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몬 3권 1.당문, 재기의 길을 걷다 전투는 오래지 않아 종결지어졌다. 세가를 포기하기로 한 마당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기에 살아남은 모용세가 무사들은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이 줄행랑을 쳤다. 그들이 향한 곳은 하남의 분가. 쟁쟁한 명성을 떨치던 모용세가에는 즐비하게 널린 시체와 운신할 수 없는 부상자들만이 남겨졌다. 대부분 독에 중독되어 얼굴이 시커멓게 물든 것을 보아 굳이손을 쓰지 않아도 절명할 자들이다. 모용세가를 완전히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묵회주의 낯빛은그리 밝지 않았다. 모용세가의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주력고수들이 대부분 살아서 퇴각했기 때문이다. “정예들은 대부분 빠져나갔군. 생각보다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어.” 무엇보다도 그의 마음을 편치 않게 만든 것은 천기대제가 신신당부한 색목인을 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점이 전투를 승리 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뒷맛을 개운치 않게 했다. “할 수 없지. 어쨌거나 모용세가의 본가를 점령한 것만 해도 어딘데……. 불로소득이나 거둬야겠군.” 묵회주는 얼마 전 무림맹 악양 지부를 궤멸시켰을 때를 떠올렸다. 무사들을 물리치고 악양 지부를 점령한 뒤 묵회는 상당히 짭짤한 성과를 거뒀다. 악양 지부의 창고에는 지부를 운영하기 위한 자금과 무사들의 내공 증진을 위한 영단이 잔뜩 쌓여 있었던 것이다. 일개 무림맹 지부도 그러할 진대 세가 중 제일이라는 모용세가의 창고에는 얼마나 많은 재보가 쌓여 있을까? 묵회주의 눈이 기대감으로 번들거렸다. “본가이니만큼 무공비급과 영단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챙겨갈 정신이 있을 리 만무할 테니 고이 접수해 줘야겠군.” 물론 그것들 대부분은 잠마련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묵회에 떨어지는 떡고물이 없을 리가 없기에 묵회주의 입가에 모처럼 미소가 맺혔다. “두세 시진이면 잠마련 분타에서 무사들이 도착할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 띄기 전에 서둘러 재보들을 옮겨야 한다.” 현재 그가 통솔하는 병력은 대부분 강시다. 재보를 옮기는 데 그것들을 쓸 수는 없다. 절정고수가 몇 있긴 하지만 그들 역시 짐꾼으로 쓸 순 없다는 점은 마찬가지. 소 잡는 칼을 닭 잡는 데 쓸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모용세가의 창고를 터는 데 문제는 없었다. 그는 승기를 잡았을 때 이미 인근의 잠마련 분타로 사람을 보냈다. 분타의 하급무사들이 수레를 끌고 올 때까지 이곳을 지켜야하는 것이 그에게 부여된 새로운 임무였다. “본가가 털리는 것만으로도 모용세가는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다. 세가를 운영하는 자금은 쉽사리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묵회주의 입가에 음침한 미소가 맺혔다. 그 시각 데이몬은 모용세가의 창고를 깔끔하게 비우고 있었다. 무림을 주름잡는 거대세가답게 모용세가에 쌓인 재보는 상상을 초월했다. 세가를 몇 년 동안 운영할 수 있는 자금이 창고에 가득했다. “흐흐흐, 수지맞았군. 이런 것을 어부지리라고 하던가?” 굳이 재보들을 들어서 옮길 필요는 없었다. 인크레시아를 연뒤 범위만 지정하면 마법보고가 알아서 재보들을 수납했다. 채 일 다경도 되지 않는 시간에 창고 세 개에 쌓인 재보가 깡그리 인크레시아 속으로 사라졌다. 내친 김에 데이몬은 무공비급이 쌓인 창고도 털었다. 모용세가에서 심혈을 기울여 구한 비급들이 하나둘씩 인크레시아 속으로 들어갔다. 데이몬은 모용세가에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을 작정이었다. 심지어 부피가 나가는 곡식자루까지도 인크레시아에 집어넣었을 정도였다. “사준환 녀석에게 복수하려면 세력을 길러야 해. 기본적으로저력을 가지고 있는 사천당문이니만큼 조금만 도와주면 금세 일어설 수 있을 거야.” 비급을 모조리 털고 난 후 데이몬이 향한 곳은 영단이 보관된 창고였다. 무사들을 키우기 위해 모용세가는 돈을 아끼지 않고 영단을 구입해서 비축해 놓았다. 물론 독과 관련된 독초와 약초들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데이몬은 그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인크레시아 속에 쓸어 넣었다. 그토록 드넓던 창고가 금세 텅 비어버렸다. 데이몬은 황량함이 느껴지는 창고를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묵회 놈들, 이 모습을 보면 무척 황당해 하겠군. 내 알 바는아니지만 말이야.” 그때 바깥쪽이 시끄러워 졌다. 재보를 실어가기 위해 묵회의 무사들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데이몬은 고개를 살짝 흔들며 인크레시아를 닫았다. “한 발 늦었어. 세가의 물건들은 이미 내가 접수했으니 헛걸음 들을 했군.” 이어 투명화 마법을 사용하자 데이몬의 신형이 그곳에서 사라 졌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일단의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 나 그들이 본 것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텅 빈 창고였다. 보고를 들은 묵회주는 깜짝 놀랐다. “뭐라고? 그게 사실인가?” 보고를 하는 무사도 황망함을 지우지 못했다. 모용세가의 창고는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재보와 비급, 영단은 물론이고 곡식 창고의 쌀자루마저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러니 맥이 빠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묵회주는 한없이 황당해 했다. “어찌 이런 일이……. 전투가 끝난 지 세 시진도 지나지 않았 거늘.” 설마 누군가가 자신들의 눈을 피해 재보를 빼돌렸으리라곤 꿈 에도 생각하지 못한 묵회주였다. “그렇다면 모용세가에서 우리의 습격을 미연에 눈치 채고 재 보를 미리 빼돌렸다는 말인가?” 결과를 보아 그가 도출해 낼 수 있는 결론은 오직 그것 하나뿐 이다. 묵회주의 눈동자에서 급격히 살광이 치솟았다. “빌어먹을 놈들이 우릴 우롱했군. 그렇다면 무림맹의 무사들 이 들이닥칠 가능성이 크다. 이건 함정이야!” “서둘러 철수한다. 흔적을 일절 남겨두지 마라. 파괴된 독강 시까지 모두 수거하도록.” 그의 명에 따라 무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묵회의 무사들이 썰물처럼 철수를 시작했다. 파괴된 강시의 잔 해를 수거하고 전장을 정리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질서정연했다. 그 광경을 데이몬은 모습을 숨긴 채 지켜보고 있었다. “제법 많은 무사를 동원했군. 대부분 이, 삼류의 하급 무사들 이지만 그래도 저 정도로 많은 무사를 동원할 정도라면 묵회의 조직구성이 상당히 치밀하다는 결론인데…….” 데이몬은 불현듯 묵회란 조직에 대한 궁금증이 치솟았다. 무림맹 악양 지부에 이어 모용세가라는 거대세가를 쓸어버릴 정도라면 결코 평범한 집단은 아니다. 물론 두 세력을 궤멸시킨 것은 강시였지만 뒷정리를 하러 온 무사들을 감안하니 쉽게 생각할 조직이 아니다. “도대체 어떤 놈들일까? 독과 강시를 이용해서 무림을 뒤흔들 어 놓다니…….” 그때 데이몬은 한 가지에 생각이 미쳤다. 비영전주. 산 속에서 붙잡았다가 놓아준 묵회의 하수인이 떠오른 것이 다. 그의 머릿속에 불어 넣어둔 어둠의 마력을 떠올린 데이몬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잘 되었군. 그 녀석을 통해 묵회의 비밀을 파헤쳐야겠어.” 당시 기억을 살짝 들춰보기는 했지만 그건 수박 겉핥기에 불 과했다. 독에 중됙된 후유증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신이 혼미한 자의 심령을 제압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하지만 데 이몬이 투여해 놓은 어둠의 마력은 시간이갈수록 피시술자의 뇌리를 장악해 나간다. 만약 그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묵회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녀석을 어디 가서 찾아내지? 안 그래도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비밀조직의 조직원인데 말이야.”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인적이 드문 곳 으로 가서 공간이동을 하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 데이몬의 얼굴은 착잡했다. “솔직히 말해 이번에는 내가 너무 안이했어.” 모용세가에서 고문을 당할 것이라고 데이몬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묵회의 독에 대한 해독술을 보유한 만큼 어느 정도는 예 의를 지켜 상대해줄 줄 알았건만 예상이 송두리째 빗나간 것이다. 고문당하던 기억을 떠올린 데이몬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정파에 대한 환상이 확실하게 깨어지는군. 역시 세가들은 9 대 문파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건가?” 너무 대책 없이 행동했다는 생각에 데이몬은 얼굴을 찡그렸 다. 온갖 음험한 계략이 난무하는 마계에서 꿋꿋이 버텨내고 당 당한 마계의 군주가 된 자신이 한낱 인간들에게 잡혀 고문을 당 하다니……. 만약 이 사실을 마계의 수하들이 안다면 차마 얼굴을 들고 다 닐 수 없으리라. “이제 긴장을 좀 해야겠군. 고향에 돌아왔다는 향수에 젖어 너 무 안이하게 행동했어.”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날려버린 데이몬은 기지개를 켰다. “이제부터는 마왕답게 행동하자. 사준환의 야망을 꺾고 그의 모든 세력을 와해시켜 완벽하게 복수해야 한다.” 인적이 드문 으슥한 곳에 도착한 데이몬은 지체 없이 마법진 을 그렸다. 마법진의 좌표는 냉유성과 당문 식솔들이 도착한 바 로 그곳이었다. * * * 모용세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대파산맥에는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드나드는 사람이 없어 산길조차 나있 지 않은 곳이었다. 마법을 처음 경험해 본 당문 사람들은 쉽사리 공간이동에 적 응하지 못했다. 냉유성으로부터 이곳이 대파산맥이라는 말을 듣 자 그들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이런일이...” “미, 믿을 수 없어. 대파산맥이 모용세가와 얼마나 멀리 떨어 져 있는데…….”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결국 믿을 수밖에 없었다. 펼쳐진 산세로 볼 때 일단 모용세가에서 멀 리 떨어진 곳이란 사실은 확살했다. 한쪽에는 당청이 어머니와 함께 해후를 만끽하고 있었다. 격정으로 인해 모녀의 눈시울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널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정말 믿어지지 않는구나.” “현실이에요, 엄마. 정말 보고 싶었어요.” 많은 대화를 통해 딸과 데이몬과의 관계를 알게 된 당청의 어 머니 은한설은 무척이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애지중지 키운 딸이 서역의 색목인에게 연정을 품었다니……. 처음에는 땅이 꺼질 듯 한숨만 내쉬던 그녀였다. 하지만 거듭 되는 당청의 설득에 마음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어차피 본가는 멸문한 상태나 다름없지. 이런 상황에서 그 정도 실력자가 도와준다면 엄청난 힘이 될 것 같구나.” 당청의 입을 통해 시아버지인 당문수가 독술대결에서 데이몬 에게 패했다는 말을 듣자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데이몬의 엄청난 능력을 똑똑히 본 상태 였다. 엄청난 위력을 과시하던 묵회의 강시를 일수에 날려버린 데 이어 서른 명에 달하는 당문 식솔을 이 먼 대파산맥으로 이동 시켰으니 말이다. 게다가 콩깍지가 씐 당청이 계속해서 데이몬을 두둔하자 그녀 의 마음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가문이 멸문의 위기 에 처하자 그녀로서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 하게 작용했는지도 몰랐다. “처음 뵙겠습니다. 데이몬 님을 모시고 있는 냉유성이라고 합 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청이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냉유성을 본 은한설은 놀랐다.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아 보 이는 경지의 냉유성이다. 쟁쟁한 무인들을 보아왔기에 그녀의 눈은 정확했다. “청이에게 듣기로 절정의 경지에 오르셨다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원래 공동의 제자였는데 파문당한 뒤 데이몬 님 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절도 있는 태도로 고개를 숙이는 냉유성을 보며 그녀는 마음 을 굳혔다. 데이몬을 당청의 배필로 인정하기로 말이다 ‘그래, 이 정도 무인을 수하로 둔 사람이라면 평범할 리가 없 어.’ 그녀 옆에서는 당문 사람들이 긴장이 풀렸는지 주저앉아 쉬고 있었고, 몇몇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중 구레나룻이 무성하 게 난 중년 사내는 뭔가 고민이 있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정말 믿을 수 없군. 이곳이 대파산맥이라는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고,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한순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지?” 중얼거리던 중년사내의 표정이 뭘 생각했는지 급격히 어두워 졌다. “그나저나 큰일이로군. 이곳에서 인가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족히 사나흘은 걸어야 할 텐데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으 니…….” 그는 당문에서 전문적으로 약초를 캐러 다니는 임무를 맡았던 자였다. 약초를 찾아 중원 곳곳을 돌아 다녀본 덕택에 이곳이 어 디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들이 골치 아픈 상황에 놓였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곳에 있는 당문 식솔들 태반은 아녀자이다. 그들을 데리고 사흘동안 이동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터. 그러니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옆에서 눈부신 빛 무리가 뿜어져 나왔다. 번쩍! 그들이 이동한 바로 그 마법진에서였다. 냉유성이 반색하며 몸을 일으켰다. “다행이군요. 주공께서 오시나 봅니다.” 눈부신 빛을 줄기줄기 뿜어내는 마법진으로 인해 당문 사람들 은 급히 고개를 돌려야 했다. 빛이 사라지고 나자 그곳에는 지금까지 없던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데이몬이었다. 그를 보자 냉유성은 급히 몸을 날렸다. “주공, 오셨군요.” “많이 기다렸겠구나. 처리할 일이 많아서 조금 늦었다.” “모용세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데이몬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모용세가의 본가는 이제 세상에 없다. 묵회에 의해 완전히 멸 문을 당했지.” 데이몬은 그간의 경과를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만약 그가 도 와주었다면 모용세가는 묵회의 습격을 막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데이몬은 모용세가가 패퇴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사실을 들은 냉유성은 고소하다는 표 정을 지었다. “그것 잘 되었군요. 그런 놈들은 당해도 쌉니다.” 그때 옆에 다가와 있던 당청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될 수도 있어요. 비록 본가가 함락되었지 만 모용세가는 아직까지 무림맹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 어요. 그들이 무림맹으로 가서 상공에게 나쁜 방향으로 증언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해요“ 고개를 돌린 데이몬의 입가에 따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일단 날 건드린 이상 모용세가는 앞으로의 일이 결코 순탄치 않을 테니까. 은원 은 열 배로 불려서 갚아주는 것이 내 철칙이다.” 차가운 말투로 내뱉은 데이몬은 당청 옆에 서 있는 은한설을 쳐다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아까는 경황이 없었던 터라 제대로 인사드리 지 못했습니다.” “괜찮아요. 청이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셨다고 들었어요.” “은혜라고 할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아무튼 예쁘게 봐 주십시 오.” 데이몬의 공손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은한설은 살짝 미소 지었다. ‘색목인들은 상당히 무례하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예의가 바르군. 인물도 반듯하고…….’ 데이몬은 자신을 쳐다보며 불안에 떨고 있는 당문 식솔들을 둘러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몸을 숨길만한 곳이 있습니까? 힘을 키우려면 남의 눈 에 띄지 않는 곳이 있어야 할텐데…….” “…….” “청이에게 말했듯 전 당문의 부흥을 위해 조력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물심양면으로 말입니다.” “그렇게까지 배려해 주시지 않아도…….” 데이몬은 조용히 은한설의 말을 끊었다. “당문이 힘을 되찾는다면 제가 하려고 하는 일이 수월해질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떠나 전 청이에게 약조를 했습니다. 당문의 재건에 힘을 아끼지 않기로 말입니다. 그러니 절 더 이상 외인으로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잠시 고민하던 은한설이 입을 열었다. “안가(安家)가 한 군데 있기는 해요.” “안전한 곳입니까?” “잠마련이나 모용세가도 모르는 곳이죠. 사실 잠마련으로 인 해 당문이 멸문되었을 때 남은 식솔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옮겨 가려고 했죠. 하지만 모용세가로 인해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답니 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당가타에요. 그곳 주민들 대부분이 당문과 연관이 있는 사람 들이죠, 장원을 몇 군데 마련해 두었으니 식솔들이 머물기에는 충분할 거예요. 하지만…….” 설명을 이어나가던 은한설의 얼굴이 가문의 몰락을 떠올렸는 지 급격히 어두워졌다. 사실 당가타는 멸문하기 전 당문이 본타 로 삼기 위해 마련해 둔 거점이었다. 처음 개파했을 때는 충분했 지만 문파의 규모가 커지고 식솔들이 늘어나자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죽은 남편인 당현수는 본가를 이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그곳이 당가타였다. 근처에 강이 흐르고 전체적인 지형 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아 당가의 본타로 삼기에는 최적지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당현수는 거금을 들여 당가타의 땅을 사들였고, 오망 성의 진법에 따라 여러 채의 장원을 지었다. 하지만 당가타가 채 빛을 보기도 전에 당문은 잠마련의 습격 을 받고 멸문해 버렸다. 그것이 벌써 오 년 전의 일이었다. 은한설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과거 에 연연할 때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고 민해야 할 때다. 그렇기에 애써 밝은 표정으로 데이몬을 바라보 며 입을 열었다. “오 년 동안 관리하지 않아서 상황이 어떤지 모르겠어요.”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일단 당가타로 가 보도록 하지요.” 그때 구레나룻을 기른 중년 사내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이동하려면 먼저 식량을 마련해야 합니다. 제가 알기 로 이곳에서 사람이 사는 곳까지 가려면 족히 사흘은 걸어야 하 니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곳까지 어떻게 왔는지 벌써 잊었습니 까?” 태연스런 데이몬의 대꾸에 중년사내는 말을 잊었다. 모용세가 에서 이곳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왔다면 의당 갈 방법도 있을 터. 데이몬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사내의 눈에 서서히 희망의 빛이 어리기 사작했다. * * * 악양 지부에 이어 모용세가 본가가 묵회의 손에 의해 괴멸되 자 무림은 발칵 뒤집혔다. 도대체 묵회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기 에 5대 세가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졌다는 모용세가의 본가를 멸 망시킬 수 있었을까. 비록 강력한 강시를 동원해서 이룬 결과라고 해도 이것은 결 코 경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남의 무림맹 본단은 그야말로 신경이 바싹 곤두서 있었다. 정사대전 이후 오랜만에 직면하는 위기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본가를 탈출한 모용세가 무사들은 모두 하남의 분가로 이동했 다. 세가의 가주인 모용황만이 무림맹에 와서 무림맹주와 독대 하고 있었다. “가주의 말인 즉슨 그 색목인이 묵회와 연관이 있다는 뜻이 오?” 무림맹주의 말에 모용황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머리를 끄 덕였다. “틀림이 없소. 우선 그는 누구도 해독하지 못한 묵회의 독을 해독했소. 게다가 그를 본가로 들인 지 채 하루도 지나기 전에 묵회의 강시들이 들이닥쳤소. 그것을 모아 색목인은 묵회의 끄 나풀이 분명한 것 같소.” “흠, 속단하기 힘든 문제 같구려.” “아니오. 모르긴 몰라도 멸망한 악양 지부에도 분명 놈이 방문 해 있었을 거요. 그놈이 먼저 들어와서 분타 내부의 취약점을 파 악한 뒤 강시군단을 불러들였을 가능성이 농후하오.” 본가를 잃었다는 분노 때문인지 모용황의 눈동자는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듣고 있던 무림맹주는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가능성은 없소. 지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곧바로 보고가 올라오는데 퇴각한 무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색목인이 방문했다 는 보고는 일절 없었소.” “아무튼 그가 묵회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오. 곧 바로 무림첩을 돌려야 하오.” “하지만 제반증거가 너무 빈약하지 않소.” 그 말에 모용황의 눈썹이 꿈틀했다. “지금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오?” 몹시 화가 난 것 같았지만 무림맹주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단순히 독을 해독했다는 이유만으로 묵회의 끄나풀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오. 모든 것은 색목인과 대화를 나 눠본 뒤…….” 모용황은 거칠게 무림맹주의 말을 끊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소. 뿌리조차 알 수 없는 색목인 놈 의 증언이 내 증언보다 비중이 높다는 뜻이오?” “그런 뜻은 아니오.” “여기서 내가 확실히 증언하리다. 그놈은 분명히 묵회와 연관이 있소.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할 수 있소.” 모용황이 고집을 부리자 무림맹주는 못 말리겠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사실 그는 이미 모용세가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보고 받은 상 태였다. 물론 모용세가에 유리한 방향으로였지만 개괄적인 사항은 모 두 들었다고 봐야 했다. 무림맹의 관점에서 볼 때 색목인의 행동은 그리 잘한 짓이라 곤 볼 수 없었다. 당문 식솔들을 불러내어 감쪽같이 빼돌린 것도 그렇고, 특히 모용세가가 강시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 나 몰라라 달아난 점은 정파의 협객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성급하게 판단할 순 없었다. 객관적인 입 장에서 보기에 모용황의 행동에는 다분히 억지스러운 데가 있 었다. ‘그는 먼 곳에서 온 색목인이야. 그의 행동을 무림인의 관점에 서 생각할 순 없어.’ 생각에 잠겨있던 무림맹주의 귓가로 모용황의 거친 음성이 파 고들었다. “서둘러 무림첩을 발동시키시오. 그 색목인을 잡아야 묵회의 독에 대한 정보를 빼낼 수 있기 때문이오.” 무림첩을 발동하는 것은 무림맹주의 고유권한이다. 만약 맹주 가 무림첩을 발동시킨다면 무림맹에 소속된 모든 문파가 눈을 부릅뜨고 색목인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러나 무림맹주는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러기는 힘들 것 같소. 한쪽 말만 듣고 무림첩을 발동시킬 수는 없소. 일단 색목인에게 자초지종을 들어본 뒤 판단하는 것 이 좋을 것 같소.” 맹주가 거절했지만 모용황은 별달리 놀라지 않았다. 마치 맹 주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렇다면 장로회의를 건의하겠소. 그것은 무림맹 장로인 나 에게 허락된 권한. 그것까지 막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오.” 맹주는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지. 원하시는 대로 하시오.” “색목인에 대한 구인장 발부를 장로회의에다 발의할 생각이 오. 그러니 각 문파에다 통문을 날려주시기 바라오.” “알겠소.” 모용황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저벅저벅 걸어 나가는 모용황의 뒷모습을 무림맹주는 착잡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모용세가의 전횡은 본가가 멸망당하고도 전혀 빛이 바래지 않는군.’ 실제적인 힘이 거의 없는 맹주라는 것이 오늘따라 유난히 씁 쓸했다. 모용세가는 장로회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장로회의 가 열린다면 색목인에 대해 구인장이 발부될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일이다. 무림맹주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쩔 수 없군. 구인장이 발부되면 나로서는 막을 도리가 없으 니…….” 못내 답답했는지 맹주는 탁자 위의 잔을 들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데이몬은 당문 식솔들을 당가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설치된 마법진으로 공간 이동 시켰다. 이미 그는 중원 곳곳에 공간이동의 거점이 되는 마법진을 설 치한 상태. 그러나 목적지로 잡은 곳은 당가타와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인가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데이몬은 우선 근처 마을에서 마차를 구했다. 일행 중에 부녀 자와 노약자가 다수 섞여있는데다 오랜 감금 생활로 기력이 쇠 해 있었기에 도보로 이동하기는 쉽지 않았다. 채비를 마친 일행은 머뭇거림 없이 당가타로 이동을 시작했 다. 그러나 중원은 역시 넓었다. 그들은 꼬박 열흘이라는 시간을 허비한 후에야 겨우 당가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가타에 도착한 일행은 곧바로 과거 당문에서 구매해 놓은 장원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반가운 얼굴을 만 날 수 있었다. 바로 당가의 전대 가주인 당문수였다. 그를 보자 당문 식솔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가, 가주님!” 물론 경악은 금세 반가움으로 화했다. 당문수 역시 상당히 놀 란 눈치였다. “이, 이게 어찌된 일이오?” 모용세가에 잡혀갔던 식솔들이 대거 안가로 밀고 들어오니 놀 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문 식솔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당문 수는 데이몬에게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정말 고맙소. 이 은혜를 도대체 어떻게 갚아야 한단 말이오.” “별 말씀을…….” 당문수의 얼굴에는 과거 독술대결에서 패한 데 대한 앙금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도리어 그는 세가의 식솔들을 구해준 데 이몬을 은인처럼 생각하는 듯 했다. 모용세가의 추적을 피해 새외로 도주한 당문수는 기회를 보아 중원으로 몰래 돌아왔다. 물론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데이몬 이 당청을 맡아주었기 때문이다. 홀가분해진 몸으로 중원으로 돌아온 당문수는 우선 뿔뿔이 흩 어진 가솔들을 규합했다. 잠마련이나 모용세가에 잡혀가지 않고 몸을 피한 제자들의 수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당문의 재건을 위해서는 후지기수의 양성이 가장 시급한 일이 다. 대부분 무공이나 독술에 조예가 낮아 몸을 피할 수 있었던 하급 무사들이었지만 당문수가 의자할 방도는 그들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십명의 가솔들을 찾아낸 당문수는 그들을 당가타에 마련된 안가로 데리고 왔다. 이곳에서 몰래 힘을 기른 뒤 기회를 보아 모용세가와 잠마련에 잡혀낸 식솔들을 구해내려는 것이 그 의 계획이었다. ‘잡혀간 식솔들을 구해낼 수 있다면 당문의 재건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어떻게든 힘을 길러야 한다.’ 당문수는 당가타로 데리고 온 청년들을 엄하게 조련시키는 것 을 1차 계획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의 야심 찬 포부는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바로 금전 문제 때문에. 오 년 동안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장원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세심하게 신경 써서 관리인을 선임했기 때문에 장원을 팔아먹 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간의 유지비용 때문에 장원 대부분을 전장에 저당이 잡혀 있었다. 관리인들이 장원을 담보로 돈을 빌 려 유지보수를 했기 때문이다. 저간의 사정을 들은 당문수는 도리어 관리인들의 어깨를 두드 려 주어야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오 년 동안 관리해 준 것만 해도 어딘 데…….’ 하지만 텅 비어버린 창고를 둘러보는 당문수의 어깨는 축 늘 어졌다. 무림세가를 운영하는 데에는 방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무사집 단은 기본적으로 소비집단. 일전한 자금원이 있어야만 무사들을 입히고 먹일 수 있다. 게다가 무사들을 조련시키는 데에도 만만 치 않은 돈이 들어간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당문수에겐 그럴 만한 여유가 전혀 없었 다. 심지어 무사들에게 제대로 된 병기 하나 장만해 줄 수 없는 형편이었으니……. 데이몬이 당문 식솔들을 데리고 도착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기쁘긴 했지만 입이 늘어버렸으니 당문수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군. 장원 한두 개를 처분하는 수밖에…….’ 당장 식솔들을 먹여 살릴 걱정이 태산이었기에 그는 다섯 개 의 장원 중 일부를 처분할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런 당문수의 걱정을 간단히 해결해 주었다. “장원이 무척 황량하군요.” 장원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데이몬이 내뱉은 일성이었다. 당문 수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오 년 동안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요. 그나마 관리인들이 장원을 팔아먹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입 니다.” “창고가 어느 쪽입니까?” 데이몬이 뜬금없이 창고를 거론하자 당문수의 눈이 의혹으로 물들었다. “창고는 왜? 먼지 말고는 아무 것도 없을 텐데요.” “한 번 보고 싶군요. 그래도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당문의 창 고 아닙니까?” 무언 때문에 그러는지 몰랐지만 당문수는 데이몬을 순순히 창 고로 안내해 주었다. 어찌 되었건 그는 식솔들을 모용세가로부 터 구해 준 은인이었다. 빈곤한 당문의 사정에 어울리지 않게 창고는 무척이나 컸다. 각종 물품들을 보관하기 위해 인수하자마자 증축공사를 한 탓 이다. 물론 창고는 텅 비어 있었다. 관리인들이 신경을 쓴 듯 말끔히 청소가 되어 있었지만 보관되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데이몬은 황량한 창고 내부를 이리저리 둘어보았다. “뭘 보관하는 창고이지요?” “통풍에 신경을 쓴 것을 보니 식량창고였을 것입니다. 뭐 지금 은 식량이고 뭐고 보관할 것도 없지만…….”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히는 당문수를 보며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제가 당문의 창고를 채워드리겠습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뜨는 당문수의 시선을 외면하며 데이몬 은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니던 윈슬럿이 앞으로 나섰다. 일꾼이 등장하자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쓰쓰쓰 천고의 마법보고 인크레시아가 당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순 간이었다. “신기하군요. 이게 대관절 무엇입니까?” 허공의 시커먼 음영을 보자 당문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때 명 령을 받은 윈슬럿이 거침없이 인크레시아 안으로 몸을 던졌다. 고개를 돌린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이제부터 당문은 물자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제 가 풍성하게 채워드릴 테니까요.” “…….” “이 속에는 제법 많은 물자들이 들어 있지요. 간단히 말해 모 용세가로부터 수거한 것들입니다.” “모, 모용세가라니요?” 데이몬은 모용세가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 었다. 사실을 들은 당문수는 무척 분개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놈들이군요. 가문의 식솔을 해독시켜 준 은인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고문까지 가하다니…….” 데이몬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 일로 인해 중원사람들에게 큰 실망을 했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희 당문 같은 경우는 은원관계를 매우 확실하게 구분합니다. 아무 리 절박한 상황에 몰리더라도 그런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겁니 다.” “유독 모용세가만 그렇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사실 모용세가는 그리 평판이 좋지 않습니다. 가문을 키우기 위해 수단 밥법을 가리지 않는 놈들이었으니까 요. 음지에서 하는 짓이 오히려 사파보다 더하다는 소문까지 돌 고 있습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그에 대한 답례로 모용세가의 창고를 모조리 털어 왔 습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묵회의 손에 들어갈 것이 뻔했고, 그놈 들도 별로 좋은 놈들로 보이지 않아 차라리 내가 접수하는 것이 나을 것 같더군요.” “그러셨군요.” “지금 생각해 보니 잘한 것 같소이다. 그 재보들이 당문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으니 말이오.” 그 말에 당문수가 눈을 크게 떳다. “그렇다면 그 재보들을 저희 당문에 주신다는 말씀이시오?” “그렇소. 저기 윈슬럿이 열심히 곡식자루들을 쌓고 있지 않 소.” 고개를 돌려 본 당문수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데이몬 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창고 한쪽에 곡식자루들이 차곡차곡 쌓 이고 있었다. 윈슬럿이 한 번에 두세 가마씩 곡식자루를 꺼내 와 서 쌓고 있는 것이다. 벌써 창고 벽에는 곡식자루들이 그득했다. 그 모습에 당문수 는 입을 딱 벌렸다. “힘이 엄청난 장사로군요. 그, 그런데 언제 저 많은 곡식 을…….” “내가 살던 곳에는 공간을 이용해 물건을 보관하는 기법이 무 척 잘 발달되어 있소. 겉으로는 신기해 보이지만 원리를 알면 간 단하오.” 좀처럼 입을 다물지 못하는 당문수를 보며 데이몬은 미소를 지었다. “저 정도에 놀라면 안 될 것이오. 모용세가로부터 거둔 재보가 그리 적지 않으니 말이오.” 그날 당문수는 여러 번 놀라야 했다. 인크레시아로부터 곡식 자루에 이어 질 좋은 병장기와 값비싼 금은보화가 끝도 없이 나 왔기 때문이다. “제법 양이 많긴 하지만 창고가 커서 모두 들어가는구려. 그럼 다음 창고로 갈까요.” 그 다음 창고에서 인크레시아가 토해 낸 물품들을 본 당문수 는 크게 반색했다. 윈슬럿이 들고 나온 것은 각종 영단을 비롯한 약초들이었기 때문이다. 당문에게 있어 현재 가장 필요한 물품 이었기에 당문수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저, 정말 놀랍군요. 이 정도라면 식솔들을 수련시키기에 충분 합니다.” 놀랄 일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영단과 약초에 이어 무공 비급이 선을 보이자 당문수의 감격은 극에 달했다. 당문의 약점 으로 치부되던 무공 방면의 문제가 이 무공비급으로 인해 깨끗 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문파와는 달리 세가의 무공은 특색이 없는 일반적인 무공이 많다. 대부분의 비급들이 널리 알려진 무공을 보완하고 발전시 킨 것이었다. 물론 남궁세가나 하북팽가처럼 역사가 오래된 세가들은 가문 비전의 무공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창궁무애검법(蒼穹無 涯劍法)이나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를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모용 세가는 그 세가들만큼 역사가 깊지 않다. 그런 탓 에 대부분의 무공들이 지극히 일반적이었다. 다시 말해 독문의 내공심법이나 구결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당장 당문의 후기지수들이 익혀도 무리가 없는 무공들이었기 에 당문수가 기뻐할 만도 했다. 데이몬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 의 모습을 잔잔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제 뒤를 든든히 받쳐줄 무림세가 하나를 얻게 된 것인가.’ 창고 정리를 마친 뒤 데이몬은 안채에서 당문수와 마주 앉았 다. 데이몬을 쳐다보는 당문수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범벅 되어 있었다. “일단 당문의 전 식솔을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귀공은 저희 당문에 엄청난 은혜를 베푸신 은인입니다.” “별 말씀을…….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구려.” 고개를 끄덕이면서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받는 입장에서는 엄청난 혜택이었지만 데이몬으로서는 별달리 힘을 쓴 것이 없었다. 당문의 식솔을 구해내는 과정에서 고문을 받기는 했지만 저력 있는 무림세가의 후원을 받는 것에 비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당문의 창고를 채워준 재보들 모두 모용세가에서 얻 은 불로소득이 아니던가. 상념에 빠진 데이몬의 귓전으로 당문수의 음성이 파고 들었다. “하지만 저는 은공께서 저희 당문에 이같이 크나큰 은혜를 베 푸시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당문에 바라시는 것이 있 다면 속 시원히 말씀해 주십시오.” 데이몬 일행에게 암습까지 가한 당문수로서는 당연히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의문이었다. 서역인인 데이몬의 입장에서 당문은 중원에 널리고 널린 중원 문파 중 하나다. 이처럼 세심하게 신경 써서 돌봐줘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에 대한 데이몬의 대답은 간단했다. “깊이 생각할 것 없다. 단지 청이가 마음에 들어서라고나 할 까?” “다, 단순히 청이 때문입니까?” “그렇소. 정말 귀엽고 아리따운 아가씨이더구려. 청이에게 소 중한 것이라면 나에게도 소중한 법. 당문을 도와주려는 데에는 그러한 이유가 있소.” “…….” 데이몬은 당문수의 눈을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당문을 도와주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소.” “혹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나와 당문은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소.” “…….” “바로 잠마련이오. 난 잠마련의 총수인 사준환에게 갚아주어 야 할 것이 하나 있소.” 데이몬은 냉유성과 당청에게 털어놓았던 이야기를 당문수에 게 그대로 들려주었다. 자신의 과거를 적당히 각색하여 말이다. 저간의 사정을 들은 당문수는 눈빛을 빛냈다. “그렇다면 사준환에 대한 복수를 위임받으셨단 말이로군요. 귀공에게 무공와 중원의 언어를 가르친 사람을 대신해서.” “바로 그렇소. 사실 트루베니아에는 사부라는 개념이 없소. 하지만 그를 통해 중원의 무공과 언어를 배울 수 있었으니 그 정 도는 해 주어도 무방하다고 생각되어 중원으로 건너왔소.” 데이몬의 말을 들은 당문수는 혀를 내둘렀다. 사준환이라면 당금 무림에서 단일 무력집단으로 으뜸가는 잠마련의 절대자 이다. 그런 자에게 복수를 해 주겠다고 약속하다니……. 물론 당문으로서는 결코 손해 볼 것이 없는 조건이다. 어차피 당문 역시 잠마련에 뼛속 잎이 각인된 원한이 있지 않던가. “좋습니다. 귀공의 복수에 당문 역시 일익을 담당하겠습니다. 굳이 귀공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잠마련에는 갚아줄 원한이 있으 니까 말이요.” 데이몬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조언을 해도 되겠소?” “말씀하십시오.” “되새기기 싫은 기억이겠지만 청이로부터 당문이 몰락한 배 경을 들었소. 그런데 당문은 과거 몇가지 실수를 했더구려.” 당문소는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말씀해 주십시오. 세이경청하겠습니다.” “무림문파의 기본은 누가 뭐라 해도 무공이오. 당문이 비록 독 과 암기술로 일가를 이루었다고는 하나 그를 받쳐주는 무공실력 이 없으면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가 없소. 일반적으로 무사들은 독과 암기에 당한 패배를 순순히 승복하지 않는 법. 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저 역시 그 문제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과거 당문은 독과 암기술에 심취한 나머지 무공의 연마를 게을리 한 면이 있 었습니다. 그 문제는 굳이 공께서 지적하지 않으셨어도 고치려 고 했었습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었다니 다행이구려. 그럼 한 가지 조언을 더 하도록 하겠소.” 당문수는 조용히 데이몬의 말을 기다렸다. 이미 그는 겨우 이 십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색목인 청년에게 깊이 감복한 상태였다. “내가 보기에 무림에는 회색이 설 자리가 없는 것 같소.” 눈치 빠른 당문수는 금세 데이몬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당청 의 빠른 눈치가 누구로부터 기인되었을까 짐작해보면 알 수 있 는 일이다. “중립을 지킨 것이 애초부터 잘못된 결정이었단 말씀이시군 요.” “그렇소, 어느 한 곳에 줄을 대고 있어야만 배후가 튼튼한 법 이오. 자고로 중립이란 충분히 자신을 지킬 실력이 되지 않는다 면 섣불리 선포하지 않는 법이오. 따라서 차후에 일어설 당문은 소속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소.” “하지만 저희 당문은 정사 양쪽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상 황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해야 하오. 그래야만 당문이 무림에서 입지를 단단히 굳힐 수 있소.” 데이몬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듯 당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군요.” “지금으로서는 정파와 사파 중 어느 곳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 이 관건이오.” 물론 그것은 물어보나 마나한 질문이다. 만약 당문이 사파를 선택한다면 같은 편인 잠마련을 적대하기 힘들다. 당문수는 조 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사파는 힘들 것 같습니다. 잠마련과 모용세가 양쪽 으로 공격을 받기는 했지만 원한은 잠마련 쪽이 더 깊습니다. 예 고도 없이 기습공격을 가한 놈들이니까요.” “그렇다면 결론이 났군요. 정파를 선택하시오 어차피 그들은 묵회의 독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으니 당문이 가입힌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요. 뭐, 모용세가와의 악연은 자체적인 힘으로 풀어야겠지만 말이오.”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은 이곳에서 힘을 기르는 것이 관건인 듯합니다. 힘이 있어야만 무림맹에서도 목소리를 낼 수 있을 테니까요.” “당장은 그래야겠지요. 잠마련에 잡혀간 식솔들을 구하기 전 까진 함부로 움직이긴 힘들 테니 말이오.” 당문수의 안색이 잔뜩 굳어졌다. 잠마련에 잡혀간 식솔들이야 말로 당문의 정예 중 정예들이었다. 잠마련은 말 그대로 당문의 알맹이만 쏙 빼서 가져간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들을 구할 방법이 없습니다. 잠마련이 워낙 강 력한 무력집단인지라…….”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힘을 써 보겠소. 물론 장담할 수는 없 지만 말이오.” 그때서야 당문수의 안색이 환히 밝아졌다. 물론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긴 하지만 상대는 모용세가에 잡혀 있던 식솔들을 감쪽같이 빼내온 인물이 아니던가. 일말의 기 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일단 시도는 한 번 해 보겠소. 대신에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시 오.” “만약 그들을 구해주신다면 공은 영원한 당문의 은인이 될 것 입니다.” 데이몬은 격정에 겨워하는 당문수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위기에 처하면 지푸라기 하나에도 희망을 갖는 것이 인간이다. 데이몬은 이제 당문에게 확실한 희망의 등불이 되어 있었다. 밤이 갚었다는 것을 느낀 데이몬이 몸을 일으켰다. “이만 들어가 봐야겠소. 세가의 부흥을 위한 문제는 차차 논의 해 보도록 합시다.” “알겠습니다, 은공.” 2. 기루를 방문한 마왕 데이몬이 쾌척한 재물로 말미암아 당문은 급속도로 안정을 되 찾아갔다. 창고 속에는 족히 오 년 이상 당문을 유지할 수 있는 재보가 들어 있었다. 재정 걱정을 말끔히 덜어버린 당문수는 후기지수들의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모용세가에서 풀려난 식솔들이 기쁜 마음으로 독과 암기를 연구했고, 새로 받아들이 문하생들은 구슬땀을 흘 려가며 수련에 매진했다. 당문수는 일단의 사람들을 중원 각지에 파견해서 과거 당문의 제자였던 자들을 끌어 모았다. 그렇게 당문은 급속도로 과거의 위용을 되찾고 있었다. 그러나 당문이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잠마련에 잡혀간 정예들을 구출하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었다. 그렇지 않는다면 당문은 족히 몇 십 년이 흘러야만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으 리라. “정말 떠나셔야 하나요?” 두 손을 맞잡는 당청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렇다. 이번만은 너를 데리고 갈 수가 없구나. 내 앞에는 많 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어차피 너에겐 이곳에 남아서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나?” “하, 하지만…….” 데이몬은 단호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난 이제부터 묵회에 대해 조사할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모용 세가에서 경험한 것과 같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몰라. 나와 냉유성이야 상관없지만 여자인 넌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 다. 최악의 경우 몸을 버릴 수도 있어. 내가 널 당문에 남겨두고 가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눈물을 뚝뚝 흘리던 당청이 고개를 수그렸다. 데이몬의 말이 백 번 지당했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이곳에 남아서 할아버지를 도와주도록 해라. 개인적 인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고.” “알겠어요, 상공. 그런데…….” 데이몬을 쳐다보는 당청의 눈동자에는 감출 수 없는 뜨거움이 떠올라 있었다. “언제 돌아오실 건가요?” “자주 들르마. 어차피 나에겐 마음 편히 쉴 곳이 이곳밖에 없 지 않니. 마음만 먹는다면 중원 어디에서도 눈 깜짝할 사이에 이 곳으로 올 수 있다.” 데이몬은 이미 당문의 후원에 공간이동 마법진을 설치해 두었다 다. 주문을 외운다면 곧바로 당문으로 공간이동할 수 있다는 뜻 이다. 그때서야 수긍했는지 당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상공. 소녀 목이 빠지게 기다릴게요.” “원 녀석도…….” 데이몬이 손을 뻗어 당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보 면서도 당문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데이몬을 당청의 배필로 점찍어두고 있었다. 우선 지닌바 실력과 인품을 따져 봐도 결코 당문에 손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데이몬은 당문에 엄청난 은혜를 준 존 재였다. “늦지 않게 돌아오마. 그 동안 가문의 어른들과 합심하여 문을 되살려라. 알겠느냐?” “네, 상공.”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은 당문수를 쳐다보았다. “일전에 제가 드렸던 조언, 기억하시지요?” “물론입니다, 은공.” “무림에서 인정받는 것은 오로지 힘입니다. 그러니 가문의 힘 을 키우는 데 주력하십시오. 그리고…….” 잠시 말을 끊은 데이몬은 심유한 눈빛으로 당문수를 쳐다보 았다. “한 가지는 사파의 법도를 따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은원관계를 확실히 하십시오. 만약 누가 당문을 건드린다면 열 배로 갚아주십시오. 당문을 건드린다면 대가가 혹독하다는 사실을 무림에 널리 인식시켜야 합니다.” 