 용납되는 중원이라서 어느 정도 재력이 이는 지주라면 여러 명의 첩을 두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제 아무리 조강지처라도 나이가 들어 용모가 추해지면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 남자의 마음. 돈만 있다면 언제든지 젊고 아름다운 첩을 들일 수 있는 것이다.
 러나 무림세가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세가의 직계들에게는 정략결혼의 굴레가 씌워져 있다.
가문의 이익을 위해 사랑이나 정 없이 행하는 정략결혼이 세가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지고 그것은 세가의 가주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현재 황보세가의 가주인 황보천에게는 다섯 명의 처첩이 있다. 본처를 제외한 나머지 첩들은 대부분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타 무림세가에서 시집온 여식들이다.
황보천은 그들로부터 다섯 명의 아들과 세명의 딸을 보았다. 황보경은 그중 제일 막내딸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아무런 배경이 없기 때문이다.
자고로 처가의 힘이 강하면 시댁에서도 대우를 받는 법이다. 황보천의 본처를 비롯한 네 명의 첩들을 하나같이 명망 있는 무림세가의 여식들이다.
처가의 눈치를 의식해야 하기 때문에 황보천은 결코 그녀들에게 함부로 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녀들이 낳은 자식에세도 적용되는 사항이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유일한 예외가 바로 황보경의 어머니였다.
황보경의 모친은 원래 기녀였다. 황보천이 기루에서 하룻밤맺은 불장난으로 말미암아 황보경이 태어난 것이다.
황보경의 어머니는 원래 몸을 파는 기녀가 아니었다. 가기(歌妓), 즉 술자리에서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우는 예인이었는데 술에 만취한 황보천이 강제로 겁탈을 하고만 것이다. 단 한 번의 관계로 인해 그녀는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황보천이 기루에 거금을 주고 그녀를 기적에서 빼내어 온다.
사실이 외부로 퍼져나가면 이만저만 망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기녀들은 황보경의 어머니를 무척이나 부러워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 용모가 훼손되면 갈 곳이 없어지는 것이 기녀의 운명 아니던가.
가장 바락직한 것은 미모가 살아있을 때 고관대작의 후처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것은 대부분의 기녀들이 꿈꾸는 희망이기도 했다. 황보경을 잉태한 그녀도 처음에는 희망을 품고 황보세가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정실과 후처들의 질투어린 시선이었다. 가문의 이익을 위한 정략결혼도 아니고 처가에 힘이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녀는 기존 부인들에게 엄청난 구박을 받았다.
견디다 못한 그녀가 황보경을 낳은 뒤 야반도주해버렸을 정도였으니 구박의 정도를 익히 짐작할 만했다.
태어나자마자 어미로부터 버림받은 황보경. 그녀의 성장과정도 그리 순탄하진 않았다. 이복형제자매들의 끊임없는 구박과 모욕으로 인해 황보경은 어릴 때부터 눈칫밥을 먹으며 성장한다.
그나마 그녀를 불쌍히 여긴 황보천이 틈틈이 관심을 기울여 주었기에 어느 정도 위안이 되기는 했다.
철이 들자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불철주야 무공연마에 몰두한다. 방계가 인정받는 길은 오직 본신의 실력을 키우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황보경의 무공에 대한 자질을 평균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어머니로부터 대단한 미모를 물려받았지만 거기에 대한 반대급부로 무공에 대한 자질마저 모친을 빼다 박아버린 것이다.
황보경의 무공실력은 현재 이류 언저리였다. 비슷한 나이의 황보세가 직계가 일류를 넘어선 것을 감안하면 정말 형편없는 성취라고 봐야 했다.
게다가 성숙해진 황보경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정략결혼의 굴레였다. 비록 어머니가 기녀  출신이긴 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엄연히 황보세가의 가주.
기댈만한 배경이 없는 데다 아름다운 미모까지 갖췄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정략결혼에 이용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가 열다섯이 되던 해부터 매파가 대문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당시를 떠올려 본 황보경의 얼굴이 우울해졌다.
'가주의 딸로 태어난 만큼 정략결혼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겼는데...'
황보경은 자신을 운명을 달게 받아들였다. 가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황보천이 직접 골라낸 혼처에 대해 들은 황보경은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황보천은 무려 환갑이 넘은 노인에게 그녀를 시집보내려 하고 있었다.
황보천이 혼담을 넣은 이는 다름 아닌 파혈객 관충이었다. 절정의 극에 이르러 있는 정사지간의 고수로서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극(戟)의 대가였다.
황보천은 바로 그를 황보세가로 끌어들이기 위해 딸을 그에게로 시집보내려는 마음을 먹었다.
그 소식을 들은 관충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황보세가 가주의 친딸에다가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아리따운 소서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으니 관충의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황보세가에 몸을 의탁할 수 있으니 금상첨화이기도 했다.
양쪽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졌기에 혼담을 순탄히 진행되어갔다.
그러나 이루어질 줄 알았던 혼담은 전혀 뜻하지 않게 깨어져버렸다. 늙은 관충에게 시집가기 싫었던 황보경이 그만 가출을 해 버린 것이다.
신부가 사라지자 혼담은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자신이 거부되었다고 생각한 관충은 화를 내고 황보세가를 떠낫다. 황보경은 그 사실을 전해 듣고 나서야 황보세가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세가 식솔들의 싸늘한 눈빛이었다.
"가문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식솔의 역할이거늘..."
"비록 나이가 많다고는 하나 관충은 절정의 극에 이른 고수다. 그를 잡지 못함으로써 본가는 엄청난 전력손실을 입었다."
엄청난 꾸지람과 함께 금족령이 내려졌지만 황보경은 달게 받아들였다. 그 정도는 늙은이에게 시집가지 않게 된 대가로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기구한 운명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사업장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돈줄을 끌어 모으던 황보천이 또다시 딸의 정략결혼을 추진한 것이다. 물론 대상은 황보경이었다.
그녀에겐 두 명의 언니가 있고 모두 성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들은 정략결혼에서 제외되었다. 만약 그녀들을 정략결혼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외가에서 엄청난 항의가 들어왔으리라.
그러므로 아무런 배경이 없는 황보경이 가장 만만했던 것이다. 황보천이 고른 혼처는 이번에도 늙은이의 후처 자리였다.
당시 섬서에는 고리대금으로 천문학적인 재산을 끌어 모은 황씨 성의 재력가가 있었다. 황노대의 재산은 그야말로 추측불가라고 했다.
무릇 돈이 있는 곳에 미녀가 꼬이는 법. 거의 칠순에 가까웠지만 황노대는 무려 열 명이 넘는 처첩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중 마지막 첩의 나이가 고작해야 열여섯이었으니 황노대의 여성편력을 익히 알만도 했다.
황보천은 바로 그 황노대에게 혼담을 넣었다. 황보천이 가져간 딸의 초상화를 보자 황노대는 두 말도 하지 않고 혼담을 승낙했다.
"흠, 황보세가 가주의 친딸이라면 구미가 당기는구려. 게다가 이 정도 미인이라면 생각할 필요가 없지."
황노대는 황보경과 혼인하는 대가로 엄청난 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황보천은 그 돈을 이용해  낭인들을 대거 고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번 혼담 역시 무산되어버렸다. 늙은이의 후처가 되기 싫었던 황보경이 또 다시 집을 나가버렸던 것이다. 혼인식 날짜가 되어도 신부가 나타나지 않자 자연히 혼인은 취소되었다.
그리고 황노대가 약속한 자금지원 역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당시를 떠올려 본 황보경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가 많지만 않았어도... 아니 후처 자리만 아니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이후 귀가한 황보경을 맞은 것은 식속들의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대놓고 황보경을 없는 사람취급을 한 것이다.
황보경은 그 모든 대접을 달게 받아들였다. 어차피 자신으로 인해 비롯되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일은 그대로 끝나지 않았다.
'바로 그 일로 인해 내가 이런 지경에 처해버린 것이지.'
황보경의 눈빛이 별안간 처연해졌다.
'이번 습격조는 철처한 미끼였다. 생존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뜻이지.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날 이리로 보냈어.'
처음 작전내용이 공개되자 낭인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고작해야 백여 명 정도의 인원으로 모용세가의 주요 거점을 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습격조에 황보경이 포함되자 낭인들은 더 이상 반발하지 않았다.
"친딸을 포함시킨다면 승산이 있다는 뜻일 테지?"
"설마 어떤 아버지가 친딸을 사지로 보내겠어."
뭔가 안배가 있으리라고 생각한 낭인들은 군소리 없이 작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안배는 없었다. 습격조는 막강한 모용세가 무사들의 반격에 간단히 괴멸되어버리고 황보경 혼자만 천신만고 끝에 빠져나왔다.
그러니 황보경으로서는 당연히 아버지의 처사가 섭섭할 수밖에 없었다.
'저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지로 보내다니 정말 무정하시군요. 가서 죽으라는 뜻이었나요? 제가 얼마나 미우셨기에?'
황보경의 눈가로 맑은 눈물 한 줄기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그녀는 급기야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흑흑.'
그런 그녀를 배 안에 탄 승객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무슨 일로 다 큰 소저가 저렇게 울고 있담?'
'실연이라도 당했나?'
한참을 흐느낀 황보경이 고개를 들었다. 배 안의 승객들이 일제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급히 고개를 돌렸다. 무안해진 황보경도 마주 고개를 돌렸다. 그때 그녀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상한 사람이로군.'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상대의 차림새가 심히 괴이했다. 황보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사내를 쳐다보았다.
사내는 거무튀튀한 무복을 입고 있었다. 원래는 흑색이었던것으로 보이지만 얼마나 먼지를 뒤집어썼는지 회백색으로 변해있었다.
그것만이라면 이상할 것이 없었다. 무림에는 외모에 관심을 두지 않는 무인들이 워낙에 많으니까. 문제는 상대가 큼지막한 죽립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사내는 비 오는 날 우산대용으로나 쓰는 큼지막한 죽립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워낙 커서 얼굴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였기에 황보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죄를 짓고 도망치는 자인가? 그렇다고 해도 저토록 눈에 띄는 차림새는 하지는 않는 법인데?'
그러나 황보경은 금세 사내에게 관심을 지웠다. 자신 역시 쫓기는 처지였기에 쓸데없는 곳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다.
죽립의 사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죽립 아래로 섬뜩한 빛이 번뜩였다. 놀랍게도 빛은 사내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안광이었다. 그것도 핏빛처럼 검붉은색의...
'빌어먹을... 이런 차림새를 하고 다니는 꼴이라니.'
사내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안광을 다른 사람이 본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틀림없었다. 고개를 숙인 상태로 계속 투덜거렸다.
'미치겠군. 이 꼴을 하고 어찌 청이를 만나러 간단 말인가?'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데이몬이었다. 혈마기를 남기없이 빨아들인 다음 마정지지를 떠나온 데이몬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영호명을 꺾은 다음 데이몬은 곧바로 마정지지로 돌아갔다. 힘을 되찾으려면 그곳의 혈마기를 남기없이 빨아들여야 했기때문이다.
그곳에서 데이몬은 마력의 원천을 활짝 개방하여 혈마기를 마구 빨아들였다. 마정지지의 혈마기가 급속도로 사라진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데이몬은 그곳에서 빨아들인 혈마기를 모조리 암흑투기로 전환시킨다음 그곳을 나서야 한다 그러나 데이몬에겐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바로 당문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잠마련에서 필시 당문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주어진다면 자신들의 독이 무력화될 수밖에 없을 테니 당연한 행동이겠지. 뭐 무림맹에서 무사를 파견해 주겠지만 여러문파가 모인 무림맹의 특성상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을 터.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다.'
데이몬은 바로 그 때문에 예상보다 빨리 마정지지를 나섰다. 쇄비수 요백이 들이닥치기 바로 직전에 말이다. 그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든 충격파는 데이몬이 천장을 뚫고 나가는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몸속으로 빨아들인 혈마기가 눈을 통해 분출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혈마기를 미처 암흑투기로 전환시키지 못해 일어난 현상이었다.
마정지지를 나선 뒤 데이몬이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인근의 화전민이었다. 데이몬을 본 화전민은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귀, 귀신이다!"
두 눈에서 시뻘건 광망을 넘실넘실 토해내는 사람을 만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인근의 샘에다 얼굴을 비춰본 데이몬은 한없이 난감해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이런 일이.'
눈에서 뿜어지는 혈마기는 마법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데이몬은 큼지막한 죽립을 하나 구해 덮어쓰는 길을 선택했다. 그것 말고는 눈에서 분출되는 혈마기를 가릴 방도가 없었다.
'젠장, 이런 꼴이라니... 이런 모습으로 어찌 당문에 간단말인가?'
원래대로라면 바로 당문으로 공간 이동했어야 했지만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데이몬은 이곳에서 미적대고 있었다. 생각을 거듭하던 데이몬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암흑투기를 소모해야 할 필요성이 있어 그래야만 넘쳐나는 혈마기를 암흑투기로 전환시킬 수 있으니...'
현재 데이몬의 몸은 혈마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마정지지의 혈마기를 남김없이 흡입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암흑투기로 전환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뭐 변환시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문제는 변환시켜 놓은 암흑투기를 빨리 소모해야 한다는 점인데.'
암흑투기가 소모되어 줘야 혈마기가 순차적으로 변환된다. 그런데 문제는 마땅히 암흑투기를 소모시킬 만한 곳이 없다는 점이다. 살짝 고개를 든 데이몬은 얼굴을 찡그렸다.
'영호명이란 놈을 다시 찾아가서 한바탕 푸닥거리라도 벌여야 하나?'
그때 배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살짝 고개를 든 데이몬의 눈에 가까이 다가온 부둣가가 보였다. 그런데 부둣가에는 다수의 무사들이 모여 있었다. 무사들의 가슴팍에 새겨진 표식을 본 데이본의 입매가 미묘하게 비틀렸다.
'모용세가. 저놈들이 여긴 웬일이지?'
그의 얼굴에는 반갑다는 빛이 역력했다. 모용세가라면 그와 악연을 맺고 있는 집단이다.
'잘 되었군. 저놈들을 대상으로 암흑투기를 조금이나마 소모시켜야겠어.'
암흑투기도 소모하고 화풀이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에 데이몬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황보경은 얼굴이 창백했다. 나룻배가 다가가는 부둣가에 무사들이 대기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사들의 복색은 다름 아닌 모용세가의 것이었다. 상황을보니 자신을 잡아들이기 위해 나온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정말 철저한 자들이군. 이 일을 어떻게 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도저히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선두에 선 모용세가 무사들의 손목에는 금색 줄이 쳐져 있었다. 일류 이상의 무사들로 구성된 선풍대 무사라는 뜻이다.
고작해야 이류에는 미치지 못하는 그녀의 무공으로는 도저히 어찌 해 볼 방도가 없는 상대.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순순히 손 놓고 잡힐 수는 없어.'
그녀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그녀가 다가가는 곳은 죽립을 덮어쓴 사내였다. 그녀가 바짝 달라붙자 죽립 사내가 움찔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때 나지막한 음성이 황보경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아직까지 내력이 일천해서 전음을 보낼 수 없는 그녀였다.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데 잠시만 이렇게 있어 주실래요? 잘 넘어갈 경우 후사하겠어요."
사내와 부부로 위장하려는 것이 그녀가 꾸민 계획이었다. 사내가 잠자코 있자 황보경은 그것으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일단은 노력해보는 수밖에...'
입술을 깨문 황보경이 사내와 팔짱을 꼈다. 당돌한 행동에도 사내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룻배 승객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나루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섬서의 패자인 모용세가 무사들의 복색을 몰라 볼 리는 없다.
"모용세가 무사들이 여긴 웬일이지?"
"단체로 강을 건너갈 일이 있나?"
연신 수군대는 가운데 나룻배가 마침내 나루터에 가 닿았다. 그러자 선두에 선 무사들이 대거 배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잠시 검문을 하도록 하겠소. 허락 없이는 하선하지 마시오."
말을 마친 무사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배 안의 승객들을 살폈다.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를 연신 들여다보는 것을 봐서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하나같이 일류 이상의 고수들이라 그들은 금세 자신들이 수색하는 이를 찾아냈다.
배 뒤쪽에 웅크리고 있는 황보경을 본 무사들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역시 예상대로로군. 황포 나루터에서 배를 탔을 거란 추측이 맞아떨어졌어."
정체가 금세 탄로 났지만 황보경은 순순히 사실을 시인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시죠? 저는 남편과 함께 여행을 하는 중인데..."
"흐흐흐. 뻔한 거짓말을 하는군."
말을 마친 무사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배에서 내리시오. 당신들에게 하선을 명하겠소."
승객들이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 섬서에 감히 모용세가 무사의 명령을 거역할 담량을 가진 사람은 없다. 그러나 불만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다.
"하, 하지만 우린 강을 건너가야 하는데..."
그 말을 들은 무사가 은전 꾸러미를 바닥에 집어던졌다.
"일인당 은전 열 냥씩 가져가시오. 다음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면 될 것이오."
뱃삯의 두 배를 보전해 주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승객들이 앞을 다투어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황보경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도저히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잠시 후 나룻배에는 황보경과 죽립사내, 그리고 모용세가의 무사들만 남겨졌다.
황보경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무사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꽤나 절색이로군. 상부에서 생포하라고 신신당부하시는 이유를 알겠어."
"그거야 이를 말인가? 생포하려 하지 않았다면 황포 나루터에서 놓칠 이유가 없었지."
"네놈은 뭐지? 정녕 네 옆에 있는 여인의 남편이 확실한 건가?"
죽립사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사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그 여인은 우리 모용세가에 엄청난 죄를 짓고 도주하는 범인이다. 그런 범인을 비호할 경우 너에게도 동일한 죄목이 적용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사실을 말하도록 하라."
황보경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두 끝났어.'
이제 영락없이 모용세가로 끌려가는 일만 남은 것이다. 끌려가게 될 경우 그녀의 처지는 뻔했다. 모용세가의 사람들은 유난히 호색한들이 많다. 게다가 그들이 포로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소문이 자자했다.
보나마나 순결을 빼앗기고 노리개가 될 것이 뻔했기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 돼. 십구 년 동안 고이 간직한 순결을 이렇게 빼앗길 수는 없어.'
그러나 그녀의 능력으로는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때 죽립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팔을 붙들고 있던 황보경의 손이 맥없이 풀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죽립사내가 말없이 몸을 일으키자 무사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맺혔다.
'흐흐흐. 네놈이 어찌 감히 본 모용세가의 위세에 거역하겠는가?'
그러나 이어진 죽립사내의 말에 무사의 눈이 퉁방울만하게 커져버렸다.
"그래, 어떤 죄명을 적용할 생각이지?"
"....."
"듣자듣자 하니 짜증이 나는군. 웬 개새끼들이 아까부터 요란하게 짖어 대서 귀가 너무 아픈걸."
사내가 여유롭게 새끼손가락으로 귀지를 파내더니 훅 불었다.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무사 하나가 날카롭게 사내를 쏘아보았다.
"방금 그 말 우리에게 한 말인가?"
"그럼 너희들 말고 개새끼가 또 있느냐? 이제 그만 좀 짖어 대는 게 어때?"
무사들의 얼굴에 싸늘하게 살기가 돌기 시작했다. 감히 자신들을 개새끼로 칭하는데 분노하지 않을 순 없는 노릇이다. 제일 선두에 선 무사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검을 뽑아들었다.
"간이 붓다 못해 배 밖으로 나온 놈이로군. 내 친히 네놈의 간색깔을 확인하고야 말겠다."
말을 마친 무사가 머뭇거림 없이 죽립 사내의 배에 검을 박아버렸다.
그런데 푸욱 하고 나야 할 파육음이 나지 않았다. 파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장검은 옷조차 찢지 못하고 죽립 사내의 복부에 걸쳐 있었다. 공격을 감행한 무사가 눈을 크게 뜨고 주춤주추 뒤로 물러났다.
"조, 조심해 외공을 익힌 놈, 컥."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무사의 몸이 훨훨 날아갔다. 죽립사내가 손을 들어 냅따 따귀를 갈겨버린 것이다.
콰당
한참을 날아가 나가떨어진 무사의 얼굴은 금세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단 한 방에 혼절한 무사의 몸이 간헐적으로  경련하다 축 늘어졌다. 무사를 날려버린 사내가 죽립 아래로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래도 개새끼라고 이빨은 있군."
무사들이 반사적으로 검진을 펼쳤다. 금방 나가떨어진 무사는 그들 중 가장 무공이 강한 자였다. 그런 무사를 일격에 날려버렸다면 결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무사 한 명이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질렀다.
"귀하는 누구시오? 정체를 밝히시오?"
죽립사내가 아무런 말없이 바닥에 떨어진 장검을 집어 들었다. 백련정강으로 된상당히 질이 좋은 장검이었다. 그것만 봐도 모용세가의 위세가 어떠한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개새끼들이 가지고 다니는 이빨 치고는 질이 제법 좋군."
그 말에 무사들이 발끈하려는 순간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사내의 손에 놓인 장검이 별안간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무사들의 눈이 툭 불거져 나왔다.
"세, 세상에..."
그들의 경지로는 꿈조차 꾸지 못하는 기술. 시뻘겋게 달아오른 장검은 금세 백열하기 시작했다. 이어 녹은 쇳물이 뚝뚝 떨어졌다.
후두둑
놀랍게도 죽립 사내는 내공으로써 장검을 녹이고 있었다. 장검은 금세 형체를 잃고 쇳덩이로 화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손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잠시 후 재미가 시들해졌는지 사내는 손에 쥐고 있던 쇳덩이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치이이익
자욱한 수증기와 함께 한때 장검이었던 쇳덩이가 강바닥으로 맥없이 가라앉았다.
무사들은 얼이 빠져 그 자리에 엉거주춤 서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귓전으로 스산한음성이 파고들었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느냐?"
"....."
"나는 모용세가라면 이가 갈리는 사람이야. 그런 점에서 너희들은 정말 운이 없다. 주인을 잘못 둔 죄로 덩달아 뭉둥이질을 당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순간 죽립사내의 신형이 그곳에서 사라졌다. 이어 둔탁한 음성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퍽 퍼퍽 퍽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뜰 시간동안 상황은 완전히 종료되어 있었다. 장내에 서 있는 무사는 아무도 없었다. 십여 명의 무사들이 하나같이 얼굴이 찐빵처럼 부풀어 오른 채 널브러져 있었다.
일인일격. 저마다 한 대씩 얻어맞은 다음 의식을 잃고 나가떨어진 것이다. 무사들을 모두 때려눕힌 사내가 손을 툭툭 털었다.
"손맛도 나지 않는 허약한 놈들."
사내는 나루터에 엉거주춤 서 있는 사공을 쳐다보았다. 뜻밖의 상황에 사공은 얼이 빠져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강을 안 건너 줄 텐가?"
사내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사공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어렸다. 모용세가 무사들을 때려눕힌 사내를 건내주면 후환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자네도 한 대 맞아볼 텐가?"
그 말에 몸을 부르르 떤 사공이 허겁지겁 달려와 삿대를 잡았다. 도무지 얼굴 형체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오른 무사들 꼴이 나고 싶지는 않았다.
승객 대부분이 하선했기에 배에 탄 이는 오로지 죽립사내와 황보경뿐이었다.
삐걱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배가 나루터를 떠났다. 그곳에는 곧 얼굴이 찐빵처럼 부풀어오른 채 혼절한 십여 명의 무사들만 남겨졌다.
'세, 세상에...'
황보경은 입을 딱 벌린 채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상황이 이토록 간단하게 종료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저들이 도데체 어떤 무사들인가? 하나같이 일류이상으로 구성된 모용세가의 정예 아니던가?
얼마 전 맞서 싸워봤기에 황보경은 저들의 강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전장을 전전하던 낭인들도 저들의 검에 마치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충실하게 무공을 익힌 황보세가 출신 무사들 조차 저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마치 장난치듯 저들을 때려눕혔다. 게다가 장검을 녹이는 무지막지한 내공이라니... 하염없이 사내의 얼굴을 쳐다보던 황보경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조, 조금 전에는 실례가 많았어요."
사내의 죽립이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괜찮으니 마음 쓰지 마시오."
생각보다 음성이 젊어 보인다고 생각한 황보경은 고개를 숙였다.
"소, 소개가 늦었네요. 전 황보경이라 해요. 섬서 황보세가의 식솔이죠."
데이몬의 몸이 움찔했다. 황보세가라면 기억에 남아 있는 문파였다. 정사대전 당시 데이몬이 휘하의 수호마왕군을 이끌고 본단을 쓸어버렸던 곳이 바로 황보세가였다.
'허, 참.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군.'
데이몬의 눈빛이 별안간 아련해졌다. 수호마왕군을 이끌고 중원을 질타하던 시기가 떠오른 것이다.
묵묵히 침묵을 지키는 데이몬을 황보경이 상기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모용세가라면 이가 갈린다고 했지? 도데체 어떤 원한관계가 있기에...'
황보경은 살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가문인 황보세가는 지금 모용세가와 사활을 건 전투를 치르고 있다. 그러나 승산이 희박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눈앞의 사내에게 마음이 끌릴 수밖에 없다.
그녀는 상기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죽립사내는 추정조차 하기 힘든 수준의 고수다.
황보경의 무공이 워낙 일천하다보니 감히 경지를 추측할 수 없었지만 모용세가의 일류무사 십여 명을 눈 깜짝할 사이에 때려눕혔다면 상상도 하기 힘든 고수라고 봐야 했다.
그 사실을 떠올린 황보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모용세가에 원한이 있으신가요?"
추억에 젖어 있던 데이몬이 그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렇소. 그놈들에게 상당히 혹독한 대접을 받아서 원한이 골수 깊이 사무쳐 있소이다."
황보경은 반색했다.
"그러시다면 저희를 좀 도와주실 수는 없나요?"
데이몬은 물끄러미 황보경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희 황보세가는 현재 모용세가와 전쟁을 치르고 있어요. 정사대전 때 본가가 힘을 잃은 틈을 타서 모용세가가 저희 사업장을 모두 빼앗아갔거든요. 본가는 그때 잃은 사업장을 되찾으려해요. 그런데..."
황보경이 주절주절 늘어놓는 사정을 데이몬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황보세가가 힘을 잃은 것은 전적으로 나 때문이로군.'
물론 거기에 죄책감을 느끼거나 하진 않았다. 문제는 황보세가가 현재 모용세가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는 점이다. 모용세가라면 아직까지 이가 갈리는 것이 데이몬의 심정이다.
게다가 모용세가는 상당히 강한 무사집단을 보유한 무림세가, 그들을 상대로 싸운다면 넘쳐나는 암흑투기를 일정량이나마 소모시킬 수 있을 터였다.
열심히 설득하는 황보경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생각에 잠겨들어갔다.
'그래도 황보세가는 제법 저력이 있는 가문이지. 이번 기회에 빚을 좀 지워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는 한데.'
데이몬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보경은 열심히 말을 늘어놓았다.
"만약 대협께서 도와주신다면 본가에서 후사할 거예요. 그러니 부디..."
데이몬이 조용히 그녀의 말문을 끊었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소."
"네? 뭐가 궁금하신가요?"
"본인은 오랫동안 폐관에 들어갔다 얼마 전에 세상에 나왔소. 그래서 무림의 정세에 대해 무척 어둡소. 혹시 당문의 최근 근황에 대해 알고 계시오?"
그러자 황보경의 얼굴이 밝아졌다. 습격조로 차출되기 전 지인을 통해 들었기에  그녀는 당문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당문은 얼마 전에 잠마련의 습격을 받았어요."
"그,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잠마련에선 다수의 무사들을 동원해 당문을 공격했어요. 무림맹에서 충분한 무사를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당문에는 막을 만한 여력이 거의 없었죠. 그런데 뜻밖에도 거기에 패왕문의 무사들이 등장했어요?"
"패왕문? 그들이 어인 일로?"
"그들은 당문의 잠마련에서 빼낸 독객들을 구하기 위해 온 거였어요. 그러다가 잠마련으 습격조와 맞딱뜨린 거죠."
느릿느릿 이어지는 말에 데이몬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거요? 결과만 간략하게 말해주시오."
"패왕문은 사파 출신의 독객들을 건네주면 잠마련의 습격조를 막아주겠다고 제의했고 당문은 그 제의를 받아들였어요. 거기에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어요."
"....."
"신임 패왕문주가 엄청난 고수라는. 그는 잠마련의 간판고수인 흑면염라 곽천도를 단 두 함 만에 죽여 버렸다고 해요. 남은 잠마련 무사들은 전의를 잃고 투항했다고 들었어요."
데이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흠, 그렇다면 당문은 지금 안전하다고 봐야겠구려."
"네. 지금은 무림맹에서 파견한 무사들이 당문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요. 그런데 혹시 대협께선 당문과 연관이 있으신가요?"
데이몬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놀랍군. 곽천도라면 그리 만만치 않은 놈인데 단 두 합 만에 처리했다면 적어도 현경은 되어야 할 터, 설마 영호명이란 놈이 패왕문주가 된 건 아니겠지? 명색이 소림 출신인 녀석이 사도문파의 수장이 되었을 리는 없을 텐데?'
미간을 찌푸린 데이몬은 다시 황보경을 쳐다보았다.
"혹시 패왕문주란 작자의 용모가 어떻게 생겼는지 들은 바가 없소?"
"잘은 모르지만 머리색이 백발이었다고 들었어요."
데이몬은 비로소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곽천도를 단숨에 꺾은 무위와 백발의 머리칼이면 오로지 영호명밖에 없었다.'뜻밖이로군. 그놈이 패왕문에 투신하다니... 하긴 그 정도 경지의 무인이라면 정사의 구별아 무의미하니 말이야.'
내심 영호명을 살려두기를 잘했다고 안도하는 데이몬이었다.
'어쨌거나 그놈에게 빚을 졌군.'
만약 영호명이 아니었다면 당문은 피로 물들었을 것이다. 그가 마음을 두고 있는 당청의 안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급히 당문으로 갈 필요는 없겠어. 이 몰골로 갈 수야 없지. 암 그렇고 말고, 일단은 암흑투기를 소모하는 것이 시급하다.'
생각을 접어 넣은 데이몬은 황보경을 쳐다보았다.
"나더러 도와달라고 했소?"
황보경이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네? 네, 도와주세요. 본가는 대협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어요. 도와주신다면 그 은혜는 결코..."
"좋소. 어차피 모용세가에 원한이 있는 판국이니 한번 가 봅시다. 대신."
말을 마친 데이몬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만에 하나 대접이 소홀할 경우 그대로 떠날 것이오. 그점 명심하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버님께서는 버선발로 달려 나와 대협을 맞을 것이옵니다."

"곽천도가 죽고 나머지 무사들은 모두 투항했다고?"
싸늘한 눈빛을 받은 무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그렇습니다. 제가 똑똑히 목격한 사실입니다."
말을 마친 무사가 넙죽 엎드렸다. 운 나쁘면 분노의 여파가 자신에게 떨어질 수도 있었다.
보고를 하고 있는 무사는 감찰원 소속이었다. 당문 공격에 나선 공격조의 뒤를 따르며 임무수행 내용을 기록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사준환은 수하들을 믿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최고의 심복인 곽천도에게도 감찰원 무사를 붙여놓았던 것이다.
사준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받은 충격이 크다는 뜻이다. 이번 일은 잠마련을 창설한 이래 가장 큰 고비였다. 과거 얼음판을 걸으면서 세력을 키워나갈 때도 이런 위기에 직면한 적이 없다.
그러나 사준환은 절망하지 않았다. 위기 상황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니던가? 그가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었다.
"수고했다. 나가보아라."
사준환의 말에 무사가 한시름 놓았다는 듯 뒷걸음질 쳐서 물러났다.
"어처구니가 없군."
사준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최고의 심복인 곽천고가 비명에 갔지만 섭섭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겐 모든 인간들이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일 뿐이었다.
"패왕문주가 곽천도를 단 두 합 만에 꺾었다니 놀랍군. 그 정도의 고수가 도데체 어디서 출연했을까?"
일단을 패왕문을 처리하는 것이 가장 시급했다. 한 산에 두마리의 맹수가 존재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사파의 종주를 자처하는 잠마련의 입장에서는 패왕문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처해 있는 상황이 묘했다. 현재 정파 무림에서는 통문을 돌려 무사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묵회와 그 배후세력인 잠마련을 치기 위해서였다.
다만 여러 문파의 연합체인 무림맹인지라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같은 사파인 패왕문을 치는 것은 제살 깎아먹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생각을 거듭하던 사준환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어쩔 수 없군. 정사대전 당시 썼던 방법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수밖에. 그러려면 일단 판을 짜야겠지?"
정사대전이 벌어진다면 같은 계열의 방파들은 서로 싸울 수없다. 공동의 적과 맞서 싸우려면 서로 반목하던 문파들도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아야 한다. 사준환은 그틈을 이용해 거치적거리는 무사들과 문파들을 정리해 나갔다.
패왕문 역시 그런 맥락으로 처리하면 될 듯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판을 벌려야 해. 큼지막한 사건을 만들어 정사대전을 유발해 낸 뒤, 사파의 힘을 한 곳에 결속시켜야 해."
패왕문을 치는데 굳이 잠마련의 힘을 소모시킬 필요는 없다. 무림맹의 무력집단과 적당히 상잔시키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잠마련이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만 패왕문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사준환이 눈을 빛내며 상념을 거듭했다. 잠시 후 그는 탁자 위에 펼쳐놓은 지도를 지그시 응시했다.
"강화시켜 놓은 강시들을 쓸 때가 되었군. 강시들을 대거 동원하여 이곳을 묵사발 내버리는 거야."
그가 손을 뻗어 가리킨 곳은 하남의 무림맹 본단이었다. 현재 잠마련에는 무림맹 본단을 말끔히 쓸어버릴 전력이 있었다. 흑법사가 만들어내었고 마정지지의 혈마기로 강화시킨 음양강시군단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본련에는 스물다섯 구의 음양혈강시와 이백여 구의 독강시가 있다. 혼자서 초절정고수 한 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음양혈강시라면 충분히 무림맹을 쓸어버릴 수 있지."
물론 잠마련의 강시군단이 무림맹을 쓸어버린다면 그 여파는 엄청나게 클 것이다.
무림맹에 소속된 문파들이 즉각 잠마련을 적으로 돌리고 반격을 가해올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군소 사파 문파들에게 불똥이 튈 것은 자명했다. 사준환은 그 틈을 타 사파 무림의 힘을 한테 결집시킬 작정이었다. 무림맹 본다을 쓸어버린 잠마련의위세라면 어렵지 않게 사파 무림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사준환의 눈이 돌연빛났다.
"패왕문은 그 다음에 차근차근 정리하는 거야. 적절한 곳에 투입하여 무사들을 순차적으로 소모시킨 뒤 최종적으로 헤어날수 없는 함정에 빠뜨리는 거지."
물론 그것은 사준환이 가장 잘하는 장기이기도 했다.
상황이 생각대로 전개될 경우 패왕문도 자신의 지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지휘를 받지 않으려면 중립을 지킬 수밖에 없는 법. 물론 마도의 전통 있는 문파인 패왕문이 중립을 지킬 가능성은 희박했다.
계산이 서자 사준환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즉각 작전에 돌입해야겠군. 이런 일은 시간이 관건이지."
명령을 내리기 위해 사준환은 몸을 일으켰다. 이미 잠마련의 명령체계는 일원화된 상태. 명령이 떨어질 경우 무적의 강시군단과 엄선된 잠마련 무사들을 일거에 투입시킬수 있다. 신호를 보내자 대기하고 있던 무사들이 즉각 달려 들어왔다.

3.고수를 보는 눈

섬서의 하늘은 고적했다. 그곳의 서남부에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황보세가의 본가가 있었다. 그런데 본가의 분위기는 매우 침울했다. 경비를 서고 있던 무사들의 얼굴에도 그늘이 깔려 있었다.
바로 어제 황보세가는 가문의 운명을 건 일전을 전개했다. 일단의 무사들과 낭인들을 엄선해서 모용세가의 주요 거점을 치게 한 뒤, 모용세가의 관심이 그곳으로 쏠렸을 때 가장 중요한 거점을 기습 공격한 것이다.
상당히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성동격서 계책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그것은 실패로 돌아갔다. 기습조의 활약으로 인해 다수의 무사들이 빠져나갔지만 남은 거점에는 황보세가가 감당하기 힘든 전력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거점 방어에 나선 무사들의 규모를 본 황보세가 무사들은 맥이 탁 풀렸다. 수적으로는 비슷했지만 무사 개개인의 수준차이가 상당히 컸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용세가가 자랑하는 세 명의 초절절고수가 모두 거기에 와 있었다.
