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몬 5권 *****깨어난 철마***** 트루베니아는 영호명게 정말로 놀아운 세상이었다. 오크나 엘프 따위의 유사인종과 각종 몬스터가 인간과 끊임없이대립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그에겐 하나의 충격이었다. 게다가 드래곤의 존재는 경악 그 자체였다. "정말 놀라운 세상이로군. 세상에 이런 곳이 존재하다니...." 화전민 마을에서 기거하며 말을 익힌 영호명은 마침내 세상으로 나왔다. 세상에 나와 그가 선택한 직업은 용병이었다. 세상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독고성을 수소문해 볼 수 있는 직업으로는 용병이 최고였기에 그는 머뭇거림 없이 용병길드에 적을 올렸다. 용병이 된 영호명은 금새 두각을 나타냈다.오우거 서너 마리정도를 식후 운동 삼아 처치하는 실력이 화젯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문을 들은 기사들이 찾아와 영호명에게 비무를 요청했지만 영호명은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았다. 그 사실로 인해 영호명은 트루베니아에 존재하는 왕국의 군주들로부터 끝없는 러브콜을 받게 된다. 만약 그때 영호명이 군주들의 충성요청을 받아들였다면 어쩌면 크로센 대제라는 이름이 트루베니아에 등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호명은 무인의 자존심을 발휘해 그 모든 요청을 과감히 거절한다. "나를 거느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보다 강한 사람뿐이오 나를 꺾으시오. 그럼 충성을 바치겠소." 물론 현경의 고수인 영호명을 꺽을 수 있는 이는 트루베니아에 없었다. 소드 마스터 열 명이 합공을 하더라도 승산이 없는 판국인데 그 어떤 군주가 언감생심, 그럼 욕심을 품겠는가? 그 결심으로 인해 영호명은 여러 왕국의 군주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된다. "하찮은 용병놈이 하늘 높은줄 모르는군." "저런 놈은 매장시켜야 해." 그리하여 영호명은 변변찮은 청부조차 받지 못한 채 트루베니아 전역을 유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지 않았다. 그저 각지를 여행하며 독고성에 대한 정보를 수소문 하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이다. 그가 트루베니아 전역을 돌아다니는 사이 마침내 제 1차 종족전쟁이 터졌다. 점점 영역을 넓혀 나가던 오크와 인간이 급기야 영토분쟁을 벌인 것이다. 1차 종족전쟁은 오크에게 월등히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오크는 태어난 지 1년이면 당당히 전사로 내보낼 수 있다. 게다가 수적으로도 세 배 이상 우세했기에 인간들은 상당히 힘든 전투를 치러야 했다. 헤아릴 수 없는 왕국들이 패망했고 인간들은 오크의 손에 무참히 살해되었다. 당연히 영호명은 인간의 편에 서서 싸웠다. 평소에는 경원시 하던 왕국의 군주들도 막상 위기가 닥치자 영호명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렇게 해서 영호명은 용병의 신분으로 전장에 참가해 오크의 대군과 맞서 싸웠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공을 세운다. 그 전쟁에서 그는 생애 두 번째 분기점을 맞게 된다. 오크 군대에 의해 영토가 점령당한 크로세나 왕국의 국왕과 대면하게 된 것이다. 영호명의 능력을 알아본 크로세나 국왕은 건곤일척의 도박을 벌인다. 아끼던 딸과 크로세나 왕국의 왕관을 영호명에게 맡긴 것이다. 크로세나 국왕을 만난 이후 영호명은 본격적으로 패왕의 길을 꿈꿀 수 잇게 된다. 비록 영토는 없지만 그에겐 500여 명에 달하는 병사와 기사가 생겼다. "그대들은 이제부터 나의 가신들이다. 왕국의 이름을 크로세나에서 크로센으로 바꾼다" 영호명은 그들에게 철혈문 비전의 내공심법을 아낌없이 전수했다. 영호명은 지금껏 트루베니아를 여행하면서 그 누구에게도 무공을 전수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 맞이한 가신들에게까지 비밀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트루베니아 대륙은 중원보다 약 네 배가량 대자연의 기가 풍부하다. 중원의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내공심법을 전수받자 휘하 기사들의 성취는 상상을 초월했다. 거기에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영호명이 달라붙어 지도했으니 기사들의 성취가 남다른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크와 인간의 종족전쟁은 상당히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 영호명은 5년 가량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기사들을 훈련시켰다. 그 결과 그는 태반이 검기를 구사할 수 있는 막강한 기사단을 휘하에 거느리게 된다. "되었다. 이제부터 우리 크로센 왕국의 이름이 트루베니아를 위진시킬 것이다." 자신이 직접 키워낸 기사단을 이끌고 참전한 영호명은 그야말로 연전연승을 거듭한다. 죽음을 겁내지 않는 오크의 군대조차 크로센 왕국의 깃발만 보아도 공포에 질려 벌벌 떨 정도였다. 수많은 오크의 군단이 크로센 기사단의 발굽 아래 짓밟혔다. 채 6개월도 되지 않아 영호명은 과거 크로센 왕국의 영토를 모조리 되찾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군대는 강해졌다. 피난다니던 크로세나 왕국 출신의 기사와 병사들이 속속 가세했기 때문이었다. 군대에 자원한 이는 크로세나 왕국 출신뿐만이 아니었다. 오크에게 멸망한 왕국 출신의 병사들도 복수를 부르짖으며 투신해왔던 것이다. 어느덧 영호명의 휘하에는 이천 여 명이 넘는 기사와 십만에 가까운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군주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것이다. 비록 그가 엄청난 활약을 펼치긴 했지만 전황은 여전히 오크쪽에 기울어 있었다. 영호명은 전황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기 위해 특전대를 결성한다. 임무는 오크의 본진 깊숙이 보관되어 있는 오크 족의 서약석 탈취였다. 그 길만이 하나로 단단히 뭉쳐 있는 오크의 결속력을 파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정말 힘든 임무였다. 오크 병사들은 종족의 서약석을 지켜내기 위해 부나방처럼 몸을 날렸다. 임무에 투입된 기사 절반이 전사하고 영호명 역시 심한 상처를 입어야 했다. 하지만 임무는 훌륭하게 수행했다. 오크의 서약석을 탈취해 내는 데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그리하여 승리의 여신은 오크에게서 시선을 접고 인간들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인간이 트루베니아를 지배하는 종족으로 우뚝서게 된 것이다. 당시의 일들을 되새겨보던 영호명이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정말 힘든 나날이었지. 몸에서 피비린내가 가실 날이 없었으까..." 영호명의 활약으로 인간들은 드디어 승기를 굳건히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서약석을 잃은 오크들은 지리멸렬해서 패주를 거듭했다. 몇몇 오크 영웅들이 분전했지만 현저히 기울어진 전세를 반전시키지 못했다. 그리하여 트루베니아 대륙의 대부분이 마침내 인간의 손에 들어왔다. 하지만 거기에서도 문제가 발생한다. 영호명의 활약을 시기한 각급 왕국의 군주들이 그를 몰아내기 위해 계략을 꾸민 것이다. 그대로 진행되다가는 인간들이 둘로 나뉘어 전쟁을 벌이게 될 판이라 영호명은 큰 용단을 내렸다. "우린 신대륙 아르카디아로 건너가겠소. 그곳을 개척하여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리다." 각급 왕국의 군주들은 그 결정에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그대로 싸우더라도 막강한 크로센 기사단을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호명은 휘하의 병력들을 모두 이끌고 배에 올랐다. 그리고 100일이 넘는 항해 끝에 마침내 아르카디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르카디아를 개척하는 것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개척민들은 영호명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몬스터를 몰아내고 밭을 개간했다. 영호명은 그곳에서도 최전방에 서서 몬스터와 싸워야 했다. 그 무렵 트루베니아에서 변고가 일어나 지원군을 대거 보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암흑의 군대, 마왕 나이델하르크가 준동한 것이다. 영호명은 다시 병사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가 어둠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 그리고 마왕을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영호명을 보는 트루베니아 군주들의 시선에는 여전히 질시가 섞여 있었다. 그로 인해 영호명은 트루베니아에 크나큰 실망을 하게 된다. "이제 두 번 다시 트루베니아와 연을 맺지 않을 것이다." 영호명은 그를 추종하는 무리를 데리고 아르카디아로 넘어왔다. 그리고 힘을 모아 꿋꿋하게 아르카디아를 개척해 나갔다.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의 몬스터와 힘겹게 맞서 싸우던 끝에 개척민들은 마침내 아르카디아 전역을 인간의 지배하에 넣을 수 있었다. 아르카디아의 곳곳에 수십 개의 왕국들이 생겨났다. 영호명 역시 아르카디아의 중심부에다 자신의 국가를 세우고 크로센 제국이라는 국명을 붙엿다. 아르카디아에서 유일한 제국으로 여타의 왕국들이 자발적으로 조공을 바치는 종주국이었다. 이후 영호명은 제국을 안정시키는 데 모든 것을 바쳤다. 그때가 영호명의 인생에 있어 최고의 황금기였다. 반생을 같이 했던 아내 발레리에게서 다섯 명의 자식들을 보았고 황제를 위해 목숨조차 바칠 수 있는 충직한 신하들과 기사들이 항상 옆에서 보필했다. 그때를 떠올린 영호명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정말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지. 지금 생각해 보아도 결코 후회가 없는 생이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영호명의 마음에는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평생을 두고 사랑했던 아내 발레리가 노환으로 세상을 떴으며 함께 전장을 전진했던 가신과 기사들도 하나둘씩 이승을 하직했다. 그렇게 되자 영호명은 비로소 자신이 이룬 경지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현경에 오름으로써 평범한 사람보다 몇 배는 오래 살 수 있게 되었지만 모든 지인들이 떠나간 뒤 홀로 살아남아 무엇 하랴. 결국 영호명은 두고 온 고향인 중원에 대한 향수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트루베니아에서의 생을 정리하고 중원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중원으로 귀향하는 데 걸림돌은 전혀 없었다. 차원이동을 위한 매개체가 있었고 뒷받침해줄 고위마법사도 있었다. "크로센 제국은 내가 없더라도 잘 돌아갈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해서 이계에서의 새로운 삶을 정리했다. 영호명은 먼저 큰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준 뒤 가짜 장례식을 치렀다. 아르카디아의 모든 개척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위대한 영웅의 타계를 슬퍼했다. 황제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은 황가의 극소수를 빼고는 비밀에 붙여졌다. 영호명은 그런 과정을 거쳐 황실 마법사 두 명을 대동한 채 중원으로 돌아오게 된다. 중원에 도착한 영호명은 깜짝 놀라야 했다. 벌써 육십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중원의 시간대는 거의 흐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중원은 그가 떠나간 지 불과 5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을 알아차린 영호명은 뛸 듯이 기뻐했다. "정말 잘되었군. 중원에서의 인연이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어." 그는 차원이동을 통해 현경의 고수가 되었다. 중원에서는 수백 년 전 검성 이래로 현경의 고수가 등장한 일이 없다. 다시 말해 그가 중원 무림계에서 가장 강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아낸 영호명은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아버님의 철혈문을 중원 제일 문파로 키워낼 절호의 기회이다. 그렇게 한다면 저승의 아버님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것이다." 그는 즉각 철혈문을 찾아갔다. 환골탈태 덕에 중원을 떠날 때와 외모가 별반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철혈문 무사들은 분명 자신을 알아볼 것이었다. 하지만 산서의 철혈문에 도착했을 때 그가 본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철혈문의 폐허뿐이었다. 누군가가 철혈문을 완벽하게 멸문시켜버린 것이다. "이럴 수가...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그는 즉각 철혈문을 멸문시킨 배후를 찾아 나섰다. 그는 운좋게도 근처에 어슬렁거리던 개방의 방도를 통해 철혈문이 잠마련에 의해 멸문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준환에 의해 일이 자행되었음을 알게 된 영호명은 이를 갈아붙였다. "용서할 수 없다. 놈에게 찾아가 혈채를 받아내야 한다." 그는 즉각 마법사들을 이끌고 잠마련으로 향했다. 사준환으로부터 철혈문을 멸망시킨 대가를 받아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마법사들에게 탈출로를 준비하라고 지시한 뒤 그는 단신으로 잠마련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중원 무림은 역시 녹록치 않았다. 잠마련에는 합공하여 자신의 검을 받아낼 실력자들이 여러 명 존재했다. 영호명은 차원이동을 통해 현경의 경지를 개척했다. 내공 방면으론 중원 무림의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검술만큼은 그 경지를 따라잡지 못했다. 트루베니아의 단순하고 정직한 검술에 익숙해져 있던 그는 포위공격을 가하는 잠마련 고수들의 다양하고 변칙적인 수법에 애를 먹어야 했다.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차원이동 마법의 불안전성을 보완하기 위해 데리고 왔던 흑마법사마저 배신을 했으니... 흑마법사 록슬레이의 배신으로 인해 궁정 마법사 두 명이 너무도 어이없는 최후를 맞이했다. 퇴로가 사라진 영호명이 분전에 분전을 거듭했지만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기력이 다한 영호명은 그만 잠마련 무사들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후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를 떠올려 본 영호명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중원 무림에 대해 조금이라도 연구한 다음 잠마련을 찾아갔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 터인데...'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늦는 법이다. 만약 그에게 중원 무림에 대한 상식이 조금이라도 더 있었다면 단신으로 잠마련에 쳐들어가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로부터 기라성 같은 초극고수들이 종종 등장했던 탓에 중원무림계에는 실력이 떨어지는 다수로 강력한 고수를 포위 공격하는 합격진이 잘 갖춰져 있었던 것이다. 비록 중원 무림 출신이라 해도 영호명은 생애의 대부분을 이계에서 보냈다. 명예를 중시하고 일대일 대결을 선호하며 비겁한 짓을 경멸하는 기사도 정신이 몸에 배어 있던 탓에 이 같은 실수를 한 것이다. 영호명은 묵묵히 다짐했다. '다시 기회가 온다면 저번처럼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으리라. 철저히 준비하여 상대방을 완벽하게 파멸시키리라.' 그렇게 영호명은 자신이 살아온 길을 한 번 더 되새겨보고 있었다. "크으으." 나지막한 신음소리와 함께 영호명이 몸을 뒤척였다. 활강시 시술을 통해 봉인되었던 의식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힘겹게 눈을 뜬 영호명은 순간 전신을 관통하는 극심한 통증을 느껴야 했다. 모든 종류의 고통을 초월했던 그조차 참기 힘든 통증이었다. 비명을 지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영호명은 눈을 크게 뜨고 입만 뻐끔거렸다. 잠마련에서는 영호명을 활강시로 만들기 위해 엄청난 양의 독을 투입했다. 그 독은 강시화 된 영호명의 몸에 잠복해 있다가 생체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온 순간 발동되었다. 현경의 경지에 올라 만독불침을 자부하는 신체도 이미 몸속에 잠복해 있던 독 기운을 이기진 못했다. 철마가 되어 있는 기간 동안 심하게 혹사당한 탓에 영호명의 몸 상태는 극도로 저하되어 있엇다. 독을 해독할 만한 여력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만약 그 상태가 그대로 지속되었다면 영호명의 몸은 독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한줌의 핏물로 화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싸늘한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는 조력자가 있었다. "해독." 주문영창이 이어지는 순간 영호명의 몸을 잠식해 들어가는 독기가 그대로 증발되어 버렸다. 독기가 사라지자 영호명이 겨우 한숨을 돌렸다. 축 늘어진 영호명의 몸이 간헐적으로 꿈틀거렸다. 오랫동안 강시화 되어 있던 육신이라서 회복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다. 그 시간은 길고도 멀었다. 만약 지켜보던 조력자가 힐링을 걸어주지 않았다면 족히 일주일 이상 걸렸을 것이다. 번쩍 눈부신 빛이 핥고 지나간 뒤 영호명의 경련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바짝 말라붙어 있던 세포에 활력이 돌고 극도로 저하된 신체기능이 점차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1분에 고작해야 10회정도 뛰던 심장도 정상박동을 시작했고 피가 모세혈관을 통해 말단세포에까지 활력을 공급했다. 한참동안 몸을 떨던 영호명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경직되었다. 부르르 눈꺼풀이 힘없이 밀려올라가며 맑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초인의 경지에 오른 자답게 무척이나 깊고 맑은 눈동자였다. 정신을 차린 영호명의 눈에 들어온 것은 기괴하게 회오리치는 검붉은 기운이었다. 검붉은 빛을 띤 기류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인 양 어둠 속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사이하고 괴악한 느낌을 내포한 기운이었는데 기이하게도 그 기류들은 자신의 몸 주위론 일체 접근하지 않았다. 가늘게 뜬 영호명의 눈에 기류로부터 주변을 보호하는 얇은 막이 들어왔다. '진법을 이용한 결계인가? 누가 결계를 펼쳐놓았지?' 고개를 들려 했지만 힘이 없었다. 오랫동안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한 탓에 움직일 기력이 없는 것이다. 축 늘어진 영호명의 귓전으로 음산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정신을 차린 모양이로군." '누구지?'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현재 영호명의 상태는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시체나 다름없었다. 입술에 뭔가 와서 닿는 것을 느낀 영호명은 눈꺼풀을 부르르 떨었다. 귓전으로 예의 그 음성이 파고들었다. "쌀로 지은 죽이다. 조금씩 섭취해서 소화기능을 활성화시켜야 할 거야." 지극히 무감각한 음성이었다. 영호명은 의아해 할 겨를도 없이 입을 벌렸다. 벌린 입술 사이로 새하얀 죽이 주르르 흘러 들어왔다. 그는 정신없이 죽을 삼키려 했다. "급히 먹지 마라. 네놈은 오랫동안 음식물을 먹지 못했다. 조금씩 넘겨서 굳어 있는 소화기관을 자극시켜야 한다." 영호명은 묵묵히 그 말에 따랐다. 오랫동안 굶은 사람이 음식을 급히 먹으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또옥 똑 죽이 한 방울씩 식도를 타고 흘러들어갔다. 바짝 말라 있던 위장이 음식물 향기를 맡자 요동을 쳤다. 하지만 죽은 감질날 정도로 조금씩 위장을 자극해 나갔다. 정말 오랜만에 음식물을 품은 탓에 위장은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의 몸이란 오묘하기 짝이 없다. 혼란스러워 하던 위장은 곧 자신의 역할을 기억해 내고 위산을 분비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도 영호명의 머리는 부산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지?'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은 잠마련 무사들의 포위공격을 받고 힘이 다해 쓰러지던 때 뿐이었다. 이후의 기억은 마치 먹물을 뿌려놓은 듯 깜깜했다. 그러니 영호명으로서는 지금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네놈은 지금까지 줄곧 활강시가 되어 있었다. 내가 네놈을 다시 인간의 몸으로 돌려놓은 것이지. 흐흐흐. 궁금한 것이 많겠지만 일단은 몸을 회복시키는 데 주력해라." '활강시?' 영호명의 눈이 커졌다. 이어 그의 눈동자에 분노의 빛이 일렁였다. 자신을 활강시로 만들다니... 거대한 제국의 황제였으며 또한 현경의 경지에 오른 무인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분노로 인해 몸이 부르르 떨렸다. '도대체 어떤 빌어먹을 놈들이 날 활강시로 만들었다는 말인가?' 그의 마음을 짐작한 듯 의문의 음성이 설명했다. "네놈을 활강시로 만든 놈들은 잠마련의 사준환이다. 네놈은 지금까지 활강시가 되어 그놈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지." '사준환' 영호명을 이를 갈았다. 아버지가 남겨준 철혈문을 멸문시킨 원흉, 그 혈채를 받아내기 위해 무턱대고 찾아갔건만 결국 원한을 갚지 못하고 사로잡히고 말았었다. 그런데 사준환이 사로잡힌 자신을 활강시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몸을 회복하는 와중에서도 영호명은 복수를 다짐했다. '사준환. 이원한을 반드시 갚아주고야 말겠다. 네 목숨은 이제부터 나의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몸은 차근차근 회복되고 있었다. 조금씩 투여되는 죽이 위장에서 소화되며 몸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조력자가 준비한 한 사발의 죽은 모두 영호명의 위장 속에 들어갔고 섞여 있던 수분이 흡수되며 바짝 말라붙어 있던 내장기관을 조금씩 활성화시켰다. 몸에 조금씩 기력이 돋아났다. 영호명은 그때서야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그가 제일 처음 주시한 상대는 죽을 준비해 준 조력자였다. '도대체 누굴까? 누구인데 날 활강시 상태에서 인간으로 돌려줬을까?' 그의 시선에 들어온 이는 스물 정도 되어 보이는 색목인 청년이었다. 오랜 세월동안 아르카디아에서 살아온 영호명에겐 더없이 친숙한 모습이다. 그런데 색목인 청년의 외모가 왠지 모르게 낮익었다. 마치 친혈육에게서나 느낄 수 있을 법한 친숙함. 영호명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신을 구해 준 색목인 청년을 쳐다보았다. '이상하군. 내가 아는 누군가와 정말 많이 닮았어. 도대체 누구지?' 색목인 청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일말의 적의가 서려있었다. 순간 영호명의 눈이 커졌다. 비로소 상대가 누구와 닮았는지를 알아차린 것이다. '발레리, 그녀와 정말 많이 닮았군.' 발레리는 그와 반생을 같이 한 아내였다. 크로세나 왕국의 왕녀로서 잃었던 나라를 되찾기 위해 영호명을 부군으로 맞아들인 여인. 그녀는 평생 동안 영호명 하나만을 사랑했다. 아내의 본분에 지극히 충실했기 때문에 영호명은 발레리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런데 자신을 구해준 자의 이목구비가 그런 발레리와 무척 흡사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데이몬이 가지고 있는 육신은 영호명의 먼 후손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와 발레리 사이에서 낳은 큰 아들의 후손인 것이다. 물론 그 사실을 영호명이 알 턱이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어째서...' 골똘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 마침내 몸이 기력을 되찾았다. 의문을 잠시 접은 영호명은 상체를 들어올렸다. 이젠 운기행공을 해서 내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영호명은 단전에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단전은 바짝 말라버린 시냇물인 양 아무런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철마로 활동하는 동안 마구 내공을 끌어 썼기에 생겨난 결과였다. 하지만 그는 조급하게 마음먹지 않고 차근차근 내력을 끌어보았다. 일단 한 줄기라도 끌어 모을 수 있다면 내력이 봇물 터지듯 모일 터였다. 그렇게 마음먹은 영호명은 차분히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기를 일 각여, 영호명의 몸이 돌연 부르르 떨렸다. 실낱같은 내력의 흐름을 붙잡는 데 성공한 것이다. '되었다.' 한 번 흐름을 붙잡은 이상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혈맥과 근육 속에 숨어 있던 내공들이 쏜살같이 단전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인인 만큼 그 속도는 무섭도록 빨랐다. 콰콰콰콰 단전에 빨려든 내공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진기로 변해 영호명의 몸을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움푹 패여 들어간 눈두덩이도 제 모습을 되찾았다. 말라붙은 팔다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부풀어 올랐다. 앙상하게 드러났던 쇄골이 흔적도 없이 파묻혔다. 피골이 상접한 못브은 간 곳 없이 영호명은 금세 건장했던 예전이 모습을 되찾았다. 눈을 꼭 감은 영호명의 코와 입으로 하얀 김이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주변의 원기를 빨아들여 진기로 변환시키는 과정에서 보이는 변화였다. 잠시 후 영호명이 눈을 떴다. 강렬한 광채가 쭉 뿜어져 나왔다. 번쩍 광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동자 저편으로 숨어버렸고 곧 담담하고 자연스러운 눈빛이 드러났다. 고개를 좌우로 꺾은 후 영호명은 몸을 일으켰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보는 영호명의 겉모습에는 활력이 넘쳐 보였다. 하지만 영호명에게는 아직까지 만족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운용할 수 있는 내공이 고작해야 1할 정도밖에 안되는군. 활강시가 된 상태에서 얼마나 험하게 몸을 굴렸기에 이 모양 이 꼴일까? 난감하군. 그렇다고 해서 이런 괴기한 기운이 가득 찬 장소에서 운기행공을 계속 할 수도 없고.'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영호명은 조력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일단은 자신을 구해준 은인에게 감사인사를 하는 것이 순리였다. 조력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영호명은 공손히 포권을 했다. "정말 고맙소.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이 은혜는 반드시 갚아드리겠소." 그러나 색목인 청년은 아무런 말없이 영호명을 뚫어지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를 쳐다본 영호명의 몸이 살짝 경직되었다. 현경에 오른 그의 무위로도 도저히 경지를 추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어, 엄청나군. 내가 감히 경지를 추측하지 못할 정도라면 나에게 필적하거나 능가하는 무위를 가졌다는 말이 아닌가?' 어찌 보면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 같았다. 하지만 은은히 배어나오는 괴기스러운 기운은 상대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데이몬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영호명의 안색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말로만 듣던 탈마의 고수인가? 지금껏 마도에서 탈마의 고수는 단 한명도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가 고민하는 사이 색목인 청년이 입을 열었다. 물론 그의 정체는 데이몬이었다. "오랜만이로군, 영호명." "..." "도대체 몇 년 만이라고 해야 하나? 중원에서는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트루베니아에서는 50년이 넘는 차이가 있었으니 도대체 어떤 곳의 시간관념을 적용시켜야 할지 모르겠군." 영호명의 눈이 살짝 커졌다. 지금껏 인지하지 못했지만 상대는 아르카디아의 공용어로 말을 걸고 있었다. 그렇다면 상대는 아르카디아에서 건너온 사람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할 점이 있었다. 상대는 자신을 중원의 이름으로 불렀다. 정녕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르카디아에서는 영호명이란 이름을 아는 자가 없다. 도대체 이자는 누구란 말인가?' 경계심이 치밀어 오른 영호명은 살며시 내공을 끌어올렸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어찌하여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오?" "물론 모를 리가 없지. 네놈 같으면 잊을 수 있겠나?" 점점 점입가경이었다. 영호명의 눈에 드리워진 의혹의 빛이 더욱 짙어졌다. "나는 당신을 전혀 모르오. 누군가와 닮긴 했지만 전혀 기억에 남아있지 않소." 그 말에 데이몬이 멈칫했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 이 몸은 네놈 후손의 것이니까. 흐흐흐. 정말 기괴하게 얽힌 우연이로군. 내가 네 후손의 몸을 차지한 채 네놈과 얼굴을 마주대하고 있다니 말이야." 계속되는 하대에 영호명도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가 누군가? 대제국의 황제이자 인간의 한계를 벗어던진 무인 아니던가? 그나마 자신을 구한 은인이었기에 무례를 참고 있지만 점점 더해지는 상대의 태도는 그의 분기를 자극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거친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누군지 정체를 밝히시오. 그리고 나를 구해준 이유에 대해서도..." "너를 구해준 이유? 별 거 없어. 단지 네놈을 살려야만 묵은 빚을 받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화가 거기까지 진행되자 영호명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무례한 작자로군. 트루베니아에서의 나를 알고 있다면 감히 그따위 언사를 내뱉을 수 없을 텐데..." "아, 물론 그렇겠지. 종족전쟁에서 인간의 운명을 구해내고 신대륙 아르카디아를 개척한 대 영웅 크로센 대제라면 내가 누구건 간에 당연히 예의를 다해야겠지? 하지만 네놈은 그 전에 영호명이야. 나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악연을 쌓아온 존재라고..." 그 말에 영호명의 눈이 커졌다. 상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중원에서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란 말인가? 믿을 수 없어하는 영호명을 보며 데이몬은 슬그머니 자신의 정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일단 내가 누구인지를 밝혀야겠군. 나는 어둠의 차원에서 왔다." 그 말에 영호명이 바짝 긴장한 채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어둠의 차원!" 아르카디아에 살았던 그는 어둠의 차원이 어디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둠의 제왕과 그 권속들이 살고 있는 죽음의 대지. 어둠의 차원은 바로 마계를 지칭하는 속어였다. "그렇다면 당신은?" 영호명은 순식간에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마계의 존재가 인간게로 강림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힘이 필요하다. 마왕이나 그 군단장, 또한 상급 마족이 아니라면 감히 인간계로 강림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게다가 이곳은 중원, 최소한 마왕급이 아니면 섣불리 넘어올 수 없는 곳이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영호명이 씹어 뱉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마왕인가?" "바로 맞췄군. 맞아, 난 마계 군주 중 한 명이다." 영호명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녕 마왕이었다니... 어둠의 전쟁을 겪어본 영호명은 마왕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날 알고 있지? 흠. 어리석은 질문을 했군. 항상 인간계를 호시탐탐 노리는 마왕이 아르카디아의 군주중 한 명인 나의 신상정보에 대해 모를 리가 없을 테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호명은 의구심을 해소하지 못했다. 제 아무리 마왕이라고 해도 자신의 중원식 이름에 대해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의구심을 데이몬이 풀어주었다. "왜냐하면 내가 인간 출신 마왕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중원 무림 출신의." 영호명의 눈이 또다시 커졌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마왕은 마족 중에서 철저한 투쟁을 거친 자들만이 된다고 들었는데?" "어디에도 예외란 것이 있지. 어쨌거나 난 유일하게 인간 출신으로서 마왕이 된 경우다. 아무튼 지금으로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데이몬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영호명을 쳐다보았다.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트루베니아로 떠나기 전 중원에서 너로 인해 겪어야 했던 설움을 말이다." 영호명으로서는 영문을 모를 수밖에 없다. "그게 무슨소리냐? 나로 인해서 설움을 겪다니...?" 그러나 이어진 말로 인해 영호명은 비로소 의문을 풀 수 있었다. 물론 경악으로 인해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지만 말이다. "중원에서의 내 이름은 독고성이었다." "..." "이제 알겠나? 내가 왜 널 증오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눈을 끔뻑거리던 영호명의 눈빛이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독고성. 평생 동안 잊지 못한 원수의 이름. 스승인 혜정선사를 무참히 살해했으며 아버지마저 죽인 천고의 원수. 감히 한 하늘을 이고 살지 못하는 원수의 이름을 들으니 격랑이 일 듯 동요되지 않을 수 없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원한이 가슴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영호명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정녕 독고성이냐?" "물론이다. 흠, 그러고 보니 옛날 일이 기억나는군. 혜정선사 아래에서 불법을 닦을 때 네놈을 몇 번 본 적 있었지. 내가 허드렛일을 할 동안 네놈은 무공을 익혔지. 이후의 일은 생각하기 싫다. 결코 유쾌했던 경험은 아니니까." 그 말에 영호명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저주받은 입으로 감히 선사의 이름을 거론하지 마라. 그분의 존함은 감히 너 같은 놈이 입에 담을 만한 이름이 아니다." "흐흐흐. 지금 네놈이 큰 소리 칠 단계가 아닐 텐데? 일단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어때? 너와 나 사이엔 나눌 대화가 무척 많지 않나?" 그 말에 영호명은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에겐 독고성에게 묻고 싶은 말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토록 열심히 찾아 다녔는데도 그는 결국 독고성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자신의 무덤에 중원말로 된 비석까지 세워두었던 영호명이 아니었던가? 그는 타는 듯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나? 얼마나 꽁꽁 숨어있었기에 그토록 종적을 찾을 수 없었던 건가?" "간단하다. 너와 난 전혀 다른 시간대로 갔다. 물론 트루베니아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너와 나는 수십년의 시간차를 두고 그곳에 도착했다." 영호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독고성을 찾지 못한 이유가 납득이 갔다. "그랬군, 그래서 네 종적을 찾을 수 없었던 거로군." "나는 네가 트루베니아에 오고 나서 수십 년 후에 도착했다. 무공을 모조리 잃은 참담한 몰골로 말이야. 물론 그게 누구 탓인지는 잘 알고 있을 테지?" 그 말을 들은 영호명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알고 있다. 네놈은 더한 꼴을 겪어도 모자랄 놈이야." "어쨌거나 좋다. 네놈이 크로센 대제란 이름으로 승승장구할 동안 나는 참담한 꼴을 겪어야 했다. 맨몸으로 오크나 트롤과 싸워야 했고 한낱 병졸로 성벽수비에 동원되기도 했다." "정말 잘된 일이로군. 네놈은 그런 꼴을 당해도 싸. 암 그렇고 말고..." 여전히 삐딱한 영호명의 태도에 데이몬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와 영호명 사이에는 말로 풀 수 없는 깊은 원한이 자리잡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그 모든 역경을 극복했다. 죽을힘을 다해서 마법을 배워 흑마법사가 되었고 몸을 바꾸는 우여곡절 끝에 드래곤의 가디언 신세에서 벗어났다. 또한 내 심신을 빼앗으려던 마왕을 제압하고 마력의 원천을 얻는 데 성공했다. 아무튼 나의 현재 신분은 마왕이다. 마계에서도 제법 알려진 마계왕국을 다스리고 있지." 영호명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하늘도 무심하군. 네놈에게 그런 기회를 주다니 말이야." "흐흐흐. 하늘조차도 감히 내 운명을 농락할 순 없지. 어쨌거나..." 데이몬은 타는 듯한 눈빛으로 영호명을 노려보았다. "멍청한 자식. 현경의 경지에 올랐으면서도 잠마련 따위 잡졸들에게 사로잡히다니... 경지가 부끄럽지 않나?" 그 말에 영호명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어쨌거나 방심했던 것은 사실이니까." "좌우지간 더 이상 말로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겠지." 말을 마친 데이몬은 주먹을 들어보였다. "이것으로 묵은 은원관계를 깔끔하게 해결하도록 하지. 어떤가?" 영호명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여기서 싸울 생각인가?" 데이몬은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장소를 옮겨야겠지. 게다가 네놈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야. 내공을 충분히 끌어 모을 수 있는 장소로 데려가주마. 정당한 조건 하에서 붙어야 네놈이 군소리하지 않을 것 아니냐." 영호명이 비릿하게 웃었다. "네놈에게 어울리지 않는 처사지만 고맙게 받아들이지. 만약 내 몸 상태가 정상이라면 설령 네놈이 마왕이라 할지라도 두렵지 않다." "두고 보도록 하지."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영호명은 무심한 눈길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마나의 흐름이 극도로 불규칙적인 마정지지. 마법진을 그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하지만 데이몬이 누구인가? 9서클의 대마법사 아니던가? 마법진을 완성한 데이몬은 냉큼 위에 올라섰다. "올라와라. 싸울 만한 장소로 가야 하니까." 영호명이 두말하지 않고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그 모습을 지켜본 데이몬은 주문영창을 했다. "워프." 마법진에서 눈부신 빛이 일어나며 둘의 몸을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공간이동시켰다. *****초인의 대격돌***** 빛 무리가 사라지자 영호명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곳은 어디인가?" "곤명 인근이다. 이곳으로 오며 대응 마법진을 설치해 두었지. 근처에 대자연의 기가 풍부한 원시림이 존재하고 있으니 내공을 회복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 말을 듣자 영호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단 고맙다는 말은 해두지. 하지만 곧 후회하게 될 거야." 데이몬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둘은 곧 기운 고르기에 들어갔다. 원시림 속에 들어간 영호명은 머뭇거림 없이 운기행공을 했다. 대자연의 기를 빨아들여 바닥난 내공을 채워야만 마왕이 되어 돌아온 독고성을 상대할 수 있다. 스승의 목숨 빛을 받아낼 생각에 영호명은 필사적으로 내공을 운기했다. '정녕 하늘의 도우심이로군. 이번 기회에 반드시 놈의 목을 취해 스승님의 영전에 바치고 말 것이다.' 반면 데이몬은 마정지지에서 빨아들인 혈마기를 암흑투기로 전환시키고 있었다. 이미 그는 마정지지에서 상당한 양의 혈마기를 흡입한 상태였다. 그것을 마력의 원천에 주입하여 암흑투기로 정제하는 일은 상당한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영호명을 치료하며 줄곧 혈마기를 흡입하기는 했지만 정작 암흑투기로 전환시킨 양은 얼마 되지 않는다. 때문에 남는 시간에 조금이라도 정제해 두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다. 그러나 데이몬은 그리 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정도 분량이라면 충분히 영호명 놈을 상대할 수 있다. 이번 기회에 놈을 단단히 혼내줘야겠어. 놈으로 인해 겪은 울분도 풀고...' 데이몬은 자신만만했다. 사실 같은 현경이라고 해도 영호명에 비해 손색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공간의 틈새에 낀 덕에 영호명은 깨달음을 얻어 현경에 접어들었다. 반면 데이몬은 암흑투기의 힘을 이용해 거의 우격다짐으로 현경의 벽을 깨트렸다. 그러니 같은 경지라 해도 수준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데이몬에게는 단단히 믿는 바가 있었다. 초인의 경지에 올랐지만 영호명은 비슷한 수준의 적과 겨뤄본 경우가 드물다. 대부분 한참 아래 급의 기사들과 싸운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사정이 달랐다. 이미 신마대전까지 치러본 데이몬이다. 자신과 비슷하거나 월등히 강한 상대와 수도 없이 싸워왔기 때문에 실전경험의 질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이 월등한 우위에 있다고 자부했다. 데이몬의 자신감은 바로 그것을 바탕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놈, 정말 열심히 운기를 하는군.' 곁눈질로 영호명을 살짝 훑어본 데이몬은 눈을 감고 혈마기를 마력의 원천에 주입했다. 영호명이 운기행공을 끝내는 순간이 바로 둘 사이에 쌓인 숙원을 해소할 순간이었다. 영호명의 운기행공은 상당히 길었다. 그 정도로 몸 상태가 악화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는 거의 두 시진 가까이를 운기조식에 몰두했다. 현경의 경지에 오른 무인인 만큼 단전의 용량이 그만큼 컸다. 다행히 그가 있는 곳은 대자연의 기가 풍부한 원시림, 필사적인 운기행공을 통해 그는 바닥난 내공을 어느 정도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회복된 것은 오직 내공뿐이었다. 몸 상태는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오랫동안 곡기를 접하지 못한 탓에 기력이 바닥난 상태였고 독 기운으로 인해 체력은 저하될 대로 저하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호명은 투지를 잃지 않았다. '비록 내가 이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독고성 네놈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 그는 스승인 혜정선사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런 스승을 독고성이 시해했다고 생각하니 복수심이 불타오르지 않을 수 없엇다. 운기행공을 마친 영호명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은 장검 한 자루를 툭 집어던졌다. 영호명이 철마로 활약하던 시절 사용하던 바스타드 소드였다. 철그렁 영호명이 묵묵히 장검을 집어들어 검날을 어루만졌다. 크로센 대제이던 시절부터 애용하던 검이라 폼멜을 움켜쥐니 과거의 호기가 솟구쳐 올랐다.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가라앉힌 영호명이 서늘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병기를 들어라." 데이몬이 빙글빙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기 따윈 필요 없다." 영호명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그가 누구인가? 검성 이래로 유일하게 현경에 오른 무인 아니던가? 그런 자신을 무시하다니. 하지만 이어진 데이몬의 행동에 그의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쓰쓰쓰 데이몬의 손에서 거무튀튀한 칼날이 불쑥 튀어나왓다. 검은 운모처럼 번들거리는 강기의 칼날이엇다. 그것을 본 영호명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귓전으로 차분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이게 바로 내 무기다." "내력소모가 만만치 않을 텐데?" 데이몬은 싸늘하게 코웃음 쳤다. "별 걱정을 다하는군. 내가 누구인지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그 말에 영호명은 입을 다물었다. 상대가 마왕이라면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할 수 없다. 물론 영호명도 내공을 이용해 검의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긴 하다. 하지만 내력소모가 엄청나서 현재의 몸 상태론 무리였다. 검을 매개체로 강기를 뽑아내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었기에 영호명은 검을 굳게 꼬나 쥐었다. "좋아, 그럼 시작해 볼까?" 투지를 불태우며 다가오는 영호명을 데이몬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두 초인의 격돌은 시작부터 거창했다. 영호명의 장검에서 무려 3미터에 달하는 검강이 뿜어져 나와 데이몬의 몸을 파고들었다. 콰콰콰콰 이글이글 타오르는 검강이 쏜살같이 내리꽂히는 장면은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어지간한 고수들조차 기가 질려 방어할 엄두도 내지 못할 만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무척이나 가볍게 공격을 차단했다. 거무튀튀한 운모 같은 손톱이 불쑥 튀어 나오더니 강기를 허공으로 퉁겨버렸다. 단 한 번의 공방이었지만 둘은 서로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직감했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현경이라는 이름값을 하는군.' 특히 영호명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데이몬이 너무도 수월하게 자신의 공격을 막아냈기 때문이다. "역시 마왕답군." 현재의 몸 상태로는 장기전을 생각할 수 없다. 시간을 끈다면 극도로 저하된 체력이 곧 바닥을 보일 것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영호명은 머뭇거림 없이 달려들었다. "에잇." 바짝 달라붙어 난전을 벌이려는 게 영호명의 계산이었다. 그는 무수한 전장을 거쳐 온 역전의 노장. 사방팔방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는 난전은 상대가 누구라 해도 자신 있었다. 쾅 콰쾅 쾅 가공할 위력을 내포한 강기 무리들이 연이어 격돌했다. 그에따라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대지가 움푹움푹 패이고 대기가 갈가리 찢어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숨 돌릴 틈도 없는 공방이 거듭해서 이어졌다. 데이몬은 차분히 가라앉은 눈빛으로 영호명의 맹공을 받아넘기고 있었다. 무시할 수 없는 공격이었지만 그렇다고 감당하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이미 영호명의 계산을 짐작하고 있었다. '난전에 특화되었다 이거지? 하지만 잘못 생각했어. 난전이라면 나에게도 더없이 익숙하니까.' 영호명은 한 가지를 예상하지 못했다. 데이몬이 마계에서 신마대전을 치르며 많은 난전을 겪어보았다는 사실을. 두 초인의 대결은 점점 도를 더해갔다. 서로가 있는 힘을 다해 상대를 공격하고 또 방어했다. 고도의 초식들이 연거푸 선을 보였고 고급 기술들이 아낌없이 퍼부어졌다. 전투에 몰입한 둘은 완전히 무아지경에 빠져 공방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지켜보는 눈동자 한 쌍이 있었다. 툭 불거져 나온 눈동자가 경악에 사로잡혀 있었다. 입술을 비집고 탄성이 흘러나왔다. "세, 세상에..." 무성한 덤불 속에 숨어서 두 초인간의 대결을 지켜보는 이는 40대 중반의 중늙은이였다. 쥐상의 몹시 교활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의외로 눈빛이 깊고 맑은 편이었다. 대결을 지켜보는 이는 바로 묵회의 비영전주였다. 포섭한 조직원들에게 폭혈단을 돌리고 다니던 그가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그는 숨도 제대로 몰아쉬지 못하고 정신없이 혈투를 관람했다. "어, 어디서 저런 초인들이..." 그는 중원 전역에 퍼져 있는 조직원들에게 폭혈단을 나눠주라는 지시를 받고 이행하던 중이었다. 점창파의 조직원들에게 폭혈단을 나눠주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 길에 우연히 엄청난 폭음을 들었다. 그래서 무슨 소리인가 하고 와 봤는데 뜻밖의 장관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우연의 일치. 지금 대결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은 그가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경지에 오른 초인들이었다. 검강을 아낌없이 난사하고 말로만 듣던 초극의 비기들을 거듭 선보이는 것을 보니 틀림이 없엇다. 얼이 빠진 비영전주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엇다. "역시 중원은 넓어. 저 같은 초극고수들이 초야에 묻혀 있었다니..." 그는 특급 정보단체인 하오문의 문주이다. 그런 만큼 중원에서 쟁쟁한 실력자들의 인상착의를 모두 파악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그런 그의 안목에 비추어 볼 때 격전을 벌이고 있는 둘은 전혀 의외의 인물들이었다. 비영전주는 그중 한 명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놀랍군. 벽안독성의 무공이 저 정도였다니..." 데이몬으로 인해 휘하의 강시군단을 모두 잃고 독단까지 깨물어야 했으니 모를 리가 없다. 그가 모르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데이몬이 심어놓은 어둠의 마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비영전주는 눈이 빠지게 격전을 지켜보았다. 비록 성취가 일천하다고는 하나 그 역시 무림인. 이런 장관을 구경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잠마련에서는 잘못 생각하고 있어. 내가 보는 것이 현실이라면 벽안독성은 초절정을 확실하게 넘어선 무인이야." 사실 잠마련에서는 데이몬의 비밀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휘하 조직원들에게도 그 점에 근거하여 정보가 전해졌다. 벽안독성이 비록 가공할 만한 술법을 발휘하고 있지만 근접전에는 극히 취약하다는 사실을. 비영전주도 그 점을 상부로부터 전달받은 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정보오류였다. 지금 보여주는 무위는 잠마련의 그 어떤 고수도 흉내 내기 힘든 수준이었다. "벽안독성을 상대하는 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그의 시선이 슬그머니 영호명에게로 옮겨졌다. 그는 지금 검강을 줄기줄기 내뿜으며 데이몬을 세차게 압박해 들어가고 있었다. 비영전주는 영호명의 정체를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정말 놀라워, 저 정도의 무공이라면 구파일방의 장문인을 훨씬 능가할 텐데 말이야. 저런 초극고수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니..." 하오문의 문주인 자신이 알아보지 못한다면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틀림없다. 