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율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1화 프롤로그. 우리들이 살아가는 대륙 트루베니아의 모든 영토는 주신(主神) 베르하젤의 입김이 닿아 만들어진 세상이다. 신께서는 대륙을 창조하시고 나서 여러 종족을 탄생시키셨다. 숲의 종족 엘프, 뛰어난 대장장이 드워프, 복수의 화신 오크. 그 외 완전하지 못한 존재인 각종 몬스터들까지. 이렇게 각 종족을 차례대로 만들어내신 베르하젤 님은 각 종족들을 조율하는 파수꾼으로 드래곤을 삼고, 그에 생명과 힘을 불어넣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각 종족들의 분쟁을 조종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하사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마법이란 권능이었다. 세상의 체계가 모두 잡히고 나자 베르하젤 님은 가장 마지막으로 신과 가장 닮은 종족으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다. 베르하젤 님은 인간을 비롯한 각 종족들에게 영원한 세월 동안 직접 보살필 것을 맹서했고, 그 증표로 신께서 직접 만드신 서약석(誓約石)을 각 종족들에게 맡기셨다. 이것이 있는 한 각 종족들은 언제 어디서든 베르하젤 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각 종족들은 이것을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비처에 소중히 보관해야만 했다. 그것은 자신 종족들의 흥망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보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종족들은 트루베니아 대륙 곳곳에 퍼져 나름대로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서로 살생함이 없이 어우러져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말이다. 고대의 인간들은 베르하젤 님에 대한 신앙심이 무척 깊었다. 인간들은 그분의 의도에 따라 여러 유사인종들과 공존하며 오랫동안 평화롭게 살아갔다고 전해진다. 엘프 족의 허락 하에 산을 개간하고 드워프에게서 경작할 도구를 공급받고 탁월한 사냥꾼인 오크 족에게서 고기를 제공받으며 각 종족 간에 아무런 다툼도 없이 조화롭게 살아간 것이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만. 그 기간은 무척 길고도 길었다. 그러나 오랜 평화기간이 지나가고 종족 간에는 분쟁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것은 땅이 넓었을 때는 전혀 일어나지 않은 문제였다. 바로 영역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비약적으로 늘어버린 개체 수를 감당하기 위해서 종족들은 타종족의 영역을 부득이하게 침범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영토 확장을 가장 갈구했었던 종족이 바로 인간과 오크 족이었다. 가장 번성하고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가진 두 종족이 슬금슬금 타 종족의 영역을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영역 확보를 목적으로 시작된 추악한 다툼은 마침내 대륙의 곳곳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베르하젤 님의 의도는 작금에 와서 그렇게 여지없이 빗나가버렸던 것이다. 그 불씨를 지핀 것은 다름 아닌 인간들이었다. 그들에 의해 정복전쟁은 시작되었고 대륙의 곳곳을 전화의 불길로 덮으며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져 갔다. 무려 오십 년 동안이나... 수많은 생명을 스러지게 만든 정복전쟁은 결국에는 인간들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갖은 사투 끝에 인간들은 오크 족을 물리치고 펠루시아 산맥 저편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인간들은 빼앗은 방대한 영토를 두고 승리의 기쁨을 여과 없이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그들이 예상했던 달고 풍성한 열매는 아니었다.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처절한 응징이었다. 평화롭게 살아가라는 뜻을 거스른 대가로 인간들은 베르하젤 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뜻을 거역한 인간들에게 신은 분쟁의 불씨를 영원히 꺼뜨리지 않고 순환되도록 만들었으며 영역전쟁을 일으킨 대가로 총 세 번의 대참사를 겪도록 안배하였다. 그중 첫번째는 인간들 간의 불화였으며, 두 번째는 마왕의 강림으로 인한 어둠의 군대와의 전쟁이다. 인간들은 갖은 고초 끝에 두 번의 위기를 극복해 내고야 만다. 하지만 마지막 위기는 인간들의 능력으로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시련으로 다가오게 된다. '종족들을 조율하기 위해 탄생한 존재' 드래곤들의 전면적인 개입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깨달아야 한다. 자신들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존재인가를. 그리고 꿇어 엎드려 경배하라. 베르하젤 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오로지 그 방법밖에는 없는 것이다. ―100년 전 베르하젤 교단의 대 승정이었던 휘린파리나의 '인간들에 대한 경고문' 中에서― 고즈넉이 해가 저물어 가는 들녘. 기괴한 적막감이 가슴을 죄어드는 공포로 화해 달려든다. 사위는 조용했으나 사방의 경물로 볼 때 이곳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결코 평온하지 못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들판에 펼쳐진 광경은 단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었다. 시산혈해(屍山血海) 머리가 갈라지고 창자가 튀어나온 시신들이 들판에 널려 있었다. 훤히 드러난 창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보아 이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생히 살아있던 사람들이 틀림없었다. 하나같이 부러진 무기를 손아귀에 틀어쥐고 죽어 있는 자들.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 무기를 놓지 않은 것을 봐서 이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존재인 무림인 임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때는 송나라 말엽, 여러 고수들에 의해 창설된 무수한 문파들이 자신들의 무공이 제일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수많은 비무를 벌여대고 그것도 모자라 문파 간의 전면적인 힘 대결마저 널리 성행되는 시기였다. 관(官)에서도 어쩌지 못하고 이들의 접전을 방관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문파들의 힘이 막강한 무림의 절정기. 시대 상황을 따져보면 이처럼 시신이 널려 있는 모습은 그다지 진귀한 일이 되지 않았다. 문파 간의 힘 겨루기가 중원전체를 걸쳐 무수하게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이곳에 널려 있는 시신들 대부분이 같은 표식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복색은 다소 틀렸지만 시신들은 하나같이 가슴팍에 아수라의 문양을 새겨 넣고 있었다. 서로간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고 죽어 있는 모습에서 이들이 서로 상잔(相殘)했음은 척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무림에서 아수라의 문양을 쓰는 문파는 다름 아닌 배교(背敎)였다. 기이막측한 사술과 괴이신랄한 무공으로 무림의 거두 마교(魔敎)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한 문파. 그런데 어떻게 배교라는 한 조직의 무사들이 서로 상잔하는 일이 벌어졌을까? 그 해답을 밝혀줄 자는 참혹한 현장의 구석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쓰쓰쓰. 마치 그 자리에서 갑자기 생겨나기라도 하듯 모습을 드러낸 자는 전신에 피 칠갑을 한 사십대 중년인이었다. 심한 상처를 입은 듯 그는 얼굴을 온통 찡그리고 있었다. "트, 틀렸어. 이미 천자혈마공(天子血魔功)이 벌써 깨어지기 시작했어." 작달막한, 왜소하다 볼 수 있는 체구에다 등이 기형적으로 굽어있는 모습을 봐서 아마도 꼽추인 듯 보였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의 몸에서는 만인을 부복시킬 수 있을 만한 위엄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족히 한 조직을 맡고 있는 절대자에게서나 볼 수 있을 듯한 자연스러운 위엄 같은. "왝." 한 움큼의 선혈을 토해 낸 사내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저녁의 석양이 사내의 얼굴을 밝게 비추어 주었다. 드러난 사내의 얼굴은 한 마디로 추악했다. 죽 찢어진 채 치켜 올라간 가느다란 눈. 보기 흉하게 휘어진 매부리 코. 입 꼬리가 치켜 올라가 무척 야비해 보이는 인상. 사내는 전신에서 퍼져 나오는 절대자의 기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사내의 눈빛만은 맑기 그지없었다. 온통 피 칠갑을 한데다 석양을 정면으로 받은 나머지 도무지 사람의 형상으로 보이지 않는 용모였지만 그의 투명한 눈빛만은 가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내의 눈빛은 점차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발산하는 분노 가득한 눈빛이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천자혈마공이 완전히 깨어지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만 한다." 서둘러 몸을 날리려던 사내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한 곳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여러 자루의 검에 관통 당한 채 늘어져 있는 처참한 시신 한 구가 있었다. 차라리 혈구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시신. 사내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애틋하게 변했다. "종리령. 너마저도..." 그곳에 죽어있는 시신은 사내의 둘도 없는 심복이었다. 모두가 등을 돌렸어도 수하들과 함께 변함 없이 충성을 바쳤던 충직한 심복. 죽어있는 모습을 볼 때 종리령은 죽는 순간까지 적에게 저항했음이 분명해 보였다. 사내의 눈가에서 서서히 피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종리령, 그리고 수호마왕군(守護魔王軍). 너희들의 희생을 이 독고성 죽는 순간까지 잊지 않겠다." 그 때 적막을 깨고 스산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흐흐흐. 미안하지만 교주. 그럴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오." 그와 함께 수십 명의 인영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와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 생겨난 것처럼 등장한 자들. 하나같이 타는 듯한 적의에 아수라의 문양을 가슴에 새겨 넣은 자들로써 풍기는 분위기를 보아 결코 범상하지 않는 자들이 분명했다. 그들 중 선두에 선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는 특이하게도 적안(赤眼)을 가지고 있었다. 특정 종류의 사술을 극성까지 익힐 경우 생겨나는 붉은 눈동자. 강퍅한 표정을 한 적의인은 아직까지 등을 보이고 있는 사내를 향해 냉랭하게 내뱉었다. "교주께서 본교의 사술을 고금을 통틀어 전무후무한 경지까지 익히신 분이시오. 때문에 숨어 있느라 우리 적미당에서 고생을 좀 했지. 교주의 천자혈마공이 깨어진 사실은 익히 알고 있는 바. 멀리는 가지 못했을 거란 생각 때문에 며칠동안 이곳에 잠복하고 있었는데 내 예상이 적중했구려. 상황을 보아하니 공은 적미당에서 세울 것이 확실하겠소." 길게 말을 늘어놓던 적의인은 힐끗 사내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사내는 미동도 없이 서서 죽어있는 시신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적의인은 숨을 한 번 내쉰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순순히 투항하시오. 교주. 정파 놈들에게 붙들린다면 당신의 최후는 더욱 비참할 것이오. 이미 전 무림이 당신을 쫓고 있는 상황, 당신이 피할 곳은 그 어디에도 없소. 그러니 더 이상 피할 생각 마시오. 총사께서 교주의 목숨을 살릴 방도를 눈이 빠져라 궁리하고 계시니 운만 닿는다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오." 총사라는 말을 듣자 사내의 눈빛이 강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적의인이 거론한 총사라는 자가 바로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배교 총사 사준환! 전 무림을 통틀어 최고라는 정평이 나 있는 지략가로서 오십 년 전만 해도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였던 배교를 지금은 마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문파로 키운 천재적인 수완가라 할 수 있었다. 사씨 가문의 제갈공명. 바로 이것이 무림에서 배교 총사 사준환을 평하는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독고성에게 있어 총사란 존재는 이제 단순한 반역자에 불과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뒤통수를 친 비열한 반역자. 독고성은 지금껏 사준환의 충성심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를 아버지와 동일한 존재로 생각했기에 독고성이 느낀 배신감은 더욱 지대했다. 물론 그가 자신에게 베푼 은혜는 분명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독고성의 귀에 적의인의 스산한 음성이 계속 들려왔다. "시간이 없소. 교주. 이젠 가타부타 결정을 할 시간이오." 독고성의 몸이 점차 떨림을 멈췄다. 그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활활 타오르는 듯한 안광이 적의인에게 퍼부어졌다. "거절이군. 준비하라." 독고성의 눈빛을 본 적의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응명령을 내렸다. 그것을 보아 독고성이 순순히 투항했더라도 살아남을 수 없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수십 명의 적의 무사들이 검진을 형성하며 독고성에게로 접근해 들어갔다. 배교의 대외척살조직인 적미당 무사들답게 그들의 몸놀림은 자로 잰 듯 정교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기형 병기들이 독고성 일인에게 겨냥되었다. 평범한 강호의 무사들이라면 이런 공격에 난색을 표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독고성은 결코 평범한 무사가 아니었다. 수많은 무사들을 이끌고 오랜 세월동안 전장을 전전하며 정파 무림계와 치열한 사투를 벌였고 대부분의 전투를 승리로 장식해서 배교를 지금의 위치에 올려놓은 절대자가 아니었던가? 그런 이유로 공격해 가는 무사들은 전신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명령이긴 하지만 결코 칼을 마주 대하고 싶지 않는 자가 바로 독고성 교주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명령을 내린 적미당주는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그는 상대의 반응을 살피며 슬그머니 품속의 신호탄을 꺼내 들었다. 사실 교주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과 적미당 만으로는 당해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비록 공을 탐해 휘하 조직만을 동원, 독자적으로 나서긴 했지만 정면 대결을 벌인다면 당해낼 수 없음은 명약관화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독고성 교주가 모든 희망을 버리고 순순히 잡혀주는 것뿐이었는데 애석하게도 상황을 보아하니 그럴 가능성은 아예 없어 보였다. "공이 다소 줄어들겠지만 어쩔 수 없지, 만사가 불여튼튼이라... 그는 서둘러 신호탄의 줄을 당기려 했다. 이미 이곳 부근은 교주 추적에 나선 고수들이 빽빽이 천라지망을 펼쳐놓은 장소. 신호탄만 터진다면 지원군이 벌떼처럼 몰려올 것이고 자신의 수하들은 충분히 그 시간을 끌 능력이 있었다. 적미당주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신호탄의 줄을 당겼다. 푸슈슈슈. 찢어지는 듯한 소성과 함께 신호탄이 불똥을 흩날리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런데 그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동시다발적으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끄아아악." "커어억." 날아오르는 신호탄을 쳐다보던 적미당주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붉은 광망이 넘실거리던 눈동자는 어느덧 공포에 젖어가고 있었다. 해가 저문 가운데 수많은 횃불이 사방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시신들이 이리저리 널려있는 모습은 변함 없었지만 한 가지 차이점은 그 시체들의 수가 다소 늘어나 있다는 점이다. 그들 중에는 적미당주도 끼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던 그가 시신이 되어 싸늘한 땅에 몸을 뉘이고 있는 것이다. 가슴이 처참하게 으스러진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찢어져라 눈을 치뜨고 있는 적미당주. "늦었는가?" 횃불의 가운데에서 느닷없이 무정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음성의 주인은 무척 청수한 용모를 가진 중년인이었다. 몸에 걸친 학창의(鶴?衣)가 더없이 자연스러웠다. 한 마디로 선풍도골이라 칭할 수 있는 단아한 용모.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적의인들의 시신을 살펴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칠공으로 진득한 선혈을 흘린 채 동심원을 그리며 쓰러져 있는 시신들. 몇 명의 회의인들이 죽은 시신들을 검시한 뒤 보고를 시작했다. "모두가 일격에 절명했습니다. 죽은 상태를 볼 때 독고 교주는 진원진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자 중년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본교의 정예 중 하나인 적미당을 반각도 안 되는 시간에 몰살시키고 도주하다니... 그렇게도 삶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가?" "서둘러 추격해야 하지 않을까요?" 등뒤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목소리. 중년인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 놈은 어차피 독 안에 든 쥐 신세야. 이곳에는 우리뿐만 아니라 정파 놈들까지 천라지망을 펼치고 있지. 공식적으로 마두(魔頭)로 공인된 놈을 잡기 위해 말이야. 놈이 숨을 곳은 이 중원천지 그 어디에도 없어." 얼굴에 수염이 숭숭 난, 마치 장비를 연상시키게 하는 흑면 중년인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받았다. "그렇군요. 하지만 속하는 아직도 조금 어리둥절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피 튀기며 싸우던 정파 놈들과 연합하다니? 그리고 어제까지만 해도 교주였던 자를 추적하게 되다니 말입니다." 중년인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무림에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 어제의 적이라 할 지라도 얼마든지 오늘의 동료가 될 수 있는 법.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정이다. 눈엣가시이던 독고 교주를 몰아낸 이상 이젠 싫어도 정파 놈들과 손을 잡고 마교를 견제해야 할 때다." 중년인의 눈가에는 무언가 회한의 빛이 흘러지나가고 있었다. 배교의 절대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와신상담한지 어언 수십 년. 그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보려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이름은 사준환. 무림 제일의 지략가로 공인되어 있는 배교의 드러나지 않은 실세이며 이 모든 상황을 배후에서 암중 지휘해온 존재이기도 했다. 그가 오랫동안 감춰온 야심을 드러내어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서두를 필요는 없어. 괜히 조급하게 행동하다간 다된 밥에 코 빠트릴 수도 있으니..." 사준환은 심유한 눈빛으로 주위의 그림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모두가 배교를 이끌어나가는 중요한 실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 앞서 하나같이 사준환의 심복들이었다. 그러므로 사준환은 심중에 품고 있던 말을 남김없이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는 암암리에 강기 막을 쳐서 아무도 엿듣지 못하게 안배한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오래지 않으면 우리의 천하가 시작된다. 독고 교주를 시발점으로 나는 마교와 구대문파를 차례차례 복속시킬 것이다. 배교의 강력한 무력이 이미 나에게 귀속되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제 그대들은 생을 다하는 날까지 나와 부귀영화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준환의 장담에 수하들은 소리 죽여 환호성을 질렀다. 총사와 함께 했던 고된 나날들. 그에 대한 보상이 마침내 눈앞에 닥친 것이다. "고수들이 넓게 포진되어 추적하고 있으니 놈의 자취는 곧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말을 이어나가던 사준환은 뭔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 발견해서 처치한 자들에 대해 뭔가 발견한 점은 없는가?" 흑면 중년인이 곧 앞으로 나와 보고를 올렸다. "아직까지는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놈들이 색목인이란 것과 이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복색을 하고 있다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발각된 놈들 중 둘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으며 한 놈의 숨이 붙어있긴 했으나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부득이 죽여 입을 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준환은 미간을 슬며시 모았다. "놈들의 은신술은 정말 보통이 아니었어. 기척마저도 감쪽같이 숨기는 놈들이니... 만약 숨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나라고 해도 전혀 존재를 발견할 수 없었을 거야. 도대체 어디 놈들일까? 색목인들이니 혹시라도 서장 포달랍 궁에서 온 놈들이 아닐까?" 사준환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저편에서 찢어지는 듯한 소성과 함께 신호탄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제법 떨어진 장소였다. "발견했나 보군. 가자!" 사준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림자들은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하나같이 상승 신법을 구사하는 것으로 봐서 모두가 절정급 고수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의 동작이 얼마나 빨랐던지 사준환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만이 장내에 남아 여운처럼 떠돌 정도였다. "교주가 정파 놈들에게 잡히기 전에 먼저 처치해야 한다. 서둘러라." 그들이 떠나고 나자 장내는 다시 적막감에 휩싸였다. 남은 것이라곤 어지럽게 널린 시신들 뿐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장내에선 또다시 웅성거리는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낮춘 채 조심스럽게 울려 퍼지는 음성은 놀랍게도 중원의 언어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생소한 언어. 놀랍게도 그 음성은 허공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햐! 정말 놀랍군. 마법을 사용한 기척은 어디에서도 없었거늘 이렇게나 빨리 모습을 감춰버리다니." "상황을 보아 조심하는 게 상책일 듯 싶소. 벌써 여러 명의 마법사들이 발각되어 목숨을 잃었소. 그것을 보아 저들은 사람의 기척을 감지하는 데 초인적인 능력이 있는 듯 하오. 인비저빌러티(Invisibility)를 시전한 마법사들을 그리도 쉽게 찾아내다니 말이오. 만약 하이드 마나 포스(Hide mana force)를 펼치지 않았다면 우리 역시 무사하진 못했을 거요." "할 수 없는 일이지. 고국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려면 다소의 희생은 불가피한 법. 덕분에 우리는 이곳 무사들의 검술실력이 고국보다 훨씬 막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않소? 우리가 이곳에 온 지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소. 하지만 그 동안 벌써 여러 명의 마스터 급을 보지 않았는가 말이오? 그 보기 힘든 소드 마스터를 말이오." 허공에서 울리는 음성은 점차 모종의 감정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드래곤의 마수로부터 우리 대륙을 지켜내려면 어떻게 해서든 이곳에서 가장 강력한 검사를 초빙해 가야 하오. 아르카디아의 크로센 대공과 맞먹는, 아니 그를 능가하는 실력자를 말이오." "하지만 쉽진 않을 것 같습니다. 이곳의 검사들은 잔인하기 그지없는 데다 무척 호전적입니다. 대화를 위해 접근한 마법사를 가차없이 죽여버리는 것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들과 대화하기는 아마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안 되어도 해야 하오. 고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단호한 말과 함께 허공에서 몇 개의 그림자가 스르르 나타나고 있었다. 이곳에서 입지 않는 특이한 복색을 걸치고 있는 자들, 그들은 뜻밖에도 벽안의 색목인들이었다. 두건이 달린 로브(robe)로 몸을 빈틈없이 감싼 이들은 서둘러 주위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있을 지도 모르는 매복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주위에는 온통 널린 시체들 뿐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위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허연 수염을 기른,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노인이었다. 특이하게도 그는 불꽃 문양이 새겨진 신관복을 입고 있었다. "자 서두릅시다. 발각되지 않도록 인비저빌러티와 하이드 마나 포스를 또다시 메모라이즈 해야 하오." 그 말에 푸른 눈을 한 중년인이 경악해서 입을 열었다. 음성을 봐서 그가 노인과 대화를 나누던 자인 듯 싶었다. 로브를 입고 있는 것을 봐서는 마법사로 보이는 자였다. "그, 그럼 설마 저들이 싸우는 곳으로 잠입하시려는 것입니까?" "그렇소.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우리는 이곳의 검사를 포섭해서 데리고 가야만 하오." "하, 하지만 그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이미 드래곤 하트에 저장된 마나가 바닥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고, 저런 엄청난 감지력을 가진 자들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또한 우리 실력만으로 마스터 급 검사를 사로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노인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예로부터 마법사는 숙련된 검사에게 약하다는 것이 정설로 정립된 상황이었다. 캐스팅에 시간이 걸리는 마법사가 검사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마법사가 동원되어 충분히 거리를 두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대상이 마스터 급을 상회하는 검사라면 가능성은 더욱 희박한 일이었다. 아마도 마법이 실현되기 전에 목이 달아날 확률이 컸다. 하지만 그들에겐 더 이상 선택할 방법이 없었다. 이곳으로 오기 위해 이용한 드래곤 하트의 마나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는 이상 어떤 방법이라도 강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돌아갈 순 없소. 모두들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고국의 사정을 생각하시오. 모두들 힘을 냅시다." 노인의 말에 마법사들의 얼굴이 극도로 침울해졌다. 그들 모두는 경각에 달한 고국의 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서둘러 마법을 메모라이즈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기척이 드러난다면 그 즉시 죽음이란 것을 알고 있던 터라 그들의 캐스팅은 신중하고 또 신중했다. 실력이 가장 뛰어난 덕분에 메모라이즈를 가장 빨리 마친 중년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노인 역시 메모라이즈를 마치고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신성마법을 사용하는 신관이었기 때문에 그의 메모라이즈는 숙련된 마법사인 자신보다도 오히려 더 빨랐다. 잠시 머뭇거리던 중년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 데리고 갈 사람은 정하셨습니까?" 노인은 무거운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데려갈지는 생각해 본적 없지만 한 명 물색해 둔 바는 있소. 내 생각으로는 아마도 크로세르 대제에 결코 뒤지지 않는 실력자인 듯 싶소." 그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었기 때문에 중년인도 그럴 듯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이 마법사들은 하나 둘 메모라이즈를 마치고 눈을 뜨고 있었다. "으아아악." 폐부를 관통하는 듯한 처절한 비명소리. 뒤를 이어 누군가가 선혈을 왈칵 내뱉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선혈을 뱉은 자는 방금 이승을 하직한 자가 아니었다. "쿨럭. 시, 시간이 없어." 묵직한 신음소리와 함께 독고성은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방금 자신이 죽인 회의인의 심장에서 호조(虎爪)를 뽑아들었다. 강철로 된 장갑에 긴 손톱이 돋아 나와 있는 형상의 기형무기 호조. 바로 독고성의 애병이었다. 그러나 호조는 그간의 험준한 혈투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끝마디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뎌진 상태였다. 한철(寒鐵)로 만들어진 기병(奇兵)의 지금 모습을 봐서 그가 돌파해 온 길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익히 짐작이 되었다. 독고성은 시선을 돌려 이리저리 죽어있는 회의인들의 시신을 쓸어보았다. 그들은 한 때 자신의 명령이라면 화약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들 정도의 수하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 자신에게 서슴없이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그것을 봐서 총사의 그림자가 배교에 얼마나 짙게 드리워져 있는지 익히 알 수 있었다. "무서운 놈." 독고성은 점점 무거워진 몸을 억지로 이끌고 장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처, 천자혈마공이 깨어진다면 이나마 발악이라도 할 수 없을 테지." 천자혈마공(天子血魔功). 독고성을 초절정고수의 반열에 올려놓은 최강의 무공이지만 또한 그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저주받은 마공이라 할 수 있었다. 전력을 다해 몸을 날리며 독고성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찢어 죽일 놈! 감언이설로 나를 속여 천자혈마공을 연성 하게 하고 이제 와서 그 사실을 널리 퍼뜨려 나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다니." 허공에 대고 화풀이를 해 봐도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총사를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정사대전을 끝내고 수하들과 함께 당당히 배교 총단에 입성한 그 날, 승리를 축하하는 자축연자리에서 그는 그토록 믿었던 총사에게 전혀 예기치 못한 암습을 받고 치명상을 입었다. 단전이 완전히 으스러질 정도의 중상. 독고성의 처절한 도주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총단을 빠져 나올 수 있었지만 암습으로 인해 천자혈마공은 벌써 깨어지기 시작한 상태. 그나마 살아남은 수하들도 운기조식을 하는 동안 하나도 남김없이 전멸 당했다. 그들을 떠올리자 독고성의 눈에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수하이기에 앞서 전장을 전전하며 서로의 목숨을 지켜주었던 절친한 전우였기 때문이었다. "사준환 이놈. 네놈을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수풀사이로 몸을 날리는 독고성은 이를 으스러져라 악물었다. 그 때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이 독고성의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너무나도 익숙한 느낌, 바로 살기(殺氣)였다. 독고성은 달려가는 자세 그대로 손을 쭉 내밀었다. 으지직. 그를 향해 날아오던 암기 서너 개가 호조에 잡혀 으스러졌다. 독고성은 그대로 뛰어들어 호조를 냅다 휘저었다. 퍼퍼퍽. 낭자한 핏둥치와 함께 살점이 비산했다. 이미 날이 무뎌진 호조였기에 베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생살을 뜯어버리고 있었다. 서너 명의 인영이 그 자리에 꼬구라졌다. 혹독한 수련을 거친 고수였는지 죽는 순간까지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았다. 암습이 탄로나자 매복해 있던 고수들은 서슴없이 몸을 드러내어 공격을 감행해 왔다. 해골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총단 산하의 음명당 고수들 인 듯 싶었다. "흑." 독고성의 호조에 두 명의 음명당 고수가 가슴이 뚫려 쓰러졌다. 그러자 뒤에 바짝 밀착해 있던 인영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몸을 숨기고 있던 것을 봐서 아마도 암습을 준비하고 있었던 듯 했다. 그는 긴 계조겸을 휘둘러 독고성의 가슴을 노려왔다. 계조겸에 푸르스름한 강기가 맺혀 있는 것을 본 독고성은 급급히 호조에 내력을 밀어 넣었다. 이미 내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는 처지라서 계속적으로 강기를 끌어올릴 수 없는 처지. 때문에 독고성은 이렇게 필요할 때에만 강기를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챵. 공격을 막아낸 독고성이 으르렁거렸다. "보아하니 너는 음명당주 곽세기인 것 같군. 네 놈 역시 사준환의 졸개였었나?" 계조겸과 호조를 맞댄 인영은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그렇소. 교주. 이곳까지 도주해 온 것을 보니 과연 배교 제일의 고수답구려. 허나 여기서 살아날 생각일랑 꿈에도 하지 마시오. 곧 총사께서 당주들을 이끌고 달려오실 테니 말이오." 독고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호조를 휘둘러 곽세기를 공격해 들어갈 뿐이었다. 뒤이어 음명당 고수들과의 처절한 혈투가 이어졌다. 총단 제일의 정예라는 음명당의 고수들도 역시 독고성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곽세기를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면서 독고성은 음명당 고수들을 하나 하나 착실하게 죽여나갔다. 이미 전 무림이 하나가 되어 그를 뒤쫓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체할 시간이란 없었다. 전력을 다했기 때문에 접전은 그리 오래 끌지 않았다. "끄아아악." 얼굴 반쪽이 날아간 음명당주 곽세기가 처절한 비명을 질러댔다. 수련이 아무리 깊다하다 생살을 파헤치는 통증에는 저항할 수 없는 법이다. 주춤주춤 물러나던 그는 그 자리에 풀썩 쓰러져 버렸다. 그러나 그 대가로 독고성은 왼팔에 깊은 검상을 입었다. 내력이 순탄하게 이어지지 않은 때문이었다. 피를 줄줄 흘려대던 독고성은 지혈할 생각도 하지 않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한심하군. 곽세기 정도에게 부상을 입다니..." 고개를 내젓던 독고성은 가차없이 몸을 날렸다. 이미 음명당의 모든 고수들은 독고성의 손에 싸늘한 시신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죽기 전에 신호탄을 쏘아 올렸으니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떠야 했다. 독고성의 왜소한 몸은 이내 바람이 되어 장내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오래지 않아 무수한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음명당까지 전멸했는가?" 늘어져 있는 음명당 고수들의 시신들을 둘러보던 사준환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피해가 정말 만만치 않군." 기밀 엄수를 위해 사준환은 자신이 신임하는 수하들만을 추격전에 투입했다. 때문에 이들을 잃은 것이 그로써는 여간 애석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의 암습으로 인해 단전이 거의 파괴되긴 했지만 독고성의 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수호마왕군의 조력이 있었다 하나 이 정도면 가히 사람의 범주를 넘어선 초인(超人)이라고 봐야 했다. 사준환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급할 것은 없어. 어차피 놈은 단전이 반 이상 파괴당했다. 천자혈마공이 와해되면 놈은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을 터. 또한 정파나 마교 놈들 역시 눈에 불을 켜고 독고성을 추격하고 있는 마당이니 더 이상 수하들을 잃을 필요는 없다. 특히 영호명이라 했던가?' 사준환은 독고성 추적대에 가담한 정파의 젊은 고수를 떠올렸다. 강북 무림의 명가인 철검문을 맡고 있는 젊은 문주로써 검강을 구사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후기지수 제일의 고수. 독고성의 손발을 잘라놓으려는 지단 토벌작전에서 그는 정말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특히 원독에 가득한 눈빛을 줄기줄기 흘리며 독고성의 수하들을 도륙해 가는 모습에서는 도저히 정파 제자 같지 않는 독랄한 모습마저 보이던 자였다. 영호명을 떠올리던 사준환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만약 이 모든 계획이 다름 아닌 내 머리 속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된다면 과연 놈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독고성과는 달리 사준환의 외부에 대한 평판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심지어 정파에서도 정정당당하고 신의가 있는 인물로 묘사될 정도였다. 비록 사준환이 사도의 인물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것은 사준환이 심혈을 기울여 자신의 평판을 관리한 때문이었다. 모두가 효과적인 배교 장악을 위해 미리 안배한 것이지만 말이다. "전서구를 날려서 놈이 도주한 위치를 정파와 마교 추격대에 알려주어라. 쓸데없는 피를 더 이상 흘릴 필요는 없다." "알겠습니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2회 안녕하세요. 김 정율입니다. 무척 오랜만에 여러분께 잡담을 드리는군요.^^ 역시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려하니 쉽지 않습니다. 외전 작업도 해야 하고 다크메이지도 써야 하고. 신형 컴퓨터로 바꾸었다고 글이 빨리 써지는 것도 아니더군요.^^ 그리고 원고 중에 검은 사각형(……)이 간혹 뜨는데 원래는 말줄임표입니다. 한글 파일로 볼 땐 이상이 없는데 유독 통신상에만 검은 사각형으로 올라가니 저로썬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운영체계가 바뀐 탓이 아닌가 합니다. 원래는 윈98 쓰다가 지금은 xp 쓰거든요. 잘은 모르지만 한글입력 상의 오류가 아닌가 합니다. 혹시 해결방법을 아시면 좀 가르쳐 주시구요. 두 번째 작품 다크메이지를 올리는 시간은 대략 7시에서 8시 사이가 될 것 같습니다. 소엠처럼 이따금 비축분이 쌓이면 연참도 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소엠 수준을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이것말고도 할 일이 무척 많거든요. 이를테면 아기 기저귀 갈고, 목욕시키고, 이따금 칭얼대면 안아주고, 곯아떨어진 아내를 위해 청소나 설거지도 하고, 등등 말입니다. 첫 딸을 보고 나서 저도 모르게 아줌마(?)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습니다. 그만큼 아기 낳는 과정이 힘들단 뜻이지요. 그 험난한 과정을 치르고 어머니가 되신 아주머니들, 정말 존경합니다. 모두들 어머니를 존경합시다. 하하! 잡담이 길었지요.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 드넓은 평원의 끝자락, 험준한 준령으로 통하는 길목에 다수의 인영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하나같이 새하얀 백의를 걸치고 있는 자들. 한 방울의 선혈이 묻어있는 장검 문양을 가슴팍에 아로새기고 있는 것을 봐서 그들은 산서 무림의 명가인 철혈문의 문도들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같이 안광이 형형한 것이 누구 하나 고수가 아닌 이가 없어 보였다. 특히 그들 중 중앙에 서 있는 인물의 전신에서는 태산이라도 꿇어 엎드리게 할 기세가 줄기줄기 뿜어 나오고 있었다. 청년이라고 하기엔 나이가 다소 많고 그렇다고 장년으로 보기도 어려운 나이. 두터운 검미 아래에는 부리부리한 두 눈이 자리잡고 있었고 눈동자에서는 헤아리기 힘들만큼의 심유함과 함께 지혜가 빛나고 있었다. 우뚝 선 콧날과 꽉 다문 입술은 그의 의지가 얼마가 굳건한지를 모여주는 듯 했다. 그의 이름은 영호명. 당금 무림의 후기지수 중 명실상부한 최고수로 인정받고 있는 신진 고수였다. 특히 검술 방면에서 그가 이룬 경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정사 대전 중 예기치 않은 사고로 세상을 타개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젊은 나이에 철혈문을 이어받았지만 지금껏 아무 무리 없이 문파를 이끌어나갈 정도의 수완을 보유한 인재. 그런 그가 문파의 전 고수를 이끌고 이곳 적령평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호명은 실각한 배교 교주 독고성에 대해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독고성은 바로 사부를 죽인,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였던 것이다. 사부를 떠올리자 영호명의 검미가 분노로 꿈틀거렸다. "놈! 너는 결코 살아서 이 적령평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죽은 영혼까지도…." 거칠게 내뱉은 영호명은 독고성에 의해 죽은 사부를 또다시 떠올렸다. 사부와의 만남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지금의 위치에 설 가능성은 아예 없었으므로 그만큼 죽은 사부에 대한 영호명의 그리움은 지극했다. 산서의 철혈문은 원래 쾌를 추구하는 쾌검술(快劍術)로 일가를 이룬 문파였다. 빠르기로 따지자면 철혈문의 철혈검법(鐵血劍法)은 쾌검술의 대명사인 곤륜의 분광검법(分光劍法)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라고 세인들이 평한 바가 있다. 하지만 쾌검술이란 본시 현란한 검로를 이용해 상대를 현혹시키는데 주안점을 두는 검술인 법, 따라서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른 고수에게는 위력이 현저히 반감되는 법이었다. 그런 철혈검법의 단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오던 전대 철혈문주 영호충은 마침내 어려운 용단을 내렸다. 장자인 영호명을 소림사의 속가제자로 입문시키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것은 철혈문의 장래를 건 결정이었다. 철혈검법에서 최고의 약점으로 드러난 신법과 내공 면을 강화시키기 위한 고육지책. 하지만 결코 쉽다고 볼 수 없는 방법이기도 했다. 보편적으로 무림의 방파에서는 직계가 아닌 방계 제자에게는 문파의 진신절기를 전수해 주지 않는 법이다. 하물며 방계에도 못 미치는 속가제자에게 이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소림사에서 영호명은 자신과 가문의 운명을 뒤바꿀 엄청난 만남을 가지게 된다. 당시 소림사뿐만 아니라 전 무림에서 최고의 실력자로 추앙받던 절대고수 소림성승과 우연한 대면을 하게 된 것이다. "보기 드문 기재로군." 소림성승 혜정은 한 눈에 영호명의 자질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이 직접 무공을 사사하겠다고 결정했다. 당시 이 문제 때문에 소림사는 상당히 시끄러웠다고 한다. 심지어 장문인까지 나서서 혜정을 말렸을 정도였으니까. "방계도 아닌 속가 제자에게 절기를 전수하다니요." "이런 일은 지금껏 유래가 없던 일입니다. 말도 되지 않습니다 사숙." 그러나 소림성승은 소림사 안팎에서 일어나는 숱한 반발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고리타분한 문규 나부랭이 때문에 절세 기재를 이대로 썩힌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아." 장문인의 만류를 한 마디로 묵살한 혜정은 그 때부터 영호명을 직접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무려 십 오년. 자질이 뛰어난 까닭도 있었지만 무림 최고의 고수에게 사사를 받은 터라 영호명의 무공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했다. 얼마나 진전이 빨랐는지 영호명은 약관을 갓 넘긴 나이에 십 팔 나한진을 파훼할 정도로 가공할 성취를 보일 정도였다. 그때서야 영호명의 진가를 알아본 소림사에서는 그에게 속가 제일인의 명호를 내렸다. 그리고 그에게 무림에 출도하여 충분한 실전경험을 쌓을 것을 종용한다. 이후 영호명의 행로는 정말 눈부셨다. 혜정에게 직접 사사받은 심후한 내공. 뛰어난 오성으로 터득한 상승 신법에다가 철혈문의 정묘한 검법이 결합되어 영호명은 이미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절세 고수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당시 세상을 어지럽히던 사파의 마두들은 영호명 이름 석자에 하나같이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그에 의해 처단된 마두들은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 산서의 음양쌍마. 청해의 혈발귀. 동정호의 묵룡지주. 애송이라 깔보며 덤벼들던 강호의 흉마들은 영호명의 살생부에 어김없이 이름을 등재하는 처지가 되며 허무하게 스러졌다. 그러기를 얼마간, 욱일천승하던 영호명에게 느닷없이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자신에게 헤아릴 수도 없는 은혜를 베푼 소림성승이 그만 암습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이었다. 영호명은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소림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부의 처참한 시신 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맹세했다. "사부님. 이 영호명 무슨 일이 있더라도 흉수는 제 손으로 처단하여 사부님의 영전에 올리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바램은 쉬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배교 총단 속에 꽁꽁 틀어박혀 있던 흉수에게 접근할 도리가 없었거니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사대전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영호명은 지체 없이 정사대전에 참가했다. 막강한 무공으로 말미암아 어렵지 않게 호천수호단(백도의 신진 고수들로 이루어진)의 단장으로 임명된 영호명은 정사대전에서 정말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마교 고수들조차 영호명이 이끄는 호천수호단과 맞닥뜨리는 것을 꺼릴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영호명에게 불운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배교와의 접전에서 철혈문을 이끌고 선봉에 섰던 아버지 영호충이 난전 중에 그만 전사하는 비보가 전해진 것이다. 거듭되는 불행. 하지만 영호명의 용기는 거기서 꺾이지 않았다. 호천수호단의 단장직을 사임한 영호명은 철혈문으로 돌아가 신임 문주 위에 오른다. 그리고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자마자 철혈문도들을 이끌고 다시금 정사대전에 참가했다. 배교에서 전대 교주의 아들인 독고성을 신임교주로 삼았다는 소식이 전해진 때문이었다. "사부님, 그리고 아버지의 원수는 분명 독고성이다. 이 혈채는 필히 받아내고야 말 것이다." 정사대전 중 영호명은 눈에 불을 켜고 독고성을 노렸다. 하지만 천자혈마공을 익히고, 또한 배교 제일의 정예라 일컫는 수호마왕군을 이끌고 있는 독고성에게 접근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독고성의 자질은 영호명에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여서 혈전을 거듭하면서 그는 끝없이 강해져 갔다. 하지만 영호명은 끈기 있게 그를 척살할 날만을 기다렸다. 그리하여 이런 절호의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놈의 수족은 하나도 남김 없이 잘렸다. 드디어 놈의 수급을 잘라 사부님과 아버님의 영전에 바칠 수 있을 것이다." 정사대전을 통해 드러난 독고성의 무공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후기지수 중 제일의 실력을 갖춘 자신이라 할지라도 감히 이긴다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영호명에게 걱정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소림사의 장문인으로부터 이미 독고성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비책을 전해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떠올린 영호명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놈! 이번만은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독고성을 기다리며 상념에 잠겨 있던 영호명은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추적대로부터 들어온 급보입니다. 놈은 교활하게도 포위망을 뚫고 천령산 산자락으로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서 무당파 고수 삼십여 명이 참살을 당했다고 전해졌습니다." 깜짝 놀란 영호명은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 "이런, 추적이다. 당주들은 수하들을 통솔해서 모두 천령산으로 올라라. 놈을 잡는 것은 필히 우리 철혈문이 해 내야 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철혈문도들은 일사분란하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봐서 그들이 이 젊은 문주를 얼마나 따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천령산을 뛰어오르며 영호명은 으스러져라 이를 악물었다. "놈은 반드시 내 손에 처단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저승에 계신 사부님과 아버님께서 한을 푸실 수 있을 것이다." "흐윽." 가슴을 관통 당한 회의인이 검을 떨구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것도 잠시 가슴속을 파고든 호조가 심장을 움켜쥐어 터뜨려버리자 회의인은 삽시간에 절명하여 고개를 꺾었다. "헉, 헉" 쓰러지는 회의인의 가슴에서 호조를 꺼낸 독고성은 점차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추슬렀다. 이미 몸은 결코 정상이라고 볼 수 없는 상태,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로 혈인(血人)이 되어버린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장장 사흘을 이어간 혈투. 잠을 못 잔 것은 물론이오 물을 제외하곤 쌀 한 톨조차 입에 넣지 못했다. 이미 기혈은 엉킬 대로 엉켜버렸고 몸은 푹 젖어버린 솜뭉치처럼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이대로 생을 마감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지만 독고성은 꾹 참고 몸을 날렸다. 적어도 이대로 죽어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가는 진로의 수풀 속에서 느닷없이 검이 쑥 튀어나왔다.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독고성은 그대로 어깨를 내밀었다. 푸슉.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에이는 듯한 통증이 어깨에서 전해졌다. 더 이상 흘러나올 피가 없었는지 출혈은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검을 쥐고 있는 그림자가 움찔하는 순간 독고성의 신형은 그림자들 사이를 뚫고 바람처럼 지나갔다. 퍼퍼퍽. 그 뒤로 생을 마감한 그림자들이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공격이 적중했다고 방심한 사이 독고성의 반격이 가차없이 그들의 명줄을 끊어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검에 독을 묻어 있었는지 독고성은 어깨가 점차 마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교 놈들인가? 음살대 놈들이 아마도 검에 독을 바른다지. 아마?" 범인이라면 벌써 백 번은 죽었어도 모자랄 상처. 그런 부상을 입고서도 독고성의 어조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어찌 보면 이미 생사를 초월한 상태라 볼 수 있었다. "후회는 없다. 이미 권력의 정점에 한 번 올라본 이상 여한 따윈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그놈, 사준환만은 용서할 수 없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3회 먼저 하이텔 김 정진님의 지적에 감사 드립니다. 정진님의 말씀대로 분광검법은 점창의 것이 맞군요.^^ 사일검법과 함께 그 유명한 점창의 분광검법을 착각하다니 이런 실수가…….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통신연재를 하는 보람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퇴고한다고 노력하건만 저도 알아차리지 못한 잘못을 역시 독자들이 예리하게 지적해주시는군요. 그럼 독자여러분의 많은 비평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서서히 포위망을 구축해 가는 마교 고수들을 보며 독고성은 어금니를 지긋이 깨물었다. '내 몸이 정상이라면 한 번 해 볼 만 하다. 하지만 이미 나는 싸울 수 있는 몸이 아니니…….' 하지만 싸워야한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독고성의 머리는 원활히 움직였다. '방법은 오직 하나, 남은 진원진기를 하나도 남김없이 불태워야 한다. 그것으로 천자혈마공의 최후초식 천마혈세(天魔血世)를 시전한다면 위청은 모르지만 휘하 고수들은 모두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행로가 결정되자 독고성의 몸은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전장에서 갈고 닦은, 죽이지 않으면 도리어 자신이 죽는다는 원칙에 따라 독고성은 얼마 남지 않은 내력을 깡그리 끌어 모아 선제공격에 나섰다. "흠. 아무리 보아도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강한 자로군. 그 많은 검사들을 도륙하고도 아직 힘이 남아있으니……." "그가 죽인 자들 중에는 마스터 급도 여럿 끼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아 저자는 아마도 말로만 듣던 그랜드 마스터 급이 틀림없습니다. 저 정도라면 충분히 크로센 대제에 비견할 수 있는 검사입니다. 이곳 무사들의 수준은 정말 놀랍군요." "어떻게 해서든 저자를 우리 대륙으로 데리고 가야만 하오. 그것만이 풍전 등화의 위기에 놓인 우리 트루베니아 대륙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능력으로 어떻게……." 허공에서 울려 퍼지는 음성에는 곤혹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해야 하는 일이오. 그런데 드래곤 하트의 마나는 얼마나 남았소?" "마나 소모량이 상상 이상입니다. 제 계산으로는 앞으로 서너 시간 남짓 지탱할 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돌아가기 위해선 이곳으로 올 때 사용한 마나보다 족히 열 배 이상의 마나가 소모됩니다. 최악의 경우 돌아갈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큰일이구려. 어떻게 해서든 저자를 회유해서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할 터인데." "사태를 조금 더 관망하시지요. 상황을 보아 저 무사가 쉽사리 당할 듯 보이진 않습니다." "그럽시다. 우리 모두가 이곳에 남는 한이 있어도 저 자를 필히 데리고 가야 하오." "그래야지요."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위청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져 있었다. 마교의 호법원 장로로써 공식 서열 육 위의 위치에 있는 최절정 고수인 쌍수마존(雙手魔尊) 위청이 이런 놀란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평소 정력(定力)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정평이 있었기에 그가 이처럼 놀란다는 것은 지금 그의 예상을 송두리째 뒤엎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크아아악." 그의 주위에서는 비명소리가 연신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곳으로 온 자들은 모두 실력이 검증된 마교 본단의 고수들. 그런 고수들이 너무도 어이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을 죽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핏빛 안개였다. 거기에 접촉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기혈이 터져 나가며 생을 마감하고 있는 것이다. 찰나지간 위청은 원로원의 예측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엄선된 본단 고수들이 저처럼 맥없이 죽어갈 이유가 없었다. "말로만 들었던 천자혈마공의 위력이 이런 것이었나?" 핏빛 안개를 따라다니며 연신 도를 날려보았지만 걸리는 것은 공허한 감각뿐이었다. 마치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하는 듯한 모습. 위청이 우왕좌왕 하는 사이 본단 고수들은 쉴 새 없이 죽어 넘어지고 있었다. "캬아아악." 마지막 고수가 거꾸러지고 나서야 핏빛 안개는 점차 흩어지고 있었다. 안개 사이로 드러난 것은 바로 독고성의 모습이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 마치 강시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독고성은 스르르 고개를 돌려 위청을 쳐다보았다. 야차 같은 모습에 위청은 절로 오한이 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독고성이 위청을 향해 걸음을 막 내딛는 순간. "허억." 짤막한 신음과 함께 독고성의 무릎이 힘없이 꺾여졌다. 풀썩 쓰러진 독고성은 거센 기침과 함께 쉴새없이 선혈을 내뱉었다. 토해낸 핏덩어리 사이에 내장 조각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내부가 완벽히 으스러진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독고성의 상태를 파악하자 위청은 그때서야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내심 조금 전 보았던 독고성의 분전이 새삼 이해가 가는 위청이었다. "대단하시오. 독고 교주. 진원진기까지 모두 소진해 가며 최후의 발악을 시도하다니……." 진원진기를 소진하는 것. 이것은 시전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진원진기란 무공을 익히는 순간부터 차곡차곡 모으기 시작하는, 다시 말해서 무인이 이룩한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보편적인 무인은 생의 마지막을 맞는 순간까지도 진원진기를 소진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절정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면 시전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보편적으로 무인들은 자신이 성취한 무공을 생명 이상으로 아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진원진기까지 아낌없이 소진해가며 저항하는 것을 보니 독고성의 삶에 대한 집착이 어느 정도인지 익히 짐작이 가는 위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에 젖을 상황이 아니었다. 위청은 시커멓게 변한 양손에 강기를 밀어 넣으며 쓰러져 있는 독고성에게 다가갔다. "교주의 끝없는 투지에 찬사를 보내오. 하지만 나로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구려. 진원진기를 모두 소진한 이상 이제 교주에겐 손가락 까닥할 힘조차 없을 터. 교주에게 무인으로써의 최후를 맞도록 해 주겠소. 이것이 내가 교주에게 바치는 마지막 배려이오." 독고성의 앞에 선 위청은 쌍수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상대는 이제 무공을 완전히 잃었다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위청은 추호도 경계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어이없이 생을 마감할 줄은 위청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독고성의 눈에서 빛이 급격히 일어났다. "에잇." 앉은 자세 그대로 손이 앞으로 쭉 내뻗어졌다. 연이은 격전으로 인해 형체도 알아볼 수 없던 호조에서 느닷없이 눈부신 광채가 폭사되었다. "헉." 막 장도를 내려치려던 위청은 혼비백산했다. 호조에 전혀 예상 못한 암기가 장치되어 있다니……. 급급히 호신강기를 끌어올려 가슴을 보호한 위청은 발을 날려 독고성의 가슴팍을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퍽. 암기 따위는 호신강기를 결코 뚫지 못하리란 자부심 때문에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 하지만 그 방심이 생과 사를 여지없이 뒤바꾸어 놓았다. 호조에서 발사된 암기는 호신강기를 유유히 뚫고 들어와 위청의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섬뜩한 느낌이 심장을 파고드는 것을 느낀 위청은 묵직한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컥. 이, 이것은." 위청의 전신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상대가 발사한 것은 한낱 암기가 아니었다. 다름 아닌 전문적으로 호신강기를 파훼하는 신기(神器)였던 것이다. 잠깐의 방심에 의해 생을 마치게 되다니, 그것은 자신의 자부심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발길질에 저만치 날아가 나동그라진 독고성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자 위청은 더욱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어떻게? 설사 곰이라고 해도 일격에 절명시킬 경력을 실었건만……." 겨우 겨우 몸을 일으킨 독고성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가슴 부위의 옷자락이 부스러지며 속에 숨어있던 엄심갑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주인을 지켜내는데 모든 힘을 소진했는지 엄심갑은 독고성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힘없이 부서지며 떨어져 내렸다. 독고성은 쓸쓸한 표정으로 손에서 호조를 풀어내어 멀리 던져버렸다. 얼굴이 파리한 것이 핏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거센 기침을 토해내며 겨우겨우 말을 이어나갔다. "저, 절맥투심정이오. 아시다시피 호, 호신강기만을 전문적으로 파훼하는 다, 당문의 명품이지. 정사대전 중 주, 죽인 당문의 고수로부터 습득한 것이라오. 만일을 위해 호조에 장착해 두었는데 이렇게 요, 요긴하게 쓰일 줄은 몰랐구려. 그리고 이 엄심갑은 우리 수호마왕군이면 기본적으로 착용하는 호신구라오. 만년한철로 만들어져서 다소 무겁긴 하지만 방어력 하나만은 호신강기에 버금갈 정도지." 금방이라도 떠나갈 듯한 의식을 추스르며 위청은 쥐어짜듯 내뱉었다. "도대체 그토록 생에 집착을 보이는 이유가 뭐요. 나 같으면 벌써 삶을 포기했을 텐데." 독고성의 얼굴에 어린 수심이 더욱 깊어졌다. "당신은 알지 못할 것이오. 믿었던 수하에게 정말 철저히도 우롱당했던 나날들. 그 앙갚음을 하기 전에는 도저히 세상을 떠날 수 없음이오." 원하는 대답이었는지 아닌지는 몰랐지만 위청은 그 말을 들을 수 없었다. 혼백이 떠난 육신은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법이었으니까. 꼿꼿이 선 채 생을 마감한 위청의 시신을 힐끗 쳐다본 독고성은 다시금 몸을 날리려고 했다. 이미 도망칠 생각은 버린 지 오래였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자진(自盡)하는 것뿐이었다. 그 때문에 천령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이곳까지 도주해 오지 않았던가? 조금 떨어진 곳에는 끝이 보이지도 않는 천장단애가 위치해 있었다. 그곳까지만 간다면 한 많았던 생애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처참하게 망가진 육신은 이미 그의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기어서라도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만신창이가 된 팔 역시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자력으론 단 한 자도 움직일 수 없었던 상태. 결국 독고성은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별빛이 눈이 시릴 정도로 파고들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이대로 끝나버리는가?" 이제 저항을 시도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위청과 수하들을 처리하느라 진원진기를 남김없이 소모해 버렸기 때문이다. 천자혈마공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몸에는 단 한 올의 내공도 남아있지 않았다. 갈가리 찢겨진 단전에서는 이제 통증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말 그대로 완벽히 파괴된 육신. 큰 대자로 드러누운 독고성은 갑자기 안면근육을 푸들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독고성아. 독고성아. 네 인생도 무척 기구하구나." 생각해보니 세상에 자신만큼 불행하게 살다 가는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거지도 침을 뱉을 정도의 추악한 외모에다 허리 똑바로 펴고 하늘도 볼 수 없는 꼽추인 것도 모자라서 사파 거두의 아들로 태어난 죄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멸시와 수모를 겪었던 어린 시절이 정말 한스럽기만 했다. 이런 신세를 벗어나기 위해 그토록 죽을힘을 다해 무공 연마에 몰두했건만 결국은 철저히도 이용당하는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니……. 숙명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생을 마쳐야 한다는 생각에 하늘이 정말 원망스러웠던 독고성이었다. 눈을 뜨고 하늘을 똑바로 쳐다보며 독고성은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위청. 당신은 아마도 내가 죽인 마지막 사람이 되겠구려." 천자혈마공이 깨어진 이상 소림성승의 시술은 다시 발동될 것이다. 천자혈마공에 의해 오랜 시간 억눌렸던 만큼 칠종단금술의 위력은 더욱 배가되어 있을 터 그는 이제 더 이상 살심을 불러일으킬 수 없을 터였다. 다시 말해 두 번 다시 살인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제 내겐 아무런 능력이 없다. 심지어 갓난아이도 죽일 수 없을 만큼." 비록 무공은 사라졌지만 전장에서 갈고 닦은 감각만은 사라지지 않은 듯 했다. 그를 노리고 수많은 인영들이 접근하는 기척이 느껴지니 말이다. 필시 자신을 척살하기 위한 추적대리라. 독고성은 생을 완전히 포기한 채 눈을 꼭 감았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4회 사준환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독고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배교 고수들이 시립해서 한 때 그들의 교주였던 자의 최후를 감상하려 하고 있었다. 이미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렸는지 독고성은 눈을 꼭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미 사준환은 독고성의 몸에 일말의 내력도 깃들어있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독고성의 핏기 없는 얼굴을 힐끗 응시한 사준환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언뜻 놀라움이 스쳐지나갔다. "대단하군. 마교 장로인 쌍수마존과 함께 본단 고수 삼십여 명을 도륙하다니..." 물론 위청에게 독고성의 도주 경로를 누설한 것은 바로 사준환이었다. 어차피 죽여야 할 자이긴 했지만 한 때 절대자였던 독고성이 정파 고수들의 손에 척살된다는 것은 배교로써는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 분명했다. 그 때문에 사준환은 정파 추적대에게 거짓 정보를 흘렸다. 그리고 위청을 비롯한 마교 추적대에만 독고성의 정확한 도주경로를 알려 주었다. 마교의 손을 빌려 암암리에 처리하려 하는 것이 바로 사준환의 속셈. 하지만 저들이 독고성의 손에 의해 전멸 당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마교 공식 서열 육 위의 위청이라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일대 일로 겨룬다면 설사 자신이라 하더라도 섣불리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고수였다. 그런 절세의 고수를 몸도 성치 않은 상태에서, 그것도 휘하의 정예 고수들과 함께 고스란히 몰살시키다니. 독고성에 대한 경외심이 절로 배어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상대를 살려줄 순 없었다. 자신이 배교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존재가 바로 독고성이기 때문이다. 사준환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독고성에게 고즈넉이 말을 걸었다. "능력이 가상하긴 하군. 정말 아까워. 만약 교주가 조금만 어리석었더라도 난 당신을 살려두었을 것이오." 사준환의 음성을 들은 독고성의 왜소한 몸이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그것 뿐, 독고성은 눈을 꼭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제 난 당신을 참수할 생각이오. 당신의 목을 총단의 성문에다 효수하여 완벽히 배교를 장악하는데 자양분으로 삼을 생각이니 말이오." 사준환은 뒤를 돌아보며 힐끗 눈짓을 했다. 그러자 회의를 걸친 두 명의 무사가 검을 뽑아들고 독고성에게로 슬그머니 접근했다. 저항할 뜻이 전혀 없는 상대의 목을 베기 위해 말이다. 그 때 이변이 일어났다. "큭." 다가서던 무사들이 갑자기 고통에 겨운 비명을 지르며 검을 떨어뜨렸다. 어깨를 움켜쥔 손가락 사이에서 피가 줄줄 배어 나왔다. 그와 함께 뒤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음성. "과연 조호이산지계였군. 그깟 졸렬한 책략으로 나 영호명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았소?" 수풀을 헤치고 일단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슴에 검을 아로새긴 철혈문의 고수들. 그들의 앞에는 영호명이 버티고 서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독고성을 직시하고 있었다. "이런." 영호명의 등장을 보자 사준환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별달리 반갑지 않은 상대가 최후의 순간에 딴지를 걸고 나선 것이다. 잠시 독고성을 노려보던 영호명은 사준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자의 목숨은 이미 내 것이라 천명한 바 있소. 어떤 일이 있어도 양보할 수 없음을 밝히는 바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에서는 추호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개가 엿보였다. 하지만 순순히 물러설 수 없었기에 사준환은 안색을 굳히고 앞으로 쓱 나섰다. "자네의 원한이 얼마나 큰 지는 나 역시 잘 알고 있네. 하지만 그는 한 때 우리의 절대자. 우리에겐 그의 명예를 지켜 주어야 할 책무가 있다." 사실 독고성의 누구의 손에 죽는가 하는 문제는 사준환에게 하등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문제는 배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하급 교도들의 사기였다. 만약 독고 교주가 정파 인물의 손에 의해 참수된다면 그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배교의 장악을 꿈꾸고 있는 사준환으로써는 독고성을 넘겨주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영호명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명예? 웃기는 소리로군.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작자에게 무슨 얼어죽은 명예." 냉랭하게 코웃음을 친 영호명은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예기를 뿌리는 검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내 앞길을 막는 자는 베고 지나갈 수밖에 없소." 그 기세에서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기개가 물씬 풍겨났다. 그 모습을 본 사준환은 혀를 끌끌 찼다. '골치 아프군. 놈이 쉽게 물러날 리가 없으니.' 영호명이 데리고 온 철혈문의 고수들은 하나같이 쾌검술의 달인들이다. 비록 자신이 배교의 정예들을 대동하고 있다고는 하나 쉬운 싸움이 될 리는 없었다. 더욱이 하등 쓸데없는 일로 수하들을, 그것도 무의미하게 잃는 일이 사준환의 성미에 맞을 리가 없었다. 그는 결국 한 발 양보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한 가지 조건을 내걸은 것은 사준환의 몸에 밴 오랜 습관이었다. "좋다. 그렇다면 전대 교주 독고성의 처형을 네게 맡기겠다. 하지만 그의 수급만은 우리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영호명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 수도 없소. 나는 이미 놈의 수급을 사부님과 아버님의 영전에 바치기로 맹세한 몸이오. 머리통을 잃은 몸뚱이라면 무방하지만 수급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양보할 수 없소." "그건 나도 허락할 수 없다. 독고 교주의 처형을 맡긴 것만도 우리로써는 크게 양보한 것이다." 사준환과 영호명은 독고성의 수급을 놓고 치열하게 설전을 벌였다.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는 사람을 두고 말이다. 눈을 감은 채 대화를 듣고 있던 독고성은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자신을 이미 죽은 시체로 간주하고 서로 차지하겠다고 저렇게 난리를 부리고 있으니... 마치 시장 좌판에 놓인 썩은 생선처럼 말이다. "이익." 부아가 치밀어 오른 독고성은 눈을 뜨며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조금 쉰 때문인지 겨우겨우 몸을 일으킬 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철혈문 고수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놈이 일어났습니다." 그 소리에 중인들의 시선이 독고성에게로 일제히 집중되었다. 하나같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오른 고수들. 뛰어난 이목답게 독고성의 상태를 한 눈에 파악하고 있는 바, 별다른 경계를 하진 않았지만 만에 하나 있을 도주를 막기 위해 몇 몇 배교 고수들이 몸을 날려 독고성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독고성의 예리한 눈은 조금 떨어진 낭떠러지를 용케 찾아낼 수 있었다. 그가 목표했던 바로 그 천장단애였다. "크크큭. 내가 순순히 네놈들의 의도에 따를 성 싶으냐." 독고성은 사력을 다해 절벽으로 몸을 움직였다. 다리가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였기에 그는 두 손만으로 죽을 힘을 다해 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사준환과 영호명의 치열하던 설전이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 이미 독고성의 명줄을 영호명이 끊기로 약조한 만큼 일단 처치해 놓고 다시 대화를 시작하기로 암묵적으로 묵계가 이루어졌다. "잡아라." 둘의 입에서 명이 떨어지자 그곳에 있던 고수들은 독고성을 목표로 일제히 몸을 날렸다. 상승 신법을 구사하는 고수들인 만큼 단 몇 번의 도약으로 독고성이 있는 곳으로 도달할 수 있었다. 한 철혈문 고수가 날랜 동작으로 독고성의 뒷덜미를 잡아갔다. 상대의 몸 상태를 알고 있는 이상 그는 아무런 경계심도 가지지 않았다. "헉." 손을 뻗던 철혈문 고수는 혼비백산했다. 그저 열심히 기고 있던 것으로 보이던 목표물이 느닷없이 몸을 돌리며 예기를 발하는 무언가를 집어던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급급히 검을 뽑아 날아오는 것을 쳐냈다. 챵. 회피동작을 취한 다음 반격을 가하는 것은 그들 정도의 고수들에겐 몸에 완전히 익은 동작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발차기로 독고성의 아래턱을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퍽. 독고성의 왜소한 신형이 마치 실 끊어진 연처럼 훨훨 날아올랐다. 마치 반발력을 이용하기라도 하듯 너무도 힘없이 퉁겨진 것이다. "아차." 검에 맞고 두 조각이 되어 떨어진 것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반지였다. 비로소 자신의 실책을 눈치챈 철혈문 고수는 이를 갈며 몸을 날렸다. 뒤를 추적하던 고수들이 각종 암기를 발사하는 기척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큭." 천운인지 독고성의 몸은 절벽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쳐 박혔다. 척추를 관통하는 듯한 고통을 느낄 여지도 없이 독고성은 반사적으로 몸을 굴렀다. 마치 그 자리에서 생겨난 것처럼 땅바닥에 푹푹 박히는 암기들. 그중 몇이 독고성의 몸에 적중했지만 이미 그의 육신은 통증을 느끼지 못한 지 오래였다. 독고성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데굴데굴 구르는데 사력을 다할 뿐이었다. 그 때 뒤에서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놈이 그토록 쉽게 자진(自盡)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것이 영호명이 지른 호통소리란 것을 눈치챌 여지도 없이 갑자기 허전한 감각이 온몸으로 전해져왔다. 사력을 다한 끝에 마침내 절벽에 도달했던 것이다. 허공으로 떠버린 독고성의 몸은 그대로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그의 핏기 없는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잘 들 있게나. 내 삶은 내가 결정할 테니..."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머리통이 송두리째 뽑혀나가는 감각과 함께 몸이 갑자기 낙하를 중지한 것이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독고성은 흐릿한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칼을 굳게 움켜쥐고 있는 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예상대로 자신을 붙잡은 자는 영호명이었다. 그것을 확인하자 독고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바짝 말라버린 입술이 벌어지며 무미건조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그토록 내 목을 자르고 싶나?" "두말하면 잔소리." 간발의 차이로 독고성을 붙잡는데 성공한 영호명은 힘을 주어 그의 몸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의 반대쪽 손은 절벽의 바위를 마치 두부처럼 파고 들어가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임기응변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영호명 역시 천장단애에서 추락하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을 터, 곧 철혈문 고수들이 그의 팔을 잡고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 때 뭔가가 끊어지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투두두둑. 영호명의 안색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이, 이런 빠, 빨리 나를 끌어올리시오." 조급한 심경을 대변하듯 철혈문 고수들의 움직임이 다소 빨라졌다. 하지만 영호명의 손을 통해 계속적으로 뭔가가 끊어지는 감각이 전해져왔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아차린 영호명은 순간적으로 힘을 주어 독고성을 잡아챘다. "에잇." 머리털이 모두 뽑히기 전에 그의 몸을 절벽 위로 던져 올리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손에서는 허전한 감각만이 전해져왔다. "이런." 뽑힌 머리칼 한 줌을 움켜쥐고 영호명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독고성의 머리칼이 잡아채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몽땅 뽑혀버린 것이다. 당연한 말로 만신창이가 된 독고성의 몸은 끝없는 천장단애 아래로 추락을 시작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영호명의 시선이 떨어져 내리는 독고성의 얼굴에 가서 꽂혔다. 그의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목격하자 영호명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놈! 죽지 말아야 한다. 너는 기필코 내 손에 죽어야 한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독고성의 얼굴에 맺힌 미소가 다소 짙어졌다. 감정이 격양된 자신도 모르게 천장단애에서 뛰어내리려 했다. "안 됩니다. 주군." 하지만 철혈문 고수들의 만류로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절벽에서 추락한다면 그가 아무리 절세 고수라고 하더라도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사부의 원수를 직접 갚지 못한 허탈감으로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눈은 다시금 이글이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지옥 끝까지도 추적할 것이다. 이미 죽었더라도 상관없다. 기필코 네놈의 수급을 떼어내어 사부님과 아버님의 영전에 올리고 말 것이다." 단호하게 내뱉은 영호명은 휘하고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난 절벽 아래로 내려가서 놈의 수급을 수습할 생각이오. 그러니 나머지 문도들은 당주들의 지휘 하에 문으로 돌아가도록 하시오. 대신 무공이 뛰어난 용호대(龍虎隊)만 내 뒤를 따르도록 하시오." "넷. 주군." 영호명의 서슬 퍼런 명령에 철혈문 문도들은 곧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준환은 혀를 끌끌 찼다. "저토록 원한이 깊었었나?" 이제 그가 할 일은 끝났다. 천장단애로 다가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본 사준환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 정도 높이라면 설사 놈이 성한 몸이라 하더라도 무사하진 못했을 것이다." 구름으로 가려질 정도로 높이를 짐작할 수 없는 절벽이었다. 이제 독고성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접어버린 사준환은 고개를 돌려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배교 고수들을 쳐다보았다. "철수한다." 수하들이 철수준비를 하는 것을 지켜보며 사준환은 만면 가득히 미소를 떠올렸다. 그것은 곧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너털웃음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제 나의 천하는 시작될 것이다. 전 무림을 일통하려는 나의 원대한 포부는 배교를 발판 삼아 시작될 것이다." 험준한 천령산의 봉우리는 곧 사준환이 터뜨리는 광소로 인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5회 그 무렵 독고성의 몸은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무릇 사람이 높은 절벽에서 떨어질 때에는 바닥에 부딪혀 몸이 박살나기 전에 이미 숨이 끊어지기 마련이다. 대기와의 과도한 마찰, 그리고 극한으로 치밀어 오르는 공포심 때문에 심장이 대번에 멎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독고성은 아직 절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입가 가득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다는 데 대한 안도감 때문이었다. 지금껏 철저히 안배된 계산에 살아온 인생, 그 삶의 마지막만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독고성의 입가에 맺힌 미소의 의미였다. "한 많았던 생애 이렇게 끝내는 것도 나쁘진 않군." 점점 의식이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저승이 어떤 곳인지 알 순 없지만 최소한 이곳보다 못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지금껏 살아온 생애를 조명해 보자니 결코 천국에는 갈 수 없을 듯 싶었다. "지옥이라." 독고성은 점차 멀어지려는 의식을 한껏 추슬렀다. 생의 마지막 순간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때 아릿하던 시선에 무언가가 잡혔다. "헉." 독고성은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놀랐다. 누군가가 그의 곁에 바짝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와 함께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 일순 영호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끄, 끈질긴 놈."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인영은 추락하는 것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존재는 마치 날개가 달린 새처럼 공중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와중에도 독고성은 존재의 정체를 샅샅이 살폈다. 우선 이곳에서 본 적이 없는 기이한 복색, 두건으로 반쯤 가린 얼굴은 결코 중원인의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영호명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이 새처럼 공중을 날아다니다니... 믿을 수 없어하는 독고성의 귀에 비행인(飛行人)이 발한 듯한 일성이 들어왔다. "리버스 그래버티(重力逆轉)" '리버..뭐? 무슨 뜻이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독고성의 몸이 추락하던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무릇 빠른 속도로 달리던 물체가 갑자기 정지하게 되면 그 충격은 결코 적지 않은 법. 독고성은 그만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혼절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누군가가 자신을 안아드는 감촉만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천사(天使)인가?' 그 생각을 끝으로 독고성의 의식은 깊은 나락 속에 빠져 들어갔다. "다행이군." 간발의 차이로 목표물을 손에 넣은 벽안의 중년인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비록 목표물이 시체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처참한 상태였지만 그에게는 충분히 목표물의 목숨을 유지시킬 능력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베니테스. 이곳에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다른 차원, 그곳에 존재하는 대륙에서 최고위급의 마법사로 인정받던 터라 가능한 일이었다. "힐링." 짤막한 외침과 함께 그의 손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졌다. 중원에서는 단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술법인 힐링 마법에 의해 생겨난 빛은 참혹한 형상의 목표물을 한 바퀴 휘감더니 그의 몸 속으로 흡수되어 들어갔다. "일단 응급처치를 했으니 빨리 마법진으로 돌아가자." 베니테스는 재빨리 캐스팅에 나섰다. 목표물의 무게 때문에 점점 낙하를 시작하고 있던 몸이 급격히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공간이동마법을 시전하는 것이 안전하겠지만 마나의 소모가 극심한 관계로 도저히 그럴 여력이 없으니..." 마치 새처럼 하늘을 날아가며 베니테스는 정말 이 일이 천운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이곳의 무사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검술실력을 지녔다. 때문에 이곳의 인물을 자신이 살던 세상으로 데리고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말이 통하지 않아 설득할 재간이 없었으며 요행히 의사를 전한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의도에 순순히 따를 지는 미지수였다. 또한 그만큼의 검술실력이 있는 자라면 이곳에서도 분명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고 있을 터, 솔직히 자신들을 따라나서는 것은 기대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그들은 우연히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엄청난 검사를 보게 되었으니... 자신의 품에 안긴 왜소한 체구를 가진 인물은 타 차원의 인물인 자신들이 보기에도 무척 추악한 모습을 한 사내였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 수많은 무사들에게 쫓기고 있던 인물. 하지만 그의 활약상을 본 이후 베니테스는 단번에 그 사내의 실력에 매료되어버렸다. 소드 마스터. 자신들이 살던 곳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은 궁극의 무예가가 이곳에는 무수히 존재했다. 선렬한 빛을 발하는 오러 블레이드(검기)의 모습에서 베니테스는 그들이 소드 마스터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소드 마스터라면 능히 근위 기사단에 들 수 있을 정도로 대우받았으며 또한 그만큼 귀한 존재였다. 때문에 제법 세력이 있는 영주들은 소드 마스터를 휘하에 끌어들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을 정도였다. 허나 이곳에는 그런 귀한 존재가 널려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 자신의 품속에 안겨 있는 사내는 그런 무수한 소드 마스터들을 마치 무 베듯 우수수 쓰러뜨려 버린 것이다. 베니테스가 보기에 사내는 말 그대로 전신(戰神)이었다. 자신의 세계로 온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순식간에 절대자가 될 수 있을 듯한 무서운 실력자. 특이하게도 그 사내는 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마치 손톱이 길게 난 건틀릿 같은 기형 무기를 사용했다. 하지만 그 실력에는 소드 마스터조차 저항할 수 없었다. 때문에 베니테스는 잠정적으로 사내를 점찍을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쫓긴다면 필시 이곳에서 중대한 죄를 지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회유해 볼 여지는 충분하다." 그 때부터 베니테스는 사내의 뒤를 바짝 추적했다. 오로지 사내에게 말을 붙여볼 틈을 엿보기 위해. 통역 마법이 통할 지는 미지수였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기에 베니테스는 줄기차게 사내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가 말을 걸 기회는 여간해선 오지 않았다. 그만큼 사내는 쉴 틈도 없이 접전을 치러나갔기 때문이다. 무수한 검사들이 그의 무기 아래 피를 뿌리며 쓰러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덤벼드는 검사들은 끝이 없었다. 그러던 중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 인간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살육전을 전개해 나가던 사내가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든 순간이 왔던 것이다. 자신들을 포위한 적들 앞에서 사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그가 절벽에서 몸을 날렸을 때 베니테스는 자신에게 두 번 다시 찾아볼 수 없는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친다면 기회는 없어." 그는 지체 없이 공간이동의 술(術)을 시행했다. 정확한 좌표를 몰랐기에 어림짐작으로 시행한 위험천만한 방법. 다시 말해 하나의 도박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시도였지만 신의 돌보심이 있었는지 도박은 다행히도 성공했다. 떨어져 내리는 사내의 옆에 베니테스는 무사히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에는 궁정 마법사 베니테스가 익힌 고위급 마법의 정수가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리버스 그래버티로 사내가 떨어지는 속도를 감소시킨 뒤 에이비에이션(비행마법)을 조정해가며 사내를 안아든 것은 어지간한 마법사는 꿈도 꾸지 못할, 차라리 곡예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고 난이도의 기술이었다. 날아가던 와중 베니테스는 슬쩍 고개를 내려 사내의 얼굴을 응시했다. 얼굴이 절로 찡그려질 정도로 추악한 외모였지만 베니테스에겐 이 세상 어떤 사람보다도 믿음직스러웠다. "그가 부디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할 텐데." 일단 그가 정신을 잃은 틈을 타서 자신들이 살던 곳으로 데려간다면 그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터. 베니테스는 속력을 더욱 올려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온통 수목으로 둘러싸인 계곡. 그곳에 서너 명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검은 로브로 온 몸을 감싼 자들로써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겠다는 의도가 역력히 드러나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두건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모습은 무척 이질적이었다. 대체적으로 옅은 갈색, 혹은 푸른 색 눈동자를 하고 있었으며 이목구비의 모습이 판이하게 다른 것을 봐서 중원인은 분명 아니었다. 그들은 특이하게도 기이하게 생긴 커다란 마법진을 사이에 두고 경계하듯 포진해 있었다.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분간도 할 수 없는 문자가 마법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특히 마법진의 가운데에는 무척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는 보석이 놓여 있었다. 선혈처럼 붉은 빛이 감도는 보석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을 주며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뒤이어 들려오는 누군가가 침 삼키는 소리. "꿀꺽." 무척 긴장하고 있는지 사람들의 안색은 모두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슬며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큰일이군. 더 이상 지체한다면 돌아가지 못할 텐데." 늙수그레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은연중 풍기는 분위기와 불꽃 문양이 그려진 로브를 봐서 성직자가 아닌가 생각되는 노인이었다. 그들은 지금 누군가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예정된 시간을 넘긴다면 그들 모두는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하기 때문에 초조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곳의 검사들에게 발각된다 해도 우리들의 운명은 마찬가지다. 오로지 베니테스가 그 검사를 구출해 올 수 있기만을 기원할 뿐이지." 착잡한 듯 노인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름은 슈렉하이머. 이곳 중원과는 공간과 시간이 판이한 전혀 다른 장소에서 온 자였다.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이 시간에도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을 자신들의 조국. 점점 밀리는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계로의 차원이동을 감행했던 것이다. 본시 차원이동이란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마법이다. 지금껏 차원이동을 통해 이계에 다녀온 마법사는 긴 인간의 역사를 뒤져봐도 단 한 번도 없었다. 간혹 차원의 문이 열려 이따금, 아주 이따금 이계의 사람이나 괴수가 모습을 드러내긴 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으니. 그러나 이 차원이동의 시도를 결심하게 된 하나의 물체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드래곤 하트란 존재였다. 방대한 마나를 저장하고 있는 드래곤의 심장. 이것이라면 차원이동에 필요한 엄청난 마나를 얼마든지 공급해 줄 수 있을 터였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시도한 모험. 슈렉하이머의 염원이 하늘에 닿았던지 그 어렵다는 차원이동은 어렵사리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으니... 원래 그들은 이곳에 상당기간 체류하며 이곳 실력자들을 설득, 구원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 때문에 사절단의 구성원으로 마법사와 예법에 밝은 학자들을 대거 대동했을 뿐이었다. 허나 그것은 애당초 일장춘몽에 불과했다. 이곳의 무사들은 생각 외로 호전적이고 잔인했다. 대화를 위해 모습을 드러낸 사절단을 그들은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도륙해 버렸다. 말을 걸 여지를 일체 주지 않는 자들. 때문에 사절단 일행들은 계속해서 몸을 숨기며 사태의 추이를 관망할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이처럼 납치라는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이 되어버린 것이다. 차원이동에 드는 마나는 생각 외로 어마어마했다. 마법사들의 계산을 무려 열 배나 초과해서 소모되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마나를 방출한 관계로 자체적인 분열마저 시작되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드래곤 하트의 마나는 계속해서 흩어지고 있을 터, 최악의 경우 그들은 두 번 다시 고국의 땅을 밝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드래곤 하트가 과연 그들이 돌아가는데 필요한 마나를 공급해 줄 수 있을 지 미지수였으므로. 그러나 슈렉하이머는 억지로 자신을 위안했다. "분명 베르하젤 님의 보살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곳으로 간 사절단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차원이동을 통해 도움을 청하러 간 사절단은 그들뿐이 아니었다. 도합 다섯 개의 사절단이 마법진을 통해 각기 다른 시간대로 이동한 것이다. 물론 차원이동이 성공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최악의 경우 좌표가 어긋나서 마계나 정령계로 떨어진다면 도착 즉시 생을 마감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으므로. 슈렉하이머는 내심 지금의 상황이 천운이라 생각했다. 다섯 사절단 중 유독 자신이 속해 있던 사절단이 이곳에 도착한 것이 말이다. 그의 생각으로 이곳이 목적했던 장소가 틀림이 없는 것 같았다.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하는 마스터 급 검사가 이토록 많이 널려있다면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했다. 이곳에 체류한 하루 동안 슈렉하이머는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크로센 대제가 살던 곳은 분명 이곳이 틀림이 없어." 그 때 한 마법사가 고함을 질렀다. "베니테스 님이 오고 계십니다." 슈렉하이머의 고개가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팩 돌아갔다. 그의 눈에 마치 새처럼 공중을 날아 이곳으로 접근해 오는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슈렉하이머의 노안에 반색의 빛이 번져갔다. "성공했는가? 정말 천운이군." 신성마법에 의한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베니테스가 안고 있는 검은 그림자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마법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어서 돌아갈 준비를 서두르도록 하시오. 한시가 급하오." "알겠습니다." 마법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6회 곳곳에 설치된 마법 트랩을 통해 외부인들이 이곳으로 몰려온다는 사실을 파악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더욱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염원이 닿았는지 마법진은 곧 활성화되었고 드래곤 하트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세차게 마나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베니테스가 마침내 마법사들이 기다리던 곳으로 날아와 착지했다. "오오. 성공하셨구려. 과연 제국 이카롯트의 수석 마법사다운 실력이오. 어, 어서 이곳으로." 연이은 마법 시전에다 먼 거리를 날아온 때문에 베니테스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힌 상태였다. 상황이 어떤지를 익히 알고 있던 터라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의 품에는 왜소한 체구를 한 시체(?) 한 구가 안겨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그 모습에서 숨이 붙어있다고 여기는 자는 없을 터였다. 그런 마음을 느낀 듯 베니테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슈렉하이머를 쳐다보았다. "다행히 살아있습니다. 물론 생명이 경각에 달해있긴 하지만 포션을 사용한다면 생명을 다소나마 연장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일시적으로 응급처치는 끝낸 상태입니다." 그 말을 들은 슈렉하이머는 품속에 손을 넣어 유리로 된 조그마한 병을 꺼냈다. 이름하여 힐링 포션. 모험가들이 흔히 소지하는 조잡한 포션과는 차원이 다른 고급품이었다. 슈렉하이머는 병의 봉인을 풀고 그것을 지체 없이 시체의 입에다 부어넣었다.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비싼 포션이었지만 슈렉하이머는 추호도 망설이지 않았다. "자 그럼 떠납시다." 이미 모든 사절단의 구성원들이 마법진 위에 모여있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차원이동의 마법이 구현될 때만 기다렸다. 쓰쓰쓰쓰. 마법진은 오래지 않아 발동되었다. 그들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지는 미지수였지만 마법진은 곧 휘황찬란한 빛에 휘감겨 돌아가기 시작했다. 멀리서도 능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광휘. 그 빛무리에 이곳으로 달려오던 무수한 그림자들이 잠시 머뭇거리는 것이 비쳐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빛무리 속에서 어른거리던 십여 명의 그림자는 곧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쏴아아아. 십여 명의 사람들을 삼킨 광휘는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돌개바람처럼 휘돌아 올라가며 점점 빛이 사그러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빛무리 앞에 갑자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잔뜩 경직된 얼굴.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영호명이었다. "어떻게 이, 이런 일이." 그는 점점 사그러지는 빛무리를 쳐다보며 아연해할 수밖에 없었다. 원수를 쫓아 이곳까지 왔는데 막상 눈앞에서 목표물이 사라져 버렸으니... 그의 입에서 비통한 일성이 터져 나왔다. "놈들의 정체를 몰라 기다리지만 않았더라면..." 독고성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산을 내려오던 중 영호명은 말도 되지 않는 장면을 목격한 바가 있었다. 절벽에서 추락하는 독고성을 계속 지켜보며 추락지점을 가늠하는 중 독고성의 옆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이, 이것은 말도 안돼. 허공답보라도 저럴 수는 없어." 영호명이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사이 놀랄 만한 일은 계속 벌어졌다. 허공에 모습을 드러낸 자는 놀랍게도 새처럼 하늘을 날며 뭐라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끝없이 추락하던 독고성의 몸이 급격히 속도가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에 닿은 듯 독고성의 몸은 계속 추락을 멈춰가다 어느 순간 허공에 딱 멈춰버렸다. 절벽의 바닥을 거의 지척에 둔 순간이었다. 그러자 의문의 비행인(飛行人)은 지체 없이 독고성의 몸을 안아들었다. 그러고 어딘가를 향해 냅다 날아가기 시작했다. 비로소 상황을 눈치챈 영호명은 추격을 시작했다. 비록 상대가 허공을 날아가긴 했어도 영호명이 보유한 상승 신법이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러기를 한 참여. 영호명은 마침내 일단의 인물들이 모여 누군가를 기다리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행인의 비행궤적은 바로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마법사들을 독고성의 동조자들로 간주했다. 독고성을 구해온 것만 보아 영호명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로써는 즉시 행동에 나설 수는 없었다. 우선 수적으로 현저히 열세였으며 무엇보다도 허공답보를 시전한 중년 고수가 가장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허공답보를 시전하는 고수에다 그 수하들이 가세한다면 내가 감당하기 힘들다. 일단 용호대가 도착한 뒤 공격을 감행해야겠군." 영호명은 철혈문 문도들이 도착한 뒤에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에 적들이 도주할 퇴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는 조금 후면 도착할 수하들을 기다렸다. 영호명의 신법이 워낙 빨랐기에 철혈문 수하들은 조금 뒤쳐져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 저들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영호명의 숙련된 감각에도 감지되지 않는 것을 봐서 저들은 이곳에서 없어진 것이 확실했다. 점점 사그러지는 빛무리를 지켜보며 영호명은 이를 으스러져라 꽉 악물었다. "배교 놈들의 사술은 과연 대단하군. 하지만 놈을 놓칠 수는 없어. 너희들이 간 곳이 지옥 끝이라 해도 따라가겠다." 마음을 굳힌 영호명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빛무리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공교롭게도 빛무리가 막 사그러지려는 찰나였다. 그의 몸 역시 광휘에 휩싸여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없어져 버렸다. 그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광휘는 완전히 꺼져버렸고 그 자리는 곧 조용해졌다. 뒤이어 이어지는 어지러운 발자국소리. "아니?" "무, 문주님." 주군이 사라지는 모습을 멀리서 목격한 철혈문 무사들만이 소리 높여 고함을 질러댈 뿐이었다. 하지만 한 번 모습을 감춘 영호명은 그 어디에서도 목격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영원히... "으아아악." 한 무인이 생을 마감하며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소리. 생과 사가 뒤바뀌는 이런 일은 무림에선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수천 명의 문하를 보유한 사파의 거두라면 결코 쉽게 생각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사령천존 독고무기. 오랜 전통을 가진 사도 문파 배교의 제 18대 교주로써 점점 강성해지는 배교의 모든 생사 여탈권을 가진 명실상부한 절대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처럼 어이없이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것도 배교 총단이 있는 천산에서 무척 떨어진 이곳 하남에서 말이다. 한 동안 몸을 부들부들 떨던 독고무기는 오래지 않아 고개를 떨구었다. 가슴이 온통 으스러져 있는 것을 봐서 그가 고도의 내가기공에 의해 절명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독고무기의 시신 옆에는 서너 명의 인물이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휴! 정말 가공했어." 긴 수염을 기른 도인이 검을 수습하며 장탄성을 토해냈다. 고풍찬연한 송문고검이 보기 흉할 정도로 이가 나간 것을 보니 격전이 무척 치열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적송평. 공동파의 원로로써 근래 얼마 남지 않은 백도의 전대 원로이기도 했다. 하지만 독고무기의 목숨을 거둔 것은 그가 아니었다. 독고무기의 친위대인 수호마왕군을 몇 도륙했긴 했지만 애당초 그의 실력으론 독고무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독고무기를 맡은 실력자가 또다시 있다는 말이다. 곧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독고무기를 쓰러뜨린 당사자에게로 말이다. "왝." 한동안 몸을 떨며 서 있던 백염의 노승이 갑자기 왈칵 선혈을 뱉어냈다.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계피학발의 노인. 무척 쭈글쭈글한 피부에도 불구하고 무척 자애스러운 풍모를 가지고 있는, 겉보기에는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어 보이는 모습. 하지만 그 노인의 정체는 바로 소림성승이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내력을 보유한 명실상부한 절대 고수로써 벌써 오십 년 전에 소림사 달마원주를 역임했던 노고수이기도 했다. 그가 바로 독고무기를 절명시킨 장본인이었다. 무척 오랫동안 은거해 있던 그는 소림 장문인의 간절한 부탁으로 이번에 하산하게 되었다. 현 소림방장을 사질로 두고 있을 정도로 배분과 실력이 높기 그지없었지만 독고무기와의 일전이 전대 고수인 그에게도 결코 쉽진 않은 모양이었다. 고통이 심한지 그는 계속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적송평이 그에게 운기조식을 권했다. "그러지 말고 조식을 통해 몸을 회복시키도록 하시지요. 대사. 저희들이 호법을 서 드리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소." 겨우겨우 내뱉은 소림성승은 사양하지 않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운기조식을 해서 들끓는 기혈을 가라앉히려는 것이다. 남은 명숙들은 만약에 있을 지도 모르는 암습에 대비해서 그의 주위를 동그랗게 둘러쌌다. 잠시 그를 지켜보던 적송평은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고즈넉이 입을 열었다. "이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소. 사파의 거두 독고무기를 이처럼 손쉽게 제거할 수 있었다니..." 그 말에 늘어선 전대 고수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오. 배교의 절대자가 달랑 수호마왕군 열 명만 대동하고 이 먼 하남으로 올 줄 누가 알았겠소?" "지금처럼 마교가 일원천리로 발원하는 마당에 이 일은 한 마디로 우리 백도의 홍복이라 할 수 있소." 사파의 거두를 제거했다는 일. 의당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겠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전혀 그런 기색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수적인 우세를 앞세워 기습을 가해 상대를 척살했다는 것은 무림인으로써 전혀 명예로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는 점점 힘이 강대해져 가는 마교 단 하나도 감당하기 힘든 시기였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또 다른 사도의 문파인 배교가 마치 욱일천승하는 기세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상황. 그런 열세를 보다 못해 전대 고수인 그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목적은 달성되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아마도 그들만 간직해야 할 비밀로 묻혀 버릴 것이다. 그 때 비쩍 마른 도인 하나가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도포에 그려진 표식을 봐서 무당파의 고수인 듯 했다. "그런데 독고무기가 수하 십여 명만을 대동하고 이리로 온다는 소식은 대관절 누가 흘렸을까요?" "그러게 말이오. 덕분에 대어를 낚는 성과를 거둘 순 있었지만 그 저의가 심히 의심스럽소." 그들이 이곳에 오게 된 배경에는 뭔가 미심쩍은 면이 있었다. 달포쯤 전 정체를 분간할 수 없는 누군가가 사람을 시켜 무림맹 총단으로 한 장의 서찰을 보내 왔던 것이다. 서찰에는 비록 아무런 서명도 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 내용만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모년 모일 정오 경 배교 교주 독고무기가 수하 단 10여 명만을 대동한 채 하남의 생사평을 지나갈 것이오. 무척이나 짧디 짧은 글귀. 하지만 이 서찰 한 장으로 인해 무림맹 총단은 발칵 뒤집혔다. "이것은 분명 우리 백도의 명숙들을 유인, 살해하려는 불온한 뜻이 있는 것이 분명하오." "사파 놈들의 잔꾀에 속아선 아니 되오." 하지만 그대로 묵살하기엔 미끼가 너무 컸다. 때문에 무림맹에선 수십 명의 무사를 파견해서 생사평 부근을 샅샅이 훑기에 나섰다. 사실 여부를 확실히 알아보고 움직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찰의 내용은 한 치도 틀림없는 사실로 드러났다. 적힌 내용대로 배교 교주 독고무기는 수하 단 10여 명만을 대동한 채 생사평 근처에서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놈이 무얼하러 온 거지?" 상황을 알게 된 무림맹은 지체 없이 대응에 나섰다. 그들로써는 장래 백도의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적이 될 것이 분명한 마두를 그냥 내버려둘 순 없었다. 결국 그를 제거하기 위해 오랫동안 은거 중이던 전대 고수들이 속속 하산했다. 가공할 무공을 지닌 독고무기를 소문나지 않게 처치하려면 오로지 그 방법 밖에는 없었다. 계획은 성공해서 예정대로 독고무기를 척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골치 아픈 일이 남아 있었는데... "그런데 저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하나?" 모두의 눈길이 적송평의 손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두 살 정도, 많아봐야 세 살이 넘어 보이지 않은 어린아이 하나가 한 무사에게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아직 아무 것도 모를 나이의 어린아이. 하지만 적의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 있는 것을 봐서 뭔가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그 아이가 독고무기의 외아들로 짐작되는 아이였으니... 가장 성질이 급한 적송평이 서둘러 검을 뽑으려 했다. "처치해 버립시다. 죽여 입을 막는다면(殺人滅口) 간단히 해결될 것이오."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은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자들은 나름대로 백도의 명숙이라 자부하는 자들이었다. 만약 합공으로 독고무기를 격살한 일이 무림에 알려진다면 자신들의 명예가 형편없이 실추될 것은 안 봐도 뻔한 사실. 거기에다가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어린아이까지 참살했다는 사실이 추가된다면 그들은 무림에서 도저히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터였다. 서찰을 보낸 자의 저의가 밝혀지지 않은 이상 그들로썬 신중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그 때 운기조식을 마친 소림성승이 몸을 일으켰다. "그 아이는 우리 소림사에서 맡겠소."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혜정에게로 집중되었다. "무, 무슨 뜻이온지?" 운기조식을 마쳐서인지 소림성승의 얼굴에는 다소나마 혈기가 돌고 있었다. "굳이 남의 시선을 따지지 않더라도 이처럼 어린아이를 죽일 순 없소. 내가 본사로 데리고 가서 한 번 계도해 보리다." 그 말에 백도 명숙들은 아연해했다. "안될 말입니다. 아직 어리다고 해도 저 아이는 사파 마두의 아들입니다." "저 원독 어린 눈빛을 보십시오. 놈이 만약 사실을 알게 된다면 필히 제 아비의 원수를 갚고자 할 것입니다." 하지만 소림성승의 태도는 추상같았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7회 이미 소림성승의 고집은 소림사 안팎으로 널리 알려진 바가 있었다. "날 때부터 악한 자는 없소. 비록 독고무기의 자식이라곤 하나 본사에서 불법을 전수받고 오랜 수행을 거친다면 한 명의 불자로 충분히 태어날 수 있을 것이오." "하, 하오나." "불법 외에 무예를 전수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걱정할 것은 없소." 하지만 적송평은 그리 쉽게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하오나 혜정대사. 일은 대사의 장담처럼 간단하지 않을 듯 싶소. 교주를 잃은 배교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저 아이를 빼앗아 가려 할 것이오. 만에 하나 아이가 추후 상상도 할 수 없을 대 마두가 되어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소. 독고무기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면 자질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터, 만약 배교의 기괴막측하고 사이한 무공과 결합한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맞습니다. 적 장로의 말이 지당합니다." 거의 모든 명숙들이 적송평의 뜻에 동의했다. 그 모습에 소림성승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어쩌자고 저 어리디 어린 아이의 명을 거두려 할꼬?' 소림성승의 시선이 얼핏 아이에게로 향했다. 아직 천진난만할 나이였지만 아이의 모습에서는 결코 귀여운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늘게 찢어져 치켜 올라간 눈. 보기 흉하게 뒤집힌 들창코에 등이 심하게 굽은 것을 봐서 선천적인 기형으로 보였다. 정말 꿈에라도 보기 싫을 정도로 추악한 용모. 녀석은 특이하게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소림성승은 아이의 시선에서 살기(殺氣) 비슷한 것을 느꼈다. "천성적으로 살기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로군." 그는 마침내 마음을 정하고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 "내가 이 아이에게 친히 금제를 가하도록 하겠소. 모두 들어보았겠지만 우리 소림사엔 계도할 수 없는 악인에게만 시전하는 금제술이 있소. 그 대법을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시술한다면 아이의 목숨을 살려주시겠소?" 적송평의 입에서 비명과 같은 음성이 새어나왔다. "치, 칠종단금술." 모인 백도 명숙 모두가 깜짝 놀랄 만큼 파장은 컸다. 칠종단금술. 피 시술자에게서 살심(殺心)을 원천적으로 말살해버리는 고도의 금제술로써 그 위력에 살계(殺戒)에 버금간다고 알려져 있는 소림 비전의 금제법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이 시술을 받은 자는 결코 살인을 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칠종단금술은 피 시술자의 영혼과 직접 연결되어 있어 만약 살심을 일으킬 경우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가한다고 한다. 그 고통은 인간이라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정도. 만약 고통을 무시하고 살인을 행한다면 피 시술자는 그 즉시 뇌의 혈맥이 모두 파열해서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살생을 금해야 하는 승려의 입장인지라 소림사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런 금제법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껏 이 칠종단금술을 시술받은 자는 천년 소림사의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서, 성승. 칠종단금술을 시전하신다면 성승께서 지금껏 쌓아온 내공 중 상당수가 소실될 터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소림성승 혜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차피 살대로 산목숨이오. 죽으면 어차피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육신일 터, 내 무엇을 아까워 하리오. 그러니 아무런 걱정말고 저 아이를 내게 데려다 주시겠소?" 칠종단금술이 널리 쓰이지 못한 데는 바로 이런 이유가 있었다. 적어도 이백 년 이상의 내공을 가진 내가고수가 자신의 진신내력을 총 동원해서 시술해야만 대법이 시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법은 시술자의 내공이 강하면 강할수록 강한 금제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그 대가로 시술자는 자신이 일생동안 익힌 내력의 일정량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현 소림 제일의 내가 고수라 자부하는 소림성승이 일개 마두의 아이를 위해 자신의 내력을 소진시키려 하다니. 무림 명숙들이 보기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소림성승을 만류하지 않았다. 이미 무림에서 정평이 나 있는 소림성승의 고집이 아니더라도 그들로써는 강대한 소림사의 제일 고수가 자청해서 힘을 잃어주겠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자고로 타파의 힘이 약해지면 자파에 기회가 돌아오는 법. 잠시 이해득실을 따져본 적송평은 만면에 미소를 떠올렸다. "과연 성승이라 불릴 만 하실 자비심이시오. 대사." "대사는 영원한 소림의 활불이 되실 것이오." 억지로 웃음 짓는 명숙들의 얼굴을 훑어본 소림성승은 쓴웃음을 지으며 잠자코 걸음을 옮겼다. 이미 아이는 무사들의 손에 의해 소림성승의 앞으로 옮겨져 있는 상태였다. "아이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름을 묻는 성승의 말에도 아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원독어린 눈빛만 희번덕거릴 뿐이었다. "살기가 하늘을 찌르는 아이로구나. 과연 내 결정이 잘한 것인지는 알 수 없구나. 그러나 모든 것은 부처님께서 판단하시겠지. 그럼 노납이 네 본성에서 영원히 살기를 제거할 대법을 시행하겠노라." 한숨을 내쉰 성승은 합장을 하며 두 손에 내력을 모았다. 소림 제일의 내력을 가진 실력자답게 무형의 엄청난 기운이 그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는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소림성승의 얼굴을 쏘아볼 뿐이었다. 그러기를 얼마간. "갈!" 기합성을 내지른 소림성승은 합장한 손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뼈가 앙상한 성승의 두 손은 삽시간에 아이의 머리를 감싸쥐었다. 장심을 통해 미증유의 거력이 아이의 머리 속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쭉 찢어진 채 치켜 올라간 아이의 눈이 급격히 크게 뜨여졌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극통이 머리 속으로부터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굳게 닫힌 입이 벌어지며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아아아악."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것도 모자라서 이처럼 극악한 시술까지 받고 있는 아이. 정말 처지가 기구하기 그지없는 아이의 이름은 바로 독고성이었다. "헉." 독고성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비록 꿈이었지만 느껴지는 통증은 잠이 싹 달아날 만큼이나 강렬한 것이었다. 꽉 잠긴 음성이 입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제, 제기랄. 그토록 겪어왔건만 이 빌어먹을 고통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군." 잠에서 덜 깬 몽롱한 상태에서도 독고성은 연신 욕설을 퍼부어 대었다. 생각하기조차 싫은 과거였기 때문에 이따금 이렇게 옛 일을 상기시키는 꿈을 꾸고 나면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때문에 배교의 절대자이던 시절엔 제법 많은 수하나 시비들이 악몽을 꾸고 난 분풀이로 호된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독고성은 연신 눈을 끔뻑거렸다. 눈꺼풀을 비집고 흐릿하게나마 빛이 새어 들어오긴 했지만 사물이 명확히 식별되지 않았다. 전신에 온통 시큰거리는 통증이 전해졌고 머리가 깨어질 듯한 두통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얼굴을 구기며 투덜거렸다. "아픈 걸 보니 아마도 저 세상은 아닌 듯 싶군." 죽은 다음이라면 생전에 입은 상처의 통증 따위가 남아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고 단정했다. 그러자 독고성의 뇌리에 문득 자신의 몸 상태가 떠올랐다. "가만..." 독고성의 안색이 갑자기 경직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자 배교 총단으로부터의 탈출. 정파와 마교, 그리고 자신을 배신한 배교 추적대와의 처절한 사투가 마치 조금 전 일처럼 생생히 떠올랐던 것이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마교의 쌍수마존 위청과 그 수하들을 처리하느라 남은 진원진기를 일시에 폭발시켰던 일이 떠오르자 독고성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당시 나는 사준환 놈의 암습에 단전이 반 이상 파괴당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진원진기를 폭발시켰다면." 독고성은 다급하게 내력을 운기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시작하자마자 무위로 돌아갔다. 내공을 일주천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인체의 기관은 이제 그의 몸에서 완벽하게 사라져버린 것이다. "어, 없어. 단전이 느껴지지 않아." 단전은 이미 존재감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듭되는 혹사로 인해 갈가리 찢겨버린 것이다. 심지어 경맥과 혈도에서조차 아무런 반응도 전해지지 않았다. 진원진기를 폭발시키는 과정에서 활짝 열렸다가 곧이어 닫혀버린 경맥과 혈도. 그것들은 콱 틀어 막힌 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다시 말해 독고성은 이제 두 번 다시 내력을 운기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의 얼굴이 갑자기 처참하게 변했다. "이런 빌어먹을..." 자고로 무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십중팔구는 지금까지 닦아온 무공을 꼽을 것이다. 무인에겐 경우에 따라서 부모나 형제, 처자식보다도 더 소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무공이기 때문이다. 물론 독고성의 경우는 더욱 절박했다. 추악한 외모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에게 숱한 멸시를 받아온 독고성. 그가 현실을 타개할 길은 오로지 무공수련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무공을 익혔다. 무공수련에 가장 중요한 어린 시절을 소림사에서 너무도 허무하게 보내고 뒤늦게 연성을 시작한 만큼 그 길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얻은 무공이 송두리째 사라지다니... 가히 하늘이 꺼지는 기분이 바로 이런 것 같았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억지로 위안해 보았지만 그의 눈에서는 어느새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뒤이어 이어지는 오열. "어흐흐흐." 독고성은 울고 또 울었다. 그런다고 잃었던 무공이 다시 돌아오진 않았지만 그래야만 속이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울고 난 뒤 독고성은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그는 퉁퉁 부은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곳은 어디일까?" 이제야 서서히 사물이 분간되기 시작했다. 그가 있는 곳은 무척 호화롭게 치장된 커다란 방이었다. 그의 몸은 장정 열 명이 누워도 넉넉할 만한 커다란 침대 위에 고이 뉘어져 있었다. 독고성의 눈에 순간적으로 의혹이 서렸다. "무척 생소한 장식이군. 방의 형태도 그렇고 침대의 모양 역시..." 배교의 교주이던 시절 독고성은 무척이나 호사스럽게 생활한 바 있었다. 하지만 과거 그가 기거하던 침실도 이곳에 비한다면 가히 오두막이라 비하할 수 있을 정도로 방은 호화롭게 그지없었다. 또한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중원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독고성의 시선이 방의 구석에 놓인 철인(鐵人)에게로 닿았다. "어디에다 쓰는 물건이지? 할 일도 없군. 정련된 강철로 사람 형상이나 본떠 놓았으니." 그것이 기사들이 걸치는 중갑주, 풀 플레이트 메일이라는 것을 꿈에도 짐작 못한 독고성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 때 문이 덜컥 열렸다. 본능적으로 경계 자세를 취하려던 독고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지금 몸 상태라면 암습이 아니라 무공을 모르는 자가 몽둥이를 쥐고 덤벼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였다. 독고성이 익힌 천자혈마공은 심오한 초식이나 정교한 변초가 필요한 무공이 아니었다. 철저히 패(覇)를 추구하는 내가기공으로써 강력한 내공을 바탕으로 닥치는 대로 치고 부수는 패도적인 마공이었다. 그런 터라 무공을 상실한 지금, 독고성에게는 차라리 하급 무사나 표사들이나 익히는 삼류 무공이 더 절실했다. 하지만 강해지기 위해 속성을 택한 독고성에게 기본기를 충실히 익힐 시간 따윈 애당초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하얀 백염이 인상적인 늙은이였다. 옅은 갈색의 눈동자와 이질적인 얼굴 형태에서 독고성은 그가 결코 중원인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선 불꽃 문양이 그려진 장포의 형태가 중원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독고성의 머리는 노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불꽃 문양의 옷에 색목인이라니... 본교와 먼 친척 뻘인 서역의 배화교(조로아스터교) 사람인가?' 들어온 노인은 다름 아닌 슈렉하이머였다. "오! 깨어났구려. 잘 주무셨소." 슈렉하이머가 반색하며 인사말을 걸었지만 애시당초 독고성이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상대의 얼굴에 떠오른 의아한 표정에 비로소 실책을 알아차린 슈렉하이머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선 의사소통부터 해결해야겠군. 과연 통역 마법이 통할 지는 미지수지만." 방안으로 들어온 낯선 이방인이 갑자기 주문 같은 것을 웅얼거리자 독고성으로써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그 자신이 배교의 기괴막측한 사술을 모두 터득한 고급 술법사였기 때문에 주문이란 것이 얼마만큼의 위력을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독고성은 이제 그 숱한 사술들은 단 하나도 쓸 수 없었다. 사술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내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단 한 점의 내공도 사용할 수 없는, 범인과 전혀 다름없는 몸이었다. 때문에 그는 긴장하며 상대의 주문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주문을 마친 노인은 다시금 자신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갑자기 중원어가 튀어나왔다. "잘 주무셨소?" 독고성의 눈이 갑자기 화등잔 만큼 커졌다. 한 눈에 척 보아도 중원인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는 색목인이 느닷없이 유창한 중원어를 구사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독고성의 고향인 양주 지방의 방언이었다. 억양까지 한 치도 틀림이 없었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8회 예로부터 땅이 넓은 중원에는 수많은 방언이 존재했다. 드넓은 영토 때문에 방언들은 각기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고, 그 때문에 같은 중원사람이라 하더라도 의사소통이 모두 가능한 건 아니었다. 남쪽 지방의 운남 사람과 북서쪽으로 치우친 산서 사람이 만난다면 두 사람이 대화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독고성의 고향인 양주 역시 중원에서 본다면 변두리였기 때문에 서부지방 사람과 만난다면 완벽한 의사소통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방인이 자신의 고향 방언을 그것도 아주 유창하기 말하고 있으니... 눈만 감았다면 마치 고향 사람으로 여길 뻔했을 정도니 독고성으로썬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는 떠듬거리며 되물었다. "너, 너는 누구냐? 어떻게 해서 색목인인 네가 양주 방언을 알고 있지?" "아! 이 언어 말이군요." 슈렉하이머는 모호한 웃음을 터뜨렸다. 무서운 능력을 과시한 이계의 실력자가 자신 대륙의 마법에 놀라는 것이 그리 싫진 않았다.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마법을 이용해서 당신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 마법?" "저는 지금 이 트루베니아 대륙의 공용어로 당신께 말을 걸고 있습니다. 이 언어를 당신이 알아듣도록 하는 것이 바로 마법의 위력이지요." "트루 머시기?" "트루베니아 대륙입니다. 지금 당신께서 딛고 서 있는 땅이 바로 트루베니아 대륙이지요. 당신이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우리는 이곳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슈렉하이머의 대답에는 일말의 자부심이 떠올라 있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태어난 트루베니아 대륙을 사랑했다. 특히 그 어렵다는 차원이동을 멋지게 성공시켜 임무를 성공시키고 차원여행을 성공한 유일한 신관이 되었다는 점에 슈렉하이머는 심히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슈렉하이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설명은 독고성에겐 그리 쉽사리 받아들일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비록 독고성이 사술에 능통한 술법자이긴 했지만 둘은 애당초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던 존재인 것이다. 슈렉하이머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독고성의 안색은 점점 싸늘해졌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네놈이 무슨 의도로 날 속이려는 지는 모르지만 거기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이곳이 어디인지 소상히 밝히도록 하라."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곳은 바로 트루베니아 대륙입니다." "트루벤인지 개똥인지 내가 알 바 아니다. 정체를 밝힐 수 없다면 내가 밝히겠다. 비켜라" 독고성은 슈렉하이머에게 거침없이 하대를 하고 있었다. 우선 절대자였던 시절 몸에 익은 버릇이기도 했으며 상대의 정체를 명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행한 것도 있었다. 자신의 호통에 상대가 움찔 하는 것을 느낀 독고성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정상이 아닌 몸은 당최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으으음." 한참동안 몸을 일으키려 애쓰던 독고성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몸은 아직까지 처참히 망가진 상태였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던 슈렉하이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는 몸을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포션과 힐링으로 외상이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고는 하나 이미 속으로 심각하게 골병이 든 상태입니다." "닥쳐라 이놈! 네가 무얼 안다고?" 내심 부끄러웠던 독고성은 짐짓 허세를 부리려는 듯 호통을 쳐 댔다. 독고성의 반응에 슈렉하이머는 할 수 없다는 듯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심기가 편치 않은 듯 싶군요. 그럼 오늘은 물러가도록 하겠사오니 푹 쉬신 다음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슈렉하이머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비록 그가 도움을 구걸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있긴 하지만 애당초 고위급 성직자였던 터라 이처럼 하대를 당하는 것이 슈렉하이머에겐 썩 달갑진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가는 슈렉하이머의 뒷모습을 독고성은 의혹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도대체 놈의 꿍꿍이가 뭘까?" 하지만 그의 생각은 그리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육신 때문에 잠이 밀물처럼 쏟아졌고 독고성은 그대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화려하게 치장된 방안에는 느닷없이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과연 그가 우리의 염원을 들어줄까?" 넓은 대청을 걸어나가며 슈렉하이머는 마치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복도에 늘어선 병사들이 공손히 예를 취해왔지만 그는 마치 정신나간 것처럼 걸어갈 뿐이었다. 차원이동은 성공했다. 슈렉하이머를 비롯한 사절단 일행은 이계의 이름 모를 무사를 데리고 그들의 고향 트루베니아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귀환한 사절단은 오로지 그들 뿐이었다. 다른 시간대로 간 이들은 하나같이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임무를 성공시킨 슈렉하이머 일행은 각국 왕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들의 대륙을 위기에서 구해 줄 영웅을 초빙해 왔다는 데 대해 일말의 희망을 품고 말이다. 그만큼 트루베니아 대륙의 상황은 절박하기 그지없었다. 자고 나면 어김없이 하나씩의 왕국들이 사라져버리는 실정. 비록 데리고 온 이계 무사가 해결책을 제시해 줄지는 미지수였지만 그래도 슈렉하이머는 그에 한 가닥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 대륙은 필히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서약석(誓約石)을 되찾아오지 않는다면 말이야. " 마치 정신병자처럼 중얼거리던 슈렉하이머는 인간들에게 가장 중요한 보물을 탈취당하던 당시의 일을 떠올렸다. 그 현장을 직접 목격했기에 슈렉하이머가 더욱 책임감을 느끼는 지도 몰랐다. 당시 트루베니아 대륙은 두 번째의 위기인 블러디 문(bloody moon)의 참사를 막 극복한 상태였다. 두 번에 달하는 전쟁으로 베르하젤 교단의 권위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슈렉하이머는 두 번의 전쟁에 모두 참여한 경험 많은 프리스트였고 베르하젤 교단의 수련생들을 교육시키는 중요한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트루베니아 대륙의 최강국 이카롯트 제국에 위치해 있는 총 교단의 프리스트로 말이다. 미래의 성직자를 키워내는 교육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았으므로 당시에는 고위급 성직자인 그가 직접 교육을 맡고 있었다. 당시를 회상하던 슈렉하이머는 점차 그 때의 상황으로 빠져 들어갔다. "알다시피 트루베니아 대륙에는 인간들 이외에도 많은 유사인종들이 살고 있다. 이곳에 사는 여러 유사인종들의 관점으로 본다면 인간이란 존재는 무척 불합리하기 그지없는 종족이다. 그렇지 않나?" 슈렉하이머의 앞에는 이, 삼십 명 정도의 젊은 수련생들이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교단의 앞날을 책임질 젊은 인재들이었다. 슈렉하이머의 반문에 수련생들은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잠시 그들을 둘러보던 슈렉하이머는 미소를 떠올리며 대화를 계속 풀어나갔다. "인간은 엘프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명을 가지고 있다. 천년 가까이 살아가는 그들의 수명을 인간이 따라갈 수가 있을까? 나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당한 말이라서 수련생들은 고개를 서서히 끄덕였다. "기술면에서 인간은 드워프들을 따라갈 수 없다. 아니 비교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옳은 말이겠지. 이 사실은 너희들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들 중 제일 가는 대장장이라도 드워프들이 만드는 장비는 도저히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사실. 그리고 힘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오우거, 트롤 따위의 저능한 몬스터에겐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비록 체력이 오크보다는 다소 낫긴 하지만 생식력과 성장속도 면에서 인간은 오크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이런 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잠시 말을 끊은 슈렉하이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복전쟁 당시 인간의 주된 적은 바로 오크 족이었다. 울창한 숲에서 살아가는 엘프나 산악지역에 거주하는 드워프들과는 달리 오크들은 인간과 맞먹는 영토를 보유하고 있는 종족이었다. 그러므로 상황은 점차 두 종족간의 전면전으로 치달아갈 수밖에 없겠지? 처음에는 힘과 인구수에서 앞선 오크 족에 유리하게 전황이 전개되었다. 인간보다 힘이 세고 천성적으로 사냥꾼으로 타고난 오크족을 인간들이 극복하기란 힘든 실정이었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황은 정반대로 진행되어갔다. 처음에는 막연히 도태되어 사라질 것이라 여겨졌던 인간들. 하지만 여러 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인간들은 무수한 전쟁을 승리로 장식하며 트루베니아 대륙에 살아가는 다른 유사종족들을 대부분 정복할 수 있었다." 잠시 말을 끊은 슈렉하이머는 수련생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인간이 어떻게 해서 막강한 오크 종족을 상대로 대승리를 거두고 펠루시아 산맥 저편으로 몰아내었는지 누구 아는 사람 있나?" 그의 질문에 한 수련생이 손을 들었다. "예 제가 대답하겠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수련생은 장황하게 자신의 의견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인간들이 이처럼 우위에 서게 된 이유에 대해서 지금까지는 조사된 바는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막연히 베르하젤 님의 축복 때문이라 생각할 뿐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바로 지혜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선대의 경험을 후대에 물려줄 수 있는 지혜 말입니다. 그 덕택에 우리 인간은 짧은 수명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 인간은 오크 족을 위시한 타 종족에 비추어 본다면 놀라울 정도로 서로간의 관계가 다양합니다. 그 인간관계로 말미암아 각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습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또는 연인을 지키기 위해.." 수련생의 설명을 들으며 슈렉하이머는 점점 감회에 젖어갔다. 지금 수련생의 의견, 이것은 삼십 년 전 당시 종교분규 시절에는 나와서는 안될 성질의 것이었다. 만약 당시였다면 그 즉시 불순한 생각으로 간주되어 발언자가 재판에 회부될 것이며 최악의 경우 재판 없이도 화형에 처해질 성질의 발언이었다. 방금 수련생의 주장은 당시 불신자들의 그것과 별달리 다름이 없었다. 트루베니아 최악의 비극이라 일컬어지는 종교분쟁의 원인 말이다. 하지만 그 지엄했던 베르하젤 교단의 권위는 지금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발언 역시 더 이상 죄가 되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세월이 참 많이 변했지." 슈렉하이머는 잠자코 그 때의 상황을 돌이켰다. 불과 백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많은 사건들. 종교 분쟁에 이어 벌어진 정말 처절했던 어둠의 전쟁. 잠시 후 수련생의 발표가 끝나고 나자 슈렉하이머는 잠자코 그 때의 상황을 학생들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오늘의 과목은 역사였고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 반수는 그 때의 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였으므로... "이제 수업을 시작하겠다." 강의를 시작한 슈렉하이머는 인간에게 닥친 두 번째의 재앙인 암흑 전쟁 당시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그에겐 선대의 경험을 어린 수련생들에게 전수해야 할 사명감 같은 것이 있었다. "다 썩어버린 살을 너덜거리며 녹슨 검을 휘두르는 스켈레톤 병사. 형형색색의 생김새를 자랑하는 이름 모를 마계의 마물, 그리고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각종 골렘과 데스나이트. 다크 쉐이드. 이 끔찍한 어둠의 군대에 맞서 병사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느냐?" 슈렉하이머는 숨을 죽인 수련생들을 둘러보며 가슴을 내밀었다. 한 수련생이 즉시 그에 응대해왔다. 아까 의견을 발표한 바로 그 수련생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죽음으로써 가족들을 살리기 위한 희생정신의 발로입니다. 가족들이 처참한 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지요." 알게 모르게 '베르하젤 님의 보살핌' 이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슈렉하이머의 얼굴에 실망감이 살짝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그리 상심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승리하는데 아르카디아 대륙의 지원군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에겐 천만다행이었다. 종교분쟁 때문에 아직까지도 각 왕국에서는 아르카디아란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금기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 국민이 베르하젤 교단의 독실한 신자였던 시기는 이제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블러디 문의 참사라 일컬어진 암흑군단과의 전쟁 때문이었다. '이러다간 백년 후쯤 되면 교단이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로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던 그의 눈에 초롱초롱한 수련생들의 눈빛이 들어왔다. 수업을 마쳐야겠다고 생각한 슈렉하이머는 종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그때 굉음이 들려왔다. 콰쾅. 그들이 수업 중이던 교실이 우르르 흔들렸다. 엉거주춤 서 있던 슈렉하이머는 그만 뒤로 볼썽사납게 나뒹굴 뻔했다. 겨우 몸을 수습한 슈렉하이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 도대체." 이곳은 이카롯트 왕국의 중심부에 위치한 베르하젤 교단의 총 본산이었다. 이러한 굉음과 진동은 있을 수도 없었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수업은 여기서 끝이다. 해산한다." 퍼뜩 정신을 차린 슈렉하이머는 학생들에게 일갈하며 얼른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문은 굉음과 함께 처참하게 부서져 내렸다. 콰쾅. 그리고 거기서 몸을 드러낸 것은... 슈렉하이머의 눈이 놀라움에 휘둥그레졌다. "오, 오크?" 온통 피에 젖어있는 도끼를 든 괴물 수십 마리가 교실 내부로 뛰어들어와 있었다. 번들거리는 녹색 피부, 1.5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작달막한 체구였지만 하나같이 울퉁불퉁한 근육을 가지고 있는 것을 봐서 한 눈에 전사(戰士)들임을 알 수 있었다. 조잡하고 거칠지만 튼튼해 보이는 갑주를 걸치고 붉게 충혈된 눈을 번들거리는 존재. 그들은 바로 오크였다. 1차 종족 전쟁 직후 지리멸렬해서 펠루시아 산맥으로 숨어들었다고 알려진 오크 무리가 난데없이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이카롯트 왕국에 위치한 베르하젤 교단의 총 본산으로 말이다. 슈렉하이머로썬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오크들의 목적은 곧 밝혀졌다. 이름하여 살육. 그들은 가차없이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멀뚱멀뚱 서있던 수련생들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도끼에 찍힌 상처에서 낭자한 피보라가 뿜어져 나왔다. 그 소리에 슈렉하이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의 입에서 거의 반사적으로 거센 주문영창이 터져 나왔다. "블라인드니스(blindness)" 사색이 된 수련생들을 막 쓸어가던 오크들이 갑자기 장님이 된 것처럼 허둥대며 기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한 눈에 보아도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크들이 더 이상 수련생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슈렉하이머의 노력은 성공했다. 이젠 이것들을 잠재워야 할 차례였다. "버닝 핸즈(burning hands)" 슈렉하이머의 두 손에서 눈부신 광휘가 뿜어져 나왔다. 손 주변을 마법으로 가열한 후 그 열기로 상대에게 강력한 타격을 주는 마법인 버닝 핸즈. 이것이라면 어렵지 않게 오크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 슈렉하이머는 얼른 장님이 된 오크들에게 다가갔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9회 그 때 오크들의 뒤에서 차디찬 일성이 터져 나왔다. "잔재주 피우지 마라 인간, 디스펠 매직(Despell Magic)" 화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슈렉하이머의 두 손에 붙은 화염이 퍽 하고 꺼져버렸다. 뒤이어 블라인드니스가 디스펠되자 오크들은 겨우 장님 신세에서 벗어났다. 위기에서 벗어나자 오크들은 이제 슈렉하이머를 노려보며 살기를 피워 올렸다. 저음의 거친 음성이 확 토해졌다. "취이이익, 인간 죽어라!" 수십여 자루의 베틀 액스가 쏜살같이 슈렉하이머의 전신을 노렸다. 공간전이로 공격을 피해낸 슈렉하이머는 얼른 반격을 가했다. 지금 그는 자신의 마법을 디스펠해 버린 존재에 대해 생각조차 나지 않을 만큼 다급한 상황이었다. "크리티컬 운즈(critical wounds)" 고위급 성직자답게 슈렉하이머는 순식간에 반수 이상의 오크들에게 마법을 걸어버렸다. 주문영창이 끝나자마자 오크들은 삽시간에 무기를 내던지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크워어어." 온몸을 비틀며 바닥을 뒹구는 오크의 몸에서 점점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벌써 절명했는지 축 늘어진 오크도 그 중에서 심심찮게 보였다. 한숨을 돌린 슈렉하이머는 일단 겁에 질려있는 수련생들에게 대피하란 몸짓을 했다. 수련생들이 후문을 통해 나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는 자신의 마법을 디스펠한 존재가 있으리라 짐작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이리 나오시게?" 그때까지 오크들은 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들이 감당하기엔 노 프리스트 슈렉하이머란 존재가 너무도 강력했다. "제법이로군." 냉랭한 일성과 함께 그림자 하나가 문을 통해 들어왔다. 검은머리를 한 무척 냉막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얼음을 깎아 만든 듯한 얼굴에는 사이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특이한 것은 청년의 두 눈에 아무런 감정이 떠올라있지 않다는 점이다. 보편적으로 눈동자는 인간의 마음상태를 보여주는 창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눈앞의 청년은 달랐다. 아무런 감정도 깃들어있지 않은 눈빛에서 슈렉하이머는 본능적으로 그가 인간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너, 넌 누구지?" 슈렉하이머의 질문에도 청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바닥에 누워 버르적거리는 오크들을 한 번 훑어본 청년은 가볍게 손을 한 번 내저었다. "크으으으."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오크들이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자신에게 고통을 가한 슈렉하이머를 쳐다보며 베틀 액스를 들어올렸다. 그 모습에서 오크가 왜 복수의 화신이라 불리는지 슈렉하이머는 잘 알 수 있었다. 전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타고난 전사가 바로 오크들이었던 것이다. 막 달려들려던 그들을 제지한 것은 의외로 마법을 풀어준 청년이었다. "멍청한 것들. 이자는 내가 상대하겠다. 너희들은 다른 인간들을 상대하라." "취이익. 알겠습니다." 청년을 무척 두려워하는 듯 오크들은 고개를 공손히 숙이더니 교실에서 달려나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슈렉하이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가벼운 손짓 하나만으로 자신의 마법을 디스펠 하는 모습에서 상대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오크들이 방안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청년은 슈렉하이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 정체를 물었나?" "...." "쉽게 얘기하도록 하지. 우린 인간들이란 존재에게 응징을 가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인간?" "그렇다. 자만심이 그득하며 욕심이 많아 끊임없이 분규를 일으키며 틈만 나면 타 종족을 정복하려 하는, 이 트루베니아 대륙에 있어서는 안 될 종족인 인간을 말살시키기 위해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이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될 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듣고 있던 슈렉하이머는 기가 막혔다. "어째서? 그런 너 자신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청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모습? 네놈들을 속이기 쉬워서 하고 있을 뿐 다른 뜻은 없다. 너희 종족들의 최후를 앞당기기 위해 선택한 모습이라고 할까?" "이놈." 참지 못한 슈렉하이머가 선제 공격을 날렸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던 간에 그가 지휘하는 오크의 손에 의해 휘하의 수련생들이 무수히 목숨을 잃었다. 제자를 잃은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에 슈렉하이머의 분노가 폭발했던 것이다. 빛이 번쩍하더니 그의 손에서 라이트닝 볼트가 형성되며 청년을 향해 날아갔다.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의 속도였다. 파지지직. 그러나 슈렉하이머가 쏘아낸 회심의 일격은 너무도 허무하게 사라졌다. 라이트닝 볼트가 작렬하는 순간 청년의 전신에서 일어난 유형의 기운이 전격을 완전히 차단했던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슈렉하이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포스 실드? 그 고위급 마법을 주문영창도 없이 시전하다니? 네, 네놈의 정체는 도대체?" 슈렉하이머의 얼굴이 갑자기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청년의 모습에서 갑자기 한 존재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마법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존재. 강대한 힘과 지능으로 대륙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존재 드래곤. 만약 그 수가 어느 정도만 되었더라도 드래곤은 능히 트루베니아 대륙을 주름잡을 수 있었다. 이 강력하고 영리한 존재에 단신으로 맞설 상대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드래곤이라면 능히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 할 수 있을뿐더러 이 정도의 위력 또한 충분히 낼 수 있었다. "드, 드래곤인가?" 몹시 충격을 받은 듯 슈렉하이머가 떠듬거리자 청년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용케 눈치챘군. 그렇다." "어, 어떻게? 드래곤은 다른 종족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청년의 눈에서 갑자기 살광이 치솟기 시작했다. 보고 있던 슈렉하이머의 등골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눈빛은 강력했다. "인간이여, 너희 천박한 자만심에 조소를 보낸다. 그 작은 몸집으로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도 모자라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의 목숨까지 노리다니... 하지만 너희 인간들은 앞으로 그 만용조차도 더 이상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무, 무슨 뜻이지." 블랙 드래곤으로 짐작되는 청년은 슈렉하이머를 뚫어지게 주시하며 한 자 한 자 내뱉었다. "너희 족속들, 그 중에서도 드래곤 슬레이어라 불리는 자들에 의해 어린 동족들이 하나 둘씩 죽어가도 우리는 그 동안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죽은 동족들의 경솔함과 어리석음일 뿐이라고 치부했을 뿐이다. 하지만 너희 인간들의 만용은 끝이 없더구나. 감히 우리들의 레어에 침입할 생각에 이어 드래곤 로드 크라누스님의 해츨링까지 사냥하다니..." 쾅! 그 말에 슈렉하이머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가장 우려했던 일이 터진 것이다. '결국 일이 벌어졌군.' 교단의 권위가 땅에 추락한 뒤 인간계는 한 동안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실력 있는 기사들 중에는 은연중에 과거 불신자들의 신념을 이으려는 목적을 가진 자들이 무수히 나타났다. 그들은 심혈을 기울여 자신들의 실력을 키우려고 노력했고 그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안달이 난 상태였다. 어둠의 군대와의 전쟁이 끝난 이후 그들은 몬스터 사냥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려 했다. 그리하여 전쟁이 끝난 후 대대적으로 몬스터 사냥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백미는 단연 드래곤 사냥이었다.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기사들이 마법사들과 파티를 결성하여 드래곤을 잡기 위해 트루베니아 대륙의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 거기까지는 슈렉하이머도 잘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그런데 그 자들이 드래곤 로드의 헤츨링을 해치다니... 망연자실해 있는 슈렉하이머의 귀에 청년의 목소리는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해츨링을 잃은 뒤 우리들의 로드 크라누스님은 너희 간악한 존재 인간들을 벌할 결심을 굳히셨다. 우리들은 그 분의 뜻에 따라 이제부터 응징을 시작할 것이다. 이곳 베르하젤 총 교단을 시작으로 인간들의 파멸을 위한 전쟁은 시작된다. 트루베니아 대륙에 인간 족의 씨가 마를 때까지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로군.' 슈렉하이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상황을 보아 드래곤들과의 일전은 피할 수 없을 듯 싶었다. 하지만 그는 추호도 겁을 먹진 않았다. 어둠의 군대까지 물리친 인간들의 저력을 깊이 믿고 있던 것이다. 주사위가 이미 던져졌다고 생각한 슈렉하이머는 두 손에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일단 해츨링을 살해한 것은 내가 대신해서 사과하지. 하지만 인간들의 씨를 말리겠다는 생각에는 도저히 찬성할 순 없군." 마나가 모임에 따라 슈렉하이머의 손에서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모자라는 수를 채우기 위해 오크 찌꺼기들을 끌어들인 모양인데 너희들은 아마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마왕이 불러들인 어둠의 군대를 물리칠 정도로 인간들의 저력은 막강하다. 오크와 연합했다고 해서 우리를 이길 수는 없어." 청년의 얼굴에서 미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은 명백히 비웃음이라 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어리석기는. 기껏 한 번의 전투에서 나이델하르크를 패퇴시킨 것을 말하는 것이냐?" "한 번의 전투라고 하지만 그 이후로 나이델하르크는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그가 모든 힘을 잃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슈렉하이머의 자신감 어린 태도에 어이가 없는지 청년은 쿡쿡쿡 웃기 시작했다. "멍청하긴. 암흑세계의 언데드 군대는 실체가 없는 존재다. 만약 나이델하르크가 잠시 쉬어 마력을 회복한다면 이카롯트 공방전에서 잃은 병력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보충할 수 있다. 곳곳에 산재한 각 종족의 고분이 어둠의 병사들을 얼마든지 공급해 줄 테니까... 너희 인간들은 그것을 간과하고 나이델하르크를 놓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실수인지를 모르고 말이다." 슈렉하이머의 얼굴에 당혹한 빛이 떠올랐다. "대관절 그게 무슨 소리지?" 청년의 음성은 점점 변해갔다. 그와 함께 그의 몸집 역시 급속도로 불어나고 있었다. "이런 시간을 너무 지체했군. 빨리 처리하고 들어가야겠어. 결론만 말해주지." 사이한 아름다움을 가진 청년의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거기에는 검은 광택이 도는 비늘을 가진 거대한 드래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말에 슈렉하이머는 핏기 잃은 표정으로 멍하니 드래곤을 쳐다볼 뿐이었다. 마침내 드래곤이 완전히 제 모습을 갖췄을 때 슈렉하이머의 뇌리로 한 줄기 음성이 메아리쳤다. ―이것 하나만 알아두어라. 인간. 펠루시아 산맥으로 패퇴한 나이델하르크가 다시 수하들을 불러들이려고 할 순간에 그것을 저지한 분이 바로 우리들의 로드 크라누스님이셨다. 그분은 천신만고 끝에 나이델하르크를 생포해서 봉인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트루베니아 대륙을 어둠의 물결에서 구해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너희 간악한 인간들은 그 은혜도 모르고 그 분의 해츨링을 살해하는 죄를 범했다. 드래곤은 타는 듯한 눈동자로 슈렉하이머를 직시했다. ―이제 너희들의 멸망은 정해졌다. 그것은 바다 건너 아르카디아 대륙의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 님의 지휘 하에 이곳에 왔다. 가장 먼저 너희들의 서약석을 빼앗기 위해. 크라누스 님을 따르는 드래곤들이 모두 이곳에 왔으므로 너희들은 결코 우리를 막을 수 없다. 과거 너희들이 오크 족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너희들의 서약석을 빼앗고 오크의 서약석을 다시 그들에게 다시 돌려줄 것이다. 드래곤의 말을 들으며 슈렉하이머의 얼굴은 점점 핏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제 끝이다 가라! 인간." 그를 향해 블랙 드래곤의 애시드 브레스가 퍼부어졌고, 지지 않겠다는 듯 슈렉하이머의 손에서도 눈이 시릴 정도의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10회 "으아아악!." 굉음과 함께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누군가가 희디흰 백염을 온통 붉은 피로 물들이며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생을 마친 자는 화려한 복장을 한 노인이었다. 온통 으스러진 가슴 부위에는 그의 신분을 증명하는 문장이 겨우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드러나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 일곱 송이가 아로새겨진 문장. 그것은 문장의 주인이 현 베르하젤 교단의 대승정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쿠르르릉. 자욱한 먼지구름과 함께 신전 내부의 석주들이 무너져 내렸다. 장정 네 사람이 손을 잡아야만 겨우 에워쌀 수 있을 듯한 아름드리 석주였지만 이처럼 맥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한때는 무척 아름다웠음직한 신전. 그러나 이곳은 이제 흉물스럽다 할 수 있는 장소로 변한 지 오래였다. 수려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산산이 깨어진 상태였고 이곳을 지키며 기도를 드리던 신관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바닥에 몸을 뉘인 채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다. 그 위를 온통 연녹색 안개가 덮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굉음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처참하게 부서진 문을 시작으로 신전은 계속해서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으지직. 마치 인간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 기성과 함께 연녹색 구름 속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팅킹 클라우드(stinking cloud). 대승정이 생애 마지막으로 전개한 고위급 마법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들어온 자는 냉막한 표정을 한 청년이었다. 그것도 눈이 시릴 듯 붉게 타오르는 적발(赤髮)이 무척 인상적인 청년. 그가 바로 대승정을 죽음에 몰아넣은 존재였다. 지금 그는 방자하게도 죽은 대승정의 시신을 지긋이 밟고 있는 상태였다. 잠시 사방을 둘러보던 청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동자에 조금 전 자신의 손에 의해 이승을 하직한 대승정의 시신이 들어왔다. 청년의 입가가 미묘하게 일그러지며 비웃음 섞인 일성이 흘러나왔다. "과연 인간들의 힘이 약해지긴 약해졌군. 베르하젤 교단의 대승정이 겨우 이 정도 실력이라니..." 그의 뒤에서 스윽하고 그림자 몇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인간들의 저력을 경시할 순 없습니다. 인간들 개개인은 약해도 전체는 결코 약하다 할 수 없으니까요." 적발 청년의 눈빛이 갑자기 강렬해졌다. 그는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시선으로 방금 말을 꺼낸 자를 쏘아보았다. "요, 용서하십시오. 미천한 존재가 그만..."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리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었다. 녹색 피부를 가진, 왜소하지만 건장한 체격의 유사종족 오크, 그것도 살아온 세월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피부가 온통 주름살로 쭈글쭈글해진 늙은 오크였다. 통상적으로 오크 중에서 늙은 오크를 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워낙 호전적인 성품을 가진 터라 오크무리 중에서 곱게 늙기란 가히 하늘의 별 따기였던 것이다. 무리 중에서 늙은 오크를 볼 수 있는 경우는 단 한가지. 젊은 오크를 능히 힘으로 제압할 만한 신력을 가진 경우 밖에는 없었고 이 오크는 바로 그 신력을 보유한 오크 로드였다. 하지만 그 신력도 눈앞의 적발 청년에게는 하등 소용이 없었다. "미천한 것을 아는 놈이 감히 내 앞에서 망발을 하는가?" 청년의 서슬 퍼런 질책에 늙은 오크는 그저 식은땀만 흘릴 뿐이었다. 사실 그는 결코 미천하다고 간주할 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비록 힘을 잃고 펠루시아 산맥 서쪽에 꼭꼭 숨어 있지만 과거에는 백만 오크 무리를 손짓 하나로 통솔하던 오크 족의 당당한 군주인 것이다. 석양의 정복자 류이켁, 이것이 바로 그의 이름이었다. 지금은 지리멸렬해서 펠루시아 산맥으로 숨어들어 있긴 했지만 젊은 오크 중에서 그를 제압하고 우두머리자리를 차지할 자는 없었다. 그러므로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오크의 수장은 아직까지 그가 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앞의 청년 앞에서 도통 오금을 펴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청년의 정체는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어리석은 것이 그만 위대하신 존재의 심기를 거슬렀습니다. 벌을 주십시오." 거듭되는 사죄에 마음이 풀렸는지 청년은 마침내 눈빛을 거뒀다. 그리고 몸을 돌려 신전의 중앙 부분으로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오크들의 군주 쿠이켁과 휘하의 친위병들은 그때서야 겨우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젠장 어쩌자고? 성질머리를 알면서도... 내가 미쳤지.' 다급하게 청년의 뒤를 따르던 류이켁의 눈에 죽어 처참하게 널브러진 대승정 이피크로스의 시신이 들어왔다. 류이켁의 눈에 갑자기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놈! 꼴 좋다." 그도 그럴 것이 시신의 정체는 정복전쟁 당시 오크 족을 무단히도 괴롭혔던 전대 대승정의 수제자였기 때문이었다. 류이켁은 지체 없이 그레이트 액스를 들어올렸다. 복수의 화신인 오크 족인 그에게 죽은 시신을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써컹. 둔중한 파육음과 함께 이피크로스의 목이 뎅겅 잘려나갔다. 이미 죽은 시신이라 피는 별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친위병에게 수급을 수습하라 명령한 뒤 류이켁은 얼른 청년의 뒤를 따랐다. 신전의 중앙 부분은 하나의 거대한 밀실 구조로 되어 있었다. 두께가 1미터에 가까운 강철 벽으로 둘러싸인 협소한 공간. 밀실 주위에는 온갖 종류의 보호마법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속에는 인간의 보물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름하여 인간의 서약석. 가치를 떠나 인간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보물이었다. 또한 그 속에는 종족전쟁 당시 탈취된 오크의 서약석도 들어있었다. 밀실을 쳐다보는 청년의 입가에 비웃음이 서렸다. "제법 장난을 많이 쳐 놓았군." 인간계 최강이라 자부하는 마법사들, 그들 중에서도 엄선된 자들이 오랜 시간 정성 들여 펼쳐놓은 각종 보호마법이었다. 이중 삼중의 보호장치들이 밀실을 겹겹이 감싸고 있었지만 청년의 눈에는 한낱 장난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청년의 정체는 마법의 조종이라 할 수 있는 드래곤이었기 때문이다. "언락(Unlock)" 오랜 세월 밀실을 지켜왔던 보호마법은 이 한마디에 너무도 어이없이 해제되어 버렸다. 두께가 1미터 남짓한 철벽 역시 청년 앞에는 무력했다. 목표제한 헬파이어 한 방에 두터운 철벽은 허무하게 뚫려버렸고 그 속에 꼭꼭 감추어졌던 보물은 마침내 청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밀실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사방이 3 평방미터 남짓한 공간의 중간에는 커다란 철괴가 놓여있었다. 물론 그곳에도 역시 여러 가지 도난 방지 수단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청년의 손짓에는 도저히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철커덕. 보호마법이 풀리며 철괴가 열렸다. 청년은 느릿하게 철괴 속으로 손을 뻗었다. "이것이 인간의 서약석이로군." 청년이 집어든 것은 오색 찬란한 광채를 내뿜는 하나의 보석이었다. 어린아이 주먹만한 크기에 형언할 수 없는 빛을 뿜는 아름다운 보석. 한 종족의 흥망을 결정짓는다는 속설과는 달리 서약석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청년의 눈동자에는 티끌만큼의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차피 이런 보석 정도는 그의 레어에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으므로... 그는 서약석을 품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크라누스님의 명령은 완수되었다. 이제 인간의 서약석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할 것이다. 영원히..." 그 때 그의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르키스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인간의 군대가 신전을 에워싸고 진입하려 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사력을 다해 막고는 있지만 워낙 수적으로 역부족인지라... 상황을 보아 외곽의 오크 부대는 모두 전멸한 것 같습니다." 모습을 드러낸 자는 슈렉하이머와 대화를 나누었던 바로 그 검은머리 청년이었다. 냉막한 표정은 변함 없었지만 군데군데 옷이 찢어진 모습은 슈렉하이머와의 결전이 그리 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저, 정말입니까?" 수하들이 전멸했다는 보고에 류이켁의 안색이 싹 변했다. 어차피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전멸이라니... 하지만 그들의 다급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적발 청년은 추호도 동요하지 않았다. "멍청한 놈들. 크라누스님께서 아시면 어쩌려고 그러나? 명색이 드래곤이라는 것들이 인간 따위에게 쫓겨오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흑발 청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의 인간들은 정말 독종들입니다. 놈들은 죽여도, 죽여도 상관없다는 듯 꾸역꾸역 밀려오고 있습니다." 베르키스라 불린 적발 청년은 그럴 듯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테지. 자신들의 서약석이 위기에 처했으니... 좋다. 공간이동 준비를 해놓을 테니 모두 불러오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블랙 드래곤이 몸을 돌리자 베르키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바닥을 한 번 쳐다본 그는 손을 한 번 가볍게 내저었다. 그러자 신전 바닥에 기이한 형태의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진은 적발 청년의 마나를 받아 점점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때 떨리는 류이켁의 목소리가 청년의 귀에 들어왔다. "위대하신 존재시여, 저희.. 저희..." 고개를 돌리자 안절부절 못해하는 류이켁의 모습이 들어왔다. 베르키스의 눈에 잠시 노기가 서렸다. "쓸모 없는 것들만 데려왔더군. 그 새를 못 견디고 전멸하다니..." "하오나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각 부족에서 최고의 용사들만..." "집어치워라." 베르키스의 일갈에 류이켁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베르키스는 잠자코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쓰윽. 그의 손에 들려나온 것은 앞서의 것에 결코 못지 않을 정도로 영롱한 빛을 내뿜는 보석이었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데 대해 불평이라도 하듯 보석은 유난히 눈부시게 빛을 발했다. 베르키스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이것이 너희의 서약석이 맞느냐?" "오오." 무심코 고개를 든 류이켁의 얼굴이 격동에 부르르 떨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어느새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인간들의 영웅 크로센에 의해 서약석이 탈취된 지 어언 오십 년. 그 세월은 명예로운 오크 족을 굴종의 나락에 떨어뜨린 세월과 한 치도 틀림이 없이 동일했다. 그토록 갈구하고 찾으려했던 자신들의 서약석은 이제 바야흐로 그의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것을 되찾기 위해 희생된 용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 비록 드래곤의 도움을 받았을지언정 자신들의 서약석을 다시 보게 되니 류이켁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귀에 냉랭한 베르키스의 음성이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약속대로 이것을 너희들에게 돌려주겠다. 하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류이켁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조건이라도 승낙하겠다는 결의가 번뜩이고 있었다. 하지만 서약석을 되찾는 조건은 오크 족이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가혹했다. "그 대가로 너희 오크 족은 앞으로 천년 년 동안 드래곤들의 수족이 되어야 한다." "그, 그것은..." 류이켁은 일순 말을 잇지 못하고 떠듬거렸다. 무려 천 년 동안이나 드래곤의 수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오크들에겐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시련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말에 류이켁의 눈망울엔 다시금 살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의 종족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던 인간들에 대한 순수한 분노였다. "나는 인간들을 정벌하는데 너희들을 선봉장으로 세울 생각이다. 크로트리아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종족들을 통합해서 인간 족의 씨를 말리려는 것이다. 세상에서 인간이란 존재를 없애고 나서 우리는 그 자리에다 새로운 질서를 세울 생각이다. 너희들은 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인간들에 대한 복수는 류이켁이 꿈에도 바라던 일이 아니던가? 류이켁은 이를 지긋이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대하신 분의 조건을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좋다." 인간의 운명을 능히 결정지을 수 있는 두 종족의 맹약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조금 뒤 인간의 모습을 한 일곱의 드래곤들이 신전 내부로 들어왔다. 전신이 먼지투성이가 되었지만 희생된 이는 하나도 없는 듯 했다. 마법진 위에 운집한 그들의 귀로 베르키스의 음성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그것은 신전 외부에 포진한 인간 기사들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내 이름은 베르키스. 위대하신 드래곤 로드 크라누스 님의 명을 받든다. 지금은 순순히 떠나기로 하지. 하지만 정확히 십 년 뒤,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인간을 정벌할 채비를 완벽히 갖춘 다음..." 파아앗. 마법진에서 급격히 빛이 뿜어졌다. 그 빛 무리는 베르키스와 류이켁을 비롯한 드래곤들의 몸을 삽시간에 휘감아버렸다. 신전 내부를 잠깐동안 밝히던 빛 무리는 오래지 않아 사라져 버렸다. 서약석과 함께... 그리고 그 자리에 완전 무장을 한 무수한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 이런..."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텅 빈 채 입을 벌리고 있던 밀실의 상자뿐이었다. 그것을 본 기사들은 망연자실한 나머지 들고 있던 병기들을 하나 둘 떨어뜨렸다. 오십 년 전과 반대로 이번에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서약석을 빼앗겨버린 것이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11회 당시 블랙 드래곤과 혈투를 벌이던 슈렉하이머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간신히 몸을 뺄 수 있었다. 그가 아무리 고위급 성직자라고 해도 애당초 드래곤과 맞서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좁은 실내라서 블랙 드래곤이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지 그러지 않았다면 벌써 이승을 하직했을 터였다. 간발의 차이로 피신한 슈렉하이머는 가장 먼저 대승정 이피크로스에게로 향했다. 가장 중요한 서약석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그가 와서 목격한 것은 목이 달아난 대승정 이피크로스의 싸늘한 시신뿐이었다. 덕분에 그는 인간들의 서약석이 빼앗기는 순간을 여과 없이 목격할 수 있었다. 아무런 힘이 없어 숨어서 피눈물을 흘리며 말이다. 당시를 회상한 슈렉하이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반드시, 반드시 서약석을 탈환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 이계의 검사를 설득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급선무다." 이미 서약석이 탈취당했다는 사실은 각 왕국의 병사들에게 널리 퍼진 상태. 따라서 현격하게 밀리는 전세를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서약석의 재탈환이 필수요소였다. "그의 능력이라면 필히 드래곤들의 손에서 서약석을 되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잠자코 자신의 거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독고성을 회유해서 서약석을 되찾겠다는 다짐과 함께.. 독고성의 몸이 회복되는 기간동안 슈렉하이머는 그야말로 열과 성의를 다해 그를 대했다. 무공을 잃었다는 상실감에 자포자기했던 독고성은 겨우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고 자신이 온 새로운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트루베니아란 대륙이 중원과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져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단순히 거리로 판단할 수 없는 엄청난 시간적, 공간적 괴리가 두 대륙 사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비록 저희들이 차원이동을 성공시킬 수는 있었지만 동일한 방법을 또다시 사용한다 하더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을 지는 미지수입니다. 차원이동의 술은 그만큼 성공률이 희박한 마법이지요." "음." 독고성은 침음성을 내질렀다. 그의 말에 의하자면 자신이 중원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긴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육신으로 돌아가 봐야 그 가증스러운 사준환 놈에게 복수를 할 가능성은 전혀 없을 테지.' 쓴웃음을 지은 독고성은 슈렉하이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성을 찾은 이후 그는 슈렉하이머에게 반 공대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이유는 무엇이오. 그리고 이처럼 지극 정성을 다해 날 대하는 이유까지 알고 싶소." "말하자면 사연이 무척 길 것입니다. 이제부터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지요." 과거 수련생들의 교육을 도맡아 했던 슈렉하이머답게 그는 이방인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입 모양을 보고 있던 독고성은 기가 찼다. '젠장. 말투만 가지고는 마치 오랜 고향 친구와 대화하는 것 같군. 통역 마법이라고 했나? 정말 요상한 술법도 다 있단 말이야?' 자신에게 들리는 어투는 분명 특유의 억양이 섞인 양주 지방의 방언이었다. 하지만 슈렉하이머의 입 모양을 봐선 그가 전혀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독순술(讀脣術)에 조예가 있는 독고성은 어렵지 않게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일단 우리가 사는 이 트루베니아 대륙은 바로 온 우주를 총괄하시는 주신 베르하젤 님께서 만드신 세상입니다." 슈렉하이머의 입에서는 트루베니아의 건국신화가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신앙심이 깊은 신관답게 슈렉하이머는 성직자의 관점에서 설명을 해 나갔다. 모든 영광을 주신 베르하젤에게 돌리고 말이다. 검에 목숨을 건 무림인이 받아들이기엔 다소 거북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보여준 성의가 있었기에 독고성은 꾹 참고 슈렉하이머의 설명을 들어나갔다. "그러니까 당신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 트루베니아 대륙엔 인간 이외에 여러 유사종족들이 살고 있으며 일 백년 전 오크라는 유사종족과 인간 사이에 종족의 사활을 건 대 전쟁이 벌어졌다는 말이구려." "그렇습니다." 그의 설명에서 독고성은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집약하자면 이 곳은 무림인이 결코 이해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쉽사리 이해하기엔 둘은 너무나도 다른 세상을 살아왔던 것이다. 우선 독고성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오크라는 몬스터였다. 슈렉하이머의 말에 의하자면 작달막한 체구에 돼지 머리를 한 괴물이 바로 오크였다. 중원인의 관점에선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 괴물이었다. 그런 미물들의 무리가 일 백년 동안이나 인간과 대등하게 전투를 치러왔다는 사실이 독고성에겐 쉬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믿으셔야 합니다. 비록 오크가 인간에 비해 다소 힘과 체력이 떨어지긴 하지만 대신 가공할 정도의 성장속도와 생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오크는 대략 1살 전후가 되면 충분히 전투와 사냥에 참가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합니다. 15세가 되어야만 비로소 무기를 들 수 있는 인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지요."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구려. 감히 인간의 아성을 위협하는 미물이 존재한다니..." "하지만 사실입니다. 특히 오크들은 한 배에 열에 달하는 새끼를 낳을 정도로 생식력이 뛰어납니다. 그러므로 충분한 식량만 제공된다면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전투에서 소모된 수를 충분히 채울 수 있을 만큼 말입니다." "...." "그런 오크종족의 특성으로 인해 인간은 당시 전멸을 각오해야 할 정도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무분별한 소모전으로 전개되어 갔을 시기입니다. 오크는 전장에서 잃은 전사를 보충할 여력이 충분히 있었습니다만 인간에겐 그것은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죠. 때문에 그 때 인간들은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끝없이 패주를 계속해야 했습니다. 정말 생각하기도 힘든 암울했던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슈렉하이머는 어린 소년 신관으로 전쟁에 참여했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 때의 참혹했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독고성에게 설명해 줄 수 있었다. "그 때 오크 놈들은 가증스럽게도 성에 고립된 저희들이 빤히 보는 앞에서 전사자와 포로를 대상으로 파티를 벌였습니다.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이 산채로 불에 구워지는 것을 보며 저희들은 이제 인간들의 역사가 완전히 끝장났구나 생각했지요." "그 오크란 놈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씀이시오." "그렇습니다. 종족전쟁 당시에는 포로를 잡는다는 것이 하등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놈들은 겨울철을 나기 위해 동족끼리도 서로 잡아먹는 놈들. 때문에 놈들은 인간들을 잡으면 꼭 산채로 불에 구워 식량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그럴 수 없었지요. 오크를 먹지 않는 때문에 생포하는 즉시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잠시 식량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자 병사들은 결국 오크 고기라도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를 회상하는 듯 슈렉하이머의 노안에 감회가 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독고성은 그 때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크 고기의 맛이 어떨까? 자고로 중원에서는 인간의 젖을 먹여 키우는 새끼돼지의 고기를 최상등품으로 친다. 그렇다면 사람의 고기를 먹고 자란 오크라면...' 뒤이어 터져 나온 슈렉하이머의 격양된 음성 때문에 독고성의 상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 때 우리 인간들에게 구세주가 나타났습니다. 전 대륙을 통틀어 가장 강했던 그랜드 소드 마스터, 크로센 대제가 바야흐로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크로센?" "그렇습니다. 근 백년간의 인간사를 통틀어 가장 강했고, 또한 가장 많은 화젯거리와 분규를 몰고 왔던 이 시대 최고의 풍운아이지요." 점점 격양되는 슈렉하이머의 음성에서 독고성은 그가 크로센 대제를 얼마나 숭배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 분의 활약에 의해 전세는 일시에 뒤집혀 졌습니다. 그 분은 정말 트루베니아의 천년 역사상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불세출의 인물이며 가히 영웅이라 불려도 조금도 아깝지 않은 분이십니다. "그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해냈기에..." 독고성을 힐끗 쳐다본 슈렉하이머는 잠자코 설명을 시작했다. "그 분의 업적을 이해하시려면 먼저 아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각 종족의 서약석에 대한 일입니다." 슈렉하이머는 베르하젤에 의해 각 종족에게 전해진 서약석에 대한 비밀을 독고성에게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각 종족의 조화를 관장하는 신비스러운 보석으로써 이것이 종족의 손에 존재하는 동안 그 종족은 언제 어디서나 영원한 주신 베르하젤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신화. 이것 역시 독고성이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놀랍구려. 그러한 내력을 가진 보석이 존재한다니..." "이미 서약석은 각 종족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고한 보물입니다. 때문에 처참한 패전을 거듭하면서도 피아가 이 서약석만은 목숨을 다 바쳐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크로센 대제께서 바로 오크들의 서약석을 빼앗아오는 위업을 이루셨습니다. 수천 명의 엄선된 오크 전사들이 경비하는 틈을 뚫고 들어가서 말이지요." "음." 독고성은 침음성을 질렀다. 일개 보석이 각 종족의 번영을 관장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지만 정색을 한 슈렉하이머의 얼굴을 보자 도저히 토를 달 수가 없었다. "당시 그 분은 크로세나 왕국의 군주였습니다. 이곳에선 국가의 명칭이 곧 군주의 이름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요. 따라서 그 분의 본명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분의 검술 실력만은 트루베니아에서 도저히 대적할 자가 없다는 사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지요." 절체절명의 순간. 그는 휘하 크로세나 왕국의 정예 기사들을 데리고 오크 족의 중심부 깊숙이 잠입해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수천 명의 오크 친위대들이 지키고 있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으로 말이다. 곧이어 이어진 처절한 혈투. 하지만 크로센 대제가 직접 사사한 크로세나의 정예 기사들은 악전고투 끝에 오크 친위대를 전멸시키고 그들이 꽁꽁 숨겨둔 서약석을 탈취해 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바로 전황의 추이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불세출의 영웅 크로센 대제에 의해 오크의 서약석이 탈취당했다. 그 일로 인해 밀리던 전황이 뒤집혔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서약석을 빼앗긴다는 일. 그것은 더 이상 베르하젤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다는 뜻과 일치했다. 그 하나만으로 오크 전사들의 사기는 걷잡을 수 없을 만치 땅에 떨어져 버렸다. 미개한 지능을 가진 오크인지라 그들이 서약석에 두는 의미는 가히 절대적이라 봐도 무방했다. 한없이 용맹스럽고 잔인하던 오크 전사들. 하지만 서약석을 빼앗긴 이래로 오크들은 미개하기 그지없는 단순한 몬스터로 전락해버렸다. 이 낭보는 곧 전장에 널리 알려졌고 오크들과는 정반대로 인간 병사들의 사기는 치솟을 대로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이여 이제 베르하젤의 가호가 함께 하신다. 이 은총은 오직 우리들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베르하젤의 보살핌에서 제외된 오크 찌꺼기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씨를 말려버리자." 크로세르 대제의 위업. 그에 의해 하나로 밀집된 인간 병사들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압도적으로 오크 족을 밀어붙였다. 물론 그 군대의 최선봉에는 어김없이 그의 기사들이 앞장을 섰다. 그 뒤로도 이십 년을 끈 기나긴 전쟁. 처절한 혈투 끝에 인간은 마침내 오크의 주력군을 궤멸시킬 수 있었다. 플로우르 대평원에서 벌어진 최후의 혈전에서 오크는 십만에 달하는 대군을 잃고 처참히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동족을 잃고 극소수만 살아남은 오크 족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척박한 펠루시아 산맥 서쪽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오크 족의 지배 하에 있던 영토는 마침내 인간들의 새로운 영토로 새로이 편입될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을 설명한 슈렉하이머는 뭔가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하여 트루베니아 대륙은 다시금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지요. 뒤이어 벌어진 두 번의 참사. 그것은 인간계에 익히 치명적이라 칭할 정도의 피해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슈렉하이머의 말을 따르자면 트루베니아 대륙은 인간들의 독무대가 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승리는 오로지 크로센 대제의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이나 그는 위대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며 또한 신비에 쌓인 인물이라 말할 수 있었다. "크로센 대제의 출신이 어디이고 어디서 검술을 배웠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주위 인물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우연히 열린 차원의 문을 통해 이곳에 온 타 차원의 인물이란 사실이 밝혀진 바 있습니다.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만 저희들은 그가 아무래도 당신이 있던 중원이란 곳에서 온 인물이리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독고성의 미간이 지긋이 모아졌다. "그 크로센 대제란 자가 우리 중원의 무사란 말이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증거로 중원이란 곳에는 무수한 소드 마스터가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는 직접 눈으로 그 사실을 확인한 바가 있습니다." 독고성은 의아하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소드 마스터라니?" "오랜 수련으로 말미암아 마나를 검과 갑옷에 응축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무예자를 말합니다. 오러 블레이드. 다시 말해 검에 마나를 불어넣어 강철조차도 무 베듯 할 수 있는 궁극의 기술을 구사할 수 있는 실력자를 이곳에서는 소드 마스터라 통틀어 칭하고 있습니다. '검기를 말하는 건지 검강을 말하는 건지 알 수 없군.' 잠시 생각에 빠졌던 독고성은 곧 50년 전의 영웅 크로센 대제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가 중원에서 온 고수일지도 모른다는 말에 별안간 호기심이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12회 독고성은 호기심 어린 시선을 슈렉하이머에게 돌렸다. "그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소." "이제부터 설명 드리겠습니다." 슈렉하이머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크로센 대제는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을 고강한 검술실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트루베니아 대륙에 존재하는 소드 마스터 중 그 누구도 크로센 대제를 당해낼 수 없었다고 하니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만 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베르하젤 님께서 보내신 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으로써 그 정도의 검술 실력을 가진다는 것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말로 크로센 대제가 이곳에 온 초기에는 이곳 사람들과는 의사소통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풍습의 차이로 인해 곳곳에서 오해를 살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고강한 검술실력에도 불구하고 삶을 연명하기 위해 용병생활을 시작했다. 또한 그는 당시 명성을 노린 기사들의 결투 신청으로 하루가 멀다하고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는데 헤아릴 수조차 없는 결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고 전해졌다. 그 결과 그는 각국 기사들의 수 없는 질시를 받았다. 예로부터 뛰어난 자에게는 선망보다 질시가 먼저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변변찮은 작위도 없이 그저 하찮은 용병 신분이었던 그에겐 어쩌면 당연한 결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만남이 어느 날 우연히 이루어졌다. "당시 그가 머물고 있던 이카롯트 제국의 수도에는 변방의 왕국 크로세나의 국왕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크로세나 왕국은 오크들의 공격에 완전히 멸망했었지요. 간신히 빠져 나온 왕족들이 살아남은 기사들과 함께 이카롯트 제국에 몸을 의탁했습니다. 그런데 망명생활을 하던 크로세나 국왕이 우연한 기회에 크로센 대제의 결투 장면을 목격한 것입니다." 크로센 대제가 보유한 인간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검술실력. 당시 크로세나 국왕은 크로센 대제의 검술실력에 넋이 나갔다고 전해졌다. "멸망한 우리 조국을 되살릴 인물은 오직 이 자밖에 없어. " 크로세나의 늙은 국왕은 오크에게 점령된 자신의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 무척 어려운 용단을 내렸다. 바로 크로센 대제에게 아름다운 자신의 딸과 함께 크로세나 왕국의 군주 자리를 양도한 것이다. 당시 이카롯트 제국의 중신들은 크로세나 국왕의 파격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결정에 무척 경악했다고 전해졌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신분이 낮은 용병 나부랭이에게 왕녀와 함께, 일국의 군주 자리를 양도하다니... 비록 멸망한 왕국이라고는 하나 이것은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크로세나 국왕은 눈썹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 일을 추진시켰다. 그 결과 크로센 대제는 공식적으로 크로세나 왕국을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크로센이란 그의 이름은 당시 지어진 것이라 했다. "아마도 대제의 본명은 이곳 트루베니아에선 아무도 알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모두가 비웃는 결정이었지만 크로세나 국왕의 결정이 탁월했다는 것은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이곳의 언어를 익히게 되자 크로센 대제의 진가가 드러났던 것이다. 그는 검술 실력뿐만 아니라 기사들을 지휘하는 통솔력 또한 전혀 못지 않았다. 당시 망명 중이던 크로세나는 오백 여 명의 기사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제대로 봉록을 지급할 수 없었기에 그들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심지어 밤을 틈타 야반도주하는 기사들도 있을 정도였으니... 크로센 대제는 당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해서 기사 오백 명의 마음을 대번에 사로잡았다고 전해졌다. 그런 다음 이어진 것은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수련방법을 기사들에게 전수하는 것이었다. 목적은 약속대로 멸망한 크로세나 왕국을 재건하기 위한 이유에서였다. "우리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당시 소드마스터란 존재는 바로 신께서 내리신 것이라 알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소드마스터가 되기란 어려웠으니까요. 무수한 기사들이 뜻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고 수련했지만 소드마스터가 되는데 성공한 자는 몇 명 없었습니다. 크로센 대제는 바로 그 고정관념을 깨트려 버렸습니다." 당시 트루베니아의 최강국이었던 이카롯트는 총 이백여 명에 달하는 소드 마스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일개 왕국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자부했기에 이카롯트 왕국은 무척 오랫동안 트루베니아의 최강대국 자리를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크로센 대제 단 일인에 의해 그 탄탄했던 철옹성이 일시에 허물어져 버렸다. 크로센 대제 비법의 방법으로 수련한 기사들 중 반수가 단 십 년 만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당시 이카롯트를 비롯한 각 왕국들은 그 사실에 경악했습니다. 비록 크로세나 왕국의 기사들이 비록 검술로 정평이 있는 실력자들이라곤 하지만 단 십 년 만에 250명의 소드 마스터를 키워낼 수 있다는 사실은 당시에는 바로 기적이었으니까요." 단숨에 이카롯트 왕국을 능가하는 기사단 전력을 보유하게 된 크로센 대제는 마침내 휘하의 모든 기사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떠났다. 비록 병사들의 수는 적었지만 그가 보유한 기사단 전력만으로도 충분히 일개 왕국을 멸망시킬 수 있는 수준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오크들과의 전면전이 막 벌어지려는 무렵. 사방에서 종족간의 사활을 건 전쟁이 벌어졌다. 크로센 대제의 기사단은 그 전쟁에서 누구도 발휘할 수 없는 위력을 선보이게 된다. "당시 크로센 대제에 의해 단련된 기사단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들은 단 일주일만에 오크 이만을 섬멸시키고 멸망한 왕국 크로세나의 모든 영토를 되찾았으니까요..." 그 뒤 크로센 대제의 행로는 탄탄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드높은 실력과 엄청난 전과가 알려지자 오크 족을 피해 숨어 다니던 크로세나 왕국의 열혈 청년들이 속속 그의 군대에 투신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굳이 크로세나 왕국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오크 족에 의해 멸망된 무수한 왕국의 패잔병과 기사들마저 대대적으로 가세하고 나섰다. 그들은 오직 크로센 대제를 섬기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았다. 그들의 가족과 고국을 멸망시킨 오크들에게 복수를 해 줄 수 있는 자는 오직 그밖에 없었으므로... 지원병들이 쇄도한 결과 크로세나 군대의 힘은 비약적으로 강해졌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흉포한 오크 전사들조차 크로세나 왕국의 휘장만 보면 꼬리가 빠지게 줄행랑친다고 알려질 정도였으니까... 이렇게 선대 국왕의 탁월한 선택에 의해 크로세나 왕국은 지금까지의 최강국이었던 이카롯트 제국을 넘어서는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은 인간들에겐 압도적으로 불리했습니다. 인구수에서 월등한 오크 족에 의해 무수한 왕국들이 멸망당하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죽어갔지요.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크로세나 왕국의 군대만은 거침없이 오크 족을 대상으로 승리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크로세나의 군대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열세마저 극복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크로센 대제는 전세를 뒤집기 위해 용단을 내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엄선된 기사들을 대동해서 오크 족 본진에 침투, 그들의 서약석을 빼앗아오려는 마음을 먹게 되는 것이다. "익히 말씀드린바와 같이 크로센 대제의 계획은 성공리에 끝났습니다. 그의 의도대로 사기가 충천한 병사들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압도적으로 오크 족을 밀어붙였고 마침내 최후에 벌어진 플로우르 공방전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지요. 베르하젤 님의 뜻을 거스르고 종족전쟁을 일으킨 대가로 우리 인간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대 참사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대 참사라니?" 해가 뉘엇뉘엇 떨어지고 있었지만 둘의 대화는 그칠 새가 없었다. 슈렉하이머가 고위급 신관이라서 통역 마법을 오랜 시간 지속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들에겐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독고성은 잠자는 것도 잊고 슈렉하이머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다. 비록 머나먼 타국의 역사였지만 그에겐 시사하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정복전쟁을 통해 크로세르 대제는 인간들의 명실상부한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거기에서 비롯될 줄은 아무도 몰랐지요.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분쟁은 그칠 새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슈렉하이머는 그 이후에 벌어진 인간사에서 가장 추악하다 볼 수 있는 다툼을 떠올렸다. 종족전쟁이 끝난 당시는 바로 베르하젤 교단의 권위가 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대였다. 때문에 베르하젤이 아닌 다른 신을 믿는다는 것은 당시엔 가장 중대한 범죄로 간주되었으며 만약 발각될 경우 재판도 없이 즉결처형이 가능했다. 거기에는 신을 믿지 않는 자들도 어김없이 포함되었다. "문제는 인간들의 영웅인 크로센 대제께서 신을 믿지 않는 불신자란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불신자. 신을 믿지 않으며 오로지 본신에 능력에 의지해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기를 꾀하는 자들. 그들은 주신 베르하젤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자신들의 의지로만 해결하려 한다. 그들 불신자의 시초가 바로 크로센 대제였다. "멍청하기 그지없는 일이오. 우리의 운명은 바로 우리 스스로가 개척해 나가야 하는 법. 신을 찾는 것은 그 다음에나 생각해 볼 문제요." 크로센 대제는 당시 신의 자비에만 모든 것을 의존하는 시대 상황을 비웃었다. 자신의 운명을 오로지 존재하지도 않는(그의 관점으로는) 신이 좌우한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신념을 우선 크로세나 왕국의 기사들에게 전파했다. 신에게 의지함이 없이 오로지 노력과 힘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간다는 신념은 곧 크로세나 왕국의 기사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갔다. 이미 그들은 자신들의 군주인 크로센 대제를 오히려 주신 베르하젤보다도 더 믿고 있는 상태. 그의 가르침에 의해 크로세나 왕국의 기사들은 신앙심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검술실력과 능력을 기르는데 주안했고 그로 인해 비약적인 실력향상을 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종족전쟁에서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되었어." 종족 전쟁이 모두 끝나고 자신감이 생긴 크로세르 대제는 자신의 신념을 거침없이 밝히기에 나섰다. 바야흐로 공개적으로 불신을 천명하는 자가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나오는 순간이었다. "나는 베르하젤 신을 믿지 않소. 나는 오로지 내 능력과 노력을 믿을 뿐이오." 그의 발언은 당시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베르하젤 교단은 물론이오 신앙심이 독실한 각 왕국 군주들이 그의 말을 그냥 받아넘길 리가 없었다. 그 때는 베르하젤 교단의 힘이 가장 강대했을 때였고 신을 부정하는 행위를 가장 중대한 범죄로 간주하던 때였다. 이 발언으로 인해 크로센 대제와 베르하젤 교단과는 필연적으로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의 사태를 전해들은 독고성은 어이가 없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고작 그런 문제로 그런 전공을 세운 자를 축출하려 하다니..." 슈렉하이머는 쓴웃음을 지었다. "당시에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비록 크로센 대제를 깊이 숭상하고는 있었지만 그 역시도 베르하젤의 독실한 신자였다. 때문에 그런 선언을 한 크로센 대제에 대해 섭섭하다는 감정마저 가질 정도였으니... 문제는 크로센 대제를 몰아내는 데 각국 군주들의 질투심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당시의 군주들은 크로센 대제를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하급 병사들에게 거의 신과 동일한 존재로 추앙받고 있는 만큼 그들이 크로센 대제를 꺼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엄청난 전공. 거기에다 자국 병사들까지도 크로센 대제의 위업에 깊이 매료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각 군주들이 크로센 대제에 대해 가지는 경계심은 상상을 초월했다. 만에 하나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왕국들을 하나로 통일하고 그 통일제국의 황제로 크로센 대제를 추대하자는 의견이 나올 시에는 그들로써는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로써는 도저히 대세를 막을 수 없었다. 이미 하급 병사들은 자국의 군주보다 크로센 대제를 더욱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터에 크로센 대제의 폭탄발언이 터져 나왔으니 각국 군주들에겐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으리라... 베르하젤 교단의 판결이 급기야 내려졌다. 이것은 각국 군주들의 전폭적인 후원을 힘입은 판결이기도 했다. "크로세나 왕국의 군주 크로센은 신을 부정하는 중죄를 저질렀다. 그러므로 그가 세운 모든 전공을 백지화하고 그를 재판에 회부하도록 하겠다." 재판에 회부된다면 그 즉시 화형에 처해진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 물론 크로센 대제와 그를 따르는 기사들이 순순히 재판에 응할 리가 없었다. 정복전쟁을 통해 크로세나 왕국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크로세나 왕국의 군사력은 지금까지의 최강국 이카롯트 제국의 모든 힘을 가볍게 넘어설 정도였다. 크로센 대제가 불복하자 각국 군주들은 보유한 군사력을 모두 연합해 크로센 대제의 군대에 대적하기로 결정했다. 트루베니아 대륙은 급기야 신자와 불신자와의 극한 대립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전쟁을 벌이기에 앞서 집안을 정리하는 것은 어느 대륙을 막론하고 가장 시급을 요하는 일이다. 때문에 각국 군주들은 전면전을 벌이기 전에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들어갔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13회 휘하 기사들 중 크로센 대제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모조리 추려내는 숙청작업. 그들에겐 어김없이 불신자의 굴레가 씌워져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미 군주들과 한 통속이 된 종교재판소의 결정은 뻔하기 그지없었다. "화형을 선포하노라." 이렇게 해서 수많은 기사들이 종교재판을 통해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교단 측의 심판은 너무나도 지엄했다. 불신자로 간주된 기사들뿐만 아니라 그들 휘하의 병사들까지 추호도 용서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오직 학살로밖에 볼 수 없는 공개적 살해가 시작되었다. 그것도 얼마 전까지 충성을 다 바치던 자신의 군주에 의해... 숙청작업이 모두 끝나고 나자 그들의 칼날은 곧 크로센 대제에게 집중되었다. 쌍방의 분쟁은 이처럼 점차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어갔다. 바야흐로 인간들간의 내전이 촉발되려 하는 시기. 하지만 마지막 순간 크로센 대제가 적절한 타협책을 내세웠다. 자신의 발언이 이처럼 심각한 파장을 불러 일으키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한 크로센 대제였다. "좋소. 내 신념을 용납하지 못하겠다면 떠나리다. 신을 믿던 안 믿던 각자의 의향에 맡기는 자유를 찾기 위해.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의 신념을 지켜나갈 것이오." 이미 크로세나 왕국의 국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크로센 대제를 지지하고 나서는 실정이었다. 그들에게 크로센 대제는 백성들의 안위를 자기 몸보다도 더 걱정하는 인자한 성군이었으므로... 그들은 오랫동안 살아온 정든 고향을 버리고 크로센 대제를 따르기 위해 서슴없이 짐을 꾸렸다. 거기에는 종교재판을 피한 자들과 크로센 대제를 숭상하는 자들이 대거 가세했다.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서 무려 트루베니아 대륙의 전체 인구 중 십 분지 일에 육박할 정도였다. 이들의 가세에 힘입어 크로센 대제는 얼마 전 발견된 신대륙으로 이주하는 의견을 제시했다. "우리는 아르카디아로 갈 것이오." 아르카디아 대륙. 불과 오십 년 전에 처음 발견된 신대륙으로 트루베니아와 무척 멀리 떨어진 미지의 대륙이었다. 그곳의 기후가 어떠하며 어떤 몬스터가 살고 있는지, 또한 어떤 작물을 가꿀 수 있는지 등등. 모든 면이 베일에 쌓인 대륙이라 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카디아 대륙은 이곳 트루베니아와 뱃길로 백일 가까이 걸리는 무척 먼 대륙이었기 때문이다. 정복전쟁 중에 뱃사람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기는 했지만 그곳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었다. 단지 트루베니아 대륙과 맞먹는 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밖에는... 크로센 대제는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을 이끌고 바로 그 신대륙을 개척하려 하는 것이다. 다름 아닌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당시 베르하젤 교단 측에서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우선 교단 측에 크로센 대제를 제압할 만한 실력 있는 기사가 없었습니다. 각 국 근위기사 단장들을 모두 모아 덤비더라도 크로센 대제를 당해낼 순 없었고 또한 오크와의 전투에서 수많은 병사들을 잃은 것도 모자라 종교분규로 무수한 기사들을 숙청했던 터라 그를 막을 엄두를 도저히 내지 못한 것입니다." 협상은 마침내 타결되었다. 크로센 대제는 자신을 추종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출발준비를 서둘렀다. 믿음의 자유를 주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배를 건조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선박건조기술로 백일이나 걸리는 항해를 할 수 있는 배를 만든다는 것이 쉽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오직 대제 하나만 믿고 있었다. 배가 완성되는 대로 사람들은 몸을 싣고 바다 건너 아르카디아 대륙을 향한 머나먼 항해를 시작한다.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크로센 대제는 휘하 기사단을 거느리고 최후까지 그 자리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크로센 대제가 떠나기를 결정함으로 인해 트루베니아 대륙에는 마침내 평화가 찾아온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분쟁의 씨앗이라 할 수 있는 그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각 국 군대의 요직에 위치한 수많은 기사들이 그를 따라나섰기 때문입니다." 크로센 대제를 따라 나선 기사들의 수는 상상을 초월했다. 뜻 있는 기사들은 그만큼 베르하젤 교단의 독선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로 인해 각 왕국의 군사력은 비약적으로 약화되었다는 사실이다. 크로센 대제가 데리고 간 기사들은 하루 이틀 사이에 양성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을 상기한 슈렉하이머는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제 살 깎아먹기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둠의 마왕 나이델하르크가 발호할 줄은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으니까요." "어둠의 마왕이라니요." 자신의 이야기에 도취되어 있던 슈렉하이머는 독고성의 반문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트루베니아의 천년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했던 시기였던지라 그만 거기에 꼬박 몰입해버린 것이다. 창 밖을 보고 시간을 가늠한 슈렉하이머는 독고성에게 빙긋 미소를 보냈다. "그 뒤의 이야기는 내일 들려주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이렇게 지난 줄은 저도 몰랐군요." "난 괜찮소. 그러니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시오." 슈렉하이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당신은 병자입니다. 안정이 필요할 터 오늘은 푹 숙면을 취하십시오. 당신을 이리로 초빙한 이유는 아마도 내일 정도면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난 지금 당장 듣고 싶소." 애석하게도 독고성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슈렉하이머가 시전하던 통역마법이 그 효력을 다 해버린 것이다. 의사소통이 차단된 이상 독고성으로서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조바심이 날 정도로 이곳 트루베니아의 역사가 흥미진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도 이제 별 수 없이 내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푹 쉬도록 하십시오.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뜻이 전해지진 않는다 하더라도 의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던 독고성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독고성을 힐끗 쳐다본 슈렉하이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아직까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남아있었다. 다음날 아침. 독고성은 어제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깨어 있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독고성을 본 슈렉하이머는 빙긋 웃으며 통역 마법을 캐스팅했다. "이제 인간계에 닥친 두 번째 대 참사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바로 어제 제가 설명 드린 상황. 인간의 힘이 극도로 약해진 상황 말입니다. 훗날 사가(史家)들에게 블러디 문(bloody moon)의 대 참사로 기록된 어둠의 전쟁은 그런 상황에서 일어났습니다. 바로 암흑 군단의 침공이 시작된 것입니다." "암흑군단이라니요?" "마계의 언데드 군단입니다. 그들의 침공이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어제와는 달리 독고성이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존재가 계속 거론되었기 때문이었다. 무림인인 그에게 언데드란 그저 강시 따위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 강시 따위가 오크 군단보다 오히려 인간계를 더욱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다니. 하지만 그는 조바심 내지 않고 슈렉하이머의 말을 경청하리란 마음을 먹었다. 적어도 그는 자신에게 이 대륙의 상황을 가장 잘 전달해 줄 인물인 것이다. "암흑군단은 죽음을 관장하는 마계의 마왕 나이델하르크에 의해 힘을 부여받았지요.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네크로멘서의 몸에 화신하여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네크로멘서?" "소환술사를 칭하는 말이지요. 주로 고위급 흑마법사들이 소환술을 시전할 수 있습니다." 슈렉하이머의 말에 따르자면 그 나이델하르크란 마왕이 인간계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어둠의 힘을 대대적으로 결집해 이 트루베니아 대륙을 자신의 휘하에 넣으려 했다고 한다. 이미 종족 전쟁과 종교 분규로 말미암아 많은 힘을 상실한 인간계는 그 때문에 또 한번의 힘겨운 싸움을 겪어야 했다. "그 전쟁으로 말미암아 트루베니아는 인구의 반을 잃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습니다." 어둠의 마왕 나이델하르크와의 전투. 그것은 트루베니아 대륙에 존재하는 인구 반을 쓸어버릴 정도로 처절했다. 때는 공교롭게도 인간들의 힘이 가장 약할 시기였고 각 왕국의 방어군은 너무도 허무하게 스러져갔다. 나이델하르크가 불러들인 마계의 마물들과 언데드 군단은 허약해진 인간의 군대를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며 그야말로 거침없는 진군을 해 나갈 수 있었다. 오랜 전통을 가진 유서 깊은 왕국의 수도들이 하루아침에 불바다로 변하고 시민들은 곳곳에서 학살당했다. 바야흐로 트루베니아 역사상 최악의 위기가 닥쳐 버린 것이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소."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트루베니아 대륙의 모든 왕국들이 마침내 하나로 뭉쳤다. 크로센 대제가 떠나간 이후 뿔뿔이 흩어졌던 연합군이 다시 결집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운명을 건 대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나이델하르크는 어떻게 해서든 인간들의 서약석을 손에 넣으려 했습니다. 반대로 저희들은 죽을힘을 다해 그것을 보호하려 애썼지요. 수많은 공방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수많은 영웅과 용사들이 피를 뿌렸고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병사들이 전쟁터의 이슬로 스러져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로 결집된 인간의 힘은 역시 대단했습니다. 처음에는 전혀 가망이 없어 보이던 전세가 서서히 역전되기 시작했으니까요. 결국 마왕 나이델하르크는 조바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들이 이렇게 위력을 보일 수 있는 배경은 바로 서약석이란 사실을 나이델하르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나이델하르크는 전세를 뒤집기 위해 어둠의 군대를 총 집결시켰다. 그리하여 수십만에 달하는 언데드 군대를 모은 다음, 그는 서약석이 보관된 이카롯트 왕국으로 향했다. 서약석을 탈취해서 인간들의 사기를 꺾어보겠다는 의도에서였다. "당시 연합군 역시 서약석을 수호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긁어모았습니다. 그리고 이카롯트 평원에서 양 군대는 인간의 운명을 놓고 역사적인 한 판 승부를 벌였지요. 그 공방전에서 인간들은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희생이 헛되지 않았던지 결국 저희들은 마침내 마왕 나이델하르크를 격파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베르하젤 님의 보살핌으로 말미암은 것도 있지요." 당연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전과. 그러나 슈렉하이머의 미간에 침중한 기색이 감도는 것을 독고성은 용케 간파할 수 있었다. "보아하니 그 승리의 배경에는 뭔가 속사정이 있는 듯 하구려." 정곡이 찔린 듯 슈렉하이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방인인 독고성에겐 왠지 숨기고 싶은 사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늘 높은 줄 몰랐던 베르하젤 교단의 교세가 꺾인 것이 바로 그 전쟁 때문이었다. 언데드 군대는 자신들의 병력을 공급하기 위해 점령한 지역의 인간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학살했다. 심지어 젖먹이 어린아이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그 유해들은 고스란히 스켈레톤과 좀비 병사가 되어 검을 들고 언데드 군대에 가세했다. 정말 눈뜨고는 쳐다볼 수 없는 참사가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암흑군단과의 처절한 전투에서도 주신 베르하젤은 인간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수많은 신관들이 밤을 세워가며 구원해 줄 것을 빌었지만 신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어둠의 군대를 물리친 원동력은 오히려 수많은 인간들의 희생이었다.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이름 모를 영웅들과 병사들이 전장에서 장렬히 산화해가며 어둠의 군대를 몰아내는데 일조를 했던 것이다. 결국 슈렉하이머는 모든 사실을 숨김없이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예리하시군요. 맞습니다. 만약 아르카디아 대륙의 지원이 없었다면 당시 트루베니아 대륙의 인간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조잡한 배에 몸을 싣고 아르카디아 대륙으로 떠난 크로센 대제 일행. 그 누구도 개척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선원들에 의하면 그곳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흉포한 몬스터들이 우글거린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개척을 훌륭히 성공시켰다. 쉴새없이 공격해오는 몬스터들을 몰아내고 국가를 건설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곳의 기후는 작물을 가꾸기에 더할 나위가 없다고 했다. 일조량도 충분하고 강수량도 넉넉했기 때문에 개척 국가는 빠른 시일 내에 기반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어느 날 비보가 전해졌으니... 멸망한 왕국의 한 군주가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트루베니아의 사정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트루베니아는 지금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무수히 학살당하고 있으니 제발..." 그 말을 들은 크로센 대제는 두말도 하지 않고 기사단을 소집했다. 오크와의 전투에서 신화를 이루었던 바로 그 기사단이었다. 모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는 말을 듣자 신대륙을 개척 중이던 병사들 역시 대대적으로 지원군으로 자원했다. 비록 자신들을 버리기는 했지만 모국의 멸망을 도저히 좌시할 수 없었던 그들이었다. 삽시간에 10만에 달하는 대군이 모였다. 크로센 대제는 개척 도시를 지킬 수 있는 극소수의 경비대만을 남겨둔 채 군대를 진두지휘해서 배에 올랐다. 그들이 이곳으로 타고 온 바로 그 배를 타고 말이다. 아르카디아 대륙의 지원군은 이렇게 트루베니아에 다시 발을 들여놓았다. 때는 바야흐로 트루베니아 대륙이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시기였다. 바로 최후의 결전이라 할 수 있는 이카롯트 공방전이 벌어지려는 시기. 아르카디아 지원군은 오랜 항해로 지친 심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운명의 이카롯트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르카디아 지원군의 피해는 엄청났습니다. 약 10만으로 추정되는 아르카디아 지원군 중 살아 남은 자가 반을 넘지 못할 정도로 희생은 컸지요. 대부분 소드 마스터로 구성된 크로세나의 기사단도 절반이나 전장에 묻혔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들의 희생 덕분에 이카롯트 공방전은 인간들의 승리로 끝날 수 있었다. 자신들을 험하디 험한 신대륙으로 쫓아낸 원한을 아르카디아의 병사들은 도리어 목숨을 다 바친 은혜로 풀었던 것이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14회 예상치 못했던 지원병에 모든 휘하세력을 잃고 패주할 수밖에 없었던 나이델하르크. 그는 이를 갈며 험준한 펠루시아 산맥으로 숨어들었다고 했다. 반드시 돌아올 것이란 말을 남긴 채,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의문스럽게 실종되었다. 그리고 대륙에 닥쳤던 두 번째 위기도 이렇게 극복되었다. 그들이 축출한 한 존재에 의해 말이다. 하지만 트루베니아 대륙의 군주들은 그 누구도 그 지원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군주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크로센 대제를 중상모략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결국 거기에 진저리를 친 것은 크로센 대제 본인이었다. "정말 뼈 속까지 썩은 자들이로군. 내 두 번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 크로센 대제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아무런 미련 없이 배를 다시 준비시켰다. 이런 추악한 권력투쟁이 없는 새로운 조국 아르카디아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여기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으니... "아르카디아의 지원군은 약 오백여 척의 배에 십만에 조금 못 미치는 병사가 타고 왔습니다. 그들 중 생존자는 채 반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르카디아로 돌아가는 선단은 어느새 일천 이백여 척에 육박해 있었지요. 배를 타고 가는 인원만 해도 물경 이십 만이 넘었습니다." "허!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이미 트루베니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크로센 대제의 신념에 깊이 매료되었다고 할까요. 다시 말하자면 그만큼 각 국 군주들과 베르하젤 교단의 횡포가 심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다시 말해 뜻 있는 자들이 대거 신대륙 아르카디아로 건너간 것입니다." 이미 그 자신이 베르하젤 교단의 고위급 성직자이면서도 슈렉하이머는 그들 교단의 치부라 할 수 있는 사실을 전혀 감추지 않았다. "크로센 대제는 새로운 추종자들을 데리고 다시 아르카디아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들의 참전 여부는 알게 모르게 금기상황이 되어 버렸지요. 바로 각 국 군주들의 소행입니다. 그들에게 크로센 대제라는 존재는 이미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렸지요." 아무리 쉬쉬하려 했지만 지원군과 함께 싸웠던 병사들 모두의 입을 막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트루베니아 대륙을 다시 한 번 구한 크로센 대제의 무용담은 발 없는 말을 타고 또다시 트루베니아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는 이번 승리가 오로지 인간들의 투혼과 아르카디아의 지원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그런 연유로 베르하젤 교단의 권위는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대륙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어도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주신 따위는 필요 없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더욱이 아르카디아 대륙으로 건너간 개척자들이 훌륭히 국가를 세우고 신대륙을 개척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진 이후로는 크로센 대제의 신념은 공개적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베르하젤 교단은 이제 더 이상 거기에 간섭할 수 없었다. 30년 전과는 정말 판이하게 다른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 이후로 우리 베르하젤 교단의 교세는 점점 쇠퇴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여간해서는 신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듣고 보니 그럴 듯 하구려." 독고성은 그 크로센이란 자에게 실로 호감이 가는 것을 느꼈다. 슈렉하이머의 말대로라면 그는 능히 영웅이라 칭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더욱이 그는 중원의 인물로 짐작되는 자가 아닌가? "암흑전쟁이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벌어졌다면 그 크로센이란 자도 꽤나 나이를 먹었겠구려." "그렇습니다. 그 때에도 백발이 성성하셨으니 아마 지금쯤은 더 늙으셨을지도..." 불연 듯 상념에 빠져드는 슈렉하이머를 쳐다 보다 독고성은 미간을 슬며시 모았다. "그런데 당신은 아직도 날 데리고 온 연유에 대해 말하지 않았소." 슈렉하이머는 만면에 빙긋이 미소를 떠올렸다. "제 이야기는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인간계에 진정한 위기라 할 수 있는 세 번째 참사는 그 뒤에 일어났습니다." 슈렉하이머는 자신이 직접 겪었던 서약석 탈취사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힘이 없어 몸을 은폐한 채 인간들에게 더 이상 소중할 수 없는 보물이 드래곤들에게 탈취당하는 그때의 상황을 독고성에게 낱낱이 설명한 뒤, 슈렉하이머는 격정을 이기지 못해 그만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에겐 정말 한스러웠던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트루베니아 대륙은 지금 세 번째 위기를 한창 치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크 족과 연합한 드래곤들과의 사투입니다. 오크와 드래곤. 그 둘만 하더라도 감당하기 힘든 존재라 할 수 있는데 거기에다 서약석마저 탈취당했으니 가히 엎친 데 덮친 격이라 할 수 있지요." 일이 벌어진 것은 서약석을 탈취당한 후 정확히 십 년 후였다.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의 호언대로 트루베니아 대륙은 또다시 전화의 불구덩이에 휩쓸려 들어갔다고 했다. 암흑군단과의 전쟁을 통한 상흔이 채 치유되기도 전에 벌어진 전쟁. 그 시발점은 펠루시아 산맥과 가장 인접한 왕국 칸두라스에서부터 제일 처음 시작되었다. 슈렉하이머는 기억을 저장하는 마법석을 통해 그 때의 상황을 독고성의 뇌리로 직접 전해주었다. 절박한 상황을 직접 체험하도록 배려해서 그의 조력을 얻으려는 마음에서였다. 때는 어스름이 깔릴 즈음이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달빛 속에 거대한 성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비쳐졌다. 달빛은 성벽을 밝게 비추다못해 성벽 뒤에 포진된 병사들의 경직된 얼굴마저 적나라하게 드러내놓고 있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으므로 사방은 온통 쾨쾨한 적막감에 휩싸인 상태. 그러나 달빛 아래 비친 성의 모습은 지금의 상황이 결코 평탄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모든 장면이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독고성의 뇌리에 떠오르고 있었다. 심지어 병사들의 두런대는 대화소리까지 독고성에게 전달되었다. 야밤에 벌어지는 전투. 모든 병사들이 잠을 잊은 듯 분주하게 오가며 사방을 경계했다. 곳곳에 세워진 횃불로 인해 성안은 온통 불야성을 이룬 상태였으며 성벽의 망루 위에는 지휘부로 보이는 여러 명의 인물들이 성 밖 어둠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준비는?" "수성전(守成戰)을 치를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모든 병사들이 제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궁수대와 포대는?"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투석기와 투석구 역시 준비완료입니다." "음!" 호화찬란한 복장을 갖춘 무장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준비가 모두 끝났다는 보고가 그다지 미덥지 않은 모양이었다. 중장갑주를 물샐 틈도 없을 정도로 갖춰 입은 모습이 나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노장군은 힘겨워하는 기색 없이 꼿꼿하게 서서 성 내부의 방비상황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성성한 백발이 인상적인 무장이었다. 옆에는 로브를 걸친 노 마법사가 하나 서 있었고 신관 복장을 한 이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그 중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격이 과연 언제 시작될까요?" "글쎄요? 오크 놈들이 비록 밤눈이 밝긴 하지만 이처럼 야밤에 전투를 벌이는 일은 거의 없는데..." 노장군은 눈매를 가늘게 모으며 성벽 저편의 어둠을 쳐다보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터라 성벽 저쪽은 아무 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노장군은 허리에 찬 장검의 손잡이를 불끈 움켜쥐었다. "그의 이름은 이라무스 폰 루드비히입니다." 슈렉하이머에 의해 무장의 이름이 독고성의 뇌리로 전해져왔다. 그는 칸두라스 왕국의 기사들 중 유일하게 오크 군대와 전투를 치러본 경험이 있는 무장이기도 했다. 그런 때문에 자신의 영지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가 이번에 왕명으로 불려왔고 이렇게 웨스트 가드 성의 방어군 사령관을 맡게 된 것이다. 칸두라스 왕국은 인구에 비해 군사력이 상당히 막강한 왕국이다. 불모지라 할 수 있는 펠루시아 산맥과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펠루시아 산맥은 오크 족 잔당들이 대거 숨어있는 장소. 오크 잔당들은 복수를 위한 일념 하에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도발을 해 왔고 그 주된 대상이 바로 칸두라스 왕국이었다. 때문에 칸두라스 왕국의 국민들은 항상 전쟁 준비에 몰두해 있어야 했고 지금껏 여러 번의 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오크에 의해 성이 함락되거나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선 수많은 전투를 통해 칸두라스 왕국의 병사들은 하나 하나가 일당백의 용사라고 할 만큼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더욱이 뒤에 위치한 다른 왕국에서 칸두라스 왕국에 대한 지원을 전혀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병참 문제도 전혀 걱정될 것이 없었다. 잇몸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사실을 각 왕국의 군주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휘하 병사가 희생되는 대신 칸두라스 왕국에 전쟁을 수행할 자금을 대어주는 쪽을 택했고 때문에 칸두라스 왕국은 총 삼십만에 못 미치는 인구를 가지고도 십 오만에 달하는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기형 국가가 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대리 전쟁을 치러주고 대가를 받는 용병국가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칸두라스 왕국도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이라무스 장군은 어제 칸두라스 왕궁을 발칵 뒤집어놓은 패전 소식을 떠올렸다. "도대체 두 성이 어떻게 함락되었을까? 그것도 이틀 동안에..." 밀튼과 하르멜 성. 이 두 성은 펠루시아 산맥과 가장 접경지에 있는 성으로써 칸두라스 왕국의 전초기지라 할 수 있었다. 왕국에서도 고르고 고른 용사들만 배치되는 성으로 지금껏 수도 없는 오크 족의 도발을 막아온 전례가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함락되지 않는다고 칸두라스 국왕이 장담한 성이었고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오크 족이 패전해서 펠루시아 산맥으로 숨어든 다음 인간들은 당연히 그 접경지에 요새를 구축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모든 왕국들의 역량이 총집결되었다. 성이란 본시 인간이 만든 최강의 방어막. 제대로 축조되어 있다면 성은 족히 세 배에 달하는 병력차이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 때문에 수성전(守成戰)은 오크와의 전투에서 가장 많이 애용되었고 또한 오랜 종족전쟁을 통해 인간들의 축성기술은 비약적으로 발달되어 있었다. 밀튼 하르멜 그리고 지금 이라무스 후작이 지키고 있는 하트모스, 이 세 성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되었다. 당시 최고의 축성 기술자들이 동원되어 성을 축조했으며 각 왕국의 궁성 마법사들이 성벽에다 각종 보호마법을 걸어놓아 어지간한 투석기에는 끄덕도 하지 않는다는 성들. 이렇게 모든 왕국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축성된 성이었기에 지금껏 수도 없이 행해진 오크들의 도발을 세 성은 아무런 무리 없이 막아낼 수 있었다. 성벽 아래에는 오십 년 동안 성을 공격하다 죽어간 오크의 원혼이 끊임없이 떠돈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철옹성의 전설은 단 이틀 사이에 허물어져버렸다. 처음 오크들의 대군이 밤을 틈타 침공했다는 첩보가 날아왔을 때, 칸두라스 왕국의 각료들은 자신만만했었다. "머리 나쁜 오크 놈들이 또 죽으러 오는 군." "내년엔 풍년이 들겠구려. 오크 놈들의 시체가 땅을 비옥하게 할 테니 말이오." 침공한 오크의 수가 다소 많긴 했지만 지금껏 수도 없이 있어왔던 일이라 각료들은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수많은 공격을 막아온 세 성의 신화를 믿은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너무도 허무하게 빗나가 버렸다. 개전 단 하루만에 밀튼 성이 함락되었고 패전을 알리는 전령이 채 수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하르멜 성이 떨어졌다. 뜻밖의 패전에 칸두라스 왕국은 발칵 뒤집혀버렸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조사할 시간은 없었다. 우선 물밀 듯 밀려오는 오크의 대군을 막아내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었다. 칸두라스 왕국의 군주 베젤리우스 3세는 부랴부라 이라무스 후작을 불러들였다. 칸두라스 왕국의 무장들 중 오크 족과의 전투 경험이 가장 풍부한 이가 그였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이라무스 후작이 이렇게 하트모스 성의 방어군을 지휘하게 된 것이다. "도대체 놈들이 어떤 방법을 썼기에..." 당시 축성과정을 감독했었기에 이라무스 장군은 두 성의 방비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두 성이 떨어진 과정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옆에는 오랫동안 그를 모셔왔던 부관이 서서 곤혹스럽다는 눈빛을 흘리고 있었다. 항상 자신만만했던 이라무스 후작이었기에 이런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그는 억지로 이라무스 후작을 안심시켰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후작님. 놈들은 고작 미개한 오크 족일 뿐입니다. 이처럼 튼튼한 성을 방어막 삼아 싸우는 이상 놈들은 우리 칸두라스 왕국의 땅을 한 치도 밟을 수 없을 것입니다." 노장군은 시선을 돌려 부관을 힐끗 쳐다보았다. 문득 자조하는 듯한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그는 흘러가듯 퉁명스럽게 한 마디 내뱉었다. "이미 놈들의 손에 넘어간 밀튼과 하르멜 역시 이곳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방비가 잘 된 성이었다. 그런데 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었으니 속단할 순 없어." 부관은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해서든 놈들의 침공을 여기서 막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칸두라스 왕국을 비롯해 모든 왕국들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우리의 서약석을 되찾아와야만 한다.' 이라무스 후작은 뒤에 이어진 말만은 결코 입밖에 내지 않았다. 이 사실을 일반 병사들이 알게 된다면 파장이 엄청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인간의 서약석이 탈취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출정하기 전 살며시 부른 칸두라스 왕의 입에서 말이다. 사실을 알게 된 이라무스 후작은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쉿, 이 사실은 결코 병사들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되오. 사실이 밝혀진다면 오십 년 전 오크족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병사들의 사기 역시 극도로 저하될 것이오. 그러니 경은 어떻게 해서든 이 사실을 병사들에게 숨기고 놈들의 선진을 막아주기 바라오." "아, 알겠습니다." 출정하기 전 국왕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던 이라무스 후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쉽진 않겠어." 오십 년 전 종족전쟁 당시 그는 십대 후반의 젊은 수련기사였다. 당시 이름난 기사의 휘하에서 전쟁을 치렀기에 그는 오크 족이 얼마나 전투에 능한 종족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당시 저들의 서약석을 빼앗지 않았다면 펠루시아 산맥 서쪽으로 밀려나는 것은 인간임이 분명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의 걱정은 무척 컸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15회 그때 후작의 귀에 찢어지는 듯한 경고소리가 들려왔다. "놈들이 온다!" 상념을 지운 후작은 성벽 가까이 붙어 성벽 너머 어둠 속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지원 나온 마법사와 신관들도 그의 뒤에 붙어 곧이어 벌어질 전투에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후작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기랄. 엄청나군." 어둠 속을 물밀 듯 밀고 오는 오크의 군대는 일견해보더라도 엄청난 규모였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이라무스 후작도 도저히 규모를 예상할 수 없을 만큼의 대군. 그러나 그는 추호도 겁을 먹진 않았다. 성을 함락시키는데 병력의 수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최우선적으로 적들의 공성 장비를 살폈다. 어둠 속을 훑어본 그의 얼굴에 다소 기뻐하는 듯한 빛이 떠올랐다. "불행 중 다행이군. 놈들에게 투석기가 보이지 않으니……." 언뜻 살펴본 결과 몰려오는 놈들은 대부분 특유의 경 장갑을 걸친 오크 보병들이었다. 병력의 양옆으로 다수의 울프 라이더 부대가 보이긴 했지만 이라무스 후작은 거기엔 하등 관심도 갖지 않았다. 늑대에 올라타서 기동성을 살린 울프 라이더가 분명 위협적인 존재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넓은 평원에서나 유용할 뿐 공성전에는 하등 쓸모 없는 존재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병력의 후미에 위치한 오우거들을 주시했다. 지능이 떨어지지만 무지막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그것들이 오히려 수성전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라무스 후작이었다. "놈들이 성문을 공격한다면 곤란해." 지능이 떨어지는 몬스터인 오우거. 과거에는 아르카디아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육상몬스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기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사냥감으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오우거를 잡아오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무수한 기사들이 오우거에게 잡혀 죽었지만 반대로 사냥 당한 오우거도 많았다. 때문에 펠루시아 산맥 이쪽에서는 이제 거의 오우거를 구경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크 군단 내부에 그런 오우거 무리가 보이다니……. 이라무스 후작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우리에게 앙심을 품은 나머지 오크와 동맹을 맺었나보군." 동작이 다소 느리긴 했지만 오우거들의 가죽은 무척 질기다. 화살 공격으로 모두 처치하지 못한다면 만에 하나 놈들의 공격에 의해 성문이 부서질 우려가 있었다. 어쨋거나 힘 하나는 무지막지한 놈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후작은 즉각 부관에게 대응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했다. "놈들이 돌격해 올 경우 궁수대는 오우거들만 골라서 집중사격을 퍼붓도록 하라. 또한 투석기들 중 상당수를 추려서 오로지 오우거들만 노리도록 시켜라." "알겠습니다." 오랫동안 전투를 치러왔기에 준비가 잘 되어 있는 칸두라스 병사들이었다. 하트모스 수비군은 후작의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싸울 태세를 갖추어갔다. "석궁수들 제 자리로!" 부대장들의 명령에 따라 전통을 둘러맨 석궁수들이 성벽에 배치되었다. 그들은 가죽으로 보강된 커다란 방패 뒤에 몸을 숨기고 석궁의 시위를 먹였다. 그들 뒤로 투석기와 발리스타가 포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커다란 돌덩이와 쇠뇌를 오크 부대에 퍼부을 채비를 마치고 말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하트모스 수비군은 숨을 죽이고 오크 군단이 사정거리에 들 때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응?" 이라무스 후작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번져갔다. 당장이라도 성벽을 들이받을 듯 돌격해 오던 오크 군단이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선 것이다. 지금까지 전혀 보지 못한 전략이었기 때문에 수비군 병사들도 무척 의아해했다. "저것들이?" "왜지?" 통상적으로 성을 공격해오는 오크 병사들은 먼 거리에서부터 달려와서 진입을 시도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달려오는 탄력을 이용해 성벽에 구름사다리를 대고 일제히 성벽 위로 기어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변변한 공성 장비가 없는 오크에게 유일한 공성법이었다. 간혹 가다 급조한 투석기로 성안에 포격을 퍼붓긴 했지만 워낙 명중률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도대체 뭘 하려고……." 멈춰선 오크 무리를 쳐다보던 이라무스 후작의 얼굴이 갑자기 경직되었다. 멈춰선 오크 병사들이 구름사다리를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뒤의 일이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긴 했지만 그로써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공성전에 나선 오크들이 구름사다리를 휴대하지 않다니……. 그 때 그의 뒤에서 경악성이 울려 퍼졌다. "이, 이것은?" 고개를 돌려보자 사색이 된 마법사의 얼굴이 들어왔다.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후작의 물음에도 마법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단지 경직된 얼굴로 뭔가를 골똘히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궁금해진 후작이 재차 질문을 했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듯 마법사는 겁에 질린 눈동자를 후작에게 돌렸다. "큰일났습니다." "큰일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즉시 모든 병력을 성밖으로 대피시켜야 합니다. 지금 당장 말입니다." 뜻밖의 대답에 후작은 멍해졌다. "당신 제 정신이오? 이 상황에서 성밖으로 나가라니……."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여기서 떼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법사의 말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쿠르르릉. 그 뒤를 비명과도 같은 마법사의 절규가 뒤따랐다. "메테오 스톰(Meteors storm), 아니 이것은 메테오 스웜(Meteors swarm)으로 봐야겠군요. 누군가가 하트모스 성을 대상으로 이 공포의 마법을 전개했습니다. 당장 병사들을 대피시키십시오. 곧 있으면 이 하트모스 성은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마법사의 경고는 한 발 늦어버렸다. 메테오 스웜에 의한 공격은 이미 시작되었다. 하늘에서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불붙은 돌덩이들이 하트모스 성을 표적으로 내려꽂히고 있었다. 운석에 적중된 병사들이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하트모스 성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살려 줘. 으아악." "크악." 이만 명의 병사들이 운집해 있던 하트모스 성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온갖 보호마법이 전개되어 있던 성벽도 운석의 공격에는 도저히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쿠르르릉. 어이없이 허물어지는 성벽, 떼죽음을 당하는 병사들. 그 모습을 보던 이라무스 후작은 온 몸을 떨고 있었다. 그의 눈 꼬리에선 어느새 피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드, 드래곤들이었군. 이 이놈들을……." 그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정통으로 내려꽂힌 운석 하나에 그만 직격해 버린 것이다. 늙은 노장의 몸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져버렸다. 간신히 살아남은 부관만이 겨우 노장의 최후를 목격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한 그는 눈물을 흘리며 목청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대었다. "모두들 성을 버리고 탈출하라. 그리고 후퇴하라." 이미 병사들은 살길을 찾아 높디높은 성벽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날 길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거대한 불덩이가 되어버린 하트모스 성을 쳐다보던 두 개의 눈동자가 있었다. 아비규환의 참상을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고 응시하고 있는 자는 창백한 안색을 한 청년이었다. 타는 듯 붉은 머리칼을 한 그는 불바다가 되어버린 하트모스 성을 한 동안 응시하다 돌연 툴툴거리며 웃었다. "과연 힘들긴 하군. 메테오 스웜을 사흘 연속으로 시전한다는 것은 역시 만만치 않아." 그의 말에 옆에 도열해 있던 오크들은 하나같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지금 불타고 있는 하트모스 성이 도대체 어떤 성인가? 축성술에 일가견이 있는 인간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던가? 아니 하트모스 성은 차지하고라도 그들은 지금껏 밀튼이나 하르멜 성조차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오십 년의 세월동안 무수한 공성전을 치러왔지만 성벽 단 한 쪽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그들이 단 이틀만에 두 성을 함락시키고 지금 이렇게 하트모스 성마저 붕괴시킬 수 있다니……. 적어도 오크들에게 이 상황은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들의 옆에 서 있는 위대한 존재 드래곤. 그 때문이었다. 베르키스는 힐끗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멀뚱멀뚱 서 있는 오크 지휘관들에게 냉소를 쳤다. "무얼 하고 있는 건가? 부하들을 풀어 살아남은 잔당들을 토벌해야지." "아, 알겠습니다." 오크 지휘관들은 부랴부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군 출정이다. 인간들을 정벌한다." "라이더 부대는 놈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후미를 차단하라." 쿠르르르. 명령이 떨어지자 도열해 있던 오크 보병들이 일제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인간들로 인해 오랫동안 척박한 펠루시아 산맥에 숨어살아야 했던 그들이었다. 막상 복수의 기회를 잡게 되자 그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분노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와아! 쳐부수자." "크르륵. 인간 놈들을 죽여라." 평지에서는 당해낼 자가 없다는 오크 보병단이 맹렬히 돌진을 시작했다. 빠른 기동성을 살린 라이더 군단이 선두에 선 채 말이다. 그들의 뒤로 흙먼지가 질펀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헉." 간신히 성을 빠져 나온 생존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사색이 되었다. 정신 없이 탈출하던 상황이라 제대로 무장을 갖춘 자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결국 그들은 맞서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벌써 울프 라이더가 퇴로를 차단해가고 있는 상태. 인간 병사들의 얼굴엔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마법석을 통해 그 때의 상황을 생생히 목격한 독고성의 안색은 어느새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세 번째 전쟁에서의 첫 패전을 직접 목격하고 나니 절로 두려움이 밀려왔다. 숱한 전투경험을 가진 독고성에게도 이번 위기는 인간들이 쉽사리 극복할 수 없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특히 마법이라 불리는 엄청난 술법을 너무나도 쉽사리 전개하던 드래곤이란 존재가 그에겐 가장 충격이었다. 무림인이었던 그에게 이 트루베니아란 대륙은 정말로 의문 자체였다. "정말 가공하구려. 무수한 수를 자랑하는 오크. 그리고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드래곤이란 존재. 그들은 족히 상호보완할 수 있는 존재들이오. 서로의 단점을 충분히 메워줄 수 있는 상생의 관계란 뜻이지."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 트루베니아 대륙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이미 대륙의 반 이상이 저들의 손에 넘어간 상태입니다. 남은 왕국들이 힘을 한데 끌어 모으긴 했지만 이미 역부족입니다." 독고성의 뇌리에 문득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아르카디아 대륙에 조력을 청하지 않았소? 당신에게 들은 바로 크로센 대공이라는 자는 충분히 도와줄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데……." 슈렉하이머의 얼굴에 갑자기 분노의 빛이 드리워졌다. 그것은 자신들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각 왕국 군주들에게 발하는 순수한 분노였다. 하지만 아무리 치졸하다고 해도 그들은 어김없는 자신의 군주. 이방인인 독고성 앞에서 그들을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각 왕국 군주들의 반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크로센 대제의 그림자가 다시 이곳에 드리워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대제가 이미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지원을 요청하자는 의견을 가차없이 묵살했습니다." 급기야 독고성의 분노가 폭발하고야 말았다. 단순 과격한 그의 성격에 각 왕국 군주들의 보여준 치졸한 처사는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크로센 대제의 말대로 정말 빌어먹을 놈들이었군." 난데없이 터져 나온 욕설에 슈렉하이머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속이 탁 트일 정도로 시원해진 것은 단순히 그의 착각 때문일까? 그는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독고성을 만류했다. "그러지 마십시오. 당신을 이리로 데리고 오도록 조처하신 분들이 바로 그 군주들입니다." "그놈들이?" "그렇습니다. 군주들의 고집으로 인해 우리 트루베니아는 그만 아르카디아에 지원을 요청할 시기를 놓쳐버렸습니다. 세 번째 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바로 드래곤들. 특히 그들의 로드는 물을 관장하는 실버드래곤입니다. 때문에 그로써는 우리가 아르카디아에 조력을 청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기 않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두 대륙간의 해로는 곧 단절되었습니다." 그 말에 독고성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그, 그렇다면 놈들이 이곳과 아르카디아와의 사이를 막았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실버드래곤 크라누스는 다름 아닌 물을 관장하는 절대자. 그는 트루베니아와 아르카디아 사이의 해저에 위치한 조류를 임의로 조정했습니다. 그 결과 양 대륙 사이에는 단 한 척의 배도 통과할 수 없는 무수한 소용돌이 군이 새로이 생겨났습니다. 아무리 큰배라도 그 소용돌이를 헤치고 지나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소용돌이와 함께 크라누스는 바다 위에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공간왜곡 마법장을 설치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공간이동을 통해서도 아르카디아로 건너갈 수 없는 실정입니다. 다시 말해 트루베니아와 아르카디아는 지금 말 그대로 완벽하게 격리되어 있습니다." 슈렉하이머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사실은 독고성에겐 말 그대로 경악이었다. "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려. 아무리 용(龍)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의 위력을 보일 수 있다니……." 독고성의 반응에 슈렉하이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당신 세계의 용(龍)은 우리 대륙의 드래곤과는 다른 존재일 것입니다. 드래곤은 단일개체로써는 감히 당해낼 수 없는 당대 최강이라 자부할 수 있는 생명체이니까요." "그 드래곤이란 존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소." "설명드리겠습니다." 슈렉하이머는 주저하지 않고 드래곤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16회 먼저 라니안의 [에스]님께 감사드립니다. 님의 말씀대로 메모장에 복사했다가 올리니 정체불명의 사각형이 없어지더군요. 거듭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투표 다들 하셨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했습니다. 지금까지 두 번 투표해 봤는데 제가 투표한 후보는 애석하게도 하나도 당선되지 않더군요. 이번에는 어떨지 궁금합니다. 그럼 이만… ***************************************************************************** "드래곤이란 존재는 이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생명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족히 일만 년 이상 살아갈 정도로 기나긴 수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고성의 입이 딱 벌어졌다. "햐! 일만 년씩이나? 무지하게 오래 사는구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드래곤은 거대한 체구에 어울릴 만큼의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드래곤의 표피를 덮고 있는 거죽은 세상에 존재하는 금속들 중 가장 강도가 뛰어나다 단언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곳에서는 개인 보호장구로 드래곤 본이 입혀진 갑주를 가장 상등품으로 치고 있습니다." "본(bone)이라 함은 뼈를 칭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드래곤이란 생물은 거죽과 뼈가 동일한 소재로 되어있습니다. 비교적 어린 드래곤의 경우에는 거죽의 강도가 그다지 강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이상의 나이를 먹은 드래곤은 피부 전체가 뼈와 같은 성분으로 변하기 때문에 평범한 방법으로는 상대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 피부를 뚫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소드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오러 블레이드라……. 혹시 검강을 말하는 것이오?" "그쪽 대륙에선 어떻게 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에서 오러 블레이드란 소드 마스터가 갈고 닦은 마나를 검에 불어넣어 유형의 기운으로 승화시킨 뒤, 검신을 보호함과 동시에 닿은 물체는 설사 그 어떤 강도를 가졌더라도 여지없이 꿰뚫어버릴 수 있는 궁극의 검술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검에 마나를 응축시켜 형태를 만들 수 있는 기술 모두를 통틀어 오러 블레이드라 칭하는 것입니다. 드래곤의 피부를 뚫을 방법은 오직 그것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으음." 독고성은 침음성을 내질렀다. 그의 말대로라면 오러 블레이드란 검기(劍氣)와 검강(劍岡) 모두를 지칭하는 것 같았다. 물론 몸이 성했을 당시 그는 단숨에 석 자가 넘는 강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실력자였다. 호조의 강철 손톱 열 개에 모두에 석자 길이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금 그의 상태로는 검강은 물론이오 검기조차도 꿈도 꿀 수 없는 실정. 별안간 서글픈 감정이 치밀어 오른 독고성은 화제를 바꿨다. "드래곤이란 생물이 그토록이나 강한 위력을 지녔다니 정말 놀랍구려. 중원에서 물론 드래곤에 비견되는 용(龍)이란 존재가 있소이다. 하지만 우리세계에서는 단순히 오래 산 이무기를 용이라 칭하는 경우가 태반이오. 승천하기 위해 오랜 세월동안의 수련을 거친 이무기가 이따금, 아주 이따금 나타나 세상을 어지럽힌 경우가 종종 있었소. 사람들은 그것들을 바로 악룡(惡龍)이라 불렀소이다. 물론 나 역시 그런 악룡들은 몇 본 적이 있고 직접 사냥도 해 보았소. 하지만 진정한 용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소이다." 무릇 정말로 용이라 지칭할 수 있는 신룡(神龍)들은 어떠한 일이 인간계에 나타나지 않는 법이다. 슈렉하이머가 털어놓는 사실에서 독고성은 드래곤이란 존재가 자신이 사냥한 바 있는 악룡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단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설사 전설 속의 신룡이라 하더라도 이곳의 드래곤보다 약할 것이다. 몬스터라 불리는 미물들이 존재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런 가공할 존재마저 이곳에 존재하다니…….' 잠시 생각에 잠긴 독고성의 귀에 슈렉하이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차지하더라도 정작 드래곤의 무서운 점은 바로 그 마법에 있습니다." "마법?" 슈렉하이머에게 개략적인 설명을 들었던 터라 독고성은 이제 마법이란 술법에 대해 어렴풋이 감을 잡고 있었다. 그가 익힌 사술이 대부분 눈을 속이는 미혼술이란 것을 감안한다면 마법은 사술에 비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술법이라 칭할 수 있었다. 이미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술법 역시 마법이 아니었던가. 독고성은 이미 마법에 대해 깊이 호기심을 가진 상태였다. "그렇다면 그 드래곤이 인간만큼이나 마법을 쓸 수 있단 말이오?" 그 말에 슈렉하이머는 어처구니가 없는 듯 씁쓸하게 미소를 떠올렸다. "원래 마법은 드래곤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 "오랜 옛날 인간들과 친분을 맺은 드래곤 몇이 금기를 깨고 마법을 전수해 준 것이 이 땅에 마법사가 나타나게 된 시초였으니까요. 그러므로 마법의 원조라 하면 단연 드래곤을 꼽을 수 있습니다." 독고성은 어이가 없었다. "그, 그렇다면 드래곤에게 훔쳐 배운 마법으로 당신들은 차원을 넘나들을 수 있는 경지까지 올랐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인간들에게는 타 유사 종족과 판이하게 다른 장점이 있지요. 바로 지식의 전수라는 것입니다. 그 옛날 드래곤에게서 마법을 배운 마법사는 배운 지식과 자신이 깨우친 바를 모두 집대성해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전수했습니다. 그 제자들 역시 전수받은 지식을 연구 개량해서 더욱 발전시킨 뒤 다시 후대들에게 전수했지요. 그런 과정을 거쳐 인간들의 마법은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차원을 넘나들 정도로 말이지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아직은 우리 인간들은 드래곤들의 적수가 되지 못한답니다. 물론 마법 면에서 말이지요." "정말 놀랍구려." 독고성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열린 새로운 세상. 그 세상이 중원과는 전혀 판이하게 다른 역사와 환경을 가지고 있다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독고성을 보며 슈렉하이머는 안색을 굳혔다. "그럼 이제부터 당신을 이곳으로 초빙하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아마도 마법석을 통해 직접 체험하시는 것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이미 트루베니아 대륙의 마법사들은 인간의 기억을 마법석에 저장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슈렉하이머는 이 마법을 통해 독고성에게 불과 얼마 전에 벌어진 군주들의 회합을 보여주었다. 이계의 무사를 초빙해오기로 결정이 내려진 바로 그 회합 말이다.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명실상부한 최고 강대국을 거론하라면 사람들은 단연 이카롯트 제국을 꼽을 것이다.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또한 거기에 걸맞게 방대한 인구를 가지고 있는 트루베니아 유일의 제국. 드높은 명성답게 이카롯트 제국의 수도 펠드리안은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였다. 대륙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인 데다가 주요 귀족들이 모두 여기에 밀집해 있기 때문이다. 펠드리안의 방어시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제 1차 종족전쟁과 뒤이어 일어난 어둠의 군대와의 전쟁에서도 함락되지 않은데서 그 중요성을 익히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도시의 명성은 얼마 전 무참히도 깨어져버렸다. 그것은 얼마 전 펠드리안의 중심부에서 일어난 일련의 탈취사건 때문이었다. 소수의 오크 특공대와 함께 잠입한 드래곤들의 손에 의해 인간들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 탈취 당한 사건. 물론 이 일은 일반 시민들에겐 철저하게 비밀로 붙여졌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 파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 인간의 서약석이 도난당한 일은 구전을 통해 은밀하게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있었다. 쾅!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하필이면 왜?" 주먹을 불끈 쥐고 노성을 지르는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금은으로 치장된 화려한 옷을 걸치고 보석이 주렁주렁 박힌 관을 쓰고 있는 모습에서 그의 신분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로젠가르트 3세. 이카롯트 제국의 17대 황제이며 인간의 운명을 건 어둠의 군대와의 대전을 앞장서서 치러냈던 인간계 제일의 권력자. 같은 군주의 신분일지라도 그의 앞에서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지고한 신분을 가진 절대자가 바로 그였다. 그런 이카롯트의 황제가 이처럼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앞에 선 신하들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그의 눈치만 살폈다. "일 처리를 제대로 하는 놈이 없군."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희디흰 백염 끝이 부르르 떨리는 모습은 지금 그의 심정이 어떤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그는 마치 뇌까리듯 탄식을 했다. "도대체 왜 내가 집권하는 시기에 이렇게 일이 연이어 터지는 거지?" 과거 그는 어둠의 군대에 맞서 몸소 전장에서 병사들을 지휘했던 용장이었다. 그런 만큼 로젠가르트 3세의 모습에서는 옛날 전장을 질타했던 혈기가 여지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기에 내가 뭐라고 했나? 비밀을 알아차린 자들을 모두 죽여 입을 막으라고 하지 않았나?" "하, 하오나." 지금 막 보고를 올린 듯한 중년 신하가 눈치를 보며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비밀을 발견한 자들 중에는 베르하젤 교단의 성기사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교권은 황권으로도 간섭할 수 없는 법. 저희들로썬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닥쳐라." 로젠가르트 3세의 노성에 중년 신하는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황제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호통을 치기는 했지만 자신의 명령이 애당초 실행될 수 없는 명령이란 것을 잘 알고 있는 로젠가르트 3세였다. "꼴도 보기 싫으니 물러가도록 하라." 황제의 호통에 신하들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앞을 물러 나왔다. 그들이 물러나고 나서도 로젠가르트 3세는 한 동안 화를 참지 못하고 씨근거렸다. "빌어먹을 교단 놈들. 쓸데없이 밥만 축내는 주제에……." 그 무렵 베르하젤 교단과 황권과의 충돌은 상당히 심각한 지경이었다. 물론 오십 년 전이었다면 제 아무리 이카롯트 제국의 황제라 할 지라고 감히 이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둠의 군대와의 오랜 전쟁은 교권을 형편없이 약화시켰다. 베르하젤이 인간들에게 아무런 구원을 내려주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첫 번째 이유였다. 그와 반대로 왕권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베르하젤에 실망감을 느낀 백성들이 대신 왕에게 충성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군주들 중에는 과거처럼 베르하젤에 대한 철저한 신앙심을 가진 이들이 드물었다. 자신의 힘으로 어둠의 군대를 막아냈다는 자부심, 그리고 백성들의 지지가 베르하젤에 대한 절대복종을 거부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물론 로젠가르트 황제 역시 그런 부류에 속했다. "서약석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서약석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욱 중요하다." 로젠가르트 황제는 오십 년 전에 끝났던 종족전쟁을 떠올렸다. 모든 면에서 오크 군대에게 밀리던 암울한 시절. 성벽 하나에 의지해 겨우겨우 버텨나가던 인간 병사들이었다. 그 누구도 자신들이 승리하리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의 서약석을 탈취했다는 낭보가 전해지고 나자 그들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병사들이 용기백배해서 오크들과 맞서 싸웠던 것이다. 그것만 보더라도 상황은 명백했다. 비록 교권이 형편없이 실추되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베르하젤은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아직까지 정신적인 지주였다. 교권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들은 대부분 귀족이나 성공한 시민들, 일반 백성이나 하급 병사들 대부분은 아직까진 독실한 베르하젤의 신자라고 봐야 했다. 그러므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서약석을 되찾아와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드래곤의 손아귀에 있는 것을 어떻게……." 로젠가르트 4세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 때 조심스런 시종의 음성이 전해졌다. "황제폐하. 회합준비가 모두 끝났사옵니다. 모든 왕국의 군주들이 한 데 모여 폐하께서 들어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그 말을 들은 로젠가르트 4세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는 인간의 운명을 지켜나가기 위해 한 데 모인 각 국 군주들과의 회견에 참석할 의무가 있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드넓은 대청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화려한 복장을 걸친 자들로써 군데군데 중년인이 끼어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나이들이 지긋한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트루베니아 대륙에 산재한 각 왕국들의 군주들이었다. 각 지방을 다스리는 최고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지금껏 그들이 회합을 가진 적은 단 두 번. 오십 년 전의 종족전쟁과 십 년 전에 벌어진 암흑군단과의 전투를 제외하면 전무했다. 그것 말고는 각 국 군주들이 이곳 이카롯트 제국으로 올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간계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친 시기. 각 왕국들이 보유한 병력을 한데 끌어 모아야만 새로이 준동한 오크 족에 대항할 수 있다. 인간의 존망을 결정짓는 전쟁을 치르기 위해 이들은 다시 한 번 뜻을 모으려 하고 있었다. "이카롯트 제국의 황제이신 로젠가르트 4세께옵서 드시옵니다." 황제가 들어온다는 시종의 말이 울려 퍼지자 군주들은 다급하게 자기 자리에 착석했다. 곧이어 눈빛이 인상적인 중년인과 함께 로젠가르트 4세가 대청에 들어왔다. "정말 오랜만에 보게 되는구려. 그래 10년만인가?" "그렇사옵니다. 암흑 전쟁 이후 처음으로 뵙는군요." 이카롯트로부터 비교적 가까운 왕국 디스페니아의 군주가 공손히 예를 올려왔다. 로젠가르트 4세는 격식에 맞게 답례를 한 뒤 자리에 착석했다.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소." 로젠가르트 4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앞으로 나가 챠트를 좍 펼쳤다. 눈빛이 인상적인 중년인. 로젠가르트 4세가 데리고 들어온 바로 그 자였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17회 그는 이카롯트 제국의 신임 총리라는 신분을 가진 이였다. 세르게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로젠가르트 황제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자로 젊은 나이에 공작에 추대된 대단히 능력 있는 인재였다. 황제를 대신해 이카롯트 제국의 국정을 무리 없이 수행해 나가는 것을 보더라도 그의 능력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챠트를 펼친 세르게이 공작은 곧 전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든 군주께서 이번 상황이 심히 위급하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계실 것이옵니다. 이미 칸두라스 왕국을 비롯한 10여 개 왕국들이 오크 연합군의 손에 의해 초토화되었습니다. 놈들의 기세는 정말 무섭기 그지없습니다. 1차 종족전쟁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수성전(守成戰)은 놈들에겐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놈들은 메테오 스웜으로 성을 완파시킨 뒤 병력을 투입, 공격을 감행해 왔다고 하옵니다. 아마도 드래곤의 소행으로 보입니다. 그 때문에 수성전으로는 이제 더 이상 놈들의 전진을 늦출 수 없사옵니다." 설명을 들은 군주들의 얼굴이 극도로 어두워졌다. 블러디 문의 참사를 겪은 지 삼십 년 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또다시 이런 위기가 인간계에 닥칠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상황을 봐서 이번 위기는 앞서의 두 번에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흉험했다.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존재. 상상만으로도 공포감을 주는 존재인 드래곤이 이번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세르게이 공작의 설명은 계속 진행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번 오크 침공군에 엄청난 수의 몬스터가 가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우거나 트롤을 비롯한 무수한 몬스터, 심지어는 와이번까지 대거 놈들과 합세한 상태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 군대는 지금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오크 놈들에게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사단의 위력이 현격히 감소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신장이 월등한 오우거나 트롤은 그리 어렵지 않게 말 탄 기사를 상대할 수 있다. 원래대로라면 오크 족에게도 기병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역시 기병에 버금갈 정도로 빼어난 기동성을 가진 울프 라이더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경장갑의 울프 라이더만으로는 중장갑주를 착용한 기사들을 감당하기란 생각하기도 힘든 법. 따라서 1차 전쟁에서 인간들이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성과 함께 말 탄 기사들의 역할이 톡톡했다. 그런데 그 이점이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려 하는 것이다. 경악한 군주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로 카르나틱 왕국의 국왕이었다. "어, 어떻게 오크 놈들이 미개한 몬스터들을 끌어들일 수 있단 말이오? 나로써는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구려." "정보부의 분석으로는 아마도 드래곤들의 입김이 개입해 이루어진 일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드래곤들의 레어에는 무수한 몬스터들이 기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으로 말입니다. 거기에다 그동안 각지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진 기사들의 사냥 역시 한 몫을 한 것 같습니다. 거기에 관해서는 모두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 사냥을 피해 무수한 몬스터들이 펠루시아 산맥 저쪽으로 도망친 바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 몬스터들이 드래곤들에게 내몰려 오크 무리와 합세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음" 군주들은 하나같이 침묵을 지켰다. 따지고 보면 몬스터들이 오크에게 가세하게 된 것이 그들의 탓도 있었기 때문이다. 군주들이 그토록 극도로 경계했지만 크로센 대제가 트루베니아 대륙에 남긴 영향은 정말 컸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기사들이 소드 마스터가 될 가능성을 크게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단 10년 만에 250여 명의 소드 마스터를 키워낸 신화. 그는 전 대륙에 그만의 체계적인 마나 수련 방법을 널리 알렸다. 물론 자신의 기사들에게 사사하는 수련법보다 효과가 현저히 떨어지는 방법이었지만 그 파장은 엄청났다. 그 방법을 얻은 기사들은 마스터가 되기 위해 더욱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이왕 검을 잡은 이상 마스터가 한 번 되어봐야겠다는 야망을 품은 것이다. 크로센 대제로부터 전래된 이 수련법을 익히려는 기사들이 그야말로 줄을 이었고 성과는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로 인해 삶을 위협받게 된 것은 오우거나 트롤 같은 중형 몬스터였다. 예로부터 사냥은 가장 효과적인 수련방법이었다. 물론 드래곤 사냥이 가장 효과가 확실하긴 했지만 그것은 목숨을 내걸어도 될까말까 할 정도로 위험도가 컸기 때문에 기사들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간혹 가다 그런 무모한 기사들이 있긴 했지만) 그 대신 기사들은 주 사냥감으로 중형 몬스터들을 택했다. 자신의 위명을 드높이고 또한 수련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기사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몬스터 사냥에 나섰고 그 때문에 트루베니아 대륙에서는 오우거나 트롤의 씨가 마를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되자 중형 몬스터들은 생존을 위해 인간의 손길이 아직까지 닿지 않은 곳, 펠루시아 산맥의 저편으로 대거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다. 험준한 펠루시아 산맥 저편에는 드래곤들의 레어가 밀집해 있는 데다 충분히 그들을 숨겨줄 수 있는 울창한 삼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들의 명예욕으로 인해 가히 중형 몬스터의 엑소더시가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지금 가공할 만한 위협이 되어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있었다. "아무리 지능이 낮은 몬스터라도 인간에 대한 적개심만은 잊지 않았을 터. 제 생각으론 드래곤들의 압력이 아니더라도 그것들은 자진해서 오크 군대에 동참했을 것입니다." 세르게이는 능히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회는 백 번 해봐도 늦은 것. 지금 상황에서는 오로지 그에 대한 대비책만을 세워야 할 때였다. "일단 이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는 모든 왕국의 힘을 한데 모아야 합니다." 그 의견에는 아무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까지 같은 방법으로 인간의 존망을 위협하는 두 번의 크나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자고로 인간들의 가장 큰 장점은 서로 협력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트루베니아 대륙에 존재하는 전 왕국의 군데가 한데 모여 동맹군을 결성한다면 충분한 시너지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군주들은 암묵적으로 그 의견에 찬성했다. 그 때 누군가의 음성이 장내에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그것만으론 안됩니다. 이번 위기는 앞서 벌어진 두 번의 전쟁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급합니다. 우리 트루베니아의 힘만으론 감당하기 어렵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모든 군주들의 시선이 일시에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소리를 지른 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르게이의 옆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왔다. 세르게이의 입에서 당혹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슈렉하이머 대승정." 나선 자는 바로 슈렉하이머였다. 현 교단의 임시 대승정을 맡고 있는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서약석이 탈취당할 때 베르하젤 총 교단에 기거하던 성직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예외가 있었으니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가 바로 슈렉하이머였다. 당시 대승정 이피크로스가 사망한 때문에 교단의 임시 대승정직을 승계한 그는 베르하젤 교단의 대리인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고위급 성직자는 오직 그만이 유일했기 때문에……. 슈렉하이머는 군주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자신이 나선 이유를 밝혔다. "이미 트루베니아 대륙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쇠약해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강력한 드래곤들과 오크 연합군을 막아내기란 말 그대로 어불성설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종족의 보물인 서약석까지 탈취당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위기는 단순히 힘을 합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층 더 시급한 자구책이 필요합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로젠가르트 4세의 눈썹이 꿈틀했다. 물론 대다수의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슈렉하이머의 참석 자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베르하젤 교단의 영광은 과거 속으로 영원히 묻혀 버린 것. 그저 격식을 갖추고자 참석시킨 것뿐인데 그가 주제넘게 나서고 있는 것이다. 곧 그의 노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이 상황에서 연합군을 결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왕국들이 오로지 힘을 합치는 것만이 방책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앞서의 두 위기를 겪으면서 증명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지금 이루어지는 연합은 정확한 의미에서의 연합이라 볼 수 없습니다. 전하들께서는 인간들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힘을 잊으셨사옵니다." "………." 슈렉하이마는 점점 굳어지는 군주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한자한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우리 인간들이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오로지 하나 뿐이옵니다. 아르카디아의 크로센 대공과 손을 잡으십시오. 그리고 도움을 요청하시옵소서." 갑자기 장내는 적막감에 잠겨 들어갔다. 크로센 대제. 각 왕국 군주들이 그토록 경계하던 인물의 이름이 마침내 거론된 것이다. 슈렉하이머의 발언은 군주들의 역린(逆鱗)을 여지없이 건드려버린 상태. 화를 참지 못한 로젠가르트 4세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쾅. 멋들어지게 기른 수염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봐서 그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익히 짐작이 되었다. 잡아먹을 듯한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슈렉하이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생각해 보십시오. 앞서 벌어졌던 두 번의 위기에 그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는지 말입니다. 제 생각에 우리들은 십중팔구 단 한번의 위기도 넘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의 업적은 역사를 통틀어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존망을 결정지을 가장 시급한 위기상황에서 그를 배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분노에 차서 채 말문을 열지 못하는 로젠가르트 황제를 보면서도 슈렉하이머는 아무 거리낌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특히 이번 전쟁은 서약석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치러야 합니다. 이미 이 사실은 알게 모르게 사람들에게 널리 소문이 나 있는 상태. 한 마디로 말해 이번 위기는 우리 트루베니아만으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전쟁입니다. 그러니 전하! 부디 자존심을 꺾고 아르카디아로 사절을 보내십시오." 말을 마친 슈렉하이머는 고개를 돌려 군주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모든 군주들의 얼굴에는 노기가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크로센 대제. 전 트루베니아 대륙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이며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명실상부한 구국의 영웅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애석하게도 각 왕국 군주들에게까지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었다. 미천한 용병에서부터 시작해서 전 트루베니아 사람들의 추앙을 받은 대 영웅으로까지 발돋움한 입지전적인 인물. 하지만 그런 크로센 대제에게 각 군주들이 느끼는 감정이란 단지 그들의 권력을 위협하는 위험인물에 불과했다. 때문에 군주들은 베르하젤 교단과 적극적으로 영합해 그를 아르카디아로 쫓아보내지 않았던가? 특히 로젠가르트 4세가 느끼는 감정은 군주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이었다. '제길. 이런 상황에서까지 놈의 이름을 들어야 하나? 크로센. 과연 네놈은 트루베니아에 얼마만큼의 그림자를 드리워야 만족해하겠나?' 종족전쟁이 벌어진 50여 년 전. 로젠가르트 4세는 혈기왕성한 10대 후반의 젊은 황태자였다. 부황과 함께 전쟁을 수행하던 중 그는 젊은 혈기와 친위 기사들을 믿고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그만 위험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 때의 상황은 말 그대로 사면초가였다. 오크들의 맹공에 호위하던 친위 기사들은 쉴 새 없이 죽어 넘어졌으며 멀리 떨어진 본진에서는 도저히 그를 구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때 로젠가르트 4세는 삶을 거의 포기했었다. 말로만 들었던 오크 족의 맹렬한 투기(鬪氣). 그리고 시체마저도 용서하지 않는 잔인성에 용기 같은 것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실정. 만약 오크 족이 포로를 살려두었다면 그는 서슴지 않고 항복을 선언했을 것이다. 당시 그는 그만큼 겁에 질려있던 상태였다. 그 때 뜻밖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18회 그는 마치 천신(天神)처럼 나타나서 철통같은 오크 족의 포위망을 여지없이 깨트려버렸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그야말로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보기만 해도 전율이 일 정도로 그의 실력은 가공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그가 거느린 기사들 역시 무적(無敵)이라 하기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으니……. 그의 정체가 바로 크로센 대제였다. 트루베니아의 최강대국 이카롯트 제국. 그 황태자를 수호하는 만큼 그의 친위기사들은 물론 고르고 고른 실력자들 중에서 뽑힐 수밖에 없었다. 가히 근위 기사단과 맞먹을 정도의 정예들로만 구성된 친위기사단. 하지만 그런 정예 친위기사들도 오크 대군의 폭발적인 공세 앞에는 허무할 정도로 무기력했다. 사방에서 찔러대는 창날에 그저 우왕좌왕하다 단 10분도 못 견디고 궤멸당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반수 이상이 소드 마스터로 구성된 크로센 대제의 기사단은 달랐다. 검광이 번쩍 하는 순간 어김없이 오크 한 마리가 조각이 나버릴 정도로 기사 개개인의 무용이 뛰어나기 그지없었다. 또 하나의 차이는 것은 바로 그들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였다.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고 대응했다. 심지어 바로 옆의 동료가 낙마하더라도 전혀 흔들림이 없이 그 자리를 채울 정도였다. 크로센 대제를 중심 축으로 세모꼴의 진세를 형성한 크로세나 기사단은 오크의 포위망을 단숨에 깨트린 뒤 마치 학의 날개처럼 넓게 산개해서 오크를 밀어붙였고 그 많던 오크의 대군은 단숨에 지리멸렬해서 패주를 시작했다. "세, 세상에……."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함을 받게 되었지만 로젠가르트 4세에게는 감사를 표할 정신도 없었다. 포위망을 깨트리는 과정에서 목격한 크로세나 기사단의 질서정연한 움직임. 그들의 움직임은 차라리 예술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현란했다. 황태자인 그마저도 크로센 대제의 위용에 매료되었을 정도. 하지만 본진에 돌아오고 나서 그 감정은 삽시간에 반전되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 뛰어들어 큰 전과를 거둔 위용으로 크로센 대제의 이름은 병사들 사이에서 마치 신화처럼 거론되었고 반대로 무모한 행동으로 휘하 기사들을 몽땅 잃은 로젠가르트 4세의 위신은 여지없이 실추될 수밖에 없었다. 막사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그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크로센 대제에 대한 칭송에 귀가 아플 정도였다. 자신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능력자에 대한 질투심은 자연히 자라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병사들 사이에서 떠도는 풍문, 트루베니아의 모든 왕국을 통합하여 그 초대 황제로 크로센 대제를 추대하자는 소문을 우연히 들은 이후 그는 크로센 대제를 극도로 경계하게 되었다. 그가 크로센이란 이름에 반감을 가진 이유는 바로 이러했다. 물론 여타의 군주들 역시 대동소이한 연유로 그를 질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로젠가르트 4세의 마음 속에 박힌 적개심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늙은 부황은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로젠가르트는 마침내 이카롯트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힘을 가지게 되자 그는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계획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다행히 타 왕국의 군주들 역시 알게 모르게 로젠가르트가 가진 감정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연합전선을 결성할 수 있었다. 반 크로센 연합전선 말이다. 가만히 있다가는 크로센에게 군주 자리를 빼앗길 것이란 위기감을 그들 군주들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서 크로센 대제의 폭탄 발언이 터졌다. 주신 베르하젤을 공개적으로 불신한 사건 말이다. 물론 로젠가르트 황제를 비롯한 군주들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들은 사건의 처리를 놓고 고민하는 베르하젤 교단에 사신까지 보내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했다. 최악의 경우 전쟁까지도 불사하겠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사태는 마침내 수습되었다. 교단과 군주들의 압력에 크로센 대제는 추종자들을 데리고 바다 건너 아르카디아 대륙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비록 그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건너갔지만 군주들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세월이 지난다면 인구는 자연히 보충될 터. 일단 자리를 보전하게 된 것만으로도 로젠가르트 황제를 비롯한 군주들은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2차 위기인 어둠의 전쟁이 터졌다. 그리고 로젠가르트 4세는 여기서 또다시 크로센이란 이름 석자를 들어야 했다. 비록 그로 인해 어둠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는 점은 그도 동의하는 바였지만 그래도 크로센이란 존재는 그에겐 위험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군주들이 생각하는 바가 한치의 틀림도 없이 동일했기 때문에 그들의 의도대로 크로센은 다시 한 번 이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와 새로운 추종자들이 탄 배가 수평선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그들은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고 모든 군주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저주받은 이름이 세 번째로 거론된 것이다. 이런 연유로 인해 트루베니아 대륙의 군주들이 크로센이란 이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다. 상념에 빠진 로젠가르트 황제가 침묵을 지키자 대신 세르게이가 앞으로 나섰다.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물론 크로센 대제의 업적만큼은 저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그도 이젠 늙었습니다. 다시 말해 과거만큼의 위용을 과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세월이 흘렀으니 그분도 힘을 잃으셨겠지요. 하지만 그분께서 키워놓은 기사단을 생각해 보십시오. 1차 종족전쟁에서도, 2차로 벌어진 어둠의 전쟁에서도 크로세나 기사단은 단연 독보적이었습니다. 이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그들만큼의 위력을 가진 기사단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르카디아 대륙에 지원을 요청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서약석을 되찾아 오게 한 다음 두 대륙의 힘을 오로지 하나로 모아야만 이 위기는 극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장내는 다시 침묵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물론 그 방법이 가장 합당하다는 것은 군주들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크로센이 또다시 이 땅에 미칠 파장을 우려해서 결정을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주저하는 배경에는 자존심 역시 일조를 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로젠가르트 4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원 요청은 없소." "……." "주류(主流)인 우리 트루베니아가 아르카디아 따위의 방계에 도움을 요청할 필요 따윈 없다는 뜻이오. 그 문제는 사태가 위급해지면 다시 논의해 보도록 합시다. 지금으로썬 전 왕국의 군대를 한데 모아 적의 침공을 막아내야 할 때요." 말을 마친 로젠가르트 4세는 슈렉하이머를 외면하며 군주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놈들에게 우리 군대의 힘을 보여주도록 합시다. 아르카디아 따위의 지원이 없더라도 우리 병사들은 충분히 강하오. 서약석이 없더라도 우리는 이길 수 있소." "옳습니다." "폐하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암묵적으로 로젠가르트 황제와 뜻을 같이하던 군주들은 일제히 동조하고 나섰다. 그들은 아르카디아로의 지원요청 없이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해 나갈 것을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결의했다. 아연해하는 슈렉하이머를 비웃듯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슈렉하이머는 처연한 표정으로 독고성의 얼굴을 직시했다. "결과는 거의 모든 전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처참한 패전이었습니다. 특히 트란보르 평원에서 벌어진 대 접전에서 우리는 무려 10만이나 잃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 결과 트루베니아 대륙의 절반 이상이 놈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당시 회합에 참여한 군주들 중 절반이 그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지요." '당연한 결과였겠군.' 독고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미 그는 권력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몸소 체험해 본 상태가 아닌가? 잘난 권력을 보전하자고 무려 10만에 달하는 인명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다니……. 군주들의 처사가 그저 어이없기만 한 독고성이었다. "결국 회합은 다시 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군주들도 아르카디아로의 지원요청을 더 이상 반대할 수 없었지요. 결정은 내려졌고 사절단이 구성되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해 지원요청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루어질 수조차 없었습니다." "………." "이미 양 대륙 간의 해로는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실버 드래곤 크라누스는 물을 관장하는 절대자. 그의 마법으로 인해 양 대륙은 공간이동조차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격리되었습니다. 군주들의 결정이 너무 늦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말입니다. 저희로써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아르카디아 대륙과 연락을 취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슈렉하이머의 음성에는 상황판단을 늦게 한 군주들에 대한 섭섭함이 역력하게 배어있었다. 결국 군주들은 다시 모여 인간의 운명을 지켜나가기 위한 최후의 회합을 벌이게 되었다. 드넓은 홀에 자리한 군주들의 얼굴은 너나 할 것 없이 굳어있었다. 정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처참한 패배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거니와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아르카디아와 연합을 했더라면 이토록 어이없는 패배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후회란 아무리 빨라도 이미 늦은 법.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권력뿐만 아니라 경각에 처한 국민들의 운명까지도 책임져야만 했다. 비통하기 그지없는 군주들의 낯빛과는 달리 로젠가르트 4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어찌 보면 자신의 결정에 추호도 후회를 하지 않는다는 표정. 원탁의 구석에는 슈렉하이머의 낯익은 얼굴도 보이고 있었다. 구석에 앉아 로젠가르트 황제를 쏘아보는 슈렉하이머의 얼굴에는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조소가 맺혀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10만 병사들의 목숨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무능한 권력자에 대한 조소였다. 하지만 로젠가르트 4세는 무표정하게 슈렉하이머의 시선을 받아넘겼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타개하려는 듯 세르게이의 청량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럼 회합을 시작하겠습니다." 뭔가 기대하는 바가 있는 듯 그의 음색은 밝기 그지없었다. 그는 펼쳐두었던 챠트를 접어 넣으며 각 군주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이미 전세는 모든 군주들께서 익히 알고 계실 터, 더 이상 설명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아르카디아 대륙에 지원을 요청하려는 일 역시 애석하게도 무위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천만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실이 한 가지 밝혀졌습니다." 여운을 남기는 말에 흥미가 감돌았는지 군주들의 시신이 일시에 세르게이에게로 집중되었다. 세르게이는 침을 한 번 삼킨 다음 설명을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아르카디아 대륙과 우리 트루베니아 대륙은 거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격리되었습니다. 실버 드래곤 크라누스에 의해 아무리 큰배라도 통과할 수 없도록 거대한 소용돌이가 곳곳에 설치되었으며 또한 광범위한 마법왜곡장에 의해 공간이동 또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가히 단절되어버린 것이지요. 하지만 도움을 청할 곳이 그곳 뿐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사람이 사는 대륙은 오로지 우리 트루베니아와 아르카디아 뿐인데?" "물론 알려진 바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곳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다른 차원을 들을 수 있겠군요. 그곳에도 어김없이 사람은 살고 있습니다." 군주들의 얼굴에 뭔가 기대의 빛이 돌기 시작했다. 그 눈빛을 느끼며 세르게이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원래 우리가 도움을 청하려던 크로센 대제는 바로 다른 차원의 인물입니다. 그가 이곳의 인물이 아니란 것을 군주들께서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를 만나본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자신이 살던 대륙에서 제일의 실력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입을 직접 통해 밝혀진 사실입니다." "그, 그렇다면." 세르게이가 말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린 듯 군주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세르게이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희들이 세운 대비책은 그가 살던 차원을 찾아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그곳 제일의 실력자를 초빙해야만 할 것입니다. 만약 그 계획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크로센 대제의 실력으로 보아 그가 살던 곳에서 가장 강한 실력자라면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검술을 지니고 있을 터, 그로 하여금 오크들의 본진 깊숙이 침투시켜 서약석을 탈환해 오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저희들의 희망입니다. 만약 성공한다면 병사들의 사기는 필경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영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하, 하지만 차원이동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한 지금껏 성공한 사례가 전혀 없지 않소." 너무도 터무니없는 제안에 테르비아 군주가 제동을 걸어왔다. 세르게이는 빙긋이 웃으며 화답했다. "혹시 아크로폰트라는 이름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군주들 중 몇이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로 이카롯트 제국의 전대 궁정마법사였기 때문이다. 아크로폰트 폰 네스발드. 공간 이동 마법의 명실상부한 대가이며 이카롯트 제국의 수석 마법사로 오랫동안 활동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의문스럽게 실종되었기에 세인의 궁금증을 자아낸 신비에 쌓인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트루베니아 대륙을 통틀어도 몇 명 존재하지 않는 8써클의 경지에 오른 대 마법사였다. 하지만 세르게이가 뚱딴지같이 아크로폰트를 거론하는 의도는 그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그의 실종은 오랫동안 미스테리로 남겨졌습니다. 심지어 시신조차도 발견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우연한 기회에 그의 연구실 지하에 위치한 던젼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 상황을 타개할 중요한 자료를 찾아냈습니다." "그, 그것이 무엇이었소?" "그것은 바로 차원이동에 대한 폭넓은 연구결과가 담겨있는 아크로폰트의 저서였습니다. 거기에 의하면 아크로폰트의 실종은 바로 그 자신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는 바로 차원이동을 통해 타 차원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차원이동이 성공했다는 말이오?" 듣고 있던 군주들은 저마다 아연해했다. 차원이동이 성공했다는 것이 그만큼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차원이동. 3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공간이동마법보다 한 층 진보된 마법으로 이것을 사용하면 능히 4차원을 오고 갈 수 있다 했다. 하지만 차원이동은 그만큼 난이도가 높고 어렵기 그지없는 마법이었다. 지금껏 차원이동이 이루어졌다는 전례가 한 번도 없었을 정도로.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19회 통상적으로 공간이동마법에는 엄청난 마나가 소모된다. 어지간한 마법사는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차원이동에는 이 공간이동보다도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마나가 필요하다고 알려졌다. 그 때문에 마법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자부하는 대마법사들조차 차원이동이라면 우선 고개부터 절래절래 흔드는 실정이었다. 그런 차원이동이 다름 아닌 아크로폰트에 의해 성공되었다니……. "그의 논리에 의하면 차원이동은 충분히 공간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목적지를 지정해서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거기에는 가장 중요한 제반요소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충분한 마나의 공급원입니다. 아크로폰트의 저서에 의하면 다른 차원에서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은 그곳으로 가는 마나의 총 필요량보다 적어도 열 배 이상이 소모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정보부에서는 그가 돌아오지 못한 이유를 아마도 마나의 부족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수하게 존재하는 차원을, 그것도 크로센 대제가 살던 장소만을 골라 이동한다는 것은 가능성이 너무 희박하지 않겠소?" 세르게이는 걱정 말라는 듯이 빙긋 웃었다. "아크로폰트는 이미 그에 대한 연구마저 끝낸 상태였습니다. 그의 저서에 따르면 차원이동은 그 차원에 존재했던 매개물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리로 이동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크로센 대제의 소지품을 구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문제라 할 수 있지요. 이미 저희들은 암암리에 그 문제를 해결해 놓았습니다." 말을 마친 세르게이는 손뼉을 쳤다. 그러자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와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았다. 상자의 문이 열리자 군주들의 시선이 일제히 상자 속으로 집중되었다. 상자 속의 내용물은 평범했다. 반 토막으로 부러진 얄팍한 검 조각. 그리고 무척 특이하게 생긴 다 헤어진 로브. 애초에 천으로 된 신발이 아니었을까 짐작되는 더러운 누더기. 대략 이런 물품들 다섯 점이 상자 속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화려한 상자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루한 물건들이었다. "이것은 바로 크로센 대제의 소지품입니다. 그가 자신이 살던 차원에서 가지고 온 것이지요. 이것을 구하기 위해 저희 정보부에서 상당한 곤욕을 치렀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구했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기사로 하여금 상자 뚜껑을 덮도록 명한 뒤 세르게이는 빙글 돌렸다. "이 차원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6 써클을 넘어서는 다수의 고위급 마법사와 함께 드래곤 하트가 필요합니다. 차원이동에 드는 마나를 공급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드래곤 하트밖에는 없으니까요." 말을 들은 군주들은 저마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드래곤 하트. 말 그대로 드래곤의 심장으로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마나를 보유하고 있는 물질이었다. 외형상 오색 영롱한 보석의 형태를 하고 있는 그것은 감히 값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마법 수련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시약이기도 했지만 그 자체로도 다이아몬드를 능가하는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는 왕국의 군주라고 하더라도 감히 하나 이상 가질 수 없을 정도로 희귀했다. 국력이 떨어지는 중소 왕국의 군주들은 감히 구경도 못할 정도였으니……. 그러므로 각 왕국이 보유하고 있는 드래곤 하트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로 붙여졌다. 하지만 이 중 한 나라의 국왕이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드래곤 하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모든 군주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그, 그렇다면 가진 드래곤 하트를 모조리 내어놓으라는 말이오?" 