황보세가의 무사와 낭인들은 감히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도저히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전황은 지극히 전형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어갔다. 세가의 주요고수들이 나와 승부를 결하는 수순을 밟은 것이다.
황보세가에서는 가문의 최고수인 황보운악이 나섰다. 그리고 모용세가에서도 가문을 대표하는 초절정고수 한 명이 나와 도전을 받았다.
이어진 것은 무려 두 시진에 걸쳐 벌어진 험준한 접전. 거기에서 승리를 거머쥔 쪽은 모용세가 였다. 치열한 혈투 끝에 황보운악이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하고 나가떨어진 것이다.
물론 모용세가의 고수도 엄중한 내상을 입어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되자 황보세가의 기세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반면 모용세가에는 아직도 두 명의 화경 고수가 남아 있었다. 설마 모용세가가 본가까지 비워두고 이곳으로 화경 고수들을 총출동시킬 줄은 몰랐기에 황보천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크나큰 실착이로군. 모용세가가 이토록 강경하게 대응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정사대전을 눈앞에 둔 상황이다. 그런 만틈 낭인들은 대대적으로 동원해서 무력시위를 하면 사업장 서너 곳을 양도하는 선에서 양보할 줄 알았다. 그러나 모용세가는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점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황보세가가 이처럼 곤란한 지경에 처해버린 것이다.
다음으로 선을 보인 이는 모용세가를 대표하는 화경의 고수 중 하나였다. 오래 전에 초절정의 벽을 넘어선 화운객 모용증평이 앞으로 나와 황보세가를 도발했다.
"다음은 누군가? 도전을 했으면 용기를 보여라."
그러나 황보세가에서는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확실하게 검증된 화경의 고수를 그 누가 감당한단 말인가? 결국 양대 세가의 세력다툼은 거기에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황보천이 무사들을 철수시킨 것이다.
"좋소. 오늘은 비세를 인정하고 물러가겠소."
그러나 모용세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불협화음의 근원을 뿌리뽑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우리 거점을 선제공격하고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었나? 기다려라. 내일 우리가 황보세가를 방문할 것이다."
모용세가의 경고에 황보천의 얼굴이 흑색이 되었다. 모용세가가 이토록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다니... 하룻밤이 지나면 모용세가의 정예들이 대거 황보세가로 밀고 들어올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가를 버리고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근거지를 버리고 도망친다면 황보세가의 재기는 그야말로 불가능했다.
황보세가의 분위기가 어두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세가의 식솔들은 두문불출하고 있었고 고용된 낭인들고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데이몬과 황보경이 세가에 도착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여기가 황보세가랍니다."
황보경의 말에 데이몬이 고개를 들었다. 웅장하게 지어진 전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각들 대부분은 새로 지어진 것들이었다. 5년 전 사파의 별동대에 의해 불태워졌기에 그런 것 같았다. 데이몬의 입 꼬리가 미묘하게 비틀렸다.
'불을 지르라고 명한 것이 다름 아닌 나였는데 말이야.'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입장은 달랐다. 굳이 정사의 구분에 연연하지 않아도 될 신분이 된 것이다. 황보경을 보자 정문을 경비하던 무사들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아, 아니 아가씨."
"사, 살아 돌아오셨군요."
무사들의 반응을 보아 이미 죽은 사람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황보경이 살짝 고개를 숙여 목례를 했다.
"네, 돌아왔어요. 총관님은 어디 계시죠?"
"금방 나오실 것입니다."
총관은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역시 황보경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살아오시다니 정말 천운입니다. 하늘이 돌보시지 않았다면..."
"운이 좋았죠. 그건 그렇고 모용세가의 거점을 공격한 것은 어떻게 되었죠?"
총관이 침울한 표정으로 오늘 일어났던 일을 설명했다. 사실을 전해들은 황보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힘들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그토록 참담하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황보운악 숙부님의 상태는 어떠신가요?"
"급한 고비는 넘기셨습니다. 그러나 6개월 이상 정양해야 다시 검을 잡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가문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감행한 기습공격이 실패했다는 사실에 황보경은 속이 편치 않았다. 전멸해가며 모용세가의 주의를 끈 기습조의 희생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었다.
"기습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멸했어요. 저만 간신히 살아나왔죠."
총관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혀를 찼다.
"쯔쯔. 그래도 아가씨께서 살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가주님께서 아시면 무척이나 기뻐하실 겁니다."
"그건 그렇고, 중요한 일이 있어요."
황보경이 손가락을 뻗어 데이몬을 가리켰다.
"오늘 길에 우연히 귀빈을 만나 모시고 왔어요."
그 말에 총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남루한 옷에 죽립을 덮어 쓴 차림새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가장 좋은 접객청을 내어주세요. 이분께 최고의 대우를 해드려야 해요. 아버님께는 제가 보고 드리겠어요."
"하, 하지만."
총관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시죠?"
"지금 비어있는 접객청이 하나도 없습니다. 빈객들이 워낙 많아서..."
"하나도 없다는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총관을 물끄러미 쳐다보단 황보경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할 수 없죠. 일단 제 방으로 모시도록 하겠어요."
머리를 흔든 황보경이 데이몬의 팔을 잡고 끌었다.
"이리로 오세요. 누추하지만 대협께서 쉬실 정도는 될 거예요."
죽립사내를 자신의 처소로 데리고 가려는 황보경을 보며 총관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총관은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황보경의 거처는 뒤뜰의 별채에 있었다. 박대 받는다고 해도 명색의 가주의 친딸이었기에 그녀는 독채 하나를 통째로 쓰고 있었다.
황보경은 머뭇거림 없이 데이몬을 자신의 처소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마땅히 비어 있어야 할 그녀의 처소는 선객이 있었다.
문을 열자 대여섯 명의 무사들이 방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황보경을 보자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아, 아가씨?"
마치 귀신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황보경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당신들은 내당 소속 무사들이 아닌가요? 그런데 왜 내 방을 차지하고 있죠?"
무사들은 그 말에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쩔쩔 맸다. 한 무사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 저희들의 처소에는 현재 빈객들이 묵고 있습니다."
"초, 총관님께서 저희들로 하여금 이곳에서 머물라고 하셔서..."
황보경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노기가 치솟았다. 꽃다운 처녀의 방을 사내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어서 제 방을 비워주세요."
무사들은 아무런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방의 주인이 돌아왔는데 계속 미적거릴 순 없는 노릇이다.
무사들이 다급히 짐을 챙겨 나가는 모습을 황보경은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보고 있던 데이몬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황보세가에서는 이미 소저를 죽은 사람 취급하는 것 같소이다."
"그, 그게 아니오라."
억지로 변명을 했지만 황보경의 얼굴은 어두웠다. 총관의 권한으로는 무사들에게 자신의 방에서 묵으라고 명을 내릴 수 없다. 오직 가주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녀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너무하시는군요, 아버지.'
그러나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바꾸었다.
"일단 제 방에서 머물고 계세요. 시녀를 시켜 요기할 만한 것을 들여보내겠어요."
"알겠소. 그리고 술도 좀 부탁하오."
"네, 걱정 마세요."
데이몬을 자신의 처소에서 쉬게 한 뒤 황보경은 곧바로 가주의 집무실을 찾았다. 
기습조가 전멸된 사실도 보고해야 했고 무엇보다고 도와줄 고수를 데리고 왔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아버지인 황보천은 집무실에 있었다.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을 보아 고민이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 돌아왔어요, 아버지."
그 말에 황보천이 고개를 돌렸다. 공허한 시선이 황보경에게로 향했다. 이미 총관에게 사실을 들었는지 그는 황보경을 보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돌아왔느냐?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하지만 기습조는 전멸했어요. 대부분은 죽고 몇몇은 포로가 되었죠."
익히 예상한듯 황보천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랬구나. 피곤할 테니 가서 쉬도록 해라."
머뭇거리던 황보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 방에 내당 무사들이 있었어요."
황보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내가 그곳에 머무르라고 명령했다. 빈객들이 많아 방이 모자라서 그렇게 조치한 것이니 마음 쓰지 말거라."
살짝 입술을 깨물던 황보경이 뭔가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떳다.
"참 좋은 소식이 있어요."
"뭐냐? 말해 보거라."
"포위망을 탈출해서 본가로 오던 길에 엄청난 고수를 만났어요. 그를 설득한 끝에 본가를 도와주겠다는 확답을 받았어요."
"그게 사실이냐?"
"그래요. 그분은 지금 제 방에 머무르고 있답니다."
황보경은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나루터에서 모용세가의 무사들과 맞닥뜨렸을 때의 일을 설명했다. 그녀는 약간의 과장을 섞어가며 데이몬의 신위를 묘사했다.
평소 가문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그녀였기에 강력한 조력자를 끌어들인 일이 자랑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보천은 그녀의 말을 액면그대로 믿지 않았다. 죽립사내가 모용세가의 일류고수 열 명을 물리쳤다는 대목에서는 조금 놀라워했지만 그가 내공으로써 검을 녹였다는 말을 듣자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만하거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아, 아버지."
황보천이 실망어린 눈빛으로 황보경을 쳐다보았다.
"너는 어릴 때부터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했다. 이 아비도 무수히 속아 넘어갔지.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도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이다. 가문이 위기에 처한 지금에도 거짓말을 해서 아비를 속이려 하느냐?"
"하지만 제 말은 모두 사실이에요."
"말이 되는 거짓말을 하거라. 세상에 그 어느 고수가 내공으로써 장검을 녹일 수 있단 말이냐. 물론 초절정의 극에 달한 고수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런 고수가 적을 앞에 두고 쓸데없이 내공을 소모해서 검을 녹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정신이 돌아버린 작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황보천의 말은 지당했다. 검을 녹이려면 그야말로 엄청난 내공을 주입해야 한다. 
상식적으로 제 정신이 박힌 무사라면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할 이유가 없다. 그것도 적을 앞에 두고 말이다. 그러니 그가 황보경의 말을 거짓말로 치부할 법도 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를 모르고 있었다. 당시 데이몬은 내공(암흑투기)이 넘쳐나는 상황이었고 어떻게든 소모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적을 앞에 두고 검을 내공으로 녹이는 짓거리를 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온갖 구박과 눈칫밥을 먹고 자란 탓에 황보경은 본능적으로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는 법을 터득했다. 황보천도 거기에 여러 번 속아 넘어간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딸의 말을 새빨간 거짓말로 치부해 버렸다.
아버지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자 황보경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저, 정말 너무하세요. 소녀는..."
그러나 그녀의 눈물은 아버지에게 통하지 않았다. 황보천이 딸을 노려보며 역정을 냈다. 안 그래도 내일 있을 모용세가의 습격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딸의 거짓말을 들어줄 여유란 없었다.
"더 이상 듣기 싫으니 썩 물러나가도록 해라."
이어지는 아버지의 호통에 황보경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힘없이 처소로 돌아가는 황보경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이 사실을 어떻게 하면 좋아?"
그가 데리고 온 죽립 사내는 엄청난 실력을 가진 고수였다. 그런 고수라면 의당 세가의 가주가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아들여야 하면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대접해야 한다. 그래야만 세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워주는 것이다. 가주의 딸이기에 황보경은 그런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인 황보천은 그녀의 말을 전혀 믿어주지 않는다. 그러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황보경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쩔 수 없다. 나라도 정성을 다해서 모셔야 햐. 당장 내일 모용세가에서 공격을 해 올 테니 그때까진 대협을 붙잡아둬야해."
방에 들어선 황보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죽립사내의 앞에는 조촐한 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그 위의 음식들이 한없이 소박했기 때문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하급 무사나 낭인들에게 차려주는 음식이었다.
어이가 없었는지 죽립사내는 멍하니 음식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황보경이 도끼눈을 뜨고 음식상을 가져온 시비를 노려보았다.
"이게 도데체 뭐하는 짓이냐?"
느닷없는 불호령에 시비를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 식사를 대령하라고 해서..."
"누가 이따위 음식을 가지고 오라고 했느냐?"
"벼, 별다른 명령이 없으셨사옵니다."
황보경이 더 이상 변명을 듣지 않겠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당장 상을 내가도록 해라. 귀인에게 대한 음식은 내가 직접 차리도록 하겠다."
그 말에 찔끔한 시비들이 음식상을 내어갔다. 황보경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데이몬을 쳐다보면 허리를 굽혔다.
"죄송해요, 대협. 아랫것들이 실수를 한 모양이데 제가 직접 음식을 차려오겠어요."
죽립사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황보경은 즉각 주방으로 달려갔다. 주방에는 온갖 산해진미들이 쌓여 있었다. 그것들 대부분은 후원의 접객청으로 갈 음식들이었다.
그러나 황보경이 누구인가? 가주의 친딸 아니던가? 박대 받는다고 해도 가문에서의 그녀 위치는 누구도 무시하지 못했다.
"이, 이 음식들은 후원으로 갈 것입니다요."
"내 처소에 귀한 손님이 있어요. 그분이 우선이에요."
황보경은 고집을 부려 데이몬을 대접할 음식상을 차리는데 성공했다. 후원으로 갈 음식들 중 좋은 것만 싹쓸이했기에 숙수들이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문제는 술이었다. 귀빈에게 대접할 만한 고급술들은 모조리 접객청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남은 것은 기껏해야 백주나 독한 화주뿐이었다.
숙수를 닦달해 보았지만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텅 빈 술도가뿐이었다. 그녀는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 일을 어떻게 한담?"
주루에 가서 술을 사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해서 싸구려 화주나 백주를 들일 순 없는 노릇이다. 그녀의 얼굴에 체념의 빛이 어렸다.
"어쩔 수 없지. 그 술을 꺼내오는 수밖에..."
그녀는 급기야 중요한 일에 쓰기 위해 담가둔 술을 개봉하려는 생각을 했다. 귀인을 붙잡아두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중원에는 여아홍이라는 술이 있다. 여자 아이가 태어날 경우 큼지막한 단지에다 좋은 재료를 엄선해서 술을 담근다. 그런 다음 땅에 묻어 숙성시켰다가 여자아이가자라 혼인식을 할 때 개봉하여 잔치에 쓰는 술이 바로 여아홍이다.
이십 년 가까이 묵은 만큼 그 맛은 일품이었다. 황보경은 바로 자신의 혼인식에 쓸 여아홍을 개봉해서 데이몬에게 대접하려는 생각을 했다.
"어쩔 수 없지. 가문이 풍전등화 위기에 처했는데."
그녀는 우선 시녀들로 하여금 차려놓은 주안상을 들어가도록 시켰다. 그런 다음 머뭇거림 없이 후원으로 향했다.
후원의 그늘진 곳에는 자신과 언니들을 위해 담가놓은 여아홍이 묻혀 있다. 병기고 근처였기에 다수의 무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황보경을 보자 무사들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아가씨?"
황보경이 잘 되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여아홍은 땅속 깊이 묻혀 있다. 그러므로 도와줄 만한 건장한 사내가 필요했다.
"잘 만났어요. 저를 좀 도와주세요."
누구의 명령인데 거절할 것인가? 두 명의 무사가 머뭇거림 없이 달려왔다. 황보경은 그들로 하여금 땅 속에 묻힌 술 단지를 파내라고 시켰다. 물론 명을 받은 무사의 눈이 휘둥그레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아, 아가씨. 이 술은..."
"어떤 술인지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지금은 귀한 손님을 접대할 때에요. 이대로 놔둬봐야 무슨 소용이에요."
그녀의 말에 무사들이 한숨을 쉬며 삽을 집어 들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책임은 아가씨께서 지셔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당신들에게 책임이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요."
무사들이 땅을 파헤치는 모습을 황보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그 시각 데이몬의 앞에는 풍성한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이번에는 제법 신경 썼는지 음식이 상당히 훌륭했다. 때마침 시장하던 참이었기에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음식을 집어먹었다.
"흠. 전통 있는 가문이라서 음식솜씨가 괜찮군. 그런데 술은 언제 들어오는 거지?"
한참동안 마정지지에 갇혀 있었기에 술 생각이 간절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데이몬이 음식을 집어먹고 있는데 누군가의 기척이 들려왔다. 잠시 후 황보경이 조그마한 술병을 소반에 담아 들어왔다.
"조금 늦었어요, 대협."
"괜찮소. 대관절 어떤 술이기에 본인을 기다리게 했는지 궁금하구려?"
그 말에 황보경이 배시시 웃었다.
"대협께서 충분히 기대하셔도 될 만한 술이에요."
뚜껑을 따자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향이 너무도 좋았기에 데이몬은 연신 코를 벌름거렸다.
"햐! 향을 보니 최소 십 년 이상 숙성시킨 술이구려. 어디 맛 좀 봅시다."
"물론이죠."
황보경이 살포시 웃으며 술을 따랐다. 잔에 담긴 술을 쭉 들이 킨 데이몬이 탄성을 질렀다.
"햐. 정말 좋은 술이구려. 그런데 맛과 향이 잔칫날에나 쓰는 여아홍 같은데, 맛소?"
황보경이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귀인을 대접하기 위해 특별히 꺼내왔지요."
"크, 좋군. 잔칫날도 아닌데 여아홍을 맛보다니 정말 운이 좋군."
술맛이 꽤나 좋았기에 데이몬은 연신 잔을 들이켰다. 황보경이 가져온 술병의 술은 금세 동나버렸다. 데이몬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양이 조금 모자라는 것 같구려."
황보경은 머뭇거림 없이 몸을 일으켰다.
"걱정 마세요. 술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녀가 파내온 여아홍은 큼지막한 단지 하나 분량이다. 그녀는 아예 단지를 통째로 방 안으로 가지고 왔다.
"많이 있으니 마음껏 드세요."
"후후. 감사히 먹겠소이다."
연신 술병을 기울이는 데이몬을 보며 황보경을 살짝 입맛을 다셨다. 향기로운 술 향기를 맡으니 한 잔 마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사실 그녀는 술을 매우 좋아했다. 어쩌면 어릴 때부터 구박받으며 눈칫밥을 먹어 온 탓에 술에 맛을 들였는지도 모른다. 물론 다 큰 소저가 술을 좋아하는 것은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랬기에 그녀도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비밀리에 마셔야 했다.
또한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엄청난 주량을 물려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맛있게 마시는 술을 보니 입맛이 동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것이 보통 술인가?
자신의 혼인식에 쓰기 위해 무려 십구 년을 숙성시킨 여아홍이 아니던가? 결국 그녀는 유혹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다.
"죄송하지만 저도 한 잔 주시겠어요?"
그 말에 데이몬이 멈칫했다.
"술을 할 줄 아시오?"
데이몬으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제 아무리 무림인이라고 해도 세가의 소저가 술을 즐기는 일은 거의 없다. 게다가 여아홍은 여자가 먹을 정도로 만만한 술이 아니다. 숙성 기간이 있는 만큼 도수가 매우 센 편이었다.
황보경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까짓것 그럽시다. 어차피 혼자 마시기도 적적했던 판국인데."
데이몬이 술을 따라주자 황보경이 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마시는 순간 짜릿한 기웃이 위장을 흠뻑 적셨다.
"정말 좋은 술이군요."
"허허, 이거 술맛을 아는 소저로군. 한 잔 더 받으시오."
황보경은 마다하지 않고 술잔을 내밀었다.
"감사히 받겠어요."
그렇게 둘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잔을 비워나갔다. 데이몬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린 소저의 주량이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독한 여아홍을 두 병이나 비웠지만 황보경은 멀쩡했다. 눈가가 보일락말락하게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도무지 취한 사람처럼 보이지 안았다.
'놀랍군. 이 정도 도수라면 사내들도 진작 나가떨어질 텐데..."
대표적인 경우가 냉유성이었다. 그가 만약 내공으로 술기운을 억제하지 않고 눈앞의 소저처럼 마셨다면 벌써 의식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어쨌거나 술을 잘 마시는 소저와 대작을 하니 좋구려. 한 잔 더 받으시오."
"호호호. 대협도 주량이 엄청나신데요?"
물론 데이몬은 술에 취하지 않는다. 내공으로 술기운을 분출하지 않더라도 몸속에 잠재한 어둠의 마력이 자동적으로 몸에 해로운 기운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황보경은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주량이 정말 대단하셔요. 세가의 무사들도 저와 대작해서 여럿 나가떨어졌는데 말이에요."
"허허, 내공이 일정 경지에 오른 무사라면 여간해서는 술에 취하진 않소이다."
그 말을 들은 황보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정도 경지에 오른 무사와는 접촉할 만한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만날 수 있는 무사는 고작해야 하급 경비무사에 국한되었다. 별볼일 없는 가문에서 처지를 잊어버리려는 듯 그녀는 끊임없이 술잔을 비웠다.
그러나 제 아무리 술이 세더라도 가랑비에 옷이 젖는 법이다. 데이몬과 계속해서 잔을 나누던 황보경은 결국 만취해버렸다.
"끄윽. 수, 술 맛이 정말 조아요. 딸꾹."
완전히 취한 채 흐느적거리는 황보경을 데이몬이 재밌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술이 제법 세긴 하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군.'
원래 인간이 술에 취하면 말이 많아지는 법이다. 이성을 반쯤 잃은 황보경이 급기야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평소 쌓인 울분을 술기운을 빌어 표출하는 것이다.
"거, 겉보기에 소, 소녀가 어떻게 보이나요?"
"소저는 아름답소. 그리고 황보세가의 따님이시니 한 마디로 축복받은 삶이라 할 수 있지 않겠소?"
"그, 그건 대협이 자, 잘못 보신 거, 거예요."
술에 취한 김에 황보경은 자신의 처지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기녀의 몸에서 태어난 뒤 어릴 적부터 받아온 냉대와 구박을 털어놓는 황보경의 눈에서는 어느덧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따, 딸이라고 다 같은 딸이 아, 아니에요. 어, 언니들에게는 드, 든든한 외가가 이, 있지만 저, 전 아닌걸요?"
감정이 북받쳐 오른 황보경은 급기야 아버지가 추진하려 한 정략결혼까지 들먹였다. 만약 그녀에게도 든든한 외갓집이 있었다면 황보천은 감히 늙은이의 후처로 들여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배경이 없었기에 두 번이나 말도 되지 않는 정략결혼을 추진했다.
듣고 있던 데이몬이 입을 딱 벌릴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허어, 어처구니가 없구려. 친딸을 늙은이의 후처로 들여보낼 생각을 하다니..."
"아, 아버지는 가, 가문을 위해서는 아, 아무것도 아까워하지 않아요. 그 심정을 아, 알긴 하지만 그래도 섭섭..."
데이몬은 눈살을 찌푸린 채 황보경의 푸념을 듣고 있었다. 솔직히 술자리에서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지만 그는 잠자코 들어주었다. 자신에게 보인 정성이 있기에 그 정도는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황보경의 기구한 처지에 동정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요지경이로군. 아무리 가문의 영광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딸을 희생시키다니..."
계속해서 주정에 가까운 넋두리를 해대던 황보경이 급기야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가버렸다. 맥없이 늘어진 황보경을 보며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완전히 날 잡아 잡수라는 식이로군."
황보경을 보는 데이몬의 눈빛이 게슴츠레해졌다. 상당한 미모를 가진 아리따운 소저가 거의 무방비로 잠들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넘어지면서 풀어헤쳐진 옷 사이로 새하얀 속살이 드러났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새근새근한 숨소리를 들은 데이몬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청이가 생각나는군. 서둘러 암흑투기를 소모한 뒤 당문으로 돌아가야겠어."
살짝 다가간 데이몬이 황보경을 안아든 뒤 조심스럽게 침상에다 눕혔다. 손가락으로 볼을 툭툭 건드렸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잘 자시오, 주정뱅이 소저."
씩 웃은 데이몬은 조용히 문을 닫아주고 밖으로 나왔다. 술을 마신 뒤 맞는 밤바람이 무척이나 상쾌했다.
마루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낮에 모용세가 무사들을 상대하며 소모했던 암흑투기를 채우려는 생각에서였다.
"내일은 힘을 좀 써줘야겠군. 귀한 여아홍을 대접받았으니 그 값은 해 줘야지."
데이몬은 조용히 운기행공에 빠져 들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날이 밝았다. 그러나 황보세가의 분위기는 착가라앉아 있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꼭두새벽부터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무력 이백에 달하는 무사들이 황보세가의 정문에 진을 치고 있었다. 아예 끝장을 보려고 작심한 채 달려든 것이다.
순순히 손 놓고 당할 순 없었기에 황보세가도 대응태세를 갖췄다. 그러나 무사들의 수는 어제보다 판이하게 줄어 있었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낭인들이 대거 야반도주를 해버린 것이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황보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황보세가가 내 대에서 끝나려는가?"
상황은 그 정도로 암울했다. 무력으로는 도저히 모용세가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봉문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반적인 문파와는 달리 세가는 봉문을 할 수 없다. 봉문을 할 경우 무사를 키우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가주가 체념하고 있으니 무사들의 사기가 높을 턱이 없다. 황보세가 무사들의 사기는 마치 소금물에 절여진 배추단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반면 모용세가 무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세가를 대표하는 초절정고사 두 명이나 동행한 상태이니 지고 싶어도 질수가 없었다. 무사들을 이끄느 우두머리들은 공공연하게 이런말을 공언하고 다녔다.
"오늘은 황보세가가 섬서에서 사라지는 날이다."
압도적인 전력을 가졌지만 모용세가는 대결을 자신들에게 지극히 유리한 방법으로 이끌어갔다. 화경의 고수인 화운객 모용증평을 처음부터 앞에 내세운 것이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초절정고수.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황의 사촌형으로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중년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고리눈에 수염투성이의 얼굴이 마치 장비를 연상케 하는 생김새였다. 외모와 일목상통하게 거칠고 화통한 성품을 지닌 그가 제일 앞으로 나와 황보세가를 도발하고 나섰다.
"나는 화운객 모용증평이다. 어제의 빚을 갚기 위해 찾아왔다. 자고로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공존할 수 없는 법, 오늘 어느 가문이 섬서의 패자인지를 가려보도록 하자."
그러나 황보세가 쪽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현실적으로 모용증평과 맞서 싸울 고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제일고수인 황보운악은 중상을 입고 병상에 누워있다. 그 외에는 화경을 개척한 고수가 없기 때문에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대답이 없자 모용증평의 태도는 더욱 광오해졌다.
"크하하핫. 겨우 그 정도의 배짱으로 본가에 도전했느냐? 감히 본가의 거점을 공격했으니 응당 거기에 대한 응징을 각오했을 것 아니냐."
고용된 낭인들은 하나같이 땅을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시선이 마주칠까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굴욕감으로 인해 황보세가의 무사들이 입술을 깨물었지만 도저히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그때 무사 한 명의 앞으로 나섰다. 황보세가 가주의 동생인 황보운성이었다.
"황보세가에도 사람이 없지는 않다. 내가 상대해 주마."
황보천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세가 내에서 제법 인정받는 실력이지만 황보운성의 무위는 고작해야 절정 중급이다.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우, 운성아 어쩌자고?"
황보운성의 얼굴은 비장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저는 더 이상 모욕을 감내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겠다는 뜻이었다. 황보세가 사람들은 어두운 얼굴로 황보운성을 배웅했다.
그러나 용기는 가상했지만 근본적인 실려차이는 극복할 수없는법. 호기 있게 나섰던 황보운성은 채 십 합도 버티지 못하고 상대의 장검에 가슴팍을 관통 당했다.
"으아아악."
상대는 화경의 고수, 애초부터 승산이 없는 대결이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무사의 비장한 최후였다. 모용증평은 추호도 사정을 보아주지않고 황보운성의 목숨을 거뒀다. 그 모습을 황보세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지켜보았다.
잠시 후 황보세가 무사들이 침울한 표정으로 나가서 황보운성의 시신을 수습했다.
한 명을 죽이고 나자 모용증평의 태도는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용기가 가상하긴 했지만 어림없다. 또 누가 분노에 찬 모용세가의 검을 받겠는가?"
그 말에 욱한 황보세가의 식솔 하나가 또다시 나섰다가 차디찬 시신이 되어버렸다.
제법 명성을 떨친 황보세가의 중견 고수였지만 초절정고수를 감당하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식솔 두 명의 죽음을 목격한 황보천의 얼굴에는 허탈함만이 가득했다.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르 잡는데도 모든 힘을 다한다더니 그 꼴이로군."
사업장을 되찾기 위해 욕심을 부렸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다음이다. 두 명이 비명에 가고 나자 더 이상 나서는 식솔은 없었다. 나가봐야 개죽음을 당할 뿐이므로 차라리 이어질 대결에 힘을 쏟을 작정이었다. 물론 그것조차 승산은 없다.
일반 무사들도 황보세가가 감히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간단히 말해 황보세가의 운명은 오로지 모용세가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황보세가사람들은 오로지 저들이 자비를 베풀어 가문의 명맥을 이어나가게 해 주기만을 바랄뿐이었다.
그러나 적에게 잔인한 모용세가에서 그런 자비를 베풀어 줄 가능성은 희박했다. 풀죽은 황보세가 진영을 모용증평의 얼굴에는 득의함이 어렸다.
"겁쟁이들... 그 정도 간담으로 우리 모용세가들 건들렸는가?"
모욕적인 말을 들었지만 황보세가 무사들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힘이 있는 자는 무슨 소릴 해도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 무림의 법도인 법. 황보세가의 진영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그때 나지막한 음성이 사람들의 귓전에 똑똑히 들렸다.
"거참 시끄러운 놈이로군. 술맛 떨어지게 소리나 버럭버럭 질러대고 말이야."
사람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죽립을 걸친 남루한 차림새의 사내가 벽에 등을 기댄 채 느긋하게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옆에는 황보경이 서서 어쩔 줄 몰라 하고있었다.
"대, 대협."
물론 죽립사내의 정체는 데이몬이었다. 이쯤에서 나서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동자에 황당함이 어렸다. 차림새를 보니 고용된 낭인인 것 같은데 감히 화경의 고수에게 어찌 그 따위 망발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긴장이 팽배한 정장에서 한가롭게 술병을 기울이는 꼴이라니.
황보천 역시 어처구니없어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뻗어 죽립사내를 가리켰다.
"저 작자는 도대체 누군가?"
옆에 서 있던 총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제 아가씨께서 데리고 온 자입니다"
체통을 중시하는 황보천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그 정도로 화가 났다는 뜻이다.
"미친놈이로군. 정신이 반쯤 나갔어. 그나저나 저런 작자를 데리고 오다니 경아도 정말..."
황보천의 눈가에 실망감이 서렸다. 따돌림을 당하는 것을 알기에 평소 딸을 불쌍히 여겼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여지없이 실망시킨다.
"어, 어떻게 할까요?"
조심스러운 총관의 질문에 황보천의 씹어뱉듯 한 마디를 던졌다.
"그냥 내버려둬라. 제 놈이 판 무덤이니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모용증평은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화경을 개척한 고수의 청력은 범인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 때문에 그는 죽립사내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시끄러운 놈? 술맛 떨어지게?"
사내의 말을 되뇌어보던 모용증평의 눈가에 급격히 살광이 치솟았다.
"지금 그 말 나에게 한 것이냐?"
"그럼 이 자리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작자가 너 말고 또 있느냐? 그러니 조용히 좀 해라."
곧바로 이어지는 대답에 모용증평은 멍해졌다. 다음 순간 엄청난 살기가 그의 몸에서 분출되었다.
"공포로 인해 머리가 돌아버린 놈이로군. 그렇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는 머뭇거림 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시퍼런 검신에서 빛 무리가 쑥하고 솟구쳤다.
다음 순간 장검이 스르르 떠올랐다.
콰콰콰콰
광망을 뿜어내며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던 장검이 이어 쏜살같이 한쪽으로 폭사되었다. 정확히 죽립사내가 기대어 있는 방향이었다. 그것을 본 황보세가 무사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기어검술이다!"
"모두 피하라."
황보세가 무사들의 대열이 썰물처럼 갈라졌다.
이기어검술.
오직 초절정고수만이 전개할 수 있는 기술이다. 내공으로써 검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궁극의 비기가 바로 이기어검술이다. 일반적인 비검술과 다른 점은 강기가 응축되어 있다는 점이다. 검에 서린 강기는 닿는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파괴해버린다.
모용증평은 황보세가 무사들의 전위를 꺾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기어검술을 전개했다. 그렇제 않고서야 한낱 미친 낭인에게 이기어검술 따위의 고급 기술을 쓸 필요가 없다.
쐐애애액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날아간 장검이 그대로 한 곳으로 내려 꽂혔다. 넋이 나갔는지 죽립 사내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강기가 어린 장검은 그대로 죽립사내의 명치로 파고들어갔다.
"끄, 끝이야."
바닥에 엎드려 있던 황보경이 눈을 감았다. 그녀가 데리고 온 죽립사내가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이기어검술을 막을 순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허나 아무리 기다려도 비명소리는 들여오지 않았다. 살짝 눈을 뜬 황보경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세, 세상에..."
황보세가 무사들은 하나같이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벌린 입으로 침을 질질 흘리는 자도 있었다. 그것은 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못 볼꼴을 본 듯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이기어검술로 쏘아진 장검은 애석하게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죽립 사내가 장난치듯 들어 올린 손에 꽉 붙들여 있으니 말이다. 장검에서 세차게 강기가 뿜어지고 있어지만 사내의 손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좌중은 침묵이 지배했다. 모용세가 무사들도 눈을 크게 뜬 채 놀라워하고 있었다.
그러니 모용증평의 놀라움은 오죽할 것인가? 이기어검술로 날린 검을 잡아채는 것은 초절정의, 그것도 극에 달한 고수라야 가능한 법이다. 오로지 맨손에 수강을 형성해야만 강기가 서린 장검을 붙잡을 수 있다.
그런데 추레해 보이는 죽립사내가 그런 고난이도의 기술을 선보인 것이다. 모용증평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데이몬은 한 손으로 장검을 단단히 움켜쥔 채 술병에 남아 있던 술을 마저 비웠다.
그의 손에는 어느덧 시커먼 암흑투기가 돋아나 있었다. 내공이 끊어졌는지 장검에 서린 강기가 순차적으로 사라졌다.
"그 자식 성질 한 번 급하군. 조용히 하라고 했더니 다짜고짜 이기어검술을 전개해?"
데이몬이 슬그머니 암흑투기를 끌어올렸다. 다음 순간 장검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자고로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그가 말을 끝맺자 장검이 스르르 허공에 떠올랐다. 이어 시커먼 기운을 줄기줄기 뿜어내면 허공을 맴돌기 시작했다.
쐐애애액
암흑투기가 집중된 장검이 허공을 맹렬히 갈랐다. 장검이 날아가는 쪽에는 모용증평이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헉."
자신이 쏘아 보낸 장검이 이기어검술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그에게는 죽립사내처럼 맨손으로 장검을 잡아낼 만한 내공이 없다. 때문에 그는 공력을 모조리 끌어올려 신법을 펼쳤다.
파파파팟
그의 몸이 순식간에 열여덟 번 뒤집히며 경로를 회피했다. 이기어검술로 쏘아진 검은 시전자의 의도대로 능수능한하게 조종할 수 있다. 때문에 시전자가 예측하지 못하는 방위호 회피해야 피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헛수고를 했다. 날아오던 장검이 바로 지척에서 우뚝 멈춰서 버렸던 것이다. 모용증평이 질린 표정으로 쳐다보자 검이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순간 그의 귓전으로 조소어린 음성이 파고들었다.
"혼자서 잘도 춤을 추는군. 꽤나 볼만한 걸?"
겨우 정신을 차린 모용증평이 자신의 검을 집어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황보세가 무사들이 갈라진 틈으로 죽립사내가 느릿하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경악어린 시선이쏟아졌지만 사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모용증평의 입에서 경어가 흘러나왔다.
"다, 당신은 누구요?"
척 보기에도 자신보다 윗줄의 고수가 틀림없었기에 본능적으로 존댓말을 하는 것이다. 무림을 지배하는 것은 역시 힘이었다.
걸어 나오던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죽립에 가려 그 미소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구태여 내가 누군지 알 필요가 있을까?"
"당신 정도의 고수가 어찌해서 황보세가의 편을 드는 것이오?"
데이몬이 머뭇거림 없이 대답을 했다.
"황보세가의 소저에게 거나한 대접을 받았지. 밥값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나왔어."
모용증평이 굳은 표정으로 그 말을 받았다.
"대접이라면 우리 모용세가도 그 누구 못지않게 해 드릴 수 있소. 도대체 황보세가에서 얼마나 후한 대접을 받았기에 우리 모용세가를 적대하시려는 거요?"