이미 몰락의 길을 한 번 걸어봤었던 터라 당문수는 데이몬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두 번 다시 그 누구도 우리 당문을 깔보지 않도 록 하겠습니다.” “부디 행운을 빌겠습니다.” 그 말을 남겨두고 데이몬은 떠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당청이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 아 눈물을 흘렸다. 당 부인이 조용히 다가가서 그녀의 등을 어루 만져 주었다.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머지않아 돌아오신다고 하지 않니?” “하, 하지만 그래도 슬픈 걸요.” “기다리는 것이 여인의 미덕이니라. 알겠느냐?” “네, 어머니.” 그와는 달리 당문수는 주먹을 불끈 움켜쥔 채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데이몬 공의 말이 맞아. 무림의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세계 야. 우선은 힘을 길러야 해. 그리고 당문을 건드릴 경우 혹독한 보복이 주어질 거란 사실을 무림에 각인시켜야 해.’ 그러나 당문수는 몰랐다. 그가 한 결심이 당문 대대로 이어지 는 전통이 될 것이란 사실을. 데이몬은 마법진을 이용해 당문을 떠났다. 그가 공간이동한 곳은 묵회의 강시와 혈전을 치렀던 대파산맥 인근이었다. 그곳에 도착한 데이몬과 냉유성은 꼬박 이틀을 걸어 장강삼협 에 이르렀다. 그들은 장강삼협의 아름다운 풍경을 느긋하게 감 상하며 성도로 향했다. “하남의 무림맹으로 가실 계획 아니셨습니까?” 냉유성의 질문에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긴 가야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시급한 문제가 있다.” “무엇입니까?” 데이몬은 나지막히 가슴속에 숨겨놓은 계획을 냉유성에게 털 어놓았다. “묵회와 접촉을 한 번 해 봐야 할 것 같다.” “묵회라니요?” “아무래도 의심쩍은 집단이야. 조사해보면 뭔가 엄청난 비밀 을 밝혀낼 수 있을 것 같아.” 데이몬은 조용히 머릿속의 계획을 정리했다. 사실 묵회의 행사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물론 가장 신 경 쓰이는 점은 활깅시로 변해버린 영호명이었다. 트루베니아에서 크로센 대제로 위명을 날렸던 영호명. 그는 오직 하늘만이 선택한다는 현경의 경지에 오른 명실상부한 초인 이다. 그런 그가 누군가에게 제압되어 활강시가 되었다는 사실은 데 이몬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믿을 수가 없군. 도대체 그 누가 있어 현경의 고수를 제압한 다는 말인가? 고수가 많은 중원이라지만 이건 말도 되지 않는 일 이야.’ 그가 중원으로 돌아와 있을 것이란 사실은 익히 짐작했던 부 분이었다. 하지만 활강시가 되어 일개 비밀집단의 하수인 노릇 을 하고 있다니……. 평생에 걸쳐 호적수로 생각했던 영호명의 처참한 모습에 왠지 모를 비애마저 느꼈던 데이몬이었다. ‘설마 묵회가 현경의 고수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현경의 고수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같은 현경뿐인데……. 만 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묵회라는 집단을 결코 얕봐서는 안 된다.’ 의문점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모용세가 습격에서 묵회가 내보 인 강시. 놀랍게도 검강을 흡수하는 강시에서는 흑마법의 기척 이 느껴졌었다.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확신하지 못했지만 뒤에 다시 떠올려보 니 흑마법의 흔적이 틀림없었다. ‘다크 서클(dark circle)의 일종 같았어. 순수한 마나를 태워 그 중 일부를 음차원의 마나로 전환시켜버리는 네크로멘서 지파의 흑마법. 게다가 그 강시에서는 미약하게나마 어둠의 마력이 깃 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트루베니아의 마법사, 그것도 흑마법사 가 중원으로 건너온 뒤 묵회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뜻인데…….’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같은 길을 추구하는 마법 사가 중원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미 최고의 경지에 오 른 대마법사로서 알지 못할 쾌감마저 느끼는 데이몬이었다. ‘어떤 녀석인지 궁금하군. 아무튼 묵회에 대해 심도 있게 조사 할 필요가 있어.’ 데이몬이 생각에 잠겨 있자 냉유성도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데이몬이 고개를 들고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것이다.”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데이몬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해 두었던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묵회를 한 번 조사해 볼 생각이다. 때에 따라서는 모용 세가에서 겪었던 일을 다시 한 번 겪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냉유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 무림이 눈을 시뻘겋게 뜨고 찾는 단체가 묵회 아닙니까? 그런 자들을 어떻게 찾아낸단 말입니까?” “달리 생각해 둔 방도가 있다. 일전에 대파산맥에서 강시와 접 전을 벌일 때 네가 생포했던 자를 기억하느냐?” “물론 알고 있습니다. 방심한 탓에 그놈에게 그만 중독되었지 요.” 당시의 일을 떠올리자 부끄러웠는지 냉유성의 얼굴이 붉게 물 들었다. 만약 주공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때 죽은 목숨이었다. “당시 그자에게 모종의 수작을 부려놓은 것이 있다. 만약 그자 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의 심령을 제압하여 입을 열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눈을 크게 뜬 냉유성이 짐짓 너스레를 풀었다. “놀랍군요. 아무튼 주공은 다재다능한 분이라니까요. 하늘 은 참 불공평하시지. 누구에겐 검 한 자루 달랑 휘두르는 재능만 주고 누구에겐……. 어이쿠.” 머리를 감싸 쥐고 울상을 짓는 냉유성에게 데이몬은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다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인데 누굴 탓하느냐. 앞으로 말 끊으 면 두 대이니라. 아무튼 그자를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다.” “그런데 그를 도대체 어디서 찾아낸단 말입니까?” 데이몬은 머리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당시 그가 독에 중독되어 혼미한 상태 일 때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에 의하면 그자는 하오문이란 단체 의 일원이었다고 중얼거렸다.” 물론 그것은 마력을 투입해 기억을 검색한 끝에 찾아낸 정 보였지만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 없었기에 데이몬은 대충 둘 러댔다. “혹시 하오문에 대해 알고 있느냐?” “예, 알고 있습니다. 기녀나 점소이, 도둑 따위가 모여 만든 문 파이지요. 정보력은 쓸만하지만 전투력은 거의 기대하지 못하는 문파입니다.” “그렇다면 기루에 가서 기녀들을 심문하면 하오문에 대한 실 마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냉유성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 힘들 것입니다. 우선 만나는 기녀가 하오문의 조직원일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정작 그렇다고 하더라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오문의 조직원들은 대부분 천대받는 자들이라 입이 무거운 편입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기 때문 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나를 찾아오게 하면 되지 않느냐?” “…….” “묵회는 나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모용세가에서 싸울 때 도 가급적 나를 사로잡으려 하는 의도가 역력히 보이더구나. 만 약 우리가 기루에 가서 여러 기녀를 만나본다면 분명 그중에 하 오문의 조직원이 걸려들 것이다. 간단히 말해 우린 기녀들을 통 해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정보를 흘리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냉유성은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렇게 되면 묵회 측에서 완벽하게 함정 을 파고 주공을 사로잡으려 할 것입니다. 주공께서 무공을 제대 로 펼칠 수 없는 지금이라면…….” “어차피 날 죽이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모용세가 놈 들처럼 고문을 가해 독술을 빼내려 하겠지. 그 정도야 충분히 감 수할 수 있다. 문제는…….” 데이몬이 빙글빙글 웃으며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너도 함께 고문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너도 알다 시피 고문의 기법 중에는 지인이나 수하를 대신 고문하여 죄수 의 입을 열게 하는 방법도 있으니까.” 예상외로 냉유성의 태도는 단호했다. “고문 따위는 하나도 겁나지 않습니다. 이미 고통을 겪을 만큼 겪어본 몸이니까요.” “녀석, 기백 하나는 훌륭하군. 좋다. 그럼 내 계획대로 한 번 해보도록 하자.” 데이몬은 기대어린 눈빛으로 멀리 보이는 성도를 쳐다보았다. “중원의 색향 중 으뜸은 단연 항주라고 했다. 하지만 성도의 기녀들도 그리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풍문을 들었지. 그럼 이 기 회에 성도의 기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몸소 견식해 볼까?” 말을 마친 데이몬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얼떨떨한 표정 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냉유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혹시 청이를 떼어놓고 온 이유가 기루에 가시기 위해서…….” “떽! 지나치게 넘겨짚지 말아라. 난 엄연히 묵회에 잠입하기 위해 그런 것뿐이다.” 데이몬의 해명이 이어졌지만 냉유성의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친 주공은 바람기가 다분한 사람이었으니까. * * * 성도에 들어선 둘은 머뭇거림 없이 환락가로 향했다. 사천성 의 큰 도시 중 하나인 성도였기에 유흥가가 무척 잘 발달되어 있 었다. 청등과 홍등이 환히 밝혀진 거리를 걸으며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중원의 미녀들 중에서 사천 미녀를 빼놓을 수 없다고 하던데 기대되는군.” 별로 내키지 않았는지 냉유성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뒤따라오 고 있었다. “주공, 혼자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속하는 그리 내키지 않습 니다.” “바늘 가는 데 실 따르지 않으면 되겠느냐? 잔말 말고 따라 오너라.” 아직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돌아다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 았다. 호객꾼도 나오지 않았고 간혹 밤새워 술을 마신 취객들 이 비틀거리며 돌아다닐 뿐이었다. 길 양쪽을 가득 메운 주루들 을 보며 데이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어디를 간다? 혹시 아는 곳이 있느냐?” 물론 검만 수련한 냉유성이 아는 곳이 있을 리 없다. 미간을 살짝 모은 데이몬은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두 명의 취객에게 다 가갔다. “아무래도 이런 곳의 사정은 술꾼들이 제일 잘 알지.” 데이몬이 목표로 다가간 취객들은 제법 반듯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부유한 상인들로 보이는 사내들은 완전히 만취했는지 연신 비틀거렸다. 데이몬이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여보시오, 말 좀 묻겠소이다.” 고개를 돌린 사내들의 눈이 동그레졌다. “그것 참 별일이네?” “딸국. 누, 눈알이 파란 도깨비 놈이 중원말을 하네 그려? 세상 참…….” 화복을 입은 사내는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색목인 의 뒤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살기 때문이었다. 한 자루 칼을 연상케 하는 냉막한 냉유성의 모습을 보자 사내 는 취기가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무, 무엇이든 물어보시오. 뭐가 궁금하시오?” “혹시 이곳에서 가장 괜찮은 주루가 어디인지 아시오?” 데이몬의 질문에 사내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은 주루라면 많지요. 술맛이 좋은 곳도 있고 요리를 잘 하는 집도 있고…….” “계집들 수준이 높은 집도 있고 술값만 이유 없이 비싼 곳도 있고…….” 주절거리는 취객들의 대답에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전반적인 수준이 가장 높은 곳 말이오. 이곳에서 최고로 인정 받는 주루가 어디요?” “최고라면 단연 월향루를 꼽을 수 있소. 그곳에서는 제 아무리 돈이 많아도 최고의 기녀를 부를 수 없으니 말이오.”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졋다. “돈을 줘도 최고의 기녀를 부를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뜻이오?” “말 그대로요. 월향루에는 네 등급의 기녀들이 있소. 여보게, 이설. 월향루의 기녀 등급이 어떻게 되지?” 이설이라고 불린 중년 사내가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대답 이 매끄러운 것을 보니 화류계 생활에 어지간히 이력이 난 모양 이었다. “천상화, 지천화, 우담화, 이래화. 이렇게 네 등급이지. 그중에 서 최고의 기녀들인 천상화는 돈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부를 수 없다네.” “맞아. 우리도 지금까지 천상화는 한 번도 구경하지 못했지.” “한 등급 아래인 지천화들도 눈이 돌아갈 만큼 예쁜데다 시서 화에 해박하니 천상화들은 도대체 어떨까?” 듣고 있던 데이몬이 미간을 좁혔다. “그럼 천상화들은 대관절 어떻게 해야 부를 수 있는 거요?” “뭔가 재간이 있어야 한다고 들었소. 뛰어난 무림의 고수나 학 문이 뛰어난 학자, 그도 저도 아니면 시서화에 조예가 있는 예인 들이 아니면 천상화가 시중드는 것을 거절한다고 하오.” “빌어먹을……. 돈 버는 것도 엄연한 재간일진대 왜 그걸 인정 해 주지 않는 거지?” 이설이 툴툴거렸지만 데이몬은 신경쓰지 않았다. “대답 고맙소. 그럼 조심해서들 들어가시오.” “꼭 천상화를 품기를 기원하겠소.” 사내들이 비틀거리며 사라지자 데이몬은 눈빛을 빛냈다. “잘 되었군. 그 월향루라는 곳을 한 번 가보도록 하자.” “웃기는 기루로군요. 기녀를 들이는데도 재주를 보여야 한다 니 말입니다.” “일종의 경영전략이지. 다른 곳과 차별화시켜 시선을 끌려는. 자, 가자.” “네, 주공.” 다행히 월향루는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주루 자체 가 워낙 규모가 크고 화려했기 때문에 데이몬과 냉유성은 금세 월향루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곳이로군.”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점소이나 나와 둘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인들. 이곳에 처음이십니까?” “그렇다.” “안으로 뫼시겠습니다.” 품속에 손을 집어넣은 데이몬이 콩알만 한 금두를 꺼내 점소 이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하면 나은 대우를 받게 된다는 것을 그 간의 경험으로 터득한 데이몬이었다. 눈이 커진 점소이가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가, 감사합니다요, 대인.” 약발은 금세 먹혔다. 일 각도 되지 않아 월향루를 관리하는 총 관이 들어와 날아갈 듯 절을 했다. “귀인들을 뵈옵니다. 월화라고 불러주십시오.” 월화는 사십 줄에 든 중년 여인이었는데 나이를 먹었어도 미 모가 대단했다. 기녀로 일하다가 나이가 들어 주루의 관리를 맡 은 경우 같았다. 풍성한 취의가 그녀에게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렸 다. “이곳 월향루에 처음이라고 들었사옵니다.” “그렇소. 이곳의 사정에 대해 잘 모르니 잘 대해주기 바라오.” 데이몬은 이번에도 예외 없이 금두 하나를 꺼내 월화의 손에 쥐어주었다. 맹색이 총관이라 그런지 월화는 금두를 받고도 전 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어떤 급의 아이들을 원하십니까?” “어떤 급들이 있소?” “네 등급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네 번째는 이래화로서 스물 안 팎의 동기들로 구성되어 있지요. 청순함은 있지만 아직 어려서 흥겹게 노시기가 어려우실 겁니다. 그 다음 단계인 우담화 는…….” 데이몬이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우린 최고를 원하오. 최고의 술과 안주, 그리고 최고의 기녀 들을 불러오시오.” 그 말에 월화가 살며시 고개를 들어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두 번째인 지천화까지는 불러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상 급인 천상화는 돈만으로는 불러드릴 수가 없군요.” 익히 알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데이몬은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돈을 주고도 부를 수 없는 기녀라니…….” “저희 루의 방침이 그렇습니다. 천상화를 부를 수 있는 분들은 각기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신 분들로 한정지어 놓았습니다. 대인도 아시다시피 쉽게 꺾을 수 있는 꽃은 가치가 떨어지기 마 련 아닙니까?” 살짝 얼굴을 찌푸린 데이몬은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하겠느냐? 한 번 재간을 부려보겠느냐?” 애초부터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냉유성이 급히 손사래를 쳤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그냥 지천화 급의 기녀들을 들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 약간 실망한 눈치였지만 데이몬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월화를 쳐다보았다. “알겠소. 그냥 지천화 급 기녀를 둘 넣어주시오. 그리고 술은 금존청으로 하고 안주에 각별히 신경 써 주기 바라오.” “알겠사옵니다, 대인.” 말을 마친 월화가 고개를 돌렸다. “이분들을 천향각으로 안내해 드려라.” “네.” 천향각의 드넓은 정원에 자리 잡은 목조 정자였다. 잘 꾸며놓 은 가산과 연못이 어우러져 더 없이 고아한 풍취를 풍겼다. 그곳에는 이미 풍성하게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일급 숙수들 이 솜씨를 부린 훌륭한 요리들이었다. 요리를 살짝 맛본 데이몬 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요리 실력이 상당히 훌륭하군. 역시 일급 주루다워.” 냉유성이 정자 내부를 훑어보며 인상을 썼다. “하지만 이곳 요리는 객잔보다 족히 다섯 배는 비쌉니다. 이곳 에서 하룻밤 술 마시는 비용이 한 가족의 육 개월 채 생활비보다 비싸니 원…….” “넌 뭐든지 마음에 안 드는구나. 이곳까지 와서 쪼잔하게 왜 그러느냐?” 데이몬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너 지금까지 주루에 한 번도 와본 적 없지?” “솔직히 말해 그렇습니다. 본산제자는 도인이나 마찬가지라 서…….” “이제 속인이 되었으니 풍류도 좀 즐겨보거라.” 데이몬은 냉유성이 채워준 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캬! 좋다. 역시 술은 금존청이 최고라니까. 그건 그렇고 너 목가장의 소저랑 나누는 눈빛이 심상찮던데 이 자리에서 솔직히 이실직고하거라.” 그러자 냉유성이 슬그머니 얼굴을 붉혔다. “좋은 아가씨이더군요. 사람을 배려할 줄도 알고 말입니다.” “너 주제에는 과분한 처자지. 암 그렇고 말고. 그토록 아리따 운 아가씨가 너같이 흉악무도한 칼잡이에게 호감을 갖다니 참 세상모를 느릇이로군.” 냉유성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흉악무도한 칼잡이라니,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아니냐? 그럼 말고. 아무튼 목가장의 장주가 꽤나 무림을 동 경하는 것 같던데 잘해 봐라. 목 소저의 인물도 그 정도면 빠지 는 편이 아니더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기녀들이 들어왔다. 일급 주루 답게 기녀들의 미모는 대단했다. 화사하게 차려입은 두 명의 기 녀가 날아갈 듯 절을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화라 불러주십시오.” “아영입니다. 예쁘게 봐 주십시오.” 절을 한 기녀들이 사뿐사뿐 걸어와 데이몬과 냉유성 옆에 각 각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화가 술병을 들어 데이몬의 잔을 채워주었다. 데이몬의 이 질적인 외모를 보고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보아 이 미 여러 번 색목인의 시중을 든 경험이 있는 모양이었다. “서역에서 오셨나보군요. 일단 한 잔 받으시와요.” “그러지. 그건 그렇고, 너 참 예쁘구나.” “호호. 감사해요. 상공.” “아니다. 중원을 여행한 지 제법 되었는데 너 정도 미모를 본 기억이 없는 것 같구나. 한 마디로 절색이야.” “풋! 정말 말씀을 잘하시는군요.” 마계를 주름잡던 마왕답게 데이몬은 능수능란하게 기녀를 대했다. 한편 화류계 경험이 전혀 없는 냉유성은 쩔쩔 매기만 했다. 기 녀에게서 풍기는 지분 냄새에 정신마저 혼미해져오는 냉유성이 었다. “괘, 괜찮소. 내, 내가 따라 마시리다.” “어머. 그러시면 안 돼요. 잔 이리 주세요.” 둘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이화가 금을 켜기 시작했다. 은은 한 금음이 정자 안을 가득 메웠다. 금존청이 가득 찬 잔을 들이키며 데이몬은 눈매를 좁혔다. ‘금음이 낯설군. 나도 이제 트루베니아 인이 다 된 건가? 그곳 의 류트 소리가 더욱 정겨우니 말이야.’ 중원에 있을 당시 데이몬은 기루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저 수 하들과 술을 먹으며 경험담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 기억 때문에 주루에 온 것인데 기대만큼 흡족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긴, 중원 출신이긴 해도 트루베니아에서 더욱 오래 살아왔 으니……. 이곳에서 좋았던 기억도 없고…….’ 머리를 흔든 데이몬은 술병을 들어 냉유성의 잔을 채워주었 다. 둘은 그렇게 한동안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마셨다. 냉유성은 생각보다 술이 센 편이었다. 내공이 높으니 술기운 을 효과적으로 중화시키는 모양이었다. “술을 꽤 잘 먹는구나. 요즘 도사들은 주도가 필수인가 보네?” 냉유성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요즘 들어 사사건건 자 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나 있는 주공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도사에게 술과 여인은 금기사항이지요.” 그 말에 옆에 앉아 있던 아영이 눈을 크게 떴다. “어머. 도사이셨나 봐요? 그런데 왜 주루에…….” 그에 대한 대답은 데이몬이 했다. “짤렸어. 도사가 되기엔 자질이 부족하다고 쫓겨났지.” “호호호. 그러셨구나.” “그런데 이곳에 무림인들이 자주 오는 편인가?” 이화가 다소곳하게 금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이따금 오시는 편이에요. 무림인들은 대부분 술이 세시더라 구요. 두 분도 무림인이신가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구나.”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요. 모르겠다니…….” 샐쭉 눈을 흘기는 이화의 모습이 더 없이 고혹적이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둘과는 달리 냉유성은 말없이 술만 들이켰다. 눈가가 붉어진 것을 보아 제법 취한 모양이었다. ‘녀석, 내공으로 술기운을 통제하지 않고 있군. 하긴 술은 취 하려고 먹는 것이니…….’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던 아영이 입을 열었다. “이분은 정말 말이 없으시군요. 얼굴의 흉터를 보아 범상치 않 은 과거를 가지신 분 같은데…….” “말이 없는게 아니라 멋대가리가 없는 거지. 그래봬도 그 녀 석 제법 쓸만한 칼 솜씨를 가진 무사야.” “어머, 그래요?” 냉유성을 샅샅이 훑어보던 아영이 그럴 듯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무사 같은 분위기가 풍겨요. 실력이 대단하실 것 같은 데…….” “당연하지. 검강을 쓸 수 있는 절정고수니까.” “놀랍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영의 얼굴에는 불신의 빛이 역력했다. 절정고수는 그리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전통 있 는 대문파에서도 몇 명 존재하지 않는 최고의 주력이니만큼 절 정고수가 주루에 출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만취한 상태에서 암습을 받는다면 문파로서는 이만저만한 손실이 아니기 때문이 다. 아영도 지금껏 말로만 들어보았지 절정고수를 접대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무튼 남자들은 술에 취하면 있는 대로 허풀만 떤다니까. 절 정고수라면 능히 천상화의 시중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왜 우리가 들어왔겠어.’ 직업의식이 투철한 기녀답게 그녀들은 결코 속내를 겉으로 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요의를 느꼈는지 데이몬이 자리에서 일어 났다. “측간이 어디에 있느냐?” “정자 뒤쪽에 있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지요.” “아니다. 좋은 데 가는 것도 아닌데 혼자 갔다 오겠다.” 제법 많은 술을 먹었지만 데이몬은 전혀 흔들림 없는 모습으 로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기녀들은 혀를 내둘렀다. ‘색목인들은 술이 세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렇군. 금존청을 벌 써 두 병이나 비웠는데도…….’ 측간에서 볼일을 본 데이몬의 얼굴에 장난기가 서렸다. ‘기녀들에게 트루베니아의 음악을 한 번 들려줄까?’ 주위를 살펴 인적이 있나 없나 살핀 데이몬은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마법 아티팩트를 하나 꺼내려는 것이다. 시커먼 음영을 뚫고 윈슬럿이 불쑥 머리통을 내밀었다. 기루 에 데리고 오기가 뭐해서 윈슬럿을 인크레시아 속에 집어넣어 놓았던 것이다.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윈슬럿에게 명령을 내 렸다. “아쉬람의 류트를 꺼내오너라.” 윈슬럿은 두말없이 사라졌다. 데이몬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윈슬럿이 마법이 걸린 류트를 꺼내오기만을 기다렸다. 물론 데이몬은 음악에 전혀 조예가 없다. 또한 류트를 탈 줄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겐 단단히 믿는 것이 있었다. “중원에 무공이 있다면 트루베니아에는 마법 아티팩트가 있 지. 저절로 음악을 연주하는 류트라면 트루베니아 음악의 정수 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인크레시아 안에는 트루베니아의 전 드래곤들이 수백 년의 세 월에 걸쳐 모아놓은 보물이 가득했다. 그중에는 저절로 울리는 류트도 있었다. 칠백 년 전 트루베니아 전역에 이름을 떨친 음유시인 아쉬람. 뛰어난 검사로서도 이름을 날린 아쉬람의 영혼이 봉인된 류트 였다. 마나만 주입하면 저절로 연주하는 만큼 트루베니아의 음악을 감상하기에는 최상의 아티팩트였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윈슬럿이 아쉬람의 류트를 꺼내왔다. “수고했다.” 인크레시아를 닫은 데이몬은 휘적휘적 천향각으로 걸음을 옮 겼다. 냉유성은 이미 만취한 상태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묵묵히 술만 들이키던 냉유성도 부쩍 말이 많아진 상태였다. “그럼 대인께서 모시는 주공께서 그토록 고수란 말인가요?” “물론이오. 나는 감히 그분의 발끝도 따라갈 수 없소.” “아까 듣기로 대인이 절정고수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주공께 선 그보다 월등히 경지가 높다는 말인가요?” 냉유성이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기녀들 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풍도 이만저만이 아니군.’ ‘신빙성이 있는 말을 해야 조금이라도 믿어주지.’ 못 말리겠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아영이 술병을 들었 다. 완전히 보내버리고 들어가 쉬려는 심산에서였다. “한 잔 더 드세요. 정말 주량이 세시군요. 소녀는 술 잘 마시는 사람이 좋더라.” 냉유성은 두만하지 않고 잔을 틀이켰다. “크으, 좋군. 아무튼 우리 주공께선 내공만 회복하신다면 능히 무림을 평정하실 분이오. 암, 그렇고 말고.” “그러시겠지요.” “거짓말이 아니오. 우리 주공은 그 능력에 있어 끝이 보이지 않는 분이라오.” 어지간히 취한 모양이었다. 그토록 자기관리에 철저한 냉유성 이 이처럼 횡설수설하며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라면. 황당했지만 기녀들은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속으로는 있는 대로 욕설을 퍼붓고 있었지만. 그녀들은 이미 무림인을 여럿 접대해 본 경험이 있다. 그 경험 에 미루어보면 무림인들은 좀처럼 술에 취하지 않는다. 내공으 로 술기운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적이 많은 무림인들은 그 어떤 장소에서도 흐트러 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그녀들의 눈에 냉유성이 허풍 선이로밖에 비치지 않는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고 데이몬이 들어왔다. 옆구리에 낀 류트를 내 녀놓자 기녀들의 시선이 쏠렸다. “특이한 악기로군요. 서역의 것인가요?” “그렇지. 중원의 금보다 표현할 수 있는 음이 풍부해서 들을 만할 거야. 그건 그렇고…….” 만취해서 상체를 이리저리 흔드는 냉유성을 보며 데이몬이 도 끼눈을 떴다. “이 녀석 완전히 취했구나.” “기분이 좋아서 조금 마셨습니다. 딸꾹.” “수하라고 있는 놈이 이 모양이니, 쯔쯔.” 혀를 찬 데이몬이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의 이화가 묘한 표정 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듣자하니 상공께서 천하제일의 고수하고 하던데 그게 사실 인가요?” 데이몬도 이미 얼큰히 취한 상태였다. 일부러 어둠의 마력을 억제했기 때문에 술기운이 올라온 것이다. “물론이지. 만약 내가 암흑투기만 되찾는다면 중원 천하에 내 적수가 없을 것이다.” “피!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말로 장담할 수 있다면 중원에서 천하제일의 고수가 아닌 사람이 없겠네.” “흐흐. 말 한 번 재미있게 하는구나.” 3. 마왕에게 시비 건 사나이 천향각에서 흘러나오는 대화를 무척 기분 나쁘게 듣고 있는 자가 있었다. 천향각의 바로 옆에 자리한 누각이었는데 그곳에 서는 강퍅하게 생긴 사십대 중년인이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그는 형비라는 이름에 선풍검이라는 무림명을 가진 정파 계열 의 무인이었는데 내공이 정순한 덕에 천향각의 대화를 여과 없 이 듣고 있었다. 어느 순간 형비는 코웃음을 쳤다. “미친놈들이로군. 뭐, 절정고수? 저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필 경 무림과 전혀 연관이 없는 놈들이 분명해. 절정고수를 이렇게 쉽게 내돌리는 문파가 어디 있단 말인가?” 옆자리에 앉아 시중을 들던 기녀 월향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상공. 원래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지요.” “정작 무림에 대해 안다면 저 따위 소리를 하지 못해. 무림이 얼마나 험난한 곳인데.” 형비는 정의문이라는 중소방파의 무사였다. 그런 그는 지금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은 상태였다. 형비는 어릴 때부터 무공을 닦은 덕분에 제법 쓸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정의문에서 그의 피를 들끓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신임 호법을 한 명 더 뽑는 심사가 열린 것 이다. 그 소식을 들은 형비는 흥분했다. ‘내 실력이라면 충분히 뽑힐 자격이 있다.’ 형비는 필승의 각오로 심사에 임했다. 하지만 결과는 탈락이 었다. 형비와 무공실력이 비슷하지만 출신성분이 더 좋은 자가 신임호법에 임명된 것이다. 낙심한 형비는 울적한 심사를 풀기 위해 이곳 천향루를 찾았 다. 세가의 주력고수가 혼자서 주루에 간다. 평상시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정의문의 문주는 형비의 기분을 감안해 특별히 승낙해 주었다. 하지만 천향루에 도착한 형비는 한 번 더 좌절해야 했다. 자신 의 실력이라면 능히 천상화를 품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그것도 천향루에서 내세운 무사에게 무공대결로 패했으니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이곳에서 홀로 쓸쓸히 술잔을 기울여야 했 다. 그러니 옆 전각에서 두런두런 새어나오는 대화가 마음에 들 리 없다. 내공이 웅혼했기에 취기도 오르지 않았다. 거기에 천향각에서 들려오는 대화는 계속해서 형비를 자극했다. “뭐? 천하제일의 고수? 내공을 잃어? 점입가경이로군. 내 이것 들을 그냥…….” 불끈하고 일어서려는데 옆자리의 기녀가 재빨리 형비의 팔을 잡았다. “참으세요, 상공. 아무 것도 모르는 촌무지렁이들의 허풍에 신 경 쓰실 것 없어요.” “끄응. 마음 좋은 내가 참아야지. 성질 급한 무림인이었다면 단칼에 목을 날려버렸을 것이다.” 분기를 간신히 억누른 형비가 술잔을 단숨에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그런 형비의 불편한 심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천향각의 분위기 는 점점 질펀해져갔다. “정말 주량이 대단하시네요. 그렇게 드시고도 의식을 잃지 않 다니…….” 아영은 혀를 내두르며 놀라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정도 먹었다면 인사불성이 되거나 아니면 먹은 것을 게워내어 확인하 고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냉유성은 아직까지 최후의 선을 넘지 않았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상체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지만 의식만은 또 렷했다. 데이몬이 싱글싱글 웃으며 잔을 채웠다. “그 녀석은 지금 내공으로 취기를 억제하고 있을 거야.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아는 거지.” 원래대로라면 냉유성은 아무리 술을 먹어도 취하지 않는다. 운기를 통해 술기운을 순식간에 몸 밖으로 배출할 수 있기 때문 이다. 하지만 술은 취하라고 먹는 것. 그래서 그는 내공을 운용하지 않고 술기운을 그대로 몸에 받아들였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 때 에만 간간이 내공을 운용하여 취기를 조절할 뿐이다. 그러나 기녀들에게는 그것 역시 허품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뭐? 내공을 이용해 취기를 억제해? 어디서 들은 것은 있어 가 지고…….’ ‘내공을 연성한 고수가 이 모양 이 꼴이야. 흥, 기가 막히네.’ 기녀들도 서서히 속내를 얼굴에 내비치고 있었다. 듣기 좋은 말도 여러 번 들으면 질리듯 말도 안 되는 허풍을 끊임없이 늘어 놓고 있으니 심사가 편할 리가 없다. 데이몬 역시 상당히 취한 상태였다. 어둠의 마력을 억눌러 술 기운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어, 취한다. 역시 술은 이 맛에 먹는 거야.” “저, 정말 그, 그렇군요. 소, 속하도 기분이 매우 조, 좋습니다.” 해롱거리는 냉유성을 보며 데이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놈 완전히 맛이 갔군. 쯔쯔.” “아, 아직까지는 멀쩡합니다. 그, 그래도 며, 명색이 절정고순 데…….” 기녀들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놈의 절정고수 타령. 어휴.’ 이 정도라면 허풍고 거의 예술 급이었다. “도저히 못 참겠군.” 분기를 이기지 못한 형비가 마침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눈동자는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절정고수가 무슨 얘 이름인 줄 아나? 우리 정의문에도 문주 님과 장로님뿐인데……. 내 이것들을 단단히 혼내주지 않으면 선품검이 아니지.” 주먹을 불끈 움켜쥔 형비는 누각을 뛰어나갔다. 이참에 옆 전 각의 허풍선이들을 단단히 혼내주어야만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꽝 내공이 실린 발길질 한 방에 문이 박살나버렸다. 휑하니 뚫린 공간으로 노기등등한 사십대 중년인이 들이닥쳤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허풍선이들을 응징하기 위해 나타난 형비였다. 서슬 퍼런 기세에 이화와 아영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형비는 살기가 줄기줄기 뿜어지는 시선을 들어 좌중을 살폈 다. 데이몬을 보자 눈동자에 서린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어떤 놈들이 말도 안 되는 망발을 늘어놓나 했더니 눈알 파란 색목인 놈이었군.” 데이몬이 혼미한 눈을 들어 형비를 쳐다보았다. “누구냐?” “늘어놓는 허풍을 더 이상 못 들어주겠더군. 너희 같은 놈들은 단단히 혼이 나야 해.” 형비가 머뭇거림 없이 달려들어 데이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비교적 덩치가 당당했기 때문에 데이몬의 몸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럼 무림인의 주먹맛이 어떤지 한 번 견식해 보거라.” 주먹을 불끈 움켜쥔 형비가 냅다 데이몬의 얼굴을 갈기려는 순간 뒤에서 다급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멈춰라.” “이건 또 뭐야?” 고개를 돌린 형비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취기로 얼굴이 벌 게진 사내 하나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색목인 놈의 뒤치닥꺼리를 하는 앞잡이 놈인가? 걱정하지 말 아라. 네놈도 단단히 혼내 줄 테니까. 듣자 하니 절정고수라고 허풍을 떤 놈이 네놈 같은데 맞느냐?”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냉유성이 몸을 쭉 폈다. “그, 그럼 저, 절정이니 절정이라고 하, 하지 뭐, 뭐라고 하느 냐?” 꼬부라진 음성을 들은 형비는 더욱 기가 막혔다. 절정고수가 저토록 술에 취해 비틀거릴 수 있단 말인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형비는 데이몬을 옆에다 내팽개 쳤다. “오냐, 네놈을 먼저 손 봐주겠…….” 순간 형비는 채 말을 마치지 못하고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갑자기 면전으로 주향이 좍 뿜어졌던 것이다. 살짝 맡기만 해도 정신이 핑 돌 정도로 독한 주향이었다. “뭐, 뭐야?” 취기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냉유성의 얼굴은 완전히 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순간적인 운기로 술기운을 몸속에서 몰아낸 것이다. 취기를 완전히 제거한 냉유성은 매서운 눈빛으로 형비를 노려 보았다. 날카로운 기세가 주위를 완전히 장악했다. 파츠츠츠 유형화된 살기로 인해 피부가 따끔따끔해질 정도였다. 형비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크으으.” 냉유성이 느릿하게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인 과도를 집어 들 었다. “그래, 어떻게 손봐줄 작정이지?” 형비는 제대로 숨도 몰아쉬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상대는 자 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고수였다. 자신을 강하게 억누르는 기세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주공과 기분 좋게 술을 마시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좋던 분위기가 네놈으로 인해 깨졌어.” 말을 마친 냉유성은 과도에 내공을 밀어 넣었다. 파아앗 과도에서 시퍼런 선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면서 일정한 형상을 이루어갔다. 절정고수의 전매특허인 검강이 발현된 것이다. 한 자루 장검의 형상을 이룬 검강은 정확히 형비의 목젖을 겨 누고 있었다. 목젖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검강을 보자 형 비는 연신 식은땀을 흘려댔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수다. 내가 눈이 삐었군. 감히 하늘 을 상대로 시비를 걸다니…….’ 저토록 간단하게 검강을 시전하는 것을 보아 상대는 최소한 절정 중상급 이상의 고수가 틀림없었다. 몸속의 취기를 운기를 통해 순간적으로 제거해 버린 것만 보아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저 정도로 뛰어난 절정고수가 왜 고주망태가 되었는지 모르지 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자신이 건드려서는 안 될 상대를 건드렸 다는 점이다. 옆에서 웅크리고 있던 이화와 아영도 눈이 툭 튀어나올 정도 로 놀랐다. 입 소문으로만 들어보았던 검강을 두 눈으로 확실하 게 견식해 보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저, 정말이었어. 오직 절정고수들만이 시전할 수 있는 검강을 선보이다니…….’ ‘입만 나불대는 허풍선이가 결코 아니었어.’ 옆에서는 데이몬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참 살다보니 별 꼴을 다 보는군. 술 먹다가 시비가 붙지 않나, 멱살을 잡히지 않나, 쯔쯔.” 말을 마친 데이몬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구석에 놓여 있는 걸레가 둥실 떠올라 그의 손으로 빨려들었다. 걸레를 받아든 데이몬이 옷에 묻은 술을 닦아냈다. 그 모습을 본 형비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겨, 격공섭물. 나는 이제 죽었다.’ 격공섭물을 저토록 수월히 시전할 정도라면 색목인 역시 최소 한 절정 이상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초고수의 멱살을 움켜쥐다 니……. 그의 귓전으로 서슬 퍼런 냉유성의 음석이 파고들었다. “어떻게 할까요, 주공. 팔 하나를 잘라서 무례에 대한 응징을 하오리까?” “기분 좋은 술자리에서 피를 보긴 싫은데…….” “그럼 단전을 으깨서 무공을 폐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 방법 은 어떻습니까?” 그러자 혼비백산한 형비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내, 내 무공을 폐, 폐한다면 저, 정의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정의문? 그게 어디 있는 문파지?” “사천 북단에 있는 군소방파입니다. 삼류에서 이류 사이에 걸 려 있는 문파이지요. 제가 알기로 그곳 문주의 무위가 저보다 낮 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데이몬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껄껄 웃었다. “모용세가도 같잖게 보는 내가 정의문 따위에 눈썹 하나 까딱 할 것 같으냐. 단전을 으깨서 내다 버려라.” “네, 주공.” 냉유성이 막 손을 쓰려는 순간 가녀린 음성이 울려 퍼졌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대인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아까 보았던 총관 월화가 나타나 있었 다. 그녀의 뒤에는 척 보아도 한 가락 할 것 같은 무사 두 명이 버 티고 서 있었다. 공손히 대례를 한 월화가 웃는 낯으로 데이몬을 달래기 시작했다. “사정을 들어보니 형비 대협이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기분 이 나쁘시겠지만 제 낯을 봐서 한 번만 참아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젠장. 기분 좋게 술 먹다가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우리가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대인들의 심정 십분 이해합니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십시오. 형비 대협은 단순히 술기운에 그런 것입니다. 자고로 죄가 밉지 사람이 밉느냐는 옛말도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형비 대협은 인근의 정의문에 적을 두신 분입니다. 형비 대협의 무공 을 폐하실 경우 정의문에서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냉유성이 코웃음을 쳤다. “모르나 본데 우리 주공께서는 이미 모용세가의 가주와도 한 판 벌이신 분이오. 모용세가도 우습게 보시는 분인데 정의문 따 위 군소방파에 신경이나 쓰실 것 같소?” 월화가 쩔쩔 매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무, 물론 대인들이야 그러시겠지만 저희 입장도 있지 않습니 까? 제가 특별히 고급술과 안주를 무료로 제공할 테니 이쯤에서 참아 주십시오. 정의문의 눈 밖에 나면 저희가 이곳에서 장사하 기 힘듭니다.” 거듭되는 만류에 데이몬은 노기를 억눌렀다. 술김에 실수를 한 것으로 무공을 폐하기는 조금 심한 것 같았다. 손짓을 하자 냉유성이 과도에 서린 검강을 거뒀다. 하지만 그 것으로 복수를 마무리 지울 데이몬이 아니었다. “감히 내 멱살을 잡아 내동댕이쳤겠다? 대신 나도 똑같이 하 겠다.” 데이몬이 슬쩍 손짓을 했다. 그러자 우두커니 서 있던 형비의 몸이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 어어…….” 그 광경을 본 월화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뒤에 시립한 무사들 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격공섭물로 사람의 몸을 들어올리다니 저, 정말 엄청난 고수 로군. 우리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제길, 과도로 삼 장이 넘는 검강을 뽑아 올릴 수 있는 고수를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제지한단 말인가?’ 그들은 월향루에 고용된 무림인들이었다. 거금을 받고 분란을 해결해 주긴 했지만 그들의 무위는 결정적으로 형비와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니 엄청난 무위를 보이는 초고수들 앞에서 바짝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십 장 가까이 형비를 들어올린 데이몬이 손목을 살짝 틀었다. “으아아.” 형비의 몸이 허공에서 빙그르르 돌더니 가산 옆에 있는 연못 으로 내려 꽂혔다. 풍덩 데이몬은 개운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총관이 만류하니 이쯤에서 끝내지.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 록 하기 바라오.”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월화가 무사들에게 손짓을 했 다. 연못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형비를 구해주라는 손짓이었다. 연못의 물이 사람 키보다 높기 때문에 꺼내주지 않는다면 술 에 취한 형비는 그대로 이승을 하직해야 한다. 무사들이 연못으 로 달려가는 것을 본 월화가 다시 한 번 예를 취했다. “문이 부서졌으니 다른 곳으로 옮겨드리겠습니다. 술과 안주 도 새로 준비해 놓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을 마친 월화가 한쪽 옆에 웅크리고 있는 이화와 아영을 쳐 다보았다. “너희들은 이만 물러가도록 해라. 이분들은 충분히 천상화의 시중을 받을 자격이 있으신 분들이다.” 엄청난 무위를 견식했기에 둘은 아무 말 없이 물러가려고 했 다. 그때 데이몬이 손을 뻗어 제지했다. “잠깐. 그런데 누구 마음대로 바꾸려는 건가?” “천상화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대인들의 무공실력이라면 그들 중 누구의 시중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데이몬은 손가락을 뻗어 좌우로 흔들었다. “구관이 명관이야. 우린 저 얘들이 마음에 들어. 그러니 그냥 저 아이들의 시중을 받고 싶네.” “하지만 직접 보시면 마음이 달라지실 겁니다.” “아니야. 예뻐 봐야 얼마나 더 예쁘겠어. 저 아이들도 충분히 예뻐.” “그렇다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어진 총관이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 * * 더욱 크고 화려한 누각으로 옮겨 술판이 다시 벌어졌다. 데이 몬은 취기가 완전히 사라진 냉유성을 보며 투덜거렸다. “젠장. 비싼 술 먹고 취했는데 그걸 다 날려버리다니. 돈이 아 깝다.” “다시 취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술맛 정말 좋은 걸요?” 아까와는 달리 이화와 아영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허풍선이로 보이던 고객들이 알고 보니 엄청난 고수들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허풍인 줄 알았는데 사실이었어. 세상에 사람을 손도 대지 않 고 들어올리다니.’ ‘말로만 듣던 검강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저런 엄청 난 사람들에게 면박을 주다니 내가 미쳤지.’ 둘을 다하는 기녀들의 태도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천상 화를 마다하고 자신들을 다시 선택해 준 고마움과 무림의 엄청 난 고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걱정으로 그녀들은 바 짝 얼어 있었다. 어색함을 눈치 챈 월화가 구석에 놓여 있는 금을 집어 들었다. “천녀가 금을 한 곡 타드리지요. 이 아이들보다는 다소 나을 것입니다.”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들어볼까?” 은은한 금음이 전각을 가득 채웠다. 확실히 이화보다는 금 타 는 실력이 나았다. 그러나 데이몬에겐 단조로울 수밖에 없는 가락이었다. 적어도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트루베니아가 수준이 높았다. 월화가 한 곡을 끝내자 데이몬이 손을 내저었다. “한 곡 들었으니 이번에는 내가 한 곡 선사하지.” “금을 타실 줄 아십니까?” “금은 탈 줄 몰라. 하지만 류트는 가능해.” 데이몬은 인크레시아에서 꺼내온 아쉬람의 류트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냥 타면 재미없을 테니 거리를 격해 내공으로 연주해 보이 겠다.” “그, 그게 가능한가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그녀들은 더 이상 허풍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이미 사람의 몸을 손도 대지 않고 들어올려 내 팽개친 무공의 고수가 아니던가. 유쾌해진 데이몬은 수인을 맺어 류트에 마나를 주입했다. ‘크크크. 중원에 와서 마법 한 번 요긴하게 잘 써먹는군.’ 마나가 공급되자 류트가 스스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현이 저 절로 퉁기면서 감미로운 가락이 흘러나왔다. 