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관도를 누군가가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상처를 입은 듯 다리를 심하게 저는 나그네는 걸레 같은 천 조각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천 조각 틈으로 날카로운 눈빛이 번뜩였다. "아무래도 당문으로 가는 것은 힘들겠어. 꼬리를 밟힐 우려가 높을 것 같으니 말이야." 괴인의 정체는 냉유성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잠마련의 추격을 뿌리친 그는 지친 몸이 쉴곳을 찾아가고 있었다. 불구덩이 속의 혈전은 그에게 엄청난 상처를 안겨주었다. 비교적 준수하던 얼굴은 화상으로 인해 엉망이 되어버렸고, 열기로 손가락이 눌어 붙어 검도 제대로 쥐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몸 전체에 걸쳐 극심한 화상을 입었기 때문에 피부에서 진물 이 배어 나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운신조차 하지 못할 중상이 었다. 하지만 냉유성은 이미 절정의 극을 바라보는 내가고수. 뛰어 난 내공의 힘으로 그는 힘겹게나마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물론 몸의 내부 또한 온전하지 않았다. 몸속을 참습한 화기 로 인해 혈도 몇 곳이 막혀버렸기에 안전한고 곳에서 충분히 시간을 두고 뒤접어진 기혈을 다스려야 예전의 무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냉유성은 제일 먼저 의원을 찾아갔다. 전신을 뒤덮은 화농이 덧나지 않도록 응급처지를 해야 했던 것이다. 냉유성의 몸 상태를 본 의생은 혀를 내두르며 놀라워했다 "이런 중상을 입고도 움직일 수 있다니 놀랍구려." 의생은 즉각 약재를 써서 화상이 덧나지 않도록 소독을 주었다. 그러나 엉망이 된 외모를 회복시키는 것은 제 아무리 명의라도 불가능 한 일이었다. 냉유성은 그곳에서 며칠 머물며 기초적인 화상치료를 받았다. 입원기간은 그가 가진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였다. 돈이 떨어지자 의생은 머뭇거림 없이 냉유성을 내쫒찼다. 흉물스런 냉유성의 외모가 내방 환자들에게 혐오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이유였다. "화농은 어느 정도 소독이 되었소. 내가 더 이상 해 줄 것은 없소. 그러니 이만 떠나시오." 내친 김에 의생은 냉유성에게 천으로 흉측한 얼굴을 가리고 다니라는 조언을 덧붙였다. "그런 얼굴로 다니면 사람들의 시신이 곱지 않을 것이오 .가급적 가리고 다니기를 권하오." 안그래도 내방 환자들의 혐오감 어린 시선이 달갑지 않았던 터였기에 냉유성은 의생의 조언을 고이 받아들였다. 검술 연마 하는 데 얼굴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생각보다 싸늘했다. 그렇게 해서 냉유성은 땡전 한 푼 없는 몸으로 머나먼 여행을 시작해야 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젠장. 주공과 하는 여행이 얼마나 편했는지 이제 알겠군." 불현듯 데이몬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주공의 능력을 맹신하고 있는 그이기에 데이몬에 대해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워낙 출중하신 분이니 무사히 빠져 나오셨을꺼야. 당문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반드시 돌아오실테지. 냉유성은 우선 당문으로 가서 회복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는 오래지 않아 생각을 바꿔야 했다. 아직까지 당문은 힘을 되찾지 못한 상태이다. 그런 상황에서 잠마련의 이목에 포착될 경우 좋을 것이 없다. 그래서 그는 전혀 다른곳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그곳은 당문보다 비교적 가까운 곳이었다. "목가장으로 가야겠어. 그곳에서 몸을 좀 추스른 뒤 이동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내친 김에 깨달음에 대한 실마리도 잡아야 할것 같고......." 냉유성에게 절실한 필요한 것은 이번 혈전에서 얻은 꺠달음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는 이번의 경험이 자신에게 엄청난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꺠달음을 얻는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떄문이다. 보편적으로 정파 문인들은 명상을 통해 꺠달음을 얻는다. 이른반 정적인 행위를 통해 무아지경에 드는 것이다. 생사가 걸린 전투를 통해 몸속의 힘을 모두 소진한 상태에서 무아징경에 이르러 깨달음 얻는 방법. 그것은 통상적으로 사파 무사들이 마의 벽을 깨뜨리는 방법이다. 냉유성은 두 번째 방법, 동적인 행위를 통해 꺠달음을 대한 실마리를 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인적이 드문 산 속에 틀어박혀 수련에 몰두하고 싶군.' 하지만 냉유성이 처한 여건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에게 충분한 휴식과 좋은 음식으로 체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급선무 였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으로 수련을 하는 것은 주화입마로 들어서는 첩경이다. 그떄문에 그는 비교적 거리가 가까운 목가장에 가서 몸을 추슬러야겠다고 생각했다. 흉측한게 일그러진 입매에 슬쩍 미소가 맺혔다. "목 소저는 잘있는지 모르겠군." 목유경의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리자 절로 발에 힘이 들어갔다. 초무극과의 결투에서 다친 몸을 밤새워 간호해 주던 그녀. 유경에서 풍겨오는 풋풋한 사과향을 냉유성은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심신이 극도로 지친 상태라서 그런지 그리움이 더욱 짙어졌다 "그녀가 무척이나 보고 싶군." 냉유성은 지친 몸을 추슬러 걸음을 옮겼다. 목가장에 가면 지친 몸을 쉴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 젖어. 그 시각 데이몬은 잠마련으로 호송되고 있었다. 귀주에 총단을 둔 잠마련이니만큼 갈 길이 멀 수밖에 없다. 곽천도를 위시한 잠마련 무사들은 현재 표행으로 위장을 한 상태였다. 여기는 자타가 공인하는 무림맹의 영역, 무사히 잠마련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신분을 위장하는 수 밖에 없다. 표사와 쟁자수로 위장한 무사들이 눈을 번뜩이며 마차를 호위했다. 하나하나가 절정을 넘어서는 고수들인 만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표행이였다. 마차 안에는 두명의 무사들이 좌석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데이몬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수 없다. 곽천도만 상기된 눈빛으로 마차 밖을 연신 살필 뿐이었다. 잠시 후 그는 무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잠깐 나가 있어라." 무사들은 두말하지 않고 마부석으로 몸을 옮겼다. 워낙 실력이 출중한 무사들이라 몸을 살짝 뒤집는 것 만으로도 간단히 마부석으로 옮겨갔다. 주위를 다시 한 번 살핀 곽천도는 무사들이 앉아있던 마차 좌석을 뒤집었다. 그러자 숨겨져 있는 공간이 드러났는데, 거기에는 누군가 의식을 잃은 채 축 늘어져있었다. 바로 데이몬이었다. 곽천도는 눈을 빛내며 데이몬의 몸 이곳저곳을 짚었다. 짚어놓은 점혈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다. 잠시후 그의 얼굴에 만족한 빛이 떠올랐다. "잘 유지되고 있군. 내 점혈을 풀수 있는자는 드물지만 워낙 재주가 많은녀석이니 조심하는 것이 좋겠지." 그는 세심하게 신경써서 다시 한번 혈도를 짚었다. 잠마련 총단까지 이런 상태를 유지해 호송하는 것이 그가 세워놓은 계획이었다. 곽천도가 앉아있는 의자 아래에는 철마가 보관되어있다. 무림맹의 눈을 속이기 위해 특수제작한 마차이니만큼 별일이 없다면 무사히 잠마련으로 돌아갈 수있을 터였다. 곽천도가 앉아 있는 의자 아래에는 철마가 보관되어 있다. 무림맹의 눈을 속이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마차이니만큼 별일이 없다면 무사히 잠마련으로 갈 수 있을 터였다. 곽천도는 괴소를 흘리며 좌석을 다시 뒤집었다. "본단에 도착할 때까지 푹 자도록." 데이몬은 다시 칠흑의 공간 속에 갇혔다. 그런데 좌석이 닫히는 순간 데이몬의 눈이 번쩍 떠졌다. 눈동자에 스산한 빛이 서렸다. '제법 철두철미한 녀석이로군. 하긴, 그러니 사준환 놈의 오른팔 노릇을 하고 있겠지.' 만약 곽천도가 알았다면 기가 막힐 법한 일이다. 하지만 데이몬의 몸에는 원천적으로 어떤 점혈수법도 통하지 않는다. 어둠의 마력이 그 어떤 혹독한 환경에서도 몸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그 상태로 데이몬은 조용히 앞으로 할 일을 떠올려 보았다.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맺혔다. '어쩔 수 없군.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원래 그는 자진해서 묵회로 잡혀갈 계획이었다. 묵회의 강시에서 드러난 흑마법의 흔적을 조사하고 철마로 변해버린 영호명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잠마련의 무사들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데이몬은 계획을 대폭 수정해야 했다. 묵회가 잠마련의 하부조직임이 드러난 이상 생각을 조금 달리 해야 할 것 같았다. '아직까지 사준환과 대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이렇게 된 마당이니 어쩔 수 없군.' 이대로 잠마련에 잡혀간다면 십중팔수 사준환과 얼굴을 마주쳐야 한다. 그것은 데이몬이 그다지 원하지 않는 일이다. 사준환에 대한 원한이 뼛속 깊이 각인된 상태라서 얼굴을 마주칠 경우 이성을 잃지 않는다고 장담할 순 없다. 만약 자신의 정체를 사준환이 알게 된다면 쉽게 넘어가는 것은 요원한 일이기 때문에 데이몬은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은 놈을 감쪽같이 속여 넘겨야 해. 그런 다음 기회를 보아 사정을 알아내야 한다.' 냉유성을 탈출시킨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는 데이몬의 비밀을 제법 깊이 있게 알고 있다. 함께 잡혀갈 경우 자신에 대한 비밀이 사준환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잠마련의 전신을 배교다. 아무리 심지가 굳건한 무사라도 입을 열게 하는 온갖 사술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므로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녀석은 잫 탈출했는지 모르겟군. 같이 잡혀가지 않는 것을 보니 괜찮은 것 같기는 한데......,' 냉유성의 안위가 걱정되었지만 데이몬은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버렸다. 지금은 자신의 일을 걱정할 때였다. '잠마련에서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 정말 기대되는군. 어쨌거나 몸으로 부딪혀 뚫어내는 수밖에 없지.' 머리를 끄덕인 데이몬은 다시 눈을 감았다. 양 팔목에 채워진 팔찌가 마법을 쓰지 못하도록 구속하고 있었지만 어둠의 마력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 * * * * * * 한적한 관도를 웬 나그네가 걷고 있었다. 개방의 거지보다도 더 추레한 모습. 때가 꼬질꼬질 묻은 넝마를 걸치고 다 떨어진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나그네의 정체는 바로 냉유성이었다. 슬쩍 고개를 들자 흉측한 얼굴이 드러났다. 불에 타서 추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에 입술이 휘말려 올라가 이빨이 훤히 드러났다. 참담한 몰골이었지만 눈빛만은 맑았다. 뭉그러진 입술이 살짝 달싹였다. "무척 시장하군. 하긴, 꼬박 나흘을 굶었으니 그럴 수밖에......," 이곳까지 오기 위해 그는 상당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극심한 화상으로 몸 상태가 엉망인 데다가 내공도 절반 정도밖에 운용하지 못한다. 그런 몸으로 꼬박 보름을 걸어온 것이다. 화상을 치료하느라 냉유성은 가진 돈을 모두 탕진했다. 그나마 하남에서 벗어날 때 운 나쁜 강도를 만나 얼마간의 노자를 얻은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그 돈으로 만두를 사서 배를 채우고 잠은 노숙으로 해결했다. 그렇게 해서 냉유성은 보름 만에 이곳 섬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완전히 거지꼴이 되었지만 표정만은 밝았다. "대략 한 식경이면 목가장에 도착하겠군. 유경 소저가 무척이나 보고 싶은 걸?" 유경의 아리따운 얼굴을 떠올리자 냉유성은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오직 검에만 매진한 지 서른 해. 외로운 무사의 길을 걷던 냉유성에게 다가온 유경은 한 마디로 따사로운 햇살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그가 유경에게 느끼는 감정은 포근함이었다. "내가 검의 길을 걷는 동안 뒤에서 드러나지 않게 든든히 뒷바라지해 줄 수 있는 여인이야. 무사의 마음을 잘 이해해 주는 아가씨이지." 초무극과의 대결에서 제법 중한 상처를 입은 그를 유경은 그야말로 정성을 다해 간호해 주었다. 그녀의 섬세한 손길을 떠올리자 얼굴이 붉어졌다. 냉유성은 묵묵히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버렸다. "이번 기회에 유경 소저에게 내 진심을 밝혀야겠군. 일전에 떠나올 때 전혀 약조를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니 말이야." 냉유성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서서히 그려지고 있었다. "일단은 목가장에 가서 전력으로 몸을 추슬러야 해. 그런 다음 주공의 소식을 수소문해봐야겠군." 그의 눈빛이 살며시 가라앉았다. "시간이 된다면 이번에 잡은 깨달음의 근을 붙잡아봐야 하겠군. 쉽게 잡기 힘든 기회이니." 묵묵히 걷는 사이 어느덧 목가장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 * * * * 목가장의 정문을 경비하는 종삼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쌀쌀한 날끼에 부동자세로 서서 근무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무사도 아닌 내가 왜 검을 차고 정문에 서 있어야 하지?" 그는 목가장에서 잡일을 하는 하인이다. 벼를 베고 소에게 꼴을 먹이는 것이 그가 주로 하는 일이다. 검술이라고는 일초반식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삼은 푸른색 무복을 입고 그럴 듯한 장검을 허리에 찬 상태로 정문을 경비하고 있었다. 주인인 목가장주의 명령 때문이었다. 싸늘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자 종삼은 몸을 움츠리며 또다시 불평을 털어놓았다. "무가도 아닌데 웬 경비 무사람?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목가장은 무도를 추구하는 무가가 아닌 일반 장원이다. 그런 목가장의 정문에 문지기가 아닌 경비무사를 배치하는 것은 그다지 어울리는 일이 아니었다. 사실, 그것은 전적으로 장주인 목수곤의 허영심 때문이었다. 무가를 동경하는 탓에 목수곤은 이처럼 하인들에게 무복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 정문에 세워놓곤 하는 것이다. 보기에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가급적 덩치 좋고 건장한 하인을 선호했기에 종삼은 하루가 멀다 하고 무사 차림새를 하고 정문을 경비해야 했다. 하인들 중 가장 체격이 크다는 점이 종삼에게 닥친 불운의 시작이었다. "큰일이로군. 조금 있으면 겨울이 닥칠 터인데 이 짓을 계속 해야 하다니......," 툴툴거리는 사이 누군가가 목가장 정문을 향해 다가왓다. 그 모습을 확인한 좀삼은 부동자세를 취했다. 무가의 경비무사처럼 행동하라는 장주의 엄명이 있었기에 태만한 모습을 보여줄 순 없다. 마치 무사처럼 오른손을 검 자루에 댄 종삼이 방문객의 모습을 살폈다. '꽤나 추레한 차림새로군. 비도 오지 않는데 웬 죽립을 쓰고 있담?' 느닷없이 나타난 나그네의 정체는 바로 냉유성이었다. 마침내 목가장에 도착한 것이다. 정문에 다다른 냉유성은 죽립을 살짝 들어올렸다. "드디어 도착했군." 냉유성의 행동을 유심히 쳐다보던 종삼이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이시오?" 냉유성의 시선이 느릿하게 종삼에게로 돌아갔다. "귀 장에 볼일이 있어 왔소." "무슨 볼일인지 알 수 있겠소?" 종삼이 마치 위협하듯 눈에 힘을 주었지만 냉유성은 일절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자세만 봐도 상대의 경지를 알아차릴 수 있는 수중에 올라 있다. 그의 눈에 비친 종삼은 칼이나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까 의심되는 범인이었다. '목가장의 장주는 꽤나 무림을 동경하는가 보군. 따지고 보면 무림이 그리 좋은 곳도 아닌데 말이야.' 머리를 살짝 뒤흔든 냉유성은 조용히 종삼을 응시했다. "귀 장의 유경 소저를 만나러 왔소. 안으로 기별을 넣어주시겠소?" 종삼은 미간을 슬며시 모으며 대답했다. "유경 아가씨는 지금 출타 중이오. 나가신 지 한참 되셨으니 금세 돌아오실 거요." "그렇다면 이곳에서 기다리겠소. 그래도 괜찮겠지요?" 종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야 상관없소이다." 지극히 추레한 몰골의 사내를 정문 앞에서 기다리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종삼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목가장이 정식 무가도 아닌데 그런 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유경은 오래지 않아 돌아왓다, 동생들과 나들이를 갔다 왔는 지 즐겁게 재잘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어머 언니, 모자가 정말 잘 어울린다." "그럼. 이래봬도 옥문관 너머 만주에서 건너온 수달 모피인걸?" 화사하게 차려입은 유경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녀들을 본 종삼이 꾸벅 인사를 했다. "아가씨들 어서 오십시오. 그런데 유경 아가씨, 찾아온 손님이 있는데......," "손님이라니요?" 유경이 의아한 듯 눈을 치뜨는 순간 냉유성이 앞으로 쓱 나섰다. "유경, 나요. 내가 왔소." "누구신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문하는 유경을 보며 냉유성은 죽립을 벗었다. 순간 유경이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뒤에서는 아경과 소희도 다급히 비명이 새어나오는 입을 틀어막았다. 느닷없이 나타난 괴인의 모습은 그 정도로 흉측했다. 머리털이 다 타버려 번들거리는 대머리는 흉터로 일그러져 있다. 쉽게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일그러진 오관에 입술이 흉물스럽게 말려 올라가 치아와 잇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정말 꿈에라도 볼까 두려운 몰골이었다. 유경이 몸서리를 치며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누, 누굴 찾아온 거죠? 난 당신 같은 사람 몰라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유경의 태도에 냉유성은 씁쓸히 미소 지었다. "나요. 냉유성이오. 기억하지 못하겠소?" 그 말을 듣자 유경의 눈동자에 경악이 서렸다. 물론 그녀가 냉유성을 모를 리는 없다. 가문의 위기를 구해준 은인인데다 은연중에 마을을 주고 있는 무사가 아닌던가. 그런 냉유성이 저토록 흉측한 몰골로 변해 돌아오다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던 유경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 정녕 유성 가가가 맞나요?" 그때서야 냉유성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소. 이제 기억하는구려. 초무극과 싸워 부상을 입은 뒤 당신의 극진한 간호로 회복한 냉유성이 바로 나요." 냉유성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던 유경은 몸서리를 쳤다. "무, 물론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잖아요. 가, 가문을 위기에서 구, 구해준 은인인데......, 그런데 어쩌다가 그런 상처를......," 냉유성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강력한 적과 맞닥뜨렸소. 천신만고 끝에 목숨만은 건져 빠져 나오긴 했지만 불길 속을 뚫고 나오다보니 이 같은 화상을 입고 말았구려." "그, 그럼 데이몬 공은 어떻게 되었나요?" "주공의 행방은 나도 모르고 있소. 몸이 회복되면 수소문해 볼 생각이오." 냉유성은 그윽한 눈빛으로 유경을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목가장에 신세를 좀 져야겠소. 나를 좀 쉬게 해 주겠소? 게다가 난 지금 몹시 배가 고프다오." "물론이죠. 어서 들어오세요." 주위를 살짝 살핀 유경은 냉유성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경과 소희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문 안으로 사라지고 나자 비로소 그녀들의 말문이 트였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 있지?" "좀 날카로웠지만 그럭저럭 준수한 얼굴이었는데......, 꿈에라도 볼까 끔찍해." 냉유성은 허겁지겁 음식을 집어먹고 잇었다. 벌써 일주일 가까이를 굶었는지라 마치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음식을 뱃속으로 쓸어 넣었다. 유경은 그 광경을 착잡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시장하다는 말에 숙수들을 닦달해서 음식을 마련해 주었는데 냉유성이 한마디 말도 없이 먹기에만 열중하는 것이다. 마치 거지처럼 탐식하는 모습에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토록 당당하던 분이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과거 그녀의 눈에 비친 냉유성은 그야말로 멋들어진 무사였다. 항상 칼날처럼 절제된 모습을 보이던 그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망가진 채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린 채 판이하게 변한 냉유성의 모습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화상을 입어 일그러진 이목구비는 보기만 해도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정말 끔찍하게 변해버렸군. 똑바로 쳐다보기도 힘들어.' 그렇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없다. 어쨌거나 냉유성은 가문을 위기에서 구해 준 큰 은인이었다. 그때 유경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 정신없이 음식을 떠먹는 냉유성의 오른손을 본 것이다. 흉물스럽게 일그러진 오른손은 엄지와 검지가 붙어있었다. 경지가 일천하다고는 하나 그녀 역시 검을 익힌 무인. 저런 손으로는 검을 제대로 쥘 수 없다. 그 사실을 간파한 유경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렸군. 이젠 무사라고 부를 수도 없겠어.' 그녀가 지켜보는 사이 냉유성이 마침내 식사를 마쳤다. "휴우, 이제 살 것 같군." 냉유성은 만족스런 눈빛으로 입가를 훔쳤다. "미안하지만 내가 지금 몹시 피곤하오. 수고스럽겠지만 쉴 곳을 마련해 주시겠소?" 유경이 아무 말도 없이 손뼉을 쳤다. 그러자 시비가 다가와 문을 열었다. "소향이를 따라가세요. 숙소로 안내해 줄 거예요." "고맙소." 냉유성은 두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워낙 피곤했기 때문에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는 따듯한 눈빛으로 유경을 쳐다보았다. "지금은 좀 쉬어야겠소. 한잠 자고 일어난 뒤 애기하도록 합시다." 유경은 슬며시 냉유성의 시선을 외면했다. "일단 들어가 주무세요. 소녀에겐 할 일이 있네요." 태도가 다소 쌀쌀하게 변해버렸지만 냉유성은 눈치 채지 목했다. 전신을 장악한 피로감 때문이었다. 시비의 안내를 받아 방을 나서는 냉유성의 뒷모습을 보며 유경은 뭔가 결심한 듯 머리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군. 이젠 선택의 여지가 완전히 없어져 버렸어.' 숙소로 안내된 냉유성은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 씻기는커녕 누더기를 갈아입지도 않고 뻗어버린 것이다. 그 시각 유경은 동생들과 함께 아버지의 처소에 가 있었다. 냉유성이 방문했다는 말에 장주인 목수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냉유성 대협이 왔다고? 그렇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서둘러 달려 나가려던 목수곤을 유경이 붙잡았다.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아버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소라도 잡아 잔치를 벌여야......," 그 말을 들은 유경은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옆에 앉아 있는 아경과 소희 역시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그는 큰 부상을 입고 온 상태예요. 화상을 입었는지 얼굴마저 흉측하게 변해버렸더군요." "부상이야 치료하면 되는 것 아니냐? 그래도 명색이 절정고수인데......," 아버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유경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상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어요.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렸으니까요." 그제서야 목수곤은 몸을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돌이킬 수 없다니?" "그의 손을 봤어요. 화상으로 인해 엄지와 검지가 붙어버렸더군요. 그런 손으론 제대로 검을 잡을 수 없어요. 다시 말해 그는 더 이상 검을 쓸 수 없는 상태예요." 목수곤의 눈가에 놀라움이 스쳐지나갓다. "어, 어디서 그런 부상을 입었는지 모르겠군." 잠자코 있던 아경이 그 말을 받았다. "부상뿐만이 아니에요. 그의 얼굴은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예요. 저희들은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겠더군요." "그렇게 심하더냐?" "예." 고개를 끄덕이는 딸의 모습에 목수곤은 손을 턱에 괴고 생각에 잠겼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제나저제나 냉유성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그였다. 무가를 꿈꾸는 그의 입장에서 냉유성 정도의 절정 고수는 천금을 주고서라도 모셔 와야 할 보물덩어리였다. 절정 고수라면 충분히 문파 하나를 개파할 수 있는 인제다. 그래서 목수곤은 냉유성을 정말 극진히 대접했다. 가문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점을 떠나 정말로 매력적인 인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큰딸인 유경이 냉유성을 마음에 두고 있고, 그 역시 싫어하는 눈치가 아닌 것 같았기에 목수곤은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리고 냉유성의 마음을 잡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했다. 그 때문인지 냉유성은 이곳을 더나며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다짐했었다. '주공의 일이 일단락되면 돌아오겠습니다. 그때 자세한 것을 상의하도록 하지요.' 이후 목수곤은 부푼 가슴을 진정시키며 냉유성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냉유성이 가뭄에 들어와 준다면 목가장을 무림세가로 만드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미 본 장의 재력은 충분하다. 그만 데릴사위로 맞아들인다면 내가 눈을 감기 전에 목가장이 무리세가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목수곤은 하루하루를 굼에 부풀어 살았다. 그런데 냉유성이 돌아오긴 했다. 하지만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겨버린 것이다. "하필이면 그가 회복 불가능한 부상을 입고 돌아오다니......," 표정을 보니 큰 딸 유경은 이미 냉유성에게서 마음이 떠난 것 같았다. 어릴 때무터 키워왔던 탓에 목수곤은 그녀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관심을 가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다가 마음이 떠나면 마치 딴사람처럼 차갑게 변해버리는 것이 유경의 성격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살짝 입술을 깨문 유경이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되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겠어요?" "......," "황보세가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사실 유경에게는 냉유성 말고도 기대할 수 있는 구석이 한 군데 있었다. 바로 섬서 남단에 위치한 황보세가였다. 유경에게는 현재 황보세가의 청혼이 들어와있는 상태였다. 황보세가는 전형적인 무림세가로, 한때는 오대세가에 들었을 정도로 찬란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정사대전 기간 동안 다수의 무사를 잃은 데다 사파의 습격으로 본가가 불타버렸던 것이다. 특히 가문의 주력 고수들이 그때 대부분 전사했기 때문에 황보세가는 현재 오대세가에서 밀려날 정도로 세가 약해졌다.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새로이 일어난 다른 세가에 자리를 빼앗긴 것이다. 힘을 잃은 황보세가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같은 섬서에 있는 모용세가에 다수의 상권마저 빼앗긴 채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저력이 있는 만큼 황보세가는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있는 재산을 총동원해서 무사들을 키웠고, 가문의 주요 고수들이 필사적으로 연공실에 처밖혀 무공을 익혔다. 그리하여 마침내 가문의 식솔 한 명이 화경의 벽을 깨뜨리는 위업을 이뤄냈다. 현 황보세가 가주의 숙부인 황보운악이 초절정의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무림 문파에서 초절정고수의 존재는 문파의 위상을 뒤바꿀 정도로 크다. 단 한 명으로 타 문파에서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이다. 거기에 고무된 황보세가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가세를 확장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걸림돌이 적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가 금전적인 문제였다. 상당수의 상권을 모용세가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황보세가의 재정 상태는 극히 좋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묵회의 느닷없는 습격으로 인해 모용세가의 본가가 멸망해버린 것이다. 그 틈을 타서 황보세가는 이전에 잃었던 상권을 되찾아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러려고 해도 역시 재정문제가 걸림돌이었다. 되찾아온 상권을 지키려면 상당한 숫자의 무사가 필요했다. 비록 본가가 멸문했다고는 하나 하남의 모용세가 분가에는 아직까지 황보세가가 감당할 수 없는 무사들이 도사리고 있다. 하다못해 낭인들이라도 고용해서 머릿수를 불려야만 일을 벌일 수 있다. 그들이 목가장의 재력에 눈독을 들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비록 무림세가가 아니라고는 하나 목가장은 제법 넓은 토지를 보유한 재력 있는 가문이다. 그 때문에 황보세가에서는 목가장에다 정략결혼을 제의했다. 결혼을 통해 금전적인 후원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황보세가에서 내세운 신랑감은 황보운악의 손자인 황보명이었다. 제의를 받은 목수곤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무림세가를 꿈꾸는 그에게 황보세가의 제안은 쉽게 떨쳐버리기 힘든 유혹이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유경은 별로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녀에겐 더욱 믿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성 가가는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예요. 그가 도와준다면 목가장 자체의 힘만으로도 능히 무림세가로 인정받은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황보세가와 인연을 맺어도 가능하다. 혼약을 맺을 경우 황보세가에서 다수의 무사를 파견해 준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황보세가에서 내세운 황보명은 저보다 나이가 어려요. 그리고 떠도는 소문도 그리 좋지 않고요.' 만약 황보세가에서 그럭저럭 쓸 만한 자를 내세웠다면 유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승낙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보명은 떠도는 소문이 그리 좋지 않았다. 약관을 지난 나이였지만 무공에 대한 재능이 떨어지는 데다 게으르기까지 해서 황보세가 내에서도 황보명에 대해 거의 기대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또한 호색한 기질이 있어 황보세가의 시녀 몇 명이 그에게 몸을 버렸다는 풍문까지 떠돌았다. 그가 유일하게 가진 장점은 첫 손자이다 보니 할아버지인 황보운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점뿐이다. 그 전 말고는 볼 것이 없었기에 유경의 입장에선 냉유성이 더욱 매력적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황보세가의 제의를 곧바로 거절하진 않았다. "일단은 생각해 보겠다고만 말씀해 두세요. 유성 가가가 확실하게 올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알았다. 그렇게 하마." 이후 황보세가에서 여러 번 사람을 보내 의향을 물어왔지만 목수곤은 생각중이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그렇게 시간을 끌고 있는 사이 냉유성이 돌아왔다. 그것도 폐인이 되어. 그렇게 된 이상 유경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은 뻔했다. 검을 잡지 못하게 된 냉유성은 이제 매력적인 존재라고 할 수 없다. 목가장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전락한 것이다. 돌아가는 사정을 대충 짐작한 목수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유경이는 한 번 마음을 정하면 더 이상 고민하지 않지.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 목수곤은 조용히 유경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하겠느냐? 황보세가에 청혼을 승낙한다고 답장을 보낼까?" 유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주세요, 아버지. 가능한 한 빨리 혼인식을 치르고 싶네요." 한 번 포기한 이상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데다 바람기까지 있는 신랑이라고는 하지만 그녀로서는 황보세가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목가장이 무림세가로 거듭나는 길은 오직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 와중에도 유경의 머리는 분주하고 돌아가고 있었다. '별로 인정받지 못한다고는 하나 그의 할아버지는 황보세가 제일의 고수이다. 나중에 그분을 잘 꼬드겨서 나와 혼인할 황보명 공자를 직접 지도해달라고 해야겠어.' 비록 소문이 좋지 않기는 하지만 황보명은 상당히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괴물이 된 냉유성과 자연스럽게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런 괴물과 얼굴을 맞댁 살 수는 없으니까. 설사 무공이 온전하다 하더라도 내키지 않아.' 그녀의 귓전으로 아버지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그럼 냉유성은 어떻게 해야겠느냐?" 퍼뜩 정신을 차린 유경은 냉랭히 내뱉었다. "정신을 차리면 곧바로 내쫓아야죠." "그건 너무하지 않느냐? 그래도 명색이 가문을 구해준 은인 인데." "어쩔 수 없어요. 쓸모없는 인연은 빨리 끊는 게 나아요. 저는 두 번 다시 그자와 얼굴을 맞대고 싶지 않네요." 목수곤은 그리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렇게 하마." * * * 2. 마왕, 고문 앞에 무릎 꿇다 냉유성은 꼬박 이틀을 곯아 떨어졌다. 잠마련 무사들과 싸우며 원기를 크게 소모한 데다 오랜 여행으로 말미암아 체력이 바닥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정신을 차린 냉유성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휴우. 이제 좀 살 만하군." 정신을 차린 냉유성은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몸 내부도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내부를 다스려서 치료를 해야 한다. 운기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냉유성은 얼굴을 찡그렸다. "일주천이 완전히 되지 않는군. 화기가 침습해 혈맥 몇 곳이 뒤털렸어. 아무래도 충분히 시간을 두고 운기해서 혈도를 추슬 러야겠군."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었기에 냉유성은 소주천 몇 번으로 운 기조식을 마쳤다. 일단은 바닥난 체력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냉유성은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지나가던 시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장하데 잘되었군." 반가운 표정을 지은 냉유성은 소리쳐서 시비를 불렀다. "잠깐 나 좀 봅시다." 냉유성을 본 시비가 멈칫했다. 얼굴에 곤혹스런 표정이 떠올랐지만 시비는 얼른 표정을 바꾸며 냉유성에게 다가왔다. "불러 계시옵니까?" "내가 지금 몹시 시장하오. 그러니 먹을 것을 좀 가져다주시겠소?" 머뭇거리던 시비가 알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사옵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잠시 후 들어온 음식상을 본 냉유성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그마한 소반에는 잡곡이 섞인 거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 가 놓여 있었다. 잠들기 전에 먹었던 음식과는 판이하게 달랐기에 냉유성은 머리를 흔들었다. "거친 음식으로 속을 다스리라는 뜻인가? 이해할 수가 없군." 형편없는 음식이기는 하지만 냉유성은 별로 음식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다. 거친 무사의 생활에 익숙해 있던 냉유성은 밥 한 그릇을 깔끔히 비웠다. "간장을 찬으로 하니 그럭저럭 먹을 만하군." 운기조식을 하기 위해 다시 몸을 돌리려는 순간 음식을 가져온 시비가 냉유성을 불렀다. "이방에는 다른 손님이 들어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방으로 바꿔드리겠습니다." 냉유성이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을 대로 하시오." 하지만 안내된 방을 본 냉유성은 아연해해야했다. 시비가 안내한 곳은 방이 아니라 헛간이었다. 바닥에 짚이 수북이 쌓여 있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이 도저히 사람이 머물 곳이 아니었다. 냉유성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시비를 쳐다보았다. "이곳에서 있으라는 말이오?" 시비는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대접은 형편없었지만 적어도 태도 하나만은 공손한 편이었다. "장주님의 분부이십니다." 냉유성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장주가 도대체 왜 자신에게 이렇게 대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냉유성에게는 뒤틀린 내기를 다스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때문에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헛간으로 들어갔다. '뭐 나중에 물어보면 되겠지.' 헛간 속에 들어간 냉유성은 정좌를 하고 앉았다. 그모습을 조소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던 시비가 재빨리 사라졌다. 든든하게 배를 채운 터라 냉유성은 머뭇거림 없이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충분한 휴식과 영양공급으로 체력을 회복하고 계속된 운기조식으로 기혈을 정상화시키려는 것이 냉유성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목가장의 푸대접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아예 식사도 넣어주지 않았다. 그로인해 냉유성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헛간을 뛰쳐나왔다. "안돼겠군.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지 한 번 물어봐야겠군." 그는 머뭇거림 없이 목가장의 장주를 찾아갔다. 장주는 집무실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바깥쪽에서 소란이 일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일이냐?" 문을 열자 냉유성이 앞을 가로막는 하인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광경이 들어왔다. "안됩니다. 장주님은 지금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 "잠시면 되오. 물어볼 것이 있소." 그 모습을 본 목수곤은 앞으로 쓱 나섰다. "비키도록 하라." 그가 손을 들자 하인들이 뒤로 물러났다. 목수곤은 짐짓 굳은 표정을 지으며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이곳까지 무슨일이시오?" 몹시 냉랭한 반응이었기에 냉유성은 잠시 머뭇거렸다. 활짝웃으며 환대하던 예전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기에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잠시 후 마음을 가라앉힌 냉유성은 장주를 쳐다보았다. "제가 무슨 실수를 했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대접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혹시 제가 뭐 잘못한게 있는지 알아보러 왔습니다." 목수곤은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이 잘못한 것은 없소. 그리고 대접이 달라진 것은 우리집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아서 그런거요." "......" "요새 지대가 제대로 걷히지 않아서 사정이 많이 어렵소. 그러니 당신도 이만 갈길을 가는 것이 어떻겠소?" 그 말에 냉유성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목수곤은 씁쓸히 웃으며 냉유성의 시선을 외면했다. 사실 가문의 은인에게 할 대접은 아니었다. 냉유성과 그의 주공이 아니었다면 장원은 벌써 초무극의 손아귀에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일 뿐이다. 딸의 미래가 걸려 있는 일이기에 목수곤은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냉유성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유경 소저를 잠시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그 아이는 지금 바쁘오. 당신을 만날 시간이 없소." 냉유성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유경 소저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반드시 만나서 마음을 들어보고 싶군요.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냉유성의 고집에 목수곤은 혀를 찼다. 저런 눈빛을 가진 자는 여간해서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 측은한 마음에 그는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어쩌다가 무공을 잃어가지고....... 그나저나 몰골이 정말 흉악하기는 흉악하군. 어지간햇다면 유경이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텐데." 냉유성이 물러갈 기색을 보이지 않자 목수곤은 어쩔수 없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잠깐 기다려 보시오. 들어가서 딸아이의 의향을 한 번 물어보리다." 내실에 들어가자 아경과 소희가 아버지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되었어요, 아버지?" "순순히 가겟다고 하던가요?" 조용히 머리를 내저은 목수곤은 유경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쉽게 물러갈 것 같지가 않다. 반드시 널 만나봐야겠다고 하더구나." 막내인 소희가 입술을 삐죽였다. "흥! 무사라고 하더니 자존심도 없나보군. 알아서 순순히 물러가면 서로가 좋잖아?" "몰골이 정말 흉악하긴 하더구나. 아무튼 어떻게 할생각이냐?" 목수곤의 말에 유경은 살짝 입술을 베어 물었다. "알겠어요. 제가 나가서 만나보겠어요." 내실을 나서자 마당에 버티고 서있는 냉유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흉측한 용모가 쉽사리 적응되지 않았기에 유경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기척을 느낀 냉유성이 고개를 돌렸다. 마침내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유경.' 이글이글 타오르는 냉유성의눈빛과는 달리 유경의 눈빛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머뭇거리던 냉유성이 힘겹게 입을 얼었다. "한 가지만 물어보겠소, 유경 소저." "말하세요 "그때 나누었던 약속이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었소?" 냉유성은 아직까지 유경을 믿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대하던 태도는 결코 꾸며낸 것이 아니다. 극진한 정성에 냉유성은 유경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고,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호감이 연정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유경은 전혀 동요하지않고 차분히 대답했다. "무슨 약속을 말하시는 건가요?" "......." "제가 당신에게 뭔가를 약속한 것이 있던가요?" 냉유성은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물론 유경이 직접 입을 열어 약속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묘령의 처녀가 어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유경은 시간이 날 때마다 몸짓과 눈빛으로냉유성에대한 연정을 표시했다. 결코 꾸민 것이 아니었기에 냉유성으로서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냉유성은 믿을수 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이해할 수가 없소. 그때 날 대하던 당신의 태도는 결코 거짓이 아니었소. 난 바보가 아니오." "물론 거짓은 아니죠. 어쨋거나 당신은 우리 가문을 위기에서 구해준 은인이잖아요? 저희 목가장을 위해 싸우다 다쳤으니 저로서는 정성을 다 할 수밖에 없었지요." 착잡한 표정으로 유경을 쳐다보던 냉유성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혹시 내 몰골 때문에 마음을 바뀐것이오?" "그렇지 않아요. 애당초 마음이 없었는데 어찌 바꿀 수 있겠어요?" "난 내 안목과 판단력을 믿소. 난 그때의 당신이 나에게 진심을 보였다고 확신하오. 그러니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오. 비록 외모가 변하긴 햇지만 나에겐 고칠 방도가 있소."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 냉유성을 보며 유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냉유성이 이 정도로 자신에게 연정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상황은 그냥 웃어넘길 분위기가 아니다. 옆에서는 목수곤이 암암리에 혀를 차고 있었다. '어리석은 사람. 매달린다고 마음을 바꿀 유경이 아닌데. 내딸이지만 냉정할 땐 한없이 냉정한 아이이거늘.....' 냉유성을 설득할 말을 찾던 유경이 마침내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죠." "뭐요. 말해보시오." "검을 한 번 뽑아보시겠어요?" 그 말에 냉유성이 멈칫했다. 검을 제대로 파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유경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왜 뽑지 않나요? 어서 뽑아보세요." 거듭되는 그녀의 채근에 냉유성은 입술을 깨물며 검을 뽑아 들었다. 왼쪽 허리춤에 차고 있었기에 왼손으로는 뽑기는 불가능하다. 안간힘을 써서 검을 뽑았지만 화상으로 일그러진 손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냉유성은 검이 반쯤 뽑힌 상태에서 그만 검 손잡이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유경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역시 내 눈이 정확했어. 저자는 이제 검을 들 수 없어. 뭐, 왼손을 수련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저자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면 다시 익히는 것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지.' 대부분의 무사들은 오른손으로 검을 익힌다. 드물게 좌수검법을 수련하는 자도 있지만 경지에 오르는 이는 드물다. 사파나 살수가 아니면 찾아보기 힘든 것이 좌수검법이다. 간혹 오른팔을 잃어 대신 왼손으로 검을 수련하는 무사들이 있긴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성공한 무사는 무림사를 뒤져봐도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경지가 높은 무사일수록 좌수검을 수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아진다. 검형이 완전히 몸에 베어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경은 냉유성이 재기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단정 지었다. "검을 뽑지 못하시나보군요." 냉유성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뽑을 수 있소."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일그러진 손으로 검의 무게를 지탱하는 것은 무리였다. 철컹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검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냉유성이 초점 잃은 눈빛으로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검을 멍하니 응시했다. 귓전으로 한없이 차가운 유경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이제 당신은 무사라고 볼 수 없겠군요. 이거 미안해서 어쩌죠? 저는 무사 아닌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거든요." 멍하니 검을 응시하던 냉유성은 푸들푸들 웃었다. "그랫었군." "......." "애당초 당신은 나에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었어. 내검술 실력에 관심을 가졌었던 거야." 유경은 시인도 부정도 하지 않고 묵묵히 냉유성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내가 바보였어.' 냉유성은 비로소 헝클어진 실마리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니 모든 사실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냉정을 되찾은 듯 냉유성의 눈빛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말은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변해있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유경 소저." "......." "소생이 뭔가를 착각한 탓에 소저를 그만 곤혹스럽게 만들었군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유경은 냉유성이 마음을 정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그녀가 원한 것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시큰했다. 그러나 그녀는 억지로 흔들리는 자신을 추슬렀다. '하지만 어쩌겠어. 여기서 마음이 약해지면 안돼.' 냉유성은 목수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저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그동안 폐 많이 끼쳤습니다." "아, 아니오. 