모든 군주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대상 국왕은 떠듬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바로 부유한 상업국가 트란벨의 국왕이었다. 광적으로 보석을 좋아하는 인물로써 그가 수집한 보석은 능히 일개 나라를 살 수 있을 정도라고 알려져 있었다. 부유한 트란벨에서 거두어들이는 엄청난 세금은 그런 그의 취미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드래곤 하트에 욕심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따금, 아주 이따금 어린 드래곤을 사냥했다는 소문이 돌면 그는 드래곤 하트를 구입하기 위해 황금을 아끼지 않고 퍼부었다. 그 결과 트란벨 국왕은 몇 개의 드래곤 하트를 수중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정도에서 그쳤으면 좋으련만 트란벨 국왕은 유난히 과시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평소 보유한 드래곤 하트를 틈날 때마다 타 왕국 군주들에게 자랑한 것이 이제 와서 화근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 하지만." 그는 갖가지 핑계를 대며 어떻게 해서든 드래곤 하트를 내놓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로젠가르트 4세의 눈매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트란벨의 부(副) 역시 없소. 인간의 국가가 모두 멸망한다면 드래곤 하트가 더 이상 보물로 간주될 것 같소? 고로 나 역시 보유한 드래곤 하트를 아낌없이 내어놓을 작정이오. 우리 인간의 운명을 생각한다면 그보다 더한 보물도 내놓아야 하오." 각 왕국 군주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켰다. 드래곤 하트도 문제였지만 6 써클 이상의 마법사를 구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6 써클이라면 어지간한 왕국에서는 능히 궁정마법사 자리를 꿰어찰 수 있는 실력자였다. 그러므로 군주들로썬 순순히 내어놓기가 여간 아깝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당면한 현실이 너무 위급했기에 트란벨 국왕은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드래곤 하트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차원의 인물을 초빙해서 위기를 극복하자는 계획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슈렉하이머 역시 거기에 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대신 조건 하나를 내걸었다. "사절단 중 하나에 제가 참가하겠습니다." 군주들은 두말하지 않고 그 제안을 수락했다. 슈렉하이머가 보유한 신성마법은 마법으로 따지자면 적어도 6 써클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마법사 한 명이라도 아쉬운 처지였기에 결정은 빨리 이루어졌다. 뒤이어 세르게이가 마지막 문제점을 설명하고 나섰다. "아크로폰트식 차원이동의 문제점은 바로 시간이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공간적으로는 정확히 그곳을 찾아갈 수 있지만 시간 선택은 오로지 우연의 일치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운이 좋은 경우에는 크로센 대제가 존재했던 바로 그 시간대로 갈 수 있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의 최고 강자를 초빙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상정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만전을 기하기 위해 적어도 다섯 이상의 파티로 구성해서 사절단을 보내야 합니다." 보유한 크로센 대제의 소지품은 도합 다섯. 그러므로 각 왕국에서 뽑힌 마법사로 하여금 다섯 개의 파티를 구성하고 그들로 하여금 각기 드래곤 하트 하나씩을 가지고 미지의 타 차원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면 각 군주들은 서둘러 마법사를 뽑아 보내도록 하시오. 그들에게 차원이동마법을 전수해야 하기 때문에 시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소. 또한 트란벨과 에스테르에는 내가 특별히 근위 기사단을 보내드리겠소. 그러니 보유한 드래곤 하트를 그들에게 맡겨 보내주시오." "아,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로젠가르트 4세는 힐끗 슈렉하이머에게 시선을 던졌다. "대승정에게는 특별히 우리 이카롯트의 궁정마법사 베니테스를 붙여 주겠소. 그러니 임무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해 주길 부탁드리겠소." "알겠습니다." 군주들의 회합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군주들은 각기 자신에게 배정된 마법사와 보물을 준비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과정을 설명한 슈렉하이머는 쓸쓸한 눈빛으로 독고성을 쳐다보았다. "이것이 바로 저희들이 중원이란 곳으로 가게 된 과정입니다." "일이 그렇게 이루어졌구려." 말을 마친 독고성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야 비로소 모든 제반 사정이 이해가 된 독고성이었다. 이들의 시도는 전혀 나무랄 데 없었다. 타 차원으로 가서 그곳 최강의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데 있어서 이들은 크나큰 실수를 했다. 독고성에겐 도와주고 싶어도 그럴 만한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아무런 힘이 없는 중늙은이에 불과했다. 서글픈 생각을 지워버리려는 듯 독고성은 마치 툭 내뱉듯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어째서 날 데려오겠다는 결정을 했소?" "그것은." 슈렉하이머는 차원이동을 통해 중원에 도착한 다음부터의 일을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차원이동은 정말 순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신비로운 빛이 전신을 감싸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이동해 있었으니까요. 공간이동 할 때를 감안해서 우리 모두는 잔뜩 에이비에이션(Aviation : 비행마법)을 준비해 놓았습니다만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공간이동과는 달리 차원이동은 정확히 마법진 위의 공간 자체를 다른 차원의 것과 바꾸어놓는 것이었으니까요. 순식간에 바뀌어버린 기후에 다소 놀라긴 했지만 사절단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슈렉하이머는 독고성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도착하자마자 저희들은 이곳의 마나 분포도를 광범위하게 검색했습니다. 강력한 실력자를 찾기 위해서였지요. 그 결과 저희들은 의외로 많은 마스터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도 쉽사리 말이지요. 당시 저희들은 그것이 베르하젤님의 보살핌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저희들은 기뻐하며 지체 없이 그리로 향했습니다." 당시 슈렉하이머가 발견한 자들은 바로 사황교의 추적대였다. 총단에서 빠져나간 독고성을 잡기 위해 사준환이 대대적으로 고수들을 동원 독고성의 도주로를 추적해 가던 순간이었다. 슈렉하이머에게서 부근의 지형과 무사들의 복장에 대해 전해들은 독고성은 그들이 다름 아닌 배교의 추적대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저희들은 무척 놀랐습니다. 지금껏 이 정도로 많은 마스터를 본 적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당신네들은 먼 곳에서도 고수들의 기척을 능히 간파할 수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저희들이 시전한 마법은 바로 씨크 마나 포스(Seek mana force). 마스터의 몸 속에 간직된 마나의 절대량을 감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은 그리 순탄히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을 발견하자 슈렉하이머는 우선 다섯 명의 마법사를 시켜 그들과의 대화를 시도했다고 한다. 은폐 마법을 풀고 마법사들이 접근하자 당연한 말로 상대 무사들은 무척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들은 우선 의사소통을 위해 통역 마법을 캐스팅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결정적인 실책이었으니……. "마법사들이 마법을 캐스팅하자 상대 무사들의 기색이 갑자기 험악해졌습니다. 그들은 주문이 끝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공격을 가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원거리에서 단검 이나 표창같은 것을 던져 두 명의 마법사를 즉사시켰습니다." 독고성은 속으로 생각했다. '암기를 던졌나 보군. 하긴 배교 무사들에게 상대방의 주문이 끝나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일 테니 그럴 만도 하지.' "놀란 마법사 한 명이 실드를 펼쳤지만 그들이 던진 표창의 위력은 정말 가공했습니다. 그들이 던진 표창은 실드를 유유히 뚫고 마법사에게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남은 두 명의 마법사는 그 즉시 은폐 마법을 펼친 터라 다행히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부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는 마법사에게 다가갈 때만 해도 저희들은 대화를 시도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원천적으로 우리의 착각이었습니다." 슈렉하이머의 음성에는 뭔가 회한 같은 것이 서려있었다. "그들이 마법사에게 뭔가 물어보는 듯 보였지만 아마도 그는 당시 대답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통역 마법의 캐스팅에 시간이 걸린다는 점도 있었지만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자 그들은……." 그 대목에서 슈렉하이머는 잠시 주저했다. "마법사의 목을 무참히 잘라버렸습니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말입니다." "아마 그럴 것이오. 그놈은 능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니까" 슈렉하이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그럼 그 자들을 아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그들은 원래 내 수하들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빌어먹을 사준환이란 놈이 반란을 일으켜 내 자리를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날 죽이려고 그 끈질긴 추격전을 벌였던 것이라오." 슈렉하이머는 비로소 독고성이 그토록 쫓기던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점도 없진 않았으니……. "그, 그렇다면 부,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말입니까? 당신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그렇소. 놈은 가증스럽게도 수하들 상당수를 이미 포섭해 놓은 상태였소.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나는 처참히 당할 수밖에 없었소." "오. 신이시여." 슈렉하이머는 말문을 잊었다. 적어도 그는 기사도 정신이 지배하는 트루베니아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반역을 일으켜 군주의 자리를 찬탈한다는 것이 감히 이해가 될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각 국 군주들이 실정을 일삼아 왔어도 그는 감히 반발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곳에선 군주에게 충성하는 것이 최대의 덕목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군요." "그럴 거요. 내가 살던 세계에서는 힘이 곧 법이니까……." "그, 그럼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편입니까?" "그렇소. 셀 수도 없을 만큼……." 슈렉하이머는 한 동안 침묵을 지켰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었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자가 있다는 자체가 크나큰 위험요소였으므로……. 하지만 경각에 처한 트루베니아 대륙의 사정을 생각하니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던 슈렉하이머였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20회 지금으로썬 그의 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였으므로 슈렉하이머는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독고성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기 영웅(Hero)님." "나는 영웅이 아니오. 차라리 마인(魔人)이라 불러주시오. 그것이 나에게 더욱 어울릴 테니……." 슈렉하이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조, 존함이 데몬(Demon)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진 않소. 정확히 말하자면 내 이름은 독고성이오 독고(獨孤) 성(成)" 트루베니아의 통역 마법은 서로간의 언어의 괴리를 완벽하게 극복한다. 때문에 독고성이 말한 뜻은 정확히 슈렉하이머에게 전달되었다. 뜻글자인 한자의 속뜻까지도 말이다. "홀로(獨) 외로이(孤) 이룬다(成). 괴상한 이름이군요. 아무튼 좋습니다. 이곳에 계시려면 이름이 있으셔야 할 테니 제가 그곳의 뜻에 맞게 이름을 하나 지어드리겠습니다." 잠시 상념에 빠진 슈렉하이머는 곧 성과 이름 하나씩을 생각해냈다. "솔로(Solo). 어떻습니까? 아마도 독고(獨孤)란 성에 가장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데몬(demon)이란 이름은 아마도 이곳에서 사용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데이몬(damon)이라 하심이……." 하지만 독고성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는 상관없소. 부르기 편하면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데이몬 솔로(Damon solo). 트루베니아에서의 독고성의 이름은 이렇게 작명(作名)되고 있었다. "그럼 데이몬. 이제 저희들이 데이몬을 초빙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알고 있소." "그러시다면 틀림없이 저희들을 도와주시겠지요." 슈렉하이머는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독고성을 직시했다.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독고성은 그러나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애석하지만 나는 도와줄 수 없소." 슈렉하이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 어째서……. 저희 대륙의 사정에 대해 모두 들으셨잖습니까? 비록 다른 세계라지만 저희 역시 인간입니다." "물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소. 나 역시 도와주지 못하는 것이 애석할 정도로. 하지만 당신들은 결정적으로 사람을 잘못 골랐소. 왜냐하면" 독고성의 음색에는 자신도 모를 서글픔이 잔뜩 배어있었다. "나는 이미 모든 힘을 잃은 상태라오. 다시 말해 나는 이제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심지어 검조차 제대로 쓸 수 없는 폐인이 되어버렸단 말이오." 물론 슈렉하이머는 쉽사리 이해하지 못했다. "도,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독고성은 안색을 굳히며 연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곳 무사들이 어떤 방법으로 수련하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살던 세계에서는 내가기공이란 것을 익힌다오. 그리고 그것을 익히기 위해서는 인체 내의 단전이란 기관이 가장 중요하오. 이것이 있어야만 검강이나 검기, 이곳에서 말하는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할 수 있단 말이오. 하지만 나는 바로 그것을 상실했소. 탈출하면서 겪은 악전고투로 인해 내 몸에서 내력, 당신들이 말하는 마나는 몽땅 사라져버렸다는 말이오. 이제 알겠소?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음을……." 슈렉하이머의 안색이 딱딱히 경직되었다. 그것을 보며 독고성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당신네들에겐 마스터를 알아 볼 수 있는 기술이 있다고 들었소. 그것을 시전해 본다면 능히 내 몸 상태를 알아볼 수 있을 터. 한 번 시전해 보도록 하시오. 내 말의 진위를 즉시 알 수 있을 테니……." 잠시 독고성의 얼굴을 주시한 슈렉하이머는 지체 없이 캐스팅에 들어갔다. 시크 마나 포스(Seek mana force)를 시전해서 독고성의 상태를 살펴보려 한 것이다. 검색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슈렉하이머의 입이 딱 벌어졌다. 독고성의 말은 한 치의 틀림도 없는 사실이었다.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차라리 범인의 그것보다도 못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마스터는커녕 평범한 병사보다도 못한 자를 초빙해 온 것이다. 불연 듯 슈렉하이머는 절망감이 전신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허탈한 듯한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그 숱한 고초를 겪고 차원이동에 성공했는데……." "도와주지 못함을 나 역시 유감으로 생각하오." 말을 마친 독고성은 책상다리를 한 채 몸을 돌렸다. 우선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이기 싫었거니와 도저히 그를 대할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의 잘못이 아니긴 했지만 슈렉하이머가 자신에게 거는 기대를 저버린 것이 더 가슴이 아팠다. 등뒤의 슈렉하이머는 한 동안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꽉 잠긴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일단 이 사실을 로젠가르트 군주께 보고해야겠습니다. 그리고 ……" 홀로 흐느낀 듯 슈렉하이머의 음성은 어느덧 젖어있었다. "일단 제 이야기를 관심 갖고 들어주신 데는 감사 드립니다. 임무에 실패한 이상 이제 저는 더 이상 데이몬을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등뒤로 슈렉하이머가 몸을 돌리는 기척이 전해졌다. 하지만 독고성은 끝까지 몸을 돌리지 않았다. 슈렉하이머가 완전히 방밖으로 나간 후에도 그의 몸은 미동도 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그 뒤로 독고성은 슈렉하이머를 당분간 보지 못했다. 또한 시중드는 시녀로 보이는 여자 하나 외에는 사람구경도 하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그 여인조차도 극도로 독고성을 두려워했다. 부들부들 떨며 들어와 음식접시를 내려놓고 외면하며 나가버리는 통에 독고성이 말을 붙여 볼 틈은 도무지 없었다. "젠장. 내가 뭐 사람 잡아 먹는 귀신인가?" 하지만 이곳에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통역마법을 캐스팅 할 수 있는 마법사에 한정된다는 사실을 독고성은 알지 못했다. 이렇게 무료한 나날들이 하루 이틀 계속되었다. 그러기를 얼마간 마침내 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덜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독고성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활짝 열린 문가에는 화려한 복장을 걸친 색목인 몇이 자신을 주시하며 서 있었다. 그들 중 한 중년인의 얼굴이 독고성의 눈에 들어왔다. 멋지게 수염을 기른 푸른 눈을 가진 중년인이었다. 그의 고개가 갸웃해졌다.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그가 바로 절벽에서 떨어지는 자신을 구한 마법사 베니테스란 것을 눈치채지 못한 독고성은 그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독고성의 얼굴을 한참 주시하던 색목인들은 곧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이 통역마법을 펼칠 이유가 없었기에 당연히 독고성은 그 대화를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힐끔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에서 독고성은 몸에 익은 반응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극도의 업신여김이 담겨있는 멸시의 눈빛이었다. "이것들이?" 분통이 터졌지만 그로써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이렇게 쳐다보는 동안 색목인들의 대화는 진행되고 있었다. "이자가 그자인가?" 베니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당시 전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을 간신히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세르게이는 독고성을 다시 한 번 쳐다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정말 추악한 생김새로군. 꿈에라도 볼까 두려워. 그런데 저자가 그렇게나 강하단 말인가?" 그 말에 베니테스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당시 저자의 손에 의해 죽은 소드 마스터는 저희들이 센 것만 해도 오십에 육박했습니다. 당시 저희들은 그 대륙의 전신(戰神)이 현신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그 말에 세르게이 공작은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야. 소드 마스터 50명을 혼자서 어떻게……." "하지만 사실입니다. 그 소드 마스터들은 한 눈에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한 술 더 떠서 착용하고 있던 손톱 달린 건틀릿 전체가 물들 정도의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할 정도였습니다." "흐음." 세르게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턱에 손을 가져갔다. 상대는 아무리 보아도 강함이 느껴지지 않는 추악하고 왜소한 이방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베니테스가 어지간해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솔직담백한 성격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잠긴 세르게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대승정께서는 어째서 저자가 힘을 잃었다고 했을까?" "아마도 그 말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저는 이미 이자가 보유한 마나량을 측정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슈렉하이머 대승정의 말은 한 치의 틀림도 없는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이자는 이제 평범한 사람에게도 못 미치는 마나를 보유하고 있을 뿐입니다." "호오. 이유는?" 베니테스는 상당히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차원이 달라져서 그런지도……." 세르게이는 고개를 흔들며 말을 끊었다. "그건 말이 되지 않지. 차원이 틀려서 힘을 못 쓴다면 크로센 대제의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텐가? 내 생각에는 필시 저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듯 싶네" "네? 거짓말을 말입니까?" "그렇지. 우여곡절 끝에 이곳에 왔지만 저자는 필시 아무 대가없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거야." "그, 그럴 리가?" 세르게이는 거의 확신하는 듯 호언하며 독고성의 얼굴을 주시했다. "아무리 심한 상처를 입었다 하더라도 몸은 회복되는 법. 나는 지금까지 상처를 입었다고 해서 소드 마스터가 가진 마나가 사라진다는 경우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어. 필시 이자를 대하는 방법이 잘못된 거라고 볼 수 있지. 슈렉하이머 대승정의 방법 말이야. 이봐 베니테스." "네." "통신마법을 시전하도록 하게. 내가 대화를 해 볼 테니……." "내 말을 알아듣겠소?" 한참동안 수군거리던 자들 중 하나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음성이 들려오자 독고성은 눈을 크게 떴다. 어쨌거나 사람과 대화를 한다는 것이 그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다. "듣고 있소." "정식으로 소개하겠소. 나는 이 이카롯트 제국의 총리를 맡고 있는 세르게이 폰 네르만이라고 하오. 만나서 반갑소이다." "동감이오." 슈렉하이머의 경우와는 달리 둘의 대화는 상당히 무미건조했다. 일단 이곳의 역사를 통해 군주들의 처사를 알게 된 데이먼이 의도적으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세르게이의 성격 자체가 다소 직선적이란 데 기인한 바가 컸다. "이미 슈렉하이머 대승정에게서 들어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 대륙은 지금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소." "물론 본인도 들어서 알고 있소이다." "그렇다면 대화가 쉽게 풀리겠군." 세르게이는 독고성의 눈을 뚫어지게 직시했다. "얼마면 되겠소?" "………." "우리를 도와주는 대가로 얼마를 지불하면 되는지 말해 주시오." 독고성의 얼굴이 점차 경직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도와주는 대가로 돈을 주겠다는 말이오?" "바로 그렇지. 비록 전쟁중이라 많은 돈을 장만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당신이 이곳에서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만큼의 금은보화를 지불할 순 있소. 아. 원한다면 여자도 얼마든지 구해줄 수 있소.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말이오." 세르게이의 얼굴에는 점점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일단 저 이방인이 얼마를 원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는 필시 살아 돌아올 확률이 희박한 곳으로 파견될 터이니……. 설사 무사히 임무를 끝마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크로센 대제의 전례를 보아 이계의 인물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크나큰 위험요소가 될 터, 서약석만 손에 넣는다면 저자는 그 즉시 생의 종지부를 찍게 되리라. 물론 정면 공격이 아닌 독약이나 기타 등등의 방법으로 말이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21회 안녕하세요. 김정율입니다. 우선 성탄절 잘 보내십시오.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로군요. 아마도 오늘 저녁에는 올리지 못할 것 같아 조금 일찍 올립니다. 다크 메이지의 진행이 다소 지루하죠?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봐도 아직까진 영 별로라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고심을 좀 많이 했습니다. 진행을 빠르고 간결하게 하자니 설정이 어설프거나 미홉할 것 같고, 그렇다고 세세히 설명하려니 무척 지루할 것 같았어요. 하지만 독자 분들의 피드백과 조언을 얻기 위해 과감히 후자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니 답답하시더라도 꾸준히 지켜봐 주십시오. 또한 많은 비평도 함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소드 엠페러 외전 15, 16권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특히 카페의 [젊은 언니] 님께서 과분한 평가로 정말 절 난처하게 하셨네요. 솔직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많은 분들께서 한성이 사황과 여인들을 데리고 가지 않은데 대해 섭섭해하시는데 아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 합니다. 전 해피엔딩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더 이상 내용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소엠은 17권에서 완결입니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부부만의 단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은서를 어머님께서 맡아주신다고 하셔서 희망에 부푼 나머지 아내랑 많은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나쁜 아빠죠?^^ 하지만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여러분 이만.^^ ********************************************************************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세르게이는 상대방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그의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다. '정말 추악한 생김새로군. 도저히 사람의 용모로 생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니……. 고민이군. 저 자를 마다 않는 여자를 구하려면 필시 노예시장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을 테니.' 그의 상념은 상대의 냉랭한 대답으로 여지없이 깨어져버렸다. "네놈은 저번의 슈렉하이머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못한 놈이로군." 세르게이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뭐, 뭐라고 하셨소?" 독고성의 어조는 추상같았다. "적어도 슈렉하이머는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금전적 논리로 사람을 평가하는 네놈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이지. 내 대답은 오직 한 가지다. 내 몸에는 이제 너희들을 도와줄 조금의 능력도 남아있지 않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거절이다. 네놈의 상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도 도와줄 수 없다." 전혀 뜻밖의 욕설에 세르게이는 정신이 멍해졌다. 지금껏 지녀온 이카롯트의 총리라는 지고한 신분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이런 험악한 욕설을 들을 기회가 조금이라도 있었을까? 상대의 입에서는 욕설이 거듭해서 튀어나왔다. "자칭 한 나라의 총리라는 놈을 보니 이곳이 이렇게 된 데 대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멍청한 놈. 그럴 시간이 있거든 목숨을 걸고 아르카디아로 건너가라. 그리고 크로센 대제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애걸하라. 제발 저희 국민들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말이다." "뭣이?" "왜? 내 말에 화가 나는가?" 독고성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한 세르게이를 계속 약올렸다. 결국 보다 못한 베니테스가 나서고 나서야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슬립." 베니테스가 행한 수면마법에 독고성은 침대 위에 쓰러져 그대로 곯아 떨어져버렸다. "내 이놈을?" 베니테스는 치를 떠는 세르게이를 달래는데 여념이 없었다. "참으십시오. 보아하니 이 자는 의도적으로 공작 전하를 능멸한 것 같습니다." "고의적으로?" "그렇습니다. 이자는 우리들이 구하기 직전 그곳에서 수많은 검사들에게 포위를 당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서슴없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뭘 어떻게 했기에?" "그는 즉시 절벽으로 가서 뛰어내렸습니다. 다시 말해 쉽사리 뜻을 꺾는 성품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런 제반 여건을 유추해 보면 이 자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부러 공작 전하를 화나게 한 것 같습니다." "흠! 그럴 수도 있겠군." 세르게이는 겨우 화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아직까지 화가 풀리지 않은 듯 그는 곯아떨어져 있는 독고성을 매서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놈을 시험하도록 하겠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세르게이는 독고성의 얼굴을 노려보며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지하 감옥 중 가장 튼튼한 곳에 이놈을 집어넣어라. 그리고 그곳에다 사로잡은 오크나 트롤을 집어넣도록 해라. 산 채로 무장을 모두 갖춰서 말이다. 때에 따라서는 오우거도 좋다.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실력을 보여야 할 터, 놈이 실력을 감추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곧 밝혀질 것이다." 쓰러져 있는 독고성을 다시 한 번 쳐다보며 세르게이의 얼굴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만약 놈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상관없다. 뒤처리는 몬스터들이 해줄 테니까……." 독고성은 자신의 운명이 정해지는 것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의 의식은 지금 이곳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 중원의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뎅. 뎅. 뎅. 고즈넉한 산사에는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승려들이 바쁘게 대웅전으로 몰려들었고 향화객들은 하산하기 위해 서둘러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고풍스럽기 그지없는, 끝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늘어선 전각들의 모습에서 사찰의 역사가 무척 오래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 사찰이 그 유명한 숭산 소림사란 사실을 밝히지 않더라도 말이다. 예불을 위해 승려들이 전각 속으로 사라지고 산사는 또다시 적막감속에 잠겨들었다. 그러나 산사의 뒤뜰, 그리 넓지 않는 잔디밭에서는 결코 절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한 눈에 보아도 주먹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란 것을 알 수 있는 음향. 그곳에는 지금 대 여섯 명의 인영들이 한참 패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산사에서 패싸움을 벌인다는 것은 물론 소림사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패싸움을 벌이는 자들은 모두가 열 살 안팎의 소년들이란 데 있었으니……. 또한 그곳에서 벌어지는 패싸움은 일대 다수의 주먹다짐이었다. 다섯 명의 소년들이 한 소년을 둘러싸고 무자비한 집단 폭행을 벌이고 있었다. 퍽퍽. 무수한 주먹질과 발길질을 당하면서도 소년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그저 독기가 줄기줄기 피어나는 눈빛으로 무언가 기회를 엿보고 있을 뿐이었다. 계속해서 퍼부어지는 주먹질과 발길질을 고스란히 맞아가며 말이다. 자세히 보니 소년의 용모는 예사롭지 않았다. 쭉 찢어진 눈에 전혀 어린 소년의 것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휘어진 매부리코. 거기에다 소년은 허리를 바로 펴지 못하는 꼽추였다. 아직은 어린 나이라서 별달리 표시가 나지 않는다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등이 심하게 솟아오를 것이 분명했다. 덜컥. 턱에 정통으로 일격을 맞은 꼽추소년은 그대로 나가 떨어졌다. 공교롭게도 그의 몸은 한 소년의 앞으로 넘어졌다. 그러자 소년은 회심의 미소를 떠올리며 발길질을 가하려했다. 그 때 다급한 경고성이 울려 퍼졌다. "조심해. 놈에게 물리기 전에……." 막 꼽추소년을 걷어차려던 소년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반응이 약간 늦어버렸으니. "악." 뒤로 물러나던 소년은 갑자기 처절한 비명을 질러댔다. 나가떨어진 꼽추 소년이 달려들어 소년의 정강이를 물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입가에 피가 배어나기 시작했다. 소년들은 지체 없이 달려들어 꼽추 소년의 입을 벌리려 했다. "이, 지독한 놈." 소년들이 사력을 다해 꼽추소년의 입을 벌리려 했다. 닥치는 대로 후려갈기고 자근자근 짓밟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꼽추소년은 그만큼 죽을힘을 다하고 있었다. "끄으으……." 물린 소년은 통증에 의해 거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보다 못해 청의를 입은 한 소년이 허리에 차고 있는 보검을 뽑아들었다. 경고성을 발한 바로 그 소년이었다. 체형에 맞게 제작된, 화려하기 그지없는 보검의 모습에서 소년의 신분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저리 비켜. 내가 놈의 턱을 잘라버릴 테니……." 그 말에 소년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 그래도 괘, 괜찮을까?" "괜찮아. 놈은 마두(魔頭)의 자식이야. 팔이나 다리 하나를 떼어낸다고 해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을 거야." 청의 소년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곤 검을 꼽추소년의 턱에다 겨냥했다. "물지 않으면 네놈의 턱을 잘라버릴 것이다." 하지만 꼽추소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알아서 하라는 듯 그는 눈을 감으며 다리를 문 입에 힘을 더욱 집어넣었다. 고통에 물린 소년은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청의 소년의 눈가에 순간적으로 살광이 스쳐지나갔다. "이놈." 그는 검을 꼽추소년의 입 속에 쑤셔 넣었다. 입술이 베어지며 피가 낭자하게 치솟았다. 그래도 꼽추소년은 턱의 힘을 빼지 않았다. 죽일 테면 죽여 보라는 듯이 말이다. 결국 난감해진 것은 청의 소년이었다. 턱을 잘라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하긴 했지만 그리 쉽사리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엄격한 소림사의 규율로 봐서 순순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어렵사리 들어온 소림사에서 혹시라도 쫓겨날 지도 몰랐기에 그는 일순 어쩔 줄 몰라했다. 그 때 꼽추소년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입이 벌어지며 꼽추소년은 입 속에 고인 피를 그대로 청의 소년의 얼굴에다 내뱉었다. "헉." 난데없는 선혈 세례에 청의 소년은 대경실색했다. 무림 명가의 자제로 고이 자란 그가 어찌 이런 경우를 당해보았을까? 그는 엉겁결에 뒤로 한 발 물러나서 손으로 얼굴을 훔쳤다. 그러느라 손에서 보검이 떨어져버렸다. 그 찰라 꼽추소년은 물었던 다리를 놓고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 청의 소년의 손에 들려있던 보검은 어느새 꼽추소년의 손에 들려 빛을 발하고 있었다. "죽인다." 살기가 줄기줄기 뿜어 나오는 음성과 함께 꼽추소년은 청의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퍽. 꼽추소년에게 떠밀려 넘어진 청의 소년은 그야말로 사색이 되었다. 예기가 줄기줄기 감도는 보검이 바로 눈앞에서 빛을 발하고 있으니……. 꼽추소년은 가차없이 검을 소년의 가슴팍에 박아 넣으려고 했다. 평소 청의 소년에게 무수하게 당해왔던 만큼 그의 행동에는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었다. 둘러싼 소년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시커멓게 변했다. "안 된다." 어디선가 들려온 굵직한 음성들. 음색을 보아할 때 소년들이 발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몸을 드러내어 달려오는 자들. 머리에 계인이 선명한 것을 봐서 소림사 승려들임이 분명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소림사 계율원의 승려들이었다. 명목상 꼽추소년을 보호하는 자들이기도 했다. 꼽추 소년이 뭇매를 맞고 있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던 그들은 그러나 전세가 역전되자 가차없이 개입하고 나섰다. 하지만 상황을 볼 때 그들의 개입은 현저히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이미 보검은 청의 소년의 가슴팍에 닿아있는 상태. 하지만 승려들의 얼굴에는 별달리 급할 것이 없다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뒤이어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악." 놀랍게도 비명을 지른 자는 청의 소년이 아니었다. 검으로 찌르려 한 꼽추 소년이 도리어 고통에 겨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보검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고 꼽추소년은 머리를 감싸안은 채 그 자리를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쉴 새없이 비명을 내지르는 것을 보아 극도의 고통이 소년에게 가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청의 소년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엔 곧 분노가 치솟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싼 소년들. 청의 소년은 암암리에 그들의 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으므로 이처럼 어이없는 기습을 허용한 데 대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분노는 곧 꼽추 소년에게로 발산되었다. 낙법을 써서 몸을 일으킨 청의 소년은 지체 없이 꼽추소년에게로 다가갔다. 땅에 쓰러져 몸을 뒹굴고 있는 꼽추 소년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구타가 시작되었다. 겁에 잔뜩 질려있던 소년들도 그 모습에 하나 둘씩 가세하기 시작했다. 이미 호법승들은 모조리 그 자리에 도착해있는 상태였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22회 그들은 일방적인 구타를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서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정말 독랄한 놈이로군. 그 틈을 놓치지 않다니……." "글세 말이야. 하마터면 산동 모용세가의 장자가 목숨을 잃을 뻔했지 않은가 그려?" 이마에 계인을 선명히 찍어 넣은, 그들 중 수좌로 보이는 호법승이 문득 감탄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칠종단금술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군. 이것이 아니었다면 저 독한 놈은 지금까지 여럿 목숨을 잡았을 걸세. 살인하려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금제가 발동되다니, 정말 소림성승께서 직접 시술한 금제답네." 한 호법승이 무척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나는 영 못마땅하네 그려. 우리 소림에서 제일 고강한 내공을 가지고 있는 성승께서 저 딴 마두의 자식을 위해 내공을 소모하시다니……. 나로썬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휴! 그 분의 고집을 누가 꺾겠나? 이미 소림사 안팎으로 정평이 나 있는 고집이신데……." 수좌 호법승은 힐끗 고개를 돌렸다. 꼽추 소년은 제대로 정신도 차리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무자비한 집단 폭행을 당하고 있었다. 호법승은 별달리 내키지 않는 듯 내뱉었다. "슬슬 싸움을 말려야겠네. 까딱하다간 저 독종 놈, 숨이 넘어가겠네 그려." "그럴까?" 호법승들이 가세하자 집단 구타는 일단락되었다. 이미 충분히 분풀이를 했다 여겼는지 소년들은 하나씩 물러나서 몸의 먼지를 털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용이란 성을 가지고 있는 청의소년은 아직까지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몸을 돌리려다 말고 바닥에 널브러져 꿈틀거리는 꼽추 소년의 복부를 냅다 걷어차 버렸다. 퍽. "이 자라 같은 자식. 감히 내 얼굴에 피를 묻히다니……." 청의 소년은 소매 속에서 비단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훔쳤다. 그리곤 밝은 얼굴로 소년들을 돌아보았다. "자. 가자." 소년들이 우르르 몰려가 버리자 호법승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단한 성깔이군. 저 성격에 자질 역시 출중하니……. 속가제자란 게 정말 아까워." "자, 자, 잡담 그만하고 이 녀석 치료나 도와줘. 괜히 성승께서 아신다면 단단히 꾸지람을 들을 테니……." "알았어." 해가 저물어 가는 소롯길을 웬 왜소한 인영이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심하게 다리를 절며 겨우겨우 걸음을 옮기는 이는 다름 아닌 꼽추 소년이었다. 얼굴은 퉁퉁 부어 형상도 분간할 수 없었지만 특유의 독기 서린 눈빛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윽." 돌부리에 걸려 꼽추소년은 그만 그 자리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의 입에서 독기가 줄기줄기 어린 음성이 배어 나왔다. "비겁한 놈들. 단체로 덤비다니 으윽." 검날에 벤 입술에서는 쉴 새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다. 피에 전, 침을 탁 내뱉은 꼽추소년은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평소에도 멀기 그지없는 숙소였지만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지금 오늘따라 더욱 멀어 보였다. 산을 하나 넘어가야만 보이는 누추한 초막. 그것이 바로 꼽추소년의 숙소였다. 그리고 소년은 알고 있었다. 비록 보이진 않지만 암암리에 호법승들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소년의 입에선 또다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개 같은 놈들. 모두 다 한 통속이야." 연신 씨근거리면서도 소년은 힘을 내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독고성. 꼽추 소년은 자신이 이런 신세가 된 수밖에 없었던 연유를 떠올리고 있었다. 백도 명숙들에게 협공 당해 죽어가던 사파의 절대자. 아직 사물을 인지할 수 없는 어린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독고성은 그 때의 일을 결코 잊지 않았다. 비록 당시에는 그가 아버지란 사실은 몰랐지만 적어도 그가 자신을 끔찍이도 사랑했었다는 것만은 인지하고 있던 독고성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바로 그 자리에서 독고성은 소림성승에 의해 칠종단금술의 금제를 시술받았다. 시술 과정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통증에 의해 정신을 잃은 독고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림사에 옮겨지게 된다. 그가 소림사에 기거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았다. 놀랍게도 배교에서는 소림사에 억류된 독고성의 존재를 알고서도 구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전대 교주 독고무기의 유일한 독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원래 소림사에서는 생각하고 있는 꿍꿍이가 있었다. 전대 교주의 아들을 손에 넣은 만큼 소림사에서는 그를 조건으로 당시 포로로 잡힌 자파 제자들과의 교환을 꿈꾸었었다. 제자들을 구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소림성승 역시 반대할 수 없는 상황. 소림 방장은 소림사의 의도를 빠짐없이 서신에 적어 배교로 보내게 된다. 당시 배교는 총사 사준환의 손에 새롭게 재정비되어 있었다. 독고무기의 죽음으로 초래된 방도들의 혼란을 재빨리 수습한 그가 배교의 새로운 지배자로 떠오른 것이다. 그런데 그는 예상을 뒤엎고 독고성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서신을 받았음에도 그는 가타부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소림사에서는 그 사실에 무척 당혹해했다. 이미 독고성에 대해 금제를 시행했던 터라 후환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교에서 독고성을 거두려들지 않다니. 갈 데가 없어진 때문에 독고성은 소림사에서 쭉 기거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한 마디로 천덕꾸러기로 전락해버렸다. 문제는 그가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까지 성장하고 나서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추악한 외모, 그리고 사파 절대자의 아들이라는 배경에 기인한 것이었다. 당시는 바야흐로 백도와 사도간의 힘 겨루기가 극대화되기 시작한 시점. 소림승이나 수련제자들이 독고성을 보는 눈이 그리 고울 리가 없었다. "더러운 잡종 꼽추 놈." "수많은 사람을 죽인 마두의 자식놈." 사물을 인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에게 퍼부어진 멸시와 괄시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고 그런 멸시 속에서 성장한 독고성이 평범하게 성장하기란 불가능의 도를 넘어서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특히 그의 아버지였던 독고무기는 대단한 실력을 가진 사파 고수였었고 그의 손에 수많은 백도의 무사들이 명을 달리했다. 그러므로 독고성에게 가해진 멸시와 냉대는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구박 속에서 독고성의 성품은 점점 비뚤어져만 갔다. 오늘 당한 집단 린치 역시 그러한 배경에 기인한 것이었다. 말없이 걸음을 재촉하던 독고성의 눈에 어딘 가로 기어가고 있는 조그마한 뱀 한 마리가 들어왔다. 싸늘한 미소를 지은 독고성은 말없이 뱀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으직. 바삐 기어가던 뱀의 머리는 독고성의 발에 밟혀 그대로 으스러졌다. 그와 함께 반사적으로 뇌리에 전해지는 다소의 통증. 물론 칠종단금술로 인한 통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까의 경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경미했다. 독고성이 능히 참아낼 수 있을 정도. 그의 입에서 갑자기 욕설이 터져 나왔다. 소년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될 험악한 욕설이었다. "제기랄. 이 빌어먹을 금제법만 아니었다면 오늘 모용 진 그놈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칠종단금술. 소림사에서 살계(殺戒) 다음으로 지정할 정도로 위력이 엄청난 금제술이었다. 피 시술자의 살심 자체를 말살하는 금제법으로 이 대법을 시술받은 자는 살인 자체가 불가하다 했다. 독고성은 이미 소림성승에게 직접 이 금제법을 시술받은 바가 있었다. 오늘 모용진의 명을 끊지 못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젠장. 그놈의 고통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참지 못하니……." 칠종단금술은 원천적으로 사람을 대상으로 살심을 일으킬 때 발동된다. 독고성은 그것을 실험하기 위해 지금까지 무수한 벌레와 동물들을 죽여본 적 있었다. 그 결과로 동물을 죽일 때는 비교적 참을 수 있을 정도의 통증만 전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대상으로 살심을 일으킬 때는 그가 상상도 할 수 없는, 뇌가 그대로 타 들어가는 수준의 고통이 가해지기 때문에 그는 벌써 여러 번 목적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자 독고성의 눈에 살기가 급격히 떠올랐다. "이 금제법이 사라지는 날에는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죽여 버릴, 아악." 그는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감정이 치밀어 오른 탓에 칠종단금술을 잠시 잊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사력을 다해 살심을 잊어버리려 애썼다. 나름대로 인내력이 강하다고 자부했지만 이 고통만은 정말 참을 수 없었다. 조금 뒤 낭패한 몰골로 몸을 일으킨 독고성은 말없이 자신의 묘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자리에는 머리가 처참하게 으깨어진 채 놓여있는 뱀의 시체만이 남아있었다. 조금 뒤 어둠 속에서 극도로 화가 난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정말이지 저놈만 보면 구역질이 나 참을 수가 없습니다. 장문인께서는 어째서 저런 놈을 본사에 기거하게 하는 거지요? 전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쉿. 목소리가 커." "상관하지 마십시오. 비록 미물이지만 아무런 죄도 없는 뱀을 저토록 잔인하게 밟아 죽이다니 과연 마두의 자식놈이로군요. 저런 놈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몇날 며칠을 밤잠을 설쳐야 하는 건지 통 알 수가 없군요?" "장문인의 엄명이니 어떻게 하겠나? 우리로써는 따를 수밖에 없지." "생각 같아서는 그냥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둠 속의 목소리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자네 감히 살계를 어기려 하는 건가? 우린 승려라네. 상대가 비록 계도할 수 없는 악인이라 해도 섣불리 죽여서는 아니 되네." 선배의 질책에 기가 질린 듯 어둠 속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 음성을 끝으로 산사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젠장 또 악몽인가?" 독고성은 투덜거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또 떠올리기도 싫은 과거였지만 과거를 되새기는 꿈은 마치 숙명처럼, 그것도 정기적으로 그를 찾아왔다. 잠에서 깨어난 뒤, 독고성의 기분이 결코 좋을 리가 없었다. 이곳이 중원이었다면 그는 필시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그의 화풀이 상대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상념을 지워버리기 위해 독고성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의혹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그가 원래 있던 장소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내실이었다. 중원에 있는 자신의 처소보다도 휘황찬란한 공간. 그런데 지금 그가 있는 곳은 그곳과는 전혀 다른 장소였다. 침실과는 판이하게 다른 구조. 한 눈에 보아도 중죄인 따위를 가두는 감옥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튼튼한 쇠격자로 된 문을 쳐다보며 독고성은 중얼거렸다. "나에게 이제 흥미를 잃었나보군. 이런 감옥으로 보낸 것을 보니……." 형태를 볼 때 감옥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그가 갇힌 곳은 적어도 백 명 정도의 사람을 수감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은 감옥이었다. 독고성은 우선 주위의 경물을 샅샅이 살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닥에 놓인 한 자루의 장검이었다. 방패 하나도 옆에 놓여있었지만 독고성은 그것을 무시한 채 검을 집어들었다. 손가락으로 날을 퉁기자 다소 둔탁한 음향이 들려왔다. 별달리 질이 좋진 않아 보였지만 두께와 길이 하나는 정말 무지막지했다. 가운데 긴 혈조가 패어 있는 것을 봐서 아마도 찌르기 용의 장검 같았다. "무식할 만큼 두터운 검이군. 그런데 놈들이 이걸 왜 넣어둔 거지?"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검을 지급한다는 것은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때문에 독고성은 자신을 이곳으로 가둔 자의 의도에 대해 머리가 빠져라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철창 저편에서 갑자기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기성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크르르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독고성의 눈에 철창 너머로 네 개의 화등잔만한 불빛이 비쳐졌다. 그것이 짐승의 눈동자라는 사실 정도는 이미 간파하고 있는 상태. 하지만 어둠에 묻혀 도저히 형태를 짐작할 수 없었다. 뒤이어 쇠격자문이 드르륵거리며 올라가자 독고성은 드디어 자신을 가둔 자의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상황을 알아차리자 그는 이를 굳게 악물었다. "나를 시험하려는 건가?" 그가 멍하니 서 있는 동안 격자문은 완전히 열렸고 그 속에서 녹색을 띄는 무언가가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그것들은 가차없이 독고성을 덮쳤다. "으헉." 독고성은 사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23회 안녕하세요. 내용 중에 몇 분이 이해하시지 못하는 점이 있어 부연설명 드립니다. 중원에서의 일은 바로 주인공의 성장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독고성이 주인공이지요. 참고하십시오.^^ *************************************************************************** 녹색 피부를 가진 그 무언가는 놀라울 정도로 몸놀림이 민첩했다. 놀랍게도 놈들은 무기를 들고 있었다. 다시 말해 흔히 보는 맹수가 아니란 말이다. 기이하게 생긴 무기에서는 예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독고성은 순간적으로 무기의 형태를 살폈다. "참마도인가? 청룡도같기도 하군." 한 눈에 보아도 예리한 날을 가진 장병(長兵). 의문의 존재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또다시 공격을 가해왔다. 자루가 달린 장병기, 이곳에서는 글레이브라 불리는 무기가 독고성의 머리털을 서걱 자르고 지나갔다. 간발의 차이로 피하긴 했지만 마음을 놓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또 하나의 글레이브가 그의 목덜미를 노리고 뻗어오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두 놈이로군." 그는 사력을 다해 수중의 장검을 곧추 세웠다. 까깡. 간신히 막아내기는 했지만 충격에 의해 서너 발자국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균형을 잃은 몸을 겨우겨우 가누며 독고성은 가까스로 석벽에 등을 붙일 수 있었다. 일대 다수의 접전에서는 벽을 등지고 싸우는 것이 최선이란 사실을 그는 이미 몸에 익혀놓은 상태였다. 그의 앞에는 어둠에 묻혀 어렴풋이 형체만 드러나는 두 개의 그림자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장검을 기울여 방어자세를 취한 독고성은 소맷자락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이, 이것들은 뭐지? 힘이 정말 대단하군." 어둠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형태. 상대는 작달막하지만 단단한 체구를 가진 괴물들이었다. 사람과 같이 직립보행을 하며, 녹색의 짧은 털이 무성하게 자라있는, 마치 돼지와 머리모양이 흡사한 괴물. 그것들은 바로 오크 전사들이었다. 슈렉하이머에게서 이곳 역사를 들은 터라 독고성은 곧 놈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군. 이것들이 오크란 놈들이었군. 그렇다면 놈들의 의도는 바로 이것이었나? 잘 되었군. 고이 죽어줄 수도 있었지만 악몽을 꾼 데 대한 화풀이를 해야 하니……. " 오래 생각할 여유란 없었다. 인간에 대해 뿌리깊은 증오심을 가지고 있는 듯 오크들은 수중의 무기를 휘둘러 맹공을 가해왔다. 뒤이어 벌어진 서너 차례의 칼부림. 겨우겨우 막아내긴 했지만 독고성은 점점 힘이 달리는 것을 느꼈다. "젠장. 내가 이까짓 미물들에게……." 우선 들고 있는 장검이 그에겐 무척 생소한 무기였다. 무예를 익히기 시작한 이후 그는 죽어라 호조만을 연마해왔기에 검술에는 거의 백지 상태였다. 또한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천자혈마공이 화근이었는지라 초식에는 그다지 조예가 없었으며 심한 상처를 입었던 몸이 아직 회복되지도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오크 두 마리와의 접전이 그리 쉬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중원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였던 자신이 이깟 미물들에게 당한다는 것이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내력을 전혀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의 혈투.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겪은 숱한 실전경험을 토대로 생전 처음 보는 괴물, 오크와의 접전을 수행해 나갔다. 지하 감옥의 상단 부분에는 두 명의 인영이 서서 독고성과 오크의 결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희미한 마법장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 중 한 인영이 돌연 탄식을 했다. "저토록 엉성하게 검을 휘두르는 꼴이라니? 한눈에 보아도 영 아니군. 계획은 실패했어."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검술에 서투른 면이 있지만 몸놀림 하나만은 일류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공격을 회피하는 동작은 정말이지 자로 잰 듯 정교합니다. 제 생각엔 아마도 무기가 손에 맞지 않아 그런 것 같습니다." 세르게이는 베니테스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다소 젊어 보이는 수려한 얼굴. 하지만 베니테스는 벌써 60이 넘은 노마법사였다. 그것도 전장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워 메이지(War mage)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궁정 내부에서 마법시험 따위로 세월을 보내지 않은, 전장에서 전투마법을 갈고 닦은 실전 마법사란 뜻이다. 전투경험이 누구보다도 풍부한 만큼 베니테스는 상대의 상태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을 터, 그 사실을 믿은 세르게이는 다시금 감옥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렇다면 저자는 검이 아닌 다른 무기를 썼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곳에서 저자를 처음 봤을 때 그는 건틀릿에 칼날이 달린 듯한 기형 병기를 사용했습니다. 그것 두 자루만으로 검을 든 마스터 급 검사 수십 명과 한 치도 밀림이 없는 접전을 펼쳤을 정도니까요." "스파이크 건틀릿을 말하는 것인가? 놀랍군. 하지만 상태를 볼 때 놈이 마나를 상실했다는 것은 아마도 사실 같군. 오크의 공격을 제대로 막지 못하는 것을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저자는 건틀릿을 완전히 감쌀 정도의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했습니다. 비록 믿지 않으실 지 모르지만." 그들이 지켜보고 있는 동안 감옥 내부의 접전은 점점 막바지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소 밀리는 감이 없잖아 있던 독고성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완전히 승기를 잡고 오크 두 마리를 압도적으로 몰아치고 있었다. 비록 전신을 여러 번 베여 피를 줄줄 흘리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감옥 바닥은 쌍방이 흘린 피로 온통 얼룩이 져 있는 상태. 독고성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마치 악귀처럼 날뛰고 있었다. 키리릭. 기세에 질린 듯 오크 한 마리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독고성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물러나던 오크가 오지 말라는 듯 글레이브를 내밀었지만 독고성은 상관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글레이브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독고성의 허벅지를 파고 들어갔다. 푸슉. 허벅지에 글레이브가 박힌 그대로 독고성은 오크의 가슴팍에다 검을 찔러 넣었다.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오크의 건장한 체구가 부르르 떨었다. 독고성의 전신이 잠시 멈칫 하는가 했더니 망설이지 않고 두 번째 목표물을 향해 달려갔다. 남은 오크는 이미 독고성의 투기(鬪氣)에 전의를 상실한 채 뒤로 끝없이 물러나고 있었다. 용맹과 투지의 상징인 오크 전사가 도리어 겁을 먹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독고성은 추호도 망설임 없이 오크의 전신을 난자해 들어갔다. 이미 오크를 죽일 때 칠종단금술이 발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취에에엑." 단말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선혈이 이리저리 치솟았다. 하지만 독고성은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그저 장검을 들어 오크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내려찍을 뿐이었다. 이렇게 무림의 고수였던 자와 몬스터 간의 대결은 승자와 패자가 갈리고 있었다. "그래도 제법 싸우는 법을 잘 아는 놈이군. 싸움의 과정을 모두 지켜 본 세르게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 이방인은 마치 맹수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었다. 피를 보면 참을 수 없는 뱀파이어처럼 말이다. 그의 귀에 베니테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떻게 하시겠습니다. 계속해서 몬스터로 하여금 시험을 하시겠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당 백 이상의 실력을 가진 소드 마스터다. 비록 투지가 가상하다 하나 만신창이가 되어 오크 두 마리를 겨우 때려잡는 놈 따윈 필요 없어. 저 정도는 어느 정도의 용병 정도면 충분히 해 낼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처치해 버릴까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해 본 세르게이는 서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도 아니야. 일단 시험을 더 해보는 것이 좋겠지? 놈을 치료해 준 뒤 다음에는 트롤과 붙여보도록 하라. 재생력이 뛰어난 트롤이라면 경험 많은 용병들도 고개를 내젓는 상대일 터, 아마도 좋은 대결이 될 거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놈이 사용하던 병기와 비슷한 것을 지급해 주는 것이 낫겠지? 일전에 자네가 보았다는 무기 말일세. 궁금하군. 스파이크 건틀릿을 놈이 과연 어떻게 사용할지?" "알겠습니다." 선혈과 떨어져 나온 살점 부스러기가 낭자하게 흩어진 곳에서 독고성은 멍하니 서 있었다. 시선은 자신의 손에 죽은 오크의 시체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한없이 흉포해 보이던 오크 두 마리는 이제 잘 다져진 고깃덩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대가로 독고성은 전신에 무수한 상처를 입어야 했다. 무기가 손에 익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심후한 내력에 힘입어 패도 내가기공에 주력하던 버릇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천자혈마공이 건재하던 시절, 강기를 끌어올린 독고성의 호조에는 만병(萬兵)이 무력(無力)했다. 신병이기라 할 지라도 부딪치면 여지없이 부러져나갈 정도였다. 하지만 그 시절은 이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이제 그는 내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몸. 오크의 글레이브를 막아내는데 그는 사력을 다 해서 검을 움켜쥐어야 했다. 직접 겪어본 결과 공격이 다소 생소하긴 했으나 오크는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전투력이 떨어지는 편이다. 물론 무림 고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런 오크 두 마리에 이처럼 고전한다는 일은 그의 경력에 비추어 본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독고성은 초점 잃은 눈동자로 늘어진 오크의 잔해를 쳐다보았다. 오크를 죽일 때는 다행히 칠종단금술이 발동되진 않았지만 그를 고뇌하게 하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내가 왜 이깟 미물들과 피 터지게 싸워야 하지?' 이곳이 아닌 중원에서 그는 철저히 계산된 삶을 살아야 했다.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의도된 생각대로. 그런데 그가 살던 곳과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 이 트루베니아에서도 또다시 다른 사람의 의도대로 움직여야 하는 일이 생기다니……. 자신의 기구하기 그지없는 운명에 대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독고성이었다. "괜한 짓을 했는가?" 불연 듯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차라리 오크들에게 순순히 죽음을 당했다면, 그랬다면 이런 상념이나 고뇌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을 텐데. 멍하니 서 있는 그에게 격자 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독고성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휴우. 대단하군." "자근자근 잘도 다져 놓았어." 등뒤에서 들려오는 생소한 목소리. 물론 병사들이 지껄이는 트루베니아 공용어가 독고성의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그저 감각으로 다른 사람들이 감옥 속으로 들어왔으려니 짐작할 뿐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일단의 병사들이 감옥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금속제 투구에 쇠사슬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신체의 주요 부분만을 가리는 약식 갑주인 것을 봐서 신분이 그리 높진 않은 모양이었다. 독고성을 극도로 꺼리는 듯 그들은 검과 방패를 들어 경계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독고성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들이 애초부터 없는 존재인양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병사들은 용기를 내어 감옥 내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네 명의 병사가 오크의 시체를 수습했고 그중 신분이 제일 높아 보이는 병사가 독고성에게 다가와서 검을 들이댔다. "나를 따라 나와라." 당연한 말로 독고성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참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했지?" 이마를 툭툭 친 병사는 독고성의 앞으로 가서 섰다. 순간 병사의 얼굴이 형편없이 찡그러졌다. "정말 못 생긴 얼굴이군. 오우거도 이 놈보다는 낫겠어." 그렇지 않아도 중원에서 역시 추면(醜面)으로 무수히 손가락질 당한 독고성이었다. 얼굴 형태가 판이하게 틀린 트루베니아 인들이 보이는 반응 역시 동일했다. 아니 독고성의 얼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우선 그들은 치켜 올라간 중원인 특유의 눈매를 본 적이 없었다. 특히 독고성의 눈매는 정도가 더 심했다. 가늘게 찢어진 눈, 거기에다 등이 휜 꼽추의 모습이니 병사가 느낀 감정을 익히 짐작할 만 했다. 그런 연유로 병사의 얼굴에는 잠시나마 경멸의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24회 자고로 인종이 틀려도 감정의 표현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동질감이 있는 법이다. 독고성은 병사의 얼굴에서 자신에겐 무척 친숙한 감정, 바로 자신을 경멸하는 표정을 용케 간파할 수 있었다. 그의 눈에서 점차 무언가 감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네놈도 날 멸시하느냐?" 자신의 운명에 대해 심각히 고뇌하는 상황에서 자신을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보게 되자 독고성은 급기야 이성을 잃어버렸다. 이미 그의 감정은 건드리면 터질 정도로 고조되어 있던 상황. 병사의 표정이 그 불씨에 불을 당겼으니……. 독고성은 마치 야수처럼 몸을 날렸다. 목표는 경멸의 표정을 지은 바로 그 병사였다. "헉." 병사는 다급하게 방어자세를 취하려 했다. 하지만 상대의 동작은 그의 예상을 훨씬 벗어나고 있었다. 비록 내력은 잃었을지언정 전장에서 갈고 닦은 몸놀림만은 일반 병사들이 도저히 당해낼 수 없을 정도. 엉겁결에 내뻗은 검을 슬쩍 피해낸 독고성은 물 흐르듯 병사의 뒤로 돌아가서 병사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손을 치켜올리자 투구 아래 가려진 목이 훤히 드러났고 독고성은 검을 목덜미에 가져다 대었다. "뭐, 뭐야?" 오크의 시체를 수습하던 병사들이 경악해서 몰려들었지만 이미 그들의 선임병은 완벽하게 포로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이놈. 놓지 못하겠나?" 졸지에 포로가 된 병사가 공포에 질려 고함을 내질렀지만 독고성은 도리어 싸늘한 미소를 떠올렸다. 애당초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거니와 설사 알아듣더라도 상관할 바는 없었다. "네놈이 뭐라 하든지 상관없다. 그저 운이 나쁘려니 생각해라. 나와 함께 황천길로 같이 가자." 독고성은 서슴없이 목에 댄 검을 그어버렸다. 아니 그것은 단지 바램일 뿐이었다. "커어억." 손에 힘을 불어넣으려는 순간 또다시 극도의 통증이 뇌리에서 밀려왔다. 칠종단금술로 인한 통증이었다. 살인하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발동되는, 한 치의 틀림도 없는 가증스러운 금제법. 마치 망치로 정수리를 맞은 듯한 충격과 함께 독고성의 뇌리는 하얗게 비어버렸다. 쨍그렁. 손에 힘이 빠지며 검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고 독고성은 병사의 목을 놓은 채 바닥에 쓰러져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목이 달아날 운명에 처했던 병사는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작금의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듯 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잘릴 뻔한 목을 어루만졌다. 정신을 차리자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자신을 죽일 뻔한 자에 대한 분노였다. "이런 개자식." 그는 들고 있던 방패 모서리로 바닥을 뒹굴던 독고성의 정수리를 내려찍었다. 퍽. 단 한 방에 독고성은 뇌리를 파고드는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즉 기절해버린 것이다. 화가 가시지 않았는지 병사는 다시 한 번 방패를 들어올린 다음 가차없이 내려 찍으려했다. 그러자 주변의 병사들이 달려들어 그를 만류했다. "참으십시오. 대장님. 상부에서 이자를 다른 감옥으로 옮겨 치료하란 지시가 있었습니다." "놈을 죽인다면 필시 처벌이 있을 것입니다." 처벌이란 말에 겨우 이성을 되찾은 병사는 성난 눈빛으로 늘어진 독고성을 쏘아보았다. 규율이 엄격한 편이었는지 병사는 그것으로 화풀이를 끝냈다. "하마터면 목이 날아갈 뻔했군. 천만 다행이야. 그런데 놈이 왜 날 끝내지 않았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가 이유를 알 리가 만무했다. 결국 그는 받은 지시대로 병사들에게 독고성을 옮기라는 지시를 내렸다. 휘하 병사들이 우루루 달려들어 독고성의 왜소한 몸을 들어올렸다. 그 와중에 독고성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게되자 그는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보아도 정말 못생긴 놈이군. 혹시 하프 오우거인가? 아니야, 그러면 체격이라도 당당할 텐데 말이야. 이놈은 오크보다 조금 클 정도니?." 잠시 고민하던 병사는 곧 상념을 지우고 부하들을 따라 감옥을 나섰다. 드넓은 감옥 안에는 오크와 독고성이 흘린 피만 남아 흥건히 고여 있었다. "그래. 놈이 근위병을 죽이려했다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병사들이 목격한 바로는 마치 극도의 고통을 겪고 있는 듯한 모습이라 하였습니다." "그래?" 세르게이는 자신의 실험물이 된 이방인에게 다소의 호기심을 가졌다. 그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면모가 많은 자였다. 우선 엄청난 경지의 소드마스터(베니테스의 증언으로 그는 이방인이 소드마스터였다는 사실을 확연히 믿고 있다)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변했다는 사실이 그에겐 의문 그 자체였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지금껏 트루베니아에선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의 은총으로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된 소드 마스터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트루베니아에서는 말이다. "정말 기이하군. 놀라워. 한 번 연구해 볼 만한 일이로군." "놈의 처리를 어떻게 할까요?" 베니테스의 말에 세르게이는 고개를 돌렸다. "일단 치료를 한 뒤 단단히 가두어두도록 하라. 상태가 호전되면 일전에 말한 것처럼 조처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어둠에 찬 감옥 속. 달빛이 어슴푸레 비치는 곳에 한 인영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사방 3평방미터 남짓한 좁은 감옥이었지만 달빛을 정면으로 맞고있어서 얼굴형태를 똑똑히 분간할 수 있었다. 갇혀 있는 자는 바로 독고성이었다. 마치 삶의 의욕을 잃은 듯 무릎 사이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고 있는 모습이 무척 처량해 보였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 오크와의 격투에서 입은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어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퉁퉁 부어있는 몸을 볼 때 내상은 그대로 남아 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키던 독고성은 한참 만에야 고개를 들었다. 창살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달빛이 무척이나 쓸쓸하게 느껴졌다. 조금 뒤 입술을 비집고 콱 잠긴 음성이 새어나왔다. "그래도 달빛은 중원이나 여기나 변함이 없군." 어차피 그에게 고향에 대한 정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억하기 싫은, 좋지 못한 기억이 더 많았던 곳이 중원이었다. 차라리 멀리 떨어진,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는 곳에 위치한 이곳 트루베니아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독고성. 불연 듯 자신을 이렇게 만든 원흉인 사준환의 얼굴이 뇌리에 떠올랐다. 정말 철저히도 자신을 이용해먹은 뒤, 이용가치가 떨어지자 가차없이 내버린 가증스런 위선자.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독고성의 얼굴엔 분노보다는 도리어 자조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크크큭. 이 쓸모 없는 몸으론 놈에게 다가가지도 못할 터." 이곳이 트루베니아란 사실이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복수를 할 수 없는 몸으로 한 하늘을 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에겐 죽음보다도 못한 수모였다. 다시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은 독고성은 자신의 삶에 가장 중요하게 관여한 존재, 사준환과의 첫 만남을 상기하기 시작했다. "누, 누구신지?" 얼굴 가득히 당혹감을 담은 청년이 떠듬거리며 내뱉었다. 꽤나 흉물스럽게 생긴 추면이라서 나이를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피부를 봐서 대충 20대 후반 정도 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등이 옷가지를 뭉쳐 넣은 듯 솟아있는 것을 봐서 청년은 꼽추였다. 남루한 옷차림에 전신에 먼지가 잔뜩 묻어있는 모습에서 아마도 고된 일을 마치고 온 듯했다. 소림사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마치고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온 청년. 그런데 그의 앞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난데없이 십여 명의 인영들이 나타나 청년 앞에 부복했던 것이다. 나타난 모습을 볼 때 그들은 다름 아닌 무림인이었다. 그것도 능히 고수라 칭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들인 것이다. 그런 자들이 소림사에서도 가장 비천한 계급에 속하는 자신에게, 그것도 절대 복종을 뜻하는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으니 청년이 얼떨떨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선 청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그들의 가슴팍에 아로새겨진 아수라의 문양이었다. 물론 무림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은 그들이 바로 배교의 문도들이란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본능적으로 경계심이 치밀어 오른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도, 도대체 왜 이러는 거요?" 그러자 부복한 자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극도의 경의를 표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마치 가마솥 바닥처럼 시커먼 얼굴을 가진 흑면중년인이었다. "죽여주십시오. 소교주님을 지금에서야 찾아뵙게 된 것을 말입니다." "소교주?"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청년의 추악한 얼굴은 온통 당혹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혹시 사, 사람을 잘못 본 것은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전대 교주의 아드님이신 독고성 공자를 찾아온 것입니다." "독고성이라면 바로 난데?" 여전히 얼떨떨해 하는 독고성을 힐끗 쳐다보며 검은 얼굴의 중년인은 공손한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해합니다. 필시 소림사의 빌어먹을 중놈들은 공자님의 출생에 대해 아무것도 밝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출생의 비밀?" 흑면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습니다. 공자님은 바로 사도의 하늘이라 자부하는 배교의 제 18대 교주 사령천존 독고 무기의 외아들이십니다." 청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배, 배교? 그럼 내 아버지가?" "맞습니다. 공자님은 그런 지고한 신분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분의 충직한 수하였던 흑면염라 도위청이라 합니다. " 다시 한 번 부복한 뒤 독고성의 전신을 재빨리 흝어본 도위청이 갑자기 두 눈에 살광을 떠올렸다. 한 눈에 보아도 독고성의 현재 처지를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가증스러운 소림사 중놈들……. 감히 본교의 공자님을 이따위로 대하다니?" 하지만 독고성은 아직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듯 했다. 그는 의혹에 찬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이름을 도위청이라 밝힌 중년인에게 반문했다. "미안하지만 자세한 제반 사정을 나에게 설명해 주시겠소." "당연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이미 설명드린 대로 공자님의 영친, 아니 이젠 선친이라 불러야 겠군요. 공자님의 선친은 본교의 당당한 18대 교주이셨던 독고 무기 교주님이십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사도의 대 효웅이시지요. 당시 그 분은 얼마 전에 태어난 외아들을 데리고 강호의 정세를 파악중이셨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분은 그만 소림사 중놈들의 계략에 빠져서 동행한 수하들과 함께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설명을 해 나가는 중년인의 어조에는 비분강개함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독고성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분의 외아들이 바로 공자님이십니다. 힘이 모자란 관계로 저희들은 이제야 공자님을 구하러 온 것입니다." 독고성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난데없이 밝혀진 출생의 비밀을 이해하는데 다소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나이는 현재 28세. 어린 시절을 소림사에서 줄곧 보낸 독고성은 이제 완전히 소림사의 허드렛 일꾼이 되어 있었다. 또한 그는 이미 자신의 처지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내가 배교의 소교주라고?' 상념에 빠져 있는 독고성의 뇌리로 지금까지 그에게 가해진 각종 멸시와 경멸의 순간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25회 간악한 사파 마두의 아들. 이것이 그가 겪어온 각종 고초의 주된 이유였다. 물론 꺾이지 않는 강직한 성격과 추악한 생김새 탓도 있었지만 이것이 아니었다면 그가 그 오랜 시간 동안의 냉대를 겪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 모든 사실을 떠올리자 독고성의 눈빛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멸시를 가한 모든 이들에 대한 분노가 서서히 자라났다. 결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그 경험은 강렬했다. 상념을 모두 마친 독고성은 착 가라앉은 음성을 발했다. "그러니까? 내가 배교의 소교주란 사실이 틀림이 없소?" 도위청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냉큼 대답했다. "한치의 틀림도 없는 사실입니다. 이제 공자님은 본교로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소림사의 한낱 일꾼이 아닌, 사파 절대자의 후계자로 말입니다." 그 말에 독고성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알게 되자 그동안 겪어왔던 멸시의 나날들이 너무도 억울하게 느껴졌던 독고성이었다. 돌연 울음 섞인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너무, 너무 늦었군요. 당신들이 조금만 빨리 왔었더라면……." 반응을 익히 짐작하고 있었던지 도위청은 그대로 고개를 푹 꺾었다. "용서하십시오. 당시 저희들은 도저히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전임 교주님의 사후, 그 틈을 타서 일신의 영달을 노리는 여러 무리들이 본교를 장악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만약 사준환 총사님이 아니셨다면 이미 본교는 자중지란으로 인해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런 터라 경황도 없었을 뿐더러 만약 공자님을 모셔온다 해도 신변의 안전을 도저히 장담할 수 없었음을 이해하십시오. 저희들은 불과 얼마 전에야 모든 불안요소를 척결하고 교중을 재정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소공자님을 모시러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도위청의 설명을 모두 들은 독고성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금 배교는 사준환이라는 총사가 통솔하고 있다는 뜻이오?" "바로 그렇습니다. 그 분은 오로지 독고가에 대한 충성심만이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해 공자님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 두셨다는 뜻이지요. 이제 공자님은 본교로 돌아가셔서 절세의 무공을 익히시고 멀지 않은 장래에는 반드시 본교 교주의 위에 오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도위청의 말에 독고성은 맥이 탁 풀렸다. 소림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에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때문에 독고성은 도위청의 눈가에 서린 모호한 표정을 간파할 수 없었다. 독고성은 한동안 하늘을 올려보았다. 온통 검은 빛 일색인 하늘을 쳐다보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나왔다. "바램이 이루어졌어." 어떻게 해서든 무공을 익혀 자신을 멸시했던 모든 놈들에게 쓴맛을 보여주겠다는 어릴 때의 다짐이 소록소록 떠올랐다. 추악한 생김새 때문에 이곳에서 얼마나 멸시를 당했던가. 심지어 그는 함께 일하는 허드렛 일꾼들에게조차도 경원시되는 존재였다. 함께 밥을 먹으려는 자가 없을 정도로. 그런 상태에서 난생 처음 자신에게 극진히 대하는 자들을, 그것도 아버지의 수하라는 자들을 만나게 되자 그는 이성을 반쯤 잃고 있었다. 그만큼이나 당면 현실이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때 독고성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문득 호법승의 존재를 떠올린 그는 다급하게 도위청을 찾았다. "이 근처에는 나를 감시하는 소림승들이 있소. 그들이 알게 되면 큰일인데?" 도위청은 걱정 말라는 듯 미소를 띠며 손짓을 했다. 그러자 부복한 인영 몇이 몸을 일으키더니 무언가를 앞으로 내밀었다. 독고성의 눈에 놀라움이 가득 찼다. 그것들은 바로 자신을 감시하던 호법승들의 잘려진 수급이었다. "이, 이들은?" "이 놈들은 저희들이 처리했습니다. 이미 소교주님께 여러 번 죄를 범한 놈들이니 살려놓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서 제가 처리했습니다. 혹시 제 판단이 옳지 않았다면 거기에 합당한 벌을 내려주십시오." "아, 아니오." 독고성은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그를 감시하던 호법승들은 소림사의 무예승들 중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배교 교주의 유일한 아들인 독고성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배치된 고수들. 그런 호법승들을 이처럼 손쉽게 처리하다니……. 물론 그들 역시 자신을 멸시해 온 것은 사실이었고 따라서 독고성은 도리어 속시원하다는 감정을 느꼈다. 더욱이 소림 호법승들조차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고수들이 왔다는 생각에 새삼스럽게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지배했다는 배교란 조직에 극도의 호감이 치밀어 오른 독고성이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도위청에게 다가갔다. "그럼 지체 없이 배교로 떠나도록 합시다. 챙길 짐이란 아무것도 없소. 이대로 떠나면 될 것이오." 하지만 도위청은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침통한 표정을 얼굴 가득히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오나 저희는 이대로 떠날 수 없습니다." 독고성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왜? 무, 무슨 이유로?" "비록 공자님을 감시하는 자들을 처치했다고는 하나 이대로 숭산을 벗어나기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저희들도 감당할 수 없는 절대고수가 이 근처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 그자가 누구요?" 도위청은 독고성의 눈을 직시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바로 공자님의 선친을 무참히 살해한 자입니다. 혹시 소림성승 혜정이라는 이름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그 말에 독고성은 아연해했다. 물론 그는 소림성승에 대해 그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다. 소림사의 명실상부한 천덕꾸러기였던 독고성, 그런 그에게 유일하게 관심을 보이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소림성승 혜정이었다. 물론 직접 칠종단금술을 시술했다는 인연을 떠나서 그는 소림사에서 독고성의 출중한 자질을 알아본 유일무이한 인물이었다. 무공방면에 대한 독고성의 자질은 정말 뛰어나다 말할 수 있었다. 그 자질을 제일 처음 알아차린 소림성승은 암암리에 하늘이 꺼질 듯한 탄식을 터뜨린 바 있었다. "허, 정말 대단한 자질이군. 이 아이는 소림 제일의 기재라는 명아에게도(영호명을 말한다) 전혀 뒤지지 않는 오성을 가지고 있어. 이런 아이가 사파라니 정말 애석하구나." 물론 자질이 뛰어나다고 사파 거두의 아들에게 무공을 전수할 순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소림성승은 애초의 목적대로 독고성에게 불법을 전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혜정은 독고성에게 하루에 한 번 자신을 찾아와 불법을 전수받도록 조처했다. 그런 연유로 독고성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소림성승을 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불법을 전수받는 일은 애당초 그른 일이었다. 불법이란 원래 자비를 최우선 덕목으로 삼는 법. 무수한 멸시 속에서 사람들에게 뼈에 사무친 증오심을 갖게 된 독고성에게 불법의 원리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소림성승은 포기하지 않고 매일매일 시간을 내어 독고성을 지도했고 그것은 소림사의 허드렛 일꾼이 된 지금까지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때문에 독고성이 받은 충격은 상상을 불허했다. "그, 그가 아버지를 죽였다고요?" "그렇습니다. 비록 놈들이 비밀에 붙였지만 그 일은 이미 무림 각파에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 말에 독고성은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다. 왜냐하면 소림성승은 이 소림사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인간답게 대해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멸시를 받은 탓에 독고성의 성정은 무척 비뚤어져 있었다. 대하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자신에게 호감을 가져주는 자는 없었다. 도리어 멸시하고 침을 뱉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마두의 아들, 그리고 추악한 생김새가 바로 그 주된 이유였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예외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소림성승이었다. 그는 유독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고 시중일관 변함 없는 태도로 독고성을 대했다. 한없이 자애로운 모습으로 말이다. 이것이 독고성이 갈등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나를 낳아주긴 했지만 독고무기란 사람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에 불과하다. 그리고 비록 아버지의 원수라고는 하나 그는 이곳 소림사에서 유일하게 나를 인간답게 대우해 준 사람이다.' 상념에 빠진 독고성의 귀에 도위청의 음성이 계속 들려왔다. "만약 그가 앞을 막는다면 공자님을 비롯한 우리들은 결코 숭산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그를 감당할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자님과 함께 본교로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소림성승을 먼저 처리해야 합니다." 독고성의 얼굴에 놀랍다는 반응이 번져갔다. "그, 그를 죽이겠다는 뜻이오." 독고성의 반문에 도위청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수그렸다. 독고성이 보기에 그것은 자신을 구해낼 능력이 없는 데 대한 자책이라 여겨졌다. "저희는 도저히 소림성승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만큼 소림성승의 무공은 고강합니다. 그리고 우리 중에서 소림성승의 의심을 사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공자님 밖엔 없습니다. 어려운 부탁을 드릴 수밖에 없는 저희들을 벌하십시오." 그 말에서 독고성은 배교 측이 자신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조사했다는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결국 나더러 소림성승을 처리하란 말이로군요 하지만 무공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도위청은 고개를 수그린 채 소매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곱게 접어놓은 종이 봉지하나였다. "어떻게 해서든 이것을 소림성승에게 복용시키도록 하십시다. 그 길만이 저희들이 공자님을 모시고 무사히 숭산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종이봉지를 받아든 독고성의 얼굴에 심한 고뇌가 떠올랐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하는 것은 그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 대상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유일하게 잘 대해준 소림성승이었으니……. 독고성에겐 원래 어린 시절부터 정립된 하나의 철칙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철저히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철칙이다. 모욕이나 멸시를 당하면 철저히 같은 방법으로 고스란히 말이다. 비록 힘이 없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멸시받은 내용과 사람은 이미 독고성의 뇌리에 단단히 각인되어 있었다. 같은 맥락으로 독고성은 한 번 입은 은혜 역시 결코 잊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은 거의 전무하다 할 수 있었지만 그 중에서 유일한 예외가 바로 소림성승이었다. 그는 지금껏 그를 인간적으로 대해준 유일한 사람이었고 또한 곤욕을 치르는 그를 여러 번 구해준 적이 있었다. 적어도 소림성승 앞에서는 그를 괴롭히는 이들이 없었기에 독고성이 그를 생각하는 마음은 타인들과는 각별히 달랐다. 적어도 독고성에게 잘 대해준 사람에 대한 배신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당면한 현실이 지금 성승을 배신하라고 요구하고 있으니……. '할 수 없는 일이다.' 독고성의 얼굴에 마침내 무언가를 결심했다는 빛이 떠올랐다. 그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종이봉지를 도위청에게 도로 내밀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를 죽일 수 없군요. 비록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고는 하나 그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날 인간적으로 대한 사람입니다. 도저히 그를 배신할 순 없습니다." 독고성의 반응에 황당해진 것은 오히려 도위청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떠듬거리며 되물었다. "그, 그는 공자님의 아버님을 죽인 원수입니다. 어찌해서 그를……." "비록 소림사에서 평생을 보낸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얼굴도 알지 못하는 아버지. 하지만 나는 소림성승이 나에게 베푼 은혜를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독고성은 한없이 당혹해하는 도위청을 두고 몸을 빙글 돌렸다. 다 쓰러져 가는 자신의 초막으로 말이다. 비록 소림사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도저히 소림성승을 배신할 수 없었던 독고성이었다. '이럴 수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독고성을 쳐다보던 도위청은 돌연 이를 질끈 악물었다. 밀명을 받고 사지에 침투했건만 뜻밖의 일로 임무 수행에 지장이 생긴 것이다. 구하러 온 대상이 이런 상황에서 얼토당토않은 고집을 부리다니……. 하지만 이 임무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수행해야만 했다. 비록 대가가 죽음이라 해도 말이다. 순간적으로 묘안이 떠오른 도위청은 서둘러 독고성을 불렀다. "저 공자님. 제 뜻을 곡해하신 듯 한데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독고성의 걸음이 멈춰졌다. "무슨 일이오?" 도위청은 정색을 하고 독고성에게로 다가갔다. "아마도 오해가 있는 듯 싶습니다. 이 약을 독으로 여기신 듯 싶은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독이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사람이 복용한다고 해도 결코 죽지 않습니다." "………." "이 약의 정체는 강력한 수면제입니다. 복용한다면 적어도 사흘은 지나야 깨어날 정도로 독하지만 말입니다." "그, 그렇다면." 독고성의 눈이 모종의 기대로 번들거렸다. 은혜를 배신하지 않고 소림사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마침내 생기려 하는 것이다. 그의 마음을 짐작한 듯 도위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공자님께서 성공하신다면 소림성승은 십중팔구 깊은 잠에 빠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배교에 거의 도착한 후, 그러니까 정확히 사흘 후면 무사히 깨어날 것입니다." "그, 그 말이 정말이오?" "한 치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속하의 명예를 걸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도위청의 대답에 독고성의 얼굴엔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기고 체념했건만 드디어 지긋지긋한 소림사에서 빠져나갈 길이 생긴 것이다. 그는 지체 없이 종이봉투를 받아들었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26회 비록 성승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 독고성이었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독고성은 종이봉투를 활짝 펼쳤다. 거기에는 검은 색 환약이 여러 알 놓여 있었다. "이것이 수면제란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설사 황소라고 해도 사흘 밤 사흘 낮을 곯아떨어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위력이지요." 미심쩍은 눈빛으로 봉투 속을 들여다보던 독고성이 돌연 환약 하나를 꺼내어 입안에 집어넣었다. 상대가 한 말의 진위를 알아보려는 심사에서였다. 깜짝 놀라긴 했으나 도위청은 독고성을 전혀 제지하려 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미소를 띤 채 말을 걸어왔다. "소교주님, 약을 드시는 것은 상관없사오나 한 시가 급하옵니다. 맛이 궁금하시거나 의심스러우시다면 소림성승과 함께 복용하셔도 무방합니다. 그렇다면 주무시는 동안 저희들은 공자님을 모시고 숭산을 빠져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태도로 인해 독고성은 겨우 약에 대한 의심을 풀 수 있었다. 만약 독이었다면 상대는 필시 자신을 제지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이 배교의 틀림없는 소교주라는 가정 하에 말이다. 독고성은 환약을 뱉어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환약을 입안에 넣기만 했을 뿐 삼키진 않았던 독고성이었다. "분량은 얼마나 사용하면 되오?" "환약 하나 씩만 사용하십시오. 물에 잘 녹기 때문에 차에 타는 것이 의심을 사지 않을 것입니다." "알겠소. 내 지금 즉시 다녀오리다. 그대들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하시오." "어김없이 봉행하겠습니다." 새 삶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독고성은 지체 없이 그곳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도위청이 번뜩이는 눈빛으로 자신의 뒤를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눈치채지 못했다. "이 야밤에 왠 일이냐?" "그냥 성승이 보고싶어 왔습죠. 흐흐흐." 괴소를 흘리는 독고성을 보며 소림성승 혜정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비록 마두의 자식이지만 그동안 정이 들대로 들었기 때문에 독고성을 대하는 성승의 태도는 따사롭기 이를 데 없었다. 보기만 해도 눈살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로 독고성의 외모가 추악해도 말이다. "이만 숙소에 돌아가 자도록 해라. 밤이 무척 깊었느니라." "원래 제가 밤잠이 없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오랜만에 성승과 차나 한잔 먹을까 해서……" "원 녀석도……. 그런데 네가 웬 일이냐? 평소에 멀리하던 차를 다 찾고……." 소림성승 혜정은 한 눈에 보아도 자애로운 풍모가 가득한 노승이었다. 비록 독고성에게 시술한 칠종단금술로 인해 상당량의 내력을 잃었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그는 소림사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장장 일백 이십 년의 세월을 살아온 만큼 소림성승은 무공 방면뿐만 아니라 수행 역시 드높은 고승이었다. 들고 온 소반을 바닥에 내려놓는 독고성을 보며 소림성승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야밤에 차를 권하는 것을 보니 속에다 독이라도 넣은 모양이구나?" 그 말에 독고성은 히쭉 웃었다. "그럼요. 무지 강도가 센 독을 왕창 넣었지요. 흐흐흐." 독고성이 내려놓은 소반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어떤 놈으로 드실래요?" "글세? 독이 어느 찻잔에 들었는지 도무지 모르겠는걸?"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림성승은 빙긋이 웃으며 찻잔 하나를 집어들었다. 추호도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러자 독고성은 남은 찻잔을 냉큼 들어올렸다. "그럼 독이 들어있나 소생이 시험을 한 번 해 볼까요?" 말을 마친 독고성은 찻잔에 담겨있는 차를 단숨에 들이켜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소림성승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녀석을 봤나? 차란 자고로 향을 음미하며 조금씩 마시는 법이거늘……." 꾸지람을 하긴 했지만 정감이 가득한 눈빛은 그대로였다. 독고성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제가 성질이 더럽게 급한 편이잖아요." "그럼 네가 직접 타왔다는 차를 한 번 마셔볼까?" 히쭉 웃는 독고성을 보며 소림성승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사실 그는 독고성의 행동이 자신의 의심을 지우기 위해서라는 것을 약간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림성승은 거기에 앞서 독고성에 대해 추호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 이미 그는 독고성의 성정에 대해 깊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파악하기로 독고성은 극히 외골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원한은 결코 잊지 못하지만 잘해준 사람에겐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정도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소림성승도 깊이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 녀석은 어떤 일이 있어도 노납에게 독을 먹일 성품은 아니야.' 생각을 마친 소림성승은 천천히 차를 들이켰다. 차 한 잔을 완전히 비운 다음 성승은 소맷자락으로 입을 닦으며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차 맛이 괜찮구나. 실력이 대단한걸?" "뭐, 별 말씀을…….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도록 합지요." "그러려무나." 냉큼 일어나서 몸을 돌리는 독고성을 보며 소림성승은 불연 듯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불쌍한 녀석. 독고무기의 아들로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생김새만이라도 정상이었다면 한 명의 훌륭한 불자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독고성이 나가자 소림성승은 잡념을 떨쳐버리고 좌선을 시작했다. 일백 년 이상을 꾸준하게 해 오던 좌선이라 성승은 곧 무아지경에 빠져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좌선을 예기치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가 있었으니……. 묘옥 밖에서 미약한 소리가 들려오는 통에 소림성승은 무아지경에서 깨어났다. 심후한 내공을 가진 소림성승은 대번에 소리의 정체가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란 것을 간파했다. "이곳을 나간 이는 성아 뿐인데? 응? 이 기척은?" 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소리성승의 안색이 다소 변했다. 그는 서둘러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삐걱.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소림성승의 눈에 우선 문가 부분에 쓰러진 독고성의 왜소한 몸이 들어왔다. 그를 포위한 정체불명의 인영 10여 명과 함께……. 소림성승은 우선 쓰러진 독고성의 상태를 살폈다. 그가 단순히 수혈을 제압 당해 잠에 빠졌다는 사실을 간파한 소림성승은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배교의 문도 분들이 본사엔 웬일이시오." 독고성의 혈도를 제압한 자들은 다름 아닌 도위청과 함께 온 배교의 고수들이었다. 가슴에 새겨진 아수라 문양은 무림인이라면 능히 정체를 간파할 수 있었다. 소림성승을 보자 그들은 부산하게 방어자세를 취했다. 그들 중 검은 얼굴의 중년인, 도위청이 앞으로 쓱 나섰다. "사람을 찾으러 왔소. 우리의 소공자 말이오." 소림성승의 얼굴엔 당혹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노납으로썬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구려. 인수를 거절할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본사를 무단 침투해 사람을 구해가겠다니……." 도위청은 단호한 어조로 말문을 딱 잘라버렸다. "그 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오. 이미 나는 소교주를 구해오란 총사의 밀명을 받았소이다." "아미타불." 소림성승은 거듭 불호를 외웠다. 솔직히 사준환의 의도가 그리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이미 그는 배교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상태. 그런 상황에서 독고성을 데려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로써는 상황을 그냥 좌시할 순 없는 상황이었다. 비록 독고성에 대해 어느 정도 정이 들었다곤 하지만 배교로만은 결코 돌려보낼 수 없었다. 마음을 정한 소림성승은 딱 잘라 말했다. "노납은 용납할 수 없소. 시주들은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무래도 좋겠소." 소림성승의 반응을 익히 짐작한 듯 배교 무사들은 서둘러 검진을 펼치기 시작했다. 자신의 병기를 꺼내든 도위청은 싸늘한 미소를 보냈다. "보내주지 않겠다면 싸워서 빼앗아 가는 수밖에……." 듣고 있던 소림성승은 기가 찼다. 비록 흑면염라 도위청이 만만치 않은 무공을 보유한 배교의 수석호법이라 할 지라도 감히 자신에게 이런 망발을 할 순 없었다. 무림상의 서열도 그랬거니와 두 사람 사이에는 상당한 무공의 격차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저런 자신감을 보이다니…….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소림성승은 마치 타이르듯 말을 이어나갔다. "경고하건데 그냥 떠나도록 하시오. 시주.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노납은 부득이 자비심을 버릴 수밖에 없소." 그러나 도위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소림성승을 포위한 수하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천살검진(天殺劍陣) 발동. 제 1조 공격개시." 명령을 받은 흑의인들은 서슴없이 몸을 날렸다. 상하좌우. 소림성승이 피할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압박하며 시퍼런 검 십여 자루가 쏜살같이 육박해 들어갔다. 천살검진(天殺劍陣). 일체의 방어를 도외시한 채 공격을 가하는, 오직 상대를 죽이는데 주목적을 두는 배교 고유의 공격형 검진이었다. 그 모습을 본 소림성승은 이제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미타불. 노납도 더 이상 어쩔 수 없구려." 그는 지체 없이 내력을 끌어올리려 했다. 호신강기를 시전해서 일차 공격을 막아낸 다음 그 힘을 이용해서 반격을 가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내력을 끌어올리려 하자 돌연 단전에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극도의 통증에 소림성승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도저히 운공을 시도할 수가 없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이, 이런." 도저히 내력을 끌어올릴 수 없었다. 저미는 듯한 통증 속에서 단전은 당최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굳어버린 소림성승의 주위로 시퍼런 검날들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무방비상태였지만 단 하나의 검도 적중되지 않는 것을 봐서 아마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닌 듯 싶었다. 그리고 한 쪽에서 돌연 광소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 과연 성공했구나." 소림성승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이, 이것은 서, 설마……." 도위청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갔다. "그 설마가 맞소. 성승은 이미 칠보단장산(七步斷腸散)을 복용한 상태요. 지금까지 만들어진 산공독(散功毒) 중 가장 위력이 강력한 것 말이오. 성승의 내력이 아무리 심후하다 하더라도 앞으로 일각(15분) 정도는 전혀 내력을 끌어올릴 수 없을 것이오." "어, 어떻게 노납에게 도, 독을 먹일 수 있었지?" 통증이 심했는지 띄엄띄엄 말을 이어나가던 소림성승의 안색이 별안간 확 바뀌었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 그의 시선은 저 멀리에 널브러져 있는 독고성에게로 향했다. 비로소 그에게 받아먹은 차가 떠올랐던 소림성승이었다. '서, 성아가 나에게 독을?'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믿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파악한 성정을 보아 독고성이 자신을 배신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불신의 빛을 떠올린 채 멍하니 서 있는 소림성승에게 도위청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이만 죽어줘야겠소. 성승. 귀하는 본교의 계획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존재이니 말이오." 도위청의 손에는 다소 거무튀튀한, 예기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도가 들려 있었다. 무림인이 라면 결코 쓰지 않는, 여물이나 고기를 써는 데 쓰는 듯한 무딘 칼이었다. 이미 도위청은 독고성의 숙소를 뒤져 이 칼을 찾아온 바 있었다. 도위청은 지금 철저히 사준환에게 들은 밀명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성승의 죽음을 독고성의 소행으로 위장하라는 밀명 말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소림성승은 도리어 평온을 되찾았다. 칼을 들어올리는 도위청을 무심하게 쳐다보던 소림성승은 나지막한 어조로 내뱉었다. "이것은 필경 시주들의 소행이구려." "………." "성아는 결코 날 해칠 아이가 아니오. 아마도 시주들은 감언이설로 그 아이를 속여 나에게 산공독을 먹인 듯 싶구려." 도위청의 눈에 긴장한 듯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꿰뚫어보는 소림성승의 안목이 별안간 무서워졌던 도위청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임무를 잊지 않는 인물. 손에 들린 도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소림성승의 목덜미를 향해 내려쳐졌다. 물론 도에는 일말의 내력도 주입하지 않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소림성승의 처참한 시신이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꼬박 하루가 지나고 나서였다. 묘옥을 찾아간 동자승에 의해 소림성승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소림사 안팎은 발칵 뒤집혀버렸다. 소림 제일의 고수라는 소림성승이 사지가 처참히 떨어져나간 채, 그것도 무딘 칼에 의해, 베어진 것이 아니라 찢겨지다시피 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소림사 전체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장문인을 비롯한 수뇌들은 즉각 진상조사에 나섰다. 흉수에 대해서는 물론 조사할 필요도 없었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27회 안녕하세요.^^. 내일이 2002년의 마지막 날이군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던 해였습니다. 아마 내일은 올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때문에 내일 치까지 함께 올리려고 합니다. 그럼 즐통하세요. ************************************************************************ 소림사에서는 소림성승 시해사건의 흉수로 독고성을 지목하고 나섰다. 사건 직후 흔적도 없이 사라진데다 사용된 무기가 그의 것이었다는 제보가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또한 소림성승의 시신에서 산공독의 흔적이 발견되고 상처의 흔적에 전혀 내력이 깃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흉수가 내공을 지니지 못한, 그리고 소림성승에게 굳게 신임을 얻은 자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이 조건은 모두 독고성에게 부합되는 것들이었다. 더욱이 독고성을 감시하던 호법승들 역시 머리가 떨어져나간 시신으로 발견되자 사건조사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종료되었다. 소림사에서는 범인을 독고성이라 확실하게 단정하고 그에게 공개 추살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 사실을 무림 각파에 널리 퍼뜨리기에 나섰다. "소림사에서 보호 중이던 배교 소교주 독고성이 소림성승을 암산했다. 그는 비열하게도 산공독을 써서 소림성승과 호법승들을 무력화시킨 뒤, 처참하게 살해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이에 우리 소림사에서는 흉수 독고성에게 공개 추살령을 선포한다. 이 추살령은 그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효력이 유지될 것이다." 그 무렵 독고성은 이미 배교 총단 깊숙이 들어간 상태였다. 수혈이 짚여 깊이 잠든 상태로 말이다. 안전한 곳에 도착하자 도위청은 독고성의 수혈을 풀어주었고 정신을 차린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한없이 청수해 보이는 학창의를 입은 중년인이었다. 그가 바로 배교 총사 사준환이었다. "크윽." 독고성의 왜소한 몸이 사정없이 벽면에 내동댕이쳐졌다. 분수 같은 피보라를 내뿜으면서 그는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축 늘어진 왼팔은 도무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팔뼈가 단단히 부러진 모양이었다. 벽에 등을 바짝 붙인 상태로 독고성은 다가오는 녹색 실루엣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쿵쿵. 그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것은 거대한 녹색 괴물이었다. 퉁방울만한 혈안(血眼), 입가를 비집고 자라난 송곳니가 무척 인상적인 괴물은 몸 군데군데가 녹색 털로 덮여있었다. 키는 대략 10척(3미터) 정도, 인간과 비슷한 체형을 가진 그 괴물은 정말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괴물은 독고성의 키보다도 긴 도끼를 두 손을 사용해서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독고성을 더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괴물의 피부였다. 여태껏 한 시간 남짓 혈투를 벌여오며 독고성은 괴물에게 무수한 상처를 입혔다. 하지만 그 상처들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 상태. 그만큼 괴물의 재생력은 뛰어나기 그지없었다. 벽에 내팽개쳐지기 바로 직전에 입힌 아랫배의 상처 역시 한참 회복 중에 있었다. 부글부글 끓는 거품 같은 것에 감싸인 채 재생되고 있는 상처를 보는 독고성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젠장 나에게 내공만 있었다면." 괴물을 응시하던 독고성은 고개를 내려 오른 손에 차인 무기를 쳐다보았다. 강철로 된 마디가 달린 거무튀튀한 쇠장갑. 이곳 이름으로 이것은 스파이크 건틀릿이라 부르는 무기였다. 주먹 부분에 4개의 기다란 칼날이 솟아있긴 하지만 그것들 대부분은 끝이 형편없이 뭉개진 상태였다. 그나마 성한 칼날은 단 하나. 나머지는 괴물과의 접전에서 모조리 부러져나간 상태였다. 그것은 이곳으로 들어오기 직전 지급 받은 병기였다. 중원에서 그가 사용하던 호조(虎爪)와 비스무레하게 만들긴 했지만 독고성에겐 이것 역시 생소하긴 마찬가지였다. 호조는 이것과는 달리 손가락부분에 칼날이 달려있다. 또한 호조를 사용하는데는 당연한 말로 심후한 내공이 필수적이었다. 길이가 현격하게 짧은 탓에 내공을 불어넣어야만 효과적인 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괴물이 지척까지 다가오자 독고성은 순간적으로 몸을 날렸다. 콰쾅. 그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도끼가 작렬했다. 벽면이 푹 패여 들어간 것을 보니 정통으로 격중되었다면 뼈도 못 추렸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껏 독고성은 괴물의 공격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착용한 건틀릿으로 막는다면 그 즉시 손이 박살날 것이 분명했으므로…….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괴물의 몸놀림이 비교적 느리다는 점이다. 그것 때문에 독고성은 지금까지 한 시간 남짓 버틸 수 있었다. 독고성의 눈에 순간적으로 투지가 치밀었다. "이놈. 내가 순순히 당할 것 같으냐?" 오크를 처치할 때만 해도 삶의 의욕을 거의 버렸던 독고성이었다. 하지만 중원에서 있었던 일, 특히 사준환과의 만남을 상기하자 자신도 모르게 복수심이 치밀어 올랐고, 이대로 허무하게 죽을 순 없다는 생각으로 독고성은 마침내 살아남을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이곳 트루베니아 인들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며칠 동안 치료를 받은 끝에 독고성이 입은 상처는 완치되었고 그는 또다시 시험에 투입되었다. 이번에 그와 맞선 상대는 이곳에서 트롤이라고 불리는 괴물이었다. 트롤(Troll). 인간보다 월등히 큰 덩치와 파워, 가공할 만한 재생력을 가진 때문에 오우거와 더불어 트루베니아의 대표적인 중형 몬스터로 손꼽히는 존재였다. 물론 숙련된 기사라면 능히 트롤과 일대 일로 겨뤄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일반 병사나 용병에겐 트롤은 여전히 두렵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독고성은 바로 그런 트롤과 혈투를 장장 한 시간 동안 벌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강해 보여도 생명체인 이상 분명히 약점이 있다. 네놈 역시 약점이 없진 않을 것이다." 독고성이 결론 내린 트롤의 약점은 바로 머리였다. 아무리 재생력 강한 괴물이라도 머리를 부숴 버린다면 살아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머리를 공격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3미터 가까운 신장을 가진 만큼 트롤의 머리로 접근하는 것이 지금으로썬 가장 걸림돌이었다. 물론 무공을 보유했을 때라면 아무런 상관이 없을 터였지만 내공을 잃은 지금, 그것도 살아서 원활히 움직이는 괴물의 머리 부분으로 뛰어오르는 것은 일견해도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독고성은 조바심 내지 않고 끈질기게 기회가 오기만을 노렸다. 하지만 트롤이 생각보다 교활하다는 점은 독고성이 미처 짐작하지 못했으니……. 쉽사리 독고성을 잡지 못하자 트롤은 무척 화가 난다는 듯 허리를 숙이며 도끼를 휘둘렀다. 트롤이 머리통이 뛰어오르면 닿을 위치에 놓였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독고성이 이 때를 놓칠 리가 만무했다. 몸을 날려 도끼를 피해낸 독고성은 가차없이 도약했다. 트롤의 머리에 건틀릿을 박아 넣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독고성의 실책이었으니……. 허공에 뜬 독고성의 몸을 향해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그것은 바로 뒤로 감추고 있던 트롤의 왼팔이었다. 허공이라 피할 수도 없었기에 대경실색한 독고성은 결국 팔을 들어 막을 수밖에 없었다. 으지직. 팔뼈가 허무하게 부러지고 독고성은 그만 벽면에 거세게 내동댕이쳐졌다. 이제 그는 한 손만으로 괴물과 대적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쾅. 간발의 차이로 도끼에 찍히는 것을 모면한 독고성은 얼른 트롤의 뒤로 돌아갔다. 숨이 턱에 닿을 듯 차 올랐고 왼팔에서 전해지는 통증 때문에 정신이 어질어질해질 정도였지만 독고성은 사력을 다해 몸을 추슬렀다. 먹이(?)가 뒤로 빠져나가자 트롤은 기성을 지르며 몸을 돌리려 했다. 그 순간 독고성의 눈에 괴물의 발뒤꿈치 부분이 들어왔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독고성은 가차없이 달려들어 손에 장착된 스파이크 건틀릿을 휘둘렀다. 인간으로 치면 아킬레스건. 걸음을 옮기는데 가장 중요한 근육인 이것을 잘라 트롤의 동작을 둔화시키려는 심산에서였다. 건틀릿에 장착된 칼날은 정확히 트롤의 발뒤꿈치에 박혀 들어갔다. 파팍. 녹색 피가 자욱하게 튀어 독고성의 전신에 뿌려졌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박힌 스파이크 건틀릿을 사정없이 뒤틀었다. 섬뜩한 음향과 함께 근육이 송두리째 잘려나갔다. 몸을 돌리려는 순간 근육이 잘렸기 때문에 트롤의 몸이 순간적으로 비틀거렸다. 무척 화가 난다는 듯 트롤이 성한 나머지 다리로 뒷발질을 가했다. 차라리 기둥으로밖에 볼 수 없는 두터운 다리가 무시무시한 파공음과 함께 접근해왔다. 피해낼 수 없음을 깨달은 독고성은 성한 팔을 벌려 다리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오랜 실전경험에서 나온 가장 적합한 대처법인 것이다. 쾅. 묵직한 충격과 함께 독고성은 또다시 선혈 한 모금을 내뱉어야 했다. 하지만 목적했던 다리를 겨우 붙잡을 순 있었다. 먹이(?)가 다리에 달라붙자 트롤은 떨쳐버리려고 세차게 발길질은 했다. 하지만 죽어라하고 매달려 있는 독고성이기에 쉽사리 떨어지진 않았다. "에잇." 대롱대롱 매달린 채 독고성은 틈을 보아 사력을 다해 건틀릿을 내뻗었다. 목표는 이번에도 다리의 근육. 워낙 재생력이 강한 괴물이기 때문에 주저할 시간이란 없었다. 녹색 피보라와 함께 두 번째 아킬레스 건 역시 여지없이 잘려나갔다. 그와 함께 독고성의 왜소한 몸 역시 트롤의 발길에 걷어 채여 저만큼 나가떨어졌다. "키르르르." 먹이가 나가떨어진 것을 보자 트롤은 지체 없이 달려들려 했다. 오랫동안 굶주린 트롤의 뇌리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엔 없었다. 도끼로 먹이를 짓이겨놓은 뒤 통째로 우적우적 씹어먹겠다는 생각. 하지만 트롤은 다리의 근육이 모두 끊어졌다는 것을 미처 염두에 두지 못했다. 기세 좋게 달려가려던 트롤의 다리가 그만 꼬여버렸다. 근육이 절단되었기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것이다. 3미터에 달하는 트롤은 그만 균형을 잃고 모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독고성이 넘어져 있는 방향이었다. 엄청난 덩치가 자신을 목표로 쓰러지자 독고성은 사력을 다해 몸을 뒹굴었다. 건틀릿에서 떨어져 나온 칼날 조각이 등판에 박혀들었지만 통증 따윈 느껴지지도 않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날릴 뿐이었다. 뒤이어 자욱한 먼지가 그의 몸을 완전히 뒤덮어버렸다. 쿵. 간발의 차이로 깔리는 것을 모면한 독고성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부러진 왼팔에서는 아무감각도 전해지지 않았고 출혈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등판이 뜨겁게 젖어드는 것을 보니 등에 난 상처가 제법 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독고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일으키려 버둥거리는 트롤에게로 달려들었다. 머리통만 해도 엄청난 크기, 독고성은 건틀릿을 트롤의 머리통에 사정없이 박아 넣었다. 쩡. 하나 붙어있던 칼날이 맥없이 부러져버렸다. 트롤의 두개골은 예상 외로 단단했다. "이런." 건틀릿에 붙어있던 유일한 무기였기에 독고성은 팔을 뻗어 퉁겨지는 칼날 조각을 잡으려했다. 하지만 칼날 조각은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손을 벗어나 멀리 날아가 버렸다. 머리에서 통증이 전해지자 트롤은 기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독고성의 몸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러나 독고성은 추호도 당황하지 않고 성한 오른팔을 등뒤로 돌려 박혀있는 건틀릿 칼날 조각을 움켜쥐었다. 슈각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제법 긴 칼날 조각이 살점과 함께 따라나왔다. 이미 트롤의 손은 독고성의 허리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상황. 칼날 조각을 역수로 틀어쥔 독고성은 그것을 트롤의 눈동자를 향해 사정없이 박아 넣었다. 자고로 두개골이 아무리 단단하다 하더라도 눈알이 있는 부분은 텅 비어있는 법이다. 핏발 선 동공이 맥없이 뚫리며 칼날 조각은 트롤의 뇌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트롤의 몸이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충격 때문에 손아귀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독고성은 허리가 갑자기 으스러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이미 트롤이 손아귀가 허리를 단단히 틀어쥐고 있는 상황. 고통이 견딜 수 없을 정도였기에 독고성은 처절하게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악." 다행히 고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뇌가 파괴된 터라 트롤은 오래지 않아 사지의 힘이 빠졌고 독고성은 겨우 트롤의 손아귀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다. 털썩. 바닥에 널브러진 채 독고성은 가쁘게 숨을 헐떡거렸다. 이젠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았다. 그는 흐릿한 시선을 들어 지금까지 싸우던 상대의 상태를 살폈다. 트롤은 이제 쓰러진 채 간헐적으로 몸을 꿈틀거릴 뿐이었다. 그것도 잠시 트롤의 거체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축 늘어져버렸다. 두 번째 대결에서 그는 트롤에게도 승리를 거둔 것이다. 피범벅이 된 입술을 비집고 메마른 음성이 새어나왔다. "힘들군." 전신의 힘을 모조리 소진했는지 피로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독고성은 앞으로 엎어진 채 그대로 곯아 떨어져버렸다. 잠시 후 감옥의 문이 열리고 일단의 병사들이 몰려 들어왔다. 그들은 곧 독고성의 몸을 수습해서 어딘 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놀랍게도 이방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투입했던 트롤은 뇌가 꿰뚫린 채 완전히 숨이 끊어졌습니다." "그래?" 세르게이는 무척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트롤이라면 어지간한 병사들도 상대하길 꺼려하는 중형 몬스터였다. 그런 트롤과 일대 일로 싸워 이기다니……. 그것도 스파이크 건틀릿 같은 짧은 무기를 사용해서 말이다. "그래 싸우는 과정은 어땠나? 스파이크 건틀릿을 지급하니 잘 싸우던가?" 세르게이의 반문에 보고하던 베니테스는 조금 머뭇거렸다. "저, 그것이……."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결국 베니테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접전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는 지금 숨이 간신히 붙어있는 상태입니다. 왼쪽 늑골과 팔뼈가 완전히 골절되었고 그 외의 타박상은 이루 말할 데가 없습니다. 그것을 봐서 트롤 정도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인 듯 싶습니다." "그래?" 세르게이는 무척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를 어떻게 처분하시겠습니까?" "글세? 어떻게 해야 할까? 자네 생각은 어떤가?" 베니테스는 잠시 주저하다 마침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어쨌거나 그는 자신이 목숨을 걸고 차원이동을 해서 데리고 온 자였다. 그러니 만큼 그냥 처치한다는 것이 그리 달가울 리가 없었다. "공작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현재 병력이 무척 부족한 상황입니다. 싸울 수 있는 젊은이는 모조리 뽑아서 전방으로 보내고 있는 실정이니까요. 전사자 수가 엄청나기 때문에 이미 병력충원마저 한계에 달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제 생각으론 그를 치료해 준 다음 노역을 시키던지, 아니면 성벽 경비병으로라도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듯 싶습니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그냥 전쟁터로 보내는 방법도 있구요. 아마 그는 한 명의 병사 정도의 몫은 충분히 해 낼 것 같습니다." 세르게이는 미소를 떠올린 채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조금 뒤 명령이 떨어졌다. "우선 놈을 치료하도록 하게." "네? 제 제안을 받아들이신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세르게이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의 얼굴엔 점차 미소가 짙어지고 있었다. "테스트를 한 번 더 해볼 생각일세. 이번에는 오우거랑 말이야. 그러니 자네는 전력을 다해 놈의 몸을 치료하도록 하게." 베니테스는 깜짝 놀랐다. "오우거 말입니까? 얼토당토않습니다. 오우거는 트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몬스터입니다. 놈은 이번 시험에서 십중 팔구 살아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놈의 운명이겠지? 아무튼 이번 시험을 무사히 끝낸다면 놈을 살려주도록 하지. 놈이 오우거를 처치한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야." 빙긋 미소를 지은 세르게이는 몸을 일으켰다. 전혀 뜻밖의 말이라서 베니테스는 그저 멍하니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공자님이 당한 금제를 풀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금제를 풀 방법이 있다구요?" 뜻밖의 낭보에 독고성의 입이 딱 벌어졌다. 소림성승에게 당한 극악의 금제술을 풀어버릴 방법이 있다니……. 그것은 정말 희소식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낭보였다. 독고성의 눈망울엔 희망의 불길이 서서히 솟구치고 있었다. 독고성이 배교에 들어온 지도 어언 한 달이 지났다. 그 동안 배교 총사 사준환은 독고성에게 그야말로 극진한 정성으로 대했다. 마치 죽은 독고 교주가 살아 돌아온 듯 말이다. 그 때문에 독고성은 이제 사준환을 가슴 깊이 신뢰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지금까지 소림사에서 무수한 멸시와 박해를 당해왔다. 누구하나 따듯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배교로 옮겨 올 수 있었고 이곳에서 보낸 한 달은 독고성에겐 그야말로 천국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우선 대하는 사람들마다 그에게 극도의 경의와 충성을 표시했다. 시비에서부터 일반무사, 그리고 신분이 높은 당주들까지도 그를 보기만 하면 어김없이 부복으로써 충성심을 표시했다. 그 누구도 그에게 함부로 하는 자가 없었다. 독고성으로썬 정말 꿈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원래 독고성은 자신에게 조금만 잘 대해주는 사람이라면 가슴속까지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생사의 기로에서도 결단코 소림성승을 해하려 하지 않는 일화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 성정 탓에 독고성은 이미 사준환에게 가슴속까지 매료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사준환을 정말로 믿을 수밖에 없던 일이 또다시 터져 버렸으니……. 독고성이 배교에 도착한 지 열흘째 되는 날. 무림맹에서 정식으로 공문을 든 사절이 도착했다. 물론 공문의 내용은 소림성승을 시해한 독고성을 공식적으로 인도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준환은 두말도 하지 않고 그것을 거부했다. "본교의 소공자를 내줄 수는 없소. 설사 그 대가가 전쟁이라 해도 말이오." 무림맹 측의 사절은 결국 쓸쓸히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전쟁까지 불사하겠다는 사준환의 뜻을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독고성은 당시 휘장 뒤에 숨어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을 보호하려는 사준환의 의지에 깊이 감명 받은 바 있었다. 하지만 소림성승의 죽음에 대해서는 독고성도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성승이 죽다니? 그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무림맹 사절이 떠나자 정신 없이 달려나온 독고성에게 사준환은 침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마도 놈들의 농간인 듯 싶습니다. 제가 도위청에게 주어 소림성승에게 복용시킨 환약은 틀림없이 수면제입니다. 이미 공자도 맛을 보셨으니 약의 정체를 짐작하셨을 줄 압니다." "그것은 맞습니다만." "원래 정파 놈들은 비열하고 간교한 수단을 즐겨 쓰는 놈들입니다. 놈들은 필시 우리 배교와 싸울 꼬투리를 잡기 위해 이 일을 꾸민 것입니다. 성승은 저 역시도 존경해 마지않는 고승이십니다. 아마도 그분은 정파 놈들에 의해 해를 당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그렇다면 성승이 정파 놈들의 손에 의해……." "저는 그렇게 예상하고 있습니다. 무림맹 족속들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니까요." 독고성의 눈에 마침내 분노의 광망이 활활 타올랐다. 그의 분노는 소림성승을 시해했다는 정파 인들을 대상으로 발산되고 있었다. 비록 자신에게 금제를 가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유일하게 자신을 인간답게 대한 자였다. 그의 죽음을 도저히 좌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공이 없는 그가 복수를 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그는 사준환에게 무공을 가르쳐달라고 간청하게 된다. "저는 강해지고 싶습니다. 절세 무공을 전수해 주십시오." 물론 사준환은 당연히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허! 무공을 익힌다. 현재 상황에서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독고성이 무공을 익히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바로 그가 당한 금제술이었다. 칠종단금술. 이 금제가 존재하는 이상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헛수고에 불과했다. 아무리 강한 무공을 익히더라도 상대를 죽일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랴……. 이미 암암리에 조사를 끝마친 터라 사준환은 독고성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준환은 독고성에게 여운이 남도록 만들었다.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독고성은 반신반의하며 물러났고 그로부터 이틀 뒤 사준환은 이 같은 낭보를 들고 독고성을 직접 찾아온 것이다. "혹시 천자혈마공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천자혈마공?" 물론 무림에 대해 문외한인 독고성이 이 무공에 대해 알 턱이 없었다. 사준환은 지긋한 어조로 독고성에게 천자혈마공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천자혈마공(天子血魔功). 이 무공은 이백 년 전 천수혈마(千手血魔) 동방련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원래 배교의 제 14대 교주였다가 실각한 인물이었지요. 이 무공은 그가 직접 만들어낸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배교의 칠백 년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공이라 볼 수 있지요." 구미가 당기는 대목이었기 때문에 독고성은 숨도 쉬지 않고 경청했다. 사준환은 천자혈마공의 비밀을 비교적 숨김없이 털어놓고 있었다. "당시 동방련은 천자혈마공을 익히기 위해 동남동녀 천 명의 정혈을 매일매일 흡수하며 무공을 완성했습니다. 물론 교도들에겐 비밀로 붙이고 말입니다. 연성방법이 얼마나 극악했는지 배교 내부에서도 지금까지 익히는 것을 금지해 올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위력만큼은 결코 경시할 수 없습니다. 당시 동방련은 이 무공 하나로 무림 제일의 고수로 평가받을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우연한 기회에 동방련의 비밀이 여지없이 탄로났고 그는 결국 실각한 채 끝없이 쫓기다 무수한 무림 고수들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천자혈마공은 바로 그런 배경이 있는 무공입니다." "동남동녀 천명이라구요?" 듣고 있던 독고성은 혼비백산했다. 무공 하나를 위해 어린 아이들 일천 명을 희생시켜야 하다니……. "나보고 그런 저주받은 마공을 익히란 말인가요? 나는 싫소. 설사 강해진다고 해도 싫소." 독고성은 자신도 모르게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났다. 사준환은 그런 독고성을 안심시키려는 듯 빙긋이 미소를 떠올렸다. "하지만 걱정하실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본교의 무공 교두들로 인해 동남동녀를 대체할 수 있는 또 다른 연성방법이 개발되었으니까요." "대체하는 방법?"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짐승을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동남동녀 대신에 어린 양 일천 마리를 죽여 그 정혈을 매일 흡수한다면 원래의 천자혈마공만은 못하겠지만 위력만은 별달리 뒤떨어지지 않는 무공을 연성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공자께서 이것을 익히신다면 시술받으신 칠종단금술 역시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음." 독고성은 잠시 상념에 빠져 들어갔다. 동남동녀 천명 대신에 양의 정혈을 흡취하는 것.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용의가 있는 독고성이었다. 강해지기만 한다면 말이다. "비밀 역시 제가 영원히 묻어두도록 하겠습니다. 이번만큼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드러나지 않을 것을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사준환이 이렇게 까지 나오는 데야 독고성도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흔쾌히 천자혈마공을 익힐 것을 승낙했다. "좋습니다. 한 번 해 보겠습니다." "탁월하신 판단이십니다." 사준환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져갔다. 그것은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어간다는 회심의 미소였다. 사실 그는 독고성에게 한 가지 밝히지 않은 것이 있었다. 천자혈마공. 더 없이 극악한 연성방법으로 인해 단시일 내에 개세 고수가 될 수 있지만 그에 따른 심각한 부작용이 있는 무공이었다. 그것은 바로 마성이 골수에 침투하여 피에 굶주린 마인(魔人)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사람을 죽여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시간이 더 흐른다면 오로지 살육밖에 할 줄 모르는 인성을 상실한 혈귀(血鬼)로 만들어버리는 저주받은 마공. 사준환은 바로 이 무공을 독고성에게 권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독고성은 무공을 익히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고 할 수 있다. 지금부터 꾸준히 익힌다 하더라도 절정고수가 되기엔 절대 불가능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무림에서는 지금껏 방파의 제자들을 단련시키기 위해 무수한 방법이 사용되었고 그 결과 서너 가지의 정석적인 방법이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보통의 경우 상승고수를 탄생시키기 위해 각 무림방파에서는 갓난아이 시절부터 개정대법을 시술한다. 심한 경우에는 산모의 뱃속에서부터 시술 받는 아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근골을 강화시킨 아이들은 말귀를 알아들을 나이가 되면 어김없이 운기조식에 대해 배우게 된다. 문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그 과정만은 대개 대동소이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장래를 결정짓는 것은 바로 2차 개정대법이었다. 다시 말해 내력이 웅후한 문파의 어른들이 아이들의 혈도에 내력을 불어넣어 내공이 흐르는 통로를 임의적으로 타동시켜 주는 것이다. 내력의 흐름이 원활해지도록 말이다. 하지만 이 두 번째 개정대법을 실시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선 시술자가 어느 정도의 고수여야 하는 조건이 있었으며 또한 개정대법의 실시 과정에서 상당량의 내공이 소실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문파에서는 적전제자, 다시 말해 문파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소수의 기재들에게만 이 방법을 적용한다. 개정대법을 실시 유무에 따라 아이들의 무공연성은 이때부터 차이가 나기 시작한다. 대법을 시술받은 아이들은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성취와 함께 문파의 기둥으로 자라날 것이며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그저 평범한 문파의 무사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제반 여건을 볼 때, 독고성이 절정 고수가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볼 수 있었다. 무공을 익히는데 가장 중요한 유년기를 소림사에 갇혀 지낸 때문에 그는 내공 방면에서 거의 문외한이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소림성승이 복용한 칠보단장산을 먹고서도 무사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칠보단장산이란 내공을 보유한 무림인에게는 치명적인 독이었지만 평범한 사람에겐 오히려 보약이 되는 약이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가 강한 무공을 익히기 위해선 천자혈마공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다고 볼 수도 있었다. 또한 마성을 골수까지 침투시켜 피에 굶주린 마인이 되게 하는 천자혈마공이라면 소림성승의 금제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준환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아무튼 독고성은 천자혈마공을 익히기로 결심했다. 사준환이 자신을 완벽히 속여넘긴 것을 까맣게 모르고 말이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28회 어둠에 덮인 지하감옥. 사방 3평방미터 남짓한 협소한 곳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전신에 붕대를 친친 동여맨 모습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병자를 연상시키는 자. 왼팔에 부목이 대어져 있는 자는 다름 아닌 독고성이었다. 그는 지금 정신 없이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트롤과의 격전에서 입은 상처는 대부분 치료된 모습이었지만 속으로 입은 내상은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감옥 내부는 거친 숨소리만이 들려올 뿐 조용한 적막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로브를 걸친 푸른 눈을 가진 잘 생긴 중년인. 그는 다름 아닌 베니테스였다. 이카롯트 왕국의 궁정 마법사인 그가 지하 감옥에 직접 나타난 것이다. 그는 말없이 서서 창살 너머에 널브러져 있는 독고성을 주시했다. 그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관찰이었다. "대충 치료는 끝난 것 같군. 하긴 일주일 동안 힐링을 꾸준히 시전했으니……." 그는 조용히 손을 들어올렸다. 힐링 마법은 이곳으로 오며 미리 캐스팅을 해 놓은 상태. 그의 손에서 난데없이 푸르스름한 빛이 일어났다. 그 빛은 일직선으로 날아가 독고성의 전신을 그대로 덮었다. 마치 살아있는 그 자체가 생명체인양 빛은 독고성을 감싸고 한 바퀴 돌더니 그대로 몸 속으로 흡수되어버렸다. "예상이 틀리지 않다면 이자는 조금 있으면 깨어날 것이다." 독고성의 얼굴에서 서서히 화색이 도는 것을 간파한 베니테스는 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 때 등뒤에서 나지막한, 그리고 힘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베니테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힘없이 뜨여진 채 자신을 주시하는 눈동자 한 쌍이 들어왔다. 이방인. 그가 눈을 뜨고 베니테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베니테스는 말없이 창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방인이 뭔가 말을 건네긴 했지만 통역마법을 시전하지 않은 탓에 뜻을 알 순 없었다. 베니테스가 창살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이방인 역시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베니테스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할 말이 있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계속해서 건네는 이방인을 보자 베니테스는 불연 듯 그와 대화를 해 볼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물론 상식적으로 그것은 하등 쓸모가 없는 일이었다. 상당한 양의 마나를 소모시킬뿐더러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었던 베니테스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통역 마법을 캐스팅했다. 그것은 상대가 지금 보여주는 초라한 모습에 연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차원이동을 통해 간 세상에서 감옥 속의 사내는 한없이 당당하고, 강한 존재였다. 수많은 마스터급 검사들을 상대로 추호도 꿀리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싸웠던 실력자. 그랬던 자의 이런 초라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도 물론 기분이 편치 않았다. 통역 마법의 캐스팅을 마친 베니테스는 독고성에게 지긋이 말을 건넸다. "내게 할 말이 있소?" 독고성의 얼굴에 반색하는 빛이 떠올랐다. 정말 얼마 만에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인가? 누구와 말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이리도 기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인물이다. 제한된 시간 내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독고성은 잘 알고 있었다. "슈렉하이머는 어떻게 되었소?" 상대가 난데없이 슈렉하이머를 거론하자 베니테스는 다소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떠올렸다. 하지만 굳이 비밀로 붙일 만한 일은 아니었기에 그는 순순히 대답해주기로 결정했다. "그 분은 며칠 전 전장으로 떠났소.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하시러 말이오. 자신이 트루베니아를 위해 할 일은 그것 밖에는 없다고 판단하시고 그 분은 가장 험준한 전쟁터로 가셨소이다. 아마 두 번 다시는 보지 못할 거요." "음." 독고성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슈렉하이머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독고성이었다. 물론 거기에 임무를 실패했다는 데 대한 군주들의 질책이 다소 섞여 있음이 분명할 터. 그도 어느 정도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 상념을 마친 독고성은 베니테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제 당신 얼굴이 기억나는군." "………?" "절벽에서 떨어지던 당시 나는 누군가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소.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인지 기억하지 못했지만 이젠 생각나오. 절벽에서 날 구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구려." 베니테스는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자신을 기억해준다는 것이 그리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 때는 이방인을 대륙의 위기를 구원해줄 구세주로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이제 도와 줄 수 있는 힘을 모조리 잃어버린 상태. 베니테스는 억지로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썼다. "뭐, 거기에 감사를 표할 필요는 없소. 나는 당시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니까……." 짤막하게 대꾸한 뒤 몸을 돌리려던 베니테스를 독고성이 다급하게 불러 세웠다. "잠깐만 기다려주시오." 멈칫한 베니테스는 다시 독고성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할 말이 있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리다. 내가 지금 치르고 있는 시험은 언제 끝나게 되오." 베니테스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놀라움이 스쳐지나갔다. 무릇 사람이란 이런 지경에 처한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공포심을 느끼는 것이 상식이다. 시시각각 찾아올 자신의 운명에 대한 생각에 몰두하다 거의 반 미쳐버리기 십상인 것이다. 그런데 저 사내는 달랐다. 침착성을 전혀 잃지 않은 채 냉철하게 자신의 처지를 꿰뚫어보고 있다니……. 바짝 경각심이 든 베니테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이것이 시험이란 것을 어떻게 알았소?" "빤하지 않소? 피차 복잡하게 머리 굴리지 맙시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요. 이 시험이 끝나고 난 뒤 내가 어떻게 되는가 알고 싶소.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싸울 필요가 없을 테니 솔직하게 말해 주시오." 독고성은 베니테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니테스는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마지막 시험을 통과한다면 당신은 살 수 있을 거요." 독고성의 얼굴에 뭔가 기대의 빛이 일어났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겠군." "하지만." 말을 잠시 끊은 베니테스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시험에서 당신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시오" "호, 그것은 또 어째서 그렇지?" "이번에 당신이 상대할 몬스터는 오우거(Ogre)요. 그것도 가장 흉포한 트윈헤드(Twin head) 오우거란 말이오. 트윈헤드 오우거라면 어지간한 기사들도 상대하기 꺼려하는 강력한 몬스터. 저번에 당신이 상대한 트롤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라오. 그러니 살 수 있다는 희망 따윈 버리기를 권유하겠소" 하지만 이방인은 추호도 겁을 먹지 않았다. "어쨌든 요는 마지막 시험만 통과하면 된단 말이구려." "그, 그렇소." "그렇다면 시험을 통과한 뒤 나는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오?" 추호도 겁을 먹지 않은 상대의 반응에 당혹해지긴 했지만 베니테스는 비교적 솔직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시험을 통과한다면 풀려나서 아마도 노역에 동원되던지 아니면 병사로 징집 될 것이란 베니테스의 말에 독고성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비싼 대가를 주고 데려온 만큼 철저히 이용해 먹겠단 말이로군." "그러기에 앞서 당신은 마지막 시험을 통과할 생각이나 하시오." 베니테스는 퉁명스럽게 내뱉은 다음 주저 없이 자리를 떴다. 안 그래도 바쁘기 그지없는 몸.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철컹. 베니테스가 나가자 문은 굳게 닫혀버렸다. 독고성은 착잡한 안색으로 계속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관한 고민이었다. "일단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나야 한다." 상념은 오래지 않아 끝났고 그는 다시 자리에 가서 잠을 청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생애에서 유일하게 행복했다고 할 수 있는 시기를 떠올렸다. 잡념 따위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바쁘게 지나갔던 시간. 피 튀기는 전장의 중심부가 바로 그의 생애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슈르르르. 한 자루의 검이 무수한 변화를 일으키며 한 곳으로 날아들었다. 짙게 풍겨나는 매화 향기와 함께 허공에 매화꽃이 무수히 그려졌다. 매화꽃이 그려지는 수준을 볼 때 검을 든 자는 화산파 제자이며 그것도 엄청난 실력을 가진 자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큭." 파풍도를 들고 기세 좋게 날뛰던, 아수라 문양을 가슴팍에 새겨 넣은 흑의인 두 명이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양단되었다. 제법 실력을 쌓은 마도의 고수였지만 제대로 된 정파의 고수에게는 역시 상대가 되지 않았다. 긴 수염을 기른 중년 도인은 검을 한 번 가볍게 휘둘러 핏방울을 떨쳐낸 뒤 새로운 목표물을 찾아 몸을 날렸다. 장 헌수. 화산파의 제 42대 제자로 현재 10여 명의 제자를 두고 있는 명망 높은 화산파 장로 중 한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적전제자로 키워진 터라 그의 앞길은 평탄하기 그지없었다. 탄탄한 내공을 바탕으로 그는 오랫동안 무림에서 명성을 드높일 수 있었고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제자를 키우는 일에 전념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당금 현실은 그로 하여금 현실에 안주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전 무림을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정사대전. 접전을 통해 많은 제자들을 잃자 그는 다시금 검을 쥘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 휘하 제자들을 이끌고 위기에 빠진 모용세가를 구원하러 온 길이었다. 하지만 벌어지는 전세는 한 눈에 봐도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어렵다. 어떻게 해서든 놈들의 우두머리를 베어야 한다." 정신 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장헌수의 눈에 마침내 우두머리인 듯한 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양손에 호조를 낀 채 무인지경으로 날뛰는, 다소 왜소한 체구의 흑의인. 본능적으로 그가 배교 기습대의 수장이란 것을 알아차린 장헌수는 지체 없이 그 쪽으로 몸을 날렸다. 때는 바야흐로 백도와 마도와의 세력다툼이 절정기로 무르익은 시기였다. 군소방파의 지리한 무력충돌로 촉발된 정사대전은 오랫동안 국지전으로 전개되다가 불과 얼마 전에 마침내 전면적으로 맞붙기에 이르렀다. 명목상 마도의 종주라고 정평이 나 있는 마교를 주축으로 배교 등 마도의 군소방파들이 한데 뭉쳐 마인연맹(魔人聯盟)을 결성하고, 그에 대항하기 위해 백도는 전통의 구대문파를 중심으로 무림맹을 결성했다. 그리하여 마인연맹과 무림맹과의 전면적인 힘 겨루기는 모든 문파를 막론한 정사대전으로 나가고 있었으니……. "컥." 목덜미를 꿰뚫린 도인 하나가 검을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막 죽은 도인의 목에서 호조(虎爪)를 빼어들던 흑의인은 등뒤에서 파고드는 강렬한 기세에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제법 원활한 몸놀림이긴 하지만 그를 향해 덮쳐드는 검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그의 요혈을 따라다녔다. "이번에는 제법 쓸 만한 놈이로군." 흑의인이 상황판단을 하고 있는 사이 매화꽃은 그의 몸 언저리에 바짝 육박해 있었다. 아름답긴 하지만 반드시 피를 부르는 죽음의 꽃이 어느새 그의 전신을 뒤덮어가고 있었다. 흑의인은 추호도 당황하지 않고 양손에 낀 호조를 사방으로 맹렬히 휘저었다. 파파파팟. 놀랍게도 허공을 뒤덮은 매화송이들이 차례차례 부서져 나갔다. 그 모습에 공격을 가한 장헌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호조 따위로 매화검법을 파훼하다니……." "크크크 매화검법 따위로 날 당해낼 것 같았나?" 걸쭉한 흉소를 날리며 흑의인은 장헌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매화검법을 완전히 막진 못했는지 얼굴을 감싼 복면이 갈가리 찢어져 나풀거렸다. 챵챵. 서너 차례의 공방이 오고간 후에야 장헌수는 마침내 흑의인의 얼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정말 못생긴 놈이로군. 응? 가만 네놈은?" 꼽추에 호조를 쓰는 추면(醜面)의 배교 고수. 그렇다면 상대의 정체는 빤했다. 정황을 파악한 장헌수의 눈에서 분노의 광망이 솟구쳤다. "네놈이 독고성이렸다? 잘 만났다. 감히 소림성승을 격살한 배은망덕한 놈." "개소리! 네놈들이 죽여놓고 무슨 망발이냐?" 독고성의 눈에도 분노가 솟구쳤다. 그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는 듯 호조를 내저으며 달려들었다. 물론 장헌수도 마다하는 바가 아니었다. [다크메이지]1장 도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 29회 곧 두 고수간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얼마 싸우지도 않아 장헌수는 놀라움에 등골이 서늘해 오는 것을 느꼈다. “마, 말이 안 돼. 놈이 소림사를 탈출한지 이제 겨우 십여 년. 그 세월동안 이런 막강한 무공을 익히다니...” 전세는 한 눈에 보아도 드러날 정도로 자신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길이가 짧아서 무사들 사이에서 별달리 쓰이지 않는 단병무기(短兵武器)인 호조를 들고서도 상대는 자신을 압도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특히 자신의 검에 서린 검기가 서서히 빛을 잃고 있다는 사실에 장헌수는 대경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상대의 내공이 자신을 능가한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무려 사십 년 동안이나 내가 기공을 익혀왔던 장헌수로써는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도, 도저히 믿을 수 없군.” 내공의 차이를 차지하고서라도 상대가 전개하는 호조술은 정말 패도적인 무공이었다. 한 번 기세를 잡으면 숨을 몰아쉴 여지를 주지 않는, 마치 폭풍처럼 몰아치는 공격에 장헌수는 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챙. 생사의 갈림길에서 일직선으로 뻗어오는 호조를 장헌수는 겨우 가로막았다. 하지만 호조의 손톱 사이로 그만 검이 끼이고 말았다. 대경실색한 장헌수는 급급히 검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상대의 얼굴에는 이미 회심의 미소가 감돌고 있었으니... 자고로 단병무기 중에서 검과 가장 상극이라고 일컫는 것이 바로 호조였다. 호조란 외문병기의 일종으로 다섯 개의 고정된 손톱(칼날)이 달려있으며 손에 장착하기 때문에 움직임이 무척 원활하다는 장점이 있는 무기였다. 특히 손톱 사이에 칼날을 끼워 비틀면 용이하게 검을 부러뜨릴 수 있기 때문에 호조를 사용하는 무사는 오랫동안 검객들에게 주의를 요하는 상대로 꼽혀왔다. 문제는 일정 수준 이상, 다시 말해 검기나 검강을 끌어올릴 수 있는 무사에겐 호조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우세를 점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강기를 끌어올린 검은 비록 호조를 비튼다 하더라도 부러뜨릴 수 없다. 오히려 검에 서린 강기에 의해 호조가 결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문제 때문에 무림에서 이름을 날린 고수들 중에서는 호조를 사용하는 무사가 드물었다. 그런데 장헌수의 앞에 호조를 사용하는, 그것도 호조에 강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실력자가 등장했으니. 파앗. 난데없이 검 한 자루가 허공에 비산했다. 손아귀가 찢어진 채 장헌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정신 없이 뒷걸음질쳤다. 호조의 손톱 사이에 검이 끼이는 순간 그는 부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극도의 강기를 밀어 넣었다. 상대는 예상대로 호조를 강하게 비틀었다. 물론 강기 덕택에 검은 부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호조를 비트는 상대의 힘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고 거기에 견디지 못해 손아귀가 찢어지며 장헌수는 그만 검을 놓친 것이다. 상대가 덮쳐오는 것이 느껴지자 장헌수는 다급하게 몸을 날렸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기억의 전부였으니... 퍼퍼퍽. 둔탁한 느낌과 함께 목덜미 살이 무더기로 떨어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장헌수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그의 눈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떠져 있었다. “후.” 길게 숨을 내쉰 독고성은 널브러진 장헌수의 시신을 힐끗 응시한 뒤 몸을 날렸다. 목적지는 모용세가의 요인들이 뭉쳐 있는 후원 부근이었다. 치열하게 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생을 마감한 무인들이 여기저기서 쓰러졌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모용세가의 무사들이었다. 세가를 엄밀하게 포위한 채 공격을 가해오는 자들은 하나같이 흑의에 아수라의 문양을 가슴팍에 박아 넣은 무사들. 대부분이 20대 중, 후반의 젊은 무사들이었다. “여, 역부족이다.” 모용세가의 가주는 뼈저린 침음성을 울렸다. 배교의 무사들에게 이토록 밀리고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새파란 애송이들에게... 배교의 수호마왕군(守護魔王軍)이 모용세가로 밀려왔을 때, 그는 아연해할 수밖에 없었다. 수호마왕군은 배교의 후기지수들이 총 집결된 명실상부한 배교의 최정예라고 할 수 있는 세력이었다. 그렇다고 도망을 칠 순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는 우선 세가 내의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그리고 전령을 보내 무림맹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 뒤로 얼마 후 벌어진 접전. 불과 삼백 명에 불과한 수호마왕군이었지만 칠백에 달하는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애당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거의 일방적인 학살이라 불릴 수 있는 접전을 겨우겨우 버텨나가던 순간이 지나가고 바로 조금 전 화산파에서 지원군이 왔을 때 그는 승리에 대한 희망을 다소나마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원군이 가세하고도 좀처럼 전황이 호전되지 않았으니... 정문 쪽에서 새로운 배교의 무사들이 속속 가세하는 것을 봐서 화산파의 지원 역시 버티지 못했다는 것을 모용진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통상적으로 무사를 키워내는 방법에서 백도와 마도는 판이하게 다른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 백도에서는 점진적으로 무공을 증진시켜나가는 순차적인 방법을 택했고 마도에서는 단시일 내에 무공을 끌어올릴 수 있는 속성법을 택했다. 대체적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방법들은 오랜 검증을 거쳐 각 방파에 확실하게 정립되어왔다. 그 차이는 양 무사들의 실력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보편적으로 정파의 하급 제자들은 마도의 무사들보다 무공연성 정도가 현저히 뒤떨어졌다. 같은 기간을 수련한다고 가정하면 마도의 무사들이 무공 성취 면에서 월등히 뛰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면 역전되었다. 비록 속성법을 택해 비약적인 실력향상을 가져오긴 하지만 마도의 무사들은 일정 수준이 되면 더 이상 무공이 진척하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마(魔)의 벽, 또는 한계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파의 제자들은 달랐다. 비록 성취도가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아도 오랫동안 착실히 수련을 쌓은 백도 무사들은 각 단계의 벽을 비교적 수월히 넘어설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한계를 넘어 절정(絶頂)의 경지에 오를 확률이 마도의 무사들보다 월등히 높다는 뜻이다. 그런 고로 무사의 수효는 사파가 앞서지만 절정급을 넘어서는 고수의 수만은 정파에서 월등한 우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점이 백도와 사도와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가장 큰 요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 불휘는 능히 절정급을 넘어섰다고 불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비록 초절정(超絶頂)은 아니었지만 최절정(最絶頂)에는 어느 정도 근접한 개세고수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실력을 가졌다 할지라도 지금 그는 수호마왕군 열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를 막아선 자들은 합격술에 정통한 자들이었다. “이놈들.” 쉴 새 없이 죽어나가는 무사들의 모습에 모용 불휘는 눈에 불을 켜며 검을 휘둘렀다. 그의 애검이 자욱한 강기를 흩날리며 사방을 짓쳐 들었다. 하지만 그를 포위한 흑의무사들은 어렵지 않게 강기 공세를 막아내곤 다시 자세를 잡았다. 사방을 포위하고 있기 때문에 한 쪽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수 없는 터라 모용 불휘로써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상대는 이미 자신 정도의 고수를 상대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온 자들이었다. “도대체 속셈이 뭐지?” 물론 포위망을 뚫을 수는 없었지만 저들 역시 자신을 공격할 수 없었다. 이들 정도의 무사와 일대 일로 겨룬다면 단 오초 이내에 목을 자를 수 있는 것이 모용 불휘의 실력이었다. 하지만 놈들은 자신을 공격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그저 포위망만 형성하고 있었다. 이렇게 모용불휘의 발목을 잡아놓고서 수호마왕군들은 실력이 떨어지는 세가의 무사들을 가차없이 도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모용 불휘의 마음은 더없이 다급했다. “크으윽.” 난데없이 들려오는 낯익은 비명소리. 고개를 돌리자 조카인 모용현도가 목숨을 잃고 쓰러지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이성을 잃을 만도 했지만 그는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전장에선 죽고 죽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는 법. 이런 일로 마음의 평정을 잃는다면 더 위험해진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모용불휘였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모용불휘가 다소 여유를 부리고 있었지만 포위한 수호마왕군은 어느 한 놈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의 눈에 저 편에서 아들인 모용진이 사력을 다해 싸우는 것이 보였다. 위태위태했지만 모용진은 그런 대로 잘 버티고 있었다. “그래도 녀석은 소림사에서 수련을 했으니 쉽사리 당하진 않을 것이다.” 모용 불휘는 어떻게 해서든 포위망을 뚫어 후퇴하려고 했다. 비록 많은 무사들을 잃었다지만 아들인 모용진만 무사하다면 모용세가의 재건은 시간 문제였다. 모용 불휘의 눈에 순간적으로 물막이 스쳐지나갔다. “녀석. 부디 이 아비를 능가하는 절세 고수로 자라나 다오.” 그의 눈엔 모용진이 한없이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그 어렵다는 소림사 속가제자 시험을 무리 없이 통과한 아들. 소림사에서 10년 동안 수련을 쌓은 다음 후기지수들 중 능히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을 얻어 선망의 대상이던 호천수호단에 어렵지 않게 합류한 자랑스런 아들이었다. 수호마왕군의 습격 사실을 알고 가문을 도우러 오긴 했지만 그는 난전 중에서도 능히 자신의 몸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만 살아난다면 이곳에서 죽더라도 여한이 없었던 모용불휘였다. 그 때 갑자기 이변이 일어났다. 난데없이 자신을 포위했던 수호마왕군들이 물 흐르듯 포위망을 풀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놈들이 미쳤나?’ 놀라움을 표시할 시간도 없이 모용불휘는 아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이미 대세는 물 건너간 것.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몸을 피한 뒤 나중을 기약해야 할 때였다. 그런데 그런 그의 앞을 막아서는 왜소한 인영이 있었으니... “어딜 가시나? 모용 가주.” “응? 네놈은?” 거무튀튀한 호조를 낀 채 앞을 막아선 왜소한 흑의인을 보자 모용 불휘는 깜짝 놀랐다. 물론 상대의 정체는 모용 불휘도 익히 알고 있었다. 워낙 특출난 생김새였기 때문에 척 보기만 해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독고성. 이, 간악한 놈. 감히 우리 세가를 공격하다니?” “욕할 여유가 있으면 자신의 생명이나 수습하시지 그래?” 천하의 패륜아(悖倫兒) 독고성은 가차없이 호조를 움켜쥐고 덤벼들었다. 자욱한 살기를 뿜으며 달려드는 모습에서 그가 골수까지 마성에 물든 마인(魔人)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모용 불휘도 나중을 기약하려던 생각을 지체 없이 버리고 접전에 임했다. 우선 상대를 얕보는 마음이 없진 않았으며 또한 그를 제거하는 것이 가문의 명예를 드높일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감안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수호마왕군이 왜 자신을 공격하지 않고 그저 발목만 잡고 있었는지 모용불휘는 곧 알 수 있었다.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자부하는 자신의 공격을 상대는 너무나도 쉽게 파훼시켰다. 그리고 마치 폭풍처럼 반격을 가해오는 것이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상대의 실력에 모용 불휘는 아연해해야 했다. 불과 10년 사이에, 그것도 무공의 무(武) 자도 모른다고 알려진 독고성이 어느새 자신을 넘어서는 초고수로 성장해 있었으니... “어, 어찌 이런 일이...” 모용 불휘는 설마 독고성을 이렇게 급성장시킨 무공이 바로 천하에 악명이 자자한 천자혈마공이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천자혈마공. 이백 년 전의 배교 교주 동방련에 의해 만들어진 무공으로 지금껏 그 무공을 익힌 자는 오직 동방련만이 유일했다. 당시는 마도의 종주인 마교와 혈투를 벌이고 있던 시기였는지라 배교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에 처해있던 때였다. 특히 가공할 마공을 연성한 마교의 고수들이 상대였는지라 배교는 계속되는 패전으로 그야말로 멸망 직전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당시 배교는 천수혈마 동방련의 지휘 하에 놓여있었는데 그는 문파의 멸망을 막기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론상으로만 전해 내려오는 절세 무공을 연성하기로 결정 내린 것이다. 비록 이론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방법이었고 무공을 익힌다면 시간이 갈수록 인성을 상실하는 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동방련은 멸망 위기에 처한 문파를 살리기 위해 결국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 바로 천자혈마공이었다. 그는 비밀리에 납치한 동남동녀 일천 명을 희생시켜 단 1000일만에 천자혈마공을 완성했다. 하루에 동남동녀 한 명분의 정혈을 꼬박꼬박 흡취한 끝에 이 저주받은 무공은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동방련은 천자혈마공을 바탕으로 위기에 빠진 배교를 구해낼 수 있었다. 동방련을 중심으로 한데 뭉친 배교의 무사들은 최후의 결전에서 마교의 정예 무사들을 단숨에 몰살시켰다. 당시 동방련은 단신으로 마교 장로 10여 명을 격살하는 믿을 수 없는 위력을 보였다. 물론 그것은 천자혈마공의 막강한 위력에 힘입은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위기는 그 이후에 다가왔으니... 마교를 물리친 이후 배교는 마침내 강력한 문파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동분서주하던 동방련이 갑자기 미쳐버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천자혈마공의 마성이 골수까지 파고든 때문이었다. 이후로 동방련은 완전히 피에 미친 살귀가 되어버렸다. 가족과 수하들을 단 하나도 알아보지 못한 동방련은 닥치는 대로 살육을 시작했다. 당시 무수한 배교의 무사들이 그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누구 하나 당해낼 수 없었다. 혈귀로 화한 동방련은 무수한 무사들을 참살한 뒤 총단을 빠져나갔다. 당시 죽은 자들은 수를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결국 보다못해 배교에서는 눈물을 머금고 동방련에 관련된 비밀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동방련이 강해지기 위해 동남동녀 천 명을 희생시켰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전 무림은 치를 떨었다. 더욱이 탈출한 동방련이 계속해서 인명을 살상해 나가자 결국 그에겐 전 무림을 망라한 척살령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정사를 막론해서 척살대가 구성되었고 결국 그는 수많은 무사들의 포위 공격 속에 최후를 마치게 된다. 하지만 그 대가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척살대에 가담한 무사들 중 절반 가량이 동방련의 손에 의해 명을 달리한 것이다. 사태가 가까스로 수습되자 배교에서는 천자혈마공을 파기할 것을 전 문파에 널리 천명했고 이 무공을 익힐 경우 설사 교주라 하더라도 용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로 인해 무림은 겨우 잠잠해질 수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저주받은 마공 천자혈마공에 얽힌 비사였다. 그런데 여기 또 천자혈마공을 익힌 또 다른 인물이 등장했으니... “으아아악.” 겨우겨우 버텨나가던 모용 불휘는 결국 천자혈마공의 위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단말마의 비명을 질러댔다.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은 완전히 파헤쳐진 채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고 있었다. 생명이 사라진 모용 가주의 육신은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가 쓰러지는 동시에 저쪽에서 처절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아버님.” 저쪽에서 몸을 뺄 기회만 노리고 있던 모용진의 눈에서 광망이 치솟고 있었다. 그 어느 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가만히 있겠는가? 그는 사력을 다해 포위망을 뚫었다. 막아서던 배교 무사들이 주춤대며 물러서는 순간 그는 가차없이 몸을 날렸다. 목표는 바로 아버지를 죽인 왜소한 흑의인이었다. “죽어라 이놈!” 화려한 검화를 그려내며 육박하는 장검에는 푸르스름한 검기가 선명하게 맺혀 있었다. 검은 일직선으로 흑의인의 등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상대는 무척 간단하게 공격을 막아낸 뒤, 몸을 빙글 돌렸다. 흑의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모용진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네, 네놈은?” “무척 오랜만이군.” 그곳에는 독고성이 싸늘한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모용진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물론 그는 독고성의 정체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왜? 내가 강해졌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는가?” 그들의 뇌리에는 어린 시절에 벌어졌던 일들이 일목요연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독고성에게는 걷잡을 수 없는 복수심을 떠올리게 하는 일화들이었다. 물론 모용진에게는 도무지 상황이 사실로 믿어지지 않았다. 모용진이 소림사에서 한참 수련에 몰두해 있을 당시 독고성은 그저 허드렛일을 하는 막일꾼에 불과했다. 무공의 기본조차도 모르던 추악한 놈. 그런 놈이 일대 일 대결로 아버지를 격살시킬 정도의 초고수로 성장했다니... 독고성의 눈에서 점차 살기가 짙어졌다. 천자혈마공의 연성으로 인해 소림성승이 시술한 칠종단금술을 완벽하게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젠 살심을 떠올려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곧 싸늘한 음성이 내뱉어졌다. “아마도 그 때에 대한 계산을 해야겠지?” “이놈! 가만 두지 않겠다.” 노기가 충천한 모용진은 앞 뒤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다. 상대의 실력을 제대로 가늠하지도 않고 말이다. 그만큼 모용진에겐 아버지의 죽음이 가져다 준 충격이 지대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정파에서 잘 나가는 후기지수라 하더라도 절정급에 오른 아버지의 경지에는 결코 못 미치는 법이다. 상대는 그런 모용불휘조차 압도적으로 밀어붙여 승리를 거둔 초고수. 아무리 분노에 차 있다 하더라도 그는 결코 독고성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불과 얼마 싸우지도 못하고 모용진은 목숨이 사라진 시신이 되어 싸늘한 땅에 몸을 눕힐 수밖에 없었다. 스륵. 축 늘어진 모용진의 피투성이 몸에서 호조를 빼어내는 독고성의 얼굴에는 차라리 광기라고 밖에 볼 수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만큼 복수의 순간은 그에겐 짜릿하기 그지없었다. 복수를 성공시킨 독고성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이미 사태는 완전히 수습된 다음이었다. 그가 데리고 온 수호마왕군은 별다른 희생 없이 모용세가를 멸문시키는데 성공했다. 과연 배교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고수들이었다. 장내에 서 있는 자들은 모두 수호마왕군들이었다.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목숨을 잃거나, 혹은 심한 상처를 입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한 무사가 독고성에게 다가와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생존자는 어떻게 할까요?” 독고성은 물어볼 필요가 있냐는 듯 눈을 한 번 흘기고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머쓱해진 흑의인은 내공을 모아 소리를 질렀다. “생존자는 모조리 죽여라. 설사 시신이라 하더라도 예외는 없다. 확인작업을 해서 확실하게 토막을 치도록 하라.” “존명.” 명성을 날리던 모용세가는 이렇게 멸문의 길을 밟고 있었다. .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30회 "다음 목표물은?" "아직 전서구가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목표가 정해질 때까지 수하들에게 휴식을 주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크크크 그것도 좋겠지. 그렇게 조처하도록." "존명." 공손히 부복하는 흑의인을 보며 독고성은 말없이 시선을 하늘로 던졌다. 주위에서 흑의인들이 날렵하게 산개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자신이 지휘하는 수호마왕군들이었다. 철저히 별동대(別動隊)로 키워진 자들로써 전문적으로 기습공격만을 전담하는 배교의 최고 정예무사들. 이들을 키워내기 위해 배교 총사 사준환은 무려 20여 년에 걸친 장기 계획을 안배했다. 자질이 뛰어난 아이들을 골라 개정대법을 실시한 뒤 갖은 영약을 투입하고, 무려 20년 동안의 혹독한 수련을 거쳐 키워낸 최고의 정예 무사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1천 5백 명이 넘는 아이들이 수련에 들어갔지만 모든 과정을 무사히 마친 아이들은 불과 오백을 넘지 못했다. 그 정도의 처절한 수련을 거친 끝에 이들 수호마왕군들은 같은 나이의 정파의 직전제자도 능히 감당할 만큼의 실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현재 독고성이 직접 통솔하고 있었다. "후후후 정말 꿈만 같군." 휴식을 취하던 독고성은 나지막이 흉소를 날렸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그는 무공의 기본도 모르는 범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초절정 급의 정파 고수를 무리 없이 격살시킬 정도의 가공할 만한 무공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최고의 자질과 오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이루기 힘들었을지도 몰랐다. 천자혈마공의 연성. 그것은 하루 하루가 견디기 힘든 고통의 연속이었다. 매일매일 새끼 양에게서 짜낸 정혈(독고성은 철저히 그렇게 믿고 있다)을 흡취하고, 통상적인 무공연성방법과 전혀 상이한 도리에 따라 천자혈마공을 익혀나가는 일. 그것은 천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이루어졌다. 그 기간이 끝난 후 천자혈마공을 완전히 몸에 배게 하기 위한 수련이 이어졌다. 독고성은 천자혈마공을 연성하는데 말 그대로 목숨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바램은 단 한가지, 소림성승을 시해한 정파 인들을 위시해서 자신을 멸시한 모든 자들을 대상으로 한 복수를 이루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그가 목숨을 걸고 무공을 연성하는 이유였다. 또한 두 번 다시 그 같은 멸시를 당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는 무공 연성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 결과 단 10년 만에 천자혈마공을 극성으로 연마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성을 경하드립니다." 수련을 마치고 연공실에서 나온 독고성을 사준환은 무척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현재 무림이 돌아가는 제반 정세의 설명을 시작했다. "현재 무림은 일촉측발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습니다. 각지에서 정사지간의 국지전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으며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전면전이 터질 것이 확실하다고 사료됩니다. 이미 저희 배교는 무림맹에 맞서기 위해 마교를 비롯한 사도 방파들과 연대해서 마인연맹을 형성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소교주님께서는 앞으로 하실 일이 무척 많으실 것입니다." "크흐흐. 내가 무얼 하면 되오?" 이미 천자혈마공의 마성에 어느 정도 사로잡힌 터라 독고성은 피에 무척 굶주려 있었다. 그런 독고성을 힐끗 쳐다보며 사준환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수호마왕군을 맡아주십시오. 이들은 지금을 대비해서 제가 미리 키워놓은 무사들입니다. 전반적인 전투지휘는 제가 맡겠습니다. 그러니 소교주님께서는 수호마왕군을 이끌고 제가 알려드리는 정파 놈들의 요지를 기습하여 초토화시켜 주십시오. 일종의 별동대인 셈이지요." "바라던 바요. 맡겨 주시오." 독고성의 임무는 그렇게 확정되었다. 소수 정예인 수호마왕군을 지휘, 통솔하여 백도의 중요한 거점을 제거하는 임무. 여기에는 독고성이 가장 합당한 인물이었다. 천자혈마공에 바탕을 둔 강력한 무공, 그리고 마치 야수와 같은 감각으로 그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실전경험의 미비로 다소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의 무공은 차근차근 완성되고 있었다. 무수한 접전을 통해 실전경험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독고성은 마침내 복수를 성공할 수 있었다. 목적했던 놈들 중 한 명에게 말이다. 어린 시절 자신에게 무수한 모욕을 가했던 모용세가의 장자인 모용진. 시간이 흘렀지만 독고성의 뇌리에 각인된 원한은 전혀 지워지지 않았다. "크크크 다른 놈들 역시 내 손을 피하진 못할 것이다." 독고성은 핏발 선 눈을 희번덕거리며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 때 누군가가 그의 곁으로 급히 다가왔다.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다음 목표물이 정해졌습니다." "바라던 바다. 수하들을 소집하라" "존명." 독고성을 위시한 수호마왕군들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자리를 뜨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감옥 속에서 독고성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기구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인생에서 나름대로 절정기라 말할 수 있는 시기를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어왔다. 비록 천자혈마공의 마기에 취한 채 정신 없이 살육을 일삼던 때였지만 말이다. 마도 천하(魔道天下)를 이루겠다는 기치 아래, 오백의 수호마왕군을 대동하고 전장을 비호처럼 누볐던 나날들. 생각이 거듭될수록 죽은 수하들의 얼굴이 독고성의 뇌리에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들은 수하이기에 앞서 절친했던 전우였으며 서로를 지켜주었던 은인들이기도 했다. 원래 수호마왕군의 구성원들은 사준환이 선발해서 키워놓은 무사들이었다. 어린 시절 선발되어 20년에 가까운 지옥훈련을 거치고 나서 독고성의 휘하에 임의로 배치된 무사들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최후의 순간에 자신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눈앞에 펼쳐진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함께 전장을 전전했던 대장을 구하는 쪽을 서슴없이 선택했던 것이다. 자신이 총단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목숨을 바쳐 적의 발길을 저지하고, 또한 운공 중인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부대장 종리령 이하 모든 무사들이 장렬하게 죽어갔다. 그들이 목숨을 잃은 배경은 다름 아닌 사준환에 의해서였다. 독고성의 눈에서 갑자기 광망이 일어났다. "죽을 때 죽더라도 너희들의 복수는 내가 꼭 해주겠다." 거듭 다짐하긴 했지만 그것이 이루기 힘든 일이란 것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우선 그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이곳이 중원과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 세계란 것을 차지하고서라도 이제 그는 평범한 강호 무사 한 명도 감당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것이다. 단전이 사라져버려 내공을 새로 연성하기란 불가능한 일. 또한 초식이나 외공 방면으론 그다지 조예가 없었으므로 새로이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오로지 전장에서 얻은 숱한 실전경험과 감각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독고성은 뭔가를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이곳에서 사용하는 마법에 관한 생각이었다. 이미 그는 슈렉하이머를 통해 개략적인 마법의 개념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다. "우선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마법이다. 슈렉하이머의 말대로라면 마법은 단전을 잃은 상태에서도 충분히 구사할 수 있을 듯 싶다. " 하지만 그에게 가장 당면한 문제는 바로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그 시험에서 살아남아야만 이후의 일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오우거라고 했나? 과연 어떤 괴물일지 궁금하군." 독고성은 앞으로 싸우게 될 마지막 상대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자신에게 남아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상대를 제압해야만 이후를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미지의 존재, 오우거를 상대하기 위해 상념에 빠져 들어갔다. 쿠르르르. 묵직한 쇠사슬 소리와 함께 쇠격자로 된 거대한 철문이 서서히 올라갔다.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뚫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문이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지금 올라가는 철문말고도 세 개나 되는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굉음과 함께 첫 번째 철문이 천장에 단단히 고정되자, 다음 철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독고성은 하나 둘씩 올라가는 철문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생사를 결정짓는, 아니 앞으로의 운명을 결정지을 상대를 맞이하기 위해 그는 전신의 감각을 극도로 곤두세운 상태였다. 쿵. 마지막 하나의 철문만을 남겨놓고 나머지 문들은 모조리 천장에 고정되었다. 그러자 철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괴성은 더욱 크게 들려왔다. 캬오오오. 극도로 화난 맹수만이 낼 수 있을 듯한 짐승의 부르짖음. 독고성은 그것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존재인 오우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마지막 대결을 위해 벌써 두 번씩이나 시험을 치른 지하감옥에 들어간 상태였다. "침착해야 한다. 독고성." 그는 나직이 내뱉으며 오른 손에 차여진 스파이크 건틀릿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마지막 대결이니 만큼 그에겐 원하는 무기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중장갑주와 철퇴, 모든 종류의 장비를 막론하고 말이다. 하지만 독고성은 모든 것을 마다했다. 그나마 호조와 비슷한, 트롤과의 격전에서 사용했던 스파이크 건틀릿만을 선택한 상태였다. 무기를 들고 들어온 병사들이 거듭 중갑주와 방패를 쓸 것을 권했지만 독고성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미 트롤과의 격전을 통해 갑주 방패 따위가 별달리 쓸모가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터득한 때문이었다. "이번에 상대할 놈은 트롤보다 월등히 강한 놈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막는 것보다 피하는 쪽이 용이할 것이다." 모든 무공을 소실했다고는 하나 수많은 격전을 치러가며 얻은 반사신경과 감각만은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비록 신법을 운용할 내력이 전무한 상태지만 그의 몸놀림은 범인보다는 월등히 빨랐다. 그것 하나만을 믿고 독고성은 변변한 갑옷도 고르지 않은 채 대결장에 들어온 것이다. 그것이 이상했는지 병사들은 저마다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상식으론 하다 못해 체인 메일 위에 플레이트 메일이라도 착용해야 겨우 오우거에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래 견디지 못하고 오우거의 한끼 식사가 될 것이 자명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독고성의 생각은 달랐다. "그딴 것 입어봐야 몸놀림만 느려질 뿐이지." 그는 시선을 내려 손에 든 스파이크 건틀릿을 쳐다보았다. 특이하게도 저번에 트롤과 결투할 때와는 건틀릿의 형태가 무척 달랐다. 원래는 4개의 얄팍한 칼날이 달려있었지만 지금은 모조리 잘려나간 상태였으며 대신 무척 튼튼해 보이는 쇠송곳 한 개가 중지손가락 손마디 부분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왼쪽 건틀릿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그가 베니테스에게 부탁해서 특별히 주문 제작한 무기였다. 독고성이 미리 생각해 놓은, 오우거를 상대할 해법에 맞춰 제작된 것이기도 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송곳 하나 보다는 칼날 네 개가 나을 텐데……." 이상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베니테스는 별 상관없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자고로 사형수에겐 다소 과중한 부탁이라도 들어주는 법이다. 무기가 완성되자마자 독고성은 대결장에 곧장 투입되었고 곧이어 있을 오우거와의 접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가 바짝 긴장하고 있는 동안 마침내 마지막 철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철문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거대한 형체가 거세게 철문에 부딪쳐왔다. 쾅. 자욱한 먼지와 함께 격자문이 들썩였다. 충격으로 인해 두터운 철문이 금방이라도 떨어져나갈 듯 휘청거렸다. 그것을 보아 괴물의 힘이 얼마정도인지 익히 짐작이 되었다. "한 대 맞으면 그대로 염라대왕과 대면하겠군." 나직이 중얼거린 독고성은 말없이 오우거가 감옥 속으로 들어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미지의 존재 오우거는 마침내 독고성의 앞에 육중한 몸매를 선보였다. 콰우우우. 오우거의 모습을 목격하자 독고성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세상에……." 땅 위에 저런 생물이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오우거의 모습은 기괴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오우거는 무시무시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우선 독고성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오우거에게 머리통이 두 개 달려있는 점이었다. 무릇 동물이라면 뇌가 들어있는 머리통은 분명 하나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보편적인 개념을 깨어버리려는 듯 오우거는 두 개의 머리통을 가지고 있었다. 달려 있는 눈동자가 각각 움직이는 것을 봐서 두 개의 머리통은 각자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있음이 분명했다. 뛰어들어온 오우거는 눈에 불을 켜며 대결장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핏발 선 눈동자가 전신을 훑고 지나가자 독고성은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감옥 안에 독고성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오우거의 눈에서 핏빛 광채가 급격히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식욕 때문이었다. 이번 대결을 위해 오우거는 꼬박 일주일을 굶었다. 그 때문에 놈은 무척 심기가 사나울 수밖에 없었다. 먹잇감을 발견하자 놈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달려들었다. 거구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빠르기였다. 오우거가 들고 있는 거대한 몽둥이, 차라리 건물의 기둥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무지막지한 무기가 엄청난 파공성과 함께 독고성의 몸을 노렸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31회 독고성의 입에서 다급한 헛바람 소리가 새어나왔다. "헉." 오우거의 빠르기가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에 혼비백산한 그는 사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콰쾅. 그가 있던 자리의 석판이 산산이 깨어져나가며 먼지를 자욱하게 일으켰다. 나무로 된 몽둥이에 의해 커다란 석판이 깨어져 나갈 정도니 그 힘이 어느 정도인지 익히 짐작할 만했다. 덩치는 크지만 동작이 다소 느렸던 트롤을 연상했었기 때문에 독고성은 오우거의 반응속도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거대한 거구가 이렇게나 빨리 움직일 수 있다니……. 오우거의 속도는 신법을 펼치는 무림 고수의 몸놀림에 거의 육박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노릇이라 독고성은 계속해서 회피동작을 취했다. 상황을 봐서 몽둥이에 격중되는 때가 바로 이승을 하직하는 순간임은 자명했다. 물론 공격은 엄두도 내지 못했으며 그저 사력을 다해 몽둥이를 피해낼 뿐이었다. 다행히 전장에서 갈고 닦은 감각만은 건재했기 때문에 독고성은 오우거가 공격해오는 사각(死角)을 미리 간파할 수 있었고 겨우나마 피해낼 수는 있었다. 먹잇감이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간발의 차이로 빠져나가자 오우거의 흉성은 극도로 치밀어 올랐다. "콰우우우." 놈은 연신 기성을 내지르며 독고성의 뒤를 쫓았다. 4.5미터의 당당한 키에 어울리게 팔 길이 역시 길었기 때문에 오우거는 먹잇감의 진로에 대고 연신 몽둥이질을 했다. 휘이이익. 엄청난 파공성과 함께 내려쳐지는 미증유의 거력. 그것이 정확히 자신이 몸을 날리는 방향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간파한 독고성은 순간적으로 몸을 핑그르르 돌렸다. 힘껏 내딛은 왼발 축을 중심으로 그의 몸이 급격히 방향을 바꾸었다. 콰쾅. 등뒤에서 굉음과 함께 엄청난 충격파가 전해졌다. 산산이 부서진 돌 조각이 날아와 등에 박히는 것을 느끼며 독고성은 다시 몸을 날렸다. 방향은 바짝 붙어 자신을 움켜쥐려 하고 있는 오우거의 다리 사이였다. 부웅. 솥뚜껑 만한 손이 간발의 차이로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위기를 모면한 독고성은 오우거의 다리 사이를 빠져나와 가차없이 몸을 날렸다. '괴물은 나보다 빠르다. 잡히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방향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또다시 먹잇감을 놓친 오우거는 기성을 지르며 독고성의 뒤를 쫓았다. 육중한 몸이 마치 거짓말처럼 방향을 바꿔 질주를 시작했다. 독고성이 비록 사력을 다해 달리고는 있었지만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잡히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방향을 바꾸는 독고성. 하지만 오우거는 멈칫멈칫 하면서도 별다른 무리 없이 독고성의 뒤를 쫓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숨마저 가빠오고 있었지만 독고성은 아랑곳없이 달리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움직임이 정말 놀랍군. 오우거의 손에서 저처럼 쉽게 빠져나갈 수 있다니." 독고성의 움직임에 대한 세르게이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는 지금 베니테스와 함께 지하감옥의 위 부분에 앉아 벌어지는 혈투를 관람하고 있었다. "정말 놀랍군요. 트윈헤드 오우거라면 어지간한 기사들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놈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오래는 견딜 수 없을 듯 하군. 이리저리 피하기만 할 뿐 공격할 엄두는 내지 못하니 말이야." 오우거는 가공할 만한 스피드를 차지하고서라도 우선 가죽이 무척 두텁기 그지없는 몬스터였다. 어지간한 무기로 찔러보아야 헛되이 검만 부러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거기에다 급소가 모여있는 상체 부분은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으니 오우거는 숙련된 기사가 아니고서는 잡을 수 있는 존재가 감히 없다 해도 무방할 정도로 강력한 몬스터였다. 물론 다수의 병사들을 동원하면 잡을 수 있긴 했지만 대신 막대한 피해는 각오해야 했다. 그러니 세르게이와 베니테스가 독고성의 승리를 생각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그들의 눈엔 이미 독고성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오우거의 위장 속으로 들어갈 고깃덩이로만 보였다. "그래, 놈이 자네에게 자신의 운명을 물어보았다고?" "그렇습니다. 이번 대결에서 승리하면 어떻게 되는지 물어왔습니다." "그래? 어떻게 대답했나?" "저번에 공작 전하께서 하신 말씀을 바탕으로 대답해 주었지요. 살아남는다면 이곳에서 사역을 하던지 병사로 징집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살아난다면 가능한 얘기겠지? 하지만 상황을 봐서 놈이 살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둘이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는 모습과는 판이하게 독고성은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콰쾅. 주위의 석판들은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서져나갔다. 퉁겨져 나온 돌 조각 때문에 입은 상처로 독고성의 전신은 선혈이 낭자했다. 이미 숨이 턱 밑까지 차 오른 상황. 하지만 오우거는 전혀 힘이 빠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헉, 헉." 몸이 흠뻑 젖은 솜뭉치처럼 나른했지만 그래도 독고성은 몸을 날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죽는 것은 하등 겁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오우거의 먹이가 된다면 죽어간 수호마왕군에 대한 복수는 누가 할 것인가? 그 생각 때문에 독고성으로써는 쉽사리 삶을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때 오우거의 공격이 바로 옆에 작렬하며 돌 조각 세례가 그의 전신에 퍼부어졌다. "우욱" 시큰하는 감각과 함께 이마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핏물이 눈을 덮어 시야마저도 가물가물해져 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바로 등뒤에서 느껴지는 오우거의 거친 숨소리. 바짝 접근해 있음이 분명했다. 여러모로 보아 절대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이었기에 그는 이를 으스러져라 악물었다. "헉, 헉. 이대로 가다간 당한다." 그는 전방에 보이는 벽을 향해 사력을 다해 질주했다. 이번 대결에서 살아남기 위해 밤새도록 생각해서 준비해 온 방법. 바로 그것을 시전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힘을 모조리 짜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가던 오우거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보통 인간이라면 이 정도 되면 도주를 포기하는 것이 십상이었는데 유독 이 인간만은 끝까지 자신을 애먹이는 것이다. 연신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오우거는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겠다는 기세로 추적을 시작했다. 인간이 달려가는 방향은 막다른 석벽. 더 이상 도망칠 길이 없다는 판단에 오우거 역시 모든 힘을 짜내어 추격하고 있었다. 달려감에 따라 지하감옥의 석벽이 급격히 확대되고 있었다.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독고성은 열심히 달리고 또 달렸다. 마치 석벽에 머리를 박고 그대로 죽어버리려는 듯 돌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 뒤에 바짝 붙어 오우거가 추격하고 있었고 둘 사이의 거리는 급격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끝났군." 그 광경을 지켜보던 베니테스의 눈에 체념의 빛이 어렸다. 상황을 봐서 이방인이 더 이상 버틴다는 것은 아예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세르게이는 상황이 끝났다고 판단했는지 관람을 포기하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때 이변이 일어났다. 석벽을 들이받을 듯 달려가던 이방인이 달려가던 탄력 그대로 석벽을 걷어차더니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뒤집는 것이 아닌가? 탄력을 적절히 이용한, 정말 놀랍다고 볼 수 있는 몸놀림이었다. 이방인은 간발의 차이로 피해냈지만 불운하게도 오우거는 그렇지 못했다. 바짝 붙어 질주하던 오우거는 그만 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벽과 세차게 충돌해 버렸다. 꽝.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하감옥 전체가 들썩였다. 석벽이 푹 패여 나가며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오우거의 거대한 몸은 반탄력으로 인해 퉁겨져 바닥에 볼썽 사납게 나뒹굴었다.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정도의 충격. 베니테스는 하지만 저 정도로 오우거가 죽을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만큼 오우거는 강인한 생명체인 것이다. 그의 눈에 비틀거리며 착지한 이방인이 쓰러져 있는 오우거에게 달려드는 장면이 들어왔다. "재미있군." 뜻밖의 상황에 마음을 바꿨는지 세르게이는 다시 의자에 앉아 장내를 주시했다. 독고성은 날렵하게 오우거의 몸 위로 뛰어올랐다. 몬스터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지금이 그에겐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단숨에 몸통 부분으로 뛰어올라간 그는 오른 손에 찬 건틀릿을 들어올렸다. 건틀릿에 단 하나만 달려있는 송곳의 끝은 날카로움을 자랑하려는 듯 번들거리고 있었다. "에잇." 독고성은 가차없이 오우거의 눈동자에다 송곳을 찔러 넣었다. 트롤을 무력화시켰던 방법을 이곳에서 다시 재현하려는 것이다. 벽면에 충돌한 충격으로 반쯤 감겨져 있던 오우거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푸슉. 기다란 송곳은 눈동자를 그대로 관통해 버렸다. 물론 그 뒤에 위치한 오우거의 대뇌까지 꿰뚫어버린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오우거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에 독고성은 쾌재를 불렀다. "성공이야. 이제 끝났어." 가쁜 숨을 내쉬던 독고성은 일순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게 결코 끝이 아니었으니……. 파공성과 함께 무언가가 맹렬한 기세로 날아오자 독고성은 반사적으로 두 손을 교차시켜 막아갔다. 뒤로 느껴지는 둔중한 충격. "으헉." 그의 왜소한 몸이 맹렬히 퉁겨졌다. 통증으로 냅다 휘저은 왼팔에 그만 적중되고 만 것이다. 독고성은 거의 일장 가까운 거리를 날아가 바닥에 냅다 쳐 박혔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낙법을 이용해서 충격을 줄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의 눈에 오우거가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키는 장면이 들어왔다. 오우거는 두 손으로 남은 머리를 틀어쥔 채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아마도 눈을 보호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공격을 받은 머리는 완전히 기능을 잃었는지 축 늘어져 있었다. "젠장 놈의 머리가 두 개였었지." 맥이 탁 풀렸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오우거가 일어난다면 그는 공격해 볼 기회를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는 뼈마디가 아우성치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우두두둑. 어디 한 군데가 단단히 부러졌는지 극심한 통증이 전신을 관통했다. 그는 고통을 애써 무시하며 다시 오우거에게로 육박해 들어갔다. 상체를 일으킨 오우거는 손으로 눈을 꼭 감싼 채 엎드려 몸을 뒤집으려 하고 있었다. 만약 일어난다면 그 즉시 죽은목숨이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독고성은 사력을 다해 달렸다. 하지만 그가 공격할 목표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오우거는 이미 성한 머리에 달려있는 눈을 손으로 빈틈없이 감싸고 있는 상태. 건틀릿의 송곳으로는 도저히 두터운 오우거의 손을 뚫을 수가 없어 보였다. 아니 설사 뚫는다고 해도 두터운 손등을 감안하면 송곳은 아마도 눈동자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독고성은 아니었다. "에잇." 몸을 일으키기 위해 엎드려 있는 오우거. 독고성은 달려가던 탄력을 이용해서 오우거의 등판 위로 뛰어올랐다. 놀란 오우거가 몸을 뒤트는 것이 느껴졌지만 독고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등 한복판을 단단히 디디고 선 뒤, 송곳을 찔러 넣을 장소를 물색했다. "여기로군." 독고성이 고른 장소는 오우거의 어깨 죽지 뼈가 서로 만나는 장소였다. 인간으로 치자면 치명적인 혈도인 명문혈이 있는 곳을 택한 것이다. 판단도 짧았지만 행동은 그야말로 순간적으로 이루어졌다. 건틀릿에 달린 송곳이 그곳을 사정없이 파고 들어갔다. "쿠어어어." 오우거의 입에서 고통에 겨운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덩치로 보아 바늘 하나에 찔린 정도로 예상할 수 있었지만 오우거의 반응은 무척 의외였다. 그 모습에서 독고성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놈은 인간과 혈도가 동일하다." 가장 중요한 것을 파악한 이상 머뭇거릴 필요는 없었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32회 건틀릿에 달린 송곳이 또 다른 목표물을 향해 쏘아졌다. 그가 택한 곳은 인간으로 따지면 치명적인 요혈이 있는 장소. 이미 인체의 혈도는 독고성의 뇌리에 명확히 기억되어 있었으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독고성이 노린 곳은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송곳에 의해 깊숙이 파헤쳐졌다. 오우거의 전신이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독고성이 연이어 요혈을 건드리고 있었으므로 오우거는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다. 마침내 가슴의 거궐혈에 송곳이 파고드는 순간 오우거의 떨림이 갑자기 멎어버렸다. "크워."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눈이 돌아가며 오우거는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박아 버렸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덩치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허망한 죽음. 하지만 독고성은 그래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 공격을 가해 머리 복판에 있는 백회혈까지 꿰뚫어버린 다음에야 그는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헉, 헉"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피가 흘러내려 이젠 눈조차 뜰 수 없었다. 한계에 달하는 힘을 모두 사용한 때문에 근육엔 경련까지 일어나고 있었으니……. 그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는 감옥 위 부분으로 희미한 미소를 한 번 보낸 뒤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감옥 위쪽에서는 눈동자 4개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빛을 띠고 죽은 오우거의 시체와 축 늘어진 독고성을 번갈아 주시하고 있었다. 이곳은 제법 규모가 큰 장원이었다. 인가와 상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원의 규모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10여 채가 밀집되어 있는 전각군을 볼 때 이곳엔 적어도 일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거주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이제 하나도 남김없이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야밤을 틈타 침투한 일련의 고수들에 의해 깡그리 도륙당한 것이다. 날이 밝은 지금 모든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사방에는 생명을 잃은 시신들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널려 있었으며 벌써 잔치를 벌이려는 듯 까마귀 떼가 장원 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간혹 흑의를 입은 시신들도 눈에 띄었는데 그것은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듯 했다. 이곳은 바로 무림맹의 비밀 거점이었다. 사천 지방의 아미파와 당문을 지원하기 위해 비밀리에 건설해놓은 무림맹의 후방기지인 셈이다. 물론 이곳을 보호하기 위해 상당한 수준의 고수들이 파견되어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급습한 자들은 그들보다 월등히 강한 자들이었다. 이름하여 수호마왕군. 마도의 떠오르는 샛별이라 불리는 파천혈마(波天血魔) 독고성의 지휘 하에 있는 무적의 군단이 불시의 기습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들의 위력을 증명하듯 죽어있는 흑의인의 시신은 몇 되지 않았다. 일천 명의 무림맹 무사들이 떼죽음 당했지만 죽은 수호마왕군 무사는 불과 사십 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독고성은 착잡한 표정으로 목숨을 잃은 수하들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접전이 계속되며 하나 둘씩 수하를 잃어 가는 것이 무척 애석했던 독고성이었다. 처음 그에게 배속되었을 때 수호마왕군의 총 수는 정확히 오백 명이었다. 하지만 3년 가까이 접전을 치러가면서 그 수는 이제 삼백으로 줄어 있었다. 그만큼 그들이 싸우는 전장은 흉험하기 그지없었고 위험도가 높은 작전에만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돌연 바로 옆의 전각에서 갑자기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 그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든 독고성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 전장에서 많이 들어보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경우가 달랐다. 생을 마감하며 내뱉는 단말마가 아니라 극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내뱉는 비명소리인 것이다. 독고성은 얼굴을 찡그렸다. "생각보다 길게 끄는군." 전각 안에는 총단에서 파견 나온 수석호법이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그는 지금 살아남은 무림맹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심문을 벌이고 있었다. 심문에는 필수적으로 고문이 동반되는 것이 당연했고 생포된 자들은 전신이 만신창이가 되어 죽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 전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깡그리 털어놓고 말이다. 하지만 독고성은 그것이 별달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대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순간적으로 숨통을 끊는 것을 선호하는, 다소 호쾌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 지라 이처럼 고통을 계속해서 주는 것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전체적인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총단에서 직접 파견되었는지라 수석호법이 하는 일에 별달리 제동을 걸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목표물이 정해지면 수하들을 대동하고 즉각 박살내는 것이 그의 임무였기 때문이다. 목표를 정하는 것은 철저히 사준환의 몫, 자신은 오로지 행동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지루하군." 사방에 널려 있는 시신들 사이를 터덜터덜 걸어간 독고성은 잘려나간 나무뿌리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훤칠한 키를 가진 흑의인 하나가 독고성에게 급히 다가왔다. "대주님께 보고 드립니다." "말하라."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이 제법 잘 생겼다 볼 수 있는 청년은 독고성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바로 수호마왕군의 부대주 중 하나인 곽상이었다. 두 자루의 쌍검을 능숙하게 잘 다루는 고수로써 검술실력 뿐만 아니라 잘 돌아가는 머리를 인정받아 독고성의 보좌로 발탁된 자이기도 했다. 총 부대장 종리령과는 별개로 말이다. 곽상은 나지막한 어조로 보고를 시작했다. "조사에 의하면 탈출한 자는 전무합니다. 이미 구백 팔십 구의 시신을 확인했으며 이곳 책임자였던 추운검객 한현필의 시신도 확인되었습니다." 그는 연신 비명이 터져 나오는 장원을 힐끗 쳐다본 뒤 말을 이어나갔다. "곧이어 추가될 다섯 구의 시신을 합친다면 조사한 것과 한 치의 틀림도 없이 동일합니다." 하지만 독고성은 거기엔 별달리 관심이 없다는 태도였다. 그의 관심사는 오히려 다른 것에 있었다. "수하들의 피해상황은?" 잠시 머뭇거리던 곽상은 지체 없이 보고를 시작했다. "사망 사십 이 명, 그리고 중상이 십 칠 명입니다. 물론 경상자는 보고에 넣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중상이라 하면 신체의 일부를 잃어 두 번 다시 검을 들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심각한 상처를 입었더라도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면 결코 중상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독고성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안타깝군." 잠시 침묵을 지키던 독고성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시신을 수습해서 양지바른 곳에 고이 묻어주도록 하라. 그리고 중상자는 일단 사천 분타까지 데리고 간다." "알겠습니다." 곽상은 당연하다는 듯 냉큼 대답했다. 이미 그것은 그들에게 익숙해진 처리방법이었다. 통상적으로 마도의 무사들은 동료가 더 이상 검을 잡을 수 없을 정도의 부상을 입는다면 가차없이 목숨을 거둬주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었다. 수호마왕군처럼 별동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조직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남은 동료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희생하는 것, 이것은 마도 무사들에겐 하나의 철칙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고성은 지금까지 그 원칙을 철저히 무시해 왔다. 접전 중에 다리를 잘리거나, 양팔을 잃은 무사의 경우에도 그는 자신이 직접 업어서라도 총단으로 데리고 갔고, 남은 여생을 편히 살 수 있도록 온갖 조처를 취해주었다. 이것은 지금껏 배교에서 유래가 없던 일이었고, 또한 겉으로 보이는 독고성의 모습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파천혈마(波天血魔) 독고성. 이것이 바로 백도에서 붙여준 명칭이었다. 살육과 파괴를 극단적으로 즐기는 마인, 심지어 백도 무사들에겐 죽음의 마왕으로까지 일컬어지는 독고성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단면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그의 손에 의해 죽은 백도 고수들은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였고 또한 그는 살인을 할 때 손속에 추호도 사정을 두지 않았다. 비참했던 성장배경과 저주받은 마공인 천자혈마공을 연성했다는 것을 따져보면 일견 당연해 보이기도 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차지하고서라도 그는 수하에 대한 애착심이 유난히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적에게는 생각도 하기 싫은 끔찍한 마두에 불과했지만 수호마왕군 무사들에게 독고성은 실력 있는 대장이며 또한 자신들을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형님과도 같은 존재였다. 사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탁월하고 냉철한 판단력으로 희생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맡은 임무를 무리 없이 완수하는 능력이 그에겐 있었다. 만약 독고성이 없었더라면 수호마왕군은 결코 지금 정도의 전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수호마왕군 무사들은 독고성의 명령이면 기름을 지고 불 속에도 서슴없이 뛰어들 정도로 충성심이 지극했다. 정파에서 그를 살생밖에 모르는 마두로 평가절하 하는 것은 그들에겐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다른 사람, 특히 적에겐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독고성은 수하들에게만은 지극할 정도로 잘 대해 주었다. 낙오된 수하들이 있다면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가서라도 구출해 올 정도로 말이다. 심지어 목숨을 잃은 수하들의 시신을 손수 땅을 파서 묻어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 때문에 수호마왕군 무사들은 하나같이 독고성에게 깊이 매료되어 있는 상태였다. 설사 그를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는 분위기가 팽배하고 있는 것이다. 곽상은 잠시 착잡한 눈빛으로 독고성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뭔가 고뇌하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본 독고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뭘 하고 있나? 전사자와 부상자를 수습해야지." "아, 알겠습니다." 상념에서 깨어난 곽상이 다급하게 수하들을 불러모으려고 했다. 그 때 등뒤에서 갑자기 묵직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안됩니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독고성과 곽상의 고개가 음성이 터져 나온 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사십대 후반의 냉막한 얼굴을 가진 무사가 서너 명의 수하를 대동하고 걸어왔다. 무슨 짓을 했는지 그들의 손은 온통 피로 젖어있었다. 그가 바로 총단의 수석호법이었다. 그는 자신감에 찬 태도로 조금 전 고문을 통해 밝혀낸 사실을 독고성에게 늘어놓았다. "조사 결과, 사천 북쪽에 있는 세검산장에 다수의 무림맹 고수들이 포진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들은 본교의 하남 분타를 기습할 채비를 한창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 즉시 수호마왕군을 대동하고 그곳을 공격해 주십시오. 이것은 한 시가 급한 일입니다." 그 말에 곽상은 안절부절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중상을 입은 동료들이 어떻게 처리될 것인지가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곽상의 모습을 힐끗 쳐다본 수석호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마디 내뱉었다. "부대주. 애석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네. 그들 역시 구차한 삶을 택하기보단 깨끗한 죽음을 더 원할 것이야. 그러니 지금 즉시 그들의 목숨을 거두길 부탁하겠네. 수호마왕군은 지금 즉시 세검산장으로 투입되어야……." 그러나 수석호법의 말은 중도에 끊겨버렸다. 뒤에서 들려온 노성에 가로막힌 것이다. "누구 마음대로……." 고개를 돌린 수석호법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곳에는 독고성이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소 기가 꺾이긴 했지만 수석호법은 지지 않고 일의 당위성에 대해 설명했다. "소교주님. 수하를 아끼는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이것은 한 시가 급한 일입니다. 하남 분타에는 적을 막을 병력이 전혀 없습니다. 서둘러 출동하지 않는다면 분타를 송두리째 잃을 수도 있……." 그러나 독고성은 단호하게 수석호법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는 불타는 듯한 안광을 내뿜으며 한자, 한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수호마왕군은 사천 분타에 돌아가 전열을 재정비 한 후에나 움직일 것이다. 설사 총단이 공격대상이라 할 지라도 이 명령은 철회되지 않는다." 말을 마친 독고성은 곽상을 쳐다보며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명령을 실시한다. 죽은 동료들을 묻은 뒤 중상자들을 데리고 사천 분타로 복귀한다. 실시." "존명." 곽상은 희열의 빛을 떠올리며 냉큼 복명했다. 함께 전장을 전전했던 동료들을 살리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수호마왕군 무사들은 곧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패를 나눠 한 패거리는 죽은 동료를 묻고 남은 패거리는 마차를 구해 중상자를 태우느라 난리법석을 떨었다. 그 모습을 총단 수석호법은 곤혹스런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쿠르르르. 각기 말을 탄 채로 수호마왕군은 사천 분타 쪽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무림맹 지단에서 노획한 마차에 중상자들을 가득 싣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동속도는 극히 느렸다. 제일 선두에는 독고성이 흔들리는 말에 몸을 내맡긴 채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으며 무사들 역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경계하며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대열의 후미에는 총단의 수석호법이 위치해 있었는데 그는 지금 안달이 난 듯한 표정으로 마차를 쏘아보고 있었다. 일견해 무척 화가 난 듯한 표정이기도 했다. '이런 빌어먹을…….' 사실 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이제 무사라 부를 수도 없는 폐물들 때문에 일을 그르치게 생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내색은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명목상 배교의 절대자는 바로 독고성이었으므로 겉으로는 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척 해야 하는 것이 수석호법의 입장이었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33회 멀찍이 떨어져 있는 독고성의 등을 표시 나지 않게 쏘아본 수석호법은 속으로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크크크 놈. 지금은 비록 제 세상이겠지만 조만간 두고보라지.' 묵묵히 걷고 있는 수호마왕군들을 한 번 쓸어본 수석호법은 소리 없이 뒤로 빠졌다. 비록 이들이 명목상 배교의 최고 정예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에겐 한낱 소모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의 정체는 원래 중원 각지에서 납치해온 아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출신은 다양하기 그지없었다. 권문세가의 자제도 있었고 또한 천한 백정이나 농민의 자식들도 있었다. 물론 정파 제자의 자식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었다. 자질만 있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납치해서 수련장에 투입했기 때문에 배교로써는 이들을 잃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 많은 아이들이 수련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갔는지도 몰랐다. '어차피 소모품이다. 독고성 역시 마찬가지…….' 비록 겉으로는 독고성을 모시는 척 했지만 그는 이미 따로 모신 주군이 있었다. 지금껏 그는 주군의 명령을 받들어 온갖 임무를 수행해 왔던 것이다. 대열의 맨 뒤로 빠진 그에게 누군가가 접근해왔다. 무척 강퍅하게 보이는 얼굴에 구레나룻이 무성하게 나 있는 중년 무사. 그의 정체는 바로 수호마왕군의 총대주인 철담사령(鐵膽邪靈) 종리령이었다. 대부분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구성된 수호마왕군에서 유일하게 40대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수석호법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며 전음을 건네 왔다. ―부르셨습니까? 수석호법님. 물론 수석호법 역시 전음으로 화답했다. ―수고가 많소. 총사께서는 종리 총대주의 노고를 결코 잊지 않고 계시오. ―이를 데가 있겠습니까? 수석호법은 대열의 선두에 서 있는 독고성의 등을 힐끗 쳐다본 뒤 말을 이어나갔다. 이 중에서 전음을 엿들을 수 있는 능력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바로 독고성. 그러므로 그에 대한 대비를 충분히 해야 했던 것이다. ―그의 현재 상태는 어떻소? ―이상 징후는 별달리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정파 놈들을 상대할 때는 마치 미친 호랑이처럼 날뛰지만 무사들에게는 별달리 마성을 드러내진 않습니다. ―그렇소? 이상하군. 이 정도 되었으면 마성이 한 번쯤은 발작할 만도 한데……. 수석호법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부 문서에 의하면 천자혈마공의 창시자인 동방련은 무공을 익힌 지 삼 년 째 되는 날 첫 발작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독고성 역시 이때쯤이면 첫 발작을 일으킬 만도 한데 예상을 뒤엎고 아무런 징후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나 보군. 좋소. 종리 총대주는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관찰하도록 하시오. 분명히 발작을 일으킬 테니 말이오. ―알겠습니다. 미미하게 고개를 까딱한 종리령은 서슴없이 수석호법의 옆에서 멀어져갔다. 비밀을 요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남의 눈을 극도로 의식해야만 했다. 그런데 고개를 돌린 종리령의 얼굴에는 뭔가 침통한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뭔가 회의적인, 나름대로의 고뇌가 담겨있는 표정이었다.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 수석호법은 만족한다는 듯 얼굴을 활짝 폈다. '천자혈마공은 그 가공할 위력만큼이나 부작용이 심한 마공이다. 오죽했으면 이백 년 전 동방련조차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상태로 처자식과 심복들을 깡그리 죽여 없앴을까……' 불연 듯 그의 뇌리에 이 모든 일을 꾸민 인물이 떠올랐다. 주군을 떠올리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비록 충성을 맹세한 주군이긴 했지만 어쩔 땐 자신도 모르게 그에 대한 공포심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있었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야. 이 모든 일을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안배할 수 있다니. 그 누가 그를 사람이라 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자신을 따르는 자에겐 확실한 당근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때문에 수석호법에겐 그를 멀리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소교주는 오래지 않아 발작을 시작할 것이다. 발작의 징후가 보이면 수호마왕군을 최대한 무림맹 근처로 이동시켜야 한다. 첫 발작이 있은 후 정확히 이틀 후면 마인이 되어버리니까 말이다. 어차피 수호마왕군은 하나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림맹 녀석들은 그로 인해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다. 크하하하.' 수석호법은 속으로 계속해서 괴소를 흘리고 있었다. "저, 대장님"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몰고 있던 독고성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부대주인 곽상이 뭔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잠시 머뭇거리던 곽상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조금 이상하시지 않습니까?" "뭐가 말인가?" 주위를 힐끗 돌아본 곽상은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이번 작전 말입니다. 아니 이번뿐만 아니라 최근에 벌어진 작전이 모두 말입니다." "………." "사실 요즈음 행해진 작전이 우리 수호마왕군에게 다소 버겁다는 느낌이 자꾸 들어서 말입니다. 이번 기습작전만 해도 대장님께서 정파의 수뇌부 세 명을 단숨에 처리해 주셔서 성공할 수 있었지만 원래 대로라면 성공하기 힘든 작전이었습니다. 최정예 정파 무사 일천 명이 운집해 있는 곳을 저희 수호마왕군 삼백 이십명 만으로 친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가능성이 희박한 일입니다." 곽상의 말에 독고성은 빙긋 웃으며 화답했다. "그래도 우린 성공하지 않았나?" "하지만 최근 들어 자꾸만 사상자가 늘고 있습니다. 물론 인원 보충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만 해도 59명을 잃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물론 곽상은 중상자는 전력에서 제외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두 번 다시 검을 들 수 없을 테니까……. "속하는 총사의 의도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수호마왕군의 힘을 줄이려는 의도로 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실 곽상의 발언은 도가 지나친 것이었다. 일반적인 마도 방파의 구성원들은 오로지 명령에 복종할 뿐 이처럼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해 죽으라면 서슴없이 칼을 물고 자결해야 할 정도로 명령체계가 엄격했다. 만약 누군가가 곽상처럼 주제넘은 참견을 한다면 그 즉시 즉결처분을 당해도 전혀 모자라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독고성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곽상의 내심을 알았기에 그저 얼굴에 빙긋이 미소를 떠올릴 뿐이었다. 워낙 흉측한 얼굴이라 미소가 아니라 그저 찡그리는 것으로만 보였지만 말이다. "지나친 걱정이야. 사준환 총사는 결단코 그럴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아무런 걱정하지 말도록……. 우린 분명히 마도천하를 이루어 낼 수 있어." 곽상은 결국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이나 독고성의 사준환에 대한 믿음은 굳건했다. 천천히 말을 몰아 나오며 곽상은 독고성의 흉측한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곽상의 뇌리에 문득 독고성이 처음으로 그들의 대장으로 배속되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 지옥훈련을 마친 무사들은 독고성의 얼굴을 보고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철저히 적자생존의 과정을 거쳐 엄선된 무사들인 만큼 실력이 없다면 대장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시기였다. "뭐 이런 인상 더러운 놈이 대장으로 왔을까?" "과연 실력이 있긴 한 거야?" 그러나 오백 명의 무사들 중 서열 1, 2, 3위가 차례대로 곤죽이 되고 나서야 그들은 독고성을 대장으로 삼았고 그 이후로 독고성은 그들에겐 바로 하늘이 되어버렸다. 그에겐 충분히 그럴 만한 지도력과 실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말고도 독고성이 그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이유는 전혀 다른 데 있었으니……. 당시를 떠올린 곽상은 얼굴에 미미하게 미소를 떠올렸다. '정말 이해가 안되었었지. 전장에서는 정말 야수처럼 미쳐 날뛰면서도 우리들에겐 마치 친 형님처럼 대해주시니 말이야.' 이제 수호마왕군 무사들은 그 누구도 독고성의 외모를 두고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비록 흉측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지만 그들에겐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럽고 정이 가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곽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과연 총사의 의도가 어떤지 걱정되는군. 나쁜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것말고도 우려되는 것이 없진 않았다. 현재 무림에서 수호마왕군은 철저히 악의 집단으로 매도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사준환의 지시대로 이행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만 무림에서의 평가는 사실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수호마왕군이 계도할 수 없는 악인들만 모여있는 집단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수호마왕군과 그를 이끄는 파천혈마 독고성은 오로지 피와 살육만을 즐기는 살인귀들이다. ―그들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어린아이는 물론 개나 닭까지도 살아남지 못한다. 곽상은 그런 무림의 평가가 심히 걱정스러웠다. 물론 적에게 공포심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사준환이 일부러 퍼뜨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도가 지나친 면이 없잖아 있었다. 물론 그들은 여자나 아이들을 학살한 적은 거의 없었다. 부득이하게 죽인 경우는 있었지만 작전을 끝내면 그 즉시 물러나 다음 목적지로 향했고 뒤처리는 철저히 총단에서 파견된 무사들이 맡아왔다. 그런데도 그런 소문이 퍼지다니……. 수호마왕군의 경우와는 반대로 사준환에 대한 무림의 평가는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비록 정파와 맞서 싸우는 배교의 총사이긴 했지만 그런 대로 정정당당하고 도의를 아는 인물이란 평가가 내려져 있는 상태. 비록 곽상이 수호마왕군의 일개 무사이긴 했지만 그런 사준환의 저의가 심히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뭐, 괜찮겠지? 우리 대장님은 가히 천하무적(天下無敵)이라고 볼 수 있는 분이니까…….' 곽상은 억지로 걱정을 숨기고 말을 몰아갔다. 어느덧 목적했던 사천 분타는 저 멀리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고 많았소." 모시는 주군을 보자 수석호법은 머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사천 분타에서 수호마왕군과 떨어진 후로 그는 곧장 총단으로 향했고 이틀만에 천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의 앞에는 무척 청수한 인상을 가진 중년인이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한없이 인자하게 생긴 얼굴이었지만 그러나 그 인상 뒤에 뱀보다도 냉혹한 진면목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수석호법은 잘 알고 있었다. 따르는 자에게는 확실한 당근을 제공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처절한 죽음만이 남게 된다는 사실. 그 정도는 이미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터득해놓은 상태였다. 그 사실을 상기하며 수석호법은 예법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답례를 했다. "다녀왔습니다. 총사님." 원래대로라면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오체투지를 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여러 수하들 앞에서 배교의 절대자에게만 올릴 수 있는 오체투지를 한다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명목상 그의 주군은 배교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총사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오체투지는 배교가 확실히 주군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때에만 시행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시기는 오래지 않아 돌아올 것이다. "그럼 들어갑시다." 주군은 한없이 밝은 미소를 띠며 내전으로 들 것을 권했다. 수석호법은 두말하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내전으로 들어간 그들은 주위의 이목을 물리친 뒤 곧장 밀담을 시작했다. 수석호법은 자신이 조사한 바에 대해 즉시 보고를 올렸다. "종리령의 말에 의하면 놈은 아직까지 마성이 제대로 발작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물론 전장에서는 혈향에 취해 무자비한 살육을 일삼지만 말입니다." "그렇겠지. 파천혈마라는 명호대로……." 보고를 들으며 사준환은 하얗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는 독고성이 왜 아직까지 발작하지 않는지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하는 점이 있었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34회 이백 년 전의 동방련과는 달리 독고성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천자혈마공의 발작을 막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칠종단금술, 비록 천자혈마공의 마기에 억눌려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금제를 시술한 존재가 최강의 내공을 자랑하는 소림성승이기 때문이다. 그의 진신진기가 독고성의 몸 속에 변함 없이 머물며 마성이 발작하는 것을 다소나마 막고 있다. 하지만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다.' 천자혈마공의 마성은 살육을 하면 할수록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사준환은 그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독고성은 지금도 꾸준히 살인을 행하고 있다. 자신의 지시에 충실하게 말이다. 상황이 그렇게 진행된다면 언젠가는 천자혈마공의 마성이 소림성승이 시술한 금제를 파훼하고 그를 완전히 마인으로 만들어버릴 터였다. 상념을 마친 사준환은 수석호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놈은 반드시 발작할 테니까 성급하게 행동할 것은 없다. 그런데 종리령의 태도는 어떻던가? 뭔가 수상한 점은 보이지 않던가?" 수석호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별다른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는 총사님의 밀명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목숨을 부지하고, 또한 가족을 살리려면 말이야." 사준환은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수호마왕군의 총대주인 종리령은 사실 그가 암암리에 파견해놓은 밀정이었다. 독고성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동시에 그가 발작할 경우를 대신해서 수호마왕군을 통솔할 임무를 띠고 있는 간세(奸細)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원래부터 사준환의 심복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소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일부러 그의 처자식을 볼모로 잡아 딴 마음을 먹지 않도록 안배해 놓은 것이다. 사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석호법을 쳐다보았다. "너는 어떤 일이 차지하고서라도 놈의 동태를 잘 파악해야 한다. 만에 하나 놈이 본교의 총단에서 발작하는 날에는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어버리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수석호법은 주군을 향해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어둠이 짙게 깔려있는 날이었다. 트루베니아 제일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펠드리안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하다 못해 불빛 한 점도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달빛마저도 완전히 구름에 가려버린 암흑. 이런 날이면 적의 기습공격이 즐겨 행해졌기 때문에 펠드리안의 성벽 수비병들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제발 무사히 넘어가야 할텐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나오는 곳은 무수하게 늘어선 망루 중 하나에서였다. 펠드리안은 성벽으로 완전히 싸인 전형적인 성곽도시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 육중한 성벽 위에 빼곡이 들어차 있는 망루. 그것들은 적의 접근을 용이하게 파악하기 위한 감시탑과 함께 성벽을 둘러가며 설치되어 있었다. "젠장. 어둠 때문에 도무지 앞을 분간할 수 없으니……." 망루에 뚫린 구멍을 통해 연신 밖을 내다보던 병사 하나가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수염이 더부룩하게 자라난, 땟국이 줄줄 흐르는 초췌한 얼굴. 망루 속에 있는 다섯 명의 병사들이 하나같이 같은 모습인 것을 봐서 그들이 상당히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었다. 구석에 있는 병사가 툭 던지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기다란 할버드가 그의 옆에 기대어 세워져 있었다. "상황을 봐서 오늘도 교대는 이루어지지 않을 듯 싶네." "아마도 그렇겠지? 오늘처럼 달빛이 없는 날이면 십중팔구 오크 유격대가 날아들 테니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우린 꼬박 일주일을 여기서 생활했지 않은가? 몸이라도 씻을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 바램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병사들은 잘 알고 있었다. 마실 물조차 모자라는 판에 목욕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희망사항이었다. "젠장. 그만 하자고. 이봐 맥밀란. 밖을 내다본다고 눈이 빠질 것 같으니 이제부턴 자네가 내다보게." "알았어. 파사트" 벽에 기대어 있던, 맥밀란이라고 불린 텁석부리 병사가 냉큼 다가와 자리를 교대해 주었다. 갑옷 위에 마지못해 새겨진 문장에서 그가 가장 상급자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들고 있던 석궁을 맥밀란에게 건넨 파사트는 벽에 들을 깊숙이 기댄 채 한숨을 내쉬었다. "쯔쯔쯔. 들려오는 것이라곤 오로지 패전했다는 소식뿐이니……. 이러다간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까?" "……." 듣고 있던 병사들은 하나같이 침묵을 지켰다. 비록 후방에 있기는 했지만 그들 역시 전황이 어렵다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도 쉴새없이 전사자가 나오는 전방으로 투입되지 않은 것만 해도 그들에겐 다행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미 그곳으로 투입된 동료들, 한때 같이 생활했었던 병사들은 이제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착잡함을 털어 버리려는 듯 파사트는 푸념 조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뭐, 지금 같은 시기에 전방, 후방이 어디에 있어." 이곳 펠드리안은 원래는 후방이라고 볼 수 있는 지역이었다. 비록 계속해서 패전한다 할지라도 오크 군대와 접전을 벌이고 있는 전선은 이곳에서 무척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틈을 노려 오크 군대는 대대적으로 유격대를 펠드리안에 침투시켰고 그것은 오늘과 같이 달빛이 없는 심야에 즐겨 이루어졌기에 이젠 이곳도 결코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독한 놈들!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유격대로 자원하다니……." "자네는 뭘 모르는군. 오크 놈들은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아. 트루베니아의 종족 중 오크 족이 가장 죽음과 가까운 종족이라고나 해야 하지." 비록 반박하기는 했지만 맥밀란의 시선만은 결코 성 밖 허공을 떠나지 않았다. 오크 유격대는 바로 창공을 통해서 침투하기 때문이다. 놈들은 트루베니아 대륙에 존재하는 몬스터들 중 창공의 제왕이라고 하는 존재인 와이번을 타고 기습공격을 가해왔다. 문제는 오크들이 와이번들을 이용해 펠드리안 시내로 직접 투입된다고 하는 점이다. 오크 유격대는 투입된 즉시 불특정다수를 겨냥한 살상을 시작했고 때문에 초기에는 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경비대가 투입되기 전까지 남녀노소 구분 없이 무수히 학살당한 것이다. 물론 침투한 오크 유격대는 하나도 남김없이 몰살당했지만 그들은 이른 바 목적을 달성했다. 펠드리안 시민들을 극도로 동요하게 만든 것 말이다. 물론 투입한 병력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오크들은 계속해서 유격대를 보내오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병사들은 와이번들이 날아오는 창공마저도 이처럼 빈틈없이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긴 놈들은 그 정도 병력쯤은 내다 버려도 괜찮을 정도로 생산력이 강하니……." 맥밀란은 공허한 눈빛으로 창공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속해있는 인간이란 종족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잠든 줄 알았던 파사트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런데 그놈은 경계를 잘 서고 있을까?" "무슨 놈?" "아! 그 괴물같이 생긴 놈 말이야. 타 대륙에서 온 용병이라는 놈." 그 말에 맥밀란의 얼굴에서 극도의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는 불과 15일 전에 그의 경비대로 배속되어 온 자였다. 얼굴이 더없이 추악했기에 일단 그의 관심을 끌었고 또한 그가 들고있던 무기 역시 평범한 병사들이 쓰지 않는 것이었기에 무척 호기심이 갔다. '기사들이 부수적으로 사용하는 스파이크 건틀릿만 달랑 들고 있다니…….' 어디서 왔는지 무척 궁금하긴 했지만 결정적으로 그와 말이 통하지 않았으므로 섣불리 대화를 시도할 수는 없었다. 그를 데리고 온 자는 다름 아닌 이카롯트의 궁정 마법사 베니테스였다. 더불어 행동을 철저히 감시하란 명령이 떨어졌기에 더욱 궁금증은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상기한 맥밀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뭐, 경계 근무는 잘 서고 있는 것 같더군." 도주하지 못하도록 잘 감시하란 명령이 있었기에 맥밀란은 그를 망루 위의 감시탑에 올려보낸 상태였다. 물론 감시탑에서 내려오는 출구는 그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기에 이방인이 도주할 우려는 전혀 없었다. 그 후 보름이 지났지만 별다른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따금 교대를 해 주면 망루로 내려와서 식사하고 잠을 자는 것 밖에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파사트는 돌연 안색을 찡그렸다. "정말 특이하게 생긴 놈이야. 만약 지금이 전시가 아니었다면 그 몰골로 용병 일 하나는 잘 하겠더군." "그만하도록 해. 우리 관점에서나 그런 거지. 혹시 모르잖아? 그가 살던 곳에서는 미남 축에 속할지도 말이야." "내 생각에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데?" 그들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이 누군가가 망루 문을 똑똑 두들겼다. 그러자 병사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드디어 교대자가 왔나보군." 반색을 한 파사트가 얼른 문 쪽으로 다가갔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 그는 문에 달려있는, 겨우 눈만 내놓을 수 있는 조그만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밖에 있는 자들이 하나같이 안면이 있는 교대조란 것을 알아차린 파사트는 얼른 문을 열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짜증 섞인 파사트의 말에 들어온 병사들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뭐, 우린 놀다온 줄 알아? 사역 일이 너무 힘들어서 우리도 교대시기만을 눈이 빠져라 기다렸다고……. 하루 쉰 다음 고생들 한번 해 보면 우리 심정 알게 될 거야." 파사트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젠장 또 사역이야?" "별 수 없잖아. 징병연한이 40세까지 올랐으니 사역할 자는 이제 우리밖에 남지 않았어. 이미 여자들도 사역에 동원되고 있는 마당이야." 툴툴거리던 파사트는 할 수 없다는 듯 무기와 장비를 수습했다. 맥밀란을 비롯한 병사들 역시 각자의 장비를 챙기고 있었다. 맥밀란이 돌연 무언가 생각난 듯 몸을 돌렸다. "이방인에게도 전갈을 해 줘야겠군. 좁은 감시탑에서 고생했을 텐데……." "젠장. 작작 좀 챙겨라." 파사트의 말을 흘려들으며 맥밀란은 망루 한쪽에 기대어 서 있는 사다리를 타고 감시탑으로 올라갔다. 넓은 범위를 감시하기 위해 감시탑은 상당히 높게 지어져 있었다. "으차."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솟구친 맥밀란의 눈에 어두컴컴한, 사방 1미터도 되지 않는 공간이 들어왔다. 어둠에 눈이 익지 않아 맥밀란은 잠시 눈을 끔뻑거렸다. 그의 눈에 창가에 바짝 붙어 밖을 내다보고 있는 왜소한 체구가 들어왔다. 자신들과 같이 상체만을 가리는 쇠사슬 갑옷에 약식 갑옷을 걸친 모습. 특이하게도 그는 병기를 들고 있지 않았다. 그저 삐죽이 칼날이 달린 스파이크 건틀릿을 양손에 차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맥밀란의 눈빛이 다소 부드러워졌다. '자고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맥밀란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이봐. 교대할 시간이야." 어둠 속에서 상대가 고개를 돌리는 것이 들어왔다. 그는 미동도 없이 맥밀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젠장. 어떻게 설명하지?" 잠시 난감해 한 맥밀란은 열심히 손짓으로 자신의 의도를 전하려 했다.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이방인은 조금 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일으켰다. 맥밀란은 자신을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 뒤 사다리를 내려왔다. 망루로 내려오자 그곳에서는 파사트가 연신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으아! 간만에 술로 목을 좀 축일 수 있겠군. 어흐흐흐." "글세? 네놈이 먹을 술이 남아있을까? 몽땅 징발되지 않았으면 다행이게……." 농지거리를 내뱉으며 바닥에 내려선 맥밀란의 뒤로 왜소한 체구 하나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그가 허리를 편 순간 교대조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놈은 뭐야?" "햐! 정말 인상이 더럽게 생겼군." 그들이 놀라는 모습을 만끽하기라도 하듯 파사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긴 뭐야. 우리 경비조에 배속된 이방인 용병이지. 정말 희한하게 생겼지?" "자, 자 어서들 떠나자고. 우리도 좀 쉬어야 될 거 아냐" 보다 못한 맥밀란이 빨리 나갈 것을 독촉했다. 그들은 마치 동물원 원숭이처럼 쳐다보는 경비병들의 시선을 뚫고 망루 밖으로 나섰다. 성벽에서 내려온 뒤, 그들은 한동안 병사들 사이를 헤치고 나와야 했다. 오크 유격대들 때문에 대부분의 병사들이 성벽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기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성벽 앞쪽에는 일단의 병사들이 눈을 번뜩이며 경계를 서고 있었고 그 뒤에는 근무를 마친 병사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맥밀란 일행은 그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성벽을 내려왔다. 전쟁 때문에 이미 모든 사람들의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선 상황. 이런 상황에서 시비가 벌어진다면 필시 칼부림부터 일어날 것임을 잘 알고 있는 맥밀란이었다. 성벽을 내려서자 파사트가 질문을 던져왔다. "그런데 그놈을 데리고 어디로 갈 거야?" "뭐, 경비병 숙소에 가서 식사를 하고 잠을 청해야겠지. 아마도 내일부터 사역에 동원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말이야." "그래? 그럼 난 먼저 들어갈게." 길게 하품을 한 파사트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다른 병사들은 무척 부러운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파사트라 불린 병사는 이곳에 집과 가족이 있는 징집병이었던 것이다. 운이 좋아 전장으로 끌려가지 않은 탓에 이런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맥밀란을 위시한 다른 병사들은 홀홀 단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35회 그들 대부분은 전장에서 상처를 입고 후송된 부상병 출신이었고, 치료를 끝냈지만 전투를 치르기엔 부적합하다 판단되어 이처럼 망루 경비병으로 뽑힌 신세였다. 물론 가족들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들의 고향은 대부분 오크의 수중에 넘어간 상태. 그런 연유로 그들 대부분은 경비병 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지금 돌아갈 가족이 있는 파사트를 무척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한쪽 눈에 안대를 댄 병사 하나가 툴툴거렸다. "젠장. 녀석 으스대지나 말지 말이야." "뭐, 어쩌겠나. 할 수 없는 일이지. 우리도 이만 가볼까?" 맥밀란은 쓴웃음을 지으며 병사들을 통솔했다. 이방인 한 명이 낀 경비 제 57조는 그렇게 교대를 마친 뒤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맥밀란의 뒤를 따라가며 독고성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상체에 걸친 투박한 쇠사슬 갑옷이 절그렁거렸지만 그의 상념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병사들을 따라 걸어가며 그는 무의식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팔자에도 없는 경비병 노릇이라니…….' 쓴웃음이 나왔지만 그는 억지로 표정을 굳혔다. 이왕 살아남기로 마음먹은 이상 어떻게 해서든 생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이곳의 마법이라는 술법을 배울 기회가 생기는 것 아닌가. 오우거와의 대결을 승리로 이끈 뒤, 그는 한동안 병상에 누워있어야 했다. 격전 중 오우거의 손에 격중되었던 그는 늑골이 네 대나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던 것이다. 상처가 치료되고 나서 한참만에 그는 자신과 유일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한 베니테스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신은 아마도 경비대에 배속될 것이오. 그러니 최선을 다해 경계임무를 해 줄 것을 당부하오." 별 도리가 없었기에 독고성은 그것을 응낙했다. 그리고 꼬박 보름동안 경비병 역할을 마친 다음 모처럼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걸어가던 와중 그는 왼팔을 슬그머니 들어올렸다. 그곳에는 거무튀튀한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각종 문양이 새겨져 있는 팔찌는 그의 팔목에 딱 맞게 채워져 있어 그의 힘으론 풀 수 없을 듯 보였다. 독고성의 뇌리에 베니테스의 경고성이 떠올랐다. "이것은 당신이 어디에 있더라도 찾을 수 있게 해 주는 팔찌요. 그러니 도망칠 생각 따윈 버리기를 권고하겠소." 하지만 독고성은 굳이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우선 이곳 말을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달아날 필요도 없었고, 또한 그에겐 이제 자신을 지킬 힘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이들의 말에 따르는 척 하며 우선적으로 이곳의 말을 익히기로 마음먹은 독고성이었다. 그는 착잡해진 심정을 달래기 위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일단 말을 익히는 시간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말도록 하자." 뒤에서 돌연 터져 나온,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에 병사들의 시선이 독고성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모두들 피로에 젖어있던 터라 별다른 상관은 하지 않았다. "혼잣말을 했나 보군." 독고성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맥밀란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목적했던 경비병 숙소는 드디어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좁은 식당 내부에는 비슷한 차림을 한 병사들이 삼삼오오 서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배식대가 있는 한 쪽에는 병사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걸음을 멈춘 맥밀란은 독고성을 보며 따라오란 신호를 했다. 다른 병사들이야 이곳의 사정을 익히 알기 때문에 보살펴 줄 필요가 없었지만 이방인만은 예외였다. 명목상 책임자인 그가 이방인을 보살필 필요가 있었다. "따라오시오." 용케 알아들었는지 이방인은 잠자코 맥밀란의 뒤를 따랐다. 한 쪽에 놓여있는 식판을 집어든 맥밀란은 얼굴을 찡그렸다. 제대로 세척하지 않았는지 오물이 묻어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불평을 늘어놓을 처지가 아니었기에 그는 말없이 식판 하나를 이방인에게 건넨 뒤, 길게 늘어선 줄의 맨 뒤에 가서 도열했다. 묵묵히 식판을 받아든 이방인 역시 맥밀란의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식당 내부로 풍겨지는 구수한 스프 냄새에 맥밀란은 절로 군침이 도는 것을 느꼈다. "얼마 만에 스프를 먹어보는 건지 모르겠군." 망루에서 근무할 때는 스프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말라비틀어진 빵과, 치즈 한 조각이 끼니를 때우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잠시 후 식사를 받아든 맥밀란은 이방인을 데리고 구석 자리로 걸어갔다. 쩝. 쩝. 말없이 식사에 열중하는 맥밀란을 힐끗 쳐다본 독고성은 식판을 입으로 가져갔다. 제대로 요리가 되지 않았는지 비린내가 코를 찔렀지만 그는 말없이 스프를 후루룩 들이켰다. 물론 차원 자체가 다른 이곳의 음식이 그에게 맞을 리가 없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수호마왕군과 임무를 수행할 때부터 노숙에 익숙해진 상태였고, 또한 이런 상황에서 음식투정이나 할 여유가 없었다. 사실 중원에서 그는 상당한 미식가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배교로 복귀한 뒤 그는 기구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듯 식도락에 취미를 들였고 그 때문에 소속되어 있는 숙수들이 상당한 곤욕을 치른 바가 있었다. 비 이상적으로 발달한 독고성의 식도락(食道樂)에 관한 취미. 물론 꿍꿍이가 있던 사준환은 독고성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주었다. 천하각지에 퍼진 분타로 하여금 이름난 숙수들을 초빙(정확한 말로 납치)해다 독고성에게 바칠 정도였다. 원래 중원이란 곳은 상당히 음식문화가 발달된 곳이다. 지역에 따라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음식이 탄생했고 그 종류는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자고로 두발 달린 것은 사람, 네발 달린 것은 책상과 걸상 빼놓고는 모두 요리 재료로 쓴다고 하는 것이 중원의 요리가 아니던가? 그런 만큼 독고성의 맛에 대한 취향은 정말 남달랐다. 특히 수호마왕군과 함께 강호를 전전하게 될 처지가 되자 독고성은 직접 요리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쉬운 말로 피와 살이 튀는 전장을 숙수를 데리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때문에 10여년 간의 강호생활로 독고성의 요리실력은 일류 숙수에 못지 않게 되었고, 간혹 가다 그의 요리를 얻어먹은 수호마왕군 무사들은 맛에 감탄해서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정말 최고입니다. 대장님." "입안에서 살살 녹는걸요?" 그런 중원의 미식에 맛들어 있던 독고성. 그러나 이곳의 음식은 척 보더라도 영 아니올시다 였다. 우선 돼지고기를 원료로 쓴 듯했지만 비린내는 전혀 제거하지 못했다. 또한 양념의 배합 역시 고기의 맛을 전혀 살리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물론 전시에, 그것도 일반 병사들이 먹는 식당에 일류급 숙수가 파견될 리는 만무할 터. 한 입 깨문 고기에서 야릇한 맛이 전해지자 독고성은 얼굴을 찡그렸다. "하긴 내 처지에 이곳의 음식 맛에 왈가왈부할 처지가 아니니……." 정신 없이 식사에 몰두하는 맥밀란을 힐끗 쳐다본 독고성은 말없이 식판에 머리를 쳐 박았다. 생존을 위해서는 어떠한 음식이라도 뱃속에 집어넣어야 했던 독고성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독고성은 맥밀란의 뒤를 따라 숙소로 향했다. 식당 위층이 바로 경비병 숙소였다. 계단을 올라가자 좁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방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맥밀란은 그 중 하나를 골라 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미 방 내부는 자고 있는 병사들로 만원이었다. 문을 여는 순간 코를 찌르는 땀 냄새가 풍겨왔기 때문에 인상을 찡그린 맥밀란은 문을 도로 닫아버렸다. "다른 방을 찾아야겠군." 한참을 뒤진 끝에 그들은 그래도 몸을 뉘일 공간이 있는 방을 찾아낼 수 있었다. 맥밀란은 비어있는 공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독고성을 쳐다보았다. "다소 좁긴 하지만 춥진 않을 거요. 우리 이곳에서 자도록 합시다." 이방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맥밀란은 간단히 갑옷을 벗은 뒤, 그것을 베개삼아 베고 누웠다. 무척 피곤했는지 그는 금방 곯아 떨어져버렸다. 망루에서 벽에 기대어 새우잠을 자던 처지였는지라 이나마 잠자리가 편했던 모양이었다. 드르렁. 코까지 골아대는 맥밀란을 말없이 쳐다보던 독고성은 슬며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방에는 온통 퀴퀴한 땀 냄새가 배어있었다. 때가 찌들대로 찌든 모포를 한 장 집어온 독고성은 쇠사슬 갑옷을 벗지도 않고 그대로 벌렁 드러누웠다. 야트막한 천장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한심하군." 나직하게 내뱉은 독고성은 잠을 청하려 했다. 어떻게 해서든 자려고 했지만 잠은 도무지 오지 않았다. 결국 독고성은 멀뚱멀뚱한 정신으로 내일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무림 전체를 피로 물들이며 벌어졌던 전면적인 정사대전도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애당초 백도무림의 우세라고 예상되었던 정사대전은 예상을 뒤엎고 마도 방파들의 연합인 마인연맹에 우세하게 진행되어 나갔다. 하지만 정사대전으로 쌍방이 모두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보았는지라 양측 수뇌부들은 암묵적으로 휴전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에 소속되어 있던 백도 방파들은 예상치 못했던 피해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고 마인 연맹 역시 의도했던 바를 달성했는지라 더 이상 접전을 이끌어나갈 필요도 없었다. 결국 10년여에 걸쳐 행해졌던 정사대전은 드디어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백도와 마도 피아가 이번 정사대전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완전히 멸문한 군소방파들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고 무림맹의 주축이었던 구파일방과 마인연맹의 주력세력인 마교 역시 전면전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지 못해 허덕일 지경이었다. 그런 상황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이득을 본 방파를 꼽으라면 세인들은 단연코 배교를 꼽을 것이다. 정사대전에 참가했던 무림 방파들 중 배교의 피해가 가장 경미했기 때문이었다. 탁월한 지략가인 사준환은 치열한 접전 중에서도 정예 무사들을 최대한 살릴 수 있었다. 철저한 계산으로 승산이 8할 이상인 전투에만 무사들을 파견했고, 가장 희생을 최소화 할 수 있는 규모의 무사단을 파견했기에 이룬 성과였다. 그 피해정도는 정예로 꼽히는 무사들 중 반 이상을 소진한 마교와 구파일방에는 결코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난전 중에서도 전력을 고스란히 유지한 이상 배교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배교의 행태에 대해 마인연맹을 구성하고 있던 마교나 패왕문 등에서는 아무런 제동도 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대외적으로 배교의 역할을 결코 폄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파천혈마 독고성과 그가 이끌고 있는 수호마왕군. 그들이 정사대전에서 가장 혁혁한 전과를 올린 집단이라는 점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무적의 폭풍군단 수호마왕군. 그 정점에는 단 10년 만에 초절정 고수의 반열에 오른 파천혈마 독고성이 있었다. 일대일 격전이라면 설사 상대가 마교의 교주라고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의 무공을 지닌 철혈의 승부사. 단 오백의 수호마왕군을 통솔하여 그는 무수한 정파의 근거지를 박살내는 전과를 올려 백도 무림의 힘을 비약적으로 약화시켰다. 그의 손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정파 무사가 죽어나갔다. 그의 공로는 마인연맹의 주축을 이룬 마교 무사들조차 달게 인정한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였다. 물론 정파에서는 악의 화신으로 묘사되었지만 배교 교도에게만은 독고성은 영원한 절대자였다. 정사대전을 통해 그는 배교라는 문파를 백도와 마도 모두에게 깊이 각인시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가 나면 정을 맞는다고, 명성이 점점 드높아만 가는 독고성을 마도 방파들, 특히 마교에서 고운 눈으로 볼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아무리 마교라고 할 지라도 독고성을 건드릴 방법은 없었다. 우선 배교가 이미 마교조차 건드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두고 마침내 정사대전은 막을 내렸다. 무림맹의 맹주와 마인연맹의 절대자가 만나 전격적으로 휴전에 합의한 것이다. 그리하여 무림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비록 그 평화가 얼마나 갈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두두두두. 배교의 총타가 있는 천산으로 말을 달리는 일련의 기마대가 있었다. 모두들 먼지를 흠뻑 덮어쓴 채로 정신 없이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 선두에는 다소 왜소한 체구의 무사가 앞장 서있었다. 심하게 굽은 등을 보아 꼽추로 짐작되는 자. 그 뒤로 약 일백 팔십여 명의 무사들이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바로 수호마왕군들이었다. 정사대전을 마도의 승리로 이끈 철혈의 승부사들. 이들이 있었기에 다소 밀리는 전력으로도 마도무림은 우세한 상황에서 전쟁을 마칠 수 있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 배교의 총단으로 복귀하는 길이었다.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전까지 활동을 계속해왔던 그들은 정사대전이 끝났다는 전갈을 받고서야 겨우 검을 수습했다. 그리고 개선군 자격으로 당당하게 배교를 향해 돌아가는 것이다. 한참 말을 달려가던 독고성은 핏발 선 눈을 번뜩였다. "길었던 전쟁이었군." 핏발 선 눈동자가 유난히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전신에서 퍼져 나오는 막강한 마기. 앞에 서면 감히 숨을 내쉴 수 없을 정도의 위압감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제 그는 능히 절대자라 칭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서 있었다. 올해로 소림사를 탈출한 지 20여 년. 그 세월은 독고성을 무척이나 많이 변화시켰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36회 물론 추악한 외모는 별달리 변하지 않았지만 이젠 그 누구도 그를 경멸하거나 멸시하는 자는 없었다. 설사 그런 자가 있다면 독고성이 먼저 손을 쓰기 전에 수호마왕군 무사들에 의해 목이 달아날 테니까……. 말없이 말을 몰아가던 독고성은 힐끗 고개를 돌렸다. 묵묵히 자신을 뒤따르는 무사들의 수는 정확히 일백 팔십 일명. 처음에는 오백 명으로 시작했던 수호마왕군이었다. 하지만 10년의 세월동안 험준한 전투를 치러오며 이렇게 수가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철저히 격전으로 단련된 일당백의 용사들이었다. 그 위력은 설사 초기의 수호마왕군 500과 상대한다 하더라도 능히 승리를 거둘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독고성은 이제 철저히 그들의 우상이 되어있었다. 설사 명을 내린다면 서슴없이 칼을 물고 자결할 만큼 무사들의 충성심은 믿어 의심할 바가 없었다. 흐뭇한 눈으로 그들의 면면을 쳐다본 독고성은 돌연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는 마치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그리 멀지 않았다. 맛 좋은 술과 산해진미가 우리를 기다린다. 힘을 내라. " "와아아아." 수호마왕군 무사들은 저마다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간의 험준한 격전을 보여주듯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상처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무림에서 가장 강한 조직, 수호마왕군이란 역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입은 영광의 상처들인 셈이다. 비록 무수한 동료들을 전장에 묻었지만 승리의 환희는 그 모든 기억을 잊기엔 충분했다. 이제 그들은 배교의 신임 교주 독고성의 친위대로써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갈 것이다. 부푼 꿈을 안고 수호마왕군은 배교 총단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배교 총단에 당당하게 입성한 수호마왕군은 당연한 말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당주급 인물에서부터 하급 무사들까지 단 하나도 빠짐없이 동원되어 그들을 맞이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수호마왕군이란 존재는 배교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 결정적인 원동력이었으므로…… "어서 오십시오." 공손한 태도로 맞이하는 총사 사준환을 보자 독고성의 얼굴에는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거듭 생각해 보아도 그가 자신에게 베푼 은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아직까지 소림사의 허드렛 일꾼으로 살고 있을 것이기에……. 특유의 성격상 독고성은 사준환을 마음 속까지 굳게 믿고 있었다. 이미 그는 암암리에 사준환에게 배교의 교주 자리를 양도하려는 마음까지 먹고 있었던 것이다. 말에서 내리는 독고성을 향해 사준환은 다시 한 번 예를 올렸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지만 감정을 표현하는데 다소 서툴렀던 터라 독고성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 찰라 사준환의 안색이 미미하게 떨렸다. 하지만 너무도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갔기에 독고성은 그 기미를 미처 간파하지 못했다. 사준환은 웃는 낯빛을 지우지 않은 채 독고성을 안으로 안내했다. "들어가시지요. 대대적으로 주연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무어라 감사의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던 독고성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 모습을 보자 사준환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걱정 마십시오. 저는 이미 소교주님께 모든 권력을 이양할 준비를 마쳐 두었습니다. 이제 백도와의 전쟁도 끝났으니 걸릴 것은 아무것도 없을 터. 내일 정도면 본교의 19대 교주로 즉위하실 준비가 모두 끝날 것입니다."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사준환은 떠듬거리는 독고성을 재차 재촉했다. "어서 드시지요. 술과 음식이 식겠습니다." 결국 독고성은 속의 말을 털어놓지 못하고 그의 말을 따랐다. 뒤에 도열해 있던 수호마왕군을 힐끗 쳐다본 사준환은 시립해 있던 수석호법을 불러 명을 내렸다. "수석호법께서는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수호마왕군을 따로 마련한 자리에 안내해 주시오." "존명." 사준환은 다시 독고성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들을 위해 충분한 음식과 미주, 그리고 어여쁜 미희들을 준비해 놓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간 무사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나는 저들과 같이 들어가고 싶소만." 그러나 사준환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교주님은 이제 본교의 제 19대 교주로 즉위하실 몸입니다. 비록 소교주님과 수호마왕군이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란 것은 속하도 익히 짐작하고 있지만 이제부터는 교중의 위계질서를 철저히 세워야 할 때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아, 알겠소." 결국 독고성은 사준환의 말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왠지 불안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수하들을 뒤로 한 채 독고성은 주연장으로 향했다. 그들이 들어가자 수석호법이 무사들에게 다가가서 웃는 낯으로 말을 걸었다. "정말 수고 많았소이다. 그럼 모두들 본좌를 따라오기 바라오. 아마 혀가 놀랄 정도의 미주가효가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오." 수호마왕군 무사들은 별 수 없이 수석호법이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비록 대장과 떨어지는 것이 다소 못마땅했지만 정사대전도 끝난 마당에 별다른 위험이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대청 안에는 떠들썩하게 주연이 베풀어졌다. 온갖 숙수들이 정성을 들여 요리해놓은 중원 각지의 산해진미가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져 있었고 죽엽청이나 여아홍등 이름만 들어도 능히 알 수 있는 이름난 명주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함께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듯 한 아리따운 시비들까지 말이다. 독고성과 사준환이 들어가자 시비들은 기다렸다는 듯 가무를 벌이기 시작했다. 사준환은 독고성에게 연신 음식을 권했다. "자 드시지요. 소교주님." "대, 대단하구려." 평소 미식가로 자부하던 터라 독고성은 서슴지 않고 음식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준환 이하 배교 수뇌부들도 만찬을 시작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들의 태도는 어색하기 그지없었고 무언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사준환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할까 하는 생각에 잠겨 있던 독고성은 미처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 그 말이 정말입니까?" 굵직한, 실로 남자다운 음성이 실내에 울려 퍼졌다. 음성의 주인은 다름 아닌 수호마왕군의 총대주인 종리령이었다. 그는 지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뚫어지게 앞을 쳐다보았다. 그의 앞에는 수석호법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네. 틀림없는 사실이네. 이미 결정은 내려졌고 조금 있으면 그는 이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네." 말을 이어나가며 수석호법은 탁자 밑에 둔 검 자루를 불끈 쥐었다. 상대의 태도 여하에 따라 단칼에 목을 베어버리기라도 할 기세였다. 하지만 종리령은 의외로 빨리 흥분을 가라앉혔다. 무언가 체념한 듯한 표정이 얼굴에 떠올랐다. "처치해 버리기엔 실력이 아깝긴 하군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미 총사는 제거하기로 굳게 결심하셨으니……. 그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 자리에는 본교의 수뇌부들이 모두 모여있는 상태이네. 하나같이 지존의 심복들인 자들로 말일세. 놈이 살아날 길은 전혀 없어." 고개를 끄덕이던 종리령의 표정이 본래대로 돌아갔다. 그 모습에 검을 쥔 수석호법의 손에 힘이 다소나마 빠졌다. 종리령은 얼굴에 모호한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어갔다. "천자혈마공의 마성이 발작했다면 쉽게 처리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발작하기 전에 정사대전이 끝나서 말일세." "그런데 소교주를 제거하고 나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어쨌거나 그는 하급 교도들에겐 신과 같은 존재일텐데……" 수석호법은 빙긋이 미소를 떠올렸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난 상태야. 놈을 처치하고 나서 아마도 이렇게 선포되겠지. ―교주 독고성은 대대로 연성을 금지해왔던 저주받은 마공인 천자혈마공을 익혔다. 따라서 이 무공을 익히는 자는 설사 교주라 하더라도 실각시킨다는 교의 법도에 따라 독고성 교주를 처형했다. 이렇게 말이야. 그럴 듯 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던 종리령은 돌연 정색을 했다. "그럼 수호마왕군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세? 그들을 일단 제압해 놓을 생각이네. 지금 그들이 먹고 있는 음식에 몽혼약이 풀려 있으니 아마 지금쯤은 모두 중독되었을 것이네. 아무래도 그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거의 10년을 소교주와 함께 했으니 놈의 그림자가 많이 드리워졌을 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제거하기엔 실력들이 아깝지 않습니까?" 비로소 종리령에 대한 의심이 다소 풀린 수석호법은 슬며시 손을 검자루에서 떼었다. 하지만 내력은 잔뜩 끌어올린 그대로였다. "하긴 전 무림에 위명을 떨친 집단이니 그냥 없애긴 아깝지. 혹시 그들 중에 회유할 만한 자가 있나?" 고개를 끄덕이는 종리령의 반응에 수석호법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위험인물들이긴 했지만 수호마왕군 무사들이 지닌 실력 하나만은 진짜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무사들을 그냥 죽여버리기는 정말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곽상이나 도일룡, 그리고 천영일 같은 자들은 골수까지 소교주의 심복입니다. 하지만 일반 무사들 중에서 제 입김이 닿는 자가 몇 있습니다. 그 외에도 전력으로 회유한다면 말을 들을 자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래? 반가운 소리구먼." 이제 종리령에게 완전히 경계를 풀어버린 수석호법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뭔가 말을 건네려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이 난 듯 넌저시 운을 뗐다. "그런데 자네 가족을 만나고 싶지 않나? 오랜만에 복귀했는데 처자식과 노모를 한 번 보고 싶을 테지?" 잠시 망설이던 종리령은 그러나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뭐 이제부터 실컷 볼 텐 데요. 그보다도 급한 일이 있으니 뒤로 미뤄도 상관없습니다." 그 말에 수석호법은 파안대소를 했다. "크하하하. 과연 지존께서 믿고 맡긴 인물답군. 자네는 분명히 중용될 자격이 있어. 그럼 어디 놈들이 늘어져 있는 곳으로 가 볼까? 자네가 그들 중에서 회유가 가능한 자들을 골라주도록 하게. 그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조리 처치해 버려야 할 테니……." "그럴까요." 밀실에서 담소를 나누던 둘은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켰다. 조금 떨어진 대청에는 수호마왕군 무사들이 몽혼약에 중독된 채 축 늘어져 있을 터였다. "아니?" 대청 문을 열어본 수석호법은 혼비백산했다. 몽혼약에 중독되어 늘어져 있어야 할 수호마왕군 무사들이 하나같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 하나 음식에 손을 댄 자가 없었다. 그저 부동자세로 자리에 앉은 채 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주위에는 음식을 나르던 숙수와 시비들이 안절부절못해 하는 태도로 몸을 떨고 서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눈이 휘둥그레진 수석호법의 뒤에서 냉랭한 일성이 터져 나왔다. "왜? 이상한가? 우리 수호마왕군에게는 하나의 전통이 있지. 그것은 바로 음식을 먹을 땐 모두 함께 한 자리에서 동시에 먹는다는 것이야. 아마도 저들은 내가 오기 전까지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을 것이야.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하지." "네, 네놈이?" 고개를 돌린 수석호법의 눈에 냉랭한 표정을 한 종리령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지 말마저 떠듬거리던 수석호법은 돌연 검을 빼 들었다. "가, 감히 네놈이 총사를 배신하다니……." 종리령도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추상같은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총사는 배신할 수 있어도 대장만은 어떠한 경우에도 배신할 수 없다. 그가 아니었으면 이미 나는 살아있는 목숨이 아닐 터, 그의 목숨이라면 충분히 가족과 나의 생명과 바꿀 가치가 있다." "멍청하군. 한낱 만용으로 부귀영화와 가족의 목숨까지 버리다니……." 비로소 상황을 눈치챈 수호마왕군 무사들이 반사적으로 무기를 뽑아들고 있었다. 이미 잘 때도 무기를 손에 놓지 않는 전통을 가진 그들이었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37회 급변하는 상황에 수석호법의 안색이 시퍼래졌다. 그 모습을 본체만체 하며 종리령은 내공을 모아 크게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들어라. 총사를 위시한 배교 수뇌부들은 지금 우리 대장을 모살하려 하고 있다. 그것도 비열한 암습으로 말이다. 대장을 구하려는 자는 지금 즉시 나를 따르라." 그 말에 무사들의 눈에는 불똥이 튀었다. 대장을 모살한다는 말에 무사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무기를 꼬나쥐고 몸을 날렸다. 종리령은 멍하니 서 있는 수석호법을 본체만체 하며 무사들을 통솔해서 달려나갔다. "비켜라. 네놈 따윌 상대할 시간이 없다." 수석호법의 얼굴이 극도로 일그러졌다. "이, 이런 빌어먹을." 물론 대청 외부에는 총단 소속 무사들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만으로 이름도 드높은 수호마왕군을 막는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석호법은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환영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또 다른 대청. 이곳은 한창 주연 분위기가 익어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긴장을 풀어버린 채 거나하게 취한 독고성에게 사준환이 가까이 다가왔다. 말없이 술을 마시던 수뇌부들이 바짝 긴장했지만 독고성은 미처 그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늘이 지나면 약속대로 교주님께 제 모든 권한을 넘겨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교주님은 명실상부하게 배교의 제 19대 교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정말 감회가 새롭구려." 독고성은 반쯤 풀린 눈동자로 사준환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무뚝뚝한 성격상 도저히 제정신으론 감사를 표할 수 없었기에 술기운을 빌리기로 작정하고 마음껏 마셔버린 독고성이었다. "축하의 의미로 한 잔 받으시겠습니까?" "꺼억. 총사가 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받지요." 독고성의 앞으로 다가온 사준환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에 독고성은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아,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 무릎을 꿇은 채 사준환은 충심이 절절히 묻어나는 어조로 비장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부터 교주님은 제 지존이십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으셔야 합니다." "아니오. 난 감당할 수 없소." 당황한 독고성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음 속에 구상해 놓은 감사의 말을 떠올리며 사준환에게 다가갔다. 그를 부축해 일으킨 다음 마음 속의 말을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난 이미 당신을……." 사준환을 안아 일으키려던 독고성은 채 말을 잊지 못했다. 따라서 사준환을 앞으로 부모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겠다는 말은 채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했다. "크윽." 단전을 파고드는 차디찬 느낌에 독고성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얼굴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손을 단전 부분으로 가져갔다. 들어올린 손엔 선혈이 질펀하게 묻어 있었다. 전장에서 수도 없이 봐 왔던 선혈. 그것이 그의 손을 흠뻑 적시고 있었던 것이다. 독고성의 눈동자가 한껏 뜨여진 채 앞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사준환은 그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그의 얼굴은 지금은 판이하게 변해있었다. 사악한 미소가 감도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간교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독고성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의 귀로 돌연 사준환의 이죽거림이 들려왔다. 한없이 맑던 그의 음성은 이제 어조마저도 완연히 변해있었다. "수고했다. 독고성. 이제 너의 임무는 모두 끝난 것 같구나." "그, 그게 무슨 소리요? 총사" 사준환은 진득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미 그의 뒤에는 어느새 배교의 실권을 틀어쥐고 있는 실세들이 모조리 다가와 시립해 있는 상태였다.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했나 보군. 내가 정리해 주지. 정확히 말하면 넌 소모품으로 키워진 것이다. 철저히 나의 기반을 다져주기 위해 만들어진 소모품. 이제 정사대전이 끝난 마당에 더 이상 널 살려둘 필요가 없겠지?" "………." "내 계획대로 천자혈마공의 마성이 일찍 발작했다면 내가 이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이야. 과연 소림성승이 직접 시술한 금제라 다르긴 하군. " "무, 무슨 소리지?" 사준환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궁금하다면 말해주지. 네가 익힌 천자혈마공은 원래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무공이다. 비록 널 10년 만에 개세고수로 탈바꿈시키기는 했지만 정상대로라면 넌 5년 이내에 오로지 살육 밖에 모르는 혈귀로 변모했을 것이다. 천자혈마공의 마성이 발작해서 말이다." "처, 천자혈마공이?" "그렇다. 이제 알겠는가?" 비로소 상황을 짐작한 독고성이었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떨리는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그, 그러려면 왜 날 굳이 소림사에서 빼내어 왔지?" "희생양이 필요했지. 나 대신 정파 무림과 피 터지게 싸워 줄,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 내 입지를 다져줄 희생양 말이야. 아! 물론 뿌린 씨를 거두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말이야." "뿌린 씨라니……." 사준환은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네 아비가 죽고 네가 소림사에 억류된 연유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짐작한 적이 없나?" "……?" "전대 교주 독고무기는 널 얻는 와중에 애석하게도 부인을 잃었지. 그 때문에 그래서인지 너 하나만은 정말 끔찍이도 위하더군. 그것이 무척 보기 싫더군. 그래서 놈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나는 너마저 없애기로 마음을 먹었지." 정말 태연자약하게 설명을 해 나가는 사준환이었다. 그러나 내용만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으니……. "먼저 난 믿을 만한 수하를 시켜 어린 널 납치하도록 명령했다. 물론 수하는 어김없이 계획을 실행했다. 널 잃어버리자 독고무기 놈은 말 그대로 광분하더군. 당시 널 경호하던 무사와 시비들을 모조리 처치해버렸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내가 결국 보다못해 네가 있는 장소를 살며시 일러주었다. 하지만 그는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이미 그곳에 정파 놈들이 그를 척살하기 위해 빈틈없이 포진하고 있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을 바로 내가 전해주었다는 일까지도 말이야. 멍청하게도 독고 무기는 달랑 수호마왕군 열 명만을 대동한 채 널 찾기 위해 떠나갔다. 그리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지." 묵묵히 듣고 있던 독고성의 눈에 서서히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사준환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만큼 충격 역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런 독고성의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 사준환은 계속해서 말을 늘어놓았다. "솔직히 네놈이 살아남게 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또한 소림성승에 의해 칠종단금술을 시술 받게 된 것 역시도 말이야. 멍청한 정파 놈들. 모든 게 내가 안배한 것인 줄도 모르고 널 내세워 포로 교환을 하자고 제의하더군. 그래서 난 아주 가볍게 묵살해버렸지." 사준환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독고성의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받고 있는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 대변해 주는 것과도 같았다. "그렇게 널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네가 떠오르더군. 또한 널 이용한 계획과 함께 말이야. 그래서 난 지체 없이 도위청을 파견했지. 물론 거기에는 소림성승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말이야." 이제 독고성의 음성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다면 소림성승의 시해는?" "바로 그렇지. 성승은 불운하게도 도위청의 손에 의해 이승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지. 물론 그의 죽음은 철저히 너의 소행으로 위장된 채 말이야." "이놈." 마침내 분노가 폭발한 독고성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지만 시큰하는 느낌과 함께 힘이 모조리 빠져 버렸기 때문에 독고성은 도로 자리에 걸터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것은?" "왜? 놀랐나? 물론 내가 이처럼 비밀을 털어놓는 것을 보면 거기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다 했다고 봐야겠지? 단전이 파괴된 데 이어 넌 이미 칠보단장산을 복용한 상태다. 소림성승을 잡은 바로 그 약 말이다. 물론 그것말고도 몽혼약과 산공독까지 음식에 듬뿍 발라놓았지. 맹수를 잡는데 그 정도 대비는 해야 하지 않겠어?" 내력을 도저히 끌어올릴 수 없는데 이어 정신마저 혼미해져 오는 상황이었다. 독고성은 조금 전까지도 사준환에게 끝없이 감사했던 자신에게 저주마저 퍼붓고 있었다. 그토록 믿었던 존재. 심지어 그에게 배교 교주 위까지 양도하겠다고 마음먹었던 자신이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었다. 그대로 당할 수만은 없었기에 그는 억지로 음성을 쥐어 짜냈다. "나, 날 죽인다면 보, 본교 교도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나?" 하지만 사준환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가시지 않았다. "물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이미 나에겐 합당한 명분이 있다." "명분?" "네가 천자혈마공을 익혔다는 증거. 바로 그것이지. 아! 아직 모르고 있겠군. 천자혈마공을 연성하면서 네가 먹은 정혈이 어린양의 것이 아니라 동남동녀들, 그것도 비밀리에 납치한 교도의 자식들의 것이란 사실을……." 독고성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그것은 지금껏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것들의 썩어 가는 시체는 내가 잘 보관해 두었다. 조만간, 아마도 널 처치한 직후가 되겠지만 그 시체들은 교도들에게 널리 공개될 것이다. 바로 널 처치한 당위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이다." 독고성은 침음성을 울렸다. 그는 말 그대로 완벽한 함정에 빠진 것이다. 몽혼약 기운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중에서도 그는 고함을 버럭 지르며 일어서려 했다. "이런 찢어 죽일 놈." 하지만 허사였다. 이미 그의 육신은 정신의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심지어 암습당한 단전에서는 아무런 감각도 전해지지 않았다. 독고성은 사무치는 듯한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글렀어." 이제 의식이 한없이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흐릿해진 시선에 사준환이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장검에서 흘러나오는 예기. 이대로 당할 수 없다고 거듭 정신을 추슬렀지만 몸은 도무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젠 끝인가?' 독고성은 결국 삶을 체념해 버렸다. 그로써는 도저히 손쓸 도리가 없었다. 그 때 갑자기 외마디 호통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멈춰라. 네놈들이 감히 우리 대장을?" 그 음성은 독고성이 익히 아는 누군가의 음성이었다. 그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종리령이군.' 하지만 독고성은 더 이상 의식의 끈을 잡고 있을 수 없었다. 그의 정신은 이미 한없는 나락 속으로 굴러 떨어져가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사준환은 지금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갈기갈기 찢어진 수석호법의 시신이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준환의 손에 의한 소행이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대가로 수석호법은 죽음이라는 댓가를 받은 것이다. 사준환은 화를 지체하지 못하고 연신 씨근거렸다. "모든 일이 다 끝났다고 여겼는데……." 그의 계획은 철저히 맞아 떨어졌고 독고성은 저항능력을 모조리 상실한 채 그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칼만 들이댄다면 이제 배교는 송두리째 그의 손아귀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수호마왕군이 난데없이 이곳으로 난입하다니……. 이것은 말 그대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사방은 온통 시체 천지였다. 대부분이 수호마왕군의 시체들이었지만 반수 이상은 심복들과 경비무사들의 것이기도 했다. 몽혼약에 취해 늘어져 있어야 할 수호마왕군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사준환은 아연해했다. 타고난 책략가인 사준환조차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의 상황은 흉험했다. 외전을 경비하던 경비무사들을 말 그대로 파죽지세로 돌파한 수호마왕군은 그대로 대청을 들이쳤다. 그들의 공격은 말 그대로 폭풍이었다. 번개처럼 대청을 들이 친 수호마왕군은 순식간에 독고성을 구한 뒤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 정도 실력이면 총단 외곽의 방어진을 돌파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일이 이렇게 틀어지다니……." 문제는 수호마왕군 무사들의 무공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하다는 데 있었다. 심지어 사준환 자신조차 종리령을 포함한 수호마왕군 무사 다섯과 겨우 평수를 이뤘을 정도였다. 그들의 합격술은 정말 정교하기 그지없었으며 그 때문에 놈들이 늘어진 독고성을 구출해 가는 것을 두 눈 버젓이 뜨고 쳐다만 보아야 했던 사준환이었다. 정말 자신조차 짐작하지 못했을 만큼 수호마왕군의 위력은 가공했다. 이 자리에 모인 심복들 중 실력이 떨어지는 자는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겨우 살아남은 심복들조차 전신이 상처투성이인 상태. 비록 수호마왕군 중 반수를 처치하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존재인 독고성은 이미 그들의 수중에 떨어진 다음이었다. 통제 하에 있는 무력조직들을 부랴부랴 출동시킨 다음에야 사준환은 비로소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는 지체 없이 이 일을 맡았던 수석호법을 불러 진상파악에 나섰다. 그리고 그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정없이 그를 난도질 쳐버린 것이다. "잡아야 한다. 놈이 살아남는다면 필시 중대한 화근이 될 것이다." 수호마왕군이 빈사상태의 중상을 입은 독고성을 데리고 도주한 후, 사준환은 지체 없이 사태 수습에 나섰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38회 내일은 아마도 올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기다리지 마시길……. ^^ ******************************************************************************* 물론 배교 고수들 중 자신을 따르는 수하들이 반수 이상이었지만 하급 교도들에게 독고성은 아직까지 하늘이었다. 배교의 장악을 꿈꾸는 사준환으로써는 독고성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서둘러 일을 수습해야겠군." 사준환은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던 계획의 실행에 나섰다. 곧 총단과 각 외부 지단으로 총사 사준환의 직인이 찍힌 서찰이 전서구를 통해 대대적으로 전달되었다. "교주 독고성은 천자혈마공을 익혔다. 천인공노한 연성방법 때문에 대대로 연성을 금지해왔던 저주받은 마공 말이다. 그간 의문 속에 실종되었던 아이들의 행방이 이제 백일하에 드러났다. 독고성 교주는 가증스럽게도 교도들의 어린 아들, 딸들을 납치해서 천자혈마공을 익히는 도구로 삼았다. 희생된 아이들의 시신은 교주의 연공실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에 나 사준환은 배교의 총사로써 눈물을 머금고 독고성 교주의 실각을 선포한다. 그는 이제 강호 공적으로 만인의 추적을 받게 될 것이며 죽는 그 날까지 척살령은 해제되지 않을 것이다." 포고령을 전해 받은 총단과 지단의 하급 무사들은 아연했다. 정사대전 기간 동안 독고성의 명성이 워낙 드높았던 지라 상황을 알고도 그들은 반신반의했다. "서, 설마 그랬을라구?" "아니야. 독고 교주가 그처럼 강해진 배경을 증명하는 데에는 오직 금지된 마공인 천자혈마공 밖에는 없어." 드러난 증거가 너무나도 명확했기에 평소 독고성을 지지하던 교도들조차 더 이상 그를 두둔할 도리가 없어져 버렸다. 사준환의 명령에 따라 숨겨져 있던 동남동녀들의 시신이 백일하에 공개되었다. 일부 교도들이 아이들의 신원을 확인했던 터라 그들로써는 더 이상 반박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물론 그 사체들은 바로 사준환이 납치해서 대법에 투입한 것이다. 대법이 끝난 뒤, 사준환은 아이들의 시신을 몰래 숨겨두었다가 독고성이 개선하는 날에 맞춰 그의 연공실 지하에다 파묻어 두었다. 그리고 그 처참한 장면은 남김없이 배교 교도들 앞에 공개되고 있었다. 그의 안배대로 모든 정황이 압도적으로 독고성에게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배교 교도들은 이 사건의 주범이 독고성이란 사실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어버렸다. "이제 되었어." 미리 준비해놓은 방법으로 배교 내부의 의혹을 해소시킨 뒤 사준환은 지체 없이 독고성의 추적에 나섰다. "일을 벌이려면 확실히 하라고 했다." 독고성의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해 그는 이 사실을 정파에까지 널리 퍼뜨리려는 마음을 먹었다. 물론 연합관계에 있던 마교에까지 전달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파천혈마 독고성과 수호마왕군. 그 가공할 무력집단을 처리하려면 얼마만큼의 전력이 손실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때문에 사준환은 남의 손을 빌어 그들을 처리하려는 생각을 굳혔다. 이름하여 차도살인지계 말이다. 파천혈마 독고성이 천명의 동남동녀를 희생시킨 대가로 천마혈마공을 익혔다는 사실과 함께 배교 교주에서 축출되어 쫓기고 있다는 소식은 곧 무림 전체에 남김없이 전해졌다. "그거 정말 반가운 소식이군." 마교에서는 이 소식을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암묵적으로 독고성을 경계하고 있던 그들로써는 더 이상 반가운 낭보가 없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만 가는 독고성의 위명에 대해 마교의 수뇌부들은 심각한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그를 처단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니 반가울 만도 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대대적으로 고수를 파견 추격대를 지원해왔다. 마교 공식 서열 6위의 쌍수마존 위청을 위시한 총단 고수를 파견한 것으로 봐서 마교에서 독고성을 처치하는데 얼마만큼의 공을 들이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독고성에 의해 수많은 고수들을 잃은 정파에서도 역시 추적대를 파견했음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독고성은 정사대전을 치르며 대외적으로 악역은 도맡아가며 맡은 처지, 그에게 문하제자를 무수히 잃은 명문 정파에서는 전폭적으로 고수를 파견해서 독고성의 추적에 나섰다. 그들로써는 배교의 묵인 하에 눈엣가시를 처치할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이 소식에 가장 기뻐한 것은 소림 제일의 속가제자인 철혈신검 영호명이었다. 철혈문의 신임 문주로써 후기지수 중에서 독보적인 검술실력을 보유하고 있는 신진고수인 그는 독고성에 의해 세상을 하직한 소림성승 혜정의 제자였다. 평소 혜정을 무척 존경하고 있던 영호명이었으므로 당연히 독고성에 대해 가슴속에서 우러나는 적개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정사대전 중 그는 사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독고성을 노렸다. 하지만 무수한 고수들의 호위를 받고 있는 독고성에게 접근할 방도가 없었는지라 영호명은 그저 사부의 원수를 두고도 쳐다만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절호의 기회가 생긴 이상 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 법. 그는 철검문의 모든 제자를 이끌고 독고성의 추적에 나섰다. 그렇게 해서 독고성은 전 무림의 쫓김을 받게 되었다. 아무리 수호마왕군이 무적의 무력집단이라고 하나 그 추적을 뿌리칠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상황은 어떠한가?" "이미 저희들은 완벽하게 포위 당했습니다.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갈 틈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수하에게서 보고를 받은 종리령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이미 수도 없는 악전고투를 치러가며 이곳에 도착했지만 더 이상 도주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버린 것이다. 그는 쓸쓸한 눈빛으로 수하들을 쓸어보았다. 이미 무사들 대부분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종리령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총단에 볼모로 잡힌 노모와 처자식들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수석호법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면 그들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부귀공명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종리령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결코 그를 배신할 수는 없어.' 아마도 이 마음은 수호마왕군 무사들이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리라. 10년 간의 정사대전을 통해 수호마왕군의 구성원들은 감히 한 몸이라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단합되어 있었다. 모두 합심하여 서로를 철저히 지켜주는 가운데 피어난 동료애. 특히 그 중에서 독고성의 역할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그가 자신들에게 보여준 정성과 보살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 마치 부모나 친 형님처럼 대해주는 독고성에게 수호마왕군 무사들은 이미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상태였다. 심지어 사준환에게 밀명을 받고 파견된 종리령조차도 마음을 돌릴 정도니 수호마왕군의 독고성에 대한 믿음과 충성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 단언할 수 있었다. 쓸쓸히 고개를 돌린 종리령의 눈에 축 늘어진 독고성의 왜소한 몸이 들어왔다. 그의 눈에 무언가 결심했다는 빛이 떠올랐다. "우리 모두가 여기서 죽어가더라도 대주만은 살려야 한다." 그 의견에 동의하는 듯 무사들은 서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령은 지체 없이 살아남은 무사들을 열 개의 부대로 나눴다. "곽상과 도일룡을 비롯한 부대주들은 각기 맡은 부대를 이끌고 사방으로 산개하라. 나는 이곳에서 추적대를 저지하겠다. 가슴 깊이 명심하도록……. 너희들이 멀리 도주하면 도주할수록 대주가 살아날 가능성이 현저히 높아진다. 알겠는가?" "존명." 물론 종리령은 만에 하나 적의 포로가 되면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에 대해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수호마왕군의 구성원이라면 능히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즉시 출발하라." "존명." 부대주들이 휘하 부대를 통솔해서 흩어지는 것을 쳐다본 종리령은 걸음을 옮겨 독고성에게로 걸어갔다. 사술에 조예가 깊은 배교의 인물인 만큼 독고성의 몸을 감추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남은 무사들이 사방을 경계하는 사이 종리령은 독고성을 숨길 술법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핏기 없이 창백한 독고성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종리령의 두 눈에 순간적으로 물막이 서렸다. "부디 살아나십시오. 대주. 당신은 우리들의 영원한 우상이십니다." 고개를 흔들어 눈물을 떨쳐낸 종리령은 독고성의 위에 장포를 덮은 뒤 지체 없이 술법을 펼쳤다. 구석진 곳에 쓰러져 있던 독고성의 몸이 곧 주위와 동화되기 시작했다. 기척을 완전히 숨기는 은폐술. 훗날 동영의 인자들에게 전래된 이 은폐술은 곧 독고성의 왜소한 몸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모든 안배를 끝낸 종리령은 몸을 일으킨 뒤 검을 뽑아들었다. 검집까지 바닥에 버린 것을 보아 그의 마음가짐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놈들은 필시 대주가 사방으로 산개한 부대에 섞여 있을 것이라 짐작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는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 알겠는가?" 비장함이 감도는 종리령의 명령. 하지만 남은 수호마왕군 무사들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주를 살리기 위해서는 백 번을 죽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었다. "저기 오는군." 뿌연 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다가오는 추적대를 보자 종리령은 생애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전원 전투준비. 신의를 배신한 놈들에게 수호마왕군의 위용을 보여주기로 한다. 실시!" "존명." 수호마왕군 무사들은 물밀 듯 밀려오는 추적대를 맞이하며 검의 손잡이를 으스러져라 꽉 쥐었다. 어스름이 깔려 가는 저녁이었다. 거대한 도시를 둘러싼 높은 성벽에도 말할 것 없이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한없이 조용한 도시. 이미 날이 저물면 문을 잠그고 집에 틀어박히는 것이 일상화된 펠드리안 시민들이었다. 왜냐하면 심심찮게 행해지는 오크 유격대의 목표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도시는 적막감 속에 묻혀가고 있었다. 수없이 늘어선 건물 어디 한 군데에서도 불빛은 새어나오지 않았다. 다만 한 군데 틀린 곳이 있었으니 도시를 둘러싼 성벽 위쪽만은 시내와는 달리 환하게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성벽 요소요소에 수를 셀 수도 없는 횃불들이 늘어서서 망루와 감시탑들을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안에는 날아오는 와이번을 찾아내기 위해 병사들이 감시에 열중하고 있었다. 적에 대한 방비를 위해 성벽 위에만은 이처럼 횃불을 밝혀놓는 것이다. 그중 하나의 망루에서 나지막한 대화 소리가 새어나왔다. 정확히 제 57 수비조가 지키고 있는 망루였다. "그러니까 내가 소금만 가지고 척 나타났다면 마을의 모든 여자들이 오줌을 질질 흘리며 달려나왔단 말이야. 그리고 나와 하룻밤 인연을 맺기 위해서 길게 줄을 섰지. 고작 한 주먹의 소금을 얻으려고 말이야." 망루 속에는 등을 돌리고 있는 병사 하나가 보였다. 뺨에 큼지막한 칼자국이 나 있는 험상궂은 표정의 병사. 하지만 눈빛만큼은 정말 순박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는 지금 열을 올리며 왕년의 경험을 설명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다른 병사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물론 그가 워낙 순박했기 때문에 놀리려는 의도가 대부분이었다. "피,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분명히 거짓말이야." 핸슨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병사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쳤다. "아니 정말이라니까. 허 참. 이거 직접 데리고 가서 보여줄 수도 없고……." "이봐 핸슨. 