금보다 표현하는 음도 다양했고 가락도 더욱 깊이가 있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음유시인 아쉬람의 영혼이 연주하는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음에 조예가 있던 월화는 대번에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저, 정말 훌륭하군요. 음과 가락이 생소하지만 정말 아름답습 니다. 이토록 연주를 잘 하실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는데…….” 아쉬람의 류트 연주는 세 기녀들의 감성을 완전히 사로잡았 다. 끊어졌다 이어지는 애절한 가락과 감미로운 음운은 그녀들 에게 새로운 음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 월화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음의 대가 앞에서 조잡한 금 실력을 선보였다니 부끄럽습니 다. 아아, 정말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보잘 것 없는 실력을 보였네.” 데이몬이 어색하게 웃으며 류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화와 아영은 아직까지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특히 이화는 데이몬에게 완전히 매료된 모양이었다. 상상할 수 없는 무공실력에 이어 이토록 뛰어난 음률까지 보여주니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다. “사, 상공.” 가쁜 숨을 몰아쉬며 품에 안겨오는 이화. 데이몬의 입가에 흡 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 인간 여자들도 별다를 것 없군. 능력을 보여주니 알아 서 안기잖아?’ 과거 중원에 있었을 때 데이몬에겐 여복이 전혀 없었다. 흉측 한 얼굴과 곱추라는 외모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데이몬은 과거 누려보지 못했 던 여인들의 관심을 한껏 즐기고 있었다. 데이몬이 기루에 온 이유는 기본적으로 하오문의 문도인 묵회 의 비영전주에게 자신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계획대로 잘 되어 비영전주를 불러들인다면 제법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 기에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었다. 하오문은 점소이나 도둑, 기녀들이 대거 가입되어 있는 방파 이다. 물론 월향루에도 역시 하오문의 정보원이 암약하고 있 었다. 데이몬이 벌인 엄청난 활약상은 곧 입 소문을 타고 기녀들 사 이로 널리 퍼져나갔다. “후원에 엄청난 무림고수가 묵고 있다며?” “말도 마. 서역의 색목인인데 손도 대지 않고 사람을 들어올릴 정도로 내공이 뛰어나. 그뿐인 줄 아니? 그가 거느린 수하는 중 원사람인데 검강을 구사하는 절정고수래.” “음에 대한 조예가 그렇게 뛰어나다며?” “호호호. 한 번 시중을 들어봤으면 좋겠다.” 우담화에 속한 기녀 하나가 그 사실을 듣자 머뭇거림 없이 자 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이건 상당히 큰 사건이야. 지체 없이 문주에게 보고해야겠어.’ 잠시 후 전서구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올랐다. 물 론 전서구가 전하는 소식으로 인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 도 몰랐다. 4. 드러나는 마교비사(魔敎秘史) 사천에서 호북으로 나가는 관도. 이곳에는 목불인견의 참상이 벌어져 있었다. 표물을 운송하는 표국의 행렬로 보이는 구성원들이 모조리 죽어 있었다. 심지어 수레를 끄는 말과 잡일을 하는 쟁자수들까지 처참한 시체가 되 어 있었다. 시체의 수는 도합 이십여 구.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시체에서는 아직까지 더운 김이 피어올랐다. 피비린내를 맡고 까마귀들이 모여들었다. 시체들은 대부분 머리가 박살난 채 죽었다. 마치 묵직한 망치 로 내려쳐서 깨뜨린 듯한 형태였다. 가슴팍이 완전히 으깨진 시신도 있었지만 많지는 않았다. 오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황량한 관도에는 오직 시체들만이 내버려져 있었다. 잠시 후 일단의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법을 펼쳐 가볍 게 땅에 내려선 무사들이 머뭇거림 없이 수색을 시작했다. 시체 를 이리저리 뒤집어가며 흔적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하나같이 시커먼 흑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뿜어지는 안광을 보 니 상당한 경지에 오른 고수들이 틀림없었다. 뭔가를 찾아낸 듯 무사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습니다. 쇄심마환수의 흔적입니다.” “최심장에 가슴이 빠개진 시신도 있습니다.” 그 말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노인이 앞으로 쓱 나섰다. 이마에 서 눈을 가로질러 턱으로 이어진 칼자국이 인상적인 노인은 다 른 무사들과 동일한 흑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소교주가 이들을 전멸시켰다는 뜻인데…….” 뭔가를 생각하던 노인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장내를 정리하라. 이곳에다 본교 무공의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된다.” “존명.” 흑의무사들이 부산하게 돌아다니며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장력으로 구덩이를 파서 시체를 몰아넣고 흙을 뿌려 낭자하게 번진 핏자국을 지웠다. 장내는 채 일각도 되지 않아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그 광경을 노인이 어두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어찌하여 본교에 이토록 불행이 중첩된단 말인가. 차마 조사 들 볼 낯이 없구나.” 형형한 눈빛이 인상적인 노인의 이름은 위연이었다. 그리고 마교의 구대 장로 중 하나라는 어머어머한 신분을 지니고 있 었다. 그가 이끄는 무사들은 내원의 호법원 무사들. 하나같이 절정 이상으로 구성된 마교 최강의 무력집단이었다. 여간해서는 마교 본단을 떠나지 않는다고 알려진 그들이 감숙 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와 있는 것이다. 무사들이 정리를 끝 내자 위연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서둘러라. 한시라도 빨리 소교주를 찾아야 한다.” “존명.” 무사들은 머뭇거림 없이 몸을 날렸다. 혈겁을 벌인 주인공이 이동했을 것이라 짐작되는 방향이었다. 무사들과 함께 신법을 펼치는 위연의 얼굴에는 착잡함이 서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속한 마교는 현재 최고로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었다. ‘정파무림인에게 최고의 공포를 안겨주는 존재’라 는 무시무시한 악명은 온데간데없이 감숙에 웅크리고 앉아 겨우 세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위연의 눈가에 느닷없이 살광이 스쳐지나갔다. “크으, 사준환. 그놈의 계략만 아니었다면…….” 놀랍게도 마교의 세력이 이처럼 쪼그라들게 된 데에는 한 사 람의 입김 때문이었다. 잠마련의 총수 사준환. 그 하나로 인해 마교는 역대 최대의 암흑기로 평가되는 지경 에 처해버렸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사준환 그놈이 벌인 수작일 가능성이 크 다. 그렇지 않고서야 상황이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내공을 돋워 몸을 날리면서 위연은 마교가 참담한 지경에 놓 이게 된 경위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았다.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마교의 전력은 정말 막강했다. 정파의 은거고인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충분히 독자적으로 무림을 정 벌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외원과 내원 휘하에 강력한 고수들 로 구성된 여러 개의 무력집단이 있었고 무사들의 사기는 드높 았다. 하지만 그때의 영광은 하룻밤의 꿈처럼 사라져버렸다. 십 년 전의 성세에 비한다면 지금의 마교에는 채 이 할도 되지 않는 전 력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오 년 전에 끝난 정사대전은 사실 마교의 주도로 일어난 것이 었다. 마교는 무림제패를 목표로 사파의 세력과 손을 잡고 정사 대전을 일으켰다.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간 마교와 사파 연합군. 하지만 정파의 저력은 역시 막강했다. 은거해 있던 전대 고인 들이 속속 등장한 데다 구대 문파를 필두로 한 정파 무인들의 조 직적인 저항에 마교는 전력의 반을 잃고 다시 감숙으로 물러가 야 했다. 위연은 무림정벌이 실패로 끝난 이유 중 하나를 사파와의 협 력이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필경 사준환 그놈이 수작을 부렸음이야. 놈이 정파에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면 월등히 유리한 상황에서 정사대전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랬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용의주도한 사준환은 의심의 여지를 티끌만큼도 남겨두지 않았다. 하지만 정사대전을 통해 가장 이득을 본 자는 바로 사준환이 었다. 정사대전 이전에는 배교의 총사에 불과했던 그가 정사대 전이 끝나고 난 뒤에는 거대세력 잠마련의 총수가 되어 있었으 니까. 정사대전으로 수많은 정예무사를 잃은 마교는 이후 극심한 내 분을 겪게 된다. 사준환의 부추김을 받은 몇몇 장로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로 인해 마교의 무사들은 두 패로 갈려 서로 죽고 죽이는 상 잔을 일으켰다. 그러나 교주에게 충성하는 세력이 더 강했기에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반란을 꾀한 장로들과 그의 직속 수하들은 마교를 탈 출해서 잠마련의 그늘에 몸을 숨겼다. 마교에 남아있을 경우 반 역죄로 오마분시의 형을 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반란을 진압했다고는 하나 그로 인해 마교가 입은 타격 은 엄청났다. 가장 큰 타격은 마교의 하늘인 교주가 의식불명이 된 것이다. 당시 장로들은 극독을 써서 교주를 중독시킨 다음 느닷없이 암습을 가해 교주에게 치명적인 중상을 입혔다. 나머지 장로들 이 안간힘을 써서 반란세력을 몰아내긴 했지만 교주는 두 번 다 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교는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잠마련에다 배신자들 을 넘겨달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 다. 그러나 마교인들은 원한을 쉽게 잊지 않았다. “이 일을 용인할 수 없다. 반드시 힘을 되찾아서 마교가 왜 마 도의 하늘인지를 알려줘야 한다.” 의식불명이 된 교주를 대신해 소교주인 담천위가 새로이 마교 를 재정비했다. 정사대전과 반란으로 인해 많은 무사들을 잃었 지만 마교에는 아직까지 경천동지할 마공과 다수의 뛰어난 무공 교두들이 있었다. 담천위는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복수를 부르짖었다. ‘십 년, 십 년이면 충분하다. 새로이 무사들을 길러내어 잠마 련을 응징하고 사준환과 배신자들의 목을 칠 것이다.’ 하지만 마교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시를 떠올린 위연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크으. 그때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위연은 사단이 벌어진 때를 상기해 보았다. 어느 날 마교에 한 대의 마차가 도착했다. 이름 없는 조그마 한 표국을 통해 전해진 마차였고 발신인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 았다. 도대체 누가 마도의 하늘인 마교에 표물을 보냈단 말인가? 의아해진 마교 무사들이 마차를 조사해 보았다. 그 결과 놀라 운 사실이 밝혀졌다. 마차에는 다름 아닌 마정석이 단단히 밀봉 된 채 실려 있었던 것이다. 마정석(魔精石). 마정지지의 중심부에서 출토된다고 알려진 돌로서 엄청난 마 기를 함유하고 있는 돌이다. 정파 무사에겐 저주의 산물이지만 마공을 익힌 고수에겐 더할 나위 없는 기연이기도 했다. 난데없이 마정석 한 수레를 얻자 마교의 수뇌부들은 고민해 휩싸였다. 뜻밖의 행운에 무슨 꿍꿍이가 숨겨져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당시 마교 수뇌부들은 둘로 갈려 갑론을박(甲論乙駁)을 벌였다. ‘뭔가 숨겨진 내막이 있소. 그렇지 않고서야 저토록 귀한 마정 석을 본교로 보낼 리가 없지 않소?’ ‘그러나 조사해 본 결과 순수한 마기를 품고 있는 마정석이오. 이번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하오.’ 순수한 마기를 함유한 마정석을 잘 이용한다면 상당한 무공의 증진을 꾀할 수 있다. 물론 마공에 대한 조예가 낮은 자에게는 치명적인 독에 불과하지만 장로급 이상이라면 능히 마기를 흡수 하여 무공을 증진시킬 수 있다. 거듭되는 갑론을박에 종지부를 찍은 자는 소교주인 담천위였다. ‘무얼 그리 걱정하시오. 우리가 누구요? 마도의 하늘 아니겠 소? 설사 계략이 있다고 해도 당당히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이 마 교인의 자세요. 그런 의미로 내가 제일 먼저 마정석의 마기를 흡 수해 보이겠소.’ 장로들은 대경실색했다. 만에 하나 마정석에 수작이 부려져 있다면 마교는 그야말로 회생하기 힘든 타격을 입게 되는 것 이다. ‘위험합니다!’ ‘소교주님의 신상에 문제가 생긴다면 본교는 구심점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소교주인 담천위는 장로들의 만류에 아랑곳하지 않았 다. 안 그래도 복수심에 불타던 소교주이기에 손에 잡은 기회를 놓치기 싫었던 것이다. 그는 절정에서 초절정으로 넘어가는 관문에 서 있었다. 그래 서 마정석의 마기를 흡수해 단숨에 초절정, 즉 극마로 도약할 계 획이었다. ‘내가 극마의 경지에 접어들어야만 잠마련에 대한 복수를 성 공시킬 수 있소. 그러니 더 이상 만류하지 마시오.’ 단호한 태도로 장로들의 만류를 뿌리친 소교주 담천위는 즉각 마정석 한 덩이를 들고 연공실로 들어갔다. 남겨진 장로들은 조 마조마한 심정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육 개월 뒤 드러난 결과는 놀라웠다. 폐관수련을 통해 마정석 의 마기를 흡수한 담천위는 마침내 최절정의 경지를 이룩한 것 이다. 비록 마의 벽을 깨뜨린 초절정에 들지는 못했지만 절정으로서 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경지였다. 소교주의 성공을 장로들은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무공이 정체되어 있던 몇몇 장로들이 소교주의 뒤를 이어 마정 석의 마기를 흡수하기 위한 폐관수련에 들어갔다. 그때를 떠올린 위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거기에서 멈추었어야 했어. 더 이상 욕심 부리지 말고…….” 폐관수련에 들어간 장로의 수는 도합 여덟. 마교로 보내진 마 차에는 모두 열 덩이의 마정석이 밀봉되어 있었는데 그중 아홉 개를 소모한 것이다. 나마지 하나는 만약을 위해 지하의 심처에 보관 되었다. 마정석을 들고 폐관수련에 들어간 장로들은 제법 짭잘한 성과 를 거두고 출관했다. 그들 역시 소교주와 마찬가지로 무시하지 못한 무공의 진전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사단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났다. 과거의 영 광을 되찾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던 소교주 담천위가 별안간 미쳐버린 것이다. 마정석의 마기가 뇌리를 파고들어 광인이 되 소교주는 피아를 가리지 않고 살수를 퍼부었다. 대경실색한 장로들이 대거 달려 들어 소교주를 제압했다. 그리고 발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강력 하게 금제하여 방에 연금시켰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진상을 철저히 조사해야 하오. 그러지 않는다면 본교의 미래 는 없소.’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마정석으로 연공에 들어간 장로들이 차례대로 미쳐버린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마교는 또다시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마정석 의 마기를 흡수한 장로들의 무공이 하나같이 고강했기 때문이 었다. 필사의 사투 끝에 마교는 마침내 미쳐버린 장로들을 모조리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들에 대한 처우는 소교주와 달랐 다. 중첩되는 금제를 적용하여 지하의 마뢰옥에 연금시켜 버린 것이다. 한숨을 돌린 마교에서는 철저한 진상조사에 들어갔다. 그리하 여 마침내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마교로 배송된 마정석이 순수한 마기가 아닌 혈기를 다수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정지지라고 해도 순수한 마기만을 함유하고 있지는 않다. 드물게 혈기(血氣)나 요기(妖氣)가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는데 마 교로 배송된 마정석은 마기보다 혈기를 더욱 많이 함유하고 있 었던 것이다. 혈기는 마기보다 제어하기가 더욱 힘들다. 그리고 혈기가 뇌 리로 파고들 경우 끝없이 피만을 탐하는 살귀가 되어버린다. 마교의 미래를 책임진 소교주가 광인이 되어버리자 마교의 무 사들은 말을 잃었다. 잠마련에 대한 복수는커녕 이제는 교를 유 지하는 것조차 불확실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소교주와 장로 여덟을 잃은 마교는 의기소침 해졌다. 위연이 전면에 나서서 동분서주했지만 한 번 가라앉은 분위기는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마교의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미쳐버린 소 교주가 금제를 풀어내고 교를 빠져나간 것이다. 소교주라는 직책 때문에 마뢰옥에 가두지 않고 자택에 연금시 킨 상태라서 탈출이 비교적 손쉬웠는지도 모른다. ‘반드시 소교주의 신병을 확보해야 한다.’ 대경실색한 위연이 즉시 호법원의 무사들을 이끌고 소교주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광인이 된 소교주를 추적하는 것은 결코 쉽 지 않았다. 결국 소교주는 섬서성을 거쳐 사천성과 호북성의 경계인 이곳 까지 도주해 왔다. 바로 이것이 위연과 호법원 무사들이 이곳에 오게 된 경위였다.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지운 위연은 형형한 눈빛으로 무사들을 둘러보았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소교주를 다시 교로 모셔가야 한다. 그렇 지 않는다면 본교의 미래는 없다.” 입술을 질끈 깨문 무사들이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 크지 않은 개울이 졸졸졸 흐르고 있었다. 마을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갈 정도로 냇물이 맑았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냇물 이 맑지 않았다. 물이 온통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물이 이렇게 된 원인이 냇물의 상류에 있었다. 누군가가 냇물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그의 몸이 온통 피에 젖어 있다. 물이 불그스름하게 변한 것은 바로 피 때문이었다. 군데군데 허연 골수까지 묻어 있는 것이 마치 지옥의 사신과 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는 한눈에 보아도 정상이 아니었다. “크크크크.” 훌떡 뒤집힌 눈동자는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산발된 머리는 온통 피에 젖었다. 얼마나 피를 뒤집어썼는지 냇물이 계속해서 희석시키고 지나가도 여전히 핏물이 배어났다. 그 상태로 우두커니 서 있던 사내가 별안간 몸을 부르르 떨었 다. 뒤집힌 눈동자가 다시 돌아오며 서서히 초점이 잡혔다. 이윽고, 사내가 머리를 감싸 안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크으윽.” 느릿하게 고개를 든 사내의 눈동자는 어느새 정상으로 되돌아 와 있었다. 몸이 저린지 이곳저곳을 주무르던 사내가 힘없는 일 성을 내뱉었다. “이곳은 어디지?” 몸을 주무르던 사내의 손이 멈췄다. 전신을 흠벅 적신 피가 손 에 묻어났기 때문이었다. 멈칫거리던 사내가 손을 펼쳤다. 끈적끈적 굳어 가는 피가 시 야에 들어오자 사내의 얼굴이 착잡해졌다. “또다시 일을 벌였구나. 아아, 도대체 몇 사람이나 죽였을까?” 힘없이 머리를 내젓는 사내의 정체는 바로 담천위였다. 복수 를 위해 마석정의 마기를 흡수한 마교의 소교주가 바로 그였다. 뭔가를 떠올리려는 듯 머리를 감싸 쥐던 담천위가 힘없이 고 개를 내저었다. “아무 것도,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 크흑.” 몸에 묻은 혈흔을 볼 때 수십 명 이상의 사람을 죽인 것 같았 다. 문제는 그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담천위가 제정신을 되찾는 경우는 그리 자주 있는 일 이 아니다. 이삼 일에 일 각 정도 제 정신을 되찾은 뒤 괴로워하 고 나머지 시간들은 피를 위해 눈에 띄는 모든 사람에게 살수를 가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보니 담천위도 기억을 잃은 사이에 벌어지는 일을 어 렴풋이 짐작했다. 온몸이 피에 젖어 있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 눈 치 채지 못할 리가 없다. 냇가에 앉아 멍하니 시냇물을 응시하는 담천위의 눈동자는 초 점이 전혀 잡혀 있지 않았다. “교는 대관절 어떻게 되었을까?” 불현듯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자신이 적지 않은 성과를 보 이자 마정석 한 덩이 씩을 안고 연공실로 들어간 장로들. 십중팔 구 그들 역시 자신이 겪고 있는 것과 동일한 일을 겪고 있을 것 이다. 마교로 마정석을 보낸 자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크으으. 도대체 어떤 씹어 먹을 놈이…….” 그것이 패착이었다. 살기를 떠올리자 담천위의 골수에 파고든 마성이 발작을 시작했다. 마치 핏물이 차오르듯 급속도로 충혈되기 시작한 눈동자. 만 약 살심을 띠지 않았다면 얼마간은 제정신을 유지했을 테지만 일단 마성이 발작된 이상 이성을 잃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아, 안되는데……크크크.” 완전히 혈귀로 화한 담천위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 고 새로운 희생물을 찾아 몸을 던졌다. * * * “어떠냐? 기루에 대한 경험이 마음에 들었느냐?” “그런 대로 나쁘지는 않더군요. 하지만 너무 비쌉니다. 주공 처럼 돈이 많지 않은 사람들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 지요.” “흘흘. 이게 다 주공을 잘 만난 덕이다.” 데이몬과 냉유성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관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월향루에서 귀빈대접을 받으며 나흘을 묵은 그들은 또 다른 기루를 찾아 길을 떠나던 참이었다. “이렇게 주루를 전전하다 보면 분명 그 녀석이 접촉을 시도해 올 것이다.” “십중팔구 묵회의 무사들을 잔뜩 이끌고 올 텐데 위험하지 않 겠습니까?” “녀석. 걱정하지 말아라. 이래봬도 난 죽음의 위기를 한두 번 넘긴 몸이 아니다.” 그 말이 십분 이해되었는지 냉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확실히 주공은 겉으로 보이는 나이로만 평가할 게 아냐.’ 그는 이미 데이몬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물론 마계의 마왕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반로환동한 전대 고수 정도로는 추정하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겪어본 결과 데이몬은 산전수전 다 겪어본 노강호 보다도 노련할 정도였다. ‘도대체 주공의 진정한 정체가 뭘까?’ 하지만 데이몬이 원래 중원에서 악명이 자자한 대마두였다는 사실을 냉유성이 알아낼 도리는 없다. 상념에 잠겨 있던 냉유성이 어뜻 정신을 차렸다. 바로 지척에 서 풍겨오는 괴이한 기운 때문이었다. 냉유성이 멈춰 서자 데이 몬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느냐?” “숲 속에 뭔가가 있습니다.” 이어 풍겨온 짙은 피비린내. 냉유성은 이맛살을 지그시 모았다. “아무래도 숲 저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냉유성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 엄청난 마기로군요. 상당한 마도고수가 싸움을 벌이고 있 는 것 같습니다.” “그래? 한번 가보자.”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귀찮은 일에 말려들 수도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자고로 싸움 구경은 돈을 내고서도 하는 법이 다.” 한숨을 내쉰 냉유성은 앞장을 섰다. ‘못 말리겠군.’ 싸움은 벌써 끝나 있었다. 도사 복장을 한 청년 두 명이 각각 머리통과 가슴팍이 으깨어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검집에 새겨 진 매화는 그들이 화산파의 문하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그들을 죽인 자는 한눈에 보아도 정상이 아니었다. 뒤 집어져 검은자위가 거의 보이지 않는 눈동자는 마치 핏물이 차 오른 듯 충혈되어 있었다. “크크크.” 괴소를 흘리며 침을 질질 흘리던 괴인의 고개가 이쪽으로 돌 아왔다. 순간 냉유성은 오싹한 한기를 느껴야 했다. 괴인의 몸에 서 엄청난 마기가 풍겨졌기 때문이었다. “대단한 고수입니다. 저보다 수준이 높은 것 같은데요?” 둘을 발견하자 괴인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이쪽으로 다가 왔다.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냉유성이 장검을 뽑아 들었다. “제가 막겠습니다.” “주문을 외우거라. 그러면 실력 차가 좁혀질 것이다.” 데이몬의 조언에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 차피 보는 눈도 없는 판국이다. 게다가 상대는 자신보다 수준이 높아 보이는 마도고수. 냉유성은 한숨을 내쉬며 주문을 외웠다. “나는 왜 이렇게 멋있을까?” 주문이 끝나는 순간 장검에서 자욱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검병을 불끈 움켜쥔 채 냉유성은 괴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 했다. “아무래도 절정의 극에 달한 자 같군요. 마의 벽을 극복하지 못해 주화입마에 든 것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데이몬이 대답하는 순간 괴인이 달려들었다. 갈고리처럼 구부 린 쌍장에서는 시커먼 묵기가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콰쾅 검과 장이 격돌하는 순간 굉음이 울려 퍼졌다. 괴인의 힘을 감 당하지 못한 냉유성이 뒤로 쭉 밀려났다. “크윽. 엄청난 놈이로군.” 그러나 검에서 뿜어진 냉기에 영향을 받았는지 괴인도 추가공 격을 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마법검에서 뿜어지는 냉기는 이 성을 잃은 괴인도 감히 경시하지 못할 정도로 매서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흉성이 폭발했는지 괴인이 살광을 줄기 줄기 뿜어내며 덮쳐왔다. “크아아아.” 바짝 긴장한 냉유성은 내공을 한껏 끌어 모은 채 마주쳐갔다. 전반적인 무공수위는 괴인이 우위에 있었다. 게다가 마공을 익 혔기 때문에 냉유성으로서도 방어하는 데 상당한 애로를 겪어야 했다. 일반적으로 같은 수준이라 해도 정파와 마도는 무공 특성상 의 차이가 있다. 정파의 무공이 안정적이며 방어에 뛰어난 면을 보이는 반면 마공은 순간적으로 몰아치는 파괴력이 월등히 뛰 어나다. 때문에 냉유성은 겨우겨우 방어하며 계속 뒤로 밀려나고 있었 다. 만약 마법검에서 뿜어지는 냉기가 아니었다면 벌써 치명적 인 일격을 허용했을 것이다. 데이몬은 미간을 지그시 모은 채 괴 인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상하군. 아무리 주화입마에 빠졌다고 해도 저토록 공격적 일 수는 없는데…….” 냉유성이 궁지에 몰리자 데이몬은 즉각 괴인에게 마법을 걸었 다. 간단한 바인딩 마법으로 발목을 묶어주기만 해도 냉유성은 어렵지 않게 궁지에서 빠져 나왔다. 미묘한 차이 하나로도 승패가 갈리는 것이 고수들간의 대결이 다. 그렇게 데이몬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냉유성에게 도움을 주 며 괴인의 상태를 면밀히 살폈다. “아무래도 뭔가가 이상해.” 괴인의 상태에 의구심을 품은 데이몬은 어둠의 마력을 끌어올 렸다. 거리를 격한 채 괴인의 머릿속을 조사해보려는 것이다. 데이몬의 손짓에 따라 어둠의 마력이 실타래처럼 풀어지며 괴 인에게로 접근했다. 그동안 냉유성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괴 인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어둠의 마력이 괴인과 접촉하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괴인, 즉 담천위의 골수 속에 파고 들어가 있던 혈마기가 부글부 글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징후는 담천위의 눈동자를 통 해 그대로 표출되었다. 기운의 정체를 알아차린 순간 데이몬은 희열감에 사로잡혔다. “이, 기운은……드디어 실마리를 잡았다.” 괴인의 눈을 통해 표출되는 기운은 더 없이 순수한 마기였다. 마공을 통한 인위적인 수련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태초의 마 기인 것이다. 데이몬의 눈동자는 모종의 흥분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틀림없어. 마정지지에서 분출되는 마기가 분명해.’ 그렇다면 상황은 명약관화했다. 괴인은 우연히 마정지지를 발 견했고 그곳의 마기를 몸속으로 받아들이려다 그만 마성이 골수 에 파고든 게 틀림없었다. ‘붉은빛이 도는 것을 보니 혈마기로군. 흐흐흐. 인간의 몸으 로는 감히 혈마기를 감당할 수 없지.’ 순수한 마기라면 받아들여 무공을 증진하는 데 제법 도움이 된다. 하지만 혈기나 요기가 섞인 마기는 인간의 몸으론 수용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데이몬은 사정이 다르다. 몸속에 마력의 원천이 있기 때문에 혈마기건 요마기건 모조리 흡수하여 암흑투기로 전환시 킬 수 있는 것이다. 힘을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어깨가 으쓱거렸다. 데이 몬은 즉시 냉유성을 불렀다. “그 녀석을 상처 없이 제압할 수 있겠느냐?” “지금 장난하십니까? 막아내는 것도 힘에 겨워 죽을 지경입니 다.” 불퉁한 냉유성의 대답을 듣자 데이몬온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트루베니아에 서 데리고 온 세 명의 수하 중 하나를 꺼내려는 것이다. 물론 윈슬럿은 아니다. 윈슬럿과 냉유성이 합공한다면 어쩌면 괴인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처 없이 제압하는 것 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데이몬은 두 번째 수하, 괴인을 압도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존재를 불러내었다. “탄타로스, 나와라.”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인크레시아가 부르르 진동했다. 이 어 인크레시아가 직경 8미터 정도로 넓어졌다. 그곳을 통해 거 대한 존재가 불쑥 튀어나왔다. 벌거벗은 근육질 전사의 형상을 한 강철 거인. 마룡 베르키스 에 의해 만들어졌고 데이몬에게 거두어진 최강의 전투병기 아이 언 골렘이 중원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전장 6미터의 역동하는 강철근육을 가진 아이언 골렘 탄타로 스가 투구 사이로 광망을 빛냈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스터. “그래, 오랜만이구나.” - 임무가 무엇입니까? 데이몬은 손을 뻗어 괴인을 가리켰다. “저 인간을 사로잡아라. 단 병기는 사용하지 말고 상처 없이 사로잡도록 하라.” - 명을 받들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탄타로스가 지축을 울리며 괴인에게로 다가갔다. 워낙 육중했기에 대지가 푹푹 패이며 비명을 질러댔다. 쿵쿵쿵 뒤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존재감에 고개를 돌린 냉유성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뭐, 뭐야.” “뭐긴 뭐냐. 내 부하다. 이제 네 임무는 끝났으니 물러나거라.” 냉유성은 의문을 표할 겨를도 없이 전장에서 물러났다. 탄타 로스를 쳐다보는 그의 입이 딱 벌어져 있었다. “어, 엄청난 괴물이로군. 저, 저 녀석이 주공의 수하란 말인가?” 탄타로스의 위용에 괴인도 움찔 놀란 모양이었다. 그럴 것이 신장이 20척이 넘는 강철 거인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데 위축되지 않을 존재는 없다. 그러나 혈마기가 골수까지 파고들어 이성을 잃은 담천위는 지 지 않겠다는 듯 살기를 빛냈다. “캬아아악.” 이어진 것은 탄타로스와 괴인과의 일대 접전이었다. 괴인의 장력은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 장력에 격중된 탄 타로스의 강철동체가 푹푹 패여 들어갔다. 쾅 콰쾅 그러나 탄타로스는 드래곤들의 역량이 모두 투입된 걸작 중의 걸작. 패일 때마다 금세 마나를 빨아들여 손상된 곳을 수복하니 괴인이 견뎌낼 재간이 없다. 부우웅 탄타로스의 거대한 주먹이 파공성을 울리며 날아들자 괴인도 기겁을 하고 몸을 피했다.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위 험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만약 괴인이 도검으로 강기를 뿜어내었다면 탄타로스에게 좀 더 타격을 입힐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맨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냉유성은 입을 딱 벌린 채 괴인과 탄타로스의 접전을 지 켜보았다. “정말 엄청난 괴물을 수하로 두셨군요. 저게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지가 푹푹 패여 들어가는 것을 보니 전체가 정령된 강철로 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쇠로 만들어진 거인이 저토록 자연스럽 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니……. “트루베니아에는 중원인의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많지.” 데이몬과 냉유성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침내 승부 가 결정 나고 있었다. 탄타로스의 거대한 발에 걷어 채인 괴인이 피를 토하며 날아가 나뒹굴었다. 성큼성큼 다가간 탄타로스가 손을 뻗어 괴인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의식을 잃은 듯 괴인은 축 늘어져 있었다. “끝났군. 어디 한 번 가 보자.” “네, 주공.” 탄타로스가 제압해 놓은 괴인을 본 데이몬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가까이에서 살펴본 결과 괴인의 골수로 파고든 마기는 자연적인 것이 분명했다. ‘인위적인 마공 연마로 생겨난 마기는 이처럼 순수할 수가 없 지. 분명 이 녀석은 마정지지에서 마기를 흡수했음이 분명해.’ 그때 냉유성이 경고를 발했다.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의 표정이 별안간 심각해졌다. “스무 명 이상입니다. 그런데 전원이 절정 이상입니다.” 그 말에 데이몬은 놀랐다. 절정고수를 스무 명 이상 동원할 수 있다면 도대체 어떤 집단이란 말인가? 그가 당황하는 사이 의문의 존재들이 마침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난 이들은 위연이 이끄는 호법원 고수들이었다. 담천위의 종적을 뒤쫓던 그들이 마침내 이곳에 당도한 것이다. 그들은 데이몬 일행을 보자 머뭇거림 없이 외곽을 포위했다. 그때 무사 한 명이 경악 어린 경고성을 토해냈다. “저, 저게 뭐야?” 시선을 돌린 무사들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거대한 강 철석상이 누군가를 움켜쥐고 철탑처럼 서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다. 머리에는 기이한 형태의 투구를 걸쳤는데 금속질의 상체 는 벌거벗고 있었다. 쉽게 찾아보기 힘든 장관이었기에 호법원 무사들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그때 무사 한 명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소주님입니다. 강철상이 소주님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데이몬은 바짝 긴장한 채 탄타로스의 옆으로 붙었다. 절정고 수 스무 명 이상이라면 제 아무리 탄타로스라 해도 섣불리 승산 을 점칠 수 없다. 저들이 구사하는 검강은 탄타로스의 동체에 심 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베르키스의 골렘 군단도 크로센 제 국의 기사단에 의해 거의 괴멸되지 않았던가. 냉유성 역시 검 자루를 굳게 움켜쥔 채 무사들의 일거수일투 족을 살폈다. 그렇게 두 집단은 숨 막힐 듯한 대치상태에 들어갔 다. 대치상태를 깬 것은 위연의 외마디 일성이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냉유성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앞으로 나서서 말을 건 노인의 경 지가 도무지 추측할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저 정도라면 초절정의 벽을 넘어선 고수야. 아니, 마도의 고 수로 보이니 극마라고 해야겠군. 설마 잠마련의 무사들인가?’ 잠마련이 아니고서야 이 정도 수준의 무사단을 동원할 역량이 없다. 데이몬이 쓱 앞으로 나섰다. “당신들의 정체를 먼저 밝혀야 하는 것이 순리가 아닌가?” 위연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데이몬을 쏘아보았다. 칼날 같은 기운이 집중되었지만 데이몬은 동요 없이 시선을 맞받을 뿐이 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위연이 쏘아내는 기세에 심신이 움츠러 들었겠지만 데이몬에게는 해당이 없는 상황이다. 잠시 후, 위연 이 입을 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을 순순히 넘겨준다면 위해를 끼 치지 않겠다. 어떻게 하겠는가?” 그때서야 데이몬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탄타로스가 제압한 괴인이 눈앞의 무사들에게 무척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 실을. ‘말투를 보니 괴인은 무사들이 속한 집단에서 꽤나 중요한 위 치에 있는 인물 같군.’ 일의 전모를 파악하자 데이몬은 비로서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내가 어째서 그래야 하지? 저 미친놈은 불문곡직하고 우릴 공격해 왔다. 그래서 제압한 것인데 넘겨 달라는 것이 말이나 되 느냐?” 위연이 싸늘하게 살기를 피워 올렸다. “죽고 싶으냐?” “우리 모두를 상대할 자신이 있나 보군. 탄타로스.” 데이몬의 명령이 떨어지자 탄타로스가 앞으로 나섰다. 늘어진 괴인을 왼손으로 고쳐 잡은 탄타로스가 등 뒤에 메고 있던 거대 한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그 모습을 본 무사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단순한 강철상으 로 알았는데 저토록 자연스럽게 움직이다니……. 위연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디서 저런 괴물이…….’ 상황을 보니 소교주를 제압한 것이 저 괴물 같았다. 절정의 극에 이른 탓에 소교주의 무공은 쉽게 상대하기 힘들 다. 게다가 자신의 안위를 전혀 가리지 않고 공격을 퍼붓기 때문 에 더욱 까다롭다. 위연도 소교주를 상처 없이 제압하기 위해 호 법원 고수들 모두를 동원한 것이었다. 그런 소주를 제압했다면 결코 간단히 생각할 만한 존재가 아 니었다. 위연은 일단 대화로 풀어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분은 우리에겐 무척 중요한 사람이다. 상처 없이 넘겨준다 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겠다.” 데이몬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무사들과 괴인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던 데이몬이 불쑥 입을 열었다. “마교의 무사들인가?” 위연은 속으로 무척이나 놀랐다. 그러나 그는 속내를 쉽게 털 어놓지 않는 경험 많은 노강호였다. “그렇게 보이나?” 거기에 대답한 것은 냉유성이었다. 물론 그것은 데이몬의 지 시에 의한 것이다. “물론이오. 저 광인이 펼친 무공은 쇄심마환수와 최심장이더 구려. 정사대전 때 질리도록 경험해 보았기에 아직까지 기억에 뚜렷하오. 대표적인 마교의 무공을 몰라보면 바보겠지.” “알지 않아도 될 것을 알아버렸군.” 위연의 눈동자에 서서히 살기가 돌기 시작했다. 살인멸구를 생각한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때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마정지지는 언제 찾아냈나?” “…….” “운 좋게 마정지지르 찾아낸 모양인데 큰 실수를 했어. 혈마기 는 인간이 쉽게 흡수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지.” 데이몬은 손가락을 뻗어 탄타로스에게 잡혀 있는 괴인을 가리 켰다. “마성이 벌써 골수로 파고들어 피를 탐하는 살귀가 되어버렸 더군.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회복하기 힘들 걸세.” 순간 위연의 눈빛이 빛났다. “소주를 회복시킬 수 있단 말인가?” “두말하면 잔소리겠지. 이래봬도 내가 그쪽으로 조예가 좀 깊 거든.” 위연은 불신의 빛이 짙게 서린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 다. 고작 스물 남짓한 색목인에게 그런 재주가 있을 것이라고 믿 어지지 않았다. 만약 주화입마에 빠진 마공고수를 그토록 쉽게 회복시킬 수 있다면 왜 장로들을 마뢰옥에 가두었겠는가. “그 말이 사실인가?” “맞아. 하지만 서둘러야 할 거야. 마성이 골수를 완전히 장악 하면 그땐 대라신선이라고 해도 회복시키지 못해.” 고민하던 위연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교주가 식물인간이 되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것이 마교의 상황이었다. 그러니 소교주는 현재 마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 소교주 를 회복시킬 수 있다면 그 어떤 대가라도 치러야 하는 것이 마교 의 입장이었다. 위연의 태도가 별안간 공손해졌다. “간청하겠소. 제발 소교주님을 회복시켜 주시오.” “뭘 믿고 그 부탁을 들어주지? 회복시켜 준 다음 공격하지 않 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나. 입을 막으려면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지.” “그럴 일은 없을 거요. 적어도 본교는 은원관계에 있어서만큼 은 확실하게 구분하오.” “속직히 말해 난 중원인을 믿지 못하겠어. 모용세가에서 한 번 당한 적이 있거든. 묵회의 독에 중독된 세가의 무사를 해독 해 주었더니 해독법을 알아내기 위해 날 제압해서 고문을 가하 더군.” 위연은 뭔가 알아낸 듯 눈빛을 빛냈다. “그랬군. 당신이 바로 벽안독성(碧眼毒聖)이었군.” “벽안독성?” “당신에게 붙은 별호요. 독을 귀신같이 해독한다고 해서 독성 이란 별호가 붙었지. 정파에 파견된 첩자들을 통해 당신에 대한 소문을 들었소. 아무튼…….” 위연은 간절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본교는 모용세가 같은 짓은 하지 않소. 마교의 명예를 걸고 약속할 수 있소.” “음.”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마교의 무사들은 적어도 신용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한 편 이다. 대부분의 무사들이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목숨을 걸고 지 켰고, 그 사실은 데이몬도 잘 알고 있었다. “좋소. 당신들의 제의를 받아들이리다.” 위연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모쪼록 부탁드리겠소.” “한 번 힘을 써 보겠소.” 몸들 돌리는 데이몬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사 실 돈을 주고서라도 괴인의 몸속에서 마기를 흡수해야 하는 것 이 데이몬의 입장이었다. 그는 탄타로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를 이곳에다 내려놓아라.” 탄타로스가 명받은 대로 축 늘어진 담천위의 몸을 데이몬 앞 에 내려놓았다. 그 광경을 마교 무사들이 경악 어린 시선으로 쳐 다보았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강철거인을 그들의 상식으로 이 해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담천위의 백회혈에 손을 댄 데이몬은 얼마 남지 않은 암흑투 기를 끌어올렸다. ‘혈마기는 사실 어둠의 마력보다 암흑투기 쪽에 가깝지. 더욱 순수한 암흑투기라면 혈마기가 제 풀에 이끌려 나올 것이다.’ 물론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혈마기가 한꺼번에 빨려나올 경우 괴인의 생사를 장담하지 못한다. 혈도를 통해 순차적으로 빨아들여야만 괴인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그에 따라 데이몬은 암흑투기를 이용해 담천위의 뇌리를 장악 하고 있는 혈마기를 조금씩 자극했다. 쓰쓰쓰 혈마기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욱 순수하고 짙은 기 운인 암흑투기를 대하자 조금씩 빨려나오는 것이다. 다량의 암흑투기를 동원했다면 흡수하는 시간이 빨라지겠지 만 그건 데이몬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때문에 데이몬은 담천위 의 혈도가 버틸 수 있는 만큼씩만 혈마기를 흡수해 나갔다. ‘크크크. 역시 순수한 마기야. 잘 하면 일 다경 정도 싸울 수 있는 암흑투기를 얻을 수 있겠는걸?’ 인간에겐 극히 치명적인 혈마기라도 마왕인 데이몬에겐 힘의 원천에 불과하다. 그런 혈마기를 흡수해서 잘 정재한다면 암흑 투기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오직 마왕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다. 그렇게 해서 데이몬은 감질날 정도로 천천히 혈마기를 흡수해 나갔다. 그에 따라 붉게 달라올라 있던 담천위의 낯빛이 조금씩 정상으로 변해갔다. 시술은 거의 한 시진 가까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담천위의 골 수에 자리 잡고 있던 혈마기가 완전히 빨려나왔다. 눈을 꼭 감은 채 흡수한 혈마기의 기운을 음미하던 데이몬이 번쩍 눈을 떴다. “다 되었소.” 위연이 상기된 표정으로 담천위에게 다가갔다. 먼저 그는 손 가락으로 담천위의 맥을 짚어보았다. 맥이 일정하게 뛰는 것을 확인하자 그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런데 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거요?” “원기를 잃어서 그렇소. 원래대로라면 며칠 푹 쉬어야 일어날 테지만 이왕 손을 썼으니 깔끔하게 마무리 해 드리리다.”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은 힐링을 캐스팅했다. 상당한 양의 혈 마기를 흡수했으니 그 정도는 해 줘도 될 것 같았다. 치료마법이 펼쳐지자 담천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곧이어 그가 눈을 떴다. 지쳐 보이기는 하지만 맑은 눈빛. 시뻘겋게 변 했던 아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는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주 위를 둘러보았다. “누, 누구요? 여기는 어디지? 응? 그대는…….” 그의 시선이 위연에게 머물렀다. 위연이 형언할 수 없는 눈빛 으로 입을 열었다. “소교주님, 저 집법장로입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어, 어찌하여 그대를 몰라보겠소? 본교의 둘도 없는 충신인 그대를…….” 격정을 참지 못한 위연이 눈물을 흘렸다. 아무도 못 알아보고 닥치는 대로 살수를 날리던 소교주가 드디어 제정신을 찾은 것 이다. “저, 정말 다행입니다. 본교가 드디어 악운을 벗어 던졌군요.” 둘의 해후를 보고 있던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반갑긴 하겠지만 장소를 옮겨야 할 듯 싶소. 환자에게는 지금 절대안정이 필요하오. 게다가 원기가 많이 상했으니 음식도 필 요할 게요.” 담천위의 시선이 데이몬에게로 향했다. 물론 그의 기억 속에 데이몬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그대는 누구지?” 그때 위연이 재빨리 나섰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우선은 자리를 옮겨 소교주님의 몸을 보살피는 일이 시급합니다.” 듣고 있던 담천위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광인이 된 상태 로 마구 몸을 굴린 탓에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즉각 가까운 객잔으로 이동했다. 스무 명의 호법원 고 수들이 외곽에 서서 주위를 경계했다. 데이몬은 눈에 띄는 탄타 로스를 다시 인크레시아 속에 집어넣었다. 그 광경을 마교 무사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 중 입을 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소교주의 안위였다. 객잔에 도착한 마교 무사들은 투속해 있는 손님들을 모두 쫓 아냈다. 은 덩어리를 하나씩 안겨주자 손님들은 불평 없이 객잔 을 나갔다. 가장 중심부에 있는 방은 소교주 담천위가 차지했다. 마교 무 사들은 그 방의 전후좌우에 포진한 채 주위를 경계했다. 데이몬과 냉유성 역시 방 하나에 안내되었다. 두 명의 마교 무사들이 문 앞에 버티고 섰는데 경계보다는 감시하는 임무 를 맡은 것이 분명했다. 냉유성은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 렸다. “마교 무사들의 호위를 받다니……. 쉽사리 적응이 되지 않습 니다.” “뭐가 걱정이냐. 느긋하게 쉬도록 해라.” “참, 주공은 정말 태평도 하십니다.” 안절부절 못하는 냉유성과는 달리 데이몬은 느긋했다. 마교의 소교주로부터 흡수한 혈마기를 완전히 암흑투기로 전환한다면 약 일 다경 가량 현경의 무위를 뽐낼 수 있다. 그렇다면 절정고수 스무 명 정도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때문 에 데이몬은 서둘러 혈마기를 정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운기조식을 해야겠다. 호법을 서 다오.”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떴지만 냉유성은 두말하지 않고 데이몬 의 뒤에 버티고 섰다. 가부좌를 하고 앉은 데이몬은 눈을 감았다. 암흑투기를 이용 해 흡수한 혈마기를 동화시킨 다음 정제하는 과정이라 다소의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 * * 데이몬은 꼬박 두 시진이 지나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는 지 금까지 찾아볼 수 없었던 신광이 일렁이고 있었다. 입술을 비집 고 광소가 터져 나왔다. “흐흐흐. 드디어 힘을 되찾았다.” 어느덧 그의 몸에서 검은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 었다. 암흑투기를 본격적으로 운용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담천위로부터 흡수한 혈마기는 모조리 암흑투기로 정제되었 다. 그로 인해 데이몬은 한동안 사용할 수 있는 암흑투기를 보유 하게 되었다. 상대가 그 누구라도 대등하게 맞서 싸울 수 있게 되었으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한쪽 벽에 기대서서 졸고 있던 냉유성이 데이몬의 웃음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주공, 행공을 마치셨습니까?” “이 녀석 보게? 