도리어 우리가 미안하오." 목수곤은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며 마주 답례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제 검은......" 냉유성은 느릿하게 허리춤에 찬 검집을 풀었다. 그리고 그것을 나동그라진 장검 옆에 고이 내려놓았다. "나중에 검을 쥘 수 있게 되면 찾으러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잘 보관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냉유성은 머뭇거림 없이 몸을 돌렸다. 그의 쓸쓸한 뒷못브을 목가장 사람들이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목가장을 나서는 냉유성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서른이 넘어 처음 찾아온 연정이 산산이 깨어져 버렸군.' 그는 그 정도로 유경을 믿었다. 그녀의 태도가 결코 거짓이 아니라 생각했고 평생의 반려로 삼을 생각까지 했던 그였다. 하지만 유경은 참담한 배신감을 안겨주며 냉유성의 마음을 사정없이 짓밟아버렸다. 그러니 가슴이 아프지 않을 도락 없다. 예상보다 충격이 컸는지 냉유성의 눈가에 슬며시 눈물이 비쳤다. 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눈물을 털어 버렸다. "애초부터 어긋난 일이었다. 난 이미 검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런 내가 다른 데 눈을 돌릴 이유가 없었거늘 헛된 기대를 하다니......," 마음의 상처로 인해 결심이 단단히 굳혀지고 있었다. "내 평생의 반려는 오로지 검뿐이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딴마음을 먹지 않으리리라." 텅 빈 허리춤이 몹시 허전했다. 주공인 데이몬으로부터 받은 마법검은 미련 없이 목가장에 두고 온 상태. 하지만 냉유성은 섣불리 검을 찾으러 갈 생각이 없었다. "다시 검을 쥘 수 있을 때까지 수련에 매진할 것이다. 그리고 검에게 부끄럽지 않을 때가 되었을 때에야 찾으러 갈 것이다." 냉유성이 향하는 곳은 사천 방향이 아니었다. 당문은 그의 몸 상태로 가기엔 너무 먼 곳에 위치해 있다. 그는 지금 섬서의 남동쪽으로 향하고 있다. 그곳에는 냉유성이 몸을 추스르고 더불어 무공수련을 할 수 있을 만한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기묘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사르륵 사르륵 매우 규칙적으로 흘러나오는 소리는 차가운 석실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스산한을 자아냈다. 소리를 내는 자는 석실의 중앙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찾백한 얼굴의 중년인이었다. 그는 고요하게 앉아 칼을 갈고 있었다. 석실을 가득 메운 괴음은 금속이 숫돌과 마찰하며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중년인의 용모는 몹시 괴이했다. 마치 종잇장처럼 얇은 입술에 양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매에서는 눈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칼날같이 날카로운 콧날과 쭉 바진 하관이 왠지 모르게 중년인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안으로 보이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엽초는 그런 세간의 평이 결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입술을 비집고 무미건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외모만 그렇지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야. 이래봬도 난 아주 따듯한 마음을 가진 남자라고......," 물론 그것은 엽초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가 속한 집단, 잠마련의 무사들 대다수는 엽초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엽초는 잠마련에서 전문적으로 고문을 전담하는 고문기술자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악명이 자자한. "하지만 그대로 난 내 직업에 자부심을 느껴. 단단한 껍데기에 둘러싸인 자들을 양파 벗기듯 하나하나 벗겨내는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거든?" 그는 지금껏 무수한 백도의 무사들을 고문해 왔다. 심지가 굳건한 소림승을 비롯해 세상사에 달관한 무당이나 화산의 도사들, 칼로 찔러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세가의 무사들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수가 그의 손을 거쳐 갔다. 물론 실패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의 손속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엽초에겐 사람의 의지를 무너뜨리는 데 특출 난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정말 재미있는 일이야. 사람의 변해가는 모습을 감상하는 것은 언제나 내 피를 끓게 하지." 그는 잠마련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고문기술자였다. 그의 손에 걸린 포로는 구 할 이상이 견디다 못해 입을 열고 만다. 타 고문기술자의 성공률이 칠 할 안팎임을 감안하면 확실하게 능력을 검증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누군가를 고문하기 위해 장비를 준비하고 있었다. 곽천도의 염라대가 무림맹 인근까지 파견 나가서 잡아온 자였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손님의 의지를 무너뜨리라고 했지? 뭐 그거야 내 전문이니까." 이미 포로에 대한 정보는 사소한 것까지 엽초에게 전달된 상태였다. "색목인이라......, 이거 정말 피가 끓는군. 색다른 놈을 고문하는 것은 정말 즐겁단 말이야. 색목인을 고문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맛일까?" 벌써부터 짜릿한 손맛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손맛으로 인해 이 직업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엽초였다. 칼을 들어 예리함을 살펴본 엽초는 칼날을 퉁겨보았다. 팅 칼날은 만족스러울 정도로 예리하게 갈려 있었다. "시간이 다 되었군. 손님을 너무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지." 그에게 내려진 명령은 색목인의 의지를 무너뜨리는 것 이다. 대신 거기에는 단서가 하나 붙었다. 추후에 련에서 중요한 일을 담당할지도 모른는 자이니만큼 근골에 심각한 손상이 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단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엽초에겐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인간에게 고통을 가하는 수천 가지의 수법 속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수법을 오백 가지나 만들어 내었을 정도로 그는 전문가였다. 웬만한 상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정신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오늘은 어떤 방법으로 손님에게 애정을 표시해 볼까? 너무 많아서 고르는데 시간이 걸리겠는 걸?" 작업도구를 챙겨든 엽초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처소에서 포로가 갇혀있는 수옥까지는 제법 먼 거리였다. 그동안 고문수법을 결정하면 되기에 그는 최대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덜컹 문이 열리고 석실 내부의 정경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제법 중요한 요인인 듯 포로는 감옥이 아닌 독립된 석실에 갇혀 있었다. 포로는 석실 구석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가늘게 몸을 떨고 있는 것을 보니 꽤나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엽초는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겁이 많은 손님이로군. 모용세가의 고문을 견뎌냈다는 말에 어느 정도 기대를 했건만......,' 그는 포로가 의지력이 굳건하고 심지가 견정할수록 흥분을 느낀다. 그런 자에게 고문을 가하며 조금씩 변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엽초에게 정사(精事)보다 더한 쾌락을 가져다 준다. 그런 명에서 이번 손님은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벌써부터 겁을 집어먹었다면 의지를 꺾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엽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문 도구를 작업대 위에 늘어놓았다. 온각 종류의 고문도구들이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었다. 퍼렇게 빛나는 고문도구를 본 포로가 겁먹은 눈빛으로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 눈빛을 본 엽초는 혀를 찼다. 벌써부터 이 정도라면 의지를 무너뜨리는 데 일 다경도 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할 수 없지. 사자는 토끼를 잡는 데도 전력을 다한다고 했다. 상황을 보니 별로 건드리지 않고도 목적을 달성 할 수 있을 것 같군.' 장침 하나를 집어든 엽초는 불행한 포로를 향해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귀빈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성심껏 접대를 해드리겠습니다." 엽초의 예상은 적중했다. 일 다경도 지나지 않아 포로는 완전히 의지가 꺾여 버렸다. 생각해 온 고문수법 중 단 두 개만 썼는 데도 상대는 완전해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렸다. "마, 말하겠소. 뭐든지 말이오. 대, 대관절 원하는 것이 뭐요?" 오랜 고문경험을 되새겨볼 때 확실하게 자백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십 할에 가까웠다. '되었군. 어차피 심문은 내 영역이 아니니까.' 임무를 마친 엽초는 고문도구를 다시 챙겼다. 몇 가지 쓰지 않아 장비를 세척할 필요도 없었다. 장비를 모두 챙겨 든 엽초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포로를 응시했다. 눈빛만 닿았을 뿐인데 포로는 겁에 질려 파들파들 떨었다. "이제부터 손님을 심문하실 분이 들어오실 겁니다. 최대한 협조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 그러면 다시 제가 손님을 접대하는 일이 생길 테니까요." 엽초는 어떠한 경우에도 포로에게 막말을 하지 않았다. 최대한 부드럽고 사근사근하게 말을 건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 번 그에게 고문을 받아본 포로는 그것을 험악한 욕설보다도 더욱 두려워 했다. 눈앞의 색목인 포로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아, 알겠소. 모, 모든 것을 털어놓으리다."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엽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 정도로 해 두었으니 다음은 심문담당자가 들어올 차례였다. 석실을 나온 엽초는 옆의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두 명이 우두커니 서서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처럼 긴장하지 않는 엽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두 명 중 한 명이 잠마련의 무사 수천 명의 생사여탈권을 관할하는 절대자였기 때문이다. 바로 천기대제 사준환이 그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오체투지를 했다. "대제를 뵈옵니다." 그러나 사준환은 심드렁한 태도로 손을 내저었다. 그럼에도 염초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옆에 서 있던 곽천도가 인상을 썼다. "일어나라." 엽초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귓전으로 잔잔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생각보다 작업이 빨리 끝났군." 엽초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쉬운 자였습니다. 고문을 하는 입장에서 가장 편한 자라고 볼 수 있죠." "그래, 순순히 입을 열 것 같던가?" "모르긴 몰라도 마누라 속옷 색깔까지 낱낱이 털어놓을 것입니다. 확실하게 공포를 느끼게 해 주었으니 감히 딴 생각을 하진 못할 것입니다." "그래? 예상 밖이로군." 사준환은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곽천도가 엽초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수고했다. 이만 나가보거라." "존명." 허리를 직각으로 꺾은 엽초는 머뭇거림 없이 방을 나섰다. 그가 나가고 나자 사준환이 흥미롭다는 듯 눈빛을 빛냈다. "흑법사의 말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군. 그런 종류의 술사들은 육체적인 고통에 취약하다고 해서 특별히 고문 기술자를 투입했는데 말이야." "확실하게 처리했을 것입니다. 일 하나나는 깔끔하게 하는 자이니까요." "혹시라도 거짓으로 꾸몄을 가능성은 없나?" 곽천도는 묵묵히 머리를 흔들었다. "엽초의 눈을 속이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워낙 경험이 많아서 포로의 눈동자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다고 하더군요." "그래야지. 그래야만 고독을 투입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의지력이 꺾인 상태에서 투입해야만 고독이 확실하게 자리 잡을 수 있어. 아무래도 모용세가에서는 색목인에게 고문을 건성으로 했나보군. 이렇게 손쉬운 자의 입을 왜 열지 못했을까?" "아마 말로만 회유했을 것입니다. 가문의 은인인 셈이었으니 심하게 손을 쓰지 못했겠지요. 애석하게도 모용세가에는 첩자가 없어 자세한 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곽천도의 말을 들은 사준환은 석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우리의 위업을 앞당겨줄 자를 한 번 만나볼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석실에 들어서자 한쪽 구석에 잔뜩 웅크리고 앉은 금발머리 색목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비교적 멀쩡한 모습이었다. 사준환과 곽천도가 들어서자 그는 고개를 숙여 시선을 외면했다. "이자가 바로 그자인가?" "그렇습니다. 이자로 인해 본 련이 제봅 상당한 타격을 입었지요." "맞아. 묵회주는 아직까지 효용가치가 많이 남아있는 자야. 그런데 이놈 때문에 계획이 송두리째 헝클어져 버렸지." 곽천도가 구석의 의자를 가져와 색목인 앞에 놓았다. 사준환은 당연하다는 듯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럼 이제부터 심문을 시작하겠다." 곽천도가 색목인의 앞에 가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겁먹은 듯한 색목인의 시선이 곽천도에게로 향했다. 엽초가 확실하게 상대의 기를 꺾어 놓았다는 생각을 하며 곽천도는 입을 열었다. "이름은?" 머뭇거리던 색목인이 입을 열었다. "데, 데이몬이오." "이름뿐인가? 색목인에겐 성이 없나보군." "데이몬 솔로요. 솔로가 성이오." 체념한 듯 눈을 깐 채 대답하는 색목인을 보며 곽천도는 심문이 무척 쉽겠다고 단정했다. "어디에서 왔나?" "트루베니아에서 왔소. 이곳에서 엄청나게 떨어진 곳이오." "무엇 때문에 왔나?" "여, 연구 목적이오. 이, 이동 마법을 연구하다 이곳까지 오게 되었소." 곽천도의 눈가에 이채가 서렸다. "꽤나 젊어 보이는 외모로군. 중원말도 유창하고..... 어떻게 된 연유인지 말해라." 잠시 고민하던 색목인이 순순히 털어놓았다. "외, 외모는 마법으로 꾸민 것이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이렇게 하고 다니오. 중원말은 내가 살던 곳을 방문한 중원인에게서 배운 것이오." 곽천도의 심문이 계속 이어졌다. 색목인은 비교적 순순히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동안 사준환은 눈을 빛내며 색목인의 말에 대한 허실을 간파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조금도 발견되지 않았다. '흑법사에게서 들은 것과 거의 다르지 않는군.' 흑법사는 날므대로 추정한 사실을 사준환에게 미리 말해주었다. 그는 색목인을 차원이동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중원에 오게된 수준 높은 흑마법사로 간주하고 있었다. 색목인의 말은 흑법사의 추정과 거의 맞아떨어졌다. '재미있군. 흑법사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자는 독술에 해박한 것이 아니다. 그저 모든 독을 무위로 돌릴 수 있는 해독마법이란 술법을 익힌 것뿐이지. 어쨌거나 상관할 것은 없겠군. 이정도라면 이용해 먹는데 무리가 없으니 말이야." 색목인이 순순히 대답했기에 심문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무림맹에선 도대체 어떻게 모용세가의 가주를 제압했지?" "마법을 적절히 응용한 것이오. 여러사람은 몰라도 한 사람정도는 제 아무리 강한 자라고 해도 꺾을 수 있소." "묵회주와 무사들은 어떻게 처리했나?" "그들 역시 마법을 적절히 이용해서 처리했소. 주문을 외울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정도는 처리할 수 있소." 옆에서 색목인을 주시하던 사준환은 상념에 잡혀있었다. '그랬군. 그래서 곽천도와 염왕대에게는 변변찮게 저항하지 못하고 사로잡혔군.' 더이상의 심문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사준환은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곽천도가 심문을 중지했다. 물론 그전에 단단히 으름장을 놓는 것은 잊지 않았다. "좋아. 네말을 믿어주겠다. 하지만 네가 본 련에 크나큰 피해를 입힌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대가로 넌 이곳에 남아 본련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어야 한다." "......" 색목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더이상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지 사준환이 몸을 일으켜 석실을 나섰다. 거대 조직 잠마련의 수장이니 만큼 그에겐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하지만 그는 보지 못했다. 고개를 수그린 색목인의 눈에서 번져 나오는 섬뜩한 눈빛을. 사준환이 나가자 곽천도의 표정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천기대제 사준환은 그 존재감만으로도 그를 긴장시키는 존재였다. 곽천도는 매서운 눈빛으로 색목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볼까?" 곽천도는 품속에 손을 넣어 조그마한 함을 꺼냈다. 속에는 두개의 자기병이 들어있었다. 짝짝 손뼉을 치자 두 명의 무사가 사내 한 명을 끌고 들어왔다. 포줄에 꽁꽁 묶여 있는 사내는 잠마련 하급 무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어지간히 구타당한 듯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이자는 무림맹에서 들여보낸 첩자이다. 너에게 한 가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특별히 데리고 왔다." 그가 손짓을 하자 무사중 한 명이 사내의 입을 강제로 벌렸다. "읍, 읍." 사색이 된 사내가 도리질을 쳤지만 저항할 도리는 없다. 무사가 강압적으로 사내의 입을 벌리자 곽천도는 자기병 하나를 꺼내어 깨뜨렸다. 쨍그랑 자기병의 파편 사이로 두 마리의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소개하겠네. 이것들은 고독(蠱毒)이라고 물건이야. 말을 듣지 않는 녀석을 길들이는 데 확실한 효과를 보이는 것이지." 고독은 마치 송충이처럼 생긴 벌레였는데 한 마리는 손가락 두마디 정도 되어보였고 나머지 한 마리는 실처럼 가늘었다. 곽천도는 그중 작은 고독을 젓가락으로 집어든 뒤 벌어진 사내의 입에다 집어넣었다. "아, 안 돼." 사내가 마구 도리질을 쳤지만 고독은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꿈틀거리며 목구멍 속으로 파고 들었다.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고독. 고개를 돌린 곽천도는 음침하게 웃었다. "작은 놈은 자고(子蠱)라고 하지.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큰 놈은 모고(母蠱)야. 둘은 심령 상으로 연결이 되어있어." 잠시 말을 끊은 곽천도는 비열하게 웃었다. "이 정도 시간이면 뇌 속으로 파고 들었겠지?" 고개를 돌려 사내를 힐끔 쳐다본 곽천도는 발을 들어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모고를 사정없이 짓밟아 버렸다. 콰직 모고의 몸이 터지며 진액이 확 뿜어졌다. 그 순간 처절한 비명소리가 석실을 가득 채웠다. "끄아아악!" 사내가 별안간 벼락을 맞은 것인 양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며 까뒤집혔고 칠공을 통해 피가 스멀스멀 배어나왔다. 마치 학질이라도 걸린 듯 몸을 떠는 것을 보니 고통이 극심한 모양이었다. 사내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꺾었다. 코와 입, 그리고 귀에서 피를 낭자하게 쏟아낸 채 눈을 까뒤집은 모습이 무척이나 괴기스러웠다. "모고가 죽으면 자고도 따라죽어. 물론 자고가 뇌 속에 파고든 인간도 역시 살아남을 수 없지.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어김없이 작용하니 무척 효과적이지. 우린 이런 식으로 말을 듣지 않는 자를 통제한다네." 색목인이 얼굴을 하얗게 질린 채 고개를 푹 수그렸다. 태연히 사람을 죽이는 모습에 완전히 질린 모양이었다. 곽천도는 유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만 잘 들으면 이처럼 되지 않을꺼야. 그러니 잘 알아서 선택하도록...." 말을 마친 곽천도가 손짓을 했다. 그러자 무사들이 다가와 색목인의입을 벌렸다. "읍, 읍." 색목인이 도리질을 쳤지만 무사들의 손길은 우악스러웠다. 그 모습을 보던 곽천도는 마지막 남은 자기병을 들어 모로 기울였다. 그곳에서도 한 쌍의 자고와 모고가 튀어나왔다. "고독이란 놈들은 위기를 느끼면 신경독을 발산하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하지. 맨 살갗에 닿으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렵거든." 젓가락을 이용해 자고를 집어든 곽천도는 그것을 색목인의 입 속에 집어넣었다. 꿀꺽 목구멍에 이물질이 지나가는 것을 느낀 색목인이 몸서리를 쳤다. 곽천도는 꿈틀거리는 모고를 다시 자기병에 집어넣었다. "이것은 내가 잘 보관해 두지. 모쪼록 허튼 생각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용무를 마친 곽천도는 몸을 일으켰다. 고독을 투입했으니 더 이상 볼일이 없었다. "흑법사에게 보내면 알아서 일을 시킬 테니 걱정할 것은 없겠군." 그사이 무사들이 바닥에 널브러진 사내의 시신을 수습했다. 곽천도와 무사들이 나가자 석실 안에는 색목인만이 홀로 남겨졌다. 잔뜩 웅크린 색목인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물론 그는 데이몬이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서글픈 빛이 서려 있었다. '이런 모멸감을 느껴야 하다니, 마왕 체면이 말이 아니로군.' 하지만 한 가지는 성과가 있었다. 사준환과 곽천도의 눈을 속이는 데는 확실하게 성공한 것이다. 본의 아니게 겁쟁이 흉내를 내야 했기 때문에 그의 심기는 그리 편하지 않았다. '두 번 다시 이런 짓을 하고 싶지 않군. 드래곤 앞에서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은 내가 겁쟁이 흉내를 내야 하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준환의 눈을 확실하게 속여야만 기회가 찾아올 테니까. 처음 고문 전문가가 들어왔을 때 데이몬은 연극을 시작햇다. 사준환으로 하여금 자신을 의지가 박약한 전형적인 학자로 생각하게 하기 위한 연출이었다. 들어온 고문전문가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고문에 대한 경험도 많았고 사람의 속내를 파악하는 능력도 출중했다. 그 때문에 데이몬은 꽤나 신경써서 그를 속여 넘겨야 했다. 다행히 연극은 성공했고 데이몬은 사준환에게 자신을 별 볼일 없는 인물로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기에 그는 무척 기분이 나빴다. '어쩔 수 없지. 이로써 놈에게 더욱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기반을 닦았으니까.' 데이몬은 두 가지 꿍꿍이를 품고 잠마련에 잡혀 들어왔다. 그 중 첫 번째는 영호명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다. 트루베니아에서는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영호명. 하지만 중원에 돌아온 그는 활강시가 되어 잠마련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잇었다.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몰락이었다. '상태를 확실하게 봐야겠어. 생기가 완전히 고갈되지 않았다면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활강시는 일반 강시와는 달리 생명력이 남아있다. 때문에 희박하긴 하지만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이 가능하다. 데이몬의 머릿속엔 그에 대한 지식이 충분히 들어있다. 배교의 사술에다 흑마법의 대가인 그이니만큼 생기만 남아있다면 영호명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 '문제는 그놈이 나와 견원지간이라는 사실이지.' 데이몬은 그리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어쨋거나 할 수 없다. 그놈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사준환을 무너뜨리려면 그럴 수 밖에 없으니....' 영호명과 자신의 오해의 골이 무척 깊다. 그는 선사인 혜정성승을 살해한 것이 데이몬이라 굳게 믿고있다. 게다가 영호명의 아버지는 정사대전 중 데이몬 휘하의 수호마왕군 무사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결코 쉽게 풀 수 있는 원한관계가 아닌 것이다. 데이몬 역시도 영호명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잇었다. 그가 트루베니아에서 보여준 위업은 차치하고라도 트루베니아로 건너오는 과정에서 영호명에 의해 몹쓸꼴을 껶어야 했기 때문이다. '굳이 오해를 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도 놈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니까.' 두번째 꿍꿍이는 당문 식솔들의 구출이었다. 현재 잠마련에는 다수의 당문 정예들이 잡혀있다. 그들을 구해낸다면 당문은 금세 과거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당문의 힘을 바탕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무림에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데이몬이 잠마련에 잡혀온 데에는 그러한 내막이 숨겨져 있었다. '게다가 기회가 되면 이곳에서 흑마법의 흔적을 한 번 조사해 봐야겠군. 강시에게서 느껴진 기척을 볼 때 트루베니아에서 누군가가 건너온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데이몬은 입맛을 다시며 살짝 머리를 흔들었다. '한 가지는 정말 아쉽군. 가용할 수 있는 암흑투기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탈출할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질 텐데 말이야.' 잠마련에서 탈출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감시하는 잠마련 무사들이 마법진을 그릴 시간을 줄 리 만무한 법. 게다가 그에겐 당문 식솔들을 구출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이래 저래 머리가 복잡했다. '유성이 녀석은 잘 피했는지 모르겠군. 뭐 죽을 고비를 한두번 겪은 녀석이 아니니 잘 피햇으리라 생각되긴 하지만.' 적막감이 감도는 석실 안에서 데이몬은 거듭되는 상념에 사로잡혔다. 목가장에서 내쫓기듯 나선 냉유성이 향한 곳은 초무극의 장원이었다. 우연히 추혼검마의 비급을 얻었다가 데이몬의 도움으로 비밀을 푼 정사지간의 고수가 바로 그였다. 초무극의 장원은 목가장에서 한 나절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냉유성은 몸을 회복하고 간신히 붙잡은 깨달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초무극에게 가는 길을 택했다. 주공인 데이몬이 베푼 은혜를 감안할 때 그 정도는 충분히 해 줄 터였다. 초무극의 장원은 몹시 규모가 작았다. 그곳에서 초무극은 자신의 문파를 세우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불철주야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냉유성이 도착하자 초무극은 적이 놀랐다. 흉측한 몰골로 변해버린 냉유성이 거지꼴을 하고 나타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명색이 무사인데 검초차 소지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데이몬 공은 어떻게 되셨는가?" "주공의 안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잘 모르오. 몸을 회복하는 대로 찾아볼 생각이오." "아무튼 잘 왔네. 환영하네." 반갑게 맞아주는 초무극의 태도에 냉유성은 긴장이 스르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뭔가? 말해보게." "나에게 수련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시오.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니 숙식도 책임져 주셔야 할 것 같소." 예상대로 초무극은 흔쾌히 냉유성의 청을 받아주었다. 데이몬 덕에 평생의 숙원을 이룬 그가 이 정도도 해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 집처럼 편하게 생각하며 수련하도록 하게. 어차피 나와 제자들도 수련에 매진하고 있으니 자네 하나 못 거둬주겠는가?" "정말 고맙소." 초무극의 호의에 냉유성은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때는 목가장의 편에 서서 초무극과 검을 겨눴지만 지금은 사정이 반대로 변해버렸다.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는 무림의 격언이 가슴에 와 닿는군. 역시 무사의 마음은 무사가 가장 잘 알아주는 것인가?' 냉유성은 나직이 각오를 다졌다. 반드시 깨달음을 얻어 당당하게 목가장으로 맡겨놓은 검을 찾으러 가기로 말이다. 초무극은 냉유성이 수련하는 데 최대한 지원을 해 주었다. 전형적인 무가라서 냉유성은 수련하는 데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초무극은 냉유성에게 흔쾌히 자신의 폐관수련장을 내어주었다. 또한 바닥난 체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각종 영양식과 내상에 잘 듣는 영약 또한 아낌없이 제공했다. 그 덕에 냉유성은 단 보름 만에 예전의 몸 상태를 되찾을 수 있었다. 체력도 말끔히 회복되었고 내상도 완전히 낫자 냉유성은 내침 김에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잠마련 무사들과의 혈투에서 얻은 깨달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수련이었다. 그렇게 냉유성은 초무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수련을 시작했다. . . . 3. 마왕(魔王)의 권속 데이몬은 오래지 않아 모처로 옮겨졌다. 그는 무사 두 명에게 이끌려 갇혀 있던 석실로부터 한참 떨어진 다른 석실로 이송되었다. 제법 규모가 큰 석실이었는데 내부에는 온갖 약재와 실험도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데이몬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생각했다. '뭘 하는 곳인데 이렇게 실험 도구가 많지?' 데이몬을 석실 안에 내버려 둔 뒤 무사들은 머뭇거림 없이 석실을 나섰다. 무정하게도 귿르은 밖에서 문을 잠가버렸다. 철그렁 둔착한 자물쇠 소리를 흘려들으며 데이몬은 석실 내부를 샅샅이 살폈다.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무사들이 들어온 반대편에 또 다른 문이 하나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리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데이몬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좌우로 꺾었다. '이번에는 도대체 어떤 놈이 들어올까?' 잠시 후 자물쇠를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컹 문이 열리고 시커먼 흑포를 뒤집어 쓴 사내가 들어섰다. 그를 보는 순간 데이몬의 눈이 커졌다. 전혀 생각지 않았던 자와 맞닥뜨렸기 때문이었다. "기가 막히군.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나?" 데이몬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들어온 흑포인은 바로 흑법사 록슬레이였다. 데이몬에 대한 보고를 받은 뒤, 당사자를 만나보기 위해 그의 실험실인 이곳에 들어온 것이다. 그의 손에는 한 장의 종이가 들려 있었다. 심문과정에서 데이몬이 자백한 내용이 거기에 적혀있었다. '흠, 뜻밖이로군. 아르카디아가 아니라 트루베니아 출신이라니..... 아무튼 상관할 것은 없지.' 그는 고개를 돌려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반갑소. 머나먼 타향에서 마나의 구도자를 만나게 되어 매우 기쁘다오. 그것도 같은 흑마법 계열이니 더할 나위가 없구려." 데이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흑법사를 쳐다보고 잇었다. 뭘생각하는지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려 있었다. 머리를 흔든 흑법사는 다시 서류를 쳐다보았다. "내 예상이 정확히 적중햇구려. 나는 당신이 차원이동에 대한 마법실험을 하다가 이곳으로 오게 되었을 것이라고 예상했었소. 아무튼 좋소. 정말 오랜만에 모국어로 대화를 하니 말이오." 흑법사가 하는 언어는 트루베니아 공용어였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아르카디아에서도 같은 말을 쓰니 데이몬이 알아듣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데이몬은 가타부타 말없이 흑법사를 응시하고만 있을뿐이었다. "마나가 희박한 중원에서 자유자재로 공간으동을 감행살 정도라면 최소한 7서클 이상은 되겠구려. 아르카디아였다면 감히 얼굴도 쳐다보지 못했겠지?" 흑법사는 느긋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튼 이 중원 천지에 마법사라고는 당신과 나 둘밖에 없소. 또한 잠마련에서의 직위는 내가 훨씬 높으니 말을 할 때는 각별히 조심히기 바라오." 그때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나도 정말 뜻밖이라고 생각한다." "....." "중원에서 나의 권속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강시에게서 흑마법의 흔적을 발견하긴 했지만 정말로 흑마법사가 이곳에 와있었다니...." 권속이라는 말에 흑법사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요? 나더러 권속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소." "물론 인간계에는 없겠지. 하지만 다른 차원에는 있지 않나?" "....." "마계 말일세." 순간 흑법사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상대의 말은 사실이었다. 자신에게 권속이라 부를수 잇는 자는 오로지 마계의 마족뿐이었으니까. 데이몬은 눈을 가늘게 뜨며 코를 벌름거렸다. "그런데 마력의 질이 그다지 좋지않군. 순도가 낮은 것을 봐서 마왕 휘하의 군단장급도 아닌 일반 마족과 계약을 햇나보군." 계속해서 코를 벌름거리던 그는 인상을 썼다. "왠지 냄새가 기분 나쁘다 했더니 위리놈 녀석의 것이었군. 고작 파리새끼의 권속과 계약을 맺었나?" "그, 그 사실을 어떻게...." 말을 잇지 못하는 흑법사를 보며 데이몬은 히쭉 웃었다. "뭐 그정도야 기본이지.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면 혀 빼물고 죽어야 하지 않겠어?" 흑법사가 뭔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데이몬은 빙그레 웃으며 흑법사에게 손짓을 했다. "내 마력을 한 번 느껴보겠나? 그럼 내가 누군지 명확히 할 수 있을거야." 거듭 손짓을 하자 흑법사가 주뼛주뼛 다가왔다. 데이몬은 어둠의 마력을 살짝 끌어올린 다음 흑법사에게 주입했다. 순간 흑법사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미, 믿을 수 없어. 이토록 짙고 순수한 마력이라니...." 흑법사는 차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상대에게서 넘어온 어둠의 마력은 지극히 순수하며 또한 짙었다. 자신이 보유한 어둠의 마력과는 질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일반 마족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이다. 아니, 마왕의 직계 권속인 군단장조차도 이토록 순수한 마력을 지니지 못한다. "세, 세상에...." 흑법사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드디어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이다. 데이몬의 신분을 파악하자 흑법사는 머뭇거림 없이 바닥에 부복하려 했다. "미, 미천한 마나의 종이 마계의 군주님을 뵙습니다." 그때 데이몬이 손을 내저었다. 막 부복하려던 흑법사가 손짓을 보고 멈칫했다. "보아하니 감시하는 무사들이 있는 것 같군. 그러니 드러나는 행동은 하지 말도록." "아, 알겠습니다." 흑법사는 조심스럽게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충격의 빛이 가득했다. 상대는 의심할 나위없는 마왕이다. 그것도 마계의 수많은 군주들 중에서도 상위에 올라 있는 대마왕 급이 분명했다. 그런 대마왕이 중원에 강림하다니..... 겨우 자신을 추스른 흑법사는 데이몬을 경의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중원에는 어인 일로 강림하셨습니까?" 감시하는 무사가 적지 않았지만 트루베니아의 언어로 대화했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잇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점을 눈치 챈 듯 데이몬은 아무 거리낌 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후후, 생각해 보거라. 마왕이 인간계에 뭐하러 오겠나?" "설마 이곳을 정벌하러 오셨습니까?" 데이몬은 슬며시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중원에는 생각보다 강한 무사들이 많더군. 트루베니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저도 정말 놀랐습니다. 마스터들이 이토록 많이 존재하는 세상이 있었다니 말입니다." "하지만 마법사는 없지 않나. 그러니 전체적인 균형은 트루베니아와 비슷할 거야."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흑법사는 불현듯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는 인간계에 강림한 마왕이다. 그가 아는 상식으로 어둠의 마나를 운용하는 흑마법사는 마왕이 강림하는 순간 그의 권속이 되어버린다. 배신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며 심지어 생각하는 것조차 제약을 받는 것이 흑마법사의 운명이다. 그런데 상황을 보니 눈앞의 마왕이 중원에 강림한 뒤로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만약 그가 아는 상식대로라면 마왕이 강림하는 순간 자신에게 영향이 미쳐야 한다. 하지만 지금껏 자신에게 그런 기미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데이몬은 이미 흑법사의 속내를 눈치 채고 있었다. "어둠의 계약에 대해서 말인가?" "......" "일반적으로 어둠의 마나를 사용하는 흑마법사는 마왕이 강림할 경우 무조건적으로 그 권속이 되어버리지. 하지만 거기에는 한가지 비밀이 있어." "비밀이라고 하시면 어떤?" "흑마법사는 다양한 마족과 계약을 맺지. 마계에는 수많은 마왕이 존재한다. 그 휘하의 직계 권속들도 수두룩하고 그 아래에 또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마족이 있어. 일반적으로 중급 마족 이상이면 흑마법사와 어둠의 계약을 맺을 수 있다." 흑법사는 조용히 머리를 끄덕이며 데이몬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마왕이 인간계에 강림할 경우 한 가지 절차를 밟는다." "어떠한 절차입니까?" "어둠의 계약을 한 흑마법사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게 하는 절차이다. 그 절차를 밟는다면 누구랑 계약했던 간에 어둠의 계약이 이루어진 자라면 모두 권속으로 부릴 수 있지. 그래서 인간계에 강림하려는 마왕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 계약 이전의 절차를 밟는다." 흑법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른 마왕이나 마족들이 순순히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일은 거의 없어. 인간계에 강림한 마왕이 전쟁을 일으킬 경우 죽어가는 원혼에게서 흘러나온 힘 중에 일정 분량이 계약한 마왕이나 마족에게 넘어가기 때문이지. 계약자가 많을수록 많은 힘이 건너가기 때문에 계약을 이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족에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야."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흑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런 절차가 잇었군요." "가만히 앉아서 힘의 원천을 넙죽넙죽 주워 먹을 수 있으니 엄청난 이득이라 할 수 있지. 아무튼 마왕의 강림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데이몬은 흑법사를 쳐다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런 절차를 밟지 않았어. 설마 중원에 어둠의 권속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그렇겠군요. 중원에 흑마법사가 존재했다면 마계의 군주들이 모를 리가 없을 테니까요."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인해 너에게 영향이 미치지 않은 것이다." 데이몬은 정색을 하며 흑법사를 쳐다보았다. "그럼 넌 이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이냐?" "......" "보아하니 너도 이곳에서 이용이나 당하는 처지인것 같은데 현재 생활에 만족하느냐?" 그 말에 흑법사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엇다. 물론 중원 생활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잠마련 측에서 충분히 실험을 할 수 있게 지원해 주긴 하지만 운신의 자유는 없다. 이대로 늙어 죽을 때까지 잠마련에 이용 당하는 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불현듯 서글퍼졌다. '이렇게 중원에서 여생을 마칠 수는 없어.' 안색을 굳힌 흑법사는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마왕님께서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뭐 뻔하지 않나?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어둠의 군대를 양성해 이곳을 뒤집어 엎는 것이 전통적인 마왕의 역할이지. 그 과정에서 원한을 품고 죽는 원혼이 나에게 힘의 원천을 제공할테고, 그렇게 되면 내가 보유한 어둠의 군대는 계속해서 강력해지겠지?" "하지만 이곳에는 실력 있는 무사들이 워낙 많습니다. 어둠의 권속(흑마법사)에게서 힘을 빌릴 수도 없는 상황인데..." 데이몬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무슨 상관인가? 보편적으로 재료가 좋으면 좋은 물건이 탄생하는 법이야. 실력있는 무사를 잡아다 데스 나이트로 만든다면 트루베니아보다 월등히 질이 좋은 녀석이 만들어지지 않겠나?" "그렇기는 하겠군요." 흑법사의 머리는 부산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마왕의 부하가 되어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것이 피할 수없는 흑마법사의 운명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 마왕의 권속이라고 할 수 없다. 데이몬이 절차를 밟지 않고 왔기 때문에 아직까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마련 무사들에게 잡혀올 정도라면 마왕으로서의 권능을 모두 발휘할 수 없다는 뜻인데.... 그를 따르는 것이 과연 현명한 결정일까?' 데이몬은 싱글싱글 웃으며 흑법사를 쳐다보고있었다. 이미 그는 상대의 내심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다. '나를 따라야 하나 따르지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겠군. 뭐 당연한 고민이겠지?' 마음을 정리한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이곳 중원은 운신의 폭이 무척 좁더군. 어둠의 마력은 그럭저럭 운용하겠는데 암흑투기는 전혀 보충되지 않아. 아마 차원의 특성상 그런 것 같더군." "암흑투기를 사용할 수 없다면...." "현재로서는 물리적인 힘을 거의 쓸 수 없어. 이곳 무사들에게 붙잡힌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지." 거기까지 말한 데이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보니 마정지지라는 곳이 있더군. 그런 곳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암흑투기를 대대적으로 보충할 수 있을텐데..... 권능만 쓸수 있다면 제 아무리 강한 무사라도 감히 내 적수가 되지 못하지." 순간 흑법사의 눈빛이 빛났다. 마정지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맞아. 마왕이라면 능히 마정지지의 마기를 흡수할 수 있을거야. 만약 이 마왕이 암흑투기를 사용할 수 있다면....' 그렇게 되자 앞으로의 일이 훤히 그려졌다. 제 아무리 강한 무사라도 마왕의 적수는 되지 못한다. 물리적인 힘을 발휘해 드래곤조차 사냥할 수 있는 존재가 마왕이니까. 거기에다 실력있는 고수들의 시체로 만들어낸 데스 나이트 군단이 가세한다면 중원을 정벌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원한을 품고 죽어가는 인간들이 많을수록 마왕의 힘은 강력해 지는법. '그래, 이것은 나에게 있어 절호의 기회야.' 흑법사는 드디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는 중원에서 유일한 흑마법사이다. 다시 말해 어둠의 군대에 들어간다면 그 누구보다도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잇다는 뜻이다. '이곳 인간들이 말하는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다른 흑마법사가 없는 이상 아성은 결코 허물어 지지 않을 것이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마왕의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그래, 어떻게 할 작정이냐? 날 따르겠느냐?" 흑법사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감시 무사들 때문에 부복을 하지 못하는 것이 철천지한이었다. "따르겠습니다. 절 권속으로 받아주십시오. 앞으로 일으키실 정복전쟁에 일익을 담당하고 싶습니다." 흑법사는 충성을 다하겠다는 말 따윈 하지도 않았다. 마왕의 권속이 된다면 배신은커녕 생각 하나도 숨길 수 없으니까. 완전히 마왕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다. 하지만 흑법사는 그 사실을 전혀 꺼림칙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 잇어봐야 평생 잠마련에 이용만 당하다 죽을것이 확실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데이몬은 빙그레 웃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널 나의 권속으로 받아들이겠다." "마왕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데이몬은 머기를 흔들며 말을 이어나갔다. "절차를 밟고 오지 않았기 땜누에 부득이 새로 계약을 맺어야 할 것 같다. 네몸의 잡스런 마력을 소멸시키고 대신 새로운 어둠의 마력을 불어넣어주겠다. 마족의 몸에서 한 번 걸러진 것이 아닌 마왕의 몸에서 분출되는 순수한 마력을 말이다." 그 말에 흥분한 듯 흑법사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흑마법사는 계약하는 마족의 수준이 높을수록 어둠의 마나를 폭넓게 운용할 수 있다. 그는 원래 마왕 위리놈이 거느리는 제 4군단장 블라토스 휘하의 상급 마족과 계약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 두 단계나 뛰어넘어 마왕과 직접 계약을 한다면 실력이 비약적으로 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기쁜 마음에 흑법사는 넙죽 머리를 조아렸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지금 즉시 계약을 하도록 하자. 절차는 알고 있겠지?" 그러나 흑법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 하오나 계약을 하려면 마법진을 그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마법진을 그릴 경우 감시 무사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일단 감시 무사들을 떨어뜨려 놓고 추후에 계약을 시도하는 것이..." 데이몬은 나지막이 흑법사의 말을 끊었다. "걱정하지 마라. 마법진은 마왕이 마계에 있을 경우에나 필요한 법이다. 나와 직접 계약하는 데 마법진 따윈 필요없다. 네 피만 있으면 계약은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데이몬의 말을 알아들은 흑법사는 머뭇거림 없이 비수를 꺼냈다. 손가락을 긋자 붉은피가 배어나왔다. 데이몬이 손가락을 갖다 대자 피가 스르르 빨려 들어갔다. 흑법사의 귓전으로 데이몬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이제부터 네 몸속에서 위리놈의 잔재를 소멸시키겠다. 그과정에서 상당한 통증이 있을 테니 마음 단단히 먹도록 하라." "아,알겠습니다." 흑법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노도같은 기운이 손가락을 통해 침습해왔다. 데이몬이 내뿜은 어둠의 마력이었다. 월등히 순수하고 농도가 짙은 데이몬의 마력은 흑법사가 보유한 마력을 거침없이 둘러싼 채 소멸시켜 버렸다. 고통이 심햇기에 흑법사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크으윽...." 흑법사가 보유한 어둠의 마력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중원에서는 어둠의 마력이 보충되지 않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 시체를 통해 어둠의 마력을 다소나마 보충하기는 했지만 질적으로 형편없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끌어 모은 잡스러운 마력은 데이몬의 순수한 마력과 접촉하자 마치 봄날 얼음 녹듯 스르르 녹아버렸다. 마력이 완전히 소멸되자 데이몬은 때를 놓치지 않고 마력을 집중시켰다. "자, 이제 어둠의 마력을 주입하겠다. 이과정이 끝나는 순간 너는 나의 권속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위리놈의 권속에게서 건네받은 마력이 모두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 데이몬의 마력이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마력의 원천에서 직접 생산된 지극히 순수한 어둠의 마력이었다. 거침없이 파고드는 마계의 권능으로 인해 흑법사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 이제 끝났다. 넌 이제부터 나의 충실한 권속이다." 계약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계약이 끝나자 흑법사의 외모는 조금 변해있었다. 백짓장처럼 창백하던 얼굴에 핏기가 돌았고 체격도 부쩍 켜져있었다. 더없이 순수한 어둠의 마력이 충분히 보충된 탓에 육체까지 완벽하게 복원된 것이다. 데이몬은 유쾌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 못브을 쳐다보았다. '흐흐흐.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로군. 보아하니 잠마련에서 꽤나 중요한 직책에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흑법사를 권속으로 거둬들인 것은 정말 엄청난 행운이었다. 이제 흑법사는 데이몬의 충실한 도구가 되었다. 데이몬이 어딘가에 봉인되거나 하지 않는 이상 배신하거나 딴마음을 먹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흑법사를 적절히 이용한다면 잠마련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당문의 식솔들도 구해낼 수 있기에 데이몬은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잠마련의 총단에서 흑마법사를 만나게 되다니.... 