데이몬은 얼굴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황보천을 비롯한 황보세가 식솔들이 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황보세가에서 대접받은 것은 하나도 없어. 우연히 황보세가의 소저를 만났는데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더군. 할 일도 없고 해서 응낙했지. 그런데 막상 황보세가에 와 보니 찬밥 대우를 하더군."
이어지는 말에 황보천의 안색이 누렇게 변해갔다.
"기주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들어온 식단은 고작해야 소채와 나물 몇 가지더군. 신경질 나서 그냥 갈까 생각도 했는데 말이야."
데이몬은 손가락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황보경이 서서 불안안 듯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저 소저가 필사적으로 붙들더군. 직접 음시도 차려오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혼인식에 쓸 여아홍까지 꺼내와 대접했어. 한마디로 지극정성이더군. 그래서 마음을 돌렸어. 맛있는 밥과 술을 얻어먹었으니 거기에 보답 정돈 해야겠다고 말이야."
뜻밖의 말에 모용증평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술과 밥을 얻어먹은 대가로 모용세가에 맞선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고작 그 정도 대우를 받았다고 우리 모용세가를 적대하겠다는 거요?"
"고작 그 정도라고 말하면 안 되지. 어쨌거나 나에게는 만족할 만한 대접이었어."
말을 마친 데이몬은 모용증평의 아래위를 쓸어보았다.
"이 자리에서 네놈을 꺾어 준다면 충분한 보은이 되겠지?"
모용증평이 발끈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시오?"
"만만하게 보이니까 나선 거 아닌가? 쓸데없는 소린 그만 하고 슬슬 푸닥거리를 시작하는 게 어때? 지켜보는 사람들도 기다리기 지루할 테니 말이야."
분기를 참지 못한 모용증평이 장검을 곧추세웠다.
"병기를 뽑으시오. 내 오늘 당신에게 모용세가의 검이 어떤지 똑똑히 가르쳐 주겠소."
"병기 여기 있잖아."
데이몬이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내민 것을 본 모용증평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데이몬의 손에 들린 것은 도자기로 된 몸통이 둥그런 싸구려 술병이었다. 그는 가느다란 손잡이를 마치 병기처럼 움켜쥐고 있었다.
그 광오한 모습에 모용증평은 이성의 끈이 툭하고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와아악."
괴성을 내지르며 공격을 감행하는 모용증평. 그 모습을 데이몬이 냉정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세, 세상에..."
황보천의 얼굴은 아직까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허접한 낭인으로 생각했던 죽립사내가 맨손으로 이기어검술을 막아낼 정도의 고수였다니... 그렇다면 그들을 어제 엄청난 실례를 한 것이다. 그의 얼굴이 참담하게 구겨졌다.
"미치겠군. 경아가 거짓말을 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조금 전의 광경이 죽립사내가 최소한 초절정 이상의 고수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기어검술을 맨손으로 막아낼 수 없는 법이다. 그 정도의 고수가 도와주겠다고 왔는데 가주가 신경조차 쓰지 않다니. 이런 실수가 없었다.
황보세가는 유난히 빈객을 잘 대접하는 세가였다. 모용세가로부터 사업장을 되찾아 오려면 빈객들에게 각별히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일류 정도 무위의 빈객이 오더라도 황보천은 맨발로 달려 나가 맞이한다. 만약 빈객이 절정 급이라면 황보천은 그를 대접하는 데 있어 어떤 것도 아끼지 않는다.
그 정도로 빈객들에게 신경을 써 왔는데 막상 가문을 방문한 초절정의 고수에겐 엄청난 결례를 저지른 것이다. 그가 떨리는 음성으로 총관을 불렀다. "어제 어떻게 상을 들였느냐?"
총관도 몸을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벼, 별다른 하명이 없으셨기에 낭인이나 평무사의 식단을 준비했사옵니다."
황보천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무지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참다못한 그가 딸을 불렀다. 엉거주춤 서 있던 황보경이 화급히 달려왔다.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는 미처 그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네, 네가 어제 귀, 귀인을 접대했느냐?"
"그렇습니다."
"주안상을 다시 차렸다고?"
"죄송하오나 그렇게 했어요. 귀인에게 드리기엔 너무 소박한 주안상이라 소녀가 직접 주방에서 음식을 차렸습니다."
"듣자 하니 네 혼인식에 쓸 여아홍을 개봉해서 대접했다던데 사실이냐?"
황보경이 움찔했다. 허락도 없이 여아홍을 개봉한 일은 크게 혼이 나더라도 이상할게 없는 일이다. 개미소리처럼 가느다란 음성이 겨우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죄, 죄송해요. 아버지. 그저 귀인을 대접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러나 내려진 것은 꾸중이 아니었다. 황보천이 감격한 표정으로 황보경을 냅다 끌어안았다.
"잘했다. 정말 잘했다. 네가 가문을 살렸구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황보경은 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 눈알만 데룩데룩 굴리고 있었다.
모용증평과 죽립사내의 접전은 더 없이 치열했다. 이룩한 무공의 경지를 입증하려는 듯 모용증평은 연신 강기다발을 퍼부었다. 기가 응축될 대로 응축된 장검에서는쉴 새 없이 섬광이 발출되었다.
쾅 콰쾅
강렬한 충격파가 숨 돌릴 틈도 없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역시 벌써 오래 전에 화경을 개척한 고수다웠다.
그러나 상대가 나빴다. 한 손에 술병을 든 죽립사내는 매우 느긋하게 맹공을 받아내고 있었다. 강기가 응축된 장검을 무리없이 받아내는 술병에는 거무튀튀한 기운이뿜어지고 있었다. 오직 마왕에게만 허락된 권능인 암흑투기였다.
화경의 고수답게 모용증평의 검로는 현란했다. 공간을 완전히 점한 채 숨 쉴 겨를도 없이 상대를 몰아쳐갔다.
그러나 데이몬은 그야말로 완벽하게 공격을 막아냈다. 허초에도 속지 않았고 변초에도 놀라지 않았다. 모용증평은 한 마디로 무너지지 않는 벽을 향해 무공을 전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려 일 다경 가까이 접전이 이어졌고 양편 무사들의 눈동자에 서서히 경악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초절정고수 모용증평의 위력적인 검세에도 놀랐지만 그것을 한 번의 오차도 없이 완벽히 막아내는 죽립사내에게도 질려가고 있었다.
죽립사내는 지금껏 단 한 번의 공격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속적으로 쪼개오는 공격을 묵묵히 막아낼 뿐이었다.
모용세가 무사들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변해갔다. 방어에만 치중하는 것도 그만한 실력이 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그런면에서 죽립사내는 모용증평을 월등히 상회하는 고수가 틀림없었다.
"헉, 헉."
모용증평은 완전히 지쳐 있었다. 위력적인 강기를 일 다경 가까이 퍼부었으니 지치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 내공은 거의 고갈되었고 기력도 거의 소진되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상대의 깔보는 듯한 태도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 있는 것이다. 참다못한 그가 고함을 버럭 내질렀다.
"지금 뭐하는 거요? 나와 장난하자는 거요?"
반격을 가하지 않고 막기만 하는 죽립사내의 태도를 꼬집는 일성이었다. 그 말을 들은 데이몬의 눈가에 스산한 광채가 스쳐지나갔다.
"지금껏 네놈이 재주넘는 꼴을 보고 있었지. 하지만 그것도 이제 시들해졌어."
데이몬은 지금 암흑투기를 소모시키는 중이었다. 힘의 근원을 일정분량 없애야만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빛 광망을 없앨 수 있다. 공격을 하지 않고 방어에 치중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래야만 암흑투기를 많이 소모시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지칠 대로 지친 상대의 상태를 볼 때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그렇게 판다하자 데이몬의 태도가 일변했다.
"원한다면 공격을 해 주지."
츠츠츠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공에 거무튀튀한 선들이 형성되었다. 그 선들이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모용증평의 몸을 파고들었다.
"헉."
기겁을 한 모용증평이 잇달아 몸을 뒤집었다. 선들이 아슬아슬하게 모용증평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귓전으로 조소어린 음성이 파고들었다.
"잘 피하는군. 그럼 이것도 한 번 막아봐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청난 공격이 퍼부어졌다. 지금까지 방어만 한 것을 설욕이라도 하듯 데이몬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공격을 감행했다.
현경의 고수가 마음먹고 가하는 공격. 모용증평의 몸이 금세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크윽."
모용증평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상대의 공격은 그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공격이었다. 서늘한 기운이 등골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이, 이자는 결코 내 상대가 아냐.'
필사적으로 방어했지만 점점 몸에 상처가 늘어났다. 필사적으로 검을 뿌렸지만 상대가 든 술병은 유유히 방어를 파훼하고 접근해 들어왔다.
콰쾅
장검을 허공으로 튕겨낸 술병이 훤히 드러난 이마로 다가오자 모용증평의 눈빛이 암울해졌다.
'끄, 끝이야.'
강기가 서린 장검을 무리 없이 받아내는 술병이다. 거기에 격중된다면 머리통이 무사할 리가 없다. 술병이 이마에 와 닿는 순간 모용증평의 눈을 질끈 감았다. 이어 둔탁한 통증이 이마에서 전해졌다.
퍼석
뭔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모용증평의 몸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눈을 뜬 모용증평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깨진 것은 자신의 머리통이 아니었다. 상대는 산산이 박살 난 술병을 들고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허, 그놈 머리통 한번 정말 단단라군."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불같은 분노가 전신을 사로잡았다. 상대는 자신을 대놓고 농락하고 있었다. 모용증평은 덮어놓고 검격을 날렸다.
"노옴! 죽여 버리겠다."
그러나 상대는 극에 이른 분노로도 극복할 수 없는 수준의 고수였다. 검을 살짝 흘려보낸 데이몬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흐흐흐. 칠종단금술 때문에 죽일 수는 없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지.'
모용증평의 품속으로 파고든 데이몬이 주먹을 내질렀다. 그의 주먹은 암흑투기가 응축되어 거무튀튀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음 순간 데이몬의 주먹이 모용증평의 하복부, 기해열이 있는 곳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커억."
폐부를 관통하는 듯한 비명과 함께 모용증평이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기해혈이 으스러진 탓에 기혈이 역류하며 칠공으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거듭 피를 게워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모용증평의 모습이 판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팽팽하던 피부에 주름살이 지고 검은 머리가 하얗게 탈색되었다. 화경을 넘어서며 얻은 젊음이 무공을 상실함과 동시에 사라지고 있는 것이었다.
"끄으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모용증평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무공을 잃은 충격은 그 정도로 컸다. 이어 맥없이 바닥에 얼굴을 박고 나가떨어졌다. 그 옆으로 빛을 잃은 장검이 힘없이 떨어졌다.
철그렁
좌중을 다시 침묵이 지배했다. 누구 하나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화경의 경지에 오른 막강한 고수가 바로 눈앞에서 처참하게 침몰했으니 누가 입을 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침묵은 잠시였다.
"와아아아."
"황보세가 만세."
황보세가에 고용된 낭인들이 환호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대결 뒤에 숨겨진 속사정 따윈 모른다. 그저 세가를 대표해 나선 무인이 승리를 거뒀기에 환호성을 질러대는 것이다.
데이몬은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황보세가의 진영으로 돌아왔다. 모용세가에서 몇 명의 무사가 달려 나와 널브러진 모용증평을 부축했다. 그들의 얼굴은 침통하기 그지없었다. 설마 모용증평이 패할 것이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은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며 황보세가의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는 오른손에 강기를 살짝 끌어올린 다음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데이몬의 입가에 씁쓸한 빛이 감돌았다.
'아직이로군.'
상당량의 암흑투기를 소모했지만 아직까지 충분하지 않았다. 더 소모시켜야 눈에서 뿜어지는 핏빛 광망이 사라질 것 같았다. 진영 앞에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엉거주춤서서 그를 맞이했다. 그중에서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천도 있었다. 그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은 채 데이몬을 맞이했다.
"저,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대협."
데이몬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더 없이 정중했다. 그러나 데이몬은 멀뚱멀뚱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실례지만 뉘신지?"
이어지는 말에 황보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티를 낼만한 상황이 아니다.
"제가 바로 황보세가의 가주입니다. 인사가 늦은 점 용서바랍니다."
"아. 그러셨구려. 처음 뵙겠소이다."
살짝 목례를 한 데이몬이 휘적휘적 걸어갔다. 어제 했던 박대가 있기에 황보천은 엉거주춤한 태도로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안쪽에는 황보경이 눈을 크게뜨고 서 있었다. 그녀를 보자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 정도면 밥값이 되었소, 소저?"
"아, 네? 네."
황보경이 쩔쩔매며 말을 받았다.
"한바탕 싸우고 났더니 목이 컬컬하구려. 한잔 걸치고 싶은데 괜찮겠소?"
그때 황보천이 끼어들었다.
"최고의 미주가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금 즉시 주안상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러실 필요 없소. 본인은 소면이랑 나물 종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소이다."
순간 황보천의 얼굴이 벌개졌다. 어제 죽립사내에게 들여보낸 신닥이 소면과 나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제의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귀인을 몰라보고..."
"가주께서 구태여 사과하실 필요는 없소. 사람이란 가진 가치만틈 대접받는 일이지. 그나마 황보세가의 젊은 소저가 열과 성의를 다해 대접했기에 대신 나가서 싸워준 것이오."
데이몬의 냉랭한 태도에 황보천을 쩔쩔 맸다. 어제 딸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 그토록 후회될 수가 없었다. 난감해하는 아버지를 보다 못해 황보경이 조그마한 병을 꺼내 내밀었다.
"여기 있사옵니다, 은공. 일단 한 잔 하시옵소서."
"햐. 고맙소. 보기만 해도 입맛이 도는구려."
마다 않고 병을 받아든 데이몬이 입에 대고 쭉 들이켰다. 그녀가 황보천 옆에 멀뚱멀뚱 서 있던 식솔들에게 살짝 눈짓을 했다.
"안주를 몇 가지 준비하도록 하겠사옵니다."
"크으, 정말 좋군. 소저가 준비해 준다는 것까지 마다할 수 없는 노릇이지. 마침 시장하던 참이니 좀 부탁드리리다."
"걱정 마세요, 은공."
이어지는 황보경의 손짓에 식솔들이 부랴부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용세가의 분위기는 극도록 침통했다. 가문을 대표하는 초절정고수 중 한 명이 무참히 패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쪽 소매가 텅 빈 모용황이 침중한 표정으로 의생을 쳐다보았다.
"그래, 상세가 어떤가?"
검진을 해 본 의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기해혈이 완전히 으스러졌습니다."
모용세가 식솔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기해혈이 으스러졌다면 두 번 다시 무공을 펼칠 수 없다는 뜻이다. 침묵을 지키던 모용황이 이를 우두둑 갈아붙였다.
"차라리 목숨을 거둘 것이지 목숨보다 중요한 무공을 전폐하다니..."
그때 조용히 서 있던 무인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모용세가 최고의 고수인 신검 모용천악이었다. 현존하는 모용세가 최고의 어른인 그가 나선 것이다.
"가주, 내가 나가리다."
모용천악의 눈동자에는 분노의 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가서 그 놈에게 빚을 받아오겠소. 허락해 주시오."
모용황은 잠시 고민했다. 사실 황보세가에 모용증평을 꺾을만한 고수가 있을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게다가 싸우는 모습을 볼 때 모용증평을 월등히 웃도는 실력을 가진 것이 틀림없었다.
'놈들이 도대체 어디서 저런 고수를 끌여들였을까?'
그러나 상황은 깊이 생각할 계제가 아니었다. 그가 공손히 모용천악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숙부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육순이 넘은 모용황의 숙부라면 나이가 엄청나게 많을 터,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오십대 초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모용황은 기대어린 눈빛으로 모용천악을 쳐다보았다.
'숙부님의 실려이라면 충분히 놈에게 응징할 수 있을 것이다.'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 모용천악이 애검을 집어 들었다.
"그럼 다녀오리다, 가주."
모용세가 진영에서 한 명이 걸어 나오자 떠들썩했던 황보세가의 분위기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잠시 후 경악어린 일성이 흘러나왔다.
"시, 신검이다."
"신검 모용천악이 나왔다."
지금 걸어 나오는 모용천악은 한 시대를 풍미한 거인이다. 지금의 모용세가를 일군산증인이나 다름없었다.
황보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설마 모용천악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상기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데이몬이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황보천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신검 모용천악이 나왔으니 의당 그를 내보내야 한다. 그런데 상대는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요리만 집어먹고 있다. 의당 채근해야 하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데이몬과의 관계가 그리 원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입을 열지 못하고 옆에 서 있던 딸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고개를 돌려본 황보경의 시선이 그와 마주쳤다.
'알겠어요, 아버지.'
살짝 고개를 끄덕인 황보경이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대협. 모용세가 쪽에서 사람이 나왔어요."
데이몬의 시선이 느릿하게 돌아갔다.
"모용세가 최고의 고수인 신검 모용천악이에요."
걸어 나오는 모용천악과 황보경을 번갈아 쳐다보던 데이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초절정고수 둘을 상대해야 하다니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구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시작을 했으면 끝을 맺어야 하니."
남아있던 술을 단숨에 들이켜 버린 데이몬이 몸을 일으켰다.
모용천악의 몸에서는 막강한 기세가 뿜어지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황보세가 무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추릴 정도의 기세였다. 느긋하게 걸어 나오는 데이몬을 본 모용천악의 눈에서 광망이 뿜어졌다.
"그대는 누구인가?"
데이몬이 심드렁하게 귀를 후비며 말을 받았다.
"그게 지금 상황에서 뭐 중요한가?"
"그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우리 모용세가를 건드린 것은 큰 실착이라고 할 수 있다."
"뭐 별로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데?"
느물느물한 대꾸에 모용천악은 분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고수. 감정 정도는 능히 조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식솔의 일에까지 냉정을 유지할 순 없는법. 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평아의 기해혈이 완전히 으스러졌더군. 무인에게 있어 무공은 삶의 전부나 다름없다. 꼭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데이몬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내가 보는 앞에서 황보세가 식솔 두 명을 죽였다. 그러니 그 꼴을 당했다 해도 누굴 원망할 처지가 아닐 텐데?"
모용천악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달리 할 말이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손은 안으로 굽는 법. 타인이 당한 일과 식솔이 당한 일을 같은 연장선상에서 놓고 볼 순 없다. 그는 매서운 눈으로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이제 그대는 우리와 양립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내 지금 부터 그대에게 모용세가의 분노를 알려주겠다."
데이몬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뭐 좋을 대로..."
스릉
모용천악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검을 뽑아들었다. 시릴 듯한 광망이 장검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
"병기를 뽑아라."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데이몬이 양손에 암흑투기를 응축시켰다. 신검 모용천악은 조금 전 그가 꺾은 모용증평보다 월등히 윗줄의 고수였다. 술병을 들고 장난칠 정도의 상대는 아니었다.
파츠츠츠츠
그의 양 손가락 끝에서 검은빛으로 번들거리는 손톱이 돋아났다. 그 모습을 본 모용천악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손가락을 매개체로 뿜어내는 강기공인가? 내공이 웅혼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한 마디로 비효율의 극치라 할 수 있지."
"말이 많군. 언제 덤빌 생각인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모용천악이 검을 꼬나 쥔 채 데이몬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두 고수의 대결은 더 없이 치열했다. 뿜어져나가는 충격하에 의해 무사들은 이리저리 도망 다녀야 했다. 응축된 강기가 충돌하면서 연이어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쾅 콰쾅 쾅
모용세가를 대표하는 고수답게 신검 모용천악의 실력은 그야말로 발군이었다. 데이몬이 지금까지 맞서 싸워본 화경의 고수중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보다 한 단계 위의 고수이다. 또한 마계에서 무수한 실전경험까지 치렀다. 그러므로 이것은 애당초 결과가 예정된 대결이나 다름없었다.
모용천악은 가진 실력을 모두 발휘해서 데이몬을 공격했다. 그러나 통하는 공격은 하나도 없었다.
모용천악이 필사적으로 내뻗는 검격은 거무튀튀한 빛을 뿜어내는 손톱네 모조리 가로막혔다. 이따금 가해지는 반격은 모용천악을 기겁하게 만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모용천악도 이제 마음 깊이 인정하고 있었다.
'이, 이자는 내 상대가 아냐... 실력이 나보다 월등히 윗줄임에 틀림없어.'
그러나 이것은 가문의 명예가 걸린 대결. 때문에 그는 모든 힘을 다해 상대를 공격하고 또 방어했다. 그러나 승기는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끊임없이 공방을 이어가던 데이몬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빛났다. 상대의 검에 자신의 얼굴이 언뜻 비쳤기 때문이었다.
'광망이 사라졌어. 혈마기를 충분히 소모했다는 뜻이로군.'
암흑투기가 소모되면 혈마기가 순차적으로 암흑투기로 전환된다.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고 느낀 데이몬은 강공에 나섰다.
촤아아악
손에서 돋아난 손톱이 순간적으로 길어졌다. 그러면서 검게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암흑투기가 집중되며 중첩되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손톱이 모용천악의 장검과 세차게 격돌했다.
콰아아앙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모용천악의 몸이 주르르 뒤로 밀렸다. 그의 눈은 경악에 물들어 있었다. 이처럼 어이없이 밀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 이렇게 강하다니...'
그러나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란 없었다. 연이어 가해지는 공격을 막아내는 데 모든 힘을 쏟아야 했다.
쾅 쾅
격돌할 때마다 모용천악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네 번째 격돌하고 나자 그는 급기야 피를 토했다. 내상을 입어 기혈이 역류된 것이다 그러나 데이몬의 손에서 돋아난 손톱은 시간이 지날수록 길어지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이다."
낭랑한 음성과 함께 다섯 줄기의 검은 기운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모용천악이 사력을 다해 방어에 나섰지만 그의 검에는 상대의 공격을 막아낼 만한 위력이 깃들어있지 않았다.
푸캉
장검이 맥없이 여섯 토막이 났다. 사색이 되어 뒤로 물러나는 모용천악의 가슴에 강력한 발차기가 작렬했다.
콰당
맥없이 나가떨어진 모용천악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역시 화경의 고수다운 반사 신경이었다. 그러나 운이 나빴다. 상대는 이미 그의 다음 행동을 뻔히 예측하고 있었다. 모용천악의 복부로 거무튀튀한 기운이 파고들었다.
"커어억."
폐부를 관통하는 듯한 신음소리와 함께 모용천악이 몸을 웅크렸다. 다섯 개의 구멍이 뚫린 아랫배에서는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진원이 깨어진 것을 알려주듯 투명한 빛을 띠는 피였다.
초점이 흐려진 눈초리로 데이몬을 멍하니 쳐다보던 모용천악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모용세가를 대표하는 전대 고수의 허무한 침몰이었다.
모용천악이 패하자 양쪽 진영의 반응은 판이하게 갈렸다. 모용세가의 식솔들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면 황보세가의 낭인들은 떠들석하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 이겼다."
"황보세가 만세."
모용황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철석같이 믿었던 모용천악이 패배한 것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수, 숙부님이 패하다니..."
그의 눈에 몇 명의 무사들이 달려 나가는 모습이 비쳤다. 모용천악의 상세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본 모용황은 퍼득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도 급히 신법을 펼쳐 모용천악에게로 몸을 날렸다.
모용천악의 상세는 엄중했다. 완전히 무공을 상실한 것이다.
하복부 기해혈에 구멍이 뚫려 투명한 빛을 띤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본 모용황의 얼굴이 허탈해졌다. 가문에서 보유한 초절정고수 두 명이 모조리 무공을 잃어버린 것이다.
무림세가에서 초절정, 즉 화경의 고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게 크다. 모용세가가 지금의 자리에 온 데에는 그들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무력화되어버린 것이다.
눈을 꼭 감은 모용천악의 핏기 잃은 얼굴을 쳐다보던 모용황은 불같은 분노에 사로잡혔다.
으드득
이를 세차게 갈아붙인 모용황은 이번 일을 초래한 장본인을 노려보았다. 데이몬은 우두커니 서서 몸속의 기운을 조율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했었소?"
데이몬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모용황의 눈에서는 불길이 활활 토해지고 있었다.
"당신 정도의 실력이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어도 되었었소. 구태여 무공을 폐지했었어야만 했소?"
"너희들은 조금 전 황보세가의 무인 두 명의 목숨을 거뒀다. 아무 망설임도 없이 말이다."
모용황의 이마에 핏대가 돋았다.
"무인에게 무공은 그야말로 전부나 다름없소. 당신은 오히려 죽이는 것보다 더한 짓을 모용세가에 한 것이오. 도데체 본가에 그 어떤 원한이 있기에..."
데이몬이 조용히 모용황의 말을 끊었다.
"원한이 있지. 암 그것도 크나큰 원한이."
분노에 사로잡혀 있던 모용황이 일순 멍해졌다. 저 정도의 초극고수가 어찌하여 모용세가에 원한을 가졌단 말인가. 모용황이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우린 당신을 알지 못하오. 그리고 본가는 당신 정도의 고수에게 죄를 범한 일이 없소."
"과연 그럴까?"
싸늘하게 미소 지은 데이몬이 머리에 쓴 죽립을 벗었다. 이미 눈에서 광망이 뿜어지지 않을 만큼 암흑투기를 소모했기 때문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잠시 후 데이몬의 얼굴이 드러났다. 하늘거리는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보자 모용황의 얼굴이 굳어졌다. 기억에 있는 용모였기 때문이었다. 점점 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벽안독성? 마, 말도 안 돼."
그의 입이 딱 벌어졌다. 모용황은 자신도 모르게 잘려나간 오른팔을 매만졌다. 다름 아닌 상대방에 의해 잘려나간 팔이었다.
벽안독성, 그 이름은 모용세가에겐 악연이나 다름없었다. 그로 인해 가문의 숨겨진 힘인 흑호대가 괴멸했다. 차기 가주 감으로 촉망받던 모용천이 무공을 잃고 폐인이 되었다. 그런 상황이니 만틈 모용황의 오른팔이 잘린 것 정도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모용황은 뭐라고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데이몬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데이몬이 냉소를 지었다.
"벌써 잊어버렸나보군. 다시 한 번 되새겨줘야겠어."
말을 마친 데이몬이 손가락을 뻗어 모용세가의 식솔들이 서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모용현도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일전에 본인은 대파산맥에서 모용세가의 식솔을 한 명 구해준 적이 있지. 묵회의 독에 중도되어 사경을 해매던 자였는데 말이야. 당시 저자가 나에게 간절히 부탁하더군. 중독된 무사를 해독해 달라고 말이야."
내공이 실린 데이몬의 음성은 그 자리에 모인 무사들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난 저자의 부탁을 받아들여 중독된 무사를 해독해 주었지. 간단히 말해 모용세가로서는 은혜를 입은 것이지."
데이몬의 눈빛이 별안간 싸늘해졌다.
"하지만 모용세가에서는 날 은인이 아닌 원수로 간주하더군. 볼일이 있어 잠시 들른 자리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가주가 직접 출수하여 날 제압했으니 말이야."
말이 이어질수록 모용황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모용세가에서는 날 제압한 이후 무참하게 고문을 가했어. 묵회에서 사용하는 독의 해독제를 만들어내라고 말이야."
데이몬의 말이 끝난 순간 무사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모용세가는 한 마디로 후안무치한 짓을 한 것이다. 가문의 식솔을 해독해 준 은인을 제압하고 고문하는 것은 사파조차도 하지 않는 짓이다.
그런데 오대세가 중 수좌인 모용세가에서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이다. 그 주장이 정말이라면 모용세ㅏ 사람들은 앞으로 무림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황보세가의 무사들이 술렁이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그게 대관절 사실일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모용세가에서 일언반구 반박하지도 않는 것을 보니 말이야."
보다 못한 모용세가의 식솔 한 명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거짓말 하지 마시오. 당신 정도의 고수가 그토록 순순히 제압당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잖소?"
데이몬이 기다렸다는 듯 반박했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지. 하지만 거기에는 사정이 있어. 모용세가를 방문할 당시 나는 가벼운 주화입마로 인해 내공을 끌어올릴 수 없는 상태였어. 원래대로라면 내상을 치료하고 가야 하는 것이 정상이지. 하지만 설마 은인에게 해를 끼치랴 싶어 찾아갔던 거였어. 
그리고 방심한 상태에서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지."
데이몬은 모용황을 쳐다보았다.
"거기에 대해 할 말이 있나?"
모용황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사실이었기에 달리 변명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무엇보다도 조금 전 보여준 데이몬의 무력이 그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상대의 주장을 거짓이라 치부하려면 상대를 억누를 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모용세가에는 그만한 힘이 없었다.
가주가 침묵을 지키자 모용세가 무사들의 안색이 침울해졌다. 침묵으로 사실을 시인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반면 황보세가 소속의 낭인들은 기가 살아서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정말 후안무치안 놈들이로군. 은혜를 베푼 은인을 제압하여 고문하다니 말이야."
"그건 사파도 하지 않는 짓이야. 오대세가의 수좌라는 가문에서 어떻게 그런 짓을..."
모용황의 얼굴은 낭패감에 젖어 있었다. 그때의 일이 그토록 후회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실수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당시에는 데이몬을 그저 서역에서 온 떠돌이로 생각했었다. 그 때문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손을 쓴 것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가 상상도 하기 힘든 수준의 고수였다니...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모용세가가 입은 피해는 실로 엄청났다. 이제 가문의 주요 고수와 주력을 잃은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세가의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가문의 명예가 실추 되는 것은 시간문제나 다름없었다. 모용황의 눈에 결의의 빛이 어렸다.
'더 이상 벽안독성을 적대해서는 안 돼.'
상대는 상상도 하기 힘든 수준의 고수. 모용세가에는 더 이상 벽안독성을 상대할 만한 전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결정을 내린 모용황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부디 용서를 바라오."
힘겹게 한 마디를 토해낸 모용황이 이마를 그대로 바닥에 박았다.
"순간의 판단착오로 인해 가문의 은인에게 엄청난 결례를 저지른 것을 인정하고 사죄하리다. 당시에는 묵회의 해독약이 너무나도 절실했기에..."
데이몬의 냉랭한 음성이 그 말을 끊었다.
"그렇다고 은인을 무력으로 제압해서 고문을 가한단 말인가?"
"그 점에 대해서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부디 용서를 바랍니다."
모용황의 말이 끝나자 엉거주춤 서 있던 모용세가의 식솔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주요 식솔에서부터 일반 무사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데이몬에게 부복한 것이다.
"부디 모용세가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큰 죄를 지었습니다."
부복한 채 바닥에 머리를 박는 모용세가 무사들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체면을 깡그리 버린 채 애원하는데 대한 굴욕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눈앞의 색목인은 모용세가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강자였다. 무림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힘의 논리. 세가의 힘이 상대보다 약한 이상 굴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모습을 데이몬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모용세가의 가주를 비롯해 모든 식솔들이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것을 보니 어느 정도 마음이 풀렸다.
'역시 세가로군.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순간의 굴욕 따윈 마땅히 감수한다 이건가?'
물론 데이몬은 모용세가의 속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다.
'나에게 힘이 있기에 굴복하는 것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자존심이 강한 모용세가가 공개적으로 나에게 사죄할 이유가 없지.'
어쨌거나 데이몬으로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과를 받아냈으니 말이다. 그가 한결 풀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좋소. 가주께서 무릎까지 꿇고 사죄하시니 묵은 원한을 일부나마 덮어두도록 하겠소. 하지만 그것으로 본인과 모용세가와의 은원관계가 모두 풀렸다고 생각하진 마시오."
"감히 그렇게 생각할 리가 있겠습니까? 앞으로 모용세가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벽안독성 대협을 적대하지 않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일전의 무례에 대한 보상까지 해 드리겠습니다."
"보상 따윈 필요 없소."
살짝 머리를 흔든 데이몬이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갔다. 슬며시 고개를 든 모용황이 눈가에 득의의 빛이 어렸다. 어쨌거나 일시적으로 원한을 덮겠다고 하니 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이미 입은 피해는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 입어야 할 피해는 막아야 해.'
서둘러 몸을 일으킨 모용황이 살기어린 시선으로 황보세가 진영을 쳐다보았다. 저들이 벽안독성은 끌어들인 탓에 모용세가는 실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어떻게든 앙갚음을 해야 했다. 강자인 벽안독성은 감히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약자인 황보세가에게는 충분히 보복할 힘이 있었다.
'벽안독성은 단순히 본가에 대한 원한 때문에 이번 싸움에 끼어들었다. 황보세가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머지않아 떠나갈터. 그때 오늘의 빚을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받아낼 것이다.'
한동안 황보세가를 쳐다보던 모용황은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벽안독성께 거듭 사죄의 말을 올리는 바요.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곤 살기어린 눈빛으로 황보천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비세를 인정하고 물러나겠소. 정말 대단한 빈객을 초빙하셨구려."
몸을 돌린 모용황이 무사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리려 했다. 그떄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냥 가실 수는 없소이다."
입을 연 자는 황보천이었더. 그가 급히 달려 나와 고함을 질렀다. 그로서는 지금과 같이 좋은 기회를 그냥 날려버릴 수 없었다.
"모용세가와 벽안독성과의 은원관계는 방금 정리되었소. 하지만 우리 황보세가와의 은원관계는 정리되지 않았소이다. 어쨌거나 벽안독성께서는 아직까지 우리 황보세가의 빈객 신분이시오. 그러니 그분이 계시는 동안 모든 일을 깔끔하게 정리하도록 합시다."
그 말을 들은 모용황의 눈빛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무슨 은원관계를 정리하자는 말이오?"
"정사대전이 끝났을 때 모용세가는 본가가 관리하던 사업장을 모조리 빼앗아갔소. 그 때문에 본가는 과거의 힘을 찾지 못하고 있소이다. 그것이 은원관계가 아니면 도데체 무엇이 은원이라 할 수 있소?"
분기가 치솟았는지 모용황의 눈에서 살기가 쭉 뿜어져 나왔다.
'저런 방자한...'
당장이라도 황보천을 갈가리 찢어발길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데이몬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다.
기세에 밀려 주춤 뒤로 물러난 황보천이 간절한 눈빛으로 데이몬은 무슨 일이 있냐는 듯 무료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다 경아를 이용하는 수밖에...'
살짝 입술을 깨문 황보천이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의 눈빛을 받은 황보경이 앞으로 나섰다. 어릴 때부터 눈칫밥을 먹어온 탓에 그녀의 눈치는 매우 빠른 편이었다.
"대협, 부디 이 자리에서 저희 가문의 은원을 마무리지어주세요. 소녀가 이렇게 부탁트리겠어요."
데이몬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쯤에서 빠질까 생각했는데 황보경이 애원하는 것을 보니 매정하게 뿌리치기가 뭐했다.
"좋소. 시작했으니 마무리를 지어주리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소저의 얼굴을 봐서 그러는 것이오."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모용황을 응시했다.
"황보세가의 가주의 말대로 본인은 아직 황보세가의 빈객의 신분이오. 그러니 두 세가 간의 은원관계에 조금 더 관여해야 하겠소이다."
모용황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말썽을 불러 일으킨 황보천과 그 딸년을 잡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속내를 겉으로 내비칠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가증스러운 것들... 내 언제고 너희들에게 모용세가의 분노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려주겠다.
마음을 정한 모용황이 억지로 얼굴빛을 고쳤다. 벽안동성은 엄연히 외인이다. 머지않아 황보세가를 떠날 사람이란 뜻이다. 앙갚음하는 것은 그때 해도 충분했다.
"좋소. 벽안독성께서 말씀하셨으니 이 자리에서 두 가문간의 은원관계를 말끔히 해소하겠소. 정사대전 이후 본가에 편입된 사업장을 모두 황보세가에 돌려주겠소."
순간 황보천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사업장만 되찾아온다면 황보세가는 과거의 영광을 다시 꿈꿀 수 있게 된다. 물론 그것을 모용세가에 다시 빼앗기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정이지만 말이다. 감격한 황보천이 목례를 했다.
"고맙소."
"고마울 것 없소."
냉랭히 내뱉은 모용황이 고개를 돌려 모용천을 쳐다보았다. 단전이 폐지되었지만 뛰어난 머리 때문에 그는 아직까지 세가의 대소사를 관리하고 있었다.
"황보세가의 사업장을 모조리 되돌려주도록. 하나도 빠짐없이 말이다."
모용천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황보천을 쳐다보았다.
"동부의 사업장 거점으로 사람을 보내시오. 거기에서 사업장에 대한 제반권리를 넘겨주겠소."
"알겠소이다."
 모용황은 즉시 무사들을 철수시켰다. 황보세가를 떠나는 모용세가 무사들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단 한 사람으로 인해 패배했으니 기운이 날 리가 없다. 반면 황보세가의 무사들과 낭인들은 연거푸 환호성을 질러댔다.