십중팔구 반로환동한 전대고수이거나 아니면 심산유곡에서 죽자고 수련을 쌓은 인물일 터였다. 접전을 지켜보던 비영전주의 눈이 갑자기 몽롱해졌다. "저런 수준의 초극고수가 단 한 명만 있다면... 그렇다면 하오문이 당당히 마도의 정보단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텐데." 비영전주는 한때 엄청난 야망을 품고 있었다. 지략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 그였기에 당연히 포부가 클 수밖에 없었다. '아마 지략만으로 따진다면 잠마련의 천기대제에게도 그다지 뒤쳐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력이 뒷받침해 주지 않는 지략은 무림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때문에 비영전주는 오래 전에 야망을 접어 버려야 했다. 그런데 접전을 지켜보며 접어 두었던 야망이 다시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입술을 비집고 아련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저런 분을 주공으로 모실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내 재능을 유감없이 펼쳐 보일 수 있을 텐데." 물론 그것은 비영전주 혼자만의 바람일 뿐이었다. 저 정도 고수가 무엇이 아쉬워 자신같이 외모도 추레하고 무공도 변변찮은 이를 거둬들일 것인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뭔가 모르게 아쉬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비영전주는 정신없이 둘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접전은 팽팽하게 이어졌다. 누구 하나 유불리를 점칠 수 없을 정도였다. 오래 끌 것 같던 접전은, 그러나 너무도 허무하게 판가름 나버렸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던 영호명이 급격히 무너져버린 것이다. 난무하던 호조의 잔영을 낱낱이 격파한 뒤 반격에 나서려던 영호명의 몸이 일순 멈칫했다. "헛" 저하된 몸 상태로 말미암아 내력의 흐름이 잠시 끊어져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장검에서 뿜어지던 검강이 흐릿해졌다. 그 틈을 타고 데이몬의 손톱이 더욱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콰지직 영호명의 바스타드 소드가 과자처럼 부서졌다. 더욱 강한 힘을 배겨내지 못한 것이다. 둘 같은 고수들의 접전에서는 아주 사소한 것이 승패를 가른다. 둘 다 티끌만한 실책이라도 놓치지 않고 파고들 능력이 있는 고수들이다. 사색이 된 영호명이 반 토막 남은 검을 필사적으로 뿌려댔다. 그러나 한 쪽으로 기울어진 승기를 되찾아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몇 합 나누기도 전에 영호명은 명치를 파고드는 손톱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스, 스승님의 복수를 하지 못하는 것이 원통하다." 검강이 깃든 장검조차도 부스러뜨리는 손톱이다. 호신강기를 전개해 봐야 막아낼 방도가 없었기에 영호명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독고성이 이토록 강해지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영호명이었다. '모, 몸 상태가 조금만 좋았더라면.' 가슴어림에서 섬뜩한 통증이 전해지는 순간 영호명은 모든것을 포기했다. "끄아아."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영호명의 몸이 훨훨 날아갔다. 근 삼십장을 날아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영호명의 고게가 맥없이 움츠러들었다. 널브러진 그의 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휴우, 큰일 날 뻔했군." 데이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길게 돋아났던 강기의 손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하마터면 영호명 놈을 끝장낼 뻔했어. 싸움에 너무 몰입했던 탓인가? 아무튼 놈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질 줄은 몰랐으니까..." 마지막 순간 데이몬은 강기의 손톱을 거두어들였다. 비록 감정이 곱지 않기는 하지만 굳이 영호명을 끝낼 필요는 없었다. "미운 놈이긴 하지만 놈 역시 사준환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놈이 트루베니아에 공헌한 바를 생각하면 구태여 죽일 필요가 없지." 나직이 뇌까린 데이몬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현경에 오른 고수답게 영호명은 과연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만약 영호명의 상태가 최상이었다면 승부를 쉽사리 가늠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데이몬은 눈매를 가늘게 좁힌 채 널브러진 영호명을 쳐다보았다. "놈의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승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조금 마음에 걸리는군. 명색이 마왕인데 정상이 아닌 녀석을 상대로 싸웠으니 말이야." 영호명은 그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야 할 정도로 강했다. 신마대전으로 단련된 데이몬의 공격을 가볍게 받아넘기고 머뭇거림 없이 반격을 가해올 정도였다. 데이몬은 스산한 눈빛으로 의식을 잃은 영호명을 응시했다. "이것으로 우리 사이의 악연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놈 때문에 겪은 설움이 아직까지 뱃속 깊숙이 각인되어 있으니까." 조용히 뇌까리던 데이몬의 눈빛이 별안간 변했다. "참, 그러고 보니 쥐새끼 한 마리가 있었지?" 이미 그는 누군가가 대결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상태였다. 설사 절정고수라 해도 둘의 이목을 속이고 다가올 수 없다. 하물며 무공이 변변찮은 비영전주의 기척을 데이몬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번쩍 하는 순간 데이몬의 신형이 그곳에서 사라져버렸다. "헉." 비영전주는 기겁했다. 저 멀리 서 있던 벽안독성이 별안간 사라지더니 바로 코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로서는 혼비백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얼이 빠져버린 그의 귓전으로 비릿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호, 어떤 쥐새낀가 했더니 인연이 있는 놈이로군." 데이몬은 대번에 비영전주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머릿속에 자신이 투여한 어둠의 마력이 도사리고 있으니 몰라볼 리가 없다. 묵회의 강시를 이끌고 명령을 수행하러 다니는 사준환의 끄나풀. 그것이 비영전주에게 내린 데이몬의 평가였다. "일단 머릿속의 정보나 좀 끄집어내야겠군." 데이몬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는 순간 비영전주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머릿속에 잠복한 어둠의 마력이 심령을 제압해 버린것이다. 데이몬은 비영전주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 느긋하게 기억을 읽기 시작했다. 오래 전에 투입된 어둠의 마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건 뜻밖인데?" 기억을 읽어내려 가면서 데이몬의 눈빛이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단순한 사준환의 끄나풀로 보았는데 직접 기억을 읽어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하오문을 당당한 사파의 정보단체로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비영전주의 내심이 가감 없이 데이몬에게 전해졌다. 그로 인해 데이몬은 비영전주에 대한 평가를 상당부분 수정해야 했다. "생각보다 뼈대가 있는 놈이로군. 하오문의 염원을 이룩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묵회에 충성을 바치다니... 뭐 강압적인 방법으로 회유되기는 했지만 목숨이 두려워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고." 데이몬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영전주의 기억을 읽어 내려갔다. "이름은 갈천성, 43세에 천기서원 출신이라..." 비영전주는 생각보다 곡절이 많은 인물이었다. 전대 하오문주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뛰어난 문재를 드러냈다. 막내라서 하오문을 이어받을 가능성이 희박했기에 갈천성은 머뭇거림 없이 문의 길을 택했다. 수재들의 전당인 천기서원에 입학한 갈천성은 거기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만약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갈천성은 아마 지금쯤 과거에 합격하여 관인이 되어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평범한 유생으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향시를 준비하던 중 갈천성의 집안에 큰 변고가 생겼다. 그만 명문정파와 시비가 붙어버린 것이다. 그로인해 아버지인 하오문주와 두 형 모두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갈천성은 즉각 문의 길을 접어버린 뒤 하오문에 투신한다. "어떻게든 아버지와 형님들의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 원래 하오문의 문주 자리는 혈연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장로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선출될 수 있는 직책이다. 하지만 갈천성은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하오문의 장로들이 이구동성 입을 모아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갈천성의 지략은 뛰어났다. 하지만 무림에서 힘이 받쳐주지 않는 지략은 통용되지 않앗다. 하오문을 마도의 당당한 정보단체로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녔지만 소득은 없었다. 그러다가 그만 묵회주의 무력에 제압되어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거기까지가 데이몬이 읽어낸 갈천성에 대한 기억이었다. "묵회가 잠마련의 하부조직이란 사실을 알아채고 회의를 느끼고 있군. 이런 녀석은 잠마련과 뜻이 일치할 리가 없지."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잘되었어. 영호명 녀석을 이놈에게 맡기면 되겠군. 이놈은 머리는 있지만 받쳐줄 힘이 절실히 필요하고, 반면 영호명 녀석은 힘은 있지만 받쳐줄 세력과 머리가 없단 말이야. 두 놈을 붙여 놓으면 사준환 녀석에게 상당히 큰 위협이 되겠어." 생각보다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았기에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어차피 난 당분간 움직일 수 없다. 마정지지의 마기를 모두 흡입하여 암흑투기로 전환시키리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니까..." 데이몬은 한동안 마정지지 안에 틀어박혀 있을 작정이었다. 마기를 모두 빨아들여 권능을 되찾으려는 것이 데이몬의 계획이었다. 무림에서 통용되는 것은 오로지 힘. 힘이 모자라서 고문까지 받았던 데이몬이기에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내가 없는 동안 사준환 놈이 당문을 노리면 곤란하지. 아직까지 놈에겐 엄청난 세력이 도사리고 있으니까 말이야." 이제 데이몬은 홀몸이 아니다. 정을 주고 있는 당청이 있었고 충직한 수하인 냉유성이 있다. 만약 그가 마정지지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둘이 해를 입는다면 상당한 타격을 입어야 할 터였다. 그러므로 그 기간동안 사준환을 견제할 제 3의 세력이 필요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데이몬은 지체 없이 갈천성을 흔들어 깨웠다. 흐릿하던 갈천성의 눈빛이 또렷해졌다. 데이몬을 발견하자 갈천성의 눈이 커졌다. "응? 당신은?" 갈천성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데이몬으로 인해 크게 쓴맛을 본 터라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머뭇거리던 갈천성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조아렸다. "벽안독성을 뵙습니다." "그렇게 이용당하고도 아직까지 묵회에 적을 두고 있나? 슬슬 손을 떼는 것이 나을 텐데." 그 말을 듣자 갈천성의 얼굴에 착잡한 빛이 떠올랐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묵회에서 투여한 독 때문에 말입니다. 주기적으로 해약을 먹지 않는다면..." 고개를 끄덕이던 데이몬이 살짝 손을 내저었다. "해독." 주문영창이 끝나는 순간 갈천성의 몸에 잠복해 있던 독 기운이 삽시간에 증발해버렸다. 깜짝 놀란 갈천성의 귀로 느긋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네 몸 속의 독을 모두 제거했다. 앞으론 해약 따윈 먹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갈천성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거렸다. 벽안독성이 어찌해서 자신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은혜를 입은 것이 사실이었기에 그는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가급적 묵회와의 관계는 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묵회의 상부조직인 잠마련과 깊은 원한이 있다. 묵회에 계속 남아있을 경우 좋은 꼴을 보지 못한다." "만성지독이 해독된 이상 묵회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갈천성의 얼굴에는 새로운 희망이 떠올라 있었다. 더 이상 묵회의 명령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으로 인해 가슴이 뿌듯했다. 데이몬은 그런 갈천성의 눈을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은공의 명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이행하겠습니다." "명령이랄 것까지는 아니고..." 데이몬은 손을 뻗어 한쪽에 널브러져 있는 영호명을 가리켰다. "저놈을 좀 보살펴 주도록.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서 한동안 요양해야 할 것이다." 영호명을 쳐다보는 갈천성의 눈에는 경이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벽안독성의 무위는 감히 추측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그런 벽안독성과 팽팽하게 격전을 치른 고수인 만큼 긴장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게다가 정체가 전혀 알려 있지 않ㅇ느 인물이 아니던가? 갈천성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저놈의 몸 상태는 그 정도로 영 엉망이야." 그 때 각천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저분의 정체에 대해서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제 식견으로도 전혀 파악할 수 없는 분이라서..." 데이몬의 눈가에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저놈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활강시로 활약했다." 그 순간 갈천성의 눈이 커졌다. 현존하는 활강시는 단 하나밖에 없다. 바로 잠마련 최대의 비밀병기인 철마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널브러진 백발의 중년인이 바로 철마였다는 말인가? 경악에 겨워하는 갈천성을 보며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철마라는 이름으로 잠마련의 주구 노릇을 했지. 그런 놈을 내가 구해다 원래대로 회복시킨 것이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영호명을 쳐다보았다. "단순히 혼절한 것뿐이니 충분히 음식을 섭취하고 푹 쉬면 예전의 무위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현경의 경지를 돌파한 녀석이니 말이다." 순간 갈천성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기나긴 무림의 역사상 현경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 대관절 몇이던가? 수백 년 전 검성 이래로 그 누구도 밟아보지 못한 전인 미답의 경지 아니던가? 흔들리는 눈빛이 데이몬에게로 향했다. 현경의 경지에 오른 무인을 꺾었다면 그 역시도... 눈빛에 담긴 의미를 짐작한 데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 역시 현경의 경지를 개척했지." 갈천성의 입이 딱 벌어졌다. "세, 세상에..." 현경을 돌파한 고시가 한 시대에 두 명이나 등장할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추스른 갈천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 정도의 고수가 어찌 사로잡혀 활강시가 되었는지..." "무림에 대한 경험이 적어서 그렇다. 분명 출신은 무림이되 놈이 활약한 곳은 전혀 다른 곳이었으니까. 놈은 내가 살던 트루베니아란 곳에서 절대적인 무신으로 군림했다. 물론 내가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다." 갈천성은 비로소 사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중원에는 예로부터 실력이 떨어지는 다수로 고수를 상대하는 합격진이 잘 발달되어 있다. 무림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현경의 고수라도 곤경에 처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데이몬은 얼떨떨해 하는 갈천성에게 영호명의 비밀을 하나씩 얘기해 주었다. "저놈은 원래 철혈문 출신이야." "철혈문이라면 오 년 전 잠마련에 의해 멸망당한 문파인데..." "맞아. 놈은 그 문제를 따지러 잠마련을 방문했지. 미련하게도 혼자서 말이야. 어지간히도 멍청한 놈이지. 거기서 사로잡혀 활강시가 되었으니 멍청하기 짝이 없지. 아무튼 놈은 사준환에게 이를 박박 갈고 있을 거야." 듣고 있던 갈천성은 몸이 오싹해졌다. 그의 눈엔 잠마련의 미래가 선명히 보였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초인을 둘이나 적으로 두고 있으니 잠마련의 미래가 순탄할 턱이 없다. 갈천성은 나직이 각오를 다졌다. '묵회로 복귀하는 것은 자살행위야. 현경의 고수 둘을 적으로 두고 무사할 집단은 없어.' 생각에 잠겨 있는 그의 귓전으로 나지막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생각이 있으면 그 녀석을 한번 잘 꼬드겨봐. 힘은 있으되 받쳐줄 세력과 머리가 없는 녀석이니까. 가슴 속에 품은 야망이 있다면 그 녀석을 잘 이용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그 말을 들은 갈천성은 가슴이 뜨끔해졌다. 품고 있는 야망을 여지없이 간과 당했으니 동요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 말을 남긴 데이몬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다." "..." 갈천성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데이몬의 등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충격적인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인지 아직까지 정신이 멍했다. 그러는 사이 데이몬의 신형이 완전히 언덕 아래로 사라져버렸다. 그때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가 서둘러 달려가 영호명을 부축했다. 영호명의 덩치가 상당해서 왜소한 체구의 갈천성이 부축하기엔 무리였다. 하지만 그는 사력을 다해 영호명을 업었다. "일단 인근의 안가로 가야 해. 수하들이 잘 찾아오려나 모르겠군." 영호명을 업은 갈천성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모종의 표식을 남겨 두었으니 머지않아 하오문의 조직원들이 그를 찾아올 터였다. 떠난 것 같아 보였던 데이몬은 나무 뒤에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한 가지가 일단락되었군. 이제 마정지지에 가서 힘을 되찾을 순서인가?" 데이몬은 지체 없이 마법진을 그렸다. 마정지지 안에 대응마법진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공간이동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잠시 후 데이몬의 모습이 그곳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마정지지 제일 깊숙한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를 둘러본 데이몬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당분간 이곳에 콕 박혀 있어야겠군. 이곳의 혈마기를 모두 빨아들여 암흑투기로 전환시키기 전까진 나가지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곳은 중원에서 제일 안전한 장소였다. 사방에 가득한 혈마기 때문에 타인은 접근이 불가능하다. 절정고수라 해도 일 각 이상을 버틸 수 없는 판국이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이제 슬슬 힘을 되찾아 볼까?" 데이몬은 느긋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암흑투기를 운용하자 사방의 혈마기가 조금씩 체내로 빨려들었다. 잠시 후 호기 있는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기다려라, 중원이여. 나 데이몬이 너를 정벌하러 갈 것이다." 음성은 쩌렁쩌렁 울리며 동굴 안에 메아리쳤다. ********************************* 사준환은 지금 기분이 무척 좋지 않은 상태였다. 악재가 거듭해서 터졌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는 어처구니없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듣는 즉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정도로 놀라움이 컸다. "도대체 어떻게 하다가 철마를 잃어버렸단 말이냐?" 평소의 그답지 않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정도로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린 듯 곽천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철마를 속박하고 있던 쇠사슬이 아무런 이유 없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듣고 있던 사준환이 분통을 터트렸다. "정련된 강철로 된 쇠사슬이 어찌하여 끊어진단 말인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끊어진 단면이 예리한 것이 강기에 상한 것 같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사준환이 성급히 되물었다. "그래, 추가조치는 했다고 하던가?" "근처에 보관중인 음양강시를 투입해 철마를 회수하려 했는데 성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현재 철마는 마정지지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버린 상태입니다." 보고를 들은 사준환은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져버린 것이다. 철마는 사준환이 가장 아끼는 비밀병기였다. 초절정고수 다섯을 홀로 상대할 수 있는 활강시는 오로지 철마밖에 없다. '미치겠군, 곧이어 있을 정사대전에 요긴하게 쓰일 철마가 마정지지 내부로 들어가 버리다니...' 마정지지는 인간의 육신으로는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천고의 절지다. 초절정고수인 그조차도 감히 견뎌낸다고 장담할 수 없다. 현재 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음양강시를 들여보내 철마를 회수해 오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았다. 일단 사고능력이 없는 음양강시가 고차원적인 수색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또한 마정지지의 중심부는 음양강시조차도 버티기 힘들 정도로 혈마기가 짙다. 자칫 잘못하면 귀중한 음양강시마저 잃을 가능성이 있었기에 섣불리 투입할 수 없는 것이 사준환의 입장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사준환은 이를 바드득 갈아붙이며 곽천도를 노려보았다. "철마의 관리를 담당하던 놈들을 모조리 처형해 버려라. 그런 쓸모없는 놈들은 잠마련에 필요하지 않다." 그 말에 화들짝 놀랐지만 곽천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철마를 담당하던 무사들은 하나같이 절정 이상의 고수들이다. 그런 고수들을 처형하는 것은 잠마련의 입장에서 상당한 손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준환의 서슬이 너무도 시퍼랬기에 곽천도는 차마 만류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평소답지 않으시군. 항상 냉정을 잃지 않으시던 분이...' 일단 총수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진 이상 돌이킬 길이 없다. 집법사자들이 명을 수행하기 위해 달려 나가는 모습을 흘겨본 곽천도가 얼굴을 굳혔다. '하긴 그럴만도 하지. 보통 사안이 아니니까.' 곽천도를 위시한 무사들이 눈치를 살피는 사이 사준환은 손을 턱에 괴고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는 최근 들어 연이어 텨저 나오는 변고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일이 어긋나도 이렇게 어긋날 수는 없어.' 지금까지 사준환의 계락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착착 맞아떨어졌다. 배교에 투신한 지 20년 만에 모든 문도들의 생사여탈권을 움켜쥔 그였다. 정사대전을 통해 잠마련이라는 거대한 단체를 만들어 내고 총수의 자리에 오른 것은 실로 엄청난 위업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 과정이 항상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항상 칼날 위를 걷듯 위태위태했지만 종국에는 그의 계략이 정확히 먹혀 들어갔다.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지금의 입지를 이룬 사준환이 아니던가?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큰마음을 먹고 추진하던 일들이 연이어 좌절되고 있으니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정점에 정확히 한 사람이 위치해 있었다. 생각을 거듭하던 사준환은 돌연 눈빛을 빛냈다. "데이몬, 그놈이 나타나고 나서는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그놈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이 어긋난 것이라고..."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도 공교로웠다. 데이몬이라는 벽안의 색목인은 사준환에게 정말 말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의 타격을 입혔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사준환은 주먹을 불끈 거머쥐었다. "놈을 회유하려 했던 것이 실착이었어. 잡아온 즉시 죽여 버렸어야 했을 것을..." 데이몬 하나로 인해 잠마련이 입은 피해는 실로 컸다. 가장 먼저 묵회가 풍비박산이 났다. 무림맹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키워온 조직인 만큼 타격이 예사로울리가 없다. 묵회주는 무림맹의 뇌옥에서 생을 마감했고 조직원들은 백일하에 정체가 드러나 버렸다. 모든 것이 데이몬 하나로 인해 생겨난 일이었다. "계획대로라면 묵회는 무림맹에 엄청난 혼란을 야기한 뒤 공멸했어야 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궤멸할 조직이 아니었어." 데이몬이 입힌 피해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음양강시를 생산하던 흑법사를 가로채 간 것도 뼈아픈 피해라고 볼 수 있다. 그로 인해 음양강시의 추가생산이 완전히 무산되어 버렸다. 심지어 데이몬은 당문이나 오독문에서 잡아온 독객들마저 감쪽같이 빼내어 가버렸다. 사준환의 입장에선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인물이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흑법사를 회유했는지 모르겠지만 놈을 가만히 내버려둘 순 없어. 어떻게든 놈을 잡아 처단해야 해." 물론 사준환은 최근에 데이몬이 어떻게 변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비록 술법 방면은 강하지만 근접전에서는 현저히 약한 놈이다. 살수들을 대거 파견해서 놈을 척살해야 해. 더불어 당문도 함께 말이야." 사준환은 당문에까지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현재 당문은 잠마련이 무림을 장악하는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힘들여 개발해 낸 절독들이 당문에 의해 속속 파훼되고 있으니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 "당문은 데이몬이란 놈과 깊은 관계에 있는 문파이다. 배신한 흑법사 놈도 십중팔구 당문에 있을 것이다. 본련이 보유중인 모든 독의 해독제가 개발되기 전에 당문을 쳐서 없애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현재의 당문은 과거의 당문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당문이 기댈 곳이 없는 중립문파라서 아무거리낌 없이 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당문은 당당히 무림맹에 적을 올리고 있는 정도 계열 문파이다. 특히 폭혈단을 해독해 준 대가로 구대문파에서 상당수의 고수들을 파견해 놓은 상태였으니 공략하기가 더욱 까다로울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준환은 당문을 멸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신중하게 계략을 짜내야겠군." 고개를 돌리자 열심히 눈치를 살피는 수하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사준환은 그중 곽천도를 향해 턱짓을 했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는 곽천도를 본 사준환은 몸을 돌려 내실로 들어갔다. "부르셨습니까?" "거기 앉아라." 공손히 의자에 앉는 곽천도를 보며 사준환은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내가 한 처사가 심하다고 생각하느냐?" 화들짝 놀란 곽천도가 급급히 도리질을 쳤다. "아, 아닙니다. 속하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구태여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 넌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표출되는 형의 인간이니까." 사준환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곽천도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무릇 조직에는 엄격한 신상필벌이 존재해야 하는 법. 비록 그들이 어디에 내놔도 제몫을 하는 절정고수라고는 하나 잘못을 유야무야 넘길 수는 없다. 일벌백계로써 처벌해야 다른 수하들이 긴장하는 법이지."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였음에도 불구하고 곽천도의 얼굴에는 그다지 수긍하는 빛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러나 사준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애당초 수하들의 기분 따위에 연연해하는 성품이 아니었다. "당문을 치려한다." 사준환이 내뱉듯 툭 던진 말에 곽천도가 깜짝 놀랐다. "다, 당문을 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곽천도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 당문을 치는 것은 시기상조입니다. 대제께서도 아시다시피 사천은 전통적으로 정파의 입김이 강한 지역입니다. 바로 지척에 청성과 아미파가 도사리고 있는데다 무림맹에서 이미 상당수의 무사들을 파견해 놓은 상태입니다. 애석하게도 당문의 중요성을 무림맹에서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그 때문에 당문을 쳐야 한다. 놈들 때문에 폭혈단의 효과가 현저히 떨어져버렸어. 놈들이 아니었다면 이번에 무림맹의 근간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준환의 눈동자가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당문 놈들은 현재 무림맹에 여러 가지 해약을 제공하고 있다. 폭혈단은 물론이고 독강시의 해독제까지 공급하고 있어. 모든 독의 해독제가 개발되기 전에 뭔가 수를 내야 한다." "하, 하오나 지금 당문을 공격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부담이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무림맹과 전면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걱정할 것 없다. 이이제이! 본련이 아닌 다른 세력을 이용하면 된다." 곽천도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다른 세력이라 하심은?" 사준환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패왕문을 이용하는 것이지. 어차피 정리해야 할 문파였으니 이번 기회에 당문과 상잔시키려 한다." 기발한 생각이었지만 곽천도는 순순히 수긍하지 않았다. "하지만 패왕문에서 순순히 당문을 치려하진 않을 텐데요? 자살행위란 것을 뻔히 아는 마당에 대관절 누가 앞장서서..." 사준환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패왕문의 주력 고수들 대부분이 나에게 포섭되어 있는 상태이니 말이다." 곽천도는 혀를 내둘렀다. 대관절 언제 손을 써서 패왕문의 고수들을 구워삶았다는 말인가? 잠마련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자신조차도 모르는 사이에 패왕문에 손을 썼다니..." 패왕문은 오랜 전통을 가진 사도의 방파다. 비록 마교만큼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수백 년 가까이 이어 내려오는 전통 있는 문파인 것이다. 한때는 마교와 함께 마도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힘을 지닌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형편없이 몰락하여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잣집은 망해도 삼 년을 가는 법. 패왕문이 지닌 저력은 아직까지 만만치 않은 수준이다. 절정 급 이상의 고수들은 별 볼일 없지만 허리 역할을 하는 일류급 무사진이 무척 탄탄했다. 사실 정사대전이 벌어질 때만 해도 패왕문은 만만치 않은 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마교를 제외한다면 사파 제일의 방파라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사대전 기간 동안 패왕문은 대부분의 주력고수들을 잃고 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해버렸다. 그것은 사준환의 입김이 작용한 탓이었다. 정사대전 중 패왕문은 의문의 고수들에 의해 본단이 쓸렸다. 그 와중에서 패왕문주를 비롯한 식솔들이 모조리 도륙 당했다. 패왕문에서는 그것을 정파의 별동대가 한 짓이라 간주하고 복수를 다짐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본단에 난입해 패왕문의 식솔들을 도륙한 것은 바로 잠마련의 무사들이었다. 패왕문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기 위해 사준환이 은밀히 무사들을 파견했던 것이다. 물론 그 사실은 대외적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심지어 사준환은 기밀엄수를 위해 습격에 가담했던 무사들까지 죽여 입을 막아버렸다. '패왕문은 다수의 마도 문파에게 정신적인 지주로 군림하고 있다. 어떻게든 몰락시켜야 해.' 그 결과 패왕문은 모든 힘을 잃고 거의 봉문에 가까울 정도로 침체되어버린 상태였다. 그나마 살육의 와중에서 패왕문주의 딸이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 몇 남지 않은 장로들이 그녀를 차기 문주로 옹립하고 패왕문의 재건을 꾀하려 했다. 그러나 패왕문이 설 곳은 이미 무림에 없엇다. 이미 잠마련이 패왕문 대신 사파의 확실한 종가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이빨 빠진 신세가 된 패왕문은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사준환은 코웃음을 쳤다. "계집이 패왕문을 살리기 위해 노심초사한다는 소식은 들었지.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야. 무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조직은 무림에 설 수 없으니..." 잠마련을 설립한 뒤 사준환은 패왕문에 은근슬쩍 손을 내밀엇다. 정략결혼을 통해 패왕문을 잠마련에 흡수시키려 한 것이다. 비록 유명무실한 존재로 몰락했다고 해도 패왕문이라는 이름만큼은 무시할 수 없다. 아직까지 많은 마도의 방파들이 패왕문이라는 이름 석 자를 똑똑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왕문의 신임 문주는 사준환의 제안을 일거에 거절했다. 정략결혼에 응한다면 패왕문 자체가 흔적도 없이 잠마련에 흡수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사준환은 노발대발했다. "이런 건방진 계집이..." 그는 지체 없이 패왕문에 손을 썼다. 흑법사가 개발해낸 독을 이용해 문의 대들보 역할을 하던 장로 세 명을 중독시켜 버린 것이다. 그로인해 패왕문의 어린 문주는 의지할 곳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를 지지해 왔던 장로들이 모조리 식물인간이 되어버렸으니 고립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전대 패왕문주의 딸이라고는 하나 그녀의 무공실력은 변변치 않은 편이다. 쓰러진 장로들이 심혈을 기울여 무공을 전수했지만 자질 자체가 그리 뛰어나지 않았던 탓에 무공방면으론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패왕문의 다른 고수들이 그녀를 탐탁하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무림에서 인정받는 방법은 오로지 무공뿐. 지지해 주던 장로들이 의식불명이 되자 그녀는 당장 곤란한 지경에 처해버렷다. 중견고수들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하고 나선 것이다. "겨우 일류에도 미치지 못하는 무공실력으로 패왕문의 문주 자리를 꿰차고 있다니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요?" "이대로 가다간 우리 패왕문은 공중분해 되고 말 것이오. 무공이 고강한 다른 사람을 영입해 신임 문주로 옹립해야 우리 패왕문이 살아날 수 있소." 물론 그들 중 대부분은 잠마련에 의해 포섭된 자들이었다. 사준환이 무공과 부귀영화를 미끼로 여러 명의 중견고수들을 포섭해 놓았던 것이다. 사준환은 그들을 내세워 패왕문을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갔다. 별다른 지지 세력이 없던 패왕문주는 변변찮게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이권을 하나 둘씩 빼앗기던 패왕문주는 종국에는 휘하 무사들에게 명령 하나 내릴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멍청한 문주일 뿐 아무런 실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사준환은 바로 그 패왕문을 내세워 당문을 공격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록 몰락했다고는 하나 패왕문에는 상당수의 정예무사들이 남아있다. 일류급 무사들의 수만 해도 오백에 달하는 만큼 성공적으로 기습을 가한다면 충분히 당문과 상잔시킬 수 있다." 현재 패왕문에서 무력단체들을 이끄는 수뇌부들은 대부분 사준환에 의해 포섭된 상태였다. 그가 명령을 내린다면 그들은 지체 없이 휘하 무사들을 이끌고 당문을 치러 갈 것이다. 이미 잠마련의 주요직책과 부귀영화를 보장받은 그들이 몰락해가는 패왕문에 미련을 가질 리는 없었다. "가급적 시간을 줄이는 것이 관건이야. 패왕문의 신임문주는 이미 발언권이 없는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지 오래니까 걱정할 것은 없겠지. 그년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지극히 효율적으로 당문과 상잔시킬 수 있어." 생각을 접은 사준환은 곽천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가 할 일이 있다." 곽천도가 고개를 직각으로 꺾었다. "하명하십시오." "너에게 음살대 소속의 살수 서른 명을 붙여주겠다. 당문 주위에 숨어 있다가 기회를 봐서 데이몬이라는 색목인 놈을 죽여라."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뜨는 곽천도를 향해 사준환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구태여 생포할 필요는 없다. 보는 즉시 죽여서 수급을 잘라 오너라. 중요한 것은 패왕문이 기습을 가해 한창 혼란일 때를 노려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패왕문이 언제 기습을 할지 알아야..." "그 시기는 내가 알려주겠다. 최소한 보름 내에 패왕문이 행동에 나설 것이다." 곽천도는 두말 하지 않고 복명했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공인 사준환이 공언했으니 패왕문은 반드시 당문을 공격할 것이다. 혼란을 틈타 데이몬을 암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데이몬을 한 번 생포했던 곽천도가 아니던가? 때문에 곽천도는 어렵지 않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몰랐다. 현재 데이몬이 당문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을. 물론 그 사실은 사준환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상황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패왕문의 신임문주를 외부로 유인해 낸 뒤 당문의 암기를 이용해 죽여야겠군. 그런 다음 포섭해 놓은 고수들을 동원해 바람을 잡는다면 능히 당문과의 전면전을 유도해 낼 수 있지.' 사준환은 포섭해 놓은 패왕문의 고수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어차피 소모품으로 영입한 자들이었지만 이 정도의 일쯤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정파냐, 사파냐***** 지극히 단아하게 치장된 방이었다. 그다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뭔가 품격이 느껴지는 내실에는 고아한 형태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벽에 걸린 수묵화가 은은한 정취를 풍겨내는 방. 화려한 비단 침상 위에는 한 중년인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쭉 뻗은 콧날과 꽉 다문 입술이 강인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특이하게도 머리칼이 하얗게 센 백발이었다.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침대 위에 늘어져 있었다. 간헐적으로 눈매를 일그러뜨리는 것을 보아 좋지 않은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사내의 정체는 바로 데이몬과 일전을 펼쳐 패한 영호명이었다. 비영전주 갈천성의 등에 업혀 그곳을 떠났던 영호명이 이곳에 누워 있는 것이다. 심기가 좋지 않은 듯 입매가 연신 쫑긋거리던 영호명이 잠시 후 힘겹게 눈을 떴다. 지쳐 보이지만 맑기 그지없는 눈빛이 드러났다. 정신을 차린 영호명은 우선 방 안을 살폈다. '이곳은 또 어디지?' 아무리 봐도 낯선 곳이었다. 데이몬과의 싸움에서 모든 힘을 소진하고 쓰러진 자신이 대관절 왜 이런 곳에 누워 잇단 말인가? 호기심이 치밀어 오른 영호명은 방 안을 살폈다. 어찌 보면 대갓집 귀부인의 규방처럼 보이는 방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고급 기루 같기도 하군. 특별히 티가 나진 않지만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그래.' 생각에 몰두하던 영호명은 돌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독고성에게 당한 패배가 떠오른 것이다. 그의 얼굴에 착잡함이 서렸다. '그놈이 그토록 강해질 줄이야.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철천지원수를 두고 힘이 모자라 복수를 하지 못하다니...'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는 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독고성의 실력은 설사 자신의 몸이 최상이었다고 해도 섣불리 승리를 자신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영호명은 잠자코 독고성과의 대결을 복기해 보았다. 용호상박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대결이었지만 영호명에게는 그리 만족할 만한 대결이 아니었다. '지금껏 난 우물 안 개구리였어. 그래놓고 현경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우쭐대었으니...' 독고성의 실력은 그 정도로 뛰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무위가 압도적일 정도로 강한 것은 아니었다. 수준 자체로만 보고 따진다면 자신과 비슷하거나 약간 떨어지는 정도였다. 그러나 영호성이 감탄한 것은 독고성의 싸우는 감각이었다. 독고성은 지극히 지능적이고 효율적으로 싸웠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자신의 공격을 피하거나 흘려버렸고 간간히 가해지는 반격은 매섭기 짝이 없었다. 덮어놓고 공격을 가하다가 급격히 체력을 소진하고 무너진 자신과는 극히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영호명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싸운다고 해도 섣불리 승부를 장담할 순 없어. 놈은 그정도로 강해졌어.' 영호명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거머쥐었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진 않아. 선사님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주신 분이야. 반드시 네놈에게 복수를 하고 말 것이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영호명은 살짝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누가 자신을 이리로 옮겨 왔는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정황을 살피려는 것이다. 잠시 후 누군가 방 안에 들어왔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호명은 들어온 사람의 정체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보폭과 마룻바닥의 진동음을 볼 때 여자로군. 무공을 익힌 것 같은데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아. 잘 봐줘야 이류 정도? 기운이 속으로 갈무리된 것을 보아 첩자나 살수류의 무공을 익힌 것 같군.' 현경의 무위를 가진 초인이 판별하는 것이니만큼 그 추측은 더없이 정확할 터였다. '뭔가를 들고 들어왔군. 냄새를 보니 생선으로 쑨 죽 같은데?' 별안간 공복감이 치밀어 올랐다. 시장한 상태에서 음식 냄새를 맡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영호명은 티를 내지 않고 죽은 듯 고요히 누워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음식접시를 들고 들어온 이가 영호명의 침대맡으로 다가왔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날 데리고 왔을까? 혹시 독고성 놈의 수족이 아닐까?' 그러나 정신없이 돌아가던 영호명의 상념은 그대로 정지해 버렸다. '뭐,뭐야?' 뭔가 부드러운 것이 입술을 덮는 순간 영호명은 감았던 눈을 부릅떴다. 지극히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영호명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20대 초반의 청초한 분위기를 풍기는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에게 입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란 것은 여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크게 뜨여진 봉목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이윽고 입술 사이로 뭔가 향기로운 것이 주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여인이 입에 머금었던 죽이었는데 놀라움이 지나치다보니 영호명은 그대로 사레가 들려버렸다. "콜록 콜록." 격하게 기침을 토해내는 영호명을 보고 여인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영호명은 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쿨럭" 여인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놀라지 마십시오, 상공. 상공께서 의식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영호명은 비로소 정황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이 기절한 상태였기 때문에 여인이 직접 음식을 씹어서 먹여준 것이었다. 중환자에게 드물게 하는 처방이었다. 그러나 당사자이다 보니 놀란 가슴이 쉽사리 진정될 리가 없었다. 영호명은 사력을 다해 들뜬 가슴을 진정시켰다. "이제부터는 그러지 않아도 되오. 정신을 차렸으니 혼자서 음식을 먹을 수 있소." 여인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알겠사옵니다, 상공." 여인은 즉시 조그마한 상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다음 가지고 들어온 생선죽을 조심스럽게 차렸다. "일단 식사를 하시지요. 많이 시장하실 텐데..." 곤혹스런 눈빛으로 여인을 쳐다보기만 할 뿐 영호명은 좀처럼 수저를 들려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나에게 음식을 먹인 것이오?" 여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가만히 여인을 쳐다보던 영호명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자세히 살펴보니 여인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청초한 분위기의 미녀였는데 흰 살결과 늘씬한 키를 보니 전형적인 북방 미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영호명에게 중요한 것은 여인의 미모가 아니었다. "이곳은 대관절 어디요?" "..." "무엇 때문에 날 이리로 데리고 왔소?" 그러나 여인은 순순히 대답해 주지 않았다. "제 이름은 수련입니다. 제가 상공의 시중을 맡고 있으니 앞으로 시키실 일이 있으면 마음껏 부려주십시오." "나는 당신의 이름을 물어본 것이 아니오. 이곳이 어디고 왜 날 이리로 데리고 왔는지 알고 싶소." 여인의 얼굴에 난감함이 떠올랐다. "죄송하지만 천녀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사옵니다." 영호명의 눈썹이 휘말려 올라가려는 순간 여인이 급히 말을 이었다. "일단은 이곳에서 축난 몸을 보하시옵소서. 머지않아 문주님께서 오셔서 상공의 의문을 풀어주실 것이옵니다." 그 말에 영호명의 눈이 살짝 커졌다. "문주? 문파에 속해 있소?" "그렇사옵니다." "혹시 무슨 문파인지 물어도 되겠소?" 잠시 머뭇거리던 여인이 공손히 대답해 주었다. "하오문이옵니다." "하오문?" 뜻밖인지라 영호명은 눈매를 지그시 모았다. 물론 그는 하오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기녀와 점소이들을 문도로 받고 있는 사도 계열의 방파. 정보력 면에선 개방과 맞먹지만 지닌 무력이 보잘것없어 삼류로 치부되는 방파 아니던가? '도대체 하오문에서 왜 날?' "상공께 해를 끼칠 생각은 추호도 없사옵니다. 그러니 당분간 이곳에서 요양하시며 몸을 회복시키시옵소서. 그동안 천녀가 성심껏 모시겠사옵니다." 수련이라는 여인의 말을 들은 영호명은 묵묵히 머리를 끄덕엿다. 하오문 정도의 무력이라면 자신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전무하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좋소. 일단은 그렇게 하리다. 하지만 칠 주야 이내에 내 의문을 풀어주어야 할 것이오."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문주님께서 가까운 시일 내에 내방하실 것이옵니다." 고개를 끄덕인 영호명은 수저를 들었다. 수련이 재빨리 생선 살을 발라 수저 위에 올려주었다. 영호명의 얼굴에 머쓱한 표정이 떠올랐다. '허 참, 황제로 있을 때도 이런 호사를 누려보지 못했거늘...'