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이몬 DAMON
  제 2권 마왕, 암습을 당하다



  스  캔 : 고통이란
  타이핑 : 레이피른, 론스



  김정률

  『소드 엠페러』, 『다크 메이지』, 『하프블러드』. 작품 하나하나가 그해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혔던, 베스트셀러 제조기 김정률 작가. 그가 2007년 네 번째 대작을 앞당겨 선보인다. 그 후속의 이야기를 열렬히 원하는 많은 독자들의 요청이 쇄도한 탓이다. 나올 때마다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온 그의 이번 신작 『데이몬』은 『다크 메이지』 2부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다크 메이지』는 첫 베스트셀러 『소드 엠페러』에 이은 두 번째 작품으로, 정상에 우뚝 선 작가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해준 든든한 작품이었다. 『데이몬』은 작가 김정률 월드를 창조해 나갈 또 하나의 거대한 성(城)이 될 것이다.



  『소드 엠페러』, 『다크 메이지』, 『하프블러드』한국 판타지 장르 최고의 작가 김정률의 4th 대작 다크메이지 2부 『데이몬』. 최고를 지키는 프로페셔널의 정점을 확인한다. 『다크 메이지』의 신화를 재연할 마계군주 데이몬의 지상과환! 누가 무엇을 위해 등장했는지 이미 모든 독자들은 알고 있다.
  "기다려라, 사준환! 우리의 운명이 이 땅에서 결정지어질 것이다!"
  "율리아나여! 나의 운명이 그대의 영혼을 다시 구원하리라!"



  1. 강시들의 습격
  2. 무림의 새로운 변수(變數)
  3. 염왕도(閻王刀) 초무극
  4. 또 다른 차원이동자
  5. 추혼검마의 비급(秘?)
  6. 마왕, 암습을 당하다
  7. 철마의 정체





     1. 강시들의 습격


  이미 일행은 모용세가의 무사들에게 완벽히 포위당한 상황이었다. 병기를 뽑아든 무사들이 서서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냉유성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용현도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이길 자신은 없었다. 그저 주군을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싸울 뿐이었다.
  "흐흐흐. 드디어 만나게 되었군."
  당청은 접근해오는 모용명을 보며 진저리를 쳤다. 물론 그녀도 모용명에 대한 더러운 소문을 잘 알고 있었다. 포로로 잡힌 당문의 여인들이 모용명에게 몸을 더럽혔다는 사실까지도.
  그녀가 치를 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악적! 다가오지 마라!"
  "흐흐흐. 앙탈을 부리니 더욱 귀여운 걸? 내가 많이 예뻐해 주마."
  모용명은 몸서리를 치는 당청을 쳐다보며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달려들 마음의 준비를 하며.
  당청도 대비를 했다. 그러나 소지한 독을 살포하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런데 울려 퍼진 것은 공격명령이 아니었다.
  쐐애애액
  난데없이 신호탄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바로 지척에서 쏘아졌기에 화들짝 놀란 모용현도가 고개를 돌렸다.
  "1대와 2대가 매복해 있는 장소인데……."
  이어 숨 가쁜 호통소리와 함께 병기 부딪히는 소리가 어지럽게 울려 퍼졌다. 그쪽에서 일대 접전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모용현도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어떻게 하지?'
  그는 서둘러 머리를 굴렸다. 냉유성과 검을 섞는다면 최소한 20합 이상을 겨뤄야 승기를 잡을 수 있다. 명색이 절정고수인 만큼 결코 순순히 당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당문의 여식도 무시할 수 없다. 독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당문의 식솔인 만큼 운이 나쁠 경우 다수의 무사가 중독될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다.
  '포기할 수밖에 없다.'
  결정을 내린 모용현도는 입술을 깨물며 몸을 돌렸다.
  "운이 좋았다, 냉유성. 다음에 보자."
  그가 손짓을 하자 무사들이 포위를 풀며 몸을 날렸다. 그런데 모용명만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당청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모용현도가 그런 그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어서 오지 못하겠느냐?"
  "하, 하지만 백부님……."
  "우리의 임무를 잊었느냐? 저들을 내버려두어라. 나중에 잡아들여도 된다."
  서슬 퍼런 명령에 모용명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쉽다는 듯 당청을 한 번 쳐다본 모용명은 백부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그들이 떠나자 냉유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정말 다행입니다."

  1, 2대가 매복하고 있던 곳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청의를 입은 모용세가 무사들이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며 적과 싸우고 있었다.
  모양새를 보니 급습을 당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들이 맞서 싸우는 상대는 인간이 아니었다.
  케케케케
  상대는 기성을 내지르며 뼈가 앙상한 손을 내젓는 강시였다. 마치 먹물에 절인 듯 몸체가 검게 번들거리는 강시가 무려 스무 구나 날뛰고 있었다. 민첩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아 공들여 만든 고급강시가 분명했다.
  놀라운 것은 모용세가 무사들의 대응이었다. 혹독한 훈련을 받은 모용세가의 정예들이 변변찮게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검진도 형성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싸우는 통에 강시들에게 밀리고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모용현도는 내공을 돋워 고함을 내질렀다.
  "뭣들 하는 것인가. 모두 검진을 펼치고 싸워라."
  자신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부대주 하나가 다급한 얼굴로 보고를 해 왔다.
  "검진을 칠 수가 없습니다. 강시들이 하나같이 지독한 극독을 방사하고 있습니다. 한데 모이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내공으로 독기를 막고 있는 듯 부대주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금방 보고한 부대주는 절정의 벽을 깨뜨린 고수다. 그런 고수를 곤란하게 할 정도라면 보통의 독기가 아니었다.
  이를 바드득 갈아붙인 모용현도는 앞에 보이는 강시를 향해 덮어놓고 신형을 날렸다.
  파츠츠츠
  뽑아든 장검에서 시릴 듯한 강기가 치솟았다. 모용현도는 검을 휘둘러 막 쓰러진 모용세가 무사를 공격하려는 강시의 목을 쳤다.
  그 순간, 부대주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무턱대고 베면 안 됩니다."
  그러나 모용현도의 검은 어느새 강시의 목덜미를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서걱
  검강을 머금은 검이 단단한 강시의 피부를 종잇장처럼 잘라버렸다. 목이 반이나 베어지자 충격을 받았는지 강시가 비틀거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모용현도는 크나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목을 베는 순간 시커먼 독혈이 사방으로 좍 뿜어졌기 때문이었다.
  미처 예상을 못한 탓에 모용현도는 독혈을 그대로 뒤집어썼다.
  "뭐, 뭐야?"
  강시에게서 뿜어진 독혈은 지독한 극독 그 자체였다. 독혈에 닿은 옷이 삭아서 구멍이 뻥뻥 뚫렸다. 피부에서 저릿한 감각이 전해지자 모용현도는 화들짝 놀랐다.
  "어, 엄청난 독이로군."
  심맥을 파고드는 독기에 저항하기 위해 모용현도는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독기는 쉽사리 제어되지 않았다. 내공으로 제어하기 힘든 종류의 독인 모양이었다.
  그때서야 모용현도는 알 수 있었다. 휘하 무사들이 왜 검진을 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싸워야 하는가를.
  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호흡을 참으며 싸우느라 무사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공이 약한 무사들은 독기를 견디지 못해 연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모용현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가, 강시 따위에게 이렇게 밀리다니……."
  그때 한쪽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흐흐흐. 질풍검 나으리까지 행차하시다니 놀랐소이다. 이거 월척을 건진 것 같소."
  복면으로 얼굴을 감싼 흑의 사내였다.
  모용현도는 본능적으로 사내가 묵회의 사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얼굴이 검게 물든 채 발치에 쓰러져 있는 사내가 다름아닌 모용수였기 때문이었다.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바로 묵회의 비영전주였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혈투를 벌이는 모용세가 무사들을 쳐다보았다.
  "대파산맥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소. 먼 길을 오셨는데 환영인사가 늦었소이다."
  비영전주의 여유 있는 태도에 모용현도는 이를 바드득 갈아붙였다. 자신들이 함정에 빠진 것을 직감한 것이다.
  "이제 보니 모용수에게 서찰을 보낸 것은 네놈들의 수작이었구나."
  "물론이오. 여러 번의 실패를 통해 세가 사람들을 회유하는 것이 무척 힘들다는 사실을 알아냈지. 혈연으로 묶인 세가 사람들은 좀처럼 마음을 바꾸지 않더구려. 그래서 그 사실을 역으로 이용할 생각을 했소."
  "간악한 놈들……. 그러면서도 서찰을 보내다니."
  비영전주의 태도는 무척 유들유들했다.
  "지금이 우리 묵회의 힘을 보여줄 때라고 생각했소. 제물로 모용세가의 무사들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지. 그런데 무사들의 수가 좀 적구려. 나는 좀더 많이 끌고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헛소리! 우리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정예 중의 정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구려. 우리 쪽에서 스무 구의 독 강시를 준비했는데 아무래도 준비가 과했던 것 같소이다."
  비영전주의 말은 사실이었다. 전장을 살펴본 모용현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휘하 무사들이 변변히 힘도 쓰지 못하고 쓰러지고 있었다.
  묵회에서 준비한 강시의 위력은 대단했다. 피부와 뼈대가 지극히 단단해서 검강이나 검기가 아니면 상처를 입힐 수 없는 데다 상처에서 극독을 머금은 독혈이 뿜어지니 상대하기가 더욱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강시는 뛰어난 독공 고수처럼 끊임없이 독기를 방사하고 있었다. 그가 지켜보는 사이에도 강시의 장력에 격중당한 무사 하나가 얼굴이 시커멓게 변색된 채 나가 떨어졌다. 호흡을 멈춘 상태로 싸워야 하기 때문에 무사들이 이처럼 고전하는 것이다.
  만약 상대가 평범한 강시라면 상대하기가 이렇게 까다롭지 않을 것이다. 모용세가 무사들은 하나같이 혹독한 훈련을 겪은 정예. 창검이 통하지 않는 것을 보아 꽤나 고급강시로 보였지만 이쪽엔 세 명의 절정고수가 포진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할 만한 싸움이었다.
  일류고수들도 검기를 북돋운다면 충분히 강시의 팔다리를 잘라낼 수 있다. 평범한 강시라면 벌써 모조리 파괴하고 전장을 정리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독이 개입하자 싸움의 양상이 전혀 딴판으로 흘러갔다.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쓰러졌다. 대부분 강시를 포위공격하다 독기에 중독되어 쓰러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쓰러지는 무사의 수는 늘어만 갔다. 참지 못하고 숨을 들이키는 순간 독기가 심맥을 파고들었다.
  급속도로 무력화시키는 독이라 내공이 약한 무사들은 일각도 버티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모용현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다니……."
  무사들의 저항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류급 무사들은 거의 전멸당한 상태였고 일류무사들도 반수 이상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반면 강시는 고작해야 네 구가 파괴당한 상태였다. 귓전으로 느물느물한 비영전주의 음성이 파고 들어왔다.
  "우린 이백 명 정도를 예상했었소. 독강시 스무 구라면 충분히 그 정도를 상대할 수 있지."
  "죽일 놈."
  모용현도는 이를 바드득 갈아붙이며 몸을 날렸다. 독기를 억누르느라 절반의 내공밖에 쓸 수 없었지만 그의 몸놀림은 무척이나 빨랐다.
  그러나 비영전주는 미리 예상했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의 앞을 두 구의 독강시가 막아섰다.
  그러나 모용현도는 그를 추격하지 않았다. 그가 관심을 보인 것은 비영전주의 발치에 쓰러져 있던 모용수었다.
  "정신 차리게."
  몸은 뒤흔들었지만 모용수는 꺠어나지 않았다.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모용현도는 그를 둘러입었다.
  그는 묵회의 사자와 접족한 유일한 인물. 반드시 그를 구해서 귀환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모용현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런 모용현도를 항해 비영전주가 이죽거렸다.
  "호오, 모용수를 구하시겠다? 아무래도 오려울 거요. 우리가 조제한 특제 독을 복용시켰으니 어디 한 번 해독해 보시구려."
  "개자식."
  욕설을 내뱉은 모용현도는 무사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더 이상 싸워봐야 승산이 없었다.
  문득 자괴감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묵회의 독강시가 이 정도로 강력할 줄 알았다면 결코 경거망동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는 내공을 한껏 끌어 모아 고함을 질렀다.
  "모두 후퇴한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몸을 빼는 이는 고작해야 다섯 명에 불과했다. 그 짧은 시간동안 모용세가의 저예무사들이 모조리 괴멸된 것이다.
  살아남은 이들은 절정고수들과 모용명, 그리고 일급 무사들을 지휘하는 우두머리뿐이었다. 모용현도의 경고성에 그들이 일제히 퇴로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러나 퇴로는 이미 차단되어 있었다. 어느 새 다섯 구의 독강시가 나타나 퇴로를 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용현도의 낯빛이 암울해졌다.
  "트, 틀렸다."
  그들은 이미 독기에 심각히 중독된 상황. 몸이 정상이라고 해도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이 같은 상황애서는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의 귓전으로 비영전주의 느물거리는 음성이 파고들었다.
  "흐흐흐, 우리가 퇴로를 순순히 허용할 줄 알았소? 미안하지만 그대들은 이곳에다 모두 뼈를 묻어야 하오."
  "철두철미한 놈들이로군."
  침음성을 내뱉은 모용현도는 늘어진 모용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제 탈출은 글렀다. 무림인답게 취후를 맞이해야 하는 것이다.
  모용현도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쳐지나갔다.
  "이 사실을 세가에 알려야 하건만……."
  그러는 사이 강시들이 달려들어 그들을 포위했다. 검게 변색되어 번들거리는 피부, 하얗게 뒤집힌 흰자위는 보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생존자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분전하겠다는 듯 검을 곧추세웠다. 모용현도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덤벼라!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싸운다. 우리에게 무인다운 최후를 다오."
  죽기 전에 단 한 구의 강시라도 더 처치하려는 것이 모용현도의 계산이었다. 그러나 비영전주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흐흐흐. 멍청한 소릴 하는구려. 이대로 포위만 하고 있으면 끝날 텐데 비싼 돈 들여 만든 강시를 소모할 필요가 있겠소?"
  비영전주는 포위된 모용현도와 무사들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시체를 관에다 넣어 세가로 고이 보내줄 테니 너무 걱정들 하지 마시오."
  그사이 무공이 가장 떨어지는 모용명이 맥없이 주저앉았다. 내공이 고갈되어 더 이상 독기를 억누르지 못한 모양이었다.
  조카의 얼굴이 삽시간에 검게 변색되는 것을 부며 모용현도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젠 죽었다 깨어나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귓전으로 낯익은 음성이 파고들었다.
  "이것들은 뭐야? 희한하게 생겼네?"
  조금 전 만났던 색목인의 음성이었다. 모용현도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돌아갔다.

  다섯 구의 독강시가 막고 있는 퇴로 뒤쪽으로 네 명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데이몬과 윈슬럿, 그리고 냉유성과 당청이었다. 모용현도는 눈매를 지그시 모았다.
  '저놈들이 왜 도망치지 않고?'
  저들은 지금쯤 꽁지 빠지게 도망쳐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더 큰 위험이 자리 잡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다니…… 모용현도의 얼굴에 조소가 어렸다.
  '죽음을 자초하다니, 멍청한 것들. 그냥 도망이나 칠 것이지.'
  데이몬은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강시들을 쳐다보았다. 한때 배교의 교주였던 그가 강시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철골강시들이로군. 산사람에다 약물처리를 해서 만드는 강시. 그런데 재미있게도 독을 결합시켜 놓았군. 누군지는 모르지만 머리깨나 썩었겠는걸?'
  느긋한 데이몬과는 달리 냉유성과 당청은 연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포위망을 풀고 달려가자 그들은 즉시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앴다. 그러나 데이몬이 그들을 제지했다.
  "잠깐 기다려 보자."
  "미쳤어요? 여기 그대로 있다간 놈들에게 다시 봍들릴 거라구요."
  "상황을 봐서 움직여도 늦지 않다. 기다려라."
  보다 못한 냉유성도 거들었다.
  "하, 하지만 주군. 저 많은 모용세가의 무사들을 상대하는 것은 역부족입니다. 주공의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나에게 방도가 있으니……."
  결국 냉유성과 당청은 꼼짝없이 붙들려 있어야 했다.
  물론 데이몬에게도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그는 이미 마법을 사용해서 전장의 상황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강시가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데이몬은 쾌재를 불렀다.
  '정말 잘 되었군.'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그야말로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강시가 뿜어내는 독 기운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데이몬은 강시를 전혀 겁내지 않았다. 인간이 아닌 상대는 천군만마가 밀려와도 겁낼 데이몬이 아니었다.
  '칠종단금술이 발동되지 않는다면 무서울 것이 없지.'
  결국 데이몬은 싫다는 당청을 질질 끌고 골짜기 안쪽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냉유성이 울며 겨자 목기로 따라온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비영전주의 시선이 데이몬에게로 향했다.
  "웬 놈이냐?"
  "지나가던 나그네다. 그러는 너는 뭐하는 놈이냐?"
  상상을 초월하는 대꾸에 비영전주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강시 두 구를 일행에게로 보냈다.
  "저승길 동반자가 많아서 쓸쓸하지는 않겠군. 잘 가거라."
  케케케케
  괴성을 지르며 다가오는 강시를 맞이한 것은 윈슬럿이었다. 그가 오랜만에 무위를 뽐낼 기회를 잡은 것이다. 묵직한 메이스와 도끼를 끄집어낸 윈슬럿이 포효를 했다.
  "크아아아!"
  이어진 것은 그야말로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강시의 피부는 창검이 통하지 않은 정도로 단단하다. 그러나 듀라한인 윈슬럿의 몸통은 그보다 훨씬 더 단단하다.
  거기에 언데드인 윈슬럿에게 독이 통할 까닭이 없으며 힘도 강시보다 월등히 세다. 그러니 제대로 된 싸움이 될 리 없었다.
  콰앙
  묵직한 메이스가 작렬하자 강시의 머리통이 움푹 패여 들어갔다. 그 자리를 도끼가 한 번 더 가격하자 강시의 머리통이 맥없이 쪼개져버렸다. 독혈이 튀어 상체가 흠뻑 젖었지만 윈슬럿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크아아아!"
  윈슬럿은 함성을 지르며 남은 강시를 마구 밀어붙였다. 강시가 순순히 당하지 않겠다는 듯 저항했지만 윈슬럿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손톱으로 긁어도 먹히지 않았고 독장이 작렬해도 끄떡없었다.
  그야말로 철저히 상극인 존재와 맞닥뜨린 것이다.
  두 번째 강시 역시 채 일 분도 버티지 못하고 만신창이가 되어 널브러졌다. 거기에는 중병기인 메이스와 도끼의 역할이 컸다.
  일반적인 장검은 사람을 살상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강시를 상대로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어지간한 자상 정도는 아랑곳 없이 달려드는 존재가 강시이니까.
  하지만 메이스와 도끼는 사정이 다르다. 워낙 육중한 중병기라 한 대 얻어맞으면 강시는 엄청난 타격을 입는다.
  그 때문에 모용세가 무사들에겐 약하다고 볼 수 있는 윈슬럿이라도 상대가 강시라면 엄청난 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독강시 두 구가 눈 깜짝할 사이에 무력회되자 비영전주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서, 설마 독인인가?"
  독이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날뛰는 윈슬럿을 비영전주는 독인으로 오해했다.
  "마, 막아라."
  명령을 내리자 모용세가의 무사들을 포위하고 있던 강시들이 일제히 몸을 돌렸다. 퇴로를 막은 세 구의 강시도 거기에 가세했다. 수적인 우위로 제압하겠다는 의도였다.
  끼끼끼끼
  강시들이 동료의 원수를 갚겠다는 듯 기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을 맞은 것은 윈슬럿이 아니었다. 윈슬럿이 활약하는 동안 캐스팅을 마친 데이몬이 마법을 펼친 것이다.
  "익스플로전(Explosion)."
  불의 속성을 한데 모아 일시에 격발시키는 마법이 작렬했다. 상대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마법을 쓰는 데 아무런 걸림돌이 없었다.
  제법 고위급 마법이라 캐스팅 시간이 길었지만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마법은 정확히 강시의 중심부에서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불또잉 튀었다. 폭발에 휘말린 강시들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가 불썽사납게 바닥에 처박혔다. 폭발의 중심부에 위치한 강시는 이미 흔적도 없이 갈가리 찢어진 상태였다.
  이어 강시들의 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화르르르
  매캐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강시의 몸에 섞인 독 기운이 강력한 열기로 인해 타오르는 것이다.
  불길에 휩싸인 강시들이 비틀거리다 하나둘씩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비영전주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미, 믿을 수 없어……."
  단 한 방에 독강시 열아홉 구가 전멸해 버린 것이다. 몇몇 강시들이 불길에 싸인 채 비틀거리긴 했지만 쓰러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나마 서 있는 강시에게 윈슬럿이 접근했다. 묵직한 메이스와 도끼를 가볍게 휘두르며. 영원한 안식을 주기 위해서였다.
  "제법 한 가락 하는 것들 같았는데 허약하기 짝이 없군."
  마법 한 방으로 강시를 모조리 쓸어버린 데이몬이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그의 손가락은 비영전주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놈을 잡아와라."
  "존명."
  냉유성은 두 말 없이 몸을 날렸다. 그러면서 그는 독강시들을 간단히 쓸어버린 주공에게 감탄의 눈빛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것도 보통 강시인가. 모용세가의 무사 팔십 명을 제압한 괴력의 강시들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머쓱해지는 냉유성이었다.
  '아까 겁먹을 필요가 전혀 없었군. 주공에게 이런 엄청난 무공이 있을 줄은 몰랐어.'
  냉유성이 달려들지 비영전주는 급히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이번에는 퇴로를 막아줄 독강시가 없었다.
  무공 방면으론 보잘 것 없었던 탓에 비영전주는 금세 곤란에 처했다. 절정고수인 냉유성의 손속은 매서웠다. 얼마 도망치기도 전에 비영전주는 허벅지에 일검을 허용하고 말았다.
  "크윽."
  피할 수 없게 되자 비영전주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잡혀가면 혹독한 고문을 받을 것이 분명하기에 독한 마음을 먹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어금니에 심어놓은 독단이 터지며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물들었다. 때마침 냉유성이 그의 목줄을 잡아오고 있었다.
  "같이 죽자."
  비릿한 미소를 지은 비영전주는 입을 벌렸다. 시커멓게 변색된 독혈이 좍 뿜어졌다.
  푸우우우
  대경실색한 냉유성이 급히 몸을 틀었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얼굴에 독혈을 덮어쓴 냉유성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그 모습을 본 비영전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쿨럭. 그래도 하, 한 놈을 더 데리고 가니 여한은 없다."
  독이 골수까지 스며들었는지 비영전주는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냉유성의 얼굴도 어느덧 새카맣게 변색되어 있었다. 불시의 암습이라 대처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지독한 독이군요, 크윽."
  "멍청한 녀석. 주의를 했었어야지."
  데이몬이 툴툴거리며 다가와서 손을 들어올렸다. 이어진 것은 해독주문의 캐스팅이었다.
  "해독."
  주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냉유성의 얼굴이 혈색을 되찾았다.
  "죄, 죄송합니다, 주군."
  "한 번만 더 당하면 해독시켜주지 않을 것이다."
  사납게 으르렁거린 데이몬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장내는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강시들은 대부분 익스플로전이 작렬할 때 파괴되었고 몇 남은 것도 윈슬럿이 말끔히 처리해 놓았다.

  "이럴 수가……."
  모용현도의 눈이 터질 듯 부릅떠져 있었다. 그는 지금껏 본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처음 색목인 일행이 등장했을 때 그는 혀를 찼다. 불을 보고 날아든 불나방이라 치부했었다. 그러나 이후로 벌어진 일들은 상식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처음 그를 경악시킨 것은 색목인 무사의 활약이었다. 덩치만 당당할 뿐 내공을 익힌 기색을 찾아보기 힘들었기에 모용현도는 색목인 무사에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도리어 조소하기까지 했다.
  "멍청한 놈. 저런 투박한 무기를 어디다 쓰겠다고……."
  그러나 색목인 무사의 손에 의해 독강시 두 구가 맥없이 파괴되자 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세가의 절정고수들도 겨우 쓰러뜨린 독강시를 너무도 손쉽게 파괴했기 때문이었다.
  이어진 것은 색목인 청년에 의해 행해진 독강시 열아홉 구의 몰살이었다.
  모용세가의 정예 팔십 명을 전멸시킨 독강시들이 단 한 방에 날아가자 모용현도는 얼이 빠졌다.
  "세, 세상에……."
  그 얼마나 끔찍했던 독강시들이었던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정예 무사들을 속수무책으로 쓰러뜨린 마물들이었다. 그렇게 강했던 독강시들의 너무도 어이없는 최후에 허무감마저 드는 모용현도였다.
  그는 경악 어린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만약 조금 전 저자에게 덤볐더라면…….
  그런 상상을 하던 모용현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랬다면 강시들을 일거에 쓸어버린 가공할 무공을 모용세가 무사들이 대신 받아야 했을 것이다.
  "우, 우리가 감히 하늘을 건들 뻔했군."
  퍼뜩 정신이 든 모용현도는 전력으로 내공을 운기했다. 목숨을 건지려면 내공의 힘으로 독기를 밀어내야 했다.

  당청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떤 무공이기에 그토록 무서운 독강시를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을까? 호기심을 참지 못한 당청이 데이몬에게로 다가갔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죠?"
  "뭐가?"
  "그게 무공인가요?"
  "강시를 쓸어버린 것 말인가?"
  "네, 맞아요."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비밀이야."
  "네?"
  "너 같으면 무공의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밝힐 수 있겠나?"
  데이몬의 말에 당청은 침묵을 지켜야 했다.
  무림인에게 무공의 비밀을 묻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다. 워낙 놀랐기에 생각 없이 질문한 것뿐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감탄이 어렸다.
  "정말 놀랍군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니……."
  "아까 말했잖아. 의술이나 독술은 내가 지닌 능력의 지극히 일부일 뿐이라고. 나에겐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숨은 능력이 많아."
  또다시 시작되는 자화자찬에 당청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또 시작이로군.'
  느긋하게 장내를 돌아보던 데이몬의 시선이 쓰러진 비영전주에게로 향했다. 썩은 피거품을 꾸역꾸역 게워내는 것을 보니 거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저놈을 족치면 내막을 들을 수 있겠군.'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데이몬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비영전주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데이몬이 손짓을 하자 비영전주가 허공에 뜬 채로 끌려오기 시작했다.

  전력으로 내공을 운기해 독기를 몰아내고 있던 모용현도는 눈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주화입마에 들 뻔했을 정도였다.
  '겨, 격공섭물……. 세상에 사람의 몸을 대상으로 격공섭물이 가능하다니.'
  사실 격공섭물은 그리 난해한 절기가 아니다. 모용현도도 충분히 시전이 가능한 기술이었다.
  문제는 대상. 조그마한 찻잔이나 그릇 정도는 그도 충분히 격공섭물로 옮길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몸을 옮기는 것은 엄청난 내공이 소모된다.
  그로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 경지였기에 모용현도의 안색이 딱딱하게 질려갔다.
  '어, 엄청난 고수였었군. 하마터면 사자 아가리를 향해 달려들 뻔했어.'
  그가 보는 사이 축 늘어진 비영전주가 데이몬 앞에 놓였다. 이어진 것은 해독 주문이었다.
  번쩍
  눈부신 빛이 스치고 지나가자 비영전주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몸속의 독기운이 일시에 해독된 것이다.
  눈을 뜬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몸을 쳐다보았다.
  "어, 어떻게? 분명히 독단을 깨물었거늘……."
  귓전으로 느물느물한 일성이 파고들었다.
  "내 허락 없이는 죽지 못한다. 그 사실을 명심하도록."
  경악한 비영전주가 고개를 돌리자 데이몬의 얼굴이 들어왔다. 손짓 한 번으로 독강시 열아홉 구를 간단히 날려버린 색목인. 비영전주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냐. 다짜고짜 우릴 공격한 이유가 뭐지?"
  비영전주는 당황했다. 운 나쁘게 날아든 날파리인 줄 알고 가볍게 처리하려고 했는데 알고 봤더니 엄청난 무공을 가진 잠룡이었다.
  데이몬은 눈매를 지그시 좁히며 비영전주를 쳐다보았다.
  "본좌는 현재 중원 나들이 중이다. 무림이란 곳을 한 번 둘러보려고 온 것이지. 그런데 왜 이렇게 달려드는 하루살이가 많은가? 귀찮아서 미칠 지경이야. 도대체 우릴 공격한 이유가 뭐냐?"
  비영전주로서는 입이 백 개라도 대답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데이몬이 무력시위를 확실하게 하고 난 다음이라 효과가 만점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대, 대협. 제가 그만 하늘을 몰라보고……."
  "그냥 무턱대고 공격했다는 말이냐? 정직하게 털어놓으면 그냥 보내줄 수도 있다."
  그 말에 비영전주는 삶에 대한 희망을 되찾았다.
  "실수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맡은 임무가 다른 사람의 눈에 뜨이면 안 되는 종류의 일인지라……. 만약 대협의 실력을 미리 알았다면 결코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에겐 분명 생에 대한 욕구가 있는 법이다. 비영전주도 포로가 된 다음에 받을 혹독한 고문을 염려해 독단을 깨물었을 뿐 생에 대한 애착이 없을 리 없었다.
  데이몬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캐스팅을 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영문을 모른 비영전주가 무릎걸음으로 걸어왔다. 데이몬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순간 비영전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머리에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크으윽."
  "참아라. 내 몇 가지 살펴보고 보내주겠다."
  데이몬은 지금 비영전주의 기억을 읽고 있었다.
  상대의 기억을 직접 빼내는 것은 마왕 고유의 권능.
  어둠의 마력을 대거 투여한 덕분에 비영전주의 최근 기억이 데이몬의 머릿속으로 곧바로 전이되었다. 데이몬의 얼굴에 실망감이 어렸다.
  '이놈도 잔챙이로군. 알고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아.'
  단지 묵회의 조직구성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했다는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마법을 끝내고 데이몬은 손을 거두었다. 비영전주가 불안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올려다보았다.
  "가라."
  "네?"
  "실수로 공격했다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 너 하나 죽여봐야 손만 더러워질 뿐이지. 마음 변하기 전에 어서 가라."
  "네, 네."
  비영전주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색목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이 자리를 떠나야 했다.
  다행히 가로막는 사람은 없었다. 모용세가의 생존자들은 독을 몰아내기 위해 운기중이라 움직일 수 없었다. 가장 내공이 심후한 모용현도만이 살기 어린 시선을 번뜩일 뿐이었다.
  '놈을 보내면 안 되오. 반드시 잡아야 하오.'
  그러나 눈빛만으론 사람을 잡을 수 없는 법이다.
  주위를 둘러본 비영전주는 쏜살같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머릿속에 이미 마왕이 투여한 어둠의 마력이 자리 잡았음을.
  냉유성이 돌아다니며 전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중독된 모용세가 무사들은 대부분 절명한 상태였다. 혈도를 막아 독이 경맥에 침입하는 것을 방지했다면 살아날 방도가 있었을 텐데, 강시와의 접전이 워낙 험준했기 때문에 전혀 손쓰지 못한 것이다.
  생존자들 중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했다. 생존자들 중 가장 먼저 쓰러진 모용명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독이 경맥에 침입하면 대라신선이라 할지라도 살아남지 못한다.
  당청은 조소 어린 눈빛으로 모용명의 최후를 지켜보았다.
  '정말 잘되었군. 쌤통이야.'
  그러는 사이 모용세가의 생존자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켰다. 내공으로 독을 밀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독과 싸우느라 잠력을 모두 소진했고 내공은 완전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모용현도는 아직까지 운기 중이었다. 독혈을 정통으로 뒤집어 썼기 때문에 비교적 깊이 중독된 것이다. 그나마 그의 내공이 심후했기에 독이 경맥까지 파고들지는 못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대부분 절정고수들이었다. 일류무사가 한 명 있기는 하지만 거의 절정의 문턱에 도달한 고수였기에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아까 공격하려고 했던 사실 때문인지 그들은 데이몬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똑똑히 목격했다. 데이몬이 손짓 한 번으로 열아홉 구의 독강시를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을.
  외면하고 있어도 저절로 등판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마터면 호랑이의 코털을 뽑을 뻔했어.'
  '그때 강시가 공격을 가해왔던 것이 천만다행이었군.'
  그사이 모용현도가 독을 모두 몰아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경이 어린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물론 태도는 아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가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포권을 했다.
  "구명의 은혜에 감사드리오."
  데이몬의 시선이 느릿하게 모용현도에게로 향했다.
  '역시 무림에서는 힘이 있고 봐야 해.'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아까 왜 덤비지 않았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격언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려고 했는데 말이오."
  데이몬의 힐난에 모용현도는 쩔쩔 맬 수밖에 없었다.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중이라……."
  "앞으론 산으로 다니지 말아야겠구려. 임무 수행하는 무림인을 만나면 무턱대고 칼을 빼들고 덤빌 테니."
  "서, 설마 그럴 리가 있겠소이까? 대협의 무공실력이라면……."
  "아무튼 좋소. 이제 더 이상 볼일이 없으리라 생각하오. 그럼 우린 갈 길을 가리다."
  냉정히 돌아서는 데이몬을 모용현도가 다급히 잡았다.
  "그런데 묵회의 사자를 왜 보내주셨습니까? 그는 지극히 간악무도한 자입니다. 그놈 때문에 우리 모용세가 무사들이 몰살을……."
  "그게 대관절 나와 무슨 상관이 있소?"
  데이몬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나에게 사과를 했소. 실수로 그랬다고 하기에 너그럽게 용서해 준 것뿐이오."
  "그는 묵회라는 비밀 조직의 사자입니다. 반드시 잡아야만 하는 자……."
  "뭔가를 잘못 생각하는구려. 내 입장에서는 모두가 동일한 중원인일 뿐이오. 그래서 보내준 것인데 뭐 잘못된 것이 있소?"
  모용현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서역의 색목인에게 정파와 사파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색목인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동일한 중원인일 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모용현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얼핏 듣기로 독술에 능하다고 했는데 사실입니까?"
  "그 정도로 능하다고 하면 안 되지. 내가 보기에 중원의 독술은 수준이 낮아."
  말을 마친 데이몬은 손가락을 뻗어 당청을 가리켰다.
  "저 아이의 할아비와 독술을 겨뤄봤는데 형편없는 수준이었어. 그 때문에 저 아이를 얻긴 했지만 말이야."
  모용현도는 적이 놀라고 말았다. 당문수라면 자타가 공인하는 독의 대가다. 적어도 중원에서는 세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런데 그런 당문수를 독술 대결로 꺾었다니…….
  뭔가 결심을 한 듯 모용현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한 가지 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요?"
  "한 사람을 해독해 주십시오. 중요한 비밀을 품고 있는 세가의 무사입니다."
  모용현도가 가리킨 이는 모용수였다. 아직까지 숨이 넘어가지 않았지만 얼굴이 검게 변색된 것을 보아 중독이 심각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강시들이 방사하는 것과 다른 종류의 독이 투여된 모양이었다.
  데이몬은 눈을 가늘게 뜨고 모용현도를 쳐다보았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
  "당신들은 내 일행을 죽이려고 했소. 그걸 그냥 넘어가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국인데 사람을 해독해 달라? 허참, 어이가 없군."
  수치심 때문인지 모용현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사실 입기 열 개라도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상대의 실력을 얕보고 죽이려고 했던 것이 바로 조금 전의 일이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모용수는 묵회의 사자와 접족한 유일한 인물. 반드시 그를 해독시켜서 증언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도가 없었다. 상황을 보니 세가로 돌아가기 전에 절명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모용현도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대신 그에 대한 충분한 금전적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돈에는 전혀 관심이 없소. 이래봬도 난 금전적으로 상당히 풍족한 편이라오."
  속이 점점 타 들어간 모용현도가 데이몬을 거듭 부여잡았다.
  "그러면 원하시는 것은 뭐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반드시 살려야 하는 무사입니다."
  "미안하지만 난 원하는 게 없소."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당청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용세가에 잡혀 있는 당문 식솔들이 떠오른 것이다.
  '만약 해독해 주는 조건으로 당문 식솔들의 석방을 요구한다면……'
  물론 자신이 해독할 자신은 없다. 할아버지라면 모르겠지만 그녀의 독술은 그에 비해 형편없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다르다. 온갖 극독을 복용해 죽어가던 할아버지까지 소생시킨 데이몬이 아니던가?
  그라면 모용세가 무사의 중독이 아무리 심해도 충분히 해독시킬 수 있을 것이라 그녀는 믿고 있었다. 문제는 그 말을 쉽사리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다는 점이다.
  '그가 과연 내 부탁을 들어줄까?'
  어지간한 철면피가 아니고서야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갇혀 있는 식솔들을 위해 당청은 힘을 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구려."
  데이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살짝 옷깃을 잡아끌었다. 당청이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것으로 보아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저기……."
  "왜 그러느냐? 말해보아라."
  말하기가 어려운지 당청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입을 열었다. 그녀는 우선 당문이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사실……."
  당문의 사람들이 모용세가에 대거 포로로 잡혀 있다는 사실을 힘겹게 털어놓은 당청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이래선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데이몬이 눈을 반짝였다.
  "네 말인즉슨, 포로로 잡힌 당문 사람들을 풀어주라는 조건을 내걸란 말이냐? 저 무사를 해독시켜 주는 대신?"
  "네, 그래요."
  스스로도 뻔뻔하다고 생각했는지 대답이 모기소리만큼 작게 나왔다. 데이몬은 재미있다는 듯 당청을 쳐다보았다.
  '요 계집애가?'
  물론 해독해 주는 것 자체는 힘들지 않다. 데이몬은 당청에게 마음의 빚을 지워두기로 작정했다.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마."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은 모용현도를 쳐다보았다.
  "청이의 제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오?"
  "그것은 좀 어려운 조건입니다."
  모용현도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당문 포로들은 현재 모용세가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독에 대한 연구를 도맡아 하고 있으니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모용수를 살리는 것도 시급하다. 하지만 그들을 풀어줄 수 있는 권한이 그에겐 없었다.
  그러나 데이몬이 누군가? 밀고 당기기식 거래에 이골이 난 존재 아니던가? 모용현도의 내심을 읽은 데이몬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협상은 결렬되었소."
  "자, 잠깐만……."
  모용현도가 황급히 돌아서려는 데이몬의 옷깃을 잡았다. 더 이상 결정을 유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알겠습니다. 조건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대신……."
  "대신 뭐요?"
  "저희 모용세가에 들러주십시오. 가주님과 상의한 다음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그 말을 누가 믿소? 해독해 주고 나서 나 몰라라 하면 우린 어떻게 한단 말이오."
  모용현도가 결연한 표정으로 허리에 차고 있는 옥패를 빼어들었다.
  "질풍검이라는 제 명호를 걸고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단지 그들을 방면할 권한이 저에게 없어서입니다."
  "명호를 건다면 믿을 수 있지."
  일리가 있다는 듯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인이란 족속이 어떤 족속인가? 명성에 모든 것을 거는 족속 아니던가?
  데이몬은 모용현도가 내미는 옥패를 받아들었다.
  "좋소. 거래가 성립되었소."
  옥패를 갈무리한 데이몬이 해독주문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워낙 마법을 많이 남발했는지라 어둠의 마력이 대부분 소진된 상태였지만 해독주문 한두 번 정도는 시전할 여력이 남아 있었다.
  그 사이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늘어진 모용수의 몸을 운반해왔다.
  "그럼 치료하겠소."
  데이몬의 손이 수인을 맺었다. 일부러 효과를 연출하기 위해 섬광 마법까지 시전했기에 모용수의 몸이 밝은 빛 무리에 휩싸였다.
  번쩍
  빛 무리가 지나가고 난 뒤 시커멓게 물들었던 모용수의 얼굴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몸속의 독기가 말끔히 정화된 것이다.
  "되었소. 원기를 북돋워주면 정신을 차릴 것이오."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모용현도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실로 엄청난 독술을 보유하고 계시는군요."
  "하하하! 독술이야 심심풀이 잡기로 익힌 것일 뿐 내 장기는 이것이 아니오."
  데이몬을 쳐다보는 모용현도의 눈빛은 복잡했다. 아까 보여준 능력도 능력이었지만 탁월한 해독술이 모용현도의 관심을 더욱 자극했다.
  '이 색목인이 무엇 때문에 중원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어떻게든 그의 비밀을 알아내야 한다. 무엇 때문에 중원에 왔는지, 저 놀라운 능력을 어떻게 배웠는지.'
  모용현도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그럼 우린 이만 가보도록 하겠소."
  "세가에 들리지 않으십니까? 당문 포로들을……."
  "천천히 들르리다.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소."
  말을 마친 데이몬은 어지럽게 널린 모용세가 무사들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전장을 정리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리겠구려. 우린 먼저 가보겠소."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이상 붙잡을 명분이 없다.
  "죄송하지만 존함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 이름은 데이몬이오. 그렇게 부르면 되오."
  "네, 알겠습니다. 그럼 훗날 세가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소."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이 눈짓을 했다.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냉유성이 앞장서서 골짜기의 입구로 향했다.
  휘하 무사들이 시체를 정리하는 사이 모용현도는 묘한 눈빛으로 일행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2. 무림의 새로운 변수(變數)