네가 소금 행상 출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만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에 있어? 보나마나 거짓말일 거야. " 병사들 사이에서 가장 흥미로운 관심사를 꼽으라면 단연코 여자 얘기가 빠질 수 없다. 때문에 망루 경비병들은 한참 음담패설을 주고받으며 날이 새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못된 것들! 너희들은 지금 내가 소금 행상이라고 깔보는 거냐?." 핸슨이 큰 소리로 더럭 역정을 내자 병사들은 찔끔했다. 물론 핸슨이 겁나서가 아니라 주위 망루에서 들을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한 병사가 목소리를 낮춰 주의를 주었다. "이봐. 옆 망루에서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심야에 대화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 만에 하나 들킨다면 저번 69 경비조처럼 두 달 동안을 꼬박 이곳에서 보내야 해." 그 말에 핸슨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화를 참지 못하고 씨근거렸다. "젠장. 어디 한 번 소금 없이 살아봐. 그 무거운 소금자루를 지고 대륙을 누비는 우리가 없다면 어디 너희들이 소금 구경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아?" "뭐, 소금이 없어도 상관은 없을 것 같군. 열심히 뛰어 땀을 흘린 다음 그것을 말리면 소금이 생기잖아?" 다른 병사 하나가 농담을 지껄이자 망루 속의 병사들이 까르르 웃었다. 한스라는 이름을 가진 병사로 평소에 핸슨과는 앙숙지간인 이였다. "이것들이?" 또다시 열을 있는 대로 받은 핸슨이 막 발작하려 했다. 그 때 나지막한 음성이 그의 발작을 제지했다. "그만 해 핸슨. 그리고 너희들도……." 음성의 주인이 57 경비조를 책임지고 있는 선임병 맥밀란의 것임을 알아차린 핸슨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39회 이제 무림 관련 회상은 모두 끝났습니다.^^ ****************************************************************************** 핸슨을 달래주려는 듯 맥밀란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핸슨의 말도 영 신빙성이 없는 것은 아냐.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나처럼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 사는 경우에는 여간해서는 소금 구경을 할 수 없단 말이지. 때문에 간혹 가다 들르는 소금 행상은 환대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맥밀란이 나서서 증명하자 병사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스는 여전히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지만 여자들이 고작 한 주먹이 소금을 얻기 위해 동침한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잖아? 우선 남편들이 가만히 보고 있겠어?" 맥밀란이 편을 들어주는데 기가 산 핸슨이 가슴을 쓱 내밀었다. "물론 그 여자들은 남편이 없는 과부들이었다. 아직도 못 믿겠냐?" "못 믿겠다. 세상에 그렇게 과부가 많은 마을이 어디에 있어." "이게 정말" 옥신각신 하던 둘을 쳐다보며 맥밀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그는 소란을 가라앉히기 위해 둘 사이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핸슨의 말은 사실이야. 산골 마을에는 과부들이 무척 많지. 왜냐하면……." 설명을 해 나가던 맥밀란의 눈가에 잠시 모호한 빛이 감돌았다. 그것은 바로 가지 못하는 고향에 대한 향수이기도 했다.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버린 맥밀란은 설명을 계속해 나갔다. "남편들은 사냥을 하다, 혹은 밭을 갈다가 몬스터들에게 많이 잡혀 먹히기 때문이야. 때문에 산골 마을에는 대체적으로 여자들이 많은 편이지. 그런 점에서 핸슨의 말도 일리가 있어." 맥밀란의 개입으로 인해 둘 사이의 논쟁은 핸슨의 승리로 끝났다. 의기양양한 핸슨은 그것 보라는 듯이 병사들을 죽 둘러보았다. "그것 보라고. 땅이나 파먹던 너희들이 알면 뭘 알겠어? 적어도 이 중에서 애초부터 병사 출신인 경우가 있어? 오직 맥밀란 밖에는 없잖아? 그것도 그는 당당한 영지 수비병이었다고……." 핸슨의 말은 사실이었다. 57 경비조를 구성하고 있는 병사들은 맥밀란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고향이 달랐고 판이하게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핸슨은 소금 행상이었고 그와 논쟁을 벌이던 한스는 농사꾼이었다. 그 외 다른 병사들도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선임병인 맥밀란만은 그들과는 달리 원래부터 병사였다. 그는 펠루시아 산맥 초입에 위치한 조그마한 영지의 경비병 출신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타의로 인해 생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강제로 징집되었고 트루베니아 역사상 최악의 패배라는 트란보르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채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후방으로 후송되었다가 치료를 마치고 이곳 이카롯트시의 성벽 수비대로 재배치되었다. 정말 우여곡절 끝에 만났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인연들인 것이다. 패배를 그대로 수긍할 수 없었는지 한스가 또다시 화젯거리를 만들었다. "그래도 이 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놈은 단연 파사트야. 왜 그런지는 알고 있겠지?" "글세? 왜 그렇지?" 병사들의 관심이 집중되자 한스는 감시탑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힐끗 쳐다본 뒤 가슴을 쭉 폈다. 지금 파사트는 감시탑 위에서 홀로 근무 중이었다.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지. 모두들 알다시피 그놈은 말만 들어도 쟁쟁한 귀족 가의 시종 출신이야. 그러니 상상을 해 보라고. 남편을 전쟁터에 보낸 아리따운 귀부인께서 외로운 나머지 파사트를 은밀히 침실로 끌어들일지 누가 알겠어? 허리통, 다리통 두꺼운 시골 여자들말고 훅 불면 하늘하늘 날아갈 듯한 고상한 귀족 부인들이 말이야……." 한스의 말에 병사들은 박장대소했다. "클클클 그거 말 된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야." 병사들이 웃고 떠드는 가운데 한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시선을 돌렸다. 망루의 구석 부분에는 무척 왜소한 체구의 병사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투구를 눌러써서 얼굴이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겨우 드러난 하관 부분은 재미있다는 듯 슬며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봐. 데이몬. 이젠 밑천도 다 떨어졌으니 자네 경험을 한 번 얘기해 보는 게 어때?" "나, 나 말인가?" 데이몬이라 불린 병사의 입에서 무척 어눌한 말투가 흘러 나왔다. 억양이나 어투가 판이하게 다른, 무척 떠듬거리는 음성이었다. 그러자 병사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는 이곳에 있는 병사들 중 가장 신비에 쌓인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데이몬은 슬며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여, 여자 경험 따위는 없어." "하긴 그 몰골에 여자가 따르면 다행이겠다. 솔직해서 좋군." 한스의 익살에 병사들은 또다시 왁자지껄하게 폭소를 터뜨렸다. 물론 망루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 모습에 맥밀란은 못 말리겠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대책이 없는 놈이군. 이봐. 데이몬 상관하지 않도록 해." "사, 상관 따윈 안 해." 데이몬이라 불린 병사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투구를 벗었다. 그러자 투구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무척 이질적인 얼굴. 길게 찢어진 채 치켜 올라간 눈매며 심하게 휘어진 매부리코. 여러 모로 보아 잘 생겼다고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다른 병사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얼굴의 형태. 데이몬이라 불린 병사의 정체는 바로 독고성이었다. '그런 대로 재미있군. 모처럼 만에 겪어보는 경험이라 해야 하나?' 상관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놀림을 당하는 것이 그리 달가울 리는 없었다. 하지만 한스는 묵묵히 앉아 있는 데이몬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런데 데이몬. 넌 도대체 뭘 하다 온 거야?" "……?" "원래 직업이 뭐였냐고?" 잠시 머뭇거리던 데이몬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나, 나 역시 병사 출신이었어. 내가 살던 곳에서는……." "으잉?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은 데? 내가 겪어본 바에 의하면 넌 분명히 광대였을 거야. 내 말이 맞지?"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이미 한스란 병사에 대해 익히 아는 이상 침묵을 지키는 것이 최선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말고는 떠버리 한스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그의 예상대로 관심이 시들해진 한스는 화젯거리를 다른 곳으로 돌렸고 데이몬은 조용히 상념에 빠져 들어갔다. 이미 그가 이곳에 배치된 지도 육 개월이 지났다. 그 기간동안 그는 이곳의 병사들과 상당히 친해진 상태였다. 물론 여러 번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별 탈은 나지 않았다. 병사들과 지내면서 독고성은 이곳의 말을 익히는데 전력을 다 했다. 그 결과 아직 어눌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은 가능한 상태였다. 전혀 형태가 다른 언어를 익히는데 고작 6개월이 걸린다는 것은 솔직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워낙 오성과 기억력이 뛰어난 독고성이었기에 가능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그런 데이몬을 가만히 쳐다보던 맥밀란은 조용히 다가와서 그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신경 쓰지 말도록 해. 원래 성격이 저런 놈이니까……." 데이몬을 쳐다보던 맥밀란의 눈은 모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번의 전투에서 데이몬이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쯤 무덤 속에 있어야 할 처지였던 것이다. 그것은 57경비대 대원들 모두가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불과 6개월 사이였지만 그 동안 오크에 의해서 많은 공습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공격 중 하나는 정확히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망루를 대상으로 행해졌다. 맥밀란은 점차 그 때의 기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와이번이다." 성벽을 향해 내려꽂히는 와이번 편대를 보자 경비탑 위의 병사가 다급한 경고성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것이 병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었다. 내려꽂히던 와이번의 입에서 화염이 토해지자 나무로 짜 놓은 경비탑은 삽시간에 불타올랐다. 물론 안에 들어있던 병사와 말이다. 하지만 그의 희생 덕분에 망루에 있던 병사들은 전투준비를 마치고 달려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세, 세상에……." 이미 성벽 위는 오크 유격병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오크들은 와이번의 등위에 탑승한 채 이리로 날아온다. 따라서 한 마리의 와이번에는 기껏해야 다섯 정도의 오크들이 탈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크들은 이례적으로 공습방법을 바꾸었다. 그것은 바로 와이번의 등에 고정시켜 늘어뜨린 밧줄에 오크 보병들이 매달린 채 강습하는 방법이었다. 그 결과 와이번 한 마리는 스물 남짓한 오크 유격병을 착륙시킬 수 있었고 이미 성벽 위에는 병사들이 감당하기 힘들 수효의 오크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곧 경비병들을 향해 물밀 듯 덮쳐들었다. "취이익." "죽어랏. 인간." 오크 유격대와 수비병 사이에서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다. 비록 인간들에 비해 힘과 신장이 열세이긴 했지만 타고난 투지로 그것을 이미 극복한 오크 유격병들이었다. 게다가 수적으로 열세이다 보니 수비병들은 계속해서 밀리고 있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야 한다. 머지 않아 지원군이 도착할 것이다. 한 치도 물러서면 안 된다." 계속해서 사기를 독려하던 경비대 대장의 부르짖음도 오래지 않아 오크의 함성에 묻혀버렸고 수비병들은 계속해서 밀린 나머지 성벽 부근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수적으로 워낙 열세였다. 그 중에는 맥밀란이 통솔하는 57경비대도 끼여 있었다. 이미 그들은 끝없이 달려드는 오크의 투지에 의해 전의를 대부분 상실한 상태였다. 그 때 누군가가 앞으로 쓱 나섰다. 왜소하기 그지없는 체구, 그가 얼마 전 배속된 이방인 용병이란 것을 알아차린 57 경비대 병사들의 눈에 의혹이 서렸다. 별달리 강해 보이지 않는 그가 수백 명의 오크들이 핏발 선 눈을 번뜩이며 접근하는 곳을 향해 단신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크크크 이런 빌어먹을 미물들이……." 한발한발 걸어나가는 데이몬의 주위로 다소 이질적인 기운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다소 생소한 기운인 살기(殺氣)였다. 데이몬은 자욱한 살기를 뿜어내며 단신으로 오크 무리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미 오크에게 살기가 통한다는 것은 최초의 격전을 통해 파악한 상태였다. "취익?" 오크들의 눈망울에 점차 의혹이 서렸다. 처음에 인간 하나가 걸어나왔을 때 그들은 웬 미친놈인가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인간의 눈에서 퍼져 나오는 기이한 기운은 점차 그들의 기세를 꺾고 있었다. 타고난 전사라 일컫는 오크의 투지는 물론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인간의 눈에서 나오는 이상한 기운은 그 투지마저도 여지없이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만큼 인간의 눈에서 퍼져 나오는 투기(鬪氣)는 강렬하기 그지없었다. 사정없이 내뿜어지는 데이몬의 투기는 성벽 위에 포진한 오크들의 기세를 순식간에 꺾어 버렸다. 데이몬이 한 발 내딛을수록 오크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치고 있는 오크들. 그들은 성벽 끄트머리까지 밀려나고 나서야 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취이익. 놈은 한 놈이다. 죽여라." 비로소 상황을 깨달은 오크들이 도끼를 치켜들었지만 이미 역부족이었다. 그 틈을 타서 수비군들은 전열을 완전히 정비해놓은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원 부대가 성벽으로 향하는 계단을 타고 맹렬히 올라오고 있는 상황. 이미 오크들에게는 승산이 사라진 전투였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40회 데이몬의 활약은 수비대에게 가장 필요한 시간을 벌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 정도 수의 오크가 성벽을 점거한다면 되찾는 데는 필경 엄청난 피해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벌어진 혈투. 그 전투에서 수비군들은 또 한번 놀라야 했다. 이방인 용병이 단신으로 무려 스물이 넘는 오크를 처치하는 전과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제대로 된 무기로 보기도 어려운 스파이크 건틀릿을 사용해서 말이다. 이곳에서 스파이크 건틀릿이란 무기는 기사들이 보조적으로 사용하는 병기에 불과했다. 낙마한 뒤 어쩔 수 없이 격투에 임할 때나 도움이 되는 병기라고 할까, 물론 정면 대결에선 거의 사용하지 않는 무기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 이방인 용병은 그 짧은 스파이크 건틀릿을 능숙하게 사용해서 오크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해 나갔다. 거친 갑주를 입은 오크의 급소만을 전문적으로 꿰뚫으며 말이다. 그렇게 해서 성벽을 강습한 오크 유격대는 하나도 남김없이 몰살되었다. 그리고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이방인 용병의 이름은 성벽 수비군 사이에 소리 없이 퍼져나갔다. "정말 그렇게 잘 싸운단 말이야." "그럼. 나는 직접 볼 수 있었는데 정말 대단하더군. 그 짧은 스파이크 건틀릿으로 철저히 목이나 눈을 노리는데 단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더군." 그 활약으로 인해 수비군 병사들은 데이몬이란 이름의 이방인 용병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같은 조에 속해있는 57 경비조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처음에는 흉측한 외모로 말미암아 다소 경원시되는 존재였던 병사 데이몬. 하지만 6개월이란 세월이 지나고 계속해서 함께 싸워나간 때문에 데이몬은 57 경비조의 병사들과 상당히 친해진 상태였다. 그 과정에서 맥밀란을 위시한 병사들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해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때문에 맥밀란이 데이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사뭇 남달랐다. "그의 출신이 어딘가 하는 것은 상관없다. 그는 이제 우리 57 경비조의 일원이다." 이제는 데이몬과 상당히 친해진 57 경비조원들. 데이몬이 이곳의 말을 익히고 싶어하는 것을 알아차린 대원들은 열과 성의를 다해 이곳 트루베니아 공용어를 가르쳤다. 그 결과 데이몬은 단 6개월만에 기초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데이몬이 부스스 몸을 일으키자 맥밀란은 그때서야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디 가려는 거지?" "시, 시간이 된 것 같아. 교대해 주려고……." 감시탑으로 통하는 사다리를 움켜쥐고 데이몬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맥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자신의 임무는 철저히도 수행하는군. 아마도 병사였다는 말이 맞을 지도 몰라. 그것도 규율이 엄격한 부대에서 말이야.' 그러나 맥밀란은 데이몬이 수천 명의 무사들을 통솔하는 거대 무력집단의 총수였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감시탑 근무는 병사들이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임무였다. 우선 만에 하나 공습이 개시된다면 가장 먼저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며 또한 좁디좁은 공간의 특성상 오직 혼자서만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그 두 번째였다. 한 번 올라간다면 꼬박 한 나절을 홀로 지내야 하기 때문에 병사들은 갖가지 핑계를 대고서라도 근무를 회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데이몬 만은 달랐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어김없이 감시탑 근무를 섰고, 간혹 말을 배우는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대신 근무를 서 주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가장 믿음직한 대원이라고 해야하나?" 조금 뒤 임무를 교대한 파사트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자 맥밀란은 망루의 벽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다음 차례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수면을 취해두려는 심산에서였다. 무척 좁은 공간. 등을 기대면 거친 나뭇결이 사정없이 등을 파고들 정도로 감시탑 내부는 좁았다. 심지어 다리도 제대로 뻗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곳에서 데이몬은 말없이 경계임무에 몰입하고 있었다. 몸에 걸친 투박한 갑옷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입술을 비집고 나지막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이제 이곳 말은 어느 정도 익혔다. 이젠 개략적으로나마 의사소통이 가능해." 무림의 당당한 실력자였던 그가 말단 경비병 노릇이나 하고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미 일신상의 무공을 모두 잃은 상태.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모처럼 혼자 있게 되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운기조식을 시도해 보았다.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을 만큼 행해왔던 시도. 하지만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단전에서 반응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익히 짐작했던 일이라 그의 얼굴에는 이제 실망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내 몸에서 무공은 완전히 떠나버렸다. 다시 말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마법(Magic) 뿐이다." 두 번 다시 내가기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지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마법뿐이었다. 그것만이 그를 강하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므로……. 하지만 어떻게 해야 마법을 익힐 수 있는지가 미지수였다. 언뜻 보기에도 이곳엔 마법사(Mage)가 드문 편이다. 그것을 보더라도 마법 역시 그리 만만한 학문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일을 쉽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교대를 한 뒤 시간이 나면 제일 먼저 베니테스를 만나봐야겠군.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를 통해서 마법을 배울 길을 찾아야 해." 하지만 교대시기는 아직까지 많이 남아있었다. 계속해서 장정들이 징집되어 전장으로 가는 관계로 경비병들은 무려 한 달이나 성벽에서 기거하며 근무해야 했던 것이다. 데이몬의 시선은 말없이 감시탑 밖으로 향했다. 생각한 바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우선 맡은 임무를 철저히 수행해야 했다. 데이몬이 소속된 제 57 경비조는 근 한 달 만에야 교대를 할 수 있었다. 비록 하루의 휴식시간을 거쳐 다시 사역에 동원될 것이 확실했지만 그래도 병사들은 기뻐하며 망루를 나섰다. 내일이 어찌 되더라도 따듯한 스프로 배를 채우고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겐 크나큰 특권이었다. "나 먼저 갈께." 제일 먼저 파사트가 으스대며 집을 향해 떠나갔고 나머지 병사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밤늦게 교대했던 저번과는 달리 지금은 해가 많이 남아있었으며 더욱이 펠드리안 시내는 평소와는 달리 떠들썩한 축재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방에 파견되었던 엘리트 부대가 휴식을 위해 귀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맞아들이느라 시내는 무척 혼잡했다. 자유시간을 얻은 병사들은 대부분 거기에 섞이기로 결심한 듯 했다. 멀어지던 병사들을 잠시 지켜보던 맥밀란은 데이몬에게 고개를 돌렸다. "넌 뭘 할거야?" "그, 글세?" 떠듬떠듬 대답하던 데이몬을 쳐다본 맥밀란은 싱긋 웃음을 지었다. "갇혀 있었으니 심심할 텐데 시내 구경이라도 하겠어?" "그, 그럴까?" 데이몬은 솔깃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 적적하기도 했었지만 그에겐 이곳의 사정에 대해 소상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맥밀란이 자청해서 안내해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가볼까?" 둘은 가던 방향을 돌려 시가지 쪽을 향해 걸어갔다. 시가지 중심부분 쪽으로 접어들수록 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몰려다녔다. 물론 거리를 나다니는 시민들의 수는 평소와는 달리 무척 많은 편이었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성벽 경비를 하며 시내의 분위기가 어떤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혹은 더욱 증폭되었다. "오늘, 조금 이상하군. 무슨 명절이야?" "명절? 음! 명절은 아니고 전방에 파견되었던 기사단이 휴식을 위해 복귀한 거야. 그 때문에 시내 분위기가 평소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고……." 맥밀란이 친절히 설명해 주었지만 데이몬의 의혹은 가시지 않았다. "기사단?" "응.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이카롯트 기사단이야. 소드 마스터를 무려 일백 명이나 보유한 당당한 이카롯트의 엘리트 부대라고 할 수 있지. 저번 전투에서 그들은 오크 놈들의 간담이 서늘할 정도의 대승리를 거뒀어." "대승리? 전세가 뒤바뀔 만큼?" 데이몬의 말에 맥밀란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추정한 바를 설명했다. "그런 것은 아니고 그저 오크 일개 사단을 섬멸시켰을 뿐이야. 놈들의 군세에 비해 극히 작은 병력이긴 했지만 그래도 승리는 승리이니 만큼 특별히 휴가를 준 것 같아." 모든 전장을 통틀어 본다면 분명히 오크들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거둔 기사단의 작은 승리. 비록 보잘것없기는 했다. 하지만 이카롯트 황제 로젠가르트 4세는 극도로 가라앉은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겉으론 공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이례적으로 휴가를 주게 된 것이다. 펠드리안 시내가 축제 분위기를 띠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때문이었다. '한심하군. 그럴 여유가 있으면 계속해서 적의 빈틈을 노릴 생각이나 하지' 물론 수호마왕군을 이끌고 계속해서 유격전을 벌였던 경험에 의해 데이몬은 그것이 하등 필요 없는 일이라고 간주했다. 하지만 수뇌부도 아니고 한낱 수비군 입장에서 왈가왈부할 처지가 아니라서 데이몬은 그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 때 다소 긴장한 듯한 맥밀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런, 이런.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기사단이 하필이면 우리 쪽으로 행진을 하고 있어." 그들의 눈에 시내를 가득 메운 시민들의 대열이 좌우로 좍 갈라지는 것이 들어왔다. 일단의 병사들이 거만한 태도로 연신 호통을 쳐 대며 시민들을 도로 가장자리로 물러나게 하고 있었다. "저리 비키시오." 중장 갑주를 완벽하게 차려입은 모습에서 그들이 왕실 근위병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하나같이 당당한 체구에 번쩍번쩍 빛날 정도로 손질된 갑주를 착용하고 있었다. 투박한 약식 갑옷을 걸친 맥밀란과 데이몬과는 천양지차라 말할 수 있는 차림새. 둘은 별 수 없이 사람들 대열에 끼여 도로 가장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젠장. 빌어먹을 놈들……." 맥밀란은 연신 사람들을 밀어내고 있는 근위병들을 보며 투덜거렸다. 눈을 부라리는 꼴이 그들을 무척 아니꼽게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도로 가장자리에 몰린 사람들은 그래도 웅성거리며 곧 도착할 기사단의 행진을 손꼽아 기다렸다. 고개를 갸웃한 데이몬은 맥밀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저들은 누구?" "누구긴 누구야. 실력은 하나도 없으면서 부모 잘 만난 덕에 왕실 근위병 자리를 꿰어차고 있는 놈팡이들이지. 하나같이 귀족 아닌 놈들이 없단 말이야." 툴툴거리는 맥밀란의 태도에는 근위병들에게 느끼는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 모습에서 데이몬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곳 트루베니아에선 실력 외에 신분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조금 뒤 그들 앞으로 완전 무장한 병력들이 열을 지어 행진했다. 경쾌한 나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빵빠라빵. 제일 먼저 지나간 자들은 도끼가 달린 긴 창, 핼버드를 곧추 세운 창병들이었다. 그들이 질서정연하기 지나간 다음 중장보병단이 그 뒤를 이었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41회 하나같이 묵직한 갑주를 빈틈없이 걸친 둔중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앞서 본 근위병과 버금갈 만큼의 중갑주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데이몬은 불연 듯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쇳덩이를 치렁치렁 매달고 제대로 달릴 수나 있을까? 말짱 쓸데없는 짓이지. 장담하건데 내 몸이 정상이고 수호마왕군 일백 명만 있다면 저들 전부를 반나절 내에 도륙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것은 상상일 뿐이었다. 지금 그의 능력으론 중장보병 한 명이 아니라 창병 한 명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극악의 금제법 칠종단금술이 남아있는 한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을 할 수 없었다. 하다 못해 상대가 검술을 모르는 평범한 농사꾼일지라도 말이다. "저기 온다." 다소 긴장한 듯한 맥밀란의 말에 데이몬은 정신이 퍼뜩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두 눈에 열망을 가득 담은 채 한 쪽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데이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돌아갔다. 중장보병단은 어느새 지나가 버리고 지금은 말을 탄 기마병들이 열을 지어 행진하고 있었다. 선두에 선 자들은 대부분 가벼운 장갑을 걸친 경기병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고 뒤를 이어 중장갑주를 걸친 기사단이 오고 있었다. 그들의 갑주는 오히려 앞서 지나간 중장보병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 데이몬의 눈에 실망감이 스쳐지나갔다. '쯔쯔. 낙마한다면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할 차림새로군. 이곳 놈들은 왜 저렇게 몸에 덕지덕지 걸치는 것을 좋아하지?' 물론 그 차이점은 양 대륙의 무술이 판이하게 다르다는데 기인한 것이었다. 이곳에 머문 기간이 그리 오래지 않았기에 데이몬은 아직까지 그 차이를 확연히 알고 있지 못했다. 중원에서는 예로부터 몸의 단련을 통한 외공보다는 내공에 바탕을 둔 내가기공이 성행했다. 물론 내가기공을 제대로 수련한 무예자에게는 갑옷이 별달리 소용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선다면 능히 갑옷을 뚫고 상대의 몸에 타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발경. 심지어 권법자들조차도 발경을 이용한다면 상대가 걸친 갑주를 어렵지 않게 무력화할 수 있었다. 특히 고도의 검객들에겐 갑주란 쓸데없이 몸놀림만 둔화시키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보유한 내공에 바탕을 둔 고도의 기술인 검기를 이용해 능히 갑주를 뚫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중원무림에서는 갑주를 사용하는 문파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중원에서 갑주란 거의 군대에서밖에 쓰이지 않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이곳 트루베니아는 달랐다. 우선 이들의 상대는 중원처럼 같은 인간이 아니라 오크 나 트롤같은 몬스터가 태반이었다. 그 때문에 힘을 강조하는 검술이 극도로 발달할 수밖에 없었고 중원처럼 개개인의 대결이 아닌 다른 종족간의 전투가 활발하게 행해졌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갑주 문화가 생겨난 것이다. 우선 갑주란 개인간의 대결보다는 이리저리 뒤엉켜 싸우는 집단전에 무척 효율적인 방호구였다. 난전 중에는 개인간의 대결보다 등에 칼을 맞을 가능성이 현저히 높은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트루베니아의 검술은 내가기공보다는 외공 쪽에 치우친 무술이 발달했고 비록 크로센 대제의 수련법이 전해지긴 했지만 아직까지 대다수의 검사들은 힘을 바탕으로 한 검술을 익히는데 주력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그 검술에는 갑주를 착용하는 것이 필수였다. 데이몬이 열을 지어 지나가는 중장기사단을 건성으로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민들의 환호성이 극에 달했다. 옆에서 흥분한 맥밀란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저, 저것 봐. 핼버트론 경이야. 세상에 라인델프 경도 있어." 맥밀란이 가리킨 방향에는 네 명의 기사들이 연신 손을 흔들며 시민들에게 답례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미남자들로써 얼굴에 옅은 웃음을 떠올리며 자랑스럽게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그들을 쳐다본 데이몬은 반사적으로 그들의 갑주에 대해 살폈다. 앞서 지나간 중장기사들과는 달리 그들은 비교적 얇아 보이는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그곳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빼곡이 그려져 있었다. "저, 저들의 갑옷은 더 야, 얇잖아?" 떠듬거리는 데이몬의 말에 맥밀란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휘저었다. "저들에겐 두터운 갑주가 전혀 필요가 없어. 가진 실력만으로도 능히 무적이라 자부할 수 있는 기사들이니까……. 저들이 입은 갑옷은 바로 마법 갑옷이야. 마법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갑옷 말이야. 물론 엄청나게 비싸지. 거기에다 저들은 가진 마나로 능히 갑주의 강도를 높일 수 있는 능력자들이니까 쉽게 생각해선 안 된단 말이야." 평소 차분한 성격의 맥밀란이 이처럼 열을 올리는 모습은 여간해선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심지어 지난 6개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터라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들이 누군데?" "저들은 말이야." 비록 입으로는 설명을 하고 있었지만 맥밀란의 눈은 지나가는 기사들을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바로 이카롯트 제국이 보유한 최강자들이야. 기사단에 소속된 소드 마스터들 중에서도 제일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강자들. 그들이 바로 저들이야. 이제 알겠어?" 뚫어져라 주시하는 맥밀란의 눈빛은 뭔가 형언하기 힘든 모호한 빛을 띠고 있었다. 어찌 보면 강한 열망과 경외가 감돌아있는 다시 보면 뭔가 씁쓸한 표정이 숨어있는 듯 했다. 잠시 그들을 쳐다본 데이몬은 맥밀란의 어깨를 다시 툭툭 쳤다. "저들이 그렇게 강하단 말이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저들은 너나 나 같은 하급 병사들이 백 명이나 무리 지어 덤빈다고 하더라도 능히 막아낼 실력들을 가지고 있어. 넌 아마 믿지 못할 테지만 말이야." 그 말에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과거에는 그도 결코 저들에 못지 않은 실력을 보유한 강자였었다. 물론 내력을 잃기 전에 말이다. '저들이 얼마나 강하기에……. 무공을 잃은 것이 정말 한스럽군. 통쾌하게 한 번 싸워보고 싶은데…….' 비록 무공은 잃었을지언정 가슴속에 품은 무사로써의 승부욕은 아직까지 남아있었기에 데이몬은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고조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현실을 깨닫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과거는 이제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더 이상 상기할 필요는 없다. 착잡한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그는 화제를 바꿨다. "궁금한 게 있어." "응? 뭐지?" "저들을 만약 크로센 대제에 비교한다면 도대체 누가 강하다고 생각해?" 건성으로 듣고 있던 맥밀란의 눈이 갑자기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그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처 사람들 중에 데이몬의 말을 들은 자가 없는지 살펴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데이몬의 발음이 워낙 어색했기에 알아들은 자는 없는 듯 보였다. 우선 맥밀란 역시도 상당기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데이몬의 발음은 어색했다. 그는 잔뜩 긴장한 채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쉿, 조용히 해." 그는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피더니 데이몬의 손을 잡고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려는 것이다. 한참을 걸은 끝에 그들은 인파를 헤치고 나올 수 있었다.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 도착한 맥밀란은 겨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대관절 그 이름은 어디에서 들은 거지?" 비로소 자신의 실책을 눈치챈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 난 그냥……."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겠어. 하지만 두 번 다시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란다. 만약 이 사실이 근위병들 귀에 들어간다면……." 맥밀란은 손가락을 들어 목에 대고 긋는 시늉을 했다. "우리 둘은 그 즉시 끝장이야. 알겠어?" 평소와는 다른 서슬 퍼런 태도에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 잔뜩 굳어있던 맥밀란의 얼굴이 그때서야 풀렸다. "하긴. 이곳의 사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까 그런 실수를 한 것이겠지. 이해해." "미, 미안해." "미안하긴. 사실 그것은 나도 무척 궁금하게 생각했던 거야. 하지만 그를 보지 못한 이상 누가 강하다고 왈가왈부할 처지는 못되니 말이야. 내 당부 깊이 명심하도록 해." "그러지." 이제 행진대열도 시가지를 거의 빠져나간 상황이었기에 둘은 시내 구경을 마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말없이 숙소로 향했다. 맥밀란에겐 서둘러 숙소로 가서 따끈한 스프로 목을 축일 생각밖에는 없는 듯 했다. 숙소로 걸어가면서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데이몬이 불쑥 말문을 열었다. "이곳에서 마법사들이란 대관절 어떤 존재지?" "마법사라고 했나?" 맥밀란은 미간을 지긋이 모았다. 물론 하급 병사였던 그가 마법사에 대해 깊이 있게 알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는 아는 대로나마 데이몬에게 알려줄 결심을 굳혔다. 비록 흉측한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 데이몬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한 맥밀란이었다. "이곳에서 마법사란 기사단과 더불어 군대의 주축을 이루는 존재라고 설명할 수 있어. 왜냐하면 상황에 따라 마법사 한 명이 일개 기사단과 맞먹는 존재일 수도 있거든." "그래?" 걸어가면서도 맥밀란은 계속해서 설명을 해나갔다. 데이몬은 점점 그의 설명에 빠져 들어갔다. "마법사란 우리 같은 보병들에게는 거의 공포와도 같은 존재야. 왜냐하면 마법 한 방에 보병 백여 명의 목숨이 좌우되는 경우가 허다하지. 그 정도로 마법사의 마법은 가공해." 말을 마친 맥밀란은 데이몬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마법사가 우리편이라면 상황은 달라져.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목숨을 걸고라도 마법사를 지켜야 하는 법이지. 그의 활약에 따라 전쟁의 성패가 좌우되니 말이야." "놀랍군." "마법사에 대해 난 그다지 많은 것을 알고 있진 않아. 다만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노력보다는 자질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 말이야. 다시 말해 마법사의 자질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 알려져 있지. 그리고……" 맥밀란은 얼굴 가득 흥미를 띠는 데이몬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제대로 된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열 살 이전부터 마나를 다루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들었어. 따라서 성년이 된 이후에는 마법을 익혀도 대성하기 힘들다는 말이지." "………." 맥밀란의 말에 다소 충격을 받았지만 데이몬은 겉으로는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 나이가 든 상태에서는 마법을 익힐 길이 없다는 것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물론 예외의 경우도 있지만 말이야." "예, 예외의 경우라니?" 맥밀란은 데이몬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혹시 아까 대열에서 기사들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가는, 검은 로브를 걸친 자들을 봤어?" "으응. 본 것도 같아." 별달리 기억나진 않았지만 데이몬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바로 내가 말한 예외의 경우라 칠 수 있어. 그들은 다름 아닌 흑마법사들이거든……." "저, 정말이야?"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슈렉하이머에게서 이곳의 역사에 대해 세세히 전해 들었기 때문에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흐, 흑마법사들은 저, 저번 암흑 군대와의 대전에서 패해 모두 처형당했다고 들었는데……." 맥밀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것도 알고 있었어? 흠. 그렇다면 얘기가 쉬워지겠군. 물론 암흑 전쟁 당시 흑마법사나 네크로멘서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마왕의 편에 서서 전쟁을 치렀지.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나서 대대적으로 처형당한 것이 사실이야. 하지만 살아남은 자가 전혀 없진 않아.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흑마법사들이 몇 있었는데 이번 전쟁을 계기로 복권되었다고 들었어. 물론 오크와의 전쟁에 참전한다는 조건 하에 말이야." "그런 사정이 있었군." 데이몬은 이제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봐서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듣기로 흑마법은 나이가 들어도 익히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어. 왜냐하면 그들은 마왕과의 계약을 통해 마력을 공급받기 때문이야. 물론 뒤늦게 익힌다고 해도 1 써클 정도 마법사의 경지에는 어렵지 않게 올라갈 수 있지. 그렇게 되면 언제든지 마왕과 계약을 할 수 있단 말이야." "위, 위력에서 차이가 있어?" "공격 방면으론 흑마법의 위력이 백마법보단 비교적 강하다고 알려져 있어. 우리 같은 일반인이 마법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려는 사람은 아마 눈을 씻고 봐도 없을 거야." "그, 그건 왜 그렇지?" "왜냐하면 마력을 얻는 대가로 자신의 영혼을 마왕에게 팔아야 하기 때문이야. 음. 암흑전쟁 때의 경우를 예로 들면 좋겠군. 당시 트루베니아 대륙에 흩어져 있던 흑마법사들은 모두 마왕의 편을 들었지. 단 하나도 예외가 없었어.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이 이미 마왕의 것이기 때문에 결코 마왕의 뜻을 거역하지 못했던 거야. 그러니 흑마법을 익히려면 언젠가는 마왕에게 몸을 빼앗긴다는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해." "………." "또한 흑마법사들은 이곳에선 상당히 경원시 되는 존재야.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운이 나쁘면 명성을 떨치려는 기사들에게 최후를 맞기 십상이지. 왜냐하면 흑마법사는 죽여도 죄가 되지 않을뿐더러 과거엔 베르하젤 교단에서 포상금까지 받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야.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그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흑마법사가 되려는 자는 없어. 물론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사람이면 모를까……." 설명을 들은 데이몬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 그런 곡절이 있었군." "괜히 딴 생각 먹지말고 근무에나 충실하도록 해. 시간이 지나다보면 전황이 나아질 수도 있으니까……." "그러지." 때마침 숙소에 도착했기 때문에 둘의 대화는 거기서 그쳤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외출한 상태였기 때문에 식당 안은 상당히 한산한 편이었다. 둘은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올라갈 수 있었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42회 드르렁. 온통 코고는 소리와 땀 냄새로 가득찬 공간에서 데이몬은 홀로 상념에 빠져 있었다. 무척 피곤했는지 맥밀란은 이미 정신 없이 곯아떨어진 지 오래였다. '과연 마법을 익히는 것이 가능할까?' 맥밀란의 말대로라면 가능성이 무척 희박한 것 같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난 무공도 늦은 나이에 익혔다. 찾아보면 마법으로 대성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없진 않을 거야.' 마음의 결정을 내린 데이몬은 억지로 잠을 청했다. 내일 아침 일찍 베니테스를 만나볼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데이몬은 아침 일찍 황궁으로 향했다. 이미 6개월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개략적인 지리는 어느 정도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 얼마 걷지 않아 웅장한 황궁의 실루엣이 데이몬의 눈앞에 펼쳐졌다. 황궁을 한 번 쓸어본 데이몬은 곧장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갑주를 걸친 근위병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데이몬이 다가오자 그들은 본능적으로 경계자세를 취했다. "서라. 무슨 일이냐." 거침없이 하대하는 말투. 이는 데이몬이 허름하기 짝이 없는 성벽 수비군 복장을 하고 있는데 기인한 듯 했다. 데이몬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나, 나는 궁정 마법사 베니테스를 만나러 왔소." 무척 어색한데다 떠듬거리는 어투에 근위병의 얼굴에 수상하다는 듯한 기색이 떠올랐다. "무슨 용무로?" "그에게 부,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소." 그 말에 근위병은 고개를 갸웃했다. 궁정 마법사 베니테스라면 그들조차 쉽사리 만나볼 수 없는 고위급 인사였다. 그런데 지저분한 성벽 수비군이 그에게 용무가 있다니……. 그것도 얼굴이 흉측하기 그지없는 이방인이 아닌가? 수상한 눈빛으로 전신을 훑어보던 근위병은 그냥 쫓아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베니테스 님은 너 따위가 만날 분이 아니시다. 그냥 돌아가라." 그 때 뒤에서 만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다른 근위병이 턱에 손을 괴고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데이몬의 정체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최근 들어 조금 유명해진 이방인 용병. 이미 그 근위병은 이방인 용병이 오우거와의 대결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곧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려보게. 내 한 번 기별을 넣어 보겠네." 데이몬은 묵묵히 그의 시선을 받아넘기고 있었다. "그래 날 만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이오?" 데이몬은 고개를 들어 베니테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예전과 별달리 다름없는 수려한 생김새였다. 그러나 얼굴이 많이 수척해진 것을 보니 뭔가 마음고생이 심한 모양이었다. "하, 한 가지 청이 있어 왔소." 어눌하긴 하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라서 베니테스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저 이방인이 트루베니아에 온 지는 고작 6개월. 그 짧은 세월동안 이곳의 말을 깨우쳤다는 사실에 베니테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놀랍군. 6개월만에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니……." 당혹해 하는 베니테스를 응시하며 데이몬은 가슴속에 품고 있는 용건을 서서히 꺼내고 있었다. "내 듣기로 당신이 이곳에서 제일 실력이 있는 마법사라 들었소. 그 말이 사실이오?" 베니테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소. 진정으로 실력이 있는 마법사는 궁정마법사 따윈 하지 않을 테니……." "아무튼 어느 정도의 실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 않소?" "그, 그렇기는 하지만." 이방인이 난데없이 자신의 마법실력에 대해 거론하자 베니테스는 이유가 무척 궁금해졌다. 그는 저의를 파악하려는 듯 데이몬의 눈을 지긋이 응시했다. "그런데 그런 얘기는 왜 하는 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나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시오." "마, 마법?" 베니테스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느닷없이 자신을 찾아와서 마법을 가르쳐달라니…….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거니와 너무도 엉뚱한 청이라서 베니테스는 말까지 떠듬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더러 마법을 가르쳐달라는 말이오?" "그렇소. 나는 마법을 배우고 싶소." "마법을 배우고 싶다……." 베니테스는 입가에 미소를 떠올린 채 데이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심 착잡한 기분도 들었다. 이방인이 마법이란 학문을 쉽게 보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쫓아내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베니테스는 좋게 설명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어쨌거나 그는 이방인의 과거를 알고 있었으므로 평소 동정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마법은 그리 만만한 학문이 아니오. 더욱이 지금처럼 쉽게 배우겠다고 나설 수도 없는 학문이기도 하지." "어째서 그렇소?" 베니테스는 지체 없이 설명을 시작했다. 그의 설명은 맥밀란이 가르쳐준 사실과 부합되는 부분이 여럿 있었다. "마법을 익히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나에 선천적인 소질이 얼마나 있는가 하는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백날 익혀도 제대로 된 효과를 볼 수 없소. 왜냐하면 마법이란 자신의 몸을 매개체로 대기 중에 분포되어 있는 마나를 임의로 제어할 수 있는 학문이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마나에 대한 친화도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소." 말을 마친 베니테스는 힐끗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물론 당신이 한 때 소드 마스터였다는 것쯤은 알고 있소. 하지만 마법에 사용되는 마나와 소드 마스터가 몸 속에 간직한 마나는 근원적으로 동일하지 않소. 다시 말해 당신의 경험이 마법을 익히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지." "………." "또한 제대로 마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최소한 열 살 이전의 어린 시절부터 마나를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하오. 그러나 그 중에서 마법사로 자라나는 아이는 극소수에 불과하지. 마법이란 그만큼이나 어려운 학문이오. 죽을힘을 다해 수련을 해도 제대로 마법사로 대접받을 수 있는 2∼3서클 급의 경지까지 오르는데는 오랜 세월이 걸릴 수밖에 없지. 우리는 그 기간을 대략 30년 정도로 잡고 있소." 예상치 못했던 사실에 데이몬의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서, 설마……." 베니테스는 그런 이방인의 모습에 일말의 통쾌함까지 느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특히 당신같이 늦은 나이에 마법을 익힌다면 그 기간은 늘어날 수밖에 없소. 내 장담하건 데 당신이 제대로 된 마법사가 되기까지 최소한 40년 이상의 세월이 걸릴 것을 보증할 수 있소." "저, 정말이오?" "그렇소. 내 이름을 걸고 보증하리다." 데이몬의 얼굴에 다소 미심쩍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베니테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척 젊어 보이는 수려한 얼굴. 데이몬의 내심을 알아차린 듯 베니테스는 빙긋 미소를 떠올렸다. "내 얼굴을 보고 의구심을 가졌나 보군요." "………." "솔직히 말해서 내 나이는 올해 여든 넷이오. 일곱 살 때부터 마법의 길에 들어서서 이제 겨우 7써클의 경지에 올라 있다오. 굳이 나이를 밝힐 필요가 없어서 지금은 마법으로 용모를 감추고 있는 것이지." 말을 이어나가며 베니테스는 상대가 깜짝 놀라는 광경을 상상했다. 결코 마흔이 넘어 보이지 않는 멋들어진 중년인이 실제로는 여든이 넘은 노인이라면 그 누가 놀라지 않을 손가?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이방인은 하나도 놀라지 않는 과묵한 태도를 보였다. 사실 데이몬은 중원에서도 이미 여러 번, 반노환동의 경지에 올라 젊음을 되찾은 고수를 봐 왔던 것이다. 물론 역체변용술을 사용한다면 더욱 쉽사리 용모를 바꿀 수 있다. 이미 데이몬 자신이 배교 내부에서도 따라올 자가 없는 사술의 대가가 아니던가?. 내력만 뒷받침된다면 그는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변용이 가능했다. 때문에 오히려 놀란 것은 베니테스였다. "노, 놀랍지 않은가 보구려." 눈이 휘둥그레진 베니테스를 보며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좋소. 나는 이미 그 마법이란 학문에 관심을 가졌소이다. 그러니 나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시기를 간청 드리겠소. 이건 진심이오." 이방인이 좀처럼 자신의 뜻을 꺾지 않자 베니테스는 난처해졌다. 물론 평상시라면 문하생 하나 정도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 모든 마법사들에게 총 동원령이 내려져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이카롯트의 궁정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참전해도 벌써 참전했어야 했을 것이다. 아니 그 모든 것을 차지하고서라도 그에겐 전혀 몸을 뺄 시간이 없었다. 마법사의 수가 극도로 부족한 상태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은 넘치고 넘쳤다. 전장에 파견된 부대와의 마법 통신, 요인들의 공간이동, 등등이 그에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업무였다. 다시 말해 베니테스에겐 결코 마법에 관심을 가진 저 이방인에게 빼앗길 시간이 없었다. 결국 베니테스는 강경하게 나가기로 작정했다. 별안간 냉랭해진 표정으로 베니테스는 싸늘한 일성을 날렸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군." "………." "경비병으로 배속 받았으면 말없이 임무에 열중할 것이지 주제넘게 마법은 무슨 얼어죽을 마법이오? 그렇게도 할 일이 없소? 마법이란 학문은 당신 같은 이방인이 심심풀이로 익히겠다고 나설 학문이 절대 아니오. 알겠소?"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태도. 업신여기며 윽박지르는 말투에는 데이몬의 기를 꺾어놓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하지만 데이몬은 추호도 놀라지 않았다. "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소. 나는 이미 마법을 배우기로 마음먹은 몸이오. 그러니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그 학문을 배워야겠소." 베니테스는 황당해졌다. 강하게 나갔지만 상대의 기가 전혀 꺾이지 않는 것이다. "대책이 없는 작자로군. 나에겐 당신 따위와 입씨름할 시간이 없소." 그는 냉랭한 표정을 견지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물론 이방인에게 마법을 가르칠 필요도 없을뿐더러 그럴 처지도 되지 못했다. 다시 말해 베니테스에게 가르칠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작금의 상황에선 시간을 쪼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베니테스는 냉랭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만 나가 보시오. 더 이상 이런 일로 나를 귀찮게 하지말고……." 하지만 데이몬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베니테스를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결국 베니테스는 근위병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갑주를 절그럭거리며 근위병 네 명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베니테스는 손가락을 뻗어 데이몬을 가리켰다. "저자를 데리고 나가라. 그리고 두 번 다시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곧 근위병 두 명이 다가가서 거칠게 데이몬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워낙 키도 작은데다 꼽추였기 때문에 데이몬은 곧 근위병들의 팔에 들려 대롱대롱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자, 가자." 거친 근위병들의 윽박지름이 들려왔다. 베니테스는 그 장면을 외면하며 말없이 내실로 들어가려 했다. 별달리 유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순간 한 줄기 격양된 음성이 그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 음성은 차라리 비명이라고 봐야 옳을 듯 했다. "이렇게 하려고 날 이리로 데리고 왔었나?" 그 말에 베니테스는 잠시 멈칫했다. 마치 울부짖는 듯한 절규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왜? 왜? 날 데리고 왔나? 차라리 깨끗하게 죽을 수 있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말이다." 베니테스의 안색이 잠시 어두워졌다. 물론 생각해보면 이리로 데리고 온 자체가 그에겐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내 비록 이런 신세가 되었지만 중원에서는 당당한 실력자였다. 적어도 2천 명이 넘는 무사들을 거느리는 절대자 중 한 명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날 이렇게 멸시하는 이유가 뭔가? 왜 나를 이리로 데리고 와서 이런 참을 수 없는 수모를 안기는 건가?" 그 동안의 설움이 북받쳐 올랐는지 데이몬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한스러운 자신의 운명에 대한 설움이기도 했다. "나는 모든 것을 참아왔다. 그래도 너희들에게 도움이 되어주기 위해 온갖 미물들과 목숨을 건 혈투를 치렀고, 한낱 경비병으로써의 소임도 달게 수행해왔다. 그런데 그 대가가 고작 이것이냐? 어떻게 해서든 강해지고 싶다는 내 열망을 이토록 무참히도 짓밟아야만 속이 시원하겠나?"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에 근위병들도 일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렸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43회 결국 자정을 넘겼군요. 머리를 식히기 위해 부산엘 갔다 왔습니다. 대구에서 삽지리 님(소엠 카페 맹주님^^) 만나 저녁 먹고, 워3 한 게임 했지요. 42회는 그때 올렸는데 43회는 제때 못올렸네요. 고속도로엔 피시방이 없었으니 이해해 주시길……. 늦었지만 올리겠습니다. *********************************************************************** 데이몬의 음성은 하나 하나가 비수가 되어 베니테스의 가슴에 와서 꽂히고 있었다. "내 비록 힘을 잃었기는 하되 무인으로써의 자존심은 가지고 있다. 그러니 더 이상 날 추하게 하지말고 깨끗하게 죽음을 다오. 날 이렇게 만든 데 일말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날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란 말이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뜨거운 눈물이 계속해서 얼굴을 적셨다. 베니테스는 한 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절대자의 신분에서 한낱 경비병으로 전락한 한 사내의 처지가 가슴깊이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참 만에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몬을 쳐다보는 베니테스의 눈빛이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겨 데이몬에게로 다가온 베니테스는 안색을 붉혔다. "일단 당신을 데리고 온데 대해, 일행 중 한 사람으로 미안하게 생각하오. 하지만 명령을 받은 이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오." 데이몬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붉게 충혈된 눈빛으로 그저 베니테스를 쏘아볼 뿐이었다. 잠시 그의 눈빛을 맞받던 베니테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을 한 번 찾아보겠소. 그러니 이대로 근무지로 돌아가 있도록 하시오." "………." "내가 직접 마법을 가르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가하오. 다시 말해 내가 원한다고 해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테니……." "저, 정말인가?" 베니테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몬을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어가며 말이다. 잠시 베니테스의 눈빛을 응시한 데이몬은 근위병에게 붙들린 팔을 흔들었다. "놓아라. 내 발로 가겠다." 주뼛거리던 근위병들이 팔을 놓아주자 데이몬은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언제 추한 꼴을 보였냐는 듯 깔끔한 태도로 베니테스를 향해 포권을 했다. "실례가 많았소.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겠소이다." 생소한 인사법에 다소 당혹해진 베니테스를 두고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데이몬의 뒷모습을 베니테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근무지로 돌아온 뒤 데이몬은 한동안 성벽 근무에 열중했다. 하루에 한 번씩 차례가 돌아오는 감시탑 근무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다른 병사들에게 부탁해서 언어를 유창하게 익히는데 주력할 뿐이었다. '마법이란 학문을 익히기 위해서는 언어라도 깊이 있게 익혀야 한다.' 하지만 베니테스로부터 기별은 여간해선 오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조금도 조바심 내지 않았다. 이미 그는 참고 기다리는 데 대해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가 베니테스를 만나고 온 지 한 달이 되는 날 마침내 기별이 왔다. 선임병인 맥밀란이 무언가를 들고 데이몬을 찾아온 것이다. 다소 씁쓸한, 다시 보면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궁정에서 명령서가 내려왔네." "………." "자네를 궁정 근위병으로 배속한다는 공문일세. 이거 정말 축하해야 할 일이로군." 맥밀란의 말에 함께 근무하던 수비병들은 하나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궁정 근위병 자리는 결코 쉽게 배속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위세 있는 귀족 집안이나 부유한 집안의 자제가 아니면 배속되기란 거의 불가능한 자리가 바로 근위병 보직이었다. 물론 평민 출신들 중에서도 근위병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경우 검술실력이 유난히 뛰어나던지 아니면 체격조건이 훌륭해야 한다는 지하는 조건이 붙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기에 데이몬은 결코 그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아니 왜소하고 추악한 외모를 차지하고서라도 그들은 지금까지 타국 출신의 용병이 근위병이 되었다는 소문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만큼 궁정근위병들은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는 엘리트 부대였다. 하지만 병사들의 술렁거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좋은 자리로 배속되게 된 데이몬을 가슴 깊이 축하해주고 있었다. "축하해. 데이몬." "가더라도 우릴 잊지는 마." 6개월 이상 함께 근무했던 덕에 수비병들은 데이몬을 절친한 동료로 생각하고 있었다. 무표정한 데이몬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극도로 메마른 그의 심성에도 수비병들의 소박한 마음이 와 닿았던 것이다. "이, 잊지 않겠어. 너희들 모두……." 수비병들은 떠나는 데이몬을 위해서 조촐한 파티를 열어주었다. 각기 음식을 아낌없어 꺼내었고, 파사트는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가서 깊이 숨겨두었던 밀주(密酒)를 가져와서 개봉했다. 곧 57 경비대만의 조촐한 전별식이 거행되었다. 독하기 그지없는 밀주가 한 순배 돌아가자 병사들의 얼굴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취기가 감돌았다. 선임병인 맥밀란이 데이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제 가면 앞으론 서로 보지 못할 거야. 전황을 봐서 우린 곧 전방으로 배속될 것 같아. 어딜 가더라도 우릴 잊지 말도록 하고……." "그, 그러지." 예상치 못했던 환대에 데이몬은 다소 얼떨떨했다. 사실 그는 슈렉하이머의 설명을 통해 이곳의 군주들에게 어느 정도의 경멸감을 가진 바 있었다. 그 생각이 이들의 태도로 인해 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트루베니아 사람들 전체에 대한 선입관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머문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수비병들을 대해 본 결과 트루베니아 사람들은 비교적 소박하고 솔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흉물스러운 용모의 데이몬이었지만 한 번 친해지자 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밀감을 보여주었다. "잘 가. 데이몬. 다시 보기를 기원하겠어." "나, 나 역시 그러고 싶어." 술에 취해 벌개진 얼굴로 데이몬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이토록 술에 취해 본 기억은 중원에서도 없었던 것 같았다. 무공을 보유하고 있을 때, 즉 중원에서는 술에 취할 일이 전혀 없었다. 그가 술을 먹을 때는 오직 수호마왕군 무사들과 잔치를 벌일 때뿐이었다. 물론 그 때는 수백 명의 수하를 책임지는 입장이라서 이처럼 술에 만취할 수가 없었다. 어느덧 데이몬의 뇌리에는 이미 죽어 세상에 없는 수하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들을 죽인 원흉인 사준환의 얼굴과 함께 말이다. '사준환! 결코 네놈을 용서할 수 없다.' 생각할수록 그에 대한 복수심이 절로 치밀어 올랐다. "뭐하는 거야. 한 잔 받아야지." 술을 권하는 파사트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난 데이몬은 술잔을 받아들었다. "아, 알았어." 생소하고 독한 밀주였지만 그에겐 지금 이 이상 맛있는 술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57 경비대가 지키고 있는 망루는 파티 분위기에 젖어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정든 동료들과 작별을 고한 데이몬은 6개월 동안 머문 망루를 나섰다. 개인 소지품이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그는 맨몸으로 성벽을 걸어 내려갔다. 베니테스가 왜 자신을 궁정 근위병으로 임명했는지 알 순 없었지만 궁성에 가 보면 곧 알게될 터라서 그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품속에 근위병 임명장을 깊이 보관한 채 말이다. 약 1시간 남짓 걷자 궁성의 모습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그는 즉시 궁성의 후문으로 향했다. 근위병들에게 임명장을 내밀자 그들은 이번에는 두말 하지 않고 그를 베니테스의 집무실로 안내해 주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베니테스가 초조한 기색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공손한 데이몬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베니테스는 함께 들어온 근위병에게 다가가서 뭔가 지시를 내렸다. 근위병이 예를 취하고 나간 뒤에야 베니테스는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아마 당신을 근위병 자리에 배치한 데 대해 무척 궁금할 것이오." "솔직히 그렇습니다." 한 달 전보다 훨씬 유창해진 말투에 베니테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알기로 이처럼 트루베니아의 언어를 빨리 배운 자는 그가 유일한 듯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었기에 그는 곧 설명에 들어갔다. "사실 그 방법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오. 물론 당신이 마법을 배울 기회 말이오." "………." "한 달 전 당신이 방문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난 세르게이 공작을 찾아갔었소. 그가 궁정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기 때문이었지. 그리고 그 분께 당신을 근위병으로 임명해야겠다는 의견을 올렸소." "모르긴 몰라도 그리 긍정적으로 생각하진 않았을 것 같군요." 물론 자신이 세르게이에게 대한 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대충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결코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예상대로 베니테스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 말대로 공작은 무척 탐탁지 않게 생각하더군. 하지만 준비해 온 논리를 풀어놓자 그는 결국 승복할 수밖에 없었지." 베니테스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공작께 당신이 트롤, 오우거를 쓰러뜨렸던 점을 부각시켰소. 다시 말해 그런 중형 몬스터가 만에 하나 공간 이동을 통해 궁성에 잠입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대비책으로 당신을 근위병으로 임명하자고 제안했었오. 어쨌거나 당신은 단신으로 중형 몬스터와 싸워 이긴 유일한 병사이기 때문이었소. 물론 기사들을 제외하고 말이오." 비로소 자신이 근위병으로 임명되게 된 연유를 알아차린 데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마법을 배우겠다는 날 왜 근위병으로………." "근위병은 현재 궁성의 모든 장소에 배치되어 있소. 물론 마법 학부 내에도 어김없이 근위병이 배치되지요." 데이몬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비로소 베니테스의 속셈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소. 그것말고는 당신이 마법을 배울 방법이 없소. 당신을 학부 경비조로 파견하는 것은 내 권한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 그러니 당신은 그곳에서 수업과정을 지켜보며 근무를 하도록 하시오." 데이몬은 진심 어린 태도로 감사를 표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길을 열어주었으니 배우는 것은 오로지 당신의 자질에 달렸소. 그럼 나는 바빠서 이만……." 몸을 돌리려는 베니테스는 뭔가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렸다. "아, 아까 당신을 데리고 온 근위병을 따라가시오. 그가 갑주와 무기를 보급해 줄 것이오." 베니테스는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 축객령을 내렸다. 데이몬은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여 사의를 표명한 뒤 근위병을 따라 집무실을 나섰다. 휘적휘적 걸어나가는 그의 등판에 베니테스의 시선이 와서 꽂히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이 나서자 베니테스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과연 그가 마법을 배울 수 있을까?" 하지만 베니테스는 이미 그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마법이란 본시 기초가 튼튼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용이한 법이다. 물론 지금 마법학부에서 교육 중인 학생들은 대부분이 고르고 고른 자질 있는 학생들이었으며 통상적으로 기초 과정을 마스터한 상태로 투입된 이들이 태반이었다. 때문에 그들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교육은 현재 고급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 터라 그런 고등 과정을 마법에 대한 아무런 기초도 없이 배운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에 불과했다. "후! 할 수 없는 일이지. 일단 길만은 열어주었으니 나머지는 그가 알아서 할 일." 마침내 베니테스는 상념을 접고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없군."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급하기 그지없었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44회 "휴, 이제 되었군." 얼굴이 박박 얽은 곰보중년인은 손을 들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손에 굳은살이 박힌 위치로 말미암아 그가 대장장이란 직업을 가지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그의 앞에는 반짝반짝 닦인 갑주 한 벌이 놓여 있었다. 대장장이의 얼굴에 돌연 짜증이 서렸다. "이렇게 괴상한 갑주를 만들어보긴 처음일세 그려." 그는 바로 조금 전 근위대로 배속된 이방인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그도 무척 신기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근위대에 이방인이 임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므로……. 하지만 막상 이방인을 직접 대하자 그는 아연해할 수밖에 없었다. 신임 근위병의 모습이 그의 상상을 여지없이 깨트려버렸던 것이다. "세, 세상에……." 일반적으로 근위병들은 근육질의 당당한 체구를 가졌다. 때문에 그는 보편적으로 치수가 큰 갑주를 만들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하지만 그 이방인은 마치 소년처럼 체구가 작았다. 그것뿐이라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는 등이 불룩 솟아오른 꼽추였던 것이다. 때문에 그의 몸에 맞는 갑주를 만드는 데 대장장이는 꼬박 반나절을 허비해야만 했다. 근위병들의 갑주는 쇠사슬 갑옷이 아닌 철판으로 된 풀 플레이트 메일이었으므로 이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맞으려나 모르겠군." 그는 완성한 갑주를 들고 작업실을 나섰다. 먼저 신임 근위병의 몸에 맞춰본 뒤 광택을 내고 장식을 달아야 했던 것이다. 덜컥. 문을 나서자 두 명의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그도 익히 알고 있는 근위병 분대장이었고 다른 자가 바로 신임 근위병이었다. 이국적이긴 하지만 자신이 보기에도 정말 흉물스러운 얼굴 형태. 거기에다 체구 역시 드워프를 연상시킬 정도로 작달막했다. 그에 비하면 얼굴이 얽긴 했지만 자신이 훨씬 미남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어쨌거나 한낱 대장장이인 자신에 비해 근위병들의 신분이 훨씬 높은 것은 사실이었기에 그는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다 되었습니다. 한 번 입어보시지요." 완성된 갑주를 힐끗 쳐다본 근위병 분대장은 곧 불만스러운 음성을 토해냈다. "이게 아니야. 투구의 얼굴 가리개가 고정식으로 되어있어야 한다고, 항상 얼굴을 가리고 다니게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일단 먼저 갑주의 치수를 재는 것이 우선인지라……." 이방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힐끗 쳐다본 대장장이는 수긍이 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고위 귀족들 앞에서 저 얼굴을 내놓고 다닐 순 없는 노릇이지.' 대장장이는 완성된 갑주를 데이몬의 전신에 대고 줄이거나 늘여야 할 부분을 펜으로 표시했다. 데이몬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옆에서는 근위병 분대장이 잔뜩 심통이 난 듯한 표정으로 데이몬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다소 경멸하는 듯한 빛이 떠올라 있었지만 데이몬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몸에 익은 눈빛이었고 그로써는 마법을 배울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데이몬의 얼굴을 훑어본 분대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젠장 어찌 저런 놈을 근위병으로 받아들였을까?' 휘하의 근위병들은 대부분 훤칠한 키를 가진 미남자였다. 물론 분대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잘생긴 용모에 멋들어지게 콧수염을 기른 분대장의 얼굴은 걸치고 있는 빛나는 갑주와 무척 잘 어울렸다. 물론 잘 생긴 얼굴을 가릴 필요가 전혀 없는지라 그는 근무를 서면서도 항상 얼굴가리개를 올리고 다녔다. 이미 근위병들 사이에 얼굴가리개는 비상사태에만 사용하는 것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로군.' 비록 상급자인 베니테스의 명령이라 따르긴 했지만 그로써는 추악한 몰골의 신임 근위병이 별달리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그것도 출신이 밝혀지지 않은 이방인 아닌가? 그 때문에 분대장은 일부러 얼굴가리개가 일체형으로 된 투구를 주문한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본 모습으로 다닌다면 궁정의 화젯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치수를 완전히 잰 대장장이가 작업실로 들어가자 그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기다렸다가 갑주를 받아 가지고 근위병 대기실로 오게." "하지만 난 근위병 대기실을 잘 모르는데……." "대장장이에게 물어보면 가르쳐 줄 거야." 냉랭하게 내뱉은 분대장은 빙글 몸을 돌렸다. 마치 너 따위와는 더 이상 대화하기조차 싫다는 태도였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얼마 겪어보진 못했지만 근위병들과 지내는 것이 그다지 쉽진 않겠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이들의 성격은 성벽 수비병들과는 판이하게 다르군.'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린 데이몬은 잠자코 갑주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50년 만에 다시 벌어진 종족전쟁의 전황은 현재 한창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트란보르 전투를 대승리로 이끌어 낸 결과 오크들은 트루베니아 대륙의 60% 가량을 점령할 수 있었다. 대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오크 군은 한동안 병력을 진군시키지 않았다. 그들에겐 전투에 투입할 병력을 생산하는 일이 가장 시급했던 것이다. 척박한 펠루시아 산맥에 숨어살면서 인구가 현저히 줄어버린 탓에 오크들에겐 싸울 병력이 모자랐다. 하지만 이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어렵지 않게 극복될 수 있는 종류의 일이었다. 태어난 오크는 평균 5년이면 충분히 전쟁과 사냥에 투입할 수 있는 전사(戰士)로 자라난다. 그리고 태어나는 새끼의 수 역시 충분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점령한 지역에서 노획한 음식물과 식량은 그들을 무사히 키워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리고 오크 군대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라 할 수 있는 드래곤들에게도 휴식시간이 필요했다. 공성작전을 위해 많은 마나를 소비한 탓에 드래곤들이 무척 지쳐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들의 만들어낸, 성이란 최강의 방어구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드래곤들은 연신 고써클급 마법을 전개했고 그 탓에 그들이 가진 마나는 대부분 고갈되어 버렸다. 그것을 채울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전장은 한동안 소강상태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다만 잃었던 땅을 되찾기 위해 인간들의 군대는 연신 공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산발적인 국지전이 전선 전체를 걸쳐 다방면으로 벌어졌다.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는 자가 뒤바뀐 전쟁. 하지만 전세가 기울면 즉각 드래곤들이 투입되기 때문에 인간들의 군대는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와이번을 이용한 강습작전이 계속해서 진행되는 것도 그들에겐 큰 부담이 되었다. 든든해야 할 후방에서마저 산발적으로 전투가 벌어지고 많은 시민들이 죽어나간다는 사실에 병사들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된 것이다. 앞으로 5년의 시간이 지나면 오크 족의 침공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물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오크 보충병들을 앞세워서 말이다. 여러모로 보아 인간들에겐 점차 불리해져만 가는 전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카롯트의 로젠가르트 4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들에겐 단 하나 손꼽아 기대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첩보부의 수장인 세르게이가 파악해 낸 사실이었다.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로젠가르트 4세는 각 국 군주들을 다시 한 번 한 자리에 불러모았다. 그리하여 인간들의 운명을 결정짓기 위한 군주들의 세 번째 회합이 성사되었고 만전을 기하기 위해 그 회합은 비교적 안전한 왕국 트란벨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카롯트의 궁성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부유한 상업왕국이라 그런지 트란벨의 궁성도 정말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 궁성의 집무실엔 현재 각국 군주들이 모두 모여 대책회의를 열고 있었다. 다만 주의할 점은 참석한 군주들의 수가 저번의 회합보다 현저히 줄어있는 점이다. 물론 나라가 무너지면서 많은 군주들이 목숨을 잃었고, 또한 상당수의 군주들이 기사단을 이끌고 전장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는 지라 참석할 수 있는 군주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들은 불안감에 가슴 조이며 앞에 나와 있는 작전관의 입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작전관은 이카롯트의 세르게이 공작이었다. "그럼 회합을 시작하겠습니다." 허리를 굽혀 군주들에게 예를 취한 세르게이 공작은 곧 전황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아직까지 전세는 어둡기 그지없습니다. 트란보르에서의 참패 이후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지속되고는 있지만 되찾은 왕국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보충병이 충원되는 오크와는 달리 계속해서 병사들의 수가 줄고 있는 것도 우리에겐 큰 부담입니다."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전세. 이러다간 인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군주들의 얼굴은 짙게 그늘이 깔려 있었다. 상황은 여러모로 보아 인간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우선 드래곤 때문에 제대로 된 병진을 구성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100년 전 시작되어 대략 50년 전에 끝난 오크 족과의 종족전쟁. 그 전쟁에서 인간들이 비교적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배경에는 세 가지 이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 중 하나는 성을 이용한 방어작전이었고, 두 번째는 중 장갑을 걸친 기사단의 위력이었다. 그 때문에 인간들은 현저하게 열세였던 병력 차이를 용이하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이점이 바로 병진이었다. 통상적으로 잘 정비된 인간의 군대는 적어도 두 배 이상의 오크 대군과 맞서 싸울 수 있다. 왜냐하면 병과(兵科)에 따른 병사들의 조합에 의해 군대의 위력이 극대화되었던 것이다. 물론 울프 라이더나 궁수대가 있긴 하지만 오크 군의 주력은 보편적으로 경장갑을 걸친 보병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엄선된 병과에 의해 임무가 엄격히 정해진 인간들의 군대에는 결코 비교 할 수 없는 것이다. 먼저 적의 예기를 꺾는 기사단을 비롯해서 후퇴하는 적의 퇴로를 전문적으로 차단하는 경갑기병, 그리고 탄성이 강한 석궁과 갖가지 활로 무장한 궁수대와 적의 진격을 선두에서 버텨내는 중갑보병단. 적의 추격과 포위를 도맡아 하는 경장보병과 창병들까지 인간들의 병과는 정말 다양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만큼 인간의 군대는 만약 한데 뭉친다면 그 위력이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여러 병과들이 조합되는 시너지 효과에 의해 힘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점은 드래곤의 참전으로 말미암아 송두리째 사라져버렸다. 다시 말해 드래곤이란 존재로 말미암아 성을 이용한 방어전과 병진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을 떠올리자 각 군주들은 공포감이 치밀어 오르는지 진저리를 쳤다. 이미 그들은 드래곤의 가공할 만한 공격마법으로 인해 벌써 여러 번이나 주력군을 잃은 경험이 있었다. 메테오 스웜(Meteors swarm)이나 블리자드(blizzard), 어스 쉐이크(earth shake) 파이어 스톰(fire storm)같은 광범위한 지역에 작용하는 고써클의 마법은 정말 위력이 가공할 수준이었다. 만약 드래곤에 의해 마법이 전개되면 밀집해 있는 인간의 군대는 정말 처참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 소규모의 부대로 분리시켜 놓을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그렇게 병력 배치를 하면 사나운 오크 보병들에게 좀처럼 승기를 잡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정말 이것은 딜레마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문제였다. 또한 각종 중형 몬스터들의 참전으로 인해 기사단이 유명무실하게 되어버린 지금 인간들의 운명은 급속히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었다. 조만간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오크 보충병이 가세할 것이 분명했고 그렇게 된다면 상황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므로……. "하지만 헤쳐나갈 방법은 있습니다." 느닷없이 터져 나온 세르게이의 자신감 어린 말투에 각 왕국 군주들은 고개를 들었다. 위기에 처하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것이 인간의 속성인지라 그들은 세르게이의 발언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들의 면면을 쳐다보며 세르게이는 지긋한 어조로 설명을 해 나갔다. "작금의 사태는 모두 드래곤들의 개입으로 인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드래곤들이 참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충분히 오크를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있습니다." "하, 하지만 드래곤들은 이미 인간들을 멸망시켜버리겠다고 선언했소. 이미 그들의 마음이 확고하게 굳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회유할 수가……." 세르게이는 빙긋 미소를 떠올렸다. "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자연적으로?" 군주들의 얼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세르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본시 드래곤이란 종족은 어느 정도 활동기를 지내고 나면 반드시 수면기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사실은 각 군주 전하들께서도 익히 파악하고 계실 줄 알고 있습니다. 특히 드래곤들이 마법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경우에는 활동기가 극히 짧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저희 첩보부에서는 드래곤들의 수면주기에 대해 세세히 분석을 끝낸 상태입니다." 세르게이의 말이 이어질수록 군주들의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급격히 떠오르고 있었다. ―드래곤만 손을 떼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이미 이런 분위기가 각 병단들 사이에 널리 팽배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만큼이나 드래곤은 병사들에겐 공포로 자리잡은 존재였다. 사실 드래곤들만 없다면 오크 따위는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비록 일백 년 전 오크들이 인간을 거의 멸종직전의 상황까지 몰아넣긴 했지만 지금과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지금의 오크들은 일백 년 전보다는 수가 현저히 적은 것이 현실이었다. 따라서 아직까지 트루베니아 대륙에서는 인간들의 수가 월등했다. 그 탓에 군주들은 모처럼 자신들의 운명에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 그렇다면 그 시기가 정확히 언제요." 성질 급한 카르나틱 군주가 벌떡 일어서서 고함을 질렀다. 이미 카르나틱 왕국은 국토의 반 이상의 오크 군의 수중에 넘어간 상태, 그러므로 카르나틱 국왕이 느끼는 위기감은 이곳에 모인 군주들 중에서 가장 지대하다 할 수 있었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45회 세르게이는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펴서 흔들었다. "고정하십시오. 카르나틱 군주님. 비록 알아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는 방심할 상황이 아닙니다." "드, 드래곤. 그 저주받은 놈들만 없었다면 이렇게 밀리진 않았을 것이오." 떨리는 카르나틱 국왕의 말에 군주들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번 전쟁에 드래곤들이 모두 참전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가장 강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드래곤 로드 크라누스는 아직까지 어떠한 전장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에인션트로 추정되는 다른 두 마리의 드래곤들과 함께 말이지요. 따라서 현재 참전중인 에인션트급 드래곤은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가 유일합니다. 물론 우리 군대는 베르키스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지요." 펠루시아 산맥과 접경지역을 이루고 있는 칸두라스왕국. 그 왕국을 무너뜨리는데 가장 혁혁한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였다. 그리고 그는 가장 활발히 활동하며 인간들에겐 이미 대항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잡은 드래곤이었다. 때문에 그의 이름을 들은 군주들 중에는 암암리에 어금니를 질끈 깨무는 이들도 있었다. "현재 크라누스는 자신의 레어에 머물며 트루베니아와 아르카디아 대륙과의 바닷길을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해저의 조류와 각종 소용돌이, 그리고 공간이동을 차단하는 마법진을 계속해서 운용하고 있기 때문에 놈의 마나 소요량은 전장에서 활동중인 다른 드래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 정보부에서 조사한 바로는……." 잠시 말을 끊은 세르게이는 정색을 했다. "앞으로 약 십 년 정도가 지나면 놈들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수면기에 들어가야 합니다. 드래곤 로드 크라누스를 필두로 다른 드래곤들이 차례대로 수면기에 들어갈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놈들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말에 잠깐 희망의 싹을 틔웠던 군주들의 얼굴이 다시 절망감으로 암울해졌다. 자리에 일어서 있던 카르나틱 국왕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시, 십 년을 어떻게 버틴다는 말이오? ." 드래곤과 오크의 연합군 앞에서 인간의 군대가 십 년을 버틴다는 것은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다. 아니 오크의 보충병이 추가되는 삼 년 후부터는 전세가 급격히 역전될 것이라는 것이 일선 지휘관들의 솔직한 평가였다. 그런 상황에서 십 년을 버티라니……. 대부분의 군주들은 말도 되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세르게이의 태도는 단호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인간들의 운명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10년을 버텨내야 합니다. 어차피 트루베니아가 오크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면 인간들은 멸종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트루베니아 인구의 반이 전사하더라도 이것은 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긴장한 듯 한 군주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지금부터 지원병을 대대적으로 모집하십시오. 오크 보충병들이 투입될 때를 대비해서, 검을 들 수 있는 자라면 나이와 신분을 막론하고 징집하여 훈련시키십시오. 오직 그 길만이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입니다. " 세르게이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말에 군주들의 얼굴은 여지없이 굳어가고 있었다. 단 한가지, 아르카디아 대륙과의 협력관계를 구축하지 않은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트루베니아 대륙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한 마디로 심각한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뎅 뎅 뎅 맑디맑은 종소리가 시가지를 휘감으며 울려 퍼졌다. 종소리와 함께 펠드리안의 아침이 밝은 것이다. 평상시라면 새로운 날을 맞이하기 위해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일 때였고 종소리는 정확히 그 시간을 알린다. 하지만 이제 종소리의 의미는 한참 변질된 지 오래였으니……. 시민들은 물론이었지만 특히 성벽 수비병들에게는 이 종소리가 더욱 뜻깊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이 종소리는 병사들이 목숨을 하루 더 이어나갈 수 있다는 소리였다. 지금처럼 오크 유격대의 습격이 빈번한 시기에 성벽 수비병들의 목숨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자고 나면 어김없이 여러 개 수비 분대가 해체되어 사라졌다. 다시 말해 하룻밤에 동료 병사들이 수십, 수백 명씩 죽어나가는 공포의 밤이 계속해서 이어졌던 것이다. 용케 살아남았군, 하는 말이 병사들에겐 이젠 일상적인 아침 인사가 되어버렸다. 그만큼 상황은 절박하기 그지없었다. 증원되는 오크 유격병들의 수는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고, 거의 매일이다시피 이어지는 공습에 병사들의 사기는 계속해서 꺾여만 갔다. 하지만 펠드리안의 중심부에 위치한 궁성은 성벽 근처와는 대조적으로 평온하기만 했다. 워낙 경비망이 엄밀했기 때문에 유격병들은 도저히 이곳까지 침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크들은 대부분 성벽 근처에서 요격되어 싸움을 벌이다 죽어갔다. 그 때문인지 이곳 궁성에 근무하는 근위병들의 일상은 성벽 수비병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궁성 정문을 경비하는 수십 명의 근위병들. 깨끗하게 닦여진 그들의 갑주에는 평온함을 증명하듯 전혀 전투의 흔적이 묻어있지 않았다. 다만 종소리가 울려 퍼짐과 함께 궁정 내부에도 달라진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궁정 내부의 한 장소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얼굴에 앳된 기색이 만연한 젊은 남녀들이었다. 다소 우람한 체구에 약식 갑주를 걸친 청년들이 있는가 하면 푸른 색 로브로 몸을 감싼 호리호리한 청년들도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바로 아카데미의 수련생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준비해온 검이나 책 등을 소지하고 자신이 교육받을 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인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단연 후대를 키워내는 교육이라 자부할 수 있다. 물론 지금처럼 미래가 암울할 때라도 교육만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행해졌다. 참혹한 전장에서 쉴새없이 병사들이 죽어나갈지라도 이들 학생들은 튼튼한 방어진이 쳐진 곳에서 안심하고 교육에 열중해 왔다. 이 모든 것이 더 나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준비인 것이다. 펠드리안 아카데미의 마법 학부를 담당하고 있는 교수 중 하나인 드로이젠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야……." 비쩍 마른 왜소한 체구였지만 눈빛이 무척 인상적인 노인. 드로이젠이란 이름을 가진 마법학부의 교수는 지금 아카데미 건물의 강의실에서 곧이어 있을 수업 준비에 열중하고 있었다. 마법 교육에 필요한 교재를 모두 챙겨 책상 위에 늘어놓은 뒤 그는 시선을 창 밖으로 던졌다. 그곳으로 수업에 참여하려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건물로 들어오는 장면이 비쳐졌다. 잠시동안 그들을 주시하던 드로이젠의 입에서 갑자기 한탄이 터져 나왔다. "트루베니아의 앞날이 정말 걱정이군. 정작 배워야 할 학생은 전쟁터로 징집되어 가고, 전혀 쓸모 없는 놈들만 남아 있으니……." 아직까지 학생들이 강의실에 전혀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드로이젠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가슴 속 응어리가 터져 나왔다. "이미 이카롯트는 썩었어. 정작 마법에 자질이 있는 학생들이 귀족의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전장으로 나가야 하다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린가?" 드로이젠의 뇌리에 불연 듯 서글픈 생각이 떠올랐다. 불연 듯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후대를 위한 교육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해진다. 이것은 트루베니아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건국이념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여러 유사종족들을 누르고 번영을 누리고 있는 토대이기도 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 이 이념의 실천에는 전혀 잘못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념이 지금 이 카롯트에선 현격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아카데미의 학생들에게는 어떠한 경우에도 징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원칙. 이카롯트에서 이미 이 원칙은 산산이 깨어진 지 오래였다. 그것은 바로 귀족들의 편협한 욕심이 빚어낸 결과였다. 갈수록 위태로워지는 전황. 이미 평민들은 물론이오 심지어 귀족들의 가문에까지 징집대상이 확대된 상황이었다. 징집 명령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고위급 귀족들은 아들딸들을 대거 아카데미에 위장 입학시켰다. 전장에 나간다면 죽을 것이 거의 확실했기 때문에 귀족들은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막대한 뇌물은 물론, 각종 인맥까지 대거 동원해서 일을 성사시켰다. 그 결과 마나에 전혀 소질이 없는 학생들이 마법 학부에 입학했다. 심지어 기사 학부에도 여학생들이 심심지 않게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 물론 학부의 정원은 엄격히 정해진 상태. 다시 말해 그들 때문에 정작 입학해야 할 학생들이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드로이젠은 바로 그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학부의 많은 교수들이 그 조처에 반발하고 나섰고 당연히 드로이젠도 그 대열에 끼여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이제 그것을 거부할 만한 담량은 존재하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 그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하고 나선 동료 교수들이 죄다 워 메이지(War mage)로 징집되어 떠나간 뒤, 그는 두 번 다시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할 수 없지." 어쩔 수 없이 체념의 빛을 띄워 올리는 그의 눈동자에 하나씩 들어오는 학생들의 모습이 비쳐졌다. 마치 전쟁터의 상황과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재잘거리며 들어오는 학생들. 물론 그들 중 태반 이상이 건성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들이었다. 징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도피해온 귀족의 아들딸들 말이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드로이젠은 어느새 교육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탓에 강의실 뒷문에 서 있는 왜소한 체격의 근위병 하나가 연신 눈을 번뜩거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곧 수업이 시작되었다. 마법사이기에 앞서 타고난 학자답게 드로이젠은 곧 강의에 몰두해 들어갔다. "대기 중에는 여러 가지 속성을 가진 마나가 분포한다. 바로 세상을 구성하는 여러 원소의 속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차례대로 나열하면 물, 불, 바람, 흙, 나무. 전기 그리고 철(鐵), 혹은 금속이다.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원소도 있겠지만 일단 그것은 제외하고 설명하겠다." 강의실 안은 곧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눈빛을 번뜩이며 드로이젠의 입을 주시했다. 그 모습에는 단 하나의 지식이라도 습득하겠다는 열의가 역력히 배어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다수의 학생들은 수업에 몰입하고 있지 않았다. 비록 드로이젠 교수가 열심히 강의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은 애초에 수업에 관심이 없는 양, 자기네끼리 속닥거리며 귀엣말을 나눌 뿐이었다. 목청이 터져라 설명하는 드로이젠에겐 당연히 힘이 빠질 만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무라봐야 들어먹지도 않을뿐더러 괜히 곤욕을 치를 우려도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미 그들에 대해 관심을 끈 상태였다. 어쨌거나 그 아이들의 뒤에는 엄청난 배경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노릇. 바로 고위급 귀족인 부모들 말이다. "마법의 실현에는 바로 이 다섯 원소의 속성을 가진 마나가 사용된다. 다시 말해 대기 중에 분포되어 있는 마나를 재배열하는 것이 바로 마법의 실현인 것이다. 먼저 기본적인 공격마법이며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파이어 볼(Fire ball)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을 시작하겠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학부의 교육은 전적으로 공격계열 마법에 주안점을 두고 진행되었다. 만에 하나 전쟁이 이곳까지 확대될 경우 이들 마법 수련생들 역시 징집될 것이 확실했으며 그렇게 된다면 이들이 전장에서 워 메이지의 역할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로이젠은 강의를 해 나가면서도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신하고 있었다. 분명 귀족들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자기 자식들만은 빼돌릴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파이어 볼은 원천적으로 화염계열 마법이다. 당연한 말로 이 마법을 실현시키는 데는 불의 속성을 가진 마나가 동원된다. 물론 대기 중에서 마나의 비율을 따져 본다면 불의 속성을 가진 마나가 가장 희박한 편이며 그것을 재배치하는 것도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하지만 파이어 볼은 모든 공격계열 마법 중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마법이다. 그 이유에 대해 누구 알고 있는 학생이 있나?" 드로이젠은 고개를 돌려 학생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화들짝 놀라 책으로 얼굴을 가리는 학생이 몇 명 눈에 들어왔지만 그는 모른 체 했다. 지적해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것은 이미 몸으로 체득한 상태였으므로……. 곧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대답해 왔다. "그것은 화염계 공격이 가장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다섯 원소 중에서 불의 속성을 가진 마나가 가장 파괴력이 강하며 또한 불 자체가 소멸을 상징하는 원소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대답이다." 드로이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흡족한 답변이었다. "마틴의 말처럼 공격 마법 중에서는 화염계열 마법의 위력이 가장 뛰어나다. 물론 고써클로 올라간다면 수계(水系)나 풍계(風系) 마법도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겠지만 일단 지금은 낮은 써클로 마나를 구동시키는데 주안점을 두고 설명하는 것이니 이해하기 바란다. 그럼 이제부터 파이어 볼을 구성하기 위해 마나를 재배열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겠다." 드로이젠이 열을 올리며 강의를 시작하자 학생들의 눈동자가 더욱 초롱초롱해졌다. 물론 수업에 뜻이 없는 학생들은 곧 딴 짓을 시작했지만 말이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46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강의실 안에서 가장 수업에 열중하고 있는 자는 학생이 아니었다. 강의실 뒷문에 버티고 서 있는 한 명의 근위병.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핼버드를 들고 있는 병사가 누구보다도 더 강의에 몰입해 있었다. 물론 그의 이름은 데이몬이었다. '놀랍군.' 깊이 눌러쓴 투구가리개 사이로 연신 눈빛이 번뜩거렸다. 그 눈동자는 드로이젠 교수의 입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한 마디의 설명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말이다. 벌써 데이몬이 수업을 들은 지도 한 달이 지났다. 베니테스의 배려로 학부 강의실 근무를 부여받은 뒤 그는 즉시 이곳에 배치되었다. 물론 오크의 습격으로부터 학생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의실 내부에서 직접 근무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강의를 듣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궁금한 것이 있어도 질문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일단 교수들의 강의하는 내용을 모조리 머릿속에 집어넣겠다는 집념으로 그는 열심히 암기하고 또 암기했다. 그 결과 데이몬은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마법이란 학문이 결코 만만하게 배울 수 있는 학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물론 고등 과정을 진행하는 탓에 기초 지식이 전혀 없는 데이몬에겐 정말 버겁기 그지없는 강의였다. 또한 마법 교육에 사용되는 전문 용어들 중에는 데이몬이 모르는 단어도 허다했다. 도무지 무슨 소린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암기에 열중했다. 어쨌거나 힘겹게 얻은 기회를 도저히 놓칠 수 없었던 데이몬이었다.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그는 다섯 시간마다 이루어지는 교대마저 마다하고 강의를 청취했다. 물론 동료 근위병에게 이것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애당초 마법에 대한 관심이 없는 근위병들로써는 다섯 시간동안의 근무가 지겹기 그지없던 참이었다. 그 증거로 데이몬과 함께 근무를 서고 있는 근위병은 연신 하품을 해 대고 있었다. 묵묵하게 서 있기가 지루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아랑곳없이 강의를 암기하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마법에서 써클이란 곧 마나 배열을 하는 횟수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끌어 모은 마나를 단 한 번 재배치 할 경우 우리는 이것을 1써클이라 칭한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들 알고 있을 줄 안다. 그러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다." 이곳에 모인 마법 수련생들은 대체적으로 1써클을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드물게는 2써클의 유저(user)도 있었지만 드로이젠은 1써클의 마스터(master)나 엑스퍼트(expert)를 기준으로 설명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귀족 자제들 중에는 전혀 마나에 문외한인 학생들도 있었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들은 애당초 수업내용 자체엔 전혀 관심이 없었으므로……. 하지만 데이몬에게 이것은 무척 중대한 난관이었다. 드로이젠 교수의 강의는 기초적인 마법 지식이 있어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 태반이었기 때문에 그저 암기만 할 뿐 내용을 전혀 이해하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데이몬의 오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단 10년 사이에 천자혈마공과 그토록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는 호조 사용법을 대성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 뛰어난 데이몬의 오성도 마법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랜 시간 트루베니아 대륙을 지배해 온 마법은 그 역사만큼이나 심오하기 그지없는 학문이었다. 때문에 그는 그저 드로이젠의 강의내용을 머릿속에 계속 주워담을 수밖에 없었다. "통상적으로 1써클과 2써클의 파이어 볼은 두 배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필적하는 차이를 보인다. 왜냐하면 마나를 한 번 재배열하는 것과 두 번 재배열하는 것은 위력에 있어 엄청난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시전자가 2서클의 엑스퍼트라면 파이어 볼은 두 가지 방법으로 전개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하나의 파이어 볼을 형성하되 시간을 줄이는 방법이오, 두 번째는 동시에 두 개의 파이어 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캐스팅 시간이 늘어나면 더 많은 파이어 볼을 만들어 날릴 수 있겠지만 그 시간동안 적이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정립된 설정이라 할 수 있다." 무척 전문적인, 난해하기 그지없는 이론들이 나열되자 학생들의 태도는 판이하게 갈려 버렸다. 정신 없이 집중하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책상 위에 엎드려 곯아떨어진 학생들도 있었다. 물론 데이몬도 투구 가리개 사이로 드러난 두 눈을 번뜩이며 열심히 암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계속 서 있은 탓에 다리가 저려왔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세 시간에 걸친 드로이젠의 강의가 마침내 끝을 맺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내겠다." 수업종료를 선포하자 학생들은 제각기 책을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 대부분은 실습을 위해 마법 실험실로 향했다. 심지어 강의가 지겨웠다는 듯 인사도 없이 내빼는 학생들도 있었다. 물론 벌써 도망친 패거리들에 비하면 그들은 신사라고 볼 수 있었다. 이런 저런 학생들의 행태를 지켜보며 드로이젠은 주섬주섬 교재를 챙겼다. 가장 마지막으로 강의실을 나서려는데 불연 듯 누군가가 드로이젠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일인가?" 그가 강의실을 지키는 근위병이란 것을 알아차린 드로이젠이 의아한 듯한 표정을 떠올렸다. 근위병이 자신에게 용무가 있을 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근위병은 바로 데이몬이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강의내용 중에 궁금한 것이 있어서 염치 불구하고 나서게 되었습니다." "강의내용?" 드로이젠의 눈이 커졌다. 경비 임무를 맡은 근위병이 설마 자신의 강의에 관심을 가질 줄은 꿈에도 몰랐던 드로이젠이었다.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데이몬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물론 그 의심에는 이유가 있었다. 통상적으로 검술과 마법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학문이다. 왜냐하면 검술은 오로지 육체적인 단련만을, 마법은 정신적인 수양에 극도로 치중된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 학부의 수련생들은 수련 과정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기사 학부에서 검술을 익히는 학생이 흥미를 잃었다고 마법을 배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근위병의 행동은 드로이젠에겐 어이없기 그지없었다. 일단 근위병이란 어느 정도의 검술을 익힌 검사만이 배치되는 자리였고, 그렇다면 분명 마법 쪽에는 문외한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검이란 외길을 판 검사가 이처럼 어려운 마법수업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드로이젠은 무척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럼 궁금한 것을 말해보게." 데이몬은 무척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제가 궁금한 것은 바로 마나를 재배열하는 방법에 관해서 입니다. 또한 각 속성을 가진 마나를 끌어 모으는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요?" 드로이젠의 얼굴에 언뜻 실망감이 어렸다. 근위병은 수련생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기초적인 상식에 대해 질문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수업에 관심을 가져준 것에 기분이 좋아진 터라 드로이젠은 근위병에게 설명을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어쨌거나 배우겠다는 마음가짐이 갸륵했기 때문이며 거기에는 수업시간에 곯아떨어진 학생들에 대한 반감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좋네. 시간상 모두 설명해 줄 순 없지만 간략히 알려주겠네." 드로이젠은 데이몬이 질문했던 점에 대해 세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물론 마법에 관심을 가진 특이한 근위병에게 호기심이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다음 수업까지 시간이 있었기에 그는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근위병의 의문점을 풀어 줄 수 있었다. 비록 마법의 방대한 내용에 비하면 마치 티끌 같은 분량이지만 예상치 못한 드로이젠의 호의는 데이몬에게 다소나마 마법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 시간 남짓 개인 교습을 받은 데이몬은 진심으로 사의를 표했다. "정말 감사 드립니다. 교수님." "뭘? 배우겠다는데 도리가 있나? 다만 이곳 교수들 중에 자네에게 설명을 해 줄만한 마법사는 거의 없을 걸세. 특히 학장인 가필드 교수는 무척 꼬장꼬장한 영감이니 아마 그에겐 질문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만약 궁금한 점이 있다면 상황을 보아가며 나에게 질문하도록 하게. 시간이 허락하는 한 가르쳐 주겠네. 알겠나?" 기분이 좋아진 드로이젠은 데이몬에게 세세하게 주의사항까지 일러 주었다. "알겠습니다." 데이몬은 다시 한 번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고 드로이젠은 만족한 표정으로 강의실을 나섰다.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던 다른 근위병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법에 관심을 가진 근위병. 정말 별종이라고 밖에 말할 도리가 없었다. 시간이 점점 흘러 어느덧 한 달이 또 지나갔다. 오크의 대 공습 시기가 임박할 때가 되었지만 데이몬은 전쟁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마법 학습에 몰두해 있었다. 강의가 있는 날이면 하루도 빠짐 없이 근무를 섰고, 교수들의 강의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머리에 주워담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데이몬의 좌절감은 커져만 갔다. 기초 지식 없이, 그저 훔쳐들은 지식만으론 마법이란 학문을 공부하기가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마법에 대해 배운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났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마법의 개념조차 감을 잡지 못하는 상태였다. 즉 훔쳐 배운 지식만으로 익히기에 마법이란 학문은 정말 난해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마법을 배우려는 수련생들은 대부분 고위급 마법사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철저히 개인교습을 통해 마법을 익히게 된다. 이것은 마법사를 키워내기 위해 트루베니아에서 오래 전부터 정립되어 온 방법이었다. 그런 점에서 지금처럼 여러 학생들을 모아놓고 강의하는 방법이 그리 큰 효과가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이카롯트 제국의 수뇌부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로썬 어쩔 수 없었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전장에서 싸우고 있었기에 교육할 만한 인원이 태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런 터라 마법 학부에서 교육받는 수련생들의 성취는 정말 더디기 그지없었다. 물론 훔쳐 배운 지식에 일관하는 데이몬에겐 더욱 진전이 없을 수밖에 없었으니……. 그나마 데이몬이 더 이상 강의조차 청취할 수 없는 사건이 어느 날 일어난다. 사건의 발단은 마법 학부의 학장인 가필드 교수가 직접 수업에 나선 데부터 시작된다. "오늘은 전격계 마법인 라이트닝 볼트에 대해 수업할 시간이다. 물론 내가 누군지는 모두들 잘 알고 있을 줄 안다." 거만한 표정으로 말을 늘어놓는 노 마법사. 날카로운 눈매를 보아 성격이 무척 깐깐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는 바로 마법 학부를 책임지는 학장 가필드였다. 학부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학장이 직접 강의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가필드 학장에게는 지금의 사태가 그리 탐탁치는 않았다. '젠장. 학장인 내가 어째서 학생들에게 강의나 해야 하지?'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 전 다수의 교수들이 워 메이지로 징집되어 간 터라 학생들을 가르칠 인원이 현저히 모자랐고, 그 덕에 가필드 학장마저 강의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사실 그는 대단한 실력을 가진 마법사였다. 궁정 마법사인 베니테스와 맞먹는 7써클의 엑스퍼트로써 트루베니아를 통틀어 백 명도 되지 않는 대마법사의 반열에 올라선 톱 메이지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 전력을 가진 가필드가 고작 1써클에서 헤매는 학생들을 지도하게 되었으니……. 하지만 징집되기는 싫었던 터라 가필드는 상념을 지우고 강의에 들어갔다. "라이트닝 볼트란 대기 중에 분포되어 있는 각종 속성의 마나들 중, 전기의 속성을 가진 마나만을 골라 한 차례 재배열한 뒤 쏘아내는 공격마법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1써클 마법에 해당되기는 하지만 써클이 올라갈수록 위력이 점점 배가되는 강력한 공격마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증거로 2써클의 마법인 체인 라이트닝 역시 전개하는 과정은 라이트닝 볼트와 전혀 차이가 없다. 다만 같은 시간에 마나를 두 번 재배열하는 데서 위력의 차이가 나오는 것이다." 강의실의 뒤에는 여전히 데이몬이 미동도 없이 서서 강의를 청취하고 있었다. 벌써 두 달째 강의를 훔쳐듣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학생은 없었다. 물론 얼굴가리개를 깊숙이 눌러써서 용모를 분간할 수 없는 탓도 있었지만 그가 워낙 조용히 지냈기 때문에 존재감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학생들보다 오히려 더한 열의로 강의를 듣고 있는 데이몬. 하지만 오늘따라 강의의 내용이 유난히 어려웠으니……. 투구 사이로 드러난 두 눈엔 곤혹스러움이 짙게 배어있었다. '답답하군. 마나를 재배열하는 과정은커녕 심지어 끌어 모으는 것도 불가능하니…….' 물론 가필드 학장의 강의는 평소에도 어렵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대부분 1써클을 상회하는 실력의 학생들일지라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판인데 기초 지식이 없는 데이몬이 알아듣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점점 조바심이 치밀어 올랐다. 그냥 단순히 암기만 하는 것도 이미 한계에 달한 상황, 어떻게 해서든 개념을 이해해야만 암기했던 지식에 적용해서 맞춰볼 것 같았다. 그런 데이몬의 조바심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가필드 학장은 아랑곳없이 진도를 나가고 있었다. "라이트닝 볼트는 한 지점에 파괴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보통 많이 사용하는 공격 마법인 파이어 볼이나 매직 미사일은 불특정다수의 목표물, 다시 말해 광범위한 표적을 공격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하지만 라이트닝 볼트는 다르다. 이 마법의 목적은 오직 하나, 즉 적의 지휘관이나 중요한 요인들을 요격해서 전투불능상태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그럼 이제부터 라이트닝 볼트에 사용되는 마나를 재배열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겠다." 드로이젠 교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학생들 중에는 수업에 관심 없는 듯 딴 짓을 하는 학생들이 상당수 있었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47회 오늘도 많이 늦었군요.^^. 요즘 할 일이 많아서……. 아마 사나흘 정도 올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버님이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셨는데 개업 일이 며칠 후이거든요. 가서 도와드려야 하는 관계로……. 글을 올리고 싶어도 인터넷이 없는 시골이라 어쩔 수 없네요. 양지하시길……. 아마도 25일 정도에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 하지만 과반수 이상의 학생들은 정신을 집중해서 가필드 학장의 강의에 몰두했다. 그 때 강의실 내부로 나지막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저,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마나를 재배열하기 전, 어떻게 해서 대기 중에서 전기의 속성을 띠는 마나만을 끌어 모을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질문자에게로 향했다. 일단 질문의 내용이 이곳에 있는 학생들이 대부분 알고 있는 부분이었기에 놀란 것이고, 또 다른 이유는 깐깐하기로 소문난 가필드 학장의 강의를 끊어먹을 정도로 담이 큰 학생이 있는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질문을 던진 자가 학생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근위병이잖아?" 놀란 학생들의 숙덕거림 속에 가필드 학장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질문을 던진 자가 강의실 뒷문에 서 있던 근위병이란 사실을 알게 되자 그의 눈초리엔 노기가 충만하게 서려 있었다. 강의의 맥을 끊은 이가 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는 것이다. 곧 추상같은 질문이 데이몬에게 쏘아졌다. "자네는 누군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데이몬은 떠듬거릴 수밖에 없었다. 답답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는데 이렇게 학생들의 주목을 받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제, 제 이름은?" "자네 이름을 물은 것이 아니다. 자네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을 물은 것이다." 데이몬은 일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저 모르는 것을 물어본 것뿐인데 교수가 무척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냉랭한 가필드의 질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자네는 근위병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근위병의 임무수칙을 한 번 말해보게." 가필드의 퍼런 서슬에 데이몬은 어쩔 수 없이 근위병의 근무수칙을 읊을 수밖에 없었다. "저, 저는 이곳에서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오크 유격대의 습격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또한………." 근무수칙을 들으면서 가필드 학장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데이몬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투구를 벗게." "예?" "투구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란 말이야." 짜증 섞인 말투에 데이몬은 얼른 투구를 벗었다. 질책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더 이상 강의를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에 그는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고 있었다. 곧 데이몬의 흉물스러운 얼굴이 학생들 앞에 드러났다. 그와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경악성. "헉. 세, 세상에……." "이방인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저런 추악한 얼굴이……." 심지어 데이몬의 얼굴을 본 여학생들은 비명까지 질러대고 있었다. "꺄아악." 그녀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며 단 한번도 이런 추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씁쓸한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이런 생김새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정말 운명의 장난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데이몬의 몰골에 다소 놀랐던 가필드 학장은 곧 특유의 싸늘한 표정을 되찾았다. 그는 데이몬과 함께 근무를 서는 동료 근위병을 손짓으로 불렀다. 앞문에 서 있던 근위병이 얼른 가필드에게로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이 자가 근위병이란 것이 확실한가?" "그, 그렇습니다." "놀랍군. 이방인을 근위병으로 쓰다니……. 그것도 강의실 근무를 말이야. 그건 도대체 누가 내린 결정인가?" 그 근위병은 데이몬의 눈치를 힐끗 살피더니 곧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배, 배치는 궁정 마법사이신 베니테스님께서……." "베니테스가?" 가필드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자신과 라이벌 관계에 있는 궁정 마법사 베니테스가 저런 추악한 몰골의 이방인을, 그리고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의 학부에 배치한 데 대해 저의가 무척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불행히도 그는 베니테스와 별달리 사이가 좋지 못했다. 사실 그들은 한 스승 밑에서 함께 수련한 동기생 사이이긴 하지만 베니테스가 자신보다 훨씬 높은 직책인 궁정 마법사를 맡았다는 사실은 그의 시기심을 극도로 자극했고, 그 탓에 가필드는 베니테스에게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단 말이지……." 가필드는 팔짱을 낀 채 손으로 턱을 괴었다. 물론 어떠한 의도인지는 모르지만 저 이방인을 계속 강의실로 들여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저런 추악한 몰골을 가진 근위병이 자신의 학부에서 근무한다는 것은 가필드에겐 결코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그것도 밉살스런 베니테스가 직접 천거한 자라 하지 않았던가. 그는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투구를 써서 얼굴을 가리게. 그리고 두 번 다시 강의를 방해하지 말도록 주의하게." "아, 알겠습니다." 데이몬은 반색하며 얼른 투구를 덮어썼다. 강의실에서 쫓겨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했다. 핼버드를 다시 집어든 데이몬은 뒷문으로 걸어가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가필드는 눈매를 좁히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수업을 재개하겠다." 학생들 앞으로 걸어간 가필드는 다시 강의를 시작했다. 술렁임도 잠시 학생들은 곧 가필드의 강의에 몰입해 들어갔다. 하지만 아직도 몇몇 학생들은 힐끗힐끗 시선을 돌려 데이몬을 훔쳐보고 있었다. 심지어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리는 학생들도 있을 정도였다. "세상에 저런 얼굴이 있다니……. 점심 먹은 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 "혹시 근위병이 아닌 첩자 아닐까? 진짜 근위병을 죽이고 갑옷을 빼앗아 잠입한 첩자." "그럴 리가?" "아니야. 그럴 수도 있어. 넌 지금까지 이방인이 궁성 근위병이 되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니?" "하긴." 비록 낮게 속삭이긴 했지만 학생들의 대화소리가 그대로 귀에 들어왔으므로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추악한 용모는 정말 어딜 가나 말썽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런 비웃음엔 면역이 된 상태였으므로 그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강의를 청취하기 시작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최소한 암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는 강의내용을 머릿속에 억지로 밀어 넣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불행히도 가필드의 속마음을 전혀 꿰뚫어보지 못했다. 그 날의 근무를 모두 마친 데이몬은 지친 몸을 이끌고 근위병 대기실로 향했다. 함께 근무했던 동료 근위병은 먼저 대기실로 간지 오래였다. 물론 동료 근위병들이 자신과 함께 다니는 것을 꺼린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는 데이몬이었다. 비록 투구로 얼굴을 가렸다고는 하나 왜소한 체구에 불룩 솟아오른 등을 보면 한 눈에 꼽추란 것을 알 수 있을 터, 허영심으로 가득 찬 근위병들이 그런 자신과 함께 걷는 것을 좋아할 리 없을 터였다. 하지만 데이몬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직 하나, 마법만 배울 수 있다면 데이몬은 그 어떤 수모라도 감수할 수 있었다. 이미 강해지기 위해 마법에 모든 것을 건 데이몬이었다. 종일 서서 근무한 탓에 다리가 무척 아팠지만 데이몬은 내색하지 않았다. 걸친 갑옷이 상당히 무거웠기 때문에 다리의 피로도는 더욱 심했다. 족히 오십 근(30kg) 정도는 나갈 듯한 갑옷이었으므로 다섯 시간의 근무로 힘이 빠진 지금 데이몬은 걸음을 옮기는 것도 힘겨웠다. "멍청한 것들. 내가기공엔 이런 갑옷이 전혀 소용없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어." 투덜거리며 걷는 데이몬의 눈에 멀찍이 근위병 대기실이 보였다. 일단 그곳에 가서 무기와 갑옷을 반납하면 데이몬의 하루 일과는 끝나는 것이다. 두 달 가량 해 왔던 근위병 생활은 성벽 수비병 시절과 판이하게 달랐다. 의, 식, 주 모든 면에서 성벽 수비병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근사한 음식에 화려한 복장, 그리고 두 명에 하나씩 주어지는 깨끗한 숙소. 물론 같은 방을 쓸 병사가 없는 탓에 그는 숙소를 홀로 독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차이가 나는 것은 근무 시간이었다. 꼬박 한 달을 성벽에서 지새는 경우가 허다했던 성벽 수비병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근위병들은 하루에 열 시간 이상 수면을 취할 수 있었다. 같은 병사이면서도 이처럼 처우가 다른데 대해 데이몬조차 어리둥절해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에게 이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적어도 마법만 배울 수 있다면 그 어떤 조건도 감수할 수 있었던 데이몬이었다.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낯익은 근위대장의 얼굴이 들어왔다. 평소와는 달리 그의 얼굴은 미미하게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마치 홀가분한 짐을 던 듯한 표정이었다. 살짝 목례를 한 데이몬은 핼버드를 반납하기 위해 무기고로 가려 했다. 그 때 근위대장이 말을 걸어왔다. "갑옷과 무기를 반납한 뒤 내 집무실로 오게." 무슨 용무인지는 몰랐지만 데이몬은 묵묵히 갑옷과 무기를 반납했다. 그런데 집무실에 들어선 데이몬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화들짝 놀란 데이몬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명령서가 내려졌네. 자네를 근위병 직에서 박탈하고 원래대로 성벽 수비병으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서일세." 근위대장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빛이 떠올라 있었다. 사실 데이몬을 평소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근위대장이었기에 그럴 만도 했다. 용모가 추하다는 이유로 사사건건 데이몬을 쫓아낼 궁리만 하고 있던 근위대장이 아니던가?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 "이것은 세르게이 공작 전하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서일세. 아마 가필드 학장으로부터 항의가 들어갔던 모양이야." 그때서야 데이몬은 정황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그가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세르게이가 정황을 알고 결코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진 않을 것이란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 자리에 얼어 붙어버린 데이몬의 귓가에 근위대장의 느물거리는 음성이 계속 들려왔다. "베니테스님께 달려가 보아도 별 수 없을 걸세. 이미 명령서에 공작전하께서 직접 사인을 하셨으니 그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거야." "………." "이렇게 이별하다니 애석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군. 내 생각인데 자네는 결코 근위병이란 직책이 어울리지 않아. 차라리 성벽 수비병으로 가서 용맹을 떨치는 것이 더 나을 듯 싶네. 자고로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물에서 놀아야 하는 법이야." 묵묵히 듣고 있던 데이몬의 눈에 점차 핏발이 돋기 시작했다. 이죽거리는 근위대장의 태도에 분통이 서서히 치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주먹이 꽉 쥐어진 채 부르르 떨렸다. 마법을 배울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생각에 그는 이성을 반쯤 잃고 있었다. 하지만 근위대장은 용케 그 기색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래 그는 능력보다 눈치와 아부 하나로 이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따라서 눈치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는 데이몬이 발작하기 전에 얼른 손을 뻗어 탁상 위의 종을 울렸다. 찌릉.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문이 덜컥 열렸다. 그리로 완전 무장을 한 근위병들이 우루루 쏟아져 들어왔다. 상황을 보아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살심을 떠올리자 어김없이 발작하는 칠종단금술. 그에 따른 고통 때문에 그는 사력을 다해 통증을 참아내는 중이었다. 근위대장을 어쩌겠다는 결심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몸을 부들부들 떠는 데이몬을 보며 근위대장은 조소를 머금었다. "행여나 허튼 짓 하지 않기를 바라네. 물론 한 때 부하였던 자를 죽이고 싶진 않으니까 말일세." 간신히 통증을 이겨낸 데이몬은 매서운 눈초리로 부대장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칠종단금술이 있는 이상 상태에서 그는 결코 살인을 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화풀이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좋다. 원하지 않는다면 가 주겠다."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고,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추한 꼴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방법은 있을 터.' 어떻게 해서든 마법을 배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데이몬은 천천히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런 그의 뒤로 부대장의 비웃음 섞인 일성이 들려왔다. "같이 근무하던 57경비조원은 몽땅 징집되어 전장으로 떠났으니 아마 다른 근무지를 찾아야 할 것이야. 성벽 수비대장에게 가보면 가장 적합한 보직을 알선해 줄 테니, 그럼 잘 가게." 뜻하지 않은 소식에 잠시 걸음을 멈춘 데이몬은 이를 지긋이 악물었다. 또한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오기가 점차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48회 안녕하세요. 무척 오랜만에 올리는 것 같군요. 독자님들에게 무척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사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작다면 작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제게는 무척 엄청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거든요. 이 일로 사흘동안 끙끙 앓다가 이제 겨우 떨치고 일어나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멀쩡하던 하드가 갑자기 왜 파티션이 지워져버렸는지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더군요. 하드는 새것으로 바꿔 주었지만 안에 있던 자료는 몽땅 날아가 버렸습니다. 물론 상당량의 다크메이지 원고와 함께 말이죠. 자료를 살리지 못한다는 기사의 말을 들은 제 심정은 정말 처참했었습니다. 백업하지 못한 분량이 상당했었는데■■. 아마 글 쓰시는 작가분들은 제 심정 이해하실 겁니다. 누군가에게 듣기로 새로 쓰면 결코 똑같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럼 연재 시작하겠습니다. **************************************************************************** 궁성을 나온 데이몬은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수비대가 있는 성벽으로 가서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아야 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시 말해 항명을 각오하고서라도 자신에게 마법을 가르쳐 줄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기로 작정한 것이다. “어차피 이곳의 언어를 완전히 익혔으니 마법사를 수소문하는 일이 어렵진 않을 것이다.” 그가 향한 곳은 시내의 주점이었다. 맥밀란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전투에 나갔다가 휴가를 얻은 워 메이지들이 간혹 주점에 와서 술을 마신다는 소문을 들은 때문이다. 그의 눈동자는 모종의 결심으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마법을 익힐 것이다. 엎드려 애걸하더라도 상관없다. 어떠한 장애가 있더라도 나는 강해지고야 말 테니까■■.” 어느덧 데이몬의 뇌리엔 어린 시절부터 당해왔던 숱한 모욕과 질시가 떠오르고 있었다. 데이몬은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 힘이 없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강했던 시기, 즉 수호마왕군의 총수로 있을 때에는 단 한 번도 이런 대접을 받지 않았다. 다시 말해 힘이 있을 땐 그 누구도 자신에게 함부로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지금 상태에선 완전히 물 건너간 상태. 따라서 그가 힘을 얻을 만한 방법은 오직 마법 밖에 없었다. 그 때 데이몬의 뇌리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비록 내공은 잃었을지언정 나에겐 지금까지 익힌 무공의 구결은 기억되어 있다. 그것을 이용한다면■■.” 물론 그의 독문 무기인 호조 사용법을 이곳의 기사들에게 전수할 수 없는 노릇이다. 특히 호조 같은 짧은 무기는 중장갑을 걸친 이곳의 기사들에겐 위력이 현저히 반감되었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엔 배교의 무사들이 익히는 내공법인 수라사령심법(修羅邪靈心法)의 구결이 남아 있었다. 수호마왕군을 키워내기 위해 사준환이 수십 명의 무공교두들을 동원해 만들어낸 속성 내공심법. 그 위력은 이미 수호마왕군의 활약에 의해 증명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내공을 쌓는 속도 면에선 그 어떤 내공심법보다 월등하다 자부할 수 있는 심법이었다. “이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준다면■■.” 모르긴 몰라도 마법을 배울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백년 전의 크로센 대제가 어떠한 내공심법을 남겼는지는 모르지만 수라사령심법을 결코 능가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의 행동패턴으로 보아 결코 마도의 인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수라사령심법은 정파의 그 어떤 내공심법보다도 내공을 쌓는 속도가 빠르다.” 물론 수라사령심법도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는 심법이었다. 정파의 내공심법보다 쌓인 내공이 비교적 정순하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절정의 경지에 이를 가능성이 다소 희박할 것이다. 이것을 익힌 무사들은 십중팔구 마(魔)의 벽에 부딪칠 확률이 컸다. 하지만 그 문제는 적어도 이곳에선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다. 적어도 수호마왕군 무사들의 수준 정도만 된다면 이곳에선 능히 일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므로■■. 하지만 그러기엔 걸림돌이 있었다. 제반 정황을 떠올려본 데이몬의 이를 으스러져라 꽉 악물었다. “그렇게 한다면 그 가증스런 세르게이란 놈에게 굽히고 들어가야 한다. 절대 그럴 수는 없다.” 데이몬은 이미 세르게이에게 깊이 반감을 품은 상태였다. 타고난 성정답게 그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같은 맥락으로 원한 역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내공심법을 전수해 주는 문제로 심각한 고뇌에 휩싸여야 했다. 하지만 결정은 오래지 않아 내려졌다. “일단 수라사령심법은 마지막 히든카드로 남겨둬야겠다. 세르게이에게 굽히고 들어가는 것은 노력하다가 안 될 경우에나 생각해 보자.” 마음을 정한 데이몬은 시가지로 걸어 들어갔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탓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그를 쳐다보며 손가락질하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한참을 걸어서 펠드리안 시내의 한 주점에 도착한 데이몬은 서슴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덜컥. 주점 안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술을 먹고 있었다. 데이몬은 재빠르게 주점 내부를 살폈다. 주점 내부의 사람들 대부분은 갑주를 걸친 병사들이었다. 다시 말해 마법사처럼 보이는 사람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데이몬은 실망하지 않았다. “주점은 많다. 몽땅 다 뒤져보면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목을 축이려는 목적으로 데이몬은 바(Bar)로 다가갔다. 감정이 고조되었던 터라 술 한 잔 생각이 절실했던 것이다. 흉물스런 용모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집중되었지만 그는 그저 못 본 체했다. 품속에서 은화 한 잎을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자 바탠더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브랜디 한 잔 주시오.” 얼굴을 조금 찡그렸지만 바탠더는 두말하지 않고 병을 꺼내어 술을 따랐다. 술잔을 받아든 데이몬은 독한 브랜디를 단번에 들이켜버렸다. 화끈한 느낌이 식도를 쭉 타고 내려갔다. “좋군.” 그는 잠시 술맛을 음미하며 서 있었다. 비록 중원의 술과는 맛과 향이 판이하게 달랐지만 그래도 제법 먹을 만 한 술이었다. 그 때 옆에서 갑자기 험악한 음성이 들려왔다. “정말 술맛 떨어지는 놈이군. 이봐 바텐더. 돈도 좋지만 저런 놈을 받아서야 쓰겠어?” 데이몬은 그저 못들은 체 했다. 이미 그는 맥밀란을 비롯한 경비대 동료들과 함께 주점에 서너 번 와 본 경험이 있었고, 이런 곳에서는 저렇게 술에 취해 억지트집을 잡는 놈들이 심심찮게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 말에 발끈한 것은 바탠더였다. “이봐 스탠리. 취했으면 고이 막사로 돌아가. 괜히 손님에게 트집잡지 말고■■.” “손님? 크카카카. 지나가던 개가 웃을 노릇이군. 저 몰골을 한 근위병이라니. 어디 실력이나 한 번 볼까?” 누군가가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느껴졌다. ‘좋지 않군.’ 상황이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겠다는 것을 직감한 데이몬은 그때서야 고개를 들었다. 비록 갑주는 걸치지 않았지만 자신이 입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근위병의 제복이다. 물론 특별대우를 받고 있는 관계로 근위병들이 일반 병사들에게 극도로 경원시되고 있다는 사실은 데이몬도 익히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저들이 어떠한 트집을 잡아서라도 싸움을 벌이려 할 것임은 안 봐도 뻔했다. 탕. 술잔을 내려놓은 데이몬은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덩치가 우람한 병사 하나가 술에 취해 몸을 건들거리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앉아있던 탁자에도 같은 복색을 한 병사들이 이쪽을 주시하며 앉아 있던 상황. 그들의 눈동자에도 적의가 떠올라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듯 했다. “잘 되었군. 안 그래도 화풀이 상대가 필요했었는데.” 데이몬은 차분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비록 무공을 잃었다지만 위력적인 체술은 여전히 그의 몸에 남아 있었다. 중원에서 그가 사용하던 무기는 극도로 짧은 단병 무기인 호조이다. 그런 호조의 단점을 보완하고 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는 이미 여러 종류의 권법과 각법에 통달한 상태였다. 내공이 없다지만 저까짓 병사 서넛 정도 처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칠종단금술이다. 만에 하나 살심을 떠올린다면 그 즉시 칠종단금술이 발동될 테고, 자신은 순식간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에 지금으로썬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다시 말해 살심을 떠올리지 않으려면 오로지 무념, 무아의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공격을 가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어떠한 경우에도 상대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저 혼찌검만 내 줄 생각으로 데이몬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 병사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나에게 볼 일이 있나?” 시비를 걸어온 병사는 의외라는 표정을 했다. “얼씨구 우리말을 곧잘 하는 군.” “싸우고 싶다면 덤벼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대로 나가겠다.” “솔직해서 좋군. 좋다. 네놈이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상관없다. 근위대 제복을 입은 이상 성한 몸으론 이곳에서 나갈 수 없는 일이지.” 으르렁거리던 병사의 얼굴에 서서히 살기가 떠올랐다. 우두두둑. 연신 손가락 마디를 꺾으며 다가온 거구의 병사는 데이몬의 앞에 선 채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데이몬의 얼굴이 가슴팍에 겨우 닿을 정도로 병사의 키는 컸다. 하지만 데이몬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견지할 뿐이었다. 주점 안의 병사들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손마디를 연신 꺾던 병사는 갑자기 몸을 돌리면서 데이몬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에잇” 무시무시한 파공성. 상황을 보아 데이몬의 얼굴은 단 한 방에 피떡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정말 힘이 좋아 보이는 병사였다. 하지만 아무리 힘이 엄청나더라도 적중시키지 못하면 하등 필요 없는 법이다. 고개를 살짝 돌려 주먹을 흘려보낸 데이몬은 거구의 품속으로 살짝 파고들며 배를 가격했다. 퍽. 복부를 가격당한 병사는 혼비백산했다. 데이몬이 그리 강하게 가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먹이 꽂힌 곳은 인체의 중요한 혈도 중 하나였으므로 당연히 통증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헉.” 숨이 넘어가는 듯한 충격과 함께 병사의 몸이 급격히 앞으로 쏠렸고 데이몬은 병사의 무릎을 움켜 쥔 뒤, 사정없이 뒤로 메다 꽂아버렸다. 탄력을 적절하게 이용한 공격. 거구의 병사는 허공을 한 바퀴 돈 다음, 탁자를 산산이 부수며 나가떨어졌다. 와장창. 큰 대자로 뻗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 모습이 단 한 방에 기절한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에 병사들이 입이 딱 벌어졌다. 저 덩치를 단 한 방에 제압하다니■■. 하지만 거구를 쓰러뜨렸다고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탁자에 앉아있던 병사들이 그 광경을 보고 일제히 몸을 일으킨 것이다. 하나같이 적의를 줄기줄기 흘리며 말이다. “스탠리를 다치게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대략 서너 명의 병사가 주먹을 움켜쥔 채 다가왔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저 쓰러진 거구를 멍하니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있진 않았다. 오로지 무념, 무아의 상태를 유지하려 애쓰는 것이다. 4대 1의 대결. 물론 순수한 힘으로 따지면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체력적인 면에서 데이몬은 병사들 중 어느 하나도 능가할 수 없었다. 트루베니아 인들은 중원 사람들에 비해 체격도 훨씬 컸으며 힘 역시 월등했다. 여러모로 보아 불리한 싸움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겐 능히 사태를 수습할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데이몬이 인체의 혈도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체에는 알려진 것만도 대략 365개의 혈도가 있다. 어떤 혈도는 의식을 잃게 만들며 또 다른 혈도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심지어 건드리기만 해도 바로 절명하는 혈도도 있었다. 데이몬은 바로 이것을 이용해서 무척 효율적인 공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덤벼드는 병사들을 보며 그의 입 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퍽, 퍽, 퍽. “윽. 억. 크억.” 단 한 방씩에 큰 대자로 뻗어버린 병사들을 둘러보며 데이몬은 손을 툭툭 털었다. 내력이 없었으므로 혈도를 제압할 수는 없지만 기절시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중요한 혈도가 있는 부위에 정확히 주먹 한 방씩 먹이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세, 세상에■■.” 뜻밖의 사태에 주점 내부에 있는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체격도 그리 크지 않은 이방인이 건장한 병사를 네 명씩이나, 그것도 단 한방씩에 넉 아웃을 시켜버리다니■■. 믿을 수 없어하는 사람들의 눈초리를 받으며 데이몬은 말없이 상의를 벗었다. 문장이 선명하게 박혀있는 근위대 제복 말이다. 벗은 제복을 둘둘 말아 아무렇지도 않게 주점 구석에 던져버린 뒤 데이몬은 사람들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이제 난 근위병이 아니야. 오늘 부로 해고당했으니 말이야.” 패싸움이 일어났지만 별다른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 때문에 이런 패싸움은 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 마법사로 보이는 자가 없었기에 더 이상 이곳에 머물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데이몬은 얇은 셔츠만을 걸친 채로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가 주점 밖으로 나가고 나자 사람들이 그때서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단 한방씩에 저 거구들을 때려눕힐 수 있지?” “글세? 보기와는 달리 힘이 무척 좋은 모양이지.”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쳐다보는 동안 기절한 병사들이 하나 둘씩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49회 처음의 계산과는 달리 마법사를 찾아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우선 전황이 워낙 험하게 돌아가고 있었기에 워 메이지들이 여간해서는 휴가를 받지 못한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바심 내지 않고 펠드리안 시내의 주점들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그리하여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마침내 한 명의 워 메이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규모가 무척 큰 주점, 그 이층에 위치한 좌석에 서너 명의 사람들이 모여 앉아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모두 갑옷을 걸친 상태였는데 갑옷의 표면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고 핏자국이 자욱하게 말라붙어 있는 것을 보니 전장에서 막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가운데 앉은 중년인 만은 예외적으로 갑주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 푸른 색 로브를 입고 있는 것을 봐서 마법사인 듯 보였다. 전장에 파견되었다가 휴가를 나왔으리라 짐작되는 워 메이지 말이다.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동자가 있는 것도 모르고 마법사는 음식을 먹으며 한창 대화에 열중해 있었다. '드디어 찾았군.' 멍하니 서서 그를 쳐다보고 있던 데이몬의 눈에서 갑자기 빛이 일어났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리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스르릉. 데이몬이 접근하자 마법사의 옆에 앉아 있던 사내들이 일시에 몸을 일으키며 검을 뽑아들었다. 무척 숙련된 동작이었다. 그 중 선임병으로 보이는 사내가 데이몬을 노려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멈춰라. 무슨 일이냐." 데이몬은 손을 펴서 다른 뜻이 없음을 밝혔다. 무기가 없음을 보여 저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려는 것이다. "다른 뜻이 아니오. 나는 마법사 님께 한 가지 청이 있어서 왔소" "청?" 사내는 의아한 표정을 떠올렸다. 용모를 보아하니 이방인이 분명한데 그가 자신이 모시는 마법사에게 볼 일이 있다니……. 그의 얼굴에 수상쩍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마법사는 사내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전장에서 마법사는 기사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전력 중 하나였다. 특히 마법사를 잘 써야만 명장이라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마법사의 파괴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거기에는 전제조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마법사에 대한 철저한 보호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기사의 경우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둘 다 군대의 주축인 것은 분명했지만 기사에겐 난전에서도 능히 자신을 보호할 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법사는 전혀 그럴 능력이 없는 것이 그들은 오로지 정신적인 수행에 전념하는 학자이기 때문이다. 일단 마법사는 체력적인 면에서 기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다. 그럴 뿐더러 마법을 캐스팅하는데 시간이 무척 많이 걸린다. 그 때문에 전투가 벌어질 경우 적병들은 제일 먼저 이쪽의 마법사를 처치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이없이 마법사를 잃을 경우 이쪽은 정말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군대에서는 보통 뛰어난 실력을 가진 병사를 엄선해서 마법사의 호위역을 맡겼다. 이들이 바로 마법사를 호위하는 가드(Guard)인 것이다. 물론 가드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마법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식사를 할 때에도, 혹은 잘 때에도 어김없이 마법사의 옆에 붙어 보호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법사가 휴가를 얻을 때에도 가드들 역시 함께 휴가를 얻어 그를 수행하며 보호해야만 했다. 이들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사내는 만에 하나 있을 지도 모르는 상황을 고려해서 상대의 청을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더 이상 접근을 허락할 수 없소. 가시오." 데이몬의 얼굴에 다급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정말 어렵게 만난 마법사를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정 의심스럽다면 몸수색을 하더라도……." 하지만 사내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몸수색이든 뭐든 상관없소. 안 된다면 안 되는 것이오. 가지 않으면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소. 어떻게 하겠소?" 눈에 힘을 주어 으르렁거린 사내는 데이몬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의 태도는 정말 교본에 오를 만한 모범적인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는 정말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마법사의 가드가 된 경우였다. 물론 마법사들은 군대에서 말 그대로 특급 대우를 받는다. 따라서 그를 수행하는 가드들 역시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었으므로 가드가 되려는 병사들은 그야말로 줄을 이었다. 그런 절차를 거쳐 가드로 임용된 만큼 사내는 정말 철저하게 위험요인을 차단하려 하고 있었다. 그 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깐 기다리게. 밀튼." 그 목소리에 밀튼이라 불린 사내는 검을 거두더니 공손히 뒤로 물러났다. 이 정도면 자신이 할 바는 다한 것이다. 그가 물러난 곳으로 푸른 로브의 마법사가 저벅저벅 걸어나오고 있었다. 마법사는 정확히 사내가 엄호할 수 있는 자리에 선 뒤, 데이몬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나에게 부탁할 것이……." 데이몬은 다행이란 표정을 지으며 얼른 말문을 열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 청은……." 데이몬의 청을 들은 마법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그러니까 당신에게 마법을 전수해 달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제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마법을 배워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보답하겠습니다. 제발 제게 마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데이몬의 어조에는 절박한 감정이 그대로 묻어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법을 배워야만 했던 데이몬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 데이몬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도리어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마법을 가르쳐달라? 허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마법사의 옆에선 가드들도 함께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하하하. 마법?" "클클클 정말 웃기는 놈이로군." 데이몬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마법사가 자신의 진심을 전혀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답답한 쪽이 오히려 자신이라서 그는 다시 부탁을 했다. "이건 제게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할 테니 제발……." 그 말을 들은 마법사는 돌연 정색을 했다. "그래 얼마를 줄 텐가?" "네?" 영문을 모른 데이몬은 의아한 표정을 떠올렸다. 마법사는 여전히 장난기 어린 태도를 고수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 마법을 가르쳐 달라며? 그러려면 수업료를 내야 할 것 아닌가?" 전혀 뜻밖의 말에 얼떨떨해진 데이몬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얼마나 드려야 할지? 저는 돈이 별로……" 그는 품속에 손을 넣으려 했다. 성벽 수비병으로 근무하며 받은, 얼마 안 되는 봉급이나마 몽땅 꺼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뒤이어 터져 나온 마법사의 말에 그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물론 많이 주면 좋지.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적정 수준만 받을 테니……. 가만있자. 내 휴가기간이 정확히 일주일이니 하루에 10셀 어떤가? 내 그 기간동안 성심껏 가르쳐줌세." 데이몬은 비로소 상대의 의도가 자신을 놀리려는데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저는 진심입니다." "아 물론 나도 진심이지. 비록 내가 그리 높은 써클의 마법사는 아니지만 자네 정도는 충분히 지도할 수 있다고 자부하네. 못 믿겠으면 여기서 시범을 보여줄까?" 여전히 이죽거리는 마법사의 태도에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게서 마법을 배우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다. 말없이 몸을 돌리는 데이몬의 뒤로 사람들의 비웃음 섞인 조소가 터져 나왔다. "원 싱거운 녀석.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 "마법을 배우겠다고? 차라리 나에게 검술이나 배우지 그래?" 덜컥. 문을 열고 나오는 데이몬의 뇌리에 문득 서글픈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왜 이곳에서 무수한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며 살아야 하는가? 정녕 마법을 배울 길은 없는가? 하지만 집념 하나만은 누구에게도 못지 않은 터라 그는 말없이 각오를 다졌다. 상황을 봐서 저 마법사는 자신을 지도해줄 수 없음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할 터. 그 어떤 모욕이라도 감수하겠다는 결심으로 데이몬은 묵묵히 다른 주점을 찾아 나서고 있었다. "그래 놈이 아직까지 수비대에 복귀하지 않았다고……." "그, 그렇습니다. 마법 학부에서 쫓겨난 뒤 그는 복귀하지 않은 상태로 정처 없이 시내를 배회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떠듬떠듬 보고하는 베니테스를 보며 세르게이는 의아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래 놈이 뭘 하고 있다던가?" 잠시 주저하던 베니테스는 곧 조사된 사항을 보고했다. "네. 목격자에 의하면 그는 주점을 돌아다니며 자신에게 마법을 가르쳐 줄 사람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보름 동안이나 끊임없이 말입니다." 세르게이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마법을?" "그, 그렇습니다." 지은 죄가 있는지라 베니테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는 데이몬을 마법 학부에 배치한 사실로 인해 세르게이에게 한바탕 곤욕을 치른 상태였다. 물론 그를 근위병으로 임명하겠다는 명령서엔 세르게이가 직접 사인을 했지만 그를 강의실에 배치한 것은 명백한 베니테스의 월권행위였다. 사실 베니테스의 제안대로 중형 몬스터를 상대하게 할 목적이었다면 그를 중앙 광장에 배치해 놓아야 옳았다. 하지만 마법 학부의 학장인 가필드에 의해 데이몬이 강의실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이 세르게이에게 직통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세르게이는 데이몬을 즉시 원래대로 성벽 수비병으로 좌천시켜버렸다. 그리고 베니테스를 불러들여 한바탕 나무란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지금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다. 데이몬의 근황에 대해 전해듣자 세르게이는 예상대로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나이에 마법을 배우겠다. 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마법이 무슨 아이들 장난인 줄 알고 있나 보군. 가르쳐 달라면 순순히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어림없는 일이지." 묵묵히 듣고 있던 베니테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이방인의 처지에 동정이 가긴 했지만 더 이상 자신으로썬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착잡한 심경을 털어 내기 위해 그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를 체포하기 위해 근위병들을 보낼까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세르게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지금은 섣불리 병력을 움직일 때가 아니었다. 특히 일반 병사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근위병을 보낼 순 없었다. 안 그래도 무차별적인 징집 명령 때문에 민심이 무척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또한 한 나라의 공작답게 그는 일반 병사들이 근위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이미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만에 하나 근위병들을 잃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가만히 사태의 추이를 관찰하기로 했다. "그저 가만히 지켜만 보도록 하게. 만약 한 달이 지나도 그가 복귀하지 않는다면……." 말을 마친 세르게이는 손가락을 들어 목에 대고 긋는 시늉을 했다. "표시 나지 않게 처리해 버리게. 암암리에 키우고 있는 어새신(Assassin:암살자)들을 파견하면 용이하게 처치할 수 있을 거야." "아, 알겠습니다." 베니테스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요즘 펠드리안 사내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것은 용모가 무척 추악한 이방인 하나가 시내를 돌아다니는 데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자네 요즘 소문 들었나?" "무슨 소문 말인가?" "마법을 배우겠다고 돌아다니는 이방인 말이야. 혹시 본 적이 있나?" "아! 그 추악하게 생긴 작자? 암 본 적 있지, 있다마다. 워낙 용모가 특이해서 한 번 본 순간 뇌리에 뚜렷하게 각인되더군." "어떻게 그렇게 생길 수가 있는 거지? 아침에 먹은 음식이 올라올 정도로 흉물스럽더군. 또한 재미있는 것이 그 놈이 휴가 나온 마법사만 찾아다니며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애걸하는 점이야." "마, 마법 말인가?" "글세 말이야. 워낙 흉측하게 생겨서 나이를 짐작할 순 없지만 적어도 40은 훌쩍 넘은 것처럼 보이네. 주제에 우리말은 제법 유창한 것 같더군." "미친놈이군. 그 나이에 무슨 마법을 배우겠다고……. 제대로 된 스승 밑에서 어릴 때부터 배우더라도 되기 힘든 것이 마법사인데 말이야." "혹시 정신이 나간 놈 아닐까?" "글세 그럴지도……." 워낙 특이한 용모인 데다가 마법을 배우겠다고 돌아다니는 때문에 데이몬에 대한 소문은 펠드리안 시내에 널리 퍼질 수밖에 없었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50회 데이몬을 본 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그를 비웃기에 바빴다. 우선 그처럼 공개적으로 마법사만을 찾아다니며 마법을 배우겠다는 사람은 지금껏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병사들조차 데이몬의 기행을 화젯거리 삼아 대화를 나눌 정도였다. 그런 것도 모른 채 데이몬은 매일 주기적으로 주점을 방문하며 자신에게 마법을 전수해 줄 마법사를 찾아다녔다. 잠은 그냥 아무데서나 쓰러져 잤으며 그 시간 이외에는 오로지 주점을 돌아다니는데 하루를 소진했다. 하지만 그는 쉽사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우선 주점에 들르는 마법사들 대부분이 잠시 동안의 휴가를 얻어 모처럼 펠드리안을 방문한 워 메이지들이었다. 물론 그들에겐 오로지 전장에서 지친 심신을 쉬겠다는 생각뿐이었으므로 마법을 배우겠다는 나이든 이방인에게 관심을 둘 리가 없었다. "정신나간 사람이군." 데이몬을 미친 사람으로 치부하고 말도 하지 않으려는 마법사들은 오히려 양반이었다. 마법사들 대부분은 데이몬을 놀림감으로 삼으려 했다. 전장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데이몬을 대상으로 풀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절 가드로 써 주십시오." 하다 못해 데이몬은 마법사들에게 가드로라도 자신을 받아달라고 했다. 그렇게나마 마법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수락하는 마법사는 없었다. 원칙적으로 가드란 마법사가 속해있는 부대의 사령관이 임명하는 것이다. 물론 마법사가 직접 고르는 경우도 있었고 그럴 경우 대부분 받아들여졌지만 추악한 용모의 데이몬을 가드로 받아들이겠다는 마법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자네 몰골을 보게. 그 누가 자네를 옆에 두려고 하겠나. 난 가드를 바꿀 생각이 없네." 고개를 가로젓는 마법사에게 데이몬은 결사적으로 달라붙었다. 한 때 무인이었던 자존심을 모조리 버리고 애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 실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마법사님의 가드 중 누구도 상관없으니 한 번 저랑 붙여주십시오." "어허.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군. 내 똑똑히 말하지만 가드를 바꾸지 않을 생각이네. 그러니 이만 물러가게." 좌절이 거듭될수록 데이몬의 의지는 약해져갔다. 그와 함께 삶에 대한 애착마저도 흔적도 없이 스러지고 있었다. 그는 힘없이 몸을 돌려 나왔다. 그의 등으로 조소어린 사람들의 시선이 꽃히고 있었다. "마법을 배우는 것이 이다지도 힘든 것인가?" 이미 무인으로써의 자존심은 상처를 받을 대로 받은 상태. 급기야 그는 자존심을 달래기 위해 술에 맛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는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하들의 복수. 기구한 자신의 운명.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중압감을 모조리 잊어버리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술을 마셨다. 품속에 들어있는 얼마 안 되는 은화를 모조리 털어서 말이다. 그럴 수록 마법사를 찾아 배회하는 횟수도 점점 잦아들었다.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인 한 달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주점. 낡은 탁자와 의자 서너 개가 전부인 이 주점은 한 눈에 보기에도 하급 병사들의 잔돈푼을 노리고 세워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주점 안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대부분 추레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물론 제대로 된 주점에서 술을 먹을 돈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주점의 구석진 자리에 지금 누군가가 고주망태가 된 채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술. 술을 가져오란 말이야." 불룩 튀어 오른 등판에 흉물스런 생김새. 바로 데이몬이었다. 마법을 배우기 위한 일념으로 펠드리안 시내를 끝없이 배회하던 그가 주점에서 술에 떡이 되어 있는 것이다. 한 눈에 보기에도 취기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듯 한 모습이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 때문에 안 그래도 흉측한 몰골이 더욱 기괴하게 보였다. 주점의 주인인 듯 한 노인이 곧 그에게로 다가갔다. 노인은 가지고 온 싸구려 밀주 한 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뒤 데이몬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자고로 이런 술집에서는 선불을 받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돈이 없는 빈털터리들만 찾는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술값을 떼일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내민 손바닥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게슴츠레한 눈을 가늘게 좁혔다. "돈? 도, 돈이라……. 물론 있지." 품속을 주섬주섬 뒤지던 데이몬의 손바닥에 동전 두 닢이 딸려 나왔다. 그것이 데이몬에게 남은 전 재산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봉급이었지만 1년 가까이 모았으므로 데이몬은 제법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많은 돈을 술을 마시기 위해 단 며칠 동안 모조리 탕진해버린 것이다. 동전 두 닢을 본 노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뒤이어 터져 나오는 퉁명스런 음성. "술 한 병에 동전 세 닢이야." "그것밖에 없는데……."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노인은 할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이미 많은 술을 마신 데다가 인상이 워낙 험상궂었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돌아서며 으름장을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술만 마시고 나가버려. 공짜 손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절이니까……." "그러지. 뭐." 데이몬은 병을 집어든 뒤, 입에다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큼한 맛이 입 속을 감돌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직 취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밀주는 데이몬의 주머니 사정에 가장 적합한 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록 이제부턴 마시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술집 내부의 사람들이 힐끔힐끔 자신을 훔쳐보고 있었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데이몬은 취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의 얼굴엔 예전에는 보지 못한 새로운 상처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며칠 전 한 마법사를 찾아갔다가 생긴 상처였다. 데이몬의 뇌리엔 어느새 그 때의 상황이 떠오르고 있었다. 정말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기억이었다. "거절하겠네. 내 가드들은 모두 일류들이야. 자네 따윌 가드로 삼을 생각은 없네." 마법을 전수해 줄 수 없다면 하다 못해 가드로라도 삼아달라는 부탁에 마법사는 물론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거절했다. 또다시 좌절할 수밖에 없게되자 데이몬은 그만 혈기를 이기지 못해 발작하고야 말았다. 그동안 거절당했던 설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도대체 이유가 뭐지? 왜 다른 사람은 되고 나는 안 된다는 거냐?" "어? 어? 이 사람이?" 당혹한 마법사의 앞을 가드들이 재빠르게 막아섰다. 하지만 이성을 잃은 데이몬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불끈 움켜쥔 주먹이 사정없이 허공을 갈랐다. "크억." 가드 한 명이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얻어맞고 주저앉았다. 정통으로 급소를 맞은 터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놀란 가드들이 무기를 뽑아들고 데이몬을 향해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싸울 상대가 난데없이 머리를 감싸안고 바닥을 뒹구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다. 물론 이것은 데이몬에게 칠종단금술이 발동되었기에 일어난 사태였다. 격정이 치민 나머지 무념, 무아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린 데이몬에게 어김없이 칠종단금술이 발동되었던 것이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가드들은 곧 눈에 불을 켰다. "이 자식이?" "수작 부린다고 속을 줄 아나?" 동료 한 명이 당한데 대한 앙갚음으로 그들은 쓰러져 버르적거리는 데이몬을 인정사정 없이 짓밟았고 그는 무려 일 다경 가량 동안이나 뭇매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퉤. 힘도 없는 자식이……." 만신창이가 된 채 널브러진 데이몬을 남겨두고 그들은 의기양양하게 주점을 나섰다. 그리고 데이몬은 꼬박 이틀 동안을 몸져누워야 했다. 가드들에게 그 정도로 무자비한 구타를 당한 것이다. 몸을 치료한 후 데이몬은 마침내 마법사를 찾아다니는 일을 포기해 버렸다. 더 이상 모욕 받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데이몬이었다. 이제 데이몬에게 남은 카드는 세르게이를 찾아가서 수라사령심법을 조건으로 마법을 배울 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전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 번 앙심을 품은 상대에겐 결코 굽히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결국 그 때문에 데이몬은 이처럼 술주정뱅이로 전락해버렸고, 오늘도 술에 취해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술이…없군." 술병이 텅 비어버리자 데이몬은 애석하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이미 자신에게 돈이 없는 것을 보았으니 주인은 결코 술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는 말 그대로 땡전 한 푼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버렸다. 당장 오늘 저녁부터 끼니를 걱정해야 할 몸이 되어버린 것이지만 미련은 없었다. 지금의 상황에서 데이몬에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면 성벽 수비대 사무실을 찾아가서 새로운 보직을 부여받는 것이겠지만 그에겐 애당초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무 희망도 없이 한낱 수비병으로 살아갈 바에는 차라리 굶어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데이몬이었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데이몬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주점을 나섰다. 몇 되지 않는 손님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지만 그는 하등 상관하지 않았다. "이제 이곳과도 작별이로군." 규모가 작아서 손님이 많지 않은 탓에 이곳에는 이례적으로 그를 구경하거나 흉보는 사람들이 몇 되지 않았다. 그나마 취하려고 오는 손님이 태반인 탓에 더욱 그러한 것이다. 그 탓에 제법 데이몬의 마음에 드는 술집이었지만 이젠 이곳마저도 오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렸다. "내가? 천하의 독고성이 돈이 없어 술을 마시지 못하다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려는 데 누군가가 돌연 앞을 가로막았다. 그 탓에 데이몬은 하마터면 그와 부딪칠 뻔했다. 겨우겨우 몸을 추스른 데이몬은 화를 벌컥 내었다. "뭐, 뭐야." 그러나 그와 부딪친 그림자는 미동도 없이 서서 데이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그의 모습을 쳐다본 순간 데이몬은 술이 확 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과 부딪칠 뻔했던 자는 로브를 입고 있었다. 다시 말해 마법사인 듯한 자였던 것이다. 그토록 찾아다니던 마법사 말이다. "마, 마법사?" 검은 로브를 걸친 자는 한동안 데이몬의 얼굴을 주시하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술주정뱅이였군." 실망기가 역력해 배어있는 말투. 기이하게도 그의 음성은 무척 탁하고 거칠었다. 마치 목을 졸린 상태에서 말하면 들을 수 있을 듯한 음성이었다. 뜻밖의 상황에 데이몬은 부랴부랴 정신을 수습했다. "호, 혹시 마법사이십니까?" 잠시 동안 서 있던 흑포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로브 자락을 뒤집어써서 도무지 용모를 분간할 수 없는 자였다. 로브 자락 사이로 예의 그 음성이 계속 새어나왔다. "마법을 배우겠다고 돌아다니는 자가 있다고 해서 와 봤는데 영 실망이군. 술주정뱅이가 마법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어이가 없군." 말을 마친 흑포인은 이젠 미련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정신이 번쩍 든 데이몬은 지체 없이 달려들어 그의 다리를 얼싸안았다. 이것이 과연 기회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상황에서 결코 그를 놓칠 수가 없었다. "아, 아닙니다. 저는 평소에는 이처럼 술을 먹지 않습니다." 하지만 흑포인은 데이몬이 매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랑곳없이 걸음을 옮겼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어.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결코 마법을 배울 수 없다네." 데이몬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르짖었다. 그것은 이대로 삶을 접을 수 없다는 한 가닥 발악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워낙, 워낙 괴로운 나머지……. 단지 외모가 추악하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 누구도 제게 마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 말이 끝나자마자 흑포인의 걸음이 딱 멈췄다.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고개를 돌려 데이몬의 얼굴을 살폈다. 이 때다 생각한 데이몬은 그 자리에 넓죽 엎드렸다. "제발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저에겐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마법을 배워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설사 목숨을 걸고서라도 마법을 배워야 하니 제발……." 묵묵히 듣고 있던 흑포인은 곧 뭔가를 결정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타의 마법사들과는 달리 그는 왜 마법을 배워야 하는지 이유에 대해 일언반구도 묻지 않았다. "나를 따라 오라." 짧게 한 마디 내뱉은 흑포인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한 데이몬은 지체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걸어서 흑포인이 도착한 곳은 제법 규모가 커 보이는 술집이었다. 트루베니아의 술집은 대부분 여관과 겸업하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1층은 보통 식당 겸 술집이고 2층부터는 여행자들이 묵을 수 있게 여관을 만들어놓는 것이다. 술집으로 들어간 흑포인은 서슴없이 2층으로 올라갔고 데이몬은 허둥지둥 그의 뒤를 따랐다. 그 때 누군가가 불쑥 나타나 그의 앞을 막아섰다. 곧이어 이어지는 으르렁거리는 듯한 거친 음성. "뭐야? 이 자식 또 왔네?" 힐끗 고개를 돌려본 데이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51회 튼튼한 갑주를 걸친 덩치 좋은 장한. 물론 데이몬과는 안면이 있는 자였다. 불과 며칠 전에 자신에게 뭇매를 가한 마법사의 가드. 바로 그자가 자신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그는 잘 만났다는 듯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손가락 마디를 하나씩 꺾기 시작했다. “좋은 말 할 때 꺼지도록■■.” 흑포인이 계단을 거의 다 올라간 상태였기 때문에 데이몬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난 너희들에게 볼 일이 없다.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갈 테니 길을 비켜다오.” 하지만 다가온 가드들이 어느새 데이몬을 둥그렇게 둘러쌌다. 저 멀리에선 일전의 그 마법사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럴 순 없지. 네놈의 추악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마법사 님의 술맛이 떨어진단 말이야. 좋게 말로 할 때 사라지는 게 좋을 거야.” 데이몬은 힐끗 시선을 2층으로 던졌다. 올라가던 흑포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은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의 태도를 보아하니 자신의 실력으로 해결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데이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념, 무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비록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상태였지만 이들을 꺾어야만 마법사에게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데이몬은 사력을 다해 정신을 집중했다. 술기운으로 인해 몽롱하게만 보이던 시야가 점점 트여졌다. 마음을 진정시키자 착 가라앉은 음성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때려눕히고 올라가겠다.” 음성에 아무런 감정이 깃들어있지 않은 것을 보아 다행히 마음의 평정을 이룬 것도 같았다. 오히려 마음의 평정을 잃은 것은 바로 가드들이었다. “얼씨구? 이 자식 보게? 저번에 쓴맛을 덜 봤나 보네?” “다리몽둥이를 하나 분질러버려.” 흥분한 가드들이 데이몬을 향해 일시에 달려들었다. 이들은 물론 데이몬이 저번에 싸워본 병사들보다 실력이 월등한 것이 틀림없었고 입은 갑주 역시 무척 튼튼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실력 있는 자들 중에서 가려 뽑은 가드들이라 해도 기본적인 체술에 있어서만은 결코 데이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니 데이몬이 인체의 혈도에 통달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에겐 전혀 승산이 없었다. 퍽, 퍼퍼 퍽. 여섯 명의 가드들이 모조리 바닥에 쓰러지는 데는 채 일분도 걸리지 않았다. 무념, 무아의 상태에서 데이몬은 공격해오는 가드들을 슬쩍슬쩍 피해내며 가장 중요한 요혈만 집중적으로 가격했다. 급소를 얻어맞은 그들은 차례대로 거품을 물고 바닥에 뒹굴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주먹다짐에 있어서 만은 그 누구도 겁나지 않았던 데이몬이었다. “세, 세상에■■.” 그 모습에 술집 내부에 있던 사람들의 입이 일시에 딱 벌어졌다. 저 왜소한 체구의 이방인이 자신보다 족히 두 배나 큰 덩치를 가진 가드들을 단숨에 때려눕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누군가? 실력 있는 병사들 중에서 가려 뽑았다는 마법사의 가드들이 아닌가? 심지어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마법사는 놀라움에 그저 이빨만 딱딱 맞부딪치고 있었다. 가드들이 저처럼 어이없이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마법사였다. 곧 타는 듯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 마법사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암암리에 끌어 모은 마나가 점차 그의 마법 지팡이로 모여들고 있었다. 손을 탁탁 턴 데이몬은 더 이상 용무가 없다는 듯 2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그 때 갑자기 그의 뇌리로 위험신호가 감지되었다. 전장에서 단련된 감각이 아니었다면 결코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의 위기감. 데이몬은 지체 없이 옆으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갑자기 폭발이 일어났다. 콰쾅. 폭발의 규모는 제법 강했다. 마룻바닥이 터져 나가며, 산산이 부스러진 나뭇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것은 바로 옆에서 웅크리고 있는 데이몬의 몸을 수북히 덮어 버렸다. “헛.” 낙법을 써서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등허리가 뻐근해왔다. 데이몬의 눈에 살기를 띠며 다가오는 마법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들고 있던 지팡이에서는 맹렬한 공기의 소용돌이가 맴돌고 있었다. “내 가드들을 때려눕히다니 용서할 수 없다.” 냉랭한 일갈과 함께 지팡이에서 눈부신 빛이 일어났다. 지팡이에 박힌 수정구슬을 축으로 공기의 소용돌이가 급속히 응축되고 있었다. 아마도 가드들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듯 싶었다. 데이몬을 대상으로 말이다. “이런.” 데이몬은 난감해졌다. 물론 체술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자신이 있었지만 저처럼 거리를 두고 마법을 전개한다면 자신은 별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낚시에 걸린 물고기처럼 말이다. 그 때 2층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자신을 데리고 왔던 바로 그 흑포인의 음성이라서 데이몬의 얼굴에 천만다행이라는 빛이 스쳤다. “그를 공격한다면 나 역시 널 공격하겠다.” 그 말에 마법사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고, 그의 눈망울에 순간적으로 공포가 떠올랐다. 2층엔 어느새 검은 로브를 걸친 마법사 한 명이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양손에서 불그스레한 빛을 띠는 방전이 맹렬하게 일어나고 있는 상태. 방전구의 크기는 거의 사람의 머리통 만했다. 적어도 4 써클은 넘어 보이는 전격계 공격마법이라서 마법사의 얼굴이 삽시간에 시퍼래졌다. 저 정도의 마법이라면 자신은 꿈도 꿀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그는 양손에 끌어올린 에어 블래스트(air blast)를 급히 소멸시켰다. 검은 로브를 걸친 것으로 보아 흑마법사로 짐작되었지만 방전의 규모로 본다면 저자는 자신보다 훨씬 윗줄의 마법사가 분명했다. 손에 모인 마나를 흩어버린 뒤 마법사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2층을 쳐다보았다. “왜? 날 방해하는 것이오. 저자는 내 가드들을 때려눕혔소.” “왜냐하면 그는 내가 데리고 온 손님이기 때문이지.” 말을 마친 흑포인은 더 이상 용무가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붉은 방전은 그의 손에서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망연히 굳어버린 마법사의 앞을 데이몬이 말없이 달려 올라갔고, 정신을 차린 가드들이 그때서야 하나 둘씩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흑포인이 묵고 있는 방으로 들어간 뒤 둘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바로 흑포인이었다. “아까 보니 체술이 정말 대단하더군.” “벼, 별 말씀을■■.” 데이몬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의 상황을 통해 상대가 자신에게 모욕을 준 마법사보다 훨씬 실력이 뛰어난 것을 알게 된지라 그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뛰고 있었다. 자고로 수준이 높은 마법사라면 자신이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커지는 법. 흑포인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왔다. “그래 이곳에서 자네의 보직은 뭐인가?” “예, 저는■■.” 데이몬은 곧 자신이 성벽 수비병이었으며 얼마 전 근위병으로 뽑혀 갔다가 마법을 훔쳐 배웠다는 일로 해고되었다는 사실을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또한 자신이 마법을 배우기 위해 겪었던 고초마저 서슴없이 이야기했다. 그 동안 흑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만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휴가를 나온 마법사들에게 마법을 가르쳐달라는 자체가 정말 어이없는 발상이었으니■■.” “하지만 제가 마법을 배울 만한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용모를 보아하니 이방인인 듯한데 조금 이상하군. 이카롯트에서는 결코 이방인을 근위병으로 쓰지 않는데 말이야.” “그것은■■.” 데이몬이 제반 사정을 이야기하자 흑포인은 놀랍다는 듯 탄성을 토했다. “허! 놀라운 일이로군. 일반 병사가 단신으로 트윈헤드 오우거와 싸워 이기다니■■.” “마법사 님의 능력에 비하면 하찮기 그지없는 것이죠.” 계속해서 대화를 나눴지만 로브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때문에 흑포인의 용모를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생각한 데이몬은 그 자리에 넓죽 엎드렸다. 그의 입에서 진심 어린 애원이 터져 나왔다. “제발 저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모조리 극복할 자신이 있습니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오체투지를 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죽어도 그 자리에서 죽겠다는 각오였다. 한동안 그의 등허리를 내려다보던 흑포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일어나게.” “제 청을 받아주시지 않는 한 죽어도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내 정체를 알고도 여전히 마법을 배우기를 원한다면 자네의 청을 들어주겠네.” 그 말에 데이몬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렇네.” 흑포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데이몬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토록 수모를 겪어가며 찾아 헤맨 끝에 마침내 자신을 제자로 받아주는 마법사를 찾은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극도로 메인 목소리로 데이몬은 한 번, 두 번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중원에서의 경우처럼 구배로 배사지례를 올리는 것이다. “마법사 님을 제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이제부터 마법사 님을 부모와 같은 존재로 여길 것이며 어떤 일이 있어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스승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는 제게 뼈 한 조각이라도 남아있는 한 잊지 않겠습니다.” 구구절절이 진심이 배어 나오는 음성. 그의 태도에 다소 놀란 듯 싶었지만 흑포인은 별달리 동요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일어나게. 이제부터 내 정체를 알려 주겠네.” 데이몬이 슬며시 눈물 젖은 얼굴을 들자 흑포인은 깊숙이 눌러쓰고 있는 로브자락을 걷어올렸다. 감춰져 있던 흑포인의 얼굴이 마침내 데이몬의 앞에 드러났다. “헉.”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드러난 흑포인의 얼굴이 정말 처참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의 용모는 오히려 데이몬보다도 더 추악했다. 심한 화상을 입었는지 피부는 타버린 종이 같았고, 코가 있던 자리에는 그저 구멍만 훤하니 두 개 뚫려 있었다. 입술조차 말려 올라가 이가 훤하게 드러나 있는 상황. 정말 눈뜨고는 못 볼 정도의 얼굴이었다. 만약 담이 작은 사람이나 여자가 본다면 그대로 까무러칠 정도라고나 할까. “왜 내 얼굴을 보니 전혀 상상 밖인가?” “아,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데이몬은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몰골이야 어떠하든 상대는 이제부터 자신의 스승인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데이몬의 반응에 실망했는지 씁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52회 순간 데이몬의 뇌리에 반짝 하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까진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못생긴 줄 알았는데 지금 스승님을 보니 그렇진 않았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데이몬의 조크에 흑포인은 실소를 머금었다. 감정이 풀렸는지 그는 정식으로 자기 소개를 했다. "내 이름은 도일이네." "도일?" "정식으로 말하자면 도일 브로큰하트라고 해야겠지?"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네? 브로큰하트(Brokenheart: 부서진 심장)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아마 트루베니아 대륙을 통틀어 단 둘 밖에 없는 성(姓)이라고 볼 수 있지." "아! 네?" 뭔가 곡절이 있는 것 같았지만 데이몬은 더 이상 묻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에겐 누구나 남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는 법이다. 이 상황에서 굳이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도일이라 이름을 밝힌 흑포인은 계속해서 설명을 해 나갔다. "우선 이것만은 자네가 알아야 할 것 같네. 정확히 말해 나는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야. 사람들은 우리를 일컬어 다크메이지( Dark mage :흑마법사)라고 부르지. 혹시 들어보았나?" "예. 들어보았습니다." 이미 맥밀란에게 들은 바가 있었기에 데이몬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일이 흑마법사란 것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태도였다. 그 모습에 놀란 것은 오히려 도일이었다. "내가 흑마법사라는 말에 왜 놀라지 않는가?" "상관없습니다. 이미 제가 스승님으로 삼은 분. 설사 흑마법사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존재라고 해도 제겐 부정할 수 없는 스승님입니다." "물론 자네가 배울 마법은 흑마법일세. 물론 트루베니아에서 흑마법사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알고는 있겠지?" "상관없습니다. 설사 마왕에게 몸을 빼앗긴다고 해도 감수하겠습니다." "………." 잠시 말문을 닫은 도일은 지긋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정말 흉측한 얼굴이었지만 눈빛 하나만은 무척 깊고 심유했다. "자네에게도 뭔가 곡절이 있는 듯 싶군. 그토록 절실히 흑마법을 배우겠다는 이유가 무척 궁금하긴 하지만 굳이 묻진 않겠네. 흑마법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은 모두 사정이 있기 마련이지. 좋네. 자네가 승낙한 이상 나는 이제부터 자네에게 마법을 전수해 주겠네. " 고개를 끄덕이는 도일을 보며 데이몬의 가슴은 희열로 북받쳐 오르고 있었다. 그는 드디어 강해질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일단 자네에게 마법을 전수해 주겠다는 이유에는 별다른 것이 없네. 굳이 말하자면 자네의 얼굴이 나 못지 않게 추악하다는 점과 또 하나를 굳이 더 들자면 나이가 많다는 점을 이유로 들 수 있을까……. "네?" 상상도 하지 못한, 아니 전혀 얼토당토않은 이유라 할 수 있었기에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도일의 설명이 곧이어 이어졌다. "흉측한 생김새로 인해 자네가 받은 고통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네. 나 역시 무수히 겪어왔던 경험이니까 말이야. 비록 자네는 선천적이고, 나는 후천적인 용모라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우린 줄곧, 같은 감정이 담긴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왔을 테니까. 바로 경멸과 멸시라는 눈빛 말이야." 수긍이 가는 점이 있었기에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자네처럼 사십에 가까운 나이에 처음으로 마법을 익히기로 작정했지.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가까스로 마법을 배우긴 했지만 그 결과 난 이렇게 흉측한 몰골이 될 수밖에 없었어." 설명을 해 나가는 도일의 눈동자에는 짙은 회한이 차 있었다. 어쩌면 그는 데이몬의 모습에서 수십 년 전 마법을 배우기 위해 대륙을 떠돌아다니던 자신을 연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도일은 흑마법사였다. 다시 말해 다른 흑마법사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흑마법을 익힌 경우라 말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이 결코 쉬울 수는 없었다. 보편적으로 따지면 흑마법사들의 경우 대체적으로 사악한 심성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흑마법에 발을 들여놓는 자들이 대부분 누군가에, 혹은 사회 전체에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은 자들이 마왕과의 계약 따윌 해서 힘을 얻을 이유가 없었다. 원한으로 인해 비뚤어진 심성에, 흑마법에 의한 강력한 힘이 결합되다 보니 흑마법사들의 성격은 판이하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계약한 마왕에게 암암리에 영향을 받다보니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런 터라 흑마법사들 대부분은 마법의 특성상 피와 살육에 심취할 뿐더러 또한 극악무도한 생체실험조차 서슴지 않고 수행할 정도로 심성이 잔혹하게 변해갔다. 그런 전반적인 경향 때문에 흑마법사는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법칙이 트루베니아에 생겼는지도 몰랐다. 불행히도 도일이 모셨던 스승 역시 그런 보편적인 흑마법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를 떠올리자 도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 생각만 해도 공포가 치미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 스승은 평소 도일을 비롯한 문하생들에게 갖은 구박을 가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어쩔 때는 문하생들을 생체 실험을 위한 도구로 투입할 때도 있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말이다. 말 그대로 문하생들의 생명을 파리목숨처럼 취급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도일 역시 스승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 도일의 추악한 외모는 바로 스승의 생체실험에 의해 생겨난 부산물이었다. 스승은 아무 거리낌없이 도일을 생체실험에 투입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긴 했지만 그 대가로 이처럼 추악한 외모를 지니게 된 것이다. 도일의 뇌리에는 외모가 변하고 난 뒤 사람들이 자신에게 대하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정말 생각조차 하기도 싫었으며 이젠 만성이 되어버린 기억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자신과 비슷한 용모를 지닌 데이몬에 대한 연민으로 변해갔다. "자네와 나는 어떻게 보면 비슷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드네." 말을 마친 도일은 데이몬의 얼굴을 직시했다. "우연한 기회에 나는 무척 흉물스러운 용모를 가진 이방인이 마법을 배우기 위해 주점을 떠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네. 당시 난 무척 호기심이 생겼지. 얼마나 추악할까? 과연 나보다도 흉한 얼굴일까. 자네를 찾아간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네. 다시 말하면 같은 외모를 가진 일말의 동질성 때문이라고나 할까?" 데이몬은 묵묵히 도일의 말을 듣고 있었다. "비록 자네가 마법을 익힐 수 있을지 자신할 수는 없네. 자네에게 과연 얼마만큼 마나에 대한 재질이 있는지 알 수 없으며 또한 나이가 많다는 점도 마법을 배우는 데에는 큰 걸림돌이 되지. 하지만 이렇게 사승관계를 맺었으니 나는 이제부터 자네에게 전력을 다해 마법을 전수해 주겠네." "스승님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뭐. 은혜랄 것까지야……." 물론 데이몬은 중원의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는 스승을 부모와 같이 지극히 대한다는 중원의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 데이몬의 지극한 태도가 다소 거북살스럽기는 했지만 결코 꾸민 행동이 아닌 것 같았기에 도일은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일단 내 신분을 말해주겠네. 나는 현재 이카롯트의 제 8군단의 별동대에 소속되어 있는 워 메이지라네. 저번의 전투에서 다소의 공을 세운 때문에 일주일의 휴가를 얻었고, 이제 이틀 뒤면 다시 전장으로 복귀해야 하네." "이, 이틀이라면……." 데이몬의 눈에 다소 긴장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물론 정식으로 사승관계를 맺었으니 도일이 이대로 자신을 내버려두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걱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데이몬의 모습에 도일은 빙긋이 미소를 떠올렸다.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그의 미소는 기괴한 안면 근육의 뒤틀어짐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말이다. "걱정하지 말게. 나는 전장에 자네를 데리고 갈 생각이야." 하지만 데이몬의 걱정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우선 세르게이가 자신을 순순히 보내 줄지도 의문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처지를 도일에게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저는 현재 탈영병 신분입니다. 근위병에서 해고된 뒤 원래는 다시 성벽 수비병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아직까지 귀환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정상적으론 스승님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데이몬의 생각은 대충 이러했다. 일단 야밤을 틈타 데이몬이 펠드리안을 빠져나간 뒤, 정해진 장소에서 성문을 당당하게 나온 도일과 다시 만나 전장으로 향하자는 내용이다. 하지만 설명을 들은 도일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 일단 자네가 펠드리안을 빠져나갈 가능성이 희박하기도 할 것이지만 구태여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네." "하, 하지만……." 도일은 데이몬을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떠올렸다. "자네 말을 들어보니 세르게이 공작도 자네에게 그다지 관심을 갖고 있진 않은 듯 하군. 그저 해묵은 앙심으로 그럴 뿐이라면 별 문제는 되지 않을 걸세. 난 충분히 자네를 빼내어 올 수 있네." "하지만 어, 어떻게……." "내 말을 믿게. 적어도 자네 하나 정도는 빼낼 정도의 능력은 있어. 이래 뵈도 난 제법 실력이 있는 흑마법사라네. 아마 세르게이 공작도 내 요구를 결코 무시하진 못할 거야." 결국 데이몬은 도일의 말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데이몬의 걱정을 불식시키려는 듯 도일은 계속해서 설명을 해 나갔다. "일단 자네에게 뛰어난 체술이 있으니 그리 큰 무리는 없을 거야. 난 자네를 우선 내 가드로 삼을 생각일세." "가, 가드로요?" "그렇다네. 이미 내가 데리고 있던 가드들은 저번 전투에서 모조리 전사했으니 걸림돌은 없어. 그러니 나는 이 길로 궁정으로 들어가 세르게이 공작에게 자네를 내 가드로 임명해 달라고 할 참일세. 그들은 감히 내 요구를 거부하지 못할 거야." 도일의 말투에는 자신감이 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일은 현존하는 흑마법사들 중 최상위급에 랭크되는 실력을 가진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도일의 현재 마법 수위는 대략 6써클의 마스터. 공격마법만을 따진다면 흑마법사들의 위력이 거의 절대적으로 강하다는 것이 정설로 정립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그것을 감안하면 도일은 적어도 7써클의 엑스퍼트나 마스터 급에 준하는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런 도일의 부탁이라면 세르게이도 섣불리 거절할 수 없을 터였다. 말을 마친 도일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난 지금 당장 궁정에 다녀오겠네." "괘,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게. 자네 정도의 실력이면 충분히 내 가드로 삼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네. 아, 참! 자네를 제자로 삼았다는 것은 엄연히 비밀로 붙여야 할 사항이니 그렇게 알도록 하게." 물론 흑마법사인 도일이 공개적으로 누군가를 제자로 삼았다고 선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문제는 데이몬이 뛰어난 체술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간단히 해결되었다. 그를 가드로 삼아 데리고 다니며 마법을 전수해준다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으므로……. 어느 정도 걱정을 던 데이몬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내 금방 다녀오지." 도일은 지체 없이 숙소로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데이몬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53회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상대의 말이 무척 당혹스러웠던지 세르게이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앉아있는 검은 로브의 흑마법사는 추호도 동요하지 않고 할 말을 해 나가고 있었다. "내 요구는 단 한 가지요. 데이몬이란 이름을 가진 성벽 수비병을 내 가드로 뽑아야겠다는 것. 잘 이해가 되지 않소?" 흑마법사의 어조는 다분히 도전적이며 또한 직설적인 표현이었다. 그의 태도에는 한 나라를 이끌어나가는 공작에 대한 예우가 전혀 깃들어있지 않았다. 불쑥 들어와서 다짜고짜 사람을 데리고 가겠다는 그의 태도에 세르게이는 기가 찼다. '걸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인가?' 상대의 현재 처지를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이것은 도가 너무 지나쳤다. 세르게이는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상대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의 말인 즉슨 가드를 이곳에서 뽑아가겠다는 뜻이오?" "바로 그렇소." 검은 로브의 흑마법사. 즉 도일은 추호도 굽히지 않겠다는 듯 세르게이를 직시했다. 그 모습에 세르게이는 무척 당혹해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도일이란 자는 별달리 보고 싶지 않은 자였다. 그런 자가 난데없이 자신을 찾아와서 가드를 뽑아가겠다니……. 물론 그의 활약을 감안하면 병사 한 둘쯤은 두말없이 내 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요구하는 병사가 데이몬이라니……. 물론 데이몬이 누구인지 세르게이가 모르고 있을 턱이 없었다. 자신에게 불손하게 대한 죄로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는 이계의 추물이 아니던가? 공교롭게도 그는 데이몬을 처치해 버리기 위해 막 사람을 보내려고 할 찰나였다. 무단이탈죄로 말이다. 명령서에 사인만 한다면 그 즉시 어새신이 파견될 것이고, 아마도 데이몬이란 자는 오늘 중으로 이세상 사람이 아니게 될 터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흑마법사가, 그것도 자신이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가진 자가 나타나서 그를 내어 달라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로군.' 물론 평상시라면 흑마법사의 저런 불손한 태도를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공작인 세르게이에겐 충분히 그럴 힘과 권력이 있었으므로……. 하지만 지금은 전시였고 전장에서 뛰어난 활약을 하는 흑마법사를 잃을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세르게이는 난감해졌다. '놈이 오랜 세월동안 가두어 둔데 대한 앙갚음을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인가?' 그의 앞에 앉아 있는 도일이란 자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바로 30년 전 암흑전쟁에서 참전한 흑마법사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전쟁에선 트루베니아에 살고 있는 모든 흑마법사들은 마왕의 편을 들어 인간을 배신했다. 그 때문에 인간들은 정말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들의 마법 공격에 의해 이승을 하직한 병사는 이루 셀 수조차 없을 정도. 전쟁이 승리로 끝난 뒤 마왕의 편을 든 흑마법사와 네크로멘서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이 이어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실제로 수많은 흑마법사들이 처형장에서 목숨을 잃어갔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통상적으로 마법사란 정말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결코 하루 이틀 사이에 키워낼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암흑전쟁 당시의 처절한 전투로 인해 많은 마법사들이 전사했고, 따라서 각 왕국에서는 심각한 마법 인력부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왕국간의 마법 통신까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몇몇 왕국에서는 사로잡은 흑마법사들 중 몇몇을 죽이지 말고 활용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당연히 죽여야 할 자들이긴 했지만 그들이 가진 실력이 정말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마법사가 부족한 때문에 결정은 어렵지 않게 내려졌고, 사로잡힌 흑마법사들 중에서 실력이 뛰어난 자들은 가까스로 처형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앞에 있는 도일 역시 그러한 경우였다. 하지만 그 외 실력이 미흡한 흑마법사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살아남은 흑마법사들에게 내려진 처우는 어떤 면에선 더욱 비참하다 할 수 있었다. 목숨을 건진 대가로 그들은 평생동안 지하감옥에서 노역할 것을 강요받았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삶을 선택한 죄로 햇빛도 들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마법무구나 스크롤 따위를 만들어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늙어서 죽을 때까지 말이다. 그 기간은 무려 30여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그 기간동안 무수한 흑마법사들이 자살이나, 기타등등의 방법으로 생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흑마법사들이 살아남았고, 이번에 벌어진 종족전쟁으로 인해 그들에겐 마침내 햇빛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점점 위태로워지는 전황으로 인해 그들의 마법을 전쟁에 활용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던 것이다. 물론 그 결정에는 전반적으로 공격력이 강한 흑마법에 대한 평가가 큰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상당수의 흑마법사들이 전쟁에 참전하겠다는 조건으로 사면을 받을 수 있었고, 도일이란 흑마법사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 전쟁에 투입된 워 메이지였다. 당시 세르게이는 직접 도일의 사면장에 서명을 했기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카롯트 제국에서 사면된 흑마법사는 도합 34명이었다. 흑마법사들이 가세함으로써 전장에서 싸우는 군대는 큰 힘을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전장에 투입된 흑마법사들 대부분이 높은 써클의 수준 있는 마법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도일이란 자는 그들 중에서도 최고급에 속하는 마법사라는 판정을 받은 자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말 난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한참을 궁리한 세르게이는 암암리에 혀를 찼다. '젠장 정말 골치 아프군.' 물론 상대가 죽여도 무방한 흑마법사이니 만큼 눈 딱 감고 처치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전장에서 손실될 전력을 생각하니 세르게이로써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놈은 6써클의 마스터. 공격마법의 위력만으로 따진다면 베니테스도 그를 따라갈 순 없어.' 지금 상황에선 어떻게 해서든 그를 구슬러 전장에 투입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세르게이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출신이 다소 걸리긴 했지만 별달리 쓸모도 없는 이방인 하나 때문에 이처럼 중요한 전력을 잃을 순 없었다. 어차피 처형하려 생각한 자가 아니던가? 마침내 세르게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겠소." "고맙소." 비록 말로는 감사를 표하고 있었지만 도일의 얼굴에는 의당 그래야지, 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 모습에 세르게이는 다시 분통이 치밀어 올랐지만 혼신의 노력으로 그것을 억눌렀다. "그 대신 당신에게 하루의 휴가를 박탈하겠소. 그러니 내일 부대로 복귀하도록 하시오. 알겠소?" "그렇게 하리다."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도일은 더 이상 용무가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 뒷모습을 세르게이는 마치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덜컥. 도일이 나가자 뒤에 시립해 있던 베니테스가 재빠르게 다가갔다.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생각해서 그가 밀착해서 세르게이를 경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자의 청을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겠나? 서슬을 봐서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싸우러 가지 않겠다는 기세이던데……." 짜증스럽게 대꾸하는 세르게이를 보며 베니테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결정을 내리셨다면 지금 즉시 데이몬을 흑마법사 도일의 가드로 삼는다는 명령서를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 "그렇게 하라." 툭 내뱉으며 집무실에서 나가는 세르게이를 보며 베니테스는 말없이 명령서 한 장을 꺼내들었다. 솔직히 말해 도일이 데이몬을 가드로 삼은 연유에 대해 의구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데리고 왔다는 점 때문에 이미 그는 데이몬에 대해 깊이 동정심을 가진 상태였다. 따라서 그 정도 편의는 직접 봐 주고 싶었다. 적합할 것이라 생각되는 명령서 한 장을 집어든 베니테스는 나직이 뇌까렸다. "잘 가시오. 이계의 무사여. 비록 당신이 뜻을 이룰지는 미지수지만 그래도 소원은 푼 것 같구려." 의자에 몸을 묻은 베니테스는 펜을 들어 명령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자신이 데이몬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하며…….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펠드리안의 성벽. 인간의 힘으론 감히 기어오를 수조차 없어 보이는 드높은 성벽이었다. 비록 드래곤들의 개입에 의해 더 이상 무적이라 말할 수 없는 방어구였지만 아직까지 웅장함은 남아있어서 성벽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고 있었다. 그런 성의 문이 지금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끼이이익. 쿵 강철로 보강되어 있는 육중한 문이 서서히 내려오더니 굉음과 함께 해자 위에 걸쳐졌다. 성문을 지지하고 있는 쇠사슬이 출렁거리며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이 시대 대부분의 성이 그러하듯 이 성문은 문의 역할과 함께 해자를 건널 수 있는 다리의 목적까지 겸해서 하고 있었다. 곧 다리 위로 수백 명의 말과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뒤로 보급품을 실은 듯한 수레 몇 대가 바짝 붙어 뒤따랐다. 두두두두. 만에 하나 있을 적의 침입에 대비하려는 듯 그들은 속도를 내어 다리를 빠져나왔다. 그들이 성을 나서자마자 문은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쿵 하는 굉음과 함께 펠드리안 성은 곧 외부와 빈틈없이 격리되어버렸다. "시간이 없다. 서둘러야 한다." 부대를 지휘하는 듯한 털북숭이 지휘관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의 지시에 따라 부대는 서서히 이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바로 전선을 지원하러 가는 지원병들이었다. 다소 안색이 창백한 병사들. 그들 대부분은 부상을 입은 뒤 후송되었다가 치료가 끝난 자들이 태반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자들도 있었지만 급박해져 가는 전황으로 인해 검을 쥘 수 있는 자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전쟁터로 보내졌다. 아마도 두 번 다시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되는 전장으로 말이다. 대략 50명 정도는 말을 타고 있는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일반 병사들로써 오랜 행군에 대비해서 가벼운 가죽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아마 기습 공격이 있거나 전장에 도착하게 된다면 그들은 수레에 실려있는 갑옷으로 갈아입고 전투에 임하게 될 것이다. 행군 속도를 가늠해본 지휘관은 눈빛을 빛냈다. "신속하게 이동하면 아마도 내일 저녁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지원부대는 지휘관의 통솔 하에 전장으로의 행군을 시작했다. 투구를 깊숙이 눌러쓴 털북숭이 지휘관은 병사들을 연신 독려하던 와중 힐끗 병력의 후미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검은 로브를 깊숙이 눌러쓴, 마법사로 보이는 자가 수레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마법사의 동태를 슬쩍 살펴본 뒤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사실 털북숭이 지휘관에게 부여된 임무는 지원병을 전장으로 수송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휴가를 나왔다가 복귀하는 저 흑마법사가 도중에 도망치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도 함께 부여받은 것이다. 이 임무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라도 수행해야 했기에 그는 흑마법사에게서 결코 감시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날씨가 맑군." 하늘을 올려다보던 도일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무려 삼십 년 동안이나 햇빛을 보지 못한 때문인지 그는 한가할 때면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정말 언제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쪽빛 하늘이었다. 잠시 주위의 정경을 감상한 도일은 슬며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수레 옆에는 투구를 깊숙이 눌러쓴 왜소한 체구의 병사 하나가 바삐 걷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도일의 입술을 비집고 따뜻한 감정이 깃든 음성이 새어나왔다. "전장에 가는 것이 두렵진 않으냐? 데이몬?" 걷는데 열중하고 있던 데이몬은 빙긋이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괜찮습니다. 스승님. 이미 저는 전장에서 수도 없을 정도로 전투를 치렀습니다." 물론 처음으로 전쟁에 참가하는 병사들이라면 전장에 가는 것이 마치 죽으러 가는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 중압감을 견디지 못해 탈영하는 병사들은 수를 셀 수도 없을 정도이므로……. 하지만 데이몬에겐 적어도 전장은 결코 낯선 곳이 아니었다. 도리어 친숙한 감정마저 느껴지는 장소인 것이다. "8군단에 도착하면 아마도 서너 명의 가드들이 보충될 것이다. 그러니 네가 그 가드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맡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데이몬의 태도는 정말 깍듯했다. 거기에는 추호도 사심이나 의도가 배어있지 않았다. 자신을 제자로 삼아 마법을 가르쳐준다는 이유 하나로 데이몬은 이미 도일에게 깊이 감복해 있는 상태였다. 다시 말해 어떠한 경우에도 도일을 배신할 가능성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녀석." 싱긋 웃은 도일은 다시금 시선을 하늘에 고정했다. 생전 처음 맞아본 제자의 성품이 그런 대로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도일에게 데이몬은 명실상부한 첫 제자였다. 오래 전 도일은 자신에게 마법을 가르쳐 준 스승에게 진절머리가 난 나머지 어떤 경우에도 제자를 맞아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삼십 년에 가까운 감옥 생활로 많이 희석되었고 다시 햇살을 보게 된 지금 그는 애초의 약속을 어기고 마침내 첫 제자를 맞아들였다. 비록 그가 트루베니아 사람이 아닌 이방인일지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에게 진심으로 대하는 데다 자신과 동일한 추악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애착이 가는 지도 몰랐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도일은 문득 자신의 스승인 브리즈만을 떠올렸다. 삼십 년 전 암흑전쟁에 함께 참가했다가 유명을 달리한 스승 말이다. 도일의 입에서 나지막한 독백이 흘러나왔다. "스승. 당신의 추측대로 난 결국 제자를 맞아들였소. 하지만 걱정 마시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난 당신의 전철을 밟진 않을 테니 말이오." 대륙을 떠돌아다니던 도일이 스승 브리즈만을 만난 것은 그의 나이 서른 여덟 살 때의 일이었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54회 도일을 맞아들이던 당시 브리즈만은 무려 삼십 명에 가까운 제자를 가지고 있었다. 마법을 배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브리즈만을 스승으로 모셨지만 그 이후의 일은 도일에겐 정말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나날들이었다. 도일이 브리즈만의 문하생이 된 지 딱 일 년 만에 삼십 명의 제자 대부분이 생체실험에 희생된 일이 생긴 것이다. 그 때 도일은 처참하게 변해버린 동료들의 시신 앞에서 절규한 바가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겠다고, 꼭 마법을 배우고야 말겠다고 말이다. 당시 동료들 대부분은 키메라 합성 시험에서 죽어갔다. 스승인 브리즈만은 생체실험에 제자들을 투입할 정도로 극악한 심성을 가진 흑마법사였다. 인간을 오크, 트롤, 심지어는 고블린과 몸을 붙이려는 실험이 그에 의해 거행되었고, 몬스터들과 몸이 뒤섞여 죽은 동료들의 시신을 도일은 무수하게 치워야만 했다. 그리고 스승의 마수는 어김없이 도일에게도 뻗쳤다. 그를 불의 중급 정령인 살러맨더와 합체시키려는 시험에 투입한 것이다. 그 뒤로 이어진, 정말 상상조차 하고싶지 않은 과정.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건지기는 했지만 이미 도일의 피부는 살러맨더의 열기에 완전히 타버린 다음이었다. 가히 인간이라 부를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생명력이 무척 질긴 놈이군. 좋아. 네놈을 나의 두 번째 제자로 삼겠다." 중화상을 입고 간신히 숨이 붙어있는 도일에게 내뱉어진 냉랭한 스승의 음성. 그 때부터 도일은 스승인 브리즈만에게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품게 되었다. 자신의 용모를 이렇게 만든 데 대해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는 원한 말이다. 하지만 마법을 익히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도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브리즈만을 대하며 그에게서 흑마법을 전수받았다. 그렇게 해서 도일의 마법실력은 꾸준히 향상되어갔다. 그러던 차에 암흑전쟁이 터졌다. 물론 브리즈만을 비롯해서 모든 제자들, 이미 상당한 수준의 흑마법사가 된 도일 역시 전쟁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도일은 스승의 최후를 목격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 브리즈만은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그의 첫 번째 제자, 정확히 말하면 트롤과 몸이 섞이고도 살아남은 제자 드류에게 느닷없이 암습을 받은 것이다. 드류 역시 도일과 마찬가지로 브리즈만에게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드류의 암습은 성공해서 브리즈만은 결국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트롤의 가공한 재생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불시에 가해진 기습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에 가해진 브리즈만의 반격에 의해 드류 역시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당시 심각한 중상을 입은 브리즈만은 구슬픈 어조로 도일을 불렀다. "도일. 나를 도와다오. 리치가 되어야겠다. 네가 이제 나의 유일한 제자이므로 너에게 나의 모든 것을 전수해주겠다. " 리치가 되어서라도 생을 유지해야겠다는 삶에의 강한 집착.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유능한 흑마법사인 도일의 도움이 절실했다. 하지만 도일은 당연하다는 듯 브리즈만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럴 수 없소. 스승." "뭐, 뭐라고?" "당신은 이 세상에 살아봐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요." 예상치 못한 도일의 태도에 브리즈만은 눈을 부릅떴다. "크으윽. 네, 네놈이?" "잘 가시오 스승." 결국 브리즈만은 도일이 빤히 지켜보는 앞에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키워낸 제자들에 의해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브리즈만이 죽은 뒤 도일은 그가 남긴 마법서적과 마법무구들을 모조리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뒤에 이어진 암흑대전은 도일의 마법실력을 늘리는데 혁혁한 역할을 했다. 이미 마왕의 마력에 지배당하고 있던 도일은 도저히 인간들과의 전투를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끌어온 전투. 그것은 결국 인간들의 승리로 끝났고 도일은 그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자그마치 삼십년 동안을 지하감옥에 갇혀 자신의 죗값을 치러야 했다. 정말 기구하다 말할 수 있는, 결코 짧지 않았던 인생이 도일의 뇌리에 주마등처럼 흘러지나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도일은 그때와는 반대로 이젠 누군가를 가르칠 스승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덜커덩. 길이 평탄하지 못했기에 수레의 진동이 고스란히 몸으로 전해져왔지만 도일의 상념을 막지는 못했다. 그는 슬쩍 데이몬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비록 데이몬이 얼마만큼 마나에 자질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서 가르칠 것이다. 적어도 그는 나와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아니 된다.' 비록 엄청난 고초를 겪은 끝에 흑마법사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도일은 자신의 경험만큼은 결코 데이몬에게 전수해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비록 스승과 같은 최후를 맞고 싶지 않아서 결정한 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자신의 업보만은 데이몬에게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도일에게는 브리즈만에 의해 초래된 사승관계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지금껏 제대로 된 스승이 없었던 데이몬은 트루베니아에서 모처럼 스승다운 스승을 만나게 된 것이다. "적이다." 갑작스럽게 울려 퍼지는 급박한 고함소리에 도일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숙련된 워 메이지 답게 그는 반사적으로 공격마법을 캐스팅하고 있었다. 두두두두. 말을 탄 한 명의 기마병이 전력으로 질주해오고 있었다. 정찰을 위해 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척후병이었다. 이미 전사했는지 다른 척후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기를 쓰고 달려오는 그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모두 전투 준비." 이런 상황에 경험이 많았는지 지휘관은 지체 없이 대응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미리 훈련받은 대로 다급하게 수레로 다가가서 갑주와 무기를 수습했다. 오랜 행군을 대비해 벗어둔 장비를 다시 착용하는 것이다. 어느새 도일도 수레에서 내린 상태였다. 높은 써클의 마법사답게 그는 이미 공격마법을 단단히 캐스팅해 놓은 상태였다. 달려온 척후병이 쓰러지듯 말에서 뛰어 내리자 지휘관이 얼른 그리로 다가갔다. "적의 규모는?" 얼굴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지만 척후병은 전혀 흔들림 없는 태도로 보고를 시작했다. "약 오백 정도로 구성된 오크 부대입니다. 라이더는 보이지 않고 대부분 보병입니다. 하지만 놈들의 부대에 이례적으로 오우거 한 마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우거?" 지휘관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물론 오크들이 기사단과 마법사를 견제하기 위해 다수의 중형 몬스터를 운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 문제는 오우거였다. 이미 지휘관은 오우거에 의해 많은 마법사들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무수히 보아왔던 것이다. 통상적으로 오우거의 피부는 마법 공격에 무척 강한 편이다. 한 두 방의 마법 공격엔 즉사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오우거의 날렵한 몸놀림은 어렵지 않게 가드들의 보호를 돌파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몸놀림이 둔한 마법사들이 오우거를 당해낼 수는 없는 노릇. 이미 오크 군대에게는 오우거로 하여금 마법사를 상대하게 하는 전법이 거의 절대적으로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지휘관은 난감해했다. "할 수 없지. 모두 방어진을 구성하고 임시 가드들은 즉시 마법사를 보호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일련의 병사들이 도일의 주위를 에워쌌다. 하나같이 중갑주를 걸친 병사들이었다. 데이몬 역시 자신의 독문무기인 스파이크 건틀릿을 움켜쥐고 도일의 앞을 막아섰다. 건틀릿에 하나씩 달린 기다란 쇠송곳이 유난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외의 병사들은 방패를 들어 앞을 가리며 적의 출현에 대비했다. 콰우우우. 오우거는 오래지 않아 모습을 드러냈다. 오크들에게 둘러싸여 있긴 했지만 워낙 덩치가 컸기 때문에 멀리서도 한 눈에 분간할 수 있었다. 저번에 데이몬이 싸워본 트윈헤드 오우거와는 달리 이번에는 머리가 하나만 달린 오우거였다. 하지만 당당한 덩치의 오우거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쪽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오우거의 뒤에 바짝 붙어 일련의 오크 보병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비쳐졌다. "오. 신이시여." 선두에 선 병사들의 얼굴이 파리하게 변했다. 바로 그들이 일차로 오우거를 막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맨몸으로 말이다. 돌격해 오는 오크들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때 도일이 앞으로 쓱 나섰다. 그의 마법지팡이에는 어느새 생겨난 방전구가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체인 라이트닝(Chein lightning)" 2 써클이긴 하지만 일대 다수의 접전에서 더 이상 위력적일 수 없는 전격계 공격마법인 체인 라이트닝이 병사들 사이를 뚫고 앞쪽으로 퍼져나갔다. 촤촤촤촥. 그것은 정확히 선두에서 달려오던 오크 보병들을 휘감아버렸다. "키이이익."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며 선진에 선 오크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뾰쪽한 끝을 타고 흐르는 전기의 특성답게 많은 수의 오크들이 심각한 타격을 받은 것이다. 그때서야 오크들은 이쪽에 마법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취익. 마, 마법사다." 달려오던 오크들은 날렵하게 병력을 재배치했다. 투박한 나무방패를 든 보병들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뭉쳐들기 시작한 것이다. 체인 라이트닝의 위력이 무시무시한 것을 보아 공격을 가한 마법사는 전격계 마법을 장기로 하는 마법사가 분명했다. 때문에 오크들은 전격계 공격을 가장 효율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형태로 병진을 구성한 것이다. 오랫동안 인간들과 싸워왔기 때문에 오크들도 나름대로 인간의 군대를 상대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애당초 도일이 노린 것이기도 했다. 오크들이 자신이 의도한 바대로 움직이자 도일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어리석은 녀석들." 곧 그는 마나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팡이의 수정 축으로 이번에는 화염의 속성을 가진 마나가 모여들고 있었다. 제법 고써클의 마법인 듯 이번에는 캐스팅 시간이 무척 길었다. 그러는 동안 한데 뭉친 오크 보병들은 빠른 속도로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오우거는 특유의 순발력으로 인해 제일 가까이 접근한 상태였다. 비록 저능한 지능을 가졌지만 오우거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뒤따라오는 보병단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어떻게 해서든 마법사를 찾아내어 죽여버려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오우거가 인간의 병진에 뛰어들기 전에 마법은 발동되고야 말았다. "플레임 스트라이크(Flame strike)." 도일의 마법지팡이에서 엄청난 규모의 불덩어리가 생겨났다. 마치 지옥의 화염을 연상시키는 푸른 불꽃을 일렁이며 생겨난 불덩어리는 곧 맹렬한 기세로 내쏘아졌다. 정확히 오크들이 달려오는 방향이었다. "취에엑?" 선두에 선 오크 보병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그의 눈동자엔 순식간에 죽음의 공포가 어렸다. 도일이 내쏜 5써클의 화염계 공격마법인 플레임 스트라이크는 달려오던 오크 부대의 중심부분에 정확히 작렬했다. 콰콰쾅. 지축을 뒤흔드는 듯한 굉음과 함께 갈가리 찢어진 육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전신에 불이 붙은 오크 보병들이 길길이 날뛰다 픽픽 쓰러졌다. 그와 함께 지독한 악취가 사방으로 퍼져 나왔다. 놀랍게도 마법 단 한방에 오백에 달하는 오크무리 중 반이 폭사한 것이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55회 그 모습에 데이몬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새삼 어째서 마법사가 기사단과 함께 군대의 주축을 이루는 존재인지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위험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으니……. 콰우우우. 엄청난 위력의 마법공격이었지만 불운하게도 오우거는 살아남아 돌격을 계속 해왔다. 전신에 불이 붙은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오우거는 눈에서 광망을 줄기줄기 토해내며 도일에게로 달려들었다. 오우거가 달려오는 궤적을 따라 살 타는 냄새가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마, 막아라." 서너 명의 병사들이 몸을 날려 오우거의 진로를 가로막았지만 소용없었다. 특유의 엄청난 힘으로 휘두른 몽둥이에 의해 앞을 가로막은 병사들은 마치 비질을 당하듯 우수수 쓰러졌다. 오우거는 그 여새를 몰아 도일에게로 달려들었다. 워낙 빠른 속도라서 병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도일은 오우거 따위에게 당할 하급 마법사가 아니었다. 거센 주문영창이 반사적으로 터져 나왔다. "홀드." 달려들던 오우거의 몸이 급격히 느려졌다. 하지만 워낙 빠른 몸놀림을 가진 오우거라서 달려드는 속도가 그다지 느려진 것 같지도 않았다. 잠시 숨을 돌린 도일은 바인딩 마법까지 시전해서 오우거의 몸을 바닥에 고정시켰다. 땅바닥에서 나무뿌리가 솟아 나와 오우거의 다리를 빈틈없이 휘감아버린 것이다. 다리가 묶인 오우거는 그대로 땅바닥에 엎어지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크아아악." 그냥 당할 수 없다는 듯 오우거는 쓰러지기 전에 손에 든 방망이를 도일에게로 냅다 내던졌다. 무시무시한 파공성과 함께 방망이는 일직선으로 도일을 향해 날아왔다. 미처 대비할 마법을 캐스팅하지 못했는지라 도일의 얼굴이 삽시간에 파리해졌다. 상황을 봐서 적중된다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실드를 펼친다고 해도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그 때 누군가가 달려들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왜소한 체구, 바로 데이몬이었다. "커억." 묵직한 비명소리와 함께 데이몬의 몸이 방망이에 맞아 저만큼 날아갔다. 가슴에 걸친 갑주가 형편없이 으스러진 상태로 그는 한참을 날아가서 바닥에 거세게 내동댕이쳐졌다. 정말 끔찍할 정도의 파워였다. 도일을 엄호하던 병사들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어서 오우거를 처치해라." 지휘관의 독려에 병사들이 분분히 달려들어 엎어진 오우거를 향해 창검을 찔러 넣었다. 가죽이 무척 질긴 몬스터였지만 워낙 많은 병사들이 달려들었으므로 오우거는 곧 여러 조각으로 분리된 고깃덩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오우거가 죽었다고 상황이 수습된 것은 아니었다. 도일의 마법 공격에 반수 이상이 비명횡사했지만 살아남은 오크 보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돌격해오고 있었다. 오우거의 죽음에 전혀 기가 꺾이지 않은 기세였다. 지휘관은 연신 고함을 질러 부대를 통제했다. "중장보병 앞으로! 기마병은 적의 퇴로를 차단한다." 비록 이쪽에 궁수대가 없었지만 수적으로 워낙 우세였는지라 지원부대는 오래지 않아 오크 보병들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 조우한 오크 부대의 수를 생각하면 입은 피해도 무척 경미했다. 하지만 도일의 마법지원이 없었다면 결코 손쉬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기에 지휘관은 주뼛주뼛하며 도일에게로 다가왔다.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소임을 다한 것뿐이오." 지휘관을 힐끗 쳐다본 도일은 짧게 한 마디 내뱉은 뒤, 몸을 돌려 수레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에겐 데이몬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 제일 우선이었다. 이미 일단의 병사들이 그를 수습해서 수레에 실어둔 상황이었다. 스승을 구하기 위해 서슴없이 목숨을 던진 제자. 혹시 그가 잘못되었을까봐 도일의 마음은 조마조마하기 그지없었다. 머쓱해진 지휘관은 곧 부대에게 행군을 명했다. "다시 행군이다. 서둘러라." 병사들은 곧 부상자와 시신을 수레에 실어 펠드리안으로 돌려보낸 뒤, 다시 전장으로 기나긴 행군을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수레에 실려 멀어져 가는 부상병들을 부럽다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이들도 있었다. "마법이란 이론보다는 수련과정이 더욱 힘든 학문이다." 데이몬은 흔들리는 수레에 몸을 실은 채 도일에게서 마법 수업을 받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데이몬에게 잘 되었다고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비록 오우거에게 한 대 맞은 대가로 늑골이 두 대 나가고 전신이 욱신욱신 쑤셔왔지만 그 대가로 수레를 탄 채, 마법을 배우며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데이몬을 쳐다보는 도일의 눈매는 정말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그 누가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서슴없이 자신의 몸을 던질 것인가? 그런 면에서 도일은 이번에 맞은 첫 제자 데이몬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마법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마나를 끌어 모으는 법을 배워야 한다. 대기 중에는 여러 가지 속성을 가진 마나들이 퍼져 있다. 그 마나들 중 필요한 속성의 마나를 끌어 모아 재배열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마법은 실행된다. 가령 불의 속성을 가진 마나는 파이어 볼. 전기의 속성을 가진 마나는 라이트닝 볼트. 이런 식으로 말이다." 데이몬은 묵묵히 도일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이미 한 달 동안의 수업 참관을 통해 제법 많은 이론을 배우긴 했지만 아직까지 그는 마나조차 끌어 모으지 못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도일의 설명에 그야말로 온 신경을 곤두세운 상태였다. "마나를 끌어 모은다는 것. 이것은 하루 이틀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피나는 수련과 정신집중을 통해 자연스럽게 몸에 익혀나가는 것이지. 대부분의 마법 수련생들의 경우 이처럼 마나를 끌어 모으는데 적어도 삼 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것도 수련생들이 대부분 어린 나이에 마법 수련을 시작한 것을 감안한 것이므로 너의 경우에는 더 시간이 걸린다고 말할 수 있다." 데이몬의 입이 딱 벌어졌다. 단순히 마나를 끌어 모으는 수준으로 오르는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리다니……. "사, 삼 년이나요?" "마법이란 그만큼이나 심오한 학문이다." 말을 마친 도일은 힐끗 데이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 역시 사십이 다 된 나이에 마법에 입문했지. 그리고 정확히 4년 6개월만에 마나를 끌어 모을 수 있게 되었다." 스승조차 마나를 끌어 모으는 단계에 오르기까지 4년이 넘게 걸렸다는 말을 듣자 데이몬은 맥이 탁 풀렸다. 그 기간동안 트루베니아가 멸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마법을 익히는 것도, 중원으로 돌아가서 사준환에게 복수를 하는 것도 아예 불가능해진다. 극도로 어두워진 데이몬의 얼굴을 보며 도일은 빙긋이 웃었다. "그런 면에서 넌 행운아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늦은 나이에 마법을 배운 날 스승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 "난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겨우 그 경지에 올랐다. 그 말을 되짚어본다면 넌 내가 겪었던 시행착오를 겪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난 경험을 토대로 너에게 가장 속성으로 마법을 터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겠다. 그렇게 된다면 네가 마나를 끌어 모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르는데 길어도 2년, 아니 노력만 한다면 시간을 더 단축시킬 수도 있다. 이제 내 뜻을 알겠느냐?" "스, 스승님." 데이몬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그에게 이처럼 신경을 써 주는 이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칠종단금술을 시술한 소림성승 혜정 말이다. 그러나 데이몬은 그 말고도 자신에게 애정을 쏟아주는 또다른 존재를 만나게 되었다. 중원과는 시간과 공간이 판이하게 다른 이 트루베니아에서 말이다. 데이몬은 울먹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스승님." 데이몬의 반응에 도일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쌍한 녀석 얼마나 설움을 받았으면……." 이미 데이몬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도일이었다. "그럼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자. 일단 마나를 끌어 모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면 마법으로의 길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일단 1써클의 경지에 오르게 되면 마왕과 계약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게 되니까 말이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데이몬은 곧 도일의 가르침에 빠져 들어갔다. 펠드리안의 마법 학부에서 근위병으로 근무하며도 마법을 배우길 갈구하던 데이몬. 이제 그는 마법 학부의 학생들보다도 훌륭한 환경에서 마법을 배우게 되었다. 하나 하나 길을 열어주고 세심하게 보살펴주는 스승 도일에게서 말이다. 인간과 오크와의 종족전쟁은 바야흐로 그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인간의 씨를 말리려는 드래곤과 오크의 군대. 그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우는 인간의 연합군들. 처음의 뼈저린 패배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오크에게 점령당한 영역을 조금씩 탈환해가고 있었다. 오크 족에게 그들의 종족을 번식시킬 시간을 준다는 것이 바로 자살행위임을 알고 있는 터라 각 지휘관들은 그야말로 병력을 쏟아 부으며 전투를 독려하고 있었다. 그 덕에 연합군은 점령당한 왕국 몇을 탈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만족할 만한 전과라 말할 수 없음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과도한 마법의 사용으로 인해 휴식중인 드래곤들. 그들이 또다시 참전하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 것인지 각급 지휘관들은 잘 알고 있었다. 가공할 만한 드래곤들의 공격마법. 이것은 전세를 일시에 뒤집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으므로……. 하지만 그들에겐 한 번 걸어볼 만한 일말의 희망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드래곤들의 수면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지금의 오크들은 백년 전의 오크에 비해 수적으로 비교도 되지 않았다. 따라서 엄청난 위력을 가진 드래곤들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해 볼 만한 전투였기에 연합군 병사들은 최후까지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드래곤의 수면기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와 병행해서 왕국 수뇌부들은 밑바닥까지 침체한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모종의 작전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래? 대승정께서는 그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오?"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런 시기에 본 교단의 성녀를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베르하젤 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지요." "정말 놀라운 일이구려." 세르게이는 거듭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앞에는 백염이 인상적인, 불꽃 무늬의 신관복을 입은 노인이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노인의 정체는 바로 슈렉하이머였다. 데이몬을 트루베니아로 데리고 오고, 또한 이곳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준 베르하젤 교단의 최고위급 성직자. 데이몬이 힘을 잃은 사실에 낙담해서 전장으로 떠났다고 알려진 그가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다소 초췌해진 얼굴이었지만 슈렉하이머의 얼굴은 모종의 기대로 빛나고 있었다. 잠시 그의 얼굴을 쳐다본 세르게이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속내를 내비쳤다. "성녀의 핏줄을 이어받은 소녀는 도대체 어디에 살고 있소?" 슈렉하이머는 쓸쓸히 미소를 떠올렸다. "그녀는 트루베니아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라덴부르크 왕국의 한 영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인적이 무척 뜸한 곳이지요.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녀는 암흑전쟁 당시 일단의 성직자들에 의해서 그리로 옮겨진 이후 그곳에서 쭉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녀를 직접 만나보았소?" "그렇습니다. 이미 성직자들은 세상을 뜬 지 오래였지만 무척 신앙심이 깊은 분들이었는지 그녀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시켜놓았더군요. 제가 보기에 그녀는 나무랄 데 없는 베르하젤의 성녀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심안(心眼)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흠! 정말 놀라운 일이구려." 세르게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트루베니아에선 이미 성녀가 존재하지 않은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베르하젤의 성녀. 비록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지만 과거 성녀란 존재는 트루베니아에선 가히 절대적인 존재 중 하나였다. 비록 베르하젤 교단의 쇠퇴와 더불어 어둠 속에 묻혀진 이름이지만 말이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56회 성녀란 말 그대로 주신 베르하젤의 뜻을 인간들에게 전달하는, 다시 말해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존재였다. 과거 베르하젤 교단이 번창했을 시기에는 트루베니아의 곳곳에 위치한 신전에서 성녀를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다. 성녀의 권위는 일개 왕국의 군주나 고위급 성직자라 할지라도 섣불리 범접하지 못할 정도로 지대했다. 성녀들은 만물을 사랑하는 베르하젤의 본성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때문에 모든 성녀들이 지극히 용모가 아름답고 또한 심성이 곱다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성녀들은 베르하젤의 축복 때문인지 아무런 편견 없이 만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심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성녀들은 성직자들과는 별개로 베르하젤과 인간들을 이어주는 존재로 오랫동안 만인의 우러름을 받아 왔다. 인간들의 소망을 주신 베르하젤에게 직접 전달하는 소명을 띠고 말이다. 하지만 인간계에 세 차례의 위기가 닥치고 베르하젤 교단이 형편없이 힘을 잃어버린 지금 성녀란 존재 역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심안이 특히 발달한 때문인지 그녀들은 대륙 도처에서 일어나는 살육을 견뎌내지 못했다. 유독 심성이 여린 그녀들은 무수히 벌어지는 생명체의 죽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 둘씩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녀들이 사라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마왕 나이델하르크가 이끄는 암흑의 군대 때문이었다. 나이델하르크의 언데드 군대는 눈에 불을 켜고 성녀가 있는 곳을 뒤지고 다녔다. 그리고 발견된 성녀는 하나도 남김없이 무참히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세상을 암흑으로 물들이려는 나이델하르크에겐 주신 베르하젤과 인간을 이어주는 성녀란 존재가 가장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많은 성녀들이 후대를 잇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성녀들은 대부분 혈연관계에 따라 후사를 잇는다. 다시 말해 자신이 낳은 첫 딸에게 자신의 소명을 이어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태초에 베르하젤으로부터 받은 성녀의 혈통을 보존하려는 데 기인한 것이었다. 성녀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결혼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녀들은 후대를 이을 자식을 자연적으로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은 무척 오랫동안 트루베니아에선 풀지 못할 불가사의로 전해 내려왔다. 단지 그것이 베르하젤의 보살핌이라는 종교적 추측 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이 베르하젤에게서 받은 서약석을 빼앗긴 이후 성녀들은 더 이상 자손을 얻지 못했다. 오랫동안 불가사의로 일컬어지는 초자연적인 잉태를 더 이상 하지 못한 것이다. 보다 못해 각 왕국의 군주들은 성녀들에게 인위적으로 짝을 지어주어서까지 성녀의 핏줄을 이어나가려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다. 인위적으로 태어난 성녀의 딸에겐 애당초 심안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짝을 맞이한 성녀마저도 보유하고 있던 심안의 능력을 잃어버리기에 이르렀으니……. 그런 연유로 인해 트루베니아에서 성녀란 존재가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그 귀하디 귀한 성녀가 우연한 기회에 슈렉하이머에 의해 발견되었으니……. "좋습니다. 그렇다면 최후의 성녀를 보호하기 위해서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기사단을 불러들이겠습니다. 대승정의 말씀대로라면 그녀가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 되겠군요." "그렇지요. 그녀가 과연 베르하젤 님이 선택하신 마지막 성녀라면 우리의 염원을 어쩌면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가닥 희망을 찾은 때문인지 슈렉하이머의 얼굴은 다소 들뜬 듯 했다. 세르게이는 지체 없이 베니테스를 불러들였다. "경은 지금 즉시 전선의 기사단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하시오. 궁정에 있는 모든 마법사들을 불러모아도 좋소. 공간이동을 통해 그들을 신속하게 이리로 불러들이시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베니테스를 보며 슈렉하이머의 뇌리에 문득 누군가가 떠올랐다. 베니테스와 함께 차원이동을 해서 데리고 온 무사. 무척 추악한 몰골을 가졌으며 슈렉하이머가 직접 이름을 지어준 이방인이 생각난 것이다.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진 슈렉하이머는 세르게이를 쳐다보았다. "참 그는 어떻게 되었소?" "누구? 말이오?" "데이몬. 차원이동을 통해 데리고 온 자 말이오." 슈렉하이머의 눈에는 별달리 기대하지 않는다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세르게이의 심성으로 보아 그가 온전히 목숨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다. 냉정한 성격을 가진 세르게이는 사용가치가 없는 자라면 결코 살려두지 않는다. 크로센 대제의 전례를 보아 세르게이가 그를 살려두었을 경우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슈렉하이머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 버렸다. "그, 그가 살아 있다고요?" "그렇소. 지금쯤 워 메이지의 가드로 전투에 임하고 있을 것이오." "어, 어떤 워 메이지의?" "아마 대승정께서도 알고 계실 것이오. 도일이라는 이름의 흑마법사. 데이몬이란 자는 바로 그 흑마법사의 가드로 활동하고 있소이다." 슈렉하이머의 얼굴에 놀랍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우선 세르게이가 그자를 살려두었다는데 놀란 것이고, 또한 데이몬이란 자가 순순히 병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 두 번째 놀람의 이유였다. 슈렉하이머가 본 바로는 데이몬은 자신이 살던 차원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절대자의 위치에 올라 있던 자였다. 그런 자가 자존심을 버리고 일반 병사로 복무한다는 것은 정말 생각하기 힘든 가능성이었으니……. "노, 놀라운 일이구려." 당혹해하는 슈렉하이머를 쳐다보며 세르게이는 데이몬이 이곳에서 치른 시험의 내용과, 우여곡절을 남김없이 설명해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슈렉하이머는 그가 트윈헤드 오우거를 상대로 싸워 이겼다는 대목에서는 다소 놀란 태도를 보였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근황이 다소 기이하긴 하지만 어차피 자신과 데이몬과의 관계는 모두 끝난 것이다. 한낱 병사가 된 이상 관심을 둘 필요는 없었다. "그럼 기사단이 도착할 때까지 대승정께서는 이곳에 머무르도록 하십시오. 그동안 제가 모든 준비를 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소." 몸을 돌려 나가는 세르게이의 뒷모습을 보며 슈렉하이머의 가슴은 점차 북받쳐 오르고 있었다. 그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인간은 트루베니아에 계속 존속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으아아악." 피가 튀고 살이 찢겨져나가는 전장이었다. 한 쪽은 인간의 군대, 다른 한 쪽은 녹색 피부를 가진, 왜소하기는 하지만 투지만큼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종족인 오크의 군대였다. 이처럼 두 종족이 한데 엉켜 피 튀기는 접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군대는 바로 이카롯트에서 파견된 제 8군단이었다. 그리고 그에 맞서는 오크 부족은 오랫동안 8군단과 싸워왔던 사카타 부족의 전사들이었다. 전세는 여러모로 보아 막상막하라고 할 수 있었다. 일단 수적으로는 오크 군이 우세했지만 인간들의 군대는 병진을 바탕으로 한 효율성으로 힘겹게나마 버텨나가고 있었다. 다만 구성된 병진의 모양이 다소 특이했다. 평소와는 달리 약 오백 명 정도로 구성된 여러 개의 병진이 사방으로 분산되어 전투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드래곤의 개입을 염려해 구성한 병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한데 뭉쳐 병과간의 공조를 극대화해야 했지만 그렇게 된다면 드래곤의 공격 마법 한 방에 치명상을 입을 우려가 있었다. 그 때문에 지휘관들은 다소의 피해를 감수한 채, 이렇게 소수의 병진을 운용하고 있었다. 다행히 드래곤이 오진 않은 것 같았지만 방심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 때 전장의 한 쪽에서 갑자기 눈부신 섬광이 번쩍 했다. 콰콰쾅. 지표면이 산산이 깨어져나가며 생명이 사라진 시체 조각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피로 물든 전장의 군데군데로 맥없이 떨어지는 시신들은 대부분 오크 보병의 것들이었다. 상황을 보아 상당히 강력한 공격마법이 밀집해 있는 오크 부대 한 복판에 직격한 것 같았다. "취에에엑. 마법사를 죽여라." 마법 공격이 날아온 방향을 가늠한 오크 부대장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이번 공격에 많은 부하들이 몰살당했기 때문에 부대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물론 더 이상의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서둘러 마법사를 죽여야 했다. 때문에 오크 부대장은 계속해서 그 쪽으로 손가락질을 해 댔다. 콰우우우. 기성과 함께 격전을 치르고 있던 오우거나 트롤 등의 중형 몬스터들이 일제히 그 쪽으로 향했다. 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중형 몬스터가 가장 제격이었다. 그 덕에 힘겹게 버텨나가던 인간 병사들이 한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지만 말이다. 오우거 두 마리와 트롤 세 마리가 전장의 한 쪽으로 맹렬히 쇄도했다. 그곳이 마법 공격이 날아온 방향이었다. "막아라." 병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지만 애당초 그들로써 중형 몬스터를 막기란 무리였다. 앞을 가로막은 병사들은 마치 비질을 당하듯 쓰러졌고 오우거와 트롤은 그 사이를 뚫고 목표한 곳을 공격해 들어갔다. "으아악." 앞을 가로막는 병사 두 명을 멀리 날려버린 오우거의 눈에 마법 지팡이를 들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비쳤다. 여타의 병사들과 같이 갑옷을 걸친 모습이었지만 마법 지팡이를 들고 있는 것을 봐서 마법사가 분명했다. 주위의 병사들이 그를 감싸는 것을 봐서 상황은 더 없이 확실해 보였기에 오우거는 지체 없이 그를 덮치려 했다. 그 때 무언가가 오우거의 면전을 한 발 앞서 덮쳤다. 인간으로 짐작되는 존재 하나가 오우거의 무릎을 살짝 딛고는 가슴 쪽으로 솟구쳐 올랐던 것이다. 도무지 인간으로 볼 수 없는 빠른 몸놀림이었다. 동시에 오우거는 가슴팍에서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콰우. 오우거의 육중한 몸이 돌연 휘청했다. 이 정도의 공격에 당할 자신이 아니었기에 오우거는 기를 쓰며 몸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이미 가슴팍의 요혈인 거궐혈을 여지없이 꿰뚫린 상태. 잠시 기를 쓰던 오우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쿵 하고 쓰러져버렸다. 자신이 이처럼 맥없이 당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듯 퉁방울만한 눈은 크게 뜨여 있었다. "하나 잡았다." 오우거를 쓰러뜨린 인간은 마치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바닥에 사뿐히 착지한 다음 지체 없이 다음 목표물을 향해 덮쳐들었다. 그의 손에 착용된 스파이크 건틀릿에서는 눈부신 예기가 줄기줄기 발산되고 있었다.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두 번째 오우거는 손에 든 방망이를 마치 풍차처럼 돌리며 상대의 접근을 봉쇄하려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인간의 몸놀림은 빠르기로 정평 있는 오우거의 움직임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하앗." 바닥을 살짝 딛고 도약한 인간은 휘몰아치는 방망이 사이를 살짝 파고 들어갔다. 크륵. 팔꿈치가 시큰하는 감각과 함께 오우거는 그만 들고 있던 방망이를 떨어뜨렸다. 곡지혈에 심각한 타격을 받은 이상 방망이를 계속해서 들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는 듯 오우거는 성한 다른 팔로 공격해오는 인간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다. 인간의 몸놀림은 이미 오우거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으므로……. 인간을 잡기 위해 허리를 숙인 순간 오우거는 갑자기 정수리가 뜨겁다는 느낌을 받았다. "크롸?" 다급히 손을 들어 정수리를 보호하려 했지만 이미 팔에 점점 힘이 빠지고 있는 상황. 오우거의 육중한 몸은 머리 꼭대기의 백회혈이 박살난 상태로 서서히 바닥에 침몰하고 있었다. "와아아. 잡았다." 그 광경에 둘러싼 병사들이 일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에겐 절대적으로 공포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너무나도 손쉽게 무력화된 것이다. 하지만 병사들은 별달리 놀라지 않았다. 이것은 이미 여러 번 지켜 봐 왔던 일이므로…….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57회 이곳으로 달려오던 트롤 세 마리는 이미 병사들에 의해 저지된 상황이었다. 힘이 비록 뛰어나지만 동작이 비교적 느린 탓에 트롤이 오우거만큼의 활약을 보일 순 없는 노릇이다. 근처의 병사들이 대거 몰려왔으므로 트롤 세 마리는 오래지 않아 여러 조각으로 나뉜 시체가 되어버렸다. "헉. 헉" 트롤의 시체를 두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병사들의 귀에 냉랭한 일성이 들려왔다. "모두 비켜라."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고 있는 병사들은 분분히 비켜나며 길을 열어주었다. 그들 사이로 엄청난 열기를 동반한 거대한 불덩어리가 폭사되었다. 대기를 가르며 날아간 불덩어리는 오크 부대의 정 가운데를 그대로 가격해버렸다. 콰콰쾅. 경천동지할 폭발이 일어나며 수많은 오크 전사들의 생명이 화염 속에서 사라졌다. 이번 타격은 그들의 사기를 꺾어놓는데 충분했다. 한 번의 마법 공격에 용맹스러운 전사 수백 명이 몰살하는 상황. 그들에겐 더 이상 인간 마법사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취이이익. 후, 후퇴하라." 이미 반수 이상의 전사들을 잃은 터라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지 오크 족장은 결국 후퇴명령을 내렸다. 더 이상 전사들을 잃는다면 사카타 부족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에 따라 사카타 부족의 오크들은 썰물처럼 전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종족의 특성상 물러나는 오크들에게 부상자들을 수습할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그저 어수선한 형태로 정신 없이 전장에서 퇴각할 뿐이었다. 자고로 전장에서 전과가 가장 극대화되는 경우는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는 순간이다. 그 때문에 제 8군단은 곧 추격을 개시했다. 기병대와 경장보병들을 중심으로 순식간에 추격대가 구성되었고, 군단장을 맡고 있는 하우젠 후작이 목청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대었다. "놈들을 추적해라.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가서 씨를 말려야 한다." 꽁지가 빠지게 줄행랑을 놓는 오크들. 놓칠세라 그 뒤를 바짝 따라가는 추격대. 그들의 모습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추격대에서 제외된 인원들은 지체 없이 전장의 정리에 나섰다. 숨이 붙어있는 오크 부상병들을 처치하는 일이 바로 그들에게 할양된 임무였다. 물론 그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부상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투지의 화신인 오크들이 순순히 죽어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발악한다고 해도 운명은 바뀌지 않는 법. 곧 장내에는 죽어 가는 오크들의 구슬픈 비명소리가 널리 울려 퍼졌다. "이제 끝났는가?" 비 오듯 흘러내리던 땀을 슬쩍 훔쳐낸 마법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브 자락 사이로 끔찍한 화상을 입은 피부가 슬며시 드러났다. 그는 바로 도일이었다. 가공할 위력을 보인 마법 공격은 바로 그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잠시 숨을 고른 도일은 걸음을 옮겨 누군가에게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바로 오우거 두 마리를 거꾸러뜨린 장본인이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수고했다. 데이몬." 괴력을 발휘한 인영의 정체는 다름 아닌 데이몬이었다. 도일은 기특하다는 듯이 데이몬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었다. 우선 그는 데이몬의 몸에 전개해 놓은 마법을 서둘러 거뒀다. 마법을 빨리 해제하지 않는다면 데이몬의 몸이 급속히 노화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데이몬이 그와 같은 활약을 하게 된 배경에는 도일의 크나큰 조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 파워 업(Power-up) 건틀릿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구나." "네. 스승님의 도움 덕분에……." 데이몬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사실 도일이 그의 몸에 여러 가지 마법을 걸어놓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이와 같은 활약을 할 수 없었을 터였다. 우선 데이몬이 그런 눈부신 활약을 한 이유는 도일이 그의 몸에다 헤이스트(haste) 마법을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캐스터에 한정된 시간을 빨리 흐르게 하여 민첩성을 극대화시키는 마법. 원래부터 날렵한 데이몬의 몸놀림에 헤이스트에 의한 빠른 속도까지 가세하자 그 공격력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이것은 날렵한 오우거가 전혀 그를 잡지 못한 데서 충분히 실감할 수 있는 문제였다. 또한 데이몬이 들고 있는 건틀릿은 도일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파워 업 건틀릿이었다. 물론 삼십 년 동안 지하감옥에 갇혀 마법 무구를 만들던 도일이 파워 업 건틀릿 따위를 만들어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이 두 가지만으로 데이몬은 오우거 두 마리를 쓰러뜨리는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만약 여타의 병사였다면 같은 조건을 가지고도 성공하지 못했을 일을 데이몬은 해 낸 것이다. 도일은 말없이 눈을 빛냈다. '하지만 이것은 만약 데이몬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해 낼 수 없어.' 이 모든 것은 데이몬이 바로 마나를 모을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데 기인한 것이었다. 만약 마나를 제어할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실력 있는 도일이라도 결코 데이몬의 몸에 헤이스트를 걸 수 없었을 것이며 파워 업 건틀릿도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리라……. 그 과정을 생각한 도일은 암암리에 혀를 내둘렀다. '아마도 트루베니아 대륙의 마법사들 중에서 이처럼 단시일 내에 마나를 끌어 모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자는 오직 데이몬이 유일할 것이다.' 그는 놀랍다는 듯한, 한편으로는 무척 자랑스럽다는 시선을 데이몬에게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제자인 데이몬은 단 6개월만에 마나를 끌어 모으는 성취를 보였던 것이다. 요즘들어 제법 기어오르긴 했지만 그래도 데이몬은 그의 자랑스러운 제자였다. 도일은 어느새 데이몬을 데리고 이곳에 도착한 6개월 전의 일을 상기하고 있었다. 이틀 동안의 여정을 거쳐 도일과 데이몬은 8군단이 있는 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함께 온 병사들은 곧 적절한 위치에 배치되었고 데이몬은 정식으로 8군단장으로부터 도일의 가드로 임명될 수 있었다. 도일에게 다섯 명의 가드들이 더 보충되었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도일은 당연하다는 듯이 데이몬을 가드들의 우두머리로 배치했다. 물론 가드들 중에는 도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는 첩자도 분명 끼어있을 테지만 그들의 이목 정도는 데이몬이 능히 차단할 수 있었다. 이미 수백 명의 수하들을 이끌고 무수한 전투를 치러나갔던 데이몬에게 첩자를 가려낼 정도의 능력정도는 있었던 것이다. 도일은 이제 마음놓고 데이몬에게 마법을 전수할 수가 있었다. 아마도 군대에서 가장 한가한 보직을 선택하라면 단연 마법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통상적인 경우 마법사들은 규모가 큰 전투에만 동원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것은 비교적 방어가 취약한 마법사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마법사의 위력을 극대화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한정된 마나를 이용하는 마법의 특성상 마법사들은 소규모의 전투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에는 한가롭게 휴식을 취했다. 휴식기간동안 마나를 많이 모아놓는다면 규모가 큰 전투에서 대단한 위력을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이들 사제지간의 마법 전수는 무척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가르치는 쪽도 전력을 다했지만 배우는 쪽도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마법을 전수 받았다. 그리고 단 6개월. 정확히 말해 바로 며칠 전에 데이몬은 자신의 의지로 마나를 끌어 모으는 위용을 보였다. 도일은 도저히 믿지 못할 일을 해 낸 제자를 따듯한 시선으로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이제 걱정할 것은 없다. 조만간 너는 1써클의 마법사가 된다. 그렇다면 마왕과 계약을 맺을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어렵지 않게 실력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데이몬을 보며 도일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 숙인 데이몬의 입가에도 슬며시 미소가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법사가 되는 길이 열렸다는 데 대한 희열의 미소였다. 단 6개월만에 마나를 끌어 모으는 경지에 올랐다는 것. 이것은 데이몬이 과거 엄청난 경지에 오른 무인이었다는데 기인한 결과였다. 비록 무사는 몸 내부의 기(氣)를, 마법사는 의지로써 몸 외부의 기를 제어한다는 차이는 있지만 마나의 움직임과 이동경로를 꿰뚫고 있다는 점에서 데이몬은 훨씬 유리한 출발을 할 수 있었다. 물론 내공을 잃었을지언정 체내의 기를 제어하고 관리하는 방법은 데이몬의 뇌리에 또렷이 각인되어 있었고 그 경험은 마법을 배우는데 엄청난 촉진제가 되었다. 거기에는 물론 자신의 경험에 입각한 도일의 훌륭한 가르침과 데이몬의 의지가 중대한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하여 데이몬은 마침내 마법의 길에 첫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전장은 대충 정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산발적으로 저항하던 오크 부상병들은 오래 견디지 전멸되었다. 멀리서 먼지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 추격에 나섰던 부대마저 짭짤하게 승리를 거두고 귀환하는 듯 싶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데이몬의 옆으로 콧수염을 기른 병사 하나가 다가왔다. 그는 로이드란 이름을 가진 병사로써 데이몬과 함께 도일의 경호를 맡은 가드 중 한 명이었다. 현재 데이몬의 아래에는 총 다섯 명의 가드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그들 모두는 데이몬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데이몬이 생각하기에 로이드는 도일의 감시를 위해 파견된 자가 분명했기 때문에 별달리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데이몬은 로이드의 몸을 쓱 흝어 보았다. 몸에 걸친 강철갑주가 이리저리 패인 것을 보니 그도 만만치 않게 격전을 치른 모양이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데이몬에게 말을 건넸다. "대장. 수고 많으셨습니다." "뭐 수고랄 것까지야 있나?" 그의 호의 어린 표정이 다분히 가식적이란 것을 간파한 데이몬은 슬쩍 고개를 끄덕여 준 뒤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로이드는 얼굴을 약간 찡그린 채 데이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사실 자신이 아니었다면 가드의 우두머리는 로이드의 것이 분명했기에 그가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이 그리 좋지는 못하리라 데이몬은 생각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헤이스트를 전개한 때문에 피로감이 물밀 듯 밀려왔다. 하지만 데이몬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해법을 찾은 데 기인한 것인지도 몰랐다. 마법이란 학문이 그에게 충분히 힘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그로 인해 데이몬의 성격은 많이 변해 있었다. 사실 사준환에게 배신당한 이래로 데이몬의 말투는 극도로 줄어들어 있던 상태. 유일하게 마음이 통했던 부하들을 모조리 잃은 것도 그러했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트루베니아 대륙에 홀로 내팽개쳐지고, 힘든 과정을 오랫동안 겪어야 했던 것 때문에 그의 심성은 지금 극도로 피폐해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뜻밖에 이곳에서 믿을 만한 대상인 도일을 만나게 되고 어느 정도의 힘을 되찾게 되자 그는 다시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온통 시신이 널려 있는 전장을 쓱 훑어보았다. "나도 평범하게 살긴 글렀나 보군. 참혹한 전장이 더 정답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쓴웃음을 짓던 데이몬은 지체 없이 스승인 도일을 찾아갔다. 접전을 통해 제법 많은 마나를 소모한 때문인지 도일의 얼굴은 무척 창백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들어 오크들의 도발이 잦아진 탓에 쉴 시간이 그다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법사가 주위에서 동원할 수 있는 마나는 엄연히 한정되어 있는 법. 도일은 지금 체내의 마나까지 심하게 고갈된 상태였다. "많이 피로하신가 보군요." 도일은 침울한 어조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그렇구나." 데이몬은 씩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크크크. 그게 바로 늙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래도 나이는 못 속이나 봅니다. 슬슬 관을 준비해 두는 것이 아무래도……." "떽! 이놈이?" 도일은 움찔하는 데이몬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관짝이라니? 아직까지 이십 년은 거뜬한 나에게?" "속일 생각 마십시오. 이미 스승님은 여든 살이 넘으셨잖습니까? 그쯤 사셨으면 가실 때도 되었지요. 암." "그래도 이놈이?" 도일은 눈을 부릅떴다. 말년에 하나 맞은 제자 놈이 어떻게 된 게 갈수록 사사건건 스승을 놀리려 들고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무척 고분고분하던 제자였다. 그야말로 자신에게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러던 놈이 시간이 지날수록 넉살이 늘어만 갔다. 그리고 지금은 아예 자신과 맞먹으려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번만은 결코 쉽사리 넘어가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도일은 눈에 힘을 주며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오늘은 기필코 네놈의 버릇을 고쳐놓고야 말겠다. 따라오너라." 무척 화가 난 표정으로 거칠게 몸을 돌리긴 했지만 도일의 얼굴에는 뭔가 이해 못할 어색함이 배어 있었다. 사실 도일은 겉보기처럼 그리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스승으로써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일부러 분노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데이몬의 진심이 변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모를 턱이 없었다. 또한 데이몬이 자신에게 친밀감을 느낀 나머지 격의 없이 대한다는 것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도일 역시 혹독한 흑마법사의 서열에 익숙해져 있는 이였고 그 때문에 이번 기회에 위계질서를 단단히 세우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잠시 놀랐을 뿐 곧 평온을 유지했다. 그는 마치 아무것도 무서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 도일을 따라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 모습에는 모종의 대비책을 세워놓은 기색이 역력했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58회 "자. 벌로 오늘의 수련은 밤새도록 계속될 것이다. 준비하도록 하라." 도일은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데이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으르렁거리면서도 내심 데이몬의 당혹한 태도를 기대했던 도일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의 얼굴에는 추호도 겁먹은 표정이 떠올라있지 않았다. '이 녀석이?' 맥이 조금 풀렸지만 도일은 억지로 얼굴 표정을 다잡았다. 이번 기회에 데이몬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으려는 심산인 것이다. "이미 수없이 행해왔던 절차이니 설명 따윈 생략하겠다. 자세를 잡거라." 약간 굳어든 데이몬의 표정에 어느 정도 만족하며 도일은 서서히 주위의 마나를 끌어 모았다. 그가 지금 시행하려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마나 수련법이었다. 자신의 경험에 입각해 데이몬을 6개월만에 마나를 끌어 모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르게 한 도일 특유의 수련법. 사실 마나를 끌어 모은다는 것은 말 그대로 고도의 정신집중이 필요한 기술이다. 일체의 잡념을 배재한 채 오로지 무욕, 무념,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주위에 퍼져있는 마나의 흐름을 원활히 느껴야만 마나를 효과적으로 끌어 모을 수 있는 것이다. 도일 역시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 그 단계를 거쳐왔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마침내 자신만의 독문 수련법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바로 고도의 정신집중을 위해 외부의 조력자가 마법을 사용해서 시술자를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혜택은 도일의 제자가 된 데이몬이 처음으로 누리게 되었다. "정신집중을 방해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굳이 들자면 시각을 통해 불필요한 것을 보고, 또한 청각과 후각을 통해 불필요한 요소를 듣고, 맡기 때문에 정신집중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난 이제 마법을 써서 너의 눈과 코, 그리고 귀를 마비시키겠다. 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너는 오로지 마나를 끌어 모으는 데에만 열중해야 한다." 도일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나를 재배열하기 시작했다. 데이몬을 밤새도록 장님에다 귀머거리로 만들기 위한 마법을 시행하기 위해서였다. 내심 웃음이 치밀어 올랐지만 도일은 이를 악물고 꾹 눌러 참았다. '클클클. 녀석, 어디 고생을 좀 해 보라지.' 사실 도일의 독문 수련법은 정말 대단한 효과가 있었다. 데이몬에게 직접 적용해본 결과 이것은 정신을 집중하는데 더할 나위 없는 수련법이었다. 데이몬의 성취만 보더라도 그 효과가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 수련법에도 한 가지 단점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수련자가 상당한 곤욕을 치러야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시각과 청각, 후각이 마비되어 세상과 격리되는 것. 듣지도 보지도 냄새를 맡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 정신을 집중하는데는 좋겠지만 시술당하는 대상자에게는 말 그대로 엄청난 곤욕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수련법으로 인해 데이몬이 놀라울 정도의 성취를 올린 것이 사실이었으므로 도일은 머뭇거리지 않고 마법 지팡이에 마나를 모았다. "그럼 시작하겠다." 막 마법을 전개하려던 순간 도일은 들릴락 말락하게 새어나오는 데이몬의 혼잣말을 용케 들을 수 있었다. "아쉽군. 오늘은 사부님을 위해 실력을 한 번 발휘하려고 했는데……." 순간 도일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그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데이몬의 얼굴을 주시했다. "실력을 발휘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크크크. 스승님도 다 아시면서?"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거리는 데이몬을 보며 도일은 굳건하게 다져놓았던 각오가 서서히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너는 혹시 이 스승을 위해 음식을 해 주겠다는 말이냐?" 데이몬의 얼굴에 걸렸다! 하는 듯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그렇지요. 대승을 거뒀으니 분명히 오늘 저녁에는 특별 메뉴가 나올 테고, 이 제자는 그것을 이용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선보이지 않는 특급 요리를 스승님께 대접해 드리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수련해야 한다니 애석하군요. 뭐 어쩔 수 없지요." 체념한 듯한 데이몬의 얼굴을 보자 도일의 얼굴은 무척 다급해졌다. "무, 무슨 요리인데 그러냐?" "뭐, 이따금 해드렸던 경장육혁(京醬肉絲)이나 무석배골(無錫排骨)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요리입죠. 이름하여 魚香肉絲(어향육사). 생선 맛이 나는 사천 풍의 특제 돼지고기 요리라고만 아시면 됩니다. 크크크. 제자. 오늘을 위해 특별히 후추를 비롯한 구하기 힘든 양념을 준비해 두었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애석하게도 솜씨를 발휘하지 못할 것 같군요. 그럼요. 수련을 해야지요." 도일의 눈이 갈등으로 인해 크게 뜨여졌다. 입맛이 동했는지 벌써 그의 입가에는 군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비록 식탐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도일은 데이몬의 훌륭한 요리솜씨로 인해 이미 식도락가(食道樂家)가 된 지 오래였다. 혼줄을 내주겠다는 애초의 각오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도일은 이제 어떻게 하면 데이몬의 마음을 돌릴까 골똘히 궁리하기 시작했다. '허, 참. 이거 어떻게 한다.' 육 개월 전. 그러니까 데이몬이 고분고분하던 시절, 도일은 우연한 기회에 데이몬이 요리한 요리를 먹을 기회가 있었다. 급식병들의 형편없는 요리실력에 넌더리가 난 나머지 데이몬이 스승에게 대접한다는 빌미로 요리 재료를 구해 직접 실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물론 식도락이 취미였던 데이몬은 중원 각지의 이름난 숙수들에 의해 미각이 단련되어 있던 상태였고, 중원을 횡행하던 시절 무수하게 음식을 만들어보았기 때문에 이 정도의 요리는 그에게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중원과는 양념이 판이하게 틀리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돼지나 양고기에서 비린내를 빼고 양념을 해서 육질을 연하게 하는 정도는 데이몬에겐 마치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데이몬의 손에 의해 트루베니아에서 첫 번째로 선보인 요리는 바로 경장육혁이었다. 뼈를 바른 돼지고기와 간장을 주재료로 조린 산동지방 고유의 요리. 물론 제대로 된 양념이 없는 탓에 원조 경장육혁과는 조금 다른 요리가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도일을 놀라게 하기엔 충분한 맛이었다. 그저 돼지고기에다 소금을 발라 굽거나 삶은 것이 요리의 전부였던 트루베니아 인의 미각에 갖은 양념을 하여 조린 중원의 고급 요리가 미친 파장은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중원의 요리에는 그만큼의 깊은 맛이 배어있었던 것이다. 당시 도일은 요리를 먹다 깜짝 놀라 혀까지 깨물 뻔했다. 그 정도로 요리의 맛이 훌륭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데이몬은 이따금 실력을 발휘해서 도일을 놀라게 했고 그는 이제 데이몬의 요리에 깊이 매료되어 있던 상태였다. 그러니 도일의 고뇌는 점점 깊어질 만도 했다. 갈등이 계속해서 교차하는 도일의 표정에서 데이몬은 자신의 계책이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이젠 그의 몸을 달게 할 시간이었다. "아니 스승님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십니까? 수련을 시작해야죠." 능청스러운 데이몬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든 도일은 표정을 바꾸어 그를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 네가 무척 피곤할 것 같구나. 오늘 전투는 정말 힘들었지? 오우거 세 마리를 처치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럼." "뭐, 전 괜찮습니다. 조금 힘들긴 했지만 수련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닙니다."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데이몬의 얼굴을 보며 도일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투엔 스승을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지만 이미 요리를 먹을 생각에 혼이 빠진 도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내가 무척 피곤하구나. 그러니 오늘 수련은 다음으로 미루자꾸나. 응?" 애초의 호기와는 달리 도일은 데이몬을 살살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떻게든 그를 구슬러 요리의 맛을 보고 싶은 것이 도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고래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욕망에는 식도락이 빠짐없이 들어간다. 훌륭한 실력의 흑마법사였지만 도일 역시 그런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완전히 자신의 꼼수에 빠져 들어간 도일을 보며 데이몬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뭐 그러시다면 수련을 생략하도록 하지요. 대신 스승님께 요리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그, 그래 주겠니?" 도일의 얼굴이 확 펴졌다. 그 모습은 마치 장난감을 얻은 어린아이의 표정과 진배없었다. 쓴웃음을 짓던 데이몬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제자는 요리재료를 구하러 가겠습니다." "그러려므나. 너무 나를 기다리게 하지는 말고……." "원래 요리란 것은 충분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법입니다." "아, 알았다." 이미 주도권이 완전히 데이몬에게 넘어간 것을 직감한 도일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데이몬이 장내에서 사라진 후 도일은 어이가 없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못 견디겠군. 참고 넘어가기엔 저 녀석의 요리 실력의 너무도 출중하단 말이야." 한동안 푸념을 늘어놓던 도일은 말없이 자신의 막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당했다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대 승리를 거둔 후라서 그런지 8군단은 완전히 축제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비록 전세를 뒤집을 만한 승리는 아니었지만 오크 족에게 점령당했던 영토를 어느 정도나마 되찾았다는 사실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가 극도로 고양되어 있는 것이다. 데이몬은 병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사이를 지나쳐서 보급창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8군단은 현재 하우젠 후작의 지휘 하에 있었다. 아마도 그는 고조된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비축된 식량을 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마도 오늘은 고기 구경을 좀 하겠군." 지금껏 승리를 거둔 후에는 항상 특별식단이 배급되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그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 사실 8군단의 보급사정은 그다지 좋은 편이 되지 못했다. 와이번 편대와 함께 활동하는 오크 유격대 때문에 이곳으로 오는 보급 부대 중 절반이 차단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그 때문에 8군단에 속해 있는 병사들은 무척 어려운 사정 속에서 전투를 치러나가야 했다. 물론 오크 점령지에 깊숙이 진격해 들어간 몇 몇 군단들은 어려움이 더 했다. 그들은 식량이 모자란 나머지 죽은 오크의 고기를 병사들에게 보급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8군단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 걸어가자 군수물자를 보관해 놓은 막사가 보였다. 데이몬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보급병으로 보이는, 성격이 무척 꼬장꼬장해 보이는 병사 하나가 고개를 돌렸다.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용무를 밝혔다. "나는 도일 마법사 님의 가드 우두머리일세.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왔지." 통상적으로 가드를 지휘하는 우두머리라면 보통 백 명의 병사를 통제하는 부대장과 동급인 직책이다. 때문에 건들거리던 보급병은 다소 공손한 태도를 취해 보였다. 하지만 데이몬의 용무를 듣자 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 고기를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요리는 내가 직접 할 테니 우리에게 배속될 음식을 재료로 주기 바라네." "그, 그것은 좀……." 보급병은 무척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급사정이 원활하지 않은 탓에 상부에서 고기 종류는 모조리 수프로 만들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정된 고기로 많은 병사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오로지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잠시 고기 재고량을 가늠해보던 보급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도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보급사정을 아시다시피 남는 고기가……." 보급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난데없이 막사 내부에서 뭔가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쿠당탕. 곧이어 병사 하나가 다급하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다크메이지]2장 거듭되는 시련 59회 안녕하세요. 김정율입니다. 오늘 부로 2장 거듭되는 시련 편도 모두 끝이 났습니다. 이제 3장을 들어가야 할 차례인데 먼저 독자님들께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휴식을 위해 연중을 할 생각입니다. 연중이 무척 잦은 편이죠?^^ 사실 요즘은 글을 쓰는 것이 무척 힘들어요. 외전과 병행해서 쓴 것 때문에 구상을 많이 ㅎ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금 쉬어 심신을 재충전하고 난 뒤 3장을 시작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미 연재한 내용에 대해 많은 분들께서 비평을 해 주셨습니다.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 대대적으로 내용을 수정할 생각입니다. 아마도 회상 씬에 대해선 과감하게 가위질을 해야겠지요. 그럼 며칠 있다 3장을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이만. ******************************************************************************** 의자에 걸려 넘어졌는지 그는 아픈 무릎을 감싸안고 끙끙대다 겨우 몸을 일으켰다. 문장을 보아 데이몬과 대화를 나누던 병사보다는 상급자로 보이는 병사였다. 그는 다급하게 데이몬에게 다가섰다. "혹시 도일 마법사님 휘하의 가드십니까?"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선임병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급격히 떠올랐다. "드,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런데 어떤 종류의 고기를……." "뭐, 이곳에 있는 것이 돼지고기밖에 더 있나? 가능하다면 육질이 연한 새끼돼지면 좋겠는데, 없다면 할 수 없겠지만……." "마련해 보겠습니다. 너는 지금 즉시……. 아니다. 내가 직접 갔다 오겠다." 그는 먼저의 병사에게 뭘 지시하려다 말고 직접 막사를 나섰다. 돌연한 병사의 태도에 데이몬은 미간을 지긋이 모았지만 별달리 개의치는 않았다. 선임병은 오래지 않아 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큼지막한 새끼돼지 한 마리가 들려져 있었다. 머리와 내장은 제거되었지만 아직까지 따끈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아 막 잡아온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미간을 슬며시 모았다. "이렇게 줘도 괜찮겠나?" "사, 상부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오늘 전투에서 큰공을 세우신 도일 마법사 님을 위해 아무것도 아끼지 말라고 말입니다." 떠듬거리며 대꾸하는 선임병의 태도에 데이몬은 뭔가 미심쩍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별달리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에 그는 말없이 새끼돼지를 받아들었다. "고맙네. 그럼 난 가보겠네." 데이몬이 막사를 나선 직후 보급병은 다소 불만스럽다는 눈초리로 선임병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아직까지 다 자라지도 않은 돼지를……." 조금 더 키운다면 더 많은 병사들에게 제공될 수 있는 식량이라서 보급병의 불만은 일리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선임병은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허겁지겁 막사를 나섰다. "잠깐 사령관님의 막사에 다녀오마. 그때까지 이곳을 잘 지키도록……." 곧 보급창 안에는 데이몬과 상대하는 보급병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선임병의 돌연한 태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데이몬이 난데없이 돼지 한 마리를 가지고 도착하자 휘하의 가드들이 우루루 몰려들었다. 가드 한 명이 반색하며 고기를 받아들었다. "난데없이 웬 돼지입니까?. 대장. 혹시 오늘 저녁에……?" 데이몬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혹시가 맞을 것 같군. 오늘 저녁은 특별 메뉴를 기대해도 좋을 거야." 데이몬의 화답에 가드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 역시 데이몬의 요리에 매료된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곧 모종의 기대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장. 오늘은 무슨 요리를 선보이실 생각입니까?" "요리 명을 말하면 네놈들이 알아들을 수 있어? 그냥 조용히 기다렸다가 요리 맛이나 보도록 해." 퉁명스러운 데이몬의 대답에도 가드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경험대로라면 대장은 오늘도 역시 자신들의 기대를 훌륭히 충족시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가드 한 명이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물론 아부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발언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은 정말 행운아들이로군요. 싸움 실력도 실력이지만 요리솜씨가 이렇게 좋은 대장을 모시고 있으니까요." "놀고있네." 냉랭하게 쏘아붙인 데이몬은 고개를 흔들며 막사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가 암암리에 준비해놓은 요리도구들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가드들의 가슴은 서서히 설레기 시작했다. 그러나 멋진 저녁식사에 대한 기대로 말미암아 그들은 가드 한 명이 조심스럽게 빠져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바로 로이드란 이름을 가진 가드였다. "어향육사(魚香肉絲)라……. 양념이 완전치 않으니 제대로 될까 모르겠군." 데이몬은 낮게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새끼돼지라서 그런지 육질이 연해서 잘 찢어지는 편이었다. 사(絲)라는 이름이 붙은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요리는 돼지고기를 가늘게 찢어서 양념을 하는 요리였다. 다양한 향신료를 첨가했기 때문에 시고 짜고 매운 세 가지 맛이 무척 강한 사천 지방 고유의 요리. 물론 마땅한 양념이 있을 턱이 없었기 때문에 제 맛을 살릴 수는 없겠지만 이미 데이몬은 부족한 양념의 배합에는 도가 튼 상태였다. 수호마왕군을 이끌고 중원을 떠돌아다녔던 시절에도 양념은 항상 모자랐으니 말이다. "정통 어향육사보다는 차라리 이것이 스승님의 입맛에 맞을 거야. 사천의 음식은 향이 너무 강하고 매운 편이라서 혹시라도 안 맞을 수가 있으니……." 힘들게 구해놓은 양념을 아낌없이 뿌려 버무리자 고기는 불그스름한 색을 띠기 시작했다. 이것을 어느 정도 재워둔 뒤 약한 불에 푹 찌고, 또다시 양념과 야채를 첨가해서 한참동안 볶으면 어향육사가 완성되는 것이다. 문제는 찌는 시간을 잘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찜통에다 고기를 집어넣은 뒤 데이몬은 나지막이 괴소를 토했다. "지금쯤 스승님의 몸이 꽤나 달아있겠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배가 고파야만 요리의 맛이 배가되는 법이니……." 서서히 끓기 시작하는 찜통을 힐끗 쳐다본 데이몬은 미리 떼어놓은 돼지의 지방을 후라이팬에 넣고 볶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완두콩 기름을 써야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것까지는 기대할 순 없었다. 그 시각 도일은 무척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가드들과 함께 식기를 움켜쥐고 요리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라는 요리는 오지 않고 난데없이 불청객들이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떼거지로 말이다. "오! 마침 계셨구려. 잘 되었소이다."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다가오는 불청객들이 어지간한 신분이었다면 도일은 사정없이 축객령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그들은 바로 8군단의 고위급 실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불청객은 바로 하우젠 후작이었다. 그의 옆에는 병사들을 지휘하는 보좌관들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도일은 무척 떨떠름한 기색으로 그들을 맞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그런데 무슨 일로……." 하우젠 후작은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도일 경께서 정말 큰 무훈을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도일 경과 저녁을 함께 들며 공을 치하하려 합니다." 말을 마친 하우젠 후작은 데리고 온 지휘관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들은 머뭇거리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가드들을 밖으로 내쫓았다. 마치 굴러온 돌이 박혀있는 돌을 몰아내는 형국이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무척 중요한 대화를 나눌 것이다. 그러니 오늘 너희들은 군단 본부 막사로 가서 식사를 하도록 해라." 데이몬의 요리만을 눈이 빠져라 기다리던 가드들에게 이것은 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애당초 지휘관의 지엄한 분부를 거스를 담량이 없었다. 하나 둘 힘없이 몸을 일으킨 가드들은 축 늘어진 모습으로 막사를 빠져나갔다. 도일은 곤혹스런 눈빛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 작자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왔을까?' 하지만 도일으로썬 하우젠 후작의 내심을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후후후. 오늘 데이몬이란 작자가 특별 요리를 준비한다고 했었지?' 하우젠 후작은 괴소를 흘리며 주머니 속에 준비해 온 식기를 만지작거렸다. 이미 보급병으로부터 1차 보고를 듣고 또한 로이드에게서 확인까지 한 터라 기대가 무척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일전에 로이드가 가져왔던 요리를 먹어본 순간을 떠올렸다. "이게 뭔가?" 흑마법사 도일의 가드로 활동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임무를 띠고 있던 첩자, 로이드가 난데없이 음식을 가지고 왔을 때 하우젠 후작은 무척 의아해했다. "일단 한 번 드셔보십시오. 가드 우두머리로 있는 데이몬이란 자가 만든 음식이온데 먹어보시면 한 마디로 놀라실 것입니다. 아깝지만 사령관 님을 위해 제 몫을 조금 숨겨 가지고 왔으니까요." 자신 있다는 말투로 로이드가 내민 요리를 하우젠 후작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겉보기에는 그리 먹음직스럽게 보이지 않는 요리였다. 거무튀튀한 액체에 잠겨있는 것이 별달리 맛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로이드가 계속해서 권유한 때문에 하우젠 후작은 어쩔 수 없이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집어넣었다. "응?" 하우젠 후작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입 속에서 사르르 녹아드는 고기 맛이 정말 일품이었기 때문이었다. 돼지고기로 짐작되었지만 일체의 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육질이 어쩌면 그렇게 연하던지…….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접시의 요리를 비워버렸다. 먹고 나서도 요리의 은은한 향이 입 속에서 계속 감돌았다. 정말 지금까지 그가 먹어본 요리 중 단연 제일이라 손꼽을 정도의 맛이었다. "세, 세상에……." 물론 후작이란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는 만큼 하우젠 후작은 무수하게 많은 요리를 먹어본 경험이 있었다. 궁정음식에서부터 각지의 특산물까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요리를 섭렵했다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기억은 단연코 이번이 처음이었다. "데, 데이몬이란 자가 이 요리를 만들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겉보기와는 달리 요리실력이 정말 대단한 자이옵니다." 텅 빈 접시를 무척 아깝다는 듯 쳐다보던 로이드가 얼른 말을 받았다. 맛보지 못한 것이 무척 아깝긴 하지만 하우젠 후작의 마음에 드는 것이 우선이었는지라 그는 억지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를 힐끗 쳐다본 하우젠 후작은 무척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민이로군. 마음 같아서는 내 전용 요리사로 두고 싶은데 마법사를 경호하는 가드의 신분이니……." 물론 지금이 전시가 아니고 평시였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데이몬이란 자를 자신의 요리사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할 수 없지. 그렇다면 너에게 임무를 한 가지 더 부여하겠다. 부여된 임무대로 도일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되 그 데이몬이란 자가 요리를 준비할 기미가 보이거든 지체 없이 나에게 보고하도록 하라.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로이드를 보며 하우젠 후작은 입맛을 다셨다. "보급창의 병사들에게 미리 통보를 해 두어야겠군. 도일의 가드 우두머리가 음식 재료를 원하거든 필요한 대로 지급하라고 말이야." 그 때의 맛을 상기한 하우젠 후작은 암암리에 입맛을 다셨다. 따지고 보면 도일이 오늘 큰 공을 세운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공을 치하한다는 핑계로 이렇게 은근슬쩍 끼여들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도일로써는 그가 온 것에 대해 탐탁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그것을 직감한 후작은 곧 입에 발린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말 훌륭한 실력이었소. 우리 이카롯트 제국에 소속되어 있는 흑마법사들 중에는 도일 경이 단연코 제일의 실력자일 것이오." "과찬입니다." 그들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 도일의 막사에는 또다시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뭐야 데이몬이 음식을 만든다고……." "감히 우리를 빼 놓다니……." 호통소리와 함께 들어 닥친 자들은 다름 아닌 중간 부대장들이었다. 각기 일백 여명씩의 부하들을 통솔하고 있는 그들 역시 데이몬에 의해 미식가가 된 자들이었다. 마법을 배울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데이몬은 솜씨를 부려 그들을 구워삶았고, 그런 연유로 데이몬은 모든 종류의 근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물론 그 시간에 마법을 배우기 위해 짜낸 꼼수였지만 이들 역시 밀정을 박아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막사에 들어서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도일의 옆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하우젠 후작과 보좌관들을 보고 난 후의 일이었다. 