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무랄 데 없는 미녀가 지극히 공손하게 식사 시중을 들어주니 기분이 나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터. 영호명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식사에 몰두했다. '그러고 보니 황제로 있었으면서도 이 정도의 호사는 누려보지 못했던 것 같군' 영호명의 뇌리에는 어느덧 더없이 바빴던 아르카디아에서의 삶이 떠오르고 있었다. 무릇 황제라 함은 온갖 부귀영화와 호사를 한껏 누릴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또 실제로도 그러했다. 하지만 영호명에게는 적용되는 사항이 아니엇다. 평화기의 황제라면 능히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호사를 누리겠지만 불행히도 영호명은 지극히 어려운 시기에 황제가 되었다. 인생의 태반을 거친 전쟁터에서 보냈고 전쟁이 끝났어도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녔기 때문에 부귀영화와는 그다지 인연이 닿지 않았다. 게다가 영호명은 평생을 걸쳐 아내인 발레리 한 여인만을 사랑했다. 그러니 다른 여인에게 한눈을 팔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아내가 죽고 다시 중원에 돌아오자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친숙한 생김새의 중원 여인, 그것도 지극히 청초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는 것이다. 식사를 하며 영호명은 힐끔힐끔 수련이라는 여인을 훔쳐보았다. '아르카디아의 여인들도 지극히 아름다워. 하지만 중원의 여인들을 보니 느낌이 또 다르군. 더없이 친숙하다고나 할까?' 영호명은 인생의 태반을 이계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의 뿌리는 엄연히 중원이다. 원천적으로 다른 세계이다 보니 두 세계의 여인들은 감정표현이나 사고방식이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영호명이 고향인 중원의 여인들에게 느끼는 감흥이 색다를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고향에 오니 좋긴 하군. 오자마자 정통으로 한 대 얻어맞아서 문제지만 말이야.'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식사를 마쳤다. 재빨리 상을 치운 수련이 탕약 한 그릇을 대령했다. "몸에 좋은 탕약이옵니다. 쭉 들이키시옵소서." 약사발을 받아든 영호명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허허, 정말 오랜만에 보약을 먹어보는군. 아르카디아에서는 특별히 보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거늘.' 몸에 좋은 약이 쓰다는 사실을 입증하듯 쭉 들이키자 씁쓸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얼굴을 찡그리는 영호명에게 수련이 정갈하게 깎은 과일을 내밀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과일을 받아들었다. 두 남녀의 기묘한 동거는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영호명은 한동안 요양에 치중했다. 철마로 활약하며 축난 몸을 추수르는 데 전력을 다한 것이다. 그동안 수련은 정말 정성을 다해 영호명의 시중을 들었다. 그 정성 탓인지 영호명은 서서히 과거의 무위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오늘도 영호명은 내실에 좌정하고 앉은 채 운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조식을 함에 따라 유형의 진기들이 쉴 새 없이 코와 입을 통해 들락거렸다. 그동안 영양분이 풍부한 음식과 몸에 좋은 보약들을 끊임없이 먹어댔기 때문에 영호명의 몸 상태는 많이 호전되었다. 고갈되었던 기력도 많이 보충되었고 체력 또한 정상으로 돌아선 지 오래였다. 영호명은 남는 시간을 모두 운기행공에 투자했다. 과거의 무위를 하루빨리 되찾아야만 복수를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개한 눈에 슬그머니 살기가 떠올랐다. '기다려라, 독고성. 지번의 패배를 설욕하는 동시에 스승님의 혈채를 반드시 받아내고야 말겠다.' 원래 운기행공에서 딴생각을 하는 것은 최대의 금기사항이다. 그러나 영호명 정도의 초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영호명은 어느덧 운기의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운기행공이 진행됨에 따라 영호명의 몸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어 쾨쾨한 냄새를 내는 액체가 모공을 통해 몸 밖으로 배출되었다. 몸 속에 축척되어 있던 나쁜 기운들을 운기를 통해 배출시키는 것이다. 영호명의 몸은 어느새 오색 서기에 휩싸여 있었다. 어지간한 고수들조차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의 장관이었다. 그 모습을 수련이 놀란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세, 세상에 저 정도의 고수가 존재했었다니...' 자신도 모르게 입이 딱 벌어졌다. 하오문의 비밀요원으로 키워져 무림에 대해 해박했던 그녀조차도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일인 것이다. 사실 수련은 하오문의 특급 정보원이었다. 어린 시절 기루로 팔려온 그녀를 하오문에서 온갖 훈련을 시켜 정보원으로 키워냈다. 흔히들 말하기를 하오문의 정보력은 결코 개방에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기녀들과 점소이들이 거둬들이는 정보가 거지들에 비해 질적, 양적으로 떨어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고급 정보를 얻어내기에는 역시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일급 회담은 보통 밀실에서 열리기 마련이다. 그런 곳을 기녀나 점소이가 접근하기는 요원한 법. 게다가 하오문에는 은밀히 잠입해서 정보를 빼낼 만한 실력을 가진 고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하오문에서는 고급 정보를 빼내기 위해 미모가 뛰어난 기녀들에게 특별한 훈련을 시켜왔다. 훈련받은 정보원들을 무림고수들의 애첩으로 들여보내 정보를 빼내는 것이다. 물론 그런 정보원들의 말로는 비참한 편이었다. 정체가 드러나서 죽임을 당하는 것은 예사였고 죽기 전에 온갖 고문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수련의 주변에는 그런식으로 세상에서 사라진 선배 정보원들이 많고도 많았다. 그러니 수련 역시 그런 운명을 각오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하오문주에게 호출을 받았을 때 수련은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처음 보는 남자에게 거리낌 없이 몸을 바치고 훈련받은 대로 방중술을 발휘해 대상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다. 그러다 일이 잘못될 경우 온갖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런데 하오문주는 수련에게 특이한 주문을 했다. "아무것도 하려 하지 마라. 단지 진심으로 그분의 시중을 들면 된다." 전혀 뜻밖의 명령이었기에 수련은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생각은 일체 하지 마라. 그저 성심껏 모시는 것이 네 임무이다." 지금껏 선배 정보원들이 받아왔던 명령과는 전혀 다른 임무였기에 수련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수련은 명령이 내려온 내막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긴 저런 초고수에게 섣부른 수작이 통할 리가 없지.' 정보원으로 훈련받으며 그녀는 무림의 쟁쟁한 고수들의 신상정보와 무위에 대해 배웠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저 정도로 엄청난 위용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 영호명의 운기조식을 보며 수련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정말 인간 같지가 않군. 도대체 어디서 저런 사람이...' 다행히 그녀의 임무수행은 무척이나 쉬운 편이었다. 지금껏 영호명은 단 한 번도 그녀의 몸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따금 모호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기는 했지만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몸을 요구한다면 두말없이 바치라는 명령을 받긴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시중드는 것도 그다지 까다롭지 않았다. 마치 예전에도 그래왔던 것처럼 영호명은 아주 자연스럽게 시중을 받았다. 수련은 두 손을 다소곳이 모은 채 운기중인 영호명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저분은 예전에 아주 높은 위치에 오르셨던 분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시중을 받는 데 저토록 능숙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물론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모시는 사람이 거대한 대제국의 황제였다는 사실을. 자유롭게 운기를 할 수 있게 되자 영호명은 본격적으로 몸을 단련하기 시작했다. 하루정도는 가벼운 권각술로 몸을 풀었고 다음날부터는 병장기를 다뤘다. 소림사에서 무공을 배웠기 때문에 그는 십팔반 병기를 자유 자재로 다루는 편이었다. 물론 주로 다루는 병기는 검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가 수련에게 주문한 병기는 전혀 뜻밖의 무기였다. "도(刀)를 한 자루 구해주겠나?" 수련은 두말하지 않고 복명했다. "어떤 형태의 도를 원하십니까? 종류를 말씀해 주신다면 즉각 구해드리겠습니다." 영호명은 지그시 미간을 모았다. 중원에 수많은 종류의 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잠시 잊은 것이다. 중원에는 병장기의 종류가 매우 다양했다. 도만 하더라도 수십 종류가 있었다. 미첨도, 귀두도, 박도, 태도 등등 종류를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든 수준이다. 영호명은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도를 찾았다. "묵직한 중도(重刀)가 좋겠군. 가급적 칼등이 두텁고 찌르기가 가능하도록 끝이 날카로운 놈으로 부탁하겠네." "알겠사옵니다. 즉각 대령하도록 하겠습니다." 영호명이 주무기인 검이 아닌 도를 주문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무공이 검법이 아니라 도법에 가까울 정도로 변형되었기 때문이었다. 영호명은 오랜 고민 끝에 검을 버리고 도를 선택했다. "검보다는 도를 쓰는 것이 월등히 나을 것 같다." 검은 공격방식이 다양한 병기이다. 찌르고 베는 등등의 모든 공격이 가능하다. 그러나 아르카디아에 건너간 뒤 영호명의 초식은 무척 많이 바뀌었다. 상대가 중갑주를 걸친 기사이다보니 현란한 기교의 찌르기보다는 힘에 의지한 베기에 치중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영호명이 검법은 거의 도법에 가까울 정도로 변형되었다. 무사들이 말하길 흔히들 무공은 살아있다고 한다. 같은 초식의 무공이라도 상대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되는 것이 무공이다. 그런 탓에 영호명의 무공은 원류와는 상이하게 변형된 상태였다. 영호명이 아르카디에서 사용한 검은 묵직한 바스타드 소드. 워낙 오랫동안 사용했기에 다른 형태의 검은 손에 맞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비교적 얇고 가벼운 편인 중원의 검이 그의 구미에 맞을 리가 없는 것이다. 영호명이 도를 택한 데에는 바로 그러한 이유가 있었다. 현란한 움직임을 버리고 도 특유의 힘에 바탕을 둔 묵직한 파괴력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어차피 내공 방면으론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 도를 사용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다.' 몇 시진 후 수련이 들고 온 도를 잡아본 영호명은 자신의 판단이 정확했음을 직감했다. 손잡이를 잡았을 때 전해지는 묵직한 무게감은 영호명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정말 좋군. 훌륭한 선택이었어." 도병을 불끈 움켜쥔 영호명은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릿하게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격력해지는 춤이었다. 내공을 일절 사용하지 않았기에 몸에 걸친 무복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버렸다. 굳어 있던 근육을 풀고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기 위해 영호명은 며칠동안 칼춤을 추며 보냈다. 그동안 수련은 땀을 닦을 수건을 받쳐 든 채 칼춤을 추는 영호명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 하오문주인 갈천성은 정확히 칠 주야가 지난 뒤 정원을 찾았다. 그때는 영호명의 몸 상태가 거의 정상으로 돌아간 때였다. 영호명을 찾아온 수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문주님께서 오셨사옵니다." 영호명은 살짝 긴장했다. 이미 누가 방문한 사실이 그의 예민한 감각에 포착된 상태였다. "드디어 만나게 되는군." 한껏 휘두르던 도를 내려놓은 영호명은 수련의 손에서 수건을 건네받아 땀을 훔쳤다. 한바탕 춤사위를 벌였기 때문에 벌거벗은 상체가 땀으로 흥건했다. 수련이 여분의 수건을 들어 영호명의 등을 닦아주었다. "수욕을 하고 들어가시지요." "그럴 순 없지. 손님이 찾아왔는데 어떻게..." "문주님께선 상공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셨사옵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영호명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저분한 몸으로 손님을 맞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지. 그럼 수욕을 하고 갈까?" "제가 시종을 들어주겠사옵니다." 수련이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수건을 받쳐 들고 영호명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수욕을 마친 영호명이 내실로 들어갔다. 정갈한 백의로 갈아입은 영호명의 모습은 정말로 멋들어졌다. 나이답지 않게 잡티 하나 없는 피부, 쭉 뻗은 콧날과 굳게 다문 입술, 치렁치렁한 백발이 독특한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벌써 구십이 넘은 나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고작해야 삼십대 중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갈천성은 내실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영호명이 들어가자 그가 재빨리 상석을 권했다. "저기 앉으시지요." "그럴 순 없소. 손이 어찌 상석에..." "그래야만 제가 편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허 참." 갈천성의 태도가 워낙 굳건했기 때문에 영호명은 혀를 차며 의자에 앉았다. 그는 우선 갈천성의 관상을 살폈다. 자신을 구해준 저의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겉보기에 갈천성은 쥐상의 음흉하게 생긴 40대 장년인이다. 그러나 영호명은 생김새에 구애받지 않고 갈천성의 눈빛을 유심히 살폈다. '생각보다 눈빛이 깊고 맑은 편이로군. 전형적인 책략가 타입이라고나 할까?' 삼국시대의 봉추 방통도 지닌바 지략에 비해 외모가 극히 추레했다고 전해진다. 그 사실을 떠올린 영호명은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우선 본인을 구해주고 보살펴 준 은혜에 대해 감사드리오." "천만의 말씀입니다. 과례를 거둬 주십시오." 갈천성이 당치도 않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게 되어 귀인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걸 어찌 은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영호명은 조영히 갈천성의 말을 잘랐다. "그래도 은혜는 은혜인 것이오. 귀 문주가 아니었다면 난 지금쯤 짐승의 밥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 보살펴준 은공 결코 잊지 않겠소이다." "허허,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싱긋 미소를 지은 영호명은 조용히 갈천성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래, 우연히 지나치는 길에 나를 발견했다고 하셨소?" "그렇습니다. 외진 산길을 지나다 폭음을 들었습니다. 호기심 덕택에 두 분의 대결을 관전할 수 있었지요.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영호명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접전 와중에 느꼈던 인기척이 바로 하오문주의 것이었군.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신경 쓰지 못했지.' 그러나 그 말을 듣자 여러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자신이 느꼈다면 독고성 역시 하오문주의 기척을 간파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모른 척하고 그곳을 떠났단 말인가? 의아해진 영호명은 그 점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그때 나와 싸우던 자가 모른 체하고 그냥 떠났단 말이오?" 그 말을 들은 순간 갈천성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그것을 설명하자면 먼저 자신의 과거행적을 밝혀야 한다. 만약 자신이 한때 잠마련의 하수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영호명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 바로 그 점 때문에 갈천성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뭔가 숨기는 것이 있군.' 영호명은 미간을 지그시 모은채 갈천성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모습을 본 갈천성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어쩔 수 없다. 숨긴다고 해서 숨겨지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모든 것을 밝히고 처분을 받는 것이 낫지.' 갈천성은 영호명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묵회라는 조직의 조직원이었습니다." "묵회?" 영호명으로서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조직이다. 철마로 활약할 당시 묵회 소속으로 움직였지만 영호명이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다. 그러나 이어지는 갈천성의 말에 영호명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묵회는 일종의 비밀결사입니다. 방계의 울분을 풀어준다는 명목으로 조직원들을 끌어 모았지요. 그러나 실상은 조금 다릅니다. 묵회는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잠마련의 하부조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가공할 기류가 내실을 휩쓸었다. 콰콰콰콰 잠마련의 하부조직이라는 말에 영호명이 격동했다. 현경의 고수가 내뿜는 기세는 실로 엄청났다. 갈천성이 채 말을 잇지 못하고 급히 숨을 들이켜야 했을 정도였다. "흡." 기류는 내실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한쪽에 다소곳이 무릎꿇고 있던 수련조차도 기세에 장악당해 얼굴이 창백해졌을 정도였다. 입술을 질끈 깨문 갈천성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영호명이 내뿜는 기세는 그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다. 단단히 화가 난 영호명이 당장 출수를 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 그러나 기세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영호명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을 되찾았다. "미안하오. 잠마련이란 말에 잠시 이성을 잃었소." "벼, 별말씀을..." 갈천성의 몸은 아직까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난생 처음 격어본 현경 고수의 기세는 그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귓전으로 무감각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한때 조직원이었다고 했으니 지금은 아니란 말이겠구려, 그렇지 않소?" "그, 그렇습니다." "손을 잘 떼셨소. 그렇지 않았다면..." 영호명을 말을 하다 말고 주먹을 불끈 거머쥐었다. "나의 분노에 직면해야 했을 것이오. 나는 잠마련의 총수 사준환에게 엄청난 원한이 있소. 그런 면에서 묵회와의 관계를 청산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 할 수 있소." "그, 그 사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영호명의 미간이 지그시 모아졌다. "당신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이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갈천성이 정색을 했다. "저는 이미 예전에 대공을 뵌 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갑옷을 입은 활강시의 상태였지만 말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또다시 엄청난 기세가 실내를 잠식했다. 그로 인해 몸이 덜덜 떨렸지만 갈천성은 억지로 버텼다. '저분에게 무조건 진심으로 대해야 해. 모든 것을 밝히고 처분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귓전으로 스산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그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알았소?" 갈천성은 차분한 어조로 지난 일들을 설명햇다. 강압적인 방법으로 묵회의 조직원이 되었지만 하오문을 당당한 마교의 정보단체로 만들기 위해 전폭적으로 묵회에 협력한 일과 그 와중에서 잠마련의 비밀병기이자 지금의 영호명인 철마와 여러가지 작전을 펼쳤던 일, 그리고 모용세가를 습격하다가 데이몬을 만나 독단을 깨물었던 일 등이 영호명에게 전해졌다. 영호명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갈천성의 말을 듣고 있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니 심중의 격동이 심한 모양이었다. '제 아무리 활강시가 되었다고 해도 내가 그런짓을 했었다니...' 영호명의 얼굴엔 어느덧 착잡함이 어렸다. 활강시가 된 상태에서 무림맹 지부를 습격해 수많은 무사들을 살상하고 모용세가를 궤멸시키는 데 일역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영호명을 보며 갈천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오나 그때의 철마와 지금의 대공을 그 누구도 연관 지어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철마로 활약한 당시 대공께서는 전신을 철제갑옷과 투구로 빈틈없이 감싼 상태였으니까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려. 그런 일을 내가 저질렀다니..." "그 일을 행한 것은 대공의 의지가 아니라 사준환의 모략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명령을 그가 내렸으니까요. 애당초 대공께서 몸담고 계시던 철혈문의 멸문에도 사준환이 깊이 관여하고 있지 않습니까?" 영호명이 예리한 눈빛으로 갈천성을 쳐다보았다. "본인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이 알고 계시는구려." "..." "대관절 누구에게 들었소?" 갈천성이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벽안독성 데이몬 공께 들었습니다." 영호명은 입술을 깨물었다. 데이몬이라면 그 가증스러운 독고성의 트루베니아식 이름이 아니던가? 그놈이 도대체 왜 자신에 대한 비밀을 하오문의 문주에게 말했단 말인가? 갈천성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대결이 끝난 뒤 데이몬 공은 의식을 잃은 대공을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잘 보살펴 주라고 말입니다." "영호명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그놈과 나 사이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은원이 자리잡고 있거늘..." "어쨌거나 데이몬 공은 대공께서 잘못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눈이었습니다. 저의 미력한 소견으로 생각하지나 아무래도 맞수에 대한 걱정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맞수에 대한 걱정?" "현 무림에서 데이몬 공과 맞서 싸울 상대는 오로지 대공뿐입니다. 현경의 경지를 개척한 초인이 그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대공께서 잘못되실 경우 영원한 호적수가 사라지기 때문에 부득이 저에게 맡긴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허, 대단한 비약이구려." 영호명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저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다지 신빙성이 없는 의견이었다. 마계의 마왕인 데이몬이 뭐가 부족해서 자신을 호적수로 생각한단 말인가? 그러나 예상되는 점이 전혀 없지만은 않았다. '독고성 놈도 사준환에게 상당한 원한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적의 적은 곧 동료라는 말이 있으니 놈은 아마도 사준환을 견제하기 위해 나를 하오문주에게 맡겼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영호명은 갈천성을 돌아보았다. "그놈이 나에 대해 뭐라고 밝혔소? 모조리 얘기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대공." 잠시 후 설명을 들은 영호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이몬이 그리 많은 것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자신이 과거 철혈문 출신이고 현경의 경지에 올랐으며 중원 무림이 아닌 다른 곳에서 활약했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물론 거기에는 자신이 철마가 되어 사준환의 꼭두각시로 전락했었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소림사에서 무공을 익혔고 철혈문의 문주였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군.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고개를 끄덕인 영호명은 재차 갈천성을 쳐다보았다. "데이몬 놈은 현재 무림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소?" "벽안독성 말씀이십니까?" "그놈의 별호가 벽안독성이오? 정말 주제 넘는 별호로군." 투덜거리는 영호명을 보며 갈천성은 씁쓸히 미소를 지었다. '데이몬 님에 대한 감정이 결코 좋으시진 않군.' 퍼뜩 생각을 접은 갈천성은 데이몬에 대한 사실들을 털어놓았다. "그분은 단기간에 상당한 무명을 쌓으신 분입니다. 게다가 정파 무림에서 차지하는 입지도 만만치 않고요. 일단 그분의 배후에는 당문이 있습니다. 한때는 멸문상태까지 몰리기도 했지만 당문으니 데이몬 님의 활약으로 과거의 성세를 고스란히 되찾았습니다. 잠마련과 모용세가에 잡혀 있던 식솔들을 모조리 구출해 왔으니까요. 게다가 그분의 휘하에는 냉유성이라는 초절정 고수가 있습니다. 그 외 몇몇 낭인 무사들과도 연관을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정보단체인 하오문주라서 그런지 갈천성은 데이몬에 대한 사항을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듣고 있던 영호명의 안색이 점점 굳어졌다. 처음에는 데이몬 하나만 상대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뒤에 당문이 도사리고 있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한때 사파의 마두였던 놈이 정파에 적을 두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니 그다지 이상하지도 않았다. 마계의 군주인 그에게 정사의 구별 따위는 무의미하다. 자신이 마왕이라는 사실을 그야말로 완벽하게 숨기고 있는 것이다. '난감하군. 설사 내가 그놈의 정체를 까발린다고 해도 누구 하나 믿어줄 사람이 없어.' 영호명은 현재 홀홀단신이다. 반면 데이몬은 명문인 당문을 등 뒤에 업고 있다. 제아무리 현경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도 개인 대 단체라는 괴리는 극복하기 힘들다. 자신만 해도 단신으로 잠마련에 뛰어 들어갔다가 사로잡히지 않았던가? '일단 천천히 생각해야겠군. 무엇보다도 놈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 중요해.' 생각에 잠겨 있는 영호명의 귓전으로 갈천성의 설명이 파고들었다.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점은 데이몬 공의 진정한 실력이 무림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현재 무림에는 데이몬 공께서 독술에 능하고 뛰어난 술법실력을 갖추었을 뿐 무공 방면에는 그리 뛰어나지 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잠마련에서도 그렇게 간주하고 있지요. 만약 데이몬 공이 현경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 무림 전체가 발칵 뒤집힐 것입니다." "그럴 것이오. 그놈은 옛날부터 음흉하며 계략에 능한 놈이었으니까. 놈의 성정이라면 능히 세상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소." "..." "어쨌거나 나는 그놈에게 원한이 있소. 그놈하고 잠마련의 사준환, 이 둘은 내가 한 하늘을 이고 살지 못하는 원수들이오." 그 말에 갈천성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 복수에 저를 동참시켜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미력한 능력이나마 일조를 하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영호명이 놀랄 차례였다. 하오문의 문주가 난데없이 자신의 복수를 돕고 싶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갈천성의 얼굴에는 어느덧 결연함이 감돌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맡길 주군을 만났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비록 무공이 변변찮지만 그래도 지략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설사 상대가 잠마련의 사준환이라고 해도 지략에서 만큼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력이 받쳐주지 않는 지략은 무림에서 통용되지 않는 법이지요. 그 때문에 저는 가슴속에 자리 잡은 포부를 일찌감치 접어버려야 했습니다." 토해내는 갈천성의 음성은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 "부디 절 휘하에 거둬주십시오. 그리고 대공의 복수에 절 동참시켜 주십시오. 제가 가진 재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갈천성의 입장에서는 절박했지만 당사자인 영호명으로서는 황당하기 그지 없는 제안이었다. "날 주군으로 모시겠다는 말씀이시오?" "그렇습니다. 심신을 다 바쳐 충성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영호명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어처구니가 없구려. 비록 문파가 멸문하긴 했지만 본인은 정파 계열의 무림인이었소. 그런데 사파 소속인 하오문의 문주께서 어찌 나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 있단 말이오?" 갈천성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정사의 구분은 하급무사나 막 출도한 자들에게만 중요한 것입니다. 주류에서 밀려나거나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다고 마도로 치부되는 것이지요. 단지 익히는 무공의 종류가 차이 날 뿐 정파와 사파의 무사가 대관절 무엇이 다릅니까? 동일한 중원인이 아닙니까?" 영호명은 흠칫했다. 오래 전부터 가져온 의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막 문파에 들어가거나 강호에 출두한 무사들은 상대편 진영에 대해 맹렬한 적개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속한 조직에서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영호명 역시 사파의 무사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살인, 강간을 자행하고 심지어 인육을 즐기기까지 하는 악인들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사대전을 치르며 그 생각은 많이 바뀌었다. 단지 추구하는 바와 무공이 다를 뿐 사파의 무사들 역시 피가 흐르는 인간이엇다. 그들에게도 동료애가 있고 목숨을 바쳐가며 지키는 신념이 있엇다. 사파 무사들과 싸우며 영호명은 그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나 당시의 영호명은 그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입장이 아니었다. 철혈문이라는 한 문파를 책임지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시에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덮어버렸다. 그러나 트루베니아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철혈문마저 멸문한 지금에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영호명은 잠자코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사파 무사들 중에서도 기개 있는 무사들이 제법 많았어. 인물도 적지 않았고...' 생각에 잠겨 있는 그의 귓전으로 갈천성의 음성이 계속 파고 들었다. "어차피 대공께서는 잠마련의 사준환에게 복수를 하셔야 합니다. 잠마련은 현 무림에서 단일 세력으로는 가장 큰 문파, 비록 대공께서 현경의 경지에 오르신 초인이라고 하나 잠마련 전체를 상대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습니다." 그 점을 인정한다는 듯 영호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신으로 난입했다가 사로잡혀 활강시가 되었던 그가 아니던가. "복수를 하시려면 우선 사람을 모아야 합니다. 문파를 창설해서 문파전으로 나가야만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그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마도를 선택하시는 것이 월등히 바람직합니다." 그 말에 영호명은 호기심을 느꼈다." "호오! 그건 또 어째서 그렇소?" "정파는 이미 체계가 확고히 잡혀 있습니다. 현경의 고수가 출도했다고 하면 무사들이 모이긴 하겠지만 어느 정도 이상은 힘듭니다. 게다가 기존에 자리잡은 문파들의 견제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9대 문파를 들 수 있겠군요. 그들은 여간해서는 새로이 부상한 강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건 오랜 무림사를 통해 증명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마도는 사정이 다르다는 말이오?" 갈천성이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도무사들은 오로지 힘만을 추구합니다. 강자지존! 적자쟁손! 무림의 법칙에 가장 충실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마도 무사들은 강력한 무공으로 자신을 꺾을 경우 아무런 거리낌 없이 충성을 맹세합니다. 반면 사승이나 혈연관계에 얽매인 정파 무사들은 그런 선택을 하기가 쉽지 않지요." "믿기가 좀 어렵구려." "하오나 사실입니다. 대공께서 정파 출신이셔서 납득하시지 못하겠지만 사파의 무사들은 생각보다 솔직담백합니다. 강자를 거리낌 없이 인정하는 풍토는 제가 보증할 수..." 영호명이 조용히 갈천성의 말을 끊었다. "그만 하시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소." "하, 하오나." "그래도 정사대전에서 정파의 편에 서서 싸웠던 나요. 내 손에 의해 무수한 무사들이 생을 마감해야 했지. 그랬던 나더러 사파의 무사가 되란 말이오?" 그러나 갈천성은 쉽사리 열정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사파의 무사가 아니라 마도의 종주입니다. 현 사파 무림에는 사준환의 전횡에 불만은 품은 무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공께서 나서주신다면 그들이 힘을 한 군데로 결집시킬 수 있습니다." "본인에겐 그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소. 그리고 나의 복수에 타인을 참여시키고 싶지 않소." 결연한 영호명의 태도에 갈천성도 입을 닫았다. 태도가 저토록 완강하니 설득할 만한 여지가 없는 것이다. 영호명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 그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소. 그러나 내 목숨을 구해준 은혜는 잊지 않겠소. 언젠가 내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 주도록 하리다. 알겠소?" "아, 알겠습니다." 영호명은 굳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본인은 지금 즉시 이곳을 떠날 생각이오.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으니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소." "이, 이리 급하게 떠나실 필요가..." "아니오. 그게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을 것 같소. 아무튼 대접 잘 받았소이다." 미련 없이 몸을 돌리는 영호명을 보며 갈천성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렇다면 부탁을 한 가지 드려도 되겠습니까?" 깜짝 놀란 영호명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 부탁을 하겠다는 말이오?" 살짝 고개를 끄덕인 갈천성이 손가락을 뻗어 수련을 가리켰다. "저 아이를 데리고 가 주십시오. 어느 정도 무공실력이 있으니 짐이 되진 않을 것입니다."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수련을 본 영호명은 미간을 지그시 모았다. "나에게 감시인을 붙이겠다는 말이오?"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세차게 고개를 흔든 갈천성이 수련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다소곳이 앉아 있던 수련이 다가왔다. "내가 널 이곳으로 보내면서 어떤 명령을 내렸느냐?" 수련이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무것도 꾸미지 말고 성심껏 대공을 모시라고 했습니다. 진심으로 말입니다." 갈천성의 시선이 영호명에게로 향했다. "이것이 제가 수련에게 내린 명령의 전부입니다. 감시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영호명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수련은 진심으로 자신을 대했다. 뭔가를 엿듣거나 다른 생각을 하는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귓전으로 갈천성의 진심어린 음성이 파고 들었다. "단지 전 대공과 한 가닥의 끈을 이어두려는 마음밖에 없습니다. 똑똑하고 영리한 아이이니만큼 대공을 시중드는 데 있어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이것이 제가 대공에게 드리는 유일한 부탁입니다." 그 말을 들은 영호명은 수련을 쳐다보았다. "너도 그렇게 하고 싶으냐?" 갈천성을 힐끔 쳐다본 수련이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허락해 주신다면 대공을 모시고 싶습니다." "앞으로 내가 걸을 길은 낭인의 길이다. 고생이 만만찮을 텐데?" "그래도 모시고 싶습니다." 사실 그녀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만약 영호명을 모시지 못하게 된다면 그녀의 운명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다른 정보원처럼 정보를 빼내기 위해 무림고수의 애첩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 분명했다. 생전 처음 보는 남자에게 순결을 바쳐야 함은 물론 정체가 탄로 날 경우 혹독한 고문을 당해야 한다. 그럴 바에야 영호명을 따라다니는 것이 백번 나은 일이었다. 게다가 정보원으로 키워졌다고는 하나 그녀 역시 무인이었다. 무의 길을 걷는 무인으로서 그 정점에 오른 절대자의 곁에 머문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바로 그 때문에 수련이 영호명을 따라나서겠다고 한 것이다. 그녀의 반응을 본 영호명은 살짝 눈매를 찌푸렸다. '허, 참 고민되는군.' 사실 그는 갈천성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철천지원수 데이몬의 끄나풀일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진솔하고 절박해 보인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안심할 수는 없다.' 원수인 데이몬은 마계에서 온 마왕이다. 어둠의 군대와 일전을 치러본 영호명은 마계군주들의 행사가 얼마나 은밀하고 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데이몬에게 세뇌되어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다. 그러나 수련만큼은 예외였다. 지난 칠 주야 동안 시중을 받아오며 그는 수련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품은 상태였다. 영호명은 수련의 청초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디 한 군데 나무랄 데 없는 미모였다. 그러나 수련을 쳐다보는 영호명의 눈빛에는 색욕 따윈 찾아 볼 수 없엇다. 그는 이미 본능마저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초인이었다. 그가 소련에게 가지는 감정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중원 여인에 대한 향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잠시후, 영호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수련을 거두도록 하겠소이다." 갈천성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수련이라면 조금의 모자람도 없이 대공을 보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갈천성이 수련을 쳐다보았다. "내가 명한대로 대공을 충실히 모시기 바란다. 대공께서는 먼곳에서 오신 탓에 중원의 물정에 대해 비교적 어두우시다. 그러니 세심하게 신경 써서 보필하도록 하라." "어김없이 봉행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갈천성의 시선이 영호명에게로 향했다.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신다면 지체 없이 수련을 통해 기별을 넣어주십시오. 그곳이 어디든 당장 달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영호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 보이오." "지금은 믿지 않으시겠지만 제가 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대공께서 찾아주실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결연한 갈천성의 태도에 영호명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영호명은 그 즉시 장원을 떠났다. 경장 차림을 한 수련이 등짐을 메고 뒤를 따랐다. 등짐 속에는 갈천성이 챙겨준 노자와 여행물품이 들어 있었다. 배낭이 부피가 만만치 않았기에 영호명이 손을 내밀었다. "이리 다오. 등짐을 내가 메겠다." "아니옵니다. 이런 일은 시녀에게 맡기는 법입니다. 천녀 역시 무공을 익힌 몸이오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수련의 고집이 완강했기에 영호명은 혀를 차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장원이 위치한 곳은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다. 하오문의 안가였기에 근처에 인적이 드문 편이다. 때문에 영호명과 수련은 한동안 시골길을 걸어야 했다. 그동안 많은 대화가 오갔다. 영호명은 우선 수련의 신상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래, 넌 어떻게 해서 하오문에 적을 두게 되었느냐?" 수련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지금껏 살아온 삶이 그리 평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체념한 얼굴로 모든 사실을 영호명에게 털어놓았다. "저는..." 어릴 적 기루로 팔려온 뒤 특출 난 미모로 인해 정보원으로 뽑혀 훈련을 받았다는 말에 영호명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삶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기구한 운명이로구나. 널 그렇게 만든 하오문이 밉지 않느냐?" 그러나 수련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정보원으로 뽑히지 않았다면 평생 웃음과 몸을 파는 기녀가 되었을 터, 전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처음에는 서운했지만 절 기루에 판 아비도 이젠 밉지 않습니다. 당시는 먹을 것이 없어 서로의 아이를 바꿔 잡아먹을 정도의 기근이 들었다고 했으니까요. 아비는 분명 저 하나라도 잘 먹고 잘 살라고 기루에 팔았을 것입니다." "허 참." 영호명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엇다. 수련의 사연이 쉽사리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그는 사회의 상류층 출신이었다. 비록 철혈문이 무림에서는 이, 삼류 문파라고는 하나 재정적으로는 지극히 부유한 편이었다. 그런 철혈문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영호명은 뭐 하나 부족함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무림 문파를 꿈꾸려면 엄청난 재정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수많은 무사들을 먹ㅇ기고 입하고 수련시키려면 어지간한 재력으로는 꿈도 꾸지 못한다. 무사들이 사용하는 그럭저럭 쓸 만한 검 한 자루가 일반 농민의 1년 치 생활비랑 맞먹을 정도이니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탓에 영호명이 수련의 사연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서로의 아이를 바꿔 잡아먹는다? 허 참, 믿을 수가 없군.' 수련은 대표적인 사회 하류층 출신이다.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 배를 곯으며 지냈다. 하층민 여인들, 특히 미모가 뛰어난 여인의 운명은 정말로 기구하다. 기껏해야 부잣집 늙은이의 첩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수련처럼 기루로 팔려가는 것이 다반사다. 그나마 수련은 잘 풀린 경우였다. 정보원으로 뽑혀 교육을 받은 덕택에 아직까지 순결을 보존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수련의 사연을 들으며 영호명의 표정이 연신 변했다. '이 아이, 정말 기구한 삶을 살아왔구나. 그런 삶이 있으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어. 소작농들이 그토록 힘들게 살아가다니...'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정파 무사들은 보통 사회 상류층 자제들이 많다. 재력과 인맥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명문 정파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빈민이나 하류층 청년들은 대부분 사파 무사의 길을 택한다. 사파에서는 재력이나 인맥보다는 자질과 노력을 따지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청년들은 일정한 경지에 오르기 전에 정파 협객의 명성을 높이는 재물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모든 난관을 극복한 몇몇만이 겨우 명성을 떨치게 되는 것이다. 영호명은 그 사실을 포로가 된 사파 무사의 입을 통해 들었다. '허, 그걸 보면 난 행운을 타고 난 편이로군.' 영호명은 씁쓸히 미소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돌연 수련에 대한 연민이 치밀어 올랐다. 부모를 잘 만난 덕에 평탄히 무공 수련을 할 수 있었던 자신과 가족의 생계해결을 위해 기루로 펼려가 처음 보는 사내에게 순결을 바쳐야 하는 수련의 삶은 정말로 대비될 수밖에 없다. 과거를 떠올린 영호명의 표정이 별안간 어두워졌다. '그때는 참 어리석었지.' 처음으로 무림에 출도했을 때 영호명은 점의감에 불타 단신으로 수라문 지부 하나를 궤멸시켰다. 그 과정에서 도합 쉰두명의 하급 무사들이 그의 손에 생을 마감했다. 그들 하나하나가 수련과 비슷한 처지의 하층민 청년이었다니... '정사의 구분이란 정말 무의미하군. 택한 문파의 성향에 따라 정파의 협객이 되기도, 사파의 마졸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야.'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도에 투신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영호명이 이끌던 철혈문의 무사들도 사파 무사들에 의해 무수히 목숨을 잃었다. 반대로 철혈문 무사들의 손에 의 많은 사파 무사들도 생을 마감해야 했다. 어느덧 영호명은 정사대전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무익한 싸움이라고 결론짓고 있었다. '당시는 불타는 정의감에 사로잡혀 사파 무사들을 도륙했었지.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짓을 했군.' 영호명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수련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상념을 접어 넣은 영호명이 조심스럽게 수련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네가 그런 삶을 살아왔었구나. 정말 고생 많았다." "벼, 별말씀을..." 수련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것을 바쳐 모셔야 할 귀인의 질문이라 순순히 대답했는데 뜻밖의 위로를 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천녀는 잘 풀린 경우입니다. 제 주변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지요." 이어 수련은 자신과 같이 훈련을 받은 정보원들의 운명을 말해 주었다. 영호명은 편치 않은 안색으로 수련이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 영호명에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사연들이었다. 촉망받는 정파의 후기지수에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영호명이 향하는 곳은 하남의 숭산이었다. 그는 가장 먼저 사문인 소림에 들러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홀홀단신인 그가 데이몬과 사준환을 상대하려면 뒤를 받쳐주는 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사문인 소림에 도움을 요청하고자 했다. 철혈문이 멸망한 상태에서 그가 기댈 곳은 오직 소림밖에 없었다. '아직까지 내가 속가제자의 적에 올라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정을 듣는다면 가만히 방관하진 않을 것이다.' 여정은 비교적 평탄한 편이었다. 하오문 정보원 출신 수련은 중원의 사정에 대해 훤했다. 게다가 문주인 갈천성이 적지 않은 노자를 쥐어줬기에 그들은 좋은 객잔에서 먹고 자며 몹시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당문과 패왕문을 상잔시켜라!***** 더없이 고풍스러운 전각이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웅장하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오랜 전통이 묻어나는 건물들이었다. 연무장을 사이에 두고 전각들이 자리 잡은 전형적인 무림문파의 구조. 그중 가장 큰 전각에서 울먹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장로님." 음성을 뱉어내는 이는 이십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처녀였다. 