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데이몬 1권 (다크메이지 2부) cafe.naver.com/pantagi (울까페~) 스캔닉네임 : 고통이란 (고통이란님 스캔자료참고) 타이핑닉네임 : 아카이아 서(序) 다른 세상과 달리 중원에는 그 안에 또 다른 세상이 하나 존재하고 있다. 바로 무림이라는 곳이다. 무예의 단련에 모든것을 바친 인간들의 세상. 내가 이렇게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과거에 무림인 출신이기 때문이다. 마왕이 된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하겠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 말은 반드시 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마왕이 될 수 있었던 근거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중원의 강대한 무림문파 중 하나인 배교 교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혹자들은 그런 겉모습에 혹해 날 행운아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 입장에서는 말짱 개소리에 불과하다. 어린 자식을 적의 손에 던져주고 허무하게 함정에 빠져 죽은 독고무기란 작자가 바로 내 아버지였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원망하진 않는다. 지금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에게 유일하게 섭섭한 점은 날 곱추에다 지극히 추악한 얼굴로 태어나게 만들었다는 것뿐이니까.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마왕의 권능을 가진 지금이라면 얼굴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뜯어고칠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지금 내가 가진 몸은 예전의 내 것이 아니라 아르카디아의 어느 멍청한 왕자에게서 빼앗은 몸이다. 깊이 따지고 들면 이야기가 복잡해지니깐 간단히 결론만 말하겠다. 중원에서의 내 삶은 철저히 다른 누군가에 의해 조정되어졌다. 한 마디로 꼭두각시의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각만 해도 피가 끓어오른는 이름. 사!준!환 마왕에 된 지금 내가 소멸될 위험을 감수하면서꺼지 중원으로가려는 이유는 바로 사준환 그놈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다. 중원으로 건너가 사준환 녀석을 손봐지지 않는다면 결코 제 명에 살지 못할 것 같다. 사준환은 철저히 내 인생을 농락했다. 아버지 독고무기를 유인해 적의 험정에 빠지게 만든 것도 사준환이고, 내가 어릴 적부터 적의 소굴인 소림사에서 멸시받으며 살게 만든 것도 사준환이다. 그런 나를 다시 구해 와서 저주받은 마공인 철자혈마공을 익히게 한 것도 역시 사준환의 소행이며, 목적을 달성하고 난 뒤 날 헌신짝처럼 내버린 것도 사준환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에 대한 원한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놈의 배신에 의해 난 충직했던 수하들을 모두 잃고 무림공적으로 전락해야 했다. 정사마를 초월한 헤아릴 수 없는 무사들이 날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뒤쫓아 왔다. 아무리 내가 초절정의 반열에 오른 고수라도 떼거지로 덤비는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는 법. 나는 오래지 않아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궁지에 빠진 날 구해준 이들은 바로 트루베니아에서 차원이동을 해 온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에 의해 난 의식을 잃은 상태로 중원과는 시간과 공간이 다른 트루베니아라는 세계로 옮겨졌다. 트루베니아는 중원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마법이 존재했고 몬스터라는 괴물들이 존재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드래곤이란 존재였다. 지금껏 세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생명체보다도 강인하며 파괴적인 생물이 바로 드래곤이다. 난 이곳에 와서 트루베니아의 인간들이 바로 그 드래곤과 맞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법사들이 날 데리고 온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드래곤과 싸워줄 전사를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헛다리를 짚어도 너무도 엉뚱하게 짚었다. 운이 없어도 지지리도 없는 놈들. 많고 많은 중원의 무사중에서 하필이면 날 선택하다니 말이다. 최후의 결전에서 전신의 잠력을 모두 터뜨린 대가로 난 무공을 잃어버렸다. 일개 병사조차 제대로 상대하기 힘든 몸이 된 것이다. 내가 아무런 쓸모도 없는 폐물이 된 사살을 알자 그들은 날 헌신짝처럼 내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내 근성을 과소평가했다. 무공을 깡그리 잃었지만 나는 마법이라는 학문에서 해법을 찾아냈다. 무공을 잃은 내가 힘을 되찾을 방법은 오로지 마법뿐이었다. 이후 나는 죽어라고 마법을 익혀 어느 정도 힘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드래곤들은 어줍잖은 힘으론 상대하기 힘든 존대들이다. 노스우드에서 벌어진 최후의 결전에서 인간의 결사대는 완전히 전멸해 버렸고, 난 드래곤의 손에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드래곤의 포로가 된 것이다. 이후 트루베니아는 멸망해 버렸다. 인간들에게 허락된 곳은 오직 바다 건너 아르카디아뿐이었다. 다른 차원의 인간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는지 드래곤은 나를 죽이지 않고 리치로 만들었다. 늙지 않는 언데드로 만들어 자신의 레어를 영원히 지키게 만들었던 것이지. 물론 그것은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드래곤들도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나를 과소평가했다. 내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난 리치가 된 5백년 동안 드래곤의 마법서를 훔쳐내어 죽자고 마법을 익혔다. 운이 좋았는지 인간으로서는 궁극의 경지라는 9서클의 벽을 돌파할 수 있었다. 힘을 얻는 나는 드래곤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유유히 레어를 탈출했다. 드래곤들의 보불창고를 털어 한 밑천 단단히 잡은 다음에 말이다. 내 일생은 파란만장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의 삶으로는 정말로 기구하지 않은가? 나는 자신한다. 인간 중에서 나만큼 기구한 삶을 산 이는 없을거라고. 각설하고, 힘을 얻은 나는 드래곤의 지배 하에 있던 트루베니아 대륙을 탈출했다. 그리고 아르카디아로 건너가 그곳 인간들의 힘을 빌렸다. 알아주는 사고뭉치인 내가 감히 날 건드린 드래곤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지. 흐흐흐. 아무튼 나는 아루카디아의 조력을 얻어 트루베니아를 지배하고 있던 드래곤들에게 다시 한 번 도전장을 날렸다. 물론 전쟁의 양상은 오백 년 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드래곤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던 나란 존재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던 존재들은 다름 아닌 언데드들 이었다. 드래곤의 레어를 털 때 얻은 봉인구(대마왕 나이텔하르크가 봉인된)로 말미암아 나는 언데드를 통솔할 수 있는 최강의 네크로멘서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운명을 또다시 옥죄는 족쇄였을 줄이야. 종족전생이 한창일 당시 난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다. 내가 야금야금 마력을 빌려 쓰고 있는 봉인구의 주인이 정신을 차린 것이다. 이름하여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의 현신. 흑마법사나네크로멘서는 한 마디로 말해 마왕의 밥이나 다름없다. 그에 따라 난 모든 것을 나이델하르크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런 날 구해준 것은 바로 율리아나라는 버릇없는 계집애였다. 그녀의 희생에 이어 중원에서부터 걸려 있던 고도의 금제술 칠종단금술 덕분에 나는 잃었던 몸과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덤으로 나이델하르크가 가지고 있던 마력의 원천 절반과 함께. 죽을 고생을 해서 마왕을 물리친 나는 나이델하르크가 이룩해놓은 데스 나이트 군단을 이끌고 마계로 건너갔다. 나이델하르크가 가지고 있던 마력의 원천, 그 나머지 절반이 내가 노리는 목표였다. 누가 건드리면 결코 가만히 두지 않는 성미를 가진 내가 나이델하르크를 가만히 내버려 둘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아무튼 난 마계로 건너가서 빈사상태의 나이델하르크를 완벽히 소멸시키고 마력의 원천을 내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으니.... 당시 마계를 지배하고 있던 윗대가리들은 날 인정하지 않았다. 마력의 원천을 온전히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왕들은 내 출신이 인간이라는 점을 문제 삼아 파상적으로 공격을 가해왔다. 그들의 목적은 한 가지, 내가 가진 마력의 원천을 모두 빼앗아 힘을 불리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순순히 당한다면 나 데이몬이 아니지. 흐흐흐. 난 나에게 쏠린 모계의 척살령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고를 쳤다. 그것도 엄청나게 큰 사고였다. 얼마 남지 않는 부하들을 이끌고 천상계를 침공해 버렸단 것이다. 물론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힘이 절정기에 달해 있던 천족들이 내가 친 사고를 정신 나간 마왕 하나의 분탕질로 인정하지 않고 천상계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보고로 인식한 것이다. 결국 나 하나로 인해 신마대전이 벌어졌다. 지금까지 벌어진 천상계와 마계의 전쟁 중 가장 큰 규모였고, 헤아릴 수 없는 천족과 마족들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소멸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난 예나 지금이나 사고치는 데는 일가견이 있나보다, 쩝. 아무튼 내가 일으킨 신마대전으로 인해 마왕들은 더 이상 나를 적대시할 수 없게 되었다. 마계의 가장 큰 두목이 천상계와의 전면전을 위해 사소한 다툼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밝힌 때문이다. 내가 가진 마력의 원천을 호시탐탐 노리던 마왕들도 더 이상 날 건드릴 수 없게 되었다.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거기에서 만족한다면 역시 나 데이몬이 아니다. 내 장기가 무언가? 두루 사고를 치고 그 여파를 널리 퍼뜨리는데는 감히 날 당해낼 작자가 없다고 자부한다. 어릴 때무터 붙은 별명이 바로 사고뭉치 아니었던가. 난 내 장기를 좀더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같은 편에게 사고를 칠 순 없으니 자연히 대상은 천상계가 될 수밖에 없는 법. 내 분탕질로 인해 천상계는 엄청나게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신마대전이 처음의 기세와는 달리 오래 가지 못하고 금세 휴전협정을 맺게 된 이유가 사고뭉치인 나 때문이었으니, 내 활약상에 대해서는 세세히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결국 난 그 전쟁을 통해 확실하게 마계의 군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사고뭉치답게 그 어떤 마왕보다도 큰 타격을 천상계에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천상계의 천족들이 내 이름 석 자를 들으면 몸서리를 친다고 하니 내 활약상에 대해서는 묻지 않아도 될 것이다. 게다가 사고치는 매 모습에 반한 마족들과 마물들로 인해 난 확실하게 마계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원조인 나이델하르크보다 더욱 넓은 영토, 더욱 많은 군대, 더욱 강력한 마력을 가진 마왕으로 거듭난 것이다. 마왕이 된 이후 나의 삶은 그 어떤 인간이 보더라도 부러워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풍족해졌다. 그 중 첫 번째는 내가 다스리는 마계왕국의 구성원들을 손가락 하나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자?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비록 인간 여자들은 없지만 그보다 백배, 천배 아름다운 서큐버스나 뱀파이어 일족이 손가락질만 해도 감격에 겨워 수청을 단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충성심에 불타는 부하들이 세상 어디든 가서 요리를 구해 온다. 심심하면 옆 동네 마왕인 바말이나 위리놈의 영토에 가서 신나게 분탕질치고 오면 된다. 놈들이 엄청 열 받겠지만 내가 상관할 것은 없다. 마계란 본시 힘을 가진 놈이 장땡이고, 그놈들보다 내 마력이 월등히 강하니 놈들이 감히 어쩌겠는가? 마력의 원천으로 인해 불노불사의 몸이 된 이상 난 세상의 종말이 닥칠 때까지 마계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솔직히 말해 내가 부러울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난 얼마 지나지 않아 마왕의 생활에 슬슬 진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내 마음속에 갈무리된 사준환에 대한 복수심과 나를 대신해 죽은 한 계집아이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비록 결과적으로 전화이복이 되었지만 난 나를 궁지에 몰아넣은 사준환이란 놈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만약 중원으로 건너가 놈에게 복수를 하지 않는다면 난 분명히 화병에 걸릴 것이다. 기나긴 마계 역사상 화병에 걸려 죽은 마왕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일단 내 심정은 그렇다. 사실 난 마왕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금제술에 걸려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을 죽일 수 없는 치욕적인 금제술이다. 정말 웃기지 않는가? 당당한 마계의 마왕이 인간 하나 마음대로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지만 사실이다. 칠종단금술이라는 이 웃기지도 않는 금제술이 존재하는 한 난 어떤 일이 있어도 인간을 죽일 수 없다. 뭐, 그렇다고 해서 원망스럽지는 않다. 만약 칠종단금술이 없었다면 난 마왕이 되지 못하고 나이델하르크에게 흡수되어 버렸을 테니까. 사준환을 죽일 수 없다고 해도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는 않다. 사준환이란 놈은 엄청나게 큰 야망을 가진 녀석이다. 그런 녀석에겐 죽이는 것보다 야망을 송두리째 깨뜨려버리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복수가 될 수 있다. 중원으로 건너가 놈을 야금야금 파멸시킬 것을 떠올리니 생각만으로도 피가 끓는다. 흐흐흐. 그리고, 나를 위해 죽어간 율리아나. 율리아나는 드래곤의 레어에서 탈출해 아르카디아를 떠돌아다닐 당시 만났던 인간계집애이다. 내가 틈만 나면 골탕을 먹였지만 어찌 된 게 같이 지내다보니 날 짝사랑하게 된 모양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내가 잘나긴 좀 잘났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 계집애는 내가 나이델하르크에 의해 중기에 몰려 있을 때 자신을 희생하여 나를 구해냈다. 그 게집애의 희생과 칠종단금술의 발동이 아니었다면 난 세상이 끝날 때까지 나이델하르크의 일부로 존재해야 했을 것이다. 율리아나는 마왕의 손에 의해 죽었기에 영혼이 오염되었고, 결국 신의 분노를 샀다. 때문에 그녀는 지극히 불우한 운명으로 환생을 거듭하며 그 업을 갚아야 한다. 난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다. 생각해 보라. 날 살리고 죽은 계집아이가 신의 저주를 받아 거듭해서 기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난 결심했다. 내가 지닌 마왕의 권능을 이용해 끊임없이 윤회되는 율리아나의 삶에 간섭해 보기로 말이다. 얼마나 바꿀 수 있을지 모르지만 힘닿는 데까지 해볼 작정이다. 그것이 날 위해 죽은 율리아나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제 난 여행을 떠날 작정이다. 이곳 마계 왕국이야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다. 충직한데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리치 슈렉하이어(사실 이 녀셕이 날 중원에서 트루베니아로 데리고 온 존재이다)와 트루베니아에서 거둬들인 데스 나이트들이 나를 대신하여 마계왕국을 잘 다스려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내 왕국은 윗대가리들이 대부분 인간 출신이다. 리치인 슈렉하이머가 집정관을 맡고 있으며, 내 군대의 사단장이나 대대장 급들은 하나같이 데스 나이트들이다. 나는 그들에게 방대한 마력을 허락하여 비약적으로 강화시켰다. 리치였던 슈렉하이머는 아크리치가 되었고, 데스 나이트들은 지금까지 없었던 데스 킹이 되어버렸다. 데스 킹 하나가 투마 발록과 막상막하로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으니 내가 얼마만큼의 마력을 쏟아 부었는지 익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은 비밀이다. 발록 일족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그 즉시 반란을 일으킬 테니까. 그들이라면 휘하의 마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금세 진압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옆 동네 마왕들이 분탕질을 쳐도 가볍게 격퇴할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한다. 그러니 내가 떠나는 데 걸림돌은 없다. 이제 출발할 시간이 다 되었다. 일단 트루베니아로 건너가서 시간대를 맞춰 차원이동 마법진을 발동시킬 작정이다. 내가 떠나왔을 때와 최대한 근접하는 시간대를 택할 것이기 때문에 운이 나쁘지 않다면 사준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놈이 이미 늙어 죽었으면 어쩔 수 없이 복수를 접어야겠지만. 중원으로서의 차원이동에는 한 가지 위험성이 있다. 그곳에서 죽을 경우 마계에서의 부활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운이 나쁠 경우 영원히 소멸되어버릴 수도 있다. 슈렉하이머도 그 점을 염려하며 나의 차원이동을 극구 만류했다. 하지만 뼈다귀만 남은 늙은이가 감히 내 고집을 꺾을 순 없다. 어느 정도의 위험성이 따르는 여행이야말로 더욱 짜릿한 법이니까. 중원에서 복수를 마치더라도 난 당분간 마계로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다. 율리아나가 환생되는 차원대를 찾아가서 그녀의 삶에 관여하려는 것이 내 계획이니까. 생각컨대 꽤나 오랜 여행이 될 것 같다. 흐흐흐. 정말 짜릿하지 않는가? 마계에서의 영생을 마다하고 자칫 잘못하면 소멸될 수도 있는 위험한 여정을 준비하는 내 계획이. 어차피 삶은 도박이다. 난 이 도박에 나의 모든 것을 걸 것 이다.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 모두들 기대하기 바란다. 나 마왕 데이몬의 도박이 과연 어떻게 결론지어질 것인가를. 1. 마왕 데이몬,강림하시다 천산. 파미르 고원의 줄기에 위치한 험준한 산을 일컫는 중원식 지명이다. 당대 서역과의 교역이 이루어지던 실크로드의 출발점이며, 극히 웅장한 산세와 가파른 지형은 인간으로 하여금 감히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곳은 해발이 높은 고원지대다. 그러므로 이곳에 적응해 살아가는 몇몇 소수부족을 제외하면 제대로 숨쉬는 것조차 힘들다. 그래서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을 찾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험준한 천산의 후미진 곳에 뜻밖의 방문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중원과는 시공간적으로 전혀 동떨어진 차원에서 온 방문자였다. 쿠르르릉 조금 전만 해도 맑고 청명하던 날씨기 급변했다. 먹구름이 모여들어 하늘을 뒤덮었고, 아득히 먼 곳에서 우레가 울려 퍼졌다. 이어진 것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퍼붓는 소나기였다. 쏴아아아 느닷없이 소나기가 쏟아졌지만 동요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곳은 척박한 고원의 환경에 적응한 원주민조차도 을 들이지 못할 정도로 험준한 곳. 그러니 쏟아지는 빗속에서 벌어지는 기현상을 목격한 이는 전무했다. 파츠츠츠츠 난데없이 허공에 불그레한 방전현상이 일어났다. 처음엔 주먹만 하던 전하덩어리가 시간이 갈수록 커지더니 마침내 집채만 하게 몸집을 불렸다. 그러더니 눈부신 빛을 사방으로 내뿜으며 폭발했다. 푸학 방전현상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먹구름이 걷혔다. 언제 소나기를 퍼부었냐는 듯 태양이 먹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대지를 따사롭게 어루만지던 태양 빛에 뭔가가 비쳤다. 방전현상이 소멸된 바로 그 장소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물체가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다. 마치 태곳적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존재감을 뿌려대는 존재의 정체는 인간이었다. 이제 겨우 스물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 놀랍게도 청년은 허공에 우뚝 멈춰 서 있었다. 고도의 무공고수나 선보일 수 있을 법한 허공답호를 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청년의 몸이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느릿한 광소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후후후, 드디어 돌아왔다. 내가, 이 데이몬이 다시 중원으로 돌아왔단 말이다!" 고함소리가 험준한 천산의 산골짜기로 퍼져나가며 메아리쳤다. 하지만 그 광소를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초목만이 그 서슬에 놀라 몸을 파르르 떨 뿐이다. 이윽고 청년이 대지에 굳건히 발을 디뎠다. 쿠웅 청년은 감개무량하다는 표정으로 대지를 내려다 보았다. 보는 것만으로 직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허리를 굽혀 한 움큼의 흙을 집어 들었다. "도대체 몇 년 만인가? 대관절 얼마 만에 맡아보는 중원의 흙냄새인가?"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움켜쥔 흙을 얼굴에 문지르는 청년의 모습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겉으로 보기에 청년은 완벽한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윤기 흐르는 금발에 푸른 눈동자, 쭉 뻗은 콧대와 희디 흰 피부는 중원인과는 확실한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청년의 행동은 마치 오랫동안 이곳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중원인과 다름이 없었다. 도대체 청년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실마리는 이어진 청년의 독백에서 서서히 베일을 벗고 있었다. "이곳을 떠나던 당시 나는 무림공적으로 무공마저 깡그리 잃고 쫓겨나듯 트루베니아로 끌려가야 했다." 느릿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청년의 눈에서 서서히 광망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난 되돌아 왔다. 그것도 당당한 마계의 마왕이 되어....." 당시를 회상하는 데이몬의 눈빛은 눈에 띄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처절했던 당시의 상황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느닷없이 이곳에 현신한 청년 데이몬. 그의 진정한 정체는 마계의 마왕이었다. 인간 출신으로 마계로 건너가 온갖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당당한 마계의 군주가 된 그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저벅저벅 데이몬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절벽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발 아래로 광활한 대지가 활짝 펼쳐졌다. 끝없이 펼쳐진 장대한 지평선. 그 너머에는 데이몬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중원이 존재했다. 데이몬의 눈동자에 애증이 쉴 새 없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토록 엄청난 난관과 인간으론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경험을 겪고 돌아왔건만 중원의 산하는 전혀 변함이 없군. 후후, 그 누가 알까? 내가 트루베니아로 건너가서 겼었던 그 엄청난 일들을 말이야." 절벽 가장자리에 앉아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내려다보며 데이몬은 누군가를 떠올렸다. 자신을 이곳으로 오게 만든 존재, 사준환을 떠올리지 데이몬의 눈동자에 급격히 살광이 떠올랐다. "간악한 놈,크윽...." 별안간 데이몬은 안색을 찌푸렸다. 뇌리 한쪽에서 전해지는 극심한 고통 때문이었다. 평생 자신을 옭죄어 온 천고의 금제 칠종단금술이 살심을 품음과 동시에 발동된 것이다. 데이몬은 사력을 다해 살심을 가라앉혔다. 소림성승 혜정에 의해 베풀어진 칠종단금술은 마왕이 된 지금까지도 데이몬으로 하여금 사람을 죽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군. 놈에게 살심조차 품을 수 없다는 사실이...." 중원을 떠날 당시 데이몬은 사준환에게 완벽히 속아 넘어갔다. 너무도 믿었기에 배신당한 아픔이 더욱 컸을지도 모른다. 마지막까지 사준환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데이몬은 그야말로 완벽한 파멸의 순간을 맞아야 했다. 만약 트루베니아에서 건너온 마법사들이 손을 쓰지 않았다면 데이몬은 그때 죽어 아직까지 중원을 정처 없이 떠도는 망령이 되어 있으리라. 당시를 상기해 본 데이몬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쨋든 이미 지나간 과거나.나에겐 앞으로도의 일이 중요할 뿐이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 상념을 날려버린 데이몬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목적은 복수. 자신을 철저히 파멸시킨 사준환에게 복수하기 위해 차원의 터널을 지나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차원이동의 술은 지극히 위험하며 또한 불안정한 마법이다. 만에 하나 과정이 어긋난다면 제 아무리 강인한 마왕의 육신을 가진 데이몬 이라도 일순간에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한 채 중원으로의 차원이동을 감행했다. 사준환에 대한 분노가 그 정도로 컸기에. 데이몬의 입매가 미묘하게 비틀렸다. "트루베니아와 마계에서 수백 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사준환에 대한 복수심은 전혀 누그러지지 않는군. 그놈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놈의 포부로 보아 범상치 않은 세력을 보유하고 있을 텐데." 중원과 트루베니아는 시간의 흐름이 다른 세계이다. 트루베니아에서의 수백년이 고스란히 중원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확신은 금물이었다. 데이몬으로서는 복수의 대상인 사준환이 천수를 다하고 죽었을 가능성까지 생각해야 했다. "최대한 시간대를 비틀었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일단 지금이 언제인지부터 알아봐야겠군." 절벽이래 지평선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데이몬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산길을 걸어 내려오는 동안 데이몬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앞으로 중원에서 벌릴 일들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마계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은 마왕이다. 여타의 마왕들조차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전투능력과 막강한 군대까지 보유한 강력힌 군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사정이 많이 다르나. 제 아무리 강한 존재라도 다른 차원에서는 보유한 권능을 제한 받는 법. 그렇지 않다면 강력한 마계의 마왕과 마족들이 진즉 인간계를 손아귀에 거머쥐었을 터였다. 공평한 신의 저울추는 이계의 존재들이 다른 차원에서 절대적인 권능을 자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때문에 마계의 존재들이 인간계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지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차원이동을 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힘을 소모해야 한다. 때문에 그토록 많은 마왕들이 인간계에 발을 디뎠지만 뜻을 이룬 자는 거의 없었다. 그것은 데이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비록 그가 중원에서 건너간 인간 출신이지만 이곳에서 그가 지닌 권능을 모두 발휘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데이몬은 눈을 빛냈다. "트루베니아에서 내가 발휘할 수 있었던 능력은 기껏해야 30퍼센트 남짓이었다. 하지만 중원에서는 그나마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현상계인 트루베니아는 마계와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다. 때문에 그곳에서 죽더라도 소멸되지는 않는다. 단지 엄청난 타격을 입고 마계로 강제귀환될 뿐이다. 하지만 중원은 달랐다. 중원은 마계와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세상. 따라서 이곳에서 죽을 경우 완전히 소멸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 위험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냥 잊어버리기엔 사준환에 대한 복수심이 너무도 강렬했다. 입술을 비집고 광소가 터져 나왔다. "완벽하게 파멸시켜주마,사준환.기다려라.흐흐흐." 실컷 웃고 난 데이몬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법. 우선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 세세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몸 상태를 파악하는 시간은 무척 길었다. 이곳은 마왕의 권능이 온전히 먹혀들지 않는 또 다른 차원이기 때문에 몸 구석구석, 터럭 하나하나까지 세세히 헤아려서 힘을 축정해야 했다. 잠시 후 데이몬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생각보자 상황이 나쁘군.암흑투기가 전혀 보통되지 않아." 데이몬이 지닌 마왕의 권능은 큰 갈래로 보면 암흑투기와 어둠의 마력으로 나뉜다. 암흑투기란 직접적인 격전을 벌일 때 소용되는 권능이다. 적의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며 또한 공격할 때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나이델하르크를 물리칠 당시 데이몬은 이 암흑투기를 내공처럼 운용해서 큰 효과를 보았다. 순수한 암흑의 기운인 암흑투기는 어찌 보면 정순한 내공보다도 효과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 자체가 마기의 집결체라서 정통 도가의 심법으로 기른 내공보다도 순수하기 때문이다. 당시 데이몬은 이 암흑투기의 힘을 적절히 이용해 무에 있어서 공극이라는 현경의 경지를 단숨에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암흑투기가 일체 보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데이몬의 몸속에는 마력의 근원이 존재하고 있다. 암흑투기와 어둠의 마력을 자체적으로 생성해내는 기관으로서 데이몬은 이 마력의 근원을 나이델하르크에게 빼앗음으로써 진정한 마왕이 될 수 있었다. 데이몬이 살아 있는 한 마력의 원천은 끊임없이 암흑투기와 어둠의 마력을 생성해낸다. 그런데 그 권능 중 하나인 암흑투기가 생성되지 않으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데이몬으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제길 반쪽짜리 마왕이 되고 말았군. 암흑투기가 없다면 이곳의 무사들과 싸우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는데...." 차원이동의 과정에서 데이몬은 상당량의 암흑투기와 어둠의 마력을 소모했다. 때문에 데이몬의 몸속에 남은 암흑투기의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한 번 정도 고수와 겨룰 수 있을 정도. 반면 어둠의 마력은 사정이 달랐다. 비록 보충되는 시간이 마계보다 느렸지만 착실하게 소모된 양을 채워가고 있었다. 데이몬의 얼굴에 착잡함이 어렸다. "오직 마법만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로군." 어둠의 마력은 마법과 관련이 있는 권능이다. 이것으로써 마나를 다스리고 재배열하여 마법을 발현시킬 수 있다. 물론 언데드를 만들어 내거나 마물 소환 따위의 권능이 있기도 하지만 중원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다고 봐야했다. 언데드 따위로는 수준 높은 중원 무사들을 감당하기 힘드니 말이다. 트루베니아와는 달리 이곳에서 검기를 구사하는 고수들이 즐비하게 널려있다. 그래서 트루베니아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는 데스 나이트라도 중원에서는 섣불리 먹히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중원의 고수들이 발산하는 검기는 단단한 데스 나이트의 몸뚱이를 단숨에 쪼개버릴 테니까. 또한 마믈 소환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이곳은 트루베니아와는 달리 마계와 연결고리가 전무한 차원이라서 소환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때문에 데이몬이 선택할 수 있는 패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마법사로 활동해야 겠군. 역대 처음으로 중원 무림에서 활동하는 마법사가 등장하겠어." 답답했는지 데이몬은 손을 뻗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마법사는 근접전에 약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물론 다수의 병력을 상대할 겨우나 원거리에서는 마법사의 효용이 월등히 높다.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마법이니까. 그러니 마법은 발동되는 시간이 너무도 길다는 단점이 있다. 그 시간이면 주문을 외우기도 전에 무림 고수의 검기에 목이 떨어져 나갈 것이 분명하다. 또한 중원은 트루베니아보다 마나분포도가 월등히 희박하다. 따라서 중원에서 마법을 발현시키려면 더욱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런 단점이 있지만 데이몬의 선택할 수 있는 패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어쩔 수 없지. 미리 세워두었던 계획을 대폭 수정하는 수밖에." 원래 데이몬은 막강한 마왕의 권능을 이용해 사준환의 휘하세력을 철저히 부숴 버리려는 계획을 세웠다. 물론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금제가 있긴 하지만 방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고로 중원의 무인들은 자신이 익힌 무공을 목숨보다도 중요시한다. 따라서 데이몬은 자신이 당했던 방법을 그대로 사준환에게 돌려주려는 계획을 세웠다. 단전을 깨뜨려 무공을 전폐하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사준환을 비롯해 그가 거느린 세력의 구성원들 모두를 대상으로. 그러나 뜻하지 않은 상황 때문에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암흑투기를 사용할 수 없는 이상 계획의 전폭적인 수정인 불가피했다. "어쩔 수 없지.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겠군." 데이몬은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적장했다. "나에게 시간은 많다.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사준환의 야망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수밖에...." 머리를 한든 데이몬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그가 입고 있던 옷은 차원이동의 압력으로 인해 갈가리 찢겨나가 있었다. "일단 믿을 것은 인크레시아에 넣어온 세 명의 수하뿐이로군. 데스 나이트 군단을 넣어왔더라면 상황이 조금 나았을까?" 생각을 거듭하던 데이몬은 머리를 흔들었다. 제 아무리 강력한 데스 나이트라도 중원에서는 큰 힘을 쓸 수 없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데이몬의 마계 왕국을 지키는 막중한 책무를 지워놓지 않았던가. "어찌 보면 중원에서는 데리고 온 세 수하들이 더욱 쓸모 있을 수도 있어. 일단 하나를 먼저 불러내야 겠군." 주의를 둘러본 데이몬은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그가 지닌 무한의 보물창고 인크레시아를 불러내려는 것이다. 수인을 맺자 아무 것도 없던 허공의 대기가 뒤틀렸다. 쓰쓰쓰쓰 이어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거무스름한 음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오랜만이라군, 인크레시아. 마계에서는 쓸 일이 거의 없어서 널 불러내지 않았다." 허공을 가르고 모습을 드러낸 검은 음영. 그것이 바로 인크레시아였다. 드래곤들이 합심해서 만들어낸 아공간을 이용한 창고. 그 속에는 데이몬이 드래곤으로부터 탈취한 보물과 함께 세 명의 수하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데이몬은 그 수하들 중 하나를 불러내려 하고 있었다. 나지막한 음성이 인크레시아 안으로 울려 퍼졌다. "어서 나와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인크레시아가 부르르 뒤틀렸다. 이어 뭔가 시커먼 것이 음영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크아아아." 모습을 드러낸 은 거구의 사내였다. 치렁치렁 늘어진 갈색 머리에다 움푹 패여 들어간 눈매가 인상적인 사십 전후의 중년인으로서 잘 단련된 몸매가 일품이었다. 그는 190센티미터가 넘는 장신이었는데, 우람한 상체에는 가 죽갑옷을 걸친 뒤 그 위에 무척 단단해 보이는 브레스트 플레이트를 입고 있었다. 허리에는 각각 한 자루씩 배틀 엑스와 육중한 메이스를 찼다. 데이몬을 보자 사내는 즉각 엎드려 예를 표했다. 지극히 공손한 태도였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마법보고 인크레시아 내부의 환경은 매우 혹독하다. 생명체는 단 몇 초도 생을 유지하지 못하는 곳이다. 모습을 드러낸 사내의 몸 여기저기에 서리가 서려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인크레시아는 원천적으로 생명체를 수납할 수 없는 마법창고다.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르는 생명체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인크레시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도대체 사내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인크레시아 안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을까. 의문점은 곧바로 이어진 데이몬의 독백으로 풀리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로구나, 윈슬럿." 윈슬럿이라 불린 사내는 마치 감격스럽다는 듯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그런 윈슬럿을 내려다보는 데이몬의 시선은 물처럼 고요했다. "너는 듀라한이다. 하지만 너는 이제 듀라한이라 불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내가 다량의 마력을 불러 넣어준 덕택에 넌 이제 듀라한을 능가하는 존재가 되었다." 듀라한. 형장에서 목이 잘린 시체를 일으켜 세운 언데드의 일종이다. 원한이 깊으면 깊을수록 양질의 듀라한이 탄생하며,그 전투력은 거의 데스 나이트에 육박할 정도로 막강하다. 어깨 위에 붙어있어야 할 머리를 마치 철퇴처럼 휘드르며 달려드는 듀라한은 그 자체가 공포의 상징이다. 그러니 자체적인 사고능력이 없는 관계로 언데드 군대의 지휘관으론 쓸 수 없다. 따라서 데스 나이트와는 달리 일선에서 싸우는 전사로 활용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나 데이몬은 이례적으로 마력을 허락해서 윈슬럿을 비약적으로 강화시켰다. 왼손에 들고 있어야 할 머리통이 제자리에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원래 윈슬럿은 아르카디아에서 악명이 자자한 까마귀 용병단의 단장이었다. 피와 살육을 광적으로 즐기는 성품 때문에 수많은 왕국에서 그의 목에 현상금을 내걸었다. 그럼에도 무예 실력이 워낙 뛰어난 윈슬럿은 추격대를 여러차례나 파멸시키고 도주를 거듭했다. 그러나 수로 밀어붙이는 데에는 장사가 없는 법. 힘이 빠진 윈슬럿은 사로잡혔고 결국 형장에서 목이 잘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의 시체는 윈터데일이라는 흑마법사의 손에 들어갔다. 그는 윈슬럿의 시체를 듀라한으로 만들었다. 데이몬은 바로 그 윈터데일의 손에서 윈슬럿을 빼앗은 것이다. 이후 윈슬럿은 데이몬의 충직한 수하가 되었다. 그리고 신마대전 당시 데이몬 휘하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데이몬은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윈슬럿을 쳐다보았다. "내가 널 데리고 온 데는 이유가 있다. 일단 너는 데스 나이트와는 달리 요기나 마기를 전혀 내뿜지 않는다. 겉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인간이기에 다른 부하들을 마다하고 널 선택한 것이다. 그러니 내 수행원으로 잘 행동해 주기 바란다. 알겠는가?" "크아아아." 윈슬럿은 알았다는 듯 나지막이 부르짖었다. 목이 제자리에 붙어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듀라한이었던 터라 말을 할 수 없다. 그러나 데이몬과의 의사소통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몸에 어둠의 마력이 존재하는 한 데이몬은 언제 어디서나 윈슬럿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일단 옷을 좀 갈아입어야겠군." 데이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윈슬럿이 등에 멘 배낭을 풀었다. 거의 어른 몸뚱이만 한 큰 배낭이었다. 무게가 상당해 보였지만 윈슬럿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배낭을 풀어헤치자 옷가지와 함께 잡다한 물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원 여행에 대비해 트루베니아에서 장만해 온 물품들이었다. "오랜만에 중원 나들이인 만큼 산뜻하게 차려입어야 겠지?" 데이몬이 고른 것은 왕족들이나 걸칠 법한 호화로운 복장이었다. 누더기가 된 옷을 벗은 데이몬은 새로 꺼낸 옷으로 갈아입었다. 검은색 빌로드로 된 튜닉을 걸치고 모직 바지를 입은 다음 물들인 사슴가죽으로 만든 부츠를 신자 데이몬의 외모는 멋들어지게 변했다. 반질반질 잘 닦인 윈슬럿의 브레스트 플레이트에 몸을 비쳐본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새겨졌다. "제법 괜찮군. 역시 옷걸이가 좋으니 맵시가 난단 말이야." 내친 김에 데이몬은 윈슬럿도 옷을 갈아 입혔다. 앞으로 사역의 부유한 귀족 신분으로 위장할 계획인 만큼 옷차림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다. 색이 바랜 가죽갑옷을 벗고 모직으로 된 검은색 기사의 예복을 걸치자 윈슬럿의 분위기도 판이하게 달라졌다. 거무튀튀한 배틀 엑스와 메이스는 보이지 않게 등을 둘러맸고, 허리에는 지극히 고풍스러운 롱소드를 찼다. 마지막으로 백색 망토를 등 뒤로 늘어뜨리자 치장이 모두 끝났다. 겉모습으로 보면 지체 높은 왕족의 그 수행기사의 차림새였다.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자, 가자.중원으로!." 배낭을 등에 짊어진 윈슬럿이 아무 말 없이 뒤를 따랐다. 둘의 모습은 인적 없는 산길을 싸라 동쪽으로 가고 있었다. 중원 땅에 첫 발을 내디딘 마왕의 행보는 바로 이곳 천산에서 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 * * * * * 호남성 장사. 관운장과 황충이 일대 대결을 벌였던 장소로 알려진 호남성의 성도이다. 장사의 외각에 있는 한 허름한 객작에 한 명의 손님이 들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허연 수염이 늘어진 노도사였다. 매화문양이 새겨진 도포가 그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게 했다. 화산의 장로 우명. 객잔에 든 노도사의 신분이다. 기분 나쁜 일이 있었는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지만 두 눈에서 뿜어지는 안광과 툭 튀어나온 태양혈이 그가 이룬 무의성취를 미루어 짐작하게 했다. 그가 들어서자 쥐상의 점소이가 재빨리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초로의 도사 우명은 느릿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식사 생각은 없다. 방으로 안내해다오." 점소이는 두 말도 하지 않고 노도사를 방으로 안내했다. 무림인을 상대하는 법을 비교적 잘 아는 점소이였다. "그럼 편히 쉬십시요." 공손이 머리를 숙이고 나가는 점소이를 일별한 노도사는 시선을 창 밖으로 던졌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마치 그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장사는 화산파가 속해 있는 섬서보다 훨씬 남쪽에 치우쳐 있다. 그 탓인지 후덥지근한 날씨가 더욱 우명의 심기를 거슬렀다. 생각을 거듭하던 우명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우명은 검으로 이름 높은 화산파에서도 알아주는 검의 고수이자 무림에 널리 알려진 명숙이었다. 장문인인 우허 진인과 사형제 사이이며 슬하에 네 명의 명 자 배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고, 그중 두 명이 또다시 제자를 맞아들여 사손까지 두고 있는 명망높은 무인이 바로 그였다. 그런 그가 섬서에서 멀리 떨어진 장사에 홀로 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은 그가 슬며시 펼쳐들고 있는 서찰에 숨겨져 있었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서찰을 훑어보던 우명은 노기를 참지 못하고 서찰을 구겨버렸다. "빌어먹을..." 도인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될 욕설. 우명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왜냐하면 서찰에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될 그의 치부가 낱낱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우명은 네 살의 나이에 고아 신분으로 화산파에 들어왔다. 쉰이 넘은 지금까지 화산의 일원으로 살아왔으니 거의 평생을 화산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문인의 사형이자 화산의 장로이며 제자와 사손까지 둔 인정받는 무림의 명숙인 우명. 그러나 그는 자신의 위치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그의 속 좁은 편협한 때문이었다. 오 년 전 정문인 자리가 사제인 우허 진인에게 돌아가자 그는 화산에 정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원래대로라면 사제 말고 내가 장문인 자리에 올라야 한다. 정사대전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니던가. 그런데 전쟁에 참가하지도 않고 본산에 머물고 있던 사제를 장문인으로 삼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목숨을 걸고 화산에 충성한 대가가 고작 이런 거라니....' 화산의 처사에 극심하게 실망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전대 장문인의 의지도 그러했고 나머지 정로들도 모두 우허 진인을 차기 장문인으로 밀었다. 편협하고 고집스러운 우명보다 너그럽고 포용력 있는 우허 진인이 장문인으로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우명은 도저히 그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우허보다 무공이 강하다. 그리고 화산을 위해 정사대전에서 엄청난 공을 세웠다. 이런 나를 홀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로도 이미 내려진 결정을 번복할 수는 없다. 그에 상심한 우명은 다른 곳에 눈을 돌렸다.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몇 가지 비리를 저지른 것이다. 장문인 직에서 밀려난 상실감을 그런 식으로 표출한 것이었는데, 문제는 그 비리를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점이다. 우명은 철두철미한 사람이다. 때문에 화산의 그 누구도 우명이 비리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우명은 은근히 그 사실을 즐겼다. 그런데 서찰을 보내온 정체불명의 집단에서 정확히 비리를 파악하고 있으니 우명의 심사가 편할 리 없었다. 우명이 제자 한 명 거느리지 않고 이곳 장사까지 온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우명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불끈 거머쥐었다. "삼경이라고 했지? 어쨌거나 일을 깔끔하게 처리해야 한다." 우명은 사건의 자초지종을 개략적으로 결론지어놓고 있었다. 그가 저지른 비리는 강호 제일의 소식통이라고 하는 개방에서도 눈치 채지 못하는 종류의 일이다. 가능성이 있다면 오직 하오문뿐이었다. 기녀들과 점소이 따위의 최하층 계층들이 속해 있는 하오문 말고는 비리가 드러날 곳이 없었다. 으득 자신도 모르게 검병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정이야 뻔하지. 하오문이나 혹은 살수집단 따위에서 우연히 얻은 장보를 빌미로 나에게 뭔가 청부를 넣으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잘못 생각했다. 나 우명이 그리 쉽게 조종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 점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 주마." 우명은 뛰어난 고수였다. 벌써 십 년 전에 절정의 경지를 돌파해서 초절정의 문턱에 머물러 있는 검의 고수였다. 뛰어난 화산의 상승검법을 극성까지 익혔고, 문하제자들을 이끌고 정사대전을 치름으로써 실전경험까지 겸비한 고수였다. 허접스러운 살수 나부랭이나 하오문원들은 제 아무리 수가 많더라도 우명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우명이 지닌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느긋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우명은 자세를 풀었다. "삼경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 대대적으로 살계를 내려야 할 테니 운기행공이나 해 둘까?" 가부좌를 틀고 앉은 우명은 즉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이경이 되자 인영 하나가 객잔을 빠져나갔다. 도포와 도관이 아니라 흑의에 복면을 걸친 우명이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야행복으로 갈아입고 서찰을 보낸 자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약속 장소는 산 속에 위치한 관제묘였다. 