  악양(岳陽).
  호남성의 성도인 장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악양에는 무림맹 지부가 설치되어 있다.
  보통 무림맹 지부에는 뛰어난 무사들이 파견되어 있지 않다. 지부의 목적은 보편적으로 정보수집이나 탐문이 주력이기 때문에 몇몇 정보요원들이 상주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악양의 무림맹 지부는 달랐다. 문파들이 밀집되어 있는 사천을 지원하기 위해 상당한 수의 무사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다.
  또한 지부장으로 무림의 명숙이자 청성파의 속가제일인인 청성파검 초무량이 와 있을 정도이니 무림맹에서 악양 지부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다수의 무사들이 거주하는 것이니만큼 무림맹 악양 지부는 시내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산기슭에 위치한 악양 지부는 무림맹의 지부답게 여러 개의 연무장을 거진 거대한 장원이었다.
  그런데 악양 지부를 내려다보는 여러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악양 지부. 오늘의 목표는 바로 이곳이다."
  서늘한 눈빛으로 악양 지부를 쓸어보는 이는 금빛 면구로 얼굴을 가린 장한이었다. 면구 사이로 드러난 눈빛이 섬뜩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다.
  베일에 싸인 신비집단 묵회. 그곳의 회주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이다.
  그의 눈동자에 서서히 살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림맹, 네놈들은 우릴 너무 얕봤어. 이제부터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냉랭하게 내뱉은 묵회주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어둠에 싸인 세 개의 그림자가 표표히 서 있었다.
  달빛이 비치고 있었지만 세 그림자는 전혀 윤곽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럴 것이, 검은 천으로 몸 전체를 푹 덮어씌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림자를 쳐다보는 묵회주의 눈동자에 의혹이 짙게 서려 있었다.
  "과연 잠마련의 비밀병기인 철마가 얼마맡큼의 위력을 보여 줄 것인가?"
  당면한 상황이 기대되는지 그의 입매가 연신 쫑긋거렸다.
  묵회 설립 당시 그는 잠마련으로부터 독강시 일백여 구를 지원 받았다. 대외적으로 잠마련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야 했기 때문에 단 한 명의 무사도 지원받지 못한 대신이었다.
  처음에는 묵회주도 잠마련에서 지원 받은 독강시에 대해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그 역시 강시가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예상 밖이었다. 그 자체로는 별달리 위력을 떨치지 못한 강시가 독과 결합하자 성능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두세 구 정도로도 능히 절정고수를 상대할 수 있으니 휘하에 절정고수 스무 명을 거스린 것이나 진배없었다.
  독강시의 위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던 묵회주는 맡은 임무의 완수를 자신했다.
  "되었어. 독강시만 있다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충분해."
  하지만 상황은 그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가 당면한 가장 큰 패착은 무림맹의 재빠른 대응이었다.
  묵회주가 맡은 임무는 소속 문파에 불만을 가진 방계제자들을 독과 무력으로 굴복시켜 회유하는 일이다.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회유되지 않는 자들은 그 자리에서 죽인 뒤 시체마저 화골산으로 녹여버렸다. 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철저히 보안을 엄수한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비밀에 부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문파원들의 은밀한 실종은 예상보다 빨리 무림맹에 보고되었다. 정사대전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무림맹은 재빠른 행보를 보였다. 정보부를 주축으로 전면적인 조사에 들어간 것이다.
  그로 인해 묵회에 회유된 몇몇 무사들의 정체가 드러났고, 고문과 문초를 통해 묵회의 정체가 마침내 드러나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사건의 전말을 알아낸 무림맹은 즉각 대응에 나섰다. 각 문파에다 통문을 돌리고 대대적으로 정보수집에 나섰기 때문에 묵회는 그 행로에 있어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묵회주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움직임이었다.
  지금까지의 일을 떠울려본 묵회주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놈들이 이처럼 재빠르게 대처하리란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내 실수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무림맹이 우리 묵회를 무시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무림맹의 재빠른 대응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만약 묵회가 다수의 무사를 보유한 방회였다면 무림맹도 섣부른 대응을 삼갔을 것이다. 더욱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신중하게 묵회에 대해 조사에 들어갔을 터였다.
  하지만 무림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독과 강시 따위를 이용하는 저열한 집단으로 치부하고 곧바로 대응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묵회주는 곤란에 처했고 결국 잠마련에다 추가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묵회주가 이곳에 온 이유는 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일단 무림맹에다 묵회의 힘을 보여줘야 해. 악양 지부를 초토화시키는 것으로써."
  묵회주의 입에서 깜짝 놀랄 만한 말이 흘러나왔다. 말이 일개지부지 악양 지부가 보유한 힘은 사실 중견 문파의 힘을 넘어서고 있다.
  일단 지부장인 초무량은 초절정의 벽을 무너뜨렸다고 평가되는 무인이다. 명문대파의 장로급에 해당할 정도로 뛰어난 고수인 것이다.
  게다가 악양 지부에는 일백 명에 가까운 일류고수들이 상주하고 있다. 각 문파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 외 경비무사들의 수까지 합치면 전투인원만 해도 삼백을 넘어선다. 그런 악양 지부를 초토화시키겠다고 장담하는 것이다. 묵회주가 눈빛을 빛냈다.
  "잠마련이 철마에 대해 장담한 것이 사실이라면 승산은 10할이다. 음양강시가 제 역할을 해 준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잠마련의 사자로부터 철마와 음양강시를 건네받았을 당시 묵회주는 반신반의했다. 초절정 고수 다섯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다는 장담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독강시보다 열 배 이상 강하다는 음양강시에 대해 듣자 묵회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강시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송두리째 뒤집는 장담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번 습격에서 진위가 드러나겠지. 잠마련 사자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머리를 흔든 묵회주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서너 명의 무사들이 달려들어 그림자를 덮은 천을 풀었다.
  달빛을 받아 요요롭게 빛나는 강시 세 구의 실루엣.
  그 뒤로 이십 구의 독강시들이 어둠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넓은 방 안에 두 명의 무사가 마주 앉아 있다. 무림맹 악양 지부의 지부장인 초무량과 부지부장인 왕평이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지만 둘은 침소에 들지 않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고민이 많은지 지부장 초무량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다.
  "묵회에 대해 더 이상 드러난 것이 없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워낙 보안을 철저히 하는 조직인지라……."
  "답답하군. 안 그래도 어수선한 판국인데 이런 놈들마저 나와 무림을 어지럽히는 형국이니……."
  "그러게 말입니다."
  부지부장인 왕평이 지당하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그는 공동파 출신이었다. 지부장이나 휘하 무사들과 마찬가지로 속한 문파에서 파견되어 이곳에 배치된 것이다.
  사실 이런 조직들은 구조적으로 상당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상명하복의 전통이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명령체계가 확실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악양 지부만큼은 예외였다. 지부장인 초무량의 능력이 워낙 월등하기 때문이다.
  오십 줄을 넘어서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무량은 무림에서 잔뼈가 굵은 명숙이다. 무공도 고강할 뿐더러 휘하 무사들을 휘어잡는 통솔력과 지도력을 갖췄기에 악양 지부의 무사들은 초무량을 무척이나 믿고 신뢰했다.
  왕평 역시 눈빛에 존경 가득한 념을 담아 초무량을 쳐다보고 있었다. 초무량이 뭔가 생각이 난 듯 왕평을 쳐다본다.
  "참, 그러고 보니 새로 들어온 소식이 하나 있구려."
  "무엇입니까?"
  "냉우성이란 무사에 대해 잘 아시겠구려. 구 파 출신이니 말이오."
  왕평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물론 그가 냉유성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한때 자파의 가장 촉망받는 후기지수였지만 문파 내부의 알력에 의해 제거된 존재가 냉유성이다. 왕평 역시 그 사실을 무척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가 무공을 되찾았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소."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왕평의 눈이 커졌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소. 냉유성에게 복수를 하러 갔던 무사들에게서 흘러나온 증언이오. 그에 의하면 냉유성은 의문의 색목인을 새로운 주군으로 삼았다고 하오. 그리고 과거의 무공을 모두 되찾은 것으로 파악되었소."
  왕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는 분명 사지근맥을 절단당하고 단전까지 파괴되었습니다. 그가 무공을 되찾을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하지만 사실이오. 이미 여러 명의 무사들이 그것을 확인했다고 하오."
  "그 사실을 본 파에서 알고 있습니까?"
  "아마 그럴 것이오. 공동파 역시 별도의 정보조직을 두고 있으니 말이오."
  왕평은 침묵을 지켰다. 새로 들어온 정보가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황을 보니 공동파에서 따로 조사단을 파견할 것 같소. 냉유성이 어떤 방법으로 무공을 되찾았는지 파악하기 위해서 말이오."
  "아마 그러겠지요. 지금까지 그런 전례는 없었으니까요."
  왕평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는 공동파 내부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역대 최고의 후기지수라 할 수 있는 냉유성을 문파 내부의 알력 때문에 제거한 일은 누가 보아도 제 살 깎아먹기였다.
  그 사실을 떠올린 왕평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과오가 있더라도 덮어주어야 할 인재를 그렇게 가볍게 내치다니……. 우리 공동파의 앞날도 그리 밝진 않군.'
  그때 갑자기 바깥이 소란해졌다.
  쾅 콰쾅
  뭔가 부서지는 음향 사이로 비명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초무량과 왕평은 둘 다 절정의 벽을 넘어선 무인.
  때문에 범상치 않은 사태가 벌어진 것을 곧바로 직감했다.
  "무슨 일이지?"
  "나가봐야겠구려."
  그들은 즉시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사단이 벌어진 곳은 정문 쪽이었다. 그곳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제대로 옷도 걸치지 못하고 뛰어나온 무사들이 느닷없이 난입한 적을 맞아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한달음에 달려온 초무량과 왕평은 눈을 부릅떴다. 난입해 온 적이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심야의 난입자는 강시들이었다. 시커먼 동체가 어둠에 묻혀 잘 식별되지 않는 강시 이십여 구가 주위를 포위한 무사들에게 무차별 살수를 펼치고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초무량은 자신의 애검을 뽑아들었다.
  "묵회! 이 자식들이……."
  초무량은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초절정이라는 그의 무위를 증명하듯 그의 신형이 쏜살같이 전장을 가로질렀다. 서릿발 같은 검기가 정면을 가로막은 강시를 향해 퍼부어졌다.
  번쩍
  역시 초절정 고수의 검기가 발휘하는 위력은 대단했다. 강시의 단단한 머리통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뒤이어 몸통에서 독혈이 폭죽처럼 피어올랐다.
  지금껏 여러 고수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독공격이다. 그러나 초무량은 걸려들지 않았다. 워낙 몸놀림이 빨랐기 때문에 독혈을 뒤집어쓰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무사들은 사정이 달랐다. 사방으로 내뿜어진 독혈이 부근에서 엉켜 싸우던 무사들의 몸에 튀었다.
  "크어억!"
  독혈에 격중당한 무사들이 목을 움켜쥐고 나뒹굴었다. 얼굴이 시커멓게 변색된 것을 보아 독이 경맥까지 침입한 듯했다. 초무량의 안색이 딱딱해졌다.
  "극독이로군. 간악한 놈들, 강시에다 독을 결합시키다니……."
  초무량은 내공을 끌어 모아 주변 무사들에게 경고성을 내질렀다.
  "강시에서 뿜어지는 독혈을 조심하라. 내공으로 통제하기 힘든 극독을 내포하고 있다."
  그때 등 뒤에서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초무량의 눈에 끔찍한 장면이 들어왔다.
  "으아아악!"
  무려 다섯 명의 무사가 일순간에 상체와 하체가 토막 나서 쓰러지고 있었다. 맥없이 허물어지는 무사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를 보자 초무량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 저것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전신을 거무튀튀한 철갑으로 감싼 괴인이었다. 특이한 형식의 갑옷을 차려입은 자가 보기에도 섬뜩한 광망을 뿜어내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장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기에 초무량은 눈쌀을 찌푸렸다.
  "특이한 형태의 갑옷이로군. 저 녀석이 우두머리 같은데?"
  초무량은 더 이상 생각할 것 없다는 듯 몸을 날렸다.
  우두머리는 우두머리가 맡는 것이 전투의 정석.
  그래야만 휘하 무사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기에 초무량은 무턱대고 공격을 가했다. 그의 장검이 시릴 듯한 빛을 품고 철갑무사의 가슴팍을 찔러 들어갔다.
  파츠츠츠
  초무량은 초절정 고수다. 검강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경지인 것이다.
  그러나 초무량은 초반부터 검강을 사용하지 않았다. 내력소모가 커서 장기전에 불리한 데다 초무량 정도 되는 고수는 검기만으로 충분히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것은 초무량뿐만 아니라 여타의 초절정 고수들도 흔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푸하학
  반면 철갑괴인의 장검에서는 서슬 퍼런 빛기둥이 뿜어져 나왔다. 처음부터 검강을 발현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장검보다 월등히 길고 두터운 대검이 가슴을 파고드는 초무량의 검을 가로막았다.
  푸캉
  둔중한 충격을 받은 초무량의 몸이 뒤로 맥없이 밀려났다. 그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선명했다. 강기의 위력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이거 보통 놈이 아닌 걸?"
  바짝 긴장한 초무량은 단전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웅혼한 내력이 구렁이처럼 꿈틀거리며 장검에 밀려들어갔다.
  검강을 쓰는 상대에겐 검강으로 마주쳐야 하는 법. 초무량의 장검에서 석자 길이의 검강이 솟아올랐다.
  "그대는 누구인가? 어찌하여 본 지부에 난입한 것이지?"
  그러나 철갑괴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섬뜩한 눈빛을 번뜩이며 초무량을 노려볼 뿐이었다. 약이 오른 초무량은 슬며시 거리를 좁혔다.
  '무거워 보이는 철갑을 두르고 있는 만큼 몸놀림이 원활하지 못할 것이다. 치고 빠지는 공격으로 상대가 스스로 파탄에 빠지게 만들어야 한다.'
  초무량이 움직이자 철갑괴인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묵직한 갑주를 입고 있었지만 몸놀림이 표홀한 것이 내공이 꽤나 정심해 보였다.
  만만치 않은 상대란 것을 직감하자 초무량은 착잡해졌다. 원래 강시를 물리치는 데는 그와 같은 초고수들이 앞장서야 한다. 그래야만 일반 무사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보니 상황이 무척 심각해 보였다. 하지만 초무량은 섣불리 몸을 뺄 수 없었다. 눈앞의 철갑 괴인에게 단단히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강을 끌어올린 상태였기 때문에 이러고 있는 상황에서도 계속 내력이 소모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선공을…….'
  결정을 내린 초무량의 신형이 바람처럼 대기를 갈랐다. 신법을 십분 발휘해서 상대의 자세를 무너뜨리기로 작정한 것이다.
  철갑괴인도 그에 맞춰 몸을 날렸다. 하지만 맨몸인 초무량에 비해 반응이 느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초무량의 눈빛이 빛났다. 괴인에게서 틈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허점!'
  이미 초무량은 마음이 가는 데 손이 가는 경지에 올라 있다. 허점을 발견하자마자 강기를 머금은 장검이 빈틈을 파고 들어갔다.
  그가 노린 곳은 철갑괴인의 팔꿈치.
  튼튼한 갑주를 두르고 있었지만 초무량은 괴인의 팔이 잘려나갈 것이란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시전하는 검강은 강철을 무 베듯 잘라내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격돌의 순간 초무량은 괴인의 갑옷이 눈부시게 빛나는 것을 목격했다.
  콰콰쾅
  이어진 것은 강기와 강기의 폭발이었다.
  뜻밖의 반응에 초무량은 깜짝 놀랐다. 상대의 갑옷에서 발현된 것은 틀림없는 강기였다. 자신의 강기를 막아낸 것만 봐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일격이 무위로 돌아갔지만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엄청난 크기의 대검이 그의 어깨를 노리고 날아왔기 때문이다.
  "웃."
  초무량이 세 번이나 몸을 뒤집으며 뒤로 물러났다. 잔뜻 부릅뜬 그의 눈동자에는 불신의 빛이 진하게 서려 있었다.
  "믿을 수 없어. 갑옷에 강기를 집중시킬 정도라면 얼마나 내공이 웅혼하다는 말인가?"
  초무량의 일격에 격앙되었는지 철갑괴인이 내뿜는 광망이 한층 더 섬뜩해졌다. 동시에 괴인이 들고 있는 장검이 타오르듯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강기의 길이가 길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껏 축약되며 더욱 빛이 짙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초무량은 자신감이 꺾이는 것을 느꼈다.
  "어, 엄청난 내공이로군. 도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이 튀어나온거지?"
  하지만 상황은 머뭇거릴 여유를 주지 않았다. 장검 손잡이를 불끈 움켜쥔 초무량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채 강철괴인을 공격해 들어갔다.

  부지부장인 왕평 역시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기괴하게 생긴 강시 하나가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연신 매서운 공격을 퍼부어 대었지만 강시는 끄떡도 하지 않고 버텼다.
  '믿을 수 없군. 내가 고작 강시 하나를 상대하지 못해 쩔쩔매다니……'
  왕평은 이미 절정의 극에 이른 고수. 깨달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 초절정의 벽을 무너뜨릴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그가 강시 하나를 쓰러뜨리지 못하다니…….
  아마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누구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혹독했다.
  그가 맞서 싸우고 있는 강시는 놀라울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무서운 점은 강시에게 검강이 도통 먹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지 왕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 낸 강시이기에……."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강시였다. 창백한 얼굴에 청의를 걸쳤는데 여러 번에 달하는 왕평의 공격을 받아낸 탓인지 청의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드러난 강시의 피부에는 보기 흉한 상처가 가득했다. 모두가 왕평의 검강이 가격하고 지나간 자리였다.
  문제는 왕평의 검강이 강시의 피부에 상처만을 입힐 뿐 더 이상의 타격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지금도 검강을 뿜어내는 장검이 강시의 어깨를 훑고 지나갔다.
  서걱
  단단해 보이는 피부가 쩍 갈라졌다. 독강시와 달리 독혈이 뿜어져 나오진 않았지만 대신 시커먼 기운이 뭉클뭉클 배어 나왔다. 쩍 벌어진 상처에 녹색 빛이 일렁이는가 싶더나 눈에 띄게 아물기 시작했다.
  금새 흉터만을 남긴 채 사라져버리는 상처.
  왕평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게다가 왕평은 몸이 눈에 띄게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흡성대법을 펼치는 상대에게서 내력을 갈취당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찌해서 이런 일이……. 강시 따위가 흡성대법을 운용할 리가 없을 텐데."
  얼마 싸우지 않았지만 왕평의 단전은 거의 고갈되어 있었다. 반면 강시는 쌩쌩했다. 지금도 강시가 뼈가 앙상한 손가락을 좍 펼쳐 왕평의 어깨를 할퀴어오고 있었다.
  "헉."
  철판교를 써서 공격을 피해낸 왕평은 강시와의 거리를 벌렸다. 주위를 돌아본 그의 눈이 암울해졌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독강시 중 반수 정도가 파괴되어 널브러져 있었지만 그 대가로 악양 지부의 무사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야 했다. 이곳에 파견된 일류고수 중 절반 이상이 독에 중독된 채 나뒹굴고 있었고, 그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무사들은 태반이 전멸한 상태였다.
  청의를 입은 나머지 한 구의 강시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그가 보는 사이에도 무사 한 명이 강시의 장력에 맞아 훨훨 날아갔다.
  "크아악."
  사지를 펼치고 나가떨어진 무사의 몸이 부르르 떠는가 싶더니 고개가 축 늘어졌다. 단 일격에 절명한 것이다.
  방어력뿐만 아니라 가공할 만한 파괴력도 함께 갖춘 강시였다. 왕평의 안색이 암울해졌다.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다. 지부를 버리고 후퇴해야 해."
  그러나 지부장이 있는 곳을 쳐다본 왕평은 또다시 경악해야 했다. 전신에 철갑을 두른 괴인에게 형편없이 밀리고 있는 지부장의 모습을 본 것이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초무량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철갑괴인을 상대할 만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상대는 싸울수록 강해졌다. 몸놀림도 더욱 원활해졌고 대검에서 뽑아내는 강기의 위력도 가일층 증가되었다.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그로서도 버티기 힘들 정도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지만 당면한 현실은 냉혹했다.
  "내, 내 상대가 아냐."
  천지를 쪼갤 듯 가로지르는 검을 간신히 막아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초무량은 맥없이 튕겨나야 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진동하는 장검을 본 초무량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상황이 역부족이란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내공을 한껏 끌어 모은 그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모두 이 자리를 벗어나라. 더 이상의 교전은 허락하지 않는다. 집결지는 하남의 무림맹 본단이다."
  후퇴 명령을 내렸지만 그는 전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 수장이 해야 할 임무였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사들의 희생이 극심할 것이기에 독강시가 밀집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지금껏 맞서 싸우던 철갑괴인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치열하게 교전을 벌이던 무사들이 하나둘씩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왕평도 다가오는 강시에게서 몸을 뺀 다음 초무량에게로 다가갔다.
  "지부장님."
  "부지부장, 당신이 책임지고 무사들을 후퇴시키시오. 퇴로는 내가 맡겠소."
  "저도 함께 남겠습니다."
  "아니 될 말이오. 무사들을 진두지휘하여 전장을 이탈하시오. 이것은 명령이오."
  "지, 지부장님."
  입술을 질끈 깨문 왕평은 무사들에게로 달려갔다. 지부장인 초무량이 목숨을 걸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악양 지부의 연무장에는 시신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간혹가다 독강시의 끔찍한 잔해도 있었지만 대부분 악양 지부를 지키던 무림맹 무사들이었다.
  살아남은 무사들은 눈물을 흩뿌리며 지부를 빠져나갔다. 괴력을 발휘하는 강시를 감당하는 것은 그들의 능력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날 밤 악양의 무림맹 지부는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상주하던 무사들뿐만 아니라 하인이나 일꾼들도 악운을 피해가지 못했다. 무려 사백이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한 참사였다.
  목숨을 건져 빠져나간 이는 부지부장인 왕평을 위시한 무사 89명뿐이었다. 지부장인 초무량은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결국 철갑괴인에게 걸려 최후를 맞은 것이다.
  이 사건은 무림맹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무림인으로 하여금 묵회의 저력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게다가 이번 대전은 강시와 독에 대한 무림인들의 생각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았다.
  지금껏 구시대의 유물로만 여겨졌던 강시. 그러나 극독과 결합하자 강시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증강되었다. 두세구만으로 능히 절정고수 하나를 제압할 수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또한 왕평의 입을 통해 악양 지부 습격사건에서 모습을 드러낸 최신형 강시의 능력이 알려지자 무림인들은 다시 한 번 놀라야 했다.
  왕평과 막상막하로 싸운 청의의 강시에 이어 악양 지부장 초무량을 압도적으로 밀어붙인 철갑괴인의 존재는 무림맹을 바짝 긴장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무림맹 본단에서는 연일 대책회의가 벌어지고, 수뇌부들이 대칙을 논의했다.

               *               *               *

  하남의 무림맹 본단 회의실에는 여러 문파에서 모인 대표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중원이 워낙 넓은 관계로 모두가 모일 수는 없었다. 때문에 비교적 가까운 문파의 대표끼리 모여 회의를 벌였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유독 목청이 높은 이가 있었다.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소. 강시가 그토록 강하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요?"
  쩌렁쩌렁 울리는 음성의 주인은 당당한 체구의 사십대 중년인이었다.
  부릅뜬 고리눈에 철사처럼 삐죽삐죽 돋은 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인은 하북 팽가에서 파견된 열혈도 팽명환이다.
  불같은 성정과 그에 꿀리지 않는 무공실력을 보유한 팽명환은 불신의 빛을 짙게 드리운 채 의견을 토로하고 있었다.
  "강시의 몸뚱이가 제 아무리 단단하다 하더라도 강기를 견딜 수는 없소. 그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 아니오?"
  "하지만 그 우려가 현실로 드러났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반론을 제기하는 이는 무림맹주인 황천호였다.
  천의대협 황천호.
  섬서 황가장 출신으로 어릴 때 이인(異人)을 만나 절세 무공을 익혔고 젊을 대부터 두각을 나타낸 무림의 명숙이었다.
  드높은 인품만큼이나 무공실력도 강하지만 그가 무림맹주가 된 거슨 그것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황천호의 출신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중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중 한 곳의 인물이 무림맹주가 된다면 문제점이 적지 않다. 사파저럼 절대권력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무림맹주가 갖는 권한은 상당히 막강한 편이다.
  그 권한을 출신 문파를 위해 남용할 수 있기 때문에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천의대협 황천호에게 무림맹주 자리를 맡긴 것이다.
  기실 황천호의 가문은 엄밀히 말해 무림세가라고 보기 힘들다. 대대로 조정의 관리를 지낸 벼슬아치 집안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바로 그 때문에 황천호를 무림맹주로 임명하는 데 어느 문파에서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문제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무림맹주로서의 입지가 확고하지 못하다는 것이지만 황천후는 나름대로 원만한 임품과 폭넓은 포용력으로 각 문파간의 사건들을 잘 조율해 나가고 있었다.
  그가 눈빛을 빛내며 각 문파의 대표자들을 쳐다보았다.
  "악양 지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묵회의 숨은 힘이 다소나마 드러났소. 솔직히 말해 우리는 지금까지 묵회를 얕봐왔소. 독을 이용해서 무림의 혼란을 조장하는 조직인 만큼 그럴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이제는 묵회를 경시할 수 없게 되었소. 악양 지부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이상 묵회를 상대하는 데 있어 최대한 만전을 기해야 할 필요가 있소."
  그러나 팽명환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봐야 강시나 독 따위를 사용하는 집단이오. 그런 놈들을 무서워 할 필요는……."
  무림맹주가 단호한 어조로 팽명환의 말을 끊었다.
  "분명히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소."
  그는 좌중에 모인 대표자들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악양 지부의 부지부장인 왕평의 증언에 따르면 묵회는 엄청나게 강한 신형 강시를 보유하고 있소. 그중 하나는 청의를 입은 강시로서 놀랍게도 검강이 통하지 않는 몸을 가졌소."
  그 말을 들은 대표들은 적이 놀랐다. 검강이 통하지 않는 강시가 세상에 존재하다니……. 말을 한 이가 무림맹주가 아니었다면 분명 거짓말로 치부해버렸을 터이다.
  "그, 그것이 사실이오? 말도 되지 않소."
  "믿기 힘든 내용이지만 사실이오. 부지부장인 왕평이 강시를 직접 상대해 봤으니 의심할 필요가 없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악양 지부장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철갑괴인이오. 지부장인 초무량 대협이 그자의 손에 목숨을 잃었소."
  좌중은 조용해졌다. 초무량은 누구나 인정하는 초절정 고수다. 자타가 공인하는 초인의 경지에 오른 인물인 것이다.
  그런 고수가 묵회의 하수인에 의해 목숨을 잃다니…….
  "철갑괴인이 사람인지 강시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소. 몸 전체를 철갑으로 감싸고 있기 때문이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지. 그런 초고수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만 보아도 묵회가 경시할 수 없는 집단임은 분명하오."
  그 생각에 동의하는지 대표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초절정 고수의 보유여부는 문파의 입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삼류 문파라 할지라도 초절정 고수 하나를 영입한다면 위상이 백팔십도 달라져버린다. 그 누구도 그 문파를 업신여기지 못한다는 뜻이다.
  맹주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묵회에서 주력으로 운용하는 독강시 역시 경시할 수가 없소. 사실 강시 자체는 별 다른 것이 없소. 정보부에서 조사해 본 결과 과거 배고의 철골강시로 파악되었소. 하지만 내공으로 잘 통제되지 않는 극독을 함유하고 있어 상대하기가 무척 까다롭다고 하오. 아무래도 묵회에서 상당한 공을 들여 만든 비밀병기 같소이다."
  맹주의 설명에 대표자들은 침묵을 지켰다.
  사실 그들은 문파 내에서 결정을 내릴 위치에 있는 이들이 아니다. 모인 대표자들 중 문파의 장문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저 장로급 위치에 있는 중견고수들이 문파를 대표하기 위해 모인 것뿐이었다.
  그런 자들을 상대로 조사도니 바를 밝히려니 무림맹주도 답답할 따름이었다.
  '답답한 사람들. 이들이 자파로 돌아가서 보고해야만 제대로 된 해결책이 나오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무림맹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정사대전 따위의 큰 사건이 벌어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은 평시에는 무림맹주가 가진 권한이 지극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일이 벌어지기를 기대할 수도 없고.'
  한숨을 내쉰 무림맹주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문제는 현재 무림에서 독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문파가 거의 없다는 점이오. 사천당문은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정사대전 말기에 멸문되었소.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몇몇 문파에서 관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
  말을 마친 무림맹주는 은근한 눈빛으로 누군가를 쳐다보았다. 모용세가에서 파견된 대표자였다.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모용세가의 대표가 슬며시 외면했다. 어쨌거나 외부의 이목에 상관없이 당문의 생존자들을 잡아들인만큼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무림맹주는 대표자들을 쳐다보았다.
  "독을 장기로 하는 운남의 오독문 역시 십 년 전에 의문스럽게 멸문당했소. 문도들 태반이 감쪽같이 실종되었는데 그들이 어디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섬서의 독곡 역시 마찬가지요. 따라서 현재 무림에서 독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문파는 전무한 실정이오. 그런고로 묵회의 독강시를 상대하는 데 많은 애로가 있을 것 같소. 독강시를 상대하려면 먼저 강시의 독을 해독해야 하니 말이오."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노승이 입을 열었다. 소림에서 파견된 대각 대사였다.
  "아미타불. 그렇다면 묵회에서 사용하는 독의 견본을 확보하셨다는 뜻이오?"
  "독 견본은 확보했소이다. 현재 무림맹이 소속된 독객(毒客, 전문적으로 독을 연구하는 자)들이 독을 분석하고 있소. 그 결과 지금껏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종류의 독으로 밝혀졌소."
  무림맹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경맥에 침입하기만 해도 일각을 버티기 힘든 극독이었소. 게다가 내공으로 쉽사리 통제되지도 않소. 시험해 본 결과 적절한 약을 투입하면 초절정의 반열에 오른 고수도 중독시킬 수 있는 것으로 나왔소."
  문파 대표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대각 대사가 믿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노납으로서는 믿기 힘들구려. 초절정에 오른 고수는 백독불침(百毒不侵)으로 알고 있소만."
  "하지만 사실이오. 이미 본인을 대상으로 시험을 해 보았소. 결과는 초절정 고수라고 해도 조건만 맞으면 충분히 중독시킬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소."
  그 말에 문파 대표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초절정의 반열에 올라 환골탈태를 한 무사의 경우 어지간한 독에 중독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심후한 내공으로 말미암아 웬만한 독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묵회에서 사용하는 독이 그런 초인조차도 중독시킬 수 있는 독이라니…….
  화산파의 대표인 진명진인이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열였다.
  "해독이 가능할 것 같소?"
  무림맹주는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독객들도 고개를 내젓더구려. 견본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오. 그들의 능력으로는 해독하기 힘들 것 같소."
  듣고 있던 진명진인이 조심스럽게 모용세가 대표의 눈치를 살폈다.
  "당문의 생존자 중 대다수가 모용세가의 보호아래에 있다고 알고 있소. 그들에게 맡기면 어떠는지요."
  "……."
  "다들 아시다시피 독에 대해서는 당문을 따라잡을 존재가 없소이다. 그들에게 한 번 맡겨보는 것이 낫지 않겠소?"
  모용세가의 대표로 파견된 모용운성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겐 그럴 권한이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한 번 가주에게 말씀드려 보리다. 하지만 장담은 할 수 없소."
  "무림의 안위가 걸린 일이오. 시급하게 결정을 내려야 하오."
  모용운성을 쳐다보던 무림맹주는 조용히 머리를 흔들었다.
  "일단은 각 문파의 독객들을 무림맹에다 모아야 할 것 같소. 그들이 한데 모여 연구해야만 묵회에서 사용하는 독의 해독제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소."
  "……."
  무림맹주의 말에 대표들은 침묵을 지켰다. 하나같이 시선을 외면하는 것으로 보아 난감해 하는 듯했다.
  그들의 반응에 무림맹주는 독객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 쉽지 않을 거란 사실을 직감했다.
  기실 무림문파에서 은밀히 사용되는 독은 최고의 기밀사항에 속한다. 독의 정체가 탄로 날 경우 즉시 해독제가 만들어지고, 그렇게 되면 문파의 독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독객이 한 군데 모인다면 필시 비밀이 유출되기 마련. 그 때문에 문파의 대표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켰다.
  무림맹주는 난감한 기색으로 혀를 찼다.
  '허어, 난감한 사람들. 아무리 자파의 이익이 우선이라지만…….'
  그때 문 밖에서 묵직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내원을 경비하는 무사의 음성이었다.
  "아룁니다. 모용세가에서 사자가 도착했습니다."
  "사자? 모시도록 해라."
  무림맹주는 뜻밖이라는 눈빛으로 문 쪽을 쳐다보았다. 모용세가의 대표는 이미 도착해서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상태. 그런 상황에서 또 다른 사자가 찾아오다니…….
  드르륵
  문이 열리고 장대한 체구의 무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이 각진 중년이이었는데, 바로 산 속에서 데이몬과 마주쳤던 모용현도였다.
  묵회의 독강시에 의해 휘하 무사들을 모두 잃은 모용세가의 중견 고수. 각 문파 대표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용현도에게로 쏠렸다. 슬쩍 목례를 한 모용현도는 무림맹주를 쳐다보았다.
  "중요한 정보 때문에 찾아뵈었습니다."
  "오, 그래 무슨 일이기에 모용현도 대협께서 친히 무림맹을 찾아주셨소?"
  "묵회에 대한 일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림 대표들의 얼굴에 호기심이 번뜩였다. 당금 무림에서 가장 관심 있는 일은 바로 묵회에 관한 것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모용현도는 우선 산 속에서 묵회의 독강시와 맞닥뜨린 일을 설명했다. 물론 세세한 사정을 제외하고 한데 뭉뚱그려 설명했다. 독강시에 의해 모용세가의 정예무사들이 몰살당했다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종류의 말이었다.
  "며칠 전 저희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우연히 산 속에서 묵회의 강시들과 맞닥뜨렸습니다."
  "호! 그랬소?"
  "묵회의 강시가 독을 방사한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저희 무사들은 상당히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구려."
  무림맹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묵척 아쉬웠다. 만약 이 사실이 조금만 일찍 보고되었어도 악양 지부가 그토록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놈들이 양동작전을 벌인 것 같구려. 일부가 모용세가의 수색대를 급습하고 나머지가 악양 지부를 공격할 정도라면 묵회의 저력이 정말 만만치 않은 것 같소."
  악양 지부가 초토화되었다는 소식은 모용현도도 이곳으로 오며 들은 바 있기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모용현도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꺼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한 색목인 때문입니다."
  "색목인?"
  무림맹주의 얼굴에 의혹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뚱딴지같이 왜 색목인을 거론한단 말인가?
  "저는 그곳에서 색목인 한 명을 만났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냉유성이란 무사를 수하로 거느리고 있더군요."
  무림맹주도 냉유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공동파 최고의 후기지수였던 그를 모를 리 없었다.
  "냉유성이라면 기사멸조의 죄를 짓고 무공을 폐지당한 뒤 파문당한 공동파 제자가 아니오."
  "맞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공을 되찾았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이는 공동파에서 파견한 대표였다. 공동 장문인의 사제인 춘성진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소. 난 그의 사지근맥을 절단하고 단전을 파괴하는 과정을 똑똑히 보았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냉유성의 파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춘성진인의 책임 하에 행해졌던 일이었다. 그러니 춘성진인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저는 그의 무위를 확실하게 목격했습니다."
  "믿을 수 없소. 믿을 수 없는 일이오."
  "듣자하니 그 색목인이 냉유성의 무공을 회복시켜 주었다고 하더군요. 놀라운 의술실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끼어든 이는 무림맹주였다.
  "아무리 의술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잘린 근맥을 이을 수는 없소. 게다가 파괴된 단전의 복구라니…….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구려."
  "아무튼 냉유성이 무공을 되찾은 것은 사실입니다."
  문파 대표들의 얼굴에는 불신의 빛이 진하게 서려 있었다. 그렇게 치료가 쉽다면 문파에서 왜 파문제자의 사지근맥을 자르고 단전을 파괴하겠는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머리를 내저은 모용현도가 정색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어서 말해 보시오."
  "그 색목인의 독술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내공으로 통제되지 않는 절독을 아주 간단하게 해독하더군요."
  그 말이 좌중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묵회의 독을 해독하는 방법을 상의하고 있는 와중에 나온 말이라 파장이 더욱 컸다.
  "저희 모용세가 무사 중에서 모용수란 자가 있습니다. 그가 묵회의 독에 의해 중독되었습니다. 독이 경맥까지 침입해서 무척 위급한 상황이었지요. 급한 마음에 그에게 부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잠시 말을 끊은 모용현도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혀 있었다.
  "가벼운 손짓 한 번으로 해독했습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자살용 독단을 복용한 묵회의 사자까지 해독시켜 주었습니다."
  "허어, 그런 일이……."
  중인들은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묵회 같은 집단에서 자살용으로 만든 독단이라면 효과가 즉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독단을 복용한 자를 해독시키다니…….
  성질 급한 팽명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데 그자가 왜 묵회의 사자를 해독해 주었단 말이오?"
  "자신을 공격한 이유를 듣고 싶었나봅니다. 이유를 듣고 나자 그를 그냥 풀어주더군요."
  "그렇다면 그자가 왜 중원에 들어왔단 말이오.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기에……."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중원을 유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가 이룩한 독술의 경지를 입증할 한 가지 증거가 더 있습니다."
  모용현도는 눈빛을 빛내며 자신을 주시하는 사람들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당청이라고 아십니까?"
  "당청이라면 죽은 사천당문주의 무남독녀가 아니오?"
  "그렇습니다. 그자는 냉유성에 이어 당청을 일행으로 데리고 다닙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당문의 전대 가주인 당문수와 독술 대결을 펼쳐 이겼다고 하더군요. 당청이 그를 따라 다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중인들은 침울해졌다. 당문수라면 현존하는 독객 중 그 수위를 달리는 이였다. 그런 그가 한낱 색목인과 독술을 겨뤄 패했다니…….
  묵묵히 듣고 있던 무림맹주가 눈빛을 빛냈다.
  "그 색목인이 그토록 독술에 해박하다면 본 맹에 많은 도움이 되겠구려."
  "이미 묵회의 독을 해독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자입니다."
  "아무튼 고맙소. 그런 좋은 정보를 본 맹에 제공해 주어서 말이오."
  "별 말씀을……."
  모용현도는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도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색목인이 단 일수로 스무 구의 독강시를 불태워버렸다는 사실을.
  모용현도는 의도적으로 그 사실을 숨겼다. 그가 무림맹으로 달려와 데이몬에 대한 사실을 언급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모용세가에서는 데이몬을 세가의 빈객으로 맞아 능력을 활용하려고 했었다. 그가 지닌 방대한 독술과 의술이 세가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양 지부 습격사건이 벌어지자 방향이 급선회되었다.
  현 무림은 묵회로 인해 독에 대한 경각심이 극에 달한 상황이다. 묵회의 독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각 문파가 보유한 독객들이 모두 모여 독을 분석해야 한다.
  그런 상황이라면 모용세가가 보유한 당문 포로들을 모두 내놔야 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들을 잡아들인 자체가 합법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데이몬이란 이름의 색목인은 모용수를 해독해 주는 대가로 당문 포로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모용세가주는 노발대발했다.
  '그럴 수는 없다! 아직까지 당문 포로들에게서 독술을 충분히 빼내지 못했다. 독에 대한 지식이야말로 현 무림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다.'
  모용현도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무림맹에 와서 데이몬을 언급한 것이었다. 무림맹의 관심이 잠시나마 다른 곳으로 돌려지기를 바라면서.
  "즉각 통문을 돌려 그 색목인을 무림맹으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맹의 무사들을 보내야 합니다. 여의치 않을 경우 강압정인 수단이라도 사용하여……."
  또다시 대화에 몰두하는 문파 대표들을 보며 모용현도는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잘들 해 보시오. 장담하건데 색목인을 상대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오. 성질도 괴팍할 뿐더러 무공 또한 고강하니 꽤나 애먹어야 할 것이오."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듣고 있던 무림맹주가 공동파의 대표인 춘성진인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냉유성에 대한 일은 어떻게 해결하실 것이오?"
  춘성진인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사형이자 장문인인 춘양진인을 지지하는 계파였다. 그러니 냉유성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릴 리가 없었다.
  "일단 집법장로들을 대동한 채 그를 만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그가 공동의 내공을 익혔다는 사실이 드러날 경우 재차 처벌할 생각입니다."
  "이미 처벌을 하지 않았소?"
  "이것과 그것은 별개입니다."
  단호하게 잘라 말하며 춘성진인은 단단히 마음먹었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냉유성을 처벌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형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 있다.'
  냉유성은 음모로 인해 죄를 뒤집어썼다. 말썽의 소지가 다분한 것이다.
  무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이다. 만약 그가 무공을 잃은 폐인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러나 모용현도의 말대로 무공을 되찾았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냉유성 정도의 무위라면 무림에 제법 쓸만한 발언권을 지녔다고 봐야 한다. 상념에 잠겨 있는 춘성진인의 눈가로 슬며시 살기가 번져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놈의 입을 막아야 한다.'
  문파 대표들이 설왕설래하고 있었지만 그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시각 데이몬을 거론하는 또 다른 집단이 있었다.
  악양 지부를 성공적으로 궤멸시키고 돌아온 묵회주에게 참담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영전주가 이끄는 스물다섯 구의 독강시가 깔끔하게 전멸되었다는 비보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나는 최소한 독강시 스무 수 이상이 귀환할 줄 예상했었는데……."
  비영전주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수그렸다. 옷이 갈가리 찢어지고 얼굴이 검게 그을린 것이 꽤나 낭패한 기색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피해가 독강시 다섯 구 남짓 되었을 것입니다. 모용세가에서 파견된 무사가 팔십 명 가량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뭔가?"
  "도중에 예상하지 못한 존재가 끼어들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끼어든 건가?"
  예기치 못했던 피해 때문에 묵회주의 감정은 잔뜩 격앙되어 있었다. 그럴 것이 비영전주에게 맡겨 내보낸 전력은 묵회가 보유한 독강시의 절반에 가까웠다.
  확실하게 모용세가의 무사들을 전멸시키기 위해 예정되어 있던 숫자에서 열 구나 더 보냈는데 돌아온 것은 강시 군단의 궤멸이라는 참혹한 소식이니 묵회주는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역의 색목인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일수에 독강시 열아홉 구가 단숨에 파괴되었습니다."
  "뭣이?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묵회주가 발끈한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제 아무리 무위가 뛰어난 고수라 해도 독강시 스무 구를 일거에 파괴시킬 수 없다. 전설상으로 전해지는 현경의 고수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강시란 그리 쉽게 파괴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제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색목인은 독술에도 뛰어난 조예를 보였습니다."
  "독에 해박하다고?"
  "그렇습니다. 독강시가 전멸한 순간 전 독단을 깨물었습니다. 사로잡힌다면 회의 기밀을 누설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충성심을 자랑하는 비영전주였다. 그러나 묵회주는 거기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독단을 깨무는 순간 전 정신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몸속의 독이 깨끗이 해독되어 있더군요. 바로 그 색목인이 저를 해독시켜 준 것입니다."
  말을 마친 비영전주는 입을 쩍 벌렸다. 어금니 한가운데 깊숙이 패인 자리를 보자 묵회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믿을 수 없군. 깨물자마자 경맥으로 파고드는 것이 자결용 독단이거늘……."
  "게다가 그는 절정급 고수 하나를 안내자로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아 중원으로 유람을 나온 서역의 고수 같습니다."
  묵회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모용세가에서 살아남은 자가 있나?"
  "서너 명이 살아남았습니다. 대부분 절정이거나 그에 근접한 무사들입니다."
  "그렇다면 곤란하군. 그 색목인에 대한 사실이 무림맹으로 흘러 들어갈 가능성이 농후해. 악양 지부가 궤멸된 이상 놈들이 생각할 것은 뻔해. 그들은 분명히 우리가 쓰는 독의 해독제를 만들어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터. 그 색목인에게 손을 뻗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묵회주는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그 모습을 비영전주가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결정을 내린 듯 묵회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접촉을 해 봐야 해."
  "하, 하오나 그는 독으로는 회유할 수 없는……."
  "독이 안 된다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회유해야 해. 그럴 수 없다면 제거하는 것이 낫겠지?"
  "그는 일수에 독강시 스무 구를 쓸어버린 고수입니다. 그러려면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묵회주의 결심은 단호했다.
  "만약 그가 무림맹과 접촉한다면 곤란해진다. 해독제가 만들어진다면 독강시는 더 이상 위력을 뽐낼 수 없어."
  그의 시선이 비영전주에게 고정되었다.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겠다. 우선 그와 접촉해 보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영전주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따. 그의 입장에서 데이몬은 저승사자나 마찬가지였다. 묵회주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너의 숨겨진 신분은 하오문의 문주다. 그 신분을 십분 활용해서 색목인에게 접근하라. 그리고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해내라. 알겠는가?"
  "……."
  비영전주의 눈빛이 착잡해졌다. 묵회주의 말대로 그의 숨겨진 신분은 하오문의 문주였다.
  하오문.
  기녀와 점소이 따위의 하층 계층이 모여 만든 비밀 집단.
  하지만 하오문의 위상은 극히 초라했다. 무림문파 그 어떤 곳에서도 하오문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보를 전문으로 취급하지만 개방에 밀려 큰 힘을 쓰지 못하는 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무력이 약하다는 점이 하오문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정사대전 당시 하오문은 정파와 마도 양쪽의 공격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기녀와 점소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의 수뇌부들이 그 당시 제거되었구 하오문은 이를 갈며 음지로 숨어 들어갔다.
  하지만 그들에게 복수할 방법은 없었다. 복수의 일환으로 문주가 묵회에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상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묵회 역시 하오문을 소모품처럼 취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비영전주는 힘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잘 처리하도록. 그대를 믿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 처진 비영전주의 어깨는 펴지지 않았다. 말없이 돌아나가는 그를 보며 묵회주가 눈매를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이 사실을 그분께 보고 드려야겠군. 의외의 변수가 등장했어.'