하늘이 날 도와주는군. 흐흐흐.' 한참을 웃고 난 데이몬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흑법사를 쳐다보았다. "미안하지만 난 어둠의 군대를 일으켜 중원을 뒤집어엎을 생각이 전혀 없다. 단지 개인적인 일을 보기위해 온 것뿐이다. 뭐, 중원 나들이를 드래곤들이 즐기는 유희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니 아마 넌 나에게서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 말에 살짝 몸을 떨었지만 흑법사는 더 이상 동요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데이몬에게 몸과 마음이 완전히 사로잡힌 상태였다.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마왕님을 보필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나의 직계 권속이니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트루베니아로 건너갈 때 널 데리고 가줄 수는 있다. 너정도의 실력이면 트루베니아에서 제법 대우받을 수 있을터, 그렇게 하겠느냐?" "그렇게 해 주신다면 여한이 없습니다." 묵묵히 대답하는 흑법사를 보며 데이몬은 가슴을 폈다. "그래, 넌 어떻게 해서 이곳에 오게되었느냐?" 흑법사는 즉각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차원이동 마법진을 안정시키기 위한 제물로 중원에 건너온 순간부터 껶어왔던 모든 일을 데이몬에게 털어놓은 것이다.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흑법사의 지나온 발자취를 들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하여 크로센 대제가 사로잡힌는 데 일조를 했고 이후 잠마련의 무림정벌을 위해 협조해 왔다는 사실을 모두 들은 그는 감탄사를 토해냈다. "햐! 그런 일이 있었군. 정말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데이몬은 마침내 영호명이 어떤 이유로 잠마련에 사로잡혀 활강시가 되었는지를 알아냈다. 그는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흑법사를 쳐다보았다. "만약 이 사실을 영호명 녀석이 알게 된다면 널 가만히 두지 않겠구나. 쯔쯔." "......" "난 그놈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릴 생각이다. 놈에게 걸리지 않게 널 꼭꼭 숨겨두어야겠구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마왕님께서 명하신다면 목숨을 바칠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야 없지. 넌 상당히 쓸모 있는 녀석이니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데이몬은 손을 들어 턱에 괴었다. 그는 지금 흑법사에게서 들은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그랬었군. 독에 마법적인 처리를 했기 때문에 이곳의 독객들이 해독하지 못하는 것이었군. 발상하나는 기가 막히는구나. 그런데 네가 처리한 독에 대한 해독은 가능하느냐?" "해독제에도 마법적인 처리를 한다면 가능합니다. 독에서부터 해독제까지 모든 과정을 제가 총괄하고 있으니까요. 이미 잠마련 내에는 해독제가 충분히 만들어져 있습니다." "잘 되었군. 널 당문으로 데리고 가 해독제를 만들어 낸다면 무림맹에서 무척 기뻐하겠어. 그런데...." 데이몬은 품고 있던 의문점을 흑법사에게 물었다. "사천당문에서 잡아들인 독객들은 네가 관할하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일부는 다른고셍 파견나가 있지만 대부분의 독객들은 제가 관리합니다." "혹시 그들을 한 곳으로 불러 모을 수 있느냐?" 흑법사는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시간동안이라면 가능합니다. 새로 만들어낸 독에 대한 지식을 전수해 줘야 한다고 말하면 잠마련 무사들이 독객들을 한 곳에다 모아줍니다." 데이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잘되었군. 사준환 놈을 한 번에 물먹일 수 잇겠어." 잠마련이 독문들을 멸망시키며 끌어 모은 독객들은 사준환의 계획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일시에 사라진다면 사준환은 상당히 곤란해질 수밖에 없다. 독객들의 유무는 사준환에겐 계획을 전폭적으로 수정해야 할 정도의 큰일이었다. "이번에 제대로 한 방 먹여야겠어. 놈이 화가 나서 펄펄 뛰는 모습을 꼭 봐야해." 흥분을 쉽사리 가라앉히지 못하고 씨근거리던 데이몬이 다시 흑법사를 쳐다보았다. 그에게서 알아낼 정보는 아직까지 많고도 많았다. "그럼 영호명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지금쯤이면 운남으로 옮겨졌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모종의 처리를 할 계획이니까요. 최종적인 처리는 제가 하겠지만 기초적인 시술은 그곳에 파견된 무사들도 할 수 있습니다." "운남? 왜 그곳으로 옮겼느냐?"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군요. 그곳에는 마왕님께서 절실히 원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흑법사의 말에 데이몬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절실히 원하는 장소라니?" 이어진 흑법사의 대답에 데이몬은 경악해야 했다. "마정지지가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뭣이? 그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혈마기가 주성분이라 잠마련에서는 그곳의 마기를 이용해 강시를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크하하핫!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구나." 격정을 참지 못한 데이몬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마정지지에 대한 실마리를 마침내 잡은 것이다. 마정지지의 마기를 흡수한다면 마왕으로서의 권능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에 기분이 한없이 유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잠마련에 붙잡혀 오는것인데..... 답답하던 것들이 모두 뚫려 버리는구나, 흐흐흐." 한참동안 실소를 흘리던 데이몬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아직까지는 적의 심장부에 위치해 있는 만큼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뭔가 생각난 듯 데이몬은 흑법사를 쳐다보았다. 곽천도가 자신의 몸에 고독을 심은 사실을 떠오른 것이다. "네 몸에도 고독이 심어져 있느냐?" "그렇습니다. 천기대제 사준환은 그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중요한 요직에 있는 수하라면 대부분 고독으로 통제합니다." "사준환은 원래 그런 놈이다.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도 믿지 않지. 아무튼 네 머릿속의 고독은 내가 제거해 주겠다. 지금 없애면 모고가 죽어 놈들이 눈치 챌 우려가 있으니 이곳을 빠져나가는 즉시 제거해주마." 데이몬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거머쥐었다. 어둠의 마력을 이용한다면 고독 따윈 간단히 제거해버릴 수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세밀한 계획을 짜봐야겠구나. 영호명과 독객들을 빼돌린 다음 마정지지의 마기를 흡수해 힘을 되찾을 계획을 말이다." 느긋하게 이어지는 데이몬의 음성을 흑법사는 무표정하게 듣고있었다. 데이몬은 즉각 잠마련을 탈출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물론 사천당문에서 잡혀 온 독객들을 함께 데리고 갈 계획이었다. 잠마련에 붙잡혀 있는 독객은 당문 출신뿐만이 아니었다. 운남의 오독문과 독곡에서도 상당한 수의 독객들이 잡혀 와 강제로 일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고 잇는 독객들이 얼마나 되지?" "모두 합치면 이백 명 가량 될 것입니다." 흑법사의 대답에 데이몬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무척 많군. 그들을 모두 데리고 탈출하려면 쉽지 않겠어." "아무리 마왕님이시라도 이백 명 모두를 탈출 시키는 것은 불가능 할 것입니다. 그들중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몇명만 추려서 데리고 가심이..." "아냐. 모두 탈출시켜야해. 난 반드시 사준환 그놈이 화가 나서 펄펄 뛰는 모습을 봐야 한단말이야. 독객을 모조리 데리고 가야만 사준환의 계획이 어긋날꺼야." "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이백 명이라면 공간이동을 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데이몬은 묵묵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냐. 마법진을 좀 크게 그린 다음 중앙에 충분한 마나를 담은 매개체를 둔다면 주문을 외우는 즉시 공간이동이 가능할 수도있어. 내가 이미 중원 곳곳에 대응 마법진을 설치해 두었어. 그러니 좌표가 빗나가는 경우는 없을거야." "하지만 거리도 매우 중요합니다. 워낙 인원이 많기 때문에 일정 범위 이내로 지정해야 하는데 가까운 곳으로 이동할 경우 잠마련의 추격을 뿌리치치 못할 수도 있습니다." 고도로 마법을 익힌 마법사답게 흑법사는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잇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염려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걱정하지 마라. 이미 갈 곳은 정해 두었으니까. 그곳으로 간다면 잠마련의 추적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데이몬은 몸을 일으켰다. "일단 지금 당장은 곤란해. 놈들이 나에게 의구심을 품고 있을테니 당분간은 순순히 협조하며 놈들의 방심을 유도하는게 나을터. 차곡차곡 준비를 해서 놈들의 뒤통수를 단번에 치는게지." 흑법사는 머리를 끄떡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내가 맡은 역할이 너의 조수라고 그랬지? 일단은 놈들의 의심을 사지 않게 순순히 일해 주도록 하자. 그런 다음 틈을 타서 마법진을 설치하면 되는거야.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데이몬과 흑법사에게 배당된 임무는 제법 많았다. 독객들이 만들어낸 독에 마법적인 처리를 가해 해독이 불가능하게 하는 것과 새로운 독에 대한 연구가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주 임무는 음양강시를 만드는 것이었다. 흑법사가 개량해 낸 음양강시에다 마정지지의 혈마기를 투여해 재처리해낸 음양혈강시는 초절정고수에 필적하는 위력을 지닌다. 사준환은 최소한 백여 구 이상의 음양혈강시를 만들어 낸 다음 무림정벌에 나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워낙 위력이 뛰어나다 보니 음양혈강시를 만들어내는 데는 만만치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음양강시는 천강시라는 고급강시를 기본 뼈대로 흑법사가 만들어낸 새로운 종류의 강시였다. 그것은 지금까지 탄생한 강시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자랑했다. 음양강시를 만드는 방법은 미리 만들어 둔 천강시에다 시체에서 뽑아낸 어둠의 마력을 불어넣어 반 언데드화시킨 다음 그 표면에다 흑법사가 장기로 삼는 타크 문이라는 흑마법을 새긴다. 다크 문(Dark moon)이란 응축된 마나를 흡수하여 음차원의 마나로 전환시켜 버리는 고서클의 흑마법이다. 다크 문 마법이 걸린 음양강시는 상대의 공격에 서린 검기나 검강을 흡수하여 음차원의 마나로 전환시킬 수 있다. 음양강시의 동체는 시체에서 뽑아낸 마력이 투여되어 반 언데드화 한 상태다. 다시 말해 음차원의 마나로 손상된 동체를 수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중원의 무사들이 상대하기에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워낙 튼튼한 천강시를 기초로 만들었기 때문에 검기나 검강이 아니면 좀처럼 타격을 입힐 수 없으니 사준환이 음양강시를 잠마련의 주력으로 삼을 법도 했다. 음양혈강시는 음양강시에 마정지지의 혈마기를 투여해 숙성시킨 최고급 강시이다. 기존의 음양강시보다 최소한 두 배 이상 강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혈마기로 인해 더욱 흉포해지고 반사 속도가 빨라진 데다 비약적으로 강화된 피부는 검기에 거의 손상을 입지 않았다. 사준환이 잠마련의 모든 힘을 투입해 음양혈강시를 양산하려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백 구의 음양혈강시를 앞세운다면 무림맹은 더 이상 잠마련의 적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음양강시를 만드는 데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린다는 점이다. 게다가 마정지지의 마기를 투여해 음양혈강시로 변모시키는 데에도 또한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강시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를 들은 데이몬은 고개를 끄떡였다. "사준환 놈이 그토록 날 사로잡으려 애쓴 것은 바로 음영강시의 양산 속도를 높이려는 것이었군." "그렇습니다. 마법사가 한명 더 있다면 음양강시를 생산하는 속도가 월등히 빨라지기 때문입니다." "일단은 놈에게 순순히 협조를 해야겠군. 적당히 음양강시를 만들어 줘야 날 더 이상 의심하지 않을테니 말이야." "아마 그럴 것입니다." 데이몬은 그날부터 음양강시의 제조에 들어갔다. 음양강시를 만드는 과정은 꽤나 복잡했다. 데이몬이 맡은 역할은 처리가 끝난 천강시에 어둠의 마력을 투여해 반 언데드화 하는 것이다. 나머지 자질구레한 일들은 모두 흑법사가 처리했기 때문에 데이몬은 오직 그것만 해 주면 되었다. 그것은 데이몬에겐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체적으로 어둠의 마력을 생성해 낼 수 있는 마왕에겐 식은 죽 먹기나 다름 없는 작업이었다. 데이몬이 그 일을 밭아주자 흑법사 역시 큰 짐을 덜 수 있었다. 그에겐 어둠의 마력을 투여하는 과정이 가장 힘들었던 것이다. 두명이 힘을 합하자 음양강시의 양산 속도가 월등히 빨라졌다. 이전까지는 음양강시를 완성하는 데 석 달 가까이 걸렸다. 그것도 한 번에 두 구 정도밖에 만들어 내지 못했다. 음양 강시를 만들어 내는 것은 그 정도로 힘든 작업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이 가세하자 작업효율이 월등히 빨라졌다. 한번에 일곱 구의 음양강시를 제련할 수 있으니 잠마련 측으로서는 고무될 수밖에 없었다. "음양강시가 월등히 빨리 제련되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약 네 배 가까이 효율이 높아졌다는 소식입니다. 이미 일곱 구의 음양강시가 제련이 끝나서 약물통에서 숙성되고 있습니다." 보고를 받는 사준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정말 잘된 일이로군. 술법사 한 명이 가세했을 뿐인데 이토록 양산 속도가 빨라지다니 놀라워." 곽천도 역시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 정도 속도라면 족히 이 년 이내에 백여 구의 음양혈강시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야망의 실현이 그 정도로 빨라진다니 고무되는군." 사준환은 만족스러워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백여 구의 음양강시를 앞세운다면 더 이상 무림맹은 잠마련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지금 껏 수도 없이 마도천하를 좌절시켰던 정파의 은거고인들도 더이상 두렵지 않다. 음양혈강시 백여구라면 초절정 고수 백여 명을 보유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힘을 잃고 처박혀 있는 마교 역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기분이 고조되었는지 사준환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그 날이 멀지 않았다. 정말 기쁘군." "정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사준환은 역시 신중했다. "아직까지 속단은 이르다. 혹시라도 술법사 놈들이 음양강시에 술수를 부릴 가능성도 생각해야 한다. 그 점도 염두에 두고 있느냐?"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술에 들어가는 천강시들의 심령은 완전히 대제께 귀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처리를 마친 음양강시에도 다시 한 번 심령금제를 가하고 있으니 놈들이 야료를 부려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들에 대한 감시의 눈을 철저히 해야 한다. 결코 방심해서는 안 돼." 곽천도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놈들에게 투여된 고독 중 모고는 제가 직접 관리하고 있습니다. 죽고 싶지 않은 다음에야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역시 철저하군. 과연 내 오른팔다워." 사준환은 손을 뻗어 곽천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열심히 하라. 훗날 일인지하 만인지상 자리에 오르고 싶거든 말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충심으로 모시겠습니다." 곽천도는 흥분으로 몸을 가늘게 떨며 허리를 꺾었다. 사준환이 묘한 눈빛으로 기뻐하는 곽천도를 쳐다보고 있었다. 데이몬은 꼬박 한 달 보름 동안 흑법사와 함께 음양강시의 제조에 몰두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족히 두 배 이상의 음양강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어둠의 마력만 충분하다면 더욱 많은 강시의 제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의도적으로 작업속도를 조절했다. 그의 입장에서 굳이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곱 구의 음양강시가 완성되었다. 그 덕에 데이몬은 자신에 대한 사준환의 의구심을 어느 정도 걷어낼 수 있었다. "훌륭하군. 완벽해." 완성된 음양강시를 본 사준환은 곽천도를 보내 데이몬과 흑법사의 공을 치하했다. 어느 한 군데도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음양강시였기 때문이다. 성과를 보였기 때문인지 데이몬을 대하는 곽천도의 태도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정말 수고 많았소. 대업을 이룰 경우 두 분은 본련의 일등 공신이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부귀와 권세를 한 몸에 누릴 수 있소. 그럼 앞으로도 계속 수고 바라오." 치하를 한 뒤 나가는 곽천도를 보며 데이몬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놀고 있네. 지금은 기분이 좋겠지만 머지않아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을 것이다.' 흑법사와 둘만 남게 되자 데이몬은 트루베니아의 언어로 말을 걸었다. "이제 슬슬 시작해야겠지?" 흑법사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준비는 모두 끝난 상태입니다. 새로운 독이 개발되었다고 하면 잠마련 측에서 독객들을 한 군데에다 모아줄 것입니다." "미리 마법진을 설치해 둔 석실에다 모아주는 것이 확실한가?" "물론입니다. 이백 명이 동시에 들어갈 정도의 석실은 오직 한 곳뿐입니다." 현재 잠마련에서 독과 강시에 관련된 작업을 하는 곳은 모두 지하에 위치해 있다. 독객들의 탈출을 막고 일반 무사들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 작업해야 하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때문에 데이몬과 흑법사는 비교적 손쉽게 탈출준비에 착수할 수 있었다. 무사가 적다 보니 감시의 눈길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이몬은 일단 독객들을 먼저 빼돌릴 생각을 했다. 마정지지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운남에 위치해 있었고, 영호명 역시 그곳에 가 있다. 먼저 독객들을 당문으로 빼돌린 다음 운남의 마정지지로 향하면 되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흑법사를 시켜 차곡차곡 탈출준비를 했다. 비록 공을 인정받았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데이몬에게는 감시의 눈이 붙어있다. 때문에 그는 비교적 감시를 덜 받는 흑법사를 시켜 모종의 장소에 마법진을 그리게 했다. 흑법사의 실력으로는 이백 명 이상을 이동시키는 대용량 마법진을 그리는 것이 조금 힘들다. 하지만 데이몬이 공간이동 마법진에 대한 제반 지식을 가르쳐 주었기때문에 마법진은 조금씩 조금씩 형체를 이뤄나갔다. 물론 겉으로 봐서는 식별을 할 수 없는 마법진이었다. 투명해지는 용액을 혼합해서 마법진을 보이지 않게 그렸기 때문이었다. 음양강시를 제조하며 흑법사는 틈나는 대로 석실에 가서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이 설치된 곳은 바로 독의 효능을 실험하는 실험실이었다. 오직 그곳만이 이백 명이 넘는 독객들을 수용 할 수 있었다. 마법의 빠른 발동을 위한 매개체는 독이 가득한 통에 집어넣어 감시의 눈길을 피했다. 감시무사들에게 독이란 상당히 껄끄러운 물건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독이 가득 든 통을 조사하려 하지 않았다. 잡혀온 독객들은 매우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지하 공간에 독기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독술에 대한 조예가 떨어지는 자들은 이미 오래 전에 싸늘한 시신으로 화해버렸다. 그나마 실력이 뛰어난 독객들만이 겨우겨우 생을 영위해 나가며 기계적으로 독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강시를 제조하며 데이몬은 몇몇 독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전혀 희망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가축과 같은 눈빛이로군. 미래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는....' 그렇게 차곡차곡 준비를 하는 사이 마침내 거사 날짜가 다가왔다. 마법진이 모두 완성되자 흑법사는 곽천도에게 가서 새로운 독을 개발했다고 전했다. "그게 사실이오?" "그렇소. 현재 독강시에 적용되는 독보다 더욱 강력하고 해독하기 힘든 독이오. 여러번 실험해 본 결과 독강시에 사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왔소." 곽천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놀랍구려. 진작에 개발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 독은 데이몬 공의 지식을 이용해 만들어낸 것이오. 그러니 공은 전적으로 데이몬 공에게 있소이다." 좋은 소식이 연달아 이어지자 곽천도는 하늘이 잠마련을 돕는다고 생각했다. "낭보로구려. 이 사실을 즉각 대제께 보고하리다. 아마 큰 상이 내려질 것이오." "그 전에 할 일이 있소. 우선 독객들을 모아주시오. 그들에게 새로운 독에 대한 주의사항을 알려줘야 할 것 같소. 자칫 잘못하면 여러 사람 다칠 수 있읜 말이오." "알겠소. 그정도야 내 권한으로 처리할 수 있으니 걱정마시오." 곽천도는 즉각 무사들을 불러 독객들을 한데 끌어모을 것을 지시했다. 여러번 있어왔던 일이라서 무사들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달려 나갔다. 그 시각 데이몬은 마법진을 손보고 있었다. 실험실 안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중앙부에는 시커먼 액체가 가득 찬 통이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마법진의 효율을 높이는 매개체가 들어있었다. 마법진이 제대로 그려졌는지 살펴본 데이몬은 어긋난 부분을 일일이 찾아 고쳤다. '멍청한 녀석. 가르쳐 줘도 제대로 그리지 못하다니....' 데이몬이 툴툴거리며 마법진을 고치는 사이 호출을 받은 독객들이 하나둘씩 들어왔다. 공허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본 그들은 석실 벽에 쭉 늘어섰다. 그들 중에는 머리가 훌렁 벗어진 작달만한 노인이 있었다. 그가 바로 당문의 전대 가주인 당문수의 동생 당문성이었다. 당문성은 공허한 눈빛으로 색목인을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자로군. 서역에서 불러들인 자인 모양이지?' 어쨌거나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 당문성은 힘없이 머리를 숙였다.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참담했기 때문이었다. 가문은 완전히 멸문했고 뿔뿔이 흩어진 식솔들은 소식조차 찾을 수 없다. 이곳에 잡혀 온 독객들은 그야말로 사천당문의 정예 중 정예. 그들이 빠진 이상 당문의 재건은 요원한 일이었기 때문에 당문성의 얼굴에서는 도무지 핏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휴우, 정말 착잡하군. 원수인 잠마련에서 노예생활을 영위해야 하다니...' 마음같아서는 이대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번씩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럴수 없는 것은 복수에 대한 일념 때문이었다. 가문을 멸문시킨 원흉인 잠마련. 복수하기 전에는 순순히 눈을 감을 수 없다. 전대 문주의 동생이며 가문의 주력고수였던 당문성은 가문이 멸망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모용세가와의 분쟁으로 다수의 무사를 잃은 상태에서 잠마련은 강력한 고수들을 파견하여 야밤에 사천당문을 기습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당문의 무사들이 죽어갔다. 워낙 강한 무사들을 파견했기에 당문의 주력고수들은 변변찮게 저항도 하지 못했다. 당문을 간단히 제압한 잠마련은 고수들 중에서 그야말로 알맹이만 쏙 빼어 포로로 잡아가 버렸다. 이 후 당문성은 잠마련에서 당문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거의 멸문지경에 간 사천당문을 또다시 모용세가에서 급습하여 완전히 몰락시켜버렸다는 사실을. 착잡한 마음에 당문성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암담하군. 이대로 죽을 때까지 잠마련에서 썩어야 하는 건가?' 그가 고민하는 사이 독객들이 계속 들어와 석실 안을 채웠다. 낯익은 당문 식솔들도 있엇지만 얼굴이 검은 묘족들도 많았다. 그들은 운남의 오독문에서 잡혀 온 독객들이었다. 원래 당문은 오독문과 극히 사이가 나쁜 편이었다. 서로 천하 제일의 독문이라 주장하였으니 사이가 좋을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소속된 문파가 잠마련에 의해 멸문된 이후 한 곳에 모여 독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두 독문의 독객들은 많이 친밀해진 상태였다. 물론 처음에는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워낙 처지가 기구하다 보니 지금은 동료처럼 잘 지내고 있었다. 거기에는 한가지 이유가 있다. 당문은 광물독과 초목독을 주로 사용한다. 그리고 오독문은 동물에게서 뽑아낸 생체독을 주력독으로 삼는다. 서로 연구하는 독의 분야가 다르니 서로의 독술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두 문파의 독객들은 그렇게 해서 정보를 교류하며 친분을 쌓아 나갔다.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다 보니 독에 대한 조예가 한층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독에 대한 조예가 깊어져도 이득을 보는 쪽은 잠마련뿐인데....' 답답해진 당문성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 계속해서 독객들이 들어와 석실 안을 가득 채웠다. 석실은 곧 발 디딜틈도 없을 정도로 꽉 채워졌다. 잠시 후 흑법사가 들어왔다. 잠마련에서 일하고 있는 독객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석실에 모인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십여 명의 무사들이 들어섰다. 독객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은 자들로서 하나같이 독공에 조예가 깊은 독공 고수들이었다. 이곳에 파견된 무사들은 대부분 독공을 익히고 있다. 그렇지 않은 무사는 만성적인 독기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한다. 감시무사들을 이끄는 수장은 만독서생이라는 별호를 가진 갈태랑이었다. 운남 오독문의 장로 출신으로 일찍이 배신하여 잠마련에 투신한 뒤 오독문을 멸문시키는 데 혁혁한 역할을 한 자였다. 배신자답게 독객들을 혹독하게 다루기로 악명이 자자한 그가 눈빛을 빛내며 독객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폈다. 그를 본 흑법사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난감하군요. 저자가 있으면 마법진을 발동시키기가 쉽지 않을 텐데..." 트루베니아 어로 말했기 때문에 알아들은 이는 데이몬뿐이었다. 갈태랑은 상당히 수준 높은 독공 고수이다. 독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만큼은 이곳의 독객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기 때문에 속여서 내보내기도 쉽지않다. 하지만 데이몬에게는 방도가 있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해결하겠다." 데이몬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갈태랑에게 다가갔다. 갈태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데이몬을 응시했다. 데이몬은 모르는 척 말을 걸었다. "이곳에 남을 생각이오?" "그렇소. 독객들을 감시하는 것이 내가 맡은 임무라서...." "조금 있으면 독 기운이 이곳을 가득 채울 텐데 괜찮겠소?" 갈태랑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가슴을 폈다. "염려 마시오. 독에대한 조예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니 말이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부작용이 있어서 걱정을 했는데 독에 대한 조예가 높다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려." 갈태랑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부작용이 있기에 그러시오?" "뭐 별건 아니오. 독술에 조예가 있다면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문제요. 게다가 부작용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으니 크게 염려 마시오." 본시 하지 말라면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이다. 자신의 독술을 신뢰하기는 했지만 부작용이 있다는 말에 갈태랑은 관심을 가졌다. 게다가 데이몬이 순순히 밝히지 않으니 호기심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무슨 부작용인지 알고 싶소만." 데이몬은 짐짓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어허, 몰라도 된다니까 그러네." "아니오. 난 알고싶소. 말해주시오." 분위기가 무르익었음을 직감한 데이몬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뭐 별건 아니고 독기가 간혹 가다 임포텐스를 유발하더구려. 매번 그런 것은 아니고 이따금, 아주 이따금 그런 증상을 보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처음 듣는 말에 갈태랑의 눈이 동그래졌다. "임포텐스? 그게 도대체 뭐요?" "음, 이곳에는 거기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나보군. 간단히 말해서..." 잠시 말을 끊은 데이몬은 사타구니 사이를 손으로 툭툭쳤다. "이게 제대로 서지 않는 증상이오. 아무리 자극을 가해도 요지부동이지. 뭐 목숨에는 지장이 없으니 그리 큰 부작용이라곤 볼 수는 없을 거요. 아참, 그러고 보니 중원말로는 발기부전이라 설명하면 될 것 같소." 데이몬의 말에 갈태랑의 눈이 번쩍 커졌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만저만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도, 도대체 발기부전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 거요?" "대중없소. 어떨때는 한 달 정도 가기도 하고 간혹 그 이상 가는 경우도 있더구료. 워낙 불규칙적이라 장담하기가 힘드오." 갈태랑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주변에 모인 독객들도 불안햇는지 동요하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힌 갈태랑은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그런 부작용이 있다면 당신은 어찌하여 그토록 태연할 수가 있소?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구료." 제법 예리한 질문이었지만 데이몬은 능수능란하게 받아넘겼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사실 난 이미 여든이 넘었소. 추레한 늙은이의 몰골이 마음에 들지 않아 외모를 이렇게 꾸미고 다니는거지. 생각해 보시오. 그런내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겠소ㅠ? 물건이 서지 않은 지 이미 이십 년이 넘었다오. 아무리 예쁜 여자를 봐도 말이오." 갈태랑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그, 그런데 어찌 발기부전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소?" "제자들의 경우를 보니 그렇더구려. 애석하게도 한 녀석은 십년 이상 발기부전이 지속되더이다. 스물도 되지 않은 녀석이 정말로 안됐지. 쯔쯔쯔. 독술에 제법 조예가 있는 녀석이었는데...." 그 말을 들은 즉시 갈태랑은 마음을 정했다. 자신의 독술을 신뢰하기는 하지만 발기부전이라는 부작용에만큼은 초연할 자신이 ㅇ벗었다. 더욱이 열 명이 넘는 첩을 두고 있는 그였기에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다. 최근에 납치해서 첩으로 맞아들인 소녀를 떠올린 갈태랑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열일곱 살 먹은 풋풋한 소녀의 나신을 보고도 물건이 일어서지 않는다면....' 너무도 끔찍한 일이었기에 갈태랑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말을 듣고도 안에 남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데이몬에게 엄포를 놓았다. "우린 나가서 경비하겠소. 그렇게 알아두시오." "뭐 나야 상관없지만 그래도 되겠소?"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시오. 이곳의 경비책임은 전적으로 내가 지고 있으니 말이오." 그가 손짓을 하자 무사들이 일제히 몸을 돌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살았다는 빛이 역력했다. 독객들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발기부전은 남자의 가장 큰 근심거리다. 하지만 독객들에겐 원천적으로 밖으로 나갈 수 잇는 자유가 없다. 부작용이 걱정되었는지 밖으로 나간 갈태랑은 문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쾅 그 모습을 보고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단순한놈. 아무튼 네 녀석 덕분에 일이 쉽게 되었구나." 고개를 돌려보니 흑법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데이몬을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 마왕님이십니다. 갈태랑은 그리 만만치 않은 놈인데 이토록 간단히 쫓아내시다니..." "명색이 마왕인데 이정도는 해야지 인간들의 심리는 생각보다 단순한 면이 있어. 특히 남자들은 더더욱 그렇지. 그럼 공간이동을 준비하자." 말을 마친 데이몬은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난해한 룬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주문이 이어지자 가운데 놓은 통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통속의 매개체가 힘을 받고 있는 것이다. "헉" "뭐,뭐야?" 뜻밖의 괴사에 독객들이 술렁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이몬은 계속해서 주문을 외워나갔다. 이미 마법진에는 마나가 충분히 주입되어 있었다. 주문에 의해 마법진이 차츰차츰 활성화 되며 빛나기 시작했다. 푸학 난데없이 바닥에서 빛이 일어나자 독객들이 동요했다. 하지만 적절한 순간에 흑법사가 나섰다. 아직까지 중원어에 익숙하지 못해 발음이 어눌했지만 독객들을 안심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너, 너무 걱정하지 마, 마라. 겨, 결코 너희들에게 해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들을 관리해 온 사람의 말이라 독객들은 불안해 하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마침내 마법진이 발동했다. 번쩍 눈부신 빛이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왔다. 매개체를 통한 완벽한 마법진이었다. 인원을 정확히 헤아려 계산했기에 공간이동은 성공적으로 전개되었다. 화르르르 빛이 사라지고 나자 석실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그 자리에서 지워진 것처럼 없어져버린 것이다. 그 사실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발각되었다. 독객들을 살피기 위해 살짝 문을 열어본 무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아무도 없잖아?" 보고를 받은 갈태랑이 석실의 문을 열어 젖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잇는 것은 황량한 석실과 마법의 발동에 의해 흩어져 버린 마법진의 흔적 뿐이었다. . . . 4. 검을 찾으러 온 사나이 사방이 꽉 막힌 밀폐된 공간. 지하 석실은 아니었지만 소음을 차단하기 위한 두꺼운 벽과 구석에 나 있는 조그마한 출입문은 이곳이 폐관수련만을 위한 공간임을 알 수 있게 했다. 방 중앙에는 누군가가 기부좌를 튼 채 명상에 잠겨 있었다. 붉게 화상 자국이 난 대머리에 입술이 휘말려 올라가 잇몸과 이가 훤히 들어난 괴인. 바로 냉유성이었다. 그의 표정은 몹시 평온했다. 한눈에 봐도 무아지경에 빠져있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된 이후 냉유성은 줄곧 수련에 매진해 왔다. 잠마련 부사들과의 혈투에서 붙잡은 깨달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수련이었다. 흔히 수련이라 함은 연무장에서 병장기를 휘두르는 것을 연상하기 쉽다. 하지만 높은 경지에 오른 무사들은 그렇게 수련하지 않는다. 몸의 단련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정신적은 수양이 무위를 높이는데 더욱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냉유성 역시 그 경지에 올라 있기에 최근 들어서는 육체적인 수련보다는 정신 수양에 더욱 많은 노력을 쏟고 있었다. 게다가 냉유성은 검을 쥐고 휘두를 수 없는 몸이다. 화상으로 인해 검을 움켜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처럼 정신적인 수양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다. 냉유성은 지금 자기 자신을 관조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혈투를 하나하나 되새기고 혹시나 무심코 잊고 지나간 것이 있는지를 살폈다. 어린 나이에 공동파에 입문하여 배웠던 모든 검술들이 하나하나 파헤쳐지고 분석되었다. 거기에 잡념따윈 끼어들 여지가 없다. 모든 신경이 한 곳에 쏠려 잇는 탓이다. 공동파에서 파문당할 당시가 떠오르자 냉유성은 눈 꼬리를 살짝 떨었다. 하지만 그뿐 그는 금세 평정을 회복했다. 이후 주공인 데이몬과 함께 다니며 겪었던 여러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이후 이어진 목유경과의 만남, 그리고 이별. 생각할수록 마음 아픈 일이었지만 냉유성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오히려 집착을 버리니 마음이 더욱 편해졌다. 이제 그는 무의 완성에 모든 것을 건 무인이었다. 시간은 흘러 흘러 마침내 외모가 흉측하게 변하게 된 혈투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것은 정말 험준하고 위험천만한 대결이었다. 만약 냉유성에게 정사지간동안 쌓은 실전 경험이 없었다면 십중팔구 잠마련 무사들에게 죽거나 제압당했을 것이다. 절정급 고수 열명의 합공은 그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냉유성은 당당히 이겨냈다. 그 대가로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어야 했지만 어쨌거나 극복해 낸 것은 사실이다. 그때의 일들이 마치 조금 전에 벌어진 일인 양 생생하게 기억에 떠올랐다. 맞서 싸우다 버티기 힘들면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지고, 이어 뒤쫓아 온 잠마련 무사들과 다시 맞닥뜨려 싸우고... 냉유성은 처절한 생사결을 통해 깨달음의 끈을 잡았다. 내공은 물론이고 온몸의 힘이 소진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른바 동적인 행위에 의한 깨달음이었다. 도무지 알듯 말듯한 모호함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냉유성은 명상을 통해 그때의 깨달음을 되새기려 하고 있었다. 가는 경로는 달랐지만 무의 극의는 하나로 귀일되는 법. 지금의 명상을 통해 그는 자신의 검술을 낱낱이 파헤치며 분석하고 있었다. 더불어 지금까지 치러왔던 무수한 혈전들도 다시 한번 되새겼다. 냉유성의 심경은 몹시도 차분했다. 정말로 급박했던 상황이었지만 마치 제삼자가 관전하는 것인 양 자신과 잠마련 무사들과의 혈투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던 대목에 이르렀다. 철저하게 동적인 행위에 의해 얻은 깨달음을 명상을 통해 되살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랬군. 그래서 내가 공격을 회피해 낼 수 있었던 것이었군.' 마치 안개에 싸여 있던 것처럼 모호하던 것들이 점점 뚜렷해지고 잇었다. 자신을 관조하며 냉유성은 점점 더 깨달음의 길에 한 발자국씩 다가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치름 혈전을 분석하니 비로소 자신의 검이 가진 장점과 단점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껏 난 매우 비효율적으로 싸워왔다. 지금보니 더욱 효과적으로 공격하고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구나.' 그러는 사이 혈투가 끝이났다. 잠마련 무사들은 철수했지만 냉유성은 그 사실을 모른 채 불길 속을 마구 내달렸다. 당시에는 그때 깨달음의 끈이 끊어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냉유성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깨달음을 음미하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한없이 느려지는 느낌. 평상시라면 느끼지 못했을 상대의 허점이 명확히 눈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모호함을 감싸고 있던 안개가 점점 걷혔다. 형상을 확실하게 분간할 수 있게 된 순간 냉유성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커헉." 속에서 뭔가가 울컥 올라왔다. 참지 못하고 그것을 내뱉고 말았다. 푸우 고약한 냄새와 함께 시커먼 피가 내뿜어졌다. 내장 속의 나쁜 기운들을 한데 끌어 모아 토해낸 것이다. 이어 냉유성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기부좌를 튼 상태로 찬란한 서기에 휩싸인 채 허공에 떠 있는 그의 모습은 정말로 장엄했다. 깨달음을 얻어 초절정의 벽을 깨뜨린 그에게 드디어 환골탈태가 일어나고 잇었다. 가장 먼저 냉유성의 전신 모공을 통해 시커먼 기체가 뿜어졌다. 이어 퀴퀴하면서도 고약한 냄새가 밴 액체가 피부를 통해 스멀거리며 배어 나왔다. 입고 있던 백색 무복이 금세 시커멓게 물들었다. 우두둑 우두둑 뼈 부딪히는 기성과 함께 냉유성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피부가 마구 일어나더니 훌렁 벗겨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살이 돋았다. 그 와중에서 엄청난 고통이 가해졌지만 냉유성의 얼굴은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고통에 달관한 듯한 모습이었다. 환골탈태는 계속 이어졌다. 한 번 허물을 벗어던진 후에도 그치지 않고 계속 해서 새 살이 돋아나는 것이다. 냉유성이 입은 화상은 정말로 극심했다. 한 번 허물을 벗어던져도 흔적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환골 탈태는 그 흔적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 되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엄지와 검지가 눌어붙었던 손이 어느덧 복구되었다. 입술이 말려 올라가 잇몸과 이가 훤히 드러났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제 모습을 되찾았다. 얼굴에 아로새겨진 흉터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헌앙하고 영준한 원래의 모습이었다. 이어 그의 몸에서 사나운 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찌익 찌이익 펄럭이던 무복이 갈기갈기 찢어져 사방에 나뒹굴었다. 완전히 알몸으로 변한 냉유성의 전신에서 찬란한 서기가 뿜어졌다. 동시에 코와 입을 통해 하얀 기가 흘러나와 머리 위에 다섯개의 환을 형성했다. 인간의 탈을 벗어 던지고 초인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한동안 방을 맴돌던 서기는 순차적으로 냉유성의 몸에 빨려들기 시작했다. 우두둑 거리는 기성도 이미 그친 지 오래였다. 이윽고 허공에 떠 있던 냉유성의 몸이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거기까지가 냉유성이 기억할 수 있는 한계였다. 냉유성의 의식은 몸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급기야 심연 속으로 잠겨 들었다. 털썩 그는 모로 쓰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얼마간, 누군가가 연공실의 문을 두드렸다. 한동안 문을 두드리던 자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냉유성의 상태를 살피러 온 초무극이었다. "아니?" 냉유성을 발견한 순간 그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이럴수가... 벌써 대공을 이루다니." 부러운 듯 하염없이 냉유성을 쳐다보던 초무극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럴게 아니지. 일단 몸을 씻긴 뒤 쉬게 해야해." 조심스럽게 냉유성을 안아든 초무극은 급히 연공실을 뛰어나갔다. "정신이 드는가?" 꿈결처럼 아련한 음성에 냉유성은 눈을 떴다. 시야에 들어온것은 초무극의 수염투성이 얼굴이었다.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햇는지 초무극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냉유성은 상체를 일으켰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초무극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월등히 오랫동안 무공을 수련햇다고 자부하건만 냉유성이 한 발 앞서 초절정의 벽을 깨뜨렸으니 허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생각보다 배포가 큰 인물이었다. "대성을 축하하네. 정말 부러우이." "....." 냉유성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만 꿈뻑거렸다. "자세한 과정은 지켜보지 않아 모르네. 내가 본 것은 자네가 환골탈태를 마치고 난 다음이라네." 냉유성의 눈이 번듯 커졌다. 자신이 환골탈태를 했다니..... 뭔가 엄청난 고통이 가해졌다는 것만 기억할 뿐 환골탈태하는 과정을 전혀 인식하지 못햇던 냉유성이었다. 믿을 수 없어하는 그에게 초무극은 조그마한 동경을 내밀었다. "얼굴을 한 번 확인해 보게." 동경을 들여다 본 냉유성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흉물스러운 모습은 간 데 없이 많이 잡아야 이십대 중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영준한 얼굴이 동경속에 들어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사, 사실이었군요. 내가 환골탈태를 했다니...." "부디 깨달음을 좀 나눠줄 순 없겠나? 부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네." 냉유성은 떨리는 눈빛으로 초무극을 쳐다보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 "초무극 님의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대성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내가 뭐 해 준게 있나? 다 자네 노력 덕택이지." "그래도 가장 큰 역할을 해 주신것은 사실입니다. 아, 깨달음에 대해 물으셨지요? 도움이 되실지 모르겟지만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냉유성은 자신이 겪은 기이한 현상들을 초무극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초무극은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며 냉유성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깨달음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게다가 다른 사람의 경험이니만큼 냉유성의 경험에서 무언가를 얻어낸다는 것은 초무극으로서는 지난한 일이다. 실망감이 역력했지만 초무극은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만의 몫이었다. "그런 식으로 벽을 깨뜨렸군. 아무튼 축하하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초절정에 올라선 기념으로 비무 한 번 부탁하네. 화경의 고수와 겨룰 수 잇는 기회는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지. 내 체면 불구하고 부탁하겠네." "알겠습니다." 그때 초무극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이런, 내 욕심만 부렸군. 일단 배를 먼저 채우도록 하게나. 모르고 있겠지만 자넨 열흘 넘게 굶었다네." 그 말이 끝나자 마자 요란한 소리가 뱃속에서 요동을 쳤다. 꼬르륵 얼굴이 빨갛게 된 냉유성은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군요." 식사 후 이어진 초무극과의 비무에서 냉유성은 엄청나게 향상된 자신의 무위를 실감했다. 불과 얼마전만 하더라도 그는 비무에서 초무극에게 무참히 패했었다. 본신의 능력을 모두 발휘햇음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실력차이로 좌절을 겪어야 했던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그는 비무 내내 시종일관 유리하게 초무극을 몰아붙였다. 손에 익지 않은 청강장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단계의 차이였지만 절정과 초절정과의 차이는 매우 컸다. 만약 마음만 먹엇다면 채 열 합을 겨루기 전에 초무극을 꺾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은혜를 떠올린 냉유성은 결정적인 일격을 자제한 채 비무를 이어나갔고, 초무극은 실력 차이를 뼈저리게 실감한 채 도를 늘어뜨렸다. "헉, 헉... 정말 대단하군.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이토록 강해지다니..." "과찬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방심하지 말게. 곧 뒤따라 갈 테니 말이야. 그래도 같은 초절정이면 내가 유리할걸세. 실전경험은 내가 훨씬 많으니까. 크하핫!" 초무극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냉유성도 마주 웃어주었다. "자, 들어가지. 오늘은 자네랑 코가 비뚤어지게 한 잔 마시고싶군." "바라던 바입니다." 초무극과 밤새워 술을 마신 다음 날 냉유성은 그곳을 떠날 채비를 했다. 제일 먼저 목가장에 가서 검을 찾아야 했다. 게다가 주공의 안위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당문으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주공께서 빠져나오셨다면 당문에 가 계실 겁니다." "그런가? 조금 섭섭하군.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데이몬 공의 안위가 걸려있는 문제이니까."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야지. 그때 한 잔 더하자구." 초무극은 냉유성에게 넉넉하게 노자를 쥐어주었다. 냉유성이 돈이 없어 고초를 겪었다는 사실을 미리 들어 알고 있는 것이다. 냉유성은 들어올 때와는 달리 백색 무복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뒤 길을 떠났다. 그가 향하는 곳은 애검이 보관되어 있는 목가장이었다.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이었다. 조그마한 가산과 연못 주변의 정자가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그 정자에 묘령의 남녀 둘이 앉아있었다. 갓 약관을 지난 듯한 젊은이들이었다. 그중 머리에 영웅건을 두른 청년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허리에 찬 검을 매만졌다. "정말 마음에 드는 검이군. 훌륭해." 옆에 앉아있는 여인은 다름 아닌 목유경이었다. 