호법을 맡겨 놓았더니 졸고 있잖아?” 냉유성이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깜빡…….” “하긴 낮에 푸닥거리를 화끈하게 했으니 졸릴 수밖에…….” 괘씸하긴 했지만 암흑투기를 운용할 수 있게 된 기념으로 데 이몬은 너그럽게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힘을 되찾으셨다니 무슨…….” “내공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이제 나는 제 실력을 십분 발 휘할 수 있어.” 냉유성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감축 드립니다.” “고맙다. 그런데 내가 운기하는 동안 별 일 없었느냐?” 냉유성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교 무사들이 몇 번 왔다갔습니다.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하더 군요. 주공께서 운기를 마치는 대로 별관에 들러달라고 했습니 다.” “자식들, 볼일이 있으면 자신들이 올 것이지. 좋다. 가 보자.” 문을 나서려는 데이몬의 팔을 냉유성이 붙들었다. “주공, 아무래도 신중하게 행동하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왜? 분위기가 수상하더냐?” 냉유성은 미간을 지그시 모으며 내심을 털어놓았다. “이 일은 마교의 치부라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무래도 입 을 막기 위해 살인멸구를 결정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마교 무 사들이 주공과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을 보니 처신을 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데이몬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신경 쓰지 말거라. 어제의 나였다면 걱정했겠지만 지금은 아 니다.” “…….” “이제부터 네 주공의 무위가 어떤지를 견식하게 될 것이다. 따 라와라.” 고민하던 냉유성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검 자루를 움켜쥐고 뒤 를 따랐다. 방을 나서자마자 마교 무사들이 달라붙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별관으로 오라고 해서 가는 길이오.” “저희들이 안내하겠습니다.” 마교 무사들이 데이몬과 냉유성의 전후좌우를 포위했다. 명색 은 안내였지만 실상은 호송이나 마찬가지였다. 눈에 거슬렸지만 데이몬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의 그에겐 그 어떤 난관이라도 극복할 능력이 있었다. 조금 걸어가자 객잔의 별관이 보였다. 객잔의 뒤뜰에 지어놓 은 귀빈 전용 숙소였다. 별관 마당에는 마교 무사들이 질서정연 하게 도열해 있었다. ‘역시 마교로군. 일개 무력집단을 전부 절정고수로 구성할 정 도라니…….’ 별관 입구에 다가서자 무사 한 명이 냉유성을 제지했다. “잠깐. 그대는 이곳에 남아 있으시오. 소교주께서 뵙고자 하 는 분은 저분뿐이오.” “안 될 말이오. 나는 주공의 수하. 그 어떤 자리에도 동석해야 하오.” “그럴 수 없소. 소주께서는 데이몬 공 혼자만을 뵙겠다고 하셨 소.” “말도 안 되는 소리.” 냉유성이 발끈하려는 순간 데이몬이 손을 뻗어 제지했다. “괜찮다. 나 혼자 들어가 볼 테니 너는 이곳에 남아있도록 해 라.” “하, 하오나…….” “걱정하지 말거라. 아까 한 말 잊었느냐?” 데이몬이 힘을 되찾았다고 한 것을 떠올린 냉유성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속하는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혹시 저놈들이 시비를 걸어오거든 참지 말거라. 내 수하로서 체면이 있으니 말이다. 주문을 외우면 만사형통이다. 알겠느냐?” 우거지상이 된 냉유성이 떠듬떠듬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싱긋 미소를 지은 데이몬은 무사들의 안내를 받아 별관 안으 로 들어갔다. 별관 안에는 담천위와 집법장로 위연이 자리하고 있었다. 낯 빛이 창백했지만 담천위는 굳건하게 정좌한 자세로 자리를 지키 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무슨 일로 날 불렀소이까?” 의아한 듯 되물으면서 데이몬은 슬쩍 기세를 흘렸다. 암흑투 기를 운용하게 된 이상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콰콰콰 맹렬히 쏘아지는 기세. 담천위와 위연의 안색이 단숨에 변했다. ‘이, 이건…….’ 태연하게 기세를 내쏘는 데이몬의 전신에서는 절대자의 풍모 가 풍겨나고 있었다. 그것을 먼저 알아차린 것은 위연이었다. 담천위와는 달리 극 마지경에 오른 위연은 능히 데이몬의 무위를 간파했다. 자고로 고수가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이럴 수가……. 아까는 무공을 숨겼단 말인가? 나보다 족히 두세 단계 위의 고수다. 순감 숨이 턱 막혀오는 위연이었다. ‘안 돼. 이자는 섣불리 건드려서는 안 되는 자야.’ 사실 그는 데이몬은 힘으로 제압해서 마교로 끌고 갈 작정이 었다. 총단의 마뢰옥에는 담천위와 마찬가지로 마정석의 마기를 흡수하려다 광인이 된 장로들이 있었다. 그는 데이몬으로 하여 금 그들을 치료하게 할 생각이었다. ‘먼저 말로 설득해 보고 안 되면 무력을 사용하는 수밖에…….’ 이 자리에는 마교 최강이라는 호법원 고수들이 있다. 강철거 인이 좀 껄끄럽기는 하지만 호법원 고수 전부를 투입하면 충분 히 승산이 있다고 위연은 생각했다. ‘어쩔 수 없지. 약속을 어기는 게 좀 걸리긴 하지만 본교이 사 정이 더욱 절박하니…….’ 계획을 짠 위연은 소교주에게 계획의 전말을 털어놓았다. 물 론 담천위는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집법장로가 직접 약조한 것인데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릴 생각이오?’ ‘어쩔 수 없습니다. 본교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불가피 한 일입니다.’ 교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논리에 결국 담천위도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계획을 짜 놓고 데이몬을 불러들였는데 상황이 뜻밖으 로 흘러가는 것있다. 색목인에게서 풍겨지는 기세는 결코 가볍 게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교주님께서 멀쩡하셨을 때와 맞먹는 기세다. 결코 건드려서 는 안돼.’ 얼어버린 위연과는 달리 담천위는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역 시 마교라는 거대한 단체를 이끌만한 그릇이었다. “충분히 알았으니 기세를 거둬들여 주시겠소? 버티기 힘들구 려. 하하.” 뜻밖이라는 듯 담천위를 쳐다본 데이몬이 기세를 거두었다. 위연은 그때서야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담천위보다 무위가 높 았기에 느끼는 압박감이 더욱 컸다. 담천위는 싱긋 웃으며 위연 을 쳐다보았다. “이거 어쩌나? 집법장로님의 계획대로 시행하기 힘들게 되었 군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위연이 얼굴을 붉혔다. 미소를 지은 담천 위는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리다. 우린 당신을 데리고 본교로 갈 작정 이었소.” “물론 강제로 데려가려 했겠구려.” 뜻밖에도 담천위는 계획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일단 설득해보고 안되면 무력을 쓰려고 했었소. 본교가 처한 상황이 너무도 절박했기 때문이오.” “마교인들은 약조를 중시 여긴다고 들었는데 새빨간 거짓이 었소?” “물론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리리다. 여간해서는 그런 일이 없는데 워낙 상황이 시급해서 그랬다오. 뭐, 당신의 무위를 보니 성공할 가능성도 없을 것 같지만 말이오.” 얼굴을 찌푸리는 담천위를 보며 데이몬은 박장대소를 했다. “하하핫! 정말 솔직한 분이로구려.” “나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소. 원래 약속을 중하게 여기는 성품이라.” “어쨌거나 당신도 찬성하지 않았소?” “그런가? 이건 한 입으로 두 말 했구려. 면목 없소이다.” 담천위는 무척 호탕하고 꾸밈새 없는 성품을 가졌다. 데이몬 은 그런 담천위에게 호감을 느꼈다. ‘마음에 드는 녀석이군. 괜찮아.’ 하지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였다. 담천위가 은근한 어조로 데 이몬을 설득하려 했다. “어떻소? 혹시 본교로 한 번 가 보실 생각이 없으시오? 본교 총 단에는 나와 같은 지경에 빠져 있는 장로가 몇 있소. 만약 그들 을 치료해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겠소.” “미안하지만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리하지 못하겠소.” 거절의 뜻을 밝혔지만 담천위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중에라도 들러주시겠소? 교의 귀빈으로 반길 것 을 약속하리다.” 데이몬은 담천위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담천위 역시 피하 지 않고 시선을 맞받았다. “뭐, 방문했는데 힘으로 제압해서 고문하거나 하지 않을까 걱 정되는구려. 모용세가에서 한 번 당한 적이 있어서 말이오.” “내 목을 걸고 약조하리다. 지금 이 순간부터 아니, 날 치료해 준 순간부터 그대는 본교의 귀빈이오.” “과연 귀 교의 장로들을 치료해 주지 않아도 귀빈으로 대접받 을지 의심스럽구려.” 데이몬의 가시 돋친 말에 담천위는 미소로써 응수했다. “만약 그런다고 하더라도 귀빈 자격을 박탈하지 않을 거요. 날 치료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소? 핫핫핫!”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담천위를 보며 데이몬은 실소했다. ‘꽤나 배포가 큰 녀석이로군. 마교의 차기 지존이 될 자격이 충분해.’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은 술상을 쳐다보았다. “한 상 잘 차려놓았구려. 날 위해 준비한 것이오?” “아 참, 깜빡 잊고 있었군. 물론 은인을 위해 준비한 것이지. 한 잔 하시겠소?”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두 말 하면 잔소리겠지?” 그때 바깥에서 무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칼 부딪 히는 소리로 보아 싸움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위연이 익히 예상했다는 듯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데이 몬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술잔을 집어 들었다. “수하들이 치고받는 모양이구려. 신경 쓰지 맙시다.” 그래도 명색이 마교 최고의 정예인 호법원 무사들이다. 그런 데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을 보니 수하 역시 주공에 어울 리는 고수일 거라 생각한 담천위는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럽시다. 얘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니 말이오.” 졸졸졸 황금빛 액체가 잔에 가득 채워졌다. 위연이 나갔음에도 불구 하고 바깥의 소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몬과 담천위 둘 중 누구도 거기에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냉유성은 검 자루를 움켜쥔 채 별관을 주시하고 있었다. 무공 을 회복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대로 걱정이 되지 않을 순 없다. ‘괜찮으실까?’ 자신도 모르게 손이 힘이 들어갔다. 그때 뒤에서 싸늘한 음성 이 들려왔다. “냉유성, 오랜만이구나.” 고개를 돌린 냉유성의 눈이 커졌다. 말을 걸어온 마교의 무사 가 아는 자였기 때문이었다. “다, 당신은…….” 그는 얼굴에 열 십자로 흉터가 아로새겨진 사십대 중반의 무 사였다. 길게 찢어진 뱀 눈에서 형형한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그가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정사대전 이후 못 만났으니 꼭 오 년 만이로군. 그렇지 않나. 냉유성?” 냉유성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려. 오랜만이오.” “우린 진작에 만났어야 했어. 하지만 하늘이 그동안 서로간의 은원을 풀 기회를 주지 않더군.” 냉유성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눈앞의 무사는 자신과 악연 으로 점철된 자이기 때문이었다. 정사대전 당시 냉유성은 풍운대에 속해 있었다. 풍운대는 대 부분의 구파일방 후기지수로 구성된 부대다. 오대세가들이 주로 사파 연합군과 싸운 반면 풍운대는 주로 마교의 무사들과 싸웠다. 지금 말을 걸어온 무사는 왕평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교의 본단 고수였다. 절정 상급의 무위를 가지고 있으며 무력단체 하나를 맡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자였다. 당시 왕평은 비마대의 수장으로서 휘하에 일류 무사 서른 명 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데 냉유성이 속한 풍운대의 지대와 왕 평이 이끄는 비마대가 전장에서 맞닥뜨린 것이 바로 악연의 시 작이었다. 풍운대 지대를 통솔하는 사람은 냉유성의 사숙이었다. 그의 무위는 왕평에 비해 한 단계 아래라고 볼 수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자 사숙은 냉유성과 그의 사형제 한 명을 데리 고 왕평을 협공했다. 당시 갓 절정에 오른 냉유성은 그들과 힘을 합쳐 왕평이 수하들과 합류하는 것을 막았다. 결과는 풍운대의 승리. 천신만고 끝에 풍운대는 왕평이 이끄는 비마대 무사들을 모두 괴멸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상처뿐인 승리였다. 부하들을 모두 잃어 분노 한 왕평의 맹공에 의해 사숙이 죽고 사제와 냉유성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결국 사제는 그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 세상을 뜬다. 냉 유성 역시 창자가 끊어지는 중상을 입고 한동안 요양해야 했다. 부하들을 모두 잃고 단신으로 탈출한 왕평은 총단으로 돌아가 서 패배에 대한 징계를 받았다. 비마대주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호법원의 평무사로 발령이 난 것이다. 그러니 왕평이 냉유성에게 원한을 품을 만도 했다. 냉유성을 노려보는 왕편의 눈동자는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네놈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 네놈들만 아니었다면…….” “흥. 당신의 손에 사숙과 사제가 죽었소. 나 역시 육 개월이나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지. 누구의 원한이 더 큰지 모르겠구려.” “그렇다면 길게 말할 필요가 없겠군.” 왕평의 얼굴에 싸늘하게 살기가 어렸다. 마교 무사들은 아무 말 없이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공동파에서 파문당했다고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은원관계 가 사라지지는 않는 법. 이 자리에서 해소하는 것이 어떠냐?” 냉유성은 잠시 고민했다. 과거였다면 생각할 필요가 없겠지만 지금 그는 새로운 주공을 모시고 있다. 생각 같아서는 비명에 죽 어간 사숙과 사제의 복수를 해 주고 싶었다. 그때 데이몬이 한 말이 떠올랐다. - 시비를 걸어오거든 참지 말아라. 냉유성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설마 이 상황을 예견해서 당부하신 것일까.’ 입술을 살짝 깨문 냉유성은 검을 뽑아들었다. 그 모습을 본 왕 평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흐흐흐. 놈! 명년 오늘이 제삿날이 되게 해 주겠다.’ 사실 그는 냉유성이 모욕을 무릅쓰고라도 대결을 회피할까 걱 정했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냉유성은 자신의 도발에 금세 걸려 들었다. 왕평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놈의 무위가 아무리 높아졌다고 해도 내 아래인 것만은 확실 하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주겠다.’ 일반적으로 같은 경지라고 하더라도 마공을 익힌 고수가 공격 력 면에서 월등하다는 것은 무림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룩 한 무위의 차이를 감안하면 자신의 승리가 확실했기에 왕평은 자신만만해 했다. “어떻게 하겠느냐? 나는 은원관계를 이 자리에서 깔끔하게 마 무리 짓고 싶다.” “그럽시다. 당신의 손에 죽은 사숙의 비명소리가 아직까지 기 억에서 지워지지 않는구려.” “잘 생각했다.” 냉유성은 검병을 굳겨 움켜쥐었다. 전반적인 무위는 확실히 상대가 높아 보인다. 게다가 마공고수란 것을 감안하면 어려운 싸움이 될 터였다. 그러나 냉유성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에겐 마법검이 있었다. 이미 여러 번 경험했던 터라 사람들 앞에서 주문을 외우는 것도 처음처럼 거부감이 생기지 않았다. 스릉 검을 뽑아드는 왕평을 보며 냉유성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 다. 그사이 마교 고수들이 둥그렇게 자리를 벌려 비무 공간을 만 들어 주었다. “나는…….” “흐흐흐. 유언을 남기려는 거냐?” 이어진 냉유성의 말은 상상을 초월했다. “왜 이렇게 멋있을까.” 어이가 없는지 왕평이 눈을 크게 떴다. 마교 무사들 역시 얼떨 떨한 기색이었다. 저런 자화자찬은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은 마교 무사들도 섣 불리 하지 못하는 말이다. 왕평의 눈에 살광이 짙게 스쳐지나 갔다. “미친 새끼. 지랄하네……헉!” 왕평이 움찔 놀라 뒤로 물러났다. 냉유성이 들고 있던 검에서 난데없이 한기가 자욱하게 뿜어졌기 때문이었다. 닿기만 해도 살이 얼어 들어갈 것 같은 한기였다. “노, 놈이 음한기공을 익혔다는 말은 전혀 듣지 못했는데…….” “자, 가겠소.” 냉유성은 머뭇거림 없이 선공을 가했다. 자욱한 냉기 속에 날 카로운 검초가 섞여 날아들었다. 왕평이 숙련된 솜씨로 공격을 막아냈다. 촤창 검초는 손쉽게 차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함께 뿜어진 냉기만 큼은 어쩔 수 없었다. 에이는 듯한 한기에 왕평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에 고무된 냉유성은 계속해서 공격을 가해갔다. 검의 움직 임에 따라 세차게 휘몰아치는 한기가 비무장을 가득 메웠다. 파파파팟 둥그렇게 원진을 만든 채 관전하던 마교 무사들이 눈살을 찌 푸리며 거리를 벌렸다. “엄청난 냉기로군.” 사실 정사대전 때도 냉유성과 왕평의 무위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단계를 높이기가 힘들다고 정평이 나 있는 것이 마공이다. 왕평이 제자리걸음하는 동안 냉유성은 꾸준히 화후를 높여나 가 이제는 거의 왕평에 근접해 있는 상황이다. 거기에 마법검의 도움까지 받으니 승부는 굳이 예견해 보지 않아도 뻔했다. “크으으. 팔이 얼어붙는 것 같군.” 왕평이 오만상을 찌푸린 채 방어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기에 노출된 피부에서 서서히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상대의 검에 서 뿜어지는 한기는 그 정도로 지독했다. 이미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어보았던 냉유성은 한기를 십분 활용하여 왕평을 공략했다. 대결은 모두의 예상과 달리 냉유성 의 월등한 우위 속에서 진행되었다. 창 차창 검기를 뿜어내는 검이 세차게 맞부딪혔다. 순간 왕평의 검이 하늘 높이 숫구쳤다. 냉기에 손이 곱아서 검병을 굳게 움켜쥐 지 못한 것이다. 왕평 정도의 고수에겐 일어나서는 안 될 실수 였다. “헉.” 대경실색한 왕평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냉유성은 지옥 끝 까지 쫓아가겠다는 듯 바짝 따라붙었다. 검을 들고도 밀리는 판국인데 검을 잃었으니 왕평이 버틸 재 간이 없다. 나려타곤까지 전개해서 피했지만 냉유성의 검은 얄 미울 정도로 요혈을 파고 들어왔다. 목젖으로 싸늘한 감각이 느껴지는 것을 느낀 왕평은 이를 갈 았다. “졌다. 죽여라.” 상대가 이 정도로 수준 높은 음한기공을 익혔으리라곤 짐작하 지 못했다. 그것이 패착이라고 생각한 왕평은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냉유성은 왕평을 끝장내지 않았다. 목을 누르는 감각 이 사라진 것을 느낀 왕폄이 눈을 떴다. 예상과 달리 냉유성은 장검을 검갑에 수납하고 있었다. “왜 날 죽이지 않느냐? 끝까지 날 모욕할 생각인가?” 냉유성은 평온한 어조로 그 말에 대답했다. “그대와의 악연을 여기에서 끝내고 싶소. 비록 내가 사숙과 사 제를 잃었지만 당신은 아끼는 수하들을 잃었지. 그러니 이쯤에 서 서로의 원한을 정리합시다.” 말을 마친 냉유성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왕평은 복잡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광경을 지켜보던 눈동 자 한 쌍이 있었다. “엄청난 음한지기로군. 호법원 평무사들 중에서 가장 강하 다고 알려진 왕평을 제압하다니……. 역시 그 주인에 그 수하인 가?” 소란을 듣고 달려 나온 집법장로 위연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냉유성을 쳐다보던 그는 몸을 돌렸다. 냉유성의 무위를 견식했 으니 이제 더 이상 볼일이 없었다. 5. 마교 소교주와 친분을 맺다 별관 안에는 질펀하게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치 술로 승 부를 보자는 듯 데이몬과 담천위는 끊임없이 술잔을 비웠다. 잔 을 쭉 들이킨 담천위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크으. 술맛이 무척 좋구려. 주도를 아는 사람과 마시니 술맛 이 더욱 살아나는 것 같소.” “주도를 잘 아는 것이 아니라 주량이 센 것이겠지.” 제법 많은 술을 마셨지만 데이몬의 얼굴은 전혀 변화가 없었 다. 오히려 술기운이 올라 얼굴이 벌게진 쪽은 담천위였다. “괜찮겠소?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인데?” “상관없소. 오늘은 좋은 날이오. 본교의 미래가 확정된 날이 니 말이오.” 데이몬은 담천위가 따라준 술잔을 묵묵히 들이켰다. “마교의 위명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보았소. 마도의 하늘이라 하더이다.” “당신도 본교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소?” “그럴 리가 있겠소? 정사의 구분은 나에게 있어 무의미한 일 이오.” 담천위가 히쭉 웃었다. “그것 참 마음에 드는 말이로군.” 그는 술기운이 올라 벌게진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어떻소. 마음도 어느 정도 맞는 것 같은데 서로 각별하게 지 내는 것이 말이오.” “각별하게?” “붕우관계를 맺자는 말이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우리 친구 하는게 어떤가?” 별안간 변한 말투에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자네 쪽이 손해가 아닌가? 장차 마도의 하늘이 될 사람 이 나 같은 색목인과 친구를 맺는다면 말일세.” 데이몬의 능숙한 응수에 담천위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지. 자네 정도의 고수와 친분을 맺는 것 을 생각하면 내 쪽이 월등히 이득이지. 게다가 자네는 독의 대가이 지 않나. 앞으로 자네의 도움을 받을 일이 적지 않을 것 같네.” “흘흘. 생각해 보니 그렇군.” “어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굳이 입을 열어 말할 필요가 있겠나? 친구, 앞으로 잘 부탁하네.” “여부가 있겠는가!”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진 담천위가 손을 뻗어 데이몬의 어 깨를 두드렸다. 데이몬도 마주 웃어주었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 마교의 차기 교주가 될 담천위와 친구가 되는 게 나쁠 리 없다. 사준환과 싸워줄 우군은 많을수록 좋다. 게다가 성격도 호탕하고 대범한 것이 자신과 죽이 잘 맞을 것 같 았다. “친구가 되었으니 가만히 있을 순 없겠군.” “뭐가 말인가?” “지금은 곤란하지만 추후에 시간을 내어 자네에게 들르겠네. 그때 주화입마에 빠진 장로들을 치료해 주지.”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그땐 술 한 잔 화끈하게 사도록 하지.” “많이 준비해야 할 걸세. 내 주량이 제법 세니까 말이야.” “여부가 있겠는가?” 둘은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조용히 들어와서 그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위연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역시 소교주님이시군. 인간적인 접근방법으로 관계를 맺으 시다니……. 확실히 내 방법보다는 효과적이야.’ 술잔이 연거푸 오고가는 가운데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 시각 잠마련에서는 묵회의 회주와 사준환이 독대하고 있었 다. 월향루의 기녀로부터 전서구를 받은 비영전주는 한동안 고 민하다 그 사실을 회주에게 털어놓았다. 묵회가 전력을 기울여 쫓고 있던 색목인이 성도의 주루에 출 현했다는 정보를 들은 묵회주는 즉시 잠마련으로 들어갔다. 그 리고 사준환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그자가 성도의 기루에서 발견되었다고?” “그렇습니다. 기루의 하오문 정보원으로부터 정보가 들어왔 습니다. 인상착의가 한 치의 어김도 없이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저번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겠다. 실력 있는 무 사들을 줄테니 색목인을 꼭 붙잡아 와라.” 그 말에 묵회주는 미간을 모았다. “하지만 그 색목인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곳으로 사라지는 재주를 가졌습니다. 그 재주를 미연에 봉쇄하지 않는다면 임무 를 성공시킬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그래?” 사준환은 손을 들어 턱을 쓸었다. 뭔가를 생각할 때 나오는 사 준환 특유의 버릇이었다. 머리가 좋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는 금 세 해결책을 떠올렸다. “흑법사에게 들은 대로라면 그는 무사가 아니라 술사라고 봐 야 한다. 암습에 약한 면모를 가지고 있으니 실력이 뛰어난 여고 수를 기녀로 위장시켜 접근시킨 다음 불시에 제압하면 될 것이 다.” “그런 방법이라면 가능하겠군요. 알겠습니다. 이번만큼은 반 드시 색목인을 생포해 오겠습니다.” “그래야지. 그래야만 저번의 실패로 실추된 나의 신뢰를 되찾 을 수 있을 것이다.” 공손히 예를 올린 묵회주는 밖으로 나갔다. 태사의에 앉은 채 사준환은 손가락으로 손잡이를 톡톡 두드렸다. “성도에서 목격되었다면 호북 쪽으로 이동하고 있겠군. 아무 튼 반드시 생포해야 할 텐데…….” 그는 흑법사를 떠올렸다. 정말 우연하게 거둬들였지만 흑법사 는 현재 잠마련에거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 하나로 인해 자 신의 계획이 십 년 이상 앞당겨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흑법사로부터 들은 색목인에 대한 정보를 되새겼다. “흑법사보다 수준이 높은 술사라고 하니 정말 기대되는군. 그 는 또 어떤 면모를 나에게 보여줄까?”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날려버린 사준환은 자신의 야망에 대해 떠올렸다. 곧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짙게 걸렸다. “후후후. 앞으로 오 년. 오 년이면 무림이 내 손 안에 들어온 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지고 있어.” 지금껏 야망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간들이 주마등처 럼 스쳐지나갔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을 짓밟고 올라섰지만 사 준환은 그때의 결정을 추호도 후회하지 않았다. “무림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 내 지략 도 엄연히 힘이라고 볼 수 있지.” 그가 세운 계획은 지금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척척 들어맞 았다. “묵회를 이용해 무림을 뒤흔들고 포섭한 고수들로 혼란을 조 장한 다음 강시군단과 무사들을 이용해 무림맹을 단숨에 괴멸시 킨다. 그 과정에서 책략을 몇 가지 사용해 무림맹의 힘을 줄여야 겠지. 마교를 격파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어차피 마교는 손을 써뒀기 때문에 당분간은 움직이지 못하니.” 마교를 생각하자 그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한 때는 마도의 하늘이라 불리던 막강한 집단이었지만 지금은 그렇 지 않았다. 그토록 위세가 대단하던 마교가 감숙성에 틀어박혀 겨우 자리 보전을 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사준환의 계략 때문이었다. “마정지지를 발굴하고 무척 기뻤지. 정작 그것이 쓸모없다는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지만…….” 사준환은 아주 운 좋게 마정지지를 찾아냈다. 무림맹에 잠입 시킨 첩자가 정체가 발각되어 도주하는 와중 우연히 마정지지를 찾아낸 것이다. 련으로 돌아온 첩자는 즉각 그 사실을 상부에 알 렸다. 당시 사준환은 하늘이 자신의 야망을 돕는 것이라 생각했다. 마정지지의 마기를 이용하면 다수의 뛰어난 고수들을 길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은 전적으로 사준환의 편을 들어주 지 않았다. 그가 발견한 마정지지는 인간이 이용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 었다. 혈마기가 다수 포함되어 있어 마기를 받아들인 사람은 누 구를 막론하고 광인이 되어버린다. 인간의 육신으로는 강대한 혈마기를 감당할 수 없다. 그로 인해 잠마련은 상당한 손실을 입어야 했다. 엄선해서 뽑 은 고수들이 대거 광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사실을 파악한 사 준환은 즉각 연공을 중지시켰다. ‘큰 피해를 입었군. 하지만 피해를 나만 덮어쓸 순 없는 법이지.’ 그는 즉각 계책을 떠올렸다. 마교의 주요 고수들을 광인으로 만드는 책략이었다. 작전이 성공한다면 마교는 당분간 움직일 수 없을 터. 그는 즉각 표국을 통해 마교로 마정석을 보냈다. 물론 배후가 잠마련이란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각별히 보안을 유지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계략이 적중했고 마교는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입었다. 첩자를 통해 그 사실을 알아낸 사준환은 무척이나 기뻐했다. “되었어. 마교의 소교주가 광인이 되었다면 성과가 기대 이상 이야.” 비록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마정지지가 전혀 쓸 모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밝혀낸 것은 흑법사였다. 호기 심에 마정지지를 연구해 본 그는 혈마기를 강시에 접목시키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마정지지의 혈마기는 인간의 육신으로는 받아들이는 것이 원 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십중팔구 혈마기가 골수에 파고들어 끝없 이 피를 탐하는 광인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강시에 혈마기를 주입한다면 결과가 많이 달라진다. 더욱 흉포해지고 강력한 강시가 탄생하는 것이다. 특히 흑법사 가 만들어낸 음양강시는 혈마기와 상생이 무척 잘 맞았다. ‘그래? 잘 되었군.’ 보고를 받은 사준환은 흑법사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었 다. 지금까지 제작된 모든 음양강시에 혈마기를 주입시켜 강화 하는 것이 1차 계획이었다. 제련이 끝난 뒤 시험해 본 결과 혈마기가 주입된 음양강시는 능히 초절정 고수 한 명을 감당해 냈다. 사준환으로서는 정말 고 무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드디어 껄끄럽던 정파의 고인들을 상대할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잠마련 같은 거대 방패에서도 초절정 고수는 고작해야 십여 명 안팎이다. 거기에 철마의 난동으로 인해 마교에서 영입한 고 수들을 잃어서 숫자가 대폭 줄어들었다. 고수가 많은 무림맹도 모두 합쳐봐야 스무 명도 되지 않았다. “은거한 전대고수도 그 정도 된다고 가정하면 정파 무림의 초 절정 고수는 모두 사십 명 가까이 될 것이다. 대표적인 정파의 저력이라고나 할까?” 지금껏 마도가 정도를 극복하지 못한 것은 바로 초절정 고수 들의 열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혈마기를 주입한 음양강기는 능히 초절정 고수 한 명을 상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혈마기가 주입 된 음양강시를 사십 구 이상 만들어 낼 경우 더 이상 정파 무림 을 겁내지 않아도 된다. 그 사실을 떠올린 사준환은 조용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내 목표는 그것이 아니지.” 그는 최소한 백여 구의 음양강시를 완성시킨 다음 무림정벌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준비가 확실할수록 승산이 높아질뿐더러 무 림맹을 괴멸시킨 다음 체제를 지키는 데에도 상당한 전력이 필 요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산술적으로 혈마기를 주입시킨 음양강시 백 구를 만드는 데 에는 오 년 이상의 세월이 걸린다. 지금으로서는 그 시간을 줄이 는 것이 관건이다.” 당금 무림은 오 년 전에 끝난 정사대전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 은 상태였다.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십 년의 세월이 걸린다. 때문에 사준환으로서는 시간을 줄이는 과정이 가장 중요했다. 정파의 후기지수들이 능히 제몫을 할 만큼 성장하기 전에 일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데이몬을 생포하는 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만약 색목인 술사를 생포할 수 있다면 음양강시를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사준환은 서서히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마도천하. 지금껏 누구도 이뤄내지 못한 전인미답의 목표였다. 수많은 마도의 문파들이 꿈꿔왔지만 끝내 정파의 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지. 후대의 무림인들은 나를 마도천하를 연 위대한 초인으로 기록할 것이다. 으하하하!” 화려한 집무실 안으로 너털웃음이 울려 퍼졌다. 데이몬과 담천위는 밤새워 술을 마셨다. 그리고 채 술이 깨기 도 전에 헤어져야 했다. 담천위의 몸 상태를 고려해 위연이 서둘 러 교로 복귀하기로 결정내린 것이다. “꼭 와야 하네. 늦으면 화낼 걸세.” “걱정 붙들어 매. 꼭 갈 테니까.” “그래야 할 걸세. 친구가 화내는 꼴 보지 않으려면 말이야.” 이별이 아쉬운 듯 담천위는 데이몬의 손을 잡고 좀처럼 놓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각기 해야할 일이 있었다. 결국 담천위는 데이몬에게 이별을 고하고 떠나갔다. 호법원 고수 스무 명의 철벽같은 호위를 받으며. 데이몬 뒤에 서 있던 냉유성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어제 비 무에서 패한 왕평이었다. 패배에 대한 기억을 말끔히 씻어버린 듯 왕평의 표정은 평온했다. “잘 있게. 난 가보겠네.” “조심해서 가십시오.” “이로써 은원관계가 말끔하게 해소된 건가?” 냉유성이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잠시 머뭇거리던 왕평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다음에 만날 때 술이나 한 잔 하도록 하지. 내가 한 잔 사겠네.” “…….” “왜? 마교 무사와는 술 먹기 싫은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문파에서 파문되어 이젠 정파인이라 고도 할 수 없는 걸요. 술 약속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왕평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묵묵히 검을 들어 검례를 취했다. “훌륭한 무인에게 보내는 약소한 예의일세. 검술 실력도 훌륭 하지만 마음가짐이 더욱 훌륭하군.” 냉유성도 웃으며 마주 검례를 취해주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살짝 미소를 지은 왕평이 몸을 돌렸다. 발걸음을 빨리 해서 소 교주의 호위대열에 끼어든 그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데이몬과 냉유성은 그렇게 소교주 일행이 떠나가는 모습을 물 끄러미 지켜보았다. 잠시 후, 데이몬이 웃으며 냉유성을 쳐다보 았다. “마교 무사하고 술 약속까지 하다니 많이 변했구나.” “정사대전을 치를 때만 해도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일 겁니다.” “그랬겠지?” “솔직히 말해 지금까지는 마교 무사들을 죽여야 할 적으로만 인식했습니다. 저들에 의해 동료들이 무수히 죽어갔으니까요. 하지만 대해보니 그들도 종국에는 인간이었습니다. 비록 추구하 는 바가 다르지만 말입니다. 어차피 저들도 나로 인해 동료들을 잃었으니 과연 누굴 탓할 수 있겠습니까?” “맞아. 따지고 보면 똑같은 무인일진대 정사를 나눠 살육전을 벌인다니……. 정말 멍청한 짓이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데이몬은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기루로 가야 하지 않겠나? 애초의 목적대로 묵회를 끌어들이 려면 하던 대로 해야지.” 냉유성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호북성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그곳의 기녀들이 어떨지 궁금 하군.” “하하! 주공도 참.” 둘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호복성으로 향했다. * * * 호복성으로 넘어간 뒤 유명한 기루로 향하는 것이 데이몬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호북성으로 들어간 순간 어긋 났다. 일단의 무사들이 관도를 틀어막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이십대 초반의 젊은 무사들이었다. 승(僧), 도(道), 속(俗)이 섞여 있는 것을 보니 무림맹 소속인 것 같았다. “웬 놈들이지?”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데이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 는 사이 무사들이 접근해왔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십대의 중 년도사가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말을 걸어왔다. “그대가 데이몬이오?” “그렇소만.” “나는 무림맹 소속 비천각을 책임지고 있는 파사검 왕문정이 라고 하오.” “무림맹에서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시오?” 헛기침을 한 중년도사가 입을 열었다. “당신에 대한 구인장이 발부되었소. 묵회와 내통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기에 당신을 무림맹으로 모시고자 하오.” 데이몬의 눈썹이 역 팔자로 휘어졌다. “그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요? 내가 묵회와 내통하다 니…….” “모용세가 가주님의 증언이 있었소. 그분께서는 당신이 묵회 의 끄나풀이라는 확실한 심증을 가지고 있다 하셨소. 그리하여 장로회의를 거쳐 구인장이 발부되었소. 당신을 맹으로 데리고 와 자초지종을 조사해 보기로 말이오.” 데이몬은 실소를 지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러고 보니 모용세가 놈들 정말로 파렴치 한들이로군. 가문의 은인을 힘으로 제압하여 고문을 가하지 않 나, 도와주지 않았다고 음해를 하지 않나.” “어쨌거나 당신은 중요 혐의를 받고 있소. 우릴 따라 즉각 무 림맹으로 갑시다.” “만약 따라가지 않는다면?” 왕문정이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렇다면 무력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소.” 데이몬은 기가 막히는 것을 느꼈다. 왕문정이 데리고 온 무사 들은 갓 약관을 넘긴 애송이들이었다. 고작 이류에도 못 미치는 햇병아리들을 동원해놓고 무력 운운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진 데이몬은 실소를 지었다. 그러나 옆에 서 있던 냉유성은의 표정은 심각했다. 귓전으로 전음이 파고들었다. - 아무래도 이건 모용세가의 음모 같습니다. 암흑투기를 운용하게 됨으로써 데이몬은 무공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그가 전음을 보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 음모라니?” - 비천각이라면 각 문파의 방계 제자로 이루어진 조직입니다. 대부분 무에 재능이 없고 출신성분이 좋지 않은 자들이 들어가 지요. 게다가 왕문정이라는 도사는 저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곤륜 출신으로 매우 고지식하여 원론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지 요. 아마 명령을 받았다면 무조건 수행하려 할 가능성이 큽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고지식한 왕문정에다 별 볼 일 없는 햇병아리 들을 보낸 이유가 대관절 무엇이겠습니까? 데이몬은 금세 냉유성의 말뜻을 깨달았다. - 내가 저들에게 손을 쓰기를 바라는 것이겠군. 무림맹의 무 사들을 공격한다면 훌륭한 명분이 될 테니 말이야. - 바로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사석으로 간주할 수 있겠군요. 데이몬은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애송이들 에게 잡혀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림맹과 척을 지고 싶진 않다. 사준환에게 복수를 하려면 정파무림과 좋 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결국 저들을 따라가야 하나?’ 냉유성의 우려대로 이것은 모용세가의 음모였다. 데이몬을 옭 아맬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고지식한 왕문정과 햇병아리 들을 보낸 것이다. 원리원칙을 따지는 왕문정이라면 일의 전후 를 불문하고 데이몬을 무림맹으로 끌고 가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데이몬의 수하인 냉유성조차 감당할 수 없 다. 참다못한 데이몬이 냉유성을 시켜 비천각 무사들을 공격하 게 하는 것이 모용황이 바라는 바였다. 데이몬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 수 없지. 구인장이 발부되었다면 따라가 봐야지.” 왕문정의 얼굴에 득의한 빛이 떠올랐다. “순순히 따라오겠다고 한 점을 감안해서 포박하지는 않겠소.” 말을 마친 왕문정이 이번에는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냉유성 당신에게도 구인장이 발부되었소.” “그게 무슨 소리요?” “당신에 대한 구인장은 공동파에서 발부되었소. 당신 역시 무 림맹으로 가서 당신이 익힌 내공이 공동의 것인지를 검증받아야 하오. 어떻게 하겠소? 순순히 따라가겠소?” 어처구니가 없어진 냉유성은 입을 딱 벌렸다. 단전이 파괴되 고 근맥이 절단된 상태에서 파문되었기에 공동파와의 연이 완전 히 끊어졌다고 생각하던 냉유성이었다. 그런데 공동파는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데이몬을 힐끔 쳐다본 냉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어차피 주군께서 가시니 따라갈 참이었소.”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고 생각했는지 왕문정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좋소. 무림맹까지의 거리가 제법 머니 공연히 소란 부릴 생각 하지 마시오.” 이렇게 해서 데이몬과 냉유성은 비천각의 햇병아리들의 감시 를 받으며 무림맹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모용세가가 의도하는 대로 넘어갈 수 없었기에 둘은 잠자코 지 시에 따랐다. 비천각 무사들은 보편적으로 이류에서 삼류 정도의 무위를 가 진 방계제자들이었다. 여러 문파가 뒤섞여 있었는데 여자도 두 세 명 섞여 있었다. 처음 보는 색목인이 신기했는지 그녀들은 연 신 데이몬을 힐끔거렸다. “저것 봐. 정말 신기하게 생겼지?” “글쎄 말이야. 눈알이 어쩌면 저렇게 파랄까? 누런 머리칼도 신기해.” “그래도 제법 잘생기지 않았니?” “어머, 별소리를 하는구나. 내 눈엔 도무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 데이몬이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나름대로 소곤소곤 이야기하 는 것 같았지만 무위가 높은 데이몬에겐 뚜렷이 들려왔다. 그렇 다고 뭐라 할 수도 없었기에 냉가슴만 앓는 수밖에 없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 비천각 무사들은 둘에게 일체 말을 걸지 않았다. 중요 혐의로 구인되어 가는 용의자인 만큼 그럴 수밖에 없다. 물론 냉유성도 입방아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저 사람이 공동산의 검귀라며?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파 문되었을까?” “모르지 뭐, 그런데 무공이 그렇게 뛰어나다며?” “아냐. 파문당할 당시 단전을 폐하고 근맥을 절단했데.” “무공을 잃은 사람처럼 보이진 않는 걸?” “뭐, 흉악무도한 마공을 연성했겠지. 마공을 익히면 팔다리가 잘려도 다시 생겨난데.” 냉유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애송이도 이런 애송이들이 없었다. ‘한심한 놈들.’ 비천각 단원들 중에는 공동의 문하도 있었다. 하지만 냉유성 에겐 안면이 전혀 없는 제자였다. 과거 그는 비록 방계 출신이었지만 본산의 주요 제자 중 하나 였다. 그런 냉유성과 비천각으로 내려갈 만큼 재능 없는 문하생 과는 만날 기회 자체가 박탈되었다. 그렇게 재미없는 여행이 반나절 가량 계속되었다. 지루함을 해소시켜 준 것은 산적들의 등장이었다. 녹림도로 보이는 일단 의 산적들이 느닷없이 튀어나와 일행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크하하하! 감히 인사도 없이 와호채의 영역을 통과하려 하다 니……. 어디서 온 천둥벌거숭이들이냐?” 왕문정이 머뭇거림 없이 앞으로 나서서 신분을 밝혔다. “우린 무림맹의 비천각 소속 단원들이다. 용의자를 구인해 가 는 길이니 소란부리지 말고 썩 사라지거라.” 만약 그들이 일반 산적이었다면 무림맹이라는 말에 질겁해서 물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와호채는 녹림 72채에 속하는 산채였다. 산적들도 대부분 무공을 익히고 있었고, 그들을 이끄는 우두머 리는 무림에서 제법 악명을 날리는 개산대부 파극산이었다. 와 호채의 부채주인 그가 직접 작업에 나선 상황이니 무림맹이란 말에 겁을 집어먹을 이유가 없다. “크하하핫! 무림맹을 들먹이면 우리가 겁먹을 것 같으냐? 잔 소리 말고 성의를 표시하도록 해라.” 제 아무리 녹림 72채라고 해도 무림맹의 위세를 완전히 무시 하긴 힘들다. 때문에 파극산은 간단한 인사치례를 요구함으로써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그것이 체면을 살리며 물러나는 길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지식한 왕문정은 그런 절차 자체를 몰랐고 설사 알 았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을 위인이었다. “도적놈들에게 무슨 성의 표시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그 말에 파극산은 이를 갈았다. 적당히 성의표시만 하면 못이 기는 척 물러가려 했는데 상대가 강단 있게 나서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물러나면 체면이 말이 아니다.’ 수하들의 표정을 슬쩍 살핀 파극산이 호기 있게 고함을 질렀다. “형제들, 저들이 우리의 호의를 무시하는구나. 녹림의 법이 어 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어라.” 산적들이 흉관을 번뜩이며 병기를 뽑아들었다. “썩을 놈들. 간을 꺼내어 안주로 삼아버릴 테다.” “창자를 꺼내 몰을 졸라 주마.” 비천각 무사들도 지지 않겠다는 듯 병기를 뽑았다. 그곳에서 는 곧 치열한 박투가 벌어졌다. 산적들의 숫자는 서른 정도. 무공식력은 비천각 무사들 쪽 이 조금 높았지만 숫자에서 열세이다 보니 팽팽한 접전이 이 어졌다. 창 차창 창 데이몬과 냉유성은 하품을 하며 사방에서 벌어지는 난전을 감 상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볼만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지루함을 느끼고 말았다. “원 녀석들, 난잡하게도 싸우는구먼. 눈만 버렸다.” “그러게요. 저놈 보십시오. 치사하게 바닥의 흙을 집어 뿌리 지 않습니까? 저런 허접한 수에 당하다니 어처구니가 없군요.” “고수들의 싸움만 보다 이걸 보니 확실하게 수준차이가 나는 구나.” “대결이라기보다는 무턱대고 치고받는 개싸움의 일종이군요.” 한가하게 싸움구경을 하는 둘과는 달리 왕문정과 비천각 무사 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특히 왕문정은 고전하고 있었다. 개산대부라는 칭호에 걸맞게 파극산의 도끼에는 엄청난 역도가 실려 있었다. 육중한 도끼를 가느다란 장검으로 막아내려니 죽을 맛이었다. 흉흉한 분위기와는 달리 쓰러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워낙 수준이 낮은 무사들이라 빈틈을 노린 일격필살은 꿈도 꾸지 못 하고 그저 상대의 병기만을 마구 후려갈기는 수준이었다. 데이 몬의 관전평이 계속 이어졌다. “저것 보게. 검을 저렇게 쓰다간 금세 폐물이 되어버릴 텐데.” “지겹게도 주인을 못 만난 검이군요.” “그너저나 지겹군. 싸움구경이 이렇게 지루할 줄 몰랐어.” “제가 나가서 해결할까요?” “그래라. 더 이상 보기 힘들구나.” 싸움은 서서히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닥치는 대로 치 고 받느라 체력이 거의 소진된 것이다. 산적들과 비천각 무사들은 숨을 헐떡대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싸움은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 이리저리 상처를 입어 피를 흘 리고 있었지만 죽은 이는 없었다. “헉헉. 제법이구나.” “역시 무림맹 소속답군. 내가 이토록 고전해보기는 처음이다.” “좀 쉬었다가 할까?” “좋다. 소모된 내공이 회복되는 대로 다시 자웅을 겨뤄보자.” 양쪽 우두머리의 합의로 싸움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피아 가 병기를 꼬나 쥔 채 서로를 노려보며 숨고르기에 바빴다. 냉유성이 나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호송하던 용의자가 자리 를 벗어나자 왕문정이 인상을 썼다. “어딜 가시오?” 냉유성이 손에 든 검을 살짝 들어 보였다. “한 수 거들어 드리려고 하는데 괜찮겠소?” “아니오. 그대들에 대한 책임은 비천각에 있소. 따라서 보호 도 우리가 전적으로 책임지겠소.” “서두르지 않으면 들판에서 야숙을 해야 할 거요. 그러니 당신 들은 그냥 두고 보기만 하시오.” “어허, 괜찮대도…….” 왕문정의 말을 흘려들으며 냉유성이 앞으로 쓱 나섰다. 비천 각 무사들은 영문을 몰라 눈만 끔뻑거렸다. 단신으로 서른 명에 달하는 산적떼에게 다가가다니……. 파극산이 고리눈에 흉광을 번뜩였다. “웬 놈이냐?” “말을 가려가면서 해야지. 고수에게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은 수명에 큰 영향을 미친다네.”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냉유성이 반말 짓거리를 하자 파극산의 고리눈이 쭉 찢어졌다. “이런 창자를 꺼내어 젓을 담가먹을 노옴!”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덮어놓고 개산대부를 휘둘렀다. 오십 근은 되어 보이는 육중한 도끼가 냉유성의 머리통을 일직 선으로 내려 찍어갔다. 