               *               *               *

  '정말 잘 생긴 얼굴이야. 처음에는 별로 느끼지 못했지만…….'
  당청은 미간을 지그시 모은 채 데이몬을 쳐다보고 있었다.
  "좀더 박진감 있게 싸우란 말이야."
  데이몬은 물을 마셔가며 싸움구경을 하고 있었다. 물론 싸우는 대상은 윈슬럿과 냉유성이었다.
  메이스와 배틀 엑스를 양손에 거머쥔 윈슬럿이 장검을 휘두르는 냉유성을 대상으로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옆에서 소리를 질러가며 구경하는 데이몬을 당청이 몽롱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당청도 데이몬의 외모를 그리 주의 깊게 살피지 못했다. 데이몬은 외형상 중원인과 전혀 다른 인종이다. 금빛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에서부터 얼굴형태마저 다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러 날을 동행하며 눈에 익자 데이몬의 수려한 외모가 조금씩 당청의 방심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곁눈질로 데이몬을 쳐다보던 당청이 살포시 얼굴을 붉혔다.
  '하나하나 뜯어보니 정말 잘생겼어. 하늘하늘한 머리칼에 쭉 뻗은 콧대, 특히 푸른 눈동자는 마치 파란 보석 같아.'
  그녀는 심지어 데이몬이 알았다면 대경실색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한 번 뽑아봤으면 좋겠어. 호호호.'
  물론 그 바탕에는 데이몬의 불가사의한 능력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할아버지를 능가하는 독술에다 강시 스무 구를 일거에 날려버리는 놀라운 무공까지.
  만약 데이몬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당청의 마음이 이렇게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창 차창
  그런 당청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냉유성과 윈슬럿은 공방을 나누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들이 싸우게 된 것은 데이몬의 권유 때문이었다.
  "이 녀석은 그래도 내가 살던 곳에서 알아주는 무사였어. 내공을 운용할 수는 없지만 기본기와 초식 면에서 제법 쓸만하지."
  그 말에 자신이 지닌 무예에 자부심을 가진 냉유성이 쉽사리 넘어갈 리가 없었다.
  "속하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중원의 무학은 내가기공뿐만 아니라 초식 면에서도 탁월합니다."
  냉유성은 윈슬럿의 실력을 현저히 얕잡아보고 있었다.
  강시 두 구를 상대하며 무위를 뽐내긴 했지만 윈슬럿의 기술은 다분이 투박하고 직선적이다. 그런 단순한 초식이 냉유성의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장난기가 치밀어 오른 데이몬은 타오르는 호승심에 기름을 끼얹었다.
  "그렇다면 내공을 쓰지 않고 한번 붙어볼 테냐?"
  "물론입니다."
  냉유성은 머뭇거림 없이 대련에 동의했다. 윈슬럿으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존재 자체가 지극히 호전적인 언데드 듀라한 아니던가.
  지금 벌어지는 박투는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쾅
  사선으로 내려 찍어오는 육중한 메이스를 냉유성은 장검을 비스듬히 세워 막아냈다. 엄청난 힘이 실려 있었지만 그는 노련하게 메이스에 실린 힘을 흘려보냈다.
  "웃차."
  한 차례 기합성을 내지른 냉유성이 현란한 초식을 거듭 전개했다.
  좍 좌좌좍
  윈슬럿이 입고 있던 흑의 무복이 갈가리 찢겨나갔다. 그러나 윈슬럿은 동요 없이 묵묵히 공격을 퍼부을 뿐이었다.
  피부가 단단하기 때문에 윈슬럿은 큰 타격이 없다고 판단되면 공격을 그냥 몸으로 때워버린다.
  그러나 냉유성의 검은 예외였다. 워낙 매서웠기 때문에 윈슬럿도 감히 몸으로 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내공을 쓰지 않고도 아름드리나무를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는 실력자였다.
  마찬가지로 윈슬럿의 공격 역시 냉유성에게 통하지 않았다. 워낙 거칠고 동작이 크기 때문에 냉유성은 아주 가볍게 공격을 피해냈다. 실전경험이 풍부한 냉유성의 방어를 뚫는 것은 윈슬럿으로선 역부족이었다.
  치열한 접전과는 달리 승부의 추가 어느 한 쪽으로 쉽사리 기울지 않았다. 물론 냉유성이 내공을 쓰면 사정이 달라지겠지만.
  데이몬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둘의 대결을 관전하고 있었다.
  '역시 중원 무학은 위대해. 카심 용병단원 전체가 덤벼도 윈슬럿을 감당하지 못했는데 냉유성 저 녀석은 혼자서 버텨내니 말이야.'
  둘은 벌써 일다경 가까이 싸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유성의 숨결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체력안배를 적절히 하며 싸우고 있다는 증거였다.
  워낙 싸움에 몰입해 있었기에 데이몬은 자신을 은근슬쩍 훔쳐보는 당청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정신없이 쳐다보던 당청이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붉혔다.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런 놀라운 능력을 배웠을까?'
  그녀의 손은 어느덧 허리에 차고 있는 주머니를 매만지고 있었다. 데이몬이 만들어준 마법주머니였다.
  그 속에는 어제와 오늘 캐낸 다섯 종의 영초가 들어 있었다. 구자엽초만큼은 못하지만 나름대로 귀한 영초들이었다.
  '오구초와 비연자초를 얻게 될 줄은 몰랐어. 아마 할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면 무척 기뻐하실 거야.'
  사실 독객의 능력은 천차만별이다. 본신의 실력보다도 지닌 독초의 질과 양에 따라 승부가 가려지는 것이다.
  비록 대결에서 지긴 했지만 그녀는 할아버지가 실력이 없어서 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문이 멸문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영초와 약초를 잃어버렸기에 본신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할아버지에게 단약이 충분히 있었다면 결과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할 거야.'
  산을 넘어오며 당청은 데이몬의 능력에 거듭 놀라야 했다. 심산유곡에 박혀 있는 영초의 기운을 멀리서 탐지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도 그녀를 경악시킨 것은 허공을 계단처럼 오르내리는 천상제였다.
  데이몬이 처음 천상제를 시전할 당시 그녀는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지금껏 세상을 위진시킨 무공고수 중에서 이 정도로 멋들어진 천상제를 시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데이몬을 보는 시선이 다시 한 번 변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능력이 대단한 사람이야. 자화자찬할 만도 해.'
  어떻게든 데이몬을 회유해 신기한 재주를 배우겠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이후 당청은 데이몬에게 각별히 살갑게 대하며 조금이라도 더 접근하려고 했다. 하지만 데이몬은 당청에게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놀릴 뿐이었다.
  "까불지 마라, 계집애야. 지금 뭐하는 거냐?"
  그 탓에 당청은 벌써 여러 번이나 상심해야 했다. 심지어 그녀는 이런 생각까지 했다.
  '나에게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전혀 없는 것일까?'
  순결한 처녀였기 때문에 그녀는 육체를 무기로 사용할 생각까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처럼 속으로만 끙끙 앓을 뿐이었다.
  그런 당청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이몬은 싸움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둘은 결국 한 식경(삼십 분) 만에야 싸움을 멈추고 휴식에 들어갔다. 냉유성이 범벅이 된 얼굴을 훔치며 검을 내려놓았다.
  "헉, 헉…… 대단하군요. 마치 싸우는 감각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이제 인정하느냐? 트루베니아의 검술도 얕볼 만한 것이 아냐."
  간간히 대화를 나눈 덕택에 냉유성은 데이몬이 살던 곳이 트루베니아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마계(魔界)였지만 솔직히 털어놓을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무기 다루는 기술이 너무 투박하고 단조롭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거야. 트루베니아의 무사들은 보편적으로 두터운 금속 재질의 갑옷을 걸치거든. 중원처럼 맨몸으로 싸우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중병기를 쓸 수밖에 없지."
  "그렇군요. 이제 이해가 됩니다."
  냉유성이 지칠 대로 지친 반면 윈슬럿은 생생했다. 한 식경 가량 난투극을 벌인 존재 같지 않았다.
  데이몬은 한가롭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며칠 동안 산을 헤매며 노숙하다 보니 일행의 옷차림은 말이 아니었다.
  "오늘은 산을 내려갈 생각이다. 옷도 갈아입고 그럴 듯한 객잔에서 배도 채우도록 하자."
  그 의견에 가장 반색한 이는 당청이었다.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그동안 영초 캐는 재미로 산을 헤맸지만 여자로서의 본성을 속일 순 없다.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던 당청이었다.
  "그러자꾸나. 먼지투성이가 된 옷도 갈아입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잠깐의 운기행공으로 피로를 씻어버린 냉유성이 몸을 일으켰다. 목적지는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3. 염왕도(閻王刀) 초무극


  꼬박 두 시간을 걸어 마을에 도착한 일행은 즉시 객잔에 투숙했다. 사람이 그리 많이 살지 않는 마을이었지만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기에 객잔은 제법 크고 깨끗한 편이었다.
  방을 잡은 뒤 데이몬은 당청에게 일행이 입을 옷을 사오도록 시켰다. 원래는 냉유성을 보내려고 했지만 당청이 자기가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옷은 남자가 고르는 게 아니에요. 제 관점에서 문사복은 상공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너무 유약한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이죠. 제가 보기에 상공에겐 청의장삼에다 영웅건이 어울릴 것 같아요."
  "……."
  황당해진 데이몬은 입을 딱 벌렀다. 당청이 아무 거리낌 없이 상공이라 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청은 아랑곳없이 냉유성의 손에서 은자를 가로챘다.
  "제가 가서 어울리는 옷으로 골라오겠어요. 비싼 옷이 능사가 아니라 조화를 고려해서 입어야 해요."
  "네 마음대로 해라."
  당청이 생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다녀올게요."
  "잠깐만 기다려라."
  데이몬은 손을 뻗어 윈슬럿을 가리켯다
  "혹시 모르니 저 녀석을 호위로 데리고 가거라. 짐꾼으로 쓸만 할 뿐더러 동네 건달 정도는 간단히 때려눕힐 것이다. 여자가 혼자 돌아다니면 못써."
  당청이 방긋 웃었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상공."
  "제기랄, 상공이라니……. 아무튼 네가 입을 옷도 여러 벌 사와라. 은자가 모자라면 더 주겠다."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아요."
  당청은 옷을 사기 위해 윈슬럿을 대동하고 나섰다.
  갈아입을 옷이 없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냉유성과 함께 객잔의 식당으로 향했다. 주린 배를 채울 심산에서였다. 냉유성과 자신의 옷차림을 훓어본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꼴이 말이 아니로군."
  며칠동안을 산에서 헤멨기에 옷 상태는 엉망이었다. 노숙을 한 탓인지 온통 흙투성인데다가 군데군데 풀이 붙어 있었다. 원래 백색이었던 데이몬의 문사복은 흙먼지가 배여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역시 흰옷은 입을 것이 못 돼."
  냉유성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흑의무복이라고 해도 흙먼지에는 자유로울 수 없다. 회색으로 변한 옷을 내려보며 냉유성은 머쓱해 했다.
  "일단 배나 채우도록 하자. 청아가 옷을 사오면 목욕을 하고 갈아입으면 될 거야."
  "네, 주공."
  둘은 탁자에 가서 앉았다. 이번에도 데이몬은 푸짐하게 요리를 시켰다. 중원에 온 김에 식도락을 마음껏 즐기려는 것이다.
  객잔 안은 한산했다. 점심때도 아니고 저녁때도 아닌 어중간한 시간대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느긋하게 식당 내부를 훓어본 데이몬은 냉유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구자엽초의 약효는 많이 흡수했느냐?"
  "아직까진 많이 남았습니다. 이제 겨우 삼 할 가량 흡수했을 뿐입니다."
  "효과가 좋은 영초였군. 너 정도 고수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라니……."
  "틈나는 대로 운기행공을 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모두 흡수할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그러겠지."
  냉유성의 말을 인정한다는듯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냉유성은 엄청난 노력파였다. 틈만 나면 정좌를 한채 운공을 했고 쉬는 시간을 아껴가며 검을 휘둘렀다. 단 일각이라도 나태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것을 그리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넌 너무 여유가 없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너무 급하게 네 자신을 몰아친다는 뜻이다. 물론 한시라도 빨리 무의 극의를 보고 싶은 마음에 그런 거겠지. 이해하긴 하지만 그런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데이몬은 잔잔한 눈빛으로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시야를 넓게 해서 너 자신을 관조해라. 뼈를 깎는 수련만이 능사가 아니야. 너 정도 되는 고수는 수련보다도 깨달음을 중시해야 하는 법이다."
  냉유성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주공은 자신보다 월등히 높은 경지에 올라 있으리라 추정되는 인물이다. 그런 고수의 조언이야말로 금과옥조나 마찬가지였기에 냉유성은 묵묵히 데이몬의 말을 곱씹었다. 물론 숙연합이 그리 오래가진 않았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여자를 사귀어본 적 없나?"
  "그런 적은 없습니다.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지요."
  이어지는 데이몬의 말에 냉유성은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하긴, 그 상판이라면 여자들이 순순히 넘어오지 않을 테지."
  "저도 그리 못난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남자답게는 생겼지요."
  "그건 남자답게 생긴 게 아니라 흉측하게 생겼다고 해야 하는거지. 낮짝에 칼자국이나 죽죽 나가지고…… 쯔쯔."
  골이 났는지 냉유성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사에게 상처는 결코 흉이 아닙니다. 전 지금껏 제 얼굴의 상처를 한 번도 부끄럽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끝까지 지지 않으려고 하는군. 아무튼 좋다."
  데이몬이 찻잔을 들어 기울였다. 차 특유의 그윽한 향기가 자연스럽게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제부터는 풍류를 좀 즐겨보도록 하거라. 기회가 되면 여자도 가까이 하고, 알겠느냐?"
  "주공께서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으셨습니까?"
  냉유성의 질문에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 셀수 없이 많았지. 눈길만 줘도 감격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는 여자들이 부기지수였어. 내 관심을 쟁취하기 위해 싸움까지 하더라니까."
  "크윽."
  냉유성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객관적으로봐서 데이몬은 결코 못난 얼굴이 아니다. 곱상한, 어찌 보면 여성미까지 풍길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다.
  그러나 말처럼 눈길만 줘도 여자들이 감격할 정도까진 아니었다. 물론 데이몬이 거론한 것은 마계에서의 경험이었지만 냉유성이 그런 속사정까지 알 리 만무했다.
  "속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뭐야?"
  "주공의 고향인 트루베니아의 여인들은 심히 이상한 모양입니다. 중원의 여인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데이몬이 '요놈 봐라' 하는 시선으로 냉유성을 노려보았다. 그가 움찔해서 시선을 돌렸다.
  "왠지 모르게 개기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걸? 이거 하극상 아냐?  
  "저기 좀 보십시오."
  냉유성이 적절한 시기에 관심을 돌렸다. 데이몬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냉유성이 가리킨 곳은 조금 떨어진 탁자였다. 그곳에는 세 여인이 탁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얼굴 윤곽이 조금씩 닮은 것을 보아 자매들 같았다. 여인들은 일견에도 눈에 확 띄는 미녀들이었다.
  깔끔하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것을 봐서 무가의 자식들 같았는데 하나같이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수려했다. 뭔가 근심이 있는듯 여인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가운데 앉아있는 키 큰 아가씨가 가장 예쁘지 않습니까? 저 정도는 되어야 미인이라 할 수 있지요."
  아닌게 아니라 여인은 데이몬의 안목에도 능히 미인이라 불릴 만했다. 늘씬한 키에 사슴같이 커다란 눈망울, 촉촉한 입술을 보니 지금까지 여러 총각 잡았을 법한 미모였다.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예쁘긴 하군. 괜찮은 편이야."
  "그런데 저 아가씨들은 주공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아무래도 서역과 중원과의 심미안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냉유성의 말뜻을 알아차린 데이몬은 눈을 샐쭉하게 떴다.
  "네 말인즉슨, 중원 여자의 눈에는 나보다 네가 더 미남으로 보인다는 말을 하려는 건가?" 
  "그, 그건 오해입니다. 제 말뜻은‥‥‥."
  "되었다. 네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내가 행동으로 가르쳐 주마."
  데이몬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외모가 중원 여인들에게도 통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지."
  데이몬은 호기 있게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냉유성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큰 사고를 치실 것 같은데…….'

  데이몬은 자신만만했다. 일단 그의 외모는 과거의 추악한 곱추 늙은이가 아니다. 대재국 크로센의 잘생긴 왕자 알카리스의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데이몬이 자신만만하게 나선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트루베니아의 기사들은 실력은 없지만 한 가지는 뛰어나지. 여자 꼬시는 기술 말이야.'
  예로부터 기사들의 낭만은 바로 아름다운 레이디와의 로맨스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능수능란한 화술과 깔끔한 매너가 필요하다.
  오죽하면 기사들이 검술을 배우는 이유가 정을 통하던 유부녀의 남편과 결투를 벌이기 위해서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데이몬의 곁에는 그런 기사 출신의 연애스승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우선 트루베니아 최고의 실력자들이자 바람둥이들이었다는 4대 기사들이 있다.
  그들은 틈만나면 데이몬에게 자신들의 무용담을 털어놓았다. 물론 적을 물리친 무용담이 아니라 여자를 유혹한 무용담이었다.
  그 외 데스 나이트들 역시 한때 한가락 하던 기사들임이 틀림이없다. 그런 자들에게 둘러싸여 지냈기에 데이몬도 그간 보고 들은 것이 적지 않았다.
  데이몬은 기사들에게서 들은 절기를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여자를 꼬실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능란한 화술과 깔끔한 매너라고했지? 그때는 말짱 쓸모없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치 않게 쓰게 되는군.'
  데이몬이 와서 서자 테이블의 여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후줄근한 옷을 입은 색목인이 다가오니 이상할 수밖에 없다. 
  가장 언니로 보이는 여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붉은입술이 마치 장미꽃을 베어 문것 같았다.
  "저희들에게 무슨 용무가 있나요?"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진정시킨 데이몬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정말 아름다우시군요."   
  "……."
  "미모가 마치 하늘을 가리는것 같습니다. 저기 들판의 꽃들이 그대의 미모로 인해 한탄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제 귀에는 마치 천둥처럼 들립니다만."
  여인들의 얼굴에서 황당하다는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데이몬은 아랑곳없이 말을 이어나갓다.
  "꽃들이 마침에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고 있군요. 부디 그대의 곁에서 향기를 음미할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낯 뜨거운 말을 늘어놓으면서 데이몬은 헬버트론을 떠올렸다. 트루베니아 4대 기사들의 수장이자 가장 많은 여인과 정을 통했다고 자랑하던 바람둥이. 지금 데이몬의 대사는 바로 헬버트론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이렇게 말을 늘어놓으면 십중팔구 넘어오기 마련이야. 성사율 백 프로의 멘트라고 할 수 있지.'
  헬버트론의 조언을 되새기면서 데이몬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헬버트론이 활약할 당시 트루베니아의 귀족사회는 극도로 성이 문란한 사회였다. 귀부인들이 공공연하게 남자를 유혹했고 남편들도 이에 질세라 맞바람을 피웠다. 그러다보니 이처럼 느끼한 대사가 충분히 먹혀들 만했다.
  그러나 새침하고 깔끔한 중원의 처자들에게 통할리 있으랴. 여인들의 얼굴에 급격히 노기가 치솟았다.
  "이런 파렴치한……."
  "어디서 속보이는 수작을……."
  여인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뜸 검을 뽑아드는 것을 보니 무가의 자식들이 확실했다. 데이몬은 적이 당황했다.
  '어? 돌아가는 상황이 들은 것과 다르잖아?'
  헬버트론에게 들은 바로는 이렇게 대사를 늘어놓으면 이후의 상황은 여인들이 능숙하게 리드한다고 했다.
  하지만 데이몬에게 돌아온 것은 살기등등한 눈빛이었다. 잡아먹을 듯한 여인들의 시선에 데이몬의 안색이 새빨게졌다.
  '빌어먹을……. 헬버트론 그놈의 말을 믿은 내가 바보였군.'
  상황이 더욱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부근에 앉아 있던 청년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겁 없이 아녀자를 희롱하는 흉적에게 철퇴를 내리기 위한 정의의 사자들이었다.
  "백주대낮에 아녀자를 희롱하다니……."
  "눈알 파란 색목인 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군."
  사방에서 쏟아지는 살기를 받으며 데이몬은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지금 생각해보니 많이 들어본 상황이로군. 아녀자를 희롱하는 색마와 그를 응징하는 정파의 협객이라…….'
  다행히 여인들은 더이상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협행을 위해 나선 협객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었다.
  깔끔하게 영웅건을 두른 청년 하나가 멋들어지게 장검을 뽑았다.
  "더러운 흉적, 내가 너의 악행에 종지부를 찍어주마!"
  '쩝. 난감한 상황이로군.'
  당혹해 하는 데이몬을 보다 못해 냉유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공, 아무래도 실수하신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다."
  "소저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하십시오. 중원의 풍속을 몰라서 벌어진 일이니 너그럽게 생각해 달라고 말입니다."
  데이몬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마왕인 내가 계집들에게 사과를 하란 말이냐?"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로 인한 사단이었다. 안색을 굳힌 데이몬은 여인들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미안하게 되었소. 서역에서 와서 중원의 풍속을 잘 몰랐소. 부디 용서를 바라겠소."
  다행히 데이몬의 사과가 먹혔는지 여인들의 얼굴에 서린 살기가 한풀 꺽였다.
  철컹
  장검을 꽂아 넣은 여인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불편한 심기를 토로하듯 데이몬에게는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색마를 응징하기 위해 나선 협객들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여인들의 행동도 어쩌면 그것을 염두해 두었기에 그런것일 수도 있었다.
  "소저들이 용서한다고 해도 나는 용서하지 못한다."
  "순순히 모가지를 늘어뜨려라."
  데이몬이 못 말리겠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는 동안 협객들이 데이몬을 포위했다. 영웅건의 청년이 호기있게 소리쳣다.
  "병장기를 뽑아라, 나는 무기없는 자를 공격하지 않는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데이몬은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시선에 담긴 뜻을 읽은 냉유성이 슬그머니 팔짱을 꼇다.
  "이제 그만하지. 소저들이 용서했으니 더 이상 너희들이 나설 이유가 없지 않나?"
  순간 시선이 냉유성에게로 쏟아졌다.
  "네놈은 뭐냐?"
  "놈?"
  냉유성의 눈매가 샐쭉해지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피부가 지릿지릿해질 정도의 살기였다. 그들 정도의 햇병아리들이 맞받을 수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헉."
  깜짝 놀란 협객들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자리에 앉아있던 여인들마져 놀라 고개를 돌릴 정도의 살기였다. 
  "으으으."
  협객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특히 호기있게 나선 영웅건 청년의 표정은 볼만했다.
  '살기를 유형으로 표출할 정도라니…….'
  '우리들의 상대가 아냐.'
  고수는 기세로 말한다고 했던가. 냉유성은 살기를 한번 내뿜는 것으로 애송이들의 전의를 말끔히 꺾어버렸다.
  "이제 그만할 마음이 드나?"
  서릿발 같은 냉유성의 음성에 협객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알겠소."
  그들은 얌전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데이몬도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이미 탁자 위에는 요리가 가득했다. 의자에 몸을 묻으며 데이몬이 투덜거렸다.
  "확실히 중원과 트루베니아는 다르군."
  "제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공."
  "뭐냐?"
  "트루베니아의 여자들이 정말 그런 대사에 넘어옵니까?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군요."
  얼굴을 찌푸린 데이몬의 음성에는 살기가 진득하게 배어 있었다.
  "거기까지다. 그만하자."
  "……."
  찔끔한 냉유성이 요리를 집어먹기 시작했다. 데이몬은 못마땅하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요즘 들어서 눈에 띄게 기어오르는군. 언제 날 잡아서 확실하게 교육시킬 필요가 있겠어.'
  그때 객잔 문이 열렸다.
  덜컹
  일남일녀가 들어왔다. 순간 객잔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들어온 여인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연두색 궁장을 풍성하게 차려입은 여인은 화장을 짙게 하고 있었다.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수준이었다. 옷에 치렁치렁 달린 장신구가 더 없이 어울렸다. 맵시 있게 잘 꾸며진 미녀라고 보는것이 정확했다.
  뒤따라 들어온 이는 장대한 체구의 색목인 사내였다. 머리에 기름을 발라 잘 빗어 넘긴 뒤 건을 씌웠고 황색 장삼에는 화려한 요대가 채워져 있었다. 황의가 당당한 채구를 잘 받쳐주었다.
  바로 당청과 윈슬럿이었다.
  데이몬은 입을 딱 벌린채 당청을 쳐다보았다.
  "제가 진정 청이 맞아?"
  당청의 외모는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 때가 구질구질묻은 얼굴에 남루한 옷을 입고 있을 떄와는 분위기가 천지차이였다.
  데이몬을 발견한 당청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마치 백송이의 모란꽃이 한꺼번에 만개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미소였다. 장미꽃잎처럼 붉게 칠한 입술이 나풀거렸다.
  "상공, 저 다녀왔어요."
  냉막한 냉유성도 얼이 빠진 듯 멍하니 당청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날듯이 달려가 데이몬의 옆자리에 찰싹 붙어 앉았다.
  달라진 데이몬의 시선을 보자 그녀는 흡족해 했다.
  '역시 치장한 보람이 있어.'
  지금껏 그녀는 외모를 전혀 꾸미지 않았다. 도피 생활을 하며 남의 눈에 띄는 차림새를 하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예외로 한껏 멋을 냈다. 데이몬에게 여자로 보이기 위한 그녀 나름대로의 몸부림인 셈이다. 상황을 보니 그녀의 노력이 나름대로 성과를 거둔 모양이었다. 데이몬이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너 청이 맞냐?"
  "그럼요. 모처럼 상공에게 잘 보이기 위해 화장을 했지요."
  "화장이 아니라 변장 수준인데?"
  그 말에 당청이 샐쭉해졌다. 
  "상공, 그러면 저 화낼 거예요?"
  "아니다. 농담이었다."
  그 한 마디에 얼굴을 푼 당청이 윈슬럿에게 손짓을 했다. 윈슬럿 역시 환골탈태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중후한 멋을 풍기는 윈슬럿을 보며 데이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 옷이 날개라더니……."
  "상공과 유성 오라버니의 옷도 구해왔어요. 한 번 입어보세요."
  "일단 밥부터 먹고……."
  "아잉, 저는 당장 보고 싶어요."
  결국 청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데이몬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냉유성 역시 그녀의 등쌀에 떠밀려 2층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들이 2층 객실로 올라가자 객잔 안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협객으로 나섰던 영웅건의 청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녀자를 희롱하던 색마에게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니……."
  "마치 화사한 모란꽃 같았어. 보기만 해도 눈이 즐겁군."

  탁자에 앉아 있던 세 여인들도 당청의 미모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녀들 중 가장 막내로 보이는 소녀가 입을 열었다.
  "정말 예쁘군요. 언니에 비해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러자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인이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그래봐야 기녀밖에 더 되겠어? 색목인 흉적을 따라 다니는 여자는 기녀밖에 없지."
  "하긴 그래요. 정신이 제대로 박힌 여자라면 색목인을 따라다니겠어요?"
  조용히 듣고 있던 나머지 여인이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자세히 보니 색목인도 제법 잘 생겼던데요? 색목인들은 죄다 털복숭이라 들었는데 그렇지도 않고……."
  순간 나이든 여인의 눈동자에 쌍심지가 돋았다.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거니? 생각만 해도 불결해."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을 꺼낸 여인이 찔끔해서 고개를 돌렸다. 돌연 한 여인의 얼굴에 수심이 서렸다.
  "그나저나 큰일이다. 시일은 다가오는데 도무지 사람을 구할수 없으니……."
  두 여인의 얼굴도 침울해졌다. 뭔가 큰 걱정거리가 있는 모양이다. 그녀들의 입에서 푸념이 흘러나왔다.
  "염왕도란 이름이 아무리 위명이 높아도 그렇지 이토록 도와줄 사람을 찾기 힘들다니……."
  "빈객들은 물론이고 아버지의 지인들도 모두 외면했어요. 이대로 가다간……."
  얼마나 큰 근심인지 그녀들의 얼굴은 도무지 밝아 질 줄을 몰랐다.

  목유경, 목아경, 목소희 
  그녀들은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목가장의 식솔들로 셋은 자매였다.
  그런 그들이 저렇게 근심에 빠져있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들의 아버지이자 목가장의 가주인 목수곤은 호방하고 사람 사귀기를 즐겨하는 인물이다. 가세가 부유한 편이었기 때문에 목가장에는 드나드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목수곤은 친교를 맺는 데 있어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무림인들과도 상당한 친분을 맺었다.
  그들 중 몇몇은 빈객이라는 이름으로 목가장에 눌러앉았다. 그런 연유로 무림세가도 아닌 목가장에 빈객이 존재하게 되었다.
  문제는 목수곤이 술만 취하면 할 말 못할 말을 가리지 않는데서 생겨났다.
  목수곤의 허풍은 이미 목가장 주변에 자자했다. 으레 그런 사람이거니 하고 웃어넘기는 것이다.
  그런데 목수곤이 어느 날 사고를 쳤다. 술자리에서 우연히 한 사람의 이름을 거론한 것이다.
  염왕도(閻王刀) 초무극
  정사지간의 고수로써 삼 년 전에 은거한 전대기인이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고향이 목가장 인근 마을이었기 떄문에 술자리에서 그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염왕도가 그토록 무림에 명성이 자자하다면서요?"
  "말도 마시오. 십 년 전에 절정고수로 이름을 날렸으니 지금은 더하겠지요."
  운이 나쁘게 그때 목수곤은 술에 잔득 취한 상태였다. 때문에 그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말았다.
  "흥,그가 강하면 얼마나 강하다고 그러시오. 내 장담하건데 우리 목가장의 빈객들 중에 분명히 그를 꺾을 사람이 있소. 목가장의 전 재산을 걸고 내기를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소."
  만약 그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목수곤의 지인들뿐이었다면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염왕도 초무극을 아는사람도 끼어있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 그 소문은 며칠 내로 초무극의 귀에 들어갔다. 공교롭게도 십 년 폐관을 마친 초무극이 막 무림에 재출도하려는 순간이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초무극은 목가장에 편지를 한장보냈다. 그로 인해 목가장이 발칵뒤집어졌으니…….

  난 염왕도 초무극이요. 귀 장의 빈객 중에 나를 꺾을 고수가 있다고 호언장담했으니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방문하겠소. 만약 나를 꺾을 자가 없다면 내기한 대로 목가장의 재산은 내가 몰수하겠소.
  
  초무극은 벌써 십년 전에 절정의 극에 달해있다고 평가되는 고수.
  뒤늦게 술이 깬 목수곤은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이미 입 밖에 낸 말을 물릴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목가장이 빈객들이 하나씩 떠나기 시작했다. 어떤 자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어떤자는 소지품까지 남겨두고 줄행량쳐 버렸다. 근 서른 명에 달하는 빈객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없어진 것이다.
  물론 그들 중 염왕도 초무극을 감당할 만한 고수가 있을 리 없었다. 그 사실을 안 목수곤은 땅을 치며 술버릇을 한탄했다.
  "이일을 어찌 할꼬. 술김에 한 농으로 인해 전 재산을 잃어버리게 생겼구나."
  두눈 버젓이 뜬 채 전 재산을 날릴 수 없었기에 목수곤은 백방으로 손을 썼다. 그러나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이는 한명도 없었다.
  일단 잘못의 발단은 목수곤이 저질렀다. 아무리 취중이라고 하더라도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이다. 따라서 조무극의 방문은 무림의 법도에 전혀 어긋나지 않은 행동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쉽게 생각하기 힘든 고수였다. 굳이 나서서 초무극과 은원관계를 맺어야 할 이유가 없었기에 섣불리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목수곤은 생각다 못해 딸드에게 편지를 보냈다. 평소 무림을 동격했던 목수곤인지라 애지중지 키운 큰딸과 둘째딸을 백현문이라는 조그마한 문파에 보내 수련을 쌓게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백현문의 문주에게 말해보아도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안하구나. 염왕도 초무극이라면 나로서도 경시할 수 없는 고수이다. 섣불리 승부를 장담하기 힘들구나. 게다가 잘못은 너희 아비가 저질렀으니 네가 나설만한 명분이 없다."
  결국 그녀들은 도움을 거절당한 채 문파를 떠나 목가장으로 향해야 했다.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려고 하는 것이 그녀들의 바람이었다.
  함께 동행하는 영웅건의 청년 염우영은 백현문에서 동문수학하던 사형제였다. 그는 목유경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동행할 뿐 초무극과 맞서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초무극은 그와 차원이 다른 고수였다.
  그런 이유로 목유경의 눈가에 맺힌 수심은 쉽게 걷히지 않았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아."
  막내인 소희가 조심스럽게 언니를 달랬다.
  "아버지가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있으니 방도가 있겠지. 너무 상심하지마."
  "넌 모르겠지만 염왕도 초무극은 무림에서 쉽게 적수를 찾아 보기 힘든 고수야. 아버지도 하필이면 그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다니……."
  "그가 나쁜 사람이지. 술김에 한 말을 문제 삼고 나서다니 말이야."
  둘째인 아경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일이 잘못되면 온 가족이 알거지가 되어 바깥에 나앉아야 할지도 모른다.
  초무극은 일단 입 밖에 낸 말을 철저히 지키기로 이름난 자였다. 그런 그가 한 번 말한 것을 철회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때 계단에서 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
  데이몬 일행이 옷을 갈아입은 뒤 다시 내려오고 있엇다. 점소이들이 재빨리 데워둔 요리를 탁자에 대령했다. 값비싼 요리를 듬뿍시켰기 때문에 이정도 서비스는 기본이었다.
  무심코 계단 위를 쳐다본 아경이 흠칫 놀랐다.
  "어머 저것봐."
  그녀의 호들갑에 유경과 소희의 눈도 돌아갔다 .눈동자가 커진것을 보아 무척 놀란 모양이었다.
  "세상에……. 저렇게 달라 보이다니."
  "아까와는 딴판인 걸?"
  아닌 게 아니라 데이몬의 외모는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 청의장삼을 산뜻하게 차려입고 은빛 복대를 둘렀다. 이마에는 가운데 보석이 박힌 영웅건을 썼는데 금빛 머리칼과 그토록 어울려 보일 수 없었다.
  한 마디로 잘 생긴 미공자로 환골탈태한 것이다.
  냉유성 역시 사람이 달라 보였다. 칙칙한 흑의만 입다가 황색장삼으로 한껏 멋을 내고 나니 마치 부잣집 귀공자 같았다.
  아까 시비가 붙을 뻔한 청년들도 놀랐는지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었다. 자신의 작품이 맘에 들었는지 당청의 얼굴에는 홍조가 돋아 있었다.
  "것봐요. 이렇게 멋있잖아요. 진작 좀 차려입고 다니지."
  "원래 남자는 치장에 신경 쓰지 않는 법이다. 아무튼 네 덕에 멋쟁이가 되었구나." 
  "고마워요. 상공."
  당청이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마음에 두고있던 데이몬에게서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점소이가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식사를 다시 데워놓았습니다, 헤헤."
  연신 손을 비비는 것을 보니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데이몬은 점소이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한 냥의 은자를 받아든 점소이는 땅에 닿을 정도로 머리른 조아렸다.
  "감사합니다요, 나리."
  일행은 다시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한 번 데운 요리였지만 시장이 반찬이라 꽤나 맛이 있었다.
  변한 모습이 적응되지 않는지 냉유성은 연신 자신의 몸을 훔쳐보았다.
  "멋있긴 한데 왠지 나에게 안 어울리는것 같아. 무인에게는 때가타지않는 흑의무복이 제격인데."
  "어머? 유성 오라버니. 그런 말하지 말아요. 요새는 무사도 멋을 부려야 한다니까요."
  "그, 그래도……."
  "다시는 칙칙한 흑의 걸치고 다닐 생각하지 말아요. 제가 좌시 하지 않을테니까요."
  그녀는 데이몬을 보며 눈웃음을 쳤다.
  "수하의 옷차림이 엉망이면 주군이 욕을 먹는 법이에요. 데이몬 상공이 욕먹는 꼴은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못 봐요."
  결국 냉유성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오로지 무의길만 파고든 그가 영리한 당청을 당해낼 방도는 없었다.

  신경이 쓰이는지 옆자리의 여인들도 힐끔힐끔데이몬 일행 쪽을 쳐다보았다. 그때 염우영이 말을 건냈다.
  "그런데 사매. 초무극을 상대할 고수를 빨리 구해야 할텐데……."
  그 말을 들은 데이몬이 이맛살을 지긋이 모았다. 몇 번 들어본 이름이었다.
  "초무극? 초무극이 누구지?"
  옆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던 냉유성이 말을 받았다.
  "염왕도란 별호를 가지고 있는 전대 고수입니다. 무림에서 은거한 지 십 년 가량 되었지요. 열화신도 강식의 세 번째 제자인데 문하생들 중 유일하게 무림에 이름을 떨쳤지요. 십 년 전에 절정의 극에 이르렀다고 알려저 있으니 지금은 어쩌면 초절정의 벽을 깨뜨렸을지도 모릅니다."
  "초절정이 그리 쉽게 깰 수 있는 벽은 아니지."
  "그렇긴 하지만 가능성을 배재할 순 없습니다. 이미 그는 스승인 열화신도 강식의 벽을 뛰어넘은 고수니까요."
  "청출어람이로군."
  뭔가 흥미가 들었는지 데이몬은 묘한 눈빛을 떠올린다.
  "너의 경지와 견주어본다면 어떻느냐? 어쨌거나 너도 절정의 벽을 깨뜨린 고수아니냐?"
  그말이 떨어지는 순간 세 자매가 숨을 죽였다. 유형의 살기를 내뿜는 것을 봐서 범상치 않는 자란 것을 알았지만 설마 절정에 오른 고수일 줄은 몰랐다.
  냉유성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같은 절정이라고 해도 그와 저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습니다. 제가 절정 중급 언저리에 위치해 있다면 그는 이미 극에 이른 자입니다. 게다가 실전경험과 연륜을 무시할 수도 없죠.
  "너도 정사대전에 참가해서 많이 싸워보지 않았느냐."
  "그래도 초무극만큼 많이 싸워보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십 년 전 경지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승산은 희박합니다. 수준차이는 쉽사리 속단할 수 없는 거죠. 게다가……."
  냉유성은 조용히 말꼬리를 흐렸다. 사실 그는 초무극의 염왕도법에 필적할 만한 고급검술을 익히지 못했다.
  그가 배운 것은 공동파의 기초와 중급 검술뿐. 직전제자들이 익히는 복마검법은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방계인데다가 장문인이 그를 무척 경계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그때 옆에서 당청이 한마디 거들었다.
  "초무극이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고 하더라도 상공에게는 안 될 꺼에요. 상공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절대고수니까요."
  "뭐라고?"
  "전 봤어요. 상공이 천상제를 시전하는 모습을. 제가 듣기로 천상제는 초절정 고수, 거기에서도 극에 이른 초인들만이 시전할수 있다고 해요. 아마 신법으로 유명한 곤륜파의 장문인조차도 상공이 선보인 천상제는 시전할수는 없을 거예요."
  "너 나를 너무 높이 평가하는구나."
  "어머? 상공이 겸손할 때가 있었네? 별일이야."
  그말에 냉유성이 실소를 지었다. 데이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는 것도 모른 채.
  그러나 당청의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모용세가 무사들 팔십 명이 당해내지 못한 존재들을 상공은 일수에 날려버렸잖아요. 전 그 광경을 똑똑히 봤어요." 
  차마 강시라는 말을 꺼내지 못한 당청이 말을 돌려서 데이몬을 추켜세웠다. 데이몬도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그거야 아무 거리낌 없이 날려버릴수 있지만 어디사람이야 그럴 수 있나?"
  "독술에 이어 외술까지 엄청난 경지에 올라 계시잖아요? 정말 상공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모르겠어요."
  별 뜻 없이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였지만 옆자리의 자매들은 그냥 들어 넘길 수 없었다. 귀를 쫑긋 세운 채 대화를 훔쳐듣던 자매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말이 정말일까?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
  "저 색목인이 정말 초무극을 상대할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듣고 있던 그녀들을 일거에 무너뜨린 것은 당청의 한마디였다.
  "비록 상공에게 패하긴 했지만 할아버지는 무림에서 손꼽히는 독의 대가였어요. 사천당문의 전대가주인 당문수라고 하면 누구나 독절로 인정했지요. 그런 할아버지를 상공은 꺾으셨잖아요. 당문의 식솔인 제가 상공을 따라다닐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으니까."
  듣고 있던 세 자매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색목인에게 교태를 부리는것을 보아 당청은 근처 주루에서 데리고 온 기녀로 생각했었다. 그런 기녀가 무림에서 이름도 드높은 사천당문의 사람이라니…….
  사실 자신들은 무림에서도 변방에 위치해 있었다.무공을 전수받는 백현문은 부근만 벗어나면 어디에서도 알아주지 못했다. 그야말로 삼류중의 삼류 방파인것이다.
  하지만 사천당문은 달랐다. 비록 멸문지경에 이르렀기는 하지만 무림에 적을 둔 사람이라면 한번 이상씩은 들어본적이 있는 대문파였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뭔가 결심한 듯 안색을 굳힌 자매들이 눈빛을 교환했다. 가장 표정이 어두워진 것은 첫째인 목유경이었다. 조금 전 매몰차게 데이몬을 면박 준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이럴줄 알았다면 아까 수작부리는 것을 모른체 받아줄걸. 그렇게 무례했던 것도 아닌데."
  '글쎄 말이야. 언니가 심했어."
  "지금 와서 도와달라고 말하면 들어줄까?"
  "혹시 모르잖아. 아까와서 수작 건 것을 보니 언니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 같은데……."
  곁눈질로 데이몬을 쳐다본 아경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데 바람둥이 인것은 맞는 것 같아. 옆에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있는데 언니에게 눈독을 들이다니 말이야."
  막내 소희까지 끼어들어 언니를 압박했다.
  "눈 딱 감고 한번 부탁해봐. 그래도 마음은 있으니 접근했겠지. 아빠를 생각해."
  한참 고민하던 목유경이 이윽고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몸을 일으켰다.