"황보세가 만세."
"벽안독성 만세."
모용세가 무사들은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환호성을 들으며 쓸쓸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모용세가 주요 식솔들의 눈동자에는 분노의 광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반드시 황보세가에 보복할 것이란 결의가 서려 있는 눈초리였다.

4.네가 춘약을 먹어라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모용세가에서는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빼앗았던 사업장의 권리를 고스한히 넘겨주었다. 그리하여 황보세가는 예전에 잃었던 사업장을 고스란히 되찾을 수 있었다.
그날 황보세가에서는 대대적으로 잔치가 벌어졌다. 세가의 무사들과 일시적으로 고용한 낭인들은 물론 정략결혼으로 혈연관계를 맺은 가문 사람들을 모두 초청해서 벌이는 성대한 잔치였다. 황보천은 이례적으로 세가의 창고를 활짝 열어젖혔다.
"아무것도 아끼지 마라. 가문의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빈객들을 대접해야 한다."
거대한 저택의 안팎에서는 요리 냄새가 진동을 했다. 가문의 무사들과 빈객들이 뜰과 연무장을 가득 채운 상태로 잔치를 벌였다. 물론 누가 최고의 공신인지는 물어보나 마나였다.
데이몬은 그야말로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최고의 숙수들이 최고의 재료를 써서 만들어낸 요리들이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졌다. 반주로 준비된 것은 다름 아닌 여아홍이었다. 호아보천은 딸들의 결혼식에 쓸 여아홍을 남김없이 개봉하여 데이몬을 대접했다.
"벽안독성께서는 특히 여아홍을 좋아하신다. 너희들의 잔치에는 다른 술을 쓰도록 하자."
거기에는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데이몬이 아니었다면 잃었던 사업장은 고사하고 가문의 명맥조차 이어나가지 못했을 것이기에 황보천의 딸들도 고이 감수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한 가지 명령만은 듣지 않았다. 벽안독성에게 술을 따라주라는 황보천의 말에 딸들은 질색을 했다.
"마, 말도 되지 않아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술을 따르는 것은 오직 기녀밖에 없어요."
물론 그녀의 어머니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벽안독성이 본가에 엄청난 은혜를 끼쳤다는 것은 인정해요. 그러나 그것과 이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에요."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내 딸이 외간남자에게 술을 따르는 꼴을 볼 수 없어요."
거센 반발에 직면한 황보천은 난감해 했다. 물론 그가 마음놓고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딸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가 황보경을 쳐다보며 단호하게 명을 내렸다.
"너밖에 없구나. 네가 가서 가문의 은인인 벽안독성께 술을 따라드리도록 해라."
그러자 황보경이 눈을 크게 떴다. 물론 그녀는 데이몬에게 술을 따라준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둘밖에 없었을 때였다. 지금처럼 여러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곳에서 술을 따라준다면 구설수에 오를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애당초 방패막이가 되어줄 어머니나 든든한 외가가 없기 때문이다.
"아, 알겠어요."
어깨가 축 늘어진 황보경이 주춤거리며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그런 황보경을 보면 데이몬이 반색을 했다.
"오, 소저. 오셨소?"
잠시 망설이던 황보경이 옆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보자 인근의 빈객들이 눈을 크게 떳다. 무림세가의 규수, 그것도 가주의 친딸이 외간남자에게 술을 따르는 것은 쉽사리 보기 힘든 경우이기 때문이다. 모기소리만한 음성이 고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가, 가문의 은인에게 술을 한 잔 올리겠어요."
그 모습을 묵묵히 보던 데이몬이 들고 있던 잔을 비웠다. 수치심으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가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웠다.
쪼르르르
황금빛 액체가 잔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데이몬은 잔을 들이키지 않았다. 술잔을 탁자 위에 살짝 내려놓은 다음 옆에 놓인 빈 잔을 들어 황보경에게 건넸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예의겠지요?"
황보경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잔을 받았다. 데이몬이 싱긋 웃으며 술병을 집어들었다.
"소생이 한 잔 따라 드리리다. 한 잔 받으시오."
받은 잔을 내려놓고 상대에게 잔을 따라준다. 이것은 마음속으로 인정한 강호의 동도에게나 하는 예의이다.
당혹해 하던 황보경이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황보천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웃는 낯으로 잔을 받쳐 들었다.
"가, 감사해요, 은공."
데이몬이 술병을 기울여 황보경의 잔을 가득 채웠다.
"자, 황보세가의 승리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건배를 합시다."
쩡
살짝 잔을 부딪친 다음 데이몬이 술을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 그러나 황보경은 섣불리 술잔을 비우지 못하고 쩔쩔 맸다. 아무리 술은 좋아하는 그녀라고 해도 이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서 술을 마시기가 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의 귓전으로 아버지의 나지막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어서 비우지 않고 뭘 하느냐? 대협은 이미 잔을 비우셨다."
그 말에 안심한 황보경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짜릿한 감각에 살짝 몸을 떨었다.
"크으."
황보경이 단숨에 술잔을 비우자 보고 있던 빈객들이 탄성을 토해냈다.
"정말 술을 잘 마시는 소저로군."
"여아홍은 여간 독한 술이 아닌데 말이야."
이후로도 둘은 서로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술잔을 비워나갔다. 그녀의 둘째 언니인 황보영을 위해 빚어놓은 여아홍은 금세 동이 나 버렸다.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술기운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황보경이 몸을 일으켰다. 이미 그녀는 한계까지 술을 마신 상태. 빈객들이 가득한 곳에서 실수를 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녀는 일찌감치 자리를 떴다.
"들어가 쉬도록 하시오."
"편히 쉬십시오."
살짝 목례를 한 황보경은 화끈거리는 볼을 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접객청을 나서자마자 무사 한 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익히 안면이 있는 내당의 무사였다.
"가주님께서 아가씨를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요?"
무사는 그녀의 대답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고개를 갸웃거린  황보경이 서둘러 무사의 뒤를 따랐다.
무사가 안내한 곳은 가문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회의실이었다. 오직 가문을 이끌어갈 후기지수와 직계식솔만이 출입할 수 있는 장소였다. 물론 그곳은 황보경에게 허락된 장소가 아니었다.
황보경은 화들짝 놀라 무사를 쳐다보았다.
"이, 이곳은 회의실이잖아요. 저는 이곳에 들어갈 수 없어요."
"괜찮습니다. 가주님께서 아가씨를 이곳으로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결국 황보경은 얼떨떨한 기색으로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실 안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가문을 이끌어나가는 주요 식솔들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가주인 황보천이 있었다.
황보경이 들어가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쏠렸다. 황보천이 앞으로 나와 황보경을 맞았다.
"어서 오너라."
"부르셨어요, 아버님."
"그래. 긴히 의논할 일이 있어서 불렀다."
황보경은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술기운이 도는 판국인데 세가의 주요 식솔들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느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황보천 역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일단 너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네, 말씀하세요."
"너, 벽안독성 대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네?"
황보경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혀 상상치 못한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식솔들의 반응은 진중했다. 때문에 그녀는 억지로 자신이 느낀 바를 설명했다.
"생각보다 젊어서 놀랐어요. 노란 머리색과 푸른 눈동자가 무척 낯설더군요. 처음에는 이상했지만 익숙해지니 상당히 수려하고 잘 생긴 것 같아요."
"그나마 다행이구나."
한숨을 길게 내쉰 황보천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우선 너에게 오늘 도출된 회의결과를 알려주겠다."
"회, 회의결과를요?"
그녀는 적이 놀랐다. 가솔회의의 내용은 철저한 극비사항이다. 오직 가문을 이끌어갈 주요 식솔과 후기지수 이외에는 유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 만큼 세가의 딸들은 회의결과를 들을 자격이 없다고 봐야한다. 시집을 가면 외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황보천이 그녀에세 회의 결과를 알려주겠다니 황보경으로서는 당연히 얼떨떨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황보천이 회의에서 도출된 결론을 설명해 주었다.
"일단 본가는 과거에 잃었던 사업장을 모두 되찾았다. 그것을 지키기만 하면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정말 다행이군요."
그러나 황보천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다.
"하지만 본가에는 그것을 지킬 만한 힘이 없다. 당장 본가가 보유한 무사는 수적으로 모용세가의 십 분지 일도 되지 않는다. 수준을 따지면 더욱 암담하지."
황보경은 창백한 표정으로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만약 모용세가가 사소한 것을 빌미로 시비를 걸어온다면 본가는 사업장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무림맹에 중재를 요청하면 안 되나요?"
그녀의 말에 황보천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럴 수는 없다. 일단 무림매에 미치는 영향력은 모용세가가 월등히 강하다. 게다가 우리가 먼저 선제공격을 한 상황이라 무림맹에서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지."
암울한 가문의 미래에 대해 듣자 황보경의 얼굴 역시 어두워졌다. 내둘린다고는 하나 그녀 역시 황보세가의 식솔임에는 틀림없었다.
"큰일이로군요."
"하지만 타개할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다."
황보천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황보경을 쳐다보았다."
"한 사람만 잡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눈치 빠른 황보경은 대번에 황보천의 말뜻을 깨달았다.
"벽안독성 대협 말이로군요. 하지만 그분이 어찌 본가에..."
"여기에서 너의 희생이 필요하다."
황보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딸에게 차마 못할 말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너를 벽안독성의 여자로 만들 생각이다. 그렇게라도 관계를 맺어야만 본가가 이번 위기를 무리 없이 넘길 수 있다."
충격적인 말에 황보경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아비도 괴롭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구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벽안독성과 네가 관계를 맺어야만 본가가 살아남을 수 있다."
어이가 없어진 황보경은 채 말문을 잇지 못했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 그녀가 떠듬떠듬 말을 이어나갔다.
"벽안독성과 저와의 정략결혼을 추진하신다는 뜻인가요?"
"최소한 하룻밤의 인연이라도 맺어야 한다는 뜻이다. 첩이든 뭐든 일단은 그의 여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라도 이용해서 말이다."
황보천이 품속에서 조그마한 자기병을 꺼내 들었다. 황보경의 시선이 자기병에 고정되었다. 의혹어린 황보경의 시선을 받으며 황보천은 담담하게 설명을 했다.
"춘약이다."
그 말에 황보경의 눈이 하얗게 치떠졌다.
"세, 세상에..."
황보세가의 가솔들은 일제히 침묵을 지켰다. 천대받는 소실의 딸이라 하나 가솔에서 차마 못할 짓인 것은 분명했다. 한참만에 정신을 차린 황보경이 겨우 입을 열었다.
"이, 이것을 벽안독성에게 먹이란 뜻인가요?"
황보천은 느릿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그의 외호는 독성, 모든 독에 대해 통달한 존재이다. 그런 그를 어찌 이런 춘약 따위로 중독시킬 수 있겠느냐?"
"그, 그렇다면..."
"이것은 네가 복용할 것이다."
충격적인 말에 황보경은 일순 멍해졌다. 친아버지라는 작자가 어찌 딸에게 춘약을 먹인 다음 외간남자와 관계를 맺게 한단 말인가?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녀가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안 돼요. 그럴 순 없어요."
그 말이 끝나자 순간 식솔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황보천 역시 노한 눈빛으로 황보경을 노려보았다.
"가문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지금까지 너 자신만을 생각하느냐? 너는 벌써 두 번씩이나 고집을 부려 가문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하, 하지만..."
황보천이 냉랭한 어조로 황보경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길게 얘기하지 않겠다. 만약 네가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고개를 돌려 식솔들을 둘러본 황보천이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너와 공개적으로 의절하겠다. 가문에서 축출하겠다는 뜻이다."
황보경은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다. 주위의 소리들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큼지막한 눈동자에 눈물이 배어나오더니 주르르 흘러내렸다.
좌중은 침묵이 지배했다. 누구 하나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 했다. 그저 소리 없이 흐느끼는 황보경을 물끄러미 주시할 뿐이었다. 고개 숙인 채 울먹이는 황보경의 어깨만 미미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본 황보천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비로서 정말 미안할 따름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구나. 가문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가솔의 본분일 터. 부디 가문을 생각해 다오."
황보경은 일언반구 없이 흐느끼기만 했다. 그만틈 가문의 처사가 서운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결정은 엄연히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황보세가의 식솔인 이상은 말이다.
 데이몬은 자신의 처소에서 한가롭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흠, 전통 있는 가문이라 음식솜씨가 괜찮군."
간간이 안주를 먹어가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데이몬의 시선이 돌아간 순간 청아한 음성이 들려왔다.
"대협, 주무시나요?"
데이몬은 문 밖의 사람이 누구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아니오. 술맛이 좋아 맛보고 있는 중이오."
"잘 되었군요. 술상을 봐왔답니다.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물론이오.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고 황보경이 들어왔다. 그녀를 보는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보경의 차림새가 생각 밖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속살이 훤히 비치는 나삼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버선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중원에서 여인이 맨발을 보이는 것은 철저한 금기사항이다. 살을 섞는 남편이 아니면 맨발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통념이다. 그런데 황보경이 그런 도발적인 차림새를 하고 방에 들어온 것이다.
옷차림이 부끄러웠는지 황보경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데이몬은 슬그머니 시선을 외면하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흠. 옷차림이 좀 민망한 듯..."
황보경이 재빨리 다가와 데이몬의 맞은편에 앉았다. 머쓱한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그녀가 들고 들어온 술병을 살짝 들어 올렸다.
"한잔 받으시겠어요?"
데이몬이 무심코 잔을 내밀었다. 황보경은 떨리는 손을 들어 술병을 기울였다.
쪼르르
황금빛 액체가 잔을 가득 채우다 못해 넘쳐흘렀다. 손이 떨려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수건을 들어 흘린 술을 닦았다.
"어머, 죄송해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이 따라준 잔을 비웠다. 그 모습을 본 황보경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은공께서 도대체 날 어떤 여자로 볼까?'
수치심 때문에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지만 그녀는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그녀가 추진하는 일은 가문의 운명이 걸린 일이다. 그러므로 단단히 마음먹어야 했다.
데이몬이 술을 들이키는 모습을 지켜 본 황보경이 소매 속에서 몰래 조그마한 잔을 꺼내들었다.
"소녀도 한잔 주시겠어요?"
미간을 지그시 모은 데이몬이 잠자코 술병을 들었다.
쪼르르르
술병에 든 술이 황보경의 잔에 가득 따라졌다. 그런데 술잔을 보는 황보경의 눈에는 복잡한 빛이 어려 있었다. 왜냐하면 술잔에는 아버지가 건네준 춘약이 발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술잔 속에 있던 연분홍빛 가루가 술에 섞여 희석되는 것을 보며 황보경은 침을 꿀꺽 삼켰다.
'침착해야 해, 황보경. 이것은 우리 가문의 운명이 걸린 문제야.'
계획대로라면 술잔을 단숨에 들이켜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 어떤 무림의 규수가 제 정신이 박힌 상태에서 춘약을 복용하겠는가? 술잔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의 귓전으로 나지막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내키지 않으면 드시지 마시오."
황보경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에요."
그녀는 머뭇거림 없이 술잔을 들이켜 버렸다. 그 모습을 데이몬은 무표정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춘약의 효과는 상상 밖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황보경은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혼미해지며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뛰었다. 손발이 마구 꼬이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만약 그녀에게 남자 경험이 있었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벽안독성의 품에 안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순결한 처녀다.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몸을 비비꼬며 괴로워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악, 하악."
연신 가쁨 숨을 몰아쉬던 황보경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쨍그렁
바닥에 떨어진 술잔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어졌다. 바닥에 웅크린 채 파들파들 몸을 떠는 그녀를 데이몬은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쳐다보았다. 잠시 후 입술을 비집고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버지가 시킨 것이오?"
그러나 황보경에게는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도무지 정신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살짝 한숨을 내쉰 데이몬은 수인을 맺었다.
"독이 아니어서 해독주문은 통하지 않겠군. 하지만 정화주문은 통할 테지."
마나가 급속도로 재배열되었다.
"퓨리피케이션(정화)."
정화 주문이 황보경의 몸에 퍼부어지는 순간 그녀를 괴롭게 만들던 춘약 기운이 일시에 증발해버렸다. 버르적거리던 황보경의 떨림도 멎었다. 그녀가 의아한 듯 눈을 떴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춘약 기운 때문에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시시각각 이성을 잠식해 들어오던 춘약 성분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황보경은 불현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 설마?"
측은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데이몬을 보고 난 후의 일이었다.
벽안독성, 독의 대가답게 그가 춘약기운을 해독해 준 것이다.
수치심으로 인해 그녀는 그만 얼굴을 감싸 쥐고 말았다. 귓전으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들었다.
"처녀의 몸으로 춘약을 복용하다니 놀랍구려. 물론 부친이 그렇게 시킨 것이겠지만 말이오."
그 말을 들은 황보경은 그대로 오열하고 말았다. 도무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입에 담지 못할 짓을 시킨 아버지와 가문에 대한 원망, 상대에 대한 부끄러움이 합쳐져서 그녀는 한없이 펑펑 울었다.
"으흐흐흑."
엎드린 채 흐느끼는 그녀의 등허리를 데이몬이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울다 지쳤는지 한참을 울먹이던 그녀의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그때 그녀의 귓전에 나지막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이름이 경이라고 했나?"
황보경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하도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지만 그녀는 억지로 힘을 내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데이몬에게로 돌렸다.
"그, 그렇습니다.
황보경의 얼굴을 보며 데이몬은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이윽고 결정을 내렸는지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한 가지 제안하겠다."
"....."
"혹시 내 여동생이 될 생각이 있느냐?"
황보경의 눈이 번쩍 커졌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데이몬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짙어졌다.
"내가 너의 든든한 오빠이자 외가가 되어주마. 네 아버지는 물론 가문에서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든든한 외가 말이다."
"....."
"나와 의남매 사이가 될 경우 너는 더 이상 앞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누구도 널 구박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하기 싫은 일은 강요받지 않아도 된다. 어떻게 하겠느냐?"
황보경의 눈에 서서히 빛이 돌아왔다.
"지, 진정이신가요?"
"물론이지. 너처럼 술을 잘 먹는 여동생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 솔직히 말해 난 술친구가 매우 그리웠었다. 너처럼 아리따운 여동생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지."
그의 살기운 말에 황보경은 이성을 잃어버렸다. 정신없이 데이몬의 품속으로 뛰어든 그녀가 또다시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가,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흑흑."
쓴웃음을 지은 데이몬은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가문에 대해서도 더 이상 걱정할 것 없다. 이제 황보세가는 외인이 아닌 내 여동생의 집안이다. 따라서 황보세가를 건드리는 자들은 나의 분노에 직면해야 할 것이다. 모용세가는 이제 두 번 다시 황보세가의 영역에 눈독을 들이지 못할 것이다."
황보경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것은 한 마디로 감격의 눈물이었다. 흐느끼는 그녀의 귓전으로 자상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나에게는 여동생이 없었다. 친인이 아무도 없는 천애고아였으니까."
"그, 그러셨나요?"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몹시 듣고 싶구나. 나에게 오라버니라고 한 번 불러봐주겠니?"
황보경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살짝 미소가 어렸다.
"오, 오라버니."
데이몬의 입이 헤벌레해졌다.
"으허허허. 정말 기분 좋구나. 앞으로 종종 불러 주려무나."
"무, 물론이죠. 오, 오라버니."
황보경이 쑥스러움에 겨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데이몬은 은은한 눈빛으로 황보경의 목덜미를 내려보았다.
"오늘은 내가 어여쁜 여동생을 맞이한 날이다. 그런 날 술이 없어서는 안 되겠지? 그런 의미에서 이 오라버니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 것은 어떠냐?"
"여, 여부가 있겠어요, 오라버니."
데이몬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술을 좀 더 준비해 오거라. 밥새도록 마시려면 아무래도 모자랄 것 같구나. 그리고 옷도 좀 갈아입고 오너라. 제 아무리 오라버니라고 하더라도 그런 차림새는 좀 민망하단다. 자고로 남편이 될 사내 말고는 속살과 발을 보이지 않는 법이야."
"네? 네. 알겠어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황보경은 정신없이 몸을 일으켰다.
한 달음에 달려나간 황보경은 남아있는 여아홍을 모조리 들고 들어왔다. 자신의 처소에 가서 단정한 경장으로 갈아입은 다음에 말이다. 새로 맺어진 두 의남매는 질펀하게 술판을 벌였다. 쉴 새 없이 술잔을 오고가며 남매 사이의 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새로 맞이한 오라버니는 황보경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럴 것이 가문의 친오빠들은 그녀에게 전혀 살갑게 굴지 않았다.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는 것은 양반이었고 갖가지 트집을 잡아 괴롭히는 일이 다반사였다.
'너 같은 것이 황보세가의 일원이라니 정말 어처구니없구나.'
'몸을 파는 기녀의 딸 주제에...'
물론 배가 다른 언니들도 그녀를 무시하거나 괄시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로 그녀는 가문에 기댈 구석이 전혀 없었던 상황이다.
그런 그녀에게 오빠가 생겼다. 피가 한 방울도 섞여 있지 않았지만 더 없이 살갑고 다정하게 대해주는 든든한 오라버니가.
술에 취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황보경이 그간의 설움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저런, 무척 힘들었겠구나."
데이몬은 때론 화를 내며, 또 걱정해주며 황보경의 푸념을 받아주었다. 감정이 북받쳐 오른 황보경은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오라버니가 생겼다는 사실이 이토록 뿌듯할 줄은 몰랐다.
데이몬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넌 이제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다. 지금 이 시간 이후로 그 누구도 널 괄시할 수 없을 테니까."
그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내 자랑 같지만 당금 무림에 나와 대등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고수는 고작해야 하나밖에 없다. 설령 무림맹주라고 해도 내 적수가 되지 못한다."
무척이나 광오한 말이었지만 황보경은 그 말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소녀는 오라버니의 말씀을 믿어요."
상식적으로도 그러했다. 바로 어제 데이몬에게 패한 신검 모용천악은 무림에서도 열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다. 그런 고수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끝에 무공을 폐지시킬 정도라면 더 이상 생각해 볼 필요가 없었다.
"내일 나는 황보세가를 떠날 생각이다. 그때 같이 가자꾸나."
황보경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가 가시는 곳은 어디든 따라가겠어요."
"우선 당문으로 갈 생각이다. 그곳으로 내가 마음을 주고 있는 여인이 있지. 흠, 그러고 보니 너에겐 언니가 되겠구나. 물론 나이는 네가 더 많겠지만 말이다."
"언니라구요? 정말 보고 싶어요. 물론 예쁘시겠죠?"
데이몬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흐허허허. 그거야 이를 데 있겠느냐? 내가 여자 보는 눈이 좀 높단다."
황보경은 살짝 입을 가리며 웃었다.
"푸훗. 오라버니도 참."
"팔불출 같지만 무척 아름답고 착한 아이란 것은 사실이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도록 하거라."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를 대하는 것처럼 극진히 언니를 대할게요."
"암, 그래야지."
데이몬이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럼 한 잔 더 할까?"
황보경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잔을 들어올렸다.
쩡
맑은 소리와 함께 술잔을 부딪혔다. 둘은 술잔 속의 술을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
"아마 당문에 간 다음 무림맹으로 갈 가능성이 클 것이다."
데이몬의 눈에 순간적으로 장난기가 어렸다.
"너도 이제 충분히 성혼할 나이가 되었구나. 그러니 무림맹에서 사내들을 잘 살펴보도록 해라. 자고로 여인의 행복은 좋은 신랑감을 얻는 데서 시작되는 법이다."
그 말에 황보경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아잉. 몰라요. 오라버니."
"흐흐흐. 원한다면 내가 직접 골라주마. 이래봬도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한다. 그래, 어떤 형의 사내에게 관심이 있느냐? 무공이 센 놈? 아니면 잘 생긴 놈?"
황보경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오라버니. 자꾸 놀리시면 저 화낼 거예요?"
"흐흐흐. 농담이었다. 용서하거라."
"푸후훗. 오빠도 참/"
둘은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며 술잔을 주고받았다. 새로 인연을 맺은 오누이의 정이 새록새록 익어가는 밤이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한숨을 길게 내쉬는 황보천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휴우."
그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문의 운명이 걸린 계획을 지켜보느라 말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그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입술을 비집고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토록 일이 안 풀릴 수가 있나? 가문의 앞날이 정말로 암담하군."
연거푸 한숨을 내쉬던 그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나.
"사내 하나 유혹하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그 아이도 참."
그러나 오래지 않아 딸에 대한 연민이 치밀어 올랐다. 솔직히 말해 그는 어제 황보경에게 못할 짓을 시켰다. 춘약을 들려 외간남자가 있는 방에 들여다 보냈으니 말이다. 어제 일을 떠올려보던 황보천의 눈두덩이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내가 못할 짓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한 가문을 책임지는 가주의 입장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는 벽안독성과 연결되는 한 가닥의 고리를 만들기 위해 일을 추진했다. 벽안독성 데이몬이 관심을 가져 준다면 황보세가는 더 이상 모용세가의 압력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터이니.
그의 활약으로 잃어버린 사업장을 되찾아오긴 했지만 그것은 엄연히 시한부였다. 벽안독성이 떠나가고 나면 모용세가는 갖가지 핑계를 대어 사업장을 다시 빼앗아가려 할 것이 틀림없다.
황보세가에는 그것을 막아낼 힘이 없다. 때문에 어떻게든 벽안독성관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이 가문이 처한 상황이다. 그런데 야심차게 추진한 일이 그만 물거품이 되어버렸으니...
어제 그는 회유와 협박을 거듭한 끝에 결국 딸의 승낙을 받아냈다. 황보경은 춘약이 발라진 술잔을 들고 얇은 나삼 차림으로 데이몬의 숙소로 들어갔다. 황보천은 그 모습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일이 처음에는 잘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황보세가는 벽안독성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황보경은 계획대로 춘약을 복용했다. 숙소 밖에서 대기하던 황보천은 춘약기운에 사로잡힌 딸의 신음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그러나 신음소리는 이내 멎었다. 그 순간 황보천은 일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직감했다.
'벽안독성에게 춘약을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니...'
황보천으로서는 망연자실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어 들려온 것은 한없이 흐느껴지는 딸의 울음소리였다. 도저희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황보천은 집무실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해서 관심을 아예 끊은 것은 아니었다. 무사 몇 명을 남겨 동정을 살피게 했으니 말이다. 잠시 후 보고를 받은 황보천의 얼굴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경 아가씨는 제 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 술병을 몇 개 챙겨 다시 벽안독성 대협의 방으로 들어가더군요. 뭐라고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가씨가 간간히 흐느끼시는 것을 보아 그리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보고를 들은 황보천은 낙담했다.
'결국 일이 이렇게 무산되어버리는 건가?'
무사의 보고에 따르면 한 시진 정도 지난 뒤 벽안독성이 나와 시녀를 불렀다고 했다.
"방 안에는 경 아가씨가 인사불성이 되어 누워있었습니다. 벽안독성은 시녀들로 하여금 아가씨를 처소로 데리고 가게 했습니다. 이후 아가씨는 지금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벽안독성과 한 줄기 끈을 이어나가려던 황보세가의 계획은 그렇게 해서 어긋나버렸다.
"진인사 대천명이라 역시 일은 하늘에 달려 있군. 사람의 노력으로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법인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탓인지 황보천의 얼굴은 무척이나 수척했다. 그때 문 밖에서 무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황보천이 고개를 들었다.
"누구시더냐?"
"벽안독성 데이몬 데협이십니다."
순간 황보천은 몸이 경직되었다.
'큰일이로군. 어제의 일을 따지러 왔나본데 이 일을 어떻게 하지?'
황보천의 얼굴이 금세 파랗게 질렸다. 그는 벽안독성이 어제의 일을 항의하러 온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못할 짓을 한 그로서는 당연히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난감하군. 어떻게든 벽안독성과 끈을 이으려고 추진한 일인데 그만 반감을 사고 말았으니...'
절망감으로 인해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나 마냥 시간을 보낼 순 없는 노릇. 그는 힘없는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모시고 들어오너라."
"알겠습니다."
잠시 후 데이몬이 무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왔다. 얼른 표정을 바꾼 황보천은 공손히 예를 올렸다.
"오셨습니까, 대협."
"안녕하시오, 가주."
데이몬은 웃는 얼굴로 가주를 쳐다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냉소어린 미소 같기도 했다. 시선을 맞받던 황보천의 얼굴에 구슬 같은 식은땀이 흐리기 시작했다.
'저, 정말 난감하군.'
잠시 후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본인은 무척 재미있는 경험을 했소이다."
화들짝 놀란 황보천은 급히 허리를 굽혔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사죄하기 위해서였다.
"죄, 죄송합니다. 가문의 은인께 그만 실례를..."
데이몬이 손사래를 쳐서 황보천의 말문을 막았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어제의 일에 대해 따지려는 것이 아니오."
고개를 든 황보천의 눈에는 어리둥절함이 서려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인가? 데이몬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리다. 나는 경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오."
황보천의 눈이 커지려는 순간 데이몬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해서 그 아이를 여동생으로 삼기로 했소."
황보천은 일순 데이몬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의남매지간이 되기로 했다는 뜻이오. 혹시 거기에 반대하실 생각이시오?"
"제, 제 딸아이와 의, 의남매가 되시겠다는 말입니까?"
"바로 그렇소."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지금까지 나와 황보세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소. 하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소. 더 없이 사랑스러운 여동생의 가문이니 내 어찌 신경을 써주지 않겠소."
"그, 그러시다면..."
"앞으로 황보세가에 문제가 생길 경우 본인이 적극적으로 도와주겠소."
황보천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소. 혹시라도 경아를 내 여동생으로 삼는 데 반대의사가 있으시오?"
황보천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 말도 되지 않습니다."
"가주께서 찬성하시니 매우 기쁘구려."
데이몬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오늘 중으로 모용세가에 사람을 보내도록 하시오. 그리고 내가 경아와 의남매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전하시오. 만약 모용세가가 앞으로 황보세가의 영역을 침범할 경우 내가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는 사실을 알리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조처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황보천의 얼굴은 희열에 차 있었다. 무림 최상위급 초고수가 가문의 뒤를 봐주겠다고 했으니 당연히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게다가 그는 모용세가가 쩔쩔 맬 정도의 힘을 가진 인물. 그런 만큼 앞으로 더 이상 가문의 운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정말 잘 되었어. 경아가 정말 큰일을 해 냈군.'
어찌 보면 이것은 어제 그가 추진하던 계획보다 더욱 나은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기쁨에 겨워하는 황보천에게 데이몬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그리고 가주께 하나 더 허락받을 일이 있소."
"무엇입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당분간 경아를 데리고 다니겠소. 그 아이에게 세상구경도 시켜주고 틈틈이 무공을 봐 줄 생각이오. 그래도 되겠소?"
황보천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경아가 무척 기뻐하겠군요."
"고맙소."
뜻밖의 소식에 황보세가는 발칵 뒤집혔다. 벽안독성이 황보경과 의남매를 맺었고 이후부터 세가를 각별히 돌봐주겠다고 공언한 것은 실로 엄청난 낭보였다. 이제 황보세거는 더 이상 모용세가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벽안독성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본 모용세가이다. 그런 그들이 감히 벽안독성의 심기를 거스리는 행위를 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 때문인지 황보세가 식솔들과 무사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황보세가는 이제 과거의 영광을 고스란히 되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가문을 위기에서 구해낸 가장 큰 공신은 다름 아닌 황보경이었다. 그런 탓에 그녀에 대한 처우는 하루 만에 판이하게 바뀌어버렸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를 기다리는 이들은 황보세가의 주요 식솔들이었다. 아버지를 비롯해 계모들, 배다른 형제자매들이 모두 모여 그녀가 잠에서 깨기만을 기다렸다.
"일어났느냐?"
술에서 덜 깨어 푸석푸석한 얼굴의 황보경이 눈을 크게 떴다. 도대체 무슨 일로 가족들이 모두 몰려와 있단 말인가? 황보천이 웃음 띤 얼굴로 다가가 황보경의 손을 움켜잡았다.
"정말 잘했다. 네 덕분에 본가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
"네가 너무도 자랑스럽구나."
그 말에 황보경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지금껏 아버지로부터 칭찬을 받아본 기억이 전혀 없던 그녀였다. 그런 만큼 당연히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잘했다."
"훌륭하구나. 정말 훌륭하다."
옆에서 의붓언니와 오빠들이 어색한 표정으로 황보경을 칭찬했다. 지금까지 구박하고 멸시한 기억만 있기에 그들 사이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정말 고생 많았다. 많이 힘들었지?"
"너, 널 동생으로 둔 게 정말 자랑스럽구나."
황보천이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벽안독성께서 기다리고 계시다. 그러니 얼른 여행할 채비를 갖추도록 해라."
얼떨떨해 하던 황보경은 금세 어제의 일을 기억해냈다. 데이몬과 함께 당문으로 가기로 한 일을 말이다.
"네, 아버님."
여장을 갖추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녀의 봇짐은 언니들이 챙겨주었다. 그녀들은 자신의 외출복을 아낌없이 꺼내와 봇짐에 넣어주었다. 그 외 자질구레한 짐들은 모두 오빠들이 챙겼다. 평상시에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황보경은 온 가족들의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으면 여행준비를 서둘렀다.
세가의 정문 앞에는 커다란 마차가 서 있었다.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가주 전용 마차였다. 황보경을 대동하고 밖으로 나온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마차는 머요?"
황보천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았다.
"마차를 내드리겠습니다. 이것을 타고 당문까지 가십시오."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성의는 고맙지만 필요 없소. 술법을 이용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당문으로 갈 수 있으니까 말이오."
데이몬은 지체 없이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목적지느 당문에 그려진 대응 마법진이었다.
황보세가 식솔들이 황당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뭘 하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법진을 완성한 데이몬이 미소를 지으며 황보경을 쳐다보았다.
"경아, 이리 오너라."
황보경이 살포시 웃으며 다가와 데이몬의 손을 잡았다.
"그럼 본인은 이마 가 보리다."
"가, 가신다구요?"
당혹해진 황보천이 떠듬떠듬 대꾸했다. 바닥에 이상한 도형을 그려놓고 간다고 하다니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헉."
바닥의 도형에서 눈부신 빛이 일어나더니 벽안독성과 황보경의 몸을 감싼 것이다. 잠시 후 둘의 모습은 그곳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황보세가 사람들은 경악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둘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저, 정말 놀라운 술법이로군."
놀라움을 금치 못한 황보천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대단한 사람이야. 그토록 고강한 무공에 이어 저토록 신묘한 술법까지 사용할 수 있다니..."
그때 황보세가 식솔 한 명이 황보천에게 말을 걸었다.
"참 가주님."
"뭔가 말하라."
"무림맹에서 전서구 편으로 온 급고가 있습니다. 경황이 없어서 미처 전해드리지 못했습니다."
황보천이 눈을 크게 떴다.
"급보라고? 그렇다면 바로 나에게 알려야 할 것 아닌가?"
"워낙 경황이 없어서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어서 가보자. 전서구 편으로 왔다면 분명 보통 일이 아닐 텐데."
황보천은 부랴부랴 식솔들을 대동한 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데이몬과 황보경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당문에 도착했다. 난생 처음 공간이동 마법을 겪어본 황보경이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했다. 눈부신 빛이 몸을 감싸는가 싶더니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니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세, 세상에... 이게 어찌 된 일이죠?"
"일종의 술법이지. 축지법 비슷한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황보경은 형언할 수 없는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오라버니 정말 대단해요. 고강한 무공에 이어 축지법까지 쓰실 수 있다니..."
그녀의 극찬에 조금 낯 뜨거웠는지 데이몬은 헛기침을 했다.
"험험. 이 오라버니가 좀 능력이 있지 않느냐?"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흠, 당문 무사들이 오고 있구나."
그가 쳐다본 방향에는 당문 무사들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 당청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데이몬은 당청이 무척 보고 싶었다. 그녀 걱정 때문에 마정지지에서 예정보다 빨리 달려 나온 것 아니던가? 그러나 당청은 당문에 머물고 있지 않았다. 달려온 무사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데이몬이 눈을 크게 떴다.
"정사대전이 일어났다고?"
당문의 대소사를 책임지는 총관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렇습니다. 잠마련에서 무사들을 모두 동원하여 무림맹으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무림맹은 현재 발칵 뒤집힌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청이도?"
"네. 바로 어제 가주님께서 청 아가씨와 냉 무사님을 대동한 채 무림맹으로 떠나셨습니다."
"그래?"
데이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준환이 이토록 빨리 행동을 개시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놈, 급하긴 급했나보군. 벌써 마각을 드러내다니 말이야.'