순간 냉유성의 허리춤에서 눈부신 검광이 뿜어져 나왔다. 번쩍 순간 파극산은 손이 허전함을 느꼈다. “어, 어, 뭐, 뭐야?” 어안이 벙벙해진 파극산이 눈을 크게 떴을 때 여러 조각으로 갈라진 개산대부의 파편이 어지럽게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본 파극산은 등골이 싸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고, 고수다!’ 그것이 파극산이 할 수 있는 생각의 전부였다. 쫘악 검의 옆면에 따귀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파극산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사정없이 바닥에 쑤셔 박힌 파극산의 의식은 깊은 암연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파극산을 일격에 기절시킨 냉유성은 머뭇거림 없이 산적떼 속 으로 달려들었다. 이어진 것은 일방적인 구타였다. 일격으로 상대의 병기를 토막내고 이어지는 이격으로 기절시 켜버리는 냉유성의 움직임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그는 산적들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병기 사이를 유유히 빠져 나가며 일격필살로 산적들을 꺼꾸러뜨리고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산적들은 냉유성의 일격도 막아내지 못했다. 따악 냉유성은 오로지 검면으로 산적의 따귀만 갈겨댔다. 내공이 주입된 검면에 따귀를 맞은 산적은 볼이 퉁퉁 부어오른 채 나가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왕문정이 입을 딱 벌렸다. “어, 어떻게 저럴 수가……. 어, 엄청난 고수였군.” 비천각 무사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이 혼신의 힘 을 다해 맞서 싸운 산적들을 마치 장난하듯 때려눕히는 냉유성 의 무위에 도무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햐!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놀라워. 도무지 눈을 믿을 수가 없군.” 절정 상급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냉유성에게 고작해야 이류와 삼류를 왔다 갔다 하는 산적들이 적수가 될 리 없다. 냉유성이 산적 서른 명을 모두 때려눕히는 데에는 채 일 다경(15분)도 걸 리지 않았다. 산적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신음을 흘리는 모습을 둘러보며 냉유성은 검을 검갑에 수납했다. 철컹 몸을 돌린 냉유성은 얼어있는 비천각 단원들을 보며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주공, 모두 정리했습니다.” “그것 참, 수고했다고 말하기도 뭣하구나.” “주공 말씀이 맞습니다. 와호채라면 녹림 72채에서 말석 중에 말석이지요. 사실 검을 뽑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하면 들판에서 노숙을 해야 하니 말이다.” 태평스러운 주종간의 대화를 들으며 비천각 무사들은 자신들 이 삼류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해야 했다. 6. 방계(傍系)만이 방계를 안다 산적과의 일전 이후 둘을 대하는 비천각 무사들의 태도가 판 이하게 바뀌었다. 특히 왕문정은 데이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냉유성은 자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고수이다. 언제라 도 마음만 먹으면 자신과 비천각 무사들을 깡그리 때려눕히고 달아날 수 있기에 호송책임자로서 처신을 잘할 수밖에 없다. 비천각 무사들의 태도는 또 달랐다. 그들 대부분은 문파에서 버림받은 신세나 다름없는 존재. 방계 중 방계였고 성장가능성 이 없다고 판단되었기에 무림맹의 잡무를 도맡아 하는 비천각에 배속된 것이다. 보편적으로 구대문파의 제자들은 직계냐 방계냐에 따라 배우 는 과정이 판이하게 다르다. 직전제자들은 문파의 장로들에게 직접 사사받는다. 여러 명의 장로들이 집중적으로 한 명에게 달 라붙어 가르치는 것이다. 그 아래 급 직계제자들은 절정 이상의 중진 고수를 사부로 모 시고 두 명에서 세 명 사이의 사형제들과 함께 무공을 전수 받 는다. 방계제자들의 경우는 처우가 확실하게 구분된다. 실력이 많이 떨어지는 사부 밑에서 적게는 일곱에서 많게는 열 명까지 배운 다. 그러니 직계와 방계의 실력 차이가 신간이 지남에 따라 벌어 질 수밖에 없다. 방계에서도 재능이 없다고 판단된 경우는 더욱 사정이 참담하 다. 겨우 일류 정도의 사부에게 수십 명의 제자가 달라붙어 배운 다. 그쯤 되면 사부가 아니라 무공 교두라고 봐야 한다. 비천각의 단원들은 거의 대부분 마지막 단계에 속해있었다. 그런 그들이 언제 냉유성과 같은 절정고수와 접해 보겠는가? 때문에 그들은 냉유성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말을 걸 기회만 기다렸다. 지나가다 한 수 얻어 배운다면 엄청난 기연이 되기 때 문이었다. 그러나 입방아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냉유성에겐 씨알도 먹히 지 않는 행동이었다. 냉유성이 산적들을 간단히 때려 눕혀준 덕분에 일행은 저녁 늦게 객잔에 투숙할 수 있었다. 물론 방을 얻고 저녁식사를 하는 비용은 모두 무림맹의 재정 에서 지출된다. 그러나 그 수준이 데이몬이 평소 먹고 자는 것과 심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저녁식사를 마친 데이몬이 인상을 썼다. “빌어먹을, 이걸 음식이라고 먹이다니…….” “평소에 먹던 것과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던걸 요? 이왕 따라가기로 결정하신 거 조금만 참으십시오.” 최근 데이몬을 따라다니며 호강하기는 했어도 기본적으로 궁 핍한 무사의 삶에 길들여져 있던 터라 냉유성은 개의치 않 았다. 데이몬이 도끼눈을 뜨고 냉유성을 느려보았다. “왠지 모르게 날 놀린다는 느낌이 드는 걸?”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냐. 틀림없이 그런 것 같아.”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엄청난 무위를 보여준 냉유성이 데이몬에게 쩔쩔 매자 비천각 단원들은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냉유성 정도 되는 고수가 고작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색목 인의 수하가 된 것이 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 리 보아도 무공을 익힌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데이몬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데이몬의 무위를 견식하게 되는 기회는 그리 오래지 않아 찾아왔다. 객잔에서 밤을 보낸 일행은 아침 일찍 일어나 출발준비를 서 둘렀다. 새벽에 일어나 무공을 연마하는 것이 생활화된 냉유성은 새벽 수련을 마치고 우물가에서 몸을 씻고 있었다. 완벽하게 균형 잡 힌 상체에서는 온갖 흉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도무지 성한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때서야 일어나 눈을 비비고 나서던 비천각 단원들이 술렁거렸다. “저, 정말 엄청나 흉터로군.” “정사대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다고 하던데…….” 사내의 벌거벗은 상체를 보자 여자단원들이 급히 눈을 가렸 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가 벌어져 있어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그 대로 드러났다. 등목을 마친 냉유성은 서둘러 무복을 입었다. 상체가 무복에 의해 가려지자 여단원들이 아쉬움 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하아.” “아깝다.” 검을 들어 허리에 찬 냉유성이 객잔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갔다. 청색 도포를 걸친 이십대 초반의 청 년이었다. 얼굴에 묘한 열망이 서려 있는 것을 봐서 냉유성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냉유성이 미간을 살짝 모은 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무슨 일이오?” “저……냉유성 사숙님이시죠? 저는 삼대 제자인 장문우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청년이 걸친 도포가 공동의 것이란 것을 알아차린 냉유성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사람 잘못 보셨구려. 난 더 이상 공동의 제자가 아니오. 그러 니 그대의 사숙이 될 수 없지.” 냉랭한 태도였지만 청년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일단 무림의 선배님 이시니까요.” “…….” “공동에 같이 있었으면서도 한 번도 못 뵈었네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청년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냉유성이 불쑥 입을 열었다. “나에게 할 말이 있소?” “우선 말씀을 낮춰주십시오. 듣기 거북합니다.” “그런가? 그럼 그렇게 하지.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나?” 말을 꺼내기가 힘든 듯 장문우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머 뭇거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떨리는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 나왔다.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호오, 나에게 비무를 청하는 것인가?” 장문우는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서,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제, 제 검을 보고 가르 침을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나는 공동에서 파문당했다. 그런 나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것 은 문규에 어긋나는 짓을 텐데?” 순간 장문우의 얼굴에 처연함이 떠올랐다. “어차피 공동에서는 저 같은 하급 제자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 습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공동 내에서 지 금까지 저에게 가르침을 주신 분은 한 분도 없었으니까요.” “…….” “제게 자질과 재능이 없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노 력할 자신은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물끄러미 장문우를 쳐다보던 냉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계 출신이었기 때문에 방계제자들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 는 그였다. “좋다. 그럼 검초를 한 번 시연해 보거라.” 장문우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그는 냉유성의 마음이 바뀔 까 서둘러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그의 검은 산적과의 싸움으 로 인해 날이 심하게 나가 있었다. “그,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장문우는 가장 최근에 배운 월향검법을 시전했다. 공동파 특 유의 패도적인 검세가 객잔 뒤뜰에서 펼쳐졌다. 그는 땀을 뻘뻘 흘려가며 베고 찌르고 자르는 등 혼신의 힘을 다해 초식을 펼쳤다. 나름대로 노력을 아끼지 않은 탓에 그는 월 향검법의 17초식을 모두 펼쳐 보일 수 있었다. 그런데 냉유성의 표정이 이상했다. 잔뜩 굳은 채 연신 입가를 실룩대는 것으로 보아 기분이 무척 상한 듯했다. 검초를 모두 시연한 장문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평가를 기 다렸다. “어, 어떻습니까?” “다른 초식을 전개해 보거라.” “이, 이것이 제가 아는 최고의 초식입니다.” “기본 검법을 펼치란 말이다. 설마 소초검을 배우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 소초검이란 갓 입문한 어린 제자들이 배우는 초식이다. 그러 니 장문우가 소초검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소초검은 지극히 단순하고 간결해서 거의 쓰지 않 는…….” “파문되기 전까지 난 소초검의 초식을 가장 많이 썼다. 공동검 의 특징은 빠르고 강맹함을 장점으로 삼고 있다. 거기에 가장 어 울리는 초식은 바로 소초검이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물론이다. 그러니 소초검을 한 번 시연해 보거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장문우는 기억을 더듬어 소초검을 시전했다. 기본검공이긴 하지만 소초검은 초식이 비교적 많았다. 무려 서른여섯 개의 초식을 모두 시전하고 나니 이마에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혔다. 장문우는 숨을 헐떡대며 냉유성을 쳐다 보았다. “다……마쳤습니다.” 냉유성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져 있었다. 사실 장문우가 전개 한 검식은 소초검이 아니었다. 그저 흉내만 비슷하게 내었다는 것이 냉유성의 평가였다. 자세부터 파지법까지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마음 같 아서는 그걸 소초검이라 펼쳤느냐고 호통치고 싶었지만 그는 심 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방계에다 재능까지 없는 제자이니 제대로 된 스승에게 배웠 을 턱이 없지.’ 불현듯 장문우가 측은해진 냉유성은 손을 내밀었다. “검을 다오.” 원래 외인에게 검을 건네는 것은 무림인에겐 금기사항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장문우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 자루를 앞 으로 해서 내밀었다. 장검을 받아든 냉유성이 살며시 자세를 취 했다. “이제부터 너에게 진정한 소초검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겠다.” 말을 마친 냉유성은 검식을 시연했다. 장검이 바람을 가르며 소름끼치는 파공성을 자아냈다. “헉.” 장문우는 눈을 크게 떴다. 냉유성이 보여주는 소초검이 자신 이 알고 있는 것과 엄청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검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사방팔방을 찌르다가 베었고, 그 에 따라 경풍이 획획 몰아쳤다. 놀랍게도 냉유성은 채 일 각도 되지 않아 서른여섯 개의 초식을 모두 마쳤다. 초식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검술시연을 멈추지 않았 다. 계속해서 소초검을 시전하는 것이다. 두 번째 시연에서 그 는 소초검의 초식을 거꾸로 펼쳤다. 장문우의 눈은 경악에 젖어 있었다. “어,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세 번째 시연에서 냉유성은 초식간의 순서를 무시했다. 사 초 식 비사낙연에서 곧바로 칠 초식 귀래첩영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십 초식으로 넘어갔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시연 역시 같은 식이었다. 아예 초식의 순서를 깡그리 뒤바꾸어 전개한 것이다. 그런데도 냉유성이 소초검의 서른여섯 초식을 다섯 번 전개하 는 데 걸린시간은 장문우가 한 번 시전한 시간보다도 짧았다. 검술시연을 마치자 장문우가 다급히 질문을 던졌다. “그,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초식간의 순서를 바꾸면 필경 자세가 무너지기 마련인데…….” “간단하다. 손이 이렇게 될 때까지 검을 휘두르면 된다.” 냉유성이 내민 손에는 굳은살이 단단히 박혀있었다. 바늘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딱딱했다. 그는 스승에게서 배운 그 대로 장문우에게 설명해 주었다. “정확히 말해 너는 소초검을 살짝 맛만 본 상태다. 그런 상황 에서 다른 검법으로 넘어간 것이다. 검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이다. 기본이 충실하지 못하니 다른 검술을 배워도 발전이 없는 것이다.” 순간 장문우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수많은 공동의 선 배 고수들 중 자신에게 이렇게 상세한 조언을 해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를 가르친 사부는 장문우에게 신경조차 쓰지 못했다. 혼자 서 서른두 명의 제자를 가르치니 그럴 짬이 있을 턱이 없다. 그 런 장문우의 귓전으로 냉유성의 조언이 계속 파고들었다. “혹시 삼재검법으로 일류고수를 꺾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 느냐?” 삼재검법이라면 무림에서 널 알려져서 어지간한 무사는 대부 분 알고 있는 기본 초식이다. 그런데 하급 무사들 사이에는 삼재 검법만 죽도록 익히면 고수도 꺾을 수 있다는 낭설이 은근슬쩍 떠돌고 있었다. 물론 장문우도 들은 적이 있다. 헛된 낭설이라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버렸지만. “드, 듣긴 들었습니다.”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초식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익히 고 초식을 임의대로 조합해서 전개할 수 있다면 충분히 일류고 수를 꺾을 수 있다. 물론 초식의 쓰임새와 거기에 숨은 오의를 완벽히 파악한 상태라고 가정해야 되겠지만 말이다.” “그렇습니까?” “소초검은 삼재검법보다 월등히 우수한 검법이다. 소초검만 제대로 익힌다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다. 하지만 넌 기본검공인 소초검조차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 다.” 냉유성은 손을 뻗어 장문우의 어깨를 툭툭 두르려 주었다. “내가 너의 검식을 좀 손보아 주겠다. 완벽한 소초검을 알려 주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수련하는 것은 오로지 네 몫이다. 제대 로 된 소초검을 펼칠 수 있는 순간 넌 그때부터 일류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저, 정말입니까?” “물론이다. 난 소초검만으로 일류무사들을 무수히 꺾어보았 다. 내가 전개한 정도로만 초식에 익숙해진다면 능히 일류라 불 릴 수 있지.” 장문우의 눈빛은 희망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평생 따라붙을 것만 같았던 삼류무사의 딱지를 떼어낼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것 이다. 비천각 단원들은 부러운 눈빛으로 자세 교정을 받고 있는 장 문우를 쳐다보았다. 물론 그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용기를 낸 이는 장문우 혼자뿐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치부했다. 패배자들의 대 펴적인 변명 중 하나였다. “자고로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지. 파문되었다고 해도 출신 이 어딜 가겠어?” “같은 문파 출신이라서 가르쳐 주는 것이겠지. 우리가 가서 간 청했다면 거들떠도 안 봤을 거야.” 그러나 그들 중에도 예외는 있었다. 여성단원 중 하나인 화운 설이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화운설은 여자라는 무기를 최대한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냉 유성은 이미 한 사람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상대 를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장문우가 했는데 나라고 못하겠어?’ 하지만 그녀와 장문우와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재능이 없다는 점은 같았지만 장문우는 그나마 노력파인데 비해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재능도 없는 데다 게으르기까지 하니 무공이 진 전될 까닭이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한 화운설은 모든 것이 실력 없는 스 승에게서 배운 탓이라 치부했다. ‘저자가 주공으로 모시는 것을 봐서 색목인도 만만치 않은 고 수일 거야.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가서 그를 구워삶아야 해.’ 마음을 정리한 화운설은 한쪽에서 구경하는 데이몬에게로 다 가갔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데이 몬이 느긋하게 나무에 기대 하품을 하고 있었다. 이미 비천각의 단원들은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날 채비를 갖 춘 상태였다. 냉유성이 장문우의 자세를 잡아주고 있으니 출발 을 미룬 것이다. 휘하 단원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기에 왕문정은 차분하게 자세 교정이 끝날 때를 기다려 주었다. 비천각 단원들을 생각하는 마 음만큼은 한결같은 왕문정이었다. “다행이로군. 문우가 가르침을 얻게 되었어. 그것도 상대가 절정고수가 아닌가? 기연이라고 볼 수도 있지.” 느긋하게 누워 햇살을 쬐고 있던 데이몬은 그림자 하나가 앞 을 가리자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무척 따뜻했는데…….’ 물론 햇살을 가로막은 존재는 화운설이었다. 그녀는 얼굴 가 득 미소를 떠올린 채 입술을 나풀거렸다. “안녕하세요, 전 화운설이라고 해요.” 그녀의 몸에서 지분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화장을 하고 있었다. 붉게 칠한 입술에 분이 짙게 발린 볼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데이몬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아무리 여인이지만 임무를 수행하는 무사가 화장을 하다니, 정신이 제대로 박히지 않은 년이로군.’ 하지만 데이몬은 그런 속마음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시오, 소저?” 데이몬이 정중하게 대꾸하자 화운설은 활짝 웃었다. 검술실력 은 모르지만 미모만큼은 수준급이라 자부했던 그녀였다. 최고의 매력이라 생각하는 보조개를 최대한 아름답게 지어가 며 화운설은 마음속의 말을 털어놓았다. “절정고수를 수하로 두고 계시니 당신 역시 무위가 뛰어나시 겠군요.” “그건 아니고 그저 한 몸 겨우 지킬 정도지요.” “수하가 저렇게 실력이 뛰어난데도요?” “수하가 칼을 잘 쓴다고 주공까지 그러란 법은 없지요.” 약간 실망하긴 했지만 그녀는 뜻을 꺾지 않았다. “그래도 기본 실력은 있으시리라고 봐요. 제게 무공을 좀 가르 쳐 주시겠어요?” 데이몬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검의 문양을 보니 화산파 소속인데 아무에게나 무공을 가르 쳐 다라고 해도 되는 것이오?” 그 말에 화운설은 살포시 웃었다. “당신과 나만 알고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잖아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게요.” 듣고 있던 데이몬은 속으로 혀를 찼다. ‘대가리에 똥만 찬 계집이로군. 개념이 하나도 없어.’ 무공이란 그리 쉽게 남에게 전수해 주는 것이 아니다. 문파의 제자란 자신이 익힌 무공의 비밀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 또 한 다른 사람에게 전수하는 일은 파문 이상의 엄중한 처벌을 받 는다. 소속이 없는 무사라면 그런 문규에서 해방되겠지만 그래도 비 전의 무공은 목숨을 걸고 유출을 막는다. 무공을 전수해 주는 경 우는 제자나 친족에 불과하다. 그런 관점에서 화문설의 요구는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하지 만 그녀는 아직까지 상황판단을 못하고 있었다. “수하 분은 저기에서 비천각 단원 중 하나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고 있어요. 그러니 제게도 가르쳐 주세요.” 엄밀히 따지면 냉유성은 무공을 전수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 렇다고 해서 깨달음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틀리게 익힌 초식 의 자세를 바로잡아주는 것뿐이었다. 데이몬은 이 철없는 아가씨의 머릿속에 개념을 집어 넣어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어제 지겹게 겪은 입방아에 대한 응 징도 섞여 있었다. “그러고는 싶지만 난 검술을 거의 모르오. 검을 쓰는 것을 보 니 검객이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오만.” “그래도 아는 검술 하나쯤은 있겠죠?”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데이몬은 뭔가 떠오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 아는 검술이 하나 있었어.” 화운설의 얼굴이 기대에 가득 찼다. “제게 가르쳐 줘요. 빨리요.” “내가 아는 검술이라곤 이것 하나뿐이오. 원한다면 가르쳐 드 리지. 우선…….” 데이몬은 손을 뻗어 화운설의 허리를 가리켰다. 그녀의 허리 춤에는 가느다란 장검이 양쪽에 하나씩 채워져 있었다. “익힌 지 오래되어 제대로 쓸 수 있을지 모르겠소. 그러니 검 을 좀 빌려주시오.” “거, 검을요?” 화운설은 잠시 고민했다. 화산파의 제자로서 사문의 존장이 아니면 검을 건네지 말라는 교육을 받아왔던 그녀였다. 하지만 장문우를 떠올린 화운설은 마음을 정하고 손을 허리에 가져갔다. ‘그래, 장문우도 건넸는데 뭐 안 될 것 있겠어? 호호, 안되면 그를 걸고 넘어지지, 뭐.’ 쌍검을 뽑아든 그녀는 그것을 데이몬에게 건넸다. “여기 있어요.” 데이몬은 받아든 검을 오른손과 왼손에 하나씩 쥐었다. 익숙 하지 않은 병기를 잡으니 아무래도 어색했다. “역시 낯설군. 쩝, 검은 역시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단 말이야.” “뜸들이지 말고 어서 보여줘요. 시간이 없단 말이에요.” 그녀의 채근에 데이몬은 자세를 잡았다. “잘 보시오. 내가 아는 검술은 오직 이것뿐이오.” 말을 마치는 순간 검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암흑투기가 주입 된 것이다. 파파파팟 푹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기운이 뭉클뭉클 배어 나오 더니 검을 감쌌다 쌍검은 금세 시커먼 불길에 싸여 활활 타오르 는 형상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본 화운설이 깜짝 놀라 물었다. “어, 어떻게 한 거죠?” “강기요. 내공이 특이하다보니 중원의 것과는 색과 형태가 다 를 것이오.”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가던 데이몬이 손을 좍 펼쳤다. 놀랍게 도 검이 저절로 허공에 떠올랐다. 그러더니 한쪽으로 쏜살같이 쏘아졌다. 쐐애애액 강기에 휩싸인 검이 날아가는 방향은 냉유성이 장문우의 자세 를 잡아주는 곳이었다. 뒤이어 데이몬의 광소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핫! 유성아, 어디 한 번 막아보거라.” 고개를 돌린 냉유성이 대경실색을 했다. 강기가 활활 타오르 는 검 두 자루가 자신을 향해 쏘아지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헛! 이, 이기어검?” 강기를 뽑아 올린 검을 저토록 자유자재로 날려 보낼 수 있는 기술은 이기어검밖에 없다. 오직 극에 이른 초절정 고수만이 시 전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냉유성은 검을 뽑 아 들었다. 차창 검에서 시퍼런 광망이 쑥하고 돋아 올랐다. 이기어검을 막아 내려면 내공이 허락하는 최대한도로 검강을 뽑아내야 한다. 그러는 사이 두 자루의 검은 허공에서 마구 용트림 치며 냉유 성의 전후를 노렸다. “에잇.” 검을 휘둘러 장검 한 자루를 퉁겨냈다. 강기와 강기가 부딪히 며 눈부신 폭발이 일어났다. 콰콰콰쾅 빛이 워낙 강렬했기에 구경하던 비천각 무사들이 일제히 고개 를 돌렸다. 냉유성은 적이 놀랐다. ‘반응을 보니 이기어검이 틀림없군. 주공께서 이기어검을 시 전할 수 있는 초극고수였다니 정말 놀랍군.’ 하지만 상황은 한가롭게 생각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녹록하지 않았다. 장검 한 자루를 퉁겨내긴 했지만 남은 한 자루가 사각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있는 힘껏 회피했지만 장검은 살아있는 뱀처럼 허공에서 마구 방향을 바꿔 날아들었다.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냉유성은 고함 을 질렀다. “절 죽이려고 그러십니까?”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검이 그 자리에 딱 멈췄다. 쏜살같이 날아오던 검이 마치 거짓말처럼 허공에 고정된 것이다. 겨우 한숨을 돌린 냉유성의 귓전으로 데이몬의 음성이 파고들 었다. “겨우 그 정도도 못 막느냐?” “제가 이기어검을 어떻게 막습니까? 그것도 불시에 가해진 기 습 아닙니까?” 냉유성의 볼멘소리에 데이몬은 히쭉 웃었다. “장난 한 번 쳐봤다. 수하 녀석의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 볼 겸해서 말이다.” “그러다가 목숨이 남아날까 걱정이군요.” 냉유성의 툴툴거림을 흘려들으며 데이몬은 손짓을 했다. 그러 자 두 자루의 장검이 쏜살같이 데이몬에게로 날아왔다. 검에 불어넣은 암흑투기를 회수하자 검은 불꽃이 순차적으로 사그라졌다. 데이몬은 검을 화운설에게 내밀었다. “자, 여기 있소.” 그러나 그녀는 검을 받아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입을 헤 벌리 고 있을 뿐이었다. 벌어진 입가로 침이 흘러내렸다.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경지의 기술. 그녀의 문파에서도 겨우 한두 명 시전할 수 있을까 말까한 기술을 바로 눈앞에서 보니 쉽 사리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데이몬이 재차 채근을 하자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검을 받아들었다. “내가 아는 검술은 오직 이것뿐이오. 심심풀이로 배워본 것이 지. 원한다면 가르쳐 드리리다.” 화운설은 멍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물론 배워도 전개할 수 없는 기술이란 사실은 개념 없는 그녀도 잘 알고 있었 다. 머뭇거리던 그녀가 조용히 머리를 흔들었다. “아, 아니에요.” “배우고 싶지 않소?” “그, 그렇지는 않지만 너, 너무 엄청나서……. 휴우, 아니에요. 잘 보았어요.” 횡설수설하던 화운설이 힘없이 머리를 떨궜다. 이기어검은 그 녀로서는 감히 엄두도 내기 힘든 경지의 검술이다. 뱁새가 황새 를 따라가려면 가랑이가 찢어지는 법. 쩌정 조용히 검을 검집에 꽂아 넣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검신에 금 이 좍좍 갔다. 그녀를 골탕 먹이기 위한 데이몬의 책략이었다. 화운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머! 이, 이를 어째?” “이런! 검에 불순물이 많았나보군. 좀 좋은 검을 가지고다니 지 그랬소. 어지간한 검은 검강을 버텨내기 힘든데…….” 그녀 같은 삼류 무사가 좋은 검을 가지고 다닐 수 없다는 사실 을 잘 알면서도 데이몬은 너스레를 떨었다. 울살이 된 화운설을 위로한답시고 내뱉은 말이 더 가관이었다. “마을에 가서 좋은 검을 한 쌍 사드리리다. 그러면 되겠소?” 데이몬은 이미 결말을 짐작하고 있었다. 검에 금이 간 것을 보 면 문파의 존장들이 분명 이유를 물어볼 것이다. 결국 외인에게 검을 건넸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되면 모르긴 몰라도 화운설 은 엄청나게 꾸지람을 들어야 할 터였다. 울상이 된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데이몬은 유쾌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데이몬의 악동기질은 중원에 돌아오고 나서도 변 하지 않았다. 일행은 출발을 서둘렀다. 장문우의 자세도 어느 정도 교정되 었기에 왕문정은 출발을 명했다. 비천각 단원들은 데이몬과 냉 유성을 에원싼 채 하남 쪽으로 발걸음을 재축했다. 묵묵히 걸어가던 데이몬이 슬며시 인상을 썼다. ‘젠장, 괜한 짓을 했군.’ 화운설을 곤란하게 만든 것은 좋았지만 그 대가로 힘들게 모 은 암흑투기가 상당량 소모되었다. 검을 전문적으로 익히지 않 았기 때문에 이기어검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암흑투기 를 주입해야 했다. 암흑투기를 다 쓰고 나면 다시 마법사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 에 데이몬은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후회했다. ‘할 수 없지. 무림맹에서의 일을 해결하고 나면 마교로 가서 장로들의 혈마기를 모조리 뽑아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어.’ 마교를 생각하자 의문점이 떠올랐다. 도대체 마교로 마정석을 보낸 세력이 어디일까가 주된 화두였다. 소교주와 밤새워 술을 마시는 동안 데이몬은 마교가 난관에 처한 이유를 모두 들었다. 누군가 알려지지 않은 세력이 마정지 지에서 출토된 마정석을 마교로 보냈고, 그로 인해 소교주 담천 위와 주요 장로들이 주화입마에 빠져 광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마교 측에서는 사준환을 배후세력으로 지목하고 있었지만 확 실하게 증거가 확보된 것은 아니었다. ‘젠장, 묵회에 이어 잠마련까지 조사해야겠군. 도대체 마정지 지는 어디에 있는 걸까?’ 만약 마정지지를 찾아낸다면 모든 일이 말끔히 해결된다. 현 경의 무위를 마음껏 뽐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정지지의 혈마기를 암흑투기로 전환시키는 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복수를 성공시킬 가능성이 월등히 높아 지기 때문에 데이몬은 기필코 마정지지를 찾아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런 데이몬을 비천각 단원들은 충격을 받은 듯한 눈초리로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들은 똑똑히 목격했다. 그들로서는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 는 고도의 검공인 이기어검, 그것도 한 자루가 아니라 두 자루의 장검을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모습을. 검은빛이긴 하지만 냉유성의 검강과 부딪히고도 이상이 없는 것을 보니 이기어검이 확실했다. 상실감으로 인해 자괴감까지 밀려올 정도로 그들이 받은 충격은 컸다. ‘우리하고 비슷한 나이에 이기어검까지 전개하다니……. 우 린 도대체 지금까지 뭘 했단 말인가?’ 왕정문 역시 의기소침하긴 마찬가지였다. 나름대로 무림맹의 일개 단을 맡고 있다는 자부심에 차 있었는데 이번 임무를 수행 하면서 기가 많이 꺾인 것이다. 그 역시 이번 임무에 대한 의구 심을 품고 있었다. ‘도대체 상부에서는 무슨 생각으로 비천각을 보낸 것일까? 엄 청난 고수일 것이 분명한 색목인과 냉유성을 도대체 우리가 감 당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일까?’ 하지만 그도 몰랐다. 그들을 파견한 모용황은 데이몬을 내공 이 하나도 없는 술사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호송단 일행은 정오가 되고 나서 야 인적이 드문 관도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그들을 쳐다보는 여러 개의 눈동자가 있었다. “뜻밖이로군. 놈들이 순순히 비천각을 따라갈 줄은 몰랐는데?” 천리경으로 일행을 보고 있는 자는 얼굴빛이 누런 중년인이었다.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인물. 바로 모용세가의 지낭인 모용천 이다. 데이몬에게 고문을 가한 장본인이 바로 여기에 와 있는 것 이다. 그의 뒤에는 복면을 한 스무 명 가량의 무사가 대기하고 있었 다. 복면 사이로 흘러나오는 눈빛이 범상치 않은 것을 보니 혹독 한 수련과정을 겪었음이 분명했다. 그들은 모용세가의 숨겨진 정예인 흑호대(黑虎隊)였다. 음지 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을 은민히 처리하는 검은 호랑이 들. 그들의 면면을 슬쩍 훑어본 모용천이 입가에 실소를 지었다. “뜻밖이긴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다. 어쨌거나 놈이 오늘 죽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모용천은 데이몬을 죽여 입을 막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솔직 히 말해 데이몬이 얽힌 비밀은 모용세가에도 큰 부담이었다. 만약 데이몬을 불시에 암습하여 제압하고 거기에다 고문까지 가한 사실이 무림맹에 알려진다면 모용세가의 위신이 추락될 것 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이번 일을 꾸민 것이다. “일을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지. 아무튼 이번 기회에 놈을 확실 하게 제거해야 한다.” 지금 돌아가는 일들은 모두 모용천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 다. 우선 모용황을 통해 삼류 무사들로 이루어진 비천각을 데이 몬에게 보낸다. 무림맹이 잡무나 도맡아하는 비천각이니만큼 데 이몬과 냉유성을 제압할 능력이 있을 턱이 없다. 만약 데이몬과 냉유성이 비천각 단원들을 때려눕히고 달아난 다면 모용천은 즉각 무사들을 투입할 계획이었다. 무림맹의 명 을 받고 출동한 단원들을 상하게 했으니 명분은 충분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데이몬은 순순히 비천각 단원들을 따라나 섰다.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어렵게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모용천은 작금의 상황을 돌발변수 중 하나로 생각해 놓은 다음이었다. “제 2단계를 써야 할 순간이로군.” 고개를 돌린 모용천은 무사들의 구성을 살폈다. 우선 가문의 일을 비밀리에 처리하는 흑호대 무사들이 열여섯이었다. 모두가 일류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다 가문에서 은밀히 뽑은 절정고수가 넷이다. 대부 분 절정 중급 이상이었기 때문에 모용천은 작전의 성공을 확 신했다. “절정고수 세 명을 붙이면 냉유성을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 다. 놈이 익힌 음한지기가 좀 꺼림칙하긴 하지만 삼 대 일이라는 수적 열세는 감당하기 힘들지. 색목인 술사 놈은 나와 절정고수 한 명이 맡는다. 내공이 전혀 없다고 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하고 도 남지. 문제는 놈이 강시를 날려버릴 때 쓴 수법인데, 그것 역 시 대응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모용천은 세가에서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강시들을 날려버릴 때 데이몬은 한참 동안 주문을 외웠다. 그러고 나서 강시들을 일 거에 날려버렸다. 모용천이 주목한 것은 주문을 외울 때 드러나는 틈이었다. “놈에게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 주문이 끝나기 전에 달려들어 처치해야 한다.” 물론 비천각 단원들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 흑호대 열여섯 명이라면 채 일 각도 되지 않아 모조리 시체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흑호대 개개인의 무위가 오히려 비천각주인 왕문정보다 더 높 았기에 모용천은 이번 일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확신했다. “모조리 처치하고 난 다음 색목인 놈과 냉유성의 시체를 감춰 비천각 단원들의 몰살을 그들의 짓으로 위장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일이 말끔히 해결된다.” 만약 일이 그의 계획대로 끝난다면 가문의 추문은 조용히 덮 여질 것이다. 모용세가로서는 상당한 부담이 사라지는 것이다. 게다가 데이몬이 모용세가의 본가가 멸망하도록 방조한 것도 그 결정에 큰 역할을 했다. 물론 실제적으로 공격을 가한 것은 묵회의 강시들이었지만 데이몬이 조금만 더 손을 썼다면 본가가 멸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멀리서 지켜보던 모용천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렸다. “놈! 본가가 멸망하는 데 일조를 한 데 대해서 톡톡히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7. 예고 없는 습격 비천각 단원들은 느릿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한가롭 게 주위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고, 냉유성은 날카로운 눈빛으 로 일행이 이동해 가는 방향을 살폈다. 그들이 가는 곳은 관도가 아니라 산을 넘어가는 지름길이였 다. 수레나 말을 끌고 간다면 관도로 이동해야겠지만 도보로 이동하니만큼 그 편이 나았다. 비록 삼류라고 해도 무공을 익 힌 무림인이었기 때문에 지름길을 택해도 아무런 무리가 없 었다. 주위에는 오가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인적이 드문 길을 비천 각 단원들과 데이몬, 냉유성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때 냉유성이 눈빛을 빛냈다. “매복이 있군요.” 길 양쪽에서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살기를 간파한 것이다. 습 격조가 살수였다면 효과적으로 살기를 감추는 법을 숙지했겠지 만 일반 무사들이다 보니 살기를 완전히 감출 순 없다. 왕문정이 의아한 눈빛으로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그게 사실이오?” “그렇소. 스물에 가까운 무사가 매복하고 있소. 하나같이 일 류 이상이오.” 왕문정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일류 이상의 무사 스무 명 이라면 엄청난 전력이었다. 뛰어난 무위를 보여준 냉유성의 말 이라 덮어놓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멈춰서 방진을 형성하라.” 비천각 단원들이 분분이 움직이며 방진을 형성했다. 그러나 숲에서는 아무 것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매복하고 있던 모용천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눈치가 빠른 놈이로군.” 매복이 탄로 났으니 더 이상 숨어있을 필요가 없다. 그가 손을 들자 은신하고 있던 무사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 러냈다. 무사들은 눈빛을 형형하게 빛내며 한껏 웅크린 비천각 단원들을 향해 접근했다. 유형화된 살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 왔다. “헉.” 비천각 단원들의 얼굴이 해쓱하게 질렸다. 이 정도 살기를 뿜 어낼 정도라면 싸워봐야 결과는 자명하다. “스, 승산이 없어.” 게다가 상대는 하나같이 복면을 쓰고 있다. 이쪽을 모두 죽여 입을 막겠다는 의도였기에 비천각 단원들은 절망감에 빠졌다. 그나마 호송책임을 맡고 있는 왕문정이 앞으로 나서 고함을 질 렀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우린 무림맹 소속 비천각의 단원들 로서 주요 용의자의 호송책임을 맡고 있다.” 나름대로 무림맹을 들먹여서 상대에게 압박을 가하려는 의도 였지만 애당초 통할 리가 없다. 복면인들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이쪽으로 접근해왔다. 특히 절정고수들의 신경은 온통 데이몬에게 쏠려 있었다. 주 문을 외우려는 기미가 보이면 불문곡직하고 달려들 채비를 갖 춘 채. 복면 사이로 감춰진 모용천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흐흐흐. 놈,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달아나지 못할 것이다.’ 색목인에겐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재주가 있다. 그러나 멀리서 본 묵회의 무사들과는 달리 자신들은 바로 옆에서 데이 몬이 공간이동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때문에 사라지기 위해서는 큼지막한 진을 그려야 한다는 사실 을 잘 알고 있었다. ‘주문을 외우거나 진을 그릴 시간을 주지 않는다면 놈은 이 자 리에서 죽는다.’ 데이몬은 눈매를 가늘게 좁힌 채 복면인들을 쳐다보았다. 제 법 두터운 천으로 얼굴을 가리긴 했지만 데이몬의 안력을 차단 할 순 없다. 그는 대번에 상대의 정체를 간파했다.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여기에 웬 일이지? 복면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말이야.” 복면인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비천각 단원들도 놀라 데이몬 을 쳐다보았다. 모용천이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섬서에 있는 모용세가가 여기서 왜 나오지?” 제법 능숙한 응수였지만 데이몬에겐 통할 리가 없다. “놀고 있네.” 데이몬은 코웃음을 쳤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모용천에 게로 쏟아졌다. “날 고문까지 해 놓고 모른 척하려니 힘들지? 하긴, 네 심정 다 안다. 가문의 은인을 불시에 기습해서 제압한 다음 고문까지 했 으니 당연히 찔릴 수밖에 없겠지. 내 입을 막으러 왔나?” “…….” “훌륭한 선택이야. 한 짓이 있으니 의당 그래야지. 충분히 이 해해.” 묵묵히 듣고 있던 모용천이 작심한 듯 복면을 벗어 던졌다. 함께 파견된 무사들이 깜짝 놀랐지만 모용천은 아랑곳하지 않 았다. “이유를 알고 있으니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되겠군.” “모두 죽여서 입을 막을 작정인가? 무림맹 사람들까지 모두?” 모용천의 시선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 비천각 단원들에게로 향 했다. “원래대로라면 네놈만 처치하려고 했지. 하지만 복면을 벗은 이상 계획이 변경되었어. 모조리 죽여 입을 막기로 말이야.” 그의 말에 비천각 단원들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고지식한 왕 문정만이 노기 어린 눈빛을 빛낼 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모용세가에서 무림맹의 명을 수행하는 비 천각을 공격하겠다는 뜻이오?” “어쩔 수 없소, 왕 단주. 시체는 고이 묻어드릴 테니 너무 섭섭 해 하진 마시오.” 말을 마친 모용천이 손을 들어올렸다. “너는 건드려서는 안 될 상대를 건드렸어. 그럼 잘 가도록.”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손을 내렸다. 그러자 뒤에 포진한 무사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각기 맡은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두 르는 모습에서는 일말의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데이몬은 덮쳐오는 무사들을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 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그는 암흑투기를 끌어올렸다.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놈들이로군.” 만약 담천위에게서 혈마기를 흡수하지 않았다면 데이몬은 무 척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수적인 열세 때문에 냉유성 혼 자서는 막아내는 것이 불가능했고, 비천각 단원들은 그야말로 있으나마나한 존재들이다. 아이언 골렘 탄타로스를 꺼내더라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 고 장담하기 힘들다. 모용세가는 말 그대로 완벽한 함정을 파 놓고 데이몬을 기다렸다. 하지만 거기에 큼지막한 변수가 끼어들었다. 데이몬은 담천위 로부터 혈마기를 흡수해 일정 시간동안 현경의 무위를 뽐낼 수 있다. 전세를 완전히 뒤바꿀 정도의 변수인 것이다.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냉유성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는 비천각 단원들을 보호하라.” “존명.” 냉유성이 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서는 것을 본 데이몬은 머 뭇거림 없이 몸을 날렸다. 암흑투기를 운용했기 때문에 그의 몸 은 검은 안개에 싸여 있었다. “속전속결이 최선이다. 놈들의 주력을 초전에 박살내야겠군.” 데이몬의 손등에서 검게 번들거리는 호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암흑투기가 집정되어 유형화 된 호조였다. 데이몬이 이쪽으로 몸을 날리자 의아한 듯 모용천이 눈을 크 게 떴다. “뜻밖이로군. 수하 뒤에 숨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그의 눈은 금세 경악으로 물들었다. 마중 나간 절정고 수 한 명이 너무도 어이없이 나가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모용천과 힘을 합쳐 데이몬을 처치하는 임무를 맡은 무 사였다. 목표물이 달려 나오자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검을 휘둘렀다. 파츠츠츠 검기가 선렬히 맺힌 공격이었기에 데이몬은 단숨에 토막이 날 것 같았다. 그 순간 데이몬의 손에서 시커멓게 번들거리는 호조 가 튀어나왔다. 푸캉 토막이 난 것은 공격해 간 무사의 장검이었다. 놀랍게도 검기 가 충만히 서려 있는 장검이 맥없이 부러져버린 것이다. 놀랄 겨를도 없이 데이몬의 맹공이 이어졌다. 나름대로 한 가 락하는 무사라서 반응은 신속했다. 반토막 난 검을 집어던진 뒤 허공에서 여러번 몸을 퉁기며 회피동작을 취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상대는 현경의 반열에 오른 초인. 미처 몸을 피하 기도 전에 데이몬이 내뻗은 순에 목덜미가 잡혔다. 이어 무사의 아랫배에 데이몬의 발이 발목까지 틀어박혔다. “우웩.” 단전이 완전히 으스러진 무사는 기혈이 역류하며 피를 토했 다. 피빛이 투명한 것을 보니 상세가 심상치 않았다. 단숨에 절정고수 하나를 무력화시킨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나머지 무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화들짝 놀란 모용천이 검을 꼬나 쥐고 마중 나갔다. “이, 이럴 수가? 내, 내공이 없다고 들었는데…….” 힘을 되찾은 데이몬은 정말로 엄청난 무위를 보였다. 암흑투 기를 이용해 현경의 벽을 뛰어넘은 덕분에 그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무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크헉.” 엄청난 타격을 입은 무사 한 명이 맥없이 뒤로 나가 떨어졌다. 명색이 절정고수라서 통증을 무릅쓰고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 켰지만 그것은 그의 불행이었다. 채 중심을 잡지 못한 사이 데이 몬의 호조가 아랫배에 틀어박혔다. 퍼억 무사는 네 개의 구멍이 뚫린 아랫배를 움켜쥐고 허물어졌다. 구멍으로 세차게 뿜어지는 투명한 피는 그의 내공이 소멸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절정고수 두 명이 순식간에 쓰러지자 모용천은 입을 딱 벌렸다. “마, 말도 안돼.” 사색이 된 모용천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비천각 단원들 을 덮쳐가던 무사들이 일제히 몸을 돌렸다. 모든 전력을 데이몬 에게 집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절정고수들도 펑펑 나가떨어지는 판국인데 일류 무사 들이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데이몬은 그야말로 신이 나서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 호쾌한 손맛.” 호조로 가볍게 두드리자 검이 여러 토막으로 잘려나갔다. 주 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무사의 턱에 데이몬의 발길질이 작렬했 다.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진 무사는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굴 렸다. 그러나 집요하게 달라붙는 데이몬을 피할 순 없었다. 세찬 발 길질이 아랫배를 향해 날아오자 무사는 사색이 된 채 단전을 가 렸다. “안 돼.” 이미 단전을 파괴당해 공력을 잃고 널브러진 동료의 모습을 목격한 그였다. 