  목유경이 다가오자 일행의 고개가 돌아갔다. 냉유성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주공인 데이몬에게 말을 함부로 했기 때문에 그의 시선은 매우 싸늘했다.
  "무슨 일이오, 소저."
  냉기가 풀풀 묻어나는 어조에 목유경은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상황을 해결해 준 것은 데이몬이었다.
  "아무튼 멋대가리 없는 녀석이라니까. 아름다운 소저에게 그토록 냉막하게 대하면 쓰나?" 
  눈살을 찌뿌린채 냉유성을 쏘아본 데이몬이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목유경을 응시했다. 
  "무슨 일로 오셨소, 소저?"
  "저……."
  그녀는 쉽사리 용건을 꺼내지 못했다. 조금 전 여러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면박 준 일 때문이었다.그러나 아버지를 떠올리자 없던 용기가 치솟았다.
  "염치 불구하고 말씀드릴게요. 공에게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
  "부탁? 한번 말씀해 보시오."  
  그녀는 나지막히 자신의 가문이 처한 일을 설명했다. 자신들이 인근의 목가장 출신이라는 것하며, 아버지와 초무극 사이에 얽히고설킨 일까지.
  "그리하여 염왕도 초무극이 내일모레 본 장을 방문하기로 했어요. 만약 본 장의 빈객들 중에서 그를 꺾을 자가 없다면 우린 전 제산을 고스란히 내어놓아야하죠."
  "호오, 그런 일이 있었구려."
  어느덧 유경의 말투는 공손하게 변해 있었다.
  "옆에서 밥을 먹다가 들었어요. 귀공께서 뛰어난 실력을 가진 무인이라고 말이에요."
  "과찬이오. 아직까지 모자랄 뿐이지요."
  데이몬이 겸양을 떨자 냉유성과 당청이 기가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화자찬이 극에 이른 데이몬에게서 쉽사리 볼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이몬은 게속해서 너스레를 떨어나갔다.
  "아직 멀었습니다. 중원에는 정말 뛰어난 고수들이 많더군요."
  "겸손하기까지 하신 분이군요."
  데이몬의 대응이 생각보다 온화했기에 유경은 안심했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는 기대감이 역력히 배어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자 그녀가 힘겹게 본론을 꺼냈다.
  "부디 저희들을 도와주시면 안되나요?"
  "귀 장으로 가서 초무극을 상대해 달라는 뜻이오?"
  "네."
  힘겹게 고래르 끄덕인 유경이 머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데이몬은 살짝 눈살을 찌푸린채 쳐다보았다.
  "냉유성.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냉유성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속하의 생각으론 굳이 끼어들 필요가 없을것 같습니다. 초무극은 무림에 널리 이름을 떨친 절정고수입니다. 무림을 종횡하여 맺은 인맥이 적지않을터. 굳이 그와 은원관계를 맺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청도 한마디 거들었다.
  "저도 반대에요, 상공. 어쨌거나 잘못한 쪽은 목가장의 장주이니까요. 초무극의 행동은 강호도의에 어긋나지 않아요. 굳이 상공께서 수고하실 필요가 없다고 봐요."
  이미 냉유성으로부터 그간의 사정을 들은 터라 유경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초리는 그리 곱지 않았다.
  '감히 상공에게 면박을 주다니…….'
  냉유성과 당청이 반대하고 나서자 유경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저…… 도와주신다면 대가는 충분히 치르겠어요.모자란다면 장원을 팔아서라도……."
  "돈으로 살 수있 는 무사는 오로지 이삼류뿐이오.일류 이상의 무림인들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돈에 움직이지 않죠."
  "……."
  할말이 없어진 유경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그녀가 만난 무림인들은 대부분 같은 반응을 보였다. 새삼 일을 벌인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지는 유경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구나.'
  데이몬은 눈매를 좁힌 채 유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그가 무림인이었다면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아무런 이득도 없는 상황에서 누가 초무극같은 절정고수와 싸워주겠는가. 하지만 데이몬에게는 달리 꿍꿍이가 있었다.
  '무림에서 필요한것은 명성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 명성을 쌓지 못했다. 무림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서는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명성을 쌓아놓을 필요가 있다.'
  물론 데이몬은 아직까지 암흑투기를 운용할 수 없다. 마정지지를 찾아 암흑투기를 보충하기 전까지 현경의 무위를 뽐낼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방도가 없지는 않았다.
  '마법을 적절히 사용하면 절정고수 한 놈쯤은 해결할 수 있다. 여러 명이면 곤란하겠지만 말이야.'
  마음의 결정을 내린 데이몬은 유경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데이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저의 제의를 받아들이겠소."
  기대했던 것과 다른 말이었기에 그녀가 얼떨떨해 했다. 데이몬의 말뜻을 알자 그녀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진정이신가요?"
  "물론이요. 일단 수하 놈들 먼저 내세워보고 안되면 내가 나서리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먹고 자는 문제나 해결해 주시오. 일급 객잔에서만 묵어왔으니 대접이 소홀해서는 안 될 것이오."
  "그야 당연한 일이지요."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경과 소희의 얼굴도 환히 밝아졌다. 무위가 확실히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일단 도와준다는 사람이 나선 것이다. 감격했는지 유경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지금 즉시 본장으로 사람을 보내 마차를 준비하겠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그러도록 하시오. 그럼 우린 못다한 식사나 마치도록 하겠소."
  고개를 돌린 데이몬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불만이 있나?"
  "아, 아닙니다."
  "일단은 네가 초무극과 겨루어 보아라. 초장부터 고수가 나설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야."
  쓸개 씹은 표정을 지은 냉유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명령이시라면 싸우겠지만 아마 승산이 희박할 것입니다."  
  "녀석. 싸우기도 전에 겁을 집어먹었느냐.안되면 쓸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 있지 않느냐?"
  데이몬의 눈빛은 장난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주문을 외우거라, 그럼 네실력이 한 단계는 상승할 것이다."
  냉유성이 씹어뱉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절!대!로! 쓰지 않을 것입니다."

  식사를 마친 일행은 객잔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다 마차가 도착하자 목가장으로 이동했다.
  목가장은 객잔에서 두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그동안 데이몬은 세 자매로부터 질문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가문을 위기에서 구해줄 구세주 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녀들의 태도는 극진했다.
  "중원에는 왜 오셨나요?"
  "유람 삼아서 왔소이다. 중원과 무림에 대해서 궁금해서 오게 되었지요."
  "그런데 중원말에 상당히 유창하시군요."
  "내가살던 곳에 중원의 무림인이 한 명 방문했었소. 중원의 말은 그에게서 배운 것이지요."
  "그러셨군요."
  데이몬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여인은 둘째인 아경이었다. 데이몬의 외모가 볼수록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의 눈빛은 초롱초롱 했다. 그녀가 슬며시 웃으며 언니를 쳐다보았다.
  "언니에게 접근한 것을 보니 관심이 있으셨나보군요."
  "하하핫. 아름다운 미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어찌 사내라고 할수 있겠소."
  그말에 유경이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대놓고 아름답다고 하는데 어찌 부끄럽지 않을소냐.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지금은 데이몬의 말이 희롱으로 들리지 않았다. 아까 대놓고 면박을 준 것이 새삼 후회되는 유경이었다.
  '하긴, 내가 너무했지.중원과는 풍속과 습관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인데…….'
  아무도 나서주지 않는 상황에서 흔쾌이 도와줄 것을 약속한 데이몬이었기에 그녀의 마음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상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도 있었다. 당청은 지금 도끼눈을 뜨고 데이몬을 노려보고 있는 중이다. 그녀의 입장에서 세 자매에게 둘러 싸여 희희낙낙해 하는 데이몬이 곱게 보일리가 없었다.
  '흥. 남자들이란…….'
  둘째인 아경이 당청의 눈치를 살피다 데이몬에게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데이몬 공께서는 풍류를 무척 즐기시나 봐요."
  "그게 무슨말이오?"
  "곁에 저토록 아리따운 분을 두시고도 언니에게 눈독을 들이시다니. 호호호."
  "자고로 벌은 여러 꽃을 돌아다니며 꿀을 채취하기 마련이지요. 핫핫핫."
  그 말에 자매들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듣기에 다라서는 무례일수도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와주러 온 은인인데다 색목인이란 점 때문에 그녀들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다.
  "별로 어울리지 않는 비유이군요. 아무튼 도와주시겠다는 호의에 감사드려요."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떤 유경이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그는 마차 구석에 좌정한 채 묵묵히 검을 닦고있었다.
  "그런데 수하 분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으셨지요?"
  "어쩌다 보니 맺게 되었소. 그는 원래 공동파의제자였소."
  "어머나, 그게 정말인가요?"
  유경의 눈동자가 선망으로 반짝였다.
  공동파.
  당당히 구파에 들어가는 일류 문파이다. 물론 구파에서 비교적 아래쪽에 속하는 세력이긴 하지만 삼류 문파인 백현방의 문도인 그녀의입장에서는 꿈과 같은 이야기였다.
  그녀들의 아버지인 목수곤은 딸을 대문파에 보내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 제법 멀리 떨어진 화산파에까지 두 딸을 대리고가서 거금을 쾌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목수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두딸의 자질이 너무도 평범했기 때문이다.
  일류문파에서는 제자를 받는데 있어 자질을 엄격히 따진다. 근골과 경맥을 면밀히 살피고 인성과 근성을 평가한 뒤에야 결정을 내리는데, 유경과 아경은 애석하게도 그 기준에 현저히 미달되었던 것이다.
  답답해진 목수곤이 백방으로 수소문해 봤지만 그녀들을 받아주는 문파는 없었다. 자질이 워낙 평범했기 때문에 심지어 이류급 문파에서도 그녀들을 받는 것을 거절했다.
  결국 유경과 아경은 삼류 중 삼류라는 백현문에 적을 두어야 했다. 그것도 목수곤이 뇌물로 거금을 납부하고 나서야 이뤄낸 성과였다.
  그런 경험을 가진 유경이 한때 공동파의 제자였다는 냉유성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공동파에는 어떻게 들어가셨나요?"
  이왕 도와주기로 마음 먹은 마당에 얼굴 붉히고 싶지 않았기에 냉유성은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난 고아였소. 어릴 때 돌림병으로 부모님을 잃고 떠돌아다니다가 공동파의 장로의 눈에 들었지요."
  그말에 유경이 탄성을 발했다.
  "어머나 놀랍군요. 도대체 자질이 얼마나 뛰어나시기에……."
  자신은 아비가 거금을 쓰고도 대문파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 대문파에서 천애고아인 냉유성을 선택했다면 자질이 얼마나 뛰어난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보고 있던 데이몬이 싱글 싱글 웃으며 말했다.
  "그 녀석은 한때 중원 제일의 후기지수라 불렸던 적이 있소. 지금은 서른이 넘어서 후기지수라 불리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냉유성이 검을 닦는 일을 멈추고 불퉁하게 대꾸했다.
  "말 좀 가려서 하십시오. 하고많은 말 중이 녀석이 뭡니까?"
  "허허, 그 녀석. 아리따운 소저 앞이라서 대놓고 대드는군. 내 이번만은 용서해 주겠다."
  세 자매들이 당혹한 눈빛으로 주종간의 대화를 들었다. 겉보기에 이십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데이몬이 삼십 줄에든 냉유성을 마치 아이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단 한가지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데이몬의 신분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높다는것. 유경이 재빨리 어색한 상황을 돌렸다.
  "공동파에서 오래 계셨나요?"
  "여섯 살때 들어갔으니 무려 25년을 공동에서 생활했군요."
  공동에서의 힘들었던 상황을 떠올렸는지 냉유성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눈치 빠른 유경이 재빨리 그의 안색변화를 간파했다.
  '공동파에서 관계가 그리 원만하지 못했나보군.'
  "그런데 제가 알기론 한 문파에 적을 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모시지 못한다고 하던데 어떻게 해서 데이몬 공을 모시게 되었나요?"
  "난 공동파에서 파문당했소.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았지"
  유경은 적이 놀랐다. 냉유성 같은 절정고수를 파문한다는 말이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말은 쉽지만 절정고수는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실제로 그녀가 속한 백현문의 문주도 절정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은 무사였다. 절정고수라 하면 당장 어디 가서도 문파 하나를 세울 수 있는 재원이다.그 런 재원을 파문하다니…….
  "무슨 이유로 파문되었는지 여쭈어 보아도 실례가 되지 않는지요."
  심기가 좋지 않았는지 냉유성의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잘못을 저질렀으니 파문된 것이겠지요."
  옆에서 아경과 대화를 나누던 데이몬이 끼어들었다.
  "저녀석은 문파 내부의 알력 때문에 축출된것이오 아까운 인재를 버린것이지. 따지고 보면 공동파 수뇌부 놈들, 참 멍청하기 그지없어."
  "그랬군요."
  유경의 눈망울에는 묘한 열망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의 나이도 어언 스물둘. 여염집의 처자들이 보통 열여덟에 성혼 하는것을 생각하며 혼기를 놓친 지 오래라고 봐야했다. 무림의 여고수들이 비교적 늦게 성혼한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긴했지만 그녀도 마음이 심란할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그녀에겐 마땅한 혼처가 없다. 또한 그녀가 만날수 있는 이들은 대부분 무공실력이 형편없는 삼류 문파의 제자들 뿐이다. 이곳까지 따라왔다가 슬그머니 사라져버린 염우영과 같은 자들 말이다.
  대문파의 제자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상황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그녀 같은 삼류들이 일류를 만날 기회는 거의 다가오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우연히 대문파의 일류 무인을 만난 것이다. 그녀의 눈빛이 묘한 기대로 반짝거렸다.
  '어쩌면 이게 기회일지도 몰라.'
  비록 파문당하기는 했지만 무공이 어디 가진 않는다.무 림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은 오로지 힘! 게다가 흔하게 찾아볼수없는 절정고수라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평소 무림을 동경해왔던 탓에 유경은 남자를 보는 눈이 조금 색달랐다. 한없이 냉정하게 무를 향해 한 발 한 발 정진해나가는 전형적인 무인이 그녀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남성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냉유성이 그런 유경의 이상향에 딱 부합되는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몽롱한 눈빛으로 검을 닦는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정말 멋있어.'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정좌한 채 검을 닦아나가는 냉유성. 심지어 얼굴에 새겨진 흉측한 흉터마져도 유경의 눈에는 매력덩어리로 보였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냉유성은 수건으로 연신 검신을 문지르고 있었다.





     4. 또다른 차원이동자


  목가장에 도착한 일행은 성대한 환대를 받았다. 목수곤에게 처음 느낀 인상은 무척이나 호방하다는 점이다. 그는 당당한 체구의 화복사내였는데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서들 오시오. 본 장을 도와주시겠다고 방문한 무림의 영웅분들을 환영하는 바요."
  "처음 뵙겠소. 데이몬이라고 불러주시오."
  "예전부터 명성을 익히 들어왔습니다. 외당을 깨끗히 치워놓았으니 일단 그리로 드시지요.
  일행은 하인들의 안내를 받아 외당으로 안내되었다.
  목가장은 상당히 고풍스러운 장원이엇다. 목수곤이 이곳 토호출신이기에 보유한 땅도 많았고 거기에서 거둬지는 소작료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뒤뜰의 정원은 아름다웠고 마당도 무척 넓었다. 커다란 연무장이 군데군데 위치해 있는 것을 봐서 문파의 본단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은 장원이었다. 장원을 둘러본 데이몬은 감탄했다.
  '역시 초무극이 술김에 한말을 꼬투리 잡을 만하군. 아무래도 그녀석이 문파를 하나 개파하려는 것 같군. 이정도 장원이라면 본단으로도 쓸 만하니까.'
  일행에게 걸고 있는 기대감을 보여주듯 목수곤은 성대한 연회를 열어주었다. 창고속의 미주가효를 아낌없이 꺼내왔기에 일행은 모처럼 미각의 즐거움을 충족시킬수 있었다.

  밤이 늦었기에 일행은 연회를 서둘러 마친 뒤 각자의 숙소로 향했다. 며칠동안 산에서 노숙한 탓에 피로했던 것이다.
  내당에서는 장주인 목수곤이 큰딸 목유경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고 있었다. 목수곤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아무래도 도와주겠다고 온 사람들이 그리 미덥지 않은 모야잉었다.
  "과연 저들이 초무극을 당적해 낼수 있을까?"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말로는 이길수 있다고 하지만 말이에요."
  "아무래도 허풍인 것 같구나. 아무리 잘봐줘도 스물남짓 되어 보이는 색목인이 도대체 무슨 수로 초무극을……."
  자신이 저지를 실수가 떠올랐는지 목수곤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그날 이후 목수곤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술에 취할 경우또 무슨 실수를 할지 몰랐으니까. 목유경은 그런 아버지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좋게 해결될 거에요."
  "그랬으면 좋으련만……."
  그때 갑자기 목유경이 눈빛을 빛냈다.
  "그들 중에서 삼십대 초반의 냉막한 무사 보셨어요? 색목인의 수하말이에요."
  "음. 보기는 했다."
  목수곤은 냉유성에게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은 선입견 때문이었다.
  그는 냉유성을 데이몬의 길 안내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죽 못났으면 색목인의 수하로 들어갔을까.
  하지만 그런 편견은 딸의 한마디에 산산히 깨어져버렸다.
  "그는 상당한 경지에 오른 고수에요. 절정이라고 하더군요."
  "뭣이? 그게 사실이냐?"
  목수곤은 깜짝 놀랐다. 그도 절정고수가 얼마나 보기 힘든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껏 그의 장원에서 기거했던 빈객들 중 가장 무위가 뛰어난 자가 겨우 일류 정도였다. 절정의 무사는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갓 서른을 넘긴 청년이 절정고수라니…….
  "그는 공동의 문하였대요. 고아 출신으로 장로의 눈에 띄어 공동의 본산제자가 된 것이지요. 게다가 그는 정사대전까지 참가해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해요."
  "이해 할수가 없구나. 공동파 정도의 대문파 제자가 어찌 색목인의 수하로……."
  "문파 내부의 압력 때문에 파문당했다고 하더군요. 색목인은 이후에 주군으로 모신거래요 놀랍지 않나요?"
  "그렇구나."
  목수곤도 쉽사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직접 겪어본 만큼 대문파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 잘 아는 목수곤이었다. 고아 출신이 공동의 본산제자가 되었다면 도대체 자질이 얼마나 뛰어나단 말인가?
  "그 정도의 인물이 어찌해서 색목인을 따라 다니는 거지?"
  "뭔가 은혜를 입었나 봐요."
  목유경이 눈빛을 빛내며 음성을 낮췄다.
  "색목인은 중원유람을 왔다고 해요. 다시 말해 유람을 마치면 돌아간다는 뜻이죠. 그런데 과연 냉유성 대협이 그를 따라 서역으로 갈까요?"
  "그건 잘 모르겠구나. 사람은 살던 곳을 떠나서는 살기 힘든법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으니까."
  "만약 그가 따라가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어떨까요?"
  목수곤은 딸의 말뜻을 금세 알아차렸다.
  "그를 우리가 잡자는 말이냐?"
  "맞아요. 그 정도의 고수라면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무엇으로 잡는다는 말이냐? 그정도 경지의 무림인은 돈으로 구워삶을 수 없는데……."
  목유경의 눈에 교활한 빛이 떠올랐다.
  "돈으로는 회유할 수 없지만 인연으로는 가능하다고 봐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가 만약 목가장의 사위가 된다고 가정하면 어떨까요?"
  목수곤의 눈이 커졌다.
  "그가 마음에 있다는 뜻이냐?"
  목유경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목수곤으로서는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정도 고수라면 신붓감이 줄줄이 널려 있을 텐데……. 비록 네가 예쁘긴하지만 그외에는 내새울 것이 전혀 없지 않느냐? 돈하고 땅은 좀있다마는……."
  "제 생각에는 가능할 것 같아요. 우선 그는 전형적인 무인이에요. 돈이나 여자에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무의 정진에 모든 것을 거는 무사 말이에요."
  목유경의 눈빛이 갑자기 몽롱해졌다. 그녀의 이상향이 바로 냉유성같은 무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사로잡는 방법은 오로지 정성뿐이에요. 지극한 정성으로 그를 감복시키는 거죠. 게다가 우리에겐 그가 마음 놓고 무예를 닦을수 있도록 뒷바라지해 줄 힘이 있어요. 그 점을 강조하는 거죠."
  그러자 목수곤도 귀가 솔깃해졌다. 솔직히 절정고수가 사윗감으로 들어와 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목가장이 무림세가로 발돋움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절정에 오른 고수란 사실이 확실히 증명된 것은 아니지 않느냐?"
  "걱정마세요 내일 모래면 증명될 거에요. 색목인이 우선 냉유성 대협을 내보낼 것인가 봐요. 초무극과 싸우는 것을 본다면 그의 무위가 확실히 들어나지 않겠어요?"
  묵묵히 듣고 있던 목수곤이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좋다 그렇게 하자꾸나. 만약 그의 무위가 증명이 된다면 아비가 전폭적으로 후원을 해주겠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것은 너에게 달려있다. 그 점은 알고있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자신 있으니까요."
  부녀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음모를 꾸미는 가운데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 시각 데이몬은 숙소에서 홀로 명상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홀로 떨어져 자려니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별안간 입가에 흐릿하게 미소가 걸렸다.
  "그래도 오랜만에 무림에 오니 좋군."
  어릴떄부터 몸을 담아왔던 무림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비무행을 벌이며 현경의 경지를 마음껏 뽐내고 싶었다. 그도 생사가 오가는 대결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무림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 데이몬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빌어먹을, 어둠의 마력이 아니라 암흑투기를 끌어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원으로 건너온 지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암흑투기의 양은 그대로였다. 암흑투기가 전혀 보충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매개체로 마나를 끌어 모아 내공화하지 않는다면 현경의 경지를 뽐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현재로서 데이몬이 할 수 있는 일은 마정지지를 찾아 암흑투기를 보충하는 길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마정지지는 그리 쉽게 눈에 띄는 곳이 아니다. 아쉬운 마음에 데이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하군, 복수할 수 있는 길은 아직까지 요원하기만하니……."
  사준환은 이미 데이몬이 넘보기 힘든 위치에 올라 있다. 만약 데이몬이 암흑투기를 자유자재로 운용할수 있는 현경의 고수라고 해도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마도련은 그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집단이었다.
  "차근차근 힘을 길러나가야지.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하고……."
  혼잣말로 푸념을 털어놓으며 고독을 즐기는 데이몬이었다.
  그때 고독을 깨뜨리는 음향이 울려 퍼졌다.
  "상공, 주무시나요?"
  당청의 청아한 음성이었다. 데이몬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늦은 밤에 왠일이냐?"
  "잠이 오지 않아서요. 들어가도 되나요?"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당청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조그만한 소반이 놓여있었다. 술병과 잔, 그리고 정갈한 안주가 놓여 있는 소반이었다.
  그것을 본 데이몬은 눈을 빛냈다.
  "잘되었군. 안그래도 술 생각이 간절했었데……."
  "소녀가 때맞춰 왔군요."
  그녀가 배시시 미소지으며 소반을 내려 놓았다. 막 목욕을 하고 온듯 당청의 머리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처녀 특유의 방향이 은은히 피어나 방 안을 채웠다. 데이몬은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코를 벌름거렸따.
  '냄새 한 번 좋군.'
  당청이 손을 뻗어 술병을 들어올렸다.
  "소녀가 한 잔 따라드리겠어요." 
  "그것 좋지."
  술은 데이몬이 가장 즐겨 마시는 금존청이었다. 술잔 가득 따른 금존청을 데이몬은 단숨에 마셔버렸다. 당청의 커다란 눈동자에 놀라움이 맺혔다.
  "금존청은 독한 술이에요. 천천히 음미하면서 드셔야 하는데……."
  "괜찮다. 이 정도는 독한 축에도 들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소녀도 한 잔 주시겠어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이 당청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법도대로 단아하게 고개를 돌린 채 술잔을 기울이는 당청. 그러나 금존청은 그녀가 감당하기 힘든 독한 술이었다.
  "콜록 콜록."
  잔을 비우다 말고 사레가 들려버린 당청.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나보고는 음미하듯 천천히 먹으라고 하더니……."
  "죄, 죄송해요, 상공. 처, 처음 먹어보는 술이라……."
  취기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당청의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당청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데이몬이 술잔을 비우면 술병을 들어 채워줄 뿐이었다. 제법 커다란 병이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바닥이 났다.
  "술을 더 가지고 올까요?"  
  "아니다, 되었다."  
  뭔가 할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당청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고민하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데이몬이 무심히 쳐다보았다. 발그스름한 당청의 얼굴이 꽤나 고혹적이었다.
  "아름답구나."
  그 말에 당청은 얼굴을 붉혔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내에게 아름답다는 말을 들으니 마치 날아갈 듯 가슴이 뛰었다. 어색함을 타개하기 위해 당청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어요."
  "뭐냐? 말해보아라."
  "윈슬럿의 정체가 도대체 뭐죠?"
  뜻밖의 말에 데이몬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당청을 쳐다보았다.
  "머리를 손질하면서 느낀 것인데 아무래도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사람이라면 의당 있어야할 체온이 느껴지지 않더군요. 게다가 맥도 뛰지 않았어요."
  "잘 보았다. 그는 산 사람이 아니다."
  그녀가 깜짝 놀라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럼 시체라는 말인가요?"
  "일종의 강시 종류라고 보면 된다. 물론 강시보다 월등히 뛰어나지만 말야."
  긍정한다는 듯 당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았어요. 움직이는 것도 자연스럽고 몸도 뻣뻣하지않고……."
  "왠만하면 비밀로 해주겠느냐? 중원에 와서 보니 강시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더구나."
  "그럴게요."
  말을 마친 당청은 베시시 미소를 지었다.
  "어떨 때 보면 상공이 마치 환갑이 넘은 노인네처럼 느껴져요."
  그말에 데이몬은 다소 충격을 받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말과 행동에서 연륜이 느껴지기 때문이죠. 제가 생각하건데 상공은 겉으로 보이는 나이를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무림으로 비유하자면 마치 반로환동한 전대고수라고 할까?"
  '이 계집애가 제법 눈치는 빠르군. 영리하기도 하고.'
  데이몬은 뜻밖이라는 눈빛으로 당청을 쳐다보았다. 지금껏 자신의 정체를 간파한 사람은 당청이 처음이었다.
  "아무튼 그래도 상공이 좋아요. 하지만……."
  당청의 표정이 별안간 침울해졌다.
  "저도 어쩔 수 없는 여자인가 봐요. 아까 상공이 다른 여자들이랑 노닥거리는 것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더군요."
  "……."
  "하긴 제 신분이 상공의 시녀이니 질투를 느끼는것이 말이 되지 않겠지요?"
  그녀의 말에 데이몬은 머리를 뒤흔들었다.
  "아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난 너를 시녀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고맙고요."
  조용히 당청을 응시하던 데이몬은 손을 뻗어 당청의 손을 움켜쥐었다. 몸을 파르르 떨던 당청이 살포시 눈을 감았다.
  '드디어…….'
  그녀는 데이몬에게 잡힌 손을 빼려고 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데이몬에게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작정한 상태였다.
  데이몬의 수려한 외모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당청이 원하는 것은 데이몬이 보유한 불가사의한 능력이다. 만약 그가 도움을 준다면 당문의 부활을 앞당기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한 가지 능력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녀의 마법보고 속에 들어있는 영초는 과거 당문이 건재했을 때 일년 동안 모은 영초보다 양도 많았고 질적으로도 뛰어났다.
  무엇보다도 데이몬은 독술과 의술, 가공할 만한 무공실력까지 보유한 절대의 고수인 것이다.
  '그만 도와준다면 가문은 살아날 수 있어.'
  얼굴 부근에서 숨결이 느껴졌다. 당청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달착지근한 냄새를 풍겼다.
  조금있으면 입맞춤을 해올 것이다. 그녀는 이미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어차피 무림세가에 여식들에겐 정략결혼을 하는 일도 비일비재해. 가문을 살릴 수 있다면 나 하나 희생하는것 정도는 문제도 아냐. 게다가 그는 무척 매력적이잖아?'
  여러 가지 상념 때문에 그녀의 머리는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첫 경험은 어떨까? 몹시 아프다고 들었는데……. 아아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뛰네?
  그러나 예상했던 입맞춤은 없었다. 살짝 눈을 떠보니 데이몬이 신비한 미소를 지은 채 당청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머."
  깜짝 놀란 당청은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얼굴이 확확 달아올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귓전으로 낭랑한 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대단한 용기구나. 야밤에 남정네의 침소로 뛰어들다니 말이야."
  "……."
  이어진 말에 당청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 그랬느냐?"
  "아……셨나요?"
  "그 정도쯤이야 눈치를 챌 수 있지. 아무튼 대단한 정성이로구나. 가문을 위해 전혀 인종이 다른 색목인에게 몸을 바칠 생각까지 하니 말이다."
  당청은 고개를 수그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처녀 특유의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조차 들지 못할 상황이었다. 귓전으로 데이몬의 음성이 계속 흘러 들어왔다.
  "넌 정말로 아름답다. 네 미모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내 불찰이야. 하마터면 나도 이성을 잃고 널 안을 뻔했구나. 물론 널 안는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하지만 그러려는 순간 누군가가 떠오르더구나."
  지금 이 순간 데이몬은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차원이동을 하기 위해 트루베니아에 머물던 시절 거뒀던 제자 레온이었다.
  "나에겐 제자가 한 명 있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 사이에 이루어져서는 안 될 관계로 태어난 혼열아지."
  당청은 깜짝놀라 고개를 들었다. 데이몬이 우수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라구요?"
  "그렇다. 그 녀석은 불행히도 인간과는 판이하게 다른 외모를 타고났다. 막 너를 안으려는 순간, 어째서 그 녀석이 떠올랐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데이몬은 살며시 손을 뻗어 당청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와 관계를 맺게 될 경우 제2의 레온이 태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나의 외모는 중원인과는 판이하게 다르니까."
  데이몬이 걱정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마왕이다. 출신이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몸속에는 마력의 원천이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불리기 힘든 존재가 되어버렸다.
  만약 그가 당청과 관계를 맺는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아무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마족이 태어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레온을 가르치며 그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 세세히 들었던 터라 데이몬은 가까스로 자신을 억제할 수 있었다.
  자신의 2세가 중원에 태어난다면 레온의 전철을 다시 되밟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외모 때문에 손가락질 받으며 자라는 것은 데이몬이 원하지 않는 일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너를 안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걱정하지는 말거라. 네 소원은 이루어질 테니까."
  그순간 당청의 눈이 커졌다.
  "소원이라니요?"
  "당문의 부활을 위해 내가 최대한 힘을 써주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너에게는 마음만 고이 받겠다. 훗날 내가 중원을 떠나가더라도 날 기억하고 그리워해 줄 사람이 하나 있다면 난 만족할 수 있다."
  그 말을 듣자 당청은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상공, 고마워요."
  그녀는 정신없이 달려들어 데이몬에게 입술을 부딪혀갔다. 열정적으로 입술을 부비는 당청의 등을 데이몬은 부드럽게 끌어안아주엇다.
  입맞춤의 순간은 재법 길었다. 입술을 땐 뒤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당청의 귓전으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 들어갔다.
  "입맞춤까지만 허락하마. 네 가문을 되살릴 방법은 차차 논의해 보자꾸나."
  "상공께서 중원을 떠나시는 순간까지 열과 성의를 다해 모실게요."
  데이몬의 품에 안긴 채 당청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코끝을 파고드는 데이몬의 체취가 이토록 좋을 수 없었다.