파파파팟 우명의 신형이 어둠을 뚫고 바람처럼 나아갔다. 화산의 신법 암향표를 극성으로 시전하는 우명의 모습은 한 마디로 꽃밭을 노니는 나비 같았다. 일 다경 정도 달리자 멀리 다 쓰러져 가는 건물이 보였다. 약속장소에 다다르자 우명은 몸을 살짝 접었다가 퉁겼다. 그의 신영이 나비처럼 유요하게 허공을 뛰어올랐다. 휘청 나뭇가지를 사뿐히 디딘 우명이 이번에는 나무 위를 달렸다. 부근에 잠복중인 놈들을 먼저 찾아내어 처리하려는 계획에서였다. 우명의 눈동자에 경멸이 어렸다. '누군지 모르지만 보나마나 부근에 방조자들을 매복시켜놓았을 것이다. 모두 죽이고 한 놈만 사로잡아 놈들의 정체를 먼저 밝혀야겠다.' 감각을 끌어올리자 귀가 밝아지며 숲 속의 기척이 여과 없이 우명의 감각에 걸려들었다. 경지에 오른 고수의 이목은 야생동물보다도 더 영민하다. 수준이 떨어지는 무사들이라면 결코 이목을 벗어날 수 없다. 이목을 속일 수 있는 존재는 그보다 고수 아니면 전문적으로 은신을 배운 살수뿐이다. 그러나 우명은 이미 초절정에 근접한 고수. 고도의 은신술을 배운 살수라도 그 정도 고수의 이목을 피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한동안 정신을 집중하여 주변을 살피던 우명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이상하군. 아무도 매복해 있지 않다니...' 고개를 갸웃거린 우명이 나무 밑으로 내려섰다. 상당히 높은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검 자루를 살짝 움켜쥔 우명은 발소리를 죽이며 관제묘를 향해 걸어갔다. 그 순간 나지막한 음성이 우명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왔으면 들어오시오, 우명 진인." 그 소리에 우명은 바짝 긴장했다. 음성에 실린 내력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하던 우명은 관제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관제묘 안은 어두운 편이었다. 그러나 고수인 우명의 눈에는 내부의 사물들이 대낮처럼 식별되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중앙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는 복면인이었다. 좌우로 복면인 둘이 석상처럼 시립해 있었다. 우명의 눈이 재빨리 주위를 훑었다. 그 외 시야에 들어온 것은 벽에 바짝 붙여 둔 네 개의 관이었다. '왠 관이지?' 의아한 듯 머리를 흔든 우명은 곧 복면인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대가 서찰을 보낸 사람인가?" 복면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간도 크군. 감히 사소한 일을 문제 삼아 대 화산파 장로에게 협박을 하다니 말이야." 우명의 말에 중앙의 복면인은 음침하게 웃었다. 곧이어 그의 입에서 수명이 저지른 비리가 줄줄 흘러나왔다. "후후후. 사소하다면 사소하겠지만 화산파에선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요. 뭐, 세 명의 첩을 둔 것 정도야 문제될 것이 없지. 영웅호걸에게 삼처사첩은 기본이니까. 문제는 당신이 정식으로 도적에 오른 도사란 점이요. 화산파의 계율은 엄격하지. 그런 화산파의 장로가 슬하에 첩과 자식을 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 "게다가 우린 첩을 거두는 데 들어간 돈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고 있소." 복면인의 말에 우명은 침묵을 지켰다.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에서 살기가 일렁이는 것을 보아 그가 살인멸구를 떠올린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장문인 자리에서 밀려난 뒤 우명이 맡은 직책은 화산파의 돈관리를 책임지는 일이었다. 물론 우명이 그 직책에 만족할 리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직책을 남용해 돈을 빼돌렸다. 그것으로써 유명하고 비싼 기방과 화화루를 드나들며 사치를 즐겼다. 장문인 자리에서 밀려난 분을 그런 방법으로 풀었던 것이다. 뒤늦게 맛들인 사치와 여색은 그를 점점 더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초절정의 문턱에서 답보상태로 전혀 나아가지 않는 무공과 장문인이 되지 못한 소외감 등이 그를 타락시킨 원천이었다. 그 결과 우명이 횡령하는 금액은 천문학적으로 불어났고, 급기야 세 명의 기녀를 기적에서 빼내와 첩으로 들어앉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명은 전혀 꼬리를 잡히지 않았다. 이 돈을 빼내어 저쪽을 메우고, 반대편의 물을 끌어와 이쪽을 채우고 하는 식으로 돌려 막기를 하는 바람에 아직까지 화산파의 그 누구도 우명의 비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며칠 전 뜻밖의 서신을 받기 전까지는. 우명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눌러 참으며 복면인을 노려보았다. "그래, 무엇 때문에 나를 불러냈나? 이유부터 알자." 복면인의 대답은 즉각 터져 나왔다. "조건은 간단하오, 우리와 손을 잡고 함께 일하자는 거요." "뭐라고?" 우명의 눈이 커졌다. 기껏해야 자신의 약점을 잡고 뭔가 청부를 맡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뜻밖의 대답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우명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다. 그는 평생 동안 대 화산파의 일원이었고, 그 그늘을 벗어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비록 비리를 저지르긴 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파멸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면벽 오 년이겠지.걸어봐야 십 년.' 그런 우명이 생판 듣지도 못한 허접한 단체와 손을 잡고 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입술을 비집고 거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럴 줄 알았소." 복면인은 예상했다는 듯 별다른 동요를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우명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는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행동해야 할 차례였다. 복면인들을 모조리 죽여 입을 막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화산의 이름을 더럽히려 한 죄로 죽어줘야겠다. 감히 화산을 범접하려 한 죄 저승에서 후회하도록..." 말이 끝남과 동시에 관제묘 안이 살짝 밝아졌다. 시퍼런 검광이 일직선으로 복면인을 쪼개어 간 것이다. 놀랄 정도로 빠른 발검술. 그러나 우명이 내지른 회심의 일격은 복면인의 목젖 바로 앞에서 가로막혔다. 챙 가로막힌 검신이 부르르 떨었다. 푸르스름한 검기가 서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검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우명은 뜻밖이라는 듯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검을 가로막은 얇은 장검에도 검기가 서려 있음을 알아본 것이다. "내 검을 막을 정도의 고수를 데리고 오다니 뜻밖이로군." 차갑게 뱉어낸 우명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이 좁은 관제묘 안을 가득 채웠다. 이번의 목표는 중앙의 복면인뿐만 아니었다. 세 명 모두를 사정권에 집어넣은 광범위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우명의 이번 공격도 먹혀들지 않았다. 우측의 복면인, 아까 우명의 일격을 막아낸 복면인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우명의 공격을 다시 차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머지 복면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창 차창 창 놀랍게도 복면인은 우명의 공격을 완벽히 막아내고 있었다. 사위를 갈가리 찢어내는 서릿발 같은 검기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검초를 차단하는 모습이 사뭇 장엄하기까지 했다. 우명은 놀랐다. 상대의 무공이 만만치 않는 데다 그리 낯설지 않은 초식을 풀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판단이 정확하다면 상대는 명문정파의, 그것도 지극히 상승의 절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우명은 몇 합 나누지 않아 상대가 사용하는 검초를 파악할 수 있었다. "태허도룡검법!" 우허의 입술을 비집고 비명처럼 흘러나온 일성이었다. 태허도롱검법. 곤륜파의 무공으로 화산파와 마찬가지로 명문정파로 인정받는 곤륜파에서도 최소한 장로급 이상만이 익힐 수 있는 최상승의 절기. 바로 그 태허도룡검법을 익힌 검객이 자신의 검을 가로막은 것이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우명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믿을 수 없군. 하오문이나 살수단으로 짐작되는 단체의 주구가 태허도룡검법을 사용하다니.' 우명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상대는 깊이 있게 익힌 정통의 검법을 시전하고 있다. 흘러나온 비급 따위로 익힌 겉핥기식의 무공도 아니었다. 자신의 검기를 무리 없이 맞받아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저 정도 검술이라면 곤륜의 중견고수라고 봐야 한다. 긴장해야겠군. 명문정파의 중견 고수를 회유할 정도의 단체라면...' 우명이 공세를 강화하자 복면인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제법 깊이 있게 무공을 익혔지만 화산의 장로인 자신을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찌이익 옷소매가 찢겨져 나가자 복면인의 검초가 살짝 흐트러졌다. 우명의 검이 그 틈을 파고들려고 했지만 어느새 튀어나온 좌측의 복면인이 휘두른 도로 인해 봉쇄되었다. 우명의 눈가에 또다시 놀라움이 스쳐지나갔다. '오호단문도? 하북 팽가의 인물마저도?' 묵직한 도를 휘두르며 위맹하게 달려드는 덩치 큰 장한. 그가 사용하는 절기는 오대세가의 하나인 하북 팽가의 오호단문도였다. 그 역시 절정의 경지를 넘어섰는지 도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정신없이 공방을 나누는 세 사람. 우명이 겨우 정신을 다잡고 상대를 몰아붙이려 할 순간 음침한 음성이 관제묘에 울려 퍼졌다. "그만."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복면인들이 검과 도를 거두더니 뒤로 물러났다. 상대를 잃은 우명이 엉거주춤하게 그 자리에 버티고 섰다. 얼굴에 놀란 빛이 역력한 채로. "놀랍군. 하북 팽가의 고수와 곤륜의 중진을 끌어들이다니..." "그대도 머지않아 우리와 한 길을 가게 될 것이오." "헛소리, 감히 화산의 이름을 우롱하려는가?" "후후후." 나지막이 괴소를 내지른 복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불허전. 역시 실력 하나는 알아줄만 하구려. 허나 실력을 더 보고 싶지만 시간이 없으니 이해하시오." 말을 마친 복면인은 손가락을 퉁겼다. 순간 벽 근처에 놓여 있던 관의 뚜껑이 일제히 부서져나갔다. 꾸물거리며 일어나는 것들을 보자 우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강시? 이 사악한 놈들!" 우명의 말대로 관 뚜껑을 부수고 나온 것들은 강시였다. 시체에다가 약물처리를 하여 거죽을 단단하게 만들고 거기에 사술로 생명을 부여한 전투체. 벌써 이백 년 전에 자취를 감춘 강시가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크워어어 온통 썩어 들어가 오관의 형태를 분간할 수 없는 강시 네 구가 몸을 일으켰지만 우명의 눈가에는 전혀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 것이 강시는 이미 효용가치가 떨어져서 무림에서 도태된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초창기의 강시는 배교에서 만들어냈다. 당시에는 막강한 강시가 위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창검이 먹혀들지 않는 질긴 피부와 강력한 파괴력으로 인해 수많은 무사들이 허무하게 죽어나갔다. 당시 배교는 강시란 존재로 인해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밝음이 있으면 반드시 어두움이 존재하는 법이다. 약점이 파악되자 강시는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되지 못했다. 그 어떤 강시라도 머리만 부수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한다. 그런 약점이 만천하에 퍼진 데다 상대하는 무림 문파들도 효과적으로 강시를 상대하는 방법을 터득해 낸 것이다. 강시는 하수에게는 강하지만 고수에게는 약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검기에도 제법 버티는 고급 강시가 개발되었지만 절정고수들이 발휘하는 검강에는 저항하지 못했다. 강시에 대한 해법은 바로 거기에서 나왔다. 강시가 등장할 경우 실력이 떨어지는 제자들은 뒤로 빠지고 검강을 무리 없이 시전할 수 있는 절정고수들이 앞으로 나와 강시를 처리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자 강시는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되지 못했고, 결국 무림에서 도태되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엄천난 시간과 비용을 들여 만들어 낸 강시가 절정고수들의 검강 한 방에 폐물이 되어버리니 더 이상 강시에 돈을 투자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강시는 이백 년 전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바로 그 강시가 다시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그 때문인지 강시를 쳐다보는 우명의 눈동자에서는 한 줌의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이미 검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최절정의 고수. 그것을 증명하듯 장검에서 푸르스름한 선이 뿜어져 나왔다. 파파파팟 검에서 뿜어져 나온 선들은 삽시간에 일정한 형체가 되어 검에 맺혔다. 부술 것이 없다는 무적의 절기인 검강이 발현된 것이다. 그러나 사고능력이 없는 강시들은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우명의 전후좌우를 포위했다. 재빠른 움직임을 보아 많은 돈을 들여 만든 고급 강시가 분명했다. 우명의 입가에 비릿함이 맺혔다. "미안하게 되었군. 비싸게 들인 강시가 허무하게 파괴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어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검강이 서린 장검이 전면을 가로막은 강시의 목 줄기를 파고 들어갔다. 강시는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슈각 역시 제 아무리 피부가 단단한 강시라도 검강에는 버텨낼 도리가 없었다. 검강에 닿는 순간 강시의 목이 반이나 끊어져 버렸다. 하지만 그 순간 우명의 예상과는 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갈라진 피부에서 마치 피처럼 시커먼 액체가 뿜어져 나온 것이다. 푸우웃 대경실색한 우명이 급히 몸을 뒤로 뺐지만 액체를 덮어쓰는 것은 막지 못했다. 피부에서 저릿한 감각이 전해졌다. 옷에는 벌써 구멍이 숭숭 뚫리고 있었다. 코로 빨려 들어온 비릿한 냄새를 확인한 우명은 안색이 검게 변했다. "독을 쓰다니 비,비겁한..." 우명은 급히 내공을 운기했다. 몸속으로 들어온 독을 밖으로 내몰기 위해서였다. 내공을 운용하는 내가고수들은몸속에 침습한 독을 운기를 통해 태워버리거나 몸 밖으로 밀어낼 수 있다. 내공이 높을수록 독기의 제거가 원활했으니 초절정에 근접한 우명이야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을 증명하듯 우명은 몸속을 파고든 독기를 금세 한 곳에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명을 포위한 강시들이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헉." 면전을 파고든 주먹에 기겁한 우명은 철판교를 써서 위기를 모면했다. 공격을 피해내기는 했지만 한 곳에 모은 독을 처리할 틈이 없었다. 시간을 두고 몸밖으로 몰아내거나 삼매진화로 태워버려야 하지만 강시들에게 둘러싸인 지금의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우명은 일정량의 내공으로 독 기운을 억제한 채 그냥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자 싸움의 양상이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슈가가각 검강이 서린 검이 강시의 앞가슴을 깊이 파헤치고 지나갔다. 또다시 세차게 뿜어진 독혈. 예상하고 있었지만 서너방울의 독혈이 옷에 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흑의가 삽시간에 변색되는 것을 봐서 지독한 독기를 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어렵다." 우명의 눈빛이 암울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상대는 완벽한 함정을 만들어 놓고 자신을 기다린 것이다. 우명이 독상시 네 구에게 둘러싸여 힘겹게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복면인들은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가운데 있는 복면인이 손가락을 뻗어 강시를 가리켰다. “재미있지 않소? 원래의 철골강시였다면 지금쯤 모조리 목이 잘려나간 폐품이 되었을 거요. 하지만 철골강시와 독을 결합시키니 상황이 확실히 달라지는구려.” 말을 마친 복면인은 우측의 복면인을 쳐다보았다. 태허도룡검법을 사용하던 바로 그 복면이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도 네 구의 독강시를 감당하지 못하고 굴복했지.” 우측의 복면인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건 이미 지난 일이오. 더 이상 거론하지 맙시다.”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인 복면인은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우명은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강시 하나를 무용지물로 만들었지만 중독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강시는 피뿐만 아니라 장력에도 독을 섞어 뿜어냈다. 내공의 대부분을 독기를 억누르는 데 쓰느라 더 이상 검강을 유지할 수 없었기에 상황이 더욱 악화될 수 밖에 없다. 고작해야 한 식경 정도 버틴 것이 우명의 한계였다. “크으윽.” 결국 우명은 강시의 장력을 정통으로 등판에 얻어맞고 나뒹굴었다. 피를 뿜어내며 나동그라진 우명의 옆으로 독기에 의해 변색된 장검이 맥없이 나뒹굴었다. 끼아아악 강시가 기성을 내지르며 쓰러진 우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명의 낯빛이 창백해지는 순간, 복면인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만.” 그 말을 듣자 강시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눈구멍에 서린 소름끼치는 빛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강시들의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복면인이 우명에게 다가갔다. “우리가 만들어낸 강시의 위력이 어떻소?” 우명은 입을 앙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화산파의 장로로서 단 네 구의 강시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어처구니없었던 것이다. 우명은 지금 완전히 중독된 상태였다. 강시의 독혈과 장력으로 인해 내공이 흩어져 독기가 골수에까지 파고들었던 것이다. 얼굴에 울긋불긋 반점이 돋아났고 사지가 저릿저릿했다. 힘겹게 입을 연 우명은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복면인을 노려보았다. “죽여라.” “아직까지 당신을 죽일 생각이 없소. 그러려고 했다면 당신을 왜 장사로 불러들였겠소?” “화산파의 명예를 더럽힐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죽는 한이 있어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우명의 반응을 익히 예상했다는 듯 복면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극락단을 쓸 때로군. 역시 화산의 장로다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좌측의 복면인이 다가가서 우명의 턱을 잡고 입을 벌렸다. 내공을 끌어올릴 수 없는 상태라서 우명은 그 손길을 뿌리치지 못했다. “읍 읍.” 장대한 체구의 복면인은 도리질치는 우명의 입을 벌리고 시커먼 단약을 집어넣었다. 목젖을 툭하고 치자 단약은 금세 물로 화해 우명의 뱃속으로 흘러 내려갔다. 복면인이 뒤로 물러나자 우명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그리 나쁜 것은 아니오.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독을 잠시 억제한 것뿐.” “너희들이랑 나눌 대화는 없다.” “그렇게 고집 부리지 마시오. 우리가 해독해 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곳에서 쓸쓸히 죽어갈 수밖에 없소. 우리의 회유를 받아들이지 않은 다른 자들처럼 말이오. 우린 화골산을 써서 당신이 세상에 존재했던 근거까지 없애버릴 것이오.” 그 말에 우명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최근 들어 명문 정파의 중견 고수들이 은밀하게 실종되는 일을 떠올린 것이다. 화산에서도 두서너 명의 중견고수가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일이 있었다. 문파에서 대대적으로 조사했지만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게 바로 너희들의 짓이었느냐?” “그렇소. 만약 우리와 같은 길을 걷지 않는다면 비밀엄수를 위해 부득히 당신을 없앨 수밖에 없소.” 말을 마친 복면인은 조그마한 약병을 품속에서 꺼냈다. “이게 바로 화골산이오. 세상에 당신이 존재했던 흔적까지 없애버릴 물건이지.” 화골산을 보자 우명의 낯빛은 창백하게 변했다. 죽어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 모습을 본 복면인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사실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는 경향이 있다. 명문정파의 명숙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눈앞의 우명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정보력을 총동원해 사람됨을 정확히 파악한 다음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우명을 불러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회유를 자신할 수밖에. 복면인은 부드러운 어조로 우명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난 당신이 우리 회에 들기를 바라오.” “회?” “그렇소. 아직까지 밝힐 순 없지만 우리 회는 방대한 힘을 보유하고 있소. 정사마를 불문하여.” 그는 손가락을 뻗어 뒤에 시립한 두 명의 복면인을 가리켰다. “저들 역시 우리 회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정하셨소. 만약 당신도 결단을 내린다면, 당신은 지금껏 누리지 못했던 부귀영화와 함께 엄청난 복락을 받게 될 것이오.” 우명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나, 난 화산을 배신할 수 없다.” “누가 배신하라 그랬소? 당신은 대외적으로 지금까지와 변함없이 화산의 장로로서 활동하면 될 것이오. 회가 부를 경우 은밀하게 변복을 하고 와 주기만 하면 그뿐이오. 그리고 우리 회의 목적은…….” 잠시 말을 끊은 복면인은 은은한 눈빛으로 우명을 쳐다보았다. “강호제패 따위를 노리는 것이 아니오. 얼마 전에 일어났던 정사대전을 생각해 보시오. 무림인들이 어찌해서 정과 사, 그리고 마로 나뉘어 서로 피를 흘려야 하오? 고작해야 자신이 속한 문파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서로 죽이고 죽는 참사를 벌였던 것 아니오? 우리 회의 목적은 바로 그것을 막기 위함이오.” 장황한 설명이 흘러나왔지만 우명은 건성으로 흘러 넘겼다. 솔직히 말해 그는 이대로 죽기가 아쉬웠다. 젊은 시절은 무공수련을 한답시고 흘려보내고 이제 겨우 세상사는 맛을 느꼈는데 이처럼 허무하게 저 세상으로 가기는 싫었다. 횡령한 돈으로 사치를 경험해 보았기에 더욱 그러할지도 몰랐다. 섬서의 집에 있는 첩들과 갓 태어난 아기를 떠올리자 우명은 마음이 더욱 약해졌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흔든 그가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너희들을 따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복면인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그렇게 하신다면 회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 드릴 것이오. 우선 더 이상 화산의 돈을 건드릴 필요가 없소. 우리가 충분한 자금을 대어드릴 것이니 말이오. 비밀은 결코 드러나지 않을 테니 당신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면 되오. 회에서 몰래 연락이 갈 때까지 말이오.” “연락이 온다면 복면을 쓰고 네 옆에 있는 자들처럼 나서서 힘을 빌려주면 된다는 뜻인가?” “그렇소. 눈치가 빠르시구려.” 고민하던 우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죽어가는 것보다 저들의 말에 따르는 척하면서 명을 부지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좋다. 그렇게 하겠다.” 일단 위기를 넘기고 나서 상황을 해결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복면인들이 속한 회란 단체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먼저 이것을 삼키시오.” 복면인이 내민 누런 단환을 본 우명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것이 무엇이냐?” “아무런 보장도 없이 당신을 보내줄 수는 없소. 이 약을 먹어야만 당신을 우리 동지로 맞아들일 수 있소.” 우명은 착잡한 눈빛으로 복면인이 내민 단환을 쳐다보았다. “독약이냐?” “일종의 영약이지만 독약으로 볼 수도 있소.” 당했다는 표정으로 우명은 단환을 받아들었다. 생각보다 철두철미한 단체였다. 복면인이 재차 채근을 해 왔다. “어서 삼키시오.” 어찌 할 방도가 없었기에 우명은 단환을 삼키는 척했다. 그 모습을 본 복면인이 싱글싱글 웃었다. “혀 밑에 감춰두지 말고 삼키시오. 복용한 즉시 반응이 나타나니 속일 생각하지 말고.” “철저한 놈들이로군.” 우명은 눈을 질끈 감고 단환을 삼켰다. 우명의 얼굴이 검게 변했다가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가는 것을 확인하자 복면인은 조그마한 꾸러미를 내밀었다. “한 달치 해독약이오. 닷새에 한 알씩 먹어야 독이 발작하지 않을 것이오.” “…….” “해독약을 먹지 않을 경우 독이 발작함과 동시에 전신의 내공이 흐트러지는 산공현상이 일어날 것이니 행여나 딴 마음은 먹지 않는 것이 좋소.” 그 말에 우명은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토록 지독한 독일 줄 몰랐기 때문이다.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명에게 복면인은 몇장의 전표를 내밀었다. “일단 이것으로 횡령한 돈을 채워놓도록 하시오.” 우명은 일그러진 얼굴로 전표를 받아들었다. “그럼 당신은 이 길로 돌아가시오. 열흘 내로 사람이 찾아갈 거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우명은 느릿하게 걸음을 관제묘를 나섰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좌측의 복면인이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그가 이 일을 발설하지 않을까요, 비영전주?” 비영전주라 불린 복면인은 느릿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마 그러지는 않을 것이오. 이미 회에서 그에 대한 뒷조사를 철저히 했소.” “그래도 그가 입을 연다면 회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날 텐데…….” “걱정하지 마시오. 회주께서 선택한 인물이니 말이오.” 회주가 선택했다는 말에 복면인은 입을 닫았다. “그럼 그대들은 문파에 가서 대기하도록 하시오. 일이 있으면 은밀히 연락하겠소.” “알겠소.” 복면인들이 조용히 포권하며 관제묘를 나섰다. 그러자 관제묘안에는 비영전주 홀로 남겨졌다. 답답했는지 그가 복면을 벗어들었다. 그러자 음침하게 생긴 사십대 중년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런 대로 일이 잘 처리되었군. 이제 회로 돌아가서 보고를 할 시간인가?” 손가락을 퉁기자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관제묘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머뭇거림 없이 다가와 멀뚱히 서 있는 강시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몇 명은 쓰러진 강시를 수습했다. 독혈이 흠뻑 묻어 있기에 하나같이 사슴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조심하는 티가 역력했다. 중년인이 미소 띤 얼굴로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2. 무림을 흔드는 손, 묵회 “뭐 보이는 거 있어?” “아직까지는.”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네 명의 사내가 은신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핏빛으로 물들인 혈의를 입고 있는 사내들이었다. 각기 예기를 뿜어내는 무기와 묵직한 각궁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평범한 양민들은 아니었다. 그중 밤송이처럼 수염을 기른 장한이 입을 열었다. “제길, 오늘은 실적이 별로 시원치 않군. 왜 이렇게 오가는 놈들이 없어?” “요새는 상단이 지나다닐 때가 아니잖아.”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는 이들은 신강 일대를 주름잡는 적풍사의 졸개들이었다. 이곳은 실크로드의 길목에 위치한 천산북로. 서역으로 교역하러 가는 상단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이곳을 지난다. 당연히 상인들을 뜯어 먹고사는 마적단이 즐비했고, 그 중에서 가장 세력이 큰 집단이 적풍사였다. 이들은 바로 그 적풍사의 척후조들이었다. 실크로드의 주요 교역로를 감시하다 상단이 눈에 띌 경우 적풍사 본진으로 연락을 취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 맡은 임무였다. 밤송이 장한이 산 아래를 감시하는 동료 마적을 불렀다. 그 비싼 천리경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아 적풍단의 위세를 익히 짐작할 만했다. “아삼, 뭐 보이는 게 있어?” 아삼이라 불린 마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자 눈을 부릅뜬 밤송이 마적이 손바닥으로 아삼의 등판을 후려갈겼다. “이노무 자식이 고참이 부르는데 대답도 없어?” “잠깐만요. 저기 뭔가 오고 있는데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적들은 자리를 잡았다. 움직임을 보아 하루 이틀 장사해본 몸놀림이 아니었다. 기대 어린 시선이 아삼의 얼굴로 집중되었다. “몇 명쯤 되냐? 수레는 몇 대야?” 천리경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아삼의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좀 이상한데요?” “뭐가?” “두 놈뿐입니다. 수레는 없구요. 아무래도 차림새가 상인 같지는 않는데요?” “두 놈뿐이라고?” 눈이 휘둥그레진 밤송이 장한이 아삼의 손에서 천리경을 빼앗아들었다. “이 험한 천산북로를 단 두 놈이 올 리가 있나? 정말이네?”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마적들은 천리경을 돌려가며 쳐다보았다. “이상한 놈들이로군. 상인 같지는 않는데?” “옷차림이 화려한 것을 보니 범상한 놈들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 말에 밤송이 장한이 입을 연 마적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겼다. “윽! 왜 때려요?” “범상한 놈이 아니면 뭐 어때서 그래. 이곳은 엄연히 우리 적풍사의 관할구역이라고.” 천리경을 다시 들여다보는 밤송이 장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옷차림을 보니 주머니가 두둑해 보이는군. 단 두 놈이라……. 잘 되었군.” “어떻게 하시려고?” “일단 화살로 공격을 가해보자. 맞아 뒈지면 잘된 일이고 만만치 않은 놈이라면 본진에다 지원요청을 한다. 명적을 날리면 일각 이내에 우리 적풍사의 기마대가 도착할 것이다.” 밤송이 수염의 결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마적들이 일제히 동의했다. “괜찮은 방법이군요.” “쉿, 기다려라. 놈들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준 사격을 가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마적들은 저마다 강궁을 들고 자리를 잡았다. 천 명이 넘는 적풍사 마적들 중에서 가려 뽑은 사수들이라 화살이 빗나가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마적들의 눈에 띈 두 명의 여행자는 바로 데이몬과 윈슬럿이었다. 윈슬럿이 앞장서고 데이몬이 느릿하게 뒤따르는 형식으로 둘은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발길이 향하는 목적지는 중원이었다. 데이몬이 돌연 입맛을 다셨다. “출출하군.” 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중원의 산해진미들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데이몬의 최대 취미는 식도락이다. 요리 실력이 일급 숙수 못지않았기에 직접 요리를 해 먹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중원 고유의 재료로 만든 본토 요리만할 리가 없다. 데이몬은 중원을 방문한 김에 좋아하는 요리를 실컷 섭렵할 작정이었다. “먼저 장안으로 가야겠어. 그곳에서 만난 요리들을 좀 즐긴 뒤 생각해 봐야지.” 생각에 잠겨 걷고 있는데 갑자기 맹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쐐애액 퍼뜩 정신이 든 데이몬은 급히 실드를 펼쳤다. 길을 가다 난데없이 화살공격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데이몬이었다. 파팍 두 발의 화살이 실드에 맞아 퉁겨나갔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은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자칫 잘못하면 화살에 관통당할 뻔했던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하마터면 화살에 맞아 죽은 마왕이 될 뻔하다니.” 현재 데이몬은 암흑투기를 운용하지 못한다. 따라서 화살에도 충분히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상황이다. 마계나 트루베니아였더라면 화살 따위에 눈썹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다. 화살보다 더한 발리스타의 살도 손가락 하나로 막아 낼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은 암흑투기를 쓸 수 없는 중원. 십분 주의해야 하는 것이 데이몬의 처지였다. 실드에 둘러싸인 상태로 데이몬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화살을 쏘는 기미를 눈치 COWL 못했다니…….” 앞에서 걷던 윈슬럿도 기미를 눈치 채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윈슬럿의 앞가슴에는 화살이 두 대 박혀 있었다. 기본적으로 언데드인 윈슬럿에게 화살 따위가 타격을 입힐 순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윈슬럿도 적의 출현을 미리 눈치 채지 못했다는 점이다. 가슴에 대롱대롱 매달린 화살을 뽑아든 윈슬럿이 사납게 고함을 쳤다. “크아아아.” “시끄럽다, 이놈아. 화살을 쏘는 기미도 눈치 채지 못한 놈이 목청만 크구나.” 화살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실드를 거둔 데이몬은 마법을 써서 화살이 날아온 궤적을 살폈다. 곧 화살을 날린 네 명이 서둘러 뒤로 물러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검붉은 옷을 입은 사내들의 모습이 허공에 비쳐졌다. 동시에 명적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삐이익 놈들의 움직임을 보아 지원군을 부르려는 것 같았다. 데이몬은 어처구니가 없음을 느꼈다. “마적 따위에게 공격당하다니.” 한심했는지 머리를 절레절레 한든 데이몬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조만간 들이닥칠 마적들을 상대로 분풀이를 하려는 심산에서였다. 데이몬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윈슬럿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윈슬럿으론 안되겠어. 살기조차 느끼지 못하니 큰일이로군.” 일반적으로 언데드는 인간보다 감각이 떨어지는 편이다. 시각은 거위 기대할 수 없고 후각은 그나마 인간보다 조금 나은 편이다. 때문에 은신해 있는 적은 곧잘 찾아내기는 하지만 지금처럼 먼 곳에서 가해지는 암습을 미연에 감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최고급 언데드인 데스 나이트라고 해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원래 데이먼은 윈슬럿에게 짐꾼 겸 호위 역할을 맡기려 했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 사정이 조금 바뀌었다. 암흑투기를 운용할 수 없는 탓에 데이몬은 육체적으론 일반인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불시에 닥칠 위험을 경고해줄 후위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렇다고 마냥 마법을 펼쳐놓을 수는 없으니.” 사실 마법을 쓴다면 절정고수보다 더욱 면밀히 주변 상황을 살힐 수 있다. 살필 수 있는 범위도 더욱 넓었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마법을 펼쳐 주위를 살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답답해진 데이몬은 머리를 흔들었다. “호위를 하나 고용해야겠어. 적어도 절정 이상으로 경지에 오른 놈으로 말이야.” 물론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절정 이상의 무사들은 대부분 대문파 소속이었고, 돈으로 살 수 있는 무사들 중에서 절정급 이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데이몬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이곳을 향해 다급히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두두두두 신호를 받은 마적들이 들이닥치는 모양이었다.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데이몬은 몸을 일으켰다. “감히 마왕을 건든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주마.” 데이몬이 수인을 맺자 허공에 은빛 선들이 생겨났다. 공기가 응축되고 응축된 은빛 선들은 금세 화살 형상으로 변했다. 트루베니아를 위진시킬 당시 데이몬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매직 미사일 다발이 중원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삼십여 기의 기마가 이곳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여러 가지 장병기들을 든 마적들이 말 위에서 흉흉한 눈빛을 번뜩였다. “고작 두 놈이야?” “젠장. 적풍사 1개 조가 고작 잔챙이 두 놈을 털려고 출동하다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적들의 눈은 멀리 보이는 표적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이곳은 나무 하나 보기 힘든 평원. 말을 타고 있지 않은 여행자들이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일단 털어 보고 짭짤하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다면 사막에 파묻어 버리자.” “오랜만에 서역의 색목인 놈을 묻어보겠군.” 신이 났는지 마적들은 말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이대로 달려가서 둥그렇게 둘러싸기만 하면 여행자들은 그 자리에 머리를 박고 몸에 지닌 모든 것을 넙죽 바칠 터였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만만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쐐애애액 소름 끼치는 음향과 함께 선두에서 달리던 마적 하나가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말에서 거꾸로 떨어졌다. “뭐, 뭐야?” 놀랄 사이도 없이 또 다른 마적이 낙마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마적들은 그때서야 볼 수 있었다. 은빛 막대기들이 허공을 빽빽하게 덮은 채 쏜살같이 날아다니는 장면을. “으헉.” 기겁을 한 마적들이 손에 든 병기로 은빛 막대기들을 쳐냈다. 악명 높은 적풍사의 행동대원들인지라 하나같이 무예실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그러나 은빛 화살의 수는 그들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쐐애애액 마적 하나당 예닐곱 발의 매직 미사일이 날아드는 데다 쳐내도 허공에서 궤적을 바꿔 다시 들어오니 이후의 상황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둔탁한 파공성과 다급한 비명성이 교차되며 마적들이 줄줄이 낙마하기 시작했다. “크헉.” 데이몬이 날린 매직 미사일 다발은 채 일각도 되지 않아 마적 서른 명을 무력화시켜버렸다. 마적단 1개조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궤멸되어버린 것이다. 그곳은 곧 깨지고 부서진 채 널브러져 신음을 흘리는 마적들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주인 잃은 말들만이 구슬퍼 울며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써보는 매직 미사일 세례로군.” 데이몬이 손직을 하자 허공을 뱅글뱅글 맴돌던 매직 미사일 다발들이 순차적으로 사라졌다. “잘 되었군. 이것들의 입을 통해 중원의 정세나 좀 알아봐야겠어.” 말을 마친 데이몬은 윈슬럿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이리저리 널브러진 마적들을 한데 끌어 모으라는 명령이었다. 명을 받은 윈슬럿이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며 마적들을 수확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마적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료들이 모두 꿇어 앉혀져 있고 그 앞에 갓 스물 정도 되어 보이는 애송이 색목인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옆에 덩치 좋은 색목인 하나가 팔짱을 끼고 있긴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긴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이 누구인가? 천산북로를 주름잡는 적풍단 아니던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머리를 내젓는 마적들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먹잇감을 보고 질풍처럼 들이닥친 것까지는 좋았다. 막 목표를 포위하려는 찰나에 느닷없이 은빛 화살이 떼거지로 날아든 것이다. 정신없이 막다가 파고 들어온 화살에 맞아 의식을 잃은 것이 그들에게 남아있는 기억의 전부였다. 그런데 화살에 맞았으리라 짐작되는 곳에는 아무런 상처가 나있지 않았다. 뻐근한 통증이 전해져오는 것을 보아 단단히 멍이 든 것 같기는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외상은 없었다. [ P 84-85 오데로 갔나... 스캔올라오면 다시 수정해서 올리겠슴둥~] 그 주위를 각기 은빛 면구를 뒤집어쓴 두 명이 보필했다. 안광이 형형한 것을 보아 상당한 경지에 오른 고수가 분명했다. 그가 들어서자 탁자에 앉아 있던 복면인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회주님을 뵙습니다.”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인 금빛 면구인이 탁자의 상석에 가 앉았다. 은빛 면구인 둘은 마치 호위병처럼 뒤에 가서 시립했다. “모두 앉으시오.” 회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복면인들은 자기 자리에 앉았다. 회주가 그들을 둘러보며 눈빛을 빛냈다. “그럼 경과보고를 해 보시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복면인이 몸을 일으켰다. “비영전주입니다. 우선 임무를 완수했음을 보고 드립니다.” 회주의 시선이 비영전주에게로 향했다. “목표 제3호를 회유하는 데 성공햇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독강시를 이용해 목표를 제압한 뒤 극락단과 제령환을 복용시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독강시 하나가 완파되고, 하나가 반파되었지만 목표 제3호는 결국 회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했습니다.” 회주는 마음에 든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목표 제3호라면 거의 초절정에 근접한 고수, 독강시 두 구로 그를 회유했다면 결코 손에 보는 장사가 아니지. 아무튼 수고 많았소. 차후 임무 완수에 대한 포상이 있을 것이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공손히 머리를 조아린 비영전주가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복면 사이로 드러난 입가에 미미하게 미소가 맺혀 있었다. 회주의 시선이 다른 복면인들에게로 향했다. 보고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제령전주 보고 드립니다. 명에 따라 목표물 제5호를 회유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피해는 독강시 세 구입니다.” “신기전주입니다. 속하 역시 목표물 제6호를 성공적으로 본 회에 귀속시킬 수 있었습니다. 피해는 …….” 보고를 들어보니 대부분의 복면인들이 임무를 완수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복면인만은 그렇지 않았다. 묵묵히 침묵을 지키던 복면인은 회주의 시선이 닿자 맥없이 고개를 떨궜다. “죄송하지만 속하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대를?” “추, 추명전주입니다. 목표 제9호를 맡았습니다.” “목표 제9호라면 남궁세가 남궁호가 아닌가? 현 남궁세가주의 동생.” “그, 그렇습니다. 제압에서 극락단을 복용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만…….” 대답하는 추명전주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준엄한 질책을 각오할 모양이었다. 그러나 회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법도 하지. 혈연관계로 묶인 세가인 만큼 아무래도 문파보다 결속력이 강할 수밖에……. 가문에 불만이 많다고 조사된 자였는데 혈연을 부정할 정도까진 아니었나보군.” 몸을 경련하던 추명전주는 머리를 조아렸다. “부디 속하를 벌해주십시오.” “물론이지. 공과에 대한 신상필벌이 확실한 것이 본 회의 율법이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로 하고 싶군.” 말을 마친 회주가 손짓을 했다. 그러자 뒤에 시립한 은빛 면구인 하나가 앞으로 나와 조그마한 함을 건넸다. “열어보시오.” 회주의 손짓에 따라 상자를 개봉한 추명전주의 눈이 커졌다. 함 속에서 눈을 부릅뜬 수급 하나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수급의 얼굴은 추명전주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자의 것이었다. “이, 이자는 남궁호?” “그대의 뒤를 따르던 밀사가 처리한 것이오.” 회주의 말에 늘어선 복면인들은 오한이라도 든 듯 몸을 떨었다. 자신들이 그 정도로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들의 귓전으로 회주의 스산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이번 추명전주의 과오는 없는 일로 하겠소. 하지만 두 번의 용서는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회주는 마치 엄포라도 놓듯 복면인들을 둘러보았다. “앞으론 일 처리를 더욱 확실하게 하기 바라오. 그대들 뒤에는 항상 본 회주가 보낸 밀사들이 도사리고 있소. 그 사실을 어디에서나 명심하도록 하시오. 알겠소?”“ “예.” 회주의 말이 끝나자 복면인들은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회주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대들은 독과 무력이라는 강압적인 바업에 의해 본 묵회의 일원이 되었소. 정상적인 무림방파라고 생각하기 힘든 조직이지. 하지만 한 가지만은 약속하겠소. 우리 묵회가 여타의 방파들을 제치고 무림에 우뚝 서는 순간 그대들에게는 상상도 하기 힘든 복락이 펼쳐질 것이오.” 복면인들을 쳐다보는 회주의 눈빛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모두들 알고 있듯 그대들은 하나같이 소속 문파에서 인정받지 못한 자들이오. 실력은 출중하지만 인맥과 고리타분한 전통, 그리고 연줄이 미치지 못해 빛을 보지 못한 것이지. 생각해 보시오. 그대들에게 충분한 후원과 연줄이 주어졌다면 지금처럼 방계로 밀려났겠소?” 회주의 음성에는 힘과 함께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뭔가가 내재되어 있었다. 복면인들은 서서히 회주의 논리에 사로잡혀갔다. “당금 무림은 극히 변질되었소. 철저히 무를 추구하는 무인들은 온데간데없고 온갖 협잡꾼과 모리배들이 판치는 곳이 되어버렸소. 일대일의 정당한 대결보다는 다수에 의한 힘의 논리가 우선이며 정정당당한 승부보다는 간교한 책략이 더욱 잘 먹혀들고 있소. 본 회의 목적은 바로 그것을 타파하는 것이오.” 회주의 눈빛이 서서히 타오르고 있었다. “오로지 자질과 노력에 의해 직전제자가 되었던 시기는 이미 지나갔소. 단순히 인맥과 혈연에 의해 선출된 자들이 벌모세수를 받고 각 파의 진산절기를 전수받소. 장문인의 조카라는 이유로, 또한 장로들의 자식이란 이유로 말이오. 진정으로 자질 있는 자들은 돈이 없거나 연줄이 없다는 이유로 방계로 취급받는 게 현실이오. 그렇지 않소?” 회주의 반문에 복면인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대부분은 문파의 방계였기 때문에 회주의 논리가 더욱 가슴속에 와 닿을 수밖에 없었다. “방계가 성공하는 확률은 극히 희박하오. 변변찮은 영약도 없이 실력 없는 스승 밑에서 이삼 류 급 무공을 익히는 방계들과 태어나는 순간 벌모세수를 받고 온갖 영약을 복용한 채 개인지도를 받는 직계와는 출발점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소. 본 회의 목적은 바로 그것을 타파하고자 하는 것이오.” 회주는 손가락을 뻗어 복면인들을 가리켰다. “묵회는 그대들 방계들에게 힘을 실어줄 것이오. 그대들은 하나같이 실력과 자질을 갖추었으되 연줄이 닿지 못해 방계로 머물고 있는 이들, 묵회는 그대들이 더 이상 방계로 떠돌게 놔두지 않을 것이오.” 말을 마친 회주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아리따운 시비 두 명이 들어왔다. 미리 준비가 되어있었는지 그녀들은 복면인 앞에 각각 한두권씩의 서적과 조그마한 목합을 내려놓았다. “그대들에게 내리는 선물이오. 먼저 목합을 개봉해 보시오.” 목합을 열자 검붉은 빛의 환약이 모습을 드러냈다. 복면인들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환약을 쳐다보았다. “본 묵회 비전의 영약이오. 각 파의 직전제자들에게 지급되는 영약을 능가하는 효능을 가지고 있지. 그대들은 이미 일정 경지에 오른 고수들, 따라서 복용한다면 충분히 약효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오.” 그 말에 복면인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직전제자들에게 지급되는 영약이 도대체 어떤 약들인가? 