곧 하우젠 후작의 호통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냐?" "아,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중간 부대장들은 가드들과 마찬가지로 힘없이 막사를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서야 도일은 하우젠 후작의 속셈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맥이 탁 풀렸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내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부대의 지휘관들인 것이다. 그렇게 도일이 마음을 졸이고 있는 사이 마침내 데이몬이 막사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접시를 들고 들어선 순간 데이몬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난데없이 하우젠 후작을 비롯한 각급 지휘관들이 도일의 막사를 꽉 채우고 있었다. 물론 그가 하우젠 후작의 얼굴을 모를 리가 없었다. 평소에 무척 근엄하게 행동하는 소속 부대의 지휘관. 그런 그가 지금 군침을 질질 흘리며 자신이 들고 있는 접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데이몬이 머뭇거리는 사이 하우젠 후작이 얼른 다가와 접시를 받아들었다. "어서 오게. 수고가 많군. 참 듣고 보니 자네도 오늘 큰공을 세웠다고 하지? 나는 자네의 공을 치하하러 왔네. 쩝쩝." 얼마나 급했던지 그는 말을 하는 와중에도 고기 한 점을 들어 입 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후작이 접시를 내려놓자 지휘관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평소의 권위와 위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모습이었다. 도일 역시 기회를 놓칠세라 접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입 속에 들어간 요리는 몇 점되지 않았다. 후작과 보좌관들은 대부분 숙련된 기사인지라 마법사인 도일보다 동작이 월등히 빨랐기 때문이었다. 접시는 눈 깜짝할 사이에 텅 비어버렸다. "쩝쩝. 왠지 양이 조금 적은 것 같군." 요리의 맛이 흡족했었는지 하우젠 후작은 무척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의 요리는 저번에 먹어보았던 것보다 오히려 더 훌륭한 맛이었다. 물론 보급병에게 보고를 들은 탓에 요리의 주재료가 돼지고기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특유의 비린내는커녕 맛조차 판이하게 달랐다. 특이하게 생선 맛이 은은히 도는 것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정말 맛있는 요리였다. 어떻게 요리했는지는 몰라도 전혀 비리거나 느끼하지 않았으니 한마디로 말해 일품요리인 것이다. 텅 비어버린 접시를 보며 도일은 망연자실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계면쩍어진 후작은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이럴 땐 줄행랑이 상책인 법이다. "잘 먹었소. 꺼억. 그럼 앞으로도 계속 수고 바라겠소." 몸을 돌린 하우젠 후작은 멍하니 서 있는 데이몬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정말 훌륭한 맛이었어. 앞으로도 종종 실력을 보여주기 바라네. 그럼 나는 이만 가겠네." 그와 함께 보좌관들이 우루루 나가버리고 막사 안에는 곧 데이몬과 도일만이 남게 되었다. 곧이어 가드들이 막사 안으로 황급히 달려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이 본 것은 텅 비어버린 음식접시와 망연자실해 있는 도일뿐이었다. "이런 젠장. 얼마나 기다렸는데 맛도 보지 못하다니……." 맥이 탁 풀린 가드들은 자리에 털썩털썩 주저앉았다. 본부 막사에서 식사를 하고 오란 지시를 받았지만 그것을 이행한 가드는 단 하나도 없었다. 데이몬이 만든 요리는 그만큼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멍하니 앉아있던 도일의 눈동자가 갑자기 번들거렸다. 그는 서서히 마나를 끌어 모으며 누군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하우젠 후작에게 고한 것이 바로 네놈이 틀림 없으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엔 로이드가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곧 모든 가드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나, 난……." 쩔쩔매던 로이드는 어떻게 해서든 변명을 하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동료 가드들마저 살기를 띠며 접근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속일 생각하지마. 자리를 비운 것은 오직 네놈뿐이니까……." "네놈 때문에 만찬을 망쳐버렸어. 그 대가를 알고 있겠지." 마나를 모으고 있는 도일은 물론이었고, 주먹을 꺾으며 다가오는 동료들의 모습에 로이드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잡힌다면 뼈도 추리지 못할 것임을 직감한 것이다. "잡아라." "저놈의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려야지." 흥분한 가드들이 로이드를 잡기 위해 일제히 막사를 달려나가려 했다. 그 때 멍하니 서 있던 데이몬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럴 필요 없어." "네?" 달려나가려던 가드들이 엉거주춤 멈춰 서자 데이몬은 도일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오늘 만찬에는 날파리들이 무척 많이 꾀었군요." "그, 그렇구나." 도일은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모처럼 데이몬이 솜씨를 발휘해서 요리를 준비했건만 몇 점 먹어보지도 못하고 불청객들의 뱃속에 고스란히 들어가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 때 도일에게 귀가 솔깃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정한 어향육사는 적어도 한 시간은 쪄야만 제 맛이 납니다. 그래야만 양념이 고루 배어들거든요." "무, 무슨 소리냐?" 데이몬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보급병이 쉽게 재료를 대어주는 것을 보고 대충 짐작은 했었지요. 그들이 먹은 것은 날파리를 쫓아내기 위해 대충 만든 미끼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진짜 어향육사는 지금 찜통 속에서 열심히 숙성되고 있지요." 거기까지 말이 이어지자 도일의 얼굴에 환희의 빛이 일렁거렸다. 그것은 도일은 물론이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는 가드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낭보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진짜는……."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1분 내로 준비하겠습니다."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마자 도일과 가드들은 식기를 움켜쥐고 식탁에 모여 앉았다. 번들거리는 그들의 눈빛에는 단 한 점이라도 더 집어먹겠다는 각오가 역력했다. 조금 뒤 데이몬이 한껏 솜씨를 부린 어향육사를 대령해 왔고 그 맛은 아까의 요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음식의 맛에 매료된 그들은 정신 없이 음식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쩝쩝. 미련한 로이드 녀석. 그 새를 못 참고 고자질을 하다니……." "글세 말이야. 이 맛을 못 봤으니 얼마나 원통할까." 그들은 말을 하는 와중에도 꾸역꾸역 고기를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마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몫을 빼앗기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데이몬에 제법 넉넉하게 음식을 준비했기에 그들은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도일과 가드들이 실컷 먹고 배를 두드릴 즈음 불쌍하게도 로이드는 본부 막사에서 쓸쓸히 식어버린 음식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2장 거듭되는 시련 편 끝 [다크메이지]3장 마법으로의 길 60회 안녕하세요. 무척 많이 기다리셨죠? 아내와 여행을 다녀온다고 예상외로 무척 길게 연중을 하게 되었습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오늘부터 연재 시작할 생각입니다. 당분간은 가급적 연중을 하지 않을 생각이니 관심을 갖고 지켜 봐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연재 들어가겠습니다. *************************************************************************** "그럼 이제부터 마법의 전개과정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겠다." 어두운 심야. 보초병 이외에는 모두가 깊이 잠든 시간이었지만 도일과 데이몬은 한참 마법수업에 열중해 있었다. 훌륭한 저녁을 즐긴 탓인지 도일은 유난히 열을 올려 수업을 진행했다. 데이몬 역시 눈을 반짝거리며 도일의 설명을 열심히 경청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드디어 마법의 본론으로 들어가는 첫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마법을 배우는 준비과정이 아닌 본 수업 말이다. 절로 가슴이 부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귀로 도일의 설명이 또박또박 들려오고 있었다. "이미 너는 마나를 끌어 모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미약하긴 하지만 각 속성의 마나를 선별적으로 모을 능력이 있으니 마법을 전개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친 도일은 데이몬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럼 우선적으로 가장 기초적인 마법인 파이어 볼의 전개 원리를 설명하겠다. 너도 알다시피 파이어 볼은 가장 기초적인 공격마법이면서 또한 위력이 강한 마법이기도 하지. 그러니 전개 원리에 대해 신경을 써서 듣기 바란다." "잠깐만 사부님." 갑자기 데이몬이 말을 가로막고 나서자 도일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지금껏 데이몬이 수업의 맥을 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슨 일이지?" 데이몬은 정색을 하며 도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실 전 파이어 볼의 구사방법보다는 먼저 매직 미사일(Magic missile)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매, 매직 미사일 말이냐?" 예상치 못한 데이몬의 반응에 도일은 얼떨떨한 얼굴로 반문했다. 지금껏 자신의 교육방법에 단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잘 따라오던 데이몬이라서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도일은 자신의 의견을 털어놓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매직 미사일을 먼저 배운다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구나. 비록 매직 미사일이 바람의 마나를 이용하기 때문에 시전하기가 비교적 쉽긴 하다. 왜냐하면 대기 중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것이 바람의 속성을 가진 마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력 면에서 매직 미사일은 파이어 볼에 결코 비할 수 없는 공격마법이다. 왜냐하면 매직 미사일은 오직 물리적인 충격만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승님……." 도일은 얼른 데이몬의 말을 끊었다. "내 말대로 따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물론 대기 중에서 가장 희박한 것이 불의 마나이긴 하지만 그만큼의 메리트 역시 가지고 있다. 희박한 마나를 모을 수 있다면 여타의 마나를 모으는 것이 비교적 용이한 법. 일단 파이어 볼만 제대로 전개할 수 있게 되면 다른 마법은 비교적 수월히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데이몬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하지만 스승님. 제가 굳이 매직 미사일을 배우고자 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도일은 곧 고개를 폈다. 데이몬에게 다른 생각이 있다면 일단 들어보는 것이 나을 듯 싶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데이몬은 곧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밝히기 시작했다. "스승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전 빠른 몸놀림을 가장 큰 장점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점은 제가 마법사가 되더라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흠! 그건 그렇지." 도일이 약간이나마 수긍하는 기색이자 데이몬은 이때다 하고 설명을 시작했다. "파이어 볼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한참동안 정신집중을 해야 하며, 또한 마나를 모으고 재배열하는 동안 꼼짝도 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즉 제 장기인 빠른 몸놀림을 전혀 사용하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물론 높은 클래스의 마법사들은 움직이면서도 낮은 써클의 마법을 쉽사리 전개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마법에 입문한 제겐 결코 해당되지 않는 사항입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 몸을 움직이며 끌어 모을 수 있는 마나는 단 한가지 밖에 없다고 들었습니다." 데이몬의 설명을 듣자 도일의 눈빛이 반짝였다. "바람의 속성을 가진 마나! 그렇군. 그래서 네가 매직 미사일을 배우려는 것이냐?" "바로 그렇습니다. 바람의 속성을 띠고 있는 마나는 유일하게 몸을 움직이며 끌어 모을 수 있습니다. 속성 자체가 유동적이기 때문에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도일은 여전히 데이몬의 의견에 반대 입장이었다.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위력도 없고 정확성도 떨어지는 매직 미사일을 배운다는 것은 내 입장에서 별달리 권하고 싶지 않구나. 매직 미사일은 다수의 적에게 어느 정도의 타격을 입힐 수는 있을지언정 치명적인 공격을 가할 수가 없다는 단점이 있다. 더욱이 공격 속도가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매직 미사일은 몸놀림이 빠른 적에게는 통하지 않아. 미리 보고 피해버리면 그만이지." 데이몬은 빙긋 미소를 떠올렸다. "거기에는 이미 제가 생각해놓은 해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저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지요." 잠시 데이몬의 눈을 들여다보던 도일은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어디 한 번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 보거라." "스승님께서 아시다시피 전 인간이나 몬스터의 급소에 대해 통달해 있습니다." "그것은 나도 무척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일전에 내가 듣기로 급소를 공격하는 기술은 무척 정확도와 적절한 힘이 요구된다고 했다. 그런데 명중율이 낮고 공격속도도 느린 매직 미사일로 어떻게 급소를 명중시킬 수 있겠느냐?" "충분히 가능합니다." 단정적으로 잘라 말하는 데이몬의 입가엔 미소가 짙게 배어있었다. "전 단 하나의 매직 미사일만을 사용할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위력이 한층 증가된 매직미사일을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공격속도가 느리다는 문제는 접근전으로 해결할 생각입니다." "접근전이라니?" "제 장기를 잊으셨습니까? 최대한 적의 몸에 근접해서 매직 미사일을 발사한다면 느린 공격속도 정도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데이몬의 의도를 알아차린 도일은 그럴 듯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데이몬의 생각을 일반적인 마법사가 들었다면 대뜸 미친 소리로 치부했을 것이다. 전형적인 학자들인 마법사들은 오직 정석적인 방법만을 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일은 늦은 나이에 마법을 배워 효율적인 면을 무척 중시하는 흑마법사였다. 일반적인 마법사와는 생각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데이몬의 생각에 일리가 있다고 여겼는지 흔쾌히 허락이 떨어졌다. "좋다. 그럼 어디 네 생각대로 해 보자. 일단 매직 미사일의 전개 과정을 가르쳐주겠다. 하지만 속도와 명중율을 높이는 것은 오직 네게 달려있다. 아마도 뼈를 깎는 듯한 수련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스승님." 스승의 허락을 받아낸 데이몬의 얼굴엔 희열의 빛이 번져갔다. 그 날부터 데이몬은 도일로부터 집중 조련에 들어갔다. 매직 미사일을 몸에 익히기 위한 수련이었다. 도일은 데이몬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평소에는 말수가 적고 비교적 자상한 편이었지만 일단 수업에 들어가자 도일은 추호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무척 힘든 과정을 거쳐 마법을 배웠던 도일이었기에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데이몬 역시 힘든 수련에 단련될 대로 단련된 무인, 가혹하다 하리만큼 힘든 과정을 별다른 무리 없이 잘 소화해 나갔다. 다행히 그들이 소속된 8군단은 한동안 전투를 벌이지 않았고 그 탓에 데이몬은 수련할 시간을 충분히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침식을 잊고 수련에 볼두한 끝에 데이몬은 열흘만에 마침내 초보적인 매직 미사일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매직 미사일!" 퍽. 굉음과 함께 아름드리 나무의 중간이 푹 패여 들어갔다. 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데이몬이 만면에 희열을 떠올리며 서 있었다. 기쁨에 어쩔 줄 몰라하던 데이몬이 겨우 입을 열었다. "서, 성공했습니다. 스승님." 비록 초급 마법이긴 했지만 데이몬은 드디어 자신의 실력으로 매직 미사일을 시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옆에는 도일이 서서 따사로운 시선을 날리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어느덧 흐뭇한 미소가 감돌았다. '녀석, 정말 이해력이 보통이 넘는군. 아무리 쉬운 매직 미사일이라고 해도 이건 정말 경이로운 성장이라 볼 수 있어. 난 파이어 볼을 구사하는데 무려 6개월이 넘어 걸렸는데…….' 하지만 도일은 흐뭇한 표정을 결코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아직까지 데이몬이 거쳐야 할 과정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느슨하게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도일은 도리어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며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그리 좋아할 것은 없다. 네가 전개한 매직 미사일은 아직까지 제대로 된 것이라 보기 어려우니까 말이다." 데이몬의 얼굴에 의혹감이 서렸다. "네? 무, 무슨." "진정한 매직 미사일은 바로 이런 것이란다." 데이몬에게서 마법 지팡이를 받아든 도일은 말없이 마나를 모았다. 쓰쓰쓰쓰. 마법 지팡이에 박힌 수정구슬을 축으로 엄청난 마나가 모여들었다. 그 존재감을 느낀 데이몬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모여드는 마나의 양에서 스승과 자신과의 실력 차가 정말 엄청나다는 것을 실감한 것이다. 마법의 길에 입문한 이상 데이몬은 이제 충분히 마나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도일의 입에서 갑자기 기합성이 터졌다. "에잇." 고함소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나무둥치가 통째로 부서져 나갔다. 콰지직. 순간적으로 생성된 여섯 발의 매직 미사일에 의해 갈가리 찢겨져버린 것이다. 발사 속도와 위력 모든 면에서이 데이몬이 전개한 매직 미사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도일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매직 미사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입을 벌리고 있던 데이몬은 곧 툴툴거렸다. "에이. 스승님과 저와 어떻게 비교할 수가 있습니까? 마법을 배운 시간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저보다 수십 배를 넘을 텐데……." 도일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물론 비교할 수 없지.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정도의 매직 미사일이라 해도 고블린 따위나 겨우 잡을 수 있을 뿐이다. 이것으론 오우거는커녕 갑옷 걸친 오크 정도만 되어도 거의 타격을 입힐 수 없다고 봐야지." "서, 설마." "정말이다. 요즈음은 몬스터들도 마법에 내성이 생겨 어지간한 파이어 볼에도 당하지 않는 놈들이 태반이다." 도일은 다소 풀이 죽은 데이몬을 잠시 쳐다보며 몸을 돌렸다. "이제 매직 미사일을 전개할 순 있으니 위력과 정확도를 증가시키는 일은 오로지 네 수련에 달려 있다. 그럼 일주일 후 시험을 볼 테니 열심히 노력하도록 해라. 만약 내 마음에 흡족하지 않을 경우 응분의 대가가 있을 테니 기대해도 좋아." 말을 마친 도일은 어둠 속으로 휘적휘적 사라져버렸다. 만약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꼬박 열흘동안을 장님에 귀머거리가 되어야 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바로 도일이 말한 응분의 대가였다. 그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주시하던 데이몬은 이를 으스러져라 악물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어떻게 해서든 매직 미사일을 완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물론 매직 미사일을 사용해서 적의 혈도를 점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혈도를 점하는 것은 정확한 위치에 한치의 오차도 없는 힘을 사용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충분한 내공 수련을 쌓은 내가 고수에게도 쉽지 않은 기술을 생소한 마법에다 적용시킨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말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기에 데이몬은 즉시 수련에 들어갔다. 우선 매직 미사일의 사용법을 몸에 익히기 위한 것이 가장 큰 관건이었다. 굳이 도일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그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이미 그는 마법이란 학문에 목숨을 건 상태. 다시 말해 마법말고는 강해질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마법사가 되어야만 했던 데이몬이었다. 그 날부터 데이몬은 맹연습에 돌입했다. 심지어 잠자는 시간과 식사시간까지 단축해서 수련에 몰두할 정도였다. "제일 관건은 정확도를 높이는 것이다." 일단 한 번 길을 뚫어놓은 이상 매직 미사일을 몸에 익히는 것은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하지만 적의 혈도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매직 미사일에 불어넣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혈도를 제압하는 일은 엄청난 정확도와 힘의 조절이 필요한 작업이다. 지금 데이몬이 이룬 경지로는 단 하나의 매직 미사일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었다. "매직 미사일이 아니라 매직 애로우(magic arrow)로 봐야겠군. 에잇." 데이몬이 들고 있는 마법 지팡이에서 갑자기 눈부신 빛이 일어났다. 주위의 마나가 급속도로 응축되며 빛을 내쏘고 있는 것이다. 쓰쓰쓰쓰. 허공에 하나의 길쭉한 막대기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공기가 극도로 응축된 마법의 화살인 셈이다. 그것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데이몬은 마나를 정해진 방식대로 재배열했다. 만들어진 매직 미사일은 곧 한 곳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목표는 저쪽에 서 있는 아름드리 나무였다. 퍽.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나며 나무 둥치에는 주먹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푹 패였다. 처음에 시전했던 것보다는 비교적 위력이 향상된 것으로 보였지만 데이몬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멀었어. 이것으론 혈도를 제압하는 것은 무리야." 데이몬은 고개를 내려 손에 든 마법 지팡이를 쳐다보았다. 물론 그것은 스승인 도일이 잠깐 빌려준 것이었다. 험한 전쟁터에서 최고급 아티팩트에 속하는 마법 지팡이를 구할 수 없었기에 그는 임의로 스승의 것을 빌려서 수련을 하고 있었다. "지팡이가 조금 짧으면 좋을 텐데……." 그래도 다소나마 위력이 향상되었다는데 위안을 삼으며 데이몬은 계속해서 매직 미사일을 전개했다. 침식도 잊은 채 말이다. 데이몬의 수련이 계속됨에 따라 불행한 아름드리 나무들은 점차 벌집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도일과 약속했던 일주일이 지났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도일은 데이몬의 성취도를 확인하기 위해 어김없이 수련장을 찾았다. "녀석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모르겠군." 도일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부서지고 꺾여져 나간 나무들이었다. 근 100여 그루가 넘어 보이는 나무들 모두가 주먹 크기의 구멍들로 푹 푹 패어있었다. 도무지 성한 나무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고 도일은 혀를 절래절래 내둘렀다. "녀석, 얼마나 수련을 했기에……." "오셨습니까? 스승님." 난데없이 등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도일은 고개를 돌렸다. 제자의 모습을 본 순간 그는 푸스스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온통 먼지와 나무 조각을 뒤집어 쓴 나머지 데이몬은 말 그대로 목불인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푸후후. 녀석, 꼴이 그게 뭐냐?" "크크크. 좀 안 씻었더니……." 데이몬은 괴소를 흘리며 머리를 벅벅 털었다. 먼지가 풀풀 일어나자 도일은 얼굴을 찡그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래 몰골만큼 실력이 늘었는지 한 번 보자꾸나." "네 스승님." 데이몬은 단단히 자리를 잡고 섰다. 들고 있던 마법 지팡이에서 급속히 빛이 일어났다. "매직 미사일." 주문영창이 끝나자 허공에 순간적으로 매직 미사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데이몬의 인도대로 전방에 서 있는 다소 온전해 보이는 나무 한 그루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퍽. 기성과 함께 두터운 나무등걸이 푹 패여 들어갔다. 대략 손가락 한마디 정도가 들어갈 깊이였다. 도일의 얼굴에 실망스럽다는 기색이 잠깐 스쳐지나갔다. "발사속도는 그런 대로 쓸만하다마는 위력이 저게 뭐냐?"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스승님." 데이몬은 지체 없이 제 2탄을 날리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모여든 마나가 응축되어 재배열되는 과정을 거쳐 두 번째의 매직 미사일이 또다시 나무등걸을 향해 날아갔다. 퍽. "조금 낫긴 하다만 아직까진 제대로 된 매직 미사일이 아냐." "이번에는 3탄입니다." 결국 데이몬은 다섯 개의 매직 미사일을 날리고 나서야 도일이 만족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지막 매직 미사일은 지름 30cm는 될 듯한 나무를 그대로 관통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는지 도일의 얼굴에는 흡족하다는 기색이 서렸다. "녀석. 제법 수련을 했구나. 그런데 왜 진작 보이지 않고 뜸을 들였느냐?" "이리로 잠깐만 와 보십시오. 스승님." 데이몬은 도일을 데리고 과녁이 된 나무로 향했다. 그리고 나무에 뚫린 구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자의 성취가 어떤지 한 번 보십시오." 나무에 뚫린 구멍을 들여다보던 도일은 눈을 크게 떴다. 데이몬이 날린 다섯 개의 매직 미사일이 정확히 수직으로 늘어서서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자로 잰 듯한 정확도였다. 그것 만이라면 별달리 놀랄 것이 없으련만 뚫린 구멍은 제각기 깊이가 달랐다. 위에서부터 구멍의 깊이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보아 데이몬이 이미 매직 미사일의 위력을 임의로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아예 관통되어 버린 구멍을 만져보며 도일은 탄성을 질렀다. "대단하구나. 벌써 매직 미사일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다니……. 네가 얼마나 수련했는지 익히 알 만하다."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헤헤헤. 뭐 제가 살던 곳에서 쓰던 암기술을 접목하니 별로 어렵진 않더군요." 도일은 따듯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능히 열을 아는 제자가 정말 자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던 도일이었다. 하지만 도일은 역시 노련한 스승이었다. 칭찬은 칭찬으로 끝내지만 제자의 마음이 풀리는 것은 결코 용납해선 안 되는 법이다. "그렇다고 너무 좋아할 것은 없다. 전쟁터에서 적은 결코 저 나무처럼 가만히 있지 않으니까……." "그, 그렇긴 하지만……." 도일은 냉랭한 얼굴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너에게 일주일의 시간을 더 주겠다. 그동안 너는 움직이는 표적의 급소를 정확히 명중시킬 수 있는 수련을 하도록 해라. 방법은 네가 적당하게 알아서 찾아내고……. 알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도일은 다소 떨떠름한 기색의 데이몬을 남겨두고 몸을 돌렸다.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데이몬은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다. 도일이 사라지고 난 뒤 홀로 남은 데이몬은 무척 난감해 했다. "젠장 움직이는 목표물을 어떻게 구하지? 그렇다고 수하들을 대상으로 할 순 없고……." 그도 그럴 것이 적당한 표적을 찾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매직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과 힘을 가감하는 것은 데이몬에겐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아직 낮은 클래스라서 여러 번을 전개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잠시 생각하던 데이몬은 뭔가 생각이 떠올랐는지 손뼉을 딱 쳤다. "그렇게 하면 되겠군." 그는 몸을 일으켰다. 꼬박 일주일동안 수련에 몰두했던 수련장을 떠난 데이몬은 지체 없이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는 병영으로 향했다. "아니 무슨 일이십니까?" 작업복을 입은 중년의 텁석부리 병사가 의아한 듯 눈을 치켜 떴다. 손바닥에 두툼하게 굳은 살이 박힌 것으로 봐서 평범한 병사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의 앞에는 흉측한 용모를 가진 사내 하나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는 흉물스런 사내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데이몬 솔로. 추면으로 소문이 자자한 마법사 도일의 수석 가드가 난데없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과거 목수였던 전력을 가지고 있는 중년 병사 카펜더는 얼굴을 찡그리며 수석 가드의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정말 흉측한 얼굴이야.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로군.' 로브로 가리고 다니긴 했지만 도일의 흉한 용모는 이미 8군단 병사들의 화젯거리가 된 지 오래였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눈을 굴리는 카펜더를 두고 데이몬은 작업장 내부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흠! 충분히 가능하겠군." 그가 찾아온 곳은 바로 8군단에 소속되어 있는 목공소였다. 대장간에서 만드는 무기에 손잡이를 만들어 붙이거나 혹은 투석기나 전투장비의 주요 부품들을 제작하는 중요한 곳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일하는 작업병들은 대부분 경험 많은 목수 중에서 차출된 병사들이었다. 데이몬은 바로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는 대뜸 카펜더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혹시 이런 것 만들 수 있나?" 데이몬이 설명한 것을 들자 카펜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무로 된 인간 모형이라구요?" "그렇다네. 크기와 모양이 사람과 동일해야 하며, 관절을 달아서 사람이 움직이는 것과 똑같이 움직여야 하네." "그, 그건……." 카펜더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정도야 만들지 못할 것은 아니었지만 안 그래도 맡은 업무가 과중한 터에 그럴 시간이 있을 턱이 없었다. 물론 엄한 군율을 따져보더라도 이 같은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줄 정도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음을 굳힌 카펜더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데이몬의 청을 거절했다. "아시다시피 저희들은 무척 바쁩니다. 정식으로 하달된 명령서가 아니면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잠시 카펜더를 쳐다본 데이몬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할 수 없구먼.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솜씨를 한 번 부려 자네에게 요리를 대접할까 했는데……. 안 된다니 할 수 없군." 데이몬은 부스스 몸을 일으켜 작업장을 나가려 했다. 추호도 미련이 없는 태도로 말이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카펜더는 급하게 달려나와서 나가려는 데이몬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그의 얼굴엔 모종의 기대감이 진하게 배어있었다. 사실 데이몬의 요리솜씨는 8군단 내에서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있는 상태. 심지어 군단장인 하우젠 후작마저도 그의 요리솜씨에 홀딱 넘어가 있다는 것은 카펜더도 이미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소문을 들은 카펜더는 요리의 맛이 어떤지 무척 궁금해했다. "도대체 얼마나 요리솜씨가 좋길래 그 난리를 부릴까?" 하지만 신분이 낮은 작업병에 불과한 그가 요리를 맛본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라 볼 수 있다. 때문에 그저 소문으로만 만족해야 했던 카펜더였다. 그런 터에 난데없이 당사자가 나타나서 요리를 조건으로 내 걸다니……. 절호의 기회를 도저히 놓칠 수 없었던 카펜더는 다급하게 되물었다. "그, 그것을 만들어드리면 정말 저희들을 위해 요리를 해 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자네를 위시해서 작업장의 목수들이 충분히 먹을 정도로 말일세." 데이몬의 대답을 들은 카펜더는 눈을 빛냈다. 확실한 반대급부가 보장된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언제쯤 완성하면 되겠습니까?" "세 시간 뒤면 어떤가?" 하루 빨리 수련하고 싶은 마음에 데이몬이 임의로 정한 기한이었지만 카펜더에겐 무척 버거운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세, 세시간 말입니까?" "그렇다네. 그 시간 동안 나는 요리를 만들겠네. 목제 인형을 완성하는 즉시 자네들은 요리를 맛 볼 수 있을 거야." "개, 갯수는 몇 개나?" "열 개 정도면 될 것 같아. 어떤가? 가능하겠는가?" "가능합니다. 가능하고 말고요." 다소 벅찬 작업으로 보였지만 카펜더는 정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소속된 목수들이 모든 일을 제쳐놓고 매달린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8군단 제일의 요리사가 솜씨를 부려 음식을 대접한다는데 다른 일이 염두에 있을 리가 없었다. 데이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부탁하겠네."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나가는 데이몬을 보자 카펜더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는 정신 없이 작업장으로 달려들어갔다. 작업에 몰두해 있는 목수들에게 모든 일을 중지하고 데이몬이 시킨 것을 제작하도록 할 심산인 것이다. 카펜더의 입가에 점차 미소가 번져갔다.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면 거부할 놈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직업의식에 충실한 카펜더는 달려가면서도 작업장 벽에 기대 세워둔 목재를 살피고 있었다. 나무 인형을 제작하기에 가장 적합한 목재를 찾기 위해 말이다. 데이몬은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요리재료를 구할 수 있었다. 그가 들어가자 보급창을 담당하고 있는 병사들은 두말도 하지 않고 요리재료를 공급해 주었다. 일반 병사들은 구경도 할 수 없는 송아지의 갈비살을 요구했는데도 말이다. 물론 사실이 직통으로 하우젠 후작의 귀에 들어가겠지만 데이몬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이미 그는 적합한 대응책을 마련해 두었던 것이다. "무슨 요리를 해 줄까?" 잠시 고민하던 데이몬은 쉽게 만들 수 있는 장우육(醬牛肉)을 만들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처소에 있는 요리도구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작업장에 간단한 요리도구 정도는 있을 테지." 보급병에게서 을궈 낸 재료를 들고 데이몬은 터덜터덜 목수들의 작업장으로 향했다. "저, 정말이겠지요. 마스터." "햐! 그 소문이 자자한 자의 요리를 맛볼 수 있다니……." 카펜더를 비롯한 목수들은 지금 정신 없이 작업에 몰두해 있었다. 나무를 깎아 사람의 형태로 만들고 관절 부분을 노끈으로 동여매어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하는 작업은 그들에겐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숙련된 목수들인 것이다. 연신 대패질을 하던 카펜더는 고개를 돌려 데이몬이 들어가 있는 창고를 쳐다보았다. 임시 요리실이 된 창고에서는 벌써부터 구수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목수가 코를 벌름거리며 탄성을 내질렀다. "캬! 맛은 어떨지 모르지만 냄새만은 정말 죽이는군." 카펜더의 눈썹이 말려 올라갔다. "서두르자. 이 사실은 결코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된다." 데이몬이 한 당부를 떠올린 카펜더는 휘하 목수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고 그들은 서둘러 작업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약속한 세시간이 지나자 카펜더를 비롯한 목수들은 마침내 데이몬이 부탁한 나무인형 열 개를 무사히 완성할 수 있었다. "다 되었습니다." 완성된 나무인형을 보자 데이몬은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것들을 병사들의 눈에 띄지 않게 내가 말한 장소로 옮겨주기 바라네. 그 다음에는 멋진 만찬을 기대해도 좋을 거야." "아, 알겠습니다." 여전해 냄새가 새어나오는 창고를 쳐다보며 카펜더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완성된 나무 인형들을 데이몬이 말한 곳으로 옮겨놓기만 한다면 멋진 만찬이 그들을 기다릴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마음이 급했다. "자, 서두르자고……." 카펜더의 통솔 하에 목수들은 일제히 나무 인형을 짊어지고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수련장에 다녀오는 동안 데이몬은 짬을 내어 간단한 요리 한 가지를 더 만들었다. 재료가 조금 남았기 때문이었다. 목수들은 오래지 않아 작업장으로 돌아왔다. "모두 끝냈습니다." "수고했네. 그럼 좋은 저녁 즐기기 바라네. 나는 이만……." 카펜더를 위시한 목수들은 몸을 일으키는 데이몬을 본체만체 하며 다급하게 창고로 달려들어갔다. 그들의 앞에는 8군단 제일의 요리사가 솜씨를 부려 만든 요리들이 탁자에 가득 놓여 있었다. 자태를 뽐내고 있는 요리들을 향해 목수들은 정신 없이 손을 뻗었다. 요리의 맛은 세시간에 달하는 고된 작업을 잊게 할 정도로 훌륭했다. "캬! 정말 맛있군. 과연 소문대로야." "내 평생 오늘 먹은 음식의 맛을 잊지 못할 거야." 정신 없이 요리를 먹어대는 목수들을 뒤로하고 데이몬은 작업장을 빠져나왔다. 그의 얼굴에 빙긋이 미소가 떠올랐다. "아마도 목수들에게 자주 부탁을 해야 할 것 같군. 그런데 요리재료를 어떻게 구한다? 보급창에서 가져오는 것도 한 두 번일 텐데……." 그는 말없이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밤도 깊었고 수련 도구도 마련되어 있으니 본격적인 수련은 내일부터 할 생각이었다. [다크메이지]3장 마법으로의 길 61회 숙소에는 난데없이 뜻밖의 사단이 벌어져 있었다. 하우젠 후작을 위시한 각급 지휘관들이 총 출동해서 데이몬의 숙소를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익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데이몬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왠 일이십니까?" 불청객들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데이몬을 주시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데이몬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그토록 기대했던 요리가 온데간데없는 것이다. '이상하군.' 곤혹스런 표정을 짓던 하우젠 후작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 듣자하니 보급창에서 쇠고기를 타갔다고 하던데 혹시 요리를 만들지 않았나?." "아 그거요?" 데이몬은 뭔가 생각이 난 듯 손뼉을 딱 쳤다. "목공소에 무척 마음에 드는 강아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먹이를 좀 구하러 보급창에 들른 것이지요. 병사들이 먹지 않는 내장이나 조금 얻을 생각이었는데 뜻밖에도 송아지 고기를 주지 뭡니까? 그래서 상한 것을 주나 싶어 그냥 가져다 주었습니다. 아무튼 그 녀석 오늘 포식했을 겁니다." 태평스레 대꾸하는 데이몬. 대답을 들은 하우젠 후작의 눈썹이 역 팔자로 휘었다. "그, 그 귀한 고기를 고작 개에게 주었단 말인가?" "보급병이 아무 말 없이 고길 내어주던걸요? 병사들이 못 먹는 것을 주나 싶어 그대로 강아지에게 먹였는데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그, 그건 아닐세." 후작을 위시한 불청객들의 얼굴에 실망감이 역력히 스쳐지나갔다. 멋진 만찬을 기대하고 달려왔건만 기대가 무참히 꺾여버린 것이다. 억지로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런가? 알겠네." 후작을 위시한 수뇌부들은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몸을 돌렸다. 사정을 알게 된 이상 이곳에 더 머물 필요는 없었다. 특히 하우젠 후작은 데이몬이 거론한 범인에 대해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아무 죄(?)없는 강아지에 대해 말이다. '빌어먹을. 내일 병사들을 시켜 그 개새끼를 처치해 버려야지.' 터벅터벅 걸어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데이몬은 빙긋이 웃으며 쳐다보고만 있었다. 자신의 거짓말에 의해 명을 달리하게 될 불쌍한 강아지의 운명도 모르고 말이다. "에잇." 외마디 고함소리와 동시에 무언가가 작렬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마치 가죽 북이 터지듯 연달아 들려왔다. 퍽퍽퍽 콰직. 뭔가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짜증 섞인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니 또? 이런 젠장! 이틀만에 벌써 일곱 개째로군." 분통을 터뜨리며 걸어나가는 이는 데이몬이었다. 그의 앞에는 나무로 된, 하반신이 완전히 박살난 인형 하나가 맥없이 매달려 있었다. 나무 인형의 몸통은 온통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성한 곳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말이다. 특이한 것은 구멍들이 죄다 인체의 혈도가 있음직한 위치에 정확히 뚫려 있다는 점이다. 힘이 일정했는지 구멍의 깊이는 대부분 균일한 편이었다. 부서진 나무인형의 옆에는 비교적 성해 보이는 것들이 줄에 매달려 있었다. 그네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지만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기 때문에 인형들은 무척 심하게 흔들거렸다. 사람 형상의 나무인형들이 바람결에 오락가락하는 모습은 일견해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그것도 사람처럼 사지를 마구 흔들어대며 말이다. 못쓰게 된 인형을 바라보며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매직 미사일의 위력을 가급적 최소화했는데도 배겨내지 못하니……." 그 말을 달리 생각해보면 그동안 그가 얼마나 수련에 몰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카펜더에게 부탁해 1차로 완성한 인형 열 개는 이미 못쓰게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지금 데이몬이 수련에 사용하고 있는 인형은 그가 세 번째 요리를 선보이고 얻어낸 것들이었다. 하지만 3차분 나무인형 열 개 역시 모조리 부서져 나가고 이제 단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 "조만간 카펜더를 한 번 더 만나야겠군." 고개를 흔들던 데이몬은 지체 없이 수련을 재개했다. 그는 인형 하나를 향해 달려나가며 마나를 끌어 모았다. 매직 미사일을 전개할 수 있도록 바람의 속성을 지난 마나만을 골라서 말이다. 이제 그는 달리면서도 마나를 자연스럽게 끌어 모을 수 있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바람의 속성을 가진 마나가 다소 유동적이란 면도 있었지만 그간 그가 얼마나 철저한 수련을 쌓아 왔는지 반증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데이몬은 눈썹을 찡그렸다. "헤이스트를 병행해서 쓰면 수련의 효과가 더욱 높을 텐데……." 하지만 헤이스트란 결코 남용하면 안 되는 마법이었다. 몸의 반사속도와 순발력을 급격히 높여주기는 하지만 그 대가로 대폭적인 수명의 감소를 각오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도일도 전투에 돌입할 때가 아니면 결코 데이몬의 몸에 헤이스트를 전개하지 않았다. 지금껏 데이몬은 헤이스트를 전개한 대가로 이미 이마에 주름살을 몇 개 얻어야 했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이 방법을 사용한다면 아마도 데이몬의 수명은 파격적으로 줄어들 가능성이 높았다. "상관없어. 어차피 쓰지 않으면 전장에서 죽을 텐데…… 뭘." 하지만 데이몬은 뒷일에 대해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강해지는 것, 한 가지에만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다. 힘껏 질주하자 매달려 흔들거리는 인형의 모습이 급속히 가까워졌다. 이제부터 그것은 인형이 아니라 데이몬이 상대해야 할 적이었다. 적의 모습이 가까워지자 데이몬은 상념을 지우고 마나를 재배열할 채비를 갖추었다. 마법 지팡이에는 어느새 매직 미사일이 형성되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에잇." 기합성과 함께 지팡이를 휘두르자 매직 미사일이 인형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것은 정확히 인형의 눈꼬리 부분을 가격했다. 퍽.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음에도 한 치의 오차가 없었다. 미세한 나무조각이 흩날리며, 인체로 따지자면 정확히 동자료가 위치한 부분이 푹 패여 버렸다. 동자료란 담경의 요혈로서 눈꼬리 옆 1-2cm 정도에 있는 치명적인 혈도이다. 안면신경의 요소로서 정통으로 격중되면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리는 요혈 중의 요혈인 셈이다. 물론 나무로 된 인형이라서 혼절하진 않았지만 충격으로 인해 반대방향으로 맥없이 퉁겨져 버렸다. 어느새 몸을 날렸는지 데이몬의 몸은 이미 그 방향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또 하나의 매직 미사일이 눈부시게 빛을 발했다. 펑. 목덜미 아래 등에 위치한 대추혈(大椎穴)에 여지없이 구멍이 뚫려버렸다. 이곳은 수족삼양독맥(手足三陽督脈)이 모이는 곳이라 만약 인간이었다면 엄청난 타격을 받았을 것임이 분명했다. 데이몬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나무인형의 요혈을 공격해 나갔다. 매직 미사일이 전개됨에 따라 견정혈, 경문혈, 예풍혈, 전중혈 등 중요한 혈도들이 계속해서 파괴되어 갔다. 계속적인 타격으로 인형이 심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데이몬의 매직 미사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목적한 혈도를 적중시켰다. 빠른 속도로 몸을 날리면서도 마법을 전개하는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정교하기 그지없었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데이몬이 어느 정도의 수련을 쌓았는지 익히 알 수 있었다. 오랜 실전경험에 바탕을 둔 데이몬의 공격은 말 그대로 동물적 움직임이라 칭할 수 있었다. 충격을 받고 퉁겨진 인형의 사각을 마치 비호처럼 파고들었으며 잠깐 잠깐 드러난 요혈 부위에는 한치의 어김도 없이 매직 미사일이 작렬했다. 물론 마법과 함께 파워 업 건틀릿을 활용한다면 훈련효과가 훨씬 높아지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도리가 없었다. 아직까진 직접적인 가격이 매직 미사일보다 위력이 뛰어났으며, 나무로 만든 인형 정도는 단 한 방에 가루가 될 것이 분명했으니……. 콰직. 계속적으로 매직 미사일을 얻어맞던 나무 인형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나무 부스러기를 낭자하게 쏟아내며 나동그라진 인형의 전신에는 성한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후! 힘들군." 길게 심호흡을 하며 숨을 가다듬던 데이몬이 고개를 내렸다. 그의 오른 손에는 스승에게서 빌린 마법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오랜 세월 도일과 함께 하며 연륜이 깊어진 마법 지팡이. 하지만 데이몬이 지팡이에 대해 생각하는 바는 조금 달랐다. "조금 짧았으면……. 아니 지팡이 없이 그냥 수정구슬만 사용할 수는 없을까?" 그 때 데이몬의 뒤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마도 힘들 것이다. 지팡이는 마나를 구동시키는데 중심 축 역할을 하기 때문에 길이가 짧을수록 모여드는 마나의 양이 적을 수밖에 없다." "스승님 오셨습니까?" 도일이 가까이 다가와 있는 줄 몰랐던 데이몬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스승 도일이 어느새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가까이에서 관찰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던 데이몬이었다. 그곳에는 도일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데이몬의 수련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록 무공은 잃었지만 전장에서 갈고 닦은 감각은 여전했기 때문에 데이몬은 고개를 연신 갸우뚱거렸다. 어지간한 자라면 결코 자신의 감각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새벽 이슬이 촉촉이 내려앉은 것을 봐서 도일은 제법 오랫동안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어, 어떻게……. 그렇군요." 도일의 몸에서 풍기는 옅은 마법의 기운을 감지한 데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을 사용한다면 자신이 눈치채지 못하게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많이 늘었구나." 도일은 따듯하게 웃으며 데이몬에게로 다가왔다. 얼핏보더라도 데이몬이 밤새도록 수련했음을 알 수 있었다. 스승이 시키지 않아도 자진해서 수련에 몰두하는 제자. 그런 제자에게 흐뭇한 마음이 들지 않으면 단연코 거짓말이리라……. 그런 마음을 숨기려는 듯 도일은 고개를 흔들며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떠날 채비를 해야 하니 수련은 여기서 접도록 해라." "떠, 떠나다니요."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상황을 보아 8군단뿐만 아니라 근처의 모든 군단에게 소집령이 떨어진 것 같구나." 데이몬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전황이 그리 급박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데이몬이 매직 미사일에 대한 본격적인 수련에 들어간 이후 그가 소속된 8군단은 두 번의 전투를 더 치렀다. 물론 공격해 온 오크 병력이 비교적 적었기에 사령관인 하우젠 후작은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물론 데이몬도 도일의 가드 자격으로 전투를 치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수련한 마법의 수준이 아직까지 실전에 써먹을 정도가 아니었기에 데이몬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헤이스트와 파워 업 건틀릿만을 사용해서 도일을 엄호했고, 오우거 3마리와 트롤 5마리를 잡는 큰 전과를 거둔 바 있었다. 데이몬은 확인하려는 듯 되물었다. "모든 군단에게 소집령이라구요?" 그가 보기에 전황은 지극히 평탄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터라 난데없이 소집령이 떨어진 데 대해 의아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다크메이지]3장 마법으로의 길 62회 오늘은 좀 빨리 올립니다.^^ ************************************************************************ 고개를 끄덕인 도일은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 상태로 이유를 설명했다. "어제 카르나틱 왕국이 있던 방향으로 진군하던 연합군 2개 군단이 완전히 궤멸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때문에 연합군 수뇌부는 지금 발칵 뒤집혀 있는 상황이야. 이건 내 생각인데……." 도일은 데이몬을 힐끗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도 드래곤이 또다시 개입한 듯 싶다." "드래곤이라구요." 데이몬의 눈이 커졌다. 비록 그가 이곳 출신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드래곤이란 존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슈렉하이머로부터 트루베니아 대륙의 역사와 함께, 당금의 위기가 어떤 존재로 인해 초래되었는지 상세히 들었던 데이몬이었으므로 충격은 더욱 컸다. 실제로 본 일은 없지만 드래곤이란 존재가 그에게 주는 중압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 궤멸된 군단에는 실력이 있는 마법사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었는데 그들 중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것을 봐서 아마도 드래곤이 가세한 것이 분명한 듯 싶구나……." 말을 이어나가는 도일의 입가엔 쓸쓸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마법 하나에 목숨을 건지 어언 50여 년. 마법이란 학문에 있어서 이제 그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건만 도일도 단 하나의 존재 앞에선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이름하여 마법의 원조인 드래곤. 그 아무리 수련을 쌓은 인간 마법사라 할지라도 드래곤 앞에서만은 감히 마법을 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드래곤의 마법 실력은 인간 마법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이다. 만약 상대가 웜 급을 넘어선 절정기의 드래곤이라면 도일 수준의 마법사 열 명이 한꺼번에 덤벼도 전혀 상대가 되지 못하리라. 보편적으로 클래스가 높은 마법사는 다수의 하급 마법사를 능히 감당해 낼 수가 있다. 반대로 클래스가 낮은 마법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신보다 수준이 높은 마법사를 이길 수 없다. 이것은 바로 단계별로 성장하는 마법의 특성 때문이었고 전개할 수 있는 마법 수준의 차이는 충분히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마법의 세계에 있어서 이 사실은 오랫동안 변함 없는 진리로 자리해왔다. 실력이 낮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여럿이 뭉치면 능히 고수(高手)를 감당할 수 있는, 기사들의 세계와는 또 다른 차이점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 마법사가 마법으로써 드래곤을 능가할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썬 전무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드래곤에게는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기나긴 수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법이란 학문은 수련 시간에 따라 숙련도가 결정된다. 제 아무리 자질이 뛰어나고 훌륭한 스승 밑에서 교육을 받는다 하더라도 수련 시간이 짧다면 별다른 성과를 올리기 힘들다. 물론 낮은 써클에서는 어느 정도의 속성이 가능하겠지만(현재 데이몬의 경우가 그렇다.) 적어도 3써클 이상의 고급 과정에서는 추호도 그런 요행을 바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인간이 5천년 이상의 보장된 수명을 가지고 있는 드래곤들을 따라잡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긴 수명에 힘입어 드래곤들은 인간에게 오랫동안 넘지 못할 벽으로 존재해온 마의 10써클을 비교적 쉽게 돌파해 왔다. 웜급에 도달한 드래곤이라면 능히 10써클의 마스터라는 경지에 올라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간 중에서 10써클에 도달한 자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주 자질이 뛰어나거나 아니면 수명에 구애를 받지 않는 뱀파이어가 되어서까지 마법을 추구했던 몇 몇 마법사들이 드물게 9써클에 오르긴 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10써클의 벽을 극복하는데는 실패했다. 다시 말해 10써클의 마법은 인간에게 결코 자신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드래곤이라고 해서 천하무적인 것만은 아니었고 트루베니아의 역사를 통틀어 드래곤을 잡은 전례가 전혀 없진 않았다. 실력 있는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대거 힘을 합친 덕택에 인간들은 지금껏 여러 번 드래곤 사냥을 성공시켜 왔고, 웜급 드래곤도 여럿 살해한 기록도 있었다. 하지만 기사들의 조력이 없이 순수한 마법사만으로 드래곤을 잡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있다 해도 대부분 천 년도 되지 않은 어린 드래곤들이 전부였다. 적어도 마법 방면에서 인간에게 드래곤이란 넘을 수 없는 벽과도 같았다.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도일은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은 밤새도록 행군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만 들어가서 짐을 꾸리도록 하자꾸나." "알겠습니다. 스승님." 수련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 조금 섭섭했지만 데이몬은 흔쾌히 대답했다. 성한 나무인형 두 개를 단단히 수습한 데이몬은 도일과 함께 주둔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데이몬이 수련하던 장소는 8군단이 주둔해 있는 곳과 조금 떨어져 있었다. 자신의 수련과정을 타인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중원 무림인의 특성상 데이몬 역시 혼자만의 장소에서 수련하기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물론 도일도 그 생각에는 찬성이었다. 배척받는 흑마법사가 제자를 공개적으로 교육시킨다는 것은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그래, 매직 미사일은 어느 정도 성취를 본 것 같구나. 하지만 다른 마법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시간상 수련을 할 수 없더라도 전개 이론만은 머릿속 깊이 숙지하고 있어야 하느니라." 걱정스레 말을 건네는 도일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십시오. 스승님. 이론은 이미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니라. 그러니 너는 조속히 나의 모든 지식을 전수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네가 나중에 홀로 되었을 때에도 수련을 계속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걱정이 담뿍 담겨있는 도일의 말에 데이몬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미 도일은 자신이 마법을 익힌 과정과 방법을 모두 집대성하여 데이몬에게 전수해 주었다. 마법을 익히는 데 있어 시행착오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최적의 방법과 효율적인 마나 재배열 법 등등을 말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도일이 평생동안 갈고 닦은 산지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귀중한 지식들을 아무 거리낌없이 데이몬에게 넘겨주고 있는 것이다. "스승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데이몬의 꽉 잠긴 목소리를 들은 도일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 누가 도일을 사악의 대명사로 불리는 흑마법사라고 보겠는가? 데이몬을 응시하던 도일은 빙긋이 미소를 떠올렸다. "나는 너를 제자로 맞아들인 것을 정말 천운으로 생각한다." "………."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흑마법이지만 내 나름대로 조예가 있다고 자부해 왔느니라. 그것의 명맥이 끊기지 않는다는 것 한 가지만으로도 나는 만족할 수 있다.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뿐이다." 말을 마친 도일은 손가락을 들어 데이몬을 가리켰다. "부디 네가 이번 전쟁에서 살아남아 훌륭한 흑마법사가 되는 것. 그 누구도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을 보유한 강력한 마법사가 되어주는 것이 내가 바라는 유일한 것이다. 알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비록 마왕에게 종속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는 흑마법이지만 위력 하나만은 결코 백마법에 뒤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흑마법은 어둠의 마나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둠의 마나라구요?" "그렇다. 일반적으로 마법사들은 대기 중의 마나를 재배열하여 마법을 실현시킨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단 한 종류의 마나, 즉 음 차원의 마나라 일컫는 어둠의 마나만은 사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마나는 마왕에게 종속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흑마법은 바로 이 어둠의 마나를 사용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마법의 위력이 강한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해 마왕에게 종속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되지만 말이다." "………." "오래지 않아 너는 마왕 하나를 골라 계약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넌 단숨에 3써클에 해당하는 경지에 오른다. 단지 어둠의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 정도의 성취를 이룰 수 있다." 단시일 내에 강해질 수 있다는 말에 데이몬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번뜩였다. 3써클의 경지라면 혼자서 능히 헤이스트를 전개할 수 있는 경지였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누구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때문에 데이몬은 마음이 급해졌다. "계약은 어느 마왕과 하는 것입니까? 의식은 언제 하지요?" 다급하게 되묻는 데이몬을 보며 도일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아니다. 때가 되면 일러줄 테니 차분히 기다리도록 해라. 그리고 마법을 배우는데 뭐 애로사항은 없느냐?" 데이몬의 뇌리에 문득 아까의 기억이 떠올랐다. "스승님 혹시 마법지팡이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수정구슬만으로 마법을 전개할 수는 없는지요? 그렇게 된다면 제가 몸을 움직이는 것이 훨씬 편해지겠는데……" 물론 데이몬이 가진 최대의 강점은 민첩한 몸놀림이다. 숙련된 기사에게도 뒤지지 않는 움직임은 민첩한 오우거라도 쉽사리 따라잡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애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1미터에 달하는 긴 마법지팡이 때문이었다. 신속한 움직임을 장기로 하는 데이몬에게 마법 지팡이는 정말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는 물건이었다. 만에 하나 부러지기라도 하면 그 즉시 마나가 흩어져버리기 때문에 데이몬은 무척 신경을 써서 지팡이를 다뤄야 하는 것이다. 물론 데이몬의 말을 들은 도일은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자고로 마법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단연코 마법지팡이를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도일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음! 그 문제는 별로 쉽지 않을 것 같구나. 수정구슬에 마나를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지팡이의 길이가 어느 정도 길어야 한단다. 네 말대로 수정구슬을 움켜쥐고 마법을 전개하는 문제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론상으로 따져보아 마나가 조금 모이기는 하겠지만 아마도 양이 형편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문제는 제 마법 실력이 향상되면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여전히 황소고집을 꺾지 않는 데이몬이었다. 그런 제자를 쳐다보던 도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어디 한 번 연구해 보자꾸나. 사실 너에게 줄 마법 지팡이를 하나 구해 놓았는데 그것을 재료로 삼아 궁리해 보아야겠구나. 일단 내 것은 이리 다오." 데이몬의 손에서 자신의 마법 지팡이를 낚아챈 도일은 내심 가슴을 쓸어 내렸다. 빨리 회수하지 않으면 저 실험정신 투철한 제자에 의해 지팡이가 어떤 꼴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마법 지팡이를 구했다는 도일의 말에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이 얼마나 구하기 힘든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특히 전장에선 더욱 그러했다. "그 귀한 마법 지팡이를 어떻게……?" "전사한 마법사의 유품으로 들어온 것을 빼돌린 것이다." 사실을 안 데이몬은 그럴 듯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품이라고 하지만 그는 전혀 꺼림칙해 하지 않았다. "서둘러 내려가자. 행군 준비를 하려면 힘들 테니……." "그러지요 스승님." 한동안 대화를 나누던 두 사제지간은 곧 소롯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장비를 모두 꾸린 8군단은 집결지로 일제히 이동을 시작했다. 물론 도일과 데이몬도 그 대열에 끼여 있었다. 이런 일은 트루베니아 대륙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넓게 퍼져 산발적으로 공격을 퍼부어 대던 연합군 병력들이 한데 운집해서 총 공세를 취하려는 것이다. 드래곤이 참전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오크 족의 총 공세가 이어질 것이 분명할 터. 그로 인해 한동안 소강상태였던 전황은 점점 급박해지기 시작했다. "서둘러라. 하루라도 빨리 집결지에 도착해야 한다." 적들의 공세가 언제 시작될지 모르기 때문에 하우젠 후작은 다소 무리할 정도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그것도 칠흑같이 어두운 심야에만 골라서 말이다. 물론 몇 몇 지휘관들은 굳이 심야를 택해 행군하는 것을 무척 탐탁지 않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상대하는 적, 오크는 야행성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야간 전투를 벌인다면 오크에게 더욱 유리했기 때문에 그들의 우려는 일리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총 지휘관인 하우젠 후작에게는 달리 꿍꿍이가 있었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63회 야간을 틈타 행군하는 이유는 단지 하나, 드래곤의 공격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오크들과는 달리 드래곤들은 보편적으로 해가 떨어지면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다. 하우젠 후작은 오크들의 야습보다 오히려 드래곤의 마법 공격을 더 우려하고 있었다. “만약 놈들이 공격을 가한다 하더라도 어둠이 깔리면 정확도가 현저하게 떨어진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전력인 마법사와 기사단의 피해는 크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일반 병사들은 대대적인 징집을 통해 얼마든지 끌어 모을 수 있다. 하지만 숙련된 기사와 마법사는 결코 그럴 수 없는 법. 때문에 하우젠 후작은 다소 비정하다고 볼 수 있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8군단을 비롯한 트루베니아 대륙 각지의 연합군 병력들은 서둘러 카르나틱 평원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도일과 데이몬 역시 행군하는 8군단 병사들의 대열에 끼여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무척 오랫동안 걸었던 터라 도일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힘들군.” 이마의 땀을 훔치던 도일은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두 마리의 소가 짐이 산더미처럼 실린 수레를 힘겹게 끌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한숨을 내쉰 도일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원래대로라면 행군할 때 마법사들은 수레를 타야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체력이 약한 마법사를 배려하고 그들의 전투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목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원칙이 이번만은 지켜지지 않았다. 싣고 갈 군수물자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도일 역시 도보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걸어가는 병사들은 대부분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지고 있었다. “힘드신가 보군요.” 도일이 힘겨워하는 기색을 보이자 데이몬이 얼른 따라붙었다. 그의 등에도 제법 무거워 보이는 보따리가 지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연신 숨을 헐떡거리는 여타의 병사들과는 달리 그의 숨결은 극도로 평온했다. 도일은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몸을 극한까지 단련한 소드 마스터 출신답군.” 소리를 낮춰 속삭이는 도일의 말에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그것은 과거에 묻혀버린 사실이었으며 굳이 떠올려보아야 마음만 아팠기 때문이다. “서두르십시오. 이러다가 뒤쳐지겠습니다.” 데이몬이 성큼성큼 걸어 앞으로 나가자 도일도 얼른 뒤를 따랐다. “불쌍한 녀석.” 그의 눈망울에는 어느덧 애틋한 감정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제자의 기구한 운명에 대한 짙은 연민이었으리라. 이제 도일은 데이몬의 과거에 대해 모조리 알고 있었다. 그가 타 차원의 인물이었고 한때 최고급 소드마스터였다는 사실까지도■■. 어젯밤 데이몬은 자신의 신세내력을 도일에게 모조리 털어놓았던 것이다. “뭐, 뭐라고? 그것이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스승님.” 도일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데이몬의 얼굴에는 뭐라고 표현하지 못할 착잡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아무리 스승이라고 해도 쉽사리 털어놓을 내용이 아니었다. “저는 원래 이곳에서 말하는 소드 마스터였습니다.” 지금껏 데이몬을 타 대륙에서 건너온 용병으로 생각해 왔던 도일에게 이 사실은 하나의 충격이라 볼 수 있었다. 데이몬이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인물이며 그것도 모자라 과거 쟁쟁한 실력을 가진 소드 마스터였다는 사실은 도일을 경악시키기에 추호도 모자람이 없었다. “세, 세상에■■.” 물론 도일이 소드마스터가 어떤 존재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마법사들이 가장 상대하기 꺼려하는 궁극의 무예가들이 바로 그들이 아닌가? 사실 상대가 소드 마스터라면 상당한 고위급 마법사라도 감당해내기 힘든 것이 현실이었다. 마법이란 학문의 특성상 캐스팅에서부터 마법의 실현까지는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고 현란한 몸놀림을 가진 소드 마스터는 어렵지 않게 공격 마법을 피해낼 수 있다. 특히 상대가 대 마법 방어갑옷을 입고 있다면 마법사에겐 전혀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고 봐야 했다. 또한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소드 마스터는 충분히 대 마법 방어갑옷을 사용할 수 있다. 아니 모든 것을 차지하고서라도 마법사와 소드마스터와는 움직임 자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어지간한 마법사는 주문이 완성되기 전에 목이 떨어질 공산이 컸다. 제자의 과거를 알게 된 도일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흠! 정말 놀라운 일이로군.” 과거 암흑전쟁에서 도일을 사로잡은 존재 역시 소드 마스터였다.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본 도일은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소드 마스터의 위력이 어떠한지 뼈저리게 실감했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그는 상대에게 온갖 흑마법을 퍼부었다. 하지만 상대는 너무도 유유히 공격마법을 피해냈다. 광범위하게 퍼부어진 공격마법 역시 별달리 힘들이지 않고 막아낸 상대는 유유히 다가와 도일을 제압했다. 당시 마왕군에서 고위급 흑마법사로 이름을 날리던 자신에겐 정말 어이없을 정도의 패배였고 그로 인해 도일은 30년 동안이나 햇빛도 들지 않는 지하감옥에서 살아야만 했다. 단지 크로센 대제 휘하의 기사라는 것만 알 뿐 모든 것이 베일에 쌓인 이름도 알 수 없는 소드 마스터. 당시 도일은 마법사가 소드 마스터에게 약하다는 것을 정말 뼈저리게 실감한 바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제자인 데이몬이 소드 마스터였다니? “정말 놀랍구나. 그런데 너는 왜 마법사가 되려는 마음을 먹었느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되묻는 도일에게 데이몬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당시 절 이 대륙으로 데리고 온 마법사들도 이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신체의 일부분을 잃는다면 그 즉시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사실을 말입니다.” “신체의 일부분이라니■■.” “제가 살던 중원 대륙에는 트루베니아와는 달리 마법이란 학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대륙에는 예로부터 마나를 운용하는 방법이 극도로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비슷한 사술이나 술법 계열이 있기는 하지만 이곳의 마법처럼 고도의 경지에까진 이르지 못했지요. 그런 때문에 이곳 트루베니아보다 소드 마스터의 수가 월등히 많을 뿐더러 인체의 급소나 약점도 오랜 세월동안 낱낱이 파악되어 있습니다. 중원에서는 소드 마스터가 되기 위해 단전이란 인체의 기관을 이용해서 내가기공을 익힙니다. 그러나 이제 제 몸엔 단전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도일은 비로소 데이몬의 인체의 구조에 해박한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넌 그 단전이란 기관이 파괴되어 소드 마스터의 능력을 잃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마법을 배워서라도 힘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은 도일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낱낱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준환에 의해 철저히 계산된 인생을 살았던 것에서부터 최후의 순간에 배신당해 수하들을 모두 잃은 사실까지 모든 사실을 하나도 남김없이 말이다. 어찌 보면 숨기고 싶은 과거일지도 몰랐지만 데이몬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미 그는 스승 도일을 깊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기구하다고 볼 수 있는 데이몬의 과거사를 모조리 들은 도일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정말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구나. 결코 나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도일에게도 뭔가 곡절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데이몬은 묻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사실은 당사자가 털어놓기 전에는 결코 캐묻지 않는 법이다.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도일은 곧 고개를 꺾었다. 모습을 봐서 쉽사리 말하기 힘든 과거임이 분명했다. 잠시 후 도일은 고개를 들고 데이몬을 응시했다. “아무튼 고맙다. 그런 밝히기 쉽지 않은 과거 일들을 모두 털어놓다니■■.” “스승님은 트루베니아에서 제가 믿고 의지하는 유일한 분입니다. 때문에 제 과거사를 모두 들려드린 것이지요.” 도일의 눈가에 당시 쓸쓸한 표정을 짓던 데이몬의 얼굴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지금은 보이지 않았지만 당시 고뇌 어린 데이몬의 표정은 한동안 도일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데이몬은 여전히 무거운 짐을 진 채 걷는데 여념이 없었다. 도일의 얼굴에 짙은 갈등의 빛이 번뜩였다. ‘내 과거사를 데이몬에게 들려주어야 하나?’ 물론 데이몬의 운명도 기구하기 그지없었지만 자신의 과거사 역시 그에 전혀 못지 않았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 마법의 길을 들어설 만큼 도일 역시 곡절있는 과거가 있었던 것이다. ‘기회가 닿는다면 얘기해 주어야겠군.’ 마음을 정리한 도일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난감한 표정이 어렸다. “그나저나 이것을 어떻게 한다.’ 힘없이 걸음을 내딛던 도일은 로브자락 속의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그 속에는 데이몬이 부탁한 마법 물품이 들어있었다. 물론 아직 미완성이고 과연 사용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아티팩트였지만 약간이나마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에 도일은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제작에 몰두하고 있었다. 힐끗 데이몬을 쳐다본 도일은 어떤 일이 있더라고 그의 부탁을 들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묵묵히 행군하고 있는 병사들의 안색은 하나같이 어둡기 그지없었다. 오랫동안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드래곤이 다시 전장에 나섰다는 소문은 병사들의 사기를 꺾어놓기에 충분했다. 특히 일부 병사들의 공포심은 더욱 컸다. 그들은 바로 드래곤과의 전투에 참가했던 경험이 있는 자이었다. 비록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실감한 드래곤의 전투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드래곤들의 마법이 그렇게 위력이 강하다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위력이라고 보면 될 거야. 마법사들이 전개하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더라고.” “에이 설마■■.” “정말이라니까? 마법 한 방에 우리 마법사 세 명과 오백 명의 병사들이 삽시간에 재로 화해버렸어. 이건 내가 직접 본 사실이라고■■.” 들릴락말락하게 속삭이며 행군하는 병사들의 얼굴은 마치 죽으러 가는 사람의 그것과 한 치도 틀림이 없었다. 드래곤과 오크의 조합. 그것을 감당하기에 인간의 힘으로 역부족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병사들은 단 한가지 사실만은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만약 적을 막지 못한다면 인간이란 종족은 더 이상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들을 사지로 뛰어들게 하는 이유였다. 병사들의 대화를 들으며 묵묵히 걷던 데이몬이 돌연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도 도일은 짐수레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비교적 편하게 행군을 하고 있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스승님.” “말해보거라.” “사실 전 단 한 번도 드래곤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소문을 듣자하니 드래곤의 위력이 트루베니아의 생명체 중 최강이라면서요?”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도일은 비교적 온화하게 대답해 주었다. “사실이다. 마법적인 측면이나 물리적인 전투력 면에서 드래곤을 능가할 생물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무적이라고 볼 수도 없다. 지금껏 수십 명의 기사와 마법사가 동원되어 드래곤을 사냥한 전례는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들은 단지 나이 어린 드래곤일 뿐이다. 웜급 이상의 드래곤이라면 인간이 사냥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그토록 강하다면 드래곤들이 왜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택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뜻이지?” “만약 제가 드래곤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각 왕국들의 궁성에 몰래 잠입해서 수뇌부를 깡그리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드래곤들에겐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을 듯 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이런 지루한 소모전을 벌일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데이몬의 말을 들은 도일은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흘렸다. “인간의 입에서 나와선 안될 소리 같구나. 물론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단다.” 도일은 주위 병사들이 듣지 못하도록 낮은 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64회. "드래곤은 그 자체로 최강의 생명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도 죽을 수 있다. 물론 드래곤이 궁성에 잠입해서 왕을 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궁성의 기사들이 즉시 벌떼처럼 달라붙을 것이다. 알다시피 기사란 족속들은 왕에 대한 충성을 목숨보다 중요시하는 자들. 그들이 목숨을 내놓고 달려든다면 제 아무리 드래곤이라 할 지라도 승리를 장담할 순 없다. 왜냐하면 어지간한 왕국의 근위 기사들 중에는 분명히 소드 마스터가 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드래곤의 비늘이 단단하더라도 단 한가지,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만은 견딜 수 없다." "하지만 드래곤들에겐 마법이 있지 않습니까? 왕을 죽인 뒤 공간이동 마법을 써서 탈출한다면 되지 않을까요?" "물론 그런 방법도 있긴 하다만 아마도 가능성이 희박할 거야. 왜냐하면 인간들에게 마법사란 존재가 있기 때문이지. 물론 마법사가 정면대결로 드래곤을 상대한다는 것은 솔직히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드래곤이 마법을 펼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 다시 말해 마법사들은 발목을 잡고 있는 동안 기사들이 덤벼든다면 제 아무리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견딜 수 없다. 특히 궁정 마법사같은 고위급 마법사들이 동원된다면 드래곤은 결국 그곳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고 봐야지." 설명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그다지 수긍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하지만 몇 몇이 희생되는 것을 감수하고 공격을 가한다면 전쟁을 더 빨리 끝낼 수 있지 않을까요?" "넌 도대체 누구 편이냐? 설마 드래곤의 편을 드는 것은 아니겠지." 눈을 둥그렇게 뜨는 도일을 보며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말입니다." 잠시 데이몬의 눈을 들여다보면 도일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녀석, 호기심은……. 좋다. 설명해주마. 우선 드래곤들은 인간처럼 조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하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 인간들과 사고방식이 현저히 틀리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대륙 최강의 생명체라는 자부심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 지금 우리가 상대하는 드래곤들도 겉으로 보기에는 드래곤 로드의 명을 받드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도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냥 뜻이 맞아서 함께 행동할 뿐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뜻이라면……." "우리 인간이란 종족에 대한 응징 말이지." 이미 슈렉하이머로부터 제반 설명을 들은 터라 데이몬은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스승님께서는 이번 전쟁이 인간들에게 승산이 있다고 보십니까?" 도일의 대답은 즉각 터져 나왔다. "현재로써는 암울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드래곤들의 힘은 그만큼이나 강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만?" "만약에 아르카디아와 힘을 합칠 수만 있다면 이번 전쟁은 분명히 인간들이 이길 수 있다." 마치 결말을 알고 있는 듯 단정하는 도일의 눈가에는 이해하지 못할 어두움이 배어있었다. 어쩌면 그는 암흑전쟁 당시 자신을 사로잡은 아르카디아의 그 소드 마스터를 떠올리고 있는 지도 몰랐다. 아르카디아의 저력은 정말 막강했다. 비록 자신을 30년 동안 어둠 속에서 살게 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들의 지원군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속에 빠져있는 것이다. 스승의 그런 분위기를 알아차린 데이몬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이미 그는 트루베니아와 아르카디아 사이의 해로가 완벽하게 봉쇄되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더불어 아르카디아가 트루베니아의 사정을 알더라도 병력을 파병할 수 없다는 사실까지 말이다. 며칠 밤을 꼬박 새워 행군한 끝에 데이몬과 도일이 속해 있는 8군단 병사들은 마침내 집결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카르나틱 평원에는 이미 각지에서 모인 대군들이 총 집결해 있는 상태였다. 트루베니아 대륙을 동서로 양분하고 있는 광활한 전선. 그곳에 넓게 퍼져 국지전을 벌이고 있던 병력들이 계속해서 카르나틱 평원으로 집결하고 있는 것이다. 병력의 수로만 따지면 이곳에 모인 군대들 중 이카롯트의 군세가 가장 많았다. 그러나 오크의 점령지에서 계속해서 피난민이 탈출하고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반강제적으로 징집되었기에 여타 왕국의 병력 수도 그리 만만히 볼 것은 아니었다. 집결지에 도착하자마자 하우젠 후작은 지정된 장소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그런 뒤 지휘관들을 대동하고 서둘러 어딘가로 향했다. 이곳을 맡고 있는 총사령관 세르게이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를 만나 자신이 보유한 병력의 상황을 보고하고 또한 전세가 돌아가는 추이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거기에는 기사들과 마법사들도 대거 동행했다. 물론 도일도 따라갔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비록 흑마법사이긴 하지만 도일은 고도의 마법실력을 가진 고위급 마법사이기 때문에……. 스승이 떠나간 뒤 데이몬은 무척 무료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수련에 몰두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보는 눈이 많았기에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워낙 병력이 많이 운집했기 때문에 병력 집결지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분주했다. 트루베니아에 있는 모든 왕국의 병력이 운집한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그런 터라 데이몬은 수련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마법 이론을 외우는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날도 데이몬은 한가로이 주둔지를 돌아다니며 마법 이론을 암송하고 있었다. 평소 버릇대로 투구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추악한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그의 얼굴을 본 병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처음 데이몬을 접하는 사람이라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물론 입고 있는 복장이 백인대장과 맞먹는다는 가드의 제복이라서 병사들도 대놓고 말하진 못했지만 워낙 데이몬의 귀가 밝은 터라 말소리를 못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뭐 저렇게 생긴 놈이 다 있어? 그래도 꼴에 가드 우두머리네?" "전황이 어렵다 보니 별놈들을 다 끌어들이는군." 부아가 왈칵 치밀었지만 데이몬은 그냥 못 들은 체 했다. 수양이 깊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시비를 걸어 두들겨 팰 시간이 있으면 마법 이론 하나라도 더 암송하자는 것이 데이몬의 평소 지론이었다. 그는 무표정하게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병사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그 때 갑자기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호, 혹시 데이몬 아냐?" 익히 들어본 적이 있던 음성이라 데이몬은 부스스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의 얼굴에 갑자기 반색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곳엔 데이몬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펠드리안 성벽 수비병 시절 자신에게 많은 배려를 해 주었던 선임수비병 맥밀란 말이다. "맥밀란." 다소 수척해지기는 했지만 선이 굵은 맥밀란의 얼굴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데이몬은 서슴없이 다가가서 맥밀란을 꽉 끌어안았다. 그는 그만큼이나 자신에게 잘 대해준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데이몬이 세 번에 걸친 시험을 끝낸 뒤 성벽 수비병으로 배속되었을 당시 맥밀란은 말도 통하지 않는 그를 무던히도 챙겨주었다. 이처럼 빠른 시일 내에 데이몬이 트루베니아의 언어를 배울 수 있게 된 것도 그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데이몬이 근위병으로 차출되어 간 뒤 맥밀란을 비롯한 57 경비조원들은 바로 전장으로 징집되었고 그 때문에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런 터라 데이몬에게는 맥밀란은 더 이상 반가운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은혜를 베푼 자는 결코 잊지 않는 특유의 성품상 맥밀란이란 존재는 이미 데이몬의 뇌리 깊숙이 각인된 지 오래였다. "정말 오랜만이야. 그래 잘 있었어?" "그, 그래……." 엉거주춤 말을 얼버무리는 맥밀란의 기색에서 데이몬은 불연 듯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맥밀란의 모습이 예전과는 달리 조금 어색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은 우선 그의 몸을 훑어보았다. 곧 경악 섞인 일성이 터져 나왔다. "아, 아니?" 조금 어색하다 했더니 맥밀란의 오른 팔이 어깨 어림부터 잘려나가 버린 것이 아닌가? 놀란 데이몬은 다급하게 되물었다. "팔은 어떻게 하다가?" "뭐 전투에서 잃었지 뭐." 맥밀란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잘린 팔을 뒤로 돌렸다. 그러나 데이몬은 그의 몸에 걸쳐져 있는 복장을 용케 간파했다. 맥밀란이 입고 있는 복장은 데이몬이 잘 알고 있는 실더(Shielder)의 복색이었다. 실더(Shielder). 통상적으로 방패수를 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통용되는 정의로 따지자면 한 마디로 인간방패라고 말할 수 있다. 맥밀란처럼 불구가 된 병사들, 특히 무기를 쥐는 오른 팔을 잃은 병사들이 배속되는 병과로써 커다란 나무 방패로 적의 화살 공격을 막는 병과가 바로 실더였다. 물론 그들에게 갑옷이 지급될 리가 없었다. 쉽게 말해서 전투력을 잃은 병사들에게 달랑 나무방패 하나만 들려서 적의 화살받이로 내모는 것이다. 전사하든 말든 하등 상관없었다. 오히려 전사하게 되면 다수의 식량과 물자를 아낄 수 있기 때문에 현재 각 병단의 지휘관들은 실더를 많이 활용하고 있었다. 물론 실더로 배속되는 병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불행이겠지만 말이다. 오랜만에 만난 과거의 동료가 단지 화살받이로 전락해 버렸다는 사실에 데이몬은 말을 잊었다. 실더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데이몬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맥밀란도 자신의 신세가 한스러웠는지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그의 풀죽은 모습에서 과거 그토록 당당하던 펠드리안 성벽 수비병 시절의 모습은 일체 보이지 않았다. "그럼 동료들은?" "모두 죽었어. 한스도, 파사트도……. 오직 나만 병신이 되어 살아남았어. 하지만 실더가 되었으니 내 운명도 곧 끝장나겠지?" 자조하듯 툴툴거리는 맥밀란을 보며 데이몬은 얼굴을 실룩거렸다. 뭐라 위로를 해 주고 싶은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때 옆에서 갑자기 커다란 음성이 터져 나왔다. 다분히 도전적인 음색이었다. "추물이랑 병신이랑 잘들 놀고 있는 군. 이봐. 시간이 급하니 회포는 이만 풀도록 하지." 부스스 고개를 돌리자 플레이트 메일로 전신을 감싼 덩치 한 명이 데이몬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데이몬의 복장을 뒤늦게 확인했는지 조금 움찔하는 눈치였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가슴에 붙이고 있는 표식으로 봐서 백인대장으로 보였다. 맥밀란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봐서 아무래도 그 덩치가 실더들을 통제하는 위치에 있는 것 같았다. 덩치는 둘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육중한 갑옷을 걸친 때문인지 걸음걸이는 느리기 그지없었다. 통상적으로 실더들은 각 병과의 병사들 중에서 가장 군기가 혹독하다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자살 특공대라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탈영하는 경우가 잦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무척 가혹한 구타를 통해 실더들의 군기를 엄격히 잡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운명이 정해져 있는 병사들이기 때문에 상관에게 반항하는 경우가 실더들 사이엔 무척 빈번하게 일어났고 그 때문에 실더를 통솔하는 부대장들은 하나같이 체격이 우람했다. 그리고 기사처럼 튼튼한 중갑주를 걸칠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 마음을 놓았다간 언제 골로 갈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위압적인 자세로 실더들을 통솔했다. 둘이 있는 곳으로 도착한 덩치는 곧 맥밀란을 향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놈아. 예고도 없이 대열을 이탈하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 "네. 지, 지금 가겠습니다." 맥밀란은 무척 당황한 듯이 몸을 날리려 했다. 이미 그가 속한 부대는 이미 행군을 멈추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부대장은 그를 순순히 용서해주지 않았다. 퍽. 복부에 강한 충격을 받은 맥밀란은 그 자리에 꼬구라졌다. 그의 옆에는 덩치가 주먹을 어루만지며 데이몬에게 우람한 근육을 과시했다. 맥밀란에게 행군을 지연시킨 책임을 물은 뒤, 부대장은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부대를 이동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모두 이동……. 커억." 그의 육중한 몸이 쓱 들려졌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부대장은 숨이 막혀 연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목젖을 움켜쥐고 있는 손은 마치 강철로 된 듯 요지부동이었다. 어느새 데이몬이 다가와서 부대장의 몸을 들어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차고 있던 파워 업 건틀릿에 는 극도의 마나를 불어넣어져 있는 상태였다. "놓아라." 실더 부대를 통솔하는 부대장들이 동료를 돕기 위해 달려 왔지만 데이몬은 아랑곳하지 않고 덩치를 쳐다보며 으르렁거렸다. "이봐! 옛친구와 대화하는 것이 안보였나? 네놈의 눈알은 그저 가죽이 모자라 찢어진 구멍이냐" 불쌍한 부대장은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발버둥만 쳐댈 뿐이었다. 물론 목젖을 잡고 있으니 말이 목구멍으로 새어나올 리가 없었다. 두 배가 넘어 보이는 덩치를 가볍게 들고 있는 데이몬의 모습은 무척 그로테스크하게 보일 정도였다. 동료를 구하기 위해 부대장들이 가까이 접근한 것을 힐끗 쳐다본 데이몬은 그들을 향해 덩치를 냅다 던져버렸다. "어이쿠." 중갑주를 걸친 덩치의 무게를 못 이겨 부대장 두 명이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덩치의 머리에서 벗겨진 투구가 데굴데굴 굴러오자 데이몬은 허리를 굽혀 투구를 집어들었다. "소문을 전혀 듣지 못했나 보군. 이카롯트 8군단에 생긴 것도 더럽지만 성질은 더더욱 더러운 가드 우두머리가 있다는 사실을……." 말을 마친 데이몬은 손에 힘을 주었다. 무척 단단해 보이는 투구가 서서히 우그러들기 시작했다. 마법을 전개할 수 있게 된 이후 데이몬은 자체적으로 파워 업 건틀릿에 마나를 불어넣을 수 있었고 그에 따라 건틀릿의 위력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65회. 끼끼끼끽. 강철로 된 투구가 고철이 되어감에 따라 부대장들의 얼굴에 핏기가 싹 사라져버렸다. 정말 소름 끼칠 정도의 악력이었다. 그것이 마법 무구에 의한 것을 눈치채지 못한 터라 부대장들은 삽시간에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단 하나도 싸우려 드는 자가 없었다. 완전히 우그러든 투구를 휙 던져버린 데이몬은 부대장들을 쏘아보았다. "옛 친구와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혹시라도 이견이 있는 자가 있나?" 주춤거리던 부대장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데이몬에 의해 던져졌던 덩치는 이미 기절한 지 오래였다. 사실 지금은 전황이 무척 어려운 상황. 병사들의 신경은 온통 곤두설 수밖에 없었으므로 결정은 어렵지 않게 내려졌다. 원칙을 지키려다간 덩치 꼴이 날 수도 있었으므로 한 부대장의 입에서 다소 맥빠진 음성이 터져 나왔다. "워, 원하는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오늘 오후까지는 저희 부대로 복귀시켜 주셔야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맥밀란의 손을 잡아끌고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장내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부대장들은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젠장 뭐 저렇게 무식한 놈이 다 있지?" "덩치는 조그마한데 힘은 정말 엄청나군." 툴툴거리던 부대장들에게 지나가던 병사 하나가 친절하게 조언을 해 주었다. "이봐! 덩치가 작다고 얕보아서는 안 돼. 저 가드는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오우거 두 마리를 가볍게 잡아죽이는 8군단의 명물 중 명물이라고……. 그것도 맨손으로 말이야." "세, 세상에……." 병사의 조언에 부대장들의 입이 딱 벌어져버렸다. "그런데 데이몬. 구해준 것은 고마운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다소 질린 듯한 맥밀란의 표정에서 데이몬은 곧 그가 걱정하는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맥밀란은 필시 부대장들의 보복을 걱정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거친 태도를 봐서 아마도 복귀한다면 무사할 수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데이몬은 이미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워 둔 상태였다. "아무 걱정하지 마. 네 거취는 내가 해결해 줄 테니 말이야. 일단 식사라도 하러 갈까?" 과거 맥밀란이 자신의 식사를 자주 챙겨준 사실을 상기한 데이몬은 그를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소모품인 실더의 식단과 가드의 식단이 동일할 리가 없었기에 일단 좋은 음식으로 맥밀란의 배를 채워줄 생각인 것이다. "시간이 된다면 네게 나의 요리실력을 보여주고 싶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네. 일단 밥을 좀 먹을까?" 그러나 맥밀란은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었다. 데이몬은 하등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그의 등을 툭툭 쳐 주었다. 원래 데이몬은 한 번 입은 은혜를 결코 잊지 않는 성품을 가졌다. 그 때문에 그는 어떻게 해서든 맥밀란의 뒤를 봐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식사를 마친 데이몬은 우선 휘하 가드들에게 맥밀란을 맡겼다. "절친한 옛 친구이니 알아서 모시도록……." 이미 데이몬이 군기를 확실히 잡아놓았기 때문에 가드들은 무척 공손한 태도로 맥밀란을 대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본 데이몬은 숙소를 나섰다. 우선 스승을 만나 맥밀란의 거취를 결정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만약 실더로 출정한다면 맥밀란은 분명히 죽어.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그를 내 휘하에 두어야 해." 데이몬은 도일에게 맥밀란을 가드로 뽑아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다. 물론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일임을 데이몬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사지 멀쩡한 실력 있는 병사도 가드가 되기 힘든 실정에 오른 팔을 잃은 맥밀란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가드가 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일을 성사시키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맥밀란이 과거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일 때문에 물불을 가리지 않을 작정인 것이다. 다행히 스승은 숙소로 돌아와 있었다. 데이몬은 서슴없이 스승이 있는 숙소로 들어갔다. "다녀오셨습니까?" "오냐? 너도 잘 있었느냐?" 다소 피곤한 음색이었지만 도일은 데이몬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데 스승님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데이몬은 곧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맥밀란이 과거 자신을 보살펴 준 사실부터 지금 그가 처해 있는 입장까지 모조리 말이다. 물론 아무리 얼굴 두꺼운 데이몬이라도 외팔이인 맥밀란을 가드로 받아달라는 대목에서는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사실을 듣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도일의 얼굴엔 표정변화가 없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한 도일은 정색을 하고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 일보다 더욱 급한 문제가 있다. 그러니 잘 듣도록 하거라. 이것은 내가 작전회의에 참석해서 느낀 사실인데……. 아무래도 오늘 밤 의식을 치러야 할 것 같다." "의, 의식이라니요?" "마왕과 계약하는 의식. 그러니까 널 흑마법사로 만드는 의식 말이다." 난데없는 도일의 말에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이미 거기에 대해 도일이 얘기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왕과 계약하는 시기는 아직 멀었다고 하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계약을 서두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도일은 침중한 낯빛으로 작전회의에서 느낀 바를 설명했다. "오늘 작전회의는 말 그대로 껍데기들뿐이었다. 각 왕국에서 참가한 기사나 마법사들 중 알맹이들은 쏙 빠졌단 뜻이지." "알맹이들이요?" "실력자들 말이다. 물론 군주들은 예외로 치더라도 각 왕국의 기사단 중 소드 마스터에 해당하는 자는 단 하나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고위급 마법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인 마법사들 중 6써클을 넘어가는 자는 죄다 흑마법사들 뿐이었다. 내 말에서 뭔가 느껴지는 바가 없느냐?" "그렇다면." 데이몬의 안색이 극도로 경직되었다. 도일의 말대로라면 이곳에 모인 병력은 말 그대로 허울 좋은 미끼로 봐야 했다. 최악의 경우 소모품으로 전락할 지도 모른다. 중원에서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데이몬은 지휘관들의 꿍꿍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설마, 이 많은 병력을 희생시키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도일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자들이 모두 빠졌다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세르게이 공작은 암암리에 기사와 마법사들을 빼내어 다른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현재 이곳에 운집한 병력은 모두 세르게이 공작의 통제 하에 있었다. 세르게이의 성품이 어떤지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데이몬은 도일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런 빌어먹을 놈." "우리에겐 화를 낼 겨를조차 없다. 오늘 밤 마왕과의 계약을 거행하도록 하겠다. 보는 눈이 많지만 마법의 장막을 펼친다면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도일의 속뜻을 알아차린 데이몬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마왕과의 계약을 서둘러 3써클의 경지에 올라야만 했다. 그래야만 데이몬이 독자적으로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의식에 필요한 준비물은 내가 구하도록 하겠다. 그러니 너도 의식을 수행할 준비를 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그리고 제가 부탁한 일은 어떻게 ……." 정신이 없는 와중에서도 맥밀란에 대한 일을 결코 잊지 않는 데이몬이었다. 도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듯 씩 웃었다. "이미 마음을 굳히고 온 듯 한데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우젠 후작에게 말을 해 두겠다. 그러니 명령서를 찾아서 그를 데리고 오도록 하라." "감사합니다. 스승님." 데이몬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하우젠 후작의 명령서라면 아무 무리 없이 맥밀란을 빼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쁜 마음에 그는 정신 없이 스승의 숙소를 달려나갔다. "녀석……."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내젓던 도일은 곧 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보초병 이외에는 모두가 잠들 법한 심야. 하지만 8군단의 워 메이지들이 묵고 있는 천막 한 채에서는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천막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천막 전체를 마법 결계로 감싸 놓았으니 눈치챌 만한 자들은 없을 것이다." "네 스승님." 공손히 대답하는 음성. 음성의 주인은 바로 데이몬이었다. 얼굴이 유난히 밝아 보이는 것은 아마도 조금 전 맥밀란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했다. 죽을 운명에서 몸이 성한 병사도 그토록 가기 어렵다는 가드로 뽑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맥밀란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하나 남은 팔로 데이몬의 손을 잡아 주었다. "저, 정말 고마워. 데이몬." "고맙기는……." 감격에 겨워하는 맥밀란의 모습에 데이몬은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마치 묵은 빛을 모조리 갚은 듯한 느낌이었다. 적어도 데이몬은 자신에게 잘 대해준 사람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좀 쉬도록 해. 난 할 일이 있으니……." 로이드를 불러 맥밀란에게 숙소와 장비를 챙겨주도록 당부한 뒤 데이몬은 곧 스승에게로 향했다. 그리고는 의식을 행할 수 있는 심야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이다. 이미 도일은 데이몬이 마왕과 계약의식을 치를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은 상태였다. 의식에 필요한 숫양과 까마귀 한 마리, 각종 약품들, 뼈로 된 칼과 피를 받을 수 있는 인간의 두개골까지 모조리 말이다. 준비된 물건들을 샅샅이 훑어본 데이몬은 혀를 쯔쯔 찼다. "무척 거창하군요. 이게 다 의식에 필요한 것입니까?" 도일은 데이몬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그건 나도 잘 모른다. 왜냐하면 나 역시 계약 의식을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마왕과 계약할 때의 준비물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마련해 왔다." "………." "아무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데이몬이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마왕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습니까?" "………." "계약하실 때 마왕의 낯짝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비로소 데이몬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린 도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글세? 마왕의 낯짝이 어떤지 모른다. 왜냐하면 나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그렇다면 얼굴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계약한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마왕과 계약하는 의식은 네 생각처럼 그리 거창한 게 아냐. 나는 그저 마계와 이곳 사이에 가느다란 통로를 열어놓을 뿐이다. 그러면 너는 영혼을 대가로 마왕에게 어둠의 마나를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제안해야 하는 것이지.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 제안은 받아들여진다. 당사자가 터무니없이 수준이 낮은 마법사가 아니면 말이다." 묵묵히 도일의 말을 듣던 데이몬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66회. "그런데 불러내는 자의 수준이 낮으면 높은 서열의 마왕과 결코 연결이 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요?" 도일은 히쭉 웃었다. "그 말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내가 옆에서 의식을 도와주는 것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 정도 수준의 흑마법사면 마계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마왕과도 연결시킬 수 있다." "그랬군요. 그런데 어떤 마왕을 불러낼지 마음은 정하셨습니까?" "음! 우선 나와 계약하고 있는 마왕 케루빔을 염두에 두고 있다.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의 오른팔로 마계 전체를 통틀어 서열 10위안에 든다는 강력한 마왕 말이다. 그와 계약한다면 넌 아마도 어둠의 마나를 원하는 대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자랑스럽게 얘기했지만 데이몬이 뭔가에 정신이 팔려있는 기색이자 도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케루빔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느냐? 그렇다면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마왕이 있는가 보구나?" 슈렉하이머에게서 들은 트루베니아의 역사를 잠시 떠올려 본 데이몬은 정색을 했다. "전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와 계약을 맺고 싶습니다. 이왕 계약할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강한 놈이 낫겠지요." 데이몬의 말에 도일은 입을 딱 벌렸다. "세, 세상에…….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와 계약하겠다는 놈이 있다니……." "왜? 안됩니까?"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은 도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안될 것은 없지만 감히 나이델하르크와 계약을 하려 할 만큼 담이 큰 줄은 몰랐구나. 어지간한 자는 결코 그와 계약하겠다는 생각을 갖지 않지." "가능하다면 나이델하르크를 불러 주십시오. 전 놈이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잠시 뭔가를 생각해 본 도일은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용기는 가상하다만 아마도 그를 불러낼 수는 없을 것 같구나. 왜냐하면 그는 지금 마계에 없기 때문이다." "마, 마왕이 마계에 없다니요?" "너도 알다시피 암흑전쟁 당시 난 마왕군의 일원으로 전투를 치렀다. 승부가 인간의 승리로 결정 난 뒤 나이델하르크는 남은 세력을 이끌고 펠루시아 산맥으로 숨어 들어갔지. 그곳에 있는 몬스터의 고분을 발굴해서 힘을 조달할 심산이었는데 그는 그만 그곳에서 의문스럽게 실종되고 말았다. 이후 수많은 흑마법사와 네크로멘서들이 그를 소환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나이델하르크는 그 누구의 소환에도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봐서 나이델하르크가 마계에 없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마계에 없다면 도대체 어디에?" 집요하다 볼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도일은 조금도 짜증내지 않고 대답해주었다. "이건 그저 짐작일 뿐인데……. 아마도 나이델하르크는 누군가에 의해 봉인되어 있는 것 같다. 일종의 마법구 따위에 의해서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이처럼 숱하게 행해진 소환에 응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 말에 데이몬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대마왕을 봉인할 자가 세상에 있단 말입니까?" "물론 없다고 볼 수는 없지. 당시 나이델하르크는 연이은 기사들의 공격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또한 마계의 존재는 인간계에선 가진 바 힘을 모두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만약 드래곤이 마음을 먹는다면 아무리 대마왕이라고 할지라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물론 대상이 에인션트 급을 넘어서는 드래곤 정도 되어야겠지만 말이다." "그렇군요." 데이몬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엔 케루빔과 계약을 맺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 싶다. 그는 마계에서 감히 무시할 존재가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마왕이다. 나도 나의 스승이 연결해 주지 않았다면 감히 그와 계약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거듭된 권유에 데이몬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이델하르크와 계약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겠지요. 그렇다면 케루빔인가 하는 마왕과 계약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그럼 의식을 시작하겠다." 도일은 데이몬의 마음이 혹시라도 바뀔까봐 서둘러 의식을 시작했다. 먼저 그는 천막 중앙에 커다란 마법진을 그렸다. 행여나 틀린 곳이 있을까봐 그는 정신을 집중해서 마법진을 하나씩 새겨나갔다. "50년 만에 다시 그려 보는 소환마법진이로군." 충분히 검토를 했지만 워낙 오랜만에 그려보는 마법진이기 때문에 도일의 손길은 무척 더뎠다. 데이몬은 가만히 서서 도일이 그려나가는 마법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소환 마법진치고는 비교적 작은 편이군요." "이것은 무엇을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마계의 마왕과 연결만 시켜주는 마법진이다. 하지만 여기에 들어가는 마나는 결코 만만치 않아." 이리 저리 잡담을 나누어가며 도일은 마침내 마법진을 완성할 수 있었다. 마법서를 펼쳐 틀린 곳이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한 도일은 사람의 두개골로 된 그릇을 집어들었다. "메에에."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숫양이 피를 낭자하게 쏟으며 생을 마감했다. 두개골 가득히 선혈을 받아든 도일은 그것을 마법진 중앙에 내려놓았다. 준비해 둔 약품을 집어넣고 휘휘 젓자 두개골속의 피는 곧 검붉은 색으로 변해버렸다. 손가락을 집어넣어 농도를 확인한 뒤 도일은 까마귀의 머리를 잘라내어 두개골 속에다 집어넣었다. "1차 준비는 끝났다. 이제 너는 충분할 정도로 마나를 끌어 모으도록 해라." "네 스승님." 도일은 곧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고대의 룬어로 된 주문이 입술을 통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지금껏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주문이라서 데이몬은 미간을 지긋이 좁혔다. "정말 희안하군. 룬어에 대해 공부를 하긴 했지만 저런 주문은 처음 들어보는데?" "마나를 모아 두랬더니 뭘 하는 게냐?" 도일의 호통소리에 데이몬은 정신을 차리고 주위의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주문은 거의 일다경 가까이 이어졌다. 이미 데이몬은 마나를 끌어 모을 수 있는 최대한도로 모아놓은 다음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뒤 데이몬은 도일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이마에 구슬땀이 줄줄 흐르는 것을 보니 도일도 무척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잘 되어야 할 텐데……." 데이몬은 숨을 죽인 채 도일의 주문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지 도일이 마침내 주문을 마치고 눈을 번쩍 떴다. "지금이다. 서둘러 팔뚝을 베어 피를 두개골에 받아라." "예." 데이몬은 미리 준비해놓은 칼을 들어 서슴없이 팔뚝에 박았다.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팔뚝에서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주르르. 선혈이 낭자하게 두개골로 떨어졌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두개골에 가득 담긴 양의 피가 데이몬의 피와 섞이자마자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 것이다. 놀라워할 겨를도 없이 도일은 또다시 주문을 외웠다. 룬어로 된 주문이라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저 마왕을 소환하는 주문일 것이라 짐작할 뿐이었다. 데이몬은 숨을 죽인 채 도일이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때다 두개골에 마나를 불어넣어라." "네 스승님." 데이몬은 모아놓은 마나를 제어해서 두개골로 집중시켰다. 근처의 마나들이 거세게 소용돌이치며 두개골로 밀려들어갔다. 물론 이 소용돌이는 마나의 흐름에 민감한 마법사가 아니면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츠츠츠. 놀랍게도 선혈을 담은 두개골이 점차 보랏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속에 든 선혈까지 모조리 말이다. 보고있던 도일도 뒤질세라 함께 마나를 끌어 모아 두개골로 집중시켰다. 그럴수록 두개골에서 발하는 보랏빛은 점점 짙어져갔다. 그러기를 얼마간, 급기야 두개골은 완전히 검은 빛으로 변해버렸다. 도일은 맥빠진 어조로 중얼거렸다. "되, 되었다. 이제 두개골 속의 선혈을 마시도록 해라" "엑? 이것을 말입니까?" "흑마법사가 되기 싫은 게냐?" "아, 아닙니다." 도일의 으름장에 데이몬은 얼른 두개골을 집어들었다. 속의 선혈을 들이키자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역한 맛이 확 풍겨왔다. 하지만 데이몬은 꾹 참고 두개골을 완전히 비웠다. "크으. 젠장 할……. 무슨 맛이 이렇지?" 연신 투덜거리던 데이몬에게 도일이 다가와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되었다. 의식은 모두 끝났다. 흑마법사의 대열에 동참한 것을 환영하마."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의식이 이렇게 간단한 것이었습니까?" "그렇다. 어디 마나를 한 번 끌어 모아 보아라." 데이몬은 반신반의하며 주위의 마나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순간 그의 눈썹이 급격히 치떠졌다. "이, 이것은……." 엄청난 마나가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데이몬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느낄 수 없었던 생소한 종류의 마나였다. 또한 그 양이 평소에 끌어 모을 수 있는 분량의 두 배를 넘어서고 있었다. 데이몬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저, 정말 대단한데요." "그것이 바로 어둠의 마나란다. 일반적인 마나처럼 이것도 역시 물, 불, 바람, 전기 등등의 속성을 띠고 있지. 이제부터 넌 이 어둠의 마나를 사용하는 법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것 역시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뼈를 깎는 수련을 통해 익혀야 하는 것이지." "흐흐흐. 네 스승님." 데이몬은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했다. 어둠의 마나를 얻게 된 지금의 기분은 마치 영약을 구해 환골탈태한 무림고수의 그것과 전혀 진배가 없었다. 그 날부터 데이몬은 어둠의 마나에 익숙해지기 위한 수련에 들어갔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만을 골라서 말이다. 타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지만 어둠의 마나가 깊은 밤에 충만해진다는 특성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매직 미사일을 수련하는 것과 다른 경우이기 때문에 데이몬은 충분히 보초병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마나의 흐름에 민감한 마법사에게만 들키지 않는다면 말이다. "무척 오랜만의 마나 수련인가?"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데이몬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처음 마나를 수련할 때는 도일에 의해 장님에 귀머거리가 된 상태에서 수련에 몰두해야 했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일반적인 마나를 통제할 수 있게 된 이상 어둠의 마나를 조절하는 것은 데이몬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통제법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기만 하면 되었으므로……. 어둠의 마나를 쓸 수 있게 됨으로 인해 데이몬이 모을 수 있는 마나의 절대량은 파격적으로 늘어 있었다. "이 정도라면 머지않아 독자적으로 헤이스트를 전개할 수 있을 것 같군." 매직 미사일에 매달리면서도 이론 방면에 대한 공부를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던 데이몬이었다. 그런 터라 마음만 먹는다면 능히 헤이스트를 전개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미 파워 업 건틀릿을 작동시킬 수 있으니 헤이스트와 매직 미사일만 완벽하게 익힌다면 그 누구에게도 꿀릴 것이 없다." 나직이 중얼거린 데이몬은 다시 한 번 주위의 마나를 순환시켰다. 어둠의 마나가 섞인 방대한 마나의 흐름이 데이몬의 몸을 축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실 마나를 통제하는데 굳이 가부좌를 틀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데이몬에겐 과거 운기조식을 하던 습성이 아직까지 남아있어서 습관적으로 가부좌를 틀게 되는 것이다. 쓰쓰쓰쓰. 범인이라면 결코 느끼지 못할 마나의 흐름. 그것이 데이몬의 몸을 휘감으며 한 번, 두 번 돌아가고 있었다. 그 때 데이몬의 감각에 뭔가가 느껴졌다. "불청객인가?" 데이몬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야밤에 접근하는 것을 보니 보초병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굳이 보초병에게 수련장면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데이몬은 마나를 통제하는 것을 일단 접었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67회. 끌어 모은 마나를 흩어버린 데이몬이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으로 희끄무레한 인영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비교적 호리호리한 체격. 오른 팔 소매가 바람에 힘없이 날리는 것을 보자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맥밀란?" "여기 있었구나." 어둠 속에서 나타난 인영은 다름 아닌 맥밀란이었다. 그가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던 터라 데이몬은 반색하며 맞았다. "안 잤어? 여긴 웬 일로……." "그냥 잠이 오지 않아서……. 물어보니 네가 여기 있다고 하더군." 씁쓸하게 웃는 맥밀란을 보며 데이몬은 우선 자리를 권했다. 제대로 된 의자가 있을 턱이 없었기에 둘은 근처의 바위를 골라 엉덩이를 붙였다. 먼저 입을 뗀 것은 데이몬이었다. "무척 심난한가 보구나?" "………." 맥밀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꺾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은 심정을 익히 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홀로 되어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 눈앞에서 동료들을 잃었으니 슬플 거야. 네 심정 익히 짐작해. 하지만 그들의 기억 속에 계속 얽매어 있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야. 그러니 슬프더라도 하루 빨리 잊는 것이 나을……." "어떻게 잊을 수 있지?" 맥밀란은 마치 발작이라도 하듯 데이몬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의 눈동자는 어느덧 벌겋게 핏발이 서 있었다. "그놈들은 함께 기거하며 울고 웃던 동료들이었어. 그런 동료들이 바로 눈앞에서 처참하게 죽어갔단 말이라고. 넌 하, 한스가 어떻게 죽은 줄 알아? 그 녀석, 그 녀석은……." 그는 끝내 말을 잊지 못하고 흐느끼고 말았다. "오우거에 의해 사지가 갈가리 찢겨 나갔단 말이야. 그 순박하던 녀석이……. 크으으." 울먹이는 맥밀란의 모습에 데이몬의 얼굴에도 착잡한 빛이 떠올랐다. 물론 그들이 맥밀란만큼 자신을 보살펴 준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친분을 유지했던 절친했던 동료들이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맥밀란이 흐느낌을 그칠 때까지 잠시 기다린 뒤, 데이몬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예전에,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이곳에 오기전의 일이야. 내가 살던 대륙에서의……" "………." 맥밀란은 눈물 젖은 얼굴을 슬며시 들었다. 데이몬은 하늘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당시 나에겐 오백 명의 동료들이 있었어." "………." "명목상 부하들이긴 했지만 그들은 사실 나에겐 형제나 다름없는 전우들이었지. 난 그들과 전장을 질타하며 함께 울고 또 함께 웃었어." "그, 그런 일이 있었어?" 이것은 맥밀란이 처음으로 들어보는 데이몬의 과거사였다. "끊임없이 유격전을 치러나가며 서로를 지켜주었던 오백 명의 동료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나에게서 떠나가 버렸어. 그것도 영원히 말이야." "떠나가다니, 설마 죽었단 말이야?" 데이몬은 침통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속한 집단에서 날 배신하는 일이 일어났지. 집단을 장악한 배신자가 날 제거하기로 결심한 거야. 당시 난 예상치 못한 습격을 받아 치명상을 입었다. 말 그대로 생명이 경각에 달한 상황이었지. 하지만 난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날 탈출시켜 준거지. 아무 거리낌없이 목숨을 바쳐서 말이야. 알아? 나 하나만을 살리기 위해서 오백 명 전부가 죽었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맥밀란의 입이 딱 벌어졌다. 비교적 담담하게 털어놓기는 했지만 그 내용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사실을 알고 난 뒤 난 그들을 위해 꼬박 하루를 슬퍼해 주었다. 그리고 이튿날이 되는 날 깡그리 잊어버렸지." 데이몬은 무표정한 얼굴로 맥밀란을 돌아보았다. "그들에 대한 추억과 감정을 잊어버리고 난 뒤 나는 슬픔 대신 복수심을 불태웠다. 그들을 죽게 만든 자에 대한 복수심 말이야. 복수를 위해 나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해지기로 결심했다. 그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그 어떤 수모를 겪더라도 말이야. 힘을 얻은 다음 나는 그 놈을 이 세상에서 가장 처참히 죽일 생각이다. 물론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모르지만 가능성이 있건 없건 간에 나의 결심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죽은 동료들의 영전에 직접 맹세한 일이니까……." 불끈 쥔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살기를 떠올렸는지 뇌리에서부터 아련한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데이몬은 꾹 눌러 참았다. 얼른 살기를 지운 탓도 있었지만 이미 그는 칠종단금술에 의한 고통에 만성이 될 대로 된 상태였으므로……. "미, 미안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떠듬거리며 사과하는 맥밀란에게 데이몬은 씩 웃어주었다. "그들을 정녕 아꼈다면 슬픔은 일단 접어두는 것이 좋아. 대신 그들을 죽게 만든 존재에 대해 복수심을 불태우는 것이 아무래도 낫겠지. 비록 그 길이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더라도 말이야." "주, 죽음 따위는 겁나지 않아. 단지 허무하게 소모품으로 죽기는 싫었던 거지." "알아. 네 마음." 데이몬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들어가 쉬도록 해. 멀리서 살기가 자욱하게 감도는 것을 보니 아마 내일부터 본격적인 접전이 시작될 것 같으니……." "아, 알았어."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맥밀란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데이몬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뭔가 곡절이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데이몬이 설마 그런 슬픔을 간직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맥밀란이었다. 데이몬의 예견대로 다음날 전쟁이 벌어졌다.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오크의 대군이 대대적으로 침공을 가해온 것이다. 수비에 치중하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오크군의 태도는 이제 전면적인 공세로 돌변해 있었다. 다수의 중형 몬스터와 와이번이 포함된 수만의 대군이 봇물 터지듯 카르나틱 평원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척후병의 보고로 침공 사실을 미리 파악한 연합군은 곧 대응을 시작했다. 병사들은 미리 훈련받은 대로 병진을 구성하고 적이 가까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크롸라라." "취에에엑." 별다른 병진을 갖추진 않았지만 험악한 기세로 물밀 듯 밀려오는 오크군의 위용은 보는 이의 오금을 저리게 하기에 추호도 모자람이 없었다. 병진에 따라 포진한 병사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격돌의 순간을 기다렸다. 특히 화살받이로 최전방에 포진된 실더들의 긴장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본진에 대응할 시간을 벌어주려는 목적으로 실더 부대는 본진에서 상당히 떨어진 부분에 위치해 있었다. 투박한 나무방패만 하나씩 든 채 그들은 오들오들 떨며 죽음의 순간만을 기다려야 했다. 간혹 중압감을 이기지 못해 도주하려는 실더들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부대장들의 검이 인정 사정없이 빛을 발했다. "으아악." 피를 뿌리며 나동그라지는 동료들의 모습이 실더들의 이탈을 겨우겨우 막고 있었다. 접전 직전이었기 때문에 부대장들은 추호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제기랄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군."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에 실더들은 들고있는 방패 손잡이를 꽉 쥐었다. 돌격해오는 오크 군이 지근 거리까지 접근하자 각 병과를 막고 있는 지휘관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었다. "석궁수들 제자리로……. 중장보병은 밀집대형을 유지하라." "마법사들도 모두 준비하시오." 혹시라도 있을 드래곤의 마법 공격에 대비해서 군단을 맡은 지휘관들은 병력을 넓게 산개시킨 상태였다. 또한 마법공격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 마법사들은 칠 팔 명 단위로 모여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처럼 모여서 공격을 가한다면 파괴력이 현저히 높아질 뿐더러 떨어지는 연사속도를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데 모인 마법사의 가드들이 서로를 엄호해 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인간들이야 어떤 움직임을 보이건 말건 정신 없이 돌격에 몰두하던 오크 보병들이 마침내 선진의 실더 부대와 격돌했다. 곧 둔중한 격돌음과 함께 비명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콰콰쾅. 선두에 선 실더 부대는 파죽지세로 무너지고 있었다. 어차피 부상병으로 이루어진 실더 부대가 오크 보병의 돌격을 막아낸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리라. 뒤에서 부대장들이 검을 휘두르며 독려하고 있었지만 실더 부대는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맡은 바 임무는 충분히 완수했다. 그들의 저항에 의해 오크 선진의 돌격속도가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지휘관들의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격개시." 슉, 슈슈슉. 가장 먼저 퍼부어진 것은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은 화살 공격이었다. 시위를 잔뜩 당기고 있던 석궁수들이 일제 사격을 퍼부은 것이다. 화살비는 실더 부대와 뒤섞여 있는 오크의 선진을 사정없이 난타했다. 물론 눈이 달려있지 않는 무정한 화살이 적아를 가릴 리가 없었다. 치열한 접전을 치르고 있던 실더들이 화살에 꿰 뚫려 처절한 비명을 질러댔다. 적과 함께 허무하게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을 죽음으로 내몬 무정한 지휘관을 저주하며………. 그 뒤를 이어 가해진 것은 대규모 마법 공격이었다. 운집한 병진의 부분 부분에서 섬광과 함께 눈부신 빛줄기들이 쏘아졌다. 발사된 마법 공격은 맹렬한 기세로 날아가 돌격해오는 오크 보병대를 가격했다. 콰콰콰콰. 엄청난 폭음과 함께 지표면이 산산이 터져 나가며 피와 살점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사방으로 번져간 불길에 휩싸여 부근에 있던 오크들이 여기저기서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실더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러 명이 한데 뭉쳐 전개한 때문에 마법 공격의 위력은 말 그대로 전율할 지경이었다. 한 대 얻어맞은 피해를 수습하지 못한 상황에서 또다시 제 2 탄이 날아들었으니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법의 위용도 돌격해오는 오크 보병대의 기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크의 대군은 마법 공격을 고스란히 허용해가며 진군을 계속했고 마침내 이쪽의 본진과 맞닥뜨릴 수 있었다. 슈캉! 챵챵챵. 철과 철이 맞부딪치며 소름 끼치는 음향이 흘러나왔다. 여기저기서 거센 호통소리와 비명소리가 난무하며 두 종족은 한데 뒤섞여 버렸다.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처절한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취에에엑." "크아악." 순식간에 돌파된 실더 부대와는 달리 중장 보병으로 구성된 본진은 쉽사리 허물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위치를 수호했다. 물론 거기에는 든든하게 차려입은 중장갑주가 큰 몫을 해 주었음은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미리 하달 받은 명령이 있었기에 중장 보병단은 희생을 감수해가며 적의 진로를 필사적으로 차단했다. 후미의 오크 보병이 선진에 막혀 돌격을 멈출 때까지 말이다. 중장 보병단이 얼마간 버텨내자 마침내 이쪽의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빵빠라 빵. 낭랑한 나팔 소리와 함께 전신을 철갑으로 감싼 기사들이 갑작스럽게 출현하여 돌격을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모습을 보니 후방에서부터 미리 말을 달려 온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등장하자 사력을 다해 적을 막고 있던 본진의 중장 보병들이 서둘러 길을 열어주었다. 퍼퍼퍽. 충분히 탄력이 붙은 중장 기사단은 오크 군의 대열을 파죽지세로 꿰뚫고 지나갔다. 걸리적거리는 오크 보병을 가차없이 짓이겨가며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기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뒤이어 등장한 중형 몬스터 무리에 의해 기사단의 진군이 가로막혀버린 것이다. 일단의 오우거들이 횡대로 서서 기사단의 돌격을 막아냈다. 중장기사단의 랜서 차지(Lancer Charge)라 하더라도 무게가 엄청난 오우거의 방어벽을 뚫을 순 없었던 것이다. 결국 기사들은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치열한 육박전을 벌여야만 했다. 이미 기사단의 위용은 중형 몬스터의 가세로 인해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전황은 곧 서로 뒤엉켜 싸우는 혼전의 양상으로 나아갔다. 수적으로 우위에 있는 오크 군은 계속해서 병력을 돌려 이쪽을 포위하려 했고 각 군단의 지휘관들은 필사적으로 병력을 통제해서 적의 군세를 분산시키기에 바빴다. 그러는 동안 마법사 부대의 제 2차 공격이 감행되었다. 슈슈슈슉. 비교적 안전한 위치에서 마나를 비축한 마법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공격마법을 퍼부어 대었다. 목표는 속속 충원되는 오크의 보충 병력이 진군해오는 곳이었다. 오크들만이 밀집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마법사들은 추호도 사정을 보아주지 않았다. 콰콰콰쾅. 맹렬한 폭발음과 함께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오크의 목숨이 화염 속에 덧없이 스러져갔다. 밀집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번 마법공격은 오크들에게 첫 번째보다 더 큰 피해를 안겨 주었다. 참담한 피해를 입은 오크 군은 그때서야 마법사 부대에 관심을 쏟았다. 뒤엉켜 병사들을 학살하고 있던 중형 몬스터들의 반수를 마법공격이 날아온 방향으로 투입한 것이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68회. "우리 차례다. 모두 준비해라." 데이몬의 경고에 가드들은 긴장한 채 무기를 쥔 손에 힘을 밀어 넣었다. 그곳에는 그들말고도 다른 마법사에게 소속된 가드들 역시 합세해서 대기한 상태였다. 한데 운집한 가드들은 3열 횡대로 서서 적을 맞을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하나같이 바짝 긴장한 모습. 물경 백여 마리에 가까운 오우거와 트롤들이 이곳을 목표로 밀려드는 광경에 긴장하지 않을 자가 그 어디 있을 손가? 한 차례 마법 공격을 가한 터라 마법사들은 핼쑥해진 안색으로 마나를 재충전하기에 바빴다. 이리로 들어 닥치는 중형 몬스터들의 규모가 가드들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란 것을 한 눈에 간파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전에 어떻게든 놈들에게 타격을 입혀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도 유일하게 여유를 부리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도일이었다. "데이몬이 해결할 수 있게 좀 도와줘야겠군." 위력이 강한 마법 공격을 날리려면 캐스팅 시간도 그만큼 길어질 수밖에 없다. 다른 마법사들이 사력을 다해 캐스팅에 열중하는 모습을 힐끗 쳐다본 도일은 미리 준비해 놓았던 마법을 전개했다. 그것은 결코 공격 계열이 아니었다. "어스 쉐이크(Earth shake)" 구구구궁. 기성과 함께 땅이 마구 진동했다. 단단한 흙바닥이 마치 파도처럼 뒤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크롸락." 그 때문에 맹렬히 달리고 있던 중형 몬스터들이 중심을 잃고 우수수 쓰러져 버렸다. 다행히 쓰러지지 않은 놈들도 도저히 균형을 잡지 못하고 볼썽 사납게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달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땅의 진동에 근처의 병사들도 함께 비틀거렸지만 다행히 전력으로 달려오던 오우거들만큼 충격은 받지 않았다. 도일의 마법은 돌격해오는 오우거 대열의 중간을 정확히 끊어놓은 상태였다. 비록 선진의 오우거들이 마법의 영향을 받지 않은 때문에 계속해서 돌격하고 있었지만 도일은 그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캐스팅을 마친 마법사들이 하나 둘씩 공격을 시작했다. 슈우우욱 쾅. 불덩어리가 어지럽게 날아가서 작렬했다. 몸에 불이 붙은 오우거들이 기성을 지르며 발악을 해 댔다. 피아가 무수히 운집해 있는 곳이라 운 나쁜 아군 병사들도 함께 불길에 휘말려 버렸다. "아악." "사, 살려줘." 마법에 내성을 가진 오우거들이라서 이번 마법 공격은 도리어 아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병사들이 죽어 가는 모습에 마법사들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더 이상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캐스팅을 포기한 소서리스(여자 마법사)한 명이 다급하게 도일에게 다가왔다. "이곳은 가드들에게 맡기고 피해야겠어요." 이럴 경우 통상적으로 몸을 피하는 것이 마법사들에겐 예정된 수순이었다. 가드들이 중형 몬스터의 발목을 잡고 있는 동안 마법사는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서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법 공격의 딜레이 시간이 무척 길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달리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마법사들은 서둘러 몸을 피할 채비를 갖췄다. 그러나 뜻밖에도 마법부대의 리더를 맡고 있는 도일이 후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아군의 피해가 너무 커진다. 신속하게 3탄을 준비해야만 아군의 피해가 줄어든다." "하, 하지만 저것들을 무슨 수로 막죠?" "지금 잘 막고 있잖아." 태평스런 도일의 말에 고개를 돌린 소서리스는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세, 세상에…… 그곳에는 정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콰우!" 오우거 두 마리가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맥없이 허물어졌다. 눈꼬리 부분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혼절해버린 것이다. 눈꼬리 부분은 담경의 요혈인 동자료가 있는 위치. 조금만 충격이 가해지더라도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리는 치명적인 혈도 중 하나였다. 쿵 하는 굉음과 함께 바닥에 나자빠진 오우거. 이 좋은 기회를 병사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사방에서 병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에잇." 기절해버린 때문에 쓰러진 오우거들은 창날이 피부를 꿰뚫는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말 그대로 기절한 상태에서 이승을 하직한 경우였다. 데이몬의 몸은 마치 바람처럼 질주해 오는 오우거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에잇." 그의 손에서 섬광이 번쩍 할 때마다 예외 없이 한 두 마리의 오우거가 맥없이 나가자빠졌다. 마치 농부의 낫질에 수수단이 쓰러지는 것처럼 말이다. 쓰러지는 오우거들도 자신이 이처럼 허무하게 당한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퉁방울만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러나 동자료 못지 않은 요혈인 예풍혈을 정통으로 얻어맞았으니 쓰러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제 데이몬은 본격적으로 매직 미사일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서 눈부신 빛이 연신 일어났다. 빛은 건틀릿의 손등 부분에 박힌 수정구슬에서 분출하는 것이었다. 퍼억. 또다시 한 마리의 오우거가 허물어졌다. 슬쩍 스쳐지나가며 가볍게 쏘아 냈지만 매직 미사일은 무정하게도 오우거의 염천혈을 그대로 제압해버린 것이다. 그가 차고 있는 건틀릿은 도일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아티팩트의 하나였다.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했지만 그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마법 지팡이의 자루를 잘라낸 다음 거기에다 특수 처리된 가죽끈을 연결해서 마법지팡이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놓은 회심의 역작다. 물론 마법의 위력이 여타의 마법 지팡이보다는 떨어지겠지만 데이몬에겐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미 마왕과의 계약으로 3써클의 경지에 올라선 데이몬에겐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효율이 떨어지는 변형 마법지팡이로도 매직 미사일에 혈도를 제압할 만한 힘을 불어넣을 수 있는 능력 말이다. 마왕과의 계약을 맺은 이후 데이몬은 어둠의 마나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매직 미사일의 위력은 비약적으로 향상된 상태. 또한 최대한 근접한 상태에서 슬쩍슬쩍 가해지는 공격이라서 오우거들은 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말 그대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헤이스트를 펼친 상태였기 때문에 오우거들이 데이몬의 그림자도 잡을 수 없었다. 데이몬의 매서운 손속에 의해 삽시간에 10여 마리의 오우거가 전투력을 잃었다. 애초에 오우거 30여 마리와 트롤 70여 마리가 달려오긴 했지만 트롤들 대부분이 병사들의 결사적인 저항에 가로막혀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정말 엄청난 전과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오우거들 중, 반이 도일이 전개한 어스 쉐이크에 지체되어 있었으므로 데이몬은 비교적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하앗." 또다시 두 마리의 오우거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굳이 사혈을 쳐서 절명시킬 필요도 없었다. 혼혈만 제압해서 쓰러뜨린다면 주위에 포진한 병사들이 깔끔하게 마무리를 해 주기 때문이다. 이제 병사들은 무리하게 오우거의 앞을 막지 않고 놈이 쓰러지기만을 기다리는 상태였다. "네놈도 누워라." 데이몬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다가가자 오우거 한 마리가 돌격을 멈추고 급히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아무리 지능이 낮은 오우거라도 지금껏 동료들이 어떻게 당했는지 보고 느낀 것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오우거의 몸은 너무도 거대했다. 애석하게도 데이몬의 눈에는 공격할 급소가 널리고 널렸다. "쿠우우." 양쪽 젖꼭지에 위치한 유근혈에 매직 미사일 한 방씩을 사이좋게 나누어 맞은 오우거는 선 상태에서 그대로 꼿꼿이 굳어버렸다. "서 있으면 안되겠지?" 데이몬이 오금 부분을 슬쩍 치고 지나가자 오우거의 육중한 몸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그 뒤로 용기백배한 병사들의 창날이 푹푹 박혀들었다. "어, 어떻게 저럴 수가……." 도일 주위의 마법사들은 데이몬의 활약에 캐스팅하는 것도 잊고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마법사 휘하의 가드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우거가 도대체 어떤 몬스터인가? 가죽이 말도 안되게 질긴데다 마법에 내성까지 가지고 있어 상대하기 힘들기로 정평이 나 있는 몬스터가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인간에게 저토록 허무하게 당할 몬스터는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일개 가드 한 명이 오우거를 저토록 쉽사리 무력화시키다니……. 그들의 귀로 다소 화난 듯한 도일의 힐난이 전해졌다. "뭘 하는 겐가? 제 3탄을 퍼부어야지." "아, 알겠습니다." 마법사들은 부랴부랴 공격 마법을 캐스팅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데이몬이 오우거들을 풀 베듯 쓰러뜨려 나가는 광경을 곁눈질로 힐끔힐끔 쳐다보기에 바빴다. 어스 쉐이크에 발목이 잡혀 있던 오우거들이 막 이곳으로 쇄도했지만 애당초 그들은 매직 미사일의 먹이감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게 데이몬이 중형 몬스터를 막고 있는 사이 마법사들은 3차 공격을 가할 준비를 마쳤다. "공격." 도일의 명령이 떨어지자 오크군 진영을 향해 각종 마법 공격이 동시다발적으로 퍼부어졌다. 콰콰콰쾅. 지축을 뒤흔드는 대폭발이 또다시 이어졌다. 집중포화에 의해 또다시 수백 마리의 오크 보병이 떼죽음을 당했다. 어떻게 보면 마법사란 존재는 전장에서 소드 마스터보다도 더 효율적일 지도 몰랐다. 개개인의 무용이 아무리 뛰어난 소드 마스터라도 다수의 적에게 이 정도의 피해를 입힐 순 없기 때문이다. 뼈저린 피해를 입은 오크 군은 남은 오우거들을 모조리 이쪽으로 투입했다. 마법사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직감한 때문이었다. "캬오오오." 병사들과 뒤엉켜 싸우던 오우거들이 일제히 몸을 빼서 이쪽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고 있는 마법사들은 이번에는 별달리 걱정을 하지 않았다. 물론 데이몬의 활약을 믿은 때문이었다. "저것들은 데이몬이 막아 줄 것이다. 그러니 모두들 4차 공격을 준비하라." 나지막하게 명령을 내린 뒤 도일은 서둘러 마법을 캐스팅하려 했다. 그때 그의 감각에 어마어마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마나가 오크 군 진영의 한 곳으로 집중되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이, 이것은?" 도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정도의 마나가 모인다는 것은 무언가 엄청난 마법이 준비되고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마나가 모이는 규모였다. 심지어 마법사들이 끌어 모아 놓은 마나까지도 오크 군 진영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도저히 인간의 마법이 아니었다. 서둘러 캐스팅을 포기한 도일은 벼락같이 고함을 쳤다. "공격을 중지하고 사방으로 산개하라. 어서." 상황파악을 하지 못했는지 아까의 소서리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마법사 님의 가드가 잘 막고 있는데……. 왜?" "자네는 오크 군 진영에서 모이는 마나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는가?" "설마……. 헉." 그때서야 마나의 흐름을 느꼈는지 소서리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도일보다 수준이 낮은 때문에 마나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도 늦을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들은 혼비백산한 채 서둘러 흩어지기 시작했다. 모이는 마나의 양을 가늠해볼 때 도대체 어느 정도의 공격이 가해질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왜 저러시지?" 고개를 힐끔 뒤로 돌려본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차 공격대를 모조리 격퇴한 뒤 두 번째 몬스터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다 우연히 마법사들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는데 뜻밖의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스승을 비롯한 마법사들이 공격할 생각도 하지 않고 사방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한창 제 4탄을 날리고 있어야 할 그들이었다. 그런데 공격은 고사하고 사방으로 뿔뿔이 도망치는 모습이 마치 사자의 기습을 받은 토끼무리 같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에 의문을 표할 여지도 없이 등뒤로 어마어마한 마나의 기척이 느껴졌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69회. 그 역시 마법사. 마나의 기척 정도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린 데이몬의 눈에 공포의 빛이 진득하게 스쳐지나갔다. "세, 세상에 이건 말도 안 돼!" 그곳에는 거대한 불덩어리가 하늘을 온통 뒤덮을 듯 일렁이고 있었다. 오크의 진영 바로 위에서였다. 푸른 빛 화염을 일렁이는 불덩어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벼락같은 음성이 접전 중인 전장의 소음을 뚫고 널리 울려 퍼졌다. "인간들이여. 감히 드래곤 앞에서 마법을 논하고자 하는가? 훔쳐 배운 주제에 무척 뻔뻔스럽구나. 이제 나 베르키스가 너희들에게 진정한 마법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겠다." 그 소리는 오크보병과 뒤엉켜 싸우는 병사들의 귀에 똑똑히 울려 퍼졌다. "드, 드래곤이야." "드래곤이 나타났어." 미지의 음성이 울려 퍼짐과 함께 병사들의 사기는 온데간데없이 싹 사라져버렸다. 드래곤이란 존재가 주는 중압감은 그만큼 절대적이었다. 콰콰콰콰. 어마어마한 크기로 팽창한 불덩어리는 병사들을 위압하듯 짓누르며 허공에 한동안 몸집을 불려나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맹렬한 빛을 발한 뒤 빠른 속도로 쏘아졌다. 목표는 인간들의 진영 한 쪽이었다. 콰콰콰쾅. 불덩어리가 작렬한 곳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말 그대로 경천동지할 규모의 폭발이었다. 형태만으로 따지자면 초급 공격마법인 파이어 볼이 아닐까 짐작되었지만 위력은 거의 헬 파이어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 이번 공격에 의해 1천 여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증발해버렸다.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마법사 서넛과 함께 말이다. 그 모습을 지켜본 도일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들었다. "트, 틀렸어. 이미 드래곤은 마법사들 모두를 명확히 포착해 놓았어." 자신의 몸을 휘감고 있는 생소한 마나의 기척. 추적마법이라 짐작되는 그것은 자신이 움직이는 방향이면 어디든 따라오고 있었다. 그의 마법실력으로도 제거할 수 없었다. 그의 입에서 뼈저린 일성이 터져 나왔다. "끄, 끝장이야." 그때서야 도일은 드래곤이 뒤늦게 등장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놈은 마법사들을 모조리 제거하기 위해 암암리에 추적 마법을 펼쳐놓고 기다린 것이 분명했다. 그러는 동안 두 번째, 세 번째 마법 공격이 날아들었다. 그것도 도주하는 마법사가 있는 방향으로 정확히. 퍼펑. 목표로 잡힌 마법사들은 결국 피하지 못하고 한 줌 재로 화해버렸다. 부근의 운 없는 병사들과 함께 말이다. "아, 안 돼!" 휘하의 소서리스가 공포감을 이기지 못하고 공간이동을 전개하려는 것을 본 도일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추적 마법을 펼쳐놓았을 정도라면 이미 공간 왜곡장도 펼쳐져 있다고 봐야 했다. 상황을 봐서 공간이동이 성공할 가능성은 극도로 희박했다. "아아악."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공간이동을 시도한 소서리스의 몸이 허공에서 분해되어 버렸다. 그녀의 능력으로 드래곤이 펼친 공간 왜곡장을 돌파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에 불과했다. 그것은 그녀보다 수준이 높은 도일조차 할 수 없는 능력이었으므로……. 그러는 동안 또다시 서너 명의 마법사들이 공격에 적중되어 목숨을 잃었다. "으아아아악." 살아남은 마법사들도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기만 했다. 이제 인간들의 진형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어야 할 마법사들은 그저 도망치는 데 바빴고 오크 보병은 계속해서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드래곤의 등장으로 인해 병사들은 삽시간에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다." "죽음으로써 이곳을 수호해야 한다." 부대장들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독려하곤 있었지만 한 번 무너진 전열을 수습하기엔 어림도 없었다. 오크 보병들은 기세가 살아 계속해서 밀려들어왔고 최후의 보루로 막고 있던 카르나틱 평원의 방어선은 이렇게 무너지고 있었다. "과연 생각대로야." 지속적으로 무너지는 방어선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세르게이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미 그는 드래곤이 참전할 것을 미리 예견하고 있던 터였다. 마법사들이 무력화된 때문에 기세가 한껏 오른 오크 군은 파죽지세로 병사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허물어지는 것은 말 그대로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세르게이의 얼굴에는 별달리 다급한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두 번째 계획을 위해 이곳은 이만 포기해야겠군." 씁쓸하게 고개를 흔든 세르게이는 부관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각급 사령관들에게 지급으로 알려라. 목숨으로써 이곳을 수호해야 한다고 말이다. 어떻게 해서든 놈들의 진군을 지체시켜야 한다고 전해라." "네? 무슨 말이시온지?" 아무리 부관이라도 전세가 절망적이란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위치를 수호하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리다니……. "명령이다. 귀관은 서둘러 명령을 하달하도록 하라." 짜증 섞인 세르게이의 질책에 부관은 서둘러 허리를 꺾었다. "아, 알겠습니다." 다급하게 달려나가는 부관에게 한 번 시선을 준 뒤 세르게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심복인 베니테스가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미 그는 달려나간 부관이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준비는 되었나?" "네 준비는 완벽합니다. 이미 드래곤의 공간이동 왜곡장이 미치지 않는 곳을 파악했으니 펠드리안으로의 공간이동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럼 이곳을 버린다. 서둘러 공간이동을 실행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세르게이는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베니테스라면 능히 드래곤의 마수를 피해 공간이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베니테스는 끝없이 학살당하는 병사들을 힐끔 쳐다본 뒤 얼른 세르게이의 뒤를 따랐다. 카르나틱의 방어선은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콰콰콰콰 오크 진영에서 공격이 한 번 이루어질 때마다 어김없이 두세 명의 마법사가 목숨을 잃었다. 목표가 된 마법사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드래곤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무리 병사들 틈에 섞여 있더라도 드래곤의 파이어 볼은 어김없이 그곳을 향해 내려꽂혔다. 그럴수록 마법사의 수는 줄어만 갔다. "스, 승산이 없어." 드래곤의 참전 사실로 인해 병사들의 사기는 땅으로 곤두박질 쳤다. 마법사가 모두 당하고 나면 그 다음은 자신들 차례란 것을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병사들은 더 이상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제각기 살길을 찾아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틀렸어." 도일은 참담한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휘하의 마법사들은 모조리 당해버린 상태. 물론 도일 역시 드래곤의 공격에 한 번 목표가 되었었다. 하지만 도일은 역시 이곳에 모인 마법사들 중 최고위급이라 자부하는 마법사였다. "에잇." 공격이 날아들자 그는 순간적으로 블링크를 펼친 뒤 헤이스트를 전개해서 간신히 공격범위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번의 공격을 피해낼 수 있었지만 더 이상 피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드래곤의 탐색마법이 이미 자신을 명확하게 포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가공격이 날아올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리저리 몸을 회피하며 다급하게 몸을 날리는 도일의 귓전에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스승님." 고개를 돌려보자 그곳엔 데이몬이 경악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역시 헤이스트를 펼친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을 따라올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데이몬의 얼굴을 확인한 도일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여기 있다간 살아남을 수 없다. 이 자리를 피하도록 하자." 도일은 순간적으로 공간 왜곡장이 미치지 못하는 범위를 검색했다. 데이몬과 함께 멀리 떨어진 곳까지 공간이동을 할 심산인 것이다. 어디로 워프해야 할지 좌표도 몰랐고 성공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지만 그래도 도일은 열심히 주위의 마나를 끌어 모았다. 그러나 드래곤의 마수는 어느덧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도일의 입에서 참담한 일성이 터져 나왔다. 예의 그 불덩어리가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쏘아지는 것을 느낀 것이다. 막을 엄두도 나지 않았고 피할 수도 더더욱 없었다. 인간 마법사와 드래곤과의 수준 차이를 정말 뼈저리게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요행히도 공간 왜곡장이 미치지 못하는 범위를 찾기는 했지만 이 상태로 워프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공격받기 전까지 공간이동에 필요한 마나를 끌어 모을 수 없었다. "놈은 지금 내가 마나를 끌어 모으는 것을 방해하고 있어." 도망치는 것을 포기한 도일은 대신 끌어 모은 마나로 실드를 펼쳤다. 물론 이것으로 공격을 막는 것은 말 그대로 가능성이 없는 일일 테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대책을 세우고 싶었던 도일이었다. 그 때 도일의 눈동자에 데이몬의 초조한 모습이 비쳤다. "그렇군." 절체절명의 순간에 도일은 비로소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떠올렸다. 이마 자신은 드래곤의 표적이 되어버린 상태. 그 어떤 노력으로도 벗어나기가 불가능했다. 다시 말해 살아남을 가능성이 전무한 것이다. 하지만 데이몬만은 예외였다. 그는 아직까지 수준이 낮은 마법사. 아마도 드래곤이 데이몬에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공산이 컸다. 심혈을 기울여 키운 제자만은 어떻게 해서든 살려야 했다고 마음먹은 도일. 마음을 정리한 도일은 데이몬을 소리쳐 불렀다. "데이몬." "네 스승님." 부랴부랴 달려온 데이몬에게 도일은 손가락을 쭉 펴서 한 쪽을 가리켰다. 그쪽에는 살아남은 가드 몇이 뿔뿔이 흩어져 후퇴하고 있었다. "지금 즉시 저들에게로 가거라." "네? 무슨 말씀이신지?" 도일은 어리둥절하는 데이몬의 몸에 다급하게 실드를 펼쳤다. 끌어 모은 마나를 이용해 제자의 몸에 최대한의 방어막을 펼친 것이다. 그리고는 영문을 몰라하는 제자에게 재차 호통을 쳤다. "어서 저들에게로 가거라. 빨리." 의구심을 가질 여유도 없이 데이몬은 달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맥밀란이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도망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보살펴주어야겠다고 생각한 데이몬은 우선 그리로 향했다. "잘 가거라 데이몬. 너만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한다. 이 스승에게는 널 제자로 맞은 것이 평생의 행운인 듯 싶구나." 어느덧 도일의 주름진 노안에는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이미 공포의 불덩어리는 도일을 향해 정통으로 내려꽂히고 있는 상황. 마음이 편해진 도일은 눈을 꼭 감고 죽음의 순간을 기다렸다. 그의 진전을 이어받은 제자 데이몬이 어떻게 해서든 살아나기를 기원하며…….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70회. 콰콰쾅. 등뒤에서 일어난 대폭발의 여파로 인해 데이몬은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던 참이라 데이몬은 다행히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전신이 으스러지는 통증이 관통했지만 데이몬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무심코 고개를 돌려본 데이몬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스, 스승님?" 스승이 서 있던 장소는 생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온통 시뻘건 불길이 대지를 휘감고 있었고 타버린 재만이 지저분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데이몬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돌려 달려갔다. 전신에 화상을 입어 온통 진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통증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도저히 스승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았던 데이몬이었다. 떠난 자리에 도착한 데이몬은 두리번거리며 스승을 찾았다. 드래곤에 대한 공포 따위는 이제 의중에도 없었다. 불운하게도 도일의 안배에도 불구하고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는 데이몬의 존재를 명확히 파악한 상태였다. 마나의 흐름에 민감한 드래곤답게 베르키스는 도일이 최후에 펼쳤던 실드를 여지없이 간파했다. "누구 앞에서 수작을 부리려는 건가?" 무정하게도 베르키스의 2차 공격은 정통으로 데이몬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서, 설마 죽지 않았겠죠? 스승님. 마, 말씀 좀 해 주세요." 데이몬은 도일이 서 있던 장소에 서성거리며 연신 울부짖고 있었다. 스승의 죽음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도일은 이미 이승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가 세상에 남긴 것은 오로지 사방으로 흩날리는 재뿐이었다. 뭔가가 발치에 걸리자 데이몬은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바로 도일이 사용하던 마법 지팡이였다. 자루도 타버리고 수정구슬마저 깨어진 채 재 속에 묻혀 있던 마법 지팡이를 데이몬은 얼굴에 대고 정신 없이 비벼댔다. "제, 제발 스승님." 도저히 스승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던 데이몬이었다. 그 얼마나 자상했던 스승이었던가? 그가 살던 중원에서도 도일만큼 자신을 아껴주고 배려해 준 이는 없었다. 그런 스승을 바로 눈앞에서 잃어버리다니…….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데이몬은 죽음의 불덩어리가 자신을 향해 내려꽂히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위, 위험해." 다급한 경악성과 함께 누군가가 데이몬을 와락 밀쳤다. 데이몬은 힘없이 바닥에 얼굴을 박고 쓰러졌다. 그러나 넘어진 데이몬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스승을 잃은 충격으로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린 것이다. 데이몬을 밀쳐 쓰러뜨린 이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갈등이 서렸다. 그러나 그는 오래지 않아 마음을 정리했다. "어차피 난 이곳에서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 그러니 데이몬. 네가 복수를 해 주기 바란다. 나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몫까지 함께 말이야." 말을 마친 맥밀란은 자신의 몸으로 데이몬을 그대로 감싸 버렸다. 가드가 된 뒤 지급 받은 두터운 갑주만을 믿고 말이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서도 맥밀란이 남긴 마지막 말은 데이몬의 뇌리에 명확히 꽂혔다. 그것도 잠시, 드래곤의 파이어 볼은 곧 그들의 몸을 완전히 집어삼켜 버렸다. 콰콰쾅. 경천동지할 폭음과 함께 그곳은 곧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마치 인간의 멸망을 알리는 서곡처럼 말이다. 마치 그것이 신호인양 카르나틱의 방어진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곳은 어디인가?" 데이몬은 마치 부유하듯 어둠 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도무지 어디인지 분간도 가지 않았다. 전신에서 아련한 통증이 전해왔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보다도 더 데이몬을 괴롭히는 것은 바로 스승의 죽음이었다. "스승님." 갑자기 격정이 치밀어 오른 때문에 데이몬은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만큼이나 스승 도일은 데이몬에겐 정신적인 지주였다. 마치 망망대해에 홀로 내팽개쳐진 듯 느껴졌다. 다시금 천애고아 신세가 되어버린 터라 슬픔은 더욱 컸다. 그 때 그의 뇌리로 아련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데이몬. "스, 스승님?" 데이몬의 눈이 커졌다. 그는 스승의 모습을 찾으려는 듯 정신 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주위는 온통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도무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뭔가가 잔뜩 짓누르고 있는 듯 몸은 무겁기만 했다. "스승님 어디 계시죠?" 데이몬은 계속해서 스승을 불러댔다. 그러기를 얼마간, 예의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렇게 이별하게 되어 정말 유감이구나. 데이몬. "스, 스승님." 비로소 스승의 최후가 떠오른 나머지 데이몬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었다. 만약 마왕에게 영혼을 팔아 스승을 살릴 수 있다면 백만 번, 천만 번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런 데이몬의 심정을 알아차린 듯 음성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난 이미 세상에 없다. 지금 이 음성은 내가 최후의 순간 마지막으로 대지에 기억시킨 메시지란다. 이것은 너에게 진작부터 들려주고 싶었던 내 과거사이기도 하다. 너에게 직접 털어놓지 못하고 이별하는 것이 무척 원통하구나……. "크흐흑. 스승님." ―이제 너에게 나의 과거에 대해 털어놓겠다. 데이몬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귀를 기울였다. ―나는 원래 이카롯트의 저명한 귀족신분이었다. 아마 너는 이 사실을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도 없는 가운데 도일의 음성은 계속해서 데이몬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고즈넉이 이어지는 이야기는 데이몬에 결코 못지 않은 기구한 과거사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오십여 년 전. 도일은 당시 이카롯트에서 쟁쟁한 권력가인 프록시아 가문의 일원이었다. 뛰어난 실력의 소드 마스터이며 이카롯트의 병권을 한 손에 거머쥐고 있는 프록시아 공작이 바로 그의 형이었던 것이다. 프록시아 가문의 권세는 지엄해서 그 어떤 귀족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오크와의 종족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전사한 때문에 그 영광을 그의 형이 고스란히 물려받았던 것이다. 아버지를 꼭 빼어 박은 형은 무척 젊은 나이에 가문을 맡았지만 아무 무리 없이 가장 역할을 해냈다. 도일은 그런 형의 아래에서 평탄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프록시아 가문은 옛날부터 정평 있는 무골 집안이었다. 역대로 수많은 뛰어난 검사들을 탄생시켰으며 그 이루기 힘들다던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조상들도 여러 명 있었다. 그러나 이례적으로 도일만은 조상의 핏줄을 잇지 못했는지 유난히 검술에 소질이 없었다. 그는 어머니를 닮아 검술보다 오히려 책을 더욱 좋아하는 성품을 가졌다. 때문에 그는 일찌감치 검술에서 뜻을 접고 학문의 길을 나서기로 결심했다. 당시 뛰어난 검사였으며 형, 프록시아 공작은 그런 도일의 결심에 대해 상당히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결코 그의 뜻을 막지는 않았다. 동생의 뜻을 십분 존중해 주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도일은 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수많은 문호들과 교류하며 학문을 닦아 나갔다. 형과는 달리 도일은 나이 25세에 일찍 결혼을 했다. 그리하여 어여쁜 아내와 함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하나를 얻었고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행복하게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록시아 가문의 불행은 도일의 아들이 만 15세가 되는 날 일어났다. 평생을 검술수련에만 매진하겠다던 형 프록시아 공작이 어느 날 갑자기 사랑에 빠진 데에서 사건은 비롯되었다. 40년 동안을 꼬박 검술에 매달리느라 여자를 사귈 시간이 없었던 프록시아 공작은 우연한 기회에 한 여인을 접하게 된다. 여인의 미모는 철석같은 프록시아 공작의 마음을 여지없이 녹여 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결국 한눈에 반해버린 프록시아 공작은 그녀에게 청혼을 결심하게 된다. 그런 프록시아 공작이 그리 싫진 않았는지 여인 역시 공작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둘은 더 이상 화려할 수 없는 성대한 결혼식을 치르게 되었다. 하지만 여인이 모종의 뜻을 품고 잠입한 자임은 그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그녀의 진정한 정체는 헬프레인 가문에서 몰래 침투시킨 첩자였던 것이다. 옛날부터 프록시아 가문의 정적이었던 헬프레인 가문 말이다. 쉐르나 헬프레인. 그녀는 이미 60이 넘은 5써클의 마스터로써 현혹술에 뛰어난 조예를 지닌 소서리스였다. 또한 원래부터 헬프레인 가문의 일원이기도 했다. 다만 어릴 적부터 스승을 따라다니며 마법을 배우느라 외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여인이었던 것이다. 오랜 마법 수련을 마치고 독립해서 가문으로 돌아온 쉐르나는 그만 오빠인 헬프레인 공작의 간곡한 꼬임에 넘어가게 된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 프록시아 가문을 파멸시킬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마법을 이용해 외모를 바꾼 뒤, 그녀는 전공인 현혹술을 이용해서 프록시아 공작의 마음을 대번에 사로잡아 버렸다. 그리하여 그녀는 의도대로 프록시아 가문에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프록시아 공작은 그녀에 대해 추호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 아름다운 그녀의 미모가 마법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계획대로 프록시아 가문에 잠입한 쉐르나는 미리 꾸며놓은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시켰다. 풍만한 육체와 미혼술로써 프록시아 가문의 기사들을 암암리에 하나 둘씩 포섭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그녀의 유혹에 믿을 만한 심복 서너 명이 넘어가 버렸고 그들은 쉐르나의 철저한 수족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리하여 쉐르나의 음모는 어둠 속에서 서서히 싹이 트고 있었다. 쉐르나가 들어온 지 정확히 일 년이 되던 날 사단이 벌어졌다. 일단의 병력이 느닷없이 프록시아 가문을 급습했던 것이다. 그들의 정체는 바로 근위 기사단을 앞세운 황제의 근위병들이었다. 물론 그 중에는 헬프레인 공작의 사병도 상당수 끼여 있었다. "무슨 일이오." 의아스럽긴 했지만 프록시아 공작은 예의를 갖춰 그들을 맞았다. "어명이오. 공작께서 불신자들의 무리와 내통했다는 제보가 들어왔기에 저택을 수색하러 왔소. 그러니 순순히 협조를 부탁드리겠소." 프록시아 공작은 그냥 웃어 넘겼다. 이카롯트의 일등 공신인 자신이 불신자와 내통하는 혐의를 받다니……. 당시는 한참 종교재판이 열리던 때였다. 또한 불신자를 가려낸다는 명분 하에 정적을 타도하려는 시도가 무수히 벌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프록시아 공작은 성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근위병들을 맞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저택을 수색하도록 허락했다. 자신만만하게 말이다. 그러나 증거물은 저택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프록시아 공작이 불신자와 결탁했다는 증거물 말이다. 물론 그것은 어린아이라도 조작한 것임을 금방 알아차릴 만큼 어설픈 것이었다. 그 정도로 프록시아 가문의 권세를 흔들기에는 어림없을 정도로……. 정적 제거를 위한 모략은 트루베니아의 각 왕국들에게는 그 정도로 만연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작의 집무실에서 하나의 서신이 발견된 것이 결정적으로 상황을 반전시켰다. 그것은 프록시아 가문에 더할 나위 없는 엄청난 부담을 안겨 주었다. 서신의 내용은 프록시아 공작이 크로센 대제에게 직접 보내는 형식으로 되어있었다. ―트루베니아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소. 그러니 나는 크로센 대제, 당신을 따르겠소이다. 이미 당신에게는 수만의 군사가 있소. 그러니 그들을 동원해서 이카롯트를 접수해 주시오. 그러면 나는 휘하의 병력과 함께 당신에게 합류하리다. 이미 난 이카롯트의 모든 병권을 틀어쥐고 있는 몸. 이카롯트의 모든 성문은 당신을 위해 열릴 것이오. 당신과 내가 뜻을 함께 한다면 그 누구도 막지 못할 것이오. 편지의 말미에는 프록시아 공작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공작이 항상 왼손 중지에 끼고 다니는 반지의 직인이 말이다. 근위병들은 일단 서신을 압수한 채 물러났다. 물론 저택은 나는 새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봉쇄되어 버린 다음이었다. 프록시아 가의 사병들과 연락할 길도 역시 차단되어버렸다. 프록시아 가문은 그 즉시 발칵 뒤집혀 버렸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공작은 서둘러 쉐르나를 찾았다. 직인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과 쉐르나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다음이었다. 그 누구도 그녀를 본 사람은 없었다. 상황을 봐서 조작된 서신은 그녀의 소행이 분명해 보였다. "이럴 수가……." 비로소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공작은 땅을 쳤다. 그러나 황제의 근위병들이 시시각각으로 포위망을 조여오는 상황이었고 자신의 무고를 증명할 길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공작은 마음을 정하고 도일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너는 비밀통로를 통해 저택을 빠져나가도록 해라. 나는 이곳에서 기다렸다가 황제폐하를 만나 뵙도록 하겠다. 어떻게 해서든 폐하께 나의 결백을 밝히도록 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만약을 위해 바깥으로 나간 뒤, 벌어지는 상황에 대처하도록 해라." 형의 명령에 도일은 어쩔 수 없이 어린 아들의 손을 잡아끌고 비밀 통로로 향했다.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느라 몸이 무거웠던 아내를 저택 안에 남겨두고 말이다. 좁고 습기 찬 통로를 걸어 한참 만에야 바깥으로 나온 도일. 그러나 그가 본 것은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프록시아 가의 저택이었다. 근위병들은 형이 결백을 증명할 기회를 주지 않고 저택에 불을 질러버렸던 것이다. "크흐흑. 형님. 마리온." 도일은 애타게 형과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71회. 그가 보는 앞에서 저택은 완전히 불에 타서 재가 되어버렸다. 그의 형과 아내 가문의 모든 사람과 함께 말이다. 한참을 울다가 겨우겨우 그곳을 빠져나온 도일은 뜻밖에도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헬프레인 가문의 음모로 비롯된 것이며, 황제인 로젠가르트 4세 역시 그들과 뜻을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황제는 진작부터 강직한 프록시아 공작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고, 이미 형을 제거할 결심을 굳히고 있었던 것이다. 가문의 모든 권력이 헬프레인 가문으로 송두리째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도일은 복수심에 불탔다. 그러나 검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도일이 복수를 할 길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평소 왕래가 잦았던 귀족 가문을 찾아갔지만 이미 대세는 물 건너간 다음이었다. 그들은 도리어 도일을 사로잡아 새로이 권력의 중추로 떠오른 헬프레인 가문에 환심을 사려고 했다. 도일은 천신만고 끝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검술도 모르는 몸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후 도일은 추격의 손길을 피해 정신 없이 도망치는 것이 일상사가 되어버렸다. 세상 그 누구도 도일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복수할 수단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돌던 그는 결국 마법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흑마법 뿐이었다. 계획의 일환으로 도일은 우선 아내의 먼 친척 뻘인 칸두라스 왕국의 트란벨 남작을 찾아갔다. 그는 유일하게 도일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오랜 고심 끝에 도일은 아들을 그곳에 맡겼다. 지금까지 트루베니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성을 지어주며 말이다. "네 성은 이제부터 브로큰하트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며 복수를 하는 그 날까지 너와 나는 브로큰하트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프록시아라는 성을 영원히 버린 뒤, 도일은 눈물을 뿌리며 어린 아들과 이별을 했다. 나중에라도 아들을 찾으려 한다면 오로지 브로큰하트라는 성만이 유일한 단서가 될 것이었다. ―그 이후 나는 흑마법의 길을 걷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스승 브리즈만을 만나 그에게서 마법을 배우고 지금의 자리에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도일은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갖춘 흑마법사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아들을 찾을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칸두라스 왕국을 찾아간 도일이 본 것은 다 허물어져버린 트란벨 영지의 저택뿐이었다. 트란벨 가문도 이미 종교분규의 여파에 휘말려 멸문해 버렸던 것이다. 물론 아들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조차 알지 못했다. "나는 오늘부터 헬프레인 가문의 멸망을 위해 살아갈 것이다." 도일은 복수의 일념 하에 목숨을 걸고 마법을 익혔다. 어쩌면 그가 고위급 흑마법사가 될 수 있었던 배후에 이런 집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지도 몰랐다. 늦은 나이에 마법사의 길을 택했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복수심의 날을 세워나가는 도일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권력의 맛에 현혹된 헬프레인 공작이 그만 황제의 자리에까지 눈독을 들이다 숙청되어버렸다는 소문이었다. 헬프레인 가문은 당연히 풍비박산이 나 버렸다. 남자들은 남김없이 목이 잘렸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시장에 팔리는 신세가 되었다. 도일은 정말 어이없이 복수할 대상을 잃어버렸다. 천만 다행인 것은 프록시아가의 멸문에 결정적인 원흉인 쉐르나가 요행히 몸을 피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삶의 목적을 되찾은 도일은 또다시 마법 수련에 매달렸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만은 자신의 손으로 잡아죽여야 했던 도일이었다. 그러나 수련하는 도중 암흑전쟁이 터질 줄은 도일은 꿈에도 짐작 못했다. ―나는 암흑전쟁 도중 스승을 잃었다. 아니 죽게 내버려두었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이겠지. 하지만 그 덕에 난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복수를 할 방법은 여전히 없었다. 크로센 대제 휘하의 소드 마스터에 의해 사로잡혀 꼬박 30년 동안을 지하 감옥에서 살아야 했으니 말이다. 어둠 속에서 보낸 30년의 기간. 가문을 무너뜨릴 당시 이미 60세가 넘었던 쉐르나였다. 그녀가 살아있기를 바라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었으니……. 도일의 사정을 전해듣던 데이몬의 얼굴에 점차 만감이 교차해가고 있었다. 스승 역시 자신에게 결코 못지 않을 정도로 기구한 과거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니……. 꿈결처럼 전해지는 스토리를 데이몬은 그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단지 스승이 저장시켜 놓은 메시지였기 때문에 물어볼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데이몬이었다. ―이것이 내가 살아온 과거사이다. 그러니 데이몬. 네가 혹시라도 브로큰하트라는 성을 가진 아이를 만나게 된다면 단 한마디만 전해다오. 못난 아비가 찾아가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네가 하는 당부이다. 부디 강한 마법사가 되어다오. 설사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능히 꺾을 수 있는 강력한 마법사 말이다. "하, 하지만 그 강력한 드래곤을 제자가 어떻게……."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도일의 음성은 계속 전해졌다. ―드래곤과 대등하게 싸우기 위해서는 오로지 한 가지 방법 밖에 없다. 네크로멘서가 되어 싸우는 방법. 그것도 스켈레톤이나 구울 따위를 다루는 하찮은 소환술사가 아닌 진정한 네크로멘서가 되어야 한다. 데스 나이트나 다크 쉐이드 정도의 강력한 마물들을 소환해서 함께 싸운다면 드래곤에게 섣불리 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8써클의 고위급 흑마법사가 된 이후 소환술을 배워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너는 ……. 음성은 네크로멘서가 되는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다. 아마도 그 과정은 도일이 평생동안 꿈꿔왔던 것일지도 몰랐다. 계속해서 전해지는 메시지를 데이몬은 정신 없이 경청했다. 비록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도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데이몬은 또다시 혼절해 버렸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제법 시간이 지난 후였다. "이곳은 또 어디지." 꽉 막힌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눈꺼풀을 들어올릴 수가 없어서 데이몬은 한 동안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무언가가 묵직하게 몸을 누르고 있었지만 도무지 힘이 없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한 참이 지난 후에야 그는 겨우 사물을 식별할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린 뒤 그가 제일 먼저 본 것은 반쯤 타 버린 한 구의 시신이었다. 그 시신이 지금까지 데이몬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몬은 안간힘을 쓰며 시신을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중장 갑주를 걸쳐 무거웠기 때문에 시신은 도무지 밀려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데이몬의 시선이 우연히 시신의 얼굴 부분으로 향했다. 순간 그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아, 아니?" 시신의 정체는 놀랍게도 맥밀란이었다. 화기로 인해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지만 데이몬은 능히 얼굴이 알아볼 수 있었다. 친구인 맥밀란이 엎드린 자세로 데이몬을 덮은 채 숨이 끊어져 있었던 것이다. 깜짝 놀란 데이몬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매, 맥밀란." 물론 대답이 있을 리가 없었다. 특이하게도 그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고 나서야 데이몬은 비로소 기절하기 전의 상황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최후의 순간 그를 목표로 날아들던 저주스러운 불덩어리까지 모두 말이다. "그렇군. 그가 막아 주었기에 내가 죽지 않았던 것이로군." 불연 듯 슬픔이 밀려들었다. 맥밀란이 자신을 지켜주고 생을 마감하다니……. 절친하던 지인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곁을 떠나갔다는 사실이 정말 한스럽기만 했다. 데이몬은 한동안 하늘을 쳐다보며 몸을 가늘게 떨었다. 한참만에 입이 열렸다. "복수할 대상에 한 놈을 더 끼워 넣어야겠군. 우선적으로 말이야. 베르키스라고 했던가? 스승과 맥밀란을 죽인 드래곤이……." 불행하게도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는 인간 하나가 자신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빼들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누워서 몸이 회복되기만을 기다리던 데이몬의 귀에 어렴풋이 무슨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비명 소리 같은데……." 조금 시간이 지나자 데이몬은 드디어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살며시 맥밀란의 시체를 밀어낸 데이몬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우욱." 힘을 주자마자 전신의 뼈마디가 아우성을 쳤고 사지에서 심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도리어 그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통증을 느낀다는 것은 몸의 상태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므로……. 자리에서 일어난 데이몬은 우선 몸을 살폈다. 당연한 말로 전신은 성한 구석이 없었다. 그 공포의 마법 공격에 격중당하고 살아난 것은 어찌 보면 천행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리 맥밀란이 막아주었다고 해도 말이다. 드러난 피부 대부분이 화상을 입어 물집이 잡혀 있었고 머리털은 물론 눈썹까지 홀랑 타버리고 없었다. 그래도 눈이 멀지 않았던 것은 맥밀란이 가슴부분으로 가려주었기 때문이리라……. 다행히 뼈가 부러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데이몬은 우선 주위를 살펴보았다. 부근은 온통 시체천지였다. 인간과 오크, 두 종족의 시신이 한데 엉켜 싸늘히 식어있는 모습은 격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데이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황을 봐서 누가 승리했는지 명백해 나타나는군." 만약 인간 쪽이 승리했다면 널브러진 시신들을 그냥 두진 않았을 것이다. 반면 오크 족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시신을 수습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식량으로 삼기 위함이다. 때문에 데이몬은 전투가 오크의 승리로 끝났다고 단정했다. 그는 맥밀란의 시신에 다시 한 번 시선을 두었다. 등뼈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을 정도로 참혹한 모습. 몸의 반이 타버릴 정도였으니 아마도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데이몬을 감싼 몸을 풀지 않았다. 데이몬의 눈에 뿌연 습막이 서렸다. "맥밀란. 걱정말고 편히 가라. 어떤 일이 있어도 너의 복수를 해 주겠다." 잠시 맥밀란을 응시한 데이몬은 다시 한 번 몸을 점검했다. 우선 오른 손의 변형 마법 지팡이는 무사했다. 수정구슬도 깨어지지 않은 상태였고 연결된 가죽끈도 무사했다. 하지만 몸의 상태가 워낙 엉망이라서 마법을 펼칠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 "빠져나갈 가능성이 다소 낮아지겠군." 상황을 봐서 이곳은 이미 오크의 점령 하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발견된다면 무척 힘겨운 접전을 치러야만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그 때 멀리서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일단 무슨 일인지 저곳으로 가봐야겠군." 마음을 정한 데이몬은 최대한 몸을 낮춘 뒤 그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사, 살려주시오." 공포로 초죽음이 된 병사 하나가 부들부들 떨며 연신 손을 비벼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를 에워싼 존재들은 말이 통하는 종족이 아니었다. 전신이 녹색 피부로 덮인 땅딸막한 체구의 종족들. 전신을 거친 갑주로 감싸고, 비어져 나온 울퉁불퉁한 근육에서 강한 힘이 절로 느껴지는 오크 보병들이었다. 비웃음 섞인 눈길로 살려달라고 빌어대는 병사를 쳐다보던 오크들은 잠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지껄여댔다. 잠시 후 한 마리의 오크가 다가와서 병사의 투구를 벗겨낸 뒤 머리칼을 쭉 잡아당겼다. "크윽." 머리털이 빠지는 듯한 통증에 병사는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퍼런 칼날이 목덜미를 사정없이 끊고 지나가자 비명소리는 금세 바람 새는 소리로 바뀌어버렸다. 병사의 얼굴은 바닥에 떨어진 채 핏줄기를 간헐적으로 뿜어댔다. 오크 한 마리가 다가와서 아직까지 얼굴근육을 실룩거리는 병사의 머리통을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데굴데굴 굴러간 머리통은 사람의 수급이 산더미처럼 쌓인 곳에서 멈췄다. "취익. 다음." 불쌍하게도 포로들은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을 기다리며 오들오들 떨 수밖에 없었다. 오크 보병 둘이 다가와 목이 떨어져나간 몸통을 치워버린 뒤 다음 희생자가 그 자리로 끌려왔다. 그 역시 머리통이 잘려나가는 신세에서 면할 수 없었다. "포로에 대한 처형식인가?" 데이몬은 시체더미 사이에 은폐한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교적 가까이 접근한 상태였지만 사각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어 눈치챈 오크는 없었다. 잠시 장내를 지켜보던 데이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불쌍하군." 물론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는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처형되고 있는 병사들은 대부분 심한 상처를 입고 사로잡힌 부상병들. 자신 역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저들을 구해내어 빠져나갈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72회. 불쌍해도 자신으로썬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오크들도 사로잡히면 같은 신세가 되니 할 수 없는 노릇이지." 처형장면을 잠시 지켜보던 데이몬은 슬금슬금 몸을 움직여 뒤로 빠져나왔다. 잠깐 훑어본 것으로 오크 경계병의 위치와 병력 배치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시체더미 뒤로 물러 나온 데이몬은 지체 없이 그곳을 뜨려 했다. 그때 무언가가 그의 바지춤을 꽉 움켜잡았다. '윽.' 등골이 서늘했지만 데이몬은 결사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돌려보았다. '다행이로군.' 바지춤을 붙잡은 것이 시체더미에서 불거져 나온 사람의 손이란 것을 알아차린 데이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허리를 굽혀 손가락을 풀어내려 하자 시체더미 사이에서 앳된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새어나왔다. "사, 살려주세요." 미약하기는 하지만 부상을 입은 것 같진 않은 목소리였다. 데이몬은 최대한 소리를 죽여가며 시체더미를 헤쳤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곧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애잖아?' 그곳에는 이제 열 대여섯 남짓해 보이는 소년 병사 하나가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숨어 있었다. 데이몬과 같은 복색인 것을 보니 이카롯트 소속이었고 표식을 봐서 귀족 출신의 부대장인 듯 했다. 그러나 군복에는 이리 저리 피가 묻어있을 뿐 찢어진 곳이 없이 멀쩡한 편이었다. 접전을 치렀다면 군복이 이리 온전할 리가 없었다. 잠깐 훑어본 것만으로 상황을 대충 짐작한 데이몬이었다. "갑옷을 모조리 벗고 숨어버렸군. 귀족 주제에 싸우는 것이 무서워서 그랬나?" 데이몬의 어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평민 출신 병사들도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마당에 솔선수범이 되어야 할 귀족 부대장이 싸우지도 않고 숨어버렸다는 사실. 거기에 부아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데이몬은 소년을 그냥 내버려두고 그 자리를 떠나려했다. 죽던 말던 그것은 소년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소년의 말에 그는 결국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냥 간다면 소리를 질러버릴 거예요." 고개를 돌린 데이몬은 성난 시선을 소년에게 던졌다. "같이 죽자는 뜻인가?" "그래요. 남아있으면 어차피 살 수 없을 테니 말이에요." 황당해진 데이몬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보아하니 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네 발로 가지 그러나?" "무서워서 도, 도저히 걸음을 뗄 수가 없는걸요?" 할 수 없이 데이몬은 허리를 굽혀 소년을 부축해 일으켰다. 하얗게 질린 소년의 얼굴에 다소나마 혈색이 돌았다. "고, 고마워요. 제 이름은 디트리히라고 해요." "살고 싶다면 아가리 닥치고 가만히 있어." 처음 들어보는 험악한 욕설에 디트리히라는 소년 부대장은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귀족이 언제 이런 욕설을 들어보았을까. 데이몬은 주의 깊게 사방을 살피며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소년은 놓칠세라 재빨리 데이몬의 뒤를 따랐다. 오크 보초병은 사방에 깔려있었다. 그러나 수호마왕군 시절부터 기습과 침투에는 이력이 날 만큼 난 데이몬이었다. 그 때의 경험을 떠올린 데이몬은 오크 감시병의 눈길을 피해가며 조심스럽게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군복을 보니 같은 소속 같은데 도대체 어디에서 근무했습니까?" 오크 점령지를 무사히 빠져나온 뒤 디트리히는 집요할 정도로 데이몬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사히 빠져나온 것은 전적으로 데이몬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데이몬의 생존능력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뛰어났다. 인간에 비해 후각과 청각이 뛰어난 오크 보병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라 빠져나오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데이몬은 그런 사지를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헤쳐 나온 것이다. "키륵." 간혹 가다 맞닥뜨리는 보초병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숨통이 끊어졌다. 비록 마법을 전개하진 못했지만 특유의 몸놀림은 여전히 살아있는 데이몬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둘은 날이 밝기 전에 오크 점령지를 벗어나 카르나틱 평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혹시 어새신으로 복무했나요? 실력을 보니 그런 것 같아요." 계속되는 질문을 견디지 못해 데이몬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초리엔 진득한 살기가 배어있었다. "더 이상 주둥이를 나불댄다면 가장 손쉬운 방법을 쓰도록 하겠다." "소, 손쉬운 방법이오?" "죽은 자는 말을 못하는 법이지. 그것도 영원히 말이야." 기가 질린 디트리히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상대는 도무지 말이 통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군복의 형태를 보아 결코 나보다 상급자는 아닌 듯 싶은데……. 표식이 모두 타버려 알아볼 수가 없으니 원.' 군복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심하게 그슬린 나머지 도무지 용모를 분간할 수 없었다. 밤에 빠져 나올 때는 몰랐지만 날이 밝자 디트리히는 데이몬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범인이라면 운신도 하지 못할 중상을 입고도 자신을 구해준 자는 신음 한마디 뱉지 않았다. 피부에 온통 물집이 잡혀 있는 것을 봐서 고통이 보통이 아닐텐데 말이다. 우선 확연히 알 수 있는 것은 상대의 키가 무척 작다는 것과 등이 굽은 꼽추란 것이었다. 그러나 그밖에 신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데이몬이 다시 출발하는 것을 보자 디트리히는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그만 따라간다면 무사히 이곳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디트리히는 굳게 믿고 있었다. 이미 십여 명의 오크 보초병을 소리나지 않게 살해한 것을 보아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는 자였다. 둘은 그렇게 방향을 서쪽으로 잡고 한동안 걸어갔다. 굳게 닫힌 채 벌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데이몬의 입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 한 참이 지난 후였다. "혹시 펠드리안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나?" 디트리히는 반색하며 그의 말을 받았다. "네, 알고 있어요. 여기서 해가 지는 방향으로 약 일주일 거리에 펠드리안이 위치하고 있어요." "혹시 가 본적이 있나?" 디트리히는 어깨를 으쓱했다. "펠드리안에서 이곳까지는 아버님과 예전에 사냥을 많이 다녀보았기 때문에 지리엔 무척 익숙합니다." "사냥? 흥. 팔자 편한 소리로군." 냉소섞인 비웃음에 잠시 움찔한 디트리히였지만 일단 상대의 말문이 트였단 사실에 기가 살았다. 디트리히는 곧 자신의 신분에 대해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은 상대의 관심을 끌려하는 행동일지도 몰랐다. "제 아버지는 펠드리안에서도 명망 높은 브릭스 후작입니다. 저는 아버님과 함께 이번 전쟁에 참전했었지요. 원래는 후퇴 명령이 떨어졌을 때 바로 퇴각해야 했지만 그만……." "겁에 질려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단 말이지?" 일순 말문이 막힌 디트리히. 계속해서 이죽거리는 데이몬의 말투에 슬며시 부아가 치밀어 오른 것은 아마도 귀족이라는 자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단 오크의 점령지를 벗어났기 때문에 공포심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또한 상대의 말투가 전형적인 평민의 그것이었기 때문에 깔보는 마음이 절로 생겨났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귀족 신분인 제가 이례적으로 공대를 해 드리는데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제 신분에 걸맞는 대우를 해 주십시오. 일단 저를 구해준 보답은 펠드리안에 도착하면 충분히 해 드리겠습니다." 잠시 디트리히의 얼굴을 쳐다보던 데이몬은 코웃음을 쳤다. "싸우지도 않고 시체 밑에 숨어버린 겁쟁이에게 해 줄 대우란 없어." 결국 디트리히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저는 이 모욕을 참을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결투를 신청하겠습니다." "결투? 네가?" "브릭스 가문은 펠드리안에서도 이름높은 무가입니다. 얕보지 마십시오." 말을 마친 디트리히는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피가 한 방울도 묻어있지 않아 예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적을 향해 휘둘러보지 않은 검임을 금세 알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디트리히가 취한 자세는 의외로 빈틈이 없었다. 한 눈에 보더라도 기본기를 충실히 닦았음을 알 수 있었다. 상대가 검을 뽑아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제법 기본기가 탄탄해 보이는군. 하지만 실전경험이 없으면 말짱 헛수고라고 말해 두지. 기껏해야 전장에서 시신의 수나 늘인다면 다행일까?" "공격하겠습니다. 이야압." 더 이상 참지 못한 디트리히가 선제공격을 가했다. 양손으로 움켜 쥔 장검이 벼락같이 데이몬의 허리춤을 목표로 폭사되었다. 데이몬은 슬쩍 허리를 뒤틀어 공격을 흘려보냈다. "제법이군." 뜻밖의 실력에 데이몬은 다소 놀란 눈치였다. 겁에 질려 숨어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건만 의외로 소년의 검술 실력은 훌륭한 편이었다. 균형도 잘 잡혀 있었고 검을 휘두르고 나서의 무게 중심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어지간한 기사에 필적하는 실력이었다. 하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소년은 결코 데이몬의 상대는 될 수는 없었다. 실전경험의 차이에서 둘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격차가 존재하고 있었다. 더욱이 갑주를 입지 않아 소년의 전신이 훤하게 드러나 있는 상태이니……. "크윽." 묵직한 신음소리와 함께 디트리히는 벌렁 나가자빠졌다. 왼 손의 건틀릿으로 검을 슬쩍 퉁겨낸 데이몬이 바짝 붙어 디트리히의 구미혈, 즉 명치를 그대로 가격해 버린 것이다. 태양신경총에 충격을 받은 디트리히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물론 구미혈은 혼혈에 속하는 혈도이므로 생명에는 별달리 지장 없을 것이었다. 쭉 뻗어버린 디트리히를 내려다보던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괜한 짓을 했군."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애송이에게 쓴맛을 보여준 것은 좋았지만 그가 깨어날 때까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할 수 없이 데이몬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으므로 마법을 전개할 수 있어야만 이곳을 벗어나가기 용이할 터였다. "만에 하나 와이번에게 발각될 경우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면 그 즉시 죽은목숨이라 봐야 한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데이몬은 끈기 있게 마나를 통제해 나갔다. 보람이 있었던지 주위의 마나가 서서히 통제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되었어." 데이몬은 만면에 희색을 떠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디트리히도 정신이 들었는지 얕은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끄응." "일어나라. 애송아." 부스스 눈을 뜬 디트리히의 눈동자엔 경악의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상대가 검도 들지 않은 맨손으로 자신을 넉아웃시키다니……. 사실 심약한 성격과는 달리 디트리히의 검술 실력은 같은 연배에선 손꼽히는 실력이라 말할 수 있었다. 소드 마스터인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혹독하게 조련시킨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대 일 대결에서는 상대가 근위대 기사라도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평민 출신의, 검도 들지 않은 상대에게 단 방에 기절해 버리다니……. "수련은 제법 한 것처럼 보이지만 네 검은 겉보기만 화려할 뿐이다. 생과 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선 전혀 쓸모 없는 검술의 전형이라 말할 수 있지." "가문의 검술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이래 뵈도 제 아버님은 소드 마스터이십니다." 예상치 못한 상대의 실력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디트리히는 아직까지 기가 죽지 않았다. 그러나 진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엔 패배감이 짙게 배어있었다. "소드 마스터라고 특출난 것은 아냐. 난 이미 소드 마스터와 무수히 싸워본 경험이 있지." 짧게 내뱉은 데이몬은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갔다. 깜짝 놀란 디트리히는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물론 상대가 내뱉은 말은 그의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암, 말도 안되고 말고, 소드 마스터가 어떤 존재인데……. 필시 그는 지금까지 소드 마스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거야.'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73회. 그 때부터 둘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오크 군이 진군하고 있는 마당이라 간혹 가다 만나는 마을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대부분의 주민들은 후방으로 멀찍이 피난을 가 버린 지 오래였다. 이것은 인간끼리가 아닌 오크라는 종족과의 전쟁이기 때문에 전쟁의 양상이 사뭇 달랐다. 다시 말해 인간끼리의 전쟁이라면 주민들이 이처럼 마을을 비워놓고 피난을 갈 필요가 없다. 전쟁터에서 기사와 병사들이 피 튀기게 싸워 승부를 가르면 주민들은 그저 이긴 쪽에 충성을 맹세한 채 소작료만 납부하면 되는 일이었다. 처신만 잘한다면 목숨이 위태로울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만은 달랐다. 오크들은 점령지의 주민들 중 자신들에게 필요한 노예를 제외하곤 모조리 학살해 버린다. 이것은 오크 점령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간혹 목숨을 건진 사람이라도 평생을 오크의 노예가 되어야 했다. 광산이나 농장, 혹은 무기 제조창에서 평생을 햇빛도 보지 못한 채 죽도록 일만 해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지금 침공해 온 오크들은 인간에게 밀려 무려 오십 년 동안이나 황량한 펠루시아 산맥에서 힘들게 살아가야 했던 자들이었다. 인간에 대한 증오심이 자연히 지대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다. 그런 이유로 마을은 완전히 황폐화되어 버린 상태였다. 들녘을 가득 메운 밀은 누렇게 익은 채 썩어갔고, 때를 잘 만난 철새 떼들만 뜻밖의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데이몬과 디트리히는 밀밭에 몸을 숨긴 채 조심스럽게 펠드리안 방면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새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주의해라." 짤막하게 내뱉은 채 앞으로 나아가는 데이몬의 등허리를 디트리히는 무척 못마땅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게 저 자는 자신의 신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반말로 일관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과 대화를 나누기도 싫은 양 꼭 필요한 말만 짧게 내뱉을 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이 그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라 디트리히는 묵묵히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펠드리안에 도착하기만 해 봐라. 아버님에게 부탁해서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다.' 디트리히의 이런 꿍꿍이를 모르는지 데이몬은 계속해서 풀숲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같이 가요." 디트리히는 새를 조심하라는 당부도 잊고 허겁지겁 그의 뒤를 따랐다. 그 때 다급하고 짤막한 경고성이 들려왔다. "쉿! 몸을 낮춰라." "무, 무슨 일이죠?" 데이몬은 어느새 밀 사이로 몸을 숨긴 상태. 하지만 디트리히는 경고소리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도리어 큰 소리로 되묻고 있었다. 그 바람에 밀을 쪼아먹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파드드드득. "이런 병신같은 자식. 숙여!" 나지막한 욕지거리가 들려오자마자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귀를 찢는 듣한 파공성과 함께 그를 덮쳤다. 동시에 들려온 광포한 포효소리. 새들이 날아오른 것과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헉." 깜짝 놀란 디트리히는 머리를 감싸고 그대로 넙죽 엎드렸다. 그것이 디트리히에겐 천만다행이었으니……. 피와 살점이 말라붙어 있는 긴 발톱이 디트리히의 등허리를 쭉 가르고 지나갔다. 끔찍한 통증에 디트리히는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아악." "콰우우우." 비명소리에 대응하듯 여기저기서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밀밭 군데군데서 중형 몬스터들이 잇달아 모습을 드러냈다. 오우거 한 마리와 트롤 두 마리였다. 그들을 통제하는 듯한 오크 보병도 서넛 모습을 보였다. 부근에서 인간 사냥을 벌이고 있었는지 놈들은 전신이 피로 물든 모습이었다. 조금 전 디트리히를 낚아채려 한 것은 바로 와이번이었다. 와이번은 또다시 디트리히를 노리고 급강하를 시작했다. 그것이 신호인 듯 오크 보병들은 디트리히를 향해 맹렬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도, 도와줘요." 디트리히는 곧 패닉상태에 빠져버렸다.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위용을 과시하는 중형 몬스터들이 하나도 아니고 넷씩이나 자신을 목표로 달려오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데이몬을 향해 과시했던 자신감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는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인 데이몬을 애타게 찾았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도, 도망쳤나봐." 앳된 얼굴이 삽시간에 시커멓게 죽어들었다. "콰우우." 이미 오우거 한 마리가 바로 앞으로 다가와서 커다란 방망이를 하늘 높이 치켜든 상태였다. 과연 빠르기로 정평 있는 오우거다웠다. 한 대 맞는다면 그대로 떡이 되어버릴 정도의 몽둥이가 디트리히를 향해 내려쳐졌다. 디트리히는 눈을 크게 뜬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절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공포심이 너무 컸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 무언가가 디트리히의 앞을 휙 스쳐지나갔다. "엉?" 디트리히의 눈동자가 급격히 커졌다. 막 방망이를 내려치려던 오우거의 몸이 굳어진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무언가가 분간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트롤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막 도달한 트롤 세 마리도 오우거와 마찬가지로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정체 불명의 그림자가 다음 차례로 노린 것은 지면에 거의 닿을 듯 내려온 와이번이었다. "케르르르." 뭔진 모르지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한 와이번은 날개를 활짝 펼치며 다시 날아오르려 했다. 퍼펑. 순간 눈앞이 갑자기 깜깜해지며 극렬한 통증이 몰려왔다. 와이번의 동공은 이미 산산이 터져 나간 채, 핏물이 분수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창촐지간에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와이번은 날아오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날개를 퍼득였다. 그러나 와이번의 거대한 몸은 이미 지면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이미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콰쾅. 굉음과 함께 바닥에 격돌한 와이번 주위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먼지 구름으로 인해 장내를 누비고 있던 물체의 형태가 희끄무레하게 드러났다. 헤이스트의 효력이 다해버린 것이다. 장내에는 곧 데이몬의 왜소한 모습이 드러났다. "취익. 인간이다." "죽여라." 비로소 상황을 알아차린 오크 보병들이 두 눈에 살기를 맹렬히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중형 몬스터들이 꼼짝달싹 못하고 굳어버린 것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헉, 헉." 데이몬은 다소 난감한 기색이었다. 피부가 질긴 것만 믿고 갑주를 입지 않는 오우거가 데이몬에겐 차라리 편한 상대였다. 비록 거칠기는 했지만 오크들은 철제 갑주로 중요 요혈을 가리고 있었으므로 데이몬이 노릴 만한 혈도는 엄연히 한정되어 있었다. 지금의 몸 상태로 혈도를 정확히 제압할 자신은 없었다. 더욱이 온전치 못한 몸으로 헤이스트를 전개했기 때문에 정신마저 아득해져 왔다. 피로감이 중첩된 때문이었다. 혀를 지긋이 깨물어 정신을 차린 데이몬은 건틀릿을 움켜쥐고 달려오는 오크들 사이를 파고 들어갔다. 마주 달려오는 데이몬을 보자 한 오크가 글레이브를 일직선으로 찔러왔다. "에잇." 몸을 슬쩍 젖혀 글레이브를 피해낸 뒤 데이몬은 글레이브 자루를 옆구리로 꽉 붙들었다. 그리고 드러난 오크 보병의 인후혈에다 건틀릿에 달린 송곳을 찔러 넣었다. "케륵." 미약한 신음성과 함께 상대의 목에서 피보라가 솟구쳤다. 급급히 건틀릿을 잡아 뺀 데이몬은 살기를 느끼고는 반사적으로 몸을 납작 수그렸다. 서걱. 날카롭게 날이 선 글레이브 두 자루가 시기적절하게 등허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데이몬은 엎드린 자세 그대로, 만들어낸 매직 미사일 한 발을 날렸다. 중형 몬스터들을 제압하느라 끌어 모은 마나를 대부분 소진했기 때문에 이것이 그가 쏠 수 있는 마지막 매직 미사일이었다. 파파팍. 그것은 바로 눈앞에 있던 오크 보병의 투구 사이를 파고 들어갔다.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해서 글레이브를 찍어 넣던 놈이었다. 바로 코앞에서 날린 것이라 피할 수도 없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오크 보병이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데이몬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순간 허벅지에서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데이몬은 통증을 꾹 눌러 참았다. 왼손을 묘자권으로 거머쥔 데이몬은 몸을 빙글 돌리며 허벅지를 찌른 오크 보병의 인중을 그대로 가격했다. 오크 보병의 투구는 인간 병사들과 달리 얼굴 아랫부분이 훤히 터져 있었기 때문에 데이몬의 공격은 정통으로 먹혀 들어갔다. 퍽. 앞니가 우수수 부러져나간 오크는 얼굴을 감싸안은 채 뒤로 나가 떨어졌다. 숨을 몰아쉴 틈도 없이 데이몬은 마지막 남은 오크 보병을 향해 육박해 들었다. 한 쪽 다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다가서는 모습이 마치 악귀를 연상케 했다. "췩, 취익." 기세에 질렸는지 오크 보병이 글래이브를 맹렬히 휘두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데이몬의 몸은 거의 본능적으로 글레이브의 사각을 파고 든 상태였다. 둘은 곧 한 덩어리가 되어 땅을 뒹굴었다. 슈각. 건틀릿에 달린 송곳이 인후혈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오크 보병은 질펀하게 피를 흘리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헉, 헉." 한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던 데이몬이 겨우겨우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정확히 디트리히가 서 있는 방향이었다. 디트리히는 아직까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도저히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데이몬은 그런 디트리히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냉랭히 내뱉었다. "지금 당장 뒤처리를 하도록 해라." "네? 뒤, 뒤처리라뇨?" "아직까지 살아있는 놈들의 명줄을 끊으란 말이다. 죽고 싶지 않다면 지금 즉시 시행해라." 데이몬의 으르렁거림에 디트리히는 어쩔 수 없이 검을 쥐고 걸어갔다. 오크 보병 둘은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는 상태였다. 매직 미사일과 묘자권에 얻어맞은 놈들 말이다. 그는 무척 엉거주춤하게 선 자세로 누워있는 오크 보병의 가슴팍에 검을 찔러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오크는 결코 고분고분 죽어주는 종족이 아니었다. "헉." 느닷없이 달려든 오크 보병이 정강이를 꽉 물어버리자 디트리히는 고통에 찬 비명성을 터뜨렸다. 그의 손에서 장검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통증에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그는 필사적으로 양손을 뻗어 다리를 물고 있는 오크의 입을 벌리려 했다. 그러나 꽉 다물린 오크의 입은 도무지 요지부동이었다. 엄니가 살을 파고들며 피가 줄줄줄 흘러나오자 디트리히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정말 쓸모 없는 놈이로군." 냉랭한 비웃음소리와 함께 검광이 번뜩였다. 서걱. 오크 보병의 목이 다리를 문 상태 그대로 떨어져나갔다. 핏줄기가 확 뿜어져 디트리히의 얼굴을 적셨다. 자신도 모르게 팔 소매로 얼굴을 정신 없이 훔치는 디트리히. "피를 덮어쓰는 것이 무서운가 보지?" 디트리히를 향해 한 번 으르렁거린 데이몬은 나머지 오크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의 손에는 디트리히가 떨어뜨린 장검이 들려 예기를 발하고 있었다. 슈각 두 번째 오크의 목도 간단히 잘려나갔다. 목숨을 끊는데 추호도 머뭇거림이 없는 데이몬이었다. 물론 매직 미사일에 마혈이 제압된 중형 몬스터들도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데이몬은 먼저 그것들의 다리힘줄을 잘라 쓰러뜨린 뒤 눈구멍에다 사정없이 장검을 찔러 넣었다. 뇌를 관통 당한 중형 몬스터들은 끽소리도 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데이몬은 마지막으로 눈이 멀어버린 와이번을 처리했다. 먼저 돌을 던져 와이번의 주의를 반대쪽으로 분산시킨 다음 드러난 급소인 귀 밑 비늘 사이로 깊숙이 검을 찔러 넣자 와이번 역시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쨍그렁. 디트리히의 발치에 장검을 던져 준 데이몬은 한심하다는 듯 뇌까렸다. "주인을 잘못 만난 검이로군." 말을 마친 데이몬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오크란 종족이 무기를 손질할 턱이 없었기 때문에 글레이브 날에는 오래된 피와 살점이 그대로 말라붙어 있었다. 상처를 그대로 둔다면 덧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우선 모닥불을 피웠다. 그런 다음 데이몬은 오크 보병이 떨어뜨린 글레이브의 자루를 잘라내어 불에 달궜다. 치이이익. 시뻘겋게 단 금속이 상처를 파고 들어가자 데이몬의 이마에 심줄이 툭툭 불거졌다. 꽉 다문 입술이 마치 경련하듯 떨렸다. 하지만 신음소리는 일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미 칠종단금술에 단련될 대로 단련되어 참을성엔 일가견이 있는 데이몬이었다. 그 모습에 디트리히는 상처의 통증도 잊은 채 입을 딱 벌리고 데이몬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74회. 어제는 시골에 다녀오느라 올리지 못했습니다. 예고 없이 연중해서 죄송하네요.^^ *************************************************************************** 그 일 이후로 디트리히는 말을 잊은 듯 했다. 그저 굳은 표정으로 데이몬을 펠드리안이 있는 곳으로 안내할 뿐이었다. 둘은 그렇게 펠드리안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잘 된 일이로군." 데이몬도 디트리히의 돌변한 태도에 별달리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다. 죽음을 무릅쓰고 디트리히를 살려낸 이유도 바로 길 안내를 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물론 데이몬에겐 펠드리안에 꼭 가야할 이유가 있었다. 누군가를 꼭 만나봐야 했던 데이몬이었다. 스승 도일을 한 번 떠올려본 데이몬은 이를 으스러져라 꽉 깨물었다. '놈에게 책임을 꼭 묻고야 말겠다.' 생각에 팔려 걸음을 내딛는데 갑자기 옆에서 비장한 말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잔인해질 수 있죠?" 고개를 돌리자 입술을 꽉 깨문 디트리히의 얼굴이 보였다. 데이몬은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질문을 묵살해버렸다.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디트리히는 데이몬이 관심을 보이건 말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어릴 때부터 전 이런 제 성격이 싫었어요. 실전에만 돌입하면 얼어붙어 버리는 성격 말이에요." "………." "사람들은 절더러 대련 마스터라고 불렀어요. 물론 비웃음섞인 말이겠죠? 그래요. 전 대련에서만은 그 누구도 겁내지 않아요. 설사 상대가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말이에요. 하지만 실전에만 들어서면……, 피만 본다면 온 몸이 굳어버려서 꼼짝도 할 수 없어요. 심지어 강아지 한 마리도……." 디트리히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배어 있었다. "원래 전 징집 대상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전 자원해서 참전했지요. 전쟁터에서 싸우다보면 이런 제 성격이 고쳐질까 싶어서 말이에요. 하지만 결과는……." 디트리히는 결국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묵묵히 걸어가던 데이몬이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 데이몬의 얼굴은 무표정한 그대로였다. "여전히 사치스러운 말만 골라서 하는군." "………." "성격을 고치기 위해 전쟁에 자원했다. 허! 화살 받이로 죽어간 실더들이 듣는다면 기가 막혀 땅을 칠 노릇이군. 이봐!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아." 데이몬의 눈에서 어느덧 싸늘한 한광이 돋기 시작했다. "그런 말을 하는 자체가 배부른 소리란 걸 모르나? 하긴 지체 높으신 귀족들께서 어찌 평민의 삶을 아실 수 있을까, 혹시라도 넌 실더의 입장을 생각해 본 일 있나? 보급 물자를 아낀다는 목적 하에 방패하나 달랑 들고 최전방으로 내몰린 부상병들 말이야.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그들을 부대장을 시켜 두들겨 패고 심지어는 목까지 잘라 사지로 내 몬 놈들이 바로 너희 귀족 놈들이야. 아마도 넌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난 달라. 나의 가장 절친했던 친구가 실더로 전락했었었으니까……." "서, 설마?" "이번 전쟁에 얽힌 내막을 하나 더 알려줄까? 아마도 모르고 있었나 본데 똑똑히 알아두도록 해. 카르나틱 평원에 운집한 10만의 병력이 사실은 적의 진군을 늦추기 위한 소모품이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마, 말도 되지 않아요." "흥! 그래? 그럼 그 명성을 떨치던 이카롯트 기사단의 소드 마스터들은 다 어디로 갔지? 또 트루베니아 제일이라는 펠드리안 마법 군단의 모습을 카르나틱 평원에서 본 적이 있어?" "………." "아마도 너희 수뇌부 놈들이 미리 빼 돌렸겠지. 물론 지체 높으신 귀족 분들은 고스란히 목숨을 보존하셨을 테고……. 뭐, 그분들도 겁에 질려 시체더미 밑에 콕 박혀 있던 놈까지 챙길 여유는 없으셨을 테지만 말이야." 전과는 달리 디트리히는 일말의 반박도 하지 못했다. "세상은 보이는 그대로 믿는 게 아냐.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모든 일에는 가려진 반대쪽이 있다. 이제 네 고민이 그 자체로도 충분히 사치스럽다는 사실을 알겠나?" 냉랭하게 쏘아붙인 데이몬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디트리히는 마치 얼어붙은 듯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데이몬의 이죽거림은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다. 그날 날이 저문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적이다." 데이몬의 경고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검을 뽑아든 디트리히는 데이몬의 옆에 넙죽 엎드렸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추호도 머뭇거리지 않는 태도였다. 그 상태로 데이몬은 조심스럽게 적의 규모를 살폈다. 대략 10여 명 정도 되는 오크 보병들이 소리를 죽인 채 둘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상황을 보아 둘을 따라온 추적대인 모양이었다. 워낙 조용히 접근했던 터라 어지간한 데이몬도 미처 눈치채지 못할 뻔했다. 달빛에 반사된 글레이브의 예기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기습당해 곤경에 빠질 뻔했다. 데이몬이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죽은 놈들의 시체를 보고 추적해온 것 같군." "제가 무얼 어떻게 하면 되죠?" 옆에서 들려오는 비장한 말투. 데이몬은 뜻밖이라는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뭐 가능하다면 시간을 좀 끌어주었으면 좋겠군. 맞서 싸우던 도망치던 상관없겠지만 대략 일각 정도만 놈들의 주의를 끌어줄 수 있겠나?" 디트리히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검을 꼬나 쥔 채 서슴없이 적을 향해 달려나갔다. 디트리히의 돌변한 태도에 데이몬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놈이?" 그러나 적을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데이몬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곤 전력을 다해 부근의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챵챵챵 칼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호통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격투소리는 제법 오래 이어지고 있었다. 마법을 펼칠 만반의 준비를 마친 데이몬은 소리를 죽여 그곳으로 다가갔다. 이미 몇 개의 매직 미사일이 형성되어 오른 손 건틀릿 주위를 맴돌고 있는 상태였다. 뒤쪽으로 돌아간 데이몬은 우선 장내를 살펴보았다. 눈가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제법이로군." 추격해온 오크 보병은 정확히 여덟이었다. 그 중 하나는 이미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고 디트리히는 남은 일곱과 정신 없이 검을 나누고 있었다. 쓰러진 모습을 보아 죽은 놈은 아마도 기습을 당한 듯 했다. 신들린 듯 검을 휘두르는 모습. 디트리히의 모습에서는 지금까지의 심약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리저리 상처를 입었는지 몸 곳곳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추호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저 맹목적으로 공격과 방어를 해 낼 뿐이었다. 하지만 워낙 수적으로 열세인지라 점점 뒤로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헤이스트까진 펼칠 필요가 없겠군." 암암리에 놈들의 허점을 파악해 놓은 데이몬은 기회를 포착하자마자 벼락같이 내달았다. "이놈." 느닷없이 뒤에서 적이 등장하자 혼비백산한 오크들이 산개해서 대응하려 했다. 그러나 데이몬의 매직 미사일은 어느새 네 마리의 오크를 꺼꾸러뜨리고 있었다. 충분히 쉰 때문에 매직 미사일에는 충분한 마나가 주입되어 있었으며 정확도 역시 지칠 대로 지쳤던 어제와는 달리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켁." 오크들은 갑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부분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벌렁 넘어져 버렸다. 목젖 부분, 정확히 말해 치명적인 사혈이 위치한 인후혈이 으스러진 오크 보병들은 그대로 절명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취, 취익." 비로소 상황이 심각함을 느꼈는지 남은 오크들이 일제히 데이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여태껏 싸우고 있던 디트리히를 버려 두고 말이다. 하지만 이미 데이몬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데이몬은 남은 오크 보병들의 곁을 스치듯 지나가며 갑옷 틈새에다 매직 미사일을 박아 넣었다. "케륵." 상황은 곧 종료되었다. 바람의 속성을 가진 때문에 매직 미사일은 갑옷의 미세한 틈새라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또한 어둠에 묻혀 날아왔으므로 오크 보병들은 변변찮은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손을 툭툭 턴 데이몬은 다소 누그러진 듯한 눈빛으로 디트리히를 쳐다보았다. "해야 할 일은 이젠 알고 있겠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디트리히는 검을 역수로 틀어쥐곤 오크들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앞서 공격받은 오크 넷은 인후혈이 파열되어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 하지만 나중에 제압된 오크 셋은 완전히 죽지 않았다. 데이몬이 일부러 마혈을 제압했던 것이다. 그곳으로 다가간 디트리히는 이번에는 아무 머뭇거림 없이 검을 박아 넣었다. "키륵." 목 줄기를 정통으로 뚫린 오크는 축 늘어져버렸다. 디트리히는 머뭇거림 없이 다른 오크의 명줄을 끊어나갔다. 목의 동맥이 끊어지며 뿜어진 핏줄기로 인해 얼굴이 흠뻑 젖었지만 이번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마무리를 완벽하게 하고 다가온 디트리히를 보며 데이몬은 고개를 서서히 끄덕였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살고 싶으면 먼저 죽여라. 알겠나?" 디트리히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관절 당신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무슨 뜻이지?" "전 지금까지 당신을 어새신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당신은 결코 어새신이 아닙니다." "………." "아무리 실전경험이 없다 하나 어새신 따위에게 당할 제가 아닙니다. 당신의 몸놀림은 오랜 수련을 쌓은 기사의 수준에 육박합니다. 때문에 결투에서 패하고 난 뒤 난 당신을 신분을 감춘 기사로 간주했습니다. 물론 말투를 감안하면 평민 출신이겠지만 말입니다."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디트리히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새신(assassin:암살자). 각 왕국의 정보기관에서 암살이나 정보수집을 주목적으로 키우는 자들로써 철저히 비밀리에 양성되는 존재들이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중원의 살수(殺手)에 비견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어새신들은 첩자 교육까지 병행해서 받기 때문에 그리 검술실력이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 어새신들이 일반 기사와 겨뤄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기습 공격을 할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이들은 철저히 변칙적인 기습공격과 독 따위의 암수에 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방심할 경우 설사 실력이 뛰어난 기사라 해도 섣불리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어새신에 대한 개략적인 사실을 잠시 떠올려본 데이몬은 디트리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도대체 알고 싶은 게 뭐지?" 디트리히의 눈동자에 기이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오크들을 쓰러뜨릴 때 당신은 분명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오우거도 꼼짝못하게 할 정도의 강력한 마법을 말입니다. 순간적으로 지나갔지만 전 그것이 풍계 공격마법이란 것을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매직 애로우 같은 것 말입니다." 말을 마친 디트리히는 데이몬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고급 기사에 필적하는 몸놀림. 게다가 비교적 위력이 약한 풍계 공격마법으로도 능히 오우거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라면 정말 강력한 마법 실력을 가지고 있다 보아야겠지요? 거기에다 당신은 마법 지팡이도 없이 마법을 전개했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 "이 모든 사실에 대해 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집요한 질문에 진저리가 난 데이몬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깟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있을까?" "제겐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어째서 그렇지?" 디트리히의 손이 슬며시 검 손잡이를 잡아가고 있었다. "제가 아는 상식으로는 그것이 가능한 존재는 오로지 하나 뿐입니다. 바로 데스 나이트(Death knight) 말이지요. 마왕에 의해 깨워진,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아야 할 자들. 오직 그들만이 뛰어난 검술과 함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마치 당신같이 말이지요." 기가 막힌 나머지 데이몬은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데이몬을 보며 디트리히는 계속해서 자신만의 추리를 풀어나갔다. "일단 저는 당신의 상처에 유의했습니다. 그 상처는 보통 사람이라면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움직입니다. 다시 말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데스 나이트가 아니면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지요." "정말 대책이 없는 놈이로군." 부아가 치밀어 오른 데이몬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75회. 디트리히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좋다. 내가 데스 나이트라고 하자. 그렇다면 정체가 탄로 났으니 다음은 널 죽여 입을 막아야 할 차례가 되겠구나?" "그, 그건……." 디트리히는 당황하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순간적으로 드러난 허점, 데이몬은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달려들었다. 뒤이어 가죽 북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억." 데이몬은 복부를 움켜쥐고 나동그라진 디트리히를 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원칙대로라면 널 죽여 입을 막아야겠지. 난 데스 나이트니까 말이야. 하지만 할 일이 남아있으니 일단 널 살려 두기로 한다. 왜냐하면 난 펠드리안으로 가는 길을 전혀 모르니까 말이다." 숨이 탁 막힌 디트리히는 띄엄띄엄 말을 이어나갔다. "제, 제가 순순히 가르쳐드릴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자고로 말을 안 듣는 놈에겐 몽둥이가 특효약 약이라 했다. 두들겨 패다보면 가르쳐 줄 것이라 확신한다. 안 되면 할 수 없겠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무지막지한 데스 나이트(?)를 보며 디트리히는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매에는 장사 없다는 원칙은 중원이나 트루베니아나 다름없이 통용되는 사실이었다. 디트리히는 얼굴이 떡이 될 정도로 얻어터진 다음에야 고분고분해졌다. 결국 그는 데이몬을 펠드리안으로 공손히 안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데이몬의 의도가 뭔지는 정말로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결국 그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말을 걸고야 말았다.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대관절 왜 펠드리안으로 가려고 하는 거죠?" "허! 그놈 참 말 많군. 생각해 봐라. 마왕의 명령을 받은 데스 나이트가 뭘 하러 수도로 가겠는지 말이다." "요인에 대한 암살이나 혼란 조성, 이런 것 말입니까?" "암살이라……." 데이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목적은 펠드리안의 한 놈에게 스승을 죽게 한 책임을 물기 위해 가는 것이었다.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세르게이에게 말이다. 사실 거기에는 그가 세르게이에게 가지고 있던 반감도 한 몫을 했다. 생각만 해도 절로 분통이 치밀어 오를 정도로. "빌어먹을 새끼!." 원래대로라면 세르게이란 놈을 천참만륙시켜도 시원치 않을 데이몬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도일과 맥밀란이 자신의 곁을 떠났으며 8만에 달하는 죄 없는 병사들까지 함께 카르나틱 평원에 묻혀야 했다. 하지만 죽일 수는 없었다. 애석하게도 그에겐 칠종단금술이 있었기 때문이었었다. 물론 사준환에 이어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에게까지 받아내야 할 빛이 생겼기 때문에 복수를 하기 전 까지는 목숨을 아껴야 할 때였다. "뭐 죽일 생각까진 없고……. 카르나틱 평원에서 죽어간 8만 병사들의 원한에 대한 앙갚음을 조금 해 줄 생각이다." 디트리히의 눈이 동그래졌다. "앙갚음이라구요?" "화가 풀릴 때까지 실컷 두들겨 패놓아야지 분이 좀 풀릴 것 같다. 더도 덜도 말고 반쯤 죽을 정도만……." 하도 어이가 없었는지 디트리히는 실소를 지었다. "정말 이해하지 못 할 분이군요." "네놈도 그 상황에 내몰려봐라! 원통하지 않겠는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한 디트리히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 앙갚음에 저도 동참시켜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 "저도 느낀 바가 없진 않습니다. 어쨌든 저 역시 부대장이었으니까요. 비록 많진 않지만 제가 지휘하던 병사들도 대부분 죽었을 겁니다." "뭐, 못할 이유야 없지만……. 과연 네게 그럴 용기가 있을지 모르겠군. 그것도 데스 나이트와 함께 말이야." "방금 그 말로 당신이 데스 나이트가 아니란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데스 나이트가 인간 병사들에 대한 복수 따윌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또한 용기와 의협심이 대단한 분이란 것까지 함께요." "큼! 그 녀석 아부는……." 괜히 머쓱해진 데이몬은 손을 절래절래 흔들며 몸을 돌렸다. 그 이후로 둘은 비교적 평온한 여행을 해 나갔다. 디트리히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데이몬에게 무척 깍듯하게 대했다. 귀족이라는 신분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데이몬도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이었다. 물론 타고난 성정이 그런지라 디트리히를 대하는 태도가 180。달라진 건 아니었다. 면박도 주고 쥐어박아 가며 퉁명스럽게 대하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의 태도엔 정감이 서려있었다. 이따금 시간을 내어 디트리히의 검술을 지도해 주는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멍청한 놈! 그렇게 말해도 못 알아듣겠나? 교본대로만 하는 건 이미 죽은 검술이야. 조금만 변칙적인 공격을 가해도 금방 자세가 무너진다고……." "하, 하지만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길 변칙은 결코 정석을 이길 수 없다고……." "물론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정석대로만 하면 네놈보다 센 놈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기지 못해. 정석을 주로 구사하되, 거기에다 적절히 변칙을 섞어야만 효과적인 싸움을 할 수 있지." 디트리히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전 도무지 무슨 말씀인지……." "이런 돌대가리! 검을 들어 봐." 자세를 잡은 디트리히를 보며 데이몬은 목검을 들어올렸다. 긴 여행을 대비해 지팡이 대용으로 깎아 만든 엉성한 막대기였다. 도저히 목검이라 볼 수 없을 정도였지만 이럴 때는 요긴한 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자 간다." 고함소리와 함께 데이몬이 달려들어 공격을 가했다. 목검이 중단세로 허리를 가격해가자 디트리히는 검을 비스듬히 들어 공격을 가로막았다. 날이 날카롭게 서 있는 진검이었으므로 허술하게 깎아 만든 목검 따위는 대번에 두 동강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목검과 검이 맞닿자마자 데이몬은 허리를 급격히 틀었다. 그러자 팔도 자연스럽게 돌아갔고 목검은 디트리히의 검 옆면과 부딪힌 상태 그대로 검신을 타고 쭉 미끄러졌다. 마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송어처럼 말이다. 딱. "아얏." 몹시 아픈 듯 검을 떨어뜨리고 손가락을 감싸쥐는 디트리히를 보며 데이몬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이 진검이었다면 넌 이미 죽은목숨이야. 손이 날아간 놈이 전투에서 이길 순 없는 노릇이지. 그렇지 않나?" "그, 그렇긴 하네요." 퉁퉁 부어오른 손가락을 감싸쥐면서도 디트리히는 기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데이몬이 가르쳐주는 것들은 철저히 실용적인 기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배운 검술과는 전혀 달랐다. 기술 하나하나가 바로 실전에 써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데이몬은 검을 수련한 검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무수한 고수와 싸워본 경험으로 말미암아 그는 이미 특유의 변칙 공격술을 깊이 있게 정립해놓은 상태였다.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기술 말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 데이몬이 툴툴거렸다. "젠장. 이러다간 언제 도착할지 모르겠군." "아마 내일 점심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아. 한 번 믿어 보도록 하지." 해가 저물자 둘은 인적이 사라진 조그마한 마을에서 묵기로 했다. 집을 샅샅이 뒤져 간단히 배를 채운 두 사람은 또다시 검술 수련에 들어갔다. 물론 디트리히는 몇 가지 기술을 배우는 대가로 흠씬 두들겨 맞을 수밖에 없었다. 뻗어버린 디트리히를 내려다보던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원. 이런 약골을 봤나?" 침을 질질 흘리며 늘어진 모습을 봐서 내일 아침까진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데이몬의 얼굴에 실소가 떠올랐다. "그녀석 정말 가관이군." 디트리히의 얼굴은 퉁퉁 부어 올라 준수했던 본래의 모습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데이몬이 얼마 전 느낀 필살의 공격법을 전수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보편적으로 젊은 기사 놈들은 얼굴을 무척 소중히 여긴다. 뭐 계집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지는 모르지만 결투 시에 이것은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서, 설마 얼굴을 공격하려는 것은 아니겠죠?" "왜 아니겠냐? 중장갑을 착용했을 땐 별달리 소용없겠지만 결투할 때나 약식 투구를 걸쳤을 때에는 충분히 효과가 있는 방법이다. 얼굴을 공격할 경우 대부분의 머저리들은 얼굴에 상처 나는 게 싫어 본능적으로 피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허점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우와! 그건 정말 치사한 공격법인걸요?" "큼! 그럼 잘 생긴 얼굴 가지고 저승에서나 가서 자랑하던지……. 어차피 죽으면 썩어버릴 얼굴 아니냐? 죽은 놈은 저승에서나 투덜거리라고 해." 디트리히는 결국 데이몬의 논리에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단점을 극복해야한다는 명분 하에 실전에 들어간 디트리히는 얼굴 부분에 무수한 공격을 허용해야 했다. 물론 그의 실력으로 데이몬의 무수한 잔기술을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디트리히는 얼굴이 떡이 되어 기절하는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 늘어진 디트리히의 옆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데이몬은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연 듯 고향 생각이 떠올랐다. 정말 생각하기조차 싫었던 중원에서의 삶. 그러나 그곳은 복수를 위해 반드시 돌아가야만 하는 곳이기도 했다. "계속 마법을 배워나가면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어쨌든 차원이동마법을 통해 이곳으로 왔으니……." 불연 듯 스승 도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자 데이몬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스승님……." 따지고 보면 데이몬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할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스승과 보낸 나날일지도 몰랐다. 물론 수호마왕군과의 추억도 좋은 시절이었지만 믿고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옆에 있었다는 것은 그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행복한 경험이었다. 스승이 자신을 떠났다는 공허감은 지금 이 순간 가슴에 사무치게 와 닿고 있었다.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것도 모른 채 데이몬은 묵묵히 뇌까리기 시작했다. "스승님. 이 데이몬 결코 스승님의 바램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최강의 네크로멘서가 되어 원수를 갚고, 또한 스승님의 혈육을 꼭 찾겠습니다. 그리고 제 힘이 닿는 날까지 보살피겠습니다." 데이몬은 묵묵히 스승의 당부에 대한 각오를 되새겼다.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누구냐? 정지!" 온통 먼지를 뒤집어쓴 남루한 나그네 둘이 접근하자 수문 병사들이 검을 뽑아들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웅장한 펠드리안의 성문으로 접근하는 자는 한 눈에 보아도 거지로 밖에 안 보이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카르나틱 평원에서의 패전 때문에 펠드리안의 분위기는 극도로 흉흉했다. 병력을 대대적으로 징집하고는 있었지만 이대로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수도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그럴수록 치안병력의 단속은 엄격해졌고 입을 잘못 놀린 시민들은 질서를 바로 잡는다는 명목 하에 처형장으로 끌려가야만 했다. 중앙 광장에서 끊임없이 피 냄새가 진동할 지경으로 말이다. 심지어 운이 나쁜 자는 아무 죄도 없이 목이 달아나는 상황이었으니 성벽 수비병들 역시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심쩍은 자들이 접근하니 수문 병사들의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전쟁으로 인해 여행자들의 발걸음은 이미 끊어진 지 오래였다. "신분을 밝혀라!" 거침없이 하대로 일관하는 수비병들의 태도에 데이몬의 눈썹이 꿈틀했다. 펠드리안으로 들어선 나그네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데이몬과 디트리히였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 데이몬이 막 발작하려는데 디트리히가 앞으로 쓱 나섰다. 섣불리 수비병들을 구타했다가는 펠드리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데이몬에게 눈짓을 보낸 디트리히는 차고 있던 검을 풀어 앞으로 내밀었다. 그곳에는 가문의 문장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나는 브릭스 후작가의 장자인 디트리히 폰 브릭스라고 하오. 카르니틱 방어군 제 6군단의 14 백인대장으로 참전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것이오." 디트리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비병들은 부동자세를 취했다. 브릭스 후작가라면 그들로썬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위 귀족이었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76회. 오늘이 가기 전에 올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늦어서 죄송..^^ *********************************************************************** 백인대장이라는 직책보다도 후작가의 장자라는 사실이 그토록 수비병들을 주눅들게 하는 것이다. "성문을 열어주시오." "아, 알겠습니다." 수문 병사들은 두 말도 하지 않고 성문을 열라는 신호를 보냈다. 끼기기기. 둔탁한 쇠사슬 소리와 함께 육중한 성문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데이몬은 무심한 눈길로 올라가는 성문을 지켜보았다. 이곳을 나설 때는 스승 도일과 함께였었지만 돌아올 때는 홀로 오게 된 것이다. 물끄러미 성문을 쳐다보고 있는데 디트리히가 다가와 귀엣말로 속삭였다. "들어가시지요" 공대하는 것을 병사들이 듣는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은 성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때 누군가가 앞을 막아섰다. 상당히 꼬장꼬장해 보이는 중년의 백부장이었다. "이곳에는 신분이 증명되어야만 들어갈 수 있소. 그러니 당신도 관등성명을 밝히시오." "그는 나와 동행입니다." 옆에서 거드는 디트리히의 얼굴을 힐끔 쳐다본 백부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물론 백인대장께서는 문장을 제시함으로써 신분이 증명되었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이 자 역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야만 출입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니 신분을 확인할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 나는 그와 함께 복무했었소. 카르나틱 방어선에서 말이오." "그러나 절차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소속 부대와 직책, 그리고 출신지가 명확한 자만이 펠드리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백부장은 추호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경험이 없는 탓에 디트리히의 얼굴은 금세 달아올랐다. 당황한 탓에 그는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그, 급한 일이 있소. 시간을 다투는…… " 디트리히의 태도는 백부장의 의혹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는 휘하의 병사들에게 눈짓을 한 뒤 한 손으로 검 손잡이를 지긋이 움켜쥐었다. "신분을 밝히기 전까진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일입니다." 둘의 논쟁을 듣고 있던 데이몬이 앞으로 쓱 나섰다. "당신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 것 같군?" 난데없는 말에 백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 날 본 적이 있다고……." "한 때 난 이곳에 근무한 적이 있었지. 제 57 성벽 경비조원으로 말이야." "네가 이곳에 근무했었다고?" "벌써 1년이 지났군. 그 때는 오크 놈들의 공습이 한창 행해지던 때였지. 음! 이 일을 알지 모르겠군. 하루는 오크 놈들이 와이번에 매달려 침투를 한 적이 있었어. 보통 때의 다섯 배가 넘는 오크 유격병들이었어. 그놈들이 일시에 성벽에 내려섰지. 그 때 자네는 단신으로 오크 무리 앞에 나아가던 자를 기억하고 있나?" "서, 설마." 뜻밖의 사실에 백부장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치 기억을 뒤져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데이몬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바로 나였지. 당시 넌 아마도 64경비조의 선임병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 이름은 잘 모르지만 부하들을 통솔하는 솜씨가 일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말이 틀렸나?" "마, 맞아. 그 때 난 64경비조를 맡고 있었어." 그때서야 비로소 백부장의 의심이 풀렸다. 당시의 상황은 상당히 위급한 상황이었다. 만약 데이몬이 아니었으면 성벽 수비병들은 전멸했을지도 몰랐다. 때문에 백부장은 데이몬이란 존재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왜소한 체구에 이질적인 용모. 그렇군. 화상 때문에 미처 알아보지 못했어." "난 이곳에서 근무하다 바로 8군단으로 전출되었다. 그곳에서 가드로 복무하며 카르나틱 방어전을 치렀지. 마법 부대의 가드로 말이야." "용케 살아왔군. 생존자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무튼 환영하네." 백부장은 손을 뻗어 데이몬의 어깨를 툭툭 쳐 준 다음 뒤를 쳐다보며 고함을 질렀다. "신분확인이 끝났다. 통과시켜라." "고맙군." "고맙긴 뭘." 데이몬과 디트리히는 창검을 곧추세운 병사들 사이를 지나 펠드리안 시내로 걸음을 옮겼다. 특히 디트리히의 얼굴엔 뭔가 이해하지 못할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펠드리안에 들어가자마자 디트리히는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이곳에 계셨습니까?" "그렇다. 성벽 수비병으로 말이다." "당신은 정말 의문에 쌓인 사람이군요. 그 정도의 실력을 가졌으면서 고작 성벽 수비병으로 복무하다니……." "왜? 실력이 있다고 수비병으로 복무하지 말란 수칙이 있나?" "그런 건 아니지만 당신 실력 정도면 그 이상의 직책도 맡을 수 있었을 텐데요. 이를테면 근위 기사라든지……. 전 이곳에서 당신이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데이몬은 짜증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 때 근위병으로 복무한 적은 있었지. 하지만 그 때는 나에게 힘이 없었을 때야. 그건 그렇고 이만 입을 좀 닫아주겠나? 이제부턴 무척 위험한 일을 하러가야 할 테니……." "위, 위험한 일이요?" "복수 말이야. 물론 일국의 공작을 두들겨 패는데 근위 기사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테지. 아마도 죽자고 싸워야 할거야. 결코 목숨을 장담할 수 없겠지." 디트리히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그, 그렇군요." "왜? 펠드리안으로 돌아오니 겁이 나나 보지? 내키지 않으면 빠져도 좋아. 어차피 이건 내 일이었으니……." "아닙니다. 겁나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지만 애석하게도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르게이 공작은 펠드리안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과시하고 있는 고위급 귀족인 것이다. 그런 자를 손보러 가는 것이니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악의 경우 아버지에게까지 파장이 미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 역시 서열 상 세르게이의 아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트리히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난 평생 심약하게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일 수밖에 없다.' 어차피 세르게이 공작이 병사들을 내버려두고 도망친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겐 합당한 명분이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죽이지만 않는다면 아버지에게까지는 누가 미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디트리히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차피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몸. 이판사판입니다." "너무 긴장하지 않는 게 좋아. 어차피 근위 기사 몇을 상대해야만 놈을 손볼 수 있다." "알겠습니다." "일단 궁성까지의 길은 네가 열도록 해라. 네 신분을 활용한다면 놈의 면전까진 어렵지 않게 나갈 수 있을 테니……." "그러지요." 펠드리안 시내로 접어든 둘은 궁성을 향해 똑바로 나아갔다. "후! 힘들군." 대책회의를 마치고 막 회의실을 나서던 세르게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각 국 군주들에게서 패전에 대한 온갖 비난과 질책을 고스란히 뒤집어썼던 터라 아직까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대책회의는 벌써 보름째 이어지고 있었고 그 기간동안 세르게이는 상당한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카르나틱 평원의 8만 병력이 몰살한 책임을 오로지 그가 홀로 져야만 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를 연합군 총사령관에서 해임하자는 건의까지 나왔다. 하지만 로젠가르트 4세가 적극적으로 두둔해 주었고 그 때문에 자리는 다행히 보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원천적으로 세르게이의 입지가 많이 좁아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세르게이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하지만 존립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8만 병력의 방치. 그로 인한 궤멸. 물론 명령을 내린 세르게이도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들이 시간을 끌어주지 않았다면 계획의 성사 여부가 불투명했다. 때문에 전멸할 줄 알면서도 부득이 자리를 사수하란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나지막이 뇌까리던 세르게이는 집무실로 들어섰다. 베니테스가 머리를 책상에 파묻고 일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다시 한 번 한숨을 내 쉰 세르게이는 자신의 자리로 다가갔다. 걸어가던 와중 뭔가 생각이 났는지 세르게이는 베니테스를 쳐다보았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네? 뭘 말씀이십니까?" "이번 전쟁에서 과연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그, 글쎄요. 저로썬" 베니테스의 곤혹스러운 표정을 잠시 들여다보던 세르게이는 말없이 의자에 몸을 묻었다. "모쪼록 계획이 성공해야 할 텐데……." 세르게이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조금 뒤 작전회의가 벌어지니 준비하라는 베니테스의 조언에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이다. 조금 뒤 벌어진 작전 회의장에는 이카롯트를 이끌어나가는 귀족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황제를 보필해야 할 근위 기사단만 빠지고 나머지 귀족들 대부분이 모인 큰 회의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군주들의 회합에서 결정된 사항을 전해듣게 되는 것이다. 주재자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지루하게 세르게이 공작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원래 늦는 편이었지만 오늘 따라 유달리 모습을 보이지 않는 세르게이 공작이었다. 결국 그는 귀족들이 조바심이 날 즈음에야 모습을 드러내었다. "기다리시느라 지루하셨지요."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세르게이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에는 결코 미안한 기색이 깃들여있지 않았다. 귀족들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히며 그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이카롯트 제일의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섣불리 그의 눈을 벗어난다면 최전선에 배치될 지도 몰랐기 때문에 귀족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들의 얼굴을 둘러보던 세르게이는 나지막하게 운을 뗐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소이다. 어제 군주 회합에서 결정된 사실로는……." 그 때 갑자기 입구 쪽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발길질로 문을 강하게 걷어찰 때 남직한 소리였다. 그 소리에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놀라 경악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발칙한……." "저, 저놈이 죽고 싶어서?" 그곳에는 무척 남루한 차림새의 왜소한 인물 하나가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온통 먼지를 뒤집어써서 복장을 식별할 수도 없었다. 심한 화상을 입었는지 체모가 홀랑 타버린 것도 모자라 온통 물집 투성이라서 꼴이 상당히 가관이었다. 화려한 문에 흙 묻은 발자국이 선명한 것을 보아 방금 그 소리의 정체를 익히 짐작할 만도 했다. 들어온 자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회의장 내부를 휘휘 돌아보았다. 다분히 도전적인 기색이 물씬 느껴지는 태도였다. "주, 죽일 놈." 귀족들의 시선에서 일시에 분노의 광망을 일렁였다. 이곳이 어디인가? 이카롯트 제국의 최 고위층 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인 장소가 아닌가? 그런 신성한 곳에서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하나가 무단으로 들어와 소란을 피우다니……. 당당한 덩치의 귀족 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미남자로써 날카로운 눈빛이 마치 벼른 칼날을 연상시키는 자였다. "네놈은 뭐냐? 이곳에 온 목적을 밝혀라." 그러나 침입자는 일언반구 대답도 없이 회의장 내부를 둘러볼 뿐이었다. 그리고 대답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그는 카르나틱 방어전에서 저와 함께 살아남은 분입니다. 아버님." 고개를 돌려본 귀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멀쩡한 모습으로 입구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귀족의 이름은 바로 브릭스였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77회. 그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디, 디트리히. 살아있었구나?" 브릭스 후작의 얼굴에 환희의 기운이 일렁였다. 그도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아들을 향해 달려갔다. 이미 죽었을 것이라 간주한 아들이 저처럼 멀쩡히 살아 돌아왔는데 기쁘지 않을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방어진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순간 그를 비롯한 수뇌부들은 미리 마련된 마법진을 통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미 서너 명의 고위급 마법사들이 지휘관들의 퇴로를 미리 마련해 놓은 상황이었다. 그들은 전투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은 채 후방에서 드래곤이 펼친 공간왜곡장의 틈을 계산하는데 몰두했고 그 결과 수뇌부들만은 무사히 몸을 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허물어진 중군 부분에 위치해 있어서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디트리히만은 데리고 올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한다면 그들조차 탈출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던 터라 브릭스 후작은 눈물을 머금고 아들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아들을 사지에 버려 두고 탈출하던 당시 그는 피눈물을 뿌렸다. 그런데 디트리히가 저처럼 멀쩡히 살아 돌아오다니……. "이리 오너라 내 아들아." 브릭스 후작은 아들을 부둥켜안으려 했다. 심성이 심약한 탓에 어릴 적부터 놀림받던 아들이었지만 그에겐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혈육이었다. 그런데 막 끌어안으려는 순간 디트리히가 그를 왈칵 밀쳐버렸다. "왜? 왜?" 주춤주춤 물러서는 후작의 눈에 딱딱하게 굳은 디트리히의 얼굴이 비쳐졌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아버님. 제겐 할 일이 있습니다." "무슨?" 당황해서 굳어버린 아버지를 두고 디트리히는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미 데이몬이 세르게이를 발견하고 그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상황이었다. 디트리히는 굳은 표정으로 데이몬의 뒤에 바짝 붙어 섰다. 곧이어 근위병들이 회의장 내부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이 정도 소란이 벌어졌는데 그들이 출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었다. 그들은 서둘러 늘어선 귀족들 앞을 가로막았다. 물론 퇴로마저 빈틈없이 차단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데이몬은 세르게이를 향해 다짜고짜 으르렁거렸다. "오랜만이군. 세르게이 공작." 세르게이의 눈매가 지긋이 좁혀졌다. "누군가?" "기억나지 않는가 보군. 이것 섭섭한데?" 데이몬은 손을 들어 얼굴의 먼지를 닦아냈다. 이리저리 물집이 잡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이 드러났다. 세르게이는 곧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워낙 용모가 특이했기 때문에 기억 속에 똑똑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너, 너는?" "이제야 기억이 나나 보군. 세르게이 양반." 계속 이죽거리는 데이몬을 보다 못해 근위 대장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런 발칙한 놈. 공작 전하께 이 무슨 망발이냐?" 고개를 돌린 데이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얼씨구? 아직까지 자리를 보전하고 있었구먼. 대장 양반." 그 말에 흠칫 한 근위 대장은 데이몬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눈이 경악으로 휘둥그레졌다. "너, 너는?" "당신 때문에 쫓겨나게 되어 정말 다행이었어. 그러지 않았다면 난 아직까지 고리타분한 학생 놈들과 함께 따분한 강의나 듣고 있어야 했으니 말이야." "뭐, 뭐라고?" "너같은 놈이 잘리지 않고 붙어있는 것을 보니 이카롯트의 앞날이 무척 훤하군 그래?" "이…. 이…." 분에 못 이겨 몸을 파르르 떠는 근위대장을 본체만체 하며 데이몬은 다시금 세르게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쥐새끼처럼 잘도 빠져나갔더구먼. 8만의 불쌍한 병사들을 몽땅 사지에 남겨두고 말이야." "………."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어떤 목적으로 8만의 생명을 사지에 몰아넣었는지는 모르지만 혹시라도 죽음을 당하는 병사의 심정을 한 번 생각해 본 적 있어?" 데이몬의 눈에 서서히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이건 빠져나오는 와중에 본 일인데 살아남은 병사들의 목을 오크 놈들이 사정없이 자르고 있더군. 그들의 얼굴 표정이 어땠는지 당신에게 정말 보여주고 싶더군." 굳게 닫혀 있던 세르게이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물론 생각해본 적 없다. 왜냐하면 나는 사령관이고 철저히 지휘관의 입장에서 명령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전쟁에서는 병사들의 목숨보다 승리가 훨씬 더 중요하다. 병사들을 희생시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같은 명령을 내릴 수 있다." "호오! 그러셔?" 데이몬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세르게이의 무감각한 음성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 그들의 희생은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물론 그들의 고귀한 희생에 본관도 마음이 심히 아프다는 것을 밝힌다. 그것을 감안해 무례는 여기까지 허락할 수 있다. 일단 살아 돌아왔다는데 경의를 표하며 대신 오늘의 무례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 물러가라. 가서 새로운 보직을 다시 배정 받도록 하라." 사무적으로 흘러나오는 어조에 데이몬은 마침내 성질이 폭발하고야 말았다. "정말 분통터지게 만드는 놈이로군. 이봐! 네놈이 무슨 목적으로 명령을 내렸는지는 내 알 바 아냐. 하지만 네놈의 결정으로 인해 내 동료들이 깡그리 죽었다. 그 책임을 명령을 내린 너에게 물어야겠다." 말을 마치고 걸음을 옮기는 데이몬. 세르게이의 눈에도 점차 광기가 돌기 시작했다. "여기서 물러가지 않으면 부득이 죄를 물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흐흐흐! 네놈의 얼굴을 떡으로 만들어 8만 병사들의 원혼을 위로하기 전까진 어떠한 일이 있어도 물러갈 수 없다." "저도 동감입니다." 데이몬의 옆에서 터져 나온 앳된 음성. 고개를 돌려본 세르게이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했더니 브릭스 가의 대련 마스터였군. 살아 돌아온 것도 용한데 용기는 더욱 가상한 걸?" 디트리히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노, 놀리지 마십시오" "물론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라 표현할 수 있다. 살아 돌아온 공은 나중에 치하할 테니 지금은 물러가라. 너는 저자와 행동할 만한 신분이 아니다." 그러나 디트리히는 못 들은 척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오크의 피를 잔뜩 머금어 별달리 예기를 뿜어내지는 않았지만 검을 쥔 디트리히의 자세에서는 당당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설사 이것이 명령 불복종에 상관 모독죄라고 해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전 죽어 가는 병사들의 눈동자를 아직까지 잊을 수 없으니까요." 세르게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포진한 근위병들에게 눈짓을 했다. "할 수 없군. 근위대는 침입자를 포박해라. 반항하면 죽여도 좋으니 최대한 신속히 제압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근위병들이 검을 뽑아들고 둘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특히 근위대장의 눈엔 번들거리는 살기까지 감돌고 있었다. 이미 그는 암암리에 살생부의 작성을 마쳐 놓은 상태였다. '이참에 저 건방진 놈을 죽여버려야겠군. 브릭스 가의 장자는 어쩔 수 없이 살려야겠지만 말이야. 놈의 아비가 가만히 있진 않을 테니……' 그는 근위병 넷을 따로 차출해서 디트리히에게 붙였다. 검술 실력이 뛰어난 자만을 골라서 말이다. "너희들은 디트리히를 맡아라. 검술실력이 보통이 아니니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 "옛." 근위병들은 미리 훈련받은 대로 침입자를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데이몬이 계속 걸어 들어간 때문에 디트리히와의 거리가 다소 떨어져 있었고 근위대장은 그것이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면 행여나 디트리히의 몸에 상처를 입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위병들이 둘 사이를 완전히 차단하자 대장의 입에서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일제히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근위병들은 침입자를 향해 창검을 번뜩이며 쇄도했다. "이, 이런……." 브릭스 후작은 망연자실한 기색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평소에 말 잘 듣고 온순한 디트리히가 설마 저런 무모한 행동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근위병들이 자신의 얼굴을 봐서 죽이지는 않을 터였지만 그래도 걱정이 태산같았다. 행여나 다칠까봐 안절부절 못해하는 모습에서 부정이 불씬 묻어나고 있었다. 나중에 세르게이의 추궁이 필경 있을 터였지만 브릭스 후작은 거기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큰일이군. 녀석이 대련은 많이 치러보았지만 일대 다수의 대결은 전혀 경험이 없어. 이 일을 어떻게 한다?" 그러는 와중에 싸움이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근위병들의 숙련된 연쇄공격에 디트리히가 점점 밀리고 있었다. 저 정도 실력의 근위병이면 자신의 사사를 받은 디트리히라도 섣불리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터였다. 설사 일대 일로 싸우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브릭스 후작이 도저히 끼여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쨌거나 죄를 범한 것이 디트리히였기 때문에 브릭스 후작으로썬 세르게이 공작의 관대한 처분만 기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렇게 가슴을 조이고 있는데 등뒤에서 갑자기 비명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으와악." "크윽." 귀족들의 고개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마치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돌아갔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디트리히만을 응시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들의 눈은 곧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세, 세상에……." "어떻게 저럴 수가……." 그곳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근위병들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데이몬을 향해 달려들었다. 인정사정 없이 창검을 후려갈기는 모습에서 살려둘 마음이 전혀 없는 듯 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미리 예견하고 있었던 데이몬이었다. 물론 대비는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에잇!" 데이몬은 잔뜩 끌어 모아둔 마나로 헤이스트를 펼쳤다. 때는 근위병들의 창검이 무자비하게 그의 몸을 난자하려는 찰나였다. 그의 몸이 잔영만 남긴 채 무시무시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내려쳐진 창검은 헛되어 허공만을 찔러버렸다. "헉." "뭐, 뭐야." 눈앞에서 갑자기 침입자가 사라지자 근위병들은 혼비백산했다. 심지어 균형을 잃은 나머지 그대로 나동그라지는 근위병들도 있었다. 데이몬의 몸은 바로 그들의 뒤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놈들아 어디 맛 좀 봐라." 데이몬의 오른 손에서 네 줄기의 섬광이 번쩍했다. 그것은 정확히 근위병들의 몸을 향해 파고들었다. 정확히 말해 갑주로 가려지지 않은 급소 부분을 말이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78회. 통상적으로 근위병이라 함은 그 국가에 소속된 병사들 중에서 최고의 정예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장비 역시 결코 모자람이 없어서 이카롯트 근위병의 경우 거의 중장 기사들 수준의 갑주를 갖춰 입고 있었다. 다만 도보로 움직인다는 특성에 따라 상당히 경량화 된 갑옷, 이를테면 중공장갑(中空裝甲) 따위의 기술이 적용된 장갑을 착용해서 움직임이 둔화되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을 써 놓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신체의 모든 부분을 가리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소리를 듣는 귀나 움직여야 할 관절 부분의 장갑이 완전히 가려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크아악." 귓밥 아랫부분의 예풍혈에 정통으로 매직 미사일을 얻어맞은 근위병 둘이 푹 꼬구라졌다. 지척에서 가해진 공격이라 도저히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데이몬은 계속해서 몸을 날리며 매직 미사일을 계속해서 급소에 꽂아 넣었다. 아래 턱 뼈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대영혈과 목젖 옆 인현혈에 타격을 받은 근위병 둘이 또다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하나같이 투구로 가려지지 않는 급소들이었다. "이, 이런." 그때서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근위병들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이미 마음의 평정은 완전히 이룬 상태. 데이몬은 거의 무아지경으로 몸을 날리며 매직 미사일을 난사했다. 마치 나무로 만든 인형의 혈도를 가격할 때처럼 말이다. "컥." "캬악." 삽시간에 근위병들 중 반이 우수수 쓰러져버렸다. 데이몬은 마치 바람처럼 그들 사이를 누비며 급소를 찾아내어 제압해 나갔다. 그 모습에 경악한 근위병들은 급기야 하나 둘씩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도저히 그들의 상대가 아님을 실감한 것이다. "이건 말도 안 돼." 근위대장이 질린 듯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이카롯트 최고의 정예라는 근위병들이 이처럼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지는 현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접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30여 명의 근위병이 전투불능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해 낸 자는 지금 자신을 향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다가오는 상태였다. 근위 대장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근위대의 총수로써 이럴 때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여차직하면 그대로 들이받아버릴 생각으로 그는 방패로 몸을 가린 뒤 마주 달려나갔다. 벼락같은 함성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이야아압…… 컥." 불행히도 그의 함성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멧돼지처럼 돌진해 오는 그를 데이몬은 살짝 비켜서서 발을 걸었다. 그런 다음 볼썽 사나운 자세로 나동그라지는 근위대장의 기호혈(氣戶穴)을 살짝 제압해 버렸다. 겨드랑이 밑의 기호혈은 다소 제압하기 힘든 급소였지만 균형을 잡기 위해 팔을 휘두르던 상황이어서 불행한 근위 대장은 액운을 피할 수 없었다. "큭, 푸하하하핫." 바닥에 벌렁 나가떨어진 자세로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근위 대장. "대, 대장." 대장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근위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의아해 했지만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었다. 동료들의 반수 이상을 꺼꾸러뜨린 가공할 만한 침입자가 그들을 향해 육박해 오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뒤쪽에서도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악. 내 얼굴……." 고개를 돌려 본 근위병들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디트리히를 상대하던 네 명의 동료도 어김없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디트리히를 상대하는 근위병들은 특히 실력이 출중한 자들만 추려놓은 상태라서 그들의 얼굴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하나같이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엎드린 채 연신 울부짖는 근위병들. 디트리히는 데이몬에게 배운 대로 근위병들의 얼굴을 인정사정 없이 그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디트리히 역시 같은 방법에 당했는지 얼굴에 사선으로 검상을 입어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근위병들과는 달리 얼굴의 상처에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네 명이 한꺼번에 덤볐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지간한 디트리히라도 벅찬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의 디트리히였다면 일대일로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근위병들의 검술 실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디트리히는 이미 데이몬에게서 여러 가지 필살의 기술을 터득해놓은 상태. 절체절명의 순간 배운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한 디트리히는 간발의 차이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허억." 싸늘한 검광이 얼굴로 폭사되자 당황한 근위병은 급히 방패로 얼굴을 가리고 뒤로 물러났다. 혹시라도 얼굴에 상처가 날까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싸우다 뒤로 물러나는 자세는 허점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자세라고 할 수 있었다. 허벅지 깊숙이 검상을 입은 근위병은 그만 푹 꼬구라지고 말았다. 한 명이 쓰러지자 다소 여유를 가진 디트리히. 그는 데이몬에게서 터득한 방법을 계속 활용해서 근위병들을 한 명 한 명 쓰러뜨려 나갔다. 동료 하나가 또다시 쓰러지자 이를 부드득 갈아붙인 나머지 근위병들은 디트리히와 같은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악에 받힌 나머지 디트리히의 얼굴만을 노리고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디트리히는 이미 데이몬에게 단련될 대로 단련된 상태. 얼굴을 향해 파고드는 검광을 무시한 대신 근위병들의 급소를 찌르고 들어가는 디트리히였다. "크어억." 얼굴에 제법 깊은 검상을 입은 디트리히. 하지만 그 대가로 나머지 두 명의 근위병들은 완전히 전투불능상태가 되어버렸다. 당연히 피하리라 생각했던 상대가 피하지 않은 때문에 치명적인 공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갑옷의 연결부분을 꿰뚫린 근위병들은 그대로 나가 떨어져버렸다. 통증 때문에 얼굴에 손을 대어본 디트리히는 진득한 피가 묻어나자 화가 잔뜩 난 기색으로 넘어져 있는 근위병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근위병들의 얼굴을 그어버렸다. "으아아악." 얼굴을 감싸쥐고 버르적거리는 근위병들에게 디트리히는 차갑게 한 마디 내뱉었다. "받은 만큼은 돌려줘야겠지?" 데이몬과 같이 지낸 며칠 동안 벌써 성격마저 닮아버린 디트리히였다. 자신의 몫을 해결하고 나자 디트리히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남은 근위병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뒤를 보고 있는 근위병의 등판에 서슴없이 검을 박아 넣는 모습은 예전엔 결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세, 세상에……." 물론 결투장면을 보고 있던 귀족들도 놀랐지만 그 중에서 더욱 놀란 것은 바로 브릭스 후작이었다. 직접 가르쳤기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도 아들의 검술실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알기로 디트리히는 결코 저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 비록 대련실력만은 그도 인정하는 바였지만 대련과 실전은 원천적으로 달랐다. 피가 튀고 살점이 비산하는 가운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회를 포착하면 추호도 망설임 없이 공격을 해야하는 것이 실전에 임하는 마음가짐이었으며 예전의 디트리히에게 가장 부족한 점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디트리히는 결코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근위병들과 싸우는 모습이 마치 피에 굶주린 늑대처럼 보일 정도였다. 다시 말해 예전에 없었던 투지가 추호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넘쳐나고 있었다. "녀석. 얼굴의 상처가 무척 아플 텐데……." 걱정스러운 듯 내뱉는 브릭스 후작의 입가에 어느덧 흐뭇한 미소가 걸리고 있었다. "으아악." 검을 떨어뜨린 채 복부를 움켜쥐고 나가떨어지는 마지막 근위병을 끝으로 상황은 일단락 되었다. 50여 명에 달하는 근위병들 중에는 이제 서 있는 자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데이몬과 디트리히의 손에 의해 모조리 쓰러져버린 것이다. 물론 근위병 중에서 죽은 자는 없었다. 데이몬이야 칠종단금술 때문에 당연히 죽일 수 없었으며 디트리히 역시 상처를 입혀 무력화시키는 선에서 그친 상태였다. "으으으으." "아, 아파" 사방에는 온통 고통에 겨워하는 근위병들의 신음소리 뿐이었다. 그 중에는 견디다 못해 울부짖는 듯한 소리로 변해버린 근위대장의 웃음소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표정한 눈빛으로 근위 대장을 쳐다보던 데이몬은 곧 다가가서 혈도를 풀어주었다. 기호혈이 제압된 채로 더 이상 방치한다면 차칫 폐인이 되어버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륵." 혈도가 풀린 근위대장은 충격에 의해 바로 혼절해버렸다. 몸을 일으킨 데이몬은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세르게이를 쳐다보았다. "이제 앞을 막아줄 놈은 없을 테고……. 느긋하게 응징이나 해 볼까?" "………" "더도 덜도 말고 딱 백 대만 맞아라. 너 때문에 죽어간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는 일이니 아파도 좀 참고……. 죽이진 않을 테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마." 손마디를 꺾으며 다가오는 데이몬을 보던 세르게이는 굳게 닫혀있던 입술을 열었다. "놀라운 실력이군.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어." "뭐라고?" "이제 알겠군. 8군단에 오우거 헌터(Ogre hunter)가 출현했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너였군." 말을 마친 세르게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베니테스가 경악한 듯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자네는 어떻게 보았는가?" "네? 무슨 말씀인지?" "저자가 어떤 방법으로 근위병들을 해치웠는지 설명해 보란 말이지." 세르게이의 짜증 섞인 질책에 베니테스는 겨우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 "예. 설명 드리겠습니다. 우선 그는 근위병들을 맞아 마법을 시전했습니다. 약 3써클 정도 되어 보이는 매직 미사일이온데 단발로 시전되어 위력이 증폭된 상태입니다. 또한 헤이스트 마법까지 병행해서 펼친 때문에 그토록 현란한 몸놀림을 보인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그래도 매직 미사일 따위로 근위병들이 저렇게 나가떨어질 수 있을까? 나로썬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군." "아마도 그는 근위병들의 급소만 전문적으로 노린 것 같습니다. 그것도 근접한 상태에서 발사했기 때문에 근위병들이 피하지 못한 것입니다." "놀랍군." 짤막하게 탄성을 내뱉은 세르게이는 데이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 마법을 배우고자 했던 것인가?" "그렇다. 그 때문에 네놈에게 몹쓸 수모까지 당해가며 마법을 구걸했었지." 데이몬의 말투가 상당히 도전적이며 불손했지만 세르게이는 거기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놀랍군. 그토록 짧은 시간 내에 이렇게 강해질 수 있다니……."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비록 힘은 잃었지만 내 머리 속에는 과거의 지식들이 모두 들어있었다. 넌 그것을 간과했다. 인체에는 대략 365개의 급소가 있지. 어떤 것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며 기절시키거나 혹은 말을 못하게 하는 급소도 인체에는 있다. 아까도 보았겠지? 근위 대장이 움직이지 못한 채 웃기만 하는 것을 말이야. 거기에다 무수히 치렀던 실전경험과 반사신경은 이미 나의 몸에 배어 있던 상태였다. 난 그것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법을 배우려는 거였어. 하지만 네놈은 그 기회를 원천 봉쇄해버리더군. 치가 떨릴 정도로 말이야." "그렇군. 그렇다면 넌 도일이란 놈에게서 마법을 배웠나?" 순간 데이몬의 눈에서 광망이 솟구쳤다. "아가리 함부로 나불거리지 마! 그분은 네놈 때문에 돌아가셨다. 만약……." 불타는 듯한 데이몬의 시선에 세르게이의 얼굴로 꽂혔다. 일국의 총리답게 세르게이는 꿋꿋하게 데이몬의 눈빛을 받아넘기고 있었다. "내가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에게 스승님의 목숨 빚을 받아내야 하지 않았다면 넌 이 자리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세르게이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데이몬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출동했는지 근위 기사들이 세르게이의 뒤에 빽빽하게 도열해 있었다. 데이몬이 보고 있는 동안 그들은 곧 세르게이의 앞을 빈틈없이 가로막았다. "저자입니까?" 완전 무장한 기사 하나가 다가와 세르게이의 옆에 시립했다. 바람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몸을 감싼 갑주였고 표면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주가 무척 얇아 보이는 것을 보니 몸놀림이 결코 둔할 것 같지는 않았다. 투구의 눈구멍 사이로 형형한 안광이 새어져 나오는 것을 보아 데이몬은 그자가 내가 고수임을 간파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말하는 소드 마스터 말이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79회. 세르게이를 손보기가 여의치 않겠다고 생각한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든든한 지원군이 와서 기가 살았나 보군." 데이몬의 말을 가볍게 묵살한 세르게이는 기사에 대한 소개를 시작했다. "자 먼저 소개하지. 그는 이카롯트가 자랑하는 네 명의 소드 마스터 중 한 명이야. 마법사의 지원만 있으면 이 넷 만으로도 충분히 웜급 드래곤을 사냥할 수 있다 자부하지." "이런 놈들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8만 병사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나?" 데이몬은 마치 혓바닥에 마치 칼날이 달려있는 듯 서릿발같은 추궁을 계속 해 나갔다. 하지만 세르게이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아! 승리를 위해서라면 나는 얼마든지 희생을 감수하지. 자 그럼 어디 자네의 실력을 한 번 테스트해보아야겠군. 헬버트론 경." "말씀하십시오." 굳건히 서 있는 기사에게서 꽉 막힌 음성이 튀어나왔다. 그것을 봐서 입 부분도 빈틈없이 가려져 있음이 분명했다. "저자의 실력을 한 번 가늠해 봐 주시오. 써먹을 데가 있으니 죽이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기사는 검을 사뿐히 뽑아들고 데이몬을 향해 다가왔다. 걸음걸이에는 내력이 충만히 배어있었다. 보폭이 일정한 것으로 보아 능히 중원의 절정고수에 비견될 만한 실력자였다. 데이몬은 바짝 긴장한 채 건틀릿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마침내 트루베니아의 소드 마스터와 결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젠장 내가 예전의 상태였더라면 좋은 승부가 되었을 텐데……." 갑옷에 새겨진 문양을 보아 대마법 방어갑옷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데이몬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한 싸움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가 자랑하는 매직 미사일이 아마도 통하지 않을 공산이 컸으므로……. 가까이 다가온 기사는 예에 따라 검을 곧추세운 채 자기 소개를 했다. "나는 베로니카 가문의 헬버트론이다. 너와의 후회 없는 승부를 원한다." "쯔쯔쯔. 네놈도 겉멋만 잔뜩 든 머저리로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덤벼라." 수양이 깊었는지 헬버트론은 데이몬의 격장지계에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성질이 급한 친구로군. 그럼 공격하겠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눈부신 섬광이 폭사되었다. 장검이 선렬한 검강을 머금고 데이몬의 어깨를 벼락같이 쪼개어왔다.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탓에 데이몬은 물 흐르듯 뒤로 미끄러졌다. 하지만 등골이 섬뜩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젠장. 더럽게 빠르군." 나직이 투덜거린 데이몬은 모아놓은 마나를 사용해 헤이스트를 극한으로 펼쳤다. 상대의 검엔 강기가 충만하게 맺혀 있었고 거기에 부딪친다면 제 아무리 파워 업 건틀릿이라도 배겨날 도리가 없었다. 부딪치는 순간 잘려나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무기를 맞부딪치는 것만은 피해야 했다. "어디 한 번 해 보자!" 벼락같이 외친 데이몬은 상대와의 거리를 쏜살같이 좁혔다. 비교적 긴 무기인 장검을 상대로 효과적으로 싸우려면 단병무기인 스파이크 건틀릿의 특성을 잘 살린 공격을 해야 했다. 그러려면 접근전이 최상의 선택이었다. 이것은 이미 중원 시절부터 데이몬의 몸에 배인 공격 습관이었다. 하지만 상대의 몸놀림은 보통을 넘고 있었다. 실전경험도 모자라지 않은 듯 그는 데이몬이 달려드는 만큼 뒤로 물러나며 검을 맹렬히 휘둘렀다.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소드 마스터라서 그런지 몸놀림이 헤이스트를 펼친 데이몬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젠장. 약은 놈." 데이몬은 연신 욕지거리를 퍼부어 가며 접근을 시도했다. 하지만 상대는 한 치의 틈도 내어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예리한 공격을 간간이 퍼부었고 데이몬은 과거의 경험에 입각해 겨우겨우 피해나갔다. 둘 사이에는 곧 맹렬한 접전이 펼쳐졌다. "에잇" 혹시나 해서 데이몬은 매직 미사일을 몇 발 퍼부어 보았다. 하지만 예상대로 상대의 갑주는 마법 공격을 완전히 차단했다. 매직 미사일이 격중된 순간 갑주에 그려진 문양이 눈부시게 빛나며 마나가 허무하게 흩어져버리는 것이다. 그 모습에 맥이 탁 풀렸지만 그렇다고 싸움을 포기할 데이몬이 아니었다. "분명 어딘 가에 빈틈이 있을 터……." 데이몬은 특유의 투지를 불태우며 접전에 몰입해 들었다. 헬버트론도 그에 질세라 사납게 검을 휘저으며 결투를 전개해 나갔다. "과연." 회의를 위해 모인 귀족들은 입을 딱 벌린 채 접전을 관전하고 있었다. 디트리히는 물론 브릭스 후작까지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물론 그도 역시 소드 마스터의 반열에 올라 있는 인물이었지만 헬버트론의 경지에 이르려면 아직 멀었다 할 수 있었다. 그는 브릭스 후작에 비해 몸놀림도 빨랐고 오러 블레이드(검강)의 빛도 더 선렬했다. 자고로 빛이 선명할수록 오러 블레이드의 위력이 강해지는 법이다. 브릭스 후작 역시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할 수 있었지만 저 지경까지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브릭스 후작이 결코 헬버트론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헬버트론의 움직임은 마치 예술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을 정도로 정교한 검로에 자로 잰 듯한 움직임. 공격과 방어가 검술의 교본에 적힌 그대로 틀림이 없었다. 또한 현란한 몸놀림은 헤이스트를 펼치는 상대를 쉴새없이 압박하고 있었다. 과연 이카롯트를 이끌어 가는 네 명의 소드 마스터 중 한 명이라 일컬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데이몬 역시 추호도 굴하지 않고 맹렬히 맞서 싸우고 있었다. 무기를 맞부딪칠 수 없을뿐더러 매직 미사일이 통하지 않은 때문에 현저히 불리한 싸움이라 할 수 있었지만 타고난 투지로 말미암아 한 치도 밀리지 않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싸움이 지속될수록 그의 눈은 점차 붉게 충혈되어 가고 있었다. 물론 칠종단금술 때문에 살심을 떠올릴 순 없었지만 전투에 몰입하자 그는 마치 미친 듯 공격과 방어를 펼쳐나갔다. 하지만 마나가 계속해서 소모되는 때문에 그의 몸놀림은 서서히 느려지고 있었다. 서걱. 옷자락이 여지없이 베어져나가고 피부에 줄이 죽죽 갔다. 상처에서 핏방울이 계속 뿜어져 나왔지만 거기에는 신경도 쓰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했기 때문이다. 헬버트론의 움직임은 시간이 지날수록 민첩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정된 마나를 사용하는 특성상 데이몬의 몸놀림은 계속 둔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데이몬은 점점 맥이 풀리고 있었다. 상대의 갑옷은 파워 업 건틀릿에 의한 가격까지도 완벽하게 막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파파팍. 오우거도 단번에 절명시킨 위력적인 공격도 마법 방어갑옷에는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표면에 음각된 마법 문양이 건틀릿에 집중된 마나를 효과적으로 흩어버린 때문이었다. 어째서 소드 마스터가 마법사에게 천적이라 일컬어지는지 익히 알 만 했다. 어지간한 마법사라면 시원찮은 마법 한 두 방 날린 다음 목이 날아가 버릴 정도의 실력이었다. 하지만 과거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던 무인이었다는 자부심이 쉽사리 데이몬에게 손을 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헉, 헉." 숨이 턱 밑까지 차 올랐고 땀으로 인해 전신이 흠뻑 젖은 상태였다. 하지만 상대는 전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다소 여유를 부리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그 모습에 관전하는 귀족들은 이미 승부가 결정 났다고 여기는 분위기였다. 오직 하나 디트리히만이 주먹을 꼭 쥔 채 데이몬의 승리를 기원할 뿐이었다. "윽." 등허리에 제법 심한 상처를 입은 데이몬이 몸을 웅크렸다. 사력을 다해 피했지만 애석하게도 몸이 제대로 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이만 손을 들지 그래?" 헬버트론은 여전히 태산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얼굴 가리개에 가려 묘하게 공명되었다. 순간 데이몬의 뇌리에 반짝하고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는 곧 생각을 실행으로 옮겼다. "먹어라." 사력을 다해 긁어모은 마나가 길쭉한 빛줄기로 화해 날아갔다. 목표는 헬버트론의 투구였다. "헛수고라니까." 헬버트론은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따라서 공격 마법은 헬버트론의 투구에 정통으로 명중했다. 순간 경악성과 함께 사방으로 눈부신 빛이 퍼져나갔다. 번쩍. 데이몬이 날린 것은 매직 미사일이 아니었다. 바로 라이트닝 볼트였던 것이다. 물론 마법 갑옷이 발산된 빛 대부분을 순간적으로 중화시켰지만 잔상 때문에 헬버트론은 일순 앞을 볼 수 없었다. 허둥대는 그의 품속으로 데이몬이 비호처럼 파고든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헬버트론의 갑옷 끄트러미를 잡고 잡아당겼다. "어엇." 몸이 딸려 가는 것을 느낀 헬버트론이 몸에 힘을 주어 버텼다. 그러나 데이몬이 때를 놓치지 않고 몸을 밀어버렸기에 그는 균형을 살짝 잃어버렸다. 안간힘을 써서 몸을 바로잡으려는 헬버트론. 그러는 그의 몸을 데이몬이 교묘하게 다시 잡아당겼다. 이것은 상대의 힘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중원 고유의 체술이었다. 그는 이미 중원의 각종 권법에 통달한 상태, 헬버트론은 결국 균형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팔을 허우적거리며 모로 비스듬히 쓰러지려는 헬버트론. "타앗." 데이몬이 그의 발부리를 살짝 걷어차 버리자 헬버트론의 몸은 허공에서 한 바퀴 돈 뒤 그대로 쿵 하고 나가 떨어져버렸다. 갑주가 울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헬버트론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데이몬이 어느새 투구를 잡고 몸을 뒤로 굴리고 있었다. 등을 바닥에 붙인 상태로 발길질을 가하자 헬버트론의 몸이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넘었고 그 바람에 단단히 고정된 투구가 벗겨져 버렸다. 나가떨어진 헬버트론은 투구가 벗겨진 낭패한 기색으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몸을 마치 제것처럼 가지고 논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 와중에서도 검을 놓치지 않은 것을 봐서 과연 소드 마스터다운 모습이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검을 휘둘러 상대를 양단해버리려 했다. 세르게이의 당부는 이미 뇌리에서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이놈!" 순간 그의 귓전을 스치는 차가운 일성. "이제 공평하겠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개의 빛줄기가 그의 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러나 헬버트론도 만만히 당하지는 않았다. 검광이 번뜩이자 매직 미사일은 그대로 허공에서 흩어져버렸다. 파파팍. 그러나 그를 향해 날아드는 매직 미사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개의 매직 미사일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쏘아지고 있었다. 검만으로 모두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날아오는 방위가 분산되어 있었다. 결국 헬버트론은 몸을 날려 피할 수밖에 없었다. "약은 놈." 소드 마스터란 명성답게 가뿐하게 피해낸 헬버트론의 앞으로 또다시 빛줄기가 쏘아졌다. 중원 암기술의 정수가 여지없이 가미된 마법 공격이었다. 혼비백산한 헬버트론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검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헛. 트릭이었군."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빛줄기의 음영 사이로 교묘하게 모습을 숨긴 매직 미사일 한 발이 바로 지척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피할 수도, 엄두도 나지 않았다. 퍽. 매직 미사일에 미간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헬버트론의 몸은 그대로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이럴 수가?" "이건 말도 안 돼." 보고 있던 귀족들은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입을 딱 벌린 채 침을 질질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 헬버트론이 누구인가? 이카롯트를 지탱하는 소드 마스터로 트루베니아 제일의 검사로 자부하는 4명 중 일인이 아닌가? 그런 자가 소드 마스터도 아닌 마법사 나부랭이에게 제압당했으니……. 보고 있던 귀족들은 자신의 눈을 거듭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80회. "헉. 헉." 한 동안 가쁜 숨을 내쉬던 데이몬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세르게이를 향하고 있었다. 멈춰 선 데이몬의 얼굴은 극도의 고통과 출혈로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몸은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로 온통 피 칠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추호도 흔들림 없이 세르게이의 눈을 쳐다보았다. "이젠 걸릴 것이 없겠지?" "………." "원래는 백 대를 채우려고 했는데 힘이 없군. 대신 한 대만 제대로 때리겠어. 아마 한 달 동안 피똥을 퍼질러 싸야 할거야." "정말 놀랍군. 헬버트론을 쓰러뜨리다니……." 세르게이가 겨우겨우 내뱉은 일성이었다. 사실 그는 헬버트론의 승리를 장담했었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그가 당할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으니……. 연신 손마디를 꺾는 데이몬을 보며 그는 정색을 했다. "할 말이 있다." "뭔가? 말하라." "우리 계획을 도와다오. 트루베니아를 구하기 위한 계획 말이다." "뭐라고?"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르게이는 데이몬의 태도에 아랑곳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원래는 엄선해놓은 소드 마스터와 마법사만으로 계획을 실행시키려 했다. 하지만 실력을 보고 나니 너도 참가시켜야만 할 것 같다. 물론 헬버트론을 이겼다고 그보다 강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하지만 중형 몬스터를 상대하는데 너 이상 적합한 자는 없는 것 같다." "무슨 개소리야?" 데이몬의 입에서 연이어 욕설이 터져 나왔지만 세르게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일단 카르나틱의 8만 병력을 희생시킨 것은 계획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 우리에겐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8만이나 사지에 몰아넣을 만큼?" 세르게이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데이몬의 귀에 무척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정말 오랜만이구려. 당신이 이렇게 강해질 줄은 꿈에도 몰랐소이다." 깜짝 놀란 데이몬이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자, 슈렉하이머가 쓸쓸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 당신은?" "설마 절 잊진 않으셨겠지요. 세르게이 공작 전하께 많이 섭섭하셨겠지만 부디 이해하십시오.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의 사정?"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들어가셔서 몸부터 치료하심이……." 비로소 상처에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어쨌거나 슈렉하이머를 만난 것이 무척 반가웠던 데이몬이었다. 옆에서 세르게이가 입을 열었다. "계획에 동참한다면 널 귀빈으로 맞아들이겠다. 내 권한으로 너에게 남작에 준하는 작위와 그에 걸 맞는 대접을 약속하지. 결코 섭섭지는 않을 것이다." 데이몬은 세르게이의 눈을 한동안 빤히 쳐다보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보고 세르게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차가운 일성이 귓가를 스쳤다. "하지만 약속했던 응징은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다. 이해하라." 그와 동시에 묵직한 충격이 복부를 강타했다. 어느새 발사했는지 한 발의 매직 미사일이 앞을 막아선 근위 기사들 사이를 여지없이 헤집고 들어와 세르게이를 명중시켰던 것이다. "우욱." 세르게이는 사력을 다해 고통을 억눌렀다. 낮에 먹은 음식물이 식도를 비집고 올라올 정도로 통증은 강렬하기 그지없었다. 귀족들 앞에서 볼썽 사나운 꼴을 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세르게이는 눈동자에 핏발이 툭툭 불거질 정도로 위장을 억눌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데이몬의 매직 미사일은 신경이 밀집되어 있는 아랫배의 상곡혈을 여지없이 뒤흔들어놓은 상태였다. "왜액!" 세르게이는 결국 늘어선 귀족들 앞에서 점심에 먹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해야 하는 수모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근위 기사들과 귀족들은 실소를 흘리며 근엄하기로 정평 있는 세르게이의 또 다른 모습을 흥겹게 감상했다. 세르게이가 사람들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구역질을 마친 세르게이는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데이몬에게 미소를 지었다. "제법 매운 일격이었다. 평생 기억하겠다." "짜식. 한 나라의 총리답게 제법 기개가 있군." 세르게이에 대한 감정이 다소나마 풀린 데이몬은 곧 슈렉하이머의 안내대로 내실로 들어갔다. 8만의 생명을 사지로 몰아넣은 장본인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고 또한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원한을 접은 것이다. 다소 초췌해지긴 했지만 세르게이의 얼굴은 곧 특유의 무표정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하도록 합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에 귀족들은 혀를 내두르며 분분히 자리에 착석하기 시작했다. 정신을 잃은 헬버트론의 몸은 이미 근위 기사들에 의해 옮겨진 상태였다. 곧이어 회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들 중 한 명만은 회의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바로 브릭스 후작이었다. 그는 무척 흐뭇한 눈빛으로 옆에 앉은 디트리히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응급처치를 하긴 했지만 아마도 얼굴의 상처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얼굴을 가로지른 검상으로 인해 앳되고 준수한 모습은 다소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후작은 목소리를 낮춰 말을 걸었다. "얼굴이 망가졌는데 괜찮느냐?" "괜찮습니다. 아버님. 도리어 경험 많은 검사처럼 보일텐데요. 뭘." "녀석." 잃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저처럼 훌쩍 큰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그는 절로 가슴이 뿌듯해오는 것을 느꼈다. 내실로 안내된 데이몬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대우를 받았다. 화려하게 장식된 욕실에서 먼지를 깨끗이 씻어내고 난 뒤 새 옷을 지급 받은 그는 다음 단계로 푸짐한 식사를 대접받았다. 오직 고위급 귀족들만이 즐길 수 있는 최상의 요리들이었다. 성벽 수비병으로 좌천되고 난 뒤 처음으로 먹어보는 음식들이었다. "이거 대접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별일이군 그래?" 마침 무척 시장하던 참이라 데이몬은 마다 않고 음식을 꾸역꾸역 뱃속에 구겨 넣기 시작했다. 화려한 외형에 비해 맛이 별달리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먹을 만은 한 음식이었다. 