하지만 데이몬은 무정하게 무사의 다리를 걷어차 자세를 무너 뜨리고 단전을 으스러뜨렸다.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지는 무사의 얼굴은 절망감에 물들어 있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절정고수는 모두 전멸했다. 남은 이들은 전 의를 상실한 흑호대 무사들뿐이었다.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모 용천이 목청이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이, 이 잔인한 놈. 차라리 죽일 것이지 무공을 패하다니…….” “후후, 네놈 입에서 잔인하다는 소리가 나오다니 어울리지 않 는 걸?” “결단코 네놈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거의 이성을 잃은 모용천이 마구잡이로 데이몬을 향해 공격해 들어 갔다. 하지만 데이몬은 가벼운 발길질로 모용천을 저만큼 날려 버렸다. “네놈은 제일 마지막이야. 일단 똘마니들부터 처리해야지.” 흑호대 무사들은 채 일 각도 되지 않아 모두 정리되었다. 데 이몬은 다 한 명도 용서 없이 단전을 파괴하여 무공을 전폐시켰다. 그곳에는 곧 무공을 잃고 널브러져 신음을 흘리는 무사들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데이몬은 그때서야 모용천에게 다가갔다. 안색이 새하얗게 변 한 모용천이 뒷걸음질을 쳤다. “이, 이놈 오지 마라.” “한 번 손을 댔으면 마무리를 지어야 하지 않겠나? 네놈에게 고문당하며 이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를 것이다.” “나, 나도 무공을 폐할 것이냐?” “두 말 하면 잔소리 아니겠어? 시간이 없이 차근차근 고문하 지 못하는 것이 한이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더 이상 볼 것 없다는 듯 모용천의 단전을 걷어차 버렸다. “커억.” 전신을 관통하는 통증에 모용천은 입을 딱 벌렸다. 단전에서 올라오는 진기가 사라지며 전신에서 힘이 쭉 빠졌다. 당당한 무림고수에서 단숨에 범인으로 변해버린 모용천의 얼 굴은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데이몬은 빙글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네놈들을 무림맹으로 끌고 갈 작정이다. 가서 시시비비를 정확히 가려봐야겠지. 뭐, 증인이야 여기에 많으니 모용세가가 아무리 무림맹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더라도 곤란해질 수밖 에 없을 것이다.” 뼈를 깎는 듯한 통증 속에서 모용천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 그럴 순 없다.’ 데이몬이 말한 대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그는 본능 적으로 직감했다. 힘겹게 고개를 돌리니 몇몇 무사들이 쓰러진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모용천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금니에 심어놓은 독단을 깨물어 자진하라는 뜻이었다. 모용천이 동원한 무사들 대부분은 가문의 어두운 일을 처리하 는 흑호대. 따라서 그들의 어금니에는 복용 즉시 절명하는 독단 이 심어져 있었다. 사실 그들이 살아서 무림맹에 가는 것과 시체로 가는 것은 엄 청난 차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빼도 박도 못하는 반면, 후 자의 경우에는 그나마 발뺌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때문에 모용 천은 머뭇거림 없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네놈이 원하는 대로는 안 될 것이다.” 어금니가 부서지며 독단이 침에 닿자 모용천의 얼굴이 삽시간 에 시커멓게 물들었다. 복용하면 일 각도 되지 않아 절명하는 맹 독이었기에 모용천은 금세 의식이 흐려짐을 느꼈다. 그때 귓전으로 가소롭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파고들었다. “이것들이 감히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쓰려고 하네. 해독!” 주문이 끝나는 순간 모용천의 몸에서 독 기운이 순식간에 증 발되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모용천은 천장단애로 추락하는 듯한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세, 세상에…….” “경고하건대 내 앞에서 독을 쓸 생각은 하지 말도록.” 데이몬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독을 삼킨 무사들을 일일이 해 독시켰다. 몇몇 무사들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독단을 깨물었던 것이다. 뜻을 이루지 못한 모용세가 무사들의 얼굴에는 참담함이 가득 했다. 독의 대가라고 듣긴 했지만 설마 자결용 독단까지 해독하 다니……. 일을 모두 처리한 데이몬은 비천각 무사들이 있는 곳으로 다 가갔다. 왕문정은 아직도 멍하니 서서 데이몬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들을 포박하시오. 증인으로 무림맹에 데리고 가야 할 것 같 소.” 그때서야 왕문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알겠소.” 굳이 데이몬이 요구하지 않더라도 왕문정의 입장에서는 당연 히 그렇게 해야 했다. 상대는 호송단과 중요 용의자의 목숨을 노 린 중죄인들이다. 무림맹으로 끌고 가서 시시비비를 따져봐야 한다. 왕문정의 명령을 받은 비천각 무사들이 달려들어 그들을 포박 했다. 무공을 상실했기 때문에 모용세가 무사들은 변변찮은 저 항조차 하지 못했다. 굴비두릅 엮이듯 줄줄이 묶인 무사들을 보 며 왕문정이 입을 열었다. “숫자가 많으니 마을에 가서 큼지막한 함거를 구하도록 합시 다. 그래야만 먼 길을 가는 데 편할 것 같소.” “알아서 하시오.” * * * 그 사건 이후 데이몬을 보는 비천각 단원들의 눈빛은 판이하 게 바뀌었다. 원래 데이몬은 묵회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무림맹으로 호 송되는 용의자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인해 사정이 많이 바 뀌었다. 데이몬의 혐의에 대해 가장 크게 문제를 제기를 한 쪽은 모용세 가이다. 그런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기습을 가해왔으니 그 저의 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틀림이 없는 것 같군.’ 왕문정은 데이몬에게 씌어진 혐의가 누명이 확실하다고 생각 했다. 꽁꽁 묶인 채 끌려가는 모용세가 무사들이 바로 그 증거였 다. 게다가 데이몬의 맹활약 덕분에 비천각 단원들은 단 한 명도 상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비천각이 전멸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사실이다. 따라서 데이몬을 대하는 비천각 단원들의 태도는 무척 극진했다. 냉유성 역시 데이몬의 무위에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천상제를 시전하시는 것을 보고 짐작했지만 주공의 무위는 정말 상상 이상이군요. 어디서 그런 무공을 익히셨습니까?” “다 내가 잘난 탓이 아니겠느냐? 깊이 알려고 하지 말거라.” 껄껄껄 웃으며 잘난 체하는 데이몬을 보고 냉유성은 실소를 지었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야.’ 한편으로는 주공을 만난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었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미 저승에 가 있었을 것이다. 한편 비천각 단원들은 모용세가 무사들을 끌고 가는 데 많은 애로를 겪고 있었다. 이대로 무림맹으로 끌려가면 세가가 곤란 에 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들은 일부러 일행의 발길을 지 체시키려 했다. 이 사실을 세가에 전해 대응책을 세울 시간을 주 려는 것이 그들의 의도였다. “순순히 걷지 못하겠소?” 비천각 단원들이 눈을 부라리며 으름장을 놓고 때론 폭력도 행사했지만 모용세가 무사들은 쉽사리 굴복하지 않았다. 비록 내공을 잃었을망정 혹독한 수련을 겪어온 그들인지라 호락호락 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 문제는 다음 마을에서 깨끗이 해결되었다. 비천각 단원들은 마을에서 소 두 마리와 함께 가축을 운송하는 수레를 구입했다. 스무 명의 모용세가 무사들을 모두 태울 수 있는 크기 였다. 그런 다음 그 수레를 목수들에게 의뢰하여 함거로 개조했다. 그렇게 하자 모용세가 무사들은 더 이상 말썽을 부리지 못하게 되었다. 공허한 눈빛을 한 모용천과 나머지 무사들을 함거에 가둔 비 천각 단원들은 다시 여정을 시작했다. 쿠르르릉 함거를 끌고 가기 때문에 속도는 느렸지만 일행은 착실하게 무림맹을 향해 나아갔다. 그 시각 일행을 뒤쫓는 무리가 또 있었다. 데이몬을 생포하기 위해 나선 묵회주와 잠마련 무사들이었다. 수는 도합 아홉. 그러나 모두가 절정 이상의 고수들이었기 때 문에 이동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그들은 가장 먼저 데이몬이 머문 월향루를 찾아가 정보를 얻었다. “놈이 호북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서둘러 뒤쫓는다면 덜미를 잡을 수 있다.” 묵회주와 특무조는 머뭇거림 없이 이동했다. 그 덕에 그들은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아 느리게 이동하는 일행을 따라잡을 수 있 었다. 함거를 끌고 가는 일행은 보자 묵회주의 눈이 가늘게 뜨여졌다. “저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정보대로라면 색목인이 수하만 하나 달랑 데리고 움직여야 했 다. 그런데 호위하는 무사들은 대관절 무엇이며 또한 수인들이 갇혀 있는 함거라니……. 워낙 급하게 움직인 탓에 그들은 아무런 정보도 듣지 못했다. 만약 자세히 알아보았다면 저들이 무림맹에서 파견된 비천각 단 원들이란 사실을 파악했을 것이다. 하지만 걸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경험 많은 잠마련 무사 한 명이 가까이 접근해 일행의 무공수위를 살폈다. “대부분이 잘 봐줘야 삼류 정도의 쓸모없는 놈들입니다. 함거 에 갇힌 놈들과 마찬가지로 신경 쓸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보고를 받은 묵회주가 코웃음을 쳤다. “삼류 정도라면 생각할 것도 없지. 한 명만 투입해도 모조리 시체로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이야. 하지만 일에 만전을 기하는 것이 좋으니…….” 그는 노련하게 무사들의 역할을 배치했다. 그의 휘하에는 여 덟 명의 절정고수들이 있다. 대부분 마공을 극한까지 익힌 노련 한 무사들이다. 정사대전을 치른 고수들이라서 전투 경험도 많 았다. “색목인에게 나를 위시한 무사 네 명이 붙는다. 술사라서 기 습에 약하다고 하니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놈의 수하에게는 두 명을 붙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떨거지들은 남은 자들이 맡는다. 함거에 갇힌 놈들까지 모조리 죽여 입을 막는다.” 작전 설명이 끝나자 무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자 맡은 인물을 상대로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함거 때문에 일행의 속도는 극도로 느렸다. 비천각 단원들은 아무런 낌새도 눈치 채지못한 채 묵묵히 걷고만 있었다. 두 번째 습격을 간파한 이는 데이몬이었다. 잠마련 고수들이 워낙 기습에 능통한 경험자들이라 어지간한 냉유성도 미처 기미 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뒤에서 일단의 무사들이 접근하고 있다. 놀랍군. 모두 절정 이상이야.” 그 말에 냉유성은 화들짝 놀랐다. 뒤늦게 감각을 집중시켜 보 니 데이몬의 말이 사실이었다. “도대체 어떤 단체에서 저토록 뛰어난 무사들을…….” “방위를 보니 우리를 습격하려는 모양이야.” 둘의 대화를 들은 왕문정의 안색이 대변했다. “모두 경계 태세로……. 함거를 중심으로 방진을 형성하라.”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비천각 단원들이 방진을 짰다. 여러 번 합벽진을 연습했기 때문에 손발이 척척 맞았다. 잠마련 무사들은 원형진이 형성되자마자 모습을 드러냈다. 한 군데 웅크려 있는 비천각 단원들을 본 묵회주가 코웃음을 쳤다. “제법 반응이 빠르군. 하지만 날뛰어 봐야 독 안에 든 쥐 신세 를 면치 못할 것이다.” 잠마련 무사들이 살기를 유형화시켜 뿜어냈다. 오랫동안 연 마한 마기가 섞여 있었기에 말로 형용하기 힘든 위압감을 자아 냈다. 하지만 비천각 단원들은 별달리 동요하지 않았다. 상대가 모 두 절정 이상의 고수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이상했는지 묵 회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험이 전혀 없는 햇병아리들인가 보군.” 비천각 단원들의 시선은 한 곳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집요할 정도의 시선을 받던 데이몬이 앞으로 나서며 주먹을 꺾었다. “또 내가 힘을 써야 할 순간이로군.” 순식간에 암흑투기가 치솟아 올라 전신에 퍼졌다. 그 모습을 본 묵회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잘 되었군. 색목인만 생포하고 나머지는 깡그리 죽여 버려라.” 명령이 떨어지자 무사들이 마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몸을 날 렸다. 그로부터 일 다경 후, 사방에는 아홉 명의 페인(?)들이 버려져 있었다. 묵회주를 필두로 잠마련 무사들 모두 단전이 으스러진 채 맥없이 널브러진 것이다. 데이몬이 사정 볼 것 없이 손을 쓴 결과였다. 모로 쓰러져 있 던 묵회주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 말도 안돼. 어찌 이런 결과가…….” 단지 술사로만 알고 있던 색목인의 무위는 정말로 가공했 다. 엄선한 잠마련 무사들이 단 일 합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 어졌다. 특히 그는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고 뻗어버렸다. 정신을 차 리고 보니 하복부에서 아릿한 통증이 전해졌다. 단전이 으스러 져 내공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공허한 그의 눈빛은 함거 속에 갇혀 있던 모용천의 눈빛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했다. 데이몬이 침을 퇘 뱉으며 고개를 이 리저리 꺾었다. “이놈들은 어디서 온 놈들이지?” 눈을 크게 뜨고 접전을 지켜보던 냉유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잠마련에서 온 무사들 같습니다. 그 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군요.” 이 정도로 마공을 정교하게 익힌 무사라면 잠마련이나 마교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교에서 무사를 파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마교 소교주와 친우관계인 것을 제외하 더라도 곤란을 겪고 있는 마교에는 이럴 만한 여력이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뻔했다. 제압해 놓은 무사들을 둘러보던 데 이몬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호! 그러고 보니 낯익은 얼굴이 있군.” 성큼성큼 걸어간 데이몬이 묵회주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이제 보니 강시들을 이끌고 모용세가를 습격한 묵회의 윗대 가리로군. 그래, 무슨 일로 날 공격했지?” 묵회주는 입술을 앙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묵 회주를 보며 데이몬은 코웃음을 쳤다. “가는 동안 심심하지는 않겠어. 이놈을 고문해서 사실을 알아 내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은데?” 그 순간 묵회주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코와 입으로 검은 피가 주르르 흘러나오는 것을 봐서 독단을 삼킨 모양이었다. 사실 묵회주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행동하는 수밖에 없다. 현 재 작전에 동원된 이들은 그들이 전부였다. 자신들의 실력만 믿 고 후속대책을 전혀 마련해두지 않은 것이다. 결국 고문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자진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묵회주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무공이 폐지당한 잠마련 무사 몇의 얼굴도 시커멓게 물들었다. 하지만 데이몬 앞에서는 애당 초 통하지 않는 수작이다. “이것들이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아도 유분수지.” 데이몬의 주문영창이 이어진 순간 묵회주의 생명력을 잠식해 가던 독 기운이 말끔히 말소되었다. 독단을 삼킨 잠마련 무사들 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 어떻게…….” 경악으로 눈이 커진 묵회주를 사정없이 내팽개친 데이몬이 왕 문정을 쳐다보았다. “이놈은 묵회의 주요 인물이오. 게다가 나머지 놈들은 잠마련 의 무사들 같소. 몽땅 무림맹으로 끌고 가서 문초하는 것이 어떻 겠소?” 왕문정으로서는 불감청일지언정 고소원이다. 그것도 무림맹 의 골치를 부단히 썩이고 있는 묵회의 주요 인물이 아니던가! 잘하면 묵회와 잠마련의 연관관계를 밝혀낼 수 있기에 왕문정 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야지요. 이, 이들을 무림맹으로 압송하면 대인에게 적용된 혐의가 완전히 벗겨질 것입니다.” 묵회의 주요 인물을 제압한 데이몬이다. 그 사실을 차치하고 라도 묵회가 공격을 가해온 것만으로도 데이몬의 혐의는 이미 벗어던진 것이나 다름없다. 비천각 단원들이 즉각 함거에 칸막이를 설치했다. 철천지원수 라고 할 수 있는 모용세가와 묵회의 무사들을 함께 수감할 수 없 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묵회주와 잠마련 무사들은 포박된 채 함거 에 수감되는 처지에 놓였다. 바로 옆 칸에는 모용세가의 무사들 이 살기 어린 눈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분가를 멸문시킨 조직의 무사들인 만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죽일 놈들.” 잠마련 무사들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마주 살기를 피워 올렸다. “허, 그놈들 참 재미있게 노는군.” 데이몬은 한가롭게 함거 위에 드러누워 두 부류 수인들의 대 립관계를 감상했다. 이미 많은 일을 겪어온 비천각 단원들은 별 달리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8. 중원의 흑마법사 록슬레이 어두컴컴한 지하 통로. 띄엄띄엄 밝혀진 햇불이 간신히 어둠 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곳을 시커먼 흑포를 뒤집어쓴 인영 하나가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흑포자락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중원인의 것이 아니었 다. 갈색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윤곽이 뚜렷한 이목구비에서는 이질감이 뚜렷이 느껴졌다. 사물의 형체가 거의 식별이 되지 않는 어둠 속이었지만 흑포 인은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듯 묵묵히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서 그가 도착한 곳은 큼지막한 석문이 있는 곳이 었다. 석문 앞에는 아수라의 문양을 가슴팍에 새겨 넣은 무사들 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흑포인을 보자 무인들이 머뭇거림 없이 예를 올렸다. “흑법사님을 뵙습니다.” 흑법사라 불린 흑포인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하고는 석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석문 안의 공간은 제법 넓었다. 사방에는 관들이 기대어 세워 져 있었고, 가운데에는 큼지막한 나무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통 안에는 시뻘건 빛을 띤 액체가 가득 체워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 에 누군가가 목만 내민 채 액체 속에 잠겨 있었다. 기괴한 형상의 투구를 쓴 장대한 체구의 사내였다. 그를 본 흑포인의 눈이 밝은 빛을 발했다. “오랜만이구려, 대제.” 흑포인의 정체는 바로 흑법사였다. 잠마련의 최고 귀빈이자 사준환의 야망을 십 년 이상 앞당겨준 장본인. 그는 음울한 눈빛으로 액체 속에 잠긴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사내의 정체는 바로 잠마련의 비밀병기인 철마였다. 묵회의 이 름 하에 출동하여 엄청난 전과를 거둔 철마가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흑법사는 복잡한 눈빛으로 철마를 쳐다 보았다. “아르카디아에서 건너온 사람들 중에서 오직 당신과 나만 남 았구려. 최근에 모습을 드러낸 마법사를 빼면 말이오.” 석실 안에는 상당히 많은 숫자의 무사들이 은신해 있었다. 하 지만 흘러나온 말이 중원의 언어가 아니었으므로 흑법사의 말을 알아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흑법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 가 걸렸다. “아마 이 사실이 아르카디아에 알려진다면 사람들은 기절초 풍을 할 것이오. 구국의 영웅이자 아르카디아의 지배자인 크로 센 대제가 반쪽 언데드가 되어 내 명령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말 이오. 크하하핫!” 돌아가는 상황이 유쾌하다는 듯 흑법사는 너털웃음을 터트렸 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카디아에 있을 당시 그는 감히 철마의 그림자조차 쳐다보지 못하는 미천한 존재였다. 그런데 중원으로 건너온 뒤 상황이 판이하게 역전된 것이다. 흑법사는 조용히 자신의 과거를 떠올려 보았다. 그의 이름은 록슬레이. 나이 서른에 1서클 마법사가 되어 마왕 과 계약을 한 흑마법사였다. 대부분의 흑마법사들이 그러하듯 록슬레이 역시 음침한 곳에 자리를 잡고 연구에 몰두했다. 흑마법의 특성상 대량의 인간제 물이 필요했기에 록슬레이는 거리낌 없이 인근 마을의 주민들을 잡아다 실험에 투입했다. 흑마법의 근간은 절망에 빠진 인간들의 원념이다. 짐승이나 몬스터에게는 원하는 만큼의 원념을 뽑아낼 수 없다. 질적으 로나 양적으로 따져 봐도 인간의 것이 제일이었기에 흑마법사들 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잡아다 생체실험을 감행했다. 록슬레이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며 연구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수배가 되 어 수많은 기사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흑마법사들이 사람들에게 경원시되는 이유는 그들이 마왕과 계약을 맺었다는 점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 때문이었다. 록슬레이는 기사들에게 쫓겨 다니면서도 필사적으로 연구를 거듭하며 자신의 실력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그는 오래지 않아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크로센 제국의 최고정예인 크로센 기사단에서 기사들이 대거 파견된 것 이다. 다수의 소드 마스터들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록슬레이는 얼마 저항하지도 못하고 사로잡히고 말았다. 원래대로라면 록슬레이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재판을 받고 목이 매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처형은 일시 보류되었다. 감옥에서 빼내어진 채 어딘가로 옮겨진 록슬레이. 거기서 누 군가를 본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대외적으로 중 병에 걸려 운명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크로센 제국의 황 제를 만난 것이다. ‘세, 세상에…….’ 엄청난 무위와 통솔력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트루베니아의 위 기를 극복하고 미지의 세계인 아르카디아를 완벽하게 개척한 절 대자. 그 위업으로 말미암아 크로센이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은 아르카디아에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엄연히 수명의 한계가 있다. 반생을 함께 한 황후도 노환으로 세상을 뜨고 황위를 이을 황태자도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된 상황이었다. 제 아무리 크로센 대제라고 해도 영원히 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록슬레이의 눈에 비친 크로센 제국의 1대 황제는 그런 인간의 범주를 넘어 있었다. 나이가 무려 90을 헤아리는 크로센 대제의 겉모습은 고작해야 삼십대 초반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록슬레이가 눈을 의심하는 사이 크로센 대제가 잔잔한 눈빛으 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준비가 모두 끝났는가?’ ‘그렇사옵니다, 폐하. 마법진의 주축을 담당할 흑마법사들이 모두 준비되었으니 당장이라도 차원이동이 가능합니다.’ 그 자리에 모인 이는 크로센 대제와 백염을 길게 늘어뜨린 두 명의 노마법사였다. 그들 외에 흑마법사로 짐작되는 마법사 한 명이 더 있었다. 노마법사들을 본 록슬레이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아무리 적 게 잡아도 7서클의 마스터 이상으로 보이는 노마법사들은 록슬 레이의 마법실력으로는 감히 어쩔 수 없는 자들이었다. 고작해야 6서클의 엑스퍼트인 록슬레이로서는 죽었다 깨어나 도 노마법사들의 손을 벗어날 수 없다. 록슬레이가 긴장하고 있는 사이 마침내 차원이동 마법진이 작 동을 개시했다. 당시를 회상하던 록슬레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당시에는 차원이동 마법진인 줄 전혀 몰랐지. 전혀 모르는 사 이에 차원의 관문을 건너오게 되다니…….” 마법진이 발동하자 흑마법사들의 역할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사실 차원이동은 무척이나 불안정한 마법이다. 노마법사들은 그 불안정성을 보완하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그리하여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바로 마법진에 서 가장 힘을 받는 부위에 희생양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마법사가 죽을 경우 다량의 마나가 방출된다. 순간적으로 일 어나는 힘의 공백을 그 마나가 채워준다면 차원이동 마법진의 안정성이 한층 나아진다. 그러나 죽을 것이 뻔한 상황에서 아무 마법사나 배치할 순 없 다. 그 어떤 마법사가 자신이 죽을 줄 알면서 자진해서 마법진의 축에 서겠는가? 그래서 노마법사들이 생각해 낸 방법은 사형이 언도된 흑마법 사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물론 마법진에 배치된 흑마법사가 살 아날 가능성은 없다. 록슬레이에게 내려진 처형이 유보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당시 록슬레이는 똑똑히 목격했다. 자신과 같은 용도로 투입 된 흑마법사 한 명이 전신이 산산이 으스러진 채 처참히 절명하 는 모습을. ‘으아아악!’ 흑마법사의 희생을 바탕으로 차원이동 마법진이 완전히 발동 되었다. 차원이동 후 록슬레이가 정신을 차린 곳은 전혀 다른 세계였 다. 그곳은 바로 중원이었다. 의식을 회복했지만 록슬레이는 깨어나지 않은 척하며 그들의 계획을 엿들었다. 가장 먼저 귀에 들어온 음성은 바로 크로센 대 제의 것이었다. ‘나는 중원에 남을 생각이오. 그대들은 저 흑마법사를 마법진 의 축으로 삼아 아르카디아로 돌아가시오. 어차피 그러려고 데 려온 것이니 말이오.’ ‘하, 하오나 폐하…….’ ‘이곳은 바로 내 고향이오. 어차피 아르카디아에서는 내가 수 명이 다 되어 운명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지 않소?’ 말을 이어나가는 크로센 대제의 얼굴에는 쓸쓸함이 가득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평생을 같이한 아내에 이어 수많은 부 하 기사들도 천수를 마치고 저 세상으로 간 후였으니까. 그러니 크로센 대제에게 아르카디아에 대한 애착이 별달리 있을 턱이 없다. ‘아르카디아에서 맺은 인연은 모두 끝났소. 이제 중원에서 다 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 볼 생각이오. 어차피 본인이 아르카디 아를 위해 해준 노력은 충분하지않소?’ ‘그, 그러하옵니다. 만약 대제가 아니셨다면 트루베니아는 물 론 아르카디아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뒷일은 그대들에게 맡기겠소. 그러니 당신들은 돌아가서 다 음의 일을 잘 수습해 주기 바라오. 차후로 제국을 이끌어나갈 주 역들은 바로 그대들이오.’ 숨어서 듣고 있던 록슬레이는 마침내 노인들의 정체를 파악했 다. 그들은 바로 크로센 제국의 궁정마법사들이었다. ‘그럼 난 잠시 다녀오겠소. 그동안 준비를 해 두도록 하시오.’ 크로센 대제는 어딘가로 떠났다. 그리고 궁정마법사들은 아 르카디아로 돌아갈 채비를 갖추었다. 록슬레이는 대화를 통해 크로센 대제가 중원에 있을 당시 이 끌던 세력을 만나러 갔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전모를 알아낸 록슬레이는 생에 대한 애착을 불태웠다. 궁정 마법사들이 차원 이동하는 순간이 바로 자신의 생이 다하는 순 간이었다.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어떻게든 살아나야 해.’ 하지만 궁정마법사들의 실력은 록슬레이로서는 감히 저항할 엄두도 낼 수 없는 경지이다. 자신보다 수준이 높은 마법사가 둘 이나 있으니 탈출조차 불가능하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틈을 엿보던 록슬레이에게 마침내 기 회가 찾아왔다. 어딘가를 다녀온 크로센 대제가 심히 분개한 채 궁정마법사들에게 협조를 요청했던 것이다. ‘그놈들이 내가 이끌던 철혈문을 완전히 멸문시켰소. 그에 대 한 대가를 받아 내야겠으니 나를 좀 도와주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궁정마법사들은 두말하지 않고 크로센 대제를 따라나섰다. 그 들은 크로센 대제가 죽으라면 죽는시늉을 할 정도로 충성심이 강한 신하들이었다. 록슬레이도 궁정마법사들에 의해 마력이 금제당한 채 끌려가 야 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철혈문을 멸문시킨 것으로 추정되는 잠마련이었다. 바로 지금 흑법사 록슬레이가 몸담고 있는 문파 였다. 그곳에서 둘의 운명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록슬레이의 배신으 로 인해 크로센 대제는 탈출하지 못하고 잠마련에 사로잡혔다. 믿었던 궁정마법사들의 죽음이 큰 역할을 했다. 만약 그들이 죽지 않았다면 크로센 대제는 무사히 잠마련을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궁정마법사들이 모종의 장소에 탈 출용 공간이동 마법진을 설치해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록슬레이의 배신으로 인해 궁정마법사들은 죽고 크로 센 대제는 힘이 다해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 대가로 록슬레이는 꿈꾸어왔던 자유를 얻을 수 있 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정적으로 반쪽뿐인 자유였다. 지난 일을 떠올려 본 흑법사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연구할 여건을 충족시켜 주긴 하지만 잠마련 역시 날 이용하 려고만 한다. 정확히는 내 머릿속에 담긴 지식이겠지만 말이야.” 야망을 도와주는 대가로 제법 높은 지위와 무사들의 생사여탈 권을 부여받기는 했지만 사준환은 자신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 다. 호위해 주는 무사들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지금은 자신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지만 만약 사준환이 지시를 내린다면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을 공격할 것이다.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연구 성과를 내는 방 법밖에 없었다. 흑법사는 조용히 사준환을 떠올렸다. “정말 철두철미한 사람이야. 사람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확실 히 아는 인물이지.” 불현듯 고향인 아르카디아가 떠올랐다. 향수 때문인지 흑법사 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기회가 된다면 돌아가고 싶군. 충분한 연구를 해서 이젠 더 이상 생체실험이 필요하지 않으니 말이야.” 그간의 연구를 통해 흑법사는 6서클의 마스터가 되어 있었다. 조금만 더 정진한다면 7서클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나가 희박한 중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아르카디아로 돌아갈 방법이 없기에 흑법사는 길게 한숨 을 내쉬었다. “일단은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수밖에 없군. 마정지지의 마 력을 조금이라도 흡수할 수 있다면 사정이 달라졌을 테지만…….” 고개를 흔든 흑법사는 손을 들었다. 그러자 일단의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 철마를 옮겨라.” 어눌한 중원어로 내뱉은 명령에 무사들이 철마에게로 달라붙었다. 흑법사에게 내려진 새로운 명령은 철마를 마정지지로 데리고 가서 그곳의 마기를 흡수시키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진행된다면 엄청난 괴물이 탄생할 터였다. 마정지지의 혈마기는 인간의 몸으론 감당하기 힘들다. 어둠의 마나에 익숙한 흑법사조차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이니 다른 사 람들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활강시인 철마는 가능하다. 혈마기가 주입되면 생명력 이 완전히 사라진 온전한 강시가 되겠지만 파괴력은 갑절 이상 높아질 터였다. 무사들이 철마를 옮기는 것을 본 흑법사는 느릿 하게 몸을 돌렸다. “마정지지가 이곳에서 무척 멀리 떨어져 있으니 준비를 많이 해야겠군.” 저벅저벅 어두운 통로를 한참동안 걸어 흑법사가 도착한 곳은 규모가 큰 석실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오가며 실험을 하고 있었다. 곳곳 에 부글부글 끓는 솥이 설치되고 있었고 매캐한 냄새가 코를 파 고들었다. 그들은 바로 독객들이었다. 잠마련이 중원에 산재한 수많은 독문을 멸문시키며 잡아들인 독 전문가들. 사천 당문의 인물들을 비롯해 오독문 등등 여러 독 문 출신의 독객들이 한데 모여 독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만성지독 때문인지 독객들의 얼굴은 누렇게 떠 있었다. 하나 같이 넝마가 된 옷을 걸치고 발목에는 두터운 쇠고랑이 채워져 있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독객들은 그야말로 기계 적으로 독을 만들어내고 있있다. 흑법사는 중앙에 설치된 거대 한 솥으로 느릿하게 걸어갔다. 흑법사를 보자 추레한 몰골의 노인 하나가 다가왔다. 한때는 사천당문의 장로였지만 지금은 흑법사의 조수에 불가한 노인이 었다. “독이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시술만 하시면 될 것입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흑법사는 마법 지팡이를 꺼내어 들고는 솥 앞에 섰다. 쓰쓰쓰쓰 마법 지팡이로 마나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흑법사가 하는 일은 바로 마법을 이용해 독의 속성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마법으로 변형된 독은 기존의 독에 비해 속성이 판이하게 달 라진다. 무림맹에서 아직까지 묵회의 독을 해독하지 못하는 것 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마법을 이용해 변형시킨 독은 기존의 방법으론 결코 해독하지 못한다. 주문이 이어지자 솥에 그득한 독의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흑 법사가 이렇게 처리하고 난 독은 모종의 자리로 옮겨져서 독강 시에 주입되거나 아니면 다른 용도로 사용될 터였다. 처리를 마친 흑법사가 지팡이를 흑포 속으로 집어넣었다. “끄, 끝났다.” 그러자 독객들이 솥에 달라붙었다. 엄청난 독성을 품고 있기 때문에 일반 무사들은 솥에 접근할 수 없다. 오직 독에 익숙한 독객들만이 독을 다룰 수 있다. 그 모습을 흘겨보며 흑법사는 몸 을 돌렸다. “숙소로 돌아가서 좀 쉬어야겠군. 이젠 연구도 지겨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흑법사는 걸음을 옮겼다. * * * 데이몬 일행은 마침내 무림맹의 정문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웅장한 무림맹의 본단을 본 그의 눈빛은 감회에 젖어 있었다. ‘드디어 무림맹을 구경하게 되는군.’ 사파의 마두였던 그에게 무림맹 본단은 결코 갈 수 없는 금지 (禁地)였다. 기라성 같은 정파고수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어 지간한 무공수위로는 접근조차 불가능했다. 마왕이 되고 난 지금에서야 겨우 구경을 하게 되었으니 데이 몬의 기분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는 고개를 돌려 함거를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묵회주가 완 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널브러져 있었다. 데이몬의 입가에 흡족 한 미소가 떠올랐다. “묵회가 잠마련의 하부세력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은 정말 큰 성과야.” 데이몬은 무림맹으로 오는 동안 묵회주에 대한 취조에 몰두했 다. 가장 큰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인 만큼 정확한 사실을 알아 내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묵회라는 큰 단체를 책임지는 만큼 묵회주의 의지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데이몬을 감당할 정도로 굳건하지는 않았다. 각종 고문에 이어 정신계 마법까지 아낌없이 사용한 덕분에 묵회주는 알고 있는 사실을 모조리 토설해 냈다. 그것도 비천각 단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리하여 묵회가 잠마련의 하부조직이란 사실이 만천하에 드 러났다. 사실을 안 왕문정과 비천각 단원들은 아연해 했다. “놀랍군요. 잠마련이 무림정벌을 위해 묵회라는 조직을 만들 어 내다니…….” 누구도 알지 못했던 비밀을 알게 된 비천각 단원들은 밤을 새 워가며 행군했고 마침내 무림맹의 본단이 보이는 이곳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한동안 무림맹을 쳐다보던 데이몬이 왕문정을 쳐다보았다. “어서 들어갑시다. 알려야 할 것이 많을 것 같으니 말이오.” “그래야지요.” 왕문정의 명령을 받은 비천각 단원들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임무 완수에 이어 엄청난 비밀까지 알아낸 덕분에 그들의 발걸 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무림맹의 정문에는 엄선된 무사들이 파견되어 경비에 열중하 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눈을 크게 떴다. “응? 저들은 누구지?” 큼지막한 함거 한 대를 끌고 일단의 무사들이 다가오고 있었 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무사들은 바짝 긴장한 채 검 자루에 손을 갖다댔다. 그중 한 명이 앞으로 쓱 나섰다. “정지. 누군지 정체를 밝히시오.” 그 말에 대응한 이는 왕문정이었다. “우린 비천각 소속 무사들이오. 상부의 명령을 완수하고 돌아 왔소.” 비천각이란 말에 무사들의 얼굴에 비웃음이 어렸다. “비천각이 임무를 맡아 외부로 나가는 일이 있었나?” “뭐,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하러 갔겠지. 아무튼 나갔다는 보고 는 받았어.” 늘 있는 일이었기에 왕문정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중대한 정보를 가지고 왔으니 총관님을 불러주시오.” 경비무사가 심드렁한 태도로 머리를 흔들었다. “총관님은 바쁘시오. 자질구레한 일로 총관님을 귀찮게 하지 말고 대신 우리에게 말하시오.” “허어, 이 사람이 아직까지 사태파악을 못하는군. 좋소. 말하 리다.” 왕문정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무사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부릅떠졌다. “그, 그러니까 저 함거에 모용세가의 무사들 외에 묵회주와 잠 마련의 마두들이 갇혀있다는 말이오?” “그렇소. 이제 이해가 되시오?” “…….” “어서 총관님을 불러주시오.” “아, 알겠소. 그, 그리하리다.” 화들짝 놀란 무사가 급히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왕문정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만저만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비천각 단원들은 경비무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비천각이 창설된 이래로 지금과 같은 관심을 받은 경 우는 처음이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금세 총관이 불려나왔다. 제대로 의관도 갖추지 못한 그는 경공까지 펼쳐가며 정문으로 달려왔다. “본인은 무림맹의 대소사를 관할하는 총관 양모외이외다.” 건성으로 신분을 밝힌 양무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왕문 정을 쳐다보았다. “비천각주는 지금 즉시 그간의 일을 보고하기 바라오.” “알겠습니다.” 왕문정이 차분한 어조로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했다. 명받은 대로 데이몬과 냉유성을 데리고 왔으며, 오는 도중 모용세가와 묵회의 습격을 받았지만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격퇴하고 도리 어 기습에 참여한 무사들을 모두 사로잡아 데리고 왔다는 말에 양무외의 눈이 번쩍 커졌다. “그, 그게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함거 속에는 모용세가와 묵회주, 그리고 잠마련 의 무사들이 수감되어 있습니다. 모두 데이몬 공께서 사로잡으 신 것이지요.” 얼마나 놀랐던지 양무외는 말을 떠듬거렸다. “그, 그것이 사실이라면 내, 내 선에서 처리할 일이 아니오. 잠 깐만 기다리시오. 이, 이 일을 맹주님께 보고 드려야겠소.” 만약 모용세가에서 손을 쓴 것이 사실이라면 이 일을 반드시 맹주에게 보고해야 한다. 양무외는 맹주 쪽 사람이다. 만약 모용 세가와 친분이 두터운 장로파 사람들이 이 일을 알게 된다면 함 거에 수감된 무사들을 빼돌릴 우려가 있었다. 그는 급히 경비무 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들을 철저히 보호하라. 그 누가 오더라도 수인들을 내어줘 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무사들의 대답을 들은 양무외가 급히 본전 쪽으로 몸을 날렸다. 데이몬의 등장과 더불어 무림맹이 발칵 뒤집혀졌다. 모용세가가 비천각 단원들을 습격했다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 다. 무림을 온통 뒤흔들어놓은 조직인 묵회의 수장과 잠마련의 무사들이 붙잡혀 왔다는 사실에 경비무사들은 혀를 내두르며 놀 라워했다. 모든 일을 똑똑히 보고들은 비천각 단원들은 단번에 폭풍의 핵으로 떠올랐다. 경비무사들에게 둘러싸인 그들은 어깨를 으쓱 거리며 그간의 경과를 설명해 주었다. “묵회의 무사들이 습격해 왔을 때 죽었구나 싶었소. 절정고수 만 여덟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그,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어떻게 되긴, 데이몬 공께서 나서서 간단히 제압하셨지. 지금 껏 살면서 그토록 멋지게 싸우는 모습은 처음 보았소.” 그동안 데이몬은 한가롭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림맹을 감 상했다. 포로로 잡혀오지 않은 다음에야 사파의 무사가 무림맹 구경을 할 순 없다. 그때 일단의 무사들이 이쪽으로 접근해왔다. 데이몬은 눈을 크게 뜨고 그쪽을 살폈다. “무림맹주가 오는 건가? 응? 저 늙은이는…….” 데이몬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일단의 무사들을 대동하고 달려오는 이는 바로 모용세가의 가주인 모용황이었다. 그리 반가운 얼굴이 아니었기에 데이몬의 눈가에 스산하게 살 기가 어렸다. “흐흐흐. 보낸 무사들이 모조리 사로잡혔을 줄은 몰랐을 것이 다.” 그들이 다가오자 경비 무사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의 입 장으론 모용세가의 가주를 통과시킬 순 없다. 어쨌거나 총관인 양무외의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으니까. “길을 열어라.” “맹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우린 모용세가다. 그런 우리의 앞을 막을 생각이냐?” “이미 별도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맹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착잡한 표정으로 실랑이를 듣고 있던 모용황이 앞으로 쓱 나 섰다. “나 혼자만이라도 안 되겠나?” “…….” “저곳에 우리 식솔들이 있네. 잠시만 만나보겠네. 제발 부 탁하네.” 명색이 모용세가의 가주이다 보니 무사들이 머뭇거렸다. 모용 황의 입가에 처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잠시만 비켜주게. 대신 다른 무사들은 이곳에 대기시키겠네.” “그럼 잠시만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무사의 허락을 얻은 모용황이 재빨리 함거로 다가갔다. ‘사, 사실이었군.’ 갇혀 있는 무사들을 보자 모용황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 졌다. 입술을 비집고 애잔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천아야.” 함거에 갇혀 있던 모용천이 차마 볼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수그렸다. 한 번 훑어본 것만으로도 모용황은 식솔들의 상태를 대번에 알아차렸다. 빛을 잃은 눈동자, 십 년은 늙어버린 얼굴. 갇혀 있는 무사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내공을 잃은 상태였다. 반드시 임무를 성공시키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떠나가던 모습과 는 사뭇 딴판이었다. 습격조로부터 연락이 끊겼을 때 얼마나 걱정했던가? 좋지 않 은 일이 생겼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설마하니 전원이 무공이 폐 지당한 채 사로잡혔을 줄은 몰랐다. 식솔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모용황은 줄곧 후원의 숙소가 아 닌 지객당에 머물러왔다. 바로 그 때문에 비천각이 복귀하자마 자 달려 나올 수 있었다. ‘감히 천아를 폐인으로 만들다니.’ 모용황의 깊은 눈동자 속에서 서서히 살기가 떠올랐다. 데이 몬을 노려본 그가 검 자루를 꽉 쥐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했었나?” 데이몬이 질 수 없다는 듯 눈빛을 맞받았다. “무슨 소리요?” “무인에게 내공은 전부나 다름없다. 차라리 죽일 것이지 단전 을 파괴하다니…….” 데이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어차피 날 죽이려고 습격조를 보낸 것 아니었소? 방귀 뀐 놈 이 성낸다더니 바로 그 꼴이구려.” 느물느물한 데이몬의 대꾸에 모용황은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놈! 죽여 버리겠다.” 머뭇거림 없이 검을 뽑아든 모용황이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아, 아니 되오.” 대경실색한 경비무사들이 앞을 막았지만 그들의 실력으론 모 용세가의 가주를 막을 수 없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간단히 무사 들 사이를 빠져 나온 모용황이 덮어놓고 검초를 날렸다. 슈슈슈슉 처절정 고수의 일격답게 수십 개의 환영이 데이몬의 전신을 뒤덮었다.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지.” 싸늘한 비웃음과 함께 데이몬의 몸이 그것에서 퍽 꺼졌다. 마 치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모용황은 당황하지 않고 전신의 감각을 끌어올렸다. 이미 한 번 겪어보았기 때문에 대응책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 는 것이다. 하지만 그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모용세가에서 데이 몬은 블링크를 써서 공간전이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데이몬은 이미 암흑투기를 보충해 힘을 얻은 상태. 모습은 비 슷했지만 이번 현상은 고도의 무공에 의한 것이다. 바로 이형환 위인 것이다. 몸놀림이 워낙 빨랐기에 그 자리에서 사라진 것처 럼 보였을 뿐이다. ‘암흑투기가 얼마 남지 않았어. 빨리 정리해야 해.’ 모용황의 사각으로 모습을 드러낸 데이몬은 거무튀튀한 손톱 이 돋아난 호조를 슬쩍 휘둘렀다. 거기에 실린 위력은 상상을 초 월했다. “헉.” 대경실색한 모용황이 종횡무진 검을 휘둘렀다. 역시 초절정 고수다운 대응이었다. 그러나 데이몬의 호조는 검세를 유유히 파고 들어와 모용황의 팔뚝 살을 살짝 뜯어놓고 지나갔다. “크윽.” 핏줄기가 솟구치는 팔을 움켜주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모용황. 그러나 데이몬의 공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모용 황은 지혈조차 하지 못한 채 검을 휘둘러 공세를 막아나가야만 했다. 창 차창 창 초절정 고수답게 면밀하게 검막을 쳐서 방어하는 모용황의 모 습은 한마디로 일품이었다. 하지만 힘을 되찾은 데이몬은 그보다 족히 두세 단계 위의 고 수였다. 거무튀튀한 강기가 솟아오른 호조가 검막을 사정없이 가르고 들어갔다. 콰콰콰콰 모용황은 체면 따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로 나뒹굴었다. 나 려타곤을 쓰지 않는다면 막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현경의 고수 가 전력을 다해 공격하니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때서야 파견한 무사들이 제압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아차린 모용황이었다. “미, 믿을 수 없어. 이렇게 강하다니…….” 데이몬의 싸늘한 얼굴에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뭔가 단단히 오판한 모양이로군. 이게 내 본래의 실력이야.” 한가롭게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데이몬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그 역시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몸속의 암흑투기 가 급속도로 소진되고 있었다. 그러니 한 시라도 빨리 모용황을 쓰러뜨려야 하는 것이 데이몬의 입장이었다. ‘암흑투기를 더 소모한다면 보충하기 힘들다.’ 썩어도 준치라고 겨우겨우 공격을 막아나가는 모용황이었다. 그러나 공격하는 데이몬의 수준이 월등히 높다보니 파탄을 드러 내지 않을 수 없다. “크헉.” 강력한 일격에 자세가 무너진 모용황은 그만 큰 허점을 드러 내고 말았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데이몬이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손에서 돋아난 강기가 하나로 합쳐졌다. 파파파팟 하나로 합쳐진 강기가 검과 격돌하는가 싶더니 금세 미끄러지 며 검의 면을 타고 거슬러 올라갔다. 대경실색한 모용황이 급히 검을 비틀며 뒤로 물러났지만 거리에 따라 늘어난 강기의 선을 완전히 피해낼 순 없었다. 