문파에서 사력을 다해 구한 약재들 중 최상등품만을 골라 문파 비전의 비법으로 연단하는 영약이었다. 말 그대로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들이 바로 그 약이다. 그 희귀성 때문에 영단을 복용할 수 있는 제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방계제자는 꿈도 꿀 수 없었고, 직전제자 중에서도 선택된 한두 명만이 겨우 약의 효과를 볼 수 있다. 거기에 모인 복면인들 중 지금껏 직전제자에게 내려지는 약을 구경이라도 해본 경우는 전무했다. 대부분의 영단을 소수의 절세고수를 키우기 위해 직전제자 한두 명에게 몰아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에 필적하는 영단이라고 하니 복면인들은 쉽사리 수긍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마음을 안다는 듯 회주는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 효과가 뛰어난 만큼 부작용이 없지는 않소. 그중 하나는 오직 극락단과 제령환을 복용한 자들만이 약효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이 약은 독이나 다름없소. 그러나 약의 효능만큼은 독보적이라고 자부하오.” 말을 마친 회주는 손가락을 뻗어 책자를 가리켰다. “동봉한 책자는 무공비급이오. 각 파의 비전절기 중 그대들이 익히지 못한 부분만을 발췌하여 정리한 것이니 외운 다음 반드시 태워버려야 하오.” 그의 말에 복면인들의 눈빛이 빛났다. 칼을 든 무인으로서 그 누가 무공비급에 관심을 갖지 않으랴. 조심스럽게 비급을 집어 드는 복면인들의 손길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회주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영단을 복용한 뒤 운공을 하도록 하시오. 비급을 익히는 것은 그 다음 순서요. 한 가지 명심할 점은 비급을 어떤 일이 있어도 유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오. 반드시 이 자리에서 외운 다음 태워버려야 하오.” 복면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복명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회주는 몸을 돌렸다. 은빛 면구인들이 그 뒤를 따랐고, 그들이 나가자 문이 닫혔다. 쿵 망설이던 복면인들은 잠자코 영단을 집어 들었다. 이미 독에 중독된 상태라서 거리낄 것이 없었기에 그들은 머뭇거림 없이 영단을 입으로 가져갔다. 느릿한 통로를 세 명이 걸아가고 있었다. 묵회의 회주와 두 명의 은빛 면구인들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손해가 너무 큰 것 같습니다.” 입을 연 면구인을 향해 회주의 얼굴이 느릿하게 돌아갔다. “어째서 그런가?” “엄연히 따져서 저들은 외부인입니다. 독과 무력으로 회유한 자들이죠. 그런 만큼 본 회에 대한 충성심이 거의 없다고 봐야합니다. 그런 저들에게 굳이 거금을 투자해 만든 영단을 내릴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 속하의 생각입니다.” 그 말을 들은 회주는 얼굴 가득 미소를 떠올렸다. “자넨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렇습니다. 사실 본 회는 여타의 다른 무림방파와 내외형적으로 많이 다릅니다.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약과 무력으로 회유한 외부인이어서 사승관계로 엮인 문파나 혈연관계로 이어진 세가보다 충성도가 취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당장 저들 중에서 딴 마음을 먹은 자가 없다고 볼 수 없으며 위기에 처할 경우 아무 거리낌 없이 본 회를 배반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둔 것이 많았는지 면구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 저들이 극락단과 제령환을 해독할 수 있다면 반드시 본 회에 등을 돌릴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 독전에서 보고하기를 당금 무림에는 극락단과 제령환을 해독할 문파가 없다고 했다. 오 년전 사천당문이 멸문한 이후 독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문파가 모두 사라졌으니 말이다. 게다가 십 년 전 멸문한 운남 오독문의 문도들은 대부분 회에 소속되어 있다.” “…….” 회주가 빙그레 웃으며 면구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어차피 저들은 소모품이다. 정사대전으로 인해 약화된 무림을 다시 한 번 뒤흔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일을 허술하게 꾸밀 수는 없는 노릇. 저들에게 어느 정도 힘을 실어주어야 부여된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 “…….” “모든 것이 그분의 머리에서 나온 책략이다. 그러니 우린 그대로 이행하면 된다.” 그분이란 말이 나오자 면구인은 입을 닫았다. 그의 마음속에 그분이란 존재가 얼마나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회로 돌아가자. 추후 다시 명령이 내려질 것이다.” “알겠습니다.” 둘의 모습을 곧 어둠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져버렸다. * * * * * * 장안. 주나라 무왕이 이곳을 도읍으로 삼은 이래 한과 당대까지 중원의 중심으로 이름을 날린 유서 깊은 도시이다. 수도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기세가 주춤하긴 했지만 규모 면에선 아직까지 중원에서 장안에 필적할 만한 도시를 찾기란 힘들다. 끝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뻗어간 시가지와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마치 난 아직 죽지 않았다, 라고 열변을 토하는 것 같다. 큰 도시답게 장안에는 여러 문파에서 파견한 분타들이 위치해 있다. 문파들 중 가장 많은 구성원을 자랑하는 개방 역시 분타를 설치해서 장안을 중점 관리하고 있다. 개방의 장안 분타를 책임지는 취풍개 허설은 매처럼 예리한 눈빛으로 거리를 둘러보았다. 중원의 정보통 역할을 하는 개방이라서 분타의 최고책임자조차 이처럼 거리에 나와 정보수집을 하고 있다. “빌어먹을……. 이 나이가 되어서 거리에서 정보 수집질이라니.” 연신 투덜대면서도 그의 눈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쫓았다. 무림 문파의 입장에서 장안은 대단히 소중한 곳이다. 서역과 왕래하는 실크로드의 종착역인 만큼 서역무림의 움직임을 감시 할 수 있는 최고의 요충지인 것이다. 역대로 서역에는 막강한 힘을 가진 대문파들이 많았다. 서장의 포달랍궁을 위시해서 천축의 뇌음사 등의 문파들이 호시탐탐 중원무림을 노려왔다. 실제로 그들 문파들이 중원에 난입하여 혈겁을 벌인 적도 적지 않았다. 여러 문파에서 장안에 분타를 설치하여 중점 관리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현재는 내분으로 인해 서역 문파들의 힘이 많이 위축되었지만 그래도 그 저력을 경시할 순 없었기에 개방에서도 중진급 장로인 취풍개 허설을 파견해 장안을 관리하게 했다. 허설은 진물이 주르르 흐르는 눈을 들어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전각을 올려다보았다. 삼 층 규모의 큼지막한 객잔에는 열빈루라는 간판이 큼직하게 달려 있었는데, 장안에서 소문이 자자한 전통 있는 요릿집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쪼로록 허기를 느낀 허설은 코를 벌렁거렸다. “캬, 냄새 죽이는군. 열빈루 요리 한 점 먹어봤으면 원이 없겠어.” 들어가서 음식동냥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허설은 금세 머리를 흔들었다. 일급 객잔인 열빈루에서 순순히 음식을 동냥해 줄 리도 없거니와 부근에 휘하의 거지 서너 명이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부하 거지들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일 순 없는 노릇이다. 허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어디 가서 길 잃은 개나 한 마리 잡아 구워먹을까?” 순간 그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막 대로로 들어서는 누군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정보 수집으로 잔뼈가 굵은 그에게 수상하게 느껴질 법한 존재들이었다. “이상하군. 색목인 단 두 명이서 장안에 어슬렁거리다니…….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상인을 아냐. 혹시 포달랍 궁의 첩자 아닐까?” 조용히 몸을 일으킨 허설은 목표물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허설의 촉각에 걸린 색목인들은 바로 데이몬과 윈슬럿이었다. 그들이 벌써 장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천산산맥에서 마적들을 족친 다음 데이몬은 그들의 말을 모조리 빼앗았다. 광활한 초원을 횡단하려면 말은 필수였다. 플라잉 마법을 써서 초원을 횡단할 수도 있었지만 마나를 아끼기 위해 데이몬은 말을 타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감히 하늘을 건든 대가로 생각해라.” 마적들에게서 삼십여 필의 말을 모조리 빼앗은 데이몬은 그것을 이용해 장안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윈슬럿을 인크레시아에 수납한 다음 말이 지치면 달고 온 다른 말로 갈아타는 방법으로 장안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그 탓에 데이몬의 옷차림은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장안 인근에 도착한 데이몬은 끌고 오다 남은 말들을 모조리 풀어주었다. 마시장에 내다 팔면 어느 정도 돈을 만질 수 있겠지만 데이몬에겐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었다. “돈이라면 인크레시아 안에 넘쳐날 정도이니 굳이 푼돈에 신경 쓸 필요 없지.” 인크레시아를 열어 윈슬럿을 꺼낸 뒤 데이몬은 장안성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무공을 잃고 트루베니아로 떠났던 데이몬이 마왕이 되어 중원에 입성하는 순간이었다. 장안성으로 들어서며 검문을 받았지만 데이몬과 윈슬럿은 아무런 제지 없이 수월히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금편 하나를 건네주자 눈이 휘둥그레진 수문 병사들이 아무런 검문도 없이 둘을 통과시켜주었던 것이다. “역시 사람 사는 세상에서 뇌물이 통하지 않는 고싱 없다니까…….”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은 데이몬은 시내로 통하는 대로를 타고 걸어갔다. 그 뒤를 바짝 붙어 윈슬럿이 뒤따랐다. 그런데 그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동자 한 쌍이 있었다. 평범한 얼굴을 가진 비쩍 마른 중년인이었다. “색목인이라 후환도 없을 테고……. 한 번 털어 볼 만한 놈들이로군.” 주위를 조심스레 살피던 중년인이 빠른 걸음으로 데이몬을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저, 저 녀석은?” 중년인을 본 순간 허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기억에 의하면 비쩍 마른 중년인은 이곳 장안 시내에서 소문난 소매치기였기 때문이다. “저놈 이름이 이삼이라고 했던가? 일전에 무림고수를 털다가 걸려 곤죽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다시 영업(?)을 재개했나보군. 빌어먹을 자식이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무심코 앞으로 나가려던 허설의 발걸음이 딱 멈췄다. 소매치기 이삼이 노리는 범행대상이 자신이 미행하는 색목인들임을 깨달은 것이다. “잘 되었군. 놈들의 무공수위를 알아볼 절호의 기회야.” 일반적으로 무공을 배운 무림인들은 범인에 비해 감각이 몇 배나 예민하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무림인이 소매치기를 당하는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허설은 곧 소매치기 이삼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어이쿠, 미안합니다.” 중년인 하나가 벌렁 나동그라지자 데이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시가지 구경을 하며 걷고 있는데 비리비리해 보이는 중년인 하나가 앞도 보지 않고 달려왔다가 데이몬과 부딪혀 넘어진 것이다. “젠장, 앞을 똑바로 보고 다녀라.” 색목인의 외모를 가진 데이몬의 입에서 유창한 중원어가 튀어 나오자 중년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라움은 잠시였고, 중년인은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딸아이가 아파서 급히 의원에게 가느라…….” 못마땅하다는 듯 중년인을 노려본 데이몬은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멍청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던 윈슬럿이 얼른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쳐다본 중년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품속에서 느껴진 묵직한 감각에 쾌재를 부른 것이다. ‘아싸, 성공이다.’ 자신이 마왕의 주머니를 턴 줄도 모른 채 소매치기 이삼은 수입을 확인하기 위해 얼른 걸음을 옮겼다. “별 볼일 없는 놈이었군.” 이삼이 작업을 성공시키자 허설의 눈가에 실망감이 떠올랐다. 분명 이삼의 손이 품속으로 들어갔다 나왔고 허설은 그것을 똑똑히 확인했다. 하지만 상대는 전혀 기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것으로 봐서 무공을 익힌 자는 아닌 것 같았다. “단순히 중원으로 유람을 나온 녀석인가?” 데이몬에 대한 의구심을 접은 허설은 미행의 대상을 바꾸었다. 금방 횡재를 한 소매치기 이삼이 새로운 목표물이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이삼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감히 내 관할구역에서 허락도 없이 영업을 하다니…….” 이삼을 윽박질러 일정량의 세금을 떼어낼 생각을 한 허설은 서둘러 몸을 날렸다. 소매치기를 당한 사실은 금세 드러났다. 뭔가 허전한 감각에 품을 뒤져본 데이몬의 안색이 변했다. “없다.” 분명 성문에 들어설 당시만 해도 있었던 돈주머니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다시 말해 소매치기를 당한 것이다. 데이몬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마왕이 소매치기를 당하다니……." 하도 어이가 없어 웃음기마저 치밀어 올랐다. 물론 돈을 잃은것 자체가 안타까운 게 아니었다. 인크레시아 안에는 잃어버린 돈의 수천, 수만 배에 달하는 보화가 보관되어 있다. 문제는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중원은 대단해. 감히 마왕의 돈을 소매치기하는 놈도 있고 말이야.” 무심코 머리를 돌리자 윈슬럿의 멍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데이몬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멍청한 자식, 주인이 소매치기 당하는 것도 느끼지 못하다니…….” 화가 발칵 치밀어 올랐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일반인보다도 감각이 떨어지는 언데드에게 그런 것까지 기대할 순 없는법. 쓸 수 없는 암흑투기가 지금 이 순간만큼 아쉽기는 처음이었다. “젠장. 그렇다고 마법을 끌어올린 채 다닐 순 없는 노릇이고…….” 데이몬은 허탈한 눈빛으로 정면에 보이는 큼지막한 객잔을 쳐다보았다. 열빈루라는 간판을 내건 객잔에서는 벌써부터 침을 동하게 하는 음식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그곳에 가서 종류별로 요리를 시켜 오랜만의 식도락을 즐겨볼 참이었는데 어이없는 이유로 무산되어버린 것이다. “할 수 없지. 조금 미룰 수밖에…….” 어깨를 축 늘어뜨린 데이몬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사람이 많고 번화한 곳에서 인크레시아를 열 수는 없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가서 다시 자금을 보충하려는 것이 데이몬의 계획이었다. 주인의 답답한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윈슬럿이 멍한 얼굴로 뒤를 따랐다. 윈슬럿이 진가를 발휘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으슥한 골목길에서 인크레시아를 연 데이몬은 당분간 쓸 정도의 금은보화를 꺼내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인크레시아를 닫고 골목길을 빠져 나오려는 순간 다섯 개의 그림자가 둘의 앞을 가로막았다. “흐흐흐. 그냥 나가면 섭섭하지.” “이곳은 우리 구역이야. 지나가려면 통행세를 납부하셔야지.” 하나같이 얼굴에 건달이라고 써붙인 것 같은 장한 다섯 명이 골목입구를 막고 키득거리고 있었다. 묵직해 보이는 몽둥이로 손바닥을 툭툭 치는 놈도 있었고, 시퍼런 대감도를 빙글빙글 돌리는 녀석도 있었다. 장한들이 느릿하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떠돌이 색목인으로 보았는지 그들의 행동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말로 할 때 주머니에 든 것을 모조리 토해내는 게 좋을 거야.” “맞고 내놓는 것보다 순순히 내놓는 게 피차 좋지 않겠어?: 데이몬의 얼굴이 픽 일그러졌다. “젠장, 소매치기에 이어 건달들마저 나에게 시비를 거는구만.” 일시적으로 중원으로 온 것에 대해 회의를 가지는 데이몬이었다.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감싸 쥔 데이몬이 뒤로 빠졌다. “윈슬럿, 해결해라. 죽이지는 말고 단단히 혼쭐을 내 주도록.” 윈슬럿이 두 말도 없이 앞으로 나섰다. 당당한 덩치의 윈슬럿이 앞으로 나서자 흠칫했지만 장한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색목인들이 힘이 좋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우린 다섯이야. 아무래도 역부족일걸?” “간단히 조져버리자.” 선두에 선 장한이 재빨리 달려들어 손에 든 몽둥이로 윈슬럿의 머리통을 힘껏 내리쳤다. 콰직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부러진 것은 윈슬럿의 머리통이 아니었다. 방패 대용으로 쓸 만큼 단단한 것이 바로 듀랴한의 머리통이다. “뭐, 뭐야.” 산산이 부서진 몽둥이를 보고 장한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표정이 떠오른 순간 눈에 불똥이 튀었다. 윈슬럿의 강철 주먹이 정확히 그의 얼굴에 작력한 것이다. 퍼억 누런 이를 옥수수처럶 흩날리며 장한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단 한 방에 실신해버린 것이다. 동료 하나가 어이없이 당하자 장한들의 눈가에 살기가 떠올랐다. “이 자식이…….” “배때기를 쑤셔 창자를 끄집어내어 주마.” 시퍼런 대감도가 윈슬럿의 몸을 파고 들어왔다. 그러나 검기가 실리지 않은 건달들의 칼이 단단한 듀라한의 몸에 상처를 입힐 순 없는 법이었다. 제련상태가 좋지 않았는지 대감도 한 자루는 그대로 부러져버렸고 나머지 하나도 맥없이 퉁겨 나갔다. “뭐, 뭐야.” “칼이 통하지 않는 놈이야.” 놀라움에 장한들의 눈이 툭 불거졌다. 하지만 감탄할 겨를도 없이 윈슬럿의 주먹이 대기를 갈랐다. 퍽 퍼퍽 퍽 일인일격. 의식을 완전히 놓아버린 장한들의 몸이 바닥에 어지럽게 깔렸다. 장한 다섯 명을 단숨에 때려눕힌 윈슬럿은 어깨를 으쓱하며 데이몬을 돌아보았다. 임무를 완수했으니 칭찬해 달라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서슬 퍼런 핀잔이었다. “이 멍청한 놈아, 고작 건달 다섯 처리한다고 비싼 옷을 다 찢어먹으면 어떻게 하냐?” 비록 몸은 도검불침이지만 몸에 걸친 옷만큼은 그렇지 않다. 대감도에 난자당한 부위의 옷이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여분의 옷이 몇 벌 더 있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가면 더 이상 남아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윈슬럿을 쳐다보는 데이몬의 눈매는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괜히 저놈을 데리고 온 것 같군. 수호마왕군 시절의 수하들이 그리워.” 윈슬럿은 기본적으로 닥치는 대로 치고 받는 난전에 특화된 언데드 몬스터 듀라한이다. 데이몬이 직접 강화시킨 만큼 전투력 자체는 결코 약하지 않다. 데이몬의 예상으로 절정급 무사 한명 정도는 거뜬히 감당할 수 있었다. 다만 심각한 타격을 주는 공격이 아니면 피하지 않고 맞받아 치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건들 다섯 눕힌 대가로 옷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무튼 마음에 들지 않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데이몬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직까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눈치 채지 못한 윈슬럿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그 뒤를 따랐다. 3. 파문제자 냉유성 “젠장, 나 취풍개 허설이 한낱 소매치기를 놓치다니…….” 열빈루 앞에는 어느새 허설이 쭈그리고 앉아 상심에 빠져 있었다. 세금을 받아내기 위해 소매치기 이삼을 추격했지만 운 나쁘게 실패한 것이다. 장안에서 이름난 소매치기답게 이삼은 확실하게 도주로를 확보해 두고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른 채 설렁설렁 추격하던 허설은 결국 이삼을 놓치고 말았다. “젠장, 이 사실을 졸개들이 안다면 난 장안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거야.” 연신 궁시렁거리며 푸념하던 허설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조금 전 이삼에게서 소매치기를 당한 색목인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허설은 이미 색목인들에 대한 의심을 깔끔하게 지워버린 상태였다. “소매치기 따위에게 털릴 정도라면 내가 관심 가질 필요도 없지.” 기지개를 편 허설은 거적을 펴고 벌렁 드러누웠다. 이제부터 따뜻한 햇살을 안주 삼아 잠에 취해볼 생각이었다. 객잔 안에 들어서자 점소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어서옵…….” 인사를 하던 점소이가 말꼬리를 흐렸다. 들어온 손님이 색목인들이었기 때문에 당황한 것이다. 그러나 점소이의 근심은 금세 사라졌다. 색목인 하나의 입에서 유창한 중원어가 흘러나왔다. “요리를 먹으러 왔다. 자리로 안내하라.” “네, 네.” 색목인의 말이 생각보다 유창하다는 생각을 하며 점소이는 얼른 그들을 자리로 안내했다. 식사 때가 지났기 때문에 객잔 내부는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그럼 뭘 드시겠습니까?” 점소이의 말에 데이몬은 손가락으로 메뉴판을 좍 훑었다. “전부 다 가져오너라.” “네?” “이 면에 적힌 요리를 모두 내오란 말이다.” 점소이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데이몬이 가리킨 요리는 모두 44종, 요리 하나를 두세 명이 먹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이걸 어떻게 두 분이서?” 주뼛거리는 점소이의 태도에 데이몬의 눈매가 휘어져 올라갔다. “주문을 받지 않을 셈이냐? 장사하기 싫어?” 그래도 머뭇거리는 점소이의 태도에 데이몬은 한숨을 내쉰 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곧 손에 딸려 나온 것은 몇 개의 금편이었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작은 순금조각은 중원에서 사용하기 위해 데이몬이 마법을 이용해서 가공해온 것이다. 금편 하나를 건네받자 점소이의 태도가 싹 바뀌었다.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한 번 깨물어본 점소이는 허리를 직각으로 꺾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잠시 후 객잔 안의 모든 시선이 데이몬에게로 집중되었다. 끊임없이 요리가 나와 탁자에 쌓였기에 보는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렇게 많은 요리를 어떻게 다 먹으려고…….” “색목인들이 먹성이 좋다는 소린 들었지만 그래도 저것은 무리인 걸?”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대상은 덩치 좋은 윈슬럿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을 저버리고 윈슬럿은 단 한 점의 요리도 입에 넣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언데드인 윈슬럿이 음식을 먹을순 없는 노릇이다. 데이몬만이 간간이 젓가락을 뻗어 요리를 한점씩 입으로 가져갈 뿐이었다. “훌륭하군. 정말 얼마 만에 느껴보는 맛인가!” 탁자가 접시로 가득 찼지만 요리는 계속해서 나왔다. 놓을 자리가 없어지자 점소이들은 다른 탁자를 붙이고 그 위에 요리 접시를 놓았다. 데이몬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수십 년 만에 먹어보는 중원의 음식 맛을 만끽했다. 요리의 맛은 훌륭했다. 일단 열빈루 자체가 오랜 전통을 가진 실력 있는 요릿집이었기에 데이몬의 미각을 충족시키는 데 충분했다. 다양한 재료에다 굽고 조리고 삶는 등 다양한 요리방법에 친숙한 소스가 끼얹어진 각종 요리들을 데이몬은 정신없이 먹어나갔다. 한정된 위장 때문에 요리 당 한 번씩밖에 젓가락질을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데이몬은 행복했다. “마계의 일급 숙수들도 이런 요릿맛을 재현하지 못했지. 건너갈 때 이곳 숙수나 몇 놈 잡아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요리를 즐기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점소이들이 접시를 들어 나르고 있었다. “미치겠군.” 거적에 드러누워 잠을 청하던 허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평상시에도 맛있는 요리냄새가 풍겨오긴 했지만 오늘은 정도가 훨씬 심했다. 데이몬의 만행으로 인한 현상이었지만 허설이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체면과 주려오는 배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하던 허설은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오늘 졸개들에게 체면을 구기더라도 요리를 얻어먹고 말겠다.” 허설은 주먹을 불끈 움켜쥔 채 열빈루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더 먹었다간 배가 터지겠군.” 데이몬은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탁자 위의 접시를 훑어보았다. 붙여져 있는 세 개의 탁자 위에는 요리접시로 인해 빈틈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각종 요리들이 아직까지 식지 않은 채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젓가락짓을 한 번씩만 했기 때문에 요리는 마치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멀뚱히 앉아 눈알을 굴리고 있는 윈슬럿을 보며 데이몬은 트림을 했다. “꺼억. 그나저나 아깝군. 너무 많이 시켰나? 아무튼 내가 알 바 아니지. 돈이 많으니 이런 호사도 누리는군.” 그때 데이몬의 귓전에 소란이 감지되었다. 그의 고개가 느릿하게 문가로 향했다. 객잔의 입구에는 몇 명의 점소이들이 늙은 거지 하나를 둘러싸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거지의 정체는 배고픔을 참지 못한 개방의 장안 분타주 허설이었다. 반드시 배를 채우겠다는 필사의 각오로 달려온 허설. 그러나 열빈루의 점소이들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때가 꼬질꼬질한 거지 차림새의 허설을 점소이들이 순순히 들여보낼 리는 없었다. “거지 영감, 감히 어딜 들어오는 거요?” “배가 너무 고파서 온 거라네. 음식을 좀 동냥해주면 조용히 나가겠네.”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하지 말고 당장 꺼지시오. 식사하시는 손님들 입맛 떨어뜨리지 말고.” 허설은 사력을 다해 성질을 가다듬었다. 그가 누구인가? 개방에서도 알아주는 중견 장로 아닌가? 점소이 세 명 정도는 가벼운 손짓 한 번만으로 석 달 열흘 동안 침대신세를 지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무림인 체면에 무공을 모르는 점소이에게 손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허설은 자존심을 죽이고 다시 한 번 애결했다. “제발 부탁이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야.” “영감, 맞고 가겠소? 그냥 가겠소?” 싸가지 없는 점소이의 태도에 허설이 무력사용여부를 다시 한 번 심각히 고민할 즈음 객잔 안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거지영감을 이리로 모시고 오너라.” 음성의 주인은 데이몬이었다. 그는 허설을 보자마자 그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툭 튀어나온 태양혈(관자놀이)에다 형형한 눈빛은 그가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임을 알려주었다. 게다가 차림새는 중원의 정보통으로 알려진 개방의 복식.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정말 잘 되었군. 개방 녀석이라면 아는 것이 많을 터. 저놈을 구슬려서 중원의 정세를 좀 캐내야겠군.’ 결국 마음을 정한 데이몬이 소리쳐서 점소이들을 부른 것이다. 손님이 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점소이들은 객잔 안으로 허설을 쉽사리 들이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이 콩알만 한 금편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누가 가장 빨리 행동하는지 보겠다.” 예로부터 황금은 귀신도 부린다는 말이 있다. 금편을 보자 점소이들은 허설을 말 그대로 납치하다시피 질질 끌어다 데이몬에게로 데리고 왔다. “헤헤, 여기 모시고 왔습니다.” 가장 재빨리 행동한 점소이의 손에 금편이 들어가는 것을 보며 데이몬은 고개를 돌렸다. “영감, 배가 몹시 고픈가 보구려.” 허설이 뜻밖이라는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분명 이 색목인이 소매치기 당한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 정도 요리를 시킬 정도의 돈이 남아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돈의 출처가 아니라 요리에서 풍기는 먹음직스런 냄새였다. 회가 동한 허설은 데이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요리접시에 머리를 박았다. “고맙소, 색목인 양반. 그럼 잘 먹겠소.” 와구와구 정신없이 요리를 집어먹는 허설을 보며 데이몬은 슬며시 마나를 끌어올렸다. ‘일단 섭혼마법으로.’ 보이지 않게 탁자 밑에서 수인을 맺은 탓에 마법은 금방 발동되었다. 그러나 허설에게 마법을 거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뭐, 뭐야.” 요동치는 기를 간파한 허설이 먹는 것을 중단하고 주위를 둘러보자 데이몬은 찔끔해서 캐스팅을 중단했다. 절정의 무인이라서 기의 흐름에 민감한 모양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데이몬은 자연스럽게 웃어주었다. ‘뭔가 착각을 한 모양이로군.’ 고개를 갸웃거린 허설이 다시 먹는 데 열중했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은 무림 고수들에게 마법을 거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 고위급 마법일수록 기의 흐름이 거칠어지기 때문에 탄로 날 가능성이 높았다. 경지가 높은 무인일수록 마나의 흐름에 민감해지는 법.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트루베니아에서도 마법사가 소드 마스터들에게 약한 면모를 보이는 것 아닌가. ‘젠장! 마법을 사용해 암습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겠어. 그렇다면 초급마법을 써보면 어떨까?’ 데이몬은 곧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허설에 먹성은 탁자 위의 요리접시를 반 정도 비우고 나서야 해소되었다. 올챙이배처럼 부푼 배를 두드리던 허설이 길게 트림을 했다. “꺼억. 고맙소.” “고마울 것까진 없소. 어차피 버릴 요리들이었으니까.” 그 말에 허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다면 이 많은 요리를 뭐 때문에 시킨 거요?” “다 먹을 순 없으니 맛만 본 거지. 내 위장은 노인장처럼 크지 않소.” “…….” “평소에 중원 요리에 대해 많이 들어왔었소. 그래서 이 객잔에서 나오는 모든 요리를 섭렵해 보고 싶었소. 그러려면 아무래도 이 방법밖에 없지 않겠소?” 데이몬을 멀뚱히 쳐다보던 허설이 더러운 소매로 입가를 쓱 닦았다. “팔자 좋고 돈 많은 양반이로군. 아무튼 덕분에 잘 먹었소.” 고개를 돌리자 초롱초롱한 네 쌍의 눈빛이 들어왔다. 허설이 벌인 소란 때문에 무슨 일인가 하고 다가온 졸개 거지들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탁자 위에 남은 나머지 요리에 쏠려 있었다. 그들의 열망 가득한 눈빛을 보며 허설은 어깨를 으쓱했다. “요리 남은 거 먹지 않을 거면 좀 싸가도 되겠소? 거두고 있는 애들이 있어서.” “원하는 대로 하시오. 대신…….” 데이몬은 슬며시 웃으며 음성을 낮췄다. “차라도 한 잔 하면서 중원이야기나 좀 해 주시오. 보다시피 중원엔 초행이라 어려운 점이 많다오.” 그 말을 듣자 허설은 생각에 잠겼다. 상대는 서역 문파의 첩자일지도 모르는 색목인. 그런 자에게 중원 정세를 가르쳐주는 것은 철저한 금기사항이다. 분명 평상시의 허설이었다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허설은 지금 데이몬이 전개한 현혹마법에 걸려 있었다. 현혹마법. 이 마법에 걸리면 대상은 캐스터에게 친근한 감정을 품게 된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여겨져 어지간한 비밀을 모두 털어놓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 거기에 3, 4서클 정도의 수준 낮은 마법이라서 허설은 마나가 재배열되는 기미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마법에 걸리고 말았다. 고도의 마법인 섭혼과는 달리 현혹마법은 마나배열이 단순한 편이었기에 기의 요동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마법에 사로잡힌 허설은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허설이 손가락을 끄덕이자 휘하 거지들이 쏜살같이 탁자로 달려왔다. 이미 금편을 받았기에 점소이들은 그들을 만류하지 않았다. “몽땅 가지고 가서 먹어라. 난 차나 한 잔 하고 가겠다.” “알겠습니다, 왕초.” 거지들이 잽싸게 접시의 요리를 자루에 쏟아 부었다. 숙수들이 한껏 솜씨를 발휘한 일급 요리들이 자루 속에서 엉망으로 뒤섞이자 데이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런 멍청한 것들……. 하긴 저 녀석들에겐 질보다 양이 우선이겠지.’ 잠시 후 거지들이 희희낙락해 하며 사라지자 데이몬은 점소이를 불렀다. “차를 가져오너라. 철관음 정도면 후식으로 적당하겠구나.” 데이몬이 비싸디 비싼 철관음을 시키자 점소이가 쾌재를 부르며 주문을 받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재신이 도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데이몬과 허설의 첫 대화는 시시껄렁한 중원의 풍속으로 시작되었다. 현혹마법이란 처음부터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분위기가 고조되어야만 중요한 부분을 들을 수 있는 것이기에 데이몬은 조바심 내지 않고 허설과 잡담을 나누었다. “그나저나 중원은 참 살기 좋은 곳 같소이다. 사람들도 많고…….” “그런데 당신은 어디서 온 거요? 노부가 색목인을 자주 봐 왔지만 당신같이 머리가 샛노랗고 파란 사람은 처음이오.” “무척 먼 곳에서 왔지요. 걸어서 오기는 불가능한 곳이지요.” “그런데 우리 중원말이 상당히 유창하시구려. 중원 서남부의 양주 사투리가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허설의 관찰력은 예리했다. 그러나 노련한 데이몬은 일체의 빈틈없이 대처할 수 있었다. “중원말은 내가 살던 곳에서 배웠소. 중원에서 건너온 자가 한 명 있었지요. 그를 통해 중원에 대해 들었기에 이처럼 나들이를 하게 된 것이지요.” 고개를 끄덕이던 허설의 시선이 윈슬럿에게로 향했다. “이분은?” “내 수행원이지요. 잡일을 도맡아하는 시종이라고나 할까?” “시종이라기보다는 호위무사 같소이다만…….” 허설은 한눈에 윈슬럿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물론 언데드란 사실은 몰랐다. 데이몬이 부여한 마력 덕분에 윈슬럿에게서는 일체의 시기(屍氣)가 뿜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우람한 체구와 단단한 몸매는 전형적인 무사의 것이었다. “호위무사 역할을 하긴 하지만 주로 잡일을 맡아 하지요. 중원말을 전혀 모르는 데다 좀 멍청해서 데리고 온 것을 후회하던 참이오.”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사이 현혹마법이 서서히 효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왜 이러지. 분명 처음 보는 색목인이거늘 이토록 친숙한 느낌이 들다니…….’ 형제자매나 사형제 간에 느껴질 법한 친숙함이었다. 마치 고난을 같이 했던 절친한 고향친구 같았다. 현혹마법에 걸린 증상이었지만 허설은 전혀 의심을 갖지 않았다. 사술이나 술법과는 궤가 다른 수법이라 의심할 만한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데이몬은 때를 놓치지 않고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중원에는 무림이라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들었소. 그것이 사실이오?” 잠시 머뭇거리던 허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놀랍구려. 세상 안에 세상이 있다니.” “오로지 무를 추구하는 무인들이 모여 만든 세상이오. 그곳은 황제나 관도 어찌 할 수 없는 곳이지. 솔직히 말해…….” 말꼬리를 흐린 허설은 데이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눈앞의 색목인에게는 무엇도 숨기고 싶지 않았다. “나 역시 무림인이오. 개방이라는 문파에 소속되어 있소이다.” “놀랍구려. 그런데 어찌하여 거지 차림새를 하고 다니는 거요?” “왜냐하면 내가 속한 단체가 거지들이 모여 만든 문파인 개방이기 때문이오.” 데이몬은 짐짓 놀란 척했다. “거지들도 문파를 만들 수 있소?” “물론이오. 중과 도사, 심지어 자객이나 기녀들도 문파를 만들 수 있는데 거지라고 못 만들 이유가 어디 있소." "대단하구려. 충분히 일리가 있소.” 데이몬은 때론 고개를 끄덕이며 때론 맞장구를 쳐가며 허설의 말을 경청했다. 허설은 신이 나서 무림에 대해 설명해 나갔다. “무림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소. 그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 자식아, 까불지 말고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 무림의 역사에 대해서는 너보다 본좌가 더 많이 알고 있다.’ 조바심이 들었지만 데이몬은 꾹 눌러 참았다. 상대는 지금 섮혼마법에 걸린 것이 아니다. 저레벨의 마법 어트렉션으로 친숙함을 느끼게 했을 뿐이었으므로 단계를 밟아 차근차근 질문해 나가야 한다. 상대가 이상함을 느끼는 순간 마법은 깨져버린다.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허설이 마침내 현 무림의 정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현재 무림은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소. 각 문파들이 오 년 전에 끝난 정사대전의 상처를 대부분 수습한 거지요. 하지만 정사대전으로 인해 문파들의 힘이 많이 약해졋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소. 봉문하거나 아직까지 힘을 되찾지 못한 문파들도 부지기수니까요.” “정사대전이라면…….” “정파와 사파, 각 성향을 가진 문파들이 서로 전쟁을 벌인 것이오. 무려 십 년을 끌었고 그 과정에서 무수한 무인들이 목숨을 잃었소. 우리 개방 역시 정사대전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소.” “놀랍군요.” 별반 감동 받을 내용은 아니었지만 데이몬은 짐짓 감탄사를 토했다. 이제부터 그가 궁금했던 것에 대해 물어볼 차례였다. “그렇다면 현 무림에서 가장 강한 문파는 어디라고 생각하시오?” 완전히 현혹마법에 장악된 허설은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대답해 주었다. “만약 그 질문을 오 년 전에 했다면 아무 거리낌 없이 마교라고 답했을 것이오. 하지만 지금은 아니오.” 그 말에 데이몬은 적이 놀랐다. 그 역시 무림에서 가장 강한 문파로 마교를 생각하고 있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마교는 깊은 전통만큼이나 정파 무림인들에게 공포를 안겨준 존재였다. “현재 무림에서 가장 강한 문파는 잠마련이오. 마교는 정사대전 직후 내분으로 인해 많은 힘을 잃고 청해성으로 물러 갔소이다. 현재 상태에서 단일문파로서 가장 강한 문파를 꼽으라면 단연 잠마련이지요.” 데이몬에겐 지극히 생소한 이름이었다. 조바심이 치밀어 오른 데이몬은 재차 질문을 퍼부었다. “내가 듣기로 무림에 배교라는 문파가 있다고 했는데 아직 존재하는지 알 수 있겠소?” 의심이 갈 만한 질문이었지만 허설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 넘겼다. “배교는 이제 무림에 존재하지 않소이다.” 데이몬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한때 배교의 교주였었던지라 충격이 더욱 컸다. 허설은 데이몬이 내심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말을 계속 이어갔다. “배교라는 문파는 정확히 사 년 전 무림에서 사라졌소이다. 신임교주가 배교를 해체하고 잠마련을 설립한 것이지요. 정확히 말해 현 잠마련의 전신이라고 보면 정확하오.” 그 말에 데이몬의 눈빛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그렇다면 그 신임교주가 현 잠마련의 련주를 맡고 있다는 말이겠구려.” “바로 맞췄소이다. 당신도 통찰력이 대단하구려. 천기대제 사준환, 바로 그가 잠마련의 련주를 맡고 있다오.” 그 순간 탁자 밑에 놓여 있던 데이몬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사준환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치밀어 오르는 격동을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데이몬이 배교의 교주였던 당시 사준환의 별호는 천기서생이었다. ‘그놈이 배교를 해체하고 잠마련을 세운 뒤 천기대제로 별호를 바꾸었나 보군. 거창한 별호를 보니 정말 많이 컸어.’ 데이몬의 격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설은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우리 정파에서는 잠마련에 대항하기 위해 정사대전 때부터 가동했던 무림맹 체제를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소. 현재 무림은 무림맹과 잠마련 그리고 마교 이 세력으로 삼등분 되어 있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오.” 허설의 설명으로 인해 데이몬은 무림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정파 무림이 연합한 무림맹의 힘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컸다. 전체 무림의 오 할에 달하는 힘을 보유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단지 문파들의 연합체라서 결정능력과 대처능력이 떨어질 뿐 결코 그 저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다음을 잇는 것이 바로 사준환의 잠마련이었다. 외형상 군소 마도문파들의 결집체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그 속내는 무림맹과는 사뭇 달랐다. 우선 련주인 천기대제 사준환이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잠마련의 모든 대소사를 관장하고 있었다. 바로 그 점이 가장 확실한 차이점이었다. 무림맹의 맹주가 단순히 관리자 역할을 하고 있다면 잠마련의 련주는 그 수준을 넘어서 지배자로 군림을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설명을 듣는 내내 데이몬은 입술을 질끈 깨물어야 했다. ‘정말 대단한 놈이긴 하군. 그 짧은 시간 내에 무림 최대 세력을 움켜쥐다니……. 놈의 야망을 분쇄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겠어.’ 남은 이할의 세력은 마교와 몇 안되는 중립문파가 틀어쥐고 있었다. 한때 전 무림의 공포라고 일컬어졌던 마교였지만 지금은 세력이 형편없이 쪼그라들어 있었다. 이유는 바로 내전 때문이었다. 정사대전이 끝나자마자 마교는 교주파와 장로파로 갈려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강력한 무공을 가진 장로들이 힘을 합쳐 교주를 밀어내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교주를 지지하는 세력이 예상보다 강력했던 것이다. 뜻을 이루지 못한 장로들과 주력 고수들은 마교를 탈출해서 잠마련에 몸을 담았다고 한다. 마교의 내전으로 인해 잠마련이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것이다. 정사대전 당시 맹위를 떨치던 마교 고수들을 떠올려 본 데이몬은 인간사의 허망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달이 차면 기울어지듯 마교도 그런 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로군.’ 생각에 잠겨 있는 데이몬의 귓전으로 허설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이것은 극비에 속하는 사안인데, 최근 들어 무림이 또다시 어지러워지고 있소.” 완전히 현혹마법에 사로잡힌 허설은 말하지 말아야 할 사안까지 털어놓고 있었다. “현재 무림에는 암약하는 조직이 하나 있소. 회라고 불리는 조직인데 그들은 독을 이용해서 각 문파의 중견고수들을 협박, 회유하고 있소. 때문에 무림맹에서는 그들의 행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오.” 그 말에 데이몬은 관심을 가졌다. 혹시 그들이 사준환에게 복수를 결정한 수호마왕군의 후예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이어진 허설의 설명으로 인해 무참히 깨어졌다. “조사된 바에 의하면 회는 무시하기 힘든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오. 그중 하나가 독강시오. 사라진 배교의 고급 강시에다 극독을 접합했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무척 까다롭다고 하오.” “강시?” 데이몬은 침음성을 울렸다. 회란 단체가 강시를 운용한다면 일단 수호마왕군의 후예는 아닌 것 같았다. 기억에 의하면 수호마왕군은 무력대결을 선호하는 무사이지 강시 따위나 만드는 술사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강시제조 기술은 배교의 총단에 보관되어 있었다. ‘강시 따위가 현 무림에서 통하진 않을 텐데……. 이미 이백년 전 효용가치를 입증하지 못해 도태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데이몬은 머리를 흔들어 회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렸다. 회의 목적이 무엇이고 무엇을 추구하는지는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데이몬에게 중요한 것은 사준환에게 복수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였다. ‘부득이 다른 세력을 이용해야겠군. 암흑투기를 운용할 수 없는 이상 나 혼자서 복수하기는 역부족이야. 무림맹이나 몰락한 마교의 힘을 빌려야만 사준환의 아성을 깨뜨릴 수 있다.’ 생각을 정리한 데이몬은 현혹마법을 풀었다. 이만하면 허설을 통해 알아낼 만한 것은 모두 알아낸 셈이었다. ‘뒤를 받쳐주는 무력단체가 아쉽군. 수호마왕군 그들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지금으로서는 데이몬에게 복수할 방법은 요원했다. 하지만 방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데이몬에겐 전례가 있지 않은가? 과거 드래곤의 레어에서 탈출했을 당시 데이몬에게는 뒤를 받쳐줄 만한 세력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페르슈타인 공작을 회유함으로써 강력한 지원군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드래곤에 대한 복수를 성공시켰다. 그때처럼 타 세력을 등에 업는다면 어쩌면 사준환의 야망을 깨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교는 이미 힘을 잃은 상태. 부득이 정파와 손을 잡아야겠군.’ 정파와 손을 잡는다는 것. 사파의 거두였던 데이몬에게 용납하기 힘든 일이긴 했다. 하지만 데이몬에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마왕이다. 한낱 정사의 이념따위에 연연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데이몬이 상념에 사로잡힌 사이 허설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현혹마법이 거두어졌지만 효과가 금세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서 말없이 차만 홀짝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가 객잔에 들어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남루한 차림새를 한 사내 하나가 조용히 들어왔다. 나이는 서른 정도. 날카로운 눈매와 얇은 입술에 얼굴을 가로지른 칼자국이 어우러져 몹시 냉막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공교롭게도 맞은편으로 걸어왔기에 데이몬은 사내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제법 분위기 있게 생긴 녀석이로군.’ 거기까지는 데이몬도 사내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사내의 몰골을 본 순간 상황이 돌변했다. 사내는 매우 힘겹게 걸음을 떼어놓고 있었다. 양쪽 발을 모두 절고 있는 것이다. ‘이상하군. 풍기는 기운을 보면 뼈를 깎는 수련을 겪은 무인 같은데 무슨 일로 두 다리를 절고 있을까…….’ 힘겹게 탁자로 간 사내가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보는 사람이 답답해 할 정도로 느린 움직임이었다. 그런 사내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점소이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주문을 받았다. “뭘 드시겠소?” 잠시 고민하던 사내가 메뉴판을 펼쳤다. 머뭇거리는 것을 보아 돈이 충분치 않은 것 같았다. 한참 메뉴판을 살피던 사내가 마침내 요리 하나를 시켰다. 탁한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진강요육을 주게.” 제법 비싼 고급 요리였다. 주문을 받은 점소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차림새를 미루어 볼 때 사내가 시킬 만한 요리가 아니었다. “음식값을 치를 돈은 있소?” 사내는 잠자코 탁자 위에 동전을 쌓았다. 정확히 진강요육을 시킬 수 있는 금액이었다. 손의 움직임이 너무 굼떠서 쳐다보던 점소이의 얼굴에 짜증기가 어렸다. “잠시 기다리시오. 금방 나올 것이오.” 데이몬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의 안목으로 볼 때 사내는 혹독한 수련을 쌓은 무인이었다. 절제된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마나를 돋워 살펴본 결과 사내에겐 내공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걷는 모습과 동전 쌓는 모습을 미루어 볼 때 몸이 결코 정상은 아니었다. ‘파문제자로군. 중대한 죄를 저질러 사지의 근맥을 잘리고 단전을 파괴당한 모양이야. 도대체 어떤 문파의 제자였기에…….’ 호기심이 치밀어 오른 데이몬은 허설을 불렀다. “혹시 저기 저자에 대해 알고 있소?” 꾸벅꾸벅 졸고 있던 허설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개방의 장안 분타주답게 허설은 사내의 정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냉유성이로군, 쯔쯔.”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보아 무척 안쓰러워하는 것 같았다. “얼굴의 칼자국을 보니 제법 실력 있는 무사 같소만?” “한때는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는 폐인에 불과하오.” “그게 정말이오?” 별다른 비밀로 생각하지 않았는지 허설은 순순히 사내의 내력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는 원래 공동파의 제자였소. 