연신 음식을 집어먹으면서도 대신 한 마디는 잊지 않는 데이몬이었다. "재료가 아깝군. 내가 요리했다면 이것보다 훨씬 맛있게 조리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식사를 마친 데이몬은 소매를 들어 입가의 기름기를 스윽 닦았다. 입을 닦으라는 듯 새하얀 손수건이 탁자 위에 놓여져 있었지만 굳이 쓰고 싶진 않았다. 시중들던 시종들이 질겁하는 것을 한 눈으로 흘려보며 데이몬은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화려한 귀족 의상이 자꾸 걸리적거려 여간 거추장스럽지 않았다. "과연 꼴이 어떻게 변했을까?" 불연 듯 외모가 궁금해진 데이몬은 방구석에 놓인 거울을 향해 다가갔다. 거울 속을 들여다보니 무척 낯선 얼굴이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모습이 상당히 많이 변했군." 눈썹과 머리털이 하나도 없는 데다 피부에 온통 물집이 잡혀 가히 사람의 얼굴로 보이지 않았다. 화기에 익은 때문에 피부는 불그죽죽한 빛을 띠고 있었고 예전엔 못 보았던 주름살들이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일견해 보아도 무척 늙어버린 모습. 아마도 헤이스트를 남용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나도 그리 오랜 못 살 것 같군." 고개를 흔들며 툴툴거리는데 거울 속에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데이몬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을 걸었다. "오셨소?" 방에 들어온 것은 바로 슈렉하이머였다.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모습에서 데이몬은 곧 슈렉하이머의 내심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 모습이 많이 변했지요?" "그, 그렇구려." 슈렉하이머는 멋쩍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그것은 데이몬을 이리로 데리고 온 뒤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방치해 두었다는 데 대한 미안함 때문일지도 몰랐다. 사실 데이몬이란 이계의 실력자는 슈렉하이머에게 정말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가진 힘을 모두 잃기는 했지만 이곳에서 또 다른 해법을 찾아 급속도로 강해질 수 있었던 그 집념에는 정말 찬탄을 금할 길이 없었던 슈렉하이머였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 동안 마법을 배울 수 있었는지 놀랍구려."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나름대로 무척 힘들었지. 세르게이란 놈이 따라다니며 훼방을 놓지 않나……. 거기에다 마법사란 족속들은 무척 폐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더군. 만약 도일 스승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트루베니아는 강력한 조력자를 잃어버렸을 것이오." 슈렉하이머의 눈가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흑마법사 도일에게서 마법을 배우셨소?" "물론……. 흠. 그러고 보니 나도 이젠 흑마법사로군." 슈렉하이머의 안색이 약간 경직되었다. 사실 신관인 그와 가장 상극이 되는 존재가 바로 흑마법사라 할 수 있었다. 만약 오십 년 전에 만났더라면 둘은 아마도 한 쪽이 죽을 때까지 싸워야만 했을 것이다. 베르하젤을 섬기는 신관과 마왕을 섬기는 흑마법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은 인간계가 존립의 위기에 처한 상황. 흑마법사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존재라도 인간의 운명을 위해서는 손을 잡아야 할 때였다. "음! 신성마법이나 백마법을 배웠으면 좋았을 것을. 하필이면 흑마법이라니……." 슈렉하이머의 말이 끝나자마자 데이몬의 눈꼬리가 쭉 찢어졌다. "크크크. 슈렉하이머 대승정. 안본 사이에 헛소리가 많이 늘었구려. 내가 이곳 펠드리안의 마법사들 중에서 찾아가 보지 않은 사람이 도대체 있는 줄 아시오? 그들 대부분은 날 미친 사람 취급하더군. 심지어 날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단 한 사람. 도일 스승님만은 예외였소. 그분만이 유일하게 마법을 배우고자 하는 내 열정을 받아주셨지. 그 덕에 난 마법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라오." "………." "그 딴 소리하려거든 난 참가하지 않겠소. 어쨌든 지금의 나는 뼛속까지 흑마법사이니 말이오." 예상치 못한 상대의 격렬한 반응에 슈렉하이머는 급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 그것이 아니오라." "당신들은 너무 성급히 날 버렸소." 데이몬은 불타는 듯한 시선으로 슈렉하이머을 쏘아보았다. "내 비록 힘은 잃었을지언정 절대자의 자리에 오른 경험과 지식만은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소. 크로센 대제라고 했던가? 비록 그가 어떠한 마나 수련법과 검술을 남겼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겐 그에 결코 뒤지지 않는 마나 수련법이 있었소. 정황을 봐서 그는 필시 정파의 인물이었을 터. 한정된 시간 내에 속성으로 고수를 키워내는 면에서 정파의 내공심법은 어떠한 경우에도 마도의 것을 따라잡을 수 없지." "………." "만약 당신들이 나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 주었더라면 난 최선을 다해 당신들을 도와주었을 것이오. 직접적으로 돕진 못해도 간접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단 말이지. 이를테면 검사들을 교육시키는 일 따위 말이오. 만약 그랬다면 아마도 지금쯤이면 소드 마스터 백 명 정도는 키워 낼 수 있었을 거요. 내가 기억하고 있는 수라사령심법이면 최절정은 아니라도 절정급 까지 연성시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 생각해 보시오. 백여 명의 소드 마스터가 가세한다면 전황이 어떻게 풀려나갔을지 말이오." 슈렉하이머는 침통한 표정으로 묵묵히 데이몬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들은 날 헌신짝처럼 버렸소. 실력을 시험한다는 명분 하에 무수한 몬스터들과 싸움을 붙였지. 난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살아남기로 결심했소. 그리고 강해지기 위해 어떠한 방법으로든 마법을 익히기로 했지."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81회. 슈렉하이머는 떠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미, 미안하오." "뭐, 미안할 것은 없소. 어쨌든 지금까지 왔으니 말이오. 그럼 당신들이 세웠다는 그 계획이나 들어보도록 합시다. 대관절 어떤 계획을 세웠기에 8만의 생명을 사지로 몰아넣었는지 말이오." 데이몬의 서릿발같은 질책에 슈렉하이머는 진땀을 흘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혹시 성녀란 존재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물론 데이몬에게 성녀에 대한 지식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은 트루베니아에서도 이미 오래 전에 잊혀진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시다시피 저희 신관들은 주신 베르하젤 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반대로 인간들의 염원을 베르하젤 님께 전달하는 이들도 있어야겠지요. 예로부터 그 역할을 성녀란 존재들이 맡아왔습니다. 신께 의존하려는 인간들의 소망과 바램을 사심 없이 베르하젤 님께 전달하는 임무 말이지요." 슈렉하이머의 입에서 성녀에 관한 사실들이 술술 풀려 나왔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는 입담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성녀에 대한 개략적인 사항을 이해한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성녀가 그런 존재라고 칩시다. 하지만 이미 트루베니아에서 사라진 성녀를 굳이 거론하는 이유는 뭐요?" "성녀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응? 당신이 조금 전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소? 어둠의 전쟁으로 인해 성녀란 존재를 트루베니아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눈을 둥그렇게 뜨며 반문하는 데이몬을 보며 슈렉하이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베르하젤 님의 축복이지요. 전 우연한 기회에 외딴 왕국에 들렀다가 그곳에 살고 있는 성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심안을 가지고 있는 확실한 성녀였습니다." "심안?"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가진 눈이지요." "젠장. 하여간 이곳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라니까……." 잠시 투덜거리던 데이몬이 정색을 했다. "아무튼 좋소. 그 성녀를 이용해 어떻게 전황을 반전시킬 생각이오? 설마 그녀를 드래곤에게 첩으로 바치며 제발 살려주십시오, 하고 비는 것은 아니겠지요?" "무, 물론 아닙니다." 데이몬의 말도 되지 않는 상상에 슈렉하이머는 연신 땀을 흘려댔다. 속으로 안 본 사이 정말 성질이 더러워졌다고 투덜대며 말이다. "아시다시피 지금의 전황은 정말 불투명하기 그지없습니다. 드래곤의 무서운 파괴력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는 땅으로 곤두박질쳤으며 새로이 태어난 오크 신병들이 계속해서 가세하므로 병력의 우세도 조만간 뒤집힐 것입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소." "어려운 전세를 뒤집기 위해서는 뭔가 파격적인 방안이 강구되어야 합니다. 저희들은 일단 성녀를 이용해서 인간의 존립을 꾀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현재 그녀는 베르하젤 님과 저희들을 연결시킬 수 있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듣고 있던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방인인 그로써도 인간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세르게이를 위시한 각 국 군주들이 꾸민 계획은 대충 이러했다. 이미 트루베니아의 힘만으론 오크와 드래곤의 연합군을 막는다는 것은 물 건너간 실정이었으므로 어떻게 해서든 아르카디아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트루베니아에서 인간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양 대륙을 단절시키고 있는 드래곤 로드를 먼저 처리해야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아르카디아로 연락을 취할 길이 없었다. 또 요행히 연락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아르카디아의 지원군이 이곳으로 올 방법마저 없었기 때문이었다. 슈렉하이머는 열을 올려 계획을 설명해 나갔다. "저희들은 성녀를 통해 저희들의 염원을 베르하젤 님께 전달할 생각입니다. 물론 그분도 인간의 멸망을 바라지는 않으실 터. 그분께서 필시 염원을 들어주실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신에게 부탁해 제발 드래곤이 손을 떼게 해 달라고 하려는 것이오?" "약간은 틀린 면이 있지만 원칙적으론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희는 베르하젤 님께 드래곤에게 빼앗긴 서약석 대신 새로운 서약석을 내려달라고 부탁드릴 생각입니다." 서약석을 빼앗긴 뒤 인간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되찾으려 시도했다. 서약석 없이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만큼 각 왕국의 군주들은 그야말로 필사적이었다. 엄선된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파견되었다. 서약석이 있는 곳으로 말이다. 베르하젤을 받드는 고위급 신관이라면 능히 서약석이 있는 위치를 간파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약석 탈환을 위해 끊임없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임무를 성공한 자는 전무했다. 심지어 파견한 기사들 전부가 돌아오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군주들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사들을 파견했다. 또 기사들은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원해서 사지로 들어갈 것을 자청했다. 하지만 그러던 와중 갑자기 서약석의 존재감이 사라져버렸다. 그 날 이후 그 어떤 신관도 사라진 서약석의 행방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아무리 신앙심이 독실한 신관이라도 말이다. "아마도 드래곤들이 도난을 막기 위해 서약석을 다른 차원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충분히 차원의 문을 열 수 있으니까요.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서약석을 찾아올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볼 수 있지요." 결국 군주들은 서약석의 탈환을 완전히 포기해버렸다. 어디 있는지도 알지 못하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우연히 발견된 성녀의 존재는 그들에게 다시금 서약석에 대한 열망을 부활시켰다. "찾을 수 없다면 신께 간청해 다시 내려 받으면 되지 않겠는가?" 유일하게 베르하젤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존재인 성녀. 그녀 하나만을 믿고 군주들은 최후의 계획을 진행시켰다. 카르나틱 방어군 8만을 희생시킨 것도 이것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저희들에게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패전이 확실하다고 짐작되는 카르나틱 방어군에서 정예 병력만을 뺀 것이지요. 다행히 그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다소의 시간은 벌 수 있었습니다." "죽은 병사들이 들으면 꽤나 가슴 뿌듯해 하겠구려." 슈렉하이머는 데이몬의 이죽거림을 그저 못들은 체 했다. "만약 베르하젤 님께서 저희들의 염원을 들어 새로운 서약석을 내려주신다면 이번 위기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드래곤들이 베르하젤을 겁내 전쟁에서 손을 뗀다는 뜻이오?"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연현상을 역행하는 행위, 이를테면 트루베니아와 아르카디아 사이의 해로를 차단한 것 같은 행위를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뜻이지요. 어차피 그들은 신에게서 각 종족간의 관계를 조율할 수 있는 권한만을 부여받았을 뿐입니다. 만약 베르하젤 님께서 서약석을 통해 인간에게 다시금 관심을 쏟게 된다면 드래곤들은 더 이상 그런 짓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차칫하면 그들 역시 베르하젤 님의 분노를 살수도 있는 문제이니까요." "그렇게 되면 아르카디아에 충분히 연락을 취할 수 있겠군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드래곤들은 벌써 수면기에 들어갔어야 할 시기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법을 사용해서 아직까지 깨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연의 법칙을 어기고 있는 것이지요. 만약 저희들에게 새로운 서약석이 생긴다면 드래곤들은 더 이상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게 행동할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수면기에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곳은 정말 말로만 듣던 전설 속의 대륙이로군." 서약석에 관한 사실을 듣고 난 데이몬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중원에서 자라난 그가 슈렉하이머의 설명을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중원에서 신의 은총이나 성녀, 신에게로의 염원 따위의 말을 입 밖에 꺼낸다면 바로 정신병자로 낙인찍혀 버릴 것이다. 중원은 그만큼이나 신화와 동떨어져 있는 세상이었다. 그런 만큼 데이몬이 ㅅㅍ렉하이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힘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곳은 신화가 통용되는 세상인 트루베니아였다. "좋소. 그렇다면 성녀를 통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신께 청원할 생각이오." "거기에 대해서는 이미 상세한 계획을 세워놓았습니다." 트루베니아의 북단.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오지인 그곳에는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되어버린 베르하젤의 신전이 있다고 한다. 베르하젤이 처음으로 각 종족을 만들어낸 뒤, 서약석에 힘을 불어넣었다고 알려져 있는 곳로써 신과의 연결을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곳도 베르하젤을 신봉하는 종족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워낙 추운 탓도 있었고 베르하젤에 대한 믿음이 많이 희석되어버린 때문에 지금은 거의 찾는 사람이 없어진 실정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저 겉으로 알려진 사실이었고 거기에는 깊이 숨어있는 속사정이 있었다. "인간을 징벌하기로 결심한 뒤 드래곤들은 그곳에다 몬스터들을 대대적으로 풀어놓았습니다. 아마도 인간들이 그곳을 찾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처로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수련하려는 기사들이 더더욱 그곳을 찾았을 것이 아니오? 자신의 실력을 향상시킨다는 목적 하에………." 그 말에 슈렉하이머는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입니다. 마치 상황을 본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실력을 검증 받으려는 기사들이 대거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돌아온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호오? 그곳에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조사 결과 그곳에는 놀랍게도 마계의 몬스터들이 무수히 서식하고 있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물론 드래곤들의 소행이죠." 여기서 데이몬은 그동안 알지 못하던 사실을 새로이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마왕 나이델하르크가 드래곤 로드 크라누스에 의해 봉인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도일이 예견했던 것은 결국 한 치의 틀림도 없는 사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나이델하르크가 봉인된 뒤, 휘하의 마물들은 대부분 크라누스의 손에 장악되었습니다. 물론 다크 쉐이드나 데스 나이트같은 영리한 마물들은 어렵지 않게 드래곤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암흑 군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하급 마물들, 다시 말해 마계에서 불러온 괴수들은 다시 마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 영원히 머물러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소환한 장본인인 나이델하르크가 봉인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곳은 완전히 죽음의 땅으로 화해 버렸습니다." 마물들을 그곳으로 몰아넣은 뒤 드래곤들은 그곳에 빙 둘러 결계를 쳤다고 했다. 첫 번째로 마물들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막는 동시에 두 번째로는 마물들이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암흑의 기운을 한데 모으는 역할을 하는 결계를 말이다. 마물들은 보통 인간계에선 가진 힘의 10분지 일도 발휘할 수 없다. 하지만 결계 안에선 마계에서의 힘을 고스란히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탓에 그곳은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절지로 변해버렸다. 모든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마계의 괴수를 감당할 기사는 이카롯트 제국을 통틀어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묵묵히 듣고 있던 데이몬은 탄성을 질렀다. "햐! 드래곤들은 정말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해 엄청난 준비를 했구려." "그렇습니다. 저희는 성녀를 그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 모든 것을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굳이 데이몬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지금 저희들에겐 단 한 명의 실력자라도 아쉬운 실정입니다." "하지만 어둠의 마물들이 상대라면 내 능력이 별달리 소용되지는 않을 텐데……. 마물들은 인간과 급소가 전혀 다를 테니 말이오." "상관없습니다. 그곳에는 마물들 말고도 온갖 중형 몬스터들이 버글거리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주로 결계 외부를 지키고 있지요. 이건 제 생각인데 아마도 오우거나 트롤 같은 중형 몬스터를 상대로는 데이몬 이상 가는 적임자가 없을 듯 합니다." "그 말은 맞는 것 같소."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적어도 갑주를 걸치지 않은 중형 몬스터를 대상으로라면 상대가 열이건 백이건 간에 자신이 있었다. 우쭐대던 데이몬을 지켜보던 슈렉하이머는 지긋한 눈빛을 보냈다. "이번에는 도와주시겠지요? 데이몬" 잠시 슈렉하이머의 얼굴을 쳐다본 데이몬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난 베르키스란 놈에게 복수를 해야 하오. 복수의 대상이 같으니 협력하도록 하리다." 슈렉하이머의 얼굴에 점차 미소가 번져갔다. 오우거 헌터인 데이몬이 가세한다면 계획이 성공할 확률이 다소 높아지기 때문이다. 데이몬은 멋쩍은 미소를 띠며 손을 내밀었고 슈렉하이머는 그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데이몬의 손은 생각 외로 따듯한 편이었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82회. 그 날부터 데이몬에겐 최상의 대우가 제공되었다. 고위급 귀족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유감 없이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에겐 남자 시종과 여자 시종, 각각 둘씩과 함께 고급스러운 큰 숙소가 주어졌다. 화려한 의상은 물론이었고 끼니때마다 최상의 식사가 제공되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데이몬에겐 새로운 대우가 마치 안 맞는 옷을 걸친 것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이거 원! 형장에 끌려가는 죄수 같잖아? 가서 죽기 전에 마음껏 호사를 누리라 이건가?" 데이몬은 펑퍼짐한, 한 눈에 보아도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은 채 한없이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대륙 북단에 위치한 죽음의 땅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에겐 차라리 전장이 체질적으로 잘 맞는 장소 같았다. 하지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세르게이는 준비가 덜 되었다는 핑계 하에 출발을 계속 미루고 있었다. "젠장! 전장에서는 지금도 무수한 병사들이 죽어갈 텐데……." 데이몬은 터벅터벅 걸어가서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최고급 보료라서 푹신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미간을 찡그린 데이몬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젠장 몸 균형도 제대로 못 잡을 정도니……." 그는 바닥에 털썩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시간이 닿는 대로 수련을 해 두어야겠군. 어떤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말이야." 막 마나를 끌어 모으려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앳된 얼굴의 시녀 하나가 종종걸음을 달려오고 있었다. 수련을 못하게 된 터라 데이몬은 얼굴을 구기며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무슨 일이냐?" "저……. 식사 준비가 다 되었사옵니다." 애석하게도 시녀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얼굴 표정을 봐서 자신을 무척 두려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돌연 짜증이 치밀었다. "이런 빌어먹을……. 내가 그렇게 험상궂게 생겼나?" "아, 아니옵니다." "속에 없는 말은 하지마!" 버럭 고함을 지른 데이몬은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돌연 그의 눈가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가만? 내가 계집을 안아본지가 얼마나 되었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족히 몇 년은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중원에서 넘어온 이후로 그에겐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중원에서야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거절할 계집이 없었지만 이곳은 사정이 판이하게 달랐다. 비천한 용병 신세였던 그에게 관심을 갖는 여자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세르게이의 명령에 의해 그는 이제 최상의 대우를 받고 있었으며, 트루베니아의 생활에 익숙해진 터라 귀족들이 심심찮게 시녀를 건드린다는 사실 따윈 잘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회포나 풀어볼까?" 눈에 색기를 띠며 다가가는 데이몬. 그 모습에 시녀는 극도의 공포감을 눈망울에 떠올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불쌍하게도 가녀린 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왜? 왜 이러시옵니까? 나리." "흐흐흐. 잘 알면서 모르는 척 하지 마라."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데이몬을 보고 시녀는 눈을 꼭 감아버렸다. 물론 모시는 주인에게 몸을 바친 경험이 없진 않았지만 지금은 경우가 판이하게 달랐다. 새로 배정된 이방인의 용모는 한 눈에 보기에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아무래도 제정신으론 도저히 저자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얼굴 부근에서 후끈거리는 단내가 느껴지자 그녀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이 열리며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 신이시여 제발……." 순간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발걸음소리가 딱 멎었다. 상대는 그 상태 그대로 거친 숨만 훅훅 몰아쉬고 있을 뿐이었다. 도무지 몸에 손을 대려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응?" 의아해진 시녀는 눈을 살며시 떠보았다. 그런데 바로 코앞에 소름끼치는 얼굴이 바짝 붙어있는 것이 아닌가? 이방인은 자신의 면전에 얼굴을 바짝 붙여놓고 있었다. 여자인 이상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악." "제기랄! 안 건들 테니 닥쳐!" 그때서야 시녀는 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상에 주인의 얼굴을 보고 비명을 지르다니……. 중세시대인 트루베니아에서 시녀의 목숨은 말 그대로 파리 목숨이라 볼 수 있다. 조금만 마음에 거슬린다면 주인은 시종에게 혹독한 처벌을 가했다. 온 몸이 시퍼렇게 멍들 정도의 매질은 물론이오, 최악의 경우 가차없이 죽여버리는 일도 잦았다. 때문에 시녀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이 미천한 것을 죽여주십시오."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 그녀의 운명은 전적으로 주인의 기분에 달린 일이다. 쉽게 말해 이방인이 앙심을 품었다면 그녀는 즉시 목이 달아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문이 열리며 일단의 군화소리가 방안으로 우루루 밀려들어왔다. 자신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근위병들이 분명해 보였다. 사정을 알게 되면 그들은 자신을 가차없이 처형장으로 끌고 갈 것이었으므로 시녀의 얼굴은 아예 사색이 되어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달려 들어온 근위병들은 다급하게 방안의 정경을 살폈다. 순간 그들 중 몇몇의 안색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방안에는 얼마 전 근위병의 명성에 치명적인 오점을 찍어놓았던 인물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신으로 근위병 오십여 명을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지게 했던 입지전적인 존재. 특히 그에게 제압 당한 경험이 있는 근위병들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근위대의 명성을 걸고라도 앙갚음을 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이제 이카롯트의 귀빈 신분이었다. 섣불리 그의 성질을 건드리는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삼가야 했다. 따라서 그들은 우선 방안의 상황을 살폈다. 눈치 빠른 근위병 한 병이 금세 정황을 파악했다. '놈의 얼굴은 남자인 자신들이 보기에도 섬뜩할 지경이야. 아마도 시녀를 겁탈하려다 비명소리 때문에 미수에 그쳤나보군. 시녀가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지.' 마음을 정리한 근위병은 데이몬에게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시녀가 귀인의 마음을 거슬렀나보군요. 저희들이 처리하겠습니다." 몸을 일으킨 근위병은 시녀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데리고 나가라. 귀인의 심기를 건드린 죄로 따끔하게 벌을 줄 것이다." 불쌍한 시녀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사시나무 떨 듯 떨 수밖에 없었다. 근위병들이 달려들어 그녀를 우악스럽게 잡아 일으켰다. 그 때 데이몬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잠깐. 너희들 지금 뭐 하자는 거냐?" "네? 저 저희는 잘못을 저지른 시녀를 벌하려는……." "잘못을 저질렀는지 안 저질렀는지 너희들이 그렇게 잘 알아?"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며 윽박지르는 데이몬. 뜻밖의 반응에 근위병들은 그저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이것들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기어 들어와 소란을 피우고 지랄이야! 저번에 맛본 매직 미사일이 여직 직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지?" "아, 아닙니다." 과거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데이몬이 근위병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결코 좋지 못했다. 과거 근위병들에게 그 얼마나 많은 수모를 겪었던가?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난 데이몬은 덮어놓고 매직 미사일을 날렸다. 유난히 뺀질거리는 놈의 면상을 향해서 말이다. "쿠엑." 잘난 체 하던 근위병은 단 한 방에 뻗어버렸다. 눈치가 유난히 빠른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기절한 동료를 부축하는 근위병들에게 데이몬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너희들처럼 허약한 놈들의 경호는 필요 없으니까 빨리 여기서 사라지도록. 이후론 이곳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도 신경 끄도록 하고……." "아, 알겠습니다." 기절한 동료를 들쳐업은 근위병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방을 빠져나갔다. 물론 속으로 갖은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말이다. '뭐 저런 성질머리가 다 있지?' '젠장 재수 옴 붙었군.' 근위병들이 모조리 사라지자 데이몬은 시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일어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목숨을 건졌다는 안도감이 뇌리를 스쳐지나갔지만 또 다른 고민거리가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는 필시 내 몸을 요구할거야.' 비록 근위병들의 처벌에서 구해주었다고는 하나 얼굴을 보자 또다시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저런 자에게 몸을 내맡기기가 정말 죽기보다 싫었다. 하지만 목숨이 걸린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살려면 어떤 요구라도 들어주어야 했다. "조금 전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말을 마친 시녀는 서둘러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옷이 한 꺼풀씩 벗겨지며 새하얀 속살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예? 저 저는……." 시녀는 옷을 벗다 말고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푹 수그렸다. 차마 다음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혀를 끌끌 찼다. "널 범할 생각이 싹 사라졌으니 그만 옷을 입거라." "네? 아, 아닙니다." "내 몰골이 그렇게도 험상궂으냐?"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쩔쩔 매는 시녀를 쳐다보던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만 두자. 오늘 일은 없던 것으로 하고 나는 이만 식사나 하러 가련다." 툴툴거리며 걸어나가는 데이몬.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시녀의 눈망울엔 의혹이 가득 차 있었다. "제미랄 것. 계집들이란……." 화려하게 치장된 회랑을 걸어나가며 데이몬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물론 시녀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여자들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들은 자신을 마치 징그러운 벌레를 보는 것인 양 대했다. 자신을 쳐다보는 여자들의 눈동자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경멸감과 메스꺼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사실 배교의 교주 시절에 그는 무수한 여자와 몸을 섞은 경험이 있었다. 물론 그가 가지고 있는 교주란 신분 때문에 여자들은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녀들에서도 동일한 눈빛을 보았다. 마치 도마뱀이나 바퀴벌레가 피부를 기어다니는 듯한 눈빛 말이다. 그것을 상기한 데이몬은 툭 던지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마법실력이 향상되면 어디 한 번 외모를 바꿔봐야겠군. 계집들이 날 어떻게 대하는지."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것은 별달리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외모를 바꿀 수 있지만 본질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데이몬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누구를 속이는 것은 결코 데이몬의 직성에 맞지 않았다. "젠장 맞을……. 그냥 생긴 대로 살아야지." 별안간 분통이 치밀어 오른 데이몬은 식당의 문을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콰당. 문이 부서질 듯 열어 젖혀지자 데이몬은 안으로 쓱 들어갔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83회. 식당 안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무척 터프(?)하게 들어온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데이몬에게로 꽂혔다. 하나같이 호화로운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봐서 이카롯트를 이끌어나가는 고위급 귀족들이 분명했다. 데이몬은 시선들을 가볍게 무시해 버리고는 빈자리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 때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았다. "응? 네놈은?" 데이몬의 눈매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앞을 가로막은 자가 상당한 내공수련을 쌓은 고수 란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상대는 대략 30대 중 후반으로 보이는 상당한 미남자였다. 금발 머리에 멋들어지게 콧수염을 기른 모습은 전형적인 이카롯트의 귀족의 표준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태양혈이 불룩 솟아있고 갈색 눈동자에 정광이 맺혀 있는 것을 봐서 엄청난 수련을 쌓았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즉 이곳에서 말하는 소드 마스터 말이다. 데이몬은 창촐간에 미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처음에 만났을 땐 투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음! 네놈이었군. 이름이 헬버트론이었나? 그래 몸은 좀 어때?" 헬버트론의 입 꼬리가 묘하게 비틀어졌다. 사실 여러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일개 마법사에게 넉다운 당한 경험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리 유쾌하다고 볼 수 있는 경험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기사도에 충실한 기사였다. 다시 말해 정정당당한 대결에서 당한 패배 따위로 앙심을 품는 소인배는 아니란 뜻이다. "뭐 덕분에 하루를 꼬박 누워 있었지. 매직 미사일 맛이 제법 맵더군." "그럴 거야. 이판 사판으로 날린 일격이었으니……." "몸놀림과 반사신경이 정말 대단하더군. 과거에 소드 마스터였다면서?" "그랬었지?"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싸워보고 싶군." 데이몬은 찔끔했다. 사실 또다시 싸운다면 결코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의 몸이 정상이었다면 헬버트론은 결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쓰러뜨린 쌍수마존은 헬버트론보다 적어도 몇 단계 위의 고수였다. 그런 자도 쓰러뜨린 마당에 헬버트론이 그를 감당할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볼 수 있다. 하지만 데이몬은 이제 내공을 완전히 잃어버린 몸이 되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결코 헬버트론보다 강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승리는 상대의 방심을 적절히 이용해서 얻어낸 것으로 다시 싸운다면 결코 승산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데이몬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기회가 된다면……." 그런 데이몬의 내심을 짐작한 듯 헬버트론은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내 동료들을 소개해 주지." 헬버트론이 가리킨 곳에는 세 명의 남자가 눈을 빛내며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눈에 정광이 서려있는 자들로써 한 눈에 보아도 헬버트론에 육박하는 고수들임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저들이 이카롯트를 이끌어나간다는 4명의 소드 마스터인 듯 싶었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우선 얼굴에 흉터가 있는 날카롭게 생긴 녀석은 라인델프." 그러자 얼굴에 긴 칼자국이 나 있는 사내가 차갑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마치 벼른 칼날처럼 날카로운 표정을 가진 자로써 얼굴을 가로지른 흉터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데이몬은 마주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저기 조금 둔해 보이는 친구는 프림베르그라는 작자야." 체격이 당당한 사내 하나가 빙그레 미소를 지어주었다. 동글동글한 인상을 가졌으며 입가에는 마냥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넷 중에서 체격이 가장 좋았지만 그렇다고 별로 뚱뚱해 보이지는 않는 몸매였다. "저놈은 몸에 붙은 살 때문에 중검(重劍) 계열의 검술을 익혔지. 저 친구가 사용하는 브로드 소드는 어지간한 병사들은 들어올리지도 못하는 걸로 알고 있어." 계속해서 동료들을 소개해 나가던 헬버트론은 마지막 사내에게 손가락 짓을 했다. 마치 여자처럼 갸름한 얼굴 선이 한없이 고운 미남자였다. 특히 우수에 차 있는 듯한 눈매가 무척 일품이었다. "저 남잔지 여잔지 분간하기 힘든 친구는 사라미스라고 하지. 우리들 중에서 여자 꼬시는데는 가장 달인이라고 보면 돼." "저 자식이……."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사라미스를 옆의 동료들이 다급히 만류했다. 화를 참지 못해 씨근거리는 것을 보면 성격이 상당히 민감한 자인 듯 했다. 머쓱해진 헬버트론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그들에게 데이몬을 소개시켰다. "자, 자. 이 친구가 어제 날 때려눕힌 친구야. 내 살아 생전 마법사에게 당하리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지. 하지만 어쩌겠나, 사실인걸……. 그의 매직 미사일은 정말 무섭더군." 그 말에 호기심이 동했는지 세 사람의 시선이 일시에 데이몬의 얼굴에 와서 꽂혔다. 별달리 호의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시선들이었다. 라인델프란 자의 입에서 냉소 비슷한 말이 터졌다. "헬버트론을 꺾었다고 우릴 얕봐선 안될 거야. 헬버트론이 우리들 중에서 가장 어리버리하다는 것은 멍청한 오크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말이야." 그 말에 세 기사는 왁자하게 폭소를 터뜨렸다. 헬버트론은 고개를 흔들었다. "못 말릴 녀석이군. 이봐. 저 녀석 말은 그냥 가볍게 무시해버리도록 해."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이었어. 한 눈에 보아도 너보다 더 어리버리하게 생겼군." 헬버트론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라인델프에게 한 방 멋지게 날린 것이 통쾌하기 그지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실력만큼이나 입담도 보통이 아니군." 나머지 둘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고 한 방 얻어맞은 라인델프 만이 어금니를 지긋이 깨물 뿐이었다. 잠시 그들을 쳐다보던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이곳에 있는 것이 괜히 안 맞는 옷을 억지로 껴입은 것처럼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헬버트론이 다급하게 그의 어깨를 잡았다. "아니 어디 가는 거야?" "밥 먹으러……." "주문하면 바로 나올텐데. 우리랑 같이 식사를 하지?" "이곳 요리사 놈들의 실력이 영 형편없더군. 그래서 내가 직접 요리를 해 보려고……." 헬버트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햐! 요리에 조예도 있었어? 맛이 어떨지 무척 궁금하군." 하지만 헬버트론과는 달리 나머지 세 기사의 얼굴에는 다소 떨떠름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들 정도의 고급 귀족에게 음식이란 그저 격식에 맞춰 즐길 줄만 알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요리를 만드는 것은 오로지 요리사들의 몫이었고 귀족들은 그것을 먹기만 하면 된다. 그런 때문에 그들은 직접 요리를 만드는 것을 하층민들의 천한 행동이라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헬버트론만은 예외였다. 상당히 낙천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듯 그는 데이몬의 요리에 부쩍 관심을 보였다. "맛 정도는 보여줄 수 있겠지?" 데이몬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헬버트론은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들도 한 번 요리를 즐겨 보겠어?" "아니 우리는 정중히 사양하지." 거절을 듣자 데이몬은 지체 없이 주방으로 향했다. 구태여 저런 녀석들을 위해 요리를 만드는 것은 그도 별달리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가 주방에 들어가고 나자 헬버트론은 동료들 곁으로 돌아왔다. 라인델프가 영 못마땅하다는 눈초리로 말을 걸었다. "난 저 녀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생긴 것도 그렇고, 말하는 것도 전혀 예의가 없고……." "얼씨구? 넌 예의가 있어?" 라인델프는 헬버트론의 농지거리를 묵살한 채 자신의 의견을 펼쳐나갔다. "사실 흑마법사가 이곳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된다고 생각해? 예전 같았으면 보는 즉시 목을 날려버렸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인간의 존립을 위해 힘을 합쳐야 할 때야. 이미 저자의 실력은 내가 겪어보았지. 공작 전하의 말씀에 의하면 저자의 오우거 잡는 솜씨가 정말 일품이라고 하더군. 그렇다면 그는 우리 계획에 꼭 필요한 자라고 볼 수 있어." "하지만 출신지도 명확하지 않고……. 또 놈이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잖아?" "뭐 그 점에 대해서는 별달리 상관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헬버트론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감돌았다. "만약 계획이 성공리에 끝난다면 세르게이 공작전하께서 그 자를 살려두실 까닭이 없을 테지. 어쨌든 놈은 타 차원에서 건너온 놈이고 이미 공작 전하께 여러 번 무례를 범했으니 말이야." "그건 그래. 놈이 제 아무리 날뛰더라도 우리 중 한 명이 맡는다면 충분히 죽일 수 있지. 물론 네놈만 빼고……." "이런 빌어먹을……. 방심만 하지 않았다면 넉다운 된 것은 분명 놈이었을 거야." 어지간한 헬버트론도 패배를 상기하자 별안간 음성이 거칠어졌다. 신중한 성격인 듯 라인델프가 주의를 주었다. "쉿 조용히……. 놈이 듣겠어." 네 소드 마스터들이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데이몬은 주방에서 연신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다음은 연어 살 4 파인트." "아, 알겠습니다." 난데없이 들어 닥쳐 요리를 한답시고 날뛰는 작자 하나 때문에 귀족 식당의 요리사들은 얼이 반쯤 빠져있었다. 물론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요리하는 일을 천한 일이라 생각하는 때문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추악하게 생긴 조그마한 녀석 하나가 난리를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복장을 봐서 고급 귀족이 틀림없어 보였기에 요리사들은 군소리 없이 그의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후추와 소금, 그리고 완두콩 기름을 조금 가져와." "하, 하오나 완두콩 기름 같은 저급 기름은 이곳에 없는지라……." "멍청한 자식! 완두콩 기름이 왜 저급 기름이야? 그럼 뭐가 있지?" 중년의 요리장이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황궁 요리실을 맡은 지 어언 20년 동안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벌어진 적이 없었다. "오, 올리브 기름은 있습니다만……." "올리브 기름? 흠! 그것도 괜찮겠군. 일단 가져와 보도록……." "아, 알겠습니다." 이름만 대면 재깍재깍 재료를 가지고 오는 때문에 데이몬은 비교적 편하게 요리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재료가 풍부했기 때문에 이참에 상당한 고급 요리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좋군. 이참에 황실 요리장 자리나 꿰어 차 볼까."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에 몰두하는 데이몬. 그 말을 들은 기존의 요리장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제미랄. 어디서 반 토막 같은 게 굴러 들어와 요리를 한다고 난리야?' 이것저것 뒤섞어서 팬에서 볶이고 있는 재료들을 보면 별 반 맛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우선 재료의 구성이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배합이었고 양념 역시 전혀 엉뚱하게 들어가 있었다. 맵고 짠맛과 신맛을 내는 향신료가 뒤죽박죽으로 뒤섞였으니 말이다. 데이몬이 지금 만들고 있는 요리는 중원에서도 오로지 황실에서만 맛볼 수 있는 최고급 요리 중 하나였다. 오로지 황족들만이 즐길 수 있는 요리이기 때문에 외부에는 명칭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 만큼 요리 방법이나 재료의 구성이 철저히 베일에 싸여있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우연한 기회에 비법을 전수 받을 수 있었다. 사준환이 그를 위해 납치해 온 숙수들 중에는 황궁에 소속된 숙수가 하나 끼여 있었던 것이다. "세, 세상에……." 당시 요리의 맛을 본 데이몬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미식가라 자부하며 무수한 요리를 맛보았지만 이처럼 오묘한 맛을 내는 요리는 처음이었다. 가히 중화요리의 정수라 일컬을 수 있음직한 요리. 그 때의 맛을 잊지 못한 데이몬은 모처럼 그 요리를 만들어 시식해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놈을 준비하려면 재료를 마음껏 구할 수 있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이지." 연어 살이 어느 정도 볶이자 데이몬은 팬 속에다 버섯을 첨가했다. 원래 사용하는 중원의 버섯보다 크기도 컸고 향도 달랐지만 양념의 배합을 약간 달리 했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을 듯 했다. 게다가 올리브 기름은 완두콩 기름보다 오히려 부드러워서 요리의 향이 제대로 살아 날 것 같았다. 팬 속에서 볶이고 있던 요리는 서서히 제 냄새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 냄새에 데이몬은 탄성을 질렀다. "캬! 과연!" 옆에서 요리장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요리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84회. 오늘은 연참을 하는 날이군요. 그동안 잦은 연중을 했으니 한 번쯤 연참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요? 이유는 바로 삭제공지 때문입니다. 이미 계약을 한 상태이고 출판사로 원고가 들어갔기 때문에 일정 분량을 지우려 합니다. 분량은 첫 회부터 71까지 잡고 있습니다. 소엠과 덜라 총 4군데에서 연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지워야 할지 엄두가……. ^^ 내일 자정 무렵에 삭제를 할 생각입니다. 그럼 즐통하세요.^^ ******************************************************************************** 처음에는 당연히 못미더운 눈빛이었다. 하지만 요리의 냄새가 발산되기 시작하자 그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이것은 그가 생전 처음으로 맡아보는 고소한 요리 냄새였다. "어, 어떻게 이런 냄새가……." 연신 코를 벌름거리는 요리장. 냄새만 맡아도 절로 군침이 돌만큼 요리의 향은 매력적이었다. 처음에는 고소했다가 어떻게 보면 싱그러운 풀 냄새 같기도 한, 요리의 냄새는 정말 복합적으로 풍겨오고 있었다. 벌써 요리장의 입 속에는 침이 가득 고이다 못해 목구멍으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는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다. 요리실 내부의 요리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군침을 삼키고 있는 것이다. 곁눈질로 그 모습을 지켜본 데이몬은 내심 어깨를 으쓱했다. "이놈들아! 중화 요리는 예로부터 천하 제일이니라……. 그저 고기를 굽거나 삶는 네놈들이 어찌 이 맛을 알까?" 요리의 냄새는 요리실 내부를 진동하다 못해 연회장 내부로까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매혹적인 냄새에 식사를 하러 들어온 귀족들은 연신 코를 벌름거렸다. "이게 무슨 냄새지?" "햐! 기가 막히는 군." 입맛이 돈 귀족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냄새를 풍기는 요리를 가져다달라고 했다. 하지만 요리사들이 애당초 그럴 권한이 없었다. 고객이 직접 만들어 먹을 요리인데 어찌 내 놓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난색을 표하며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대단히 죄송하오나 저 요리는 데이몬 남작께서 직접 만드시는 요리입니다. 직접 드실 것이기 때문에 그 요리만은 주문을 받을 수 없습니다." "뭐라고 직접 요리를 한다고……." 남작이나 되는 작자가 직접 요리를 한다는 말에 귀족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문할 수 없는 요리란 말에 그들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할 일이 무척 없는 사람이군. 하지만 냄새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군." 요리사들의 경의 어린 눈빛 속에서 데이몬은 마침내 요리를 마쳤다. 요리사들의 눈빛이 경멸감에서 경의로 바뀌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팬 속의 요리를 접시에 쏟아 부은 데이몬은 향이 날아가지 않도록 뚜껑을 단단히 덮었다. 그리고 막 접시를 들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다급한 음성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저…. 대단히 죄송하지만 제게 요리의 맛을 감상할 영광을 내려주시지 않겠습니까?"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요리장이었다. 그의 눈망울에는 어떻게 해서든 요리의 맛을 보겠다는 열의가 가득 차 있었다. 향에 반한 나머지 맛이 어떨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던 요리장이었다. 내심을 짐작한 데이몬은 흔쾌히 승낙했다. "좋다. 까짓 것." 접시를 열어 요리를 한 점 집어준 데이몬. 그는 요리장이 요리를 먹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이미 요리의 맛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데이몬이었다. 요리를 입에 넣은 요리장이 잠시 침묵을 지키자 궁금해진 요리사들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저, 마스터…. 맛이 어떠신지?" "향만 그럴 듯 하지 맛은 별로겠지요?" 요리사들의 질문공세에도 요리장은 침묵을 지켰다. 별안간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요리사들은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마스터. 도대체 왜 눈물을……."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요리장은 침통하게 입을 열었다. "아, 앞으론 나에게 더 이상 마스터라고 부르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오늘……." "오늘?" "지, 진정한 하늘을 뵈었다.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요리의 신이었다. 신. 나는 이토록 훌륭한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신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나는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요리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겨우겨우 말을 마친 요리장은 결국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순수한 요리 실력의 차이에서 오는 열등감 때문이었다. 요리사들은 입을 딱 벌린 채 요리장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다 되었다." 요리접시를 탕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은 데이몬은 헬버트론에게 손짓을 했다. "맛이 궁금하다고 그랬지? 뚜껑을 열고 먹어도 좋아. 물론 너 하나에 한정된 허락이겠지만 말이야." 주방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냄새에 아까부터 입맛이 동했던 터라 헬버트론은 사양하지 않고 뚜껑을 열어 젖혔다. 순간 요리의 향이 온 식당 내부를 진동시키기 시작했다. "햐! 냄새 정말 죽이는데……." "맛은 더 죽일 거야. 난 아무에게나 요리를 만들어주지 않거든……." "그럼 맛을 한 번 볼까?" 연회장 안 사람들의 선망 어린 눈빛을 받으며 헬버트론은 요리 한 점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코끝을 맴도는 먹음직스런 냄새에 벌써부터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헬버트론은 요리를 입안에 넣고 한 입 씹었다. 순간 요리는 그래도 침과 섞여 그의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동시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응!" 딱딱하게 굳어버린 헬버트론의 얼굴. 그 모습에 나머지 세 기사들은 긴장한 채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혹시라도 독이 들어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뒤이어 이어진 헬버트론의 영문 모를 행동에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와구와구. 헬버트론은 정신 없이 음식을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고개를 아예 접시로 쳐 박고 말이다. 그 모습은 마치 맛있는 과자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아이의 행동과 한 치의 틀림도 없었다.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도무지 모를 정도로 요리의 맛은 훌륭했다. 일류급 요리사에 의해 단련된 그의 입맛도 전통 있는 중국 요리의 유혹을 견뎌내기엔 부족했던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은 빙그레 웃으며 요리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이봐. 헬버트론." "뭐 하는 거야?" 의아해진 동료 기사들. 물론 그들이라고 냄새에 군침이 돌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체면 때문에 억지로 참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헬버트론이 보여주는 모습에 요리의 맛이 어떤지 궁금해 미칠 지경인 그들이었다. "이봐! 그렇게 맛있어?" "대답을 좀 해봐." 거듭되는 질문을 거듭 무시한 채 헬버트론은 여전히 접시에 고개를 쳐 박고 정신 없이 먹어댈 뿐이었다. 마침내 그는 접시가 완전히 빈 다음에야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깨끗하게 비웠는지 아예 설거지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식사를 마친 헬버트론은 데이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초리에는 예외 없이 경외감이 짙게 배어있었다. "정말 잘 먹었다." "뭐, 인사까지야." "이 헬버트론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훌륭한 맛이었다. 말도 안 되는 설명이겠지만 요리를 먹으며 오르가즘 비슷한 것을 느낄 정도였다." "뭐 맛있게 먹었으면 되었고……." 요리접시가 아직 비진 않았지만 데이몬은 식사를 마쳤다. 어느 정도 배가 찬 상황이었고 내심 잘난 체 하는 세 기사를 좀 놀려줄 심산도 있었다. 수건을 들어 입을 닦은 데이몬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난 이만 가 봐야겠군. 요리를 해 준 대가로 내게 궁전 구경을 좀 시켜주지 않겠어?" 헬버트론을 이곳에 남겨둔다면 분명 자신이 남긴 요리까지 섭렵해버릴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그를 데리고 가야 했다. "그, 그럴까?" 헬버트론은 할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물론 몹시 아깝다는 눈빛으로 데이몬이 남긴 요리를 한 번 응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일어서며 그는 동료들에게 한 마디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말 죽이는 맛이었어. 아마 너희들은 죽었다 깨도 모를 정도로 말이지." 데이몬이 헬버트론을 데리고 나간 뒤 남은 기사들의 시선은 곧 접시에 남은 음식으로 집중되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요리의 맛이 어떨지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음식접시에 손을 대는 것은 결코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이카롯트를 이끌어나가는 네 기둥이라는 소드 마스터들이 남이 먹다 남은 음식에 눈독을 들인다는 것은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음식의 향이 남아 코를 자극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식당 내부의 모든 귀족들이 요리 접시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접시가 다른 탁자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마도 같은 탁자에 있었다면 바로 달려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정말 미치겠군.' '대관절 어떻게 한다?' 라인델프와 프림베르그, 사라미스 세 사람의 얼굴에 짙은 갈등의 빛이 거듭 교차했다. 마음 같아서는 요리를 맛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탁자를 향해 집중되는 시선으로 말미암아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다. 말 그대로 유혹과 체면 사이에서 심각하게 갈등하고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이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다가왔다. "다 드셨으면 치우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의 요리사들이 다가와 탁자 주위를 빼곡이 에워쌌다. 하나같이 군침을 흘리는 모습에서 탁자를 치우려는 목적 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음이 분명했다.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린 라인델프가 짐짓 헛기침을 했다. "아니다.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았다. 치우려면 조금 기다리거라." 요리사들은 몹시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갔고 라인델프는 침을 꼴깍 삼키며 포크를 들어 접시로 가져갔다. 순간 식당 내부의 무수한 시선들이 그의 얼굴로 꽂혔다. 하지만 그는 이미 마음을 단단히 먹은 상태였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요리의 맛을 보고야 말겠다는 다짐 말이다. 얼굴이 연신 화끈거렸지만 과감하게 포크로 요리를 찍은 라인델프는 그것을 재빨리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예외 없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헬버트론과 한 치의 틀림도 없는 모습으로 말이다. "마, 맛이 어때?" "괜찮아?" 프림베르그와 사라미스의 질문공세가 이어졌지만 이미 라인델프의 뇌리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뿐이었다. '맛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접시에 쳐 박았다. 이것까지도 헬버트론과 다름이 없었다. 그 모습에 남은 동료들은 반사적으로 접시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런 치사한 자식." "같이 먹자." 곧 그곳은 동료들끼리 아귀다툼을 벌이는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그 모습을 뜻을 이루지 못한 불쌍한 요리사들과 귀족들이 몹시 아쉽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밖으로 나간 데이몬은 한 동안 헬버트론으로부터 궁전 내부를 안내 받았다. 훌륭한 요리를 대접받은 데 대한 보답인지 그는 비교적 친절하게 궁성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하지만 머나먼 타국의 궁궐에 대해 데이몬이 관심을 가지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아무리 화려하다 하더라도 그와는 하등 상관없는 것들인 것이다. 결국 그는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헬버트론을 떼어놓았다. 그와 헤어진 뒤 데이몬은 홀로 정원을 거닐었다. 고민거리가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마법 실력을 급상승시킬 수 있을까?" 그를 고뇌하고 만드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사준환에 이어 복수해야 할 대상이 하나 더 생겼고 그것은 바로 강력한 존재 드래곤이란 사실.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는 설사 자신이 온전한 몸이었더라도 이길 가능성이 희박한 존재라 볼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복수를 해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줍잖은 마법으로 드래곤을 상대한다는 것은 정말 어불성설이야. 어떻게 해서든 빨리 8,9 써클로 올라서 네크로멘서가 되어야 된다." 하지만 생각을 해 보니 그 시간동안 자신이 살아있기를 바라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헤이스트를 마구 남용한데다 몸을 함부로 굴린 때문에 그의 몸은 이미 심하게 노화가 진행된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솔직히 20년도 장담하기 힘들었다. 벌써 오십 줄에 접어든 터라 데이몬은 안면을 찡그렸다. "고작 이십 년, 정상적인 방법으론 6써클에도 오르기 힘들다. 어디 속성으로 마법을 익히는 방법이 없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배운 지식에 유추해 보건데 마법이란 학문은 오히려 무공보다도 속성이 힘들다고 볼 수 있었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85회. 그렇다고 무공이라고 해서 결코 속성이 쉬운 것은 아니다. 오랜 역사동안 수많은 고수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고 그 결과 나름대로의 속성법이 여러 문파에 정립되어 있긴 하지만 속성법들 대부분이 치명적인 약점을 간직하고 있었다. 일례로 데이몬이 익힌 천자혈마공이 바로 그러했다. 천인공노할 만한 연성방법도 문제였지만 강해지더라도 마성이 골수에 사무쳐 피에 굶주린 살인귀가 된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인 것이다. 내공수련법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사파의 내공심법이 정파의 그것에 비해 연성속도가 빠르기는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일정 수준까지였다. 절정의 경지에 접어들면 사파의 내공심법은 더 이상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름하여 마의 벽에 봉착하는 것이다. 그 벽을 깨고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것은 정파 내공심법에 비해 가능성이 무척 희박했다. 물론 절정의 경지 정도라면 이곳 트루베니아에선 능히 이름을 떨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데이몬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도무지 방법이 없군." 무공이던 마법이던 간에 정석에 따라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수련하는 것만이 오직 최선이었다. 속성으로 익힌다는 것은 분명히 나름대로의 문제점을 간직하고 있을뿐더러 주화입마에 빠질 우려도 있었다. 거기에다 가장 중요한 점은 마법에는 속성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물론 도일이 정립해놓은 속성법이 있지만 그것은 단지 3써클까지만 적용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 이후의 단계는 오로지 정석적인 방법으로만 길을 밟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데이몬에게 그 방법을 시도할 만한 시간이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다. "빌어먹을……. 제기랄." 데이몬은 연신 욕설을 퍼부으며 정원을 걸어갔다. 곱게 단장되어 있는 정원이었지만 생각에 팔려 있느라 그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뾰족한 음성이 들려왔다. "자, 잠깐만요." 난데없는 음성에 데이몬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췄다. 앞으로 내딛던 발을 허공에 멈춘 채 말이다. 뒤이어 누군가가 그를 향해 후닥닥 달려들었다. 왜소한 그림자는 데이몬의 발 앞에서 딱 멈췄다. 곧이어 안도감이 역력히 배어있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행이군요." 보고 있던 데이몬의 뇌리에 써늘한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아무리 생각에 팔려있었다손 치더라도 자신의 감각으로 누군가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그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대응자세를 취했다. 상대의 모습을 주의 깊게 살피는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계집이잖아? 그것도 젖비린내 나는……." 데이몬의 이목을 속이고 접근한 이는 소녀였다. 대략 십 칠, 팔세 정도 되었을까? 수수한 백의를 입은 소녀는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흙바닥에 대고 있었다. 옷자락이 흙으로 더럽혀 졌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데이몬은 일단 소녀가 움켜쥐고 있는 것을 살폈다. "꽃이잖아?" 소녀는 이름 모를 꽃 한 줄기를 두 손으로 곱게 감싸고 있었다. 마치 어여뻐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진 데이몬을 향해 감사의 말을 전했다. "고마워요. 걸음을 멈춰줘서……." 순간적으로 분통이 치밀어 오른 데이몬이 막 욕설을 퍼부으려고 했다. "이런 빌어먹을 계……." 입에 담을 수조차 없을 듯한 욕지거리가 막 입술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찰나에 소녀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허억." 순간 데이몬은 숨이 콱 막히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소녀의 얼굴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아니 단순히 예쁘다는 말보다는 한없이 귀엽다는 표정이 옳을 듯 싶었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망울은 마치 하늘의 은하수를 옮겨다놓은 듯 싶었고 오똑한 코와 도톰하다 싶은 입술은 가히 미란 이런 것이다 하고 강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소녀의 미모에 데이몬은 우두커니 굳어버렸다. 지금껏 살면서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를 본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며 말이다. 그 모습에 소녀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입 좀 다무세요. 침 떨어지겠어요." "으음!" 비로소 자신의 실책을 눈치챈 데이몬이 헛기침을 했다. 괜히 계면쩍어진 탓에 그는 또다시 고개를 들고 욕설을 퍼부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뿐이었다. 별처럼 초롱초롱 빛나는 소녀의 눈동자만 대하면 마치 얼어붙은 듯이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결국 그는 속으로만 되뇌일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내가 왜 이러지? 갈 때가 되었나?'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절래절래 젓는데 갑자기 코끝에서 풋풋한 방향이 풍겨져왔다. 한없이 싱그럽고 달콤한 냄새였다.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리는 데이몬의 눈이 갑자기 크게 뜨여졌다. 소녀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자신의 코끝에 얼굴을 바짝 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한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당황해진 데이몬은 다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지금껏 살아오며 이런 황당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살포시 웃으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처음 보는 분이군요? 오신지 얼마 안 되었나 봐요?" "그, 그렇다." "저도 그래요." 말을 마친 소녀는 배시시 웃었다. 살짝 주름잡힌 눈꼬리가 한없이 사랑스러운 모습. 그 모습에 데이몬은 눈을 질끈 감으며 또다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소녀의 미소는 사람의 혼백을 송두리째 빠져나가게 할 정도로 강렬했다. '이, 이년은 요물이야. 결코 사람이 아니야.' 눈을 감은 채 연신 고개를 내젓던 데이몬의 뇌리에 한 사람의 영상이 떠올랐다. 그는 데이몬이 중원에 있을 당시 안면이 있던 마도 고수 하나의 영상이었다. 소살마군 등천리. 그는 마교의 십대 장로 중 한 명으로써 미공(眉功)의 달인이었다. 나이가 일흔에 가까웠지만 흡정술(吸精術) 덕택에 결코 서른이 넘어 보이지 않는 외모를 가진 자로써 하루라도 여자가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색마이기도 했다. 그가 가장 장기로 삼는 절기가 바로 미공이었다. 사도의 절기인 환영마소(幻影魔笑)를 극성까지 익힌 탓에 미공으로 상대의 혼백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것이 바로 그의 특기였다. 그의 뇌살적인 미소가 얼마정도의 위력을 지녔는지는 데이몬도 익히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그의 환영마소(幻影魔笑)는 대상이 여자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그대로 혼백을 뽑아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소살마군의 미소를 한 번 본 여자라면 아무리 천하 열녀라 해도 소용없었다. 모든 것을 잊고 그대로 소살마군의 품에 안길 정도니 말이다. 소녀의 미소는 그 소살마군의 환영마소(幻影魔笑)에 능히 비교될 정도로 뇌쇄적이었다. 하나 전자는 극도의 무공절기에 의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타고난 것으로 보이는 것이 다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데이몬은 눈을 꼭 감은 채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러지 않으면 도저히 욕설을 퍼부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계집! 무슨 수작 부리는 것이냐? 당장 그만두지 못할까?" 소녀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전 계집이 아니에요. 제 이름은 다프네예요." "네년은 지금 나랑 장난치자는……." 거칠게 내뱉던 데이몬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그 덕에 소녀의 뇌쇄적인 미소를 여지없이 보고야 말았다. 바로 눈앞에서 본 덕에 데이몬의 뇌리는 삽시간에 하얗게 비어가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다프네의 미소는 매력적이었다. '저, 정말 죽여주는 미소로군. 이건 환영마소 따위의 사공이 아냐.' 다프네의 미소는 한없이 밝고 천진난만했다. 마치 어린아이의 그것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또한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추호도 사심이 깃들여있지 않았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절로 가슴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저 정말 아름다운 계집이군. 마치 선녀처럼 말이야.' 데이몬은 꼼짝도 하지 않고 다프네의 얼굴을 응시했다. 마치 그녀의 아름다움을 한껏 눈에 담아두려는 듯이 말이다. 웃는 낯으로 데이몬을 마주 쳐다보던 다프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제 얼굴 뚫어지겠어요." "그, 그러냐?" 데이몬은 급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심각하게 고뇌해야 했다. 그 얼마나 당당했던 데이몬이었던가? 이카롯트 제일의 권력자인 세르게이 공작에게까지 그는 거침없는 욕설과 하대로 일관했던 전례가 있었다. 설사 드래곤 앞에 선다고 하더라도 심중의 말을 못 털어놓을 자가 아니었다. 그런 자신이 한낱 소녀 하나 앞에서 이렇게 쩔쩔매다니……. 자신이 왜 이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복장을 보니 귀족이신가 봐요? 그것도 아주 높은……." "아니……. 그, 그렇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으려던 데이몬은 생각을 바꿨다. 썩어빠진 귀족 행세를 하는 것이 비록 적성에 맞진 않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다프네에게 호감을 사고 싶은 것이 데이몬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프네는 빙긋 웃으며 데이몬의 손을 잡아끌었다. "잘 되었네요. 그럼 절 좀 도와주세요." 손길이 닿는 순간 데이몬은 마치 라이트닝 볼트에 감전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얼른 손을 잡아 빼며 급급히 되물었다. "무, 무엇을 말이냐?" "화단에 물을 좀 주고 싶은데 도무지 우물로 갈 수가 없네요. 경비하시는 병사 분들께서 상부의 허가가 없다고 결코 내보내주시지 않거든요? 높은 귀족이시라면 절 좀 제발 내보내 주세요." "뭐 뭐라고?" "저걸 보세요. 화단의 꽃들이 바짝 타 들어가고 있잖아요? 어떻게 해? 불쌍한 것들……." 발을 동동 구르는 다프네의 모습에 데이몬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아닌게 아니라 화단의 꽃들이 모조리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관리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듯 싶었다. 아마도 정원지기들이 모조리 징집되어 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불쌍한 꽃들이 말라죽게 내버려두시진 않겠죠? 아저씨 절 좀 도와주세요." "그 정도야." 데이몬은 으쓱하고 어깨를 폈다. 물론 그에게 그럴 만한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심정으로는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다프네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젠장 내가 정말 왜 이러지? 한낱 계집아이에게 이토록 빠져버리다니…….' 물론 다프네의 부탁 정도는 가볍게 해결할 수 있을 듯 했다. 경비하는 병사라면 근위병이 분명할 터 아마도 그들은 상부의 명령보다 자신을 더 두려워할 터였다. 수틀리면 놈들을 가차없이 때려눕혀 버리겠다고 다짐하는 데이몬이었다. 마음이 급했던지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는 다프네.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데이몬은 자신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머리가 빠지게 고민해야 했다. 출입문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근위병들 몇이 핼버드를 교차시켜 진로를 막았다. "정지! 무슨 일이…… 헉!" 돌연 한 명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려보자 근위병 한 명이 자신을 쳐다보며 몸을 마치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기세 좋게 다프네가 나가는 것을 막은 것까진 좋았지만 뒤에 따라온 이를 본 뒤 나온 반응이었다. "오랜만이군." 이를 드러내며 하얗게 웃는 악귀(?)를 쳐다보며 근위병은 자신도 모르게 한 쪽 눈을 가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한 손으론 가릴 수 없을 만큼 시퍼렇게 멍들어 있는 상태였다. 그의 정체는 바로 오늘 아침 데이몬에게 매직 미사일을 선물 받고 뻗어버린 그 근위병이었다. 때문에 데이몬을 보자마자 근위병에겐 그 때의 공포가 새삼 치밀어 올랐다. "무, 무슨 일인지?" 나머지 근위병들이 쭈뼛거리며 용무를 물었다. 모습을 보아 데이몬에 대한 악명을 익히 알고 있는 듯 했다. 데이몬은 일부러 얼굴을 험상궂게 구기며 으르렁거렸다. "이 아이와 잠깐 나갔다 와야겠다. 한 방씩 얻어맞고 문을 열 것인지 순순히 열 것인지 열 셀 동안 생각해 본 뒤 결정하기 바란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근위병들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사실 그들에겐 그 누구의 출입도 엄격히 통제하란 명령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86회. 하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이 있는 법. 눈 앞의 악귀는 도저히 말이 통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라. 모조리 때려눕혀서라도 널 내보내 주겠다." 다프네의 기대 어린 시선을 느끼자 데이몬은 일부러 마나를 살짝 끌어 모았다. 건틀릿이 눈부시게 빛나자 안 그래도 멍이 들어 시퍼런 근위병의 얼굴이 아예 샛노랗게 변해버렸다. '하. 할 수 없군.'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 서로의 얼굴을 힐끗힐끗 쳐다보던 근위병들은 곧 결정을 내렸다. "열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바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마음 내키면 생각해 보지."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해대는 데이몬. 그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근위병들은 쭈뼛거리며 문을 열었다. 그들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조차 해 보지 않은 채 말이다. 데이몬은 좋아서 펄쩍펄쩍 뛰는 다프네를 데리고 문 밖으로 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근위병들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빌어먹을……. 세상에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재수 옴 붙은 날이로군. 그런데 놈과 함께 나간 소녀는 도대체 누구지?" "글세? 시녀는 아닌 것 같은데 얼굴이 제법 예쁘더군. 가만……." 주섬주섬 말을 늘어놓던 근위병의 별안간 경직되었다.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지나가서 새카맣게 잊고 있었는데 별안간 근위대장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그 누구의 출입도 통제하라는, 특히 젊은 여자의 경우에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내보내지 말라는 명령. 입 소문이 엄격히 단속되었기에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궁전 내부에 인간의 운명이 달려있는 여인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근위병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사실 성녀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그녀가 맞는다면 우리는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그들은 다급하게 문을 열어젖히며 달려나갔다. 겁에 질려있던 아까와는 달리 근위병들의 태도엔 데이몬과 일전도 불사하겠다는 기백이 넘쳐흘렀다. 이것은 단순한 처벌 차원이 아니었다. 트루베니아에 사는 인간 전체의 존망이 걸린 문제인 것이다. 싸우다 죽더라도 그녀만은 보호해야 했다. 어차피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목이 달아나는 것은 기정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판사판이란 심정으로 검 자루를 꼭 쥐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의 얼굴엔 안도감이 떠올랐다. "다, 다행이군." 두 남녀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이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특히 제 몸뚱이 만한 물동이를 짊어진 채 걸어오는 악귀의 모습은 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근위병들의 얼굴에는 웃음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들은 우루루 달려가서 둘의 주위를 에워쌌다. "뭐야?" 데이몬이 눈을 치켜 떴지만 근위병들은 막무가내였다. 한 근위병이 단호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한 쪽 눈두덩이 시퍼렇게 물든 바로 그 근위병이었다. "문까지 안전하게 호위해 드리겠습니다. 마다하지 마십시오." "이것들이 뭘 잘못 쳐 먹었나?" 판이하게 변한 근위병들의 태도에 다소 어리둥절한 데이몬. 그러나 자청해서 호위해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결국 둘은 근위병들의 철통같은(?) 호위 하에 무사히 궁정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백짓장같았던 근위병들의 얼굴은 그때서야 본래대로 돌아왔다. "오늘 일은……." 멀찌감치 걸어가는 둘을 보고 근위병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 생각한다. 결코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간주해 버리고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기로 한다. 알겠나?" "두말하면 잔소리."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근위병들의 얼굴엔 목숨을 건졌다는 안도감이 배어나고 있었다. "여기 놈들은 나와 미적인 감각이 틀린 모양이지?" 다프네와 함께 화단 쪽으로 걸어가며 데이몬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까지 숨이 막혀 다프네의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데이몬이었다. 그녀의 미모는 그 정도로 탁월했다. 그런데 근위병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프네를 보고도 별달리 동요하지 않는 모습이 정말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다프네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다 왔어요. 여기예요." 음성을 들으니 또다시 가슴이 떨려왔다. 내심을 들키지 않으려고 데이몬은 일부러 쿵 소리를 내며 물동이를 내려놓았다. 튀어 오른 물방울에 얼굴과 옷자락이 흠뻑 젖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머." 다프네는 화들짝 놀라 손을 뻗었다. 옷소매로 데이몬의 얼굴에 묻은 물방울을 닦아주려는 것이다. 도리어 놀란 것은 데이몬이었다. 그는 얼떨떨한 기색으로 연신 화끈거리는 얼굴을 매만졌다. 다프네의 손길이 스쳐지나간 부분은 특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곤혹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데이몬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자신이 왜 이러는 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소 떨리는 듯한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여, 여기다 뿌리면 되느냐?" "그래 주시면 고맙겠어요. 아저씬 정말 친절하신 분이시군요." 데이몬은 홍당무가 된 얼굴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푹 수그린 채 화단에 물을 주었다. 생각해보니 꽃에다 물을 주는 일은 머리털 나고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화단에 물을 뿌리는 데이몬. 생전 처음 해 보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신경 써서 한 때문에 꽃들은 골고루 물을 머금을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다프네는 또다시 생긋 웃었다. "힘드셨죠? 아마 꽃들이 아저씨께 마음 속으로 정말 고마워 할 거예요." "그, 그러냐?" 웃는 낯으로 고개를 든 데이몬. 하지만 환하게 웃는 다프네의 얼굴을 대하자 또다시 가슴이 설레어 올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데이몬은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 난 이만 가보마." 다프네의 눈이 동그래졌다. "벌써 가시게요? 저랑 얘기나 좀 나누시고 가시지……." "내, 내일 오마. 오늘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할 수 없군요. 그럼 내일 이 자리에서 아저씰 기다릴게요. 꼭이요." 다프네의 음성을 들으며 데이몬은 땅을 박찼다. 자신이 이러는 이유를 도저히 찾아낼 수 없었다. 한낱 계집아이에게 정신이 홀려버리다니……. 숙소로 돌아가는 도중 데이몬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욕설을 퍼부어 대었다. "빌어먹을 놈. 멍청한 자식. 그러고도 네놈이 스승의 복수를 할 수 있겠느냐? 수호마왕군들이 시퍼렇게 눈 부릅뜨고 저승에서 쳐다보고 있다. 한낱 여색에 정신이 팔려 대의를 잊으려 하느냐? 정신 차려라." 하지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다프네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특히 수줍은 듯이 웃는 해맑은 미소는 눈을 감아도 떠오를 정도였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데이몬은 근처 분수대가 눈에 띄자 가차없이 몸을 날렸다. 첨벙. 아직까지 물이 차가운 계절이었다. 물보라를 사방으로 튀기며 뛰어든 탓에 데이몬은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연신 두방망이치던 가슴이 차츰 진정되었고 붉게 상기된 얼굴도 본래대로 돌아왔다. 데이몬은 연신 고함을 치며 머리를 물 속으로 쳐 박았다 빼기를 반복했다. "요, 요물. 사람의 정신을 홀리는 요물." 들뜬 마음이 차츰 진정되자 데이몬은 터벅거리며 분수대 밖으로 나왔다. 오한이 들어 이빨이 덜덜덜 떨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근처를 경비하던 근위병들이 서너 명 분수대 근처로 몰려와 데이몬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데이몬은 그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뭘 보나?" "아니 왜 갑자기 분수대에 뛰어드셨습니까?" "내가 살던 곳의 목욕법이야. 왜 아니꼽냐?" "아, 아닙니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 하는 격언을 떠올리며 근위병들이 물러가자 데이몬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춥긴 춥군. 으으으. 요, 요물. 가만……" 별안간 그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다프네의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니……." 생각해 보면 자신을 대하는 다프네의 태도는 그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일반적인 경우 여자들은 자신을 마치 징그러운 벌레나 도마뱀 보듯 대했다. 그것은 그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흉측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외모는 여자들의 심미안과는 아예 극성이라 볼 수 있었다. 심지어 품에 안길 경우조차도 여자들의 몸은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이미 거기에 만성이 되어버린 나머지 데이몬은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 치부해왔다. 하지만 지금 그 상식이 여지없이 깨어져버린 것이다. 몸이 흠뻑 젖은 것도 모르고 데이몬은 분수대 옆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다프네의 태도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장님이었나?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다프네는 결코 자신을 꺼려하지 않았다. 도리어 무척 친밀하게 자신을 대했다고 볼 수 있었다. 문제는 그 행동에 결코 사심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에 달한 감각을 가진 만큼 데이몬은 능히 상대의 진의를 꿰뚫어볼 수 있다고 자부했다. 눈동자의 움직임, 하찮은 손놀림이라도 유심히 살펴본다면 충분히 속셈을 찾아낼 수 있다. 일례로 데이몬은 벌써 여러 번이나 여 살수의 정체를 간파해 낸 적이 있었다. 물론 중원에서의 일이었고 당시는 무수한 방파에서 그를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던 상황이었다. 그들의 청부를 받은 살수집단에서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여살수들을 파견해서 데이몬의 목숨을 노렸다. 미모는 기본이었고, 방중술 따위의 남자를 홀리는 기술에 도가 튼 여 살수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들 역시 데이몬의 감각을 피해 가진 못했다. "요망한 것들." 데이몬은 그녀들의 미소가 가식이란 사실을 한 눈에 간파했고 그녀들은 데이몬의 호조아래 예외 없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버렸다. 그들 중에는 미공이나 사람의 마음을 혼미하게 만드는 몽혼약을 사용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 어떤 방법도 데이몬의 눈을 속이지 못했다. 데이몬은 한 마디로 닳고 닳은 사파의 거두였던 것이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87회. 하지만 이번만은 경우가 달랐다. 다프네가 자신을 대하는 것은 결코 가식이 아니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에는 따뜻함이 깃들어 있었고, 음성에는 걱정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데이몬은 맹세코 지금껏 그런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오직 스승 도일말고는……. "허 참. 별일도 다 있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던 데이몬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계속 머리를 굴린 때문에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는 힘없이 걸음걸이를 떼어 숙소를 향해 옮겨놓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치장된 자신의 숙소 말이다. 일단 눈을 좀 붙이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뜬 데이몬은 한동안 이불 속에서 뭉그적거렸다. 수련에 몰입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하나의 생각 때문에 도저히 정신집중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가 봐야 하나? 아니야. 괜히 그랬다간 어제처럼 볼썽 사나운 꼴이나 보일 텐데……." 그에게 어제의 경험은 정말 한심한 것이었다. 사람의 목을 베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파 거두인 자신이 한낱 계집아이 앞에서 그처럼 쩔쩔매는 꼴이라니……. 그랬던 자신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고함을 지르며 고개를 베개 속에 파묻었다. "그년은 요물이야! 요물! 요물." 그는 거듭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제 같은 꼴을 두 번 다시 당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드래곤이 아니라 심지어 염라대왕 앞에서도 섣불리 꿀리지 않을 자신이 아니던가? 수족이 잘려나가고 심장에 검이 박혀도 신음소리 한 마디 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자신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 앞에서 입조차 제대로 떼지 못한 채 가슴만 조이다니……. "나는 가지 않는다. 곧 전쟁터에 나갈 내가 계집 따위에 마음을 둘 이유가 없다." 눈을 감은 채 데이몬은 계속해서 웅얼거렸다. 때마침 시녀가 침상을 정리하기 위해 들어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주인의 일에 참견을 할 수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행여나 자신에게 눈독들이지나 않을까 해서 시녀는 몹시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결코 데이몬의 감각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이불 속에서 그 기미를 눈치챈 데이몬은 잡념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휘저었다. "계집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똑같다. 벗겨 놓으면 하나도 다를 게 없어. 이를테면 저 시녀 년이랑 하등 틀릴 게 없다는 뜻이지." 하지만 모든 게 허사였다. 잊어버리려 할수록 다프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해맑은 미소가 끊임없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또한 그녀가 자신에게 대하는 친밀한 태도. 평소 냉대와 질시에 익숙해져 있던 데이몬에 이것은 분명 색다른 경험임이 분명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데이몬은 냅다 자신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짝.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뺨이 벌겋게 부어 올랐다. 통증 때문에 다소나마 정신이 들었던지 눈을 부릅뜬 데이몬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수련이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네크로멘서가 되어야 한다. 스승의 원수를 갚고 중원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나는 오직 마법만을 생각해야 한다. 정신 차리자. 데이몬!" 그 자리에 털퍼덕 가부좌를 틀고 주저앉은 데이몬은 전력을 다해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쭈그리고 앉아 꽃을 들여다보던 소녀의 얼굴에 반색이 스쳤다. "오셨군요. 아저씨" 그녀의 앞에는 데이몬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그토록 다짐을 했건만 결국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다프네는 환한 표정으로 데이몬을 맞았다. "이것 봐요. 꽃들이 파릇파릇하게 살아났잖아요?" "그, 그렇구나." 데이몬은 입꼬리를 미묘하게 비틀며 겨우겨우 말을 털어놓았다. 그토록 마음을 단단히 먹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다프네를 보고 나자 마음이 여지없이 뒤흔들려버린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다프네가 생긋 미소를 떠올리자 데이몬은 또다시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절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데이몬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연신 도리질을 쳐야 했다. "이러면 안 된다. 정신통일! 정신통일!"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무언가 극히 부드러운 것이 품속을 파고들었다. 눈을 뜬 데이몬은 순간 마치 9써클의 라이트닝 볼트가 전신을 관통하는 듯한 타격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다프네가 한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데이몬의 몸은 그 상태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정말 고마워요. 아저씨. 덕분에 꽃들이 살아났어요." "어……. 어……" 불쌍한 데이몬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 데이몬의 얼굴을 쳐다보며 다프네는 생긋 미소를 떠올렸다.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특유의 미소였다. "아저씨는 정말 좋은 분 같아요. 꽃들을 위해 그토록 애써 주시다니……." "이, 이것 좀 놓고 말하자. 제발." 버둥거리던 데이몬은 겨우 그녀를 떼어놓을 수 있었다. 마치 전신의 털이 모조리 곤두선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느낌이 결코 나쁘진 않았지만 말이다. 다프네가 생긋 웃으며 한 발 물러선 뒤에야 데이몬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로써는 자신을 대하는 다프네의 반응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말 하긴 미안한데……. 혹시 내가 무섭지 않니?" "무섭긴요. 정말 좋은 분 같은데요……." "내 얼굴이 험상궂다거나 소름끼치지 않아?" 데이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다프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더 괜찮아 보이는걸요? 아저씨는 다른 사람보다 마음씨가 더 고운 것 같으니까요?" "음! 미치겠군." 데이몬은 지금 자신의 존재에 대해 심각하게 고찰을 하고 있었다. 다프네가 보는 자신은 지금껏 타인의 눈빛에서 느낀 경험과 너무도 상충되는 것이었으므로……. 데이몬은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런 평가를 받지 못했다. 아니 상상조차 하지 못한 평가라고 해야 정확할 듯 싶었다. 데이몬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다프네를 쳐다보았다. "너 혹시 장님 아니니?" "네?" "앞을 못 본다거나……. 아님 사물의 형체를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다거나……. 혹은 정신이 이상하다거나." "그렇진 않은 것 같은데요? 전 눈이 무척 좋은 편이거든요. 그리고 전 미치지 않았어요." 말을 마친 뒤 또다시 미소를 짓는 다프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데이몬은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미치겠군. 저 행동이 가식이라면 마음이라도 편하겠건만 추호도 그런 기미가 안 보이니…….' 아닌게 아니라 다프네의 눈동자에는 추호도 거짓이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저토록 순수한 눈동자 뒤에 만약 꾸밈이 있다면 그녀는 아마도 신이 틀림없을 터였다. 신이 아니고서야 자신의 이목을 이처럼 감쪽같이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다. 눈을 꼭 감은 상태로 데이몬은 옆의 바위로 다가가 털썩 걸터앉았다. "일단 옆에 좀 앉거라. 네 미소를 보면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그럴게요." 다프네는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데이몬의 옆에 붙어 앉았다. 풋풋한 방향이 여과 없이 코로 스며들었다. 또다시 정신이 아찔해지는 데이몬. 하지만 그것은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방향과는 한없이 거리가 먼 것이었으니……. 데이몬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네 몸 냄새가 정말 좋구나……." 때에 따라서는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다프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경험이 부족한 탓에 데이몬은 아직까지 이런 방면에서 서투르기 그지없었다. "정말 그래요?" "음! 그렇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데이몬. 자신이 여자에게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색함을 지워버리려는 듯 데이몬은 다프네의 직책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넌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니?" "여기서요?" "그렇단다. 복장을 보니 귀족은 아닌 것 같고……. 혹시 황궁에 소속된 시녀이니?" "글쎄요? 그것은 저도 잘 모르는 걸요?" 다른 사람이 이런 대답을 했으면 분명 불호령을 내렸을 데이몬이었다. 하지만 다프네 앞에서만은 왜 이렇게 약해지는지 데이몬 자신도 정말 모를 노릇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행동은 어떠한 경우에도 삼가고 싶은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불확실한 대답에도 데이몬은 그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니?" "그럼 아저씨는 뭘 하시는 분이세요?" "응. 나? 나, 난 마법사란다. 전쟁터에 나가 용감하게 싸우는 워 메이지라고나 할까?. 지금은 임무수행을 위해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지." "그럼 마법을 잘 사용하시겠네요." "뭐, 조, 조금은……." 떠듬떠듬 대답하며 데이몬은 다프네의 옆 얼굴을 힐끔 훔쳐보았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귀 밥 부분이 정말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앙증맞았다. 공교롭게도 그때 다프네가 고개를 돌려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뭔가 기대가 잔뜩 서려있는 시선이었다. " 저에게 마법을 좀 보여주시면 안 되요?" "응? 마, 마법." "마법사들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도 못하는 일을 해 낸다고 들었어요. 이를테면 물건을 공중으로 띄운다거나 안보이게 하던지, 아니면 불꽃을 만들어 내거나 하는 것 말이에요.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무척 신기했어요." "으, 으음." 데이몬은 연신 식은땀을 흘렸다. 사실 그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오로지 매직 미사일로 몬스터를 제압하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사실 다프네가 말한 것들은 초급 마법에 속했다. 마법(魔法)이 아니라 마술(魔術)로 봐야 하는 것들. 대략 1,2써클의 마법사라면 충분히 시전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철저히 실전 위주의 마법만을 연성했던 터라 데이몬은 그런 것들을 수련해 본적이 없었다. 아무리 써클이 높더라도 익히지 않은 마법은 전개할 수 없는 법. 하지만 다프네의 기대를 저버리기 싫었던 터라 데이몬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마음에 들지 안 들지 모르겠지만 한 번 보거라." 말을 마친 데이몬은 마나를 끌어 모았다. 어느 정도의 마나가 모이자 데이몬은 즉시 헤이스트를 펼쳤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88회. 궁성 안에 몬스터 따위가 있을 턱이 없었고, 또한 다프네에게 살육을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에게 남은 마지막 밑천을 드러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슈슈슛 그의 몸은 곧 바람이 되어 정원 내부를 누비기 시작했다. 원래 탁월했던 몸놀림에다 헤이스트까지 가세하자 데이몬의 움직임은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그는 꽃이나 나무를 꺾지 않도록 주의하며 사방을 맴돌았다. 그가 달려간 궤적을 따라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났다. 정원을 대략 열 바퀴쯤 질주하고 난 데이몬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프네 앞에 내려섰다. "어떠냐. 볼 만 했느냐?" 뜻밖에도 다프네의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뜻밖의 반응에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그가 전개한 것은 아무나 볼 수 없는 마법의 일종이었다. "왜, 왜 그러느냐? 내가 널 슬프게 했느냐?" "그게 아니고요." 참지 못했는지 다프네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보고 있던 데이몬의 가슴이 아련히 아파 올 정도였다. "앞으로 그런 마법은 두 번 다시 쓰지 마세요. 몸의 시간을 빠르게 돌린 때문에 아저씨가 더 늙어 버렸잖아요. 그것은 자연의 법칙을 깨는 일이랍니다. 단순히 제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아저씨께 그런 일을 시키다니………. 다프네는 무척 슬프답니다." 말을 마친 다프네는 고개를 숙인 채 흐느꼈다. 하지만 보고 있던 데이몬은 더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가 헤이스트의 비밀을 꿰뚫어보다니…….' 불연 듯 다프네의 신분이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헤이스트의 비밀을 간파하는 것만 보더라도 한낱 시녀라고는 결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울먹이는 모습에 추궁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그녀에 대해 아무런 경계심이 들지 않는 자신이 정말 이상하기만 했다. 또한 다프네가 흐느끼는 이유 자체가 자신을 걱정한 때문이 아니던가? 우는 모습에 덩달아 슬퍼진 데이몬은 잠자코 다프네의 등을 두들겼다. "아, 알았다. 앞으로는 네 앞에선 결코 헤이스트를 전개하지 않겠다. 울지 말아라." 그 말에 다프네는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정말이에요."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다." 물론 전장에서는 헤이스트를 쓰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다프네는 눈물 젖은 얼굴에 살포시 미소를 떠올리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지 않기 위해 급히 고개를 돌린 데이몬. 하지만 손가락을 걸자마자 예외 없이 강력한 체인 라이트닝이 전신을 관통했다. 전신이 짜르르 하는 느낌에 데이몬은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허억." "어디 아프세요?" "아, 아니다."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얼른 손을 잡아 빼는 데이몬. 그녀와 닿으면 왜 이렇게 살이 떨리는지 알 수 없었다. 다프네는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앞으론 아저씨께 마법을 보여달라고 하지 않을 게요." "으음!" 데이몬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옆에 나란히 앉은 다프네는 곧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전 바다가 보이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자랐어요. 영주님도 무척 인자하시고 동네 주민들도 모두 한 가족처럼 아주 정다운 분들이셨어요. 비록 제가 거기서 태어났는지는 확실히 잘 모르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그곳에서 산 것 같아요." "그러니?"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절 기른 분들은 세 분의 할아버지셨어요. 아주 인자하고 다정하고 어떨 땐 무척 엄격하신 할아버지들……. 그분들께서 엄마 아빠 역할을 모두 다 해 주셨지요." "고아였나 보구나?" "글쎄요? 아마도 그런 것 같네요. 사실 어릴 땐 엄마 아빠의 얼굴을 무척 보고싶어했던 것으로 생각해요. 하지만 할아버지들이 워낙 잘 해 주셔서 그들에 대한 생각을 금방 잊을 수 있었지요." "그랬다면 다행이구나." 다프네의 말을 들으며 데이몬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기했다. 결코 유쾌할 수 없었던 성장과정. 소림승들이나 속가제자들에게 늘 얻어맞는 것이 일상이었고, 하루 종일 손가락질과 질시 속에서 성장했던 데이몬이었다. 그런 만큼 정상적인 방법으로 자란 아이들을 보면 항상 화가 치밀었고 하루가 멀다하고 싸움을 벌였던 처절한 유년기이기도 했다. 다프네는 계속해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자란 어린 시절에 대해 털어놓았다. 묵묵히 듣고 있던 데이몬은 점점 그녀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다. 누가 보아도 단조롭고 평범하다 볼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그는 마치 마법 이론을 듣는 것처럼 몰입해서 듣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들은 늘 표정이 우울했어요. 마치 세상의 고뇌를 모두 짊어지고 계신 얼굴들이셨죠. 다프네는 그것이 마음이 아파 항상 그분들 마음을 풀어드리려고 노력했어요." "네 마음이 어릴 때부터 고왔나 보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데이몬은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이 고작 어린 계집아이의 말상대나 되어주고 있다니……. 만약 과거의 그였다면 정말 꿈도 꾸지 못할 일들이었다. 시간 나는 대로 복수의 칼날을 끊임없이 갈아야 할 자신이 이런 하잘 것 없는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다니……. 하지만 다프네의 얼굴을 보면 도저히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때문에 데이몬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냉혹하게 떨쳐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은 결코 냉정하지 않았다. "네 얘기가 재미없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아저씬 할 일이 있단다. 이만 가 보아야……." "조금만 저와 얘기하시면 안될까요?" 마음이 절로 끌리는 듯한 다프네의 애원, 하지만 눈을 감은 탓에 데이몬은 겨우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미안하다. 어쩔 수 없구나. 아저씨에겐 무척 급한 일이 있단다. 그러니 오늘 못다 한 이야기는 내일 만나서 하도록 하자꾸나." "꼭 부탁드려요. 이곳의 사람들은 아무도 제 얘기를 들어주지 않아요. 그러니 제 말상대는 아저씨만이 유일해요. 심지어 다른사람들은 절 상대조차 하지 않는 걸요?" 뜻밖의 말에 데이몬은 눈을 떴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슬픔이 가득한 다프네의 눈동자였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가슴 한 구석이 저릿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이 상대해주지 않는 외로움. 데이몬은 적어도 그 설움이 가슴속에 사무친 사람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이? 걱정 말아라. 다프네. 이곳 놈들은 모조리 눈알이 썩은 놈들 뿐이야. 너처럼 착하고 예쁜 아이를 상대하지 않다니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린가?. 만약 그런 놈들이 눈앞에 띈다면 당장 모가지를 뽑아버릴 테니 마음놓거라." 분노가 치민 나머지 단숨에 의중의 말을 털어놓은 데이몬. 다프네에게 함부로 하는 놈이 있다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사지를 끊어버리고 싶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연신 씨근거리는 데이몬의 눈에 깜짝 놀란 듯한 다프네의 모습이 비쳤다. 어린 다프네가 험악한 욕설을 감당하기가 힘들 것이란 생각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미,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아니에요. 오히려 절 걱정해주시는 아저씨의 마음이 깊이 와 닿는 걸요? 제게 관심 가져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말을 마친 다프네는 고개를 들어 데이몬의 볼에 쪽 소리나게 입을 맞추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가볍게 몸을 일으켜 저쪽으로 날아갈 듯 달려갔다. "급한 일이 있으시다니 전 이만 가 볼게요. 그럼 아저씨 내일 봐요." 하늘하늘 달려가는 모습이 마치 천상의 선녀 같기만 했다. 하지만 데이몬은 미처 그럴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얼굴이 잘 익은 홍당무가 되어 그 자리에 얼어버린 데이몬. 다프네의 입술이 닿은 뺨이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굳은 자세로 볼을 감싸안은 채 굳어버린 데이몬은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입술을 비집고 음성이 튀어나왔다. "이, 입술이……… 저, 정말 부드럽군." 볼을 감싸안은 자세로 데이몬은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혹시라도 이 광경을 본 자가 없는지 사방을 주의 깊게 돌아본 데이몬은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그때서야 부끄러움이 물밀 듯 밀려왔다. 자신 같은 대마두가 보이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행동. 그것이 설사 트루베니아 사람의 시선이라 해도 피하고 싶었던 데이몬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데이몬은 예전의 냉혈(冷血)모드로 돌아와 있었다. 다프네 앞에선 순한 양이었지만 지금의 데이몬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맹수로 돌변해 있었다. 쾅. 단단해 보이는 탁자가 그대로 박살이 났다. 주인이 폭주하는 모습에 시종이나 시녀들은 이미 몸을 피한지 오래였다. "내가? 이 데이몬이 세상에 그런 꼴을 보이다니……." 생각해 볼수록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던 데이몬이었다. 드래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선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마법 수련에 빠져있어도 시원찮은 시간을 한낱 계집아이와 노닥거리며 보내다니……. 굳건한 철심과 인내력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데이몬이었다. 그런 만큼 다프네에게 빠진 자신이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미웠다. 연신 씨근거리던 데이몬은 눈을 차갑게 빛냈다. "처음부터 생각해 보자. 내가 왜 그 계집아이 앞에서만큼은 꼼짝을 하지 못하는지……." 하지만 다프네를 떠올리자 또다시 마음이 풀어졌다. 특히 이별 선물로 받은 키스의 감촉은 아직까지도 볼에 아련히 느껴질 정도였다. 데이몬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녀와 함께 있던 시간은 사실 그에겐 무척 행복했던 순간이라 볼 수 있었다. 집요하게 머리를 죄어오는 복수에 대한 부담, 드래곤을 상대해야 하는 두려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회의. 하지만 다프네와 함께 있는다면 데이몬은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잊고 극히 평온한 마음상태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껏 나에게 그토록 친밀하게 대해준 계집은 없었다. 혹시 그년이 나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닐까?" 차라리 다프네를 그냥 겁탈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몸에 깔려 울부짖는 그녀의 모습을 본다면 어느 정도 자신을 추스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데이몬의 논리대로라면 여자란 벗겨놓으면 모두 똑같은 존재이니 말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곧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에겐 도저히 강압적으로 나갈 수는 없어 보였다. 특히 그녀가 싫어할 만한 짓은 추호도 하기 싫다는 것이 데이몬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데이몬은 또다시 분통을 터뜨렸다. "이런 제기랄. 바로 이게 문제라니까. 그년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해. 그 길만이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이야. 수틀리면……." 데이몬은 눈을 번뜩였다. "그대로 그년을 죽여 버려야지. 그래야만 내가 수련에 몰두할 수 있으니……." 그의 눈에서 명백히 살기로 보이는 안광이 서서히 퍼져나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칠종단금술은 발동되지 않았다. "혹시 맛있는 요리 좋아하니?" "글쎄요? 요리를 먹어본 일이 별로 없어서……." "그래? 그렇담. 이 아저씨가 정말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주마." 가슴을 탕탕 치며 장담하는 데이몬. 그는 어느새 순한 양 모드로 돌변해 있었다. 다프네를 절단내기 위해 파워 업 건틀릿까지 준비해 왔던 데이몬이었다. 칠종단금술 때문에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요망한 얼굴이라도 갈가리 찢어발겨 버리겠다고 그는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그래야만 그녀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기다리던 다프네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런 마음은 씻은 듯 사라져버렸다. 애초에 먹은 마음이 어디 갔는지 온데간데없었고 어울리지 않게 얼굴에 미소까지 떠올리는 데이몬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소름이 끼칠 만큼 데이몬의 미소는 어색했다. 아마도 웃어본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때문으로 보였다. 하지만 다프네의 관점은 타인들과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웃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아요. 아저씨." "웃는 모습?" 데이몬의 눈빛이 갑자기 멍청하게 변했다. 십여 년 정도 전 우연히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본 뒤 두 번 다시 거울을 찾지 않았던 데이몬이었다. 심지어 거울이 보이면 먼저 박살부터 내어버릴 정도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했다. 물론 데이몬의 심미안도 여타의 사람들과 그리 다름이 없었으므로……. 그런데 자기보고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정신나간 계집아이가 있다니……. 데이몬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그러니? 시간이 흘러 용모가 좀 바뀌었나 보구나?" 숙소에 돌아가는 대로 거울을 한 번 봐야겠다고 거듭 다짐하는 데이몬이었다. 물론 애궂은 거울들이 떼로 박살이 날 것이 자명한 사실이었지만……. "그건 그렇고.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라. 내가 솜씨를 발휘해서 요리를 좀 해 오마. 아마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맛있는 요리를 맛보게 될 거야." "정말이요?" "물론이다. 내 한 달음에 다녀오마." 데이몬은 마치 비호처럼 몸을 날렸다. 어떻게 해서든 다프네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던 데이몬이었다. 물론 그 마음은 오래지 않아 바뀌고 있었다. "젠장! 내가 왜 이 딴 짓을 하고 있지?" 팬에다 고기를 넣고 연신 볶고 있던 데이몬은 미간을 찡그렸다. 연회장의 요리실까지 단숨에 달려온 것은 좋았는데 막상 요리를 하고 있자니 자신의 행동에 갑자기 회의가 들었던 데이몬이었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89회. 예고 없이 연재하지 않아 죄송합니다. 역시 러브 스토리는 전공이 아닌가봐요. 무척 힘들군요. 어제 분까지 함께 올릴게요. *************************************************************************** 물론 요리사들을 닦달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그의 요리솜씨에 깊이 감복한 요리장이 물심양면으로 정성껏 지원해준 덕분이었다. "젠장맞을……. 빌어먹을……." 계속 투덜거리며 요리를 해 대던 데이몬. 하지만 그의 손은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양념과 재료를 쏟아 붇고 있었다. 요리가 완성되자 데이몬은 그것을 조그마한 접시에 덜었다. "둘이 먹을 것이니 이 정도면 되겠지?" 접시에 뚜껑을 씌워 집어든 데이몬은 요리사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순순히 재료를 대어준 만큼 남는 요리로 인심이나 써 볼 심산이었다. "이것은 너희들이 먹도록 해라. 앞으로도 이렇게 잘 협조해 준다면 의당 응분의 보상이 있을 것이다. 알겠느냐?" 요리사들의 눈동자엔 순식간에 탐욕의 빛이 일렁였지만 데이몬은 그것을 보지도 않고 몸을 날렸다. 그 뒤로 요리사들이 일제히 요리를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왜, 왜 마음에 안 드느냐?" 데이몬은 무척 황당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정성껏 만든 요리를 가져와 자랑스럽게 내려놓았지만 다프네가 도무지 먹으려 들지 않는 것이다. 데이몬은 일단 이유를 분석했다. "요리는 틀림없이 제대로 만들어졌어. 헬버트론에게 만들어 준 것과 향이나 맛이 한 치의 오차도 없으니 말이야. 그런데 왜 다프네가 안 먹으려는 거지?" "미안해요. 아저씨. 저는 고기를 먹지 않는걸요." "아항!" 데이몬은 손가락을 탁 퉁겼다. "알고 보니 넌 채식주의자였구나? 조금만 기다려라. 아저씨가 금방 만들어다 올릴 테니. 중원에서 제일 유명한 채소 요리로 말이다. 가만있자, 버섯을 듬뿍 넣어서……." 다급하게 몸을 날리려는 데이몬을 다프네가 다급하게 부여잡았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저씨. 전 불로 요리한 음식을 먹지 않는걸요?" "엥? 그게 무슨 소리냐?"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기를 먹지 않는 것도 모자라 불을 댄 음식을 일절 먹지 않는다니……. 중원 사람의 관점으론 전혀 상상을 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어이가 없어하는 데이몬을 향해 다프네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고기를 먹는 것을 말릴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전 그럴 수가 없더군요.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죽어간 동물들의 고통이 느껴지거든요. 채소도 마찬가지예요. 익히고 삶았던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서 견딜 수가 없어요. 때문에 전 옛날부터 그런 것들을 먹지 않았어요." "그, 그럼 넌 뭘 먹느냐? 설마 공기와 물만 먹는 것은 아니겠지?" 다프네는 고개를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저씨. 제가 먹는 음식을 대접해 드릴게요." 조금 뒤 데이몬의 앞에는 다프네가 가지고 온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음식의 정체가 전혀 뜻밖이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무척 심각한 표정으로 음식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넌 오로지 이것만 먹고산단 말이냐?" "네. 아저씨."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짓는 다프네. 데이몬은 그 미소를 보지 않기 위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앞에는 온갖 과일과 나무열매가 바구니 가득 놓여 있었다. 중원의 것과 비슷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과일이 데이몬에겐 생소한 것들뿐이었다. 물론 과일 따위에 관심을 가질 그가 아니었으므로 중원의 과일도 별달리 먹어본 적도 없었다. 그는 과일들을 내려다보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것만 먹고사니 저렇게 예쁜 걸까?' '하나 드셔보세요.' 다프네의 권유에 데이몬은 손을 뻗어 마치 조롱박같이 생긴 과일 하나를 집어들었다. 불그스름한 빛깔이 도는 것이 그리 먹음직스러워 보이진 않았다. "이게 뭐라는 과일이지?" "무화과랍니다. 생긴 것과는 달리 상당히 맛있는 과일이예요." 고개를 끄덕이던 데이몬은 과일을 입으로 가져가 한 입 베어 물었다. 순간 싸 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응?"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과일의 맛은 좋았다. 온갖 산해진미에 익숙해져 있던 입맛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에게 전혀 색다른 맛을 가져다 줄 정도였다. "맛있지 않아요?" "그렇구나. 내 평생 과일 따위가 이렇게 맛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과일을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향긋한 향이 감도는 것이 제법 별미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과일을 먹어볼 걸 하는 생각을 하며 무화과 하나를 해치운 데이몬은 다른 과일을 집어들었다. 이번에는 초록 빛깔이 나는, 마치 애호박처럼 생긴 과일이었다. "이것은 멜론이랍니다. 아시다시피 과일이란 꽃과 나무들이 인간과 동물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의 축복이지요. 식물들은 이것을 제공함으로써 자신들의 종족 번식을 할 수 있으니 서로에게 좋은 방법이라고나 할까요?" "이것으로 종족번식을 어떻게 한단 말이냐?" 물론 싸우는 것과 강해지는 것말고는 세상에 대한 지식이 극히 부족했던 데이몬이었다. 다프네는 배시시 웃으며 과일 하나를 집어 쪼갰다. 그러자 속에 들어 있는 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이 바로 식물들의 아기랍니다. 이것들이 동물들의 뱃속으로 들어간 뒤 소화과정을 거쳐 땅 속에 묻힌다면 인간들에게 또다시 이런 축복을 제공할 초목으로 자라나게 되죠." "그, 그러냐."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붉혔다. 자기 나이의 삼분지 일도 되지 않은 어린 계집아이도 알고 있는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둘은 그렇게 담소를 나누며 과일을 집어먹었다. 주로 다프네는 이야기를 풀어놓는 쪽이었고 데이몬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물론 그녀의 이야기에서 강해지거나 힘을 얻을 만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데이몬은 정신을 집중해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그저 듣고 있기만 해도 좋았던 데이몬이었다. 그 순간만은 마치 모든 것을 잊고 어린 시절의 동심으로 돌아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둘이 담소를 나누는 사이 해가 뉘엿뉘엿 서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다프네가 하늘을 쳐다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벌써 저렇게 되었군요." "그, 그러니?" 데이몬은 당황한 채 몸을 일으켰다. 다프네와의 대화에 정신이 팔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해야 할 수련은 이미 물 건너간 일이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별로 다급하거나 하는 마음은 없었다. 마치 마음이 극도로 편안한 상태로 있다고 해야 할 정도였다. 다프네는 데이몬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어주었다. "전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그, 그러려므나' 마지못해 대답하는 데이몬의 얼굴에는 아쉽다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대로 다프네와 앉아 밤새도록 담소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도저히 다프네를 잡을 담량이 없었기에 데이몬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모종의 기대감이 짙게 배어있었다. "밤길이 어둡다. 조심해서 들어가거라?" "네. 아저씨도……. 참 우리 내일 또 만나는 거죠?" 데이몬의 얼굴이 확 펴졌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말을 들은 것이다. "물론이지 암! 그렇고말고……." 정신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갑자기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다프네가 예의 그 기습키스를 해왔던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전기충격에 의해 데이몬의 몸은 꼿꼿이 굳어버렸다. 심지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그런 데이몬에게 생긋 미소를 지어주며 다프네는 몸을 돌렸다. "고마워요 아저씬 정말 좋은 분이에요." 말을 마친 다프네는 날아갈 듯 저리로 뛰어갔다. 하지만 불쌍한 데이몬은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입조차 떼지 못했다는 것이 솔직한 견해였다. "허, 참.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군."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연신 탄성을 토해내던 데이몬은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자신에게 왜 이런 증상이 생겼는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던 데이몬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뒤 데이몬은 정신 없이 수련에 매진했다. 오늘 하지 못한 수련을 보충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것을 일절 할 엄두를 못한 것이다. 정신 없이 수련에 몰두하느라 별달리 분노도 치밀어 오르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그녀에 대한 나쁜 감정이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고 있었다. "수련하자. 수련! 수련! 다른데 눈 돌릴 시간이 없다." 결국 데이몬은 밤을 꼬박 샌 끝에 그 날 못한 수련을 겨우 마칠 수 있었다. 마법도 무공과 마찬가지라서 계속 연성하지 않으면 결코 실력이 늘지 않는 법이다. 그 날부터 며칠동안 데이몬의 일과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돌아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다프네를 만나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해가 기운 뒤에는 숙소로 돌아와 정신 없이 수련에 몰두하는 나날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된 것이다. 처음에는 다프네와 헤어진 다음 자신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던 데이몬이었다. 시간을 헛되이 보낸 것이 무척 아까워서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분노는 점점 사라져갔다. 이상하게도 그녀를 만나고 나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수련의 성과가 더욱 높아졌다. 데이몬에겐 이제 다프네와 보내는 시간이 오히려 더욱 뜻깊은 시간이 되어버렸다. 이유는 데이몬도 도무지 알지 못했다. 그냥 그녀와 있는 것이 마냥 좋아 어쩔 줄 모르는 것이다. 차라리 출동이 미뤄지는 것을 반갑게 생각될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어느 날 그의 숙소로 불청객이 찾아왔다. 다프네와 만나고 온 뒤 데이몬이 한창 수련준비에 몰두하던 때였다. 근위 기사 서너 명을 대동하고 찾아온 불청객은 천연덕스럽게 말을 걸었다. "잘 있었나?" "얼씨구? 네놈이 웬 일이지?" 몹시 도전적인 태도로 맞이하는 데이몬을 보고 세르게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명색이 일국의 공작인데 대접이 이게 뭔가?" "네놈에게 해 줄 대우 따윈 없어. 온 용무나 말하는 게 어때?" 세르게이를 호위하던 근위 기사들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표정이 역력히 떠올랐다. 지금껏 세르게이 공작에게 이런 대접을 한 자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저런……." "발칙한 작자!" 하지만 상대의 실력을 알고 있었기에 섣불리 검을 뽑아드는 기사들은 없었다. 자고로 왕실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눈치가 빨라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상대는 근위병 50명을 순식간에 절단낸 인물이다. 섣불리 덤벼들었다가 여지없이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얄미운 기사들에게 눈총을 한 번 날린 뒤 세르게이는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물론 그라고 부아가 치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기려는 것이다. "요즘 재미가 무척 좋다고 들었네." "재미? 무슨 재미?" 세르게이는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마치 상대의 속을 다 안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괜히 기분이 나빠진 데이몬은 툭 던지듯 한 마디 내뱉었다. "쓸데없는 소릴 하러왔으면 그만 가보도록. 난 바빠……." "다프네란 아이가 그토록 마음에 들던가?" 데이몬의 안색이 갑자기 경직되었다. 가장 숨기고 싶은 사실을 가장 껄끄러운 상대가 꺼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를 지긋이 깨물며 세르게이를 노려보았다. "사람을 시켜 내 뒤를 밟았나보군. 마법사를 시켰나?" 자신의 감각을 피할 자는 오로지 마법사 밖에 없다는 가정 하에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세르게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뭐 자네의 뒤를 미행할 필요까지야 있겠어? 안 그래도 손이 모자라는 판국인데……."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지?" 데이몬의 눈빛이 점점 짙어가고 있었다. 화가 극도로 치밀어 올랐을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세르게이는 그게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잘못 짚었어. 미행을 받는 자는 자네가 아니야." "내가 아니라면 누군가?." 신경질적으로 반문하던 데이몬의 얼굴에 돌연 이채가 서렸다. "그렇다면 다프네가?" "바로 그렇다네." 고개를 끄덕이는 세르게이를 보며 데이몬은 약간 불신 어린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 그 아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뭐 죄를 지은 것은 결코 아니지. 도리어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아이를 보호해야 하네. 왜냐하면……." 세르게이는 데이몬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우스워서 못 참겠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아이가 바로 성녀라네. 물론 슈렉하이머 대승정에게서 성녀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겠지?" "다, 다프네가 성녀라고?" 데이몬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평범한 신분이 아니란 것은 익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다프네가 설마 그런 신분을 가지고 있다니……. 물론 슈렉하이머에게 설명을 들어서 데이몬도 성녀에 대한 사항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한없이 연약해 보이는 다프네에게 트루베니아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의 운명이 걸려 있다니……. 그런 데이몬의 반응을 보며 세르게이는 안색을 싸늘하게 굳혔다. "성녀란 원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을 사랑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네. 이 사실은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왜냐하면 성녀란 신의 뜻에 의해 그렇게 행동하도록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지. 따라서 성녀는 한낱 벌레나 심지어 냄새나는 오크 놈들까지 미워할 수 없어. 이제 알겠나?" 세르게이는 차마 뒷말을 입 밖에 뱉어내지 못했다. 다프네가 만약 성녀가 아니었다면 데이몬 같은 추악한 자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다정스럽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을……. 데이몬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견해서 세르게이의 말에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을 감상하듯 지켜보던 세르게이는 단호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 "그녀에게 관심이 있던 없건 내 알 바는 아니야. 하지만 임무가 끝나기 전까진 어떤 일이 있어도 그녀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네. 오직 하나만 명심하도록 하게. 우린 기필코 일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것을……." "………." "임무만 성공시킨다면 자네에게 한 가지를 약속하도록 하지. 서약석을 받은 뒤 자네가 다프네를 데리고 멀리 떠날 수 있게 조처해 주겠네. 뭐 이카롯트에 머무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지만 자네 성격을 봐서 그렇게 할 리는 만무할 것이니 말이야." 말을 마친 세르게이는 힐끔 데이몬의 눈치를 보았다. 데이몬은 아무런 말도 없이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굳어 있는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나는 이만 가보겠네. 조만간 출동 명령이 떨어질 걸세. 아직까지 교란작전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지만 조만간 마무리될 테니 준비 단단히 하고 있는 게 좋을 거야." 말을 마친 세르게이는 몸을 빙글 돌렸다. 근위 기사들도 데이몬을 한 번씩 쏘아본 다음 황급하게 세르게이의 뒤를 따랐다. 화려하게 치장된 복도를 걸어가던 세르게이는 갑자기 허공으로 고개를 돌렸다. "베니테스. 모습을 드러내도록……." "알겠습니다." 놀랍게도 허공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조금 뒤 그 자리에는 마치 저절로 생겨나기라도 하듯 베니테스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세르게이를 보호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해서 숨어있었던 것이다. 가공할 만한 위력을 보여 준 데이몬이었으므로 그가 만약 흑심을 품을 경우 근위 기사들이 막기란 힘든 일이므로……. 마법사가 된 데이몬을 상대할 자로는 베니테스가 가장 제격이라는 생각을 하며 세르게이가 고개를 돌렸다. "드래곤들의 근황은 어떠한가?"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는 않습니다. 지금껏 위치가 확인된 드래곤은 도합 넷입니다. 마지막 하나의 행방이 아직 묘연합니다." "그래?" 세르게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드래곤들의 위치가 완전히 파악되어야만 작전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드래곤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병력을 무차별적으로 쏟아 붇고 있었다. 드래곤들이 눈치를 채지 못해야만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물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병사들이 전장에서 죽어갔다. 하지만 드래곤들의 마나 역시 그만큼 소모될 터였다. 그것을 생각한 세르게이는 이를 지긋이 깨물었다. "최선을 다해 놈들의 위치를 추적하도록 하게. 남은 드래곤 하나의 위치를 마저 파악하는 대로 작전에 들어갈 테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베니테스를 보며 세르게이는 걸음을 옮겼다. 그 때 베니테스의 눈가에 의문이 짙게 깔렸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뭐가 궁금하지?" 베니테스는 정색을 했다. "데이몬에게 한 약속 말입니다. 제가 알기론 공작 전하께서 평소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데이몬에게 어찌 성녀를 데리고 떠나라는 말씀을 하셨는지 저로써는 도무지 이해가?" "흠. 그것 말인가?" 세르게이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서렸다. "물론 사실이야. 성녀가 가야 할 길은 굳이 내가 설명할 필요도 없을 테고……. 임무가 성공한다면 놈도 어김없이 성녀의 뒤를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내 말이 틀렸나?" "아, 아닙니다." 베니테스는 황급히 입을 닫았다. "놈은 트루베니아에서는 존재할 필요가 전혀 없는 자일세. 자네도 그렇게 알고 행동해야하네. 가슴 깊이 명심하도록……" 냉랭하게 내뱉은 세르게이는 홀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황해하는 베니테스를 남겨두고 말이다. 오랫동안 세르게이를 보필해 왔으면서 뱀보다도 냉정한 저 성품이 아직까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던 베니테스였다. 그는 데이몬이 기거하고 있는 숙소 문을 힐끔 쳐다본 뒤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날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오셨어요. 아저씨" 다프네는 변함 없이 정겹게 데이몬을 맞았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데이몬은 침음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마음먹은 일이 있는 듯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문 채 각오를 다잡았다. 데이몬의 태도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는지 다프네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따라 얼굴이 무척 안되어 보여요. 아저씨. 어디 아파요?" "그, 그렇진 않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세요?" 무척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다프네.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지만 데이몬은 꾹 참고 걸음을 옮겼다. 둘은 늘 앉던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도무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도저히 다프네의 얼굴을 마주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한 가지만 물어보자." "말씀하세요." 데이몬은 사무적인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누군가에게서 네가 성녀란 말을 들었다. 그게 사실이니?" "………." 직선적인 질문에 당황했는지 다프네는 일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데이몬은 마치 채근하듯 되물었다. "사실대로 얘기해 주겠니? 난 진실을 알고 싶단다." 다프네는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것도 모기 소리 만한 어조로 말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절 이곳으로 데리고 온 슈렉하이머 아저씨가 누차 강조하신 말씀이거든요." 다프네의 시인을 들은 데이몬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사실이었구나." "시, 실망하셨나요." 다급하게 되묻는 다프네. 데이몬은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런 말을 하는 날 용서하거라. 사실 난 지금까지 여자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 "여자들은 날 마치 징그러운 벌레나 뱀 보듯이 대하더구나. 이런 외모를 가진 덕에……. 그렇다고 내 마음씨가 착한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난 몹시 나쁜 축에 속하지." "그렇지 않아요. 아저씬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꽃에 물을 주실 정도로 착한 심성……." 데이몬은 단호하게 다프네의 말을 잘랐다.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평소의 나였다면 결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 다프네를 지켜보던 데이몬의 눈동자엔 무척 복잡미묘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순간 그는 슈렉하이머에게서 들은 성녀에 관한 제반지식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고 있었다. 천성적으로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과 심안을 타고난 여인인 성녀. 물론 그랬기 때문에 다프네가 그토록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했을지도 몰랐다. 지금껏 어떠한 여인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태도로 말이다. 어찌 보면 데이몬에겐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일 지도 몰랐다. 만약 그녀가 성녀가 아니었다면 결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일 리가 없었을 것이므로. 하지만 데이몬은 이미 아무 상관도 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굳힌 지 오래였다. "성녀가 세상 모든 존재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나도 익히 알고 있다. 물론 그런 사실 때문에 네가 나 같은 추악한 놈에게도 관심을 가져 주었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이유야 어쨌든 넌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 준 유일한 여인이니까……." 다프네는 묵묵히 데이몬의 한탄을 듣고 있었다. 데이몬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뭔가 결심했다는 듯한 빛이 일렁였다. "널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널 가지고 싶다는 뜻이다. 물론 하찮은 욕정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저 네 옆에 머물며 네 얘기를 들어주고 싶다는 작은 욕심 때문이라 생각해라." 이미 다프네에게 깊이 빠진 데이몬. 그녀를 얻기 위해서 그 어떠한 대가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는 다소 놀란 듯한 다프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감히 쳐다보기조차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사슴처럼 커다란 눈동자, 오똑한 콧날. 살짝 드러나는 보조개와 흰 치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데이몬에겐 하등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라면 다프네가 자신과 맞먹을 정도의 추녀라도 상관없었다. 지금처럼만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준다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데이몬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오늘 널 취하겠다." 눈을 번들거리는 데이몬의 뇌리에는 어느덧 겁탈이라는 단어가 각인되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다프네를 가지고 싶었던 데이몬이었다. 물론 겁탈이라는 경험은 데이몬에게 결코 낯설지 않았다. 이미 그는 수호마왕군 시절 몇 번의 경험이 있었던 터였다. "날 거부하지 말아라." 데이몬은 경직된 표정으로 다프네의 몸을 들어 바닥에 눕혔다. 마치 새털같이 가벼운 몸이었다. 앙탈할 것을 대비해 데이몬은 한 손으로 다프네의 양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녀는 추호도 저항하려 하지 않았다. 눈빛이 마주칠까 두려운 나머지 데이몬은 고개를 수그린 채 남은 한 손으로 다프네의 옷섶을 잡아뜯었다. 부욱. 천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흰 천으로 된 가슴가리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얗게 빛나는 가슴가리개였다. 하지만 데이몬의 눈에는 한 점의 욕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다프네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한 가지만을 생각하는 데이몬이었다. 그의 손이 가슴가리개를 잡아가는 순간 떨리는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아저씨." 데이몬은 그저 못들은 체 했다. 쌀이 익으면 밥이 되어버리듯, 이 단계만 지나가면 다프네가 확실히 자신의 여인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데이몬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의 손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아저씨" 눈물이 가득 담긴 다프네의 눈동자.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은 데이몬은 가슴가리개를 잡은 손에 힘을 주려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다프네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다프네의 말이 결정적으로 데이몬을 머뭇거리게 했다. 전혀 반항하지 않는 것도 그를 맥빠지게 했다. 데이몬의 아래 깔린 자세로 다프네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절 사랑하시나요?" "사랑." 막 잡아뜯으려다 말고 데이몬은 묵묵히 사랑이란 말을 되뇌여 보았다. 어쩌면 이것이 사랑일지도 몰랐다. 한 여인을 영원히 소유하고픈 욕망이 사랑이라면 말이다. 지금껏 그는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여러 여자를 안기는 했지만 욕정을 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리고 말뿐이었다. 하지만 다프네는 달랐다. 그녀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대가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설사 스승과 수하들의 복수를 하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말이다. 데이몬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입에 담은 적 없던 말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나, 난 널 사랑한단다." 그것은 데이몬의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다프네의 말에 데이몬의 몸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버렸다. "저도 아저씰 좋아해요. 하지만 아저씨가 이러시면 다프네는 정말 슬프답니다." 무심코 고개를 든 데이몬에게 다프네의 눈동자가 들어왔다. 슬픔이 한없이 담긴 눈빛이었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90회. 그 모습에 데이몬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비로소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프네만큼은 여타의 여자들과 같이 생각하면 안 된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내, 내가 다프네를 슬프게 하다니…….' 손에 스르르 힘이 빠졌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다프네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데이몬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또한 이대로 그녀를 범한다면……. 아마도 다프네가 다시는 자신에게 미소를 보여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었던 데이몬이었다. "미, 미안하다." 데이몬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의 얼굴에는 부끄러움과 자신의 행동에 대한 회의가 짙게 배어있었다. 그것을 쳐다보며 다프네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묵묵히 가슴을 여미는 다프네. 데이몬은 차마 다프네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불연 듯 다프네가 앞으론 자신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일반적인 여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아, 안 돼' 다급해진 데이몬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미소짓는 다프네의 눈부신 미소를 보게 되었다. 일순 숨이 턱 막혀버린 데이몬. 그의 귓가로 다정스런 음성이 전해졌다. "역시 아저씬 착한 심성을 가진 분이에요. " 불쌍하게도 데이몬은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 "전 지금까지 한 번도 사랑을 해 본적이 없어요. 혹시 아저씨는 해 보셨어요." "………." 늘 앉던 자리에 나란히 앉은 둘은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데이몬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묵묵히 다프네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차마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데이몬을 대하는 다프네의 태도였다. 아까의 일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듯 그녀는 무척 친밀한 태도로 데이몬을 대했다. 어제와 한 치의 변함이 없을 정도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프네는 연신 즐겁게 재잘댔다. "제가 살던 마을에는 남자가 거의 없었어요. 전쟁 때문에 모두 징집되었기 때문이죠." "그, 그랬니?" "아저씨는 저보다 오래 사셨으니 분명 멋있는 사랑을 해 보셨겠죠?" '사랑?' 다프네의 말에 데이몬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사랑이란 말은 물론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는 지금껏 그 어떤 여자에게서도 욕정 이상의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만약 사랑이란 말을 쓴다면 그 대상은 엄연히 다프네 밖에 없을 것이었다. '나이 오십에 사랑 한 번 못해보다니 내 신세도 기구하군.' 데이몬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떠듬떠듬 말을 이어나갔다. "나 역시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단다. 그런 말을 한 것은 네가 처음이야." 그 말에 다프네는 눈을 반짝였다. "그럼 제가 아저씨의 첫사랑이네요?" "사랑이란 게 한 여자를 정말 절실히 소유하고 싶은 것이라면 아마 그렇게 되겠지?" 다프네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예요. 아저씨." "………." "저 역시 사랑에 대한 개념은 몰라요. 단지 하나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람을, 혹은 다른 존재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 밖에는 말이에요. 사랑은 무엇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없이 주는 것이랍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사랑의 개념은 그래요." "주, 주는 것." "아무런 조건 없이 주는 것 말이에요. 예를 들면 아기에 대한 엄마의 사랑이 그렇겠지요? 엄마가 아기에게 뭔가 대가를 바라고 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냥 사랑하기 때문에……." 다프네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데이몬은 지금까지와 같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 어쩌면 이 순간이 그가 그토록 바라던 것일지도 몰랐다. 다프네를 안는 것보다도 이처럼 이야기를 들어주며, 그녀의 체취와 음성을 느끼기만 해도 한없이 행복했던 데이몬이었다. 조그마한 사건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해가 뉘엿뉘엿 떨어질 때까지 대화를 나누다 일어났다. "내일도 나오실 거죠? 기다릴게요. 아저씨." 다프네는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으로 내일을 기약했다. 쪽. 데이몬은 몹시 당혹해하며 다프네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여타의, 아니 일반적인 여자라면 오늘의 사건에 대해 뭔가 반응이 있을 텐데 다프네는 달랐다. 자신을 강제로 겁탈하려고 했던 자에게 이처럼 아무 거리낌없이 대할 수 있다니……. "성녀라서 그런 것인가?" 한동안 얼떨떨해하던 데이몬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오늘 같은 행동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저녁에 할 수련 내용을 상기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난데없이 검은 그림자 넷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헛." 그들의 접근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터라 데이몬은 반사적으로 경계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가장 선두에 선 자의 얼굴을 보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헬버트론." 앞으로 가로막은 네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헬버트론과 나머지 세 명의 소드 마스터였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그 모습에서 데이몬은 다프네를 감시하던 자들이 누구인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랬군. 너희들이……." 마법사가 아닌 소드 마스터가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데이몬은 적이 놀랐다. 소드 마스터가 새삼 중원의 고수들과 다른 일면이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데이몬이 묵묵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는데 헬버트론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생각보다 담이 큰 친구로군. 감히 성녀를 건드릴 생각을 하다니……." "………." "그 정도에서 그쳤기에 망정이었지 진도가 더 나갔다면 지금쯤 자네는 아마 목이 없는 시체가 되었을 걸세. " 자신의 감각을 속인 것으로 봐서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기 때문에 데이몬은 안색을 굳혔다. 그런 데이몬을 보며 헬버트론이 안색을 조금 풀었다. "어쨌든 서로 다행이로군. 우리로썬 너처럼 요리 잘하는 친구의 목을 자르고 싶진 않았으니 말이야." "지금껏 내 행동을 모두 보았나?" "물론.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굳은 표정으로 돌변한 데이몬. 물론 아까의 상황은 타인에게 보이고 싶은 장면이 결코 아니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화도 치밀어 올라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능력만 있다면 이들 넷을 모조리 죽여 입을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데이몬의 마음을 오해했는지 헬버트론이 나지막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너무 걱정하진 말게. 세르게이 공작에게 굳이 보고할 마음은 없으니……. 물론 한 가지 조건이 있긴 하지만 말이야." "요리를 해 달란 뜻인가?" "말귀를 잘 알아듣는 친구로군. 이번에는 우리 넷 모두에게 돌아가도록 부탁하겠네." 요리를 생각하니 입맛이 동한 듯 네 소드 마스터는 안색을 풀었다. 끓어오르던 화를 겨우 진정시킨 데이몬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없지. 하지만 나도 조건을 하나 내 걸겠네." "뭐지?" "술을 한 잔 사다오." 무슨 조건인지 미심쩍어하던 헬버트론의 얼굴이 확 펴졌다. 그 정도야 가뿐히 들어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까짓 것 좋아. 우리의 미각만 충족시켜 준다면 그까짓 술이 문제겠어? 코가 삐뚤어질 정도로 사 줄 테니 가자고." 소드 마스터 넷은 데이몬을 마치 포위하듯 에워싼 채 연회장으로 향했다. 안 그래도 심중이 어지러웠던 데이몬은 이참에 만취해버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헝클어진 머릿속을 바로잡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회장에 도착한 데이몬은 정신 없이 요리에 몰두했다. 넷이 먹을 것이라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요리사들이 아낌없이 지원해 준 덕택에 오래지 않아 요리는 완성되었다. 요리의 맛을 보고 난 뒤 요리사들의 태도는 한층 더 고분고분해져 있었다. 요리를 앞에 놓은 기사들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역력히 배어있었다. 곧 만찬이 시작되었다. "햐! 기가 막히는군." "어떻게 요리를 이렇게 맛있게 만들 수 있지." 정신 없이 먹어대는 기사들 앞에서 데이몬은 묵묵히 술잔을 들이켰다. 고급술이라 도수가 상당히 세었지만 데이몬은 아랑곳없이 술잔을 비우는데 몰두했다. 마치 취하는 것이 지상 과제인 것처럼 말이다. 결국 기사들이 요리 접시를 깨끗이 비울 즈음 데이몬은 만취해서 고주망태가 되어버렸다. 식탁에 코를 박고 곯아떨어진 데이몬을 보고 기사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허, 참! 그 친구 생긴 것과는 달리 주량은 형편없군." "그게 아니야. 줄기차게 먹어댔으니 나가떨어지는 것이 당연하지." 기사들은 어쩔 수 없이 데이몬을 들쳐 메고 그의 숙소로 향했다. 가는 와중에도 한 마디씩을 잊지 않는 그들이었다. "그런데 성녀가 그렇게나 마음에 들었나? 뭐 조금 예쁘기야 하지만 넋이 나갈 정도는 아니던데……." "하긴 성녀라고 생각하면 그녀가 도저히 여자로 보이지 않으니 말일세. 마치 인형 같다고나 할까?" 사라미스가 슬쩍 데이몬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물론 절로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하긴 이런 생김새를 가지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해. 어디 이런 얼굴로 여자가 따랐겠어?" "혹시 모르지. 이 녀석의 요리솜씨에 반한 여자라면 그럴 수 있을지도……." 기사들은 두런두런 대화를 늘어놓으며 데이몬의 몸을 숙소 침대에 눕혔다. 데이몬은 그것도 모르고 정신 없이 곯아떨어져 있었다. 의식불명 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을 듯 보였던 데이몬. 하지만 그는 유달리 민감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데이몬은 그만 새벽녘에 울려 퍼진 비상종 소리에 잠을 깨고 말았다. 땡땡땡땡. 다급하게 울려 퍼지는 비상 종소리. 잠에서 깨어난 데이몬은 머리가 아픈 나머지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일이지?" 이미 이곳에서의 경험이 적지 않은 탓에 데이몬은 상황을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기습이 이루어졌나 보군. 오크 유격병들인가?" 신경을 꺼버리려고 하던 찰라 데이몬의 안색이 갑자기 경직되었다. 새삼 다프네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시간이면 다프네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화원에 와 있을 터, 그곳은 공중 강습에 훤히 노출된 장소였다. 만에 하나 그녀에게 위험이 닥칠 지도 몰랐기에 그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이럴 시간이 없어." 데이몬은 다급하게 건틀릿을 챙긴 다음 방에서 뛰어나왔다. 네 명의 소드 마스터가 경호하고 있는 상황이라 별달리 걱정할 것은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야 했다. 벼락같이 복도를 내닫는 데이몬은 근위병 한 무리를 발견하자 그들을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인가? 오크의 공습인가?" 근위병들은 하나같이 질린 기색이었다.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와 상황보고를 해 왔다. "오크 유격병들은 아닙니다. 리치로 보이는 마법사들이온데 실력들이 정말 대단합니다. 이미 근위병 7개조가 놈들에게 전멸 당한 상황입니다." 말을 듣자마자 데이몬은 다급히 내달렸다. 근위병들의 전사 따위는 그에겐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프네의 안전이다. 그는 헤이스트까지 펼쳐가며 후원 쪽으로 몸을 날렸다. "상황이 그리 만만치는 않군." 후원 뜰에는 온통 근위병들 시체 천지였다. 강력한 마법 공격에 당한 듯 온전한 시신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데이몬은 그들 사이를 지나 다급하게 약속장소로 뛰었다. 정신 없이 달려가는 데이몬의 뇌리에 불연 듯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군. 리치라면 드래곤들과는 별다른 연관이 없을 텐데……." 리치. 높은 경지에 오른 마법사들이 죽음 직전에 도달했을 때 영생을 얻기 위해 택하는 길 중 하나였다. 보통의 경우 무척 학구적인 성향을 지닌 마법사들이 끊임없는 마법 연구를 위해 이 방법을 선택한다. 모종의 마법으로 자신의 생명력을 용기(life force vessel)에 봉인하여 늙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즉 영생을 꾀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91회. 하지만 어지간한 마법사들은 섣불리 리치가 되는 길을 원하지 않는다. 우선 리치가 되기 위해서는 고도의(대략 6써클 이상) 마법 실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 첫 번째요 두 번째로 리치가 되는 과정에서 인성을 잃어 잔혹한 언데드 몬스터가 되는 경우가 태반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만큼 장점도 없을 수는 없었다. 우선 영원히 살 수 있는 데다 어지간한 타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물론 신성력이 깃든 공격에는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지만 라이프 포스 베슬만 온전하다면 나중에라도 충분히 몸을 복원할 수 있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의 생명력을 빨아들여야 하지만 말이다. 물론 라이프 포스 베슬이 파괴된다면 그 즉시 영혼까지 소멸되는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리치에 대한 개략적인 사항을 떠올린 데이몬의 얼굴에는 뭔가 찜찜한 기색이 떠올랐다. "혹시 마왕이 강림했나?" 물론 데이몬에겐 그 이상 두려운 일은 없었다. 흑마법사의 길로 접어든 이상 마왕의 명령을 들어야만 했다. 마왕이 명령을 내린다면 만에 하나 다프네를 죽여야 할 경우에 처할 지도 모르는 일. 과거 암흑전쟁을 상기해 본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도일의 경우를 봐서 자신은 명령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달리 선택할 방도가 없었기에 데이몬은 계속해서 약속장소로 질주했다. 후원 부분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다프네가 아끼던 꽃들은 남김없이 뽑혀져 나갔고 둘이 담소를 나누던 돌 의자는 아예 박살이 나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데이몬은 급히 주위를 수색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사방에 널려 있는 근위병들의 시신이었다. 침입자의 시신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상하군. 그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놈들인가?" 문득 그의 감각에 격투를 벌이는 소리가 들렸다. 데이몬의 몸은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조금 달려가자 일단의 무리들이 뒤섞여 접전을 벌이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별궁의 대문 바로 앞이었다. 상황을 봐서 그곳이 바로 다프네가 기거하는 곳 같았다. "저놈들이……." 그곳에서 데이몬은 침입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치 해골처럼 앙상한 몸을 가진 놈들이 근위병들과 뒤섞여 정신 없이 싸우고 있었다. 시커먼 로브로 전신을 감싼 탓에 도저히 용모를 짐작할 수 없었다. 놈들은 긴 손톱이 달린 손을 맹렬히 휘둘러 근위병들과 치열한 격전을 치르고 있었다. 그것을 본 데이몬의 눈에 불이 일어났다. "놈들의 목적이 확실해졌군. 침입자들은 철저히 다프네를 노리고 있어." 지금까지의 경험에 따라 데이몬은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앙상한 놈들은 지금 별궁의 안으로 지원군이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놈들의 주력은 별궁 내부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데이몬은 왜 침입자들의 시신이 없는지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끼야아악." 서너 자루의 장검에 관통된 검은 로브 하나가 끔찍한 비명을 질러대었다. 그것도 잠시, 검은 로브의 몸은 순식간에 먼지로 화해 흩어져버렸다. 있었던 자리에 흔적조차 남지 않을 정도였다. 달려가던 데이몬의 눈에 의아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상하군. 리치는 무척 강하다고 하던데 근위병들에게 당할 정도라니……." 그 때 누군가가 그를 스쳐지나가며 냉랭하게 내뱉었다. "저것들은 리치가 아니야. 놈들이 소환해 낸 와이트란 마물이야. 마법으로 만들어 낸 변형된 좀비의 일종이라 보면 되." 헬버트론의 음성이었다. 음성의 주인을 확인한 데이몬은 그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다프네는 안전해? 그런데 넌 왜 그녀의 곁에서 경호를 하지 않았지?" 헬버트론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기랄. 양동작전이야. 리치 두 놈이 덤벼들기에 그 중 한 놈을 처치했지. 그리고 도망치는 놈을 열심히 쫓았는데 결정적으로 그놈은 미끼였어. 상황을 봐서 놈들의 주력이 성녀를 노리는 것이 확실한 것 같아." 데이몬의 눈이 확 뒤집혔다. 다프네에게 위험이 미칠지 모른다는 말에 화가 극도로 치민 것이다. 둘은 곧 와이트 무리로 뛰어들었다. 헬버트론의 검에서 빛이 번쩍할 때마다 한 번에 두세 마리씩 와이트의 몸이 쪼개져갔다. "끼야아악." 명성에 걸맞을 정도로 놀랄 만한 신위였다. 데이몬도 질세라 근처의 와이트들을 대상으로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와이트에는 혈도가 없었으므로 데이몬으로써는 상당히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헬버트론 만큼의 활약을 보일 수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파워 업 건틀릿의 위력에 힘입어 두 마리의 와이트를 간신히 쓰러뜨린 데이몬은 거친 숨을 연신 몰아쉬었다. "놈들의 정체가 도대체 뭐지? 저런 마물들을 소환하다니……." "잘은 모르지만 리치 중에 과거 네크로멘서였던 놈이 있는 것 같아." "그렇다면 놈들을 보낸 자가 마왕이란 뜻인가?" 별안간 소름이 치밀어 오른 데이몬이 다급하게 되물었다. 검을 휘둘러 두 마리의 와이트를 양단해버린 헬버트론이 빙긋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데이몬의 고민을 익히 짐작한다는 듯이 말이다. "아마 아닐 거야. 마왕이 보냈다면 고작 와이트 따윌 소환할 필요가 없겠지? 상황을 보니 놈들은 아마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의 가디언들인 것 같다." "가디언?" 궁금한 것이 무척 많았지만 상황이 시급했기 때문에 데이몬은 입을 닫았다. "에잇." 그의 손에서 매직 미사일이 형성되어 날아갔다. 끌어올릴 수 있는 마나를 모조리 집중해서 말이다. 하지만 중형 몬스터에겐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한 그의 매직 미사일은 애석하게도 소환된 마물들에겐 정말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퍼퍼퍽. 와이트란 놈들은 가슴팍이 관통되어 구멍이 뻥 뚫린 상태에서도 움직였고 심지어 머리통이 날아간 놈들도 위력적인 공격을 가해오는 상황이었다. 철저히 급소만을 노리는 데이몬에겐 말 그대로 상극이라 볼 수 있는 상대들이었다. 전신을 곤죽으로 만든 후에야 데이몬은 겨우 와이트를 하나 쓰러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겨우 셋을 쓰러뜨린 사이 헬버트론이 이미 대부분의 와이트를 도륙해 버린 상황이었다. 그때서야 한숨을 돌린 근위병들은 부산하게 움직이며 부상당한 동료들을 수습했다. 데이몬에게 고개를 돌린 헬버트론은 그것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오우거 헌터라는 그 명성은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와이트 따위에게 고전하다니……." "이럴 시간 없어. 안으로 들어가자고." 둘은 신속하게 별궁 내부로 진입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딱 멈춰져 버렸다. 건물 밖으로 걸어나오는 두 인영을 보고 난 뒤의 일이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마치 해골 같은 용모를 가진 자가 여자 하나를 허리에 낀 상태로 뒤를 견제하며 걸어나왔다. 실신했는지 여자는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로브 자락 사이로 드러난 얼굴에는 살이 하나도 붙어있지 않은 자였다. 얼굴이 해골 그대로인 것이다. 그 뒤로 검을 꼬나쥔 여러 기사들이 따라나왔다. 그 장면을 본 데이몬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다, 다프네." 해골 같은 사내의 허리에 끼여있는 여자. 그녀는 바로 다프네였다. 사로잡혀 있는 다프네의 모습을 본 뒤 앞 뒤 가릴 것 없이 달려들려던 데이몬. 하지만 그는 이내 헬버트론에게 제지당했다. "상황을 봐서 놈은 성녀를 인질로 잡고 있는 것이 분명해. 지금은 경거망동할 때가 아니야." 비로소 자신을 수습한 데이몬의 얼굴에 비장한 각오가 떠올랐다. 만약 다프네가 해를 입는 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데이몬은 정말 미쳐버릴 지도 몰랐다. 해골 같은 사내는 이미 양쪽으로 빈틈없이 포위된 상황이었다. 건물 내부에서 나온 기사들 중에는 세 명의 소드 마스터가 포진되어 있었고, 이쪽에는 헬버트론이 연신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한 리치라도 버틸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주위를 느긋하게 둘러볼 뿐이었다. 푸른 안광이 서려 있는 동공이 포위한 기사들을 스윽 돌아보았다. 순간 리치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데이몬이 있는 쪽을 돌아본 다음이었다. "흑마법사인가? 이거 놀랄 노자로군. 이카롯트의 황궁에 흑마법사가 있다니 말이야." 쳐다보기도 섬뜩한 눈빛이 데이몬의 전신을 샅샅이 훑었다. 조금 후 다소 실망한 듯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마치 유부에서 들려오는 듯한 음산한 음성이었다. "갓 계약한 햇병아리로군. 3써클의 그것도 유저(User)정도?" 데이몬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지만 결코 경거망동하지는 않았다. 우선 다프네가 놈의 손에 잡혀있는 데다 상대가 리치라면 그로써는 도저히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리치의 몸에 급소가 있을 턱이 없었고, 마법의 특성상 데이몬의 공격 마법이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의 매직 미사일이 통하는 상대는 오로지 살아 숨쉬는 인간이나 몬스터 밖에 없는 것이다. 리치의 태도를 보다 못해 헬버트론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너는 누구냐? 왜 시녀를 인질로 잡고 있는 거지?" 그것은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기 위한 연막전술의 일종이었다. 하지만 리치는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리치의 입 부분에 미묘한 비웃음 같은 것이 서렸다. "내 이름은 게덴하이드. 베르키스님을 모시는 영광스런 가디언이다. 인간들이여, 너희들의 어줍잖은 잣대로 섣부른 판단 따윈 하지 말도록 해라. 적어도 성녀를 알아보는 눈은 너희 인간들보다 월등하다 자부할 수 있다." 그의 이름을 듣자 포위망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세, 세상에……. 게덴하이드라면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의 심복? " "저, 정말이야. 과거 암흑 군단의 수석 참모였던 게덴하이드가 아직까지 살아있다니……." 경악성은 대부분 암흑전투를 겪은 마법사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반면 비교적 나이가 어린 기사들은 영문을 모른 나머지 그저 눈만 멀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게덴하이드. 인간들에게 있어 이 이상 저주스런 이름이 있을 수는 없었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정말 많은 사람들의 눈에 피눈물이 흐르게 했던 자 게덴하이드. 그는 원래 어느 왕국의 궁정을 맡았던 궁정 마법사출신이었다. 하지만 마법실력의 향상에 몰두한 나머지 그만 흑마법에 관심을 가졌고 마침내 마왕과 계약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7써클에 육박한 상태에서 계약했으므로 그는 정말 엄청난 실력의 흑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심성의 변화가 없을 수는 없었으므로 그는 결국 피와 살육을 서슴지 않는 잔혹한 악마가 되어버렸다. 생체실험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수많은 양민들이 그의 실험도구로 처참하게 죽어갔고 그에 비례해서 게덴하이드의 마법실력은 끝없이 향상되었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각 왕국에서는 기사단을 파견해 게덴하이드를 잡아죽이려 했다. 하지만 흑마법의 위력에 힘입어 벌써 9써클에 접어든 대마법사가 된 게덴하이드를 처치할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구사하는 고써클의 공격 마법은 대마법 갑옷을 입은 소드 마스터라도 감히 경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무리 대마법 방어갑옷이라 해도 방어할 수 있는 마법의 수준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게덴하이드의 공격마법은 대마법 방어갑옷을 만든 마법사의 수준을 가볍게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그의 손에 헤아릴 수 없는 기사와 마법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 소드 마스터가 당한 경우도 있었다. 기사단의 포위망을 마치 비웃듯 넘나들며 살육을 일삼던 게덴하이드. 목에 천문학적인 현상금이 걸렸지만 그는 도무지 잡힐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암흑전쟁이 터졌다. 물론 게덴하이드는 당연하다는 듯 마왕군에 가담했고 소속된 흑마법사와 네크로맨서를 모두 총괄하는 요직에까지 오르게 된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승승장구하던 것처럼 보이던 게덴하이드. 하지만 마왕군은 최후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게덴하이드는 퇴각하던 나이델하르크를 따라 펠루시아 산맥으로 숨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나이델하르크와 함께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것이다. 이것은 벌써 삼십 년 전의 일이었고 그 악명 자자하던 인물이 리치가 되어 또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이카롯트의 황궁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그를 기억하고 있는 마법사들은 절로 몸이 오싹해지는 감정을 느껴야 했다. 공포심을 잊기 위해 마법사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가증스러운 놈." "죽어 영혼조차 남기지 못할 놈." 게덴하이드가 악명을 떨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그가 바로 성녀의 학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데 있었다. 암흑군대에 의해 대대적으로 자행된 성녀에 대한 학살. 게덴하이드는 바로 그 임무를 총괄해서 맡아 했던 책임자였고 색출된 성녀를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처참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그의 손에 의해 죽어간 성녀는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그를 바라보는 눈길이 결코 고울 리가 없었다. 물론 최후의 성녀가 게덴하이드의 손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은 포위한 기사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하고 있었다. 마침내 울분을 참지 못했는지 누군가가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천벌을 받아 마땅할 놈. 네놈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니……." 앞으로 나선 자는 바로 슈렉하이머였다. 물론 암흑 전쟁에 참가한 때문에 그는 게덴하이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92회. 안녕하세요. 날씨가 많이 따듯해졌군요.^^ 먼저 죄송하다고 말씀드려야겠네요. 며칠 연중을 할 생각입니다. 오늘 부로 비축분이 모두 동이 나버렸거든요. 한 이틀 푹 쉰 뒤 다시 쓰려 합니다. 이해해 주시길……. 그럼 이만.^^ ************************************************************************ 슈렉하이머를 쳐다본 게덴하이드의 동공에 이채가 서렸다. "크크크. 누군가 했더니 그 때의 햇병아리 신관이었군. 응? 그 복장은……. 켈켈켈. 네놈 따위가 대승정이라니 이카롯트도 썩었군 그래?" "말 함부로 하지 마라. 아직까지 이카롯트는 네놈 따위가 감히 넘볼 제국이 아니다." "오래지 않아 사라질 이름이기도 하지. 베르키스 님의 막강한 파워 아래 말이다." 하지만 슈렉하이머의 입담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의 입가에 슬며시 비웃음이 서렸다. "나이델하르크를 따라 꽁지 빠지게 도망치더니 고작 드래곤의 개로 숨어 들어가 목숨을 유지했나? 한 번 짖어보지 그래? 멍, 멍하고 말이야." "이놈이?" 게덴하이드의 눈에서는 마치 불타는 듯한 안광이 일렁였다. 그만큼 슈렉하이머의 반격이 모욕적이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이제 나이델하르크를 모시지 않는다. 앞으로 영원히 베르키스 님의 충실한 가디언으로 살아갈 생각이므로……. 인간이여 나불대는 입을 조심하는 게 목숨을 유지하는데 좋을 것이다." "나이델하르크가 그 말을 듣는다면 얼굴 표정을 볼 만 하겠군." 매섭게 쏘아대고 있었지만 슈렉하이머의 안색은 그리 좋지 못했다. 상황을 보아 게덴하이드는 드래곤의 손에 세뇌된 것이 확실해 보였다.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놈의 능력을 감안해 본다면 인간들에게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 분명했으므로……. 임무를 떠올린 게덴하이드는 곧 평정을 회복했다. 슈렉하이머를 그다지 안중에 두지 않는 듯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냉랭하게 내뱉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길이나 열어라. 만약 열지 않을 시, 성녀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 그 말에 기사들의 안색이 딱딱히 굳어져버렸다. 성녀를 인질로 잡고 있는 이상 그들은 아무런 방법도 시도할 수 없다고 봐야 했다. 물론 놈이 공간이동으로 달아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다수의 마법사들이 포위망을 형성하며 마법 방해를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게덴하이드가 아무리 고위급 마법사라도 이 장벽을 돌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정도라면 드래곤조차도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직접적인 공격은 힘들지만 마법의 실현을 방해하는 것 정도는 이들 마법사들도 충분히 할 수 있었으므로……. 하지만 결정적으로 성녀를 구해낼 방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게덴하이드의 손에 제압되어 있는 것이다. 슈렉하이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가장 중요한 단계에서 성녀가 사로잡힐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또한 이미 드래곤들이 자신들의 계획을 간파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성녀를 납치하려는 거지?" "물론 너희 인간 놈들의 하잘 것 없는 기대를 꺾어버리려는 거지. 너희들이 아무리 발버둥친다 하더라도 멸망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카롯트의 궁정에서 그리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하지만 게덴하이드는 느긋한 기색이었다. "뭐 성녀를 잃고싶지 않다면 길을 열어야 할 테지? 어떻게 할 텐가?" 순간 슈렉하이머의 눈빛이 번쩍였다.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넌 드래곤의 명령을 받는다고 들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베르하젤 님의 비위를 건드릴 수는 없는 법. 성녀란 베르하젤 님의 눈과 귀라고 볼 수 있는 존재. 그러므로 드래곤이 결코 성녀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넌 성녀를 건드릴 수 없다." 게덴하이드는 다소 놀란 눈치였다. "머리가 좋군.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죽일 순 없지만 백치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물론 나는 베르키스님을 위해 베르하젤의 응징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 그 말을 듣자 슈렉하이머를 위시한 기사들의 얼굴에 허탈한 표정이 떠올랐다. 게덴하이드의 말대로 성녀가 백치가 되어버린다면 베르하젤에 청원을 하겠다는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말하는 기색으로 보아 게덴하이드는 충분히 계획대로 시행할 작자였다. 과거 무수한 성녀를 살해한 전례를 보아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성녀가 백치가 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길을 열어라!" 하지만 기사들은 도무지 움직이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들 역시 공간이동을 차단할 준비를 완벽히 펼쳐 놓은 다음이었다. 어차피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은 오로지 성녀 뿐이었다. 그녀를 빼앗긴다면 희망이 깡그리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게덴하이드의 눈에 갑자기 살광이 치솟았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손으로 성녀의 머리를 덮었다. 손에서 섬뜩한 빛이 치솟는 것을 보아 모종의 마법을 시행하는 것이 분명했다. "원한다면 백치로 만들어주지. 크크크." "자, 잠깐……." 결국 보다 못해 슈렉하이머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성녀가 백치가 되는 것을 도저히 좌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떤 방법으로 길을 열어주면 되겠느냐?" "글세? 그게 고민이군. 걸어서 나갈 순 없을 테고……. 공간이동은 위험성이 너무 높단 말이야?" 게덴하이드는 늘어선 기사들을 죽 둘러보았다. 그들 중에는 잔뜩 마나를 끌어올린 마법사들이 군데군데 섞여 포진되어 있었다. 만에 하나 그들 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마음을 먹는다면 공간이동이 실패할 가능성이 무척 높았다. 공간이동이란 그만큼 시전하기 까다로운 마법이었다. 만약 방해가 이루어진다면, 최악의 경우 땅 속으로 워프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로써는 무척 심각한 문제였다. 금방 죽어버리는 인간과는 달리 영생하는 리치인 그는 평생 땅 속에 묻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비교적 안전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이동 마법진을 그릴 놈을 하나 불러줘야겠군. 물론 수준이 낮은 마법사로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슈렉하이머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정말 용의주도한 놈이로군." 6써클이 넘어서는 마법사는 물론 주문영창만으로도 충분히 공간이동을 할 수 있다. 물론 목적지의 좌표를 명확히 기억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많은 위험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고로 목적지에 이물질이 있는 경우와 함께 마법 방해가 있을 경우가 공간이동을 시도한 마법사에겐 치명적인 결과가 따르는 법이다. 공간이동을 방해하는 방법은 무척 간단했다. 시전자가 이동하려는 경로로 다른 마나를 은근 슬쩍 끼워 넣는 것이 전부였고 그렇게 된다면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경사로를 굴러 내려가는 구슬에 살짝 힘을 주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구슬이 굴러가는 경로가 바뀔 수밖에 없다. 먼 거리를 갈수록 도착점의 왜곡도가 커지는, 다시 말해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게되는 것이다. 공간이동 역시 이와 마찬가지였다. 아주 미약한 마나가 끼여들더라도 가는 거리가 멀다면 전혀 상상도 못한 곳으로 워프가 이루어지는 법이다. 마법의 조종인 드래곤들이 감히 펠드리안으로 난입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들이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수준 낮은 인간 마법사라 할 지라도 공간이동에 대한 방해 정도는 충분히 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보편적인 경우 마법사들은 주로 마법진을 이용해 공간이동을 행했다. 이것은 수준이 높은 마법사라도 마찬가지였다. 일정한 마나의 흐름을 갖는 마법진에는 타 마나가 끼여들 여지가 없었으므로 마법 방해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만약 대상이 게덴하이드 정도의 대마법사라면 공간이동의 차단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었다. 일그러진 슈렉하이머의 얼굴을 마치 감상하듯 쳐다보던 게덴하이드는 늘어선 마법사들을 둘러보았다. "어떤 놈을 시킬지 한 놈 골라주지 않겠어? 보다시피 내가 직접 마법진을 그릴 처지는 아니니 말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게덴하이드는 적합한 인물을 한 명 물색해 놓은 듯 했다. 그는 손을 뻗어 한 쪽을 가리켰다. 정확히 앞쪽을 향해서 말이다. 지명 받은 자의 얼굴에 다소 얼떨떨한 표정이 떠올랐다. 바로 데이몬이었다. "나, 나 말인가?" "맞아.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내게 친숙한 흑마법사를 택하고 싶군. 또한 실력을 보아 위험할 가능성이 가장 낮으니 말이야. 물론 공간이동 마법진 정도야 그릴 순 있겠지?" "나, 난 마법진을 그릴 줄 모르는데……." 그러자 게덴하이드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 "형편없는 놈이었군. 명색이 마법사라는 놈이 마법진 하나 그릴 줄 모르다니……. 할 수 없지. 내가 그리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 우선 저쪽으로 걸어가도록……."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데이몬에게로 집중되었다. 간혹 기대 어린 시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벌레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론 대상이 중형 몬스터라면 데이몬의 매직 미사일은 정말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애석하게도 리치였다. 급소도 없는 데다 마법실력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나는 만큼 그가 성녀를 구해낼 가능성은 아예 제로라고 봐야 했다. 꿀꺽. 침을 한 번 삼킨 데이몬은 그가 시키는 데로 걸어나갔다. 다소 겁을 먹은 듯 보였지만 그의 내심은 다프네를 구해내기 위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말이다. 하지만 게덴하이드는 전혀 빈틈이 없는 인물이었다. 9써클의 대마법사답게 그는 데이몬의 상대를 금세 간파했다. "헤이스트와 파워 업 건틀릿이라. 정말 어이없는 조합이로군.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지만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야겠지? 디스펠!" 그의 주문영창이 끝나자마자 데이몬의 주위를 돌고 있던 마나가 싹 사라졌다. 기껏 끌어 모아 놓았던 마나가 깡그리 없어져버린 것이다. 정말 마법의 수준차이를 뼈저리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데이몬을 향해 게덴하이드가 냉랭하게 내뱉었다. "그 따위 쓸데없는 건틀릿은 벗지 그래?" 데이몬은 묵묵히 건틀릿을 벗어 한 쪽으로 집어들었다. 적어도 상대는 마법으로는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게덴하이드는 품속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 데이몬에게 던져주었다. "그 책의 61페이지를 보면 공간이동 마법진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너는 바닥에다 그대로 그리면 된다." "하지만 난 마법진에 마나를 불어넣을 줄 모르는데……." "그건 내가 할 테니 넌 상관없이 그리기만 해라." 데이몬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게덴하이드는 그런 데이몬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관찰했다. 틀리게 그릴 때마다 불호령이 떨어졌다. "멍청한 녀석. 도대체 마법사가 맞긴 맞는 거야? 마법진 하나 똑바로 못 그리겠나?" 계속 욕을 먹어가며 데이몬은 묵묵히 마법진을 그렸다. 울화가 불끈 치밀었지만 그는 꾹 눌러 참았다. 다프네를 구하기 전까진 어떤 일이 있어도 참아야 했다. 마법진을 완성한 데이몬은 게덴하이드를 쳐다보았다. "이 정도면 되었나?" "좋아. 마법진에 마나를 불어넣을 테니 이리로 와라." 데이몬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를 유심히 쳐다보던 게덴하이드의 눈가에 이채가 스쳤다. "상당히 인상적인 외모로군. 인간들에게 별달리 환영받지는 않겠어. 차라리 우리편에 붙는 게 어떻겠나? 원한다면 베르키스님의 마법 군단에 추천을 넣어보도록 하지. 물론 마법실력을 더 쌓아야겠지만 말이야." "그런 데로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군." 상대의 관심을 끌기 위해 데이몬은 그럴 듯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게덴하이드는 자신이 한 말에 별달리 비중을 두지 않는 듯 했다. "그것은 내가 일단 빠져나간 후에야 생각해 볼 일일 테고……. 내 앞으로 오도록." 순순히 게덴하이드의 앞으로 다가간 데이몬은 손을 내밀었다. "성녀를 넘겨다오." "………." "마법진에 마나를 불어넣으려면 그녀를 들고서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보다시피 나는 네가 하등 경계할 필요가 없는 자이다." 하지만 게덴하이드는 역시 철두철미했다. "클클클 말도 안 되는 수작 부리지 말고 몸을 돌려라. 마나를 불어넣는 것은 네 몸을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말을 마친 게덴하이드는 손을 뻗어 데이몬의 어깨를 짚었다. 순간 살을 에이는 듯한 한기가 어깨를 통해 전해졌다. "크윽." 극심한 통증에 데이몬의 몸이 잠시 비틀거렸다. 하지만 게덴하이드는 아랑곳없이 데이몬의 몸을 잡아 빙글 돌렸다. "자, 마법진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도록……. 행여라도 수작부릴 생각일랑 꿈에도 하지 않기를 권한다.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너는 그 즉시 얼음덩이가 되어버릴 테니까……." 이를 지긋이 깨문 데이몬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냉기에 얼어 붙어버린 듯 어깨에서는 아무런 감각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 상태로 둘은 서서히 마법진을 향해 걸어갔다. 물론 의식을 잃은 채 늘어져 있는 다프네까지 합친다면 셋이지만 말이다. 포위망을 갖춘 기사들은 긴장한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황을 보아 그들이 손을 쓸 여지는 전혀 없어 보였다. "큰일이군." 슈렉하이머의 얼굴은 말 그대로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눈 버젓이 뜨고 성녀를 빼앗기에 생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 상황에선 소드 마스터라도 무용지물이었다. 헬버트론을 위시한 네 명의 소드 마스터는 그저 검을 꼬나 쥔 채 게덴하이드의 뒤를 조금씩 따라갈 뿐이었다. 물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말이다. 성녀를 지키는 소임을 완수하지 못한 터라 그들 역시 속이 타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잠깐 방심한 사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으니 말이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어이쿠." 외마디 신음소리와 함께 데이몬이 벌렁 엎어졌다. 마치 돌부리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 게덴하이드의 눈에 살광이 급격히 치솟았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손을 들어 데이몬의 머리를 움켜쥐려 했다. "어디서 수작을……. 원한다면 죽여주……." 애석하게도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앞으로 꼬꾸라진 상태 그대로 데이몬이 두 다리를 휘저어 자신의 양 발목을 걷어차 버렸기 때문이었다. 상당히 빠른 일격이었다. 아무리 급소가 없는 리치라도 관절부분을 걷어차인 이상 균형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마법을 끌어올린 손이 그만 허공을 짚어버렸다. 데이몬은 때를 놓치지 않고 두 다리를 뻗어 게덴하이드의 다리 오금을 휘감았다. 넘어진 상태 그대로 말이다. "에잇." 기합성과 함께 몸에 힘을 주어 뒤틀자 게덴하이드의 몸이 기우뚱했다. 리치가 되었어도 몸을 움직이는 원리는 인간의 것이었으므로 상대의 힘을 절묘하게 이용하는 중원의 체술에 그만 넘어 가버린 것이다. 결국 게덴하이드는 한쪽 무릎을 쿵 하고 땅에 찧고 말았다. "이놈." 극도로 분노한 듯한 게덴하이드의 음성. 하지만 데이몬은 상대에게 전혀 틈을 주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이라도 캐스팅 할 시간만 있다면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라 봐야 했다. 다프네를 구해내려면 어떻게 해서든 상대의 캐스팅만은 막아야 했다. 그러려면 무조건 머리를 공격해야 할 듯 싶었다. 리치화 된 터라 내장 따위가 있을 턱이 없었고 그렇다면 몸을 공격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을 터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프네가 아직까지 게덴하이드의 팔에 단단히 휘감겨 있다는 점이다. 물론 마법의 캐스팅에는 극도의 정신집중이 요구되는 터라 계속 머리를 가격한다면 아마 마나를 끌어 모을 수 없을 지도 몰랐다. 이것은 자신이 마법을 익히던 경험에서 떠올린 결정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을 단단히 믿고 데이몬은 공격을 시작했다. 파파파팍. 그의 어깨를 필두로 팔꿈치, 손목, 수도가 연속적으로 게덴하이드의 안면을 가격했다. 마치 모든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경쾌한 타격소리가 연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게덴하이드의 머리는 마치 전기충격이라도 먹은 듯 연신 들썩거렸다. 연환공격이 지나가자 게덴하이드의 동공에서는 분노의 눈빛이 마치 불길처럼 치솟았다. 그가 언제 이렇게 얻어맞아 보았던가? 통증을 느끼지 않는 탓에 그는 금세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데이몬도 말 그대로 필사적이었다. "이얍." 몸을 빙글 돌린 채 나머지 다리의 오금을 걷어차자 게덴하이드는 다른 무릎도 마저 꿇을 수밖에 없었다. 데이몬은 완전히 무릎을 꿇은 자세의 게덴하이드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연환공격을 퍼부었다. 이미 이런 종류의 체술에는 이력이 날 만큼 난 데이몬이었다. 퍽, 퍽, 퍽. 양쪽 무릎이 번갈아 가며 게덴하이드의 안면을 강타했다. 그 다음은 발등이 턱을 걷어차 올렸고 허공을 한바퀴 돌고 내려온 발 뒤꿈치가 뒤통수를 강타했다. 데이몬은 알고 있는 연환각법(連環却法)을 모조리 동원해서 게덴하이드가 제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드는데 주력했다. 조금이라도 틈을 준다면 상대의 반격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두두두두. 게덴하이드의 머리통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쉴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도저히 정신집중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게덴하이드는 역시 대마법사였다. 연환각법이 한차례 돌아가고 난 짧은 틈을 이용해서 그는 순식간에 캐스팅을 마쳤다. "죽어라 이놈." 엄청난 화염줄기가 데이몬의 몸을 목표로 덮쳤다. 바로 코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역시 싸워본 경험이 많은 노련한 고수였다. 창촐지간에 몸을 숙인 데이몬은 그대로 게덴하이드의 품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화염줄기는 데이몬의 등판만 벌겋게 익혔을 뿐 헛되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살과 살이 맞닿는 순간 에이는 듯한 냉기가 파고들었지만 데이몬은 아랑곳없이 상대의 몸을 밀어붙였다. 둘은 곧 한 덩어리가 된 채 뒤로 나뒹굴었다. 그 바람에 게덴하이드의 팔이 풀려 다프네의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을 확인한 데이몬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내질렀다. "뭘 하는 겐가? 성녀를 구해라." 상황판단을 할 여유도 없이 고개를 돌려보니 게덴하이드의 부릅뜬 눈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극도의 분노가 활활 타오르는 눈빛이었다. 이어 음산한 음성이 그의 귀청을 파고들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주겠다." 이미 게덴하이드는 데이몬의 양팔을 굳게 움켜쥐고 있었다. 아무리 그라도 데이몬의 체술만은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동시에 양팔에서 극심한 통증이 전해져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대로 정신을 잃었을 정도로 통증은 강렬했다. 하지만 데이몬은 이미 통증에 단련될 대로 단련된 상태. 그는 고통을 가볍게 무시한 채 상대의 안면을 향해 냅다 박치기를 날렸다. 빠악. 게덴하이드의 머리통이 급격히 뒤로 젖혀졌다. 팔이 자유로와진 데이몬은 그 틈을 타서 필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렸다. "이놈." 미끄러지듯 몸을 일으킨 게덴하이드는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데이몬을 향해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 했다. 이번 공격만은 피할 수 없으리라 자부하며……. 순간 냉랭한 음성이 귀를 찔렀다. "이제 입장이 역전되었군." 동시에 등판을 파고드는 싸늘한 예기. 깜짝 놀란 게덴하이드는 다급하게 마나를 재배열했다. [다크메이지] 3장 마법으로의 길 93회. 연재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이 3장 마법으로의 길 마지막 회입니다. 내일부터는 4장이 시작됩니다. ************************************************************************ 게덴하이드의 몸이 순간적으로 그곳에서 사라져버렸다. 거의 동시에 시퍼런 광망이 넘실거리는 검 두 자루가 그가 있던 자리를 사정없이 난자했다. "헉! 블링크(Blank)." 경악성과 함께 암습자들이 다급히 방어자세를 취했다. 공격을 가한 자는 사라미스와 라인델프였다. 하지만 그들이 방어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가슴팍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콰쾅. 거쎈 폭음과 함께 둘의 몸은 허공에 붕 뜬 채 사정없이 나가떨어졌다. 암습자를 물리친 뒤 주위를 돌아본 게덴하이드는 이미 일이 글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두 명의 기사가 성녀를 들쳐업은 뒤 죽어라 달려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임무가 실패했다는 것을 실감한 게덴하이드는 혀를 찼다. "젠장. 빌어먹을 놈 하나 때문에 임무를 망치다니……." 그 때, 나가떨어진 두 기사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크으으." 묵직한 신음소리를 내뱉기는 했지만 심하게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것을 본 게덴하이드는 이를 갈았다. "호리드 윌팅에 죽지 않는 것을 보니 상급의 소드 마스터로군. 대 마법 갑옷의 질도 제법 좋은 편이고……." 하지만 결코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캐스팅을 마친 마법사들이 일제히 마법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게덴하이드는 눈 하나도 깜짝하지 않았다. "켈켈켈. 이까짓 것쯤이야." 손을 한 번 휘두르자 그의 앞에 거대한 마법의 장벽이 형성되었다. 마법사들이 날린 공격마법은 그 장벽에 가로막혀 헛되이 스러질 뿐이었다. 하지만 이루어진 공격은 마법뿐만이 아니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선렬히 머금은 검 두 자루가 마법의 장벽을 순식간에 갈가리 찢어버린 채 육박해 왔다. 남은 두 명의 소드 마스터가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가해왔던 것이다. 상대가 상대인 이상 어지간한 게덴하이드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블링크." 공간 왜곡 마법을 펼쳐 공격을 피해 낸 게덴하이드는 자신의 몸에 헤이스트를 걸었다. 빠른 속도로 포위망을 돌파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얼마 가지도 못하고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허억." 전신이 찌르르 하는 통증에 포위망을 돌파해가던 게덴하이드의 몸이 그대로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제법 마력이 흩어진 것을 보니 아마도 고도의 신성마법에 격중된 모양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한 쪽을 쳐다보았다. 공격을 가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자에게 말이다. "이것은 엑소시즘(Exosym)이군. 슈렉하이머. 네놈이었구나?" 자고로 어둠의 마나를 사용하는 자들에겐 신성마법이 가장 두려운 법이다. 슈렉하이머 정도의 고위급 신관이 전개한 신성마법이라면 어지간한 흑마법사는 일격에 재로 화해버릴 정도라고 봐야 했다. 신성마법은 그만큼 어둠의 마나와 상극이었다. 하지만 게덴하이드는 이미 9써클의 엑스퍼트에 오른 대마법사. 제법 타격을 받았지만 그리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신관들이 서둘러 엑소시즘을 캐스팅하는 것이 보였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신성마법의 최대의 단점은 캐스팅에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지." 냉랭하게 내뱉은 게덴하이드는 등뒤로 파고드는 예기를 느끼고는 또다시 블링크를 펼쳤다. 몸을 잠시 차원의 틈새로 끼워 넣었다가 다시 그 자리로 되돌리는 이 마법은 적의 공격을 피하기에 더없이 유용한 방법이었다. 물론 들어가는 마나가 만만치 않아 대마법사가 아니고서는 전개할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소드 마스터의 공격을 피하는데 있어 이 이상 훌륭한 마법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만은 예외였다. 공격을 피한 뒤 다시 모습을 드러내던 게덴하이드가 갑자기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악." 나타나는 순간 난데없이 매직 미사일 한 발이 몸 속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매직 미사일은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정확히 그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이따위 초급 마법에 당할 자는 아니었지만 이 매직 미사일은 정통으로 몸의 내부를 직격한 상태였다. 충격이 없을 수는 없었으므로 그의 몸은 통증으로 굳어버렸다. 소드 마스터들이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다. 오러 블레이드가 충만한 검이 게덴하이드의 몸을 사정없이 난자했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리치의 피부도 오러 블레이드에만은 결코 저항하지 못했다. "키아아아." 사지가 잘려나가고 여러 자루의 장검에 몸통이 산적처럼 뚫려버린 게덴하이드가 처절한 비명을 질러댔다. 그것도 잠시 그의 몸은 곧 재로 화해 흩어져버렸다. 푸스스. 마치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장내는 곧 정적 속에 잠겨들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드래곤 휘하의 한낱 가디언이 이 정도로 강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한참 만에야 헬버트론이 입을 열었다. "놈이 필경 죽었겠지요?" 듣고 있던 슈렉하이머가 묵묵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마 아닐 거요. 리치라는 특성상 라이프 포스 베슬만 무사하다면 아무리 심각한 타격을 입어도 놈은 능히 몸을 복원할 수 있소. 이미 오크들에겐 생명력을 보충할 수많은 포로들이 있으니 게덴하이드는 아마도 오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낼 것 같소." 말을 마친 슈렉하이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는 경로에는 오늘 가장 혁혁한 공로를 세운 인물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성녀를 구하는데 가장 지대한 역할을 했으며 게덴하이드를 쓰러뜨리는데 결정적인 공격을 가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이제 의식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최후의 순간에 매직 미사일 한 발을 간신히 발사하기는 했지만 통증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혼절해버린 것이다. 이미 그는 게덴하이드가 몸을 움직이는 경로를 파악해놓은 상태였다. 따라서 그가 발사한 매직 미사일이 아니었다면 게덴하이드는 필시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갔을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다가온 슈렉하이머는 우선 데이몬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다. "별로 좋지 않군." 데이몬의 양팔은 말 그대로 뼈만 남아있었다. 근육이나 살이 모조리 사라져버리고 뼈에 말라붙은 가죽이 간신히 붙어있는 형태인 것이다. 슈렉하이머는 그것이 죽음의 손길(Hand of death)에 당한 상처라는 것을 간파했다. 상대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리치 특유의 마법 말이다. 얼마나 처참했던지 다가온 기사들도 하나같이 고개를 돌려 외면할 정도였다. 헬버트론이 얼굴을 찡그린 채 안됐다는 듯 중얼거렸다. "급한 나머지 게덴하이드가 다른 마법을 전개할 엄두를 내지 못한 모양이군. 그러나 저러나 정말 대단한 체술을 가진 녀석이었는데 이젠 그나마도 전혀 쓰지 못하겠어." 근육이나 혈관이 하나도 남지 않은 앙상한 팔. 이것으로 체술을 쓴다는 것은 누가 봐도 무리였다. 아마도 데이몬은 십중팔구 두 번 다시 체술을 쓸 수 없을 터였다. 한 기사의 등에 업혀 안으로 옮겨지는 데이몬을 보며 라인델프가 불쌍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저렇게 되었으니 이번 임무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겠군. 그런데 놈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공작전하께서 쓸모가 없어진 놈을 살려둘 리가 만무하니 말이야. " "뭘 걱정이야. 요리실로 보내면 되지. 팔이 저 꼴이 되었어도 요리정돈 할 수 있을 테지?" 천연덕스러운 헬버트론의 말에 나머지 기사들은 지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그들은 데이몬의 진가를 아는 자들이었다. 리치의 습격 때문에 펠드리안의 왕궁은 발칵 뒤집혀버렸다. 게덴하이드가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의 가디언이란 것이 확인된 터라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인간들의 계획이 이미 드래곤들의 촉각에 간파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이미 성녀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세르게이는 큰 충격을 받아야 했다. "이곳에는 분명 놈들의 끄나풀이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드래곤들이 성녀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굳이 끄나풀의 정체를 밝혀낼 시간은 없었다. 드래곤들이 추가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작전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임무를 성공할 확률은 현저히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민을 거듭하던 세르게이는 눈을 빛냈다. "놈들은 아마도 사실 확인을 위해 게덴하이드를 보낸 것이 틀림없어. 리치는 비록 소멸되더라도 다시 되살릴 수 있으니 말이야." 그는 마침내 계획을 지체 없이 추진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까지 마지막 드래곤 하나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지만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작전에 투입할 정예 병력의 편성은 모조리 끝난 상태. 그가 결정만 내리면 인간의 운명을 건 작전은 시작되는 것이다. "4대 기사를 위시한 소드 마스터 2백여 명. 전원이 5써클 이상의 마법사로 구성된 1백여 명의 마법 부대의 편성이 모조리 끝난 상태다. 이들의 힘이라면 드래곤 한 두 마리 정도는 능히 상대할 수 있다. 더 이상 계획을 늦출 수 없다." 그는 결국 용단을 내렸다. 북쪽의 울창한 침엽수림인 노스우드.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 죽음의 절지를 향해 병력을 들여보낼 결심을 완전히 굳힌 것이다. "작전 명을 [피와 얼음의 향연] 정도로 하는 게 좋겠군." 보안을 위해 아직까지 작전 명까지 지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결정이 내려진 이상 최대한 신속하게 작전을 진행시키는 것이 최선이었으므로 그는 곧 소집 명령을 내렸다. "대 지급이다. 작전을 시작한다." 소집 명령서를 받아든 부관이 다급하게 달려나갔다. 이미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부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세르게이는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명단에서 한 명의 이름을 빼야겠군. 이제 전혀 쓸모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 말이야." 비교적 수수하게 꾸며진 방 안. 한 쪽 귀퉁이에 덩그렇게 놓여진 침대에는 한 사내가 침통한 안색으로 누워 있었다. 양어깨에서부터 팔이 붕대로 친친 감겨진 상태였으며 얼굴은 핏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창백했다. 물론 그는 데이몬이었다. 이미 그는 치료를 담당한 신관으로부터 몸의 상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은 다음이었다. "리치의 사악한 마법 때문에 팔의 생명력이 깡그리 빠져 나가버렸습니다. 당신의 팔은 현재 피가 전혀 통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게다가 근육까지 모조리 말라 붙어버린 때문에 아마도 팔을 영원히 움직일 수 없을 겁니다." 데이몬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무감각한 음성을 토해냈다. "회복될 가능성은?" 신관은 얼굴을 찡그렸다. "아마 힘들 겁니다. 만약 벰파이어릭 터치(Vampiric touch)에 당한 경우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처가 치료될 가능성이 조금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흑마법 계열인 죽음의 손길(Hand of death)에 당한 상처입니다. 아마도 회복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 "혈액순환이 안 되는 때문에 팔의 세포가 계속 괴사하고 있습니다. 일단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응급처치는 해 놓았지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기필코 팔을 잘라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점점 번져 가는 죽음의 기운이 심장으로까지는 파고들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팔은 자르지 않을 거요." 데이몬은 단호한 표정으로 신관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당혹해 하는 신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만 나가보시오. 혼자 있고 싶소." 신관이 나간 뒤 데이몬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그토록 힘을 얻으려고 발버둥쳤지만 그만 원점으로 다시 돌아와 버린 것이다. 이제 그는 생애 두 번째로 힘을 잃어버린 몸이 되었다. 더 없이 위력적이었던 그의 체술은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며 마법 역시 시간이 얼마나 흘러야 펼칠 수 있을지 도저히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랜 시간동안 그와 함께 했던 거무튀튀한 스파이크드 건틀릿이 침대 옆에 쓸쓸히 놓여 있었다. 건틀릿의 손등 부분에는 수정 구슬이 박혀 있었고, 긴 가죽끈이 두 건틀릿을 연결하고 있었다. 그것은 스승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마법 무구였다. 이제 세상에 없는 스승 도일이 말이다. "스승님……." 데이몬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 했다. 건틀릿에 배인 스승의 손길을 조금이나마 느껴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으로만 가능할 뿐이었다. 말라 붙어버린 팔은 전혀 그의 의지에 따라주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상황을 봐서 게덴하이드에게 날린 매직 미사일이 그가 시전할 수 있었던 마지막 마법일지도 몰랐다. 최후에 날린, 게덴하이드를 패퇴시켰던 공격 말이다. 데이몬의 입에서 자조적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 완벽하게 폐물이 되었다고 봐야 하는 건가?" 그는 지금껏 철저하게 오른 손만을 이용해 마법을 펼쳤다. 하지만 그 방법은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을 듯 싶었다. 심지어 마법 지팡이조차 들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다시 말해 그가 당분간은 정상적인 마법사로 활동할 수는 없다는 뜻과 진배가 없었다. 물론 마법 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어깨나 이마에 수정구슬을 달아서 마법을 펼치는 방법을 찾는다면 어쩌면 얼마간의 힘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그것을 익히는 수련기간 동안 트루베니아가 멸망하지 않는다고 전혀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도 후회는 없다." 데이몬은 고개를 들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비록 힘을 잃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폐물이 되어버렸지만 중요한 것은 그 대가로 다프네를 구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다프네는 필경 백치가 되어버렸거나 드래곤의 수중에 잡혀갔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녀가 성녀라 해서 구해낸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다프네가 해를 입는 것을 결코 볼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데이몬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프네의 해밝은 미소를 떠올려 본 데이몬은 묵묵히 중얼거렸다. "팔 두 개로 다프네를 살릴 수 있었다면 싼 거지." 그 날 이후 데이몬은 단 한번도 다프네를 보지 못했다. 곧 있을 임무를 위해 그녀는 정령조차도 스며들 수 없는 장소에 격리되었고 수십 명의 기사와 마법사들에 의해 철통같은 경호를 받고 있었다. 이미 쓸모 없는 존재가 된 데이몬이 그녀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을 데이몬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봤으면 좋겠는데……. 먼발치에서라도 말이야."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데이몬은 이제 자신의 운명에 대해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자신에 대해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세르게이. 엄밀히 생각해보면 그가 자신을 고이 놓아둘 이유는 전혀 없었다. 최악의 경우 맥밀란처럼 쉴더로 전락해 화살받이로 전쟁터에 나갈 수도 있었다. 이래저래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란 놈도 정말 신세가 기구하기 짝이 없군." 툴툴거리며 웃는데 문이 덜컥 열렸다. 걸음걸이가 무척 익숙했다. 다행히 감각만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위안하며 데이몬이 고개를 돌렸다. "대승정이었구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슈렉하이머였다. 다소 어색한 듯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역력히 배어있었다. 데이몬은 그것을 성녀를 구해 준 데 대한 고마움과 함께 이제부터 자신에게 대해야 할 냉정함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 것이라고 간주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슈렉하이머는 고즈넉이 입을 열었다. "몸 상태는 좀 어떻소?" "뭐, 신관의 보고를 받았을 테니 나보다 잘 알고 있지 않겠소?" 정곡을 찌르는 대답에 슈렉하이머는 쩔쩔 맬 수밖에 없었다. "일단 성녀를 구한 데 대해 사의를 표하리다. 당신은 우리 트루베니아의 운명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오." "그 딴 것 생각해 본적도 없소. 다프네만 무사하다면 난 괜찮으니……." 무언가를 생각하며 말꼬리를 흘리던 데이몬이 돌연 슈렉하이머의 눈을 직시했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소. 이제부터 난 어떻게 되는 것이오?" "………." "물론 임무에선 제외되었을 터, 불구자가 되었으니 쉴더 보직으로 가게 되는 것이오?" 무척 당황해 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슈렉하이머는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은 임무에서 제외되지 않았습니다." 놀란 것은 도리어 데이몬이었다. 그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반문했다. "날 놀리지 마시오. 내겐 거짓 위로 따윈 필요 없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전 바로 그것을 알려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내일, 정확히 말하면 새벽 한 시에 작전이 시작됩니다. 이름하여 [피와 얼음의 향연]이라는 작전이지요. 물론 당신도 그 일원으로 참가하게 됩니다." "지, 지금의 난 마법조차 제대로 시전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렸소. 분명 세르게이가 내가 참가하는 것을 관망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분께서 직접 사인하신 안건입니다. 당신의 이름은 [피와 얼음의 향연]에 참가하는 용사의 명단에 분명히 끼여 있습니다." 데이몬은 도저히 영문을 몰라 이리저리 눈을 굴릴 뿐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난다면 어느 정도의 위력을 회복할 수 있을 테지만 지금의 자신은 말 그대로 폐인일 뿐이었다. 지금의 자신은 오크 한 마리도 당할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평가였다. 그런데도 자신을 임무에 참가시키다니? 그의 의문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슈렉하이머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성녀께서 강력하게 주장하셨습니다. 당신이 참가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말이죠." "다프네가? 그랬군." 비로소 의문이 풀린 데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뜻밖의 소식에 새삼 극도의 희열감을 떠올리는 데이몬이었다. 쉴더로 전락할 처지에서 벗어난 사실이 기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오직 하나, 다프네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마치 하늘 끝까지 오른 것처럼 좋아 어쩔 줄 모르는 데이몬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슈렉하이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외모와는 달리 본성이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군. 천성이 악하다면 결코 성녀의 호감을 살 수 없을 테니.' 내심과는 달리 슈렉하이머는 사무적인 태도로 할 말을 털어놓았다. "성녀의 고집에 세르게이 공작전하도 어쩔 수 없이 당신의 참가를 승인하셨지요. 하지만 전투를 담당할 수 없을 테니 당신은 최대한 성녀의 마음을 안정시켜드리는데 주력해야 합니다. 이번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성녀는 지금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알겠소." 데이몬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슈렉하이머는 잠자코 그의 방을 빠져나왔다. 마치 폭풍전야를 연상시키는 밤. 임무에 참가할 용사들은 하나같이 뜬눈으로 밤을 새울 수밖에 없었다. 불안하기 그지없는 트루베니아 인간의 운명. 그 운명을 바꾸는 열쇠를 자신들이 쥐고 있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운명의 시간인 새벽 한 시가 마침내 다가왔다. 이번 작전에 사활을 걸고 있기 때문에 각 국 군주들도 대대적으로 용사들의 대열에 참가한 상태였다. 펠드리안 궁정 지하의 드넓은 광장. 그곳에는 대규모의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원래 이 광장의 마법진들은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왕족들을 피신시키는 용도로 건설된 것이었다. 만약을 위해 각종 마법 방해에 견딜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마법진이 돌 바닥에 빼곡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용도가 바뀐 지 오래였다. 용사들을 직접 노스우드로 투입하려는 목적으로 말이다. 임무에 투입되는 용사들은 도합 사백여 명. 그들 중 절반이 소드 마스터였으며 나머지 인원의 절반은 고위급 마법사였다. 그 외의 자리는 각 국 군주들과 고위급 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실력이 있는 기사들이었으므로……. 물론 세르게이 공작도 일원으로 참가했다. 인간의 운명이 걸려 있는 가장 중요한 작전이었으므로 모든 임무를 총괄 지휘해야 했기 때문이다. 구성원 면면을 살펴볼 때 하나같이 강하지 않은 자들이 없었다. 심지어 물자를 나르는 포터(Porter)들도 검술 실력이 뛰어난 근위병 중에서만 뽑힐 정도였다. 하지만 구성원들 중 단 둘은 그렇지 않았다. "아저씨." 얼굴을 보자마자 단숨에 달려와 안기는 가녀린 인영. 물론 상대는 여지없이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데이몬은 엉거주춤 다프네를 안은 채 어색한 미소를 떠올렸다. 데이몬을 올려보는 다프네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괴어있었다. "전 믿고 있었어요. 아저씨가 절 구해줄 것이라고요……." 다프네를 쳐다보던 데이몬의 눈빛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녀는 정말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소녀였다. 설사 다프네가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의 수중에 있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아무 거리낌 없이 마계로 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 모습에 용사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가장 성스러워야 할 성녀의 그렇지 못한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이다. 데이몬의 앞가슴에 얼굴을 묻고 연신 도리질치던 다프네. 그녀의 시선이 불연 듯 데이몬의 양팔에 가서 닿았다. 순간 그녀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붕대로 감아놓긴 했지만 틈새로 시커멓게 말라버린 팔의 일부가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어, 어떻게 해요? 저, 저 때문에 팔이……."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다프네. 그것을 보던 데이몬의 가슴도 어느새 뭉클해지고 있었다. 지금껏 자신의 상처에 대해 이 정도로 관심을 보여준 존재가 있었던가? 아마 스승 도일말고는 전무했을 것이라 생각하던 데이몬은 손을 들어 다프네의 등을 다정하게 쓸어주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말라붙은 팔은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말로써 그녀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난 괜찮다. 다프네. 아저씬 널 위해서 죽음도 감수할 수 있다……." "그, 그런 말하지 마세요. 제가 너무 슬프잖아요." 다프네의 눈에선 눈물이 끊임없이 샘솟았다. 그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진 데이몬. 하지만 급박한 작금의 상황은 두 사람의 해후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시간이 없습니다. 성녀님. 지금 즉시 출발하셔야 합니다." 총총히 다가온 세르게이가 다프네를 향해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물론 데이몬을 외면한 상태로 말이다.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 세르게이는 다프네에게 말 그대로 극도의 공대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여타 수뇌부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심안을 가지고 있다는 능력말고는 여타의 소녀와 별달리 다를 것도 없는 다프네에게 말이다. 하지만 다프네는 도무지 울음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프네. 시간이 없다고 하는구나. 이만 출발해야지?" 결국 보다 못한 데이몬이 나서고 나서야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아저씨의 말씀이시라면……." 데이몬을 부축한 채 몸을 돌리는 다프네를 보고 세르게이는 혀를 찼다. 연약하게만 보였던 다프네는 의외로 고집이 무척 센 소녀였다. 그는 곤혹스러웠던 아까의 상황을 떠올렸다. "아저씨 없이는 전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어요." 당시 세르게이는 그녀를 마법으로 재워서라도 노스우드로 옮기려고 했다. 이미 그는 데이몬을 처치해버릴 결심을 굳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특유의 성품상 데이몬에게 깊은 반감을 가졌던 세르게이. 데이몬이 힘을 잃은 지금이 그에겐 화풀이를 할 가장 좋은 기회였다. 물론 그의 요리솜씨를 경험해보지 못한 터라 걸릴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다프네의 고집에 뜻을 꺾고야 말았다. 데이몬이 가지 않는다면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겠다는 고집에 그는 결국 명령서에 사인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상황에 처해버렸다. 무척 천천히 걸어 마법진으로 향하는 두 사람. 그들을 쳐다보는 세르게이의 얼굴엔 무척 못마땅하다는 표정이 떠올라있었다. "할 수 없지. 기회는 또 있을 테니……." 나중을 기약하겠다고 결심한 세르게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엄선된 용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바짝 붙어 뒤따랐다. 이미 도착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일부의 인원들이 노스우드로 미리 공간이동을 해 간 상태였다. 한 쪽에서는 마법사들이 땀을 흘리며 열심히 공간이동의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이 임무는 결코 드래곤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말 그대로 필사적이었다. 용사들은 맡은 보직 별로 약 이십 명씩의 소규모 부대로 분류되었다. 그들 중 다섯 개 부대가 성녀의 경호를 전담했고 나머지 부대들은 각기 수색과 정찰, 외곽 방어 등을 맡게 되는 것이다. 물론 가장 검술실력이 뛰어난 4명의 소드 마스터는 성녀의 바로 옆에 배치되어 있었다. 슈렉하이머와 함께 말이다. 데이몬을 보자 헬버트론이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다시 보게 되어 반갑군. 그래?" "나 역시……." "꼭 살아나서 네 요리를 맛봐야 하는 건데 말이야." 너스레를 떨던 헬버트론은 세르게이의 눈총을 받자 움찔한 채 입을 닫았다. 마법사들의 준비가 끝나자 용사들은 각 부대별로 나뉘어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공간이동이 실현되면 순식간에 극한지인 노스우드에 서 있을 것이기 때문에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두툼한 방한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다만 소드 마스터들만은 예외였다. 그들은 지닌 마나를 활용해서 혹독한 조건 하에서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물론 데이몬과 다프네는 그럴 수 없었지만 말이다. 누군가가 다가와서 둘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고개를 돌려보자 슈렉하이머의 미소 띤 얼굴이 보였다. "성녀와 함께 이것을 입도록 하시오. 어떠한 조건 하에서도 체온을 보호해주는 마법이 걸린 외투라오." 거절할 도리가 없었기에 데이몬은 말없이 외투를 받아들었다. 다소 얇은 편이었지만 걸치자 훈훈한 온기가 순식간에 전신을 감돌았다. 옷을 입은 후에도 다프네는 데이몬의 옆에 바짝 붙어 서 있을 뿐이었다. "공간이동을 해 간 뒤에는 내 옆에 꼭 붙어있도록 하시오. 노스우드는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는 절지 중의 절지라오. 아시겠소." "알겠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데이몬을 보며 슈렉하이머는 마나를 끌어 모았다. 남아있는 마법사들이 모두 공간이동의 흔적을 지우는데 몰두하고 있었으므로 워프하는 것은 철저히 임무에 투입된 마법사들의 몫이었다. 물론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것은 신성마법으로도 충분히 가능했으므로 그들은 곧 찬란한 빛 무리에 쌓였다. 데이몬, 다프네, 슈렉하이머, 세르게이, 그리고 헬버트론을 위시한 네 명의 소드 마스터들이 포함된 20여 명의 몸은 곧 마법진 위에서 사라져버렸다. . 다크 메이지 김정율 ( 2003-04-09 19:20:18 , Hit : 4853 )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94회. 눈보라가 거세게 내려치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마치 뼈 속까지 파고들 정도로 매서웠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눈보라 때문에 도저히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 그런데 그런 악천후 속에 묵묵히 걸어가는 일단의 인물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두툼한 외투를 걸친 채 묵묵히 행군에 몰두하는 자들. 수는 대략 삼백여 명 정도였다. 외투 사이로 강철 갑주가 언뜻언뜻 드러나는 것을 봐서 결코 평범한 여행자들은 아닌 듯 보였다. 눈보라를 피하기 위해 얼굴을 외투 깃 사이로 깊숙이 파묻은 상태로 묵묵히 걷는 자들. 그들 중 가장 선두에 서서 걸어가던 자가 고개를 슬며시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투구의 얼굴 가리개 사이로 드러난 눈빛이 마치 뱀처럼 날카로운 자였다. 마치 잘 단련된 사냥개 같은 눈빛, 하지만 그의 눈에는 지금 곤혹스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정확히 거대한 얼음산 아래로 갈라진 갈림길에서 말이다. "정지." 그가 손을 들어 펴자 묵묵히 걷던 일행들이 일시에 걸음을 멈췄다. 모습을 보아 그가 안내자 역할을 맡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혹독한 날씨로군. 방향은 맞는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방을 둘러보던 안내자는 몸을 돌려 열의 중간 부분으로 얼른 뛰어갔다. 그러자 누군가가 한 발 앞으로 나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인가?" 어조를 보아 가장 신분이 높은 듯한 자였다. 선도자는 그를 향해 서슴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방향을 잃은 것 같습니다……." "멍청한 녀석. 한 번 와보고서도 모른단 말이냐?" "눈보라 때문에 그 때와는 지형이 판이하게 변해버린 지라……." "이런 밥 벌레같은 놈." 질책을 받은 안내자는 고개를 푹 꺾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를 쳐다보던 이는 부아가 치미는 듯 연신 씨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정말 엄청난 거금을 들여 키운 재원이었다. 그런 자가 한낱 길 안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외투 깃 사이로 슬며시 드러난 얼굴은 바로 세르게이의 것이었다. 눈보라 속에서 행군하던 일행들은 바로 성녀를 데리고 베르하젤 신전을 찾아가는 용사들이었던 것이다. 선도자의 진정한 정체는 바로 어새신이었다. 이미 세르게이는 휘하의 어새신들을 총 동원해서 노스우드의 베르하젤 신전을 정탐하도록 시킨 바가 있었다. 이미 쓸모 없어진 그들을 활용할 길은 오로지 이것 밖에는 없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생존하도록 훈련받은 어새신들이 아니었다면 이나마 정보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세르게이가 어새신 양성에 들인 자금과 정성은 정말 천문학적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맡고 있는 정보부의 존속을 위해서 가장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바로 어새신이었던 것이다. 정보부의 주 임무인 미행, 조사, 납치와 암살, 그리고 고문을 시행하려면 어새신이 거의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그들의 역할은 검술실력이 뛰어난 기사조차 대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2차 종족전쟁이 벌어지고 나자 어새신들은 그만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물론 일반 사람들에 비해 어새신들이 은신과 침투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오크들에게만은 무용지물이었다. 청각과 후각 면에서는 오히려 오크들이 어새신보다 월등한 우위를 보였다. 그러므로 어새신들은 종족전쟁에서 철저히 천덕꾸러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릴없이 펠드리안에 기거하며 밥만 축내던 어새신들. 그들이 할 일이라곤 간혹 가다 내려지는 암살명령을 수행하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성녀의 존재가 밝혀지고 난 뒤, 그들은 마침내 중대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북쪽의 성지 노스우드의 상태를 정탐하기 위해 그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세르게이는 일백 육십 이 명, 어새신 전부를 그곳으로 파견했다. 물론 감각과 생존능력이 범인에 비해 뛰어난 어새신들을 파견한 것은 사실 탁월한 판단임이 분명했다. 문제는 살아 돌아온 어새신이 단 일곱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나머지 어새신들은 모조리 노스우드에 묻혀버렸다. 그들을 훈련시키느라 들어간 천문학적인 금액과 함께 말이다. 그 정도로 노스우드는 위험스러운 곳이었다. 하지만 세르게이는 별달리 개의치 않았다. 일단 그곳의 정보를 얻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긴 것이다. 정보를 알고 가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과는 천양지차라 할 수 있으므로……. 그런데 믿었던 어새신의 우두머리가 길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한 번 가본 길을 말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세르게이는 꾹 눌러 참았다. 이런 상황에서 분노를 표출해봐야 하등 쓸모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또다시 병력을 분산시키기로 결심했다. "11조와 12조는 안내자 한 명을 대동해서 좌측으로 간다. 나머지는 우측으로 간다." 물론 안내자는 당연히 살아남은 어새신이었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이처럼 병력을 분산시킨 때문에 처음에 출발했던 인원에 비해 규모가 많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바른 길을 찾는다면 속속 마법통신을 통해 합류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출발한다." 두 개의 조를 다른 길로 들여보낸 일행은 곧 행군을 시작했다. 비교적 바른 길이라 짐작되는 길을 향해서 말이다. 공간이동을 통해 바로 노스우드로 워프한 용사들. 하지만 그들의 앞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우선 그들을 맞은 것은 뼈까지 파고드는 혹독한 추위였다. 내쉬는 숨결마저 그대로 얼어붙을 정도로 무서운 추위가 그들을 강타했다. 그 때문에 몇 몇 멋쟁이들이 본의 아니게 면도를 해야 했다. 숨결이 수염에 얼어붙어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문제 때문에 말이다. 콧수염을 기른 기사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고이 기른 수염을 깎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용사대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소드 마스터들에게는 추위가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들은 마나로 충분히 몸을 보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또한 마법사들도 힘들게나마 추위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었다.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인 마법으로 말이다. 문제는 포터로 따라온 50명 가량의 근위병이었다. 물론 검술실력 만으로 본다면 이들은 철저히 정예라고 볼 수 있었다. 근위병 수천 명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자들로만 뽑혀온 것이다. 하지만 추위를 견디는데 검술실력은 하등 쓸모 없는 것에 불과했다. 행군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포터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한 것은 세르게이조차 미리 예견하지 못한 일이었다. 털썩. 쓰러진 근위병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의 발은 동상으로 인해 살이 모조리 괴사한 상태일 것이다. 임무에 따른 중압감 때문에 그들은 통증을 전혀 호소하지 못하다가 한계에 달해 결국 쓰러진 것이다. 통상적으로 근위병들이 걸친 갑옷은 소드 마스터의 그것보다 훨씬 두꺼운 편이다. 또한 식량과 장비를 잔뜩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게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런 환경에서는 발은 정말 엄청나게 혹사당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다 몸에 두른, 손을 대면 피부가 바로 떨어져 나갈 정도로 냉각된 갑옷에서는 정말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파고들었다. 금속제 갑옷은 보온에 전혀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으므로. 따라서 근위병들이 버티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라고 볼 수 있었다. 발끝부터 얼어붙어 가던 병사들은 심장이 멎은 후에야 맥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세르게이는 아랑곳없이 행군을 지속시켰다. 쓰러진 포터의 등에서 짐만 수습한 채 그냥 그곳에 방치해 두라고 명한 것이다. 물론 이처럼 혹독한 추위 하에서 그들이 살아날 가능성은 말 그대로 아예 없었다. 하지만 막중한 임무 때문에 용사들은 울분을 꾹 눌러 참고 행군을 계속해야 했다. 인간 전체의 운명이 걸린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작은 희생 따위에 연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두 번째로 그들을 곤란하게 했던 것은 바로 얼음호수였다. 추운 날씨 때문에 호수가 두껍게 얼어있을 것이라 지레짐작한 세르게이는 아무 거리낌없이 용사들을 얼음호수 위로 행군시켰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호수를 덮은 얼음은 그리 두껍지 않았다. 쩌정. 얼음호수로 진입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다급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으아아." 고개를 돌려보니 근위병 한 명이 쩍 갈라진 얼음 사이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거운 갑주와 함께 짐의 무게를 얼음이 버티지 못한 듯 싶었다. 몸놀림이 날랜 소드 마스터들이 대거 달려들어 허우적거리는 근위병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근위병은 끌어올리기도 전에 고개가 힘없이 꺾여 버렸다. 차가운 물의 온도에 심장이 멎어버렸던 것이다. "할 수 없군." 냉정하게 쳐다보는 세르게이의 눈총에 기사들은 어쩔 수 없이 절명한 근위병의 등에서 짐을 끌어냈다. 부글부글 시퍼렇게 얼어붙은 근위병의 시체는 포말을 일으키며 호수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이런 일은 호수를 건너며 무척 빈번하게 일어났다. 물론 희생되는 것은 거의 모두가 근위병들이었다. 포터들이 하나씩 죽어갈 때마다 용사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드래곤의 방해에 앞서 자연의 시련에 봉착할 줄은 결코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 결국 보다 못해 세르게이도 어쩔 수 없이 자구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간다면 소드 마스터마저도 희생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죽은 포터의 짐을 그들이 대신 짊어져야 했으니 말이다. "짐을 분산하기로 한다. 외곽 경계를 맡은 기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자들은 빠짐없이 포터들의 짐을 덜어주도록 한다." 그리하여 용사들은 신분의 고하를 불문하고 일정량의 짐을 등에 짊어져야 했다. 체력이 약한 마법사를 제외하고 말이다. 하지만 데이몬만은 예외였다. 그는 이미 아리따운 짐(?)을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되지 않는 행군이었지만 다프네는 이미 녹초가 된 지 오래였다. 비록 마법 외투로 몸은 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얼굴과 발로 전해져오는 한기를 그녀는 도저히 참지 못했다. 따듯한 아열대기후의 라덴부르크 영지에서 살았던 그녀가 어찌 이런 추위를 겪어보았을까? 결국 탈진한 그녀의 몸은 데이몬이 업을 수밖에 없었다. 일행 중에서 전투에 소용되지 않는 자는 오직 데이몬밖에 없었던 데다 다프네도 그것을 원했다. 마법 외투와 털가죽으로 빈틈없이 감싼 다프네의 몸을 가죽끈으로 단단히 고정시켜 업은 채 걷고 있는 데이몬. 물론 그라고 추위를 느끼지 않으라는 법은 없었지만 추운 중원의 겨울을 여러 번 경험한 탓에 별달리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인물을 업고 있는 탓에 신경 써야 할 것은 없었다. 얼음호수에 빠지지 않도록 마법사들이 번갈아 마법을 걸어 몸을 가볍게 만들어 주었고, 네 명의 소드 마스터들이 줄을 연결해서 튼튼하게 지탱하고 있는 상태였다. 얼음이 갈라지려는 기미가 보이면 곧바로 끌어당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말이다. 그렇게 조처하고 나자 희생이 다소나마 줄어들었다. 일행은 걸음을 빨리 하여 공포의 얼음호수를 마침내 지날 수 있었다. 스무 명의 근위병을 삼켜버린 얼음호수를 뒤돌아보며 기사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정말 저주받은 호수로군." "꿈에라도 다시 볼까 두려워." 얼음호수를 건넌 용사들은 다시금 베르하젤 신전으로 향한 기나긴 행군을 계속해야 했다. 이번에 앞을 가로막은 것은 온통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는 험준한 산이었다. 용사들은 그 산을 넘어가야 했다. 가야 할 길은 무척 험난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산길 곳곳에는 발을 헛디뎌 죽은 듯한 산양의 시체가 군데군데 널려 있을 정도였다. 산에 익숙한 짐승조차 실족하는 곳. 만약 용사들 대부분이 몸놀림이 날랜 소드 마스터가 아니었다면 벌써 행군을 포기해야 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일행은 이곳에서 남은 근위병을 모조리 잃어야 했다. 짐을 덜긴 했지만 극도로 지친 탓에 근위병들은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갑옷의 무게를 주체하지 못했다. "으아아아." 험준한 준령을 넘어가며 일행들은 실족해 추락하는 근위병의 외마디 비명소리를 심심지 않게 들어야 했다. 얼음호수를 무사히 건넌 근위병들은 결국 이곳을 극복하지 못하고 영면을 취하게 된 것이다. 펠드리안에서 포터로 데리고 온 근위병들은 단 두 개의 관문을 넘지 못하고 허무하게 전멸되어 버렸다. 이제 일행에는 오로지 소드 마스터와 마법사만 남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단 둘만 제외하고 말이다. 다프네를 업고도 데이몬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길을 헤쳐나갔다. 내력만 없다 뿐이지 몸놀림은 여전히 민첩했다. 포터 모두를 잃었지만 일행은 그래도 행군을 멈추지 않았다. 하나같이 굳은 표정으로 묵묵히 발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과연 신의 힘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일행의 중간 부분에서 걸어가는 자의 입에서 가느다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95회. 갑주를 걸치지 않은 것을 보아 마법사인 듯 싶었다. 산정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칼바람에 두건을 잔뜩 여민 채 고개를 돌리는 마법사. 외투 자락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바로 슈렉하이머의 것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덧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이 배어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처럼 험준한 관문이 생겨난 이유를 생각해보고 있었다. "옛 서적에 따르면 예전에는 이곳의 자연환경이 이토록 혹독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곳은 도리어 신의 보살핌이 끊이지 않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베르하젤 신전을 찾는 여러 종족들의 발길이 단 하루도 끊임이 없던 곳이었고, 대지는 그들에게 먹을 식량과 마실 물을 넉넉하게 제공해 주었다. 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던 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땅이 이처럼 황량하고 척박한 곳으로 변해버리다니……. 묵묵히 걸어가던 슈렉하이머는 오래 전 고서에서 읽은 내용을 되새겼다. ―종족전쟁을 일으킨 두 종족에게 극도로 실망하신 베르하젤께서는 마침내 신전을 봉인하시기로 결심하셨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종족으로부터 자신의 신전을 격리하시기로 마음먹으신 것이다. 결심은 바로 실행되었다. 깎아지른 듯한 준령이 땅으로부터 솟아올라 그 분의 신전을 에워쌌다. 그리고 어떠한 생명체도 생존할 수 없는 차가운 한기가 대지를 휘감아버렸다. 대지를 가득 메우고 있던 수많은 초목들이 영원히 얼음 속에서 잠들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신전은 트루베니아와 격리되었고 그 후로 영원히 잊혀졌다. 그 누구의 발길도 거부하며 말이다. 신의 노여움으로 인해 이곳의 신전은 인간계와 동떨어진 세상이 되어버렸다. 베르하젤 교단의 고위급 성직자였지만 슈렉하이머는 단 한번도 이곳에 와 본적이 없었다. 이처럼 무서운 자연의 장벽을 돌파할 자신이 없었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곳은 공간이동조차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좌표도 알려지지 않았고, 설사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공간이동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곳은 마나의 흐름이 극도로 불안정한 곳이기 때문이다. 마법은 재배열한 마나의 흐름에 의해 힘을 발휘하는 학문. 마나의 흐름이 불안정한 곳에서의 마법의 실현 가능성은 극도로 낮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역대 베르하젤의 무수한 고위급 성직자들 중 그 누구도 감히 이곳에 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자신이 이곳으로 오게 되다니……. 다소 들뜬 기분으로 걸음을 옮기던 슈렉하이머. 그의 귀에 갑자기 경고성이 전해졌다. "적이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몬스터 특유의 기성이 들려왔다. 크르르르. 쌓여 있는 눈들이 폭발하듯 비산하며 그 속에서 흰털이 수북하게 자라있는 거구의 몬스터들이 튀어나왔다. 언뜻 봐서 이런 극한지에 즐겨 서식하는 아이스 트롤인 듯 싶었다. 놈들은 길게 기른 손톱을 빛내며 일행을 향해 덮쳐들었다. 놈들이 쉽게 볼 수 없는 먹이감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챵. 기사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들고 대응태세를 갖췄다. 같은 트롤의 일종이긴 했지만 아이스 트롤의 모습은 생체 구조상 일반 트롤과 판이하게 틀렸다. 아마도 추운 환경에 적응된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우선 한기를 막을 수 있는 두터운 털가죽 때문에 다소 뚱뚱한 모습이었고 덩치 또한 트롤보다 훨씬 작았다. 하지만 몸놀림만큼은 거의 오우거에 필적하는 수준이었다. 놈들은 빠른 속도로 달려들어 하나씩 떨어져 있는 기사들을 낚아채려 했다. 물론 먹기 위해서였다. "핫." "어림없다." 하지만 일행의 외곽 경비를 맡고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실력이 쟁쟁한 소드 마스터들. 이까짓 아이스 트롤 따위에게 당할 기사들이 아니었다. 슈각. 눈부신 검광과 함께 하얀 눈 위에 푸른 피가 낭자하게 번져갔다. "케륵." 덤벼든 트롤은 도합 여섯이었고 그 전부가 하나도 빠짐없이 순간적으로 몸통이 조각난 채 눈 위에 널브러졌다. 그러자 나머지 트롤들이 잽싸게 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습격할 상대가 아님을 직감한 것이다. "일반 트롤보다 지능이 높은 모양이군. 몸을 피할 줄도 알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널브러진 아이스 트롤의 시체를 주시하던 세르게이가 힐끔 내뱉은 말이었다. 그는 기사 몇을 남겨 아이스 트롤의 가죽을 벗겨오게 지시한 뒤 일행을 다시 진군시켰다. 이런 극한지에서 서식하는 아이스 트롤의 가죽이라면 보온에 있어 탁월한 효과를 발휘할 것임이 분명했으므로……. 하지만 아이스 트롤들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정면 공격으로 당해낼 수 없음을 직감한 아이스 트롤들은 무척 교활한 방법을 동원해서 일행을 습격해왔다. "어엇." 눈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털북숭이 손에 발목을 잡힌 기사들이 헛바람 소리를 토해냈다. 하지만 그들이 검을 휘두르기 전에 아이스 트롤들은 잽싸게 몸을 날렸다. 기사의 발목을 움켜쥔 채로 험준한 얼음 절벽을 그대로 굴러 내려가는 것이다. 험한 산길을 겨우겨우 걸어가는 기사들에게 이것은 말 그대로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두터운 털가죽과 지방층을 가진 아이스 트롤의 피부는 울퉁불퉁한 얼음절벽에 부딪치는 충격을 효과적으로 흡수해 주었다. 하지만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결코 그것을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퉁. 퉁. 외투로 감쌌다고 하나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므로 몇 몇 기사들은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아마도 그들은 기절한 상태로 아이스 트롤의 위장 속으로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물론 실력이 실력이니 만큼 대부분의 기사들은 사력을 다해 아이스 트롤을 처치하고는 절벽 위로 다시 기어올라왔다. 소드 마스터란 명성을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말이다. 하지만 일행은 이곳에서 뛰어난 기사 다섯을 잃어야 했다. 대부분 굴러 떨어지는 충격으로 기절해버린 기사들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겨둔 기사 넷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스 트롤의 가죽을 벗기기 위해 남았던 기사들 말이다. 상황을 봐서 그들의 목숨 또한 끊어졌으리라 보는 것이 정확할 듯 싶었다. "정말 지긋지긋한 곳이군." 세르게이는 이를 지긋이 깨문 뒤 다시 행군을 명했다. 소드 마스터의 반열에 올라선 뛰어난 기사들을 이렇게 허무하게 잃은 경우는 맹세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저씨. 춥지 않아요?" 가느다랗게 새어나오는 음성에 데이몬의 얼굴이 확 펴졌다. 기사나 아이스 트롤의 목숨이 하나씩 끊길 때마다 눈에 띄게 몸을 떨었던 다프네였다. 생명의 죽음에 무척 민감하다는 성녀의 본성. 이미 슈렉하이머에게 들어 잘 알고 있었던 터라 데이몬으로써는 여간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해 줄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저 그녀에게 충격이 가지 않도록 조심조심 발을 내디딜 뿐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다프네가 충격을 모두 참아내고 말을 걸어오다니……. 데이몬은 얼른 대꾸했다. "춥지 않다. 난 비교적 추위를 많이 겪어본 적이 있으므로. 조금 심하긴 하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냐." "전 지금껏 눈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춥긴 하지만 시릴 정도로 깨끗하고 하얀 눈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다프네의 말을 들은 데이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는 눈을 무척 싫어하는 편이었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 지겹도록 눈을 치워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림사에서 머물 당시 허드렛 일꾼으로 일했던 데이몬에겐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정말 원망스럽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치워도, 치워도 수북하게 쌓이는 눈. 물론 눈을 치우는 일은 전적으로 데이몬의 몫이었고 그는 쉴새없이 소림사의 드넓은 후원을 치워야 했다. 그 때문에 데이몬은 눈에 대해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데이몬의 귓전으로 계속해서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저씬 고향이 어디예요?" "나? 음. 여기서 무척 멀단다." "몇 밤이나 자면 갈 수 있죠?" 다프네의 말에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걸어서는 수백, 수천 년이 걸려도 돌아가지 못하는 곳에 위치한 고향이었고, 그렇다고 결코 좋은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 아니었다. 오로지 복수를 위해서만 돌아가야 하는 곳 중원. 복수가 아니라면 가야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곳에 불과했다. 데이몬은 나쁜 기억을 지워버리려고 고개를 흔들며 물었다. "다프네는 고향에 가고 싶지 않니?" "가고 싶어요." 즉각 터져 나오는 대답. 그 말을 들은 데이몬은 이대로 다프네와 함께 도망쳐버릴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미 복수는 물 건너간 일. 그의 능력으론 이제 오크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다프네를 데리고 도망쳐버린다면……. 그리고 그녀의 고향으로 가 둘이 오순도순 살아간다면. 하지만 그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에 내뱉지 못했다. 이런 곳에서 둘이 달아나 봐야 고작 아이스 트롤의 먹이가 되기 십상이었다. 우선 그에겐 다프네를 보호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또한 트루베니아가 오크 족의 손아귀에 넘어간다면 다프네의 고향인들 무사할 턱이 없었다. 착잡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데이몬은 툭 하고 질문을 던졌다. "혹시 넌 베르하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니?" "베르하젤 님과요?" "그렇다. 자칭 트루베니아를 만들었다는 신 말이다." 생각에 잠긴 듯 다프네는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조금 뒤 가느다란 음성이 전해졌다. "그, 그분이 베르하젤님인지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이따금, 아주 이따금 그분의 감정을 느낄 순 있어요. 그분은 지금 무척 슬퍼하고 계신답니다." 데이몬의 눈이 급격히 크게 뜨여졌다. "가, 감정을 느낀단 말이냐?" "네, 생명이 죽어갈 때마다 그분은 슬퍼하세요. 제가 느끼는 충격도 그분이 느끼는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미약할 뿐이에요." "놀랍구나. 신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니……. 그렇다면 신전에 가서 네가 해야 할 일도 잘 알고 있겠구나." 다프네가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등을 통해 전해졌다. "자신 있느냐?" "모르겠어요. 전 그냥 슈렉하이머 아저씨가 당부하신 대로 신께 청원을 드릴뿐이죠. 트루베니아의 모든 사람들을 살리려면 오직 그 길밖엔 없다고 그러셨어요. 하,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반대로 많은 오크들이 죽어가겠죠? 사람들이 그들을 살려둘 리가 없으니까요?" 말문이 막힌 데이몬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사실 그것은 데이몬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 오크란 결코 살아있을 필요가 없는, 죽이고 또 죽여야 할 존재일 뿐이므로……. "………." "왜 두 종족은 공존할 수 없는 거죠? 신은 바로 그것을 바라고 계신데……." 한참을 생각해 본 데이몬이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것은 바로 욕심 때문이란다. 자기 종족만이 생존하려는 욕심." "욕심……." 그 말을 끝으로 다프네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잠이 든 모양이었다. 데이몬은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디며 산길을 걸어갔다. 네 소드 마스터의 철통같은 경호를 받으며 말이다. 아까의 사건 이후 아이스 트롤은 한 동안 출몰하지 않았다. 갖은 고생 끝에 용사들은 봉우리를 넘을 수 있었다. 총 60여 명의 동료를 잃었기는 했지만 관문 절반은 통과한 것이다. 말로만 듣던 베르하젤의 신전을 볼 수 있다는 기대에 기사들은 일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그들은 베르하젤 신전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던 상태였다. 산봉우리에서 내려다본다면 신전의 정경이 훤히 보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목적했던 신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분지 내부를 온통 뿌연 안개 같은 것이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96회. 마치 구름에 완전히 뒤덮인 듯한 형상. 기사들은 실망 섞인 눈초리로 서둘러 하산 준비를 했다. 세르게이는 일단 어새신 우두머리를 불렀다. "아래의 상황은 어떤가? 카빙스턴." 카빙스턴이라 불린 어새신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물론 카빙스턴이란 이름은 가명임이 분명했다. 어새신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진실한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그는 손을 뻗어 하얀 안개 같은 것을 가리켰다. "일단 저곳이 바로 드래곤들이 쳐 놓은 결계입니다. 저 속에는 암흑전쟁 당시의 마물들이 엄청난 규모로 들끓고 있습니다." 가리키는 손끝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본 세르게이는 카빙스턴의 얼굴에 알게 모르게 공포감이 배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인성이 말살될 정도로 혹독한 훈련을 받은 어새신이다. 그런 자가 공포를 느끼는 것은 무척 드문 경우였지만 짐작되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뭔가를 깨달았던지 세르게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하지. 파견한 어새신들 대부분을 저 결계가 집어삼켰으니…….' 정찰 차 보낸 어새신들의 피해는 본대에 비해 훨씬 큰 편이었다. 아무리 지옥훈련을 받았더라도 그들이 소드 마스터만큼의 위력을 보일 수는 없었다. 물론 얼음호수에서는 몇 명 죽지 않았다. 통상적으로 어새신들은 갑옷을 착용하지 않았을 뿐더러 짐도 별로 없는 편이었다. 문제는 아이스 트롤이 출몰하는 산길이었다. 봉우리를 넘으며 무려 오십 명이 넘는 어새신들이 아이스 트롤에게 잡혀갔다. 만약 아이스 트롤의 수가 더 많았더라면 어새신들은 분명 봉우리를 넘지 못하고 전멸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몬스터 특유의 습성 상 아이스 트롤들은 배가 부르면 사냥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하 오십 명을 잡아간 아이스 트롤과 대면하고도 카빙스턴은 별다른 두려움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결계에 대해서는 유독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세르게이로써는 호기심이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마물의 종류는 무엇 무엇이 있던가?" 잠시 머뭇거리던 카빙스턴은 곧 보고를 시작했다. "가장 많은 것이 구울(Ghoul)이었습니다. 와이트(Wight)와 스펙터(Specter)도 심심찮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기이한 것은 놈들이 보통의 구울이나 와이트에 비해 전투력이 무척 강력하다는 점입니다. 잘 훈련된 대원들이 마물 하나 이상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 세르게이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카빙스턴이 거론한 마물들이 비록 암흑 군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전투원이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정확히 따져보자면 그리 강력한 놈들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물론 최하급 언데드 몬스터인 스켈레톤보다는 강하지만 말이다. 어둠의 군대가 가진 최강의 장점은 단연 그 수에 있었다. 구울이나 스펙터는 잘 훈련된 인간이나 오크 병사에 비해 전투력은 정말 하잘 것 없었다. 인간 병사 한 명이 능히 구울 둘이나 셋을 상대할 수 있었으니까……. 구울보다 약한 와이트나 스펙터는 거론할 필요조차 없었다. 하지만 어둠의 군대의 진정한 위용이 개개인의 전투원들이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과 순식간에 많은 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많은 사상자를 내더라도 전투만 이긴다면 병력은 눈 깜짝할 사이에 충원이 가능하다. 심지어 죽은 상대방의 시체에서도 새로운 병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물론 어새신들의 능력은 소드 마스터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일반 병사에 비해서는 훨씬 뛰어난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어새신들이 구울이나 와이트 하나 이상을 감당하지 못하다니……. 세르게이로써는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놀랍군. 다른 놈들은 없던가? 데스 나이트나 다크 쉐이드 같은 고급 언데드 말이다." "그런 것들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듀라한이 몇, 모습을 보였습니다." 듀라한, 한 손에는 자신의 목, 한 손에 녹이 시뻘겋게 슨 장검을 들고있는 기사 모습의 언데드였다. 물론 잘린 목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 살아있는 자에게 깊은 증오를 갖고 있으므로 오로지 피와 살육밖에는 모르는 잔인한 언데드라 볼 수 있었다. 물론 뛰어난 지능을 가진 데스 나이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였지만 순수한 전투력만으로 따진다면 듀라한은 어지간한 데스 나이트에 필적할 정도로 강력했다. 카빙스턴의 말에 세르게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듀라한이라……. 그 보기 드문 놈이 있다니 놀랍군." 물론 걱정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이스 트롤에게 몇 명 잃기는 했지만 그의 휘하에는 아직까지 이백에 가까운 소드 마스터들이 건재했다. 그 중에서 듀라한 따위에게 당할 허약한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할 수 있는 강자들인 것이다. "데스 나이트나 다크 쉐이드가 없다면 돌파가 그리 어렵진 않겠군." 가장 걱정했던 존재들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 쉰 세르게이는 기사들에게 즉각 하산을 명했다. 구울이나 와이트 정도의 하급 마물 따위는 얼마가 있더라도 상관없었다. 보유한 전력이라면 그 정도 마물들 쯤이야 충분히 무찌르고 돌파할 수 있었으므로……. 산을 내려가던 세르게이는 가장 마음에 걸렸던 두 마물에 대한 지식을 되새겼다. 데스 나이트(Death Knight). 원한 때문에 이승을 떠돌아다니는 기사의 영혼에다 어둠의 힘을 불어넣어 탄생시킨 언데드였다. 어둠의 마나를 많이 부여받을수록 전투력이 강해지며 때로는 생전에 지니고 있던 능력 이상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데스 나이트들은 죽기 전 지녔던 능력의 70% 정도의 능력을 보이는 경우가 태반이다. 왜냐하면 마왕들이 데스 나이트를 하급 전투원들을 통솔하는 부대장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마왕이 동원할 수 있는 어둠의 마나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는 법, 다수의 언데드 병사들을 통솔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수의 데스 나이트가 필요했고 따라서 마왕들은 질보다는 양적인 면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데스 나이트는 소드 마스터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약했다. 특유의 흑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을뿐더러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는 데스 나이트의 단단한 육체를 아주 쉽게 양단해 버렸다. 하지만 거기에도 예외가 있었으니……. 이따금, 아주 이따금 예상을 뒤엎고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놈들이 등장했다. 이름하여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 말이다. 놈들은 소드 마스터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들은 트레이드 마크인 강력한 흑마법 외에도 어둠의 마나를 이용한 가공할 만한 위력의 오러 블레이드까지 시전했다. 말 그대로 전율할 정도로 전투력이 강한 언데드가 탄생한 것이다. 암흑 전쟁 당시 수많은 소드 마스터들이 이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소드 마스터에 대적하기 위해 마왕이 만들어낸 강력한 비밀 병기라고 봐도 무방한 셈이었다. 비밀은 바로 죽은 소드 마스터를 이용해서 데스 나이트로 만들었다는데 있었다. 물론 그것은 아무리 마왕이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선 대상이 검술의 극한을 깨달은 소드 마스터이니만큼 자부심이 엄청나게 강하기 마련이다. 그런 자들은 결코 마왕에게 쉽사리 복종하지 않는 법이다. 비록 죽은 영혼이라도 말이다. 또한 천신만고 끝에 굴복시켰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생전에 지녔던 정도의 능력을 보유하려면 정말 엄청난 어둠의 마나가 필요했다. 죽은 소드 마스터 하나를 변모시키는데 백 명의 일반 데스 나이트를 만들 수 있는 암흑의 힘이 들어갈 정도로……. 그런 만큼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를 하나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전력 누수를 각오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마왕 나이델 하르크는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를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소드 마스터를 대적하는 데 그 이상 적합한 존재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떠올리자 세르게이의 안색이 침울하게 잦아들었다. "강력한 크로세나 기사단의 소드 마스터들도 이들에게만은 역부족이었지. 둘 이상 합세해야만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 하나를 겨우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어려웠던 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암흑전쟁 당시 마왕군이 보유한 또 하나의 비밀 병기가 바로 다크 쉐이드였다. 마계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는 어둠의 정령으로 인간계에서 활동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강력한 마물의 일종이었다. 적어도 7써클이 넘어서는 네크로멘서만이 마계에서 불러올 수 있을 정도로 소환하는 것이 까다로왔지만 대신 그만큼의 위력이 있었다. 특징으로는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신장에다 몸 전부를 감쌀 수 있는 마치 망토처럼 생긴 커다란 날개가 있었다. 또한 오러 블레이드에도 잘리지 않는 긴 손톱과 닿기만 해도 몸이 마비될 정도로 강력한 독성이 기본적인 공격 무기였다. 통상적으로 마계 몬스터들이 그러하듯 물리적인 공격이 거의 먹히지 않는 편이지만 오러 블레이드나 신성력에 의한 공격에는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유자재로 날아다닐 수 있는 데다 동작 또한 빠르기 때문에 다크 쉐이드에 대적할 만한 기사는 그리 흔치 않았다. 다시 말해 소드 마스터 정도가 아니면 일대 일로는 결코 다크 쉐이드를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가장 강력한 마물로 마왕이 소환한 발록(Balouge)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긴 했지만 한정된 시간 동안만 인간계에 머물 수 있다는 단점으로 인해 그리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시간만 끈다면 발록은 다시 마계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다행이로군." 결계 안에 두 마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세르게이는 걱정을 한시름 덜 수 있었다. "최대한 속도를 내어 결계를 돌파한다. 드래곤 놈들이 눈치채기 전에 신전에 들어간다면 임무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에 용기를 낸 기사들은 저 멀리 보이는 안개를 쳐다보며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내려가는 길도 험하기 그지없었지만 종족의 운명을 지키려는 기사들의 열의를 가로막지는 못했다. 약 세 시간 동안의 고된 산행 끝에 일행은 무사히 봉우리를 내려올 수 있었다. 도저히 길이라고 볼 수 없는, 얼음으로 뒤덮인 험준한 길이었지만 하나같이 실력이 뛰어난 자들로만 구성된 때문에 용사들은 무사히 대지를 밟을 수 있었다. 내려올 때는 아이스 트롤의 습격조차 없었으므로 희생된 자는 없었다. 용사들은 우선 배를 채우고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마물들이 우글거리는 결계 속에서 식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불을 피운다거나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용사들은 짐 속에서 건량과 식수를 꺼내 서둘러 둘러앉았다. 식사를 끝마치는 대로 경계를 서고 있는 동료들과 교대를 해 줘야 하는 것이다. 다프네도 오랜만에 데이몬의 등에서 풀려나 대지에 발을 디뎠다. 추위는 그대로였지만 바람이 별달리 불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견딜 만 한 듯 싶었다. 그런데 짐을 뒤지던 데이몬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추운 날씨 때문에 다프네가 먹을 과일들이 모조리 얼어버린 것이다. "이런 이런." 다프네가 오로지 과일만 먹는다는 것을 알고 있던 터라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데이몬에게 다프네는 살포시 미소를 지어주었다. "괜찮아요. 아저씨. 전 배고프지 않아요."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아저씨 등에 업혀 왔는데요. 뭘. 아저씬 배고프지 않아요?" "나도 별로 생각이 없구나." 사실 데이몬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한 사람을 업고 산을 하나 넘어왔는데 배고프지 않다면 도리어 비정상이리라……. 하지만 혼자 먹고 싶진 않았기에 그는 꺼낸 건량을 다시 짐 속에 쑤셔 넣었다. 짐을 정리하던 데이몬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다프네가 불쑥 한 마디를 던졌다. "신께서 청원을 받아주시면 전쟁이 필시 끝나겠지요?" "아마도……." "전쟁이 끝나면 아저씬 뭘 하실 거예요?" 짐을 정리하던 데이몬의 손길이 뚝 멈췄다. 사실 그것이 데이몬에겐 가장 고민되는 일이었다. 물론 데이몬은 자신이 다프네 덕택에 살아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임무가 성공리에 끝난다면 세르게이 놈이 날 살려둘 리가 없다.' 그러므로 임무가 성공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반드시 달아나야 할 듯 보였다. 하지만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물론 세르게이는 자신을 순순히 놔주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망가진 몸으로 과연 놈들의 추적을 피할 수 있을까?' 데이몬은 슬쩍 고개를 돌려 식사에 열중하는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물론 실력을 엄밀히 따져본다면 이들은 과거 배교 추적대 무사들과 별달리 다를 바가 없었다. 탈출할 때 자신의 손에 의해 무수히 살육되었던 무사들 말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때와는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내공을 잃은 것도 모자라서 자신은 이제 헤이스트 조차 시전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이들 중 가장 약한 자라 할지라도 자신보다는 월등히 강할 것이 분명했다. 또한 그를 괴롭히는 것은 마치 결계를 뒤덮고 있는 안개처럼 불투명한 자신의 미래였다. '이런 몸뚱이로 뭘 할 수 있을까? 깊은 산중에 꼭꼭 숨어 사냥이나 하며 연명해 나가야 하나?' 복수는 이미 물 건너간 일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결코 그렇게 살고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배교라는 한 조직의 수장이었다는 경험이 그의 자부심을 겨우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그렇게 살진 않겠다. 어차피 중원에서 죽었어야 할 몸 그냥 깨끗하게 최후를 맞이하겠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대답을 기다리는 다프네의 얼굴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얼굴만 보면 마음이 포근해지는 데이몬이었다. 당황한 데이몬은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뭐, 뭐라고 물었지?" "전쟁이 끝나면 어디서 사실 거예요." "글세?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걸." 다프네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는 데이몬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마을에 와서 같이 살아요." "………." "작고 외진 곳이지만 인심이 정말 좋아요. 따듯하고……. 아저씨같은 분이라면 분명히 마을 사람들이 환영하실 거예요." "과, 과연 그럴까?" 데이몬이 별달리 내키지 않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다프네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전 아저씨랑 함께 살고 싶은데……." 그 말에 데이몬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의 말이야말로 자신이 꿈에라도 바라던 소원 아니었던가? 소원만 성취된다면 설사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상관없었던 데이몬이었다. 그는 말까지 더듬어가며 되물었다. "저, 정말이니?" "그럼요. 슈렉하이머 아저씨가 그랬어요. 신께서 부탁을 받아들이신다면 절 다시 고향으로 보내 주시겠다구요. 아저씨 우리 함께 가요. 네?" 데이몬은 하마터면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97회. 내일은 올릴 수 없을 듯 싶네요.^^. 내일치까지 함께 올릴께요. *************************************************************************** 하지만 데이몬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실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다. 닳고, 닳은 그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세르게이가 다프네를 순순히 놓아줄 리는 만무했다. 트루베니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성녀란 존재는 병사들의 사기를 고조시키는데 가장 효과가 클 것이므로……. 데이몬은 침울해진 어조로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그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보도록 하자꾸나." "다프네는 꼭 아저씨와 함께 가고싶어요. 정말로요." 결국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기대를 품고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을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슈렉하이머의 얼굴에 침울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이미 다프네의 소원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속으로만 기도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신이시여. 거짓을 고한 절 벌하소서. 그러나 트루베니아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 용사들은 다시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저 멀리 보이는 결계였다. 이곳만 돌파하면 신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으로 용사들은 서둘러 행군에 몰두했다. 그러나 결계가 있는 곳은 보기보다 멀었다. 한참을 걸었지만 안개 지역은 도무지 가까워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용사들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고 마침내 결계를 감추고 있는 안개지역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결계 진입이 임박해지자 세르게이는 서둘러 용사들의 구성을 재배치했다. "미리 교육받은 대로 병력배치를 하기 바라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성녀를 보호하는 것. 그리 알고 임무에 임하도록 하시오." 계획에 의하면 1에서 8조까지의 병력이 가장 먼저 결계 속으로 진입하기로 했다. 최전방에서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려는 목적으로 배치되었던 것이다. 모두 합쳐 기사 120명과 마법사 40명이었다. 선발조는 각각 2개조 단위로 넓게 산개해서 전방을 철저히 경계하며 전진하기로 배치가 끝난 상태였다. 다음이 본대 병력이었다. 가장 실력이 뛰어난 10조부터 15조까지의 기사들은 성녀를 철통같이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물론 여기에 4대 기사가 이곳에 포진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슈렉하이머와 세르게이는 당연히 성녀 옆에 머물러 있었다. 남은 6개 조는 조금 떨어져서 본대를 따라가며 혹시라도 있을 후방에서의 기습에 대비하기로 했다. 말 그대로 성녀가 위치한 본대를 철저히 호위하는 병진이었다. 4대 기사와 함께 한 눈에 보아도 실력이 뛰어나 보이는 기사들이 주위를 빼곡이 에워싸자 데이몬의 안색이 더욱 침울해졌다. '마치 들러리가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누구 하나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를 마치 성녀를 태운 말 정도로 생각하는 듯 했다. 미련 없이 최후를 맞이하기로 마음먹었건만 절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데이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르게이는 무정하게 출발 명령을 내렸다. "출발." 선발대를 맡은 8개조의 기사들이 일제히 결계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가로막는 구울과 와이트 무리를 가차없이 분쇄하며 본대에 길을 열어주는데 치중할 병력들이었다. 사방을 뒤덮은 안개는 160명의 몸을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본대가 출발했다. 100명으로 구성된 본대가 무척 조심스럽게 결계 속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가시거리가 무척 짧았지만 여타의 안개와 별달리 다를 것도 없었기에 용사들은 다소 마음을 놓으며 결계 속으로 하나 하나 빨려 들어갔다. 데이몬도 다프네를 업은 상태로 결계 속으로 사라졌다. 본대 병력이 모두 진입하고 난 뒤, 마침내 후발대도 진입을 개시했다. 인간의 운명을 구하기 위해 파견된 용사들은 마침내 하나도 남김없이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기분이 별로 좋진 않군." 결계 속으로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세르게이가 내뱉은 일성이었다. 끈적끈적하게 몸을 휘감는 안개가 상당히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결계 속은 그다지 춥지 않았다. 산을 넘어올 때 느꼈던, 숨결을 얼어붙게 만들 정도의 혹한이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예상했던 언데드 몬스터의 습격은 없었다. 물론 습격이 있었다면 선발대에서 필시 경고를 해 왔을 테지만 말이다. 용사들은 검자루를 꼬나 쥔 채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나같이 잔뜩 긴장한 모습. 그 사이에 끼여 데이몬도 터덜터덜 걸어갔다. 깊이 잠들었는지 업힌 다프네에게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묵묵히 걷던 데이몬은 주위를 슬며시 돌아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사방을 가득 채운 안개뿐이었다. 안개 저쪽에 무엇이 있는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다. 불연 듯 데이몬의 뇌리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과연 임무가 성공할까?' 물론 이것은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은 작전이었다. 일단 다프네가 과연 베르하젤과 대화를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으며 인간에게 실망한 베르하젤이 순순히 청원을 받아들일지는 더더욱 미지수였다. 게다가 서약석을 얻게 되더라도 드래곤이 순순히 전장에서 물러나는 것 또한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이방인인 데이몬에겐 모든 것이 의문 투성이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중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현재로써는 수뇌부를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이 가장 최선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물론 행군하는 기사들도 한결같이 그런 마음을 먹고 있을 터였다. 데이몬은 그저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팔자에도 없는 신과 대면하게 생겼군.' 순간 등을 통해 다프네가 몸을 파르르 떠는 것이 느껴졌다. 데이몬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여러 번 겪어왔던 일이었으므로……. '다프네는 지금 생명이 스러진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발대와 언데드 몬스터와의 접전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게 무방하겠군.' 다프네는 쉴 새 없이 몸을 떨었다. 아마도 상당히 큰 규모가 전투가 벌어진 것 같았다. 불연 듯 이 사실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세르게이에게 말을 걸고 싶지 않은 것이 데이몬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뭐 잘 난 체 하는 놈이 알아서 하겠지?' 전투가 벌어졌다면 분명 선발대에서 보고가 있을 터, 데이몬은 가만히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작정했다. 지금 그에게 가장 급한 것은 쉴새없이 충격을 받고 있는 다프네를 달래는 일이었다. 물론 그가 해 줄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습의 징후는 오래지 않아 사실로 드러났다. "뭔가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선두에 선 기사의 다급한 경고소리와 함께 용사들은 일제히 대응태세를 갖췄다. 가장 실력이 뛰어난 4명의 기사가 데이몬의 주위에 바짝 붙어 섰고, 나머지 기사들은 검을 뽑아든 채 전방을 주시했다. 뭔가가 급하게 뛰어오는 듯한 발자국 소리였고 절그렁거리는 갑옷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앞을 쳐다보던 세르게이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전령인가?" 상황을 보아 다가오는 자는 둘 정도였다. 전령이 확실할 것이라 생각되었지만 그래도 기사들은 대응태세를 풀지 않았다. 마침내 발자국 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기사들의 얼굴에 긴장한 빛이 급격히 떠올랐다. "데스 나이트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두 명의 데스 나이트였다. 거무튀튀한 갑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투구의 눈구멍 사이로 사람의 심혼을 뽑아버릴 듯한 안광이 번뜩였다. 마왕의 문양이 선명한 투구와 갑주에는 암흑의 기운이 칙칙하게 배어있었다. 일행을 보자 데스 나이트들은 서슴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갑주와 마찬가지로 거무튀튀한 검신에서는 검은 아지랭이같은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처치해라." 세르게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선두의 기사 네 명이 달려들었다. 둘이 하나씩 맡을 요량으로 네 명만 공격에 동원된 것이다. 곧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다. 기사들은 정교한 동작과 매서운 공격으로 두 데스 나이트를 정신 없이 몰아붙였다. 마치 자신이 소드 마스터란 것을 증명하듯 검신 전체를 걸쳐 오러 블레이드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말이다. 푸캉. 하지만 상대하는 데스 나이트들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놈들은 오러 블레이드가 응축된 공격을 아무 무리 없이 맞받으며 세찬 저항을 해 왔다. 도저히 평범한 데스 나이트로 보이지 않는 놈들이었다. 아무래도 말로만 들었던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로 보였기에 세르게이는 기사 두 명을 더 충원시켰다. 상황을 봐서 선발대도 지금쯤 치열하게 접전을 치르고 있는 것 같았다. 기사 두 명이 가세하자 데스 나이트들은 급격히 밀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라도 소드 마스터 여섯 명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용사들이 데스 나이트를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을 목격하자 세르게이는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쏘아보았다. 그의 눈에는 극도로 분노한 안광이 일렁이고 있었다. "어찌 된 건가? 분명히 데스 나이트는 없다고 하질 않았나?" 카빙스턴도 무척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 그때는 분명 없었습니다. 고작 듀라한 셋만 모습을 드러내고 나머지는 모조리 구울과 와이트들 뿐이었는데……." "멍청한 것! 정찰 따위도 제대로 하지 못하나? 저놈들은 평범한 데스 나이트가 아냐. 소드 마스터 여섯을 맞아 이처럼 오랫동안 버틸 수 있다면 분명히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로 봐야 한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섭게 끔찍한 기성이 들려왔다. 세르게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끼아아아아." 데스 나이트 하나가 가슴과 복부를 관통 당한 채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마치 마계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음성이었다. 그것도 잠시 투구의 눈구멍에 서린 안광이 잦아들며 데스 나이트의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마치 빈 갑옷이 그대로 허물어지듯 말이다. 하나가 쓰러지자 남은 데스 나이트 하나도 오래지 않아 최후를 맞았다. 목덜미가 뚫린 데스 나이트는 맥없이 몸을 땅에다 뉘었고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검날 여러 개가 갑주를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상대가 몸이 완전히 조각나지 않는 한 죽지 않는 언데드임을 감안한 끝내기였다. "끝났습니다." 동원되었던 기사 여섯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검을 수습했다. 데스 나이트가 이렇게 강할 줄은 그들도 미처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 특이하게도 그들의 검에는 시커먼 검댕 같은 것이 잔뜩 묻어있었다. 하지만 닦아낼 새가 없었기에 그들은 서둘러 맡은 위치로 이동했다. 데스 나이트 둘을 처치한 뒤 본대는 다시 진군을 개시했다. 용사들은 널브러진 데스 나이트의 잔해에 시선을 한 번씩 둔 뒤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 물론 거기에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데이몬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데스 나이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대가 행군을 시작했기 때문에 유심히 관찰할 시간은 없었다. 맥없이 나가자빠진 데스 나이트를 힐끗 쳐다본 데이몬은 돌연 우습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런 것들이 돌아다니다니 아무튼 재미있는 대륙이야." 그의 혼잣말에 용사들이 힐끔 쳐다보았지만 말을 건네는 자는 없었다. 다들 극도로 긴장한 탓이었다. 데스 나이트 둘이 모습을 보였으니 그 어떤 마물이 나타날지 아무도 몰랐다. 습격은 오래지 않아 이루어졌다. 데스 나이트 여덟과 듀라한 다섯이 안개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일행을 급습해왔던 것이다. 이번에는 리치도 모습을 보였다. 리치 셋이 후미에서 지원이라도 하듯 동시다발적으로 마법공격을 퍼부어 왔다. "으아악." 불시에 이루어진 기습이라 용사 두 명이 불시에 목숨을 잃었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인 듯 싶었다. 하지만 잔뜩 긴장하고 있던 용사들은 지체 없이 반격을 개시했다. 제 자리를 지키던 기사들이 수적 우위를 발판 삼아 맹공을 개시했던 것이다. "끼야아아."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갑옷 틈새로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며 나가자빠지는 데스 나이트 하나를 시발점으로 사방은 온통 비명과 호통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놈들의 실력은 정말 가공할 정도였다. 비교적 전투력이 떨어지는 듀라한은 용사들이 다대일로도 맞상대가 가능했지만 데스 나이트들의 실력은 용사들과 거의 동급이었다. 둘이 하나씩 맡아 상대하면서도 좀처럼 우위를 잡지 못하는 것을 보면 데스 나이트가 되기 전엔 과연 어느 정도의 실력자였는지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투구 가리개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안광은 보는 사람의 심금을 저리게 할 정도로 끔찍했다. 물론 머리통을 마치 방패처럼 들고 검을 휘두르는 듀라한의 모습도 충분히 공포스러웠다. 하지만 트루베니아 전역에서 고르고 고른 탓에 용사들은 전혀 밀리지 않고 맞서 싸웠다. 이따금 용사들이 목숨을 잃고 쓰러졌지만 그에 비례해서 데스 나이트의 수도 계속 줄어갔다. 리치는 비교적 상대하기가 쉬운 편이었다. 용사들은 대부분 대마법 방어갑옷을 입고 있었으므로……. 마법 공격을 한 두 방 얻어맞으며 다가간 용사들은 리치의 몸을 단숨에 양단해버렸다. 펠드리안 왕궁에 침입한 게덴하이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리치였다. 그 어느 쪽도 물러서지 않는 혈투였다. 마치 전투에 도취된 듯 쌍방은 쉴새없이 공격과 방어를 주고받았다. 어느 한 쪽이 완전히 전멸될 때까지 말이다. "싸움구경을 하는 것도 무척 재미있군." 데이몬은 혼잣말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머리통을 휘두르며 싸우는 듀라한이 무척 신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데이몬을 향해 기사들이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빌어먹을 놈." 동료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듣고 기분 좋은 말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저 못들은 척 했다. 사실 그는 등에 업힌 채 계속해서 몸을 떨고 있는 다프네 때문에 걱정이 태산같은 상황이었다. 몸의 떨림이 끊임없는 것을 보면 대관절 그녀가 얼마만큼의 충격을 받고 있는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손을 뻗어 등을 쓸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데이몬은 결코 그럴 수 없는 처지였다. 이미 그의 팔은 뇌의 통제를 받을 수 없게 된지 오래였다. '불쌍한 것. 어쩌다가 그런 운명을 타고나서…….' 어떻게 보면 다프네와 자신은 비슷한 처지를 타고났을지도 몰랐다. 가진 능력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쉴새없이 이용당하는 처지 말이다. 데이몬이 그렇게 마음 졸이고 있는 사이 전장은 마침내 정리되었다. 기습공격을 가해온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 리치들은 단 하나도 남김없이 바닥에 몸을 뉘이는 신세가 되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용사들과 언데드의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있는 사이에서 세르게이는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해서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들이 이처럼 떼거지로 모습을 드러내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것도 어새신들이 대거 동원되어 사전 답사를 한 곳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젠 물어볼 상황도 아니었다. 어새신 우두머리인 카빙스턴이 이미 데스 나이트에 의해 주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방을 둘러본 세르게이는 결국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선발대와 합류한 뒤 행동하기로 하자." 무수한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가 출몰한다는 것을 확인한 터라 더 이상 병력을 분산시킬 수는 없었다. 나머지 병력과 합류하고 나서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할 듯 싶었다. 그는 실력이 뛰어난 기사 두 명을 뽑아 전령으로 후발대에 보냈다. 선발대를 따라잡은 뒤 그곳에서 후발대를 기다릴 계획이었고 병력을 한데 모은 다음에나 진군을 계속할 심산인 것이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기사들은 곧 온 길을 되짚어 달려갔다. 그들의 모습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지도 않은 채 세르게이는 병력을 출발시켰다. "전속 전진한다. 서둘러 선발대를 따라잡아야 한다." 본대의 모습은 곧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렸고 그곳에는 죽은 용사들의 시체와 데스 나이트의 잔해만이 남아 쓸쓸하게 뒹굴고 있었다. "헛." 데이몬은 전력을 다해 목을 파고드는 검날을 피해냈다. 하지만 검의 주인은 집요할 정도로 데이몬을 따라붙었다. 소름 끼치는 듯한 안광. 마왕의 문장이 뚜렷한 투구와 갑주. 데이몬을 공격하는 자는 바로 데스 나이트였다. 소드 마스터와 필적하는 실력을 가진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 말이다.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데이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적절한 순간에 가세한 헬버트론의 도움으로 데이몬은 다행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눈부신 빛을 토해내는 검이 불쑥 튀어나와 데스 나이트의 검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끼아아악." 십자로 양단된 데스 나이트의 몸에서 자욱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도 잠시, 전투력을 상실한 데스 나이트의 몸은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헬버트론의 안색이 그때서야 정상으로 돌아왔다. "큰일 날 뻔했군. 이젠 결코 네 곁을 떠나지 않고 보호하겠다."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그 말은 자신이 아닌 다프네에 한정된 것임을 데이몬은 잘 알고 있었다. 헬버트론이 자신을 지켜줄 일은 꿈에도 없었으므로……. 본대는 지금 무척 어려운 상황에 빠져있었다. 아무리 진군해도 선발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 리치 무리가 끊임없이 나타나 본대를 쉴새 없이 공격해왔다. 정말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어. 암흑전쟁 당시에도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의 수는 결코 백을 넘지 않았는데……." 아무리 부정해보아도 이것은 현실이었다. 데스 나이트의 거듭되는 습격에 용사들은 여기 저기서 피를 뿌리며 쓰러져갔다. 물론 공격해온 데스 나이트는 남김 없이 몸통이 조각난 채 바닥에 뒹구는 신세가 되었지만 이쪽의 피해 역시 클 수밖에 없었다. 우선 습격해온 놈들은 거의 대부분이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였기 때문이었다. 듀라한들의 실력도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전투력이 거의 소드 마스터에 육박하는 수준이었고, 둘 이상이 덤빌 경우 용사들은 예외 없이 곤경에 처해야 했다. 모두 합쳐 네 번의 기습이 이루어졌고 용사들은 지금 가장 많은 데스 나이트로 구성된 다섯 번째의 습격을 맞아 치열하게 맞서 싸우고 있었다. 물론 많은 용사들이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갔다. 워낙 전황이 험난했기에 데이몬을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도 하나 둘씩 접전에 가세할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 4대 기사들까지 싸움에 뛰어들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 틈을 타서 데스 나이트 하나가 포위망을 돌파한 뒤 성녀를 향해 공격을 감행해왔다. 만약 전장에서 단련된 데이몬의 몸놀림이 아니었다면 둘은 마치 산적처럼 장검에 꿰인 채 운명을 마감했을 것이다. 쌍방은 마치 미친 듯 공방을 주고받았다. 마치 데이몬을 죽이는 것이 지상 과제인 양 데스 나이트들은 쉴새없이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다. 아마도 데이몬에 업혀 있는 다프네가 목적인 듯 싶었다. 하지만 실력자가 집중되어 있는 탓에 뜻을 이룬 데스 나이트는 하나도 없었다. 놈들의 공격을 파상적으로 막아내는 와중에서 무수한 용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에 비례해 데스 나이트, 듀라한들도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마침내 마지막 데스 나이트가 머리통이 떨어져나간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잘려져 나간 부분에서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헉, 헉." 용사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미 반수가 넘는 용사들이 희생되는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말 끔찍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습격이었다. "혹시 이곳의 정체는 마계와 연결된 아비스(大魔宮)가 아닐까?" 데스 나이트의 잔해와 뒤섞여 쓰러진 용사들의 시신을 일그러진 얼굴로 쳐다보던 세르게이가 내뱉은 일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처럼 많은 데스 나이트가 도사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것도 하나 하나가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가 아닌가? 출몰한 데스 나이트의 수는 지금이 암흑전쟁을 벌어지던 삼십 년 전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많았다. 머리가 빠질 정도로 고민했지만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 정도라면 선발대도 결코 무사하지 않겠군." 나직이 중얼거리는 세르게이의 귀로 또다시 경고성이 들려왔다. "적입니다. 이번에는 후미에서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히 퍼져나갔다. 고개를 돌린 세르게이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신 베르하젤을 찾고 있었다. "오! 신이시여. 제발 저희들에게 가호를……." 일단의 데스나이트, 듀라한, 리치들이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어 후미를 들이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스물에 가까운 숫자였기에 동료들이 얼마나 죽어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용사들의 얼굴에는 피로감과 함께 절망감이 역력히 떠오르고 있었다. "피해는?" "일단 살아남은 인원부터 보고 드리겠습니다. 본대 일백 명의 인원 중 살아남은 기사는 도합 서른 둘입니다. 거기에서 중상자를 제외한다면 스물 일곱이 겨우 전투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4대 기사는 무사하다는 것이 천만 다행입니다." "마법사는 얼마나 살아남았지?" "두……명입니다. 중상을 입었지만 슈렉하이머님은 다행히 목숨을 건지셨습니다." 보고를 들은 세르게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본대가 이 정도로 만신창이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결계 속에서 예상했던 희생은 고작해야 열 이내였다. 상대가 구울과 와이트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결과가 올 줄은 정말 몰랐다. 원래대로라면 이들은 베르하젤에게 청원을 한 뒤 탈출하는 과정에서 드래곤들의 공격을 차단해야 할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이처럼 허무하게 소모되어 버리다니……. 하지만 이 상황에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이들은 트루베니아가 보유한 가장 강력한 전력이었고 병사들이 쉴새없이 죽어 가는 상황에서도 끔찍이 아껴왔던 전력이었다. 그런 기사단이 이처럼 허무하게 궤멸되어버리다니……. 이런 상황에서 승리를 생각한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법. 어떤 일이 있어도 서약석을 손에 넣어야만 했던 세르게이였다. 그는 결국 전진 명령을 내렸다. "중상자들은 놓고 간다. 운이 좋아 후발대와 만난다면 살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 냉정한 판단. 중상을 입은 기사들의 얼굴에 체념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렇게 많은 데스 나이트가 출몰하는 상황에서 살아남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일 터. 그들은 편안하게 죽음을 맞기로 작정하고 눈을 꼭 감았다. "몸을 잘 숨기고 있어." "어떤 일이 있어도 구하러 오겠어." 한 마디씩 위로를 건네는 기사들의 얼굴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언제 저들의 신세가 될지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임무를 떠올리며 억지로 자신을 추슬렀다. 저벅저벅. 수가 판이하게 줄어든 본대의 용사들은 눈물을 삼키며 안개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상자들의 모습은 곧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98회. 데이몬은 기사들과 섞여 묵묵히 걸었다. 완전히 기절해 버렸는지 다프네는 아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가냘프게 전해지는 심장 박동소리만이 데이몬을 안심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상황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가 보기에도 정말 처절한 접전이었다. 그런데 전투과정을 되새겨보던 데이몬의 눈동자에 갑자기 이채가 떠올랐다.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습격해 온 데스 나이트들. 특이하게도 그들은 무척 낯익은 검술을 사용했다. 바로 기사들이 사용하는 것과 한 치도 틀리지 않는 동일한 검로였으니까.' 싸움에 몰두하느라 정신 없었던 기사들과는 달리 데이몬은 전투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용사들과 데스 나이트들은 같은 뿌리로 짐작되는 검술을 사용했다. 이미 많은 고수와 싸워봤던 경험으로 인해 데이몬은 그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데스 나이트는 죽은 기사의 영혼으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놈들은 죽은 이카롯트의 기사들에게서……."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던 데이몬은 헬버트론을 불러 세웠다. 그는 몹시 피곤한 안색으로 왜 그러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아랑곳없이 수중의 의혹을 털어놓았다. "이봐! 헬버트론. 놈들과 싸우면서 혹시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았어?" "무슨 생각 말이야." 몹시 짜증스러운 듯이 대꾸하는 헬버트론이었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쌍방은 분명히 같은 검술을 사용했어. 혹시 선발대가 당하고 난 뒤, 그들이 데스 나이트로 변해 덤비는 것이 아닐까?" "말도 되지 않는 소리하지마. 선발대가 그리 빨리 전멸 당했을 리도 없거니와 데스 나이트가 그리 금방 만들어지는 줄 알아." 화가 치미는 듯 헬버트론은 사납게 역정을 부렸고 데이몬은 결국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르게이는 그 말을 예사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걸음이 별안간 멈춰졌다. "가만……." 사실 이처럼 많은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들이 등장한 자체가 의문투성이였다. 아마도 마왕이 아니라면 이들을 불러내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그것을 떠올리자 세르게이의 뇌리를 번쩍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만약 이들이 애초부터 같은 편이라면……. 그는 다급히 데이몬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안색을 굳히는 데이몬을 향해 냉랭히 내뱉었다. "성녀를 내려놓아라." "무슨 일이지?" "네놈 따위에게 설명할 시간이 없다. 서둘러라." 부아가 왈칵 치밀어 올랐지만 다프네에게 별달리 위해를 가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데이몬은 묵묵히 몸을 숙였다. 기사들이 달려들어 다프네를 묶은 가죽끈을 풀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이미 혼절해 있었다. 핏기가 하나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세르게이는 지체 없이 슈렉하이머를 불렀다. 부상을 입어 한쪽 어깨를 붕대로 감싼 슈렉하이머가 기사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오." 슈렉하이머는 통증이 심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세르게이를 쳐다보았다. "성녀를 깨우실 수 있겠소?" "가능하긴 하지만 이 상태로 데리고 가는 것이 충격을 덜 받을 텐데요." "중요한 일이오. 지금 즉시 그녀를 깨우도록 하시오." 슈렉하이머는 어쩔 수 없이 마법을 캐스팅했다. 힐링으로 그녀의 기력을 돋워주려는 것이다. 마나의 흐름이 불안정한 곳이라 캐스팅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참을성 있게 마나를 끌어 모은 슈렉하이머는 마침내 다프네를 깨울 수 있었다. 핏기 없는 얼굴, 공포 가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다프네는 데이몬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아저씨. 여기는……."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세르게이가 말을 잘랐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소. 성녀." "무, 무슨 일이지요?" "성녀이니 만큼 충분히 느꼈을 것이오. 아까 느꼈던 죽음들에 대해서 말이오." 다프네의 안색이 별안간 시퍼렇게 질렸다. 세르게이는 잔인하게도 다프네로 하여금 생명이 소멸하는 순간을 다시 되새기도록 채근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데이몬이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이런 빌어먹을 놈……." 하지만 세르게이가 손을 들자 주위의 기사들이 달려들어 데이몬을 붙들었다. 꼼짝달싹 못하게 된 데이몬은 그저 씨근거리며 세르게이를 노려볼 뿐이었다. 데이몬을 처리한 뒤 세르게이는 다프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것은 중요한 일이니 사실대로 대답해 주어야 하오. 아까 당신은 어떤 죽음을 느꼈소? 인간의 생명이 소멸되는 걸 느꼈소? 아니면 다른 것도 섞여 있었소?" 불쌍하게도 다프네의 얼굴은 아예 백짓장이 되어 있었다. 세르게이는 채 입을 열지 못하는 다프네를 다시 한 번 채근했고 마침내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사, 사람들의 죽음뿐이었어요. 오로지……. 왜 내게 그 끔찍한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거죠." 대답을 하자마자 다프네는 울음을 펑펑 터뜨렸고 결국 슈렉하이머가 손을 쓸 수밖에 없었다. "슬립." 마법의 힘에 의해 강제로 잠이 들어버린 다프네. 기사들은 그녀를 다시 데이몬에게 업힌 뒤 가죽끈으로 꽁꽁 동여매었다. 데이몬은 세르게이를 노려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네놈에게 본때를 보이고야 말겠다." "네놈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면……." 짧게 대답한 세르게이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이 배어 있었다. 