               *               *               *

  험준한 대파산맥. 그중에서도 인적이 드문 골짜기에 일단의 무사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정체를 숨기려는듯 복면을 뒤집어썼지만 눈구멍 사이로 흘러나오는 안광이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대략 일백여 명 정도 되는 무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뭔가를 수색했다.
  그들의 중앙에는 수뇌부로 보이는 자들이 서서 수색현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들 중 장대한 체구의 복면인이 입을 열었다.
  "머지않아 찾아낼 것이오, 흑법사.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오."
  흑법사라 불린 자는 흑포에 죽립을 뒤집어쓴 왠지 모르게 음산한 분위기가 피어나는 자였다. 그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 그래야지요. 마, 마음이 급하구려."
  흑법사의 말투는 어눌했다. 억양도 이상했고 발음도 명확하지 못해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수뇌로 보이는 사내는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흑법사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어 왔기 때문이다. 그가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쳐다보았다.
  "비영전주. 그때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시겠소?"
  놀랍게도 거기 서있는 이는 비영전주였다. 이곳에서 모용세가 무사들을 급습했다가 데이몬에게 혼쭐이 난 묵회의 조직원. 그가 멍하니 서있다가 말을 받았다.
  "저희들은 바로 이곳에서 모용세가의 무사들을 유인해서 습격을 가했습니다. 모용세가 무사들의 수는 대략 팔십 명. 저희 측에서 독강시 스물다섯 구를 동원했기에 예정대로라면 경미한 희생으로 모용세가 무사들을 모두 전멸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끼어드는 바람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얼마전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이 비영전주의 입을 통해 하나둘씩 흘러나왔다.
  원래 비영전주는 묵회주로부터 숨겨진 신분을 이용해 데이몬과 접촉해보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명령은 금새 철회되었다. 대신 이들을 독강시가 전멸한 현장으로 안내하라는 새로운 지시를 받았다.
  그리하여 생각하기도 싫은 이곳으로 다시 오게 된 것이다. 비영전주의 설명을 들어나가는 흑법사의 눈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틀림없군. 마법이 아니고서야 그런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때 무사 한 명이 흔적을 찾아냈다.
  "저곳에 독강시의 잔해로 보이는 흔적이 있습니다."
  보고가 전해지기가 무섭게 무사들이 그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흑법사가 손을 들어 만류했다.
  "그, 그만 두시오. 그곳에는 나, 나 혼자 가겠소."
  장대한 체구의 복면인이 즉각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하십시오. 모두 움직이지 말고 주변을 경계하라."
  "존명."
  비영전주가 충격을 받은 눈빛으로 장대한 체구의 복면인을 쳐다보았다. 그는 상대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한때 하오문의 문주였던 그가 상대를 알아보지 못할리 없었다.
  '틀림없어. 저자는 잠마련의 흑면염라 곽천도야. 천기대제 사준환의 심복 중의 심복.'
  비영전주는 서둘러 놀란 흔적을 감췄다. 만약 자신이 곽천도의 정체를 알아봤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죽여서 입을 막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내가 안내한 자들은 잠마련의 무사들인가? 놀랍군. 묵회가 잠마련과 연관이 있는 단체였다니…….'
  그는 애써 놀란 기색을 감추며 그들이 하는 모습을 곁눈질로 살폈다. 지금껏 묵회에 속해 있었으면서도 자신이 소속된 곳이 잠마련의 하부조직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사건이 벌어진 곳으로 들어간 이는 흑법사 혼자였다. 그의 뒷모습을 곽천도가 무심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특이하군. 흑법사가 이번 일에 관심을 가지다니……."
  처음에는 잠마련에서도 이번 일에 별달리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흑법사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올라온 보고를 듣자마자 현장으로 가봐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항상 연구실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던 그로서는 뜻밖의 행동이었다.
  결국 사준환의 허가가 떨어졌고 그를 호위하는 임무를 곽천도가 맡게 되었다. 그들이 이곳에 오게 된 과정은 대략 그러했다. 곽천도는 슬그머니 실눈을 뜨고 흑법사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그의 정체가 뭘까? 평범한 서역인이 아닌 것은 분명한데…….'
  흑법사는 이곳 사람이 아니다. 곽천도조차 그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는 잠마련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것 때문에 그를 호위하기 위해 잠마련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집단인 혈마대를 이끌고 오지 않았던가?
  혈마대(血魔隊).
  잠마련이 보유한 여러 무력집단 중 그 수위를 달리고 있는 집단이다. 정사대전 직후 사라진 수호마왕군의 뒤를 이은 조직이었는데 구성원들은 열 살 이전에 뽑혀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열 명 중 한 명이 겨우 생존할 정도로 혹독한 훈련과정이었다.
  혈마대를 투입했다는 것은 흑법사가 그 정도로 잠마련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증거였으며 곽천도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 의해 이론으로만 전해지던 활강시가 만들어졌다. 음양강시 역시 그가 만들어낸 걸작이다. 게다가 독강시, 철골강시에 독을 결합한 것 역시 그의 지식이 아니였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곽천도는 조용히 흑법사를 만나게 된 계기를 떠올려보았다. 흑법사는 생각만해도 끔찍한 존재인 철마(鐵魔)와 함께 잠마련으로 왔다.
  철마를 떠올리자 곽천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철마가 잠마련에서 보여준 가공할 만한 무위가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공포심이 치밀어 오른 것이다. 철마는 그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존재였다.
  철마와 흑법사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로지 천기대재 사준환만이 짐작할 뿐이었다. 그가 철마를 처음 본 것은 잠마련의 연무장에서였다.
  당시 철마는 단신으로 잠마련을 찾아와서 대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어눌한 어조로 천기대제 사준환을 찾았다.
  "나는 사준환을 만나러 왔소. 그에게 물어볼 것이 있소."
  사준환은 자타가 공인하는 잠마련의 절대자. 잠마련의 무사들이 그를 순순히 사준환에게 안내해줄 리 없었다.
  그렇게 되자 철마는 실력발휘에 들어갔다. 일각도 안 되는 시간에 잠마련의 정문을 경비하던 무려 칠십여 명의 무사들이 줄비하게 쓰러졌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외원의 고수들도 철마의 상대는 아니었다.
  결국 그렇게 되자 천기대제 사준환이 나섰다. 그는 우선 철마로 하여금 내전으로 들도록 했다.
  "일단 들어갑시다. 우선 대화로 문제를 풀어봅시다."
  천기대제 사준환은 정면대결을 그리 신호하지 않는 인물이다.
  이후 안에서 은밀하게 전갈이 전해지자 곽천도는 쾌재를 불렀다. 사준환이 독을 탄차를 주문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잠마련은 당문을 멸문시키고 오독문의 생존자를 모두 끌어들였기 때문에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독객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곽천도는 그들을 닦달해서 최고의 절독을 추려낸 뒤 차에 타서 시비에게 들려 보냈다.
  "흐흐흐. 제아무리 강한 놈이라도 이 정도 독이라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허무하게 깨어졌다. 독이 든 차를 마시고도 철마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워낙 내공이 심후했기에 독 기운을 억제하고도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내전을 박살내고 뛰어나온 철마. 다행히 사준환은 호위무사의 희생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더러운 놈들. 정중히 초청해 놓고 독을 쓰다니. 무사도가 어찌 기사도보다 못하다는 말이냐?"
  알아듣기 힘든 말을 내뱉은 철마가 잠마련을 송두리째 뒤집어 엎기 시작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는지 철마는 아무거리낌 없이 살수를 펼쳤다.
  내원의 무사들이 무수히 죽어나갔다. 곽천도도 그때 겁 없이 달려들었다가 단 일합에 엄중한 내상을 입고 나가떨어졌다.
  당시를 상기해 본 곽천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분명 현경 이상의 경지를 개척한 무인이었다. 안 그러면 그 정도의 무위를 뽐낼 수 없겠지.'
  단신으로 엄청난 활약을 보인 철마. 내원의 초절정 고수들이 동원되었지만 그의 앞길을 막아낼 순 없었다. 장로들마저 호출되고 급기야 마교에서 갓 영입한 마공고수들까지 동원했지만 상황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마교의 내분으로 영입에 성공한 초절정 고수들이 대부분 그때 죽어나갔다.
  만약 흑법사가 나타나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잠마련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곽천도는 그때 상황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철마가 잠마련의 최고 고수들과 치열한 교전을 치르고 있을 때 한쪽에서 갑자기 공간이 일렁였다. 당시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던 곽천도는 그 광경을 분명히 목도했다.
  쓰쓰쓰
  일렁이던 공간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그가 흑법사였다.
  깜짝 놀란 곽천도가 병장기를 휘두르려는 순간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놀랍게도 유창한 중원어였다.
  "나는 당신들을 도우려는 사람이오. 우선 나를 도와주시오."
  그가 다급한 표정으로 등 뒤쪽을 가리켰다. 그쪽의 공간도 마구 일렁이고 있었다.
  "저곳에 나타나는 사람들을 불문곡직하고 죽여주시오. 그렇게 해 준다면 내가 당신들을 돕겠소."
  어찌 된 영문인지 판단할 겨를이 없었지만 곽천도는 그의 말을 따랐다.
  쓰쓰쓰
  흑법사의 말대로 공간을 가르고 백의를 걸친 두 명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역의 색목인들이었는데 손에 기괴하게 생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곽천도는 흑법사의 앞을 가로막으며 명령을 내렸다.
  "저들을 죽여라!"
  실력이 모자라 철마를 상대하지 못하던 무사들이 명령을 받고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모습을 드러낸 노인들이 당혹한 기색으로 입을 우물거렸다. 뭔가 주문을 외려는 것 같았다.
  그때 또다시 흑법사의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서두르시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 말고 저들의 목을 날려야 하오."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청난 폭팔이 일어났다.
  그때 곽천도는 보았다. 노인들을 덮쳐가던 무사 십여 명이 난데없이 일어난 폭발에 휘말려 갈가리 찢어지는 것을. 얼이 빠져 멍하니 서 있던 곽천도에게 다시 흑법사가 경고를 했다.
  "뭐 하는 것이오! 모두 죽고 싶소?"
  퍼뜩 정신을 차린 곽천도는 들고 있던 자모건곤권을 날렸다. 다행히 자모건곤권은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투척무기였다.
  쐐애액
  굉음을 내며 날아간 자권이 한 노인의 목줄기에 들어박혔다. 내공이 가득 실렸기 때문에 노인은 단숨에 절명해 버렸다.
  하지만 모권은 성공하지 못했다. 또 다른 노인 앞에 하얀 빛이 생겨나는가 싶더니 모권이 퉁겨나 버린 것이다. 방어에 성공한 노인이 또다시 입을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끝났어."
  흑법사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린 것을 보아 엄청난 위력을 가진 주문 같았다.
  하지만 그의 주문은 애석하게도 실현되지 못했다. 아까의 폭발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혈살대의 살수 한 명이 때맞추어 단검을 던졌던 것이다.
  큰부상을 입고 쓰러진 상태였지만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검을 날릴 수 있게 훈련받은 살수였다. 단검은 정확히 노인의 목줄기에 틀어박혔다.
  "커어억."
  주문을 채 마치지 못하고 고꾸라진 노인. 엄청난 무위를 뽐낸 초인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곽천도의 귓전으로 안도하는 듯한 음성이 흘러들었다.
  "휴우, 다행이로군. 이젠 그를 제압하도록 내가 도와주겠소."
  고민하던 곽천도는 그를 천기대제 사준환에게로 데리고 갔다.
  그때까지 철마와 잠마련의 고수들은 백중지세로 싸우고 있었다. 합격진을 펼쳐 싸우긴 했지만 잠마련의 고수들은 현저히 지친 상태였다.
  한편 철마는 시종일관 무서운 공격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마치 내공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치솟는 모양이었다. 벌써 4명의 초절정 고수가 절명한 채 널브러진 상태였다. 마교의 내분을 이용해 영입한 마도고수들이 허망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사준환의 안색은 극도로 어두웠다. 그토록 영입하기 힘든 초절정 고수를 이토록 무력하게 잃었으니 허무할 수밖에 없다. 곽천도가 흑법사를 데리고 가서 자초지종을 말하자 사준환이 눈빛을 빛냈다.
  "저자를 제압할 수 있도록 도울수 있다고 그랬소?"
  "그렇소."
  "그럼 당장 손을 써 주시오."
  "그런데 무사들이 좀 망가져도 되겠소?"
  그 말에 사준환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인간에게 한정된 시간을 빠르게 흐르게 하여 민첩하게 만드는 마법을 펼칠 것이오. 단점은 그만큼 나이를 먹는다는 점인데 그래도 괜찮겠소?"
  사준환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마공 중에도 비슷한 효과를 내는 것이 있으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사준환이 승낙하자 흑마법사는 즉시 주문을 외웠다. 대상은 철마를 포위공격하고 있던 초절정 고수들이었다. 사준환은 우선 전음으로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이제 되었소."
  사준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흑마법사는 즉시 주문을 외웠다.
  "헤이스트."
  순간 초절정 고수들의 몸놀림이 배나 빨라졌다. 지금까지는 겨우겨우 버티는 수준이었지만 몸놀림이 빨라지자 상황은 조금씩 역전되기 시작했다. 합격진이 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공할 만한 무위를 뽐내던 철마도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사준환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절정고수를 모두 투입했다. 물론 흑마법사가 그들에게도 모두 주문을 외워주었다.
  "놈을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 결코 죽여서는 아니 된다."
  주문으로 인해 민첩해진 절정고수들이 앞 다투어 투입되자 철마는 결국 패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워낙 많은 무사들이 헤이스트를 걸고 달려드니 그로서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대기하고 있던 노인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빠져나갈 방법이란 없었다.
  결국 철마는 집법장로인 북리무극의 일장에 맞아 나가떨어졌고 무사들이 달려들어 제압했다. 잠마련을 발칵 뒤집어 놓은 철마가 생포되는 순간이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린 곽천도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무서운 자였어. 흑법사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결코 제압하지 못했을 것이야."
  그때의 일로 흑법사는 잠마련의 귀빈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가치는 이후에 드러났다. 그는 실로 엄청난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잠마련은 철골강시에 독을 결합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강시가 독을 방사할 수 있다면 엄청난 위력을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잠마련은 그야말로 모든 역량을 독강시 제조에 쏟고 있었다.
  당문과 오독문을 멸문시킨 것도 바로 그 계획 때문이었다.
  독강시가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하려면 전문적으로 독을 취급하는 문파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잠마련은 우선 당문과 독곡, 오독문을 공격하여 비축한 영초와 독초를 모조리 빼앗고 그 식솔들을 포로로 붙잡아왔다. 그리고 포로들로 하여금 연구를 시켰다.
  독을 방사하는 강시를 만들기 위한 목적의 연구였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독성이 포함되자 강시들은 대부분 작동을 하지 않았다. 그 탓에 잠마련은 벌써 여러 번이나 실험에 실패해야 했다.
  그러던 상황을 타개해 준 것은 흑법사였다. 그가 제시한 이론대로 실험하자 마침내 독강시가 탄생했다. 무림을 위진시킬 강력한 병기가 탄생한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오 년 정도의 연구 끝에 그는 음양강시라는 희대의 걸작을 만들어냈다. 상대의 강기를 흡수하여 상처난 몸을 수복하는 강시로서 독강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고급강시였다.
  잠마련의 수뇌부들은 음양강시의 위력을 시연해보고 하나같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지금껏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강력한 강시가 탄생한 것이었다.
  흑법사의 활약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잠마련에 거대한 피해를 안겨 주었던 철마, 그를 활강시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때 보여주었던 엄청난 무위를 고스란히 간직하면서도 사준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활강시.
  그러니 흑법사가 잠마련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잠마련은 흑법사를 지원하는데 있어 그 어떤 것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연구를 위해 산 제물을 원했다. 잠마련은 그가 원하는 대로 제물을 지원해 주었다.
  동남동녀에서부터 남자경험이 없는 숫처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제물로 바쳐졌다. 어차피 강시를 만드는 데도 제물이 필요한 상황이었으니 잠마련의 입장에서 거리낄 게 없었다.
  당금 잠마련에서 흑법사의 지위는 서열 5위 안에 들 정도로 높았다. 잠마련이 흑법사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반증하는 사실이었다.
  흑법사에 대한 일을 떠올려 본 곽찬도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어쨌거나 이유가 있어서 왔을 테지.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흑법사를 경호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엄선된 혈마대의 무사들이 주위를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사건현장에 홀로 들어간 흑법사는 눈을 반개한 채 주위를 살폈다. 마치 뭔가를 느끼려는 것 같았다.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런데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언어는 중원의 말이 아니었다.
  "역시 생각대로군. 이곳에서 마법이 시전되었어."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가기 시작했다.
  "마나배열을 보아 이곳에서 시전된 마법은 5서클의 마법 익스플로전이다. 이로써 한 가지가 더 확실해졌군."
  그는 눈빛을 빛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일반적인 마법사의 익스플로전은 이 정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어둠의 마나를 운용할수 있는 흑마법사만이 익스플로전의 효과를 이 정도로 극대화시킬 수 있지. 불의 속성을 가진 마나와 어둠의 마나를 충돌시키면 익스플로전의 위력은 세 배 이상 증대되니까."
  죽립 아래로 드러난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맺혔다.
  "중원으로 온것을 환영하오. 차원이동에 성공한 동지여. 정황을 보니 평범한 마법사가 아닌 것 같구려. 마나가 희박한 중원에서 5서클 마법 익스플로전을 시전하려면 최소한 8서클이 넘어야 가능하니까."
  기분이 좋은지 흑법사는 연신 낄낄거렸다.
  "아무튼 반갑소. 혼자서 연구를 계속하려니 많이 막혔는데 말이오. 함께 연구해 줄 동지가 생겼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소?"
  고개를 흔든 흑법사는 계속 마나배열을 관찰해 나갔다.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마법의 흔적을 추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해독마법까지 전개되었군. 만만치 않은 자라고 봐야겠지. 일단은 나보다 수준이 높은 마법사라고 보는 것이 확실하겠어."
  하지만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법실력이 자신보다 강하다고 해도 상관할 것은 없었다. 그의 휘하에는 강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무사들이 수두룩했다.
  제 아무리 마법사가 강하다고 해도 뛰어난 무사에겐 당적해 낼 수 없는 법.
  "총수에게 말해 그를 산채로 붙잡아달라고 해야겠군. 흑마법을 익혔으니 말귀를 잘 알아먹을 거야.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상관할 것은 없다. 고문에는 장사가 없으니 말이야."
  마나배열을 모두 살핀 흑법사는 몸을 돌렸다. 이제 남은 일은 곽천도를 위시한 무사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데이몬 일행은 하루 동안 푹 쉬며 싸울 채비를 갖추었다. 초무극과 겨루기 위해 냉유성은 운기행공을 통해 구자엽초의 성분을 흡수하는 데 주력했다.
  강적과의 대결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이미 정사대전을 통해 생사를 건 대결을 여러 번 치러보았던 냉유성이었다.
  초무극은 정오 정도에 목가장을 방문했다. 청년 몇 명을 데리고 왔는데 새로 거두어들인 제자들인 모양이었다.
  "문을 열어라."
  문을 쿵쿵 두드리자 목가장 사람들은 바짝 긴장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늙은 총관이 나가 문을 열어주었다.
  초무극은 위맹하게 생긴 오십대의 장한이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 송곳처럼 빳빳하게 솟은 수염. 타오르는 듯한 붉은 적포를 입고 등에는 염왕도를 둘러매고 있었다.
  동행한 네 명의 청년도 초무극과 마찬가지로 적색 무복을 걸치고 있었다. 총관이 쩔쩔 매며 그들을 안내했다.
  "이, 이리로 오십시오."
  총관의 안내를 받으며 초무극은 목가장 내부를 샅샅이 훓어보았다. 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역시 괜찮은 장원이로군. 곧이어 창설할 문파의 본단으로 삼으면 안성맞춤이겠어. 소작료가 걷히는 전답이 적지 않다고 했으니 더욱 잘 되었군.'
  처음 목수곤의 허풍을 들었을 때 그는 그냥 웃어넘겼다. 기분이 나쁘긴 하지만 술김에 한 말을 굳이 트집 잡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 제자들이 알아온 목가장의 상황을 듣고 난 뒤의 일이었다. 데이몬이 예상한대로 그는 문파를 창설하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다.
  '목가장은 한 마디로 알짜배기입니다. 장원도 클 뿐더러 인근의 전답에서 들어오는 소작료가 엄청납니다.'
  '제가 살펴본 결과 목가장은 곧 창시할 문파의 본단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합니다. 연무장도 훌륭하고 제반 입지도 나무랄 데가 없더군요.'
  제자들이 부추기자 초무극도 귀가 솔깃해졌다.
  '흠, 구미가 당기는군. 좋다, 목가장을 우리가 접수하자. 어차피 강호도의에 거리낄 것도 없으니 말이다.'
  초무극이 목가장으로 서신을 보낸 데에는 그러한 연유가 있었다. 그 때문인지 초무극은 목가장 내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연무장은 훌륭하군. 저쪽의 정원을 헐면 두 개는 더 나오겠어. 개인 연공실은 뒤뜰에다 지어야 하나?'
  아직까지 승부가 나지 않았지만 초묵그은 이미 목가장이 손에 들어온 것처럼 생각했다.
  그는 강호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목가장에서 아무리 거금을 제시한다고 해도 최절정 고수인 자신을 상대하러 나올 만한 고수는 없다. 이득 될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목가장 사람들에게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초무극은 마침내 내원의 뜰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목가장의 식솔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걱정이 그득했다.
  그 모습을 본 초무극은 코웃음을 쳤다.
  '술김에 한 말로 인해 장원을 빼았기게 생겼으니 그럴 수 밖에 없지.'
  우선 그는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샅샅이 훓었다. 만에 하나 은거기인이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이 냉유성에게로 닿았다. 눈가에 얼핏 놀라움이 스쳐지나갔다.
  '놀랍군. 목가장에 저 정도 고수를 끌어들일 역량이 있었나?'
  하지만 그는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눈에 경지가 보인다는 것은 상대가 자신보다 무위가 낮다는 뜻이다.
  '아무튼 상관할 것은 없다. 오늘 부로 목가장은 내 소유가 되는것이 확실하니까.'
  마음을 정한 초무극은 목가장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내가 바로 염왕도 초무극이오. 귀 장의 장주는 어디에 있소?"
  그러자 중앙에 서 있던 풍채 좋은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긴장 했는지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내, 내가 목가장의 장주 목수곤이오. 어서 오시오."
  "그대가 바로 목가장의 장주였구려."
  초무극의 언성이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비록 본인이 십 년 전에 은거했다고 하지만 말이 너무 심했소. 그래, 귀장의 빈객들을 한번 소개시켜 주시오. 날 꺾을 수 있는 고수는 도대체 누구인지 알고 싶소."
  "……."
  목수곤은 쩔쩔맸다. 일단 대화로 풀어보려고 했는데 초무극이 그럴 여지를 전혀 안 주는 것이다.
  "그, 그말은 내가 술김에 실수로……."
  "남자는 자신이 한말에 책임을 져야 하오. 목가장의 전 재산을 걸고 내기까지 했으니 더 이상 할말이 없을 줄 아오. 그럼 비무를 시작해 봅시다."
  목수곤은 힘없이 머리를 떨궜다. 초무극은 이미 자신의 장원을 빼았겠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온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설득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냉유성이 장검을 움켜쥐고 앞으로 나섰다. 목가장 사람들의 기대어린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내가 당신을 한번 상대해 보겠소."
  초무극의 시선이 냉유성에게로 돌아갔다.
  "보기 힘든 고수로군. 목가장에서 그대 같은 고수를 끌어들일 역량이 있다고 믿기 힘든데?"
  "그래봐야 당신보다는 하수일 것이오. 하지만 온 힘을 다할 것이니 당신도 최선을 다해 주시오."
  그때 목수곤의 뒤에 서 있던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냉유성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청년은 초무극이 은거기간 동안 키워낸 수제자였다. 십 년 동안 초무극으로부터 시사를 받았기 때문에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스승님,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해결 하겠습니다."
  그 순간 초무극의 눈썹이 역 팔자로 치솟았다.
  "멍창한 녀석, 그렇게 상대를 볼 줄 모르느냐?"
  "……."
  "그는 너보다 두 단계는 높은 고수다. 최소한 절정, 거기에서도 중급이상이 확실해. 넌 그의 백초지적도 되지 못한다."
  그 말에 청년은 풀이 죽은채 뒤로 물러났다. 비슷한 연배라서 나섰건만 자신보다 수준이 높은 고수라니……. 스승의 안목은 자신보다 월등히 정확하다. 때문에 청년은 군소리없이 물러섰다.
  초무극이 등에 매고있던 염왕도를 풀어 손에 쥐었다. 오랫동안 사용했던 독문병기라서 손바닥에 착 감기는 맛이 일품이었다.
  "그럼 한번 어울려 볼까?"
  "바라마지 않던 바요."
  그들이 대면한 장소가 연무장이기 때문에 굳이 장소를 옮길 필요는 없었다.
  냉유성도 장검을 뽑아들었다. 새하얀 검신이 태양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스르릉
  초무극도 염왕도를 뽑아들었다. 어떻게 재련했는지 모르지만 도신이 시뻘건 빛을 띠고 있었다. 도갑을 제자에게 넘긴 초무극은 호기있게 외쳤다.
  "덤벼라. 선배로서 삼 초를 양보해 주겠다."
  "마다하지 않겠소."
  냉유성은 머뭇거림 없이 달려들었다. 장검이 공간과 공간을 일직선으로 갈랐다.
  쐐애액
  이미 수천, 수만 번의 수련을 통해 단련된 찌르기라서 속도가 상상을 불허했다.
  그러나 초무극 역시 그 이상의 수련을 쌓아 온 무인이다. 날카로운 찌르기는 초무극의 노련한 방어에 가로막혔다. 냉유성이 이어 두 번의 공격을 날렸지만 역시 무산되었다. 명성에 걸맞은 매끄러운 방어였다.
  세 번의 공방이 끝나자 초무극은 여유 있게 눈빛을 빛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바라던 바요."
  이어진 것은 숨 막히는 대치였다. 병기를 꽉 움켜쥐고 서로의 눈을 노려보며 둘은 연무장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빈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 하나 공격할 염두를 내지 못했다.
  마치 철벽이 앞을 가로 막은 느낌을 받은 냉유성은 눈매를 좁혔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엄청나군…….'
  상대하는 초무극도 감탄하고 있었다.
  '직접 겪어보니 엄청난 녀석이었군. 생사의 고비를 한두 번 넘겨본 놈이 아냐.'
  이 같은 대결은 엄청난 심력을 소비한다. 견디지 못하고 먼저 공세에 나선 냉유성이었다.
  "하아앗!"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장검이 대기를 갈랐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초무극의 염왕도가 마중 나왔다. 검기가 한껏 응축된 검과 도가 연이어 충돌하기 시작했다.
  창 차창 창
  사방에서 불꽃이 튀고 대기가 갈가리 찢어지며 박살난 검기가 맹렬히 흩뿌려졌다.
  둘의 병장기는 제대로 식별하기 힘든 속도로 격돌했다. 무위가 낮은 목가장 사람들은 미처 둘의 신형도 제대로 식별하지 못했다.
  마치 바람처럼 연무장을 누비며 공방을 펼치고 있는 둘의 모습은 한 마디로 장관이었다. 이 정도 절정고수들의 대결을 본 적이 없었기에 목수곤은 눈을 크게 뜨고 접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오오, 정녕 초인들이로다. 내 생에에 이런 대결을 볼 수 있다니……."
  내공이 한껏 주입된 근육이 수축을 거듭했다. 도검이 격돌하며 피어오른 불꽃이 사방에 마구 흩날렸다. 둘의 대결은 그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숙련된 몸놀림으로 공방을 주고 받는 두 사람. 그들은 완전히 싸움에 몰입해 있었다.
  물론 내력과 힘에서는 초무극이 월등한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실전경험과 기세만큼은 냉유성도 뒤쳐지지 않았다. 이미 정사대전을 치르며 생사의 고비를 무수히 넘겨본 냉유성이 아니었던가.
  그런 자부심으로 인해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의 대결을 치르면서도 쉽사리 밀리지 않고 있었다.
  보고 있던 데이몬은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대결에 끼어들어 마음껏 병장기를 휘둘러보고 싶었다.
  '빌어먹을……. 암흑투기만 운용할 수 있다면.'
  옆에서는 당청이 걱정되는 듯 두 손을 꼭 맞잡고 대결을 관전했다. 침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꿀꺽
  그들중에서 가장 심정이 조마조마한 이는 목유경이었다.
  그녀는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그녀가 마음에 두고 있는 냉유성이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염왕도 초무극을 맞아 한 치도 밀리지 않고 치열하게 맞서 싸우는 모습을.
  '절정고수란 말이 사실이었어. 아아, 너무 멋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무의 길을 정진해 나가는 무사의 모습이 바로 저런 것인가? 역시 내가 꿈꿔왔떤 남성상의 모습이야.'
  그녀는 간절히 두 손을 맞잡은 채 냉유성의 승리를 기원했다.

  일각 가량 싸우자 마침내 승기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초무극은 싸울수록 강해졌다. 오랜 폐관으로 잃은 감각을 서서히 되찾고 있는 것이다.
  반면 냉유성은 지친 기색이 조금씩 드러났다. 워낙 강한 상대라서 전력으로 싸워야 하니 내력이 급속도로 소진되고 있는 것이다. 여유를 되찾았는지 초무극이 싸우면서 말을 걸어왔다.
  "정말 대단하구나. 내 수제자랑 비슷한 나이이면서도 이 정도 경지에 올랐다니……. 검초를 보니 공동파의 제자 같은데 맞느냐?"
  "……."
  냉유성은 대답하지 못했다. 말 한 마디 꺼내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초무극은 얄밉게도 계속해서 이죽거리며 냉유성을 자극했다.
  "왜 복마검법을 쓰지 않는 거냐? 이런 기초 검법으로 날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냉유성의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차마 대답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상태였다.
  '빌어먹을……. 배우지 못했으니 쓸 수 없는 것 아니오.'
  냉유성은 서서히 밀리고 있었다. 도와 검이 충돌할 때마다 신형이 눈에 띄게 흔들렸고 숨이 턱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꾹 눌러 참으며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럼에도 초무극은 완벽하게 냉유성의 공세를 차단했다.
  "제법이지만 아직까지 내 상대는 아니다. 네 무공을 보아 죽이지는 않으마."
  냉유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검초를 펼쳐내는 데에만 열중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패배를 자인했다. 이대로 싸운다면 일각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 확실했다.
  그때 귓전으로 데이몬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주문을 외우거라. 그러면 이길 수 있다."
  순간 냉유성은 입술을 악물었다. 데이몬의 말대로 주문을 외운다면 패색을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장검에서 뽑아지는 음한지기는 맞서 싸우는 상대에게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다. 그도 과거 음한지기를 익힌 무사와 싸우며 얼마나 곤욕을 치렀던가.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문을 외울 수는 없다. 게다가 이 자리에는 마음에 둔 여인도 있지 않은가.
  사실 목규영의 연정은 일방통행이 아니었다. 냉유성 역시 그녀에게 약간이나마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내라면 그녀 정도의 미모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순 없는 노릇. 그 때문에 냉유성은 마음을 굳혔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주문을 외울 순 없다.'
  입술을 꽉 깨문 냉유성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승부는 결판이 나고 있었다.
  쾅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일격에 냉유성은 그만 검을 놓치고 말았다. 하늘높이 치솟은 검이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해 내렸다. 검을 움켜쥔 손아귀가 터져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초무극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시뻘건 도신이 횡으로 휘둘러졌다.
  부우웅
  안색이 돌변한 냉유성은 철판교를 써서 공격을 피해냈다. 재빨리 땅을 굴러 위기를 넘긴 그는 바닥에 떨어진 장검을 주어들었다. 초무극이 빙글빙글 웃으며 다가왔다.
  "더 할 테냐? 너로서는 역부족일 것 같은데……."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소."
  안색을 굳힌 냉유성은 검 자루를 불끈 움켜쥐었다. 찢어진 상처가 검병에 닿아 쓰라렸지만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초무극이 사납게 공세를 펼쳤다. 냉유성은 입술을 악물고 공격을 막아냈다.
  차창
  그러나 초무극의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내력이 모두 소진되고 손아귀까지 찢어진 상태라서 오래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냉유성은 어깨에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크으윽."
  어깨에 깊숙한 상처를 입은 냉유성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치다 검을 떨궜다. 여기까지가 그의 한계였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냉유성의 얼굴이 차츰차츰 평정을 되찾았다. 상대가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고수란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어깨의 혈도를 짚어 지혈한 냉유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초무극을 쳐다보았다.
  "졌소. 당신의 승리요."
  초무극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져갔다.
  "너도 휼륭했다. 굽힐 줄 모르는 투혼에 찬사를 보낸다."
  말을 마친 초무극이 염왕도를 휘둘러 도에 묻은 핏방울을 털어냈다. 그사이 힘을 모두 소진한 냉유성은 맥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력을 모두 소모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냉 대협."
  목유경이 날듯이 달려왔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찌익
  덮어놓고 옷소매를 찢은 목유경이 그것으로 냉유성의 상처를 눌렀다.
  "괘, 괜찮소. 이미 혈도를 눌러 지혈을 했소이다."
  "그래도 피가 계속 배어나요."
  패배가 생각났는지 냉유성은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미안하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고수였소."
  "괜찮아요. 냉 대협께서는 최선을 다하셨잖아요."
  괜찮다는 듯 머리를 내젓는 목유경. 그 모습을 본 초무극은 뭔가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여자 때문에 나선 녀석이었군. 그렇지 않고서야 목가장에서 저 정도 절정고수를 동원할 순 없지.'
  퍼뜩 생각을 접은 초무극은 목수곤을 쳐다보았다.
  "제법 실력 있는 무사를 구하긴 했지만 날 꺽진 못했소. 이제 날 꺾을 빈객을 내보내 보시오. 만약 그도 날 꺾지 못한다면……."
  그는 목수곤을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목가장은 오늘부터 나의 것이오."
  그 순간 목가장의 사람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쏠렸다.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데이몬이었다. 초무극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가 날 상대할 빈객이오?"
  목수곤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소."
  초무극은 눈매를 가늘게 좁힌채 데이몬을 샅샅히 살폈다. 스물 남짓한 색목인 청년이 자신을 상대할 빈객이라는데 호기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한참동안 데이몬을 쳐다보던 초무극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포달랍궁에서 왔나?"
  다분히 데이몬이 색목인임을 염두해 둔 질문이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이거 자존심이 상하는 걸? 그런 촌구석 문파를 떠올리다니 말야."
  그 말에 초무극의 이맛살이 지그시 모아졌다. 지금은 힘을 잃었지만 포달랍궁은 중원의 문파들이 결코 경시하지 못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단체였다. 그런 포달랍궁을 촌구석 문파라고 표현하다니…….
  초무극의 얼굴에 슬며시 노기가 떠올랐다. 고작해야 스물 언저리로 보이는 애송이가 오십 줄이 넘어선 자신에게 반말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버르장머리가 없는 놈이로군. 색목인들이 위아래가 없다는 사실은 들었지만."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고운 법이야. 존대를 듣고 싶으면 먼저 존대를 했었어야지."
  초무극의 이맛살이 급격히 휘어졌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욕지거리가 퍼부어졌지만 데이몬은 동요하지 않았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귀지를 후빌 뿐이었다.
  "말로 싸울 생각인가? 나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자를 좋아하는데 말이야."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녀석이로군."
  험악한 어조와는 달리 초무극은 쉽사리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데이몬을 노려보며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도저히 경지를 간파할 수 없다. 겉보기에는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범인처럼 보이거늘…….'
  결론은 두 가지였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 아니면 자신보다 월등히 높은 경지에 올라 있는 자. 자신을 앞에두고 저처럼 여유만만하다면 분명 후자로 봐야 한다.
  그러나 젊어 보이는 외모 때문에 초무극은 도저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해대던 데이몬이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봐, 언제 시작할 건가? 나도 밥값은 해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데이몬 역시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그는 지금 순수한 마법만으로 초무극을 상대하려 하고 있었다. 처음 해 보는 시도이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데이몬의 책략에 말려든 초무극이 염왕도를 들어 올렸다. 무척이나 신중한 태도였다.
  "그럼 공격하겠다."
  "할 거면 빨리 해. 배고프니까."
  심호흡을 한 초무극은 단전의 내공을 끌어올려 전신으로 퍼뜨렸다. 팽팽이 당겨진 근육이 파르르 떨었고, 염왕도에 내력이 충실히 맺혔다. 반개한 눈으로 데이몬을 노려보던 그가 마침내 땅을 박찼다.
  "하아아앗."
  거센 기합성과 함께 그의 몸이 한 줄기 바람이 되어 데이몬을 덮쳤다. 치켜세운 염왕도에서 시릴 듯한 도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데이몬은 미동도 없이 그 모습을 쳐다볼 뿐이었다.
  쐐애액
  시뻘겋게 변한 염왕도가 데이몬의 어깻죽지를 향해 폭사되었다.
  하나, 데이몬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마치 피할 염두를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초무극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야? 이거 순 맹탕이잖아?'
  그러나 초무극은 도의 기세를 거두지 않았다. 이미 팔 하나 정도는 잘라낼 생각을 한 초무극이었다. 자신에게 건방을 떤 이유로 그 정도 처벌을 가할 필요는 있었다.
  촤아아악
  염왕도가 정확히 데이몬의 어깻죽지에 박혀들었다. 보고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저, 저런……."
  그러나 당사자인 초무극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염왕도가 건방진 색목인의 몸을 훓었지만 손에서 아무런 감각이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순간 색목인의 모습이 허깨비처럼 꺼져버렸다.
  "자, 잔영(殘影)."
  깜짝 놀란 초무극은 몸을 황급히 돌렸다. 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어느새 색목인이 자신의 등 뒤에 나타나 있는 것을.
  만약 상대가 출수를 했다면 정통으로 먹혀들었을 것이기에 초무극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렇게 빠른 신법을 가진 상대는 지금껏 상대해 본 적이 없었다.
  "서, 설마 이형환위(移形換位)란 말인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데이몬이 빙그레 웃어주었다.
  "몸놀림이 꽤나 느리군. 그래가지고 파리나 잡겠어?"
  느물대는 태도에 부아가 치민 초무극이 마구잡이로 도를 휘둘렀다. 상대가 빠져나갈 방위를 모두 계산한 공격이었다. 살벌한 도기가 주위를 갈가리 찢어놓았다.
  "놈! 이제는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사방팔방을 도기의 그림자로 덮어놓은 뒤 초무극은 염왕도를 쭉 뻗었다.
  이번에 노린 곳은 목덜미였다. 그가 시전할 수 있는 최강의 절초를 펼진 것이다. 초무극의 얼굴에는 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파파팟
  염왕도의 도첨이 색목인의 목덜미를 정통으로 꿰뚫었다.
  하지만 초무극의 얼굴에 또다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 정도 고수라면 손의 감각이 무척 예민하다. 그런데 염왕도에서 전혀 손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급히 몸을 돌린 초무극의 눈동자가 토끼 처럼 커졌다.
  "헉."
  어느새 나타났는지 데이몬이 잔잔히 미소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내뻗은 손이 어느새 내 어깨에 닿아 있었다.
  초무극은 급히 손을 떨쳐내려 했다. 그러나 마치 그러기 전에 데이몬의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ing)."
  순간 강력한 전기가 초무극의 전신을 관통했다. 어깨에 손을 대고 바로 마법을 전개했기 때문에 피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5서클 급의 마법인 체인 라이트닝은 전신을 면밀히 보호하던 내공을 뚫고 초무극의 본신에 강력한 타격을 입혀버렸다.
  파지지직
  시뻘건 머리털이 그대로 곤두섰다가 끝부터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옷도 시커멓게 그을리더니 불이 붙었다.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낭패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초무극. 눈동자가 서서히 뒤집히더니 육중한 몸이 맥없이 뒤로 넘어갔다.
  쿵
  눈을 완전히 까뒤집고 개거품을 문 초무극의 모습은 참혹했다. 간간히 이어지는 숨결이 아니었다면 영락없는 시체였다. 뻗어버린 초무극을 두고 데이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도박이 성공했군.'
  데이몬이 시전한 것은 순수한 마법이었다. 오로지 마법만으로 절정고수인 초무극을 쓰러뜨린 것이다.
  냉유성이 초무극에 맞서 싸우는 동안 데이몬은 여러 가지 마법을 캐스팅해 놓았다. 마법이 의지만으로 발동하도록 만발의 준비를 갖춘 것이다.
  초무극과 입씨름을 벌이며 데이몬이 몸에 펼친 것은 헤이스트(Haste)였다. 몸에 한정된 시간을 빠르게 흐르게 하여 월등히 민첩해지는 마법. 여러 번 중첩해 걸었기 때문에 몸놀림이 월등히 빨라졌다.
  그 덕에 데이몬은 블링크(Blink, 공간전이)을 펼칠 정확한 순간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초무극의 일격을 미처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초무극의 첫 공격이 날아온 순간 데이몬은 블링크를 써서 초무극의 등 뒤로 이동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정확한 순간이었다.
  초무극의 등이 완전히 무방비상태로 드러났지만 데이몬은 공격을 할 수 없었다. 체인 라이트닝의 캐스팅이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뒤늦게 데이몬을 포착한 초무극이 제2격을 날렸을 때 그는 또 다시 블링크를 썼다. 체인 라이트닝을 캐스팅 하면서 블링크를 펼치는 더블 캐스팅을 한 것이다.
  9서클의 마스터인 데이몬이 아니었다면 흉내도 낼 수 없는 기술이었다.
  두 번의 블링크가 성공한 데에는 헤이스트에 이어 데이몬이 가진 무인으로서의 경험이 큰 역할을 했다.
  마침내 데이몬의 눈앞에 초무극의 널따란 등판이 무방비로 펼쳐졌다.
  데이몬은 손을 뻗어 초무극의 어깨를 짚은 다음 완전히 캐스팅이 끝난 체인 라이트닝을 펼쳤다. 상대로 하여금 피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데이몬은 이미 모든 것을 염두해 두고 적절한 마법을 순차적으로 캐스팅했다.
  '뛰어난 고수들은 마법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다. 내공이 순화시켜주기 때문이지. 거의 최절정에 이른 고수를 기절시키려면 체인 라이트닝 정도는 되어야 한다.
  데이몬의 계산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맞아떨어졌고, 초무극은 완전히 초주검이 되어 널브러졌다. 그러나 목적을 이뤘지만 데이몬은 그리 통쾌하지 않았다.
  '역시 이런것은 내 적성에 맞지 않아. 무인이란 자고로 신나게 치고받으며 싸워야 제격인데 말이야…….'
  하지만 암흑투기를 보충하기 전까진 생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장내는 조용해졌다. 누구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특히 무공을 모르는 사람들은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파악도 하지 못했다. 겉으로 보기에 데이몬은 완벽하게 칼에 베였고 초무극이 저 혼자 칼을 휘두르다 쓰러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무공에 조예가 있는 이들은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냉유성과 초무극의 제자들이었다.
  '저것이 신법의 꿈이라는 이형환위인가. 놀랍군. 전신의 감각을 모조리 끌어올렸건만 주공의 기척을 두 번이나 놓쳤어. 주공은 정말 대단한 경지에 오른 고수였군.'
  냉유성의 생각이었다.
  초무극의 제자들 역시 입을 딱 벌린채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스승이 저토록 허망하게 패할 것이라곤 꿈에도 예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목가장 사람들 역시 눈을 크게 뜬 채 놀라워하고 있었다. 호기있게 장담했지만 아무래도 데이몬이 못미더웠던 것이 사실이었는데 저건 생각보다 더한 고수가 아닌가? 그 이름만 해도 무시무시한 염왕도 초무극을 저토록 간단히 쓰러트리다니…….
  쓰러진 초무극을 살펴보던 데이몬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응? 이것은……."
  초무극의 옷은 완전히 걸레가 되어 있었다. 전신을 관통한 강력한 전류의 흐름에 견디다 못해 갈기갈기 찢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옷 사이로 책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그스름한 가죽 같은, 다소 특이한 재질로 된 책자였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데이몬이 손을 뻗어 책자를 들어올렸다.
  "재미있는 책자로군. 사람의 가죽으로 만든 책이라니."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바짝 말라 있었지만 데이몬은 대번에 책자의 비밀을 간파했다. 소환술을 연구하며 수없이 시체를 만져보았던 터라 그가 인간의 가죽을 몰라볼 리 없었다.
  표지에는 오래된 고어체로 제목이 써져 있었다.

  『추혼수라무(追魂修羅舞)』

  호기심이 동한 데이몬은 책자를 펼쳐보았다. 얼마 읽지도 않았는데 등 뒤에서 굵직한 음성이 들렸다.
  "흠, 흠. 그, 그건 실례되는 일이오.
  고개를 돌리자 벌겋게 상기된 청년의 얼굴이 들어왔다. 아까 소개받았던 초무극의 수제자였다. 그가 쭈뼛쭈뼛 다가와 데이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스승님의 독문 무공이오. 귀하는 잘 모르겠지만 중원에서는 다른 사람의 무공 비급을 보는 것이 철저히 금기시되는 일이오. 그러니 제자인 나에게 넘겨주시오."
  말을 건네는 청년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보나마나 엄청난 고수일 것이 분명한 데이몬에 대한 부담감이 엄청난 모양이었다.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으며 책자를 청년에게 넘겨주었다. 물론 그가 그 정도 상식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가? 몰랐네."
  "고맙소."
  데이몬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청년을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초무극의 독문무공이 검법이었나? 놀라운 일이로군. 조금 전 펼치던 도법과는 판이하게 다른 무공이던데……."
  "그, 그건……."
  청년이 쩔쩔 매며 책자를 등 뒤로 감췄다. 그러나 데이몬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볼 필요도 없을 정도로 뻔했다.
  뒤이어 데이몬이 흘린 말에 청년이 움찔했다.
  "어디서 전대고인의 비급을 구해서 자신이 익힌 무공과 융합을 시도해 본 모양인데 헛수고일껄? 고작 최절정 정도로는 무공을 융합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말이야."
  한마디를 남긴 데이몬이 몸을 돌렸다. 그가 걸어가는 방향은 목가장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는 곳이었다.

  데이몬이 다가가자 목수곤이 환한 표정으로 달려와 맞았다.
  "수, 수고 많으셨습니다. 은공."
  "수고랄 게 뭐 있겠소? 한 것도 없는데 말이오."
  "저희 목가장은 은공께 커다란 은혜를 입었습니다. 부디 이 은혜를 어떻게……."
  데이몬을 쳐다보는 목가장 식솔들의 눈동자에는 감동의 빛이 일렁였다. 전 재산을 빼앗기지 않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아경과 소희 두 소녀의 눈동자는 몽롱하게 변해 있었다. 데이몬이 말만 앞서는 허풍쟁이가 아니라 진정한 고수란 사실을 깨달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급한 마음에 목수곤은 데이몬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연회를 준비하겠습니다."
  "그것보다도 저자나 좀 보살펴 주시오. 며칠 요양해야 할 상처를 입었으니 말이오."
  내키지 않았는지 목수곤이 떠듬거렸다.
  "하, 하지만 저자는……."
  "자고로 무인은 무인의 법도대로 대해야 하는 법이오. 상처를 입은 자를 무정히 내쫓는다면 훗날 앙심을 품을지도 모르는 일이오."
  그 말에 안색이 싹 바뀌었다. 은공들이 떠나간 뒤에 초무극이 화풀이를 한다면 사실상 막을 방법이 없다. 후환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았다.
  "아, 알겠습니다. 대인의 말씀이 백 번 옳은 것 같습니다."
  목수곤은 하인들에게 손짓을 한 뒤 초무극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초무극의 제자들은 의식을 잃은 스승을 둘러업은 채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머무는 장원은 이곳에서 무척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때문에 그들은 인근 의원으로 가서 먼저 스승을 치료할 계획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목수곤이 하인들을 대동한 채 달려오자 그들의 눈동자에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오?"
  "그러지 마시고 저희 장원에서 치료를 받으시지요. 여기서 의원까지는 무척 멉니다."
  뜻밖의 제안이었기에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가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일단 방으로 옮겨 응급처치를 하는것이 어떻습니까?"
  고민하던 제자들이 결정을 내렸다.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스승의 안위였다. 만약 스승이 쓰러지지 않았다면 목가장에 머물 이유가 없는 그들이었다.
  "귀 장을 빼앗으러 온 저희들을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신세를 지겠습니다."
  덩치 좋은 하인이 다가가서 초무극을 둘러업었다. 초무극의 덩치가 워낙 당당했기에 하인도 힘에 겨워 연신 비틀거렸다.

  일은 그렇게 해서 일단락되었다. 목수곤은 별채 하나를 내어 초무극과 제자들을 기거하게 했다.
  초무극은 대략 한 시진 정도 지나자 정신을 차렸다. 워낙 내력이 심후해서 충격에서 빨리 깨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목가장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한 짓을 생각하면 얼굴이 뜨거워서라도 사라져 줘야 하지만 그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고 남았다.
  데이몬은 그 이유를 잘 알았다.
  '사람들 이목이 뜸한 밤에 찾아오겠군. 그럼 한잠 늘어지게 자 볼까?'

  여인네들의 숙소인 내원에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금남의 지역인 목유경의 침소에서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침상에 웬 남정네가 누워 있었다. 낮에 초무극을만나 고초를 겪은 냉유성이었다.
  그는 완전히 번데기가 되어 있었다. 다치지도 않은 팔과 다리에는 붕대가 친친 감겨 있었다. 처녀의 달콤한 체향이 풍겨나는 침상에서 그는 한없이 난감해했다.
  "소, 소저 그러지 않아도 되오."
  "가만히 있어요. 냉 대협은 엄청나게 큰 상처를 입었어요. 이렇게라도 치료하지 않으면 안 돼요."
  하지만 그녀의 치료 실력은 척 보이도 아니올시다였다. 불러온 의생이 옆에서 쿡쿡 웃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미 응급처치가 끝난 상황이었는데도 목유경은 냉유성의 팔다리에 열심히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연신 울먹였다.
  "세상에 얼마나 아플까? 아까는 뼈가 보였다고요."
  "괜찮소, 소저. 그 정도 상처는 흔히 있는 일이오."
  "그런 말하지 말아요. 손가락만 살짝 베여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픈데 뼈까지 갈라지는 중상이라니……."
  목유경의 정성이 싫지 않았는지 냉유성은 너스레를 떨었다.
  "그정도는 중상 축에도 들지 못하오. 정사대전을 치를 당시에는 뱃가죽이 갈라져 흘러내린 창자를 도로 쓸어 담으며 싸운적도 있었다오."
  그말에 목유경은 몸서리를 쳤다.
  "어머 끔찍해라. 그런 상처를 입고도 싸우시다니 정말……."
  말을 이어나가는 목유경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그녀가 평소 꿈꾸어왔떤 무사의 표상이 바로 앞에 누워있는 것이다.
  "그때 아프지 않았나요?"
  "고통이 심하면 도리어 익숙해지는 법이오. 사실 그땐 아픈 줄도 몰랐소. 정작 아픈 것은 치료를 마치고 나서였소. 경험해 본 결과 상처가 회복될 때의 간지러운 느낌이 더 참기 힘들더구려."
  "정말, 정말 대단해요."
  목유경이 박수를 치면서 냉유성의 팔뚝을 덮석 움켜쥐었다. 공교롭게도 상처를 입은 바로 그 팔이었다.
  "끄어어."
  냉유성의 눈이 툭 불거져 나왔다. 체면 때문에 비명은 지르지 못했지만 얼마나 아팠는지 식은 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왔다.
  "소, 소저. 소, 손 좀 놔주시겠소?"
  "어머 죄송해요."
  화들작 놀란 목유경이 얼굴을 감쌌다. 어깨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냉유성은 애써 낯빛을 고쳤다.
  "괜찮소. 이젠 아프지 않소이다.
  "정말요?"
  "그렇고말고요."
  젊은 청춘들의 연정이 무르익어 가는 밤이었다.




  
     5. 추혼검마의 비급(秘?)