유일하게 직계들을 능가한 방계라서 방계 출신 제자들 사이에서는 전설적인 존재로 통하지요. 공동파에서 검귀이라는 칭호를 내릴 정도로 검술실력이 뛰어났었소. 하지만 모든 것이 과거에 묻혀버렸소. 공동파에서 파문당하는 과정에서 사지의 근맥이 잘리고 단전이 파괴당해 지금은 범인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말이오.” 익히 파악한 사실이었지만 데이몬은 과장되게 놀란 척했다. “놀랍구려. 그래도 한때는 문파의 제자였는데 어떻게 그토록 잔인한 손속을 가할 수가 있소?” “문파에서 배운것을 모두 거두겠다는 의미이지요. 게다가 그가 범한 과오가 결코 작지 않소. 다른 파에서도 동일한 형별을 내릴 판국인데 문규가 특히 엄격한 공동파라면 더 이상 생각해 볼 필요가 없지.” “도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허설의 입을 통해 나온 냉유성의 죄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말 그대로 기사멸조의 대죄를 지은 것이다. 냉유성은 고아로서 공동파에 팔려왔다. 그리고 대부분의 방계 제자처럼 어릴 때부터 공동파에서 무공을 익혔다고 한다. 그런 그가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자질과 무공에 대한 집념 때문이었다. 다른 제자들이 잠을 잘 시간에도 시간을 내어 수련을 하고 자질 역시 탁월했기에 냉유성은 오래지 않아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다. 냉유성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정사대전에서였다. 당시 스물을 갓 넘긴 나이에 3대 제자로서 참전한 그는 죽을 고비를 무수히 넘긴 끝에 자신만의 실전검술을 완성했다. 원래부터 공동파의 검술은 살기가 짙고 실전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 공동파의 검술을 실전을 통해 완성시켜 정사대전이 끝날 즈음에 냉유성은 자신만의 독보적인 검술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십대 후반의 나이에 절정의 벽을 깨뜨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냉유성의 집념에는 이유가 있었으니……. 냉유성은 어릴 때부터 장문인의 딸인 소향을 사모했었다고 한다. 신분상의 차이 때문에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소향에 대한 연심은 시간이 갈수록 증대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다분히 일방적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소향이 냉유성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무뚝뚝하고 냉정한 냉유성보다 다정다감하고 온화한 직계제자 이정휘에게 연심을 품었다. 둘 사이의 정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만 갔고, 그 모습에 냉유성은 속절없이 속만 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그걸 참지 못한 냉유성이 결국 사고를 쳤다. 반항하는 소향을 강제로 납치한 다음 으슥한 뒷산에서 겁탈하려 한 것이다. “강제로 몸을 범하면 어쩔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 같소. 서역과는 달리 중원에서는 정조관념을 무척 중요시하니까 말이오.” 하지만 냉유성의 그런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소향의 실종으로 몸이 단 이정휘와 여러 제자들이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고, 내유성은 채 일을 치르기도 전에 발각되고 만 것이다. 범행이 탄로 나자 냉유성은 순순히 포박되지 않고 저항하는 길을 택했다. 이후 벌어진 치열한 접전. 그 과정에서 냉유성의 실력이 확연히 드러났다. 무려 삼대 제자 다섯 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정휘가 크나큰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그러나 냉유성의 무위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결국 공동파의 장로들이 동원되었지요. 냉유성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붙잡혔소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지 않았소. 심문하는 과정에서 장문인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까지 퍼부었다고 하니 말이오. 어찌 보면 냉유성이 강력한 처벌을 받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오. 함께 수련한 동료 다섯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말이오. 아무튼 그 죄로 냉유성에겐 사지 근맥이 자르고 단전을 파괴하는 형벌이 내려졌소. 파문된 것은 그 다음이지.” “그런 일이 있었구려.” 데이몬이 침음성을 울리며 허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설명대로라면 냉유성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범지자였다. 동문제자를 살해하고 장문인의 딸을 강제로 겁탈하려 한 죄는 그 어떤 문파에서도 용납되지 못한다. 하지만 데이몬은 허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다. 떠도는 소문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중시하는 성품때문이었다. ‘자고로 소문은 입과 입을 거치면서 증폭되기 마련이다. 내가 보기에 냉유성의 눈빛은 존장을 능멸하는 자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무심코 쳐다본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냉유성의 모습에 누군가의 영상이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최후까지 자신을 보필하다 산화한 충직한 수하 종리령의 모습이었다. 수호마왕군의 부대주였던 그는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충성을 보여주었다. ‘저놈의 눈빛이 어쩐지 종리령과 흡사하군.’ 냉유성을 쳐다보는 데이몬의 귓전으로 허설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내 짐작으로 그는 내일을 넘기지 못할 것이오.” “호오? 그것 또 왜 그렇소?” “그에겐 원수가 무척 많소. 특히 사파의 무사들에게 무수한 원한관계를 쌓았지. 정사대전에서 공을 세웠다는 것은 즉 그의 손에 죽은 사파 무사가 많다는 뜻이니까. 게다가 냉유성에게 죽은 3대 제자의 친인들마저 이를 갈고 있소. 모르긴 몰라도 냉유성에게 복수하기 위해 벌떼처럼 달라붙을 거요. 그러니 무공을 잃은 그가 오늘을 넘기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지 않겠소?” “그렇겠지. 자고로 이빨 잃은 사자에게는 하이에나 떼가 달려들기 마련이니까.” 주절거리던 허설이 완전히 정신을 차렸는지 몸을 일으켰다. “아차, 그러고 보니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노화자는 이만 가봐야겠소. 차 잘 얻어 마셨소이다.” 이제 더 이상 볼일이 없었기에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허설에게서 풍겨지는 냄새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던 데이몬이었다. “다음에 또 봅시다. 모쪼록 중원 나들이가 즐겁기를 바라겠소.” “고맙소이다.” 몸을 돌린 허설은 휘적휘적 객잔을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데이몬이 다시 냉유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후후, 이빨 빠진 사자라…….” 차분하게 음식을 먹던 냉유성은 어이가 없다는 듯 툴툴거렸다. 옆 탁자에서 늙은 거지와 색목인이 나누던 대화는 하나도 빠짐없이 그의 귀로 들어왔다. 비록 내공을 잃은 몸이지만 지근거리에서 들리는 대화를 듣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대놓고 그의 잘못을 파헤치니 심기가 편할 리가 없다. 그는 공허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장문인, 정말 대단하시구려. 날 이토록 철저히 망가뜨려야 속이 시원하겠소?’ 이제 그는 지쳐있었다. 제 아무리 결백을 부르짖어 보아도 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늙은 거지, 개방의 장안 분타주 허설이 밝힌 자신의 죄상은 사실 철저히 날조된 것이었다. 진실이 아니라 장문인이 직접 위조하여 퍼뜨린 것이었다. 문제는 무림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말이 아니라 장문인의 말을 믿는다는 점이다. ‘이미 난 장로들에게도 미운 털이 박힌 상태이고 날 지지해 주는 세력은 공동파에 전혀 없다. 세 사람이 입을 보으면 한 사람을 완벽히 파멸시킬 수 있다는 속담이 이토록 들어맞을 줄이야.’ 요리접시는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가진 전 재산으로 시킨 요리였다. 이른바 최후의 만찬인 셈이었다. 그에게 내일은 의미가 없었다. 당장 오늘밤을 넘기기조차 힘든 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냉유성은 잠자코 지난 일을 떠올려 보았다. 그는 철저히 검의 길을 추구했던 무인이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거리를 떠돌다 한 장로의 손에 이끌려 공동파에 입문하였고 이후 그는 무의 완성에 모든 것을 걸었다. 잠자는 시간을 아껴 내공을 닦았고 식사하는 시간을 아껴 검을 휘둘렀다. 무예는 한 마디로 그의 모든 것이었다. 그러니 무공을 잃어버린 지금 뭔가에 대한 애착이 있을 리가 없었다. 돌연 냉유성의 입가가 푸들푸들 덜렸다. ‘내가 소향이를 사모했었다고? 후후, 모든 것을 무의 완성에 바친 내가 한낱 여인에게 음욕을 품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사람들은 모른다. 정작 사모한 쪽은 내가 아니라 소향이란 사실을…….’ 냉유성의 성취는 문파 내에서도 단연 독보적이었다. 가장 먼저 연무장에 나오고 가장 나중에 연무장을 뜨는 만큼 그의 노력을 따라올 자는 공동파 내부에는 없었다. 그런 그를 장문인의 딸 소향이 관심을 가진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공동의 장문인은 냉유성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단순히 싫어할 것이 아니라 증오했다는 것이 정확했다. 왜냐하면 냉유성이 장문인인 춘양진인이 가장 싫어하는 사제인 춘명진인의 제자였기에. 냉유성은 돌연 타오르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여기 술 한 잔 주겠나?” 남은 동전을 모두 털어 주자 점소이가 싸구려 백주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술잔을 기울이며 냉유성은 또다시 옛 기억의 편린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그를 가르친 스승인 춘명진인은 공동에서 그리 인정받지 못하는 장로였다. 무공도 그리 강하지 않았고 인망도 없었기 때문에 춘명진인의 휘하에 들고자 하는 제자는 없었다. 그에게 배움을 청한 유일한 제자가 바로 냉유성이었다. 당시 냉유성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끌림에 의해 춘명진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것이 냉유성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다. 비록 무공이 그리 뛰어나진 않았지만 춘명진인은 제자를 키우는 데 있어서만큼은 발군의 자질을 보였다. 실패를 많이 해 본만큼 어떻게 가르쳐야 시행착오를 하지 않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다른 제자들이 없었기에 냉유성은 춘명진인의 집중적인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이 냉유성에겐 엄청난 행운이었다. 당시 장로였던 춘양진인과 춘명진인은 철저한 앙숙관계였다. 외골수적일 정도로 고집이 센 춘명진인과 욕심 많고 야망이 컸던 춘양진인은 철저히 상극인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문파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사뭇 달랐다. 차기 장문인으로 거론되는 춘양진인과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춘명진인 사이에는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어쩌면 그런 춘양진인의 위상 때문에 춘명진인이 찬밥처럼 무시당하고 살았는지도 몰랐다. 그런 춘명진인에게 있어 유일한 낙은 제자인 냉유성의 성취를 보는 것이었다. 냉유성 역시 그런 스승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수련을 했다. 가르침도 남달랐고 배우는 제자의 열정도 남달랐다. 그러니 성취가 범상하다면 그게 바로 이상한 일이었다. 냉유성은 오래지 않아 같은 삼대 제자들 중에서도 수위에 꼽힐 정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것은 스승인 춘명진인의 설움을 어느 정도 풀어주었다. 무림 문파에서는 제자들의 성취를 파악하고 실력을 검증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비무대회를 연다. 공동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 비무대회에서 냉유성은 스승과 앙숙인 춘양진인의 제자를 연거푸 꺾는 데 성공한다. 한두 번도 아니고 거듭해서 말이다. 지금은 장문인이 된 춘양진인이 냉유성에게 가진 앙심은 그때부터 비롯된다. 냉유성이 본격적으로 검도고수의 길로 접어들게 된 계기는 정사대전이 벌어지는 동안이었다. 스승인 춘명진인은 냉유성이 전장에 있을 당시 노환으로 세상을 떴다. 냉유성에게 있어 유일한 방패막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상심한 냉유성은 푸념을 했다. ‘나도 참 어리석었지. 인맥을 넓힐 생각 없이 개인적인 수련에만 몰두했으니…….’ 정사대전이 끝나자 냉유성은 문파 내에서 감히 무시할 수 없는 무위를 쌓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춘양진인도 문파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장문인이 되어 있었으니……. 냉유성의 실력이 드러나자 춘양진인도 굳이 그를 제거하려 하지 않았다. 도리어 냉유성에게 연정을 품은 소향을 이용해 그를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같은 문파 내에서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 계파인 법. 냉유성의 실력은 춘양진인이 가장 싫어하는 자의 제자에게 눈독을 들일만큼 뛰어났다. 그러나 냉유성은 소향의 구애를 매몰차게 거절했다. 그녀의 아비인 춘양진인이 싫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검의 완성에 모든 것을 바쳤던 것이다. ‘난 여자 따위에게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검을 한 번 더 휘두르겠다.’ 딸의 구애가 무참히 거절당하자 춘양진인으로서는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주제를 모르는 건방진 놈!’ 그는 급기야 계략을 꾸민다. 냉유성을 합법적으로 매장시키기 위한 계략이었다. 그 대목에서 냉유성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잘 짜여진 하나의 계략이었어. 공동파에 내 편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장문인의 제자인 이정휘와 소향, 그리고 장문인 계파의 제자들이 모두 입을 맞추니 없던 죄도 뒤집어 씌울 수 있을 수밖에……. 무공을 폐할 것이라는 말에 흥분했던 것이 후회되는군.’ 냉유성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때 격분해서 검을 휘두르지만 않았다면 무공을 박탈하는 형벌에까진 처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분노한 그의 검에 동문제자 다섯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은 사실이다. 변명할 여지가 있을 턱이 없었다. 힘없이 떨구어진 그의 시선에 축 늘어진 오른손이 들어왔다. 얼마나 검을 쥐고 휘둘렀는지 손가락 마디 안쪽과 손바닥에 굳은살이 두텁게 박혀있었다. 그러나 냉유성은 이제 두 번 다시 검을 쥘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팔다리의 주요 근맥이 절단당한 이상 닭 한 마리 잡을 수 없었다. 자신의 처지를 실감하는 순간 치밀어 오르는 격정에 냉유성의 눈시울이 불게 달아올랐다. “다시 한 번 검을 잡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으련만…….” 고개를 떨군 냉유성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객잔의 문 쪽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쿵 고개를 돌린 냉유성의 눈망울이 암울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이제 끝장이로군.’ 폭급한 기세로 들이닥친 이들은 열 명 정도의 장한들이었다. 그 선두에는 덩치가 당당한 중년인이 고리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냉유성의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는 존재들이었다. ‘마가장 사람들이로군. 내 손에 의해 세상을 하직한 마일영의 가문.’ 그들이 이곳으로 온 이유는 뻔했다. 냉유성에 의해 죽어간 장남 마일영의 복수. 예상대로 그들은 냉유성을 향해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네 이놈, 드디어 철천지원수를 만나게 되는구나.” 마음의 정리를 한 냉유성은 마지막 남은 술잔을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그런 다음 마음대로 하라는 듯 두 눈을 꼭 감았다. 마가장의 장주 마문태는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냉유성을 노려보았다. 자식을 죽인 철천지원수를 만나게 되자 절로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마가장은 공동파 인근에서 제법 명성을 떨치는 무관이다. 특히 장주의 권술은 공동파에서도 절기를 인정해 줄 정도로 패도적이었다. 그는 가문을 더욱 키우기 위해 장남인 마일영을 공동파에 입문시켰다. 마일영을 직계제자로 만들기 위해 워낙 많은 돈을 써서 가세가 기울 정도였지만 마문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장남이 공동파의 상승검술을 배워온다면 금세 가문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믿었던 장남은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가문의 기대가 산산이 부서져버린 것이다. 그러니 마문태가 냉유성을 향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흥! 아까 말한 대로 이빨 빠진 사자에게 하이에나가 달려드는 격이로군. 만약 냉유성이 무공을 아직 보유하고 있다면 저렇게 기세등등하게 달려들 수 있을까?’ 무림세계는 철저히 약육강식의 법칙에 의해 돌아간다. 만약 냉유성이 무공을 잃지 않았다면 마문태가 저토록 자신만만하게 달려들 수 없다. 원한을 갚겠다고 가문 전체를 말아먹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일단은 놈을 살려놓고 봐야겠군. 가만히 내버려두면 처참히 죽을 것이 분명하니까.” 그러나 개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무림에서 데이몬은 명백히 이방인이다. 색목인이 먼저 시비를 걸고 나선다면 다른 무림인들이 개입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마법에 의한 정면대결로 절정 이상의 무림인을 상대하는 것은 아직까지 데이몬에겐 무리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데이몬이 아니었다. ‘먼저 시비를 걸기 싫다면 상대가 걸게 만들면 되겠지?’ 마음을 정한 데이몬은 탁자 아래 감춘 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그리 수준이 높지 않은 마법이라 순식간에 마나가 재배열되었고 캐스팅으로 인한 기의 동요는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마가장 사람들 중 가장 먼저 달려든 이는 마일영의 동생이었다. 스물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 하나가 장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이놈! 형님을 죽인 원한을 갚겠다!” 그가 노리는 곳은 냉유성의 어깨였다. 비록 무공을 잃었다고는 하나 냉유성은 이미 오래 전에 절정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아무래도 꺼림칙하니 먼저 오른팔을 잘라낸 다음 차근차근 요리하려는 것이 마가장 사람들의 생각인 듯했다. 그러나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스(Grease)." 캐스팅한 마법이 발현되는 순간 청년은 균형을 잃어버렸다. 마찰계수가 0이 되어버린 만큼 버틸 재간이 없었다. “어이쿠.” 청년은 볼썽사납게 나동그라지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들고 있던 장검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내리꽂혔다. 데이몬은 절묘하게 공간을 계산해서 마법을 시전했다. 때문에 장검은 멀뚱히 앉아 있는 윈슬럿의 등판에 정통으로 내리꽂혔다. 그 순간 마가장 사람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청년이 미끄러진 탓에 엄한 사람이 죽게 생겼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팅 들려온 것은 섬뜩한 파육음이 아니었다. 마치 강철 방패에 부딪힌 것처럼 맥없이 퉁겨나는 장검을 보자 마가장 사람들은 눈을 부릅떴다. 외공을 극성으로 익힌 사람이 아니고서야 저럴 수는 없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윈슬럿이 괴성을 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캬아악.” 인상을 쓰며 등판을 어루만지던 윈슬럿의 시선이 바닥에 넘어져 있는 청년에게 가서 닿았다. 윈슬럿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한 손으로 청년의 목을 잡고 들어올렸다. “미, 미안하고, 커억.” 청년은 윈슬럿의 손에 목덜미가 잡힌 채 버둥거렸다. 지은 죄가 있으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주뼛거리던 마문태가 얼른 이쪽으로 달려와서 포권을 했다. “실수였소.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오.” 그의 말을 받은 것은 데이몬이었다. 싸늘한 시선이 마문태를 향해 쏟아졌다. “실수? 당신들은 사람을 죽여 놓고도 실수라고 발뺌할 셈이오?” “…….” “만약 윈슬럿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분명 장검에 관통당했을 것이오. 만약 그가 강력한 외공을 익혔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소?” 분통을 터뜨리는 데이몬의 기세에 마문태는 쩔쩔 맸다. 어쨌거나 잘못한 것으 마가장 쪽이기에 마문태로서는 저자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니 이해해 주십시오. 찢어진 옷에 대해서는 적절히 보상을…….” 그러나 데이몬의 태도는 냉랭했다. “사람이 죽을 뻔한 일이오. 당신 같으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없던 일로 돌릴 수 있겠소?” “그, 그럼 제가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내가 살던 세계의 방식으로 합시다. 당한 만큼 갚아주는 것이 우리 세계의 철칙이지. 등판에 칼질을 한 번 했으니 우리도 당사자에게 한 번 칼질을 하겠소. 거기에 동의하시오?” 데이몬의 말도 되지 않는 억지에 마문태는 입을 딱 벌렸다. 눈앞의 덩치 큰 색목인이야 외공을 익혀서 도검에 상처를 이지 않는다지만 자신의 차남은 그렇지 않다. 등판에 칼질을 당한다면 죽거나 아니면 극심한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마문태의 눈가에 스산한 살기가 스쳐지나갔다. ‘말로는 안 통하는 놈들이로군. 부득이 실력행사를 하는 수밖에 없겠어.’ 그러나 그의 내심은 금세 데이몬에게 간파되었다. 눈치 빠르기로는 그 누구에게도 못지않다고 자부하는 데이몬 아니었던가? 데이몬은 빙그레 웃으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일단 한 잔 받으시겠소? 술 한 잔 하고 마음을 가라앉힌 뒤 다시 얘기해 봅시다.” 그 순간 술잔이 허공에 떠올랐다. 술이 가득 담긴 술잔이 마치 날개 달린 새처럼 둥실둥실 떠올라 마문태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마문태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겨, 격공섭물…….” 그 순간 마문태의 투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격공섭물 이라면 평범한 무사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최고의 절기이다. 엄청난 내공을 가진 고수만이 시전할 수 있으며 절정 고수라고 해도 내력이 웅혼하지 못하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세상에…….” 입을 딱 벌리고 경악하는 사이 술잔이 느릿느릿 날아와 마문태의 손위에 놓였다. 바짝 긴장한 채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자신들로서는 도저히 싸워볼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넋을 잃은 마문태의 귓전으로 데이몬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다분히 원론적인 해결책이지 그렇게 하겠다는 뜻은 아니오. 이곳은 중원이고 중원에 왔으면 중원 법을 따라야겠지? 그럼 서로가 절충점을 한 번 찾아보도록 합시다.”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은 뒤 타협점을 제시하는 데이몬 특유의 협상법이 전개되었다. 물론 데이몬이 전개한 기술은 격공섭물이 아니었다. 격공섭물이란 몸속의 기를 체외로 내보낸 뒤 형상화시켜 물리적인 힘을 가하는 기술이다 겉보기엔 비슷하긴 하지만 데이몬이 쓴 방법은 마법에 의한 것이었다. 데이몬의 마법실력을 감안하면 술잔 하나를 공중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흐흐흐. 잔뜩 긴장했군. 이게 격공섭물이 아니란 사실을 안다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미소를 지운 데이몬은 정색을 하고 마문태를 쳐다보았다. “남자다운 받법으로 처리하는 것이 어떻소? 좁은 객잔 안에서 치고받으며 싸울 수는 없는 법. 그러니 깔끔한 승부를 통해 해결 합시다.” “까, 깔끔한 승부라니요?” “간단하오. 서로 순서를 정해 한 대씩 치고 받는 거요. 버티지 못하고 먼저 쓰러지는 쪽이 지는 것이지. 나는 윈슬럿을 내세우겠소. 만약 윈슬럿이 진다면 깨끗이 물러나리다. 검에 맞은 걸 없던 일로 하겠다는 뜻이오. 하지만 당신 쪽이 진다면 더 이상 소란 부리지 말고 조용히 나가주시오. 어떻소?” 곰곰이 생각하던 마문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로서는 결코 손해 보는 제안이 아니었다. 이긴다면 이곳에 온 목적을 이룰 수 있다. 만약 진다고 해도 단순히 복수를 하지 못한다는 것뿐, 가족들 누구도 상하지 않는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마문태의 흔쾌한 승낙에는 한 가지 계산이 깔려 있었다. 비록 높은 경지에 오르진 못했지만 그는 상당한 실력을 지닌 권사였다. 만만치 않게 내공을 쌓은 만큼 내가중수법을 쓰는 것이 가능했다. 내가중수법이란 발경을 이용해 권력을 상대의 내부 깊숙이 전달하는 고도의 기법이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다면 겉을 전혀 상하지 않게 한 상태로 내부를 파괴하는 것이 가능했다. 마문태는 바로 그것을 믿고 내기에 응한 것이다. 윈슬럿을 쳐다보는 마문태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제법 쓸만한 외공을 익혔나본데 철저히 속을 뒤집어 엎어주마.’ 피부와 근육을 단련해서 어지간한 충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 외공의 최대 장점이다. 수준 높게 외공을 단련할 경우 창검에 상처를 입지 않기 때문에 초기에는 많은 무사들이 외공을 익혔다고 한다. 하지만 외공에도 최대의 단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내가중수법에 취약점을 보인다는 점이다. 겉은 단련할 수 있지만 속만큼은 그럴 수 없다. 내가중수법에 의해 내부에 직접 타격이 가해진다면 제 아무리 외공의 달인이라도 버티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무림에서 외공이 선호를 받지 못하는 이유였다. 마문태는 그런 지식을 믿고 내기에 나섰다. “우리 마가장에서는 내가 대표로 나서겠소.” “좋소.”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이 눈짓을 했다. 그러자 윈슬럿이 움켜쥐고 있던 청년을 놓아주었다. 서너 명의 마가장 사람들이 달려 나와서 청년을 부축했다. 그 모습을 흘려본 마문태가 재빨리 자세를 잡았다. “내가 먼저 치도록 하겠소.” “좋도록 하시오.” 데이몬이 고개를 끄덕이자 윈슬럿이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칠 테면 쳐 봐라는 식으로 가슴을 펴자 마문태가 재빨리 내공을 모았다. “그럼 가겠소. 조심하시오.” 파르르르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이 주먹으로 집중되었다. 한동안 심호흡을 하며 기를 돋운 마문태가 외마디 기합성을 내질렀다. “하아암.” 불끈 움켜쥔 주먹이 윈슬럿의 명치를 향해 날아들었다. 퍼억 마문태의 권술은 대단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타격점 바로 직전에 주먹을 멈춰 파괴력을 높이는 것도 정교했고, 주먹을 통해 공력을 한껏 분출하고 나서도 호흡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 것을 보니 어딜 가서도 충분히 고수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발경이 확실하게 전개된 것을 확인한 마문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윈슬럿을 올려다보았다. ‘내장이 완전히 뒤집어졌을 것이다. 헉!’ 마문태는 깜짝 놀랐다. 윈슬럿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내가 뭔가 실수를 했나?”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마문태의 귓전으로 낭랑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그럼 이번에는 우리 차례로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문태의 얼굴에 강력한 일격이 작렬했다. 쾅 마문태의 경우처럼 타격 직전에 주먹을 멈춰 파괴력을 높인 것도 아니고 발경이 침투한 것도 아니었다. 아무런 기술이 실려있지 않은 평범한 주먹에 불과했다. 내공도 없었다. 그러나 마문태가 받은 타격은 엄청났다. 우선 윈슬럿의 힘이 장난이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주먹이 돌덩이보다도 더 단단했다. 내공을 끌어올려 얼굴을 보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문태는 눈가에 별이 번쩍함을 느껴야 했다. “크으으.” 신음을 흘리며 물러나는 마문태의 콧대는 폭삭 주저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제법 맷집이 좋군. 내공도 튼실하고……. 하지만 이건 이미 결정 난 승부야.’ 윈슬럿은 기본적으로 언데드 몬스터이다. 뱃속에 내장이 있긴 하지만 이미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 그러니 제 아무리 위력이 뛰어난 내가중수법이라도 윈슬럿에게 타격을 가할 수는 없다. 상황은 데이몬의 예상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크헉.” 마문태의 머리통이 뒤로 한껏 젖혀졌다가 가까스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눈이 풀리고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것을 보아 상당한 타격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반면 윈슬럿은 멀쩡했다. 벌써 세 번이나 내가중수법에 가격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천연덕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수습한 마문태가 단전의 내공을 모조리 끌어 올렸다. 분노와 수치심 때문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이익.” 마문태는 사력을 다해 주먹을 날렸다. 불끈 거머쥔 주먹에는 내공이 한껏 축약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확실하겠지?’ 일권을 성공시킨 뒤 기대 어린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마문태. 그러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윈슬럿이 씨익 하고 웃어주었다. 이어 날아든 솥뚜껑만 한 주먹. 퍽 그 한 방에 마문태는 정신을 놓아버렸다. 제 아무리 내공을 모아 보호했다 하더라도 오우거에 육박하는 언데드의 힘을 감당할 순 없었다. 바위도 깨뜨릴 정도로 단단한 것이 윈슬럿의 주먹이었다. 실신해버린 마문태의 곁으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마가장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데이몬은 그런 그들을 향해 거만하게 말했다. “승부가 결정 났소. 그대들은 지금 즉시 이곳을 떠나시오.” 마가장 사람들은 아무 말도 없이 마문태를 둘러업고 등을 돌렸다. 복수할 대상을 두고 물러서는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격공섭물을 구사하는 고수를 향해 달려들 순 없는 노릇. 말없이 냉유성을 쏘아보다 몸을 돌려 나가는 마가장 사람들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마가장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데이몬은 한가롭게 기지개를 켰다. “이제 해결되었군.” 성큼성큼 걸어간 데이몬이 냉유성의 앞자리에 앉았다. 눈을 가늘게 뜬 채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하던 냉유성의 눈빛이 빛났다. “나에게 볼일이 있소?” 거만하게 다리를 꼰 데이몬은 냉유성에게 말을 걸었다. “시장한가?” “…….” “배가 고프다면 요리를 더 시켜줄 수 있다.” 거침없는 하대에 냉유성의 눈매가 미미하게 경련했다. “미안하지만 별로 시장하지 않소.” “체면 따지지 말고 사줄 때 순순히 먹어라. 괜한 자존심 내세우지 말고.” 냉유성은 조용히 침묵을 열었다. 데이몬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먼저 입을 연 이는 냉유성이었다. “당신은 누구요?” “나? 사람.” “장난하지 마시오. 무공수준을 보니 서역의 문파에서 온 것 같은데 이곳에는 뭐 하러 온 거요?” “놀러.” 냉유성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대관절 당신 나이가 어떻게 되오?” “나? 가만 보자…… 갑자기 물어보니 기억이 나지 않는군. 스물 하나인가 둘인가 모르겠어.” 천연덕스러운 데이몬의 대답에 냉유성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서역에서는 위아래가 없는가본데 중원은 그렇지 않소. 내 나이는 올해 서른이오. 당신보다 연장자란 뜻이지. 그러니 섣부른 하대는 삼가 주시기 바라오.” 그 말에 데이몬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연장자에게 존대하는 것은 동일한 신분일 경우에만 적용되는 법이야. 네가 생각하기에 너와 내가 같은 신분일 것같나?” “…….” 어이가 없어 침묵을 지키는 냉유성을 보며 데이몬은 하품을 했다. “한 가지 제안을 하지.” “뭐요, 말해보시오.” “자네가 보다시피 나에겐 시종이 하나밖에 없어. 그나마 있는 녀석도 중원 말을 못해서 별로 쓸모가 없지. 그래서 중원인 시종을 하나 구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어. 네가 시종이 되어줬으며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시종이 되라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냉유성은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냉유성은 당당한 무인이었다. 비록 무공을 잃었을망정 자존심만큼은 꺾고 싶지 않았다. “상종 못할 작자로군.”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강철 같은 팔뚝이 어깨를 눌렀다. “윽.” 어느새 다가온 윈슬럿이 냉유성의 양어깨를 움켜쥐고 있었다. 힘을 이기지 못한 냉유성은 의자에 거칠게 쑤셔 박혔다. 냉유성의 가느다란 눈매에 스산하게 살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힘으로 억누르겠다는 모양인데 한 번 해 보시오. 이 냉유성, 비록 무공을 잃어 수모를 당하지만 자존심을 꺾을 생각은 없소.” 비장미가 뚝뚝 떨어지는 대답이었지만 데이몬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성질 한 번 급하군. 시종이 되기 싫으면 그만이지 나갈 필요까지는 없잖아. 아무튼 상관없으니 술이나 한 잔 하지. 저 멍청이와 대작하는 것은 그리 내키지 않아.” “거절하겠소. 당신 같은 작자와는 대작하고 싶지 않소.” “그럼 나가서 호시탐탐 널 노리는 놈들에게 유희거리가 되어 주든가. 나간다면 말리지 않겠다.” 그 말에 울컥 하긴 했지만 냉유성은 일어나지 않았다. 객잔 밖에는 조금 전 물러난 마가장 사람들이 도사리고 있다. 이대로 나간다면 그들의 손에 갈가리 난도질당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죽음 따윈 두렵지 않다. 하지만 술 얘기를 듣자 마음이 다소 흔들렸다. 때마침 터져 나온 데이몬의 한 마디가 흔들림을 파도로 만들어버렸다. “이왕 죽을 거면 술이나 잔뜩 먹도록 해. 취하면 아프지도 않을 거 아냐?” 냉유성은 체념한 듯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좋소. 이왕 죽을 운명이라면 술이나 잔뜩 먹어봅시다.” 결코 자존심을 꺽지 않는 냉유성의 태도에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윈슬럿과 자신의 활약을 보고도 주눅 들지 않는 모습을 보니 확실한 사내였다. 딱 손가락을 퉁기자 점소이가 재빨리 다가왔다. 데이몬의 손에는 어느덧 금편이 하나 들려 있었다. “술과 안주를 대령하라. 최고급으로.” 점소이는 두 말도 하지 않고 주방으로 달려갔다. 4. 한 목숨, 마왕에게 바치다 술맛은 훌륭했다. 여자아이가 태어났을 때 담궜다가 성혼할 때 꺼내 쓴다는 여아홍을 비롯해서 금존청 등등의 최고급 술 단지가 탁자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안주 역시 모자람이 없었기에 둘은 연신 술잔을 기울였다. 눈동자가 붉게 달아오른 냉유성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캬아, 죽이는구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이렇게 좋은 술을 먹어본 적은 없었소.” “너 정도 실력이라면 문파 내에서 훌륭한 대우를 받지 않나?” 데이몬을 힐끔 쳐다본 냉유성은 쓸쓸히 머리를 흔들었다. “공동파는 도가계열 문파라서 일신의 향락 따윈 추구하지 않소. 게다가 무공 연마하는 데 바빠 다른 곳에 눈을 돌릴 틈이 전혀 없었소.” “그래?” 이젠 데이몬의 하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냉유성도 그러려니 하고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술 단지가 하나둘 쌓이고 냉유성의 얼굴도 취기로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내공이 없으니 술기운이 몸에 고스란히 쌓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당신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중원으로 왔소?” “아까 말하지 않았나? 놀러왔다고.” “농담하지 마시오. 당신 정도 실력을 가진 무인이 중원으로 놀러왔다는 말을 믿으란 말이오?” 말을 이어나가는 냉유성의 입가에는 쓸쓸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만약 내 몸이 정상이었다면 머뭇거림 없이 대련을 신청했을 것이오. 강한 자와의 대련이야말로 내가 절실히 바라는 것이니 말이오.” “난 대련 따윈 하지 않아. 필살의 대결만을 펼칠 뿐이지. 나와 싸우려는 자는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해.” 데이몬의 엄포에 냉유성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거야 당연한 것이 아니오. 강한 자에게 패해 죽는 것이야말로 가장 무인다운 죽음이지.” “별난 놈이로군.” 대화를 하면 할수록 데이몬은 냉유성이 마음에 들었다. 한 마디로 그는 뼛속까지 무인이었다. ‘공동파 따위의 쓰레기 문파에서 이런 녀석이 나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군. 놀라워.’ 어느덧 객잔도 파장 분위기였다. 청소를 시작하는 점소이를 힐끔 쳐다본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끝내긴 아쉽군. 방에 올라가서 한 잔 더 하겠나?” 대부분의 객잔들이 그러하듯 열빈루 역시 식당과 여관을 겸하고 있다. 냉유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처음에는 당신 성질이 개차반 같다고 생각했는데 술잔을 기울이다보니 첫인상보다는 훨씬 낫구려.” 데이몬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뭐라고?” “아무튼 색목인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소.” “빌어먹을 녀석.” 투덜거리던 데이몬은 손가락을 퉁겨 점소이를 불렀다. “여기 얼마냐?” 요리와 술값을 치르고 난 뒤 데이몬은 방을 두 개 잡았다. 물론 최고로 비싼 특실이었다. “여아홍보다는 금존청이 술술 더 잘 넘어가는군. 방으로 금존청 두 단지를 올려 보내라. 안주될 만한 것 두어 가지와 함께.” “네.” 엄청난 금액을 지불했기에 점소이는 두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방에 올라간 둘은 또다시 술판을 벌였다. 데이몬도 적당히 취한 상태였다. 마법으로 깨어날 수도 있었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었다. 충실한 시종답게 윈슬럿은 방구석에 공손히 시립해 있었다. 그것이 이상했는지 냉유성은 술을 먹다 말고 손가락을 뻗어 윈슬럿을 가리켰다. “그런데 저자는 왜 술을 먹지 않는 거요?” “어찌 시종이 감히 주인과 겸상을 할 수 있겠는가? 저 녀석은 내가 명령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못해.” “꽤나 불쌍한 시종이구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보여주면서 나더러 시종을 하라는 거요?” “물론.” 냉유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아마 내 정신이 돌지 않은 이상 그럴 일은 없을 것이오.” “나도 굳이 싫다는 사람을 시종으로 쓰진 않아.” 데이몬의 능청스런 대꾸에 냉유성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당신 참 특이한 사람이구려.” “그나저나 네 얘기나 좀 들어보자. 같이 동문수학하던 제자들은 도대체 왜 죽인거야?” 그 말에 냉유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치부를 정면으로 들춰내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묻지 마시오. 생각하면 괴롭소.” “그렇다고 해서 비밀을 무덤 속까지 가지고 갈 생각인가?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털어놓는 것도 나쁘진 않아. 내가 가장 객관적인 입장에서 들어주겠다.” 그 말에 냉유성은 흠칫했다. 지금까지 그는 줄곧 자신의 결백을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의 말을 믿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보다 일파의 장문인인 춘향진인의 발언이 더욱 큰 신뢰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흐릿한 눈을 들어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상대는 서역에서 온 색목인이다. 중원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만큼 가장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래, 누구에게라도 털어놓는다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까?’ 마음을 정한 냉유성은 가슴속에 쌓아 두었던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은 진실이 아니오.” 말문이 트이자 마음속의 울분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난 예나 지금이나 여자 따위에게 전혀 관심이 없소. 내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 무의 완성뿐이오. 무의 끝을 보기 위해 난 모든 것을 포기했소. 그랬던 내가 음심에 사로잡혀 장문인의 딸을 납치했다는 사실이 웃기지 않소?” 공동파의 비사가 하나둘씩 공개되었다. 장로들 사이의 알력과 계파 투쟁 등, 이미 파문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냉유성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문파의 치부를 털어놓았다.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들어주었다. ‘역시 정파 놈들은 역겨워. 고리타분한 전통에 사로잡혀 인재를 보지 못하는 놈들…….’ 냉유성의 신세한탄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오직 무예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함정에 빠지고 그로 인해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는 무공까지 잃게 되었다는 사실을 때론 실의에 빠진 목소리로, 때론 울부짖으며 털어놓았다. “내가 어리석었소. 나만 옳다면 세상이 그것을 능히 알아줄 거라 생각한 거지.” 데이몬은 냉유성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그 역시 한때 무의 길을 걷던 무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냉유성의 비사는 장장 한 시간동안 계속되었다. 열변을 토하던 냉유성의 이야기도 마침내 끝이 났다. “그렇게 해서 결말이 난 거요. 난 이제 공동파의 사람이 아니오. 내게 주었던 모든 것을 앗아갔으니 말이오.” 모든 사연을 들은 데이몬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결한다. 어떻게 하겠는가? 가부를 결정하라.” 냉유성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미 공동파에서는 파문된 상태. 색목인의 휘하에 들어가는 데 아무런 걸림돌은 없다. 냉유성이 결정을 내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다고 했다. 비록 서역의 색목인이지만 중원천지에서 유일하게 내 말을 믿어주고 인정해주는 자다.’ 마음을 정한 냉유성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데이몬을 향해 공손히 포권을 했다. “이제부터 주공이라 부르겠소. 성심껏 모실 것을 약속드리오.”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드디어 저 고집 센 사내를 굴복시킨 것이다. 부복한 냉유성의 귓전으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 들어갔다. “난 배신을 용납하지 않는다. 어떠한 경우에도 날 실망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냉유성의 입가에 미소가 맺혀졌다. “이미 내 성품을 알지 않소? 주공께서 날 진정한 사내로 봐준만큼 그런 염려는 하시지 않아도 될 거요.” “그래, 너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날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안목을 믿는다.”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일어나라.” 명령이 떨어지자 냉유성은 두 말도 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팔을 내밀어보도록.” 뚱딴지같은 명령에 냉유성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팔을 내밀었다. 팔목의 상박 부근에는 근맥이 잘려나간 흉측한 상처가 자리잡고 있었다. 데이몬은 가만히 손을 내밀어 상처 부근을 쓸었다. 영문을 모른 냉유성은 멀뚱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한참 뒤 데이몬이 고개를 들었다. “혹시 상처를 치료하고자 한 적이 있는가?” 냉유성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불가능하오. 잘린 근맥을 잇는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소.” “그것은 중원의 의술에 한정될 뿐이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잘린 근육을 봉합하는 것이 가능하다.” 순간 냉유성의 눈이 커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투가 극존칭으로 변해 있었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물론이다. 잘려나간 팔다리도 다시 붙일 수 있는데 고작 근육 따윌 붙이지 못할 이유는 없다.” 격정으로 인해 냉유성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다시 희망의 불이 켜진 것이다. “그, 그렇다면…….” 말꼬리를 흐렸지만 데이몬은 냉유성의 내심을 눈치 채고 있었다. “살펴봐야 하겠지만 파괴된 단전 역시 복구가 불가능하지는 않다.” 데이몬의 입가에 어느덧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사실 그도 한 번 단전을 파괴당해 본 적이 있다. 트루베니아로 건너갈 당시 데이몬은 단전이 파열되어 무공을 잃어버렸다. 마법을 익힌 후 파괴된 단전을 복구하기 위해 연구에 몰두했다. 그 결과 외적 요인으로 파괴된 단전은 충분히 복구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외과적 수술과 힐링을 병행하면 충분히 단전의 기능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데이몬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데이몬의 단전은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난 기의 폭발로 인해 갈가리 찢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과도한 내공의 운용으로 경맥마저 돌덩이처럼 굳어버렸다. 당시 데이몬은 무공을 되찾을 수 없음을 알고 낙심했다. 그리고 마법에 더욱 매진했다. 그러나 그때의 연구가 전혀 쓸모없지만은 않았다. “경맥만 온전하다면 단전을 복구할 수 있다. 물론 내공을 다시 모아야겠지만 말이다. 그릇이 커진 상태이니 금세 예전의 경지를 되찾을 수 있겠지.” 냉유성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무공, 그것을 다시 되찾을 방법이 생겼다니! 데이몬은 그런 냉유성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럼 지금 즉시 시술에 들어가도록 하자. 내일부터 달려들 부나방들을 상대하려면 무공을 빨리 되찾아야지.” “네, 네 주군.” 냉유성의 강퍅한 얼굴에는 어느덧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최후의 순간에 빛을 본 인간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수술 준비는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일단 냉유성은 술에 취할 대로 취한 상태. 데이몬은 남은 술을 모조리 먹여 냉유성을 인사불성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수술 준비를 했다. 끊어진 근육을 잇는 외과 수술 정도는 데이몬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소환술을 연구하며 데이몬은 무수히 많은 시체를 해부해 보았으므로 인체의 구조에 대해서는 해박했다. 파괴된 단전을 복구하는 과정이 조금 까다롭기는 하지만 영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수술용 메스를 꺼내 든 데이몬은 거기에 샤프니스 마법을 걸어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럼 작업을 시작해 볼까?” 데이몬은 메스를 거침없이 냉유성의 팔에 찔러 넣었다. 서걱 날카로운 칼이 살을 베어내었지만 의외로 피는 많이 흐르지 않았다. 철저히 혈관을 피해 결대로 잘라냈기 때문이었다. 표피를 들어내자 얼기설기 얽힌 근육조직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대로 끊어진 팔의 힘줄은 보이지 않았다. 수축을 통해 물리력을 발휘하는 근육이니만큼 오므라들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생각보다 깊이 절개해야겠군.” 계속 살을 절개해 나가자 마침내 끊겨진 근맥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데이몬은 팔 아래쪽의 살도 절개해서 근맥의 반대쪽 끄트머리를 찾아냈다. 