안개 속을 계속해서 전진해가던 일행들은 또다시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기습당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충격적인 것은 이번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푸캉 푸캉. 안개 속에서 각각 스물 남짓으로 이루어진 두 무리가 치열하게 교전을 나누고 있었다. 문제는 쌍방이 모두 데스 나이트라는 점이었다. 심혼을 빨아들일 듯이 눈구멍에서 이글거리는 안광, 마왕의 문양이 선명한 거무튀튀한 갑주, 습격해 온 데스 나이트와 한 치도 틀림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데스 나이트 두 무리가 서로 상잔을 하고 있었다. 물론 리치와 듀라한도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그들이 보고 있는 동안에도 듀라한 둘, 리치 하나가 몸통이 조각난 채 쓰러졌다. 뜻밖의 광경에 기사들은 어리둥절해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둘 다 적이 분명했으므로 대응할 태세를 갖춘 채 말이다. 본대를 발견하자 데스 나이트 무리들은 싸움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외형상 본대의 인원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놈들이 만약 힘을 합쳐 공격해온다면 결코 쉬운 싸움이 아닐 것이었으므로 기사들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상황이 그렇게 전개될 것 같았기에 기사들은 검자루를 불끈 거머쥐었다. 그때 세르게이의 냉정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절대로 공격하지 마라. 방어하는 것만 허용하겠다." 무척 놀란 듯한 기사들의 눈동자를 뒤로하고 세르게이는 한 발 앞으로 쓱 나섰다. 두 무리의 데스 나이트는 양편으로 갈라진 채 이쪽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안광에서는 적의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앞서의 상잔으로 열 정도가 쓰러진 터라 모두 합친다면 삼십 남짓 되어 보였다. 때문에 용사들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에서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인원은 고작 스물 일곱. 물론 그랜드 마스터 급인 4대 기사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길 수는 있어 보였지만 대가는 분명 어마어마할 터였다. 동료들 중 반수 이상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 공격하기로 마음을 정한 듯 데스 나이트들이 살기를 피워 올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전에 세르게이의 음성이 크게 울려 퍼졌다. "너희들은 누군가? 정체를 밝혀라." 그 말에 다가서던 데스 나이트들의 걸음이 뚝 멈췄다. 놈들은 서로 마주보며 서로의 눈빛을 주시했다. 뭔가 의견을 나누는 듯한 눈치였다. 곧 한 데스 나이트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들 중 가장 상급자로 보이는 자였다. 그의 입에서 데스 나이트 특유의 묘하게 공명되는 음성이 터져 나왔다. 질그릇이 깨질 때 나는 듯 듣기가 무척 거북한 음성이었다. "존존재재하하지지 않않아아야야 할할 것것들들이이 도도리리어어 정정체체를 운운운운하하다다니니 가가소소롭롭구구나나." 상대의 말을 일순 알아듣지 못한 세르게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뭐라고?" "성성녀녀를를 내내놓놓아아라라. 그그렇렇지지 않않으으면면 부부정정한한 생생애애에에 영영원원히히 종종지지부부를를 찍찍게게 되되리리라라." 신경써서 들은 탓에 이번에는 상대의 말을 알아들은 세르게이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의 목적이 성녀였나?" "그그렇렇다다." 말을 마친 데스 나이트들은 일제히 검을 치켜올렸다. 검은 아지랭이같은 기운이 검신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보아 거의 모두가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로 보였다. 하지만 세르게이는 추호도 당황하지 않았다. "일단 싸우기 전에 네놈들의 신분을 알고 싶다. 말할 용의가 있나?" "원원한한다다면면……." 앞으로 나선 데스 나이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데스 나이트의 입에서 예의 그 음성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놀랄 만한 사실이 밝혀졌다. "나나는는 이이카카롯롯트트의의 명명예예로로운운 기기사사단단장장 알알프프레레드드 백백작작이이다다. 성성녀녀를를 수수호호하하여여 베베르르하하젤젤의의 신신전전으으로로 모모시시는는 사사명명을을 띄띄고고 있있다. 너너희희 더더러러운운 것것들들이이 어어떻떻게게 해해서서 성성녀녀를를 납납치치했했는는지지는는 모모르르지지만만 순순순순히히 내내놓놓지지 않않으으면면 영영혼혼조조차차 온온전전하하지지 못못할할 것것이이다다." 기괴하게 공명되는 음성이라 일순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상대의 진의를 파악하자 세르게이의 눈이 급격히 치떠졌다. 그것은 다른 기사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충 나이델하르크의 암흑군단 휘하 어느 어느 부대 소속이란 대답을 기대했는데 예상이 여지없이 빗나가버린 것이다. "뭣이라고?" 조금 전까지 교전을 나누던 다른 데스 나이트 무리도 놀라긴 마찬가지인 듯 싶었다.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뭐라고 시끄럽게 중얼거렸다. 얼굴 표정이 없는 데스 나이트라서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도무지 몰랐지만 제법 심각해 보였다. 간신히 정신을 추스른 세르게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내뱉었다. "네가 7조를 맡고 있는 알프레드라고?" "아아니니 어어떻떻게게 그그 사사실실을을?" 앞으로 나선 데스 나이트는 다소 놀란 눈치였다. 그때서야 세르게이는 상황을 명확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들은 다름 아닌 같은 편과 상잔을 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 저들이 데스 나이트의 몰골로 보이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더 이상의 손실은 막아야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지체 없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나는 용사단의 총사령관을 맡고 있는 세르게이 공작이다. 알프레드 날 기억하나?" "개개소소리리. 너너 따따위위 너너절절한한 듀듀라라한한 따따위위가가 어어찌찌 총총사사령령관관님님을을 사사칭칭하하는는가가?" 반사적으로 터져 나온 말에 세르게이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이쪽을 데스 나이트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검술실력이 높은 자는 데스 나이트, 비교적 약한 자가 듀라한으로 보이는 듯 싶었다. 사실 세르게이 공작의 검술실력은 그다지 뛰어난 편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리치의 진정한 정체는 마법사일 가능성이 컸다. 도저히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다. 불연 듯 좋은 생각이 떠오른 세르게이 공작은 손가락을 펴서 한 쪽을 가리켰다. 바로 다프네를 업고 있는 데이몬을 향해서였다. "그렇다면 저자는 어떻게 보이는가? 성녀는 바로 보이는가?" "물물론론! 성성녀녀님님의의 존존귀귀하하신신 몸몸을을 고고작작 구구울울 따따위위에에게게 맡맡기기고고 있있다다니니 발발칙칙한한 것것들들……." 안광을 이글거리며 사납게 내뱉는 데스 나이트. 헝클어진 생각을 겨우 정리한 세르게이는 한자 한자 똑바로 내뱉었다. 한 국가의 대소사를 책임지는 총리인 만큼 그는 부하의 면면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난 너를 똑바로 알고 있다. 알프레드. 너는 이카롯트에서 애처가로 소문난 기사이다. 하지만 나는 너의 알려지지 면모를 똑똑히 알고 있다. 클론델 백작 부인과 알게 모르게 정을 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데스 나이트의 입에서 놀란 듯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허허, 헉헉. 어어떻떻게게 그그 사사실실을을……." "나는 정보부를 총괄하고 있는 세르게이 공작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그 사실을 알겠는가?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다. 본대에 소속되어 있던 클론델 백작은 이미 전사했으니까 말이다." 데스 나이트는 말이 없었다. 일견해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99회.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데스 나이트 무리에서 한 명이 갑자기 앞으로 불쑥 나왔다. 물론 들려오는 음성이 기괴하게 공명되긴 마찬가지였다. "그그렇렇다다면면 내내 이이름름도도 알알고고 있있는는가가? 나나는는 선선발발대대의의 4지지단단을을 맡맡고고 있있다다. 네네가가 진진정정한한 세세르르게게이이 공공작작 전전하하라라면면 날날 모모를를 리리가가 없없다다." "물론. 델리피어 자작을 내가 왜 모르겠나? 얼마 전 딸의 결혼식에 직접 참석했었는데 말이다. 애석하게도 사위가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불운이 있었지?" "노노, 놀놀랍랍군군." 모두가 말을 잊었다. 비로소 상황이 명확히 정리되었다. 그들이 싸운 적은 데스 나이트가 아니라 아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상대의 모습은 데스 나이트나 듀라한이 분명했다. 심지어 나뒹구는 시신들조차 한 치의 틀림이 없었다. 나뒹구는 갑주의 표면엔 마왕의 문장이 뚜렷이 각인되어 있었다. 비로소 상황을 파악한 세르게이가 사태 장악에 나섰다. "이제부터 싸움은 용납하지 않는다. 모두가 나서서 신분을 밝히고 동료란 것을 증명하기로 하자. 자신의 이름과 소속부대, 그리고 가문을 밝혀 더 이상의 상잔을 피하도록 해야 한다." 곧 대대적인 확인작업이 벌어졌다. 용사들과 데스 나이트, 듀라한, 리치들은 쭈뼛거리며 다가와서 서로의 이름과 신분을 교환했다. 하나같이 불안한 눈빛으로 말이다. 슈렉하이머에게 리치 하나가 다가왔다. 뼈만 남은 몰골에 사악한 기가 감도는 전형적인 리치였다. 마치 귀곡성같이 찢어지는 음성이 이빨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왔다. 데스 나이트와는 달리 음성이 기괴하게 공명되지는 않았다. "나는 이카롯트 궁정 소속 마법사인 펠렌드다. 너의 이름과 소속을 말하라." 슈렉하이머의 얼굴에 침통한 기가 서렸다. 지금껏 죽이고 죽었던 자들이 모조리 한편이었다는 사실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펠렌드. 날 모르겠소? 나 슈렉하이머요." "뭐, 뭐라고……." 리치는 소스라치게 놀란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슈렉하이머는 그가 평소에 무척 존경해 마지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슈렉하이머 역시 같은 리치로 보이는 듯 싶었다. 그 증거로 상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슈렉하이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장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머리통을 옆구리에 떡 하고 끼고 있는 듀라한 하나가 라인델프에게 다가왔다. 잘려져 나간 채 핏발 선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머리통의 입이 열렸다. 물론 목 위에는 아무것도 붙어있지 않았다. "너는 누군가? 나는 엘링턴 가문의 크란시아다. 이름과 신분을 밝혀라." 라인델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상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듀라한은 바로 자신의 처남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동생 말이다. "날 모르겠는가? 처남? 나 라인델프다." "뭐, 뭐라고……." 둘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우습게도 듀라한의 눈에는 라인델프의 모습이 영락없는 데스 나이트로 보였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절친했던 처남 매부 사이는 의심 섞인 눈초리로 서로의 몸을 샅샅이 훑어보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진군은 일단 거기서 멈춰졌다. 같은 편임이 확인된 이상 모든 병력을 모은 뒤에나 출발해야 할 듯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기사들이 상잔으로 죽어갈지 몰랐다. 특히 세르게이는 드러난 사실에 아예 질려버린 듯 했다. 같은 편끼리, 그것도 최후에 써먹기 위해 아끼고 아꼈던 소드 마스터들이 서로 죽이고 죽였다니……. 결국 참다 못한 그는 슈렉하이머에게로 다가왔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현상인지 대승정은 짐작하시겠소?" 슈렉하이머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가 아는 상식으론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듯 싶소. 만약 환각 마법에 의한 것이라면 죽은 자들은 분명히 본 모습으로 돌아와야 하는 법이오. 하지만 이들은 죽은 뒤에도 마법이 풀리지 않았소."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몸통이 조각난 데스 나이트의 잔해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슈렉하이머는 허리를 굽혀 머리통 하나를 집어들었다. 듀라한의 손에서 굴러 떨어진 듯한 머리통이었다. 슈렉하이머는 머리통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차가운 감촉. 질감 모두가 듀라한의 머리통이 분명하오. 보시다시피 본체가 쓰러진 뒤에도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 않소? 만약 이것이 분명 마법에 의한 것이라면……." 슈렉하이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아마도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은 10써클의 마법이 아닌가 생각되오. 드래곤들의 전유물 말이오." 하지만 세르게이는 그 말을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신께서 펼치신 것일 가능성도 있지 않소? 각 종족의 발길을 막기 위해 험한 관문을 설치하신 분이니 말이오." "그럴 가능성도 물론 있소. 하지만 그분께서 이토록 처참한 죽음의 관문을 설치하셨다고는……."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 슈렉하이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용사들은 정신 없이 사방을 둘러보며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포의 대명사인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이 지척에서 웅성거리고 있는데 놀라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물론 데이몬에게도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언데드들이(아마도 용사로 짐작되는) 들이닥쳤다. 데스 나이트 하나가 싸늘한 안광을 피워 올리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비비교교적적 약약한한 구구울울을을 보보니니 그그래래도도 반반갑갑군군. 이이봐봐 네 네정정체체는는 뭐뭐지지?" 데이몬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데스 나이트의 눈구멍에서 피어오르는 안광이 급격히 짙어졌다. 검을 뽑아들려는 데스 나이트를 제지한 것은 헬버트론이었다. "그만 두도록……. 녀석의 신분은 내가 보증하지." "그그러러는는 네네 녀녀석석의의 정정체체를를 먼먼저저 밝밝혀혀라라" "내 이름은 헬버트론이다." 헬버트론의 말에 상대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이미 이카롯트의 4대 기사는 대륙의 모든 기사들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있었다. 데스 나이트는 무척 송구스럽다는 듯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실실례례했했습습니니다다. 저저는는 4지지단단 소소속속의의 세세바바인인입입니니다다. 무무례례를를 용용서서하하시시길길……."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데스 나이트는 미심쩍은 듯 헬버트론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물론 헬버트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다프네는 제대로 보이나 보군." 데이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술의 대가인 그였으므로 작금의 상황에서 뭔가 짚이는 바가 없진 않았다. 그는 용사들 사이에 섞여 듀라한과 데스 나이트가 부산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힐끔 쳐다보며 나직이 되뇌였다. "아무래도 이들은 고도의 정신계 마법에 당한 듯 싶다. 상대를 자신의 적으로 착각하게끔 하는……." 물론 마법은 어느 모로 보아도 중원의 사술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다. 하지만 단 한가지, 사술이 마법보다 우월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정신적인 측면에 작용하는 측면이었다. 마나의 재배열을 통해 여러 가지 물리적, 화학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점에서 사술은 결코 마법을 따라갈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거나 심령을 제압한다는 점에서 사술은 나름대로의 높은 완성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마법을 익히는 과정에서 데이몬이 파악한 것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중원에 고도의 내가기공을 익힌 고수가 많다는 점에 기인한 것인지도 몰랐다. 정신을 직접 조종할 수 있다면 뛰어난 실력을 보유한 상대를 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으므로……. 물론 내가기공도 거기에 따라 진보를 거듭해왔고, 뛰어난 내공을 익힌 자는 보편적으로 사술에 저항하는 힘이 무척 강한 편이었다. 다시 말해 절정 급 경지에 오른 무사라면 사술에 거의 제압되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정파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물론 정파와 사파의 내공 차이에 따른 격차가 분명히 있었지만 말이다. 만약 데이몬이 사술을 펼칠 수 있다면 상당한 힘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사술에 문외한인 이곳의 기사들에게 그가 알고 있는 술법은 정말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데이몬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내공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물론 사술도 무공의 갈래에 속했다. 그러므로 시전하는데 반드시 일정량의 내공이 필요했다. 데이몬에게 끌어올릴 내공이 남아있을 턱이 없었고 뇌리에 온갖 사술의 구결이 기억되어 있었지만 그런 이유로 도저히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용사들은 서로의 이름과 신분에 대한 확인작업을 마치고 뒤이어 도착할 후발대 병력을 기다렸다. 뒤쳐진 후발대 병력은 오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내었다. 물론 하나같이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의 모습을 한 채 말이다. 리치의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을 봐서 대부분 접전의 와중에 죽어간 모양이었다. 소드 마스터의 앞에서 마법사란 무력하기 그지없는 존재이므로……. 그들은 본대의 모습을 보자마자 성급히 덤벼들려 했고 세르게이는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상당한 곤욕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상황은 진정되었다. "실실례례했했습습니니다다. 무무례례를를 용용서서하하시시길길………."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리는 자는 겉으로 봐서는 전형적인 데스 나이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신분은 후발대의 17지단을 맡고 있는 카를로스 남작이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세르게이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혹시 이곳에 오며 부상자를 본 적이 있는가? 음! 아마도 데스 나이트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고개를 수그린 데스 나이트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보보았았습습니니다다." "어떻게 되었는가?" 데스 나이트는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꺾었다. 그 모습에 세르게이는 부상자들이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 착잡한 기가 감돌았다. "모조리 죽여 없앴나보군. 할 수 없는 일이지. 상황을 보아 내가 전령으로 보낸 두 기사도 살아있을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 겠군." 제일 먼저 자신들에게 덤벼든 두 명의 데스 나이트는 아마도 선발대에서 보낸 전령이 분명한 듯 싶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보낸 전령 역시 후발대에 같은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 틀림없었다. 데스 나이트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의 예상을 증명하듯 무릎 꿇은 데스 나이트의 음성이 귓전에 전해졌다. 기괴하게 공명하는 데스 나이트 특유의 음성 말이다. "용용서서하하십십시시오오. 그그들들은은 영영락락없없이이 데데스스 나나이이트트의의 형형상상을을 하하고고 있있었었기기에에……." 세르게이는 낙담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200명의 소드 마스터로 구성된 막강한 이카롯트의 기사단이 상잔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될 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끼고 아낀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었나? 이럴 줄 알았으면 드래곤과의 전투에나 투입했을 걸……."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이미 늦어버린 것. 이제 그는 남은 용사들만으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아무래 안타까워 해봐야 죽은 기사들이 되살아날 리가 없었다. "할 수 없지." 그는 우선 인원 편성을 서둘렀다. 상황을 보아 남은 용사들은 모조리 목숨을 잃은 듯 싶었다. 병력 파악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소드 마스터와 데스 나이트로 보이는 자들은 도합 사십 육 명, 귀족 기사들과 듀라한이 십 이 명. 거기에다 마법사와 리치를 합한 수가 여덟 명이었다. 물론 그 속에는 슈렉하이머가 끼여 있었다. 그 외의 인원으로는 우선 성녀를 꼽을 수 있었고, 또한 그를 업은 데이몬까지 합친다면 남은 용사들의 수는 정확히 69명이었다. 사백 명으로 시작했던 막강한 용사단이 이 정도로 수가 줄어버린 것이다. 본격적인 접전을 치르기도 전에 맞이한 엄청난 피해. 하지만 수행해야 할 임무가 워낙 막중했기에 용사들은 또다시 결계 속으로 묵묵한 행군을 시작해야 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제는 싸움을 용납하지 않는다. 상대가 그 어떤 모습으로 다가와도 말이다." 세르게이의 추상같은 명령에 용사들은 안색을 굳히며 묵묵히 행군에 열중했다. 바로 옆에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이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이제 놀라지 않았다. 그들의 진정한 정체는 바로 동료들이었으므로…….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00회. 어느새 100회로군요. 어젠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100회라고 뜸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이 안 되서 못 올렸어요. 한동안 괜찮던 메가패스가 공교롭게도 어제 말썽을 부리네요. 사실 하이텔 무료로 쓰는 것말고는 메가패스엔 메리트가 거의 없지요. 싼 것도 아니고 빠른 것도 아니고. 3년 계약하지 않았다면 벌써 바꿨을 텐데 할 수 없네요.^^ **************************************************************************** 깊숙이 들어갈수록 결계가 품고 있는 마법의 힘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래도 처음에는 같은 무리의 동료들만은 제 모습으로 보였지만 이제 그것도 옛 말이 되었다. 조금 전까지 인간의 모습이던 동료들이 죄다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결계의 비밀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검부터 날리고 볼 뻔했을 정도였다. "이이봐봐! 너너 데데이이몬몬 맞맞어어?" 옆에서 들려온 기괴한 말에 고개를 돌린 데이몬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헬버트론이 걷고 있었는데,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눈구멍 사이로 사이한 빛을 일렁이는 데스 나이트 하나가 걷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몸에 걸친 갑주까지 마왕의 문양이 선명한 데스 나이트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혹시 헬버트론?" "맞맞는는가가 보보군군. 제제길길 네네 모모습습이이 별별안안간간 구구울울로로 변변해해서서 하하마마터터면면 검검을을 날날릴릴 뻔뻔했했어어." 헬버트론으로 짐작되는 데스 나이트는 고개를 흔들며 툴툴거렸다. 데이몬은 자신이 변한 모습에 호기심이 생겼다. 물론 그는 구울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구울의 모습이 어떤데……." "묘묘지지에에서서 시시체체를를 파파먹먹고고 사사는는 식식인인 몬몬스스터터말말이이야야. 시시뻘뻘건건 눈눈동동자자와와 귀귀밑밑까까지지 찢찢어어진진 입입, 날날름름거거리리는는 긴긴 혀혀까까지지 틀틀림림없없는는 구구울울의의 모모습습이이군군. 놀놀라라워워." 실력에 따라 모습이 달리 보인다는 말이 아마도 맞는 듯 싶었다. 일행 중에서 제일 약한 때문에 오직 데이몬만 구울로 보이기 때문이다. 헬버트론은 상당히 강력해 보이는 데스 나이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른 데스 나이트보다 갑주에서 일렁이는 검은 기운이 무성했고 뽑아든 검은 암흑의 오러 블레이드에 덮여 아예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고개를 돌려본 헬버트론은 거의 모든 용사들의 모습이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의 몰골로 바뀐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래의 모습을 간직한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드러난 사실에 용사들은 저마다 모골이 송연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사방을 온통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이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눈 버젓이 뜨고 지켜볼 자 담량 큰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데이몬만이 재미있다는 듯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실력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보이다니 재미있군." 세르게이의 모습은 어느새 듀라한으로 바뀌어 있었다.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있는 머리통은 목 위가 아닌 옆구리에 끼여져 있었다. 그것을 봐서 세르게이의 검술실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은 것 같았다. 잠시 그를 지켜보던 데이몬은 고개를 돌렸다. "슈렉하이머는 어떨까?" 백발이 성성한 슈렉하이머의 모습은 벌써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에는 몹시 사악해 보이는 리치 하나가 떡 버티고 있었다. 머리에 쓴 관(冠)과 함께 마치 뱀파이어처럼 길게 자라난 어금니가 다른 리치와 비교적 다르게 보이는 점이었다. 흥미를 가진 데이몬은 연신 주위의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우선 외곽의, 비교적 강한 기사들이 배치되는 위치에는 어김없이 데스 나이트가 검을 꼬나 쥔 채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 듀라한들이 걷고 있는 것을 봐서 아마도 귀족 기사들인 듯 싶었다. 문득 데이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다프네의 눈엔 이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하지만 다프네는 이미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충격을 받지 않도록 슈렉하이머가 마법으로 재운 것이다. "심안을 가지고 있으니 제대로 보이겠지. 뭐." 데이몬과 다프네는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의 철통같은 호위(?)를 받으며 결계 속을 묵묵히 걷고 있었다. 정말 엄청난 손실이었다. 마지막 반격을 기약하기 위해 아끼고 아꼈던 트루베니아 최강의 기사단은 결국 전력의 대부분을 안개 속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같은 편끼리의 상잔으로 말이다. 그런 아픔을 간직한 채 용사들은 결국 결계 지대를 돌파할 수 있었다. 동료의 모습이 언데드로 바뀌는 것말고는 더 이상의 공격은 가해지지 않았다. 뿌연 안개로 덮인 결계 지대의 중심부를 빠져나온 기사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정말 지긋지긋했다는 표정이 감돌았다. "휴! 끝인가?" "정말 저주받은 곳이었어. 결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결계 지대를 지나자마자 살을 엘 듯한 추위가 엄습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도리어 홀가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료 330명을 집어삼킨 결계 지대의 안개는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차리리 뼈까지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이 더 반가울 정도로……. 안개가 걷힐수록 결계에 깃든 마법의 힘은 약해졌다. 그에 따라 끔찍한 언데드의 모습을 하고 있던 용사들이 하나씩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직까진 신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가시거리가 점점 길어지고 있었으므로 머지않아 신전의 모습이 들어올 것이다. "혹시 신전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소? 대승정." 세르게이의 질문에 슈렉하이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고문서에 따르면 신전은 거대한 성곽에 둘러싸여 있다고 합니다." 이제 그는 모든 용사들에게 본 모습으로 보이고 있었다. 아직까지 데스 나이트나 듀라한의 모습을 한 용사들이 드문드문 섞여 있었지만 말이다. 슈렉하이머의 말에 세르게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이한 일이로군. 많은 사람들이 찾는 신전의 둘레에 성곽이 둘러쳐져 있다니……." "원래는 성곽이 없었다고 합니다. 훗날 베르하젤님의 후광을 독차지하려는 목적으로 고대의 군주들이 쌓은 것이지요. 베르하젤님의 뜻이 꺾이기 시작한 시기에 말입니다." "그렇소?"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세르게이의 눈에 갑자기 빛이 일렁였다. 저 멀리서 웅장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정말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가히 펠드리안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과 비견될 정도로 말이다. "저곳인가?" "엄청나게 크군." 용사들의 눈망울에 긴장감이 역력히 떠올랐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목표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세르게이가 특유의 싸늘한 음성으로 주위를 환기시켰다. "결코 서두르지 마라. 이제부턴 정신 바짝 차려서 주위를 경계해야 한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몰랐기 때문에 용사들은 긴장한 채 병진을 새로 구성했다. 가운데 위치한 데이몬과 다프네를 철저히 보호하는 형상으로 말이다. 이제부터 그들은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절로 마음이 떨릴 수밖에 없었다. 용사들은 대열을 유지한 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건축물의 형상이 점점 뚜렷해졌다. 또한 성곽과 가까워질수록 안개 또한 옅어졌다. 마침내 웅장한 신전 외벽의 모습이 용사들의 눈에 명확히 들어왔다. "드디어 도착했는가?" 무척 고풍스러운 건축물이었다. 성곽이나 망루의 양식이 지금 것과는 무척 달랐다. 워낙 웅장했기 때문에 허물어진 부분이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성곽은 용사들에게 점점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유심히 성곽을 관찰하던 세르게이가 이마를 찡그렸다. "무척 낡은 성곽이로군." 아닌게 아니라 성벽의 풍화가 정말 극심한 수준이었다. 쉴새없이 불어대는 바람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성문이 달려 있어야 할 곳은 아예 뻥 뚫려 있었고 성벽 또한 이음새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모되어 있었다. 세르게이는 우선 척후를 보냈다. "성벽 내부를 철저히 정찰하고 오도록……." "알겠습니다." 두 기사가 척후로 출발한 뒤 일행들은 그곳에 멈춰 서서 보고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사방의 상황을 명확히 파악하고 난 뒤 행동하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 그들의 전력으론 드래곤 하나 이상을 상대할 수 없었다. 도합 칠십 명에서 한 명이 빠진 상태로 용사대는 척후의 보고가 도착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조금 뒤 도착한 척후들은 이상 징후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일단 육안으로 보기에 움직이는 물체는 전혀 없었습니다. 성벽 내부는 무척 광활한 공터를 이루고 있었으며 성벽과는 약 1km 거리에 신전으로 보이는 건물이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허! 1km라니……. 엄청나게 넓은 공터겠군. 신전도 많이 허물어져 있겠지?" 척후를 나갔던 기사의 얼굴에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어찌 보면 당혹하다고도 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그것이……. 특이하게도 신전 건물은 외관상 전혀 풍화된 흔적이 없었습니다. 마치 금방 지어진 듯 보일 정도입니다. " "그래?" 세르게이는 별달리 이상할 것도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성벽이야 물론 인간들이 멋대로 지어놓은 것인 만큼 무너질 만도 했지만 신전은 바로 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베르하젤이 신전이 무너지도록 그대로 방치할 리는 없어 보였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세르게이는 베니테스를 쳐다보았다. 마법을 사용해서 숨어있는 몬스터가 있는지 확인해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돌연 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베니테스가 뭔가에 정신이 팔린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베니테스의 태도가 최근 들어 조금 이상하긴 했다. 이따금 정신이 나간 듯 멍하니 있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딴 생각이나 하다니…….' 세르게이는 짜증 섞인 일성을 내뱉었다. "베니테스." 그 말에 화들짝 놀란 베니테스가 고개를 돌렸다. 멍한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다. 그것을 보고 세르게이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는 겐가? 지금이 그토록 한가한 시기인가?" "죄,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나발이고 탐색 마법이나 시전하도록……. 신전 주변에 몬스터 따위가 없는지 살펴보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다급하게 캐스팅에 들어가는 베니테스. 미덥지 못했는지 세르게이는 남은 마법사들에게도 탐색 마법을 시전하도록 명령했다. "만에 하나 있을 위험을 철저히 회피해야 한다. 슬라임 따위의 하등한 몬스터도 놓치지 말고 살피도록 하라. 마법사들은 묵묵히 신전 주위를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물론 마나의 흐름이 극도로 불안정했기 때문에 캐스팅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1시간에 걸친 탐색시간이 지나가고 아무런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세르게이는 그때서야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놈들이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했나 보군. 결계 지역을 철석같이 믿은 모양이지?"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병력을 진군시켰다. 70여 명의 용사들은 잔뜩 긴장한 채 성벽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갔다. 물론 뽑아든 장검에 오러 블레이드를 잔뜩 끌어올린 채로 말이다. 마법사들의 검색에 아무것도 나오진 않았지만 이곳은 신의 성역이었으므로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걸어들어 감에 따라 성벽은 점점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명확히 식별할 수 있는 거리에서 바라본 성벽은 말 그대로 폐허 그 자체였다.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워낙 웅장했기 때문에 멀리서 볼 때 별로 티가 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성이랄 것까지도 없겠군." 세르게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느덧 선진이 성의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라기보다는 그저 터진 곳이라 불러야 정확할 듯 싶었다.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채 걸어 들어가던 용사들. 멀찍이 떨어져 있는 신전을 보자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세, 세상에……." 용사들의 입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탄성이 튀어나왔다. 신전의 모습이 그만큼 웅장하고 멋있었다. 신전의 모습은 완전히 허물어져 건축물이라고 볼 수 없는 성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달랐다. 고대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아름다웠고, 어디 한 군데 허물어진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방치되었건만 신전은 말 그대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용사들은 저마다 입을 벌린 채 신전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에 바빴다. 참다 못한 세르게이가 역정을 벌컥 낼 때까지 말이다. "서둘러야 한다. 지금 이럴 시간이 없다." 정신이 든 용사들이 검을 고쳐 쥐자 세르게이는 뒤를 쳐다보았다. 다프네는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데이몬의 등에 업혀 있었다. 잠시 다프네의 얼굴을 들여다본 세르게이는 슈렉하이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절차에 대해선 알고 있겠지요?" "네. 신전 내부에 들어가면 거대한 홀이 있다고 합니다. 저희는 그곳에서 베르하젤 님께 청원을 올려야 합니다. 물론 청원을 올릴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성녀에 한정됩니다. 현재로썬 그곳이 베르하젤 님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확실하오?" "그렇습니다. 고문서에 적혀 있는 내용이 맞다면 말이지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세르게이는 용사들을 쳐다보았다. "저곳이 우리의 목적지다. 힘을 내라. 트루베니아의 운명이 우리에게 달려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용사들은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손에 트루베니아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의 운명이 걸려있다 생각하니 어깨가 무겁지 않을 수 없었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01회. 사방으로 훤히 터진 공터. 용사들은 예리한 눈빛으로 사방을 주시하며 조심조심 신전을 향해 나아갔다. 그럴수록 신전의 모습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런데 용사들의 대열이 성벽과 신전이 위치한 중간쯤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굉음이 터져 나왔다. 마치 산이 일시에 무너지는 듯한 엄청난 폭음이었다. 콰르르르. 용사들의 고개가 마치 뺨이라도 맞은 듯 뒤로 팩 돌아갔다. 굉음이 바로 뒤에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린 용사들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이게 무슨?" "헉." 놀랍게도 성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용사들이 진입한 바로 다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오랜 시간동안 풍화에 시달린 성벽이었고, 무너질 만큼 낡기는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들이 들어선 지금에야 무너지다니……. 용사들이 주시하는 동안에 성벽은 연쇄적으로 허물어졌다. 마치 도미노를 연상시킬 정도로 맥없이 말이다. 그와 함께 엄청난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성벽이 있던 곳은 순식간에 먼지구름에 덮여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세르게이의 뇌리에 불연 듯 불길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성벽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들이 지나가자마자 무너지다니……. 혹시 매복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급하게 용사들의 진군을 중지시켰다. "정지. 이 자리에 서서 일단 사태의 추이를 파악하도록 하자." 용사들은 그 자리에 서서 성벽을 감싼 먼지구름이 가라앉기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전력 상 퇴로를 확인한 뒤에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할 듯 싶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만만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뒤쪽을 예의 주시하던 기사들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저, 저런……." "세상에……." 아무리 흙먼지에 덮였다 하더라도 먼지구름 속의 상황이 전혀 안보이지는 않는 법이다. 하물며 뛰어난 시력을 가진 소드 마스터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너진 성벽, 다시 말해 성벽을 이루고 있던 돌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인양 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쿠르르르. 먼지 속에서 솟아오른 돌들은 한데 엉켜 곧 일정한 형태를 이루어갔다. 돌로 된 수많은 거인의 형상으로 말이다. 보고 있던 기사들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고, 골렘?" "이런. 스톤 골렘(Stone Golem)이야." 성벽을 이루고 있던 돌들은 어느새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스톤 골렘으로 바뀌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스톤 골렘. 일종의 마법석을 이용해서 돌에 생명을 불어넣어 탄생된 괴물이다. 몸 전체가 돌로 되어 있는 만큼 방어력이 상상을 초월하며 힘 또한 엄청났다. 또한 생물이 아니기 때문에 팔, 다리가 잘려나가도 금방 재생이 되는 데다 몸 속의 마법석이 파괴되기 전까진 결코 쓰러지지 않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극히 까다로운 괴물이었다. 물론 스톤 골렘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고도의 마법 실력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어지간한 마법사는 꿈에도 제조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 스톤 골렘들이 용사들의 퇴로를 빈틈없이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한 눈에 보아도 백은 훌쩍 넘기는 숫자였다. 보고 있던 세르게이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과연 놈들이었어." 이 정도의 스톤 골렘을 만들어 낼 정도의 마법 실력이라면 인간 마법사로는 불가능했다. 오로지 마법의 조종인 한 존재만이 이런 모습을 연출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보고 있는 동안에 완성된 골렘 군단은 일렬로 늘어선 채 이리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쿵쿵쿵. 동작이 무척 느린 편이었지만 지축을 뒤흔들며 다가오는 모습은 용사들의 심금을 저리게 하기엔 충분했다. 스톤 골렘은 설사 대상이 소드 마스터라 할지라도 상대하기 극히 까다로운 괴물 중의 하나였다. 물론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는 충분히 스톤 골렘의 신체를 잘라낼 수 있다. 하지만 스톤 골렘은 몸 속의 마법석이 파괴되기 전까진 끈질기게 죽지 않는다. 두터운 몸 속에 간직된 마법석을 파괴하는 것 자체가 까다롭기 그지없는 일이었으므로 용사들의 얼굴엔 질린 기색이 퍼져갔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이라도 저렇게 많은 스톤 골렘들을 상대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다. 모두들 전력으로 신전을 향해 질주한다. 스톤 골렘은 동작이 느리니 결코 우릴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 세르게이의 명령에 용사들은 서둘러 몸을 돌렸다. 좁은 신전 입구를 방패삼아 싸우는 것이 그래도 효과적인 대응책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몸을 돌린 용사들은 하나같이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신전으로 향하는 길은 이미 빈틈없이 차단되어 있었다. 마치 거짓말처럼 말이다. 눈을 찢어져라 부릅뜬 용사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말이 안 돼!" "설마 꿈이 아닐까?" 얼어붙은 용사들 앞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크르르르. 일단 눈에 띈 것은 엄청난 수효의 중형 몬스터 군단이었다. 일견해 삼백이 넘어 보이는 오우거와 트롤이 손에 무기를 꽉 움켜쥔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날개를 접은 와이번들이 웅크리고 앉은 채 핏발 선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듬성듬성 서 있는 중형 몬스터들의 틈을 오크들이 메우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틀림없는 정예들만 가려 뽑은 오크 보병들이었다. 뜻밖의 상황에 용사들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잠깐 고개를 돌린 사이 모습을 드러내다니……. 결계지대와 마찬가지로 환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용사들이 굳어있는 동안에 퇴로를 차단한 스톤 골렘들은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망연히 오크 군단을 응시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용사들. 그들 틈에서 세르게이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오크들 사이에 선 이질적인 존재. 인간의 모습을 한 존재들에 대해 말이다. 물론 그들은 결코 인간이 아닐 것이다. 세르게이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떠올랐다. "도합 다섯. 가망이 없군." 그의 시선이 오크 군단의 중심부에 위치한 붉은 머리 청년에게로 향했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칼을 감안하면 저자는 아무래도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일 공산이 컸다. 그가 알기로 인간과의 전쟁에 참전한 드래곤 중 레드 드래곤은 베르키스만이 유일했으므로……. 베르키스. 인간과의 전쟁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전하는 드래곤으로써 지금까지 인간들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준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에인션트 급으로서는 드래곤 로드인 크라누스에 이어 두 번째 서열을 차지하고 있는 드래곤이었으며 마법실력만으로 따진다면 오히려 크라누스를 능가할 정도라는 마법광(魔法狂)이기도 했다. 마법에 관한 애정이 얼마나 강했는지 그는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을 모조리 리치로 채울 정도였다. 물론 세뇌마법을 통해 자신에게 맹목적으로 충성을 다하도록 조처한 뒤에 말이다. 일전에 펠드리안에 난입한 게덴하이드 역시 베르키스 휘하의 가디언이었다. 30년 전 베르키스는 사로잡은 게덴하이드를 세뇌시켜 자신의 가디언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를 리치로 만든 것도 물론 베르키스의 소행이었다. 수명이 짧은 인간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자신의 레어를 지키게 하려면 오로지 리치로 만드는 방법 밖에 없었으므로……. 통상적으로 드래곤들은 스톤 골렘이나 오우거 따위의 중형 몬스터로 하여금 가디언을 삼는다. 그런 점에서 베르키스는 여타의 드래곤들과는 다른 별종 드래곤이라 할 수 있었다. 특유의 타는 듯한 안광으로 운집한 용사들을 쳐다보던 베르키스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눈처럼 새하얀 얼굴에 한 가지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비웃음이란 표정이 말이다. 그는 곧 용사들의 면면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환영한다. 각본에 따라 충실히 연기해 준 배우들이여." 용사들의 얼굴에 암울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단지 환영이기를, 아니 꿈이라면 원이 없겠다고 거듭 되뇌였는데 그 기대가 여지없이 꺾여버린 것이다. 쿵쿵쿵. 그 와중에서도 스톤 골렘들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 많은 적들을 상대로 용사들이 승리를 거둘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면면을 보아 하나하나 강력하지 않은 놈들이 없었다. 그나마 원래의 전력이었다면 제대로 된 저항이나마 한 번 해볼 수 있을 텐데, 만신창이가 된 지금의 상황에서는 포위망을 돌파하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세르게이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결계 지역 안에서의 일은 당신의 짓이오?" 베르키스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무척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그곳에는 애초에 신께서 펼쳐놓으신 결계가 있었다. 원래의 결계는 너희들이 겪은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저 극도의 공포심만을 주어 범접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었지. 하지만 내가 마법을 사용하여 결계의 속성을 조금 변형시켰다. 공포심 대신 상대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이 끓어오르도록 말이야." 베르키스의 얼굴에는 신이 설치한 결계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역력히 배어나고 있었다. 그 말에 세르게이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휘하 기사들이 왜 수적으로 뒤지는 상태에서도 무리한 공격을 해 왔는지 말이다. 어찌 보면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를 법한 상황이었지만 역시 세르게이는 냉정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뭔가 말하라." "도대체 어떻게 해서 우리의 계획을 파악한 것이오?" 마치 쥐어짜듯 내뱉는 세르게이의 음성. 베르키스는 가타부타 말없이 그저 미소만 띠고 있을 뿐이었다. 그를 노려보던 세르게이는 이를 지긋이 깨물었다. "첩자를 사용한 것이오? 도대체 어떻게……." 이번 작전은 정말 극비 속에 진행된 작전이었다. 포터로 정해진 근위병들조차 당일 아침에 통보 받았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마법사와 기사들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신분과 실력을 엄밀히 조사해 아무 이상이 없는 자들로만 선별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행적을 이토록 훤히 파악하다니……. 잠자코 있던 베르키스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토록 알고 싶다면 가르쳐 주지." 베르키스의 손가락이 누군가를 지목했다. 그러자 용사들의 시선이 일시에 그에게로 쏠렸다. 당사자의 눈이 급격히 뜨여졌다. 베르키스가 자신을 지명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나, 난 아냐."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 뒷걸음질치는 자는 바로 베니테스였다. 이카롯트의 궁정마법사로써 세르게이의 심복임과 동시에 데이몬을 데려오려는 작전에도 참가했던 베니테스 말이다. 물론 그를 쳐다보는 용사들도 무척 당혹해 하고 있었다. 그들이 알기로 베니테스는 결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세르게이조차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말도 되지 않소. 베니테스가 어째서." "물론 그도 몰랐을 것이다. 내가 그의 일거수 일투족, 심지어 생각까지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거, 거짓말." 듣고 있던 베니테스는 귀를 막고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것은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심지어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베르키스의 냉엄한 말은 계속 들려왔다. "그는 이미 나와 패밀리어(Familiar) 계약을 맺고 있다. 계약을 맺은 직후 기억을 지웠으므로 당시를 결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베니테스의 얼굴은 파랗다 못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드래곤과 패밀리어 계약을 맺고 있었으며 그동안 용사대의 근황을 드래곤에게 낱낱이 알려왔다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작금의 상황이 도저히 현실로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베니테스를 쳐다보던 세르게이는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의 상황이 이제 일목요연하게 드러나는군." 오래 전. 칸두라스 왕국이 멸망했을 당시 세르게이는 베니테스를 전장에 파견한 적이 있었다. 베니테스는 전투경험이 많은 워 메이지였고, 칸두라스 왕국이 멸망한 이유를 캐내는데 그 이상 적합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베니테스는 십여 명의 수하를 대동하고 칸두라스 왕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신으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매복에 걸려 수하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하지만 칸두라스 왕국의 멸망에 드래곤이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밝힐 수는 있었습니다." 그날이후 베니테스는 이상하게도 전장으로 파견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전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워 메이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당시 그의 행동이 조금 미심쩍었지만 세르게이는 별달리 상관하지 않았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베니테스는 그 이외의 일에도 충분히 쓸모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 탓에 베니테스는 궁정 마법사가 될 수 있었고, 이계의 절대자를 초빙하려는 작전에도 어김없이 참가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드래곤이 안배한 일이었다니……. 불안한 기색으로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베니테스의 시선이 세르게이와 딱 마주쳤다. 세르게이는 고개를 끄덕여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걱정하지 말게. 드래곤의 소행이었다면 자네도 어쩔 수 없었을 테니……." 그 말을 듣자 베니테스의 눈에 격정의 빛이 떠올랐다. 믿어주는 것을 보니 과연 자신이 믿고 의지할 만한 상관이란 생각도 들었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02회. 오늘 다크 메이지 1, 2권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벌써 두 번째 작품이 책으로 출판되다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많이 삭제하고 덧붙였기 때문에 통신본과는 차이가 있을 겁니다. 그럼 이만. ^^ **************************************************************************** 베니테스는 결국 참지 못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비록 기억에 없긴 하지만 그래도 드래곤의 수족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에 자기 자신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미웠던 베니테스였다. 그런 자신을 이해해 주다니……. "저, 정말 죄송합니다. 공작 전하." "죄송하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데……." 세르게이는 착잡한 기색으로 다가와 베니테스를 얼싸안았다. 베니테스는 결국 눈물을 펑펑 쏟을 수밖에 없었다. "제, 제 마음을 알아주셨으니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떠듬떠듬 말을 이어나가던 베니테스의 눈이 별안간 부릅떠졌다. 가슴팍에서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렸다. 콸콸콸. 그의 왼쪽 가슴은 이미 한 자루 장검이 관통한 채 연신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정확히 심장이 있는 위치였다. 출혈로 인해 새하얗게 질린 베니테스의 얼굴이 장검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그리 마음이 편치는 않았는지 세르게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러는 날 이해하게. 미안하네. 우리 계획을 누설한 데 대한 응징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겨, 결코 내 뜻이 아니었는데." 베니테스는 겨우 한 마디를 내뱉은 채 눈을 까뒤집었다. 털썩. 생명이 사라진 그의 몸은 바닥에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가 쓰러지는 것을 보지도 않은 채 세르게이는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는 지금 회심의 미소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지금 한 가지 사실을 머리 속에 새겨 넣고 있는 상태였다. 패밀리어 계약을 맺은 자가 죽는다면 그것을 시전한 자는 엄청난 타격을 받는다는 사실. 세르게이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충실한 부하의 명을 거둔 것이다. 패밀리어 계약. 상당히 고등한 존재가 그보다 저등한 대상을 상대로 펼치는 일종의 종속 마법이었다. 피 시술자는 패밀리어 계약을 통해 시술자에게 철저히 종속되게 된다. 또한 피시술자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공간을 뛰어넘어 시술자에게 전해진다. 위험부담 없이 주변이나 멀리 떨어진 상황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마법사들은 곧잘 패밀리어 계약을 맺곤 했다. 박쥐나 기타 눈에 띄지 않는 조그마한 짐승을 상대로 말이다. 하지만 패밀리어 계약은 일정 수준 이상의 고등한 존재에게는 시전 자체가 불가능했다. 설사 9써클의 대마법사라도 인간을 대상으로 패밀리어 계약을 맺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드래곤밖에 없었다. 하지만 패밀리어 마법에도 단점이 없진 않았으니……. 그것은 바로 패밀리어가 죽을 경우 그것을 시술한 자는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지금껏 마법사들 중에서 이유 없이 미치거나 오랫동안 몸져눕는 경우가 종종 보고된 적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패밀리어가 포식자에게 잡아먹히거나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죽은 경우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패밀리어가 고등한 존재일수록 시술자는 더욱 강한 타격을 입게 된다. 만약 패밀리어가 인간 정도의 고등한 존재라면 시술자에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이 가해질 것이 분명했다. 세르게이는 이 사실 하나만을 믿고 베니테스의 심장에 검을 쑤셔 박은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드래곤일지라도 패밀리어의 죽음에 결코 무사하진 못할 것이오." 회심에 차있던 세르게이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져버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는 채 말도 이어나가지 못했다. "패밀리어가 죽었는데 어떻게……." 놀랍게도 베르키스의 신상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조금의 고통도 겪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대신 그의 옆에 서 있던 리치 하나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연신 몸을 뒤틀어대는 것을 보니 상당한 타격을 받은 듯 했다. 묵묵히 세르게이를 쳐다보던 베르키스가 입을 열었다. "과연 인간은 교활하고 간교한 놈들이 틀림없군. 나는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리치 하나를 매개로 패밀리어 계약을 맺었다. 따라서 패밀리어의 소멸로 인한 고통은 오로지 리치에게만 집중될 뿐이다." 그 말에 세르게이의 몸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섣부른 생각 때문에 쓸만한 마법사 한 명을 제 손으로 처치해 버린 것이다. 잔인하기도 한 결단에 심지어 용사들도 세르게이를 향해 눈총을 보내고 있었다. 명석한 머리가 더 이상 돌아가지 않았는지 세르게이는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고통에 연신 몸을 꿈틀대던 리치를 힐끗 쳐다본 베르키스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이제 너희들을 시작으로 트루베니아의 인간들은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르카디아의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다. 너희 인간이란 것들은 한 마디로 존재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들이야." 물론 그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닌 경우이리라……. 참다못해 슈렉하이머가 앞으로 나섰다. "물론 당신네들이 매우 강력한 존재란 것은 인정하오. 하지만 인간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모조리 꺾지는 못할 것이오." 베르키스의 시선에 슈렉하이머에게로 와서 멎었다. "그 때의 신관이로군. 서약석을 탈취할 당시 유일하게 살아 도망갔던 신관." "그렇소. 당신들이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결과적으로 인간들은 존속할 수 있을 것이오." 쥐어짜듯 내뱉는 슈렉하이머의 음성에 베르키스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모습이 제법 볼 만 하더군. 하지만 하나 알아둘 게 있다. 너는 철저히 내 계산에 따라 움직였다는 사실을……." "뭐라고?" "결론적으로 말해서 너는 인간들을 모두 멸망시키기 위한 내 유희에 가장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인간이다." "유희?" 그 말에 분노를 느낀 것은 슈렉하이머 뿐만이 아니었다. 늘어선 용사들의 눈에서도 예외 없이 광망이 일렁였다. 인간 모두의 생사가 걸려 있는 문제를 단순한 유희라 칭하다니……. 참다못한 기사 두 명이 몸을 날렸다. "죽인다." 4대 기사는 아니었지만 비교적 실력이 있는 소드 마스터들이었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베르키스를 향해 육박해들었다. 동료들을 잃어 감정이 고조되어 있던 상황에서 유희란 말을 듣게 되자 아예 이성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베르키스는 여유 만만한 태도로 다가오는 소드 마스터들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심지어 그의 뒤에 늘어선 리치들조차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들이 지척까지 접근하자 베르키스는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서 갑자기 눈부신 빛이 폭사되었다. 그 빛은 눈 깜짝할 사이에 소드 마스터의 몸에 적중되었다. 츄팟. 달려들던 소드 마스터들의 몸이 허공에서 멈춰버렸다. 그들의 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여 있었다. 그것도 잠시. 기사들의 몸은 단계적으로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시작해서 목, 가슴까지 차근차근 말이다. 신기한 것은 그들의 몸에 걸친 대마법 갑옷까지 함께 부스러진다는 것이다. 소드 마스터 두 명은 곧 바닥에 쌓인 소복한 가루만을 남긴 채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기사 두 명을 소멸시킨 베르키스는 느릿하게 손을 털었다. "고작 인간들이 만든 조잡한 대 마법 갑옷을 믿고 나에게 덤벼들다니……." 말을 마친 베르키스는 슈렉하이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법의 위력에 용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저 정도로 마법 실력이 강하다니……. 평소 대마법 갑옷 때문에 마법 공격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역시 드래곤의 마법은 차원이 달랐다. "왜 네가 나의 유희의 주연 배우가 되었는지 설명해 주겠다. 아마 너는 그것을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말을 마친 베르키스는 손을 뻗어 다프네를 가리켰다. 그녀는 데이몬의 등에 업힌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뜻밖의 상황에 데이몬 역시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질린 듯한 표정의 용사들을 둘러본 베르키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짙어졌다. "우선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최초로 성녀를 발견한 존재가 바로 나라는 점이다." 베르키스의 설명이 진행됨에 따라 슈렉하이머의 안색은 점점 굳어 들어갔다. 그것은 늘어선 용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일이 베르키스에 의해 안배된 것이라니……. 그의 말에 의하자면 성녀의 발견은 베르키스의 명령을 받는 다크 엘프 하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했다. "트루베니아에 사라졌다고 알려진 성녀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은 나는 상당히 곤혹스러웠다. 물론 베르하젤 님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었기에 그녀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 때문에 나는 석화마법(石化魔法)을 사용, 그녀를 돌로 만들어 나의 레어에서 영면을 취하게 만들려고 했다. 인간들과 베르하젤 님이 연결되는 것을 막으려면 오로지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베르키스의 계획은 곧 수정되었다. 그것은 곧이어 다가올 드래곤들의 수면기 때문이었다. 베르키스의 시선이 얼어붙어 있는 세르게이에게로 향했다. "저 녀석의 노력은 제법 가상했다고 볼 수 있다. 핵심전력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일반 병사들만 전장에 내모는 수법 말이다. 그 방법 탓에 수뇌부를 일망타진 한 채 마무리를 오크들에게 맡기려던 우리들의 계획에 여지없이 차질이 생겨버렸다. 핵심전력들이 건재하다면 오크들이 결코 인간들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 때문에 우리들은 섣불리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너희 소드 마스터들을 모조리 처치하기 전까진 마법을 사용해서 수면기를 연장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저놈은 얄밉게도 계속해서 소드 마스터들을 전장에서 빼돌렸다. 상황을 보아 수면기 전까지 모두 처치할 수 없을 듯 보였기에 결국 나는 중대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인간들의 군대에 소드 마스터가 존재한다면 오크들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오크의 군대엔 소드 마스터를 상대할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르키스는 성녀를 이용해 세르게이가 아끼고 아꼈던 전력들을 없앨 계획을 꾸미게 된다. 베르키스는 우선 성녀를 발견한 다크 엘프를 우연을 가장해 슈렉하이머와 만나게 한다. 당시 슈렉하이머는 인간의 존속을 위해 하루가 멀다하고 동분서주하고 다니던 시기였다. 다크 엘프에게서 성녀에 대한 한 가닥 실마리를 잡은 슈렉하이머. 그는 결국 베르키스의 안배대로 행동하게 된다. "성녀를 얻게 된다면 너희들은 필시 새로운 서약석을 얻어내기 위해 이곳 노스우드로 향할 터. 때문에 나는 암암리에 이곳에 와서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일단 피해를 줄이기 위해선 너희들의 수를 좀 줄여놓을 필요가 있었기에 결계에 손을 대게 된 것이고……." 베르키스의 안배대로 함정은 완성되었다. 결계 개조작업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르게이의 명을 받은 어새신 부대가 이곳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들은 용사들이 당한 것과 동일한 과정을 거쳐 상잔하게 된다. 그리고 펠드리안에는 결계 속에 구울과 와이트가 우글거린다는 보고가 올라간다. 어새신들에게는 동료들이 어김없이 구울과 와이트로 보였기 때문이다. 용사들의 귀에 베르키스의 이죽거림이 계속 들려왔다. "한가지 더 가르쳐주지. 아르카디아와 트루베니아 사이의 장벽은 벌써 해제되었다. 너희들이 노스우드에 모습을 드러낸 직후에 말이다. 많은 힘을 소모한 때문에 크라누스 님에겐 휴식이 절실히 필요했지. 그분은 지금쯤 레어에서 한창 수면 준비에 몰두하고 계실 것이다." 모든 사실을 전해들은 용사들의 얼굴에는 핏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들이 드래곤의 안배대로 움직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또한 그들이 여기서 허무하게 전멸되어 버린다면 트루베니아는 필시 오크의 수중에 넘어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트루베니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운명은 결코 장담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크의 먹이감이 되거나 노예로 전락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용사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베르키스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너희들을 시작으로 트루베니아에서 인간이란 종족은 사라진다." 이미 스톤 골렘들이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이미 드래곤들의 가디언들은 이곳에 총 집결해 있는 상태였다. 거기에다 수백 마리의 중형 몬스터와 오크 보병들, 베르키스의 리치들까지 가세해 있는 상태. 그것들은 눈에 흉성을 띄워 올리며 서서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빠져나갈 가능성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하지만 용사들은 아무 머뭇거림 없이 적을 맞을 준비를 갖췄다. 세르게이가 비분강개한 표정으로 검을 들어올렸다.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그대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겠다. 기사들이여. 목숨을 바쳐 명예를 지키자. 비록 여기서 생을 마감할지언정 나는 부끄럽지 않은 죽음을 택할 것이다." 그 말에 기사 몇 명이 호응했다. "당신만의 잘못이 아니오. 당신은 이미 최선을 다했소." 하지만 세르게이의 눈망울엔 이미 좌절감이 짙게 배어있었다. 승산이 전혀 없는 싸움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캐스팅이 시작되었는지 드래곤들의 손에서 광휘가 동시다발적으로 피어올랐다. 하지만 용사들의 얼굴에는 추호도 겁먹은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곧 전투가 시작되었다. 스톤 골렘과 중형 몬스터들의 돌격을 필두로 와이번과 오크 보병들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그 뒤로 드래곤과 리치의 대대적인 지원사격이 이루어졌다. "끄아아악." "케르륵." 피와 살이 튀는 처절한 접전. 용사들은 최후의 일인까지 집요한 저항을 해 댔다. 정말 놀랄만한 투혼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압도적인 전력차이를 극복할 방법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생명을 소진한 용사들은 결국 하나씩 싸늘한 대지에 몸을 뉘이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03회. 전투는 끝났다. 용감히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용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들의 저항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스톤 골렘 군단의 절반이 폐물이 되어버렸고 살아남은 중형 몬스터는 고작 스물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물론 오크 보병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는 상황.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이 목적했던 존재, 드래곤은 단 하나도 죽이지 못했다. 용사들의 힘으론 스톤 골렘과 중형 몬스터로 이루어진 포위망을 뚫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노스우드 평원에서 대지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인간은 단 둘밖에 남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가?" 용사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인 데이몬이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그의 등에는 의식을 잃은 다프네가 축 늘어진 채 업혀 있었다. 이곳에서 벌어진 처참한 살육에 의해 그녀는 또다시 크나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실신하지 않았다면 더욱 고통스러웠으리라……. 신기하게도 스톤 골렘들과 중형 몬스터는 데이몬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오크 보병들조차 접근하지 않았기에 둘은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물론 데이몬은 그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다프네를 업고 있지 않았다면 자신은 벌써 여러 번이나 생을 마감했을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베르하젤의 눈과 입인 성녀만은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허무하군." 데이몬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갔다. 시선이 늘어진 세르게이의 시신에 가서 멎었다. 머리통이 떨어져나간 채 피바다 속에 누워있는 총사령관 세르게이. 스톤 골렘의 무지막지한 힘에 의해 세르게이의 머리통이 뽑혀져나가는 광경을 데이몬은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을 이어나가기 위해 그토록 발버둥쳤던 세르게이 공작의 최후였다. 수많은 병사들을 사지에 몰아넣으면서까지 동분서주했지만 그는 결국 드래곤이란 벽을 넘어설 수 없었다. 비교적 용감히 분전했지만 애당초 그의 검술실력으론 오우거 한 두 마리가 한계에 불과했다. 그는 이제 결계지역 안에서 보였던 듀라한과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물론 두 번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없을 터였다. 이카롯트의 상징이라는 4대 기사 역시 시신이 되어 나뒹구는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물론 그들의 명성은 결코 허명이 아니었다. 그들의 손에 가장 많은 스톤 골렘들이 파괴되었고 몸통이 두 조각으로 잘려나간 중형 몬스터 역시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은 힘이 한정된 인간이었다. 체내의 마나가 점차적으로 소진되자 그들은 하나씩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헬버트론은 스톤 골렘의 거대한 주먹에 짓이겨진 채 한 쪽 구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두개골이 으스러진 채 두 눈알이 튀어나온 처참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나마 그는 다행한 경우라고 볼 수 있었다. 라인델프와 프림베르그는 드래곤의 헬 파이어에 격중되어 시신조차 남기지 못했던 것이다. 사라미스의 최후 역시 끔찍했다. 그의 몸은 상체만 남아 스톤 골렘의 잔해로 보이는 돌무더기에 맥없이 걸쳐져 있었다. 하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잘린 허리 어름에서는 잘린 창자와 함께 피가 끝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무심히 쳐다보던 데이몬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곳으로 오며 얼굴을 익혔던 용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대지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인간은 오직 그만이 유일했던 것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슈렉하이머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그로 짐작되는 시체는 없었다. "라인델프처럼 흔적도 없이 타버렸나 보군." 고개를 내저은 데이몬은 실소를 지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별달리 슬픈 감정은 들지 않았다. 물론 그 역시 생을 체념하고 있던 상태. 등뒤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소리에 그는 몸을 돌렸다. 쿵, 쿵. 육중한 발자국소리와 함께 스톤 골렘 두 기가 다가왔다. 험난했던 격전을 보여주듯 돌로 된 동체가 이리저리 패여 있었다. 하지만 마법석이 무사했는지 골렘들의 움직임은 비교적 원활한 편이었다. 데이몬의 옆으로 다가온 스톤 골렘들은 육중한 팔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라는 모양이군." 데이몬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원래대로라면 접전의 와중에 틈을 보아 도망쳐야 했지만 데이몬은 결코 그럴 순 없었다. 우선 다프네를 두고 혼자만 갈 순 없었던 데이몬이었다. 지금 이순간 데이몬에게는 다프네가 자신의 생명보다도 소중한 존재였다. 또한 데리고 가는 것 역시 불가능하긴 마찬가지였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었을 뿐더러 그에겐 아이스 트롤에게서 다프네를 보호할 만한 힘이 전혀 없었다. 물론 드래곤의 손에서 빠져나간다는 자체가 가능성이 전혀 없는 발상이었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데이몬은 걸음을 옮겼다. 죽 늘어선 드래곤들의 모습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그들 틈으로 베르키스의 가디언으로 보이는 리치들이 마치 호위하듯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저번에 보았던 게덴하이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데이몬이 다가오자 베르키스는 눈을 빛냈다. 이미 그는 데이몬의 정체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베니테스를 패밀리어로 삼았던 덕택에 말이다. "네가 그 이계에서 데리고 온 소드 마스터로군. 놀라워 이계의 존재를 보게 되다니……." "………." 데이몬을 쳐다보던 베르키스의 눈엔 득의한 듯한 빛이 서려 있었다. "심심하지는 않겠군. 오백 년 후 아르카디아를 멸망시키고 난 뒤 또다시 유희를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야." 데이몬의 입꼬리가 살며시 말려 올라갔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또다시 중원을 침공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는가?" "물론. 이미 우리들은 인간이란 존재가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고 간주했다. 그것은 네가 살던 곳의 인간들에게도 틀림없이 적용되는 사실이다." 말을 마친 베르키스는 데이몬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보통 이럴 경우 인간들이 보이는 반응은 뻔했다. 하지만 상대는 결코 자신의 예상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한 번 시도해 보면 재미있겠군. 한 가지 부탁이 있다. 그곳에 사준환이란 이름을 가진 녀석이 있을 거야. 기회가 되면 그놈을 가장 처참하게 죽여줄 수 있겠나? 내겐 그놈에게 갚아줄 빛이 있으니 말이야." 뜻밖의 반응에 베르키스는 멍해졌다. 그 때문에 그는 상대가 자신에게 반말로 지껄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세르게이조차 감히 반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한 존재에게 말이다. 인간계 최강의 존재라는 드래곤이 주는 위압감은 그 정도로 컸다. "재미있군. 이런 상황이라면 다른 인간들은 너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던데 말이야." "당연하지. 나는 그들과 전혀 틀리거든." 빙글빙글 웃으며 이죽거리는 데이몬. 이미 삶에 미련을 버린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그의 광오한 태도에 결국 베르키스도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로군." "글세? 강아지치고는 좀 크지 않아?" 마치 잡아먹을 듯 데이몬을 노려보던 베르키스의 얼굴에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이미 그는 베니테스를 통해 데이몬에 대한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더불어 그가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까지도 함께 말이다. "좋다. 조금 뒤에도 네가 그 태도를 유지하는지 보겠다. 성녀를 내려놓아라." 베르키스의 말은 즉시 효과가 나타났다. 데이몬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져버렸다. "그,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물론 계획대로 해야겠지? 난 그녀를 드래곤 로드 크라누스 님의 레어로 데리고 갈 것이다. 크라누스님께서 그녀를 돌로 만드실 테고……. 그녀는 아마도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영면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안 돼" 데이몬은 비통하게 고함을 질렀다. 다프네가 돌이 되는 것을 추호도 좌시할 수 없었던 데이몬이었다. 등을 통해 다프네가 가늘게 몸을 떠는 것을 느낀 데이몬은 서슴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녀를 놓아다오. 너희들에게 결코 해가 되지 않도록 보살피겠다. 이미 난 너와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종족에게 전혀 애정이 없다. 심산유곡에 숨어들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오지 않을 테니 제발……." 베르키스의 얼굴에 배인 미소가 짙어졌다. 물론 그는 상대의 제안을 받아들일 의도가 추호도 없었다. "사랑 때문에 종족을 배신한다……. 재미있는 현상이군." "그녀는 나에게 생명보다도 소중한 존재이다. 원한다면 내가 대신 죽어주겠다. 그러니 제발 그녀를 고향으로 돌려 보내다오." 데이몬의 애원은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하지만 베르키스는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데이몬을 주시하고만 있었다. "그 어떤 고통도 감수하겠다는 뜻인가?" "그렇다. 설사 내 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겨도 좋다. 이미 나는 고통에는 단련될 대로 단련된 몸이다. 결코 네 흥미를 떨어뜨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제발……." 데이몬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베르키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나쁘진 않겠군." 데이몬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고, 고맙다." 하지만 이어진 베르키스의 말에 데이몬의 얼굴에서 핏기가 다시 사라져버렸다. "고마울 것은 없어. 성녀를 돌로 만드는 것은 예정된 일이니까 말이야. 그녀의 운명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 말을 곡해하지 말도록……. 정확히 따지자면 널 이 자리에서 죽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내 레어로 데리고 가서 차근차근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 나의 새로운 계획이고, 그것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뜻이니까." "이런 비열한……." 몸을 부들부들 떨던 데이몬이 별안간 몸을 뒤쪽으로 날렸다. 어떻게 해서든 다프네를 구하고 싶었던 데이몬이었다. 하지만 베르키스는 데이몬의 행동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절대 명령 목표제한 석화!(Power word Limitted ovject harden into stone)" 제법 긴 스펠이었지만 마법은 순식간에 구현되었다. 달아나려던 데이몬의 몸이 그 자리에 고정되어버렸다. 안간힘을 썼지만 다리는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았다. 데이몬의 얼굴에 식은 땀이 연신 흘러내렸다. "이익." 젖먹던 힘까지 다해 용을 써 봤지만 허사였다. 다리는 팔과 마찬가지로 그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숙여본 데이몬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그의 다리가 어느새 돌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정확히 허리어림 아래에서부터였다. "어, 어떻게?" "너무 힘을 쓰지 말도록……. 그러다 부서지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넌 이제부터 내 장난감이란 것을 어떠한 경우에도 명심하도록……." "끄아아." 데이몬의 입에서 결국 절규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힘이 없어 한 여자를 지키지 못한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말이다. 하지만 베르키스는 아무 동요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성녀 역시 그 방법으로 돌을 만들 것이다. 물론 크라누스님께서 직접 시전하실 것이지만 말이다." 말을 마친 베르키스는 힐끗 눈짓을 했다. 그러자 오우거 몇 마리가 데이몬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등에 업혀 있는 다프네를 내리기 위해서였다. "콰우우우." 오우거의 손길을 느끼자 데이몬은 발악을 했다. 하지만 사지를 움직일 수 없는 터라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04회. 그는 결국 눈 버젓이 뜨고 다프네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 역시 데이몬을 쳐다보며 울부짖고 있었다. 오우거의 굳센 팔에 안긴 채 연신 발버둥을 치며 말이다. "아, 아저씨." "다프네." 둘의 음성은 황량한 노스우드 평원에 널리 메아리쳐졌다. 하지만 구원의 손길은 어디에서도 미치지 않았다. 거의 반미치광이가 된 데이몬의 귀에 베르키스의 음성이 전해졌다. "그래도 넌 나에게 감사해야 한다. 만약 너희들의 임무가 성공했다면 성녀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테니까……." "뭐, 뭐라고?" 정신이 없는 와중에서도 귀가 번쩍 트인 데이몬이었다. "주신 베르하젤 님과 의사소통을 한다는 일. 그것은 하등한 인간에게 엄청난 정신적 타격을 입는 일이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나 보군. 베르하젤 님께 청원을 올리고 난 뒤 성녀는 그 즉시 생명이 다하게 된다. 모르긴 몰라도 이 사실은 아마도 인간들 대다수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거, 거짓말……." 치를 떨며 연신 고개를 뒤흔드는 데이몬을 보자 베르키스의 입가에 또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데이몬의 반응이 무척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작별 인사나 해 두도록. 너희 둘은 이제 영원히 만날 수 없을 테니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데이몬은 고개를 돌렸다. 다프네 역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다프네의 슬픈 눈빛을 보자 데이몬의 가슴은 마치 생으로 도려내어지는 듯 아려왔다. "다, 다프네……." "이렇게 헤어지게 되는 군요. 아저씨." 이미 체념한 듯 다프네는 처연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꽃잎 같은 입술이 미미하게 달싹거렸다. 핏기가 하나도 없는 입술이었다. "아저씨랑 꼭 함께 살고 싶었는데……." 그 말을 남기고 다프네는 멀어져갔다. 오우거의 팔에 끼인 채 말이다. 그것을 보자 데이몬의 눈꼬리가 찢어지며 핏물이 점점이 배어 나왔다. "다프네. 으아아아아." 하지만 그의 절규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베르키스가 손을 들자 데이몬은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상당히 시끄러운 녀석이군. 과연 참을성이 얼마나 되는지 기대해 보지." 말을 마친 베르키스는 고개를 돌렸다. 이미 가디언들은 이곳을 떠날 준비를 마쳐둔 상태였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드래곤들은 이미 본래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사실 그들은 본체로 현신한 상태에서 이리로 날아온 것이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이곳으로 공간이동을 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살아남은 오우거와 트롤들이 공포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그들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드래곤의 등에 올라타는 경험이 그리 달가울 리가 없었다. 반면 할 일을 잃은 스톤 골렘들은 순차적으로 원래의 형태인 돌로 돌아가는 상태였다. 다프네를 든 오우거가 화이트 드래곤의 등에 올라타는 것을 확인한 베르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누스님께 잘 호송하도록 하라. 결코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화이트 드래곤은 곧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것을 필두로 드래곤들이 여기저기서 공중으로 치솟고 있었다. 시신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평원을 다시 한 번 쓸어본 베르키스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뒷일은 오크들에게 맡기고 편안히 수면기에 들어가야겠군. 오백 년 후에 있을 아르카디아 정벌에 대비하려면 충분히 수면을 취해야 할 테니……." 두리번거리던 그의 시선에 데이몬의 모습이 들어왔다. 리치 둘이 늘어진 그의 몸을 들쳐 메고 다가오고 있었다. "수면기에 들어가기 전에 일단 저 녀석을 먼저 손보는 것이 좋겠군. 내 정신계 마법에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군?" 묵묵히 뇌까리던 베르키스의 몸이 붉게 물들며 급격히 커지고 있었다. 쓰쓰쓰. 순식간에 거대한 레드 드래곤의 형상으로 변한 베르키스는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폴리모프를 끝내자 리치들이 다급하게 베르키스의 등에 탑승했다. 의식을 잃은 데이몬과 함께 말이다. 리치들을 실은 베르키스는 곧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곤 자신의 레어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노스우드 평원은 다시 적막감 속에 젖어 들어갔다. 주인을 잃은 투구와 장검이 사방에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고 그 사이에 놓인 용사들의 시신을 달빛이 밝게 비추고 있었다. 최후까지 분전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용사들의 넋을 위로하며 말이다. "으아아악." 데이몬의 입에선 그칠 새 없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오우거가 양손으로 그의 몸을 움켜쥐고 세차게 쥐어짜고 있는 상황이었다. 칠공에서 피가 마치 분수처럼 솟구쳤다. 심지어 땀구멍을 통해서도 피가 스멀스멀 배어 나오고 있었으니 그의 몸에 가해지는 압력이 얼마 정도인지 익히 짐작할 만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의식이 멀쩡한 것이 정말 원망스럽기만 했던 데이몬이었다. 고통이 그 정도로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흐으으." 기진맥진한 나머지 비명소리는 점차 신음소리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전신을 통해 가해지는 고통은 여전했다. 그 정도 고통을 겪었다면 감각이 무뎌질 만도 했지만 신경을 통해 전해지는 통증은 조금도 가실 줄 몰랐다. 아무래도 모종의 마법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우거의 엄청난 손아귀 힘에 의해 전신이 으스러지는 끔찍한 경험. 데이몬은 벌써 한 시간 가량이나 오우거에게 쥐어짜지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 처절한 고통으로도 데이몬의 기는 꺾이지 않았다. 고통으로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에서도 그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존재에게 말이다. "크, 크으. 네놈을…… 컥." 오우거의 손아귀가 또다시 조여들자 숨이 턱 막혀버린 데이몬은 연신 도리질을 쳤다. 전신의 세포들이 숨을 쉴 수 없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콱 눌려진 허파는 도저히 공기를 빨아들일 여력이 없었다. 그의 얼굴이 점차 납빛으로 변해갔다. 조금만 더 지체된다면 그는 필시 생을 다하게 되리라. 하지만 그의 숨이 끊어지기 바로 직전 차가운 일성이 지하 광장에 메아리쳐졌다. "그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데이몬의 몸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오우거가 급작스럽게 손을 놓아버린 것이다. 머리가 둘 달린 흉포한 트윈 헤드 오우거가 발치에 나동그라진 데이몬을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끄으으." 데이몬은 눈을 까뒤집은 상태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풀려나긴 했지만 오랜 시간 눌린 나머지 허파가 공기를 빨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허파 뿐만이 아니라 그 외의 장기들도 제 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막 숨이 넘어가려 하는 데이몬. 하지만 그가 절명하기 전에 눈부신 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이름하여 힐링(healling) 마법이었다. 생물을 치료해서 되살아나게 하는 고급 마법이긴 하지만 데이몬에겐 정말 가증스러울 수밖에 없는 빛이었다. 사라락. 몸을 뒤덮은 휘황찬란한 빛 속에서 데이몬의 몸은 점차 치료가 되어가고 있었다. 산산이 으스러진 전신의 뼈마디가 제자리에 가서 붙고 터진 혈관이 흔적도 없이 아물었다. 파열된 신체 장기 역시 원래대로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 고통 역시 잦아들었다. 하지만 데이몬의 얼굴은 일그러진 그대로였다. 또다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의 그 냉랭한 음성이 또다시 귓전을 맴돌자 데이몬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치료가 끝났으니 또다시 시작해야겠지?" 그와 동시에 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쿠르르르. 데이몬은 이를 지긋이 깨물었다. 공포감이 역력히 배어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러나 입을 통해 나오는 음성은 판이하게 달랐다. "이번에는 스톤 골렘인가?" "잘 아는군. 오우거보단 손속이 조금 매울 거야."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음성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한 번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한 태도였다. "얼마나 매운지 한 번 기대해 보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청난 충격이 쾅하고 뒤통수를 강타했다. 데이몬의 몸은 마치 실 끊어진 연처럼 허공에 붕 떠올랐다가 바닥에 냅다 쳐 박혔다. "끄으으."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일어서려 버둥거리던 데이몬의 얼굴로 뭔가가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전체가 돌로 이루어진 스톤 골렘의 주먹이었다. 퍼퍼퍽. 부러져나간 이빨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데이몬은 안면이 형체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진 채 뒤로 나가떨어졌다. 으스러진 코와 입을 통해 선혈이 낭자하게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지능이 없는 스톤 골렘은 조금도 사정을 보아주지 않았다. 으지직. 스톤 골렘에게 밟힌 데이몬의 왼쪽 다리가 그대로 짓뭉개졌다. 부릅뜬 데이몬의 눈에 핏발이 섰다. 비명을 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건만 통증은 이미 그가 참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 콰직. 콰직. 계속해서 발을 짓찧고 있는 스톤 골렘의 아래에서 데이몬의 몸은 말 그대로 곤죽이 되어가고 있었다. 물론 머리와 가슴 등의 치명적인 부위는 제외하고 말이다. 척추가 부러져나가고 전신의 뼈가 아예 가루가 되어갔다. 마침내 데이몬이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자 예외 없이 예의 그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만." 눈을 까뒤집은 채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 데이몬. 근육이 모조리 결딴난 터라 그의 몸은 비정상적으로 뒤틀려 있었다. 도저히 살아날 수 없을 듯 보이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찬란한 빛이 그의 몸을 뒤덮자 치유의 과정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점점 치료되고 있는 데이몬의 모습을 지켜보던 음성의 주인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조금 늦었군. 하마터면 부활(Resurrection.)을 써야 할 뻔했으니 말이야." 입가에 만족스럽다는 듯한 미소를 떠올리고 있는 자는 바로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였다. 그의 앞에는 데이몬이 마치 죽은 듯 늘어져 있었다. 치료가 완전히 끝났는지 그의 몸은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말라붙은 팔은 그대로였지만 말이다. 아직까지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깨울 마음이 없는 듯 베르키스는 섣불리 마법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인간은 그가 처음 겪어보는 훌륭한 실험대상이었던 것이다. 이런 장난감을 성급하게 잃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베르키스는 잠정적으로 실험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이 녀석은 지금까지 실험해 본 인간들 중에서 참을성과 의지가 단연 으뜸이라고 할 수 있겠군. 두 번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우니 오늘은 이만 아껴둬야겠지?" 이미 베르키스는 데이몬을 대상으로 일 주일 동안이나 혹독한 고문을 퍼부었다. 그의 마법 실력이라면 대상이 숨만 멎지 않는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치료를 할 수 있었으므로 고문은 추호도 사정을 보아주지 않고 진행되었다. 빈사상태에까지 고문당했다가 치료되는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되었고 그 과정에서 데이몬이 보인 반응은 베르키스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데이몬은 도저히 인간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인내력을 보였던 것이다. 베르키스는 지금껏 인간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 결과를 떠올려보았다. "이럴 경우 통상적인 인간들은 하루까지는 살려달라는 애원을 한다. 하지만 이틀을 넘어가면 변하지. 도리어 죽여달라고 말이야. 사흘이 넘어가면 십중팔구는 미쳐버린다. 하지만 이놈은 달라. 꼬박 일주일 동안을 고문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치기는커녕 나에게 변함 없이 적개심을 보이고 있지." 레어로 잡혀온 뒤 데이몬은 우선 베르키스 휘하의 고블린 고문술사들에게 맡겨졌다. 고블린 고문술사(拷問術士)들. 베르키스의 휘하에서 전문적으로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방법만을 연구한 전문가들이었다. 그런 만큼 그들은 설사 죽은 시체의 입이라도 열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고문실력은 단 한 사람 데이몬에게 만은 통하지 않았다. 손톱 밑에 못을 박고 피부를 벗긴 뒤 소금을 뿌려도 데이몬은 신음소리 한 마디 흘리지 않았다.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모든 종류의 고문을 죄다 가했어도 데이몬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미 고통에 만성이 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 혹독한 분근착골도 여러 번 겪어보았고, 칠종단금술에 의한 고통마저 당해본 상태였기 때문에 데이몬의 참을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도리어 고문하는 고블린들이 먼저 지쳐 두 손을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모습을 본 베르키스는 방법을 바꿨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05회. 엄청난 힘을 가진 중형 몬스터와 스톤 골렘으로 하여금 가장 원초적인 방법, 즉 무차별적인 구타를 통해 데이몬의 기를 꺾어버리려 한 것이다. 고문을 위해 특히 힘이 좋은 트윈 헤드 오우거가 넷이나 선발되었다. 거대한 스톤 골렘 또한 새로이 만들어졌다. 가디언 전원이 리치로 채워져 있던 터라 베르키스는 마법을 써서 고문 전용 스톤 골렘을 새로 만들어내야 했다.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해서 베르키스는 이틀만에 데이몬의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얻은 것은 오로지 비명소리와 신음소리 뿐이었다. 놈은 여전히 기가 꺾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치지도 않는 데다 정신만 차리면 자신을 향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어 대었다. 정말 호기심이 도는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 때문에 베르키스는 수면에도 들어가지 않고 거듭 실험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물리적인 고문은 그만 끝내야겠군. 이번에는 정신 마법을 한 번 사용해 볼까? 놈이 과연 얼마나 견딜지 궁금하군. 일전에 실험해 본 인간들은 채 한 시간도 지나기 전에 미쳐 버렸는데 말이야." 베르키스가 손짓을 하자 오우거들이 다가와 데이몬을 집어들었다. 그들은 곧 데이몬을 베르키스의 정신마법 실험실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 이곳은……." 정신이 든 데이몬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눈엔 어리둥절한 빛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만 해도 오우거와 스톤 골렘에 의해 전신이 자근자근 다져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판이하게 다른 곳으로 와 버린 것이다. 사방은 온통 흰 안개가 가득했다.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데이몬은 우선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예상했던 대로 몸은 이미 깨끗하게 치료가 끝나있는 상태였다. 그것을 확인하자 데이몬은 또다시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런 개자식." 베르키스에 대한 분노가 물밀 듯 밀려왔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에게 고문을 가한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베르키스는 자신에게서 다프네와 스승 도일을 빼앗아간 존재였다. 이미 데이몬은 돌이 되어버린 다프네의 모습을 똑똑히 목격한 바 있었다. 데이몬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가할 작정으로 베르키스가 의도적으로 마법을 사용해서 그곳의 영상을 투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데이몬은 하늘이 꺼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에 슬픈 표정이 가득한 상태 그대로 다프네는 돌이 되어 있었다. 크라누스의 레어 한 귀퉁이에서 말이다. 기억을 떠올린 데이몬의 얼굴에 점차 살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드래곤이란 종족을 향해 발산하는 순수한 증오심이었다. "네놈들에게 응징을 할 수 있다면 마왕에게 혼을 팔아서라도 ……. 이를 갈며 주위를 둘러보던 데이몬의 눈이 급격히 뜨여졌다. 가까이 다가와 자신을 노려보는 한 존재를 쳐다보고 난 뒤의 일이었다. 그는 데이몬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였다. 바로 그를 배신한 배교 총사 사준환이었던 것이다. 사준환은 지금 두 눈 가득 비웃음을 담고 데이몬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 네놈이 감히……." 말을 하다 말고 데이몬은 냅다 몸을 날렸다. 감정이 이성을 지배해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행동이었다. 지금 데이몬의 뇌리에는 오로지 상대를 죽여야겠다는 생각 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준환의 면전에 접근한 데이몬은 손을 뻗어 그의 목젖을 거머쥐려 했다. 하지만 장작개비처럼 말라비틀어진 팔은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런." 그때서야 힘이 없음을 절감한 데이몬은 얼굴을 참혹하게 일그러뜨렸다. 순간 숨이 콱 막히는 듯한 통증이 복부에서 전해졌다. "크윽." 데이몬은 허공에 붕 떠서 사정없이 바닥에 구겨졌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와중에도 귓전을 통해 이죽거리는 사준환의 음성이 전해졌다. "완전히 폐물이 되었구려. 독고 교주. 아마도 나에 대한 복수는 물 건너간 일일 듯 하오이다." 데이몬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이놈! 어디서 아가리를……." 말이 끝나기도 전에 턱에서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누군가가 발길질로 그의 얼굴을 차 올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무엄한 놈. 감히 교주님에게……." 부서진 이빨과 핏물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킨 데이몬의 눈빛이 암울하게 젖어들었다. 사준환의 곁에는 어느새 그의 심복들이 다수 모여든 채 데이몬에게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자신의 손에 의해 죽은 적미당주와 음명당주도 끼여 있었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너, 너희들은 내 손에 죽었는데……." "죽일 놈. 눈 버젓이 뜨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 무슨 망발이냐." 사준환과 그의 수하들은 곧 데이몬에게 달려들었다.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데이몬에게 무자비한 린치가 가해졌다. 퍽퍽퍽 내공이 깃든 주먹과 발이 날아듬에 따라 데이몬의 몸은 쉴 새 없이 들썩거렸다. 하지만 데이몬의 의식은 무자비한 구타 속에서 도리어 냉철하게 돌아오고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허상이로군. 사준환 놈이 이곳에 나타날 턱이 없는 데다, 내 손에 죽은 놈들이 살아 돌아올 리가 없으니……. 또다시 드래곤 놈의 소행인가?' 그는 억지로 전신에 가해지는 통증을 잊으려 애썼다. 상황을 봐서 이것은 드래곤이 정신마법을 써서 연출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사술에 높은 조예가 있는 데이몬은 금세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무념 무아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유일한 대비책이었다.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모두가 허상이었고 그 모든 것에 반응을 한다면 자신의 정신과 자아는 얼마 견디지 못하고 파괴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떠올린 데이몬은 가급적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다. 물론 전신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마치 현실인 것처럼 생생했고 사준환에 대한 증오심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솟구쳐 올랐지만 그는 사력을 다해 정신을 가다듬었다. '가증스런 드래곤 놈들에게 복수를 하려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그의 노력이 성공했는지 전신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일각도 견디기 힘든 과정이었지만 칠종단금술에 단련된 그의 의지력이 많은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데이몬이 감당해야 하는 시련은 끝이 없었다. 사준환의 모습이 사라지고 이번에는 쌍수마존 위청이 살기를 띤 채 자신에게 달려들었다. 데이몬의 손에 의해 이승을 하직한 마교 장로 위청 말이다. "이노옴! 감히 나에게 암습을 가했겠다?" 위청의 성명절기인 장공이 데이몬의 가슴팎을 단숨에 으스러뜨렸다. 웅혼한 그의 내력이 전신 혈맥을 헤집고 다니는 통증은 정말 끔찍할 정도였다. 하지만 데이몬은 마냥 참았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 복수를 하려는 일념으로 그는 말 그대로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지금껏 그의 손에 죽은 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심지어 어린 시절 앙숙이었던 모용진까지 나타나 침을 뱉으며 발길질을 하는 상황이었다. 그의 손에 당한 오우거와 트롤들마저 나타나 몸을 짓밟았다. 그의 몸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난자되었고 짓밟혔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 모든 과정을 견뎌냈다. 복수의 일념 하나로 모든 과정을 극복해낸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견디기 힘든 상황이 전혀 없진 않았으니……. "성아야. 어찌 네가 날……." 가슴이 으스러진 참혹한 모습으로 나타난 자는 바로 소림성승 혜정이었다. 비록 자신에게 칠종단금술이란 금제를 가한 존재이긴 하지만 그 이후 유일하게 데이몬에게 인간적으로 대해준 자였다. 그런 혜정이 나타나 원망스런 눈빛을 보내는 데에는 데이몬도 배겨날 수 없었다. 데이몬의 얼굴이 극도의 격정으로 일그러졌다. "아, 아닙니다. 제겐 결코 성승을 해할 의도가 없었습니다." "거짓말 말아라. 넌 이미 나에게 뿌리깊은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느냐?" 일그러진 얼굴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다가오는 소림성승. 데이몬은 하마터면 베르키스의 술수에 말려들 뻔했다. 이성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바로 그의 정신이 파괴되는 첩경이었으므로. 다행히 위기를 넘긴 것은 그가 이미 소림성승에 대해 철저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덕택이었다. '성승께서는 나에게 결코 이럴 분이 아니다.' 소림성승에 대한 철저한 신뢰로 인해 데이몬은 마침내 심마(心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소림성승의 인품을 믿지 않았다면 그는 벌써 미쳐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고난은 그것뿐만이 아니었으니……. "데이몬. 날 구해다오. 나, 나는 너무나 괴롭단다." 신체의 반이 타버린 끔찍한 모습으로 나타난 도일. 그는 애절한 눈빛으로 데이몬에게 절실히 도움을 청했다. 마계의 악마들이 새카맣게 달라붙어 도일의 남은 육신을 파먹고 있는 상황. 하지만 데이몬은 냉랭하게 그를 떨쳐버렸다. "너는 스승님이 아니다. 스승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렇게 말씀하실 분이 아니다." 데이몬이 부정하자 도일의 모습은 곧 사라졌다. 하지만 뒤이어 나타난 존재로 인해 데이몬의 인내심은 한계에까지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날 사랑한다고 했죠? 그런데 왜 날 돌이 되게 내버려뒀나요." 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나타나서 데이몬을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었다. 목 아래 부분이 돌이 되어 있는 상태의 다프네였다. 한없이 맑았던 눈빛은 간 곳 없이 그녀의 얼굴에는 오로지 표독함만이 가득했다. 그녀를 보자 데이몬의 얼굴엔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져버렸다. "미, 미안하다. 다프네." "그렇게 능력이 없었나요? 그러고도 날 사랑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나 보죠?" "………." 데이몬의 가슴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가 자신에게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질시 어린 시선을 퍼부어도 단 한 사람만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데 그 한 사람마저 지금 자신을 냉대하고 있다니……. "다, 다프네 너마저……." "흥! 벌레만도 못한 사람." 냉랭한 코웃음소리와 함께 다프네가 고개를 돌렸다. 맥이 빠진 나머지 데이몬은 그 자리에 털썩 허물어졌다. 도무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데이몬이었다. '차라리 죽자. 그것이 나에게 도리어 편할 테니…….' 점점 마음을 굳혀 가는 데이몬의 앞에 또다시 다른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면면을 따져보아 하나도 가볍게 생각할 만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데이몬의 입이 벌어지며 힘없는 음성이 튀어나왔다. "종리령. 너, 너희들은 수호마왕군?" 복수를 다짐했던 과거의 수하들이 나타나 다프네의 곁에 죽 늘어섰다. 그 중에는 오래 전 명을 달리했던 아버지, 독고무기도 끼여 있었다. 원망 어린 시선들이 데이몬을 향해 집중되었다. 한 마디 말도 없었지만 시선들에는 무수한 질책이 섞여 있었다. '아들아. 왜 나의 복수를 해 주지 못했느냐?' '정말 실망스럽소. 총수. 우리의 복수마저 해 주지 못할 정도로 무능했었소.' 시선을 견디다 못해 데이몬은 귀를 막아버렸다. 무능했던 자신이 미워 견딜 수가 없었던 데이몬이었다. 차라리 지옥인들 이보다 더 고통스럽지 않을 듯 싶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미치지 않는 것이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 데이몬은 귀를 틀어막은 채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차라리 날 그냥 내버려 둬. 복수고 뭐고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 제발……." 뇌리가 하얗게 비어 가는 것을 느끼며 데이몬은 의식을 잃어갔다. 두 번 다시 깨고 싶지 않다는 것이 데이몬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대로 생을 마감했으면.' 하지만 그는 결코 미칠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이질적인 기운 때문이었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06회. 안녕하세요. 오늘은 좀 짧죠? 500년의 차이를 두고 벌어지는 일이라 부득이 여기서 잘랐습니다. 연중 없이 바로 들어갈 생각이니 이해해 주시길……. 사실 여기서부터가 제가 원래 구상했던 내용입니다. 500년 후의 일이기도 하지요. 지금까지의 내용을 그저 소설 전개에서 필요한 양념이라고 치부해 버리면 너무한가요?……….^^ 여러분들께서 무척 애석해하시던 데이몬의 능력 부족은 이제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내일이면 무척 강해진 데이몬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보기엔 강해진 내용이 별로 허황되게 느껴지진 않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어요. 이후의 내용을 기대해주셨으면 합니다. 참 그리고 북박스 독자님들께서 많이 어리둥절하셨을 겁니다. 100회에서 104회까지의 분량이 연재되지 않아서 말입니다. 공사 중이라 올릴 수 없었고, 따로 올리자니 이상할 것 같아서요. 그러니 라니안이나 소엠 카페, 하이텔에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만……. **************************************************************************** "정말 연구해 볼만한 물건이야." 연신 꿈틀거리던 데이몬의 몸이 축 늘어지자 터져 나온 일성이었다. 데이몬을 쳐다보던 베르키스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 배어있었다. 맹세코 그는 저토록 의지가 강한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단 한시간도 견디기 어려운 정신계 마법을 데이몬은 장장 일주일 동안을 버텨냈다. 도무지 인간이라고 보기 어려운 정신력이었다. "일주일이라……. 설사 드래곤이라 해도 그 정도를 버틸 수 없을 텐데 말이야." 베르키스의 얼굴에는 몹시 아쉽다는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시간이 있다면 저 인간이 과연 얼마나 버티는지 실험을 해보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이젠 수면기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이미 다른 드래곤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500년 간의 깊은 잠에 들어간 상태. 뛰어난 마법 실력 탓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지만 아무리 베르키스라 해도 더 이상은 힘들어 보였다. 편법으로는 결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는 법. 베르키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뒤흔들었다. "아쉽군. 500년 동안 수면을 취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일주일 동안 데이몬에게 가해진 정신계 마법. 평범한 인간이라면 단 한시간도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위력이 가공한 마법이었다. 인간의 정서를 극도로 피폐하게 만드는, 그리하여 정신공황의 상태에까지 몰고 가는 공포의 마법을 저 인간은 장장 일주일이나 버텨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인간의 뇌리를 장악하고 있는 이종의 술법 때문이란 사실을 베르키스는 결코 알 수 없었다. 평상시에는 살심을 억제하지만 정신이 피폐해질 경우 칠종단금술이 전력을 다해 시술자를 보호한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사실이었다. "인내심에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로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베르키스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다소 낯익은 인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쏘아보고 있는 한 명의 리치. 바로 게덴하이드였다. 데이몬에 의해 생명력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으니 적대감을 보일 만도 했다. 잠시 고개를 뒤흔든 게덴하이드는 마치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음성을 토해냈다. "하지만 베르키스 님. 놈은 정말 위험한 존재입니다. 차라리 후환을 없애기 위해 바로 처치해 버리심이 옳은 판단인 듯 합니다."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3써클의 유저인 데이몬에게 본체가 소멸 당하는 경험을 겪었던 터라 데이몬을 쳐다보는 게덴하이드의 시선은 결코 곱지 못했다. 벌써 100명이 넘는 인간 포로들에게서 생명력을 빨아들였지만 그의 몸은 아직까지 정상이 아니었다. 때문에 데이몬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극히 지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베르키스는 애당초 휘하 가디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성품이 아니었다. "게덴하이드. 판단은 전적으로 내가 하는 것 같은데……." 갑자기 냉랭해진 목소리에 게덴하이드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주제넘게……." 게덴하이드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복종한다는 표정이 일렁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미 베르키스의 세뇌마법에 의해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지." 그의 반응에 베르키스는 마음이 다소 풀렸다. 만약 명령을 내린다면 게덴하이드는 설사 대상이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일지라도 서슴없이 공격을 가할 것이다. 그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베르키스는 단정적으로 내뱉었다. "놈을 리치로 만들어서 나의 가디언으로 삼을 것이다. 그리하여 오백 년 동안 나의 레어를 지키게 할 것이다. 비록 놈의 의지력이 가상하긴 하나 나의 세뇌마법을 감당하진 못할 것이다. "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베르키스 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게덴하이드의 지극한 태도에 유쾌해진 베르키스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잠시 후 세뇌마법을 시술할 것이다. 너는 이놈을 리치로 만들기 위한 과정에 착수하라. 수면기에 들어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직각으로 꺾은 뒤 몸을 날리는 게덴하이드를 보며 베르키스는 만족스런 미소를 떠올렸다. 세뇌마법을 시술한다면 놈 역시 게덴하이드와 같은 태도를 보일 것이 분명했다. 그로 하여금 오백 년의 기간동안 자신의 레어를 지키게 한 다음 유희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실험은 언제 보아도 유쾌한 경험이었다. "앞으로 십 년 이내에 트루베니아는 오크 족의 수중에 들어갈 것이다. 다음은 아르카디아 차례인가?" 이미 트루베니아의 인간들은 수뇌부를 깡그리 잃어버린 상황. 몇 몇 군주들이 살아있긴 하지만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베르키스의 생각에 트루베니아가 오크의 수중에 들어오는 것은 말 그대로 시간문제였다. 또한 천년 동안의 충성을 맹세한 터라 오크 족이 아르카디아 정벌에도 역시 혁혁한 역할을 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오백 년 후 또 다시 유희가 시작되겠군. 심심하진 않겠어." 베르키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세뇌마법의 캐스팅이 완료된 상황. 마법이 실행되면 데이몬이란 인간의 태도는 판이하게 바뀔 것이다. 오직 자신만을 섬기는 충실한 종복으로 말이다. 베르키스는 그 사실을 결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우선 대상의 몸 상태를 살폈다. 베르키스의 눈썹이 찡긋했다. "녀석, 헤이스트를 남발하고 몸을 함부로 굴린 때문에 생명력이 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군. 리치로 만들지 않는다면 고작 6개월도 버티지 못했을 터였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베르키스의 손에서 눈부신 광휘가 솟아올랐다. 쓰쓰쓰. 광휘는 순식간에 데이몬의 머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미 옆에서는 게덴하이드가 데이몬을 리치로 만들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두고 있었다. 베르키스는 의식을 잃은 데이몬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그 와중에서도 광휘는 계속해서 데이몬의 머리로 빨려들고 있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오백 년 후에도 날 실망시키지 않길 바란다." 베르키스의 얼굴에는 모종의 기대감이 짙게 배어있었다. 마법의 효력이 다했는지 의식이 가물가물해져왔다. 잠시라도 빨리 수면기에 접어들기 위한 일념으로 베르키스의 마음이 급해졌다. 다행히 세뇌의 과정은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졸립군." 베르키스는 힘을 내어 마나를 재배열했다. 베르키스의 예상은 결국 적중되었다. 로젠가르트력 247년. 트루베니아 대륙은 마침내 오크 족의 수중에 완전히 장악되었다. 베르키스를 포함한 드래곤들이 모조리 수면기에 들어간 지 단 5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펠드리안이 함락되는 사건을 마지막으로 트루베니아는 한 치도 남김없이 오크 족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남은 군주들을 비롯한 병사들이 최후까지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총사령관을 위시한 정예 전부가 노스우드에 묻혀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배겨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살아남은 인간들은 예외 없이 죽거나 오크 족의 노예가 되어야 했다. 일부 인간들은 위험을 감수한 채 조각배에 몸을 싣고 아르카디아로 향했다. 살기 위해선 오로지 그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뜻을 이룬 인간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비록 크라누스의 방어벽이 효력을 상실하기는 했지만 두 대륙 사이의 바닷길은 결코 만만한 항로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배들은 백여 일에 이르는 오랜 항해를 극복하지 못하고 침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트루베니아 대륙은 이제 오크의 것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그것은 오백 년의 세월 동안 변함 없이 지속될 것이 분명했다. [다크 메이지 1부 끝]. [다크메이지 2부]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2부가 시작되는군요. 모쪼록 재미있어야 할텐데…… 며칠 전에 3권 원고가 들어갔습니다. 따라서 통신상의 글을 일정 분량 삭제하려고 합니다. 기한은 내일 자정쯤 생각하구요 분량은 99회까지입니다. 그럼 이만…… *************************************************************************** 햇살이 무척 따사롭게 내려 쬐는 날이었다. 때는 겨울이 지나고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시기. 겨울을 보낸 뱀과 개구리가 동면에서 깨어나 보금자리에서 여기저기 기어 나오고 있었다. 만물의 생동감이 그야말로 절정에 이른 상황이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산등성이에 몸을 숨긴 채 먼 산을 쳐다보고 있는 몇 명의 존재들에겐 봄의 생동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잔뜩 긴장한 채 건너편 산을 주시하고 있는 이들. 그들은 이미 트루베니아의 주인 자리에서 밀려난 종족들이었다. 오크 족의 보호 아래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명맥을 이어나가는 인간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에서 무기력함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추구하려는 자신감이 얼굴에서 역력히 배어나고 있었다. 수는 정확히 네 명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몸을 빙글 돌렸다. "과연 우리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까……." 말을 건 자는 스물 남짓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푸른 색 눈동자가 금발 머리와 어우러져 상당히 수려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몸에는 무척 견고해 보이는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두께가 얇아 상당히 가벼워 보이는 갑옷이었다. 갑옷에 그려진 기하학적인 문양과 허리에 찬 검집을 보니 트루베니아의 인간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트루베니아의 인간들에게 이미 무기의 소지는 오크에 의해 엄격히 제한되었던 것이다. 소수의 저항군 빼고는 말이다. "걱정하지 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계획이니까……. 거기에다 우리에겐 강력한 조력자가 있잖아?" 말을 받은 이 역시 스물 남짓 보이는 젊은 기사였다. 그곳에는 그들 외에도 머리를 짧게 자른 젊은 아가씨와 로브를 걸치고 있는, 마법사로 보이는 이도 있었다. 서른 정도로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는 마법사였지만 그들은 서로 말을 놓고 있었다. "이봐 페트릭. 감히 드래곤의 레어로 접근할 생각을 하다니, 네놈의 담량도 정말 보통이 아니야." 마법사의 감탄에 처음에 말을 꺼냈던 금발머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오우거 따윌 잡아가 봐야 팔라딘 자격을 취득하는 것은 요원하다고 봐야 하지. 최근 들어 팔라딘 자격심사가 무척 엄격해졌단 말이다. 오우거는 운반하기도 힘들뿐더러 흔해빠졌기 때문에 제대로 인정도 받지 못해.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오우거보다 더욱 강력한 몬스터를 잡아가야 한단 말이지. 만약 드래곤 레어의 가디언을 잡아간다면 우리 모두는 틀림없이 뜻을 이룰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이건 너무 위험한 일이야." "하지만 팔라딘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지." 팔라딘(Paladin)이란 말을 듣자 그들의 눈에는 열망의 빛이 일렁였다. 팔라딘 자격을 취득하는 일이 그들에겐 그만큼이나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사실 다른 대륙에서 건너온 자들이었다. 바다 건너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 크로센의 수련 기사들이었던 것이다. 인간들의 영웅 크로센 대제가 그의 이름을 따서 아르카디아에 세운 제국. 크로센 대제가 트루베니아, 아르카디아 두 대륙에 끼친 영향은 정말 크다 할 수 있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기사들에게 소드 마스터가 되는 길을 크게 열어놓았다는 점이다. 때문에 과거엔 그 찾아보기 힘들었던 소드 마스터를 요새는 심심치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크로센 대제의 비법대로 수련에 몰두한다면 오랜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거의 틀림없이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따라서 아르카디아에는 나름대로의 서열이 따로 정해졌다. 지금까지는 검기(劍氣)와 검강(劍岡)중 하나만이라도 시전할 수 있다면 소드 마스터로 칭해졌지만 이제부터는 검강을 전개할 수 있는 수준까지만 소드 마스터로 칭해지게 된 것이다. 검기를 더욱 더 응축시켜 검에서 일정 길이 이상 뽑아낼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자들, 즉 검강을 전개할 수 있는 자만이 소드 마스터란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 이외의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기사들에게는 따로 팔라딘이란 명칭이 주어졌다. 팔라딘(Paladin). 한 때는 교회에 소속된 성기사를 지칭하는 말로 여겨졌다. 하지만 어원으로 따지자면 원래는 실력이 뛰어나고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수준 높은 기사들을 총칭하는 말이었다. 팔라딘이란 칭호가 아르카디아 대륙에서 새로이 정립되게 된 과정은 바로 이러했다. 지금까지의 소드 마스터 중 수준이 낮은 자는 팔라딘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기사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햐! 팔라딘이 된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군." "실력이 있어도 쉽사리 될 수 없는 것이 팔라딘인데 말이야." 오크 족의 손에 의해 패망되어버린 트루베니아와는 달리 아르카디아의 인간들은 시간이 갈수록 힘이 강해졌다. 혈통과 신분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트루베니아와는 달리 아르카디아에서는 오로지 실력만이 제일이었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기사들이 작위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곳에 있는 젊은이들 역시 그런 기사들 중 몇이었다. 그들은 필생의 소원이던 팔라딘 자격 취득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그런데 트루베니아엔 더 이상 인간이 살지 않는 거야? 레이몬드?" 패트릭의 말에 레이몬드라고 불린 마법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는 않아." 사실 그는 젊은 기사들보다 열 살이나 연상이었다. 하지만 기사들과 학부 동기였기 때문에 결코 나이를 내세울 수 없는 처지였다. 오로지 수련에 시간이 걸리는 마법을 택한 것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크 족의 노예로 살아가는 인간들이 얼마간 있다고 들었어. 그 외에 아직까지 저항하는 자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힘이 극히 미미한 실정이지." "당연한 결과겠지? 멍청한 자들." 싸늘하게 내뱉는 기사들의 얼굴엔 예외 없이 경멸감이 서려있었다. 아르카디아에서 온 때문에 그들이 트루베니아 인에게 느낀 감정은 결코 유쾌하지 못했다. 그들 역시 5백년 전의 비사에 대해 똑똑하게 알고 있었다. 패트릭은 성이 차지 않는다는 듯 연신 씨근거렸다.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인간 전체가 멸망할 만한 위기를 두 번씩이나 구원해 줬건만 끝내 은혜를 저버린 놈들이니 멸망해도 싸지. 그렇지 않아? 아드리안." 패트릭의 말에 아드리안이라 불린, 상당히 미모가 뛰어난 아가씨가 맞장구를 쳤다. 견고한 갑주를 입고 있는 것을 봐서 그녀 역시 기사인 듯 싶었다. "맞아. 최후의 순간에 도움만 청했더라도 트루베니아는 멸망하지 않았을 거야. 자신들이 자초한 화이니 만큼 할 말이 없겠지?" 묵묵히 듣고 있던 세 번째 인물이 끼여들었다. 다른 둘과 마찬가지로 같은 연배로 보이는 붉은 머리칼의 젊은 기사였다. "내가 알기로 트루베니아에서는 여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기사가 될 수 없다고 들었어. 그러니 아드리안. 너는 아르카디아에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해. 그렇지 않았다면……." 젊은 기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처럼 멋진 기사의 아내가 되어 아기나 낳을 수밖에 없었겠지? 아무리 검술실력이 뛰어나도 여자는 기사가 될 수 없었으니 말이야." "놀고 있네. 멋진 기사? 스펜서 네가? 기가 차서 말이 안나오는군." 화가 치밀었는지 아드리안의 아름다운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검을 뽑아들려 했다. "대련이다. 이번에는 아예 한 쪽 팔을 잘라주마. 스펜서." "어, 어, 농담이야." 그 모습에 질린 듯 스펜서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드리안은 그들 중에서 가장 검술 실력이 뛰어난 수련기사였던 것이다. 지금껏 검술 대련에서 스펜서는 아드리안에게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다. 그러니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의 오른 팔은 몸통에서 떨어져 나갈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곤경에 빠진 스펜서를 패트릭이 구해주었다. "뭘 하는 거야? 이곳이 어디인지 벌써 잊었어. 가디언이 우글거리는 드래곤의 소굴이라고……" 패트릭의 질책에 아드리안은 씨근거리며 검을 도로 꽃아 넣었다. 하지만 매서운 눈빛으로 스펜서를 한 번 쏘아보는 것을 잊지 않는 아드리안이다. "원 성질은……." 찔끔 하며 고개를 돌리던 스펜서는 페트릭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헤이우드님이 왜 이렇게 늦으시는 거지?" "걱정 마. 삼촌의 실력이라면 드래곤의 손아귀에서도 능히 살아오실 분이니까 말이야." 패트릭의 두 눈에는 삼촌을 굳게 믿는다는 신뢰가 일렁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삼촌 헤이우드는 크로센 제국에서도 이름 높은 소드 마스터였던 것이다. 검기를 응축해서 유형의 기운으로 만드는 고도의 검술, 검강을 일으킬 수 있는 진정한 소드 마스터로써 크로센 제국을 수호하는 근위 기사단의 당당한 일원인 기사가 바로 그의 삼촌이었다. 사실 패트릭이 이런 용담호혈의 절지로 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삼촌의 혁혁한 조력이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조카를 위해 특별휴가까지 내어가며 그들을 도와주러 온 것이다. "하지만 가디언을 잡는데 그분의 조력을 기대해선 안 돼. 그분은 오로지 비상 상황에서 우릴 보호해 줄뿐이니까……. 다시 말해 팔라딘 자격을 얻을 수 있고, 없고는 오로지 우리 실력에 달린 일이야. 알겠어?" "알았어." 아드리안과 스펜서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우드란 든든한 보호자가 있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몬스터 포획은 오로지 그들의 힘으로만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로지 본신의 실력뿐이었으므로. 그들을 보며 패트릭은 히쭉 웃었다. "하지만 삼촌은 날 무척 사랑하시지. 아마도 그분은 지금쯤 레어 근처에서 우리에게 적합한 몬스터를 물색하고 계실 거야." "저, 정말이야?" "물론. 드래곤의 레어에서 잡아왔다면 아무리 저급한 몬스터라도 대단한 평가를 받게 되지. 아마 삼촌은 우리가 충분히 잡을 수 있는 오우거나 트롤 정도의 가디언을 염두에 두고 계실 지도 몰라. 가능하다면 이리로 유인해 오실 수도 있고……." 아드리안과 스펜서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물론 레이몬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현재 4써클의 엑스퍼트 수준에 머물러 있는 마법사였다. 하지만 마법실력만 따지자면 레이몬드의 마법 실력은 능히 그 이상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비록 마법진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일행 다섯 명을 이곳까지 무리 없이 공간 이동시킨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클래스를 올리기 위해서는 실력 외에 반드시 플러스 알파가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실력이 이 정도란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었다. 이미 아르카디아에서는 그들 외에도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혈안이 된 기사들이나 마법사들이 우글거리는 상황이다. 만약 악명 높은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의 레어에서 가디언을 하나 잡아간다면 그들은 능히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수련기사들인 패트릭과 아드리안, 스펜서는 꿈에도 그리던 팔라딘 자격을 취득할 수 있을뿐더러 자신 역시 5써클의 유저로 승급할 수 있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기회가 바로 눈앞에 닥친 것이다. "만약 일만 잘 풀린다면 네 녀석에게 술 한잔 단단히 사지. 아니 술이 문제겠어? 이런 기회를 제공해 주신 네 삼촌에게도 톡톡히 사례를 해야겠지?" 당연히 그래야지 하는 듯한 표정으로 패트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 만약 삼촌의 조력이 없었다면 우리가 감히 이럴 엄두를 낼 수나 있었을 것 같아? 지금까지 드래곤의 레어에서 가디언을 잡아온 경우는 거의 없어. 백년 간 통틀어 손가락에 겨우 꼽을 수 있을까 말까 하니까……." "하긴 그래." 스펜서와 아드리안은 그럴 듯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드래곤 레어에서 가디언을 포획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젊은 기사들에 의해 무수하게 행해져왔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미 아르카디아에서는 중형 몬스터의 씨가 마른 지 오래였고 몬스터 포획을 위해서는 오로지 트루베니아로 건너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레어를 경비하는 가디언은 가장 훌륭한 사냥감이었다. 물론 대가가 큰 만큼 위험도도 높았지만 말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패트릭은 스펜서를 돌아보았다. "이봐 가디언 사냥이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했지." 스펜서는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아마 10% 남짓 될까? 많은 수련 기사들이 돌아오지 못했지. 물론 그들에겐 소드 마스터의 지원이 없었으니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말이야."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던 패트릭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레이몬드가 한창 탈출용 마법진을 손보고 있었다. 그것은 이곳에서 10km 정도 떨어진 해변에 정박 중인 그들의 배로 이어지는 공간이동 마법진이었다. 가디언을 포획한다면 그들은 즉시 배로 공간이동을 해 갈 것이다. 변변찮은 배도 보유하지 못한 오크들이 그들을 추적할 방법은 없었다. 그러므로 배까지 가기만 한다면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쪼록 삼촌께서 적당한 가디언을 한 놈 유인해 오셔야 할 텐데……." 초조한 기색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패트릭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지척까지 접근해서 그들을 주시하고 있는 그림자 하나를 보고 난 이후의 일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무슨 일이야. 패트릭." 갑자기 터져 나온 욕설에 일행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패트릭이 가리킨 방향을 쳐다본 일행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들이 눈치조차 못 챈 사이,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와 그들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존재가 말이다. 상대는 리치였다. 해골에 얇은 피부가 말라붙어 있는 형상의 마물(魔物)인 리치는 일단 그 이름만으로도 악(惡)의 대명사였고 결코 약하다 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들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승리할 수 있다는 진리에 따라 그들은 발검자세를 취하며 상대의 모습을 세세히 살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상대의 키가 무척 작다는 것이다. 그것을 봐서 리치가 되기 전에 체구가 상당히 작았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뼈만 남았을 법한 등 부분이 완만한 굴곡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아 생전에 꼽추였다는 것 또한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 외에 상대는 전형적인 리치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시커먼 로브를 깊숙이 눌러쓴 데다 드러난 얼굴에는 살이 거의 붙어있지 않았다. 또한 눈구멍에서 피어오르는 안광이 강렬한 것을 보아 제법 강력한 리치인 것 같았다. 챵. 기사들은 서둘러 검을 뽑아들며 대응 준비를 갖췄다. 날렵한 몸놀림을 보아 상당한 수련을 쌓은 흔적이 보였다. 마법사인 레이몬드 역시 서둘러 주위의 마나를 빨아들였다. 리치라면 그들이 결코 만만히 생각해선 안 될 강적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의외로 느긋한 태도를 보였다. 그들 정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는 듯 텅 빈 동공을 이리저리 돌려 일행을 둘러볼 뿐이었다. "패트릭. 시간을 좀 끌어주겠나? 놈에게 한 방 먹이려면 캐스팅할 시간이 필요해." 레이몬드의 귀엣말에 고개를 끄덕인 패트릭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웬 놈이냐?" 텅 빈 리치의 동공이 패트릭에게로 옮겨졌다. 순간 패트릭은 등골이 오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리치의 눈빛이 그 정도로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거기에는 아르카디아의 수련기사라는 자부심이 큰 몫을 했다. "정체를 밝혀라. 이놈. 무얼 하려 여기 왔느냐?" 거듭되는 패트릭의 호통에 마침내 리치가 반응을 보였다. "애송이들이로군. 목숨을 건지려면 이곳에서 즉시 사라져라." 뜻밖의 말에 일행은 멍해졌다. 상대가 분명 리치라면 불문곡직하고 이쪽을 공격해야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라면 리치는 의당 그렇게 행동해야 했다. 그런데도 자신들을 순순히 놓아보내려 하다니……. 하지만 목적이 있는 터라 그들은 순순히 물러날 수 없었다. 상황을 보아 상대가 드래곤의 가디언일 가능성도 없진 않았다. "터무니없는 소리. 우리는 반드시 네놈을 잡아가야겠다." 패트릭, 스펜서, 아드리안은 검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리치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물론 몸에 걸친 대 마법 갑옷을 철석같이 믿고 말이다. 팔라딘 자격만 취득하지 못했다 뿐이지 그들은 이미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고 하나같이 부호의 자제들이라 대 마법 갑옷 또한 남김없이 걸치고 있었다. 질이 상당히 좋은 고급 갑옷이라 5써클 정도의 공격 마법은 충분히 차단할 수 있다고 자부했다. 리치 정도의 마물을 잡아간다면 만족할 만한 성과라 할 수 있었기에 그들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짙게 배어있었다. "네놈이 우리를 당해낼 수 있을 성싶으냐?" 패트릭의 말에 리치의 얼굴에서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어찌 보면 비웃음으로도 생각할 수 있을 법한 표정이었다. "멍청한 것들. 마음 같아서는 너희 애송이들을 일격에 저승에 보내고 싶다. 하지만 금제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구나." "헛소리." 양쪽이 설전을 나누는 사이 레이몬드의 마법이 완성되었다. 그는 광휘가 맺혀 있는 마법 지팡이를 들어올리며 고함을 질렀다. "모두 비켜." 시간을 끌고 있던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좌우로 좍 갈라졌다. 그 사이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불줄기가 불똥을 맹렬히 튀기며 쏘아졌다. 쿠쿠쿠쿠. 공간을 가르며 퍼부어진 불줄기는 정확히 리치를 목표로 퍼부어졌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08회. 족히 5써클은 될 듯한 파이어 블래스트(Fire blast). 레이몬드의 얼굴엔 회심의 미소가 서려 있었다. "네놈이 비록 리치라도 이 공격에서 무사하진 못할……." 레이몬드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져버렸다. 자신이 날린 파이어 블레스트가 리치 앞에 이르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파파팍. 자욱하게 퍼져나가는 스파크만이 마법 공격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었다. 레이몬드는 미처 마나가 재배열되는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리치가 손을 한 번 휘젓자 5써클의 공격 마법 파이어 블레스트가 그대로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레이몬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떠올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 정도의 위력을 보이려면 상대는 적어도 6써클의 엑스퍼트를 넘어서는 실력자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공격을 저토록 수월하게 막아낼 수는 없는 법이다. 순간 거센 기합성이 울려 퍼졌다. "타앗." 마법 공격이 통하지 않자 패트릭을 위시한 세 명의 기사가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감행해 들어갔다. 그들은 방패에 끌어올릴 수 있는 마나를 모조리 주입한 채 리치에게로 육박해 들었다. 대 마법 주문이 각인된 방패에서는 마법 문자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콰콰쾅. 정확히 세 번의 폭음이 이어지고 공격해 들어간 기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나뒹굴어야 했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빛이 번쩍한 순간 그들은 들고 있던 대 마법 방패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또한 형언할 수 없는 힘이 그들의 가슴팍을 가격한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크윽. 이, 이런……."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패트릭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슴을 싸고 있는 흉갑이 완전히 박살난 것을 발견한 것이다. 뒤이어 일어선 스펜서와 아드리안 역시 같은 꼴을 하고 있었다. 가슴에서 아련한 통증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그들은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세, 세상에 대 마법 갑옷과 방패를 아예 박살내다니……." 그들을 쳐다보며 리치는 무표정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말로 할 때 꺼져라. 네놈들을 죽일 수는 없지만 팔다리 하나정도 잘라내는 것은 가능하니 말이다." 그들은 질린 표정으로 몸을 돌리려 했다. 상황을 봐서 그들이 감당할 만한 적이 아니었다. 5써클의 공격마법을 막아낼 수 있는 갑옷과 방패를 한 방에 박살낸 것을 봐서 리치의 마법 수준은 충분히 그 이상이라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승산이 전혀 없는 싸움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보내 줄 때 가는 것이 현명한 판단 같았다. 하지만 다급하게 마법진으로 향하던 그들의 걸음은 오래가지 않아 멈춰졌다. 수풀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한 인영을 본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무슨 일이냐." 패트릭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사, 삼촌." 이 상황에서 더 없이 든든할 수 없는 우군이 나타난 것이다. 모습을 드러낸 자는 은빛 갑주를 착용한 중년의 기사였다. 매서운 눈빛과 콧수염 아래에 자리한 입술이 무척 강퍅한 인상을 주는 중년인으로써 관자놀이(태양혈)가 불룩한 것을 봐서 엄청난 수련을 쌓았음을 알 수 있었다. 사방을 둘러본 그는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서슴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챵. 스펜서와 아드리안의 얼굴에도 반갑다는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헤이우드님." "모두 내 뒤로 비켜라." 헤이우드는 검을 치켜세우며 싸늘한 눈빛으로 리치를 응시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리치로군. 반가워."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에는 가장 적합한 사냥물을 찾았다는 듯한 빛이 일렁였다. 리치라면 오우거나 트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훌륭한 사냥물이다. 죽으면 재가 되어 흩어져버린다는 특성 때문에 산 채로 잡아가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지만 일단 성공한다면 조카 패트릭과 그 동료들이 팔라딘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은 기정 사실이었기 때문에 헤이우드는 검에 슬며시 마나를 밀어 넣었다. "나와 맞닥뜨리다니 정말 운이 없는 녀석이로군. 경계가 워낙 삼엄해 뚫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이거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날 잡아가겠다는 뜻인가?" "물론. 패트릭은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조카라서 말이야." 헤이우드는 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접근을 시도했다. 선열한 오러 블레이드가 뿜어져 나와 그의 검을 완전히 감쌌다. 하지만 리치는 별반 겁을 먹지 않은 듯 했다. "멍청한 작자. 뜨거운 맛을 봐야겠군." 느긋하게 팔짱을 풀던 리치의 눈에 기이한 빛이 일어났다. "응?" 마치 뭔가를 감지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느긋하던 리치의 반응이 별안간 다급해졌다. "빌어먹을. 이봐! 한가롭게 싸울 형편이 못되니 즉시 이곳에서 꺼져." 돌연한 상대의 반응에 의아해 졌지만 그렇다고 뜻을 접을 헤이우드가 아니었다. "순순히 우리들을 따라간다면 생각해 보지." 리치의 눈빛이 다소 사나워졌다. "지금 즉시 꺼지지 않으면 뜨거운 맛을 봐야 할 걸……." "미친 놈. 헉." 헤이우드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리치의 손에서는 어느새 사람 몸통 만한 불덩어리가 생겨나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콰콰콰콰. 특이하게도 불덩어리는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빛을 띠고 있었다. 화염 가운데에서는 선렬한 마왕의 문양이 소름끼치는 빛을 내뿜고 있었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열기가 화끈하게 전해질 정도였다. 상황을 봐서 결코 평범한 마법이 아니었다. 뒤이어 레이몬드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헤, 헬 파이어(Hell fire) 세, 세상에 9써클의 마법이라니……." 그 한 마디에 헤이우드는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9써클의 헬 파이어라면 그의 대 마법 갑옷도 버티지 못하는 고위급 마법이다. 닿는 모든 것을 깡그리 태워버리는 공포의 공격 마법 헬 파이어. 그 위력은 대인 공격 마법 중 가장 으뜸이었고 심지어 대상이 돌이나 쇠라고 하더라도 이것에 명중된다면 무사할 수 없었다. 인화물질이 없더라도 그대로 타버리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이것은 인간이 전개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 마법이라 생각해야 했다. 아르카디아의 궁정 마법사들 중에도 헬 파이어를 시전할 수 있는 마법사가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까. 만약 헬 파이어에 적중된다면 일행 모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이승을 하직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헤이우드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도, 도대체 네놈의 정체가 뭐냐? 설마 드래곤은 아니겠지?"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냐. 시간을 더 지체한다면 도망조차 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정확히 셋 세겠다. 그 안에 사라지지 않는다면 나는 이후의 결과를 책임질 수 없다." "무슨 꿍꿍이지?" "하나." 결국 헤이우드는 수련기사들을 독촉해서 마법진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뇌리에는 이미 전의가 싹 사라진 상태였다. "둘." 헤이우드는 수련 기사들을 데리고 서둘러 마법진 위에 섰다. 저 리치가 무슨 이유로 자신들을 보내주려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상황을 보아 몸을 빼는 것이 백 번 나을 듯 싶었다. 우선 상대가 9써클 이상 되는 리치가 분명하다면 싸워봐야 자신들에게 전혀 승산이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9써클의 고위급 리치를 감당하긴 힘들었기 때문이다. 우선 착용하고 있는 대 마법 갑옷이 헬 파이어를 막아낸다는 가능성은 전무했다. 갑옷에 각인된 대 마법 주문에는 엄연히 감당할 수 있는 마법의 한계가 존재했다. 리치의 손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푸른 광구가 헬 파이어가 분명하다면 자신이라 하더라도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때문에 그는 레이몬드에게 연신 독촉을 했다. "서둘러라.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아, 알겠습니다." 레이몬드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마법진을 발동시키는데 주력했다. 그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리치의 등장과 그 마법 수준에 얼이 반쯤 빠져있던 상황이었다. 사력을 다한 끝에 마침내 공간이동 마법진이 발동되었다. 쓰쓰쓰. 마법진 위에 서 있던 다섯 명의 신형이 점차 광휘에 휘감기며 흐릿해져갔다. 하지만 리치는 그저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이 말이다. 그의 손을 감돌고 있던 헬 파이어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도망치는데 열중하던 헤이우드 일행에겐 미처 그것을 관찰할 여유가 없었다. 다음 순간 크로센에서 온 가디언 사냥꾼들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나지막한 음성이 리치의 입 부분에서 흘러나왔다. "다행이군. 그나저나 조금 귀찮아지겠는걸?"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곳에 여러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헤이우드 일행과 마찬가지로 워프 마법으로 이동해 온 듯 보이는 자들이었다. 놀랍게도 그들 또한 리치였다. 멀뚱멀뚱 서 있는 자와 같은 모습과 복장을 한 리치들은 나타나자마자 사방으로 흩어지며 무언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오래지않아 남은 것이 공간이동 마법진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수색을 끝낸 리치들은 곧 먼저의 리치에게로 몰려들었다. "어떻게 된 건가? 인간 놈들은?" 처음의 리치는 무척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놓쳤어." 무척 간단한 한 마디. 질문을 던진 리치들은 말문이 막힌 듯한 모습으로 그의 얼굴을 멍하니 주시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만만하게 돌아가지 않았으니……. 번쩍 하는 섬광과 함께 그 자리에 그림자 하나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자 헤이우드 일행을 순순히 보내준 리치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 모습을 드러낸 자 역시 리치였다. 하지만 그는 여타의 리치들과 달리 무척 강해 보이는 놈이었다. 머리에 기괴하게 생긴 관을 쓰고 있었고 긴 송곳니가 자라나 있는 데다 입고 있는 복장도 달랐다. 나중에 나타난 리치들이 곧 그를 향해 몰려들었다. "인간들을 놓쳤다고 합니다. 게덴하이드님." "뭐라고?" 자초지종을 들은 리치의 눈구멍에서 소름끼치는 듯한 안광이 솟아올랐다. 놀랍게도 그의 정체는 바로 게덴하이드였다.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의 수석 가디언으로 약 500년 펠드리안의 궁정에 난입해 성녀를 납치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자 말이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누군가에게로 다가갔다. 헤이우드 일행을 놓아준 리치에게로 말이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다짜고짜 으르렁거렸다. "어찌해서 인간들을 놓아주었나?" 리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하게 게덴하이드의 시선을 맞받을 뿐이었다. 마치 한 번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 모습에 결국 게덴하이드는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자신의 지휘통제를 받는 부하가 저처럼 도전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부아가 치밀지 않을 지휘관은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마나를 재배열했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가……." 콰쾅. 그의 손에서 섬광이 번쩍하는 순간 리치의 앞가슴에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리치의 몸은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 저쪽의 암벽에 사정없이 틀어박혔다. 가슴팍이 완전히 으스러진 것을 보아 게덴하이드의 공격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익히 알 만 했다. 그 모습에 둘러싼 리치들은 무척 당황해 하며 게덴하이드를 쳐다보았다. "저, 게덴하이드님. 이러실 필요까지야……." 그들의 말에 게덴하이드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불문곡직하고 공격을 가하기는 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비록 자신의 부하이기는 했지만 상대는 엄연히 자신의 주인이 직접 만든 리치였다. 만약 놈의 본체가 소멸된다면 그 사실은 수면 중인 주인 베르키스에게로 즉시 전달될 것이 분명했다. 가해진 공격은 게덴하이드의 장기인 호리드 윌팅이었다. 9써클의 호리드 윌팅이라면 아무리 단단한 리치의 몸이라고 해도 버티기 힘들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게덴하이드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경솔했군." 물론 문책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게덴하이드는 그 사실로 인해 베르키스의 수면이 방해받을까봐 이처럼 전전긍긍해 하는 것이다. 단단히 세뇌당한 탓에 그는 베르키스에게 극도의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그가 지휘하는 모든 리치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곧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09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툭툭 몸을 털고 일어나는 리치를 보고 난 뒤의 일이었다. "이럴 수가……. 내 호리드 윌팅을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몸을 일으킬 수 있다니……." 앞가슴이 으스러진 상태였지만 리치는 전혀 비틀거리지 않고 이리로 걸어왔다. 그렇다고 별달리 분노한 것 같지도 않았다. 느긋하게 걸어와 자신의 앞에 태연하게 서는 리치를 보고 게덴하이드는 미간을 찡그렸다. "방어력 하나는 강력한 놈이로군. 어쨌거나 침입자를 놓쳤으니 그에 대한 응징을 치른 것으로 생각하라." "그러지 뭐." 반말 짓거리로 대꾸하는 리치를 보자 게덴하이드는 또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말투로 보나 태도로 보나 놈은 결코 자신을 상급자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눈에 띄게 반항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섣불리 손을 쓸 수도 없었다. 죽여도 무방한 고블린이나 중형 몬스터와는 달리 상대는 베르키스가 직접 임명한 가디언이었기 때문이다. '놈은 세뇌과정에서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 분명해. 이 사실은 베르키스님께서 깨어나시는 즉시 보고 드려야겠어.' 결국 게덴하이드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상대를 무시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놈과 상대해봐야 자신의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이것은 그가 오백 년 동안 함께 지내며 느낀 상대에 대한 평가였다. "레어로 돌아가라. 너처럼 멍청한 놈에게 더 이상 외곽 경계를 맡길 수 없다." 그 말을 듣자 리치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 게덴하이드는 혀를 끌끌 찼다. "레어에 인간 노예가 몇 있을 것이다. 그것들의 생명력을 흡수해서 몸을 복원하도록……." "그러지." 그 말을 뱉은 뒤 리치는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모습을 보아 타격이 전혀 없지는 않은 듯 싶었다. 공간이동을 하지 않고 걸어가니 말이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게덴하이드의 눈구멍에 기이한 안광이 일렁였다. "설마 놈이 아직까지 나에게 앙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약 500년 전, 그러니까 눈앞의 리치가 인간이었을 때 둘 사이에는 감정의 앙금이 자리하고 있었다. 원수지간이라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앙금이 말이다. 혹시나 그 사실 때문에 자신에게 이렇게 대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게덴하이드는 곧 그 사실을 머리 속에서 지웠다. "그럴 리는 없어. 놈은 베르키스 님에 의해 기억이 깡그리 지워진 채 세뇌당했어." 그 사실을 의심한다는 것은 곧 베르키스의 마법 실력을 의심한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베르키스의 충실한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게덴하이드에겐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아무래도 세뇌하기 전 가해진 정신계 마법의 영향으로 봐야 할 것 같군." 결론을 내린 게덴하이드는 멀뚱멀뚱 서 있는 리치들을 쳐다보았다. "앞으론 이곳을 너희들 둘이서 경비를 서도록 해라. 추후 인간 놈들의 침입이 있을 경우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추적해서 처치해야 한다.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리치를 보며 게덴하이드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이들의 태도는 저 얼빠진 리치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럼 수고하도록." 말을 마친 게덴하이드의 몸이 서서히 허공에서 흩어지고 있었다. 명령을 받은 리치들은 곧 자신들의 위치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산정으로 향하는 소롯길에 그림자 하나가 느릿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검은 로브로 감싼 왜소한 몸. 뼈만 남은 손을 흔들며 걸어가는 그림자는 아까의 그 리치였다. 가슴팍이 참혹하게 으깨진 모습이었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라서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리치의 입에서 갑자기 욕설이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놈. 누군 죽이고 싶지 않아서 놓친 줄 아나." 리치의 퀭한 눈구멍에는 분노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런 정신 나간 놈들이라면 솔직히 나도 살려보내고 싶지 않았어. 세상에 출세를 위해 드래곤의 레어에 잠입해 가디언을 포획할 생각을 하다니……. 정말 어이없는 놈들이지. 만약 칠종단금술만 아니었다면……." 뭔가 생각이 떠올랐는지 리치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뼈만 남은 얼굴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감돌았다. "리치가 되고 나서도 칠종단금술이 남아있다니 정말 놀랍군. 하긴 그 덕에 베르키스의 세뇌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었긴 하지만 말이야." 과거를 상기하자 또다시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리치의 뇌리에 지난 일, 정확히 말해 500년 전의 일이 마치 어제 겪었던 것처럼 일목요연하게 떠올랐다.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그리고 모호한 감정이 담긴 음성이 새어나왔다. "다프네." 그는 지금 한 소녀를 떠올리고 있었다. 기구한 운명으로 태어나 돌이 된 채 잠들어 있는 소녀. 그에게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구해내야 할 존재이기도 했다. 더불어 그에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원한을 갖게 한 존재 역시 떠올랐다. 인간이 아닌 존재 드래곤. 놀랍게도 리치는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베르키스. 기다려라 나의 응징을……." 뼈만 남은 주먹이 불끈 쥐어진 채 부르르 떨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리치의 주인인 레드 드래곤은 그에겐 같은 하늘을 두고 살 수 없는 원수였다. 바로 스승과 사랑하는 여인을 앗아간 원흉이었던 것이다. 또한 인간이었던 그를 리치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가 인간이었던 시절에 가지고 있던 이름은 바로 데이몬이었다. 격정을 주체하지 못한 것을 깨달은 데이몬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암암리에 탐색 마법을 펼쳐 주위를 감지하고 있었으므로 혼잣말이 들킬 가능성이 없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만약을 대비해야 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면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500년 동안 데이몬이 정체를 숨겨온 비결이었다.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베르키스가 날 리치로 만든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으니……." 데이몬은 슬며시 손을 들어 주위의 마나를 끌어 모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엄청난 양의 마나가 모여들었다. 이것은 그가 과거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경지였다. 이미 데이몬은 9써클의 반열에 오른 대마법사가 된 지 오래였다. 비록 리치의 몸이었지만 말이다. "우선 몸을 복원해야겠군." 털썩. 그 자리에 좌정한 데이몬은 끌어 모은 마나로 형편없이 부서진 앞가슴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레어에 준비된 인간 노예의 생명력을 빨아들여 몸을 복원하는 것이 정상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칠종단금술의 금제를 받고 있는 그에겐 결코 생각할 수 없는 방법이다. 아직까지 그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데이몬은 오랜 연구를 통해 터득한 그만의 방법으로 몸의 복원을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500년의 세월은 그를 대마법사로 만듦과 동시에 잊고 있었던 수많은 사술을 복원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으므로………. 쓰쓰쓰. 그의 앞가슴 부분이 점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데이몬은 자신이 대 마법사가 될 수 있었던 과정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다. 오랜 시절 데이몬을 통제했던 칠종단금술. 시술자에게 살심을 원천적으로 말살해 버리는 이 금제법은 놀랍게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효용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시술자의 인성을 보호하는 효용이었다. 사실 칠종단금술의 효과는 데이몬이 중원에 있을 때부터 증명된 상태였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익힐 경우, 피에 굶주린 혈귀로 만들어버린다는 천자혈마공. 그 저주받은 마공을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인성을 상실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그의 뇌리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칠종단금술 때문이었다. 그리고 칠종단금술은 트루베니아에서도 데이몬을 한 번 더 구해주었다. 데이몬을 베르키스의 세뇌마법에서부터 벗어나게 해 주었던 것이다. 드래곤의 세뇌마법(洗腦魔法). 인간으로써는 감당할 수 없는 10써클의 최고위급 마법으로써 대상이 어떠한 의지력을 가지고 있던 간에 가차없이 충실한 종복으로 만들어버리는 마법이다. 이 마법이 시술될 경우 대상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시술자를 거역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말 그대로 시술자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서슴없이 버릴 정도로 철저하게 세뇌되어 버리는 것이다. 과거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의 오른 팔이었던 게덴하이드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굴복할 정도로 마법의 위력은 강렬했다. 당시 벌써 9써클의 반열에 올랐으며,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에게 깊이 지배되고 있던 게덴하이드였지만 그 역시 세뇌 마법에는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결국 베르키스의 충실한 종복이 되어 잘 훈련된 개처럼 레어를 지키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 인간이라면 세뇌 마법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데이몬은 그 과정을 극복할 수 있었다. 아니 애초부터 세뇌되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한 설명이었다. 자신의 마법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베르키스는 세뇌 과정이 끝나자마자 수면에 들어갔고 데이몬은 정신을 온전히 보존한 채 다른 실험실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데이몬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게덴하이드를 비롯한 서너 명의 리치였다. 그는 데이몬을 리치로 만들라는 베르키스의 엄명을 받고 있었다. 베르키스의 수면기가 끝날 때까지 데이몬을 살려놓으려면 오로지 그 방법 밖에는 없었다. 데이몬이 도착하자 게덴하이드는 곧 그를 리치로 만드는 과정에 들어갔다. 그것이 바로 데이몬이 리치가 되게 된 배경이었다. 그 과정을 상기한 데이몬은 눈빛을 번뜩였다. "나에겐 차라리 다행이었지. 리치가 되지 못했다면 나는 채 6개월을 살지 못했을 테니까……." 당시 데이몬의 몸은 헤이스트의 남발과 심한 화상으로 인해 생명력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게덴하이드에 의해 당한 죽음의 손길로 인해 어둠의 마력이 심장까지 파고들어 있었으므로 어찌 보면 리치가 된 것이 데이몬에겐 정말 다행일지도 몰랐다. 리치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강해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를 떠올리자 데이몬의 얼굴에 미미하게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놈들은 내가 세뇌되지 않았다는 것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복수를 위한 일념으로 데이몬은 철저히 자신을 숨겼다. 어떻게 해서든 강해져서 다프네를 구해내고 복수를 하고 싶었던 데이몬이었다. 그의 노력은 결국 성공했다. 조금 이상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게덴하이드는 그것을 단순히 정신마법의 후유증이라 간주했다. 리치가 된 이후 데이몬은 예정대로 베르키스의 가디언 군단에 편입되게 된다. "그것이 내가 힘을 얻게 된 과정의 시작이었지." 리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의 정신은 온전했다. 어쩌면 그것 역시 칠종단금술이 작용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데이몬은 의문을 떠올릴 틈도 없이 마법 수련에 들어갔다. 그에겐 영원한 수명과 함께 폭넓게 마법을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제공되었기 때문이었다. 베르키스의 휘하에 있는 리치들에겐 실력을 높이기 위한 마법 수련이 허용되었다. 물론 일정 수준까지였지만 말이다. 그 때문에 데이몬은 엄청난 양의 마법서를 접할 수 있었다. 이것은 배움에 목말라했던 데이몬에겐 행운이라 말할 수 있었다. 이미 수명의 구애를 받지 않게 된 터라 데이몬에겐 마음놓고 마법을 수련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조로운 가디언으로써의 생활은 지금까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자유시간을 그에게 제공했다. 이후 데이몬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마법을 익혔다. 500여 년 동안의 마법 수련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이미 도일로부터 기초가 탄탄하게 닦였던 터라 걸릴 것은 전혀 없었다. 속성으로 익혔던 인간 시절과는 달리 데이몬은 순리대로 과정을 닦아나가며 차근차근 써클을 올려나갔다.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마법을 익힌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단 150년 만에 6써클의 마스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데이몬에게 한 번의 고비가 찾아왔으니……. "베르키스는 휘하의 리치들이 6써클 이상으로 올라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내가 상당히 고생을 해야 했지만 말이다." 베르키스의 리치들 중에서 6써클을 초과하는 자는 오로지 게덴하이드만이 유일했다. 그는 이미 인간이었을 때 9써클의 반열에 올라섰던 것이다. 그 외의 리치들은 모조리 6써클의 마스터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정도만 해도 인간을 상대하는데 모자람이 없었으므로……. 하지만 6써클은 데이몬에겐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복수를 위해서는 9써클의 마스터라도 성에 차지 않았던 데이몬이었다. 그는 결국 위험을 감수하고 서클을 높일 방법에 대해 궁리하게 된다. 그 당시를 상기한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세뇌되지 않았다는 것이 나에겐 천만 다행이었지. 그 때문에 베르키스의 마법서실(魔法書室)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 당연한 말로 리치들의 마법서실에는 6써클 이상의 마법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게덴하이드에게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할 수 없었으므로 데이몬은 대신 베르키스의 마법서실에 쌓여 있는 마법서를 노렸다. 드래곤의 마법서라면 충분히 자신을 9써클로 올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는 베르키스의 마법서실로 잠입할 방법만을 골똘하게 생각하게 된다. 장장 40여 년의 세월동안을 말이다. 데이몬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베르키스의 마법 서실로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쉬울 줄은 몰랐지." 비록 경계가 삼엄하기는 했지만 그리로 숨어드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편이 아니었다. 문제는 리치들에게 펼쳐진 세뇌 마법이었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10회. 물론 마법서적에 관심이 있을 만한 존재는 리치들뿐이었으므로 베르키스는 마법서실에 별다른 관문을 설치해 두지 않았다. 그가 시술해놓은 세뇌 마법을 그만큼 깊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뇌마법이 시술된 리치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베르키스에게 해가 될 만한 행동을 할 수 없다. 때문에 다른 리치들은 명령이 없는 한 결코 베르키스의 서가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것은 게덴하이드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그들의 뇌리에 베르키스의 서가는 들어가서는 단 될 금지(禁地)로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데이몬만은 예외였다. 세뇌마법에 조종되고 있지 않았던 데이몬만이 아무 거리낌없이 서실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경비의 눈을 피해 잠입하는데 30년이 걸렸지. 그리고 마법서실의 문을 여는데 5년, 서실 내부의 알람 마법을 해제하는데 또다시 5년." 비록 6써클의 마스터가 되었지만 데이몬에게는 마법서실 앞을 경비하는 리치들의 눈을 속일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전원이 데이몬과 동일한 써클의 마법사들이었던 것이다. 실력이 동일한 10여 명의 리치를 단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때문에 데이몬은 결국 다른 방법을 궁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택한 방법은 바로 지하로 길게 굴을 파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데이몬은 장장 30년 동안 굴을 파서 마침내 마법서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리치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척 깊이 굴을 파야 했기 때문에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마법서가로 들어가긴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마법서실의 문을 봉인하고 있는 마법을 제거하기 위해 그는 또다시 오랜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물론 마법 서실 안의 알람 마법을 제거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조바심 내지 않고 차근차근 매듭을 풀어나갔고 마침내 베르키스가 애용하는 마법서들은 그의 수중에 들어오고 말았다. 마법서를 손에 든 데이몬은 치밀어 오르는 격정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되었어." 그 때부터 그는 고위급 마법에 대한 수련을 시작했다. 물론 드래곤의 마법서인 만큼 익히는 것이 결코 만만하지 않았지만 그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걸었다. 시간이 충분했기에 그는 차근차근 연구하며 이치를 풀어나갔고 그 과정에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모르는 것을 물어볼 스승이 없었기에 그는 철저한 연구를 통해 해답을 발췌해내야만 했다. 해법을 찾기 위해 초급 마법서를 수없이 뒤적여본 탓에 그는 거의 모든 종류의 마법을 극성까지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그의 마법실력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그리하여 데이몬은 200년의 노력 끝에 9써클의 마스터가 될 수 있었다. 9써클의 엑스퍼트인 게덴하이드를 능가하는 경지 말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인간이 익힐 수 있는 극한의 마법이었다. 물론 데이몬의 피땀어린 노력도 있었지만 이 성과는 그가 리치가 되지 않았다면 결코 성취할 수 없었던 경지였다. 인간에겐 수명이라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이제 그는 게덴하이드와 1대 1로 붙어도 섣불리 꿀리지 않을 마법 실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리치가 된 탓에 다소 반감되긴 했지만 몸놀림과 실전경험을 감안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섣불리 정체를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는 여전히 자신을 철저히 숨겨야 했다. 아직까지 베르키스에겐 자신이 없었던 탓이었다. 때문에 그는 이미 과거에 익혔던 사술을 모조리 복원하려는 마음을 먹게 된다. 비록 사술의 시전에는 내공이 필수적이었지만 써클이 올라감에 따라 단번에 엄청난 마나를 운용할 수 있게 된 점을 감안해서 데이몬은 마나로 하여금 내공을 대치하는 방법을 오랫동안 연구해 왔었다. 수십여 년에 걸친 정진, 그로 말미암아 데이몬은 마침내 사술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데이몬이 7써클의 엑스퍼트가 된 이후 이루어낸 성과였다. 그것을 운용해 데이몬은 마침내 게덴하이드의 눈을 완벽히 속일 수 있었다. 자신을 완벽히 숨기는 여러 가지 사술과 술법은 게덴하이드의 눈에 데이몬의 경지를 항상 6써클 정도로만 보이도록 감춰주었다. 그것은 데이몬이 9써클의 마스터가 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게덴하이드의 경지를 넘어선다면 그의 이목을 더욱 손쉽게 숨길 수 있었으므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여전히 성이 차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9써클의 마스터가 되었고 사술도 얻었지만 그것만으로 드래곤에게 감히 도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성장한 드래곤이라면 대부분 10써클의 경지를 넘어서는 대마법사라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마법 공격이라도 드래곤에게 거의 통하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때문에 데이몬은 스승의 유언에 따라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네크로멘서가 되는 길을 택한 것이다. 당시를 떠올린 데이몬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지." 베르키스의 마법서실에는 흑마법과 네크로맨시(Necromancy)에 대한 서적이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아마도 대마왕 나이델하르크를 봉인하며 얻은 것인 듯 싶었다. 데이몬에겐 또다시 상당한 분량의 연구과제가 생겼고 그는 또다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야 했다. 네크로맨서가 되어 고급 언데드 몬스터와 합세한다면 드래곤을 상대하기가 더욱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연구하는데 또다시 10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결국 데이몬은 네크로멘서의 기술을 대부분 터득하긴 했다. 하지만 데이몬은 여기서 두 번째 관문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미 초월한 것으로 여긴 시간 문제 때문이었다. "드래곤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언데드 몬스터를 소환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어둠의 마력이 필요하다. 언데드 몬스터를 모을 마력을 모으려면 적어도 200년의 세월을 연구에 정진해야 한다. 인간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마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래곤들의 수면기는 앞으로 10년이면 끝난다." 물론 지금은 게덴하이드를 비롯한 리치들의 이목을 속일 수 있었지만 베르키스에게만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정신마법의 대가인 베르키스라면 자신이 이룬 마법의 경지를 단박에 눈치챌 수 있을 터였다. 다시 말해 베르키스가 깨어난다면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자신이 9써클의 마스터라도 오직 하나 베르키스에게만은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다. 세상 어디로 도망가던 간에 그는 베르키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베르키스는 나를 위시한 모든 리치들의 라이프 포스 베슬을 가지고 있다. 만에 하나 놈이 눈치채고 베슬을 깨뜨려버린다면 나는 그 즉시 소멸되어버릴 것이다." 물론 베르키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혀 시도를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힘을 얻은 이후 데이몬은 제일 먼저 그의 생명력이 담긴 베슬을 훔쳐내고자 했다. 하지만 라이프 포스 베슬은 이미 그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베르키스가 자고 있는 곳은 외부와 완벽히 격리된 곳에 위치해 있었고 그의 실력으로도 그곳은 도저히 뚫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만약 강제적으로 돌파를 시도한다면 그 즉시 내부의 알람 마법이 울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베르키스가 깨어날 테고 자신은 그 즉시 소멸될 것이 분명했다. 라이프 포스 베슬이 베르키스의 손아귀에 있는 이상 결코 경거망동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데이몬은 다른 방면으로 해법을 찾으려 했다. "드래곤들의 수중에는 대마왕 나이델하르크가 봉인된 구슬이 있다고 했다. 만약 그 구슬을 손에 넣어 마력을 이용할 수 있다면 빠른 시간 내에 강력한 언데드 몬스터를 소환해 낼 수 있다. 충분히 드래곤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 규모의……." 하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나이델하르크가 봉인된 구슬이 베르키스의 레어에 존재하지 않았고 게다가 어떻게 해서든 그 전에 자신의 라이프 포스 베슬을 빼내어 와야 했다. 무엇 하나 만만해 보이는 것이 없었지만 데이몬은 결코 용기를 잃지 않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난 해낼 것이다. 다프네를 구해낸 뒤 난 드래곤을 눈에 보이는 대로 족족 죽여 없애버릴 테니까……." 어찌 보면 광오한, 다시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다짐이었지만 데이몬은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가슴이 완전히 복원된 것을 느낀 데이몬은 몸을 일으켰다. "오늘밤은 베르키스의 서가에 한 번 들어갔다 와야겠군. 이미 모든 서적을 독파한 상태지만 찾아볼 것이 있으니……." 그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레어로 향하는 데이몬의 얼굴은 다시 무표정하게 돌아와 있는 상태였다. 아르카디아 대륙은 트루베니아 대륙보다 정확히 1.5배 넓은 신대륙이다. 원류 격인 트루베니아 대륙이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신대륙 아르카디아의 인간들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정확히 550년 전 뱃사람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아르카디아를 밟았다. 그들의 후손은 계속해서 대륙 곳곳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드넓게 펼쳐진 기름진 대지와 대륙 곳곳을 가로지르는 강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풍성한 수확물을 거둘 수 있었으며, 그 덕에 아르카디아의 인간들은 비약적으로 그 수가 늘어날 수 있었다. 이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조상은 대부분 트루베니아에서 쫓겨난 자들이었다. 죄를 짓고, 또는 종교 분쟁으로 말미암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신대륙을 밟은 자들. 그들은 끊임없이 습격해오는 흉포한 몬스터들에 용감히 맞서 싸우며 신대륙을 개척해 나갔다. 대륙의 곳곳에는 여러 왕국이 세워졌고 개척 과정에서 흘린 정착민들의 피땀을 토대로 그 왕국들은 점점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거대한 제국에서부터 변방의 조그마한 왕국까지, 아르카디아는 원류인 트루베니아와는 판이하게 다른 발전과정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수한 왕국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를 꼽으라면 사람들은 단연 크로센 왕국을 선택할 것이다. 구국의 영웅 크로센 대제가 직접 세운 제국으로써 아직까지 크로센 제국의 황제자리는 그의 후손이 이어 내려오고 있었다.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넓은 영토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였지만 굳이 그 사실이 아니더라도 여타 왕국의 왕들은 크로센 황제에게 무한한 경외를 보냈다. 단지 크로센 대제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경외받을 자격이 있었으므로……. 아르카디아의 왕국들은 대체로 원류인 트루베니아와는 판이하게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다. 트루베니아의 왕국들은 대부분 전형적인 봉건 국가로써 군주는 영주들과 기사들에게 영지를 하사하는 대가로 충성을 맹세 받는다. 물론 영지가 없는 귀족들도 많았으며 영지를 하사 받기 위해 혈안이 된 귀족들 역시 없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군주의 눈밖에 난다면 대상 귀족과 그 식솔들은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어버리기 십상이었다. ―아무개 영지의 누구누구를 영주 자리에서 해임하노라. 이렇게 선포한다면 영지가 없는 무수한 귀족과 기사들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를 몰아낸다면 자신이 그 영지의 신임 영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칙령이 떨어지면 그런 자들이 벌떼처럼 달라붙어 공격을 가할 것이 분명했고 실각한 영주는 영지는 물론이오 목숨조차 제대로 부지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국왕보다 병사가 많은 귀족들이 있었어도 감히 왕권을 넘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 트루베니아의 현실이었다. 트루베니아는 이런 봉건 체계 아래에서 왕권을 튼튼하게 확립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카디아의 왕국들은 달랐다. 그들은 왕국의 군사력을 반 이상 군주가 쥐고 있는 형태의 집권제 국가들로써 각 영주들은 보유할 수 있는 병사의 수에 엄격한 제한을 받았다. 왕국의 군주들 대부분이 혈혈단신으로 건너온 뒤 사람들을 모아 왕국을 세운 경우였기 때문에 당연히 역사와 정통성 면에서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왕권은 항상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군주들은 왕국의 군사들을 대부분 휘하에 두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유지할 수 있는 선까지 말이다. 물론 귀족들이 암암리에 병사를 모아 군주를 밀어내고 자신이 직접 국왕이 되는 경우도 빈번했다. 그럴 경우 주변 왕국들은 자신에게 별다른 피해가 없는 한 새로운 국왕을 묵인한다. 이것이 바로 크로센 대제가 아르카디아의 왕국에 끼친 영향이었다. 크로센 제국을 세운 이후 대제는 바로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것은 자신의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은 평생동안 이어진 내 신념이다. 오라! 나보다 검술 실력이 뛰어나고 통치를 잘할 자신이 있는 자가 있으면……. 그렇다면 정정당당한 대결을 통해 내 자리를 넘겨주겠다." 물론 크로센 대제의 아성에 도전하는 자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용장 아래 약졸 없다고 그의 휘하엔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강한 크로센 기사단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크로센 대제의 말이라면 아무 거리낌없이 사지에 뛰어들 정도로 충성심이 깊었다. 게다가 크로센 대제가 낳은 다섯 명의 아들 모두가 뛰어난 소드 마스터로 성장한 때문에 크로센 대제는 무척 평안하게 천수를 마칠 수 있었다. 오히려 그 영향은 여타 왕국들에게 더욱 크게 파급되었다. 야심이 있는 영주들은 암암리에 병사를 모아 조련했고 틈나는 대로 끊임없이 왕권에 도전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이유는 자신이 직접 왕이 되어보겠다는 일념에서였다. 물론 군주들도 마찬가지로 항상 귀족들의 도전에 대비해야 했고 그 덕에 아르카디아에서는 군주자리가 뒤바뀌는 일이 무척 빈번하게 일어났다. 트루베니아와는 달리 능력이 없다면 결코 왕위를 보존할 수 없는 것이다. 자고로 인간사를 가장 발전시킨 것이 전쟁이라는 말이 있듯 끊임없는 도전과 시련을 겪은 탓에 아르카디아 왕국들의 저력은 날이 다르게 성장을 거듭했다. 처음에는 인간들에게 크나큰 위협이 되었던 몬스터들도 이젠 그 명맥을 유지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쇠망해 버렸다. 거듭되는 전쟁으로 단련된 아르카디아 병사들에게 몬스터들은 더 이상 두려운 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아르카디아에도 드래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고 대부분 깊은 산중에 꼭꼭 숨어있다는 점이 인간들의 번영에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드래곤들은 트루베니아의 드래곤들처럼 호전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을 토대로 아르카디아는 점점 인간들만의 대륙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크로센 제국의 수도 펠젠틴. 불과 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펠젠틴은 정말 엄청난 규모의 도시로 성장해 있었다. 아르카디아 최강국의 수도에 걸맞게 방대한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고 외곽의 방어시설 역시 잘 정비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규모만으로 본다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카롯트의 수도 펠드리안에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비록 고풍스러운 면에서 펠드리안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펠젠틴은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진 도시였다. 잘 정비된 도로망과 방사형으로 지어진 건물들을 보면 한 눈에도 방어를 목적으로 건설된 도시임을 알 수 있었다. 방사형의 중심 부분에는 바로 황궁이 위치하고 있었다. 노황제 발렌시우스 1세가 기거하는 동시에 제국을 이끌어나가는 고급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데 황궁의 한 곳에서 갑자기 기나긴 탄식이 새어나왔다. "휴우." 한숨소리가 새어나오는 곳은 바로 집정관의 집무실이었다. 총리와 맞먹을 정도로 높은 직책인 집정관. 이것은 트루베니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직책이었다. 다수결로 귀족들 사이에서 뽑힌 총리의 독주를 막기 위해 국왕이 직접 임명하며, 원래는 총리와 협력하여 국사를 의논해나가는 아주 높은 자리라고 할 수 있다. 국왕이 타국과의 전쟁이나 세금 부과 등의 굵직한 사안을 결재한다면 이들 둘은 비교적 세세한 사안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다. 물론 경미하다고는 하나 거대한 제국의 국무인 만큼 결코 소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집정관 실에서 한숨 섞인 탄식이 터져 나오는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곧 창문이 열리며 한숨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말 걱정이로군." 모습을 드러낸 집정관은 의외로 무척 젊은 인물이었다. 서른 중반 정도의, 집정관으로 보기에는 파격적인 나이라 할 수 있는 자로써 상당히 수려한 용모를 가진 장년인이었다. 맑은 눈빛을 보아 범상치 않은 지혜를 가진 것이 분명했고 꽉 다문 입술은 굳은 의지력을 대변해주는 듯 했다. 하지만 인상적인 외모와는 달리 그의 얼굴은 지금 잔뜩 찌푸려 있었다. 일견해도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11회. 그의 이름은 테오도르 폰 네르시스. 크로센 제국의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집정관을 맡은 행운아였지만 예상을 뒤엎고 뛰어난 일처리로 인해 여러 귀족들을 놀라게 했던 관리의 귀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말못할 고충이 있었으니……. 테오도르는 얼굴을 찡그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빛이 눈을 파고들었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다. "드래곤들이 잠에서 깨어날 때가 채 십 년도 남지 않았다. 지금부터 전쟁에 대비해도 모자랄 판인데 고작 권력다툼이나 하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할까……." 테오도르의 고개가 스르르 돌아갔다. 그의 시선은 곧 황궁 내부의 가장 거대한 건물을 향해 고정되었다. 그곳에 기거하는 이는 바로 크로센 제국의 주인이었다. 비록 노환 때문에 의식불명상태로 병상에 누워있기는 하지만 젊은 테오도르를 집정관에 임명한 노황제 발렌시우스 1세였던 것이다. 테오도르의 눈에 잠시 애틋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굳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미 그는 모종의 일을 행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던 것이다. "황제께서는 필시 내 마음을 알아주실 것이다. 이 일을 해내지 않는다면 아르카디아도 역시 트루베니아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니까." 그는 지금 훗날 역모라고 불릴지도 모르는 일을 꾀하고 있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결코 일신의 영달을 위해 그 일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오로지 크로센 가문을 영원히 지속시키려는 열망으로만 불타고 있었다. 그것만이 자신을 집정관에 봉한 발렌시우스 1세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테오도르는 굳게 믿고 있었다. 사실 그는 명색만 집정관일 뿐이었다. 현 크로센 제국의 총리인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밀려 사소한 권한하나 행사하지 못하는, 말 그대로 이름뿐인 집정관이었던 것이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한 노력으로 황제가 그를 집정관으로 임명하긴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린 상태였다. 이미 페르슈타인 공작은 권력을 미끼로 대부분의 귀족들을 포섭해놓은 다음이었으니까 말이다. 페르슈타인 폰 헬프레인. 그는 과거 혈혈단신으로 아르카디아에 넘어온 벨티모스 폰 헬프레인의 후손이었다. 오래 전 이카롯트에 대한 역모사건으로 멸문한 가문의 마지막 일원이었던 벨티모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아르카디아로 건너온 벨티모스는 가문을 부흥시키는데 평생을 바쳤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그 노력은 후손 대대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지금의 헬프레인 가문은 아르카디아에서는 손꼽히는 가문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하지만 역모를 꾀한 피가 어디 가지는 않는 법. 현 헬프레인 가문의 가주인 페르슈타인은 지금 크로센 제국의 황권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비록 강자지존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는 아르카디아였지만 단 하나 크로센 제국에서만은 그 법칙이 인정되지 않았다. 황권을 넘보기에는 크로센이라는 이름 석 자가 너무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로센 대제가 아르카디아에 베푼 은혜는 그 정도로 큰 것이었고 그 때문에 어지간한 귀족들은 감히 그의 후손에게 해가 되는 짓을 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헬프레인 가문만은 예외였다. 그들은 크로센 제국에서 가장 크고 풍요로운 영지를 가진 가문이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사병을 길러서 지금은 황제와 맞먹을 정도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총리 자격으로 궁정으로 들어온 페르슈타인 공작은 국정의결권을 가진 귀족들을 포섭하는 방법으로 황권을 계속해서 갉아먹고 있었다. 그에게 넘어간 귀족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때문에 지금은 황제라 할지라도 감히 숙청하지 못할 정도로 헬프레인 가문의 힘은 방대해져 있었다. 발렌시우스 황제의 정신이 멀쩡했다 해도 제거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그 사실을 상기한 테오도르는 눈을 빛냈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견제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왕국들의 힘을 한데 모아 드래곤의 침공에 대비해야 하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크로센 궁정에서의 그의 힘은 너무나 미약했다.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의 수는 겨우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라고나 할까. 그나마 그의 지지세력은 개혁파 신진 귀족들이 전부였고 그들 대부분은 권력에서 소외된 계층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고위급 귀족들을 모조리 규합해놓은 페르슈타인 공작과 겨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쌍방이 보유한 힘에 너무나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으므로 그의 뜻은 번번이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왕국의 군대를 한데 모아 드래곤의 침공을 막아내고, 역습으로 트루베니아까지 진격해서 탈환하자는 것이 바로 테오도르가 줄기차게 주장하는 사안이었다. 반면 페르슈타인 공작파들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과거 전례를 잊었소? 우리 아르카디아는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파병으로 트루베니아를 위기에서 구해주었소. 하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해 준 게 뭐요? 도리어 중상 모략으로 크로센 대제께 크나큰 모욕이나 주지 않았느냔 말이오. 그러니 트루베니아가 멸망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거요. 그런데 우리가 왜 트루베니아를 탈환해야 하오? 백 번, 천 번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트루베니아를 차지했으니 드래곤들은 아르카디아까지 건너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오. 설사 건너오더라도 아르카디아의 군사력은 과거 트루베니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오. 그 사실을 아는 이상 놈들은 쉽사리 바다를 건너오려 하지 않을 것이오." 전쟁불사를 주장하는 페르슈타인의 논리에는 거의 대부분의 귀족들이 찬성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느 편에서 서지 않는 중도파 귀족들조차 페르슈타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실정이었으니 테오도르에겐 정말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장의 안위만 중시하다니, 멍청한 작자들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속고 있는 것도 모르면서……. 테오도르의 주먹이 굳게 쥐어진 채 부르르 떨렸다. "어떤 일이 있어도 꼭두각시 황제를 세울 순 없다." 이미 그는 페르슈타인 공작의 음모에 대해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크로센 제국은 헬프레인 가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 사실 현 황제인 발렌시우스 1세에게는 원래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릴 때 죽은 첫째를 제외한 나머지 황자들이 하나씩 의문의 죽음을 당해버린 것이다. 아무도 그 원인을 캐내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의 사인은 아직까지 의문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그 죽음의 배후에 필시 페르슈타인 공작이 있을 것이라 단정했다. 황자들의 죽음으로 이득을 얻을 만한 자는 오직 그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증거가 일체 없었기 때문에 테오도르는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 아니 증거가 있더라도 감히 그를 건드릴 수가 없는 것이다. 황위계승자들이 모두 죽어버린 때문에 발렌시우스 황제는 무척 오랫동안 권좌에 앉아있어야 했다. 남은 황손이 단 둘 뿐이었고 그들의 나이가 무척 어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죽은 둘째 황자가 낳은 자식들이었고, 그들 외에는 황위 계승자가 아무도 없었다. 나머지 황자들은 일가족 모두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현존하는 황손이 있는 때문에 외견상 보기에 황위 세습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여기에 있었다. 두 황손 중 첫째 알카리스가 바로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알카리스는 무척 수려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청년이었다. 한 번 본 여인들이 며칠동안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정박아였다. 스물을 넘긴 나이였지만 그의 지능은 대여섯 살 정도의 어린아이와 비슷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하늘의 저주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둘째 황손 드비어스는 나이답지 않게 총명하고 명석한 소년이었다. 열 넷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형과는 달리 의젓하고 재지가 넘치는, 말 그대로 군주의 풍모를 타고난 소년이었다. 성장한다면 귀족들의 전횡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현명한 황제가 될 것이라 테오도르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문제는 페르슈타인이 차기 황제로 첫째 황손인 알카리스를 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그 근거로써 오래 전에 명을 달리한 크로센 대제의 마지막 유언을 내세우고 있었다. "황위를 둘러싼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막기 위해 군주 자리를 불가피한 일을 제외하고는 큰아들에게 넘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알카리스를 밀고 있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페르슈타인의 속셈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는 필시 사리판단을 하지 못하는 알카리스를 황제 자리에 앉혀놓고 국정을 자기 뜻대로 좌지우지할 생각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테오도르는 개혁파 귀족들을 대대적으로 규합해 페르슈타인의 계획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대제께서 말씀하신 불가피한 일이 바로 이것이오. 정박아인 황손 알카리스에게는 국정을 운영해나갈 능력이 없소. 나이가 어리더라도 총명한 둘째 황손 드비어스를 차기 황제로 삼아야 하오." 하지만 명분에서도, 세력에서도 뒤지는 터라 테오도르에게는 페르슈타인의 독주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에게 포섭된 귀족들이 이미 의석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터였다. 또한 정신이 혼미한 노황제 발렌시우스 1세는 지금 의사표현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때문에 테오도르로써는 무모한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 들통난다면 그대로 목이 달아날 위험천만한 계획을 말이다. 그의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단 두 사람의 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 두 사람만 포섭한다면 그의 계획은 반 이상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한 사람은 나에게 협조하기로 맹세했다. 나머지 한 사람이 문제다." 천만 다행으로 테오도르와 뜻을 같이하기로 한 사람은 진정으로 아르카디아를 걱정하는 열사로 보였다. 당시 암암리에 그를 만난 테오도르는 제반 사정을 모조리 털어놓고 협조를 구했다. "이 임무는 당신의 목숨을 버려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오.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 도저히 대답을 강요할 수 없소. 모든 것을 당신이 판단해서 결정하시오." "알겠습니다. 집정관 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예상 밖으로 그는 흔쾌히 테오도르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을 설득하겠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럼 모쪼록 조심하시기 바라오." 테오도르는 무척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실 테오도르가 두 사람 모두를 만나는 것은 정말 위험천만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으므로……. 만에 하나 페르슈타인의 의심을 살 수 있었기 때문에 테오도르는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와서 그가 도착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위험한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이것은 도박이다. 만약 그가 딴 마음을 먹었다면 이곳으로 들이닥치는 것은 필경 페르슈타인의 사병들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도저히 액운을 피할 수 없었다. 페르슈타인의 능력이라면 집정관 한 명의 실종 정도는 충분히 감출 수 있었으므로. "하지만 후회는 없다. 단지 뻔히 닥칠 위기를 알고도 준비할 수 없다는 것이 애석하긴 하지만……."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테오도르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모든 것이 하늘에 달려있다는 심정으로 말이다. 똑똑. 문 두들기는 소리에 테오도르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는지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꿀꺽. 침을 한 번 삼킨 테오도르는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문 밖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그와 아르카디아의 운명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덜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을 바라본 테오도르의 얼굴엔 환희의 빛이 번져가고 있었다. 문을 두드린 자들은 그가 손꼽아 기다렸던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며 테오도르는 아르카디아의 앞날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역시 정신에 작용하는 면에서는 사술이 마법보다 월등히 뛰어나군." 마법 서적을 뒤적이며 데이몬은 고개를 까닥였다. 그가 지금 들어와 있는 곳은 바로 베르키스의 마법 서실이었다. 오직 베르키스 말고는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 심지어 게덴하이드조차 이곳에 들어와 본 적이 전무할 정도였다. 그런 금지(禁地)를 데이몬은 지금까지 밥먹듯 들락날락해 왔던 것이다. 원래 이곳에는 침입을 막는 마법 장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가디언들이 이곳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했는지 베르키스는 의외로 이곳에다 간단한 알람 마법 하나만 달랑 설치해 놓았을 뿐이었다. 물론 6써클의 마스터였던 데이몬이 이 마법을 파훼하는데 장장 5년이 걸릴 정도였으니 결코 간단한 마법이라 할 수 없을 테지만 말이다. 베르키스의 마법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 할 만 했다. 베르키스의 마법서실은 사방 30평방미터 정도 되는 석실이었다. 벽면을 온통 서가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곳에는 마법 서적이 빈틈없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그 중에는 드래곤들의 마법서도 있었고 인간들로부터 약탈한 것도 있었다. 심지어 언데드 몬스터를 소환하는 마법서도 있었으니 가히 인간계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마법이론서가 이곳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그 서적들은 데이몬이 한두 번씩 탐독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데이몬은 수백 년 동안 서실 내부의 책을 모조리 독파한 상태였다. "그건 그렇고……." 훑어본 서적을 바닥에 내려놓은 데이몬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마법과 관련된 서적은 이미 그의 관심 밖이었다. 이미 바닥은 데이몬이 읽다 버린 책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다. 물론 데이몬에게는 그것을 정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베르키스가 깨어나기 전에 반드시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으므로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은 바로 인간들과의 전쟁과정과 그 전후처리를 기록한 보고서였다. 베르키스는 인간 정벌에 총사령관 격인 드래곤이었고 분명 그의 레어 어딘가에 그 과정을 기록한 보고서가 있을 터였다. 물론 중요한 것이니 만큼 그냥 서가에 꽃아 두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말이다. "이것이 마지막 서가인데……." 텅 빈 서가 앞에서 데이몬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베르키스의 비밀 서류들을 찾아내기 위해 그는 지금 서가마다 디스펠과 탐색마법을 빠짐없이 시전하고 다니는 중이었다. 물론 이것은 지금까지는 꿈도 꾸지 못하던 일이었다. 서클이 낮은 마법사는 그보다 높은 마법사가 시전한 마법을 결코 디스펠하지 못하는 법이므로……. 하지만 데이몬은 이제 일반적인 마법 실력만은 결코 베르키스에 뒤지지 않는다 자부할 수 있었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12회. 그가 베르키스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정신에 작용하는 10 써클의 마법뿐이었다. 그 외의 마법실력은 격차가 그리 크지 않았다. 9 써클과 10 써클의 차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사술을 다각적으로 응용한다면 놈이 10 써클의 정신 마법을 시전하더라도 쉽사리 당하진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내 라이프 포스 베슬만 빼돌린다면 말이다." 격정이 치밀었는지 뼈만 남은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리치가 된 이후 그는 이제 팔을 원활히 사용할 수 있는 상태였다. 잠시 감정을 가라앉힌 데이몬은 지체 없이 수인을 맺었다. "디스펠." 예상대로 서가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데이몬은 실망하지 않고 재차 탐색 마법을 펼쳤다. 마법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서가 구석구석을 샅샅이 검색하려는 것이다. "응?" 텅 빈 데이몬의 동공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극히 미세한, 아마도 과거였으면 결코 눈치채지 못했을 마법의 기척이 그의 탐색마법에 감지된 것이다. 그는 지체 없이 서가에 손을 붙였다. 디스펠을 캐스팅하자 뼈만 남은 손을 축으로 눈부신 광구가 맺혔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광구는 어느 순간 빛을 맹렬히 내쏘았다. 번쩍. 목표제한으로 단위 면적 당 작용하는 마법의 효과를 비약적으로 늘인 변형 디스펠이 전개되었다. 그러자 마침내 서가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책을 꽂는 부분이 빙글 돌아가며 시커먼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데이몬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이곳이었군." 데이몬은 급히 손을 집어넣으려다 잠시 멈칫했다. 이미 그에겐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신중함이 몸에 배어 있던 상태였다. "혹시라도 놈이 수작을 부려놓았을지도 모르니……." 공간 가장자리에 손가락을 살짝 걸친 데이몬은 목표제한 디스펠을 다시 한 번 캐스팅했다. 천만 다행으로 마법 하나가 거기에 걸렸다. 서실 내부에 펼쳐져 있던, 데이몬이 파훼하는데 5년이 걸렸던 바로 그 알람 마법이었다. 데이몬의 얼굴이 미묘하게 비틀어졌다. "이 정도야 이젠 문제도 아니지. 이미 난 9써클의 경지에 올랐다고……." 그가 정신을 집중함에 따라 마나의 재배열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로 이루어졌다. 알람 마법은 결국 1분도 버티지 못하고 파훼되었다. 과거 5년이 걸린 것을 감안하면 놀랄 만한 성장이었다. 한숨을 내쉰 데이몬은 서슴없이 공간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후 그의 손엔 한 무더기의 서류 뭉치가 딸려 나왔다. 그것을 본 데이몬은 눈을 빛냈다. "이것이로군." 데이몬은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서류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약 두 시간 가량의 집중 끝에 데이몬은 서류의 내용을 모조리 파악할 수 있었다. 몇 가지 마법을 시전해서 기억력과 응용력을 높인 탓에 데이몬은 단 시간 내에 많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서류를 읽고 난 뒤 그의 얼굴에서 득의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비록 리치의 얼굴이라 많은 표정을 드러내진 못하지만 말이다. "성공했군." 데이몬은 거기에서 마침내 목적했던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라진 봉인구에 대한 행방이었다. 대마왕 나이델하르크가 봉인된 마법의 구슬. 드래곤 로드 크라누스가 만들어내고 휘하 드래곤들의 마나가 대대적으로 주입된 봉인구는 대마왕 나이델하르크를 지금까지도 꼼짝달싹 못하게 옭아매고 있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나이델하르크는 마계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영원히 잠에 빠져있어야 하는 것이다. "되었어." 데이몬은 눈을 빛내며 몸을 일으켰다. 물론 그것말고도 많은 제반 지식을 얻는 수확을 얻었지만 현재 그에겐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봉인구에서 나이델하르크의 마력을 뽑아내어 언데드 몬스터들을 소환하지 못한다면 그의 복수는 어떠한 경우에도 성공할 수 없다. 일의 성패는 바로 그것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해서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빼오는 것인가 이다. 물론 그 전에 내 라이프 포스 베슬을 먼저 훔쳐내야 하겠지만 말이다." 서류를 통해 데이몬은 한 가지 사실을 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베르키스의 레어에 어째서 보물이 존재하지 않은지에 대해서 말이다. 통상적으로 드래곤들은 보석이나 보물 종류를 무척 좋아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베르키스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미 데이몬은 수많은 보석과 보화들이 드래곤들의 레어로 실려 가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것들 대부분은 인간들에게서 약탈한 것들이다. 드래곤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오크들은 빼앗은 전리품 중 값진 것들은 모조리 드래곤들에게 바쳤다. 어차피 오크들에게 보물은 별달리 소용없는 물품이었다. 물론 드래곤들은 무척 기뻐하며 받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500년의 세월동안 베르키스의 레어를 지키며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간에게서 약탈한 보물들은 모조리 드래곤들의 레어로 옮겨졌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베르키스의 레어에는 보물이 별로 없었다. 금이나 은 따위의 부피 큰 보물은 있을지언정 값비싼 보석이나 마법 무구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던 것이다. 이미 베르키스의 레어 구석구석을 살펴본 데이몬은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서류를 통해 그 해답이 백일하에 드러났으니……. "그랬군. 놈들은 도난을 우려해서 그곳에다 보석을 옮겨놓았던 것이로군." 현재 드래곤들 대부분이 수면기에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모든 드래곤들이 잠을 자는 것은 아니었다. 단 하나 지크레이트라는 이름의 그린 드래곤 하나 만은 이례적으로 잠에서 깨어 있었다. 왜냐하면 전쟁 기간 중 그만이 잠을 자고 있었으므로……. 따라서 지크레이트는 인간과의 전쟁에 참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드래곤들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바로 수면기 동안 그들의 보물을 보관하는 임무를 맡긴 것이다. 그들이 잠을 자는 동안 지크레이트는 깨어있는 상태로 보물을 지킨다.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는 바로 지크레이트의 수중에 있었다. "서류에 의하면 놈은 아직 웜급이 되지 못한, 비교적 약하다 볼 수 있는 드래곤이다. 하지만 서류에는 놈을 처치하더라도 결코 보물을 탈취하진 못할 것이라 나와 있다. 왜냐하면 지크레이트는 드래곤들이 힘을 모아 만든 마법의 보고(寶庫) 인크레시아에다 봉인구를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서류에 의하면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는 결코 타인이 털 수 없는 종류의 보고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질적으로 인간계에 존재하지 않는 보고였기 때문이었다. 인크레시아는 일종의 차원의 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약속된 자의 주문에 의해서만 열리는, 그 외에는 인간계에 존재하지 않는 보고이므로 그야말로 도난을 완벽하게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속의 보물들 역시 타 차원, 그것도 생명체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차원에 보관된다. 설사 신이라고 해도 보물에 손을 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약속된 자 외에는 결코 문을 열어주지 않기 때문에 인크레시아는 말 그대로 철옹성 같은 보고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손에 넣어야 한다." 그것말고도 데이몬에겐 자신의 라이프 포스 베슬까지 훔쳐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집념을 꺾지 않았다. 그에겐 복수와 함께 다프네를 구해내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뜻을 이루고야 말겠다." 아무도 없는 베르키스의 마법서실에서 데이몬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두 가지 물품을 훔쳐낼 방도를 떠올리기 위해서 말이다. "이곳은 어디지?" 누군가가 기대 어린 시선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음성의 주인은 무척 젊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소년이라 하기엔 다소 나이가 많고, 그렇다고 청년으로 보기는 다소 미흡한 금발의 청년. 놀랍게도 그는 너무도 헌앙하고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늘하늘 휘날리는 금발머리 아래엔 두툼한 눈썹이 자리해 있었고 우뚝한 콧날과 도톰한 입술은 남자도 여자만큼이나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청년의 얼굴에는 치기만이 가득했다. 눈매가 왠지 모르게 멍해 보이는 청년은 뭔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짜증스러운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이곳에 온다면 사탕과 과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그랬잖아?" 그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묵직한 음성이 옆에서 들려왔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사탕과 과자는 저쪽에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온 자는 갑옷을 걸친 기사였다. 투구를 쓰고 있지 않아서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반백의 머리칼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얼굴을 가로지른 끔찍한 흉터와 짜부러진 왼쪽 눈이 그를 결코 범상하게 보이게 하지 않았다. 외눈에서 새어나오는 안광은 보는 이의 심금을 저리게 할 정도로 강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아르카디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의 실력을 지닌 강자였다. 루드비히 폰 아미르트. 그는 크로센 근위 기사단의 부단장으로써 황가에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진 근위기사였다. 벌써 30년 전에 소드 마스터의 자격을 취득한 자로 검술 실력이 아르카디아 전체를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끼인다고 자부할 정도로 강한 검사인 것이다. 황제를 경호하는 근위기사단장의 뒤를 이어 황태자를 경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일국의 황태자를 보호하는데 부단장이 나서는 것은 극히 지극한 일이었다. "이미 사탕과 과자가 준비되어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의 말을 듣자 청년의 안색이 갑자기 환해졌다. "정말이죠? 루드비히 경?" "그렇습니다." "아이 좋아라." 청년은 무척 기쁜 듯이 기사가 가리킨 방향으로 뛰어갔다. 그 뒤를 친위 기사들이 바짝 붙어 뒤따랐다. 그들에겐 자신의 목숨을 버리더라도 청년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별달리 급할 것이 없다는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상급의 소드 마스터인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매에는 이해할 수 없는 짙은 고뇌가 떠오르고 있었으니. '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왕가의 존속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그는 힐끗 시선을 던졌다. 뒤따라가고 있던 노 마법사 하나가 그의 시선을 받자 입술을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 역시 평범한 신분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크로센 제국의 궁정 마법사로써 7써클의 마스터인 페이런이 바로 그의 이름이었으니……. 그의 얼굴에도 예외 없이 쓸쓸한 우수가 서려있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크로센 제국에 얼마나 엄청난 파장을 가지고 올지 익히 아는 지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크로센 제국이 귀족들의 손에 좌지우지해 지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청년을 따라 걸어가며 루드비히는 바로 어젯밤 페이런이 찾아왔을 때를 상기했다. "뭐, 뭐라고?" 페이런의 말을 들은 루드비히는 모골이 송연한 느낌을 받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늦은 밤에 찾아온 자신의 오랜 지기 페이런이 정말 경천동지할 제안을 해 왔던 것이다. 루드비히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나, 나는 할 수 없네. 어찌 크로센 대제의 핏줄을……." "하지만 우리가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크로센 제국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았나? 자네는 이미 궁정에서 돌아가는 일을 잘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나, 난 기사라네. 도저히 그 일을……." "그렇다면 황가가 몰락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겠다는 뜻인가?" 루드비히는 말을 잊었다. 물론 그라고 궁정의 사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어린 황손을 두고 권력의 중심부에서 벌어지는 추악한 암투를 말이다. 하지만 페이런의 제안은 기사인 그로써는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었던 일이었으니……. 페이런은 지긋한 음성으로 루드비히를 설득해 나갔다. "지금 자네가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더 이상 기회가 없네. 오래지 않아 페르슈타인 공작은 황태자의 호위를 자신의 충실한 심복으로 대처할 것이 분명하네. 시간이 없어." "………." "알카리스 황태자가 황위에 오르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자네도 익히 알고 있을 줄 아네." "하지만 어찌 우리 손으로 그 분의 후손을……." "어쩔 수 없는 일이네." 침통한 표정의 페이런을 보며 루드비히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페이런과 자신은 평생동안 크로센 제국에 충성을 바쳐온 충신들이었다. 이런 일을 계획해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그 일이 꼭 필요함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승낙을 한다는 사실까지도…….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황가에 대한 충성심에 바탕을 둔 결정이었다. "어쩔 수가 없군. 자네 제안대로 하겠네." "고맙네." 감사를 표하기는 했지만 페이런의 얼굴에는 어두움이 짙게 깔려 있었다. 임무를 성공하더라도 그 대가로 그들 둘의 목숨과 함께 가문의 운명까지 끝장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사실을 상기한 루드비히는 얼굴빛을 고쳤다. '후회는 없다. 평생을 황가에 충성했으며 마지막까지 내 모든 것을 바칠 작정이었으니……. 오직 가족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지만 젊은 황태자를 보자 침울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자신과 페이런이 벌써 20년 동안이나 호위해왔던 황태자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지능이 뒤떨어지기는 했지만 알카리스는 무척 천진난만하고 쾌활한 청년이었다. 지금껏 호위해오는 동안 마치 손자 같은 느낌도 받았으니 그들 둘에게 연민의 정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으리라……. 하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기필코 알카리스가 사라져야 했다. 그래야만 영명한 드비어스가 황위를 물려받을 수 있으며 또한 페르슈타인 공작의 독주를 막을 수 있었다. 더불어 크로센 황가의 존속까지도 말이다. '저희들을 용서하십시오. 폐하.' 사실 집정관 테오도르에게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았어도 페이런은 어렴풋이 제국의 위기를 직감하고 있었다. 루드비히는 그런 페이런의 푸념을 벌써 여러 번이나 들어본 상태였다. 둘은 같은 학부를 졸업한, 마치 형제와도 같은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페이런에게 집정관이 찾아간 것은 정말 천행이라 볼 수 있었다. 페이런은 테오도르의 제안을 듣자마자 두말없이 동의하고 나섰다. 그만큼 뜻 있는 자들은 페르슈타인 공작의 전횡에 치를 떨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갈등이 없진 않았지만 루드비히 역시 뜻을 같이하기로 결심했다. 그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자는 오직 그들 둘밖에는 없었다. 아무리 마법실력이 뛰어나고 검술실력이 강하더라도 황태자를 바로 옆에서 경호하는 둘이 아니라면 계획은 실패할 확률이 높았으므로……. 긴장으로 굳어있는 루드비히의 모습을 보자 페이런은 마치 위로하듯 중얼거렸다.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우리가 직접 처리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저곳만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네. 비운의 황태자와 함께 우리들의 늙은 목숨까지 처리해 줄 존재가 말이야." "그렇게 강한 존재가 있단 말인가?" 페이런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곳은 바로 레드 드래곤의 레어이네. 또한 그곳에는 9써클에 이른 무시무시한 리치가 살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와 있는 상태이지. 테오도르 집정관이 근위기사 헤이우드의 입에서 직접 확인한 사실이니 아마 틀림없을 걸세." 루드비히는 그럴 듯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9써클의 리치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우리와 함께 비운의 황태자 알카리스까지 끝장낼……." 다시금 침울한 표정으로 돌아온 루드비히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정해졌는지도 모르는 채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태자 알카리스가 걸어가고 있었다. 옆의 시종에게서 과자를 받아 연신 입 속에 집어넣고 있는 황태자. 그들을 쳐다보는 노기사와 노마법사의 눈빛은 극도로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13회. 쾅! 화려하게 치장된 커다란 방에서는 난데없이 굉음이 울려 퍼졌다.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친 자는 화려한 복장을 걸친 중년인이었다. 가늘게 찢어진 눈매가 인상적인 그는 지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있었다. "뭐라고? 황태자가 실종되었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그의 앞에는 서너 명의 기사들이 쩔쩔매는 기색으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한 기사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예정대로라면 알카리스 황태자는 수도 남쪽의 별궁으로 공간 이동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마법 통신에 의하면 황태자 일행은 그리로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올 시간이 훨씬 넘었는데도 말입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이렇게 중요한 시가에……." 크로센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권력자라 할 수 있는 페르슈타인 공작은 도저히 화를 주체할 수 없는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지금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은 도저히 진정할 수 없는 소식이었다. "조금 있으면 발렌시우스 황제가 유명을 달리할 것이다. 그가 죽기 전에 알카리스를 찾아오지 않으면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정말 큰일이군." 별안간 그의 눈에서 살광이 치솟았다. 황태자의 호위를 맡고 있는 자들에게 발산하는 분노였다. "루드비히. 페이런. 내 이놈들을 그냥……." 불연 듯 경솔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계획대로라면 그들의 자리에 벌써 심복을 배치했어야 했지만 설마 하는 생각에 그들을 그냥 내버려둔 것이 화근이었다. 그들은 골수까지 노황제의 심복이었다. "젠장맞을……. 어떤 일이 있어도 놈들을 찾아야 한다. 두 노물은 찾는 즉시 죽여버려도 무방하지만 황태자만은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게 데려와야 한다." "아,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부산하게 달려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페르슈타인은 눈을 빛냈다. 그에겐 선조의 이루지 못한 염원을 이뤄내야만 하는 사명 같은 것이 있었다. "이미 크로센 제국의 군사력은 반 이상 내 수중에 들어온 상태다. 하지만 신중해야 한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조상들의 전철을 밟지 않을 테니 말이다." 통상적으로 아르카디아에서는 쿠데타에 의해 정권이 뒤바뀌어도 주변국가들이 개입하는 일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이름하여 강자지존(强者至尊)! 크로센 대제가 주창한 원칙에 따라 능력이 있는 귀족이라면 얼마든지 국가를 뒤엎고 새로운 시대를 개척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방어하고 못하고는 원칙적으로 군주의 능력에 달려있다. 무능력한 군주라면 왕위에서 밀려나는 것이 아르카디아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아르카디아를 지배하고 있는 철학이었다. 그 논리에 의하자면 페르슈타인은 벌써 크로센 제국의 절대자가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쉽사리 행동할 수 없는 것이 당금 제국의 황제는 바로 크로센 대제의 후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르카디아에 끼친 은혜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런 이상 자신에게 힘이 있더라도 섣불리 그 후손을 실각시킬 수는 없었다. 최악의 경우 다른 왕국들이 연합군을 결성해 자신에게 응징을 가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어쨌거나 그들은 크로센 대제 덕분에 왕이 될 수 있었던 자들이었으므로……. "현재 나는 왕국 둘 정도는 멸망시킬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근교의 왕국들이 군사력을 하나로 합친다면 나로써도 벅찰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는 최우선적으로 크로센 제국을 안전히 장악해야 한다. 제국의 군사력을 하나로 모아야만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알카리스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사리판단을 하지 못하는 그를 황제자리에 앉혀놓아야만 제국의 국정을 자신의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 상태에서 내가 황제로 등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크로센 기사단이 아직까지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기 때문이다. 놈들은 황제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웃으며 받아들이는 골수분자들이다. 그들의 힘을 얻지 못하면 내 꿈은 실현될 수 없다." 페르슈타인이 나지막이 지껄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의 집무실로 달려 들어왔다. 로브를 걸친 것으로 보아 마법사로 보였는데 무척 다급한 기색이었다. "무슨 일인가?" "크, 큰일났습니다." 숨을 헐떡거리는 마법사는 그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쿠슬란이었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그는 채 말도 잇지 못한 채 헐떡거렸다. 그 모습에 페르슈타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노, 놈들의 행선지를 밝혀냈습니다." "뭐라고?" 페르슈타인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곳이 어디이던 간에 동원할 수 있는 기사들을 모조리 파견해서 알카리스를 되찾아와야 한다는 것이 그의 굳은 결심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쿠슬란의 말에 페르슈타인은 온 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레,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의 레어라고? 트루베니아에 있는……." "그, 그렇습니다. 일전에 근위기사 헤이우드와 수련기사들이 몬스터 사냥을 다녀온 바로 그곳입니다." "이런." 페르슈타인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루드비히와 페이런의 흉계를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던 페르슈타인이었다. 그곳은 명백히 사지라고 볼 수 있는 장소였으므로……. "드래곤의 손을 빌어 황자를 처리하겠다는 뜻이군. 할 수 없지. 즉각 기사들을 파견해라.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알카리스를 되찾아와야 한다." "하, 하지만 그곳에는 9써클의 리치가 있다는 보고가……." "알카리스를 되찾아오지 못한다면 내 손에 죽는다. 양자 택일하라. 리치에게 죽겠는가? 아니면 나에게 죽겠는가?" 결국 쿠슬란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리치에게 죽는다면 그 하나로 끝날 테지만 페르슈타인의 눈 밖에 난다면 가족들 모두가 무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루드비히와 페이런의 식솔을 남김없이 체포해라. 반역을 시도한 놈들에 대한 본보기를 보여야 하니까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몸을 부들부들 떨던 쿠슬란은 알았다는 듯 몸을 돌렸다. 페르슈타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가 나가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테오도르. 이 모든 것을 꾸민 것이 네놈의 소행인가? 감히……." 도저히 화를 주체할 수 없는 듯 페르슈타인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가만있자. 기문둔갑술을 마법으로 적용하는 공식이 어떤 것이었지?" 자신의 처소에서 데이몬은 골똘히 생각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사술을 모조리 마법으로 응용시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중원의 문파들 중 사술에 가장 정통한 집단이 바로 배교였고 그곳의 교주였던 탓에 데이몬은 온갖 사술과 술법에 통달한 상태였다. 비록 지금까지는 내공이 없던 탓에 사술을 시전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9써클의 마스터가 된 이후 데이몬은 꾸준히 사술을 발굴해왔고, 오랫동안 잊혀졌던 사술의 이론들은 죄다 마법으로 둔갑되어 있는 상태였다. "드래곤을 상대하려면 마법으로는 역부족이다. 그러므로 놈들에겐 생소한 술법인 사술로 상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듯 싶다." 그린 드래곤 지크레이트에게서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빼앗고 베르키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사술을 해법으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뼈만 남은 데이몬의 머리통이 좌우로 흔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라이프 포스 베슬을 빼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빌어먹을……." 베르키스가 직접 작성한 서류를 통해 데이몬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리치들의 라이프 포스 베슬이 현재 베르키스의 몸 속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베르키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은 정녕 요원한 일이었다. 물론 베르키스가 잠에서 깨어난다면 레어를 경비하는 리치 모두가 덤벼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니 배에 조금의 힘만 준다면 리치들은 모조리 소멸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것도 게덴하이드를 위시한 리치들이 세뇌마법에서 벗어나서 데이몬에게 협조한다는 가정 하에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말이다. 물론 그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능성이 전무한 일이었다. "하지만 방법은 있어." 데이몬은 돌연 눈을 빛냈다. 이미 그는 사술을 통해 몇 가지 대안을 생각해 놓은 다음이었다. 물론 그 방법이란 게 가능성이 무척 희박하고 위험부담이 높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어떻게 해서든 성공시키고 만다." 나직히 각오를 다지는데 갑자기 그의 앞에 놓인 수정구슬에서 희미한 빛이 일어났다. 그것이 마법 통신이란 것을 알아차린 데이몬은 다급하게 수정 구슬 앞에 앉았다. 마나를 불어넣자 수정구슬에는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다. 자신과 동일한 리치의 모습이. 그는 다급하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모든 가디언들에게 알린다. 지금 레어의 동남부에 강력한 적이 출현했다. 이미 가디언 셋이 놈들의 손에 당했다. 빠른 지원을 바란다." 데이몬의 눈에 짜증이 스쳐지나갔다. 그까짓 사소한 일로 인해 상념을 중단한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물론 레어의 안전이야 관심조차 없는 일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강력한 적에 의해 레어 전체가 쑥밭이 되어버렸으면 속이 시원하겠지만 그것 역시 생각하기 힘든 가정이었다. 이곳에는 적어도 오십 명이 넘는 6써클의 리치가 있었으며 또한 9써클에 오른 게덴하이드도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침입자들은 일다경을 버틸 수 없을 것 같군. 도대체 어떤 놈들일까?' 데이몬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수정구슬에서 또다시 음성이 튀어나왔다. "놈들에게는 강력한 소드 마스터 하나와 고위급 마법사 하나가 끼여 있다. 그 외의 놈들은 별달리 문제가 없지만 둘의 실력은 결코 얕볼 수 없다. 최상급의 소드 마스터인 만큼 방어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서둘러다오." 그 말을 끝으로 수정구슬에 맺힌 영상이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싸우는 동료들을 지원하러 간 모양이었다. 데이몬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돌아앉으려고 했다. 굳이 자신이 가지 않더라도 게덴하이드를 비롯한 다른 리치들이 침입자들을 끝낼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눈에서 갑자기 괴이한 빛이 일어났다. 불연 듯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가만있자. 만약 그 소드 마스터란 놈의 몸을 얻는다면……." 좋은 생각이 떠오른 데이몬은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그의 얼굴에는 뭔가 해법을 찾았다는 듯한 빛이 일렁거렸다. 열심히 몸을 날리는 데이몬의 뇌리에는 사술의 이론들이 쉴새없이 지나쳐가고 있었다. 지금 데이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몸이었다. 베르키스의 손아귀에 단단히 쥐어져있는 썩어빠진 리치의 몸이 아닌, 살아 숨쉬는 생생한 인간의 몸. 지금 데이몬의 뇌리에는 영혼교환의 사법(靈魂交換邪法)에 대한 구결이 떠오르고 있었다. 영혼교환의 사법, 이것은 배교의 사술 중에서도 최고위급 주술이라고 칭할 수 있었다. 기억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다른 사람의 영혼을 뽑아내어 그 자리에 대신 들어가 앉는, 한 마디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고급 술법의 일종이다. 물론 고위급 사법인만큼 그 시술조건이 엄청나게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뇌의 파장이나 영혼의 동질성 따위의, 수치로 설명되지 않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대법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다. 과거 읽었던 배교 경전을 통해 데이몬은 이 사법이 성공할 확률이 고작 10%내외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패한다면 둘 다 백치가 되어버리겠지?" 영혼교환의 사법은 그만큼이나 성공하기 어려운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이 이 방법을 선택하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절박한 지경에 처해있는가를 보여주는 듯 했다. 사실 그의 명줄을 쥐고 있는 베르키스에게서 벗어나려면 이 방법 밖에는 없었다. 라이프 포스 베슬을 훔쳐낼 방도가 없는 터라 몸을 바꿔치는 것말고는 방도가 없어 보였다. 사실 오랜 역사를 가진 배교에서도 이 술법을 시행한 전례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우선 실패할 확률이 현저히 높은 데다 그것을 감수할 만한 메리트가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무예란 정신과 육신의 합일을 최우선조건으로 한다. 따라서 몸을 바꾸어 능력을 차지하길 바라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었다. 최강 고수를 납치해서 몸을 차지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내공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때문에 이 방법은 지금껏 빈사상태에 처하거나 늙어 죽을 위기에 처한 배교의 장로들이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제한적으로 사용해왔다. 하지만 그 효과는 정말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10%의 확률을 극복해서 새로운 젊은 몸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시술자는 내공이 전혀 깃들지 않은, 범인과 다름없는 몸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오랜 수련을 통해 다시 무예를 익히기 전까진 시술자는 전혀 쓸모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만에 하나 교내에 원한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 날을 넘기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탓에 이 영혼교환의 사법은 오랫동안 배교의 경전 창고에 묻혀있었다. 데이몬 역시 이 구결을 외우기는 했지만 이것이 실제로 소용될지 심각하게 의심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나의 경우는 다르지. 설사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육신을 얻게 되더라도 마법을 전개하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로지 대법이 성공하는 것만을 바라는 것이지." 데이몬은 이제 마법의 극한을 경험하고 있는 대마법사였다. 마법이란 학문 자체가 정신적인 면에 극도로 치중한 학문이니 만큼 몸이 바뀌더라도 마법을 시전하는 데는 별다른 장애가 없어 보였다. 물론 마법을 몸에 익숙하도록 다시 연습해야 하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짧은 시간 내에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마법은 무예와는 전혀 다른 경우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14회. 이 순간 데이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바꿔치기 할 수 있는 싱싱한 몸이었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베르키스가 보관하고 있는 라이프 포스 베슬의 파괴를 더 이상 겁낼 필요가 없어진다. 하지만 그것 역시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중원과는 판이하게 떨어진 이곳 사람들과 정신파장이나 여타의 조건이 맞아떨어지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으므로……. 물론 데이몬의 입장에서는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정신 없이 달려가며 데이몬은 이를 지긋이 깨물었다. "나에겐 영원한 시간이 있다. 일단 대법이 성공해서 베르키스 놈의 손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소드 마스터의 몸을 발판으로 수련을 거듭해서 반드시 복수를 꾀할 수 있을 터. 비록 내공은 얻지 못하겠지만 소드 마스터의 잘 단련된 몸이라면 빠른 시간 내에 절정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테니까." 그 소드 마스터가 얼마나 강한 자인지는 모르지만 부디 게덴하이드의 손에 당하지 않았길 기원하며 데이몬은 정신 없이 몸을 날렸다. "페, 페이런." 루드비히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오랫동안 절친했던 친우가 바로 눈앞에서 죽어 가는 데 경악하지 않을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미 페이런의 몸은 산산이 부스러지고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9써클의 고위급 마법에 격중되었던 탓이다. 루드비히의 귓가에는 페이런이 남긴 마지막 말이 감돌고 있었다. "나, 나인 써클의 호리드 윌팅! 헤이우드의 보고는 사실이었어." 페이런의 몸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스러져버렸다. 그것을 쳐다보던 루드비히의 뇌리에도 어느덧 죽음이라는 단어가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이곳에 오면 계획이 성공하리라는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드래곤의 레어에는 그들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한 가디언들이 우글거렸다. 대부분이 6써클을 넘어가는 고위급 언데드 몬스터인 리치. 세상에 리치가 이토록 많을 줄은 그들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접전을 벌인지 10분도 되지 않아 데리고 왔던 친위 기사들 대부분이 죽어 넘어졌다. 그들 대부분이 팔라딘이었지만 6써클의 리치를 상대하는데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한숨 돌릴 사이도 없이 퍼부어지는 마법 공격, 팔라딘들은 대마법 갑옷과 함께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살아남은 자는 단 세 사람. 뛰어난 소드 마스터인 루드비히와 리치보다 써클이 높은 마법사 페이런,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기를 쓰며 보호하는 황태자 알카리스였다. 죽일 목적으로 데리고 왔긴 하지만 그들 둘은 사력을 다해 알카리스를 보호하는데 주력했다. 어쩌면 그것은 그를 사지로 데리고 온 데 대한 미안함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이곳은 그들이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뚫고 나갈 수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달한 상황이었다. 페이런이 목숨을 잃은 이상 자신 역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알카리스를 쳐다보았다. "흐으, 흐으." 거듭되는 친위기사들의 죽음에 알카리스는 아예 넋이 나가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크게 뜨여진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이미 머리에 큰 상처를 입어 피가 얼굴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곱게 자란 그가 언제 이런 상황을 맞아보았으랴! 그 모습에 루드비히는 상당한 양심의 가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이 죗값은 죽어 저승에서 치르겠습니다." 살짝 목례를 한 루드비히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페이런을 일격에 소멸시켰던 공포의 리치가 시퍼런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일견해 보더라도 여타의 리치와는 다른 차림새를 하고 있는 자. 루드비히의 입가에 만족스럽다는 듯한 미소가 걸렸다. "네놈이 말로만 들었던 9써클의 리치로군. 반가워. 그래도 내 최후를 하찮은 것들에게 맡기지 않아도 되니 말이야." 그를 쳐다보던 게덴하이드의 눈매에 기이한 빛이 스쳤다. 사실 이번 침입자들은 역대 트레저 헌터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행동패턴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저 인간은 마치 죽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것 같지 않은가? 처음 접전이 벌어졌을 때 그는 인간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외곽에다 포위망을 갖추는데 주력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려보내지 않을 작정으로 말이다. 하지만 저들은 예상을 뒤엎고 레어가 있는 쪽으로 계속 밀고 들어왔다. 그렇다고 자신들을 압도할 만한 전력도 아니었다. 고작 소드 마스터 몇과 마법사 하나로 이런 무모한 일을 벌인다는 것은 솔직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할 게덴하이드가 아니었다. 어차피 상대는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척살해야 할 침입자에 불과했다. 트레져 헌터이든 드래곤 슬레이어를 꿈꾸는 자이건 상관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안광을 번뜩이며 게덴하이드는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네놈이 무슨 이유로 왔는지 모르지만 상관없다. 감히 트루베니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 자체가 죽을 이유이므로……." "놀랍군. 리치가 드래곤의 가디언으로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굳힌 루드비히는 검을 잔뜩 꼬나 쥐었다. 그의 눈에 멍하니 선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비운의 황태자가 비쳐졌다. 순간 가슴이 저려왔지만 그는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목숨을 끊어 고통을 줄여줄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상황은 결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공격." 게덴하이드의 명이 떨어지자 리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콰콰콰콰. 파이어 블레스트, 체인 라이트닝. 새도우 블레이드. 브로큰 스워드등의 중급 공격마법들이 루드비히에게로 일제히 집중되었다. 루드비히의 몸은 곧 섬광에 싸여 버렸다. "우욱." 전신을 관통하는 듯한 통증에 루드비히는 묵직한 신음을 뱉었다. 비록 대 마법 갑옷이 열심히 마법 공격을 막아주고는 있었지만 그것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었다. 갑옷에 새겨진 마법진이 깨어지던가 아니면 체내의 마나가 고갈되면 그도 결국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이처럼 열세인 상황에서는 마법사를 상대하기가 힘들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것도 면면을 따져보아 하나, 하나가 6써클의 마스터로 짐작되는 리치들이 아니던가? 갑옷의 마법진이 붕괴되는 것을 느낀 루드비히는 마나를 한껏 끌어 모았다. 허무하게 당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최후의 반격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갈 순 없지." 리치 하나라도 처치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물론 저승길에 페이런을 소멸시킨 리치와 동행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에잇." 마나를 밀어 넣음에 따라 갑옷에 새겨진 마법 문자가 눈부시게 빛났다. 루드비히의 몸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쏘아졌다. 목표는 페이런을 소멸시킨 바로 그 리치였다. 루드비히는 검을 머리 위로 치켜세우며 벼락같이 고함을 쳤다. "내 임무는 이제 끝났다." 리치의 손에서 눈부신 광휘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지만 그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콰쾅.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청난 충격이 그의 몸을 관통했다. 갑옷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리치들의 공격에 이미 한계에까지 달아올랐던 대마법 갑옷. 그것이 리치의 9써클 마법에 저항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끝인가……." 갑옷과 함께 몸이 부스러지는 것을 느끼며 루드비히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그의 혼백은 육체를 벗어나 하늘로 날아올랐다. 챙그렁. 주인을 잃은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어쩌면 그것은 황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노기사의 충성심을 애도하는 소리인지도 몰랐다. 상황은 종결되었다. 목적이 모호하긴 했지만 베르키스의 레어에 침입했던 자들은 남김없이 살해되었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하나에겐 저항할 능력도, 심지어 마음조차 없어 보였다. "이건 완전히 바보로군." 마지막 생존자를 보자 게덴하이드의 눈에서 경계심이 싹 사라져버렸다.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는 놈의 모습에서는 우스움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이미 그는 상대의 상태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뜬 채 입가로 침을 질질 흘리는 모습은 한 눈에 보기에도 얼이 빠진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기사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니고……. 놈들이 사력을 다해 보호하던 것을 보니 꽤 중요한 인물인 것 같은데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군. 복장을 보면 고급 귀족 같은데 말이야." 알카리스의 면면을 훑어보던 게덴하이드는 끌어올린 마나를 풀어버렸다. 이런 바보 같은 놈을 처리하는데 자신이 직접 손을 쓴다는 것이 솔직히 마나가 아까운 일이다. "너!" 게덴하이드의 지목에 리치 하나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이놈을 데리고 가서 포로들이 갇혀 있는 곳에 가둬라. 죽여버려도 되겠지만 그래도 나이가 젊은 놈이니 생명력을 흡수하는데 쓰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리치는 얼른 다가가서 알카리스를 둘러메었다. 반항할 정신도 없는지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서 호위를 잃었던 충격이 무척 컸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자신을 돌보아준 사람이 아니던가? 게다가 시종들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처참하게 죽어갔으니 놀라지 않았으면 도리어 이상한 일이리라. 완전히 얼이 빠진 듯 알카리스는 눈을 크게 뜬 상태로 그저 입가로 침만 줄줄 흘릴 뿐이었다. 그 모습에 게덴하이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찜찜한데 그냥 죽여버릴까?"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갑자기 뒤에서 다급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침입자입니다. 약 100여명 정도 되어 보이는 인간 기사들인데 이쪽으로 거침없이 난입하고 있다는 급보입니다." 고민하던 게덴하이드는 그 소리로 인해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떠올렸다. 이곳이 드래곤의 레어란 것을 알고도 돌입했다면 분명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놈들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저 얼빠진 귀족 녀석이 목표물일수도 있었다. 생각을 마친 게덴하이드는 알카리스를 들고 있던 리치에게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그 녀석을 당장 처치해버리고 따라오도록. 그리고 다른 놈들은 모두 날 따르라." 짤막하게 내뱉은 게덴하이드는 몸을 날렸다. 진용을 정비한 리치들이 일제히 뒤를 따랐다. "놈을 어떻게 처치한다?" 알카리스를 내려놓은 리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대는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인간이었고 놈을 처치하는 방법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방법이 너무 많아 어떤 것을 선택할지 고민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정하고 손을 들었다. "아이스 브링거로 꽁꽁 얼린 뒤 에어 블레스트로 산산이 박살내버려야겠군. 그래야만 시체 썩는 냄새가 잘 퍼질 테니 말이야." 말을 마친 리치는 지체 없이 마나를 재배열했다. 서둘러 명령을 완수하고 접전에 참가할 생각이었으므로 마음이 급했다. 하지만 그의 마법은 소리도 없이 나타난 그림자에 의해 캐스팅이 잠시 중지되었다. "너, 너는?" 나타난 자는 자신과 동일한 리치였다. 다만 평소에 리치들 사이에서 경원되고 있는 자라서 문제였지만 말이다. 리치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같은 가디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게덴하이드가 정말 끔찍이도 싫어하는 리치였다. 바로 데이몬이라는 이름의 리치. "이놈의 처리는 내가 맡지." 나타난 데이몬은 서슴없이 알카리스의 머리통을 쥐었다. 그것을 보던 리치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서렸다. 그가 알기로 상대는 결코 인간을 죽이려들지 않는 특이한 리치였다. 인간 침입자들과 싸움이 벌어지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접전을 회피했고 그가 맡은 경비구역에 침입한 인간들은 단 하나도 죽여 없애지 않았다. 물론 경비망이 뚫린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이유로 상대는 리치들 사이에서 극도로 꺼리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그런 자가 난데없이 나타나서 인간을 처리하겠다니…….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지만 그럴 수 없다. 이미 게덴하이드님께서 이놈의 처리를 나에게 하명하셨다." "이해해주면 안되겠나? 익히 알다시피 게덴하이드에게 얻어맞은 상처가 낫지 않았거든. 놈의 생명력을 좀 흡수했으면 하는데……." 하지만 리치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미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는 게덴하이드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놈을 내놓지 않으면 널 공격할 수밖에 없다." 수틀리면 둘 다 얼음덩이로 만들어버릴 심산으로 리치는 양손에 한껏 마나를 끌어 모았다. 어쩔 수 없다 여긴 때문인지 상대는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원 녀석. 이렇게 까진 하고 싶진 않았는데……. 내 눈을 보아라." "헉." 짤막한 경악성과 함께 리치의 동공이 한껏 팽창했다. 상대의 눈구멍에서 이글거리는 사이한 안광을 보고 난 뒤의 일이었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15회. 특이하게도 리치의 안광이 점차 풀리고 있었다. 마치 최면술에라도 걸린 듯한 반응이었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은 빙긋 미소를 떠올렸다. "이제 넌 나의 종이다. 그렇지 않느냐?" "그, 그렇습니다." 리치의 손에서 아이스 브링거가 서서히 소멸되고 있었다. 그것을 본 데이몬은 상대가 완전히 걸려들었음을 직감했다. "넌 날 본 일이 없다. 그렇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 인간 역시 네 손에 죽어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그렇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넌 이 인간을 어떻게 처리했느냐?" "저, 저는 아이스 브링거로 인간을 꽁꽁 얼린 뒤 파이어 스톰으로 송두리째 태워버렸습니다. 인간이 존재했던 흔적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좋다." 기대했던 대답을 얻자 데이몬은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넌 게덴하이드에게로 돌아가라. 그리고 모든 것을 사실대로 보고하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리치는 멍한 눈빛으로 몸을 돌렸다. 완전히 홀린 듯 머리통을 흔들어대는 모습이 상당히 우스꽝스러웠다. 데이몬의 눈을 보지 못하게 되자 리치의 눈빛이 점점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것을 느낀 데이몬이 일침을 놓았다. "서둘러라. 게덴하이드를 도와 침입자들을 격퇴해야지." "그, 그렇지." 리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날렸다. 이유는 모르지만 왠지 그래야겠다는 느낌을 받은 때문이었다. 그 뒤에서는 데이몬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배교의 수준 높은 사술인 귀령제심안에 당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라. 게덴하이드까지 제압할 자신이 없지만 네놈 정도면 식후 운동거리라고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고개를 숙였다. 멍청한 알카리스의 얼굴이 한 눈에 들어왔다. 침이 입가로 흐르다 못해 데이몬의 소맷자락까지 적시고 있었다. 데이몬의 눈에 아쉽다는 듯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간발의 차이로 소드 마스터가 죽다니 아깝군. 할 수 없지. 이 녀석이라도 잡아다가 시도를 해 보는 수밖에……." 빠르게 손을 놀려 알카리스의 상태를 짚어본 데이몬의 얼굴에 뭔가 기대의 빛이 떠올랐다. "천행인가? 이놈은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야. 뇌의 파장이 고르지 못한 것을 봐서 애초부터 정박아였던 것 같은데 차라리 잘 되었군. 넋이 나간 놈이라면 대법이 성공할 가능성이 비교적 높지." 말을 마친 데이몬은 몸을 날렸다. 게덴하이드의 이목이 닿지 않는 곳에 놈을 꽁꽁 숨겨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목적한 소드 마스터는 아니었지만 데이몬은 도리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그에겐 강한 힘을 가진 육신보다는 넋이 나간 육신이 더욱 반가웠다. 알카리스를 들쳐업고 달려간 데이몬이 도착한 곳은 베르키스의 레어에서 조금 떨어진 계곡이었다. 기암괴석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는 것을 봐서 외부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는 장소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은 데이몬에게 있어 극히 소중한 장소 중 하나였다. 그는 이곳에서 사술을 마법으로 변환시키는 방대한 작업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바위가 켜켜이 쌓인 곳에 도착한 데이몬은 지체 없이 수인을 맺었다. 쿠르르르. 굉음과 함께 바위가 돌아가며 시커먼 입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알카리스를 들쳐업은 상태로 데이몬의 모습은 곧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들어가자마자 바위는 원상태로 돌아가며 입구를 차단했다. 밀실 내부는 비교적 넓은 편이었다. 사방의 바위벽들이 칼로 잘려 나간 듯 반듯하게 깎여 있었고 한쪽에는 자그마한 서가가 놓여 있었다. 서가에 꽂힌 책들은 대부분 수기로 작성된 것들이었다. 데이몬이 마법과 사술을 집대성해서 완성해놓은 이론들이 모두 여기에 적혀 있는 것이다. 석실 가운데에는 큰 제단이 놓여 있었다. 마법과 사술을 연성하는데 사용한 듯 제단에는 데이몬의 손때가 시커멓게 묻어 있었다. "으차." 데이몬은 그 위에다 알카리스의 몸을 내려놓았다. 마치 시체가 되어버린 양 알카리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데이몬은 무표정한 눈빛으로 알카리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정말 수려한 얼굴이었다. 여자라면 아름답다고 묘사할 수 있는 외모에 마음이 떨릴 만도 하건만 불행히도 데이몬은 남자였다. 그것도 잘 생긴 사람을 극도로 미워하는 추남 말이다. "녀석. 반반하게는 생겼군. 다 부질없는 것이지만 말이야." 고개를 흔든 데이몬은 한쪽 석벽을 열어 젖혔다. 그 속에는 사술의 시전에 쓰이는 시약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먼저 놈을 가사상태로 빠뜨려야겠군. 시술 과정에서 만약 놈이 죽는다면 칠종단금술 때문에 나 역시 살아남지 못할 터이니……." 자신을 금제하고 있던 칠종단금술을 떠올리며 데이몬은 나직이 뇌까렸다. 생각해보면 무척 신기한 일이었다. 리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 없이 살생을 할 수 없는 자신이 말이다. 그렇다면 칠종단금술은 영혼에 직접 작용하는 것이라 봐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집요하게 자신을 금제할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은 멍하니 뜨여진 알카리스의 눈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미안하지만 네 몸을 내가 차지해야겠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으니 별달리 여한은 없을 테지. 아마 바보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보다 나에게 몸을 넘겨주는 것이 나을 테니까……." 물론 대답은 없었다. 이미 알카리스는 극심한 충격으로 인해 혼백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쉽게 말하자면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봐야 했다. 가만 놔두면 그대로 죽어버릴 운명의……. 몇 가지 재료를 골라낸 데이몬은 그것을 섞어 시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법이 완전히 준비될 때까지 놈의 몸을 보존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물론 인간 하나를 가사상태로 만드는 것 정도야 데이몬에게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시약이 완성되었다. 데이몬은 그것을 가져다가 알카리스의 입에 흘려 넣었다. 목젖을 살짝 잡아당기자 시약은 알카리스의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꾸르르르. 그것을 본 데이몬은 지체 없이 마나를 끌어 모았다. 원래대로라면 내공을 동원해서 타혈법을 시전해야 했지만 지금 데이몬에게 끌어올릴 내공이 있을 턱이 없었다. 때문에 그는 주위에서 끌어 모은 마나로 하여금 내공을 대치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데이몬이 발견해놓은 사술에 대한 해법이었다. 마나가 어느 정도 모이자 데이몬은 지체 없이 그것을 재배열했다. 그의 양손에서 헤아릴 수 없는 섬광이 피어올랐다. 섬광의 정체는 과거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매직 미사일이었다. 데이몬은 이것을 이용해서 알카리스의 혈도를 타동할 생각인 것이다. 퍼퍼퍽. 석실 내부를 뒤덮은 매직 미사일들은 데이몬의 통제에 따라 순차적으로 알카리스의 전신을 두드렸다. 힘과 정확도, 모든 면에서 빗나가는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어찌 보면 손으로 혈도를 타동하는 것보다 더 수월해 보였다. 이미 데이몬은 오로지 매직 미사일을 다루는 실력만큼은 신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혈도에 계속해서 힘이 가해지자 알카리스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멍하니 뜨여있던 눈동자가 슥 돌아가며 백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와 함께 싸늘한 기운이 알카리스의 전신을 뒤덮었다. 핏기가 사라져가던 알카리스의 몸은 곧 꼿꼿이 굳어버린 시체와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되었다." 한숨을 내쉰 데이몬은 모아놓은 마나를 흩어버렸다. 베르키스의 레어와 그리 멀지 않은 만큼 마법의 기척은 가능한 빨리 숨겨야 했다. 비록 그가 게덴하이드보다 높은 경지에 올라있긴 하지만 그래도 조심할 것은 조심해야 했다. 만약 자신이 9써클의 마스터가 된 것을 게덴하이드가 알아차린다면 그는 즉시 베르키스에게 이 사실을 보고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내 복수도, 다프네를 구해내는 것도 끝장이겠지?" 나직이 되뇌인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이 정도 시간이면 게덴하이드를 비롯한 가디언들이 레어로 돌아와 있을 시간이었다. 물론 침입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격퇴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게덴하이드를 당적해 낼 인간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야 할 정도였으니까……. 데이몬의 시선이 알카리스에게로 향했다. "이놈의 몸은 약 한 달간 이 상태로 유지될 것이다. 그 전에 나는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찾아와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 빠져나갈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다." 한가지 문제는 극복한 듯이 보였지만 그래도 일이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도난을 완벽히 봉쇄하는 마법보고 인크레시아 속에서 어떻게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빼내어와야 할지 도대체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이 나가고 난 뒤, 석실에서는 제단에 누워있는 비운의 황태자만이 남게 되었다.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작전은 완전 실패입니다. 투입한 병력은 거의 궤멸되다시피 했습니다." "뭐라고? 괴멸?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페르슈타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알카리스를 구해내기 위해 3개 기사단이라는 엄청난 전력을 투입했는데 괴멸이라니……. 부관은 그것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양 안절부절못해하며 보고를 해 나갔다. "투입한 3개 기사단은 정말 엄청난 손실을 입었습니다. 소드 마스터 10명 중 4명이 전사하고 팔라딘들은 대부분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쿠슬란 궁정 마법사님도 전사하신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만약 그분의 후퇴 명령이 없었더라면 나머지 인원도 그곳에 뼈를 묻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런 빌어먹을." 더 이상 참지 못한 페르슈타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부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정말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도대체 그곳이 어떤 곳이기에……." "정보부에 의하면 그곳은 과거 종족 전쟁에서 가장 위력을 떨쳤던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의 레어라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곳을 지키는 가디언들 대부분이 6써클을 넘어서는 리치입니다. 이것은 생존자들의 입을 통해 알아낸 사실입니다." "말도 되지 않아. 상대가 6써클의 리치라면 팔라딘들은 역부족이겠지만 소드 마스터들마저 당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아. 소드 마스터들이라면 6써클의 공격 마법정도는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페르슈타인의 역정은 일견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수준이 높은 소드 마스터와 그보다 낮은 팔라딘과는 막아낼 수 있는 마법에서 현격한 격차를 보이기 마련이다. 물론 여기서 대마법 갑옷의 질은 별달리 문제가 되지 못했다. 같은 갑옷을 입고 있더라도 소드 마스터는 팔라딘이 견딜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고위급 마법까지 막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끌어올릴 수 있는 마나의 차이 때문이었다. 많은 마나를 주입 받을수록 대 마법갑옷의 방어력은 증가되는 것이다. 물론 일정 수준까지겠지만 말이다. 페르슈타인의 의문은 곧이어 이어진 부관의 설명에 의해 풀렸다. "그곳에는 9써클로 짐작되는 무시무시한 리치가 있었습니다. 리치들의 우두머리로 짐작되는 놈으로써 사망한 소드 마스터 대부분이 그놈에게 당했습니다." "9써클이라……. 놀랍군." 페르슈타인은 그때서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9써클의 대마법사에게만은 역부족이었다. 비록 대마법 갑옷으로 인해 소드 마스터가 마법사보다 월등히 강한 면을 보인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일정 수준까지였다. 9써클의 대마법사가 시전한 공격 마법이라면 소드 마스터의 몸을 감싼 대마법 갑옷을 일격에 분쇄할 수 있었으므로……. 또한 대마법사의 주문영창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진다. 적어도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아니고서야 대마법사를 당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페르슈타인은 인상을 팍 구겼다. "미치겠군. 일이 이렇게 꼬이다니……." 3개 기사단이 괴멸한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밀고 있는 황태자 알카리스가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파견한 기사들이 페이런과 루드비히의 시신을 확인해서 수습해 온 상태였다. 비록 그것이 몸의 일부분뿐이었지만 말이다. 물론 그에겐 추가로 파견할 병력이 충분히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미 죽었을 것이 확실한 알카리스를 위해 더 이상 병력을 파견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에 불과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패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정박아인 알카리스를 황제 자리에 앉혀 국정을 좌지우지하겠다는 계획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 했으니 말이다. 그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결국 둘째 황자인 드비어스를 밀어야 하는 것인가?" 나이가 어리기는 했지만 둘째 황자는 알카리스와는 달리 결코 만만치 않은 존재였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판단력과 결단력이 이미 범인의 수준을 능가하고 있었다. 지금은 모르지만 나이가 든다면 결코 그의 손에 휘둘릴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봐야 했다.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슈타인은 마음을 정리했다. 사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드비어스를 밀어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둘의 부모처럼 암암리에 암살할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다. 사실 황손들의 원인 모를 사망에는 바로 페르슈타인 공작의 입김이 작용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지. 크로센 대제의 후손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황좌를 노리고 귀족이나 타 왕국의 군주들이 벌떼처럼 일어날 테니……. 아직은 나에게 그놈들을 막을 능력이 없다." 만약 크로센 기사단의 힘을 손에 넣었다면 그것은 하나도 걱정할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는 것이므로. 하지만 애석하게도 크로센 기사단은 아직까지 발렌시우스 황제 한 사람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 충성심이 드비어스 황자에겐 이어질지언정 자신에게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페르슈타인 공작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할 수 없지. 알카리스를 잃은 이상 드비어스를 황좌에 올려 시간을 번 다음 차근차근 놈들을 회유해야겠군. 그것이 지금 상황에서 가장 최선책일 테니……." 페르슈타인 공작의 눈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뜻을 이루고 말겠다는 결의의 눈빛이 번뜩였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16회. 끓어오르는 화를 곰삭이고 있는 자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멀리 떨어진 트루베니아 대륙에도 하나 있었다. "빌어먹을." 게덴하이드는 지금 몹시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 느닷없이 난입한 침입자들에 의해 리치가 열 다섯이나 작살이 났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500년 동안 레어를 지키며 입은 피해 중에서 가장 큰 것이었다. 물론 리치라는 존재의 특성상 팔이나 다리 하나정도 잘려나가는 것은 부상으로 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상자들이 대부분 수십 조각 이상으로 분해되어 버렸다는 것이 문제였다. 라이프 포스 베슬이 온전한 이상 되살려낼 수 있긴 하지만 상당기간 경비임무에 투입하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레어에 갇혀 있는 인간 노예들만으론 그들을 회복시킬 수 없었고 추가로 노예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그들은 병상에만 누워있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이 베르키스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란 사실 때문이다. 직접 만들어낸 리치가 소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으니 그들의 라이프 포스 베슬을 가지고 있는 베르키스가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면 거짓말이었으리라. 그것이 바로 게덴하이드가 안절부절못해하는 이유였다. "큰일이군. 하찮은 인간 나부랭이들로 인해 베르키스님의 수면이 방해를 받았으니……." 홧김에 침입자들의 시신을 몽땅 가루로 만들어버리긴 했지만 그것으론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침입자를 상대하던 순간을 떠올려 보던 게덴하이드의 눈이 미묘하게 빛났다. "놈들의 규모와 실력을 봐서 단순한 트레져 헌터 따위가 아니었어. 도대체 놈들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물론 트레져 헌터 중에서는 소드 마스터가 끼여있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희귀한 경우였고 트레져 헌터들 대부분이 행운을 노리는 애송이들이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게덴하이드가 보기에 이번 침입자들의 실력은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소드 마스터가 대부분이었다면 단순한 목적으로 침입한 자들이 단연 아니라고 봐야 했다. "설마 그 멍청한 바보 놈을 구하러 온 놈들일까?" 게덴하이드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의 시선이 멎은 곳에 리치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보를 죽이라고 명령했던 바로 그 리치였다. "명령은 어김없이 완수했겠지?" 몸을 가늘게 떤 리치는 지체 없이 복명했다. 게덴하이드는 이미 인간뿐만 아니라 같은 리치들 사이에서도 공포의 대상이 된지 오래였다. "말씀대로 흔적도 없이 소멸시켰습니다. 놈은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습니다." "틀림없겠지." "물론입니다." 리치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그 모습에 만족할 듯 싶었던 게덴하이드였지만 그는 도리어 고개를 앞뒤로 흔들었다. "놈을 죽이지 말고 추궁을 해 볼 것을 그랬나? 덮어놓고 죽여버렸으니 놈들이 난입한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잖아." 고민에 빠져 있던 게덴하이드의 눈에 살금살금 들어오는 리치 하나가 비쳤다. 그를 보자 게덴하이드의 눈가에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 거의 모든 리치들이 출동해서 침입자를 막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얄미운 놈이 이제야 어슬렁거리며 들어오는 것이다. 게덴하이드로써는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손가락을 좍 펴서 놈을 불렀다. "너 이리로 와 봐!" "나 말인가?" 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다가왔다. 그 모습이 게덴하이드의 화를 더욱 북돋웠다. 족히 700년의 세월을 살아왔지만 저렇게 대책 없는 놈은 정말 처음이었다. 그의 앞으로 걸어온 리치는 무슨 일이냐는 듯 가슴을 펴고 게덴하이드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게덴하이드는 더욱 황당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만 두자. 네놈과 말씨름해봐야 내 머리만 아플 뿐이니……." "그럴 것을 왜 불렀어?" 상대의 반응에 게덴하이드는 또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발작하지 않은 것은 지금까지 놈을 대해 본 경험 때문이었다. 두들겨 패고 고통을 가해보아도 상대의 태도에는 결코 변함이 없었다. 이 사실을 게덴하이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500년의 세월 동안 놈을 대해보며 절실히 느낀 것이므로. "말을 말아야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은 게덴하이드는 몸을 돌렸다. 그에겐 베르키스에게 조금 전 일어난 사건에 대해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데이몬의 동공에 빛이 번뜩였다. 하지만 몸을 돌린 게덴하이드는 애석하게도 그 눈빛을 보지 못했다. 리치들에게 레어 주변을 빈틈없이 경계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난 뒤 게덴하이드는 지체 없이 베르키스에게로 향했다. 베르키스는 지금 레어의 최하단에 위치한 지하공동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500년의 긴 세월 동안 말이다. 게덴하이드는 그리로 통하는 좁은 통로를 무척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비록 그가 레어 외곽의 총 경비책임을 맡고 있는 자였지만 이곳에만 들어오면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가진 가디언들이 경비를 맡고 있었던 것이다. 통로를 지나 커다란 철문이 가로막고 있는 곳에 도착하자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거인상들이 통로를 따라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전체가 청동으로 된 거인상들. 하지만 게덴하이드는 적이 침입해 올 경우 그 거인상들이 엄청난 힘을 가진 브론즈 골렘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스톤 골렘보다 월등히 강력하다고 볼 수 있는 브론즈 골렘.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 지하공간에는 그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9써클의 마스터인 그도 감히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존재 말이다. "저기 있군." 목적한 것을 찾았는지 게덴하이드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철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유달리 덩치가 큰 거인상이 두 기 서 있었다. 고대 타이탄(Titan)의 모습을 본떠 만든 금속제 거인상은 벌거벗은 근육질의 몸매를 과시하며 마치 문지기인양 철문 양옆에 버티고 있었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근육은 금속으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느껴졌으며 6미터에 달하는 신장은 올려다보고 있는 게덴하이드에게 엄청난 위압감을 주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전체가 강철로 만들어져 있는 거인상이었다. 이름하여 아이언 골렘인 것이다. 전체가 정련된 강철로 되어있는 탓에 무지막지한 방어력을 자랑했고, 또한 베르키스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마법석이 몸 속에 들어있는 터라 움직임이 오우거에 육박할 정도였다. 느린 스톤 골렘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골렘 기술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놈들인 것이다. 얼마나 아꼈으면 베르키스는 이것들을 노스우드 대회전에서도 동원하지 않았다. 아마 드래곤이란 종족 전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거나 하지 않는다면 이것들은 결코 레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상기해 본 게덴하이드는 불쑥 입을 열었다. "문을 열어라." 굳이 신분을 밝힐 필요도 없었다. 영원히 깨어있는 저 아이언 골렘들은 이미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면밀히 살폈을 테니까…….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여겼는지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가디언 게덴하이드. 신분 확인이 끝났으니 들어가는 것을 허락한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굉음이 터져 나왔다. 기둥처럼 서 있던 아이언 골렘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끄러운 동작으로 몸을 돌린 아이언 골렘은 철문의 손잡이를 잡고 힘을 주었다. 쿠르르르 거대한 철문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정말 놀랍군. 이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 문이 열리자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아이언 골렘을 쳐다보며 게덴하이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통상적인 스톤 골렘이라면 결코 이런 빠르고 원활한 움직임을 보일 수 없었다. 물론 강력한 마법석을 집어넣는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본체가 배겨날 수 없을 것이다. 돌이란 특성상 제대로 움직이기 전에 몸체가 부서져나가기 십상이었으므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게덴하이드는 철문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덮쳤지만 그에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도리어 눈부신 햇살보다 어둠이 더 반가웠던 게덴하이드였으므로…….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래로 늘어진 계단이 눈에 들어오자 게덴하이드는 그리로 향했다. 뚜벅뚜벅. 발자국소리가 어둠 속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 소리는 오래지 않아 잦아들었다. 통로의 길이가 생각보다 짧았던 것이다.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벽에 도착하자 게덴하이드는 서슴없이 무릎을 꿇었다. 이미 가디언의 보고로 자신이 온 것이 전달되었을 터. 그 상태로 베르키스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다. 반응은 오래지 않아 들려왔다. 물론 벽 너머로부터였다. "게덴하이드인가?" "그렇습니다. 베르키스님." 무릎을 꿇은 상태로 게덴하이드는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몸짓 하나하나에서는 베르키스를 향한 경외심이 역력히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가 얼마만큼 베르키스에게 복종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리치가 몇 상했더군. 나에게 느껴졌을 정도니 말이야." "그, 그렇습니다." 엎드린 게덴하이드의 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예상대로 베르키스가 잠에서 깨었다는 사실에 몸둘 바를 몰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정도 힘을 가졌다면 분명 아르카디아에서 건너온 놈들이었겠군. 자세한 상황을 얘기하라. 게덴하이드." "아, 알겠습니다." 고개를 직각으로 꺾은 게덴하이드는 곧 침입자들의 내습에 대한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약 열 명 남짓으로 구성된 파티의 잠입에서부터 뒤이어 공격해 들어온 무리까지, 침입을 막아낸 과정을 세세히 보고한 게덴하이드는 짐작까지 덧붙였다. "아마도 놈들은 처음에 들어온 파티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놈들을 쫓고 있었던지, 아니면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말이지요." "가디언이 열 다섯이나 상한 것을 보면 놈들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나 보군." "그, 그렇습니다. 대부분 소드 마스터들이었고 그 중에 열 놈은 특히 실력이 뛰어났습니다. 여러 모로 보아 최상급에 랭크되는 실력자들이었으니까요. 물론 놈들 중 넷은 제 손에 죽었습니다." 당연한 말로 게덴하이드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카디아에서는 실력이 떨어지는 자들이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 팔라딘이라는 칭호로 불려진다는 것을 말이다. 그 말을 들은 베르키스는 다소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아르카디아 놈들의 힘이 500년 전보다 비약적으로 강해졌다는 말이 되는군." "그렇진 않을 것입니다. 500년의 세월동안 오크들도 비약적인 성장을 했으니 결코 인간들에게 밀리진 않을 터. 베르키스 님을 비롯한 드래곤들이 가세한다면 승부는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게덴하이드의 호언장담에도 베르키스는 마뜩찮은 반응을 보였다. 인간들의 저력이 어떠한지 베르키스만큼 절실히 알고 있는 존재도 없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베르키스가 입을 열었다. "수면기가 끝날 때까지 정확히 10년 남았다. 그러니 너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나의 레어를 철통같이 경비하도록 하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트레져 헌터 놈들이 또다시 몰려올지도 모르니 이번에 들어온 보물 몇 가지를 지크레이트의 보고로 가져가 보관하도록 하라. 중요한 일이니 네가 직접 행해야 한다." "어김없이 거행하겠습니다." 게덴하이드의 태도에 만족한 듯 석벽 너머로부터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다시금 깊은 잠에 빠져든 것 같았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게덴하이드는 지체 없이 출구로 향했다. "되었어." 바닥에 땅을 대고 있던 데이몬은 손바닥을 쳤다. 베르키스와 게덴하이드와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 노심초사한지 한시간여 만에 목적을 이룬 것이다. 소기의 목적을 마친 그는 지체 없이 끌어 모은 마나를 흩어버렸다.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 터라 더 이상 지체할 여지가 없었다. 데이몬의 동공에는 희열의 눈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예상대로 놈들은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어." 사실 베르키스와 게덴하이드의 대화를 엿듣는 것은 9써클의 마스터에 오른 그의 능력으로도 벅차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베르키스 앞에서 패밀리어나 도청마법 따위를 사용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아이언 골렘의 눈을 피해 잠입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무척 오랜 시간동안 이 사실 때문에 고민해야 했다. 심지어 땅의 정령인 노움을 이용한다고 해도 베르키스의 이목을 속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해법은 의외로 술법에서 드러났다. 이름하여 천리지청술(千里地廳術). 먼 곳에서 적의 규모와 구성을 파악하기 위해 익혔던 중원의 술법이 그의 목적에 크나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사실 천리지청술은 중원에서는 그리 널리 사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대화는 대부분 전음을 통해서 하는 무림인의 속성상 도청에 사용되기에는 기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땅의 울림을 통해 음성을 도청하기 때문에 내력이 무척 깊은 자가 아니면 대화내용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조차 없다. 그 때문에 데이몬은 천리지청술의 감도를 높이는데 오랜 시간을 투자했고 마침내 예상했던 결실을 거두게 된 것이다. "서둘러야겠군. 일이 예상대로 진행된다면 아마 내일 정도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몸을 날렸다. 사실 그는 지크레이트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파악조차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일 정도면 그를 친절히 지크레이트의 레어로 안내해 줄 존재가 출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린 드래곤 지크레이트를 상대할 방도에 대해서는 이미 궁리가 끝난 상태였다. 물론 그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볼 수 있었지만 말이다. 성공한다면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며 그렇지 못한다면 지크레이트의 손에 명을 달리하게 될 테니까……. "어차피 인생사 모든 것이 도박이지." 데이몬의 몸은 곧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17회. 오늘은 무척 일찍 올리는군요. 저녁에는 올라오지 않습니다. ************************************************************************** 다음날 게덴하이드는 아침 일찍 레어를 나섰다. 베르키스의 명령대로 새로 들어온 보물들을 지크레이트가 관리하는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로 옮기려는 것이다.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인간이 멸망한지 벌써 오백여 년. 하지만 대륙 각지에서는 심심찮게 보석이나 마법 무구들이 출토되고 있었다. 왕이나 군주의 무덤이 오크족에 의해 파헤쳐지며 생겨난 이른바 약탈의 부산물인 셈이다. 그것들은 오크들에 의해 고스란히 드래곤에게 바쳐졌다. 때문에 베르키스의 레어에는 이따금 그런 보물들이 짐수레에 실려 오곤 했다. 물론 짐수레를 호위해 오는 자들은 하나같이 오크 보병들이었다. 보물들은 일정기간동안은 베르키스의 보고에 보관된다. 그러다가 이따금 귀중한 것만 추려져서 게덴하이드에 의해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로 옮겨지는 것이다. 물론 베르키스가 눈을 뜨고 있을 때라면 그의 보고를 털 만한 존재는 감히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깊은 수면기에 빠져있었고 레어를 지키는 리치들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베르키스로써는 도난을 완벽히 방지할 수 있는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선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는 모든 드래곤들의 공유물이라 봐야 했다. 비록 지금은 그린 드래곤 지크레이트가 보유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관리인에 불과했다. 그 속의 보물들은 오랜 세월동안 드래곤들이 모아놓은 것들이었고 한데 섞여 보관된다. 베르키스의 보물 역시 인크레시아의 한켠에 단단히 보관되어 있었다. 게덴하이드가 보물을 가져다준다면 지크레이트는 약속된 방법대로 인크레시아를 열어 보물을 집어넣는다. 인크레시아는 자신이 인정한 주인인 지크레이트가 아니면 결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것은 이미 게덴하이드가 여러 번 해 왔던 일이었고 비밀 엄수를 위해 그는 단 하나의 리치도 대동하지 않고 홀로 길을 떠나는 것이다. "레어에서 조금 떨어진 뒤 공간이동을 해야겠군." 나직이 중얼거린 게덴하이드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어깨에다 묵직해 보이는 자루를 짊어지고 손에 한 자루의 보검을 든 지금의 모습은 전혀 리치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리치가 검을 사용한다는 것은 솔직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들고 있는 보검은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물이라 할 수 있었다. 검의 이름은 르헤르트 세이버. 주인에게 용기와 투지를 심어주는 영구 마법이 걸려있는 검으로 심지어 영혼조차 벨 수 있다고 자부하는 명품(名品) 중의 명품이었다. 이 검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이카롯트를 상징하는 로젠가르트 황가의 검이라는 데서 드러난다. 이 검이 없다면 진정한 이카롯트의 황제라고 단언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비운의 검 르헤르트 세이버는 한동안 주인을 잃고 황야에 내버려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베르키스의 레어로 오게 되었다. 과거 이카롯트가 패망할 당시 황제 로젠가르트 4세는 이 검을 어린 태자에게 주어 다수의 기사들과 함께 궁정을 빠져나가게 했다. 어떻게 해서든 혈통을 이어나가게 하려는 시도였지만 불행히도 태자 일행은 펠드리안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한다. 그 과정에서 르헤르트 세이버는 땅속 깊이 묻히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태자가 죽고 난 뒤 검을 넘겨주지 않을 심산으로 동행한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해서 검을 바닥에 깊숙이 묻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상태로 르헤르트 세이버는 거의 500년 가까이 땅 속에 묻혀있었다. 우연히 지나가던 한 오크 헌터의 눈에 띄기 전까지 말이다. 당시 오크 족장들은 보물이 발견되면 죄다 드래곤의 수중에 바치고 있었다. 오크들에겐 이런 보물보다 한 끼 식사를 때울 수 있는 고기가 더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르헤르트 세이버는 이곳 베르키스의 레어로 오게 되었고 급기야 마법 보고 인크레시아에 보관되기 위해 옮겨지는 신세가 되었으니……. 오백 년 동안 묻혀있었지만 르헤르트 세이버의 칼날은 조금도 부식되지 않았다. 심지어 예기조차 사라지지 않았던 터라 당시 이 검을 인수했던 게덴하이드는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좋은 검이로군." 그는 이 검을 특별히 베르키스의 제 1 보고에 집어넣었다. 금과 은 따위의 흔한 보화가 아니라 정말로 보물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들이 보관되는 장소로 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지금 모조리 자루에 담긴 채 게덴하이드의 등에 메어 있었다. "서둘러야겠군." 귀한 것들을 가지고 있던 까닭에 게덴하이드는 걸음을 재촉했다. 물론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만약의 일도 생각해야 했다. 이것이 그가 레어에서 멀리 떨어진 뒤 공간이동을 하려는 이유였다. 조금 뒤 적합한 장소를 찾은 게덴하이드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으로 판단되자 그는 지체 없이 마법진을 그렸다. 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온 그의 손에서 갑자기 하얀 가루가 휘날렸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뼛가루로써 마법진을 그리기 위해 가지고 온 것이었다. 먼지보다 월등히 가벼운 뼛가루는 공간이동이 끝나자마자 흔적도 없이 없어져버릴 것이 분명했다. 물론 캐스팅만으로도 충분히 공간이동을 할 수 있었지만 게덴하이드는 위험부담을 덜기 위해 마법진을 그리려는 것이다. 쓰쓰쓰쓰. 자욱하게 뿌려진 뼛가루들이 곳 일정한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게덴하이드의 마법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뼛가루들은 용케 마법진의 형태를 유지했다. 작업을 마친 뒤 게덴하이드는 냉큼 마법진 위에 올라서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스산한 음성이 등뒤에서 들려올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마법진의 좌표를 보니 지크레이트의 레어가 남쪽 엘마리노 산맥에 있는 것 같군. 맞나?" "뭐, 뭐야?" 대경한 게덴하이드가 다급히 몸을 돌렸다. 9써클의 엑스퍼트인 그의 이목을 속이고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자가 있다니……. 뒤에 멀뚱멀뚱 서 있는 그림자를 보자 그의 동공에 놀라움이 서렸다. 접근한 자는 그가 익히 아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휘하의 가디언인 자였다. "네, 네놈은 데이몬?" 상대의 모습을 확인한 게덴하이드는 빠른 시간 내에 평정을 회복했다. 상황을 봐서 놈은 자신의 뒤를 밟아 온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이미 레어의 리치들에겐 레어를 벗어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려놓았던 터, 그것을 무시하고 이리로 왔다면 불경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할 터였다. 슬며시 마나를 끌어 모으며 게덴하이드는 살광을 피워 올렸다. "오래 전부터 의심을 해 왔었는데 이제 증명이 되었군." "………." 상대는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게덴하이드를 쏘아보고 있었다. "베르키스님의 실력을 차마 의심할 수 없어서 가만히 두고 봐 왔는데 이제야 분명해졌어." "뭐가 말인가?" "네놈의 목적. 어떤 이유로 베르키스님의 마법을 풀었는지 모르지만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세뇌마법에서 풀려난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해야겠지? 그렇다면 네놈을 가만히 놔둘 수 없다." "날 처치하겠다는 뜻인가?" "물론. 일단 네놈의 본체를 소멸시켜놓고 베르키스님께 소명하겠다. 나중에 그 분께서 친히 심문하실 수 있게 말이다." 말을 마친 게덴하이드는 메고 있던 자루를 풀어놓았다. 물론 르헤르트 세이버 역시 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다. 양쪽으로 활짝 펼친 손에서 급격히 광휘가 떠올랐다. 슈르르르. 그가 장기로 삼고 있는 공격 마법 호리드 윌팅이었다. 이것은 이미 소드 마스터 여러 명을 저승으로 보냈던 공포의 마법이라 볼 수 있었다. 마법을 완전히 캐스터 해 놓은 게덴하이드는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동공에서는 무척 기다렸다는 듯한 빛이 일렁였다. "오백 년 전에 당한 수모를 이제야 갚을 수 있겠군. 이곳까지 따라온 것을 보면 증거가 충분하니까 말이야." "얼마든지." 느긋한 상대의 태도를 보다 못한 게덴하이드는 손을 휙 털었다. 양손에 맺힌 호리드 윌팅이 무시무시한 파공성과 함께 상대의 몸을 향해 쏘아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게덴하이드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어려있었다. "9써클의 호리드 윌팅. 이 정도라면 네놈의 몸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을 터, 이후 남은 네 영혼은 내가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짓이겨……." 말을 이어나가던 게덴하이드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져버렸다. 상대가 살짝 몸을 움직여 호리드 윌팅을 퉁겨내는 것을 보고 난 후의 일이었다. 파파파팍. 빗나간 호리드 윌팅은 애꿎은 나무들만 우수수 쓰러뜨리며 저쪽으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게덴하이드는 그 과정에서 상대의 몸을 축으로 전혀 다른 4종류의 마법이 캐스팅되었음을 용케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마법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자신의 호리드 윌팅을 허공으로 퉁겨버린 것이다. 그 정도 수준이라면 결코 자신의 아래라고 할 수 없었기에 게덴하이드는 입을 딱 벌렸다. "어, 어떻게……. 네놈은 고작 6써클에 불과할 터인데." "네놈이 알고 있는 써클이 아니라서 어떻게 하지? 무척 미안하군."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자신을 향해 무시무시한 청색 화염줄기가 퍼부어졌다. 콰콰콰콰. 게덴하이드는 놀랄 겨를도 없이 공간전이(Blank)를 시전해서 그곳을 벗어나야 했다. 가해진 공격이 대인 공격 최강의 공격 마법 헬 파이어임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9써클 급의 헬 파이어라면 그가 장기로 삼고 있는 호리드 윌팅보다 족히 두 배의 파괴력을 가진다. 거기에 정통으로 격중된다면 그도 역시 소멸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조금 떨어진 곳에 모습을 드러낸 게덴하이드는 치를 떨었다. "어, 어찌 이런 일이……." 상대를 6써클 정도의 중급 리치로 알고 있던 게덴하이드에게 이것은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헬 파이어라면 그도 아직까지 완전히 캐스터하지 못하는 마법이었다. 9써클의 마스터가 아니면 감히 익히지 못하는 궁극의 마법. 휘하 리치의 마법실력이 벌써 자신을 추월했고, 또한 그 낌새를 지금껏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게덴하이드는 도저히 정신을 추스를 수 없었다. 게다가 공포의 마법 공격은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니……. 콰콰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굳건히 딛고 서 있던 지표면이 사정없이 파헤쳐지며 엄청난 크기의 구덩이가 패였다. 돌과 흙이 그대로 증발되어 버리는 것을 보니 상대의 공격이 진정한 헬 파이어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또한 퉁겨져 나가던 돌과 흙이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것은 상대가 이미 모종의 결계로써 이곳을 완전히 감싸 놓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장기인 블링크로써 또다시 위기를 모면한 게덴하이드는 사력을 다해 호리드 윌팅을 날렸다. "에잇." 상대가 정녕 9써클의 마스터라면 오로지 같은 써클의 호리드 윌팅 말고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피할 필요도 없다는 듯 가슴으로 맞받았다. 이미 푸른빛의 광막이 그의 몸을 빈틈없이 덮고 있는 상황이었다. 퍼펑. 