  데이몬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방문객을 맞았다.애상대로 초무극이 그를 찾아온 것이다.
  "들어가도 되겠소이까?"
  문 밖에서 울려 퍼진 정중한 어투를 기다리고 있던 데이몬은 얼른 말을 받았다.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고 초무극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들어와 데이몬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데이몬은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 야심한 밤에 어인 일이시오."
  "내가 찾아온 이유를 이미 짐작하시겠지요."
  데이몬은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본인은 잘 모르겠소만."
  "제자로부터 언질을 들었소. 내 품에서 떨어져 나온 책자를 보셨다고……."
  말을 이어나가는 초무극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사생결단을 하러 온 사람 같았다.
  "일단 그대의 무위에 찬사를 보내오. 당신은 도저히 내가 감당할 만한 자가 아니오. 기척을 두 번이나 놓쳤다는 것은 나보다 적어도 두세 단계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오. 게다가 난……."
  말하기가 힘든지 잠시 말을 끊은 초무극은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단 일 수에 나가딸어지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소. 이래봬도 맷집 하나에는 자신이 있었지. 하지만 당신의 장력만큼은 예외이더구려. 본인은 지금껏 그토록 강력한 장력에 맞아본 적이 없소."
  '멍청아! 장력이 아니라 마법이다.'
  우스웠지만 데이몬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초무극이 서서히 본론을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당신에게 따질 수밖에 없는 입장이오. 그 책의 제목을 분명히 보셨지요?"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았소. 추혼수라무라고 적혀 있더구려."
  그 순간 초무극의 안색이 침울해졌다.
  "솔직히 말씀드리리다. 만약 당신이 색목인이 아니라 중원의 무사였다면 난 불문곡직하고 출수(出手)했을 것이오. 당신이 나보다 고수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말이오.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아니겠소?"
  초무극이 저러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데이몬은 침묵을 지켰다.
  "만약 이 사실이 무림에 퍼진다면 내 운명은 며칠을 넘길수 없소. 제자들의 생명 역시 마찬가지요. 중원에는 이런 말이 있지. 사람에게는 죄가 없지만 가진 물건에는 죄가 있다."
  초무극은 말없이 품속에 책자를 꺼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 책은 백 년 전 세상을 위전시킨 대마두 추혼검마(追魂劍魔)의 유진이요. 그의 최후 심득이 담겨져 있다고 알려저 있지. 나는 우연한 기회에 추혼검마의 유해를 발견하고 이 책을 얻었소이다. 이후 난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했소. 항상 품속에 간직했고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에만 꺼내 보았소. 만약 이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그 대목에서 초무극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십 년 동안 지켜왔던 비밀이 드러났으니 허탈해진 모양이었다.
  "수많은 무사들이 비급을 빼앗기 위해 나와 제자들을 추격해 올 것이오. 추혼검마의 최후 심득이라면 탐내지 않을 자가 없소. 어떻게든 비급을 빼앗아 절세고수가 되겠다는 생각에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 것이 분명하오. 비록 내가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무사라고 하나 끝없는 추격을 감당할 수는 없소. 어쨋거나 나는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낭인이니 말이오."
  초무극의 심경을 데이몬이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
  추혼검마라면 백 년 전 무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 거물이다. 마도의 고수로는 드물게 극마지경(極魔之經)에 들었던 이니 데이몬이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
  '추혼검마의 유진이라면 무림인들이 탐욕을 부릴 만하지. 분명 기연을 얻기 위해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 무림인들이 부기지수이겠지?'
  무림사에서 이런 일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일어난다. 비급을 힘 있는 문파가 가졌을 경우라면 별 문제 없이 넘어가겠지만 초무극처럼 홀로 활동하는 무사가 구했다면 틀림없이 쟁탈전이 벌어질 것이다.
  거기에는 대문파도 예외가 아니었다. 문파의 힘이 비약적으로 강해지기 때문에 대문파들 역시 다수의 무사들을 파견하여 쟁탈전에 가세한다.
  게다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혈겁을 막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소림이나 화산 등의 구파일방에서도 무사들을 파견할 터였다.
  개인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다수의 힘을 감당할 수 없는 법.
  결국 비급은 엄청나게 피를 뿌리고 헤아릴 수 없는 무사들의 손을 전전하다 마침내 대문파의 손에 들어갈 것이 분명하다.
  그 사실은 무림의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데이몬의 귓전으로 초무극의 말이 이어졌다.
  "그간 난 비밀을 잘 지켜왔소. 그러다가 당신에게 처음으로 들킨 것이오."
  "그런데 그런 말을 나에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서역에서 온 색목인이오. 당신에게서 사정을 들은 이상 소문을 퍼뜨리지 않겠소. 하지만 당신이 이런 사정을 나에게 늘어놓는 진정한 의도를 알고 싶소."
  데이몬을 뚫어지게 처다보던 초무극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리다. 난 이 비급을 십 년 동안 연구했소. 하지만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소. 당신을 찾아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초무극은 데이몬의 눈을 직시했다.
  "당신은 강하오. 나보다 적어도 두세 단계 위의 고수임이 틀림없소. 당신이 만약 중원의 무림인이었다면 아무리 무공이 강하더라도 비급을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오."
  "그렇다면 내가 색목인이라 비급을 보여준단 말이오?"
  "그렇소."
  초무극은 비급을 들어 데이몬에게 내밀었다.
  "당신이 한 번 보고 평가해 주시오."
  잠시 망설이던 데이몬은 비급을 집어 들었다. 초무극이 데이몬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비급을 펼치자 어지럽게 쓰여진 고어(古語)들이 데이몬의 눈을 파고들었다.
  "흠, 오래 전에 쓰여잔 중원의 문자로군. 따로 공부하지 않았다면 읽지 못할 뻔했는 걸?"
  "중원의 고어도 알고 있소?"
  "물론이오. 이래봬도 중원으로 오기 위해 공부를 많이 했다오."
  데이몬은 세심하게 신경 써서 비급을 읽어나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초무극이 비급을 구하고도 얻은 것이 전혀 없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비급은 바로 고수의 심득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니만큼 극단적으로 축약되고 함축된 언어들로 기록이 되어 있다. 의도적으로 암호화하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난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공은 비급만으로 익힐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데이몬은 그 사실을 인정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무공 수련과정에는 헤아릴 수 없는 시행착오가 도사리고 있다. 백여 명의 수련생이 동일한 조건하에 동일한 무공을 익히더라도 그들이 겪는 시행착오는 모두 다르다.
  문제는 그 시행착오를 바로잡아줄 스승의 존재다.
  제대로 된 스승 밑에서 배우는 수련생은 비급만으로 배우는 수련생보다 경지에 오를 확률이 수십, 수백 배 높다. 비급으로 무공을 익히는 수련생이 난관에 부딪쳐 고민할 때 다른 수련생은 스승으로부터 슬기롭게 난관을 극복하는 법을 배운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시간적 격차가 생겨나는 것이다.
  무림에서 사승관계를 중요시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비급을 이해할 수 있다고 가정할 때 나오는 경우의 수다.
  일반적으로 비급은 작성자가 불현듯 깨달은 심득을 기록한다. 그러므로 그보다 떨어지는 경지의 무사는 그 비급을 얻는다 해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비급을 이해할 수 있는 경우는 그것을 읽는 자가 작성자와 비슷한 무위이거나 그보다 높아야만 가능하다. 초무극이 추혼검마의 심득이 적힌 비급을 구하고도 여태껏 이해하지 못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추혼검마는 확실하게 초절정의 벽을 넘어선 고수였다. 극마를 넘어서 현경을 바라보는 경지의, 그것도 그가 죽기 전에 깨달았다는 최후 심득을 아직까지 초절정에 오르지 못한 초무극이 이해한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사정이 다르다. 비록 암흑투기의 힘을 빌렸다고는 하지만 그는 이미 현경의 벽을 깨뜨린 존재. 게다가 깨달음의 방법을 통하지 않고 무지막지한 내공의 힘을 빌려 이룬 경지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데이몬이 현경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거기에 마계에서의 수없는 실전경험을 통해 무위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암흑투기를 쓰지 못해 내공을 끌어올리지 못하지만 그 안목마저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참에 걸쳐 비급을 읽어본 데이몬이 책자를 초무극에게 내밀었다.
  "어떻소?"
  "후! 훌륭한 무공이구려. 내가 보기에 이 책자를 작성한 사람은 마공을 연성했으되 끝내는 마를 극복한 사람 같소. 그렇지 않소?"
  초무극의 눈이 빛났다. 상대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역인인 이자가 백 년 전의 추혼검마에 대해 알 리는 없지. 그렇다면 그가 이 비급을 이해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고수란 말인가?'
  다급해진 초무극의 귓전으로 데이몬의 설명이 파고들었다.
  "이 책에는 상당히 높은 경지의 검법이 수록되어 있소. 그것도 마공 계열의 내공을 기반으로 한. 혹시 이 책자 외에 따로 내공심법이 기록된 책은 없었소?"
  "본인이 얻은 것은 오직 이것뿐이오."
  데이몬은 예리한 눈빛으로 초무극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비급을 얻고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가오. 이 책은 초절정의 벽을 깨뜨린 고수가 작성한 것이오. 하지만 당신은 아직까지 그 경지에 오르지 못했소. 그러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그렇다면 당신은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오?"
  "물론이오. 당신이 믿을지 모르겠지만 내 경지는 이 비급을 작성할 때의 작성자보다 다소 높소. 원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수록 잘 보이는 법이지."
  그 말에 초무극은 충격을 받았다. 고작해야 스물 정도로 보이는 색목인이 초절정의 벽을 돌파한 초고수라니…….
  사실대로라면 데이몬은 현경을 극복한, 게다가 수백 년을 살아온 마왕이었지만 초무극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데이몬은 잔잔한 눈빛을 뿌렸다.
  "일단 이 책은 당신에게 맞지 않소. 내공심법의 속성이 다를 뿐더러 당신은 검이 아니라 도를 익힌 도객(刀客)이오. 도와 검은 엄연히 사용법이 다른 무기지. 익히기 위해서는 당신이 익힌 내공의 속성에 맞춰 초식을 수정해야 하오. 물론 모든 초식이 다 가능한 것은 아니오. 오직 도로 펼쳐낼 수 있는 초식만이 가능하지. 게다가 검법 자체에 깃들어 있는 마성도 제거해야 하오. 마공의 잔재가 남아있기 때문에 심마로 인해 주화입마에 들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오."
  데이몬의 유창한 설명에 초무극은 입을 딱 벌렸다.
  "다, 당신은 그게 가능하단 말이오."
  "나야 가능하지. 이 정도를 하지 못한다면 내가 어찌 중원에 왔겠소."
  초무극의 눈빛이 다급해졌다.
  "부디 부탁드리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소."
  초무극으로서는 정말 염치 불구하고 내뱉은 말이었다.
  비급을 십 년 동안 연구하고도 아무 것도 건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경지가 높은 고수들을 찾아가서 비급을 보여주는 것은 초무극의 입장에서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십중팔구 비급을 빼앗기고 덤으로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 테니까.
  그러니 그가 몸이 달 만했다. 하지만 데이몬은 역시 노련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 고생을 해야 하오. 척 봐도 며칠 동안 골머릴르 싸매야 할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초무극이 정색을 했다. 그의 말투가 어느새 극존칭으로 변해 있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초무극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데이몬이 손가락을 뻗어 비급을 살짝 가리킨 뒤 다시 들어 초무극을 가리켰다. 그러자 초무극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데이몬의 어투는 다분히 고압적이었다. 하지만 초무극은 전혀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줄 수도 있는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바라는 것은 비급이오. 솔직히 말해 비급에 적힌 검술이 탐이 나는구려."
  초무극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상대가 한 번 읽어본 마당에 마다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제게 비급을 전수해 주신다면 은공께 넘기겠습니다."
  "비급을 줄 필요는 없소. 이미 머릿속에 있으니까. 게다가 두번째로 바라는 것은 당신이오."
  초무극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저……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사실 나는 볼 일이 있어 중원에 온 것이오. 일을 보다 보면 사람의 손이 필요로 할 때가 있지. 그때 나를 도와주기 바라오. 어떻소?"
  "수하가 되어달라는 말씀이십니까?"
  "단 한 번에 한해서 말이오."
  데이몬은 고민에 잠긴 초무극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 승낙하면 난 비급의 내용을 풀어 당신에게 전수해 줄 것이오. 물론 비급에서 당신이 얻는 것은 고작해야 삼사 할 정도일 것이오. 내가 보기에 도법으로 펼쳐도 될 만한 초식을 추리고 거기에서 당신이 익힌 내공심법의 속성에 맞는 추식을 또다시 추려내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오. 거기에서 마기를 제거한 뒤 당신이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가르쳐 주겠소. 그럼 당신은 제자들과 함께 모처에 숨어서 무공을 익히면 되오. 어떻게 하겠소?"
  고민하던 초무극이 결정을 내렸다. 그로서는 상승무공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이대로 차버릴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단……."
  "단 뭐요?"
  "강호도의에 어긋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그 점만은 해량해 주십시오."
  다분히 데이몬이 색목인임을 염두해 둔 조건이었다. 혹시라도 데이몬이 중원무림을 정복하기 위해 온 서역의 마두일 수도 있었으니까.
  "알겠소. 그때 당신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리다. 만약 당신이 그때 불가다하고 말하면 나도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겠소."
  초무극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렇게까지 해 주신다면 기꺼이 승낙하겠습니다."
  "좋소. 계약은 성립되었소. 그럼 이제부터 당신이 익힌 내공심법의 구결을 설명해 주시오. 거기에 맞춰 초식을 가다듬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초무극은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내공심법의 구결을 데이몬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무림인에겐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초무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그보다 더한 추혼검바의 비급까지 내놓은 초무극이 아니었던가.
  내공심법의 구결을 듣고 있던 데이몬의 눈빛이 점차 깊어지기 시작했다.

  데이몬 일행은 그날 이후 목가장에서 며칠을 보냈다. 초무극과 그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래대로라면 목가장 식솔들과 얼굴 맞대기가 껄끄러웠을 테지만 데이몬에게 볼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눌러앉았다.
  그동안 데이몬은 추혼검마로부터 전래된 추혼수라모를 뜯어 고치는 데 열중했다. 비급에 수록된 열여섯 개의 추식들 중 도법으로 활용 가능한 초식만을 골라내어 그것을 초무극이 익힌 내공심법에 맞춰나가는 작업이었다.
  그것은 데이몬이 이미 현경의 경지를 맛본 무인이기에 가능했다. 그렇지 않은 자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검과 도는 언뜻 보면 비슷한 무기이지만 사용법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병장기이다. 여러 가지 용법이 있지만 검은 대체적으로 현란한 변화를 추구하는 무기이고, 반면 도는 휘둘러 베는 과정에서의 파괴력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두 병장기의 초식이 확실하게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변환시킬 수 있는 초식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비급을 뜯어고치며 데이몬은 도법으로 쓸 수 없는 초식이라도 그냥 버리지 않았다. 그가 비급의 내용을 원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냉유성 그 녀석은 아직까지 고급 검술을 배우지 않았다. 추혼수라무를 적당히 뜯어고친 다음 그 녀석에게 전수한다면 제법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초절정 고수의 최후 심득이니만큼 무당이나 화산의 쟁쟁한 검술에 비하더라도 크게 손색이 없다."
  데이몬은 바로 냉유성에게 전수하기 위해 초무극에게 비급을 요구했던 것이다. 휘하의 수하가 조금이라도 강해져야만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 녀석이 익힌 전진의 내공심법에 대해서는 구결을 자세히 알고 있으니…….'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데이몬은 비급의 내용을 분석하며 완성되지 않은 초식, 즉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초식은 아까워하지 않고 버렸다.
  그렇게 하자 어느 정도 실마리가 잡혔다.
  도법으로 쓸 수 있는 초식은 모두 다섯. 모두가 초무극이 익힌 내공심법의 고유속성에 맞춰 수정된 초식이었다.
  검법은 모두 열 개의 초식이 나왔다. 그것 역시 냉유성의 내공심법에 맞춰진 것이다.
  데이몬이 작업을 완료하는 데에는 무려 오 일이나 걸렸다. 그것도 밤을 꼬박 새워가며 이룩해 낸 쾌거였다.
  초식이 완성되자 데이몬은 사람을 시켜 초무극을 불렀다.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밤 깊은 시간에 데이몬을 찾아왔다.
  "부르셨습니까?"
  "마침내 초식이 완성이 되었소."
  "오오."
  초무극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십 년을 두고도 깨우치지 못한 비급의 내용을 이제야 듣게 되는 것이다.
  "모두 다섯 초식이오. 구결을 불러줄 테니 외우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초무극은 엄숙하게 좌정한 채 데이몬의 말에 집중했다. 새로이 수정된 추혼수라무의 구결들이 초무극의 머릿속으로 하나씩 전달되었다.
  구결의 양은 방대했다. 알아듣기 쉽게 데이몬이 풀어서 설명하고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경우 보충 설명을 해 주었기 때문에 초무극은 오래지 않아 구결을 모두 숙지할 수 있게 되었다.
  구결 전수를 마친 데이몬은 책자 한 권을 내밀었다.
  "구결이 적혀 있는 비급이니 잘 간직하시오."
  "가, 감사합니다."
  "그럼 구결대로 초식을 한 번 시전해 보기 바라오."
  "알겠습니다."
  초무극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냉큼 염왕도를 들고 일어났다.
  데이몬이 묵고 있는 객당의 옆에는 연무장이 있었다. 무림의 세계를 동경하는 만큼 목수곤은 연무장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갖춰 놓았다.
  연무장 중앙에 선 초무극이 염왕도를 곧게 세워 천지합일(天地合一)의 자세를 펼쳤다. 그리곤 전수받은 구결대로 도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데이몬은 눈을 반개한 채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초무극의 실력은 대단했다. 단 한 번 고결을 설명 들었을 뿐이어었는데도 금세 오의를 파악하여 초식을 전개하고 있었다.
  초식 하나하나가 극히 정교할 뿐더러 힘이 배어 있었다. 역시 도법으로 일가를 이룬 희대의 도객다웠다.
  그러나 지켜보던 데이몬의 눈에는 허점이 보일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그는 내공을 끌어올릴 수 없다 뿐이지 초무극보다 여러 단계 높은 고수였다.
  "그 부분은 틀렸소. 초식간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오. 힘에 의존하지 말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초식을 연결시키시오."
  초무극 정도의 절정고수에겐 장황한 설명 따위 필요 없다. 어색한 부분만 지적해 주면 알아서 틀린 부분을 수정한다.
  초보 수련자들이 보이는 시행착오를 수없이 겪어본 상태였기에 맥점만 짚어주면 충분히 알아서 잘못을 고쳐나가는 것이다.
  데이몬은 묵묵히 초식의 전개를 지켜보다 걸리는 부분이 눈에 띄면 지적해 주었다. 문제점만 간략히 설명해 주었지만 그것만 해도 초무극에는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스승이 죽은 이후 그는 모든 문젯거리를 혼자서 해결해야 했다. 그런 그에게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에 불과했다. 흥분 때문인지 초무극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 정말 대단하군. 마치 돌아가신 사부님께 직접 전수받는 것 같아.'
  새로이 개량된 초식의 위력은 정말 대단했다. 그가 익힌 염왕도법의 최고 절초보다 두세 단계는 훌륭한 초식들이었다.
  게다가 데이몬이 흐름을 지켜봐주고 군데군데 막히는 부분을 뚫어주니 초식의 전개가 더욱 자연스러워졌다.
  무엇보다도 데이몬에 의해 수정된 초식은 원래부터 그가 익히고 있던 염왕도법과 너무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십 년 동안 추혼검마가 남긴 비급을 연구하며 지금껏 셀 수도 없이 초식을 흉내 내어 봤지만 초무극은 끝내 그 오의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난해하고 고절한 절기이었다.
  그러나 데이몬에 의해 손보아진 초식은 놀라울 정도로 그가 익힌 내공의 속상과 들어맞았다. 염왕도법의 연장된 초식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다섯 초식을 모두 전개한 초무극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 초식들을 완전히 몸으로 익힌다면 무위가 족히 서너 단계는 발전할 수 있다. 어쩌면 꿈의 경지라는 초절정에 입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흥분에 잠겨 있는 그의 귓전으로 데이몬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어떻소? 최선을 다해 고쳤는데 마음에 드시오?"
  침을 꿀꺽 삼킨 초무극은 데이몬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오체투지를 했다. 보고 있던 데이몬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왜 이러시오?"
  "이제부터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 은공께서는 저에게 엄청난 은혜를 배풀어주셨습니다."
  데이몬은 머쓱하게 미소 지었다.
  "허허, 계약에 의한 것일 뿐 은혜랄 것까지야……."
  "아닙니다. 저에게 이것은 무한한 은혜입니다. 이 시간 이후로 저는 죽는 한이 있어도 은공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 일어나시오."
  데이몬의 만류에 초무극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머뭇거림없이 품속의 비급을 꺼내어 데이몬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저에겐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입니다. 가지고 있어봐야 화만 자초할 뿐입니다."
  "나에게도 필요 없소. 이미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있으니."
  데이몬은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에게도 필요 없다면 없애버리는 것이 어떻소. 자고로 이런 물건은 화를 부르기 십상이지."
  "알겠습니다. 은공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초무극이 손에 내공을 집중시켰다. 삼매진화가 피어나며 비급이 화염에 휩싸였다.
  화르르르
  바짝 마른 가죽이었기에 비급은 금세 타서 재가 되어버렸다. 초무극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재를 보며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이제 추혼수라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소. 존재하는 것은 단 두 가지. 염왕도법의 제2초식과 추혼검법뿐이오. 그렇지 않소?"
  초무극은 대번에 데이몬의 뜻을 이해했다. 자신이 익힌 내공시법에 맞춰 수정된 초식은 더 이상 추혼수라무가 아니다. 염왕도법의 2초식이라고 해도 아무런 무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되겠군요. 더 이상 비밀이 탄로 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추혼검법은 내 수하에게 전수할 생각이오. 어차피 그 녀석은 고급 검술을 익히지 않았으니 말이오."
  "훌륭하신 생각입니다. 한 번 겨뤄본 결과 그는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무사였습니다. 그가 추혼검법을 익힌다면 마치 범이 날개를 단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말을 마친 초무극은 품속에서 조그마한 옥패를 하나 꺼내 데이몬에게 내밀었다.
  "혹시 저에게 시키실 일이 있다면 언제든 이 패를 저에게 보내주십시오. 표국에 맡기면 어렵지 않게 전달될 것입니다. 오패를 받는 순간 대인에게 달려가겠습니다. 설사 죽음이 앞을 가로막는다고 해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순간 데이몬의 눈가에 장난기가 돌았다.
  "그것이 강호도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오?"
  초무극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은공께서는 저에게 엄청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솔직히 저도 은공께서 약속을 지키실지 반신반의했습니다. 하지만 은공께서는 저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저 역시 은공의 믿음을 감히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좋소. 당신의 마음을 받아들이리다."
  데이몬이 옥패를 품속에 집어넣자 초무극은 공손히 포권을 했다.
  "그럼 저는 제자들과 함께 산장으로 가서 수련에 몰두하겠습니다. 언제든지 연락을 주십시오."
  "알겠소."

  초무극은 그날 밤 떠나갔다. 제자들을 모두 대동한 채로.
  데이몬은 초무극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최강의 절기를 얻었으니 하루라도 빨리 갈고 닦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겠지. 그나저나 무척 피곤하군.'
  심력을 많이 소모했기에 몹시 피곤했다. 하지만 데이몬에겐 할 일이 있었다. 그가 걸어간 곳은 목가장의 여인들이 기거하는 내원이었다.
  "까르르르."
  내원에 들어선 순간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밤이 늦은 시간이었지만 냉유성의 거처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아직까지 자지 않고 목가장의 여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모양이었다. 데이몬을 보자 내원의 하인이 다가와서 허리를 굽혔다.
  "나리,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내 수사를 불러주겠소?"
  "냉 대협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알겠습니다."
  잠시 후 냉유성이 밖으로 나왔다.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문 듯 어깨에만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야밤에 찾아온 것이 의외였는지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부르셨습니까, 주공?"
  "팔자 좋구나. 누군 골방에 틀어박혀 머리를 굴렸는데 누군 꽃밭에서 노닐고 말이야."
  데이몬의 말에 냉유성은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일단 내 거처로 가자. 너에게 줄 것이 있다."
  "네, 주공."
  냉유성은 머뭇거림 없이 데이몬의 뒤를 따랐다. 물론 내원의 하인에게 한 마디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소저들에게 주공이 부르셔서 갔다고 전해주시오."
  "알겠습니다, 나리."

  처소에 도착한 둘이 마주앉았다. 데이몬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유경 소저를 쳐다보던 눈빛이 심상치 않더군. 이제 여자에 대해 관심이 좀 생겼나?"
  데이몬의 말에 냉유성은 얼굴을 붉혔다.
  사실 그는 지금까지 여자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공동파는 누구나 인정하는 도가 문파. 따라서 적전제자들은 대부분 도인이라 볼 수 있다. 도사는 결혼을 할 수 없다. 냉유성 역시 그 점 때문에 지금껏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차후 도사가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문된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기에 그의 마음가짐은 다소 달라져 있었다. 머쓱해진 냉유성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그건 주공께서 좀더 여유를 가지라고 하셔서……."
  "핑계는 좋군."
  면박을 준 데이몬은 품속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냉유성이 의아한 눈빛으로 책자를 받아들었다. 책자의 표지에는 큼직하게 제목이 적혀 있었다.
  "이게 뭡니까? 추혼검법?"
  "내가 만들어낸 검법이다. 한 번 읽어보거라."
  데이몬의 말에 냉유성은 기대를 갖고 비급을 읽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고수가 만들었다는 비급이니 흥미가 돌지 않을 수 없었다.
  "헉! 이, 이것은……."
  비급을 읽어나가는 냉유성의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비급에 적혀 있는 것은 그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고절한 검법의 절기였다.
  이십 년을 넘게 검을 수련해 온 덕택에 냉유성은 그 초식들이 얼마나 훌륭한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떨리는 시선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이, 이것을 저, 저에게 주시는 것입니까?"
  "그렇다. 이 정도 검법이라면 공동의 복마검법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이 믿어지지 않았는지 냉유성이 손을 덜덜 떨었다.
  말은 쉽지만 이 같은 고급 무공을 수하에게 하사하는 주공은 없다. 이 정도 무공이라면 문파에서도 직전제자들에게나 전수해 주는 최고 수준의 무공이었다. 아연해진 냉유성의 귓전으로 데이몬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원래 이 검법은 백 년 전 대마두였던 추혼검마가 남긴 추혼수라무라는 비급이었다. 초절정 고수의 최후 심득이니만큼 제법 난해하고 복잡했다. 그 비급의 초식 중 미완성인 것은 버리고 쓸만한 것을 추리고 또 추려서 네가 익힌 내공심법에 맞게 수정했다. 검식 자체가 가진 마성까지 제거했으니 익히는 데 주의할 점은 없을 것이다."
  그 말에 냉유성은 또다시 놀랐다. 추혼검마라면 백 넌 전 중원을 위진시킨 대마두이다. 엄청난 혈로를 걸어왔으며 늘그막에 극마의 경지에 들어 중원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던 무의 대가가 바로 그였다.
  그런 전대고인의 비급이라면 상상을 초월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만약 비급이 외부로 드러난다면 당장 혈겁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냉유성의 눈은 경악으로 인해 크게 떠져 있었다.
  "추, 추혼검마의 비급을 주공께서 뜯어고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내 경지가 비급을 작성했을 당시의 그보다 약간 높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말에 냉유성은 또 한 번 놀랐다. 만만치 않은 고수란 사실을 깨닫고 있었지만 전대고인인 추혼검마보다도 높은 경지였다니…….
  무엇보다도 놀라운 점은 주공인 데이몬이 이 비급을 자신에게 하사했다는 점이다. 대문파 출신이기 때문에 냉유성은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떨리던 냉유성의 몸이 차츰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실감이 나지 않지만 믿겠습니다."
  "그래야 할 것이다. 일단 구결을 외워놓고 몸이 회복되는 대로 수련하도록 해라. 모르긴 몰라도 이 비급이 너의 모자란 점을 상당부분 채워줄 것이라 자부한다."
  "물론입니다."
  내융성의 눈빛은 격정에 차 있었다. 공동파의 본산제자이면서도 복마검법을 배우지 못했던 그였다. 그런 그가 복마검법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추혼검마의 최후 심득을 배우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쏘냐.
  "주공은 정말 특이하신 분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냐?"
  "중원에서 이렇게 수하를 배려해 주시는 주군이 있다고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몸을 회복시켜 주신 데 이어 이런 절세무공까지 전수해 주시다니……. 솔직히 저는 아직까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중원에서는 생소할지 모르지만 내가 살던 곳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수하가 목숨을 건 충성을 바치는 대신 주군은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 주지. 트로베니아의 사회는 대부분 이런 봉신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냉유성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주공께선 과연 제가 베풀어주신 만큼 충성을 바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 아니냐? 최소한 누군가가 강요해서 되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네가 판단해서 할 문제이겠지."
  "그만큼 절 믿는다는 말씀이시군요."
  "물론이지. 수하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느냐?"
  뭔가 결심한 듯 냉유성이 정색을 했다.
  "이제부터 주공을 사부로 모시겠습니다. 명목상으론 주종관계이되 전 주공을 철저히 사부님을 생각하겠습니다."
  데이몬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그게 무슨 뜻이냐?"
  "중원 특유의 방식입니다. 주군은 배신할 수 있지만 사부는 어떠한 일이 있으도 배신할 수 없습니다. 사부는 한 마디로 부모나 마찬가지인 존재니까요."
  데이몬은 그때서야 냉유성의 말에 숨겨진 속뜻을 깨달았다.
  "결코 날 배신하지 않겠다는 뜻이로구나."
  "그렇습니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주군을 보필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후후, 그거야 나중에 생각할 문제이고……."
  데이몬은 미소를 지으며 냉유성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사부로 생각한다고 했으니 부득이 사부 역할을 해야겠군. 이제부터 추혼검법의 구결을 불러주겠다. 비급을 읽는 것보다 내 설명을 듣는 것이 더 알아듣기 쉬울 것이다. 준비가 되었느냐?"
  "네, 주군."
  "좋다."
  데이몬은 즉시 추혼검법의 구결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본 골격 자체는 추혼검마의 추혼수라무였지만 데이몬이 철저히 뜯어고친 덕분에 구결이 다소 변해 있었다. 설명을 듣는 냉유성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남달리 총명했던 냉유성인지라 한 시진도 되지 않아 구결을 모두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이제 되었다. 내가 틈틈이 자세를 잡아줄 테니까 몸이 회복되는 대로 수련을 시작하거라."
  "네, 주군."
  잠시 고민하던 데이몬이 정색을 하고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그동안 궁금했을 것이다. 내가 어찌해서 중원으로 왔는지 말이다."
  "……."
  냉유성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솔직히 말해 그 역시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데이몬 정도의 초고수가 무슨 일로 중원으로 왔는지 궁금하지 않으면 그것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주군이 입을 열지 않는 이상 물어보기 힘든 것이 냉유성의 입장이다.
  데이몬은 여기서 자신의 비밀과 목적을 어느 정도 냉유성에게 털어놓을 작정이었다.
  "그러기 전에 청이를 데리고 오겠느냐? 너와 청이는 내가 중원으로 와서 처음 인연을 맺은 이들이다. 둘이게만큼은 비밀을 밝히는 것이 도리일 듯싶구나."
  "존명."
  냉유성은 두 말 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혼자 남은 데이몬은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어디까지 밝혀야 할까?'
  물론 자신이 마왕이란 사실은 밝힐 수 없다. 이해시키기도 난해할 뿐더러 데이몬에게는 제반 정황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때문에 데이몬은 자신의 지나온 생애를 어느 정도 각색했다. 사실을 어느 정도 꾸며서 말해줄 계획인 것이다. 다행히 잠을 자고 있진 않았는지 냉유성은 금세 당청을 데리고 왔다.
  "부르셨어요, 상공."
  "거기 앉거라. 내가 할 말이 있다."
  "불러주셔서 고마워요."
  당청이 배시시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데이몬은 그 둘을 쳐다보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너희들도 알고 있듯이 나는 이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왔다. 특별한 방법을 쓰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걸어가도 도착하지 못하는 곳이지."
  냉유성과 당청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데이몬의 말을 경청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누군가의 복수를 대신 해주기 위해서이다."
  그 말에 둘은 깜짝 놀랐다. 설마 데이몬이 복수를 위해 이곳에 왔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데이몬은 심유한 눈빛으로 둘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살던 곳에 방문한 중원인이 두 명 있었다. 난 그중 한 사람으로부터 중원의 언어와 무학을 전수받았다."
  "놀랍군요. 그런 일이 있었다니……."
  "혹시 들어본 적이 있느냐? 한때 배교의 교주였던 독고성이라는 자에 대해."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소개하기가 좀 그랬지만 데이몬은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이야기를 각색해 나갔다. 다행히 냉유성이 과거의 자신을 알고 있었다.
  "물론 알고 있는 자입니다. 정사대전 당시 배교의 저예인 수호마왕군을 이끌고 엄청난 전과를 올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활동영역이 달라 맞닥뜨린 일은 없지만 단시일 내에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었기 때문에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군요."
  "그에 대해 더 이상 알고 있는 지식이 있나?"
  "정사대전이 끝나고 무림공적으로 몰려 쫓기다 척살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풍문에 의하면 천인공노할 방법으로 무공을 연성했다고 하더군요. 수백 명의 동남동녀를 희생시키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 당시 저도 무척 분노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도 얼핏 들었어요. 정말 끔찍한 대법을 통해 무공을 연성했다고요."
  데이몬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비록 과거의 신분이지만 자신에게 그토록 드높은 악명이 붙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그렇게 만든 존재는 명확했다.
  '사준환! 이 죽일 놈.'
  억지로 낯빛을 고친 데이몬은 다시 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에게 중원의 언어와 무공을 가르쳐 준 이가 바로 독고성이다. 나는 바로 그의 복수를 대신 해주고자 한다."
  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림공적으로 쫓기다 척살되었다고 알려진 자가 데이몬에게 무공을 전수한 사부라니……. 둘의 표정을 읽은 데이몬은 재빠릴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나에게 무공을 가르치기는 했지만 사부는 아니다. 난 내가 살던 곳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그는 빈객 신분으로 나를 가르쳤다."
  그 말을 들은 냉유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랬군요. 이제 이해가 갑니다."
  "그는 나에게 모든 사실을 밝혔다. 자신이 저지른 악행은 모두 누군가에 의해 뒤집어쓴 누명이라고 말이다."
  "……."
  둘은 쉽사리 믿지 않는 눈치였다. 누명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독고성이 저지른 죄과가 너무도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이몬은 꽤나 오랜 시간을 할애해서 과거의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비록 동남동녀들의 정혈을 마시고 천자혈마공을 연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은 사준환에게 속아서 양의 피인 줄 알고 먹은 것이며, 정사대전 기간 내내 이용당하다가 전쟁이 끝나는 순간 숙청되었다는 사실까지.
  "그는 얼마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쫓기는 과정에서 무공을 잃었기 때문이지. 그는 나에게 한 가지를 신신당부했다. 부디 중원으로 건너가서 자신을 철저히 농락한 사준환에게 복수를 해달라고 말이다.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럼 주공꼐서 중원으로 건너오신 것은……."
  "그의 복수를 대신 해주기 위해서이다."
  "그랬군요."
  당청과 냉유성의 얼굴은 어두웠다. 천기대제 사준환이라면 무림에서 단일단체로는 최강인 잠마련을 이끄는 총수 신분. 데이몬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더라도 감히 넘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어려운 일이로군요. 잠마련은 저희 가문을 멸문시킨 원수예요. 하지만 저희도 감히 잠마련을 대상으로 복수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어요. 워낙 강력한 단체이기 때문이죠."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저는 상관없습니다. 설사 주군께서 천기대제에 대한 암살을 지시한다고 하셔도 속하는 그대로 이행할 것입니다. 이미 제 목숨은 주공의 것입니다."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수하의 목숨을 그토록 가볍게 여기는 자는 주군이 될 자격이 없지. 아무튼 그렇게만 알고 있거라. 내 목적이 이렇다는 것을."
  "존명."
  "그리고 이 사실이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하라.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견제 받을 가능성이 있으니 말이다."
  "걱정 마세요. 소녀의 목숨을 걸고 비밀을 지키겠어요."
  둘의 표정은 결연했다. 데이몬이 비밀을 털어놓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을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자신들도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난 이곳에서 누군가를 찾고자 한다."
  "누구를 찾으시려는지?"
  "아까 내가 말했듯 중원에서 건너온 자들 중에는 독고성 외에 한 명이 더 있다. 트루베니아 식으로 크로센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이지. 그는 내가 살던 세상에서 무신(武神)으로 추앙 받았다."
  둘은 깜짝 놀랐다. 중원 출신의 무림인이 트루베니아에서 무신으로 추앙받았다면 엄청난 무공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자라면 못해도 초절정 급의 고수였을 터.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근래에 의문스럽게 실종된 초절정 급의 무사는 없었다. 그러니 그들이 당혹해 할만했다.
  데이몬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아마 그는 중원에서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무사였을 것이다. 이건 추정인데 그는 차원이동 과정에서 엄청난 기연을 만나 강해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할 도리가 없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문제는 그가 트루베니아 대륙을 발칵 뒤집어 놓고 다시 중원으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주공께서는 앙갚음을 하기 위해……."
  "앙갚음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와 한 번 겨루어 보고 싶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경이다. 하지만……."
  그 대목에서 데이몬은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사실 나는 중원에서 내가 지닌 능력의 전부를 발휘할 수 없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난 독고성으로부터 배운 무공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다만 내가 살던 곳의 기법인 마법만을 펼칠 수 있을 뿐이다."
  그 말에 둘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렇다면 데이몬이 지금까지 보여준 능력은 대관절 무엇인가?
  그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은 중원의 무공과는 체계와 추구하는 방향이 다른 학문이다. 따라서 무공으로는 어려운 일들도 마법으로는 쉽게 이룰 수 있지."
  "하지만 속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스니다. 추혼검마의 비급을 뜯어고치셨다는 말은 주공께서 추혼검마보다 수준이 높은 고수란 사실을 뜻합니다. 그런데 어찌……."
  추혼검마란 말에 당청이 깜짝 놀라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그녀 역시 무가의 자식인지라 추혼검마가 누구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데이몬은 뭔가 생각이 난 듯 손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보니 청이 너에게 줄 것이 있구나."
  데이몬의 손에 들려나온 것은 얄팍한 비급이었다. 당청이 떨리는 손을 들어 비급을 받아들었다.
  "추혼검마의 유진에서 얻은 암기술이다. 원래는 비검술이었지만 내가 완전히 뜯어고쳤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속가의 내공심법을 바탕으로 수정했으니 당문의 고수들도 충분히 익힐 수 있다. 아마 네 할아버지가 익히면 유용할 것이다."
  비급을 받아든 당청이 속을 들여다보았지만 그 우의를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 정도 비급을 이해하기에는 당청이 이룬 무의가 너무도 보잘 것 없었다.
  "너는 무리겠지만 네 할아비가 보면 진가를 알아차릴 것이다. 잘 보관해 두었다가 할아버지를 주도록 하거라."
  당청은 상기된 표정으로 비급을 갈무리했다. 추혼검마의 유진에서 얻은 것이라면 쉽사리 생각할 수준의 비급이 아니었다.
  "네, 상공. 감사드려요."
  "냉유성의 말도 맞다. 난 중원의 무학을 상당한 경지까지 익혔다. 추혼검마의 비급을 원하는 대로 뜯어고칠 정도까지. 그러나 실전에서 무공을 쓸 수는 없다. 왜냐하면 중원에서는 내공을 전혀 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데이몬의 말에 둘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엄청난 무위를 보인 데이몬이 내공을 전혀 운용할 수 없는 몸이라니…….
  "믿을 수 없군요. 초무극을 단 일수에 쓰러뜨린 상공께서 어찌……."
  "그것은 내가 살던 곳의 기법인 마법을 응용한 것이다. 독강시들을 날려버린 것도 역시 마법이지. 하지만 마법은 직접적인 박투에서 쓰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초무극을 상대한 것은 나로서는 상당한 도박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데이몬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는지 둘은 연신 머리를 흔들었다. 그들을 보며 데이몬이 정색을 했다.
  "이것은 너희들만 알고 있거라. 혹시라도 마정지지 같은 곳을 발견할 경우 어쩌면 난 내공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마정지지의 기운이 내가 살던 곳의 기운과 동일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혹시 너희들은 마정지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느냐?"
  둘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마정지지는 그리 쉽게 눈에 뜨이는 곳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내 비밀에 대해서는 모두 밝혔다. 이제 너희들은 어떻게 하겠느냐?"
  냉유성이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목숨은 엄연히 주공의 것입니다. 이제 주공께서 원하시는 바를 알았으니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설사 죽음이 앞에서 기다린다고 해도 말입니다."
  "소녀 역시 마찬가지예요. 상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어요."
  둘이 결연한 표정으로 다짐하자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고맙다. 그럼 잘 해보도록 하자."
  둘의 입가에서도 역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손을 맞잡았다.
  도원결의 같은 형식을 차용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의 마음은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6. 마왕, 암습을 당하다

  "그렇다면 그 색목인이 당신과 같은 능력자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제가 가서 살펴본 결과 그는 마법사가 분명합니다."
  사준환의 눈가에 놀라움이 스쳐지나갔다. 흑법사와 같은 능력을 가진 자가 또다시 중원을 방문하다니…….
  "그가 대관절 무엇 때문에 중원으로 온 거요?"
  "아마 연구를 위해 왔을 것입니다. 마법사들은 대부분 외길을 파고드는 학자라고 봐야 하지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얼굴을 가린 죽립 사이로 스산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저에게 엄청난 조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를 회유하여 도음을 받는다면 음양강시를 양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월등히 높아질 테니까요."
  "그게 정말이오?"
  "그렇습니다. 마법 수준을 보니 그는 저보다 수준이 높은 마법사입니다. 또한 아직까지 어둠의 마력을 상당량 보유하고 있을테니까요."
  "어둠의 마력이 무엇이오?"
  "음차원의 마나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지요. 저는 그 어둠의 마력을 바탕으로 음양강시에게 힘을 불어넣었습니다. 그 때문에 제가 보유한 어둠의 마력은 상당부분 소진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그를 붙잡아 어둠의 마력을 얻을 수 있다면 무림을 일통하려는 주공의 계획이 훨씬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흠."
  사준환은 손을 들어 턱을 매만졌다. 뭔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때 보이는 버릇이었다.
  "그렇다면 반드시 그를 생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구려."
  고개를 끄덕인 사준환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금빛 면구를 걸친 장한이 공손히 시립해 있었다.
  잠마련의 하보조직인 묵회의 회주였다. 철마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단신으로 잠마련에 들어온 것이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
  "며칠동안 목가장에 머물러 있다가 오늘 아침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목가장? 그곳은 어디지?"
  묵회주는 목가장에서 일어난 일의 내막을 사준환에게 설명해주었다.
  목가장주가 술김에 한 말로 인해 염왕도 초무극과 시비가 붙었고, 데이몬 일행이 가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는 말을 듣자 사준환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괘나 한가한 작자들이로군. 그래, 어디로 떠난 것 같나?"
  "자세히는 모르지만 방향을 보아 모용세가를 방문할 계획인 것 같습니다."
  "모용세가라……."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사준환이 묵회주를 쳐다보았다.
  "무림을 묵회의 이름으로 한 번 더 뒤흔드는 것은 어떤가?"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악양 지부를 궤멸시킨 덕분에 무림맹 놈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네. 이 참에 모용세가까지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네."
  묵회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모용세가는 일전에 궤멸시킨 악양 지부보다 방비상태가 탄탄합니다. 실력 있는 무사들이 즐비한데다 절정고수들도 많습니다."
  "걱정할 것 없네. 저번 습격에서 철마의 위용을 직접 보지 않았나? 철마는 싸울수록 강해진다네. 철마에겐 더 많은 실전경험이 필요해. 게다가 독강시와 음양강시도 속속 생산되고 있어."
  "얼마나 지원을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독강시 이십 구와 음양강시 세 구일세. 묵회가 보유중인 강시들과 합한다면 모용세가 정도는 한나절 안에 박살낼 수 있을 것이야."
  지원되는 강시의 수를 듣자 묵회주는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모용세가를 쓸어버릴 수 있지요."
  "중요한 것은 그게 아냐. 그곳에 머물고 있을 상처없이 사로잡아오는 것이지. 지금으로서는 그게 제일 중요해."
  듣고 있던 흑법사가 끼어들었다.
  "철마를 투입한다면 마법사를 손쉽게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철마가 입고 있는 갑옷에는 대마법 방어진이 새겨져 있으니까요."
  "대마법 방어진?"
  "마법을 원천적으로 무효화시키는 것이지요. 마법사는 지닌바 위력에 비해 신체적인 능력이 약합니다. 그러니 철마로 놈을 견제하여 무사들을 투입한다면 무리 없이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잘 되었군."
  사준환은 묵회주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색목인이 모용세가로 들어가는게 확인될 경우 즉각 출동하도록 하게. 알겠는가?"
  "염려 마십시오. 반드시 색목인을 잡아 대령하겠습니다."
  묵회주의 눈빛에는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고 말겠다는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사준환의 집무실에서 물러난 흑마법사는 자신의 연구실로 움직였다. 그가 잠마련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증명하듯 뛰어난 고수들이 그를 호위했다.
  그가 걷는 곳은 어두운 지하통로였다. 마치 거미줄처럼 뻗은 지하통로가 그의 연구실과 여러 곳을 연결하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통로를 한참동안 걸어서 도착한 곳은 큼지막한 석실이었다. 그곳에는 악양 지부 습격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철마가 점검을 받고 있었다.
  부글부글
  철마는 검붉은 액체가 끓고 있는 커다란 통 속에 갑옷째 들어가 있었다. 서너 명의 흑포인들이 모여 철마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흑법사를 보자 공손히 예를 올렸다.
  "흑법사님, 오셨습니까?"
  흑법사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를 보던 사내들이 순차적으로 물러났다. 흑법사가 왔으니 그들이 할 일은 더 이상 없었다.
  그들은 잠마련 측에서 임의로 붙여준 조수들이었다. 명목상 도제(徒弟)관계였지만 실상은 흑법사의 지식을 빼내기 위한 첩자라고 봐야 했다. 흑법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클클클. 용을 쓰긴 하다만 뭔가를 얻을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마나의 분포도가 희박한 이곳에서 마법사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중원식의 사제관계에 익숙하지 않은 그가 도제들에게 순순히 지식을 전수해줄 리가 없다.
  "그건 그렇고……."
  흑법사의 시선이 철마에게로 고정되었다. 입가에 징그러운 괴소가 맺혔다.
  "후후후.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구려."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말은 중원의 말이 아니었다. 이곳과는 시간과 공간이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철마를 쳐다보며 그는 과거의 상념에 사로잡혔다.
  흑법사는 사실 본의에 의해 중원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한때는 절대자였지만 지금은 이지를 상실한 활강시로 변모한 철마에게 강제로 이끌려 중원으로 온 것이었다. 차원이동에 필요한 마나를 제공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하지만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적절한 순간에 배신한 덕택에 흑법사는 잠마련의 최고 귀빈이 되었고 철마는 그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렸다.
  철마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흑법사가 느릿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보 보니 중원도 살기가 괜찮군. 금지된 실험 때문에 쫓겨다닐 필요도 없고 필요한 재료는 무엇이든 대어주니 말이야. 어둠의 마력이 보충되지 않는 것이 단점이긴 하지만……."
  빙그레 미소를 지은 흑법사는 연구실을 향해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묵회주가 마법사를 붙잡아 올 때까지 느긋하게 연구에 몰두할 심산이었다.