목가장의 첫째 딸로서 황보세가와의 혼약을 앞두고 있는 여인. 그녀가 내키지 않는 눈빛으로 청년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원래의 임자가 그 검을 찾으러 올지도 몰라요. 다시 검을 쥘 수 있게 되면 반드시 찾으러 온다고 그랬어요." "걱정하지 마시오, 경매." 청년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자가 검을 찾으러 올 가능성은 전혀없소. 엄지와 검지가 붙어버렸다면 이미 무사로서의 생명이 끝난 거나다름없지." "하지만 그가 좌수검을 익힐 가능성도 있잖아요?" "무슨 걱정이오? 그러면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리겠소. 할아버지께서 나서신다면 놈은 기절초풍해서 도망쳐야 할 것이오." 청년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엇다. 그가 바로 목유경과 혼담이 오고가는 황보세가의 황보명이었다. 전반적으로 수려한 얼굴이었지만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가서 그런지 조금 간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목유경은 어쩔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명 가가의 할아버님께서 나서신다면 냉유성도 더 이상 어쩔 수 없겠지요." "자자, 우리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즐겁게 놉시다." 황보명은 음흉하게 웃으며 목유경의 허리를 감쌌다. 움찔 했지만 그녀는 몸을 빼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황보명의 손길이 허리를 타고 엉덩이로 내려오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틀었다. "이러지 마세요. 우린 아직까지 혼인식을 치르지 않았잖아요?" "무슨 상관이오? 머지않아 치르게 될텐데 말이오. 게다가 오늘은 우리 둘의 약혼식이 기다리고 있지 않소?" "그래도 혼인식 전까지는 허락할 수...." 황보명의 표정이 별안간 돌변했다. "정말 실망이오. 이 황보명에게 이 정도도 허락하지 않다니. 경매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구려, 흥." 콧방귀를 뀐 그가 찬바람이 불 정도로 냉랭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모습에 목유경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몸에 손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바로 토라지는 것은 도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하지만 아쉬운 쪽은 목가장이었기에 그녀는 은근한 어조로 황보명을 달랬다. "명 가가, 화내지 마세요. 그렇게 하시면 저 슬프답니다." "그러게 왜 내가 화를 낼 짓을 했소?" 퉁명스러운 황보명의 음성에 그녀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그때 황보명이 고개를 돌리며 느믈느믈 웃었다. "경매의 야들야들한 살결을 느끼게 해 준다면 용서해 주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이 엉덩이에 와 닿았다. 감히 몸을 뺄 엄두를 내지 못한 목유경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철이 없는 작자로군. 앞으로 정말 피곤하겠어.' 목유경의 엉덩이를 마구 주물럭 거리던 황보명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기 시작했다. 욕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흐흐, 정말 참을 수 없군. 경매, 우리 내실에 들어가지 않겠소?" 그때 목유경의 안색이 돌변했다. 이건 정말 점입가경이 아닌가? 다행히 그녀는 비교적 총명한 편이었기에 쉽사리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에이, 명가가도. 내실에는 할아버님이 계시잖아요?" "그, 그렇군." 황보명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녀의 말대로 내실에는 그의 할아버지이자 황보세가 최고의 고수인 홍보운악이 기거하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에 초절정의 벽을 돌파한 위대한 무인. 그럴 떠올리자 목유경의 표정이 착잡해졌다. '호부(虎父) 밑에서는 견자(犬子)가 나오지 않는다더니.... 어쩌면 이렇게 할아버지와 다를 수 있을까?' 황보명의 할아버지인 황보운악은 훌륭한 무인이었다. 자신을 잘 절제할 줄 알며 언제나 칼날 같은 기상을 내보이는, 그야말로 골수까지 무사라 불릴 수 있는 인물이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황보운악은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 수련장으로 향햇다. 게다가 틈만 나면 명상에 잠기는 모습에 목유경은 큰 충격을 받았다. 환갑이 넘은 황보운악에게 연정까지 느낄 정도였다. 무사를 정말로 좋아하는 그녀가 아니었던가. '하긴, 그러니까 초절정의 벽을 깨뜨린 초인이 될 수 있었겠지. 정말 놀라운 분이야.' 반면 황보명은 그와 정반대였다. 주색을 좋아하며 틈만 나면 게으름을 부렸다. 누군가가 지켜볼 때는 열심히 하는 척하지만 시선이 사라지면 바로 목검을 집어던지는 위인이 황보명이었다. 지금도 황보명은 정신없이 목유경의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었다. "흐흐, 경매의 엉덩이는 정말로 부드럽군." 그를 쳐다보는 목유경의 눈동자에 경멸이 서렸다. '할아버지를 십분의 일만 닮았더라도....' 그러나 황보명이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살포시 미소 지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그녀의 성품이 드러나는 단면이었다. 현재 그녀가 기댈 곳은 황보세가밖에 없었다. 목가장이 당당한 무림세가로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이대로 차버릴 수는 없었다. 때문에 목유경은 껄떡대는 황보명의 손길에 계속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내실에서는 한 중년인이 기부좌를 튼 채 명상에 잠겨 있었다. 사십대를 갓 넘어 보이는 외모였지만 피부에는 주름살 하나 잡혀있지 않았다. 그가 바로 황보세가 제일의 고수인 황보운악이었다. 대외적으론 환갑이 넘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겉으로 보이는 외모는 무척 젊었다. "휴."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명상을 끝냈다. 바로 지척에서 손자와 손자며느리로 예정된 여인이 나누는 대화소리가 여과없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듣기 좋은 소리라고는 할 수 없었기에 황보운악은 얼굴을 찌푸리며 푸념을 털어놓았다. "한심한 놈."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황보운악의 얼굴에는 애틋함이 서려 있었다.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친손자인 만큼 애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모 없이 키웠더니 버릇이 너무 없어. 그렇다고 혼낼 수도 없고, 쯔쯔." 황보명의 부모, 즉 황보운악의 아들과 며느리는 오 년 전 끝난 정사대전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이후 고아가 된 황보명을 황보운악과 그의 아내가 도맡아 키워왔다. 그때문에 손자에 대한 그의 애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키운 것 같곤. 하지만 도무지 꾸중을 할 수 없으니..." 세가의 최고수인 황보운악이 감싸고 돌았기 때문에 세가 내에서 황보명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때문에 황보명의 버릇이 더욱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세가의 사정을 떠올리자 황보운악의 얼굴에 수심이 서렸다. "어쨌거나 가주가 추진하는 일이 잘 되어야 할 텐데..." 황보세가는 오 년 전 끝난 정사대전에서 거의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무림맹에 파견 나갔던 주력 고수들이 살아남았기 때문에 세가의 명맥만은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황보운악은 조용히 과거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당시 황보세가는 사파의 습격으로 본가가 완전히 불타버리는 액운을 겪었다. 배교 소속의 정예기습부대이자 정파의 가장 큰 골칫거리인 수호마왕군이 황보세가의 본가에 쳐들어 왔던 것이다. 원흉은 당시 배교의 교주를 맡고 있던 독고성과 그 휘하의 수호마왕군 오백명이었다. 그로 인해 황보세가의 본관은 완전히 불타버렸다. 남아있던 무사들과 식솔들도 대거 떼죽음을 당했다. 몇몇 부녀자와 하인등만이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주했으니 실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이다. 이후 황보세가의 입지는 나날이 실추되었다. 분가조차 만들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황보세가는 바야흐로 암흑기에 접어들어야 했다. 오대 세가에서도 밀려났고 엎친 데 엎친 격으로 상당수의 사업장을 인근 지역의 모용세가에 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저력 있는 황보세가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가주인 황보천은 주먹을 불끈 거머쥐고 제기를 부르짖었다. "우린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그리하여 오대세가에 다시 황보세가라는 이름을 올릴 것이다." 장원은 불타버렸지만 다행히 지하의 창고에는 많은 무공비급과 영단이 남아있었다. 황보세가는 그것을 바탕으로 제기의 몸부림을 취했다. 가주인 황보천이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초절정고수를 키워 내는 것이다. 가문의 제일 고수이던 초절정고수가 정사대전 중에 전사했기에 황보세가는 아직까지 화경의 고수를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초절정고수의 유무는 세가의 입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세가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초절정고수를 키워내야 한다.' 황보천은 가문의 주력 고수들 중 가장 자질이 뛰어나고 무공이 강한 한 명을 뽑았다. 그리고 그에게 최고급 영단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그때 선출된 무사가 바로 황보운악이었다. 황보세가에서는 돈을 아끼지 않고 풀어 최고급 영단을 사 모았다. 그리고 수집한 영단은 모두 황보운악이 복용했다. 그것을 위하여 황보세가는 보유한 토지를 절반 이상 매각해야 했다. 현재 황보세가가 금전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다행히 황보세가의 대계는 성공했다. 비싼 영약을 아낌없이 먹은 황보운악이 마침내 초절정의 벽을 깨뜨린 것이다. 이후 낭보가 여럿 전해졌다. 그중 가장 큰 낭보는 모용세가의 본단이 묵회에 의해 함락된 것이다. 본가가 쓸려버린 모용세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 소식을 들은 황보천은 무릎을 쳤다. '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 엄청난 기회다. 이번 기회에 과거 빼앗겼던 사업장을 되찾아야 한다.' 하지만 황보세가에는 여력이 없었다. 주력고수는 물론 하급무사마저도 모자란 실정이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다. 비록 본가가 멸망했다고는 해도 하남의 모용세가 분가에는 아직까지 황보세가가 감당살 수 없는 수의 무사들이 도사리고 있다. 황보운악이라는 기댈 구석이 있었지만 모용세가라고 초절정고수가 없는 것이 아니다. 낭인들을 사 모으려고 해도 그럴 만한 돈이 없었다. 그러나 황보천은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다. 어떻게든 사업장을 되찾아야만 본가가 과거의 영화를 되찾을 수 있다.' 황보세가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정략결혼을 통해 돈줄을 끌어 모으는 것이었다. 끌어 모은 재물로 낭인들을 대거 고용해서 모용세가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보려는 것이다. 그 싸실을 떠올린 황보운악은 씁쓸히 미소 지었다. "역시 무림에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어. 정사대전 당시에는 모용세가의 무사들과 합동작전을 벌였는데 말이야." 귓전으로 야릇한 음향이 파고들었다. 남녀가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였다. "아,안돼요. 이, 이곳만큼은 정말로...." "안될게 뭐 있소? 좋은게 좋은거라고, 이자리에서 아예 끝장을 봅시다." 정황을 보니 황보명이 점점 깊은 곳을 더듬자 손자며느리가 될 목유경이 반항하는 모양이었다. 황보운악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저런 한심한 녀석. 조금 있으면 약혼식을 올릴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황보운악은 머리를 내저었다. "저 녀석이 조금만 무공수련에 관심을 가져주면 좋으련만. 워낙 게을러서 세가 내에서도 내둘리고 있는 상황이니." 아무리 한심해도 혈육의 정만은 어쩔 수 없다. 황보운악은 눈살을 찌푸린 채 황보명의 장래를 걱정했다. "아무래도 가주에게 특별히 부탁을 해야겠군.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으니 특별히 엄한 스승을 골라 이번 기회에 명이를 확실하게 가르쳐야겠어. 매질을 해서라도 버릇을 고쳐야해." 물론 그것은 지금까지 수없이 해왔던 다짐이다. 하지만 황보운악은 알고 잇었다. 황보명이 찾아와 눈물로 호소하면 깜빡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황보운악이 언급한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천은 한창 약혼식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미 많은 하객들이 목가장에 도착해서 약혼식 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마당에는 빈틈없이 술상이 들이찼고 인근 마을 사람들이 둘러앉아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장주인 목수곤이 신이 나서 손님들을 맞아들였다. "어서들 오시오. 오늘은 우리 목가장이 황보세가와 인연을 맺는 날이오." "경사를 축하드립니다." 혼인이 아닌 약혼식이었지만 무척 많은 사람들이 축하하러 찾아왔다. 농한기였기 때문에 목수곤은 심지어 소작인들까지 불러들였다. 그로서는 목가장의 위세를 자랑하기 위해 사람들을 끌어 모은 것이지만 당사자인 황보천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너무 심하군. 그냥 조용히 치르려 했는데 말이야.' 사실 별 볼일 없는 목가장과 정략결혼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황보세가로서는 좋을 게 없다. 금전적으로 곤란하다는 사실을 널리 떠벌리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목수곤에게 가급적 약혼식을 조용히 치르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이 난리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목수곤을 노려보았다. '한심한 작자로군. 겉멋만 들어가지고...' 사실 황보세가의 가주은 그가 구태여 목가장까지 올 필요는 없었다. 황보명은 직계제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촉망받는 후기지수도 아니다. 상대 또한 평범한 가문의 식솔이니만큼 그저 총관만 보내도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황보천으로서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황보명의 할아버지가 황보세가의 제일 고수인 황보운악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목가장 같은 형편없는 장원을 방문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신이 나서 사람들을 맞아들이는 목수곤의 뒷모습을 보며 황보천은 코웃음을 쳤다. '흥! 무림세가 좋아하네. 지금은 ㅁ수가를 파견해 주겠지만 사업장만 되찾고 나면 어림없다.' 황보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목수곤은 한껏 흥에 겨워 있었다. 목가장의 정문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러나 약혼식을 올릴 시간이 되자 드나드는 사람들이 부쩍 줄어들었다. 황보세가에서 파견된 무사 운천이 길게 하품을 했다. "흐아암. 피곤하군." 부동자세로 서서 사람들을 맞이했기 때문에 전신이 마구 저려왔다. 혹독한 수련을 겪은 무사라고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기에 운천은 자세를 풀고 길게 기지개를 켰다. 옆에 서있던 비표가 농담을 걸어왔다. "그러다가 가주님의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러나. 몸가짐에 각별히 신경 쓰라고 명하셨거늘..." "뭐 이제 오는 사람도 없잖아. 그나저나 배가 몹시 고프군." "글쎄 말이야. 안에서는 한창 신나게 잔치를 벌이고 있을 텐데 말이야." 운천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음성을 낮췄다. "그런데 우린 언제까지 여기에 파견되어 있어야 한다고 들었나?" "잘 몰겠네. 그리 오래 있지는 않을 거야." 운천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정말 운이 없군. 조만간 사업장을 되찾기 위해 모용세가와 싸움을 벌여야 할 텐데 이런 촌구석에 쳐박혀 있어야 한다니 말이야. 공을 세워 직책을 올릴 기회가 허무하게 사라지는군." 그 말에 비표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운천을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모용세가와 싸움이 벌어지면 우리같은 하급 무사들은 무수히 죽어나갈 것이 분명하네. 이곳에 배치된 것이 크나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야지." 운천이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댄관절 무사의 임무가 뭔가? 싸우는 것 아닌가? 무공은 그러기 위해서 배우는 거야. 아무튼 난 이번 기회를 놓친것이 무척 아깝네." "원 사람도...." 투덜거리며 고개를 돌리던 비표의 눈이 번쩍 커졌다. 전혀 느끼지 못한 사이 누군가가 정문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다가오는 기척도 느끼지 못했기에 비표는 바짝 긴장한 채 부동 자세를 취했다. 나타난 사람은 백색 무복을 산뜻하게 차려입은 젊은이였다. 이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이는 꽤나 수려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비표는 반사적으로 방문객의 허리춤을 살폈다. 무복을 입고 있었지만 예상 밖으로 젊은이는 검을 차고 있지 않았다. 꽤 잘 생겼다는 생각을 하며 비표는 용무를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젊은이가 비표를 쳐다보았다. 젊은이의 정체는 바로 초무극의 장원을 떠나온 냉유성이었다. "이곳에 무슨 잔치가 있나보군요." "아! 소문을 듣지 못하셨나보군요. 저희들은 황보세가 소속의 무사들입니다. 본가의 황보명 공자와 목가장의 유경소저와의 약혼식이 오늘 벌어질 계획입니다." 그 말에 냉유성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유경 소저가 오늘 약혼을 하는군요. 전혀 모르고 있엇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냉유성은 웃는 낯으로 용무를 설명했다. "목가장에다 보관해 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받으러 왔습니다." 순간 운천과 비표는 바짝 긴장했다. 혹시라도 젊은이가 받아갈 것이 사람의 목일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를 받으러 왔다는 말은 원한은 가진 자가 시비를 걸 때 종종 하는 말이다. 그래서 운천은 슬그머니 허리춤에 찬 호각으로 손을 가져갔다. '겉으로 봐서는 도무지 무공을 익힌것으로 보이지 않는 청년이거늘... 우리가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을 볼 때 살수일 가능성도 있어. 자고로 가장 평범한 자가 살수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했어. 이 사실을 가주님께 알려야해.' 모용세가와의 대결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무사들은 신경이 바짝 곤두선 상태였다. 그들의 반응을 보고 저간의 사정을 알아차린 냉유성은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저는 검을 받으러 왔습니다. 일전에 목가장에 묵으며 제 검을 보관한 적이 있거든요. 그러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소생에겐 소란을 일으킬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요." 그때서야 운천과 비표는 비로소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귓전으로 냉유성의 낭랑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이왕 온거 약혼식을 축하해 드리고 가야겠군요.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비표가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살짝 목례를 한 냉유성이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문을 닫은 비표는 생글 생글 웃었다. "그 청년 인상 한 번 정말 부드럽군. 여자들에게 정말 인기 많겠어." "그러게 말이야.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이기에 인상이 그토록 부드러울까?" 냉유성의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과거와는 판이하게 변해있었다. 환골탈태를 하기 전의 냉유성은 상대에게 마치 잘 벼린 칼과도 같이 날카로운 인상을 안겨주었다. 특히 강렬한 안광은 마주치는 사람을 저절로 주눅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대공을 성취하고 나자 냉유성의 분위기는 지극히 부드럽게 변했다. 돌출되었던 태양혈(관자놀이)도 쑥 들어가서 겉으로 봐서는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냉유성은 사람들이 왁자지껄 잔치를 벌이고 있는 연무장을 한가롭게 걸어 통과했다. 소작인으로 보이는 농부들이 연무장에 둘러앉아 흥겹게 농주를 마시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 엄청난 수모를 안겨준 목가장에 찾아왔지만 냉유천의 안색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그는 모든 감정을 바람결에 날려버린 상태였다. 목가장에 온 목적은 오직 하나 검을 되찾는 것뿐이었다. "검을 되찾는 즉시 당문으로 가야겠어. 그곳에 가면 주공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야." 내전 역시 잔치분위기로 들떠있었다. 바깥쪽과는 다른 점이 있다면 음식이 더 고급스럽고 좋은 술이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른바 귀빈석인 것이다. 한쪽에는 초청된 가기(歌妓)들과 예인(藝人)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뚱 따당 땅 흥겨운 가락이 내전을 가득 메웠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안쪽에 앉아 있는 두 명의 남녀였다. 화려한 복색으로 한껏 치장한 황보명과 목유경이 약혼식을 위해 앉아있는 것이었다. 상석에는 황보운악과 황보천, 그리고 목수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무래도 장주가 내 검을 가지고 있겠지?' 살짝 고개를 끄덕인 냉유성은 머뭇거림 없이 걸음을 옮겼다. 황보운악은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약혼식이 거행될 순간을 기다렸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그로서는 이런시끌벅적한 분위기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대협, 한 잔 받으시지요." 옆에 앉은 목수곤이 연신 잔을 권했지만 황보운악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제가 권하는 잔이 내키시지 않나보군요." 머쓱해진 목수곤이 술잔을 거두자 황보운악은 얼굴을 찡그렸다. 빨리 돌아가서 수련에 몰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때 그의 눈이 커졌다. 이쪽으로 느릿하게 걸어오는 백의의 청년을 본 순간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아야 했다. '이, 이럴 수가...' 겉으로 보기에 청년은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초절정의 벽을 깨뜨린 탓에 황보운악은 청년의 무위를 대번에 간파했다. 자고로 고수만이 고수를 알아본다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청년은 자신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경지의 고수였다. '미,믿을 수 없군. 저토록 젊은 나이에 어찌...' 청년은 자신처럼 초절정의 벽을 돌파한 화경의 고수가 틀림 없었다. 여유 넘치는 발걸음과 자연스럽게 갈무리된 기세만 봐도 틀림 없었다. 황보운악은 자신의 판단을 의싷맣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문파에서 저런 고수를 키워냈을까? 아무리 봐도 서른이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초절정의 벽을 돌파하다니....' 누구보다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자부하는 황보운악이었다. 그런 자신도 환갑이 넘어서고 나서야 겨우 초절정의 벽을 무너뜨렸다. 그것도 온갖 영약을 닥치는 대로 복용한 끝에 이룬 성취가 아니던가? 호승심을 느낀 황보운악은 전신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아무래도 확인해 봐야겠어. 혹시라도 내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으니...' 이윽고 황보운악의 몸에서 엄청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콰콰콰콰 화경의 고수가 뿜어낸 기세는 마치 노도처럼 청년이 있는 방향으로 폭사되었다. "으헉! 뭐, 뭐야?" "꺄아악." 장내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화경의 고수가 있는대로 기세를 쏘아냈기 때문에 사람들의 안색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심신을 강하게 억누르는 기세는 사람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이곳에 운집한 사람들의 태반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혹독한 수련을 겪은 무사들도 화경의 고수가 발산하는 기운을 견디기 힘드는데 하물며 범인이 견뎌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웠다. 옆에 앉아있던 황보천조차 기세에 압도당해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수,숙부님?" 손자의 약혼식을 치르는 자리에서 느닷없이 기세를 내뿜어 사람들을 경동시키다니.... 물론 황보운악이 그러는 이유를 황보천이 알 리 만무햇다. 기세를 내뿜어 본 황보운악은 자신의 판단이 정확햇음을 알아차렸다. "역시." 엄청난 기세가 집중되었지만 청년은 태연히 기세를 받아넘겼다. 아니, 자연스레 흘려버린다는 게 정확한 판단이었다. 동일한 수준의 고수가 아니고서야 저럴 수는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황보운악은 기세를 거뒀다. 사람들은 그때서야 겨우 가쁜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심약한 사람 몇은 혼절한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숨을 고른 황보천은 의아한 표정으로 황보운악에게 물었다. "수, 숙부님, 도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황보운악에게로 향했다. 조금전의 강력한 기운을 뿜어낸 것이 과연 사람이 한 짓이란 말인가? 실감이 나지 않는지 몇몇 하객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황보운악은 황보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백의를 입은 청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말문이 한참 만에 트였다. "정말 놀랍군. 믿을 수가 없어." "....." "벽을 깨뜨렸는가?" 그의 말에 냉유성은 빙그레 웃으며 목례를 했다. 이미 황보운악이 기세를 내뿜은 이유를 짐작하고 있던 냉유성이었다. "목가장에서 화경의 고수를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그렇습니다. 벽을 깨뜨렸습니다." "어, 언제 깨뜨렸는가?" "얼마 되지 않앗씁니다." 황보운악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어떻게 깨뜨렸는가? 그대 역시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는가?" "제 경우는 약간 다릅니다. 동적인 체험을 겪은 뒤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지요." 황보운악은 경악했다. 그런 경우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놀랍군. 두가지 방법을 모두 이용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니..."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선배님의 존함이 궁금하군요. 감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황보운악이 대답해 주었다. "노부는 황보세가의 황보운악이라네. 무림 동도들이 과분하게도 파랑검이란 명호를 붙여주었지." "황보세가 분이셨군요. 역시 황보세가의 이름은 명불허전입니다." "내가 정체를 밝혔으니 자네도 밝혀야 하지 않는가?" 그때서야 냉유성은 공손히 포권을 했다. "냉유성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원래 공동 출신이었지만 지금은 파문당해 낭인으로 떠돌고 있습니다. 현재 한 분을 주공으로 모시고 있지요." 황보운악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냉유성? 그럼 자네가 공동산의 검귀란 말인가? 색목인을 주공으로 두고 있다는...." "그렇습니다." 냉유성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황보운악이 탄식을 했다. "허어, 공동은 엄청난 인재를 잃었군. 이토록 젊은 나이에 화경의 고수가 된 자네를 파문시키다니... 아마 공동파의 장문인이 이 사실을 안다면 땅을 치고 후회할 걸세." 둘의 대화를 듣고 잇던 사람들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물론 무림과 연관이 없는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지만 무림에 적을 둔 사람들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저토록 젊은 나이에 초절정의 벽을 깨뜨린 이가 나타나다니... 특히 목유경의 안색은 백짓장이나 다름없었다. "세,세상에..." 처음 냉유성이 들어섰을 때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기억으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서, 설마? 아니겠지?" 그가 아는 냉유성은 화상으로 얼굴이 흉측하게 변해버렸다. 때문에 그녀는 백의의 청년을 얼굴만 닮은 타인으로 간주해 버렸다. '흉터가 없는 것을 보니 다른 사람이로군. 나이도 월등히 어려보이니 틀림없겠지? 그런데 정말로 많이 닮았네?' 이후 그녀는 연거푸 놀라야 했다. 황보운악이 기세를 내뿜는 순간 그녀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과연 이게 사람이 한일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놀라운 능력이었다. '화경의 고수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니... 정말 놀라워.'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어진 대화는 그녀의 입이 쩍 벌어지게 만들었다. 대화에 따르면 청년은 황보운악에 견주어도 전혀 뒤쳐지지 않는 고수. 다시말해 초절정의 벽으 ㄹ깨뜨린 화경의 고수란 뜻이다. 저토록 젊은 사람이 사람 같지도 않은 화경의 고수라니.... 그녀의 눈빛이 금세 몽롱해졌다. '저런 사람을 남편으로 맞을수 있다면 그 얼마나 행복할까?' 하지만 그녀는 이내 혼비백산했다. 백의청년이 자신의 이름을 밝힌 순간이었다. 냉유성이라는 이름 석자는 그녀를 여지없이 얼어붙게 만들었다. 크게 뜨여진 눈동자에는 경악이 가득했다. '이, 이건 꿈이야. 결코 현실이 아니야.' 하지만 이어지는 대화는 그녀에게 이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여지없이 각인시켜주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서른하나입니다." 그 말에 황보운악은 감탄사를 토해냈다. "정말 놀라우이. 그나이에 대공을 이루다니 말일세. 무림사를 통틀어 봐도 자네 나이에 대공을 이룬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겔서." "하하! 과찬이십니다." "그래, 이곳에는 무슨일로 왔나?" 냉유성의 시선이 목수곤에게로 향했다. "맡겨두었던 검을 찾으러 왔습니다. 제 검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거든요." 목수곤 역시 얼이 빠진 듯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아경과 소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쩍 벌어진 입에서 침이 흘러 내렸지만 그녀들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황보운악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검? 자네정도의 고수가 왜 이곳에다 검을 맡겨놓았지?" "얼마 전에 잠마련 무사들과 맞닥뜨려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불길 속에 갇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크나큰 화상을 입었지요. 그때 이곳에서 잠시 신세를 진 일이 있습니다." 말을 마친 냉유성은 오른손을 들었다. "그땐 화기로 인해 엄지와 검지가 눌러 붙어버렸지요. 그래서 도저히 검을 파지할 수 없더군요. 검을 두고 간 것은 바로 그때문입니다. 다시 검을 들 수 있게 되면 찾으러 온다고 햇으니 잘 보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랬군. 그렇다면 의당 찾아가야지." 황보운악의 시선이 목수곤에게로 향했다. "냉유성 소협에게 지금 즉시 검을 돌려주시오. 일단 줄 건 주고 대화해야 할 것 같소." 목수곤이 쩔쩔매며 황보운악의 시선을 회피했다. "거, 검은...." 황보운악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설마 잃어버린 것은 아니겠지요?"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쩔쩔 매던 목수곤이 손가락을 들어 한쪽을 가르켰다. "거, 검은 황보명 공자가 가지고 갔습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보관하고 있는것이라 말씀드려도 막무가내로...." 목수곤이 가르킨 쪽에는 황보명과 목유경이 앉아 있었다. 목유경은 완전히 넋이 나가 잇었고, 황보명은 불안한 기색으로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가렸다. 황보운악은 비로소 사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명이가 선물 받았다며 가져온 것이 바로 냉유성 소협의 검이었군. 어쩐지 목가장 정도의 장원에서 보유할 만한 검이 아니다 싶었지.'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 황보운악이 황보명에게 손을 내밀었다. "명아야, 그 검을 이리로 가지고 오너라." "....." "그 검은 냉 소협이 맡겨둔 검이다.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가야 한단다." 황보명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집을 풀었다. 하지만 그것을 할아버지에게 건네지 않고 등 뒤에 감췄다. "시,싫어요. 이 검은 정말 제 마음에 든단 말이에요." 황보운악의 미간에 노기가 서렸다. 설마, 설마 했더니 손자가 이토록 상황판단 못하는 천둥벌거숭이라니.... 그는 다시 한 번 좋은 말로 타일렀다. "그 검의 주인은 엄연히 냉 소협이란다. 돌려드려야지?" 그러나 황보명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안 돼요. 이 검은 절대로 넘겨줄 수 없어요, 할아버지. 제발 부탁이에요. 할아버지 실력이라면 저놈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잖아요. 제발 이 검을 제가 가질 수 있게 해주세요." 순간 황보운악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손자에 대한 애정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낀 황보운악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런 망할 자식아! 당장 검을 내놓지 못하겠느냐?" 거친 욕설에 황보명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지금까지 자라오며 할아버지로부터 거친 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던 황보명이었다. "하,할아버지." "만약 검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황보운악은 머뭇거림 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차창 이어지는 황보운악의 말이 황보명의 귀를 파고들었다. "팔 하나를 베어버리겠다. 오늘의 잘못에 대한 징죄로 말이다." 얼굴이 하얗게 변한 황보명이 주춤주춤 다가왔다. 황보운악은 황보명이 떨리는 손으로 내민 검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머뭇거림 없이 냉유성에게로 건넸다. "자, 받게. 그리고 부디 손자의 무례를 용서해 주기 바라네." "별 말씀을... 순순히 검을 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닐세. 원래 자네 것이 아니었는가? 당치도 않네." 황보운악의 시선을 조용히 맞받으며 냉유성은 입을 열었다. "괜히 저 때문에 잔치 분위기가 식어버렸군요. 황보대협의 은덕을 기리는 뜻에서 제가 검무를 한 곡 추어 올리겠습니다. 오랜만에 애검을 손에 쥐었더니 무척 기쁘군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그럼 부탁하네." 냉유성이 검을 들고 내전 한가운데에 섰다. 스르릉 맑은 소리와 함께 새하얀 검신이 드러났다. 내공을 끌어올리자 검신이 순식간에 시퍼렇게 물들었다. 그 상태로 냉유성은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초절정의 벽을 돌파한 뒤 추혼검법이 한결 완숙해졌다. 이 상태라면 충분히 실전에 응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신이 빠른 속도로 대기를 갈랐지만 파공성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냉유성의 검무는 한 폭의 그림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입을 딱 벌린 채 너울너울 움직이는 냉유성의 움직임을 감상했다. 검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었지만 그들의 눈에도 결코 검무가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파츠츠츠 검에서 자욱하게 검사(劍絲)가 뿜어져 나왔다. 검기와 검강의 중간 단계에 있는 검사가 마치 거미줄처럼 뿜어져 나와 씨줄과 날줄을 이루었다. 파란빛을 뿜어내는 검사가 냉유성의 몸을 마치 그물처럼 둘러쌌다. 사람들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어떻게 저럴 수가...." 한 자루 검으로 저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할 정도였다. 냉유성의 검무는 약 일 각 정도 계속되었다. 검무가 끝나자 사람들이 막혔던 숨을 겨우 토해냈다. 냉유성의 검무는 그 정도로 장관이었다. 고개를 돌리며 사람들에게 일일이 목례를 한 냉유성은 마지막으로 황보운악을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조금 살아난 것 같으니 소생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버, 벌써 가려고...." 약혼식이나 보고 가지." "갈 길이 바빠서 그러니 이해해 주십시오." 살짝 고개를 돌린 냉유성은 목유경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목유경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녀를 쳐다보는 냉유성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물끄러미 목유경을 지켜보던 그가 살짝 포권을 했다. "유경 소저, 약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행복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겠습니다." 목유경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부들 부들 떨리는 몸을 추스르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검을 잡지 못하게 되었다고 매정하게 내쳤던 사람이 감히 쳐다보기조차 힘든 존재가 되어 돌아오다니... '안 돼! 이건 정말 아니야.' 그 짧은 순간 그녀는 불과 한 달 전의 결정을 수없이 후회하고 후회했다. 하지만 인간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냉유성의 시선이 다시 목수곤에게로 향했다. 담담한 시선을 받은 목수곤이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 역시 면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큰 행사를 치르시느라 힘드시겠군요. 부디 목가장이 앞으로도 더욱 번창하기를 기원합니다." 살짝 목례를 하고 돌아서는 순간 누군가가 냉유성을 불렀다. "내, 냉 소협.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냉유성을 부른 이는 황보세가의 가주인 황보천이었다.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눈빛으로 냉유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내뱉은 말은 정말로 엉뚱했다. "호, 혹시 성혼을 하셨소?" 냉유성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걸 왜 물으시는지?" 황보운악과 냉유성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황보천은 주먹을 불끈 거머쥐었다. '이것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기회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 청년을 붙잡아야 해.' 초절정고수의 존재는 무림문파의 위상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제 아무리 무사를 많이 보유한 문파라도 화경의 고수가 없다면 무림에서 인정받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황보천도 바로 그런 이유로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면서 황보운악을 초절정고수로 변모시켰지 않았는가? 그런 황보천의 입장에서 냉유성은 걸어다니는 보물덩어리나 다름없었다. '서른하나에 초절정의 벽을 깨뜨렸다면 차기 천하제일인은 예약한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저 청년을 본가로 끌어들인다면 황보세가가 다시 오대세가로 인정 받는 것은 일도 아니다.' 비록 공동파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파문 당했다고 했으니 문제 될 것이 없다. 색목인을 주공으로 모시고 있다는 점도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서역에서 온 자는 다시 서역으로 돌아가는 법. 그렇게 된면 냉유성은 중원에 남겨진다. '자기 입으로 낭인이라는 사실을 밝혔으니 먼저 잡는 자가 임자야. 만약 냉 소협을 황보세가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면...' 생각을 거듭하던 황보천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렇게 된다면 당장 있을 모용세가와의 대결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시간이 지나면 무림세가 중 제일로 발돋움할 수 있다. 그러니 황보천의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그는 두서 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우, 우리 황보세가에는 결혼 적령기에 놓인 아이가 열명이상 있소. 그중 몇은 어디에 내세워도 꿀리 장ㄶ을 만큼 미모가 출중하다오. 부디 황보세가의 여식을 반려로 맞아주실 수 없겠소?" 난데 없이 엉뚱한 말이 나오니 냉유성으로서는 황당해질 수밖에 없다. 마음이 급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황보천이 급히 말을 바꾸었다. "데, 데릴사위로 들어오라는 뜻이 아니오. 처, 첩이라도 좋으니 받아들여 달라는 말이요. 소협이 원하는 아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내어주겠소. 서, 설사 내딸이라고 해도 말이오." 떠듬거리는 황보천의 음성에는 절실함이 배어 있었다. 냉정하다고 평가받는 황보천이 이토록 허둥지둥 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그 정도로 마음이 앞서 있다는 뜻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하객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황보세가의 가주가 저토록 저자세로 나선다는 것은 쉽사리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런 사정을 떠나 황보천으로서는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가문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모용세가와 일전을 벌여도 성공률은 고작해야 삼 할 미만이었다. 하지만 냉유성만 회유한다면 단숨에 칠 할 이상으로 올라간다. 초절정고수 하나의 위력은 그정도로 컸다. 그러니 황보천이 이같이 파격적인 제안을 할 만도 했다. 그러나 그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냉유성은 이미 여자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은 상태. 그가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죄송하지만 전 이미 성혼을 한 상태입니다." 순간 목수곤의 눈이 화둥잔만 하게 커졌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미혼이었던 그가 어느새 혼인을 했단 말인가? 황보천의 눈가에 실망감이 어렸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쉽사리 물러날 그거 아니었다. "처, 첩이라도 좋소. 아이 하나만 받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이니까요." 황보천은 급기야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 "소협과 혼약을 맺은 처자가 도대체 어느 가문의 누구요? 알고 싶으니 가르쳐 주시오." 냉유성과 혼약을 맺은 처자를 알아낸 뒤 그쪽 가문에 청탁을 넣어 가문의 여아 하나를 냉유성의 첩으로 들이려는 것이 황보천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이어진 냉유성의 대답에 여지없이 깨어져버렸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을 들어올린 냉유성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소개 드리겠습니다. 이 검이 바로 제 아내입니다. 평생을 함께 할 반려이지요. 그럼 전 이만..." 간략하게 아내를 소개한 냉유성이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남겨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그 속에는 완전히 넋을 잃은 목유경의 시선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멍청하게도 제 발로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 차 버린 것이다. . . . 여기까지 여우님 이 쳐주신거에요~>< 5.폭혈단으로 살귀를 만들어라! "졸리군. 아흠." 당문의 무사 마충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가 근무하는 곳은 적막감이 감도는 당문의 후원. 함께 근무하는 백자명이 눈웃음을 치며 마충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욱! 이놈이 감히 선배의 옆구리를 찌르다니..." 마충은 백자명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조심하십시오. 이곳은 당직이 자주 순찰을 도는 곳입니다." "그, 그렇지. 일전에도 자백이 꾸벅꾸벅 졸다가 혼찌검이 났지." "그런데 이해할 수 없군요. 바닥에 이상한 그림만 그려져 있는 곳인데 경비무사를 두 명이나 배치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외부인이 쉽게 침입할 수 잇는 곳도 아닌데..." 5.폭혈단으로 살귀를 만들어라! "졸리군. 아흠." 당문의 무사 마충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가 근무하는 곳은 적막감이 감도는 당문의 후원. 함께 근무하는 백자명이 눈웃음 을 치며 마충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욱! 이놈이 감히 선배의 옆구리를 찌르다니……." 마충은 백자명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조심하십시오. 이곳은 당직이 자주 순찰을 도는 곳입니다." "그, 그렇지. 일전에도 자백이 꾸벅꾸벅 졸다가 혼찌검이 낫 지." "그런데 이해할 수 없군요. 바닥에 이상한 그림만 그려져 있 는 곳인데 경비무사를 두 명이 배치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다 고 해서 외부인이 쉽게 침입할 수 있는 곳도 아닌데……." 백자명의 의구심은 당연했다. 이곳은 당문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곳이다. 있는 것이라곤 바닥에 그려져 있는 기괴한 형태 의 그림뿐이다. 상식적으로 경비무사를 배치해야할 이유가 없는 장소였다. 그러나 마충은 이곳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은 매우 중요한 곳이다. 오히려 정문보다 신경 써야 할 곳이기도 하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이한 음향이 그들의 귓전을 파고들 었다. 파파파파 고개를 돌리자 바닥에 그려진 도형에서 희미한 빛이 일어나 고 있었다. 백자명이 의아한 듯 눈을 치켜떳다. 당문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그가 거기에 얽힌 비밀을 알 턱이 없었다. "뭐지? 이상한 일이로군." 하지만 마충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드디어 데이몬 님을 보게 되는군. 당청 아가씨가 오매불망 기다리더니……." "뭐, 뭐가 말입니까?" 마충은 백자명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즉시 기주님에게로 달려가거라. 그리고 데이몬 님이 방 문하신다고 전하라." "그, 그게 무슨 뜻입니까?"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다. 그대로만 전하면 된다." "아, 알겠습니다." 백자명은 영문도 모른 채 몸을 날렸다. 마충은 기대어린 표정으로 바닥의 도형을 쳐다보았다. 분명 그는 뭔가를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점점 빛나던 도형이 어느 순간 강렬한 빛 무리를 내쏘았다. 번쩍 깜짝 놀란 마충은 고개를 돌렸다. 도저히 쳐다보기 힘들 정도 로 빛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빛 무리가 사라지고 나자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 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기괴한 도형 위에 수많은 사람들 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공이로군." 주변을 둘러본 데이몬은 미소를 지었다. 독객 이백여 명 전부 를 당문으로 공간 이동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독객들은 하나같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 리고 있었다. 분명 지하 석실에 모여 있었는데 빛 무리에 휩싸 였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전혀 다른 곳에 와 있지 않은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당혹한 표정으 로 눈만 꿈뻑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심경을 눈치 챈 데이몬이 앞으로 나섰다. "이곳은 잠마련이 아니오. 그러니 그대들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그 말에 독객들이 눈을 부릅떴다. "그, 그 말이 사실이오?" 데이몬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대들은 이제 자유요." 독객들은 눈을 꿈뻑거리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 어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잠마련의 지하석실에 있었는데 난 데없이 자유의 몸이라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당문성이 앞으로 나섰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무엇 떄문에 우릴 구해준 거요?" "설명하려면 매우 복잡하오. 일단 이곳이 잠마련이 아니란 사 실만 알아두시오." "이곳은 도대체 어디요?" 