가느다란 눈매가 인상적인 미녀의 얼굴은 온통 수심에 젖어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죽은 듯 침상에 누워 있었다. 낮빛이 시커멓게 변한 것을 보아 독에 중독된 상태인 것 같았다. 물끄러미 노인을 쳐다보던 여인이 혹시나 하는 눈빛으로 노인의 머리맡에 앉아 있는 의원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의원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문주님. 저로서는 더 이상 손 쓸 도리가 없군요." 진맥도구를 주섬주섬 챙겨 넣은 의원이 방을 나갔다. 여인의 시선은 죽은 듯 누워있는 노인에게서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잠시 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정말 큰일이로군. 치료는커녕 아직까지 장로님들을 중독시킨 독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침상 밖으로 늘어진 노인의 손을 매만졌다. "제발 좀 일어나세요, 장로님. 저 혼자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요." 여인의 얼굴에서는 의지할 곳 없는 외로움이 배어나고 있었다. 놀랍게도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여려 보이는 여인의 정체는 사도 방파의 문주였다. 무려 오백여 명에 달하는 무사를 보유한 패왕문의 신임문주가 바로 그녀인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소정이었다. 패왕문주 풍소정은 착잡한 표정으로 지난날을 떠올려 보았다. '힘들어, 더 이상 버티기 힘들만큼...'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녀가 이런 상황에 처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무뚝뚝하지만 더없이 믿음직스러운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 그리고 그녀를 금이야 옥이야 아껴주는 두 오빠가 있었으니까. 심지어 어리광만 부리는 두 남동생도 그녀에겐 크나큰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그녀의 곁에 남아 있지 않았다. 정사대전 말기에 모조리 생명을 잃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규방에 있어야 할 그녀가 이처럼 일선에 나앉게 되었다. 5년 전 끝난 정사대전에서 패왕문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주력고수들이 함정에 빠져 몰살당하고 의문의 습격에 의해 본단이 쓸리면서 문주와 그 식솔, 대부분의 장로들이 이승을 하직했다. 남은 자들은 일, 이류 정도 수준의 중하급 무사들뿐이다. 그때 입은 타격이 얼마나 컸던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피해를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잣집은 망해도 삼 년은 간다고 했던가. 정사대전 와중에 세 명의 장로가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패왕문을 재건하려 했다. 당시 문주의 무남독녀인 풍소정은 약혼 문제로 다른 곳에 가있어서 화를 면했다. 장로들은 그녀를 신임문주로 임명한 다음 패왕문을 재정비하려고 했다. 패왕문의 소식을 듣자 상대 가문인 비천문에서 지체 없이 혼약을 취소했기에 걸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풍소정은 씁쓸히 미소 지었다. '더없이 야박한 것이 무림인심이라 듣긴 했지만...' 물론 그녀의 혼약은 다분히 정략적이었다. 아버지는 패왕문의 세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 비천문과 전략적 제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려면 정략결혼이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어쩔 수 없이 널 비천문에 시집보내야겠구나." 아버지의 권고를 들은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정략결혼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무림세가 식솔의 운명인 법. 그러나 갑작스럽게 혼담은 취소되었고 그녀의 앞에는 패왕문의 문주라는 무겁고 막중한 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5년 동안 그녀는 장로들의 도움을 받아 패왕문을 재건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선 혜성처럼 등장한 잠마련이 사도의 종주 자리를 꿰차 버렸다. 또한 주력고수들이 모두 전사한 탓에 문을 아직까지 정비하지 못했다. 일류 무사들이 절정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고수들의 집중적인 지도가 있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무사들을 모두 정사대전에서 잃었으니 좀처럼 무사들의 실력이 향상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그녀의 일천한 무공이었다. 풍소정의 무공에 대한 자질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기에 아버지인 패왕문주도 풍소정에게 거의 무공수련을 시키지 않았다. 신임 문주로 오른 뒤 그녀는 장로들의 집중적인 지도를 받았지만 무공 자체가 급성장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렇게 되자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났다. 무력을 최선으로 치는 탓에 패왕문 무사들이 그녀의 명령을 잘 듣지 않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장로들이 버티고 있을 때는 사정이 다소 나았다. 그나마 명령을 듣는 척이라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장로들이 쓰러지고 나자 사정은 지극히 악화되었다.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대놓고 이죽거리는 무사들도 생겨났다. 명을 받들지 않는 무사들은 문규에 따라 엄격히 처벌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그녀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이들은 고작 십여 명 남짓한 호위대뿐이었다. 그나마 아버지가 남겨준 호위대 무사들만큼은 그녀의 명령에 절대 복종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호위대 무사들의 무공실력은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다. 그들의 선배들이 전대문주와 함께 모조리 몰살당해버렸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풍소정과 함께 비천문에 갔던 십여 명뿐이었다. 지옥과도 같았던 지난 세월을 떠올려 본 풍소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 가슴을 열어보면 아마도 시커멓게 타 있을 거야. 그 정도로 힘들었으니까." 얼마나 힘들었던지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한동안 몸을 떨던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미치겠어. 이대로 가다간 돌아버리고 말 거야." 입술을 비집고 힘없는 넋두리가 흘러나왔다. "짬을 내어 가족들 무덤에 갔다 와야겠어. 그렇게라도 위안을 삼지 않는다면..."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이었다. 그러나 소정은 알지 못했다. 문가에서 걸레질을 하는 시녀의 눈빛이 갑자기 빛났다는 사실을. 잠시 후 소정은 침소로 향했다. 밤이 이슥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침실에 든 것을 확인한 시녀가 조심스럽게 그곳을 물러났다. 그녀가 향한 곳은 숙소가 아니었다. 주위를 살짝 살핀 시녀는 외곽의 한 전각으로 들어갔다. 당주들 중 한 명이 머무는 숙소였다. 전각 안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야심한 시각이었지만 아직 침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머뭇거림 없이 내실로 다가간 시녀가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당주님, 소녀이옵니다." 안에는 음침한 인상의 중년인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고개를 돌린 중년인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보아하니 시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문을 열고는 시녀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어찌 되었느냐? 알아보았느냐?" 시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힌 손목을 빼려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중년인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모양이다. "예, 당주님. 청소를 하며 문주의 혼잣말을 들었사옵니다." "그래, 뭐라고 하더냐?" "답답해서 가족들 묘소에 다녀와야겠다고 했사옵니다." 신기하게도 시녀는 패왕문주에게 경어를 붙이지 않았다. 중년인에겐 꼬박꼬박 당주님이라 칭하면서 말이다. 중년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맺혔다. "네게 새로운 임무를 주겠다. 문주가 언제 묘소로 가는지 알아내어 나에게 은밀히 전해다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하오나..." 시녀가 말꼬리를 흐렸다. 중년인은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손목을 잡아끌었다. "일만 잘 된다면 내가 널 그냥 내버려 두겠느냐? 내 분명 너의 공을 잊지 않을 것이다." 중년인은 아무 거리낌 없이 시녀를 침상으로 데리고 갔다. 순순히 따라가는 것을 보아 이미 시녀는 중년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인 듯했다. 중년인의 투박한 손이 옷을 벗기는데도 시녀는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옷을 벗기기 쉽게 몸을 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이윽고 침상위에서는 열락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잠시 후 일을 치른 시녀가 빨갛게 상기된 표정으로 내실을 나섰다. 중년인이 음침한 표정으로 시녀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흐흐흐, 지금은 목적이 있어서 널 예뻐해 주지만 오래 가진 않을 것이다. 잠마련의 간부가 될 내가 어찌 하찮은 시녀 따위에게..." 흐트러진 옷차림을 추스른 중년인이 몸을 일으켰다. 옆방으로 간 그는 머뭇거림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놀랍게도 안에는 서너 명의 무사가 단정히 좌정하고 있었다. 동태를 보니 오랫동안 방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바로 옆방에서 운우지락이 펼쳐졌지만 표정은 무표정하기만 했다. "일이 잘 풀릴 것 같다. 며칠 내로 문주가 가족들 묘소에 다녀와야겠다고 하더구나." 무사들의 얼굴에도 기쁜 빛이 떠올랐다. 마치 이 순간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들은 하나같이 패왕문 당주의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중년인과 동일한 복장인, 다시말해 패왕문 내에서의 지위가 동일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중년인에게 존대를 했다.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중년인의 정체는 패왕문의 당주였다. 혈도부(血刀夫) 유천이 그의 본명이었다. 밀실 안에 있던 네 명의 무사들 역시 패왕문 당주의 신분이었다. 휘하에 무사 오십여 명을 두고 있는 패왕문의 실세들. 그들이 이 야심한 시각에 무슨 이유로 한데 모여 있을까. 그들은 모두 변절자들이었다. 잠마련의 회유에 넘어가 그들과 뜻을 같이 하기로 한 자들인 것이다. 그들은 며칠 전 잠마련에서 전해진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녀가 뜻밖의 낭보를 가지고 온 것이다. 유천이 상기된 눈빛으로 당주들을 둘러보았다. "이미 패왕문은 싹수가 텄다. 이대로 가다간 채 1년도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자고로 가라앉는 배에서는 빨리 내려야 생존확률이 높은 법. 이번 명령의 수행여부에 우리들의 미래가 걸려 있다." 대외적으로 유천과 당주들은 같은 직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천의 무공이 특별히 뛰어나다고 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당주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유천에게 공대를 했다. 왜냐하면 잠마련에서 내정된 직책이 유천이 가장 높았던 것이다. 그가 회심의 눈빛으로 당주들을 둘러보았다. '흐흐. 역시 선택이 가장 중요해. 다른 당주들보다 빨리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가장 높은 직책을 받은 것 아니겠어.' 가장 먼저 잠마련과 접촉한 이가 유천이었다. 다른 무사들은 유천의 전폭적인 협조로 잠마련의 밀사를 만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패왕문을 버리고 잠마련을 선택했다. 그런 만큼 잠마련에서 유천을 가장 우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잠마련에서는 유천 등을 패왕문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고 잠마련 소속의 무사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패왕문이 현재 처한 상황이었다. 패왕문에는 모두 3각과 7당이 있다. 그중 3각은 세 명의 장로들이, 나머지 7당은 일곱 명의 당주들이 맡고 있다. 패왕문이 보유한 무사들은 총 오백이십일 명, 그들 중 문주의 호위대를 뺀 나머지 무사들은 모두 3각 7당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 근원이 밝혀지지 않은 독에 의해 장로 세 명이 식물인간이 되었다. 그로 인해 패왕문의 실권은 일곱 명의 당주들에게로 넘어왔다. 그런데 그들 중 다섯 명이 잠마련의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유천이 돌연 눈빛을 빛냈다. "다른 당주들의 동태는 어떠한가?" 구렛나룻이 짙은 무사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별다른 동태는 보이지 않습니다. 팽각 당주는 여전히 연무장에서 무사들의 원성을 사고 있고 비사문 당주는 좀처럼 폐관수련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이대로 일을 진행해도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패왕문에는 그들 외에도 두 명의 당주가 더 있다. 그중 한명인 팽각은 열렬한 패왕문의 추종자다. 원래 그는 패왕문의 하인 출신이었다. 그러나 자질을 눈여겨 본 전대 패왕문주에게 무공을 전수받고 당주의 직책에까지 올랐다. 그런 만큼 패왕문에 대한 팽각의 충성심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 때문에 유천도 팽각을 회유할 생각을 애초에 버렸다. 지금도 팽각은 패왕문이 처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 열심히 연무장에서 무사들을 지도하고 있다. 그러나 무공이 뛰어난 것과 무사들을 잘 지도하는 것은 사정이 다르다. 가혹하리만큼 무사들을 독려하지만 무공은 좀처럼 증진되지 않는다. 때문에 팽각이 이끄는 철혈당 소속의 무사들은 여타의 패왕문 무사들에게 동정 아닌 동정을 받아야 했다. 매일매일 피나는 지옥훈련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다른 당주인 비사문은 현 당주들 중에서 가장 무공이 강한 자였다. 당주들 중 유일하게 절정의 극에 이르러 있는 자로서 그 역시 팽각처럼 패왕문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마의 벽에 막혀 있는 상태였다. 정파의 무공보다 경지에 오르기가 곱절이나 어렵다는 마공의 특성답게 그는 오랫동안 최절정에서 정체되어 있었다. 경지를 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 당주들의 판단이었다. 유천이 싱긋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둘은 나중에 기회를 봐서 차차 처리하도록 하자. 일단은 문주를 처리하는 것이 더 시급하니까." 말을 마친 유천이 책상 밑에서 조그마한 보퉁이를 꺼냈다. 풀어헤치자 거무튀튀한 십여 개의 원통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사들이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원통을 쓸어보았다. "상부에서 전달된 폭우이화통이다. 당문의 대표적인 암기로 알려져 있는 물건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사들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폭우이화통은 무시무시한 이름만큼이나 위력이 뛰어난 암기였다. 그러니 무사들 역시 그 위력을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폭우이화통. 당문을 암기의 명가로 만든 명품 암기였다. 발사통을 누를 경우 수백, 수천 개의 우모침이 일시에 발사된다. 제 아무리 신법이 뛰어난 무사라도 피해낼 재간이 없다. 게다가 각각의 우모침에는 독이 발라져 있다. 피에 섞일 경우 일각을 버티지 못하고 중독되는 극독이었다. 그러니 무사들이 충분히 겁낼 만했다. 유천이 폭우이화통 하나를 들어 올려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우린 이것을 이용해서 문주와 그 호위대를 처치해야 한다. 그래야만 당문의 짓으로 위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서 시비 몇은 증인으로 살려둬야 한다. 알겠나?" 잠마련에서 내려온 명령은 바로 이것이었다. 당문의 암기를 이용해서 문주를 살해한 다음 그 죄를 당문에 덮어씌우는 것. 그리고 문주의 복수를 한다는 명목으로 패왕문 무사들을 독려해 당문을 선제공격하는 것이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였다. 그러나 당주들은 쉽사리 수긍하지 못했다. 그들 역시 귀가 있으니만큼 최근에 당문이 어떻게 변모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눈매가 가느다란 당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문은 현재 비약적인 발전을 한 상태입니다. 정파에 적을 둔 이후 여러 문파에서 무사들을 파견한 상태이니만큼 패왕문의 힘만으론 역부족일 것 같습니다. 기습을 한다고 하더라도 승산이 희박합니다. 자칫 잘못되면 전멸될 가능성이..." 유천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성공 여부는 상관없다.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은 당문을 패왕문과 상잔시키라는 것이었으니까." 순간 당주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록 잠마련을 선택하기는 했지만 그들 휘하에는 오랜 시간을 동고동락해 온 수하무사들이 있다. 그들을 몰살시키는 것이 임무라니 동요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머뭇거리는 무사들에게 유천이 날카로운 눈빛을 빛냈다. "이미 우리는 패왕문을 버리고 잠마련을 택했다. 그런 마당에 뭘 망설이는 것인가?" "..." "어차피 패왕문은 오래 가지 못한다. 이번 기회에 깔끔히 정리해버리고 홀가분하게 잠마련으로 떠나는 게 낫다. 우리 모두 잠마련에서의 직책이 내정되어 있는 상태 아닌가?" 유천은 당주들의 얼굴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반 이상 침몰한 배에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당주들의 얼굴이 무척이나 어두워졌다. 사실 그들은 독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였다. 한 달에 한 번씩 내려지는 해약을 먹지 않는다면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잠마련은 독을 이용해서 수하들을 단속한다. 잠마련의 일원이 되기로 결정한 순간 그들은 어김없이 독약을 복용해야 했다. 결국 당주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유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제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때다. 익히 말한 대로 문주는 머지않아 제 가족의 묘소로 갈 것이다. 하남성과의 경계에 있는 만큼 인적이 드물 터, 우리 다섯이 모두 나선다면 어렵지 않게 제거할 수 있다. 당문의 폭우이화통을 사용한다면 더욱 수월할 테지. 그런 다음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돌아와 그 사실을 알리면 우리가 앞장서서 바람을 잡아야 한다. 당문을 기습 공격해야 한다고 말이다." "문주의 원한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말입니까?" "바로 그렇다. 단순한 팽각 당주는 두말할 것 없이 앞장설 것이다. 그에겐 패왕문이 인생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비사문 당주인데..." 그러자 텁석부리 당주가 앞으로 쓱 나왔다. "비사문 당주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습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페관수련장에서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심지어 정사대전에도 참가하지 않은 그가 아닙니까?" "그래도 모든 일에는 만전을 기해야 하는 법. 누구 한 명이 남아서 비사문 당주를 중점적으로 감시해야 한다."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었는지 유천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다음 결정이 내려지면 패왕문의 전 무사들을 이끌고 가서 당문을 치면 된다. 주의해야 할 점은 안전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는 점이다. 하급 무사들을 독려하되 결코 앞으론 나서지 마라. 독으로 이름난 당문인 만큼 십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유천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당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 무사들이 모조리 전멸해서 패왕문이 완전히 몰락해야 우리가 적을 옮기기가 쉽다. 알겠는가?" 모여든 당주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당주들이 동의한 만큼 이제는 임무에 신경을 써야 할 때였다. 유천의 시선이 책상 위의 폭우이화통으로 향했다. '흐흐흐. 이번 일은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지.' 이곳에 모인 당주들은 모두가 절정이상의 고수들이다. 반면 문주와 그 호위무사들 중에서 절정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런 만큼 임무는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뜻밖의 변수가 끼어들지 않는 이상 말이다. '정말 기대되는군.' 그는 조용히 잠마련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임무를 무사히 완수할 경우 그는 잠마련의 당주 자리를 얻게 된다. 말이 같은 당주이지 거대 문파인 잠마련의 당주와 몰락해가는 패왕문의 당주와는 수준 자체가 다르다. 일단 지급되는 봉록과 대우 자체에서 몇 배나 차이가 나는 것이다. '잠마련 무사들은 대부분 외부에서 영입된 자들이다. 배교 출신도 있고 군소방파 출신도 있다. 심지어 마교 출신의 무사들도 있다고 들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공을 세운다면 그에 적합한 상이 주어지니 처신만 잘하면 직위가 더 올라갈 수도 있다.' 그는 잠마련을 택한 결정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패왕문에 남아봐야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며칠 후가 기대되는군. 후후후.'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유천과 같은 생각을 하는지 당주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음모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 수련은 한창 다림질에 몰두하고 있었다. 우물가에서 깨끗이 빤 세탁물을 인두로 다리는 것이다. 시녀 교육을 받았기에 그녀는 다림질에 상당히 능숙한 편이었다. 풀을 먹인 뒤 인두로 다린 덕에 옷이 새것처럼 빳빳해졌다. 다림질을 하는 수련의 얼굴에는 미소가 짙게 배어 있었다. 마냥 행복한 얼굴이었다. 잠시 후 다림질을 마친 수련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상공께서 오실 때가 되었는데?" 옷을 차곡차곡 갠 수련은 마루에 앉았다. 그들은 바로 어제 하남의 숭산에 도착했다. 객잔의 별관에 투숙하여 하룻밤을 보내고 난 뒤 영호명은 소림사로 올라가고 수련 혼자 남은 것이다. 금녀 지역인 소림사에까지 동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가한 틈을 타서 수련은 여행 중 입었던 옷들을 세탁했다. 마루에 앉아 다리를 흔들던 수련의 입가에서는 좀처럼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상공을 모시는 것이 정말 좋군. 무엇보다도 겉마음과 속마음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이 마음에 들어." 그녀는 지금껏 정보원 교육을 받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내에게 순결을 바치고 온갖 교태를 부려 사로잡는 것이 첫 번째 임무이다. 그런 다음 암암리에 정보를 빼내야 하는 것인데, 그중에서 가장 금기시 되는 것이 표적에게 마음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정보원들이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표적은 여러 부류가 있다. 그중에는 변태도 있고 제정신이라고 볼 수 없는 자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자들에게도 웃음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이 정보원의 마음가짐이다. 물론 모든 표적들이 다 이상한 것은 아니다. 정보원이 반할 정도로 호감이 가는 미남자나 군자도 있다고 봐야 한다. 정보원들은 태반이 꽃다운 나이의 20대 처녀로 구성되어 있다. 표적이 잘 대해줄 경우 본분을 잃고 마음을 빼앗기는 경우도 종종 생겨난다. 그렇게 되면 상당히 곤란한 경우가 초래된다. 임무수행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상황이 악화될 경우 투입된 정보원 전체의 정보가 드러날 경우도 있다. 훈련을 받으며 수련은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처참한 운명을 맞은 선배 정보원 예기를 종종 들은 적이 있다. 그녀는 그네들로부터 들은 얘기를 되새겨 보았다.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는 게 가장 힘들다고 했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복귀한 선배 정보원들은 종종 그 점을 토로하곤 했다. 속마음을 숨기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이다. "그나마 난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런 점에서 수련은 무척이나 편했다. 속마음을 숨길 필요 없이 그저 진심으로 영호명을 모시면 되니까 말이다. "상공께서는 도대체 나이가 어떻게 되실까? 혼인은 하셨을까?" 그녀는 영호명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그는 여간해서는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는 편이었다. 게다가 신분이 신분인지라 물어볼 엄두도 낼 수 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생각을 접고 퍼뜩 몸을 일으켰다. "오셨습니까?" 문이 열리고 영호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색을 잔뜩 찌푸린 것을 보아 일이 뜻대로 안 풀린 모양이었다. 성큼성큼 걸어온 그가 마루 위에 올라섰다. 수련이 댓돌아래 나동그라진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내실에 들어간 영호명은 머리를 감싸 안고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하필이면 소림이 이때 봉문을 하다니...' 오랜만에 사문을 찾은 그를 맞은 것은 굳게 닫힌 산문이었다. 중년승들이 선장을 꼬나 쥐고 영호명을 막아섰다. "소림은 현재 봉문 중입니다. 외인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소림이 봉문 중이란 말에 영호명은 깜짝 놀라야 했다. "나는 속가제자요. 혜정선사께 사사받았소." 혜정선사란 말에 중년승들이 움찔했다. 아직까지 소림에 전설로 전해지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가제자 명부에 영호명의 이름이 없자 소림승들의 태도는 판이하게 바뀌었다. "시주, 어디서 얄팍한 수작을 부리는 것이오?" "썩 물러가지 않으면 단단히 경을 치게 될 것이오." 자신을 몰아붙이는 소림승들을 두고 영호명은 기가 막혔다. 그렇다고 힘으로 뚫고 들어갈 수도 없는 판국이었다. '어떻게 하지?' 난감해 하는 영호명에게 노승 한 명이 다가왔다. 그는 점잖은 어조로 현재 소림이 처해 있는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그때서야 상황을 납들할 수 있었다. ㅡ소림은 선종의 본산이자 수행하는 곳이오. 결코 무림방파라 볼 수 없소. 그런 점에서 소림은 너무나 부끄러운 짓을 했소. 정사대전에 참가하여 많은 피를 뿌리다니... 이번 봉문은 그때의 일에 대한 사죄로 자발적으로 시행하는 것이오. 앞으로 소림은 오십 년 동안 무림의 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을 것이오. 노승의 자조어린 설명에 영호명은 조용히 산문을 물러서야 했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 자숙하고 있는 소림을 무림의 풍전속에 끌어들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스승님, 제자 반드시 스승님의 원한을 풀어드리겠나이다.' 스승인 혜정선사에게 묵념을 올린 영호명은 미련 없이 산문을 등지고 내려왔다. 그러나 고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복수를 하려면 어떻게든 세력을 끌어 모아야 한다. 데이몬과 사준환 모두 강력한 세력을 배후에 업고 있는 자들이다. 혼자서 복수를 꾀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에겐 세력을 끌어 모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하오문주가 말한 대로 사파에 적을 둘 순 없는 노릇이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영호명이 결심한 방법은 산서로 가는 것이었다. "비록 철혈문이 멸문했다고는 하나 무사들이 전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단 그들을 수소문해서 휘하에 거둬야 한다. 세력을 일으키는 건 결코 서둘러서는 안 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뒤 숙소로 돌아왔던 영호명이었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수련은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영호명이 고개를 들었다. "짐을 꾸리거라. 산서로 가야겠다." 뜻밖의 명령이었지만 수련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사옵니다." 바로 어제 투숙했지만 수련은 아무런 불평 없이 짐을 꾸렸다. 다림질 해 놓은 옷을 행랑 속에 곱게 개어 넣은 수련이 객잔주인에게 가서 숙박료를 지불했다. 중원의 물정에 어두운 영호명인지라 대외적인 일은 모두 수련이 처리했다. "준비가 모두 끝났사옵니다." "그래? 그럼 출발해 볼까?" 둘은 지체 없이 객잔을 나섰다. 한시라도 빨리 산서로 가서 철혈문의 잔존세력을 규합해야 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하남에서 산서로 넘어가는 길은 무척이나 멀었다. 중원이 워낙 넓다 보니 도보로 걸어서는 최소 한 달 이상 걸렸다. 그 때문에 영호명은 섬서 쪽으로 돌아가는 지름길을 택했다. 길이 워낙 험해 인적이 드물고, 그렇기에 경신법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로는 금세 난관에 부딪혔다. 길이 워낙 험했기에 수련이 제대로 따라오지 못했던 것이다. 자고로 경공은 지닌 공력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내공이 워낙 변변찮은 탓에 수련은 금세지쳐버렸다. "헉, 헉."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비 오듯 땀을 쏟는 수련을 보고 영호명은 혀를 찼다. "이래서는 산중에서 밤을 지새야 할 것 같군." "죄송합니다. 상공, 금세 따라갈 수 있습니다." 조용히 머리를 내저은 영호명이 다가가서 수련을 안아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 이러지 않으셔도..." "괜찮다. 서둘러 가야 그럴 듯한 객잔에 묵을 것 아니냐?" "처, 천녀는 도저히 그럴 수..." 걱정 말라는 듯 머리를 내저은 영호명이 본격적으로 경신법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지닌 내공이 워낙 웅혼했기 때문에 둘의 몸이 빗살처럼 대기를 갈랐다. 엄청난 속도감에 수련은 비명을 내질렀다. "꺄악." 그녀는 영호명의 목을 꼭 끌어안은 채 파들파들 떨었다. 주변의 나무들이 쏜살같이 뒤로 사라지고 나뭇가지들이 마구 다가오다 보니 겁에 질린 것이다. 영호명의 경신법은 정말로 대단했다. 슬쩍슬쩍 땅을 박차는것 같았는데 순식간에 수십 장을 도약하곤 했다. 둘은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섬서를 향해 질주했다. 수련은 오래지 않아 평온을 되찾았다. 인간은 유난히 적응을 잘하는 존재이다.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계속해서 달리다보니 어느덧 속도감이 몸에 익어버렸다. 게다가 영호명이 호신강기를 펼친 상태였기 때문에 나뭇가지 같은 것은 몸에 닿기 전에 그대로 부러져버렸다.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수련은 어느새 속도감을 즐기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이렇게 빠른 속도로 오랫동안 경공을 펼칠 수 있다니...' 그들은 무려 한 시진 가까이를 질주했다. 말이 전력으로 달리는 것보다도 빠른 속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호명의 안색은 그대로였다. 숨결도 거칠어지지 않았고 땀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영호명의 내공이 얼마나 웅혼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양팔로 목을 꼭 끌어안은 채 수련은 영호명을 은근슬쩍 훔쳐보았다. 얼굴이 저절로 붉어졌지만 그녀는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정말 잘생긴 분이야.' 가까이에서 보는 영호명은 정말로 잘생겼다. 부리부리한 눈매에 쭉 뻗은 콧날, 굳게 다문 입술은 의지가 깊음을 일러주었다. 심지어 바람결에 휘날리는 백발마저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영호명의 품에 안긴 채 수련은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그런데 도대체 이분은 나이가 어떻게 되실까?' 자신보다 월등히 많은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자신을 손녀 대하듯 하는 것을 보아 환골탈태를 거친 전대고수가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련은 영호명에게 마음이 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언제나 한결같은 분이야. 무림에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이분만큼은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아.' 품 안에서 여심이 무르익어 가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영호명은 경공을 펼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영호명은 수련을 안은 채 무려 이틀 동안 경공을 펼쳐 산 속을 달렸다. 산 속에 객잔이 있을 리가 없었기에 잠은 산신당이나 관재묘에서 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련은 전혀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영호명이 야전생활에 무척 능했기 때문이었다. 알아서 모닥불을 척척 피웠고 잠깐 나갔다 오더니 토끼나 노루 몇 마리씩을 잡아왔다. 가죽을 벗겨 모닥불에 굽는 실력도 일품이었다. 양념은 오직 소금뿐이었지만 입맛에 딱 맞았기에 고기를 먹던 수련은 감탄성을 내뱉었다. "정말 맛있어요. 객잔에서 먹는 요리보다도 월등히 맛있는걸요?" 그 말을 들은 영호명이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 먹어보니까 그런 거다. 오래 먹다보면 질린다." 정사대전 당시 영호명은 별동대를 이끌고 사파의 근거지를 기습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다 보면 며칠씩 산 속에서 보내는 일이 다반사였다. 트루베니아 시절에도 기사들과 함께 들판에서 먹고 자며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니 야전생활에 유난히 능숙할 수밖에 없다. 과거를 떠올린 영호명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고 보니 그때 동고동락했던 이들은 모드 저승으로 갔군.' 어찌 보면 초인의 경지에 오른 것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은 이렇게 쌩쌩한데 동료들은 모두 수명을 다하고 저세상으로 갔으니 말이다. '모두 좋은 곳으로 갔을까?' 영호명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수련이 이부자리를 폈다. 내일도 하루 종일 달리려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빠르면 오늘 오후에 섬서에 접어들 수 있겠군." 오늘도 영호명은 수련을 안은 채 경공을 펼치고 있었다. 꼭두 새벽에 일어나 간단히 아침을 차려 먹은 뒤 곧바로 길을 떠난 둘이었다. 느닷없이 터져 나온 혼잣말에 수련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영호명의 품에 고개를 파묻은 채 한껏 그의 채취를 음미하던 그녀였다. "산서로 간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내가 찾아가는 곳은 섬서에서 넘어가는 것이 훨씬 가깝다. 예전에도 하남으로 넘어갈 때에는 종종 섬서로 들려서 가곤 했지." 알았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련이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영호명의 달리는 속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도무지 공력의 한계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영호명의 발걸음은 불과 두 시진도 지나지 않아 멈췄다. 수련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영호명을 올려다보았다. "목적지에다 오신 건가요?" 이맛살을 지그시 좁히며 영호명이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뭔가 이상한 기척이 잡혀서 그렇다." 눈을 가늘게 뜬 영호명은 한쪽을 응시했다. 연신 고개를 갸웃 거리는 모습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수련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영호명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영호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무래도 저쪽으로 가봐야 할 것 같구나." 그는 안고 있던 수련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수련의 얼굴에 한 줄기 아쉬움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생각에 잠겨 있는 영호명은 그 기미를 눈치 채지 못했다. "어서 가자." 영호명이 앞장서서 수풀 속을 헤치고 들어갔다. 수련이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그를 뒤따랐다. 풍소정의 눈은 크게 뜨여져 있었다. 도무지 자신에게 닥친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피부가 검케 변색된 시신들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시신의 반 정도는 전신에 우모침이 빽빽이 박혀 있었고 나머지 반은 예리한 병기에 난자당해 아직도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두 그녀를 호위하던 수행원과 호위무사의 시체였다. 그녀 앞에는 복면을 쓴 다섯 명의 괴한이 의기양양하게 서 있었다. 그들을 쳐다보는 소정의 눈동자에는 짙은 적의와 함께 공포감이 서려 있었다. 사건이 벌어진 것은 바로 조금 전이었다. 소정은 호위대원 열명과 철혈당주 팽각 휘하의 무사 열 명을 데리고 가족들이 묻힌 묘소를 방문했다. 지친 심신을 달래고 또한 가족들의 영전에 술을 따라주기 위해서였다. 모든 일을 마친 뒤 산을 내려갈 때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패왕문으로 귀환하기 위해 산을 내려오던 그들 앞을 다섯 명의 괴한들이 막아섰다. 그때까지만 해도 패왕문도들은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쪽의 인원이 월등히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괴한들이 시커먼 통을 꺼내자마자 상황은 판이하게 뒤바뀌었다. 괴한들이 꺼낸 것은 당문의 독문암기로 알려진 폭우이화통이었다. "포, 폭우이화통이다!" 무사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릴 무렵 괴한들은 일제히 폭우이화통을 발사했다. 그로 인해 십여 명의 무사들이 변변찮게 대항도 못하고 쓰러졌다. 수백, 수천 개의 우모침이 날아왔기에 무사들은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나마 호위대원들이 전멸하지 않은 것은 팽각 휘하의 철혈당 무사들 덕택이었다. 팽각으로부터 지옥훈련을 받아온 무사들은 육탄으로 달려들어 암기를 막아냈다. 물론 그 대가는 처참한 죽음이었지만 말이다. 이후 살아남은 호위대 무사들이 이를 갈며 덤벼들었다. "죽은 동료들의 복수를 하겠다." 그러나 괴한들의 실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들은 흔하디흔한,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초식을 사용했다. 하지만 호위대 무사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실력자들이었다. 그들의 손에 의해 호위대 무사들은 하나둘씩 쓰러졌고 채 일 다경도 되지 않아 전멸해버렸다. 풍소정은 그렇게 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그녀의 주위에 남은 이는 고작해야 다섯뿐이다. 시녀 세 명과 그녀를 지근거리에서 경호하는 무사 두 명. 그들의 무력으로는 괴한들을 불과 일 각도 막아서지 못한다. "우린 당문과 아무런 은원관계가 없는데 도대체 왜?" 풍소정의 말을 듣고 선두에 선 복면인이 탁한 음성을 토해냈다. 변조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풍소정에겐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은원이야 만들어 내면 그만 아니오?" 도대체 당문에서 왜 패왕문을 공격하는 거죠?" 괴한의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이 가늘어졌다. "뭐 간단한 문제 아니오? 우리 당문은 더 이상 중립을 표방하지 않소. 당당한 정도의 문파라는 말이지. 그런 상황이니만큼 우연히 길가다 만났다고 해도 사파의 마두를 가만히 내버려 둘순 없는 노릇 아니겠소?" 풍소정이 기가 막혀 소리를 빽 질렀다. "그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린가요? 설마 당문에서 정사대전을 재차 촉발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건가요?" 복면 괴한이 느물느물하게 대꾸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소? 우린 단지 당문이 정파의 일원임을 입증하려는 의도밖에는 없다오." 말을 마친 괴한이 한데 모여 웅크리고 있는 패왕문 문도들을 싸늘하게 쓸어보았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입을 전부 막으면 누가 당문의 짓인 줄 알겠소?" "사, 살인멸구를 하겠다는 뜻인가요?" 괴한의 입가에 잔혹한 살소가 맺혔다. "두말하면 잔소리겠지?" 말을 마친 괴한이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나머지 복면인 네명이 품속에서 시커먼 통을 꺼내들었다. 풍소정의 얼굴이 암울해졌다. 저들에게 여분의 폭우이화통이 더 있었다니... 이죽거리던 괴한의 손에도 어느새 폭우이화통이 들려져 있었다. "본문 무사들은 폭우이화통을 항상 두 개씩 가지고 다닌다오. 그럼 잘 가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복면인들이 폭우이화통을 앞으로 겨눴다. 잔뜩 도를 움켜쥐고 있던 무사들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드리워졌다. 괴한들이 단추를 누를 경우 완전히 전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후후 깔끔하게 끝나겠군.' 복면을 뒤집어쓴 유천이 음침하게 웃었다. 그의 앞에는 잔뜩 겁에 질린 풍소정과 그녀의 앞을 막고 있는 무사 둘밖에 없다. 그 외에도 시녀 두명이 마차 밑에 머리를 처박고 벌벌 떨고 있었지만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작금의 상황을 패왕문으로 전해줄 증인이 하나둘 정도는 필요했기 때문이다. '신임문주 풍소정만은 확실하게 저세상으로 보내야 해. 그런데 좀 아깝긴 하군.' 그는 느물거리는 눈빛으로 풍소정의 몸매를 훑어보았다. 전대 패왕문주의 아내는 절색으로 유명한 미녀였다. 그런 모친의 미모를 그대로 물려받았는지 풍소정도 매우 빼어난 미녀였다. 혼기를 넘겨 나이가 좀 많다는 것이 유일한 흠일까? 유천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냥 죽이는 것이 조금 아깝지만 할 수 없지. 일단 임무가 우선이니...' 잡념을 털어버린 유천은 폭우이화통의 발사단추에 손을 가져갔다. 그가 암기를 발출할 경우 함께 온 당주들 역시 폭우이화통을 쏘아댈 테고 그렇게 되면 깔끔하게 임무가 종료될 터였다. 그러나 의외의 경우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나지막한 음성에 그는 혼비백산해서 고개를 돌렸다. "상당히 익숙한 상황이로군. 예전에 협객으로 활약했을 당시에는 이런 상황을 무척이나 많이 기대했었지. 애석하게도 지금에야 기회를 잡았지만 말이야." 나지막했지만 힘이 실려 있는 음성이었다. 그로 인해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잠마련의 두 번째 계략***** 느닷없이 등장한 이는 백발이 인상적인 중년인이었다. 그가 한가롭게 뒷짐을 진 채 장내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청초한 생김새의 미녀가 봇짐과 묵직해 보이는 도 한 자루를 짊어지고 다소곳이 서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꾼에게 듣는 것과는 상황이 조금 다르군. 보통 핍박하는 쪽이 사파의 마졸들이고 곤란에 처한 쪽이 정파의 아리따운 여식이라고 하던데 말이야?" 백발의 중년인은 처한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싱글싱글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를 본 유천의 안색이 지그시 좁혀졌다. '운이 없군. 이런 곳에서 방해꾼과 맞닥뜨리다니...' 말투를 봐서는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같았다. 그러나 무시해 버리기엔 중년인의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심상치 않았다. 해서 그는 점잖게 타일러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당문과 패왕문 간의 일이오. 못본 척 지나쳐 주신다면 고맙겠소. 추후 당문에서 이 일에 대해 후히 사례할 것이오." 어차피 증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 면에서 뭔가 꺼림칙한 중년인을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중년인은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당문 사람들인가?" 유천이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약초채집 차 이곳으로 나왔다가 우연히 패왕문주를 만나 그동안 묵은 은원관계를 해결하는 중이오. 당문을 잘 알고 있다면 양보를..." 중년인이 조용히 유천의 말을 끊었다. "그것 정말 잘되었군. 그럼 나도 이참에 당문과의 묵은 은원 관계를 해결해야겠어." 유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설마 백발의 중년인이 당문과 청산해야 할 은원관계가 있단 말인가? 더럽게 걸렸다는 생각에 그의 얼굴이 찌푸러졌다. 상황이 험악해진 이상 구태여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 그런 탓인지 그의 말투가 별안간 바뀌었다. "당문과 은원관계가 있나?" 백발의 중년인, 즉 영호명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은원관계랄 것까지는 아니지만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 그나저나 자네 말투가 상당히 거슬리는군. 막 나가기로 작정한 것인가?" 유천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놈이로군, 그래, 본문에게 악감정이 있다니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겠군." "악감정까지는 아냐. 단지 당문에 미운 놈 하나 있을 뿐이라네. 자고로 주인이 미우면 기르는 개도 미운 법이지. 게다가 자네 말투를 보니 그 생각이 더욱 짙어지는군." 대화가 거기까지 진행되자 유천도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었다. 그가 턱짓을 하자 당주 한 명이 앞으로 쓱 나섰다. 손에 들고 있던 폭우이화통을 동료에게 건네준 당주가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시퍼런 청강장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주무기는 엄연히 도였지만 검으로도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하나 정도는 충분히 요리할 수 있는 것이 당주의 실력이다. 내공을 밀어 넣자 검신이 순식간에 시퍼렇게 물들었다.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 놈! 무림의 쓴맛을 확실하게 보여주마." 짧게 내뱉은 당주가 머뭇거림 없이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백발 중년인은 피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는 듯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슈가각 당주가 휘두른 검은 정확히 백발 중년인의 목에 작렬했다. 그러나 그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인 것뿐이었다. 검에서 아무런 감각이 전해지지 않자 당주의 안색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백발중년인의 신형은 언제 그곳에 존재했느냐는 듯 그 자리에서 퍽 꺼져버렸다. "이런." 입술을 질끈 깨문 당주가 거듭 몸을 뒤집으며 마구 검을 휘둘렀다. 시퍼런 검기가 돋아난 장검이 전후좌우를 사정없이 난자했다.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자는 감히 내가 상대할 수 없는 강자다.' 당주는 확실하게 절정에 접어든 고수이다. 그런 그조차도 상대가 움직이는 기척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상대가 자신보다 최소한 두세 단계 위의 고수임을 뜻한다. 그것을 증명하듯 귓전으로 나지막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하룻강아지도 여러 종류가 있네. 대부분의 하룻강아지들이 범에게 잡아 먹히지만 반대로 범을 잡아먹는 하룻강아지도 있단 말이야." 대경실색한 당주가 급히 몸을 비틀며 혼신의 내공을 검에 실었다. 촤아아악 절정이란 사실을 증명하듯 시퍼런 검강이 검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벨 수 있다는 무적의 기운 그러나 그 기운이 실린 장검은 허무하게 허공에 멈춰버렸다. 놀랍게도 사라졌던 백발 중년인이 느긋하게 손을 뻗어 검신의 중턱을 잡고 있었다. 그것을 본 당주의 눈이 툭 불거져 나왔다. "세, 세상에... 이건 말도 안 돼." 맨손으로 검강이 서린 검을 움켜쥔다. 다시 말해 일반적인 호신강기가 아닌, 강기화된 진정한 호신강기를 손에 응축시켜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그가 초절정, 그것도 극에 달한 자임을 의미했다. 얼어붙어버린 당주의 귓전으로 나지막한 음성이 재차 파고들었다. "애석하게도 내가 그런 종류의 하룻강아지인 것 같군." 백발중년인이 검을 움켜쥔 손을 틀었다. 파직 검신이 맥없이 부러지며 검에 서린 검강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백발 중년인이 느긋하게 손을 뻗어 당주의 맥문을 틀어쥐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이 무림인의 운명이 아닌가? 날 죽이려 했으니 의당 그 반대의 경우도 각오하고 있을 터. 그렇다고 해서 죽일 생각은 없어. 그저 무공만 폐할 생각이니 그렇게 알게." 그 말을 들은 순간 당주의 입이 딱 벌어졌다. 