  잠마련에서 짐작한 대로 데이몬 일행은 모용세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처럼 급하게 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모용세가가 무림맹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데다 당청이 조바심을 부렸기 때문에 잠깐 들르기로 결정을 내렸다.
  물론 그 결정에 가장 기뻐한 사람은 당청이었다.
  "상공, 정말 고마워요."
  "고마울 게 있겠느냐? 어차피 가는 길인데……."
  묵묵히 뒤를 따르던 냉유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주공, 과연 모용세가에서 약속을 지킬까요?"
  "질풍검이라는 명호를 걸고 약조한 것이니 아마 지키지 않을까?"
  "혹시라도 어길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솔직히 말해 모용세가 사람들은 믿을 수 없습니다.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자들이니까요."
  "그래?"
  데이몬의 눈매가 살며시 좁혀졌다. 실은 그도 약속에 대해 모종의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가 무림에서 명성이 자자한 명숙이라면 모용세가에서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처럼 색목인인 데다가 무림에 알려져 있지 않은 이라면 약속을 뒤집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개의치 않았다.
  "정 안되면 데리고 온 부하를 풀어놓지 뭐."
  "데리고 온 부하가 있었습니까?"
  "인간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쓸만한 녀석들이야."
  냉유성이 눈을 크게 떴다.
  "어디서 뒤따르고 있습니까? 전혀 기미가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시간과 공간이 다른 곳에 머무르고 있지. 잠깐……."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선 데이몬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여러 번 겪어본 일이기에 냉유성은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그의 감각에 주변의 기가 요동치는 것이 감지되었다.
  '그 마법인가 뭔가를 쓰시는 모양이로군.'
  냉유성의 예상대로 데이몬은 탐지마법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저곳에 뭔가가 있다. 영초 같은데 기의 분포도를 봐서 제법 쓸만한 것이 있는 모양이야."
  "정말이에요?"
  당청이 반색을 했다. 이미 여러 번 겪은 일이었고 그럴 때마다 쉽게 보기 힘든 귀한 영초를 건졌기에 그녀의 눈동자는 기대감에 젖어있었다.
  "우리 빨리 캐러 가요."
  "그러자꾸나."
  그들은 걸음을 빨리 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데이몬의 예측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데이몬이 캐어 온 영초를 보자 당청이 눈빛을 빛냈다.
  "이건 명정초에요. 놀랍군요. 이렇게 오래 묵은 명정초는 처음 봐요."
  "그것도 독초냐?"
  "독초는 아니에요. 내공증진에 특히 효과적인 영초죠."
  "잘 되었군."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은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구자엽초는 어느 정도 흡수했느냐?"
  "대략 오 할 정도 흡수했습니다. 초무극과의 대결로 인해 약효가 빨리 흡수된 것 같습니다."
  "머지않아 모두 흡수할 수 있겠군."
  데이몬은 명정초를 당청에게 내밀었다.
  "주머니 속에 넣어두어라. 훗날 유용하게 쓰일 일이 있을 것이다."
  "네, 상공."
  그들은 산길을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관도로 가면 편하지만 이 같은 불로소득(?)을 올리기는 힘들다. 때문에 고생을 마다한 채 산을 넘어가는 것이다. 데이몬이 준령을 올려다보며 탄성을 토했다.
  "그나저나 산세가 무척 멋지군. 한 폭의 그림 같아."
  "상공께서 살던 트루베니아는 어떤가요?"
  "트루베니아도 괜찮아. 어찌 보면 자연이 중원보다 더 잘 보존되어 있지."
  데이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찌 보면 그는 중원이니 아니라 트루베니아 인으로 봐야 했다. 중원에서보다 트루베니아에서 더욱 오랜 세월을 지냈으니까.
  게다가 힘을 얻은 곳도 트루베니아였다. 그 때문에 트루베니아에 더욱 정이 갈 수밖에 없었다.
  잠시 트루베니아를 떠올려 보던 데이몬이 냉유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모용세가까지 얼마나 걸리지?"
  "산만 넘어가면 바로 보입니다. 지름길이니 반나절 정도 걸릴 겁니다."
  "그래? 서둘러야겠군."
  일행은 모용세가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모용세가.
  섬서성 북단에 위치한 유명한 무림세가이다. 강력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기에 그 어떤 문파도 얕잡아보지 못하는 세가로, 무림맹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위하는 곳이다.
  모용세가는 원래 상단을 바탕으로 성장한 세가다. 지금도 만금상단이라는, 중원상계에서 서열 1, 2위를 다투는 거대상단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만큼 자금력에 있어서만큼은 정말 튼튼하다고 할 수 있었다.
  모용세가는 만금상단에서 나오는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젊은 기재들을 끌어 모아 혹독한 훈련을 시켰다. 그리하여 무려 일천에 가까운 강력한 무사집단을 휘하에 거느릴 수 있었다.
  그러나 모용세가가 인정받는 것은 튼튼한 자금력과 다수의 무사집단 때문만은 아니다.
  모용세가는 대문파에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절정고수를 보유하고 있다. 절정고수의 수야말로 각 문파의 숨겨진 힘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모용세가 식솔들의 뛰어난 자질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몽요세가는 무려 세 명의 초절정 무인이 있다. 초인이라고 일컬어지는 무의 절대자들. 그들 덕분에 모용세가는 무림에서 확고하게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천무군(天武君) 모용황.
  현 모용세가의 가주로사 자타가 공인하는 초절정 고수다. 모용세가의 대소사를 책임지는 가주로서 모용세가의 발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지금 모용세가의 주요 식솔들과 함께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래, 어떻게 결론이 나왔는가?"
  모용황의 질문을 받은 이는 문약해 보이는 사십대 서생이었다. 병색 어린 얼굴에 문사복을 걸쳐서 그런지 더욱 왜소해 보이는 중년인.
  그의 이름은 모용천이었다.
  무공 방면엔 별달리 자질이 없지만 문(文)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출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지녀 현재 모용세가의 군사 역할을 하고 있는 그였다. 그만큼 매우 총명하고 지모가 뛰어나 모용세가의 대소사에 그가 관여하지 않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모용천이 차분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제 예상으로는 머지않아 무림에 혈풍이 불 것 같습니다."
  예상 밖으로 모용황은 별달리 놀라지 않았다.
  "어찌 해서 그런 결론이 나왔느냐?"
  "현 무림은 묵회로 인해 무척 어지럽습니다. 지금껏 무림에서 묵회만큼 독을 전문적으로 이용한 집단은 없었습니다. 그들이 운용하는 독강시의 위력은 상상을 불허합니다. 혹독한 훈련을 겪은 본가의 무사들이 그토록 허무하게 당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모용황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무려 팔십 명이나 되는 정예 무사들이 고작 스무 구의 강시에게 궤멸되었다. 너무도 어이없는 희생이 아닐 수 없었다.
  그중에는 가문의 미래를 책임질 후기지수인 모용명도 끼어있다. 그러니 그의 기분이 더욱 착잡할 수밖에 없다. 모용천의 보고기 이어졌다.
  "이후 본가에서는 모든 힘을 다해 해독제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미 죽은 무사를 통해 독의 견본은 채취한 상태이지만 성과는 미미합니다. 하도 생소한 종류의 독이라서 독객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판국입니다."
  "그렇게 지독한 독이었나?"
  "아마 사정은 다른 문파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묵회를 상대하는 데는 독의 해독이 관건이기 때문에 무림맹에 소속된 문파들은 나름대로 해독제를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현 무림에서 독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문파는 거의 씨가 마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모용황의 눈이 빛났다.
  "그렇다면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뜻인가?"
  모용천이 안색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처럼 독문만을 골라 쓸어버릴 이유가 없습니다."
  "사전 정지작업이란 뜻이로군. 그렇다면 묵회의 배후에는……."
  "십중팔구 잠마련이 도사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독문의 씨를 말린 방파는 잠마련이니까요. 본가에서도 당문을 공격하긴 했지만 정작 멸문까지 고려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잠마련은 전격적으로 다수의 무사들을 투입해 완전히 쓸어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무림맹주도 짐작하고 있을까?"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정식으로 잠마련에 이의제기를 할 순 없을 것입니다.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까요. 단순히 정황증거만으로 잠마련이라는 거대방파를 추궁할 순 없는 법입니다."
  모용황은 미간을 지그시 모았다.
  "보통 일이 아니로군."
  "어쨌거나 지금으로서는 묵회의 독에 대한 해독제를 만드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적절한 대비책을 마련한 문파는 이번 사태를 슬기롭게 해결한 뒤 번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문파는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 사실은 무림의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이번 사태가 본가에게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해독제를 만든다는 가정 하에서 내린 추론입니다."
  "독객들을 더욱 닦달할 수는 없나?"
  몽요천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의 능력으로는 힘들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당문의 최고정예들은 대부분 잠마련에 붙들려 갔으니까요. 하다못해 당문수라도 잡아들였다면 가능성이 보이겠지만……."
  "걱정이로군. 가장 많은 독객을 보유한 본가에서 해독제를 만들어내지 못하다니……."
  그때 묵묵히 듣고 있던 모용현도가 입을 열었다.
  "해독제는 모르지만 해독할 수 있는 자는 있습니다."
  그 말에 식솔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용현도에게 집중되었다. 어쨌거나 그에겐 세가의 무사들을 이끌고 묵회의 강시와 일전을 치러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눈빛을 빛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말했던 색목인 말입니다. 모용수를 해독해 준 색목인은 묵회의 독을 해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용수가 복용한 독은 강시가 발산하는 독과 종류가 다르지 않나?"
  "그는 자결용 독단을 복용한 묵회의 사자도 해독했습니다."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강시의 독이 아무리 지독하다고 하더라도 자결용 독단만큼 독할 리가 없다. 다시 말해 색목인은 묵회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자가 분명했다.
  살아남은 무사들을 데리고 귀환했을 때 모용현도는 가주에게 색목인과의 사이에서 오갔던 약속을 털어놓았다. 물론 돌아온 반응은 냉담했다.
  '그럴 수는 없다. 당문의 독객들은 본가가 엄청난 피해를 입어가며 잡아들인 자들이다. 모용수를 해독해 준 것은 고맙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객들을 풀어줄 수는 없다.'
  '하, 하지만 제 명호를 걸고 약조했습니다.'
  '네 명호가 가문의 운명보다 소중한가?'
  그 한 마디에 모용현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비록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쓸지언정 가문에 손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그도 어쩔 수 없는 모용세가의 일원이었다.
  당시의 일을 상기한 모용현도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에겐 분명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는 독술 대결로 당문수를 패퇴시킨 인물이니까요."
  "고민되는군. 그렇다면 무림맹에다 괜히 그자에 대한 사실을 누설한 것인가?"
  모용황이 인상을 찡그렸다. 물론 그것은 가주의 명령에 의해 실행된 일이다. 모용세가가 보유하고 있는 독객들을 보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데이몬에 대한 정보를 무림맹에 흘렸던 것이다.
  듣고 있던 모용천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상관할 것은 없습니다. 해독제만 빼낸다면 색목인에게 더 이상 아쉬운 것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과연 그가 본가를 찾아올까요?"
  모용현도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머지않아 찾아올 것이다. 그런데 어쩔 작정인가? 그를 강압적인 방법으로 대할 것인가?"
  모용현도가 말한 강압적인 방법은 색목인을 힘으로 제압한 다음 고문을 통해 독술을 빼내는 것이다. 모용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그럴 작정입니다. 먼저 다른 것으로 회유를 해 봐야겠지만 궁극정으로는 그렇게 해야겠지요."
  "힘들 것이다. 그는 단 일수로 열아홉 구의 독강시를 날린 인물이야. 어설픈 무력은 쓰지 않느니만 못하다."
  그때 듣고 있던 모용황이 끼어들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직접 출수할 생각이니까. 그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내가 불시에 가하는 암습에는 당할 수밖에 없다. 일단 혈도를 제압하면 대라신선이라도 도리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에게는 절정에 이른 무사가 호위하고 있습니다."
  "냉유성 말이군요.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본가에는 그를 능가하는 무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까요."
  모용천의 눈빛이 교활하게 빛났다.
  "게다가 사람은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습니다. 남자의 경우 가장 큰 약점은 계집이지요. 색목인에게는 당문의 여식이 붙어 있습니다. 목가장에 파견되었던 첩자들이 살펴본 결과 색목인이 당청과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보인다 하더군요. 제 소견으로 둘은 이미 살을 섞은 것 같습니다."
  "어처구니가 없군. 무림세가의 여식이 색목인에게 몸을 허락하다니……."
  "아무튼 색목인이 방문하는 즉시 제압해서 독술을 빼내는 것은 이미 결정된 사실입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술을 빼내야만 본가가 이번 사태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을 거리낌 없이 제압해서 고문을 가한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모용세가 사람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내뱉고 있었다. 지금껏 그들이 널리 해왔던 방법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모용세가가 이처럼 커 올 수 있던 배경에는 바로 이런 점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실을 모른 채 데이몬 일행은 걸음을 재촉하며 모용세가로 향하고 있었다.
  "이곳이 모용세가인가?"
  "그렇습니다, 주공."
  "더럽게 크군."
  모용세가의 정문을 올려다보며 데이몬은 혀를 내둘렀다.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비록 지금은 사라졌지만 데이몬은 한때 강력한 무림방파인 배교의 교주였다. 그러나 배교 본단의 규모도 이렇게 크지 않았다. 험준한 골짜기에 마치 요새처럼 지어놓았기에 모용세가만큼의 위용을 보이지 못했던 것이다.
  "기대되는군. 과연 모용세가가 어떻게 나올지."
  "속하는 솔직히 걱정이 좀 됩니다. 모용세가에 대한 평은 사실 그리 좋지 않은 편입니다.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떠돌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가문의 식솔을 해독해 준 은인인데 그렇게까지 하겠어?"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좋으련만……."
  안색을 굳힌 냉유성이 정문으로 다가갔다. 정문을 지키던 무사들이 그를 보고 잔뜩 긴장했다. 절도 있는 태도와 날카로운 눈빛을 보아 상당한 수련을 쌓은 무사들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막 냉유성이 대답하려던 찰나, 무사들은 뒤에 떨어져 있던 데이몬을 발견했다. 그들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헉."
  이미 위로부터 특별한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서역의 색목인이 올 경우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안으로 모셔라. 명령을 떠올린 무사들은 머뭇거림 없이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무사가 달려가는 것을 보니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려는 모양이었다.
  "이거야 원. 빨라서 좋긴 한데."
  데이몬 일행은 무사들의 정중한 환대를 받으며 모용세가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들이 안내된 곳은 입구 부근의 객청이었다. 모용세가의 위세를 보여주듯 객청은 크고 깨끗했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곧 총관님이 나오실 겁니다."
  "알겠소."

  총관은 금세 나타났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늙은이가 무사들을 다수 대동하고 나타났다.
  "모용세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제가 손님맞이를 담당하는 총관 모용비도입니다."
  "반갑소. 데이몬이오."
  이름을 확인한 순간 총관의 눈빛이 빛났다. 그는 이미 모용현도로부터 색목인의 이름을 전해들은 바 있었다.
  "드높은 명성, 오래 전부터 들어왔습니다. 당문 사람들 때문에 오셨습니까?"
  "그렇소. 모용현도와의 약조를 이행 받기 위해 왔소."
  "이미 가주께서 별도의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때 옆에서 뾰쪽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당청이었다. 모용세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기에 그녀의 눈빛은 싸늘했다.
  "우리 식솔들은 어디에 있죠?"
  "본가에서 잘 모시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흥. 나는 뭐 귀가 없는 줄 알아요? 우리 식솔들이 잘 있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거친 어조였지만 모용비도는 얼굴에 띤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역시 거대 세가의 총관다운 인내력이었다.
  대신 노기가 치솟은 쪽은 총관을 수행하고 온 무사들이었다. 그들이 내뿜는 흉흉한 살기를 맞받고도 당청은 물러서지 않았다.
  스산해지는 분위기를 가라앉힌 것은 데이몬의 한 마디였다.
  "청아, 그만 해라. 일단 먼저 할 일이 있지 않니?
"
  데이몬의 만류에 당청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총관이 그런 데이몬을 향해 공손히 포권을 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곧 가주님이 오실 것입니다."
  "알겠소."
  총관이 고개를 돌려 고함을 질렀다.
  "술상을 봐 와라. 먼 길 오시느라 시장하실 것이다."
  주안상은 금세 대령되었다. 네 명의 시비가 탁자 가득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아무래도 미리 준비를 해 놓은 모양이었다.
  "시장한데 잘 되었군."
  그때 귓전으로 전음이 파고 들어왔다. 냉유성이 날린 전음이었다.
  ㅡ조심하십시오, 주공. 독이 들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데이몬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걱정하지 마라. 나에게 독을 쓴다는 것은 공자 앞에서 문자쓰는 격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탁자 위의 요리를 집어먹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냉유성과 당청도 슬그머니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먼 길을 오느라 시장했던 것이다.
  요리의 맛은 훌륭했다. 거대 세가답게 일급 숙수들을 보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음식에 독도 없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음식에는 아무런 수작을 부리지 않은 것이다.
  일행이 식사를 마치자 시비들이 상을 들고 나갔다. 데이몬이 트림을 하며 배를 두드렸다.
  "꺼억. 잘 먹었다."
  그때 바깥이 술렁거렸다. 마침내 모용세가의 가주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가주님 듭시오."

  모용황은 모용천과 모용현도를 대동하고 들어왔다. 거대 세가를 다스리는 총수답게 모용황의 기도는 출중했다. 보고 있던 냉유성이 급히 숨을 들이마실 정도였다. 그가 이채 어린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대가 데이몬이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소이다."
  "본인도 반갑소."
  데이몬도 예법에 따라 정중히 포권을 했다.
  "우리말이 아주 유창하시구려."
  "중원으로 오기 위해 열심히 배웠지요."
  모용황이 시선을 돌려 냉유성과 당청을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나눌 말이 적지 않을 것 같은데 수하를 물리는 게 어떻소? 주인들끼리 허심탄회하게 대화합시다."
  그러자 냉유성이 어림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안 됩니다, 주공. 반드시 제가 옆에서 주공을 보필해야 합니다."
  모용황이 재미있다는 듯한 눈빛으로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내가 듣기로 자네의 주공은 자네보다 무공이 월등히 강하다고 하더군. 그런데 굳이 자네가 있을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데이몬은 조용히 냉유성의 말을 끊었다.
  "그렇게 하도록 해라. 난 괜찮다."
  데이몬의 허락이 떨어지자 모용현도가 다가와 냉유성의 팔을 잡아끌었다. 다른 무사들은 윈슬럿을 붙들고 늘어섰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우리랑 같이 술이나 한 잔 하겠나?"
  냉유성은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데이몬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못이기는 척하고 모용현도를 따라나섰다. 그 뒤를 윈슬럿이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뒤따랐다. 그러나 당청만은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저는 싫어요. 모용세가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군요."
  당청은 데이몬과 떨어지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데이몬이 그녀를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구려. 청이가 저렇게 고집을 부리니 말이오."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데이몬과 모용황은 내실로 들어가 마주앉았다. 내실에는 간단하게 술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데이몬의 뒤에는 당청이 공송히 시립해 있었고, 모용황의 옆에는 모용천이 자리했다. 당청이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 그 핑계로 모용천이 배석한 것이다.
  먼저 용건을 꺼낸 쪽은 모용황이다.
  "일단 현도로부터 요구사항은 들었소이다."
  "알고 있으니 간단히 말하겠소. 모용세가에 포로로 잡혀 있는 당문의 식솔들을 풀어주시오."
  모용황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일단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오. 나는 당신에게 한 가지를 부탁하고자 하오."
  "부탁?"
  "그렇소."
  고개를 끄덕인 모용황이 정색을 했다.
  "일단 본가의 무사를 해독해준 데 대해 감사드리오. 정말 훌륭한 독술을 익히셨더구려."
  "하찮은 재주일 뿐이오."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지. 일단 이것을 한 번 봐 주시겠소?"
  모용황이 품속에서 자기병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강시와 싸우다 죽은 무사의 몸에서 채취한 독이었다.
  "이 독을 해독할 수 있으시오?"
  데이몬은 잠자코 자기병을 받아들었다. 뚜껑을 열자 매캐한 냄새가 풍겼다. 데이몬은 그 독이 묵회의 독강시에서 방사되는 독이란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해독제를 원하는군.'
  미간을 지그시 모은 데이몬이 자기병을 입에 대고 마셔버렸다. 보고 있던 모용황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해독제가 없는 약을 마셔버리다니…….
  그러나 그들은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독술의 대가인 색목인이 아무 생각 없이 독을 복용할 리가 없다.
  그들의 예상대로 데이몬은 입맛을 다시며 독을 음미하고 있었다. 물론 독이 데이몬에게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럭저럭 독한 독이구려. 내공으로도 잘 통제되지 않는 성질의……"
  "해독하실 수 있으시오?"
  미간을 좁힌 채 뭔가를 생각해 보던 데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독할 수 있소."
  그 말에 모용황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드디어 묵회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독객을 만난 것이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소. 해독제를 만들어 주시오. 그렇게 해준다면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드리리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데이몬은 잔잔한 눈빛으로 모용황을 쳐다보았다.
  "본인은 약조를 이행 받기 위해 모용세가를 방문했소. 본인은 분명히 귀가의 무사를 해독해 주는 조건으로 당문의 식솔들을 풀어준다는 약속을 모용현도로부터 받았소. 먼저 그 약속을 지키기 바라오."
  그 말에 대답한 것음 모용천이었다.
  "악속은 분명히 지킬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 입장에는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해독제를 만들어 주신다면 본가에서는……."
  그러나 데이몬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것은 추후에 생각할 문제요. 일단 약속을 먼저 지키시오."
  모용황은 난감해졌다. 먼저 좋은 말로 구슬려 해독제를 구하려고 했는데 뜻밖에 색목인이 완강하게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의 말대로 당문의 식솔들을 풀어준다는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일이다.
  '부득이 강수를 써야겠군. 일단 잡아놓은 다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독제를 만들게 해야겠어. 만들 수 있다는 확언을 들었으니 나중에 발뺌을 할 순 없겠지.'
  마음을 정리한 모용황이 모용천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모용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알겠습니다. 지금 가서 당문 식솔들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모용천이 몸을 돌리자 모용황이 술병을 들어 내용물을 잔에다 따랐다.
  "한 잔 하시겠소?"
  놀랍게도 술잔이 허공에 둥실 뜬 채 날아왔다.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으며 술잔에 손을 뻗었다.
  '무력시위인가?'
  그런데 술잔에 손이 닿은 순간 데이몬은 둔중한 흉기로 가슴을 후려친 듯한 충격을 받았다.
  "커헉."
  술잔에 깃들어 있던 모용황의 내공이 손을 통해 몸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아무런 방비가 없었기 때문에 데이몬으로서도 속수무책이었다.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나는 데이몬. 그런 그를 향해 모용황이 바람처럼 달려들었다.
  나가려는 시늉을 하던 모용천 역시 당청에게 다가가 손을 뻗고 있었다. 문약한 서생처럼 보였지만 그도 당당한 모용세가의 무사였다.
  "깍."
  급박한 신음소리와 함께 당청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혈을 제압당한 것이다. 무공이 워낙 일천한 탓에 암습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데이몬에겐 그 모습을 볼 겨를도 없었다. 불시의 기습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한 사이 모용황이 달려들어 맥문을 움켜쥐었던 것이다. 맥문을 통해 모용황의 웅혼한 내공이 성난 노도처럼 밀려들었다.
  콰콰콰콰
  고통 때문에 데이몬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크으으……."
  데이몬을 완전히 제압한 모용황이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분명 엄청난 고수라고 들었거늘……."
  모용현도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색목인은 격공섭물로 사람의 몸을 들어올릴 정도의 고수라고 했다. 그 말에 모용황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격공섭물로 사람의 몸을 들어올리는 것은 자신에게도 벅찬 일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모용황은 세심하게 신경 써서 데이몬을 암습했다. 자신과 무위가 비슷한 고수를 제압하는 데는 암습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런데 상대는 너무도 어이없게 제압당했다. 맥문을 통해 느껴지는 반응을 보니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의 것과 동일했다. 모용황은 예리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확실해. 이자에겐 내공이 전혀 없어."
  몸속으로 타인의 내력이 파고들 경우 내가고수들은 자연적으로 경맥의 내력을 동원해 막아낸다. 무공을 익힌 수준이 높을수록 반탄력이 강하다.
  하지만 상대의 몸에서는 전혀 반탄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 내공이 전무한 상태인 것이다. 화가 났는지 모용황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사기를 친 것이로군. 현도를 속여 넘길 정도라니……."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다는 듯 데이몬의 혼혈을 짚었다. 축 늘어지는 데이몬을 안아드는 순간 바깥쪽에서 폭음이 울려퍼졌다.
  "주공."
  당청의 비명을 들은 냉유성과 윈슬럿이 모용세가의 무사들을 뿌리치고 달려든 것이다. 윈슬럿이 몸통박치기로 문을 박살내고 뛰어 들어왔다.
  콰쾅
  실내를 둘러본 순간 냉유성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데이몬은 의식을 잃고 늘어져 있었고, 당청은 마혈을 제압당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러니 냉유성의 눈이 뒤집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장검을 뽑아들었다.
  "이런 가증스러운 놈들……."
  베틀 엑스와 메이스를 뽑아든 윈슬럿이 포효를 내질렀다.
  크아아아
  그러나 그들이 모용황에게 달려들기 전에 일단의 무사들이 앞을 차단했다. 급히 달려온 모용현도와 휘하 무사들이었다.
  상황을 미리 예상한 듯 흔들림 없이 검진을 펼치는 무사들. 모용현도의 입가에는 쓸쓸함이 감돌고 있었다.
  "미안하게 되었군."
  "이러고서도 너희들이 정파를 표방하느냐? 간악한 사파 놈들도 이런 짓은 하지 않는다. 어찌 은혜를 베푼 은인을 암격한단 말이냐."
  그 말에 모용황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듣는 앞에서 모용세가를 사파보다도 못하다고 매도하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저놈들을 잡아라. 단 죽이지 말고 생포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모용현도가 장검을 뽑아들었다. 외당 소속 무사들 역시 병장기를 움켜쥔 채 냉유성과 윈슬럿을 포위했다.
  모용세가 사람들의 눈에 이것은 이미 끝난 승부나 마찬가지였다. 냉유성보다 월등히 뛰어난 무사인 모용현도에다 세 명의 일류급 무사들이 가세했으니 결과는 생각해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러나 냉유성은 쉽사리 투지를 잃지 않았다. 물론 언데드인 윈슬럿이 기가 죽을 이유도 없다. 모용천이 이죽거리며 말을 붙였다.
  "이미 끝났어.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검을 버리지 그래?"
  "죽는 한이 있어도 그럴 수 없다. 목숨을 걸고 인면수심의 무리인 네놈들을 치죄하겠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그럴 만한 능력이 안 되지 않나?"
  그 말에 냉유성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상황은 그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돌연 그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어쩔 수 없다. 주문을 외워야만 할 상황이다.'
  마음을 정한 냉유성은 내공을 장검에 밀어 넣었다. 지금은 체면 따윌 생각할 겨를이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주문을 외는 그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용기가 가상하긴 하지만 역부족일 것이다.'
  냉유성을 쳐다보는 모용현도의 입가에는 씁쓸함이 감돌고 있었다. 가문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뒷맛이 그리 개운치 않은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의 눈에 비친 냉유성은 진정한 무인이었다. 묵묵히 무의 길을 걸어가는 참다운 무사. 그런 냉유성을 쓰러뜨리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막 공격명령을 내리려단 찰나에 냉유성이 장검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나는……."
  검 자루를 굳게 움켜쥔 모용세가 무사들이 냉유성의 입을 주시했다.
  무슨 말을 할까?
  분명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란 비장한 말을 그들은 예상했다.
  그러나 흘러나온 말은 모두의 예상을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내용의 것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멋있을까?"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 누구도 이런 말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게 정확했다.
  그들의 안목으로 냉유성은 말수가 적고 한없이 냉정한, 그야말로 뻣속까지 무혼을 지닌 무사였다.
  그런데 그런 무사의 입에서 그따위 말이 흘러나오다니…….
  어안이 벙벙해진 무사들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 제 정신이 박힌 무사라면 결코 입 밖에 내선 안 될 종류의 말이기 때문이다.
  "미친 놈. 지랄하네."
  "염병을 떠는군. 생긴 것 같지 않게 꼴값을 떨다니……."
  냉유성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빌어먹을…….'
  여러 무사들 앞에서 내뱉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데이몬이 제압된 것을 보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말 그대로 무작정 주문을 외운 것이다.
  그러나 장내의 싸늘한 반응을 보자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제일 먼저 냉유성을 자극한 것은 수치심이었다.
  하나, 상황은 이것저것 생각할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내공을 밀어 넣자 장검에 걸린 마법이 발동되었다.
  파츠츠츠
  검에서 자욱하게 냉기가 뿜어졌다. 냉유성은 머뭇거림 없이 달려들어 장검을 휘둘렀다.
  푸캉
  바짝 긴장하고 있던 모용현도가 앞으로 나서서 공격을 막아냈다. 검세는 완벽히 차단되었다. 하지만 검에서 뿜어지는 냉기는 막을 도리가 없었다.
  "크헉."
  전신을 엄습하는 극한의 냉기에 모용현도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살짝 닿기만 했는데도 드러난 피부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냉기였다.
  생각보다 공격이 잘 먹히는 것을 실감한 냉유성은 종횡무진 장검을 휘둘렀다. 그에 따라 살을 엘 듯한 냉기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창 차창 창
  한 번 검을 맞댄 무사는 어김없이 몸을 파르르 떨며 뒤로 물러났다. 검에서 뿜어지는 냉기를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모용현도의 눈은 경악으로 크게 뜨여졌다.
  "어, 엄청난 음한기공이로군. 냉유성이 이 정도까지 음한기공을 연성한 무사였던가?"
  그러나 상황은 눈뜨고 보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무사들이 형편없이 밀려나는 것을 확인한 모용현도는 전신에 내공을 끌어올린 채 달려들었다.
  쾅 쾅 쾅
  상황은 정신없이 전개되었다. 냉유성은 모용현도를 위시한 무사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전후좌우 사방을 포위하고 있으면서도 무사들은 쉽사리 냉유성을 제압하지 못했다. 장검에서 뿜어지는 냉기가 정말 무시무시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무사들의 안색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놀랍군. 냉유성이 저 정도로 실력이 높았나?"
  보고 있던 모용황이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옆에 서 있던 모용천이 손을 들자 일단의 무사들이 검을 뽑아들었다.
  차창
  힘들게 버티고 있는 무사들과 교대하려는 것이다. 물론 새로이 투입되는 무사들은 대부분 절정고수들이었다.
  그 모습을 본 냉유성이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더러운 놈들. 차륜전을 펼칠 생각인가?"
  그러나 모용세가 무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짓이지만 가문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조금이라도 빨리 냉유성을 제압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교체되어 뒤로 물러난 무사들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어, 엄청난 냉기로군."
  "칼에 맞아 죽는 게 아니라 얼어 죽는 줄 알았어."
  새로이 전장에 가세한 무사들은 지금껏 싸우던 자들보다 무위가 현격히 높았다. 합격진에도 익숙한 듯 그들은 숙련된 솜씨로 매섭게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냉유성은 한 치도 밀리지 않고 버텨냈다. 검에서 뿜어지는 냉기가 무사들의 운신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윈슬럿은 한없이 고전하고 있었다. 강시를 상대로는 엄청난 괴력을 발휘했던 윈슬럿. 그러나 정통무공을 익힌 무사에게 윈슬럿의 괴력은 먹히지 않았다.
  푸캉
  엄청난 힘이 실린 메이스였지만 모용세가의 무사는 간단히 막아냈다. 힘을 흘려버리는 고급 검술을 배운 무사였다.
  크아아아
  윈슬럿이 종횡무진 도끼와 메이스를 휘둘렀지만 둘러싼 무사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막아내며 반격을 가했다. 그러는 와중에 몇몇 무사들이 장검을 뻗어 검기점혈을 시도했다.
  그러나 혈도 자체가 없는 윈슬럿이 점혈당할 리가 없었다. 한 무사의 눈가에 놀라움이 번져갔다.
  "외공을 극성까지 익힌 놈이라 점혈이 안돼."
  그렇게 되자 무사들은 작전을 바꿨다. 다소의 상처를 입히더라도 반드시 제압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윈슬럿의 몸에 하나둘 칼자국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쿠우우
  계속해서 타격을 입던 윈슬럿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강인한 언데드의 신체로도 검기에만은 버티지 못했다.
  하지만 냉유성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동료가 제압당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꿋꿋이 저항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정말 쓸만하군.'
  냉유성은 마법검의 효능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검의 위력이 이토록 뛰어날 줄은 냉유성도 미처 몰랐다. 사방으로 뿜어지는 한기로 인해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제 실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번 공격을 받아내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모습에 냉유성은 완전히 자신감을 되찾았다. 만약 마법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벌써 제압되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상대는 자신에 비해 별로 떨어질 것이 없는 절정고수 네 명의 합공이다. 그중 한 명은 거의 절정의 극에 이른 모용현도였다. 그러니 승부는 생각해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러나 검에서 뿜어지는 냉기가 예상외의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에 냉유성은 당당히 맞서 싸우고 있었다.
  '훌륭한 검이야. 빌어먹을 주문만 제외하면…….'
  접전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모용황의 안색에 짜증이 어렸다. 보고 있던 모용천이 재빨리 데이몬에게로 다가갔다. 정신없이 접전을 펼치던 냉유성의 귓전으로 냉막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이쪽을 봐라."
  고개를 돌린 냉유성은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모용천이 예리한 단검을 데이몬의 목에 대고 있었다. 치사한 행동이었지만 모용천은 머뭇거림 없이 협박을 단행했다.
  "저항을 멈추지 않는다면 네 주공의 목숨은 없다."
  "크윽."
  입술을 꼭 깨문 냉유성은 장검에 들어가는 내공을 끊었다. 주공의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더 이상 싸울 수는 없었다.
  푸스스스
  사방을 뒤덮은 냉기가 순차적으로 사라졌다. 장검을 검갑에 수납한 냉유성이 팔짱을 꼈다.
  철컹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 눈을 감아버린 냉유성.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용현도가 다가가서 혈도를 짚었다.
  "끌고 가서 옥에 가둬라."
  그가 손짓을 하자 무사 두 명이 다가와 냉유성의 양팔을 잡아 끌었다. 윈슬럿은 이미 일단의 무사들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냉유성은 순순히 그들을 따라갔다.
  다른 무사들이 주뼛거리며 다가와서 데이몬과 당청을 가리켰다.
  "저들은 어떻게 하죠?"
  모용천이 머뭇거림 없이 명을 내렸다.
  "계집은 내당에다 가둬라. 그리고 색목인 녀석은 지하 연공실로 옮기도록."
  "존명."
  무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모용황은 눈매를 일그러뜨린채 색목인이 옮겨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별로 입맛이 개운치는 않군.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본가의 미래를 위해서는…….'






     7. 철마의 정체

  두터운 돌로 만들어진 석실에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느닷없는 암습으로 제압된 데이몬이었다.
  그 옆에는 모용세가의 사람들이 서서 데이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용현도가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 내공이 없다는 것이 확실합니까?"
  "물론이다. 그의 신체에서 전해지는 반응은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의 것과 동일하다. 만약 조금이라도 무공을 익혔다면 미미하게나마 반탄력을 감지했을 것이다."
  "믿을 수가 없군요. 전 분명 그가 단 일수에 스무 구에 가까운 독강시를 날려버리는 것을 목격했습니다만."
  모용황이 데이몬을 쳐다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아무래도 그가 익힌 무공은 중원의 내가기공과 다른 종류의 것 같다. 네가 본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옆에서 듣고 있던 모용천이 끼어들었다.
  "아무튼 그를 이토록 손쉽게 제압해서 다행입니다. 가주님께서 친히 손을 써 주신 덕택에 일이 쉬워졌군요."
  "모용세가의 사람이라면 의당 해야 할 일이지. 아무튼 그를 잘 다뤄서 기필코 해독약 제조법을 빼내도록 해라."
  모용천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그건 제 전문입니다."
  모용황의 시선이 죽은 듯 늘어져 있는 데이몬에게로 향했다.
  "그건 그렇고, 이자는 상당한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나와 비슷한 고수로 생각하고 공력을 무한정 퍼부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속이 완전히 뒤집어졌을 것이다. 운이 나빴다면 즉사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나마 죽지 않았으니 다행이구나."
  "설사 내상을 심각하게 입었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자의 무공이 아니라 지식이니까요."
  "아무튼 잘 다루도록 해라."
  "걱정 마십시오."

  데이몬은 바로 옆에서 나누는 대화를 낱낱이 듣고 있었다. 혼혈이 제압되었지만 그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몸에 잠재한 어둠의 마력이 그를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몬은 내심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놈들……. 강호도의를 이처럼 깡그리 무시하다니.'
  모용황의 말대로 제압당할 당시 데이몬은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웅대한 모용황의 공력이 노도처럼 밀려들어와 내부를 갈가리 찢어놓았던 것이다. 보통사람이라면 몇 달을 요양해도 회복하기 힘든 내상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의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완전히 정상을 되찾은 상태였다. 몸속을 흐르는 어둠의 마력이 만들어낸 효능이었다. 데이몬은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현경의 벽을 허물어뜨렸으면서도 겨우 초절정 따위에게 제압되다니…….'
  그러나 모용황 정도의 고수와 맞서 싸우기엔 보유한 암흑투기가 충분하지 않다. 훗날 마정지지를 찾아 암흑투기를 흡수하기 위해서는 항상 일정량의 암흑투기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 때문에 데이몬은 모용황에게 제압당하면서도 암흑투기를 끌어올리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을 죽이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마법은 암습에는 약할 수밖에 없어. 모든 게 캐스팅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 때문이야.'
  불현듯 냉유성이 떠올랐다. 그가 이를 갈며 주문을 외우던 사실을 떠올리자 웃음기가 치밀어 올랐다.
  '녀석, 그토록 주문을 외우기 싫어하다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위기에 처한 것을 보자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주문을 외운 냉유성이었다. 그것도 수많은 무사들 앞에서 체면 망가지는 것을 깡그리 무시하며.
  게다가 자신의 목숨으로 위협을 가하자 대뜸 저항을 포기한 것은 일반적인 수하들이 보여주기 힘든 행동이었다.
  '역시 사람 하나는 잘 골랐어.'
  하지만 데이몬은 몰랐다. 냉유성이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 데이몬이 그렇게 하게끔 이끌었다는 사실을.
  '청이는 어떻게 대우받는지 모르겠군. 아무튼 이 원한은 반드시 갚아주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모용현도와 모용황이 밖으로 나갔다.
  "그럼 부탁한다."
  "맡겨 주십시오."
  둘이 나가자 석실 안에는 데이몬과 모용천만이 남겨졌다.

  뭔가가 가슴을 누르는 듯한 느낌과 함께 데이몬은 혼혈이 풀리는 것을 감지했다. 눈을 뜬 데이몬의 시야에 모용천의 냉정한 얼굴이 들어왔다.
  "정신이 들었나?"
  "끄응. 대접이 꽤나 야박하군. 느닷없는 암습이라니……."
  데이몬의 태연한 태도에 모용천은 이채를 떠올렸다. 통상적으로 이런 상황이 닥치면 사람은 누구나 주눅이 들기 마련이다. 아니면 호통을 치며 허세를 부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눈앞의 색목인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대응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간이 큰 것인가 아니면 대범한 것인가?"
  "내 간이 조금 크긴 하지."
  심드렁하게 대꾸한 데이몬이 기지개를 켰다.
  "뭐부터 시작할 텐가? 고문인가?"
  "고문을 하기엔 좀 이르지. 일단 말로 시작하는 것이 서로 좋지 않겠나? 자넨 쓸데없는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고 우린 수고를 아끼게 되니 말이야."
  "미안하군.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
  데이몬의 결연한 눈빛을 본 모용천은 이번 일이 쉽지 않음을 직감했다.
  그에게 내려진 임무는 어떻게든 데이몬을 회유하여 묵회의 독에 대한 해독약을 제조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초장부터 순순히 따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모용천에게는 상대를 굴복시킬 자신이 있었다.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분야가 바로 이 부문이었다.
  "일단 맛보기로 분근착골부터 시작하지."
  양손에 내공을 끌어올린 모용천이 데이몬의 가슴팍 대혈을 하나씩 점해 가기 시작했다.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서 말이다.
  "몇 가지 혈도를 점해 피를 거꾸로 흐르게 하는 중원특유의 고문법이다. 처음에는 간지러운 정도지만 시간이 지나면 수천, 수만 마리의 개미가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며 물어뜯는 듯한 고통이 느껴질 것이다. 몸에 그리 무리가 가지 않는 고문법이니 한번 겪어보도록."
  그 말에 데이몬은 코웃음을 쳤다.
  '후후. 분근착골은 소싯적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겪어본 고문이다. 나에게는 감히 고문이라 할 수도 없지. 게다가 뭐?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해도 유분수지.'
  분근착골은 몸에 상당한 타격을 입히는 고문법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뿐이었다.
  데이몬은 서서히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분근착골의 효과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을 모용천이 미소 띤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맛이 어떤가? 제법 견딜 만하지?"
  데이몬의 몸은 어느덧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있었다. 극한의 고통에 신경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데이몬의 얼굴은 지극히 평온했다.
  "지루하군.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냐."
  급기야 데이몬은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모용천은 질리고 말았다.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시술받는 자가 느끼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고통에 익숙한 무림인도 일각 이상을 버티기 힘든 것이 분근착골이다.
  하지만 눈앞의 색목인은 끈질기게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견디가 못한 모용천이 데이몬의 옷을 풀어헤쳤다. 가슴팍의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니 분근착골이 정확히 시술된 상태였다.
  "대단한 참을성이로군. 고통이 만만치 않을 텐데……."
  "미안하지만 이 정도 고통은 무수히 겪어보았어. 날 애송이로 취급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데이몬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모용천은 혈도를 풀어주었다. 더이상 분근척굴을 시전하는 것은 시간낭비였다. 상대는 이런 종류의 고통에 익숙한 것이 분명했다.
  "좋아. 실수를 인정한다. 다음 단계로 들어가도록 하지."
  다음 단계는 지극히 원초적인 고문이었다. 집게로 손톱을 뽑아내거나 칼로 난자한 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등등의 방법. 전문적인 고문술사들이 들어와 데이몬에게 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냉막하게 생긴 중년 고문술사가 데이몬의 손톱 아래에 대나무 침을 박아 넣었다.
  푸슉
  인간의 손톱 아래는 신경이 극도로 밀집도이ㅓ 있다. 거기에 생으로 대나무 침을 박아 넣는 고통은 정말 참기 힘들다.
  침을 박아 넣는 순간 손톱이 뒤틀리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데이몬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 정도 고문은 그에게 아린아이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이봐, 재미없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라고."
  그러나 고문술사들은 무표정하게 하던 일을 계속했다. 포로의 반응에 상관없이 고문을 계속 진행하는 것은 고문의 가장 기초적인 상식이었다.
  데이몬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그들의 손속에 몸을 내맡겼다. 결국 그들은 데이몬의 발톱에까지 모조리 대나무 침을 박아넣었다.
  "어때, 이제 협조할 생각이 드나?"
  "별로 들지 않는 걸? 조금 더 짜릿하게 해 봐. 심심하잖아."
  모용천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색목인은 생각보다 인내력이 강한 자였다.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고문술사들에게 다음 단계를 지시했다. 인간은 결국 고통 앞에 무너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그가 평소 생각하는 고문에 대한 지론이었다. 당문에서 잡아들인 포로들도 고문과정을 통해 협조를 약속하지 않았던가?
  온갖 종류의 고문이 데이몬에게 가해졌다. 뒤틀어진 손톱, 발톱을 생으로 잡아 뽑고 예리한 칼로 상처를 낸 다음 그 위에 소금을 뿌리고…….
  데이몬은 눈을 꼭 감은 채 고문을 몸으로 받아들였다. 고문술사들이 도리어 질릴 정도로 담대한 반응이었다.
  약 두 시진 정도 고문을 받자 데이몬의 몸은 완전히 피로 뒤덮였다. 고문을 마친 중년인들이 모용천에게 보고를 했다.
  "여기까지가 저희가 할 수 있는 고문의 전부입니다."
  "그래? 수고했다."
  모용천은 데이몬의 턱을 잡아 들어올렸다.
  "어떤가? 조금 짜릿했지?"
  "벼, 별로 짜릿하지 못하군. 색다른 건 없나?"
  "보통 놈이 아니로군."
  힘들여 가한 고문이 효과가 없자 모용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내일은 색다른 고문을 약속하겠어. 오늘은 푹 쉬도록 해."
  모용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일은 너에게 직접 고문을 가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널 꽁꽁 묶어놓고 네 수하와 계집을 고문할 테니 즐겁게 감상하도록……."
  순간 데이몬의 눈동자에 노기가 떠올랐다.
  '비열한 자식.'
  통상적으로 고통에 강한 자도 친인의 고통에는 약할 수 있는 법이다. 모용천은 데이몬의 약점을 정확히 파고든 것이다.
  데이몬의 격렬한 반응에 자신의 생각이 적중했음을 감지한 모용천이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내일이 기대되는군. 그럼 잘 자게."
  고문을 마친 모용천이 석실을 나섰다. 석실 안에는 데이몬만이 홀로 남겨졌다.