데이몬은 가만히 당문성을 쳐다보았다. "혹시 당문의 식솔이시오?" "그렇소만." "잘 되었군. 이곳이 바로 당가타요. 사천당문이 새로 자리 잡 은 곳이라고 생각하시오." 당문성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당가타에 새로운 당문 이 자리를 잡다니……. 당문성의 입장에서는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일이였다. 하지만 아래쪽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사람들을 보자 그는 멍해졌다. "혀, 형님?" 달려오는 이는 당문의 전대 가주이자 그의 친형인 당문수였다. 백자명의 보고를 받은 당문수는 즉각 후원의 마법진으로 향 했다. 때마침 방문해 있던 당청도 그의 뒤를 따랐다. "상공이 오실 것 같다고요?" 문주의 처소와 마법진이 그려진 후원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 였다. 금세 도착한 당문수는 깜짝 놀라야 했다. 마법진 위에 이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같이 누더기를 걸친 것을 보니 평온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아 니었다. "무슨 사람들이지?" 그들을 둘러보던 당문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 사이에 잘 알고 있는 당문의 식솔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친동생인 당문성의 모습도 있었다. "무, 문성아……."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낀 당문수는 머뭇거림 없이 몸을 날 렸다. "혀, 형님." 우두커니 서 있던 당문성을 끌어안은 당문수는 눈물을 펑펑 흘렸다. 잠마련의 습격 이후 보지 못했던 동생을 보게 되다니. 당문성의 눈가에도 어느덧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널 다시 만나게 되다니……. 꿈인지 현실인지 당최 실감이 나지 않는구나." 당문수의 얼굴을 알아본 당문 식솔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저,전대 가주님?" 물론 오독문이나 독곡 출신 독객들은 영문을 몰라 눈만 꿈뻑 거릴 뿐이었다. "장내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긴장이 풀린 독객들이 그 동안 못 다했던 말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소식을 들은 당문 무사들이 하나둘씩 후원으로 왔고 곧 낯익 은 얼굴을 만나 해후를 만끽했다. 그때 큼지막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반갑겠지만 조금만 기다리시오." 사람들의 시선이 데이몬에게로 향했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 탈출하신 분들 중에 고독에 중독된 분이 있소? 무척 기 쁘겠지만 고독을 먼저 처리해야 할 것 같소." 독객 중 몇 명이 앞으로 나섰다. 당문성도 거기에 끼어있었다. 잠마련 측에서는 실력이 있는 독객들에게 죄다 고독을 투여 해 놓은 상태였다. 그때서야 데이몬을 본 당청이 눈물을 뿌리며 안겨들었다. "상공, 오셨군요." "잠깐만 기다리거라. 일단은 고독을 없애는 것이 더욱 중요하 니까." 데이몬은 당문수를 쳐다보았다. 당문수가 형언할 수 없는 눈 빛으로 데이몬의 시선을 받았다. 그는 정말 당문에 엄청난 은혜 를 내린 은인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구태여 그것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시급 했다. "당 문주께 묻겠소. 혹시 고독을 제거할 수 있소?" 당문수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종류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고독에도 여러 종류 가 있으니까요." "실지렁이처럼 생겼더구려, 자고와 모고로 나뉘어져 있는데 모고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로 크고 자고는 작더이다." 당문수의 얼굴에 다행이라는 및이 떠올랐다. "충고로군요, 다행이 충고는 해독할 수 있습니다." "잘 되었군. 그럼 독객들의 고독은 당 문주께서 책임지고 제 거해 주시오. 난 흑법사의 몸속에 있는 고독을 제거하리다." 사람들은 일단 해후의 기쁨을 접었다. 지금으로서는 고독을 없애는 것이 급선무였다. 독객들은 서둘러 아래로 내려갔다. 누가 고독에 중독되어 있 는지 모르기 때문에 당문 사람들이 모두 달라붙어야 했다. 데이몬은 흑법사를 데리고 방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이제부터 네 머밋속의 고독을 제거해 주겠다." 데이몬의 머릿속에 들어간 고독은 이미 가사상태에 빠져 있 었다. 제 아무리 독한 고독이라도 어둠의 마력에 버텨내기는 힘든 노릇. 데이몬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고독을 없앨 수 있었다. 어둠의 마력을 집중시키자 고독이 그대로 타버린 것이다. 하지만 흑법사의 고독을 제거하는 것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내가 손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다. 흑마법사가 아니 면 어둠의 마력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지." "마왕님께서 직접 손을 써 주신다니 영광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시술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데이몬은 흑법사의 몸에 어둠의 마력을 밀어 넣었다. 이미 마 력에 익숙해져 있던 흑법사의 몸은 아주 자연스럽게 어둠의 마 력을 받아들였다. 데이몬은 세심하게 신경 써서 마력을 흑법사의 뇌에 불어넣 었다. 뇌의 혈관에 기생하는 고독은 매우 조심스럽게 건드려야 한 다. 조금이라도 위협을 느끼면 고독이 반사적으로 독을 발산하 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중독된 사람은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절명할 수밖 에 없다. 신경독이 뇌혈관에 곧바로 침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없이 순수한 마계의 기운인 어둠의 마력은 고독이 위협을 느끼기 전에 없애버릴 능력을 가지고 있다. 고독을 발견해 낸 데이몬은 조심스럽게 마력을 집중시켰다. 그리곤 움찔거리는 고독을 살살 달래며 마력으로 감싼 후 순간 적으로 힘을 주었다. 푸학 고독은 흔적도 없이 타버렸다. 독을 발산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말이다. 그렇게 해서 흑법사는 잠마련이 씌워놓은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반명 당문 사람들이 고독을 제거하는 방법은 조금 달랐다. 고 독의 종류가 충고란 사실을 알아낸 당문 사람들은 독객들의 귀 에 하얀 가루를 뿌렸다. 그리고 그 반대쪽 귀에는 거무스름한 빛을 내는 액체를 발랐다. 고독은 보통 운남이나 귀주 지방의 밀림에 서식한다. 좋아하 는 먹이는 물론 극도로 싫어하는 천적이 없을 리 없다. 한 쪽 귀에 바른 액체는 고독의 천적인 혼강충의 침을 농축시 킨 것이다. 또한 하얀 가루는 고독이 즐겨 먹는 풀뿌리를 가루 낸 것이었다. 천적인 혼강충의 침 냄새를 맡은 고독은 반사적으로 반대편 으로 움직였다. 그러다 가장 좋아하는 먹이 냄새를 맡자 머뭇거 림 없이 뇌에서 기어 나왔다. 잠시 후 독객들의 귀에서 실지렁이 같은 고독이 꾸물거리며 기어 나왔다. 경과를 지켜보고 있던 독객들이 머뭇거림 없이 손 을 뻗어 고독을 잡아챘다. 고독이 꿈틀거리며 신경독을 내뿜었 지만 사슴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착용하고 있던 당문도에겐 아 무런 해를 끼치지 못했다. 콰직 짓이겨진 고독이 채액을 낭자하게 뿜어냈다. 그런 식으로 독 객들을 중독시키고 있던 고독들이 하나둘씩 무력화되어갔다. 데이몬과 당문수는 문주의 집무실에 마주앉아 있었다. 데이 몬의 뒤에는 흑법사가 시립하고 있었고 옆에는 당청이 앉아 데 이몬의 손을 소중하게 매만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당문수가 싱긋 웃었다. "녀석, 데이몬 공이 꽤나 보고 싶었던 모양이구나." 당청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데이몬이 손을 뻗어 그 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도 네가 무척 보고 싶었단다." "정말요?" 행복에 겨워하는 당청을 웃는 낯으로 쳐다보던 당문수가 차 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도대체 데이몬 공의 능력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노부로써 는 감히 짐작하지 못하겠소이다. 잠마련 본단에 갇혀 있던 우리 식솔들을 구해내시다니……. 아마 이 사실을 노부가 남에게 말 한다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오." "운이 좋았지요. 때마친 이 녀석을 만나게 되어 구해낼 수 있 었답니다." 당문수의 시선이 흑법사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그분은 누구신지?" "나와 같은 곳에서 온 사람이오. 잠마련에서 주요 요직을 맡 고 있더구려. 지금껏 제조된 묵회의 독은 모두 그의 손길이 거 쳐 간 것이라오." 그 말에 당문수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그, 그렇습니까?" "그렇소. 하지만 염려하지 마시오. 그는 이제 나의 충실한 권 속이 되었소. 내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것은 물론 딴마음을 먹 을 우려가 없으니 믿어도 될 것이오." 당문수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얼마나 데 이몬을 믿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데이몬 공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믿겠습니다." 데이몬은 정색을 하며 당문수를 쳐다보았다. "이제 잠마련에 잡혀 간 식솔들도 구해내었으니 당문이 도약 을 할 시기가 돌아왔소. 일전에 의논한 대로 무림맹에 가서 정 파에 적을 두시오. 그러면 잠마련도 섣불리 손을 써오지 못할 것이오." "시기가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아직까지 저흰 힘이 모자랍 니다. 돌아온 독객들이 몸을 추스를 시간을……." 데이몬은 조용히 당문수의 말을 끊었다. "한 가지를 가지고 간다면 무림맹은 두말하지 않고 당문을 정 파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것이오." "그게 무엇입니까?" "묵회의 독에 대한 해독약이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손가락을 뻗어 흑법사를 가리켰다. "그에겐 해독약을 만들 능력이 있소. 묵회의 독은 모두 그가 만들어 낸 것이오. 그러니 해독약을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안겠소?" 당문수의 안색이 훤히 밝아졌다. "묵회의 독에 대한 해독제를 만들어 간다면 간단히 해결되겠 군요. 무림맹에서 두말없이 당문을 가입시켜 줄 것이 확실합니 다." "당연히 그렇겠지. 아무튼 그의 신병을 당분간 당문에 맡길 생각이오. 그를 이용해 해독약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내도록 하 시오." "알겠습니다. 데이몬 공." 그때 뭔가 떠오른 듯 데이몬이 당청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혹시 유성이가 오지 않았니?" "아니에요. 오지 않았어요, 상공." 데이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직까지 오지 않은 것을 보니 무슨 일이 있나보군. 별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상공과 같이 가지 않았나요?" "잠마련에 잡혀 가는 와중에서 헤어졌단다. 무사히 탈출한 줄 알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반드시 돌아올 거에요. 유성 오라버니는 그리 쉽게 당할 인물이 아니잖아요." "하긴, 그놈은 지옥에다 갖다 놔도 무사히 돌아올 녀석이니 까." 머리를 흔들어 걱정을 떨쳐버린 데이몬은 흑법사를 쳐다보 았다. "그럼 너는 이곳에 남아 당문에서 해독제 만드는 일을 도와주 도록 해라. 알겠느냐?" 흑법사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말씀대로 이행하겠습니다."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은 당문수를 쳐다보았다. "그럼 본인은 들어가 쉬도록 하겠소이다. 워낙 많은 일을 했 더니 무척 피곤하구려." "알겠습니다. 청아, 데이몬 공의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도록 해라. 알겠느냐?"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 데이몬이 이백 명의 독객을 구출해 온 이후 당문은 부산해졌 다. 당문도들의 기쁨은 정말 컸다. 정예들을 다시 되찾았으니 당문이 과거의 성세를 되찾는 것은 시간문제였따. 잠마련에 잡혀 갔다 돌아온 독객들의 몸 상태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데다 거듭된 중노동으로 체 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당문에서는 영양이 많은 보양식과 함 께 몸에 좋다는 영약을 대거 풀어 독객들을 치료했다. 그리하여 독객들은 조금씩 예전의 건강을 되찾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영입되었지만 장원이 워낙 넓었기 때문에 수 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오독문과 독곡 출신 독객들도 당분 간 당문에 남기로 결정했다. 소속 문파가 멸문했으니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당문수는 그들 모두를 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은 당문에서 지내도록 하시오. 추후에 기회가 되면 다시 문파를 세우는 데 도움을 드리도록 하리다." "넓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당문의 넓은 마음씀씀이에 감복한 독객들은 남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협조하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해서 당문은 급속도로 힘을 키워갔다. 잠마련 본단이 발칵 뒤집혔다. 이백여 명의 독객들이 하루아 침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잠마련의 계획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독객들이 사라졌 으니 모든 직업이 정지될 수밖에 없다. 독의 공급이 중단된 탓 에 독강시의 생산라인도 멈춰서버렸다. 그 소식을 들은 곽천도 의 눈이 터질 듯 커졌다. "그, 그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냐? 독객들이 한꺼번에 없 어지다니?" 독객들이 사라진 사실을 처음 알아낸 갈태랑이 겁먹은 표정 으로 보고했다. "석실 속에서 독객들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흔적도 없이 말 입니다." "이백여 명이 전부 말이냐?" "그, 그렇습니다." 곽천도는 매서운 눈빛으로 갈태랑을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네놈은 도대체 무얼 했느냐? 독객들의 동향을 감 시하는 것이 네 임무 아니냐?" "그, 그게……." 지은 죄가 있는지라 갈태랑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 거렸다. "이놈! 솔직히 말하지 못하겠느냐?" 곽천도의 호통에 찔끔한 갈태랑은 급급히 대답했다. "부, 부작용 때문에 밖에 나가 있었습니다." 곽천도의 얼굴에 어처구니가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독술에 대한 조예가 높은 네놈이 무슨 부작용을 걱정한단 말 이냐?" "부, 부작용이 발기부전을 유발한다고 해서……." "빌어먹을 놈." 곽천도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갈태랑을 노려보았다. 호색하 기로 유명한 갈태랑이라면 충분히 겁을 집어먹을 만한 부작용 이었다. 곤혹스러워하던 곽천도는 몸을 일으켰다. "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상황을 보니 독객들이 탈출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기정사실 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입을 막아야 했다. 해서 그가 달려간 곳은 독객들에게 투여한 고독의 모고가 보 관되어 있는 장소 였다. "놈들이 자고를 제거하기 전에 모고를 죽여야 한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한 곽천도는 맥이 탈 풀리는 것을 느꼇다. 모고가 하나도 남김없이 죽어있었기 때문이다. 모고가 죽으면 자고도 따라 죽는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 가지이다. 주먹을 불끈 움켜쥔 곽천도의 눈이 이글거리며 타올 랐다. "놈들이 벌써 고독을 제거했군. 그렇다면?" 그는 급히 석실을 나섰다. 그가 달려간 곳은 자신의 집무실이었다. 그곳에는 데이몬과 흑법사에게 투여한 고독의 모고가 보관되어 있었다. 집무실로 달려가는 곽천도는 마음이 급했다. "상황을 보니 그놈들도 고독을 제거했을 가능성이 큰 데……."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 있는 고독의 모고들도 죄다 죽어 있었 다. 다시 말해 데이몬과 흑법사가 몸속의 고독을 말끔히 없앴다 는 뜻이다. 허탈해진 곽천도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이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대제께 보고한단 말인가?" 생각보다 빠른 작업속도를 보고 고무되었던 것이 바로 오 늘 오전이었다. 그런데 단 몇 시진 만에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쨋거나 이곳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천기대제에게 이 사 실을 보고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몫이었기에 그는 마치 도살 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심정으로 사준환의 집무실로 향했다. 예상대로 사준환은 불같이 화를 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이냐?" 곽천도는 쩔쩔 매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데이몬 그놈이 수작을 부린 것 같습니다. 흑법사가 말한 공간이동마법이란 술법을 썻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놈에게는 감시의 눈길이 붙어 있지 않았느냐? 설마 그놈 에게 술법을 전개할 틈을 준 것이냐?" "그, 그럴 리는 없습니다. 저, 정말 철저히 데이몬을 감시했다 고 자부합니다." 사실 마법진은 비교적 감시에서 자유로운 흑법사가 전적으로 맡아 그렸다. 그러니 곽천도가 내막을 모를 수밖에 없었다. 사준환은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곽천도를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흑법사도 배신했다는 말이냐?" "정황을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데이몬 그놈에게 포섭된 것 같습니다." "그놈이 도대체 어떻게 공간이동 술법을 썻느냐? 설마 술법 을 사용할 수 있게 내버려둔 것은 아니겠지?" "그, 그게……." 곽천도가 떠듬거리며 내막을 설명했다. 그로서는 독객들의 탈출을 방조한 갈태랑에게 팔밀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을 들은 사준환이 불같이 화를 냈다. "저놈을 지금 당장 처형하라. 저딴 놈은 잠마련에 필요 없 다." 갈태랑이 새파랗게 질린 채 고개를 푹 수그렸다. 집법전의 무 사들이 그를 강제로 끌고 나갔다. 겁에 질린 갈태랑의 고함소리 가 대전안에 울려 퍼졌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대제. 부디 속하에게 다시 한 번만 기 회를……." 갈태랑이 끌려 나간 뒤 무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 기도 언제 저렇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동안 씨근거리던 사준환이 곽천도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된 것 어쩔 수 없다. 음양강시는 몇 구나 완성되었느 냐?" "운남으로 보낸 것까지 합치면 모두 스물다섯 구입니다." "독강시의 수는?" "대략 이백여 구가 완성되어 있습니다." 보고를 들은 사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군. 음양강시의 제조가 더 이상 불가능하니 그것 만으로 일을 치를 수밖에 없겠군." 비록 음양강시의 생산이 좌절되었다고는 하나 남아있는 것만 으로도 충분한 전력이라 할 수 있다. 초절정고수와 대등하게 맞 서 싸울 수 있는 음양강시가 스물다섯구나 되었고, 독강시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다. 무엇보다도 잠마련에는 철마가 있다. 마정지지의 마기를 흡 입해 강화된 철마라면 초절정고수 다섯 정도는 쉽게 처리할 수 있다. 그 정도 전력이라면 무림맹과 자웅을 겨루고도 오히려 남 음이었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한 사준환은 명을 내렸다. "묵회의 조직원들에게 폭혈단을 전달하라. 그것으로 일단 정 파의 내분을 유도해서 무림맹의 힘을 약화시켜야 한다." 폭혈단이라는 말에 곽천도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위 력이 엄청난 약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묵회주에게 포섭된 묵회의 조직원들은 태반이 구대문파 의 방계제자들이다. 오대세가의 인물도 있긴 하지만 그 수가 그 리 많지는 않다. 그들은 극락단이라는 희대의 독에 중독되어 있다. 그 독은 정 기적으로 해약을 먹지 않으면 오장육부가 녹아내리는 고통 속 에 숨을 거둬야 하는 극독이다. 잠마련은 한 달에 한 번씩 묵회의 조직원들에게 극락단의 해 약을 공급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해약이 아는 폭혈단을 공급하 라는 명이 떨어진 것이다. 폭혈단은 원래 배교에서 사용하는 약물이다. 전신의 잠력을 일시에 끌어올려 폭발시키는 약물이기 때문에 궁지에 몰린 무 사들이 동귀어진을 할 때 사용한다. 그 폭혈단을 잠마련의 독객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약효 를 비약적으로 변화시켰다. 극락단에 중독된 사람이 폭혈단을 복용할 경우 피를 갈구하는 살귀가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마성에 사로잡히는 것은 아니다. 평소대로 말 하고 행동하기에 겉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시술받은 자는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살심을 주체할 수 없게 된다. 주로 평상시에 반감을 품은 사람을 대상으로 말 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성을 잃는 경우는 없다. 폭혈단의 무서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마성에 사로잡힌 마공고수처럼 자신을 전혀 돌보지 않고 무차별 공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만 살심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더 욱 무서운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한참 뒤에서 써야 할 폭혈단이었다. 하지만 사 준환은 지금 당장 쓰라고 하고 있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던 곽천도가 허리를 꺾었다. "명령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제조된 음양강시를 모조리 운남으로 보내라. 빠른 시간 내에 음양혈강시로 변모시켜야 한다." "존명." "이게 웬 날벼락이냐. 데이몬이라는 놈 하나 때문에 잘 진행 되던 계획이……." 분기를 주체하지 못한 사준환은 연신 씨근거렸다. 생가 같아 서는 데이몬을 잡아 갈가리 찢은 뒤 돼지 밥으로 던져주고 싶 었다. 사준환을 열 받게 만들려는 데이몬의 계획은 이렇게 여지없 이 먹혀들고 있었다. 공간이동을 하느라 심력을 많이 소비한 탓에 데이몬은 정신 없이 자고 있었다. 한 달 반 동안 중노동을 했기에 체력이 많이 저하된 상태였다. 그런데 누군가가 살짝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기미를 느낀 데 이몬은 눈을 크게 떳다. "뭐, 뭐야." 뭔가 따듯한 것이 품속에 안겨 있었다. 살짝 이불을 들추자 붉게 상기된 당청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달아오른 얼굴이 더 없이 고혹스러웠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당청을 얼싸안은 데이몬의 눈이 크 게 부풀어 올랐다. "응?" 당청은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었다. 말 그대로 완벽한 나신. 귓전으로 모기소리처럼 가느다란 당청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죄송해요. 상고으이 잠을 깨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요." "이미 깻다." 퉁명스런 데이몬의 말에 당청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새근새근 가슴팍에 와 닿는 숨결을 느낀 데이몬은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일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널 지켜주고 싶다고 말이다. 그런 데 이게 무슨 짓이냐?" "면목 없는 짓인 것은 알아요, 하지만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 습니다." "……." "오늘 밤 상공에게 제 모든 것을 드리고 싶어요." 당청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순결한 처녀의 몸으로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였다. 하지만 사랑에 불타는 당청은 아무것도 가리지 않았다. 데이 몬은 잠자코 손을 뻗어 당청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네 마음만 고이 받겠다. 넌 더 없이 사랑스러운 아이야." 당청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상공, 전 상공에게 아이가 아니라 여인이고 싶답니다.' 데이몬은 손을 뻗어 당청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난 언젠가 이곳을 떠날 사람이다." "알아요. 알고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나와 같이 서역으로 갈 수도 없지 않느냐?" 당청은 고개를 푹 숙였다. 데이몬 말대로 가문을 두고 서역 으로 가는 것은 쉽사리 결단내릴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데이몬도 그녀를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가 사는 곳은 척박한 마계. 당청 같은 어린 소녀가 버티는 것은 그 야말로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청은 살짝 고개를 들어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동 자는 어느덧 촉촉히 젖어 있었다. "저에게 증표를 주세요." "……." "상공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그런다면 상공이 떠나시더라도 아이에게 사랑을 쏟으며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데이몬은 어림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순 없다. 아이의 운명이 뻔히 보이는데 어찌 그럴 수 있 단 말이냐?" 중원 사람들은 상당히 폐쇄적이다. 그 사실은 데이몬이 지금 까지 중원을 종횡하며 뼈저리게 느낀 점이다. 그나마 힘을 보유한 데이몬이 그럴진대 그렇지 않은 아이는 도대체 어떤 운명을 맞을 것인가? 하지만 당청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전 사천당문의 주요 식솔이에요. 그 누가 제 아이를 핍박할 수 있겠어요. 소녀가 목숨을 걸고 보호할 거에요. 그러니 제 발……." 데이몬은 당청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조금 도 물러서지 않고 데이몬의 시선을 맞받았다. 데이몬의 입술이 달싹였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후회하지 않아요." 대답을 들은 데이몬은 고개를 숙였다. 살포시 눈을 감은 당청 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급기야 둘의 입술이 하나로 포개 졌다. 열락의 시간이 지나간 뒤 당청은 데이몬의 팔을 벤 채 한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사랑을 쟁취한 여인의 표정이라고 나 할까. 데이몬 역시 홍조 어린 표정으로 당청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넌 정말 사랑스러운 여인이다." "감사해요, 상공." 당청은 꿈만 같았다. 처음 데이몬을 봤을 때에는 그리 의미 깊게 다가오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대결에서 패하고 자신의 운 명이 그에게 귀속되었을 때에도 그리 큰 의미를 둔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의 데이몬은 그녀에게 있어 전부나 마찬가지였 다. 물론 데이몬이 당문에 큰 은혜를 입힌 은인이라고 해서 그 런 것은 아니다. 엄밀히 따져서 전혀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 만 자신을 아껴주는 마음씀씀이에 마음이 완전히 사로잡힌 그 녀였다. 귓전으로 데이몬의 낭랑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할아버지는 이 사실을 아시느냐?" "네, 오기 전에 말씀드렸어요." 데이몬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제부턴 할아버지를 웃어른으로 대해야겠구나. 네 할아버 지라면 나에게도 그렇게 되니 말이다." "풋." 당청이 소리 없이 웃으며 데이몬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더없이 듣기 좋았다. 데이몬의 얼굴이 표 시나지 않게 구겨졌다. '젠장, 나보다 월등히 어린 녀석에게 할아버지라고 부르려니 난감하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가 비록 마계의 당당한 군주 중 하나 라고 하나 관계를 맺은 이상 당문수에겐 손자사위에 불과했다. 중원에 남아 있는 동안만큼은 역할에 충실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 당문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예들 이 모두 돌아왔으니 오대세가에 드는 것도 시간문제야." "모두 상공 덕분이에요. 소녀와 소녀의 가문을 위해 힘써주셔 서 감사드려요." "고맙다고 말하면 안 되지. 너와 나는 남남이 아니지 않느 냐." 당청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그녀였다. "할아버지께 들은 것이 있어요." "뭐냐? 말해 보거라." "아마 정파에 적을 올린다고 해도 오대세가와는 보조를 같이 하지 않을 거에요. 그러기엔 감정의 골이 너무 깊죠." "그렇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가급적 구파일방과 보조를 맞춰나가려고 해요. 무슨 일이 있 으면 그쪽 편을 들 생각이에요. 위급할 때 도움도 받고……." 데이몬은 괜찮은 생각이라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훌륭한 판단이다. 가문만을 생각하는 세가들보단 그래도 구 파일방이 낫지. 대의를 생각하는 작자들인 만큼 어려운 일에 처 했을 때 도움 받기도 쉬울 것이다." "가문에서도 그렇게 결론을 내렸어요. 독자적인 길을 걷되 구 파일방과 교류를 자주 가지기로 말이에요." 당청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상공은 언제까지 당문에 계실 생각이세요?" 데이몬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난 몇일 내로 떠날 생각이다." 당청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데이몬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 도 한없이 행복한데 바로 떠난다니……. 그녀의 눈빛이 간절해 졌다. "그렇게나 빨리 떠나시게요? 조금 더 계시면 안 되나요?" "해야 할 일이 있어. 잠라련의 기세를 조금 더 꺽어놓을 필요 가 있구나. 게다가 잃었던 힘도 되찾아야 하고." 당청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힘을 되찾으시다니요?" "내공을 회복할 방법이 생겼단다. 일이 수월히 진행될 경우 난 권능을 여과 없이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어떠한 경우에 처해도 널 지켜줄 수 있을 것이야." 당청은 풀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떨궜다. "알겠어요, 상공." 데이몬이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번에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구나. 혼자서 잘 지낼 수 있 지?" "걱정 마세요. 이래보여도 소녀는 무가의 식솔인걸요?" "그래야지." 데이몬은 몹시 사랑스럽다는 듯 당청을 끌어안고 오고가는 눈빛 속에 또다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술을 맞추는 두 사람. 방 안은 또다 시 열락의 회오리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 * * * * * * * 섬서를 출발한 냉유성이 막 사천에 들어섰다. 사천의 북단에 는 청성산이 있다. 그곳에는 구파일방 중 하나인 청성파가 위치 해 있었다. "오랫만에 이곳에 오는군. 정사대전 직전에 두어 번 들렀었는 데……." 냉유성은 한가롭게 주변을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오랫동 안 걸어왔기에 그는 배가 몹시 고픈 상태였다. "식사나 하고 갈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냉유성의 눈에 큼지막한 객점의 간판이 들어왔다. "잘 되었군." 그는 머뭇거림 없이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객잔 안은 만원이었다.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손님이 빼 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는 가늘게 눈매를 좁혔다. "이 층으로 가야겠군." 이 층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냉유성은 삼 층까지 가서야 빈자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예약이 된 곳이었다. 삼 층에 올라간 냉 유성의 앞을 건장한 체격의 점소이가 막아섰다. "이곳은 이미 예약이 된 곳입니다. 그러니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십시오." 냉유성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래층엔 자리가 없어서 그렇소." 그러나 점소이는 완강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예약하신 손님께서 삼 층 전체를 쓰시겠 다고 하셧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냉유성의 귓가에 계단을 올라오 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삼 층 전체를 세놓은 작자들이 올라 오는 모양이었다. "한 번 사정을 말해 동의를 구해봐야겠군." 위로 올라온 자들은 남녀가 뒤섞인 이십대 중반의 무사들이 었다. 하나하나가 눈빛이 형형하고 태양혈이 돌출된 것이 상당 한 수련을 쌓은 무사들이었다. 냉유성은 대번에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구대문파의 직전제자들이로군. 그렇지 않고서야 이십대 중 반에 저 정도의 성취를 이룰 수 없지.' 직전제자란 무림문파에서 차세대 주력으로 키우는 제자를 말 한다. 출신 성분과 가문이 좋은 자들 중에서 무학에 대한 자질 이 출중한 제자를 뽑아 문파의 역량을 한껏 집중시켜 키우니만 큼 진전이 타 제자들보다 월등히 빠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냉유성은 직전제자들에게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문파의 차세대 정예라 할 수 있는 직전제자들은 자존심이 강 하고 자부심 역시 대단하다. 그 때문에 속가나 방계제자들을 우 습게 보고 멸시하는 경향이 있다. 냉유성도 수련과정에서 직전제자들에게 모멸감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이놈들은 방계제자들을 동류로 인정조차 하지 않지. 이런 놈 들에게 부탁하기는 조금 껄끄럽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직전제자들이 모두 들어가 좌석에 앉 았다. 서른 명 이상이 앉을 수 있는 넓은 공간이었지만 들어찬 탁자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지' 냉유성이 포기하고 돌아내려가려던 순간 누군가와 딱 마주쳤 다. 예닐곱 명 정도 되는 무사들이 허겁지겁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을 본 냉유성의 눈가에 흥미가 돌았다. 차림새와 이룬 경 지를 볼 때 그들은 다름 아닌 방계제자들이었다. '무슨 일로 직전제자와 방계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을까?' 궁금해진 냉유성이 올라가던 무사 한 명을 붙잡았다. 눈빛이 초롱초롱한 이십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냉유성이 말을 걸자 여인은 눈을 둥그렇게 떳다. 곧 그녀의 볼이 봉숭아꽃처럼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준수한 미남자가 말을 걸어오니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아래층에 자리가 없어서 그러는데 혹시 합석해도 되겠습니 까?" 여인은 잠시 망설였다. 허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경우 꾸지람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냉유성이 눈웃음을 치며 다시 한번 청하자 그녀는 결 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게 하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서 냉유성은 겨우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물론 말을 걸었던 여인과 합석해야 했지만 말이다. 그 자리에 모인 자들은 무림맹의 비룡대 소속 무인들 이었다. 각 문파의 직전제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무림맹 소속 무력집단 중에서 상위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비룡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지 않는다. 구성원들이 각 문파의 직전제자들이다 보니 안전에 각 별히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비룡대는 비교적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임무만 맡아왔다. 지금 비룡대가 맡은 임무는 이곳 근처에서 횡행하는 색마 화 화낭인을 잡는 것이었다. 비교적 무공은 약하지만 그에 비해 악명이 월등히 드높은 색마들은 비룡대의 가장 좋은 먹잇감이었다. 임무를 떠올린 천무한은 주먹을 불끈 거머쥐었다. 그가 바로 비룡대의 대주였다. "반드시 놈을 잡아야 해. 미꾸라지 같은 놈. 네놈의 운명도 이 제 결정되었다." 옆에 앉아 있던 비룡대 대원들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놈은 독안에 든 쥐나 다름없습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가면 회롱현이란 마을이 있는데 놈이 그 곳에 자주 출몰한다고 합니다. 밀각에서 들어온 첩보이니만큼 확실할 것입니다." "그래야지." 그러는 사이 또 다른 무사들이 올라왔다. 같이 임무에 투입된 천봉돼 무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본 천무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같은 무림맹 소 속이긴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적전제자들이 아니다. 방 계 중에서 그나마 쓸 만한 자들을 모아 만든 무력단체 이기 때문 에 비룡대 대원들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저것들은 항상 늦는단 말이야." "쫌 일찍 일찍 다니지 못하겠나?" 방계 중에서 실력이 검증된 자들이라고는 하나 감히 적전제 자들에 비할 순 없다. 때문에 비룡대 대원들은 아무 꺼리낌 없 이 천봉대를 향해 면박을 주었다. "얼씨고? 저건 또 뭐야?" 비룡대 대원 중에서 광오하기로 소문난 단철민이 눈살을 찌 푸렸다. 뜻밖에 장면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천봉대 대원 중 한 명이 외인을 데리고 들어와 있었다. 화산파의 방계제자인 여민이었는데 그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외인과 합석해있었다. 그 모습을 본 단철민의 눈동자에 불똥이 튀었다. "저런 건방진……." 함께 임무에 투입된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버젓이 외인을 끌어들이다니……. 단철민은 머뭇거림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 다. 여민의 자리로 다가간 그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요? 작전회의를 해야 할 중요한 장소에 외인을 끌어들이다니……." 여민으로서는 쩔쩔 맬 수밖에 없다. "죄, 죄송해요. 아래에 자리가 없다고 해서……." "그렇다고 해서 외인을 끌어들이다니 도대체 정신이 있소, 없 소? 애당초 작전회의를 위해 삼 층을 통째로 전세 낸 것 아니오? 설마 그 사실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여민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보다 못한 냉유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담담하게 말하고 계단으로 걸어가는 냉유성의 뒷모습을 단철 민이 타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흥! 그래도 주제를 아는 놈이로군." 그 말에 냉유성이 걸음을 멈췄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단철민 의 입가에 걸린 조소가 보였다. "말씀이 심하시군요. 초면에 놈이라니……." 담담히 흘러나온 냉유성의 말에 단철민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뭐라고? 너 말 다했느냐?" 입구에서 벌어진 소란을 비룡대 대원들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다혈질로 소문난 단철민이 타인과 시비가 붙었으 니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다. "젠장, 또 한 사람 무참히 박살나겠군." "밥이나 먹고 싸움을 벌일 것이지." 보다 못한 여민이 다가와 냉유성을 달랬다. "제발 참으세요. 이러시면 제가 곤란해진답니다. 부디 제 얼 굴을 봐서라도……." 여민의 설득에 냉유성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이어 린 후배들과 다퉈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다. 막 몸을 돌리려는데 단철민의 냉소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흥! 계집 치마폭이 무척 든든한가 보지?" 고개를 돌린 냉유성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이어 폭풍 같은 기 세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콰콰콰콰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초절정고수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살기가 사방을 완전히 압도했다. 적전제자들의 성취가 빠르다고 해도 고작해야 일류 정도이 다. 그런 그들이 냉유성의 기세를 감당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 능한 일이다. 비룡대와 천봉대 대원들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일반인들과 는 달리 그들은 문파의 선배고수를 통해 이 같은 기세를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최소한 화경의 고수가 아니면 이같이 어마어마한 기세를 쏘 아낼 수 없었다. 무사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으으으으." 내공을 있는 대로 끌어올려 저항했지만 덜덜덜 떨리는 몸을 도저히 추스를 수 없었다. 단철민의 얼굴은 어느새 새하얗게 변 해 있었다. '세, 세상에…….' 저런 초고수에게 시비를 걸다니……. 그 와중에서 평정을 유지하는 사람은 오로지 여민뿐이었다. 냉유성이 의도적으로 그녀에게만큼은 기세를 뿜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냉유성은 기세를 거뒀다. 객잔 삼 층을 완전히 점했 던 기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크헉." 무사들이 신음을 토하며 힘없이 늘어졌다. 기세로 인해 엄청 나게 심력을 소모했기 때문이었다. 유일하게 서 있던 단철민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냉유성이 냉랭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나더러 뭐라고 했느냐?" 단철민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한 번 쓴맛을 본 그가 어떻게 또다시 막나갈 수 있단 말인가? 귓전으로 서슬 퍼런 냉유성의 음성이 계속 파고들었다. "어느 문파 소속인가?" "저, 점창 소속입니다." "점창파에서는 무림의 선배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던가?" "서, 선배란 사실을 몰랐기에……."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는 것을 보니 네 자질과 정신상태 가 심히 의심되는구나. 내 필히 점창에 가서 이번 일에 대해 따 져야겠다." 순간 단철민의 안색히 하얗게 질렸다. 그렇게 될 경우 문파에 서 치도곤을 당할 것이 분명했따.ㄹ 초절정고수가 와서 항의한다 면 점창파에서도 쉽게 생각하지 않을 터. 고민하는 그를 보다 못해 비룡대 대주인 천무한이 다가섰다. 이미 무력시위를 벌인 냉유성이였기에 그를 대하는 태도는 무 척 깍듯했다. "제 대원이 실수를 대신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무림맹 소속 비룡대 대주인 천무한입니다." 냉유성은 싸늘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천무한을 쳐다보 았다. "비룡대의 대주라……. 대원을 보니 비룡대의 기강을 알만도 하군." 칼날 같은 시선에 천무한은 감히 맞받지 못하고 시선을 외면 했다. 물론 사단을 일으킨 단철민이 곱게 보일 리 없다. 곧 준엄 한 질책이 단철민에게 내려졌다. "그러기에 평소 성질을 잘 다스리라고 하지 않았소? 어서 선 배님께 사과드리지 않고 뭐하는 거요?" 단철민은 머뭇거림 없이 허리를 꺾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부디 실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사과를 받은 냉유성이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쨋거 나 까마득한 후배의 실수를 계속 꼬투리 잡을 수는 없었다. 그때 천무한이 질문을 던졌다. "실례지만 선배께서는 어디에 적을 두고 계신지 알고 싶습니 다." 기도를 보니 사파 소속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알 아볼 필요가 있었다. 만약 사파 소속이라면 이대로 물러날 순 없는 노릇이다. 내심을 알아차린 냉유성은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확실한 소속은 없다. 그저 정사지간으로 생각하면 된다." "……." "하지만 한때는 정파에 적을 두고 있었다. 정사대전 당시 무 림맹의 파천대 대주를 맡은 적도 있지. 정사대전이 끝난 뒤, 청 성 출신의 구양무기에게 대주 자리를 넘겼는데 지금은 어찌 되 었는지 모르겠군." 천무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파천대라면 무림맹 소속 무력 단체 중 최고의 정예들이 배치되는 곳이다. 가장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고 그런 만큼 사망률이 높았다. 오 년 전 끝난 정사대전에서 사파에게 가장 큰 타격을 입힌 무력단체가 바로 파천대였다. 명성 하나만큼은 배교의 수호마 왕군에 맞먹는다는 조직이 바로 파천대인 것이다. 천무한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허리를 꺾었다. "선배님을 뵙습니다. 파천대는 아직까지 구양무기 선배님께 서 맡고 있습니다." "그런가? 이것 참 격세지감이로군." 냉유성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몸을 돌렸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식사들 하도록 하게." "아닙니다. 같이 하시지요. 무림의 대선배님을 만났는데 어 찌 보낼 수 있겠습니까?" 냉유성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자네들하고는 같이 먹고 싶은 생각이 없네. 새카만 후배에게 치마폭에 휘감긴 놈이란 말을 들으니 밥맛이 싹 달아나는군." 순간 단철민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파천대의 대주 구 양무기라면 자신 못지않게 다혈질로 소문난 무사였다. 만약 자 신이 전대 파천대주에게 망발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상당 히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내, 내가 미쳤지.' 그가 전전긍긍해 하는 사이 냉유성이 고개를 돌려 여민을 쳐 다보았다. "하지만 날 따뜻하게 배려해 준 여민 소저가 부탁한다면 합석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네." 천무한은 재빨리 여민에게 손짓을 했다. "무얼 하는 게요. 어서 선배님을 모시지 않고." 여민이 쭈뻣쭈뻣 다가왔따. 그저 준수한 미남자로만 생각했 는데 엄청난 경지에 오른 초고수였으니 떨리지 않을 도리가 없 었다. 냉유성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여민에게 포권을 했다. "소저의 마음씀씀이에 감사드리오. 아까는 무척이나 배가 고 팠다오." "아, 아니 제, 제가 뭘……." 여민을 옆자리에 앉힌 냉유성이 비룡대와 천봉대 대원들에게 둘러싸여 식사를 시작했다. 사단을 일으킨 단철민은 한쪽 구석 으로 쫓겨나 쓸쓸하게 식은 음식을 먹어야 했다. 냉유성이 이름과 신분을 밝히자 그들은 일제히 감탄사를 토 해냈다. 공동산의 검귀라는 명성은 그들에겐 전설이나 다름없 었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문파에 파문당하신 이후 불철주야 수련 에 몰두하여 초절정의 벽을 깨뜨리시다니……." "운이 좋아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평 생 절정에서 정체되었을 거야."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희들은 아직까지 절저으이 벽도 넘지 못 해 쩔쩔매고 있습니다." 흥겹게 음식을 집어먹던 냉유성이 천봉대 대원들을 쳐다보았 다. 방계제자들로 구성된 천봉대 대원들은 약간 주눅이 들어 있 었다.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나도 방계 출신이다. 사실 직계와 방 계 이런 식으로 나누는 것이 옳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문파들이 그 방식을 따르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한 가지만 명심하도록." "……." "기본에만 충실하면 방계도 능히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 을." 냉유성을 쳐다보는 천봉대 대원들의 가슴은 서서히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자신들의 앞에 방계의 전설이 앉아 있었다. 출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초인의 경지에 오른 냉유성을 보며 자신들도 반드시 대공을 이루겠다고 다짐 하는 천봉대 대원들이었다. 5장 끝. 6. 마교 뇌옥의 마인들. 데이몬은 당문에서 이틀을 보낸 뒤 길을 떠났다. 당문수가 호 위를 붙여주겠다고 했지만 데이몬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가려고 하는 곳은 마도의 하늘인 마교였다. 괜히 그런 곳에 당문 무사를 데리고 간다면 곤란한 일이 초래될 가능성이 높았다. 당청은 예상 외로 순순히 데이몬을 보내 주었다. '울며 매달릴 줄 알았는데……. 그나마 다행이로군.' 데이몬은 마법진을 이용해서 당문을 떠날 계획이었다. 마교 가 위치한 감숙 근처에 대응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최대한 만전을 기할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십분 조심해야 해. 또다시 잠마련에 잡혀갈 수는 없어.' 잠마련에 잡혀가며 느꼇던 굴욕감을 또다시 느낄 수는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최대한 마법을 활용하여 마교로 들어가는 것 이 데이몬이 세운 계획이었다. 마법진을 작동하며 데이몬은 생각했다. 마중 나온 당문수와 당청이 주시하고 있었지만 그의 생각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마교로 가자마자 장로들의 혈마기를 흡수해서 힘을 되찾아 야 한다. 운남의 마정지지에는 분명 상당수의 잠마련 무사들이 파견 나와 있을 터. 힘을 되찾아야만 무사히 영호명 녀석을 빼 낼 수 있다.' 힘이 없어 겪어야 했던 설움을 데이몬은 뚜렸히 기억했다. 떄 문에 데이몬은 이참에 힘을 완전히 되찾을 생각이었다. '부디 마정지지의 마기가 충분하기를……. 그래야만 사준환 녀석에게 화끈하게 복수할 수 있을 테니까.' 생각에 잠겨 있던 데이몬의 몸이 빛 무리에 휩싸였다. 공간이 동 마법이 실현되는 것이다. 곧 데이몬의 몸은 그곳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조그마한 무을은 온통 어두컴컴한 적막감에 휩싸여 있다. 이 따끔 들려오는 순라꾼의 딱따기 소리 외에는 거리를 오가는 사 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두운 골목. 