데이몬의 반응을 살펴보던 총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흠, 그렇다면 무림맹으로 가봐야지. 청이를 혼자 전장에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까."
그 말에 총관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데이몬의 실력을 아는 총관으로서는 당연히 반가울 수밖에 없는 소식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마차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하겠소."
무림맹 인근에는 대응 마법진을 설치해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차 편을 이용해 갈 수밖에 없었다.

5.제2차 정사대전

5년 전 끝난 정사대전은 백도와 흑도에게 엄청난 손실을 안겨주었다. 각 문파의 정예 무사들이 대거 사망했고 심지어 근거지가 상대편에게 초토화된 문파도 수두룩했다.
정사대전이 끝난 시점이 되자 각급 문파에는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전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로 인해 무림에는 한동안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다.
손바닥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싸움을 벌이려고 해도 정사 양도에는 그럴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제2차 정사대전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어느 날 갑자기 발발했다. 천기대제 사준환이 잠마련의 정예를 모조리 긁어모아 하남의 무림맹으로 진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잠마련은 철저희 상명하복이 통용되는 문파였다. 구성원들 대부분이 독에 중독된 상태이기 때문에 잠마련의 총수인 천기대제가 내린 명령을 거역할 수 있는 무사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일천 이백에 달하는 잠마련의 정예 무사들은 한데 뭉쳐 하남의 무림맹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그로 인해 무림맹은 발칵 뒤집혔다. 잠마련의 행보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무림맹이었기에 그런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좋다. 잠마련에서 싸움을 걸어온다면 피하지 않겠다."
무림맹주를 맡고 있던 천의대협 황천호는 즉각적인 대응을 했다. 산하의 문파에 통문을 돌려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무림맹에 대기 중인 무사들을 대거 대동하여 잠마련 무사들을 맞으러 나갔다. 각급 문파의 지원이 도착할 동안 잠마련의 발을 묶으려는 의도에서였다.
잠마련의 진군을 저지하며 시간을 벌다가 무림맹에 모인 전력과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상대를 분쇄할 수 있다. 황천호는 그 사실을 추호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잠마련이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일을 벌이려는지 모르지만 승산은 우리에게 있다. 이참에 잠마련을 무림에서 지워버리겠다."
그럴 법도 한 것이 현재 무림맹에는 엄청난 전력이 모여 있었다. 묵회의 발호와 폭혈단으로 인해 각급 문파들의 경각심이 극에 달해 있는 상황이다. 특히 폭혈단으로 피해를 본 문파들은 주력무사들을 대거 무림맹으로 보낸 상태였다.
그로 인해 황천호는 무려 구백이 넘는 무사들을 대동한 채 잠마련을 맞으러 나갈 수 있었다. 수적인 면에서는 조금 밀리지만 무공수준으로 따지면 충분히 잠마련을 압도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지금 무림맹으로 진군하는 것은 잠마련 단일세력이다. 조기에 격파에버린다면 사파 무림이 감히 가세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무림맹과 잠마련의 세력이 맞붙은 곳은 진령평원이었다. 귀주에서 하남으로 넘어오는 길에 위치한 진령평원은 그간 정사의 주력이 수도 없이 맞붙은 전력을 가진 곳이다.
황천호가 이끄는 구백의 무림맹 무사들은 승리를 자신하며 잠마련 무사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수적으로는 딸리지만 무공수준에서는 월등히 우수한 만틈 최소한 잠마련의 발목을 묶을 수 있을 것이라 장담했다.
그러나 결과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진령평에서 벌어진 접전은 무림맹의 처참한 패배로 결론지어졌다. 무림맹 무사들은 무려 절반이나 되는 전력을 잃고 참담하게 후퇴해야 했다. 잠마련에서 엄청난 위력을 가진 최신예 강시를 앞세웠기 때문이었다.
묵회가 잠마련의 하부세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무림맹은 강시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했다. 무사 하나 하나가 당문에서 공수한 해독제를 소지했고 불에 약한 독강시의 약점을 노려 비밀리에 화탄과 벽력탄을 준비했다.
허나, 그런 대비는 철저히 무위로 돌아갔다. 잠마련에서 선봉으로 내세운 강시는 독강시가 아니라 마정지지의 혈마기로 강화된 음양혈강시였다.
첫 접전에서 드러나 음양혈강시의 위력은 엄청났다. 절정고수의 검강이 정통으로 작렬해도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을 정도였다.
무림맹 무사들이 화탄과 벽력탄을 쏘아대며 저항했지만 음양혈강시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표면에 새겨진 마법진은 벽력탄의 폭발에너지까지 흡수하여 손상된 동체를 수복했다.
혈마기가 가미된 강시의 장력은 실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산전수적 다 겪은 무사들이 장력 한 방에 피를 토하면 나가떨어지는 상황이었다.
장력에 혈마기가 깃들어 있었기에 어지간한 무사들은 쓰러진 후 다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음양혈강시를 막아낼 수 있는 무사는 오직 하나, 화경에 접어든 고수뿐이었다.
물론 무림맹에 화경의 고수가 없을 리가 없다. 선발대에는 맹주인 황천호를 비롯해 십여 명의 화경고수가 포진해 있었다. 밀리는 전세를 보다 못해 그들이 전면에 나섰지만 패색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음양혈강시의 수가 무려 스물다섯이나 되었기 때문에 섣불리 공격에 나서기 힘들었던 것이다.
자칫 잘못해서 포위되기라도 한다면 끝장이기 때문에 화경 고수들은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했고 그로 인해 무림맹 무사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패퇴해야 했다. 그나마 황천호가 재빠르게 퇴각 명령을 내렸기에 무림맹이 전멸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절반의 전력을 보존한 채 후퇴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강시의 위력으로 말미암아 대승을 거뒀지만 잠마련은 곧바로 추격에 나서지 않았다. 무림맹이 거점을 버려둔 채 도망치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살아남은 무림맹 생존자들은 무사히 무림맹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무림맹의 분위기는 극도로 무거웠다. 예상치 못했던 대패와 뜻하지 않은 강시의 위력에 맹 전체가 절망감에 젖어 있었다. 데이몬이 무림맹에 도착한 것은 바로 그즈음이었다.
히히히힝
여섯 대의 말이 끄는 마차가 다가와 서자 문지기들이 바짝 긴장했다. 경비를 맡고 있던 장삼이 조심스럽게 마차에 그려진 표식을 확인했다.
'당문의 마차로군. 하지만 검문은 철저히 해야 한다.'
정사대선이 촉발된 상황이었다. 언제 잠마련의 첩자들이 잠입해 올지 모르기에 경비대는 비상이 걸려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장삼이 마부석이 마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당문에서 오실 분이 또 있으셨소? 문주님을 비롯한 주요 고수들이 모두 도착한 상황인데?"
마부가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당문 최고의 귀빈이시오. 어서 문을 여시오."
그러나 장삼은 순순히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누군지 신분을 밝히시오. 신분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으면 문을 열어줄 수 없소."
"허, 참. 마차를 보고도 모르시오?"
문지기와 마부가 옥신각신 하는 사이 마차의 문이 열렸다. 그리로 일남일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이십대 초반의 청년과 한없이 아름답게 차려입은 아가씨였다.
그들은 바로 데이몬과 황보경이었다. 둘의 사이는 더 없이 친밀해 보였다. 스스럼없이 팔짱을 끼고 마차에서 내렸으니 말이다.
"자고로 여자란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자를 택해야 하는 법이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사모하는 남자와 결혼해야 행복한 것 아닌가요?"
"어허, 그건 모르는 말이다. 자고로 남자란 달라붙는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법이지."
둘은 무림맹으로 오며 한층 더 친밀해져 있었다. 여동생이 없었던 데이몬은 눈치 빠르고 애교덩어리인 황보경이 마음에 쏙 들었다. 게다가 쉽게 술에 취하지 않고 오랫동안 대작을 해 주니 더 이상 바랄 바가 없다.
황보경 역시 새로 맞아들인 오라버니가 마음에 들긴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가문의 오빠들 앞에서는 바짝 긴장해야 했었다. 언제 책을 잡혀 야단을 맞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출신을 문제 삼아 구박하는 것은 그녀의 가슴에 큰 상처를 주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실수를 해서 야단맞을까봐 마음 졸일 필요도 없었고 세심하게 신경써주는 마음씀씀이가 그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오빠란 존재가 이토록 든든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을 정도였다.
둘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무림매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즉각 장삼이 길을 막았다.
"멈추시오."
데이몬과 황복경이 쳐다보자 장삼의 안색이 경직되었다.
"신분을 명확히 밝히시오. 그렇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소."
이미 그는 데이몬에 대해 일말의 의심을 품고 있었다. 일단 쉽게 찾아보기 힘든 서역의 색목인인 점이 그의 의심을 부추겼다. 물론 하급 문지기에 불과한 장삼이 벽안독성을 알아볼 안목이 있을 리가 없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이 혀를 찼다.
"허 참, 검문 한번 철저히 하는군."
황보경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은 전시잖아요. 검문을 철저히 할 만하죠."
장삼의 시선이 황보경에게로 향했다.
"소저도 역시 신분을 밝혀야 하오. 신분이 확인되지 않으면 출입을 허락할 수 없소."
그 말에 황보경이 정색을 했다.
"저는 황보세가의 식솔이에요. 세가의 가주가 아버님이시죠."
장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색목인에게 교태를 부리는 것을 보아 인근 기루의 기녀로 생각했는데 한때 오대세가의 일원이었던 황보세가의, 그것도 가주의 딸이라니...
"혹시 신분을 증명할 만한 패가 있소?"
황보경이 잠자코 내민 패를 받아들어 확인한 장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동행하신 분도 신분패 확인을 해야 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애석하게도 오라버니에겐 신분패가 없어요. 서역에서 오셨기 때문이죠. 그러니 당문에 전갈을 좀 넣어 주세요. 벽안독성 데이몬 공께서 찾아오셨다고요."
순간 장삼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가 요새 소문이 떠들썩한 벽안독성을 모를 리 없었다. 다른 소문은 차지하더라도 모용세가 제일의 고수인 신검 모용천악을 처참히 패배시킨 일이 바로 엊그제 일어난 사건이었다. 무림을 지배하는 법칙을 역시 힘, 장삼은 다급히 부동자세를 취했다.
"시, 실례가 많았습니다. 즉각 내부에 전갈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흠, 당문에서 사람이 나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소."
"그,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곧바로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쿠르르릉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무림맹의 대문이 열렸다. 옆에 달린 쪽문이 열리는 것이 아니었다. 단 한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그 큰 대문이 통째로 열리는 것이었다.
'역시 무림은 힘이 있고 봐야해.'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당문은 무림맹 후원에 위치한 독채 한 채를 통째로 쓰고 있었다. 데이몬은 황보경을 대동한 채 당문 식솔들에게 배정된 전각을 향햐 다가갔다.
벽안독성 데이몬이 도착했다는 사실은 금세 안으로 전해진 모양이었다. 당가 요인들이 헐레벌떡 데이몬을 마중 나오고 있었다. 그 선두에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당청이 위치해 있었다.
"가가."
당청이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달려와 데이몬의 품에 안겼다.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요."
"음 그래, 나도 보고 싶었단다."
당청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들어 데이몬을 올려다보았다.
"그동안 어디 계셨어요?"
폐관 수련을 좀 했느니라. 과거의 힘을 되찾기 위해서 말이다."
"잘 되셨나요?"
데이몬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난 과거의 힘을 되찾았다. 권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지. 그러니 걱정하지 말거라."
"저는 그것보다도..."
말꼬리를 흐린 당청이 고개를 수그렸다. 부끄러움으로 인해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가께서 몸성히 돌아오신 것이 더욱 기쁘답니다."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린 데이몬이 당청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정말로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한동안 데이몬의 품에 안겨 숨을 새근거리던 당청이 고개를 돌렸다. 데이몬의 옆에 서 있던 황보경을 본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급격히 불안감이 서렸다.
'혹시?'
상공이 데리고 온 미모의 젊은 여인. 누가 보더라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청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사이에 다른 여자를 데리고 오시다니...'
물론 중원은 삼처사첩이 허용되는 사회다. 게다가 데이몬 정도의 능력자라면 열 명의 첩을 거느려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그 어떤 여인이 정인을 다른 여자와 공유하고 싶겠는가? 불안감에 젖어 있던 당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분은 누구신지요?"
데이몬이 빙그레 웃으며 당청의 의구심을 풀어주었다.
"이번에 여동생으로 맞아들인 아이이니라. 황보세가의 직계식솔이기도 하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황보경이 방긋 웃으며 목례를 했다.
"처음 뵙겠어요, 언니. 오라버니 말씀대로 정말 아름다우시군요."
그때서야 당청이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전신을 옭죄고 있던 불안감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아가씨를 뵈어요."
둘을 보고 있던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도록 하거라. 알겠느냐?"
대답은 동시에 터져 나왔다.
"네 가가. 친언니처럼 모시게요."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
움찔한 당청과 황보경이 마주보고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데이몬이 고개를 돌리자 냉유성이 두 눈에 격정을 가득 담은 채 쳐다보고 있었다.
"주군."
"응, 유성이구나.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런데..."
데이몬의 눈이 살짝 커졌다. 냉유성이 성취한 무위를 단숨에 알아본 것이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녀석, 화경을 깨달았구나. 축하한다."
냉유성의 얼굴에 뿌듯한 빛이 떠올랐다.
"모두가 주공 덕분입니다."
"녀석, 그사이 부쩍 컸군."
고개를 흔드는 데이몬의 눈가에 장난기가 어렸다. 그는 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를 살짝 벌렸다.
"한 이 정도는 컸어."
냉유성의 이마에 핏대가 돋았다. 화경이 도대체 어떤 경지인가? 수백 명의 무사들 중 고작해야 하나, 둘 이룩할까 말까 하는 지고의 경지 아니던가? 우거지상이 된 냉유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하시군요, 주공."
"내 말은 엄연히 사실이다. 비록 깨달음을 얻었으되 기세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구나. 너는 현재 기세를 억지로 깨달음에 끼워 맞추려 하고 있다."
냉유성은 순간 등골이 서늘함을 느꼈다. 주공인 데이몬은 정확히 자신의 비밀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냉유성은 현재 깨달음을 따라가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귓전으로 나지막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더욱 정진하여 깨달음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라. 그래야만 진정한 화경 고수로 거듭날 수 있다."
흔들리던 냉유성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는 데이몬을 쳐다보며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각골명심하겠습니다, 주군."
"암, 그래야지."
다음으로 데이몬의 시선이 멎은 곳은 당문의 가주 당문수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당문수가 빙그레 웃으며 포권을 했다.
"무공을 되찾은 것을 감축드리오, 은공."
"당연히 찾아야 할 것을 찾은 것뿐이지요. 그건 그렇고 잠마련의 습격으로 곤란을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지요. 다행히 패왕문이 난입한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데이몬은 얼굴을 살짝 굳혔다.
"이제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당문을 보호할 테니까요."
데이몬의 장담에 당문수의 얼굴이 환해졌다. 물론 그는 데이몬의 최근 근황을 잘 알고 있었다. 정식 대결로 모용세가 최고의 고수인 신검 모용천악을 꺾었다는 사실을. 그런 초고수가 가문의 뒤를 봐준다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게다가 당문의 현재 입지는 상당히 위태했다. 정사지간의 문파에서 멸문의 위기를 겪었다가 최근에야 겨우 정파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니 기존 무림맹 문파와 친분이 있을 리가 없었다.
무림맹은 여러 문파가 힘을 합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휘하 무사들도 무림맹주보다는 소속 문주의 명령을 더 중시한다. 그런 만틈 조직의 구성이 지극히 자율적이었다.
지금처럼 정사대전이 촉발된 상황이라면 각 문파들은 친분과 연분이 있는 문파들끼리 힘을 합친다. 그 힘이 강할수록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투에서의 생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군소방파들끼리 뭉친 집단은 그리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때문에 비교적 위험한 임무에 투입될 가능성이 컸다. 반면 대문파들이 힘을 합한 집단은 안전한 곳에서 임무를 수행한다. 현재 무림맹에는 그렇게 결집된 집단들이 무수히 존재했다.
당문은 아직까지 아무런 집단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질 경우 화살받이로 소모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뜻이다. 게다가 현 무림맹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다름 아닌 모용세가이다. 그런 그들이 눈엣가시인 당문에 편한 임무를 맡길 리 만무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당문수는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데이몬이 도착한 것이다. 당문의 입장에서는 가장 든든한 응원군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당문수가 데이몬을 향해 웃는 낯을 지었다.
"일단 들어가시지요. 여정이 무척 피로하셨을 텐데 음식과 수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고맙소이다. 안 그래도 술 생각이 간절하던 참이었소."
데이몬은 두 말도 하지 않고 당문수의 뒤를 따랐다. 당청과 황보경이 서둘러 따라붙었다.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지 두 여인은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데이몬이 가세한 이후 당문은 새로운 집단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 오후 황보세가에서 지원군이 도착했다. 그러나 그 규모는 무척이나 초라했다. 되찾은 사업장을 관리하기 위해 상당수의 무사들을 배치했기에 여력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천은 고작 삼십여 명의 무사를 대동한 채 무림맹에 입성했다.
무림맹에 도착하자 황보천은 그 즉시 당문에 합류했다. 초고수인 데이몬의 옆에 머무르려는 것이 그의 속내였다. 당문과 황보세가가 연합세력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그 다음 당문의 진영에 합류한 세력은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다. 염왕도 초무극. 그는 원래 정사지간의 고수였다. 5년 전의 정사대전에는 은거를 핑계로 참여조차 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는 정파의 일원이 되고자 무림맹에 합류했다.
그의 출현은 무림맹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왜냐하면 그가 화경의 벽을 깨뜨린 초절정고수가 되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초절정고수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다. 웬만한 문파에서는 키워낼 꿈도 꾸지 못하는 최고의 전력이다.
그런 만큼 초무극이 제자 네 명만을 대동한 채 무림맹에 들어섰을 때 모든 문파들이 탐욕의 눈빛을 흘렸다. 초무극만 끌어들인다면 문파의 위신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는 것이다. 그러나 초무극은 두 말도 하지 않고 당문에 합류하는 길을 선택했다.
"저런."
뜻밖의 사태에 당문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초무극 정도의 고수가 어찌하여 자발적으로 당문에 합류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데이몬과 초무극의 해후를 보고 나서야 사정을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어서 오시오, 초 장주."
데이몬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초무극을 맞이했다. 그런 데이몬을 흔들리던 눈빛으로 쳐다보던 초무극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은공,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지금에야 찾아뵙게 되는군요."
데이몬은 한눈에 초무극이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사실을 알아차렸다.
"화경에 드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리오."
초무극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따지고 보면 그가 이룬 성취는 모두가 데이몬 덕이었다.
"은공 덕분이지요. 은공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직까지 화경은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허허. 별 말씀을 다 하시는구려. 모든 것이 장주께서 노력하신 탓이지요."
"아무튼 은공께서 무림맹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은공께 입은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그게 사실이라면 초무극은 벽안독성에게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해 이번 정사대전에 참전하려는 것이다. 정사지간 고수인 초무극이 무림맹에 찾아온 이유가 명확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저와 제 제자들을 당문의 전력으로 합류시켜 주십시오. 밥값정도는 할 것입니다."
당문수가 얼토당토않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문으로서는 두 팔을 벌려 환영해도 모자랄 일이지요."
그렇게 해서 초무극의 초가장이 당문에 합류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무시하지 못할 집단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묘용세가의 사람들은 원한을 그리 쉽게 잊지 않는다. 비록 더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벽안독성에게 굴복하는 척했지만 그로 안한 굴욕은 모용세가 사람들의 가슴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었다.
황보세가의 전령으로부터 전갈을 받은 모용황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벽안독성 그자는 정말 본가와 끝었는 악연이란 말인가?"
그들이 황보세가에서 순순히 물러난 데에는 나중에 충분히 사업장을 되찾아올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현재 벽안독성은 황보세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벽안독성만 황보세가를 떠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황보세가의 전력은 모용세가의 십 분지 일도 되지 않고, 그런 만큼 휘하 세력을 이용해 끊임없이 시비를 건다면 돌려준 사업장을 되찾아오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뜻밖의 일이 터진 것이다.
벽안독성이 황보세가 가주의 친딸과 의남매를 맺었고 이후 황보세가의 시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사실을 알려온 것이다. 모용세가 사람들은 망연자실행졌다. 그 말은 모용세가가 사업장을 영원히 빼앗겼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화가 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행동에 나설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벽안독성은 모용세가가 감히 건드리기 힘든 실력을 가진 초고수였다. 그 때문에 모용세가는 암암리에 모략을 꾸몄다.
"벽안독성 일인은 강하다. 하지만 그가 비호하는 세력은 결코 그렇지 않다."
모용세가가 무림맹에 끼치는 입김은 막강했다. 그들은 그 입김을 이용해 모략을 꾸몄다. 현재 벽안독성이 몸담고 있는 당문이 그들의 새로운 목표였다.
그날 밤 무림맹에는 대책회의가 열렸다. 내일 있을 잠마련과의 일전을 위한 대책회의였다. 회의에는 각 문파를 책임지는 수뇌들이 대거 참석했다. 열띤 공방이 이어지면서 대책회의는 밤이 늦게야 끝났다.
그런데 대책회의를 참석하고 돌아온 당문수의 안색이 그리 편치 않았다. 그는 처소로 돌아오자마자 데이몬을 찾았다. 그의 어두운 안색을 본 데이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 있으셨소?"
데이몬을 쳐다본 당문수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큰일 났습니다, 은공."
"아니 대관절 무슨 일이시기에? 한 번 말해 보시오."
고민하던 당문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일 저희 당문이 선봉을 서게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데이몬이 깜짝 놀랐다. 옆에서 듣고 있던 당청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마, 말도 되지 않아요. 우리 당문에는 제대로 된 실력을 가진 무사들이 없어요. 대부분 해독 전문가들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참모진에서 그렇게 전략을 짰다고 하더구나. 우리 당문과 몇몇 군소방파들로 구성된 별동대를 창설하여 잠마련의 강시군단을 상대하게 하겠다고 말이다."
어처구니 없었던지 당청이 입을 딱 벌렸다.
"뭔가 농간이 있군요."
어두워진 당문수의 안색은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모용세가에서 손을 쓸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이토록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현 무림맹의 전략전술을 총괄하는 참모진에는 모용세가의 입김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물론 그들이 당문에게 편한 위치를 제공할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변변찮은 무사도 없는 당문에 선봉의 중임을 맡길 것이란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못했다. 그것도 무적이라 알려진 잠마련의 강시군단을 막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다름 아닌 데이몬 공을 거론했습니다. 강시를 상대하는 데 적임자라고 말입니다."
데이몬의 미간이 가늘게 좁혀졌다. 모용세가에서 아직까지 이런 치졸한 술수를 쓸 줄은 몰랐다. 어처구니가 없어서인지 입가에 실소가 그려졌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소? 승낙하셨소?"
"아직까지 확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보니 거부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참모진에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문을 몰아붙였다. 막 무림맹에 가입한 당문이니만큼 이번 전투에서 반드시 공을 세워야 한다고 말이다. 거기에 몇몇 군소방파들이 미끼가 되어 함께 선봉에 서게 되었다.
"호북성의 군소방파들로 구성된 창의문과 구천방의 수뇌들은 참모진의 협박에 굴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본문과 함께 별동대가 되어 선봉에 설 것입니다."
당청의 안색은 어느덧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이미 잠마련의 강시 군단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오직 초절정고수만이 겨우 맞서 싸울 수 있는 강력한 강시가 스물다섯 구나 똘똘 뭉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막강했던 선발대도 강시 군단의 벽을 넘지 못하고 처참히 패퇴했다. 그런 강시군단을 변변찮은 무사도 없는 당문에서 막아내야 하는 것이다.
"승낙하지 마세요. 우리가 강시군단을 막아낸다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해요."
"그러나 거부하기 힘든 상황이란다."
당문수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승낙하시오."
뜻밖의 말에 당문수는 눈을 크게 떴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강시군단을 당문에서 맡겠다고 참모진에다 말하시오."
어느덧 데이몬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감이었다.
"물론 강시군단을 막아내는 것은 나 혼자서 할 것이오. 당문과 군소방파들은 그저 대결을 지켜보기만 하면 되오."
당청이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사, 상공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물론 그녀는 데이몬의 믿을 수 없는 능력을 똑똑히 목격했다. 단 일수에 독강시 스무 구를 불태워버린 사건을 말이다.
하지만 지금 잠마련이 주력으로 내세운 강시는 독강시가 아니다. 엄청난 위력을 가진, 초절정고수가 아니면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음양혈강시가 주력이다. 게다가 그 강시는 화기에도 강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당청은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당청에게 데이몬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그 정도 강시를 처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 하지만 그 강시는..."
"강시의 위력이 어떤지 나도 잘 알고 있다. 충분히 해결할 자신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당청에게서 시선을 뗀 데이몬이 당문수를 쳐다보았다.
"그럼 문주께서는 답을 해 주도록 하시오. 당문에서 선봉을 맡아 강시군단을 처리하겠다고 말이오."
당혹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던 당문수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은공."
당문수는 즉시 참모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당문에서 선봉을 맡겠다고 밝혔다.
참모부에서는 뜻밖이라는 눈빛으로 당문수를 쳐다보았다. 누가 보더라고 무리인 임무였기에 당문에서 틀림없이 거절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참모부에서는 그것을 빌미로 당문을 압박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임무로 맡겠다고 나선 것이다. 참모부에서는 당문수의 결정을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정말 훌륭한 결정을 내렸소."
대부분 모용세가와 그의 영향력이 미치는 인물들로 구성된 만큼 그들이 마다해야 할 이유가 없다. 확실하게 데이몬과 당문을 곤경에 몰아넣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물론 그들은 임무 실패에 대한 책임소재를 명확히 했다.
"만약 별동대에서 강시군단을 막아내지 못할 경우 무림맹은 잠마련의 손에 넘어가게 되오. 그 책임은 엄연히 당문에서 져야 할 것이오."
당문수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이미 그는 데이몬의 장담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나 처소로 돌아오는 그의 안색은 그리 밝지 않았다. 초고수인 데이몬이 도와주더라도 그는 엄연히 일문의 문주. 막강한 강시군단을 막는 데 얼마나 많은 무사들이 죽어갈지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문에서 선봉을 맡기로 했다는 소문은 금세 맹주부로 들어갔다. 그 소식을 들은 무림맹주 황천호는 즉간 당문의 처소를 찾았다. 그로서도 전혀 뜻밖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놀랍군. 분명히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거늘...'
이미 잠마련 강시군단의 위력을 뼈저리게 실감한 그였다. 그런 그의 관점은 당문이 강시군단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건 말도 되지 않아. 변변찮은 무사도, 고수도 없는 당문에서 어찌 강시군단을 막아낸다는 말인가?
그는 벽안독성인 강시를 상대하는 데 특출 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상대했던 강시는 독강시다. 만약 잠마련에서 독강시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무림맹은 잠마련의 선봉을 무난히 분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독을 지닌 강시는 화탄과 벽력탄에 극히 약한 면모를 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마련의 주력 강시들은 벽력탄에도 거의 손상을 입지 않았다. 그러니 황천호로서는 당연히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가 당문을 찾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뜻밖의 방문에 당문수가 직접 나서서 황천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맹주님."
황천호는 다짜고짜 용건을 털어놓았다.
"당문에서 선봉을 맡아 강시 군단을 상대하겠다고 들었소. 그게 사실이오?"
당문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가능성을 보고 승낙한 것이오? 아니면 무턱대고 나서 본 것이오?"
당문수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데이몬이 미소를 띤 채 앉아 있었다.
"강시군단은 데이몬 공께서 맡으실 것입니다. 저분께서 확실하게 강시군단을 분쇄하겠다고 공언하셨습니다."
황천호의 시선이 데이몬에게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뵙는구려, 데이몬 공."
"그렇군요. 상당히 오랜만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묻겠소. 강시 군단을 막아낼 확실한 방도가 있는 거요? 본인은 그것이 알고 싶소."
황천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당금의 무림맹으로서는 강시군단을 막아내는 것이 최고의 관건이니만큼 당연한 질문이었다.
현재 그는 선발대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근신 중에 있었다. 그 때문에 이번 일에 대한 내막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를 보는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걱정 마십시오. 강시군단은 본인이 확실하게 분쇄할 터이니 말이오."
"틀림이 없어야 하오. 강시군단을 막아내지 못할 경우 무림맹은 이번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소. 무림맹의 운명이 당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이오."
황천호의 얼굴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 그럴 것이 내일 벌어질 전투에서 무림맹이 패할 경우 그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일단 관망중인 사파의 문파들이 대거 잠마련에 합류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되면 잠마련의 힘은 지금과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커진다.
근거지를 빼앗긴 탓에 무림맹이 재정비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사이 사파의 힘이 한 곳으로 결집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황천호가 애를 태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황천호는 이번 일의 내막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모용세가의 입김이 짙게 드리워진 참모부에서 데이몬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당문에 억지를 썼다는 사실을.
'가증스러운 작자들. 위기에 처한 지금에도 사적인 감정을 풀기 위해 간교한 수작을 부리다니...'
그런 황천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데이몬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짙어졌다.
"걱정 마시오. 강시군단은 확실히 맡아줄 테니 맹주는 무림맹주로서 할 일을 하시오."
"....."
"이번 대전을 틈타 확실하게 무림맹주가 되라는 뜻이오. 지금처럼 장로들에게 휘둘리지 말고."
데이몬의 지적에 황천호는 얼굴이 벌게졌다. 눈앞의 색목인 청년은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상대의 말대로 그는 현재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애당초 장로들이 자신을 무림맹주로 삼은 것은 뒷받침해줄 문파가 없는 홀홀단신이기 때문이다. 허수아비 무림맹주로 앉혀 놓고 자신들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의도였다.
물론 황천호도 바보가 아니다. 때문에 진정한 무림맹주가 되기 위해 암암리에 힘을 기르고 세력을 키웠다.
그런데 잠마련의 침공으로 인해 그의 노력은 그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애써 키웠던 무사들이 잠마련의 강시군다에 의해 괴멸된 데다 패배로 인해 맹 내에서의 입지가 더욱 줄어든 상황이었다. 황천호는 복잡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다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지켜보겠소. 장담대로 강시군단을 처리해주길 기대하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데이몬의 입가에 서린 미소는 도무지 지워질 줄을 몰랐다.
마침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천기대제 사준환은 일천이백의 잠마련 고수들을 이끌고 무림맹 정문 앞에 진을 쳤다. 선두에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 강시군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에 맞서 무림맹도 배수진을 친 상태였다. 무려 천팔백에 달하는 무사들이 무림맹의 정문을 등지고 진을 쳤다. 무림의 지배권을 두고 정과 사가 다시 맞부딪치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무림맹의 진형이 다소 어색했다. 가운데 무사층이 무척이나 두터운 방지 형태였다. 대부분의 무사들이 중심부에 배치되어 있다는 뜻이다. 하나같이 두 눈에 정광이 번뜩이는 모습을 보니 철저히 단련된 무사들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정작 선두에 배치된 무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같이 십대 후반이나 이십대 초반 정도의 젊은 무사들이 태반이었다. 어디에 내놔도 제 몫을 하는 각 문파의 정예들이 대부분 이십대 후반이나 삼십대임을 감안하면 다소 특이한 구성이라고 봐야 했다.
그들은 바로 별동대 무사들이었다. 목숨을 담보로 잠마련의 강시군단을 막아내야 하는 자들로서, 당문과 여타 군소방파의 무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참모들이 득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후후. 저들이 잠마련의 강시군단을 막아낼 가능성은 애초에 없지. 빨리 궤멸해 주는 것이 우릴 도와주는 것이다.'
이미 참모부에서는 당문이 실패할 것을 염두해 두고 전략을 짰다. 당문의 뒤로 가장 막강한 무력집단을 포진시킨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실상 강시군단을 막아내는 것은 그들의 역할이었다. 각 문파의 중추를 담당하는 무사들인 만큼 강시군단을 붙들고 시간을 끄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전략을 짠 것이다. 그들이 강시군단의 발을 묶고 있는 사이 좌우의 날개에 배치된 무사들을 동원해 잠마련의 본진을 뭉개려는 것이 참모부에서 짜낸 전략이었다.
그 참모 중 한 명인 모용일성이 스산한 눈빛으로 당문 무사들을 쳐다보았다.
'어쨌거나 강시군단을 막아내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당문에 지울 수 있으니 여한이 없다.'
그가 쳐다보는 사이 잠마련의 진영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기대제 사준환은 긴장어린 눈빛으로 무림맹 진영을 쳐다보았다. 오랫동안 꾸며왔던 야망이 바야흐로 실현되려는 순간이니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견해도 무림맹 앞에는 상당한 수의 무사들이 운집해 있었다. 자신이 데리고 온 잠마련 무사들보다 월등히 많은 숫자였다. 그러나 그들을 쳐다보는 사준환의 눈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무림맹 무사들의 수가 제 아무리 많더라도 충분히 쳐부술 자신이 있었다.
'막강한 강시군단이 함께 하는 한 무서울 것이 없다.'
이미 강시군단의 위력은 무림맹 선발대를 쳐부수는 과정에서 충분히 입증되었다. 하나하나가 초절정고수와 맞먹는 위력을 지닌 막강한 음양혈강시가 무려 스물다섯 구나 뭉쳐 있는 상황이다. 어지간한 고수들도 섣불리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바로 어제 막강한 강시 군단은 무림맹 선발대의 예봉을 단숨에 격파해버렸다. 그 덕에 잠마련 무사들은 전열이 흐트러진 무림맹 무사들을 상대로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본 사준환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강시군단이 있는 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역대 마도무림의 그 누구도 못해낸 일을 내가 해 내는 것이지."
하남의 무림맹 본단은 지금껏 한 번도 마도무림의 입성을 허용하지 않은 철옹성이다. 심지어 전대 배교 교주 독고성이 이끄는 수호마왕군조차도 무림맹 본단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만약 잠마련의 정예들이 정파 무사들을 쳐부수고 무림맹에 입성한다면 그 반향을 실로 엄청날 터였다. 눈치만 보고 있던 사도 문파들이 속속 가세할 것이 틀림없었고 숨어 다니던 마두들이 대거 잠마련 휘하에 들기를 바랄 것이다. 잠마련을 축으로 전 마도가 하나로 집결되는 것이다.
바야흐로 마도천하가 이루어지려는 순간이었지만 사준환은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려면 반드시 무림맹에 입성해야 한다. 저들을 모두 쳐부수고 말이다."
그는 이미 모든 경우의 수를 가정해 놓은 상태였다. 여기에서도 변수는 역시 벽안독성 데이몬이었다. 이미 그는 첩자들의 보고를 통해 벽안독성이 무림맹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보고 받은 상태였다. 그 사실을 떠올린 사준환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놈이 무림맹에 있다니 좀 껄끄럽기는 하군."
벽안독성 데이몬은 그에게 한 마디로 천적이나 다름 없었다. 그 하나로 인해 추진해왔던 계략들이 대거 무위로 돌아갔다. 묵회를 내세워 무림맹의 근간을 뒤흔들려던 일도 수포로 돌아갔다. 보유하고 있던 독객들을 빼앗긴 일은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사준환은 심지어 잠마련 최대의 비밀병기인 철마의 실종에도 데이몬이 관여한 것이라 추정하고 있었다. 데이몬으로 인해 입은 피해를 헤아려 본 사준환의 눈에 분노의 광망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당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놈에게 내둘리지 않겠다는 뜻이지."
물론 걱정거리가 없지만은 않았다. 현재 그가 보유한 강시군단의 절반을 데이몬의 손길이 닿은 상태였다. 뭔가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에 그는 강시군단에 대해 철저히 조사를 지시했다.
다행이 도출된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강시에는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애당초 강시의 심령을 철저히 귀속시킨 다음 데이몬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었다.
"강시의 심령은 철저히 나에게 귀속되어 있다. 놈이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그는 데이몬에 대해 철저히 대비책을 세워두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데이몬이 발휘하는 가공한 위력의 술법이었다. 데이몬은 강력한 폭발을 불러일으키는 술법을 펼칠 수 있다. 그러 인해 묵회가 보유한 독강시가 대거 파괴되었다.
그러나 잠마련이 운용하는 주력강시는 독강시가 아니라 마정지지의 혈마기로 강화된 음양혈강시였다. 외부의 힘을 흡수해 손상된 동체를 수복하는 기능이 있는 만큼 그 어떤 폭발에도 버텨낼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한 그 사실은 무림맹 선발대와의 접전에서 증명되었다. 당시 무림맹 선발대는 몰래 가지고 온 화탄과 벽력탄을 대거 터뜨렸다. 그러나 음양혈강시들은 폭발 속에서도 멀쩡했다.