무인에게 무공은 그야말로 전부나 다름없다. 차라리 죽는 것보다 더한 결과였기에 그는 급히 도리질을 치려했다. 그러나 맥문이 콱 틀어 막힌 터라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복부 기해혈에 둔중한 충격이 가해지는 것을 느낀 당주가 입을 딱 벌렸다. "커어억." 기혈이 역류하며 투명한 피가 입을 통해 뿜어졌다. 그 자리에 꼬꾸라진 당주가 잔뜩 웅크린 채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단전이 파괴되어 내공이 빠져나가는 고통은 그 정도로 컸다. 절정고수 한 명을 순식간에 범인으로 만든 영호명이 손바닥을 툭툭 털었다. "서슴없이 살수를 가했으니 이 정도 응징은 받아야지." 그는 당문이란 말을 듣고 이곳을 찾았다. 당문은 철천지원수인 데이몬이 머무르는 문파였다. 복수를 위해서는 당문의 힘을 조금이라도 줄여야 한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생긴 마당에 굳이 손속을 자제할 필요는 없었다. 고개를 돌린 영호명이 엉거주춤 얼어붙어버린 당문도(?)들을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역시 개들도 주인을 닮아 사악하기 그지없군. 제아무리 사파라 해도 전혀 연관 없는 사람들에게 느닷없이 기습공격을 가하다니 말이야. 데이몬이 그렇게 가르쳤나?"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받게 되었지만 가짜 당문도들에게 변명할 만한 말이 없었다. '잘못 걸렸군.' 유천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백발중년인이 맨손으로 검강이 서린 검을 잡아채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한 그였다. '미치겠군. 최소한 초절정에 들어선 고수다. 도저히 당해 낼 도리가 없어.' 패왕문주 일행은 이미 백발중년인의 등장을 틈타 마차 뒤로 숨어버렸다. 진작 손을 쓰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될 줄 생각지 못한 유천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가 발악이라도 하듯 고함을 질렀다. "모두 폭우이화통을 써라." 말을 마친 그는 머뭇거림 없이 발사 단추를 눌렀다. 순간 둔중한 폭발음과 함께 수백, 수천개의 우모침이 일시에 발사되었다. 얼어붙어 있던 당주들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폭우이화통을 발사했다. 슈슈슉 우모침은 빠른 속도로 영호명의 전신을 뒤덮어갔다. 그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서렸다. "최후의 발악을 하려는 건가?" 몸을 날려 피하려던 영호명이 멈칫했다. 등 뒤에 수련이 있다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자신이 피할 경우 수련이 우모침을 고스란히 뒤집어 써야 할 터였다. "어쩔 수 없이 막아내야겠군. 오랜만에 장력을 쓰는 건가?" 천추부동의 자세로 버티고 선 영호명은 전신의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에 따라 몸에 걸친 옷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다 못해 펄럭거렸다. 극한의 내력이 집중되며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어 앞으로 내뻗은 영호명의 장심에서 막대한 경력이 뿜어져 나왔다. 콰르르릉 그는 소림 제일의 고수였던 혜정선사에게 무공을 사사받았다. 주로 사용하는 무공은 철혈문의 검공이되 소림의 다른 무공들 역시 충실하게 배웠다. 거기에 장법이 빠질 리는 없었다. 예로부터 무림의 으뜸으로 인정받았던 것이 소림의 장법이다. 많이 변형되기는 했지만 뿌리를 소림에 둔 막강한 장력이 뿜어져 나와 대기를 갈가리 뒤흔들기 시작했다. 콰콰콰콰 거침없이 날아오던 우모침들이 거센 풍랑에 휘말린 조각배들 처럼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기관의 힘으로 발사된 암기인지라 막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추진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후두두둑 힘을 잃은 우모침들이 바닥에 비 오듯 떨어졌다. 당문의 대표 암기인 폭우이화통이 장력 한 방에 무력화되어버린 것이다. 회심의 일격이 빗나가자 당주들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었다. 지극히 위력적인 장풍을 저토록 넓은 범위에 걸쳐 뿜어낼 수 있는 고수가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입을 딱 벌리고 있던 당주들의 귓전을 절박한 음성이 강타했다. "모, 모두 쳐라! 이판사판이다!" 유천의 악에 받친 고함소리였다. 입술을 질끈 깨문 당주들이 분분히 검을 뽑아들고 몸을 날렸다. 귓전으로 유천의 전음이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ㅡ이 사실이 패왕문에 전해질 경우 가족들이 무사하지 못한다. 정체가 드러날 바에야 차라리 당문도로 오인 받은 상태에서 죽는 게 낫다. 당주들이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배경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그들에게 선택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명령을 내린 유천은 백발중년인을 향해 달려들지 않았다. 당주들이 자포자기한 상태로 달려드는 모습을 은근슬쩍 지켜보며 수련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위기를 모면해야겠다는 생각에 그의 머리가 부산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암기를 피하지 않고 쳐내는 것을 보니 저 여자와 깊은 관계에 있는 것이 틀림없어. 저 여자를 인질로 잡아야만 내가 살아 날 수 있어.' 다행히 백발중년인의 관심은 목숨을 내놓고 달려드는 당주들에게 쏠려 있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연신 흘러내렸지만 유천에겐 닦을 만한 여유도 없었다. '일의 성패는 저들이 얼마나 버텨주는가에 달려 있다.' 당주들은 다행히 제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백발 중년인을 전후좌우로 에워싼 채 매서운 공격을 퍼붓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들의 공격은 백발 중년인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다. 느긋하게 뒷짐을 진 채 공격을 피해내는 중년인에게서는 여우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절정고수인 유천이 여인에게 달려들어 제압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중년인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쏠리자 유천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빛났다. '이때다.' 틈을 발견하자 그가 극성으로 신법을 발휘했다. 목표는 나무아래 우두커니 서 있는 여인이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지금 유천에게는 여인의 미모 따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유천을 발견한 여인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앗." 급히 보법을 펼치는 것을 보아 제법 무공을 익힌 흔적이 보였다. 그러나 절정고수인 유천의 손길을 피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유천의 양손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여인의 퇴로를 차단했다. 갈 곳이 없어 갈팡질팡하던 여인은 결국 유천의 금나술에 맥문이 제압되고 말았다. "되었다." 여인을 제압한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유천은 순간 등 뒤로 뻗어오는 날카로운 기세를 느꼈다. 대경실색한 유천이 급히 여인을 돌려세우며 검을 뽑아들었다. 차창 시퍼렇게 검기가 서린 검이 여인의 목덜미에 대어졌다. 어느덧 유천의 눈동자는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 세상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백발 중년인은 당주들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달려들어 여인을 제압하는 그 짧은 시간동안 상황은 판이하게 바뀌어 버렸다. 당주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칠공으로 피를 뿜어내며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전멸당한 것이다. 그리고 백발 중년인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재빠른 임기응변이 아니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뻔했기에 유천은 혀를 내둘렀다. 다행히 여인을 돌려세워 목에 검을 댄 덕분에 중년인은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유천은 검을 여인의 목에 바짝 들이대며 으르렁 거렸다. "뒤, 뒤로 물러서시오." 중년인의 신위를 목격한 탓인지 유천의 어조가 가늘게 떨렸다. 어조뿐만 아니라 몸도 잔 경련을 계속했다. "허, 참." 영호명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수련에게 신경 쓰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그의 방심이 빚어낸 결과였다. 설마 수련에게 손을 쓰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같은 상황에 몰리게 된 것이다. 영호명은 생애의 대부분을 아르카디아에서 보냈다. 레이디를 공경하는 기사도 정신이 보편화된 아르카디아에서는 여성을 인질로 잡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 짓을 할 경우 당장 기사 자격이 박탈당할 뿐더러 동료들에게도 지탄받을 가능성이 높다. 닳고 닳은 용병이 아니면 섣불리 여인에게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아르카디아의 사회상이다. 그런 세계에서 활약하다 보니 이런 실수를 한 것이다. "오랫동안 중원을 떠나있다 보니 실수가 크군." 머리를 내저은 영호명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유천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예상했던 대로 중년인은 자신이 제압한 여인과 깊은 관계에 놓여 있음이 분명했다. 여인의 목숨이 위험해지자 머뭇거림 없이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보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상대의 약점을 노린다는 유천의 예상이 여지없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뒤로 물러서는 영호명에게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 당신은 대관절 누구요?" "글쎄? 지금 상황에서 그게 중요할까?" 유천의 시선이 재빨리 널브러진 당주들을 훑었다. "저들을 죽인 것이오?" "죽이진 않았다. 그저 무공을 폐했을 뿐이지." 유천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인이 무공을 빼앗기는 것은 오히려 죽음보다도 더한 형벌이었다.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원한이 있기에..." 그러나 유천의 입은 이어진 중년인의 말로 인해 다물어졌다. "그럼 너희들은 무슨 원한이 있기에 저들을 죽였느냐?" "..." "어차피 무림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다. 주인이 미우니 부리는 수하들 역시 미울 수밖에 없는 법이지. 날 원망하지 말고 당문의 문도로서 내 눈에 뜨인 상황을 원망하라." 듣고 있는 유천으로서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상부의 명령을 수행하느라 당문도로 위장한 것뿐인데 이런 외진 곳에서 당문에 원한을 가진 초고수를 만날 줄이야...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신분을 밝힐 상황도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중년인을 구슬리려 했다. "이 여인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소. 순순히 협조만 해준다면 털끝 하나 손대지 않고 놓아주겠소." 그러나 영호명은 실소를 지었다. "연약한 여인을 볼모로 잡은 놈의 말을 믿고 싶진 않은데?" 유천의 표정이 별안간 험악해졌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려." 상대의 완강한 태도에 유천은 독한 마음을 먹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운명이라면 할 수 있는 선택은 뻔했다. 게다가 유천은 결코 혼자 죽을 위인이 아니다. 그는 손가락을 뻗어 마차 뒤에 웅크리고 있는 패왕문도들을 가리켰다. "지금 당장 저들을 죽이시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이 여인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게 될 것이오." "..." "당신은 내가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고수요. 하지만 내가 이 여인을 죽이는 것까지는 막지 못할 것이오." 그 말에 사뭇 긴장한 이들은 패왕문도들이었다. 그들은 여태껏 숨을 죽인 채 백발 중년인의 활약상을 지켜보던 참이었다. 그들의 안목으로 볼 때 백발 중년인은 초절정, 거기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고수가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검강을 전개하는 절정급 고수 네 명을 눈 깜짝할 사이에 물리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중년인이 복면괴한의 말대로 시행할 경우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기에 그들은 숨을 죽인 채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가장 난감한 입장에 처한 것은 영호명이었다. 수련과 패왕문도들을 번갈아 쳐다보던 그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순간의 방심이 이런 결과를 남기는군.' 복면괴한의 말대로 아무 죄도 없는 패왕문도들을 죽일 순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두 눈 똑바로 뜨고 수련이 죽는 것을 볼수도 없다. 정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심정이 괴로운 이는 단연 수련이었다. 유천에게 제압당한 수련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 잘못이야. 모든 게 내 잘못이라고...' 영호명의 활약에 정신이 팔린 것이 잘못이었다. 그랬기에 복면 괴한의 접근을 간파하지 못하고 맥없이 사로잡힌 것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다면 이토록 손쉽게 제압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 어떻게 해? 나, 나 때문에 상공께서 곤란에 처하게 되었으니...' 머뭇거리는 영호명을 보다 못해 유천이 또다시 채근했다. "뭘 머뭇거리는 것이오? 정녕 이 여인의 피를 보고 싶은 것이오." 유천이 검을 수련의 목에 바짝 들이댔다. 그럴수록 수련은 더욱 괴로워졌다. 결국 그녀는 독한 마음을 먹었다. '어쩔 수 없어. 비천한 계집 하나 때문에 상공을 더 이상 곤란하게 만들 순 없어.' 눈을 질끈 감은 수련은 목을 앞으로 내밀었다. 비록 맥문이 제압당했다고는 하나 그 정도는 움직일 기력이 있었다. 서걱 백옥처럼 새하얀 목이 칼날에 베어지며 붉은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 이 계집이?" 화들짝 놀란 유천이 급히 검을 뺐지만 이미 수련의 목에는 제법 큰 상처가 난 다음이었다. 설마 제압된 여인이 검을 향해 목을 들이밀 줄은 꿈에도 몰랐던 유천이었다. 그러나 유천의 신경이 거기에 쏠린 사이 상황은 이미 종료된 상태였다. 그 짧은 기회를 놓칠 영호명이 아니었다. 격공섭물로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를 집어든 영호명은 거기에 공력을 주입했다. 진기가 주입된 나뭇잎은 잘 제련된 검보다도 날카로웠다. 다음 순간 나뭇잎은 명궁이 쏜 화살보다 빠른 속도로 대기를 갈랐다. 서걱 미간 사이로 섬뜩한 감각을 느낀 유천이 눈을 부릅떴다. "끄으으으." 그러나 거기까지가 유천이 기억할 수 있던 전부였다. 영호명이 날린 나뭇잎은 유천의 미간에 끄트머리까지 박혀 있었다. 손에서 힘이 빠지며 검이 맥없이 바닥에 떨어졋다. 챙그렁 주춤주춤 물러나던 유천의 몸이 맥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즉사였다. 목에 큰 상처가 난 수련 역시 힘없이 바닥에 주저 앉으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강인한 팔뚝이 그녀의 몸을 부축했다. "수련아." 익숙한 음성에 수련이 눈을 떴다. 흐릿해지는 시야에 상공의 모습이 잡혔다. "죄, 죄송해요, 상공. 저같이 미련한 계집 때문에..." "더 이상 말하지 마라. 일단 지혈부터 하겠다." 영호명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이며 수련의 주요대혈을 점했다. 그에 따라 목에서 뿜어지는 피가 잦아들었다. 그런 다음 영호명은 수련이 메고 있던 행랑을 잡아챘다. 비단 끈이 맥없이 끊어지며 행랑이 손에 잡혔다. 화르르르 행랑이 난데없이 불타올랐다. 마음이 급했던 영호명이 삼매진화로 행랑을 둘러싼 천을 태워버린 것이다. 수련이 쓰던 받짇고리를 찾아낸 영호명의 눈빛이 빛났다. "여기 있군." 받짇고리에서 바늘을 꺼낸 영호명이 내공을 집중했다. 그러자 바늘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꿰매기에 앞서 소독을 하는 것이었다. 바늘귀에 가느다란 비단실을 꿴 영호명은 지체없이 벌어진 수련의 목을 꿰맸다. 오랫동안 전장을 전진한 덕분에 영호명은 자상(刺傷)의 응급처치에 더없이 능통했다. 게다가 현경의 경지에 오른 영호명의 시력은 하늘을 나는 매의 시력에 비할 바 아니었다. 반 이상 베어진 혈관을 봉합한 영호명은 내공을 집중해서 꿰맨 부위를 강제로 접합시켰다. 이어 갈라진 피부도 꼼꼼히 꿰맸다. 재빠른 응급처치 덕분에 다행히 수련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꿰멘 자국을 보며 영호명은 혀를 끌끌 찼다. "쯔쯔, 아무래도 흉터가 지겠군. 꽃다운 처녀의 목에 이게 무슨 꼴이람."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수련이 안쓰러웠는지 영호명은 부드럽게 그녀의 볼을 어루만져 주었다. 패왕문주 소정과 그 일행들은 마치 얼어붙은 듯 마차 뒤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심지어 그들은 숨조차 제대로 몰아쉬지 못했다. 세상에 저 정도로 강한 고수가 있으리라곤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세상에, 절정고수 세 명을 눈 깜짝할 사이에...' 조금 전 백발의 중년인에게 덤볐다가 궤멸된 복면인들은 절정고수가 틀림없었다. 장검에서 세차게 뿜어지는 검강만 보아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백발중년인은 마치 장난하듯 농락하다가 여인이 위기에 처하자 단 일수로 그들을 추풍낙엽처럼 날려버렸다. 절정고수가 도대체 누구인가? 한 문파의 대들보 역할을 하는 이들이 아니던가? 그런 절정고수들이 너무도 어이없이 몰락하는 모습에 그들은 입을 딱 벌려야 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분명 검을 들었지만 위기에 처하자 복면인들이 패왕문의 절기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게다가 중년인이 마지막으로 선보인 수법은 다름 아닌 적엽비화였다. 나뭇잎에 내공을 주입해 빳빳하게 만든 다음 암기로 사용하는 수법. 이것은 초절정고수가 아니면 꿈도 꿀 수 없는 수법이다. 하늘하늘한 나뭇잎을 칼처럼 단단하게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진기가 들어갈 것이며 또한 손에서 떠난 뒤에도 강도가 유지되게 하는 것은 얼마만큼의 집중력이 필요할 것인가? 어지간한 고수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절기임에는 틀림없었다. 조금 전 그들은 똑똑히 보았다. 중년인이 날린 나뭇잎이 복면인의 미간에 끄트머리까지 박혀 들어갔다는 사실을. '도대체 어디서 저런 고수가...' 풍소정과 무사들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보아도 무림에 저런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무릇 칼을 든 무인이라면 무림의 정세에 해박해야 하는 법. 고수로 알려진 자들의 특징과 무공연원에 대해 밝아야만 장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패왕문의 문주인 만큼 풍소정도 무림의 유명한 고수들에 대해 열심히 공부한 바 있다. 그런데 눈앞의 백발 중년인에 대한 정보는 전무했다. '저자는 현존하는 초절정고수들 중에서 가장 강할 것이라 판단되는 자다. 그런데 대외적으로 알려진 정보가 전혀 없다니...' 고민하던 풍소정이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마차 뒤에 숨어 있으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일단은 중년인에게 사의를 표해야 할 때였다. 지금 중년인은 목에 검상을 입은 여인을 치료하고 있었다. 다행히 풍소정에겐 자상에 잘 듣는 금창약이 있었다. 응급처치를 마친 영호명의 얼굴엔 난감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곤란하군.' 다행히 수련은 위험한 상태를 넘겼다. 목의 동맥이 절반 이상 잘려나간 중상이었지만 재빠른 응급처치 때문에 위기를 넘긴것이다. 당분간 요양을 하면 정상을 되찾을 것이었다. 문제는 피로 얼룩진 의복이었다. 목에서 흘러나온 피 때문에 수련의 옷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행랑 안에 갈아입을 옷이 있기는 했지만 남자인 자신이 어찌 갈아입힐 것인가? '어쩔 수 없군. 수련이 기력을 되찾을 때까지 내버려 둘 수밖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어 청아한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구명지은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 결고 잊지 않겠습니다." 자신 때문에 위기를 모면한 패왕문 여문주의 음성이었다. 잔뜩 긴장했는지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영호명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고마워할 것 없소. 당문과 은원관계가 있어서 우연히 개입하게 된 것이니 운으로 여기고 이대로 갈 길을 가시오." 정파 출신의 영호명에게 사도의 대표적인 문파인 패왕문이 곱게 보일 리가 없다. 그런 탓인지 영호명의 말투 역시 곱지 않았다. 그러나 풍소정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무림에서 인정받는 것은 단연 무공이다. 그러나 인맥과 연분도 무시할 수 없다. 강한 고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는 여간해서는 위기에 처하지 않는다. 연분이 두려워 주위에서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풍소정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지금은 냉정해야 할 때야.' 엄청난 고수와 교분을 쌓는 일이니 만큼 자존심 따위는 저 멀리 던져버려야 한다. "제게 좋은 금창약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그분을 치료하심이 어떠신지요?" 영호명이 흠칫했다. 강호를 돌아다니는 무림인에게 효능 좋은 금창약은 필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중원을 떠나 있었던 영호명에게 금창약이 있을 리가 없다. 물론 수련의 행랑 속에는 있었지만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고민하던 영호명이 고개를 들었다. "여기 있습니다." 풍소정이 쭈뼛거리며 조그마한 단지에 든 금창약을 내밀었다. 영호명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금창약을 받아들었다. 비록 응급처치를 했다지만 금창약을 바르면 더욱 빨리 아물 터였다. "저희 패왕문 비전의 금창약이라 여간해서는 흉터가 남지 않을 것입니다." "고맙소." 영호명이 사의를 표하자 풍소정이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목숨을 구해주신 은공에 비하면 이깟 금창약 따위야..." "지금 나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이 금창약이라오.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지." 영호명은 금창약을 수련의 상처에 조심스럽게 펴서 발랐다. 문파의 문주가 소지한 것이라 그런지 질이 매우 좋아 보였다. 풍소정의 시선이 피투성이가 된 수련의 의복에 닿았다. "저기..." 그녀의 말에 영호명이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패왕문이 있습니다. 잠시 저희 문에 가셔서 그분의 상처를 치료하심이..." "아니오. 금창약을 얻은 것만으로도 충분하오." 영호명이 거절의 의사를 밝혔지만 풍소정은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하오나 그분께는 안정이 필요합니다. 근처에 쓸 만한 객잔이 없으니 우선 패왕문으로 가셔서 요양하시지요. 저희 문에는 실력 좋은 의원도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영호명으로서도 더 이상 거절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피투성이가 된 수련의 의복도 갈아입혀야 하지 않는가? 풍소정과 수련을 번갈아 쳐다보던 영호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럼 신세를 좀 지도록 하리다." 풍소정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초고수를 마침내 패왕문으로 모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녀는 지체 없이 호위무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즉각 마차를 대령하세요." 그녀가 타고 온 마차는 우모독침으로 인해 말들이 대부분 죽은 상태였다. 그러나 호위무사들이 타고 온 말들은 다수 살아남아 있었다. 명을 받은 호위무사들이 서둘러 마차의 말을 교체했다. 죽은 말의 시체를 빼내고 거기에 동료들이 타고 온 말을 매단 것이다. 준비가 끝나자 그들은 죽은 동료들의 시신을 한 곳에 끌어 모아놓았다. 지급은 수습할 여우가 없으니 나중에 사람들을 보내 거둘 생각이었다. 풍소정이 서글픈 눈빛으로 널브러진 시신을 쳐다보았다. 모두가 자신을 지키려다 죽은 무사들인 만큼 마음이 아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마차에 오르시지요. 한 식경 정도면 패왕문에 도착할 것입니다." "알겠소. 그럼 신세를 지도록 하리다." 수련을 살짝 안아든 영호명이 마차에 올랐다. 마부가 죽은 상태였으므로 호위무사들이 마부석에 앉아 말고삐를 잡았다. 풍소정이 시녀들을 데리고 타자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랴." 마차가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곧 시체만이 남겨졌다. 마차 안에서 수련은 영호명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기력이 충만해야 상처의 회복이 빠르다는 사실을 떠올린 영호명은 끊임없이 수련의 명문혈에 진기를 주입했다. 과도한 출혈 탓인지 수련은 좀처럼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애틋함을 느낀 영호명은 연신 손을 뻗어 파리한 수련의 볼을 쓸어주었다. '불쌍한 것. 도대체 어떤 훈련을 받았기에 머뭇거림 없이 자결을 결심한단 말이냐?' 그녀의 기구한 운명을 들어 알고 있었기에 더욱 불쌍해 보였다. '오냐. 내가 몸이 편치 않을 때 정성껏 간호해 주었으니 이제 내가 보살펴 주마.' 그 모습을 풍소정과 시녀들이 한쪽 구석에 잔뜩 웅크린 채 쳐다보고 있었다. 영호명의 정성이 통했는지 오래지 않아 수련이 눈을 떴다. "이제 정신이 드느냐?" "사, 상공." 영호명이 빙긋이 웃으며 손가락으로 수련의 입술을 눌렀다. "가급적 말을 하지 말거라. 상처가 벌어질 우려가 있다." 수련의 눈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초인이 자신을 세심히 돌봐주는데 감복한 것이다. 조심스럽게 수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영호명이 돌연 안색을 굳혔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하지 말거라. 알겠느냐?" "하, 하오나 저 때문에 상공께서..." "널 제압한 자는 절정고수였다. 제압당한 것은 네 탓이 아냐. 게다가 그러지 않았다고 해도 충분히 널 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영호명의 눈빛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사람의 목숨은 존귀한 것이다. 그토록 쉽게 버려서는 안되는 것이야." "하, 하오나 비천한 계집 하나 때문에..." "사람 목숨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세상 모든 여성은 언젠가 어머니가 된다. 세상을 주름잡는 대 영웅에게도 엄연히 어머니가 있는 법. 그 누가 알겠느냐? 수련 네가 앞으로 천하제일인의 모친이 될 수도 있지 않느냐? 그렇게 되면 그 누가 너더러 비천하다 하겠느냐? 천하제일인을 아들로 둔 너에게 말이다." "대, 대공." 수련의 눈에 눈물이 가득 괴였다. 정말 가슴 깊이 와 닿는 위로였기 때문이었다. 감정을 참지 못한 수련은 영호명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중상을 입은 그녀에게 그럴 힘이 남아있다는 것이 불가사의였지만 말이다. "허허, 거 참."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영호명은 곧 쓴웃음을 지으며 수련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풍소정과 시녀들은 그 광경을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이해하기 힘든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대화 내용으로 봐서 상처 입은 여인은 중년인의 시녀가 분명했다. 그런데 시녀를 대하는 중년인의 태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손녀를 대하는 것 같아. 직감이지만 말이야.' 그러면서도 소정은 마음 한구석이 한없이 공허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 저 수련이라는 이름의 여인이 못 견디게 부러워지는 것은 왜일까? 어릴 적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시집을 가서 아들 딸 놓고 잘 살고 있었다. 반면 자신은 성혼조차 하지 못한 채 거친 무사들 사이에서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다. 죽을 운명을 넘기고 나니 그런 자신의 처지가 더욱 비관스러워졌다. 마음 같아서는 야반도주라도 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경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겐 야반도주를 할 만한 남자도 없었다. '애당초 난 한 문파의 문주감이 못 돼. 너무 힘들어 견딜 수가 없으니 말이야.' 남자의 품이 저토록 포근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그녀의 나이도 어언 스물여섯. 가족들에게 불운한 일이 닥치지 않았다면 벌써 성혼해서 자식을 낳았을 나이였다. 답답해진 풍소정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런 소정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시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이 보기에도 풍소정이 불행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수련은 또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피를 많이 흘려 몸 상태가 극히 좋지 않았다. 수련을 편하게 눕힌 영호명이 풍소정을 쳐다보았다. "패왕문의 문주라고 하셨소?" 딴 생각을 하고 있던 풍소정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문파의 단속을 잘해야 할 것 같소." 뚱딴지같은 말에 소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아까 당신들을 습격한 복면인들은 당문도들이 아니었소." "다, 당문도들이 아니었다고요?" 영호명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마지막 순간 복면인들은 전혀 생소한 초식을 사용했소. 비록 검을 들었지만 그들이 펼친 것은 도법이었소. 게다가 그들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영호명은 손가락을 뻗어 풍소정을 가리켰다. "당신과 마부 석에 있는 무사들과 거의 동일하오. 다시 말해 같은 종류의 내공심법을 익혔다는 말이지. 내 어림짐작이지만 아무래도 그들은 패왕문의 무사들인 것 같소." 풍소정의 눈이 경악으로 치떠졌다. 패왕문의 무사들이 자신을 습격했다는 말이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얼이 빠진 그녀의 귓전으로 나지막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패왕문에 절정고수가 몇 명이나 되오?" 그 대목에서 풍소정은 잠시 머뭇거렸다. 한 문파에 존재하는 절정고수의 수는 어떠한 상황에서 감춰야 하는 일급비밀이다. 외인에게 섣불리 말할 만한 종류의 사안이 아니었다. 그러나 풍소정은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백발 중년인은 그런것을 따질 수 없을 정도의 고수였다. "본문의 절정고수는 모두 열 명입니다. 그중 세 명은 정체불명의 독에 중독되어 의식불명상태에 있지요." "그렇다면 일곱 명이 남는구려. 아까 습격한 복면인들은 십중팔구 그들 중에 있을 거요." 풍소정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당주들이 모두 변심했다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후우, 냉정해야 해.' 풍소정은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일단 당주 중에서 팽각은 제외해야 한다. 지극히 외골수적이고 패왕문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그가 자신을 습격하는데 가담할 리는 없다. 게다가 팽각은 유난히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한 편이었다. 그런데 복면인들 중에서 팽각과 체격이 비슷한 이는 없었다. '비사문 당주도 제외해야 해. 벌써 7년가량을 폐관수련장에 박혀 있는 그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답은 뻔했다. 남은 당주들 모두가 변심을 한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풍소정의 몸이 분노로 인해 파르르 떨렸다. '결코 이 일을 가만히 넘어가서는 안 돼.' 하지만 사안을 조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명색만 문주일 뿐 그녀에겐 아무런 실권도 없다. 심지어 조사를 위해 무사를 동원하기조차 힘든 상황이다. 풍소정은 돌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쓰러진 자들을 제압했어야 했는데...' 백발중년인에게 일패도지한 복면괴한들은 여인을 치료하는 사이 은밀히 도주해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풍소정 일행은 움직일 수 없었다. 백발 중년인의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연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만, 죽은 복면인의 시신이 아직까지 남아 있을 텐데?' 여인을 인질로 잡았다가 중년인의 적엽비화로 죽은 복면인.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온다면 중대한 증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부질없는 짓이오. 아마도 도주한 복면인들이 시신을 챙겼을 것이오." 풍소정은 맥이 탁 풀렸다. 증거가 없는 이상 당주들을 추궁하기조차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영호명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그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무공이 폐지된 상태요. 문으로 돌아가서 자세히 조사해 보시오." "알겠습니다. 은공." 무공이 폐지된 상황이라면 확실하게 증거를 잡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굳게 움켜쥔 풍소정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내 결단코 이 일을 순순히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결심이 실행될지는 불투명했다. 마차는 꼬박 한나절을 달려 마침내 패왕문에 도착했다. 풍소정은 문파가 발칵 뒤집힐 것을 예상했다. 문주의 행렬이 기습공격을 받아 호위무사 대부분이 죽은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반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풍소정은 도착한 즉시 각 당에게 소집령을 내렸다. 그러나 소집령에 응한 당은 단 둘 뿐이었다. 팽각의 철혈당과 폐관 중인 비사문의 현의당. 나머지 다섯 당은 단 한 명의 무사도 보내지 않았다. 그들의 대응에 풍소정은 눈매를 파르르 떨었다. '정녕 내가 패왕문의 문주가 맞기는 한 건가?' 그녀의 처소로 온 당주는 단 한 사람. 연무장에서 무사들을 훈련시키던 팽각 당주뿐이었다. 비사문 당주는 폐관수련 중이라는 핑계로 오지 않고 부당주를 보냈다. 그것까진 이해해 준다 하더라도 다른 당들의 행태는 도를 넘어섰다. 최소한 부당주라도 보내서 문주의 안위를 살펴야 하는것 아닌가? 유일하게 참여한 팽각 당주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풍소정의 성난 눈빛이 팽각 당주에게로 쏟아졌다. "철혈당주님, 중대한 사안이 발생했으니 모든 당의 당주들에게 제 처소로 모이라고 전해 주십시오." 팽각 당주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머지 당주들이 집안에 일이 생겻다고 모두 출타한 상태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당주는 저와 비사문 당주뿐입니다." 풍소정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자신을 습격해야 했으니 당연히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다. "상관없어요. 당주가 없다면 부당주를 소환하세요. 각 당에는 두 명의 부당주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문주님." 문주의 서슬이 예상 외로 시퍼랬기에 팽각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자신이 가지 않으면 부당주들이 출두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안 그래도 당주들이 신임문주를 업신여기는 통에 부당주나 대원들조차 문주를 시답잖게 생각하는 상황이었다. 문주의 무공이 고작해야 일류도 되지 않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나마 세 명의 장로들이 건재했을 때는 사정이 달랐지만 그들이 폐인이 된 이후 풍소정의 명령은 거의 먹혀들지 않았다. 그래도 당주가 나선 덕택인지 한 시진 뒤 모든 당의 부단주들이 문주의 처소에 모였다. 그들이 모두 모이자 소정은 우선 자신이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반응은 지극히 싸늘했다. "말도 되지 않소. 도대체 무슨 이유로 우리 풍령당주님을 모략하는 것이오." "칠성당주님은 현재 모친상으로 인해 문을 비우셨소. 증거도 없이 사실을 호도하지 마시오." 부당주들의 격한 반발에 풍소정은 말문이 콱 막혀버렸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부당주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상관을 두둔하고 있었다. 심지어 팽각 당주마저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너무 신빙성이 없는 말씀이시군요. 그들은 정사대전을 거쳐가며 패왕문에 충성을 바쳐온 당주들입니다. 그들이 대관절 왜 문주님을 공격한단 말입니까?" "내 호위무사들이 전멸 당했어요. 철혈당에서 지원받은 무사들까지 전부 말이예요. 다행히..." 부당주들은 풍소정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당주님께서 돌아오시면 직접 말씀하십시오. 그 전까진 듣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당주님을 믿습니다." 부당주들은 두말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최전선에 서는 무력단체라 그런지 결속력이 놀라울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본 풍소정은 치를 떨었다. 대관절 자신은 패왕문에서 어떤 존재란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어 입가에 실소가 맺혔다. '일개 부당주에게마저 무시당하는 문주라...' 생각 같아서는 하극상을 범한 부당주들에게 엄벌을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에겐 그럴 만한 무력이 전혀 없었다. 그나마 남은 호위무사들도 오전의 습격으로 인해 궤멸되고 단 둘만이 남은 상황이다. 자신의 처지를 실감한 풍소정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알겠어요. 그 사실은 당주들이 돌아오고 나서 논의하도록 해요." 힘없이 몸을 돌리고 나가는 풍소정의 등으로 비웃음 섞인 시선이 집중되었다. '정말 힘들구나.'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숙소로 가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어야 겨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옆방에서 상황을 듣고 있던 영호명은 기가 막혔다. "이건 완전히 콩가루 문파로군." 문주가 습격을 받아 호위무사 대부분이 죽었는데도 별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한낱 부당주들이 태연히 문주의 말을 반박한다. 도저히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문파였다. 장로들의 입김이 짙은 백도의 문파에서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하물며 상명하복이 철저한 마도의 문파가 이런 행태를 보인다는 건 정말 어처구니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도저히 정상적인 문파로 생각할 수가 없군." 그래도 패왕문이라면 사파에서 제법 전통이 있는 문파로 유명했다. 그런 문파에서 보여주는 작태라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영호명은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있는 곳은 더없이 화려한 침실. 한쪽 구석의 비단 침상에는 수련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영호명은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수련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래도 크게 흉이 질 것 같지 않군. 다행이야."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 그는 수련의 머리를 계속해서 매만졌다. 그 시각 습격에 실패하고 도망친 당주들은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다. 하나같이 무공이 폐지된 탓인지 얼굴이 초췌했다. 그들 옆에는 광목으로 싸인 유천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정체가 드러나면 안 되기 때문에 마차가 떠나간 즉시 챙겨온 것이다. 당주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허탈했다. 무인에게 전부라 할 수 있는 무공을 잃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앞에는 강퍅한 인상의 중년인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잠마련의 외원 전주 중 한 사람으로서 당주들과 접촉해 그들을 잠마련의 일원으로 만든 이였다. 이름은 엽초, 한때 제법 명성을 가진 살수문을 이끌다가 잠마련에 투신한 경우였다. "정말 운이 없었군. 하필이면 당문에 원한을 가진 초고수와 맞닥뜨리다니..." "정말 강한 자였습니다. 저희를 거의 농락했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가지고 놀았으니까요." 그 말을 들은 엽초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지나갔다. 그가 포섭한 당주들은 하나같이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이다. 그런 고수들 다섯이 농락당했다고 표현할 정도라면 얼마나 무공이 강하단 말인가? "특이하군. 아무리 생각해봐도 머리색이 백발인 초절정고수는 없는데..." 그들은 영호명을 초절정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던 당주들이 한 마디씩 덧붙였다. "초절정 중에서도 상위에 오른 고수가 틀림없습니다." "정말 끔찍할 정도로 강하더군요." 엽초는 턱에 손을 괴고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만약 임무가 실패했다는 사실이 상부에 전해진다면 엄중한 처벌을 받을 것이 틀림없었다. 잠마련은 임무 실패에 대한 처벌이 혹독하기로 소문이 난 문파이다. 반대로 임무를 성공시킬 경우 엄청난 보상이 주어진다. 잠마련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여러 문파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엽초 역시 군소 살수문파 출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마련은 휘하 무사들을 효율적으로 잘 관리해 왔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독을 이용한 통제였다. 잠마련 무사들은 태반이 정기적으로 해약을 먹어야 하는 중독 상태에 놓여 있다. 엽초나 눈앞의 당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배신하거나 딴마음을 먹지 못하게 한 조치였는데 의외로 효과가 컸다. 그 다음에 잠마련에서 시행한 정책은 철저한 당근과 채찍이었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무사에게는 어마어마한 포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절색의 미녀 두셋 정도는 기본이었고 평생쓰고도 남을 금은보화와 잠마련 내에서의 주요 직책을 내린다. 그러나 임무를 실패할 때의 처벌은 포상만큼이나 혹독했다. 임무에 실패한 무사들이 처벌받는 장면을 떠올린 엽초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대로 실패를 보고할 순 없어. 어떻게든 임무를 완수해야 해.' 그는 상기된 눈빛으로 당주들을 쳐다보았다. "혹시 그 고수가 패왕문으로 갔을 가능성은 없나?" "그럴 가능성이 없진 않습니다. 동행한 여인이 큰 상처를 입었으니 말입니다." 암울한 소식이었지만 엽초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제아무리 고수라도 잠은 자야 할 터, 만약 내가 패왕문의 문주를 몰래 암살할 경우 혹시라도 문의 실권을 되찾아올 수 있겠나?" 그 말에 당주들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현재 패왕문주는 문내에서의 권한이 전혀 없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저희들이 맡고 있는 당은 대원들 간의 유대가 각별합니다. 아마 문주의 명령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엽초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렇다면 일반 무사들을 규합하여 당문을 공격하게 할 수도 있는건가?" "충분히 가능합니다. 문주만 사라진다면 저희들 휘하의 대원들과 죽은 유천 당주 휘하의 무사들을 모두 통솔할 수 있습니다." "패왕문 무사들 중 절반을 동원할 수 있다는 말이로군." 엽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내려진 명령은 패왕문의 전 문도들을 이끌고 당문을 기습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획이 어긋난 이상 어쩔 수 없다. 일단 절반이라도 동원해서 당문을 치면 남은 무사들도 어쩔 수 없이 가세할 수 밖에 없다. 한 대 얻어맞은 당문이 가만히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엽초의 눈빛이 돌연 빛났다. '그렇게 한다면 임무를 성공시킬 수 있어. 내 입장에서는 반드시 임무를 완수해야 해.' 마음의 결정을 내린 엽초는 당주들을 쳐다보았다. "좋다. 그럼 내가 은밀히 숨어들어 패왕문주를 암살하겠다. 너희들은 기회를 보아 무사들을 규합시키도록 하라." 당주들이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꺾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무공을 잃은 그들에게 선택할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벽 앞에 선 자가 가르침을 청하다***** 사건이 벌어진 지 하루가 지났지만 패왕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울화병이 치민 풍소정이 몸져누운 것 빼고는 어제와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팽각은 여전히 연무장에서 무사들을 괴롭혔고 비사문은 폐관수련장에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앗다. 영호명과 수련은 숙소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수련의 상세는 많이 나아진 편이었다. 혈색이 많이 좋아졌고 이젠 혼자서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지금 수련은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서 마룻바닥에서 운기조식중인 영호명을 훔쳐보고 있었다. 얼굴이 연신 붉어지는 것을 보아 묘한 상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천하제일인의 모친이 될지 누가 아느냐고 하셨지?' 물론 그것은 가능성이 매우 낮은 일이다. 최소한 대문파의, 그것도 초절정 이상 가는 고수의 아내가 되어야만 꿈꿔볼 수 있는 일. 흔히 말하기를 고수는 대를 이어 탄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고수가 되는 데에는 그만큼 주위환경과 가르침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무림세가에서 적자 한 명에게 총력을 쏟는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수련은 매우 발칙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천하제일인의 엄마가 되려면 한 가지밖에 없어. 바로 대공의 아이를 낳는 것이지.' 처녀가 떠올리기에는 너무도 부끄러운 생각이었기에 수련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장 타당한 생각이기도 했다. 그녀가 모시는 대공은 감히 추측하기조차 힘든 고수이다. 그런 만큼 그의 핏줄은 자질 하나는 타고난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영호명이 직접 무공을 전수해 준다면 그 성취는 감히 추측조차 할 수 없을 터였다. '정실의 자리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아.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주제넘는 생각이지. 그저 아이 하나만 갖게 해 주신다면, 그리고 이따금 찾아와 지도해 주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데 말이야.' 그러나 그녀의 발칙한 상상은 영호명이 운기조식을 마침으로써 산산히 깨어져버렸다. 상상 속에 빠져 있던 수련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행공을 마치셨습니까?" "음, 그렇다." 슬며시 고개를 끄덕인 영호명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수련을 쳐다보았다. "이제 몸은 좀 괜찮으냐?"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너무 침상에만 누워있어도 좋지 않은 법이다. 나가서 햇볕이라도 좀 쬐는 것이 어떠냐?" 수련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애로우신 배려에 소녀 감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헛. 그게 배려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럼 나가볼까?"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아직은 몸이 불편한 수련이었다. 해서 영호명은 그녀를 부축해 바깥 나들이에 나섰다. 둘은 접객청 외부로 빙 둘러 난 길을 따라 산보를 했다. 길의 끝에는 큼지막한 연무장이 위치해 있었다. 연무장에는 수십 명의 무사들이 모여 힘차게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쩌렁쩌렁한 기합소리가 대기를 갈가리 뒤흔들었다. "심심한데 연무장 구경이나 할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영호명의 눈빛이 빛났다. 연무장 한족에 조그마한 차양이 쳐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수련을 부축한 채 차양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무사들의 연무장은 보통 외인에겐 섣불리 공개되지 않는 장소다. 무림에서 다른 사람의 무공연마를 훔쳐보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 제아무리 귀빈이라도 무사들의 연무장을 구경하는 것은 대단한 실례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영호명은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트루베니아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탓이었다. 