팔을 굽히자 근육이 다소 느슨해졌다. 데이몬은 집게로 끊어진 근맥을 잡아당겨 이었다. “부러졌다 붙은 뼈가 더 단단하듯, 끊어졌다 이어진 근육 또한 더욱 질겨지기 마련이지. 힐링.” 치료마법이 캐스팅되자 근육의 끊어진 부위에서 빛 무리가 일어났다. 치료마법이 발현된 순간 근육은 언제 끊어졌냐는 듯 단단히 붙어버렸다. 나인 서클의 대마법사가 캐스팅한 힐링인 만큼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데이몬은 끊어진 근맥의 가닥을 모조리 찾아내어 차례대로 봉합했다. 수십 가닥을 이어야 하는 만큼 몹시 지루한 작업이었다. “이제 되었군.” 근맥이 모두 이어진 것을 확인하자 데이몬은 벌어진 상처를 꿰맸다. 힐링을 건다면 흉터 없이 아물겠지만 냉유성 같은 무인에게는 쓸데없는 것이었다. 무인에게 흉터는 결코 흉이 될 수 없다. 팔 하나를 치료하는 데 거의 한 시진이 흘렀다. 늘어진 냉유성의 얼굴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투덜거렸다. “수하 한 놈 때문에 이 무슨 고생이냐? 나중에 밥값을 못하기만 해봐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데이몬의 손은 축 늘어진 냉유성의 왼팔을 잡아끌고 있었다. 팔다리의 근맥을 잇는 것이 모두 완료되었다. 과정이 다소 지루하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뿐이지 수술 자체의 난이도가 높은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파괴된 단전의 복원이었다. “냉유성 녀석의 말에 의하면 대략 일주일쯤 전에 단전이 파괴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경맥이 아직까지 굳어지지는 않았겠군.” 날카로운 메스가 냉유성의 아랫배를 길게 갈랐다. 움찔하긴 했지만 냉유성은 의식 없이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환부를 넓게 벌린 다음 데이몬은 세심하게 신경 써서 냉유성의 경맥을 살폈다. 육안만으로는 식별할 수 없었기에 그는 기를 끌어 모아 혈도에 불어넣어 보았다.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다행이로군. 경맥은 건재해. 기해혈만 복구시킨다면 운공이 가능하겠어.” 사실 외과수술만으로 파괴된 단전을 완전히 복구하지 못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혈도나 세맥을 수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력을 돌릴 수 있다면 치료하는 것이 가능하다. 어그러지고 깨어진 신체의 균형을 바로잡는 것은 내가 기공의 효능이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이다. 데이몬은 냉유성의 뭉개진 기해혈에 손바닥을 붙인 다음 치료마법을 전개했다. “힐링, 힐링, 힐링, 힐링.” 단순히 베어진 자상을 치료하는 것은 쉬운 편이다. 그러나 이처럼 완전히 뭉개져버린 혈도를 복원하는 것은 몇 배나 더 어렵다. 그 때문에 데이몬은 거듭될수록 파괴된 조직이 생명력을 되찾았다. “되었다.” 기해혈이 제 모습을 되찾자 데이몬은 살며시 기를 불어넣어 보았다. 복원된 기해혈은 아무런 무리 없이 기를 받아들였다. “성공이야.” 데이몬은 지체 없이 상처를 봉합했다. 가장 중요한 아랫배의 상처인 만큼 데이몬은 절개부위에 아낌없이 힐링을 퍼부었다. 이로써 장장 다섯 시진에 달하는 대수술이 문제없이 완료되었다. 데이몬은 의자에 몸을 묻은 채 투덜거렸다. “힘들군. 인간 하나 때문에 이게 웬 고생이지.” 그러나 냉유성의 핏기 없는 얼굴을 보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중원에서 모처럼 쓸만한 부하 한 명을 얻은 것이다. * * * * * “끄으으.” 냉유성은 힘겹게 눈을 떴다. 순간 아릿한 고통이 사지에서 전해졌다. 수술부위에서 느껴지는 통증이었다. 그러나 냉유성은 신음을 흘리지 않았다. 근맥이 잘리고 단전이 파괴당할 때에도 비명 한 마디 지르지 않았던 그였다. 그의 시선이 이불 사이로 드러난 팔로 향했다. 팔에는 길게 찢어진 상처가 촘촘히 꿰매진 채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대대적인 수술이 가해졌다는 증거였다. ‘어떻게 되었을까.’ 수술 결과가 궁금해진 냉유성은 손을 움직여 보았다.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우, 움직인다.’ 뻐근한 통증이 전해지긴 했지만 손은 그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근맥을 잘렸을 때처럼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눈이 커진 냉유성이 이번에는 발을 들어보았다. 발 역시 그의 의지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단전은?’ 냉유성은 이불을 들추고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실망감이 어렸다. 아랫배에는 수술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그때 귓전으로 나지막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단전은 회복되었다.” 냉유성의 고개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는 데이몬이 빙그레 미소를 지은 때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큼지막한 요리접시가 들려 있었다. “중요한 부위라서 특별히 흉터가 남지 않게 치료했다. 기해혈이 원래대로 복원되었으니 이제부터 내공을 쌓을 수 있다. 기초부터 다시 시작해야겠지만 어렵지 않을 것이다.” “…….” “일단 배를 채우도록 하라. 수술하느라 기력이 많이 소진되었을 것이다. 먹어야 힘을 쓰지.” 데이몬을 쳐다보는 냉유성의 눈동자가 붉게 달아올랐다. 격정 때문에 얼굴이 연신 실룩거렸다. 이제 자신은 폐인이 아니었다. 다시 무의 극의를 추구할 수 있는 무인이 된 것이다. 감정을 참지 못했는지 냉유성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주, 주공…….” 돌연 그가 침대 위에서 오체투지를 했다. 주종관계를 맺을 때에도 오체투지를 하지 않았던 냉유성이었다.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 제 생명은 주공의 것입니다. 주공이 명하신다면 이 냉유성 심지어 지옥이라도 뛰어들 것입니다.” 데이몬은 빙그레 웃으며 요리 접시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지옥도 생각보다 무서운 곳이 아냐. 내 관점에서 보면 따분한 천상계보다 월등히 나은 곳이지.” “네?” “잡담이었다. 아무튼 식사를 먼저 해라. 이것은 명령이다.” “주, 주군께서는…….” “난 벌써 먹었다. 배고픈 것을 결코 못 참는 성미라서 말이야.” 냉유성이 한 구석에서 식사를 하는 사이 데이몬은 방 가운데에 마법진을 그렸다. 뼛조각으로 그려지는 마법진이 서서히 형태를 이루어갔다. 데이몬은 지금 공간이동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사실 공간이동을 중원에서 구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좌표가 계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가시거리 내에서 이동하는 블링크(공간전이)만이 가능했다. 하지만 양쪽에 좌표를 설정하는 대응 마법진이 그려져 있을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중원에서도 공간이동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데이몬은 마법진을 이용해 어딘가로 공간이동을 할 작정이었다. “위기에 처할 경우 쓰려고 했는데 예상 밖으로 벌써부터 쓸 일이 생겨버렸군.” 데이몬은 천산에서 이곳으로 오며 틈틈이 좌표설정 마법진을 설치해 놓았다. 위기에 처할 경우 피신할 대피장소였다. 물론 마법진들은 인적이 드물고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 설치했다. 하나같이 대자연의 기가 풍부한 장소였다. 식사를 마친 냉유성은 의아한 눈빛으로 마법진을 내려다보았다. 궁금할 법도 하건만 그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마법진을 다 그린 데이몬이 냉유성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위에 올라서라.” 냉유성은 두 말도 하지 않고 마법진 위로 올라섯다. “오늘 중으로 잃어버린 무공을 대부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복수한답시고 달려다는 잔챙이들을 쫓아버릴 수 있지.” “그,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여기서는 불가능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가능하다. 우리는 이 마법진을 통해 대자연의 기가 풍부한 곳으로 이동할 것이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즉시 주문을 외웠다. 캐스팅이 시작되자 마법진 위의 기가 맹렬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나가 맹렬히 재배열되며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냉유성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는 사이 마침내 마법이 발현되었다. 번쩍 그 순간 둘은 장안에서 수천 리 떨어진 탑리목 분지 인근으로 이동되었다. “이, 이곳이 어디입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경관이 바뀌자 냉유성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안 번화가에 자리 잡은 객잔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전혀 다른 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주위에는 사람 그림자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이동한 곳은 아름드리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곳. 태고의 원시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데이몬은 빙그레 웃으며 냉유성을 잡아끌었다. “이리로 와라. 이곳은 대자연의 기가 무척 풍부한 곳이다. 마법진을 이용해서 기를 한 곳으로 축약시킨다면 어렵지 않게 예전의 경지를 되찾을 것이다.”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냉유성은 별말 없이 데이몬의 지시에 따랐다. “알겠습니다.” 데이몬은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계곡에다 새로운 마법진을 그렸다. 이번에는 좌표 설정용 마법진이 아니라 부근의 마나를 끌어들여 한 곳에다 집약하는 마법진이었다. 마법진이 완성되자 데이몬은 냉유성을 마법진의 중앙 부위로 보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라. 그런 다음 네가 알고 있는 내공심법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을 골라 운용하도록 하라.” 냉유성은 두말하지 않고 지시에 따랐다. 물론 공동파에서 배운 내공심법을 그대로 쓸 수는 없다. 사실이 드러나면 공동파에서 또다시 추살대를 보낼 수도 있었다. 때문에 냉유성은 기억을 뒤적인 끝에 무림을 종횡할 당시 우연히 얻은 내공심법 하나를 떠올렸다. 지금은 멸문한 전진파의 내공심법으로 혹시 쓸 일이 있을지 몰라서 구결을 기억해 둔 것이었다. 당시 스승인 춘명진인은 그 내공심법이 공동의 것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하긴 내공심법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 내공심법의 질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수련도와 성취에 달려있다.’ “자, 시작하라.” 데이몬의 명령이 떨어지자 냉유성은 내공심법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같은 도가계열의 심법이라 운공방식 자체는 큰 차이가 없었다. 운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냉유성의 아랫배에 따스한 기운이 생겨났다. 부근의 기를 끌어들여 자신만의 내공으로 변환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것을 확인하자 데이몬은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지금부터는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 콰르르르 부근의 기가 세차게 요동치다가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마법진이 주변의 기를 게걸스럽게 끌어당겼다. 워낙 기가 풍부한 곳이라서 마법진의 중심부는 금세 기로 응축되었다. 전신을 휘감는 방대한 기의 흐름에 냉유성은 신음을 흘렀다. “크으윽.” 정말 방대한 양이었다. 이미 냉유성은 복원된 단전을 토대로 한 번의 소주천을 이룩한 상태. 내공심법의 구결에 따라 운공에 들어가자 주변의 기가 폭포수처럼 체내로 빨려 들어갔다. 콰콰콰콰 이때가 운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대자연의 기를 몸속으로 끌어들여 내공심법에 따라 정제한 뒤 내공화하여 단전에 쌓는 작업. 그 과정에서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운공과정에서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그러나 냉유성은 여타의 수련자들과 달랐다. 이미 절정의 경지에 한 번 올라갔었던 만큼 제 아무리 방대한 마나라고 해도 받아들여 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미 주요 혈맥이 기의 흐름에 익숙해진 상태였고 확장된 단전은 내공의 공급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게다가 데이몬이 설치한 마법진은 냉유성이 필요로 하는 기를 무제한 공급해 주었다. 콰콰콰콰 마법진에 의해 모여든 대자연의 기를 냉유성은 마치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그 과정을 데이몬은 눈매를 좁힌 채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경지에 올랐던 녀석인 만큼 편하군. 방향만 일러주니 알아서 길을 개척할 줄도 알고……. 레온 그 녀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쳐 줘야 했는데 말이야.” 트루베니아에서 머물 때 잠시 가르쳤던 제자를 떠올린 데이몬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장기간의 수술과 마법진 설치로 인해 피로했기 때문에 잠시 휴식을 취하려는 것이다. 이제부터의 과정은 데이몬이 도와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냉유성에게 달려 있다. 모든 관문은 극복하고 예전의 무위를 회복하느냐, 아니면 주화입마에 들어 다시 폐인이 되느냐는 모두 냉유성의 의지력에 달려 있었다. 그 사실을 믿고 데이몬은 느긋하게 잠을 청했다. “한숨 늘어지게 자고 나면 결판이 나 있겠지?” 몹시 피곤했기에 데이몬은 금세 수마에 빠져 들어갔다. 서너 시간 정도 실컷 자고 난 데이몬이 눈을 떴다.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눈을 꼭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냉유성이었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녀석 성공했구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냉유성이 눈을 떴다. 동시에 시릴 듯 뿜어지는 날카로운 안광. 이어 그의 몸에서 칼날 같은 기세가 솟아올랐다. 냉유성이 마침내 예전의 무위를 회복한 것이다. 그는 마치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부복을 했다. 무릎과 양손 그리고 머리를 바닥에 댄 오체투지. “주공을 뵙습니다.” 나지막한 음성에는 내공이 충만히 맺혀 있었다. 몸도 가누지 못하던 폐인에서 단숨에 절정의 무인으로 변모한 것이다. 데이몬은 흡족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든 냉유성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과거에 불렸던 공동산의 검귀라는 별호가 충분히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데이몬은 다가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무공을 되찾은 것을 축하한다. 앞으로 잘 해보자.” 냉유성의 입매가 실룩거렸다. “제 목숨은 이제부터 주공의 것입니다.” 짧은 말이었지만 거기에는 냉유성의 진심이 어려 있었다.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녀석은 굴복시키기가 힘들지만 한 번 마음을 정하면 결코 배신을 하지 않지. 마치 과거 수호마왕군 부대주였던 종리령처럼 말이야.’ 냉유성의 얼굴에서 다시 한 번 옛 수하의 얼굴을 상기해 본 데이몬이 몸을 돌렸다. “장안으로 돌아가자. 일단 배부터 채워야 할 것 같다.” “존명.”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복명구호로군. 앞으로 자주 쓰도록 해라.” “존명.” 데이몬은 다시 마법진을 이용해서 객잔으로 돌아왔다. 제일 먼저 그는 점소이를 불러 냉유성이 입을 만한 옷 몇 벌을 사오도록 시켰다. “수하가 궁상떠는 것은 딱 질색이야.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 먹을 것, 입을 것을 항상 최상으로 유지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옷을 구해오면 식사를 하러가자. 참, 그건 그렇고 네 무기가 없구나.” 냉유성이 텅 비어 있는 허리춤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오랫동안 벗해왔던 장검은 공동파에 압수된 상태였다. 그의 쓸쓸한 표정을 보고 있던 데이몬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수하가 된 기념으로 검을 한 자루 주마. 서역의 검이라 형태가 낯설겠지만 잘 찾아보면 너에게 맞는 것이 한 자루쯤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갑자기 허공에 음영이 생겨나자 흠칫 했지만 냉유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생사여탈권을 보유한 주군이기도 했다. 데이몬이 손짓하자 방 한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던 윈슬럿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들어와서 검을 있는 대로 챙겨오너라. 손에 맞는 것을 골라야 하니 가능한 많이 꺼내 와야 한다.” 그 말에 냉유성이 앞으로 쓱 나섰다. “차라리 속하가 들어가서 골라오는 것이…….” “큰일 날 소리. 이 속에는 생명체가 들어가지 못한다. 오직 윈슬럿만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명을 받은 윈슬럿이 인크레시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데이몬은 손가락을 뻗어 인크레시아를 가리켰다. “사실 저 녀석은 인간이 아니다. 움직이는 시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지.” “강……시입니까?” 냉유성은 눈을 크게 뜨고 인크레시아를 쳐다보았다. “강시는 아니지만 비슷한 종류라고 생각하면 된다. 겉모습이 산사람과 다름없는 데다 인크레시아에서 물건을 꺼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데리고 다니는 것이다.” “인크레시아라면…….”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것이 인크레시아다. 쉽게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술법을 이용한 창고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속에 제법 많은 것이 보관되어 있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윈슬럿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들어왔다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윈슬럿의 전신에는 온통 서리가 맺혀 있었다. 인크레시아 내부의 환경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모습이었다. 윈슬럿이 한 아름 안고 온 장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촤르르르 여러 종류의 검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한 자루 골라보아라. 그래도 내가 살던 곳에서는 최상급이라 평가받는 검들이다.” 사실 장검을 제련하는 기술은 트루베니아보다 중원이 월등히 앞서 있다. 중원의 검들은 대체적으로 균형도 잘 잡혀 있었고 섞여 있는 불순물도 없다.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이가 빠지는 일도 없다. 제련술에서는 뒤떨어지지만 대신 트루베니아에는 검을 만드는 재료가 다양했다. 특히 드래곤 본이나 미스릴은 중원의 해저묵철이나 만년한철에 비해도 손색이 없었다. 데이몬은 팔짱을 끼고 앉아 냉유성이 검을 뒤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실 만년한철은 버너디움과 동일한 재질이라고 봐야겠지. 둘다 유성에서 추출한 것이니까.’ 윈슬럿이 제법 많은 검을 들고 나왔지만 냉유성의 손에 맞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인크레시아 안에는 들고 나온 것보다 더 많은 장검이 보관되어 있었다. 윈슬럿이 세 번째로 가지고 나온 장검들 중에서 마침내 냉유성의 구미에 맞는 장검이 나왔다. “이게 괜찮군요. 손잡이가 손에 착 감기는 것이 예전에 쓰던 검과 느낌이 비슷합니다. 형태가 다소 틀리지만 크게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냉유성이 고른 검은 바스타드 소드였다. 한 손으로 휘두르다가 강력한 힘이 필요할 때 두 손으로 휘두를 수 있도록 손잡이를 길게 만든 장검. 바스타드 소드 치고는 검폭이 좁아서 마치 중원의 패검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마음에 들었는지 냉유성은 검집채 검을 이리저리 휘둘러보고 있었다. “잘 골랐다. 훌륭한 검을 골랐구나.” 윈슬럿으로 하여금 남은 검을 다시 인크레시아에 집어넣도록 한 뒤 데이몬은 검을 받아들었다. “이 검은 프로즌 마법이 걸려 있는 마법검이다.” “마법검이라니요?” “일종의 술법이 봉인된 검이라 생각하면 된다. 검을 휘두를 때 냉기가 뿜어지니 상대가 무척 혼란스러워 할 것이다. 어쩌면 너를 음한기공을 익힌 고수로 오인하게 만들 수도 있다. 게다가 검의 재질 자체도 훌륭하다. 화이트 드래곤의 뼈로 만들었으니 거의 만년한철에 필적하는 강도를 자랑할 것이다.” “화이트 드래곤이라니요?” 냉유성의 질문에 데이몬은 인상을 썼다. “그냥 그런 게 있다. 설명하면 머리 아프니 그냥 검이나 한 번 뽑아보거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냉유성이 검을 뽑아들었다. 순간 눈부신 빛이 객방 내부를 가득 채웠다. 파아앗 때 하나 묻지 않은 순백의 검신이 창문으로 들어온 태양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검신을 쳐다보던 냉유성은 탄성을 토했다. “대단한 검이로군요. 하얀빛을 띤 금속이 세상에 존재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무척 가볍군요. 제 검술이 주로 쾌를 추구하는데 발검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 같습니다.” 냉유검은 검을 허공에다 대고 휘둘러보았다. “무게중심도 맞고 균형도 잘 잡혀 있군요. 혈조가 없는 데다 칼날이 무딘 점이 좀 아쉽습니다만.” “드워프가 만든 것이니 제련상태가 괜찮을 것이다. 내가 살던 세상에서는 무사들이 대부분 철제 갑옷을 입는다. 칼날이 무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뭐, 너 정도 경지라면 칼날 무딘 것 정도는 문제도 되지 않을 테지?” 데이몬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냉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조란 검 중심부에 홈을 파서 피가 잘 흘러나오게 만든 장치이다. 만약 사람의 몸을 찌를 때 검에 혈조가 없다면 뽑을 때 상당한 곤란을 겪게 된다. 근육과 지방이 검에 달라붙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유성 정도의 고수에겐 예외사항이다. 검 자체보다는 검기를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칼날이 무디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점소이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옷을 사 왔습니다.” 때마침 윈슬럿이 검을 모두 수납하고 나왔기에 데이몬은 인크레시아를 닫았다. “옷 갈아입고 나서 밥 먹으러 가자.” “존명.” 냉유성을 위해 준비된 옷은 흑의무복이었다. 움직임이 편한 데다가 혈흔이 드러나지 않아 무인들이 가장 많이 입는 옷이다. 그러나 점소이가 사온 옷은 무인들이 입는 싸구려 흑의무복과는 차원이 달랐다. 질 좋은 비단에다 고급 안료로 물들인 최고급 의복이었다. 윈슬럿도 옷을 갈아입었다. 입고 있던 트루베니아의 옷은 몇 번의 혈투로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였다. 윈슬럿의 복장 역시 냉유성과 동일한 흑의무복이었다. 데이몬이 고른 것은 흰색의 문사복이었다. 트루베니아에서 사온 옷은 몇 벌 되지 않는다. 때문에 중원의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아무래도 편할 것 같았기에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중원풍으로 깔끔하게 차려입은 데이몬은 몸을 일으켰다. “밥 먹으로 가자.” 흑의무복으로 몸을 휘감은 냉유성과 윈슬럿이 그 뒤를 따랐다. 식당 안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데이몬의 눈이 빛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두나 소면을 하나씩만 시켜놓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가장 구석자리에는 어제 충돌했던 마가장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복수를 하러 온 놈들이로군. 냉유성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데이몬은 짐짓 모른 체하며 비어있는 탁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울상이 되어 있던 점소이가 재빨리 탁자로 다가왔다. “무얼 드시겠습니까?” “궁보계정과 어향육사를 가져오너라. 차는 용정차, 반주는 금존청으로 하겠다.” 그때서야 점소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손님이 많기는 했지만 돈 되는 음식을 시키는 이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쫓을 수도 없다. 하나같이 무기를 품고 있는 것을 보니 무림인들이 분명했다. 그런 상황에서 재신이 비싼 요리를 듬뿍 시키니 어찌 기쁘지 않을쏘냐. 데이몬과 윈슬럿이 탁자에 앉았지만 냉유성은 앉지 않았다. “그럼 주공, 날파리들을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가급적 살인은 자제하도록. 밥 맛 떨어지니까 말이야.” “존……명.” 몸을 돌린 냉유성은 품고 있던 검을 왼손에 들었다. 그리고 스산한 눈빛으로 객잔 내부를 둘러보았다. “나는 냉유성이다. 과거에는 공동산의 검귀라는 별호로 불렸지.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은원을 청산하고자 한다. 나에게 원한이 있는 자는 덤벼라. 무림의 법도대로 해결해 주겠다.” 냉유성의 음성에는 내공이 충만했다. 그러자 앉아 있던 자들의 안색이 싹 변했다. 냉유성이 무공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는데 실제로 보니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겁을 상실한 천둥벌거숭이가 존재하는 법. 삿갓을 눌러쓴 세 명의 장한이 괴소를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흐흐흐. 네놈이 냉유성이렷다? 우리는 산서삼걸이다. 공동산 검귀라는 이름을 무림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찾아왔지.” “그렇다면 긴말 할 필요가 없겠군. 무기를 뽑아라.” 냉유성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산서삼걸이 병기를 뽑아들었다. 두 명은 두터운 귀두도였고 한 명은 묵직해 보이는 유성추였다. 그들은 살기를 풍기며 냉유성을 품(品)로 에워쌌다.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유성추를 머리위로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흐흐흐, 유언은 없느냐?” 그 말에 냉유성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말이 많군. 난 입으로 싸우고 싶지 않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로군. 하아앗!” 기합소리와 함께 유성추가 허공을 갈랐다. 나머지 두 명 역시 귀두도를 휘둘러 냉유성의 상단과 하단을 동시에 공격했다. 냉유성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대로 서서 죽기를 바라는 사람 같았다. 순간, 화아아악 눈부신 빛이 일어나며 쇠가 끊어지는 듯한 강렬한 음향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동시에 객잔을 울리는 비명소리. “크으윽.” 어깨를 움켜쥐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세 사람. 그들의 어깨에는 구멍이 하나씩 뚫려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삿갓도 잘려나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기에 산서삼걸의 질린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텅 터텅 정확히 손잡이 부근에서 두 동강 난 귀두도가 그때서야 바닥에 나뒹굴었다. 후두두둑 산산이 부서진 유성추의 파편이 어지럽게 떨어져 내렸다. 냉유성은 마치 천신처럼 버티고 서서 스산한 눈빛으로 산서삼걸을 쳐다보았다. 늘어뜨린 검에서 핏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검기를 잔뜩 끌어올린 상태라서 피가 검에 맺히지 않고 흘러내리는 것이다. 승부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결판 지어졌다. 유성추가 막 머리에 적중되려는 순간 검을 뽑은 냉유성이 유성추를 부수고 귀두도를 토막 낸 다음 산서삼걸의 삿갓을 잘라내고 그 다음에 어깨에다 각각 한 번씩 검을 찔러 넣은 것이다. 설명은 길었지만 일어난 것은 순식간이었다. 산서삼걸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산서삼걸이 혈도를 눌러 지혈을 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장한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 이렇게 빠르다니…….” 자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수였기 때문에 산서삼걸의 낯빛은 침울했다. 무림의 높은 벽을 실감한 모양이었다. 냉유성이 다시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처음이고 주공께서 식사를 하시기 때문에 인사치레만 했다. 다음에는 오른팔이다. 팔을 잃어도 좋다면 덤벼라.” 이어진 음성에는 내공이 충만히 실려 있었다. “이후에는 용서가 없다. 나 냉유성은 도전하는 자를 살려두지 않는다.” 말이 끝나는 순간 냉유성이 든 장검에서 눈부신 빛 무리가 솟아올랐다. 파츠츠츠 검강의 발현이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냉유성이 무공을 모두 되찾았음을 알 수 있었다. “미, 믿을 수 없다.” 핏기 잃은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킨 이는 마가장의 장주 마문태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너에게는 무공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 냉유성은 마문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주군께서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 주셨다. 잃었던 무공, 나에게는 생명이나 다름없는 것을 돌려주신 대가로 나는 주군께 목숨을 드렸다.” 말을 마친 냉유성은 좌중을 둘러보았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원한을 해결하려는 자는 나서라. 만약 나서지 않는다면 은원관계를 청산하겠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일어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냉유성의 무위를 본 터라 누구 하나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냉유성은 입으로 내뱉은 말을 철저히 실천하는 무인으로 알려져 있다. 괜히 나섰다간 오른팔을 잃을 게 확실했기 때문에 모인 사람들은 침묵을 지몄다. 심지어 아들을 잃은 마문태 역시 침울한 표정을 지었을 뿐 나설 엄두를 내지 않았다. “그럼 이로써 은원관계가 모두 종결되었다.” 검을 검집에 꽂아 넣은 냉유성이 몸을 돌렸다. 등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데이몬은 한창 식사에 몰두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간 냉유성이 공손히 포권을 했다. “주공, 모두 해결했습니다.” “수고했다. 앉아라. 식사나 하자.” “예.” 데이몬과 냉유성이 식사에 몰두하는 사이 객잔 내부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복수할 가능성이 없어졌으니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썰물 빠지듯 무림인들이 빠져나갔고 마지막으로 마문태가 공허한 시선으로 냉유성을 쳐다보니 몸을 돌렸다. 그의 축 늘어진 어깨에서는 아들의 원수를 앞에 두고도 복수를 하지 못하는 비애가 서려 있었다. 냉유성도 그리 마음이 편치 않은 듯 어두운 낯빛을 하고 있었다. “미안한가?” “솔직히 말해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다. 무림이란 원래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 아닌가?” 그 말에 냉유성은 의아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어찌 보면 주공께서 저보다 더 노련한 무림인 같습니다만.” 그 말에 뜨끔한 데이몬은 말을 돌렸다. “그, 그거야 무림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거지. 게다가 내가 살던 세상을 방문한 무림인이 하나 있었다. 중원말도 그에게서 배운 거지.” “그랬군요.” “그나저나 검술이 비교적 날카롭고 살기가 짙은 편이로군.” “공동파 검술이 원래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원래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정사대정을 겪으면서 살기가 더욱 굳어졌습니다. 아직까지 고급검술인 복마검법을 배우지 못해서…….” “그래도 실전검술로 절정의 벽을 깬 것은 대단한 거야. 언제 기회 되면 윈슬럿과 한 번 대련을 해봐. 이 녀석 역시 실전무술로 일가를 이룬 녀석이니까.” “알겠습니다.” “이제 이곳을 떠나야겠군. 원래 아침 일찍 떠나야 했는데 네 녀석 때문에 지체되었어.” “어디로 가실 것입니까?” “일단은 느긋하게 유람할 생각이야. 중원천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감상해야지.” 데이몬은 너스레를 떨며 몸을 일으켰다. 윈슬럿과 냉유성이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냉유성이 가세하자 이후의 여정이 다소 편해졌다 일단 한 가락 할 것 같은 냉유성의 인상이 일행의 안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살벌하고도 냉혹한 얼굴의 냉유성이 인상을 쓰면 야바위꾼들이 섣불리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실 생김새가 다른 이방인 둘이 중원을 여행할 경우 제약사항이 많다. 가장 우려할 만한 점은 범죄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후환이 없는 이방인이라서 건들이나 소매치기, 강도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범행을 저지른다. 그리고 바가지를 쓰는 일도 중원인에 비해 몇 곱절 높다고 봐야 한다. 타고난 장사꾼이라 불리는 중원인이라 이방인에겐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바가지를 씌우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들이 냉유성이 합류함으로써 말끔히 해결되었다. 척 보더라도 이마에다 무림인이라 써 붙인 냉유성 덕분에 건달이나 강도들이 주변에 얼씬도 하지 못했고, 소매치기들은 미처 범행을 저지르기도 전에 발각이 되었다. “커억.” 한 소년이 데이몬의 품에 손을 집어넣은 자세로 굳어 있었다. 목젖에 살짝 닿아 있는 검집 때문이었다. 귓전으로 스산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그 손을 빼지 않는다면 목에 바람구멍이 날 것이다.” “네……네…….” 소년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데이몬의 주머니에서 뺐다. 데이몬은 흡족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쓸모가 있군. 고생해서 구해주기를 잘한 것 같아.’ 매서운 눈빛으로 소년을 노려보던 냉유성이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주공. 팔 하나를 잘라서 두 번 다시 소매치기를 하지 못하게 만들까요?” 살벌한 말에 몸을 부르르 떨던 소년이 지체 없이 바닥에 꿇어 엎드렸다. “자,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를…….” “가라. 어린애 팔을 잘라서 어디다 쓰겠느냐?” 데이몬의 말에 소년은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쳤다. 그 모습을 잠시 쳐다보던 데이몬이 냉유성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역시 절정고수답군. 훌륭해.” “별 말씀을……. 주공께선 저와 비교도 할 수 없는 고수이시잖습니까. 일전에 시현하신 격공섭물은 제 내공으론 불가능한 절기입니다.” 데이몬은 가슴이 뜨끔했다. 단지 마법에 의한 눈속임일 뿐 속내는 결코 격공섭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데이몬의 내심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냉유성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주공께서는 무엇 때문에 중원으로 오신 것입니까?” “왜 궁금한가?” “솔직히 그렇습니다.”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긴 걱정될 만도 하지. 내가 서역문파에서 파견된 첩자일 수도 있으니 말이야. 최악의 경우 중원무림을 무너뜨리기 위한 마두일 가능성도 있고.” “…….”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에게 한 충성의 맹세를 철회하겠는가?” 데이몬을 쳐다보던 냉유성이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전 주공께 목숨을 드렸습니다. 설사 주공의 뜻이 그러하다 하더라도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냉유성은 손에 쥔 검 자루를 굳게 움켜쥐었다. “제게 무공이란 생의 의미입니다. 그런 무공을 되찾아주신 주공을 배신하는 일은 어떠한 경우라도 없을 것입니다.” “고맙군.”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냉유성의 어깨를 쳐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사는 곳은 이곳과는 무척 먼 곳이다. 평생을 걸어도 도착할 수 없는 곳이지. 그런 데서 온 내가 그따위 짓을 할 이유는 없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갔다. “이곳에서의 용무를 모두 마친 뒤 너를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겠다. 그때까지 나를 잘 보필해 주길 바란다.” “속하, 견마지로를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두 손을 모아 공손히 포권을 한 냉유성은 조용히 데이몬의 뒤를 따랐다. 5. 영초를 쫓는 이들 두툼한 서류뭉치를 들고 있는 하얀 손이 있었다. 실핏줄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창백한 손이었다. 손의 임자는 학창의를 차려입은 초로의 문사였다. 하얗게 센 귀밑머리가 완숙한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는 문사의 외모는 지극히 청수했다. 완만하게 휘어진 눈썹과 부드러운 눈매 아래에 온화하게 빛나는 눈이 있었다. 한동안 문서를 들여다보던 문사가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예상대로로군.” 고개를 끄덕이던 문사는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때 뒤에서 묵직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회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까?” 입을 연 이는 얼굴이 시커먼 중년인이었다. 가시 같은 수염이 삐죽이 돋아나 마치 장비와도 같은 외모를 가진 자였다. 문사의 시선이 슬그머니 돌아갔다. “그다지 좋지 않다고 봐야겠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초로 문사의 이름은 사준환이었다. 무림의 한 곳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거대방파 잠마련의 총수. 이십 년 전만 해도 그는 조그마한 무림방파의 일개 참모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의 입지는 달랐다. 배교의 조직을 바탕으로 마교의 이탈자와 흑도 문파를 규합하여, 당금 무림에서 단일 문파로는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 방파의 총수에 오른 것이다. 오로지 머리 하나로 잠마련이라는 거대단체를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옆에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흑면중년인의 이름은 곽천도였다. 흑면염라 곽천도. 천기대제 사준환의 심복으로서 충성심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또한 무공실력도 충성심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고강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사준환은 들고 있던 서류를 곱게 접어 곽천도에게 내밀었다. “자네가 한 번 읽어보겠나?” 곽천도는 머뭇거림 없이 서찰을 받아들고 읽었다. 얼마 읽지 않아 얼굴이 일그러졌다. “생각보다 회의 존재가 빨리 드러나 버렸군요. 무림맹 놈들의 대처가 예상보다 빨랐던 것 같습니다.” 곽천도의 고리눈에는 누군가에 대한 불신이 역력하게 서려 있었다. “큰소리 탕탕 칠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앓는 소리를 하다니……. 속하는 이미 장담할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그래,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곽천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뭐가 말씀이십니까?”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 것 같나?” 잠시 고민하던 곽천도가 입을 열었다. “속하의 소견으로는 굳이 회를 이용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주공의 휘하에는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즐비합니다. 오합지졸들이 모인 무림맹 정도는 우리 잠마련의 힘만으로도…….” “양패구상하자는 얘기인가? 그렇게 한다면 마교 녀석들이 무척 좋아하겠군. 눈엣가시로 보고 있는 두 세력이 서로 치고 받으며 싸운다면 말일세.”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없네. 자넨 골수까지 무인이야. 모사들과는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사준환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쳤다. 그것을 보아 그의 대답에 뭔가를 기대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자네도 알다시피 난 무사가 아니라 모사 출신이라네. 따라서 무사들이 생각하는 그런 싸움은 하고 싶지 않아.”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지 손가락이 멈췄다. “묵회에다 지원을 해 줘야겠어.” “하, 하오나 위험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회와 우리와의 관계가 탄로 날 수…….”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 대외적으로 회와 잠마련과는 일체의 연결고리가 없어야 하네. 만약 사실이 탄로 날 경우 무림맹과 마교를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 “비밀을 유지하면서 지원하려면 선택의 폭이 매우 좁습니다. 만들어놓은 독강시는 모두 묵회로 보냈습니다. 더 이상 보낼 독강시가 없습니다. 아무리 은밀하게 정예 무사들을 차출한다고 해도…….” “무사를 보내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아.” 사준환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에는 곽천도가 당혹해질 차례였다. 아니, 무사를 보내지 않는다면 도대체 뭘 지원한단 말인가? “비밀병기 철마를 보내줄 생각이네. 그렇게 한다면 문제가 말끔히 해결될 거라 생각하네.” 그 말에 깜짝 놀랐는지 곽천도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마, 말도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철마를 회에다 보내다니요? 묵회주를 도대체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는 외부인입니다. 따라서 위기에 처할 경우 배신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런 그에게 우리 잠마련 최고의 비밀병기를 어찌…….” 곽천도가 놀라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현 잠마련에 있어 철마는 베일에 겹겹이 싸여진 비밀병기이다. 초절정 고수 다섯 이상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바로 철마였다. 잠마련에서조차도 몇몇 수뇌부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철마의 존재자체를 몰랐다. 사실 말은 쉽지만 초절정 고수 다섯을 상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역대 최고의 강시라는 혈강시조차 세 구 이상을 투입해야만 초절정 고수 하나를 겨우 상대할 수 있다. 그런 초절정 고수를 다섯 이상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 그 말을 외부인이 들었다면 틀림없이 미친 소리로 치부해버릴 터였다. 그러나 사준환과 곽천도는 태현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철마를 우리 손에 넣기 위해 입은 손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혈강시가 무려 팔십 구에 초절정 고수 다섯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겨우 우리 것으로 만든 철마를 독과 무력으로 회유한 외부 단체인 묵회에 보내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곽천도가 토하는 열변을 사준환은 미소 띤 얼굴로 듣고 있었다. 마치 할 말이 있으면 마음껏 해 보라는 눈치였다. “솔직히 말해 속하는 그자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는 분명히 목적을 가지고 주공의 휘하에 든 것이 분명합니다.” “이상하군. 나는 목적이 있다는 점 때문에 묵회주를 신뢰하고 있는데 말이야.” “…….” “인간은 무척 이기적인 생물이야. 난 바로 그런 관점으로 인간관계를 해석하지.” 사준환은 심유한 눈빛으로 곽천도를 쳐다보았다.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일종의 거래로 본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묵회주에게 독강시를 제공했네. 묵회주가 지닌 야망을 펼치도록 뒷받침을 해 준 것이지. 묵회주는 그 대가로 나에게 충성을 맹세했네. 비록 묵회주가 외부인이긴 하지만 그와 나 사이의 관계는 혈연이나 사승관계로 맺힌 대부분의 무림문파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네. 어찌 보면 더욱 신뢰도가 높을 수도 있겠지. 인간이란 자고로 야망의 실현을 위해 가족까지 희생시킬 수 있는 존재이니 말이야.” “…….” “아무튼 난 묵회주를 믿네. 그리고 그가 겪고 있는 난관은 익히 예상했던 일이야. 내가 평가한 바론 묵회주의 능력이 일을 진행시켜나가는 데 조금 못 미친다고 판단했으니까.” 곽천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 그러셨다면 어째서…….” “혹시나 해서 추진해 본 것이지. 묵회주의 능력이 내 예상 밖일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으니까. 아무튼 이로써 내 판단이 정확하다는 것이 드러났네. 여기서 적절한 지원을 해 준다면 묵회주는 분명히 맡은 바 역할을 완수할 수 있을 거야.” “처, 철마를 회로 보내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음양강시 두 구를 함께 끼워서 보내면 더욱 확실하겠지?” 그 말에 곽천도는 또다시 놀랐다. 음양강시 역시 철마와 마찬가지로 잠마련이 보유한 최고 수준의 비밀병기였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그 어떤 강시보다 강력하며 심지어 검강을 발현하는 절정고수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최고급 강시가 바로 음양강시였다. 그런 최고의 전투병기들을 묵회에다 보낸다는 것이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곽천도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경험에 따라 사준환이 한 번 마음을 정하면 결코 뜻을 꺾지 않는 성품임을 알아차린 탓이다. “알겠습니다, 주공.” 사준환은 미소 띤 얼굴로 곽천도를 쳐다보았다. “아,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나도 예외로 보는 인간관계가 있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자네 같은 경우이지.” “…….” “자넨 아무런 조건 없이 목숨을 나에게 맡겼네. 인정하는가?” 곽천도의 눈빛이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물론입니다. 가문의 복수를 해 주신 이래 제 목숨은 이미 주공의 것입니다. 주공께서 원하신다면 웃으며 죽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자네 시체를 보고 싶진 않군. 인간이란 살아서 움직일 때에만 가치가 있는 법. 목숨을 함부로 하지 말게나.” “존명.” “그럼 가서 철마와 음양강시를 깨우도록 하게. 묵회주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만들려면 조금의 사술이 필요할 거야.” “알겠습니다.” 절도 있게 포권을 한 곽천도가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사준환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곽천도가 완전히 방을 나서자 사준환의 입술이 움직였다. “미안하지만 자네 역시 내가 정한 인간관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네. 인간이란 철저히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야. 의리와 신의 같은 것은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하지.” 사준환은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묻었다. 철마와 음양강시를 깨우는 데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구태여 지금 가서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사준환은 조용히 상념에 사로잡혔다. 지금껏 거쳐 왔던 발자취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야망의 실현을 위해 모든 것을 건 나날들……. 돌연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세인들은 이미 내가 야망을 달성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 단일 세력으론 무림에서 제일 크다고 볼 수 있는 잠마련을 휘하에 두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판단이 아냐. 내가 원하는 것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확고한 기반이다. 무림 전체의 과반수 이상을 한 손에 틀어쥐고 흔드는 절대권력이 바로 내가 추구하는 야망의 종착역이지.” 자존심 강한 무림인들이 들었다면 대경실색할 말을 사준환은 태연히 늘어놓고 있었다. 사준환의 시선이 손에 가서 닿았다. 소수마공을 익혀 실핏줄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희디흰 손. 