자신의 공격이 광막에 막혀 헛되이 스러지는 것을 목격한 게덴하이드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네놈이 9써클의 마스터란 것을 사실로 인정해야겠군. 도대체 어떻게 마법을 익혔나?" "이런 상황에서 천연덕스럽게 그거나 묻고 있을 형편이 아닌 것 같은데……." 또다시 엄청난 기운이 자신을 향해 휘몰아치고 있는 것을 느낀 게덴하이드는 또다시 블링크를 펼쳤다. 그의 뇌리에는 이미 상대를 피해 도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난 저놈의 상대가 아냐.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베르키스 님의 레어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놈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라이프 포스 베슬은 엄연히 베르키스님이 가지고 있다. 베르키스님께 이 사실을 알린다면 놈은 분명 소멸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각은 길었지만 판단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일단 이곳에서 몸을 뺀 뒤 휘하의 리치들을 동원해서 놈의 발목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게덴하이드였다. 그 틈을 타서 지하로 들어간다면 골렘들로 이루어진 가디언들이 2차로 놈의 난입을 저지할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은 어렵지 않게 베르키스를 잠에서 깨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듯 싶었다. 물론 휘하 리치들 대부분이 엄청난 타격을 받겠지만 그들은 애당초 복원이 가능한 존재들이었다. 아니 이것은 그들을 모조리 잃더라도 반드시 해 내야 하는 일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몸을 드러내던 게덴하이드는 반사적으로 공간이동을 캐스트하려고 했다. 이미 레어의 좌표는 그의 뇌리에 명확히 기억되어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면 그는 결코 캐스트를 마칠 수 없었다. "엇." 순간적으로 아랫배를 파고드는 둔중한 충격 때문에 게덴하이드의 몸이 기역(ㄱ)자로 꺾였다.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무언가가 그의 복부를 파고들었던 것이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18회.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리치라고 하나 워낙 강력한 충격이었던지라 끌어 모은 마나가 순식간에 흩어져버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일격은 시초에 불과했으니……. "오백 년 전에도 이런 경험을 겪은 적이 있지?" 냉랭한 음성과 함께 무언가가 쉴새없이 그의 전신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매직 미사일이었다. 초급 마법인 매직 미사일로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위력에다 그조차 감지할 수 없는 빠른 속도. 그것들은 게덴하이드가 전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몸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특히 관절 부분을 집중적으로 말이다. 퍼퍼퍼퍼퍼퍽. 불쌍하게도 게덴하이드는 쉴새없이 전신을 난타하는 매직 미사일로 인해 전혀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그의 몸은 끝없이 날아드는 매직 미사일로 인해 간헐적으로 경련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마법 캐스팅은 말 그대로 희망사항이었으리라…….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게덴하이드의 주변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단 두 번의 공격으로 네놈이 회피범위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지. 내 모습을 보자마자 도망치지 않은 이상 네놈에게 기회는 없었다."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림에 따라 게덴하이드가 얻어터지고 있는 주변의 땅이 길게 파헤쳐졌다. 게덴하이드가 그리려던 마법진과는 달리 효과가 무척 오래 가는 마법진이었다. 게덴하이드를 난타하고 있는 매직 미사일들에게 마나를 계속 공급하여 그 효과가 지속되게 하는 마법진인 것이다. 잠깐 사이에 마법진을 완성한 데이몬은 그곳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9써클의 마스터답게 순식간에 모여든 마나가 마법진에 가득 채워졌다. 작업을 마친 데이몬은 춤을 추고 있는 듯한 모습의 게덴하이드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베르키스란 놈이 눈치를 챌 것이 분명하기에 그럴 수 없는 것이 안타깝구나. 미안하지만 그 모습으로 한 나절만 버티거라. 그 정도면 내가 목적을 이룰 것도 같으니……." 하지만 게덴하이드는 대답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니 데이몬의 말을 들을 경황도 없는 것이 정확한 상태였다. 마법진에 갇힌 채 연속적으로 매직 미사일의 공격을 받는 게덴하이드. 아마 마법진의 효력이 다할 때까지 그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마법진 주위에 결계를 하나 설치해서 흔적을 감춰버린 데이몬이 몸을 빙글 돌렸다. "그래도 속이 조금 시원하긴 하군." 생각해보면 이것은 정말 비약적인 발전이라 해야 했다. 과거에는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었던 게덴하이드를 순수한 마법 실력으로 저 지경으로 만들어버리다니……. 하지만 이것을 이루기 위해 그가 투자했던 시간과 노력을 감안하면 충분히 합당하다고 생각해야 했다. 비록 이 실력으로도 드래곤과 상대할 엄두를 내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손에 넣은 후라면 이야기가 틀려질 것이다." 나직이 되뇌인 데이몬은 허리를 굽혀 게덴하이드가 떨어뜨린 자루와 르헤르트 세이버를 집어들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데이몬은 마법진 위에 섰다. 게덴하이드가 설치해놓은 공간이동 마법진 말이다. 마법진을 구성하던 뼛가루들이 모두 흩어져 있었지만 좌표는 데이몬의 뇌리에 명확히 기억되어 있었다. 그가 손을 들자 흩어졌던 뼛가루들이 모여들더니 다시 마법진의 형태를 이루었다. "자 그럼 드래곤들의 보물을 어디 한 번 견식하러 가볼까?" 섬광이 번쩍 일어나며 그의 몸은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마법진을 이루고 있던 뼛가루들도 동시에 흩어져버렸고 그 자리에는 끊임없이 몸을 들썩거리는 게덴하이드만 남게 되었다. 물론 결계로 인해 아무도 그 기척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데이몬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베르키스의 레어에서 멀리 떨어진 트루베니아 최남단이었다. 그곳의 엘마리노 산맥이 바로 그린 드래곤 지크레이트의 레어가 위치한 곳이었다. 모습을 드러낸 데이몬이 잠시 몸을 움찔했다. 누군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놈들은?' 그가 워프해 간 곳에는 커다란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서너 마리의 트윈헤드 오우거가 방망이를 치켜들고 경비를 서고 있었다. 아마도 지크레이트의 레어를 경비하는 가디언인 듯 싶었다. 또한 사방에 서 있는 석상들은 아마도 스톤 골렘이 분명할 터였다. 곧 한 마리의 고블린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끽끽거리는 고블린 특유의 음성이 좍 찢어진 입에서 터져 나왔다. "펠루시아 산맥에서 오신 분입니까?" 베르키스의 레어가 펠루시아 산맥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떠올린 데이몬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런데 당신은 늘 오시던 분이 아닌데……." 데이몬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히 거짓말을 털어놓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표정이 없는 리치란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얼마 전 트레져 헌터들의 공격이 있었다. 놈들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게덴하이드는 그만 큰 부상을 입고 치료 중에 있다. 따라서 이번 임무는 내가 맡게 되었다." "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고블린은 별달리 의심하는 기색 없이 몸을 돌렸다. "따라오십시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던 터라 데이몬은 즉각 뒤를 따랐다. 사실 이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서라도 지크레이트에게 가야 하는 것이 데이몬의 입장이었다. 만약 게덴하이드가 마법진에서 풀려난다면 그의 염원은 그 즉시 물거품처럼 흩어질 것이 분명했으므로……. 지크레이트의 레어는 생각보다 경계가 삼엄하지 않았다. 베르키스의 레어에 비하면 말이다. 아마도 레어의 주인이 깨어있다는 점과 그를 죽이더라도 보물을 탈취할 수 없다는 점에 기인한 듯 싶었다. 고블린의 안내를 받으며 데이몬은 레어의 경비상황을 유심히 살폈다. '일단 가디언은 오우거와 트롤을 주축으로 이루어져있군. 스톤 골렘도 심심치않게 보이고 말이야.' 목적을 이룰 경우 빠른 시간 내에 이곳을 뚫고 나가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는 방어진이 갖춰진 형태를 특히 주의해 보았다. 물론 오우거 따위의 중형 몬스터는 그에게 별달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3써클의 초급 마법사이던 시절에도 중형 몬스터는 결코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하물며 9써클의 대마법사가 된 지금이라면 놈들을 처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군데군데 배치된 스톤 골렘이었다. 골렘에 혈도가 있을 리는 만무했고 또한 상당한 마법 저항력을 가진 터라 어지간한 마법으로는 스톤 골렘을 쓰러뜨리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빠져나올 땐 헤이스트로 강행 돌파해야 할 것 같군. 문제는 지크레이트가 나에게 속아넘어가는가 하는 것이 관건인데…….' 물론 그는 지금까지 게덴하이드의 눈만은 완벽하게 속여넘겼다. 당하는 순간까지 게덴하이드는 자신의 마법수준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크레이트까지 속으란 법은 없었다. 그는 웜 급에 도달한 다 자란 드래곤이었고 그렇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10써클의 마스터라고 봐야 했다. '속인다는 것이 아마도 불가능하겠군.' 생각이 정해지자 그는 암암리에 끌어올리고 있던 은폐 마법을 풀어버렸다. 기척을 일정수준 숨기는 이 마법으로 지금껏 자신을 감싸 왔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자신을 감추는 것은 오히려 지크레이트에게 의심을 사는 격이 된다. 때문에 데이몬은 모처럼 자신의 본 모습으로 레어의 초입에 들어섰다. 지나가던 가디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데이몬의 모습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당당하게 행동하는 그의 모습은 이를 데 없는 베르키스의 사자였다. 지금까지 이곳을 방문한 게덴하이드 역시 무척 거만하게 행동하며 이곳을 들어섰던 것이다. 이제부터 드래곤을 만난다 생각하니 긴장이 아니 될 수 없었으므로 데이몬은 암암리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생각 같아서는 침이라도 삼키고 싶었지만 리치가 된 이후 그럴 수도 없었으므로 그는 가슴을 조이며 지크레이트의 처소로 안내를 따라 걸어갔다. "베르키스의 가디언이 보물을 가지고 도착했다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늘 오던 자가 아니고 오늘은 다른 자가 왔습니다. 기이하게도 수준이 게덴하이드보다 높아 보이는, 9써클의 마스터로 짐작되는 자였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게덴하이드보다 마법수준이 높다고? 이상하군. 수면 중인 베르키스님께서 가디언 우두머리를 바꿨을 리는 없을 텐데……. 좋아 만나보도록 하겠다." "알겠습니다." 문간에서 잠시 기다리던 데이몬은 곧 지크레이트의 처소로 안내되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절로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스톤골렘으로 짐작되는 석상이 끝없이 늘어서 있는 회랑을 지나자 화려하게 장식된 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아마도 전부가 황금으로 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화려한 문이었다. 드래곤들이 정말 황금을 좋아한다고 투덜대던 데이몬은 문이 열리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베르키스의 레어도 황금으로 전신에 도배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문안으로 들어서자 내부가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내부는 생각보다 좁은 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엄청나게 넓다고 볼 수 있었지만 무언가 거대한 것이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진 것이다. 그가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혔고 곧 우렁거리는 음성이 머리 속으로 전달되었다. ―네가 베르키스님의 레어에서 보물을 가지고 온 자이냐? 실내를 가득 채운 거대한 초록색 덩어리를 쳐다보고 있던 데이몬은 그 말에 화들짝 놀라 머리를 숙였다. 초록색 덩어리의 상단 부분에서 어둠을 뚫고 두 줄기의 강렬한 빛이 그를 향해 퍼부어졌다. 그것이 그린 드래곤이란 사실은 이미 들어올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이여. 저는 이번에 들어온 보검과 보화들을 마법보고 인크레시아에 보관하라는 베르키스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저번에 왔던 자는 어디에 가고 네가 왔느냐? 고개를 조아린 상태로 데이몬은 사정을 털어놓았다. 물론 마법진에 갇혀 끝없이 매직미사일에 난타당하고 있는 게덴하이드가 듣는다면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겠지만 말이다. "얼마 전 제법 규모가 큰 인간들의 침입이 있었습니다. 게덴하이드는 그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어 현재 치료 중에 있습니다. 그 외에도 리치로 구성된 가디언 열 다섯이 소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무척 큰 접전이었습니다." ―놀랍군. 인간들에게 아직까지 그런 힘이 남아있다니……. "아르카디아에서 건너 온 트레져 헌터들이었습니다." 지크레이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미 그는 베르키스의 레어를 전원 리치로 구성된 가디언들이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만들 엄두를 내기 힘든 강력한 리치 가디언들. 눈앞의 사자 역시 의심할 여지없는 리치였다. 10써클의 마스터에 오른 지크레이트의 눈은 데이몬의 성취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9써클의 마스터라, 놀랍구나 게덴하이드보다 강력한 리치가 있을 줄은…….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었다. 사소한 말꼬투리 하나가 오해를 살 여지가 있었으므로 그는 잠자코 침묵을 지키며 지크레이트가 말을 걸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면서 그는 암암리에 처소 내부의 경비상황에 대해 살폈다. 골렘으로 보이는 석상 열기 남짓을 제외하면 지크레이트가 전부였다. '하긴. 드래곤은 그 자체로도 강력하기 이를 데 없는 생명체이니…….' 지금의 상황에서 지크레이트를 상대한다는 것은 결코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그가 아무리 9써클의 마스터라도 드래곤에게 정면 대결로 싸워 이긴다는 것은 결코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 조금 뒤 드래곤의 입이 떨어졌다. ―그럼 보화를 꺼내보아라. "알겠습니다." 데이몬은 짊어지고 있던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손에 쥐고 있던 보검 르헤르트 세이버까지 말이다. 르헤르트 세이버를 지켜보던 지크레이트는 탄성을 내질렀다. ―근래에 보기 힘든 뛰어난 보검이로군. 이카롯트의 로젠가르트 황가를 상징한다는 검인가? "그렇습니다." 그 외에도 지크레이트는 몇 가지 질문을 더 퍼부었다. 상황을 보아 약간의 의심이 남아있는 듯 했다. 하지만 원래부터 베르키스의 가디언인 데이몬에게 대답하기 힘든 종류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무 머뭇거림 없이 대답하는 데이몬의 모습에 지크레이트는 가지고 있던 의심을 모두 지워버렸다. "좋다. 보화들은 내가 알아서 마법보고에 보관할 테니 넌 이만 가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금방이라도 몸을 돌려서 나갈 듯 몸을 일으키던 데이몬이 돌연 지크레이트를 돌아보았다. 지크레이트의 눈에서 이채가 떠올랐다. 사실 베르키스 휘하의 리치와 그와는 결코 볼 일이 없었으므로 경계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마나를 슬며시 끌어올린 상태로 지크레이트는 리치의 눈을 쏘아보았다. "무슨 일이지?" "저…….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만." "청?" 지크레이트의 커다란 눈에 의혹의 빛이 서렸다. 청이라니……. 베르키스의 가디언 사자가 자신에게 할 청이 있었던가? 그는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청인지 말해보아라" 다시 몸을 돌린 데이몬은 고개를 숙인 상태로 용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대단히 실례되는 일인 줄 알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이러는 것이니 하해 같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사실 약 100년쯤 전에 전 우연히 이계의 술법이 적인 한 장의 종이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계의 술법?" "그렇습니다. 이계에서 차원이동으로 건너온 존재가 남긴 술법이온데 머리가 나쁜 탓인지 무려 100여년을 연구에 몰두했어도 그 뜻을 하나도 풀지 못했습니다. 비록 리치의 몸일지라도 저 역시 마법을 추구하는 마법사입니다.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술법의 비밀을 풀고자 이렇게 무례한 청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묵묵히 데이몬의 말을 듣고 있던 지크레이트의 눈에 호기심이 번뜩였다. 그 역시 10써클의 대 마법사였으므로 이계 술법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거짓말이었으리라. "무슨 종류의 술법이더냐?"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100년 동안 연구해서 간신히 번역만을 해 놓은 상태입니다. 마나를 모종의 기운으로 변환시켜 활성화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을 마친 데이몬은 볼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수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크레이트의 눈에는 점점 호기심이 증폭되고 있었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야 말았다. "어떤 술법인지 한 번 꺼내어보아라." "알겠습니다. 사실 제 주인이신 베르키스님께 여쭈어보아야 합당한 도리이겠지만 그 분께서는 지금 수면을 취하고 계신지라." 말을 마친 데이몬은 한쪽 손을 조심스럽게 품속에 집어넣었다. 성질 더러운 베르키스라면 아무리 이계의 술법이라도 잠을 깨우는 것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을 하던 지크레이트는 극도의 호기심을 떠올리며 리치를 주시했다. 조금 뒤 리치의 손에 한 장의 종이가 딸려 나왔다. 언뜻 보아도 수기로 작성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데이몬은 그것을 공손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서너 발짝 뒤로 물러서서 하명을 기다렸다. "이것이옵니다." "그런가?" 지크레이트는 손을 슬쩍 휘저었다. 그러자 종이는 마치 날개가 달린 듯 떠오르더니 지크레이트를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종이를 들여다보는 지크레이트의 눈망울엔 극도의 기대가 서려있었다. "흠. 이것이 바로 이계의 술법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지크레이트는 뚫어지게 종이를 쳐다보았다. 종이에 적혀있는 것은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공식들이었다. 마법 공식과 어느 정도 비슷하긴 하지만 전개과정이나 응용법 면에서 판이하게 달랐다. 잠깐 훑어본 것만으로도 지크레이트는 그것을 푸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놀랍군. 이런 술법이 있었다니……. 언뜻 봐서는 정신에 작용하는 종류 같은데 도저히 원리를 파악할 수 없군. 마법과는 사뭇 다르지만 나름대로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술법 같아." "모쪼록 부탁드립니다. 제 굳은 머리로는 앞으로 천년을 연구하더라도 해독하기가 힘들 듯 싶어서……." 그럴 만도 하다 싶어서 지크레이트는 종이에 적힌 공식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하지만 드래곤인 그라도 오의를 쉽사리 파악하긴 힘들었다. 그 사실에 지크레이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10써클의 마스터에 오른 자신이 해독하지 못하는 마법 공식이 있다니……. 오기가 치민 지크레이트는 종이를 고쳐 잡았다. "아무래도 공식을 직접 시전해 보아야 할 것 같군." 말을 마친 그의 주위로 마나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해독하지 못하는 사실에 부아가 치민 지크레이트가 적힌 공식대로 직접 시연을 해 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렇지!' 그것을 느낀 데이몬의 얼굴에 기대의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탓에 지크레이트는 그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종이에 적힌 공식은 데이몬이 백년 동안의 고심 끝에 만들어낸 걸작이었다. 귀령제혼술이라는 섭혼술의 변형 버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마법으로는 드래곤을 상대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데이몬이 선택한 방법으로 종이에 적힌 내용의 대부분이 배교의 최고위급 사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원래는 이것으로 베르키스를 상대할 작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론 지크레이트에게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귀령제혼술(鬼靈制魂術). 이것은 배교의 독문 절기로써 오랜 시간동안 백도 무림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섭혼술이었다. 인간의 혼백을 직접 조종하여 시술자의 명에 절대 거부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리는 술법으로써 여기에 걸린 자는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또한 이 술법의 가장 무서운 점은 상대가 내공이 하늘에 닿은 초절정고수라도 걸려들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술법은 상대의 내공을 역이용하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내공이 높은 자는 사술에 쉽사리 걸려들지 않는다. 하지만 귀령제혼술은 일정수준까지만 술법이 전개되면 그 이후부터는 상대의 내공을 빨아들여 저절로 금제를 완성시킨다. 당하는 자가 저항하기 위해 내력을 쏟아 부을수록 심혼을 제압되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귀령제혼술에 당한 자는 일정 시간동안 시술자가 시키는 대로 모든 것을 다하게 된다. 심지어 명령이 떨어진다면 자신의 혈육에게조차 서슴없이 살수를 펼치게 되고 심중에 있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남김없이 털어놓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말 그대로 가공할 만한 술법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창이 있다면 의당 방패가 존재하듯 중원에도 귀령제혼술에 저항하는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배교와 상대하는 문파들(주로 명문정파들이다)도 처음에는 이 귀령제혼술에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때문에 그들은 이 술법을 파훼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했고 그 덕에 귀령제혼술도 오래지않아 무적이라는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귀령제혼술에 제압되지 않는 고수들이 속속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술법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여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기에 그 이후론 그리 널리 쓰이진 않았다. 하지만 사로잡은 적의 수뇌부의 입을 열기 위해 귀령제혼술보다 효과가 있는 술법이 없었기에 간간이 사용되곤 했다. 데이몬도 포로의 심문을 위해 귀령제혼술을 여러 번 시전한 적이 있었다. 그런 유래를 가진 배교의 술법이 이번에는 마법으로 형태를 바꿔 트루베니아에서 전개되려 하는 것이다. '귀령제혼술은 세뇌마법과는 판이하게 형태가 다른 술법이다. 경험해 본적이 없는 이상 설사 드래곤이라 할 지라도 걸려들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데이몬은 긴장한 채 종이의 공식을 읽어나가는 지크레이트를 주시했다. 한 번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크레이트의 신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귀령제혼술은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리는 술법이었고 또한 마법으로 변환한 때문에 효능이 어느 정도인지 데이몬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 걸려들지 않을 수도 있었기에 데이몬은 숨을 죽인 채 반응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약간의 마나를 동원해서 공식대로 시행해 본 지크레이트의 얼굴에 실망기가 스쳤다. 시험삼아 마나를 조금 밀어 넣었지만 정작 마법이 실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나가 모자라서 그런가?" 공식의 내용은 흥미를 돋구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우선 끌어 모은 마나를 다른 형태의 기운으로 변환시켜 구현하는 형식이었고 방식 역시 재배열되는 형태가 아니었다. 타고난 마법사라고 볼 수 있는 드래곤에겐 정말 구미가 당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재배열이 아니라 거의 합성된다고 봐야겠군." 살짝 캐스터해 본 결과 지크레이트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선 종이에 적힌 공식에는 리치가 상당히 공을 들인 흔적이 보였다. 언어와 기초적인 접근 방법은 마법의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정작 술법의 중요한 줄기 부분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때문에 마법이 실현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못 참겠군." 지크레이트는 용언마법(龍言魔法)으로 술법을 시행하고픈 마음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정말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지크레이트의 시선이 꿇어 엎드려 있는 리치의 등허리에 가서 멎었다. '혹시나 놈이 수작을 부린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는 길게 의심하지 않았다. 우선 이것이 어떤 종류의 술법인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드래곤인 자신에게 위험할 것 같지가 않았다. 또한 상대는 이미 베르키스에게 심령이 제압 당한 리치. 따라서 드래곤에게 해가 될 짓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지 못한다고 봐야 했다. 지크레이트는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좋아. 이까짓 것이 나를 해할 수는 없다.' 숨을 깊숙이 들이마신 지크레이트는 마나를 한껏 끌어 모았다. 무시무시한 마나의 소용돌이가 그를 축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드래곤의 용언마법이 힘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되었어.' 데이몬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기색을 지웠다. 지금은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드래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복수를 꾀하고 그와 더불어 다프네를 구해낼 수 있다는 희망이 오로지 이것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는 숨을 죽인 채 지크레이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10써클의 마스터라 그런지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지크레이트가 끌어 모은 마나의 양은 정말 방대한 수준이었다. 그의 거대한 초록빛 동체는 마나를 한껏 머금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 상태 그대로 지크레이트는 이계 술법을 캐스터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는 곧이어 실현될 결과에 대한 기대로 빛나고 있었다. 콰콰콰콰. 마침내 이계 술법이 실현되었다. 짙은 회색의, 왠지 모르게 사이한 느낌을 주는 기운이 자욱하게 피어나서 지크레이트의 몸을 감싸 버렸다. "크하하하. 성공이다." 지크레이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곧이어 이루어질 마법의 결과를 손꼽아 기다렸다. 이계의 술법마저 극복했다는 자부심이 얼굴에서 줄기줄기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은 거의 동시였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19회. 피어오른 운무가 머리 쪽으로만 집중되자 지크레이트의 눈에 의혹의 빛이 서렸다. "운무의 정체가 도대체 뭐지?" 회색 빛의 운무는 이미 그의 머리를 자욱하게 덮고 있었다. 놀랄 만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피어오른 운무들이 그의 머리통으로 파고들려 하고 있었다. 코와 귀, 입을 통해서 말이다. 깜짝 놀란 지크레이트는 얼른 캐스팅을 멈췄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란 것을 직감한 것이다. 캐스팅이 멈춤에 따라 끌어 모아 놓은 마나가 심하게 요동을 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지크레이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어버렸다. "이, 이것은?" 놀랍게도 캐스팅은 멈춰지지 않았다. 잠시 멈칫하던가 싶더니 운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마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지크레이트가 모아놓은 마나를 고스란히 말이다. 섬뜩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얼른 코와 입을 닫고 고개를 돌렸다. 이 이상한 술법을 자신에게 가져다 준 리치에게 영문을 물어보기 위해서 말이다. 거기서 지크레이트는 또다시 놀라야 했다. 꿇어 엎드려 있던 리치가 어느새 일어나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상대의 눈빛에서는 적의가 줄기줄기 묻어나고 있었다. 기가 찬 지크레이트는 떠듬떠듬 말을 이어나갔다. "네, 네놈이?" "대법은 발동되었다. 이미 필요조건을 모두 충족했으니 너는 결코 귀령제혼술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짤막하게 내뱉은 데이몬은 즉시 몸을 날렸다. 목표는 우두커니 서 있는 석상들이었다. 그것들의 정체는 스톤 골렘이 분명할 터였고 지크레이트의 명이 떨어진다면 즉시 공격을 가해올 것이기 때문에 먼저 선수를 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 모습에서 지크레이트는 상대가 단단히 준비를 하고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분노가 모락모락 피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놈." 공격을 퍼붓기 위해 상체를 쳐들려는데 갑자기 머리에서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그때서야 이계 술법의 존재가 떠오른 지크레이트는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일단 이 술법부터 해결해야 해." 스톤 골렘들에게 리치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지크레이트는 서둘러 마나를 재배치했다. 시시각각 자신을 옥죄어 오는 이계 술법을 파훼하기 위해 디스펠을 캐스팅하려는 것이다. 콰쾅. 우두커니 서 있던 스톤 골렘 두 기가 움직여보지도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다. 아무리 강한 몸체를 가지고 있더라도 지옥의 화염이라는 헬 파이어에는 배겨내지 못했다. 그 상태 그대로 데이몬은 문가의 커다란 스톤 골렘에게 짓쳐 들었다. 문을 여는 것이 놈의 역할이란 것쯤은 이곳으로 들어오며 미리 파악해놓은 사실이었다. 지원군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면 놈을 가장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했다. "에잇." 그의 양손에서 길쭉한 섬광의 기둥이 생겨났다. 한 손에 세 개씩 도합 여섯 개였다. 이름하여 에너지 볼트(energy bolt). 물리적 데미지와 화학적 피해를 동시에 입힐 수 있는 상당히 수준 높은 마법이었다. 또한 스톤 골렘의 몸에 화염이나 전격계 마법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한 결정이기도 했다. 어마어마한 크기로 생겨난 에너지 볼트는 막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스톤 골렘을 향해 화살처럼 내려 꽂혔다. 콰지직. 골렘의 가슴팍과 어깨, 옆구리가 동시에 터져 나갔다. 하나같이 마법석이 들어 있음직한 부분이었다. 속에 들어있는 마법석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히 튼튼하게 만들어진 부위였지만 9써클의 대마법사가 시전하는 에너지 볼트에는 배겨나지 못했다. 하지만 골렘은 쓰러지지 않았다. 흉측하게 깨어져나간 옆구리 부분에서 눈부신 빛이 일어났고 그와 동시에 골렘은 사납게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용케 적중되기는 했지만 다행히 마법석이 무사했던 것이다. 하지만 가해진 공격은 그것뿐만이 아니었으니……. 에너지 볼트와 거의 동시에 퍼져나간 무수한 매직 미사일이 이미 스톤 골렘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상태였다. 가히 매직 미사일의 신이라고 불려도 될 듯한 신위. 데이몬의 통제를 받은 매직 미사일 몇 발이 목표했던 골렘의 마법석을 어김없이 파고들었다. 퍼퍼퍽. 휑하니 드러나 있던 마법석은 결국 산산이 깨어지는 운명을 맞이했다. 물론 스톤 골렘과 함께 말이다. 빙글 몸을 돌린 데이몬의 손에서 또다시 청색 화염이 솟구쳤다. 콰콰쾅. 두 번째 헬 파이어가 작렬했고 다가오던 스톤 골렘 두 기가 산산이 바스라진 채 나뒹굴었다. 데이몬이 아무리 9써클의 대마법사라도 헬 파이어는 결코 연사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었다. 때문에 데이몬은 매직 미사일로 놈들을 견제하여 시간을 벌고, 그 틈을 타서 끌어 모은 마나를 이용한 헬 파이어로 스톤 골렘들을 하나하나 착실히 파괴시켜 나갔다. 헤이스트까지 펼친 상태였기 때문에 스톤 골렘들은 그의 그림자도 밟지 못했다. 지크레이트의 가디언들은 정말 허무하게 괴멸되고 있었다. 줄기차게 쓰러지는 모습에서 무기력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스톤 골렘이라면 결코 약한 존재가 아니다. 다만 상대가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싸워본 노련한 전사였고 효과적으로 싸우는 방법이 아예 몸에 배어있었다. 쿠르르르. 마지막 골렘 한 기의 몸체가 부서지며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 모습을 보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다행히 이곳으로 들어오는 문은 굳건히 닫힌 그대로였다. 소동을 들었는지 밖에서 연신 두드려대고는 있었지만 안에서만 열 수 있는 문의 특성상 어느 정도는 마음놓을 수 있을 듯 했다. 마음을 가라앉힌 데이몬은 지크레이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크레이트의 모습을 보자 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져갔다. "귀령제혼술이 드래곤에게도 통할 줄은 아마도 배교 장로들조차 몰랐을 거야." 불쌍하게도 지크레이트는 잔뜩 웅크린 채 연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귀령제혼술에 반쯤 제압 당한 것이 확실했다. 연신 디스펠을 해 대는 지크레이트였지만 애당초 마법이 아닌 귀령제혼술을 파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이제 마법을 전개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뇌리를 파고들려는 회색 운무를 방어하는 것만도 그에겐 벅찬 일이었다. "이, 이런 술법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놈의 계교에 넘어가는지도 모르고 순순히 용언마법을 전개한 자신이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가능하다면 술법을 캐스팅하기 전으로 돌아가 놈을 단박에 박살내고 싶은 것이 지크레이트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하지만 방도가 없었다. 사력을 다해 이계 술법을 막아내고 있는 사이 자신에게 올가미를 걸어놓은 가증스런 존재는 뚜벅뚜벅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상황을 보아 스톤 골렘들은 모조리 당한 것 같았다. 그에겐 상대를 제압할 만한 여력이 전혀 없었다. "많이 괴롭나 보군. 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지크레이트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잡아먹을 듯한 시선이 데이몬에게 퍼부어졌다. 하지만 그는 곧 신음소리와 함께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계 술법 때문에 조금이라도 정신을 분산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얄밉게도 계속해서 비위를 긁고 있었다. "이봐! 대륙 최강의 종족이란 자부심은 어디로 간 거야? 고작 리치 하나에게 당하는 놈들이 대륙 최강이라고 자부할 수 있어?" "이, 이 자식." 결국 부아를 참지 못한 지크레이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뇌리 속에는 이계 술법이고 뭐고 간에 놈을 당장에 박살내어 버리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었다. 고개를 든 순간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동공을 파고드는 회색 빛 동공을 볼 수 있었다. "헉." 데이몬은 이미 마나를 모아 사술을 전개하고 있었다. 회백색 안광이 이글거리는 데이몬의 눈을 직시한 지크레이트의 눈동자가 점차 혼탁해지기 시작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시전한 귀령제심안의 도움에 의해 귀령제혼술이 본격적으로 발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도저히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혼백이 마치 송두리째 상대의 눈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았다. 하등한 리치에게 맥없이 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기를 쓰고 저항했지만 무리였다. 지크레이트의 의식은 점차 깊은 심연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펑. "크으으." 묵직한 신음소리와 함께 앙상한 몸뚱이 하나가 바닥에 털썩 나뒹굴었다. 음성의 주인은 갈기갈기 찢어진 로브를 걸치고 있는 리치였다. 조금 전까지 그를 구속하고있던 마법진은 이제 힘이 다한 채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동그라진 리치는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거듭되는 타격으로 몸이 완전히 걸레가 되어버린 터라 쉽사리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빌어먹을." 욕설을 퍼부어 가며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그의 몸은 마치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도저히 실행에 옮길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법인들 제대로 시전할 수 없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비록 불노불사의 리치였지만 벌써 다섯 시간 가까이 매직 미사일에 난타 당하고도 멀쩡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겨우겨우 등을 기대고 몸을 세운 게덴하이드는 마나를 끌어 모을 수 있을 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다. 문득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자가 떠오르자 그는 생각조차 하기 싫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무, 무서운 놈." 아마도 그자는 끈질기기로 말하면 전 우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해야 할 정도라고 단언할 수 있는 자였다. 500년 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잡혀와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베르키스의 정신 마법까지 체험해야 했던 자. 어떻게 해서 세뇌마법을 풀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눈을 감쪽같이 속이고 9써클의 마스터가 되었다는 사실에는 정말 찬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3써클의 햇병아리였던 자가 말이다. 하지만 게덴하이드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사실을 베르키스에게 알려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무척 급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놈의 의도가 무엇일까? 날 잡아둔 것을 보면 분명 지크레이트님께 간 것 같은데 대관절 무슨 이유로……." 물론 게덴하이드는 데이몬이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더불어 이미 지크레이트를 완벽하게 제압해 놓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머리를 흔든 게덴하이드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놈이 도대체 무얼 노리는지는 모르지만 결코 목적을 이루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라이프 포스 베슬이 있는 이상 어떤 일이 있어도 베르키스 님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이지." 게덴하이드 역시 물론이오 가디언으로 있는 모든 리치의 라이프 포스 베슬은 베르키스가 직접 가지고 있다. 때문에 세뇌마법이 아니라도 리치들은 감히 베르키스의 명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만에 하나 베르키스가 라이프 포스 베슬을 깨뜨려버린다면 대상 리치는 허무하게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 데이몬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게덴하이드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네놈이 아무리 나인 써클의 마스터라도 소멸되는 운명을 피할 순 없을 것이다." 몸을 움직여본 게덴하이드는 어느 정도 회복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고위급 리치인 탓에 그의 회복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상태를 점검해보고 나서 게덴하이드는 또다시 머리털이 쭈뼛 솟는 듯한 공포심에 휘감겨야 했다. 상대는 자신을 너무도 정확하게 망가뜨려 놓았던 것이다. "제대로 운신하기도 힘든데다 마법을 사용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 몸이 베르키스 님께 전해지지 않을 정도로만 망가뜨렸다는 점이다." 통상적으로 리치가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경우 라이프 포스 베슬에 담긴 생명력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대부분의 리치에게 통용되는 사실이었다. 일전의 예로 수면중인 베르키스가 휘하 리치들이 당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아차린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이미 리치들의 라이프 포스 베슬에 제한적인 탐지마법을 걸어놓고 있었다. 따라서 게덴하이드가 심각한 타격을 받거나 소멸될 경우 베르키스는 즉시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분명 수면을 중지하고 레어 바깥으로 나올 것이 분명했다. 리치 우두머리가 당했다면 통상적인 상황이 아니니 말이다. "놈은 그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어." 상대의 용의주도함에 게덴하이드는 딱딱하게 질려 버렸다. 그의 뇌리에는 서둘러 놈의 반역을 베르키스에게 고해야 한다는 하는 마음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나는 생각만큼 원활히 모여들지 않았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20회. 조바심이 날 정도로 노력한 끝에 그는 마침내 공간이동에 필요한 분량의 마나를 겨우 끌어 모을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캐스팅에 들어갔다. "워프." 찬란한 빛무리와 함께 게덴하이드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는 거의 동시라고 할 수 있는 시간에 약 10km 정도 떨어진 베르키스의 레어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니? 게덴하이드님." 우두머리인 게덴하이드가 몹시 낭패한 기색으로 마법진에서 나타나자 리치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알기로 감히 게덴하이드를 저 지경으로 만들 존재는 여간해서는 없었다. 9써클의 리치를 저 지경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 뿐이었다. 이름하여 드래곤 말이다. 하지만 게덴하이드에겐 한가롭게 그들과 대화를 나눌 생각이 전혀 없었다. "비켜라." 호통을 쳐서 리치들을 물러나게 한 게덴하이드는 곧장 베르키스의 처소로 향했다. 비틀거리면서도 결사적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은 절박한 심경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듯 했다. 하지만 지하 깊숙이 위치한 베르키스의 처소는 정말 멀었다. 만약 공간왜곡장이 펼쳐져 있지 않았다면 그는 실례를 무릅쓰고서라도 워프를 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그는 비틀비틀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발을 놀림에 따라 저 멀리서 브론즈 골렘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깨트려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 "그렇다. 나이델하르크는 봉인구에 각인되어 있는 마법진에 의해 제압되어 있다. 만약 마법진이 깨어질 경우 그 즉시 나이델하르크가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흠." 데이몬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 그린 드래곤 지크레이트의 입을 통해 궁금했던 사실을 모조리 듣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귀령제혼술에 의해 완전히 제압된 지크레이트. 마법의 조종인 드래곤이 중원의 사술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귀령제혼술의 무서운 점이었다. 심령금제에서 벗어나더라도 그동안 자신이 무얼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니까 말이다. 붉게 충혈된 눈빛. 거대한 드래곤의 눈동자에는 오로지 혼탁함만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은 마침내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 그럼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 질문하겠다." "뭐든지 물어보도록……." 번들거리던 지크레이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이미 확인한 다음이었다.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나에게 보여다오." "알겠다." 대답하는데 있어 지크레이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그만큼 귀령제혼술에 깊숙이 제압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한 쪽 손을 지긋이 치켜들었다. 손에 광구가 맺히며 눈부신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파파파팟. 너무나도 영롱한 빛이었다. 빛이 지속된 시간은 정확히 일각. 이후 빛무리는 맹렬한 빛을 내쏘며 소멸해갔다. 그 바람에 데이몬은 손으로 눈을 가려야 했다. 빛이 사라지자 데이몬과 지크레이트의 앞에는 사방 1.5미터 남짓한 크기의 검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차라리 차원의 문이라고 불러야 할 듯한 왜곡된 공간.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는 마침내 데이몬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나 단순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도저히 인크레시아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데이몬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이것이 인크레시아인가?"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는 현세에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주문을 외워야만 모습을 드러낸다. 그 외에는 차원의 틈새에서 잠들어 있을 뿐이다." "재미있군. 그렇다면 물건을 넣을 때와 꺼낼 때는 어떻게 하지? 직접 들어가서 보관해야 하나?" 지크레이트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불가하다. 인크레시아의 안은 대기가 전혀 없는 데다 극한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보관한 물품이 썩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들어갈 수는 없다. 생명체는 인크레시아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 역시 인크레시아의 안에서는 단 1분도 버틸 수 없으니까 말이다." 말을 마친 지크레이트는 데이몬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생각해 보니 넌 들어가는 게 가능하겠군.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언데드, 리치이니까 말이다." "빌어먹을. 덩치만 커다란 초록 도마뱀녀석이……" 데이몬은 인상을 쓰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쨌거나 언데드 몬스터로 불리는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물건을 꺼낼 때는 어떻게 하지?" 지크레이트는 손을 들어 머리를 툭툭 쳐 보였다. 데이몬에겐 물론 앞발로 보였지만 말이다. "인크레시아에 물건을 넣고 빼는 것은 모두 마법에 의해 행해진다. 물건이 보관된 위치는 머리 속에 기억되어 있고 모종의 마법 주문과 함께 그 물건을 떠올리면 인크레시아는 어김없이 그것을 꺼내어 준다. 보관할 때도 마찬가지다. 넣을 것을 명령한다면 인크레시아는 속의 방대한 공간으로 물건을 수납한 뒤 안전하게 보관한다. 그리고 좌표는 내 머리 속에 기억되는 것이지." "무척 복잡하군." 설명을 들은 데이몬은 얼굴을 찡그렸다. 이만하면 알아낼 것은 거의 알아낸 셈이었다. 설마 드래곤을 심문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데이몬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에 갑자기 다급한 기색이 떠올랐다. 지금쯤 게덴하이드를 구속하고 있는 마법진이 효력을 다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그는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크레이트의 얘기가 너무나 흥미진진하다보니 시간가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그는 다급하게 지크레이트를 쳐다보았다.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는 어디에 보관되어 있지?" "원한다면 꺼내주겠다. 하지만 그것을 찾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꺼낼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나는 그것의 좌표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그것은 영원히 인크레시아의 안에 존재해야 하므로. 이것은 크라누스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일이다." "빌어먹을……. 나에겐 시간이 없단 말이야." 다급한 마음에 데이몬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풀려난 뒤 게덴하이드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는 뻔했다. 놈은 분명 베르키스에게 달려갈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의 라이프 포스 베슬을 노리고 말이다. 안절부절못해하던 데이몬. 그때 마법보고 인크레시아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데이몬의 뇌리에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인크레시아와 지크레이트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던 데이몬은 손뼉을 딱 쳤다. "좋아. 그렇게 하면 되겠군." "어떻게 하겠다는 뜻이지?" 지크레이트가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어왔다. 지금의 그는 전혀 드래곤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넌 몰라도 돼." 지크레이트를 쳐다보던 데이몬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지크레이트는 그저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무슨 일인가? 게덴하이드." 벽 너머에서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게덴하이드는 반색을 했다. 그는 지금까지 베르키스가 깨어나기를 말 그대로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참이었다. 드래곤은 인간과는 달리 금방 잠들고 바로 깨어날 수 없다. 어느 정도의 준비기간이 필요하기에 이처럼 튼튼한 장막 속에서 수면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크, 큰일났습니다. 베르키스님." "큰일?" 게덴하이드는 곧 그간에 일어난 일들을 세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500년 전 재미 삼아 리치로 만들었던 데이몬이 어느새 9써클의 마스터가 되어 게덴하이드를 제압했다는 사실에 베르키스는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설마 놈의 정신력이 내 세뇌마법을 극복했단 말인가?"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아마도 그런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놈이 어떻게 해서 9써클의 마스터가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짚이는 바가 없진 않다. 조금 기다리거라." 베르키스는 잠시 정신을 집중하는 듯 했다. 곧 극도로 분노한 음성이 벽 너머에서 터져 나왔다. "그랬군. 내 마법서실의 알람마법들이 모조리 디스펠되어 있어. 놈은 내 마법서를 가지고 마법을 익힌 것이 틀림없다. 이놈을 그냥……." "하, 하지만 베르키스님의 마법서실에는 10여 명의 리치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또한 리치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마법서실에 들어갈 수 없을 텐데요." "세뇌마법을 극복했다면 그럴 수도 있지. 놀랍군 10써클의 마법을 이겨내는 인간이 있을 줄은……." 사정을 게덴하이드가 알아봐야 하등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던지 베르키스는 그저 짧게 얼버무렸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베르키스는 이번에는 다른 것에 대해 물어왔다. "그래. 놈이 지크레이트에게 갔다고?" "그렇습니다. 조금 전 연락을 취해 본 결과 놈이 어김없이 지크레이트님의 레어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사자 행세를 하며 그 분의 처소에 들어간 것은 확인되었지만 그 뒤로 문이 폐쇄되어버린지라 자세한 사정은 그곳의 가디언들도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 만에 하나 지크레이트가 놈에게 당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게덴하이드는 그 말을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드래곤이란 종족을 능멸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베르키스가 불같이 화를 낼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소드 마스터의 암습이면 몰라도 마법이 장기인 리치가 정면대결로 드래곤을 감당할 가능성은 아예 없었기에……. 예상대로 베르키스는 지크레이트가 당했으리란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재미있군. 놈의 목적이 도대체 무엇일까?" "가디언들이 사력을 다해 문을 부수고 있으니 곧 전말이 드러날 것입니다. 베르키스님. 그것보다도 먼저 놈을 끝장내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됩니다만." "아무래도 그게 낫겠군. 상당히 위험한 녀석이니……." 베르키스는 마침내 마음을 정한 듯 했다. 좋은 실험대상을 잃어버리는 것이 다소 애석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뇌마법을 극복한 놈을 살려두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 때문에 베르키스는 커다란 아가리를 좍 벌려 몸 속에 보관한 데이몬의 라이프 포스 베슬을 토해냈다. 리치 데이몬의 생명력이 보관된 용기를 쳐다보는 베르키스의 눈망울에는 차가움만이 가득했다. 수면을 취하던 도중에 깨어난 덕택에 결코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놈.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지만 곧 이승을 하직하게 될 것이다." 손으로 베슬을 틀어 쥔 베르키스는 지긋이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지지직. 베슬에 가늘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느낀 베르키스는 힘을 살짝 풀었다. 그의 입가에는 어느덧 싸늘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아마도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베슬이 깨어진다면 리치는 그 즉시 소멸되어 버린다. 그것은 아무리 먼 곳으로 도망친다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물론 베르키스에겐 놈을 단번에 죽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힘을 주었다 뺐다하며 극한의 고통을 가한 뒤에야 끝내려는 것이 바로 베르키스의 속셈이었다. 베슬에 금이 가면 속에 저장된 생명력이 조금씩 새어나오고 그것은 리치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할 것이다. 베르키스는 바로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잠에 빠져있어야 할 자신을 깨운 데 대한 대가였다. "크윽."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난데없이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점의 빛도 없는 태고의 어둠 속이었다. "바, 발각되었나 보군. 조, 조금만 있으면 대, 대법이 완성되는데……. 큭." 신음소리는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성의 주인은 줄기차게 무언가에 몰두하는 듯 했다. 필생의 염원이 걸린 듯 말이다. "크으, 그래도 다행이군. 바, 바로 죽일 생각이 없어 보이니… 커컥." 간헐적으로 끊어지는 비명 소리로 보아 얼마만큼의 고통이 가해지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둠 속의 인물은 끈질기게 고통을 참아내며 작업에 몰두했다. 사실 그는 고통이라면 이력이 날 대로 난 인물이었던 것이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21회. 그에 따라 알 수 없는 기운이 계속해서 피어났다. 어둠 속 미지의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음성의 주인말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거듭된 과정이 무척 지루하게 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파앗. 어디선가 눈부신 빛무리가 생겨나며 어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빛무리는 제단에 누워있는 한 사람의 머리 부근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빛무리가 뿜어내는 찬란한 빛으로 말미암아 그곳의 모습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사방이 돌로 되어 있는 석실. 그곳의 정체는 바로 데이몬의 비밀 거처였다. 다만 서가를 채우고 있던 사술의 이론서들이 남김없이 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유일한 차이점이었지만 말이다. 머리에 빛무리를 가득 머금고 있는 자는 스물 남짓한 미소년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창백한 나신으로 제단에 누워있는 모습은 시체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하늘거리는 금발머리에 우뚝한 콧날을 가진 청년의 용모는 무수한 처녀들의 방심을 흔들어버릴 정도로 뛰어났다. 창백한 낯빛으로 말미암아 도저히 산사람처럼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그의 앞에는 왜소한 체구를 한 흑포인이 쉴새없이 몸을 떨고 있었다. 이미 몸을 덮고 있던 로브가 갈가리 찢겨져나간 상태. 자세히 보니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대표적인 악의 언데드 몬스터로 지칭되는 존재인 리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리치는 무척 참혹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정말 눈뜨고는 못 볼 몰골을 하고 있었으니……. 놀랍게도 리치의 팔과 다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맷돌에 넣고 갈아버린 듯 손과 발이 있던 자리에는 수북한 가루만 쌓여 있었고 남은 부분 역시 조금씩 부스러지고 있었다. 게다가 뼈만 남은 두개골 역시 점점 금이 가고 있으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퀭한 동공은 빛을 잃은 지 오래였으며 쉴새없이 경련하는 몸뚱이만이 리치가 아직까지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으니……. 뚝. 리치의 몸이 별안간 떨림을 멈췄다. 곧이어 두개골이 퍽 하는 음향과 함께 둘로 쪼개진 채 떨어져 내렸고 유일하게 남은 몸뚱이는 바닥에 철퍼덕 쓰러져버렸다. 푸스스. 리치의 몸은 삽시간에 재가 되어버렸다. 흰 가루에 묻힌 상태로 널브러져 있는 찢어진 로브만이 리치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했다. 석실은 또다시 적막감에 묻혀버렸다. 아무런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는 가운데 제단에 누운 미소년의 알몸만이 은은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마치 억겁의 시간동안 이대로 유지될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변화는 오래지 않아 일어났으니……. 번쩍. 시체처럼 누워있던 미소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사이하고 칙칙한 빛이 동공에서 흘러나왔다. 어찌 보면 소름이 끼친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듯한 눈빛. 곧이어 소년의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온 웃음소리가 석실을 가득 메웠다. 쇠그릇을 긁는 듯한 무척 듣기 싫은 음성이었다. "크하하하. 성공이다. 드디어 베르키스의 손아귀를 벗어나 새로운 몸을 얻은 것이다." 도저히 미소년에게서 나왔다고 보기 힘든 눈빛과 음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년은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했다. 사실 그의 진정한 정체는 바로 데이몬이었다. "정말 천행이었어. 하늘이 도와줬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미소년의 눈가에는 조금 전의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말 그대로 도박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던 시도였다.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그대로 소멸해버릴 수밖에 없는 도박. 데이몬은 그 희박하기 그지없는 확률을 극복하고 마침내 새로운 몸을 얻은 것이다. 그것도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추악한 몸뚱이가 아닌 잘 생긴 미소년의 몸을 말이다. 더불어 베르키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새로 얻은 몸에 적응하기를 기다리며 데이몬은 조금 전의 일을 상기하기 시작했다. 게덴하이드를 속박하고 있던 마법진이 힘을 다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후 데이몬의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일단 그에게는 지크레이트가 인크레시아에서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찾을 때까지 기다려 줄 시간이 없었다. 9써클의 리치인 게덴하이드에겐 눈 깜짝할 사이에 레어로 돌아갈 능력이 있다. 이 사실이 베르키스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자신은 그 즉시 끝장이었다. 때문에 데이몬은 다른 방법을 구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송두리째 삼켜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데이몬은 지크레이트에게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넘겨줄 것을 요구한다. "인크레시아를 내가 가져야겠다. 가능하겠지?" 완전히 귀령제혼술에 제압된 지크레이트는 도저히 그 요구를 거부하지 못했다. 지크레이트를 죽이더라도 인크레시아를 빼앗진 못하겠지만 만약 그가 자유 의지로써 넘겨준다면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다. "가능하다." 결국 지크레이트는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인크레시아의 소유권을 데이몬에게 넘겨주게 된다. 마법 보고를 사용하는 방법을 하나도 남김없이 가르쳐주고 내친 김에 인크레시아에게 새로운 주인을 각인시켜 준 터라 이 천고의 마법보고는 마침내 데이몬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된다. "되었어." 시간관계상 보화들이 어디에 저장되어 있는가에 대한 기억을 듣진 못했지만 데이몬은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 그에겐 서둘러 비밀거처로 돌아가 대법을 시행할 생각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바로 공간이동을 시전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지크레이트에 대한 처리문제 때문이었다. 비록 그가 자신에게 엄청난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엄연히 귀령제혼술에 의한 것이다. 그로써는 장차 강력한 적이 될 것이 분명한 지크레이트를 살려 둬야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것도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가지고 있던 종족 드래곤이 아니던가? 애당초 하찮은 동정심에 휘둘릴 성품이 아니었기에 데이몬은 그 즉시 지크레이트에게 자진(自盡)을 명했다. "지금 즉시 너의 드래곤 하트를 뽑아내어 나에게 건네주도록 하라." 드래곤 하트. 드래곤이 가진 힘의 원천으로 이것이 없다면 드래곤은 결코 생존할 수 없다. 하지만 귀령제혼술에 깊이 제압 당해 있는 지크레이트로써는 도저히 그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지크레이트는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오른 손을 목에다 박았다. 푸학.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목뼈와 함께 찬란한 빛을 발하는 드래곤 하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단발마의 비명소리는 그 이후에 터져 나왔다. 콰우우우. 생명의 원천이 빠져나감과 함께 거대한 그린 드래곤은 자신의 처소에 몸을 뉘었다. 지크레이트가 최후를 맞이했던 전말은 바로 이러했다. 하찮은 리치 하나로 인해 보물을 지키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것이다. 늘어진 지크레이트의 시체를 쳐다보던 데이몬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놈의 시체를 가져가야겠군. 증거도 증거지만 쓸모가 있을 테니……." 그는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지크레이트의 시체를 인크레시아에다 집어넣을 심산에서였다. 이미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깊이 숙지하고 있던 터라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인크레시아는 아무리 큰 물건이라도 무리 없이 수납할 수 있었다. 드래곤 하트와 함께 지크레이트의 시체를 인크레시아에 밀어넣은 뒤 데이몬은 즉시 공간이동을 시전했다. 목적지는 그의 비밀 거처에 그려놓은 마법진이었다. 때는 게덴하이드가 막 베르키스에게 보고를 시작한 순간이었고 돌아가자마자 데이몬은 영혼교환의 사법을 시행했다. "서둘러야 한다." 10%의 가능성만을 믿고 시작한 대법. 중간에 베르키스의 방해가 있었지만 그는 사력을 다해 대법에 집중했다. 고통을 참는 것은 그에겐 이미 이력이 난 일이었으므로……. 정신이 흐트러지는 위기를 몇 차례 극복한 결과 데이몬은 결국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성공이야." 그의 영혼은 무사히 새로운 몸에 들어가 안착했다. 아마도 새로운 몸이 넋이 빠진 상태라서 대법이 비교적 수월히 이루어졌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법이 끝난 것과 동시에 라이프 포스 베슬이 깨어진 리치의 몸은 재가 되어 흩어져버렸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몸 말이다. 그러나 수북히 쌓인 재를 쳐다보는 데이몬의 눈동자에는 별반 감정이 깃들어있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다소 섭섭했을 테지만 말이다. "잊을 것은 빨리 잊어야겠지?" 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까지 적응이 되지 않았는지 몸을 움직이는 것이 상당히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에겐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 사명이 있었다. 리치의 몸이 부서지며 발산한 마나의 기운을 베르키스가 놓칠 리는 만무할 터. 게덴하이드를 위시한 리치들이 곧이어 이곳으로 들이닥칠 것이 분명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 그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아직까지는 이 몸으로 마법을 전개할 수 없다. 그러니 우선은 놈들의 이목을 피해야 한다." 비틀거리며 서가로 걸어간 데이몬은 그곳에서 병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마법을 사용한다면 게덴하이드의 눈을 속일 수 없을 터. 이것을 사용해야겠군." 병 속에 든 용액은 역체변용술을 시전하는데 꼭 필요한 약품이었다. 전혀 다른 종족으로 변장한다면 놈들의 의심을 별달리 사지 않을 터. 이미 거기에 필요한 마나는 조그마한 마법진 하나에 가득 저장해놓은 상태였다. 가히 준비성 하나는 철저한 데이몬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뚜껑을 제거한 데이몬은 주저 없이 병을 입에 대고 들이켜버렸다. 꿀꺽꿀꺽 흑갈색 액체가 식도를 타고 넘어간 것을 확인한 데이몬은 지체 없이 마법진 위에 섰다. 이미 마법진은 누군가가 위에 올라서는 즉시 발동되도록 조처해 놓은 상태였다. 츠츠츠츠. 마법진에서 눈부신 빛이 피어올랐다. 데이몬의 몸은 곧 빛무리에 휘감겨버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변화가 일어났다. 빛무리 속에서 그림자로만 보이던 데이몬의 몸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180cm가 넘었던 그림자의 키가 점점 줄어들었다. 가느다란 팔과 다리는 대조적으로 두터워졌으며 전체적으로 땅딸막하면서 당당한 체격으로 변해 가는 것이다. 조금 뒤, 빛무리가 사라진 마법진 위에는 전혀 다른 종족이 버티고 서 있었다. "크크크. 과연 놈들이 눈치를 챌까?" 괴소를 흘리던 땅딸막한 그림자는 허리를 굽힌 뒤 무언가를 집어들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끝났군." 어둠 속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곳은 거대한 지하 공동이었고 뭔가 불그스름한 빛을 띠는 덩어리가 공동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바로 수면기를 지내기 위한 베르키스의 처소인 것이다. 베르키스는 무표정한 눈빛으로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조그마한 용기의 조각들이 산산이 깨어진 채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것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 리치의 생명력을 담고 있던 라이프 포스 베슬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깨어진 것을 보니 용기의 주인이 도저히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란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베슬 조각들을 내려다보던 베르키스의 거대한 눈동자에 이채가 맺혔다. 마치 무언가를 느낀 듯한 눈빛이었다. "놈!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숨어 있었군." 라이프 포스 베슬이 깨어진다면 대상 리치의 몸은 거의 동시에 소멸되어버린다. 하지만 리치 역시 고도의 마법사인지라 순순히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몸뚱이가 부스러지는 과정에서 상당한 마나의 기운을 발산하는 것이다. 드래곤인 베르키스는 당연히 그 기운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곧 벽 너머의 심복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라. 게덴하이드. 놈의 소멸을 확인하는 동시에 놈이 가지고 있던 보화들을 수습해오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명령을 기다리던 게덴하이드는 만면에 희열을 떠올리며 냉큼 머리를 숙였다. 상대는 자신을 장장 다섯시간 동안 마치 복날 개 패듯 두들겨 팼던 가증스런 존재였다. 직접 복수하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애석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통쾌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즉시 몸을 돌렸다. 때문에 그는 벽 너머의 주인이 지금 심각하게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지크레이트가 처소를 나선 뒤에도 베르키스는 수면에 들어가지 않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사실 데이몬의 행동은 베르키스로써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도대체 놈이 왜 지크레이트에게 갔으며 어째서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을까?" 물론 놈이 자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은 결코 변할 수 없는 기정 사실이다. 이미 자신은 리치들의 라이프 포스 베슬을 하나도 빠짐없이 몸 속에 보관하고 있던 상태. 제 정신을 차렸다고 하더라도 도망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여기서 상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 게덴하이드를 암습한 일은 그 즉시 정체가 탄로나는 일이므로 정체를 숨겨야 하는 놈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피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게덴하이드를 공격했다. 게다가 자신이 잠을 자는 사이 지크레이트의 레어에까지 갔다왔다니……. "혹시?" 베르키스의 뇌리에 문득 불길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만약 놈의 목적이 지크레이트였고 만에 하나 그가 당했다면……. 하지만 베르키스는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비록 상대가 9써클의 리치라고 하더라도 지크레이트가 당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볼 수 있어. 지크레이트가 아무리 경험이 없더라도 고작 리치 하나를 감당하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불안한 심정은 도무지 가시지 않았다. 만약 놈이 지크레이트의 손에 당했다면 이곳까지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온유한 성질의 그린 드래곤이라도 침입한 적을 순순히 살려보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결국 베르키스는 직접 나서서 사정을 알아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미 잠 생각은 뇌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우선 지크레이트에게 가보고 와야겠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으니……." 생각이 끝나자마자 베르키스의 거대한 몸은 레어에서 사라져버렸다. 10써클의 드래곤에게 공간이동 마법진 따위는 하등 쓸모 없는 것에 불과했다. 게덴하이드는 수하 오십을 대동한 채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의 뇌리 속에는 서둘러 놈의 소멸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었다. "도대체 놈이 어떤 방법으로 9써클의 마스터에 올랐을까?" 머리가 빠지게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게덴하이드는 머리 속에 잠재한 세뇌 마법으로 인해 마법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것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500년의 세월이면 그 역시 9써클의 마스터에 오른다는 것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라 봐야 했다. 마법은 익힌 기간과 정확히 비례해서 성장하는 학문이니 말이다. 하지만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는 베르키스의 세뇌마법이 그로 하여금 암암리에 마법수련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게덴하이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답답해진 그는 휘하의 리치들만 독촉해댔다. "서둘러라. 빨리 끝내고 경비 업무에 복귀해야 하니 말이다." 명령을 받은 리치들이 부쩍 속도를 올렸다. 게덴하이드로썬 공간이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기만 했다. 불행히도 그 장소는 좌표가 파악되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선두에서 달려가는 리치들이 별안간 멈춰 섰다. 그들을 보자 무언가가 화들짝 놀라며 길옆으로 비켜서는 누군가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이동이 멈춰지자 게덴하이드는 짜증 섞인 일성을 내뱉었다. "무슨 일이냐?" "난데없이 오크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차림새로 보아 떠돌이 헌터로 보이는 자이온데……." 리치의 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게덴하이드가 앞으로 쓱 나섰다. 일단 앞의 상황은 리치의 보고와 한 치도 틀림이 없었다. 길옆에는 남루한 차림새를 한 오크 한 마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비켜 서 있었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22회. 연참 입니다. ********************************************************************* 부족의 표식이 없는 것을 보아 무리에서 쫓겨난 수컷 오크가 아닐까 생각되는 놈이었다. 게덴하이드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다. "너는 웬 놈인데 감히 베르키스님의 영역에 들어섰느냐?" "취익. 베, 베르키스님이 누구신지……." 떠돌이 오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아무리 호전적인 오크라도 리치에게만은 감히 함부로 하지 못했다. 한 눈에 보아도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어린 오크가 틀림없었기에 게덴하이드는 곧 경계심을 지워버렸다. "이곳은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 님의 영역이다. 몰라서 그런 것 같으니 문제삼지 않겠다. 그러니 즉시 이곳을 벗어나도록 하라." 레드 드래곤이란 말이 떨어지자 오크의 얼굴에 공포의 기색이 떠올랐다.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니 대답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만족한 게덴하이드는 곧 휘하 리치들에게 출발할 것을 명했다. "그만 출발한다." 사실 이곳에 침입한 것만으로도 죽을죄를 지은 것이었지만 게덴하이드는 떠돌이 오크를 그냥 용서하기로 했다. 조만간 오크족과 연합해서 아르카디아를 정벌할 것이란 사실 때문에 전혀 그답지 않은 자비심을 보이는 것이다. 그는 떠돌이 오크가 대답하는 것을 듣지도 않고 몸을 날렸다. 때문에 오크의 눈에 스산한 한광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게덴하이드는 미처 보지 못했다. "이런 완전히 허물어졌잖아?" 목적지에 도착한 게덴하이드는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동굴로 보이는 곳이었지만 이곳은 지금 완전히 무너져있는 상태였다. 베르키스가 지목한 곳은 이곳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무너져 내린 동굴을 파헤치고 들어가려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게덴하이드로써는 해야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에겐 상대의 소멸을 확인하고 또한 보검 르헤르트 세이버를 비롯한 보물들을 되찾아와야 하는 사명이 있었다. 결국 게덴하이드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들 경량화 마법을 캐스팅하라. 바위를 가볍게 만들어 제거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당연한 말로 리치란 존재에게 육체적인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의 무서운 점은 오로지 고위급 마법에 의한 것이었고 순수한 힘만으로 따진다면 오히려 범인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리치였다. 때문에 리치들은 부산하게 캐스팅에 들어갔다. 마법을 시전해서 바위를 가볍게 해야만 그들이 겨우 들어 옮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돌연히 일어난 상황에 의해 경량화마법은 전개되지 못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리치 하나가 고개를 돌리다 그대로 얼어 붙어버렸다. "베, 베르키스님."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게덴하이드 역시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그곳에는 레어에 있어야 할 그들의 주인이 애초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베르키스의 얼굴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표정이 드러나는 것이지만 말이다. 다소 당황하긴 했지만 냉정을 되찾은 게덴하이드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이곳은 저희들이 오기 전에 이미 허물어져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바위를 치우기 위해……." "비켜라." 냉정하게 게덴하이드의 말을 자른 베르키스가 앞으로 다가섰다. 명령이 떨어지자 리치들은 분분히 옆으로 물러섰다. 베르키스의 명령은 그들에겐 말 그대로 법(法)이었다. 설사 그 길이 죽음으로 향할지라도 지켜야 하는…….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 앞에 선 베르키스가 손을 슬쩍 들었다. 그의 손에 언뜻 광구가 맺히는 듯 싶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콰콰콰콰. 돌무더기를 이루고 있던 바위들이 마치 풍선으로 변한 것처럼 일시에 치솟기 시작한 것이다. 바위들은 무서운 속도로 하늘 높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 무너진 동굴 내부의 정경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베르키스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날아올랐던 바위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내렸다. 콰쾅. 굉음과 함께 작렬하는 바위 때문에 리치들은 분분히 몸을 날려 피해야만 했다. 게덴하이드 역시 다급하게 마법을 캐스팅해서 자신을 향해 내려꽂히는 바위 하나를 가루로 만들어야 했다. 부스러진 바위 가루를 온통 뒤집어쓴 볼썽사나운 모습이었지만 게덴하이드는 서둘러 베르키스에게 다가갔다. 이미 베르키스는 동굴의 정 중앙으로 짐작되는 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위들이 몽땅 치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동굴은 마치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형상을 하고 있었다. 가운데 놓여 있던 석제 제단은 형체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고 벽면의 서가들 역시 바닥에 흩어져있는 나뭇조각이 아니었다면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가장 큰 집기들이 그 모양이었으니 그 이외의 것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베르키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것들을 샅샅이 노려보았다. 열심히 관찰한 끝에 그는 오래지 않아 목적했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저기 있군." 그곳에는 두어 뼘 정도 크기의 갈가리 찢겨진 로브 자락이 돌에 묻혀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리치들이 입고 있는 것과 동일한 재질이었다. 베르키스는 고개를 돌려 게덴하이드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명령하는 듯한 눈빛. "알겠습니다." 베르키스의 눈짓을 받은 게덴하이드가 얼른 그리로 다가갔다. 그는 마법을 써서 무척 조심스럽게 돌덩이들을 제거했다. 그러자 로브 자락 아래서 곱게 갈아진 뼛가루가 아주 조금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게덴하이드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껏 베르키스의 명을 완수하지 못한 리치들이 흔히 남기던 것이었으므로……. 뼛가루를 한 주먹 쥐고 들어올린 게덴하이드는 그것을 베르키스에게 펼쳐 보였다. "상황을 봐서 놈이 소멸된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거의 확실하다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베르키스의 얼굴에는 기이한 표정만이 감돌았다. 어찌 보면 슬픔에 잠겨있는 듯한, 달리 보면 극도로 화가 치민 듯한 복합적인 표정. 게덴하이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의 하명을 기다렸다. 조금 뒤 착 가라앉은 베르키스의 음성이 들렸다. "지크레이트가 놈에게 당했다." 무척 짧은 한 마디. 그러나 그 말이 가져온 파장은 정말 어마어마할 정도였으니……. 게덴하이드를 비롯한 리치들은 그 말에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드래곤이 리치에게 당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유래가 없었던 일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대부분의 리치들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것은 게덴하이드조차 마찬가지였다. "서, 설마……." 베르키스의 눈에 떠오른 안광이 짙어졌다. "감히 내 말을 의심할 셈이냐?" "아, 아닙니다. 부디 용서하시길."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수그린 게덴하이드. 그런 그의 등허리를 내려다보며 베르키스는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지크레이트는 드래곤 하트를 빼앗긴 뒤 목숨을 잃었다. 인크레시아 또한 놈의 수중에 들어갔다.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이것은 사실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세, 세상에……." 게덴하이드는 입을 딱 벌렸다. 단신으로 드래곤을 처치할 수 있는 리치가 있다는 일은 정말 금시초문이었다. 그것은 자신과 같은 써클의 리치가 열 명이 있어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많은 수가 있어도 낮은 써클은 높은 써클을 감당할 수 없다는 마법의 특징 때문이다. 자신이 데이몬이란 놈에게 처참하게 당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게덴하이드였다. 또한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법보고 인크레시아의 탈취였다. 이미 여러 번이나 지크레이트에게 보화를 전달했던 탓에 그는 인크레시아가 어떤 물건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지크레이트의 동의가 없다면 설사 신이라고 해도 빼앗지 못하는 완전무결한 보고. 그것을 데이몬이란 놈이 빼앗아 갔다니……. 그를 쳐다보던 베르키스는 눈을 빛냈다. "놈은 소멸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바로 인크레시아를 만들어낸 드래곤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크레시아는 주인이 죽는다면 자동적으로 다음 차례의 드래곤을 새로운 주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놈이 소멸되었다면 반드시 나에게 와야 하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인크레시아는 오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놈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충격으로 인해 게덴하이드는 아직까지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베르키스는 그가 듣건 말건 상관없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지크레이트의 죽음을 확인한 뒤 나는 트루베니아 전역에 탐지 마법을 전개했다. 아무리 가까운 거리에 행해진 공간 이동이라도 감지할 수 있게 말이다. 하지만 놈은 걸려들지 않았다. 그것을 보아 놈이 공간이동으로 도망치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말을 마친 베르키스는 동굴의 가운데 놓인 제단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대지의 정령인 노움을 불러 이곳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물어보려는 심산에서였다. 쓰쓰쓰. 에인션트 급 드래곤의 부름이라 대지의 정령은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반신이 없는 투명한 소년의 모습을 한 노움이 나타나서 베르키스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베르키스님. 무척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을 남김없이 나에게 고하도록 하라. 네가 기억할 수 있는 한도까지 모조리 말이다." "알겠습니다."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베르키스의 명령이라 노움은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얼른 대답했다. 만에 하나 그의 성질을 거스른다면 그 즉시 소멸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움은 열심히 대지의 기억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바위와 흙의 기억을 추출해내어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노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설사 에인션트 급 드래곤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그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작업은 그 정도로 방대했고 또 어려웠다. 조금 뒤 작업을 마친 노움은 알아낸 사실을 베르키스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보고 드리겠습니다. 이 동굴에는 원래 인간 하나가 누워있었습니다. 죽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살아있다고 보기도 어려운 상태의 인간이었는데 언제부터 이곳에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바위나 돌 같은 암석의 기억은 하루를 넘기기 힘들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좋다. 그 이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 약 두시간 정도 전 갈가리 찢겨진 로브를 걸친 리치 하나가 공간이동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미리 그려져 있던 마법진으로 나타난 리치는 곧 무언가 이상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상한 일은 작업에 열중하던 리치가 간헐적으로 고통을 겪었다는 점입니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상당히 고통스러워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리치는 결국 전신이 부스러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시체처럼 누워있던 인간이 리치의 소멸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는 점입니다." 그 말을 들은 베르키스는 무척 놀라워했다. 노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바로 리치의 영혼이 인간에게로 전이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영혼교환(靈魂交換). 그것은 베르키스조차도 하지 못하는, 말 그대로 신이나 마왕의 귄능으로 밖에 볼 수 없는 능력이었다. 그런데 하찮은 리치가 그것을 행하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대지의 정령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법. 베르키스로써는 노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놈은 이후 어떻게 행동했느냐?" "이후 인간은 머뭇거림 없이 이곳을 빠져나갔습니다. 놀라운 것은 동굴을 나설 때 인간의 모습이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변했지?" "놀랍게도 그는 완연한 오크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폴리모프를 사용한 듯 합니다." 부정확한 암석의 기억을 되살렸음에도 불구하고 노움은 비교적 정확하게 동굴 속에서 일어난 상황을 묘사했다. 모든 일을 들은 베르키스는 한숨을 내쉬며 노움을 돌려보냈다. "너의 도움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 이후 합당한 보상이 있을 것이다." "아닙니다. 베르키스님께 도움이 되어 드린 것이 오히려 영광이지요." 노움은 옅은 미소를 남긴 채 사라져버렸다. 그가 사라지는 것을 보지도 않고 베르키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에선 무서운 안광이 이글거리며 쏘아져 나왔다. "이제부터 놈을 찾는다. 레어를 경비하는 리치들을 모조리 동원도 좋다. 어떻게 해서라도 오크로 폴리모프한 놈을 사로잡아 나에게 데리고 오도록 하라." 말을 마친 베르키스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즉시 터져 나와야 할 게덴하이드의 응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게덴하이드는 무척 안절부절못해 하고있었다. 마치 큰 죄를 지은 듯한 모습이었기에 베르키스는 버럭 호통을 쳤다. "무슨 일이냐? 게덴하이드." 게덴하이드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을 했다. "사실 이리로 오던 도중 오크 한 마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떠돌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상황을 유추해보니 아마도 놈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예상대로 베르키스는 게덴하이드를 향해 벼락같이 분노를 표출했다. "이런 멍청한 놈. 멀쩡히 두 눈뜨고 놈을 놓치다니……. 가만 있자. 이럴 시간이 없다." 애가 탄 베르키스는 리치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렸다. "모두 흩어져서 서둘러 수색에 들어간다. 명심할 것은 반드시 놈을 산채로 잡아야 한다는 점이다. 가만, 놈은 이미 9써클의 마스터이니 너희들로썬 역부족이겠구나. 그렇다면 너희들은 우선적으로 놈의 위치만을 파악하도록 해라. 떠돌이 오크를 발견하면 먼 거리에서 탐색 마법을 펼쳐본 뒤 마법의 기척이 느껴지면 그 즉시 나에게 통보하도록 한다. 알겠느냐?" 트루베니아에 돌아다니는 떠돌이 오크가 하나 둘이 아니었기에 베르키스의 명령은 일견 합당해 보였다. 리치들은 군소리 없이 복명했다. "알겠습니다." "아마도 놈은 분명 아르카디아로 건너갈 것이다. 그러니 서부로 향하는 길목을 중점적으로 수색하도록 하라." "지엄하신 명령 틀림없이 봉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소리 높여 대답한 리치들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비행마법으로 날아오른 자도 있었고 주요 길목으로 공간이동을 해 간 리치들도 있었다. 게덴하이드는 경비하던 리치들을 모조리 소집하기 위해 레어로 워프를 해 갔다. 베르키스의 가디언으로 있는 리치들이 모조리 수색에 동원된 것이다. 때문에 베르키스는 놈이 오래지 않아 걸려들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미 나는 트루베니아 전역을 탐지하고 있다. 따라서 놈이 공간이동을 한다면 그 즉시 좌표가 파악될 터. 놈은 결코 내 손에서 도망칠 수 없다. 설사 걸어서 가더라도 리치들의 이목은 피할 수 없을 테니 놈은 이미 독 안에 든 쥐라고 볼 수 있다."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베르키스에게 별안간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데이몬이란 놈이 펼친 술법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술법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군." 사실 베르키스는 그것 때문에 놈을 죽이지 않고 생포하리란 마음을 먹은 것이다. 놈에게서 인크레시아를 회수해야 한다는 것 이외에도 놈이 사용한 술법에 대해 자세히 알고자 했던 것이 베르키스의 심정이었다. 마법의 극한을 추구하는 드래곤에게 새로운 술법은 말 그대로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영혼을 바꾸는 것은 오로지 신과 마왕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상식이 여지없이 깨어져버렸군. 도대체 놈이 어떤 방법을 썼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베르키스는 마침내 놈이 이계에서 건너온 존재라는 사실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렇군. 아마도 놈이 살던 곳의 술법일수도 있어. 아마 지크레이트가 당한 것도 그 때문인 것 같군. 경험해보지 못한 술법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베르키스는 보고가 도착하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마법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은 리치들이 빠짐없이 수색할 터, 오크로 폴리모프한 이상 놈의 종적이 오래지 않아 드러날 것이 분명했다. 설사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갔더라도 도망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공간이동을 할 수 없는 이상, 하늘에서 또는 길목에서 시퍼렇게 뜨고 있는 리치들의 이목을 피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때문에 베르키스는 비교적 느긋한 심정으로 놈을 발견했다는 리치들의 보고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놈이 마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모습을 바꿨다는 데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23회. "저기 또 한 놈이 오는군." "이번에는 맞아야 할 텐데……." 조그마한 계곡 위에서 리치 둘이 목소리를 낮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시선은 연신 계곡 아래쪽을 힐끔거렸다. 그들이 서 있는 계곡 아래에는 제법 큰 소롯길이 나 있었다. 과거 인간들의 손에 건설되었지만 지금은 그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긴 길. 이미 이곳은 중형 몬스터나 오크의 것이 된 지 오래였다. 물론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엉망이 된 상태였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도로의 형상은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도로 위에 땅딸막한 그림자 하나가 한가로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1미터 50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은 키였지만 제법 탄탄한 근육을 가진 종족인 오크였다. 등에 큼직한 보퉁이를 짊어진 채 열심히 걸어가는 오크를 두 리치들은 열심히 관찰했다. 이미 그들에겐 이곳을 지나는 모든 떠돌이 오크를 검사해야 하는 임무가 내려져 있었다. "이상한 점이 있어?"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없는 것 같군. 저놈은 이미 이곳을 지나는 127번째 떠돌이 오크이니까 말이야. 트루베니아에 웬 놈의 떠돌이 오크가 그리도 많은지……." "우리가 찾는 놈은 겉모습만 오크인 놈이야. 폴리모프한 상태일 테니까 일단 마법의 기운을 한 번 검색해보자고……." "그럴까?" 리치들은 곧 탐색 마법(view magic force)을 캐스팅했다. 대상 물체에게서 마법의 기운을 감지하는 상당히 수준 높은 마법이었지만 대부분 6써클의 마스터인 리치들에게는 결코 어렵지 않은 작업이었다. 마법이 완성되자 둘은 서로간의 거리를 넓게 벌렸다. 만약 찾던 존재가 맞다면 그들은 도저히 무사할 수 없을 터였다. 추적의 대상은 리치들을 훨씬 능가하는 고위급 마법사였고 그런 자가 자신을 탐지하는 기척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때문에 리치들은 둘 중 하나라도 살아남을 요량으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조심해. 놈은 이미 게덴하이드님조차 능가하는 9써클의 마스터라고 했어.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베르키스님께서 도착할 때까지 하나는 살아남아 보고를 해야 해." "그래야겠지?" 수군거리던 리치들은 준비가 완료되자 곧 캐스팅에 들어갔다. 한 리치의 손에서 찬란한 빛이 일어나더니 오크를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파파파팟. 인간 마법사들과는 달리 리치들은 마법 지팡이를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몸 자체가 마법 지팡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나의 흐름에 걸림돌이 되는 피와 살, 근육이 전혀 없는 때문에 굳이 마법 지팡이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손만으로도 충분히 마법을 캐스팅할 수 있는 것이다. 리치의 손에서 발사된 탐지 마법은 삽시간에 오크를 덮어 버렸다. "취익." 뭔가 이상한 기운이 전신을 감돌자 오크의 얼굴에 어리둥절함이 떠올랐다. 하지만 리치들은 개의치 않고 탐지에 몰두했다. 하지만 마법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리치들의 얼굴에 실망감이 떠올랐다. "제기랄. 저 놈도 아니군." "하긴. 게덴하이드님께서 아마도 놈이 아르카디아로 건너가기 위해 서부의 항구로 가실 것이라고 했어. 이곳은 북부로 향하는 곳이므로 아마 오지 않을 공산이 클 거야." 리치들은 맥빠진 말을 주고받으며 탐지 마법을 거뒀다. 의아한 듯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오크의 시선이 그들에게 와서 닿았지만 리치들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들을 보고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린 오크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머리통을 뒤흔들며 말이다. 하지만 리치들의 관심은 이미 그 오크에게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들의 시선은 지평선 위에 모습을 드러낸 128번째 오크 방랑자에게 향하고 있었으니까……. 서둘러 걸음을 옮기던 떠돌이 오크는 곧 장내에서 사라져버렸다. "크크크. 멍청한 놈들." 완전히 계곡에서 벗어나자 오크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몹시 웃겨서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한 비웃음이었다. "예상대로 베르키스가 나의 생존을 눈치챘나 보군. 필시 대지의 정령을 불러 동굴 속의 상황을 물어보았을 테지?" 혼잣말을 지껄이면서도 오크는 열심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작달막한 다리가 다소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아직까지 새로운 몸에 완전히 익지 않은 탓이었다. "탐지마법(view magic force)이라……. 내가 폴리모프를 사용했다고 생각한 모양이군. 크크크. 역체변용술이 탐지마법 따위에 걸릴 턱이 없지." 오크의 정체는 바로 데이몬이었다. 동굴을 빠져나온 뒤 그는 아무런 마법도 사용하지 않고 걸어서 이곳까지 도망쳐 온 것이었다. 그는 지금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 먼저 볼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로 향하는 것이다. 데이몬이 생각하는 목적지는 당연히 아르카디아였다. 오크의 소굴인 트루베니아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이곳에서는 마법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베르키스를 비롯한 드래곤들이 자신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을 터. 항상 드래곤의 감시망 속에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데이몬은 필연코 아르카디아로 건너가야 했다. 그곳에서 흑마법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드래곤과 대적할 수 있을 때까지 힘을 길러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을 마친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경비가 심하지 않군. 아마도 놈들의 감시망이 서부로 통하는 길목에 집중된 모양이야." 머리를 뒤흔든 데이몬은 또다시 길을 나섰다. 사실 그가 가고자 하는 곳은 걸어서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머나먼 곳이었다. 하지만 급할 것이 없었기에 그는 느긋이 걸음을 옮겼다. 우선 그에겐 새로 얻은 몸을 익숙해져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다. 베르키스 때문에 당분간 마법을 캐스팅할 수는 없어 보였다. 따라서 그동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잊혀졌던 위력적인 체술을 가장 먼저 복원할 필요가 있었다. 오랜 여정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기에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9써클의 마법에 이어 강력한 언데드 전사들의 힘을 합한다면 드래곤을 때려잡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기다려라. 드래곤들이여. 너희들이 얼마나 강력한 적을 만들었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마." 불끈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잠시 몸을 떨며 격정을 진정시킨 데이몬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는 방향은 북쪽이었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여정이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쾅 "이런 빌어먹을……." 베르키스는 불같이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가디언들 모두를 풀었지만 정작 놈의 종적을 찾지 못한 것이다. 놈이 지크레이트를 죽이고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탈취해간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하지만 놈의 행방은 마치 땅 속에라도 꺼진 듯 오리무중이었다. "도대체 놈이 어디로 갔지? 분명히 공간이동을 한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말이다. 있다면 오로지 나의 가디언들뿐이다. 그렇다면 놈이 분명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미 베르키스는 모든 종류의 마법을 광범위하게 탐지하고 있었다. 9써클과 그 이하의 써클과는 마나가 모이는 수준에서부터 판이하게 차이가 나는 법. 혹시라도 놈이 에이비에이션(Aviation:비행마법)이나 인비저빌러티(invisibility:투명마법)을 써서 도주했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베르키스는 그야말로 탐지마법을 극도로 돋운 상태였다. 하지만 그 어떤 기척도 베르키스의 촉각에 걸려들지 않았다. 놈은 필시 아무런 마법도 캐스팅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도보로 탈출했다는 것도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미 레어를 지키는 모든 가디언들이 동원되어 수색에 나선 상황. 서쪽으로 향하는 길목은 완전히 차단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베르키스는 근처 오크 부족을 닦달해서 수많은 병력을 차출했다. 그들이 모두 동원해서 길목을 완전히 막아버린 것이다. 그런 이상 놈의 종적은 반드시 드러나야 했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놈은 발견되지 않았다. "설마 놈이 가까운 계곡이나 동굴에 깊숙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수색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말이다."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 보였다. 베르키스는 결국 레어 주변을 샅샅이 수색할 결심을 굳혔다. "어떤 일이 있어도 놈의 손에서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되찾아와야 해." 베르키스에겐 그것은 별달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크들이 드래곤들에게 1천년 동안의 충성을 맹세한 만큼 수색에 나설 병력 정도는 충분히 조달할 수 있었다. 문제는 놈이 벌써 이곳을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럴 가능성도 없다고 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대륙에 떠돌아다니는 떠돌이 오크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면 어떨까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가졌다. "놈은 분명히 떠돌이 오크의 차림새를 하고 있다 했다. 어차피 그놈들은 허약하다는 이유로 부족에서 쫓겨난 놈들이 전부일 터. 전 대륙의 오크 부족에게 명령을 내려야겠군. 떠돌이 오크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명령 말이야. 그 과정에서 놈의 종적이 드러날 수도 있으니까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베르키스는 놀랍게도 떠돌이 오크들을 모조리 학살해버리려는 마음을 굳혔다. 레어 주변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과 병행해서 말이다. 사실 그가 명령한다면 명령은 어김없이 실행될 것이다. 어차피 오크에게 떠돌이란 하등 쓸모 없는 존재에 불과했으므로…….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트루베니아 대륙이 오크 족의 수중에 들어온 지도 어언 오백여 년. 그 기간은 오크 족의 수를 엄청나게 불려놓았다. 인간들이 키워놓은 작물과 가축들은 오크의 엄청난 생산력을 감당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따라서 인간의 빈자리를 차고앉은 오크는 번영에 번영을 거듭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1차 종족전쟁 때의 규모를 거의 채우는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에서부터였다. 미개한 오크들에게는 경작과 목축을 할 지혜란 없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먹어치웠기 때문에 그들은 곧 식량부족이라는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너무나도 수가 불어난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물론 몇몇 현명한 오크 부족은 인간노예로 하여금 경작과 목축을 시켜 식량을 조달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슬기롭게 위기를 헤쳐나간 경우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모든 오크 부족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오크 부족들에겐 내일을 생각하는 지혜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곧이어 대두된 식량문제. 인간노예들조차 모조리 먹어치운 것도 모자라 심한 경우 같은 종족끼리 잡아먹는 참사도 다반사로 벌어졌다. 부족간에 전쟁을 일으킨 뒤 전사자와 포로를 대거 식량으로 삼아버린 것이다. 물론 전사한 동료들의 시체도 어김없이 부족의 위장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해서 트루베니아의 오크 족은 자연적인 균형상태로 돌입하게 되었다. 약육강식(弱肉强食). 약한 자는 도태되고 강한 자만 살아남는 태고적 원리가 다시 대륙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인위적인 방법도 없을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오크 부족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마리나 되는 많은 오크가 태어난다. 물론 그들을 모두 먹여 살릴 정도로 식량이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그들 대부분은 자연적으로 도태되어 버렸다. 말 그대로 강한 놈들만 어른으로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름하여 오크 족의 성인식. 만 한 살이 되는 시기에 벌어지는 성인식에 의해 힘이 있고 강한 전사들만이 종족의 후사를 이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한 놈들은 죽거나 부족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늙어서 사냥에 참가하지 못하는 오크까지 함께 말이다. 떠돌이 오크들이 생겨난 배경은 바로 이러했다. 부족에서 추방당한 오크들. 대부분 병들고 힘없는 오크였기 때문에 그들은 거친 황야에서 얼마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고 생존한 오크들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추방되는 오크의 수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바로 떠돌이 오크였다. 어느 부족에도 속하지 못한 채 대륙을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자 오크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적은 오크를 잡아먹고 사는 중형 몬스터나 와이번이 아니었다. 바로 같은 종족인 오크를 더욱 두려워해야 했던 것이다. 오크란 종족은 그 어떤 고기라도 마다하지 않는 악식가(惡食家)들이다. 같은 오크의 고기라고 해서 먹지 않을 놈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떠돌이 오크는 발빠른 초식동물이나 강력한 중형 몬스터보다 사냥하기가 월등히 쉬웠다. 때문에 대부분의 오크 부족에서는 떠돌이 오크를 보기만 하면 어김없이 사냥감으로 간주하고 공격을 가했다. 그 탓에 떠돌이 오크들의 생명은 마치 파리목숨과도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루베니아에는 수많은 떠돌이 오크들이 존재했다. 많은 방랑자들이 몬스터에 의해, 혹은 동족에 의해 잡아먹혔지만 그 수를 능가하는 오크들이 또다시 부족에서 추방되기 때문이었다. 베르키스는 바로 그 떠돌이 오크의 씨를 말리려는 발상을 하고 있었다. "인간노예들을 시켜 경작을 하는 부족들은 식량이 풍족하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떠돌이 오크 사냥을 하지 않는다. 그 부족 모두에다 명령을 내려야겠군. 떠돌이 오크를 보는 족족 죽여 없애라고 말이다." 베르키스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맺혔다. 어차피 죽을 놈들이니 떠돌이 오크 따위의 목숨에 연연할 필요 따윈 없을 듯했다. 어떤 방법으로든 데이몬이란 놈을 잡는 것이 최선이었던 베르키스였다. "죽지 않으려면 놈은 반드시 마법을 사용해야 할 터. 오크 부족에다 대대적으로 가디언들을 파견해 놓아야겠군. 마법이 사용된 기미를 파악하면 바로 연락할 수 있게 말이야. 놈에 의해 오크 부족이 전멸된다 하더라도 나완 상관없는 일이지." 생각을 정한 베르키스는 지체 없이 게덴하이드를 불러들였다. "떠돌이 오크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란 말씀이십니까?" 베르키스의 명령을 들은 게덴하이드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데이몬은 무척 한가롭게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베르키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지도 벌서 보름이 지났다. 아직까지 목적지는 한정 없이 남아있었지만 별달리 급할 것도 없었기에 그는 느긋하게 여정을 즐겼다. 드래곤들은 놀라울 정도로 수명이 길었고 그가 힘을 얻을 때까지 충분히 살아있을 터였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오로지 다프네뿐이었다. "다프네가 죽게되면 드래곤들도 곤란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놈들은 단순석화가 아닌 절대석화명령으로 다프네의 생명을 이어나갈 것이다. 그녀의 생명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긴 하지만 문제는 디스펠에 관한 것이다. 드래곤 로드가 직접 마법을 시전했으니 만큼 나로써는 도저히 풀 도리가 없다." 다프네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은 오로지 한가지 방법뿐이었다. 그녀를 돌로 만든 장본인인 크라누스가 직접 마법을 풀어주는 것. 데이몬이 우여곡절 끝에 10써클에 오른다해도 석화마법을 푸는 것만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정말 갈 길이 첩첩산중이라고 밖에 말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어떠한 경우에도 뜻을 꺾지 않았다. 이미 그의 집념은 끈질기기로 공인된 것이라 할 수 있었으므로……. 생각에 팔려 있던 데이몬의 눈이 갑자기 가늘어졌다. "응?" 500년을 리치의 몸으로 살았지만 다행히 예전의 감각은 다시 되돌아온 듯 했다. 자신을 향해 집중되는 살기(殺氣)를 느낀 데이몬은 얼른 자세를 고쳐 잡았다. "살기의 형태가 무척 단순한 것을 보니 인간은 아닌 것 같고……. 오크 나부랭이정도 되겠군." 그의 예상대로 길 앞에서 예닐곱 마리 정도 되는 오크가 후다닥 뛰어나와 길을 막았다. 데이몬이 걸음을 멈추자 뒤에서도 서너 마리의 오크가 달려나와 퇴로를 차단했다. 삽시간에 진퇴양난의 처지에 직면한 데이몬은 일단 놈들의 차림새를 유심히 살폈다. 놈들은 하나같이 둔중한 갑주를 걸친 보병들이었다. 데이몬이 변장하고 있는 모습보다 덩치도 월등했으며 힘도 훨씬 좋아 보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전사(戰士)로 키워진 놈들이 틀림없었다. 그들에 비하면 데이몬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걸음을 멈춘 데이몬을 축으로 오크 보병들은 둥글게 포위망을 형성한 채 좁혀 들어왔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24회. 연참입니다.^^ ********************************************************************** "취이익. 이 놈이 열 여섯 번째 사냥감인가?" 오크 전사 투르카는 억지로 입술을 말아 올렸다. 말려 올라간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개를 돌려보니 동료들 모두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투르카를 비롯한 일행들은 불쌍한 희생자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갔다. 상대는 도망갈 생각도 잊어버린 듯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투르카의 뇌리에 무척 재미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떠돌이 오크를 사냥하는 재미도 상당하군. 물론 죽인 뒤 그냥 버려야 하겠지만 말이야.' 투르카가 소속된 부족은 트루베니아 동북부 지방에서 상당한 힘을 과시하고 있는 츄가르 부족이었다. 비교적 인간의 문물을 잘 받아들인 부족 중 하나로써 식량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한 부족이기도 했다. 츄가르 부족의 족장은 역전의 노장이라 할 수 있는 용사 츄가르였다. 투르카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며 용맹과 함께, 뛰어난 지혜까지 보유한 명실상부한 최고의 용사. 사실 그는 족장이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경우였다. "취이익. 도망칠 생각 따윈 버려라." 동료들이 희생물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서는 것을 곁눈질로 지켜보며 투르카는 과거의 일을 상기했다. 할아버지인 츄가르가 족장이 되게 된 경위를 말이다. 전대 족장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인간 노예들이 사는 마을을 습격하려던 마음을 먹었다. 눈앞의 고기에 정신이 팔려 다른 것을 모조리 잊어버린 것이다. "취익. 안 된다." 당시 츄가르는 전대 족장의 앞을 과감히 막아섰다. 인간 노예들을 모조리 잡아 먹어버린다면 종족의 미래가 암울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이어 족장과 츄가르 간의 일대 일 대결이 벌어졌고 승부는 결국 츄가르의 승리로 끝났다. 전대 족장의 숨통을 끊었으니 관례대로 그가 신임 족장이 된 것이다. 족장이 되고 난 뒤 그는 모든 부족원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했다. "취이익. 이제부터 인간노예를 죽이는 자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경작과 목축을 해 줄 수 있는 귀중한 존재들이므로……." 물론 그렇다고 노예를 노리는 오크가 없을 수는 없었다. 굶주림에 견디다 못해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노예들을 습격한 사건이 심심찮게 일어났지만 츄가르는 그런 사건에 무척 엄격히 대응했다. 사건을 저지른 범인을 잡아다 불문곡직하고 목을 쳐버린 것이다. 잘려나간 수급은 인간 노예들의 마을로 보내져 그들을 안심시키는 역할을 했고 몸뚱이는 부족의 배를 채우는데 사용되었다. 마음을 놓게된 노예들은 말 그대로 열심히 경작과 목축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츄가르 부족은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츄가르의 탁월한 판단이 부족 전체를 살린 것이다. 그 때문에 사냥감을 향해 다가가는 츄가르 부족원의 눈에는 별달리 식욕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들은 같은 종족의 질긴 고기보다 소나 돼지의 고기가 더 맛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그들이 예정대로 사냥을 해야 하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었다. 그것은 며칠 전 트루베니아를 지배하고 있는 종족에게서 내려진 통첩 때문이었다. 바로 그들의 주인인 드래곤의 통첩. ―오늘부터 각 부족은 근처를 지나치는 떠돌이 오크를 모조리 사냥하도록 하라. 이것은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의 이름 하에 내려진 명령이다. 명령이 떨어지자 거의 전부라고 볼 수 있는 오크 부족들이 그 명령을 받아들였다. 그들로써는 감히 드래곤의 명령을 거부할 담량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츄가르 부족원들은 지금까지는 떠돌이 오크들을 그저 본체만체 해 왔다. 그들에겐 충분한 식량이 있었으므로 굳이 사냥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사냥을 나설 때는 단 하나, 성인식이 벌어질 시기뿐이었다. 만 한 살이 된 어린 오크들에겐 떠돌이 오크만큼 손쉬운 사냥물은 없었다. 그 때를 제외하고는 굳이 떠돌이 오크를 사냥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투르카와 그 동료들 역시 아직 어린 전사들이었다. 그들에게 경험을 쌓아주기 위해 부족에서는 의도적으로 이들을 파견했던 것이다. 동료들이 사냥감의 지척으로 다가선 것을 느낀 투르카는 손에 든 글레이브를 고쳐 잡았다. 호전적인 성품의 오크답게 측은한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준비를 마친 그는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취이익. 공격이다. 전사들이여! 모처럼 사냥감의 피를 흠뻑 만끽하도록 하자." 하지만 그의 눈이 경악으로 툭 튀어나오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장 먼저 공격해 들어간 전사 두 마리가 맥없이 나가자빠지는 것을 보고 난 후의 일이었다. 그것도 왜소한 떠돌이의 주먹과 발길질에 맞아서 말이다. "크크크 이런 비천한 것들이……." 명치를 향해 찔러 들어오는 두 자루의 글레이브를 보고 데이몬은 코웃음을 쳤다. 이미 새로운 몸에는 적응할 대로 적응한 상태였으므로 과거 익혔던 체술의 70% 정도를 사용할 수 있었던 데이몬이었다. 그에게 열 마리 정도의 오크는 식후 운동거리에 불과했다. 그것도 전투경험이 거의 없는 어린 놈들이 아닌가? 게다가 그가 오크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도 큰 이점이라고 볼 수 있었다. 키가 작고 땅딸막한 오크의 체형은 과거 그의 모습과 무척 흡사했다. 따라서 새로 얻은 몸보다도 더욱 익숙하게 움직일 수 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글레이브 날이 몸에 닿을 정도까지 접근하자 데이몬은 몸을 모로 슬쩍 틀었다. 간발의 차이로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던 글레이브를 오른 손으로 움켜쥔 데이몬은 그 상태 그대로 팔꿈치를 쭉 밀었다. "퀙." 말 그대로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오크 한 마리가 목을 움켜쥐고 비실비실 나가떨어졌다. 달려오던 탄력까지 가미된 공격이라 오크의 낯빛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데이몬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몸을 빙글 돌리며 두 번째 오크의 인중을 걷어찼다. 바로 코앞에서 가해진 공격이라 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퍽 처절한 비명과 함께 적중된 오크는 코와 입으로 피를 낭자하게 뿜어내며 뒤로 나뒹굴었다. 그리 강하게 가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확히 급소를 가격한 때문에 두 마리의 오크가 순식간에 전투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데이몬은 오크들이 떨어뜨린 두 자루의 글레이브를 냉큼 집어들었다. 우지직 발로 밟아 칼날이 달린 부분을 분질러버리자 글레이브는 그만 두 자루의 봉이 되어버렸다. 하나는 짧고 하나는 조금 긴 봉. 데이몬은 두 자루의 봉을 잡고 바람개비처럼 휘둘렀다. 파파파팟. 봉이 사정없이 공기를 가름에 따라 소름끼치는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오랜만에 소림사에서 훔쳐 배운 봉술을 한 번 사용해볼까?" 무척 오랜만에 체술을 사용하게 된 터라 데이몬은 지금 무척 신이 난 상태였다. 500년 동안 리치로 지내며 그가 언제 체술을 사용해보았을까? 경직되고 거북한 리치의 몸에서 벗어나 젊고 싱싱한 새로운 몸을 갖게 된 터라 그의 몸놀림은 더 없이 자연스러웠다. 그의 뇌리에는 이미 어린 시절 소림사에서 섭렵했던 봉술의 원리가 모두 기억되어 있었다. 일꾼으로 일하면서, 혹은 연무장의 눈을 치우면서 무승들이 무술을 익히는 것을 데이몬은 틈틈이 훔쳐 배웠던 것이다. "이놈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주춤거리는 오크들에게 달려들었다. 가장 선두에 선 오크가 엉겁결에 글레이브를 내밀었다. 하지만 짧은 봉이 그것을 쳐내고 긴 봉이 오크의 턱을 올려친 것은 그야말로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딱 퍽. 한 놈이 나가떨어진 이후 오크들은 마치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있었다. 가해지는 공격이 정확히 급소만을 노리는 데다 그들의 어설픈 기술로 소림사의 유서 깊은 봉술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물론 들고 있는 무기가 검이었다면 데이몬이 그처럼 거리낌없이 방어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무로 된 봉으로 시퍼렇게 날이 선 검날을 가로막을 수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글레이브의 자루는 나무로 되어있었으므로 데이몬은 방어에 대한 부담 없이 마음껏 공격을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십여 마리의 오크는 그야말로 걸레가 된 채 사방에 널브러지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초 한 자루가 채 반도 타지 않을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데이몬은 쓰러진 오크들을 쳐다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몽땅 죽여버리고 싶지만 참기로 한다. 상대를 잘못 택한 네놈들의 개 눈깔을 탓하도록……." 데이몬은 아무 미련이 없다는 듯 무서운 위력을 발한 봉 두 자루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사실 죽여버릴 수도 있었지만 데이몬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필요 없는 살생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위치가 베르키스에게 파악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드래곤을 감당할 힘이 없었으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그 때문에 데이몬은 오크들의 숨통을 완전히 끊지 않은 것이다. "헉, 헉." 봉술을 전개하느라 전신이 땀에 젖었고 숨마저 가빠왔지만 데이몬은 도리어 그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데이몬에게 별안간 시장기가 몰려왔다. "반갑군." 그 사실에 데이몬은 반색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리치로 있던 500년 동안 그는 한 번도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먹을 필요가 없긴 했지만 식도락가였던 데이몬에게 그것은 상당한 곤욕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늘어진 오크에게 시선을 던졌다. "몹시 시장한데 이참에 한 놈 잡아다가 먹어버릴까?" 그 말을 들은 오크들은 하나같이 몸서리를 쳤다. 풍족한 츄가르 부족에서 태어난 때문에 그들은 동족을 먹어본 적도 없었지만 먹혀본 일도 없었다. 아무리 오크라고 잡혀 먹히는 일이 결코 달가울 리가 없었다. 때문에 그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투르카가 용기를 내어 몸을 일으켰다. "취이익. 네놈은 도대체 뭐냐?" 투르카는 오직 오크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공용어로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데이몬은 이제 오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베르키스의 가디언으로 있던 500년 동안 여러 종족들과 접촉을 했던 때문에 데이몬은 제법 많은 종족의 언어를 알고 있었다. 물론 오크의 언어 역시 깊이 익혀놓은 상태였다.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상태에서도 지지 않겠다는 듯 쏘아보는 젊은 오크를 보고 데이몬은 빙그레 웃었다. 퍽. 만용의 대가로 얼굴을 부여잡고 벌렁 나가자빠지는 신세가 되어버린 투르카. 적어도 데이몬은 오크를 다루는 방법에 있어선 도가 텄다고 할 수 있었다. 그가 느낀 바로는 오크만큼 힘의 논리에 충실한 종족은 없었다. 이것은 가디언으로 있을 시절에 파악해 둔 것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투르카의 눈빛은 상당히 고분고분해져 있었다. 오우거에게 맞을 때도 이렇게 아플것이라 생각되지 않았기에 그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다, 당신은 누군가? 취이익." "이제야 좀 듣기가 편해졌군. 보면 모르겠나?" 투르카의 얼굴에 기이한 표정이 떠올랐다. "취이익. 떠돌이 오크?" 퍽. 이번 타격은 제법 매웠던 모양인지 투르카는 한참 만에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데이몬은 그런 투르카의 멱살을 그러쥐고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험상궂은 오크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므로 협박의 효과는 충분했다. 또한 자신의 몸보다 한 배 반이나 큰 오크의 멱살을 쥐고 있는 모습은 상당히 그로테스크하다고 볼 수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놈이……. 버릇없이 떠돌이 오크가 뭐야?" 투르카의 얼굴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가 알기로 떠돌이 오크에게 이런 취급을 받은 경험은 전무하다 할 수 있었다. 상대는 아무리 보아도 비루먹은 떠돌이 오크에 불과했다. "취익. 그, 그럼 뭐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데이몬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 미소로 인해 투르카가 몸서리를 쳤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황야의 무법자라 불러다오." "그것이 당신의 이름인가?" 데이몬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지은 오크 식 이름이 무척 마음에 든다는 듯이……. "이, 이름이 그렇게 길단 말인가?" "그럼! 난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 그건 그렇고," 데이몬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자빠져 있는 오크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자 오크들은 하나같이 살이 떨리는 듯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네놈들이 날 운동시켰으니 의당 대가를 치러야 할 터. 어디 보자. 어떤 놈이 가장 먹음직스럽게 살이 올랐는지." 불쌍하게도 오크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왜소해 보이게 몸을 움츠려 가며 말이다. 그런 동료들을 보다 못해 투르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취익. 먹을 것이 필요하면 주겠다. 대신 전사들을 잡아가진 마라." 그 말을 듣자 데이몬의 눈에 쌍심지가 돋았다. "먹을 것? 네놈들이 먹는 지저분한 것을 나더러 먹으란 말이냐?" 하지만 투르카가 허리춤에서 풀어놓은 고기를 본 데이몬은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한 눈에 보기에도 틀림없는 양고기였다. 도저히 오크들이 먹을 것으로 보이지 않았기에 데이몬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놈들이 어째서 이런 고기를……." "농장을 인간 노예들이 관리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 츄가르 부족은 여간해서는 오크 고기를 먹지 않는다." 투르카는 마치 부족의 일원인 것이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쭉 폈다. 하지만 날아온 것은 무정한 주먹 한 방이었다. 퍽. 길게 뻗어버린 투르카를 밟고 선 데이몬은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는 오크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꽤나 말이 많은 놈이군. 그래 너희들은 어떤 고기를 내놓을 생각이냐?" 비틀거리는 오크들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취, 취익. 무슨 뜻인지?" "허리춤에 찬 고기를 내놓겠느냐? 아니면 네놈들 몸에 있는 고기를 내놓겠느냐? 양자택일하라." 물론 그 상황에서 오크들의 선택은 당연히 정해져있었다. 앞을 다투어 내미는 고기를 받아든 데이몬은 그것을 주섬주섬 배낭 속에 집어넣었다. 멀리 북단까지 가려면 상당히 많은 식량이 필요했던 것이다. 배낭 속에다 오크에게서 빼앗은 휴대식량을 모조리 털어 넣은 데이몬은 용무가 끝났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25회. 한 대 맞고 기절해있던 투르카가 그때서야 몸을 일으켰다. 그는 데이몬의 정체가 못내 의심스럽다는 듯 또다시 질문을 던져왔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취익." "또 그 질문이군. 이미 말하지 않았나? 황야의 무법자라고……." "아니 그것말고 당신의 종족과 출신지를 알고 싶소. 취이익. 더불어 어떻게 해서 그렇게 강해질 수 있었는지도 함께 말이오."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 말인가? 뭐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상대의 질문을 가차없이 묵살해 버리려고 했지만 데이몬은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자유의 몸이 되어 신이 나 있던 참이었고 철부지 오크를 놀리려는 의도도 없진 않았다. 그는 곧 혈기왕성한 젊은 오크 전사에게 허황된 꿈을 불어넣으려는 작업에 들어갔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꾸며낸 이야기였다. "좋아. 말해주지." 데이몬은 투르카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우선 나에겐 출신 종족이란 없다. 왜냐하면 나를 버렸다는 이유로 나 또한 종족의 이름을 버렸기 때문이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난 약하다는 이유로 종족에서 버림받은 몸이다. 하지만 그것이 강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데이몬의 이야기가 이어짐에 따라 오크들의 관심은 그의 입으로 집중되었다. 하나같이 젊은 전사들이라 데이몬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정말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부족의 엄중한 보호 속에서 자란 너희들은 모를 것이다. 황야의 환경이 얼마나 척박하고 위험이 많은지.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위험은 얼마든지 자기발전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 끊임없이 습격해오는 오우거, 트롤, 와이번 거기에다 타 부족의 위협까지……. 황야에서의 삶은 정말 위기의 연속이라 표현할 수 있다. 물론 수많은 떠돌이 오크들이 극복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음은 기정 사실이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그 모든 위험을 극복한 자는 진정한 강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취칙. 그렇다면 당신이 진정한 강자란 말이오?"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말을 끊은 오크를 노려보았다. 퍽. 기절한 채 저만큼 나가떨어지는 동료를 본 오크들은 몸서리를 쳤다. 데이몬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툭툭 털며 말을 이어나갔다. "강자이기에 앞서 무법자이기도 하지. 이름하여 황야의 무법자! 혹시라도 너희들은 오우거를 상대해 본 일이 있느냐?" 물론 있을 턱이 없었다. 오우거 정도의 거물을 사냥하는 데에는 경험이 없는 어린 오크는 동원되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은 세 살도 되지 않은 혈기 왕성한 오크들. 이번 사냥은 그들의 경험을 키워주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젓는 오크들을 보며 데이몬은 가슴을 폈다. "아마도 너희들은 모를 것이다. 이미 내 손에 이승을 하직한 오우거들이 스물을 넘는다는 사실을……."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마자 믿을 수 없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취이익. 거짓말이오. 믿을 수 없소." "경험 많은 전사들조차 스물 이상이 모여야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오우거요. 헛소리." 데이몬은 싸늘한 눈빛으로 오크들을 쏘아보았다. 그 눈빛에 움찔한 오크들이 하나 둘씩 입을 닫았다. 데이몬은 무척 실망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하긴. 이런 놈들을 데리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내가 미친놈이지." 미련 없이 몸을 돌리려는데 다급한 투르카의 일성이 데이몬의 발목을 잡았다. "취이익. 당신은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소?" 데이몬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투르카를 보자 그의 얼굴에는 재미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물론 책임질 수 있지. 하지만 네놈들이 오우거를 불러올 수 있을 리가 만무할 텐데……." "불러올 수는 없소. 하지만 날 따라간다면 한 마리 상대할 수는 있을 것이오. 취칙." 투르카의 말에 흥미를 느낀 데이몬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실 그의 손에 이승을 하직한 오우거는 스물을 훌쩍 넘었다. 만약 트롤까지 합친다면 그 수는 거의 백에 육박할 터였다. "좋다. 그럼 사정을 이야기해 보도록." 데이몬이 고개를 끄덕이자 투르카는 기다렸다는 듯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풍요로운 츄가르 부족에도 고민거리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한 마리의 늙은 오우거 때문에 일어난 소동이었다. 사실 종족전쟁에서 연합군으로 함께 싸운 덕분에 오우거와 부족에 소속되어 있는 오크와는 그리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특히 츄가르 부족은 상황이 더욱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식량이 풍부했기 때문에 부족에서는 오우거가 찾아왔을 경우 상당한 고기를 식량으로 내주었고 오우거는 그 답례로 떠돌이 오크나 잡아먹을 뿐 츄가르 부족원에게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인간고기에 맛을 들인 늙은 오우거가 나타난 이래로 츄가르 부족에서 엄청난 골칫거리가 생겨버렸다. 늙어서 노회한 데다 교활하기까지 한 오우거는 먹으라고 건네주는 가축의 고기도 마다한 채 오로지 인간 노예들만 노렸다. 가히 인간의 고기에 중독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밭을 갈던 그리고 양을 치던 많은 노예들이 놈에게 잡혀 먹혔고 그 결과 츄가르 부족으로 오는 식량은 반으로 줄어버렸다. 노예들이 오우거를 겁내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결국 츄가르 부족에서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고 족장은 많은 전사들을 파견해서 오우거를 잡아죽이려 했다. 놈을 방치할 경우 식량공급이 완전히 끊길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노련하고 교활한 오우거였다. 놈은 전사들이 많이 배치된 곳에는 결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상대할 수 있는 규모의 오크들만 상대했고 그 결과는 완전한 오우거의 승리였다. 언제나 허술한 곳만 파고들었기 때문에 전사는 전사대로 죽고 노예들은 계속해서 잃을 수밖에 없었다. 오우거는 혼자서도 열 명 남짓한 전사들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츄가르 부족이 당면한 큰 골칫거리였다. 투르카는 바로 그 오우거를 잡아달라고 하고 있었다. 데이몬의 말이 사실이라면 츄가르 부족에서는 큰 골칫거리를 덜게 되는 것이다. 설사 거짓으로 판명난다 하더라도 손해날 것이 전혀 없었다. 고작 떠돌이 오크 한 마리 객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때문에 투르카는 열심히 데이몬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투르카의 머리 꼭대기에 서 있는 데이몬에겐 뻔히 보이는 수작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냥 계략에 넘어가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살려둬선 안될 놈이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잡아먹는 오우거를 그냥 두고볼 수가 없었다. 또한 오크 수중에 들어간 인간 노예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보고싶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한 번 리치가 되었을지언정 그의 본질은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좋다. 안내하라. 내 반드시 놈을 잡아 보이겠다." 데이몬의 말에 투르카는 반색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상대가 자신의 책략에 넘어갔다는 생각에 그는 얼른 데이몬을 자신의 부족으로 안내했다. 오크 전사의 안내를 받아가며 본거지로 들어가는 데이몬에게는 조금의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도리어 의문에 쌓인 오크 족의 생활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도리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드래곤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오크 족은 그에겐 적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놈들의 습성을 알게 되면 상대하는 것이 더욱 용이하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던 데이몬은 마침내 츄가르 족의 거주지에 들어서게 되었다. 가장 먼저 본 것은 투르카보다도 더 우락부락한 체구를 자랑하는 경비병들이었다. "취이익. 서라." 경비를 서던 오크 보병들은 무척 이상하다는 듯 데이몬의 아래위를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떠돌이 오크 사냥을 떠난 젊은 전사들이 아주 떡이 되어있는 것도 이상했지만 그들이 한 눈에 보아도 떠돌이 오크임이 분명한 놈을 마치 귀빈 모시듯 공손히 모셔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투르카가 곧 다가가서 귀엣말로 뭐라고 속삭였다. 다소 못미더운 표정이었지만 경비병들은 별 의심 없이 그들을 통과시켰다. 아마도 거기엔 투르카가 현 족장의 손자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수백 명이 넘는 손자 중 한 명일 뿐이지만. "취이익. 통과." 데이몬은 말로만 듣던 오크 본거지의 정경을 감상하며 한가롭게 걸음을 옮겼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오크들의 생활수준이 무척 미개하다는 점이다. 놈들은 대부분 가죽과 나뭇가지로 만든 거친 천막에서 생활했다. 거주지를 감싼 방벽 역시 아름드리 통나무를 그대로 잘라만든 듯 멋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철저히 실용적인 면만 추구한 방벽과 방어구들. 하지만 대조적으로 놈들의 무기만은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오크들이 들고 있는 글레이브는 잘 벼려져 있을뿐더러 한 눈에 보기에도 담금질이 잘 되어 있었다. 물론 데이몬은 이유를 오래지 않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인간 노예들이 만든 것인 듯 하군. 세상에 오크 놈들의 노예가 되다니 그들의 운명도 기구하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일단의 병력이 앞을 막아섰다. 하나같이 경험이 많아 보이는 전사들이었기에 데이몬은 다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웬 놈들이지?' 그들을 보자 데이몬을 안내해 온 젊은 전사들의 태도가 공손해졌다. 투르카가 얼른 달려나가는 것을 보니 부족 내에서도 상당히 지위가 높은 놈들인 듯 싶었다. 달려나간 투르카는 놈들 중 가운데 서 있는 나이가 지긋한 오크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러는 동안 데이몬은 느긋하게 팔짱을 낀 채 놈들이 하는 양을 지켜볼 뿐이었다. 둘 간의 대화는 상당히 길었다. '괜히 왔나?' 크게 하품을 하던 데이몬의 눈이 별안간 커졌다. 오크 본거지 안. 아마도 천막으로 짐작되는 곳에서 퍼져나가는 마나의 기척을 눈치챘던 것이다. 등골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만에 하나 드래곤일 가능성도 있었기에 데이몬은 가슴이 철렁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는 다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우선 천막 속에서 퍼져나가는 것은 광범위한 탐지마법에 불과했고 기운을 미루어보아 결코 6써클을 능가하지 않았다. 하물며 자신은 아무런 마법도 시전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던가? 상황을 보아 베르키스 휘하의 리치인 듯 싶었기에 데이몬은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고약하군.' 물론 실력이야 충분했지만 섣불리 대적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베르키스에게 자신의 행방이 발각되게 하는 지름길이었으므로……. 역체변용술로 화신한 자신을 감지할 리가 없다고 굳게 다짐하며 데이몬은 태연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투르카와 대화를 나누던 늙은 오크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하며 데이몬은 그를 맞았다. 아무래도 그가 족장인 츄가르인 모양이었다. "취이익. 우리 츄가르 부족에 온 것을 환영한다. 방랑자여." 오크 특유의 콧소리와 함께 얼굴에 침이 튀자 데이몬은 얼굴을 찡그렸다. 생각대로 상대는 오크 부족의 족장이 틀림없어 보였다. 데이몬은 제법 당차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취익. 입에 발린 소리는 하지 말라고……. 어차피 떠돌이 오크에게 대할 대접이야 뻔하니 말이야. 그래 상대 할 오우거는 어디에 있지?" 상대가 지금까지의 어린 오크가 아닌 노련한 오크였기에 데이몬은 제법 그럴 듯하게 오크의 콧소리를 흉내내며 말을 받았다. 물론 상당히 도전적인 태도로 말이다. 그 태도에 부아가 치민 듯 츄가르 휘하의 친위병들이 글레이브를 데이몬에게 겨누었다. "췻. 고작 떠돌이 오크 주제에 버릇없이……." "취익. 죽고 싶으냐?" 데이몬은 재빨리 놈들의 면면을 살폈다. 하나같이 경험 많은 노련한 전사들로 보였다. 물론 그렇다손 치더라도 결코 데이몬의 적수가 될 수 없음은 자명했지만 말이다. 데이몬은 두 말도 하지 않고 투르카를 향해 손을 쓱 내밀었다. "내 놔." "뭐, 뭘?" 영문을 모른 투르카가 눈을 희번덕거리자 데이몬은 잠자코 그의 손에서 부러진 글레이브의 자루를 받아들었다. 츄바카와 그 휘하의 전사들을 때려눕혔던 봉 말이다. 두 자루의 봉을 손에 나눠든 데이몬은 자세를 취했다. 자신을 얕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무력시위의 필요성을 느꼈던 데이몬이었다. 그는 무기를 겨눈 친위병들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취익. 슬라임 한 마리도 못 잡을 것처럼 보이는 허약한 놈들이 날 어떻게 죽일지 궁금해 죽겠군. 취익. 어디 한 번 날 죽여보지 그래?" 데이몬의 예상대로 친위병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물론 족장 츄가르를 비롯한 모든 오크들은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대결을 통해 실력을 증명하는 것은 오크 사회에서 가장 빈번한 일이었으므로……. 물론 싸움을 거는 데이몬에겐 속셈이 있었다. 이미 탐지 마법이 자신을 샅샅이 훑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접전을 치르며 천막 속에서 마법을 시전하는 존재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다크메이지] 4장 최후의 결전. 126회. 마지막 연참입니다. 그리고 오늘로서 4장이 모두 끝납니다. 내일부턴 5장 [별종 네크로멘서 ]편이 연재됩니다. 이젠 하루에 하나씩이겠죠?^^ ***************************************************************************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고 지금 상황에선 하찮은 리치 하나라도 섣불리 상대할 수가 없었다. "취이익. 죽어라." 우렁찬 기합성과 함께 친위병 하나가 다짜고짜 공격해 들어왔다. 여러모로 보아 투르카같은 어린 전사보다 훨씬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자세도 잘 잡혀 있었고 글레이브를 휘두르는 동작에 절도도 있었다. 하지만 원천적으로 놈은 결코 데이몬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퍼퍽. 봉 하나로 글레이브를 막은 뒤 나머지 봉으로 글레이브를 잡은 손을 가격하자 친위병은 비명을 질렀다. 손가락 부분은 신경이 밀집된 만큼 통증도 엄청나기 때문이다. "췌에엑."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레이브를 놓지 않는 것을 보니 과연 친위병으로 뽑힐 만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감상 따위에 사로잡힐 때가 아니었다. 몸을 날린 데이몬은 사력을 다해 자세를 잡으려는 친위병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엉겁결에 방어자세를 취한 친위병이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두 자루의 봉이 글레이브의 양끝을 아래위로 두드리자 어지간한 친위병도 글레이브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손이 글레이브에 가해진 충격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퍼퍼퍽. 글레이브가 땅에 떨어진 이후로 이어진 것은 무자비한 구타였다. 데이몬은 친위병의 목과 허리, 그리고 허벅지를 연속해서 가격했다. 마치 빨래를 두드리듯 말이다. 모두가 갑주로 가려지지 않은 부위였다. 친위병은 비명을 지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사시나무처럼 떨기만 했다. 결국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동료를 보다 못해 나머지 근위병들이 싸움에 가세했다. "이놈." "취이익. 멈춰라!" 두 명의 친위병이 달려들었지만 데이몬은 싸늘한 미소만 날릴 뿐이었다. 어차피 봉술의 특성상 그에겐 일대 다수의 대결이 더욱 편하다고 볼 수 있었다. 퍽, 퍽, 퍽. 북 두드리는 소리가 몇 번 들린 다음 세 명의 친위병은 큰 대자로 쭉 뻗어버렸다. 특히 처음에 당했던 친위병은 말 그대로 목불인견의 참상을 하고 있었다. 녹색 피부를 가진 오크가 지금은 아예 검은 오크로 변해버렸다. 물론 멍자국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 세 명의 친위병을 때려눕힌 데이몬은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땀이 이렇게 상쾌할 줄은 여지껏 몰랐던 일이었다. 싸움과정을 지켜보던 족장 츄가르가 탄성을 내질렀다. "취이익. 떠돌이 오크치고는 정말 대단한 실력이군." "………." "우리 부족에 들어올 생각은 없나? 원한다면 전사로 받아들여 주겠다." 떠돌이 오크에겐 파격적이라 볼 수 있는 제안이었지만 데이몬에겐 애당초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니 사양하겠어. 어디에 소속된다는 것이 영 거북해서 말이야. 그렇게 된다면 황야의 무법자라는 이름을 버려야되겠지?" "이해할 수가 없군. 우리 부족이 된다면 항상 풍족하게 먹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츄가르를 보며 데이몬은 정색을 했다. "그딴 소리는 집어치우도록. 그런데 오우거는 언제쯤 보게 해 줄 작정이지? 가급적 빠르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 말에 츄가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비로소 투르카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오우거란 말을 듣자 대뜸 마을로 오겠다고 한 상대의 태도. 그것은 평범한 떠돌이 오크와는 판이하게 차이가 있었다. 츄가르는 대뜸 한 마디를 던졌다. "취익. 왜 그렇게 오우거를 상대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거지? 혹시 오우거와 원수진 것이라도 있나?" 일개 부족의 족장인 만큼 예리하다 볼 수 있는 질문이었다. 상대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목적. 하지만 데이몬은 츄가르보다도 오히려 더 노련했다. 일순 말이 막힐 법한 어려운 질문을 그는 노회하게 돌려 쳤다. "혹시 오우거 고기를 먹어본 적이 있나? 좀 질기긴 하지만 씹는 맛이 정말 일품이지. 명심하도록……. 오우거를 잡는다면 그 고기는 모조리 내가 갖는다는 사실을……." 데이몬의 말이 떨어지자 츄가르의 관심은 단번에 다른 곳으로 쏠려 버렸다. 그들 자체가 먹이에 탐욕이 많은 종족이었고 또한 오우거 고기는 여간해서는 먹어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즉각 터져 나온 츄가르의 대답은 오크족의 욕심 많은 일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취익. 그럴 순 없다. 이번 사냥은 우리 부족의 청부에 의한 것이므로 엄연히 고기의 소유권은 우리에게 있다." "그렇다면 안되겠는걸? 나에겐 오랜 여정을 위한 식량이 필요하니 말이야." "그렇다면 대신 양고기를 주겠다. 취익. 알다시피 우리에겐 식량이 풍족하니까……." 마치 선심 쓰듯 내뱉는 츄가르의 말에 데이몬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오우거 고기에 관심이 있을 턱이 없었다. 악식가인 오크들이야 잘 먹을 수 있겠지만 사실 인간의 위장이 받아들이기에 오우거 고기는 너무 질겼다. 결국 합의점은 도출되었다. 투르카를 부른 츄가르는 데이몬을 인간 노예들의 거처로 안내해 주도록 명령했다. "너는 전사 오십 명을 데리고 저자를 즉시 노예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 물론 츄가르는 목소리를 낮춰 데이몬이 오우거 고기를 빼돌리지 못하도록 감시하란 명령까지 내렸다. 용케 그것을 알아들은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 단순한 오크 놈들이라 비웃으며 말이다. "취익. 가시지요." 데이몬은 이번에는 오십 명의 오크 전사의 호위를 받으며 떠나는 처지가 되었다. 마을에서 빠져나오자 마자 데이몬은 투르카에게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그런데 마을에 왜 이상한 기운이 감도는 거지? 마치 마법의 기운 같은 데 말이야." "취익. 그것 말이군요." 친위병들을 때려눕힌 일 때문에 투르카의 태도는 한층 더 고분고분해져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친위병들은 부족에서 손꼽히는 용사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런 자들을 혼자서 셋이나 때려눕혔으니 투르카가 주눅이 들 법도 했다. 그것도 그동안 얕봐왔던 떠돌이 오크에게 말이다. "실은 지금 부족에 베르키스님의 사자가 와 있습니다." 데이몬은 짐짓 딴청을 피웠다. "베르키스? 펠드리안 산맥의 레드 드래곤 말인가?" "취익. 그렇습니다. 그 분의 가디언 중 하나가 도망쳤다고 해서 우리 부족에 사자가 오게 된 것입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 가디언이 도망쳤다고 굳이 츄가르 부족에 사자를 보낼 필요가 있었던가?" 데이몬의 능청에 완전히 속아넘어간 투르카는 부족의 일급 비밀이라 할 수 있는 사실들을 줄줄 털어놓았다. 물론 그 하나, 하나가 데이몬에겐 중요한 단서였지만 말이다. "취익.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깁니다. 도망친 가디언의 정체는 바로 리치로써 현재 떠돌이 오크로 폴리모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지금 전 부족에는 떠돌이 오크에 대한 추살령이 내려져 있습니다. 저희들이 사냥을 나가게 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취익." 자신 때문에 전 대륙의 떠돌이 오크들이 죽음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는 말을 듣자 데이몬은 등골이 오싹해왔다. 하지만 그는 일체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도리어 짜증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이런. 걱정이군. 북단으로 가려고 했는데 골치 아픈 일이 많이 생기겠어. 네놈 같은 애송이들이 벌떼처럼 달려들 것이니 말이야." 그 말에 귀가 솔깃해진 투르카가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젊은 오크 전사의 눈에는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빛이 가득 차 있었다. "취익. 그것이 걱정되신다면 우리 부족에 들어오십시오. 츄가르 부족의 일원이라면 그 누구도 건들지 않을 것입니다." 데이몬은 무척 태연스레 말을 이어나갔다. "그것도 나쁘지 않기는 한데 아무래도 안되겠어." "왜 그렇지요?" "내 이름이 뭐지?" 돌연 튀어나온 질문에 투르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화, 황야의 무법자요." "황야의 무법자에겐 나름대로의 길이 있다. 그 길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무법자는 그 길을 가야만 하는 법이지. 비록 죽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지라도……." 말을 하는 데이몬도 우습게 여길 정도로 유치한 말이었지만 투르카에겐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로 인해 젊은 오크의 가슴에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는 열망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으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은 마침내 노예들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오크의 노예 신세가 된 인간들에 대해 관심이 없을 수 없었으므로 데이몬은 마을의 이모저모를 유심히 살폈다. 마을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곳은 약 100호 가량의 가옥이 있는 전형적인 트루베니아의 마을이었다. 일단 데이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마을을 온통 휘감고 있는 무기력함이었다. 예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암울한 기운이 마을 전체에 칙칙하게 배어있었다. 데이몬은 투르카의 전사들과 함께 마을 어귀로 들어섰다. 이미 마을 외곽에는 오크 보초병들이 다섯 명씩 짝을 지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 옆에서 마을 주민 서너 명이 밭을 매고 있었는데 데이몬에게 그 광경은 상당히 어색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오크의 보호아래 밭일을 하는 인간. 적어도 과거의 트루베니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들 옆을 지나쳐가며 데이몬은 농민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하나같이 비쩍 말라 있었으며 얼굴에는 전혀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 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을 리가 없으니…….' 농민들에게는 이미 오크에 대한 경계심마저 사라져버린 듯 했다. 매서운 눈빛으로 경비를 서는 오크 보병이 바로 지척에 있었음에도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저 기계적인 동작으로 밭을 갈고 있는 인간들. 그 모습에서 데이몬은 과거 트루베니아를 지배했던 군주들에게 부아가 치밀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판단 착오 때문에 그들의 후손은 기구하게도 미개한 오크의 노예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찮은 자존심만 버렸다면 이들은 이런 처지에 놓이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놈들이 이 모습을 본다면 상당히 가관이겠군. 아마도 아르카디아에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저승에서 뼈저리게 후회하겠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데이몬은 마을 중심부를 향해 걸어갔다. 도중에 몇몇 마을 주민과 마주쳤지만 그들 역시 마찬가지로 행동했다. 완전 무장한 오십여 명의 오크 보병들이 마을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평상시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물론 움찔거리며 몸을 피하는 모습에서 그들이 오크를 상당히 두려워하고 있음을 데이몬은 잘 알 수 있었다. 데이몬은 마을 주민들의 면면을 세세히 살폈다. 비쩍 마른 사내아이를 안고 가는 뼈만 앙상한 아낙네. 조그마한 나뭇짐을 짊어지고도 힘겨워하는 피골이 상접한 청년. 마을 사람 중에서 살이 찐 사람은 하나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니 정상적인 체격을 지닌 사람도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으니 마을의 사정이 어떠한지 익히 짐작할 만 했다. '오크들이 겨우 목숨을 이어나갈 만치만 남기고 모조리 털어 가나보군.' 측은한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이 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데이몬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투르카가 이끄는 대로 말이다. 오크 보병들이 도착한 곳은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한 너른 공터였다. 그 바로 앞에 낡을 대로 낡은 집이 한 채 있었는데 아마도 촌장이 사는 곳인 듯 했다. 앞에 도착한 투르카는 거칠게 고함을 질렀다. "취익 촌장! 당장 나오라고." 놀랍게도 그는 유창한 인간의 언어로 말했다. 과거 트루베니아 왕국 사이에서 통용되었던 공용어 말이다. 무척 오랜만에 들었으므로 데이몬에겐 색다른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삐꺽. 문이 열리고 왜소한 체구의 중년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뼈만 앙상한 모습이 마을 사람들과 한 치도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다소 특이한 것은 촌장의 나이가 갓 사십이 되었음직하다는 점이다. '이상하군. 보통 촌장이라면 나이가 지긋한 마을의 제일 어른이어야 하는데 말이야.' 데이몬의 의문 어린 시선 속에서 촌장은 투르카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오셨습니까? 나으리. 그래 어쩐 일로……." 연신 굽실거리는 촌장의 모습에선 과거 트루베니아의 전역을 지배했던 인간의 당당함은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오크 족에 의해 사육되고 있는 가축. 데이몬은 촌장의 모습에서 대충 이런 느낌만을 느낄 수 있었다. '불쌍한 사람들.' 착잡한 데이몬의 속도 모르고 투르카는 기세 좋게 고함을 질렀다. "취이익. 오우거 자식을 상대할 용사를 데리고 왔다. 이젠 아무도 희생되지 않을 것이니 마음놓도록 하라." 말을 마친 투르카는 몸을 돌려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촌장의 힘없는 눈빛이 데이몬에게 향했다. 오크의 모습을 하고 있는 탓에 촌장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데이몬에게는 자신을 그리 탐탁지않게 여기는 기색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졌지만 말이다. 잠시 데이몬을 훑어본 촌장은 투르카를 향해 울상을 지었다. "벌써 열 다섯 명의 주민이 오우거에게 잡혀갔습니다. 꼭 오우거를 잡아주셔야만 주민들이 일을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 능력으론 역부족입니다. 그러니 제발……." 연신 손을 비비는 모습을 보니 그동안 오크들에게 상당한 고초를 느꼈음을 알 수 있었다. "취익. 이번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투르카는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을 했다. 하지만 촌장의 눈빛이 변화가 없는 것을 보니 투르카의 말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듯 했다. "모쪼록 부탁드리겠습니다." 겉으로는 큰 은혜를 입었다는 듯 머리를 굽실거렸지만 말이다. "취췩. 그건 그렇고 저번에 얘기한 것은 분명히 준비가 되었겠지?" 촌장의 얼굴이 삽시간에 시커멓게 죽어들었다. 그것을 보아 투르카가 상당히 무리한 요구를 한 듯 싶었다. 물론 노예신세인지라 선택의 여지가 없음은 분명해 보였지만 말이다. "하, 하오나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오우거에게 잡혀간 때문에 일손이 현저히 모자랍니다. 그러니 그들이라도 있어야……." "취익. 안 된다면 네놈이라도 대신 끌고 갈 수밖에 없다." 결국 촌장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아, 알겠습니다. 내일 사람들을 모아놓겠습니다." 무슨 말이 오고간 듯 싶었지만 데이몬이 내역에 대해 알 턱이 없었다. 그저 속으로만 궁금증을 달랠 수밖에. 우거지상이 되어있는 촌장을 두고 투르카는 몸을 돌렸다. "취익. 가시지요." 전사들을 데리고 어딘가로 걸어가는 투르카. 그의 뒤를 따르던 데이몬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살기가 스쳐지나갔다. 그 역시 인간이었으므로 촌장에게 함부로 대하는 투르카의 태도에 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현실을 생각한 데이몬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드래곤을 상대할 만큼의 힘만 기르기만 하면 놈들을 가만두지 않을 테다.' 데이몬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며 묵묵히 투르카의 뒤를 따라갔다. 언젠가 돌아와서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27회. 데이몬이 안내된 곳은 마을 외곽의 조그마한 초소였다. 마을에서 산으로 통하는 길목에 지어진 것으로써 한 눈에 보기에도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조그마한 움막이 전부였다. 사방이 온통 숲으로 둘러싸인 탓인지 초소 부근은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무척 어두컴컴했다. 귀기까지 감도는 것이 어지간히 담이 큰 자라도 감히 밤을 지샐 엄두를 낼 수 없어 보였다. 하지만 데이몬이 누군가? 트루베니아에서 간이 크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자가 아니던가. 오히려 그는 주변을 살피며 접근로와 도주로를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도리어 투르카가 겁먹은 듯한 눈빛을 보였다. "취익. 이곳입니다. 보고에 따르자면 오우거가 산에서 내려오며 가장 먼저 접하는 초소이니 여기에 계신다면 놈과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조금이라도 머물고 싶지 않은 듯 투르카는 말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몸을 돌리려 했다. 휘하 전사들도 남김없이 따라가려는 것을 보니 아마 놈들도 이곳을 겁내는 듯 싶었다. 혼자만 놔두고 가려하자 데이몬은 적이 당황했다. "잠깐만." 데이몬이 부르는 소리에 투르카는 의아한 듯 눈을 치켜 떴다. "왜 그러시는지?" "마을을 습격하는 오우거가 늙고 노련한 놈이라고 했었지?" "그, 그렇습니다만." "지금까지 놈이 전사들의 포위망도 여러 번 벗어났다 했고……." 상대의 의중을 모르는 터라 투르카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이미 놈의 손에 스물이 넘는 전사들이 당한 상태였다. 놈은 그만큼 노회하고 교활한 오우거였다. 투르카를 쳐다보는 데이몬의 눈엔 뭔가 확신했다는 듯한 빛이 서려있었다. "나 혼자 남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나만 남는다면 놈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지만 투르카에겐 애당초 대답을 유추해낼 만한 지능이 없었다. "취췩. 저, 저는 잘………." "멍청하기는……. 놈은 분명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떠돌이 오크는 분명히 미끼다. 분명히 부근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오크 전사들이 매복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말이야." 투르카의 얼굴이 갑자기 멍해졌다. "취익! 그렇군요. 그렇다면………." "놈의 습격을 받았을 때를 떠올려보거라. 그때 전사들이 대체로 몇 명이나 배치되어 있었나?" "대, 대략 다섯 남짓." "그 정도가 놈에게 가장 만만한 숫자로군. 그렇다면 이곳에 네 명의 전사를 더 배치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때서야 데이몬의 말뜻을 알아차린 투르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취익. 알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이곳에 남길 만한 전사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스쳐 지나가자 전사들은 하나같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하나같이 경험이 없는 어린 오크들이라서 오우거를 상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잔뜩 주눅이 든 표정이었다. '상황이 예상대로 진행되는군.' 장난기가 돈 데이몬은 슬며시 투르카의 비위를 긁기 시작했다. 그를 남겨서 마을의 상황을 물러보기 위한 심산이었다. "저쪽 녀석들이 그래도 제법 쓸만해 보이는군. 저들 넷만 남기고 나머진 내려가도록 해. 너도 마찬가지야. 이것은 상당히 위험한 임무니까 말이야." 투르카의 얼굴에 약간 골이 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취췻. 이 중에서는 제가 제일 강력한데요?" "오우거를 상대하는데 애들이 끼면 일이 안 돼." 예상대로 투르카는 심하게 반발했다. "애라니 터무니없습니다. 적어도 전 이들 중에서 가장 용감하다고 자부합니다. 취익. 용맹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전 꼭 이곳에 남아야겠습니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물론입니다."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내미는 투르카를 보며 데이몬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속으로 멍청한 오크라고 한없이 비웃으며 말이다. 투르카는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앞으로 나와 섰다. 그러자 데이몬은 남은 오크들을 둘러보았다. "너희들 중에서 진정한 용사라고 생각하는 자는 나서라. 당당하게 오우거를 맞서 싸울 만큼 용기가 있는 자들 말이다." 그 말에 오크 전사들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앞으로 나섰다. 진정한 용사라는 말에 넋이 나가버린 것이다. 데이몬은 그들 중에서 셋을 골랐다. "너, 너, 그러고 너 이렇게 셋과 나, 투르카가 남아 오우거를 상대하기로 한다." 지목된 오크들은 천만다행이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나머지 오크들은 그렇지 못했지만 말이다. 애초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자 투르카는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날이 져서 어둑어둑했고 전사들은 그들 다섯만 남겨두고 모조리 마을로 내려간 상태였다. 적막한 산중에 달랑 다섯만 남게 되었으니 두려움이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나머지 오크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까지 야성이 살아있는 오크였지만 이들은 이미 집단 생활에 익숙해진 종족이었다. 따라서 집단에서 떨어진 이상 용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라 말할 수 있었다. 언제 오우거가 나타나서 목뼈를 부러뜨릴지 몰랐기 때문에 투르카를 비롯한 전사 네 명은 바짝 긴장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은 암암리에 코웃음을 쳤다. '멍청한 녀석들…….' 이미 그는 사방의 경계를 전사들에게 맡겨놓고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상태였다. 야행성 종족인 이들이 자신보다 밤눈이 밝을 것이란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편한 자세로 누워 사방을 둘러보던 데이몬의 눈에 문득 이채가 서렸다. '재미있군. 오크 놈들이랑 어우러져 오우거 사냥을 나서다니……. 그런데 아까 일은 무얼 말하는 것이었을까?' 궁금증을 참지 못한 데이몬은 소리쳐 투르카를 불렀다. "이봐 투르카. 이리 와봐." 투르카는 깜짝 놀라 데이몬에게 다가왔다. "취췻. 큰 소리를 내면 어떻게 합니까? 오우거란 놈은 우리보다 청각이 월등히 좋습니다." "원래 놈을 불러들이려고 한 것 아니었어?" 비로소 실책을 눈치챈 투르카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췻. 그건 그렇군요." "그런데 내일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촌장이 상당히 난감해하던 것 같은데……." "취익. 그것 말씀이시군요." 투르카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듯 태평스레 설명을 이어나갔다. "췻. 노예들 중에서 늙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자들을 선별해내는 일입니다. 오우거 사냥이 끝난다면 그놈들을 끌고 부족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죠." "늙어서 일을 할 수 없는 자들? 그들을 어떻게 처리하려고……." 투르카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말이다. 하지만 듣고 있던 데이몬에게는 결코 가벼운 일이 될 수 없었으니……. "취익. 쓸모 없게 된 노예들을 살려둘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때문에 놈들을 부족으로 데리고가서 요절을 낼 생각입니다." "………." 데이몬은 멍한 눈빛으로 투르카를 쳐다보았다. 투르카의 얼굴에는 뭔가 기대한다는 듯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먹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고기는 상당히 연하고 부드럽습니다. 취익. 일이 예정대로 끝난다면 부족에서는 대대적인 잔치가 벌어질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 오우거 고기가 더해진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요?" 모든 실정을 알게 된 데이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세상에 노인들을 죽여 그 고기로 잔치를 벌이다니…….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참담한 느낌이었다. 트루베니아의 인간들이 이런 처참한 처지에까지 전락해버렸다니……. 같은 인간으로써 침통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와 함께 오크에 대한 살기가 모락모락 치밀어 올랐다. "혹시 인간을 먹어보셨습니까? 오백 년 전에는 전사들이 하루 세 끼를 인간의 고기로 때웠다고 하던데, 지금은 구경하기가 쉽지 않죠." 태평스레 말을 이어나가는 투르카를 노려보며 데이몬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생각 같아서는 단방에 때려 죽였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바램이었다. 하지만 인간을 잡아먹는 놈은 구태여 이놈뿐만이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트루베니아 전역의 오크들이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데이몬의 가슴속엔 한 가지 결심이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맹세컨대 기필코 트루베니아에서 오크의 씨를 말려야겠군.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간에 말이야.' 마음을 가라앉힌 탓에 데이몬의 얼굴은 다시 무표정하게 되돌아갔다. "아니. 난 인간의 고기를 먹고 싶지 않아." "왜 그러시죠? 그처럼 연하고 감칠맛 나는 고기는 드문데." 데이몬은 다시 한 번 끓어오르는 분노를 진정시켜야 했다. "한 번 목에 걸려 죽을 뻔한 경우를 넘긴 이후로 먹지 않기로 했지." 그럴 듯한 대답에 투르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데이몬의 눈에서 빛이 일어났다. 무언가를 감지했다는 듯한 빛이었다. '뭔가가 접근하고 있다. 묵직한 발자국소리. 십중팔구 오우거라 생각되는군.' 데이몬은 슬쩍 고개를 돌려 오크들의 동정을 살폈다. 놈들은 전혀 기미를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바야흐로 데이몬의 감각이 오크의 본능보다 우수하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데이몬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며 놈이 오는 방향을 가늠했다. '보폭이 상당히 넓게 느껴지는 것을 보아 오우거가 틀림없군. 방향은…….' 데이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맹수들은 거의 틀림없이 바람을 안고 사냥을 행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냄새를 간파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쪽에는 한 마리의 오크가 초소의 벽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놈은 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모르긴 몰라도 오우거는 그놈을 노리는 것 같았다. 조심성이 많은 놈인지 금방 달려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데이몬은 무릎 위에 얹어놓은 스파이크 건틀릿을 슬며시 집어들었다. '한 놈이 당한 뒤 나가면 되겠군.' 당할 놈이 불쌍하긴 하지만 데이몬에겐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오크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크란 족속은 결코 동료의 죽음에 슬퍼할 종족이 아닌 것이다. 오우거가 기습해오길 기다리며 데이몬은 건틀릿을 소중하게 매만졌다. 들고 있던 건틀릿은 그가 유일하게 스승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가 사로잡힌 후 건틀릿은 잡동사니 창고 구석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졌고 리치가 된 이후 데이몬은 상당히 고생한 끝에야 이것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백 년의 세월동안 무척 소중히 간직해왔다. 그런 유래가 있는 물건이었지만 데이몬은 단순히 오우거를 상대하기 위해 꺼낸 것이다. '가급적 마법을 사용하면 안 된다. 필시 드래곤들은 나에게서 마법보고를 돌려 받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문득 인크레시아 속에 어떤 것들이 들어있을지 궁금해져왔다. 보고 자체를 넘겨받기는 했지만 안에 들어있는 물품 목록은 하나도 넘겨받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목록 자체가 몽땅 지크레이트의 머리 속에 들어있었으니……. '좌표만 파악한다면 물건을 꺼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찾으면 될 테니까 걱정할 것은 없다.' 드래곤들이 꼭꼭 숨겨놓은 것들이니 만큼 가치가 얼마 정도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트루베니아의 보물 중 가장 진귀하고 값진 것만 모아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 어쩌면 대륙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데이몬의 얼굴엔 기뻐하는 표정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애초부터 그는 물욕이 그다지 없는 무사 출신이었으니까. 생각에 잠겨있던 그의 얼굴에 긴장하는 듯한 기색이 스쳤다. '놈이 공격하려나 보군.' 그는 얼른 건틀릿을 고쳐 잡았다. 초소의 거친 나무 벽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갔다. 콰지직. 나무 벽을 부수고 들어온 것은 가마솥 뚜껑 만한 커다란 손이었다. 손은 기대앉아 있던 오크의 머리통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취에엑." 운 없는 오크 전사는 구슬픈 비명만을 남기고 나무 벽 너머로 끌려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서야 기습을 알아차린 오크들이 부랴부랴 글레이브를 움켜쥐고 몸을 일으켰다. "취익. 놈이다." 그들의 앞으로 뭔가 바람 같은 것이 휙 스쳐지나갔다. 그것이 데이몬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투르카가 반색을 했다. "무, 무법자님." "놈의 퇴로를 차단해라. 도망치지 못하도록……." 짤막하게 내뱉은 데이몬은 오우거가 뚫어놓은 구멍으로 몸을 날렸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28회. 안녕하세요. 4권 원고가 어제 들어갔습니다. 때문에 부득이 일정 분량을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분량은 5장 전 까지이고요 내일 자정을 기해 삭제할 예정입니다. 그럼 이만. ^^ *************************************************************************** 데이몬의 뒤를 오크 전사들이 부랴부랴 뒤따르고 있었다. "제법이로군." 초소 밖 공터로 달려나온 데이몬은 고개를 갸웃했다. 오우거란 놈이 끌어당긴 오크를 정신 없이 먹고 있으리란 기대가 여지없이 빗나가버렸던 것이다. 크르르르. 어둠 속이었지만 한 눈에 보아도 육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실루엣이 달빛을 받고 서 있었다. 끌려나간 오크는 놈의 발치에 맥없이 나동그라져 있는 상태였다. 목이 기괴하게 돌아간 것을 봐서 즉사한 것처럼 보였다. 놈은 늘어진 오크에게 관심도 두지 않은 채 데이몬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두 개의 구슬이 데이몬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상대가 머리가 하나인 오우거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트윈헤드 오우거보다 힘은 떨어지지만 지능 면에서 낫기 때문에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존재. 그런 오우거를 노려보며 데이몬은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오래 전 이곳으로 처음 왔을 때 데이몬은 오우거와 무척 힘겨운 싸움을 해야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사투였다. 결국 승리하긴 했지만 대가로 몸이 만신창이가 될 수밖에 없었으니…….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미 그의 손에 의해 수십 마리의 오우거가 이승을 하직하지 않았던가? 비록 마법을 쓸 수 없다는 제약이 있었지만 오우거 정도는 결코 데이몬의 상대가 아니었다. 때문에 데이몬은 오우거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크롸?" 눈앞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간 큰 오크를 보자 오우거의 눈에 우습다는 듯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자고로 하이에나가 사자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가 떼로 뭉쳐 덤벼야 하는 법. 다 자란 오우거에게 오크 다섯 정도는 식후 운동거리도 되지 않았다. 하물며 상대는 전사로도 보이지 않는 떠돌이 오크에 불과했다. 그런 놈이 달랑 혼자서 다가오다니 우습지도 않았던 오우거였다. 하지만 놈은 지금까지 무수하게 죽을 고비를 넘겼던 노련한 오우거. 나이를 헛먹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오우거는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우선 자신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듯한 오크 전사 셋. 갑옷은 걸쳤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세 살도 되지 못한 풋내기들이었다. 자신의 손에 목이 꺾인 놈과 한 치도 틀림없이 동일했다. 그밖에 오크들이 매복한 기척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오우거는 경계심을 완전히 버렸다. 이 정도 방비라면 멀리 돌아갈 필요도 없이 돌파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던 오우거였다. 겁도 없이 다가오는 떠돌이 오크를 먼저 죽여버릴 요량으로 고개를 돌린 오우거의 눈에 난데없이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코앞에 있어야 할 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리번거리며 놈을 찾는데 갑자기 하복부에서 끔찍한 통증이 전해져왔다. "크와아악." 오우거는 펄쩍 뛰었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끔찍한 통증이었기에 놈은 깨금발로 펄쩍펄쩍 뛰며 고통을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눈물과 콧물이 배어 나와 제대로 앞을 분간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옆으로 조그마한 녹색 실루엣이 슬며시 빠져나왔다. "이런, 이런. 빗나갔나?" 뒤로 살짝 물러 나와 오우거가 광분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녹색 몸체는 바로 데이몬이었다. "젠장." 그는 돌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건틀릿의 송곳에 피와 함께 척 보기에도 지저분한 오물이 묻어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공격을 가한 곳은 오우거의 회음혈. 항문과 생식기 사이에 위치한 신경이 밀집된 혈도로써 이곳을 공격받는다면 제대로 걸음을 옮길 수가 없다. 그렇게 놈의 발을 묶어놓고 느긋하게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오우거의 두꺼운 피부 때문에 송곳이 미끄러져 그만 항문을 찔러버린 것이다. 쉬운 말로 오우거는 정통으로 똥침을 맞아버렸다. "지저분한 놈. 밑을 제대로 닦지도 않는군." 엉덩이를 잡고 펄쩍펄쩍 뛰는 오우거를 흘겨본 데이몬은 얼굴을 찡그린 뒤 바닥의 나뭇잎을 집어 건틀릿을 닦았다. 피와 함께 지저분한 배설물이 따라나왔다. 그 모습을 보던 오우거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찮은 떠돌이 오크 나부랭이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놈을 뭉개버릴 생각에 오우거는 필사적으로 통증을 참으며 몸을 돌렸다. 부우우웅. 오우거는 상대를 향해 바람처럼 쇄도해 들어갔다. 주먹 한 방이면 피떡이 되어버리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오우거의 몸놀림은 과연 빠르기 그지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척으로 접근해 들어간 오우거는 솥뚜껑 만한 주먹으로 데이몬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파파팟. 때맞춰 터져 나온 엄청난 파공성 소리에 보고 있던 오크들은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저 주먹에 맞는다면……. 아마도 몸과 갑옷이 사이좋게 뒤섞여버릴 것이 분명했다. 기세 좋게 내뻗어진 오우거의 주먹. 하지만 애석하게도 거기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주먹이 가까이까지 오기를 기다렸던 데이몬이 몸을 살짝 돌려버리자 주먹은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로 빗겨 지나가 버렸다. 닳고닳은 싸움꾼인 데이몬이 그 틈을 놓칠 리가 만무했다. 퍽. 팔 오금부분에 송곳을 박아 넣자 오우거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펄쩍 뛰었다. 신경이 극도로 밀집된 곳에 금속이 파고드는 통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콰우우." 입을 딱 벌린 채 고통으로 몸을 파르르 떠는 오우거. 하지만 데이몬의 공격은 쉼 없이 계속되었다. 상대가 저항을 하건 말건 상관없이 말이다. 퍼퍼퍼퍽. 데이몬의 송곳은 닥치는 대로 오우거의 요혈을 파고들었다. 어느 것이 사혈이고 어느 것이 혼혈인지 상관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걸리는 혈도는 남김없이 송곳을 박아 넣고 보는 것이다. 사시나무 떨 듯 계속해서 몸을 뒤흔들던 오우거.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장난처럼 툭툭 건드리는 듯한 공격이었지만 강인하다 자부해왔던 자신의 몸은 맥을 추지 못했다. 골수까지 치밀어 오르는 극통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으니……. 오우거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수 없는 역경을 헤쳐 나온 역전의 노장이었다. 강한 적은 무조건 피하고 약한 적은 철저히 눌러가며 끈질기게 살아왔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판단한 죄로 놈은 정말 허무하고도 처절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인간을 즐겨 잡아먹은 죄로 말이다. 목뼈와 척추사이에 위치한 대추혈이 파헤쳐지자 오우거의 몸이 기역자로 꺾여 버렸다. 놈은 곧 비명도 없이 대지에 몸을 뉘었다. 쿵. 눈을 까뒤집고 쓰러진 오우거의 전신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헉 헉."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는 데이몬의 몸 역시 피투성이였다. 물론 그의 피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팽팽히 당겨진 근육과 거기서 전해지는 피로감은 언제 겪어보아도 상쾌했다. 데이몬은 우선 건틀릿을 벗어 수습했다. 오크의 모습으로 변용한 상태라 건틀릿이 손에 맞지 않았던 탓인지 드러난 손은 온통 멍투성이였다. "놈! 인간을 먹은 대가로 생각해라." 늘어진 오우거에 대고 짤막하게 내뱉은 데이몬은 몸을 빙글 돌렸다. "응?" 순간 그의 눈에 의혹의 빛이 가득 차 올랐다. 오크들이 하나같이 멍한 눈빛을 하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몬은 오래지 않아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크란 종족은 힘을 극도로 숭상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눈빛에는 위대한 용사에게 보내는 경탄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신으로 오우거를 처치해버린 용사를 만났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우거라면 설사 그들의 족장인 츄가르라고 할 지라도 감히 일대 일로 붙을 상대가 아니다. 그런데 한낱 떠돌이 오크에 불과한 자가 이런 믿지 못할 일을 이루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오크 전사들은 한동안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입만 딱 벌리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데이몬은 차갑게 일갈을 했다. "뭐 하는 건가? 마을에 있는 놈들을 불러다 놈의 시체를 날라야 하지 않는가?" "취익. 아, 알겠습니다." 투르카는 그때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휘하의 전사 하나에게 명령을 내렸다. "쉭, 너는 지금 당장 내려가서 마을의 전사들을 모조리 데리고 오너라." "알겠습니다." 전사 한 명이 급히 달려 내려간 뒤 투르카는 모호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극도의 연모가 담겨있는 시선이었다. "사, 사실이었군요. 단신으로 오우거를 처치했다는 말이……."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놈은 비교적 쉬운 상대였어. 예전엔 트윈 헤드 셋과 맞서 싸운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급하게 되묻는 투르카는 눈에 불이 번쩍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딱. 머리를 감싸쥐고 나뒹구는 투르카를 향해 데이몬은 엄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멍청한 놈. 내가 살아있는 것을 보면 결과를 모르겠나? 조금 힘들긴 했지만 놈들은 모조리 내 손에 시체가 되어버렸다." "세, 세상에……." 투르카와 남은 전사 한 명은 또다시 입을 딱 벌리고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역시 오크였지만 같은 종족이 이렇게 강하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크란 오로지 뭉쳐야만 강해지는 종족이었다. 개개인의 능력을 따진다면 결코 강하다고 할 수 없는 종족인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뇌리에는 무척 엉뚱한 생각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만약 황야에서 떠돈다면 당신처럼 강해질 수 있습니까?" 열망이 번들거리는 투르카의 눈을 들여다보며 데이몬의 머리 속에는 무척 사악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온갖 역경을 견디고 생존한 떠돌이 오크에게는 그에 합당한 신의 보상이 있다. 난 그 보상을 받은 것뿐이다." "취익.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하지요?" 데이몬은 투르카의 코앞에다 주먹을 불끈 쥐어 내밀었다. "무조건 싸우는 거다. 싸우다 힘이 부치면 도망쳐라. 하지만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면 목숨을 걸고 물고늘어져라. 그것이 자신의 실력을 늘일 수 있는 지름길이다." "취익. 아, 알겠습니다." 투르카는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크게 인심쓰는 척 하며 늘어진 오우거의 사체를 가리켰다. "난 이만 떠나도록 하겠다. 이미 약속했으니 오우거 고기는 모조리 너희들에게 넘기겠다." "취익.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가십시오. 약속했던 양고기입니다." 투르카가 내미는 꾸러미를 받아든 데이몬은 그것을 배낭 속에다 쑤셔 넣었다. "그럼 잘 있거라." 짧게 한마디 내뱉은 뒤 데이몬은 걸음을 옮겼다. 능선 너머로 사라지는 그의 등으로 투르카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의 눈망울에는 뭔가를 기대한다는 듯한 열망이 솟구치고 있었다. 격정을 참지 못한 듯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한 마디를 겨우 내뱉었다. "취익. 저렇게 강해질 수만 있다면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어느덧 떠돌이 오크의 삶이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부족에서 쫓겨나 어쩔 수 없이 되는 삶이 아닌 자의로 택한 삶 말이다. "크크크 멍청한 오크 놈들." 좁다란 산길을 걸어가며 데이몬은 연신 흉소를 머금었다. 모르긴 몰라도 츄가르 부족의 젊은 전사 중 상당수가 황야로 나갈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분명 투르카가 앞장 설 것이다. 물론 데이몬은 그런 무모한 만용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황야에서 백 번 떠돌아봐야 놈들이 뭘 얻겠어?. 죽음?" 하지만 그와 함께 착잡한 생각 또한 물밀 듯 밀려들었다. 오크 치하의 인간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직접 목격한 터라 기분이 결코 좋지 않았다. 그가 본 대로라면 가축과 전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한창 나이에는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늙어서는 고기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삶은 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같은 인간의 일원으로써 정말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아르카디아의 인간들은 이들의 삶보다는 낫겠지?" 이 한마디로 자신을 위안하며 데이몬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생각 같아서는 중원으로 건너가서 무림의 고수들을 몽땅 끌어오고 싶었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29회. 이들의 처참한 삶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두말할 것 없이 찬성하고 따라올 터였다. 정사지간을 불문하고 말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것이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계획임을 알고 있었다. 우선 그에겐 자신이 살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매개물이 전혀 없었다. "드래곤 하트는 있다. 차원이동의 방법 역시 완벽하게 암기하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나에겐 가지고 온 물건, 차원이동의 좌표를 잡을 수 있는 소지품이 없다. 때문에 돌아가는 것을 결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이리로 온 지 대략 500년의 세월이 흘렀다. 물론 중원에서 가지고 온 물건이 아직까지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이 있어야만 자신이 살던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실력으로 복수를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으니 우선은 드래곤부터 처리하고 보자. 어떻게 해서든 스승의 원수를 갚고 다프네를 구해내야 한다. 가능하다면 트루베니아에서 오크 놈들을 몰아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데이몬은 나직이 각오를 되새겼다. 그에게 당면한 현실적 과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일단 북쪽으로 가자. 그곳에서 조력자를 얻은 다음 아르카디아로 건너가서 마력을 쌓는다면 방법이 생길 테니……." 데이몬은 목적지를 상기하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틀렸군." 베르키스의 얼굴에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한 빛이 떠올랐다. 부근의 오크 부족에게서 물경 오천 명이라는 병력을 차출했던 그였다. 그들로 하여금 근 한 달 동안 레어 주변을 물샐틈없이 수색했건만 결국 놈의 머리카락 하나조차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의 앞에는 게덴하이드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눈 버젓이 뜨고 놈을 놓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놈은 필시 일을 저지른 직후 이곳을 빠져나갔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 역시 의문투성이였다. 분명 공간이동이 일어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인비저빌러티나 에이비에이션도 전개된 징후가 없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5써클 급 이상의 고급 마법이다. 때문에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가지, 놈이 도보로 빠져나갔다는 가정인데……." 그것 역시 결코 수월치 않은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레어를 지키는 모든 리치가 촉각을 곤두세우며 길목을 지키는 상황이었다. 그와 병행해서 떠돌이 오크에 대한 대대적인 추살령이 내려져 있었으니 놈의 종적은 반드시 드러나야 했다. 이미 자신의 명령에 의해 일만이 넘는 떠돌이 오크가 학살되었다는 사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날아올랐는지 종적이 묘연해져 버렸으니. 베르키스의 얼굴에 착잡한 빛이 떠올랐다. "실수다. 놈을 가디언으로 삼는 것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하더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런 짓을 저지를 놈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베르키스였다. 그저 심심풀이 삼아 살려두었던 놈인데 이런 큰 일을 벌이다니……. 특히 이해하지 못할 점은 놈이 어째서 자신의 세뇌마법을 극복했는가 하는 것이다. 10써클의 정신계 마법인 세뇌마법은 인간이라면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절대 마법을 극복하는 인간이 있을 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담이 크기로 따지자면 인간들 중에서 제일이겠군. 감히 나의 마법서가에 들어가 마법을 훔쳐 배우고 그것도 모자라 지크레이트를 살해한 뒤 인크레시아를 훔쳐가다니……." 데이몬이란 놈을 꼭 잡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놈을 놓치는 일 따위야 조금 섭섭하기는 하겠지만 그에겐 별로 큰 일이 아니었다. 9써클의 마스터에 오른 마법사 따위는 드래곤에게 위협거리도 되지 못했다. 베르키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법보고 인크레시아였다. 그 속에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와 뜻을 함께 하는 모든 드래곤들의 귀중한 보물들이 들어있었다. 평생을 걸쳐 모은 보물들 중 가장 귀중한 것만 들어있었으니 베르키스의 속이 쓰릴 만도 했다. 그 역시 보물을 극단적으로 좋아하는 드래곤의 속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 인크레시아를 회수해야 한다. 놈만 처치한다면 마법보고는 다음 차례인 나에게 반드시 돌아올 터이니……."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미 포위망을 빠져나갔다면 이 넓은 트루베니아에서 놈을 찾아내는 것은 말 그대로 사막에 떨어진 바늘 찾기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놈이 어디에 있건 우리에겐 기다릴 수 있는 수명이 있다. 목적이 있는 놈이니 반드시 마각을 드러낼 터, 그 때 요절을 내어버리겠다. 베르키스는 결국 수색을 중지하기로 마음먹었다. 계속해서 탐색마법을 펼치느라 심신이 극도로 피로했다. 하물며 그는 정해진 수면기간도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 더 이상 무리하다간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듯 싶었기에 그는 펼쳤던 마법을 풀어버렸다. "10년 후면 모든 드래곤들이 잠에서 깨어난다. 그들이 함께 탐색마법을 펼친다면 반드시 놈의 종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놈이 마법을 사용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설사 놈이 아르카디아로 건너갔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곧 그곳에 대한 침공이 시작될 것이니 놈이 숨을 곳은 양 대륙을 통틀어봐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생각을 정리한 베르키스는 게덴하이드를 쳐다보았다. "모든 리치들을 철수시켜라." "알겠습니다." "이후 너희들은 레어의 보호에만 주력한다. 놈에 대한 추적은 십 년 후 모든 드래곤들이 잠에서 깨어난 이후 시작할 것이다. 알겠느냐?" "지엄하신 명령 어김없이 봉행하겠습니다."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게덴하이드를 보며 베르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러 가야겠군." 그는 곧 몸을 일으켰다. 처소를 향해 발길을 옮기는 베르키스의 얼굴에는 결코 유쾌하지 못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휴우." 베르키스가 처소로 들어가고 나자 게덴하이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놈을 놓친 일로 큰 처벌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베르키스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마도 수면에 들어가는 것이 더 급해서 그런 듯 싶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게덴하이드가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드래곤이란 원래 망각을 모르는 종족. 십 년 후에 깨어나더라도 베르키스는 반드시 이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책임추궁이 언제 일어날지 짐작할 수 없었다. 게덴하이드는 별안간 살광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가증스런 놈. 날 이 지경까지 몰아넣다니……." 하지만 생각할수록 놈의 능력에 대해 찬탄을 금하지 못했던 게덴하이드였다. 과거 자신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했어도 죽음을 면치 못했던 3써클의 햇병아리가 어느새 자신을 추월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500년의 세월동안 거의 마법실력의 향상을 보지 못했던 게덴하이드로써는 놈의 실력변화가 부럽기만 했다. "놈이 어떻게 해서 9써클 엑스퍼트의 벽을 통과했을까?" 게덴하이드는 그것이 베르키스의 세뇌마법에 의한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것을 단지 인간이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트루베니아의 역사를 통틀어 9써클의 마스터에 오른 대마법사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는 것도 일조를 했다. 때문에 놈의 자질에 대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튼 상관할 바는 없겠군. 놈이 베르키스 님의 손에 죽게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니 말이야." 인간 마법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드래곤에 대적할 수 없다. 9써클의 마스터가 아니라 더한 경지에 올랐어도 불가능했다. 드래곤과 대적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뛰어난 소드 마스터들과 파티를 이뤄 덤비기 전에는 어림없었다. 때문에 게덴하이드는 데이몬에 대한 생각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렸다. 이제 그에게 남은 당면과제는 리치들을 통솔해 레어를 철통같이 지키는 것이었다. 휘유유융. 바람이 불었다. 날카로운 칼바람이 마치 생명체의 접근을 불허하겠다는 듯 매섭게 불어대고 있었다. 아무리 두터운 털가죽을 가진 짐승일지라도 순식간에 체온을 빼앗아 동사하게 만들 정도로 매서운 죽음의 바람. 사방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적막한 평원이었다. 그런 곳이라 바람은 더욱 살벌하게 대지를 뒤덮은 얼음 위를 마구 휘저어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죽음의 벌판 위에 옷자락을 표표히 날리며 서 있는 인영 하나가 있었다. 허술한 옷차림. 변변한 방한도구도 갖추지 않은 자였지만 마치 자신과 추위와는 무관하다는 듯 미동도 없이 서서 한 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는 모습에 이미 동사한 시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법했지만 코를 통해 새어나오다 바로 동결되어버리는 입김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죽음의 대지 위에 서 있는 자는 청년이었다. 그것도 용모가 무척이나 수려한……. 제대로 빗지 않아 헝클어져 있었지만 윤기가 흐르는 보기 좋은 금발 머리에다 푸른 눈동자는 마치 별을 그대로 박아놓은 듯 요요로왔다. 우뚝 선 콧날과 갸름하게 뻗어나간 얼굴 선이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절세미남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했다. 하지만 대조적으로 꽉 다문 입술을 보아 의지가 철석같이 굳음을 알 수 있었다. 그대로 굳어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되던 입술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정확히 오백 년만인가?" 뒤로 펼쳐진, 조금 전 넘어온 만년설에 뒤덮인 준령을 보며 데이몬은 감개무량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절세미남의 정체는 바로 데이몬이었다. 사방을 둘러보던 눈동자에 모호한 빛이 떠올랐다. "감회가 새롭군." 그는 지금 500년 전의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다프네를 업은 상태로 사백 명의 용사들 틈에 끼여 이곳으로 들어섰던 기억. 그 때의 일이 마치 어제일인 것처럼 생생했다. 물론 그에게는 결코 유쾌했던 경험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데이몬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베르키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지 딱 석 달 만이었다. 이곳은 죽음의 절지인 노스우드 평원이었다. 인간의 운명을 구하려 노력하던 400명의 용사들을 인정사정없이 묻어버린 곳 말이다. 이곳으로 오며 데이몬은 수없이 많은 싸움을 치러야 했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떠돌이 오크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므로 생긴 일이었다. 중형 몬스터나 와이번이 습격했던 횟수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타 부족의 오크들에 의해 공격받은 적도 많았지만 데이몬은 체술과 함께 베르키스가 탐지하지 못할 정도의 마법을 병행해서 써 가며 천신만고 끝에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베르키스는 이미 수면에 들어간지 오래였지만 데이몬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그가 도착한 곳은 용사대가 펠드리안에서 공간이동을 해 온 장소였다. 그는 오백 년 전 용사들과 함께 넘었던 죽음의 장벽을 혼자 몸으로 넘어왔다. 온갖 역경을 혼자서 극복해내며 말이다. 물론 얼음호수를 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별다른 장비도 없었을 뿐더러 9써클에 달하는 마법 실력은 이곳의 혹한으로부터 그를 완벽하게 지켜주었다. 준령에 거주하는 아이스 트롤들 역시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극한에 이른 감각과 체술로 데이몬은 아이스 트롤의 습격을 무리 없이 방어해가며 준령을 넘어올 수 있었다. 문제는 용사대가 몰살했던 마법의 결계였다. 혼자서 들어섰지만 결계는 데이몬을 쉽게 통과시키려 하지 않았다. 혼자서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마물과 몬스터들이 나타나서 데이몬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사술에 이어 마법에도 통달한 때문에 데이몬은 그것들이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니 그것이 아니라도 환영 따위에 겁을 집어먹을 데이몬이 아니었다. "날 시험하려 하지 마라. 난 이미 너무나도 많은 시험을 치러온 몸이다." 데이몬은 눈썹 하나도 깜짝하지 않고 마물들이 휘두르는 이빨과 발톱 속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상대가 겁을 먹어야만 환상진이라는 것이 성립되는 법. 퍽. 데이몬과 몸이 맞닿자마자 마물들의 환영은 허공에서 그대로 꺼져버렸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데이몬은 마침내 베르하젤의 신전이 있는 노스우드 평원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넘어온 과정을 잠깐 상기해본 데이몬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단 사방의 정경은 500년 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한 때 괴력의 스톤 골렘으로 변해 용사대를 궤멸시키는데 일익을 했던 돌무더기들이 그때 모습 그대로 나뒹굴고 있었다. 폐허가 된 성벽은 그때보다도 더 허물어진 상태였다. 오직 멀리 보이는 베르하젤 신전만이 완전한 모습 그대로 위용을 뽐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곳은 데이몬의 목적지가 아니었다. 들어갈 필요도 없었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무표정한 눈빛으로 신전을 한 번 훑어본 데이몬은 걸음을 옮겼다.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던 곳, 용사대가 몰살했던 장소로 가려는 것이다. "이곳이군." 스톤 골렘의 잔해가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곳에 도착한 데이몬은 눈을 빛냈다. 물론 인간이나 몬스터의 시체는 세월의 풍파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와 갑옷만은 뻘겋게 녹이 슨 채 주인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데이몬의 뇌리에 그때의 급박했던 순간이 스쳐지나갔다. 힘이 없어 그저 보고만 있어야 했을 당시 말이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30회. 격정이 치밀어 올랐는지 그의 주먹이 꽉 쥐어진 채 부르르 떨렸다. 다프네를 빼앗기던 순간을 떠올리자 갑자기 베르키스에 대한 증오가 끝없이 치밀어 올랐다. 데이몬은 적막한 벌판에다 대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베르키스 네놈에게 반드시 처참한 최후를 안겨 주겠다. 네놈이 하찮게만 생각했던 인간에게 당하는 것은 예정된 네 운명일 것이다." 한껏 고함을 질렀지만 그의 목소리는 연신 불어대는 바람에 묻혀 힘없이 사그라져 버렸다. 그렇게 가슴 속 응어리를 조금이나마 풀어버린 데이몬은 메고 있던 배낭을 풀어 발치에 내려놓았다. "그럼 슬슬 준비를 해야겠군. 그런데 놈들의 영혼이 아직까지 남아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린 데이몬은 곧 바닥에다 영혼을 불러내기 위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을 품고 죽은 기사의 영혼을 불러들이기 위해서 말이다. 데이몬이 이곳으로 온 목적은 바로 데스 나이트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드래곤을 상대로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조력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더 이상의 마법실력 향상은 기대하기 힘들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마법으로 드래곤을 상대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드래곤을 가장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서는 절정의 경지에 이른 소드 마스터의 조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오로지 그들이 전개하는 오러 블레이드만이 강철보다 단단한 드래곤의 비늘을 뚫고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다. 아무리 고써클의 마법이라도 드래곤에게만은 통하지 않았다. 때문에 드래곤을 상대할 때 마법사는 철저히 조연의 역할만을 맡을 수밖에 없었고 주연은 엄연히 소드 마스터의 몫이었다. 하지만 귀하디 귀한 소드 마스터를 끌어들이기란 결코 쉽지 않은 법. 데이몬은 그 대안으로 데스 나이트에 기대를 걸었다. 그것도 소드 마스터에 뒤지지 않는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 여야만 했다. 데이몬은 바로 그런 이유로 머나먼 노스우드까지 왔던 것이다. "데스 나이트를 소환하는데 가장 필요한 조건은 바로 한을 품어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기사의 영혼이다. 그것도 반드시 생전에 뛰어난 실력을 지녔던 기사여야 한다." 데이몬이 생각하기에 그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은 이곳밖에 없었다. 400에 달하는 소드 마스터가 몰살한 곳. 물론 그들 대부분이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음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이곳을 떠도는 소드 마스터의 영혼이 있을 법도 했다. "많을 필요는 없다. 나에겐 실력이 떨어지는 다수보다 실력이 뛰어난 소수가 더 절실하니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자들은 바로 이카롯트의 기둥이었던 4대 기사였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거의 근접한 그들을 데스 나이트로 만든다면 드래곤을 사냥하기에 추호도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9써클의 마스터인 자신이 가세한다면 마법사의 지원은 충분하니까 말이다. 마법진을 완성한 데이몬은 슬며시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럼 시작해 볼까?" 노스우드 평원은 마나의 흐름이 극도로 불규칙한 곳이므로 마법을 시전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몬의 경지는 인간 궁극의 경지인 나인 써클. 주위의 마나들은 오래지 않아 그의 의도대로 재배열되기 시작했다. 쓰쓰쓰쓰. 마법진을 축으로 마나의 소용돌이가 뻗어나가며 사방으로 광범위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신호들은 정처 없이 이곳을 떠돌아다니는 망령들에게 시술자의 의도를 전달하는 사명을 띠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펼쳐진 노스우드 평원. 마법진에서 퍼져나가는 신호는 노스우드 평원의 끝까지 데이몬의 뜻을 전파했다. 망령의 첫 번째 대답이 들려온 것은 데이몬이 마법을 전개한지 한 시간 남짓 된 시점이었다. 데이몬의 앞에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완전무장을 한 기사의 모습으로 나타난 망령이었지만 한쪽 팔이 떨어져나간 데다 피투성이가 된 모습이 공포감을 조성하기엔 충분했다. 안개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모습은 또한 묘한 요요로움까지 가져다주고 있었다. 첫 번째로 나타난 망령은 의외라는 듯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응시하다 말을 걸었다. ―날 부른 자가 그대인가? 마음 속으로 직접 전달되는 음성.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날 부른 것인가? "몰골을 보아하니 과거 용사대에 소속되었던 자가 맞는 것 같군. 이름이 뭐지?" 겁먹은 기색이 전혀 없이 다짜고짜 할 말을 털어 내는 데이몬의 모습에 망령은 제법 당황한 듯 싶었다. ―간이 큰놈이로군. 내 이름은……. 애석하게도 그는 4대 기사의 일원이 아니었다. 기대했던 대답이 나오지 않자 데이몬은 즉시 축객령을 내렸다. 그 역시 생전에는 소드 마스터였을 터였지만 최고 강자가 아닌 이상 데이몬에겐 필요 없는 자에 불과했다. "널 부른 게 아니야. 그러니 넌 이만 가봐도 좋아." ―실없는 놈이로군. 분노 섞인 일갈을 남겨놓고 망령의 모습은 그곳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데이몬이 불러들인 망령들이 끝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 이름이 뭐지?" ―나의 이름은……. "네놈도 아니로군." 지루한 확인작업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나가 사라지면 또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이 찾는 망령은 여간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심지어 용사들의 손에 의해 죽은 중형 몬스터의 영혼까지 데이몬을 찾아오는 실정이었다. 오우거나 트롤 말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꾹 참고 찾던 영혼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가장 강력한 데스 나이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영혼들이었다. 끈질기게 기다린 끝에 마침내 데이몬이 찾던 대답이 들려왔다. ―날 부르는 자는 누구인가? 내 이름은 헬버트론이다. 용건을 말하라. 지루함에 지쳐 권태로움까지 떠올라 있던 데이몬의 얼굴이 확 펴졌다. "헬버트론? 너 맞아? ―날 아는가? "예상대로 이승을 떠나지 않았군." 데이몬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비록 망령이었지만 헬버트론은 트루베니아를 통틀어 안면이 있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날 모르겠는가?" 몸의 반이 으스러진 모습으로 나타난 헬버트론의 망령은 데이몬의 모습을 훑어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널 본 기억이 전혀 없다. 누군가? 정체를 밝혀라. "멍청하기는……. 외모에 현혹되지 말고 영혼을 직접 보도록 해라. 망령이라면 그 정도 능력은 있을 테니." 잠시 데이몬을 뚫어지게 관찰하던 망령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이, 이 냄새는…… "이제 알겠나? 나 데이몬이다. 너에게 요리를 만들어주었던……." 헬버트론은 그때서야 데이몬을 알아보았다. 망령이 되었어도 생전의 기억은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놀랍군. 아직까지 살아있다니……. 그런데 그 어울리지 않는 외모는 뭐지?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별건 아니야. 드래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꾼 몸이라고나 할까?" ―트루베니아는 어떻게 되었지? 이카롯트 제국과 황제 폐하는……. 모처럼 외부의 사정을 알 수 있게되자 헬버트론의 망령은 데이몬에게 끝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잠깐 기다려. 조금 뒤 모든 것을 설명해 줄 테니까. 그건 그렇고 나머지 셋의 망령도 이곳에 있나?" ―그렇다. "재미있군. 그들이 모두 모이고 난 뒤 용건을 밝히도록 하지. 더불어 트루베니아의 현재 사정까지 모두 말이야." 한 인간과 한 귀신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망령들이 모여들었다. 그것을 보아 용사대에 소속된 모든 이들의 영혼이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수도 없이 몰려드는 망령들에 지친 데이몬이 짜증을 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놈들은 죽어서 왜 저승으로 가지 않은 거야." 그 말에 헬버트론의 망령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모르고 있었나 보군. 이곳 노스우드 평원은 신의 영역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죽은 자들은 신의 노여움을 샀다고 봐야겠지? 그 대가로 영혼이 영원히 이곳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망령들이 많은 것인가?" ―아마도……. 그러던 사이 그가 찾던 나머지 세 망령도 모여들었다. 노스우드 평원을 떠도는 모든 망령들이 데이몬에게 한 번씩 왔다간 셈이다. 원했던 영들이 모여들자 데이몬은 지체 없이 망령을 소환하는 마법진을 지워버렸다. "이제 되었군." 데이몬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4대 기사의 망령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헬버트론도 꽤나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셋도 예외는 아니었다. 육신이 완전히 증발해버린 라인델르와 프림베르그는 그저 희끄무레한 안개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가슴 윗부분이 완전히 날아가 버린 사라미스의 모습에서는 예전의 수려했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 모였으니 이제 얘기를 시작해보자." 데이몬은 우선 그들에게 이카롯트 제국의 멸망과 함께 트루베니아가 오크의 수중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얘기해주었다. 예상대로 그들은 착잡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예상은 했었지만 직접 들으니 별로 기분이 좋지 않군……. ―폐하는 어떻게 되었나? 황족들은 무사히 아르카디아로 건너갔겠지? 죽어 망령이 되어서까지 황가를 챙기는 4대 기사를 보고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그러진 못한 것 같아. 이카롯트 황가를 상징하는 르헤르트 세이버가 내 수중에 있으니까 말이야." ―저, 정말인가? 그들은 하나같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로써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죄책감마저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데이몬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꽤나 지극한 충성심이로군.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황가 따위에 죽어서도 충성을 다 하다니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야 ." 그 말에 망령들은 발끈했다. ―발칙한 작자. 감히 황가를 능멸하다니……. ―우린 기사로써의 서약을 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은 이후라고 해도 변하지 않는다. 데이몬의 표정이 별안간 냉랭해졌다. "멍청한 것들. 바보 같은 군주들 때문에 트루베니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나 해? 놈들은 하찮은 자존심을 지키려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고 그들의 후손에게까지 멍에를 지워놓은 자들이야." ―……… "오크 치하의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지금부터 얘기해 주겠다. 정신 차리고 들어." 데이몬은 그들에게 츄가르 부족에서 본 오크족 노예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젊어서는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나이가 들어서는 오크 족의 식량이 되어버리는 기구한 인간들. 설명을 들은 망령들은 아연해할 수밖에 없었다. ―서, 설마 그런 일이……. "이것은 내가 두 눈으로 똑바로 확인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나는 떠돌이 오크로 모습을 바꿔 이곳까지 왔기 때문이다." ―………. 망령들은 말을 잊었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31회. 그들이 이곳을 하염없이 떠도는 동안 트루베니아에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절실히 실감한 듯한 모습이었다. 인간들이 그렇게나 기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니. 그들을 보며 데이몬은 나지막이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그들이 이런 처지에 놓인 것에는 그대들의 책임이 없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애초에 너희들이 군주들의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아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절규하는 듯한 프림베르크의 음성이 전해졌다. ―그만, 그만 하라. 우리 역시 괴롭다. 쌍방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어느 누구도 선뜻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휘유우웅. 살을 에이는 듯한 바람이 사방을 휘감았지만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법으로 몸을 보호하는 탓에 데이몬은 추위를 느끼지 않았고 게다가 한 번 죽은 망령들이 한기를 느낄 리가 없었다. 말을 걸어온 것은 라인델프였다. 생전에 소문났던 애처가답게 그는 가족의 안위에 대해 물어왔다. ―혹시 우리 가문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나? "모른다. 내가 알기로 극소수의 사람들이 간신히 아르카디아로 건너갔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나? 아마도 오크 족의 노예가 되었거나……." 데이몬은 말을 잠시 끊고 망령들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죽어서 놈들의 식량이 되었거나 둘 중 하나겠지?" 비정하기까지 한 말에 망령들은 또다시 침묵을 지켰다. 그토록 노력했건만 그들의 노력은 결국 허사가 되어버렸다. 영혼마저 이곳을 떠나지 못하니 저승의 가족들을 만날 방법도 요원했다. 두 번째로 침묵을 깬 자는 헬버트론이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우리를 불러냈는가? 이제 쓸모 없는 망령이 되어버린 우리들을……. 데이몬은 이때다 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쓸모가 있고 없고는 내가 판단할 문제다. 난 너희들을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우리들을? 왜? 어째서……. "난 너희들을 데스 나이트로 만들려고 한다. 생전에 이카롯트 제일이라 불렸으니 훌륭한 데스 나이트가 될 테지?" ―………. "이미 난 9써클의 마스터에 오른 대마법사가 되었다. 너희들이 기억하던 초급 마법사가 아니라는 뜻이지. 따라서 너희들을 데스 나이트로 만드는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데이몬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망령들은 쿡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우스워 못 견디겠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헬버트론의 망령이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데이몬에게 말을 걸었다. ―고작 그것 때문에 이 먼 곳까지 온 거야? 헛고생을 했군. "………." ―결론부터 말하지. 우리에겐 결코 데스 나이트 따위가 될 생각이 없다. 4대 기사의 망령들은 한사람씩 돌아가며 대답을 했다. ―비록 몸은 죽었으되 우리의 정신은 어떤 일이 있어도 고결한 기사의 서약을 따른다. ―한 번 죽기는 했지만 명예를 더럽힐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뜻이지. ―장담하건 데 이곳에 있는 기사들의 영혼 중 그 누구라도 너의 뜻에 따르지 않을 것이다. ―데스 나이트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영원히 암흑 속에 가두는 것이므로. 설사 네가 아니라 대마왕 나이델하르크가 직접 오더라도 우리의 대답은 마찬가지다. 대답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의 얼굴에는 표정변화가 없었다. 마치 이런 대답을 예상이나 한 듯한 기색이었다. "그런가? 알겠다." 데이몬은 두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의 반응에 도리어 얼떨떨해진 것은 4대 기사의 망령들이었다. ―그냥 가는 것인가? ―무척이나 실없는 작자로군. 뒤돌아서 걸어가던 데이몬은 나지막하지만 망령들에게 충분히 들릴 법한 음성을 토해냈다. "하긴 너희같이 멍청하고 고리타분한 놈들을 데리고 드래곤 사냥을 하려 하다니 나도 정신나간 놈이지. 예정대로 소드 마스터를 물색하는 게 나을 것 같군." 그 말에 망령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헬버트론이 다급하다는 듯 데이몬의 발목을 잡았다. ―그렇다면 너는 드래곤을 상대할 생각인가? 데이몬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렇다. 내 목표는 오로지 드래곤이다. 마법 또한 그것 때문에 익힌 것이고……. 특히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의 목숨은 어떤 일이 있어도 끊을 생각이다. 나머지 드래곤들을 결딴내는 것과 놈들에게 잡혀있는 성녀를 구해내는 것 역시 행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자신이 있는가? "가능성 따위는 생각도 해 보지 않았다. 트루베니아 대륙 최강의 존재인 드래곤. 그것도 모든 드래곤들을 대상으로 행하는 복수이다.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아마 시도조차 할 수 없겠지? 하지만 나는 할 것이다. 설사 이루지 못할지라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므로……. 망령들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데이몬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모호한 느낌을 주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잘들 있게. 여기서 영원히 산다면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야. 복수를 성공한다면 기필코 기별을 넣어 줄 테니……. ―잠깐 기다려라. 침묵을 지키던 4대 기사의 망령들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유일하게 머리가 붙어있는 헬버트론의 얼굴에는 무언가를 결심했다는 듯한 빛이 서려 있었다. ―만약 우리가 데스 나이트가 되어 널 도와준다면 복수를 성공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질 것 같나? 상대가 반쯤 넘어왔다는 것을 직감한 데이몬은 슬며시 낚싯줄을 끌어당겼다. "멍청하기는…….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미리 얘기하지 않았나? 물론 도움이야 조금은 될 테지만 말이야." ―혹시라도 다른 일을 할 목적으로 이러는 것은 아니겠지? "다른 일? 뭘 말하는 거지?" ―사악한 네크로멘서들이 흔히 하는 일 말이다. 이를테면 인간을 죽이거나 납치하는 등등의 네 욕심을 채우는 일. 헬버트론의 말을 들은 데이몬은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들의 걱정에는 일견 일리가 있어 보였다. 왜냐하면 데스 나이트가 된 영혼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네크로멘서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의지력이 강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설사 네크로멘서가 생전의 가족이나 군주를 처치하라 명한다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심정이 익히 이해가 되었지만 데이몬은 냉정하게 나가기로 작정했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작자들이로군. 그딴 소리하려거든 당장 꺼져버려." ―대답해 다오. 우리에겐 절실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망령들의 애절한 태도를 본 데이몬은 비로소 때가 무르익었음을 직감했다. "많은 것을 약속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다. 드래곤과 싸우게 해 주는 것. 이것만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지켜 주겠다." 헬버트론의 얼굴에 환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곧 나머지 세 기사의 망령들을 향해 뭐라고 지껄이기 시작했다. 망령들의 대화까지 엿들을 수 없었기에 데이몬은 그저 잠자코 기다렸다. 조금 뒤 헬버트론의 망령이 마치 대표자처럼 한 발 앞으로 나와 데이몬을 응시했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다시 말해 데스 나이트가 되겠다는 뜻이다. "정말인가?" ―물론이다. 이 결정으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영원히 구제 받지 못하게 될 지라도 상관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하나다. 드래곤에게 복수하는 일. 그것을 위해서라면 설사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감수하겠다. "………." ―널 주인으로 모시겠다. 네가 우리를 어떻게 부리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 오직 하나. 드래곤의 몸뚱이에 검을 박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해 줄 수 있다면 우리 모두를 한낱 스켈레톤으로 만들어도 상관하지 않겠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바로 복수이니 말이다. 진심이 진득하게 묻어 나오는 헬버트론의 말을 들으며 데이몬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바야흐로 강력한 조력자를 얻게 되는 순간이었다. "좋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즉시 대법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데이몬은 짊어진 배낭을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네크로멘시에 대한 지식이 모조리 머리 속에 들어있었으므로 책을 볼 필요도 없었다. 데이몬은 헬버트론을 쳐다보았다. "마법진을 그리겠다. 그러니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라." ―준비는 되어있다. 대답을 들은 데이몬은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계약에 동의한 영혼을 데스 나이트로 재 탄생시키기 위한 마법진이었다. 그러는 동안 네 명의 망령들은 데이몬이 그리는 마법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영혼이 영원히 구제 받지 못할지도 모르는 결정을 내렸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한 점의 후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끝났다." 맥이 빠진 듯한 음성과 함께 데이몬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앞에는 시커먼 갑옷을 걸친 네 명의 데스 나이트가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들은 무척 얇은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신체 주요부분을 가리는 약식 갑옷이 아닌 전신 갑주였지만 두께가 비 이상적일 정도로 얇았다. 마치 갑옷 아래에 받쳐입는 가죽옷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는 갑주였다. 사슬갑옷 형식으로 되어 있었기에 움직이는데는 전혀 무리가 없어 보였지만 방어력에 있어 현저한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대법은 성공리에 끝났다. 데이몬이 그간 모아놓은 어둠의 마력(魔力)은 모조리 네 명의 망령들에게 주입되었고 그들은 드디어 실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저주받은 데스 나이트의 몸체를 말이다. 데이몬에 의해 탄생된 데스 나이트들, 헬버트론, 라인델프, 프림베르그, 사라미스는 연신 안광을 희번덕거리며 서로를 둘러보았다. 그들 중 헬버트론이 극도로 실망한 듯한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기괴하게 공명되는 음성은 결계 속에서 들었던 것과 한치의 틀림도 없었다. 환영 때문에 한때 데스 나이트로 보였던 그들이 진짜 데스 나이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이것것이이 네네 마마력력의의 전전부부인인가가?" "현재로써는." "마마왕왕이이 아아니니라라서서 예예상상은은 했했었었지지만만 조조금금 실실망망스스럽럽군군. 생생전전에에 내내가가 가가졌졌던던 능능력력의의 10%도도 되되지지 않않으으니니 말말이이야야." 나머지 세 기사들도 지지 않겠다는 듯 한 마디씩 거들었다. "제제길길 드드래래곤곤의의 꼬꼬리리질질 한한 방방이이면면 가가루루가가 되되어어버버리리겠겠군군" "스스켈켈레레톤톤보보다다 하하등등 나나을을 것것도도 없없겠겠어어." 가만히 듣고 있던 데이몬이 역정을 냈다. 사실 그가 모아놓은 마력은 겨우 이들을 데스 나이트로 변모시킬 수 있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네크로멘서가 끌어 모을 수 있는 어둠의 마력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는 것이다. 마왕이 아닌 한 말이다. "잡담은 그만하도록. 이것이 전부가 아니니 말이야." 몸을 일으킨 데이몬은 마법진을 거뒀다. 그러자 헬버트론의 눈에서 이채가 떠올랐다. "데데스스 나나이이트트를를 더더 이이상상 만만들들지지 않않을을 것것인인가가?" "그럴 필요가 없겠지?" "그그렇렇다다면면 너너와와 우우리리 넷넷으으로로 드드래래곤곤을을 대대적적하하겠겠다다는는 뜻뜻인인가가?" "현재로써는." 헬버트론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무무리리라라고고 생생각각하하지지 않않나나? 이이 정정도도로로는는 드드래래곤곤은은커커녕녕 와와이이번번 한한 마마리리도도 제제대대로로 잡잡을을 수수 없없다. 우우리리에에게게 유유령령군군마마(幽靈軍馬: phantom steed )조조차차 만만들들어어 줄줄 마마력력이 이없없었었나나?" "………." "정정말말 실실망망스스럽럽군군. 이이러러려려면면 굳굳이이 우우리리를를 불불러러낼낼 필필요요가가 있있었었나나? 이이곳곳의의 망망령령들들 중중 아아무무나나 불불러러내내더더라라도도 이이 정정도도 수수준준의의 데데스스 나나이이트트를를 만만들들 수수 있있을을 텐텐데데……." 데이몬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감돌았다. "그래서 결정을 후회한다는 뜻인가?" "아아니니 그그렇렇지지는는 않않다다. 계계약약을을 맺맺은은 이이상상 우우린린 너너의의 명명령령에에 절절대대 복복종종할할 것것이이다다. 하하지지만만 이이 상상태태론론 드드래래곤곤의의 일일초초지지적적도도 되되지지 못못한한다다는는 점점을을 보보장장할할 수수 있있다다. 그그러러니니 가가능능하하다다면면 데데스스 나나이이트트를를 더더 만만들들어어내내기기를를 권권고고하하고고 싶싶다다. 목목적적을을 밝밝힌힌다다면면 이이곳곳의의 망망령령들들 중중 거거절절할할 자자는는 아아무무도도 없없을을 것것이이다다." 데이몬은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내가 판단할 문제야. 더 이상 데스 나이트를 만들어 낼 생각은 없다. 더 이상 질문이 없나?" 실망감에 젖은 나머지 데스 나이트들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32회. 하긴 이 상황에서 물어볼 만한 것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들을 둘러보며 데이몬은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불러내기 위한 주문이었다. 쓰쓰쓰쓰. 주문이 완성되자 왜곡된 공간의 틈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마법보고 인크레시아였다. 데이몬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인크레시아를 가리켰다. "너희들에게 첫 임무를 하달해 주겠다. 너희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창고지기 일이다." "고고작작 창창고고지지기기?" 데이몬의 말에 데스 나이트들은 맥빠진 듯한 대답을 해 왔다. "그렇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이것은 드래곤들의 마법보고 인크레시아. 이 속에는 놈들이 평생을 모아놓은 보물들이 가득 들어있다. 내가 드래곤 한 놈을 처치하고 가로챈 것이지." "그그, 그그 말말이이 사사실실인인가가?" 데스 나이트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9써클의 마스터를 결코 약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정도 수준의 대마법사라면 그들 넷이 생전에 덤볐더라도 섣불리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인 것이다. 하지만 드래곤을 상대하는 일은 달랐다. 자고로 인간 마법사가 드래곤과 싸워 이길 가능성이 아예 제로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데이몬이 천연덕스럽게 드래곤 하나를 처치했다고 털어놓으니 그럴 만도 했다. "멍청하기는……. 안에 놈의 시체가 들어있으니 들어가 확인해보면 되지 않은가?" "노노, 놀놀랍랍군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데스 나이트를 보며 데이몬은 또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에는 그들에게 용기와 투지를 심어주기 위한 절차였다. "한 가지 더 말해 둘 것이 있다. 그것은 너희들이 아직까지 완성되지 못한 존재, 다시 말해 미완성 데스 나이트란 점이다. 유령군마를 만들어주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예상대로 데스 나이트들은 데이몬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데이몬은 손을 뻗어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가리켰다. "이 속에는 대마왕 나이델하르크가 봉인되어 있는 봉인구가 있다. 마법보고를 훔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지." 말이 떨어지자 마자 데스 나이트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그렇렇다다면면 너너는는……."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희들을 정말 강력한 마스터급 데스 나이트로 만들 생각이다. 소드 마스터 열과 싸워도 지지 않는……. 너희들을 선택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 "………." "데스 나이트는 생전의 실력이 강할수록, 그리고 주입되는 어둠의 마력이 많을수록 강해진다. 따라서 나는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에서 마력을 흡수해서 그것들 대부분을 너희들에게 주입할 생각이다. 너희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점까지." "그그게게 정정말말인인가가?" 데이몬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봉인구의 마력이라면 모르긴 몰라도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 백 명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실력이 떨어지는 다수보다 진정으로 강한 소수다. 생각해 보라.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의 마력을 무한정 주입 받는다면 너희들이 얼마나 강해질지……." 잠시 침묵을 지키던 데스 나이트들이 들뜬 목소리로 화답해왔다. "아아마마도도 사사상상 최최강강의의 마마스스터터급급 데데스스 나나이이트트가가 탄탄생생할할 것것 같같군군. 능능히히 괴괴물물이이라라 칭칭할할 수수 있있을을 듯듯한한……." "그들 넷과 9써클의 마스터. 이 정도라면 드래곤을 사냥할 만 하지 않나?" "충충분분히히 가가능능하하지지. 가가능능하하고고 말말고고." 데스 나이트들의 안광에는 묘한 기대감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드래곤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는데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데이몬은 씩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 좋아할 단계는 아니야. 봉인구가 이 속에 있긴 하지만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 말이야. 그래서 너희들이 필요한 거고." 성질 급한 라인델프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우우리리가가 무무얼얼 하하면면 되되지지?" "이미 말하지 않았나? 창고지기라고……. 내가 알기로 마법보고 인크레시아의 안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극한의 환경을 유지하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너희 데스 나이트들에게는 상관없는 일일 터. 우선 이 속에 들어가라. 그리고 안의 물품을 찾아 그 좌표를 명확히 기억해 놓기 바란다." "마마법법보보고고의의 안안이이 그그렇렇게게 넓넓은은가가?" 데이몬은 라인델프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멍청한 자식!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그래서 너희들을 들여보내는 것이지." "알알겠겠다다. 설설사사 수수백백 년년이이 걸걸리리더더라라도도 네네 말말대대로로 보보고고 속속을을 샅샅샅샅이이 뒤뒤지지도도록록 하하겠겠다다." "그래야지. 그래야만 예상치 못한 수확도 건질 수 있을 테니……." "예예상상치치 못못한한 수수확확이이라라니니?" 데이몬의 얼굴에 모호한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드래곤들이 모아놓은 보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었다. "인크레시아의 안에는 드래곤들이 가진 보물들 중 가장 귀중한 것들이 들어있다. 물론 뛰어난 무구나 마법병기가 없진 않을 테지? 너희들은 오래지 않아 어둠의 마나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신성 마법만 걸려 있지 않으면 어떠한 마법 무구라도 사용할 수 있게 되겠지?" "갑갑옷옷과과 무무기기를를 직직접접 고고르르란란 말말인인가가?" "그렇다. 그 때문에 너희들에게 얇은 사슬 갑옷만을 착용시킨 것이다. 내가 알기로 이 속에는 지금까지 트루베니아에 존재했던 온갖 신병이기(神兵利器)들이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마법 갑옷에서부터 명검. 가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아티팩트들. 이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지." "………." "그것들은 이제 모두 너희들의 것이다. 가서 찾아라. 입맛에 맞는 신병이기는 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한도까지 모조리 허락하겠다. 강해질 수만 있다면 말이다." "설설사사 그그것것이이 르르헤헤르르트트 세세이이버버라라도도 말말인인가가?" "두말하면 잔소리. 물론 그 전에 누가 가질 것인지 서로 상의를 해야겠지만……." 프림베르그가 놀랍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이거거 정정말말 영영광광이이로로군군. 지지금금까까지지 구구경경도도 하하지지 못못했했던던 무무기기들들을을 선선택택할할 수수 있있다다니니……." "신성마법이 걸린 무기를 선택하는 우는 범하지 않도록 하기 바란다. 아마도 아직까지 너희들은 신병이기를 사용할 능력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고른 무기가 보관된 좌표만 기억해두도록 해라. 나중에 너희들에게 힘을 부여하게 된다면 남김없이 넘겨줄 테니 말이다." "고고맙맙군군." 데스 나이트들의 눈에는 묘한 열정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 정도의 안배라면 전 대륙의 드래곤과 맞서 싸울 수 있다. 그들의 눈빛에서는 자신감이 새록새록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럼 이제 들어가도록 해라. 난 이 길로 아르카디아로 넘어가서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로부터 마력을 빼낼 방법을 강구하도록 하겠다." 헬버트론이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다. 잠시 인크레시아를 응시하던 헬버트론은 데이몬을 향해 불쑥 손을 내밀었다. 데이몬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무슨 뜻이지?" "진진심심으으로로 네네게게 감감사사한한다다. 나나에에게게 복복수수를를 할할 기기회회와와 힘힘을을 준준데데 대대해해서서 말말이이다다." 데이몬은 씩 웃으며 헬버트론의 손을 맞잡았다. "가능하다면 네 더듬거리는 말투나 고치도록 해. 듣기가 심히 거북하군." "노노력력해해보보지지." 헬버트론이 인크레시아 안으로 사라진 뒤 라인델프가 나섰다. 그 역시 데이몬에게 손을 내밀었다. 맞잡은 둘의 손으로 사나이의 교감 같은 것이 교차되었다. 다음에는 프림베르그가, 그 다음에는 사라미스가. 이렇게 해서 네 명의 데스 나이트가 인크레시아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그러자 데이몬은 인크레시아를 다시 공간의 틈으로 숨겨버렸다. "이제 끝났군. 다음은 아르카디아로 건너갈 차례인가?" 가장 중요한 조력자들을 섭외한 이후라서 그의 얼굴에는 홀가분하다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신대륙의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무척 궁금하군." 내려놓았던 배낭을 다시 짊어진 데이몬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바다 건너 아르카디아가 위치한 서쪽 방면이었다. ******************************************************************** 페이류트. 이곳은 신대륙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큰 항구를 가지고 있는 도시국가이다. 오백 년 전 아르카디아로 인간의 이주가 시작되었을 때 거의 모든 배들이 정박해 닻을 내렸던 곳이었고 지형 자체가 거대한 만(灣)을 이루고 있었기에 더할 나위 없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기도 했다. 내륙 안쪽으로 둥글게 말려 들어간 만 덕택에 외해의 거친 파도가 거의 안쪽으로 침습해 들어오지 못했으므로 만 안쪽의 바다는 항상 평온을 유지했다. 그 탓에 페이류트는 아르카디아에서 으뜸가는 항구도시로 튼튼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아르카디아에는 해상 무역이 그리 발전하지 못했다. 대륙을 항상 감싸고 있는 거센 조류 때문도 있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불어닥치는 폭풍우 탓이 더욱 컸다. 혹자는 그것이 오백 년 전부터 시작된 실버 드래곤의 저주 때문이라는 의견도 내었지만 아르카디아 대륙 부근의 바다는 그 전부터 풍랑이 세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처럼 거대한 대륙이 이렇게 늦게 발견된 것도 모두 거기에 기인한 것이었다. 트루베니아와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는 점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당연한 말로 짐을 가득 실은 해상 무역선은 폭풍우에 가장 무기력한 선종이었다. 때문에 아르카디아에서 행해지는 대부분의 무역활동은 내륙을 통해 이루어졌고 페이류트의 항만을 가득 채운 배들은 대부분이 고기잡이 어선들 일색이었다. 하지만 항구에 정박중인 배들은 도저히 어선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크기가 컸다. 대부분이 복층 구조의 선실을 가졌으며 간혹 가다 마스트(돛대)가 세 개씩이나 달린 거선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고기를 잡는데 이 정도 큰배가 소용이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 법도 한 모습. 하지만 페이류트의 역사를 되새겨보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페이류트는 아르카디아의 포경선(捕鯨船)들이 총 집합해 있는 고래잡이의 산실이었기 때문이다. 고래(鯨). 육지에서는 그 거대한 몸집을 도저히 추스를 수 없는 동물이다. 오로지 체중을 받아줄 수 있는 바다에서만 생존이 가능한 고래는 덩치만큼이나 쓸모가 많은 동물이었다. 한 마리를 잡을 경우 나오는 엄청난 양의 고기도 고기였지만 장식물로 가치가 높은 고래뼈에서부터 다방면으로 사용되는 지방. 거기에다 머리 속에 간직된 향유는 수준 높은 귀족들의 애호품으로 깊이 있게 자리잡은 지 오래였다. 그 때문에 페이류트의 뱃사람들은 하나같이 고래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33회. 제대로 자란 고래 한 마리 잡기만 하면 팔자 고치기는 시간문제였던 것이다. 물론 그에 따른 위험이 없을 수는 없었다. 일년에 수백 마리의 고래가 잡히기는 했지만 그를 능가하는 수의 포경선들이 풍랑으로 또는 고래의 반격으로 말미암아 침몰되는 운명을 감수해야 했다. 바다에서 생을 마친 선원들은 그야말로 부지기수라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류트에는 아르카디아 각지의 사내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찾아오곤 했다. 단시일 내에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포경선에 타는 것 이상의 일은 없었다. 그것은 마치 도박과도 같은 것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었다. 운이 좋으면 거금을 손에 쥘 수 있었으며 그렇지 못한 경우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 탓에 페이류트는 엄청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무수한 포경선으로부터 거둬들이는 세금도 세금이었지만 뱃사람들이 풀어놓고 가는 돈 또한 엄청났던 것이다. 거금을 손에 쥔 선원들이 가장 먼저 찾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술과 여자였다. 물론 몇몇 견실한 선원들은 가족들을 위해 바로 집에 돌아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선원들의 오랜 항해로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주점을 찾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선원들을 위해 페이류트 시내에는 엄청난 수의 주점과 여관들이 존재했다. 돈을 벌기 위해 아르카디아 전역에서 모여든 엄청난 수의 상인과 여자들이 선원들에게 술과 웃음을 팔았다. 페이류트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경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페이류트의 번영은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페이류트 외곽에는 다소 초라하고 볼품 없는 주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물론 페이류트 중심부에는 황제도 부러워할 정도로 호사스런 술집과 여관이 줄지어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곳도 분명히 존재했다. 이곳은 바로 포경에 실패한 선원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곳이다. 고래를 잡지 못했다고 해도 선원들은 어김없이 주점을 찾았다. 그렇게 라도 지친 심신을 달래지 않으면 선원들은 도저히 오랜 항해를 배겨나지 못했다. 물론 주머니가 얇은 탓에 술값이 비싼 중심부에는 가지 못하고 이런 허름한 주점에서 싸구려 술이나 마셔야 하는 것이다. 그런 술집들 한 군데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말이라고. 이건 우리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거야." "거짓말하지 마. 세상에 서펜트(바다뱀:serpent)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인간이 어디 있어?" "미치겠네. 정말이라니까."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는 자는 전형적인 뱃사람이었다. 머리를 묶은 수건 아래에는 강한 햇살과 거친 바다 바람에 단련된 구리빛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쪽 눈가를 스쳐지나간 흉터가 무척 인상적인 사내는 실버 블레이크란 이름을 가진 포경선의 갑판장이었다. 그의 옆에는 함께 승선했던 선원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멀리서 관찰하기는 했지만 그 서펜트의 머리 위에는 분명 인간이 타고 있었단 말이야. 그것도 바다의 폭군이라 불리는 거대한 킹 서펜트였어." 갑판장이 열을 올려 설명했지만 주점 내부의 선원들은 그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펜트라면 포경선 선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바다의 악마라 불리는 괴물. 서펜트와 정면으로 맞닥뜨린다면 결코 무사할 수 없었다. 서펜트는 아무리 큰 포경선이라도 유유하게 뒤집어놓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놈들은 그래놓고 바다에 빠진 선원들을 하나씩 삼켜버리기를 곧잘 했다. 그 때문에 페이류트의 선원들에게 서펜트란 보기만 해도 줄행랑을 쳐야 하는 상대였다. 아무리 작살로 무장한 포경선이라도 단단한 비늘을 가진, 바다에서만은 무적이라 자부하는 서펜트에겐 당할 재간이 없었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거친 선원들조차 서펜트에게만은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서펜트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인간을 보았다는 목격자가 나왔으니……. "말도 되지 않는 소리야. 서펜트가 인간의 고기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오죽했으면 내해 근처까지 들어와 자맥질하는 아이들까지 물어갈 정도인데 그게 가능한 얘기야?" "혹시 모르지. 나중에 먹으려고 머리 위에 올려둔 시체를 보았을지도." "이런 빌어먹을 놈들이……." 애초에 말을 꺼낸 갑판장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터라 시력 하나는 자부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를 아예 눈 뜬 장님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거친 뱃사람에 불과한 그에게 사람들을 납득시킬 만큼 조리 있게 이야기를 풀어갈 재간은 없었다. 그런데 연신 옥신각신하던 그들을 쳐다보던 눈동자 한 쌍이 있었다. 로브를 뒤집어 쓴 채 주점 구석에 술잔을 기울이던 자의 것이었다. '재미있군. 날 본 자가 있다니?' 고개를 들자 영롱한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 아래 드러난 얼굴은 정말 수려하다고 할 수 있는 얼굴이었으니. 그의 정체는 바로 데이몬이었다. 마침내 그가 아르카디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신대륙이라. 그래도 이곳의 인간들은 살 만한 것 같군.' 무척 오랜만에 인간들 틈에 끼이게 된 터라 데이몬은 연신 고개를 돌려 주위의 정경을 감상하기에 바빴다. 뼈만 앙상한 리치들 사이에서 바짝 긴장한 채 오백 년을 살아왔던 터라 오랜만에 취하는 휴식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반가웠던 데이몬이었다. 노스우드에서 데스 나이트 넷을 거둔 뒤 데이몬은 그 즉시 서쪽 해안으로 이동했다. 또다시 떠돌이 오크의 모습으로 변용한 탓에 데이몬은 비교적 무난하게 아르카디아에 접한 해안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르키스의 추적을 염려한 때문에 그는 공간이동을 하진 못했다. 아니 베르키스가 수면중인 사실을 알았더라도 공간이동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르카디아의 좌표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데이몬은 바다를 건너가기 위해 상당히 고심해야 했다. 그러던 중 그의 눈에 우연히 해안으로 다가온 킹 서펜트 한 마리가 눈에 띄었으니……. "잘 되었군." 데이몬은 즉시 마법을 펼쳤다. 그것은 서펜트로 하여금 자신을 동족으로 생각하게 하는 현혹 마법이었다. 물론 그가 펼친 마법은 정통 마법보다 효과 면에서 월등히 뛰어난 것이었다. 거기에는 뱀의 심령을 조종하는 영사술이 가미되었기 때문이었다. 영사술(靈蛇術). 뱀을 이용해 적의 접근을 막고 또한 적의 이목의 흐리는 목적으로 중원에서 즐겨 사용되는 술법이다. 물론 이것은 배교 이외에도 많은 집단들이 사용했다. 특히 힘이 약한 하오문같은 방파에서는 문도들에게 기본적으로 숙지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사술의 종주문파인 배교의 술법이 효과 면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덩치가 크기는 했지만 서펜트 역시 바다뱀의 일종이었으므로 영사술이 먹혀들지 않을 순 없었다. 게다가 마법까지 병행해서 사용되었으니. 데이몬의 의도는 오래지 않아 이루어졌다. "캬오오오." 가까이 다가와 머리를 숙인 서펜트를 보며 데이몬은 쉽게 바다를 건너갈 수 있으리란 사실을 직감했다. 킹 서펜트라면 바다에서만은 무적이라 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물론 드래곤을 빼고……. 킹 서펜트 덕택에 데이몬은 무척 수월하게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서펜트는 그 어떠한 쾌속선도 낼 수 없는 빠른 속력으로 트루베니아와 아르카디아 사이의 바닷길을 가로질렀다. 데이몬은 무척 느긋하게 바다의 정경을 감상했고 먹고 자는 것은 모조리 서펜트의 머리 위에서 해결했다. 간혹 인간의 냄새를 맡은 상어 따위가 다가왔지만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어들은 데이몬이 타고 있는 킹 서펜트를 보자마자 꽁지가 빠지게 줄행랑을 쳤다. 그것은 다른 서펜트들도 마찬가지였다. 만용을 부려 가까이 다가온 서펜트 한 마리가 그대로 킹 서펜트의 위장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며 데이몬은 자신이 탈것 하나는 잘 골랐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정확히 57일만에 데이몬은 아르카디아의 땅을 밟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수고했다." 바다를 건네준 킹 서펜트를 돌려보낸 뒤 데이몬이 찾은 곳은 바로 주점이었다. 오백 년 만에 마실 수 있게 된 터라 술 단지에 묻히고 싶은 생각이 정말 간절했다. 또한 말린 고기만 먹어왔던 까닭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에겐 돈이 없었다. 인크레시아의 속에는 분명 가치를 논할 수 없는 보물들이 그득할 테지만 지금 데이몬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좌표를 몰라 꺼낼 수가 없는 것이다. 리치였던 그에게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젠장 어떻게든 되겠지?" 술 생각이 간절했던 탓에 데이몬은 그만 무전취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허름한 주점 하나를 찾아 들어간 데이몬은 닥치는 대로 음식과 술을 시켰다. 별로 비싸 보이지 않는 음식이었지만 지금껏 말린 고기만 먹어왔던 데이몬에겐 별미일 수밖에 없었다. 삶은 고래고기와 생선 수프. 그리고 뱃사람들이 즐겨먹는 럼주를 시킨 데이몬은 그야말로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그런 뒤 툭 튀어나온 배를 두드리고 있는데 우연찮게 자신을 목격한 뱃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재미있군. 날 본 자가 있다니…….' 배를 채우고 나자 고민거리가 밀려들었다. 물론 그에겐 술값을 계산할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결국 그는 애꿎은 육체의 원래 주인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놈. 고위급 귀족 같은데 주머니에 돈이 한 푼도 없다니……." 툴툴거린 데이몬은 몸을 일으켰다. 아직까지 떠돌이 오크의 복장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행색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남루했다. 팔꿈치와 무릎밖에 오지 않는 지저분한 가죽옷에다 허름한 배낭. 만약 뱃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반바지를 입고 있지 않았다면 즉시 미치광이로 간주될 차림새였다. 그 상태 그대로 데이몬은 출구 쪽으로 향했다. 출구 옆의 카운터에는 상당히 당차 보이는 젊은 여자 하나가 버티고 있었다.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는 모습이 자신에 대해 이미 일말의 의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데이몬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어디 몸으로 한 번 때워볼까?" 사실 그에겐 곤경을 헤쳐나갈 방법이 많이 있었다. 그의 장기인 마법을 사용한다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이다. 간단하게는 최면술을 걸던가 아니면 돌을 은화로 보이게 하는 현혹마법을 걸면 된다. 그 이상의 방법을 쓰고 싶다면 인비저빌러티를 시전해서 슬쩍 빠져나가면 그 뿐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다.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에게 마법을 쓴다는 것은 심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비록 사파 고수이긴 했지만 과거에 그는 무공을 모르는 사람에겐 살수를 쓰지 않는 전형적인 무림인이었다. 그것 때문에 데이몬은 마침내 몇 대 맞아주는 것으로 술값을 치르려고 마음먹었다. 데이몬이 다가가자 술집 주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출입구 앞을 막아섰다. "많이 드셨군요. 모두 25동화되겠습니다." 25동화가 얼마나 되는 금액인지 몰랐지만 애당초 상관없는 일이었다. 데이몬은 쑥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생각해 보니 돈이 없군." 상당히 황당해 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여인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일을 많이 겪어본 듯한 반응이었다. 데이몬의 아래위를 한 번 훑어본 여인은 주방 쪽을 향해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오빠! 이리 나와봐요." "무슨 일이지?" "오랜만에 무전취식하는 놈이 걸렸어요. 손을 좀 봐줘야겠는걸요." "알았어." 걸쭉한 대답과 함께 덩치 큰 사내 하나가 앞치마를 두른 상태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근육이 울퉁불퉁한 힘깨나 쓰게 생긴 건장한 사내였다.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손님들의 시선이 일시에 집중되었다. 밀가루를 미는 봉 같은 것을 들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내를 본 데이몬의 얼굴에 재미없다는 듯한 빛이 떠올랐다. '젠장. 제대로 맞으면 성치 못하겠어.' 선선히 맞아주려고 생각했던 데이몬은 마음을 바꿨다. 그는 은근슬쩍 마나를 끌어올려 전신에 프로텍팅(Protecting)을 걸었다. 물리적인 타격에서 몸을 보호해주는 보호 마법. 이것이라면 사내의 힘이 아무리 좋더라도 자신에게 타격을 가할 수 없음은 기정사실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데이몬은 다가오는 사내에게 씩 미소를 지어주었다. "미안하군.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하도 배가 고파서 말이야." "이런 빌어먹을 놈이……." 사내는 더 이상 사정 봐줄 것도 없다는 듯 데이몬의 멱살을 쥐고 들어올렸다. 그 바람에 두건이 벗겨져 수려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 때 짤막한 경악성이 바로 옆에서 터져 나왔다. "흡." 경악성은 바로 사내를 불러낸 여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사내에게 단단히 멱살을 잡힌 데이몬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제대로 씻지 않아 지저분했지만 먼지가 옥을 가릴 수는 없는 법. 항구도시에서 여간해선 보기 힘든 미남자의 모습에 여인은 마치 넋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34회. 데이몬의 얼굴을 주시하던 여인이 다급하게 고함을 질렀다. "자, 잠깐. 오빠." 막 데이몬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려던 사내가 잠시 멈칫했다. "무슨 일이지? 마리네." "가만 생각해 보니 그분의 사정도 이해가 되네요.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무슨 소리야? 얼굴이 제법 곱상하긴 하지만 이런 놈은 혼줄을……." "그만하고 그 사람을 내려놓으세요. 안 그러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사내는 머쓱해진 표정으로 데이몬을 내려놓았다. 뜻밖의 상황전개에 얼떨떨해진 데이몬에게 여인이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미리 얘기를 하시지 그랬어요? 그렇게 배가 고프셨나요?" "지, 지금은 아니오." 떠듬떠듬 내뱉는 데이몬을 향해 여인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훅훅하고 내뿜는 숨결이 생생히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앞으로 식사를 하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이리로 오세요. 제 이름은 마리네랍니다." 얼떨떨한 기색으로 두 사람을 둘러보고 있던 사내는 그때서야 상황을 눈치챘다. '이 계집애가 설마…….' 남루한 꼴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놈의 용모는 남자인 자신이 보기에도 빼어났다. 험한 바다 사나이에게만 둘러싸여 있던 동생이 언제 이런 미남을 보았을까 하는 생각 또한 들었다.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험험. 이거 미안하오. 요즘 하도 나쁜 놈들이 많아서." 갑자기 돌변해버린 상황에 데이몬은 미칠 지경이었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덤비던 두 남녀의 태도가 이렇게나 변하다니…… "여행자신 듯 한데 숙소는 정하셨나요?" "아, 아니 아직." "그럼 저희 집에서 주무세요. 숙박비는 받지 않을 테니……." "그, 그래도 되겠소?" 마리네는 떠듬떠듬 대꾸하는 데이몬을 억지로 떠밀어 2층에 올려보냈다. 그 와중에서 보여지는 눈초리에 여간 난처하지 않았던 데이몬이었다. 하지만 웃는 낯에 침을 뱉을 순 없는 노릇이라 그는 조용히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물을 받아놓을 테니 씻으신 뒤 푹 쉬도록 하세요." 살짝 눈웃음을 보낸 뒤 마리네는 얼떨떨한 기색의 데이몬을 남겨놓고 문을 닫았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마리네에게 사내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어떻게 하려는 것이냐? 마리네." "아잉, 오빠는 다 알면서……." 마리네가 슬며시 얼굴을 붉혔지만 사내는 쉽사리 마음을 놓지 못했다. "얼굴은 곱상하다만 놈의 정체를 모르지 않느냐? 어디 나쁜 짓을 하고 도망쳐 온 놈일지도 모르잖아. 그러니 섣불리 마음을 주는 것은……." "괜찮아요. 그 사람의 맑은 눈빛은 결코 나쁜 짓을 하고 도망 다니는 것이 아니란 것을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었어요."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사내는 계속해서 마리네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자고로 사랑에 빠진 여자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사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주방에 들어가야 했다. 다시 카운터에 앉은 마리네의 마음은 어느덧 콩닥콩닥 뛰어오르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일까? 옷차림을 봐서 부근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예상이 틀렸구려. 아가씨. 나쁜 짓을 하고 도망쳐 온 것이 맞으니 말이오." 천리지청술을 펼쳐 아래층의 대화를 모조리 엿들은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잘 생긴 용모 탓에 곤경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게 결코 반갑지 않았던 데이몬이었다. 물론 그에겐 이런 대접이 결코 친숙하지 않았다. "젠장. 여자들이란 정말 이해하지 못할 족속들이라니까……." 지금껏 그가 여자들에게 받았던 대접을 한 마디로 축약하자면 경멸이라 표현할 수 있었다. 추악한 외모를 타고 난 탓에 데이몬은 지금까지 그 어떤 여자에게도 다정한 눈빛을 받아보지 못했다. 오로지 다프네말고는 그런 눈빛을 보내는 여자는 없었다. 바로 그것 하나 때문에 데이몬이 다프네를 그리 끔찍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용모를 바꾸자마자 바로 대접이 틀려지다니……. "결코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니군. 지금의 얼굴은 엄연히 따져 내 것이 아니니 말이야." 다시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데이몬은 생각을 바꿨다. 다른 용모로 살아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받은 대접과 판이하게 다른 대접을 받는 것. 그것을 위해 데이몬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로 결심했다. "우선 돈이 필요하겠군." 그는 우선 문을 잠궜다. 그가 이제부터 하려 하는 일은 결코 누가 엿봐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다음 데이몬은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그는 지금 드래곤들에게서 탈취한 보물을 조금 사용하려는 것이다. 쓰쓰쓰쓰 공간의 입구가 열리자 데이몬은 거기다 대고 냅다 고함을 질렀다. "이봐! 거기 누구 없어?"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계속해서 이름을 불러댔다. 그가 인크레시아에 들여보낸 데스 나이트들의 이름을 말이다. "헬버트론. 라인델프. 프림베르그, 이봐 사라미스." 한참 만에야 대답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데이몬." 음성으로 봐서는 누구인지 분간할 도리가 없었다. 공간 저쪽에서 들려오는 것이라 그런지 데스 나이트의 음성이 공명되지 않는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넌 누구지?" "난 사라미스야. 나머지 녀석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금방 오지 못할 거야. 이 안이 워낙 넓어서 말이지. 얼마나 넓은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야. 가서 놈들을 불러줄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사라미스를 말린 데이몬은 곧 요구사항을 이야기했다. 보석이 필요하단 말에 사라미스는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딴 것을 부탁하려고 우릴 부른 거야?" "안 그러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금화나 은화 중에서 찾은 게 있으면 좀 건네다오." "젠장. 금이나 은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어. 음 한가지 있긴 하군. 여기서 발견했는데 이것으로 되려나 모르겠군……. 조금 뒤 인크레시아의 입구를 통해 무언가 찬란한 빛을 내뿜는 것이 던져졌다. 그것은 전체가 눈부신 보석으로 뒤덮여 있는 커다란 왕관이었다. 데이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건 트란벨 왕국의 왕관이군. 이걸 여기서 어떻게 팔아먹지? 다른 것은 없어? 좀 덜 귀해 보이는 것 말이야." "잠깐 기다려봐."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이번에는 목걸이 하나가 던져졌다. 사라미스가 상당히 고른 티가 나긴 했지만 그것 역시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어른 손톱 만한 진주를 수십 알 꿰어만든 데다 가운데에는 어린아이 주먹만한 루비가 박혀 있었다. 데이몬의 얼굴에 어쩔 수 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할 수 없지. 풀어서 판다면 가능할지도……. 이봐 사라미스. 수고했어." "앞으론 이런 일로 부르지 말라고……." 잔뜩 골이 난 듯한 음성과 함께 사라미스의 기척이 사라졌다. 한숨을 내쉰 데이몬은 트란벨 의 왕관을 다시 속으로 던져 넣고 인크레시아를 닫아버렸다. "빌어먹을 놈. 데스 나이트가 되었어도 성질은 여전하군." 잠시 씨근거리던 데이몬은 몸을 일으켰다. 우선 나가기 전에 목욕이나 할 심산이었다. "이것 받으시오." "어머나. 이게 뭐죠?" 데이몬이 불쑥 내민 진주를 보자 마리네의 눈동자가 왕방울만 해졌다. 상대가 내민 것은 한 눈에 보기에도 극상품의 진주였다. 비록 구멍이 뚫려 있어 가치가 다소 떨어질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크기를 봐서 결코 만만히 생각할 물건이 아니었다. 돈 한 푼 없을 것 같은 남루한 차림새의 여행자가 내놓을 물건이 아니란 뜻이다. 놀라는 마리네를 보며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숙박비라 생각하시오. 원래는 처분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당신의 고운 마음씨에 내가 반한 것 같소." "저, 정말이에요?" 마리네의 얼굴은 삽시간에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마음을 두고 있는 사내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가슴이 뛰어 도저히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쳐다보는 데이몬의 눈동자에는 오로지 냉정함만이 가득했다. '저 여인은 오로지 껍데기에만 현혹되어 있는 것이다. 진정하자 데이몬.' 어쩔 줄 몰라하던 마리네를 보다 못해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데이몬이 내민 진주를 집어들고 유심히 살폈다. '구멍이 뚫린 것을 봐서 목걸이에서 풀어낸 것으로 보이는데 진품은 틀림없군. 그나저나 이 정도 크기의 진주를 꿰어 목걸이로 만들었다면 원래는 대단한 물건이었겠는걸?' 순식간에 진주의 진위여부를 파악한 사내는 곤혹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 진주라면 식대와 숙박비의 열 배도 넘습니다. 아마 거스름돈이 없을 텐데……." "괜찮소. 있는 대로 주고 나머지는 그냥 가지시오. 당신들의 선행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하겠소." "그,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사내는 데이몬의 마음이 변할까 두렵다는 듯 서둘러 돈이 들어있는 통을 털었다. 진주를 감안한다면 속의 돈을 모조리 건네주더라도 확실하게 남는 장사였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오빠가 야속하다는 듯 마리네가 연신 눈을 흘겼지만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 눈에 보아도 동생의 배필감이 아니었으므로 현실적으로 행동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돈이 든 주머니를 건네 받은 데이몬은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럼 난 가보겠소." 등으로 마리네의 시선이 꽂히는 것이 느껴졌지만 데이몬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걸음을 옮겼다. 그가 나가자 반사적으로 따라 나가려던 마리네. 하지만 그녀는 오빠의 제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진정해라. 마리네. 저 녀석은 결코 너와 어울리지 않아. 그것은 너도 잘 알지 않니?" "오빠, 흑흑흑." 한 바닷가 처녀의 방심은 이렇게 산산이 깨어지고 있었다. "휴우. 혼났군."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생전 처음 여자의 그런 눈빛을 받아본 터라 난감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마리네의 눈빛은 다프네의 그것과는 또 달랐다. 한 눈에 보아도 한껏 들뜬 데다 자신에게 완벽히 매료된 듯한 눈빛. 물론 정말 색다른 경험임에는 분명했기에 데이몬은 시험을 계속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옷차림과 분위기를 좀 바꿔봐야겠군." 데이몬은 사내에게서 받은 주머니의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절그렁. 예상과는 달리 제법 묵직했다. 데이몬은 그것을 들고 일단 가까운 옷가게를 찾았다. 오랜만에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이상 그에 걸 맞는 옷을 입는 것이 급선무였다. 물론 변한 용모에 어울릴 만큼 말이다. 시내 중심부로 걸어 들어간 데이몬은 그곳에서 가장 화려한 옷가게를 골라 들어갔다. "모두 얼마요." "헤헤헤. 다 해서 2실버 50동화되겠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주인이 어울리지 않게 헤실헤실 웃으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자기 가게의 한달 매출을 일시에 올려준 특급 손님이었던 것이다. 데이몬이 처음에 남루한 차림새로 들어섰을 때 주인은 무척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상대의 모습은 한 눈에 보기에도 빌어먹는 거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몬이 묵직해 보이는 돈주머니를 탕 소리내며 탁자에 올려놓았을 때 주인의 태도는 180。 바뀌어버렸다. "이 가게에서 가장 고급 옷으로 한 벌 대령하시오. 당신이 봐서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릴 듯한 옷으로 말이오." 허름한 차림새의 데이몬이 얼굴을 가린 두건을 벗어 던졌을 때 주인은 또 한 번 놀라야 했다. 상대의 용모가 옷차림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헤헤헤. 이를 데가 있겠습니까?" 주인은 말 그대로 열과 성의를 다해 데이몬의 차림을 코디해 주었다. 물론 가게에서 가장 비싼 옷들로만 말이다. 오랫동안 옷가게 주인을 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데이몬의 외모를 단연 돋보이도록 차려 입혔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35회. 연참입니다.^^ *************************************************************************** 코디가 끝나자 데이몬은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몸에 걸친 값비싼 옷에 전혀 손색이 없는 용모를 가진 귀공자로 말이다. "여기 있소." 데이몬은 묵묵히 대금을 지불하고 나왔다. 그러고도 주머니 속의 돈은 반이나 남아있었다. 걸어가던 도중 데이몬은 돌연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꽃단장인가." 사실 그의 원래 정체는 500살이 넘은 늙은이였다. 하지만 겉모습은 그와 전혀 딴판이었다. 귀족들이나 입는 실크 셔츠에 최고급 복장을 받쳐입은 그의 모습은 황궁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귀족 귀공자였다. 그 상태로 데이몬은 페이류트의 시내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어머. 저것 봐." "세상에……. 저런 미남자가 있었다니." 길을 가며 마주치는 여인들의 눈동자가 삽시간에 몽롱해졌다. 그녀들이 지금껏 살아오며 단연코 제일이라 칭할 수 있는 미남자를 보게 된 것이다. 한 번 보기만 해도 넋이 빠질 정도로 데이몬의 용모는 멋들어졌다. 심지어 잡고 있던 남자친구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데이몬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이는 여인들도 있었으니……. 데이몬은 그 모든 여인들에게 슬쩍 미소를 흘리며 대로를 걸어 올라갔다. "어머나. 날 보고 웃었어." "손이라도 한 번 잡아봤으면……." 데이몬의 미소를 접한 여인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했다. 옷차림과 외모, 뇌쇄적인 미소까지 말 그대로 완벽한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럴수록 남자들의 시선이 사납게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진리였다. 외모로는 상대가 되지 않으니 다른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것이다. 여자친구에게서 매정하게 뿌리침을 받은 사내 하나가 결국 데이몬에게 앙심을 품고 말았다.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마음먹은 듯 그는 일부러 데이몬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지?" 사내는 불문곡직하고 어깨로 몸을 부딪쳐왔다. 퍽. 데이몬이 별로 힘을 주지 않은 상태였지만 상대는 마치 밀쳐진 듯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날렵하게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고 고함을 질렀다. 예기를 줄기줄기 발하는 상당히 좋은 검이었다. "이놈! 감히 날 밀치다니……. 모욕을 받은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검을 뽑아라." 사내는 제법 서슬이 퍼렇게 으르렁거렸다. 물론 거기에는 데이몬을 낭패하게 만들 심산이 다분했다. 자세를 보아 제법 검을 잡아 본 듯 보였지만 데이몬의 눈에는 영락없는 풋내기에 불과했다. 하도 기가 막혀 데이몬은 실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웃겨서 말이 안나오는군." "거기에다 날 비웃기까지? 이놈!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지 않는다면 넌 오늘 이곳에서 살아날 수 없다." 기세 좋게 고함을 질렀지만 보고 있던 데이몬에겐 실소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저런 천둥벌거숭이에게 약이 될 것은 오로지 몽둥이 찜질밖에 없다는 사실을 데이몬은 잘 알고 있었다. "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나에겐 검이 없는데 말이야." "………." "결투를 벌이려는 것 같은데 나에게 검 한 자루 빌려주지 않겠나?" 상대의 대범한 태도에 사내는 못내 찜찜한 표정이었다. 당차게 나오는 것을 보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수가 없었기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데이몬의 발치에 검 한 자루를 집어던졌다. "결투다. 이것은 서로 합의 하에 이루어지는 결투이므로 어느 한쪽이 죽더라도 처벌되지 않는다는 사항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런 사항이 있었나?" 데이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검을 집어들었다. 그의 주변에는 이미 구경꾼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그들의 태도가 성별에 따라 판이하게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여인들의 눈빛에는 데이몬을 걱정하는 빛이 가득했으며 대조적으로 남자들은 데이몬이 당하기를 기원하는 듯 보였다. 거기에는 그들이 사내에 대해 알고 있는 상식도 큰 몫을 했다. 시비를 걸고 있는 사내는 이곳에서 상당히 이름을 날리는 검사(劍士)였기 때문이었다. 검을 집어든 데이몬을 보며 사내는 이를 으스러져라 악물었다. '얼굴만 곱상한 놈이 검을 수련했을 리는 없다. 설사 수련했다 하더라도 기사학부에 다닌 날 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그는 기사학부를 완전히 수료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돈 많은 부친을 둔 까닭에 입학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지만 워낙 자질이 떨어지는지라 그는 결국 수료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정식 기사가 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변방이라 할 수 있는 페이류트에서 중앙의 기사 학부에 들어가기란 정말 하늘의 별 따기였으므로……. "그럼 공격하겠다." 제법 자세를 가하려던 사내의 눈이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 상대의 검에서 솟아오른 현란한 청색 빛무리를 보고 난 후의 일이었다. "오, 오러 블레이드. 세, 세상에……." 그는 채 말을 마치지도 못하고 다리를 달달 떨기 시작했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후회가 물밀 듯 밀려들었다. 정황을 보아 상대는 팔라딘이 확실해 보였다. 기사학부를 정상적으로 수료하고 10년 이상을 검술에 매진한 자들 중에서 단 10%도 될까말까 한 고급 기사인 팔라딘. 기사학부에서 자신을 가르치던 교관들도 저처럼 찬란한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하지 못했기에 그의 용기는 마치 물에 씻은 듯 사라져버렸다. "파, 팔라딘이었소?" "팔라딘? 글쎄? 그것보다는 소드 마스터라 불러야 옳지 않을까?" 아르카디아의 사정을 모르는 데이몬으로써는 당연한 대답이었다. "소……." 말을 하다 말고 사내는 몸을 돌려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미 체면이고 뭐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상대가 팔라딘이라도 승산이 아예 없는 판국인데 그보다 훨씬 강하다고 알려진, 그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소드 마스터라니……. 그에게 선택할 길은 오로지 도망 밖에는 없었다.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뒤에서 뭐라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사내에게는 그것을 들을 여유가 없었다. "이봐! 검을 가지고 가야지."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는 사내를 보고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살짝 혼만 내주려고 시도한 일이었는데 효과가 너무나도 컸다. 데이몬은 검에서 슬며시 오러 블레이드를 풀었다. 물론 그것은 진짜가 아니었다. 암암리에 섬광과 함께 환영마법을 전개해서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한 것뿐이었다. 물론 진짜 소드 마스터가 보았다면 그 차이점을 대번에 지적했겠지만 애석하게도 이곳에서 그것을 분간할 만한 안목을 가진 자는 없었다. "원 녀석. 검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아 넣은 데이몬은 사내의 여자친구로 짐작되는 여인에게 걸어갔다. "아까 그 자가 당신의 남자친구 맞소?" 예상외로 여인은 매몰차게 그 사실을 부인했다. 상당한 미모를 가진 것으로 보아 사내가 검을 뽑아들 법도 했다. "아니에요. 보지도 못한 사람인걸요? 제겐 남자친구가 없어요." "허 그렇소. 낭패로군. 검을 돌려줘야 할 텐데……. 한 가지 부탁해도 되겠소?" 여인은 최대한 아름답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혹시라도 그 자를 만나게 된다면 이 검을 전해주시오. 나 원 참. 싸움을 먼저 걸어놓고 도망치다니 어이가 없군." 검을 여인에게 건네준 뒤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등으로 수많은 시선이 와서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우선 열렬한 애모가 담겨있는 것은 여인들의 시선이었고 질투심과 함께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강자에 대한 경외심이 담겨 있는 것은 남자들의 것이었다. 그렇게 상반된 시선이 교차하는 가운데 데이몬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사람들의 새로운 반응에 대해 데이몬이 진력을 내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여러 사내들의 결투신청이 이어졌기에 데이몬은 그때마다 마법을 써서 가짜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어내야 했다. 물론 결과는 한치의 틀림도 없이 대동소이했다. 하지만 그 탓에 행로가 많이 지체되었고 처음에는 색달라 보이던 여인들의 반응도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이것도 할 짓은 못되는군."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는 다섯 번째 사내를 보며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했지만 이젠 슬슬 싫증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차라리 예전의 경멸 어린 시선이 그에겐 더 편할 듯 싶었다. 수십 년 동안 단련되었기에 그만큼 더 친숙했던 것이다. 새로운 용모로 인한 데이몬의 관심은 그때부터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둬야겠군." 데이몬은 마침내 드러나지 않는 용모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어딜 가나 여인들이 졸졸 따라다녔기에 그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데이몬은 근처에 보이는 여관에 들어서고 나서야 그녀들의 집요한 추적을 피할 수 있었다. 방에 들어선 데이몬은 먼저 사환을 불렀다. 열 서너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환아이가 주뼛거리며 다가왔다. 한 눈에 보아도 데이몬의 외모에 잔뜩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데이몬은 사환에게 동전 몇 닢을 건넸다. "너 이 길로 옷가게에 가서 두건이 달린 로브를 한 벌 사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조금 뒤 데이몬은 판이하게 달라진 모습으로 여관을 나섰다. 여관의 앞에는 데이몬을 한번이라도 보기를 원하는 여인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데이몬을 알아보지 못했다. 로브를 깊숙이 뒤집어 쓴 덕택에 데이몬은 모처럼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여관 앞에서 아우성을 질러대는 여인들을 흘겨보며 그는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차림새를 하지 않겠다." 조금 전의 일을 통해 여인들에 대해 환멸감까지 치밀어 올랐던 데이몬이었다. 한낱 껍데기에만 현혹되는 여인들의 안목은 언제 보아도 한심했다. 그 누구도 진면목을 보려 하질 않는 것이다. "진정으로 날 아껴주는 여인은 오직 다프네밖에 없다. 오직 그녀만이 내 진면목을 알고 있지." 이미 데이몬의 마음은 비 온 후의 땅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상태였다. 다프네 이외의 여인을 사랑해 볼 마음이 전혀 없었다. 데이몬은 그 결심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 마음은 오직 다프네를 향할 뿐이다. 기다려라 다프네. 아저씨가 꼭 널 구해줄 테니." 나직이 다짐하며 데이몬은 여인들 사이를 헤치며 걸음을 옮겼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36회. 그 이후로 데이몬은 평탄한 여행을 계속해 나갔다. 로브로 얼굴을 가린 덕분에 여자들의 관심을 끌지 않았고 그 덕에 사내들의 결투신청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던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여행자들이 가장 즐겨 입는 복장인 로브 덕분에 데이몬은 홀가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그 상태로 데이몬은 내륙 쪽으로 계속해서 여정을 이어나갔다. 우선 아르카디아를 여행하며 절실히 느낀 점은 치안이 완벽하게 유지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실 트루베니아에서는 여행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온갖 몬스터는 물론이오 심지어 산적(Bandits)들까지 여행자의 재물과 목숨을 노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트루베니아에서 오래 살려면 결코 여행을 하지 말라는 속설까지 나돌 정도였다. 여행을 많이 다녀본 덕분에 데이몬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카디아는 달랐다. 여행을 시작한 한달 남짓 동안 데이몬은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보지 못했다. 물론 산적의 습격도 없었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접경지에는 완벽한 경비망이 갖춰져 있었다. 그리고 다소 후미지다 판단되는 곳에는 어김없이 경비초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경비대원들의 얼굴에 긴장감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지금 데이몬을 보고 다가온 경비대원의 얼굴에도 보기 좋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좋은 날씨입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아르키아 방면으로 갑니다만." 얼마 전 15실버를 주고 구입한 지도에서 지명 하나를 골라낸 데이몬이 짧게 얼버무렸다. 하지만 경비병은 목적지에 그리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억양이 낯선 것을 보니 부근의 분이 아니신가 보군요. 그럼 좋은 여행되십시오." 웃는 낯으로 인사하는 경비대원의 태도에서 데이몬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르카디아의 치안이 완벽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잠시 얼떨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데이몬은 나지막이 뇌까린 뒤 걸음을 옮겼다. "무척 재미있는 현상이군." 이럴 경우 트루베니아의 경비대원들은 결코 여행자를 통과시키지 않는다. 혼자 다니는 여행자는 몬스터나 산적의 좋은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숫자 이상이 모여야만 통과를 허락하는 것이 관례였다. 여행을 많이 다녀본 덕분에 데이몬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에겐 별로 좋은 현상이 아니라 봐야하나?" 지금 그가 찾는 곳은 인적이 전혀 없는 심산유곡이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연구를 계속해서 기필코 데스 나이트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야 했던 데이몬이었다. 그래야만 드래곤에게 대적할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필수였다. 만약 어둠의 마력을 끌어 모으고 있다는 사실이 퍼져나간다면 아르카디아의 군대가 벌떼처럼 몰려올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물론 당해내지 못할 바는 아니겠지만 상당히 귀찮아지겠지?" 고개를 앞뒤로 뒤흔든 데이몬은 걸음을 옮겼다. 해안지방은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기 때문에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륙의 산간 지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옳을 듯 했다. 꼬박 하루를 걸은 후에야 데이몬은 해안지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앞에는 번화한 도시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하여 교역도시 로르베인.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요충지에 지어진 곳으로써 지역적 이점으로 인해 나날이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도시였다. 내륙과 해안의 특산품이 바로 이곳에서 거래되었다. 그 과정에서 거둬지는 세금이 바로 로르베인을 살찌우는 원천이었다. 또한 상인들과 더불어 내륙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해안으로 나오려는 여행자는 빠짐없이 이곳에 들러 물품을 구입해야 했다. 오랜 여정을 위해서는 여행에 필요한 물품의 구입은 필수였고 부근에서 이 정도 큰 시장을 가진 도시는 로르베인 이외에는 없었다. 그런 여러 가지 제반 여건으로 인해 로르베인은 페이류트에도 뒤지지 않을 규모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잘 정돈된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데이몬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루비와 나머지 진주를 파는 게 나을 것 같군." 지금까지 그가 거쳐온 곳들은 페이류트를 제외하곤 하나같이 규모가 작은 마을이었다. 그런 이유로 데이몬은 보유한 진주를 무척 싼 가격에 넘겨야 했다. 작은 보석상이라 충분한 대금을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그저 되는 대로 진주를 팔아 넘겼다. 여행할 경비만 충당되면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루비를 처분할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보석에 대한 안목이 없는 데이몬이 보기에도 루비는 엄청나게 비싸 보이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로르베인의 보석상이라면 충분히 루비를 매입할 수 있을 듯 싶었기에 데이몬은 남은 보석을 이곳에서 모조리 처분해버리기로 마음을 굳혔다. "여비는 충분할수록 좋을 테니……." 행로를 결정한 데이몬은 멀리 보이는 로르베인을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교역도시답게 로르베인은 여타의 도시와는 판이하게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앞뒤로 하나씩 달려있는 문 외에 온통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일반적인 도시와는 달리 로르베인은 도시 외곽에 소규모 방어용 요새만을 가지고 있는 완전 개방형 도시였다. 다시 말해 도시의 동서남북 끝자락에 4개의 요새가 설치되어 있고 성곽이 없는 전형적인 교역도시인 셈이다. 그런 탓에 드나드는 것이 무척 자유로왔다. 물론 방어에 있어서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지만……. 오랜 전쟁경험 탓에 데이몬은 단숨에 로르베인의 허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선적으로 요새들을 포위해서 고립시킨다면 어렵지 않게 함락시킬 수 있겠군. 보급선을 끊어버린다면 요새의 수비병들이 오래 버틸 수 없을 테니……." 물론 보급로 확보를 위해 지하 터널을 뚫어놓았을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차단은 쉬운 편이었다.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들인다면 터널은 금세 제 구실을 못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교역도시라는 특성상 로르베인이 공격을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같은 인간끼리의 전쟁이 아닌 이상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데이몬은 천천히 로르베인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데이몬을 보자 경 무장을 한 경비병 한 명이 웃는 낯으로 다가갔다. "여행자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데이몬이 고개를 끄덕이자 경비병의 얼굴에 서린 미소가 짙어졌다. "로르베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는 목적지조차 물어보지 않고 데이몬을 통과시켰다. 오히려 도시 접경지의 수비대보다도 편하게 통과할 수 있었기에 데이몬조차 얼떨떨해 할 정도였다. 과연 교역도시의 수비대다웠다. "고맙소." 짤막하게 내뱉은 데이몬은 걸음을 옮겼다. 성벽이 없는 때문인지 곳곳에 방책과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었지만 병사들의 태도엔 긴장감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교역도시란 특성 때문에 그런 것인가?'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는 병사들을 힐끗 쳐다본 데이몬은 묵묵히 시내 쪽으로 걸어갔다. 솔직히 이곳의 방어상태에 그가 신경을 쓸 필요는 전혀 없었다. 시내에 들어간 데이몬은 바로 중심가로 향했다. 보석을 처분하기 위해서는 규모가 큰 보석상이라야 했고 통상적으로 그런 곳은 중심 가에 위치해 있는 법이다. 교역도시답게 로르베인은 무척 활기가 넘치는 도시였다. 좌판대와 상점에는 각지의 특산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팔기 위해, 혹은 사기 위해 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데이몬은 북적이는 사람들을 헤치고 다니며 보석상을 찾았다. 목적했던 보석상은 오래지 않아 눈에 들어왔다. 『로메인의 보석상(Romein's jeweller)』이라는 커다란 간판을 내건 휘황찬란한 보석상을 찾은 데이몬은 지체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무척 젊어 보이는 점원이 데이몬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를 본 데이몬은 짐짓 인상을 썼다. "자네말고 주인을 부르게. 아무래도 그것이 나을 것 같네." 점원의 얼굴에 벌레 씹은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음성을 봐서 결코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 녀석인데 대뜸 하대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손님은 왕이라는 가게 방침을 떠올리며 점원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러시면 지배인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리로 따라오십시오." 몸을 돌린 점원을 따라 데이몬은 휘적휘적 내실로 걸어 들어갔다. 덜컥. 문이 열리고 나이가 지긋한 중년인 하나가 데이몬을 맞았다. 머리가 반쯤 벗어진데다 얼굴에 개기름이 주르르 흐르는 것이 전형적인 상인의 모습이었다. 또한 연신 눈알을 굴리는 모습에서 장사에 닳고, 닳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이 가게의 지배인인 듯 싶었다. "어서 오십시오. 그런데 왜 절 찾으셨는지……." "보석을 팔러 왔소." 데이몬의 말을 들은 지배인의 얼굴에 탐탁지 않은 표정이 떠올랐다. 남루한 차림새의 나그네가 가져온 보석이 별게 있으랴,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이 보석을 내놓자 그의 반응은 돌변해버렸다. 데이몬의 손위에서 광채를 내뿜고 있는 커다란 루비를 보자마자 그는 눈이 불쑥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이, 이런 물건이……." 그는 마치 낚아채듯 루비를 받아들었다. 돋보기를 사용해서 루비를 샅샅이 관찰하기 시작한 지배인. 조금 뒤 그는 예상이 적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오랜 경험에 미루어 이것은 틀림없는 진품이었다. '틀림없어. 이 정교한 세공기술. 이것은 드워프의 세공품임에 틀림없어.' 자신의 눈이 정확하다면 이 보석은 정말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진 보물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물론 루비의 가치도 가치였지만 이것의 진면목은 다른데 있었다. 그것은 바로 누가 세공했느냐 하는 차이였다. 이것이 정녕 드워프가 만든 것이 틀림없다면 이것은 말 그대로 부르는 것이 값이었다. 루비를 들여다보던 로메인 보석상의 지배인 안토니는 지금 자신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닥쳤음을 직감했다. 우여곡절 끝에 잡은 지배인 자리를 영원히 차지할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안토니는 눈앞의 재신(財神)을 쳐다보며 나직이 각오를 되새겼다. '겨, 결코 이자를 놓쳐서는 안 돼. 얼마를 주더라도 이것을 매입해야 한다.' 자신의 오랜 경험에 미루어 루비는 드워프의 세공품이 틀림없다고 단정할 수 있었다. 드워프(Dwarf)란 작달막한 체격의 유사종족으로써 주로 산간벽지에 모여 사는 종족을 말한다. 인간과 흡사한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지만 부족 이상의 군집생활을 하지 않으며 특히 귀금속에 대한 세공기술이 뛰어난 종족이었다. 이들의 극히 섬세한 세공기술은 도저히 다른 종족이 따라갈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 세공사라 할 지라도 드워프의 솜씨는 모방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같은 재료와 같은 연장을 가지고 만들었다 하더라도 드워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물품은 어디가 달라도 달랐다. 물론 매겨지는 가치 역시 몇 배를 호가했다. 그 탓에 과거 트루베니아의 궁정에서 쓰이는 고급 물품들은 대부분 드워프들의 솜씨로 만들어져 있었다. 어지간한 왕국의 군주들은 드워프의 세공품을 소장한 사실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 전통은 고스란히 아르카디아로 이어졌다. 특이한 점은 드워프의 세공품에 대한 가치가 아르카디아에선 극에 달해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트루베니아에서도 드워프가 만든 것이라면 같은 물건이라도 족히 두 배 이상 비쌌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르카디아에서는 아무리 작게 잡더라도 열 배는 넘어서는 가치를 지녔다. 왜냐하면 아르카디아에는 극히 적은 수의 드워프만 거주하기 때문이었다. 심산유곡에서 심심찮게 드워프를 만날 수 있는 트루베니아와는 달리 아르카디아에서는 드워프를 보기가 극히 힘들었다. 워낙 수가 적은데다 아르카디아의 드워프들은 극도로 폐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 인간과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세공품을 얻기란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 탓에 드워프의 세공품은 그만 부르는 것이 값이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 트루베니아에서 가지고 온 것과 이따금 드워프 마을을 습격해서 약탈한 것 외에는 드워프의 세공품을 구할 방법이란 없었다. 물론 그것으로 여러 군주들의 소유욕을 감당하기란 턱도 없이 부족했으므로 자연히 가격이 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안토니가 들여다보고 있는 루비는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는 드워프의 세공품이었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37회. 루비의 표면을 물결 모양으로 가공한 솜씨와 주위 금장 장식의 섬세한 세공은 인간 세공사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실력이었다. 기필코 매입하리란 생각에 안토니는 심호흡을 한 번 내쉬며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래 얼마를 원하시오?" 겉으로 보이는 안토니의 표정은 속마음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별달리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심드렁하게 내뱉는 모습에는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연륜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상대하는 데이몬 역시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물론 장사를 해 본적은 없었지만 이재(理財)를 타고난 중원인이었고 눈치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가 아니던가? 살아온 경험 또한 범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기에 그는 단숨에 안토니의 속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흠. 보석의 가치가 생각 이상인가 보군.' 생각을 마친 데이몬은 안토니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상하군. 원래 매입하는 쪽에서 가격을 제시하는 것이 관례 아니오?" "생각하고 온 가격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하오. 그러니 받고 싶은 가격을 말씀해 보시오. 들어보고 적절하다 판단되면 대금을 바로 지불하도록 하리다." 능구렁이같은 돌려 치기였지만 데이몬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이런 경우 상대의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것이 정석적인 방법이었다. 데이몬은 손을 뻗어 루비를 집어들었다. "날 보석의 가치도 모르는 바지저고리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잘못 짚으셨소. 예정대로 펠젠틴에 가서 처분하는 것이 나을 듯 하구려. 하도 멀어서 그냥 이곳에서 처분하려 했는데 안 되겠……." 부스스 일어서는 데이몬의 옷깃을 부여잡는 손이 있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원 사람 성격 급하기는……." 일이 생각대로 풀려나가지 않자 안토니는 다급해졌다. 행색을 보아 보석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로 보였는데 예상외로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나그네를 보며 안토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좋소. 그럼 가격을 제시하리다." "말해보시오." 순간 안토니의 눈이 교활하게 돌아갔다. 그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적절한 가격을 떠올렸다. 루비의 진정한 가치에서는 턱도 없는 가격이었지만 나그네에겐 충분히 거금이라 생각될 만한 금액 말이다. "50골드 내겠소. 이 정도면 어떻소?" 데이몬의 머리 역시 빨리 돌아가고 있었다. 솔직히 50골드 정도라면 여행하는데 모자람은 없었다. 1골드가 100실버였고 5실버 정도면 충분히 일주일을 생활할 수 있다. 최고급 식단과 좋은 여관에서 묵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루비의 가치가 충분히 그 이상 되리라 생각되었기에 데이몬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널리고 널린 것이 보석상이었고 여러 군데 돌아다녀 본다면 루비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괜히 들어왔군." 짤막하게 내뱉으며 루비를 주머니에 집어넣는 데이몬을 보자 안토니는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좋소. 75골드 내리다. 이 정도면 내가 크게 인심 쓴 것이오." 데이몬은 두말도 않고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가 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안토니가 달려와 앞을 가로막았다. 도저히 그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는 몸놀림이었다. 손수건을 들어 이마의 땀을 닦아낸 안토니는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내가 졌소. 90골드 드리겠소." 데이몬은 아무런 말도 없이 안토니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럴 땐 침묵이 가장 좋은 협상 방법이었다. 내심 상대에 대한 괘씸한 생각도 함께 스쳐지나갔다. '빌어먹을 놈. 감히 50골드로 후려치려 해?' 부아가 치민 데이몬은 가격을 있는 대로 올려보기로 마음먹었다. 이곳말고도 보석상은 있을 테니 팔리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 데이몬을 마주보고 있는 안토니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상대가 한 마리라도 말을 한다면 좋은 협상거리가 되겠지만 침묵만을 지키고 있으니 그의 달변도 하등 쓸데가 없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안토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110골드 주겠소. 로르베인의 그 어느 보석상을 가더라도 이 이상 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증하겠소." 그래도 데이몬은 묵묵부답이었다. 그저 무표정한 눈빛으로 안토니의 얼굴을 쏘아볼 뿐이었다. 결국 안토니는 자신에게 허락된 금액 모두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드릴 수 있는 금액은 총 150골드요. 아시다시피 보석 하나의 가격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액수지. 이 이상은 절대 불가하오. 나에겐 지불할 능력도 권한도 없소." 거기까지 협상이 진행되자 마침내 데이몬의 입이 열렸다. "미안하지만 150골드로는 안될 것 같구려." "그, 그럼 도대체 얼마를……." 데이몬은 손가락 세 개를 좍 펴서 내밀었다. 그것을 본 안토니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들었다. "사, 삼백 골드씩이나?" "그 정도는 되어야 적정한 가격이라 생각되는데?" 안토니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협상이 예상외로 자신의 참패로 끝난 것이다. 물론 루비를 경매에 붙인다면 충분히 500골드 이상 받아낼 자신이 있었던 안토니였다. 드워프의 세공품은 그만큼 구하기 힘들었고 물건을 직접 본다면 부유한 귀족들이 혈안이 되어 덤빌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경매가 잘 진행된다면 700 골드이상도 충분히 가능했다. 따라서 300골드를 지불하더라도 루비를 구입해야만 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안토니에게 그럴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엄연히 고용인이었고 그가 지불할 수 있는 금액에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보석상의 금고를 모두 털더라도 300골드가 되지 않았기에 그는 결국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안색을 굳히며 상대의 눈을 쳐다보았다. "좋습니다. 그 가격에 매입하겠습니다. 하지만……." "………." "제겐 그 금액을 지불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 보석상의 소유주이신 로메인 남작님께 함께 가 주시겠습니까? 