영호명과 수련을 발견한 무사들이 술렁거렸다. '저것들은 뭐지?' '감히 신성한 연무장에 계집을 데리고 오다니...' 심사가 좋지 않은 듯 인상이 험악해졌지만 무사들은 감히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자칫 잘못해 대오를 흩트릴 경우 무시무시한 지옥훈련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무사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영호명은 수련을 차양 안에 앉혔다. "자, 여기 앉아라." 무사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졌지만 영호명은 신경 쓰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호랑이가 햇병아리들의 시선에 반응해야 할 이유는 없다. 무사들을 훈련시키던 팽각 단주도 살짝 눈살을 찌푸렸을 뿐 뭐라 하지 않았다. '문주님의 손님이라고 했지? 함부로 연무장에 들어오다니 꽤나 무례한 작자로군. 뭐, 문주님의 체면을 보아 한 번은 그냥 넘어가주마.' 불행히도 풍소정은 휘하 문도들에게 영호명의 정체를 밝히지 못했다. 당면한 문제에 신경이 팔린 데다 회의결과로 인해 몸져 누운 탓이었다. 때문에 팽각은 영호명을 그저 문주를 방문한 손님으로만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림인이 아닌가 보군. 타인의 무공수련을 지켜보지 말라는 금기를 어기다니 말이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결정한 팽각이 더욱 무사들을 독려했다. "똑바로 하지 못하겠나? 동작이 일사불란하지 못하잖아?" 팽각은 덩치답지 않게 상당히 철두철미한 자였다. 그가 무사들에게 요구한 것은 동작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척척 들어맞는 것이었다. "하나가 도를 휘두르나 열이 휘두르나 한결같아 보여야 한다. 대오를 흩트릴 경우 각오하라." 그의 명령에 따라 무사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도를 휘둘렀다. 그 모습을 영호명과 수련은 한가롭게 그늘에 앉아 감상했다. 연무장면을 보던 수련이 감탄성을 내뱉었다. "정말 대단해요. 저 많은 무사들의 동작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맞아 떨어지다니... 역시 전통이 있는 패왕문이라 그런지 뭔가 다른걸요?" 그리 크지 않은 음성이었지만 여기 모인 무사들은 하나같이 일류 이상의 무사들이다. 몇몇 무사들의 어깨에 과도하게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청초한 미녀가 칭찬을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흐흐. 그래도 보는 눈은 있군.' '예쁘니까 무례를 너그럽게 용서하마.' 그러나 영호명만큼은 곱게 볼 수 없었다. 신성한 연무장에 허락받지 않고 여자를 데리고 온 것 자체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잔뜩 힘이 들어간 그들의 귓전으로 청아한 음성이 계속 파고들었다. "상공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말 멋지지 않나요?" 영호명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수련을 쳐다보았다. "저것이 멋지게 보이느냐?" "그, 그런걸요?" 무사들의 수련장면을 쳐다보며 영호명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보기에는 말짱 쓸데없는 짓들을 하고 있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고 기질이 다른데 어떻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겠느냐? 내 상각으로 저들을 가르치는 교관은 머리가 아주 나쁘거나 아니면 뭔가 조금 모자란 작자 같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무사들이 일제히 살기를 내뿜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수련은 살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영호명이 호신강기를 펼쳐 살기를 막아주었기 때문이었다. 무사들의 귓전으로 신랄한 평가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도법 자체는 그럭저럭 쓸 만해 보인다. 드물게 유의 기운이 내포된 도법이야. 하지만 저들이 펼치는 도법은 그 극의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어. 그저 흉내만 낸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까?" 무사들의 표정이 점점 심상치 않게 변했지만 수련은 전혀 기미를 눈치 채지 못했다. "그렇다면 실전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뜻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실전에서 저런 짓거리를 하면 칼맞아 죽기 딱 좋지.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는 그리 나쁘지 않지만 그 이상은 기대할 수 없어."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영호명의 등판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무사들을 훈련시키던 팽각이 참지 못하고 다가온 것이다. 이어 스산한 음성이 영호명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영호명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느물느물 대꾸했다. "허허, 머리가 나쁜데다 청력까지 좋지 않은 작자로군." 팽각의 얼굴은 완전히 대춧빛으로 물들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것이다. 그가 발작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 눈앞의 남녀가 문주의 손님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호명의 마지막 말로 인해 팽각의 머릿속에서 이성의 끈이 툭하고 끊어져버렸다. 도를 거칠게 뽑아든 팽각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이리 나와라, 실력이 입담에 걸맞는지 한번 확인해봐야겠다. 제아무리 문주님의 손님이라고 해도 더 이상은 용서하지 못한다." "허허, 나오라니 나가봐야지." 영호명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사실 그는 일부러 무사들을 도발한 것이다. 사파에 대한 불편한 감정과 어제의 볼썽사나운 작태에 대한 분노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이다.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은 좀 혼이 나야 해. 부당주 따위가 문주를 능멸하는 문파라니...' 팽각을 쳐다보는 영호명의 눈빛은 그리 곱지 못했다. 부당주가 불손한 것을 빤히 보면서도 나서지 않은 것이 죄였다. 단단히 골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한 영호명이 병기대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뭘 쓰지? 적당한 병기가... 옳지, 여기 있군." 영호명이 집어든 것은 묵직해 보이는 목도(木刀)였다. 그것을 본 팽각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완전히 자신을 업신여기는 처사였기 때문이다. 목도는 대련용 병기가 아니다. 잘못한 무사들을 벌주는 징벌용이었다. 이성이 마비된 팽각은 마치 멧돼지처럼 콧김을 내뿜었다. "내 비록 문주님께 책망을 듣는 한이 있더라도 감수하겠다. 단단히 쓴맛을 보여주마." 무사들의 눈빛 역시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자신들이 익힌 도법을 모욕한 데 이어 당주까지 능멸하니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것이다. 병기를 움켜쥔 철혈당 무사들이 연무장을 빙 둘러쌌다. 건방진 백발 중년인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포위한 것이었다. 무사들의 포위망 속에서 철혈당주 팽각이 핏발 선 눈을 번들거리며 영호명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쏘아지는 살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영호명은 한가롭게 서서 목도를 휘둘러 보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쓰는 목도로군." 한가롭게 도를 휘둘러보는 영호명을 향해 팽각이 한 발 한 발 접근하기 시작했다. 쐐애애액 육중한 도가 쏜살같이 대기를 갈랐다. 팽각은 패왕투심의 초식을 써서 건방진 중년인의 앞가슴을 갈라갔다. 수천, 수만 번 이상 휘둘러 본 초식이라 도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중년인의 명치를 쑤셨다. 팽각은 이번 일격이 성공할 것이라 추호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예외는 어디에나 있는 법. "어, 어엇." 팽각이 초식을 펼치다 말고 돌연 비틀거렸다. 놀랍게도 초식을 전개하던 중에 중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막 초식이 변화를 일으키려는 찰나에 중년인이 장난이라도 하듯 목도를 불쑥 내밀었는데 그것이 정확히 맥점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투로가 막힌 탓에 초식은 엉망으로 헝클어져버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의아한 듯 팽각이 머리를 흔들었지만 깊이 생각할 여유란 없었다. 눈앞의 건방진 중년인을 박살내야겠다는 생각에 팽각은 재차 초식을 전개했다. "단칼에 쪼개버리겠다." 서슬 퍼런 일격이 중년인의 어깨를 갈라갔다. 그러나 이번 초식도 완전히 펼쳐지지 못했다. 절묘한 순간에 초식의 맥이 끊어졌기 대문이었다. 중심을 잃고 두세 걸음 물러선 팽각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디서 잔재주를..."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덮어놓고 도를 휘둘렀다. 눈부신 빛 무리가 도첨을 통해 맹렬히 뿜어져 나왔다. 콰콰콰콰 절정고수의 전매특허인 강기의 발현이었다. 그러나 도강을 뿜어냇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중년인은 계속해서 장난이라도 하듯 목도를 내밀어 투로를 끊어버렸다. 강기가 서린 도와 맞부딪혔지만 목도에는 아무런 손상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분노로 인해 눈이 뒤집힌 팽각은 그 사실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개자식. 죽여 버리겠다." 그는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콧김까지 뿜어내며 공격에 몰두했다. 지극히 단순하고 우직한 그의 성미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하나, 애석하게도 그의 도는 중년인의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심지어 몸 근처로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팽각의 귓전으로 느물느물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이것이 바로 유의 기법이다. 상대가 전개하는 초식의 맥을 끊어 허점을 유발하는 것. 하지만 네 도법은 이 유의 기법이 완전히 결여되어잇다. 도법이 아깝구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충고였지만 팽각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개소리." 버럭 고함을 지른 팽각이 혼신의 진기를 도에 불어넣었다. 순간 도에 서린 빛 무리가 비약적으로 길어졌다. 파파파팟 거의 석 자 가까이 뿜어져 나온 도강이 대기를 이글이글 달궜다. 그러나 먹히지 않는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은 목도가 강기를 척척 받아넘기고 있었다. 완전히 꼭지가 돌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팽각과는 달리 무사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명색이 절정고수인 팽각을 중년인이 농락 수준으로 가지고 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중년인의 목도에는 아무런 기운이 서려 있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보일락 말락한 기운이 목도의 표면에 살짝 서려 있다. 도기만을 살짝 응축시킨 목도로 강기를 받아낼 정도라면 얼마나 무공이 높다는 말인가? 경악으로 눈을 부릅뜬 무사들이 채 숨도 몰아쉬지 못하고 접전을 관람했지만 팽각은 여전히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다. "사술을 쓰지 마라. 정면으로 겨뤄보자." 그 말이 팽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영호명의 기세가 판이하게 변했다. "정말 미련한 녀석이로군. 좋다." 그가 자세를 고치는 순간 폭풍 같은 기세가 사방으로 쭉 뿜어져 나갔다. 영호명의 눈에서 강렬한 광망이 쭉 뿜어져 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네 도법이 패의 기법에 충실한 것도 아냐. 겉으로 비슷하게 흉내만 낼 뿐이지. 진정한 패가 어떤 건지 보여줄까?" 느릿한 음성과 함께 목도가 맹렬한 속도로 정면을 쪼개어갔다. 고급 초식을 쓴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목도를 하늘 높이 세웠다가 그대로 내려친 것뿐이었다. 그러나 정면에 있던 팽각은 마치 절벽이 자신을 향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헉." 팽각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공격을 막아냈다. 콰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팽각의 몸이 주르르 뒤로 밀려났다. 앞으로 두 줄기 고랑이 팬 것으로 보아 이번 일격의 위력을 익히 짐작할 만했다. 영호명은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이격을 가했다. 강호의 삼류무사도 알고 있는 지극히 흔한 초식, 태산압정이었다. 일정경지 이상 오른 무사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초식. 그러나 팽각은 마치 산악이 내려누르는 듯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어느덧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압력을 느낀 것은 팽각뿐만이 아니었다. 둘러싼 무사들 역시 안색이 핼쑥해진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세, 세상에 어디서 저런 고수가?' '가, 감히 추측조차 할 수 없는 경지야.' 팽각은 이제 이성을 되찾은 상태다. 그토록 가공한 압력을 받고도 정신이 들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거침없이 자신을 찍어오는 목도, 입술을 질끈 깨문 팽각은 사력을 다해 도를 마주쳐갔다. 콰아아앙 강렬한 격돌음과 함께 팽각이 피를 토했다. 목도와 도가 마주치는 순간 기혈이 뒤집힌 것이다. 술에 취한 듯 상체르르 마구 흔들며 뒷걸음질 치는 팽각의 귓전으로 나지막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강기는 아무 때고 엿가락 뽑듯 뽑아내는 게 아냐. 필요할 때 일순간에 집중시키는 것이지. 이렇게 말이야."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엄청난 광휘가 장내를 뒤덮었다. 영호명이 들고 있던 목도에서 휘황찬란한 강기가 쭉 뿜어져 나온 것이었다. 놀랍게도 강기의 길이가 십 장(약 30미터)에 달할 정도로 자라나 있었다. 그 광경을 본 팽각의 입이 딱 벌어졌다. "세, 세상에..." 저 정도 길이의 강기를 뽑아낼 수 있는 실력자가 세상에 존재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목도를 이용해 뽑아낸 것 아닌가? 그가 얼이 빠져 지켜보는 사이 중년인이 강기가 돋아난 도를 사정없이 내려찍엇다. 세 번째의 태산압정이었다. 그러나 넋이 나간 팽각은 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콰콰콰콰 돌바닥에 길게 홈이 파이며 비명을 내질렀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강기가 연무장을 그대로 갈라버린 것이다. 목도는 절묘하게 팽각을 약간 비켜나서 바닥을 때렸다. 단단한 청성이 일시에 녹아내리며 쩍 갈라졌다. "세, 세상에..." 실로 엄청난 장관에 무사들은 할 말을 잃었다. 입을 딱 벌린 채 눈을 부릅뜬 상태로 얼어붙어 버린 것이다. 무력시위를 마친 영호명은 목도를 들어 이리저리 매만졌다. 그토록 엄청난 위용을 과시했지만 목도에는 아무런 흠집도 나지 않았다. "이 정도는 되어야 패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물론 대답은 들려오지 않앗다. 운집한 무사들이 하나같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호명이 저벅저벅 걸어가서 병기대 위에 목도를 올려놓았다. '내가 좀 심했나?' 몸을 돌린 영호명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팽각 당주에게 너무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정도로 농락을 당했다면 자신이 익힌 무에 대한 회의감을 가질 가능성도 있었다. 심할 경우 자괴감에 빠져 폐인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생각해야 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영호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사파 무사라는 것 때문에 손을 과하게 쓴 것 같군.' 그러나 상황은 영호명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겸연쩍어진 영호명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팽각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제가 하늘을 몰라 뵈었습니다." 말을 마친 팽각이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오체투지를 했다. "감히 하늘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례를 저지른 저를 벌해주십시오." 오체투지를 한 것은 팽각뿐만이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싼 철혈당 무사들 역시 한 명도 빠짐없이 오체투지를 했다. "저희들에게 벌을 주십시오." 황당해진 영호명은 눈을 크게 떴다. 압도적인 무력을 동원해서 모욕을 주었는데 오체투지를 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경우란 말인가? 살짝 고개를 든 팽각의 얼굴은 온통 눈물에 젖어 있었다. "감히 하늘을 알아보지 못하고 막말을 한 죄 미천한 목숨으로 갚겠습니다." 팽각은 머뭇거림 없이 도를 들어 목으로 가져갔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자결을 할 판국이라 영호명이 성큼성큼 걸어가서 팽각을 냅다 걷어 차버렸다. 쨍그렁 도가 맥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저만큼 나가떨어진 팽각이 재빨리 꿇어 엎드렸다. "지금 뭐하자는 건가?" "..." "모욕을 받았으면 절치부심하여 복수를 꾀할 일이지 생목숨을 끊겠다는 건가? 그 정도로 모욕감이 심했나?" 팽각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도리질을 쳤다. "모욕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이것은 하늘을 몰라보고 귀인에게 욕설을 퍼부은 데 대한 사죄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사들이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기 시작했다. "감히 귀인께 불경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부디 저희들을 벌해 주십시오." 어처구니가 없어진 영호명이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이런 단순한 작자들이 존재한단 말인가? 이건 아르카디아의 기사들보다 정도가 더 심했다. 거의 맹목적으로 힘을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영호명은 순간적으로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을 느꼈다, '이들에겐 힘이 곧 법이요 진리다. 그야말로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에 가장 철저한 자들이야.' 만약 이런 단순한 자들을 사악한 우두머리가 이끌면 어떻게 될까? 보나마나 혈겁이 벌어질 것이 불 보듯 뻔한 노릇이다. 강자가 시키는 것은 뭐든지 할 테니 말이다. 영호명은 침음성을 흘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비로소 하오문의 문주 갈천성이 한 말이 이해가 갔다. '그의 말이 이제 이해되는군. 사파에서는 월등히 쉽게 무사들을 끌어 모을 수 있겠어.' 그러나 아직까지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정파 출신인 그가 사파의 마두가 되어 지금껏 동료였던 정파 무사들을 살상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버린 영호명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팽각과 철혈당 무사들은 그때까지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다. "일어나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사들이 시립했다. 문파의 존장이 아닌 외인의 명령임에도 두 말없이 복종하는 무사들이었다. 영호명은 짐짓 안색을 굳혔다. "사과를 받아들이겠다. 그대들의 무례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팽각을 비롯한 무사들이 직각으로 고개를 꺾었다.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까 말했듯 사람은 체질이나 기질이 제각기 다른 법, 동작을 일치시키는 것은 실전에 그다지 도움을 주지 않는다. 차라리 동료간의 호흡을 밀접하게 일치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난전에서 등을 지켜주는 동료가 있고 없고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법이다." 무사들이 조언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아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훈련에 열중하도록..." 영호명의 전신에서는 패도적인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천군만마를 호령해 보지 않은 자는 결코 내뿜을 수 없는 기세. 자연스럽게 기세에 장악당한 무사들은 자기도 모르게 복명했다. "존명."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영호명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사람을 강하게 짓누르는 기세는 수련 앞에 가자 씻은 듯 사라져버렸다. "이만 들어가자꾸나." 수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몽롱한 눈빛으로 영호명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사람이 이토록 멋있을 수가 있다니...' 무사들의 오체투지를 받으며 당당히 서 있던 영호명을 다시 한 번 떠올린 수련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햇볕을 너무 많이 쬐어도 좋지 않느니라." 수련은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네 상공." 그녀는 퍼뜩 몸을 일으켜 영호명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도통 영호명의 등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연무장에서 행한 영호명의 활약은 이내 패왕문 전체로 전해졌다. 절대적인 신위를 목격한 무사들이 동료들에게 퍼뜨렸던 것이다. 맥이 빠진 팽각이 오후의 훈련을 모두 생략했기에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더욱 빨랐다. 오히려 당사자인 팽각조차 문파내의 주요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는 상황이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 영호명의 신위는 문파 깊숙이 틀어박혀 폐관수련을 하던 누군가의 귀에도 들어갔다. 벽곡단과 식수를 전해주는 무사의 입으로부터 그 사실을 전해들은 누군가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게 정말이냐?" "틀림없는 사실이옵니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폐관을 풀었다. 무려 일 년 가까이 처박혀 있던 폐관수련장을 박차고 나온 것이다. 그 후 그가 찾은 곳은 다름 아닌 접객청. 엄청난 신위를 선보인 영호명과 수련이 머물고 있는 곳이었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시녀가 조심스럽게 걸어와 쭈뼛쭈뼛 말을 걸었다. 연무장에서의 사건 때문인지 시녀의 태도도 한결 조심스럽게 변해 있었다. 영호명이 의아한 듯 눈을 치떴다. "손님? 패왕문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던가?" "현의당의 비사문 당주이십니다." "당주? 그가 나에게 무슨 볼일이... 어쨌거나 들라고 하라." "알겠습니다." 시녀가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나간 뒤 잠시 후 누군가가 들어왔다. 얼굴에 이리저리 흉터가 난 냉막한 얼굴의 중년인이었다. 지금껏 평탄한 삶을 살지 않았다는 듯 전신에서 거친 기세가 흘러나왔다. 영호명은 우선 의자를 권했다. "무슨 일로 왔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앉으시오." 그러나 당주 비사문은 의자에 앉지 않앗다. 그저 영호명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잠시 후 그의 입이 열렸다. "팽각 당주를 단단히 혼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몹시 탁한데다 쇳소리가 섞여 있는 음성이었다. 목에 난 흉터를 보니 성대를 심하게 다친 모양이었다. 영호명은 비사문 당주를 마주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랬었지. 거기에 대한 앙갚음을 하러 오신 거요?"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늘을 몰라본 팽각 당주의 죄이지요. 제가 찾아온 것은 그것을 따지고자 함이 아닙니다." 비사문의 얼굴이 별안간 절박해졌다. "제 나이가 올해로 오십입니다. 열여섯 살 때 도를 잡은 이래로 줄곧 무공에 정진해 왔습니다. 그동안 죽을 고비도 수없이 넘겼고 살육도 무수히 해 보았습니다." 영호명의 표정이 묘해졌다. 기껏 찾아와서 신세타령을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사문은 아랑곳없이 사정을 털어놓았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나날의 연속이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우연히 절정의 경지에 접어들었습니다. 백 명 중 한 명이 겨우 잡을까 말까 한 행운이 저에게 찾아온 것이지요." 비사문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듯 영호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사파 소속 하급 무사들의 생존율은 극히 히박하다. 대부분 방패막이나 화살받이로 최전방에 내몰리는 만큼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경지에 오를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 비사문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절정에 들고 나서야 비로소 무공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진 그저 살기 위해 막연히 도를 휘둘렀던 것이지요. 그러나 무공이란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더욱 난해하더군요. 그리고 저에게 마침내 그것이 찾아왔습니다." 비사문이 말하는 그것은 바로 마의 벽이었다. 사파 무사들에겐 굴레와 같은 벽, 절정에서 초절정으로 넘어가는 길에 버티고 있는 마의 벽은 사파인들에게 그야말로 숙명과도 같았다. 벽을 넘어설 경우 초절정, 즉 사파에서 칭하는 극마의 경지에 접어들 수 있다. 그러나 그 벽은 너무도 탄탄했다. 수많은 사파 무사들이 끝내 그 벽을 넘지 못해 좌절하고 만다. 비사문은 현재 그 마의 벽에 부딫혀 있었다. "벽에 부딫힌 지 어언 칠 년입니다. 그 칠 년 동안 전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필사의 각오로 노력해도 요지부동인 벽입니다." 비사문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영호명을 쳐다보았다. "귀인을 찾아온 것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같은 길을 먼저 걸어가신 선배로서..." 영호명이 조용히 비사문의 말을 끊었다. "가르침을 달라는 것이오?" 예상외로 비사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사승관계도 아닌데 어찌 그것까지 바라겠습니까? 제가 바라는 것은 단지 방향을 좀 제시해 달라는 것뿐입니다. 마의 벽은 막연히 수련에 정진하는 것만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는 벽입니다. 칠 년 동안 수련하며 그 점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말을 마친 비사문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제가 주제넘은 부탁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답답한 나머지 이렇게 귀인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실마리, 단 한 가닥의 실마리만 잡을 수 있다면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영호명이 머리를 끄덕였다. 흘러나오는 말투가 어느새 하대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비사문은 당연하다는듯 받아들였다.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인가?" 비사문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병기를 들고 연무장에서 기다리게. 곧 나가겠네." 비사문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가,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아직까지 감사를 표할 단계는 아냐. 현재로서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지도 미지수라네. 아무튼 한번 봐 주도록 하지." 비사문의 얼굴에는 감격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문주를 비롯한 주력고수들이 모두 사망한 이래 마의 벽을 깨트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그가 아니던가? 마침내 실마리를 제공해 줄 사람을 만난 것이다. 얼마나 마음이 급했는지 비사문은 연무장까지 신법을 발휘해서 달려갔다. 홀로 남은 영호명은 뭔가를 생각하는지 미간을 지그시 좁혔다. 이윽고 그가 수련을 쳐다보았다. "내 도가 어디에 있느냐?" 수련이 두말없이 행랑 옆에 놓인 도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밖으로 나오지 말거라." 수련이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비록 경지가 일천하다 하나 소녀 역시 무인입니다. 꼭 보고 싶습니다." 수련의 완강한 태도에 영호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멀리 떨어져 있도록 해라. 알겠느냐?" "네, 대공." 연무장에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춘 비사문 당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따라온 십여 명의 현의당 무사들이 연무장 가에 앉아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영호명의 신위를 직접 확인하려는 것이다. 도를 움켜쥔 영호명이 연무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을 본 비사문이 품고 있던 도를 뽑아들었다. "일단 제 무공을 펼쳐 보이겠습니다." 영호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자네 문파의 비전무공을 봐서 뭐하겠나. 가볍게 대련이나 한 번 하도록 하지." 말을 마친 영호명은 눈빛을 빛냈다. "수준차이가 있다 보니 위험할 수도 있어. 그러니 수하들에게 단단히 당부해 두게." 비사문이 머뭇거림 없이 휘하 무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대련과정이 다소 위험하다 하더라도 나서지 마라. 알겠는가?" "존명." 현의당 무사들의 복명소리를 들으며 영호명은 도를 뽑아들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지." 이어진 것은 영호명의 선공이었다. 팽각 당주를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태산압정이었다. 바짝 긴장한 비사문이 절묘한 각도로 도를 틀어 막아갔다. 팽각 당주의 말대로 미증유의 힘이 깃들어 있다면 정면으로 받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짓이다. 경로를 틀어 힘을 흘려버려야 한다. 그러나 도에는 아무런 감촉이 전해지지 않았다. 비사문의 눈이 살짝 커졌다. "허, 허초?" 대련에서 허초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직한 대결로 서로간의 실력을 겨루는 것이 대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발의 중년인은 첫 초식부터 허초를 사용했다. 그럼에도 비사문에겐 놀랄 틈이 없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쏘아지는 추가공격 때문이었다. 콰쾅 단 한 번의 격돌로 비사문의 몸이 주르르 뒤로 밀렸다. 최대한 힘을 흘렸음에도 여력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막강한 기세를 뿜어내는 제 이격, 삼격이 연이어 날아왔다. 두 번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낸 비사문의 입가로 선혈이 살짝 내비쳤다. 막강한 경력으로 말미암아 기혈이 역류한 것이다. '가, 강하다고 듣긴 했지만 이, 이건 상식 밖이야...' 감탄하던 비사문의 눈이 커졌다. 상대의 검에서 별안간 도강이 쭉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파파파팟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비사문은 혼신의 진기를 도에 주입해야 했다. 도강을, 그것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초고수의 도강을 막아내려면 자신 역시 강기를 뽑아내야 했다. 콰콰콰콰 강기와 강기가 맞부딪히며 빛 무리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보고 있던 무사들이 급히 고개를 돌려야 할 정도로 강한 섬광이 주위를 가득 메웠다. 연무장에서 벌어지는 접전은 점점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접전이라 표현할 수 없었다. 영호명이 맹공을 가하고 비사문이 간신히 막아내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겨우겨우 공격을 막아나가던 비사문의 눈이 커졌다. 귓전으로 전음이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ㅡ실전을 통해 이 정도 경지까지 오른 게 가상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자리에서 널 제거할 수밖에 없는 날 용서하라. 이어 뿜어진 것은 피부를 저릿저릿하게 하는 살기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라 비사문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입술을 비집고 믿을 수 없다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도, 도대체 왜?" ㅡ너는 모르고 있겠지만 사실 난 정파 무림인이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비사문의 눈빛이 암울해졌다. 상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결론은 뻔햇다. 삭초제근, 될 성싶은 싹의 뿌리를 미연에 잘라내려는 것이 분명했다. 비사문의 내심을 알아차린듯 전음은 계속 들려왔다. ㅡ네가 마의 벽을 돌파할 경우 수많은 정파의 후지기수들이 네 손에 의해 죽어가겠지?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난 지금 이 자리에서 널 죽일 생각이다. 전음이 끝나는 순간 상대의 공격이 일변했다. 하나하나가 살초가 아닌 것이 없었다. 비사문은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지닌 무위를 십 할 이상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자신보다 월등히 높은 경지에 오른 고수. 비사문의 몸에 잇달아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푸슛 푸슛 옷이 갈라지며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치명적인 공격이 계속해서 펼쳐졌기에 비사문은 삽시간에 혈인이 되어버렸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듯 종횡무진 도를 휘두르던 비사문이 치를 떨었다. 정파의 끄나풀에게 멋도 모르고 가르침을 청하다니... 말 그대로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통을 집어넣은 형국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는 수하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정파의 끄나풀이니 일제히 공격하라고 말이다. 그러나 상대는 그럴 만한 틈을 전혀 주지 않았다. 중년인의 공격은 시간이 갈수록 매서워졌다. 비사문은 급격히 힘을 소진하고 있었다. 도에 서린 강기도 더이상 빛나지 않았다. 진기가 완전히 고갈된 것이다. 그러나 비사문이 눈치 채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도강이 흐릿해졌으니 의당 도가 부서져 나가야 정상인데 비사문의 도는 멀쩡했다. 영호명이 의도적으로 강기를 가감하고 있음이었다. 그러나 겉보기에 둘의 접전은 더없이 치열했다. 그쯤 되자 관전하던 현의당 무사들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뿜어지는 살기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뭔가 이상이 있어." "막아야 해." 그러나 그들의 몸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영호명이 기세를 발산하여 무사들이 옴짝달싹 못하도록 옭아맸기 때문이었다. 엉거주춤 멈춰 서서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는 수하들을 본 비사문의 낯빛이 암울해졌다. 더 이상은 버틸 힘이 없었다. 서걱 옆구리가 길게 갈라지며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비사문은 그야말로 무의식적으로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눈에 체념의 빛이 서렸다. '여기서 내가 죽는구나.' 몸 상태를 볼 때 앞으로 두세 합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 틀림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상대의 공격이 느닷없이 느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왜 이렇게 느리게 보이는 거지?' 더없이 빠르고 위력적으로 몰아치던 도의 움직임이 지금은 눈에 훤하게 들어왔다. 지금까지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공격이었지만 이제는 충분히 피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완전히 소진되어버린 체력이었다. 머리는 피할 수 있다고 판단하건만 몸이 따라주지 못하는 것이다. 심장 부위를 정확히 파고드는 도를 노려보던 비사문은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피하려고 해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끝인가?' 그런데 도의 궤적이 기괴하게 틀어졌다. 충분히 심장을 파고들 수 있었던 도가 방향을 바꾸더니 어깨살을 한 움큼 뜯어내고 지나갔다. 그러나 비사문에겐 그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약간이나마 비축된 힘을 사용해서 상대의 다음 공격을 막아내야 했으니까. 접전은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더없이 치명적이던 일격이 도중에 경로를 틀어 상처만 내고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면서 비사문의 머릿속에는 뭔가 희미한 형상이 떠올랐다. 주위의 모든 것이 느려지면서 마침내 자신을 관조할 수 있게 된것이다. 거의 한계에 가깝게 몸을 움직이면서 비사문은 생각하고 생각했다. '도대체 뭐지?' 형상이 뚜렷해지는 순간 비사문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동시에 비사문은 분수같은 선혈을 토해냈다. 푸우우 그것을 끝으로 비사문의 몸이 맥없이 바닥에 허물어졌다. "당주님." 기세에 제압당해 움직이지 못하던 무사들이 비통하게 고함을 질렀다. 몇몇 무사들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영호명을 노려보는 무사들의 눈빛에는 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서린 감정은 분노에서 경악으로 급격히 변해갔다. 맥없이 널브러진 비사문의 몸이 허공에 떠오르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얼이 빠진 무사들의 귀로 묵작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지금부터 절대 정숙을 유지해야 한다. 너희들은 지금 당주가 마의 벽을 돌파하는 장면을 보고 있다." 무사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은 평생 가야 한번 본다고 장담할 수 없는 귀한 장면이었다. 비사문의 몸은 완전히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이어 뼈가 어긋나는 음향이 울려 퍼졌다. 우두두둑 이어 고약한 냄새가 사방을 진동했다. 몸속에 남아있던 나쁜 기운들이 배출되는 것이다. 비사문이 걸친 옷은 삽시간에 시커멓게 물들어버렸다. 검은 땀은 옷을 적시는 것도 모자라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우두둑거리는 기성은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잠시 후 소리가 그치고 비사문의 몸에서 강렬한 기파가 발산되었다. 얼마나 강했던지 몸에 걸친 옷이 갈가리 찢겨나갔다. "어맛." 멍하니 지켜보던 수련이 급히 눈을 가렸다. 벌거벗은 사내의 알몸이 드러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무사들의 반응은 딴판이었다. 하나같이 눈을 크게 뜨고, 혹은 침을 질질 흘리며 직속상관이 환골탈태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사문의 환골탈태는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내공이 정순하지 못하다보니 환골탈태하는 시간도 길었다. 이윽고 환골탈태를 마친 비사문의 몸이 서서히 하강했다. 털썩 지켜보던 무사들 역시 그 자리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전신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들의 귓전으로 영호명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이제 끝났다. 당주를 데리고 가서 씻겨라. 꼬박 하루 정도는 잘 테니 감안하도록 하고..." 영호명을 쳐다보는 무사들의 눈에는 경이의 빛이 서려 있었다. 무려 칠년 동안이나 마의 벽에 봉착해 있던 자신들의 당주를 일순간에 환골탈태시켰으니 존경의 염을 보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표출할 만한 시간이 없었다. 무사들이 분분히 달려들어 비사문을 들쳐 업었다. "일단 당주님의 처소로 모셔야 해." "냄새 정말 고약하군. 일단 씻겨야 하는데 시녀를 부를까?" "남자끼린데 뭐 어때? 그냥 우리가 씻기자." 현의당 무사들이 허둥대며 비사문을 업고 사라졌다. 그 모습을 영호명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왜 너에게 가르침을 내려 준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그동안 내 손에 의해 죽어간 사파 무사들의 목숨값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젊은 시절의 혈기로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사파 무사들을 살상한 것이 지금 와서 무척 후회되는구나."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내저은 영호명은 휘적휘적 걸어 수련에게로 갔다. 수련은 마치 인간이 아닌 존재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만 들어가자꾸나. 몸을 움직였더니 밥 생각이 간절하다." 수련이 얼이 빠진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과연 자신이 모시는 상공이 인간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녀에겐 실로 중요한 명제가 아닐 수 없었다. 뜻밖의 변고로 인해 패왕문은 발칵 뒤집혔다. 무려 칠 년 동안 폐관수련장에 처박혀 있던 당주 비사문이 마침내 마의 벽을 깨고 극마의 경지에 접어든 것이다. 그것이 문주의 손님에 의해 행해졌다는 사살이 퍼지면서 패왕문 전체가 술렁이고 있었다. 울화병으로 몸져누워 있던 풍소정의 눈동자는 경악으로 크게 뜨여 있었다. "그, 그게 사실인가요?" 그녀의 앞에는 철혈당주인 팽각이 들뜬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현의당의 무사들이 똑똑히 목격했다고 합니다. 비사문 당주가 마의 벽을 무너뜨리고 환골탈태하는 모습을 말입니다." "세, 세상에..." 맥이 풀렸는지 풍소정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부분의 패왕문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치부했던 일이었다. 마의 벽을 뚫는 것은 그 정도로 지난한 일이었다. 이끌어줄 고수가 전무한 상황이라 가능성이 희박했는데 뜻밖의 변고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풍소정의 낯빛은 그리 밝지 않았다. '내 입장에서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냐.' 만약 비사문이 자력으로 벽을 깨뜨렸다면 정말로 기뻐해야 할 일이다. 그는 패왕문에 대한 충성심이 비교적 굳건한 무사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면 지금보다는 사정이 월등히 나아질 것이다. 초절정고수 한 명이 문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풍소정이었다. 문제는 그가 외인의 도움을 받아 극마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마도 문파에서 자라난 탓인지 풍소정은 사파 무사들의 생리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비사문 당주는 패왕문에 남지 않을 가능성이 커. 백발 중년인을 따라 나설 것이 불을 보듯 뻔해.' 사파 무사들의 생리를 떠올리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백발 중년인은 비사문에게 그 정도로 큰 은혜를 입혔다. 마의 벽을 허물어뜨릴 수 있게 가르침을 준 것은 정말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풍소정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곤란하군. 정말 곤란해." 불현듯 백발 중년인을 떠올렸다. 도대체 그런 초고수가 어디 숨어 있다가 나왔단 말인가. 그녀의 시선이 팽각에게로 향했다. 물론 그녀는 팽각이 백발 중년인에게 단단히 혼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와 겨뤄봤다고 들었어요." 팽각이 급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겨룬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분께서 저에게 교훈을 내리신 것이지요." "..." "그분은 한 마디로 하늘이셨습니다. 저는 그분과 감히 병기를 맞대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한한 영광을 느낍니다." 잔뜩 들뜬 팽각의 얼굴을 보며 풍소정은 기가 차는 것을 느꼈다. 우직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단순할 줄은 몰랐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자신을 가지고 논 자에게 이런 경외심이라니... 그러나 이어지는 팽각의 말에 풍소정은 마치 찬물을 뒤집어 쓴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파 무사들을 지배하는 것은 엄연히 힘의 논리. 그분은 제가 감히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무공이 뛰어나십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능히 존경받을 수 있는 분이지요." 팽각이 정색을 하며 풍소정을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뭐가 말이예요?" "이대로 간다면 패왕문은 유명무실한 방파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속하의 미력한 생각이지만 새로운 경지에 접어든 비사문 당주는 십중팔구 패왕문에 남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신도 익히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풍소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주님은 모르시겠지만 다른 당주들의 불만이 대단합니다. 고작 일류도 되지 않는 문주님이 위에 버티고 있다고 말입니다." 우직한 성격답게 팽각의 화술은 다분히 직선적이었다. 아픈 부분을 정면으로 꼬집고 나서니 말이다. 풍소정이 발끈해서 대들었다. "저도 열심히 수련하고 있어요. 하지만 좀처럼 무공이 늘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해요?" "제 예상으로 문주님이 절정의 경지에 오르려면 최소한 이십년이 걸릴 것입니다. 과연 그동안 패왕문이 존속할 수 있을까요?" 팽각의 말에 풍소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당장 일 년도 버티기 힘든 판국인데 이십 년이라니... "그러나 방법은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에 풍소정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팽각이 얼굴을 잔뜩 굳힌 채 풍소정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분을 패왕문으로 끌어들이십시오." "누구 말인가요?" "절 패배시키신 분, 그리고 비사문 당주에게 깨달음을 주어 마의 벽을 깨뜨리게 하신 분 말입니다." 풍소정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크게 뜨여졌다. "그, 그 정도의 초고수가 도대체 뭐가 모자라서 패왕문에 들어온단 말이예요. 게다가 현의당 무사들의 말을 들어보니 출신이 정파일지도 모르는데..." "힘들어도 영입해야 합니다. 본문을 정상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것밖에 없습니다." 팽각의 음성은 결연했다. "그분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본문을 정상화시키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오히려 잠마련을 누르고 잃었던 마도의 종가 자리를 되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하, 하지만 가능성이 희박..." 팽각이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은 가능성 따위를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본문의 존폐가 걸려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방법이..." 팽각이 정색하며 또박또박 내뱉었다. "그분과 혼인을 하십시오. 그런 다음 그분을 전면에 내세운다면 본문의 미래는 극히 밝을 것입니다. 다행히 문주님의 미모는 어디에 내놔도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춘약이라도 사용해서..." 풍소정이 발끈해서 팽각의 말을 끊었다. "도대체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요? 팽 당주님은 지금 저에게 엄청난 무례를 저지르고 있어요!" 그때서야 실책을 알아차린 팽각이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해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 종류의 말이었다. 풍소정이 좀처럼 분을 참지 못하고 씨근거렸다. "금방 그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어요. 혼자 있고 싶으니 그만 나가보세요." "죄, 죄송합니다, 문주님." 주뼛주뼛 눈치를 보던 팽각이 조심스럽게 집무실을 나섰다. 홀로 남겨진 풍소정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는 팽각의 제안을 다시 한 번 곱씹어보고 있었다. '그 방법이 가장 좋기는 하지만 가능성이 너무 희박해. 그가 뭐가 모자라서 패왕문을 택하겠어? 게다가 난 이미 혼기도 한참 넘긴 노처녀잖아?' 그녀의 머릿속은 매우 복잡했다. 당주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큰일들이 연달아 터지니 도저히 정신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역시 난 문주 체질이 아냐. 