  데이몬은 어둠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손톱에 박힌 대나무 침이 스르르 밀려났다. 이어 빠진 손톱, 발톱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전신에 난 흉측한 자상도 눈에 띌 정도로 아물었다.
  고문을 받는 동안 데이몬은 의도적으로 몸속의 어둠의 마력을 통제했다. 고문 받는 동안 상처가 회복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데이몬의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졌다. 손발에 채워진 쇠사슬을 응시한 데이몬이 마법주문을 캐스팅했다.
  "언락(Unlock)."
  간단한 주문영창으로 쇠사슬이 풀어졌다. 데이몬은 인상을 쓰며 기지개를 켰다.
  "정말 오랜만에 받아보는 고문이로군. 베르키스 놈에게 호되게 당한 다음으론 처음인걸."
  어둠 속에서 데이몬의 눈빛이 서서히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며칠 더 머물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오늘 당장 빠져나가야 할 것 같군."
  데이몬은 살짝 눈을 감고 냉유성과 당청의 위치를 파악해 보았다. 이미 그들에겐 추적마법이 걸려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위치가 금세 파악되었다.
  "냉유성은 가까운 지하 감옥에 갇혀 있군. 청이는 본당 쪽인가? 아무튼 상관할 것은 없지. 일단 당문 포로들의 구출은 나중으로 미룬다."
  데이몬은 눈을 꼭 감은 채 마법을 메모라이즈하기 시작했다. 냉유성과 당청을 구해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고위급 마법을 여러 번 시전해야 했고 그러려면 메모라이즈를 해놓는 것이 나았다. 그래야만 유사시 신속한 캐스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데이몬의 주변으로 서서히 마나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시각 불야성처럼 환하게 불이 밝혀진 모용세가를 응시하는 일단의 집단이 있었다. 보고를 이어나가는 이는 비영전주였다.
  하오문의 정보망을 총 동원한 덕택에 그는 데이몬의 일거수일 투족과 행로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간파하고 있었다.
  "색목인 일행은 확실하게 모용세가로 들어섰습니다. 객청 부근에서 일단의 소동이 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모용세가가 손을 쓴 것 같습니다."
  "제 명을 재촉하는군."
  묵회주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미 천기대제 사준환으로부터 모용세가의 괴멸과 색목인의 납치를 명받고 온 그였다. 그러니 모용세가에서 먼저 손을 쓴 데 대해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모용세가를 공격할 막강한 강시 군단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강철 갑주를 뒤집어 쓴 철마였다. 거대한 대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천신같이 당당했다.
  그 뒤에 일렬로 늘어선 다섯 구의 강시는 바로 음양강시였다. 상대의 강기를 흡수해서 상처를 수복하는 음양강시는 혼자서 절정고수 두셋을 능히 감당해 내는 마물들이다.
  그 뒤 열에는 마흔 구의 독강시가 서 있었다. 묵회주는 회가 보유한 독강시를 모두 이끌고 왔다. 오늘 밤 안으로 모용세가를 끝장내기 위해서.
  강시들 외에도 십여 명의 복면무사들이 더 있었다. 지금껏 묵회의 비밀임무를 수행해 왓던 밀사들로서 무도가 잠마련에서 파견된 절정고수들이었다.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는 색목인을 납치. 이지를 상실한 강시들에게 납치 같은 고차원적인 임무를 맡길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그들이 동원된 것이다.
  습격에 동원된 존재들을 하나하나 확인한 묵회주가 눈빛을 빛냈다.
  "그럼 공격하기로 한다. 오늘 부로 모용세가의 이름은 무림에서 지워진다."
  낮게 깔리는 그의 어조는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림을 좌지우지하던 거대세가가 자신의 명령에 의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니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강시군단의 접근은 금세 간파되었다. 망루에서 경비를 서던 모용세가의 무사가 접근하는 강시군단을 보자 비상종을 쳤다.
  땡땡땡땡
  모용세가의 대비태세는 완벽했다. 한참 잘 시간인데도 비상종에 신속하게 반응했다.
  숙소의 문이 일제히 열리더니 무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병장기를 움켜쥔 채 정문 쪽으로 집결했다. 그러는 사이 정문에 도착한 강시들은 머뭇거림 없이 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쾅 콰쾅
  강철로 보강된 정문이 맥없이 부서지며 흩날리는 파편 사이로 흉칙한 강시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모용세가 무사들은 바짝 긴장했다.
  "강시다! 묵회가 습격해 왔다!"
  "모두 약물에 적신 물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아라. 독기를 흡입하면 곧바로 중독된다."
  묵회의 강시에 대처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내린 처방이었다. 물론 독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때마침 당직을 맡은 모용천의 낯빛은 지극히 어두웠다. 가장 대비가 안 되어 있는 시기에 묵회가 공격을 감행해 온 것이다.
  "하필이면 오늘 습격을 가하다니……."
  그는 자신의 가문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음을 직감했다. 해독제만 만들어진다면 묵회의 강시군단 따위는 전혀 겁낼 필요가 없다. 하지만 해독제는 아직까지 준비되지 않았다.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오늘 밤 어려운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모용천의 옆으로 모용세가의 주요 식솔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제일 먼저 가주인 모용황이 의관을 갖춰 입고 달려 나왔다. 그의 손에는 가문의 보검인 명정검이 들려 있었다.
  "묵회의 습격인가?"
  "그렇습니다."
  모용황은 코웃음을 쳤다.
  "묵회 놈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우리 세가를 고작 멸망한 악양 지부 정도로 생각한 모양인데 그것이 오산이란 사실을 증명해 주겠다."
  모용세가의 전력은 모림맹 악양 지부에 비할 바가 아니다. 무사의 수도 두 배나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절정고수들의 수가 몇 배 이상 많았다. 게다가 초절정 고수가 세 명이나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충분히 승산이 있다.
  이것은 바로 모용세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모용황이 주위를 돌아보며 명령을 내렸다.
  "모두 검진을 펼쳐라. 절정 이상의 무사들이 나서서 강시를 상대한다. 강시의 몸을 벨 때 뿜어지는 독혈에 특히 주의하라."
  이미 강시군단은 연무장 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모용세가 무사들이 계속해서 후퇴했기에 아직까지 접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명령이 떨어지자 무사들이 재빨리 검진을 펼쳤다. 그리고 강시를 상대하기로 결정된 무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하나같이 약물에 적신 천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은 상태였다.
  거기에 모용황을 위시한 세가의 주요 고수들도 가세했다. 고수들이 나서야만 일반 무사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사들이 나서자 강시들도 진형을 바꿨다. 어둠 속에서도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철마가 선두로 나왔고 그 뒤를 음양강시들이 받쳤다. 이어진 것은 대대적인 접전이었다.
  파츠츠츠츠
  모용황의 애검에서 시릴 듯한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는 파멸의 기운 검강이었다. 여타의 절정 고수들이 전개하는 검강보다 길이도 길었고 색도 짙었다.
  모용황이 검강이 서린 검을 휘둘러 철마의 목을 베어갔다. 그 순간 철마의 투구에서 섬뜩한 빛이 치솟았다. 동시에 대검에서 눈부신 검강이 치솟았다.
  번쩍
  철마는 대검을 휘둘러 모용황의 일격을 막아냈다. 사방으로 강기의 파편들이 마구 흩날리며 폭음이 울려 퍼졌다.
  놀랍게도 격돌하는 순간 모용황의 신형이 뒤로 쭉 밀려났다. 서로간의 우열이 단숨에 판가름 나는 순간이었다.
  "크윽."
  모용황의 눈은 경악으로 크게 뜨여져 있었다. 전력을 다해 강기를 뽑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밀려난 것이다. 그러나 철마는 모용황에게 놀랄 겨를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존재자체가 변해버린 듯 종횡무진 검을 휘두르는 철마.
  노련한 몸놀림으로 이격, 삼격을 막아냈지만 모용황의 몸은 눈에 띄게 움찔거리고 있었다. 모용세가의 가주가 일개 강시에게 밀리는 이변이 벌어진 것이다.
  "이, 이건 괴물이로군."
  보다 못한 모용세가의 식솔들이 가세했다. 남은 두 명의 초절정 고수가 검을 꼬나 쥐고 철마에게 달려든 것이다.
  초절정 고수 세 명의 합공.
  여간해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지만 철마의 무위는 그 정도로 고절했다. 아니, 세 명이 합공하면서도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다.
  철마의 일격에 큰 충격을 받고 뒤로 주르르 밀린 세가의 장로가 눈을 부릅떴다.
  "크윽. 어디서 이런 놈이?"
  정말 엄청난 위력이었다. 검과 검이 맞닥뜨리는 순간 엄청난 충격이 몸을 엄습했다. 고급 검술로도 흘려버리기 힘들만큼 강맹한 힘이었다.
  모용황에 이어 두 명의 초절정 고수들이 가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세는 팽팽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미 사방은 치열한 격전지가 되어 있었다. 절정급 고수들이 검강을 자욱하게 흩날리며 강시들을 공격해 들어갔다.
  만약 상대가 평범한 독강시였다면 단 일격에 파괴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을 상대하는 강시는 음양강시였다.
  콰직
  한 무사의 검이 음양강시의 어깨를 가르고 지나갔다. 검강이 서려 있었기에 단단한 강시의 어깨가 푹 패여 들어갔다.
  그러나 상처 부위에서 눅색 빛이 어리는가 싶더니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무사는 눈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뭐, 뭐야?"
  음양강시는 각각 한 구가 절정고수 두세 명과 어울려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때문에 대부분의 절정고수들이 음양강시에게 붙들려 있었다.
  그러는 사이 뒤 열의 독강시들이 전투에 가세했다. 검진을 펼치고 있던 무사들도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상황이 난전으로 흘러가자 독강시가 방사하는 독이 위력을 발휘했다.
  "크헉."
  무사 한 명이 낯빛이 시커멓게 변하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독강시가 방사하는 독에 중독된 것이다. 약물에 적신 천으로 코와 입을 막았지만 피부를 통해 침습하는 독에는 어쩔 수 없었다.
  여기저기서 중독된 무사들이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주로 무공이 약한 무사들 순이었다. 사방으로 뿜어지는 독기는 절정고수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한 무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기랄, 지독한 독이로군."
  내공이 심후한 덕택에 독이 경맥에까지 침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기를 억누르느라 상당량의 내공을 쓰지 못했다. 한 손을 묶고 싸우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자 전세가 절박하게 흘러갔다.
  지금껏 백중지세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독으로 인해 일정량의 내공을 쓸 수 없게 되자 음양강시들이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희생자가 속출했다.
  "크아악."
  강시의 장력에 적중된 무사가 피를 낭자하게 뿜으며 훨훨 날아갔다. 바닥에 거칠게 처박힌 무사는 벌써 절명한 상태였다.
  모용황의 상황도 그리 좋지 않았다. 그를 위시한 초절정 고수 두 명에 이어 무사 다섯 명이 추가되었지만 철마와 팽팽하게 맞서 싸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독기가 영향을 미치자 승기가 철마 쪽으로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방사되는 독이 초절정 고수도 중독시킬 수 있는 절독이라서 상당량의 내공으로 독기를 억눌러야 하는 것이다.
  전장에서는 끊임없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대부분 독기에 중독된 하급 무사들의 비명소리였다.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 때문에 모용세가 사람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시각 데이몬은 냉유성을 구하기 위해 침투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냉유성이 정좌를 하고 있었다. 멀쩡한 모습을 보니 그에게는 고문이 가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구석에 서 있던 무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출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 비상종소리를 듣고 달려 나간 무사들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수인(囚人)을 감시하는 일이다. 때문에 비상사태가 벌어져도 그만은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때 출입문이 열렸다.
  덜컥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든 무사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누구냐?"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도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린 무사는 검을 움켜쥔 채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라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
  무슨 소리인지 짐작할 겨를도 없이 무사는 거센 충격이 전신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끄아악."
  머리털이 온통 곤두서고 전신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치솟는 모습으로 변한 무사가 맥없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리고 허공에서 누군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쓰러진 무사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매직 미사일로 혈도를 제압하는 것이 좋지만 이놈 같은 일류 무인에겐 통하지 않을 공산이 크니……."
  갇혀 있던 냉유성은 깜짝 놀라 철창을 움켜쥐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난데없이 주공이 나타나 무사를 제압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놀라움보다 재회의 감격이 더욱 컸다.
  "주공, 무사하셨습니까?"
  데이몬은 냉유성에게 따듯하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오래 기다렸지. 이제 풀어주마. 언락!"
  주문영창을 하자 철창의 자물쇠가 열렸다. 냉유성이 달려 나와 데이몬을 끌어안았다.
  "무사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별로 편하진 않았다. 분근착골에다 시답잖은 고문 몇 가지를 받았거든."
  그 말에 냉유성은 깜짝 놀라 데이몬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간악한 놈들. 그런데 멀쩡하신데요?"
  "내 의술실력을 잊었느냐? 벌써 치료했지 아직까지 끙끙 앓고 있으란 말이냐?"
  냉유성의 머리통을 가볍게 쥐어박은 데이몬은 옆 감옥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이곳저곳에 자상을 입은 윈슬럿이 쓰러져 있었다. 주요 요헐이 패여 있는 것을 보니 상당한 타격을 입은 모양이었다.
  데이몬은 허공을 격하고 어둠의 마력을 윈슬럿에게 불어넣어 주었다.
  어둠의 마력이 충원되자 윈슬럿이 정신을 차렸다.
  "크아아아."
  전신의 상처들이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활기를 되찾은 윈슬럿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콰쾅
  윈슬럿의 돌주먹이 맞은 창살이 형편없이 구겨지며 떨어져나갔다.
  "원 녀석, 성질도 급하지.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열어줄 텐데……."
  그러는 사이 냉유성이 자신의 장검을 수습해서 허리에 찼다. 다행히 마법검이 간수의 책상 위에 있었던 것이다. 엄청난 위력을 보여준 마법검이라 그는 검을 마치 가보처럼 대했다.
  "이곳에서 기다리거라. 청이를 구해올 테니."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혼자 가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조금 전에 내가 마법 쓰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
  일리가 있다는 듯 냉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까처럼 보이지 않게 접근한다면 그 누가 당해내겠습니까? 아무튼 놀랍습니다."
  "마법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쓴웃음을 지은 데이몬은 캐스팅을 했다.
  "인비저빌러티(Invisibility)."
  캐스팅이 끝나는 순간 데이몬의 모습은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지워지듯 그 자리에서 사리진 것이다. 그 광경을 본 냉유성은 눈을 크게 떴다.
  "아무튼 주공께는 신기하신 재주가 많다니까."
  냉유성이 혀를 내두르며 신기해하는 사이 데이몬은 감옥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이미 당청에게 추적마법을 걸어둔 덕택에 데이몬은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정문의 연무장에서 벌어지는 접전은 승기가 한쪽으로 현저히 기울고 있었다. 눈에 훤히 들어올 만큼 모용세가의 패색이 짙었다.
  "이, 이럴 수는 없다."
  모용황이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지만 한 번 빼앗긴 승기를 되찾아올 수는 없었다.
  철마는 싸울수록 강해졌다. 마치 전설상의 경지인 현경의 무인과 맞서 싸우는 듯한 느낌이었다.
  함께 싸우던 절정고수들은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렸다. 나머지 초절정 고수 둘도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분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힘이 빠지고 내공이 거의 고갈된 탓에 패배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음양강시에 의해 수십 명의 절정고수들이 목숨을 잃었다. 독에 중독되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음양강시의 막강한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일반 무사들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대부분의 무사들이 중독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내공이 미약한 일반무사들에게 독강시의 독은 거의 치명적이었다.
  걷잡을 수 없을 만치 무너지는 전열을 보며 모용천은 이를 악물었다.
  "묵회의 힘이 이토록 강하다니……."
  그때 누군가가 모용천에게로 다가왔다.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모용현도였다. 그의 눈엔 결연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힘들다. 색목인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세가의 명운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모용천의 눈가에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하,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해독제를 만든다고 해도……."
  "멍청하긴. 그는 내가 보는 앞에서 독강시 열아홉 구를 일수에 날려버렸다. 그것을 보아 강시를 상대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야. 어떻게든 그를 데리고 와야만 이번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저는 이미 그에게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순순히 협력할지……."
  모용현도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를 데리고 와라.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주더라도 그를 데려와야만 한다. 설사 당문 포로들을 모조리 풀어주더라도 말이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모용천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는 무사 두 명을 대동한 채 데이몬이 갇혀 있는 지하 연공실을 향해 달려갔다.

  데이몬은 이미 당청과 대면하고 있었다.
  "꺅."
  갑자기 시비들이 쓰러지자 당청의 눈이 커졌다. 여자인데다 무공이 일천한 덕분에 당청에게는 경비무사가 붙지 않았다.
  하지만 무공을 익힌 시비 두 명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비들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허공이 흐려지더니 누군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하던 당청의 망막에 데이몬의 모습이 맺혔다.
  "사, 상공."
  "무사한 모습을 보니 좋구나. 다행이다."
  당청의 눈에 금세 눈물이 괴었다.
  "무사하셨군요."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자."
  "하, 하지만 저희 식솔들은……."
  "일단 우리가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다. 모용세가의 태도를 볼 때 너희 식솔들은 나중에 기회를 봐서 구해야 할 것 같구나."
  영리한 만큼 체념도 빨랐다. 당청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알겠어요, 상공."

  그 시각 지하 연공실에 들어간 모용천은 난감해 하고 있었다. 분명 석실에 감금되어 있어야 할 색목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연공실의 입구를 지키던 무사들은 수인이 사라진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탈출했군. 대체 어떻게 감시무사들의 눈을 속이고 빠져나갔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모용천이 몸을 돌렸다.
  "일단 지하 감옥으로 가자. 그곳에 놈의 수하가 갇혀 있으니 분며으 그곳을 갔을 것이다."
  모용천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는 그곳에서 데이몬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당청과 자신에게 투명화 마법인 인비저빌러티를 걸어 내당을 빠져나온 데이몬은 곧장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그리고 냉유성과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 있을 무렵 모용천이 들이닥친 것이다.
  경비무사들을 모두 이끌고 왔기에 제법 많은 무사들이 그의 뒤를 받치고 있었다.
  "과연 여기에 있었군."
  고개를 돌린 데이몬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대응이 제법 빠르군."
  냉유성이 머뭇거림 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윈슬럿 역시 싸울 채비를 갖추었다.
  그때 모용천이 손을 내저었다.
  "지금은 싸오구 싶은 마음이 없다."
  "그게 무슨 소리냐?"
  "지금 본가는 묵회의 강시들로 인해 위기에 처해있다. 만약 강시들을 처리해 준다면 원하는 것을 뭐든지 들어주겠다. 당문의 포로들을 풀어줄 수도 있다."
  그 말에 발끈한 것은 냉유성이었다.
  "개소리 하지 마라. 모용세가의 말은 콩으로 팥을 쑨다고 해도 믿지 못하겠다. 가문의 은인을 강압적으로 제압해 고문을 가한 놈들이 바로 너희들이다."
  당청의 반응 역시 냉랭했다. 데이몬에게 고문을 가했다는 말에 감정이 격앙된 것이다.
  "정말 상종도 하지 못할 종자들이로군요."
  모용천으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무사들의 수에 있어서만큼은 이쪽이 우위였지만 빠른 시간 내에 제압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일이 글렀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상대를 설득할 수 없는 것이다.
  '하긴 나라도 해도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
  그는 마음을 굳혔다. 비밀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이 자리에서 색목인 일행을 죽여 없애야 했다.
  그때 데이몬이 나섰다. 모용천의 눈가에 흐르는 살기를 미리 간파한 것이다.
  "묵회의 강시가 등장했다고?"
  "그렇다. 해독제가 없어 본가의 무사들이 고전하고 있다."
  그 순간 데이몬의 머리가 정신없이 돌아갔다.
  '어쩌면 청이의 식솔들을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정리한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일단 전황을 보고 결정하겠다. 나를 그곳으로 안내해다오."
  그 말에 냉유성과 당청이 깜짝 놀랐다. 한 번 속아 넘어가고도 모용세가의 제의를 받아들이다니……. 그러나 그들은 데이몬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았다.
  '뭔가 생각이 있으시겠지.'
  '상공이 하시는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어.'
  뜻밖의 상황에 모용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꿍꿍이지?'
  하지만 이것저것 재기에는 모용세가에 닥쳐온 위기가 너무 급박했다.
  "나를 따라와라. 전장으로 안내해 주겠다."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 있었다. 모용세가의 무사들 중 반수 이상이 죽어 넘어져 있었다.
  반면 강시들의 수는 거의 줄어있지 않았다. 고작해야 독강시 열 구가 파괴되어 널브러진 상태였다. 그러나 철마와 음양강시들을 여전히 건재했다.
  그런 상황에서 데이몬이 전자엥 도착했다. 전장을 지배하고 있는 강시군단을 보자 데이몬은 탄성을 토해냈다.
  "대단한 전력이로군. 이처럼 많은 강시군단을 보게 되다니."
  주위를 둘러본 데이몬이 모용천을 응시했다.
  "무사들을 뒤로 물려라. 한데 엉켜 있으면 강시를 공격할 수 없다."
  그러나 모용천에게는 그럴 만한 권한이 없었다.
  "알겠다. 가주님에게 말씀드리겠다."
  그가 철마에 맞서 싸우는 가주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힐끔 쳐다본 데이몬은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물론 강시에게 효과적인 화염 계열의 마법이었다.
  "한데 섞여 있으니 하나씩 파괴해야겠군."
  그러는 사이 윈슬럿이 메이스와 배틀 엑스를 움켜쥐고 성큼성큼 나아갔다. 비록 모용세가 무사들에겐 약한 모습을 보인 윈슬럿이었지만 강시에겐 거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꽝
  막 모용세가 무사 하나의 머리를 으스러뜨린 독강시가 엄청난 충격에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메이스에 얻어맞은 어깨가 참혹하게 으스러져 있었다.
  윈슬럿은 머뭇거림 없이 도끼를 휘둘러 독강시의 머리통을 쪼개어버렸다.
  콰직
  맥없이 파괴되어 널브러지는 독강시. 뿜어진 독혈에 상체가 흠뻑 젖었지만 윈슬럿은 아랑곳없이 다른 독강시를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 데이몬의 마법이 강시들에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파이어 볼(Fire ball)."
  낭랑한 주문영창과 함께 큼지막한 불덩어리가 전장으로 쏘아졌다.
  화르르르
  파이어 볼에 격중된 독강시가 그대로 파괴되며 불타올랐다. 독기가 타오르며 매캐한 연기가 치솟았다. 놀랍게도 괴력을 보이는 독강시가 단 한 방에 파괴된 것이다.
  사람들이 놀랄 겨를도 없이 독강시가 연이어 격파되기 시작했다. 마치 거센 바람에 갈대가 넘어가듯 말이다. 모용천의 보고를 받고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모용황이 그 모습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 세상에……. 강시를 저토록 간단히 격파하다니."
  데이몬이 날린 파이어 볼은 음양강시에게도 날아들었다. 그러나 독강시와는 달리 음양강시는 일격에 격파되지 않았다.
  전신이 시커멓게 그슬린 채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음양강시. 그 광경을 본 데이몬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나인 서클의 마법사인 그에게 마나의 흐름을 감지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파이어 볼이 격중되는 순간 마나배열이 흐트러지며 상당량의 마나가 음양강시에게로 흡수되고 있었다.
  "이상하군. 이것은 마법에 의한 반응인데? 그것도 흑마법 계열의……."
  하지만 데이몬은 의문을 접었다. 일단 전투를 진정시켜놓고 생각할 문제였다.
  모용황의 명령을 받은 무사들이 전투를 중지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경공을 펼칠 수 없기 때문에 무사들과 강시와의 거리는 금세 벌어졌다. 단지 철마를 상대하는 초절정 고수들이 몸을 뺄 수 없을 뿐이었다.
  캬오오오
  장내에는 곧 강시들만 남겨졌다. 강시들이 기성을 내지르며 무사들에게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이 캐스팅을 했다. 메모라이즈를 해 두지 않았기 때문에 캐스팅 시간이 제법 길었다.
  그사이 모용세가 무사들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숨을 돌렸다. 한 시진 가까이 이루어진 혈투라서 무사들은 대부분 지친 상태였다.
  데이몬의 마법이 발현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익스플로전(Explosion)."
  대파산맥에서 열아홉 구의 독강시를 쓸어버린 공포의 마법이 또다시 발현되었다. 불의 속성을 가진 마나가 어둠의 마나와 반응하며 대 폭발이 일어났다.
  콰콰콰쾅
  눈을 뜨지 못할 섬광과 함께 엄청난 열기가 치솟았다. 선두에 서서 달려오던 십여 구의 독강시가 폭발에 휘말렸다. 강시는 대번에 기능이 정지되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섰고 곧 타오르기 시작했다.
  음양강시 한 구도 거기에 말려들어 파괴되었다. 마나를 빨아들여 몸을 복원하는 기능를 가진 강시였지만 폭발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불운하게 당해버린 것이다.
  엄청난 폭발로 인해 전투는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 독강시 절반이 일거에 날아가자 묵회주는 재빨리 강시들을 뒤로 물렸다. 철마 역시 싸움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났다. 이마에 가득한 땀을 닦던 모용황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현도의 말이 사실이었군."
  놀라울 정도의 괴력을 발휘하던 강시가 일거에 몰살당했다. 열한 구의 강시가 파괴되었지만 빽빽히 늘어서 있었다면 서른 구, 마흔 구라도 모조리 날라갔을 것이다.
  철마가 물러나자 초절정 고수 둘은 맥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힘과 내공을 모두 소진해버린 것이다. 살아남은 무사들이 다급히 달려가 그들을 부축했다.
  싸움은 그렇게 해서 잠정적인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극도로 지친 데다 대부분 중독된 상태였기 때문이었고, 묵회 측은 데이몬의 가공할 만한 마법 때문에 섣불리 강시를 내보내지 못했다.
  데이몬은 장내를 둘러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만 하면 연출효과는 충분한 셈인가?'
  그때 모용황이 다가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데이몬을 훑어보았다.
  "믿을 수 없는 능력을 지녔군. 강시를 이토록 간단히 처치하다니……."
  "인간들에게도 통하는 능력이지. 저런 폭발 속에서 살아남을 인간은 없을 테니까."
  겨우 한숨을 돌린 모용황의 눈에 형편없이 줄어든 무사들의 몰골이 들어왔다.
  세가가 보유한 무사의 삼분지 이 가량이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숨이 붙어 있는 무사들도 얼굴이 시커멓게 변한 것을 보니 회생하기 힘들 것 같았다. 모용황은 이를 부드득 갈아 붙였다.
  "가증스러운 놈들……."
  건너편 묵회 진영을 노려보는 모용황의 눈동자에는 살기가 진득했다. 한동안 적진을 노려보던 그가 데이몬에게 말했다.
  "가능하다면 무공을 한 번 더 써 줄 순 없겠나? 저기 놈들이 운집한 곳으로 말이야."
  묵회의 무사들은 강시와 함께 똘똘 뭉쳐 있었다. 나름대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짜낸 것 같았지만 그것은 한 마디로 자살행위였다.
  대부분의 마법은 거리를 격하고 전개된다. 중앙부에 익스플로전을 작렬시킨다면 깡그리 섬멸되어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칠종단금술이 발동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가능한 것이겠지만.
  묵회의 강시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을 쳐다보던 데이몬이 느릿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기 전에 우리끼리 해결해야 할 일이 있지 않소?"
  "……."
  데이몬은 모용황의 눈을 들여다보며 한자 한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당문의 포로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오시오. 한 명도 빠짐없이."
  "그것은 전투가 끝난 다음에……."
  "난 당신들의 약속을 믿을 수 없소. 이미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 쪽은 당신들이오. 만약 당문 포로들을 데리고 오지 않는다면 나는 더 이상 강시들을 상대하지 않을 것이오."
  모용황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여기에서 색목인이 돕지 않는다면 모용세가는 회생하기 힘든 타격을 입을 것이다. 더 이상 결정을 미룰 수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해 주어라."
  "알겠습니다."
  명을 받은 모용천이 무사들을 이끌고 달려갔다. 그 모습을 쳐다보는 당청의 눈에는 기대의 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귓전으로 데이몬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사람들이 도착하면 네가 확인해 보거라. 혹시 빠진 사람이 있나 없나 말이다."
  당청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상공."

  전투가 소강상태에 머무는 사이 데이몬은 적진을 쳐다보았다. 생각할 여유를 갖게 되자 아까의 의문점이 떠올랐다.
  '이상하군. 어째서 중원의 강시들에게서 흑마법의 기척이 느껴지는 것이지?'
  강시들을 둘러보던 데이몬의 눈이 더욱 커졌다. 늠름하게 버티고 서 있는 철마를 보고 난 후의 일이었다. 그는 경악했다.
  '어찌 이런 일이……. 어째서 저 녀석이 여기에 있는 것이지?'
  데이몬은 한눈에 철마의 정체를 간파했다. 그도 거럴 것이, 철마의 가슴팍에 세겨져 있는 문장은 그가 잘 알고 있는 제국의 것이었다. 바로 아르카디아 대륙의 크로센 제국의 황가 문장인 것이다.
  '저 문장은 분명 크로센 제국의 황족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문장이다. 그렇다면…….'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데이몬은 입을 딱 벌렸다. 그의 짐작대로라면 철마의 정체는 바로 크로센 대제였다.
  중원식으로 영호명. 데이몬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그가 묵회의 강시가 되어 있는 것이다. 데이몬은 대번에 영호명의 상태를 짐작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현경의 경지에 든 무인이 심지가 제압되어 활강시로 변모하다니…….'
  트루베니아 대륙을 구해냈던 영웅의 너무도 어이없는 추락에 데이몬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한 데이몬이었다.
  '저 녀석이 어째서 활강시로 전락한 거지?'
  냉정을 되찾은 데이몬은 영호명의 변한 모습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일단 입고 있는 갑옷은 전형적인 트루베니아 방식의 풀 플레이트 메일이었다. 색상을 보아 드래곤 본이나 미스릴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문제는 거기에 대마법 방어진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데이몬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지금의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놈을 제압할 수 없다. 대마법 갑옷의 수준에다 영호명 녀석의 내공을 고려하면 나인 서클의 마법을 써도 통하지 않는다. 만약 놈들이 영호명을 투입하면 나로서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데이몬이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모용천이 당문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혈색과 옷차림을 볼 때 그럭저럭 후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 같았지만 하나같이 얼굴에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숫자는 모두 서른 명. 남녀노소가 골고루 섞여 있었다. 당청이 눈물을 흘리며 달려 나갔다.
  "엄마."
  포로들 사이에는 죽은 당문 문주의 아내, 즉 당청의 어머니가 끼어있었던 것이다.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중년 부인이 깜작 놀라 두 눈을 비볐다. 이윽고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괴었다.
  "청아."
  모녀는 생각할 것도 없이 서로 부둥켜안았다. 하지만 상황은 모녀가 해후의 기쁨을 나눌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청아, 미안하지만 기뻐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인원점검을 해주겠니?"
  "네, 상공."
  상공이란 말에 당 부인의 눈이 커졌다.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이 낯선 색목인에게 상공이라 칭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뜬 그녀가 데이몬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도대체 청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지?'
  당문 사람들을 하나하나 확인한 당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모용세가에서도 달리 수작을 부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일단 빠진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당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뼛가루를 꺼내 한 곳에다 큼지막하게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른 명이 모두 올라설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뜻밖의 행동에 모용천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지금 뭐하는 것이오."
  "보다시피 진법을 펼치고 있네. 당문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우선 아닌가?"
  "지금 그 따위 진법이나 펼칠 때요?"
  "나에겐 이것이 우선이라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한 데이몬이 계속 진을 그려나갔다. 그사이 강시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모용세가 사람들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모용천이 불퉁한 어조로 소리쳤다.
  "강시들이 접근하고 있소. 어서 무공을 써 주시오."
  "아직까지 시간은 충분하네.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
  계속되는 모용천의 채근 속에서도 데이몬은 꿋꿋하게 마법진을 그려나갔다. 마법진이 완성되자 데이몬은 당문 식솔들을 그 위에 올라서게 했다. 물론 윈슬럿과 냉유성도 마찬가지였다.
  당문 사람들이 모두 마법진 위에 올라선 것을 확인한 데이몬은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일전에 겪었던 일 기억하느냐? 네 무공을 회복할 때의 일 말이다."
  그때의 그억을 되짚어본 냉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합니다."
  "그때의 일이 다시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놀라지 말고 사람들을 잘 이끌도록 해라."
  냉유성은 금세 데이몬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 당시 그는 공간이동 마법진을 통해 대자연의 기가 풍부한 곳으로 이동했었다. 데이몬은 지금 공간이동 마법으로 당문 식솔들을 대피시키려는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다음에 이어진 말은 전음이었다.
  ㅡ주공께서는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이곳에 남아계실 것입니까?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진을 발동시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이곳에 남아서 마력을 불어넣어야만 마법이 작동한다. 데이몬은 복잡한 계산을 통해 이 방법을 선택했다.
  어차피 상황은 그가 가세한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을 터. 대마법 방어갑옷을 입은 영호명이 있는 한 변변찮게 힘을 쓸 수 없었다. 마법진을 그린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이미 데이몬은 중원의 곳곳에 마법진을 설치해 두었다. 마법진이 발현되면 당문 식솔들은 냉유성이 내공을 되찾았던 탑리목 분지 인근으로 이동될 것이다.
  '혼자 남게 되더라도 걱정할 것은 없지. 적절히 마법을 사용하면 나 하나 벗어나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
  재빨리 머리를 굴린 데이몬은 마법진에 마나를 불어넣으려 했다. 그러나 묵회의 강시들이 벌써 가까이 접근한 상태였다. 일단 마법진의 발동을 포기한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일단 강시를 먼저 처리해야겠군.'
  다행히 철마는 뒤에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혹시라도 상하는 것을 우려한 묵회주의 염려 때문이었다. 데이몬은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마법을 전개했다.
  "파이어 월(Fire wall)."
  주문영창이 끝나는 순간 마법이 발현되었다.
  화르르르
  진군하는 강시 군단의 앞으로 불의 벽이 형성되었다. 파이어 월이 내뿜는 열기에 강시들이 진군을 멈췄다. 본능적으로 불기운을 두려워하는 강시인 만큼 더 이상 나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강시의 발길을 막아놓은 데이몬은 다시 마법진에 마나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방대한 기가 마치 밀물처럼 마법진으로 빨려 들어갔다.
  초조함을 견디지 못한 모용천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지금 뭐하는 거요? 강시들을 완전히 파괴해야지 발길만 막아 놓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오?"
  "그 녀석, 정말 말이 많군. 나에겐 진법을 펼치는 것이 우선이야."
  느물거리며 대꾸한 데이몬이 계속해서 마법진에 기를 불어넣었다. 인원이 많고 거리가 멀기 때문에 방대한 양의 마나가 필요했다.
  참지 못한 모용천이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 마나의 공급이 끝났다.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주문영창을 했다.
  "텔레포트(Teleport. 공간이동)."
  캐스팅이 끝나는 순간 마법진이 작동되었다.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무사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릴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뭐, 뭐야."
  "무슨 현상이지?"
  잠시 후 빛이 사그라졌을 때 마법진 위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서른 명이 넘는 인원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모용천의 눈이 툭 불거져 나왔다.
  "이, 이게 무슨……."
  상황을 눈치 챈 모용황이 노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초절정 고수답게 그의 몸놀림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독객들을 빼돌리다니……. 무슨 수작이냐?"
  달려들어 데이몬의 맥문을 틀어쥐려던 모용황은 화들짝 놀랐다. 데이몬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픽 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허공을 움켜쥔 상태로 모용황은 허탈해 했다.
  "이럴 수가…… 움직이는 기척도 눈치 채지 못했거늘……."
  대답은 하늘 위에서 들려왔다.
  "블링크(Blink)라는 수법이지. 쓸만하지 않소?"
  모용세가 무사들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 그리고 하나같이 입을 쩍 벌려야 했다. 데이몬이 마치 날개 달린 새처럼 허공에 둥실 떠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의 시선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인질들을 모두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다음이라 데이몬에게 거리낄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모용세가로부터 받은 대접은 정말 인상적이었소. 가문의 은인을 강제로 제압한 다음 고문을 가하다니 말이오. 솔직히 말해 손톱을 생으로 잡아 뽑을 때는 조금 아팠지."
  그 말에 모용세가 무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비록 데이몬을 제압할 때는 가세했지만 정작 고문이 가해졌을 줄은 몰랐던 무사들이었다.
  데이몬은 명백히 모용세가에 은혜를 베푼 은인이다. 독에 중독되어 죽을 운명의 모용수를 해독해 준 것은 분명 은혜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 은인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도 모자라 고문을 가하다니…….
  모용천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빌어먹을…….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귓전으로 계속 데이몬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모용세가는 약속을 어겼소. 헌신짝처럼 무시해버렸단 말이지. 고로 나 역시 모용세가와의 약조를 이행할 이유가 없소."
  말을 마친 데이몬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강시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불의 벽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데이몬의 의도는 명백했다. 목회와 모용세가를 다시 싸우게 만들려는 것이다.
  파이어 월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열기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강시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머지않아 공포의 진군을 시작할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데이몬은 서늘한 눈빛으로 모용황을 노려보았다.
  "독강시 열 구를 처리해 준 것으로 내 할 바는 다했소. 그러니 남은 일은 그대들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시오."
  그 말에 모용천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런 비열한 자식.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은인에게 고문을 가하는 것은 비열하지 않고?"
  이어진 데이몬의 말에 모용천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그저 이를 갈며 치를 떨 수밖에.
  모용세가 사람들의 얼굴은 창백했다. 자신들이 한 일이 있으니 데이몬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모용세가의 수뇌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악한 놈. 네놈을 우리가 가만히 내버려둘 것 같으냐?"
  이를 갈아붙인 모용천이 무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활을 쏴라. 세가를 농락한 건방진 색목인을 징죄해야 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무사들이 내키지 않는 눈빛으로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곧 데이몬을 향해 수십, 수백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쐐애애액
  하지만 데이몬의 몸에 와 닿는 화살은 없었다. 화살들은 대부분 데이몬이 펼친 실드에 맞고 퉁겨 나가 버렸다.
  "멍청한 것들. 화살 날릴 시간이 있으면 강시나 상대할 생각을 해야지."
  그때 데이몬의 뇌리로 위기감이 엄습해 왔다. 데이몬은 생각할 것도 없이 블링크를 펼쳤다. 순간 엄청난 기운이 실드를 통째로 박살내고 들어왔다.
  콰지직
  실드를 꿰뚫고 지나간 것은 시퍼런 검강이 돋아나 있는 한 자루의 장검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모용황이 이기어검(以氣御劍)으로 데이몬을 암습했던 것이다.
  그러나 데이몬이 적절한 순간에 블링크를 펼쳤기에 장검은 실드만 꿰뚫었을 뿐 데이몬의 몸에는 닿지도 않았다.
  "이런……."
  허탈해하는 모용황의 귓전으로 데이몬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아무래도 모용세가 가주의 무위는 암습으로 터득한 것 같소이다."
  간신히 가슴을 쓸어내린 데이몬은 주위를 쳐다보았다. 어느덧 묵회의 독강시가 진군을 시작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이쯤에서 빠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잘들 해결하시오. 본인은 이만 가 보리다."
  주위를 다시 한 번 살펴본 데이몬이 주문을 외웠다. 그 주문이 끝나는 순간 데이몬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그곳에서 사라져버렸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리는군."
  입술을 질끈 깨문 모용황은 무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이미 무사들은 병장기를 챙겨들고 싸울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모용세가의 전력은 참담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전투를 시작했을 때의 삼 할이 될까 말까한 전력이다. 강시와의 접전을 통해 무수한 무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살아남은 무사들도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반면 데이몬의 활약으로 인해 묵회도 상당히 큰 피해를 입었다. 독강시 열한 구와 음양강시 한 구가 파괴된 것이다. 모용세가 무사들에게 입은 피해보다 데이몬 한 사람에게 당한 피해가 더욱 컸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는 강시들인만큼 모용세가보다는 사정이 다소 낫다고 봐야 했다.
  접전이 다시 속개되었다. 상황은 아까와 똑같이 전개되었다.
  모용황과 초절정 고수 두 명이 나서서 철마를 상대했고 절정 고수들은 음양강시에게 발이 묶였다. 그리고 열 구도 되지 않는 독강시가 나머지 무사들을 하나씩 쓰러뜨려 나갔다.
  강시의 수가 조금씩 줄긴 했지만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현저히 지쳐 있었다. 때문에 전세는 묵회 쪽에 월등히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묵회주의 얼굴은 잔뜩 찡그려져 있었다.
  "난감하군. 색목인이 그토록 갑자기 사라져버리다니……."
  그의 임무는 모용세가를 궤멸시키는 것만이 아니다. 총사로부터 직접 색목인을 잡아오리는 명령까지 받았다.
  그런데 색목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발한 방법으로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그를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군. 일단 모용세가부터 쓸어버리는 수밖에."
  그러면서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색목인이 강시군단에 타격을 더 입혔다면 모용세가를 상대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졌을 것이다.
  데이몬이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사라져 준 것이 묵회주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괴소가 터져 나왔다.
  "흐흐흐. 머리 터지게 싸우고 있군."
  데이몬은 그곳에서 사라진 게 아니었다. 투명화 마법인 인비저빌러티로 몸을 감추고 플라이 마법으로 몸을 허공에 고정시킨뒤 아래에서 벌어지는 참극을 감상하고 있었다.
  자신을 무력으로 제압한 모용세가 무사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다 후련했다.
  "이런 대규모 살상극을 본 일이 얼마만이지? 아무튼 통쾌하군."
  불현듯 탑리목 분지 인근으로 공간 이동해 간 당문 식솔들이 떠올랐지만 데이몬은 걱정하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곳인데다가 절정고수인 냉유성이 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게다가 당문 식솔들도 독술에 일가견이 있는 독객들이니……. 아무튼 청이가 모친과 만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훈훈하군."
  나직이 독백하며 지켜보는 사이 접전은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직감한 모용황이 세가를 버릴 것을 명했던 것이다.
  "세가를 포기한다. 모든 무사들은 지금 즉시 전장을 이탈하라. 하남의 분가에서 집결하기로 한다."
  모용황으로는 무척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세가에는 심혈을 기울여 구한 각종 영약과 무공비급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지하의 창고에는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가 있다. 그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승산이 보이지 않았기에 모용황은 어려운 용단을 내렸다.
  무림에서 인정받는 것은 오로지 힘이다. 만약 여기서 정예무사들을 모두 잃는다면 무림에서 모용세가가 설 입지는 없다. 원한관계를 무수히 쌓아온 모용세가인 만큼 어느 정도의 전력은 보전해야 했다.
  명령이 떨어지자 무사들이 하나둘씩 순차적으로 후퇴했다. 무공을 모르는 하인이나 아녀자들은 이미 뒷문을 통해 빠져나간 상태였다.
  급기야 무사들이 급속히 전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경공을 쓰지 못하는 강시들인지라 그저 무사들의 뒷모습을 멍하지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전장에는 시체와 중독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부상자들만 남겨졌다.
  모용황과 초절정 고수들 역시 적절한 순간에 몸을 뺐다. 지금 상황에서는 초절정 고수를 한 명이라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합격진을 풀고 뒤로 물러나자 철마도 더 이상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제 아무리 활강시라도 이런 상황까지 이해해서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허공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데이몬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결국 세가를 포기하는군. 탁월한 결정이야. 제법 상황판단이 빠른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데이몬이 느릿하게 기지개를 켰다.
  "잘 되었군. 이 참에 모용세가의 금고나 털어야겠어."
  모용황은 세가를 포기했다. 모용세가에는 방대한 양의 재보와 무공비급, 영약이 쌓여 있다. 무림에서의 입지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분량일 터이다.
  또한 독의 제조와 해독에 사용되는 약재 역시 충분히 비축되어 있다. 무사들이 세가를 비우면 그것들은 묵회의 차지가 될 것이다. 동원된 전력이 강시들뿐이라서 비록 지금은 손을 대지 못하겠지만 오늘 내로 무사들을 불러서 묵회로 실어갈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 때문에 데이몬은 모용세가의 창고를 털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지."
  어차피 데이몬에겐 상관할 게 전혀 없었다. 그에겐 한계가 없는 마법보고 인크레시아가 있었고, 강시의 이목을 피해 자유롭게 돌아다닐 마법실력이 있었다. 데이몬은 두 손을 비볐다.
  "그럼 슬슬 작업을 시작해 볼까?"
  그의 발길이 향하는 곳은 모용세가의 내원이 있는 곳이었다.

          (『데이몬』 제3권에서 계속)

          김정률 작가 팬카페 cafe.daum.net/S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