그곳에 누군가가 우두커니 서서 사위를 주시하고 있었다. 얼굴 전체를 휘감은 복면에 검은 야행의. 차림새를 보니 자신 의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가 분명했다. 초조한 듯 주위 를 두리번 거리는 것을 보니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예상이 틀리지 않아 잠시 후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슷 한 차림새를 한 장한이 멋들어지게 공중제비를 넘은 뒤 복면인 앞에 내려섰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도 나지 않는 것을 보니 상 당한 수준에 오른 무공고수였다. 그 모습을 본 복면인이 눈빛을 빛냈다. "오늘은 좀 늦었구려." "어쩔 수 없었소. 사문의 감시가 하도 심해진 탓에 요새는 몸 을 쉽게 뺄 수가 없소." 머리를 살짝 흔든 장한이 손을 쓱 내밀었다. "어서 물건을 주시오. 서둘러 돌아가 봐야 하오." 내민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구레나룻을 멋지게 기른 사십대 중반 정도의 중년인이었는데 매우 강인해 보이는 외모 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백리영. 구대문파 중 하나인 종남파의 중견고 수였다. 그런 그가 이 야심한 시간에 무슨 일로 이곳을 방문했 을까. 사실 그는 묵회에 포섭되어 극락단을 복용한 상태였다. 백리 영이 이곳까지 나온 것은 묵회의 사자에게 극락단의 해약을 받 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는 떨리는 눈빛으로 묵회의 사자를 쳐다보았다. "시간이 없소. 어서 약을 주시오." 종남파의 방계 제자인 백리영은 사십을 넘긴 나이에도 아직 까지 절정의 벽을 돌파하지 못한, 문파 내에서 그렇고 그런 고 수중 하나였다. 물론 일류의 극에 이르러 있지만 지금껏 변변찮은 영단 하나 복용하지 못했기에 아직까지 절정을 넘어서지 못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백리영은 사문의 처사에 상당한 불만을 지니고 있 었다. 그런데 술기운을 빌어 내뱉은 몇 마디 불평이 묵회에 귀에 들 어갔고. 그리하여 그에게 마수가 뻗어졌던 것이다. 비록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백리영은 종남을 배신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사정이 어찌 되었건 종남은 그를 거둬서 무공을 가르친 사문이었다. 그런 백리영에게 묵회는 두 가지 선택을 종용했다. 하나는 극 락단을 먹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화골산 으로 세상에 살았던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백리영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뻔했다.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이라서 그는 묵회의 사자가 내민 극락단을 받아먹 었다. 하지만 사문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것이 백리영의 진정한 속내였다. 그래서 백리영은 한동안 극락단의 해약을 복용하지 않았다. 허나, 극락단이 주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것을 떠올려 본 백리영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생각조차 하기 힘든 고통이었어. 오장육부가 통째로 녹 아내리고 기경팔맥이 한꺼번에 뒤집히는 것 같았어.' 백리영은 단 하루 만에 백기를 들었다. 먹지 않고 아껴두었던 극락단의 해약을 결국 복용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전달되는 해약을 수령하기 위해 정해진 약속장소에 꼬박꼬박 나왔다. 초조해하는 백리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묵회의 사자가 조그마한 주머니를 건넸다. "여기 있소. 이번 달치 해약이오." 백리영은 재빨리 해약을 잡아챘다. 그의 얼굴에는 안도하는 빛이 역력했다. 해약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주머니를 풀어헤쳤다. 불그스름 한 빛이 도는 단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본 백리영은 미 간을 슬며시 좁혔다. "이번 해약은 모양이 조금 다르구려. 색깔도 불그스름한데다 크기도 더 큰 것 같소." "그 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소. 내가 받아온 것은 오직 이것 뿐이오."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던 백리영은 단약 하나를 집어삼켰 다. 어차피 그에겐 달리 선택할 방도가 없었다. 단약은 침에 닿자마자 액체로 화해 백리영의 목구멍을 넘어 갔다. "흠. 그래도 효과는 이전과 동일하군. 온몸이 저릿저릿하던 감각이 금세 사라져버리니……." 고개를 끄덕인 백리영은 해약이 든 주머니를 품속에 갈무리 했다. 몸을 돌려 사라지려던 그가 돌연 묵회의 사자를 향해 날 카로운 눈빛을 내뿜었다. "비록 본인이 극락단을 복용하기는 했지만 나를 이용해 뭔가 를 할 생각은 하지 마시오. 본인에겐 사문에 누를 끼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 "만약 묵회에서 무리한 요구를 해올 경우……." 백리영의 눈동자에 싸늘한 살기가 번뜩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작정이오. 물론 그 전에 모든 사실을 적 나라하게 밝히고 나서겠지? 그러니 알아서 처신하기 바라오." 말을 마친 백리영은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날렸다. 나지막한 파공성과 함께 그의 신형은 금세 그곳에서 사라져버렸다. 홀로 남겨진 묵회의 사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숨쉬기가 답답했는지 얼굴을 가린 복면을 내렸는데, 드러난 얼굴은 오십 대 중반 정도의 음침하게 생긴 노인의 것이었다. 하오문 문주 출신으로 모용세가 무사들을 습격했다가 데이몬 에 의해 사로잡힌 비영전주가 바로 노인의 숨겨진 신분이었다.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백리영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사문에 대한 충성심이 높구려, 그러나 미안하지만 나에겐 그럴 만한 권한이 없다오. 어차피 나도 소모품에 불과하 니 말이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가 품에 손을 넣어 주머니 하나를 꺼 내었다. 속에는 극락단의 해약이 들어 있었는데 백리영이 복용 한 것과는 색깔이나 모양이 확실하게 달랐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해약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받은 해약은 이전의 것과 같다. 하지만 백리영의 것은 이것과는 확실하게 달랐어. 색깔도 다르고 크기도 한 배 반가량 컸어. 도대체 왜 그런 해약을 전달하게 했을까?' 그러나 그가 그 이유를 알아낼 방법은 없다. 사실 백리영에게 전달된 것은 다름 아닌 폭혈단이었다. 복용 할 경우 극락단과 약효가 상충되며, 복용자의 질투심과 시기심 을 극대화시켜 살심까지 띠게 하는 무시무시한 약물이다. 하나, 비영전주에게는 폭혈단이 내려지지 않았다. 묵회의 회 주가 사망한 뒤 묵회의 대소사를 도맡아하고 있는 탓에 아직까 지 이용가치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약이 전달되었을까?; 물끄러미 해약을 쳐다보던 비영전주는 주머니를 품속에 넣고 몸을 돌렸다. 아직까지 다른 조직원들에게 해약을 돌려야 하기 때문에 길게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다음 접선지로 이동하는 비영전주의 머리는 부산하게 돌아가 고 있었다. 돌연 그의 얼굴이 서글픈 빛을 띠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잠마련의 하수인 역활을 해야 하는 걸까?' 처음 묵회에 투신할 당시만 해도 비영전주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 희망은 모든 하오문도들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 는 염원이었다. 당당한 정보단체로서 무림에 널리 인정받는 것. 그것이 바로 음지에서 일하는 하오문도들이 꿈에라도 바라마 지 않는 목표였다. 하오문도들이 노리는 것은 무림맹에서 개방이 차지하는 위치 였다. 거지들로 이루어진 개방은 폭넓은 정보수집능력과 다수 의 인원동원력으로 인해 당당히 정파의 정보단체로 인정받고 있다. 정파를 떠받치는 하나의 기둥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하오문도들은 자신들이 사파의 개방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오문은 정보수집력이나 문도들의 수에 있어 개방에 전혀 뒤처지지 않는 조직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은밀 한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는 개방보다 나은 면이 있다. 그랬기에 충분히 그런 희망을 품을 만 했다. 하지만 그러한 하오문의 꿈은 쉽사리 실현되지 않았다. 역대 사파의 종주들은 하오문을 단지 소모품으로 이용만 하려고 했을 뿐 개방과 같은 입지를 일절 허락하지 안았다. 다시 말해 하오문이 가진 정보력을 이용하려고는 하지만 인 정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오문은 철저히 점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오문을 지배 하는 문주라도 각지의 지부장을 모두 알지 못한다. 몇몇 수하들 을 통해 명령을 내릴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그것이 바로 하오문이 지금까지 비밀을 유지할 수 있게 지켜 준 원동력이었다. 무림의 혼란을 꾀했던 묵회주는 가장 먼저 하오문에 눈독을 들였다. 잠마련의 정보단체를 공식적으로 이용할 수 없었기에 불가피하게 내린 선택이었다. 잠마련의 이목을 최대한 활용한 끝에 하오문 문주의 위치를 파악한 묵회주는 머뭇거림 없이 급습을 가했다. 무공방면으로 는 그리 뛰어나다곤 할 수 없는 터라 하오문 문주는 맥없이 사 로잡히고 말았다. 묵회주는 사로잡힌 하오문주를 좋은 말로 구슬렸다. 그리고 그를 묵회의 비영전주로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묵회주의 드넓은 포부를 들은 하오문주는 모든 하오문도들 의 염원을 실현시키기 위해 묵회에 최대한 협조하기로 마음먹 었다. '그래, 이것은 하나의 기회야. 하오문의 입지를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하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어긋난 결합이었으니……. 생각을 이어나가는 비영전주의 눈가에 짙은 회한이 스쳐지나 갔다. "기대가 너무 컸어. 묵회에서도 우리 하오문을 이용하려고만 했을 뿐 애당초 동반자로 생각하진 않았어……." 지금까지 존속해 오면서 하오문은 셀 수 없을 만큼의 위기를 겪었다. 문도들 대부분이 무공을 익히지 않았거나 익혔다고 해 도 고작해야 이, 삼류를 전전하는 만큼 자력으로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하오문의 문주조차도 기껏해야 이류 언저리를 맴도는 무공실 력을 가졌으니 타 문도들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런 만큼 하오문의 입장에서는 무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위기를 회피해야 했다. 하오문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도마뱀의 꼬리 자르기였다. 위기에 처한 문도를 내버린 뒤 연관된 인원을 잠적시키고 모든 연락체계를 바꾸어버린다. 그럼으로써 더 이 상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는, 하오문 특유의 문제해결방법이 었다. 거기에는 문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만약 문주가 적의 손에 사로잡힐 경우 그는 하오문도들만이 아는 밀마(암호)를 통해 사실을 하오문 본단에 알린다. 그 사실이 본단에 전달되는 순간 문주는 그 즉시 외인이 되어 버린다. 모든 연락체계가 뒤바뀌고 문주에게 명을 받는 자들은 모조리 음지로 잠적한다. 그것이 바로 도마뱀의 꼬리 끊기 작전이었다. 하지만 비영전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잘 하면 묵회를 통해 하오문도들의 염원을 실현시킬 수 있 다.' 그는 이번 일을 하나의 기회로 여겼다. 그리곤 묵회의 일에 전폭적인 협조를 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오래지 않아 풍비박산이 나 버렸다. 묵회가 잠마련의 하부조직임이 밝혀진 순간 하오문도들의 염원은 산산 조각이 나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영전주는 착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따. "어쩔 수 없군. 이대로 잠마련에 이용당하기만 할 순 없는 노 릇이니……." 그는 하오문이 전통적으로 사용해 온 도마뱀 꼬리 끊기 작전 을 떠올렸다. 자신이 밀마를 남긴다면 직계수하들이 모조리 잠적함과 동시 에 모든 연락체계가 뒤바뀔 것이다. 설사 잠마련에서 손을 써온 다고 해도 어느 선 이상까지는 파헤칠 수 없다. 물론 자신도 살아남기 힘들겠지만 비영전주는 그 정도쯤은 각오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겠다. 그래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부득이한 선택을 할 수밖에……." 생각을 접은 비영전주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시각 냉유성은 당문에 들어서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데이 몬이 떠나고 한 시진 정도 지나서였다. 반가운 손님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당문수와 당청이 서둘러 마중 나왔다. 수문위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냉유성을 본 당문 수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어서 오시오, 냉 소협.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소이 다." 그러나 냉유성을 자세히 본 당문수는 두 눈을 부릅떳다. 냉유 성의 변한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항상 풍기고 다니던 칼날 같은 예기는 간곳없고 부드러움이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겉으로 봐서는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일반인 같았다. "서, 설마……." 무림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당문수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의 눈 꼬리가 미미하게 떨렸다. "축하드리오. 벽을 깨뜨리셧구려." 냉유성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운이 좋아서 벽을 깨뜨릴 수 있었습니다." 냉유성을 쳐다보는 당문수의 눈동자에는 복잡한 심정이 떠올 라 있었다. 육십이 넘어서까지 무공에 매진했던 그조차 깨뜨리 지 못한 절정의 벽을 갓 서른이 넘은 냉유성이 넘어선 것이다. 비록 독술과 병행해서 무공을 연마하긴 했지만 순수하게 수 련한 시간을 따지면 냉유성보다 월등히 길었다. 그러니 당문수 의 입장에서는 부럽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옆에 서 있던 당청이 반면에 미소를 지었다. "정말 축하드려요, 오라버니. 이제 명실상부한 초인이 되셧군 요." "고맙다, 청아." 그들은 곧 자리를 옮겼다. 내당으로 들어간 냉유성은 그간의 일을 하나 둘 털어놓았다. 잠마련의 기습을 받고 데이몬과 헤어진 이후부터 혈로를 뚫고 나가는 과정에서 깨달음의 실마리를 잡은 뒤 초무극의 도움으 로 절정의 벽을 돌파할 수 있었다는 말에 당문수와 당청은 연신 경탄성을 토해냈다. "정말 대단하구려. 동급의 고수 열 명을 뿌리치고 도망칠 수 있었다니……." "정말 운이 좋았지요. 만약 사방이 불바다가 아니었다면 전 그곳에서 뼈를 묻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어 냉유성은 목가장에서 겪었던 일까지도 털어놓았다. 어 찌 보면 아프다고도 볼 수 있는 기억이었지만 그는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닌 양 담담히 이야기했다. 당청은 분개했다. 그녀는 저간의 사정을 직접 봐 왔기 때문에 일의 전모를 잘 알고 있었다. "정말 여우같은 계집애로군요. 오라버니께서 검을 잡을 수 없 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안면을 바꾸다니……. 솔직히 말해 전 그 계집애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어쨋거나 상관할 것은 없다. 그녀로 인해 내 반려가 오로지 검이란 사실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한 마디로 쌤통이군요. 정말 목가장에다 검을 잘 두고 오신 것 같아요." "그나저나 황보세가 가주가 정말 급했나보더구나. 나에게 그 런 제안을 하다니 말이야." 묵묵히 듣고 있던 당문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럴 법도 하지요. 나에게도 뭐 그런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니까. 삼십대 초반에 절정을 넘어선 무사라면 무림방파에 서 어찌 탐내지 않을 수 있겠소? 더욱이 냉 대협은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낭인 신분이지 않소?" 당문수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슬핏 돌았다. "한 번 생각해 보시오. 당문에서도 잘 찾아보면 결혼적력기에 놓인 아이가 있을 것이오. 뭐, 인물은 장담할 수 없소만 냉 대협 이 원한다면 누구든지 드릴 용의가 있소." 냉유성은 쩔쩔매며 대답했다. "하, 하지만 저는 이미 검과 평생을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습 니다만……." 당문수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농담이었소. 구태여 그런 방법으로 냉 대협을 옭아매고 싶진 않구려. 아무튼 공동은 큰 실수를 했소. 모르긴 몰라도 공동에 서 이 사실을 안다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오, 냉 대협 같은 인 제를 파문시키다니 말도 되지 않는 일이지." 냉유성은 살며시 얼굴을 붉혔다.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주공께서 혹시 이곳에 오지 않으셧습 니까?" "아! 그러고 보니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군." 당문수는 얼마 전에 일어났던 일을 냉유성에게 털어놓았다. 데이몬이 잠마련에 잠입한 뒤 그곳에 잡혀 있던 독객들을 모조 리 구출해 왔다는 사실을 들은 냉유성은 입을 딱 벌리며 놀라워 했다. "아무튼 주공의 능력은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철옹성이나 다름없는 잠마련에서 이백 명에 가 까운 독객들을 탈출시키다니……." "이제 당문은 과거의 위용을 고스란히 되찾았소. 수련중인 무 사들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접어들면 당당히 무림에 이름을 내 걸 수 있을 것이오."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런데 주공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당청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상공은 떠나셨어요. 내공을 되찾을 방법이 있다고 하셨거든 요. 이번에는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라고 하셨으니 언제 돌아오 실지 몰라요." 주공이 떠났다는 말을 들었지만 냉유성은 전혀 동요하지 않 았다. "뭐,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겠지요. 어차피 수련할 시 간이 필요한 참이었으니까요. 부디 저에게 수련할 공간을 제공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주공께서 돌아오실 동안 실력을 높여 놓 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여부가 있겠소? 모든 뒷바라지를 해 드릴 테니 편히 수련에 몰두하도록 하시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냉유성은 공손히 목례를 했다. 당문에 머물러 있는 동안 추혼 검법을 실전에 쓸 수 있을 정도로 수련하려는 것이 그의 계획이 었다. 그 시각 데이몬은 하늘을 날아서 마교로 가고 있었다. 휘이이잉 귓전을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더 없이 상쾌했다. 구름이 낮게 깔려 있어서 땅 위에 것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생각하 면 땅 위에 사람들 역시 구름 위로 날아가는 데이몬을 보지 못 할 것이다. 마법진을 통해 감숙으로 공간이동을 한 데이몬은 인크레시아 를 열어 탄타로스를 꺼냇다. 현재 그는 마법만을 쓸 수 있는 상태다. 때문에 실력 있는 고 수들이 기습할 경우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탄타로스의 비행능력을 이용해 안전하게 마교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하늘을 날아서 간다면 기습당할 걱정을 하 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중원은 마나분포도가 트루베니아에 비해 월등히 희박한 곳이 다. 비행마법이 걸려 있는 탄타로스도 이곳에서는 자력으로 하 늘을 날지 못한다. 동체에 새겨진 마법진으로 빨아들일 수 있는 마나가 월등히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이몬에게는 그것이 그다지 장애요소가 되지 못했 다. 그에겐 탄타로스가 날 수 있을 만큼의 마나를 공급해 줄 능 력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데이몬은 탄타로스의 어깨에 올라탄 채 허공을 유유히 비행하고 있었다. 귓전으로 탄타로스의 중후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 마스터, 중원은 제가 활동하기에 그리 좋지 않은 곳이로군요. "아마 그럴 것이다. 마나 분포도가 지극히 희박하기 때문이 지." 말을 마친 데이몬은 수인을 맺었다. 어디까지 왔는지 살펴보 려는 의도에서였다. 낮게 깔린 구름 때문에 지형지물이 거의 보이지 않으니 이처 럼 마법을 써서 살필 수밖에 없었다. 위치를 파악한 데이몬은 눈빛을 빛냈다. "거의 다 왔군. 이참에 곧바로 내성으로 직행하는 것이 낫겠 지?" 이미 데이몬은 담천위에게 들어 마교의 본단 구조에 대해 간 략하게 알고 있었다. 마도의 하늘이라고 일컬어지는 마교답게 그 본단은 난공불락 의 철웅성이었다. 지금껏 그 어떤 문파도 마교의 본단까지 난입한 경우가 없다. 거대한 성벽이 본단을 휘감고 있고, 기라성 같은 마도 고수들이 물샐틈없는 경비망을 펼치기에 마교에 침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굳건한 방어막일지라도 파고들어갈 구멍이 없지는 않은 법. 허공을 쳐다보던 데이몬은 눈빛을 빛냈다. "모르긴 몰라도 마교의 하급 무사들 중에는 무림맹이나 잠마 련에서 들여보낸 첩자들이 상당수 섞여있을 것이다. 가급적이 면 그들의 눈을 피하는 것이 낫지." 데이몬이 마교 본단의 내성으로 곧바로 가려는 데에는 그러 한 이유가 있었다. 마고는 상당히 폐쇄적인 집단이다. 어지간한 경우를 제외하 면 외부에서 고수를 영입하는 경우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자체적으로 고수를 키워내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기에 지금 처럼 한 번 위기에 처하면 쉽사리 힘을 회복하기 힘들다는 단점 이 있다. 물론 첩자가 활약할 여지가 적고 구성원 개개인을 확실히 믿 을 수 있다는 점은 마교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다. 하지만 하급 무사로 넘어가면 타파의 첩자가 적지 않게 존재할 터였다. "내성으로 곧장 간다면 첩자의 눈을 피할 수 있겠지.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자는 내성으로 들여보내지 않는 것이 철칙이니. 까."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은 손을 뻗어 탄타로스의 머리를 두드 렸다. "조금만 더 가면 마교 본단의 성벽이 보일 것이다. 가장 안쪽 으로 들어가거라." -예, 마스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교의 본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원지 대라서 구름층이 그다지 짙지 않았다. 틈새로 웅장한 위용을 자 랑하는 성벽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은 눈빛을 빛냈다. "이곳이로군." 머리를 두드리자 탄타로스가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첩 자들의 눈을 의식해서 데이몬은 탄타로스의 동체를 구름 속에 숨겨서 비행했다. 드높은 성벽 위에서는 수많은 무사들이 눈을 번뜩이며 사위 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름 속에 숨어 비행하는 아이언 골렘을 발견해 내지는 못했다. 한가롭게 날아서 외성의 성벽을 통과한 데이몬과 탄타로스가 마침네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착륙지로 삼은 곳 은 내성 안에 위치한 거대한 연무장이었다. 난데없이 구름 사이로 거대한 강철 거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연무장에서 수련에 몰두하고 있던 무사들이 혼비백산했다. "뭐, 뭐야?" "어찌 이런 일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강철로 된 거인이 하늘을 날아서 접근하다니……. 하지만 내성의 연무장에서 수련하는 무사들은 마교에서 차세 대 주력으로 키우는 정예 중의 정예. 그들은 더 이상 동요하지 않고 곧바로 대응했다. 병장기를 뽑아든 무사들이 병진을 구성한 채 착륙지를 둥그 렇게 포위했다. 그러는 사이 탄타로스의 거대한 동체가 연무장을 목표로 서 서히 하강했다. 쿵 탄타로스가 착지하자 무사들의 포위망이 더욱 두터워졌다. 살기가 한곳으로 집중되며 분위기가 점차 살벌하게 변해갔다. 데이몬을 어깨 위에 얹고 있던 탄타로스가 허리를 굽혔다. 살 짝 내민 손바닥을 디딘 데이몬은 사뿐하게 바닥에 내려섰다. "살기가 장난이 아니로군. 역시 마교 본단다워." 주위를 둘러본 데이몬은 한가롭게 중얼거렸다. 그때 무사 한 명이 앞으로 쓱 나섰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누구긴 누구냐. 손님이지." 데이몬의 느물느물한 대응에 입을 연 무사의 눈매가 쫙 찢어 졌다. "이곳은 본교에 중지 중 중지이다.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즉각 공격하겠다." "원 녀석, 성격도 급하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데이몬은 입을 열었다. "소교주를 보러 왔다. 담천위에게 전하라. 친구 데이몬이 방 문했다고 말이다." 소교주를 보러왔다는 말에 호기 있게 나섰던 무사가 움찔했 다. 하늘을 통해서 온 침입자가 소교주의 친구라니……. 하지만 상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법. 그 가 손짓을 하자 무사 한 명이 쏜살같이 몸을 날렸다. "잠시 기다려 주시오. 소교주님께 전갈을 올리리다." 사람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마교 무사들은 포위망을 풀지 않았다. 점점 견고하게 변해가는 포위망을 보며 데이몬은 탄성 을 내질렀다. "역시! 마교는 뭔가 달라도 달라." 사실 데이몬은 마교라는 단체와 만만치 않은 인연을 쌓아 왔 다. 정사대전 때에는 사파의 동맹군으로 함께 싸웠고 배교에서 실각한 뒤 마교의 추적대로 인해 상당한 곤란을 겪었다. 특히 마교 장로 위청과의 결투에서 그는 치명적인 상세를 입 어야 했다. 그러니 마교에 대한 생각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 이다. 데이몬은 묵묵히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날려버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복수를 위해서는 마교의 힘을 십분 이 용해야 할 테니…….'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마침내 담천위가 모습을 드러 냈다. 데이몬이 왔다는 말에 모든 일을 제쳐놓고 달려온 것이 었다. 마교 무사들은 그때까지 포위망을 풀지 않고 있었다. 데이몬 을 본 담천위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어났다. "친구, 왔는가?" "물론이지, 자네 얼굴을 보러 먼 길을 왔네. 그동안 잘 있었 나?" 이야기가 거기까지 진행되자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마교 무사들이 일제히 부복했다. "소종사의 친구 분을 뵈옵니다." 백여 명의 무사가 함성을 질렀지만 한두 사람이 지른 듯 일치 했다.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훌륭한 수하들을 두었군." "쓸 만한 녀석들이지. 이들이 있으니 본교가 부흥을 꿈꿀 수 있는 게지. 어서 들어가세. 좋은 술과 맛있는 안주가 기다리고 있다네." "마음 단단히 먹게. 마교의 기둥뿌리를 뽑아버리기 위해 작심 하고 왔으니 말이야." 담천위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핫! 본교의 뿌리는 깊고도 단단하다네. 제 아무리 자네 라 해도 쉽게 뽑기 힘들 걸세." 내당으로 안내된 데이몬은 담천위와 술상을 두고 마주앉았 다. 우선 데이몬은 잠마련에서 얻은 정보를 그에게 털어놓았다. "아무래도 이것은 자네가 알아야 할 것 같네." "뭐가 말인가?" "자네와 장로들을 주화입마에 빠뜨린 마정석을 기억하나? 마 정지지의 마기가 농축된 마정석 말이야." 담천위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있나?" "마정지지는 현재 잠마련에서 관리하고 있다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분기를 주체하지 못한 담천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렇다면 음모를 꾸민 원흉은 잠마련이 틀림 없었다. "역시 그랬군. 이 가증스러운 놈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담천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정하게. 아직까지 잠마련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네." "……." "살펴본 결과 잠마련의 전력은 결코 만만치 않아. 우선 일대 일로 초절정고수를 상대할 수 있는 음양혈강시가 스무 구가 넘 게 있어. 다시 말해 초절정고수 스무 명을 보유했다고 간주해야 하네. 문제는 잠마련의 전력이 그것뿐만이 아니란 사실이지. 묵 회에서 사용하던 독강시도 상당수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네." 데이몬의 설명을 듣던 담천위의 안색이 점점 굳어졌다. 데이몬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교의 힘으론 감히 잠마련을 건 드릴 수 없었다. 마교가 자중지란에 빠져 있는 사이 잠마련의 전력은 엄청나게 증강되어 있었다. 담천위는 입술을 지그시 깨 물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언제 그 정도로 힘을 키웠지?" 현재 마교의 전력은 최악을 달리고 있다. 전력을 다해 무서를 키우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주력으로 내세우기 힘든 수준이었 다. 최소한 오 년 이상 수련시켜야만 실전에 써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잠마련이 벌써 무림정벌을 꾀할 정도의 전력을 갖추 었다니……. 침울해진 담천위를 보며 데이몬은 위로하듯 입을 열었다. "일단은 교의 힘을 추스르는 것이 관건이야. 그러려면 먼저 주화입마에 빠진 장로들을 치료해야 할 걸세. 내가 그들을 먼저 치료해 주겟네. 술자리를 갖기 전에 말이야." "그, 그래도 되겠는가?" "물론이지. 자넨 나의 절친한 친구 아닌가? 그 정도는 충분히 해 줄 수 있네?" "정말 고맙네." 두 손을 움켜쥐고 고마워하는 담천위를 보며 데이몬은 양심 이 살짝 찔리는 것을 느꼇다. 사실 데이몬이 주화입마에 빠진 마교 장로들을 치료하려는 데에는 모종의 꿍꿍이가 있었다. 그는 현재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다. 그 때문에 잠마련에 서 용납하기 힘든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런 전철을 이곳 마교에서도 밟지 않는다고 장담할 순 없다. 비록 마교 소교주의 친우 신분으로 방문했다고는 하나 철혈의 승부사들로 가득 찬 마교인 만큼 도전에 직면하지 않는다고 장 담할 수 없다. 그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힘을 되찾아야 하는 것이 데이몬의 입장이었다. '일단 힘을 되찾아야 해. 그래야만 마왕으로서의 자존심을 지 킬 수 있어.' 술자리에 앞서 장로들을 치료하려고 하는 데에는 그러한 계 산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담천위는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부탁하겠내. 사실 나도 그게 무척 마음에 걸렸어. 주화입마에 빠진 상태가 지속되면 돌이키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일세." "염려하지 말게. 내가 깔끔히 치료해 주겠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는데 지금 가볼까?" "그러세." 데이몬은 담천위의 안내를 받아 주화입마에 빠진 장로들이 갇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들은 마교 본단의 지하금옥에 갇 혀 있었는데 중지 중 중지이다 보니 외인은 결코 접근 할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에게는 걸릴 게 없었다. 안내자가 마교의 차기 절대자라 할 수 있는 소교주이니 만큼 은잠해 있는 경비무사들 도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얼마 걷지 않아 그들은 커다란 철문 앞에 도착했다. 거무스름 한 빛을 띠는 것을 보니 만년한철을 섞어 만든 철문 같았다. "이곳이 바로 금옥이네. 문을 열어라." 명령이 떨어지자 경비하는 무사들이 머뭇거림 없이 문을 열 었다. 쿠르르릉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담천위는 빙그레 웃으며 손짓을 했다. "영광으로 생각하게. 원래 외부인은 한번 들어가면 백골이 되어서야 나올 수 있지. 아마 자넨 그렇게 되지 않은 유일한 외 부인이 될 걸세." "흐흐흐. 별 놈의 영광 다보겠내." "아무튼 조심하게. 내부가 극히 어두우니 말일세." 어둠에 싸인 통로는 상당히 길었다. 예상과는 달리 양옆으로 늘어선 수옥에는 죄인들이 거의 수감되어 있지 않았다. 역시 교 화보다는 일벌백계를 통한 처형을 즐겨 행하는 마교의 뇌옥다 웠다. 데이몬은 생전 처음 보는 마교의 뇌옥을 감상하듯 훑어보며 담천위의 뒤를 따랐다. 주화입마에 빠진 장로들이 갇혀 있는 곳은 지하 사 층에 위치 한 석옥이었다. 철창도 없이 출입구 부분만 제외하면 전체가 두 터운 돌로 되어 있는 곳이었다. 석옥에 도착하자 담천위가 손짓 을 했다. "이곳이라네. 이 안에 장로들이 갇혀 있지." "꽤나 고요한 곳이로군. 그래도 명색이 장로들인데 너무하지 않나? 바람도 통하지 않는 석옥에다가 가두다니 말이야." 담천위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네. 장로들위 무위는 나보다 높네. 그런 장로들이 마기가 골수까지 파고든 상태에서 난동을 부린다면 엄청난 희 생이 발생할 거야." "하긴, 자네 상태를 보았으니 그럴 만도 하겠군." 담천위가 발광하던 장면을 상기해 본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 였다. 담천위가 석윽의 철문에 달린 조그마한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 안에는 제일장로인 사도천광이 수감되어 있네. 자해를 방 지하기 위해 만년한철 재질의 쇠사슬로 꽁꽁 묶어두었지." "문을 열어주게. 들어가서 치료를 시작하겠내." 그러나 담천위는 손을 내저었다. "아냐. 그냥은 안 되네. 자칫 잘못하면 공격당할 우려가 있어. 운신의 폭을 더욱 좁혀 놓을 필요가 있네." 담천위가 손 짓을 하자 따라온 호교원의 무사들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순간 흉포한 맹수의 부르짖음 같은 괴성이 울려 퍼졌 다. "캬아아악." 호교원 무사들과 일장로 사도천광이 실랑이를 벌이는 모양이 었다.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소리였다. 제갈을 채웠는지 기성은 오래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잠시 후 땀투성이가 된 호교원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포박을 끝냈습니다. 정련된 강철사슬로 사지를 속박했으니 치료하는 데 무리는 없으실 것입니다." "수고했네."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 모습을 담 천위가 기대어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마교가 힘을 되찾 느냐, 되찾지 못하느냐가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초조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석옥 안에 들어가자 쇠사슬로 칭칭 동여매어져 있는 괴인이 눈에 들어왔다. 백발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괴인의 눈동자에는 온통 핏발이 서 있었다. 이리저리 몸을 뒤틀지만 쇠사슬에 감겨 있었기 때문에 괴인은 움지일 수가 없었다. 쇠사슬의 끝은 석벽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물어뜯는 것 을 방지하기 위에 튼튼해 보이는 가죽 재질의 재갈을 입에다 물 려 놓았다. 데이몬은 터덜터덜 걸어가서 괴인 앞에 털썩 주저앉 았다. "그럼 이제부터 시작해 볼까?" 데이몬은 손을 뻗어 괴인의 머리에 올려놓았다. 괴인이 마구 도리질을 쳤지만 쇠사슬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데이몬은 차분히 숨을 가라앉혔다. '담천위의 혈마기를 흡수할 때보다 신중하게 해야겠군. 몸속 에 남아있는 암흑투기의 양이 그때보다 훨씬 적으니 말이야.' 마음을 안정시킨 데이몬은 서서히 암흑투기를 끌어올렸다. 괴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데이몬이 하는 양을 물끄 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6장 끝. 5 / 6 장은 jjh890505 저 구요^^* 7장 당문이 무림맹을 찾은 까닭은? 백리영은 좀처럼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묵회의 사자에게서 받아온 해약을 먹은 이후로 계속해서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유 없이 화가 났고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의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왜 이러지? 이래선 안 되는데....' 처음에는 그도 자신이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평상시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점점 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만 해도 그랬다. 그는 현재 서른 명 정도의 수련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연줄도 없고 재능도 그다지 뛰어나다고 할 수 없는 방계 제자 서른 명의 기초를 잡아주는 것이 문파 내에서 그가 맡은 임무였다. 여러 명의 무공교두들 중에서 그래도 백리영은 수련생들에게 비교적 온화하며 잘 지도해 준다는 평을 받고있다. 하지만 오늘 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 그는 제대로 초식동장을 따라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여러 명의 수련생을 심하게 구타했다. 다른 무공교두들이 질겁하고 말릴 정도로 혹독한 체벌을 가한 것이다. 그런 모습을 처음 본 수련생들은 눈을 동그렇게 뜨고 놀라워했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자네 몸은 오늘 정상이 아니야." 백리영은 못이기는 척 동료의 말을 받아들여 숙소로 돌아왔다. 사실 수련생들을 구타한 데에는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이유없이 화가 났다는 것이 백리영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빌어먹을.... 다른 놈들은 고작해야 두 세 명의 제자를 휘하에 두고 집중해서 수련을 시키는데 나는 이게 뭐야. 재능도 없는 놈들을 서른 명이나 붙여놓고 무공을 가르치라니...' 평소에는 불쌍하게만 생각했던 수련생들이었다. 연줄도 없고 재능도 뒤떨어져서 박대 받는 방계 제자들의 모습은 과거 자신의 모습과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일치했다. 그 때문에 조금이라도 잘 대해주려고 노력했고 물어보는 것은 성심껏 지도해 주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수련생들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그들이 자신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처럼 느껴졌다. 분기를 참지 못한 백리영은 방 안을서성거리며 평소에 반감을 품었던 자들을 향해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퍼부었다. 아직까지 이성을 잃지 않았기에 다행히 욕설은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모조리 마음에 들지 않아. 그놈들만 없었으면 내가 이 모양이 꼴이 되지 않았을 텐데.....' 한 번 욕설을 퍼붓기 시작하자 감정이 급격히 들끓어 올랐다. 급기야 백리영은 평소에 친분이 깊었던 동문들에게까지 서운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운엽 이 개자식. 나보다 늦게 입문햇는데도 나보다 빨리 절정의 벽을 깨뜨리다니.... 예의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 지금 그가 욕설을 퍼붓고 있는 대상은 사제인 운엽이었다. 같은 방계 출신이었지만 운엽은 부단한 노력으로 백리영보다 빨리 절정의 경지에 들어섰다. 어릴 때부터 함께 수련을 해 왔기때문에 백리영에게 그는 마치 친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폭혈단으로 인해 치밀어 오른 감정은 백리영으로 하여금 친분이 두터운 운엽에게까지 욕설을 퍼붓게 하고 잇었다. '종남파의 모든 인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줬다면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지 않았을 텐데.....' 자신의 처지가 더욱 서글퍼졌고 그럴수록 사문에 대한 반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때 문이 열렸다. 덜컥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에 사제인 운엽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백리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몸이 좀 어떻습니까, 사형?" 백리영이 급급히 낯빛을 바꿨다. "괘, 괜찮다." "동문들에게 사형에 대한 얘길 듣고 걱정 많이 했습니다. 그간 너무 과로하셨나 봅니다." "그, 그런가 보구나." 백리영이 살짝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사제의 얼굴을 보고 잇으니 시기심이 걷잡을 수 없을 만치 치밀어 올랐다. 그런 백리영의 내심을 눈치 채지 못한 운엽이 자신의 사물함에 다가가서 물건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었는데 어딜 가는 게냐?" "연무동으로 갑니다." 그 말에 백리영의 눈이 커졌다. "연무동에는 왜?" 운엽은 별 의심 없이 저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대사형께서 운공에 드신다고 합니다. 사문에서 영단이 내려졌거든요. 대사형께서 저에게 호법을 부탁하셨기 때문에 아무래도 밤을 꼬박 새야 할 것 같습니다." "....." 고개를 돌린 백리영의 눈빛은 싸늘했다. 사문에서 대사형에게 영단을 내린 일로 인해 분노하고 있는것이다. '빌어먹을... 나는 지금까지 변변찮은 영단 한 조각 얻어먹지 못했다. 그 때문에 절정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데 영단을 밥 먹듯이 먹고 자란 대사형놈에겐 또다시 영단을 하사하다니.... 세상에 이런 법은 없다.' 대사형 윤지평은 종남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적전제자였다. 문파의 모든 역량을 아낌없이 퍼부어 키웠기 때문에 같은 항렬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고 평가받고있다. 비록 적전제자라고는 하지만 성격이 호방하고 동문들을 잘 챙겨주었기 때문에 윤지평은 방계 제자들 사이에서도 평이 좋은 편이었다. 백리영은 대사형인 윤지평을 매우 좋아했다. 막혀 있던 무의 이치를 아무 부담 없이 물어볼 수 있는 이가 대사형 윤지평이었기 때문이다. 윤지평 역시 항상 열심히 노력하는 백리영을 세심하게 잘 보살펴 주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 현재 백리영이 윤지평에게 느끼는 감정은 활활 불타오르는 시기심이었다. '만약 내가 네놈처럼 영단을 밥 먹듯 먹었다면 이미 초절정의 벽에 올라 있을 것이다.' 백리영의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운엽이 짐을 다 챙기고 애검을 집어 들었다. "그럼 사형, 푹 쉬십시오. 저는 아마 내일 저녁쯤에나 돌아올 수 잇을 것 같습니다." 백리영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디에서 호법을 설 계획이냐?" "9호 연무동입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몸을 돌린 운엽이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뒷등으로 싸늘한 시선이 쏘아졌다. 백리영의 눈동자에서 어느새 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입술을 비집고 나온 음성은 전혀 딴판이었다. "잘 다녀오너라." "네, 쉬십시오. 사형." 운엽이 나가고 나자 백리영의 감정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증폭되었다. 평소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일이었지만 지금이 순간만큼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영단 한 알만 준다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절정의 벽을 치워 버릴 수 있을 터인데....' 자신을 냉대하는 사문의 처사가 이해되지 않았고 온갖 혜택을 누리는 대사형 윤지평에 대한 시기심이 모락모락 자라났다. 급기야 그는 사제인 운엽에게도 이를 갈기 시작했다. '놈! 만약 사형으로 생각햇다면 영단을 자기가 먹지 않고 빼돌려 나에게 줄 수도 잇는 문제 아닌가? 빌어먹을.... 종남파에는 온통 위아래도 없는 놈들 투성이야. 세상에 정말 믿을 놈이 하나도 없군. 대사형 놈도 그렇지. 지금까지 영단을 밥 먹듯 쳐먹었으면 한 알 정도는 사제인 나에게 양보해도 될 상황이거늘....' 모락모락 자라난 시기심이 급기야 살심으로 전환되어갔다. 백리영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이참에 놈들을 몰래 죽여버릴까? 비록 대사형 놈이 나보다 무위가 월등히 높다지만 연공 중에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한다. 운기행공 중에는 무공을 모르는 범인이라도 능히 고수를 죽일 수 잇는 법이지.'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조금씩 마음이 바뀌었다. 운기행공에 빠져 있는 지금이 대사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심지어 그는 대사형의 호법을 서는 운엽마저도 살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대사형을 처치하기 위해서는 먼저 운엽을 제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이 나에겐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어. 평소 눈엣가시엿던 두 놈을 없애기 위해서라면 말이야.' 서서히 고개를 들던 살심은 급기야 백리영이 제어할 수 없을정도까지 자라났다.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사물함에 다가간 백리영은 검은 무복을 집어 들었다. 찌이익 무복을 찢어내어 복면을 만든 백리영은 사물함 하단에 놓인 자신의 애검을 집어들었다. 시퍼렇게 갈린 칼날을 살펴보는 그의 눈빛은 살기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죽일 것이다. 내가 누려야 할 것들을 빼앗아 간 놈들에게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검병을 움켜쥔 백리영은 머뭇거림 없이 몸을 날렸다. 그가 향하는 방향은 대사형인 윤지평이 연공에 몰두하고 있는 9호 연무동이었다. 운엽은 상기된 눈빛으로 대사형이 연공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아지경에 빠진 대사형 윤지평의 코와 입으로 새하얀 기가 쉴 새 없이 들락날락거렸다. 원기가 정제되어 변한 본신의 진기였다. 반개한 눈에서는 득도한 고승에게서나 볼 수 있는 초연함이 맴돌고 있었다. '난 언제 저런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검병을 잔뜩 움켜쥔 채 철탑처럼 버티고 선 운엽은 부럽다는 눈빛으로 대사형의 운공을 쳐다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도 불철주야 수련하여 대사형이 이룬 경지에 반드시 도달하고 말겠다는 각오가 아로새겨지고 잇었다. '뭐 그때쯤 되면 대사형도 월등히 높은 경지에 도달해 계실테지만...' 그들이 있는 9호 연무동은 종남 문도들이 쉽사리 오가지 못하는 곳이다. 그런 탓에 주위에는 적막감만이 가득했다. 내공의연성은 주위 환경에 엄청난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내공연마를 전문적으로 행하는 1호에서 10호 연무동 주변은 종남파 내부에서도 철저히 금지(禁地)에 속한다. 허락받지 못한 이는 발길조차 들여놓지 못할 정도로. 또한 쉽게 드나들 수 없도록 절진이 펼쳐져 있었고, 엄선된 무사들이 진의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사위를 경계했다. 그런 까닭에 구태여 운엽이 굳이 호법을 서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는 연신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주위를 노려보았다. 세심하고 꼼꼼한 운엽의 성품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운기에 몰두중인 대사형을 보며 운엽은 자신이 영단을 복용 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는 영단을 복용함으로써 절정의 벽을 깨뜨릴 수 있었다. 종난파는 적전과 방계제자에 대한 차별이 그다지 심하지 않은 문파였다. 비록 방계제자라고는 하나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한 성취가 뒷받침되어 주는 제자에게는 어김없이 영단을 하사했다. 그래서 종남파에는 방계 출신 고수의 비율이 비교적 높은편이었다. 운엽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연무동 바깥쪽을 쳐다보았다. '부디 백리 사형에게도 영단이 내려져야 할 텐데.... 절정의 벽을 넘지 못해 고뇌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안타까워.' 그러난 운엽은 알고 있었다. 백리영에게는 사문에서 영단을 내려주지 않을 가능성이 현저히 높다는 사실을. 사십대 중반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일류에 머물러 있는 백리영이다. 그런 그에게 영단을 내려 절정의벽을 깨뜨리게 하는 것보다는 훨씬 젊고 자질이 뛰어난 제자에게 투자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판단이다. 그 사실을 아는 터라 운엽으로서는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감각이 예민한 운엽은 금세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누군가가 접근하고 있다.' 운엽은 머뭇거림 없이 몸을 날렸다. 대사형의 운공을 방해할 수 없었기에 연무동 바깥으로 나가서 침입자를 상대하는 게 현명한 판단이었다.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침입자의 윤곽을 본 운엽은 검 자루를 살짝 뽑아들었다. 스르릉 맑은 음향과 함께 검신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그 소리에 침입자가 동작을 멈췄다. 운엽은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침입자에게로 다가갔다. "누구요.... 응? 사형?" 조심스럽게 접근하던 이는 사형인 백리영이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를 확인한 운엽은 다시 검갑에 검을 수납했다. "이 시간에 왠일이십니까?" 들려오는 사형의 음성은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너, 너에게 볼일이 잇어서 왔다." "저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의아해 하는 운엽에게 백리영은 기름종이에 싼 뭔가를 내밀었다. "밤 새워 호법을 서려면 시장할 것 같아서 요기할 것을 조금 가지고 왔다." "전 괜찮습니다. 저녁을 든든히 먹고 왔거든요." "그래도 밤을 새워야 하지 않느냐? 이것 좀 먹고 호법을 서거라." 운엽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자신을 배려해 주는 백리영의 마음씀씀이가 너무도 고마웠다. "고맙습니다, 사형. 하지만 앞으론 이러지 마십시오. 연무동은 허락된 이들 외에는 아무도 오지 못하는 곳입니다. 만약 사문의 존장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단단히 꾸지람하실 것입니다." 백리영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사실 먹을 것을 가지고 온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내가 이곳까지 찾아온 진정한 목적은 따로 있단다." "그게 무엇입니까?" "너에게 무리(武理)에 대해 물어보려고 왔단다. 비록 내가 사형이기는 하지만 무공 방면에서는 너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지 않느냐?" 운엽은 비로소 백리영의 이상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말은 쉽지만 사제에게 무리에 대해 물어본다는 건 어지간한 각오가 아니면 하기 힘든 행위이다. "그래서 이 야심한 밤에 절 찾아오셨군요. 알겠습니다. 어떤것이 궁금하십니까?" 