사준환은 당금 무림에서 당당히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무공의 소유자였다. “이 무공을 익히기 위해 많은 생명을 희생시켰지. 소수마공은 오히려 천자혈마공보다 더 많은 피의 제물을 필요로 하는 마공이니까. 하지만 내가 믿는 것은 무공이 아니다.” 사준환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지금까지 내가 이룩한 모든 위업의 바탕은 무공이 아니라 머리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최선. 따지고 보면 무인들만큼 조종하기 쉬운 존재는 없지. 후후후.” 사준환은 고개를 들어 창 밖을 쳐다보았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눈을 파고들었다. “사실 이 정도를 이룩한 것도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내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무림은 철저히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세계. 능력 있는 자가 그렇지 못한 자 위에 군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사준환의 시선이 탁자 위의 바둑판에 가서 닿았다. 이미 한번 대국이 오고간 듯 검고 흰 돌이 바둑판 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빙긋이 미소를 지은 사준환은 손을 휘저어 바둑판 위의 돌을 모두 쓸어버렸다. 후두두둑 검고 흰 돌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널렸다. 사준환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어차피 내 입장에서는 모두 바둑판 위의 돌일 뿐이야. 인간으로 보아선 안 되고 말고. 설사 야망을 이루지 못한다고 해도 후회는 없다. 남자로 태어나서 세상을 쥐고 뒤흔들어보는 것은 누구나 한 번쯤 시도해 볼 만한 일이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사준환은 손가락을 퉁겼다. 딱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시비가 들어와 예를 올렸다. 어느 곳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아름다운 시비였다. 바닥에 어지럽게 널린 바둑돌을 보자 시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깨끗이 정리해 놓도록.” 사준환의 시선이 닿자 시비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청수한 외모와는 달리 사준환은 아랫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가차 없이 목을 날리기 때문이다. 사소한 실수로 처형된 시비가 지금까지 몇이던가. 안색이 딱딱하게 굳은 시비는 지체 없이 엎드려 바둑돌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사준환이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지금쯤이면 철마와 음양강시들이 잠에서 깨어났을 테지?” 사준환이 걸어 나가자 집무실 안에는 시비만이 홀로 남겨졌다. 자르륵 자륵 바둑돌 치우는 소리만이 실내에 고즈넉이 울려 퍼졌다. 화려한 전각 사이를 걸어가며 사준환은 생각에 잠겼다. 곳곳에 배치된 경비무사들이 예를 표해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한때는 부단히 평판을 관리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 없는 위치에 올라 있다. 무심하게 걸음을 옮기는 사준환의 입매가 돌연 쫑긋거렸다. “옛날 일이 생각나는군. 어렵지 않았을 때가 없었지만 그땐 특히 힘들었지.” 사준환은 급히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날려버렸다. “지금은 앞만 보고 달릴 때다. 쓸데없는 과거의 상념에 사로잡힐 때가 아냐.”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 사준환은 무수한 사람들을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그에게 인간관계란 야망을 이루기 위한 수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헤아릴 수 없는 무인들이 그의 야망실현을 위한 제물이 되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유독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를 떠올리자 사준환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독고성 그 녀석이 생각나는군. 마지막까지 내 배신을 믿지 않은 녀석이었지.” 지금껏 사준환에 의해 이용당하다 배신당한 이들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다. 그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아있는 이가 바로 독고성이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은 사준환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때문에 나름대로 방도를 세워놓고 사준환을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사준환은 뛰어난 머리를 십분 활요하여 기어코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독고성만큼은 그 과정에서 예외였다. 그는 말 그대로 철저히 사준환을 신뢰했다. 최후의 순간까지 사준환을 믿었기에 그는 완벽한 파멸을 맞아야 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사준환은 혀를 끌끌 찼다. "정말 멍청한 녀석이었어. 사람 사이의 신의나 의리란 물거품처럼 허망한 것일 뿐인데.“ 의외였던 점은 그를 따르던 수호마왕군의 태도였다. 사실 사준환은 수호마왕군만큼은 도태시키지 않으려 했다. 수호마왕군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무력집단이었다. 배교내외의 정영들을 뽑아 지원을 아끼지 않고 훈련시킨 뒤 정사대전을 통해 단련시킨 최고의 무사들이었다. 따라서 사준환은 온갖 당근을 제시하여 그들을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독고성과 함게 정사대전을 치러낸 탓인지 그들의 의리는 좀처럼 회유할 수 없을 정도로 굳건했다. 결국 수호마왕군 무사들은 독고성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길을 택했고 모두 함께 파멸의 순간을 맞았다. “아무튼 놈이 죽은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야. 시체를 찾지 못한 것이 좀 걸리긴 하지만.” 독고성은 모든 무공을 잃고 천장단애로 떨어졌다.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닌 이상 벗어날 수 없는 곳이다. 때문에 사준환은 독고성의 최후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는 어느새 목적했던 곳에 도착해 있었다. 우렁우렁한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련주님을 뵙습니다.” 태양혈이 툭 튀어나오고 눈빛이 형형한 무사들이 절도 있게 예를 표했다. 이어 지하로 통하는 석문이 굉음과 함께 열렸다. 쿠르르릉 사준환은 경비무사에게 일별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좁은 통로를 한동안 걸어서 사준환이 도착한 곳은 큼지막한 지하 대전이었다. 왠지 모르게 스산한 분위기가 풍기는 장소였다. 대전의 중심부에는 큼지막한 석관이 세로로 세워져 있었다. 그 주위로 네 개의 관이 동서남북을 점한 채로 자리 잡고 있었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곽천도가 사준환을 보자 허리를 꺾었다.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오랜만에 철마를 보겠군. 깨워라.” “존명.” 명이 떨어지자 서너 명의 무사들이 석관에 달라붙었다. 끼이이익 거북한 소리와 함께 관 뚜껑이 열렸다. 석관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내부의 모습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사준환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오랜만이구나, 철마.” 석관 안에는 장대한 체구의 철인이 서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두터운 강철 갑주를 입은 인간이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을 정도로 전신을 철갑으로 감싼 정체불명의 인간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석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단단해 보이는 투구와 면갑을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형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사준환이 철인을 쳐다보는 사이 주위에 늘어선 술사들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섞인 사이한 주문이었다. 주문이 발동하자 철마가 눈을 떴다. 투구의 면갑 틈새로 강렬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이어 철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갑 틈새가 마찰되며 거북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끼이이익 끼익 그 모습을 본 사준환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름을 좀 쳐야겠군.” 무사들이 황급히 달려들어 기름을 치는 사이 사준환은 곽천도를 쳐다보았다. “병기를 뽑아라, 곽천도.” 스르릉 곽천도가 뽑아든 것은 한 쌍의 자모건곤권이었다. 주먹을 감싼 형태의 둥근 몸체에 거치도의 칼날처럼 비쭉비쭉 날이 서 있었다. 내력을 주입하자 건곤권이 웅웅거리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어 솟아난 것은 시퍼런 강기였다. 곽천도는 이미 강기를 자유자재로 수발하는 절정, 그중에서도 상급의 고수였다. 그러나 사준환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철마를 한 번 가격해 보아라.” “존명.” 곽천도는 일체의 이유를 달지 않고 즉시 행동에 나섰다. 내력을 돋우자 자모건곤권에 서린 강기가 더욱 강렬해졌다. 파츠츠츠 한 쌍의 자모건곤권이 혼신의 힘을 싣고 철마의 가슴팍을 파고 들어갔다. 그런데 강기가 철갑에 닿을 무렵 철마가 움찔했다. 순간 푸르스름한 선들이 철갑을 감쌌다. 파파파팟 각각의 선들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감싸며 철갑 표면에 막이 생겨났다. 놀랍게도 철갑 전체에 강기의 막이 발동된 것이다. 이어진 것은 강렬한 강기끼리의 충돌이었다. 파지직 공격을 가한 곽천도가 신음을 흘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강기의 격돌로 인해 충격을 받은 것이다. “저, 정말 대단한 호신강기로군요. 매번 겪는 일이지만 정말 놀랍습니다.” “진정한 호신강기이지. 일반적인 호신기와는 차원이 다른.” 사준환의 얼굴에는 자랑스럽다는 빛이 역력했다. “내가 철마를 얻은 것은 한 마디로 천운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대가로 혈강시 팔십 구와 초절정 무인 다섯을 잃기는 했지만 말이야. 만약 흑법사의 조력이 아니었다면 고스란히 손실로 가지고 갔어야 했을 것이다.” 만족스럽다는 듯 사준환은 손을 뻗어 철마의 어깨를 두드렸다. 철마의 키가 워낙 커서 발뒤꿈치를 들어야 할 정도였다. “흑법사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 실험중입니다. 지존께서도 아시다시피 흑법사는 실험할 때 아무도 만나지 않습니다.” “방해하지 말아라. 그리고 그가 원하는 재료는 무엇이든 구해 주도록. 흑법사에겐 그만한 자격이 있다.” 명령을 내린 사준환은 철마를 쳐다보았다. “강시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 활강시가 내 손에 의해 구현되다니 믿어지지가 않군. 그렇지 않나, 곽천도?” “그렇습니다. 역대로 실혼인은 종종 만들어졌지만 활강시가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모든 게 흑법사의 공이야. 그의 지식이 아니었다면 철마를 활강시로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활강시란 강시제조를 주업으로 하는 술법사에겐 꿈과 같은 존재다. 일반적으로 강시는 시체에 처리를 해서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단단한 외피와 강력한 힘을 지닐 수 있지만 반응속도와 민첩성 면에선 별로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살아있는 사람의 몸을 처리해서 만든 고급강시가 나왔다. 배교의 혈강시나 철골강시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그런 고급강시들도 범인에 비해 빠르다 뿐이지 뛰어난 고수들에게는 어림도 없다. 그 점을 극복한 것이 바로 활강시였다. 일반적으로 강시는 움직이는 시체에 불과하다. 살아있는 사람으로 만든 고급강시도 종내에는 생명력이 정지되어 죽은 시체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활강시는 달랐다. 완벽하게 심장도 뛰고 피도 통한다. 그리하여 활강시, 즉 살아있는 강시로 불리는 것이다. 활강시의 가장 무서운 점은 원래 지녔던 무공을 고스란히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뛰어난 고수처럼 반응하고 공격과 수비를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 활강시는 무서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철마가 본련에 난입하여 날뛸 때를 생각해 보라. 혈강시도 무용지물이었고 초절정 고수들도 채 몇 합 나누지 못하고 쓰러져갔다. 후후후. 생각만 해도 피가 끓는군. 철마가 무림맹 본단에 난입해서 뒤집어엎을 때를 상상해 보니 말이야.” “그런데 철마가 대관절 어디에서 왔을까요?” 철마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곽천도의 눈망울엔 두려움이 역력했다. 그럴 것이 철마의 난입 당시 곽천도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단 일합에 엄중한 내상을 입고 나가떨어진 것이다. “무위가 초절정은 확실히 넘어섰습니다. 속하의 좁은 소견으로는 최소 현경에 든 무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뭐 중요한가? 아무튼 철마는 우리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활강시가 되었다. 철마의 힘이 더해진다면 묵회는 확실하게 평온한 무림을 뒤집어엎을 수 있을 것이다.” “충분하지요. 충분하고 말고요.” 너털웃음을 터뜨린 사준환은 곽천도를 쳐다보았다. “철마와 음양강시를 묵회로 이송하는 임무는 네가 맡아라. 너말고 적임자가 없을 것 같다.” 곽천도가 직각으로 허리를 꺾었다. “맡겨만 주십시오.” 사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곽천도를 쳐다보고 있었다. * * * * * “혹시 영호명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나?” “영호명이라면 과거 철검문의 소문주가 아닙니까? 정사대전 과정에서 문주가 전사해서 문을 물려받은……. 정사대전 말기에 의문스럽게 실종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아. 그런데 말이야.”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데이몬의 얼굴이 잔뜩 찡그러져 있었다. “혹시 그가 다시 무림에 재출도했다는 소식은 없었나?” “그런 소문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무림에 현경의 고수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데이몬의 말을 들은 냉유성이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백 년 전 검성 이래로 무림에는 현경의 고수가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현경이란 노력만으로는 이루기 불가능한 경지이지요.” ‘미치겠군. 이 자식이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골치가 아픈지 데이몬은 머리를 감쌌다. 예상대로라면 영호명은 분명히 중원에 와 있어야 한다. 무덤의 석판에도 그렇게 적어놓지 않았던가? ‘사실 그놈과 나와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 특히 놈은 날 철천지원수로 생각한다. 혜정선사를 죽인 것이 나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영호명. 트루베니아의 이름으로는 크로센. 위기에 빠진 트루베니아를 구원하고 아르카디아를 개척한 위대한 군주의 이름이기도 했다.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무위와 넓은 포용력으로 인류를 암흑에서 구해낸 영웅 중의 영웅. 그러나 그가 중원 출신의 무림인이란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오직 데이몬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무덤의 석판에 적힌 말은 중원의 언어였다. 트루베니아에서 오직 나만이 읽을 수 있다는 뜻이지.’ 대외적으로 알려지기를 크로센 대제는 팔십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데이몬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크로센 대제는 차원이동을 하는 과정에서 기연을 얻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경지라는 현경에 발을 디뎠다. 초절정 고수도 환골탈태를 거쳐 수백 년 이상 살 수 있는 판국인데 꿈의 경지인 현경의 고수가 고작 팔십 세를 일기로 타계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행로는 무덤의 석판에 똑똑히 적혀 있었다. 데이몬은 그 문구를 되새겨 보았다. ‘영호명 그놈은 향수를 이기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중원에 와 있어야 정상인데…….’ 영호명과 데이몬은 엄청난 악연으로 얽히고설킨 사이다. 처음의 인연은 혜정선사로부터 비롯된다. 사실 데이몬과 영호명은 사형제간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한 사람은 무공을, 한 사람은 불법을 배웠다고는 하나 엄연히 스승은 하나였으니까. 그러나 데이몬이 사준환의 도움으로 소림사를 빠져나간 이후 둘의 운명은 엇갈리게 된다. 스승인 혜정선사가 데이몬에 의해 시해당했다고 믿은 영호명은 데이몬에 대한 복수를 결심한다. 또한 정사대전 중 데이몬의 휘하 무사에 의해 아버지가 전사하자 영호명의 복수심은 더욱 굳어진다. 바로 그 때문에 데이몬이 사준환에게 축출될 당시 영호명은 철혈문의 전 무사들을 이끌고 끈질기게 추격해왔다. 오직 복수의 일념으로. ‘정말 지옥 끝까지 쫓아올 기세였지. 트루베니아의 마법사들이 날 허공에서 가로채지 않았다면…….’ 데이몬이 트루베니아의 마법사들에게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호명은 복수심을 접지 않는다. 급기야 그는 데이몬과 마법사들이 떠난 마법진으로 뛰어드는 결단까지 내린다. 그러나 그 이후 둘의 행로는 판이하게 바뀐다. 데이몬이 정상적으로 차원이동에 성공한 반면 영호명은 차원이동의 틈새에 걸려 전혀 다른 식나대로 이동하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영호명에게는 최고의 행운이 되고 말았으니……. 당시 영호명은 초절정의 벽을 갓 깨뜨린 상태였다. 그런데 환골탈태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만 차원왜곡의 압력에 직면한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차원왜곡의 압력. 범인이라면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공중분해 되어버렸겠지만 영호명은 당당히 극복해 냈다. 그리고 현경의 벽을 깨뜨려 명실상부한 초인이 되었다. 둘의 행로는 그렇게 해서 완전히 엇갈리게 되었다. ‘놈은 오백 년 전으로 갔고 난 모든 무공을 잃고 또다시 버려졌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운명이지.’ 데이몬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솔직히 그 녀석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복수를 위해서는 반드시 그 녀석의 힘이 필요하다.’ 솔직히 말해 데이몬의 복수는 아직도 요원한 일이다. 사준환은 이미 무림제일의 거대 방파를 거느리는 총수다. 반면 데이몬이 가진 힘이라곤 윈슬럿과 얼마 전 거둔 수하 냉유성뿐이었다. 인크레시아 속에 숨겨 둔 수하 둘이 더 있었지만 쉽게 개봉할 수 있는 패가 아니었다. 데이몬은 착잡한 눈빛으로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절정 중급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이라……. 후기지수들 중에서는 단연 수위겠지만 사십대 이상의 절정고수들에게는 아무래도 힘들다. 골치 아프군.’ 무림문파의 주력은 대부분 사십대 장년층 고수의 힘에서 판가름 난다. 내외공이 조화를 이루고 실전경험까지 갖춘 사십대 무사들이 무림무나들이 보유한 실질적인 힘이었다. 비록 냉유성이 뛰어난 무위를 갖췄다지만 그런 주력 무사들에게는 손색이 있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다. 물론 냉유성이 사십 세까지 수련을 계속한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준환 휘하에는 냉유성 정도의 고수가 족히 수백은 넘을텐데.’ 불현듯 수호마왕군의 빈자리가 아쉬워지는 데이몬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죽은 자식의 불알만 쥐고 있을 순 없어. 어떻게든 대책을 강구해야 해.’ 데이몬의 내심을 모르는 냉유성과 윈슬럿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뒤를 따를 뿐이었다. “가만 있자, 여기가 어디쯤 되지?” 지도를 펼쳐든 냉유성이 즉각 대답했다. “대파산맥 인근입니다. 여기서 북쪽으로 이틀 정도 거리에 화산파가 위치해 있습니다.” “걸어서?” “물론 아닙니다. 말을 타고 달리는 속도로 말입니다.” “역시 중원이 넓긴 넓어. 그러고 보니 경치가 무척 좋군.” 데이몬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사를 떠나온 지 이틀, 어느새 험준한 준령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관도를 타고 가면 조금 편하겠지만 데이몬은 굳이 산행을 선택했다. 곳곳에 차원이동 마법진을 설치하려면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다녀야 한다. 게다가 데이몬이 품은 꿍꿍이도 있었으니……. ‘돌아다니다 운 좋게 마정지지 같은 곳을 찾아낸다면 소모된 암흑투기를 보충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현경의 무위를 뽐낼 수 있다.’ 마정지지란 지형적인 요건으로 인해 마기가 비정상적으로 축약된 장소를 말한다. 귀기나 요기 따위의 음차원의 기는 어느 차원에서도 존재한다. 단지 그 양이 많지 않을 뿐이다. 그런 음차원의 기들이 오랜 세월동안 쌓이고 쌓인 곳이 바로 마정지지이다. 귀신이나 망령이 자주 출몰하며 사람들의 눈에 좀처럼 띄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보통사람들이라면 마정지지에 쉽게 접근하기 힘들다. 부근에 만연한 음차원의 기가 생기를 서서히 앗아가기 때문이다. 무림 고수들이라면 사정이 조금 달라지겠지만 그대로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몇몇 마공을 수련하는 마도고수들을 빼면. ‘그러고 보니 몇몇 마두들이 마정지지를 찾아내어 마공을 연성했다고 들은 적이 있군. 대부분 마기를 이겨내지 못해 미쳐버렸지만 말이야.’ 마기란 인간이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기운이다. 마기를 내공과 혼합하여 가공할 파괴력을 발휘하는 종류의 마공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끝이 좋지 못하다. 마기가 뇌로 침습하여 광인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이몬에게는 사정이 다르다. 그는 몸속에 마력의 원천을 보유하고 있는 마왕. 마기가 그에게 힘을 실어줄지언정 해를 끼치는 일은 없다. 문제는 마정지지를 찾아내는 것이 지극히 힘들다는 점이다 데이몬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아무튼 골치 아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지?” 데이몬의 넋두리를 들은 냉유성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 “그냥 혼잣말이다. 일단 여기에서 좀 쉬어가자.” “존명.” 일행은 한가롭게 앉아 물을 마셨다. 험준한 산길을 오랫동안 행군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지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왕인 데이몬이 지칠 일은 없고 언데드인 윈슬럿도 마찬가지다. 냉유성 역시 거뜬했다. 냉유성 정도의 절정고수라면 체력이 범인의 수십 배에 달할 테니까. 데이몬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깎아지른 듯한 계곡 아래에 울창하게 나무가 자라나 있었다. ‘혹시 이 근처에 마정지지가 있을까?’ 가능성이 없을 것 같았지만 데이몬의 손은 어느새 수인을 맺고 있었다. 주변을 한 번 탐색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손해 볼 것은 없지. 운 좋으면 마정지지를 찾아낼 수도 있고…….’ 일정 범위를 설정한 데이몬은 탐색마법을 캐스팅했다. “스캔.” 마나의 분포도를 감지하는 마법이었다. 마법 자체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지만 범위가 광범위하기 때문에 제법 많은 마나가 소모되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데이몬은 주변의 마나 분포도를 살폈다. 그러나 음차원의 마나는 쉽게 감지됮 않았다. ‘하긴, 마정지지가 그리 쉽게 드러날 리가 없지. 응? 이것은…….’ 데이몬이 눈을 번쩍 떴다. 탐색마법에 뭔가가 파악된 것이다. 그는 세심하게 신경 써서 그 부근을 다시 탐색했다. 이윽고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음차원의 마나는 아니지만 기가 무척 충만하군. 분명 뭔가가 있어. 아무래도 영초 같은데…….” “여, 영초라니요?” 듣고 있던 냉유성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탐색마법을 풀었다. “저쪽 절벽 위에 영초가 있는 것 같다. 그리로 가 보자.” 데이몬이 가리킨 절벽은 제법 멀었다. 냉유성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저렇게 먼 곳에 영초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내셨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분이로군.’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냉유성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절벽까지 가는 데는 꼬박 한 시진이 걸렸다. 절벽 아래에 도착한 데이몬은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세히 쳐다보니 절벽 중턱에 거무스름한 음영이 보였다. “절벽 중턱에 동굴이 하나 있다. 보이느냐?” “동굴이라기보다는 바위 틈 같은데요.” “아무튼 그 속에 영초가 있다. 마나 분포도를 보아 제법 오래 묵은 영초 같구나. 최소한 이삼백 년은 된 것 같다.” 데이몬의 말을 듣고 있던 냉유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영초를 그대로 먹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들었습니다.” 냉유성의 말은 사실이었다. 무림에는 기연이라는 말이 존재한다. 원수와 싸우다 절벽 아래로 떨어진 자가 우연히 영초를 발견하고 그것을 복용한 뒤 절세 고수가 되어 원수를 갚는다는 내용이 가장 많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영초는 사람이 먹을 만큼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아주 운이 좋아 적정량을 복용하여 효과를 본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영초의 강렬한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 가는 것이 현실이다. 적정량을 먹으면 영약이지만 과도하게 복용하면 극독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영초란 약초가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오랫동안 기운을 축척해서 진화한 것을 말한다. 오래된 영초는 영성을 띤다고 알려져 있으며, 엄청난 기운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무림고수들이 먹을 경우 내공을 급상승시킬 수 있다. 일반인이 먹어도 무병장수할 수 있을 정도이니 내공화한다면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영초가 내포한 독성이었다. 방대한 기를 함유하고 있는 만큼 영초를 노래는 존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인간뿐 아니라 오래 묵은 영물들도 영초를 탐한다. 영초를 복용하여 축적된 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승천하는 시기를 비약적으로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몇몇 종류의 영초들은 다른 영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독을 만들어낸다. 탐욕스러운 영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극약처방인 셈이다. 그렇지 않은 영초들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이다. 오랫동안 축척시켜 온 기의 결정체인 만큼 과도하게 먹으면 독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냉유성이 말했던 것처럼 영초를 그대로 먹는 것은 자살행위란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 해결책이 바로 영단이다. 영초를 여러 약재와 섞어 성분을 희석시킨 영단으로 만들면 부작용을 최소화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무림 문파에는 고유의 영단 제조법이 있다. 영초나 오래 묵은 약초를 전래의 방법에 의해 배합, 연단하여 독성을 없애고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내공을 증진시키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기 때문에 각 문파에서는 극소수의 적전제자에게만 영단을 지급한다. 따라서 냉유성 같은 방계제자들은 영단을 구경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냉유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영초는 무턱대고 먹어서는 안 됩니다. 독성이 없는 것이라고 해도 적당히 먹지 않으면 몸에 해가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차후 문제이고 일단은 영초를 가지고 오는 것이 급선무겠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절벽을 둘러보던 냉유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는 돌출물이 거의 없어 올라가기가 불가능했다. “그냥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반대쪽으로 올라가서 밧줄을 이용해서…….” “그럴 만한 시간은 없지. 그냥 내가 올라갔다 오겠다.” “힘드실 텐데…….” “걱정하지 말아라.” 데이몬이 빙그레 웃으며 몸을 돌렸다. 절벽은 무척 가팔랐다. 제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고수라도 오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데이몬에겐 예외사항이었다. 마법을 사용한다면 전혀 힘들이지 않고 절벽을 오를 수 있다. 다만 데이몬이 염두에 두는 것은 연출효과였다. ‘그냥 비행마법으로 날아오른다면 폼이 안 나겠지?’ 냉유성을 힐끔 쳐다본 데이몬은 세심하게 신경 써서 마법을 캐스팅했다. 중급 정도의 마법이지만 연출효과를 넣으려니 캐스팅 시간이 제법 걸렸다. “자, 그럼 올라갔다 오겠다.” 말을 마친 데이몬이 허공을 밟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보고 있던 냉유성의 눈이 점점 커져갔다. “세, 세상에…….” 주공이 한가롭게 허공을 걸어 절벽을 오르고 있었다.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기에 냉유성은 입을 쩍 벌렸다. “천상제를 저토록 완벽하게 시연하다니……. 도대체 주공의 무위가 어느 정도란 말인가!” 냉유성은 그만 얼이 빠져버렸다. 말로만 들어왔던 천상제를 실제로 목격할 줄이야. 천상제. 말 그대로 허공을 걸어 오르는 최고 수준의 경공이다. 어지간한 무공을 가진 이는 시연조차 할 수 없으며 내공소모가 엄청나기 때문에 초절정 고수들조차 서너 걸음 이상 떼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데이몬은 냉유성이 보는 앞에서 무려 백 걸음 이상을 걷고 있었다. 벌써 절벽의 절반 정도를 올랐으니 눈으로 보지 못했다면 믿지 않았을 터였다. “믿을 수 없군. 믿을 수 없어.” 솔직히 말해 격공섭물을 볼 때에는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내공을 더 쌓는다면 냉유성 자신도 충분히 시연할 수 있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상제는 사정이 달랐다. 초절정의 벽을 깨뜨려 환골탈태를 하더라도 저 정도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냉유성의 판단이었다. 여유 있게 허공을 걸어 올라간 데이몬이 어느새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흔든 그는 머뭇거림 없이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냉유성이 입을 쩍 벌린 채 쳐다보고 있었다. “흐흐흐, 냉유성 녀석 혼이 쏙 빠졌을 것이다.” 데이몬은 괴소를 지으며 동굴 내부를 살폈다. 입구가 좁아 겨우 들어왔지만 동굴 내부는 허리를 펼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깊었다. “역시 영초가 자라는 곳답군. 그럼 얼마나 대단한 녀석이 있는지 한 번 볼까? 라이트.” 간단한 마법으로 주위를 밝힌 데이몬은 동굴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 속은 음습했다. 게다가 잡초나 이끼 따위의 식물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영초의 독성이 워낙 강해서 살지 못하나 보군.” 중얼거리면서 걸어가던 데이몬의 눈에 마침내 목적했던 영초가 들어왔다. 마치 피처럼 새빨간 빛을 띤 약초 하나가 동굴 끝 공터 중앙에 자라고 있었다. “저것인가보군.” 영초가 눈에 들어오자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다가서서 손을 뻗었다. 순간 손에서 저릿한 감각이 전해졌다. 데이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윽! 보통 독성이 아니로군.” 맹독을 품은 생물이 천연색으로 자신을 과시하듯 붉은빛을 띤 영초는 지독한 독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하찮은 독에 당할 데이몬이 아니었다. 어둠의 마력을 끌어올리자 검게 물들어가던 손이 금세 제 색깔을 찾았다. 데이몬은 손에 힘을 주어 영초를 움켜쥐었다. “보통사람이라면 만지는 것만으로 중독되어 즉사하겠군.” 놀랍게도 영초는 마치 지성이 있는 생물체처럼 데이몬의 손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뿌리를 땅에 내린 식물이 도망칠 수는 없는 법. 움켜쥔 손바닥에서 부르르 떠는 감각이 전해지자 데이몬은 코웃음을 쳤다. “이 정도 살았으면 충분하지 않느냐. 그만 본좌를 위해 헌신하거라.” 그리곤 영초를 뿌리채 뽑아버렸다. 기아아악 영초는 마치 인간처럼 비명을 내지른 뒤 뽑혔다. 데이몬은 신기하다는 듯 영초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참 희한하게 생겼군. 근데 하도 독성이 강해서 약호가 있을지 모르겠네. 그런데 도대체 이게 무슨 영초야?” 고개를 갸웃거리던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목적했던 영초를 손에 넣은 이상 음습한 동굴 속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동굴 밖으로 나가자 까마득한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냉유성과 윈슬럿이 눈에 들어왔다.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절벽에서 몸을 날렸다. “헉! 주, 주공!” 밑에서 쳐다보던 냉유성이 혼비백산했다. 모시는 주군이 절벽에서 몸을 던지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혹감은 금세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한동안 자유낙하를 하던 데이몬이 적절한 시기에 마법을 펼친 것이다. “리버스 그래버티(Reverse gravity)." 중력역전, 중력의 방향을 바꾸어버리는 마법이 작용하자 데이몬의 낙하속도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정확히 중력이 0이 되어버리자 데이몬은 마법을 풀었다. “으차.” 사뿐히 바닥에 내려앉는 데이몬을 보며 냉유성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상식으론 도조히 이해할 수 없는 이가 바로 그의 주공이었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어허, 입 다물어라. 먼지 들어가겠다.” 데이몬은 손바닥을 펼쳤다. 그의 손에는 동굴 속에서 뽑아온 영초가 축 늘어진 채 놓여 있었다. 냉유성의 관심이 영초에게로 쏠렸다. “혹시 본 적이 있느냐?” “모르겠습니다. 속하는 검만을 갈고 닦은 무인이라서……. 다만 색이 붉은 것을 보니 독성이 강할 것 같습니다.” “맞다. 대단한 독성을 품고 있더구나.” “아마 문파에서 약초를 총괄하는 자들만이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속하로서는 도무지 무슨 영초인지…….” “이럴 줄 알았다면 공부를 좀 할걸. 귀한 영초를 구해놓고도 정체를 모르는 판국이니, 쩝.” 고개를 갸웃거리던 데이몬이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어떠냐? 네가 한 번 복용해 보겠느냐?” “네?” 순간적으로 냉유성의 눈간에 욕심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을 데이몬은 용케 잡아낼 수 있었다. 지금껏 단 한 개의 영단도 복용하지 못하고 지금의 성취를 이룬 냉유성이였다. 그런 만큼 영단이나 영초에 대한 욕심이 없을 수가 없다. 영단을 먹는다면 비약적인 내공의 증진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뽑아온 영초는 척 보더라도 한가락 할 것 같은 귀물이었다. 그러니 냉유성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주공 앞에서 내색을 할 순 없는 법이다. 냉유성은 사력을 다해 마음을 다잡았다. “아닙니다. 속하가 어찌……. 영초는 주공께서 복용하십시오. 단 약초 전문가 손에 맡겨 독성을 해독한 뒤 드셔야 합니다.” “아니다. 나에겐 영초 따윈 필요 없다.” 데이몬의 말은 진심이었다. 마왕인 그에게 제 아무리 약효가 뛰어난 영초라도 소용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부터 널 위해 뽑아온 영초였다. 독성은 내가 해독해 주마. 내공이 얼마나 늘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마친 데이몬은 해독주문을 외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마법과는 달리 캐스팅 시간이 월등히 길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독주문은 7서클 급의 고레벨에 속하는 것으로 어지간한 마법사는 시전조차 할 수 없는 고도의 마법이다. 인간의 몸에 해가 되는 독의 성분 자체를 없애버리기 때문에 현존하는 모든 독을 해독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해독이라 함은 중화를 의미한다. 독이 지닌 속성과 정반대 속성의 약을 이용해 독성을 희석시키는 것이다.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독으로써 독을 중화시키는 이독제독의 방법도 있다. 어쨌거나 독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몸에 상당한 후유증이 남게 된다. 독 기운과 약기운이 싸우며 몸의 균형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고수가 내공의 통제를 통해 독을 배출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며, 또한 내공으로 통제할 수 없는 종류의 독이 많이 개발되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무림인들에게 독이란 항상 두려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해독주문은 바로 이 제약조건에 전혀 걸리지 않는다. 몸에 악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마나의 화학적 배열에 따라 아무런 해가 없는 물질로 순식간에 치환해버린다. 독 자체는 물론이며 독에 의해 변화된 신체 조직조차 눈 깜짝할 사이에 치료해 버리는 그야말로 궁극의 마법인 셈이다. 바로 이 해독마법 때문에 트루베니아는 독술이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도둑, 혹은 어새신(Assasin, 암살자)들만이 광물독이나 독사의 독 따위를 사용할 뿐이었다. 파츠츠츠 마법주문이 작렬하자 붉은 영초에 하얀빛이 맺혔다. 이어 영초가 급격히 탈색되며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영초가 지닌 독성이 해독마법에 의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영초는 이전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크기로 줄어 들어버렸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은 입맛을 다셨다. “독성이 성분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나보군. 괜히 해독마법을 했나? 해독주문에 드는 마나가 만만치 않은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데이몬은 영초를 냉유성에게 내밀었다. “다 되었다. 먹고 운기조식하도록 해라. 그래도 수백 년 이상 먹은 놈이니 효과가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소, 속하는 괜찮습니다.” “까불지 말고 줄 때 먹어. 수틀리면 확 뺏어버리는 수가 있어.” “조, 존명.” 냉유성은 조심스럽게 영초를 받아들었다. 영초를 쳐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영초를 들어올렸지만 냉유성은 쉽사리 입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왜? 아까우냐.” “그, 그렇지 않습니다만.” 잠시 주저하던 냉유성이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주공.” “말해라.” “어찌하여 속하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겁니까? 잃었던 무공을 찾아주시고 이런 고귀한 영초까지 내려주시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녀석, 의심이 많군. 이유는 간단하다.” “…….” “네가 강해져야 내가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다. 그러니 넌 아무 생각하지 말고 강해지는 데에만 전념해라. 알겠느냐.” 데이몬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냉유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주공.” “그럼 영초를 복용하도록 하라.” “존명.” 냉유성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런 다음 영초를 냉큼 입 속으로 털어 넣었다. 그 광경을 데이몬이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쳐다보았다. “영초의 기운은 단시일 내에 흡수하지 못한다.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녹여 내공화 해야 하니 성급하게 시도하지 마라.” 그러나 냉유성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영초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순간 가공할 만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냉유성이 바짝 긴장해야 할 정도로 영초가 축척해 놓은 기의 양은 풍부했다. * * * * * “헉헉…… 할아버지, 아직 멀었어요?” “다 왔다. 조금만 더 가면 간다.”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오르고 있는 이는 노인과 소녀였다. 조손지간으로 보이는 둘은 뭐가 그리 급한지 정신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의 인내심은 거의 한계에 달해 있었다. “힘들어서 못 가겠어요. 조금만 쉬었다 가요.” 백짓장이 된 소녀의 얼굴을 쳐다보던 노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좀 쉬자꾸나. 이까지 온 것만 해도 너에겐 무리다.” 허락이 떨어지자 소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신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던 소녀가 조그마한 호리병을 꺼내 내용물을 입 속에 털어 넣었다. 벌컥벌컥 “물을 너무 많이 마시지 말아라. 오히려 탈진할 수 있다.” “예, 할아버지.” 생긋 웃으며 입을 닦는 소녀는 무척 귀여웠다. 나이는 열대여섯 정도,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흑진주처럼 검은 눈이 인상적이었다. 뽀얀 피부는 규방에서 곱게 자란 규중처녀임을 알려주었다. 반대로 노인의 외모는 추레했다. 하얗게 센머리와 주름살, 검버섯이 피어난 모습이 영락없이 시골촌로나 다름없었다. 도무지 조손지간으로 보이지 않는 둘이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고개를 끄덕이던 노인이 돌연 주먹을 불끈 거머쥐었다. “구자엽초만 손에 넣는다면 그때는 더 이상 추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맞아요. 그리고 비명에 간 가족과 식솔들 복수를 할 수 있지요.” 나직이 결의를 다지는 둘은 당문 사람들이었다. 사천의 당문. 무공이 아니라 독과 암기를 주무기로 삼는 무림세가의 이름이다. 뿌리 깊은 씨족사회의 전통을 가지고 있기에 무척 배타적인 가문이지만 독과 암기의 운용 면에서 타 세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한 그들이 어찌해서 이처럼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까. 노인이 회환 어린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애초부터 잘못된 결정이었다. 정사대전에서 중립을 지키기로 결정한 것이…….” 노인의 이름은 당문수. 사천당문의 전대 가주였다. 옆에서 까만 눈을 빛내고 있는 소녀는 당청, 당문수의 손녀이자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당문주의 무남독녀였다. 애초부터 사천당문은 정사지간의 문파였다. 사파도 아니고 그렇다면 정파로 볼 수도 없는 문파. 오년전 전 무림을 뒤엎은 정사대전에서 당문은 그 어느 곳도 편들지 않겠다고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 결정이 오히려 가문의 패망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으니……. 당문수가 자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무림에서 회색은 설 수 없어. 어느 한 쪽으로 줄을 서야만 안전한 것이 무림의 법칙이지. 애초부터 독자노선을 걷겠다고 한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당문주, 즉 당문수의 아들은 가문의 구성원을 지키기 위해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 결정으로 인해 정사의 합동공격에 직면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무릇 어떤 조직에서도 배신자는 존재하는 법. 당문의 식솔 중 누군가가 가문의 비전 독과 암기를 빼내어 사파에 넘겼다. 그 독과 암기로 인해 당시 무림세가들 중 가장 강력했던 모용세가의 정예들이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차기 가주로 물망에 올라있던 후기지수까지 목숨을 잃었으니 모용세가의 분노는 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두 가문 사이의 알력은 급속도로 커져만 갔고, 전면적인 대결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결과는 무승부. 양쪽 다 큰 타격을 입고 잠정적으로 휴전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졌다. 모용세가와의 대결로 대부분의 정예들이 전사된 상태에서 마도련이 전면적인 침공을 해온 것이다. 그들이 노린 것은 당문이 보유한 독과 암기였다. 대경실색한 당문에서 다급히 무림맹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림맹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모용세가의 개입으로 인해 무산되어버린 것이다. 힘을 잃은 당문이 마도련의 정예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사천당문은 무너져버렸고, 가문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마도련에 포로로 잡혀갔다. 그 와중에서 극소수의 인원이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당문수와 당청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소기의 성과를 거둔 터라 마도련도 더 이상 생존자를 추적하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생존자들은 다시 당문을 재건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 앞에서 거대한 암초가 떡 버티고 있었으니……. 당문에 단단히 앙심을 품고 있던 모용세가에서 무사들을 풀어 생존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무림인들이 보통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들라면 단연코 독과 암기를 꼽을 수 있다. 제 아무리 혹독한 수련을 쌓은 무사라도 허망하게 죽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두가지이다. 때문에 전통적인 무림세가에서는 전문적으로 독과 암기를 연구하는 부서를 만들어서 대비해왔다. 그런 상황에서 당문의 생존자들에게 눈독을 들이지 않을 문파는 없었다. 당문 사람들이 하나같이 독과 암기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문파들 중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 모용세가였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당문의 생존자들을 추격했고 많은 식솔들을 포로로 붙잡아갔다. 당문수는 요행히 붙잡히지 않고 당청을 데리고 도망칠 수 있었다. 당문의 전대 가주인 만큼 암기 실력이 탁월했기에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뒤를 쫓는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혼자서 감당하기 불가능했다. 둘이 이렇게 도주자 신분이 된 것은 바로 그런 연유에 기인한 것이었다. 과거를 떠올려 본 당문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재기해야 하건만 막막하기만 하니…….” 옆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던 당청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할아버지, 구자엽초만 손에 넣는다면 희망이 있어요.” “그렇다.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은 구자엽초뿐이란다.” 구자엽초는 약초 중에서도 희귀한 맹독을 품고 있는 영초다. 워낙 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범인은 물론 독을 지닌 영물들조차 접근하지 못한다. 모용세가의 추격을 피해 대파산맥을 떠돌던 중 당문수는 우연히 구자엽초가 자라는 곳을 발견했다. 당시 당문수는 뛸 듯이 기뻐했다. “되었어. 구자엽초라면 그 누구도 해독할 수 없는 극독을 제조할 수 있다. 이것을 이용하면 뒤를 쫓는 모용세가의 무사들을 제압할 수 있을뿐더러 그들의 목숨을 담보려 협상하는 것도 가능하다.” 마음을 정한 당문수는 다시 거처로 돌아갔다. 제 아무리 독에 능숙한 그라도 철저한 준비 없이는 구자엽초를 캘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청을 데리고 나오는 과정에서 그들은 모용세가의 무사들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또다시 험난한 도주를 거듭해야 했으니……. 거기까지가 이 대파산맥으로 오게 된 경위였다. 