"놈의 술법이 제 아무리 강하더라도 벽력탄만큼은 못할 거이다. 충분히 버텨낼 수 있어."
그러나 사람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 사준환은 데이몬의 술법을 차단하기 위해 철저히 손을 써 두었다. 먼저 그느 잠마련이 보유한 살수들을 대거 무림맹에 잠입시켰다. 일반 무사로 위장한 살수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데이몬에게 암기를 발사할 것이다.
"놈이 술법을 펼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살수들이 암습을 가한다면 충분히 주문을 방해할 수 있어."
그것도 모자라 사준환은 서른 명의 궁수들을 대기시켜 놓은 상태였다. 하나같이 화살에 내공을 실을 수 있는 실력자들로서 원거리 저격의 달인들이었다. 데이몬이 술법을 쓰기 위해 앞으로 나선다면 궁수들이 즉각 저격에 나설 것이다. 그렇게 대비를 해둔만큼 데이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쓸 것이 없어 보였다ㅏ.
사준환은 머릿속으로 구상해 둔 계획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일단 강시군단을 내세워 놈들의 진형을 단숨에 쪼개버린다. 놈들은 필시 가장 강력한 무사집단을 내세워 강시군단의 진군을 저지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소용없지. 본련의 강시군단은 동일한 수의 화경고수가 동원되지 않으면 막을 수 없으니까."
도열한 잠마련 무사들을 힐끔 쳐다본 사준환의 시선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강시군단에 가 멎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희열의 빛이 역력했다.
'드디어!'
역대 최초로 무림맹의 본단을 함락시킨 마도무림의 종주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명령을 내렸다.
"강시군단을 진군시켜라. 오늘 안으로 무림맹 본단을 점령한다."
뒤에 시립해 있던 참모들이 즉각 복명했다.
"존명."
명령이 떨어지자 강시군단이 진군하기 시작했다.
쿵쿵쿵
지축을 울리며 걸어 나오는 강시군단의 위용은 지켜보던 무림맹 무사들의 심금을 강하게 자극했다. 이미 강시군단의 위력을 한 번 겪어본 무사들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날 보았던 강시의 위용은 정말로 무시무시했다. 절정고수의 검강이 작렬해도 강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단단한 동체가 살짝 패이기는 했지만 금세 원래대로 수복되었다.
게다가 강시의 장력은 엄청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장력에 얻어맞은 무사들은 대번에 피를 토하고 나가떨어졌다. 그런 기억이 생생했기에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중압감을 느끼는 이들은 본진 앞에 배치된 별동대의 젊은 무사들이었다. 당문과 황보세가, 그리고 군소방파들로 구성된 젊은 무사들은 다가오는 강시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강시군단은 정확히 무림맹의 본단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 이대로 진군해 오면 정확히 자신들과 맞닥뜨릴 것이 틀림없었다.
'죽었군.'
'우리가 어떻게 강시를 막는다고?'
몇몇 무사들의 다리는 공포로 인해 후들거리고 있었다. 이미 그들은 선발대 무사들의 입을 통해 강시의 위력을 전해들은 바 있다. 벌써부터 겁을 집어먹고 있으니 사기가 충천할 리 만무했다.
별동대의 수뇌부들도 긴장하긴 마찬가지였다. 당문의 가주인 당문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진군해오는 강시들을 쳐다보았다.
"허. 위세가 정말 대단하군."
물론 당문에 강시를 막을만한 전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 만에하나 데이몬이 강시군단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당문의 운명은 오늘로 끝장이었다. 옆에 서 있던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천의 얼굴 역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무래도 줄을 잘못 선 것이 아닐까?'
별달리 기댈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에 당문과 합류하는 길을 택했다. 그런데 무림맹 참모진에서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임무를 당문에 맡기다니...
창의문 문주인 공손승과 구천방 방주 허석의 안색 역사 어둡기 그지없었다. 무림맹 참모진의 강요로 승낙을 하긴 했지만 임무를 성공할 가능성이 그야말로 무에 가깝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의 시선은 줄곧 데이몬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구석은 오지 데이몬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데이몬은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흥미로운 눈빛으로 다가오는 강시군단을 쳐다보던 그가 기지개를 켰다.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직접 만들어본 만큼 데이몬은 음양혈강시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표면에 뱁파이어릭 마법진이 새겨져 있고 마정지지의 혈마기로 강화된 음양혈강시는 공격력과 방어력에 있어 데스나이트를 능가했다. 단지 지성이 없고 행동이 굼뜬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물론 데이몬에게는 확실하게 강시를 무력화시킬 방도가 있었다. 음양혈강시는 어둠의 마력을 매개체러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 또한 어둠의 마력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표면에 새겨진 뱀파이어릭 마법진이 작동을 한다. 따라서 어둠의 마력을 제거해버린다면 그 즉시 평범한 강시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어둠의 마력을 회수하려면 일단 강시와 접촉을 해야 한다. 그런데 잠마련에서 데이몬이 강시에게 접근하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 만무하다. 이미 그는 주위에서 뿜어지는 은밀한 살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잠마련에서 살수를 잠입시켰나보군. 일반 무사들이 포진한 곳에서 살기가 풍겨지는 것을 보니 암습을 조심해야겠어.'
데이몬에게는 그것 말고도 강시를 처리할 방법이 있었다. 칠종단금술 때문에 인간을 상대로 살수를 펼칠 순 없지만 강시를 상대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현경의 무위를 발휘한다면 강시 스물다섯 구 정도 처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데이몬에겐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강시들을 강대로 푸닥거리를 하다가 한두 마리 정도 놓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 강시들로 인해 당청과 황보경이 다칠 수도 있으므로 데이몬은 비교적 안전한 방법을 선택했다. 지금껏 선보이지 않은 세번째 수하를 이용해 강시를 처리하기로 말이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정말 오랜만에 꺼내게 되는군."
데이몬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공간을 왜곡시켜 물건을 수납하는 마법보고 인크레시아가 중원 무림인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쓰쓰쓰
허공에 거무스름하게 음영이 생겨났다. 당무수를 비롯한 별동대 수뇌부들이 놀란 눈빛으로 음영을 쳐다보았다. 벽안독성이 도대체 뭘 하려는 건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다음 순간 그들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뭐, 뭐야?"
음영 안에서 상상도 못한 존재가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쿵
거대한 발이 바닥을 디뎠다. 육중한 체중을 이기지 못해 대지가 비명을 질러댔다. 인크레시아에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탄타로스였다.
데이몬이 휘하에 거뒤들인 아이언 골렘 탄타로스. 6.5미터의 신장에 한 손에 거대한 장검을 들고 있는 강철 거인. 벌거벗은 근육질의 동체가 유난히 번들거렸다. 투구와 스커트 외에는 아무런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해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동체의 재질 자체가 잘 정련된 강철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인크레시아에서 빠져나온 탄타로스가 마치 위협이라도 하듯 거대한 장검을 바닥에 내려찍었다.
쿠웅
주위 사람들의 눈은 경악으로 부릅떠져 있었다.
"세, 세상에..."
그들의 상식으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존재였다. 저처럼 거대한 덩치의 강철 거인이 마치 인간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모습은 중원 무림인의 상식으론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람들이 입을 딱 벌리고 서있는 사이 탄타로스가 원활히 움직여 데이몬의 뒤에 버티고 섰다. 마치 주군의 안전을 지키는 호위병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 당청이 입을 열었다.
"저 가, 강철 거인은 도대체 뭔가요?"
데이몬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내 부하란다. 윈슬럿처럼 말이다."
"저 거인으로 하여금 강시들을 상대하게 할 것인가요?"
데이몬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뭐 그래도 되긴 하지만 현명한 선택은 아니야. 인크레시아 속에서 저 녀석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강시들을 처리할 녀석이 들어 있지. 탄타로스는 그저 배후를 지키기 위해 꺼내놓은 거야."
눈치 빠른 당청은 금세 데이몬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인크레시아라는 것이 거인을 토해낸 거무스름한 음영이며 강철거인의 이름이 탄타로스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의 눈빛이 몽롱하게 변했다.
"정말 대단해요. 저런 강철 거인을 휘하에 거두고 있다니 말이에요."
"인크레시아 속에 있는 세 번째 수하를 보면 생각이 더욱 달라질 것이다."
데이몬은 인크레시아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나와라, 베르키스. 너에게 시킬 일이 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인크레시아 속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콰우우우
주위의 사람들이 흠칫 놀라 뒤로 한 발짝 물러설 정도로 괴성은 컸다. 이윽고 음영 사이로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벌어진 입으로 침이 주르르 흘러내렸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크르르르
목젖이 떨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동체가 인크레시아에서 튀어나왔다. 시퍼런 광망을 줄기줄기 뿜어내는 눈과 쭉 뻗은 콧등, 그 아래로 사람의 몸통만한 이빨이 가지런히 돋아난 입이 위치해 있었다. 머리 위에는 기다란 뿔이 장엄하게 뻗어 있고, 입 사이에는 찬란한 보광을 뿜어내는 커다란 구슬을 물고 있다.
머리통에 이어 빠져나오는 것은 기다란 목이었다. 윤기가 반들거리는 배색 비늘이 표피를 완전히 덮고 있었다.
당문수를 비롯한 병동대 수뇌부들은 완전히 얼이 빠져버렸다. 창의문의 문주인 공손승이 비명과도 같은 신음을 흘렸다.
"용이야. 용을 불러냈어."
그의 말대로 음영 사이로 튀어나온 존재는 전설상의 신수인 용과 거의 흡사하게 생겼다. 입에 물고 있는 구슬은 영락없는 여의주였다. 긴 목을 흔들어 주위를 둘러본 용이 포효를 내질렀다.
크롸라라라
그 소리에 무사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감히 당적할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 앞에서 저절로 몸이 떨려왔다.
사람들은 말을 잃었다. 용이 도대체 무엇인가? 비비람을 불러일으키는 전설상의 신수 아니던가? 구전으로만 전해 들었을 뿐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는 영물 중의 영물, 그런 용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좌중을 일시에 침묵이 지배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어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설상의 존재인 용의 등장은 그 정도로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심지어 진군하던 강시군단조차 강력한 존재감을 느끼고 진군을 멈췄을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흐흐, 공을 들인 보람이 있군.'
인크레시아에서 튀어나온 용은 다름 아닌 본 드래곤 베르키스였다. 긍지 높은 레드 드래곤의 일족으로 인간종족의 말살을 위해 온갖 모략을 꾸미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비운의 용족. 최후의 순간 베르키스는 마왕에게 몸의 통제권을 넘겨주면서까지 인간을 멸종시키려 했지만 운명은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후 데이몬은 베르키스의 몸속에 깃든 마왕 나이델하르크를 마계로 쫓아내고 난 뒤 껍질만 남은 몸뚱이를 본 드래곤으로 만들었다. 베르키스에 대한 원한을 그런 식으로 앙갚음한 것이다. 그동안 본 드래곤이 된 베르키스는 마계로 건너간 데이몬을 위해 혁혁한 역할을 했다.
그런 이력을 가진 베르키스가 중원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베르키스의 모습은 예전과는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
본 드래곤은 일종의 언데드다. 살이 녹아내려 뼈만 남은 모습으로 변하며 브레스의 속성도 달라진다. 그러나 모습을 드러낸 베르키스는 일반적인 본 드래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불그스름한 빛이 감고는 새하얀 동체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비늘이 뒤덮고 있었다.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어야 할 날개 역시 온전했다.
게다가 전체적인 형상이 레드 드래곤의 그것이 아니라 중원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는 용의 외모를 닮아 있었다. 사슴의 것처럼 마디가 진 뿔과 길게 늘어진 수염, 입 속에서 빛을 발하는 여의주는 드래곤에게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베르키스의 모습이 변한 것은 데이몬의 소행이었다. 신마대전이 끝나고 자신만의 왕국을 갖게 된 이후 데이몬은 어둠의 마력을 집중해서 베르키스의 몸을 변화시켰다. 중원으로 데리고 가서 부리기 위해서였다.
'본 드래곤의 모습을 처음 본다면 누구라도 악의 근원으로 생각할 것이다. 뼈만 남은 괴수이니만큼 그럴 수밖에 없지. 부득이 손을 좀 봐야겠군.'
데이몬은 보유한 마왕의 권능을 발휘해 베르키스를 변화시켰다. 강력한 마수들의 살과 근육으로 베르키스의 뼈대를 덮은 뒤 거기에 어둠의 마력을 집중시켜 완벽하게 생체 조직화했다. 그 다음 거죽에다 마계의 마숭니 스피릿 나가의 비늘을 이식했다. 드래곤의 비늘과 강도가 버금간다고 알려진 스피릿 나가의 비늘로 무장한 것이다.
베르키스의 방어력이 한결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베르키스의 개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데이몬은 완만하게 휘어진 레드 드래곤의 특유의 뿔을 다른 모양으로 다듬었다. 구전으로 전해들은 용의 뿔과 흡사한 모습으로 말이다. 여기 저기 돋아난 마룡 특유의 뿔은 미련 없이 잘라내어 버렸다. 그 다음 입가에다 용의 수염과 흡사하게 생긴 마수의 수염을 이식했다.
개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베르키스의 입 안에는 본 드래곤의 특유의 프로스트 브레스를 강화시켜 주는 마법구를 집어넣었다. 그리하여 지금과 같은 모양의 본 드래곤이 탄생한 것이다.
데이몬의 생각은 여지없이 먹혀 들어갔다. 그 자리에 모인 정사의 무사들은 베르키스가 용의 환신이라고 추호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 살아생전에 용을 보게 되다니..."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군."
무사들은 연신 베르키스를 훔쳐보며 놀라워했다. 그것은 무림맹 수뇌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경악어린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세상에 벽안독성에게 용을 불러낼 재주가 있었다니..."
'도대체 저자의 능력은 어디까지 닿아 있다는 말인가?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며 데이몬은 호기 있게 명령을 내렸다.
"가라! 베르키스. 저 너절한 강시 나부랭이들을 몽땅 쓸어버려라."
명령을 받은 베르키스가 기다란 목을 하늘 높이 쳐들고 포효를 내질렀다.
크롸라라라
큼지막한 눈에서 눈부신 광망이 뿜어졌다. 베르키스는 머뭇거림 없이 강시들을 향해 쇄도했다.
쿵쿵쿵쿵
거대한 다리가 바닥을 디딜 때마다 대지가 푹푹 패이며 비명을 질러댔다. 단순에 강시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간 베르키스가 거대한 아가리를 쫙 벌렸다.
움찔 하긴 했지만 강시들은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성이 없는 강시이기에 제 아무리 강대해 보이는 존재가 달려들어도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그런 강시들을 향해 베르키스가 브레스를 내뿜었다.
촤아아아악
새하얀 브레스가 거침없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프로스트 브레스였다. 몸속 가득 저장된 냉기를 일시에 발산하는 본 드래곤 특유의 권능.
대지가 순식산에 얼어붙기 시작했다. 마계의 혹독한 한기를 잔뜩 흡수한 상태였기 때문에 금세 지표면이 꽝꽝 얼어붙었다. 그러나 강시들은 쉽사리 얼어붙지 않았다. 외부의 기운을 흡수하는 뱀파이어릭 마법진이 한기를 지속적으로 흡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뱀파이어릭 마법진이 흡수할 수 있는 기운은 엄연히 한계가 있다. 베르키스는 강시들이 흡수할 수 있는 한계 이상으로 냉기를 내뿜어댔다.
쏴아아아
세차게 뿜어지는 냉기는 주변 무림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으으으"
"저, 정말 춥군."
극심한 한기를 느낀 무사들이 옷자락을 여미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니 정면으로 브레스를 맞받고 있던 강시들은 오죽하겠는가?
강시들의 표면이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버티기 힘들 정도로 한기가 집중되자 마법진이 작동을 멈춘 것이었다. 마법진이 무력화된 강시들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쩡 쩌정
얼어붙은 강시의 표면으로 성에가 쌓여갔다. 마치 눈사람이 된 듯한 형국이었다. 마침내 스물다섯 구의 강시가 모두 마법진이 망가진 상태로 얼어붙어버렸다.
그쯤 되자 베르키스는 브레스를 멈추고 얼음덩어리가 된 강시들을 주시했다. 마치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어 베르키스가 몸을 빙글 돌렸다.
휘리리릭
거대한 꼬리가 하늘 높이 치솟더니 힘차게 바닥에 내려 꽂혔다. 얼어붙은 강시들이 있는 정중앙이었다.
콰아앙
대지가 깊숙이 패여 들어갔다. 육중한 중량을 가진 본 드래곤의 꼬리치기, 그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있던 무사들이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을 정도였다.
꼬리치기 한 방에 강시들 절반이 박살나버렸다. 온몸이 얼어붙은 상태에서 강력한 타격을 받으니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푸스스스
완전히 가루가 되어 허물어지는 강시들, 지금껏 보여주었던 위력에 걸맞지 않은 허무한 최후였다. 베르키스는 남은 강시들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눈빛을 빛내며 달려간 베르키스가 거대란 앞발로 눈에 띄는 강시들을 그대로 짓밟아버렸다.
콰지직
거대한 앞발에 깔린 강시들은 그대로 박살이 나며 흩어져버렸다. 들어 올린 앞발 아래에는 흔적도 분간할 수 없는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쾅 콰쾅 쾅
스물다섯 구의 강시 군단이 말끔히 전멸하는 데에는 채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존재의 근거 자체를 추궁당하며 완전히 분쇄되어버린 것이다. 강시를 깔끔히 처리한 베르키스가 거대한 입을 좍 벌려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다.
콰우우우우
무림맹과 잠마련의 무사들은 미동도 하지 못하고 강시군단이 전멸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난생 처음 보는 용의 위력은 전율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토록 강하던 강시군단을 채 일각도 되지 않아 모조리 궤멸시켜버리다니...
특히 잠마련 무사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만약 저 용이 자신들을 향해 냉기를 뿜어낸다면... 생각해보던 무사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보나 마다 강시와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눈앞의 용이 자신들을 공격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용의 주인에게 살심을 품을 수 없는 칠종단금술이란 금제가 걸려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강시들을 모조리 분쇄한 용은 잠마련 무사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위압적으로 포효를 한 번 내지른 뒤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콰우우우
본 드래곤 베르키스는 머뭇거림 없이 무림맹의 진영으로 돌아왔다. 걸음을 옮김에 따라 지축이 쿵쿵 울렸다. 무림맹 무사들은 경이어린 눈빛으로 용의 모습을 낱낱이 살폈다.
"모습이 듣던 것과는 좀 다르군. 거대한 뱀처럼 생겼다고 들었는데."
"마치 무지막지하게 큰 도마뱀 같군. 하지만 위압감이 장난이아니야."
그들은 데이몬마저 경이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용을 수족처럼 부리다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별동대 수뇌부들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당문수와 황보천을 비롯해 문주들은 입을 딱 벌린 채 용을 올려다보았다. 데이몬의 능력을 알긴 하지만 이건 정말 놀라웠다. 전설상의 신수인 용을 불러내어 강시군단을 격파할 줄은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본 드래곤 베르키스가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쿠우우우
나지막하게 포효를 내지른 베르키스가 고개를 숙였다. 모여있던 별동대 무사들이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가까이에서 본 용의 모습이 너무나도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머리통이 어지간한 초가집만큼 크니 겁을 집어먹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베르키스를 쳐다보던 당청이 데이몬을 올려다보았다.
"이, 이 요, 용이 가가의 수하인가요?"
"그렇단다. 쓸 만하지 않니?"
당청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쓸 만할 뿐이겠어요. 정말 대단하셔요."
"후후. 내가 좀 대단하긴 하단다."
옆에서 입을 벌리고 있던 황보경이 끼어들었다.
"오, 오라버니, 도, 도대체 어떻게 용을 수하로 삼으신 거예요?"
데이몬은 씨익 웃었다.
"비밀이다. 아무튼 쓸모는 그럭저럭 많은 편이야. 하늘을 날 수 있으니 이동할 때 유용하기도 하고..."
그 말을 들은 당청과 황보경이 눈빛을 빛냈다.
"좀 태워주시면 안될까요? 저는 평소 하늘을 날아보고 싶었어요."
"저도요. 너무너무 하늘을 날고 싶어요."
"뭐 안 될 거야 없지."
데이몬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양측 무사들은 아직까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용의 등장으로 인해 넋이 나간 모양이었다. 데이몬의 시선이 무림맹주 황천호에게 가 닿았다. 그 역시 멍하니 베르키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을 본 데이몬이 큰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이로써 당문은 맡은 바 임무를 모두 완수했소. 그렇지 않소?"
멍하니 서 있던 황천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그렇소."
"그렇다면 더 이상 할 일이 없겠군. 우린 이만 쉬도록 하겠소. 남은 싸움은 당신들이 맡으시오."
"자, 잠깐만..."
황천호가 급히 데이몬을 붙들려고 했다. 강시 군단이 궤멸되긴 했지만 잠마련 무사들은 아직까지 건재했다. 괴력을 발휘한 용을 전투에 투입시킨다면 그야말로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에 그는 필사적으로 데이몬을 설득하려고 했다.
"강시군단은 처치했지만 아직까지 적이..."
그러나 데이몬은 황천호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았다.
"강시군단을 처치해 준 것으로 내 할 바를 다한 것이오. 본인은 더 이상 싸움에 관여하지 않겠소."
냉정하게 선을 그은 데이몬이 손을 뻗어 당청과 황보경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머나."
그녀들이 깜짝 놀라는 순간 데이몬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비행 마법을 써서 날아오른 것이었다. 데이몬이 착지한 곳은 다름 아닌 베르키스의 머리 위였다.
"하늘 구경을 시켜줄 테니 놀라지 말거라."
데이몬은 베르키스에게 명령을 내렸다.
콰우우우
기성을 내지른 베르키스가 날개를 활짝 펼쳤다. 펄럭이는 날갯짓으로 인해 돌풍이 발생했다. 잘 단련된 무사들이 일순 몸을 가누지 못했을 정도로 가한 바람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우웃."
날려가지 않기 위해 무사들이 필사적으로 몸을 지탱하는 사이 베르키스의 육중한 몸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날갯짓이 거세지며 베르키스는 금세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꺄아악."
난생 처음 하늘을 날아보는 경험을 하는 당청과 황보경이 눈을 가리고 비명을 내질렀다. 데이몬은 그런 그녀들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너무 무서워할 필요 없다. 내가 있지 않느냐?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 보거라."
"너, 너무 무서워요."
"처음에만 그렇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느니라."
확실히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처음에는 그토록 무서워하던 그녀들이 조금 시간이 지나자 적극적으로 비행을 즐기기 시작했다.
베르키스는 날개를 활짝 펼친 채 상공을 선회했다. 두 여인이 몽롱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깨알처럼 작게 보이는 광경이 정말로 장관이었다.
"하늘을 날아보다니 정말 꿈만 같아요."
"너무나도 상쾌한걸요?"
그렇게 그들이 고적하게 비행을 즐기는 사이 아래에서는 치열한 혈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6.사준환 그놈이 자결을?

베르키스의 등장으로 인해 양편의 사기는 확실하게 역전되었다. 전설상의 신수인 용이 등장해 강시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덕분에 무림맹 무사들의 사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반면 잠마련 무사들의 사기는 급전직하로 곤두박질쳤다. 철석같이 믿었던 강시 군단의 궤멸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게다가 강시군단을 쓸어버린 용이 머리 바로 위 허공을 선회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용기를 내려 해도 도저히 낼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접전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벌어졌다. 무림맹의 참모들은 모든 전력을 동원해 잠마련을 공격했다.
"공격하라. 이번 기회에 사파의 씨를 말려버리자."
명령이 떨어지자 일천팔백에 달하는 무림맹 무사들이 일시에 달려들었다. 눈엣가시였던 강시군단이 궤멸된 터라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선발대의 패배에 대한 설욕을 하려는 듯 무림맹 무사들이 거세게 잠마련의 진형을 몰아쳤다. 잠마련 측에서도 순순히 당할 수 없다는 듯 반격을 가해왔다. 그러나 병기를 휘두르는 잠마련 무사들의 어깨에서는 왠지 모르게 맥이 빠져 있었다.
원래 무림에서는 이처럼 대규모로 맞붙는 싸움이 여간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보통 수십 명에서 많아봐야 백명 안팎으로 무사들이 실력을 겨루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 같은 전면전은 오랜 무림사를 통틀어 봐도 몇 번 되지 않았다.
때문에 양측 무사들은 단단하게 진형을 갖추고 접전을 벌였다. 물론 승기는 처음부터 무림맹 측에서 잡고 있었다. 수적으로도 월등히 우세인데다가 무사들의 무공수준도 비교적 높은 편이다. 게다가 공포의 강시군단을 쓸어버린 용이 하늘을 선회하며 사기를 북돋워주고 있는 상황이다. 무림맹 무사들은 그 기세를 몰아 세차게 잠마련 무사들을 몰아쳤다.
그러나 잠마련 무사들의 저항도 처절했다. 애당초 독에 중독된 상황인데다가 무림맹의 영역에 너무도 깊숙이 들어간 상태다.
후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고 그들은 연신 독이 오른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전황은 그리 오래지 않아 판가름 나고 있었다.
밀리는 전세를 본 사준환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확실하게 승리를 장담했던 그였다. 벽안독성 데이몬에 대해서도 철저히 대비책을 세워놓았다 자신했다. 하지만 데이몬은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방법을 써서 또다시 자신을 좌절 속에 몰아넣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탓인지 입가에 실소가 걸렸다.
"정녕 놈은 나의 천적이란 말인가?"
설마 용을 소환해서 강시군단을 공격하게 할 줄은 몰랐다. 물론 명석한 사준환은 데이몬이 소환한 것이 진짜 용이 아니란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용은 단지 전설상의 신수일 뿐 현세에는 존재하지 않는 영물이다. 서역에서 온 놈이 진짜 용을 소환해 낼 리는 없었다.
그러나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데이몬이 소환해 낸 용은 진짜 용보다도 더한 괴력을 발휘하여 단숨에 강시군단을 분쇄해버렸다. 더불어 치솟아 오른 잠마련 무사들의 사기까지 여지없이 꺾어버렸다. 그 탓에 전황은 잠마련에 현저히 불리하게 변해버렸다.
수적으로도 불리하고 무공 수준도 딸리는데다가 사기까지 꺾여버린 상황. 잠마련이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준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야망의 성취를 부득이 뒤로 미뤄야겠군.'
이미 패배는 기정사실이었다. 잠마련을 도우러 올 응원군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도의 문파들은 힘의 향방에 매우 민감하다. 예정대로 강시군단의 힘을 빌려 무림맹을 점령했다면 사파의 세력들이 앞 다투어 가세할 테지만 패배가 확정된 지금 도우러올 사도 문파는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강시군단을 철석같이 믿고 벌인 도박이었다. 강시군단이 무력화된 지금 잠마련이 이길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사준환의 얼굴에서는 도무지 낙심한 표정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기회가 사라졌다면 다음에 또 만들면 그만이다.'
사준환은 손가락을 뻗어 머리를 가리켰다.
'이 머리가 살아 있는 한 언제고 야망을 성취할 수 있다. 다만 시기가 늦춰질 뿐이지. 슬슬 금선탈각의 계책을 실행할 때가 왔군.'
결정을 내린 사준환이 옆에 시립한 참모진을 쳐다보았다.
"전 무사들에게 명령을 내려라."
참모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복명했다.
"존명."
"잠마련의 전 무사들은 한 발짝도 후퇴하지 않고 무림맹에 맞서 싸운다. 거기에는 일체의 예외가 없다."
그 말을 들은 참모들은 화들짝 놀랐다. 누가 봐도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데 뭉쳐 귀주까지 후퇴하든지 차라리 무림맹에 항복하는 것이 합당한 명령이었다.
그런데 한 명도 빠짐없이 맞서 싸우라니, 그것은 한 마디로 옥쇄하라는 것과 다름없는 명령이었다.
참모들이 동요하는 모습을 본 사준환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한쪽에 서 있던 마차에서 별안간 화염이 솟구쳤다. 화약이 실려있었는지 마차는 금세 불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저, 저런."
참도들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지금 불타오르는 마차는 다름 아닌 독의 해독제가 실린 마차였다.
사준환의 참모들도 예외 없이 독에 중독되어 있다. 그러니 하루에 한 번싹 해독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전신의 혈맥이 터져 처참히 죽게 된다. 그런데 사준환이 머뭇거림 없이 해독제가 실린 마차를 불태워버린 것이다. 그가 무감각한 어조로 말을 늘어놓았다.
"어차피 벗어날 방법은 없다. 우린 무림맹의 영역에 너무도 깊이 들어왔다. 한데 뭉쳐 후퇴해봐야 무림맹의 추적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모들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애당초 왜 그런 무모한 진군을 명했단 말인가? 그런데도 사준환은 조금도 미안한 표정을 내비치치 않았다.
"너무 억울해하지 말도록. 나 역시 그대들과 운명을 같이 할 터이니..."
절레절레 머리를 내저은 사준환은 손가락을 뻗어 전장을 가리켰다.
"그대들에게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 되겠군. 그대들고 전장에 가세하라. 죽을 때 죽더라도 무림맹의 잡졸들을 하나라도 더 처치하여 사파 무사의 명예를 높이도록 하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사준환을 쳐다보던 참모들이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린 채 걸음을 옮겼다.
사준환은 무심한 눈길로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힘들게 만들어낸 세력이 와해되게 생겼지만 그의 눈둥자에선 도무지 아쉬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이용가치에 의해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제 때가 되었군.'
참모들이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한 사준환은 살짝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옆에 세워진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이동할 때 사용하는 전용마차인 천향백옥차였다.
여덞 마리의 백마가 끄는 천향백옥차는 지극히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마차 안에 들어선 사준환은 한쪽 벽의 휘장을 젖혔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사준환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죽은 듯 누워있었다. 수려한 용모에서부터 풍기는 분위기까지 한 치의 틀림도 없이 동일했다. 심지어 입고 있는 옷까지도 똑같았다.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사준환의 분신이었다. 이런 일을 대비해 오래 전부터 자신과 닮은 사람을 물색해 놓은 다음 가사상태에 빠뜨려놓은 것이다.
무심히 얼굴로 분신을 쳐다보던 사준환은 소매 속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푸욱
단검은 눈 깜짝할 사이에 분신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간헐적으로 경련하던 분신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것을 본 사준환은 지체 없이 변장을 시작했다. 걸치고 있던 화려한 옷을 벗고 남루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서랍 속에서 인피면구를 꺼내어 쓰고 준비되어 있던 수염을 붙였다. 그러자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주름살이 쭈글쭈글한 시골 촌로의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내공을 끌어올려 주위를 살펴본 사준환은 마차의 바닥을 눌렀다.
덜컥
바닥이 빠지며 한 사람이 빠져나갈 만한 통로가 드러났다. 사준환의 몸은 금세 통로 속으로 사라졌다. 물론 그가 전장을 이탈한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전세는 이제 눈에 띄게 무림맹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잠마련 무사들이 사력을 다해 저항을 거듭했지만 점점 밀려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진 않았다. 어쨌거나 이 자리에 온 잠마련 무사들은 전 마도에서 모인 정예 중의 정예. 그런 만큼 호락호락 목을 내어줄 무사들은 없었다.
게다가 사준환의 극약처방이 무사들에겐 오히려 득이 되었다. 해독제가 모조리 불타버렸다는 말을 들은 무사들은 목숨을 도외시하고 독 오른 공세를 펼쳤다.
거기에 말려든 무림맹 무사들이 적지 않게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형세는 무림맹의 우세로 판가름 나고 있었다.
무림인들의 싸움은 군대의 싸움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내공을 이용해 힘을 발휘하는 무림인들은 순간적으로 강력한 위력을 뿜어낼 수 있는 반면 지구력에 있어 현저한 한계를 보인다. 내공이 소진되면 더 이상 싸우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 탓에 잠마련과 무림맹의 전면전은 두 시간을 한계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서로가 운기를 통해 소모된 내공을 벌충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짧은 접전이었지만 서로가 입은 피해는 실로 컸다. 이번 접전으로 잠마련은 삼백 명의 무사를 잃었다. 반면 무림맹은 백오십여 명의 무사들이 피바다에 누워야했다.
잠정적으로 휴전을 선포한 다음 양 세력은 피해의 수습에 들어갔다. 잠마련 무사들에게 경천지동할 소식이 전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천기대제 사준환의 자살.
심장에 단검이 박힌 사준환의 시체가 발견되고 그 사실은 잠마련 무사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총수의 어이없는 자살로 인해 잠마련 무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승산이 없다는 것을 총수가 시인한 것이다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최고 명령권자가 자결했기 때문에 잠마련의 통수권은 수석참모인 혈전검 순우곤에게 돌아갔다. 과거 패진문의 문주로서 뛰어난 검술실력과 통솔력을 지닌 순우곤이 잠마련 무사들의 생사여탈권을 맡게 된 것이었다.
통솔권을 맡자 그는 가장 먼저 무림맹과의 교섭을 시도했다. 하급 무사들의 목숨이라도 살리려는 극약처방이었다.
"어차피 승산은 없다. 게다가 무림맹에서 본련의 수뇌부들을 순순히 용서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천에 달하는 무사들을 이대로 전멸시킬 수는 없는 문제 아닌가?"
순우곤의 사자는 무림맹주 황천호를 찾아가서 화평을 요청했다. 이전에 입힌 피해에 대해 책임을 지며 무림맹이 원할 경우 금전적인 보상을 하겠다는 제의였다.
그러나 무림맹은 순우곤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무림맹에서 그 제의를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이곳에 운집한 잠마련 무사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나면 모든 것은 무림맹이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준환이 미리 예측했었던 결과였다.
화평이 결렬되고 전투가 속개되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잠마련 무사들은 한데 뭉쳐 물러나는 길을 택했다. 이곳은 무림맹의 영역. 뿔뿔이 흩어져서 퇴각할 경우 금세 무림맹의 추적대에 포위되어 괴멸당할 터였다. 따라서 잠마련 무사들은 한데 뭉친 상태로 혈로를 뚫고 퇴각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결코 쉽지 않았다. 쉼 없이 가해지는 무림맹의 요격에 잠마련 무사들은 끊임없이 차가운 대지에 몸을 눕혀야 했다. 공격이 한 번 가해질 때마다 무사 수십 명이 전사했다.
계속해서 희생을 치르면서도 잠마련은 후퇴를 거듭했다. 어차피 그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곳의 잠마련 무사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독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 독이 발작하기 전까지 귀주에 있는 총단으로 후퇴해야 했다. 독의 발작을 억제하는 해약은 오직 총단에만 있었으므로.
잠마련의 퇴각을 막기 위해 무림맹은 속속 차단조를 구성하여 보냈다. 길을 우회하여 앞질러가서 잠마련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정적으로 무림맹의 실책이었다. 잠마련 무사들은 현재 궁지에 몰릴 대로 몰려 독이 한껏 올라있는 상태.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림맹의 차단조를 들이쳤다. 그로 인해 무림맹은 상당한 손해를 입어야 했다. 궤멸된 차단조만 해도 여럿이었다.
그렇게 되자 무림맹도 더 이상 차단조를 운용하지 않았다. 뒤를 바짝 추격하며 요격하는 것이 훨씬 피해가 적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잠마련은 무림맹의 영역 깊숙이 들어온 상태. 현실적으로 잠마련 무사들이 머나먼 귀주까지 후퇴하는 것은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일이었다.
잠마련 무사들은 악전고투를 거듭하며 진령평원까지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잠마련의 전력은 어느덧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고자 육백여 명의 무사들만이 살아남아 무림맹의 선발대와 전투를 벌였던 진령평원에 입성한 것이다.
잠마련 무사들의 몰골은 정말로 처참했다. 제대로 쉬지 못해 극심한 피로에 휩싸여 있었고 운기조차 하지 못해 내공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접전 초반에 보급품을 탈취당해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무사들의 상태를 점검해 본 순우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겠군.'
잠마련의 총단이 있는 귀주까지는 아직까지 까마득하게 멀다. 지칠 대로 지친 무사들을 이끌고 그곳까지 가는 것은 누가 보아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다.
사실 여기까지 후퇴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불현듯 모든 일을 야기한 사준환에 대한 반감이 치밀어 올랐다.
'일을 이렇게 벌여놓고 무책임하게 자결을 하다니...'