그 순간 백리영의 눈가에 빛이 번뜩였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운엽은 미처 그 눈빛을 발견하지 못했다. "차마 크게 말할 수가 없구나. 귓속말로 해도 되겠느냐?" 운엽은 머뭇거림 ㅇ벗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십시오, 사형." 조심스럽게 다가온 백리영이 운엽의 귓전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운엽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사형의 질문에 대답할 채비를 했다. 하지만 귓전을 통해 흘러 들어온 귀엣말은 질문이 아니라 사과였다. "미안하구나, 운엽 사제."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옆구리가 화끈해졌다. 이어 가슴어림에서 엄청난 통증이 전해졌다. 참지 못한 운엽이 비명을 내지르려는 순간 큼지막한 손이 입을 막았다. 비명은 손바닥에 가로막혀 가느다란 신음소리로 화해버렸다. "끄으으." 운엽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백리영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백리영의 눈동자에서 번들거리는 살기를. 운엽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형인 백리영이 어이해서 자신을 암습한단 말인가? '왜? 어찌하여...' 상식적으로 백리영이 자신을 암격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운엽의 영혼은 해답을 풀기 전에 육신을 벗어나고 있었다. 털썩 생명이 사라진 운엽의 육신이 힘없이 미끄러져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의 옆구리에 단검 한 자루가 자루까지 박혀 있었다. 정확히 늑골 사이를 파고든 단검은 운엽의 심장을 완전히 둘로 쪼개었다. 한솥밥을 먹던 사제를 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백리영의 눈에서는 전혀 죄책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흐흐흐. 이제 대사형만 남았군. 그를 제거하고 숙소로 돌아간다면 범인이 나란 사실을 감쪽같이 은폐할 수 있다. 어차피 내가 이곳으로 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운엽뿐이니 말이다.' 이곳은 백리영이 즐겨 연공하는 연무동이다. 그러니 펼쳐진 진법의 허실이나 어느 곳에서 문도들이 근무하는지에 대해서는 훤히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백리영은 연무동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두 번재 목표는 운기행공중인 대사형 윤지평이었다. 대사형을 암슴하는 것은 운엽을 죽이는 것보다 월등히 쉬웠다. 운기행공을 통해 무아지경에 빠진 윤지평은 백리영이 접근 하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백리영은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연공 중인 윤지평의 등판에 검을 박아 넣었다. 푸우우 윤지평이 분수처럼 피를 뿜었다. 적공이 깨어지며 투명한 피가 사방에 낭자하게 뿌려졌다. 고개를 돌린 윤지평의 눈동자에 경악이 떠올랐다. 자신을 암습한 자가 사제인 백리영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 어찌하여...." "흐흐흐. 잘 가시오, 사형. 왜 그러냐고 묻지는 마시오. 왜냐하면 나도 설명하기 부끄러우니까." 백리영은 괴소를 흘리며 대사형이 절명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는 윤지평의 숨이 완전히 넘어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 곳을 떠났다. 다시 복면을 하고 연무동을 빠져나간 뒤 개울에서 핏자국을 씻고 숙소로 돌아간다면 아무도 자신이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터였다. 이런 일은 구대문파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연공중인 주력고수가 그 사제 혹은 제자에 의해 암습을 당해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고, 그 일은 전서구를 통해 즉각 무림맹에 알려졌다. 그로 인해 무림맹은 발칵 뒤집어졌다. 여간해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벌어졌기에 무림맹에서는 즉각 대책회의를 열었다. 사안을 전해들은 무림맹주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군요. 문규가 엄격하기로 소문난 구대문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사승관계로 얽혀 있는 구대문파에서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을 암습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가족을 볼모로 잡고 협박하더라도 쉽사리 행하지 않는 것이 구대문파 문원들의 모습이다. 구대문파에서 벌어진 살인사건들은 전모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심지어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진 경우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암습 자체가 워낙 완벽한 순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몇몇 흉수들이 살인을 저지른 이후 발각되었기 때문에 전모가 드러난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영원히 미궁에 빠졌을 공산이 컸다. 종남파에서 파견된 대표가 침울한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본파에서 일을 저지른 범인은 일대제자인 백리영이었소. 그는 연공중인 대사형과 사제를 무참히 죽이고 증거를 은폐하려다 발각되었소. 문초해 본 결과 어처구니없는 사실이 드러났소. 그는 단순한 시기심을 이기지 못해 살인을 저질렀다고 자백했소." 듣고 있던 화산의 장로가 그 말을 받았다. "본 파의 경우도 비슷하오. 유철환이라는 일대제자가 연공하는 틈을 이용해 사숙 둘을 살해했는데 그 역시 질투심으로 인해 일을 저질렀다고 했소." 그 말을 들은 무림맹 대표들의 얼굴에 짙은 회의가 떠올랐다. 마음의 수양을 중요시하는 구대문파의 제자들이 한낱 시기심때문에 문파의 존장을 살해했다는 사실은 쉽사리 믿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었다. 철천지원수가 아닌 이상 연공 중에 기습을 가할 순 없다. 하지만 이런 살인이 대부분의 문파에서 일어났다. 소림이나 무당도 예외가 아니었다. 종남의 대표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어나갔다. "왜 그랬는지 백리영도 정신을 차리고 나서 뼈저리가 후회하더구려. 하지만 어쩌겠소.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 게다가 그는 중요한 사실을 자백했소." "....." "그는 자기 입으로 자신이 묵회에 포섭되었다고 자백했소. 그것도 상당히 오래전에 말이오." 대표들의 얼굴이 일제히 굳어졌다. 구대문파의 방계제자 중 상당수가 묵회에 포섭되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중 몇은 문파의 감찰부에 꼬리가 잡혀서 은밀히 감시를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화산파의 유철환 같은 경우는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은 덕분에 살인을 저지른 사실을 발각해 낼 수 있었다. 제자들이 묵회에 포섭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구파에서는 별달리 손을 쓰지 않았다. 문원들 중에서 누가 연루되었는지 모르는데다가 포섭된 제자들이 설마 문파에 피해를 끼치랴 하는 생각에 더 이상 파고들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안일한 생각이었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살인사건에 연루된 구파의 제자들은 거의 전부가 묵회에 포섭된 자들이었다. 잡히지 않은 범인들의 경우도 그러할 터였다. 그러니 이것은 결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살인사건이 일어났으되 아직까지 범인을 잡지 못한 청성파의 대표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묵회에서 어떤 방법을 썼기에 사형이나 사숙에게 살수를 가할 수 있는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구려." "그러게 말이요. 정종 무공을 익힌 제자는 여간해서는 섭혼술등등의 사술에 걸리지 않는데 말이오." 갑론을박이 벌어졌지만 속 시원한 해법은 제시되지는 않았다. 그저 추측만이 이리저리 난무할 뿐이었다. 소림과 무당에서 파견된 대표들은 침중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자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무림 맹주는 착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정파의 힘을 한데 운집시켜 잠마련에 대항해야 할 때에 이런일이 일어나다니...' 불현듯 잠마련의 총수 사준환이 존경스러워지는 무림맹주였다. 오 년 전 끝난 정사대전 당시 정파와 사파의 휴전을 주선했던이가 바로 사준환이었다. 그로 인해 지루했던 정사대전이 종결되었다. 그래놓고 오 년 동안 무림을 집어삼킬 계략을 차근차근 꾸미고 있었다니.... 곤혹스러워하는 무림맹주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총관인 양무외였다. 그를 본 무림맹주는 눈을 크게 떴다. "회의 중에 어인 일인가, 총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양무외가 다가와 무림맹주의 귓전에 대고 귀엣말을 넣었다. 말을 들은 무림맹주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게 사실이라면 바로 나가봐야겠군." 몸을 일으킨 무림맹주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잠시 나갔다와야 할 것 같소." 무림맹주가 휘적휘적 걸어 나갔지만 각 문파의 대표들은 논쟁에 몰두하느라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무림맹주가 무림맹에서 차지하는 입지를 여실히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무림맹 정문에는 일단의 사람들이 운집해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 중 두 집단은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이는 모용세가의 중견고수이 모용현도였다. 그가 모용세가 출신의 무사 십여 명과 함께 정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들과 대치를 벌이는 이들은 도합 다섯 명이었다. 그중에는 여인 한 명과 노인도 끼어있었고 나머지는 이십대 초반의 젊은 무사들이었다. 특이하게도 한 명은 죽립을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모용현도는 그들 중 노인을 향해 적의를 뿜어내고 잇었다. "당문수. 당신이 감히 무림맹에 발을 들여놓다니..." 모용현도와 대치를 벌이는 이들은 바로 당문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노인의 정체는 당문의 문주인 당문수였고 여인은 당청이었다. 두 명의 당문 문도들이 그들을 보필하고 있었다. 모용세가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기에 당문수 역시 싸늘한 눈빛으로 모용현도의 시선을 맞받았다. "당문도들은 무림맹에 들어서지 못한다는 법도가 있는가? 내발 가지고 내가 왔는데 뭐가 문제인가?" "물론 문제될 것은 없소.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풀어야 할 은원관계가 있지 않소?" 당문수의 얼굴이 더욱 싸늘해졌다. "물론 은원관계가 있지. 잠마련의 습격으로 말미암아 위기에 빠진 본문을 습격했고, 가문의 식솔들을 사로잡아다 노예로 부렸으니 은원관계가 없을 수는 없겠지." "그건 당신네들 입장일 뿐이오. 우리 모용세가에 먼저 선제공격을 가한 쪽은 엄연히 당문이오. 당신들의 독과 암기 때문에 우린 엄청난 피해를 입었소." 모용현도 역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맞받았다. 애당초 당문과 모용세가는 말로 풀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된 상태였다. "그건 말도 되지 않아. 그때 사용된 독과 암기들은 첩자들이 유출한 것이야. 그걸 가지고 당문에다 책임을 요구한 것은 명백한 억지야." "그렇다면 길게 말할 필요가 없겠구려. 이 자리에서 은원관계를 속 시원히 해소하는 수밖에..." 안색을 굳힌 모용현도가 주위를 둘러보며 눈짓을 했다. 눈빛을 받은 모용세가 무사들이 검병을 꽉 움켜쥐었다. 이 자리에는 모용현도를 비롯한 세 명의 절정고수가 있다. 다른 무사들이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충분히 당문도들을 제압할 수 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본 당문수는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운이 좋지 않군. 무림맹으로 돌아오자마자 모용세가와 마주치다니...' 그가 무림맹에 찾아온 이유는 정파에 적을 두기 위해서이다. 먼저 무림맹주를 만난 뒤 장로회의를 거쳐 공증을 받는다면 당문은 정도의 문파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런데 시작부터 모용세가라는 암초에 걸린 것이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당문수가 입을 열었다. "우린 무림맹주를 만나러 왔네. 그런데도 우리 앞을 가로막을 셈인가?" "당신들이 무림맹주를 만나든 말든 상관하지 않소. 그러나 일단 마주친 이상 은원관계를 해소해야 하지 않겠소?" "중요한 일 때문에 무림맹주를 만나러 왔네. 은원은 잠시 미를 수는 없겠나?" 당문수가 대의를 생각해서 한 발 물러났지만 모용현도에겐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미 데이몬으로 인해 가문의 입지가 실추될 대로 실추된 상황. 그런 상황에서 당문도들을 그냥 보내준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당문으로 인해 많은 인명피해를 입은 만큼 최소한 당문수라도 사로 잡아야 체면이 선다. 모용현도는 굳은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나에겐 은원관계를 해소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오." 당문수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죽립을 뒤집어쓴 이가 돌아가는 상황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잇었다. 당문수가 죽립인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부득이 소협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소." "그래야겠군요. 생각해 보니 동행하기를 정말 잘한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젊은 음성이었다. 모용현도가 의혹어린 눈빛으로 죽립인을 쳐다보았다. '대관절 누구지? 방수를 데리고 온 모양인데 목소리가 저토록 젊다니...' 무림은 실력과 함께 연줄이 통용되는 세상이다. 얼마나 실력잇는 고수를 초빙할 수 잇는가 하는 것도 엄연히 능력이라고 봐야 한다. 모용세가와 맞닥뜨릴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림맹을 방문했다면 당문수는 분명 실력있는 방수를 대동하고 왔을 터. 그러니 모용현도로서는 죽립인에게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죽립인이 앞으로 쓱 나섰다. 침을 꿀꺽 삼킨 모용현도가 입을 열었다. "우린 당문과 해소해야 할 은원관계가 있소. 더이상 개입한다면 당신 또한 지금 이 순간부터 모용세가를 적대하겠다는 뜻으로 간주하겠소." 쉽사리 넘기기 힘든 협박이었지만 죽립인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상관없소. 당문의 빈객으로 밥을 얻어먹고 있으니 밥값을 해야 하지 않겠소?" "밥값 치고는 상당히 비싸구려. 당신도 무림에 적을 두고 있다면 모용세가의 힘을 뻔히 알 터인데..." 뒤이어 흘러나오는 죽립인의 음성은 싸늘했다. "물론 알고 있소. 모용세가가 무림에 미치는 영향력뿐만 아니라 얼마나 얼굴이 두꺼운지까지도 말이오." 죽립인이 느긋하게 죽립을 풀었다.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모용현도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그가 익히 알고 잇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내, 냉유성..." 그가 놀라는 것은 상대가 냉유성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판이하게 변한 냉유성의 기도 때문이었다. 과거의 냉유성은 항상 잘 벼린 칼날같이 날카로운 기도를 내뿜었다. 그랫던 그의 기도가 몰라볼 정도로 부드럽게 갈무리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 같았다. 그 사실은 한 가지를 뜻한다. 냉유성이 앞을 가로막았던 벽을 깨고 새로운 경지로 한 발 더 나아갔다는 사실을. 게다가 냉유성이 초절정의 벽을 돌파했다는 소문은 황보세가의 입을 통해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용현도는 그 사실에 반신반의했다. '믿을 수 없어. 나보다 하수였던 냉유성이 어찌 나보다 먼저 벽을 깨뜨릴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직접 보니 그 소문은 허구가 아니었다. 물처럼 담담한 냉유성의 기도를 보며 모용현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모용세가의 적전제자로서 영단을 밥 먹듯 먹은 그조차 아직까지 밟아보지 못한 단계였다. 그런 경지를 방계 출신으로 소속문파에서 파문까지 당한 냉유성이 이뤘다는 사실에 말로 표현하지 못할 모멸감까지 느끼는 모용현도였다. 모용현도의 눈빛을 받으며 냉유성은 허리에 찬 검을 뽑아들었다. 목가장에 맡겨두었다가 찾아온 바로 그 마법검이었다. "굳이 주문을 외울 필요도 없겠지?" 냉유성의 눈빛에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당문에서의 수련을 통해 그는 추혼검법을 충분히 소화해냈다. 지금 상태라면 충분히 실전에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냉유성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모용현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제 와서 물러 설수는 없다.' 현재 이곳에 대기중인 모용세가 무사는 도합 열 명. 그중 자신을 비롯한 세 명이 절정고수였다. 원래대로라면 절정고수 네 명 정도로는 초절정고수를 상대할 수 없다. 하지만 냉유성은 초절정의 벽을 깨뜨린 지 얼마 되지 않는다. 네 명의 절정고수가 한꺼번에 협공을 펼친다면 승기를 잡을 가능서잉 전혀 없지 않았다. 그 사실을 철석같이 믿은 모용현도가 무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모두 준비하라. 당문에 우리 모용세가의 저력을 보여줘야 한다." 모용현도는 일류무사 여섯 명에게 디로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상대가 초절정인 만큼 일류무사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러 거치적거리기만 할 뿐이다. 그렇게 해서 채비를 갖춘 모용세가 무사들이 냉유성의 전후좌우를 포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냉유성은 한가로이 검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귓전으로 모용현도의 결의 어린 음성이 파고들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나는 준비되었소." "좋아." 그 말을 끝으로 모용세가 무사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무림맹 정문의 연무장에서 펼쳐지는 싸움을 여러 사람들이 관전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무림맹주도 섞여 잇었다. 그는 놀란 눈빛으로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놀랍군.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초절정의 벽을 돌파하다니...' 물론 초절정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것은 아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초절정에 오르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례로 무림맹주 역시 십여 년 전에 초절정의 벽을 깨뜨렸다. 문제는 냉유성의 나이였다. 서른이 갓 넘어 초절정에 오른 이는 무림사를 뒤져봐도 그리 흔하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차기 천하제일인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봐야겠지? 그나저나 공동은 정말 씁쓸하겠어. 저런 인재를 문파 내부의 알력때문에 내쫓았으니 말이야'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공동파 대표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공동파의 대표 춘성진인은 무림맹주가 예상했던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얼굴이 일그러져 있기를 기대했건만 냉유성을 쳐다보는 춘성진인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 모습에 무림맹주는 감탄했다. '생각보다 배포가 큰 인물이로군. 엊그제 만나본 공동의 장문인은 속이 꽤 좁아보였는데 말이야.' 공동의 장문인인 춘양진인은 현재 무림맹을 방문해 있었다. 자파 출신의 파문제자와 모용세가 무사들이 접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그는 연무장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까지 냉유성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려 본 무림맹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배포나 포용력 면으로 따지면 춘양진인보다 천성진인이 훨씬 나아. 장문인 자리는 마음이 넓고 대범한 사람이 맡아야 하는데 말이야.' 무림맹주의 추측대로 춘성진인은 싸움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그가 주시하는 것은 냉유성이 펼치는 검술이었다. 입술을 비집고 거듭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정말 놀라워. 본 파의 복마검법에 견주어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어." 사실 냉유성이 펼치는 추혼검법은 아직까지 어설프다고 볼 수 있었다. 처음으로 실전에 응용하기 때문에 쓸데없는동작이나 군더더기가 비교적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술 자체의 완성도는 놀라운 수준에 올라있었다. 충분한 실전경험을 통해 보완한다면 능히 무림의 일절로 불릴 만했다. 춘성진인은 냉유성이 펼치는 검식의 어설픔을 단점으로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추혼검법을 냉유성이 창안해 낸 검식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해. 저 정도의 검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한마디로 유성이가 두 번 다시 찾기 힘든 천고의 기재란 뜻이야." 문득 냉유성이 더 ㅇ벗이 자랑스러워지는 춘성진인이었다. 파문 여부를 떠나 공동에서 저 정도의 기재를 배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깨춤이 절로 추어질 정도였다. 만약 자신이 장문인이었다면 냉유성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서라도 다시 공동의 품 안으로 받아들일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춘성진인의 생각일 뿐이었다. 냉유성에 대한 시험을 마친 뒤 천성진인은 즉각 공동파로 전서구를 날렸다. 그는 서신에다가 냉유성의 천재성과 함께 반드시 그를 다시 공동의 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장은 싸늘한 질책이었다. 장문인 충양진인은 아직까지 냉유성에게 악감정을 품고 잇었던 것이다. 이후 목가장의 활약을 통해 냉유성이 초절정의 벽을 깨뜨렸다는 사실이 각 문파에 전해졌다. 무림맹에서 그 소문을 들은 춘성진인은 흥에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쳤다. '역시 냉유성이야. 그 정도의 검술을 만들어 낸 녀석이 초절정의 벽을 깨뜨리지 못할 리가 없지.' 냉유성이 서른 초반에 초절정의 벽을 깨뜨렸다는 사실은 공동파 내부에도 엄청난 파장을 안겨주었다. 구대문파 중에서 가장 약체로 평가되는 공동파이다. 다른 문파에서 두세명씩 보유한 초절정고수를 공동은 단 항 명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그나마 한 명 있는 화경의 고수도 이미 나이가 칠순이 넘었다. 그러니 냉유성의 파문에 대해 문제제기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춘양진인은 장문인의 권한으로 모든 문제제기를 찍어 눌렀다. 장문인의 완강한 반발에 냉유성을 다시 공동의 품으로 받아들이자는 의견은 조용히 사라졌다. 냉유성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무림맹에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출중한 검술실력으로 모용세가의 정예 네 명과 당당히 맞서 싸우고 있었다. 정신없이 싸움을 관전하던 춘성진인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정말 자랑스럽구나, 유성아. 설사 네가 다시 공동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공동이 너에게 못할 짓을 한 것은 사실이니까. 단지 네 무공의 뿌리가 공동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사숙은 만족할 수 있다.' 치열햇던 접전도 서서히 마무리 지어지고잇었다. 냉유성은 여유로운 태도로 모용세가 무사들의 공격을 받아넘겼다. 벽을 깨뜨린 이후로 무위가 현저하게 늘어났기 때문에 모용세가 무사들이 휘두르는 검의 궤적이 훤히 눈에 들어왔다. 이전에는 마법검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모용현도를 상대했지만 지금은 여유를 부려가며 공방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접전과정에서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다. '구태여 모용세가 무사들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어. 현재 나는 당문의 빈객 신분으로 출전한 상태이니까.' 당문수의 요청이 무림맹에 받아들여진다면 당문은 정도의 문파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다시 말해 모용세가와 한솥밥을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에서 모용세가 무사를 죽이거나 혹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면 또 다른 알력이 생겨날 공산이 컸다. 무엇보다도 그에겐 상처 입히지 않고 모용세가 무사들을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다. 냉유성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주공을 강제로 제압해 고문을 가한 놈들.... 마음 같아서는 모조리 죽여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당문의 입장이 곤란해지니 어쩔 수가 없구나.' 일 각 가량 이어진 대결에서 냉유성은 모용세가의 검로를 훤히 파악했다. 더 이상 방어에 치중하며 시간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냉유성은 마침내 공세에 나섰다. 푸캉 상단과 중단을 쪼개어오는 두 자루의 검을 흘려버린 냉유성이 전면의 무사에게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구렛나룻이 희끗희끗한 말상의 무사였다. 엄청난 공세가 자신을 향해 짓쳐들어오자 말상 무사는 입술을 깨물고 공력을 집중했다. 파파파팟 눈부신 검강이 폭죽처럼 피어올랐다. 냉유성의 장검에도 이미 눈부신 검강이 솟구쳐 오른 상태. 강기를 더욱 집중시킨다면 능히 상대 무사의 장검을 잘라 낼 수 있다. 하지만 냉유성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푸캉 날카로운 격돌음과 함께 말상 무사의 검이 허공으로 퉁겨났다. 힘의 작용을 적절히 이용한 것이다. 자세가 허물어진 말상 무사의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다. 냉유성은 머뭇거림 없이 검을 쭉 뻗었다. "아, 안 돼." 대경실색한 모용세가 무사들이 급히 달려들었지만 이미 냉유성의 장검은 말상 무사의 거궐혈에 닿아 있었다. "느, 늦었어." 무사의 눈빛이 절망감으로 물들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피가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냉유성이 검기점혈(劍氣點穴)의 수법을 사용해 말상 무사의 마혈을 제압해버린 것이다. 그 자리에 굳어버린 무사를 남겨두고 냉유성은 몸을 돌렸다. 날카로운 검세가 전신을 쪼개어왔지만 그는 여유 있게 공세를 받아넘겼다. 창 차창 창 네 명이 덤벼들었어도 냉유성의터럭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 명이 줄어들었으니 승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잠시 후 또 한 명의 무사가 검기점혈에 의해 제압당했다. "크윽." 모용현도와 마지막 남은 무사 한 명이 사력을 다해 공격을 퍼부었지만 냉유성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공격을 차단했다. 그간의 접전을 통해 지칠 대로 지친 모용세가 무삳르은 금세 파탄을 드러냈다. 냉유성의 날카로운 눈은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검기에 의해 겨드랑이의 연액혈을 짚인 무사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동작을 멈췄다. 이제 남은 무사는 오로지 모용현도뿐이었다. 그나마 그도 극도로 지쳐 숨이 턱 밑까지 치밀어 올라 있었다. 검강을 최대한 뽑아 올려 싸웠으니 내공이 바닥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헉, 헉." 냉유성은 심유한 눈빛으로 헐떡이는 모용현도를 쳐다보았다. "당신 혼자 남았는데 어떻게 하겠소? 계속 하시겠소?" 그 말에 모멸감을 느꼈는지 모용현도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네 명이 합공을 가했어도 제압하지 못햇는데 어찌 혼자서 버틸 수 있단 말인가? 더 이상 창피를 당하기 전에 승부를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한 모용현도는 검을 거뒀다. "본가 무사들에게 살수를 가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하오. 하지만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시오. 본가에는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무사들이 무수히 존재하오." 냉유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언제든지 도전을 받아주겠소. 어차피 무림은 적자생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 아니오?" "패배했으니 더 이상 당문의 행로에 대해 관여하지 않겠소. 부디 무사들의 점혈을 풀어주기 바라오." 고개를 끄덕이 냉유성은 마혈이 제압된 무사들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검기로 제압당한 혈도는 오로지 검기로써만 해혈할 수 있다. 혈도가 풀린 무사들이 착잡한 표정으로 검을 검갑에 수납했다. 더 이상 덤빌 엄두를 내지 못한 그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한쪽으로 걸어갔다. 보고 있던 무림맹주가 박수를 치며 앞으로 나섰다. "정말 훌륭한 실력이오. 황모 정말로 감탄했소이다." 냉유성은 그때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일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두커니 서 있던 당문수와 당청이 재빨리 냉유성의 옆으로 다가갔다. "정말 대단하시오. 그 젊은 나이에 벽을 깨뜨리다니.... 이는 정말 무림의 흥복이 아닐 수 없소." 무림맹주의 극찬에 냉유성은 얼굴을 붉혔다. "과찬이십니다. 보잘것없는실력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허허, 그게 보잘것없는 실력이면 도대체 뭐가 볼만한가? 아무튼 만나서 반갑소. 무림맹의 맹주를 맡고 있는 황천호라고 하오." 비록 냉유성이 전대 파천대의 대주였지만 현 무림맹주인 황천호와는 대면한 적이 없다. 정사대전이 벌어질 때는 소림의 혜문선사가 무림맹을 책임졌기 때문이다. 명리에 초연한 소림승답게 혜문선사는 정사대전이 종결되자 머뭇거림 없이 무림맹주 직을 내놓았다. 이후 천의대협 황천호가 신임 무림맹주에 올랐기에 냉유성과는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흡족한 눈빛으로 냉유성을 쳐다보던 황처호의 시선이 당문수에게로 향했다. "야! 이거 실례가 많았구려. 그래, 당문의 문주께서 어인일로 무림맹을 방문하시었소?" 당문은 공식적으로 정사지간에 위치한 문파이다. 중립문파로 간주되기 때문에 무림맹주가 허락하지 않을 경우 무림맹에 들어 올 수 없다. 모용세가가 머뭇거림 없이시비를 걸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당문수가 입을 열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희는 맹주님께 용무가 있어 무림맹을 찾아왔습니다." "무슨 용무인지 알 수 있겠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당문은 무림맹에 가입하고자 합니다." 뜻밖이었는지 무림맹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정파에 적을 두고 싶으시다는 말씀이시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내 권한이 아니오. 각급 문파의 대표가 모인 장로회의에서 과반수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만 하오. 그런데 본인이 보기에 그건 좀 힘들 것 같소이다만..." 무림맹주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당문수가 준비해 온 카드를 꺼내들었다. "저희 당문은 묵회의 독에 대한 해독약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무림맹주는 흠칫 놀랐다. 무림맹에서도 아직까지 묵회의 독을 해독하지 못하고 잇다. 그러니 다른 문파의 사정은 안 봐도 뻔했다. 그런데 당문에서 해독제를 개발해 냈다니.... 침을 꿀꺽 삼킨 무림맹주는 황급히 안쪽으로 손짓을 했다. "일단 들어갑시다. 아무래도 장로회의에서 토의를 해 봐야 할 것 같소. 현재 회의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니 함께 들어가도록 합시다." 그러나 무림맹주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하지만 긍정적인 반응은 기대하지 마시오. 무림맹은 생각 외로 모용세가의 영향력이 많이 미친다오. 게다가 당문을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문파들도 많으니 설득하는 게 조금 힘들 것이오." 황천호의 말은 사실이었다. 당문은 무공보다는 독과 암기를 주력으로 삼는다. 문제는 그것을 비겁한 수단으로 인식하는 무림인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독과 암기를 소지하고 다니다 사파로 몰린 당문의 문도들이 적지 않다. 그 점을 떠올린 당문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무림맹주의 뒤를 따랐다. 그의 예상대로 회의장에 모인 문파 대표들은 당문의 무림맹 가입에 대해 거센 거부감을 표출했다. "말도 되지 않소. 당문이 대관절 어떤 문파요? 독과 암기를 이용해서 암격이나 일삼는 문파 아니오. 그런 당문을 어찌 정파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소?" "당문은 결코 정파에 적을 둬서는 안 되는 문파요." 특히 모용세가의 대표인 모용운성이 격렬히 반대했다. "당문은 간교한 수작으로 무수한 모용세가 무사들을 살해했소. 그리고 대화로 해결하려는 본가의 사과요청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소. 그런 당문을 도대체 어떻게 정파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이오. 우리 모용세가는 결코 이 일을 좌시할 수 없소. 발상 자체도 용납되지 않ㅎ소." 뜻밖의 반발에 당문수는 난감해 했다. 보다 못한 황천호가 끼어들었지만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당문에서는 이미 묵회의 독에 대한 해독제를 개발했다고 하오. 그러니 대승적인 차원에서 한 번 논의를 해 보는 것이 낫지 않겠소?" "묵회의 독은 시간이 지나면 해독할 수 있소. 고작 해독제 하나 때문에 우리 모용세가의 체면을 짓밟겠다는 거요?" 격렬히 반대하는 쪽은 오대세가의 대표들이었다. 모용세가가 오대세가의 수장노릇을 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구파일방의 대표들은 가타부타 말없이 오가는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구태여 당문의 편을 들 이유는 없다. 어쨌거나 그들 역시 독과 암기를 꺼려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물론 직접적인 은원관계가 없기 땜누에 오대세가처럼 적극적으로 당문을 몰아붙이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침묵을 지키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만 있는 것이다. 오가는 논쟁을 묵묵히 듣고 잇던 당청이 앞으로 쓱 나섰다. "소녀가 한 마디 해도 되겠어요?" 대표들의 시선이 당청에게로 향했다. 특히 모용운성은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당청을 노려보았다. 한낱 계집아이가 문파의 대표들이 논의하는데 끼어들다니.... 그가 분통을 터뜨리기 전에 무림맹주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시오, 소저." 심호흡으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당청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묵회는 잠마련이 무림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만들어낸 조직이에요. 생소한 독을 발산하는 독강시를 주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지금껏 여러 문파들이 고초를 겪어야 했지요." "그것은 우리도 알고 있는 사실이오." "문제는 잠마련에 묵회의 독강시가 발산하는 독보다도 더 무서운 독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죠. 극락단이라는 독인데 묵회가 포섭한 각 문파의 방계제자들이 중독되고 있어요. 묵회에서는 그 독으로써 포섭한 사람들을 제어하죠." 각 문파 대표들은 귀가 솔깃해지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회의를 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인데 당문의 어린 소저가 비슷한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귓전으로 당청의 음성이 차분히 파고들었다. "극락단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서운 독이에요. 만약 일정한 시간 내에 해약을 복용하지 않는다면당사자는 오장육부가 뒤집히고 기경팔맥이 뒤틀리는 고통속에서 숨을 거둬야 하죠. 하지만 정작 무서운 점은 다른데에 잇어요." 당청은 흑법사에게서 들은 정보를 토대로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데이몬에게 완전히 종속된 흑법사는 당문의 일에 전폭적으로 협력했다. 그로 인해 당문에서는 많은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극락단에 관련된 비밀이다. 잠마련에서 만들어 낸 독의 대부분을 흑법사가 관할햇기 때문에 더 이상 비밀이라고 볼 수 없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사준환이 예정보다 빨리 폭혈단을 퍼뜨렸던 것이다. "잠마련에는 폭혈단이란 단약이 있어요. 과거 배교 무사들이 동귀어진할 때 복용하던 독의 일종으로서 전신의 잠력을 일시에 폭발시키는 효능이 있죠. 하지만 잠마련의 독객들이 오랜 연구를 통해 폭혈단의 약효를 현저히 변화시켰답니다." 각 문파 대표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당청의 말을 경청했다. 심지어 모용세가의 대표인 모용운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폭혈단이 극락단의 성분과 결합한다면 무서운 일이 일어난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극락단에 중독된 상태에서 폭혈단을 거듭 복용하는 경우가 되겠군요. 그럴 경우 당사자는 전혀 다른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돌변합니다. 시기심과 질투심이 극도로 치밀어 올라 최악의 경우 살인까지도 불사하게 되는 것이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종남의 대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미 백리영으로 인해 문파가 발칵 뒤집힌 상황이었다. " 그,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소?" 다른 문파 대표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모용세가의 모용운성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당청을 노려보았다. "그 사실은 잠마련에서도 특급대외비로 처리될 것이 확실한 기밀이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당장 말하시오. 모두 밝히기 전에는 무림맹을 나가지 못할 것이오." 무림맹주인 황천호도 놀란 눈빛으로 당청을 쳐다보았다. 잠마련에 잠입시킨 첩자들조차 알아내지 못한 고급 정보를 당문이 알고 있으니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살짝 머리를 흔든 당청이 입을 열었다. "데이몬 상공께서 조사해 오셨답니다. 그분께서는 본가의 식솔들을 구하기 위해 잠마련에 잠입해 들어가셨지요. 그 과정에서 잠마련의 간부 하나를 포섭하여 극락단과 폭혈단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모용운성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거짓말! 본인은 결코 그 말을 믿지 못하겠소." "하지만 사실인걸요? 데이몬 상공께서는 잠마련에 붙잡혀 갔던 식솔 이백여 명을 모두 구해오셨어요. 그래서 저희들은 과거 전성기의 힘을 고스란히 되찾은 상태에요." 당청의 말에 문파 대표들은 입을 딱 벌리고 놀라워했다. 철옹성이라 일컬어지는 잠마련에 잠입해서 이백 명이나 되는 당문 식솔들을 구해내다니... 심지어 천하제일인이라 해도 성공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일을 색목인 한 명이 해 내리라곤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지금 어디에 있소? 어찌하여 그와 함께 오지 않았소?" 구태여 사실을 밝힐 필요가 없었기에 당청은 사실을 적당히 각색했다. "데이몬 상공은 잠마련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크나큰 부상을 입으셨습니다. 그래서 현재 모처에서 부상을 치료하고 있어요." 대표들은 일제히 침묵을 지켰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만저만 큰일이 아니다. 침중한 표정으로 안색을 굳히고 있던 종남의 대표가 당청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소저. 혹시 극락단과 폭혈단에 대한 해약은 개발되었소?" 당청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잠마련의 강요에 의해 극락단과 ㅎ폭혈단을 개발하셨으니 해약을 만들어내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그녀의 말대로 극락단과 폭혈단은 흑법사와 잡혀온 독객들이 만들었다. 만들어낸 사람들이 있으니 해독제를 만드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종남 대표의 안색이 다급해졌다. "미안하지만 해독약을 좀 나눠줄 수 있겠소? 바로 그 문제 때문에 본 파는 지금 발칵 뒤집혀 있소." 대표의 말대로 종남파는 난리가 난 상태였다. 백리영에 의해 윤지평과 운엽이 비명횡사한 이후 연공실에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누구의 손에 의해 암습당할지 몰랐기 때문에 섣불리 연공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문파 전체가 술렁이고 있으니 종남의 대표가 체면 불구하고 당청에게 해독약을 부탁할 만도 했다. 다급한 쪽은 종남파뿐만이 아니었다. 비교적 피해를 적게 입은 오대세가보다는 구파일방 사람들의 표정이 절박했다. 하지만 당청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문제는 소녀가 결정할 수 없군요. 만약 당문이 정파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조건 없이 해약을 넘겨드리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말하기가 곤란한 듯 당청이 말꼬리를 흐렸지만 이어지는 말은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당문을 정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만 해약을 나눠준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되자 상황의 양상은 또다시 바뀌었다. 극락단과 폭혈단에 별 피해를 보지 않은 오대세가에서는 여전히 당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지만 구파일방의 태도는 돌변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당문이 독과 암기를 주력으로 삼는 문파이지만 어차피 사파의 마두들도 마찬가지요. 사천당문을 정파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면 독과 암기에 한결 수월히 대처할 수 있소." "지금껏 당문은 눈에 띄는 악행을 저지른 적이 없소. 게다가 사천 인근에서의 평판도 나쁘지 않은 편이오. 구태여 당문을 배척해야 할 이유가 없소이다." 그러나 모용세가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한 번 생각해 보시오. 극락단과 폭혈단은 당문 식솔들이 만들어냈소. 제 아무리 잠마련이 강요했다고 하더라도 책임이 전혀 없지는 않소. 그러니 당문에서 아무 조건 없이 해독약을 내어줘야 하는 것이 원칙이오. 만약 순순히 내주지 않는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받아내어야만 하오." "그것은 너무 가혹하오. 당문을 정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면 깔끔하게 해결되는 문제 아니겠소?" 문파 대표들은 두 개의 파벌로 나뉘어 실전을 벌였다. 모용세가를 옹호하는 오대세가의 파벌과 해독약이 절실한 구파일방으로 나뉘어 벌어지는 논쟁이었다. 성과 없는 논쟁을 지켜보던 무림맹주가 당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아직은 외인이라 할 수 있는 당문 사람들에게 이런 추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아무래도 논의를 더 해봐야겠소. 그러니 당신들은 접객당에가서 쉬도록 하시오. 총관에게 일러 숙소를 마련해주도록 하리다." 더 있어봐야 뾰쪽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당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곧 총관 양무외가 들어왔다. 냉유성과 당문 사람들은 총관의 안내를 받아 접객당으로 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달아 오른 논쟁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공동의 장문인인 춘양진인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최근에 터진 논란거리 때문이었다. 입술을 비집고 거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놈. 끝까지 말썽을 부리는군." 그는 지금 냉유성을 향해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놈 하나때문에 난감한 지경에 처해 잇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분노로인해 눈빛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춘명 그놈도 미웠지만 그 제자 놈은 더욱 밉군. 날 이토록 궁지에 몰아넣다니 말이야.' 춘양진인과 냉유성은 악연의 연속이었다. 그는 냉유성의 사부인 춘명진인과 극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편협한데다 시기심이 강한 그와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춘명진인과는 성격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둘은 종종 다투었고 그로 인해 사문에서 꾸지람도 많이 들었다. 다행히 자질과 무공의 성취 면에서는 춘양진인이 월등히 나았는지라 둘의 운명은 극명하게 뒤바뀌었다. 춘양진인은 문파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공동의 주력고수로 떠올랐지만 별다른 성취를 보여주지 못한 춘명진인은 문파 내에서 그렇고 그런 무사로 전락해 버렸다. 만약 상황이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조용히 마무리될 수도 잇었을 터였다. 문제는 춘명진인에게 제자를 가르치는 데 특출 난 재주가 있다는 점이 발단이었다. 그리고 뛰어난 자질을 지닌 냉유성이 춘명의제자로 들어가는 것으로 인해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춘명진인은 공동의 고수들 중에서 좌절과 실패를 특히 많이 겪어본 사람이었다. 문파의 존장들에게 어처구니없는 질문도 많이 퍼부었고, 완성되지 않은 무공을 실제로 익혀본다고 난리법석을 떨었던 적도 많았다. 그 때문에 문파 내에서 골칫거리로 찍히기도 했었다. 그런 까닭에 극상의 자질을 지닌 냉유성이 그에게 배정되었을 때 반대의견이 많이 나왔다. 하지만 당시 장문인인 현정진인은 춘명을 적극적으로 두둔해 주었다. '그는 실패를 많이 해 본 사람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실패하지 않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장문인 현정진인의 판단은 정확했다. 춘명진인은 냉유성에게 튼튼한 기초를 거듭 강조했다. 다른 제자들이 이삼 년 가량 소초검을 연마하고 다른 검술로 넘어갈 때 냉유성은 무려 십 년 이상을 소초검에 매달려야 했다. 게다가 춘명에게는 다른 제자가 한 명도 없었다. 기명으로 거둔 제자라고는 오로지 냉유성 혼자뿐이었기 때문에 춘명은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냉유성을 지도했다. 처음에는 냉유성도 두각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여타의 제자들에 비하면 한두 수 가량 떨어진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냉유성이 약관의 나이에 도달하자 상황은 극명하게 바뀌었다. 그가 대기만성형의 인재는 이런 것이다, 라고 증명하듯 엄청난 성취를 보여준 것이다. 이후 공동파에서 벌어진 문도들 간의 친선 비무에서 냉유성은 춘양진인의 제자들을 모조리 격파했다. 춘양진인이 냉유성에게 가진 반감은 그때부터 비롯되었다. 춘양진인도 그러했지만 냉유성 역시 춘양진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스승에게 못할 짓을 많이 햇으니 곱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 딸의 일까지 겹쳤으니 편협한 성격의 춘양진인이 냉유성에게 단단히 앙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그 감정은 춘양진인이 장로들을 구워삶아 장문인 자리에 오른 다음 폭발했다. 그는 냉유성에게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운 다음 무공을 폐하고 파문시키는 데 성공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자 춘양진인은 더 이상 냉유성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스승과 제자를 모두 처리햇으니 이제 편하게 발 뻗고 잘 수 있겠군.'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단전이 파괴되고 사지의 근맥이 절단된 탓에 그는 냉유성이 얼마 살지 못하고 비명횡사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오산이었다. 냉유성은 이해 못할 방법으로 자신의 잘린 근맥을 치료하고 파괴된 단전을 복구했다. 그런 다음 미지의 음한기공을 익혀 전성기의 무공을 되찾았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문파 내의 상승검법을 전수 받지 못한 그가 복마검법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엄청난 검술을 창안해 냈다. 그 소문으로 인해 공동파는 발칵 뒤집혔다. 공동의 문도들은 여러 장소마다 삼삼오오 모여 의구심을 표출했다. '이건 온당치 못해. 그 정도의 기재를 파문시키다니....' '냉유성의 혐의에 대한 당시의 정황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 확실하게 재조사를 해봐야 한다구.' 문제가 제기되자 춘양진인은 장문인의 권한을 십분 활용해서 각종 소문들을 무마시켰다. 그렇게 해서 사건이 일단락되는가 싶었는데 또다시 일이 터진 것이다. -공동에서 파문당한 검귀 냉유성이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초절정의 벽을 무너뜨렸다. 전전긍긍해 하던 춘양진인에겐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공동파에 존재하는 초절정고수라고는 칠순이 넘은 현허도인 하나뿐인 상황에서 냉유성이 일을 저질렀으니 이후에 일어난 상황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소문은 발 없는 말을 타고 급기야 공동의 전대 원로들에게까지 들어갔다. 즉각 장로회의가 소집되었고 춘양진인은 원로들에게 불려가 단단히 꾸지람을 들었다. '도대체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 그 정도의 기재를 네 손으로 파문시키다니...' '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라. 