손녀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당문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출발하자. 서둘러야 모용세가의 추적대를 따돌릴 수 있다.” “예, 할아버지.” 둘이 한참동안 산을 올라서 도착한 곳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는 장소였다. 아래를 내려다 본 당청은 아찔했는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저, 정말 높군요. 떨어지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아요.”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구자엽초는 절벽 중간의 동굴에 자라고 있다.” 당문수는 짊어지고 온 망태기를 내려놓았다. 뚜껑을 열자 기다란 밧줄이 나왔다. 자세히 보니 당청도 큼지막한 망태기를 짊어지고 있었다. 어린 소녀가 짊어지기엔 커 보였지만 당청은 힘들다는 말없이 꿋꿋이 들고 있었다. 당문수가 절벽 가장자리로 가더니 큼지막한 말뚝을 꺼내 바닥에 박았다. “내려가서 구자엽초를 캔 다음 아예 절벽 아래로 내려가자꾸나. 다시 올라오는 것이 너에겐 무리일 게야.” “예, 할아버지.” 당청은 말없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가문을 재건해야 한다는 사명 때문에 마음을 단단히 먹은 모양이었다. 말뚝에 밧줄을 단단히 맨 당문수가 줄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휘리리릭 밧줄의 길이가 절벽의 높이보다 길었는지 까마득한 아래에서 줄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되었다. 내려가자꾸나.” 밧줄을 먼저 탄 쪽은 당청이었다. 손을 보호하기 위해 두터운 가죽장갑을 낀 당청이 줄을 타고 내려갔다. 소녀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당청은 별 무리 없이 줄을 탔다.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무공수련을 한 무가의 여식다운 모습이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당청을 쳐다보던 당문수가 뒤를 이어 줄에 매달렸다. 절벽은 정말 높았다. 열심히 내려왔지만 아직까지 바닥은 까마득하기만 했다. 땀범벅이 된 당청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래를 내려다봐서는 안돼.” 모용세가에 노예처럼 잡혀 있는 식솔들을 떠올린 당청은 다시 힘을 냈다. 지성이라면 감천이라고 지긋지긋해 보이던 줄타기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바닥을 보며 당청은 흐르는 땀을 닦았다. “할아버지는 구자엽초가 있는 곳에 잘 도착하셨을까?” 구자엽초는 강력한 독성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동굴에는 할아버지 당문수만 들어가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힘을 낸 당청은 힘을 주어 바닥에 내려섰다. 줄이 휘청거리는 것을 보아 할아버지는 벌써 절벽의 동굴로 들어가신 모양이었다. “헉, 헉.” 당청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땀을 식혔다. 할아버지는 그녀가 내려온 지 이 각 만에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할아버지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은 것을 본 당청은 가슴이 철렁한 것을 느꼈다. “어떻게 되었어요, 할아버지?” “한 발 늦었다. 벌써 어떤 놈이 구자엽초를 캐어 가 버렸구나.” “구자엽초는 독성이 워낙 강해서 범인은 건드리지도 못한다면서요?” “틀림없이 독에 대해 잘 아는 녀석 같구나. 큰일 났군. 이 일을 어떻게 한다.” 낙심하는 할아버지를 본 당청은 주위를 면밀히 살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누군가가 머물고 간 흔적을 찾아냈다. “여기 발자국이 있어요. 흔적을 보아 이곳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 당문수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비록 선수를 빼앗겼지만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구자엽초를 캐어간 사람을 찾아 도로 빼앗으면 그만이었다. “강호도의에 어긋나지만 어쩔 수 없다. 구자엽초는 우리 당문에 꼭 필요한 것이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들은 머뭇거림 없이 흔적을 찾아 뒤쫓기 시작했다. 한때 당문 최고수라 불리던 당문수에다 암기와 독술을 일가견이 있는 당청이니만큼 구자엽초를 회수할 수 있다는 확실한 자신감이 있었다. 6. 독과 마법의 대결 “그래, 어떤가?” “엄청나군요. 마치 몸속에 불덩어리가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단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었군요.” 냉유성이 감탄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체가 모호한 영초의 약효는 대단했다. 데이몬의 해독마법으로 인해 성분의 절반 이상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냉유성이 미처 소화해 내지 못할 정도였다. 사실 냉유성은 지금껏 단 한 알의 영단도 복용한 적이 없다. 따라서 혈맥에 불순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수련을 통해 쌓은 내공에 비해 영단을 통해 얻은 내공은 순수하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다. 때문에 영단을 밥 먹듯 먹으며 수련한 적전제자들도 경지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무릇 영단을 먹을 때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반드시 절정이상의 고수가 내력을 도인해 주어야 주화입마에 걸리지 않는다. 갓 입문한 수련생들은 영단의 방대한 약효를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냉유성은 자력으로 절정에 접어든 고수였다. 때문에 어지간한 영단 정도는 충분히 조식을 통해 흡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냉유성은 복용한 영초의 기를 채 일 할도 흡수하지 못했다. 영초가 그 정도로 많은 기를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약효때문인지 냉유성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일 할 정도를 겨우 흡수했는데도 내공이 부쩍 증진된 느낌입니다. 전부 흡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후후. 그렇다고 해서 초절정에 접어들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버려. 경지에 오르는 것은 내공의 양보다도 깨달음이 중요하니까.” “그것은 속하도 숙지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일행은 한가롭게 걸어서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영초를 얻은 덕택에 데이몬은 기분이 무척 좋은 상태였다. “탐색마법이 영약을 찾아내는 데 이토록 효과적일 줄 몰랐어. 이 길로 나간다면 돈을 좀 만질 수 있겠는데?” 만약 캐어온 영초를 무림세가에 팔았다면 엄청난 돈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영초의 효능을 보니 보편적으로 문파에서 적전제자들에게 먹이는 영단을 최소한 수십 알 이상 만들 수 있을것 같았다. 말 그대로 부르는 것이 값인 것이다. 그 생각을 하던 데이몬은 별안간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이런, 중원의 일개 성을 살 수 있는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돈 생각이라니. 나도 참 한심하군.’ 데이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일행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동자 두 쌍이 있었다. “저자들인가?” “맞아요, 할아버지. 족적을 보니 구자엽초를 캐어간 자들이 맞는 것 같아요.” “색목인 둘에 무림인 하나라. 아무래도 저 무림인이 마음에 걸린다. 절정을 넘었거나 아니면 거의 근접한 고수인 것 같다.” 그 말에 당청은 깜짝 놀랐다. 절정의 무림고수는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상황을 보니 색목인들의 길 안내를 맡은 자 같은데 그가 절정고수라니……. “설마 안내인을 절정고수로 고용할 리가 없을 텐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정교한 보폭과 강렬한 안광을 보니 만만하게 생각할 놈이 아니야.” “색목인들은 어떤가요?” 당문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일행을 쳐다보았다. “저들 둘은 별 볼일 없어 보인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이 확실해. 혹시 모르지. 기척을 숨길 수 있을 정도의 초고수일 가능성도 있으니까. 하지만 색목인이니 만큼 그런 가정은 배제하자.” “어떻게 하실 작정이세요?” 당문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손가락에 침을 묻혀 풍향을 가늠해 보았다. 바람의 방향이 맞았는지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일단 독을 살포해 중독시키자. 그런 다음 멀리서 암기로 공격한다면 제 아무리 절정이라도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알겠어요. 독을 준비할게요.” 데이몬과 함께 걸어가던 냉유성은 불현듯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든 냉유성은 호흡을 멈추고 내기를 움직여 보았다. 순간 몸속을 파고드는 이질감. 냉유성은 벼락같이 고함을 지르며 검을 뽑아들었다. “암습입니다. 호흡을 멈추십시오.” 데이몬과 윈슬럿이 멈칫하는 순간 냉유성의 몸이 한쪽으로 폭사되었다. 정확히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이었다. 당문수와 당청이 숨어있는 방향과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냉유성이 반사적으로 암습을 간파하자 당문수는 깜짝 놀랐다. “경험이 많은 녀석이로군. 청아, 넌 저 두명의 색목인들을 중독시켜라. 저놈은 내가 맡겟다.” “알겠어요, 할아버지.” 무성한 수풀로 뛰어든 냉유성은 종횡무진 장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수풀이 맥없이 잘려나가며 산산이 흩날렸다. 냉유성은 거침없이 호통을 쳤다. “감히 암습을 하다니, 웬 놈들이냐?” 그러나 대답은 사위를 점하며 날아오는 금전표였다. 쐐애애액 여덟 개의 금전표가 매섭게 회전하며 냉유성의 전후좌우를 파고 들어왔다. 사각을 절묘하게 노린 공격. 그러나 냉유성은 코웃음을 쳤다. “흥, 이까짓 암기 따위가 날 해할 수는 없다.” 검광이 번쩍이자 전방의 금전표 네 개가 맥없이 잘려나갔다. 이어 몸을 돌린 냉유성은 나머지 금전표를 모두 쳐냈다. 하지만 공격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두 줄기의 섬광이 재차 짓쳐들자 냉유성은 힘껏 검을 휘둘렀다. 챙 장검에 쪼개진 것은 묵직해 보이는 철령전이었다. 강철화살에 실린 내력이 만만치 않아 냉유성도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했다. 나머지 한 개의 철령전이 거의 냉유성의 면전에 도달한 상태였다. “에잇.” 힘찬 기운소리와 함께 철령전이 중턱에서 둘로 쪼개졌다. 거의 명중 직전이었기 때문에 냉유성은 가슴이 서늘함을 느껴야 했다. 이미 그는 살포된 독에 중독된 상태. 독이 경맥으로 파고드는 것을 막느라 내공을 전부 쓰지 못하고 있었다. 암기공세를 겨우 막아낸 냉유성은 지체 없이 공격이 날아온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금전표와 철령전은 조금 떨어진 나무 뒤에서 쏘아졋고 실전경험이 풍부한 냉유성은 그 사실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서둘러 암습자를 제거해야만 운공을 통해 독을 뽑아낼 수 있다. 냉유성은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내기가 아니군.” 냉혹한 일성과 함께 뭔가 뿌연 것이 엄습해왔다. 냉유성의 안색이 대변했다. “이런, 우모침을…….” 냉유성은 급히 검풍을 뿌리며 뒤로 물러났다. 세찬 경력에 휘말린 우모침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그러나 그것을 예상한 듯 암습자는 끊임없이 공격을 해 왔다. 쐐애애액 금전표가 파공성을 내며 날아오다가 장검에 퉁겨 나갔다. 그러나 금전표에 바짝 붙어 우모침이 날아오는 것까지는 냉유성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헉!” 화들짝 놀란 냉유성은 검을 종횡무진 휘둘렀다. 그러나 허공을 뒤덮은 우모침이 허공을 이미 빽빽이 뒤덮은 상태. 이 정도 거리에서 소털처럼 가는 우모침을 검풍으로 모두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허벅지가 따끔함을 느낀 냉유성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빌어먹을……. 맞았군.” 맞는 순간 허벅지에서 화끈한 감각이 전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공으로 억누르고 있던 독 기운이 발작하기 시작했다. 내공으로 잘 제어가 되지 않는 것을 보아 상당한 극독이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진 냉유성은 검으로 바닥을 짚었다. “크윽.” 우모침에 맞은 허벅지에 감각이 사라졌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중독의 대표적인 증상이었다.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낀 냉유성은 암담한 눈빛으로 앞을 쳐다 보았다. 이제 그에게 저항할 능력은 없었다. “대, 대단하군.” 이쪽의 상태를 알았는지 암습을 가한 상대가 어느새 모습을 드러냈다. 정체를 감추기 위해 복면을 뒤집어쓴 당문수가 나무 뒤에서 걸어 나온 것이다. “제법 경험도 많고 검술 실력도 훌륭한 자로군. 낭인으로 보기 힘든 솜씨인데 어떤 문파 출신인가?” 냉유성이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무, 무엇 때문에 우릴 암습한 거지?” “자고로 보물이 화를 부른다는 말이 있지. 우린 너희들이 캐어간 구자엽초를 원한다.” “구자엽초라니?” 순간 당문수의 눈썹이 꿈틀했다. “감히 날 속일 생각인가? 우린 너희들의 흔적을 찾아 이곳까지 추격해 왔다. 순순히 구자엽초를 내어준다면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냉유성이 맥없이 툴툴거렸다. “내가 먹은 영초의 이름이 구자엽초인가 보군. 그런데 어쩌지? 한 발 늦어버려서.” “그런 뻔한 거짓말에 내가 속을 것 같으냐? 구자엽초가 도대체 어떤 영초인지 알면서 그런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이냐?” “…….” 그때 뒤쪽에서 다급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할아버지, 독을 살포했는데 중독이 안 돼요.” 뒤어어 허겁지겁 달려오는 당청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를 따라 데이몬과 윈슬럿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검을 뽑아든 무림인이 할아버지를 향해 달려가는 순간 당청은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서 독 가루를 꺼내들었다. 무림인이 아닐 거라 생각한 당청은 우선 사람을 기절시키는 독을 살포했다. “무공이 없다면 공기 중에 살포된 독을 피할 수 없지.” 푸르스름한 연기가 색목인 둘을 감싸는 순간 당청은 쾌재를 불렀다. 내공이 없다면 채 일 각도 버티지 못하고 혼절하는 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색목인들은 독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당청을 발견한 색목인들이 이쪽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오기 시작했다. “내공이 있단 말인가?” 깜짝 놀란 당청이 이번에는 강도가 센 독을 방사했다. 내공으로로 쉽게 제어할 수 없는 종류의 독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색목인들은 전혀 중독이 되지 않았다. 결국 당청은 학정홍을 꺼냈다. “이번에도 버티는지 한 번 보자.” 학정홍은 한 방울만 피에 섞여도 호흡곤란으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되는 강력한 신경독이었다. 독의 성분상 살포가 불가능했기에 당청은 수리검에다 학정홍을 살짝 묻혔다. 물론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치사량보다 조금 적게 처방했다. “이 정도 분량이면 한 달은 자야 할 것이다.” 분량을 확인한 당청은 수리검을 냅다 집어던졌다. 쐐애애액 매서운 파공성을 울리며 날아가는 수리검은 당청의 암기술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보여주었다. 예상대로 색목인들은 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녀가 날린 수리검은 색목인의 어깨에 각각 한 발씩 박혀들었다. 아니, 하나는 박혔지만 다른 하나는 피부에 닿지못하고 퉁겨 나갔다는 것이 정확했다. 순간 그녀의 눈이 커졌다. “서, 설마 호신강기?” 그녀는 볼 수 있었다. 두 색목인 중 젊은 자의 몸에서 생겨나는 하얀 막을. 수준이 그리 높지 않다고는 하나 내력이 실린 수리검이다. 그런 수리검을 기의 발산을 통해 퉁겨내는 것은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나머지 색목인의 반응은 더욱 이상했다. 분명 칼날이 피부에 박혔지만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다. 무심한 태도로 어깨에 박힌 단검을 뽑아 팽개치고는 성큼성큼 걸어오는 색목인이었다. 혈액에 섞이는 즉시 전신을 마비시키는 것이 학정홍이다. 그러니 상대는 독에 강력한 내성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에 당청은 투지를 잃어버렸다. “내, 내 상대가 아냐.” 재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그녀는 머뭇거림 없이 할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데이몬은 서늘한 눈빛으로 암습자들을 쳐다보았다. 복면을 뒤집어쓴 일노일소가 이처럼 갑작스럽게 암습을 가해올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한쪽에는 냉유성이 검으로 땅을 짚은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낯빛이 검게 변한 것을 보아 중독이 심각한 게 분명했다. 데이몬은 일단 냉유성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자신들에게 암습을 가한 당청은 이미 당문수의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데이몬의 귓전으로 스산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그는 이미 극독에 중독되었다. 해독약을 얻고 싶다면 순순히 구자엽초를 내놓기 바란다.” “구자엽초? 그게 뭐지?” “조금 전 절벽의 동굴에서 붉은빛이 도는 약초를 캐지 않았느냐? 우리는 그것을 원한다.” 그때서야 상황을 알아차린 데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영초의 이름이 구자엽초였군. 고작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릴 암습했느냐?” 데이몬의 능숙한 말투에 당문수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색목인 치고는 우리말을 잘 하는군. 말을 잘 듣는다면 다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어차피 너희들이 구자엽초를 가지고 가 봐야 쓸 데도 없다.” “미안하군. 구자엽초는 이미 써버렸다.” 데이몬은 손가락을 뻗어 냉유성을 가리켰다.. “이미 복용했으니 차차 내공화 될 것이다. 이미 성분의 일 할 정도는 흡수한 상태이고.”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당문수의 눈에 급격히 살광이 치솟았다. “지금 농담하는 것이냐? 구자엽초를 복용하고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구자엽초는 황소 백 마리라도 죽일 수 있는 극독을 함유하고 있다.” “아무튼 사실이야. 미안하군. 이미 먹은 것을 토해낼 수도 없고…….” 데이몬은 당문수와 당청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희한하군. 무위를 봐서 절정의 벽을 넘어선 암기술의 대가 같은데 고작 약초 하나 때문에 강도짓을 하다니. 그것도 묘령의 소저까지 대동하고 말이야.” 데이몬의 말에 당문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복면을 써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무인답지 않은 행동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모용세가에 잡혀 있는 식솔들을 떠올린 당문수는 힘을 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에겐 반드시 구자엽초가 필요하다. 순순히 내준다면 결코 해를 끼치지 않겠다.” “이미 말하지 않았나? 먹어버렸다고.” “계속해서 날 속일 생각인가? 네 말대로 진정 구자엽초를 복용했다면 지금쯤 시체가 되있어도 모자랄 판국이다. 구자엽초의 독은 나조차도 해독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넌 아니지만 난 가능해. 독이야 해독하면 그만 아닌가?” 말을 마친 데이몬은 손을 내뻗었다. 이미 당문수와 대화를 나누며 암암리에 해독마법을 캐스팅 해놓은 데이몬이었다. 냉유성은 거의 빈사상태가 되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때마침 데이몬의 손에서 일어난 눈부신 빛 무리가 그의 몸을 뒤덮었다. 모든 독을 무위로 돌리는 궁극의 마법이 발현된 것이다. 파파팟 섬광에 휩싸인 냉유성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빛이 사라지는 순간 냉유성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붉게 상기된 얼굴에서는 이미 중독현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가 이를 바드득 갈아붙이며 장검에 내공을 밀어 넣었다. 냉유성의 분노를 대변하듯 눈부신 검강이 검신을 타고 치솟았다. “감히 주공 앞에서 추태를 보이게 하다니…….” 당문수의 눈은 찢어져라 부릅떠져 있었다. “어, 어떻게 저럴 수가…….” 그가 배합한 독은 쉽사리 해독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각기 다른 속성의 독을 상쇄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 써서 중독시켰기 때문에 어지간한 독공고수라도 해독하는 데 한참 애를 먹어야 한다. 게다가 해독했다고 하더라도 저처럼 금세 떨치고 일어날 수 없다. 이삼일 가량 요양해야만 겨우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자신의 독술이 저처럼 간단한 손짓 한 번에 와해될 것이라곤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당문수였다. 자신이 누구인가? 이미 멸문햇다고 하지만 명색이 당문의 최고 고수 아니던가. “각오하랏!” 멍하니 서 있는 당문수를 향해 냉유성이 쇄도했다. 검강을 머금은 장검이 당문수의 몸을 난자해 들어갔다. 그러나 당문수는 얼이 빠진 듯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뒤에 서 있던 당청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악! 하, 할아버지!” 퍼뜩 정신을 차린 당문수는 경공을 써서 뒤로 물러났다. 일검에 당문수를 양단해 버리려던 냉유성의 귓전에 나지막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그만. 그를 죽이지 마라.” 그 말에 냉유성의 검이 멈칫했다. 그사이 당문수가 급히 거리를 벌렸다. “늙은이,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검을 수습한 냉유성은 데이몬에게로 다가갔다. 데이몬의 시선은 당문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자가 누구인지 아는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사천당문의 인물 같습니다. 사용하기가 까다롭다고 알려진 우모침을 저토록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다면 당문 외에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사천당문이라…….”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당문이라면 그도 익히 알고 있는 문파였다.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독과 암기로 제법 명성을 날리는 정사지간의 문파. 정사대전 내내 중립을 지킨 그들이기에 데이몬은 당문 사람들과 접촉해 본 경험이 없었다. “사천당문 사람이 고작 영초 하나를 빼앗기 위해 우릴 암습하다니, 이해하기 힘들군.”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을 겁니다. 당문은 이미 멸문했으니까요.” “멸문? 정사대전에서 중립을 지킨 문파 아닌가?” “중립을 지킨다는 건 사실 위험한 발상입니다. 여차직하면 정사 양쪽에서 공격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당문을 멸문시킨 문파도 마도련입니다. 그 전에 모용세가와 알력이 있어 정파에서도 모른 척했지요.” “그래?” 데이몬은 미간을 좁혔다. 일단 마도련이라면 그의 철천지원수인 사준환이 있는 곳이다. 적의 적은 곧 동지인 법. 데이몬은 처참히 응징하겠다는 애초의 생각을 버렸다. 사실 예상치 않았던 암습 때문에 데이몬도 화가 머리끝가지 치솟아 있던 상태였다. 아끼던 수하마저 중독된 상황이니 죽이지는 않더라도 반신불수 정도는 만들어 버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도련의 적이라는 말에 데이몬은 마음을 바꿨다. 그러나 상대를 순순히 용서해 줄 수는 없는 법이다. “암습을 실패했으니 대가는 각오하고 있겠지?” 입술을 질끈 깨물긴 했지만 당문수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부탁이다. 구자엽초를 우리에게 건네다오. 기회가 닿으면 섭섭지 않게 보상해 주겠다.” “이미 말하지 않았나? 구자엽초는 이미 이 친구가 복용한 상태다. 설마 뱃속의 것을 꺼내달라는 말은 아니겠지?” 그 말에 당문수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이었다. “그가 혹시 독공을 수련하는가?” 냉유성이 발끈해서 반박했다. 독공고수가 순수한 무인에 비해 천대받는 것이 현 무림의 실상이었다. “무슨 소리! 나는 오직 검만 갈고 닦은 검수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내공증진을 위해 구자엽초를 복용했다는 말인가?” “그렇다. 난 구자엽초를 복용한 덕분에 상당한 내공을 얻을 수 있었다.” “미쳤군. 구자엽초가 도대체 어떤 영초인데…….” 당문수는 황당하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구자엽초. 분명 오래 묵은 영초임에는 분명했다. 그러나 구자엽초의 주요 가치는 축척된 기가 아니라 내포된 독성이었다. 여러 종류의 극독을 함유하고 있으며, 그 중에는 내공으로 제어하기 불가능한 독이 존재했기 때문에 독공 고수들 사이에서 구자엽초는 신의 영초로 불린다. 그런 구자엽초를 일반 영단처럼 복용했다고 하니 당문수로서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정신이 나간 작자들이군. 구자엽초를 판다면 최고급 영단을 백 알 이상 살 수 있을 텐데…….” “어쨌거나 우리가 캔 것이니 팔아서 영단을 사든 먹든 우리의 자유다. 그건 그렇고, 우릴 암습한 대가를 치러야겠지?” 그때서야 퍼뜩 정신이 든 당문사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순순히 당하지 않을 것이다. 다가오지 마라.” 데이몬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 알량한 독술이 나에게 위협거리가 될 것이라 생각하냐?” 순간 당청이 발끈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할아버지는 당문의 최고 고수에요. 중원천지에서 독술로 할아버지를 능가할 사람은 없어요.” 순간 당문수가 대경실색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내뱉은 말이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오호, 당문의 최고 고수라……. 중원 독술의 수준을 짐작할 만하군.” 이번에는 당문수가 발끈했다. “중원의 독술을 모욕하지 마라. 아까 내가 살포한 것은 기초적인 독일 뿐이다.” “흥미가 가는군. 좋다. 그럼 내기를 하나 하자.” “…….” 유희거리를 찾았다는 듯 데이몬의 눈빛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서로 번갈아 가며 독술을 전개하는 것이다. 물론 상대편은 그것을 해독하는 것이지. 해독하지 못하는 쪽이 지는 것이다. 진 사람의 목숨은 이긴 자가 처분하는 것으로 하자. 어떤가?” 당문수는 잠시 갈등했다. 생각 같아서는 이대로 도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자신이 없었다. 상대편에는 절정의 검수가 있다. 일대일 대결이라면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상대편에 독공의 고수가 있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독을 쓰지 못한다면 싸워봐야 이길 가능성이 적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 손녀를 데리고 도주하는 것도 지난한 일이다. 갈등하던 당문수가 제의를 받아들였다. “좋다. 그렇게 하겠다.” 허락한 배경에는 자신의 독술에 대한 자부심이 큰 역할을 했으리라.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좋다. 네가 먼저 하독해 보아라.” 데이몬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팔짱을 꼈다. 그 모습을 냉유성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등에 맨 망태기를 푼 당문수가 독을 배합하기 시작했다. 자신과 손녀의 목숨이 걸린 대결이니만큼 독 배합에 각별히 신경을 쓸 필요가 있엇다. ‘간단히 생각해서는 안 돼. 여러 가지 속성의 독을 상쇄되지 않게 섞어야 해.’ 상대가 해독할 수 없도록 독을 배합하는 것은 하독의 기본이었다. 한 가지 속성의 독이라면 손쉽게 해독할 수 있지만 독의 가짓수가 늘어나면 해독하기가 더욱 까다로워진다. 게다가 두세 가지 이상의 독이 상생작용을 할 경우는 그만큼 난이도가 높아진다. 그것을 염두해 둔 당문수는 자신이 가진 절독을 모조리 배합했다. 거기에는 그가 지닌 독에 대한 지식이 최대한 반영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신경독인 학정홍에다 피와 반응하는 화혈독을 섞으면 간섭현상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한다면 설사 대라신선이라고 해도 해독하지 못한다. 놈을 일 각도 되기 전에 핏물로 화해 버릴 것이다.’ 독을 완성한 당문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는 조그마한 호리병과 함께 예리한 비수가 들려 있었다. 복용시키는 방법과 피를 통해 중독시키는 방법을 같이 쓰겠다는 뜻이었다. 데이몬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팔짱을 끼고 있을 뿐이었다. “좋다. 그럼 하독하겠다.” 당문수가 굳은 표정으로 다가가서 손에 둔 호리병을 내밀었다. “내가 조제한 독이다. 이걸 마셔라.” 호리병을 받아든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쭉 들이켰다. 병을 비운 그가 인상을 썼다. “왜 이렇게 써? 원래 몸에 좋은 약이 쓴 거 아냐?” 당문수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왼손의 비수를 앞으로 내밀었다. 극독이 묻은 비수의 날이 데이몬의 팔꿈치를 파고 들어갔다. 서걱 비수에 묻은 피를 확인한 당문수는 뒤로 물러났다. 그의 얼굴엔 의기양양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내 독에 중독된 이상 넌 이제 대라신선이라 할지라도 살아나지 못한다. 날 탓하지 말고 어리석은 네 만용을 탓해라.” 그런 당문수를 데이몬은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가? 몸속에 마력의 원천을 간직하고 있는 마왕이 아니던가? 어둠의 마력이 고갈되지 않는 한 데이몬은 죽지 않는다. 하물며 독 따위가 그에게 해를 입힐 순 없는 노릇이다. 예상대로 당문수가 전개한 독은 지독했다. 그러나 어둠의 마력이 집중되자 독은 금세 무력화되었다. 일 각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자 당문수는 눈을 부릅떴다. 상황을 보아 자신의 하독이 무위로 돌아간 것이 틀림없었다. 비록 젊어 보이기는 하지만 상대는 엄청난 수련을 쌓은 독공 고수가 분명햇다. “이럴 수가, 그 독은 나라고 해도 해독하기 불가능하거늘…….” “이번에는 내 차례다. 각오하라.”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당문수가 손짓을 했다. 그러자 당청이 등에 맨 망태를 들고 왔다. 망태를 열자 큼지막한 함이 보였다. 함을 꺼낸 당문수는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준비가 되었다. 하독하라.” 이미 데이몬은 마법을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캐스팅을 하는 순간 음습한 기운이 당문수의 몸을 파고들었다. 몸이 급작스레 무거워지자 당문수는 자신이 중독되었음을 직감했다. ‘놈이 대관절 무슨 계열의 독을 썼을까. 일단 순리대로 차근차근 중화시켜 나가야 한다.’ 안색을 굳힌 당문수는 함을 열었다. 그 속에는 수십 개의 해독단이 종류별로 보관되어 있었다. 당문수는 그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독에 작용하는 해독단을 꺼내 복용햇다. ‘일단 반응을 보고 독의 성질을 파악해야 한다.’ 해독단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며 용해되었다. 다문수는 눈을 지그시 감고 몸의 반응을 살폈다. 독의 성분과 해독단이 부딪히며 전해지는 미묘한 반응을 통해 독의 속성을 알아내려는 것이다. 속성만 알아낸다면 해독은 시간문제였다. 독술의 대가인 만큼 독에 대한 저항력이 강한 편이었기에 당문수에겐 해독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아무런 반응이 전해지지 않았다. 당문수는 미간을 지그시 좁혔다. ‘이상하군. 그럼 다른 해독단을…….’ 생각은 길었지만 행동은 빨랐다. 당문수는 함 속에서 화의 속성을 가진 해독단을 꺼내 복용했다. 그러나 이번 해독단에서도 아무런 반응이 전해지지 않았다. 몸이 점점 더 무거워지고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아 중독이 심해지고 있는 건 분명했다. ‘이럴 수는 없는데.’ 다급해진 당문수가 함 속의 해독단을 마구 꺼내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했다. 해독단을 복용했으면 뭔가 반응이 있어야 되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당문수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도대체 어떤 독을 하독했기에…….’ 당문수의 다급한 표정을 데이몬은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흐흐흐, 멍청한 녀석. 해독단을 먹는다고 해서 나을 줄 아느냐? 내가 전개한 것은 독이 아니니라.’ 데이몬은 독을 하독한 것이 아니었다. 흑마법의 일종인 저주를 건 것이다. 저주에 걸리면 몸이 무거워지며 전신에 힘이 쭉 빠진다. 종래에는 모든 의욕을 잃고 축 늘어진다. 물론 그렇다고 사람을 죽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칠종단금술의 금제가 있는 이상 데이몬은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을 하지 못한다. 저주를 건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당문수는 해독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가 지닌 모든 종류의 해독단을 복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차도는 없었다. 아무리 효과가 뛰어난 해독단을 복용한다고 해도 저주를 풀 수는 없는 법이다. 당문수는 급기야 극약처방을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어쩔 수 없다. 이독제독. 독으로써 독을 제압하는 수밖에…….’ 망태에서 다른 함을 꺼낸 당문수는 시커먼 단약을 꺼내들었다. 그것을 본 당청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할아버지! 그, 그건 극독의 일종인 절명독이에요.” “알고 있다. 나로서는 이 방법밖에 없구나.” 데이몬을 힐끔 쳐다본 당문수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저자의 독술은 정말 고명하다. 내가 가진 해독단이 하나도 통하지 않아.” 당문의 독술이 중원 제일이라 믿고 있는 당청에겐 청천벽력 같은 선언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이독제독밖에 없구나.” 당문수는 검은색 단환을 입 속에 털어 넣었다. 절명독은 사람을 일 각 이내에 숨이 멎게 하는 극독이다. 복용하는 순간 당문수의 얼굴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제 아무리 독에 내성이 강한 그라고는 하나 절명독의 독기에는 도리가 없었다. 당문수는 눈을 감고 다시 몸의 반응을 살폈다. ‘독기가 제발 서로 상충되어야 할 텐데…….’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독기는 부딪히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정신계열에 작용하는 저주와 독기가 부딪힐 리 없었다. 반응이 전해지지 않자 다급해진 당문수가 다른 종류의 독단을 재차 복용했다. 그러나 여전히 반응은 잠잠했다. 급기야 당문수는 자신이 해독하기 힘든 종류의 독단까지 집어먹기 시작했다. “하, 할아버지.” 지켜보는 당청이 발을 동동 굴렀다. 할아버지가 지독한 극독들을 연거푸 복용하니 애가 타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만류할 수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독의 대가. 그녀가 관여할 수 있는 여지 자체가 없는 것이다. “크으윽.” 급기야 당문수는 시커먼 독혈을 토해냈다. 중독 상태가 해독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이제 그에게 생사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멈출 수 없었다. 당문수는 끊임없이 독단을 집어 삼켰다. 그러나 인간의 몸에는 한계가 있는 법. 독단 하나를 집어 들어 입으로 가져가려던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모로 넘어가 버렷다. 얼굴은 시퍼렇게 변색되었고 코와 입을 통해 시커먼 독혈이 뿜어져 나왔다. “하, 할아버지!” 보고 있던 당청이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보통의 소녀였다면 발만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했겠지만 당청은 역시 달랐다. 그녀는 머뭇거림 없이 데이몬의 발치에 꿇어 엎드렸다. “제발 할아버지를 살려주세요.” “이건 정당한 대결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네 할아버지를 해독해 주어야 하지? “제, 제발 부탁이에요.” “나는 죽을 정도의 독을 쓰지 않았다. 네 할아버지가 저렇게 된 것은 무턱대고 집어먹은 독단 때문이다.” 데이몬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가 건 것은 단순한 저주이다. 당문수는 그것을 풀기 위해 마구 독을 집어먹다가 저 지경에 처해 버린 것이다. 당청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뭔가를 작정한 듯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대로 둔다면 할아버지는 십중팔구 절명하고 말 것이다. 차마 말하기 힘들었는지 그녀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만약 할아버지를 구해주신다면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뭐라고?”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청의 입에서 여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말이 흘러나온 것이다. 정절을 중하게 여기는 중원여인이라면 결코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다. 그 한 마디에 정절이 유린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청의 사정은 급박했다. 할아버지 당문수는 당문을 재건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그런 그가 이렇게 죽어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만약 할아버지가 죽는다면 당문은 영원히 재기하지 못한다.’ 그 생각이 당청으로 하여금 독한 결단을 내리게 한 배경이었다.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한다고 했나?” 데이몬은 손가락을 들어 턱을 긁었다. 솔직히 말해 당문수를 해독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해독마법을 펼친다면 아무런 후유증 없이 당문수를 완치시킬 수 있었다. 원래 데이몬은 당문수가 이대로 죽어가도록 내버려두려고 했다. 자신이 죽인 것이 아니기에 칠종단금술도 발동하지 않을 터였다. 사파의 마두 출신인 데이몬이 인명에 연연해 할 리는 없다. 그러나 데이몬은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물론 당청의 미모 때문에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당문 출신이라면 영초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겠군. 데리고 다니면 쓸모가 있을지도 몰라.’ 결정을 내린 데이몬은 해독마법을 캐스팅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데는 사준환에 대한 복수심도 한 몫을 했다. 사천당문은 잠마련에 의해 멸문 당했다. 그렇다면 분명 잠마련에 대한 뿌리 깊은 복수심을 가지고 있을 터. 당문수를 살려준다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잠마련에 대항할 것이 분명했다. ‘자고로 적의 적은 동지라고 했다. 살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생각을 마친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 제의를 받아들이겠다. 뭐든지 하겠다고 했지?” “제, 제발……. 그, 그렇게 하겠어요.” 모기 소리만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꿇어 엎드린 당청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은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 네 할아비를 치료해 주겠다.” 당문수는 이미 숨이 넘어가기 일보직전이었다. 시커멓게 썩은 피 거품이 입 밖으로 꾸역꾸역 밀려나왔고 눈이 돌아가 백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해독마법이 작렬하자 상황이 뒤바뀌었다. 해독마법에 의해 마나가 배열되자 당문수의 몸을 침습하던 독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뒤집혔던 눈이 돌아오며 당문수는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몸 밖으로 흘러나오던 피 색깔이 어느새 선홍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쿨럭, 쿨럭.” 겨우 정신을 차린 당문수가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할아버지.” 당청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달려가 당문수의 품에 얼싸 안겼다. 그는 착잡한 눈빛으로 손녀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독술 대결에서 무참히 패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저 색목인은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독술의 경지에 올라 있다. 믿을 수 없군. 아무리 봐도 스물을 갓 넘긴 애송이 같은데…….’ 독에 중독되어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던 당문수는 당청과 데이몬 사이에 오간 대화를 듣지 못했다. 그래서 당청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순간 당문수의 얼굴은 하얗게 탈색되었다. “안 된다. 그럴 순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 꼴 못 본다. 널 색목인에게 보내느니 차라리 죽는 길을 택하겠다.” 당문수의 태도는 완강했다. 당청은 그에게 남은 유일한 직계혈손이다. 그런 그녀를 어찌 짐승과도 같이 생각하는 색목인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당청은 필사적으로 당문수를 설득했다. “할아버지, 가문의 재건을 생각하세요. 할아버지가 없으면 당문은 일어나지 못해요. 저야 있으나 없으나 그만이지만 할아버지만큼은 반드시 계셔야 해요. 그래야만 가문을 부활시킬 수 있답니다.” “차라리 내가 죽으면 죽었지 그건 안 된다.” 여전히 완강한 당문수의 태도에 당청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후로 이어진 대화는 전음이었다. ―저보다 할아버지가 본문의 부활에 더 필요하신 분이에요. 아시잖아요? ―그래도 그것만은 안 된다. 하늘이 뒤집히는 한이 있어도 용납하지 못하는 일이다. ―그렇게만 생각할 게 아니에요. 어차피 저희들은 가문의 부활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잖아요. 선조들이 피와 땀을 흘려 가꾼 터전이에요. 당문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식솔들이 죽어갔나요? 거기에 비하면 저 하나 정도는 희생도 아니에요. 안색이 무거워진 당문수는 침음성을 흘렀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일은 가문의 부활이었다. ―생각을 달리 해 보세요. 저 색목인은 할아버지도 어쩌지 못하는 독술의 대가잖아요. 당문수는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확실히 자신보다 독술이 뛰어났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했어도 해독하지 못했다. 몰론 그는 데이몬이 자신에게 하독이 아니라 저주를 걸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게다가 그는 해독을 위해 온갖 독단을 다 복용했다. 그랬던 자신을 아무런 후유증 없이 치료한 것만 보아도 상대는 독술에 엄청난 조예가 있음이 분명했다. ―그 점만은 놀랍더구나. 별로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 색목인 애송이의 독술이 이 정도로 뛰어나다니……. 그 말을 들은 당청이 눈빛을 반짝 빛냈다. ―어차피 저와 다니면 할아버지가 위험해져요. 혼자 몸이라면 할아버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몸을 빼내실 수 있잖아요. 저 색목인 정도의 독술이라면 모용세가에서도 섣불리 건드리지 못할 거예요. 또한. 잠시 말을 끊은 당청의 얼굴은 결연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포섭하여 독술을 빼내겠어요. 그렇게 한다면 가문의 부활을 앞당길 수 있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너를 짐승 같은 색목인에게 팔아넘기란 말이냐? ―생각을 달리하세요. 어차피 정략결혼이 횡행하는 것이 무림의 실정이잖아요. 어차피 저희들은 가문의 재건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잖아요. ―네 말도 틀리지 않는다만……. ―색목인도 외모가 틀리기만 할 뿐 엄연히 사람이에요. 그러니 제 청을 수락해 주세요. 데이몬과 냉유성은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둘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대략 파악한 데이몬이 싸늘한 일성을 남겼다. “어떻게 하겠는가? 만약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다시 하독하겠다. 어쨌거나 대결은 대결이니까.” 그러자 당문수의 몸이 움찔했다. 다시 중독당하면 끝장이다. 그에겐 더 이상 써 볼 해독단도 없었다. 데이몬의 눈이 느릿하게 당청에게로 향했다. “때마침 약초전문가가 필요하던 참이다. 사실 난 중원의 약초에 대해 잘 모른다. 만약 구자엽초가 어떤 영초인지 알았다면 영단 대용으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때마침 시녀도 없고 하니 약속을 지키겠다면 시녀로 받아들이겠다.” 당문수는 모욕감으로 몸을 가늘게 떨었다. 당문의 직계혈손을 시녀로 쓰겠다고 하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당청이 급히 당문수의 손을 잡았다. ―진정하세요, 할아버지.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 해요. 그러지 않는다면 저 색목인은 할아버지를 다시 중독시킬 거예요. ―그래도 시녀라니 너무하지 않느냐? ―모용세가의 포로보다는 낫지 않나요? 한참을 고민하던 당문수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구나. 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기실 당청의 의견이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다. 솔직히 그에겐 손녀딸을 데리고 다닐 여력이 없었다. 약초나 독에 대한 지식은 해박하지만 무공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혼자 다니면 아무래도 위험에 처했을 때 몸을 빼기가 한결 수월할 터. 게다가 색목인의 독술을 보니 모용세가에서도 쉽사리 손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거기에다 검강을 자유자재로 쓰는 절정고수도 하나 있지 않은가. 허락을 얻어냈지만 당청의 얼굴은 어두웠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색목인의 독술을 빼내겠어요, 할아버지. ―부디 건투를 빌겠다. 고개를 끄덕인 당청은 몸을 일으켰다. 묵묵히 보고 있던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겠느냐?” 당청은 조용히 데이몬과 시선을 맞췄다. “약속을 지키겠어요.” “잘 생각했다. 그럼 지금부터 너는 내 시녀다. 앞으로 나를 충실히 보필해주기 바란다.” 묵묵히 몸을 일으킨 당문수가 안색을 굳혔다. “부디 손녀를 잘 부탁드리겠소.” “걱정 마시오, 노인장. 그럼 노인장은 제 갈 길을 가시오. 더 이상 잡지 않으리다.”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당문수는 냉유성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까의 감정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의 표정은 냉랭했다. 당청의 처지를 떠올린 당문수는 자존심을 접고 냉유성에게 사과를 했다. 자신에 대한 감정을 손녀딸에게 풀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다. “미안하네. 구자엽초에 눈이 멀어서 크나큰 무례를 범했네. 부디 이해해 주기 바라네.” 냉유성은 어느 정도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어쨌거나 상대는 자신보다 배분이 높은 무림의 선배. 그런 당문수가 먼저 사과를 하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당문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판단됩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근데 자네 추정되는 나이에 비해 무위가 무척 높군. 실례가 안 된다면 사문을 물어봐도 되겠나?” 잠시 고민하던 냉유성이 입을 열었다. “한때 공동파에 몸을 담았습니다만 지금은 파문된 상태입니다.” 당문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문? 문율이 엄격한 공동파에서 무공을 폐하지 않고 파문했다는 말인가? 이해하기 힘든 말이로군.” “물론 사지근맥이 절단되고 단전이 파괴된 채로 파문되었습니다.” 순간 당문수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지나갔다. “그렇다면 자네가 냉유성인가? 공동산의 검귀라고 불리던…….” “그렇습니다.” “그런데 무공을 어떻게 되찾았나? 손발의 움직임이 자유로워 보이는데…….” 그 말을 들은 냉유성은 가슴을 쭉 폈다. “주공께서 치료해 주셨습니다.” 당문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농담하지 말게. 팔다리의 근맥이 잘리면 그 어떠한 처방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해. 게다가 파괴된 단전의 복원은 상상조차 힘든 일이야.” “하지만 사실입니다. 주공께서는 중원과는 다른 의술실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곤 냉유성은 팔꿈치를 걷어붙였다. 촘촘히 꿰맨 수술자국이 드러났다. “근맥을 봉합한 자국입니다. 단전도 수술을 통해 복원되었지요. 아까 싸워보셨으니 제가 무공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잘 아실 테지요. 