어려운 일에 봉착하니 도저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는걸?" 이미 밤이 깊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기에 풍소정은 창가로 걸어갔다.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풍소정의 눈동자에 의혹의 빛이 일었다. "언제 창문을 열어놓은 거지? 그런 기억이 없는데?" 그녀는 무심히 창문을 닫으려 했다. 그때 뜨끔 하는 느낌과 함께 몸이 굳어졌다. 깜짝 놀란 그녀는 비명을 지르려 했다. 그러나 아혈도 함께 제압당했는지 비명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놀란 그녀의 시야에 시커먼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 자객?' 나타난 인형은 전형적인 살수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시커먼 야행의에 복면을 보니 틀림없었다.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흰자위가 유난히 번들거리는 것을 보니 수도 없이 사람을 죽여 본 살수가 분명했다. 풍소정은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상황을 보니 자신을 죽이려 온 것이 분명했다. 살수는 풍소정에게 곧바로 손을 쓰지 않았다. 그저 마혈만 제압해 놓고 실내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따금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보아 뭔가 상황을 연출하려는 것 같았다. 풍소정은 마혈이 제압당한 채 그 광경을 멀뚱멀뚱 쳐다봐야 했다. 이윽고 결정을 내린 듯 살수는 풍소정을 집무실의 가운데 있는 탁자로 데리고 갔다. 마치 물건을 옮기는 것처럼 목덜미를 움켜쥐고 질질 끌고 갔다. 살수는 풍소정을 강제로 의자에 앉힌 뒤 몸의 각도를 조절했다. 몸을 창문 쪽으로 돌리는 것으로 보아 창 밖에서 날아온 암기에 맞아 죽은 것처럼 위장하려는 것 같았다. 더없이 아름다운 풍소정의 몸을 주물럭거리면서도 살수의 눈동자엔 아무런 감정 변화가 없었다. 어느새 풍소정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싫어, 이대로 죽기 싫어. 시집도 가지 못한 처녀귀신이 되긴 정말 싫어.' 그러나 그녀의 절규는 소리 없이 속으로 사그라질 뿐이었다. 완벽하게 상황을 만들어낸 살수가 길쭉한 화살을 꺼냈다. 그런다음 품속에서 거무튀튀한 자기병을 꺼내 화살촉을 담았다. 자기병 속에 들어갔다 나온 화살촉은 시퍼런 빛을 띠고 있었다. 척 보아도 알 수 있는 극독이었다. 살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앗다. 그저 기계적으로 제 할 일만 하는 모습이 풍소정에겐 극도의 공포를 안겨주었다. 준비를 마친 살수가 풍소정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럼 잘 가거라." 말을 마친 살수가 화살을 들어 풍소정의 목울대를 겨냥했다. 마혈이 제압당했기에 풍소정은 멍하니 눈을 뜬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야밤에 등장한 살수의 정체는 바로 엽초였다. 패왕문의 문주를 몰래 암살한 뒤 잠마련에 충성을 맹세한 당주들을 내세워 패왕문으로 하여금 당문을 치게 하려는 것이다.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본 엽초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겉으로 보기에 패왕문 문주는 탁자에서 차를 마시다 창 밖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절명한 것으로 결과가 나올 것이다. 화살촉에 당문에서 사용하는 독이 발라져 있으니 패왕문은 금세 혼란에 빠질 터. 그때 당주들이 나서서 바람을 잡는다면 분노한 무사들은 당장 당문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임무가 말끔히 완수되는 것이지. 흐흐흐' 생각을 접어 넣은 엽초는 화살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인근 야산에서 활을 쏜 것으로 위장하려면 화살이 패왕문주의 목을 완전히 관통해야 한다. 그에 맞게 내공을 가감한 그는 화살대를 움켜쥐고 패왕문주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예상대로 상대는 극도의 공포로 인해 동공이 활짝 열려 있었다. 곧 죽을 희생자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것은 엽초의 오랜 취미 중 하나였다. 차갑게 살소를 지은 엽초는 화살촉으로 희생자의 목을 힘껏 찔렀다. '이로써 임무가 끝난 건가...헉!'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엽초가 돌연 혼비백산했다. 손에 쥐고 있던 화살대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사라진 화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황당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엽초의 귀로 나지막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이걸 찾고 있는 건가?' 퍼뜩 고개를 돌린 엽초의 눈빛이 암울해졌다. 사라진 화살을 들고 천연덕스럽게 서 있는 자는 당주들의 무공을 폐지한 바로 그 백발 중년인이었다. 그가 마치 그 자리에 저절로 생겨난 것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은밀한 기척이 느껴져서 와 봤더니 살수였군. 간도 크게 일문의 문주를 암살하려 하다니..." 말을 마친 영호명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일단 살수를 제압하려는 의도였다. 순간 엽초의 얼굴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어금니에 심어놓은 독단을 깨문 것이다. 입술을 비집고 시커먼 피가 주르르 흘러나왔다. 엽초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중년인에게 들켰으니 패왕문주를 암살하는 것은 수포로 돌아갔다. 임무를 실패한 것이라 잠마련으로 돌아가 봐야 엄중한 처벌만을 받을 것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중년인의 손을 벗어날 자신이 없었다. 사로잡힐 경우 패왕문도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을 것이 확실했기 때문에 그의 입장으로는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나았다. 그것이 바로 엽초가 머뭇거림 없이 독단을 깨문 이유였다. 게다가 상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초고수. 어차피 엽초에게 선택의 폭은 없었다. 맥없이 그 자리에 허물어지는 살수를 보며 영호명은 혀를 찼다. "아무래도 중원을 너무 오래 떠나있었나 보군. 먼저 제압해놓고 심문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호명이 손을 내저었다. 의자에 앉은 채 굳어 있던 풍소정의 마혈이 풀렸다. 거리를 격해 혈도를 점하거나 푸는 고도의 수법이 발휘된 것이다. 맥이 빠진 풍소정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죽음의 공포를 겪은 탓인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몸을 날렸다. 그녀가 뛰어든 곳은 다름 아닌 영호명의 품이었다. 그녀에겐 세상에서 가장 듬직하고 안전한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헝. 어허헝." 품에 꼭 안긴 채 서럽게 오열하는 풍소정을 보며 영호명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허 참, 살수 때문에 무서웠던 것은 이해하겠는데?" 눈물 때문에 앞섶이 뜨겁게 젖어들었다. 풍소정은 그야말로 펑펑 울고 있었다. 그동안 쌓인 울분을 모조리 풀어내려는 듯. 영호명에겐 한없이 난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문주의 집무실에서 일어난 난리로 인해 무사들이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영호명이 다급히 풍소정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문주, 이만 진정하시오. 수하들이 들어오고 있소." 그러나 풍소정은 요지부동이었다. 영호명의 품속에 고개를 파묻은 채 마냥 흐느끼고만 있었다. 그러는 사이 호위무사들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문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들어온 무사들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모시던 문주가 백발 중년인의 품속에 안긴 채 마구 울고 있었고 방 한쪽에는 살수로 보이는 시신이 널브러진 채 역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기에 무사들은 데굴데굴 눈알만 굴렸다. 그러나 다행히 그들 중에 눈치 빠른 자가 하나 있었다. 호위무사 하나가 재빨리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일단 시체를 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동료들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 무사가 시신을 향해 다가갔다. "모두 조심해. 독을 삼키고 죽었으니 말이야." 무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시신을 떠메고 나갔다. 눈치 빠른 무사는 문까지 닫아주는 재치를 선보였다. "자, 잠깐만..." 영호명이 그들을 불렀지만 무사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풍소정은 여전히 영호명의 품에 고개를 묻은 채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허 참, 이 일을 어떻게 하지?" 당면한 상황이 고약하다는 듯 영호명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현경에 오른 무공실력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은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었다. 결국 영호명은 패왕문주의 전각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잔뜩 겁에 질린 풍소정이 영호명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과년한 처자와 밤을 보낼 순 없는 노릇. 어쩔수 없이 영호명은 수련을 불렀다. "일단 수련과 함께 자도록 하시오. 본인은 바로 옆방에서 대기하도록 하리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달려오겠소." "그, 그래도 무서워요. 귀, 귀인께서 잠드신 틈을 타서 살수가 오면 어떻게 해요?" 영호명은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풍소정을 달랬다. "걱정 마시오. 내 감각을 속이고 숨어들 만한 살수는 중원에 없소. 그리고 본인은 거의 잠을 자지 않소. 옆방에서 운기행공을 하고 있을 테니 이만 날 놔 주시오." 보고 있던 수련이 옆에서 거들었다. "걱정 말고 천녀와 함께 자요. 상공이 옆방에 계신다면 저승사자조차 접근하지 못할 거예요." 풍소정은 그때서야 영호명의 옷깃을 놔 주었다. 영호명의 얼굴에 십 년 감수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가 입고 있던 옷은 풍소정의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 상태로 영호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빌어먹을, 차라리 대군을 상대로 한바탕 싸우는 것이 낫지.' 여전히 벌벌 떠는 풍소정을 수련이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걱정 마세요. 이제 살수는 안 올 거예요." "너, 너무 무서웠어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호명이 몸을 일으켰다. "그럼 본인은 옆방에 가 있겠소. 옷도 갈아입어야 할 것 같고." 풍소정이 잔뜩 겁에 질린 음성으로 재차 확인을 했다. "여, 옆방에 계, 계실 거죠?" "틀림없이 대기하고 있을 테니 안심하시오." 영호명이 질렸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을 나섰다. 파들파들 떨면서도 풍소정의 시선은 영호명을 떠날 줄을 몰랐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풍소정은 이성을 되찾았다. 옆에서 계속 말을 걸어주고 등을 토닥여 준 수련 덕이었다. 그녀가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입매를 쫑긋거렸다. "아까는 정말 무서웠어요." "걱정 마세요. 이젠 그런 일이 없을 거예요." 정신을 차린 풍소정이 수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가 보기에도 수련은 대단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청초함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미녀였다. "귀인을 모신 지 오래 되셨나요?" "얼마 되지 않았어요. 겨우 한 달 정도 되었나요?" 그 말에 풍소정은 혀를 내둘렀다. 각별한 사이를 봐서 오랫동안 모셔왔다고 어림짐작하고 있던 그녀였다. '틀림없이 몸을 섞은 사이일 거야. 그러니 그토록 거리낌 없이 포옹할 수 있지' 포옹이라는 말을 떠올리자 돌연 얼굴이 붉어졌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생각하지 못했지만 정신을 차리니 부끄러움이 밀려온 것이다. 외간남자의 품에 안겼으니 얼굴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묘한 여심이 발동되고 있었다. '그래도 그의 품은 너무나 포근했어. 떠나가기 싫을 정도로 아늑했으니까.' 야릇한 생각을 하며 또다시 얼굴을 붉히는 풍소정이었다. '일단 그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야 할 것 같아.' 마음을 정리한 풍소정은 수련을 쳐다보았다. 바로 옆에서 모시는 시녀인 만큼 아는 것이 많을 터였다.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잠시 머뭇거리던 수련이 이름을 말해주었다. 풍소정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예쁜 이름이군요.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되죠?" "올해로 정확히 스물이랍니다." "정말 꽃다운 나이로군요. 정말 부러워요." "아니에요. 문주님도 그다지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는걸요?" 수련의 위로에 풍소정은 쓸쓸히 미소 지었다. "혼기가 지난 지 오래예요. 시집을 갈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고요." 별안간 감정이 고조되는 풍소정이었다. 그녀는 무심이 자신의 신세를 수련에게 털어놓았다. 갑작스런 가족들의 죽음으로 인해 패왕문주 자리를 떠안게 되었고, 이후 엄청난 마음고생을 해왔던 사연들이 설명되었다. 여인의 인생 치고는 기구했기에 수련은 연신 감탄사를 토해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정말 힘들었겠어요?" "많이 힘들었지요. 견디기 힘들 만큼..." 두 여인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대화가 오감에 따라 그녀들의 사이는 점점 친밀해졌다. 소정의 이야기를 듣고 난 수련이 자신의 사연을 하나둘씩 털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두 여인은 사연을 털어놓으며 서로 위로하고 또한 걱정해 주었다. 대화를 나누다 말고 풍소정이 묘한 눈빛으로 수련을 쳐다보았다. "이제부터 수련이라고 불러도 되나?" 수련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한낱 시녀 신분인걸요?" "좋아. 그럼 이제부터 날 언니로 부르렴." 수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될 말이예요. 일문의 문주이신데 한낱 시녀가 어찌?" "널 내 동생으로 맞으면 되지 않니? 나에겐 여동생이 없었어. 말썽꾸러기 남동생만 둘 있었지. 그나마 그들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단다." "그, 그래도 어찌 그럴 수가..." 풍소정이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수련을 쳐다보았다. "나에겐 너처럼 예쁜 여동생을 가질 자격이 없는 거니?" "그, 그런 말이 아니라..." "그렇다면 날 언니라고 불러보렴. 너무도 듣고 싶구나." 고개를 푹 수그린 수련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을 흘려냈다. "어, 언니." 풍소정이 활짝 웃으며 수련을 와락 껴안았다. "정말 고마워. 나에게 이런 예쁜 동생이 생기다니..." "언니도 예쁜걸요." 소정의 호의에 감동했는지 수련의 눈동자가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수련을 껴안은 풍소정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고로 장수를 잡으려면 먼저 말을 쏴야 한다고 했어. 일단 이 아이를 내 편으로 포섭해야 해. 그런데 언니라는 말을 들으니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음모가 모락모락 자라나는 밤이었다. *****지존, 날개를 달다***** 우여곡절 끝에 날이 밝았다. 패왕문주 풍소정의 불길한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비사문 당주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문주의 처소를 찾은 것이다. 비사문의 외모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단 하루 사이에 판이하게 변했는데 도저히 오십대로 보이지 않았다. 물론 환골탈태를 했다고 해서 미남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원판 그자체가 그리 잘 생겼다고 볼 수 없는 외모였기 때문이다. 가늘게 쭉 찢어진 눈매에 메부리코, 잔혹한 성품을 드러내는 얇은 입술은 그대로였다. 단지 얼굴을 빽빽이 뒤덮고 있던 흉터가 말끔히 사라졌고 피부가 깨끗해진 것뿐이었다. 비사문 당주를 달라보이게 하는 것은 판이하게 변한 기세였다. 지금껏 비사문 당주에게서는 더없이 거칠고 난폭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평생 생사의 혈투를 치르며 살아온 터라 어쩔 수 없이 각인된 기세였다. 그랬던 기세가 많이 순화되어 있었다. 풍소정은 침을 꿀꺽 삼키며 비사문 당주를 쳐다보았다. '기세가 변하니 사람이 달라 보이는군.' 살짝 고개를 끄덕인 풍소정은 입을 열엇다. "일단 대성을 축하드려요, 비사문 당주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절 찾았지요?" 비사문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영호명이 한가롭게 앉아 비사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큰 성취를 이룬 제자를 보는 듯한 자애로운 시선이었다. 뭔가를 결심한 듯 비사문의 안색이 경직되었다. "문주님." 그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풍소정에게 부복했다. 뜻밖의 태도에 풍소정은 깜짝 놀랐다. 지금껏 당주들 중 그 누구도 자신에게 부복한 적이 없다. 하물며 당주들 중 가장 무공이 강한 비사문 당주가 자신에게 부복을 하다니... 그의 입술을 비집고 침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문주님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순간 풍소정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음에 이어질 말을 예상한 탓이다. "마, 말씀해 보세요." "저를 풀어주십시오." "..." "더 이상 패왕문 소속으로 남아있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상했던 탓에 풍소정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예감이 현실로 닥친 것이다. 각오했던 일이기에 그녀는 별달리 놀라지 않았다. 도리어 놀란 것은 영호명이었다. 기껏 가르침을 주어 마의 벽을 깨뜨리게 해 줬는데 무엇 때문에 패왕문을 떠난단 말인가. 어안이 벙벙해진 영호명과는 달리 풍소정은 비교적 침착하게 대응했다. "재고해 보실 수는 없나요?" 비사문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이미 제 마음은 패왕문을 떠난 상태입니다. 원하신다면 팔 하나를 내어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비사문이 품고 있던 도를 뽑아들었다. 시퍼런 칼날이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햇볕을 받아 날카롭게 빛났다. 망설임 없이 도를 왼쪽 어깻죽지에 대는 비사문을 보며 풍소정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비사문 당주의 청을 받아들이겠어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대신 당주님의 팔은 받지 않겠어요. 왼팔이라도 무인에게 무척 중요한 법, 지금 이 시간부터 비사문은 패왕문의 식솔이 아님을 문주의 권한으로 공헌합니다." 평소답지 않은 의연하고 침착한 대응이었다. '놀랍군.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줄 알았건만...' 흔들리던 눈빛으로 풍소정을 쳐다보던 비사문이 바닥에 살짝 머리를 박았다. 쿵 지금껏 몸담앗던 문파의 문주에게 보내는 마지막 예의였다. 몸을 일으킨 비사문이 걸어간 곳은 영호명이 앉아 있는 곳이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영호명에게 다가간 비사문은 머뭇거림 없이 오체투지를 했다. "지존을 뵙습니다." 놀란 것은 영호명이었다. 비사문에게 가르침을 주어 마의 벽을 깨뜨린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몸담고 있던 문파를 버렸다. 그런 다음 자신에게 와서 오체투지를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게다가 지존이라니... "이게 무슨 뜻인가?" 비사문이 머리를 바닥에 박은 채 대답했다. "지존께서는 저에게 실로 표현하기 힘든 은혜를 주셨나이다. 머리카락을 풀어 신을 삼아도 모자랄 것이며 미천한 목숨을 송두리째 바쳐도 갚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지존께 드릴 수 있는 것은 고작 저의 목숨과 한 자루의 도뿐입니다. 턱없이 모자라지만 이것이라도 받아주십시오." 어처구니가 없어진 영호명이 실소를 지었다. "그 이유 때문에 패왕문을 탈퇴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무인에게 두 명의 지존이 있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평생 지존의 손과 발이 되어..." 영호명이 싸늘한 어조로 비사문의 말을 잘랐다. "나는 그대에게 뭔가를 바라고 깨달음을 준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던 그대의 처지가 안타까워, 그리고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묵은 빛을 풀고자 그랬던 것이지. 그대는 나를 치졸한 소인배로 만들려 하는가?" "어떻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 한 목숨 지존께 바치고자 하는 마음은 변하지 많을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군." 영호명이 성난 기색으로 몸을 일으켰다. 사파 무사들의 저 단순하고 우직한 태도는 도무지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그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원래대로 패왕문에..." "저는 이미 패왕문을 탈퇴한 몸입니다." 살짝 몸을 일으킨 비사문이 간절한 눈빛으로 영호명을 쳐다보았다. "지존께서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제가 택할 길은 오로지 한 가지뿐입니다." 말을 마친 비사문이 바닥에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전혀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비사문의 이마가 벌겋게 부어오르더니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바닥에 깔린 청석이 금세 새빨갛게 물들었다. 영호명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파 무사들의 사고방식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군.' 묵묵히 보고 있던 영호명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만."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비사문이 동작을 멈췄다. 이미 그의 이마는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시간을 줄 수 있겠나?" "..." "지금 이 자리에서 가부를 결정할 수는 없네. 생각을 좀 한 뒤 그대를 거둘 것인가를 결정하겠네." 비사문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생각을 해 본다는 것은 자신을 거둘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속하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습니다." "알겠네. 일단 물러가서 이마의 상처를 치료하도록 하게." "존명." 소리 높여 복명한 비사문이 무릎걸음으로 물러갔다. 풍소정은 익히 예상했다는 듯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사파 무사들의 생리에 익숙한 그녀에겐 그리 놀라운 장면이 아니었던 것이다. 방으로 들어간 영호명이 머리를 싸맸다. "뭐 이렇게 단순한 작자들이 다 있지?" 물론 영호명이 베푼 은혜가 결코 평범하다고는 볼 수 없다. 막혀 있는 벽을 깨뜨릴 수 있도록 깨달음을 준 것은 평생을 두고 갚아도 모자랄 정도의 은혜였다. 그래도 몸담고 있던 문파를 버리고 새로운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도가 지나쳤다. "초절정의 벽을 넘는 것이 정파 무사들에 비해 몇 배나 어렵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해." 고민에 잠겨 있는 영호명의 귀에 사박사박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영호명은 고개도 들지 않고 입을 열었다. "수련이냐?"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영호명의 눈이 살짝 커졌다. 다가온 이는 수련이 아니라 패왕문주 풍소정이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두 손으로 공손히 찻상을 받쳐 들고 있었다. 시녀가 해야 할 일을 그녀가 직접 하고 있는 것이었다. "문주께서 왜?" "그냥 은공과 차 한 잔 하고 싶어서 왔어요. 혹시 방해가 되진 않았나요?" "아니오. 안 그래도 차 생각이 간절하던 참이오." 목이 타던 참이라 영호명은 찻잔을 받아들였다. "문주에게 미안하구려. 그럴 의도로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풍소정이 방긋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알고 있어요. 은공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비사문 당주가 무척 원망스럽겠구려?" "이해해요. 그런 상황에 봉착하면 대부분의 무사들이 동일한 결정을 했을 테니까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풍소정이 영호명을 올려다보았다. "은공께 한 가지 청이 있어요." "무슨 부탁이오? 말해보시오." 풍소정은 가만히 품속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었다. "오래 전 저희 패왕문의 조사께서 우연히 얻으신 비급이에요. 뭔가 깨달음을 적어놓은 것 같은데 너무 난해해서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은공의 경지라면 알아보실 것 같아 가져왔어요." 영호명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 그런 것을 어찌 외인인 나에게..." "어차피 신외지물이에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니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지요. 은공께서 살짝 읽어보시고 내키신다면 가르침을 주세요. 물론 주시지 않아도 괜찮답니다." 고민하던 영호명이 책자를 받아들었다. 무공이라면 밥 먹는것보다 좋아하는 영호명이 아니던가? 아무도 해독하지 못한 비급이라는 말에 구미가 당겼다. "그러시다면 한번 살펴보도록 하리다." 책자를 받아든 영호명이 표지를 넘겼다. 풍소정의 말대로 책자에는 누군가의 심득이 적혀 있었다. 극도로 함축되고 축약된 언어로 표현되어 있었기에 영호명도 미간을 살짝 좁혀야 했다. 그러나 그가 대관절 누구인가? 현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가 아니던가?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자가 서술한 것 같군. 그것도 거의 극에 이른 자야. 아무래도 도법의 극의 같은데?' 책장을 넘기는 영호명을 풍소정은 침을 삼키며 쳐다보았다. 사실 그녀가 넘긴 책자는 패왕문 대대로 전해지는 비급이엇다. 문주가 아니면 볼 수 없는데다 비급의 존재 자체가 철저히 숨겨져 있었다. 비급은 패왕문의 8대 문주가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역대 패왕문주들 중 가장 높은 경지에 올랐다고 평가되는 이였다. 책자에는 8대 문주가 죽기 직전에 깨달은 심득이 담겨져 있다. 그런 만큼 지금껏 책자의 내용을 이해하는 자가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다. 지금 그녀는 비급을 걸고 엄청난 도박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나에게 선택은 없어.' 오랜 고민 끝에 비급을 꺼내왔던 풍소정이 아니던가? 문파가 건곤일척의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면 풍소정은 결코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풍소정에게는 오직 혼자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문주 직계가족만이 알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패왕문의 비전무공이 숨겨져 있는 비고의 위치가 바로 그것이었다. 어린시절 풍소정은 아버지로부터 비고의 위치를 들은 바 있었다. '비고의 위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외부로 유출되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장로들에게도 지켜야 하는 비밀이다.' 이후 그녀의 가족들은 의문의 습격으로 인해 몰살되었다. 그 탓에 패왕문에서 비고의 위치를 아는 이는 오로지 풍소정 밖에 없었다. 문주 자리에 오른 뒤 풍소정은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만약 그 사실을 당주들이 알게 된다면 목숨이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믿고 의지하는 장로들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견물생심이라고 장로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딴 마음을 먹을 수도 있었다. 장로들에게 무공을 전수받으며 풍소정은 틈틈이 비고에 드나들었다. 무공을 진전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일천한 무공경지로 비급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비급을 통해 수련하는 것은 스승에게서 무공을 전수받는 것보다 수십 배 이상 어려운 법. 그 때문에 풍소정은 한동안 비고에 출입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녀가 금기마저 깨며 비고의 비급을 가지고 나온 것이다. 비급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영호명을 쳐다보며 풍소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것은 패왕문의 운명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모든 것이 걸려 있는 도박이었다. 비급을 다 읽은 영호명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풍소정은 가슴을 졸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영호명이 눈을 떴다. "애석하지만 전해줄 만한 것이 없구려. 심득 자체가 완전하지 않아서 그렇소. 아무래도 이 책의 저자는 심득을 완성하지 못하고 천수를 다한 것 같소. 이것을 완성하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것 같소." 풍소정은 적이 놀라고 말았다. 영호명의 말이 무척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은공께서 비급을 저술하신 8대 조상님보다 무위가 높다는 말인가?' 몹시 놀랐지만 그녀는 심중의 격동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은공께서 완성시킬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시간을 두고 정진하면 가능할 것 같기는 하오. 저자가 익혔던 도법의 원류를 모르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것이오." 풍소정이 두말없이 품속에서 비급 하나를 더 꺼내 내밀었다. "그분께서 익혔던 도법의 원류입니다." 영호명은 말없이 비급을 받아들어 펼쳤다. 사실 지금 둘 사이에 벌어지는 상황은 무척이나 이상한 것이었다. 이 정도 수준의 비급을 저술한 저자의 원류무공이라면 그 문파에서 최고의 절기라고 봐야 한다. 그런 절기를 외인에게 함부로 내주는 것은 이상함을 넘어서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급의 내용에 푹 빠진 영호명은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원류 무공을 통해 심득의 모자람을 채워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풍소정은 상기된 눈빛으로 패왕문 최고의 절기인 패왕도법 후반부를 읽어 내려가는 영호명을 쳐다보았다. 경지가 경지인지라 영호명은 금세 패왕도법의 극의를 이해했다. 입술을 비집고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괜찮은 도법이구려. 보기 드물게 유와 패가 적절히 배합되어 있는 도법이오. 극성까지 익힐 경우 상대하기가 제법 까다로울것 같소." 패왕문의 최고절기를 그저 괜찮다고 표현하는 영호명의 말에 풍소정은 입술을 깨물며 허탈해했다. 그러나 상대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고수였다. "심득을 완성하는 시간을 현저히 줄일 수 있을 것 같소. 그런데 지금 준 책자가 도법의 후반부인 것 같은데 혹시 전반부는 없소? 뭐 없다면 급한 대로 대충 만들어내면 될 것 같기는 한데..." 조사들이 대대로 공을 들여 만들어낸 도법을 대충 급조할 수 있다는 말에 기가 막혔지만 풍소정은 아무런 말없이 비급 하나를 더 꺼냈다. 패왕문의 무사들이 익히는 패왕도법의 전반부였다. 영호명은 아무 생각 없이 비급을 꺼내어 펼쳤다. 전반부를 참조할 수 있다면 심득을 더욱 빨리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풍소정은 패왕문의 밑천(?)을 모조리 털어간 영호명을 복잡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외인에게 가문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전절기를 보여주고 나니 가슴이 조마조마해질 수밖에 없다. 혹시라도 영호명이 나 몰라라 하면 그녀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입을 막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책자를 모두 읽은 뒤 지그시 눈을 감은 영호명을 보며 풍소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은 은공의 결정에 달려 있으니까. 지금은 하늘에 운을 맡겨야 할 때야.' 잠시 후 영호명이 눈을 떴다. "다행이오. 이제 심득이 명확히 이해되었소. 일주일 정도면 훌륭한 초식을 몇 개 정도..." 말을 이어나가던 영호명이 멈칫했다. 궁금증을 풀고 나니 당연한 상황이 이해된 것이다. 그는 급하게 책자의 표지를 살폈다. '이런!' 그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그가 무심코 읽은 것은 패왕문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비전절기였다. '이, 이런 실수를...'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풍소정을 쳐다보았다. "혹시 이 비급들은 귀 파의 비전절기 아니오?" 풍소정이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패왕문의 전부라고 할 수 있지요." "그, 그런 것을 어찌 나에게..." 풍소정의 표정이 돌연 처연해졌다. "어차피 사라지거나 타 문파의 손에 들어갈 비급입니다. 현재 상태로 패왕문은 1년 이상 존속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풍소정은 나지막한 어조로 패왕문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정사대전에서 주력고수들을 모두 잃고 의문의 습격으로 문주와 그 식솔들이 궤멸당한 상태에서 자신이 문주 자리를 물려받은 일, 그리고 자신의 일천한 무공으로 말미암아 아직까지 문의 사정이 어지럽다는 사실이 영호명에게 설명되었다. 비로소 영호명은 며칠 전의 일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랬군. 그래서 그런 모습을 보였던 것이로군." "그런 상황에서 비사문 당주가 극마의 경지에 접어든 것은 실로 고무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패왕문을 져버리고 은공을 모시겠다고 공언했습니다. 패왕문의 미래는 그것으로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지요." "섣불리 속단할 일이 아니오. 참고 기다리면..." "이미 5년을 참고 견뎠습니다. 애석하지만 제 능력으로 문을 재건하는 것은 역부족입니다. 애당초 전 한 문파를 책임질 수 있는 재목이 아니었습니다." 풍소정의 눈에서는 어느덧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5년 동안의 설움이 한꺼번에 북받쳐 오른 탓이었다. "너무, 너무 힘들었습니다. 누군가의 품이 그토록 든든해 보이기는 처음이었으니까요. 은공께 실례를 범한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영호명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의 난감했던 상황이 떠올랐던 것이다. "은공께 본문의 비전절기를 보여드린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부디 간청하건대.." 풍소정이 머뭇거림 없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패왕문을 맡아 주십시오." 영호명으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제안일 수밖에 없었다. 느닷없이 패왕문을 맡아 달라니... 그것도 사파 계열의 문파가 아니던가. 황당함으로 인해 말문이 막힌 영호명의 귓전으로 풍소정의 음성이 계속 파고들었다. "은공께서 맡아주시지 않는다면 패왕문은 이대로 멸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 말도 되지 않는 소리요." "무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만약 은공게서 승낙하신다면 장차 패왕문은 잠마련을 넘어 마도의 종주로 우뚝 서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잠마련이라는 말에 영호명이 흠칫했다. 잠마련의 사준환에게 엄청난 원한을 가진 그였다. 격동 탓인지 그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어차피 복수를 위해 철혈문의 무사들을 다시 규합하려 했던 그였다. 만약 패왕문을 맡게 된다면 복수의 길이 더욱 빨라질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 쉽사리 응낙할 순 없었다. "하지만 본인은 외인이오. 그런 내가 어찌..." "방법은 있습니다." 풍소정은 얼굴이 별안간 빨개졌다. 처녀의 입으로 내뱉기엔 심히 부끄러운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저, 저와 호, 혼인을 하시면 됩니다. 그, 그러실 경우 은공에겐 능히 패왕문도들의 생사여탈권을 관장하실 자격이 생깁니다." "..." "제,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으, 은공의 아이를 여럿 낳아드릴 테니 그, 그중 하나에게만 풍이라는 성씨를 허,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것이 소녀의 자그마한 소망이옵니다." 풍소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영호명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풍소정의 내심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식솔들이 모두 죽어 혼자만 남은 상황에서 어떻게든 가문의 대를 이어가려는 정성이 갸륵하기도 했다. 사실 영호명으로서는 그리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덥석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영호명의 입장이었다. '만약 내가 패왕문을 맡는다면 사파 무사들을 이끌고 정파 제자들의 생명을 거두어야 한다. 한때 정파에 적을 두었던 내가 그럴 수는 없지.' 그렇다고 해서 단칼에 거절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풍소정은 지금 자존심이고 뭐고 깡그리 내팽개친 채 애걸하고 있다. 웬만한 사람이면 이렇게 하지도 못한다. 영호명은 복잡한 시선으로 고개 숙인 풍소정을 내려다보았다. '당면한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영호명의 성품상 단칼에 거절하진 못했다. "문주의 뜻을 잘 알겠소. 하지만 지금 당장 대답을 할 순 없소. 본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알겠사옵니다.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습니다." 탁자 위에 어지럽게 널린 비급을 가지런히 정리한 영호명이 몸을 일으켰다. "비급을 잘 보관해 두도록 하시오." 몸을 일으킨 영호명은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을 풍소정이 애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가진 패를 모두 다 내보였다. 오로지 상대의 처분에 모든 것이 걸려 있는 상황이었다. 풍소정의 방문으로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진 영호명이었다. 승낙할 수도 없고 거부하기도 난감한 상황.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물론 복수를 위해서는 승낙하는 것이 현명하다. 철혈문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난 상태. 생존자가 있다고 해봐야 하인이나 무공이 일천한 하급무사 몇 명이 전부일 터였다. 그에 비하면 패왕문은 양반이었다. 절정고수들의 수가 모자란다고는 하나 일, 이류 무사들은 충분했다. 충실히 훈련을 해왔는지라 앞으로 나아갈 여지도 많았다. 영호명이 조금만 이끌어준다면 상당수의 무사들이 절정의 경지에 접어들 수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영호명은 이미 이런 일에 이골이 난 상태였다. 멸망한 크로세나 왕국의 기사와 오백 명으로 시작해 대제국을 일구어냈던 그가 아니던가? 조직 관리와 인재등용, 전략 전술이 완전히 몸에 배인 그였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패왕문이 사파 계열 문파라는 점이다. 정파와는 필수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패왕문을 맡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정파 무사들을 죽여야 할 상황이 올 것이다. 한때 한솥밥을 먹었던 만큼 안면 있는 무사들이 많을 터, 영호명의 성격상 섣불리 그들을 죽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패왕문의 수하들이 죽어가는 것도 볼 수 없다. 난감해진 영호명은 머리를 흔들었다. '도무지 결정을 할 수가 없군.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하던 영호명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오문의 문주 갈천성을 떠올린 영호명은 미간을 지그시 모았다. '그라면 내가 직면한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까? 지략 하나는 자신 있다고 했으니 능히 난제를 해결해줄 수 있지 않을까?' 물에 빠진 사람이 온 힘을 다해 지푸라기를 잡듯 영호명도 조언을 해 줄 누군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결정을 내린 듯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군. 그를 불러 조언을 구하는 수밖에..." 마음을 정한 영호명은 수련을 불렀다. 그녀라면 갈천성과 연락을 취할 여러 가지 방도를 알고 있을 터였다. 예상대로 수련은 갈천성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하오문 전래의 방법이라 어떻게 연락하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물론 영호명이 구태여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문주님더러 이 부근으로 오시라고 전갈을 넣겠습니다."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 그냥 내가 찾아가는 것이..." "문주님도 찾아오는 것을 원하실 것입니다. 상공께 죄송스럽지만 하오문의 지부는 결코 외인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그렇게까지 나오니 영호명도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알겠다. 그렇게 해라." 갈천성은 정확히 다음날 영호명을 찾아왔다. 그렇다고 패왕문으로 직접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영호명을 찾은 수련이 귀엣말을 건넸다. "문주님께서 인근 객잔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하옵니다." 깜짝 놀란 영호명이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빨리 왔단 말이냐?" "상공의 전갈을 오매불망 기다리신 것으로 압니다." "알겠다. 서둘러 가보자." 영호명과 수련이 행장을 갖추고 외출하자 불안해진 사람이 있었다. 풍소청과 비사문이었다. 만약 영호명이 이대로 종적을 감춘다면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외출을 막을 수도 없었기에 그들로서는 마음을 졸이며 영호명의 귀환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갈천성은 객잔에 방 하나를 잡고 투숙해 있었다. 영호명을 보자 그는 공손히 예를 올렸다. "대공을 뵈옵니다." 영호명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청을 냉정히 거절해 놓고 이제 와서 조언을 구하려니 다소 겸연쩍었던 것이다. "오랜만이오. 그동안 잘 지냈소?" "모처럼 한가롭게 지냈습니다. 대공의 전갈을 기다리느라 계속 본단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허허, 또 날 곤란하게 하는구려." 너털웃음을 터뜨린 영호명이 정색을 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소. 난 지금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소." "곤란한 상황이라면..." 영호명은 즉시 당면한 상황을 설명했다. 모든 설명을 듣고 난 갈천성이 탄성을 내질렀다. "역시 대공이십니다. 그 짧은 시간동안 패왕문이라는 저력 있는 문파를 장악하시다니... 대공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난 칭찬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오. 도대체 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오?" 잠시 뭔가를 생각해 보던 갈천성이 영호명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대공께서 꺼리시는 것은 한 가지로군요. 패왕문을 맡을 경우 정파 무사들을 살상해야 하는 경우가 오지 않을까 걱정되시는 겁니까?" "바로 그렇소. 내 성정상 결코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소." 갈천성이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해결방법은 간단합니다. 패왕문을 맡으신 뒤 정파 무사들을 살상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 말에 영호명의 눈의 커졌다. 사도 문파의 수장으로서 어찌 정파 무사를 죽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어지는 갈천성의 논리는 마치 청산유수와 같았다. "현재 무림은 상당히 혼탁합니다. 잠마련의 총수 사준환이 노골적으로 야심을 드러내고 있으니까요. 제 예상으로 5년 내에 2차 정사대전이 벌어질 것이 확실합니다." "흠, 그렇소?" 영호명이 이맛살을 지그시 좁혔다. 악몽과도 같았던 정사대전이 또다시 벌어진다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무의미한 살육이 또 시작되겠군. 서로 다를 것이 없는 중원의 청년들이 쓸모없는 명분으로 서로 죽이고 죽여야 하는...' 생각에 잠긴 영호명의 귓전으로 갈천성의 설명이 계속 파고 들었다. "그러나 원래대로라면 정사대전이 벌어지지 않아야 정상입니다. 현재 정도와 마도는 5년 전 끝난 정사대전으로 인해 엄청나게 힘을 소진한 상태입니다. 주력고수들도 많이 죽었고 하급 무사들의 수도 모자랍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사대전이 벌어지는 자체가 이상한 일이지요." 영호명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갈천성의 설명을 경청했다. "지금 벌어지는 정사대전은 전적으로 사준환의 야망 때문입니다. 무림 전체의 힘을 소진시켜야만 야망을 성취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강호독패, 이것이 바로 사준환이 추구하는 이상입니다." "그렇다면 사준환만 없다면 정사대전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거요?" "바로 그렇습니다. 현재 정도와 마도는 정사대전을 감당할 만한 여력이 되지 않습니다." 말을 마친 갈천성이 영호명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 소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공께서는 반드시 패왕문을 장악하셔야 합니다." "..." "그런 다음 힘을 키워 잠마련을 견제하십시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많은 않을 것입니다. 잠마련은 그 정도로 거대한 문파입니다." 듣고 있던 영호명이 침음성을 내뱉었다. 사실 잠마련과 패왕문은 비교자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컸다. "익히 말씀드렸듯이 마도무사들은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강자를 아무 거리낌 없이 인정합니다. 하지만 사준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모략과 독, 각종 간계를 써서 지금의 잠마련을 일군 것이지요. 때문에 마도 무사들, 심지어 잠마련의 하급 무사들도 잠마련을 머리로만 인정할 뿐 가슴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설명을 이어나가는 갈천성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일단 패왕문을 접수하십시오. 그런 다음 사파 무사들을 가슴으로 굴복시키십시오. 그러면 잠마련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제 목을 걸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영호명은 서서히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무사들을 가슴으로 굴복시키라는 말에 감흥을 느낀 것이다. "만약 그러실 경우 앞으로 있을 정사대전에서 죽어갈 수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대공께서 살리시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대로 사준환이 정사대전을 일으키는 것을 방관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패왕문을 접수하셔서 추후 일어날 정사대전을 미연에 방지하시겠습니까?" 거기까지 설명이 진행되었는데 답이 나오지 않을 수는 없다. 갈천성이 마지막으로 말뚝을 박았다. "정사대전이 벌어지지 않는 한 정파와 마도의 문파는 거의 분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대공께서 정파 무사들에게 손을 댈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게다가 정도와 마도는 하급 무사들만 서로 반목할 뿐, 초절정 이상의 고수들은 오히려 교류를 갖습니다. 서로가 일군 무공의 경지를 인정하는 것이지요. 구파일방의 장로와 마도문파의 문주가 만나 술자리를 갖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합니다." 설명이 거기까지 진행되자 마침내 영호명이 결정을 내렸다. "좋소. 아무래도 패왕문을 접수하는 것이 현명할 것 같소. 본인 역시 정과 마를 나누는 데 회의를 가지고 있었는데 문주의 설명으로 인해 모든 것이 분명해졌소." 그 말을 들은 갈천성이 속마음을 여과 없이 내비쳤다. "대업에 절 동참시켜 주시지 않겠습니까? 모든 힘을 바쳐 보필하겠습니다." 고개를 돌린 영호명의 말투는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 "오늘부로 그대를 군사로 임명하겠다. 하오문의 정보망을 총 동원해서 무림정세를 살피도록 하라." 갈천성의 눈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드디어 영호명의 수하가 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감격한 갈천성이 그대로 오체투지를 했다. "존명." "네 염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앞으로 하오문은 마도의 당당한 정보단체로 거듭 태어나게 될 것이다. 