그렇게 해서라도 냉유성을 다시 공동의 품으로 받아 들여라.' 내친 김에 공동의 원로들은 냉유성에게 내려진 혐의에 대해 재조사를 명했다. 그대로 있다가는 자신이 꾸민 음모가 그대로 드러날 상황인지라 춘양진인은 잠시 공동산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대외적으로 냉유성을 만나 설득하겠다고 밝혔기에 원로들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춘양진인이 무림맹에 오게 된 것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곳에서 냉유성과 딱 맞닥뜨리다니....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춘양진인은 옆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었다. 이미 그는 술에 상당히 취한 상태였다. "미치겠군.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지?" 그에겐 냉유성에게 굽히고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성격이 편협한 만큼 자존심도 남달리 강한 춘양진인이다. 그런 그가 가장 싫어하는 사형제의 제자, 더욱이 자신이 음모를 꾸며 파문시킨 냉유성에게 저자세로 나선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하늘이 뒤집히는 한이 있어도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할 순 없어. 더욱이 날 증오할 것이 뻔한 놈에게 말이야." 춘양진인은 인상을 쓰며 술병을 기울였다. 하지만 빈 술병에서는 술이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시동을 불렀다. "정운아, 어디 있느냐?" 문이 열리고 십이삼 세 정도 되어 보이는 소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러계시옵니까?" 춘양진인이 공동에서 데리고 온 시동이었다. 원래는 제자였지만 무공에 대한 자질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춘양진인이 시동으로 삼은 아이였다. 다만 제법 총명하고 눈치가 빨라 어디에 갈 때마다 항상 대동하고 다녔다. 춘양진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가서 술을 더 가지고 오너라." 시동 정운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늦어서 식당이 문을 닫았사옵니다." 춘양진인이 눈을 부라렸다. "이놈! 장문인의 말이 말 같지가 않느냐? 그렇다면 외부에 나가서라도 사와야 할 것이 아니냐? 당장 가서 사오지 못할까?" 호된 질책에 찔끔한 정운이 몸을 돌렸다. 문가에 도착한 정운은 살짝 고개를 돌려 춘양진인을 노려보았다. 기이하게도 그의 눈동자엔 맹렬한 적의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몸을 돌린 춘양진인은 미처 그 눈빛을 보지 못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정운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춘양진인의 상념은 계속되었다. '어떻게 한다? 설사 장문인 적에서 쫓겨난다 하더라도 냉유성 놈에게 고개를 숙이고 싶진 않은데 말이야.' 하지만 방도가 없다. 현재 공동파에서는 냉유성의파문에 대한 내막을 조사하고 있다. 머지않아 자신이 꾸민 음모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터였다. 그렇게 될 경우 장문인 자리에서 해임될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차기 천하제일인의 자질을 지닌 제자를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해 파문시켰으니 자칫 잘못하면 여생을 징벌동에서 썩어야 할 수도 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춘양진인은 표정을 구겼다. "빌어먹을 냉유성 자식. 조용히 사라져 줬으면 얼마나 좋아." 그때 정운이 술병 몇 개를 안고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이리 다오." 잡아채듯 술병을 받아든 춘양진인이 입에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잔에 따르지도 않고 술을 마셔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보지 못했다. 정운이 마치 철천지원수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다는 사실을. 벌겋게 충혈된 정운의 눈동자에서는 연신 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만취한 탓에 춘양진인은 전혀 기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술기운을 빌어 잠을 청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만 나가보거라." "네, 장문인." 정운이 급히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빠져나갔다. 춘양진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고 계속해서 술병을 기울였다. 한 병, 두 병. 빈 술병이 쌓이기 시작했다. 의도적으로 내공을 억제했기에 춘양진인은 완전히 술에 취하고 말았다. 급기야 그는 취기를 주체하지 못해 술병을 떨어뜨렸다. 퍽 도자기로 된 술병이 박살이 났다. 그 상태로 춘양진인은 모로쓰러져 코를 골아대기 시작했다. 드르렁 드르렁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정운이 들어섰다. 그는 조심스럽게 방안을 살폈다. 그런데 거의 오른손에는 시퍼런 비수가 들려 있었다. 비수를 꽉 움켜쥔 상태로 정운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흐흐흐. 장문인 네놈 때문에 내 꿈은 풍비박산이 났다. 절정고수가 되어 무림을 질타해야 할 나의 자질을 시기해서 시동으로 삼다니.... 오늘 네놈의 죄를 통쾌하게 응징하고야 말겠다." 나지막이 지껄인 정운이 무방비상태로 늘어져 있는 장문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나 완전히 곯아떨어진 춘양진인은 전혀 기미를 눈치 채지 못했다. 다음날 무림맹은 발칵 뒤집혔다. 무림맹을 방문한 공동파의 장문인이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그것도 비수에 전신을 난자당한 참혹한 죽음이었다. 급보를 들은 무림맹주가 한달음으 접객당으로 달려왔다. 접객당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맹주가 가장 먼저 총관을 찾았다. "총관, 총관. 어디 있는가?" 굳은 표정의 양무외가 달려와서 포권을 했다. 무림맹주는 거두절미하고 공동파 장문인인 춘양진인의 사인에 관해 물었다. "사망원인이 무엇인가?" "예리한 비수에 의한 자상입니다.결정적인 사인은 심장파열로 보입니다. 명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에 전신을 난자당한 것을 보아 죽기 전에 엄청난 고통을 겪었으리라 사료됩니다." 무림맹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흉수의 정체는 밝혀졌나?" "네, 춘양진인을 보필하는 시동 정운이 흉수였습니다. 현재 그를 체포하여 구금하고 있습니다." 무림맹주의 눈이 터질 듯 커졌다. "믿을 수 없군. 춘양진인은 절정의 극에 이른 고수이다. 그런 그가 어찌 변변찮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시동에게 당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시 춘양진인은 술에 완전히 만취한 상태였습니다." 그때서야 이해가 된다는 듯 무림맹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아무리 절정고수라도 술에 만취한 상태라면 범인의 손에도 죽을 수 있다. "시동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모시던 장문인을 살해했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주뼛거리던 총관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시동의 상태가 뭔가 모르게 이상합니다." "상태가 이상하다니?" "뭔가에 홀린 상태같습니다. 말하는 것도 두서없는데다 횡설수설하기까지 하니...." 양무외의 말에 답답한 듯 무림맹주는 손을 내저었다. "시동이 갇혀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 직접 만나봐야겠다." 장문인을 살해한 시동 정운은 접객당의 가장 구석방에 감금되어 있었다. 무림맹 소속 무사들이 눈빛을 빛내며 정운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자결을 방지하기 위해 재갈이 물려져 있었고, 손과 발 역시 동아줄에 꽁꽁 묶여 있었다. 무림맹주가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 닥치자 무사들이 공손히 예를 올렸다. "맹주님을 뵈옵니다." 정운의 상태를 훑어본 무림맹주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눈짓을 받은 무사 한 명이 달려들어 정운의 입을 막은 재갈을 풀어냈다. "네 이름이 정운이냐?" 제갈이 풀리자 정운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 그렇소."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장문인을 살해했느냐? 또한 저토록 참혹한 방법으로 죽인 데에 무슨 이유가 있느냐?" 정운이 이를 갈며 대답했다. "그놈은내 꿈을 송두리째 앗아간 자요. 장문인 놈은 출중한 자질을 가진 나를 시기해 강제로 시동으로 만들었소.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놈을 용서할 수 없소." 무림맹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작 그런 이유로 장문인을 살해했단 말인가? 그것도 그토록 참혹한 방법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 다른 이유는 없느냐? 널 대상으로 남색을 했다던가 하는..."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오. 그놈은 이유 없이 내 어깨를 종종 두드렸소. 그것을 보니 나에게 흑심을 품은 것이 분명하오." 정운과 말을 주고받던 무림맹주의 안색이 점점 굳어졌다. 아무리 보아도 정운은 정상이 아니었다. 앞뒤도 맞지 않았고 말도 두서가 없었다. '고작 그런 시답잖은 이유로 장문인 살해라는 엄청난 일을 감행하다니 이해하기가 힘들군.' 그때 무림맹주의 뇌리를 뭔가가 스쳐지나갔다. "혹시 묵회의 사자와 만난 적이 있느냐?" 순간 정운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렀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무림맹주는 자신의 예감이 적중했음을 확신했다. "역시." 고개를 돌리자 각 문파 대표들의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상황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둘 중에서 총관을 찾아낸 무림맹주가 입을 열었다. "당문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와 주겠나?" "이, 이곳으로 말입니까?" "그렇다네. 지금 즉시 데리고 와야 하네." 총관인 양무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다행히 당문 사람들은 같은 건물에 묵고 있었다. "확실하군요. 이 시동은 현재 극락단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당청의 장담에 사람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공동장문인의 사망에 묵회가 얽혀 있다는 것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무림맹주가 조심스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확실한 증거가 있소?" 당청은 아무 말 없이 정운의 눈을 가리켰다. "눈꺼풀을 뒤집어 보십시오. 아마도 눈꺼풀 안쪽이 시커멓게 물들어 있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극락단에 중독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무림맹주는 즉각 정운의 눈꺼풀을 뒤집어 보았다. 불그스름해야 할 눈꺼풀 안쪽이 당청의 말대로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소지품을 조사해 보십시오. 십중팔구 폭혈단이 있을 것입니다." 정운의 품속에서 붉은빛이 도는 단약을 발견한 무림맹 사람들은 말을 잃었다. 묵회의 마수가 장문인을 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시동에게까지 닿아 있었으니 도대체 누굴 믿어야 한단 말인가? 넋이 나간 사람들의 귓전으로 당청의 차분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극락단과 폭혈단의 성분이 결합하여 일어나는 일입니다. 복용자의 시기심과 질투심을 극단적으로 키워 평소에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지요. 이 시동도 제 정신을 차리고 나면 자신이 왜 그랬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무림맹주는 굳은 표정으로 당문수를 쳐다보았다. "만약 당문에서 만든 해약을 쓰면 극락단에 중독된 사람을 완전히 되돌릴 수 있소?" 당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단지 중독된 기간만큼의 치료기간이 필요합니다만...." "좋소." 고개를 끄덕인 무림맹주는 웅성거리고 있는 문파 대표들을 쳐다보았다. "맹주의 권한으로 한 시진 뒤 장로회의를 소집하도록 하겠소. 안건은 사천 당문을 정도의 문파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해서요. 이번 일로 인해 많은 것을 알았을 테니 길게 말하지 않겠소. 곧 이어 벌어질 정사대전에는 반드시 사천당문의 조력이 필요하오. 그러니 반대할 사람들은 확실한 근거와 이유를 준비해 나오도록 하시오." 그리곤 무림맹주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뒤에 남은 사람들은 침묵을 지켰다. 심지어 모용운성조차 입숩을 지그시 깨문 채 침묵을 지켰다.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여우님이 7장 다 쳐주셧어요!>ㅡ< 감사합니다. 8장 마정지지. 데이몬은 한가롭게 서서 구릉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그곳에는 엄청난 크기의 바위산이 존재하고 있었다. "저곳이 바로 마정지지가 위치한 곳이로군." 데이몬이 서 있는 곳은 운남이었다. 그가 힘을 되찾기 위해 마정지지가 있는 운남으로 온 것이다. 이곳은 운남의 가장 구석이었다. 구대문파 중 하나인 점창파 가운남에 위치해 있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다. 데이몬은 한동안 마교에 머물며 주화입마에 빠진 장로들을 치 료했다.그것은 오직 데이몬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순도높은 암흑투기가 아니면 장로들의 골수 깊숙이 침투한 혈 마기를빨아들일 수 없다. 데이몬이 제일 처음으로 치료에 들어 간 이는 장로인 사도천광이었다. 데이몬은 꼬박 하루에 걸쳐 혈마기를 흡수해야 했다. 몸속에 남아있는 암흑투기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이 가장 힘들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치료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도천 광의 혈마기를흡수하여 암흑투기의 절대량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데이몬은 단 사흘 만에 장로들을 주화입마에 빠뜨린 혈마기를 모두 흡수할 수 있었다. 골수로 파고든 혈마기가 제거되자 장로들은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주화입마에 빠진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로 들 전부를 회복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장로들이 모두 제정신을 차리자 담천위는 데이몬의 손을 부 여잡고 고마움을 표했다. '정말 고마워. 도대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지?' '친구 사이에 무슨 은혜? 그나저나 조용한 곳에 숙소를 마 련해 줘. 장로들을 치료하느라 공력이 많이 소비되었으니까.' 담천위는 머뭇거림 없이 자신의 숙소를 내어주었다. 그곳에서 데이몬은 장로들에게서 흡수한 혈마기를 암흑투 기로 전환시켰다. 물론 흡수한 혈마기 전부를 암흑투기로 전환 시킬 순 없었다. 영호명의 생명력이 모두 소진되기 전에 마정지지가 있 는 곳으로 가야 했기에 데이몬은 흡수한 혈마기의 일 할 정도 만 암흑투기로 전환시킨 뒤 마교를 나섰다. '이 정도면 충분히 위기를 넘길 수 있을것 같군.' 혈마기를 모두 암흑투기로 전환시키려면 최소한 한 달 이상 이 소요되었는데 데이몬에겐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문제가 하나 생겼다. 담천위가 호교원 무 사들을 이끌고 데이몬을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피 값은 피로써 받아내는 것이 마교의 율법이야. 비록 본 교의 전력으로 잠마련의본단을 건드릴 순 없지만 운남의 분타 정도는 박살낼 수 있어. 그정도는 해야 직성이 풀리겠어.' '아직은 잠마련을 건드릴 때가 아냐. 일단은 힘을 기르는 것이 급선무야.' 데이몬이 만류했지만 담천위는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감숙의 본단은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어. 잠마련 놈들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방어하는 데는 무리가 없어.' 결국 데이몬은 잠마령이 보유한 강시전력을 조금 과장해서 퍼뜨릴 수밖에 없었다. 담천위와 마교 무사들을 데리고 마정지 지로 가는것이 조금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음양혈강시와 철마의 능력에 대해 들은 담천위는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했다. '그렇게 강한 강시가 있다니 믿을 수 없군.' '하지만 사실이야. 이곳이 천혜의 요새란 사실은 인정하지만 잠마련 측에서 만약 철마와 음양혈강시를 전면에 내세운다면 대책이 없어. 그러니 일단은 장로들의 몸을 회복시키고 무사들 을 키우는 데 전념해.' 담천위는 어쩔 수 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데이몬은 담천위를 떼어놓고 운남으로 향할 수 있었다. 운남까지 가는 과정은 비교적 평탄한 편이었다. 아이언 골렘인 탄타로스를 타고 구름 위를 날아서 비행했기 때문에 데이몬은 채 사흘도 되지 않아 운남 남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정지지가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데이몬은 이미 흑법사 로부터 마정지지가 자리 잡은 곳의 상세한 위치를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 여러 번이나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흑법사는 세심하게 마정지지의 위치를 가르 쳐 주었다. 또한 경비무사들의 구성이나 설치된 기관에 관해서도. 사람의 눈으로는 식별하기 힘든 거리였지만 데이몬은 마정지지의 입구를 바로 앞에서 보는 것처럼 똑또히 보고 있었다. 마정지지의 입구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 한 광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커먼 입구가 입을 벌리고 있었고 근처에는 광산 에서 볼 수 있는 온갖 구조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군병 복장을 한 무사들이 이리저리 흩어져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완벽히 국가 에서 관할하는 광산으로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흑법사에게서 사정을 듣지 않았다면 찾기 힘들었겠어." 머리를 흔든 데이몬은 주문을 외웠다. 주문이 끝나고 마법이 발현되자 그의 모습이 그곳에서 지워졌다. 쓰쓰쓰쓰 인비저빌러티를 쓰면 경비무사들의 눈에 띄지 않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괜히 말썽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기에 데이몬은 은밀하게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입구 부근은 경비가 꽤나 삼엄했다. 군병 차림새를 한 무사들이 눈빛을 빛내며 사위를 감시했다. 진영의 요소요소에는 강노가 설치되어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침입자를 노렸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삼엄한 경비 사이를 누군가가 유유하게 걸어 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긋하게 걸어서 임구로 들어선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마정지 지의 중심부를 향해 걸어나갔다. 내부구조에 대해선 흑법사에게 들었기 때문에 걸 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좁은 통로 요소요소마다 기관과 무사들이 잠복해 있었지만 데이몬의 발목을 잡지 는 못했다. 마법으로 허공에 살짝 떠서 이동했기 때문에 기관의 발동요건이 충족 되지 않았고,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무사들도 속수무책이었다.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는 상당히 길었다. 한참을 걸어 들어간 데이몬의 앞에 다섯 개의 입구가 시커먼 입을 썩 벌렸다. 만약 평범한 침입자였다면 갈림길 앞에서 한참 고민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데이몬 에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왼쪽에서 두 번째 통로로 들어가라 했지?'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걸음을 옮겼다. 통로 안쪾, 마정지지의 가장 중심부에는 커다란 공동이 있다. 그곳이 바로 마기가 운집되는 마정지지의 중심부 였다. 그곳으로 통하는 조그마한 통로 안쪽에는 두 명의 무사들이 벽에 기대고 서서 한가 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형형한 안광과 툭 튀어나온 관자놀이를 보아 상당한 내 공을 보유한 고수들이었다. "지겹군. 교대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그말에 쥐상의 무사가 혀를 끌끌 찼다. "아직도 멀었다네. 적어도 세 시진은 더 근무를 서야 하지. 왜? 벌써 좀이 쑤시나?" "그게 아니라, 솔직히 말해 기분이 이상하네. 주먹이 근질근질 한 것이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싶은 마음이........" 순간 쥐상 무사의 안색이 변했다. "어서 마음을 가라앉히게. 이곳에서 근무할 때의 주의사항을 듣지 못했나?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운공을 하면 안 된다네. 혈마기가 체내로 흡수될경우 그만 피를 보고 미쳐 날뛰는 살귀가 되어버리지." 처음 말을 꺼낸 무사는 사력을 다해 마음을 가라앉혔다. 상당한 숫자의 무사가 이곳에서 근무하다 혈마기가 골수를 파고들어 미쳐버렸다는 소문을 여러 번 들었기에 쥐상의 무사는 거듭해서 주의를 주었다. "몇몇 녀석들은 상부의 경고를 무시하고 일부러 운공을 했다네. 이곳의 마기를 빨아들여 무위를 상승시키려는 욕심에서 말이야. 하지만 이곳의 혈마기는 인간의 육신으론 결코 받아들일수 없네." "그렇다고 들었네." 장대한 체구의 무사가 알아들었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 그들이 근무하는 통로에도 상당한 양의 혈마기가 존재 한다. 그래서 어지간한 수준의 무사들은 이곳에서 근무하지도 못한다. 혈마기가 체내로 파고들며 서서히 심성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잠마련에서도 그 사실을 몰라 실력이 그니 뛰어나지 않는 경비무사들을 배치했다. 하지만 경비무사들이 하나둘 미쳐버리고 나자 방침을 바꾸었다. 최소한 절정 이상의 무사 를 배치해야만 혈마기로 인해 미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절정 이상의 무사들이라 할지라도 통로 안쪽으로 더이상 들어갈 수 없다. 혈마기의 농도가 더욱 짙어지기 때문이다. 더 이상 들어가면 절정급 무사들 역시 혈마기를 견디지 못하 고 미쳐버린다. "그나저나 이놈은 언제 완성되는 거지?" 장대한 체구의 무사가 가운데 놓인 쇠말뚝을 툭툭 쳤다. 거기에는 꽤나 튼튼해 보이는 쇠사슬 이 매어져 있었다. 쇠사슬의 끝은 통로의 안쪽, 마정지지의 중심부가 있는 곳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쇠사슬을 점 검해 본 쥐상 무사가 고개를 흔들며 대답해주었다. "머지않아 완성될 거야. 인간의 몸으로는 감히 들어갈 수 없는 마정지지의 중심부 근처에서 혈마 기를 흡수하고 있으니 말이야." 이곳에서 통로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바닥에 마정석이 즐비하게 깔린 곳이 나온다. 마교의 장로들을 주화입마에 들게 했던 마정석이 바로 그곳에서 출토된 것이다. 물론 마정석들은 인간의 속으로 캐온 것이 아니다. 강시, 제련중인 음양강시들이 들어가서 캐 어온 것이다. 중심부의 혈마기는 그 정도로 지독했다. 심지어 초절정고수조차 그곳에선 일각 이 상 버틸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이 관리하고 있는 쇠사슬에는 잠마련의 비밀병기인 철마가 매어져 있었다. 마정석이 흩어져 있는 곳으로 걸어 들어가게 해서 혈마기를 흡수시키고 있는것이다. 철컹철컹 쇠사슬은 시간을 두고 팽팽히 당겨졌다 늘어졌다가를 반복했다. 쇠사슬에 묶인 철 마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음이었다. 무사 한 명이 그 광경을 보고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 그만 끌어당겨야 하지 않을까?" "아냐. 아직 멀었어. 오늘 중으로 철마의 생명력이 소멸된다고 했으니 한참 더 내버 려둬야 할 거야." 한가로운 무사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인비저빌러티를 시전한 데이몬 이 바로 지척에서 쇠사슬을 쳐다보고 있었다. '바로 이곳이로군. 철마를 제련하고 있는 곳이.' 무사의 말을 들었기에 마음이 급해졌다. '서둘러야 한다. 영호명의 생명력이 다해 완전한 강시가 되어 버리면 곤란해. 그나저나 정말 순수한 마기로군. 맡고만 있어도 힘이 솟는걸?' 이곳은 인간에겐 지극히 위험한 기운인 혈마기가 만연한 곳. 하지만 마왕인 데이몬에겐 활력을 공급해주는 힘의 원천일 뿐이었다. 가슴을 펴고 혈마기를 한껏 흡입한 데이몬은 걸음을 내디뎠다. '그럼 영호명을 한 번 대면하러 가 볼까?' 저벅저벅 마법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발자국 소리가 석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경비하던 무사들이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데 난데없이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더욱 놀랄 만한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팽팽히 당겨져 있던 쇠사슬 한 가닥이 갑자기 맥없이 늘어져버렸다. 철그렁 깜짝놀란 무사들이 고개를 돌린 순간 나머지 한 가닥 역시 힘없이 바닥에 늘어졌다. 순간 무사들의 눈이 커졌다. "크, 큰일났군." "쇠사슬이 끊어졌어." 그들은 정신없이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마치 강기로 잘라낸 것처럼 깔끔하게 잘린 쇠사슬의 끄트머리였다. 무사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안쪾은 인간의 몸으로는 감히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그런 상황에서 철마를 회수할 수 있는 쇠사슬이 끊어져 버렸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어서 이 사실을 상부에 알려야 해." 다른 곳에서 제련중인 음양강시를 들여보내 잘려나간 쇠사슬의 끄트머리를 찾는 것이 유일한 대처방법이었다. 그들은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 서둘러 통로를 빠져나갔다. 허공이 갑자기 흐릿해지더니 난데없이 누군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쇠사슬의 잘린 끄트머 리를 들고 있는 데이몬이었다. 그는 막 통로 안쪽으로 사라지는 무사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깜짝 놀랐을 것이다." 쇠사슬을 움켜쥔 데이몬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쇠사슬 끝에는 그와 악연으로 거듭 얽힌 철마가 묶여 있을 터였다. 거대한 공동. 기이한 기운이 회오리치며 날뛰고 있었다. 마치 폭풍이 몰아 치는 것처럼 대기가 마구 요동을 쳤다. 이곳은 대지속에 희박하게 존재하는 마기가 한데 운집해 만들어진 마정지지였다. 공동의 한쪽에는 조그마한 통로가 나 있었는데 그 입구에 누군가가 철탑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체격 이 비교적 당당한 자였는데 기이한 형태의 갑옷으로 전신을 감싸고 있어 도무지 성별이나 나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견고하게 생긴 투구의 면갑 사이로 섬뜩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입고 있는 갑옷에 기이한 형태의 문양 이 그려져 있었는데 허리춤에 중원의 검과는 형태가 다른 대검이 채워져 있었다. 콰르르르 생명체의 침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혈마기 덩어리가 연신 괴인의 전신에 부딪혀갔다. 고통이 적지 않은 듯 괴인은 그때마다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혈마기 덩어리가 부딪히며 조금씩 내부로 파고드는 것이다. 저벅저벅 통로 안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지만 괴인은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잠시 후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혈마기 덩어리가 화가 난 듯 새로 나타난 침입자에게로 쇄도했다. "후으으읍." 나타난 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심호흡을 하며 혈마기 덩어리를 빨아들였다. 생명체의 존립을 허용하 지 않는 마기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물론 나타난 이의 정체는 데이몬이었다. "정말 상쾌하군. 마계의 기운과는 비교하기 힘들지만 인간계에서 이 정도 수준의 마기를 접하기란 쉽지않지." 그의 눈에 통로 입구에 버티고 서 있는 괴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데이몬의 눈에 서린 빛이 서서히 짙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만났군, 영호명" 앞에 서 있는 괴인은 자신과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악연으로 얽힌 인물이었다. 데이몬이 폐인의 몸으로 트루베니아에 내동댕이 쳐졌을 때 영호명은 이미 일세의 영웅으로 크로센이라는 이름 석 자를 확실하게 트루베니아에 각인시켜놓고 있었다. 오백 년의 시간차를 두고 트루베니아에 건너간 둘의 운명은 그렇게 해서 판이하게 갈라졌다. 돌연 트루베니아에서 겪어왔던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하염없이 영호명을 쳐다보던 데이몬의 눈빛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아차! 이럴때가 아니지." 그는 급히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날려버렸다. 지금은 쓸데없는 감정 따위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영호명의 생명력은 이미 경각에 처해있다. 우선은 공동 안을 가득 채운 혈마기로부터 영호명을 보호해야 했다. 이곳에 만연한 혈마기는 현경의 경지에 오른 영호명조차도 버텨낼 수 없을 정도로 지독했다. "일단 혈마기를 몰아내는 결계를 설치해야겠군. 그런다음 시술을 가해 원래대로 돌리는 것이 정석이지." 데이몬이 손을 살짝흔들자 돌바닥이 저절도 패이며 일정한 문양이 그려졌다. 콰콰콰콰 오랜 시간동안 혈마기를 빨아들여 마정석이 된 돌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주위의 기운을 밖으로 밀 어내는 효능의 마법진이었다 혈마기 덩어리들이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매섭게 휘몰아쳤지만 9서클 대마법사가 그리는 마법진의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잠시 후 마법진이 빛을 발하자 혈마기들이 순차적으로 밀려났다. 쓰쓰쓰쓰 대략 집채만 한 크기였다. 데이몬은 그곳에다 결계를 설치했다. 이어 손을 휘젓자 영호명의 몸이 둥실 떠오르더니 마법진의 중앙 부분에 가서 안착했다. 명령을 내릴 자가 없었기 때문에 영호명은 데이몬의 손속에 몸을 내맡긴 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기운을 차단하는 결계이니만큼 강시를 조종하는 놈의 명령도 전달되지 않을 테지." 데이몬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다음 영호명의 몸을 샅샅이 살폈다. 이미 그는 흑법사의 입을 통해 영호명이 어떠한 처리를 통해 활강시가 되었는지 똑똑히 들었다. 하지만 만일 을 위해 다시 한 번 살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런, 갑옷을 통째로 고정시켜 놓았군. 벗길수 없게 말이야. 하지만 문제될 것은 없지." 데이몬이 검지손가락을 들자 시커멓게 번들거리는 손톱이 자라났다. 암흑투기가 한데 운집해 형상화된 강기의 손톱이었다. 손톱을 갖다 대자 갑옷과 갑옷을 연결하는 부위가 힘없이 잘려나갔다. 드래곤 본 재질의 최고급 갑옷이었지만 오르 블 레이드보다도 강력한 암흑투기의 결정체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연결고리가 계속해서 잘려나가자 갑옷이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영호명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삼십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강인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짙은 검미에 쭉 뻗은 콧날, 특이하게도 머리칼이 새하얀 백발이었다. 활강시가 되어 전신의 잠력을 모조리 끌어 쓴 탓에 머리칼이 탈색된 모양이었다. 기억에 남아있는 얼굴을 보며 데이몬은 중얼거렸다. "나이가 구십이 넘었을 텐데 그나마 외모는 환골탈태할 때를 유지하고 있군." 살짝 머리를 흔든 데이몬은 계속해서 갑옷을 해체해 나갔다. 철그렁 철컥 잠시 후 영호명은 거의 알몸 상태로 데이몬의 앞엥 서 있었다. 해체된 갑옷의 안쪾에는 누더기를 걸치고 있 었다. 누더기에서 풍기는 악취에 데이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냄새가 정말 지독하군." 그가 슬쩍 솔을 내젓자 영호명의 몸이 힘없이 그자리에 쓰러졌다. 영호명을 반듯하게 눕힌 데이몬은 손 바닥으로 그의 전신을 쓸었다. "일단 주요 대혈에 박아놓은 금침을 제거하는 게 첫 번째겠지?" 그의 손짓에 따라 영호명의 몸속에 박힌 침들이 스르르 빠져 나왔다. 놀랍게도 영호명의 주요 대혈 에는 어김없이 금침이 하나둘씩 박혀 있었다. 워낙 많은 금침을 박아놓았기 때문에 제거하는 데에만 꼬박 반 시진이 걸렸다. 손바닥위에 수북 이 쌓인 금침을 보며 데이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독한 놈들..... 하긴, 현경의 고수이니만큼 이 정도는 해야 안심했겠지." 몸에 박힌 금침을 모두 뽑아낸 데이몬은 이어 그의 머리에 손을 댔다. 거기에서부터 데이몬의 손 길이 한결 조심스러워졌다. 조금만 실수하면 그대로 절명해 버리는 요혈이기 때문에 최대한 세심하 게 신경써서 침을 뽑아내야 했다. 잠시 후 큼지막한 금침 하나가 영호명의 백회혈에서 빠져나왔다. 내친 김에 뇌호혈에 박힌 금 침까지 마저 뽑아낸 데이몬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단 금침은 모두 제거했으니 다음에는 골수로 파고든 혈마기를 빨아들여야겠군. 이 정도 분량의 혈마기라면 제 아무리 현경의 고수라도 피만을 탐하는 혈귀로 변모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지." 다행히 혈마기를 빨아들이는 과정은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데이몬이 혈마기를 모조리 빨아들이자 핏기 하나 없던 영호명의 얼굴에 서서히 혈색이 돌아왔다. "다음은 흑법사가 불어넣은 어둠의 마력을 없앨 차례인가? 여타의 약물따위는 신경 쓸 필요도 없지만 어둠의 마력만큼은 뽑아내야 한다." 물론 어둠의 마력을 제거하는 것 따위 데이몬에게 걸림돌이 될 리가 없다. 데이몬에게 어둠의 마력은 암흑투기만큼이나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기운이다. 시술을 마친 데이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되었어. 혈마기와 어둠의 마력을 제거한 데다 심령을 제압하고 있던 금침을 모조리 뽑아냈으니 시술은 일단락되었다고 봐야한다. 현경의 고수인 만큼 신체의 자연치유력이 보통이 넘을터. 이대로 두면 머지않아 정신을 차릴 것이다." 그렇다고 영호명의 몸에 타격이 없을 수는 없다. 활강시로 활동하며 몸을 마구 굴린 데다 잠마련 측에서 제데로 음식물을 제공했을 턱이 없기 때문에 영호명의 몸 상태는 형편없이 망가져 있을 터였다. 하지만 데이몬이 그것까지 신경 써야 할 필요는 없다. 영호명이 자신을 증오하는 만큼 데이몬 역시 영호명에게 좋은 감정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늘어진 영호명을 쳐다보는 데이몬의 눈빛은 싸늘했다. "놈! 정신이 들면 단단히 쓴맛을 보여주겠다. 트루베니아로 건너오는 과정에서 네놈으로 인해 겪은 고초를 떠올리니 도무지 화를 주체하기 힘들구나." 한동안 씨근거리던 데이몬이 몸을 일으켜 결계 바깥쪽으로 나갔다. 영호명이 정신을 차릴 동안 마정지지의 혈마기를 조금이라도 흡수해 두려는 의도에서였다. 현재 그가 운용할 수 있는 암흑투기의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마교 장로들에게서 흡수한 혈마기조차 미처 정제하지 못한 상황이었으니........ 결계에서 조금 떨어진곳. 혈마기가 비교적 충만한 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데이몬은 전력으로 혈마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흐흐흐. 놈! 깨어나는 순간 지옥을 맛보게 해 주겠다." 데이몬의 광소가 지하공동에 메아리 쳤다. 하지만 의식을 잃은 영호명은 그 소리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영호명은 꿈을 꾸고 있었다. 지금껏 살아온 삶이 또다시 그의 앞에 펼쳐졌다. 보통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파란만장한 생애였다. 그는 눈을 똑바로 뜬채 자신이 살아온 생애를 다시 한 번 경험했다. 영호명은 철혈문이라는 정도 계열의 소문파에서 태어났다. 문주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니 그런대로 축복받은 출생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실 철혈문은 그리 이름 있는 문파가 아니다. 산서에 자리잡고 있지만 고작해야 이류에서 삼류정도의 문파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러던 것을 영호명의 아버지, 즉 철혈문주인 영호충이 비약적으로 문파의 규모를 키웠다. 정략결혼을 통해 경쟁광계에 있던 비룔문과 힘을 합친 것이 가장 큰 상승요인이었다. 비룡문과 철혈문의 무공은 철저히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 즉, 비룡문 무공의 강점이 능히 철혈문 무공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두 문파가 합쳐져 태어난 철혈문은 능히 일류를 넘보는 문파로 도약하게 도니다. 하지만 철혈문의 문주인 영호충은 큰 결단을 내렸다. 맏아들인 영호명을 소림의 속가제자 로 들여보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소림의 뛰어난 내가기공을 철혈문의 무공과 융합 시켜 문파의 발전을 꾀하려는 것이 영호충의 계산이었다. '속가에겐 고급 무공을 가르쳐주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소림의 무공이다. 명아가 소림 무공의 정수를 잘 깨우쳐 온다면 철혈문은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다.' 속가제자는 직전제자들에 비해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무공의 격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영호충이 여러 인맥과 많은 돈을 써서 영호명을 소림사에 넣기는 했지만 그 또한 속가제자의 틀을 벗어날 순 없었다. 하지만 영호명에게 엄청난 기연이 주어졌다. 당시 천하제일인으로 평가받던 소림의 혜정선사가 영호명의 자질을 눈여겨 본 것이다. 그는 여러 장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호명을 자신의 직계제자로 삼았다. "안됩니다, 사숙. 직계도아닌 속가제자를 어찌 사숙의 적전제자로 받아들일 수 있단 말입니까?" "차라리 다른 제자를 물색하십시오." 그러나 혜정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영호명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에게 소림의 방대한 진신무학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었다. 본시 자질 자체로는 극상이라 평가되는 영호명이다. 게다가 무학에 대한 열정 역시 자질에 비해 추호도 손색이 없었다. 그리하여 소림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무학이 영호명을 만나 찬란하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훌륭한 스승에 뛰어난 무공, 그리고 자질있는 제자가 노력조차 모자라지 않으니 성취가 남다르지 않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영호명의 성취는 곧 무림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영호명은 스승인 혜정선사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무공에 이어 인품, 그리고 자신 을 생각해주는 마음까지 그토록 각별하니 존경하지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영호명은 혜정선사의 체계적인 지원으로 인해 이십대 중반에 절정의 벽을 깨뜨리 는 위업을 달성한다. 이것은 초반의 성취가 비교적 느린 정파 무림인에겐 무척 드문 경우였다. 절정고수가 된 영호명은 소림의 허락을 얻어 탕마행에 나선다. 당시는 사파의 힘이 걷잡 을 수 없을 만큼 커진 상태였고 사악한 마공을 익혀 성정이 변한 마두들이 각지에서 혈겁 을 일으키고 있었다. 영호명은 그런 마두들을 척살하며 서서히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무림에 알리기 시작했다. 물론 탕마행이 마냥 쉬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어떨 때는 상대하기 힘든 마두를 만나 생명의 위협을 겪기도 했었고, 암습을 당해 목숨이 경각에 처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영호명은 그 모든 난관들을 당당히 극복해 나가며 본신의 실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중 그는 탕마행을 마치고 잠시 소림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자신의 생애 두 번째 기연을 맞는다. 늙고 노쇠한 혜정선사가 자신의 모든 내공을 영호명에게 물려준 것이다. "어차피 죽으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몸이다. 그런데 너에게 무얼 아끼겠느냐?" "스, 스승님." "거부하지 말거라. 너는 노납의 가르침을 물려받은 유일한 제자이니라." 여기까진 "없음" < 님이 수고해 주셧어요~^^* 영호명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혜정선사의 내공을 받아들였 다. 혜정선사가 평생을 걸쳐 쌓은 내공이 고스란히 영호명에게 전해졌다. "노납의 내공을 얼마나 너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내공을 전수받더라도 모도를 소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 다. 영호명의 경우에는 고작해야 일 할 정도를 흡수할 수 있으 면 성공이라 생각해야 한다. 그것도 같은 내공심법으로 연성한 내공이기에 그 정도가 가능한 것이다. 나머지 내공은 혈맥에서 잠자고 있다가 조금씩 소멸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영호명에 겐 엄청난 기연임에는 틀림없었다. 영호명에게 모든 내공을 넘겨준 혜정선사는 평범한 노인이 되어버렸다. 영호명은 그런 스승을 남겨두고 또다시 탕마행을 위해 소림을 나섰다. 그러나 탕마행에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엄청난 비보를 듣는다. 소림에 남겨둔 스승인 혜정선사가 또 다른 제자이자 사 파 마두의 자식인 독고성의 손에 의해 무참히 죽었다는 소식이 었다. 영호명은 대경실색해서 소림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보았다. 무자비하게 난자된 스승의 처참한 시신을. 그때 영호명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다짐했다. "기필코 원수를 갚겠습니다. 철천지원수인 독고성 그놈의 목 을 반드시 스승님의 영전에 올리겠습니다." 하지만 영호명의 다짐은 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도의 강 력한 문파인 배교 총단에서 무공을 연성중인 독고성에게 접근 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정사대전이 터졌다. 영호명은 머뭇거림 없이 철혈문 무사들을 이끌고 정사대전에 참가했다. "이번 기회에 반드시 스승님의 원수를 갚고 말겠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바람은 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 려 정사대전에 참전한 아버지 영호충이 독고성이 이끄는 수호 마왕군과 맞닥뜨려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한다. 아버지를 죽인 자는 독고성 휘하의 수하였다. 하지만 영호명 은 모든 원한을 독고성에게 돌렸다. "스승에 이어 아버지까지……. 독고성 너와 나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임이 분명하다." 그는 눈에 불을 켠 채로 독고성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하늘 은 여간해서는 둘을 대면시키지 않았다. 결국 그가 독고성을 만나게 되는 것은 정사대전이 휴전에 접 어들고 나서였다. 수호마왕군을 이끌고 정파 무림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독고 성은 정사대전이 끝나는 날 배교 총사인 사준환의 손에 의해 숙 청된다. 기회를 잡은 영호명은 철혈문 무사들을 이끌고 독고성의 뒤 를 쫓았다. 어떻게든 독고성의 목을 베어 스승인 혜정선사와 아 버지의 영전에 올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한을 갚는 일은 힘들고도 힘들었다. 절벽 끝까지 몰 아붙여 멱살을 쥐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독고성은 순순히 목을 내밀지 않았다. 그에게 조소를 보낸 뒤 절벽에서 뛰어내린 것 이다. 필사적으로 팔을 뻗었지만 손에 잡힌 것은 머리칼 한 움큼뿐 이었다. "이놈!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가겟다." 영호명은 눈에 불을 켠 채 뒤를 쫓았다. 절벽에서 떨어져 으 깨어진 시신이 목이라도 베어 스승과 아비의 영전에 바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던 영호명의 눈 앞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가 하늘을 훨훨 날며 절벽에서 떨어지는 독고성의 몸을 낚아챈 것 이다. 그는 독고성을 구해 어딘가로 날아갔다. "저, 저 정도라면 허공답보를 넘어 천상제라고 봐야 한다. 무 림에 저 정도의 고수가 있었나?" 영호명은 마법에 대한 상식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그는 데이 몬을 구한 마법사를 엄청난 경지에 오른 무인으로 착각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추격을 포기하지 않았다. "무슨 일로 독고성을 구해 가는지 모르지만 순순히 양보하지 는 않겠다." 그는 최대한도로 신법을 발휘해 독고성의 뒤를 쫓았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기를 여러 번. 그리고 마침내 볼 수 있었다. 기이 하게 생긴 그림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색목인들을. 영호명은 몸을 숨긴 채 독고성의 목을 칠 순간만을 노렸다. 그러던 그의 눈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번쩍 눈부신 빛 무리가 일어난 뒤 그림 위에 모여 있던 색목인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경악으로 눈을 부릅뜬 영호명 이 숨어있던 곳에서 달려 나왔다. 하지만 그가 본 것은 감쪽같이 사라진 색목인들과 서서히 사 라지고 있는 빛 무리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지만 영호명은 머뭇거림 없이 빛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겠다. 스승님을 시해한 독고성 네놈 을 순순히 보내줄 수는 없다." 빛 무리 속으로 뛰어든 영호명의 몸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그곳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몸은 중원과는 전혀 다른 차원 에서 재구성되고 있었다. 그때를 상기한 영호명은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하늘이 나에게 내려준 세 번째 기연이었지." 영호명은 독고성보다 조금 늦게 차원이동 마법진에 뛰어들었 다. 때문에 독고성과는 다른 시간대의 트루베니아로 갔다. 그것도 곧바로 트루베니아에 도착한 것이 아니었다. 차원과 차원의 틈새. 엄청난 압력이 집중되는 공간으로 차원이동된 것 이다. 재구성된 영호명의 몸에 엄청난 압력이 가해졌다. 평범한 사 람이라면 그대로 납작하게 짜부러져 버렸을 정도로 강력한 압 력이었다. 전신을 짓누르는 압력에 영호명은 몸을 둥그랗게 만 채 고통스러워해야 했다. "크으으." 절정의 벽을 타파하고 초절정의 문턱에 서 있는 영호명조차 도 견디기 힘들 정도의 압력이었다. 내공이 순차적으로 소진되고 막 생명이 넘어갈 무렵 영호명 의 몸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스승인 혜정선사가 전해준 내 공, 진신내력으로 흡수하지 못하고 혈맥에 깃들어 있던 내공이 전신에 가해지는 무지막지한 압력 때문에 깨어난 것이다. 적절한 순간에 꺠어난 혜정선사의 내공으로 인해 영호명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버텨내야 한다. 어떻게든 버텨내야만 독고성 그놈의 목을 스 승님의 영전에 바칠 수 있다." 세차게 몰아치는 압력을 버텨내기 위해 영호명은 소림에서 배웠던 무공을 모두 사용했다. 금강선공으로 마음의 평정을 유 지하고 차력대법으로써 몸에 가해지는 압력을 분산시켰다. 끊 임없는 명상으로 외로움과 고통을 달랬다. 압력으로 인해 혜정선사가 불어넣은 내공은 순차적으로 영호 명의 진신내력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차원의 틈새가 가하는 압 력은 혜정선사의 내공으로도 버텨내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이란 오묘하기 그지없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순간 영호명은 깨달음을 얻었다. 앞에 떡 버티고 있던 초 절정의 벽을 허물어뜨리고 새로운 경지로 나아간 것이다. 영호명은 바로 차원의 틈새에서 환골탈태를 겪었다. 차원 의 틈새에 존재하는 순수한 마나를 빨아들여 몸을 재구성한 것이다. 우둑 우두둑 초절정의 경지에 접어들었지만 압력은 완화되지 않았다. 이 곳은 생명체의 존립을 허락하지 않는 태고의 장소. 영호명은 생 존을 위해 계속해서 압력에 맞서야 했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 지 수련의 연속이었다. 압력에 저항하는 것은 내공과 외공을 키워주었고 고통과 외 로움을 잊기 위해 한 명상은 정신적인 수양을 쌓아 주었다. 이 곳에서 하루 수련하는 것은 중원에서 족히 일 년 이상 폐관수련 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안겨주었다. 그렇게 시일이 지났고 영호명은 마침내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경지를 개척해나갔다. 마지막 남은 벽을 무너뜨려 현경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차원의 틈새에서 이루어진 두 번째 환골탈태. 그로 인해 영호명은 인간의 탈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기나긴 중원 무림사에서 두 번째로 현경의 고수가 된 것이다. 현경의 경지를 개척하자 차원의 틈새가 가하는 압력은 더 이 상 영호명에게 시련을 주지 못했다. 그렇게 되자 차원의 틈새는 방법을 바꾸었다. 영호명에게 더 이상 압력을 가하지 않고 다른 차원으로 내쫓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영호명은 시간대가 뒤틀린 트루베니아로 내몰리 게 된다. 당시를 떠올려 본 영호명은 실소를 지었다. "그때가 바로 내가 트루베니아에 첫 발을 디디던 순간이었 지." 영호명은 중원에서 건너온 차림새 그대로 트루베니아에 내 팽개쳐졌다. 시간대가 뒤틀린 탓에 데이몬이 도착하기 오백 년 전의 트루베니아에 도착했지만 영호명이 그 사실을 알 턱 이 없다. 그에게 닥친 것은 이방인의 운명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생 김새도 다른 사람들 틈에서 영호명은 엄청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일단은 말을 배워야 한다. 그런 다음 이곳의 사정을 파악해 서 독고성의 뒤를 쫓아야 한다." 말을 배우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화전민 마을에서 기거 하는 것이었다. 조그마한 화전민 마을을 물색한 영호명은 마 을 외곽에 기거하여 마을사람들로부터 트루베니아의 말을 배 웠다. 틈틈히 사냥을 하니 식량과 옷가지를 구할 수 있었다. 현경 의 경지에 이른 영호명에게 사냥 정도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 없었다. 그렇게 해서 영호명은 정확히 일 년 만에 트루베니아의 말을 터득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