제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당문수는 입을 딱 벌리며 놀라워했다. 그의 상식으론 잘린 근맥의 봉합은 불가능한 일이다. 파괴된 단전의 복구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렇지 않다면 문파에서 왜 파문제자의 근맥을 자르고 단전을 파괴하겠는가?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치료를 했기에?” 그런데 치료방법을 물어보기 위해 몸을 돌리던 당문수의 몸이 멈칫했다. 데이몬이 벌컥 짜증을 내었기 때문이다. “노인장, 안 갈 건가?” “하, 한 가지만 물어보겠소.” “뭘 물어보든지 대답하지 않을 거야. 노인장은 우리에게 암습을 가해 약초를 빼앗으려 한 도적이야. 그 과정에서 내 수하도 중독시켰지. 당신 같으면 순순히 대답해 줄 것 같나.” 당문수는 말문을 잃어버렸다. 어쨌거나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입이 백 개가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마음 바뀌기 전에 어서 가라구. 안 그러면 다시 하독하는 수가 있어.” “아, 알겠소.” 당문수는 주춤주춤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그는 손녀딸인 당청에게 슬쩍 눈짓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독술에 이어 의술의 비밀도 파헤치라는 눈빛이었다. 영리한 당청은 할아버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반드시 그의 모든 것을 알아내겠어요. ―부디 부탁한다. 그 말을 남기고 당문수는 떠났다. 당청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떠나가는 할아버지의 등을 쳐다보았다. “이름이 뭐지?” “청이에요. 당청.” “나이는?” “올해 열어섯 살이에요.” “아직 어린애로군.” 데이몬의 천연덕스런 말에 당청이 발끈했다. “누가 아이라는 거예요? 전 다 컸다구요.” “다 큰 애가 가슴이 그것밖에 안돼?” “어, 어딜 보는 거예요?” 데이몬의 말에 당청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붉히며 가슴을 가렸다. 그러나 데이몬의 시선은 가슴이 아니라 엉덩이에 가 있었다. “엉덩이도 빈약하고……. 그래가지고 애나 제대로 낳겠어?” 낯 뜨거운 빈정거림에 당청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모욕감 때문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보고 있던 데이몬은 아차 했다. ‘이런! 트루베니아에서 오래 지내다보니 그쪽 풍습에 너무 물들었어. 중원에서는 이런 말이 금기사항인데…….’ 트루베니아는 중원보다 훨씬 개방적이다. 따라서 이런 말이 그리 큰 결례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중원에서는 당장 칼부림이 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난감해 하던 데이몬을 구원해 준 것은 냉유성이었다. “주공, 중원에서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실례입니다.” “호오? 그건 왜 그렇지?” “문화상의 차이입니다. 중원에서는 여성의 신체부위를 거론하는 것이 철저한 금기사항입니다.” 데이몬은 때맞춰 난관을 타개해 준 냉유성에게 고맙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런가? 그럼 내가 실수한 것이로군. 트루베니아에서는 이런 말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데 말이야.”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아무튼 고마워.” 데이몬은 당청을 쳐다보았다. 모욕감 때문인지 그녀는 고개를 숙인 상태로 흐느끼고 있었다. “미안하다. 내 중원의 풍습을 몰라서 실수를 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으마.” 사과하면서도 데이몬은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을 했다. ‘제길, 마계의 당당한 군주인 내가 한낱 인간 계집아이에게 굽실거리다니…….’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원인제공을 한 쪽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사과가 효과가 있었는지 당청이 눈물 젖은 얼굴을 들었다. “앞으론 그러지 마세요.” “알았다. 절대로 그러지 않으마.” 당청은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았다. 여기저기 얼룩진 허름한 무명손수건이었다. 오랫동안 도주생활을 한 탓인지 손수건 뿐만 아니라 옷차림도 허름했다. 살짝 눈살을 찌푸린 데이몬은 배낭을 풀어헤쳐 손수건 하나를 꺼냈다. 백학이 수놓아져 있는 최고급 비단 손수건이었다. “이걸 쓰거라. 꽃다운 아가씨가 지저분한 손수건을 쓰면 안 된다. 한 번도 안 쓴 새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머뭇거리던 당청이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은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그만 출발하도록 하자. 시간을 너무 지체했구나.” “넷, 주공.” 정말 얼떨결에 일행이 하나 늘어버렸다. 게다가 새로 가세한 일행 때문에 이동속도가 현저히 느려져 버렸다. 당청이 짊어지고 있는 큰 망태기 때문이었다. 크기도 크기였지만 안에 약재가 가득 들어있었기에 제법 무거웠다. 급히 가느라 당문수가 깜빡 잊고 챙겨가지 않은 것이다. 가녀린 당청에게 그 물건은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헉, 헉.”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따라오던 당청이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소녀의 몸으로 마왕과 언데드, 그리고 절정고수의 발걸음을 따라잡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게다가 오랜 도피생활로 인해 심신이 극도로 지친 상태 아니던가. 보다 못한 냉유성이 당청에게 다가갔다. “소저, 망태기를 내가 들어주겠소. 이리 내시오.” 그러나 당청은 허락하지 않았다. “안 돼요. 이 안에는 당문 비전의 약재가 들어있어요. 당문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약재를 남에게 맡기지 않아요.” 당청이 고집을 부리자 냉유성이 혀를 찼다. “허 참, 난감하군.” 보고 있던 데이몬이 다가왔다. 당청으로 인해 여정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그도 심기가 그리 편치 않았다. “일행이 아니라 골치 덩어리로군, 쯔쯔.” 당청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기 때문에 지체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데이몬이 안되겠다는 듯 윈슬럿이 짊어지고 있던 배낭을 풀어헤쳤다. 그리곤 속에서 조그마한 주머니 하나를 꺼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속으로는 연신 궁시렁거리면서 말이다. ‘이게 왠 헛고생이냐. 아무튼 계집이 끼면 그 순간부터 말썽이 일어난다니까.’ 그러면서도 데이몬은 캐스팅을 그치지 않았다. 조금 안쓰럽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당청에게서 율리아나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여복이 꽤나 없긴 하군. 오백 년 동안 기다렸던 다프네는 나를 버렸고, 또 나를 선택해 준 율리아나는 날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다니…….’ 사실 데이몬이 마계에서 화려한 나날을 보낸 것은 틀림없었다. 인간보다 월등히 아름다운 여성체 뱀파이어나 서큐버스, 헬메이드들에게 둘러싸여 보냈으니 말이다. 모든 것이 힘으로 해결되는 곳이 마계인지라 데이몬은 그야말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그가 눈길이라도 한 번 주면 그녀들은 감격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데이몬에게 한 번 안기기 위해 소멸가지 각오하고 마궁으로 뛰어드는 존재도 있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런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인간이 아니란 점이지. 외모는 확실히 아름답지만……. 그러고 보니 난 인간여자에겐 그다지 인기가 없군.’ 툴툴거리던 데이몬이 캐스팅을 마쳤다. 그는 즉시 주머니에 마법을 걸었다. 인챈트, 물품에다 속성을 부어하여 마법아이템으로 만드는 마법이었다. 작업을 마친 데이몬은 주머니를 당청에게 던져주었다. “자, 되었다. 망태기 안에 있는 것을 모두 주머니에다 넣어라.” 주머니를 받아든 당청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건넨 것은 허리에 차고 다니는, 고작해야 주먹 두 개 정도 크기의 조그마한 주머니였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런 조그만 주머니에 뭘 넣으라고.” “넣어보면 안다. 내 말을 믿어라.” 옆에서 냉유성이 거들었다. “주공께서는 결코 허언을 하지 않는 분이오. 지시대로 행하는 것이 나을 것이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던 당청이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망태기를 풀었다. 큼지막한 하수오 두 뿌리를 꺼내 그녀는 그중 한 뿌리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일견해 보기에도 주머니보다 커 보이는 하수오였다. 그런데 하수오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순간 당청의 눈이 커졌다. “어머? 이게 웬 일이지?” 분명 하수오는 주머니보다 컸다. 그런데 주머니 속에 하수오를 집어넣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린 당청은 하수오를 다시 꺼내보았다. 하수오는 아무런 이상 없이 손에 들려나왔다. 그녀의 동그란 눈이 더욱 커졌다. “이해할 수가 없네? 어떻게 이런 일이…….” 데이몬은 신기해하는 당청을 하품을 하며 바라보았다. 그가 주머니에게 건 마법은 공간왜곡과 경량화 마법이었다. 공간을 접어 많은 물품을 보관할 수 있게 하고 경량화 마법으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게 한 것이었다. 트루베니아에서는 그리 신기할 것이 없는 마법 아이템이었지만 중원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거듭 하수오를 넣었다 뺐다 하던 당청이 마침내 망태기의 약재들을 주머니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주머니는 마치 한계가 없는 것처럼 망태기의 약재들을 끊임없이 받아들였다. 망태기 안의 약재를 모두 넣고도 여유가 남자 당청은 신기한 듯 주머니를 쓸어보았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한 거죠? 직접 보지 못했다면 믿지 않을 거예요.” “세상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눈으로 보는 것만이 전부는 아냐.” “그래도 이건 너무 신기하잖아요.” 잠자코 보고 있던 냉유성이 한 마디 거들었다. “주공께서는 우리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능력을 보유하신 분이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주공께서는 나의 잘린 근맥과 파괴된 단전을 말끔히 치료해 주셨소.” “정말 놀랍군요.” “잡담 그만하고 출발하도록 하자. 지체할 시간이 없다.” “네, 알겠어요.” 당청은 허리에 주머니를 찼다. 어떻게 한 것인지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 연신 주머니를 매만졌다. 당청의 몸이 가벼워지니 여정에 속도가 좀 붙었다. 그리고 여정도 훨씬 재미있어졌다. 지금까지는 일행들이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기라도 하듯 묵묵히 걷기만 했다. 데이몬도 별로 말이 없는 편이었고 냉유성 역시 과묵했기 때문이다. 말 못하는 윈슬럿이야 있으나마나한 존재이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묘령의 소저가 하나 끼어들자 분위기가 조금 화기애애해졌다. 영리하고 재치 있는 당청인지라 일행의 눈치를 살피며 대화를 잘 이끌었다. “냉유성 대협에 대한 얘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요. 후기지수들 중에서 당적할 상대가 없다고 말이에요. 이제 냉유성 대협께서 무공을 회복하셨으니 무림이 다시 뒤흔들리겠군요.” “소,소저…… 그, 그건 과찬이오.” “아니에요. 무림에서의 명성은 다른 사람들이 평가해 주는 거예요. 제가 들은 바로는 냉유성 대협의 무공이 후기지수들 중에서 단연 독보적이라고 하더군요.” 머쓱해진 냉유성은 얼굴을 붉혔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칭찬해 주는 상대에게 화를 낼 수는 없다. 결국 냉유성은 이 눈치 빠르고 영악한 아가씨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나이를 먹었다 하더라도 무공수련에만 전념한 냉유성인지라 영리한 당청의 상대가 도진 못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도 임자가 있었으니……. 사실 당청은 데이몬을 무척 얕보고 있었다. 비록 할아버지를 능가하는 독술과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지만 겉보기에 데이몬은 이십대를 갓 넘긴 색목인 청년이었다. 무림에 대한 제반지식도 별로 없어 보이니 그녀가 충분히 얕잡아볼 만했다. ‘어떻게든 잘 구슬려서 독술을 빼내야 해. 그렇게 어려운 상대는 아냐.’ 그러나 그녀는 몰랐다. 데이몬이 사실은 무림에서 잔뼈가 굵은 사파의 마두였으며 수백 년 이상 살아온 노력한 마왕이란 사실을. “오신 곳이 트루베니아라고 했나요?” 지금도 데이몬은 질문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흘려보낸 말을 똑똑히 기억해내자 데이몬은 적이 놀랐다. “그렇다.” “그곳은 어디에 있어요? 이곳에서 먼가요?” “엄청나게 멀지. 늙어죽을 때까지 걸어도 못 가는 곳이다.” 당청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피! 그런 곳이 어디 있어요. 그럼 데이몬께서는 어떻게 오셨어요?” “나야 방법이 있지. 다른 사람과 나를 같은 범주에 놓고 바라보지 말아라.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은 결코 흔치 않은 법이다. 후후.” 데이몬의 자기 칭찬에 당청은 입을 딱 벌렸다.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 이런 밥맛없는 작자가 다 있지?’ 그러나 속내를 그대로 털어놓을 당청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데이몬을 회유하여 독술을 빼내겠다고 작정한 당청이 아니던가? “놀랍군요. 그 나이에 그 정도의 독술을 깨우치시다니……. 게다가 의술까지 뛰어나시다면서요?” “이 정도 가지고 잘한다고 하면 말이 안 되지. 그 정도는 내 능력에서 보면 빙산의 일각일 뿐이야.” “그런……가요. 아무튼 대단해요.” 당청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자화자찬도 이 정도면 예술이라고 봐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알지 못했다. 데이몬의 장난기 어린 눈빛 속에 자리 잡은 날카로움을 말이다. 그는 이미 당청의 속내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어떻게든 날 구슬려 독술을 빼내겠다는 말이지? 더불어 의술도 말이야. 하지만 방향을 잘못 잡았어. 중원의 마나분포도를 볼 때 마법을 가르쳐 준다고 해도 익히지 못할 것이다.’ 데이몬이 펼친 것은 마법이다. 냉유성을 치료한 것은 힐링, 당문수를 중독시킨 것은 저주, 독을 해독한 것은 해독마법이다. 중원의 술법과는 궤가 다르기 때문에 더욱 잘 먹힌 것이다. 그러나 다른 마법사들은 결코 이렇게 하지 못한다. 트루베니아는 중원보다 네 배 가량 마나가 풍부하다. 중원의 내공심법이 트루베니아에서 효과를 보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워낙 마나가 풍부하니 이류, 삼류 내공심법도 중원보다 월등히 높은 성취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트루베니아의 마법을 중원에서 쓰는 것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 마나분포도가 사분의 일에 불과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마법사는 중원에서 마법을 쓰지 못한다. 설사 쓴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사 곱하기 사, 무려 열여섯 배나 더 걸리는데다가 주문을 외는 과정에서 마나배열이 흐트러질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4서클 이하의 마법사는 마법 자체를 구현할 수 없다. 또한 6서클 마법사라 할지라도 중원에서는 4서클 정도의 마법밖에는 쓰지 못한다. 마법을 캐스팅하는 시간도 월등히 오래 걸린다. 오백 년 전 데이몬을 데리고 간 트루베니아의 마법사들도 바로 그 때문에 이곳에서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다. 그러나 데이몬은 사정이 많이 달랐다. 우선 그는 9서클의 마스터이다. 어지간한 마법 정도는 주문 없이 바로 마나배열에 들어갈 수 있고, 적은 마나로도 효과적으로 마법을 발현시킬 수 있다. 거기에 그는 어둠의 마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마왕이다. 어둠의 마력을 매개체로 마나를 끌어 모을 수 있기 때문에 이처럼 능수능란하게 마법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청이 데이몬으로부터 독술과 의술을 빼내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마법의 이론을 가르쳐 주더라도 4서클을 능가하기 전에는 마법을 실현시킬 수 없을뿐더러 마나가 극히 희박하니 마법을 익히는 과정도 트루베니아보다 몇 배나 힘들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흐흐흐. 네년이 호호 할머니가 되어도 간단한 파이어 볼 하나 구사할 수 있나 보자.’ 별안간 우스워진 데이몬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왜 웃어요?” “그냥 웃었다. 누군가 생각나는 녀석이 있어서. 참 그러고 보니…….” 데이몬이 고개를 돌려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차고 있던 마법검 사용법을 아직까지 안 가르쳐 줬구나. 그것을 안다면 싸움할 때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검을 한 번 보자.” 데이몬의 말에 냉유성은 두 말 없이 검을 뽑아 손잡이를 앞으로 하고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검을 받아든 데이몬은 검신과 손잡이를 유심히 살폈다. 보통 이런 종류의 마법검은 시동어가 새겨져 있기 마련이다. 그 모습을 당청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기이한 검이로군. 저토록 하얀 금속이 있었나? 처음 보는 형태의 검이로군.’ 데이몬의 예상은 맞았다. 마법검의 칼날받이 부분에 시동어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동어를 읽어나가는 데이몬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시동어가 뭐 이따위야. 푸훗 푸후훗.” 데이몬이 돌연 실소를 지었다. 순간 예상되는 상황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시동어는 마법 아티팩트를 제작한 이가 입력시키는 언어로 되어 있다. 마법검의 이름이나 명칭은 다른 언어로 표현하더라도 시동어만큼은 그 언어로 발음해야 한다. 데이몬이 알기로 이 마법검의 시동어는 트루베니아 북부에 위치한 루슈티 지방 드워프의 고대 방언으로 되어 있었다. 마법검의 제작자가 루슈티에 살던 드워프라 뜻이다. 시동어의 뜻은 간단했다. 「나의 의지가 폭풍이 되어 적의 몸을 꿰뚫으리라!」 무척이나 고풍스러우면서도 널리 쓰이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중원어로 발음하면 꽤나 우스꽝스러운 말이 된다는 것이다. 데이몬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미치겠군.” 이해를 하지 못한 냉유성과 당청이 눈을 멀뚱히 떴다. “정말 어이가 없군. 이렇게 일치할 수도 있나? 푸하하핫!” 한참을 웃고 난 데이몬은 냉유성에게 검을 건네주었다. 제법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이다. “이 검은 내공을 한껏 불어넣은 상태에서 주문을 외워야 한다. 너에게 많은 도움이 돌 것이다. 주문을 가르쳐 줄까?” 그 말에 냉유성이 눈빛을 빛냈다. “예, 가르쳐 주십시오.” 겪어본 바에 의하면 그의 주공은 범상치 않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주공이 장담을 하니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해 봐라. 나는 왜 이렇게 멋있을까?” “네?” 냉유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웬 뚱딴지같은 말인가. 당혹해하는 냉유성을 보며 데이몬은 안색을 굳혔다. “나는 왜 이렇게 멋있을가? 이게 검의 마법을 발동시키는 주문이다.” 냉유성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주공, 농담이시겠지요?” “농담이 아니다. 원래 그 주문의 뜻은 우리말로는 나의 의지가 폭풍이 되어 적을 꿰뚫을지니, 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대로 발음하니 중원 말로는 그렇게 표현이 되는구나.” 냉유성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세상에 이 무슨 거지같은 주문이 있단 말인가! “거짓말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우연 같기는 하다만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주문을……. 혹시 다른 주문은 없습니까?” “마법검의 주문은 만들 때 입력시킨 한 가지뿐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그래도 그것은 너무합니다.” 소름이 돋는지 냉유성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생각해 보라. 적 앞에서 검을 빼들고 ‘나는 왜 이렇게 멋있을까’ 라고 한다면 상대가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예를 중시하는 중원에서는 겸양이 최고의 덕목이다. 그렇게 한다면 바보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냉유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차라리 이대로 쓰는 것이 낫겠습니다. 죽으면 죽었지 그럴 순 없습니다.” “효과가 대단한 마법검이다. 네 정도 내공이라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래도 싫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냉유성을 보며 데이몬은 실소를 지었다. “한 번 발동시켜 보기나 해라. 여기서 볼 사람은 나와 청이밖에 없다. 청이도 이미 들었으니 무슨 상관이겠느냐?” “…….” “시연이나 한 번 해 보거라.” 옆에서 당청이 거들었다. 그녀도 마법검의 효과가 어떤지 무척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래요, 대협. 한 번 해 보세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고민하던 냉유성이 검을 뽑아들었다. 그 역시 궁금할 수밖에 없다. 내공을 밀어 넣자 검에 푸르스름한 검기가 맺혔다. 파츠츠츠 싱글싱글 웃으며 보고 있던 데이몬이 채근을 했다. “주문을 외워야지.” 안색을 굳힌 채 고민하던 냉유성이 마침내 주문을 외웠다. 모기소리 만하게 흘러나왔기 때문에 청력이 약한 당청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물론 마법검은 발동되지 않았다. “크게 외워야 한다. 목청껏 외치지 않으면 주문이 발동되지 않는다.” 결국 냉유성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주문을 외쳤다. 될 대로 ELH라는 심정으로. “나는 왜 이렇게 멋있을까?” 보고 있던 데이몬과 당청이 웃음을 터뜨릴 정도로 큰 음성이었다. 순간 검이 부르르 떨었다. 이어 오싹한 냉기가 검신을 타고 뿜어져 나왔다. 화아아악 닿기만 해도 몸이 얼어 붙어버릴 것 같은 냉기였다. 냉유성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정말이었잖아!” 신기한 눈빛으로 냉기를 뿜어내는 검을 보던 냉유성은 그것을 휘둘러보았다. 휘리릭 휙 칼날이 대기를 가르며 냉기가 산산이 흩뿌려졌다. 냉유성은 검에 주입하는 내공을 가감하며 냉기를 통제해 보았다. 검이 잡아먹는 내공이 만만치 않았지만 곤란을 느낄 정도까진 아니었다. 확실히 냉기를 주입하는 내공의 양에 따라 뿜어지는 양에 차이가 있다. 냉유성 정도의 고수라면 그 정도 내공의 통제를 못할 리가 없다. 냉기를 마음먹은 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냉유성의 얼굴에 감탄이 어렸다. “놀랍군요. 정말 훌륭합니다. 일전에 음한기공을 익힌 무사와 싸워봤는데 상당한 곤란을 겪었습니다. 실전에서 쓰면 정말 유용할 것 같군요.” 그러나 이어진 데이몬의 말이 냉유성의 기분을 벼랑 끝으로 추락시켜버렸다. “유용하긴 유용하지. 주문만 빼면.” “윽!” 냉유성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 지금은 두 사람만 있어서 체면 불구하고 주문을 외울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특히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적 앞에서 그 따위 말을 뱉을 수는 없다. 냉유성도 명성을 목숨만큼 소중하게 여기는 무림인. 안 그래도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성품 아니던가? 냉유성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검에 주입하는 내공을 끊었다. “쓸만한 기능이긴 하지만 쓰고 싶지 않습니다. 아마 앞으로 영원히 쓸 일이 없을 겁니다.” 데이몬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모쪼록 그러길 바란다.” 검을 검갑에 수납하며 냉유성은 굳게 다짐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주문을 외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짐이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깨질 것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7. 일진 사나운 하루 그리 깊지 않은 골짜기에 일단의 무사들이 운집해 있었다. 하나같이 병장기를 패용하고 있었는데 동작이 절도 있는 것을 보아 무척 잘 단련된 무사들이었다. 수는 대략 팔십 명 정도. 뭔가를 기다리는 듯 연신 골짜기 안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중 선두에 선 자가 눈빛을 빛냈다. “기대되는군.” 얼굴이 각진 사십대 중반의 사내였다. 툭 불거진 광대뼈와 형형한 눈빛은 그가 혹독한 수련을 쌓은 무인임을 알려주었다. 그가 옆에 선 무사에게 눈짓을 했다. “모두 준비하라. 신호가 오면 머뭇거림 없이 들이쳐야 한다.” 무사가 공손히 허리를 꺾었다. “알겠습니다.” 다시 시선을 골짜기 쪽으로 돌리는 사내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드디어 묵회의 정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겠구나. 그것도 우리 모용세가의 손에 의해…….”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이십대 중반의 무사가 미소를 지었다. 전반적으로 준수하게 생겼지만 말려 올라간 입 꼬리가 다소 간교하다는 인상을 주는 청년이었다. “만약 이번 작전이 성공한다면 무림맹 내에서 우리 모용세가의 입지가 더욱 굳어질 것입니다, 백부님.”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 말고.” 숙질간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바로 모용세가의 사람들이었다. 당금 무림의 세가들 중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을 지닌 가문. 사실 혈족을 주축으로 하는 세가는 일반 문파만큼의 세력을 이루기 힘들다. 다른 성씨에 대한 배타적이며 주요직을 모두 혈족들에게 맡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용세가는 사정이 약간 달랐다. 일단 모용세가의 혈족들은 대부분 무공에 뛰어난 자질을 보인다. 그 때문에 모용세가에서 보유한 절정고수의 수는 결코 여느 문파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만금상단이라는 거대상단을 병행해서 운영하기 때문에 자금력도 풍부하다.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당금 무림맹을 떠받드는 4대 기둥 중 하나라는 모용세가가 만들어진 것이다. 사천당문이 마도련의 공격을 받았을 때 무림맹이 외면한 이유도 모용세가의 입김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그런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대거 대파산맥의 골짜기에 운집해 있는 것이다. 그들의 임무는 당금 무림의 가장 큰 골칫거리인 묵회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서였다. 묵회. 각 문파에서 불만을 품은 반골들을 규합해 무림을 뒤엎으려는 불순한 목적을 지닌 단체이다. 점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행동이 극히 은밀하기 때문에 묵회의 실체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비밀이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는 법. 독과 무력을 이용해 은밀하게 조직원을 끌어들이는 묵회의 존재는 이제 어느 정도 규모의 무림문파에서는 다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단지 누가 묵회의 조직원인가 하는 것이 베일에 싸여 있을 뿐. 묵회는 대개 조직에 불만을 품은 방계제자에게 접근한다. 철저히 조사해서 회유 가능하다고 판단될 때에만 접근하기 때문에 좀처럼 실마리를 잡아내기 힘들다. 일단 묵회에 회유된 자는 철저히 비밀을 지키기 때문이다. 그렇게 철두철미하던 묵회도 드디어 꼬리가 잡혂다. 바로 모용세가의 식솔 중 누군가에 의해. 모용세가에는 모용수라는 중년고수가 있다. 재능도 떨어지고 무공도 변변치 않아 세가 내에서 그리 인정받지 못하는 자였다. 사람은 궁지에 물리면 모든 것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는 법. 모용수는 술만 먹으면 세가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하게 떠벌이고 다녔다. 눈엣가시였지만 그래도 식솔이었는지라 세가에서는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그런 모용수에게 묵회가 접근한 것이다. 회유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묵회는 모용수에게 은밀히 서신을 보냈다. 남의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서 만나자고 접근한 것이다. 그러나 그 서신은 곧바로 모용세가주의 손에 넘어갔다. 모용수가 전갈을 받은 즉시 가주에게 보고한 것이다. 사실 모용수는 세가에 대한 충성심이 남다른 자였다. 그의 불평불만은 묵회를 낚기 위한 연극이었던 것이다. 꼬리를 잡자 모용세가는 즉시 행동에 나섰다. “회유를 담당하는 자를 붙잡으면 묵회의 비밀을 충분히 파헤칠 수 있다. 묵회의 사자를 사로잡기 우해 모용세가에서는 무사들을 대거 편성했다. 여기 모여 있는 무사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절정고수 세 명에 일류에 속하는 무사 삼십 명, 이류지만 실력이 출중한 무사 사십오 명이 모여 모용수까지 도합 일흔아홉 명의 무사단이 조직되었다. 그들은 즉각 대파산맥으로 출발했다. 물론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모용수가 먼저 떠났고, 나머지 무사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어 이동했다. 얼굴이 알려진 절정고수들은 철저히 사람을 피해 산으로만 이동했다. 그러니 모용세가가 이번 작전에 거는 기대를 익히 짐작할 만했다. 중간에 몇 몇 무사들이 안면이 있는 무림인에게 들키긴 했지만 변명거리가 없진 않았다. 당문의 생존자를 수색하러 간다는 것이 바로 변명거리였다. 모용세가가 눈에 불을 켜고 당문의 생존자를 잡아들이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부근의 무림방파들도 별달리 경계를 하지 않았다. 무림문파들은 타문파의 절정고수들이 부근에 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각 문파의 주력이니만큼 기습을 받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힘들게 대파산맥에 모인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지금 눈이 빠지게 모용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접선 장소로 통하는 길은 이곳뿐이다. 여기만 지킨다면 날아가는 새가 아닌 이상 빠져나갈 수 없다.” 얼굴이 각진 중년인의 이름은 모용현도였다. 질풍검이라는 별호로 불리며 이번에 출동한 무사들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은 이였다. 옆의 청년은 모용명으로 모용세가에서 잘나가는 후기지수 중 한 명이다. 태어나자마자 벌모세수를 받고 각종 영단을 밥 먹듯 먹으며 수련한 덕분에 제법 뛰어난 무위를 가진 이였다. 이번 출정에 그가 가담하게 된 것은 경험을 쌓기 위해서였다. 제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더라도 실전경험이 없으면 정말 어이없이 당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무림인에게 실전경험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주위를 살펴보던 모용명이 입을 열었다. “소문에 듣자하니 묵회 놈들이 독을 방사하는 강시를 운용한다고 하던데 위험하진 않을까요?” “걱정하지 말아라. 강시 따윌 겁낼 필요는 없다. 설사 독을 발랐다고 하더라도 걱정할 것은 없다. 검강으로 베어버리면 그만이다. 게다가 우리에겐 다수의 독 전문가들이 있지 않느냐?” 모용현도는 자신만만했다. 그럴 것이 강시는 근 이백 년 동안이나 등장하지 않은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독을 발랐다는 것이 조금 꺼림칙하긴 하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자신들에겐 당문에서 잡아들인 수십 명의 독 전문가들이 있었으니까. 말뜻을 알아차린듯 모용명은 음침하게 미소 지었다. “하긴, 당금 무림에서 저희만큼 독 전문가를 많이 보유한 문파는 없을 것입니다.” “전화위복이라고 해야지. 무사들의 희생 덕분에 독에 대해서는 더 이상 겁낼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말이야. 지금 생각해 보니 당문과 시비가 붙은 건 정말 잘된 일이야.” 사실 당문이 같은 정파 계열의 세가였다면 이처럼 공개적으로 잡아들일 수 없다. 주변의 이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문은 정사대전에서도 중립을 선언한 정사지간의 문파. 그러니 신경 쓸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하긴 독과 암기로써 문파를 운영해 나간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무공 실력 아닙니까?” “그렇다. 독과 암기에 패한다고 순순히 패배를 승복할 무림인은 없지.” 대회를 나누던 모용명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우리가 쫓던 당문의 전대 가주가 대파산맥 인근으로 피했다면서요?” “그렇다고 들었다.” “내친 김에 같이 잡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물론 같이 잡아들이면 금상첨화이긴 하지만 거기에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다. 우리의 주 목표는 묵회의 사자를 포획하는 것이다. 당문수 정도야 천천히 잡아도 상관없다.” “흐흐흐. 그래도 구미가 당기는 걸요.” 모용명의 말에 모용현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혹시 잿밥에 관심이 있는 것 아니냐? 설마 당문수와 함께 다닌다는 당문의 여식에게…….” 모용명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었다. “맞습니다. 일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미모가 상당하더군요. 아직은 어리지만 조금만 키우면 상당한 미인이 될 거 같습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모용현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툴툴거렸다. 사실 모용명에겐 좋지 않은 버릇이 있었다. 여색을 병적으로 좋아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세가 인근 기루의 미모가 뛰어난 기녀들 중에서 모용명과 동침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세가의 시녀들 중에서 얼굴이 반반한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외부의 여인들에게까지 눈독을 들이는 것이다. 만약 여색 때문에 무공성취가 늦어진다면 의당 불호령이 떨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세가주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었다. ‘무공수련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면 그대로 내버려두어라.’ 그렇게 해서 모용명의 악취미는 공개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런 모용수(??모용명이겠지요..오타발견)가 이번에는 당문의 여식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모용현도는 못 말리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넌 이미 당문 포로들 중에서도 둘이나 건드렸지 않느냐?” “엇! 어떻게 아셨어요?” “세가 내의 대소사는 결코 나를 벗어날 수 없다. 감출 것을 감춰야지.”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남자를 겪어본 여자들이었어요. 전 순결한 처녀를 원해요.” “못 말리겠군. 아무튼 여유가 남으면 추격조를 한 번 편성해 보겠다. 그러나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라. 우리에겐 묵회의 사자를 잡아 압송하는 것이 우선이니 말이다.” “네, 백부님.” 대답을 한 모용명이 음침한 미소를 흘렀다. 그때 외곽을 살피던 무사의 전음성이 귓전을 파고 들어왔다. ―누군가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모용현도는 바짝 긴장했다. 묵회의 사자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무사의 보고가 이어졌다. ―산 아래쪽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인원은 네 명, 남자 셋에 여자 하나입니다. 거리가 멀어서 정체는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모용현도는 주위 무사들에게 나지막이 주의를 주었다. “3대는 검진을 펼칠 준비를 하라. 1대와 2대는 원래대로 골짜기 안쪽을 경계하도록 하고.” “존명.” “이쪽은 막혔어요. 들어가도 도로 돌아 나와야 할 거예요.” “상관없다. 가서 할 일이 있다.” 당청은 데이몬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자화자찬에 이어 고집까지도 하늘을 찌르는 작자로군.’ 그러나 그녀는 알지 못했다. 데이몬이 인적이 드문 곳에다 틈틈이 공간이동 거점을 만들고 다닌다는 사실을. 묵묵히 걸어가던 냉유성이 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매복이 있습니다.” “매복? 이 산골짜기에 무슨 매복이지?” 데이몬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냉유성이 심각한 표정으로 장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꽤나 다수가 매복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일류 정도의 무사로 판단되는데 어떻게 하죠?” 무공이 높은 고수는 감각이 월등히 뛰어난 편이다. 자신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무사들의 매복 정도는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다. 무위가 비슷하거나 높은 고수가 아니라면 그의 이목을 벗어날 수 없다. 냉유성이 당문수에게 암습을 허용한 것도 자신보다 수준이 높은 고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상황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뭐, 별 일 있겠느냐? 설마 우리를 노린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그렇다면 먼저 대화를 해보겠습니다.” 장검을 뽑아든 냉유성이 앞으로 쓱 나섰다. “어느 방면의 동도들이시오? 모습을 드러내시오.” 우렁우렁한 음성이 숲으로 울려 퍼졌다. 음성에는 내공이 충만하게 실려 있었다. 모용현도는 모용명과 함께 불청객들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제법이로군. 목소리에 실린 내공을 보아 절정은 확실히 넘어섰어.” “색목인들과 다니는 것을 보아 길 안내인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군요. 당금 무림의 낭인들 중에서 절정고수가 있습니까?” “모르지. 낭인들만큼 실력의 편차가 높은 작자들도 없으니까.” “절정 정도라면 세가로 끌어들일 필요가…… 응?” 모용명이 눈을 크게 떴다. 색목인들 옆에 서 있는 여인이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져갔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 공교롭군요. 저 여인 보이십니까?” “여인이라기보다는 소녀로 보이는데?” “그녀가 바로 당청입니다. 당문수의 손녀이자 죽은 당가 가주의 무남독녀이지요.” “당청이라면 네가 눈독들이고 있는 그 당문의 여식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어떤 연유로 색목인과 동행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잘 되었군요.” 모용명의 눈동자에 욕망의 빛이 언뜻 스쳐갔다. 으슥한 곳에서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을 만나니 거칠 것이 없었다. “색목인들을 모두 처치해 버리고 그녀를 손에 넣죠. 저 낭인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백부님께서 계시니 걸릴 것이 없잖습니까? 어차피 보는 눈도 없는 판국인데.” 모용명의 조급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모용현도는 눈살을 찌푸렸다.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우선은 자세한 것을 알아봐야겠다.” 말을 마친 모용현도가 몸을 일으켰다. “그대들은 누구요? 정체를 밝히시오.” 무사들이 매복한 곳에서 누군가가 몸을 일으키자 냉유성은 바짝 긴장했다. 좀처럼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곳에 다수의 무사들이 매복하고 있으니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연히 이곳을 지나는 나그네요. 그대들은 누구시오.” 그러자 모용현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이곳에서 작전을 벌인다는 것은 결코 드러나서는 안 될 특급대외비였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일행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색목인들이 여긴 웬일이지? 저 소녀는 명이가 말한 당문의 여식이고……. 제일 앞의 낭인 검수는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걸?’ 그러나 모용현도의 정체는 냉유성에 의해 금세 탄로 났다. 한때 공동파의 제자였던 냉유성이라서 무림맹의 명숙인 모용현도의 얼굴을 똑똑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질풍검 모용현도 대협 아니십니까?”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정확히 짚어내자 모용현도는 이맛살을 지그시 모았다. “그대는 누구요.” “저 냉유성입니다. 예전에 공동파의 제자였을 당시 무림맹에서 대협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동산의 검귀 냉유성 소협이란 말이오?” 모용현도는 깜짝 놀랐다. 후기지수 중 제일이라는 냉유성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물론 그가 잘못을 저질러 공동파에서 파문 되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공동파에서 파문되었다고 들었소. 그런데 여긴 웬 일이시오?” 과거의 치부가 들춰지자 냉유성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파문된 뒤 새로운 주군을 모셨습니다. 이제 저는 공동파의 제자가 아닙니다.” “안타까운 일이로구려. 그렇다면 어느 문파에 들어간 게요?” “문파가 아닙니다. 바로 이분이 제 주군이십니다.” 냉유성이 가리킨 사람을 본 모용현도는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냉유성라면(;; 오타인가.. 아님 내가 알지못하는 문법인가..아님 스캔이 잘못된 것인가..;;아마도 냉유성이라면이겠죠..) 그래도 서른 이전에 절정에 오른 촉망받는 후기지수이다. 그런데 갓 이십이 넘어 보이는 애송이를, 그것도 서역의 색목인을 주군으로 삼다니……. 모용현도는 대단히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좀 깊이 생각하지 그랬소. 정파의 협객으로서 색목인의 주구가 되다니 말이 되는 소리요?” 냉유성의 눈썹이 급격히 휘말려 올라갔다.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이분은 내가 목숨 바쳐 충성하는 주군이시오.” “아무튼 좋소. 그렇다면 당문의 여식을 데리고 다니는 이유는 뭐요?” 모용현도의 시선이 당청에게로 향했다. ‘나쁜 놈들.’ 당청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이런 외진 산골에서 철천지원수를 만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용현도는 무사들을 진두지휘하여 당문의 생존자를 잡아들인 가장 큰 원흉이다. 그러니 모용현도를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다. 한동안 모용현도를 노려보던 당청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소녀 역시 이분을 주군으로 모시기로 했어요. 시녀 신분으로 말이죠. 뭐 잘못된 것이 있나요?” “허 참, 점입가경이로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모용현도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냉유성에 이어 당문의 여식이 색목인의 시녀로 들어가다니……. 비록 멸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당청은 당당한 무림세가의 여식이다. 그런 당청이 태연하게 색목인의 시녀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데이몬에게로 향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무엇 때문에 중원에 왔지?” 반하대였다. 그러니 데이몬의 대꾸도 곱게 나갈 리가 없었다. “왜? 색목인은 중원에 오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가?” 모용현도의 눈썹이 급격히 치솟았다. “버릇없는 작자로군. 색목인들이 예절 따윌 모르는 야만인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래서 예절을 아는 중원인이 처음 대하는 사람에게 반말 짓거리를 하는가? 상대의 신분 따윈 알아보지도 않고 말이야.” 태연하게 대꾸하면서도 데이몬은 속으로 골치 아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법으로 탐색해 본 결과 숲 속에는 무려 팔십명이나 되는 무사들이 매복하고 있었다. 믿을 만한 수하가 냉유성 하나뿐인 상황인지라 섣불리 행동하긴 힘들었다. 물론 그가 가진 마법실력을 모두 발휘한다면 처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그러나 문제는 그가 칠종단금술의 금제 때문에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는 점이다. ‘만에 하나 매직 미사일이 무사들의 사혈을 쳐서 칠종단금술이 발동한다면 끝장이다.’ 현재 그의 입장으로서는 살상마법을 사용할 순 없다. 그렇다면 쓸 수 있는 것이 트레이드마크인 매직 미사일 다발뿐이었는데 그나마도 한계가 있다. 매직 미사일은 실력이 떨어지는 다수를 상대할 때 진정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여기 모인 무사들은 그야말로 정예 중의 정예. 일류 고수만 되어도 충분히 매직 미사일을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이 데이몬의 판단이었다. 상대가 절정이라면 매직 미사일에 당하지 않을 공산이 컸다. 그러나 데이몬은 결코 굽히지 않았다. 마왕이라는 자존심이 그를 쉽사리 물러서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정 안되면 남은 암흑투기를 깡그리 끌어올려 싸우면 되지.’ 상황은 점점 최악의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모용현도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버르장머리 없는 색목인에다가 공동파의 파문제자라면 생각할 것도 없지. 보는 눈이 전혀 없으니 모조리 죽여 버린 다음 당청은 명이에게 주면 되겠군. 3대만 동원해도 충분할 것 같아.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군.’ 모용현도는 의아한 듯한 눈빛으로 냉유성을 쳐다보았다. ‘공동에서 파문시키며 팔다리의 근맥을 자르고 단전을 폐했다고 들었는데…….’ 냉유성의 지금 모습은 결코 무공을 잃은 폐인이 아니었다. 형형한 안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무공을 되찾은 거지? 이해하기 힘들군.’ 하지만 거릴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비록 냉유성이 절정이라고는 하나 고작해야 후기지수들 중에서 돋보이는 수준이다. 반면 자신은 문파의 주축인 절정고수들 중 단연 수위로 인정받는 고수였다. 그러니 비교 자체를 할 필요가 없었다.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걱정할 것은 없다. 냉유성 녀석은 내가 책임지고 당문의 여식을 명이에게 맡기면 그 사이에 3대 무사들이 색목인들을 정리할 테지. 그런 다음 임무를 수행하면 되겠군.’ 결정을 내린 모용현도는 서늘한 눈빛으로 냉유성을 바라보았다. “냉유성 소협, 오늘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시오?” 바짝 긴장한 냉유성이 장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우릴 적대하겠다는 뜻입니까?” “우린 이곳에서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있소.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될 종류의 것이오. 비록 그대들에게 감정은 없지만 어쩔 수 없소. 입을 막아야 하는 것이 우리 입장이오.” 말을 마친 모용현도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매복하고 있던 스물다섯 명이 몸을 일으키며 퇴로를 차단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행은 완전히 포위당해 버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운이 좋지 않군.” 냉유성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당청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자신마저 원수인 모용세가로 끌려가게 생긴 것이다. 무표정한 사람은 오직 데이몬과 윈슬럿뿐이다. 그러나 데이몬 역시 마음이 그리 편치 못했다. 남은 암흑투기가 팔십 명이나 되는 무사들을 모두 상대할 만큼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 통하든 통하지 않든 매직 미사일다발을 발사한 다음 암흑투기를 끌어올리 수밖에…….’ 이미 마법은 몇 가지 캐스팅해 놓은 상태였다. 데이몬의 인상이 난데없이 팍 일그러졌다. 중원에 와서 이런 상황에까지 몰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암흑투기만 충분하다면…….’ 암흑투기만 충분하다면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현경의 무위를 맘껏 뽐내며 무사들을 마구 때려눕힐 수 있다. 그러나 암흑투기의 양은 충분하지 않고 그것이 떨어진다면 데이몬이 쓸 수 있는 것은 어둠의 마력뿐이다. 마법으로 승부를 결해야 하는 것이다. 자고로 마법사는 정면대결에 있어서만큼은 무사에게 철저히 약할 수밖에 없는 존재. 여러 모로 불리한 싸움이 아닐 수 없었다. ‘할 수 없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싸워볼 수밖에…….’ 데이몬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마나를 재배열하기 시작했다. (『데이몬』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