서걱 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핏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오른 팔이 날아간 모용황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때 맞춰 데이몬의 손에서 돋아난 강기도 사라져버렸다. 운용 할 수 있는 암흑투기를 모두 소모한 것이다. 데이몬은 한숨을 길 게 내쉬며 고개를 이리저리 꺾었다. ‘정말 적절한 순간이로군.’ 팔뚝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지만 모용황은 지혈할 생각도 하 지 못했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가는 인영 하나가 있었다. “피를 더 흘리면 생명이 위험하오. 본인이 지혈해 드리리다.” 다가간 인영은 모용황의 동의도 듣지 않고 혈도를 짚었다. 그 에 따라 세차게 뿜어지던 핏줄기가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누구지?’ 데이몬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의 얼굴을 살폈다. 암흑투기 를 운용할 수 없게 되었기에 상대의 경지를 추측하진 못하지만 척 봐도 만만치 않은 무위를 가진 듯 했다. 등장한 자는 평범한 황의를 입은 초로인이었다. 한동안 모용 황의 상태를 살피던 노인이 고개를 돌려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대가 데이몬이오?” “그렇소.” “반갑소이다. 본인은 무림맹을 맡고 있는 황천호라고 하오. 무림의 동도들이 천의대협이라는 과분한 명호를 붙여주었소이 다.” 데이몬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당신이 무림맹주란 말이오?” “그렇소이다. 뭐, 권한도 별로 없는 맹주지만 말이오.” 말을 마친 무림맹주는 털털하게 웃었다. “일단 무림맹을 대신해 감사드리오. 묵회주를 비롯한 잠마련 무사들을 제압해 주셨다고 들었소. 젊은 나이에 정말 대단한 실 력을 갖추셨구려.” 데이몬은 씁쓸히 웃었다. 겉은 이십대 초반이지만 실상은 수 백 년 이상 살아온 노마물이 아니던가? “관찬이시오. 소생에겐 그럴 만한 실력이 없소.” “실력이 없는 분께서 모용세가 가주의 팔을 자를 정도로면 본 인은 나가죽어야겠구려. 그건 그렇고…….” 무림맹주 황천호의 눈길이 함거에 가 닿았다. “저들에 대한 처리는 본 맹에서 일임해도 되겠소?” “그렇게 하시오. 어차피 무림맹에 처리를 맡길 생각이었으니.” “고맙소. 진심으로 감사드리리다.” “그건 그렇고, 나에게 씌워진 혐의는 어떻게 할 생각이오?” “무슨 혐의 말이오?” 얼떨떨해 하는 무림맹주를 쳐다보며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내가 묵회의 끄나풀이라는 혐의 말이오. 모용세가의 가주가 그렇게 주장했다지요?” 무림맹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것은 본인이 책임지고 해결해 드리리다. 묵회주까지 사로잡아 주신 마당에 문제될 것이 있겠소? 다만 장로회의가 끝 날 때까지 본 맹에 머물러 주시기를 간청하는 바요.” “뭐, 강압적으로 제압해서 고문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요?” 데이몬의 말에 무림맹주가 눈을 크게 떴다. “서, 설마 그럴 리가 있겠소이까?” “모용세가에서 한 번 당했더니 약속 자체를 믿지 못하게 되었 소. 이해하시오.” “…….” 모용세가 사람들과 데이몬을 번갈아 쳐다보던 무림맹주가 무 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 데리고 가서 수옥에다 감금시켜라. 특히 묵회주와 그 하 수인들은 특별히 경비를 엄중하게 유지하도록.” 세가 소속 무사들을 수감시키라는 말에 모용세가 사람들이 발 끈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항의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 다. 어쨌거나 비천각 단원들을 공격했다가 사로잡힌 현행범들이 었기 때문이다. 한쪽 팔이 날아간 모용황은 넋이 나간 듯 공허하 게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문득 뭔가가 생각난 듯 데이몬이 무림맹주를 쳐다보았다. “참, 모용세가 가주의 팔을 자른 것은 정당방위였소. 모용세가 에서 그 점을 물고 늘어질까 봐 염려되는구려.” “알고 있소. 이미 모용세가 가주가 먼저 공격했다는 무사의 증 언을 들었소. 그 문제는 공에게 피해가 가진 앖을 것이오.” 말을 마친 무림맹주는 총관을 불렀다.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 던 양무외가 급히 달려왔다. “손님들에게 머물 거처를 마련해 드리도록.” “알겠습니다.” “행여나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실력 있는 호위를 붙여드 리도록 하게.” “존명.” 단호하게 복명한 총관이 데이몬을 향해 공손히 읍을 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거처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데이몬과 냉유성은 총관을 따라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모 용황을 둘러싸고 있던 모용세가 사람들이 살기 어린 눈빛을 번 뜩였지만 애당초 주눅들 그들이 아니었다. 무림맹에서는 즉각 대책회의가 열렸다. 무림맹주를 비롯한 장 로들이 대거 참여한 대책회의였다. 데이몬이 무림맹에 가져다 준 파장은 그 정도로 컸다. 묵회와 잠마련과의 관계는 이미 비천각 단원들을 통해 각 문파의 장로 들에게 보고 된 상태였다. “놀랍구려. 묵회가 잠마련에서 만들어낸 하부조직이라니…….” 그게 사실이라면 머지않아 정사대전이 벌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오 년 전 끝난 정사대전의 상처가 미처 치유되기도 전에 또다시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장로들은 상황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현 마도는 분열되어 있소. 잠마련과 마교의 사이가 극히 좋지 않다는 사실은 각 문파에서도 익히 알고 있는 상황이오. 잠마련 하나만 상대하는 것은 정파의 힘으로 충분하오.” “하지만 묵회의 강시도 잠마련의 전력에 집어넣어야 하오. 이 번에 드러났듯 묵회의 강시가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음이 입 증되지 않았소?” 장로들의 갑론을박을 듣고 있던 무림맹주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직까지 확실한 것이 조사되지 않았소이다. 일단 포로들 을 엄히 문초해 모든 것을 알아낸 뒤 결정해야 할 것 같소. 지금 은 그보다 시급한 문제가 있소.” 무림맹주는 모용세가의 대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표로 파견된 모용운성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고 있 었다. “모용세가는 도대체 어찌해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오? 무사들 을 파견해서 무림맹의 일을 수행하는 비천각을 공격하다니 말이 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구려.” 미리 준비를 해 놓은 듯 모용운성이 태연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비천각 단원들을 공격할 생각은 전혀 없었소. 우리 본가의 멸 문을 좌시한 데이몬이란 작자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을 뿐 그 이상의 의도가 없었음을 밝히는 바요.” “이미 비천각 단원들이 증언을 했소. 모용세가 무사들이 복면 을 한 채 나타나 모조리 죽이겠다고 공언했다고 하더구려.” “겁만 줘서 물러나게 하려고 한 것뿐이오. 어쨌거나 비천각 단 원 중에서 사상자가 단 한 명도 안 나왔지 않소?” 한 문파에서 파견된 대표답게 모용운성의 말재간은 출중했다. “오히려 피해를 입은 쪽은 우리요. 작전에 참가했던 무사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무공을 잃었으니 말이오.” 무림맹주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거나 공격한 쪽은 모용세가이니 그것으로 문제 제기를 할 수는 없소.” “우리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소. 데이몬이란 작자 때문에 본 가가 멸망했소. 그가 조금만 손을 썼다면 우린 묵회의 강시군단 을 격퇴시킬 수 있었소. 우린 그에 대한 해명을 듣고자 했던 것 뿐이오.” 모용세가의 변명에 무림맹주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모용세가에서 묵회의 독에 대한 해독제를 구하기 우해 색목 인을 암습하여 제압하고 고문까지 가했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어 떻게 생각하시오?” “전혀 근거 없는 소리요. 우린 결코 그런 적이 없소. 알다시피 누군가를 음해하려면 무슨 소린들 못하겠소?” 모든 사실을 완강히 부정하는 모용세가였다. 하지만 데이몬과 모용천 사이에 오간 말을 비천각 단원들도 똑똑히 들었다. “비천각 단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모용천이 그 사실을 일정부 분 인정했다고 하오. 그런데도 부정할 생각이오?” “어쨌거나 그런 일은 없었소. 정 의심스러우면 본가 무사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 보도록 하시오.” 무림맹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모용세가 무사들 중 제대로 증 언해 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가문의 존폐가 걸린 일인데 세가 에 속한 혈족이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는 생각해보지 않아도 자 명했다. 게다가 무림맹주의 입장에서 강압적으로 사람을 뽑아다 심문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본가가 날아갔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모 용세가가 무림맹에 미치는 영향력은 컸다. “좋소. 그렇다면 모용세가의 노가주께서 암습을 감행하신 사 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오. 가문의 무사들이 무공을 잃고 폐인이 되어 버렸는데 이성을 잃지 않을 자가 어디 에 있소?” 다분히 억지스러운 모용세가의 논리에 무림맹주는 할 말을 잃 어버렸다. “어쨌든 좋소. 맹주의 권한으로 이 문제에 대해 별도로 조사해 보리다. 그건 그렇고…….” 맹주가 은근한 눈빛으로 장로들을 둘러보았다. “데이몬에 대한 혐의는 사실무근이라고 생각하오. 모용세가 에서 습격한 것도 미심쩍지만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가 있소. 그는 다름 아닌 묵회주를 붙잡아 왔소. 만약 그가 묵회의 끄나풀 이라면 애당초 묵회에서 기습을 가할 리가 없겠지. 해서 나는 맹 주의 권한으로 그에게 내려진 혐의를 거두려고 하오.”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였 다. 신비세력 묵회의 수장을 붙잡아 존 만큼 그에 대한 혐의는 없던 일로 해야 옳았다. 하지만 여전히 딴죽을 걸고넘어지는 모용세가였다. “하지만 거기에 숨겨진 저의가 없다고 어찌 단정하시오. 만약 그 가 무림맹에 잠입하게 위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면…….” 맹주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다. “그렇다면 모용세가에서는 잠마련에 잠입하기 위해 가주를 희생양으로 삼을 셈이오?” 모용운성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억지 논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코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 모 용운성이었다. “허나, 그의 무공실력을 생각해 보시오. 그자는 본가의 노가주 님을 정면대결로 격퇴시켰소. 그 정도 무공실력이라면 분명 꿍 꿍이가 있어 본 맹에 잠입한 자가 아니겠소? 우린 그자의 진정한 의도를 밝혀내야 하오.” 그 말에 흥미가 돌았는지 장로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모용 세가의 가주 모용황은 자타가 공인하는 초절정 고수다. 그런 고 수를 정면대결로 꺾을 정도라면 보통의 고수가 아니다. “그 말이 맞소. 그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무림맹에 들어왔는 지 밝혀내야 하오.” “서역무림의 끄나풀일 수도 있소.” 의견을 낸 장로들은 평소 모용세가와 왕래가 잦은 문파 출신 이었다. 골치가 아픈지 무림맹주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소. 색목인 데이몬은 제 발로 무림 맹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비천각에 이끌려 왔소. 다시 말해 우리 가 불러들인 경우란 말이오.” 그때서야 장로들이 조용히 입을 닫았다. 장로회의의 결정에 따라 구인장이 발부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그럼에도 쉽게 물러서지 않는 이는 모용운성뿐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 고수가 비천각 따위 삼류 무인들들 순순히 따 라왔다는 사실이 수상쩍지 않소?” “그렇다면 그가 비천각 단원들을 때려눕히고 도망쳤어야 했 었다는 말씀이시오? 그랬다간 당장 수배령이 떨어질 터인데?” 무림맹주가 마치 선포하듯 장로들을 둘러보았다. “일단 그에게 적용된 혐의는 맹주의 권한으로 철회하도록 하 겠소. 하지만 그가 서역무림의 끄나풀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 으니 그에게 일정 거리를 두도록 하겠소. 물론 적대시할 필요도 없겠지. 그 정도 실력자를 적으로 둘 필요는 없으니까.” 제법 공평한 결정이었기에 모용세가도 이번에는 이견을 제시 하지 않았다. 가문의 치부를 유야무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 의 역할을 끝났다. “그럼 더 이상 다른 의견이 없는 것으로 알겠소. 이제부터는 수옥에 갇힌 묵회주와 잠마련 무사들에 대한 심문을 진행하도록 하겠소.” 그때 장로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공동파 출신의 장로 춘성진인 이었다. “잠깐! 아직까지 냉유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소.” “냉유성이라면 색목인의 수하가 아니오. 공동파에서 파문된 것으로 알려진…….” “그렇소. 하지만 그의 내력이 불분명하오. 우린 이번 기회에 반드시 그의 무공에 대한 내력을 알아낼 작정이오. 그러니 거기 에 협조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소.” 무림맹주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근맥을 절단하고 단전을 파괴한 뒤 파문시켰으면 그만이지 뭘 또 알아낸다는 말인가? 공동파의 장로는 상기된 표정으로 일의 당위성에 대해 설명했다. “행여나 처벌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을지도 모르오. 만약 그가 공동의 내공심법을 이용해 무고을 되찾았다면 재차 처벌을 해야 하오.” “다시 근맥을 자르고 단전을 파괴하겠다는 말이오?” “그렇소. 그와 공동과의 인연은 완전히 끝났소. 따라서 그가 공도의 것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오. 게다가 그는 본파 출신의 비천각 단원에게 검술을 전수했소. 따라서 거기에 관한 것도 자 세히 알아봐야 할 것 같소.” ‘냉유성을 완전히 매장시키기로 아예 작정했군.’ 공동파의 저의가 심히 의심되었지만 자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 니다. 무림맹주는 간단명료하게 결론을 내렸다. “알겠소. 하지만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총관인 양무외를 참여 시키겠소. 거기엔 이견이 없으리라고 생각하겠소.” “알겠소이다. 그럼 무림맹의 권한으로 냉유성에게 출석요청 을 해 주시길 바라겠소.” 무림맹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리다.” 그 시각 잠마련의 사준환은 전서구로 날아온 보고서를 받아보 고 있었다. “묵회주를 위시해 출동한 무사들 전부가 생포되었다니, 이거 생각지 않은 일이 벌어졌군.” 사준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색목인 술사를 잡 아오라고 사람을 보냈건만 도리어 보낸 무사들이 생포되다 니……. 전서구는 무림맹에서 암약 중인 첩자에게서 날아왔다. 다시 말해 생포된 무사들의 신병을 무림맹에서 관할하고 있다는 뜻이 다. “어떻게 된 거지? 색목인 술사는 정면대결에서 뛰어난 무사의 적수가 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 말에 대답한 것은 회의에 참여하고 있던 흑법사였다. “제, 제 상식으로는 그, 그렇습니다. 거리를 두지 않는다면 마 법사는 무사의 적수가 될 수 없습니다. 이미 제가 살던 곳에서 입증된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결과가 나왔지?” “그,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그가 무공을 극한까지 익혔을 가능성은 없나?” 흑법사는 말도 되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부, 불가능합니다. 아시다시피 마법은 정신적인 면에 치중한 학문입니다. 따, 따라서 육체를 극한으로 단련해야 하는 무공을 익힐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낮습니다. 혹시 가능하다 하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은 힘들 것입니다.” 떠듬거리며 설명하는 흑법사의 말에 사준환은 짜증 어린 표정 을 지었다. “어쨌거나 내가 보낸 무사들이 생포되었다면 놈이 상당한 실 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가?” “…….” “골치 아프군. 묵회주는 아직까지 효용가치가 있는 존재인 데…….” 계획대로라면 묵회주는 조금 더 무림에서 암약하며 정파 무림 을 흔들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전체적인 구도가 잠마련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런 관점에서 묵회주가 무림맹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은 전 폭적인 계획의 수정을 부를 수밖에 없다. 사준환의 입가에 싸늘 한 미소가 걸렸다. “어쩔 수 없군.” 사준환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흑면염라 곽천도가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암향 1호에게 연락을 취해라. 그를 쓸 때가 되었다.” “암향 1호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만약을 위해 아껴두었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쓸 수밖 에 없구나. 확실하게 묵회주와 무사들의 입을 막도록 시켜라.” 부리던 부하의 목숨을 거두라는 명령이었지만 사준환은 추호 도 망설이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 부하는 장기판의 말과 존재 가치가 전혀 다르지 않다. 곽천도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 였다. “알겠습니다.” “그들의 입을 막는다면 무림맹에서 공식적으로 따지고 들 수 없다. 물론 대비야 하겠지만 그 정도는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다.” 살짝 고개를 흔든 사준환은 흑마법사를 쳐다보았다. “철마는 지금 어디에 있나?” “마, 마정지지의 혈마기를 주입하기 위, 위해 옮기려고 합니다.” “일시 보류하라. 시급하게 써먹을 때가 있다. 우선은 완성된 음양강시부터 시술하도록 하라.” 이번에는 사준환이 곽천도를 쳐다보았다. “네 휘하의 염왕대를 이끌고 충동하라. 철마를 붙여줄 테니 확 실하게 임무를 수행하도록.” “무, 무슨 임무를…….”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곽천도를 사준환은 싸늘한 눈빛으로 노 려보았다. “묵회주가 실패한 색목인 술사를 잡아오란 말이다. 첩보에 의 하면 그놈은 정면대결로 모용세가 가주의 팔을 잘랐다고 한다. 철마를 붙여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놈이 아무리 재간을 부 리더라도 철마의 손아귀를 벗어날 순 없을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염왕대를 모두 데리고 가거라. 임무에 실패할 경우 묵회주와 같은 운명을 걸을 테니 정신 바짝 차리도록 하고.” 곽천도는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첩자의 손에 생 을 마감하는 것은 그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놈이 무림맹에서 오래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워낙 고리타분 한 놈들이고 모용세가와 문제를 일으킨 이상 금세 무림맹을 나 설 것이 자명하다. 내 이미 첩자들로 하여금 놈의 일거수일투족 을 감시하라고 명해 놓았으니 놈이 언제 나서는지 금세 연락이 닿을 것이다.” “틀림없이 놈을 생포해 오겠습니다.” “그래야지. 지금으로서는 믿을 방편이 강시군단밖에 없다. 만 약 색목인 술사만 잡아온다면 강시군단을 완성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 비약적으로 줄어든다. 무림 정벌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 관건이다.” 말을 마치며 사준환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그의 기세에 곽천도와 흑마법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귓 전으로 사준환의 나직한 다짐이 파고들었다. “누구도 내 야망을 꺾을 수 없다. 설사 하늘이라 할지라도!” 허공에 고정된 사준환의 눈동자는 저만치 떨어져 있는 야망을 부여잡고 있었다. 냉유성은 인상을 찌푸린 채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림맹의 이름으로 발행된 출석요구서였다. 이의 제 기를 한 쪽이 공동파였으니 무슨 의도로 불렀는지는 자명 하다. “아무래도 갔다 와봐야 할 것 같군요.” “공동파 놈들이 무슨 일로 널 부른 게지?” 냉유성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무공을 되찾았다는 소문을 듣고 절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다 고 생각했나봅니다.” “하지만 문제될 것이 없지 않나? 넌 공동파가 아니라 전진의 내공심법을 익혔으니 말이야.” “사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문의 처사가 섭섭했는지 냉유성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어차피 같은 도가계열의 내공심법입니다. 만약 그걸 공동의 내공심법이라고 주장한다면 달리 부인할 방도가 없습니다. 공동 의 내공심법을 익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엄연히 제 몫이니까요.” 데이몬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증명할 방법이 있다. 주문을 외우면 되지 않느냐?” 냉유성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무림맹과 공동파의 사람들 앞에서 주문을 외우란 말입니까?” “얼굴에 철판 한 번 깔면 말끔히 해결된다. 게다가 한두 번 해 본 일도 아니지 않느냐?” “…….” 할 말을 잃어버린 냉유성이 눈만 끔뻑거렸다. 데이몬은 더 이 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럼 다녀오너라. 잘 해결하고 올 것이라 기대하겠다.” 한동안 데이몬의 등을 쏘아보던 냉유성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 다. 터덜터덜 걸어 나가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던 데이몬은 슬며 시 눈을 감았다. ‘암흑투기를 모두 소모하고 나니 무척 허탈하군.’ 어찌 보면 천운이었다. 그때 담천위를 만나 혈마기를 흡수하 지 않았다며 이후의 일은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용세가와 묵회는 그야말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덮쳐왔다. 그 습격을 막아내느라 오랜만에 만끽한 권능의 힘을 모두 날려 버렸다. 그 대가로 위기는 확실히 모면했지만 말이다. 지금 데이몬으로서는 암흑투기를 보충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이곳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마교로 가야겠군. 그곳에서 느긋 하게 장로들의 혈마기를 흡수해야겠어.’ 물론 그 일은 담천위의 혈마기를 흡수하는 것보다 비교적 어 렵다고 봐야 한다. 그때보다 암흑투기의 절대량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내 목숨을 위협할 만한 요소가 없으니 급 할 게 없지.’ 앞으로의 일을 결정한 데이몬은 느긋하게 잠을 청했다. 무림 맹주가 붙여준 호위들이 바깥에 대기하고 있으니 냉유성이 없더 라도 걱정할 것은 없었다. 9. 공동파로 돌아오라 출석요구서를 받은 냉유성은 곧바로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태반이 공동파의 사람들이었는데 낯익은 무림맹 총관의 모습도 보였다. 그런데 공동파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한결같이 적의가 서려 있 었다. 다시 말해 장문인인 춘양진인의 사람이란 뜻이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무림맹에 대표로 파견되어 있는 춘성 진인이었다. 그가 노골적으로 냉유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외 신분이 낮은 2, 3대 제자들도 몇 보였다. 주목할 점은 그 들 중에 그가 자세를 교정해 주었던 장문우도 끼어있다는 점이 다. 단단히 문책을 받았는지 낯빛이 극도로 어두웠다. ‘그래, 어차피 부딪혀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심호흡을 한 냉유성은 가슴을 쭉 폈다. 그러는 동안 총관이 다 가왔다. “오셨구려, 냉 대협.” “안녕하십니까, 총관님.” “본인은 참관인 자격으로 이 자리에 왔소이다. 최대한 공정한 입장에서 양쪽의 의견을 수렴할 테니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씀 해주시기 바라오.” 냉유성은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야겠지요.” 춘성진인이 눈살을 찌푸린 채 냉유성을 노려보았다. ‘안광을 보니 무공을 되찾은 것이 확실하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냉유성은 자신의 참관 하에 사지근맥을 절단당하고 단전을 파 괴당했다. 처벌 후 확실하게 확인까지 한 춘성진인이었기에 작 금의 사태가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 보면 냉유성이 무공을 되찾 은 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춘성진인에겐 냉유성을 다 시 한 번 옭아맬 방법이 있었다. ‘한 번 공동의 내공을 익힌 이상 타 계파의 내공을 연성할 순 없 다. 경락과 혈맥이 길들어져 있기에 같은 도문의 것을 익혀야만 내공을 되찾을 수 있지. 그렇다면 네놈이 빠져나갈 길은 없다.’ 내공심법에는 여러 갈래가 존재한다. 공동이나 곤륜, 무당과 화산처럼 도문의 내공심법도 있고 불가 계통의 내공심법도 있 다. 불가 계통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소림사다. 또한 무림세가들이 속하는 속가의 내공심법에도 수십 갈래가 존재하며 마공까지 포함시킬 경우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다. 문제는 한 갈래의 내공을 연성한 자가 무공이 전폐되었다고 해서 다른 갈래의 내공심법을 익히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내공심법이란 일정한 법칙에 따라 기를 전신으로 보내 일주천 시 키는 것이다. 화후가 높을수록 일주천시키는 신체범위가 넓어진다. 그런 법칙에 맞추어 혈도를 비롯하여 경락과 혈맥이 사용되기 때문에 ‘길들여진다’는 춘성진인의 표현은 정확했다. 다시 말해, 도문의 내공을 익힌 자가 무공이 폐지된 다음에 불 가나 속가의 내공심법을 익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물 론 마공의 경우는 더더욱 가능성이 희박하다. 한 번 도문의 내공을 익힌 자는 오로지 도문의 내공만을 익혀 야 한다는 것이 정설. 그렇기 때문에 춘성진인이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이다. ‘기껏 익혀봐야 몰락한 전진의 내공심법이나 익혔겠지? 타파 의 내공심법을 훔쳐 익혔다면 더욱 좋고. 그땐 놈을 확실하게 파 멸시킬 수 있으니까.’ 장문인인 춘양진인뿐만 아니라 춘성진인 역시 냉유성에게 그 리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제자 들이 모두 한두 번씩 냉유성에게 패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냉유성의 사부인 춘명진인을 노골적으로 멸시했던 춘성진인 인 만큼 냉유성이 곱게 보일 리가 없다. 게다가 사형인 춘양진인 과 자신은 같은 계파인지라 반드시 냉유성을 옭아매야 할 필요 가 있었다. 그런 춘성진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냉유성은 한가롭게 걸어왔다. “오랜만이군요.” 목례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아 냉유성 역시 춘성진인에 대해 그리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춘성진 인이 냉유성의 사지근맥을 자르고 단전을 파괴시키는 과정을 직 접 주관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 모습에 발끈한 것은 춘성진인의 제자인 적명자였다. “이놈! 존장을 보고도 예를 갖추지 않을 셈이냐?” 순간 냉유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누가 존장이지? 파문당하는 순간 나와 공동파의 인연은 완전 히 끝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네놈은 아직까지 공동의 검술을 익히고 있다. 3대 제자 장문 우에게 소초검을 전수해 준 것이 바로 그 이유다.” 적명자는 추호도 물러서지 않고 냉유성을 질책했다. 사실 냉유성이 파문당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이 적자 항렬의 도호를 받았을 터였다. 적성자, 이것이 바로 냉유성에게 내정된 도호였다. 하지만 파문으로 인해 그 도호는 다른 제자가 가져가 버렸다. “어처구니가 없군. 난 단지 소초검의 자세를 잡아줬을 뿐이다. 어떤 놈이 가르쳤는지 모르지만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더군.” “네 말대로 인연이 끝났다면 어찌하여 소초검을 기억하고 있 느냐?” “후후후.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군.” 냉유성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춘성진인을 쳐다보았다. “방계라는 이유로 복마검법의 전수도 불허했으면서 이제 와 서 트집을 잡는 이유가 뭐요? 내 무공이 폐지되었다는 것을 두 번, 세 번 확인까지 해 놓고 말이오.” “나는 그때 확인과정이 확실하지 않았다고 본다. 네가 내공을 회복한 것을 보니 시술이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만약 네가 공동 의 내공심법을 이용해 무공을 되찾았다면 공동파의 장로로서 이 사실을 좌시할 수 없다.” “후후후, 다시 사지근맥을 끊고 단전을 폐하겠다는 뜻이오?” 춘성진인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된다면 그렇게 해야지.” 그때 오가는 설전을 듣고 있던 양무외가 앞으로 나섰다. “아직까지 확실한 것이 밝혀지지 않았소. 우선은 냉 대협이 어 떤 내공심법을 익혔는지가 관건이오. 그에 대한 감별을 춘성진 인께서 맡기로 하셨소.” “…….” “더불어 냉 대협이 익히고 있는 검법이 공동의 것이 아니란 것 을 직접 증명하셔야 하오.” 냉유성의 입가에 피식거리는 미소가 걸렸다. “그게 과연 공정하다고 생각하시오? 어떻게 하면 날 물고 늘 어질까 혈안이 되어 있는 춘성진인께서 감별을 맡는다는 사실이 말이오.” “하지만 어쩔 수 없소. 내공을 감별하는 것은 공동의 무공을 깊이 있게 익힌 사람만이 가능하오. 현재로서는 춘성진인 외에 그럴 만한 분이 없으니까.” 냉유성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럴 필요 없소. 내가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겠소.” 냉유성은 대답도 듣지 않고 검을 뽑아들었다. 새하얀 검신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애정 어린 눈빛으로 검신을 훑어본 냉유성은 시선을 춘성진인 에게 고정시켰다. “내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 “과거에는 당신이 엄청나게 강하다고 생각했소. 하지만 지금 보니 아니구려. 경지가 훤히 보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당 신을 추월한 모양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디서 허튼 망발을 늘어놓는 것이냐?” “아마 그 사실은 진인께서 똑똑히 알고 있을 것이오.” “헛소리하지 마라.” 적명자와는 달리 춘성진인은 침중한 안색을 감추지 못했다. 과거에는 화후가 눈에 뚜렷이 보였던 냉유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 사실은 춘성진인에게 한 가 지를 일러주었다. 냉유성의 무위가 그와 엇비슷하거나 조금 높 다는 사실을. 귓전으로 냉유성의 이죽거림이 계속 파고들었다. “근맥이 잘리고 단전이 파괴당한 채로 파문당했지만 난 무공 을 완전히 회복했소. 게다가 무공에 상당한 진전을 보았지. 아마 공동은 날 버린 것을 뼈저리게 후회해야 할 것이오.” “미친 소리!” 적명자의 신경질적인 반박이 이어졌지만 냉유성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튼 좋소. 이제부터 내가 공동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 실을 증명하리다.” 말을 마친 냉유성은 내공을 검에 쭉 밀어 넣었다. 사람들이 상 기된 눈빛으로 냉유성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었다. * * * 무림맹의 지하뇌옥. 무림공적이나 사파의 마두를 거두는 용도로 쓰이는 뇌옥은 그 동안 텅 비어 있었다. 정사대전이 끝나고 협상을 통해 서로의 포 로를 교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각각의 뇌옥들이 주인(?)을 찾은 상태였다. 데이 몬이 사로잡아온 묵회주와 잠마련의 무사들이 갇혀 있는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모용세가의 무사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 었다. 하지만 모용세가가 무림맹에 끼치는 영향력을 입증하듯 그들은 모두 풀려난 후였다. 모용세가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조건으로 무림맹주가 모용세 가 무사들의 석방을 승인한 것이다. 해서 뇌옥에는 오직 묵회주 와 잠마련 무사들만이 갇혀 있었다. 경비는 무척 삼엄했다. 각 뇌옥마다 두 명씩의 무사들이 눈을 부릅뜬 채 수인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있을 잠마 련의 구출시도를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수인들은 하나같이 두터운 쇠고랑과 수갑을 차고 있었다. 목 에는 묵직한 칼이 채워져 있어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웠다. 어찌 보면 무척 비인도적인 처사였지만 중요 사실을 밝혀낼 증인이었 기 때문에 무림맹에서는 아무 거리낌 없이 조치를 취했다. 수인들은 희망을 완전히 잃은 눈빛으로 허공만을 공허하게 쳐 다볼 뿐이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조만간 가해질 혹독한 고문이었다. 그들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 온갖 종류의 고문이 가해질 것이 틀림없었다. 묵회와 잠마련의 연관관계를 알아내기 위해 무림맹 측에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터. 무공을 잃어버린 약한 몸 뚱이로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 가장 안쪽에 갇혀 있던 묵회주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빌어먹을. 독단만 제대로 삼켰다면……. 아니, 색목인 놈이 해 독만 해주지 않았다면…….’ 사준환이 무사들을 파견해서 구출 시도를 할 가능성은 희박했 다. 수하를 장기판의 말로 생각하는 그가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 며 자신들을 구해내려 할 턱이 없다. 게다가 그들 모두는 무공을 깡그리 잃지 않았던가. 때문에 그들로서는 곧이어 있을 심문의 순간만을 기다릴 수밖 에 없었다. 더구나 순순히 사실을 털어놓는다고 하더라도 뾰족 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평생 뇌옥에서 썩는 것이 고작이다. 수십 년 적공을 잃은 이상 그들에겐 삶에 대한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나 드름없었다. 그들이 고민에 쌓여 있는 사이 뇌옥의 문이 열렸다. 덜컹 경비무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문 쪽을 쳐다보았다. “누구냐?” 물을 열고 들어온 이는 남루한 옷을 걸친 추레한 노인이었다. 그가 진물이 뚝둑 떨어지는 눈으로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수인들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요, 나리.” “일단 거기에 내려놓아라.” 가까이 다가간 경비무사가 노인의 전신을 샅샅이 수색했다. 그러나 나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노인의 몸을 더듬거리던 무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크으, 냄새. 좀 씻고 다닐 것이지.’ 그러는 사이 다른 무사가 다가가 음식을 검수했다. 검수방법 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은침으로 찔러 독의 유무를 검사하는 식 이었다. 은침의 색이 변하지 않는 것을 보아 독이 섞여 있지는 않았다. 확인절차를 끝낸 무사는 제일 안쪽의 뇌옥을 열었다. “서둘러 먹이도록 하라.” 수인들은 하나같이 팔이 뒤로 돌려진 채 수갑에 채워져 있다. 게다가 입에는 혀를 물지 못하게 하는 재갈이 채워져 있다. 자진 을 방지하기 위한 처사였으므로 자력으로는 음식을 먹지 못한 다. 결국 수인들의 입에 떠 넣어주는 것 역시 노인이 해야 할 일 이었다. 노인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안쪽 뇌옥으로 걸어갔다. 경비무사 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노인은 자진을 방지하게 위해 간수가 채워둔 재갈을 풀었다. “음식을 가져왔소.” 하나, 묵회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먹지 않 아 시장했지만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식욕이 있 을 턱이 없었다. 그러나 노인은 아랑곳없이 음식을 한 솓갈 떠서 묵회주의 입 으로 가져갔다. 그럼에도 묵회주의 입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먹여라. 실패한다면 단단히 혼날 것이다.” 무사의 으름장에 몸을 흠칫 떤 노인은 다시금 숟갈을 묵회주 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묵회주의 눈빛이 변했다. 귓전으로 파고든 전음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전음을 보낸 이는 노인이었다. 입술이 전혀 움직이 지 않았는데도 음성은 정확히 묵회주에게 전달되었다. - 음식 속에 작은 표창이 숨겨져 있소.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오. 묵회주의 눈동자에 서서히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고통은 없을 것이오. 가족들은 본련에서 책임지고 돌볼 터 이니 무인답게 최후를 맞이하시오. 전음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잠시 고만하던 묵회주가 음식을 받아 물고 씹었다. 우적우적 노인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해서 음식을 떠먹여 주 었다. 그 모습을 본 경비무사들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죽고 싶지는 않은가 보군.” “우리 수고를 덜어줘서 고마운데? 끝까지 안 먹었다면 관을 목구멍에 박아 직접 먹였을 텐데 말이야.” 음식은 금세 묵회주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확인한 노 인이 다시 재갈을 채웠다. 그러나 처음과는 달리 느슨했다. 그런 사실을 무사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다 먹였습니다.” 음식통을 집어든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철컹 간수가 문을 따 주자 노인이 옆 뇌옥으로 걸음을 옮겼다. 홀로 남겨진 묵회주는 조용히 입을 오물거렸다. 순간 혀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감촉. 노인이 말한 표창이란 것을 알아차린 묵회주는 그것을 재빨리 혀 밑으로 밀어 넣었다. 깊게 배인 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지 만 그는 조용히 피를 목으로 넘겼다. ‘결국 이렇게 가게 되는군. 하지만 후회는 없다.’ 혹독한 고문을 받고 평생을 뇌옥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월등히 현명한 판단이다. 묵회주는 교묘하게 혀를 움직여 표창을 혀뿌 리에다 박아 넣었다. 푸슛 시큰한 통증이 전해졌지만 참을성 강한 무인답게 그는 아무런 표정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많은 양의 피가 뿜어져 나오며 잇몸 을 흠뻑 적셨다. 하지만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기에 피가 입 밖으로 비치지 않 았다. 그 상태로 묵회주는 흘러나오는 피를 계속해서 삼켰다. ‘다행히 독보다는 고통이 심하지 않군.’ 이렇게 계속 피를 삼키다보면 조용히 생명이 끊어진다. 생명 유지에 필수인 피를 일정량 이상 잃으면 뇌로 가는 혈류가 끊어 져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자결을 위해 혀를 깨무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그 일념 하나로 묵회주는 계속해서 목구멍으로 피를 삼켰다. 그에 따라 서서히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노인이 수인들에게 모두 음식을 먹였다. 텅 빈 음 식통을 확인한 경비무사들이 문을 따고 노인을 밖으로 내보냈다. “소고했소, 늙은이.” 순간 노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고개를 돌 리고 있던 무사들은 누구 하나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식사를 마친 수인들은 하나같이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들의 입에 물려진 재갈을 확인한 경비무사들은 다시 자리로 돌아갔 다. 물론 그들은 감옥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상의 징후가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포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경비무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그렇군. 수인의 얼굴이 유난히 창백한데?” 가장 먼저 음식을 먹었던 묵회주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과도한 출혈 때문이다. 인간은 피의 4분의 1을 잃으면 생존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이 상의 피가 묵회주의 혈관이 아닌 위장에 들어가 있었다. 계속 혀 를 움직이며 피가 지혈되는 것을 막았기에 묵회주의 목숨은 경 각에 처해 있었다. 상황의 심각함을 알아차린 경비무사들이 서둘러 문을 땄다. “들어가 봐야겠어.” 하지만 그들이 들어가는 순간 묵회주의 몸이 모로 쓰러졌다. 쿵 그것이 시작이었다. 하나같이 얼굴이 하얗게 변한 수인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무사들은 그때서야 상황을 알아차렸다. “이놈들, 혀를 깨물었어.” “그럴 리가 없어. 재갈을 물고 있는데 어찌하여……. 가만!” 눈치 빠른 무사 하나가 검을 뽑아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수 인들에게 음식을 먹인 노인을 붙잡으려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노인의 종적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휘르르르 세찬 냉기가 주위를 완전히 잠식했다. 냉유성의 마법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였다. 그는 지금 마법검을 휘두르며 검무를 추고 있었다. 그에 따라 에워싼 사람들이 움찔거리며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특히 춘성 진인의 눈동자는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미, 믿을 수 없어. 이런 음한지기라니…….” 처음 냉유성이 검을 들고 나섰을 때만 해도 그는 자신만만했 다. 냉유성 혼자서는 증명할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유성이 주문을 외우는 순간 그의 평정심은 여지없이 깨어졌다. ‘나는 왜 이렇게 멋있을까?’ 공동 문하생들의 얼굴이 일제히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냉유성은 언제나 과묵하고 냉정한 전형적인 무사였다. 그런 자의 입에서 그 따위 말이 흘러나오다니……. 하지만 놀랄 일은 이후에 벌어졌다. 부르르 진동하는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싸늘한 냉기 때문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무사 들조차 흠칫 놀라 몸을 떨어야 할 정도의 냉기였다. 특히 춘성진인은 떨리는 몸을 부여잡으며 자신의 눈을 의심해 야 했다. 저 정도면 북해의 빙궁에서나 볼 수 있는 순수한 음한 지기였다. ‘서, 설마……모용세가의 말이 사실이었나?’ 이곳으로 오기 전 그는 모용세가로부터 냉유성에 대한 사실 하나를 들었다. 그것은 바로 냉유성이 높은 수준의 음한지기를 연성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상당한 수준의 음한지기를 써서 우리 무사들을 상대했 소. 한기가 워낙 혹독했기 때문에 우리 무사들이 상당히 곤란을 겪어야 했소.’ 하지만 그는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렀다. ‘말도 되지 않소. 도문과 음한지기는 형태가 전혀 다른 내공이 오. 도문의 내공을 익혔던 자가 음한지기를 연성한다는 것이 대 관절 납득이 된다는 말이오?’ ‘하, 하지만 우린 똑똑히 목격했소.’ ‘뭔가 착각했겠지. 어쨌거나 놈이 무공을 되찾았다면 필경 우 리 공동의 것을 연성했음이 틀림없소.’ 믿을 수 없는 일로 치부해버리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던 춘성 진인. 하지만 모용세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냉유성은 이미 상 당한 경지에 도달해 있는 음한지기의 고수였다. 파르르르 검에서 냉기가 그칠 줄 모르고 뿜어져 나왔다. 물론 연성한 내 공이 아니라 마법검의 특성 탓이었지만 이 자리에서 그 차이를 아는 이는 없었다. 두 번째로 춘성진인이 놀란 것은 냉유성이 전개하는 검식이었 다. 그는 지금 검무를 추고 있었다. 그런데 한눈에 봐도 공동파 의 것과 판이하게 다른 검식이었다. “도, 도대체 어디서 저런 검식을…….” 춘성진인이 감탄할 정도로 검법의 완성도는 뛰어났다. 아니, 그로서는 감히 추정조차 못할 정도로 수준이 높다는 것이 명확 한 판단이었다. 냉유성이 전개하는 것은 추혼검법이다. 전대의 대마두 추혼검마 의 최후심득이 담겨 있는 절초. 그것을 데이몬이 뜯어고친 덕분 에 냉유성은 아무 무리 없이 검초를 시전하고 있었다. 물론 충분히 수련을 하지 못했기에 실전에 사용하는 것은 무 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검무 형태로 시연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춘성진인의 입에서 경악성이 연거푸 터져 나 왔다. “믿어지지가 않아. 저 정도로 괴이신랄하고 파격적인 검초라 니…….” 공동의 절초 복마검법에 비추어 봐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말 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가 사그라졌다. 사문의 명예가 걸려 있 기 때문에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추혼검법의 파괴적인 검세에 여지없이 매료되었 다. 그 역시 고도의 수준으로 검술을 연마한 검객. 따라서 냉유 성이 전개하는 검법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정확히 실감했다. 그 의 얼굴은 침중하기 그지없었다. ‘실수다. 냉유성을 내치는 것이 아니었어. 전혀 다른 형식의 음한지기를 이 정도로 익혀내고 저 정도로 뛰어난 검초를 만들 어 낼 정도라면 전무후무한 무예의 기재라고 볼 수 있어. 냉유성 을 파문시킨 것은 엄청난 오판이었다.’ 그는 한 가지를 착각하고 있었다. 지금 시전하는 추혼검법을 냉유성이 만들어낸 것으로 간주해버린 것이다. ‘이, 이 사실을 장문인에게 보고해야 해. 어떻게 해서든 그를 다시 공동의 그늘로 끌어들여야 한다.’ 냉유성의 파문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에 그는 거기에 얽힌 일 을 잘 알고 있었다. 냉유성은 다름 아닌 장문인의 질시와 방계라 는 한계 때문에 축출되었다. 공동파 내부에 그를 대신할 무사들 이 얼마든지 있다는 결론 하에 결정지어진 일이다. 하지만 춘성진인은 그것이 오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 했다. ‘냉유성을 대신할 만한 무사는 공동에 없다. 아니, 전 무림을 통틀어 봐도 그보다 자질이 뛰어난 기재가 없을 것이다.’ 춘성진인의 상념은 계속 비약되어만 갔다. ‘만약 냉유성을 파문시키지 않고 잘 보듬어 안았다면 공동은 다음 세대의 천하제일인을 보유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거 엄청난 실수를 한 것 같군.’ 천하제일인. 쉽게 올라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천하제일 인을 한 번 배출한 문파의 위상은 엄청나게 치솟을 수밖에 없다. 고금 이래도 유일한 현경의 고수인 검성을 배출한 무당파가 명실상부한 무림 제일검문으로 일컬어지는 것이 대표적인 예 였다. ‘어떻게든 그를 다시 회유해야 해. 장문인에게 이 사실을 고한 다음 전력으로 그를 포용하려는 노력을 보여줘야 해.’ 그는 아직까지 엇갈린 단추를 다시 끼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 했다. 지금은 서역의 색목인을 임시 주군으로 삼고 있지만 색목 인이 중원유람을 마치면 냉유성은 중원에 남겨진다. 그는 냉유성이 색목인을 따라 서역으로 갈 것이란 생각을 전 혀 하지 않았다. ‘그래도 무의 기초를 마련한 곳이 공동이니만큼 냉정하게 뿌 리치지는 못할 것이다.’ 춘성진인은 서둘러 마음을 정리했다. 생각을 바꾸니 냉유성의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그 사이 냉유성은 검무를 서서히 마무 리지어가고 있었다. 휘리리릭 척 사방으로 검을 떨친 냉유성이 검에서 내공을 회수했다. 그 러자 사위를 잠식하고 있던 냉기가 순차적으로 사라지기 시작 했다. 절도 있는 태도로 검을 검갑에 수납한 냉유성은 총관인 양무 외를 쳐다보았다. “이 정도면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양무외의 눈동자도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 역시 고수의 대 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무사. 따라서 냉유성이 전개한 검초의 위력을 모를 리가 없다. “엄청난 음한지기를 익히셨군요. 게다가 제 안목으로 그 검무 는 확실히 공동의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려 춘성진인을 쳐다보았다. “판단은 춘성진인께서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공동의 내공과 검술에 가장 해박하신 분이 진인이시니까요.” 냉유성의 시선이 춘성진인에게로 돌아갔다. “아직도 내 내공과 검법이 공동의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퍼뜩 정신을 차린 춘성진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나?” “뭘 물어보시려는 겁니까? 아직까지 물어보실 것이 남아있습니 까?” 냉유성의 삐딱한 태도에 적명자가 다시 한 번 나서서 호통을 쳤다. 그는 이미 이 일을 계기로 스승인 춘성진인의 눈에 들겠다 고 단단히 작심한 듯했다. “이놈! 존장께서 물어보시면 그대로 대답할 것이지, 어디서 토 를 다느냐?” 