무림맹 침공을 결정한 것은 철저한 사준환의 독단이었다. 독에 중독된 탓에 무사들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명령에 따랐다. 한마디로 사준환은 천이백에 달하는 무사들을 한꺼번에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러니 죽은 사준환이 원망스러운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순우곤의 얼굴에 체념의 빛이 어렸다.
"어쩔 수 없군.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하는 수밖에..."
무림맹 무사들은 바로 지척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배를 채우고 운기를 해서 내공을 보충한 다음 다시 공격을 가해올 것이다.
반면 잠마련 무사들에겐 운기할 시간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무림맹 측에서 수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무사들을 교체하면서 틈을 주지 않고 들이쳐 온 것이다.
잠마련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공세를 막아내면서 조금씩 후퇴하는 것뿐이었다. 순우곤이 피로에 젖은 무사들을 쳐다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언덕을 넘은 뒤 휴식을 취한다. 힘을 내라."
그의 독려에 무사들이 힘을 짜내어 언덕을 올라갔다. 언덕 윗부분은 비교적 방어가 용이한 편이다. 조를 짜서 힘이 남아있는 무사들로 하여금 무림맹의 공세를 막아내게 하고 그사이 다른 무사들에게 휴식시간을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언덕 위에 올라선 척후의 얼굴이 암울해졌다.
"어느새 이곳까지..."
언덕 위에는 다수의 무사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일견해 삼백이 넘는 규모였다. 뿜어내는 기세를 보아 철저히 단련된 무사들이 틀림없었다. 보고를 받은 순우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정말 철저하게 포위망을 형성했군. 이곳까지 무사를 배치하다니..."
싸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기에 순우곤은 잠자코 장검을 뽑아들었다. 그의 애검은 피가 말라붙어 거무튀튀하게 변해 있었다. 그때 한 무사가 고함을 질렀다.
"저들은 무림맹 무사들이 아닙니다."
그 말에 깜짝 놀란 순우곤이 고개를 들었다. 무사의 말대로 언덕 위의 무사들은 무림맹의 무사들이 아니었다. 깃발을 본 순우곤의 얼굴이 곤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저 깃발은 패왕문의 것인데? 같은 사파 계열의 패왕문이 이곳에는 어인 일로..."
사파의 지원군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상황이다. 그런데 이곳에 패왕문의 무사들이 진을 치고 있다니...
잠마련 무사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사이 패왕문의 진형이 갈리며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부리부리한 고리눈에 당당한 덩치를 지닌 장한이었다. 패왕문의 철혈당주인 팽각이었다. 그가 내공을 끌어올려 고함을 질렀다.
"우린 패왕문의 무사들이다. 그대들을 지원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순간 잠마련 무사들의 얼굴에 조금씩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지원군이 도착한 것이다. 패왕문이라면 오랜 전통을 가진 사파의 명문 문파였다. 비록 정사대전을 통해 많이 약해지긴 했지만 최근 들어 재기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사, 살았어."
긴장이 풀린 무사들이 하나둘씩 주저앉기 시작했다. 물론 하급 무사들인 그들이 잠마련과 패왕문 사이에 얽힌 알력을 알 턱이 없었다. 그런 그들을 팽각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제부터 전투는 우리 패왕문 무사들이 맡겠다. 그러니 잠마련 무사들은 뒤로 물러나서 휴식을 취하도록 하라. 후위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준비해 놓았다."
희소식에 잠마련 무사들은 마지막 힘을 내어 걸음을 옮겼다. 허시와 갈증에 시달리던 그들이었기에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대부분의 무사들이 패왕문의 안내를 받아 후위로 이동했다.
그러나 수뇌부들은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 그들로서는 패왕문의 호의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사준환이 모략을 획책하여 패왕문을 당문과 상잔시키려 했던 사실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또한 당문을 치러갔던 흑면염라 곽천도가 패왕문주의 손에 비명횡사하고 기습조 무사들이 대거 투항한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순우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녕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온 것이오?"
그 말에 대답한 것은 팽각이 아니었다. 뒤에 서 있던 비사문이 앞으로 쓱 나섰다. 그 모습을 본 순우곤은 적어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화경고수이다. 그런 그가 같은 반열에 오른 초절정고수를 몰라볼 리 없었다.
'패왕문에 문주 외에 또 다른 초절정고수가 있었다니 놀랍군.'
놀라워하는 순우곤을 쳐다보며 비사문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 우리 패왕문은 잠마련과 알력이 있소.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지?"
사실이었기에 순우곤은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우리 패왕문은 그때의 원한을 깨끗이 잊기로 했소. 죽어가는 잠마련 무사들을 두 손 놓고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이오. 우리는 아무런 사심 없이 이곳으로 왔소.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후위에 가서 휴식을 취하도록 하시오."
비사문을 쳐다보던 순우곤의 눈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패왕문의 처사가 너무도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떨군 순우곤이 탄식을 토했다.
"허! 패왕문에 큰 빚을 졌구려."
"걱정 마시고 후위에 가서 운기를 하도록 하시오. 그곳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준비되어 있소."
"알겠소. 그럼 신세를 좀 지도록 하리다."
잠마련 수뇌부들도 패왕문의 후위로 이동했다. 그러자 패왕문 무사들이 달려들어 그들이 빠진 자리를 메웠다. 그곳에는 곧 철통같은 방어진이 쳐졌다.
잠시 후 밀려온 무림맹의 공격조는 아연해했다. 뜻밖의 무사들이 나타나 길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패왕문의 등장으로 인해 무림맹의 공격조는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고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그들 역시 잠마련과 혈투를 벌이느라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그런 만틈 충분히 힘을 비축한 패왕문 무사들에게 섣불리 싸움을 걸기가 힘들었다.
그 광경을 영호명이 잔잔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의 옆에는 군사 갈천성이 서 있었다.
"정말 절호의 기회입니다. 설마 일이 그렇게 반전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영호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준환이란 놈이 설마 자살을 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지."
원래 그들의 목적은 지금과는 달랐다. 그들은 잠마련의 무림맹 점령을 견제하기 위해 이곳싸지 왔다. 막강한 강시군단의 힘을 동원한 잠마련이 무림맹을 쳐부수는 것은 영호명이 가장 우려하던 바였다.
잠마련이 무림맹에 입성할 경우 사파의 힘은 한 군데로 결집된다. 그렇게 될 경우 패왕문은 잠마련의 휘하세력으로 전략하게 된다. 그것을 막기 위해 무사들을 이동시키고 있다가 뜻밖의 사실을 들은 것이다. 그것은 잠마련에 파견해 놓은 하오문 출신 첩자가 보내온 급보였다.
-벽안독성 데이몬이 용을 소환하여 잠마련의 강시군단을 완전히 분쇄했다.
이후 기가 산 무림맹의 파상공세에 잠마련 무사들은 큰 피해를 입었고 그 와중에 천기대제 사준환이 자살했다는 사실이 첩자를 통해 보고되었다.
그러자 갈천성을 작전을 바꾸었다. 이대로 가다간 전멸될 것이 뻔한 잠마련의 잔존세력을 패왕문 산하로 흡수하기로 말이다. 그것이 바로 패왕문이 이곳에 진을 치고 있는 이유였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영호명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쓸데없이 피를 흘리는 것은 이쯤에서 그쳐야 한다. 그것이 정사 양도를 통해 좋은 일이지."
그 말이 백번 옳다는 듯 갈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패왕문 무사들이 길을 막고 있는 사이 무림맹 공격조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무림맹주인 황보천과 참모부의 장로들도 끼어있었다. 뜻밖의 상황에 황천호의 이맛살이 지그시 모아졌다.
"뜻밖이로군. 패왕문이 우릴 적대하고 나서다니..."
설마 패왕문이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황천호는 상황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패왕문이 동원한 무사는 고작해야 삼백 정도, 결코 대세에 영향을 줄 만한 숫자는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대치상태를 유지하며 후위의 무사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순차적으로 휴식을 취하고 운기행공을 한 무사들이 계속 가세하는 상황이었다.
후위로 이동한 잠마련 무사들은 패왕문에서 제공한 음식물과 물로 허기를 채웠다. 전위를 패왕문 무사들이 든든히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운기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기력을 회복한 잠마련 무사들에게 녹색 옷을 입은 자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잠마련 무사들에게 어린아이 주먹만한 단환을 내밀었다.
"이것을 받으시오."
잠마련 무사가 의아한 눈빛으로 단환을 받아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잠마련 무사들이 알 턱이 없었다. 오래지 않아 모든 잠마련 무사들이 단환을 하나씩 분배받았다. 그것을 확인하자 팽각이 앞으로 나섰다.
"지금 그대들이 분배받은 단환은 만성지독의 발작을 억제하는 해약이오. 복용하셔도 좋소."
잠마련 무사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직 잠마련 수뇌부들만이 취급하는 해약을 어찌 패왕문에서 나눠준단 말인가? 그러나 이어진 설명을 들은 무사들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우리는 당문으로부터 독곡과 오독문 출신 독객들을 구출해 왔소. 지금 단환을 나눠준 녹의인들이 바로 그 독객들이오. 그들은 한때 잠마련에 억류되어 독에 대한 연구를 한 적이 있었소. 그러니 그대들을 중독시키고 있는 만성지독의 해약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소."
설명을 들은 잠마련 무사들은 비로소 의심을 풀고 해약을 입속에 털어 넣었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독이 발작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가지고 온 해약은 모두 자살한 사준환이 태워버린 상태였다. 그런 만큼 지급받은 단환이 독약이라고 해도 복용해야하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잠마련의 수뇌부들은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단약을 그저 손에 들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팽각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녹의인들이 큼지막한 수레를 끌고 들어왔다. 거기에는 누런빛을 띤 단환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수레가 도착하자 팽각이 내공을 돋워 고함을 질렀다.
"지금 이 단환은 그대들을 중독시키고 있는 만성지독을 완전히 해독할 수 있는 해독약이오. 중독된 기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복용할 경우 보름에서 한 달 정도면 만성지독을 완전히 해독할 수 있소."
잠마련 무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삶을 제어하고 있는 독을 해독시킬 수 있는 해약을 보고 그 누가 동요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들의 귓전으로 팽각의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약을 복용할 경우 독이 해독될 때까지 내공을 온전히 쓸수 없소. 그러니 필히 안전한 곳으로 가서 복용하도록 하시오. 패왕문에서는 그대들에게 이 해약을 아무런 조건 없이 제공할 것이오."
뜻밖의 상황에 순우곤은 이맛살을 지그시 모았다. 그것은 같이 있던 수뇌부들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패왕문에서 어찌 이런 호의를 베푼단 말인가?
불신이 팽배해 있는 잠마련에 몸담고 있던 그들이었다. 때문에 조건 없는 호의가 좀처럼 가슴에 다가오지 않았다.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던 순우곤이 팽각에게 다가갔다.
"이 약이 정말로 만성지독을 완전히 해독할 수 있단 말이오?"
"그렇소. 본문의 독객들이 이미 임상시험을 마친 상태요. 체질과 중독 기간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 달 내로 만성지독을 말끔히 해독할 수 있소."
순우곤은 단환 하나를 들어 올려 살펴보았다. 역한 약냄새가 풍겼지만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약을 들여다보았다. 팽각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본인의 말을 쉽사리 믿을 수 없나 보구려. 하지만 한 가지만 알아주시오. 우리 패왕문은 순수한 패도를 추구하오. 본문의 문주님께서는 계략과 모계를 지극히 싫어하시오. 오로지 힘의 논리오써 지배가 아닌 군림을 추구하시려는 것이오."
"....."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독 따위를 이용해 수하를 통솔할 바에야 아예 수하를 거두지 않을 것이다. 신의와 의리를 바탕으로 맺어지지 않은 군신관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라고 말이오."
그 말에 순우곤의 눈 꼬리가 파르르 떨었다. 잠마련의 분위기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살짝 훑어본 팽각이 급히 몸을 돌렸다.
"무림맹에서 공격을 가하려고 하고 있으니 본인은 이만 가보겠소. 당신이 책임지고 수하들에게 해약을 배분해주기 바라오."
말을 마친 팽각은 급히 몸을 날렸다. 그때까지 순우곤은 단환하나를 손에 든 채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사들이 충분히 모이자 무림맹이 행동에 나섰다. 강력한 무사들로 구성된 공격조가 앞으로 나섰다. 패왕문 무사들을 상대로 한바탕 접전을 벌이려는 것이었다.
영호명이 장도를 움켜쥔 채 앞으로 나섰다. 서로의 무사들이 얽혀 피를 뿌리며 싸우는 것은 그가 바라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더 이상 피를 원하지 않는다. 이제부터 싸움은 내가 맡겠다."
그의 말에 갈천성은 황송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가 새로 모신 주군은 정말로 패도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수하들이 피를 흘리지 않도록 솔선수범해서 앞에 나서는 주군이 마도에 그 얼마나 있단 말인가?
패왕문 진형에서 누군가가 홀로 걸어 나오자 무림맹 공격조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시선은 금세 경악으로 바뀌었다. 영호명의 몸에서 별안간 강력한 기세가 쭉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헉."
기세에 압도당한 공격조 무사들이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영호명에게서 발산되는 기세는 그 정도로 강렬했다.
그런 그들을 노려보며 영호명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한 걸음 내딛는 순간 폭풍같은 기세가 전면으로 휘몰아쳤다. 거기에 휘말린 무림맹 무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단 한사람으로 인해 이백이 넘는 무사들이 주눅이 들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무림맹 수뇌부들도 마찬가지였다. 맹주 황천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인간의 몸에서 저런 기세가 발산될 수 있단 말인가?'
상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잘 단련된 무사들조차 견디기 힘들었다. 그들을 쳐다보며 영호명이 고즉넉이 입을 열었다.
"내가 바로 패왕문주다."
내공이 실린 음성이 무림맹 무사들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음성에 실린 기세 때문에 무사들은 움찔했다. 한 사람의 존재감이 이토록 거대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부르르 몸을 떤 황천호가 앞으로 나섰다. 영호명의 시선이 느릿하게 그에게로 돌아갔다.
"그대가 무림맹주인가?"
"그렇소."
"이쯤에서 추격을 그만두는 것이 어떠한가?"
황천호의 눈썹이 급격히 휘말려 올라갔다.
"본 맹은 빚을 받아내기 전까진 결코 물러나지 않을 것이오. 잠마련은 묵회라는 하부조직을 결성해 무림맹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소. 그리고 사악한 강시군단을 앞세워 본 맹을 선제공격하기까지 했소. 어찌하여 잠마련의 잔당들을 비호하려는지 모르지만 계속 앞으로 가로막을 경우 우린 아무런 망설임 없이 패왕문을 공격할 것이오."
영호명의 어조는 기세와 반대로 물처럼 잔잔했다.
"정과 사는 이미 충분한 피를 흘렸다. 본인은 더 이상의 피를 보지 않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
"무림맹을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은 엄연히 사준환이다. 그는 이미 자결한 상태, 휘하의 무사들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본인은 더 이상 잠마련 무사들의 희생을 좌시할 수 없다."
말을 마친 영호명의 몸에서 또다시 강렬한 기세가 쭉 뿜어져나왔다. 기세에 압도된 황천호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무림맹 무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황천호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후위에 서 있던 잠마련 무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미 그들은 최후를 각오한 상태였다. 자결한 사준환이 해약을 모조리 태워버린 데가 현저히 밀리는 전력으로 무림맹의 영역 깊숙이 들어온 상태였다. 날개 달린 새가 아닌 이상 벗어나기가 불가능했다.
그런 상황에서 패왕문의 지원은 그들에겐 말로 형용하기 힘든 감동을 안겨주었다. 더욱이 그들은 만성지독을 완전히 해독할 수 있는 해약까지 제공해주지 않았던가?
거기에다 단신으로 나서서 무림맹의 무사들을 가로막고 있는 패왕문주의 모습은 그들에겐 충격적이었다. 잠마련의 총수였던 천기대제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잠마련을 이끌어오면서 사준환은 단 한 번도 선두에 나선 적이 없었다. 그는 휘하 무사들을 대거 투입하여 승기를 확실히 잡은 다음에야 등장했다.
그에게 휘하 무사들은 이용할 수 있는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만성지독으로 수하 무사들을 통제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사준환은 원천적으로 수하들을 믿지 않는다.
수하들을 대신해 최전선에 나서서 무림맹 무사들과 대치하고 있는 패왕문주의 패기에 잠마련 무사들은 당연히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패왕문주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가만히 있을 순 없다.'
무사들 중 중견 당주 한 명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가 쳐다본 것은 수레 주위에 배치된 독객이었다.
"이 약을 먹을 경우 내공은 온전히 쓸 수 없다고 했소?"
독객이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중독된 시간에 따라 보름에서 한 달 가량 내공을 온전히 쓸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무사가 한 손에 들고 있던 만성지독의 해약을 다시 수레에 집어던졌다.
"그렇다면 지금 해약을 복용하지 않겠소. 왜냐하면 나도 귀문 무사들과 함께 무림맹에 맞서 싸울 것이기 때문이오."
무사는 허리춤에서 병기를 뽑아들었다. 그는 시커멓게 피가 말라붙은 장도를 움켜쥐고 성큼성큼 걸어가서 패왕문 무사들의 대열에 끼어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패왕문과 운명을 같이 할 것이라는 결의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뒤를 잠마련 무사들이 속속 뒤따랐다.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패왕문주가 단신으로 적을 가로막고 있는데 더 이상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잠마련 무사들은 일망의 망설임도 없이 해약을 수레에 올려놓고 패왕문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들 중에는 순우곤의 모습도 끼어있었다. 애검인 혈전검을 단단히 움켜쥔 그가 비사문의 바로 옆에 가 섰다.
"나도 싸우겠소. 우릴 구해주러 온 패왕문에 대한 신의를 조금이나마 지키고 싶소."
비사문도 웃는 낯으로 순우곤을 맞아주었다.
"어서 오시오. 환영하오."
그렇게 하여 잠마련 무사들이 대거 패왕문의 대열과 합류했다. 허기와 갈증을 채우고 운기로 내공을 보충한 탓에 싸울 여력은 충분했다.
육백에 달하는 잠마련 무사들 중 그 누구도 꽁무니를 빼지 않았다. 하나같이 핏발이 선 눈빛으로 병기를 불끈 움켜쥔 채 무림맹의 진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황천호는 탄식을 토해냈다.
'실기했군.'
패왕문주의 기세에 눌려 침묵을 지킨 사이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 버렸다. 잠마련의 패잔병들이 대거 패왕문에 합류해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패왕문의 전력은 거의 천에 가까이 불어나 버렸으며 그들의 사기는 시간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었다.
더 이상 일이 틀어지기 전에 뭔가 수를 써야 했다. 그가 고민하고 있는데 패왕문주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끝맺기를 권고한다. 공식적으로 무림맹에 화평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것이 서로에게 이익이 될것이다."
황천호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입장에선 패왕문주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장 장로들의 반발이 빗발칠 게 틀림없을 테니.
'피해가 크더라고 전면전을 벌이는 수밖에...'
결정을 내린 황천호가 검 자루를 움켜지고 입을 열려 했다. 그때 한 줄기 전음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패왕문주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오.
황천호는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전음은 바로 벽안독성이 보낸 것이었다. 데이몬은 그때까지 두 여인을 용의 머리 위에 태우고 허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귓전으로 재차 전음이 파고들었다.
-싸워봐야 승산이 없을 것이오. 왜냐하면 패왕문주는 이미 현경에 접어든 무인이기 때문이오.
순간 황천호의 눈이 경악에 물들었다. 현경의 경지, 수백 년전 검성 이래로 누구도 범접해보지 못한 경지.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승산은 불 보듯 뻔했다.
현경의 고수를 꺾을 무사는 무림맹 측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과 장로들이 힘을 합쳐 합공을 하더라도 현경의 고수를 꺾는다고는 보장할 수 없다.
다급해진 그는 황급히 전음을 보냈다. 데이몬이 하늘 높이 날고 있었지만 용케도 그의 전음이 전해졌다.
-그게 사실이오?
-패왕문주는 틀림없는 현경의 고수요. 내 이름을 걸고 보장할 수 있소.
대답을 들은 황천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가 간곡한 어조로 다시 전음을 보냈다.
-우리를 좀 도와주시오. 용을 동원한다면...
그러나 데이몬은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강시를 처리해 준 것으로 내 할 도리는 다한 것이오. 그러니 날 더 이상 이용하려 하지 마시오.
-.....
-이번 일을 위기라고 생각하지 마시오.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오. 장로들에게서 맹의 주도권을 되찾아올 수 있는 기회 말이요.
황천호의 표정이 연신 돌변했다. 벽안독성의 말대로 패왕문주가 현경의 고수라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다. 현경의 고수 한 명의 위력은 거의 무사 천여 명과 맞먹는다. 당장 이 자리에는 현경의 고수를 막을 방도가 없었다. 상대가 본격적으로 힘을 쓸 경우 맹의 수뇌부들이 저자의 손에 모조리 죽어나갈 것이 틀림없었다.
한참동안 생각을 거듭하던 황천호는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어쩔 수 없다. 장로들이 반발하더라고 여기에서 선을 그어야 한다.'
마음을 정한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좋소. 패왕문주의 제의를 받아들이리다. 본 맹은 여기에서 추격을 종결지을 것이오."
영호명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드디어 원하는 대답을 도출해 낸 것이다.
"훌륭한 선택이시오. 그대의 결단에 찬사를 보내오."
그러나 상황은 호락호락 흘러가지 않았다. 장로들이 불쑥 튀어나와 맹렬히 삿대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맹주, 그게 도대체 무슨 망발이지오?"
"말도 되지 않소. 여세를 몰아 사파의 마졸들을 모조리 소탕해야 할 판국에..."
장로들의 반발은 거셌다.
"헛소리 하지 마시오. 전력은 우리가 월등히 우세하오. 이참에 패왕문까지 말끔히..."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뢰 같은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갈!"
사자후에 실린 내공으로 인해 충격을 받은 장로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영호명의 눈에서 불같은 광망이 쭉 뿜어져 나왔다. 벽력같은 음성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불복할 자 나서라. 내가 직접 상대해 주겠노라!"
영호명이 장도를 뽑아들었다. 시퍼런 광망이 장도에서 넘실거렸다. 나섰던 장로들의 눈에 망설임이 서렸다. 그러나 이미 기호지세였다. 장로들 중 한 명인 점창 장문인이 애검을 움켜쥐고 앞으로 나섰다.
"무량수불! 빈도가 그대의 도를 한 번 견식해 보리다."
영호명은 머뭇거림 없이 도를 치켜세웠다.
"오라! 그대에게 패왕문의 저력을 알려주겠노라."
이후 벌어진 일은 한 마디로 경악 그 자체였다. 호기 있게 나섰던 점창 장문인은 단 두 합 만에 피를 토하고 나가떨어졌다. 첫 격돌에서 애검인 청파검마저 산산이 부서졌다. 이후 쟁쟁한 무림맹의 원로들이 줄줄이 침몰하기 시작했다. 점창 장문인의 처참한 패배에 발끈하고 나섰던 남궁세가 가주가 한 일합 만에 검이 꺾였다.
그 뒤를 이은 화산 장문인 역시 이초를 넘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영호명의 무위는 실로 가공했다. 누구 하나 그의 동에 실린 경력을 받아내는 이가 없었다. 단숨에 무림맹 원로 다섯 명을 꺾은 영호명이 부리부리한 눈에 힘을 주었다.
"고작 그 정도 실력으로 마도의 말살을 외쳤단 말인가? 귀찮으니 한꺼번에 덤벼라!"
이후 이어진 것은 무림맹 무력단체들과의 접전이었다. 무림맹 장로들이 상위 서열의 무력단체를 순차적으로 내보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도전하겠소."
가주의 패배에 분노한 남궁세가의 창궁검대가 검을 움켜쥐고 나왔다. 하나하나가 절정 상급의 고수들로 구성된 창궁검대는 합격술이 능수능란했다.
그러나 그러한 합격술도 영호명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영호명이 내지른 일도에 단숨에 진이 깨어졌고 구성원들은 피를 토하며 줄줄이 나가떨어졌다.
"크억."
화산의 매화검진도 압도적인 무공 앞에서 무력했다. 매화검수들은 처절한 좌절을 맛보며 검을 떨어뜨렸다. 점창의 쾌검도 개방의 타구봉법도 영호명에겐 통하지 않았다. 나서는 족족 영호명의 장도 아래 무릎을 꿇어야했다.
이제 상황은 판이하게 바뀌어버렸다. 무림맹 무사들의 사기는 급전직하로 추락해 내렸다. 원로들이 침몰한데 이어 쟁쟁한 무력단체들이 단 한 사람에 의해 모조리 꺾였다. 그러니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도를 움켜쥔 채 철탑처럼 버티고 서 있는 영호명은 무림맹 무사들에겐 감히 넘어설 수 없는 철벽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잠마련 무사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영호명의 압도적인 무위에 전율을 느꼈다. 또한 수하들을 뒤로 물리고 혼자서 다수의 무사들과 맞서는 솔선수번에 감동했다.
"세, 세상에..."
잠마련의 총수인 천기대제에게선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가공할 무위를 선보이며 무림맹 고수들을 연거푸 꺾어나가는 영호명을 보며 잠마련 출신 무사들은 서서히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눈동자에선 열기가 이글이글 피어났다.
"패왕문이여 영원하라."
"문주님 만세!"
영호명이 승리할 때마다 패왕문 무사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어느덧 잠마련 무사들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패왕문을 찬양하고 패왕문주를 연호했다. 역시 힘을 숭배하는 마도 무사들다웠다.
영호명의 일인대전은 이제 그 결말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더 이상 도전하고 나서는 고수나 무력단체는 없었다. 용기를 내어 나선 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패배의 쓴잔을 들이켜야 했다. 반발하던 장로들은 풀이 죽은 기색이었다. 휘하의 무력단체까지 모조리 꺾였으니 더 이상 나설 명분이 없었다.
그렇게 되자 모두의 시선이 황천호에게로 쏟아졌다. 반대의견이 사라졌으니 이제 그가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그가 차분한 어조로 영호명을 쳐다보았다.
"이제 대화를 나눌 분위기가 된 것 같구려."
영호명이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했다.
"무림맹주의 결단에 감사드리오. 이미 정과 사는 많은 피를 보았소. 더 이상의 피를 보고 싶지 않은 것이 본 문주의 의도라오. 그 점에서 무림맹주는 지극히 현명한 선택을 했소."
황천호도 포권으로써 답례했다.
"패왕문주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오. 아무래도 정과 사에는 숙고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소. 잠마련의 기습으로 인해 본맹은 많은 피해를 입었소. 그러나 모든 일을 지시간 잠마련의 총수가 자결했으니 휘하 무사들에게는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소."
영호명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역시 무림맹주다운 배포시구려."
"하지만 한 가지는 양해해 주시오. 잠마련으로 입은 피해는 실로 크오. 비록 휘하 무사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본인에게는 본 맹 무사들의 불만을 잠재울 명분이 필요하오."
"....."
본 맹은 무사들을 동원하여 잠마련의 총단을 점령할 것이오. 그것을 패왕문주께서 용인해 주시오."
영호명은 두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용인하리다. 단 이틀의 말미를 주시오. 잠마련 총단에 남아있는 무사들에게 몸을 피할 시간을 주어야 하니 말이오."
그것은 황천호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지 명분이다. 무림맹을 침공한 잠마련의 총단을 점령해서 불태움으로써 무사들의 불만을 달래려는 의도였다. 그런 만큼 이틀의 시간을 주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패왕문주의 제의를 받아들이겠소."
"고맙구려."
영호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일이 원하던 방향으로 마무리 지어진 탓에 가슴이 더 없이 뿌듯했다.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졌다. 황천호는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힌 잠마련 무사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패왕문에 인도했다.
장로들은 더 이상 무림맹주의 결정에 딴죽을 걸지 못했다. 패왕문주에게 당한 처참한 패배로 더 이상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로 무림맹주의 위상은 상당히 높아졌다. 빠른 상황판단으로 위기를 모면한 것과 패왕문주와 당당히 교섭을 벌여 잠마련 총단의 공격을 용인받은 일로 인해 무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된 것이다. 반면 고집을 부렸다가 망신을 당한 장로들의 위신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추락했다.
패왕문의 일도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일단 구함을 받은 잠마련 무사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패왕문에 투신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우리의 목숨은 패왕문주님께서 구해주신 것입니다."
"받아만 주신다면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이미 패왕문주 영호명의 패기와 무위에 반한 무사들이다. 그들은 앞을 다투어 영호명을 섬기겠다고 무릎을 꿇었다. 심지어 손우곤을 비롯한 수뇌부들마저도 영호명에게 오체투지를 했다.
"소인 이제야 진정한 하늘을 보았습니다. 부디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시옵소서."
영호명은 복속을 결심한 잠마련 무사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패왕문의 위세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된 계기였다.
원래부터 힘을 숭상하는 마도 출신인지라 잠마련 무사들은 영호명의 휘하에 드는 것을 전혀 꺼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사준환이 일으킨 정사대전이 잠정적으로 마루리 지어졌다.
그러나 영호명에겐 볼일이 남아 있었다. 뭔가를 결심한 듯 안색이 살짝 경직된 영호명이 군사 갈천성을 불렀다.
"군사, 그대에게 시킬 일이 있다."
갈천성이 부동자세를 취했다.
"하명하십시오."
"그대는 무사들을 통솔하여 본문으로 돌아가라. 나는 여기에서 할 일이 있다."
갈천성이 조심스럽게 영호명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 무슨 볼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영호명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거기에는 거대한 용이 날개를 활짝 펼친 채 허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데이몬과의 묵은 은원을 풀 생각이다."
그의 말에 갈천성의 안색이 돌변했다. 지금은 그러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아직까지 무림맹과의 대치상황이 풀리지 않은 상태. 그런데 가장 큰 전쟁억지력을 지닌 영호명이 대결에서 잘못된다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었다.
무엇보다고 영호명이 데이몬을 이길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당장 갈천성은 영호명이 벽안독성에게 무참히 패하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았던가!
"지,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주군."
그러나 영호명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마음이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구나. 데이몬은 나와 한 하늘을 이고 살지 못하는 원한관계를 맺고 있다."
영호명은 손을 뻗어 갈천성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남은 일을 군사에게 맡기겠다. 그대가 무사들을 통솔하여 본문으로 데리고 가서 정비하도록 하라."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데 더 이상 만류할 명분이 없다. 갈천성은 체념한 표정으로 떠듬떠듬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주군."

7.은원(恩怨)의 고리

뒷일을 갈천성에게 떠넘긴 영호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시선은 하늘을 선회하는 용에게 쏠려 있었다.
느닷없이 패왕문주가 앞으로 나서자 무림맹 무사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가공할 무위를 보여준 패왕문주가 무슨 일로 앞으로 나왔단 말인가?
영호명이 내공을 모아 소리를 질렀다.
"데이몬!"
그가 느닷없이 데이몬을 부르자 무림맹 무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천호를 비롯한 무림맹 수뇌부들도 눈을 둥그렇게 뜨고 영호명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데이몬을 불렀다.
"데이몬, 너에게 도전하고 싶다."
그 말에 반응이 왔다. 허공을 선회하던 용의 머리 위에서 데이몬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영호명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운남에서 벌인 대결에서 난 너에게 패했다."
데이몬은 아무런 말없이 영호명의 고함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래서 너에게 다시 도전하려 한다. 무인대 무인으로서 다시 한 번 겨루어 실력을 판가름해보자."
영호명의 말은 그 자리에 모인 무사들에게 상당한 파장을 안겨주었다. 조금 전 영호명이 보여준 무위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무림맹의 쟁쟁한 장로들에 이어 손꼽히는 무력단체들까지 단신으로 꺾은 패왕문주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운남에서 벽안독성 데이몬에게 무참히 패배했었다니... 황천호가 눈을 크게 뜨고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벽안독성의 실력이 그 정도로 강했단 말인가?'
놀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청 역시 눈을 한껏 치뜬 채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세, 세상에 가가의 능력이 그 정도였다니...'
그녀의 옆에서는 황보경이 한없이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그토록 강한 무인이 자신의 오라버니인 것이다. 담담한 눈빛을 받고 있던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나에게 도전할 만한 상황이 아닐 텐데?"
"물론 나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 몸을 흐르는 무인의 피가 대결을 미루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구나. 그러니 데이몬. 나의 도전을 받아다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은 베르키스의 머리르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지 베르키스가 선회를 멈추고 날개를 접었다.
쐐애애액
거대한 본 드래곤의 동체가 빠른 속도로 바닥으로 내려 꽂혔다. 그 모습을 무림맹 무사들이 선망어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쿠웅
둔중한 음향과 함께 착지한 베르키스가 고개를 숙였다. 데이몬은 당청과 황보경의 허리를 얼싸안은 채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좋다. 너의 도전을 받아들이겠다."
그의 대답에 영호명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고맙다."
"고마울 건 없어. 그건 그렇고..."
말을 마친 데이몬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싸우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것 같군. 그러니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떤가?"
데이몬은 영호명을 생각해서 그런 제의를 한 것이다. 현재 데이몬은 무림맹 산하 당문의 식객 신분이다. 때문에 대결에서 패배하더라도 별달리 잃을 것이 없다.
그러나 영호명은 사정이 달랐다. 패왕문의 총수 신분이며 또한 잠마련 출신의 무사들을 대거 거둬들인 상황이었다. 그런 만큼 그가 이 자리에서 패한다면 그 반향은 상당히 클 것이다. 최악의 경우 사시가 오른 무림맹 무사들이 패왕문을 선제공격할 수도 있었다.
데이몬은 그런 정황을 감안하여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한 것이다. 눈치 빠른 영호명은 금세 데이몬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너에게 거듭 신세를 지는군. 네가 말한 대로 하겠다."
"녀석, 눈치 하나는 빠르군."
씨익 미소를 지은 데이몬은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거추장스러운 베르키스를 수납하기 위해서였다. 드래곤의 거대한 동체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모습을 무림맹 무사들이 입을 딱 벌린 채 쳐다보았다.
"세상에, 용이 사라져 버렸어."
준비를 갖춘 데이몬은 당청의 어깨를 살짝 짚었다.
"청아, 경이랑 무림맹으로 돌아가서 기다리도록 하거라."
"사, 상공."
당청의 큰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정인이 걱정되는 것이다. 패왕문주의 가공한 무위를 견식한 터라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데이몬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녀의 볼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염려 말거라.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냉유성이었다.
"주군, 제가 보필하겠습니다. 저를 데리고 가 주십시오."
그러나 데이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다. 대결의 결과는 철저히 비밀에 붙여져야 한다. 너는 이곳에서 청이를 지키고 있거라. 동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주, 주군."
냉유성이 충혈된 눈으로 거듭 호소했지만 데이몬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본 그가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저번에 대결을 벌인 장소가 낫겠지?"
"원하는 대로 하라. 어느 곳이든 상관없다."
"좋아."
마법진은 금세 완성되었다. 좌표를 설정한 데이몬은 마법진위에 올라섰다. 영호명도 군사인 갈천성에게 뒷일을 맡긴 다음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지존, 저도 데리고 가 주십시오."
비사문이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영호명은 승낙하지 않았다.
"그럼 다녀오겠다. 뒷일을 부탁한다."
영호명이 마법진 위에 올라선 것을 확인한 데이몬은 워프를 시행했다.
번쩍
눈부신 빛이 마법진을 온통 뒤덮었다.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운남으로 공간 이동되었다.
데이몬이 자표로 잡은 곳은 과거 마정지지가 있던 곳이었다. 데이몬이 영호명을 활강시에서 인간으로 만든 곳이기도 했다.
한때 이곳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혈마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데이몬이 혈마기를 모조리 빨아들여 암흑투기로 바꾼 탓에 이곳은 더 이상 마정지지가 아니었다.
바닥에 깔린 불그스름한 돌이 이곳이 한때 마정지지였다는 사실을 강변하는 듯했다. 데이몬이 이곳을 빠져나가면서 뚫어놓은 구멍 때문에 중심부에는 환하게 햇빛이 내려쬐고 있었다.
원래 공간이동은 약간의 어지럼증을 수반한다. 약간의 두통을 느낀 영호명이 눈매를 가늘게 좁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대번에 지하공동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이곳이로군."
영호명의 짐작이 맞다는 듯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곳에서 널 인간으로 만들었지."
영호명은 복잡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와 데이몬 사이에는 결코 풀 수 없는 원한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에게 큰 은혜를 입은 것도 사실이었다. 활강시가 되어 잠마련의 주구로 활동하던 그를 다시 인간으로 되돌려 준 은혜도 실로 컸다. 그러나 영호명은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버렸다.