다름 아닌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영호명의 전신에서는 폭풍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당당한 패왕의 기세. 아무나 흘려낼 수 있는 기세가 아니었다. "오오." 갈천성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진정한 주인을 만난데 이어 하오문의 오랜 숙원이 풀리게 되었으니 격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이성을 되찾은 갈천성이 영호명과 함께 앞으로 패왕문을 키워나갈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패왕문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단 정상화시켜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조직을 꾸려나가는 것은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일이니까." 영호명은 어느덧 트루베니아에서의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지금 그에게 당면한 상황은 그때와 매우 흡사했다. 심지어 여인과의 결혼을 통해 세력을 얻는 과정도 동일했다. '천상 결혼을 두 번 해야 하는 팔자인가? 트루베니아에서 한 번, 중원에서 한 번...' 죽은 아내 발레리를 떠올린 영호명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보고 있던 갈천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패왕문으로 돌아가는 즉시 풍소정 문주와 혼약식을 치러야겠군요." "그래야겠지. 하지만 당장은 아니다. 일단은 문을 안정시키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 갈천성이 슬쩍 수련을 돌아보았다. 영호명과 동침을 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수련이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을 본 갈천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오문도 어떻게든 지존과 연을 맺어야 하는데..." 패왕문은 머지않아 혼인을 통해 지존과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하오문은 자신이 지존의 수하로 들어간 것 말고는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다. 지금은 차이가 없겠지만 그 문제 때문에 앞으로 차이가 더욱 벌어질 것이다. '최소한 하오문의 여인 하나 정도는 지존의 첩으로라도 들여 보내야 한다.' 하오문이 지닌 무력이 워낙 보잘것없었기 때문에 갈천성이 이처럼 조바심을 내는 것이다. 마음을 굳힌 갈천성은 영호명을 올려다보았다. "지존께 한 가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뭔가? 말해보라." "수련이 지존을 지극히 잘 모셨는지 궁금합니다." 뜻밖의 말에 영호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해 본 영호명이 짤막하게 대답해 주었다. "부족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갈천성이 이번에는 수련을 쳐다보았다. "지존의 밤 시중을 들어드렸느냐?" 시선을 받은 수련이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소녀가 심히 모자란 탓에 수청을 들어드리지 못했사옵니다." 갈천성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맡겨진 임무 하나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실망을 시키다니 안타깝구나. 그토록 믿었건만 나에게 실망을 안겨주느냐?" "..." "널 믿었던 것이 정말 후회되는구나." 수련이 고개를 떨어뜨린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귓전으로 갈천성의 서슬 퍼런 음성이 파고들었다. "문으로 복귀하라. 너에겐 다른 임무가 내려질 것이다." 명령을 내린 갈천성이 영호명을 쳐다보았다. 돌아가는 상황에 영호명은 매우 당혹해 하고 있었다. "지존, 아무래도 시녀를 바꿔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존의 밤 시중을 들어드리는 것도 엄연히 임무인데 임무를 소홀히 하다니 용서할 수가 없군요. 더욱 나은 아이로..." 영호명이 그럴 필요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다. 괜찮다. 난 수련이 마음에 든다." 그러나 갈천성의 태도는 완강했다. "아닙니다. 주공께서 침상으로 부르지 않으신 것을 보니 아무래도 수련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정보원으로 훈련받았기 때문에 시중드는 데 익숙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저 아이는 원래대로 정보원의 임무를 맡기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대신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아이를..." 영호명이 조용히 갈천성의 말을 끊었다. "난 수련이 마음에 든다. 다른 여인을 옆에 두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 "하, 하오나." "내가 수련을 안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한낱 욕정을 풀기 위해 한 여인의 정조를 유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 정도 자제력은 있다." 갈천성이 눈빛을 빛냈다. 기다렸던 대답이 나온 것이다. "만약 수련이 지존을 진심으로 사모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영호명의 눈이 퉁방울만 해졌다. "그게 대관절 무슨 소리냐?" 갈천성은 그때서야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수련을 쳐다보았다. "네 솔직한 심경을 주공께 털어놓도록 해라. 나는 이만 나가 보마." 그는 머뭇거림 없이 객잔의 방을 나섰다. 방에는 영호명과 수련만이 남겨졌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수련은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미간을 잔뜩 좁힌 영호명이 수련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날 사모한다고 했느냐?" 들려오는 수련의 대답은 모기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렇사옵니다, 지존." "혹시 갈천성 군사가 시킨 것이냐?" 수련이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도리질을 쳤다. "결코 그렇지 않사옵니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니냐? 계기가 있어야만 누군가를 사모할 수 있는 법. 한번 말해보거라." 수련이 가느다란 음성으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일전에 지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천녀도 천하제일인의 모친이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로 인해 소녀는 하나의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반드시 천하제일인의 모친이 되고 말겠다는 꿈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러기 위해서는..." 수련의 음성이 점점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인의 청력을 가진 영호명은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지, 지존의 아이를 갖는 수밖에 없사옵니다. 그런 이유로 부득이 천녀가 지존을 사모하게..." 그때서야 상황을 알아차린 영호명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었구나. 그래서 네가 그런 마음을 먹었구나." 수련이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부끄러움 때문에 드러난 목덜미가 온통 벌겋게 변해 있었다. "면목 없사옵니다." "아니다. 듣고 보니 내 잘못이구나." 쓴웃음을 지은 영호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수련에게 환상을 갖게 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다. 어떻게든 책임을 지긴 해야 했다. 그는 체념한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쩔 수 없군. 늘그막에 웬 여복이 이렇게 몰린담?' 그래도 싫지는 않다는 게 영호명의 솔직한 심경이였다. 아름다운 여인에게 끌리는 것은 남자의 본능. 비록 나이가 구십이 넘었지만 영호명의 생체시계는 30대 중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에겐 중원에서의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지 않던가? "고개를 들어라." 영호명의 말에 수련이 고개를 들었다. 청초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은 온통 눈물에 젖어 있었다. 영호명이 부드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매만졌다. "널 거두어들이도록 하겠다." 수련의 눈이 커졌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수련의 이마에 영호명이 살짝 입을 맞춰 주었다. "네 소망대로 널 천하제일인의 모친으로 만들어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최대한 노력은 해 보겠다." 감격한 나머지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젖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말에 수련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널 아내로 맞아들일 작정이다. 풍소정 문주와 함께 말이다. 수련이 급히 도리질을 쳤다. "아, 아닙니다. 천녀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나는 이미 몸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 있다. 색욕 따위는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지. 난 널 색욕을 푸는 도구가 아닌 인생의 반려로 맞아들일 작정이다." 말을 마친 영호명이 수련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당면한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듯 수련은 큰 눈을 연신 끔뻑이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갈천성 군사는 패왕문을 의식해서 이번 일을 추진했을 것이다. 물론 그 마음도 이해한다. 하지만 난 모든 것을 떠나서 널 너무도 사랑스럽게 생각한다. 알겠느냐?" 영호명의 품속에 안긴 수련이 급기야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결코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 행복해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기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갈천성은 밖에서 열심히 안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그에겐 그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다.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리자 그의 안색이 환해졌다. 마침내 지존이 수련을 거두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그것도 첩이 아닌 아내로. 갈천성의 눈동자에는 희열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되었어. 역시 수련을 택한 것은 탁월한 판단이야. 이로써 하오문의 미래는 한없이 밝아졌어.' 그의 입가에서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패왕문의 비상(飛上)***** 영호명은 즉시 패왕문으로 복귀했다. 갈천성은 무림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헤어졌다. 돌아오면서 영호명과 수련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수련의 안색은 상기된 채 좀처럼 풀릴 줄을 몰랐다. "저, 정녕 꿈만 같사옵니다. 저같이 미천한 계집에게 이런 꿈같은 일이 닥치다니..." "꿈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거라. 넌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여인이다." 그래도 실감이 나지 않는 듯 연신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그녀였다. 그녀의 귓전으로 중후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사실 나에겐 아내가 있었다." 수련은 살짝 영호명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성혼을 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던 그녀였다. "소녀, 그분께 극진히 대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영호명이 실소를 지었다. "그럴 필요 없다. 아내는 이승에 있지 않으니까..." 수련의 눈이 커졌다. 이승에 있지 않다면 죽었다는 말이다. "도, 도대체 누가?" 영호명은 살짝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이 그녀를 데리고 갔느니라. 천수를 다하고 운명한 것이지. 난 평생 동안 그녀 하나만을 사랑했다. 다른 여인에게 눈을 돌린 적이 한 번도 없었지." "그, 그랬었군요." 영호명은 빙긋 웃으며 수련을 쳐다보았다. "내 나이는 생각보다 많다. 아마 네가 예상하는 것보다 월등히 많을 것이다." "소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상공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요." "허허. 그렇느냐?" 한없이 사랑스럽다는 듯 영호명이 손가락을 뻗어 수련의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패왕문의 정문에서는 비사문이 초조하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영호명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음이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영호명을 본 그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오셨습니까, 지존?" 비사문을 발견한 영호명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날 기다렸느냐?" "그렇사옵니다." 묵묵히 비사문을 쳐다보던 영호명이 입을 열었다. "결정을 내렸다." 비사문은 침을 꿀꺽 삼키며 영호명의 말을 기다렸다. "너를 수하로 거둬들이겠다." 순간 비사문은 허물어지듯 오체투지를 했다. "이 비사문,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충심으로 모실 것을 지존께 맹세하는 바입니다." 영호명은 잔잔한 눈빛으로 꿇어 엎드린 비사문의 등허리를 내려다보았다. "내 너에게 한 가지를 당부하고 싶다." "하명하십시오." "나는 명령을 지킨답시고 아낌없이 목숨을 던지는 수하는 원하지 않는다." 뜻밖의 말에 비사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영호명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함께 동고동락하며 끝까지 내 옆을 보필해 줄 수하를 원한다. 나이가 들어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지난날을 회상할 수 있는 동료와도 같은 수하. 이건 당부가 아니라 명령이다. 지킬 수 있겠느냐?" 비사문의 눈매가 붉게 젖어들었다. 한없이 단순한 무인이라 그런지 감동도 컸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존명." 복명하는 비사문의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비로소 진정한 주군을 만난 느낌이었다. "따라오라.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 비사문은 두말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가슴에 도를 품은 채 영호명의 뒤를 따르는 비사문의 얼굴에서는 비장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풍소정은 집무실에 있었다. 영호명은 머뭇거림 없이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를 보자 풍소정이 반색했다. "오, 오셨군요." 살짝 고개를 끄덕인 영호명은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일단 앉으시오." 소정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영호명의 맞은편에 앉았다. "문주의 제안에 대해 심사숙고해 보았소." 그 대목에서 소정은 숨을 훅 들이켰다. 바짝 긴장한 탓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소. 문주의 제안을 받아들이리다." 대답을 들은 풍소정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 긴장이 풀리면서 현기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의 눈에서는 금세 수막이 차올랐다. 드디어 과중한 책임감에서 해방된 것이다. 고개를 떨어뜨린 그녀의 귓전으로 묵직한 음성이 계속 파고들었다. "문주께 한 가지를 약속드리겠소." "..." "패왕문은 장차 잠마련을 넘어 마도 제일의 문파로 비상할 것이오." 쾅 듣고 있던 풍소정의 머릿속에서 벼락이 쳤다. 뒤에 공손히 시립해 있던 비사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영호명을 섬기기로 결정했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패왕문에 대한 죄책감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자신을 문도로 받아들여 절정의 경지에까지 이끈 패왕문이 아니던가. 그 죄책감이 일시에 해소된 것이다. 풍소정은 어느덧 흐느끼고 있었다.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에게 중압감을 떠넘기고 나니 맥이 탁 풀렸다. 영호명이 빙그레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이리 오시오." 풍소정은 머뭇거림 없이 영호명의 품에 안겼다. 넓은 품속이 더할 나위 없이 아늑하고 편안했다. "흑흑." 쉴 새 없이 어깨를 들먹거리는 풍소정의 귓전으로 믿음직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이젠 그대 혼자서 걱정할 필요가 없소. 모든 일은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하리다." "네, 네." "그리고 문주에게 한 가지 양해를 구하고 싶소이다." 풍소정은 눈물에 젖은 얼굴을 살짝 들어올렸다. 영호명이 손가락을 뻗어 수련을 가리켰다. "수련도 함께 거두어들일 작정이오. 도저히 저 아이를 저버릴수 없기에 이렇게 부탁을 하는 거요." 풍소정이 침을 꿀꺽 삼키며 수련을 쳐다보았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지만 수련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눈동자 한 가득 간절함을 담아 소정의 시선을 맞받고 있었다. 소정의 얼굴에 살포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수련이라면...' 이미 의자매를 맺은 사이 아니던가? 게다가 밤세워 대화하며 둘은 무척이나 친밀해졌다. 그런 수련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상공을 모실 수 있을 것 같았다. 결정을 내린 소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상공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소정이 승낙하자 수련의 눈에 눈물이 괴었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여 사의를 표했다. "저, 정말 고마워요. 언니." "고맙긴. 앞으로 함께 상공을 모시자꾸나." 말은 쉽지만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소정은 정말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 광경을 본 영호명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고맙소. 대신 한 가지를 약조하리다." 두 여인의 시선이 영호명에게 쏠렸다. "앞으로 그대들 말고는 그 어떤 여인도 들이지 않겠소. 그대들 두 사람만을 아내로 인정하겠다는 뜻이지. 비록 정략적인 면이 다분한 혼인이지만 그대들에게 영원히 충실할 것을 약조하오." "사, 상공." 그 말에 참지 못한 소정이 재차 영호명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오랫동안 외로움에 떨어야 했던 그녀가 마침내 의지할 곳을 찾은 것이다. 문가에 버티고 선 비사문이 그 장면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주군을 잘 만난 것 같군. 감히 추측할 수조차 없는 무공에 인품까지 겸비하시다니... 내 선택은 정말 훌륭했어. 암 그렇고말고.' 잠시 후 영호명과 두 여인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했다. 원래대로라면 성대하게 혼인식을 치른 뒤 문주 자리를 넘겨 받는 것이 순리였다. 하지만 영호명은 그렇게 하길 원하지 않았다. "일단은 문을 정비하는 것이 시급하오. 내가 보기에 패왕문은 조속한 정비가 필요하오." 풍소정은 순순히 영호명의 의견에 동의했다. "상공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과중한 중압감을 덜어서 그런지 그녀의 안색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일단 본인에게 그럴 듯한 직함을 하나 주시오. 그것을 바탕으로 문을 정비하도록 하리다." 비록 수련이 아무런 실권도 없는 문주였지만 엄연히 인사권은 가지고 있다. 문제는 임명된 인사를 문도들이 인정하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영호명이 아무리 높은 직책에 임명되더라도 문도들이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터였다. 고작해야 3각과 철혈당, 현의당 무사들 정도만이 영호명의 직함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영호명은 소정의 그런 걱정을 일거에 해소시켜 주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본인이 모두 알아서 하리다. 당신은 그저 직함 하나를 내리기만 하면 되오." 결연한 영호명의 얼굴을 본 소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상공은 무공이 하늘에까지 닿아 있으신 분. 뭔가 방법이 있으시겠지.' 소정은 즉각 철혈당주인 팽각을 불러들였다. 그가 문의 사정에 가장 훤하기 때문이었다. 연무장에서 부산하게 무사들을 훈련시키던 팽각이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 소정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순간 팽각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영호명을 향해 부복했다. "지존을 뵙습니다." 영호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까지 직함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예를 취할 필요 없네." "그래도 지존은 지존이십니다. 이제 패왕문의 미래가 더없이 밝아지겠군요." 팽각은 좀처럼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형편없이 실추된 패왕문을 재건하기 위해 얼마나 가슴 태웠던가? 과거의 영화를 위해 불철주야 무사들을 닦달해왔던 팽각이니만큼 지금의 상황이 기쁠 수밖에 없었다. 소정은 곧 팽각과 함께 논의에 들어갔다. 사정을 들은 팽각이 거침없이 의견을 제시했다. "간단합니다. 태상호법의 직함을 내리시면 됩니다. 소정의 눈이 번쩍 커졌다. 태상호법이라 함은 문도들의 생사여탈권을 한손에 관할하는 지극히 높은 직책이다. 거의 문주에 버금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함인 것이다. 물론 영호명에게 내리기 아까워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패왕문의 규모는 태상호법의 직함을 내릴 정도가 아니예요. 지금까지 패왕문에는 태상호법이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런 만큼 급한 대로 수석호법이라도..." 영호명은 빙그레 웃으며 소정의 말을 잘랐다. "걱정 마시오. 패왕문은 머지않아 태상호법 한둘 정도 둘 수 있는 규모를 갖추게 될 것이오." 그렇게까지 장담하는데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소정은 즉시 영호명을 태상호법으로 임명했다. 임명장을 받아든 영호명이 팽각을 쳐다보았다. "태상호법의 이름으로 명한다." 팽각이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꺾었다. "존명." "모든 문도들에게 소집령을 내린다. 한 시진 이내로 패왕문의 모든 문도들을 연무장으로 집결시켜라." 팽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물론 자신의 철혈당과 현의당은 신임 태상호법의 명에 복종할 것이다. 신위를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머지 당들은 명에 복종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문주를 허수아비로 생각하는 만큼 문주가 임명한 태상호법 역시 업신여길 것이 물을 보듯 뻔했다. 같은 생각을 하는지 소정의 낯빛도 어두워졌다. '그들이 순순히 명을 들을 리가 없는데.' 그러나 팽각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달려 나갔다. 그 정도로 영호명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는 것이었다. *********************************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연무장에 모인 자들은 병석에 누워있는 장로들 휘하의 3각과 철혈당, 현의당 무사들뿐이었다. 나머지 5당의 무사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연무장에 모여 웅성거리는 무사들을 보며 팽각은 안절부절못했다. 자칫 잘못해 지존에게 밉보일 것을 우려한 탓이었다. '그토록 경고를 했건만...' 같은 조직에 속해 있는 만큼 5당의 부당주들과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다. 그래서 연무장에 모일 것을 간곡히 부탁했는데 부당주들이 결국 당주와의 의리를 지킨다는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물론 팽각은 저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문주를 그토록 업신여기는 그들이 문주에 의해 임명된 태상호법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 그가 애를 태우는 사이 영호명이 도착했다. 단상 위에 올라선 그는 무사들을 쭉 훑어보았다. 무사들의 수는 고작해야 이백 명이 약간 넘었다. 5당이 끝내 모이지 않은 것이다. 영호명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후후. 역시 예상대로로군.' 이미 그는 5당의 무사들이 모이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트루베니아에서 수도 없이 겪어본 일이다. 무사들은 다양한 표정으로 단상 위의 영호명을 쳐다보았다. 그들 중 일부는 경의의 빛을 떠올리고 있었다. 영호명의 신위를 직접 경험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불신어린, 혹은 조소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호명은 그들의 내심이 익히 짐작되었다. '정말 들은 대로의 무공실력을 지니고 있을까?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어.' '태상호법? 흥! 놀고 있네. 고작 오백 명의 문도를 가진 패왕문에 무슨 태상호법이람. 주제가 넘어도 유분수지.' 대다수의 무사들은 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영호명이 입을 열었다. "전 무사들이 모인 것인가?" 내공이 실려 있어 쩌렁쩌렁 울리는 음성이었다. 그러나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 팽각이 쩔쩔 매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5당의 무사들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단상 위에서 엄청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연무장에서 흙먼지가 확 피어날 정도로 유형화된 기세였다. 무사들이 움찔 놀라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콰콰콰콰 기세는 점점 도를 더해갔다. 안색이 변한 무사들이 급기야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반면 영호명의 뒤에 앉아 있는 풍소정과 수련, 비사문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영호명이 의도적으로 기세를 집중시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급기야 무공이 약한 순으로 무사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현경 고수가 발산하는 기세는 그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크헉." 무사들의 눈은 어느덧 경악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이것이 과연 인간의 능력이란 말인가? 단순히 기세만을 발산해서 이백여 명의 무사들을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만들다니... 기세는 점점 더 강해졌다. 이제 일류급 무사들조차 버거워서 이마에서 식은땀을 줄줄 흘려야 할 정도였다. 다음 순간 기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후우." 기세가 사라지자 무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몇몇은 긴장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기도 했다. "세, 세상에..." 무사들의 눈은 크게 뜨여져 있었다. 말로만 듣던 신위를 직접 확인한 것이다. 영호명을 보는 무사들의 눈빛은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 반신반의하던 무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기세를 겪고나니 자연스럽게 승복하게 된 것이다. 강자에게 복속하는 것이 사파 무사들의 생리. 영호명은 팽각을 쳐다보았다. "철혈당주." 팽각이 직각으로 허리를 꺾었다. "하명하십시오." "집결령을 한 시진 뒤로 미룬다. 무사들을 해산시켜라." "존명." 명을 내린 영호명은 미련 없이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팽각은 즉각 각 당을 책임지는 우두머리들에게 명을 전달했다. "알겠습니다." 그들이 명령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아까와 사뭇 달라졌다. 아까는 마지못해 응하는 티를 냈는데 지금은 두말하지 않고 무사들을 통제했다. 무사들은 그들의 통제 아래 일사불란하게 대열에 맞춰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무사들을 해산시킨 팽각이 영호명에게 다가왔다. "무사들을 모두 해산시켰습니다." "좋아. 그럼 5당으로 가볼까?" 팽각의 얼굴에는 흥분한 기가 역력했다. 그토록 말을 듣지 않던 5당 부당주들은 이번 기회에 단단히 혼이 나게 될 것이었다. 영호명이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칠성당이었다. 패왕문을 정비하려면 구성원들을 복속시켜야 한다. 첫 번째 본보기로 칠성당이 낙점된 것이다. 칠성당은 패왕문의 외원에 위치해 있었다. 50여 명의 무사들이 전각 하나를 차지한 채 기거하고 있었다. 팽각과 비사문만을 대동한 채 도착한 영호명이 전각을 살폈다. 연무장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아 모든 무사들이 전각 안에서 쉬고 있는 듯했다. 영호명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그럼 무력시위를 시작해 볼까?' 영호명이 살짝 발을 굴렸다. 진각을 펼친 것이다. 막강한 내공이 발을 타고 땅 속으로 파고들었다. 콰르르릉 땅이 출렁이는가 싶더니 전각이 크게 흔들렸다. 실로 놀라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보고 있던 팽각과 비사문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단순한 진각으로 건물 하나를 통째로 뒤흔들 정도라면 얼마나 내공이 정심하단 말인가? "뭐, 뭐야?" "지진인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진동하는 진각 안에서 무사들이 튀어나왔다. 동작이 신속한 것을 보아 제법 훈련받은 티가 났다. 달려 나온 무사들이 영호명 일행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 중에는 당주의 부재 시에 당을 책임지는 두 명의 부당주도 끼어있었다. 그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고함을 쳤다. "무, 무슨 일이오?" 영호명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발에 힘을 주어 다시 한 번 진각을 펼쳤을 뿐이었다. 쿠웅 땅바닥이 물결치듯 진동하며 전각 쪽으로 밀려갔다. 경로에 서 있던 무사들이 중심응ㄹ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다음 순간 전각이 굉음을 내며 무너져버렸다. 와르르 무사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건물에서 달려 나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깔려죽었을 터였다. 진각을 이용해서 건물을 허물어뜨릴 정도의 고수는 들어본 적도 없었기에 당주들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한 명이 용기를 내어 겨우 입을 열었다. "무, 무슨 일로 치, 칠성당을 무너뜨린 거요?" 비사문의 눈매가 급격히 치솟아 올랐다. "말조심하라. 이분은 패왕문의 신임 태상호법님이시다." 무사들의 안색이 확 변했다. 신임 태상호법이 저 정도의 고수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아침에 전해진 소집령을 무시한 당주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굴복할 순 없는 노릇. 산적처럼 수염이 뻗친 부당주 한 명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평소에 담이 크고 용감하기로 유명한 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아무리 태상호법이라고 해도 칠성당의 전각을 무너뜨릴 순 없는 노릇이오. 우릴 무시하지 않고서야...컥." 기세 좋게 말을 늘어놓던 부당주가 파랗게 질려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엄청난 기세가 그를 향해 뿜어졌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숨조차 몰아쉴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기세였다. 기세는 부당주뿐만 아니라 칠성당의 오십 무사들 모두에게 퍼부어졌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크으으." "헉." 이번에 뿜어진 기세는 조금 전 연무장에서 선보인 것과 차원이 달랐다. 아까의 기세가 심신을 강하게 억누르는 정도라면 이번 기세는 아예 숨통을 콱 막아버렸다. 내공을 끌어올려 저항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무사들이 하나둘씩 바닥에 나뒹굴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끄으으으..." 여기서 무공의 강약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강한 자도, 약한 자도 모두 동일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부당주들 역시 잔뜩 웅크린 채 몸을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기세는 약 일각 정도 지속되었다. 칠성당 무사들에겐 마치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잠시 후 기세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겨우 정신을 차린 무사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들의 귓전으로 스산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본인은 오늘 부로 패왕문의 태상호법으로 임명받았다. 그리고 패왕문의 모든 무사들에게 연무장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그대들은 어찌하여 명령을 받들지 않는 것인가?" 물론 거기에 대답할 말이 있을 턱이 없다. 업신여기던 문주가 임명한 태상호법이라서 그랬다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신임 태상호법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 일부러 항명했다고 말할 것인가? 태상호법의 엄청난 신위를 목격했기 때문에 더더욱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자, 잘못 걸렸군.' 무사들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시선을 외면하기에 바빴다. 그 모습을 본 영호명이 팽각을 쳐다보았다. "패왕문의 문규에 상급자의 명령에 불복하는 하급자에 대한 처벌규정이 있나?" 팽각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물론 있습니다. 상급자의 명령에 불복할 경우 오십 대의 태형에 처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사문화 된 조항이었다. 만약 문규를 엄격하게 적용할 경우 5당의 당주와 부당주들은 죽을 때까지 태형에 처해져도 모자랄 터였다. 팽각의 말을 들은 무사들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아무래도 신임 태상호법이 문규를 엄격히 적용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원래대로라면 문규에 따라 처벌해야 하겠지만 처음이라 그냥 넘어가겠다. 소집령을 한 시진 뒤로 미뤘으니 이번에는 정확히 참석하도록. 이번에도 명을 어길 경우 문규를 엄격히 적용하도록 하겠다. 알겠나?" 부들부들 떨고 있던 무사들이 두말없이 복명했다. "존명." 영호명이 칠성당의 부당주 두 명에게 손짓을 했다. 완전히 질린 부당주들이 후다닥 달려와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영호명은 느릿하게 손을 뻗어 부당주들의 가슴에 달린 표식을 잡아뗐다. "그대들의 부당주직을 지금 이 시간부로 박탈한다. 죄명은 휘하 무사들을 잘못 이끈 죄이다. 여기에 이의가 있나?" 말을 마친 영호명이 두 명에게 기세를 집중시켰기에 그들은 감히 반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부당주들이 겨우겨우 대답했다. "어, 없습니다." "좋아. 소집에 늦지 않도록." 영호명은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갔다. 무사들이 질린 눈으로 뒷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조금 전에 겪은 일들이 마치 꿈만 같았다. 물론 그들 중에서 조금 뒤에 있을 소집에 불참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무사는 아무도 없었다. 영호명은 그런 식으로 5당의 무사들을 단단히 혼내주었다. 3개의 당은 전각이 완전히 무너져 당분간 천막에서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되었고 그나마 두 개의 당은 상황판단이 빠른 탓에 전각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연무장에는 무려 오백여 명의 무사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패왕문의 전 문도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모인 것이다. 대부분의 대화내용은 신임 태상호법의 믿을 수 없는 무위에 관해서였다. "그럼 칠성당은 전각이 무너졌다는 말이야?" "말도 마. 지진이 일어난 줄 알고 달려 나갔더니 전각이 그대로 무너져 내리더군. 알고 봤더니 신임 태상호법님이 진각을 사용하신 거였어." 대답을 들은 풍령당 무사의 입이 딱 벌어졌다. "세상에... 진각으로 전각을 무너뜨리는 것이 대체 가능한거야? 제 아무리 전각이 오래 되었다고 해도." "그뿐인 줄 알아? 그분께서 기세를 뿜어내셨을 때 난 하마터면 오줌을 지릴 뻔했어. 그 정도로 강렬한 기세를 내뿜을 수 있는 고수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어." 크게 혼이 났지만 무사들의 얼굴에는 기대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수가 태상호법으로 왔으니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분이 오셨으니 패왕문의 미래가 사뭇 달라지겠어." "암, 그렇고말고... 문제는 그분께서 얼마나 오래 본문의 태상호법을 맡아주시는가인데..." 다음 순간 무사들의 웅성거림이 일순간에 잦아들었다. 팽각이 나서서 태상호법의 등장을 알렸기 때문이었다. "태상호법님께서 드신다. 모두 대오를 맞춰라." 언제 웅성거렸냐는 듯 입을 닫은 무사들이 질서정연하게 줄을 섰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아 지금까지 받은 훈련이 헛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백 명의 무사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곧이어 등장할 태상호법을 기다렸다. 풍소정은 마치 꿈만 같았다. 패왕문의 전 무사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실로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즉위식 때에도 이렇지 않았다. 세 명의 장로들이 건재했을 때도 하지 못했던 일을 영호명이 해 낸 것이다.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사이 영호명이 단상 위에 올랐다. 큼지막한 도 한 자루를 왼손에 파지한 그의 모습은 당당한 천신과도 같았다. 이어 팽각 당주의 소개가 이어졌다. "오늘 임명되신 태상호법님을 소개하겠다. 앞으로 태상호법님께서 문을 이끌어 가실 것이다." 그 말이 끝나자 무사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무사들이 열렬히 박수를 보냈다. 강자가 영입되는 것은 패왕문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신임 태상문주는 최소한 초절정 이상으로 추정되는 고수이다. 몸담고 있는 문의 장래가 밝아지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잠시 후 환호성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팽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비록 지금은 태상호법이시지만 조만간 문주님과 혼인하실것이다. 명실상부한 패왕문의 주인이 되시는 것이지." 또다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들 아까보다 더욱 감정이 고조되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태상호법과 문주는 입장 면에서 차원이 다르다. 태상호법은 상황이 변하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지만 문주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무사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희색이 만연했다. 엄청난 무위를 가진 초고수가 패왕문의 새 주인이 되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소개를 마친 팽각이 뒤로 물러나고 영호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가 손을 들자 좌중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무사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신임 태상호법을 응시했다. '실로 오랜만에 겪어보는 상황이로군.' 영호명은 한가롭게 무사들의 면면을 지켜보았다. 하나같이 눈에 정광이 충만한 것을 보아 훈련을 충실히 해온 무사들이었다. 이 정도라면 오히려 트루베니아 시절 크로세나 왕국의 기사들보다 나은 수준이었다. 심호흡을 한 영호명은 팽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패왕문은 도대체 어떤 문파인가?" 나지막했지만 내공이 실려 있어 무사들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팽각이 즉각 대답했다. "무려 팔백 년의 역사를 가진 전통 있는 문파입니다. 사파 무림의 정신적인 지주이며 수많은 초고수들을 배출해 낸 저력이 있습니다." "하면 지금도 그러한가?" 이어지는 말에 팽각은 말문이 콱 막혔다. 조금 전 말한 사실들은 말 그대로 과거의 일일 뿐이었다. 무사들의 표정도 침울해졌다. 당장 언제 멸문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패왕문의 현실이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정사대전을 통해 힘을 키운 잠마련으로 인해..." 영호명은 조용히 팽각의 말을 끊었다. "패왕문은..." 그가 들고 있던 도를 강하게 바닥에 내려찍었다. 쿠웅 강력한 파장이 그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이어 내공이 깃든 음성이 무사들의 마음속을 울려 퍼졌다. "예전의 영광을 고스란히 되찾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무사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막연한 말이긴 했지만 결코 허풍으로 들리지 않았다. 영호명이 재차 도를 바닥에 내려찍으며 부르짖었다. "앞으로 패왕문은 끝없이 비상할 것이다." 무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도집을 씌운 도를 바닥에 내려찍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두 명의 무사들이 시작했지만 금세 모든 무사들에게로 퍼져나갔다. 쿵 쿵 쿵 쿵 도를 내려찍는 소리는 마치 심금을 뒤흔드는 북소리처럼 무사들의 이성을 마비시켜갔다. 누구도 입을 열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거듭 도를 들어 바닥을 내려찍을 뿐이었다. 그들의 심장은 지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풍소정은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아 올랐다. 짧은 말 한 마디로 무사들을 사로잡아버린 영호명이 도무지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토, 통솔력을 본능적으로 타고나신 분이야. 저분을 선택한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어.' 그녀는 몰랐다. 영호명이 한때 대제국을 좌지우지하는 황제였다는 사실을. 그것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일구어낸 제국이었다. 숙연한 분위기는 한참동안 이어졌다. 적절한 순간이 되자 영호명이 손바닥을 좍 펴서 내밀었다. "그만." 무사들이 일시에 동작을 멈췄다. 그들은 완전히 영호명의 위압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영호명은 느릿하게 걸어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지금부터 조직개편을 시행하겠다. 각 당의 당주들을 다시 뽑겠다는 뜻이다." 영호명은 느릿하게 무사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가 지나가자 무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는 무척이나 꼼꼼하게 무사들을 살폈다. 각기 오십 명의 무사들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인 만큼 최대한 신경 써서 선별해야 한다. 지도력과 무공, 통솔력을 모두 겸비한 무사를 뽑아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영호명에게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경력이 워낙 화려한 그가 아니던가! 한 무사 앞에 멈춰선 영호명이 눈빛을 빛냈다. "이름이 뭔가?" "넷. 칠성당의 대원 이하명이라 합니다." 영호명이 손을 뻗어 무사의 어깰르 툭툭 쳤다. "앞으로 나가라." 무사가 일순 당혹해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영호명은 그런 식으로 무사들을 하나씩 선출했다. 하나의 당에서 단 한 명씩을 뽑았기에 잠시 후 여덟 명의 무사가 앞으로 나가 있었다. 장로들이 의식불명이 된 3각에서 한 명씩, 그리고 당주들이 변절한 5당에서 한 명씩이었다. 무사들을 선별한 영호명이 이번에는 비사문을 쳐다보았다. "현의당을 떠나면서 후임당주로 내정한 자가 있는가?" "있습니다." 머뭇거림 없이 복명한 비사문이 눈짓을 했다. 그러자 현의문에서 한 명의 무사가 달려 나왔다. 그 다음 영호명의 시선이 멎은 곳은 팽각 당주였다. "팽각 당주도 앞에 나온 무사들과 함께 서라." 누구의 명령인데 꾸물거릴 것인가? 짧게 복명한 팽각 당주가 무사들과 나란히 섰다. 선출된 무사들은 다양했다. 무공이 뛰어나서 차기 당주감으로 꼽히는 무사도 있었고 별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던 무사들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들을 뽑았는지 몰랐기에 무사들은 무척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호명의 말이 이어지자 그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대들은 각 당의 당주 후보생들이다." 무사들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선출되지 않은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십여 명의 무사들을 통솔하고 또 훈련시키려면 최소한 절정 이상의 무사여야만 된다. 그런데 앞에 나선 무사들중에서 절정은 오직 팽각 당주뿐이었다. '사라진 당주들이 혹시라도 귀환한다면 곤란해질 텐데...' 그러나 무사들은 누구 하나 반발하거나 의혹을 제기하지 않았다. 상명하복이 몸에 박힌 사파 무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영호명은 느릿하게 무사들을 둘러보았다. "물론 아직까지는 당주 후보일 뿐이다. 그에 대한 검증은 한달 뒤에 하도록 하겠다." 영호명은 선출된 무사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대들은 지금부터 나와 함께 한 달 동안의 폐관에 들어간다. 그동안의 노력여하에 따라 성취가 결정될 것이니 마음 단단히 먹도록..." 무사들의 눈동자에 감격의 빛이 일렁엿다. 감히 경지를 추측할 수도 없는 초고수와 함께 폐관에 들게 되었으니 기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실로 엄청난 기연이라 할 수 있었다. 말을 마친 영호명은 비사문을 쳐다보았다. "그동안 너는 책임지고 문을 보살피도록 해라." 비사문이 머뭇거림 없이 허리를 꺾었다. "존명." "그럼 팽각 당주는 무사들을 폐관수련장으로 데리고 가도록. 나도 곧 가도록 하겠다." 머뭇거림 없이 복명한 팽각이 선출된 무사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이어 비사문이 운집한 무사들을 해산시켰다. 돌아가는 무사들의 눈동자에는 곤혹스러움과 함께 앞날에 대한 희망이 빛나고 있었다. 숙소로 들어간 영호명이 소정, 수련과 마주 앉았다. "갑자기 결정해서 미안하오.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반드시 폐관이 필요할 것 같소. 그동안은 비사문이 돌봐줄 것이니까 별일은 없을 것이오." "미리 말씀하시지 않으셔서 조금 놀랐답니다." "내가 폐관하려는 이유는..." 이유를 들은 소정의 눈이 커졌다. 놀랍게도 영호명은 한 달 동안의 폐관동안 아홉 명의 당주 후보생들을 모두 절정으로 끌어올리려 하고 있었다. 풍소정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들었다. "그, 그게 대관절 가능한 일인가요?" "가능하오. 애당초 가능성을 보고 무사를 뽑았기 때문이오. 가르침이 모자란 무사에겐 가르침을 주고, 내공이 부족한 무사에겐 격체전력을 쓰면 가능하오. 그리고 나에게도 폐관수련이 꼭 필요하오." 영호명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소정을 쓸어보았다. "명색이 패왕문의 태상호법인데 패왕도법을 몰라서야 되겠소? 이번 폐관을 통해 패왕도법을 완전히 터득할 작정이오. 더불어 비급을 통해 얻은 깨달음도 내 것으로 만들고..." "그러셨군요. 그렇게 깊은 뜻이 있으셨다니..." 아직까지 혼인식을 올리지 않았지만 풍소정은 이미 현숙한 아내가 되어 있었다. "아무 걱정 마시고 수련에 몰두하세요. 비사문 당주가 도와준다면 아무 문제없이 문을 꾸려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혼인식은 폐관을 마치고 나온 뒤 올리도록 합시다. 더없이 성대하게 말이오." 그 말에 풍소정이 얼굴을 붉혔다. 수련의 얼굴 역시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이미 그녀들은 함께 혼인식을 치르기로 약조해 놓은 상태였다. "아, 알겠어요." 영호명의 얼굴에 슬며시 장난기가 서렸다. "허허. 아무래도 그날 무사들이 날 질투하지 않을까 걱정되는 구려. 꽃 같은 미녀 둘을 동시에 맞아들이니 말이오." "모, 몰라요, 상공."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두 여인이 영호명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이어 영호명의 너털웃음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데이몬』제6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