하지만 그런 그의 의도는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춘성진인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불호령을 내린 것이다. “입 닥치거라! 누가 너에게 끼어들라고 했느냐?” “하, 하지만 사부님…….” “지금부터 너는 일체 입을 열지 마라. 알겠느냐?” 준엄한 호통으로 적명자의 입을 막아버린 춘성진인은 다시 냉 유성을 쳐다보았다. 아까와는 달리 그의 눈빛에는 부드러움이 감돌고 있었다. “지금 시전한 검식을 어떻게 구한 것이냐? 혹시 네가 만들어 낸 것이냐?” 순간 냉유성은 잠시 머뭇거렸다. 주공인 데이몬이 검식의 출 처를 밝히지 말라고 한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비밀이 밝혀지면 골치가 아플 것 같다. 그러니 누가 물어보거 든 네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해라.’ ‘그,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해라. 아무래도 그 편이 나을 것 같다. 추혼검마의 최 후 심득을 내가 손봤다고 하면 엄청나게 귀찮아질 것 같으니까. 초무극에게도 영향이 미칠 터이고.’ 데이몬의 당부를 떠올린 냉유성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전장에서의 경험을 바탁으로 말입 니다.” 춘성진인의 눈 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여, 역시 생각대로였군.” 추정이 확신으로 화하자 춘성진인의 마음은 더욱 단단히 굳어 졌다. 냉유성을 공동의 품으로 다시 끌어안기로 말이다. 그러려 면 어긋난 단추부터 제대로 채워야 했다. “정말 대단하구나. 음한지기를 그 정도로 익혀낸 데 이어 그토 록 훌륭한 검초를 만들어 내다니……. 한때 널 품었던 공동의 장 로로서 자부심을 금할 길이 없다.” 별안간 변한 춘성진인의 태도에 냉유성은 얼떨떨해 했다. 당 혹해하는 그의 귓전으로 춘성진인의 음성이 흘러들었다. “여기서 확실하게 말하겠다. 네가 익힌 내공과 검식은 확실히 공동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너에게 내려진 혐의를 모두 철회하 도록 하겠다.” 아까와는 판이하게 변한 태도가 쉽게 적응되지 않는 냉유성이 었다. “진심이십니까?” “그렇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너와 공동 과는 아무래도 단추를 잘못 끼운 것 같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뭔가 많은 오해가 있었다는 말이다. 언제 시간이 나면 공동산 에 한 번 들러주겠느냐? 거기에서 공동과 너 사이에 얽힌 악연을 정리하자꾸나.” 착잡한 표정으로 춘성진인을 쳐다보던 냉유성은 느릿하게 고 개를 끄덕였다. “한 번 들르겠습니다. 어찌되었건 간에 공동은 한때 제 사문이 란 사실은 분명하니 말입니다.” “그래도 네가 무의 기초를 닦은 곳 아니냐. 오해는 풀어버리면 그만이니 그때 보자꾸나.” 강호 경험이 많은 춘성진인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리곤 다 소 풀어진 얼굴로 총관 양무외를 쳐다보았다. “그에 대한 이의를 철회하겠소. 이후로 더 이상의 문제재기를 하지 않을 것이오.” 별안간 변한 태도에 양무외도 얼떨떨해 했다. “아무튼 원만하게 잘 해결되어 다행입니다. 이의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춘성진인의 말씀을 제가 확인했으니 이만 돌아들 가십 시오.” 고개를 끄덕인 춘성진인은 문하 제자들을 돌아보았다. “이만 돌아가자.”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있던 문하제자들이 하나둘씩 몸을 돌렸 다. 적명자가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앞장을 섰고 다른 제 자들도 냉유성을 힐끔 쳐다보며 걸음을 옮겼다. 가르침을 얻었던 장문우가 고개를 숙여 목례를 했다. 냉유성 역시 살짝 검을 들어올려 줌으로써 화답했다. 그는 복잡한 눈빛 으로 물러가는 공동 제자들을 쳐다보았다. 객당으로 돌아온 그는 그간의 사실을 데이몬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데이몬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핫! 그놈들, 잔머릴 굴리는군.” “태도가 너무 변해서 저도 얼떨떨합니다. 처음에는 절 못 잡아 먹어 안달이더니 말입니다.” “그게 정파 무인들의 최대 장점이지. 문파의 이익을 위해서 라면 개개인의 은원 정도는 깔끔하게 접어버리거든.” 냉유성이 고개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속하는 아직까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런 결정 을 내렸는지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간단하지 않나? 그 녀석들 앞에서 추혼검법을 시전했더냐?” “그렇습니다. 주공의 말씀대로 제가 만들어냈다고 둘러댔습 니다.” “그렇다면 확실하게 증명이 되는군. 생각해 보거라. 무공을 폐지한 채 파문한 제자가 엄청난 음한지기를 연성한데 이어 훌 륭한 상승검법을 만들어 냈다면 장로라는 녀석이 대관절 무슨 생각을 하겠는지.” “…….” “보나마나 엄청난 무의 기재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냐?” 냉유성도 그때서야 뭔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뭐, 엄청난 착각이지만 말입니다.” “잘하면 천하제일인을 배출할 수도 있는 기회를 이대로 날려 버리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너도 알다시피 천하제일인을 배출 한 문파의 위상이 얼마나 올라가느냐? 내 장담하건데 공동산에 가면 장문인을 위시한 장로들이 널 열렬히 환영할 것이다. 글 고 은근슬쩍 파문철회를 요청할 것이다. 이게 틀린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마.” 냉유성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맴돌았다. “그런 속셈이었군요. 그게 계산된 호의였다니…….” “어쨌거나 잘 생각해서 결정하거라. 공동으로 돌아간다면 말 리지 않으마.” 냉유성은 단호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비록 사문이라고는 하나 그들은 절 버렸 습니다. 이제 와서 다시 받아준다고는 하나 과장된 제 능력을 감 안해서 베푸는 호의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냉유성의 머릿속에는 공동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결심이 굳은 상태였다. 그는 음한지기를 연성한 것이 아니다. 단지 마법 검의 도움을 받았을 뿐이다. 게다가 검술은 데이몬에게서 전수 받은 것이었다. 다시 말해 데이몬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는 결코 지금의 위 치에 서지 못했을 것이다. 냉유성은 한결 홀가분해진 표정을 지 었다. “모든 것을 알게 되니 확실해지는군요. 제가 공동으로 돌아가 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후회하지 않겠느냐?” “그럴 일이 없을 겁니다. 이후로 전 영원히 주공의 옆을 지킬 생각이니까요.” “흐흐, 그 녀석. 마음에도 없는 말 하기는…….” 그래도 냉유성의 진심이 싫지는 않은지 데이몬은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푹 쉬도록 해라. 내일 무림맹주를 만나고 난 뒤 곧바로 떠날 생각이니까.” “어디로 가실 것입니까?” “마교로 갈 것이다. 아마 정파 출신의 무사 중에서 네가 처음 으로 마교를 방문하게 될 것 같다.” 데이몬과 지내며 많은 것을 보고들은 덕분에 냉유성은 마교로 간다는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무림맹이 또다시 발칵 뒤집혔다. 묵회주와 잠마련의 무사들이 모조리 시체가 되어버린 사실이 보고된 것이다. 여러 명의 감시무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벌어진 일이라 여파 가 무척 컸다. 경비무사에게 보고를 들은 무림맹주는 즉시 무림 맹 전체를 수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반드시 그놈을 찾아내라. 묵회의 끄나풀이 틀림없다.” 무림맹 소속의 무사들이 총 출동하여 전체를 수색했다. 하지 만 발견된 것은 노인의 싸늘한 시신 한 구뿐이었다. 얼굴가죽이 벗겨진 채 으슥한 곳에 나뒹굴고 있는 노인의 시 체가 맹주의 처소로 옮겨졌다. 그 모습을 본 맹주는 어떻게 된 연유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당했군.” 즉각 의원들을 투입했지만 이미 수인들의 목숨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맹주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가장 유력한 증인들을 잃었으니 잠마련에다 정식으로 항의할 수도 없다. 그나마 묵회와 잠마련과의 연관관계를 미연에 파악 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놈을 심문했다면 묵회에 포섭된 자의 명단을 손에 넣을 수 있 었을 텐데…….” 그 자리에는 데이몬도 나와 있었다. 그는 한심하다는 눈빛으 로 맹주를 쳐다보았다. “경비를 좀 철저히 하지 그랬소?” 맹주가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면목이 없소. 놈들이 이런 식으로 접근할 줄은 전혀 몰랐소.” 물끄러미 맹주를 쳐다보던 데이몬은 느릿하게 머리를 흔들 었다. “뭐, 어쨌거나 처분을 무림맹에 넘겼으니 내가 상관할 바는 아 니겠지. 난 이대로 떠날 생각이오. 무림맹에 더 이상 볼일이 없 을 것 같소.” 그 말에 무림맹주가 화들짝 놀랐다. “며칠 더 머물다 가시지 그러시오?” “눈칫밥 먹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소. 뭐, 이유는 맹주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오.” “…….” “어차피 중원 유람을 나왔으니 이곳저곳 둘러볼 생각이오.” “그, 그러시다면야…….” 어차피 맹주로서는 말릴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적으로 돌리 지는 말되 가까이 두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데이몬이 떠나 주는 것이 오히려 홀가분했다. 모용세가와의 껄끄러운 관계를 보더라도 그러했다. “본인은 오늘 중으로 떠나겠소. 다음에 기회가 되면 들르리 다.” “반드시 들러주시기 바라겠소.” 맹주의 형식적인 인사를 뒤로한 채 데이몬은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소지품을 챙겨 한시라도 빨리 무림맹을 떠나려는 마음 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 한 명이 그의 일거 수일투족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허한 빛이 도 는 하인의 눈빛은 뇌옥에서 수인들에게 밥을 먹인 노인과 무척 닮아 있었다. 데이몬과 냉유성은 조용히 무림맹을 나섰다. 정문이 아닌 후 문으로 나갔기에 마중 나온 사람도 없었다. 아무에게도 기별을 하지 않았기에 비천각 단원들조차 마중 나오지 않았다. 냉유성 이 눈살을 찌푸렸다. “푸대접이 이만저만이 아니군요.” “저들 입장에서 난 단순한 이방인일 뿐이야. 중원 사람들은 대 체적으로 이방인에게 배타적이지. 게다가 혼자 몸이니 더욱 그 럴 테고.” “나중에 당문을 뒤에 업으신다면 사정이 달라지지 않겠습니 까?”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당문은 힘을 좀더 길러야 해.” “그렇겠지요. 아직까진 무림세가라 불리기 부끄러운 형편이 니 말입니다.” 둘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거리를 걸어갔다. 무림맹 주변 에는 제법 번화한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역사가 오래된 만틈 사 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형성한 것이다. 그들은 곧바로 마교로 갈 생각이었다. 데이몬은 그곳에서 주화 입마에 빠진 장로들을 치료해준 다음 뽑아낸 혈마기로 다시 힘을 되찾을 적정을 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한 번 힘을 만끽해보니 거기에 중독되었나 보군. 지금의 상황 이 잘 적응되지 않으니 말이야.” 냉유성은 데이몬이 다시 힘을 쓸 수 없는 상태로 돌아간 사실 을 잘 알고 있었다. “웬만하면 무림맹 내부에서 공간이동을 하시지 그러셨습니 까?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그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냐. 하지만 하도 보는 눈이 많으니 말이야. 내가 가진 재주를 어느 정도는 숨겨야 할 것 같아.” “하긴, 저도 신경이 많이 쓰이더군요.” 데이몬은 마을을 벗어난 뒤 인적이 드문 곳에 가서 공간이동 마법진을 그릴 생각이었다. 마교가 위치한 감숙 인근에 대응 마법진이 그려져 있으니 길어봐야 이틀이면 마교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 생각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상인 차림새를 한 중년인 한 명이 은밀히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데이몬은 당연히 알아차리지 못했고 냉유성도 전혀 기미를 눈 치 채지 못했다. 10. 시련은 좋은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은 꼬박 반나절 만에 산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무림맹 인근에 조성된 거리가 워낙 넓었기 때문이었다. 평야가 많은 하남이라 산이 그리 높지 않았지만 안쪽으로 쭉 들어가면 인적이 없을 것 같았기에 그들은 머뭇 거림 없이 골짜 기 않쪽으로 들어갔다. “마교로 가면 제법 후한 대우를 받겠지? 그래도 명색이 소교 주의 친구인데 말이야.” “아무래도 그렇겠죠?”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는데 갑자기 냉유성의 안색이 변했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요?” “왜? 기척이 느껴지느냐?” “아닙니다. 산새나 곤충 소리가 멈춘 것을 보니 누군가가 매복 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데이몬은 지체 없이 탐색마법을 펼쳤다. 계속 유지하기는 힘 들지만 이처럼 정신을 집중해 펼친다면 냉유성보다 더욱 넓은 거리를 세세하게 살필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데이몬의 안 색이 굳어졌다. “매복이 있는데 엄청나군. 스무 명 이상인데 기의 양을 측정해 보니 개개인이 절정 이상인 것 같아. 그중 한 놈은 초절정이 아 닐까 짐작되는 녀석이야.” “어떤 놈들일까요?” 냉유성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지금껏 두 번의 기습을 받았지 만 지금처럼 심각하진 않았다. 일단 주공인 데이몬이 힘을 제대 로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계속해서 마법으로 살펴보던 데이몬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이 기운은……. 그렇군. 잠마련 놈들이로군.” 데이모이 감지한 기운은 바로 대마법 갑옷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었다. 중원 천지에 대마법 갑옷을 걸치고 다닐 존재는 단 하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철마가 앞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매복하고 있는 무사들은 잠마련 소속일 가능성이 절 대적이었다. “난감하군.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공간이동을 하면 안 되겠습니까?” “무리다. 저놈들이 마법진을 그릴 틈을 줄 리가 없다.” 데이몬으로서는 무척 난감한 상황이었다. 마법으로 살펴본 결 과 절정 이상의 고수가 스무 명 이상이다. 도저히 마법으로 헤쳐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탄타로스를 꺼낸다 하더라도 어 렵긴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고민하던 데이몬이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일단 너 혼자 빠져나가거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적의 병력을 분산시켜야 한다. 한 자리에 있다가는 모두 붙잡 힌다.” 만약 무림맹에 들어가기 전이었다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붙잡 혀 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일단 데이 몬에게 암흑투기가 전혀 없었다.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믿을 구석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데이몬으로 인해 묵회주와 여덟 명의 잠마련 무사들이 무림맹에 체포되었다. 그러니 잠마련 무사들이 데이몬과 냉유성 을 곱게 대할 이유가 없다. 데이몬은 그 때문에 냉유성을 따로 탈출시키려 했다. “혼자 빠져나가거라. 내가 주의를 끈다면 빠져나가는 것이 불 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주공께선 어떻게 하시려구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빠져나간 뒤 당문으로 가서 무 공을 연마하고 있도록 하라. 앞으로 놈들과 부딪힐 일이 적지 않 을 테니 일단 실력을 키워놓아야 한다.” 냉유성의 얼굴에 걱정이 어렸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내 걱정할 필요는 없다. 혼자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빠져나갈 수 있으니 말이다.” 데이몬은 둘 다 잠마련으로 잡혀갈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렇게 된다면 데이몬의 비밀이 남김없이 까발려진다. 어쨌거나 냉유성은 데이몬의 비밀을 제법 많이 알고 있다. 데 이몬이야 사술 따위에 넘어갈 이유가 없지만 냉유성은 그렇지 않다. 제 아무리 심지가 굳건하고 의지력이 강하더라도 사술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아직까지는 사준환에게 감춰야 할 것이 많았기에 데이몬이 이 런 결단을 내린 것이다. 다행히 잠마련 무사들이 아직까지 모습 을 드러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곧바로 가지 말고 우회해서 꼬리를 떼어낸 뒤 가도록 해라. 알겠느냐?” 냉유성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가 적의 이목을 돌리도록 하겠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 순간 숲 속에서 거친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치 챘다! 공격하라!” 데이몬이 주문을 외자마자 공격에 나서는 것을 보니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춘 모양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이 전개한 마법은 그리 수준이 높지 않았다. 그러니 마법 전개의 속도는 순식간 이었다. 화르르르 데이몬의 전방으로 거대한 불의 벽이 생겨났다. 거침없이 불 타오르는 파이어 월. 그 틈을 타서 데이몬이 고함을 쳤다. “가거라.” “네, 주공. 부디 보중하십시오.” 불의 벽으로 인해 무사들의 이목이 가려진 틈을 타서 냉유성 이 몸을 날렸다.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본 데이몬은 재차 주문을 외웠다. 일단은 적의 시선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데이몬이 선택한 것은 투 명화 마법이었다. “인비저빌리티(Invisibility)!” 나지막한 음향과 함께 데이몬의 모습이 그곳에서 지워졌다. 불의 벽은 한동안 타오르다 주문이 끝난 순간 사그라졌다. 그 러나 바짝 말라있던 나무와 풀에 옮겨 붙어 점점 번져가기 시작 했다. 불운하게도 맞바람이 불었기 때문에 불은 잠마련 무사들이 아 니라 냉유성이 도망친 쪽으로 타올랐다. 투명화 마법으로 몸을 감춘 상태로 데이몬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괜찮을까?” 그의 시선에 일단의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투명화 마법 때문에 무사들의 시선에는 데이몬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다.’ 그 상태로 데이몬은 조심스럽게 우회하려 했다. 그때 나무 위에서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평범한 상인의 모습 을 한 중년인이었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무사들에게로 다가갔 다. 정황을 보니 한 패가 분명했다. “한 놈이 불이 번져 가는 쪽으로 도망쳤소. 속히 수색대를 보 내시오.” 그 말을 듣자 지휘자로 보이는 사내가 손을 들었다. 순간 십여 명의 무사들이 몸을 날렸다. 그 광경을 본 데이몬은 얼굴을 일그 러뜨렸다. ‘빌어먹을. 그런데 언제 꼬리가 붙었지?’ 중년인이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은 냉유성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있는 방향을 쳐다본 순간 데이몬의 눈동자가 찢어 져라 부릅떠졌다. 무사들을 이끌고 온 사내가 데이몬이 결코 잊 을 수 없는 자였기 때문이다. 바로 사준환의 최측근인 흑면염라 곽천도였다. 데이몬은 도망 치는 것도 잊은 채 곽천도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네놈을 이렇게 해서 보게 되는구나, 곽천도.’ 제법 많은 수의 수하들이 곽천도에게 목숨을 잃었기에 데이몬 의 가슴속에서는 살심이 부글부글 타오르고 있었다. 나무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중년 사내는 바로 암향 1호였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첩자로서 역용과 잠입, 미행에 대단한 능 력을 지니고 있는 자였다. 뇌옥의 수인들을 처리한 노인도 바로 그였다. 그는 바로 조금 전까지 데이몬과 냉유성을 감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즉각적인 대처가 가능했던 것이다. 십여 명의 무사가 달려간 것을 확인한 암향 1호가 염왕대를 이 끌고 온 곽천도를 쳐다보았다. “색목인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뭐라고? 그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추종향의 냄새가 풍겨 오는 것을 봐서 부근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곽천도는 전신의 감각을 끌어올려 주위를 샅샅이 훑었다. 하 지만 감지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인비저빌리티는 모습뿐 만 아니라 기척까지 감춰주는 마법이다. 그때 숨막히는 듯한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윽.” 데이몬이었다. 곽천도를 보자 순간적으로 살기를 제어하지 못 한 탓에 칠종단금술이 발동된 것이다. 재빨리 살심을 가라앉히 기는 했지만 이미 정신집중이 깨어진 상태였다. 인비저빌리티가 여지없이 해제되어 버리고 데이몬의 모습이 그 자리에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본 관천도가 머뭇거림 없이 명령 을 내렸다. “놈이다! 잡아라!” 무사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몸을 날렸다. 이어 숲 속에서 거대 한 체구의 괴인이 나무를 뚫고 튀어나왔다. 곽천도가 철마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다. “크으. 실수했군.” 데이몬은 재빨리 마나를 재배열했다. 가장 신속하게 써먹을 수 있는 매직 미사일 다발을 전개한 것이다. 성공할지 자신은 없 었지만 일단 쓸 수 있는 방편은 그것밖에 없었다. 쓰쓰쓰쓰 공기가 급속도로 응축되더니 허공에 눈부시게 빛나는 매직 미 사일 다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매직 미사일은 곧 데이몬의 손짓 에 따라 덮쳐오는 무사들을 향해 폭사되었다. 쐐애애액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수련기사들과 용병들을 좌절시켰던 매 직 미사일 다발. 중원에 와서도 마적 무리에게 단단히 쓴맛을 보여주었던 매직 미사일은 그러나 잠마련 무사들에겐 통하지 않았다. 하나같이 실전경험이 풍부한 절정고수들로 구성된 잠마련 무사들은 어렵 지 않게 매직 미사일을 막아냈다. 콰콰쾅 검기를 끌어올린 검에 부딪힌 순간 매직 미사일은 그대로 소 멸되었다. 고작해야 한두 명의 무사들이 경미한 상처를 입었을 뿐 매직 미사일 다발은 더 이상의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사라 졌다. 뜻밖의 반격에 잠마련 무사들이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는 게 성과라면 성과였다. 그 광경을 본 데이몬은 얼굴을 일그러뜨 렸다. “역시 고수들은 다르군. 매직 미사일을 이토록 손쉽게 막아내 다니…….” 이미 산불이 번질 대로 번져 사위가 온통 화염과 연기에 가 득 차 있었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한 데이몬 은 재차 마법을 펼쳤다. 마나배열이 풀린 인비저빌리티를 시 전하려면 시간이 걸리기에 그는 플라이 마법으로 이곳을 벗어 나려 했다. 하지만 잠마련 무사들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데이몬의 몸 이 허공으로 떠오르자 무사들은 머뭇거림 없이 암기를 꺼내 던 졌다. “이런 제길…….” 시커멓게 날아오는 암기를 본 데이몬은 인상을 쓰며 실드를 전개했다. 그러나 절정고수들이 내던진 암기에는 내력이 충만히 실려 있 었다. 표창이나 수리검 같은 가벼운 암기들은 차단되었지만 판 관필이나 문심정 같은 묵직한 암기들이 그대로 실드를 뚫고 들 어왔다. 데이몬은 그 안에 재차 실드를 쳐 암기를 막아냈다. 그 순간 엄청난 기운이 데이몬을 노리고 폭사되었다. “크헛. 블링크(Blink)!” 절체절명의 순간 데이몬은 공간전이를 써서 그 자리에서 사라 졌다. 그곳을 스퍼런 빛을 토해내는 장검이 뚫고 지나갔다. 곽천 도가 전개한 이기어검이었다. 다행히 피해내긴 했지만 정신이 분산된 탓에 플라이가 풀려 버렸다. 땅에 내려선 데이몬은 이를 부득 갈았다. ‘빌어먹을 놈. 그 사이 초절정에 올라섰군.” 잠마련 무사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중상 을 입혀서라도 사로잡겠다는 뜻이 역력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데이몬은 체인 라이트닝을 캐스팅했다. “뜨거운 맛을 보여주마.” 절정고수들은 체인 라이트닝에 정통으로 얻어맞아도 쉽게 죽 지 않는다. 이미 초무극을 대상으로 시험을 해 보았기에 그는 덮 어놓고 마법을 실현시켰다. 파지지직 그의 두 손에서 맹렬한 방전현상이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잠 마련 무사들은 바짝 긴장하며 뒤로 물러났다. 색목인의 공격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이미 몸으로 겪어본 그들이었다. 그 순간 강렬한 전하가 그들을 향해 폭사되었다. “크아앗!” 한 명의 무사가 체인 라이트닝에 감전되어 게거품을 물고 꼬 꾸라졌다. 곤두선 머리칼과 시커멓게 변색된 이빨이 주변 무사 들의 안색을 질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머지 무사들은 재빨리 회피했기에 걸려들지 않았다. 역시 고수들이라 쉽게는 당하지 않았다. 데이몬은 살심을 필사 적으로 억누르며 곽천도에게 마법을 날렸다. “이놈, 맛 좀 봐라.” 체인 라이트닝이 막 곽천도에게 작렬하는 순간 누군가가 앞 을 막아섰다.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체인 라이트 닝이 그대로 소멸되었다. 파츠츠츠 대마법 갑옷을 걸친 철마였다. 데이몬이 놀랄 겨를도 없이 철 마가 그대로 돌진해왔다. 더 이상의 마법공격이 소용없음을 깨 달은 데이몬은 이를 갈았다. ‘놈에겐 아무런 마법도 먹히지 않는다.’ 더 이상은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무사들이 사위를 완벽히 포 위한 채 검을 겨누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저항을 포기한 데이몬은 손을 늘어뜨렸다. 잡혀가는 수 밖에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어쩔 수 없군. 유성이는 잘 도망쳤는지 모르겠어.’ 너무 서둘렀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차라리 무림맹 에서 마법진을 통해 감숙으로 갔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주위의 시선을 너무 의식한 것이 패착이었다. ‘아니, 적의 매복을 감지한 순간 세 번째 수하를 불러내었더라 면…….’ 그것이 데이몬이 할 수 있었던 마지막 생각이었다. 콰아앙 철마의 육중한 몸통박치기에 부딪힌 데이몬의 몸이 훨훨 날아 가다 나무에 처박혔다. 길게 늘어진 데이몬의 몸을 무사들이 달 려들어 포박했다. 체인 라이트닝에 맞아 파들파들 떨고 있는 무 사도 둘러 업었다. 색목인이 제압되자 곽천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둘러 철수한다. 자칫 잘못하면 불길에 퇴로가 막힐 수 있다.” 데이몬을 짊어진 무사들이 빠른 속도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선두에는 곽천도와 철마가 서서 길을 뚫고 있었다. 냉유성 역시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불길이 바람을 타고 그를 엄습했던 것이다. 갈 방향을 잡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잠마련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내어 공격 해왔다. “이런.” 검을 뽑아든 냉유성은 머뭇거림 없이 주문을 외웠다. 순간 차 디찬 냉기가 검에서 자욱하게 뿜어졌다. 차창 공격을 막아낸 냉유성은 눈빛을 빛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대는 도합 열 명. 모두가 절정 이상으로 보이는 고수들이었기 에 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군.” 어떻게 해서 잠마련 무사들이 이토록 신속하게 추격해 왔는지 모르지만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화르르르 성난 화마가 나무를 사정없이 집어삼켰다. 그런데도 잠마련 무사들은 꿋꿋이 서서 냉유성의 퇴로를 막아서고 있었다. 일단 부딪혀 보자는 심정으로 냉유성은 무사 한 명을 향해 검 을 날렸다. 싸늘한 냉기를 머금은 장검이 대기를 갈가리 찢었다. 창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아냈지만 전신을 엄습하는 냉기 탓에 상 대 무사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틈을 타고 냉유성은 몸을 날렸다. 그러나 잠마련 무사들은 하나같이 합격술에 능한 자들. 냉유성은 얼마 가지 못하고 또다 시 발목이 잡혔다. 이후부터 벌어진 것은 엄청난 혈투였다. 모두가 절정 이상인 잠마련 무사들을 상대로 냉유성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만약 넓은 들판에서 싸움이 붙었다면 냉유성은 별달리 저항하 지 못하고 붙잡혔을 것이다. 자신과 맞먹거나 조금 떨어지는 무 위를 지닌 열 명을 상대로 버틸 재간이란 없으니까. 하나, 사방을 휘감은 불길과 빽빽이 자라난 나무들로 인해 냉 유성은 겨우겨우 버텨나갈 수 있었다. 거기에는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의 역할이 컸다. 적에게 만만치 않은 타격을 입히는 데 이어 전신을 엄습해오는 화기를 잡재워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잠마련 무사에 이 어 사납게 번지는 불길과도 싸워야 했던 것이다. 냉유성과 열 명의 잠마련 무사들은 사위를 엄습해오는 불길에 아랑곳없이 치열하게 공방을 벌여나갔다. 맞바람이 불고 있었기 때문에 곽천도가 이끄는 무사들은 어렵 지 않게 불길을 빠져 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희색이 가득했다. “드디어 놈을 사로잡았군.” 임무를 완수했다는 쾌감에 그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색목인 은 의식을 잃은 채 무사 하나의 등에 업혀 있었다. 그가 손짓을 하자 무사 한 명이 뭔가를 꺼내들었다. 푸르스름 한 보석이 박힌 팔찌로 흑마법사에게 받아온 것이다. “이 팔찌를 채우면 술법을 쓸 수 없다고 했지?” 그는 머뭇거림 없이 팔찌를 데이몬의 팔목에 채웠다. 바로 마 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팔찌였다. 그것은 마법사 마법을 쓰지 못하게 하는 용도로 사용되며, 흑마법사가 중원으로 올 때 차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그 팔찌는 6서클 이하의 마법사에게만 효용이 있다. 하지만 극 도로 마나가 희박한 중원에서는 데이몬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몸이 축 늘어진 데이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곽천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놈이 왜 나에게 적의를 드러냈지?” 분명 처음 보는 색목인이다. 전혀 안면이 없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는 여러 명의 무사들 중 유독 자신에게만 뚜렷한 적의 를 표출했다. 그 이유를 알 리 없는 곽천도는 묵묵히 머리를 흔들었다. “뭐, 본 련으로 가서 심문해보면 알게 될 테지. 아무튼…….” 입술을 살짝 깨문 곽천도는 데이몬의 복부를 사정없이 걷어 찼다. 퍼억 의식을 잃은 데이몬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나가떨어졌다. 곽도천의 눈동자에는 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네놈으로 인해 직속수하 여덟 명을 잃었다. 묵회주 그놈은 죽 어도 상관없지만 그 녀석들은 내가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무사 들이란 말이다.” 묵회주를 따라 데이몬 생포에 나섰다가 체포된 무사들은 바로 곽천도 직속 염왕대의 무사들이었다. 곽천도는 그래도 분이 풀 리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 번 걷어차려 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무사가 그를 말렸다. “대제께서는 놈을 멀쩡한 상태로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살펴본 결과 놈에겐 내공이 전혀 없습니다.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 이런 놈에게 묵회주와 무사들은 어째서 붙잡혔지? 이 해할 수가 없군.” 제법 세차게 저항하긴 했지만 색목인을 상대하는 것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묵회주와 무사들의 실력으로 감당해 내지 못할 정도가 아니었기에 곽천도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후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날려버린 그가 무사를 쳐다보 았다. “그건 그렇고, 색목인의 수하 놈을 붙잡으러 간 녀석들은 어떻 게 되었지?” “아직까지 제압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한 무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번지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무사들을 잃을 가능성이 높겠는데요?” 처음에는 누가 달아났는지 몰랐기 때문에 무작정 무사 열 명 을 보냈다. 하지만 색목인을 생포한 이상 애초의 목적은 달성했 다고 봐야 했다. 비록 다수의 무사를 데리고 오긴 했지만 이곳은 엄연히 무림 맹의 영역이다. 장사대전의 일익을 담당할 고수들을 허무하게 잃을 수 없었기에 곽천도는 머뭇거림 없이 명령을 내렸다. “무사들을 철수시켜라. 색목인을 잡은 이상 수하 놈에게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 놓쳐도 상관하지 않겠다.” “존명.” 복명한 무사가 머뭇거림 없이 몸을 날렸다. 냉유성은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상대는 자신보 다 약간 경지가 떨어지는 고수 열 명. 하나같이 합격술에 능통한 자들이라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맞서 싸워야 했다. 게다가 사납게 번져 가는 불길은 그를 더욱 곤욕스럽게 만들 었다. 수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잠마련 무사들은 냉유성을 계속 해서 불길 쪽으로 몰았다. 그 탓에 냉유성은 머리털이 그슬리고 눈썹이 눌어붙는 처참한 지경까지 몰렸다. 옷 역시 멀쩡하지 못했다. 몸속을 파고드는 열기야 내공으로 어찌 막는다 해도 옷까지 막을 순 없다. 그럼에도 냉유성은 굴복하지 않겠다는 듯 거센 저항을 거듭했 다. 어지간한 잠마련 무사들도 질려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정말 독한 놈이로군.” “도무지 정파 출신 같지가 않아.” 그는 벌써 반 시진 가까이 싸우고 있었다. 잠마련 무사들이 교 대로 힘을 비축해가며 싸운 반면 그는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기 때문에 공력도 바닥을 보이는 실정이었다. 지칠 대로 지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헉, 헉…….” 마법검에서는 더 이상 냉기가 뿜어지지 않았다. 검의 마법을 발동시킬 내공조차 부족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유성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사로잡힐 경우 주공께서 곤란해진다.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사로잡힐 순 없다.’ 상대가 마도 고수들이라서 병장기도 다양했다. 묵직한 귀도도 를 쓰는 자도 있었고 원거리에서 환을 날리는 자도 있었다. 판관 필이나 갈고리 같은 기문병기를 쓰는 자도 있었기 때문에 상대 하기가 더욱 까다로웠다.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낭아검을 쳐내던 냉유성이 기겁을 하 고 몸을 숙였다. “헛.” 섬뜩한 감촉과 함께 환이 머리털을 우수수 자르고 지나갔다. 뒤이어 날아오는 판관필을 비스듬하게 검을 기울여 퉁겨냈다. 완전히 궤적을 바꾸지 못해 허벅지에 혈선이 그어졌다. 냉유성은 완전히 혈인이 되어 있었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인해 전신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나마 치명상을 입진 않 았기에 냉유성은 계속해서 회피하며 검을 떨쳐냈다. 지금 공격해 오는 것은 도합 여덟. 한 명은 이미 냉유성의 검 에 찔려 절명했다. 그 대가로 그는 옆구리에 깊은 자상을 입어야 했다. 다른 한 명은 팔뚝이 찔려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그의 한계였다. 동료의 죽음을 본 잠마련 무사들의 서슬 퍼런 공세에 궁지에 몰린 그는 아직까지 수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두 명의 무사가 달려들었다. 뒤에서 힘을 비축 하고 있던 무사였다. 차창 창 서너 합이 지나간 뒤 냉유성의 자세가 급격히 무너졌다. 공력 이 바닥나서 상대의 힘을 흘려보내지 못한 것이다. 그토록 단단 하던 마법검도 이리저리 칼날이 나가고 균열이 가 있었다. “이익.” 사납게 몰아치는 공격을 냉유성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막 아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몸 여러 곳에 또다시 자상을 입어야 했다. 더 이상 막아낼 여력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냉유성은 급히 몸 을 날렸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몸을 던졌기 때문에 무사 들이 선뜻 추격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치익 상처에서 떨어지는 피가 불길에 닿아 증발했다. 상대하던 잠 마련 무사의 얼굴에 질렸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질긴 놈이로군. 끝까지 포기하지를 않아.” 잠시 머뭇거리던 무사들이 불길이 약한 곳을 찾아 몸을 던 졌다. 냉유성은 곤경에 차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위기를 모면해 냈 다. 하지만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에 몸을 던진 결과는 처참 했다. 옷은 이미 새카맣게 눌러붙어 있었고, 머리털은 남김없이 그 슬려 대머리가 되어 있었다. 끌어올릴 내공이 모자랐기 때문에 화기가 몸속을 사정없이 침습했다. 슈가가각 불길 속을 정신없이 달리던 냉유성의 몸을 시퍼런 광망이 쪼 개어왔다. 냉유성은 슬쩍 몸을 비틀었다. 시퍼런 빛이 서려 있는 귀두도가 그의 몸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공격이 실패하자 잠마련 무사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 순 간 냉유성이 돌연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해. 뭔가가 이상한데?’ 한 시진 가까이 혈투를 지속해오며 몸속의 힘이 깡그리 바닥 난 상태였다. 단전에서는 더 이상 내공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 상태라면 적의 검격을 한 번도 막아낼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제법 실력 있어 보이는 고수의 급습을 여유 있게 막아냈다. 조금 전부터 그의 눈에 주변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활활 타오르며 급격히 기세를 불려 가는 불길도 그의 눈에는 느리게만 보였다. 뒤이어 잠마련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내어 공격을 가해왔지만 냉유성의 눈에는 그들의 움직임이 훤히 보 였다. ‘이상하군. 이게 어찌 된 현상이지?’ 한 점의 내공도 끌어올릴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냉유성은 절묘하게 몸을 틀어 공격을 모조리 피해냈다. 쩔쩔 매던 조금 전 과는 판이하게 변한 상황이었다. 잠마련 무사들의 공격은 그 정 도로 눈에 훤히 들어왔다. “이놈! 죽어라.” 공격이 계속 이어졌지만 냉유성은 마치 허깨비처럼 몸을 흐느 적거리며 회피해 냈다. 물론 반격할 힘을 없다. 고작해야 종이 한 장 간격으로 피해내는 것이 고작이다. 전신이 나른해지며 이해하기 힘든 쾌감마저 전해졌다. 마치 이 상황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느낌. 냉유성의 돌변한 태도에 잠마련 무사들은 얼떨떨해 했다. 그 중 한 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상황 같은데?” 하지만 그는 끝내 기억해 내지 못했다. 냉유성과 비슷하거나 조금 떨어지는 무위를 가진 그들이 지금 냉유성이 겪고 있는 상 황을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기묘한 대치상태가 한동안 이어졌다. 나른함을 즐기고 있던 냉유성은 정신이 번적 들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사위를 가득 채운 불길이 계속해서 그의 원기를 갉아먹고 있 었다. 이미 신발을 비롯한 옷가지가 다 타버려 벌거숭이가 된 상황. 정신을 차리자 기묘한 현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다 행히 잠마련 무사들은 자신의 기묘한 행태에 잠시 공격을 멈춘 상태. 그는 입술을 으스러져라 깨물었다. ‘어쩔 수 없다. 도박을 하는 수밖에…….’ 그는 머뭇거림 없이 몸을 날렸다. 세차게 타오르는 불길 속 으로 들어갔기에 잠마련 무사들이 일순 뒤쫓지 못하고 머뭇거 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불길이 다소 잠잠한 곳을 찾아 들어가려 는 순간 뒤에서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휘이이익 임무를 중단하고 철수하라는 신호였다. 무사들이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병장기를 수습했다. 그들 역시 꼴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털은 홀랑 타버렸고 옷도 그슬려 있었다. 그들은 머뭇거림 없이 불길을 피해 몸을 날렸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무사의 얼굴에 질렸다는 빛이 뚜렸했다. “지긋지긋한 놈이로군. 다시는 그런 놈과 맞서 싸우고 싶지 않 아.” 뒤따르던 무사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냉유성은 불길 속을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잠마련 무사 들이 추격을 중지했지만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다. 거센 화기가 거침없이 그의 몸을 그슬렀다. 하지만 그는 통증 을 무릅쓰고 몸을 날렸다. 그 와중에도 그는 조금 전의 현상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게 뭐였을까?’ 마치 그것이 절정에 올라설 때의 깨달음과 비슷하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렇다면 혹시?” 만약 예상이 맞다면 엄청난 기연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 다. 냉유성은 그것을 초절정에 오르기 위한 깨달음이라 간주 했다. 많은 무사들이 불철주야 무공을 수련하지만 초절정에 이르는 경우는 결코 많지 않다. 아니, 절정조차 오르지 못하고 사라지는 무사가 부지기수다. 그만큼 초절정, 즉 화경은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경지였 다. 운과 자질, 그리고 여건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영원히 밟지 못하는 경지인 것이다. 그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쳐지나갔다. ‘정말 아쉽군. 조금만 더 경험했더라면…….’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만약 조금만 더 늦게 깨어났다면 그 는 영락없이 시체가 되어버렸을 터였다. ‘주공은 어찌 되셨는지 모르겠군. 일단 이곳을 벗어난 뒤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때 뭔가 부러지는 음향과 함께 엄청난 화기가 그를 엄습해 왔다. 고개를 돌린 그의 눈이 화악 커졌다. “헉.”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나무 하나가 그를 향해 쓰러지고 있었 다. 다급히 몸을 틀려 했지만 발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미 불길로 인해 피부가 벌겋게 익어버렸고 군데군데 물집이 잡혀 있었다. 피할 수 없음을 짐작한 냉유성은 오른손을 들어 머리를 보호 했다. 이어 불덩어리가 된 나무가 냉유성을 사정없이 깔아뭉 갰다. “끄아아아.” 끔찍한 비명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왓다. 나무의 무게로 인 해 손이 젖혀져 얼굴이 불덩어리에 접촉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나무는 냉유성을 깔아뭉갠 뒤 아래쪽으로 굴러 내려갔 다. 얼굴과 팔에서 전해지는 끔찍한 통증으로 인해 냉유성은 제 대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머릿속에 똑똑 히 각인되어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죽는다.’ 그는 필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나무가 굴려간 그 방향이었다.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도 그는 불씨가 꺼질 때 나는 소리를 간 파했다. 아래쪽에 뭔가 불을 끌만한 물체가 있다는 뜻이다. 치이익 불씨에 닿은 몸이 금세 벌겋게 익어 들어갔다. 살결에 눌어붙 은 옷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꾹 참고 몸을 굴 렸다. 얼마나 굴렀을까. 그의 몸이 부드러운 무엇에 빠졌다. 첨벙 운 좋게 근처의 개울에 빠진 것이다. 벌겋게 화상을 입은 피부 에 차디찬 물이 닿는 기분은 정말로 상쾌했다. 냉유성은 물 속에 몸을 푹 담근 채 거듭된 혈투로 지친 몸을 추 슬렀다. 화마가 지나간 숲은 황량했다.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모락 모락 피어올랐고 사방이 잿더미였다. 그 사이로 지나가는 조그마 한 개울이 그나마 산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개울 안에 뭔가 이질적인 것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 은 조그마한 갈대줄기였다. 끄트머리가 다 타버린 갈대줄기가 물 위에 포말을 일으켰다. 잠시 후 갈대줄기가 있던 곳에서 물보 라가 솟구쳤다. “푸.” 물에서 튀어나온 존재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심 히 이상했다. 온통 화상을 입어 일그러진 피부에 머리털이 하나 도 없는 대머리였다. 특히 얼굴에 입은 화상은 끔찍했다. 입술이 온통 일그러져 치 아와 잇몸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오른손 역시 과도한 열기로 인해 손가락이 한데 들러붙어 있었다. 개울에서 솟구친 인간의 정체는 바로 냉유성이었다. 열기를 피해 개울 속에 들어간 그는 갈대줄기를 구해 호흡을 하다가 지쳐서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불이 지 나간 다음에 깨어난 것이다. 물 위로 상체를 드러낸 상태로 몸을 일으키려던 냉유성이 얼 굴을 찡그렸다. “크으, 정말 아프군.”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전신에 화상을 입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린 그는 안간 힘을 써서 몸을 일으켰다. 뼈마디가 사정없이 저렸고 흉하게 물집이 잡힌 피부에서 끔찍한 통증이 전해졌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화상이라는 말을 이해하겠군.” 말이 이상하게 울리는 것을 느낀 냉유성이 물을 쳐다보았다. 재가 이리저리 떠다니는 수면 위로 얼굴을 비쳤다. 멍하니 수면 을 쳐다보던 그는 툴툴거리며 웃었다. “후후, 이게 내 모습인가? 꿈에라도 나타날까 두렵군.” 원래 냉유성은 제법 준수한 외모를 가졌다. 정사대전을 통해 얻은 흉터로 말미암아 날카로운 인상으로 변하긴 했지만 제법 봐줄만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꿈에서도 보기 싫을 정도의 흉물스 러운 얼굴로 변해있었다. 하지만 그는 변한 얼굴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검술 익히는 데 잘 생긴 얼굴이 필요한 것도 아 니고…….”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조용한 곳을 찾아 가서 생사결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급했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물 밖으로 나가려던 그가 급히 뒤를 돌아 보았다. “아참, 내 검.” 다행히 검은 물 속에 잠겨 있었다. 긴장이 풀어져 놓친 모양이 었다. 그런데 검을 집어 들려던 그의 몸이 멈칫했다. 불타는 나무에 짓이겨진 손가락이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는데 열기로 인해 엄지 와 검기자 붙어버렸다. 그 탓에 냉유성은 검을 잡지 못하고 떨어뜨리고 말았다. 손바 닥을 뒤집어본 그는 툴툴거렸다. “검객이 검을 놓치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엄지와 검지가 붙은 탓에 도무지 검을 파지할 수가 없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왼손으로 검을 집어 들었다. 혈투로 인해 검은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검날도 여기저기 나갔고 균열이 간 곳도 있었다. 내공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강기 와 부딪혔으니 제 아무리 좋은 검이라도 버텨낼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왼손으로 힘겹게 검을 검갑에 수납한 뒤 고개를 들었다. 따가운 피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더 없이 싱그러웠다. 눈을 살짝 감은 채 바람을 느끼던 냉유성은 조용히 이후의 일을 떠올 려 보았다. “주공은 어떻게 되었을까? 잘 빠져 나가셨겠지?” 물 밖으로 걸어 나온 냉유성은 비틀거리며 걸었다. 발바닥에 심한 화상을 입었기에 걸을 때마타 통증이 전해졌다. 참을성이 강한 그조차도 견디지 못하고 신음을 흘려야 할 정도의 통증이 었다. “일단 먼저 의원을 찾아가야겠군. 화상치료를 먼저 해야겠어.” 그는 길의 되짚어 다시 무림맹 쪽으로 걸어갔다. 의원에 가서 화상을 치료하고 며칠 푹 쉬어 기력을 회복한 뒤에야 원하는 곳 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데이몬』제4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