"일전에는 너에게 호되게 당했지. 그러나 그때는 나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어."
데이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도 마찬가지일걸? 마왕이 된 나의 권능을 얕잡아보면 큰 코 다칠 것이다."
영호명은 물끄러미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사실 그때의 대결에서 내가 이길 수도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영호명은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을 뻗어 머리를 가리켰다.
"그땐 경황이 없어 떠올리지 못했지. 하지만 시간을 두고 차분히 생각해보니 방법이 없지 않았다."
"....."
"너에겐 소림의 금제안 칠종단금술이 걸려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는 칠종단금술을 강제로 발동시키는 주문이 각인되어 있지. 생각해 보라. 그때 내가 너를 옭죄고 있던 칠종단금술을 강제로 발동시켰다면 결과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데이몬의 안색이 돌변했다. 솔직히 그것까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영호명이 칠종단금술의 강제발동 주문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크로센 대제의 무덤에서 확인한 바가 있었다. 얼굴을 찌푸린 데이몬은 이를 갈았다.
"그랬다면 상당히 곤란한 꼴을 겪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칠종단금술에 걸려 있는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그래. 이번 대결에서 그 주문을 외울 것이냐?"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도 데이몬의 머릿속에는 걱정이 가득차 있었다. 만에 하나 영호명이 주문을 외운다면 상당히 큰 곤욕을 치러야 하지 때문이다. 뜻밖에도 영호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난 그러지 않을 것이다."
"....."
"너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한 가지는 확신한다. 나는 너를 진정한 무사이자 평생의 적수로 생각한다. 그런 너에게 그 따위 치졸한 방법으로 승리를 거두고 싶은 생각은 없다. 더욱이 너에게 소정의 빚까지 지고 있지 않느냐?"
데이몬의 얼굴이 다소 풀어졌다.
"놈! 그래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영 없지만은 않군."
그러나 이어지는 영호명의 어조는 서릿발 같았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용납하지 못한다. 네놈은 내 스승이자 평생의 은인인 혜정선사님을 무참히 살해했다. 그것 한 가지만으로도 너와 나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참을 수가 없어진 데이몬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하지 마라."
영호명을 노려보는 데이몬의 눈빛을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혜정선사님을 너 혼자만 스승으로 생각하는 줄 아느냐? 나 역시 그분을 너 못지않게 생각하고 있다. 비록 무공을 전수해주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 모두가 멸시하던 소림사 시절, 그분만은 유일하게 날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하나의 인격체로서 말이다. 그 사실을 알고 하는 소리냐?"
그 말에 반발하려던 영호명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데이몬의 눈동자에서는 불똥이 튀고 있었다.
"아직도 그분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뭐가 어쩌고 어째? 나더러 혜정선사님을 시해했다고?"
"난 그렇게 알고 있다. 혜정선사님을 무참히 살해한 범인이 바로 너라고 말이다."
쾅
난데없이 굉음이 울려 퍼져다. 참다못한 데이몬이 주먹을 들어 바닥을 내려친 소리였다. 바닥이 푹 패이며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내공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주먹이 터져 피가 주르르 흘러나왔다.
데이모은 핏발 선 눈을 들어 영호명을 노려보았다.
"개소리 하지 마라. 맹세코 난 혜정선사님께 해를 끼치지 않았다. 내가 한 것이라곤 단지 그분께 산공독이 든 차를 갖다드린 것뿐이다. 당시에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지. 차에 수면제가 들어 있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은 것이 나의 실수였다."
어느덧 데이몬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혜정선사를 떠올리자 감정이 북받쳐 오른 것이다. 영호명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그, 그렇가면 혜정선사님을 도대체 누가?"
입술을 질끈 깨문 데이몬은 당시의 정황을 설명했다. 소림사에서 냉대를 받으며 갇혀 있을 때 배교의 사준환이 보낸 백면염라 도위청이 그를 찾아왔다는 사실, 그리고 탈출하기 위해서는 혜정선사에게 수면제를 먹여 잠재워야한다는 말에 속아 산공독이 든 차를 갔다 주었던 일까지도.
"당시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심지어 그분께서 시해당했다는 사실조차도 먼 훗날에 알았으니 말이다."
사실을 전해들은 영호명은 한 방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혜정선사의 살해범으로 데이몬을 지목했었던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 그말이 사실이냐?"
"내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할 수 있다. 난 맹세코 혜정선사께 해를 끼친 일이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스승님을 시해했다는 말이냐?"
데이몬이 잠자코 정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혜정선사에게 산공독이 든 차를 갖다 주고 난 직후 점혈당해 정신을 잃었다. 그사이 도위청이 혜정선사를 암습했다. 산공독으로 말미암아 내공을 쓸 수 없었던 혜정선사는 도위청의 손에 무참히 살해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도위청은 의식을 잃은 데이몬을 데리고 소림사를 탈출했다. 데이몬은 배교에 입성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전해들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영호명은 아연했다.
"그, 그렇다면 스승님을 죽인 원흉은?"
"날 소림사에서 빼낸 백면염라 도위청이 바로 흉수지이지."
"하지만 그는 정사대전 중간에 의문스럽게 실종되었다고 들었는데?"
묵묵히 영호명을 쳐다보던 데이몬이 주먹을 불끈 거머쥐었다.
"그놈은 내가 죽였다. 배교 밖으로 유인한 뒤 사지를 토막내어버렸지. 혜정선사님이 시해당한 사실을 알고 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를 진정한 흉수라고 보긴 어렵다."
데이몬의 말을 인정한다는 듯 영호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황대로라면 도위청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혜정선사를 암습한 것이 틀림없었다.
"모든 일의 원흉은 사준환이다. 혜정선사를 시해하라고 명한 장본인이 바로 그놈이지."
"하지만 그놈은 이미 자결했다고 들었는데?"
데이몬은 코웃음을 쳤다.
"네 녀석은 그것을 믿나? 사준환이라는 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자결한 위인이 아니다. 그놈은 틀림없이 대역을 내세워놓고 잠적했을 것이다. 나중을 기약하면서 말이다."
영호명이 그럴 듯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금선탈각의 계를 썼다는 말이로군. 하긴 나도 드러난 사실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 사준환의 성정을 볼 때 그토록 쉽게 생을 포기할 위인이 아니지."
데이몬이 불타는 듯한 시선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놈은 나를 정말 철저히 농락했다. 그것도 모르고 난 그놈을 은인으로 생각했었지.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한 원한은 실로 크다. 마왕이 된 지금 복수를 위해 중원으로 건너온 것도 바로 그놈 때문이지."
묵묵히 데이몬의 말을 듣고 있던 영호명이 맞장구를 쳤다. 철혈문을 멸문시킨 것도 모자라서 따지러 간 나를 활강시로 만들어 버렸으니 말이다."
"사방으로 무수한 원한관계를 맺은 놈이지. 아무튼 나는 무슨 일이 있더리도 놈을 잡아서 혜정선사님의 한을 풀어드릴 것이다."
격정을 참지 못해 몸을 부르르 떤 데이몬이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대결을 앞두고 흥분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잠시 후 그는 차분히 가라앉은 눈빛을 영호명에게 던졌다.
"아무튼 사담은 여기서 끝내기로 하고 슬슬 대결을 벌이도록 할까?"
그러나 영호명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아니, 난 너와 대결을 벌이지 않겠다."
"그게 무슨 소리지?"
"난 지금까지 네가 선서님을 시해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사정을 들어보니 그렇지가 않구나."
"....."
"그리고 너와 나의 대결은 원천적으로 불공평하다. 사실을 몰랐으면 모른 척하고 복수를 감행했을 테지만 오해가 풀린 이상 대결을 벌이는 것은 무의미하다."
뜻밖의 말에 데이몬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게 대관절 무슨 말이냐?"
"넌 현재 칠종단금술에 걸려 있다. 따라서 인간을 대상으로 살생을 할 수가 없지. 그사실을 알고 있는 한 너에게 승산은 없다. 난 마음껏 널 공격할 수 있는 반면, 너의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데이몬은 이를 부득 갈았다. 영호명의 말이 백번 옳았기 때문이었다. 영호명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나는 첫 번째 대결을 벌였을 때와 처한 입장이 다르다. 그때는 홀홀단신이었지만 지금은 책임지는 문파와 사랑하는 두 여인이 있다. 그들을 두고 모험을 하는 것은 왠지 내키지 않는다."
듣고 있던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영호명의 심정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당장 자신이 잘못되면 당청이 그 얼마나 슬퍼할 것인가? 그 사실을 떠올리자 싸우고 싶은 마음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
그러나 거기에서 순순히 물러난다면 데이몬이 아니다. 그는 영호명에게 한 마디 쏘아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싱거운 녀석이로군. 먼저 시비를 걸어놓고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하자니 말이야. 그나저나 소림의 속가였던 네놈이 패왕문의 총수가 된 것은 정말 뜻밖이로군."
"거기에는 속사정이 있지."
영호명이 차분한 어조로 패왕문주가 된 연유를 설명해 주었다. 패왕문을 거두는 과정에서 풍소정과 수련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말을 들은 데이몬은 입을 딱 벌렸다.
"완전한 도둑놈이로군. 네 나이가 도대체 몇인데?"
"사돈 남 말할 처지가 아닐 텐데? 당문의 소저도 채 스물이 되어 보이지 않았거늘..."
영호명의 반박에 데이몬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이것으로 우리의 은원관계를 종결짓도록 하자. 어차피 서로에겐 책임질 사람들이 있으니 말이다."
끊이지 않는 데이몬의 독설에 영호명은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협력해야 할 것 같다."
"뭔가? 말해보아라."
"사준환에 대한 복수는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
데이몬도 지지 않겠다는 듯 맞받아쳤다.
"어림없는 소리! 놈의 목숨은 당연히 내 것이야."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데이몬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칠종단금술에 걸려 있는 네가 과연 사준환을 죽일 수 있나?"
할 말이 없어진 데이몬은 이를 갈며 영호명을 노려보았다. 어쨌거나 그에겐 사준환의 목숨을 거둘 방법이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영호명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놈의 목숨을 나에게 맡겨라. 너를 대신해서 내가 놈을 죽여주겠다. 더불어 나의 원한도 갚고..."
"어림없는 소리!"
툭하고 쏘아붙였지만 데이몬의 말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계획대로 사준환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막상 사준환 당사자에게 복수를 할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너와 사준환과의 사이에 얽힌 일을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곤란할 터, 내가 깔끔히 마무리지어주겠다."
"한번 생각해 보지."
퉁명스럽게 한 마디 내뱉은 데이몬이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대결이 무산되었으니 돌아가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더 이상 네놈의 낯짝을 보고 싶지 않다. 난 이만 가보겠다."
"사준환의 행방을 찾거든 꼭 전갈을 넣어주기 바란다."
데이몬은 영호명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휭 하니 몸을 돌렸다. 어느덧 그의 몸을 누부신 광망이 둘러싸고 있었다.
잠시 후 데이몬의 모습은 그곳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호명이 쓴웃음을 지었다.
"빌어먹을 자식. 운남의 오지에 나 홀로 버려두고 가다니..."
그러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그의 능력이라면 패왕문을 찾아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영호명의 몸이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쏜살같이 밀림을 가르기 시작했다.
잠마련의 무림맹 침공 이후 무림의 판도는 획기적으로 개편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무림맹주 황천호의 입지 개선이다.
지금까지 그는 장로들의 권세에 짓눌려 변변찮게 힘을 쓰지 못했다. 그랬던 것이 이번 일을 계기로 판이하게 바뀌었다. 빠른 상황판단으로 패왕문주와의 협상을 성공시켜 일을 완만하게 마무리한 것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틀의 말미를 준 뒤 황천호는 무림맹의 무사들을 이끌고 잠마련의 총단을 공격했다. 이미 잠마련의 총단에는 개미새끼 한마리 남아있지 않았다. 무림맹이 공격해 올 것을 아는 마당에 그 누가 남아있겠는가? 대부분의 잔존세력은 패왕문에 투신하는 길을 선택했기에 잠마련 총단은 텅 비어버린 상태였다.
황천호가 이끄는 무림맹 무사들은 잠마련의 총단을 철저히 초토화시켜버렸다. 닥치는 대로 파과하고 그 잔해에 불까지 질렀다. 그렇게 해서 한때 사파 최고의 세력으로 평가받던 잠마련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대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패왕문주에게 덤볐던 장로들의 세력은 급속히 위축되었다. 처참한 패배에 이어 주력 무사집단까지 일패도지했으니 도저히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무림맹의 권력은 맹주 황천호를 중심으로 급속히 개편되었다. 물론 장로들을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군소방파 출신의 하급무사들이 대거 지지했기에 황천호는 무림맹에서 상당한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사건은 당문의 급속한 부상이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데이몬의 후광이 작용한 덕분이었다. 이번 일로 인해 데이몬의 위명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용을 불러내어 막강한 잠마련의 강시군단을 단숨에 분쇄해버린 자.
-압도적인 무위를 지닌 패왕문주에게 패배를 안겨준 자.
거기에다 패왕문주 영호명이 현경에 오른 고수라는 소문이 퍼지자 데이몬의 위명은 더더욱 치솟았다. 현경의 고수를 꺾었다면 데이몬도 의심할 여지없는 현경의 고수라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데이몬과 패왕문주의 두 번째 대결 결과를 궁금해 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당문으로 복귀한 데이몬이 대결 결과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영호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패왕문으로 복귀한 뒤 그는 데이몬과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굳게 닫아걸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저 상상만으로만 대결의 결과를 도출해낼 수밖에 없었다.
-벽안독성 데이몬과 패왕문주는 아마도 무승부를 기록했을 것이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정적으로 도출해낸 결론이었다.
그런 데이몬이 뒤를 봐주는 탓에 당문의 미래는 탄탄대로였다. 그 증거로 당문에서 벌인 개파대전에는 수많은 무림의 명숙들이 참석했다. 구파일방은 물론이고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대거 참석했다. 모두가 데이몬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참석한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당문의 개파대전에 마교의 교주와 패왕문주가 참석한 것이다. 이례적으로 마교의 교주에 새로 오른 담천위가 달랑 호위 몇 명을 대동하고 당문을 찾아왔다.
처음에는 담천위를 공격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악의 대명사인 마교의 교주가 찾아왔으니 몇몇 젊은 무사들이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행동에 나서려 한 것이다. 그러나 마교 교주 담천위와 데이몬 사이에 오간 대화가 공개되자 그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잘 있었나, 친구?"
"어서 오게. 이 먼 곳까지 용케도 찾아왔군."
"후후. 친구의 처가에서 개파대전을 벌이는데 내가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당연히 축하해주러 와야지."
그 대화를 통해 벽안독성 데이몬과 마교의 신임교주 담천위가 친구 사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로 인해 마교 교주를 공격하려던 자들은 아연해 해야 했다.
데이몬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담천위를 친구의 예로써 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파의 명숙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예로부터 무림은 힘으로써 인정받는 법. 그에 걸맞은 힘을 지닌 이상 데이몬에게 시비를 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뒤 패왕문주 영호명이 비사문을 대동하고 당문을 찾았어도 사람들은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정과사, 마를 아울러 폭넓게 교분을 맺은 거인을 그저 부러워할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당문의 개파대전은 지극히 성대하게 치러졌다.
개파대던 이후 당문의 전력은 하루가 다르게 강력해졌다. 수많은 청년들이 당문의 무사가 되기 위해 당가타를 찾았다. 제법 명성을 떨친 낭인무사들도 서슴없이 당문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당문의 전력에 한 명의 초절정고수가 가세했다. 자신만의 문파를 창설하기 의해 제자들과 함께 노심초사하던 염왕도 초무극이 당문에 투신한 것이다.
사실 문파 하나를 창설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초무극은 머뭇거림 없이 당문의 일원이 되기를 선택했다. 물론 그의 진정한 의도는 데이몬의 옆에 머물며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뜻밖의 사태에 당문의 문주 당문수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초무극 정도의 초절정고수라면 당문의 전력에 엄청난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해결되고 난 뒤 데이몬은 냉유성과의 군신관계를 철회했다.
"넌 나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해 주었다. 따라서 더 이상 너를 붙잡고 있지 않겠다. 원하는 곳으로 가거라."
"그럴 순 없습니다, 주군. 주군께서는 저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데이몬은 막무가내로 냉유성과의 군신관계를 철회했다. 그때 사람들은 예상했다. 냉유성이 틀림없이 당문에 투신할 것이라고.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냉유성은 공동파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이해해 주십시오. 저는 도저히 절 키워준 사문을 버릴 수가 없군요."
뜻밖의 사실에 허탈해 했지만 당문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초무극이 가세한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공동으로 돌아간 냉유성은 그야말로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그리고 만장일치로 차기 장문인 후보가 되었다. 새로 장문인이 된 춘성진인이 모든 제자들 앞에서 공언함으로써 공동에서의 냉유성의 위치는 확고해졌다.
변화는 사파에서도 거세게 일었다. 사파 최강의 문파이던 잠마련이 허무하게 몰락하고 나서 패왕문이 사파의 새로운 종주자리를 거머쥐었다. 잠마련 출신의 무사들이 대거 패왕문에 투신했기에 걸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또한 패왕문주가 진령평원에서 선보인 가공할 만한 무위 덕분에 사도의 문파들은 두 말도 하지 않고 패왕문을 사파의 종주로 인정했다. 전대 패왕문주였던 풍소정의 염원이 채 1년도 되지 않아 현실이 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무림의 정세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개편되었다.
한때 잠마련의 총단이 위치했던 곳은 적막하기만 했다. 과거의 영화는 간데없이 오직 폐허만이 남아 있었다. 황천호가 이끄는 무림맹 무사들이 그야말로 초토화를 시켜버린 탓이었다. 그런데 그 폐허를 묵묵히 쳐다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꼬질꼬질한 차림새에 쭈글쭈글한 얼굴, 허리에 망태 하나를 걸고 있는 것을 봐서 심마니 같았다. 폐허를 쳐다보던 노인이 탄식을 했다.
"사상누각이었군. 이토록 급속히 허물어지다니 말이야."
그의 눈빛에는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노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천기대제 사준환이었다. 금선탈각의 계책을 사용하여 빠져나온 그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선 허탈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평생을 일구어 온 세력이 잿더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는 묵묵히 실패의 원인을 되새겨 보았다.
"데이몬 그놈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 돌아가지 않았을 텐데."
데이몬만 아니었다면 지금 사준환은 무림맹 맹주의 의자에 앉아서 속속 가세하는 사파 무사들의 인사를 받고 있을 터였다. 생각할수록 아쉬웠지만 사준환은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버렸다.
"이미 지난 일에 미련을 둘 필요는 없지. 이젠 앞으로의 계획을 짜야할 시간이다."
비록 잠마련이 무너졌지만 그에겐 야망을 접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니, 더욱 시간을 두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기필코 야망을 실현시킬 작정이었다. 이미 그는 그러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 둔 상태였다.
"새로운 신분이 준비되어 있다. 이번에는 마도가 아닌 정파에서 시작하는 것이지. 몰락해서 완전히 무림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간주된 북궁세가. 그 북궁세가가 다시 무림에 등장하는 것이다."
북궁세가는 한때 오대세가 안에 들었을 정도로 힘이 있었던 문파였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배교와의 전면전을 통해 완전히 패망했다. 그것이 무려 20년 전의 일이었다.
사준환은 바로 그 북궁세가를 부흥시켜 새로운 발판을 삼으려고 하고 있었다.
북궁세가의 식솔들은 불과 몇 십 명만이 살아남아 절강성의 오지에서 은인자중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겐 세가를 부흥시킬 만한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그들의 근거지로 북궁천후라는 세가의 전대 고수가 나타났다. 그는 잃어버렸던 북궁세가의 무공비급과 헤아릴 수 없는 영약, 그리고 재보를 가지고 북궁세가를 찾았다.
그로 인해 쇠락했던 북궁세가 식솔들은 다시금 가문의 부흥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대가로 북궁천후는 북궁세가의 가주로 추대되었다. 이후 그들은 잃어버린 가문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하여 무공연마에 전념한다.
그 북궁천후라는 인물은 다름 아닌 사준환의 화신이었다. 그는 이런 일을 대비해 몰래 신분을 위장하여 북궁세가를 지원한 것이다.
"계획은 완벽하다."
사준환은 담담한 눈빛으로 잠마련의 폐허를 쳐다보았다. 잠마련의 지하, 오직 그만이 아는 비밀창고에는 그동안 잠마련이 모아온 온갖 영약과 무공비급, 그리고 재보가 들어 있었다. 무림맹 무사들이 철저히 수색했지만 그곳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사준환은 바로 그것을 회수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영약과 무공비급을 가지고 북궁세가로 돌아가서 무사들을 키운다. 그럼 다음 무림에 다시 등장하는 것이지. 내 지략을 모두 동원한다면 북궁세가가 오대세가에 드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이미 수좌인 모용세가가 많은 힘을 소진한 상태이니 말이다."
물론 사준환은 북궁세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진짜 북궁천후는 오래 전 그의 손에 죽어 시체마저 썩어버렸다. 사준환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맺혔다.
"독으로 수하들을 통솔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더욱 좋은 방법은 심령금제를 통해 수하들을 제어하는 것이지."
그는 이미 심령금제에 대한 연구를 만족할 정도로 해 놓은 상태였다. 돌아가는 대로 북궁세가의 식솔들을 상대로 심령금제를 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북궁세가의 식솔들은 감히 거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자신의 명에 철저히 따를 것이 틀림없었다.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다시 한 번 무림을 뒤흔드는 것이지. 다름 아닌 머리를 이용하여."
그때 사준환의 상상에 찬물을 끼얹는 일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놀고 있군."
깜짝 놀란 사준환이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누군가가 나타나 뒤에 버티고 서 있었다. 문제는 그가 자신의 야망을 꺾은 인물이라는 점이다.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데이몬이었다. 그가 단신으로 나타나 팔짱을 낀 채 스산한 눈빛으로 사준환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랜만이로군, 사준환."
사준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가 급히 얼굴을 찡그리며 허리를 굽혔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소인은 그저 장뇌삼을 캐기 위해..."
"연극 따윈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이미 네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고 있다."
말이 끝나는 순간 사준환의 눈이 커졌다. 상투 속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꿈틀거리는 물건을 잡아챘다.
"이, 이건?"
손에 잡힌 것은 기괴하게 생긴 벌레였다. 지금껏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생김새의 벼룩만한 벌레가 손에 잡혀 버둥거리고 있었다. 귓전으로 부연설명이 들려왔다.
"마계의 곤충 중 하나다. 나와 심령이 통해 있어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벌레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지. 강시군단을 박살낸 직후 난 너에게 이 벌레를 뿌렸다. 상투 속에 파고드는 즉시 가사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눈치 챈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깝지."
비로소 연유를 알아차린 사준환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쥔 사준환.
퍽
벌레의 몸이 산산이 으스러져 버렸다. 더 이상 속일 상황이 아니었다. 사준환의 눈가에 스산한 빛이 감돌았다.
"용케도 알아냈군."
"네놈은 결코 자결한 위인이 아니지. 흐흐. 조잡한 금선탈각 따위로 내 눈을 속이려 했었나?"
사준환은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무림맹의 머저리들은 대부분 속아 넘어갔지. 아무튼 대단하더군. 내 계략을 그토록 철저히 봉쇄하다니 말이야."
데이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미소 띤 얼굴로 사준환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 가지 제안을 하지."
"....."
"나와 손을 잡는 것은 어떤가? 원한다면 널 무림의 제왕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 정사마를 통틀어서 말이다. 나의 뛰어난 머리는 충분히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사준환은 데이몬을 회유하는 길을 택했다. 현재 그의 무력으로는 데이몬을 당해낼 수 없다. 그러므로 좋은 말로 회유한 다음 빠져나갈 방도를 모색하려 하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데이몬은 사준환의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내가 누군 줄 아는가?"
물론 사준환이 데이몬의 진정한 정체를 알 리 만무했다. 그는 데이몬을 단순히 서역에서 건너온 술사로 알고 있다. 그런 사준환을 향해 데이몬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정체를 밝혔다.
"나의 중원식 이름은 독고성이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사준환의 표정이 곤혹스러워졌다. 당연히 그가 독고성을 모를 리 없다. 문제는 외눈에 꼽추인 독고성과 눈앞에 데이몬이 도무지 일치되지 않는 점이다. 데이몬은 무감감한 어조로 사준환의 의구심을 풀어주었다.
"소림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네놈이 보낸 도위청에 의해 구함을 받았지. 당시 난 너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신뢰했다. 애초에 내가 소림사에 잡혀가게 된 이유가 네놈 때문이란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말이다. 너는 내 인생 전체를 움켜쥐고 농락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배신을 했지.
들리는가? 네놈으로 인해 죽어간 수호마왕군 수하들의 원한어린 음성이? 그것을 잊지 못해 내가 건너왔다. 몸을 바꾸고 마왕의 권능까지 얻은 상태로 말이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사준환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 믿을 수 없다."
"네놈이 믿건 말건 상관없다. 내가 독고성인 것은 틀림이 없으니 말이다."
"거, 거짓말."
사준환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쌍수를 휘둘렀다. 그의 손은 어느덧 혈관이 투영될 정도로 하얗게 변해 있었다. 천자혈마공보다도 극악한 연공과정을 거쳐야 하는 소수마공이었다.
그러난 상대는 마왕이다. 소수마공 따위로 어떻게 할 상대가 아니었다. 거무튀튀한 기운에 휩싸인 데이몬의 손이 소수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다음 순간 소름끼치는 음향이 울려 퍼졌다.
우두두둑
놀랍게도 소수마공이 그대로 깨어져버린 것이다. 완전히 으스러진 손을 감싸 쥔 채 사준환은 신음을 흘렸다.
"크으으으."
"이제 네놈에게 지금껏 당한 원한을 그대로 설욕하겠다."
"나, 날 죽일 생각이냐?"
그러나 데이몬은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러는 것은 너무 편한 복수야. 난 네놈을 함거에 가뒤놓고 무림 전역을 돌아다닐 작정이다. 지금껏 네놈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마음 놓고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말이야."
사준환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 말대로 한다면 달려드는 사람은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터였다. 그때 나지막한 음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 방법은 별로 권장하고 싶지 않군."
놀란 것은 사준환뿐만이 아니었다. 데이몬 역시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그의 이목을 속이고 다가와 있으니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다.
"누구냐?"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영호명이었다. 그가 아름드리나무 아래 팔짱을 낀 채 버티고 서 있었다. 데이몬을 보며 그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망신을 주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냐. 어쨌거니 놈은 한때 사파 무림의 지존이었다. 그에 걸맞게 깨끗이 최후를 안겨주는 것이 나아."
데이몬이 얼떨떨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네, 네놈이 도대체 어떻게 여기에?"
영호명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소매 속에서 조그마한 병을 꺼내들었다.
"천리추종향이라는 것이다. 군사에게서 건네받았지. 당문의 개파대전 당시 너에게 슬쩍 발랐어. 아무래도 네 녀석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데이몬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놈."
"어쨌거나 사준환의 목숨은 내가 거두어주겠다. 약조한대로 말이다."
입술은 질끈 깨물고 있던 사준환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듯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그가 분개하는 것은 당연했다.
"네놈은 도대체 누구냐?"
"나는 패왕문주다."
사준환은 머릿속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패왕문주가 어인일로 자신을 찾아왔단 말인가?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그를 경악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네놈의 손에 의해 활강시가 된 기분은 그리 좋지는 않더군."
사준환이 떨리는 손을 들어 영호명을 가리켰다.
"그, 그렇다면..."
"맞아. 네놈에게 사로잡혀 철마가 되었던 자가 바로 나다. 어떻게 생각하나? 너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영호명은 도의 손잡이를 움켜쥔 채 사준환에게로 다가갔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사준환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니 얼마 가지 못하고 나무에 가로막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스르릉
그 모습을 쳐다보던 영호명이 도를 뽑아들었다.
"네놈이 저질렀던 죄악한 죄상에 대해 종지부를 찍어주겠다."
그때 데이몬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안 돼! 그놈을 그리 쉽게 보내면 속이 풀리지..."
데이몬이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또다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영호명의 시선 역시 그쪽으로 향했다. 그쪽을 쳐다본 데이몬의 눈이 커졌다.
"너, 넌?"
그 자리에는 어느새 서너 명의 사람들이 등장해 있었다. 그중 가운데에 서 있던 중년인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친구, 잘 있었나? 늦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로군."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마교의 신임교주 담천위였다. 그의 옆에 서 있는 노인은 마교의 집법장로 위연이었다. 느닷없는 마교 고수들의 등장에 데이몬과 영호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사준환을 노려보고 마교 무사들의 눈에는 원독이 광망이 서려 있었다. 마교 역시 사준환과 씻을 수 없는 원한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를 노려보며 담천위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사준환에 대한 원한은 본교도 누구에게 못지않지. 본교가 복수에 동참하는 것을 허락해 주게, 친구."
데이몬은 미간을 지그시 모았다.
"자네는 어떻게 이곳을 찾아왔지? 영호명 녀석처럼 추종향을 사용했나?"
담천위가 겸연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추종향이라고 하지. 당문의 개파대전 때 자네에게 은근슬쩍 발라 놓았네. 자네라면 기피코 사준환을 찾아낼 수 있을것 같아서 말이야."
데이몬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준환에게 마계의 곤충을 심어놓고 의기양양했었는데 막상 자신에겐 두 종류의 추종향이 뿌려져 있었던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군."
"속여서 미안하네, 친구. 하지만 이해해 주게. 본교가 사준환 저놈으로 말미암아 입은 피해를 누구보다도 잘 알지 않나?"
웃는 낯으로 말을 이은 담천위가 영호명을 쳐다보았다.
"당문의 개파 대전 때 뵙고 또 뵙는구려, 문주."
"반갑소이다, 교주."
"미안하지만 본교에도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오. 물론 마무리는 패왕문주께 양보하리다."
뜻밖의 제안에 영호명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어떻게 복수를 하시려고?"
담천위의 얼굴에 서릿발 같은 한기가 돌았다.
"본교에는 인간에게 극한의 고통을 가하는 고문기술인 백대독형이 있소. 그것을 사준환에게 시술하고 싶소. 물론 본교가 입은 피해는 그 정도로도 갚을 수 없을 만큼 지대하오."
"하, 하지만..."
"놈의 마지막 명줄을 끊는 것은 패왕문주께 맡기겠소. 그러나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소."
말을 마친 담천위가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이해를 좀 해 주게, 친구. 본교가 본시 은원관계가 확실하다는 사실을 잘 알지 않나? 받은 것을 되갚기 전에는 본교의 부흥이 힘들 것 같아 그러네."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자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자네에게 천마추종향을 뿌린 죄는 훗날 술로써 갚겠네."
돌아가는 대화를 듣던 사준환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꼼짝없이 마교의 백대독형을 당해야 할 판국이라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 상황에서 독을 쓸 수 없다. 데이몬이란 놈은 해독의 대가. 그렇다면...'
독하게 마음먹은 사준환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심맥을 끊어 자결하려는 것이었다. 소수마공을 익힌 터라 자진할 만한 내공은 충분했다.
쿠쿠쿠쿠
내공이 폭주하며 그의 심맥이 갈가리 찢어져버렸다. 입술을 비집고 분수처럼 피가 뿜어져 나왔다.
푸우우
뜻밖의 상황에 모두의 시선이 사준환에게로 향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사준환은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날 멋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 것 같나? 흐흐, 그렇게는 못하지."
데이몬은 그 광경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트루베니아로 건너갈 당시 내가 느낀 심정이 너와 동일했다. 인과응보라고 네가 고스란히 그 꼴을 당하게 되는구나. 하지만 어림없다. 넌 내 허락 없이는 죽을 수도 없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데이몬이 힐링마법을 전개했다. 하나의 주문이 끝나기 전에 다른 주믄을 중첩하는 연쇄 캐스팅이었다.
데이몬의 손끝에서 퍼부어진 눈부신 빛은 끊어진 사준환의 심맥을 급속도로 복구했다. 심맥이 이어진 것을 느낀 사준환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이게 어찌 된?"
"넌 내 허락 없이는 죽지 못한다."
비릿한 미소를 지은 데이몬은 손가락을 퉁겼다. 순간적으로 쏘아진 지풍이 사준환의 기해혈에 구멍을 뚫어버렸다.
"크으윽."
묵직한 신음소리와 함께 사준화의 아랫배가 피로 젖었다. 이제 그는 무공이 폐지당해 심맥조차 자력으로 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불안요소를 완전히 제거해 버린 데이몬이 담천위를 쳐다보았다.
"만약 백대독형을 가한다면 인간의 몸이 얼마나 버틸 수 있나?"
"지금껏 나온 결과로는 독형 아홉 가지를 가하는 것이 한계이더군. 그 이상은 신경이 녹아버려서 불가능했어."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에 한번 시험해 보게. 한 인간의 몸에 백대독형을 모조리 퍼붓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란 말이야. 놈의 몸을 회복시키는 것은 내가 맡겠네. 아무리 엉망으로 망가뜨려도 원래대로 회복시킬 수 있으니 아무 걱정 말게."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언덕 아래 마차에 본교의 고문기술자들이 대기하고 있네. 이번 기회에 본교 백대독형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아봐야겠군."
담천위의 눈빛이 환희로 빛났다.
"걱정하지 말게. 고문에 못 이겨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사준환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은 죽을 때까지 극심한 고문에 시달려야 한다. 상대가 허락하지 않는 한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다.
"안 돼! 제발 그러지 말아다오."
그러나 데이몬과 영호명, 담천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네가 한 짓을 생각해라."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마음껏 가지고 놀 때는 좋았겠지? 이제 그 반대의 경우가 닥쳤군."
"인과응보라고 모든 업보는 그대로 돌아오는 법이다."
담천위가 손짓을 하자 마교 무사들이 우루루 몰려왔다. 그들은 마구 울부짓는 사준환을 사정없이 끌고 갔다. 잠마련이 존재했었던 잔해 사이에는 고문할 만한 장소가 충분했다.
"이럴 수는 없어. 제발 날 이대로 죽여 다오."
그러나 사준환의 절규에 신경 쓰는 무사는 아무도 없었다.
사준환은 예전에 잠마련에서 지하 뇌옥으로 쓰던 장소로 끌려갔다. 담천위와 위연은 고문기술자들이 사준환에게 백대독형을 가하는 과정을 지켜보기로 했다. 데이몬과 영호명은 뇌옥의 위 폐허에 남았다. 사준환의 목숨이 경각에 달할 경우 즉시 데이몬이 내려가서 힐링을 퍼부을 터였다.
"끄아아아악."
폐부를 관통하는 듯한 비명소리가 철문을 뚫고 위로 전해졌다. 비명소리를 들은 영호명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업보가 많은 작자로군. 저토록 많은 원한관계를 맺다니 말이야."
"놈은 그래도 싸. 지금껏 해 온 짓을 생각하면 이것도 오히려 약소하지."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영호명이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너는 어떻개 할 생각이냐?"
"뭐가 말인가?"
"마계에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냐?"
영호명을 쳐다본 데이몬이 씩 웃었다.
"물론 돌아가야지. 하지만 지금은 아냐. 당문이 확고하게 정파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고 나서 기회를 보아 떠날 생각이다."
"그래야지. 마왕이 인간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인과율에 어긋 나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아르카디아에서 보낸 시절이 떠오르느군."
영호명의 눈이 아련해졌다. 아르카디아는 그가 반생을 보낸 곳이다.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해도 그립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돌아가고 싶으냐?"
데이몬의 물음에 영호명은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이미 중원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몸. 거기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마땅히 그래야지."
바닥에 걸터앉은 데이몬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계에 돌아가더라도 머지않아 여행을 떠날 것 같다. 환생한 율리아나를 찾아 헤매는 길고 긴 여행이지."
"율리아나? 그게 누구지?"
"내가 마왕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막아준 소녀이다. 난 율리아나에게 큰 빚을 졌어. 그녀는 날 구하기 위해 신의 분노를 샀다. 그리하여 불행한 삶을 끝없이 윤회해야 하는 운명을 맞이했지. 그 빚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난 환생한 그녀의 삶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려 한다."
영호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신이 정해준 운명에 관여하는 것은 좀 그렇지 않나?"
데이몬이 씩 웃었다.
"내가 누군지 잊었나? 난 마왕이야. 신이 부여한 인과율을 충분히 거스를 권능이 있는 존재라고."
"하긴..."
납득했다는 듯 영호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중원에서의 복수행이 거진 마무리된 셈인가?'
복수를 성공시킨 지금 그의 마음은 더 없이 통쾌했다. 사준환은 그야말로 소행에 걸맞는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끝]  -J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