그분께서는 능히 300골드를 지불하실 능력이 있습니다." "당신이 보석상의 주인이 아니었소?" "전 단지 고용인일 뿐입니다. 소유권은 엄연히 로메인 남작님께 있지요." 쓸쓸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안토니를 보자 자신이 너무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300골드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만약 상대가 바로 150골드를 불렀다면 그냥 팔아 넘겼을 터였다. 하지만 지배인의 약삭빠른 태도 탓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결국 데이몬은 그를 따라 로메인 남작을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좋소. 한 번 만나보리다." "감사합니다. 이리로 오십시오." 안토니는 무척 공손한 태도로 데이몬을 안내했다. 굽실거리며 데이몬을 모시고 나온 안토니는 점원들에게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지급이다. 지금 즉시 마차를 준비해라." 영문을 모른 점원들이 부산하게 움직였고 보석상 앞에는 곧 4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대기되었다. 측면에 로메인이란 상호가 새겨져있는 화려한 마차였다. "타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은 마차에 올랐다. 마부 옆자리에 올라탄 안토니는 서둘러 마부를 재촉했다. "빨리 남작님의 저택으로 가자." "예. 이랴." 데이몬을 태운 마차는 대로를 통해 시 외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약 한 시간 정도 달리자 데이몬의 앞에 무척 화려한 저택이 펼쳐졌다. 정원만 해도 산 하나는 충분히 될 것 같은 거대한 저택이었다. 특이한 것은 저택의 정문에 어마어마할 정도로 중무장을 한 경비병들이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경비병들은 하나같이 체인 메일 위에 하프 플레이트 메일을 받쳐입고 있었고 건틀릿과 정강이 받이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로르베인 외곽의 방어를 맡은 병사들보다도 더한 무장이라 볼 수 있었다. 거의 귀족 자제들로만 구성된 중장 보병을 떠올릴 정도로 말이다. 그들을 훑어본 데이몬은 얼굴을 찡그렸다. "로메인 남작이란 작자가 돈이 무척 많은가 보군. 문지기들에게 저 정도로 차려 입힌 것을 보니……." 무심코 흘러나온 말에 기분이 상할 법도 하건만 안토니는 과연 상인이었다. 자신의 고용주를 모욕하는 말에도 그는 웃음을 흘렸다. "명실상부한 로르베인 제일의 거부이시지요. 이곳 부(副)의 20%를 한 손에 틀어쥐고 계신 분이랍니다. 로르베인 시의 시장도 감히 그분의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자신의 실책을 알아차린 데이몬이 짐짓 헛기침을 했다. "그, 그렇소?" "제가 맡고 있는 가게뿐만 아니라 요지의 점포 일 백여 개가 그분의 소유입니다. 물론 보석상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분께서 보유하고 계시지요." "놀랍군." 짧게 내뱉은 데이몬은 시선을 창 밖으로 던졌다. 정원이 얼마나 큰지 정문을 통과한지 5분이 넘었어도 아직까지 저택이 보이지 않았다. 저택의 주인을 떠올려보던 데이몬은 얼굴을 찡그렸다. '이 정도 부를 축척할 정도면 나쁜 짓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 물론 그가 얼마나 나쁜 놈이던 간에 데이몬이 상관할 일은 없었다. 보석을 넘겨주고 대금만 받아내면 그 뿐이었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작정한 데이몬은 좌석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열심히 달려가는 마차 앞엔 화려함의 극치라 표현할 수 있는 저택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많이 기다렸소이다." 걸쭉한 음성과 함께 누군가가 들어서자 데이몬은 고개를 돌렸다. 저택에 들어선 뒤 화려하게 장식된 응접실로 안내된 데이몬은 대략 10분 남짓 저택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급할 것이 없었기에 느긋하게 응접실의 장식물들을 감상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주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고개를 돌린 데이몬의 눈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들은 대로라면 안토니와 흡사한 용모를 가진 전형적인 상인일 것이라 짐작했지만 예상이 여지없이 빗나가버린 것이다. 데이몬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듯 상대는 보기 좋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바로 로메인 남작이라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휘적휘적 걸어와서 데이몬의 맞은 편에 앉은 자는 훤칠한 키를 가진 멋진 중년인이었다. 다소 깡마른 체격에 유순해 보이는 갈색 눈동자가 인상적이었고 콧수염이 더없이 어울리는 전형적인 귀족. 도저히 상인으로 보이지 않았기에 데이몬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 모습을 보자 로메인 남작은 또다시 미소를 떠올렸다. "왜 믿어지지 않소?" "솔직히 그렇소." 말을 마친 데이몬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루비를 꺼냈다. 어차피 저택의 주인이 상인이건 멋쟁이 귀족이건 그가 상관할 것은 없었다. 그저 보석을 팔고 대금을 쥐면 그 뿐이었다. 루비를 대하자 로메인 남작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안토니의 보고로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예상 밖이구려." 로메인 남작은 조심스럽게 루비를 집어들었다. 돋보기를 들어 루비를 들여다보는 그의 모습에서는 경건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은 넌즈시 운을 뗐다. "300골드를 지불할 가치가 있소?" 로메인 남작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루비에만 쏠려 있었으므로……. "물론이오. 그런데 대관절 이것을 어디서 얻었소?" 데이몬은 히쭉 웃었다. "많은 걸 알려하지 마시오. 대금을 받기 전까진 엄연히 내 소유이니 말이오." "그렇겠지?" 로메인 남작은 루비를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지긋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이 루비는 목걸이의 일부였던 것 같은데, 맞소?" 데이몬은 의외라는 듯 눈을 치켜 떴다. "그 사실을 알다니 놀랍구려. 어떻게 알았소?" "세공된 형태를 보니 전형적인 트루베니아 드워프의 솜씨요. 아르카디아 드워프는 그렇게 세공하질 않지. 구하기도 힘든데다가 실력도 떨어지니 자연 트루베니아의 것이 선호될 수밖에……. 그건 그렇고 안타깝구려. 완전한 목걸이 상태로 팔았다면 족히 두 배는 더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오." "………." "다른 보석은 없소? 내 톡톡히 값을 쳐 드리리다." 데이몬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목걸이 하나가 그토록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그였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38회. 모르긴 몰라도 여기서 진주를 판다면 지금껏 받아왔던 금액보다 훨씬 많이 받을 수 있을 듯 했다. 하지만 물욕이 없는 탓에 데이몬은 굳이 욕심을 부리려 하지 않았다. 물론 인크레시아에는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보화들이 그득할 터였다. "내가 가진 것은 그것이 전부요. 그건 그렇고 이제 대금을 지불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아깝군." 모호한 느낌을 주는 한 마디를 내뱉은 뒤 로메인 남작은 탁자 위의 루비를 집어들었다. "그럼 집사를 불러 대금을 가져오도록 하리다." 말을 마친 그는 손뼉을 쳤다. 짝짝. 조금 뒤 문이 열리고 집사로 보이는 중늙은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재빨리 로메인 남작에게 다가가서 귀엣말로 뭐라고 지껄였다. 무슨 말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로메인 남작의 눈빛이 갑자기 변한 것을 봐서 결코 좋은 말은 아닌 듯 했다. "그렇단 말이지?" 로메인 남작의 눈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악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문에다 대고 냅다 고함을 질렀다. "모두 들어오랏." 덜컹. 문이 열리고 안으로 중무장을 한 10여 명의 병사들이 우루루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을 보아 미리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삽시간에 데이몬의 주위를 에워쌌다. 흉흉한 병사들의 기색에서는 로메인 남작의 의도가 고스란히 배어나고 있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데이몬에게 다가왔다. "이거 미안하게 되었군." 데이몬은 묵묵히 로메인 남작을 쏘아보았다. 사실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미라 간파하고 있었다. 또한 로메인 남작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 역시 위선이란 사실 까지도……. 때문에 데이몬은 제 발로 사지에 뛰어들려는 로메인 남작에 대해 불쌍하게 여기던 상태였다. '불쌍한 녀석.' 물론 로메인 남작은 상대가 9써클의 대마법사란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 정도 병사들이라면 매직 미사일로 충분했기 때문에 그는 이미 적당하게 마나를 끌어 모은 상태였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데이몬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돈을 지불할 수 없다는 뜻인가?" "200골드라면 상당히 많은 금액이라 생각하지 않나? 난 필요 없는 일에 결코 돈을 낭비하지 않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사태파악도 못하고 느물거리는 남작의 태도에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그는 남작을 비롯한 병사들에게 톡톡히 쓴맛을 보여주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 대책이 없는 놈이로군." 독 안에 든 쥐(?)의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로메인 남작은 혀를 내둘렀다. "상당히 담이 큰 친구로군. 하지만 그래봐야 자네 운명은 변하지 않을 걸세." "물론 변하지 않지." 나지막이 대꾸한 데이몬은 얼굴을 가린 로브를 젖혔다. 그 바람에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지금껏 여러 여인들의 방심을 여지없이 뒤흔들어 놓았던 수려한 얼굴이 말이다. 데이몬의 모습을 보자 로메인 남작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허! 이거 놀랄 일이로군. 대단한 미남이야. 도저히 떠돌아다닐 용모가 아닌데?" "왜? 잘 생긴 녀석들은 여행을 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나?" "물론 없지. 여행을 시키는 것보다 더욱 좋은 방법이 있으니 말일세." "………." 로메인 남작의 눈가에는 어느덧 묘한 색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크게 심호흡을 했다. "후. 방금 결정했네. 자네를 죽이지 않기로 말이야." "무슨 뜻이지?" 눈을 희번덕거리며 데이몬의 얼굴을 훑어보는 로메인 남작의 눈빛은 벌거벗은 여인을 보고 흥분해 있는 사내의 눈빛과 하등 차이가 없었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불길한 생각이 동시에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너…. 혹시?" "예상이 맞을 것이라 생각하게. 아마 자네는 앞으로 평생동안 날 위해 봉사해야 할거야. 하지만 걱정하지는 말게. 자네를 향한 내 마음이 변할 일은 없을 것 같으니……. " 남작은 색정 가득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훑어보며 느물느물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가, 감히 나에게 눈독을 들이다니?" 결국 데이몬은 화가 폭발하고야 말았다.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노골적으로 남색(男色)을 밝히는 남작의 태도에 이성까지 잃어버렸던 것이다. 지금껏 이런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깜짝 놀란 병사들이 창을 들이댔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 놈! 가루로 만들어버리겠다." 데이몬은 재배열해놓았던 마나를 모조리 흩어버렸다. 매직 미사일론 성이 차지 않았기 때문에 더 위력적인 마법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그를 중심으로 무시무시한 마나의 소용돌이가 모여들며 판이하게 다른 형태로 재배열되었다. 데이몬은 9써클 궁극의 마법 헬 파이어로 저택을 깡그리 날려버리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물론 가증스러운 로메인 남작과 함께 말이다. "크크크." 살심(殺心)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치밀어 올랐다. 오랜 기간동안 그를 금제해 왔던 칠종단금술. 그 저주받은 금제가 몸을 바꾼 이후 사라졌을 것이라 여긴 때문에 데이몬은 추호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맹백히 오산이었다. "헉!" 한없이 마나를 끌어들이던 데이몬의 몸이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져 버렸다. 크게 떠진 눈에는 경악이 가득했다. 그 상태로 데이몬은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전신을 관통하는 감히 형언할 수조차 없는 극통. 이것은 그에겐 무척 익숙했던 고통이었다. 아니 많이 경험해 보았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이기도 했다. 살심을 떠올릴 경우 칠종단금술이 가하는 고통 말이다.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에게 잡혀간 이후 데이몬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 모든 고문을 겪으면서도 데이몬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차원이 달랐다. 마치 쇠갈고리로 척추 내부를 훑어 내리는 듯한 극통에 도저히 의식의 끈을 잡고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비, 빌어먹을." 데이몬의 의식은 어느덧 한없는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털썩. 혼절한 데이몬의 몸은 맥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재배열을 거의 마친 마나 역시 허무하게 흩어져버렸다. 로메인 남작이 무척 얼떨떨한 기색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포위한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이군." 완전히 의식을 잃은 채 널브러진 데이몬을 잠시 내려다보던 로메인 남작은 한 병사에게 손짓을 했다. 고개를 끄덕인 병사는 냉큼 데이몬에게 다가가서 품속을 뒤졌다. "여기 있습니다." 묵직한 돈주머니와 함께 진주 몇 알을 찾아낸 병사는 남작이 볼 수 있게 높이 들어올렸다. "과연 생각대로군." 남작은 희색이 만연한 상태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진주를 굴려본 남작은 돈주머니의 무게를 한 번 가늠해본 뒤 그대로 병사들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은 자네들이 갖게. 수고했으니 술이나 한 잔 해야지? 그리고 이 녀석은 지하 감옥 깊숙이 가두어 두도록……." 불로소득을 건진 병사들은 희희낙락하며 데이몬을 들쳐업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멀찍이 떨어져 걸려있는 횃불이 실내를 희미하게 비출 뿐이다. 석벽을 따라 길게 늘어선 철창은 이곳이 죄인들을 가두는 감옥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놀라운 점은 이 감옥이 로메인 남작의 저택 지하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다. 일개 장사꾼에 불과한 로메인 남작의 저택에 이 정도로 규모가 큰 감옥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비밀을 아는 자는 로르베인을 통틀어봐도 몇 명 되지 않았다. 그것은 로메인 남작이 비밀리에 사람 장사를 한다는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을 증명하듯 늘어선 감옥 속에는 많은 죄수들이 초췌한 안색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대부분 묘령으로 보이는 여인들. 체념한 듯한 눈빛이 대부분이었고 암울한 자신들의 미래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공허한 눈빛을 머금고 있었다. 삶의 희망을 상실한 듯 초점 잃은 시선은 허공에 멍하니 고정된 상태였다. 아르카디아에는 수많은 왕국들이 존재했다. 그 왕국들은 저마다 다른 법령과 국가 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노예제도를 허락한 왕국과 그렇지 않은 왕국이 엄연히 존재했다. 물론 크로센 제국을 비롯한 커다란 왕국에서는 당연히 노예 매매란 금지되어 있는 사항이었다. 크로센 대제의 이념을 받드는 왕국에서 같은 인간을 노예로 삼는 일을 허락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변방에 위치한 조그마한 왕국이나 교역으로 성장한 도시 국가에서는 노예 제도를 암묵적으로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윤락가(淪落家)의 창부(娼婦)나 변방의 용병(傭兵)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노예를 통한 방법 이상의 선택이 없었다. 로메인 남작이 천문학적인 부를 축척한 배경에는 바로 이 노예 매매에서 거둬들이는 막대한 이익금이 있었다. 사들이거나, 혹은 납치한 여인들을 페이류트를 비롯한 해안 도시에 팔아 넘긴 탓에 지금의 부를 이룩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노예 매매를 금지한 국가들은 자국의 영토 내로 노예상인들이 노예를 데리고 통과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발각될 경우 노예상인은 즉시 구금되고 노예들을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따라서 노예 매매를 금지한 로투스, 페어놀드, 안드레아 세 왕국에 둘러싸인 해안 국가에서는 노예 값이 치솟을 대로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산지(?)에서 노예를 사오는 값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로메인 남작은 바로 이 차익을 노렸다. 그는 우선 노예 매매를 금지한 세 왕국의 고위급 귀족들을 대상으로 거금을 뿌렸다. 재물을 전혀 아끼지 않고 펑펑 뿌렸고 파티 등을 통해 안면을 익힌 귀족들에게는 수시로 값비싼 선물을 선사했다. 그 결과 그는 세 왕국의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귀족들에게 환심을 살 수 있었다. "되었어." 그 이후에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노예매매는 확실하게 남는 장사였다. 로메인 남작이 세 왕국에 뿌린 금액의 두 배를 초과하는 이익금이 매년 그의 금고로 들어왔으니 말이다. 뇌물을 뿌린 덕분에『로메인』가의 문장이 박힌 마차는 어떠한 경우에도 검문을 받지 않았다. 뇌물을 받은 귀족들의 입김이 작용하는 곳에서는 말 그대로 무사통과를 하는 것이다. 이 루트를 통해 각지에서 사 모은 노예들이 대대적으로 로르베인으로 이송되었다. 그런 다음 노예들이 해안 도시로 팔려나가며 로메인 남작에게 거금을 안겨주는 것이다.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여인들은 대부분 북부 출신이었다. 흉년이 들어 살기 힘들어지거나 더 나은 미래를 찾기 위해 이주하던 중 노예 상인의 꼬드김에 빠져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노예가 된 여인들. 로메인 남작의 지하 감옥은 그런 여인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구석에 위치한 감옥에는 이례적으로 수감자의 성별이 틀렸다. 대부분의 감옥에는 대충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한창 나이라 볼 수 있는 여인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빼곡이 갇혀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단 둘만이 갇혀 있었고 성별도 남자였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로메인 남작은 어떠한 경우에도 남자 노예를 사들이지 않는다. 남자 노예가 소용되는 곳은 오로지 북부의 척박한 평원뿐이었다. 대륙의 거의 전부가 평정된 아르카디아이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북부는 인간들의 것이라 부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아직까지 인간과 몬스터의 처절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부는 워낙 척박한 곳이었으므로 다른 왕국에서는 굳이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다수의 아이스 트롤이 서식하기는 하나 군대를 보내 점령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경작이나 목축도 할 수 없었고 만년설(萬年雪) 때문에 지하자원조차 캘 수 없었다. 따라서 아르카디아의 대부분을 개척하기는 했지만 유일하게 북부만은 아직까지 미개척지로 남아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는 자는 목숨을 담보로 땅을 얻으려는 정착민들 뿐이었다. 북부에서 남자노예가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병사로 싸워줄 건장한 남자 노예 말이다. 자유 용병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가지 않을 정도로 북부는 위험지역이었고 그 탓에 정착민들은 오로지 남자 노예를 사서 병사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해안 도시에서는 남자 노예가 말 그대로 불필요한 존재에 불과했다. 안 그래도 남자들로 넘쳐나는 도시인만큼 필요한 것은 오로지 여자들뿐이었다. 굶주린 선원들을 만족시켜 주고 그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긁어낼 수 있는 젊은 여자. 그런 때문에 로메인 남작에게는 남자 노예를 사들일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의 감옥에 남자가 존재하다니…….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39회. 두 남자 죄수 중 한 명은 머리가 허연 노인이었다. 감옥의 싸늘한 석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노인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가득 차 있었다. 어디를 가도 만날 수 있을 듯한 평범한 용모. 도저히 노예로 보이지 않는 차림새의 노인이었지만 그는 체념 섞인 눈빛으로 몸을 벽에 기대고 있을 뿐이었다. 나머지 수감자는 젊은 청년이었다. 그것도 눈에 확 뜨일 만큼 용모가 수려한 젊은 청년. 무표정한 눈빛으로 감방 바닥에 길게 누워 있는 자는 바로 데이몬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분명히 몸을 바꿨다. 소림성승이 불어넣은 내공은 저번 몸과 더불어 사라져버렸어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칠종단금술이 날 변함 없이 금제하고 있다니…….' 그가 아는 상식으론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리치로 변하고, 거기에다 새로운 몸으로 영혼이 옮겨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칠종단금술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머리가 빠지게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짐작이 사실이었나? 칠종단금술이 영혼에 직접 작용한다는 것이…….' 상황을 보아 그것이 정답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앞으로도 영원히 살생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정 사실이라 봐야 했다. 그것을 떠올린 데이몬은 얼굴을 찡그렸다. "무척이나 재미없게 되었군." 그는 로메인 남작을 가차없이 죽여버리려고 했었다. 그 탓에 칠종단금술로 인한 고통을 정통으로 받게 되었고 그는 꼬박 삼일을 의식불명으로 누워있었다. 칠종단금술의 금제는 그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끔찍했던 기억을 되새긴 데이몬은 고개를 내저었다. "차라리 베르키스 놈에게 고문을 당하는 것이 낫지." 누군가와 함께 갇혀 있는 것 같았지만 데이몬은 상관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몸은 정상으로 돌아온 상태였고 이 정도 감옥을 빠져나가는 정도야 식후 운동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살짝 마나만 재배열한다면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공간이동을 해버릴 수 있었다. 또한 마음만 먹는다면 감옥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로메인 남작에 대한 처벌이었다. 그를 죽일 수가 없기 때문에 섣불리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보석 따위는 찾아도 그만 못 찾아도 그만이었다. "놈을 가만 내버려둘 수는 없어. 두들겨 패는 것으론 도무지 직성이 차지 않으니……." 남색(男色)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데이몬이 지금까지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연신 씨근거리는 데이몬의 귀로 힘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무척 늙수그레한 음성이었다. "이제 정신을 차렸는가?" 그 말에 데이몬은 고개를 돌렸다. 무척 수척한 노인의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나? 뭐 자네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이겠지?" 노인은 얼굴에 쓸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어찌 보면 삶을 달관한 듯한 표정이기도 했다. 데이몬은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것말고도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았다. "나에게서 신경 끄시오. 영감. 안 그래도 머리통이 복잡하니……." 냉랭하게 대꾸하고 돌아눕는 데이몬. 하지만 노인의 눈에도 어느덧 이채가 떠오르고 있었다. "트루베니아에서 왔는가?" 노인의 말에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벌떡 일어난 그는 노인의 멱살을 움켜쥐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그러나 노인은 추호도 겁을 먹지 않았다. "무척 버릇없는 젊은이로군. 자네보다 배는 많이 살아온 늙은이에게 이러면 쓰는가?" "뭐? 나보다 배를 살아?"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노인의 열 배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 왔지 않았던가? 하지만 데이몬은 묵묵히 자신을 추슬렀다. 가지고 있는 몸이 많아봐야 스물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관심이 닿은 것이다. 그는 묵묵히 노인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미안하오. 영감." "이해하네. 자네 처지에 놓인다면 누구나 그럴 수 있지." "내 처지가 어떤데 그러시오." 노인의 얼굴에 다 안다는 듯한 웃음이 떠올랐다. "로메인 남작의 취미는 무척 독특하지. 용모를 보아하니 그가 왜 자네를 가둬두었는지 이해할 만 하네." 그 말에 또다시 부아가 치미는 데이몬이었다. 로메인 남작의 느물거리는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살심이 떠올랐다. 아련한 통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낀 데이몬은 얼른 고개를 수그렸다. "젠장맞을. 그럼 당신은 왜 갇혀 있는 것이오." 데이몬의 퉁명스런 대꾸를 들은 노인의 얼굴에 쓸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도 자네는 삶을 기대할 수 있지만 난 그렇지 않네. 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에 놓여 있으니 말일세." 노인의 말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이리라. 호기심이 치밀어 오른 데이몬은 노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로메인이란 놈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오?" "그렇다네. 사실 난 알지 말아야 할 사실을 알고 있거든……." "알지 말아야 할 사실?"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데이몬의 뇌리에 조금 전 노인이 말한 사실이 떠올랐다. 그 사실이 못내 궁금했던 데이몬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트루베니아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소?" "그거야 쉬운 일이지. 말투를 들어보면 바로 알 수 있으니 말이야." "거짓말 마시오. 지금까지 그 누구도 내가 트루베니아 출신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소. 그저 억양이 다른 타지방 사람으로 간주하더군. 그러니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대 보시오." "사실이야. 왜냐하면……." 노인의 눈빛이 갑자기 몽롱해졌다. 어찌 보면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떠올리는 사람의 눈빛 같기도 했다. "나 역시 트루베니아 출신이기 때문이지." "그 말이 정말이오?" 데이몬은 무척 놀라워했다. 자신말고 트루베니아에서 온 사람이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양 대륙 사이의 바닷길은 그만큼이나 험했다. 오크 족의 노예가 되어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트루베니아 사람이 이곳으로 건너오기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놀랍군. 대관절 언제 건너왔소." "내가 열 살 때의 일이었으니 벌써 50년이 흘렀군." 노인은 처연한 어조로 자신이 건너오게 된 연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척 긴 이야기였다. 트루베니아와 아르카디아 사이에는 정말 엄청난 거리적 괴리가 존재했다. 배를 타고 백 일이 넘게 항해해야만 닿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것은 결코 평탄한 항해가 아니었다. 강한 바람과 풍랑, 곳곳에 숨어있는 암초와 소용돌이를 극복해야 했고 이따금 습격해오는 서펜트와 상어 떼에도 대응을 해야 했다. 어지간히 큰배가 아니고서는 대해를 건널 방법은 없었다. 작은 배는 서펜트의 꼬리질 한 방으로 단번에 격침될 것이 분명했고 타고 있던 사람들은 남김없이 서펜트의 먹이가 되어버릴 테니까. 500년 전 트루베니아가 무너질 당시 많은 사람들이 배에 타고 아르카디아로 향했다. 하지만 목적을 이룬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항해술도 변변찮은 데다 작은 배로 대해를 건너기는 그야말로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다름없었다. 대부분의 배들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침몰되는 운명을 겪어야 했다. 그 탓에 두 대륙은 무척 오랫동안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혀 교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아르카디아의 기사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교류였다. 아르카디아의 전역을 평정한 이후 기사들은 이제 트루베니아에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실력을 인정받아 승급하기 위해서는 몬스터 사냥이 필수였고 아르카디아엔 더 이상 사냥할 몬스터가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북부 지방에 다수의 아이스 트롤들이 서식하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사냥해봐야 실력 증명에 별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 탓에 다수의 기사들이 사냥할 몬스터를 찾아 대대적으로 트루베니아로 건너오게 된 것이다. 통상적으로 기사라 함은 속해 있는 국가의 최고 엘리트를 칭한다. 때문에 그들의 출정에는 경험 많은 뱃사람들과 거대한 선박이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배들이 젊은 기사들을 싣고 트루베니아로 향하게 되었으니……. 수많은 트루베니아인이 아르카디아로 오게 된 데에는 바로 이런 배경이 있었다. 패기 넘치는 젊은 기사들은 오크 족의 노예가 되어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혈기를 주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나쁜 오크 놈들……." 분개한 기사들은 힘을 모아 오크 부족을 치기에 이르렀다. 본래의 목적인 중형 몬스터 사냥을 까마득하게 잊고 말이다. 그 결과 수많은 기사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반대로 토벌된 오크 부족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요행히도 작고 약한 부족을 선택한 기사들은 예외 없이 승리의 열매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승리를 만끽하고 나서도 문제가 없진 않았으니 그것은 바로 오크의 노예로 살고 있던 인간들에 대한 처리 문제였다. 놔둔다면 오크 놈들의 보복 대상이 되어버릴 것이고 데리고 가자니 너무 수가 많았던 것이다. 가지고 온 배에 태울 수 있는 인원은 엄연히 한정되어 있었다. "할 수 없지." 일부 기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그들을 버렸다. 두고 가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살려달라는 매달리는 사람들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며 길을 떠났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으니……. 거의 대부분이라 할 수 있는 기사들은 위험을 감수하며 그들을 배에 태웠다. 홀수선이 뱃전까지 차오를 때까지, 선원들의 경고까지 무시하며 말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태운다면 풍랑이 칠 경우 대단히 위험합니다. 최악의 경우 침몰할 수도……."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소. 만약 이들을 두고 간다면 오크 놈들의 손에 죽을 게 분명하오." 바로 이것이 다수의 트루베니아 인이 아르카디아로 오게 된 배경이었다. 노인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쳐 아르카디아에 발을 들여놓았다. 사정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아르카디아의 기사들은 더 이상 오크 부족을 습격하지 않았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지. 따라서 그들은 목적했던 대로 중형 몬스터만 사냥하고 얼른 트루베니아를 떠났어. 그런 관점에서 내가 구출된 것은 말 그대로 요행이었지." 이것은 오십 여 년 전 노인이 열 살 남짓한 소년이었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노인은 불운하게도 친구들과 함께 드래곤에게 바쳐지는 운명에 직면하게 된다. 드래곤의 레어에 인간이 필요하다는 명령을 받은 오크 부족장이 노인을 비롯한 열 명의 소년들을 차출했고 그들은 부모형제와 떨어져 죽을 것이 확실한 길을 떠나야만 했다. "그 때 난 친구 열 명과 함께 다수의 오크 보병의 감시를 받으며 펠루시아 산맥으로 향했었지. 목적지는 레드 드래곤의 레어였는데 당시 난 삶을 포기했었어. 왜냐하면 그곳에 가면 결코 살아 나올 수 없다는 풍문이 돌고 있었거든……." "그, 그랬었소?" 데이몬은 내심 가슴이 뜨끔 하는 감정을 느꼈다. 펠루시아 산맥이라면 베르키스의 레어가 있는 곳이었고 그가 오백 년의 세월을 보낸 곳이기도 했다. 정황을 봐서 노인을 비롯한 아이들은 생체 제물로 바쳐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리치가 침입자를 막다가 몸이 상할 경우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생체 제물 말이다. 기묘한 운명의 장난이었기에 노인의 처지에 동정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데이몬은 점점 노인의 이야기에 빠져 들어갔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노인은 우울한 표정으로 그 때의 일을 상기했다. "천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 때 아르카디아에서 몬스터 사냥을 나온 기사들이 공교롭게도 우리들을 호송하는 오크 보병과 맞닥뜨린 거야. 곧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고 오크 보병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죽임을 당했지." 오크 보병을 전멸시킨 아르카디아 기사들은 레어로 잡혀가던 소년들을 본국으로 데리고 가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소년들은 집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돌아간다 해도 오크 족이 소년들을 가만 내버려둘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것이 바로 노인이 아르카디아에 발을 들여놓게 된 배경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끝은 아니었으니……. "당시 우리를 아르카디아에 내려놓은 기사들은 곧바로 그들의 왕국으로 향했다. 신대륙에 도착했으니 이제부턴 너희들의 힘으로 살아가라는 말을 남겨두고 말이다." 혈혈 단신으로 아르카디아에 내동댕이쳐진 어린 소년들. 하지만 그들이 생존하기에 신대륙의 환경은 너무도 척박했다. 하나같이 돈벌이를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 천지였고, 트루베니아 인의 소박한 마음씨는 아르카디아에선 전혀 통하지 않았다. 거기에 대해서는 데이몬도 느낀 바가 없진 않았다. 그가 느끼기에 약삭빠른 아르카디아 사람들은 솔직 담백하고 순박한 트루베니아 인에 비해 현격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그래도 다행이었지. 일부 나쁜 기사들은 데리고 온 트루베니아 사람들을 몽땅 노예 상인에게 팔아 넘기는 일도 비일비재했으니……." 어린 나이에 가족과 떨어진 채 험한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열 명의 트루베니아 소년들. 그들은 정말 사력을 다해 생존해야 했다. 그러나 트루베니아와는 달리 아르카디아는 말 그대로 눈감으면 코 베어갈 곳이었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40회. 안녕하세요. 다크메이지 4권이 나왔습니다. 오늘부터 서점과 대여점에 배포된다고 하니 저도 내일 쯤 받아보겠네요. 많이 읽어주시길.^^ *************************************************************** 사람들의 감언이설에 속고 속던 소년들은 결국 하나씩 동료들과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회상을 마친 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많은 아이들이 팔려갔지. 국경 경비병으로, 북부 용병으로, 심지어는 포경선의 노예 선원으로 팔려간 녀석들도 있었지. 아르카디아에서 순박한 트루베니아 사람들이 갈 곳은 정해져 있어. 여자는 창부, 남자는 용병 이런 식으로 말이야. 그러고 보면 난 무척 운이 좋은 편이지." "한심하군요. 따지고 보면 아르카디아 사람들의 조상은 엄연히 트루베니아일 텐데." "그걸 누가 아는가? 이곳 사람들은 트루베니아 인을 보면 먼저 이용부터 하려고 하니 말이야." 힘들게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하듯 노인의 얼굴에는 세월의 풍상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를 쳐다보던 데이몬도 감정의 동요가 없을 순 없었다. 물론 태어난 곳은 아니었지만 트루베니아는 그의 인생 대부분을 보낸 곳이었다. 태어나서 50년 남짓 살아왔던 중원. 하지만 나머지 500년에 가까운 세월을 트루베니아에서 살아왔던 데이몬이었다. 따라서 그는 누구 앞에서도 트루베니아 출신이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동향 사람들이 이렇게 힘겹게 살고 있다니……. "그럼 당신은 지금까지 뭘 하며 살아왔소." 노인은 데이몬을 쳐다보며 빙긋 미소를 떠올렸다. 처연한 느낌을 감추지 못하는 미소였다. "오랜만에 동향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니까 정말 좋군 그래. 따지고 보면 정말 힘들게 살아왔다고 볼 수 있는 인생이지. 곧 끝장이 날 테지만 말이야." 노인은 어릴 때부터 장사에 소질이 있었다고 했다. 때문에 그의 첫 출발은 여관 점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제대로 봉급을 받지 못할 때도 있었고 기껏 모아놓은 돈을 사기로 몽땅 날린 적도 있었지만 노인은 그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세상을 살아왔다. 기필코 자신의 가게를 차리겠다는 일념 하에 말이다. 열심히 노력한 끝에 그 결실이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많이 겪어보았지만 아르카디아 사람의 속은 도무지 알 수가 없더군. 동업하기로 한 사람이 내 돈까지 모조리 챙겨 달아나 버리는 일이 일어났지. 그 때문에 일하던 직장에서도 쫓겨났고 말이야." 그 이후로 노인은 떠돌이 행상 생활을 시작했다. 그 이후의 인생 대부분을 떠돌이 행상으로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풍족한 곳에서 물품을 구입하여 귀한 지방에 가서 파는 일. 물론 위험이 많은 행상 일이었지만 그만큼 이윤도 컸다. 자신만의 가게를 차릴 만큼의 돈이 모일 때까지 노인은 정말 열심히 살았다. 목적했던 돈을 모아 가게를 차리기 위해 로르베인에 들어 올 때까지 말이다. "정말 바쁘게 살았군. 그런데 왜 로르베인에다 가게를 차리지 않았소?" "말하자면 기네. 자네 이거 아는가? 내가 한달 전까지만 해도 이 로메인 상회의 집사로 있었다는 사실을……." 물론 데이몬이 그 사실을 알 리가 만무했다. 그를 쳐다보며 노인은 사정을 설명해 나갔다. 그가 로메인 가의 집사로 있었던 5년 남짓한 세월을 말이다. 오랜 행상 생활로 모은 50골드의 돈을 움켜쥐고 노인은 마침내 로르베인에 첫 발을 디뎠다. 로르베인 시내에 보석상을 차리고자 하는 것이 노인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이미 로르베인의 상권은 모조리 로메인 상회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고 그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업을 방해했다. 하지만 노인은 어떻게 해서든 로르베인에 자리를 잡고자 동분서주했다. 교역도시이며 동시에 소비도시이기도 한 로르베인만큼 소비자의 구매력이 큰 도시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내 중심부에 가게를 하나 얻었던 노인. 그는 신용을 철저히 지켰으며 한 번 지나친 손님은 결코 잊지 않았다. 모두가 오랜 행상 시절에 얻었던 경험이었다. 그로 인해 계속해서 단골이 생겨났고 그의 가게는 나날이 번창을 거듭했다. 미리 자리잡은 로메인 상회들이 전부 파리를 날릴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채 1년이 되기도 전에 끔찍한 악몽이 찾아왔다. 가게에 원인 모를 불이 나서 기반이 모조리 타버렸던 것이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잿더미를 쳐다보던 노인에게 유혹의 손길이 뻗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로메인 상회의 총수가 그를 직접 찾아왔던 것이다. 데이몬을 쳐다보며 노인은 한탄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 때 놈의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어야 했어. 그랬다면 이런 처지에 놓이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야." 당시 로메인 남작이 제안한 것은 기반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노인에겐 말 그대로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일단 가게가 불타버린 데 대해 심심한 애도를 표하는 바요. 하지만 노인장의 놀라운 관리능력을 그대로 썩혀둘 수는 없지 않소? 그러니 괜찮다면 내 가게를 맡아주시오. 보수는 충분히 지불하도록 하겠소." 절박한 처지의 노인은 결국 미끼를 덥석 물 수밖에 없었다. 가게를 담보로 빌린 돈까지 갚아준다는 데에야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 때부터 노인은 로메인 상회의 고용인이 되어버렸다. 듣고 있던 데이몬은 뭔가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불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었지. 로메인 상회를 맡고 4년이 지나서 난 모든 사실을 알 수 있었지." 노인은 그야말로 목숨을 바쳐 일했다. 단 일 년 만에 맡은 보석상을 두 배 수준으로 불려놓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로메인 남작의 깊은 신뢰를 얻게 되었고 급기야 그의 모든 사업장을 관리하는 집사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다. "따지고 보면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인과응보라고 볼 수 있어. 그간 로메인 남작이 저질러온 온갖 악행들을 내가 무마해 왔으니 말일세." 그가 알기로 로메인 남작은 말 그대로 인면수심의 악당이었다. 겉으로는 성공한 사업가로 보기 좋은 미소를 떠올리고는 있지만 뒤로는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천륜에 어긋나는 일도 서슴없이 행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돈 벌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로메인 남작의 밑에서 일하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다면 그게 거짓말이었으리라. 노인의 눈에 짙은 후회의 빛이 떠올랐다. "정말 힘들었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여인들을 가차없이 팔아 넘긴 것도 모자라 그들이 번 돈을 뱀파이어처럼 착취하고 세금이나 포탈해서 남작의 배나 불려주고……." 그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계기는 우연히 남작의 비밀 금고에서 서류 하나를 보게 된 데서 기인했다. 서류를 통해 자신의 가게가 불타버렸던 경위를 알아차린 노인은 마침내 로메인 남작에게 환멸을 느끼게 된다. "더 이상 그를 위해 일할 수 없다." 그는 그 길로 남작을 찾아갔다. 이미 로르베인의 권력층에는 로메인 남작의 입김이 깊숙이 드리워져 있었으므로 조용히 떠나는 길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고발을 해봐야 자신에게 화가 미칠 뿐이었다. 남작을 만난 노인은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겠으니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그런가? 뜻이 안 맞으면 할 수 없군 그래." 남작은 의외로 선선히 승낙했다. 그리고 퇴직금으로 상당히 많은 금액을 건네주었다. 노인은 천만 다행이라 여기고 서둘러 짐을 정리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결코 로메인 가를 떠날 수 없었다. 짐을 정리하고 나서다 바로 병사들에게 포박되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 노인은 지하감옥에 갇히는 처지가 되었다. 죽을 날만 기다리며 말이다. "놈은 도저히 날 보낼 수 없었지. 알고 보면 나만큼 놈의 비리를 잘 알고 있는 이도 없으니 말일세. 놈은 필시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묻어버릴 거야. 아마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걸세." 노인의 긴 신세타령을 들은 데이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메인 남작이란 놈은 거의 나만큼 나쁜 놈이로군요." "자네가 나쁜 놈이라고?" "그렇소. 섬기던 주인을 속이고 빠져나온 뒤, 주인 친구를 죽여버리고 보물을 강탈해서 이 곳으로 도망쳐 왔으니 말이오. 그 과정에서 하인 우두머리를 거의 죽을 만큼 두들겨 팬 죄도 있지." 물론 데이몬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이었다. 그의 말에 다소 놀란 듯 노인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쁜 짓을 하긴 했군. 하지만 자네도 로메인 남작의 소행에 비하면 조족지혈일 뿐이야. 내가 알기로 놈만큼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솟게 한 자는 없다고……. 놈의 멋들어진 웃음 뒤에는 마치 악마와도 같은 인면수심의 본성이 도사리고 있으니 말일세." "글쎄요?"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물론 로메인 남작이 무슨 짓거리를 하던 간에 상관할 바는 없었다. 문제는 그가 자신을 건드렸다는 점이다. 자고로 은혜는 반드시 기억하는 반면 원수는 확실히 갚아주는 게 데이몬의 성품이었다. "그럼 영감은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오?" "나? 뭐 죽을 날만 기다리는 수밖엔 없겠지?" "아니 그게 아니고. 만약 기회가 생긴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다시 한 번 열심히 살아보시겠소?" "말만이라도 고맙군." 노인은 모처럼 웃는 낯을 지었다. 오랜만에 동향 사람을 만나 신세타령을 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던 것이다. "자네 걱정이나 하게. 로메인이란 놈은 꽤나 악취미를 가지고 있어. 지금껏 놈을 거쳐간 녀석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미치거나 자살해버렸지. 자네라고 예외가 될 순 없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요. 날 도대체 어떻게 대접할지 궁금하기만 하군." 걱정이라곤 하나도 없는 데이몬의 태도에 노인은 얼떨떨한 듯 싶었다.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돌렸다. 사방의 창살 속에는 많은 여인들이 꾀죄죄한 몰골로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저들도 다 노예요?" "페이류트로 팔려갈 아이들이야. 죽을 때까지 뱃사람들의 정액받이로 살아야 할 테니 저 아이들의 처지도 기구하기 그지없지." 데이몬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만약 노인장에게 권한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권한?" "저들의 운명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 말이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노인은 나지막이 털어놓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내게 권한이 생긴다면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겠네. 어차피 돈 때문에 팔려온 아이들이니 풀어준다면 고향으로 바로 돌아갈 테지? 로메인의 창고에 그득한 돈으로 여비를 좀 쥐어주면 금상첨화일테고……." "그 마음 잊지 말도록 하시오."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뒤 데이몬은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접근하는 기척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저벅저벅. 조금 뒤 감옥 문 앞에는 여러 명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중무장을 한 네 명의 병사와 상당히 간교하게 생긴 50대의 중늙은이였다. 눈알을 원활히 굴리는 모습이 상당히 교활하게 생긴 염소수염의 늙은이. 데이몬의 귀에 노인의 보충설명이 들려왔다. "저자는 로메인 가의 총집사인 당글라스라네. 한때 내 윗사람으로써 골수까지 로메인 남작의 심복이지. 저놈도 나쁘기는 마찬가지야." "그러는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데이몬의 반문에 노인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얘기 안 했던가? 내 정신 좀 보게. 내 이름은……." 뜻밖에도 대답은 감옥 밖에서 들려왔다. "그 녀석의 이름은 젠가르트라고 하지. 하지만 기억할 필요는 없네. 곧 죽어 땅에 묻힐 이름이니까 말이야. 그럼 이만 우리를 따라가 줘야겠는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덜컹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감옥 문이 열리는 소리 같았다. 노인 젠가르트는 다급하게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내가 자네에게 해 줄 충고는 하나밖에 없네. 어떤 일이 있어도 로메인 남작의 비위를 맞추게. 일단 살아나야지 빠져나갈 기회를 갖지 않겠나?" "내 걱정일랑 하지말고 당신 몸이나 챙기시오." 퉁명스럽게 내뱉은 데이몬은 반쯤 열린 문을 향해 몸을 쓱 들이밀었다. 도리어 놀란 것은 총집사 당글라스와 병사들이었다. 이미 그들은 나오지 않겠다고 버티는 죄수를 강제로 끌고 나오려고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죄수가 자진해서 나와주다니. 당글라스의 능글맞은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말을 잘 들어서 좋군. 대가로 편히 모시지." "얼마나 편하게 모시는지 기대해 보지. 그럼 안내하도록." 병사들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이곳에 근무하는 동안 데이몬만큼 담이 큰 죄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생각에 그들은 인상을 쓰며 데이몬을 압송했다. 특히 당글라스는 무척 못마땅하다는 듯 데이몬을 연신 노려보고 있었다. "잘 가게. 그러고 보니 자네 이름도 묻지 않았군." 감옥 속에 홀로 남게 된 젠가르트는 애틋한 시선만 창 밖으로 보냈다. 다음은 자기 차례였고 행선지가 다를 것이 분명했다. "휴, 이제 되었군." 커다란 침대 중앙에 큰 대자로 묶여 있는 죄수를 보며 당글라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로메인 남작의 명을 완수한 이상 이제는 자리를 피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는 미동도 없이 묶여 있는 죄수를 다시 쳐다보았다. 당글라스의 얼굴에 징그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녀석, 오늘밤이 지나고 나서도 여유를 부릴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 죄수는 말 그대로 완벽하게 묶여 있었다. 양쪽 팔목과 발목에 두꺼운 쇠고랑이 채워져 있었고 그것은 어린아이 손가락 굵기 만한 쇠사슬로 침대 가장자리의 쇠기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아마도 죄수는 누가 풀어주기 전까지는 침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시선을 힐끗 옆으로 돌렸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41회. 제법 화려하게 치장된 방이었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침실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벽에 죽 둘러가며 걸려 있는 고문도구들은 오히려 사람의 심금을 저리게 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채찍들이었다. 그곳에는 형형 색색의 채찍들이 자태를 뽐내며 걸려 있었다. 긴 것, 짧은 것, 굵은 것, 가는 것, 가시 돋친 것 등등 아르카디아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채찍들이 걸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글라스는 괴소를 흘리며 채찍을 훑어보았다. "그나저나 네놈 운명도 기구하군. 남작님의 악취미에 걸리다니 말이야." 그는 병사들에게로 빙글 고개를 돌렸다. "누구 나와 내기 할 사람 있어? 이 녀석이 며칠만에 미치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병사 하나가 나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제 생각에 이놈은 한 달을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당글라스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이 녀석 태도를 보니 보름을 견디지 못할 것 같네. 나는 이놈이 보름 안에 미치는 것에 10실버 걸겠네." "저도 보름에다 걸겠습니다." "저는 한 달이오." 병사들이 분분히 은화를 내밀며 내기에 동참했다. 돈을 챙긴 당글라스는 병사들을 채근해 문으로 향했다. "이만 나가자고. 남작 님의 취미에 방해가 되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우루루 달려나갔고 방안에는 데이몬 혼자만 남게 되었다. 범인이라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미래에 불안감을 표시할 만도 하건만 데이몬은 달랐다. 그저 권태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볼 뿐이었다. 느긋하다고도 볼 수 있는 표정. 로메인 남작은 아주 적당한 시간, 죄수가 충분히 조바심을 낼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모습을 드러내었다. "많이 기다렸나?" 태연스레 들어서는 로메인 남작. 그런데 그의 꼴이 상당히 기괴했다.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몸에는 가죽으로 만든 조끼와 반바지 같은 것을 걸쳤는데 곳곳에 징이 박혀 있어 상당히 눈꼴시린 모습이었다. 반바지가 워낙 짧아서 털이 숭숭 난 다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는데 그래도 제법 균형 잡힌 근육질의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침대에 꽁꽁 묶여 미동도 할 수 없는 데이몬이 시야에 들어오자 로메인 남작의 얼굴이 점차 상기되기 시작했다. "이거 미치겠군. 근래에 보기 힘든 미색이란 말이야." 그 말에 굳게 닫혀 있던 데이몬의 입술이 열렸다. "왜 남자를 건드리는 거지? 감옥에 보니 여자들이 많던데 말이야." "그거 말이지?" 로메인 남작은 히쭉 웃었다. "이제 시들해졌다고나 할까? 사실 이 방에서 계집년들이 제법 많이 죽어나갔지. 하지만 그 짓도 금방 흥미가 떨어지더군. 이젠 남자를 상대하는 것이 훨씬 구미에 맞지." 남작은 능글맞게 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옆에 놓인 테이블에서 날이 시퍼렇게 선 칼을 하나 집어든 남작은 칼날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살짝 베여 피가 비쳤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이제 네 속살을 한 번 구경해야겠어. 당글라스 녀석 제법 눈치가 빠르단 말이야. 내가 직접 옷을 벗길 수 있게 잘도 묶어놓았으니……." 남작은 여유만만하게 데이몬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데이몬의 화가 폭발해버렸으니……. "언락(unrock)." 짧은 주문영창이 이어지자 데이몬의 사지를 묶고 있던 쇠고랑이 대번에 벗겨져 버렸다. 철커덩. 상체를 반쯤 일으키는 데이몬을 보자 로메인 남작은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슬슬 요리를 시작해 볼까?" 데이몬이 슬쩍 손을 들어올리자 로메인 남작의 몸이 그대로 굳어져버렸다. 순간적으로 발사된 매직 미사일이 남작의 전신 마혈을 모조리 제압해버렸던 것이다. 순식간에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버린 로메인 남작. 아혈을 제압하지 않아서인지 그는 연신 호통을 쳐댔다. "이놈! 날 풀어라. 그러지 않는다면 병사들을 불러 네놈을 당장 천참만륙해 버리겠다." "시끄럽군." 인상을 찌푸린 데이몬이 다시 한 번 손을 휘젓자 로메인 남작은 이젠 고함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할 처지에 놓여버렸다. 아혈마저 제압되어버린 것이다. 슬며시 흉소를 흘리며 다가서는 데이몬. 그의 얼굴에 어린 미소는 조금 전 로메인 남작의 것과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일단 맛보기로 분근착골을 선물해줄까?"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서너 발의 매직 미사일이 발사되어 로메인 남작의 대혈을 점했다. 남작의 몸은 삽시간에 사시나무 떨 듯 떨기 시작했다. 사지백해를 수십만 마리의 개미가 동시에 뜯어먹는 고통에 그는 벌써부터 식은땀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냅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도저히 음성이 목구멍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으으으." 실낱같은 기성을 흘리며 몸을 비비꼬는 로메인 남작. 그를 힐끗 쳐다본 데이몬은 몸을 돌려 문가로 향했다. 문간에 선 그는 크게 고함을 질렀다. "경비병." 놀랍게도 그의 음성은 로메인 남작의 것과 똑같았다. 말투와 어조 모두가 한치의 틀림도 없이 동일했다. 하지만 분근착골을 당하는 로메인 남작에게는 놀랄 여유도 없었다. 분근착골이 주는 고통은 그 정도로 강렬했다. 경비병의 응답이 곧 이어졌다. "부르셨습니까?" "지금 즉시 감옥으로 가서 젠가르트를 데리고 오라. 들어올 때는 당글라스 혼자서 데리고 들어와야 한다." "알겠습니다." 지시를 내린 뒤 데이몬은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로메인 남작이 몸을 비비꼬는 장면을 감상했다. 직접 당하는 로메인 남작에게는 죽을 맛이었지만 관람하는 데이몬에게는 충분히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녀석. 춤을 그따위 밖에 못 추겠나? 제대로 한 번 춰봐." "으으으." 욕설을 퍼붓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말이 한 마디도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던 통증에 로메인 남작은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이 녀석아. 소싯적에 난 웃으며 분근착골의 형을 받았다. 참을성이 그리 없나?" 테이블 위의 포도주까지 벌컥벌컥 마시며 관람하던 데이몬은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얼른 몸을 일으켰다. "누구냐?" "당글라스입니다. 지시하신 대로 젠가르트를 데리고 왔습니다." "들어 오라." 덜컥.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섰다. 물론 두 사람은 실내의 정경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데이몬의 주문영창이 이어졌다. "락(Rock)" 문은 곧 파성퇴로 밀어붙여야만 열릴 정도로 굳게 봉쇄되어 버렸다. "네, 네놈이 감히……." 데이몬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당글라스. 하지만 데이몬의 손짓이 이어지자 그 역시 로메인 남작과 똑같은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악." 주종관계라서 그런지 분근착골을 당해 몸을 비비꼬는 동작에도 차이가 없었다. 데이몬은 내친 김에 그의 아혈까지 점해 버렸다. 작업(?)을 마친 뒤 데이몬은 젠가르트에게 다가갔다. 달아날 것을 대비했는지 그는 굵은 오라줄에 꽁꽁 묶여 있는 상태였다. 그는 멍청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이, 이게 어찌된 일이오." "놀랐나? 영감." 데이몬은 손을 뻗어 오랏줄을 풀어주었다. 자유롭게 되었지만 젠가르트는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 춤을 추는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쳐다볼 뿐이었다. "설명하자면 길어. 영감.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하겠지?" "무, 무슨." 데이몬은 짜증을 부렸다. "이런 늙은이를 봤나? 기억력하고는……. 이봐 기회가 생기면 다시 한 번 열심히 살아본다며?" "그, 그랬었지요." 젠가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경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그래야겠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좋아. 그렇다면 영감이 가장 싫어하는 놈이 로메인 맞아?" "아, 아마 그럴 겁니다." 마치 다짐을 받으려는 듯 데이몬은 재차 되물었다. "틀림없겠지?"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곧 데이몬의 몸을 축으로 무시무시한 마나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마나에 대해 무지한 젠가르트도 느낄 만큼이나 방대한 마나의 흐름이었다. 그 상태로 데이몬은 마법의 캐스팅에 들어갔다. 어둠의 마나까지 모여드는 것을 보니 흑마법의 일종이었고 9 써클의 마스터인 데이몬이 전개하는데도 이리 오래 걸리는 것을 보니 결코 만만한 마법이 아니었다. 충분한 마나가 모여들자 데이몬은 지체 없이 그것을 재배열했다. "어둠의 권능으로 저주를 실현한다. 네가 가장 미워하는 것으로 모습이 바뀔지어다. 커스(Curse)!" 캐스팅이 끝나자마자 눈부신 빛무리가 젠가르트를 휘감았다. 제대로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빛무리였다. "헉. 무, 무슨." 영문을 알지 못한 젠가르트가 놀라서 두 팔을 휘저었지만 데이몬은 동요 없이 마나를 재배열해갈 뿐이었다. 급기야 빛무리는 급격히 빛을 내쏘고는 소멸해버렸다. 팟. 빛이 사라진 뒤 그 자리에는 전혀 다른 인물이 서 있었다. 옆에서 미친 듯 몸을 비비꼬고 있는 자와 한치의 틀림도 없는 녀석이 말이다. 자신에게 닥친 변화를 실감하지 못한 듯 젠가르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볼 뿐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영락없는 로메인 남작의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데이몬은 손을 뻗어 한 쪽에 있는 전신 거울을 가리켰다. "남작 녀석을 가장 미워하는 게 사실이었군. 바뀐 모습이 마음이 드는지 한 번 살펴보도록……." "예? 예." 젠가르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을 들여다본 순간 젠가르트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익숙했던 자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가장 증오했던 자의 모습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로메인 남작의 모습이 말이다. 장사로 단련된 눈치가 어디가지는 않는지라 젠가르트는 이내 데이몬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 그렇다면 앞으로 로메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상당히 고위급 저주이니까 어지간한 놈은 풀 엄두를 내지 못할 거야. 물론 자연적으로 풀릴 리는 없지. 어떤가 마음에 드는가?" "마, 만족합니다. 만족하고 말고요." 젠가르트는 정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로메인 남작을 미워했기는 했지만 그의 배경까지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로르베인 제일의 부를 가진 남작의 배경은 그 누구라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이라 볼 수 있었다. 때문에 젠가르트의 얼굴은 삽시간에 환희에 차 올랐다. "세, 세상에, 나에게 어찌 이런 일이……." 좋아하는 젠가르트를 보며 데이몬이 으름장을 놓았다. "발각 당하지 않도록 행실을 조심하도록 해." "걱정 마십시오. 로메인 가의 대소사는 이미 훤하게 꿰뚫고 있습니다." 자신에 찬 젠거르트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은 이번에는 로메인과 당글라스를 향해 다가갔다. 로메인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이 되어 정말 목불인견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데이몬은 매직 미사일을 시전해서 그를 분근착골의 형으로부터 풀어주었다. 더불어 마혈과 아혈까지 모두 말이다. "크으윽." 묵직한 신음소리를 흘리며 로메인 남작이 그 자리에 풀썩 널브러졌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42회.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삭신이 쑤셔왔다. 정말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의 고통이었다.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남작의 면전에 대고 데이몬은 얼굴을 바짝 붙였다. "맛이 어땠나?" "으으으. 네, 네놈을?" "내가 밉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는 로메인 남작. 데이몬은 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한 번 저주를 캐스팅했다. 마나는 이미 여러 번 전개할 수 있게 충분히 모아놓은 상태였다. 파팟. 눈부신 빛무리가 이번에는 로메인 남작의 몸을 휘감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빛무리가 사라진 뒤에 전혀 다른 인물이 그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들여보는 데이몬과 한치의 틀림도 없는 모습이 말이다. 물론 로메인 남작으로써는 데이몬이 극히 미울 수밖에 없었으므로 일어난 일이었다.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동일한 모습. 자신의 판박이 얼굴을 들여다보며 데이몬은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잘 생기긴 했군. 이제 이 얼굴과도 이별인가?" 데이몬은 젊고 잘 생긴 용모를 버려버릴 심산이었다. 이곳에 온 뒤 어느 정도 회의를 품었다가 이번에 남작의 남색 대상이 된 뒤 아주 정나미가 떨어져버린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예전의 흉측했던 모습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그저 평범한 얼굴,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을 모습이 가장 제격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젠가르트를 쳐다보았다. 그는 아직까지 거울을 들여다보며 놀라워하고 있었다. "이봐. 젠가르트." "예, 예. 말씀하십시오." "네 예전 모습을 내가 가져도 되겠나? 내 얼굴을 이놈에게 주었으니 새 얼굴이 필요한데 말이야." "무, 물론입니다. 이를 데가 있겠습니까?" 무척 고소하다는 눈빛으로 로메인 남작을 쳐다보던 젠가르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냉큼 대답했다. "좋아. 그리고 젠가르트." "예. 말씀하십시오." 고개를 깊숙이 숙이는 젠가르트를 보며 데이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벌써부터 실수를 하나? 이제부터 젠가르트는 네 이름이 아냐. 사소한 일에도 신경을 써야지. 이제부터 네 이름은 바론(Baron) 로메인이야. 알겠어?" 비로소 실책을 알아차린 젠가르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반말하는 게 섭섭하더라도 참아. 사실 난 너보다 몇 배는 오래 살았으니 말이야." "아무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젠가르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마법을 전개하는 시점부터 그는 데이몬을 젊은이라 믿지 않았다. 저 정도 고위급 마법을 눈 깜짝할 사이에 캐스팅하는 것을 봐서 무척 오래 살아온 마법사임이 분명했다. 자신보다도 훨씬 오래……. "좋아." 데이몬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손을 슬쩍 들자 몸을 비비꼬던 당글라스가 맥없이 쓰러졌다. 털썩. 이번에는 총집사 당글라스를 처리할 차례였다. 물론 처치해 버리는 것이 깔끔하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순 없었다. 바로 칠종단금술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폴리모프(Polymorph)를 사용해야겠군. 아마도 아르카디아엔 날 능가하는 마법사가 없을 테니 넌 영원히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야 할거야." 자신의 모습에서 약간 변화를 준 용모를 떠올린 데이몬은 지체 없이 캐스팅을 했다. "폴리모프." 주문영창이 끝남과 동시에 당글라스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끄아아악." 전신의 살과 근육의 제 멋대로 움직이는데 고통을 느끼지 않을 자는 없었다. 분근착골의 형을 받을 때처럼 또다시 몸을 비비꼬는 당글라스. 잠시 후 그는 판이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들여다보는 데이몬의 모습과 눈동자와 머리색만 달랐을 뿐 나머지는 모두 동일했다. 작업을 마친 데이몬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제 내가 변할 차례인가?" 우두둑거리는 기성과 함께 그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역체변용술이었다. 옅은 블론드의 머리색이 점점 탈색되더니 삽시간에 백발로 변해버렸고 코밑과 턱에서 무성한 수염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팽팽하던 피부에 주름이 가며 윤기가 사라졌다. 조금 뒤 데이몬은 판이하게 변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젠가르트는 입을 딱 벌렸다. 상대가 변한 모습은 그가 조금 전까지 하고 있던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세, 세상에……." "왜? 놀라운가?"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킨 젠가르트가 겨우겨우 내뱉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런 고급 마법은 어지간한 마법사라면 하나를 전개한 뒤 꼬박 며칠을 앓아 누워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틀렸어. 영감. 폴리모프는 어지간한 마법사는 캐스팅하지도 못해. 왜냐하면 9써클의 마법이거든……." 말로만 듣던 9써클의 마법사를 보게 된 젠가르트는 다시 한 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를 보며 데이몬은 안색을 굳히고 으르렁거렸다. "이 비밀은 오로지 가슴속에만 묻어둬야 해. 결코 퍼져나가서는 안 돼! 알겠지?"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젠가르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역시 목숨을 걸고서라도 비밀을 지켜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새로 얻은 신분과 재산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그렇게 해야만 했다. "어디 한 번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도록……. 감옥의 여자들도 풀어주고. 설마 그 사이에 벌써 마음이 바뀐 것은 아니겠지?" "무, 물론입니다. 넉넉하게 노잣돈을 쥐어 고향으로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맹세까지야 할 건 없고. 그리고 혹시라도 트루베니아 사람을 보게 된다면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도록 해. 이 정도야 할 수 있겠지?" 젠가르트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저로써는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죠." "남색을 밝히는 놈이니 마누라는 없을 거야. 그러니 로메인 행세를 하는데 만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해." 짤막하게 내뱉은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바뀐 로메인과 당글라스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중에서 로메인으로 짐작되는 놈이 입을 열었다. "이, 이놈. 내 재산을 어떻게 할 작정이냐? 당장 원상태대로 돌려놓지 못할까?" 데이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시끄러운 놈이니 이참에 입도 영원히 막아버려야겠군. 이터널 데프니스(eternal deafness)." 주문영창이 끝나고 로메인 남작과 당글라스는 불쌍하게도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앞으로도 영원히 말이다. 손을 탁탁 턴 데이몬은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젠가르트를 돌아보았다. "그건 그렇고 저놈들을 처리하는 임무를 자네에게 맡기겠네." 젠가르트의 눈에 득의한 빛이 떠올랐다. "걱정 마십시오. 놈들을 평생동안 빛이 통하지 않는 지하감옥에 쳐 박은 뒤……." "그렇게 간단히 처벌할 수야 없지. 자넨 놈의 장기를 잊었나?" "그, 그렇다면……." 뭔가 깨달았다는 듯 젠가르트가 눈을 치켜 뜨자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이 좋으니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자넨 비밀리에 귀족 중에서 남색을 즐기는 작자를 물색해 보라고……. 취미가 가학적일수록 좋으니까 말이야." "걱정 붙들어매십시오. 어떤 일이 있더라고 일을 성사시키겠습니다." 잔뜩 신이 난 젠가르트가 냉큼 대답했다. 이것은 정말 통쾌하다고 볼 수 있는 복수였다. 로메인 남작이 지금까지 해 온 소행에 가장 어울리는 복수. 덤으로 끼게 된 당글라스가 불쌍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로메인 남작과 당글라스는 서로 부둥켜안고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들에겐 암울한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껏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해왔던 미래 말이다. 자신을 욕(?)보이려 했던 로메인 남작에게 통쾌한 복수를 한 뒤 데이몬은 한동안 저택에 머물렀다. 새로이 로메인 남작이 된 젠가르트의 만류로 바로 떠나지 못한 것이다. "이대로 떠나시다니요? 정말 섭섭합니다. 단 며칠이라도 쉬었다 가심이……." "그것도 나쁘진 않겠군." 데이몬은 무척 융슝한 대접을 받으며 사흘을 푹 쉬었다. 그 동안 젠가르트는 감옥에 갇혀 있던 여인들을 풀어주었다. "그, 그냥 풀어주란 말씀이십니까?"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다소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외모에서부터 음성까지 로메인 남작과 한 치의 틀림이 없었기에 지시대로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냥 보낸 것도 아니었다. 여인들에게 1인당 5골드씩이나 되는 여비를 주었으니 젠가르트로서는 로메인의 돈으로 인심 한 번 확실하게 쓴 셈이 되었다. 자유의 몸이 되고 거기에다 5골드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챙긴 여인들은 감격해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 정도 금액이라면 고향의 식구들이 몇 년을 걱정 없이 생활할 정도의 거금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감격한 나머지 계속해서 절을 올린 여인들은 하나씩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하녀로라도 남아 일을 하겠다는 여인들도 나섰지만 젠가르트는 그녀들을 잘 타일러 모조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모든 여인들이 떠나간 다음 젠가르트는 무척 홀가분한 표정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아직까지 자신의 예전 얼굴(데이몬이 변용하고 있는)을 보는 것이 다소 이상하긴 했지만 그는 억지로 그런 표정을 억눌렀다. "가슴이 무척 뿌듯하군요. 아마 원판 녀석은 이런 기분을 결코 느끼지 못하겠지요?" 데이몬은 히죽 웃어주었다. "모르지? 팔려간 귀족 녀석에게 잘 봉사한다면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를 들을지 모르잖아?" "놈의 성격으론 아마 불가능할걸요?" "그렇지?" 저택에서 머무는 동안 데이몬은 젠가르트로부터 아르카디아에 대한 제반 사항을 전해들었다. 행상으로 떠돌며 겪은 젠가르트의 경험은 데이몬에게 더 없이 좋은 정보였다. 자신의 신세를 바꿔 준데 대한 보답으로 젠가르트는 알고 있는 상식을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놓았다. 그 탓에 데이몬이 사흘이라는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야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다시 짐을 꾸려야했던 데이몬이었다. "이만 떠나야겠군." "벌써 가시게요?" 젠가르트는 무척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새 삶을 살게 해 준 장본인이었기에 섭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만큼 데이몬에게 감복해 있는 상태였다. "할 일이 많아." 데이몬의 결심이 굳은 것을 알아차린 젠가르트는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그러시다면 할 수 없지요. 대신 부근을 지날 때는 반드시 들러주십시오." 젠가르트가 여비조로 많은 금화를 내놓았지만 데이몬은 그 중에서 정확히 300골드만 챙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루비를 판 대가였다. 그런 다음 데이몬은 길을 떠났다. 무척 아쉬워하는 젠가르트를 남겨두고 말이다. 그의 뒤로 젠가르트의 진심 어린 당부가 이어졌다. "꼭 오셔야 합니다.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습니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43회. 안녕하세요. 날씨가 무척 덥습니다. 통풍도 잘 안 되는 좁은 골방에서 글을 쓰다보니 약간 맛이 간 것 같네요.^^ 오타도 많고, 실수도 잦고, 좌우지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우선 lock을 rock로 착각한 것과 deafness를 벙어리로 적은 점은 명백한 제 실수입니다.^^ 철저한 교정을 거친 뒤에 연재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 점에 대해 머리 숙여 사과 드립니다. 그러고 보니 교정이란 것이 정말 해도해도 끝이 없더군요. 통신본에서 적어도 세 번은 수정하고 난 뒤 원고를 보내는데 그것을 가지고 편집자님께서 꼬박 보름가까이를 교정에 몰두합니다. 물론 최종 교정까지 보지요. 하지만 모든 과정을 통과했어도 출판된 책에 어김없이 오자가 나오더군요. 사람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일까요? 책 한 권에 오자 서너 개 정도면 아주 양호한 편이라고 편집자님께서 그러시던데……. 여전히 횡설수설하는군요. 갑자기 왠 교정 얘기?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당분간 연중을 하려고 합니다. 푹 쉬며 심신을 재충전한 뒤 다시 연재에 들어가는 것이 나을 듯 하네요. 성의 없이 글을 연재하는 것은 제 글을 읽어드리는 독자들을 모욕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비록 완벽한 교정이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성의라도 보여드리는 것이 제가 할 도리인 것 같네요. 비축분이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 교정을 한 번 더 본 뒤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잘못을 지적해드린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P.S 연중이 끝난 뒤 연참할 생각이니 너무 돌 던지지 말아주시길…….^^ **************************************************************************** 저택을 떠난지도 이틀이 지났다. 데이몬은 지금 한가롭게 대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지금 결코 두드러지지 않는 용모인 젠가르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평범한 노인의 모습이라 사람들의 관심을 전혀 끌지 않았기 때문에 데이몬은 무척 편안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여정 도중 잠시 멈춰선 데이몬은 지도를 펼쳐 들었다. "가만 있자. 젠가르트에게 들은 곳이 세바인이라고 했나?" 젠가르트의 유랑 경험을 듣던 데이몬은 자신의 목적에 꼭 부합되는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으면서 충분히 외진 곳 말이다. 젠가르트의 설명에 의하면 그 환경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내륙 국가인 안트로스 왕국의 변방에 세바인이란 마을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겐 공포의 절지로 소문이 나 있는 곳이지요. 안트로스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곳에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엔 윈터데일이라는 이름의 극악한 네크로멘서가 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가 5년 전 그곳을 지나다 들은 소문입니다." 젠가르트의 설명을 떠올려 본 데이몬은 그곳이 바로 자신이 찾던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악명 높은 곳이라면 자신이 마음놓고 연구에 몰두하는데 더 없이 훌륭한 장소였다. 비록 주인이 있는 곳이지만 상관없었다. 쫓아내고 차지해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데이몬은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네크로멘서라니 아쉽군. 리치라면 그냥 박살을 내어버렸을 텐데." 아무리 사악한 네크로멘서라도 역시 인간이었다. 칠종단금술의 금제를 받고 있는 이상 놈을 죽일 도리가 없었으므로 단순히 쫓아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튼 놈이 친절하게도 날 위해 악명을 떨쳐 놓았다니 고맙군. 감사히 접수해야지?" 불행히도 세바인이란 지방은 걸어서 가기에는 제법 멀었다. 북서쪽으로 두 달 가까이 걸어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지도에 좌표가 나와 있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바로 공간이동을 해버리려는 마음을 먹었다. "예상보다 며칠 지체되었으니 시간을 줄이는 것이 좋겠지?" 데이몬은 암암리에 마나를 끌어 모았다. 쓰쓰쓰쓰. 엄청난 양의 마나가 모여들었다. 이제 데이몬은 통상적인 마법사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어지간한 마법사라도 고급 마법을 한 두 개 캐스팅하고 나면 녹초가 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달랐다. 궁극의 마법이라는 헬 파이어를 열 번 이상 쏘아내고 나서도 평온을 유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바로 마법의 기초가 탄탄하다는 데 있었다. 세상 어느 마법사가 5백년의 세월을 두고 천천히 마법을 익힐 수 있겠는가? 또한 이것은 도일이 그의 기초를 충실히 닦아주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스승을 떠올리자 어느덧 데이몬의 눈매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스승님. 이 제자 원수를 반드시 갚아드리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애석하게도 데이몬은 스승의 두 번째 당부는 이행하지 못했다. 베르키스에게 잡혀 있느라 그만 그의 아들을 돌봐주지 못한 것이다. 힘을 얻었지만 500년의 세월이 흘렀고 후손의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이상 그로써는 방법이 없었다. "아르카디아에서 브로큰하트란 성을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가능성을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는 동안 마나가 모였고 데이몬은 지체 없이 공간이동을 캐스팅했다. "텔레포트." 몸 주위로 마법진 형상이 힐끗 나타나는가 했더니 그의 몸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온데간데없이 말이다. 데이몬은 무사히 세바인 외곽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불행히도 그곳은 마을 중심부였다. "으헉." 빛이 번쩍 한 순간 나타난 데이몬을 보고 사람들이 기겁을 했다. 난데없이 나타난 사람을 보고 놀라지 않을 자는 없었다. 물론 데이몬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들이 좌표가 일치되는 곳에 서 있었다면 그대로 비명횡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9서클의 마스터라고 해도. 데이몬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 데이몬으로서는 지도를 만든 사람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좌표를 하필이면 마을 중심부로 잡아놓은 가증스러운 놈 말이다. 어쨌거나 천만다행으로 무사할 수 있었기에 그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 때 누군가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자, 잠깐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무슨 일이오." 데이몬은 일부러 늙수그레한 음성을 흉내내어 되물었다. 그가 하고 있는 용모는 늙은 노인이다. 따라서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데이몬을 불러 세운 자 역시 늙은이였다. 차림새를 보아 마을에서 제법 요직을 맡고 있을 것으로 보였다. 옆에는 쇠스랑을 멘 농군 차림의 청년이 하나 서 있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묘한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호, 혹시 마법사이십니까?" "그렇소." 공간이동을 해 온 때문에 데이몬으로써는 솔직히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란 말을 듣자 노인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그, 그러시다면 저희를 좀 도와주십시오. 공간이동을 하실 줄 아시니 드리는 부탁입니다. 저희로써는 정말 절실한 문제입니다." "대관절 무슨 문제인데 그러시오." 눈을 둥그렇게 치뜨는 데이몬에게 노인은 열심히 사정설명을 했다. 설명을 들어보니 그가 바로 이 마을의 촌장이었다. "이곳에는 오랫동안 악명을 떨쳐온 원터데일이란 이름의 사악한 네크로멘서가 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마을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었지요. 마을 사람들 중 가족과 친지를 잃은 자가 없을 정도입니다." 찾아가려는 자를 거론하는데 흥미가 생기지 않으면 거짓말이었으리라. 데이몬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그래서요." "생업을 포기할 수 없어서 저희는 줄곧 각지에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물론 저희 국왕폐하께서 많은 토벌군을 보내 주셨지만 무리였습니다. 놈의 실력이 워낙 강한지라 병사들은 남김 없이 시체가 되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저희 염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마침내 구세주가 당도했습니다. 바로 강력한 크로센 제국의 근위 기사들과 궁정 마법사들이셨지요." 뜻밖의 소식이라 데이몬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물론 아르카디아에서 크로센 제국이 가장 강대하다는 사실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큰 제국의 근위 기사와 궁정 마법사라면 제 아무리 강력한 네크로멘서라도 당해낼 수 없을 터. 다급해진 데이몬이 대답을 채근했다. 우습게도 그는 네크로멘서의 안위를 더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되었소. 놈이 죽었소?" 결과는 정말 허무했다. 네크로멘서의 거처 깊숙이 진입해 들어간 토벌대는 범인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장장 사흘을 머물렀건만 네크로멘서는 나타나지 않았고 시체에서 풍기는 장독(葬毒)이 워낙 지독했기 때문에 토벌대는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로 돌아온 토벌대는 자신만만하게 네크로멘서의 퇴치를 선포했다. "네크로멘서는 도망쳤소. 그러니 당신들은 아무 염려말고 생업에 열중하셔되 됩니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놈의 거처를 수습하도록 하시오. 그곳에는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소." 이 말만을 남기고 토벌대는 크로센 제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안심한 마을 사람들은 곧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산을 올랐다. 그러나……. 촌장의 얼굴이 극도로 일그러졌다. "놈은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놈은 시체를 수습하러 간 우리들을 공격해 왔습니다. 그 탓에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요. 그 때문에 부득이 마법사님께 부탁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데이몬은 네크로멘서가 다시 나타났다는 촌장의 말에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놈이 반드시 살아있어야 했다. 정황을 봐서 그리 강력한 놈은 아닌 것 같았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났소?" 잠시 머뭇거리던 촌장은 곧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사실 이번에 세 번째입니다. 저희 국왕전하께서 오백 명이나 되는 병사를 마법사와 동행시켜 보내신 적이 정확히 두 번 있었지요.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지만 놈은 그 때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데이몬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과중한 부탁이란 것을 아는지라 촌장은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모쪼록 부탁드립니다." "나도 마법사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소?" 그러나 데이몬은 공간이동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을 그리로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촌장은 무척 의아해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데이몬은 자신 있게 가슴을 탕탕 쳤다. "그런 놈이라면 크로센 기사단을 부를 필요까진 없소. 나 역시 강하다고 자부하는 마법사요. 내가 놈을 처리해 드리리다." "구,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실 필요는……." "어허! 내가 공간 이동해오는 것을 보지 못했소? 공간이동은 4서클의 마법이오. 아무나 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란 말이지." 그 말에 촌장의 얼굴이 확 펴졌다. 절박한 상황에서 희망을 되찾은 사람이 보일 법한 눈빛이라고나 할까? 그는 황송하다는 듯 허리를 꺾었다. "그,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동안 저희 집으로 가서 먼저 식사라도 하심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소. 갈 길이 바쁘니 안내하는 사람이나 서둘러 붙여주시오." "알겠습니다." 촌장은 얼른 옆의 청년을 불렀다. 청년은 얼른 쇠스랑을 땅에다 내려놓았다. "제 아들입니다. 이 녀석을 따라가신다면 놈의 거처에 당도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알겠소." 네크로멘서의 거처는 생각보다 멀었다. 둘은 무척이나 험한, 소롯길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산중을 무려 두 시간이나 걸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데이몬은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길에 무척 흡족해했지만 말이다. 촌장의 아들은 쭈뼛거리며 손을 뻗어 절벽 밑동에 뚫려 있는 시커먼 동굴의 입구를 가리켰다. "저곳입니다." 다리를 후들후들 떠는 폼이 무척 겁에 질린 듯한 기색이었다. 데이몬은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자네는 이 길로 마을로 돌아가게. 놈을 처치한다면 마을에다 기별을 넣어 줄 터이니……." "아, 알겠습니다." "만약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놈에게 당한 것으로 생각하게. 알다시피 죽은 자는 말을 못하는 법이니 말일세. 크로센 기사단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이야." "그, 그러지요." 고개를 끄덕인 청년은 잠시라도 있기 싫다는 듯 몸을 돌려 온 길을 되짚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허둥지둥 달려가는 모습에서 네크로멘서에 대한 공포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원 녀석도……. 그나저나 마을로 가지 못하는 것은 기정사실이겠군." 네크로멘서를 제압하든 못하든 마을엔 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걸어감에 따라 멀찍이 보이던 절벽의 동굴 입구가 점차 가까워졌다. 데이몬은 윈터데일이란 이름의 네크로멘서에게 관심을 가졌다. "대관절 어떤 놈인지 궁금하군." 마을 사람들을 즐겨 습격하지만 강력한 토벌군이 왔을 때는 나타나지 않는다. 데이몬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상대는 필시 그리 강력하지 않은 네크로멘서가 분명했다. "약한 놈이니 5서클 정도로 봐야겠군. 그 이하의 흑마법사는 거의 네크로멘서가 될 수 없으니 말이야." 물론 그 정도 네크로멘서는 백이 덤벼도 데이몬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세상에 나와있는 유일한 9서클의 마스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라도 신경써야 할 것은 분명히 있었다. "강한 적이라 판단되면 놈은 분명히 숨어버릴 테지? 그렇다면 비교적 약하게 보여야겠군." 데이몬은 마법을 펼쳐 자신의 서클을 숨겼다. 게덴하이드에게 늘상 써먹은 방법이었으므로 마법은 금방 실행되었다. 통상적으로 마법사들은 자신보다 서클이 낮은 마법사라면 마법 수준을 금방 간파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수준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상대는 십중팔구 자신보다 서클이 높다고 봐야 했다. 그것을 감안해서 데이몬은 겉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마법 수준을 4서클 정도로 변환시켰다. 이 정도로 낮은 서클이라면 놈이 아무런 경계를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자 그럼 네크로멘서 사냥을 시작해볼까?" 만반의 준비를 갖춘 데이몬은 주저 없이 동굴 내부로 쓱 들어섰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44회. 따르르릉. 난데없이 울려 퍼지는 알람 마법소리에 흑마법사 원테데일은 잠에서 깨어났다. 조심성이 강한 성격답게 그는 서둘러 동굴 내부의 상황을 점검했다. 그와 같이 실력이 낮은 네크로멘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조심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것이다. "침입자로군. 어떤 놈일까?" 상대가 단 하나란 것을 알아차린 원터데일은 고민에 사로잡혔다. 한 놈이었지만 이곳까지 들어온 것으로 보아 자신보다 강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사실 그는 마법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다. 기를 쓰고 수련했지만 고작해야 4서클의 엑스퍼트를 벗어날 수 없었다. 마법에 대한 자질이 워낙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터데일은 그 때문에 네크로멘서가 될 마음을 품었다. 오랜 시간 어둠의 마력을 모은다면 상당히 강력한 언데드 몬스터를 소환할 수 있었고 그래야만 강해질 수 있었다. "일단 조심하는 게 상책이겠군." 그는 조심스럽게 침실 바닥의 비밀 문을 열었다. 그곳에 숨어 있으면 그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간파하지 못한다. 비밀 문의 입구는 3인치 두께의 강철이었고 손잡이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안에서 걸어 잠근다면 그 누구도 열지 못했다. 게다가 바닥이 워낙 깊은데다 마법진까지 설치되어 있어서 자신의 마력이 새어나갈 위험도 없었다. 이곳에 숨어서 침입자가 떠나가기를 기다린다면 다시금 자신의 세상이 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위해서는 조력자가 필수였다. 적의 상황을 남김없이 전해주는 조력자 말이다. 철컥. 밀실 속으로 들어간 윈터데일은 서둘러 자신의 패밀리어(Famillar)를 불렀다. 깊숙이 숨어있는 자신에게 위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전해줄 조력자 말이다. 왜애앵. 놀랍게도 그의 패밀리어는 파리(fly)였다. 지극히 하찮은, 지금도 시체에 새카맣게 내려앉아 있는 수많은 파리 중의 몇 마리인 것이다. 원터데일이 파리를 패밀리어로 삼은 데는 바로 이런 속셈이 있었다. "크크크. 이 많은 파리 중에 내 패밀리어가 숨어 있으리라곤 아무도 모를 것이다. 고작해야 박쥐 따위나 패밀리어로 간주해서 잡아죽이겠지?" 원터데일의 말대로 이 상황에서 파리는 가장 훌륭한 패밀리어였다. 동굴 안에는 적어도 수백만 마리의 파리가 우글거릴 것이었고 그 중에서 자신의 패밀리어를 간파하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도 힘들었다. 그 사실을 철석같이 믿고 원터데일은 패밀리어가 적의 정체를 파악해 오기까지 기다렸다. 물론 숨소리도 내지 않고 말이다. "이건 정말 심한데……." 동굴의 통로를 지나치며 데이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동굴 속은 온통 시체 천지였다. 시체가 썩어 들어가며 내뿜는 악취는 거의 살인적이라 말할 수 있었다. 파리가 새카맣게 앉아 있었고 온갖 벌레들이 파먹어 대부분의 시체는 신체 장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공기를 정화해버리고 싶었지만 정체가 드러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데이몬은 억지로 악취를 참아야 했다. 4서클 정도의 마법사가 고위급 마법인 공기정화 마법을 시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서 이 상황을 만든 네크로멘서에게 증오심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미친 녀석. 필요도 없는 사람들을 왜 이렇게 많이 죽인 거야. 이런 시체로는 좀비 따위나 만들 수 있을 텐데……." 네크로멘서가 행한 짓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쓸데없는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도리가 없었다. 아니면 시체가 썩으며 내뿜는 독기를 이용해 적을 막을 생각이던지……. 데이몬은 혀를 쯔쯔 내찼다. "하는 짓을 보니 네놈도 쓸만한 네크로멘서가 되기는 글렀어." 물론 데이몬의 실력이면 이 시체들을 가지고도 충분히 언데드 몬스터를 소환해 낼 수 있었다. 좀비나 스켈레톤은 일도 아니었고 구울이나 스펙터도 손짓 한 번이면 해결되었다. 조금 까다롭기는 했지만 스펙터나 듀라한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다. 그의 목표는 엄연히 드래곤이었으므로 쓸데없는 것에 마력을 소비하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나에겐 오로지 데스 나이트만이 필요하다. 드래곤을 상대하는데는 다크 쉐이드보다도 오히려 데스 나이트가 나으니까 말이다." 봉인구에서 나이델하르크의 마력을 반만 뽑아낸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가 소유한 데스 나이트들은 그야말로 무적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인크레시아 속의 최고급 마법 무구까지 착용시킨다면 지금까지 탄생한 적이 없는 강력한 데스나이트가 되기에 결코 모자람이 없다. 생전의 실력이 최상급 소드 마스터였으니 말이다. 철벅 철벅. 시체에서 흘러나온 물을 밟으며 데이몬은 동굴 내부를 샅샅이 탐색했다. 하지만 목적했던 네크로멘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동굴 내부를 샅샅이 뒤질 때까지 말이다. 이곳은 제법 규모가 큰 동굴이었다. 자연적으로 생겨난 듯 했지만 인공적인 손길이 많이 가미되어 있었다. 네크로멘서는 동굴의 일부만을 사용한 듯 보였다. 침실과 연구실로 사용한 듯한 석실 하나와 중앙의 큰 공동만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보였다. "이 자식이 어디로 갔지?" 데이몬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탐지 마법을 실시해본 결과 놈이 속에 있다는 것은 확실히 파악했지만 어디 있는지는 오리무중이었다. 워낙 꼭꼭 숨어있는 탓에 도저히 기척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노움이라도 불러서 파악해볼까?" 대지의 정령을 부르려던 생각을 하던 데이몬은 이내 그것을 포기했다. 노움의 입을 통해 베르키스에게 사실이 전해질 수도 있었다. 때문에 데이몬은 느긋하게 놈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소굴이 이곳이니 어디 가랴 싶었기 때문이다. "분명 오겠지?" 전신에 시체 천지가 되어있는 중앙 광장에서 데이몬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이곳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기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미치겠군." 패밀리어를 통해 침입자의 모습을 지켜본 원터데일은 고민에 사로잡혔다. 자기보다 강한 것이 확실해 보이는 침입자가 도무지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데이몬이 생각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네크로멘서의 실력이 상상이하라는 점이었다. 데이몬은 지금 4서클의 마스터 정도의 기척을 표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크로멘서는 4서클의 엑스퍼트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데이몬의 수준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데이몬의 예상이 여기에서 여지없이 빗나가버린 것이다. 서클을 파악하지 못하는 이상 상대는 자신보다 강하다고 봐야 했기 때문에 원터데일이 섣불리 나서지를 못하는 것이다. "놈이 과연 몇 서클일까? 5 서클? 6 서클? 최악의 경우 7 서클의 대마법사일 수도 있어. 어차피 나에겐 승산이 없는 싸움이야.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이곳에서 버텨야만 해." 어차피 참고 기다리는데는 이력이 나 있었던 원터데일이었다. 저번에 크로센 기사단이 왔을 때도 그는 비밀 석실 속에서 칠주야를 버텼다. 석실 속에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으므로 침입자보다 조건이 월등히 낫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상태로 원터데일은 침입자가 이곳을 떠나기만을 기다렸다. "무료하군." 꼬박 하루를 기다리자 데이몬도 마침내 진력이 나기 시작했다. 배도 고팠고 졸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잘 수는 없었다. 아무리 대마법사라도 자는 동안 습격을 받는다면 깨끗하게 이승을 하직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놈을 어떻게 끌어내지?' 고민을 거듭해 봤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싸우지 않겠다고 꽁꽁 숨어있는 놈을 무슨 수로 끌어낼 수 있을까? 결국 그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나오게 만들어버리겠다." 데이몬은 그 동안 모아놓은 어둠의 마력을 남김없이 뽑아 올렸다. 1백년 가까이 모아놓은 마력은 깡그리 데스 나이트들에게 털어 넣어버린 터라 모인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목적을 이루기에는 충분했다. 어둠의 마력(魔力). 이것은 소환술의 가장 근간이 되는 것으로 음의 마나 속에 극히 미약하게 분포되어 있는 원소이다. 마왕이 발휘하는 힘의 근원이기도 하며 바로 마력에 의해 언데드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계에서 끌어 모을 수 있는 마력에는 한계가 있다. 대상이 네크로멘서인 이상 말이다. 주위에 널린 시체들을 훑어보며 데이몬은 괴소를 지었다. 하루를 지내면서 이미 네크로멘서가 사람을 죽여 널어놓은 이유를 간파했던 데이몬이었다. "크크크. 놈. 시체가 발하는 시기(屍氣)를 통해 어둠의 마력을 모아온 모양인데 이제 어림없다. 두 번 다시 이런 짓거리를 할 수 없을 테니……." 어지간한 네크로멘서는 어둠의 마력을 쉽사리 얻을 수 없다. 음의 마나 속에 극히 희박하게 배열되어 있는 터라 마력을 뽑아내는 것은 적어도 6서클 이상이 아니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작업이었다. 도일이 데이몬에게 당부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네크로멘서는 오로지 편법으로써 마력을 끌어 모아야 한다. 지금처럼 시체의 기운을 이용하는 것이 수준 낮은 네크로멘서에겐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달랐다. 나인 클래스에서 네크로멘서가 되었던 탓에 미약하지만 자력으로도 어둠의 마력을 뽑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시체에서 나오는 질 나쁜 종류가 아닌 순도 높은 마력을 말이다. "좀비 따위는 만들지 않으려고 했는데 할 수 없군. 피고름과 진물에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으니……." 데이몬은 한껏 끌어 모은 마나를 재배열시키며 그 속에 어둠의 마력을 적절히 섞어 넣었다. "에니메이트 데드(Animate dead)" 그의 양손에서 소름끼치는 듯한 기괴한 빛이 일어났다. 파파팟.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빛줄기는 삽시간에 널린 시신들을 덮어버렸다. 빛줄기는 마치 체인 라이트닝처럼 시체들 사이를 점점 번져나가고 있었다. 끼이이이. 놀랍게도 벌레들에게 파 먹히고 있던 시체들이 세차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마치 되살아난 것처럼 말이다. 계속해서 몸을 경련하는 시체들. 그것들은 이내 하나 둘씩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썩어버린 피고름을 줄줄 흘리는 좀비들로 변해서 말이다. 그에 따라 동굴 속의 악취는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되었군." 코를 틀어막은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놈.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 수 있는지 정말 존경스럽군."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데이몬의 뒤로 좀비들이 천천히 뒤따르고 있었다. 이미 동굴 속의 시체들은 남김없이 좀비로 바뀐 다음이었다. 깨어난 좀비들은 데이몬의 통제에 따라 하나 둘씩 어기적거리며 동굴 밖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완전히 썩어 뼈만 남은, 마치 스켈레톤을 연상시키는 녀석에서부터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까지 붉은 피를 흘리는 녀석까지 좀비들의 종류는 다양했다. 하지만 좀비들은 공통적으로 짙은 시독(屍毒)을 흘리고 있었다. 좀비들의 무서운 점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사실 전투력 면을 따지자면 좀비들은 언데드 몬스터 중 최하위에 속할 수밖에 없다. 썩어문드러지고 경직된 근육에서 힘이 나올 턱이 없었으므로. 하지만 그들이 흘리는 시독은 생물에겐 극히 치명적인 독이었다. 중원에서도 시독은 만독(萬毒) 중 최상위의 절독에 속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닿기만 해도 살이 썩어 들어가는 맹독 때문에 좀비는 결코 만만히 봐서는 안 되는 언데드였다. 어쨌거나 데이몬이 일으킨 좀비들은 하나 둘씩 동굴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되겠군." 동굴에서 조금 떨어진 양지바른 곳에 도착한 데이몬은 눈을 빛냈다. 이미 동굴 속의 시체는 남김없이 그의 주위에 모인 상태였다. 그는 좀비들에게 모종의 명령을 내렸다. "이곳을 깊이 파헤쳐라." 끼끼끽. 좀비들은 데이몬의 명령에 따라 그곳을 파기 시작했다. 뼈만 남은 앙상한 손으로 맹목적으로 바닥을 파헤치는 좀비들. 물론 땅을 파는 이유는 데이몬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사고능력이 없는 탓에 좀비는 오로지 시키는 것만 할 수 있었으며 복합적인 임무 수행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매우 단순한 작업이었기에 좀비들은 쉬지도 않고 땅을 파서 삽시간에 사방 10평방미터나 되는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어놓았다. 깊이를 가늠해보던 데이몬은 눈을 빛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들어가 누워라." 그가 손짓을 하자 좀비들은 남김없이 구덩이에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털썩. 털썩. 좀비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제법 크고 깊었던 구덩이가 삽시간에 채워져 버렸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45회. 구덩이 안의 상황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지옥을 연상시켰다. 한데 뒤엉킨 채 꿈틀거리는 좀비들. 그들의 몸에서 배어 나오는 썩은 피고름과 진물사이에는 온갖 벌레와 구더기가 우글거렸다. 피어나는 악취로 부근의 초목이 누렇게 시들어버릴 정도였다. 모든 좀비들이 들어간 것을 확인하자 데이몬은 그들에게 불어넣었던 어둠의 마력을 다시 회수했다. 마력을 모은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모을 수 있는 양이 결코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낭비할 이유 따윈 없었다. 어둠의 마력을 회수하자 좀비들은 다시 원래의 시체로 돌아가 버렸다. 무표정한 눈빛으로 그것들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다시 한 번 캐스팅을 시작했다. "이제 너희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마. 인시너레이트!(incinerate)." 화아아악. 시체더미 사이에서 갑자기 맹렬한 화염이 솟구쳤다. 대기 중에 분포된 마나들 중 화(火)의 속성을 가진 마나만을 골라 일시에 발화시키는 고위급 마법이 캐스팅된 것이다. 한데 엉킨 시체들은 급속도로 타올랐다. 사실 피고름과 진물 때문에 시체 더미에 불을 붙이기는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인시너레이트에 의한 고열로 인해 시체들은 순식간에 습기를 잃어버렸고 지방이 연쇄적으로 타오르며 자력연소(自力燃燒)까지 가능하게 된 것이다. 화르르르. 시체 더미는 무섭게 타올랐다. 사방으로 검은 연기와 역한 냄새를 풍겨내며 말이다. 보고 있던 데이몬은 얼굴을 찡그렸다. "이놈은 나보다 더한 놈이군. 단순히 어둠의 마력을 끌어 모으려는 목적으로 이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다니……." 점차 재가 되어 가는 시신들을 두고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불이 꺼진 뒤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들어주려는 생각으로 말이다. 이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그런데 그의 걸음이 우뚝 멈춰졌다. 동굴 입구에 서 있는 그림자 하나를 보고 난 후의 일이었다. 데이몬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서렸다. "드디어 나타났는가?" 동굴의 주인이라 생각되는 네크로멘서를 쳐다보며 데이몬은 눈을 빛냈다. "이런 빌어먹을……."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네크로멘서 원터데일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기껏 끌어 모아 놓은 시체가 몽땅 타버리고 있는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가지 않으리란 각오는 그것으로 인해 무너져버렸다. 데이몬의 예상대로 그는 시체의 시기(屍氣)를 통해 어둠의 마력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그가 강해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바로 그것뿐이었다.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버린 이상 밀실에 더 이상 박혀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는 지금 데이몬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쥐어짜는 듯한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도, 도대체 왜 그랬소?" "………." 데이몬은 말이 없었다. 모습을 드러낸 네크로멘서의 꼴이 너무나 기괴했기 때문이었다. 윈터데일의 얼굴은 정말 흉측했다. 머리털과 눈썹이 홀랑 빠져버린 데다 피부에는 온통 물집이 잡혀 진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마치 귀신과도 같은 행색. 담이 작은 자가 본다면 그대로 혼비백산해버릴 듯한 용모였다. 아마도 시독 속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아연해 하던 데이몬이 겨우 입을 열었다. "가히 예전의 나와 비할 수 있는 용모로군." 데이몬이 동문서답을 하자 윈터데일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소환술(Necromancy)을 쓰는 것을 보니 같은 네크로멘서인 것 같은데 도대체 내 작업을 방해하는 이유가 뭐요? 이유나 압시다." 윈터데일은 마치 이판사판이라는 듯 따지고 들었다. 사실 서클을 파악하지 못하는 이상 상대는 자신보다 분명히 강하다. 다시 말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상대를 제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아주 미약한 차이라도 마법사들 간의 접전에선 치명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생의 염원이 산산이 깨져버린 때문에 그는 이성을 반쯤 잃고 있었다. "당신과 나는 마왕과 계약을 했고 소환술을 익혔다는 점에서 처지가 동일하오. 그런데 왜 날 건드리는 거요?" "그럼 넌 저 사람들을 왜 건드렸지?" 불쑥 내뱉은 데이몬의 대꾸에 원터테일은 그만 입이 딱 막혀버렸다. "그야………." "넌 너의 목적을 위해서 사람들을 죽여 시체로 만들었다. 그렇지 않느냐?" "그, 그렇소." "마찬가지야. 난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네 작업을 방해한 것이다." 천연덕스런 대꾸에 윈터데일은 할 말을 잊은 듯 싶었다. 데이몬은 느긋한 표정으로 윈터데일을 노려보았다. "저 사람들은 힘이 없었기 때문에 너에게 죽었다. 그렇다면 상황이 명백해지지 않는가? 힘이 있다면 날 막아내면 그 뿐이 아니겠나?" "당신의 모, 목적은 무엇이오?" 데이몬은 지긋이 손을 뻗어 동굴을 가리켰다. 그러자 윈터데일의 안색이 확 변해버렸다. "내, 내 거처가 목적이란 말이오?" "그렇다. 나에겐 숨어서 어둠의 마력을 끌어 모을 장소가 필요하다. 네 녀석이 충분히 악명을 떨쳐놓은 까닭에 이곳이 나에겐 가장 제격이지." 윈터데일의 얼굴은 더욱 처참히 일그러졌다. "그, 그렇다면 다른 곳을 찾아도 되잖소. 당신 정도의 실력이면 충분히 가능할 텐데." 데이몬은 한 마디로 일축해버렸다. "귀찮거든. 빼앗으면 그만인데 언제 찾고 있나?" "………." 어이가 없다는 듯 윈터데일은 하염없이 데이몬을 쳐다볼 뿐이었다. "시체를 통해 어둠의 마력을 끌어 모아봐야 헛일이다. 워낙 불순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언데드는 소환하기 힘들지. 편법은 결코 정석을 뒤따르지 못하는 법. 헛고생하지 말고 이 자리에서 깔끔하게 사라지기를 권유하는 바이다." 마치 인심이라도 쓰듯 내뱉는 어조. 하지만 윈터데일은 완강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순 없소. 난 10년 동안이나 이것을 준비해왔소." 그러자 데이몬은 할 테면 해보라는 듯 지긋이 팔짱을 꼈다. "그렇다면 나와 싸워 볼 생각이냐?" 놀랍게도 윈터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마법으로는 나보다 훨씬 윗줄 같소. 하지만 다른 것으로 싸운다면 나도 순순히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오." 제법 당차게 나오는 윈터데일의 태도에 데이몬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재미있군. 그럼 무슨 종목으로 해 볼 생각이냐?" "소환술로 합시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떻소? 나와 당신이 언데드를 하나씩 소환해서 서로 겨루게 합하는 것 말이오." "이를테면 내기를 하잔 말인가?" "그렇소. 만약 당신이 이길 경우 내가 물러나리다. 하지만 내가 소환해 낸 언데드가 이긴다면 순순히 떠나주시오. 어떻소?" 자신이 있다는 듯 가슴을 펴는 윈터데일을 보며 데이몬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상대의 행동에는 모종의 자신감이 깔려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데이몬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좋다. 한 번 해 보지." 흔쾌히 허락하는 데이몬을 보고 윈터데일은 다짐하듯 되물었다. "약속은 분명히 지켜야 하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고개를 끄덕이는 데이몬을 보며 윈테데일은 마지막 희망을 떠올렸다. 사실 그에겐 굳게 믿고 있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법만으로 따진다면 놈이 강하다. 하지만 소환수까지 강하란 법은 없다. 미완성이긴 하지만 '그것'을 내세운다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생각을 마친 윈터데일은 즉시 준비에 착수했다. "조금 시간이 걸릴 것이오. 기다려 주시겠소?" "물론 기다리지."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윈터데일은 잽싸게 동굴로 달려들어갔다. "조금만 기다리시오. 나의 대전사를 깨워 올 테니……." 윈터데일이 사라지고 난 뒤 데이몬은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과연 놈이 어떤 언데드 몬스터를 소환해 올지 기대하며……. 동굴 속으로 들어간 윈터데일은 서둘러 한 쪽 구석으로 달려갔다. 그가 수인을 맺자 바위로 교묘하게 위장된 문이 스르르 열렸다. 놀랍게도 그 속에는 완전 무장한 전사 형상의 시체가 하나 놓여 있었다. 잘려나간 머리통이 발치에 놓여 있는. 그것을 보자 윈터데일은 마침내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듀라한. 이것이라면 충분히 승리를 장담할 수 있다. 비록 마력이 부족해서 제 위력을 내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듀라한을 쳐다보는 윈터데일의 눈빛에는 일말의 흐뭇함까지 담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어둠의 마력을 긁어모으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듀라한 때문이었다. 그에게 힘을 실어줄 가장 강력한 조력자로써 말이다. 듀라한(Durahann). 중급 언데드 몬스터로써 암흑 군대의 전사들 중 전투력 면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마물이다. 형장에서 목이 잘린 시체를 대상으로 만들어지며 대부분의 언데드 몬스터가 그러하듯 생전의 실력이 강할수록 전투력이 향상되는 경향이 있다. 데스 나이트에 그리 뒤떨어지지 않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으며 방패 대신 머리통을 들고 휘두르는 모습은 전장에서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듀라한에 대한 개요를 떠올려 보던 윈터데일은 흉측한 미소를 지었다. "일어나라. 윈슬럿. 나를 위해 네 무용을 다시 한 번 과시해 다오." 그의 손에서 푸르스름한 광채가 일어나 듀라한의 몸으로 번져갔다. 이미 윈터데일은 듀라한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듀라한은 생전에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었던 뛰어난 용병이었기 때문이었다. 윈슬럿 케이지. 십 년 간 무려 오백 사십 명의 목을 베었던 악명 높은 살인 용병(殺人傭兵)의 이름이다. 공포의 대명사로 불리던 크로우 밴디츠(Crow Bandits: 까마귀 도적단)의 우두머리이기도 했던 그는 목에 어마어마한 현상금이 걸린 거물급 도적이었다. 원래 그는 용병으로 이름을 날린 검사였다. 그것도 놀라운 무용(武勇)을 가진 무사로써 몸값이 치솟을 대로 치솟은 일류급 용병이었다. 전장에서 적의 머리를 마치 과일꼭지 따듯 잘라내는 무용은 아직까지 세인들의 입에서 오르내릴 정도였다. 또한 그는 하루라도 적의 목을 자르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살인광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오래지 않아 살인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크로센 왕국의 개입으로 마침내 아르카디아 대륙에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46회. 전쟁이 끝나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되자 그는 결국 도적단에 투신한다. 놀라운 검술실력으로 어렵지 않게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한 뒤 그의 도적단은 오래지 않아 아르카디아에 엄청난 악명을 떨치게 된다. 재물을 약탈하는 것도 모자라 걸리는 사람들을 남김없이 죽여버리는 무자비한 살인집단로 말이다. 윈슬럿은 대상이 누구라도 가리지 않았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머리통과 몸을 분리시켜버렸다. 심지어 명령을 받들지 않는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까닭에 그는 결국 목에 천문학적인 현상금이 걸리고 말았다. 현상금 사냥꾼은 물론이었고 각지의 군대와 기사단이 눈을 벌겋게 뜨고 그를 추적했다. 그의 살인행각은 말 그대로 천인공노(天人共怒) 그 자체였다. 수많은 추적자들을 농락하며 도주를 거듭하던 윈슬럿. 하지만 그에게도 최후가 다가왔으니……. 부하들을 하나 둘씩 잃어가던 그는 결국 이곳 세바인에서 군대에 포위되어 파란만장한 생애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소드 마스터까지 동원된 추격전이었기에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더 이상 버틸 수도 없었다. 윈슬럿은 결국 무수한 상처를 입고 사로잡혔고 그가 줄곧 그래왔던 것처럼 형장에서 목과 몸통이 분리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듀라한의 과거를 떠올려보던 윈터데일은 회심에 찬 미소를 지었다. "네가 처형된 뒤, 난 위험을 무릅쓰고 형장에서 너의 시체를 수습해왔다. 이름하여 최강의 듀라한을 만들기 위해 말이다. 이제 너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겠다. 윈슬럿. 날 위해, 그리고 네 유희를 위해 다시 한 번 네 능력을 보여다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듀라한은 눈을 번쩍 떴다. 덩그렇게 잘린 채 발치에 놓여있는 머리통에서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빛이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윈터데일은 때를 놓치지 않고 남은 마력을 모조리 듀라한에 밀어 넣었다. 시체를 통해 그간 흡수했던 어둠의 마력을 말이다. 듀라한의 입이 벌어지며 소름끼치는 기성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듀라한은 허리를 굽혀 머리통을 집어들었다. 철그렁. 거무튀튀한 갑주가 요동치며 자욱한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머리통을 마치 방패처럼 움켜쥔 듀라한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신이 난 윈터데일은 냅다 고함을 쳤다. "가라. 동굴 밖에 너의 상대가 있다. 놈을 아주 박살을 내어놓아라." 명령이 떨어지자 듀라한의 동작이 빨라졌다. 허리춤에서 시뻘겋게 녹이 슨 전투용 도끼(Battle axe)를 뽑아든 듀라한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동굴 밖으로 향했다. 윈터데일도 뒤질세라 뒤를 따랐다. 동굴 속에는 그가 흘린 괴소만이 남아 메아리치고 있었다. "흐흐흐. 놈. 시체를 모조리 태워버렸으니 마땅히 소환할 언데드가 있을 턱이 없다. 설령 있다해도 듀라한의 적수가 되진 못할 터. 아마 놈은 순순히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루하게 대전사(代戰士)를 기다리던 데이몬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흉흉한 기색으로 동굴에서 튀어나오는 듀라한을 본 것이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녀석. 고작 듀라한을 믿었던 거야?" 데이몬의 눈이 별안간 휘둥그레졌다. "응? 그러고 보니 원념(怨念)이 상당히 강한 놈인데? 아마도 죽기 전에 한 가닥 했던 놈 같아." 보고 있는 동안 듀라한은 데이몬 앞에 와서 섰다. 동작도 민첩했고 자세도 잘 잡혀 있었기에 얕봐서는 안될 듯 싶었다. 마치 기선을 제압하려는 듯 듀라한은 계속해서 함성을 질러댔다. "크아아아아." 듀라한을 따라 동굴 밖으로 나온 윈터데일이 음침한 괴소를 흘렸다. "저 녀석이 나의 대 전사요. 그럼 당신은 무얼 내세우겠소?" 하지만 데이몬의 시선은 여전히 듀라한에 못 박혀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원념이 강한 녀석은 처음 보겠군. 정말 놀라워. 얼마나 사람을 많이 죽였기에……." 한참동안 듀라한을 관찰한 데이몬은 혀를 쯔쯔 찼다. "애석하군. 좋은 물건을 아예 망쳐놓았어. 완성되지도 않은데다 주입된 마력이 불순하기 그지없으니 과연 제 위력을 발휘할까 의심스럽군." 그 말에 부아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윈터데일은 안색을 굳히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남 걱정은 하지말고 당신 대 전사나 꺼내 보시오. 자신이 없다면 이곳을 떠나던가?" "그럴 수야 없지."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제법 강해 보이는 듀라한이었지만 그에겐 결코 통하지 않았다. 감히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듀라한 정도는 간단히 때려눕힐 대전사가 그에겐 넷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나의 대 전사를 보여줄까?" 데이몬은 잠자코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그리고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이봐! 급한 일이니 아무나 하나만 나와봐." 조금 뒤 짜증스런 대꾸가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야? 또 보석이 필요해?"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싸워야 할 일이 생겼어. 이름하여 대 전사 결투라네. 그러니 몸이 근질근질한 녀석이 있으면 한 놈 나와 주겠나?" "싸움? 그거 좋지." "내가 하겠어." 무료하게 창고를 정리하고 있던 데스 나이트들에겐 이것은 말 그대로 낭보라 할 수 있는 소식이었다. "상대가 뭐야?" 네 명의 데스 나이트들은 앞을 다투어 모습을 드러냈다. 오백 년 동안 망령으로 떠돌던 그들이었고 다시 싸운다는 소식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게 뭐지?" 윈터데일은 문을 열어제친 상태의 인크레시아를 의혹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난데없이 모습을 드러낸 지름 1.5미터 정도의 음영. 거무스름하게 물결치는 모습이 마치 공간의 틈새 같기도 했는데 도무지 정체가 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보고 있는 사이 음영이 갑자기 커지더니 그곳에서 뭔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으헉." 쳐다보던 윈터데일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튀어나온 것들은 그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그는 신음하듯 떠듬떠듬 내뱉었다. "데, 데스 나이트." 전신을 감싼 거무튀튀한 중장 갑주. 투구 가리개 사이로 이글거리는 소름끼치는 안광. 정체를 드러낸 녀석들은 한 눈에 보더라도 알 수 있는 데스 나이트였다. 물론 네크로멘서인 그가 데스 나이트를 모를 리가 없었다. 언데드 몬스터 중 드물게 뛰어난 지성을 보유하고 있으며 대부분 암흑 군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는 강력한 존재가 바로 데스 나이트였다. 또한 수많은 네크로멘서들이 이것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중 뜻을 이룬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적어도 6서클 이상의 네크로멘서가 아니면 데스 나이트를 만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가공한 존재가 넷이나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세, 세상에……." 그는 삽시간에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상대가 데스 나이트라면 이미 결정난 승부였다. 설사 그가 내세운 것이 완벽한 듀라한이라고 해도 대적하지 못함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 사이에는 그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었다. 데스 나이트가 괜히 무서운 게 아니었다. 암흑 군단의 당당한 주축을 이루는 말 그대로 무시무시한 존재였던 것이다. '안 돼! 이, 이길 수 없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윈터데일은 관전을 포기하고 동굴 쪽으로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상대의 눈치를 슬그머니 보아가며 말이다. 모처럼 인크레시아에서 벗어난 네 명의 데스 나이트들은 놀랍게도 서로 다투고 있었다. 상대가 듀라한이라는 말에 다소 실망한 눈치였지만 그래도 싸움을 지켜보고 싶지만은 않았던 모양이었다. 서로 싸우겠다고 나서는 통에 결투는 벌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와서인지 그들의 음성은 다시 공명되고 있었다. "내내가가 싸싸우우겠겠다다." "아아니니야야. 단단순순 무무식식한한 듀듀라라한한을을 상상대대하하려려면면 힘힘이이 좋좋은은 내내가가 제제격격이이야야." "내내게게 맡맡겨겨 두두라라고고. 단단칼칼에에 두두조조각각을을 내내버버릴릴 테테니니……." 옥신각신하던 넷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급기야 녀석들이 검까지 뽑아들자 데이몬은 절래절래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 원. 겉모습만 데스 나이트지, 하는 짓은 시정잡배나 다름없잖아?" 못마땅한 눈으로 데스 나이트들을 쏘아보던 중 데이몬은 뭔가 깨달은 듯 듀라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응?" 듀라한의 태도가 전혀 뜻밖이었다. 명령을 받으면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가서 임무를 완수하고야 마는 듀라한. 그 호전적인 언데드가 멍청히 배틀 액스를 늘어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안광도 뿜어져 나오지 않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모습에서는 전의를 찾아볼 수도 없었다. 의아해진 데이몬은 반사적으로 윈터데일이 있던 쪽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이 녀석. 도망쳤잖아?" 이미 윈터데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승산이 없음을 간파하고 도망친 것 같았다. 발자국을 보아 동굴 속으로 다시 들어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듀라한에게 싸우란 명령도 내리지 않고 말이다. 어이가 없어진 데이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쥐새끼 같은 놈. 그나저나 놈을 어떻게 찾아낸다?" 그는 아직까지 옥신각신하고 있는 데스 나이트들을 소리쳐 불렀다. "이봐. 싸울 상대가 없어졌으니 이제 그만들 해 둬." 데스 나이트들은 일시에 데이몬을 돌아보았다. "무무슨슨 소소리리야야?" "네크로멘서가 사라졌어. 따라서 듀라한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거야. 명령을 내리는 놈이 없어졌으니 말이야." "뭐뭐라라고고?" 데스 나이트들은 허탈한 기색이었다. 기껏 싸울 기회를 잡았는데 자신들끼리 다툰다고 기회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데스 나이트 하나가 멍청히 서 있는 듀라한을 향해 한 발 내딛었다. 모습이 똑같았기 때문에 아직까진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상황을 봐서 성질 급한 프림베르그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저저것것이이라라도도 처처치치해해버버려려야야겠겠군군. 검검을을 뽑뽑은은이이상상 그그냥냥 내내버버려려둘둘 수수 없없으으니니……" 데이몬은 손을 내저었다. "그만 둬. 명령을 받지 못한 이상 움직이지 못할 테니……. 그건 그렇고 인크레시아의 정리는 잘 되고 있어?" 데스 나이트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이번에는 헬버트론 같아 보이는 녀석이었다. "그그럭럭저저럭럭 하하고고 있있다다. 그그나나저저나나 보보고고 안안이이 엄엄청청나나게게 넓넓더더군군. 값값진진 보보물물들들도도 정정말말 많많아아. 정정리리에에 시시간간이이 얼얼마마나나 걸걸릴릴지지 짐짐작작조조차차 할할 수수 없없어어." 데이몬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일이 없어졌으니 이만 인크레시아 안으로 다시 들어가. 또 일이 있으면 부를 테니……." "알알겠겠다다." "그럼 계속 수고들 해 줘." "그그러러지지." 짧은 인사말을 남긴 채 데스 나이트들은 다시 인크레시아 속으로 사라졌다. 인크레시아를 닫은 뒤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녀석들의 말투가 여간 듣기 거북하지 않군. 마스터 급으로 만들어놓으면 좀 나으려나?" 몸을 돌린 데이몬은 멍청히 서 있는 듀라한을 향해 걸어갔다. 듀라한을 샅샅이 훑어본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 원념이 강한 놈이로군. 제대로 완성시킨다면 정말 쓸만한 놈이 되겠는걸?" 현재 데이몬에게 강력한 무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비록 듀라한의 능력이 데스 나이트에 비해서 손색이 있겠지만 이 정도 원념을 가진 놈이라면 충분히 기대해 볼 만 했다. 봉인구에서 뽑아낸 순도 높은 마력에다가 9서클에 이른 자신의 실력이라면 듀라한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질 터였다. 생전의 실력을 능가할 정도로 말이다. "좋아. 널 나의 파티에 합류시켜주지. 이름하여 드래곤 슬레이어 파티 말이다. 나를 섬기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 듀라한의 어깨에 오른 손을 얹은 데이몬은 좀비에게서 회수한 어둠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윈터데일이 불어넣은 마력을 소멸시키기 위해서였다. 원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마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서너 배가 넘는 마력이 필요했지만 데이몬에겐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다. 털썩. 윈터데일의 마력이 소멸되자 듀라한은 다시 원래의 시체 형태가 되어 그 자리에 널브러졌다. "그럼 이제부터 쥐새끼를 사냥하러 가볼까?" 데이몬은 느긋하게 손마디를 꺾으며 동굴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47회. 이번이 마지막 연참같네요.^^. 말씀대로 오류를 찾아내는 것을 독자분들에게 맡기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지적하신 부분은 꼬박꼬박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통신본에 오류가 많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다크 메이지는 저 뿐만 아니라 독자분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작품입니다. **************************************************************************** 예상대로 동굴 속에서는 윈터데일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데이몬은 손을 턱에다 괸 채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도대체 놈이 어디에 숨어 있을까?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을 봐서 분명 패밀리어나 기타 등등의 방법으로 날 관찰하고 있을 텐데……." 놈을 쫓아내지 않는다면 동굴을 차지할 수 없다. 언제 나타나 기습을 감행할지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문제였다. "골치 아프군. 콱 죽여버렸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 방법이 안 된다는 것을 데이몬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 데이몬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군. 분명 놈의 패밀리어가 동굴 속에서 날 관찰하고 있을 테니……." 데이몬은 눈을 번뜩이며 주위를 면밀히 살폈다. 놈이 패밀리어로 삼았음직한 짐승을 찾아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만만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동굴 속에는 어림잡아도 수백, 수천 종의 생물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체는 사라졌지만 바닥에 고여있는 썩은 물에는 여전히 엄청난 수의 벌레들이 꾀어 있었다. 높은 천장에도 어김없이 박쥐나 그리마 따위가 작은 생물이 빼곡하게 붙어있었다. 문제는 이 중에서 숨어있는 놈의 패밀리어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데이몬은 쉽게 해결하기로 작정했다. "깡그리 없애버리면 되겠군. 분명히 그 중에 놈의 패밀리어가 걸리겠지." 그는 또다시 마나를 끌어 모아 재배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벌써 여러 번이나 마법을 캐스팅했지만 데이몬에게서 지친 기색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충분한 마나를 끌어 모은 데이몬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간만에 게덴하이드 놈의 장기를 한 번 사용해야겠군." 데이몬이 생각하는 마법은 바로 호리드 윌팅(Horrid wilting)이었다. 게덴하이드가 가장 애용하는 마법으로 적중한 자의 몸에서 물기를 순간적으로 증발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시무시한 마법이었다. 데이몬은 그것을 동굴 전체를 걸쳐 전개하려고 마음먹었다. "윈터데일이란 놈이 죽으면 안 되니까 스프레이 형태로 변형시켜 사용해야겠군. 동굴 전체에 걸쳐 말이야." 아주 쉽다는 듯 얘기했지만 마법의 변형은 결코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서너 가지 마법을 섞어 전개하는 것은 정말 엄청난 계산과 제반지식이 필요한 법이다. 물론 마법의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고 소모되는 마나를 현저히 아낄 수 있지만 어지간한 마법사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고도의 작업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에게는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니……. "호리드 윌팅에다 에어 스프레이(air spray), 스팅킹 클라우드(stinking cloud)를 섞으면 간단히 해결되겠군." 생각은 짧았지만 행동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데이몬의 양손에서 눈부신 빛이 생겨났다. 한 손에서는 눈이 시릴 듯한 청색의. 나머지 손에서는 아른거리는 연분홍 색의 빛이 말이다. 두 빛은 순식간에 한데 섞여버렸다. 번쩍. 데이몬의 몸을 축으로 눈부신 빛이 폭사되었다. 연분홍과 청색의 빛이 한데 어우러진 빛은 동굴의 벽면을 일직선으로 뒤덮어버렸다. 뒤이어 전개된 에어 블래스트에 의해 음영이 드리워진 곳까지 환하게 밝아졌다. 동굴 전체가 한 군데도 빠짐없이 말이다. 파파파팟.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바닥에 질펀하게 고여 있던 시체 썩은 물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증발해버린 것이라 봐야 했다. 그와 함께 피고름에 들끓고 있던 구더기와 파리들이 순간적으로 바짝 말라버렸다. 그것은 동굴 천장의 박쥐와 곤충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후두두둑. 말라죽은 곤충과 박쥐들이 마치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동굴 속의 생물들은 데이몬의 일격으로 일시에 몰살해버렸다. 살아있는 생물에겐 반드시 물이 필요한 법이다. 체내의 물이 일정분량 이상 빠져나간다면 결국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신진대사를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동굴 바닥은 말라죽은 벌레와 박쥐의 시체로 말미암아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였다. 물론 그 와중에서 윈터데일의 패밀리어가 무사할 리는 만무했다. "끄아아악." 데이몬의 시선이 비명이 새어나오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놈. 바닥에 숨어있었군." 그는 발을 살짝 굴러보았다. 퉁 하는 공명소리가 들려오자 얼굴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네크로멘서는 바닥 깊숙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는 허리를 굽혀 바닥을 샅샅이 살폈다. 하지만 손잡이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속에서만 열 수 있나보군. 두께가 상당해 보이는 철판인데……." 하지만 데이몬에겐 문제될 것이 없었다. 손에 마나를 모아 둥글게 돌리자 철판의 일부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물체의 일부을 아예 공간 저편으로 옮겨버리는 8서클의 고위급 마법. 이것 역시 아무나 전개할 수 없는 마법이었다. 두터운 철판바닥에는 직경 1미터 남짓한 구멍이 뻥 뚫려버렸고 데이몬은 그 구멍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녀석 완전히 미쳐버렸군." 데이몬은 온 몸을 뒤틀고 있는 윈터데일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눈이 돌아간 상태로 게거품을 물고 있는 모습은 오로지 미쳤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이미 데이몬은 이유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하긴 패밀리어가 깡그리 몰살했으니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겠지. 그나저나 내가 너무했나?" 미쳐버린 윈터데일을 보고 데이몬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연히 자리를 먼저 잡고 있는 놈을 이 지경으로 몰아붙였다는 사실에 미안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지체할 시간이란 없었다. 데스 나이트들을 강화시키는 것은 한시가 급한 일이었다. 더불어 우연찮게 얻게된 듀라한까지 함께 말이다. "드래곤들이 깨어나기까지 10년밖에 남지 않았다. 그 동안 충분한 힘을 길러야 한다." 데이몬은 나직이 각오를 되새겼다. 그에겐 어떻게 해서든 봉인구에서 마나를 뽑아내어야 할 사명이 있었다. 오로지 드래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왔다!" 마을 어귀로 들어서는 일단의 인물들을 본 노인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기다리던 자들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대략 10여명쯤 되어 보이는 일행의 대부분은 갑옷을 걸친 기사들이었다. 푸른 로브를 걸친 묘령의 아리따운 여인은 마법사가 분명했다. 노인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마을 사람들과 함께 그들을 마중 나갔다. "혹시 크로센 제국에서 오셨습니까?" 반갑게 맞이하는 노인을 보자 무리들 중에서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중년 정도의 나이에 무척 날카로운 눈빛을 가지고 있는 기사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이들의 리더인 엘케인입니다만." "어서 오십시오. 제가 이 마을의 촌장입니다.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그 말에 엘케인이라 불린 중년 기사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환대에 감사 드립니다. 저희들은 안트로스 국왕전하의 청원으로 크로센 제국에서 파견된 토벌대입니다. 전 근위기사단의 일원이고 저들은 수련 기사들이니 사악한 네크로멘서에 대해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수, 수련기사들이라고요?" 촌장의 얼굴에 다소 떨떠름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중년 기사 엘케인은 촌장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미소를 지어주었다. "비록 수련기사들이라고는 하나 이들은 당당한 크로센 기사단에 속해 있습니다. 실력은 충분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전 저번에 왔던 토벌대의 일원이었지요. 비록 놈을 잡아 처치하진 못했지만 사악한 네크로멘서의 마법 수준 정도는 파악해 놓았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와 이들이라면 놈을 잡는데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촌장은 그때서야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하긴 크로센 기사단의 실력은 비록 일반 기사라도 다른 왕국의 근위기사에 맞먹는다고 하니…….' 촌장은 속마음을 숨기며 그들을 안내했다. "절 따라오십시오. 마을에 환송연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 말에 엘케인은 급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바로 놈의 거처로 데려다 주시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저희들에겐 할 일이 워낙 많아서……." "그러시다면." 촌장은 걸음을 돌려 토벌대 기사들을 네크로멘서의 거처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촌장의 뒤를 따라가던 엘케인의 얼굴에는 별달리 걱정하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토벌대의 일원으로 파견되었을 때 네크로멘서의 실력을 파악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동행했던 마법사에 따르면 상대는 겨우 4서클의 엑스퍼트에 불과한 수준 낮은 네크로멘서라고 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엘케인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 "그 정도로 형편없는 놈이라면 나 혼자서도 능히 처치할 수 있다." 이번만은 분명히 임무를 완수할 것이라고 그는 장담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엘케인은 제법 실력이 있는 소드 마스터였고 몸에 걸친 대마법 갑옷은 6서클까지의 공격마법 정도는 완벽히 차단한다. 그런 그에게 4서클의 네크로멘서는 상대라고 칭할 수도 없었다. '놈. 저번에는 준비가 부족해서 잡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어림없다. 흑마법의 기척을 완벽하게 포착하는 스크롤을 준비해 가고 있으니 네놈이 아무리 꼭꼭 숨어있더라도 이번에는 꼬리를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저번 토벌대에 비한다면 현재 일행의 규모나 실력은 보잘것없다고 볼 수 있었다. 일단 유일한 소드 마스터인 자신을 제외하고 팔라딘 급 기사는 단 두 명이었고 나머지는 모조리 수습기사였다. 게다가 마법사도 5서클의 마스터인 소서리스 한 명뿐이었다. 통상적으로 네크로멘서를 토벌하러 가는 병력치고는 정말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엘케인은 이번 작전의 승산이 100%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저번에는 놈의 실력을 몰라서 정말 엄청난 전력을 데리고 왔었다. 하지만 놈의 그림자조차 찾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었지. 그러나 이번만은 틀리다. 스크롤을 비롯해 만반의 준비를 완전히 갖춘 상태이니 전혀 희생 없이 놈을 포획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이 정도 악명을 떨치는 네크로멘서라면 엄청난 실력을 가진 마법사라 봐야 한다. 어지간한 실력으론 도저히 이름을 날릴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제보를 들은 크로센 제국에서는 희생을 최소화하고 완벽하게 처리하기 위해 실력 있는 기사들을 다수 파견했다. 소드 마스터 두 명에 팔라딘 급 기사 열 명, 그리고 6서클의 고급 마법사 세 명이었으니 가히 놀랄 만한 전력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먼 길을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애석하게도 헛걸음을 해야 했다. 일단 놈의 거처를 찾기는 했지만 문제는 네크로멘서를 볼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그저 동굴을 가득 채운 썩어 가는 시체들만 그들을 맞아줄 뿐이었다. "세상에 어찌 이런 만행을……." 동굴에 널린 참혹한 시체를 보며 그들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사악한 네크로멘서를 잡아죽이리라 다짐했었다. 몇날 며칠을 기다리든 말이다. 하지만 시체에서 풍기는 시독이 너무나 지독해서 그들은 그리 오래 버틸 수 없었다. 마법으로 공기를 정화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시체를 묻어버리는 것도 여의치 않아 그들은 결국 철수를 결심한다. 놈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터라 더 이상 죽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것이 바로 1차 토벌대가 실패한 이유였다. 우여곡절 끝에 두 번째 토벌대로 뽑혀 나왔으니 이번만은 반드시 놈을 잡겠다고 다짐했던 엘케인이었다. 촌장의 뒤를 따라가던 엘케인은 무심코 생각난 것처럼 마을의 사정에 대해 물어보았다. "놈이 요즘도 마을 사람들을 무수히 살상합니까?" 그런데 고개를 돌린 촌장의 얼굴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그, 그렇진 않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마을 사람들이 죽는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물론 놈의 거처에 접근했던 사람들이 거의 초죽음이 되어 돌아오긴 하지만 최근 1년 간 죽은 자는 아무도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요? 놀랍군요." 엘케인은 놀랍다는 듯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이곳으로 파견되며 미리 들은 것이 있었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48회. 사실 그들이 세바인 마을로 파견되게 된 배후에는 안트로스 국왕의 개입이 있었다. 사실 세바인 마을 사람들이 아무리 탄원을 한다 하더라도 제국의 기사단이 움직일 수 없는 노릇이다. 사정이 아무리 딱하다 하더라도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은 출동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군주의 정중한 요청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토벌대가 세바인 마을로 파견되게 된 데에는 바로 안트로스 국왕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세바인 영지는 엄연히 안트로스 왕국의 영토였으므로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1차적으로 안트로스 왕국에서 해결해야 한다. 사악한 네크로멘서의 전횡을 보다 못한 안트로스 국왕은 최근 1년 사이에 두 번씩이나 토벌대를 보냈다. 구성된 토벌대는 무려 500명에 달하는 병사에 근위기사 10명, 궁정마법사까지 포함한 방대한 인원이었다. 물론 크로센 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사단의 일개 지대에도 미치지 못하는 전력이었지만 약소국인 안트로스 왕국에서는 가히 전력의 전부라고 볼 수 있는 힘이었다. 반드시 사악한 네크로멘서를 찾아내어 토벌할 요량으로 토벌대는 장기간 주둔할 채비를 완벽하게 갖춘 상태로 산에 올랐다. 이미 그들에게도 두 번이나 헛걸음질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토벌대의 처참한 패배. 그것도 도착한지 단 한 시간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토벌대는 네크로멘서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지리멸렬해서 꽁무니를 빼야 했다. 어떻게 패했는지 영문도 몰랐다. 슈슈슈슝 도착하자마자 동굴 내부에서 퍼부어지는, 정말 생각하기조차 싫은 매직 미사일 세례에 토벌대 전원은 한 명도 남김없이 큰 부상을 입은 채 산 아래로 퇴각해야 했다. 단 한 방에 근위 기사의 방패를 쪼개버리는 위력의 매직 미사일. 이쪽의 마법사는 싸움이 벌어지기도 전에 마법공격을 얻어맞고 기절해버렸다. 그러니 일반 병사들의 사정은 안 봐도 뻔했다.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겨우겨우 마을까지 후퇴해온 토벌대 병력들. 기이한 것은 토벌대 병사 중에 전사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뜻밖의 결과에 아연한 안트로스 국왕은 남은 병력을 모조리 긁어 다시 한 번 토벌대를 보냈다. 이번에는 용병들까지 대대적으로 고용해서 말이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토벌대의 완벽한 괴멸. 저번과 마찬가지로 전사자는 없었지만 병사들은 하나같이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견디다 못한 안트로스 국왕이 결국 크로센 제국에 도움을 청하게 되고 그 결과 이들이 파견된 것이다. 하지만 엘케인은 그것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근위 기사들 중에 팔라딘이 한 명도 없다니……. 그러니 네크로멘서를 상대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공간이동으로 안트로스 왕국의 궁정에 도착한 엘케인에게 어이가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근위 기사들 중에 기사단장을 제외하곤 팔라딘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도 놀라웠지만 궁정 마법사를 이제 4서클의 엑스퍼트에 오른 애송이가 맡고 있다는 사실에 엘케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정도 마법사라면 크로센 제국에서는 수습 마법사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근위 기사단장의 실력도 자신이 데리고 온 팔라딘에 비해 하등 낫다고 할 수조차 없었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정말 왕국이라고도 보기 힘든 전력인 것이다. '어쨌거나 놈은 우리가 잡는다.' 그는 부스스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에는 상당히 아리따운 용모를 지닌 소서리스가 연신 눈을 반짝거리며 이국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엘케인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이봐. 사리나. 이 참에 안트로스 왕국에 눌러앉을 생각은 없어?" "무슨 말이죠?" "며칠 전에 보지 못했어? 세상에 4서클의 엑스퍼트가 궁정 마법사이니 5서클의 마스터인 사리나라면 두 말도 하지 않고 궁정 마법사로 뽑힐 텐데……." 사리나라 불린 예쁘지만 상당히 성깔 있게 생긴 소서리스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뒤흔들었다. "정중히 사양할게요. 세상에 그게 궁전인가요? 엘케인 님의 저택도 그것보다는 크고 화려하잖아요. 이름만 들었지 안트로스가 이렇게 약소국인지는 꿈에도 몰랐어요." "하긴." 담소를 흘려듣던 촌장의 얼굴에 어두운 기미가 서렸다. 사실 안트로스는 왕국이라 불리기에도 아까운 국가였다. 세바인 마을을 비롯한 산간 마을 몇을 아울러 놓은 것이 안트로스 왕국의 전부였고 인구가 모두 합쳐 2만도 채 되지 않는, 그야말로 초미니 국가라고 봐야 했다. 워낙 영토가 척박해서 부근 왕국이 눈독을 들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리고 안트로스 국왕이 보기 드물게 발이 넓어 크로센 제국의 귀족들을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왕국의 유지에 한 몫을 했다. 여러 가지 여건이 어우러져 겨우 왕국이라는 명칭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말을 들을 만도 했다. 하지만 어쩌랴, 힘이 없는 것이 사실인데……. 촌장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엘케인과 사리나는 담소를 계속 해 나갔다. "그런데 500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단 하나도 죽지 않았다니 정말 놀라워. 도대체 놈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을까?" "글세 놈의 생각을 제가 어찌 알겠어요. 그런데 놈의 소굴에 정말 시체가 그리 많아요?" 엘케인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은 정말 지옥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어. 그러니 아마 넌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사리나의 얼굴에 뾰로통한 표정이 떠올랐다. "어머. 절 무시하시는 건가요? 이래뵈도 전 워 소서리스라고요." 엘케인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내 말을 들어. 아무리 너라 해도 시체에 구더기가 득시글거리는 데다 비어져 나온 내장에 파리가 새카맣게 꾀어 있는 것을 보면 속의 것을 죄다 게우지 않고는 못 버틸 테니 말이야." 말을 마친 엘케인은 촌장을 돌아보았다. "혹시 마을사람들 중에 놈의 얼굴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고개를 가로 저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놈의 얼굴을 알고 있습니다." 엘케인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왜냐하면 놈이 이따금 마을로 물건을 사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네크로멘서의 행동패턴은 그만큼이나 이해하기 힘들었다. "대관절 무슨 물건을 사러……." "생필품입니다. 이따금 술을 사가는 경우도 있고요. 야채와 고기를 주로 가져갑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놈인지 알아차렸습니까?" 촌장은 엘케인을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아마 누가 보더라도 놈이란 것을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생긴 것과 차림새는 별로 이상할 게 없지만 정말 끔찍한 괴물을 짐꾼으로 데리고 다니거든요." "끔찍한 괴물이라니……." "갑옷을 입은 기사의 형상을 한 괴물입니다. 놀랍게도 머리통이 목에 붙어있지 않고 왼손에 들려 있지요. 엄청나게 덩치가 큰 괴물인데 오른 손에는 큰 도끼를 들고 있습디다. 힘이 엄청나서 일전에는 커다란 송아지를 아예 통째로 짊어지고 가더군요." 손짓발짓까지 동원된 촌장의 설명에서 엘케인은 괴물의 정체가 언데드 몬스터인 듀라한임을 알 수 있었다. "정말 놀랍군요. 마을에 정기적으로 내려와서 물품을 강탈해가다니……." 엘케인의 말에 촌장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놈은 물건을 산 뒤 반드시 대금을 지불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가져가지 않지요." 엘케인은 결국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가 상대하러 가는 자는 정말 괴팍한 네크로멘서였다. 통상적인 네크로멘서의 범주를 벗어나는 정도 말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사리나가 한 팔 거들었다. "그러고 보니 놈의 본성이 그리 나쁘진 않아 보죠?" "아니 그렇지 않아." 엘케인은 단호하게 사리나의 말을 잘랐다. 그는 이 중에서 유일하게 놈의 거처를 목격한 경험자였다. 무수한 사람들의 시체를 확인한 만큼 네크로멘서에 대한 증오심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촌장의 얼굴을 살폈다. "마을 사람들이 놈에게 물건을 팔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놈이 밉지 않습니까?" 촌장의 얼굴에 쓸쓸한 기색이 서렸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죽은 사람들은 그저 운이 나빠 사고를 당했거니 생각할 뿐입니다. 사실 최근 들어 살기가 그리 어렵지 않거든요. 놈의 거처에만 가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죽을 일이 없고, 게다가 놈이 마을에서 소란을 피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조용히 왔다가 물건만 사갈 뿐이지요. 어쨌거나 저희들이 놈을 상대할 방법이 하나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무기력함이 감도는 촌장의 얼굴을 보며 엘케인은 반드시 놈을 잡아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과연 꿀맛이군." 식사를 마친 데이몬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입가를 닦았다. 자화자찬을 하긴 싫었지만 자신의 요리실력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뛰어났다. 마을에서 사 온 재료로 오랜만에 솜씨를 부려보았던 데이몬이었다. 500년 동안 먹지 못했던 한을 풀기라도 하듯 그는 한껏 식도락에 취미를 들인 상태였다. "나 혼자 먹긴 정말 아까운 걸……." 배를 두드리던 데이몬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목이 없는 기사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머리통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언데드, 바로 듀라한이었다. 데이몬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너도 먹고싶은가 보군? 하지만 머리통이 손에 들려 있으니 그럴 수 있을까?" 듀라한은 그저 멍청히 눈알을 굴리고 있을 뿐이었다. 데스 나이트와는 달리 듀라한은 지성이 없다. 구울이나 와이트 따위의 하급 언데드와 마찬가지로 내려진 명령만 철저히 수행할 뿐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기 힘든 마물이었다. 그 때문에 듀라한은 가공할 만한 전투능력에도 불구하고 최전선에 투입하는 전사로밖에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암흑군대의 지휘관을 맡는 데스 나이트와는 달리. 데이몬은 느긋한 눈빛으로 듀라한의 전신을 둘러보았다. "윈슬럿. 이거 아느냐? 지금 네 전투력이 원터데일에 의해 만들어졌을 때보다 적어도 열 배는 강해졌다는 사실을……." 물론 듀라한이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멍청하게 눈알만 데룩데룩 굴리고 있는 윈슬럿. 녀석은 애초에 윈터데일이 만들어낸 듀라한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이 완성시킨 이후 윈슬럿의 전투력은 파격적으로 늘어나 있었다. 중급 언데드 몬스터에 불과하지만 평범한 데스 나이트(마스터 급이 아닌)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듀라한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윈슬럿을 데이몬은 거처를 지키는 수문장으로 쓰고 있었다. 이따금 짐꾼으로도 쓰긴 하지만 말이다. 식사를 마친 데이몬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나저나 또다시 마력을 뽑으러 가봐야겠군." 그는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보관해 놓은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여곡절 끝에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는 데이몬의 손으로 들어오고야 말았다.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샅샅이 뒤지던 데스 나이트들이 마침내 나이델하르크가 봉인된 마법의 구슬을 찾아내고야 만 것이다. 봉인구를 손에 든 데이몬은 마침내 복수에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다. 이제 나는 드래곤에 맞설 힘을 보유할 수 있다." 봉인구에서 아른거리며 피어나는 어둠의 마력. 데이몬은 그만 거기에 매료되어버렸다. 봉인구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지금껏 자신이 끌어 모아온 마력보다 순도 면에서도 월등했고 또한 강력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라면 데스 나이트들을 강력하게 만드는데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이 없진 않았으니……. "한 번에 일정분량이상 뽑아낼 수 없을 듯 하군. 봉인구의 균형이 깨어져 나이델하르크가 눈을 뜬다면 말짱 헛고생이니 말이야." 이것은 한 달간의 연구 끝에 데이몬이 내린 결론이었다. 봉인구에는 드래곤들이 펼친 것으로 짐작되는 여러 가지 마법의 힘이 총 결집되어 있었고 이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나이델하르크를 깨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만약 그 균형이 깨어진다면 놈은 다시 현세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떠올린 데이몬은 눈을 빛냈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돼." 나이델하르크가 깨어난다면 복수는 거의 틀림없이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놈이 드래곤에게 원한을 품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데이몬이 생각하기에 다프네를 되찾는 것은 말 그대로 염원에 지나지 않았다. 어둠의 마왕이 성녀를 살려둘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자신은 결코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어둠의 마나를 사용하는 이상 그가 마왕에게서 벗어날 길은 없으므로. 때문에 데이몬으로써는 무척 신중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지극히 정석적인 방법을 이용해야겠군." 그는 우선 마법진을 이용해서 봉인구에서 조금씩 마력을 흡수하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실행으로 옮겨졌다. 그리하여 봉인구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조금씩 데이몬에 의해 모여졌다. "그것으로 윈슬럿을 완성시켰지. 더불어 헬버트론과 함께……." 데스 나이트 모두를 강하게 하는 것은 아직까지 시기 상조였다. 때문에 그는 우선적으로 헬버트론에게만 마력을 주입했다. 나머지 데스 나이트들은 아직까지 인크레시아에서 보물찾기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문제는 헬버트론이 아직 충분히 강해지지 못하다는 점이다. 생전에 가지고 있던 능력의 50% 정도를 간신히 발휘할 수 있을 뿐이었다. 데이몬이 충분한 마력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강해지려면 마력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난다면 극복될 문제라서 데이몬은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작정했다. 봉인구의 마력이 마법진에 의해 지속적으로 뽑아지고 있는 상태이므로 헬버트론은 오래지 않아 생전의 위력을 되찾을 것이었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49회. 밀실에 들어가자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불쑥 나타나서 데이몬을 맞았다. "오늘은 조금 늦었군." 데이몬을 맞은 것은 데스 나이트였다. 투구의 눈구멍사이에서 이글거리는 광망은 지옥의 업화인 양 섬뜩한 분위기를 풍겼고 칠흑같이 검은 갑옷을 두른 채 어둠 속에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지옥의 전사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하지만 데이몬은 무표정하게 데스 나이트를 돌아볼 뿐이었다. "봉인구에는 별 일 없지? 헬버트론." "물론 있을 턱이 없지." 놀랍게도 헬버트론의 말투는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 기괴하게 공명되는 데스 나이트 특유의 음성이 아니었다. 물론 유부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음산하기는 했지만 데이몬은 그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마스터 급으로 올라선 이상 음성 정도는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잠시 그를 쳐다보던 데이몬은 히죽 웃었다. "혼자만 식사해서 미안하군. 살아있을 때 내가 만든 요리를 상당히 좋아했었지." 강렬하던 헬버트론의 안광이 조금 옅어졌다. "그랬었지. 하지만 상관없다. 이젠 미각을 느낄 수조차 없으니 말이다." "하긴." 데이몬은 그럴 듯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헬버트론으로 하여금 봉인구를 지키게 한 것은 정말 탁월한 판단이라 할 수 있었다. 생전의 50%에 지나지 않는 실력만으로도 헬버트론은 충분히 강했다. 살아있을 때 워낙 실력자였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소드 마스터 정도는 간단히 요리할 수 있는 실력이라고나 할까? "조금만 기다려. 어둠의 마력을 뽑아내는 대로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테니……." "당연히 그래야지. 그렇지 않으면 데스 나이트가 된 보람이 없을 테니까……." 헬버트론의 퉁명스런 대꾸에 데이몬은 얼굴을 구겼다. "이런 빌어먹을……. 명색이 네놈들을 만들어 낸 주인인데 좀 고분고분한 면이 있어라. 처음부터 끝까지 반말에다 이젠 비꼬기까지 하냐?" "어쩔 수 없다. 네가 우리들을 그렇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고위급 네크로멘서가 데스 나이트를 만들어낼 경우 통상적으로 전투력은 극대화시키는 반면 생전의 지성은 상당수 억제한다. 그래야만 데스 나이트가 명령을 충실히 받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데스 나이트 넷의 지성을 거의 생전의 수준까지 복원시켰다. 어차피 전투력이야 나중에도 향상시킬 수 있는 법. 맹목적으로 명령에 복종하는 데스 나이트보다 상황에 따라 대응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가진 놈들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데스 나이트들의 태도가 무척 불경스럽게 변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말을 말아야지." 데이몬은 쯔쯔 혀를 차며 마법진으로 향했다. 덜컥. 문이 열리자 커다란 석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거대한 마법진이 눈에 들어왔다. 고대의 기괴막측한 문자와 도형들이 마법진을 빼곡이 채우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마법진은 마나가 흩어지지 않도록 모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이 마법진만은 용도가 달랐다. 중심 부분에서 모종의 기운을 계속해서 빼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마법진의 정중앙에는 커다란 구슬이 하나 놓여있었다. 칙칙한 검은 빛을 띠는 사람 주먹만한 구슬에서는 알 수 없는 기운이 계속해서 뿜어져 나왔다. 이것이 바로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였다. 어둠의 군대를 규합해서 인간계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그만 드래곤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봉인되어버린 대마왕 나이델하르크. 그가 바로 이 구슬 속에서 영원한 잠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마왕이 보유했던 마력은 봉인구에서 끊임없이 표출되고 있었다. 마치 마계의 수하들에게 자신을 구해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듯이 말이다. 마법진은 바로 그 마력을 끌어 모아 한 곳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러니 마력을 모으는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그런 내력을 가진 봉인구를 쳐다보는 데이몬의 얼굴엔 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과연 무공과 마법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사실 이곳에 자리를 잡고 난 뒤 데이몬은 전력을 다해 무공을 연성하려고 마음먹었다. 소드 마스터가 된다면 드래곤을 상대하기가 더욱 용이하리란 판단에서였다. 게다가 단전이 파괴된 이전과는 달리 새로 얻은 몸으로 무공을 익히기란 충분히 가능했다. 이미 내공심법과 무공의 구결은 그의 뇌리 속에 남김없이 기억되어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이미 그는 마법의 극한에 다다른 대마법사였기 때문이다. 데이몬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마법과 무공은 같은 마나를 이용한다는 면에서는 동일하지만 운용방법 면에서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인다. 그 때문에 두 가지를 한꺼번에 연성한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아." 무공은 주위에서 같은 성질의 마나를 조금씩 끌어 모아 내공심법을 통해 정제시킨 뒤 몸 속 단전에 저장한다. 따라서 단전에 저장된 내공은 극도로 정제되고 농축된 상태의 마나라고 표현할 수 있다. 내가고수는 바로 그것을 이용해서 검기나 호신강기를 표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법은 달랐다. 주위의 마나를 끌어 모은다는 점에서는 일치했지만 그 마나를 체외에서 재배열해서 여러 가지 물리적, 화학적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현저한 운용방법의 차이가 나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마법사와 내가고수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두 가지를 함께 병행한다는 것은 아무리 데이몬이 과거에 절세고수였어도 불가능했다. 물론 익히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그렇게 되면 마법 능력이 퇴보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마법을 도저히 버릴 수 없었으므로 데이몬은 마침내 무공을 익히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나에겐 네 명의 마스터급 데스 나이트가 있으니……." 비록 무공을 익히지 못한다고 해도 자신에겐 소드 마스터에 결코 못하지 않는 조력자가 있었다. 물론 말을 지독히도 듣지 않는 녀석들이긴 해도 말이다. "무공에 대한 것은 잊고 마법에만 열중해야겠군. 체력단련은 결코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지만 말이야." 사실 무공을 익힐 수 없다고 해도 데이몬에겐 충분히 위력적인 몸놀림과 체술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기사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기에 데이몬은 크게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뭔가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따르르릉. 그것이 알람 마법에서 전해지는 소리란 것을 알아차리자 데이몬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가 침입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고 원래 윈터데일이 설치해 놓은 것을 데이몬이 복원해놓은 경보망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침입자가 생긴 것이므로 데이몬의 얼굴에 재미있겠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두 달 전 안트로스의 토벌군을 상대한 뒤로 처음이었다. "무료한데 잘 되었군." 그는 얼른 동굴 입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침입자들의 실력과 구성을 가늠해본 뒤 대응할 생각에서였다. "저기입니다." 촌장은 떨리는 손을 들어 멀리 떨어진 동굴입구를 가리켰다. 평소라면 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사악한 네크로멘서를 잡아주겠다고 머나먼 크로센 제국에서 토벌대가 왔는데 위험을 각오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연신 동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촌장의 얼굴에는 극도로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엘케인이 손을 뻗어 촌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촌장님께서는 사람들을 데리고 이만 돌아가십시오. 뒤는 제가 맡겠습니다."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웃는 낯으로 촌장을 안심시킨 뒤 엘케인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근엄하게 변해있었다. 촌장과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그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대원들에게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팔라딘 둘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경험이 없는 수습기사들이었으므로 작전에 앞서 군기를 확실히 잡아야 했다. "평소 교육받았던 대로 진용을 짜서 진입한기로 한다. 제 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허둥지둥하는 놈이 있다면 추호도 용서하지 않을 테니 각오하라. 그리고 명심하도록. 이번 기회가 팔라딘 자격을 취득하는데 가장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너희들이 알다시피 팔라딘이 되는 것은 실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공을 세우고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야만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번 기회에 반드시 놈을 죽여야 한다. 알겠는가?" 말을 마친 엘케인은 수련 기사들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경험이 많은 팔라딘들은 비교적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수련 기사들의 얼굴에는 오로지 긴장감만이 가득했다. 엘케인은 그들의 긴장을 풀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 중에서 놈을 잡거나 처치하는 자가 나온다면 그 즉시 팔라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내 명예를 걸고 보증하겠다. 왜냐하면 내가 적극적으로 추천해 줄 테니까……." "와아아아." 수련 기사들은 비로소 환호성을 내질렀다. 수련기사들에게 팔라딘이 되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엘케인이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모두 전투준비." 열 다섯 명의 수련 기사들은 부산하게 준비를 시작했다.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부관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대동해 온 두 명의 팔라딘 중 한 명이었다. 윌터라는 이름을 가진 부관은 미소를 머금은 채 엘케인의 귓전에 소곤거렸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잠깐 사이에 저들에게 투지를 불어넣다니……." "교관 노릇을 오래 해 보면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지. 그건 그렇고 이번에는 놈을 분명히 잡을 수 있겠지?" 윌터 역시 1차 토벌군의 일원이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놈이 흑마법과 소환술을 쓰는 이상 이번에는 결코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이미 패밀리어를 추적하는 스크롤까지 준비해왔으니까요." "확실하겠지?" "그럼요." 고개를 끄덕인 엘케인은 이번에는 소서리스를 돌아보았다. "사리나. 자네도 준비하게. 놈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엄연히 자네 임무니까……." "걱정 마세요. 네크로멘서라 해도 고작해야 4서클의 엑스퍼트인데 그 정도도 제압 못하겠어요? 전 5서클의 마스터라고요." "그런 그래." 고개를 끄덕인 엘케인은 지체 없이 진입을 명했다. 명령이 떨어지자 열 다섯 명의 수련기사들이 일제히 동굴의 입구로 뛰어들었다. 대 마법 갑옷을 입은 자들을 선두에 세운 채 말이다. 그 뒤를 팔라딘 두 명이 받쳤으며 소드 마스터인 엘케인과 소서리스는 바짝 뒤따랐다. "소드 마스터라……. 아무래도 크로센 제국에서 파견된 토벌대 같군." 침입자들의 정체를 파악한 뒤 데이몬은 빙긋이 미소를 떠올렸다. 이미 마법을 배우기 전에도 적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물며 마법까지 사용해 탐지까지 했으니 침입자의 능력 정도는 완벽히 파악되었다 할 수 있었다. "그럼 손님 맞을 준비나 슬슬 해 볼까?" 소드 마스터란 존재가 조금 꺼림칙하긴 했지만 상관할 것은 없었다. 이곳에 온 뒤 그는 팔라딘과 소드 마스터의 차이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젠가르트에게 아르카디아에 대한 제반지식을 설명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직 검강을 사용할 수 있는 자들만이 소드 마스터로 불린다는 사실. 그 외 검기만을 운용하는 자들은 아르카디아에서 모조리 팔라딘으로 불린다. 물론 검기 정도야 신경 쓸 필요도 없었지만 소드 마스터는 어떠한 경우에도 얕봐서는 안 된다. 그들의 오러 블레이드는 데이몬이 펼친 9서클의 실드라고 해도 가를 수 있었으니까……. 물론 데이몬이 전력을 다한다면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상대가 되지 못함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아무리 실력 있는 소드 마스터라도 헬 파이어 한 방이면 그대로 재로 변할 테니까……. 하지만 칠종단금술 때문에 데이몬은 결코 상대를 죽일 수 없다. 접전의 와중에 실수로 놈들이 하나라도 죽는다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데이몬은 봉인구를 지키고 있는 데스 나이트의 조력을 얻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헬버트론을 한 번 이용해야겠군. 두 명의 팔라딘은 윈슬럿에게 맡기면 될 테고……." 대응 전략을 짠 데이몬은 지체 없이 침입자를 마중 나갔다. 기세 좋게 동굴 속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토벌대. 이미 네크로멘서가 4서클 정도의 수준 낮은 흑마법사란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기사들은 별반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도리어 지휘관인 엘케인은 꼭꼭 숨은 네크로멘서를 찾아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동굴 속으로 들어간 뒤 즉시 산개해서 혹시라도 있을 퇴로를 차단한다. 스크롤을 사용한다면 어렵지 않게 놈의 종적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들은 네크로멘서가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꼭꼭 숨어있을 것이라 간주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가장 큰 오산이었으니……. 동굴 속으로 들어간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헤아릴 수 없는 빛무리가 그들을 향해 폭사되었다. 콰콰콰콰. 엄청난 규모였으므로 선두에 선 기사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노래져버렸다. "서, 선제 공격이다." "매직 미사일이다. 서둘러 방어진을 쳐라." 엘케인의 명령이 떨어지자 기사들은 서둘러 진형을 정비했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에서 그들이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받아왔는지 익히 짐작할 만했다. 대마법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앞으로 나와 방패를 치켜세웠고 그렇지 못한 기사들은 뒤를 단단히 받쳤다. 물론 마법 저항력이 강한 엘케인과 두 명의 팔라딘들이 선두로 나왔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새 캐스팅했는지 사리나의 전신에도 푸른 광막이 씌워지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50회. 완전히 준비를 갖춘 토벌대의 위를 빛무리가 사정없이 덮어씌웠다. 물론 그것은 데이몬이 대면인사 삼아 퍼부은 매직 미사일 세례였다. 퍼퍼퍽. 연이어 터져 나오는 둔중한 타격음. 그 속에는 고통에 겨워하는 비명소리가 간간이 섞여 있었다. "크윽." 물론 가해진 것이 화살공격이었다면 토벌대의 진용은 정말 대단한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다. 직선이나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화살은 대부분 방패에 맞고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해진 공격은 애석하게도 매직 미사일 세례였다. 또한 그것을 조종하는 자가 9서클의 마스터였으니 위력이 상상불허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콰콰쾅. 대부분의 매직 미사일이 방패를 때렸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몇 발의 매직 미사일이 마치 살아있는 미꾸라지처럼 원활히 움직이며 뒤편의 기사들을 가격했다. 비명소리는 바로 그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공격이 한 차례 지나가자 엘케인은 벼락같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공격이 끝났다. 돌격! 으헉?" 막 튀어나가려 하던 엘케인은 기겁을 하며 다시 방패로 몸을 가렸다. 마법 공격의 특성상 한 차례 공격을 가했으니 마법사에겐 2탄을 날리기 위한 준비기간이 반드시 필요한 법. 그 틈을 노리려고 마음먹었는데 그만 엘케인의 예상이 빗나가버린 것이다. 엄청난 수의 매직 미사일이 또다시 동굴 내부를 새카맣게 뒤덮으며 날아들고 있었다. 파파파팟. 오히려 1차 공격보다도 더한 규모였다. 방패 뒤에 움츠린 엘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 제기랄. 뭐가 어찌된 거야." 퍼부어진 매직 미사일 세례가 몸을 움츠린 토벌대 진용을 무자비하게 두드리고 지나갔다. 이번에도 비명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주위를 돌아본 엘케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런." 수련기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기사도 있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날아온 매직미사일에는 대마법 갑옷도 소용없었다. 단 한 방으로 갑옷에 새겨진 마법진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고 두 번째 공격에 갑옷이 부서졌다. 그 상태에서 수련기사들이 버틸 리는 만무했다. 자신이나 팔라딘이면 몰라도 수련기사들이 이 정도 마법 공격을 막아낸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미치겠군." 매직 미사일이 이렇게 강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두 번의 매직 미사일 공격에 수련기사 15명은 완전히 궤멸되어버렸다. 다행히 죽은 이는 없는 것 같았지만 대부분의 수련기사들이 갑옷과 방패가 산산이 으스러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이제 서 있는 것은 자신과 두 명의 팔라딘, 그리고 사리나 뿐이었다. 마법 방어력이 높은 자들과 실드를 펼쳐놓았던 사리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쓰러진 수련기사들에게서 끊임없이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으으." "아, 아파." 그 모습을 본 엘케인은 이를 악물었다. "이 자식을?" 엘케인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날렸다. 그의 뇌리 속에는 공격을 가한 마법사를 잡아 회를 떠버릴 생각밖에는 없었다. 팔라딘 두 명이 그의 뒤를 바짝 붙어 뒤따랐다. 실드로 몸을 보호하고 있던 사리나의 입은 어느새 딱 벌어져 있었다. "저, 정말 엄청난 매직 미사일이야. 어찌 저렇게 많은 공격을 퍼부을 수 있을까?"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사리나는 곧 공격 마법을 캐스팅했다. 이미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기사들이 놈의 종적을 찾아내어 달라붙으면 그들을 배후 지원하는 것이 바로 마법사의 임무였고 그녀는 지금껏 수없이 임무를 성공시켰다. 5서클의 마스터답게 라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 다발이 순식간에 캐스팅되었다. 파파파팟. 보편적으로 흑마법사들은 빛을 이용한 공격에 취약한 면을 보인다. 자신의 실력이라면 빗나가는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고 이 정도 라이트닝 볼트 다발이라면 아무리 강한 네크로멘서라도 일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 틈을 타서 기사들이 공격을 가한다면 네크로멘서는 분명히 두 조각이 나버릴 것이다. 사리나는 그 사실을 추호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네크로멘서가 어디에 있지?" 라이트닝 볼트를 잔뜩 캐스팅한 상태로 사리나는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네크로멘서를 찾는 즉시 실드를 풀고 라이트닝 볼트를 날릴 계산이었다. 그녀는 특히 기사들이 공격해 들어가는 쪽을 면밀히 살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득의한 듯한 빛이 일어났다. "저기 있군." 기사들이 돌진하는 쪽으로 검은 로브를 입고 서 있는 자 하나가 보였다. 목표를 발견하자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실드를 풀었다. 츠츠츠. 라이트닝 볼트가 캐스팅 된 마법 지팡이에서 급격히 빛이 번져가고 있었다. 네크로멘서가 뭔가 캐스팅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상관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마법을 펼쳤는지 모르지만 라이트닝 볼트의 속도를 능가하진 못할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명백한 오산이었다. "까아악." 라이트닝 볼트가 채 발사되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에서 뾰쪽한 교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가녀린 몸이 갑자기 허공에서 벌렁 뒤집혔던 것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이 사리나의 발목을 잡고 거꾸로 들어올린 형상이었다. 막 실드를 풀고 공격을 감행하려던 그녀로써는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것은 업셋(upset)?" 자신에게 걸린 것은 중력의 방향을 일정시간 거꾸로 바꿔버리는 마법이었다. 거꾸로 뒤집혔으니 치마가 흘러내리는 것은 당연지사. "어머머." 여자로써의 본능에 의해 사리나는 반사적으로 흘러내리는 치마를 부여잡았다. 그 탓에 마법지팡이가 바닥에 떨어졌고 기껏 캐스팅해 놓은 라이트닝 볼트는 정말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꺄아아악." 급속히 침습해 오는 공포에 사리나는 한껏 비명을 내질렀다.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치마를 잡은 두 손을 한껏 뻗어 속옷이 보이지 않게 하는 것뿐이었다. 한 마디로 그녀는 적의 공격에 완전 무방비 상태로 놓여있었다. 물론 네크로멘서가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잠시, 유유하게 날아온 매직 미사일 한 방이 우아하게 복부를 가격하자 그녀는 그대로 까무러쳐 버렸다. 퍽. 손에서 자연스럽게 힘이 빠졌고 결국 치마가 흘러내렸다. 의식을 잃은 사리나는 거꾸로 매달린 채 속옷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크크크. 계집을 상대하는 방법은 중원이나 이곳이나 똑같단 말이야."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사리나를 쳐다보며 데이몬은 괴소를 머금었다. 사파 고수였던 그가 적을 상대하는데 수단 방법을 가릴 이유란 없었다. 여자로써의 본능을 가장 적절하게 이용한 공격. 그 덕에 5서클의 소서리스 한 명을 아주 간단히 무력화시킬 수 있었던 데이몬이었다. 물론 그냥 싸웠어도 금방 제압했을 테지만. "그나저나 금방 끝나겠군."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남은 세 기사를 느긋하게 쳐다보았다. 기세 좋게 달려들던 기사들은 뜻밖의 복병을 만나 고전 중이었다. 데스 나이트 하나와 듀라한에 의해. 푸캉. 헬버트론과 윈슬럿이 압도적으로 상대를 밀어붙이는 것을 흘겨보며 데이몬은 느긋하게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싸움구경이었지만 이미 데이몬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쏠려 있었다. "그럼 굴러 들어온 떡이나 느긋하게 감상해볼까?" 그의 고개가 아주 자연스럽게 뒤로 돌아갔다. 기절한 채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소서리스에게로 말이다. 사리나의 새하얀 허벅지를 주시하던 데이몬의 입가에는 어느새 군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햐! 고것 보면 볼 수록 괜찮네?" "이, 이럴 수가?" 엘케인의 눈은 경악으로 부릅떠져 있었다. 하지만 놀랄 틈이란 없었다. 앞을 가로막은 존재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자신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도저히 자신이 당해낼 상대가 아니었기에 그는 죽을힘을 다해 수비에만 열중해야 했다. 뼈저린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그, 글렀어. 도저히 당해낼 상대가 아니야." 말을 하는 사이에도 상대의 매서운 공세가 방패에 작렬했다. 콰쾅. 마나를 한껏 불어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방패의 상단 부분이 잘려나갔다. 그냥 막았다면 방패가 그대로 두 쪽이 나버렸을 정도의 공격이었다. 상대는 데스 나이트였다. 그것도 갑옷과 검에서 거무스름한 오러 블레이드를 피워 올리고 있는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 놀랍게도 데스 나이트의 실력은 자신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매서운 공격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진퇴. 틈이라 생각되면 가차없이 파고들었고 전력을 다한 자신의 공격도 간단한 손동작으로 손쉽게 흘려버렸다. 방패를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빈틈이 보이지 않았으니 생전의 실력이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데스 나이트가 이렇게 강하다니……." 데스 나이트에게 밀릴 줄은 꿈에도 몰랐던 엘케인이었다. 상대는 소드 마스터인 자신을 아예 가지고 놀 듯 다루고 있었다. "이익." 부아가 치민 엘케인이 맹목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일체의 방어를 도외시한 공격. 하지만 놈은 검을 휘둘러 아주 가볍게 자신의 공격을 차단했다. 뒤로 주춤 물러선 엘케인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길 수 없어. 절대로……." 이미 휘하의 팔라딘은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한 명은 오른 팔이 부러진 채 기절해 있었고 그나마 남은 윌터 역시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언데드 몬스터인 듀라한이었다. 머리통을 왼쪽 옆구리에 꼭 낀 채 오른 손의 배틀 엑스를 미친 듯이 휘두르는 모습은 윌터를 공포에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콰쾅. 거대한 배틀 액스가 방패에 작렬하자 윌터는 뒤로 형편없이 쭉 밀려갔다. 엄청난 괴력. 그와 싸우는 듀라한 역시 비정상적으로 강한 놈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통상적으로 팔라딘 정도 되는 기사는 충분히 듀라한을 상대할 수 있다. 검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몸이 단단하기는 하지만 검기를 끌어올린다면 듀라한을 충분히 두 조각 낼 수 있다. 하지만 눈앞의 듀라한은 달랐다. 우선 놈이 들고 있는 황금빛 배틀 엑스는 검기가 서린 윌터의 검을 무리 없이 방어하고 있었고, 한 손만으로도 윌터를 아예 압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가롭게 그들의 싸움을 관전하고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또다시 무시무시한 기운이 몰려오는 것을 느낀 엘케인은 사력을 다해 검에 곧추세우며 마나를 불어넣었다. 파파파팍. 엘케인의 건장한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간신히 공격을 차단하기는 했다. 하지만 맞닿은 검에서 자욱한 스파크가 튀기며 자신의 검에 서린 푸른 빛 기운이 눈에 띄게 옅어졌다. 정황을 보아 상대의 검에도 오러 블레이드가 서려있음이 분명했다. 그것도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위력의 오러 블레이드가……. "미치겠군." 기가 질린 엘케인은 또다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후퇴 명령을 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젠 그것을 들을 대상이 아무도 없었다. 윌터마저 그가 보는 앞에서 쓰러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크으윽." 듀라한의 도끼에 허벅지를 찍힌 윌터가 힘없이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듀라한은 넘어진 윌터의 가슴을 지긋이 밟으며 쥐고 있던 검을 쳐서 멀리 날려버렸다. 퍽. 죽일 생각은 없는지 듀라한은 도끼의 뒷면으로 투구를 후려갈겼고 윌터는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이제 대지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자는 엘케인만이 유일했다. 이미 사리나는 정신을 잃고 허공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상태였다. 언제 당했는지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데스 나이트와 잠깐 싸우다가 물러나 보니 상황이 완전히 종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훤히 드러난 사리나의 속옷과 허벅지가 눈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51회. 엘케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끄, 끝장이야." 이미 앞에는 맹위를 떨친 데스 나이트가 안광을 빛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놈 하나만도 자신이 없었는데 듀라한마저 뒤를 차단하고 있으니 승산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챙그렁. 그는 검을 버리고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저항해봐야 도리가 없었으므로 깨끗하게 최후를 맞이하리라 작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는 엘케인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퍽 둔중한 타격 소리와 함께 그의 의식은 어두운 심연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엘케인의 건장한 육체가 힘없이 허물어지며 검을 늘어뜨린 데스 나이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끄으응." 엘케인은 머리에서 아련한 통증이 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그는 이내 이성을 되찾았다. 통증이 전해진다는 것은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내, 내가 살아있었나?" 부지불식간에 정신이 번쩍 든 엘케인은 다급하게 주위를 살폈다. 기절하기 전의 상황이 비로소 떠올랐던 것이다. 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주위의 상황이 예상을 전혀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선 보이는 것은 굴비두릅처럼 줄지어 묶여 있는 부하들이었다. 윌터를 필두로 팔라딘과 수련기사들이 일렬로 벽에 묶여 있었고 가장 끝에는 사리나가 있었다. 의자에 단단히 묶여 있는 것을 보니 그녀 역시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서둘러 부하들의 상태를 살폈다. "불행 중 다행이군" 다행히도 죽은 자는 없는 듯 보였다. 하나같이 부상을 입어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깨어나셨습니까?" 옆에 묶인 윌터가 말을 걸어왔다. 머리에 피가 흥건히 말라붙어 있는 것을 보니 제법 호되게 당한 것 같았다. 엘케인의 시선이 윌터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기절했다가 깨어보니 모두들 이렇게 묶여 있더군요." "그럼 우린 네크로멘서의 포로가 된 것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엘케인의 얼굴에 극도의 상심이 어렸다. 명예로운 기사로써 네크로멘서 따위의 포로가 되다니……. 엘케인에게는 차라리 전사하는 것보다도 못한 결과였다. 그러나 방도가 없었다. 네크로멘서가 거느린 전력은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아르카디아에 이렇게 강한 네크로멘서가 있을 줄은……."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사리나에게로 향했다. 그녀 역시 상당히 초췌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엘케인은 한 가닥 희망을 포기하지 못한 채 질문을 던졌다. "사리나. 혹시 마법을 쓸 수 있겠어?" 사리나는 안색을 굳히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미 그녀의 주위에는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불가능해요. 이미 여러 번 시도해 보았지만 단 한 점의 마나도 끌어 모을 수 없네요." "놀랍군. 놈의 실력으로 사리나를 제압하다니……." 그 말에 사리나는 고개를 팩 돌렸다. "놈은 결코 4서클의 엑스퍼트가 아니에요. 나에게 가한 업셋(upset)은 적어도 5서클이 넘어가는 고위급 마법이니까……. 아니 그것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예요. 그것은 매직 미사일을 발사한 수준만 보더라도 알 수 있어요. 상황을 미루어 놈은 최소한 7서클, 최악의 경우 8서클을 상회하는 대마법사일 가능성이 농후해요. 대관절 4서클의 엑스퍼트란 말이 어떤 녀석의 입에서 나왔는지 궁금하군요." 그녀의 눈빛에는 광기 같은 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네크로멘서에게 발하는 순수한 분노였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잠깐 기절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에겐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다. 네크로멘서가 자신의 허벅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침까지 질질 흘리며 말이다. 거꾸로 매달린 상태였으므로 사리나로썬 다급하게 치마를 밀어 올리며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꺄아아악." 네크로멘서는 몹시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쩝쩝 다시며 몸을 일으켰다. "구경 한 번 정말 잘 했군." 그가 손짓을 하자 데스 나이트가 자신에게 다가왔다. 놈은 자신을 벌렁 둘러메더니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 일을 상기한 사리나는 이를 빠드득 갈며 말을 이어나갔다. "데스 나이트는 날 이방으로 메고 와서 의자에 묶었어요. 조금 시간이 지나자 듀라한이 기절한 기사들을 하나씩 데리고 와서 벽에다 묶더군요. 엘케인님이 가장 나중에 들어왔어요. " "도대체 놈의 꿍꿍이가 뭘까?" 엘케인을 비롯한 토벌대 대원들은 네크로멘서의 의도에 대해 머리가 빠져라 고민해야 했다. 이미 모든 무기를 빼앗긴 상태였고 사리나마저도 마법을 전혀 쓰지 못했다. 말 그대로 완벽하게 제압당한 것이다. 네크로멘서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들은 누구하나 살아남을 수 없었다. 때문에 그들로썬 시시각각 다가오는 운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무척 지루하게 자신들의 종말을 기다리던 토벌대 기사들.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가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덜컥. 모습을 드러낸 자는 의외로 평범한 용모를 지닌 늙은 마법사였다. 물론 사리나는 한 눈에 사악한 네크로멘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들의 면면을 훑어보던 데이몬은 나지막하게 괴소를 흘렸다. "크크크. 무척 오래 기다렸지? 준비할 것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시간을 끌었네. 미안하군." 그 말에 사리나의 눈에서 쌍심지가 돋았다. "이런 나쁜 자식. 감히 내, 내………." 아무리 전장에서 단련된 워 소서리스라 하더라도 본성이 여자인 것은 틀림이 없었다. 사리나는 차마 뒷말을 내뱉지 못하고 씨근거리기만 했다. 무슨 뜻인지 익히 짐작하면서도 능청을 떠는 데이몬이었다. "내가 뭘 어쨌기에?" "나쁜 새끼! 멍게, 말미잘, 비루먹은 오크 꼬랑지 같은 놈. 풀려나기만 하면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릴 거야." 사리나의 말투가 점점 거칠어지자 데이몬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물론 여자에게 욕을 먹는다는 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유쾌하지 못한 일이다. 하물며 한 때 절대자였던 데이몬에겐 도저히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 냉랭한 기가 돌았다. "한 번만 더 욕을 한다면 단단히 혼을 내줄 테다." "혼? 어떻게 혼을 내려고? 고작해야 네 녀석이 죽이기밖에 더 하겠어? 한 번 해보지 그래? 난 죽음 따윈 하나도 겁나지 않아." 사리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욕설을 퍼부었다. 지긋한 나이의 늙은이에게 함부로 하는 것을 봐서 그녀의 성질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이미 이런 일에 이력이 난 상태였다. 다시 말해 어떤 방법으로 협박을 해야 정통으로 들어먹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등뒤에 서 있는 윈슬럿에게 고개를 돌렸다. "윈슬럿. 당장 저년을 발가벗겨서 거꾸로 매달아라. 기다린다고 지루했을 텐데 저놈들에게 눈요기라도 조금 시켜줘야지." 그 말에 사리나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버렸다. 한솥밥을 먹던 동료들, 그것도 하급자인 수련기사들에게 알몸을 보이고 싶은 여자가 도대체 어디 있을까? 물론 데이몬의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꾸민 것이었다. 듀라한은 심령으로 움직이는 언데드였고 지금처럼 말로 명령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생각만 하면 그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하지만 뜻이 충분히 전해졌는지 윈슬럿은 어슬렁거리며 사리나에게 다가갔다. 윈슬럿의 흉측한 몰골을 보자 사리나는 또다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꺄아악. 살려줘요." 그 모습을 보던 엘케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경험이 많은 그는 상대의 장난기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만하시오. 내가 부탁한다면 그녀는 더 이상 당신에게 욕설을 하지 않을 거요." 데이몬의 시선이 엘케인의 얼굴로 향했다. "그대가 지휘자인가?" "그렇소. 나는 듀렐류드 가문의 엘케인이라 하오. 크로센 제국의 근위 기사로써 토벌대의 책임자를 맡고 있소." 전혀 굴하지 않고 데이몬의 시선을 맞받는 모습을 보니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그의 얼굴엔 겁먹은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죽음 따윈 웃으며 받아들이겠다는 기백을 보니 마치 명예를 존중하는 기사의 표상이라고 일컬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데이몬은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괜찮은 녀석이로군." "칭찬 따윌 받고 생각은 없소. 그저 힘이 모자라 당신을 처벌하지 못하게 된 것이 원통하기만 하니 말이오. 하지만 이대로 죽어도 여한은 없소. 머지 않아 당신을 잡기 위해 더욱 강력한 기사단이 수도에서 도착할 것이니까……. 그들이 반드시 우리들의 원한을 갚아줄 것이오." 당당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엘케인의 대답. 하지만 데이몬은 냉랭하게 코웃음 칠 뿐이었다. "그깟 녀석들 떼거지로 와봐야 하등 겁날 것도 없다." "그렇진 않을 거요. 크로센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1백여 소드 마스터 중에는 내가 가장 약하니 말이오. 비록 당신의 데스 나이트가 제법 강하긴 하지만 그들 모두를 감당하진 못할 것이오. 당신 뒤에 서 있는 듀라한까지 합세한다고 해도 말이오." 그 말에 데이몬은 다소 놀란 눈치였다. "햐! 팔라딘도 아니고 소드 마스터가 백 명씩이나? 정말 대단한 전력이로군." "당신이 악명을 떨칠 날도 오래 남지 않았소. 머지않아 최후가 닥쳐올 테니 기대하시오." 데이몬은 엘케인의 눈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악명이라. 내가 그렇게 악명을 높았던가? 내 기억으론 이곳에 와서 그다지 나쁜 짓을 한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엘케인의 두 눈에 분노의 광망이 줄기줄기 솟구쳐 올랐다. 저번에 들어왔을 때의 참상이 생생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가증스러운……. 꼭 말로 해야 알겠소? 언제 치웠는지는 보이지는 않지만 난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가 썩어 가는 장면을 목격했었소. 정확히 1년 전에 말이오. 사람으로써 어찌 그리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소?" 서슬 퍼런 엘케인의 질책. 하지만 데이몬은 추호도 동요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짐작 가는 바가 없진 않군. 하지만 하나만 알아두게. 난 이곳에 와서 단 한 명의 사람도 죽이지 않았으니 말이야." 엘케인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래도 가증스럽게 거짓말을 하려 하시오? 당신의 죄악은 인간이 징벌하지 못한다면 신께서 반드시 징벌하실 것이오. 당신의 영혼은 억겁의 세월동안 지옥에서 고통받을 테니 각오하시오." 추상같은 엘케인의 꾸짖음에 어지간한 데이몬도 부아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놈이 보자보자 하니 끝도 없이 기어오르는군. 아무래도 쓴맛을 보여줘야겠어." "마음대로 해 보시오. 발가벗겨 매달든 고문을 가하든 난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을 테니……." 말을 마친 엘케인은 눈을 꼭 감았다. 데이몬은 무척 곤혹스런 눈빛으로 이 고지식한 기사를 어떻게 요리할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그는 우선 묶여 있는 기사들을 죽 둘러보았다. "좋아. 어떻게 생각하던 나에겐 상관없는 문제이니 일단 당면과제부터 해결해야겠군. 일단 너희들은 무단으로 내 거처에 침입한 죄를 지었다. 날 살상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갖고 침입했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겠지?" "물론 없소." 엘케인을 대신해 윌터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당찬 태도였다. 심지어 수련기사들조차 죽음을 각오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크로센 기사단원의 마음가짐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구성원들의 마음가짐이 이럴 진데 왜 명성을 떨치지 못하겠는가? 크로센 대제. 정말 부럽소. 배교의 수하들이 모두 이런 자들이었다면 진작 배교가 무림을 평정했을 텐데 말이오.' 물론 그를 따르던 수호마왕군은 이들에 비해 추호도 손색이 없었다. 불행히도 배교 무사들 대다수가 그렇지 못했기에 데이몬이 이런 처지에 놓여야 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도 결코 나쁜 처지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데이몬은 일단 저들의 기를 꺾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려면 실력행사가 필수였다. "그럼 어떤 놈부터 시작할까?" 그의 오른 손에서 난데없이 푸른색 화염덩이가 이글거리며 생겨났다. 그의 마법실력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마법, 헬 파이어였다. 삽시간에 사람 머리통만큼 커져버린 헬 파이어. 그것을 목격하자 인해 포로들의 얼굴엔 핏기가 싹 사라져버렸다. "헤, 헬 파이어. 오, 신이시여……." 사리나는 헬 파이어를 보자마자 그대로 까무러쳤다. 9서클 궁극의 마법 헬 파이어. 이것은 그녀를 가르쳤던 스승조차 전개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초고위급 마법이었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52회. 그것은 크로센 제국의 그 어떤 마법사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크로센의 궁정을 맡고 있는 수석 마법사 필라모네스조차도 이제 겨우 8서클의 엑스퍼트에 불과했다. 벌써 일백여세가 넘은 노마법사도 그럴 진데 사리나는 오직 하겠는가? 그녀는 지금 마법계의 전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세, 세상에……." 어지간한 엘케인조차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아르카디아의 역사상 9서클의 마스터에 오른 마법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역사가 유구한 트루베니아에서조차 천년을 통틀어 단 두 명의 9서클 마스터가 나타났을 뿐이다. 그런 엄청난 마법사가 모습을 보였는데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엘케인은 한참 만에야 입을 열고 떠듬떠듬 말을 내뱉었다. "도, 도대체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오. 혹시……." "………." "드래곤입니까?" 엘케인으로썬 그렇게 밖에 생각할 도리가 없었다. 9서클은 수명이 짧은 인간에겐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벽이었다. 심지어 마법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진 궁정 마법사 필라모네스 조차도 100여세가 되고 나서야 겨우 8서클의 벽을 허물어뜨렸다. 9서클에 오르기는 그만큼 힘들었다. 그러니 엘케인이 데이몬을 드래곤으로 간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말이 데이몬의 분노를 자극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엘케인이었다. "헉." 난데없이 상대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살기에 엘케인은 등골이 오싹했다. 맹렬한 살기가 데이몬의 눈에서 마치 이글거리듯 퍼져 나오고 있었다. 적어도 드래곤에게만은 거리낌없이 살기를 피워 올릴 수 있었던 데이몬. 그는 착 가라앉은 어조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경고하겠다. 앞으로 내 앞에서 두 번 다시 그 저주받은 존재를 거론하지 마라." 잔뜩 격양된 음성이었기에 엘케인은 결국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봐서 상대가 드래곤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런 엘케인을 향해 데이몬은 나지막이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물론 네놈이 내 말을 믿건 안 믿건 상관없다. 내 말은 모두가 사실이니까……. 그리고 크로센 기사단이 이곳으로 몰려오더라도 난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에겐 충분히 그것을 막을 능력이 있으니까……." 자신이 속한 기사단을 비하하는 듯한 발언에 엘케인이 발끈했다. "불가하오. 당신이 아무리 9서클의 마스터라 하더라도 그것이 무리임에는 틀림이 없소. 물론 최고의 소드 마스터라도 헬 파이어를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하오. 그런 고위급 마법은 아무도 막을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헬 파이어는 어떠한 경우에도 여러 번 전개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오. 아무리 당신이라 하더라도 고작 헬 파이어 대여섯 발이 한계일 터. 그것으론 우리 기사단을 당해낼 수 없소." 어찌 보면 상당히 정확하다고 할 수 있는 분석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느긋하게 고개를 저었다. "예상이 빗나가서 미안하군. 난 적어도 하루에 20여 발이 넘는 헬 파이어를 전개할 수 있지. 하지만 내가 믿는 것은 그것이 아니야. 나에겐 충분히 강력한 조력자들이 있단 말이지." 엘케인의 얼굴에 조소가 서렸다. "데스 나이트를 말하는 거요? 장담하건데 크로센 기사단원 다섯이면 충분히 당신의 데스 나이트를 상대할 수 있을 거요. 저주받은 데스 나이트 하나 가지고 큰소리치지 마시오." "미안하군. 내가 보유한 데스 나이트는 하나가 아닌데 말이야." 말을 마친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고함을 질렀다. "이봐! 모두 들어오도록 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렸다. 시커먼 실루엣들이 소리도 없이 실내로 들어왔다. 그들을 보자 엘케인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가장 선두에 선 존재는 자신을 정말 무참히도 패퇴시켰던 데스 나이트였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놈과 똑같이 생긴 데스 나이트가 셋이나 더 있다는 사실. "세상에……." 뒤따라 들어온 데스 나이트를 본 엘케인은 기가 막혀 말이 안나올 지경이었다. 끔찍할 정도로 강한 놈들이 하나도 부족해서 셋이나 더 있다는 사실에 그는 아예 패닉 상태에 빠져 버렸다. 그런 엘케인을 감상하듯 지켜보며 데이몬은 느긋하게 말을 꺼냈다. 이미 그는 완벽한 연출을 위해 인크레시아에 있던 나머지 데스 나이트까지 불러모은 다음이었다. "그럼 소개하지. 이쪽부터 이름이 헬버트론. 라인델프. 프림베르그. 사라미스라고 하지. 아! 헬버트론은 잘 알겠군. 네 놈을 제압한 녀석이니 말이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광망이 이글거리는 헬버트론의 시선이 엘케인의 얼굴에 쏘아졌다. 유부에서 터져 나오는 듯한 음성이 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애송이. 제법 실력이 쓸만하긴 했지만 아직은 멀었어. 수련을 한참 더 해야 할 것 같군." 이죽거리는 상대를 보고도 엘케인은 일언반구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월등히 말이다. 자신들의 지휘자이며 또한 우상이기도 한 엘케인을 애송이 취급하자 윌터를 비롯한 수련 기사들의 눈에서 분노가 샘솟았다. 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는 그들이 끼여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데이몬은 그들을 둘러보며 느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알기로 그 정도 큰 제국의 기사단이라면 할 일이 결코 적지 않을 터. 그렇다면 보내봐야 고작 이삼십 명 안팎일 테지? 그 정도야 이들이 나서면 간단히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 "아마도 내가 합세한다면 사십 명까지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군. 헬 파이어 한 발에 한 명씩…….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엘케인은 겨우겨우 입을 떼었다. "물론 그 말도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오. 하지만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황제폐하께서는 분명 기사단 전원을 파견하실 것이오. 당신을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데이몬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멍청하긴. 병석에 누워있는 황제가 어떻게 그런 명령을 내린단 말인가? 내가 알기로 크로센 제국은 귀족들의 권력다툼 때문에 완전히 난장판이라 하더군. 그 때문에 기사단의 주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수도를 비울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되면 권력장악에 혈안이 되어 있는 귀족들이 얼씨구나 하고 황궁을 점령할 것이 분명하지. 그렇지 않은가?" 상대가 너무도 정확하게 황궁의 사정을 짚어내자 엘케인은 아연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건……." "놈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몰려오면 자리를 피하면 그만이야. 아니. 이 자리에서 너희들을 깡그리 죽여버린다면 과연 이 사실이 수도에 전해질까?" 구구 절절히 옳은 소리였기에 엘케인은 고개를 푹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상황을 너무도 명철하게 꿰뚫고 있었다. 지금 크로센 제국의 사정으로는 눈앞의 네크로멘서를 감당할 수 없음이 분명했다. 샘솟듯 치밀어 오르는 절망감에 엘케인은 가늘게 몸을 떨어야 했다. '오 신이시여. 어찌 이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은 이제 때가 무르익었음을 직감했다. "그건 그렇고 일단 너희들을 처리해야 할 시간인데……." 턱에 손을 괴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척 하던 데이몬은 그것이라는 듯 손뼉을 딱 쳤다. "그렇지! 이러면 되겠군. 나는 너희들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기회?" 엘케인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빛이 떠올랐다. 데이몬은 상대의 눈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난 사람을 죽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물론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야. 네놈이 믿거나 말거나 이곳에서 지낸 1년 동안 나는 한 사람의 목숨도 끊지 않았다. 따라서 너희들을 죽인다는 것이 내겐 그리 탐탁지 않아." 촌장에게서 들은 말이 있는지라 엘케인의 얼굴에 뭔가 미심쩍은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더불어 9서클의 마스터에 오른 자가 섣불리 거짓말을 할 까닭이 없다는 생각과 함께……. "당신이 1년 전에 이곳에 왔다는 말이 사실이오?" 데이몬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원래 이곳엔 윈터데일인가 하는 놈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 놈이 시체를 워낙 많이 널어놓아서 치운다고 고생을 좀 했지만 말이야." 엘케인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그, 그자는 어디에 있소?" "지하감옥에 있어. 패밀리어를 깡그리 없애 버렸더니 완전히 미쳐버렸어. 어쨌거나 그놈도 죽이기가 싫어 그냥 지하감옥에 가둬두고 있어."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데이몬. 이제 엘케인은 상대의 말을 어느 정도 믿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말과 유추해보면 충분히 신빙성이 있는 얘기였다. 그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노, 놈을 나에게 보여주시오. 그러면 당신의 말을 완전히 믿겠소." 임무에 비교적 충실한 편인 엘케인의 태도에 호감이 가긴 했지만 데이몬은 짐짓 안색을 굳혔다. "네놈이 지금 나에게 요구를 하는 것이냐? 기회를 주긴 했지만 아직까지 너희들의 생사여탈권은 내가 꼭 쥐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엘케인은 풀 죽은 모습으로 힘없이 몸을 늘어뜨렸다. 그때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아차린 듯한 모습이었다. "당신이 말한 기회란 것이 무엇이오. 한 번 들어 봅시다." "조건은 간단하다. 나와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지." 너무나도 간단한 조건이었기에 엘케인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 정도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조건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소." 아무리 심지가 굳은 자라 하더라도 생명에 대한 애착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런 엘케인의 모습을 데스 나이트 넷과 듀라한이 무척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데이몬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가? 그럼 음식을 준비하도록 하지." 그러나 준비된 식단을 본 엘케인은 아연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릇 세 개에 가득 담겨 나온 음식은 도저히 인간이 먹을 음식이 아니었다. 커다란 그릇에는 온갖 흉물스러운 것들이 가득 차 있었다. 구더기와 지네, 거미, 바퀴벌레 따위 징그러운 벌레가 종류별로 푹 삶긴 채 싯누런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고 아래에는 토막 난 뱀의 사체가 깔려 있었다. 그 위에는 박쥐와 개구리, 도마뱀의 머리통이 아직까지 시뻘건 피를 뚝뚝 흘리며 얹혀 있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릇을 쳐다보는 기사들의 얼굴에는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깨어난 사리나의 얼굴은 아예 사색이 되어 있었다. 마치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라고나 할까? 엘케인은 눈을 부릅뜬 채 그릇을 노려보았다. "이, 이런 것을 먹으라는 말이오?" "물론. 얼마나 맛있는데……." 데이몬은 서슴없이 박쥐의 머리통 하나를 집어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우적우적.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에 엘케인은 가슴속이 메슥거려옴을 느꼈다. 눈 버젓이 뜨고 저것을 먹는다면 분명 사람이 아닐 터였다. 박쥐 머리통 하나를 깨끗이 해치운 데이몬은 계속해서 손을 그릇으로 가져갔다. 벌레로 보이는 것 한 주먹을 입 속에 털어 넣은 데이몬은 길쭉한, 엘케인이 아직까지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고깃덩이를 집어들었다. "이건 숫말의 거시기야. 맛이 정말 끝내주지." 입 속으로 사라지는 거시기(?)를 보며 엘케인은 진저리를 쳤다. 만지는 것조차 끔찍스런 음식들을 상대는 아주, 아주 맛있게 먹고 있었다. "우왜액." 결국 보고 있던 사리나가 마침내 먹은 것을 확인해보기 시작했다. 몇 몇 비위 약한 수련 기사들의 눈동자에는 핏발이 벌겋게 서 있었다. 욕지기를 참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데이몬은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꺼억. 잘 먹었다. 자네도 들지 그래?" 태연스레 음식을 권하는 데이몬을 보며 엘케인은 결국 이성을 잃어 버렸다. "이런 것을 먹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소. 비록 당신의 포로가 되었지만 난 당당한 크로센 기사단의 일원이오. 내 명예를 더럽힐 생각일랑 꿈에도 하지 마시오." "그래? 자네 부하들의 목숨이 걸려있는 문제인데도 말인가?" 엘케인은 눈을 부릅뜬 채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상대는 지금 자신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었다. 참다 못한 윌터가 고함을 질렀다. "놈의 수작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저희들은 포로가 된 순간부터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저희들에게 신경 쓰시지 말고 명예를 지키십시오." 심지어 수련기사들조차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53회. 자신의 목숨은 아랑곳없이 상관의 명예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모습에는 비장함조차 감돌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 뜻을 꺾을 데이몬이 아니었다. "만약 자네가 그 음식을 먹는다면 소서리스를 제외한 모든 기사들을 자유롭게 풀어줄 것을 약속하지. 더불어 너희들이 잡고자했던 네크로멘서 윈터데일의 신병까지 함께 말이야." 엘케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갈등이 교차했다. "그 말이 정말이오?" "물론. 음식을 비우는 순간 자네들은 풀려날 걸세. 어차피 윈터데일이란 놈은 나에게 하등 필요가 없는 존재이니 원한다면 즉시 넘겨주겠네." "그런데 왜 사리나를 제외시키는 것이오." 데이몬은 싸늘한 눈빛으로 사리나를 노려보았다. "나에게 욕을 한 계집애를 순순히 풀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아마도 풀려나고 싶으면 저년도 어쩔 수 없이 음식을 먹어야 할 걸?" 불쌍하게도 사리나는 입가에 거품을 부글부글 물고 있었다. 아까 상대에게 욕을 한 것이 이토록 후회될 줄은 몰랐다. 보다 못한 엘케인이 그녀 편을 들었다. "그, 그건 너무하오. 여자에게 어찌……." "내 요구조건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아. 그게 싫으면 이 자리에서 죽던가." 엘케인은 결국 마음을 정했다. 자신의 목숨만 걸려 있다면 달게 죽음을 받아들이겠건만 앞길이 창창한 젊은 기사들까지 잃을 순 없었다. 하물며 저들은 자신이 직접 검술을 전수해왔던 부하들이 아니었던가? 사리나가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애당초 잘못은 그녀에게 있었다. "먹겠소." 엘케인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릇을 끌어당겼다.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오로지 이 방법밖에 없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상태로 음식을 닥치는 대로 입 속에 털어 넣었다. 먹는 것을 직접 보는 순간 욕지기를 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로써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릇의 음식들이 끊임없이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밀려들어갔다. 와구와구. 맛을 느끼지 않으려고 그는 음식을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켰다. 그 모습을 수련 기사들은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엘케인이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자신들을 살리기 위함이란 것을 그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엘케인 님."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습니다." 그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엘케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애절하게 쳐다보았다. 앞으로 목숨을 바쳐서라도 엘케인에게 충성하리라는 각오가 그들의 가슴에 깊숙이 새겨지고 있었다. "응?" 눈을 감은 채 정신 없이 음식을 집어삼키던 엘케인이 미간을 지긋이 모았다. 맛을 보지 않으려고 그토록 노력했건만 결국 음식 맛을 보고야 말았던 엘케인이었다. 놀랍게도 음식의 맛은 너무나 훌륭했다. 지금껏 그가 먹어본 음식보다도 훨씬 뛰어난 맛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음식을 씹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음식의 맛은 엘케인을 매료시키고 있었다. '이, 이럴 수는 없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지만 음식의 맛은 어느덧 혀에 또렷이 각인되어가고 있었다. 음식의 맛은 달고 맵고 쓰고 짠 인간의 오감을 모조리 충족시키고 있었다. 연신 음식을 털어 넣던 엘케인의 손이 서서히 느려졌다. 이제 그는 음식의 맛을 즐기고 있는 상태였다. '구더기나 바퀴벌레 따위가 이렇게 맛있을 줄은…….' 먹는 속도를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접시는 서서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달그락. 그릇에서 아무것도 집혀지지 않자 엘케인은 슬며시 눈을 떴다. 그릇 바닥에 지저분하게 깔려있는 벌레의 다리와 진액을 보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지만 그는 두말도 하지 않고 그것을 훑어다 입 속에 집어넣었다. 결국 그릇은 설거지를 할 필요도 없을 만큼 깨끗이 비워졌다. 입가에 묻은 찌꺼기까지 모조리 털어 넣은 엘케인은 이제 되었냐는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조건을 충족시켰으니 약속을 지키겠네. 부하들을 풀어줄 테니 데리고 동굴 밖에 나가서 기다리게." "사, 사리나는 어떻게 할 작정이오?" 데이몬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 계집애는 어떠한 경우에도 식사를 마쳐야 나갈 수 있네. 먹지 못한다면 죽여 시체라도 갖다줄 테니 걱정하지 말게. 일단 나가서 기다리면 결과를 알 수 있을 거야. 원터데일은 그 때 넘겨주겠네." "하, 하지만." 데이몬은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데스 나이트들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묶인 밧줄을 풀어주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말로 할 때 순순히 들어라. 만용을 부리는 놈에겐 톡톡하게 쓴맛을 보여줄 테다." 엘케인을 비롯한 토벌대 기사들은 결국 데스 나이트들에게 떼밀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무기도 없었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로썬 속수무책이었다. 엘케인 역시 한 마디만 겨우 내뱉을 수 있었다. "사리나. 눈 딱 감고 먹어버려. 그 정도로 죽지 않으니 말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모든 기사들이 쫓겨났다. 물론 데스 나이트들이 입구를 철통같이 경계할 테니 그들이 다시 들어올 우려는 없었다. 혼자 남게 되자 사리나는 아예 이성을 잃어버릴 지경이었다. 물론 데이몬은 돌아가는 상황을 무척 즐기고 있었다. 사리나의 결박을 풀어준 뒤 데이몬은 무척 음흉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자 이제 네 차례가 돌아왔군. 이 순간을 무척 기다렸지?" "오. 신이시여." 까무러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애석하게도 사리나의 정신은 또렷하기 그지없었다. 뱃 속의 것을 모조리 게운 터라 더 이상 토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릇에 담긴 흉물스런 음식을 보자마자 또다시 욕지기가 밀려왔다. "우왜액." 한참동안 위액을 토해낸 사리나는 한없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입가에 토사물이 질펀하게 묻어 있었지만 그녀는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제, 제발 용서해줘요. 여자에게 어찌 이런 것을 먹일 수 있어요?" "당연히 먹어야지. 여자는 사람 아닌가? 먹고 싸는 것이 똑같은데 왜 못 먹지?" 능글능글하게 받아치는 데이몬. 사리나도 결국 마음을 정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날 죽여. 죽으면 죽었지 저것은 죽어도 못 먹어." 사리나가 이판사판으로 나오자 데이몬은 기다렸다는 듯이 흉소를 머금었다. 이미 이런 상황 정도는 미리 예상했던 데이몬이었다. "멍청하기는. 넘겨짚지 말도록…….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도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그 말에 사리나는 생에 대한 한 가닥 희망을 되새겼다. 이미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노련한 사리나였다. 심지어 몸을 요구한다고 해도 사리나는 들어줄 생각이었다. 음식을 먹는 편보다는 차라리 그것이 나았다. "그럼 절 어쩌실 생각이죠?" 데이몬은 사악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들어 옆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윈슬럿이 머리통을 옆구리에 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사리나의 얼굴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빛이 떠올랐다. "저, 저것은 듀라한이잖아요?"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는 사리나에게 데이몬이 친절히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저 녀석을 소개하지. 이름은 윈슬럿. 보다시피 제법 쓸만한 듀라한이지. 애석한 것은 저 녀석에게 적당한 짝이 없다는 것이야. 평소에 그 점이 가장 마음에 걸려서 말이다. 좋은 기회가 생긴 이상 난 너와 저 녀석 둘을 짝 지워주고 싶어. 물론 그것은 네가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지." 사리나는 전신의 털이 급격히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녀는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저, 절 저 흉측한 듀, 듀라한에게 시, 시집보내겠다는……" 데이몬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이야. 내가 보기에는 더 없이 어울리는 한 쌍인 것 같군. 아! 밤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도록……. 만들면서 녀석의 남성이 더할 나위 없이 우람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확인했으니 말이야." 이 상황에서 사리나가 기절하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사력을 다해 정신을 추스른 사리나는 말없이 식탁으로 다가갔다. "머, 먹을게요. 먹으면 되잖아요. 차라리 먹지요. 먹고말고요." 사리나는 눈을 꼭 감은 채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음식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듀라한의 아내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먹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되었지만 상황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선택은 오로지 이것뿐이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흐느끼며 음식을 집어삼키는 사리나. 그릇을 가득 채운 음식들은 사리나의 눈물, 콧물과 범벅이 되어 식도를 타고 위장 속으로 들어갔다. "맛이 어때?" 그 모습을 데이몬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건방진 계집애를 골탕먹이는 일은 언제 보아도 신나는 일이었다. 사실 엘케인이 먹어치우고 사리나가 한창 먹고 있는 것들의 정체는 데이몬이 정성 들여 만든 요리였다. 다시 말해 흉측한 외형은 데이몬이 마법을 사용해서 연출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음식의 정체는 어향육사. 쇄향육. 청증반채 등등 중원 고유의 요리들이었고 겉으로 보기에만 끔찍해 보일 뿐이었다. 데이몬은 고도의 현혹마법과 사술을 적용해 그들의 눈을 속인 것이었다. 그래도 엘케인은 맛이나마 볼 수 있었지만 사리나에겐 도저히 그럴 여유가 없었다. 울며 먹고 토하기를 거듭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쩝쩝. 왜애액. 흑흑흑." 오로지 듀라한의 아내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었다. 토사물로 식탁이 엉망진창이 되고 있었지만 그릇은 마침내 조금씩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굴 밖으로 쫓겨난 엘케인과 그 부하들은 동굴 부근을 계속해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눈이 빠지게 동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록 사리나가 살아나올지 아니면 시체로 나올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녀를 수습해야만 했던 그들이었다. 데스 나이트들은 자신들을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하여 동굴 밖으로 몰아낸 상태였다. 힘이 없는 탓에 그들로썬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몸뚱이가 얼마나 단단한지 시험해보고 싶은 자들은 언제든지 들어와도 좋아." 험악하게 으름장을 놓은 뒤 데스 나이트들은 동굴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그들에겐 목숨을 건졌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겨를도 없었다. 임무 실패가 주는 중압감은 그 정도로 컸다. 하지만 엘케인에게는 임무실패로 수도로 돌아가서 받을 처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사리나의 생환이었다. "제발 그녀가 무사히 돌아와야 할텐데……." 걱정스레 내뱉은 엘케인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부상이 심한 탓에 수습기사들은 대부분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있었다. 당장은 생명에 지장이 없어 보였지만 마을에 가서 상처를 치료하지 않는다면 평생 흉터를 안고 살아가야 할 터였다. 이리저리 널브러져 끙끙 앓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 그것은 전투에서 패한 패잔병의 몰골과 전혀 다름없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뼈저린 패배. 평소 엄한 군기를 강조해온 엘케인이었지만 그는 기사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르카디아에 이렇게 강한 네크로멘서가 있을 줄은 몰랐어. 제국의 앞날이 정말 걱정스럽군." 한숨을 내쉬던 엘케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동굴 안쪽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감지한 것이다. "온다." 엘케인의 말에 수련기사들의 고개가 일제히 동굴 쪽으로 돌아갔다. 저벅거리는 걸음소리와 함께 마침내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먼저 나온 녀석은 일단 그들에겐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네크로멘서였다. 얄미운 미소를 띠며 나온 네크로멘서는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엘케인이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사리나는 어떻게 되었소." 데이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손가락을 들어 뒤쪽을 가리켰다. 그를 따라 동굴에서 나온 것은 듀라한이었다. 사리나를 어깨에 둘러맨 윈슬럿. "사리나……." 그 모습을 보자 엘케인의 눈매가 미미하게 떨렸다. 자기 발로 걸어나오지 않고 듀라한이 메고 나왔다면……. 엘케인은 앞뒤 가릴 것 없이 듀라한에게로 후다닥 달려갔다. 데이몬을 향해 잔뜩 격양된 노성이 토해졌다. "결국 그녀를 죽인 것이오?" 그러나 듀라한이 내려놓은 사리나를 본 뒤 엘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눈을 까뒤집은 채 게거품을 물고 있으니 결코 죽었을 리는 없었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54회. 꼴이 좀 좋지 않기는 했지만 일단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윌터가 다가와 사리나를 받아드는 것을 확인하자 엘케인은 곧 데이몬에게 감사를 표했다. "일단은 그녀를 살려준 데 대해 감사드리오. ." "뭐 고마울 것은 없어. 조건을 실행했으니 약속대로 살려준 것 뿐이야." 엘케인의 눈가에 기이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혹시 사리나가 음식을 먹었소?" 데이몬은 옅은 미소를 띤 채 어깨를 으쓱했다. "게운 게 더 많기는 했지만 일단 그릇은 비웠어. 원칙대로 따지자면 토했으니 규칙 위반이라 해야 했지만 이번 한 번만 봐 주기로 했지." 그 말에 엘케인을 비롯한 수련기사들이 입을 딱 벌렸다. 엄청난 말괄량이기는 했지만 사리나는 엄연히 여자였다. 그런데 푹 삶긴 벌레나 독사로 만든 음식을 먹어치우다니……. 그러나 살아 나온 이상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들을 보며 데이몬은 눈을 빛냈다. "그럼 약속은 지켜야겠지?" 동굴 쪽으로 손짓을 하자 헬버트론이 누군가를 데리고 나왔다. 바로 윈터데일이었다. 멍청한 빛이 가득한 얼굴은 여전히 흉터투성이였지만 진물이 흐르던 피부는 많이 나아 있었다. 헤실헤실 웃고만 있는 것이 한 눈에 보아도 정상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데이몬은 그를 끌어다 엘케인에게 넘겨주었다. "약속했으니 이 녀석도 넘겨주겠다. 데리고 가라." 잠자코 윈터데일의 몸을 받은 엘케인의 얼굴에는 뭔가 복합적인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일단 이리로 왔던 목적은 이뤘다고 봐야 했다.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던 사악한 네크로멘서 윈터데일을 잡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엄연히 따지자면 그들은 결코 목적을 달성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윈터데일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력한 악(惡)을 목격했으니 말이다. 엘케인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가겠소. 하지만 머지 않아 다시 돌아올 것이오. 강력한 크로센 기사단과 함께……." 데이몬은 느긋하게 엘케인의 시선을 맞받았다. "얼마든지……. 손꼽아 기다리지." "아마 우리를 놓아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오." "아니 후회 따윈 안 해. 그럼 나중에 보자고……." 멍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한 번 쳐다본 엘케인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가자. 철수한다." 여기 저기서 몸을 일으킨 기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데이몬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몸을 돌렸다. 거기에는 사리나의 초점 잃은 눈빛이 섞여 있었다. 동굴 속으로 들어온 데이몬에게 데스 나이트들이 꼬치꼬치 따지고 들었다. 그들로썬 데이몬의 처사가 정말 어이없었던 모양이었다. "도대체 왜 놈들을 놓아준 거지? 내 상식으론 이해가 가지 않아." "원칙적으론 놈들을 죽였어야 했어. 그래야만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잖아? 왜 자청해서 화를 불러들이려고 하지?" 데스 나이트들의 불만은 일견 일리가 있어 보였다. 그들 넷 중 소드 마스터에 대적해 싸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헬버트론 뿐이었다. 오로지 그만이 마력을 추가로 주입 받았으므로 가장 강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라고 해도 지금 상태에선 엘케인 정도의 소드 마스터 셋을 겨우 상대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나머지 데스 나이트들은 아직까지 소드 마스터 한 명을 상대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충분한 어둠의 마력이 주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데이몬이 만든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 정도로는 생전 능력의 10분지 1도 발휘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데이몬이 일부러 그들을 인크레시아에서 끌어내어 가며 허풍을 떨었으니……. 더욱 더 충격적인 것은 크로센 기사단의 저력이 생각 밖으로 막강하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완성된 오러 블레이드(검강)을 전개하는 자들만 100명이라니……." 이제 데스 나이트들 역시 팔라딘과 소드 마스터의 차이를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르카디아에서는 오로지 검강(劍剛)을 시전할 수 있는 자만이 소드 마스터라 불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면 크로센 기사단의 전력은 과거 노스우드에 투입되었던 용사단을 능가하는 전력이라 봐야 했다. 400명의 용사단 중 검강을 구사할 수 있는 자들은 고작 4,50명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데스 나이트들이 데이몬에게 볼멘소리를 할 만도 했다. "만약 놈들 중에서 삼분지 1만 몰려온다고 해도 우리에겐 전혀 승산이 없어." "아직 드래곤을 상대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아. 그런 상태에서 왜 만용을 부렸지?" 거듭되는 데스 나이트들의 질책에 데이몬은 짜증이 났다. 저들은 자신이 사람을 죽일 수 없는 금제가 걸려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 유쾌한 사항이 아니라서 데이몬은 그들에게 칠종단금술에 대한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으로썬 데스 나이트들의 불만을 고스란히 덮어써야만 하는 것이다. 듣다못해 데이몬은 인상을 구기며 고함을 질렀다. "시끄러워. 모든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들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이것은 굳이 네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냐. 우리의 복수도 함께 걸려있는 문제라고……." "드래곤에 복수하기 전까지 우린 결코 당할 수 없어. 우리가 왜 데스 나이트가 되었는데?" 결국 데이몬은 고개를 내저으며 상황을 설명해 줄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놈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지성을 억제해 놓는 건데, 할 수 없지. 잘 들어. 비록 저놈들을 놓아주긴 했지만 크로센 기사단은 어떠한 경우에도 이곳으로 오지 않는다." "어째서 그렇지?" 데이몬은 이유를 꼬치꼬치 캐어묻는 데스 나이트들을 노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크로센 제국은 지금 기사들의 권력다툼 때문에 엉망이 되어 있는 상태야. 페르슈타인인가 뭔가 하는 놈이 황제자리를 꿰차고 앉기 위해 갖은 수작을 부리고 있고 늙은 황제는 기식이 엄엄한 나머지 국정에 일절 관여할 수 없어. 따라서 기사단의 주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황궁을 벗어날 수 없지. 만에 하나 궁정을 비운다면 귀족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주니까 말이야. 따라서 놈들이 새로운 토벌대를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을 거야. 기껏해야 열에서 스물 안팎? 그 정도는 우리 전력으로 능히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데스 나이트들은 여전히 못미덥다는 반응을 보였다. "확실한 정보겠지?" "물론이지. 믿을만한 정보니까 믿어도 좋아." 데이몬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듀라한을 대대적으로 만들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뒤흔들었다. 당장은 골치가 아프긴 하지만 드래곤을 상대하는데 데스 나이트 이상 적합한 존재는 없었다. 게다가 이 정도 상황판단을 할 수 있는 녀석들이라면 충분히 제몫을 하고도 남을 것이다. 사실 그는 젠가르트로부터 정보를 얻고 있었다. 로메인 남작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젠가르트와는 계속해서 연락을 하고 있었고 크로센 제국의 사정도 그에게서 넘겨받은 것이었다. 진짜 로메인 남작은 벌써 오래 전에 남색의 대상으로 팔려가 버렸지만 젠가르트는 충분히 그의 몫을 해내고 있었다. 게다가 젠가르트의 탁월한 관리능력과 경영방침으로 인해 로메인 상회는 시간이 거듭될수록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보석을 거래한다는 특성 때문에 로메인 상회는 각 왕국의 고위급 귀족들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런 만큼 젠가르트의 귀엔 반드시 고급정보가 들어오기 마련이다. 때문에 데이몬은 이따금 로르베인으로 공간이동을 해서 정보를 얻어오곤 했다. 따라서 그는 크로센 제국뿐만 아니라 여러 왕국의 사정에에도 통달해 있는 상태였다. 데이몬은 늘어선 데스 나이트들을 보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너희들도 이만 들어가. 조만간 모아놓은 마나를 주입해 줄 테니……." "가급적 작업을 서둘러 주기 바란다. 드래곤들이 깨어날 때가 멀지 않았어." "알았어. 알았다고……." 헬버트론을 제외한 나머지 데스나이트들을 떠밀 듯이 인크레시아에 밀어 넣은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별일 없을 테니 오늘은 로르베인에 한 번 다녀와야겠군. 울적한 기분도 풀 겸 말이야." 인크레시아에 대한 정리는 어느 정도 끝난 상태였다. 데스 나이트들이 잠을 잘 리가 없었으므로 그들은 말 그대로 불철주야 작업을 해서 인크레시아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의 위치를 대부분 파악해 놓고 있었다. 드러난 결과는 엄청났다. 과거 트루베니아가 보유했던 부의 10% 가까이가 인크레시아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가히 엄청난 재화의 산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어차피 데이몬에겐 관심 밖의 것들이었으니……. "특별하지 않은 보물을 몇 가지만 젠가르트에게 가져다줘야겠군. 정보를 얻는다고 돈깨나 썼을 테니……." 데이몬은 묵묵히 마법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없는 동안 거처를 빈틈없이 지키란 명령을 받은 윈슬럿이 입구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데이몬의 예상대로 크로센 제국에서는 더 이상 토벌대를 파견하지 않았다. 어수선한 국내 정세로 말미암아 신경을 쏟을 여력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수도로 귀환한 엘케인은 세바인 영지의 별종 네크로멘서와 그가 보유한 전력에 대해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물론 끔찍한 음식을 먹어치웠다는 사실은 영원한 비밀로 묻혀졌지만 말이다. "세, 세상에……." 막강한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를 넷이나 보유하고 있다는 말에 크로센 기사단장은 입을 딱 벌렸다. 9서클의 마스터도 부족해서 강력한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를 넷이나 보유하고 있다면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네크로멘서를 처치해야 했다. 그것이 아르카디아의 종주국인 크로센 제국으로써의 사명이었다. 하지만 기사단장인 윌리엄스 후작은 그 일을 그냥 덮어두기로 작정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수도를 비울 수 없다는 사정 때문에 도저히 손을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몰랐기 때문에 그를 비롯한 기사단의 주력은 결코 황궁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윌리엄스가 이렇게 결정을 내린 데에는 네크로멘서가 토벌대 기사들을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도 가장 큰 몫을 했다. "상황을 보아 그리 악한 놈 같지는 않으니 일단 두고보자. 놈에 대한 토벌은 제국이 안정되고 나서야 생각해 볼 문제 같다." 이렇게 해서 데이몬에게 가해질 가장 큰 위협은 마침내 침묵을 지키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세바인 영지에 강력한 네크로멘서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암암리에 널리 퍼져버린 것이다. 물론 그것은 엘케인이 데리고 왔던 수련기사들의 입에서 퍼져나간 소문이었다. 그 바람에 데이몬이 무척 귀찮은 상황에 놓여버렸으니……. 명성을 떨치려는 용병들과 자신의 실력을 검증 받으려는 수련기사들이 대거 세바인 영지로 향하게 되었으며 그 탓에 데이몬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우아악." 다리뼈가 생으로 꺾이는 통증에 란바인은 입을 딱 벌리고 몸을 푸들푸들 떨었다. 이미 투지는 물에 씻은 듯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기필코 네크로멘서를 잡아가리란 각오 역시 말이다. "으으으으." 그는 극도로 겁에 질린 눈빛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거무튀튀한 실루엣을 응시했다. 목이 없는 기사의 형상을 한 언데드 몬스터. 자신을 이 지경으로, 아니 동료들 모두를 혼자서 때려눕힌 끔찍한 존재는 바로 듀라한이었다. 란바인은 북부의 부유한 왕국인 펜슬럿의 수련기사였다. 부유한 아버지를 둔 턱에 어릴 때부터 명사들에게 검술을 사사받은 그는 나이에 비해 범상치 않은 검술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타고난 자질도 그리 나쁘지 않아 서른도 되기 전에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그는 자신의 실력을 검증받기 위해 기세 당당하게 크로센 제국으로 향했다. 자신의 실력이라면 크로센 제국에서도 팔라딘 자격을 충분히 취득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물론 펜슬럿에도 팔라딘 자격 심사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펜슬럿과 크로센과는 차원이 틀렸다. 크로센에서 팔라딘으로 인정받는다면 타국에서 소드 마스터의 자격을 얻는 것보다 더욱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각지의 기사들이 크로센 제국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고 란바인도 그런 이유 때문에 크로센 제국으로 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란바인의 오산이었다. 크로센 제국에 위치한 팔라딘 자격심사장에는 란바인에 비해 추호도 뒤떨어지지 않는, 아니 한 수위라고도 볼 수 있는 기사들이 그야말로 우글거리고 있었다. 면면을 따져보아 란바인보다 하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니 란바인이 팔라딘 자격을 취득하는 것은 거의 가망이 없는 일이라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뜻을 접을 란바인이 아니었다. "방법이 없다면 찾으면 된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크로센 제국으로부터 팔라딘 자격을 부여받고야 말 테다……." 그는 트루베니아 대륙에 건너가서 몬스터 사냥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강력한 몬스터를 사냥해오는 길만이 팔라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55회. 트루베니아 행 배편을 찾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그의 귀에 우연히 세바인에 살고 있다는 강력한 네크로멘서에 대한 얘기가 흘러 들어왔다. 물론 그에게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자고로 소문이란 엄청나게 과장되어 전달되기 마련이다. 마법사가 기사에게 약하다는 것은 고금을 통틀어 변할 수 없는 진리. 그렇다면 놈을 잡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란바인의 자신감은 바로 비싼 돈을 주고 산 대마법 갑옷에 기인했다. 마나를 다룰 수 있으므로 어느 정도의 마법 저항력이 있었고 상대가 마법사란 제반 여건을 감안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였다. 만에 하나 네크로멘서를 잡는다면 팔라딘 자격을 부여받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므로 그는 곧 행동에 돌입했다. 거기에는 같은 처지의 수련 기사들이 대거 동참했다. "나도 참가하지." "나도……." 단 하루 사이에 무려 60여 명에 달하는 수련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중 반수 이상이 대마법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으며 하나같이 네크로멘서를 잡겠다는 열망에 불타고 있었다. 충분한 인원이 모이자 그들은 지체 없이 세바인 영지로 향했다. 이 정도 인원이면 네크로멘서를 잡고도 남는다는 생각이 그들 사이에 팽배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이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는 사실은 오래지 않아 밝혀졌다. 그들은 오랜 여정 끝에 드디어 네크로멘서의 소굴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동굴 속에 들어간 그들에게 대면 인사로 퍼부어진 것은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매직 미사일 세례였으니……. 파파파팍. 단 한 번의 공격에 파티의 3분지 2가 거덜나버렸다. 마나를 운용할 수 없는 자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고, 심지어 대마법 갑옷을 착용한 기사도 만신창이가 되어 널브러지는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서클이 높을수록 전개하는 마법의 위력도 늘어난다. 고작 1서클에 지나지 않는 매직 미사일이었지만 무려 아홉 번의 재배열을 마친 탓에 데이몬의 매직 미사일의 위력은 5서클의 공격 마법을 상회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미 끝난 승부였다. 소드 마스터나 팔라딘만이 6서클 이상의 공격 마법을 막아낼 수 있었다. 동일한 갑옷을 걸쳤더라도 수련 기사들이 끌어올릴 수 있는 마나에는 한계가 있었고 5서클 이상의 공격 마법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 중에서 엄청난 위력을 가진 데이몬의 매직 미사일을 막아낼 수 있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명성을 노리던 애송이들은 불과 10여명만을 남긴 채 괴멸해 버렸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크아아아." 요행으로, 또는 약간의 실력차로 매직 미사일 공세를 막아낸 자들 앞에는 거무튀튀한 갑주를 걸친 듀라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데이몬은 문지기인 윈슬럿을 시켜 그들을 정리하게 했던 것이다. 듀라한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공격해 왔고 남은 기사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궤멸해 버렸다. 매직 미사일 공세를 막아내느라 지칠 대로 지쳤고 체내의 마나도 거의 고갈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윈슬럿은 평범한 듀라한이 아니었다. 거의 데스 나이트와 맞먹는 전투력을 가진 괴물이었다. 그 탓에 저항하던 기사들은 하나 둘씩 쓰러져갔고 마지막 남은 란바인마저 한 쪽 다리가 부러져 전투불능상태에 빠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듀라한은 추호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퍽. 둔중한 타격음과 함께 란바인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투구가 형편없이 찌그러진 처참한 모습으로 말이다. 기필코 팔라딘이 되겠다는 란바인의 뜻은 여기서 꺾이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 수십 명의 수련기사들이 만신창이가 되어 널브러진 곳에서 데이몬은 인상을 구긴 채 서 있었다. 크로센 기사단이 오지 않은 것은 분명 반가운 소식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런 어중이떠중이까지 몰려드는 것이 데이몬에게 그리 달가울 리가 없었다. "이 달 들어서 벌써 세 번째야. 귀찮아서 환장하겠군" 물론 명성을 노리는 날파리들 따위야 윈슬럿 선에서 대부분 해결되었다. 봉인구를 지키고 있는 헬버트론까지 부를 필요도 없었다. 그저 매직 미사일을 한 차례 날리고 난 뒤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뒷일은 윈슬럿이 모조리 수습하는 것이다. 문제는 쓰러진 놈들을 확실하게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냥 놓아보내면 또다시 몰려들 것이 분명했으므로 다시 오지 못하도록 혼찌검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모조리 죽여버렸으면 좋겠지만……으음." 살심을 떠올린 때문에 통증이 밀려들었는지 데이몬은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죽여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것은 애초에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거머리같은 금제를 나에게 씌워 놓다니. 성승. 정말 대단하시오." 이미 세상에 없는 소림성승을 향해 잠시 툴툴거리던 데이몬은 윈슬럿에게 지시를 내렸다. "일단 놈들을 지하에다 가둬두도록……. 혼내는 것은 로르베인에 다녀와서 생각해 보겠다." "크아아아." 알았다는 듯 기성을 내지른 윈슬럿은 양손에 늘어진 기사 하나씩을 집어들고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은 기사들 중 상세가 중한 자들만 골라 힐링을 걸었다. 계속해서 투덜거리며 말이다. "귀찮군. 이런 놈들에게까지 마나를 낭비해야 하다니……." 하지만 이들 중 사망자가 나올 경우 자신에게 어떤 여파가 미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데이몬이 반드시 신경 써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오셨습니까?" 빛이 번쩍하며 데이몬이 마법진 위에 모습을 드러내자 젠가르트가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 물론 그의 겉모습은 한 치의 틀림도 없는 로메인 남작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원래의 로메인은 벌써 오래 전에 팔려간 상태였다. 북쪽의 부유한 국가인 펜슬럿의 고위급 귀족 중 하나가 남색을, 그것도 아주 가학적인 남색을 즐긴다는 소문을 들은 젠가르트는 암암리에 그 귀족과 접촉을 시도했고 마침내 거래가 성사되었다. 로메인 남작은 결국 자신이 수없이 행해왔던 남색의 대상으로 팔려 가는 불운을 겪게 되었으니……. 벙어리가 되어버렸으니 비밀이 탄로날 리가 없었다. 만에 하나 글로써 사실을 밝힌다고 해도 남색 대상으로 팔려온 노예의 말을 믿을 자는 아무도 없을 터. 로메인 남작의 말로는 정말 기구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빈자리는 젠가르트가 완벽하게 꿰어차 버렸다. 게다가 그가 관리를 시작한 이후로 로메인 상회는 더더욱 번창하고 있었다. 데이몬이 잔뜩 골이 난 듯한 기색을 보이자 젠가르트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뭐 기분 나쁘신 일이 있습니다." "말 마. 천둥 벌거숭이 같은 놈들이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몰려드는데 아주 미칠 지경이야. 눈 딱 감고 죽여버려야 정상이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으니 원." 끝없이 흘러나오는 데이몬의 푸념에 젠가르트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충분한 능력이 있으면서도 처소에 침입한 자들을 살리시려 하다니요. 원래 가진 힘이 있다면 아무 거리낌없이 쓰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거늘……." 젠가르트의 찬사에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원래 자비심과 인내력이 좀 있는 편이지. 그건 그렇고 크로센 제국은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혹시 토벌대가 준비된다는 첩보는 없던가?" 사실 데이몬이 자신의 처소에 콕 쳐박혀 있으면서도 대륙의 정세에 훤할 수 있었던 것은 젠가르트의 조력이 절대적이었다. 주된 업종이 보석상이었으니 각국의 고위급 귀족들과의 거래가 적지 않았고 조금만 힘을 쓰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물론 귀족들의 부관이나 보좌관의 목구멍에 기름칠을 좀 해야했지만 말이다. 젠가르트는 그렇게 해서 알아낸 정보를 모조리 데이몬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만이 자신이 데이몬에게 유일하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토벌대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 합니다. 현재 펠젠틴에서는 황제 편 과 페르슈타인 공작간의 힘 싸움이 극에 달해 있으니까요." "그래?" "발렌시우스 황제가 식물인간 상태로 드러누운지도 어언 10년이 되어갑니다. 따라서 관심은 유일한 황위 계승자인 드비어스 황태자에게로 쏠려 있지요." "그거 재미있군. 귀족 따위가 황제의 자리를 넘보다니 말이야." 데이몬은 눈을 빛내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보유한 몸의 정체가 드비어스 황태자의 친형이라는 것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마주 앉아있는 젠가르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보석거래를 하며 알아낸 중요한 정보들을 남김없이 데이몬에게 털어놓았다. "일단 황제파의 주축은 집정관인 테오도르와 기사단의 단장 윌리엄스 후작이 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힘과 규모로 따지자면 주요 귀족들을 모조리 포섭한 페르슈타인 공작의 세력이 훨씬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크로센 제국이 보유한 대부분의 병권이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넘어간 상태입니다. 오로지 크로센 기사단만 제외하면 말입니다." "크로센 기사단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이지. 소드 마스터가 100명이나 되니 말이야." 젠가르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명실상부한 아르카디아 최강의 기사단이지요." "그건 그렇고 페르슈타인이란 작자 상당히 실력이 뛰어난 녀석인걸? 한 나라를 그 정도로 장악할 수 있다니 말이야." 젠가르트는 데이몬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미 페르슈타인 공작의 수완은 전 대륙에 정평이 나 있는 상태입니다. 또 한가지 무시할 수 없는 점은 그가 뛰어난 전술가인 동시에 지휘관이란 것입니다. 그의 지휘통제능력은 이미 두 번의 전투를 통해 확실하게 검증되었지요." 젠가르트의 설명을 들은 데이몬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에는 제법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가 들려있었다. "그건 그렇고 보석을 조금 더 가지고 왔네. 이것도 마저 처분해 주도록 하겠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젠가르트는 두말도 하지 않고 데이몬이 내민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그 주머니 속에는 데이몬이 인크레시아 속에서 추리고 추린 보석들이 들어있었다. 별로 값어치가 나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만 골랐지만 그 가치는 방대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데이몬은 젠가르트에게 제법 많은 보석을 건넸고 그것은 고스란히 골드 금화로 바뀌어 젠가르트의 지하창고(예전에는 감옥이었던)에 보관되어 있었다. 주머니를 받아든 젠가르트는 빙긋 웃었다. "보석들이 최상품이라서 가격을 제법 잘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이런 보석들을……." "알려고 하지 말게." 짧게 내뱉은 데이몬은 몸을 빙글 돌렸다. 이젠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 포로들을 족칠 차례였다. 마법진 위에 올라서는 데이몬의 모습을 젠가르트는 미소 띤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으아아아." 란바인은 지금 정신 없이 달리고 있었다. 뒤쪽에서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구울과 와이트들이 뒤를 추격하고 있는데 혼비백산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대관절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도 없었다. 눈을 떠보니 사방이 온통 언데드 천지였던 것이다. 물론 그도 처음에는 용감하게 맞서 싸웠다. 한 두 마리의 언데드 몬스터가 그의 주먹에 맞아 쓰러졌다. 하지만 온 천지가 언데드로 덮여 있었고 맞서 싸우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주먹이 피투성이가 된 끝에 란바인은 도망치는 길을 택한 것이다. "키에에엑." 바로 옆에서 스펙터 하나가 불쑥 손을 내밀자 란바인은 기겁을 하며 몸을 틀었다. 어떻게 된 게 가는 곳마다 언데드 천지였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지만 란바인으로썬 상황판단을 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무기라도 있으면 다시금 맞서 보겠건만 그의 수중엔 단검 한 자루도 쥐여있지 않았다. 게다가 평소에 충만했던 용기가 마치 씻은 듯 사라져버렸다. 그러니 정신 없이 도망에만 열중할 수밖에……. "헉, 헉." 숨이 턱 밑에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바로 등뒤에서 언데드 몬스터의 기성이 들려오자 그는 사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그의 눈망울에는 오로지 공포감만이 가득 차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동료들은 보이지 않았다. 도망치는데 열중하던 그의 옆에 난데없이 시커먼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날름거리는 혀, 시뻘겋게 핏발 선 눈알을 번뜩이는 구울이었다. 도저히 피할 여유가 없었다. "케케케케." "에잇." 란바인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구울은 란바인보다 전투력이 뛰어났다. 날렵하게 몸을 피한 구울은 가차없이 란바인의 턱을 강타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강력한 일격을 맞은 란바인은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잘한다. 잘해. 꿀꺽꿀꺽." "그렇게 패면 쓰나? 쯔쯔. 힘이 빠졌나보군." 데이몬은 한가롭게 술잔을 기울여가며 싸움구경에 열중하고 있었다. 지하에 넓게 펼쳐진 광장. 과거 윈터데일이 몸을 숨기는 용도로 썼던 지하 공터는 지금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이곳에 침입했던 60여 명의 애송이들이 서로 난타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퍽. 퍽. 여기저기서 주먹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무했다. 거친 숨소리와 호통 소리로 인해 지하 공터에는 차마 눈뜨고는 못 볼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싸우는 상대를 전혀 동료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맹목적으로 맞서 싸우거나 도망칠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는 상대가 확연한 언데드 몬스터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56회. 데이몬은 지금 애송이들의 혼을 빼놓아 다시는 이곳에 발을 못들이도록 하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거기에는 노스우드에서의 경험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그 방법이 좋겠군. 한 번 겪고 나면 놈들이 혼이 나서 다시는 이곳을 떠올리지 않으렸다?" 완벽한 연출을 위해 데이몬은 이곳에 환상미리진(幻想彌璃陳)을 펼쳐놓았다. 동료와 적을 분간하지 못하게 하는 중원 고유의 절진(絶陳)인 환상미리진에는 충분한 마법적 효과가 가미되어 위력이 훨씬 증가된 상태였다. 거기에다 데이몬은 환상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의식을 혼미하게 하는 몽혼약까지 조제해서 애송이들에게 복용시켰다. 삼위일체(三位一體). 세 가지 안배가 완벽하게 조합되어 데이몬의 지하광장은 완벽하게 노스우드의 환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저, 저런."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던 데이몬이 별안간 일어서더니 지체 없이 매직 미사일을 날렸다. 한 녀석이 다른 녀석을 쓰러뜨린 뒤 깔고 앉아 목을 조르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물론 놈은 상대를 언데드로 간주하고 하는 행동이겠지만 그렇게 되면 데이몬이 곤란해진다. 한 명이라도 죽어 나간다면 데이몬에게 어떤 파장이 미칠 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저들의 행동은 자신이 조종하는 것이었으므로 매사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퍽. 목을 조르던 녀석은 그 상태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물론 쓰러진 녀석도 일어날 기력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꼬박 하루동안 벌어진 혈투에 기력을 모조리 소진해버린 것이다. 지하광장에서의 일장박투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조금이나마 실력이 나아 동료들을 마구 때려눕히던 놈들조차 기진맥진해서 픽픽 쓰러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마지막 녀석이 널브러진 뒤 지하 광장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그 모습을 본 뒤에야 데이몬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슬슬 뒤처리를 좀 해 볼까? 이 상태로 일주일만 고생시킨 뒤 풀어준다면 두 번 다시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지?" 지하 광장으로 내려간 데이몬은 만신창이가 된 기사들 틈새를 돌아다니며 치료를 시작했다. 그의 손길이 스침에 따라 피가 멎으며 부러진 뼈가 제자리에 가서 다시 붙었다. 워낙 고위급 힐링 마법이라 효과는 확실했다. 치료를 마치고 엉망이 된 광장을 마치 감상하듯 훑어본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이건 베르키스 놈이 나에게 했던 짓이잖아? 망가뜨린 뒤 치료하기를 반복하는 것 말이야."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은 데이몬은 몸을 솟구쳤다. 위에는 윈슬럿이 커다란 자루를 등에 맨 채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이제는 마을로 나가 장을 봐올 차례였다. 녀석들을 일주일동안 고생시키려면 일단은 먹여야 할 터. 엄청난 식량이 필요할 터였다. "서둘러야겠군. 그나저나 60명분의 음식을 어떻게 만든다?"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던 데이몬은 별 수 없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난타전을 구경할 때는 좋았지만 놈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려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왔다. "할 수 없지." 데이몬과 윈슬럿의 모습은 곧 그곳에서 사라져버렸다. 데이몬은 꼬박 일주일 동안 정말 바쁘게 움직였다. 거처에 난입한 애송이들을 혼내주랴, 그들이 먹을 음식을 장만하랴 정신 없었다. 무려 60명이 먹을 음식이라 데이몬은 눈 코 뜰 새가 없이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일주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작업이 끝나자 데이몬은 윈슬럿을 시켜 놈들을 남김없이 거처 밖으로 내몰았다. "가, 감사합니다." 혼쭐이 난 녀석들은 목숨을 건졌다는 희열에 정신 없이 달려나갔다. 그것을 보니 살아 돌아갈 것이란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은 듯 싶었다. 완전 패잔병의 몰골을 한 채 세바인 마을로 돌아가는 녀석들. 그들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유쾌하다는 듯 껄껄 웃었다. "놈들. 이제 두 번 다시 내 거처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지?" 한숨 돌린 데이몬은 지체 없이 봉인구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헬버트론이 무표정한 얼굴로 맞아주었다. "애송이들을 혼내주는 작업은 이제 끝났는가?" "물론. 놈들은 이제 세바인의 세자만 들어도 치가 떨릴 것이야." "이해할 수가 없군. 그냥 죽여버리면 간단히 끝나는 일을 왜 힘들게 처리하는 거지?" 헬버트론의 반문에 데이몬은 인상을 구겼다. 물론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순 없었던 데이몬이었다.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 가만히 있어. 그건 그렇고 마나가 얼마나 모였나?" 봉인구가 놓인 마법진을 살펴본 데이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이런. 일주일 동안 모았는데 이것밖에 안되나? 큰일이군." 마법진을 이용해서 마력을 빨아들이는데는 엄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마력을 강제로 빨아들이는 방법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섣불리 시행할 순 없었다. 만에 하나 나이델하르크가 깨어난다면 더욱 큰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급적 걸려있는 마법의 균형을 깨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어둠의 마력을 끌어 모아야 했다. 지금 상태로써는 자연적으로 흘러나오는 마력만 긁어모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데이몬이 아니었다. "이러다간 드래곤들이 깨어나기 전에 작업을 끝내는 것이 요원하겠어. 어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얼굴을 찌푸린 데이몬은 골똘히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어떻게 해서든 데스 나이트들을 강화시켜놓아야만 드래곤들과 일전을 벌일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을 거듭하던 데이몬의 뇌리에 뭔가 한 가지 방도가 떠올랐다. "혹시 그렇게 한다면……." 자신이 떠올린 생각이었지만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데이몬은 실소를 지었다. 그는 정말 엉뚱한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리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아니야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어. 그렇게 한다면 마법의 균형을 깨지 않는 상태로, 마력을 빨아들이는 효율을 현저히 높일 수 있어" 데이몬은 지금 봉인구의 마나를 운공을 통해 흡수한다는 지극히 엉뚱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원래 그는 고도의 내가기공을 능숙하게 사용했던 고수였고 혈도를 따라 내공을 돌리는 기술을 완벽하게 숙달해 놓은 상태였다. 비록 애초에 가지고 있던 몸이 아니었지만 내공이 통하는 경로는 빠짐없이 데이몬의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었다. 차라리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성이 더욱 높을 수도 있었다. 내공 대신 어둠의 마력을 이용하는 것 말이다. "봉인구의 마력을 이용해서 주요 경혈을 타동시키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그것이 가장 관건이겠군." 내가 고수의 내력통제 기술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한 작업에 속한다. 운기는 반드시 신체의 균형을 깨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 균형이 깨어지는 것이 바로 주화입마에 드는 첩경이었으므로 내공을 익힌 고수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신체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주력했고 데이몬 역시 그 방법을 뇌리 깊숙이 익혀놓은 상태였다. 그런 만큼 이 방법이 성공한다면 봉인구에 작용하는 마법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훨씬 더 많은 마력을 뽑아낼 수 있을 듯 했다. 데이몬은 묵묵히 눈을 빛냈다. "그렇게 되면 굳이 이 동굴에 박혀 마력을 끌어 모을 필요가 없지. 한 자리에 오랫동안 머문다면 드래곤 놈들의 추적을 받을 우려가 있으니까……." 생각을 정리한 데이몬은 지체 없이 작업에 착수했다. 내공을 사지백해로 일주천시켰다가 단전에 채워 넣는 데에는 이력이 나 있던 데이몬이었고 그에 합당한 내공심법 또한 보유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공 대신에 봉인구의 마력을 이용하여 운공을 할 차례였다. "내 짐작이 맞아떨어진다면 적어도 1년 이내에 데스 나이트를 강화시키는 작업이 끝날 것 같군………." 새로운 해법을 찾은 데이몬의 눈은 모종의 기대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트루베니아 동남쪽에는 드넓게 펼쳐진 울창한 밀림이 자리하고 있었다. 과거 인간이 트루베니아를 지배하던 시절에도 손길이 전혀 닿지 못했을 정도였다. 빽빽이 자라난 원시림과 이름 모를 기화괴초들이 이곳을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뒤덮고 있었다. 가히 태고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한 지역. 그 밀림의 가장 중심부에는 거대한 늪지대가 있었다. 부글부글. 검은 색을 띠는 물이 연신 끓어올랐고 짙은 유황연기가 늪을 자욱하게 뒤덮고 있었다. 늪은 도저히 깊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또한 늪의 물과 유황연기에는 독기가 충만하게 서려 있었으므로 어지간한 짐승들조차 이곳에 올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늪의 주변에는 중독되어 죽은 듯한 짐승들의 유골이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 이름하여 죽음의 늪이라 불러야 할 만한 장소. 이 늪의 중앙에는 큼지막한 돌산이 위치해 있었다. 돌산은 마치 해자에 싸인 성과 같은 모습으로 주위 모든 것들의 접근을 봉쇄한 채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지하에 드래곤의 레어가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오로지 늪의 주인인 블랙 드래곤과 그의 가디언들 밖에는……. 콰루루루루. 불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돌산의 중앙부에 위치한 지하 공동이었다. 엄청난 크기의 지하 공동은 통풍도 원활하게 될 뿐더러 습기가 적당해 무척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방 약 1백 평방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무척 거대한 공동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거대한 검은 색 실루엣 하나가 잠들어 있었다. 전신이 칠흑같이 검은 빛 비늘로 덮여 있었으며 금속질의 거대한 꼬리로 몸을 친친 감은 채 잠들어있는 실루엣의 정체는 바로 블랙 드래곤이었다. 어둠에 묻혀 유난히 눈에 띄지 않는 검은 빛 비늘. 숨소리가 고르지 않는 데다 미미하게 몸을 떠는 것을 보니 블랙 드래곤은 아마도 깨어날 때가 임박한 듯 싶었다. 급격히 거칠어지는 웨이크닝 사운드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콰우우." 계속해서 거친 숨을 몰아쉬던 블랙 드래곤은 어느 순간 한 마디 기성을 내뱉고서 눈을 번쩍 떴다. [다크메이지] 5장 별종 네크로멘서 157회. 오늘이 5장 별종 네크로멘서의 마지막 편입니다. 이후부터는 6장이 펼쳐질 계획입니다. 이번 장에서 데이몬은 동료들을 얻게 되지요. 그것도 아주 골치 덩어리인 동료들입니다. 데이몬이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펼쳐지는 모험을 펼쳐질 것입니다. 5장이 끝났으니 당분간 연중을 하려합니다. 약 일주일 정도 생각하고 있어요. 그 동안 아무 생각 없이 푹 쉴 생각이니 아마 연중이 끝나도 연참은 힘들 것 같다는……. 그럼 6장 골치 아픈 동료들 편을 많이 기대해 주세요.^^ ************************************************************************* 몸 색깔과 같은 칠흑 빛의 동공이 지하 공동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오로지 어둠뿐이었다. 방금 잠에서 깨어났으므로 사물이 식별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블랙 드래곤 러셀런트는 조바심 내지 않고 신체의 모든 감각이 깨어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드래곤이란 생물은 생체주기가 일반적인 생물과 무척 다르다. 무려 500년이란 세월동안 잠을 자는 만큼 인간이나 기타 생물들처럼 잠에서 깨어나 바로 활동할 수 없다. 적어도 삼 개월 동안을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준비해야 하며 또한 몸이 완전하게 정상화되기까지 꼬박 하루가 소요된다. 물론 그 동안은 외부의 위협에 대해 철저히 무방비 상태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드래곤들이 가디언들로 하여금 자신의 레어를 빈틈없이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이 잠을 자는 곳에는 가디언들도 들어오지 못했다. 침소를 말 그대로 세상과 완벽히 격리시켜놓고 난 뒤에야 마음 편하게 잠을 청할 수 있었으므로……. 몸의 감각이 돌아올 때까지 러셀런트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러셀런트는 이미 웜급을 넘어선 드래곤이었다. 500년 간의 수면을 통해 명실상부한 절정기에 접어든 성룡.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의 충실한 심복이기도 한 러셀런트는 수면기에 들어간 드래곤들 중 가장 먼저 잠에서 깨어난 상태였다. 통상적으로 드래곤들의 수면기간은 일정한 편이다. 그것은 나이 든 드래곤이든 아직 어린 드래곤이든 간에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의 드래곤들이 500년 동안 꼬박 잠을 자야 했다. 수면기간의 차이가 난다면 거기에는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다. 수면 도중 깨어난 베르키스 같은 경우에는 더 오랜 시간을 잠을 자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러셀런트는 예정보다 정확히 5년 가량 앞서 잠에서 깨어났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드래곤보다 조금 먼저 수면기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과반수 이상의 드래곤들이 참전했던 대인간전쟁(代人間戰爭). 그 전투에서 크나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러셀런트는 부득이하게 예정보다 일찍 수면기에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한 인간 소드 마스터에 의해 당한 상처 때문이었다. 뼛속 깊숙이 당한 내상이라 마법으로 치료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자연적으로 아물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호전적인 러셀런트라도 더 이상 전투에 참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데는 잠을 자는 것 이상의 치료법은 없었으므로 그는 제일 먼저 수면기에 들어갔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러셀런트가 이렇게 일찍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자 러셀런트의 커다란 눈망울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존재들에 대한 순수한 분노였다. '크으으. 가증스러운 인간들…….' 물론 상처를 입힌 소드 마스터는 자신의 손에 의해 즉시 이승을 하직했다. 지금 러셀런트가 터뜨리는 분노의 대상은 소드 마스터가 속한 인간이란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복수의 기회는 바야흐로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이제 아르카디아만 정벌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세상에서 지워진다. 5년 후 아르카디아 침공이 시작될 것이니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러셀런트는 몸이 회복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만 나가볼까?" 하루가 지난 뒤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 러셀런트는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조금 떨어진 레어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오로지 공간이동을 통해야 했다. 그가 잠을 자던 곳은 외부와 완벽히 격리된 장소였고 거기에다 외부에서 워프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각종 방해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무리 러셀런트라 할 지라도 방해마법진을 해제하지 않으면 공간이동을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때문에 러셀런트는 먼저 주위의 마나를 끌어 모아 디스펠을 전개했다. 츠츠츠. 허공에 눈부신 광구가 맺혔다. 이윽고 광구는 맹렬히 빛을 내쏘고는 소멸해 버렸고 곧이어 마법진의 발동조건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것을 감지하자 러셀런트는 곧장 텔레포트를 실현했다. 번쩍. 러셀런트의 몸 주변으로 마법진이 언뜻 생겨나는가 싶더니 자욱한 섬광을 내뿜으며 사라졌다. 물론 섬광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레어로 돌아가자 고블린과 스톤 골렘으로 이루어진 가디언들이 러셀런트를 공손히 맞았다. 레어라 해 봐야 넘어지면 코 닿을 만한 곳에 위치한 곳이었지만 말이다. 러셀런트의 레어는 단단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의 가운데 뚫린 동굴이었다. 동굴의 끝 부분을 막아 침실로 사용했기에 그리 볼품은 없었다. 금과 은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한 베르키스나 크라누스의 레어에 비하면 천향지차라 표현할 수 있을 정도. 하지만 성정이 단순한 블랙 드래곤답게 그는 레어의 치장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드래곤들도 종류에 따라 성정이나 취미의 차이가 뚜렷한 것이다. "너는……." 러셀런트의 시선이 제일 앞에 나와있는 고블린에 가서 멎었다. 1미터 남짓한 작은 키에 기다란 코와 귀를 가진 고블린은 감히 러셀런트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가장 화려한 복장을 걸친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가 우두머리로 선출된 녀석 같았다. 러셀런트는 곧 상황을 알아차렸다. "네가 가디언들을 통솔하고 있느냐?" 러셀런트의 말에 고블린은 잔뜩 주눅든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판에 박힌 듯한 말투가 고블린 특유의 끼익거리는 기성과 함께 새어나왔다. "러셀런트님을 뵙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정확히 15년 전에 제가 선대 우두머리로부터 러셀런트님의 레어를 관리하는 임무를 넘겨받았습니다. 앞으로 충심을 다해 모실 것을 맹세 드립니다." "좋다." 러셀런트는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알고 있던 가디언 우두머리는 벌써 죽어 뼈조차 남아있지 않을 터였다. 통상적으로 드래곤들은 고블린을 가디언 우두머리에 임명하는 경우가 많다. 지능이 떨어지는 중형 몬스터나 스톤 골렘 따위에게는 레어를 관리할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체력과 힘은 약한 대신 고블린은 뛰어난 지능을 보유했다. 보물의 입출고나 가디언의 통솔 따위를 무리 없이 수행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리치로 하여금 가디언 우두머리로 삼는 베르키스같은 별종 드래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드래곤들은 고블린을 가디언 우두머리로 쓰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고블린에게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워낙 힘이 약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고블린들은 항상 상위의 몬스터에게 사냥 당할 위험을 안고 살아야 한다. 체내에서 분비되는 독소말고는 그들에겐 저항할 힘이 없었다. 따라서 무수히 많은 고블린들이 오우거에게 트롤에게, 혹은 오크에게도 사냥 당할 위험을 감수하며 힘겹게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드래곤의 가디언으로 들어간다면 입장이 판이하게 달라져 버린다. 드래곤의 엄격한 보호아래 지금까지 포식자였던 중형 몬스터들을 손짓 하나로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블린으로써는 정말 유혹적인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드래곤에게 잡혀와서 가디언이 되는 중형 몬스터와는 달리 고블린들은 제 발로 레어를 찾아와 가디언으로 삼아달라고 청원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개중에서 똑똑한 녀석들만 뽑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도 엄연히 한계가 있었다. 제법 긴 편이긴 하지만 고블린의 수명은 불과 80년 가량에 불과하다. 엄청나게 긴 드래곤의 수명을 가정해 본다면 현저히 짧은 수명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가디언으로 있는 고블린들은 우두머리의 수명이 다 될 경우, 자체적으로 후임자를 뽑았다. 늙은 우두머리는 신임 우두머리가 된 젊은 고블린에게 모든 지식을 전수해주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 절차는 드래곤이 관여하든 하지 않던 간에 계속 유지되어 왔다. 때문에 500년 간의 긴 잠에서 깨어난 러셀런트에게 현재의 가디언 우두머리가 낯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상기한 러셀런트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은 태도로 고블린에게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트루베니아는 이제 완전히 오크의 수중에 들어갔겠지?" "그렇습니다. 인간들은 트루베니아에서 거의 사라졌고 극소수만이 오크의 노예로 남아있는 실정입니다." 러셀런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인간들을 노예로 쓰고 있다고? 재미있군. 그렇다면 몇 놈 끌고 와서 유희거리로 삼아도 되겠어." 러셀런트는 지금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의 별난 유희를 떠올리고 있었다. 인간들을 잡아다 생체실험을 통해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는 것. 처음에는 조금 별난 취미 정도로 여겼지만 이제 러셀런트도 거기에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인간 소드 마스터에 의해 크나큰 상처를 입었으니 러셀런트로써는 인간에게 더욱 적개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죽 늘어선 스톤 골렘들을 돌아보며 러셀런트는 눈을 빛냈다. "잘 되었어. 어차피 다른 드래곤들이 깨어날 5년 동안 소일거리가 없었는데 말이야." 인간 노예들을 끌고 와서 당장이라도 분풀이를 할 생각으로 러셀런트의 가슴은 조금씩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블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러셀런트님." "무슨 일인가?" "지금 러셀런트님을 기다리고 있는 사자가 있습니다. 일단 그를 다른 방에 대기시켜놓았습니다만……." 러셀런트의 눈망울에 의혹의 빛이 스쳤다. 사자라니? 아직까지 깨어있던 드래곤이 있단 말인가? "사자라니? 어디서 온 자이지?" 고블린은 아무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베르키스님의 가디언 우두머리인 게덴하이드라는 자였습니다. 그는 벌써 한 달 전부터 이곳에 와서 러셀런트님께서 깨어나실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게덴하이드라……." 물론 러셀런트가 게덴하이드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가 가장 존경하고 따르는 드래곤이 바로 베르키스였고 그의 가디언 우두머리인 게덴하이드도 벌써 여러 번 봐 왔던 터였다. 러셀런트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리치도 가디언 우두머리로 삼을 만하군. 500년이 아니라 몇 천년이 지나도 죽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같은 얼굴을 계속 볼 수 있는 건 좋은 일이지." 그 말에 고블린들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만에 하나 러셀런트도 베르키스처럼 리치로 하여금 새로운 가디언 우두머리로 삼는다면 자신들은 그 즉시 쓸모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또다시 중형 몬스터들에게 사냥 당할까 두려워하며 동굴에 꼭꼭 숨어살아야 할 수도 있었다. 웜급에 접어든 러셀런트에겐 충분히 리치를 만들 능력이 있었다.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러셀런트는 느긋하게 지시를 내렸다. "이리로 데리고 오라. 그를 만나보겠다." "알겠습니다." 고블린들은 두말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설령 그렇게 된다손 치더라도 드래곤의 명령은 철저히 따라야 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운명이었으므로…….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58회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러셀런트님." 자신을 향해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는 리치를 보며 러셀런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의심할 나위 없는 베르키스의 가디언 우두머리 게덴하이드였다. 이미 여러 번 봐 왔던 터라 그는 게덴하이드의 얼굴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얼굴이라 해 봐야 살점이 하나도 붙어있지 않은 해골바가지에 불과했지만. "그래 오랜만이구나. 베르키스님께서는 잘 계시겠지?" "그렇습니다만……." 게덴하이드의 대답이 별로 신통치 않자 러셀런트는 눈매를 지긋이 모았다. 이미 그는 드래곤 로드인 크라누스보다도 오히려 베르키스를 더욱 존경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베르키스의 일에 관심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 분께 무슨 일이 있느냐?" 러셀런트의 질문에 게덴하이드는 마치 큰 죄라도 지은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실은 러셀런트님께서 잠드신 사이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곧이어 게덴하이드의 입에서 놀랄 만한 소식이 흘러나왔다. 리치로 만든 인간 하나가 베르키스의 이목을 속이고 마법을 익힌 다음 드래곤들의 보물창고인 인크레시아를 탈취해서 달아났다는 소식. 그 과정에서 그린 드래곤 지크레이트가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는 어이없는 사실을 듣자 러셀런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켜 떴다. "세상에 어찌 그런 일이……. 한낱 리치 나부랭이가 지크레이트를 죽이고 인크레시아를 강탈해갔다는 사실을 나더라 믿으란 말이냐?" "하, 하오나 모든 것이 사실입니다. 모든 것을 베르키스님께서 확인하셨습니다. 정황을 보아 놈이 벌써 아르카디아로 내뺀 것 같다는 베르키스님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러셀런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지만 베르키스의 레어를 지켜야 할 가디언 우두머리가 벌써 한 달 동안이나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렸다는 것은 그것이 틀림없는 사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알기로 가디언 우두머리는 결코 레어를 비울 수 없다. 특히 그 기간이 한 달에 달하는 긴 시간이라면………. "이런 빌어먹을……." 러셀런트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인크레시아 안에는 그가 모아놓은 보물들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4천년의 세월 동안 긁어모은 보물 중 가장 귀하고 값비싼 것들로만 말이다.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군. 베르키스님은 어째서 그놈을 죽이지 않고 가디언으로 삼으셨느냐? 그토록 위험한 녀석을……." "놈은 놀랍도록 교활할뿐더러 지능 역시 뛰어납니다. 원래 베르키스님께서는 놈을 생체실험의 도구로 잡아오셨을 뿐입니다. 어쩌다 보니 리치로 만들게 되었던 것이지요. 사실 그놈은 이곳의 인간이 아닙니다. 타 차원에서 넘어온 인간이었으므로 호기심이 생기신 것 같습니다." "아무리 타 차원의 인간이라도 그렇지?" 러셀런트의 입에서는 거듭해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인크레시아를 송두리째 도난 당했다면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러셀런트의 반응은 보물에 탐욕이 많은 드래곤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었다. 그러던 사이 게덴하이드의 설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잡아올 당시, 놈은 겨우 3써클의 엑스퍼트에도 미치지 못했던 놈입니다. 그러던 놈이 놀랍게도 500년 동안 마법을 익혀 9써클의 마스터에까지 올랐습니다. 특히 놈은 베르키스님의 마법 서가에 잠입해서 마법을 훔쳐 익힌 가증스러운 놈입니다. 결코 만만히 봐서는 안될 놈이지요." "흠. 정말 가증스런 놈이로군. 그렇다면 네가 이리로 온 이유는 그놈 때문이냐?" "그렇습니다. 베르키스 님께서는 러셀런트님이 아르카디아에 건너가서 놈을 잡아죽이고 인크레시아를 되찾아올 것을 바라십니다. 놈의 명줄을 끊는다면 인크레시아는 자동적으로 다음 차례의 드래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베르키스님은 수면 도중에 깨어나신 탓에 앞으로도 50년 동안은 꼼짝없이 수면을 취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오로지 러셀런트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러셀런트는 일리가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현재 잠에서 깨어난 드래곤은 오로지 그만이 유일했다. 또한 인간들이 지배하는 대륙인 아르카디아에 건너가는 것이 분명 껄끄러운 일이기는 했지만 이미 웜급에 오른 성룡인 러셀런트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 다시 말해 그 말고는 이 임무를 맡을 만한 드래곤이 없는 것이다. 러셀런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가 아르카디아로 건너가서 놈을 잡아죽이겠다. 그러니 너는 놈의 특징이나 주로 쓰는 마법 따위를 모조리 나에게 털어놓도록 해라." 인크레시아에 들어있을 자신의 보물을 되찾기 위해서 러셀런트는 별도의 당부가 없었더라도 직접 나설 생각이었다. 게덴하이드는 들고 있던 책자를 러셀런트에게 건넸다. "여기 놈에 대한 모든 것이 적혀 있습니다. 현재 아르카디아엔 9서클의 인간 마법사가 존재하지 않을 터. 놈을 찾아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좋다. 걱정하지 말거라. 틀림없이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올 테니……." 고개를 숙이는 게덴하이드를 보며 러셀런트는 슬그머니 마나를 재배열했다. 아르카디아로 건너가려면 반드시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를 해야 했다. 그가 증오해 마지않는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드래곤이 최강의 생명체라 할지라도 수많은 인간들의 포위공격을 받으면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으므로……. 번쩍. 눈부신 섬광과 함께 러셀런트의 거대한 몸은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그곳과 멀리 떨어진 아르카디아 대륙에는 한 사내가 한창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정말 미치겠군. 이 일을 어쩌면 좋지?' 사내는 난감한 신색으로 눈앞의 고용주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고용주는 자신의 뜻을 전혀 꺾으려 하지 않았다. 고집이 가히 쇠심줄보다도 더 질기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 몰랐으면 넘어갔을 테지만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어요. 마을 사람들의 자포자기한 반응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들이 불쌍하지 않나요?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그 사악한 네크로멘서 녀석을 잡아 죽여야 해요." 허리에 양손을 떡 하니 올린 채 자신을 쏘아보는 고용주의 모습에 사내는 또다시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마을 사람들을 위해 사악한 네크로멘서를 처단한다는 의도, 그 자체는 전혀 나무랄 데가 없었다. 도리어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권장할 만한 의도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무기가 있어야 몬스터 사냥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법. 보유한 전력이 결코 쓸만하다고 볼 수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네크로멘서를 잡으러 간다는 것은 솔직히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사내는 카심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삼십대 중반의 강퍅한 얼굴과 제법 우람한 체구를 지닌 카심은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용병이었다. 20대 초반에 이름난 용병단에 투신해서 용병 생활을 시작했고, 죽을 고비를 무수하게 넘겨가며 나름대로 명성을 얻은 제법 경험 많은 용병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관점에서 이것은 정말 말이 되지 않는 요구였다. 그들의 전력이라 해봐야 고용주와 그를 따르는 호위기사 한 명. 나머지는 자신의 부하 용병들이 전부였다. 결코 강하다고 할 수 없는 전력.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용주가 철딱서니 없게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그의 고용주는 율리아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제 열 여덟이나 되 보일까 하는 계집아이였다. 꼴에 일개 왕국의 공주란 신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카르셀이라는, 왕국이란 이름을 붙이기에도 아까운 산골 국가의 공주. 따라서 그녀에겐 왕녀에게 기대할 수 있는 품위 같은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에게 윽박지르는 것만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당신은 분명히 우리 카르셀 왕국으로부터 크로센 제국까지 날 보호하라는 청부를 받았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 그렇습니다만." "난 미첼과 함께 이 길로 사악한 네크로멘서를 잡으러 갈 거예요. 그렇다면 당신들은 당연히 동행하여 날 보호해야 하지 않나요?" 카심은 정말 대책이 서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하다 못해 용병 1개 중대만 보유하고 있었어도 그는 두말 없이 고용주를 따라나섰을 터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가 보유한 전력은 자신을 포함해서 용병 일곱 명이 전부였다. 그것도 둘은 아직 머리에 피딱지도 마르지 않은 어린아이가 아닌가? 사실 카심은 썬더버드라는 이름을 가진 제법 명성을 떨치는 용병단의 부대장 출신이었다. 수많은 왕국들이 존재하는 만큼 영토분쟁이 없을 수는 없었고, 그 탓에 아르카디아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국지전이 벌어졌다. 크로센 제국이 존재하는 탓에 대규모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영토나 이권을 건 소규모 다툼은 가히 일상적인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고로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법. 대리 전투를 청부받기 위해 수많은 용병단이 설립되었다. 썬더버드 용병단도 그렇게 탄생한 수많은 용병단 중 하나로써 용병계에서 상당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카심은 그곳에서 백여 명의 부하들을 통솔하는 백부장으로 복무하며 수많은 전과를 세웠다. '소드 브레이커의 카심'이라는 그의 별칭은 어지간히 용병밥을 먹은 자들이라면 한 번씩은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용병들이 그렇듯이 카심 역시 자신의 용병단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아무리 목숨걸고 열심히 싸워봐야 소속된 용병단의 이름만 드높일 뿐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을 규합해서 썬더버드 용병단을 탈퇴했다. 당시 그를 따라나온 자는 갓 용병이 된 어린 소년 둘과 그의 백인대에 소속되어 있는 용병 네 명이 다였다. 불과 일곱 명으로 구성된 용병단. 하지만 카심은 용기를 잃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초라한 모습이지만 어찌 알겠는가? 일단 작은 청부를 해 나가며 사람들을 모으고 명성을 드높인다면 우리 카심 용병단의 이름이 나중에 썬더버드 용병단보다 더 높아질 수도 있다." 일장 연설로 휘하 용병들의 마음을 다잡은 카심은 그 즉시 청부거리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여간해서는 나오지 않았다. 불과 일곱 명의 인원으로 전쟁을 치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요인의 호위나 몬스터 퇴치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미 몬스터의 씨가 마른 아르카디아에서 그들이 할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무려 석 달 동안이나 단 한 건의 청부를 받지 못한 카심 용병단. 그들에게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청부가 들어왔는데……. 카르셀 왕국의 재상이라고 신분을 밝힌, 그러나 겉모습이 영락없이 시골 농부에 지나지 않는 늙은이가 어느 날 그를 찾아온 것이다. "청부를 하고 싶소. 임무는 크로센 제국까지 우리 왕국의 왕녀를 호위하는 것이오." "네? 무슨 말씀이신지?" 기다리던 청부이기는 했지만 내용이 너무나 뜻밖이라 카심은 어리둥절해 할 수밖에 없었다. 왕녀의 호위를 용병단에게 맡긴다는 것은 지금까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인원이 겨우 일곱에 불과한 소규모 용병단이 아닌가? 하지만 사정이 급했던 카심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청부를 받아들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반드시 임무를 성공시키겠습니다." "그런데 청부금이 좀 비싼 것 같소." 일개 왕국의 재상이란 작자가 청부금액을 적정가격에서 반 이상이나 후려쳤지만 그는 상관도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것은 그의 용병단이 받은 첫 청부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호위해야 하는 왕녀가 이토록 말이 통하지 않은 계집아이인 줄 알았다면 그는 결코 청부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벽창호 계집애는 지금 또다시 자신을 벼랑 끝까지 밀어붙이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따라가지 않는다면 전 가차없이 계약위반으로 간주하겠어요." '미치겠군.' 카심의 얼굴은 아예 우거지상이 되어있었다. 물론 용병생활에 이골이 난 그가 계약위반이 어떤 것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통상적으로 용병단이 계약을 위반할 경우 계약금의 세 배에 달하는 금액을 물어주게 되어 있다. 하지만 카심은 애석하게도 청부금 전액을 계약금을 받았다. 지금 같은 상황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입장에서 계약 위반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거의 파산지경인 용병단의 재무상태를 감안하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비록 그에게 휘하 용병들의 목숨을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더라도 첫 임무부터 배상금을 물어줄 순 없었기 때문에 그는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저희들도 동행하겠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지만 카심은 속으로 울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용주 율리아나 공주는 얼굴 가득히 미소를 머금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마을사람들을 괴롭히는 네크로멘서는 반드시 우리 힘으로 처단해야만 해요." 정말 우는 아이 뺨때리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카심은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려는 욕설을 사력을 다해 목구멍에서 삭여야 했다. 지금껏 살아오며 저렇게 철부지 짓을 하는 계집아이는 처음 보았다. 하물며 그것도 명색이 일개 왕국의 왕녀 신분이 아니던가? 그는 굳은 표정으로 묵묵히 애병, 소드 브레이커를 집어들었다. 소드 브레이커(Sword breaker). 날 부분이 톱니로 된 검으로써 적을 베기보다는 뜯어버리는걸 목적으로 하는 무척 잔인한 기형검이다. 강도가 낮은 검과 부딪힐 경우 상대 검의 이를 나가게 할 수 있으므로 검사와 상대할 때 무척 효율적인 무기라 말할 수 있었다. 마치 중원의 낭아검(狼牙劍)을 연상시키는 외모. 소드 브레이커는 카심을 지금의 위치에 올려놓은, 마치 친구와도 같은 애병이라 할 수 있었다. 무기를 챙긴 카심은 몸을 일으켰다. "언제 출발하실 겁니까?" "지금 바로 가도록 하죠." 짧게 대답한 율리아나는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젊은 기사를 쳐다보았다. "미첼. 너도 갈 거지?" 순간 카심의 얼굴이 팍 찌그러졌다. 그는 이미 미첼이란 기사가 동행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니……. 한 마디로 말해 카심은 율리아나에게 완벽하게 속은 것이었다. 하지만 남자가 입 밖에 꺼낸 말을 번복할 수 없는 법. 그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율리아나와 미첼이라 불린 젊은 기사를 번갈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글쎄? 사악한 네크로멘서를 잡기엔 우리 전력이 너무 약하지 않을까?"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하는 미첼은 상당한 미남자였다. 이제 스물을 갓 넘어 보이는 멋쟁이 청년으로 낡았지만 반질반질 광을 내 놓은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었다.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 것을 보니 조금 간교하다는 느낌을 주었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상당히 준수한 편이었다. 율리아나와 말을 놓고 있는 것을 보니 상당히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인 것 같았다. 하지만 듣고 있던 카심은 다시 한 번 기가 차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 호위기사란 작자와 왕녀가 서로 말을 터놓다니……. 이렇게 위계질서가 엉망인 왕국은 살다살다 처음 보겠군.' 물론 카심의 생각도 일리가 있었다. 보편적인 왕국에서 왕족이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에 속한다. 지금처럼 호위기사와 왕녀가 터놓고 지낸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카르셀 왕국은 안트로스 왕국과 마찬가지로 총 인구가 일만도 되지 않는 소국이었고, 일개 국가라기보다는 산골마을 몇을 아울러 놓은 데 불과하다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왕이라는 허울좋은 감투를 눌러쓰고는 있지만 본질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시장 정도로 보는 것이 합당했다. 그런 카르셀 왕국에서 왕족에 대한 권위가 존재할 리가 없었다. 율리아나와 미첼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소꿉 친구였다. 그러므로 서로간에 허물이 있을 리가 없었다. 비록 하나는 왕의 딸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궁정 수비대장의 아들이었지만 말이다. 머뭇거리는 미첼을 보자 율리아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럼 안 갈거야?" "글세? 생각을 좀 해봐야겠는걸?"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미첼을 보고 율리아나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이미 그녀는 미첼이 가진 최대의 약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름을 떨쳐 정식 기사가 됨과 동시에 부와 명예를 거머쥐겠다는 출세지향형의 야심가. 이것이 미첼에 대한 율리아나의 솔직한 평가였다. 이번에 율리아나를 따라 나선 것도 기필코 중앙 귀족의 눈에 들어 출세하겠다는 것이 미첼의 속셈이었다. "애석하군. 만약 네크로멘서를 잡는다면 네 이름이 아르카디아 방방곡곡에 널리 알려질 것이며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들이 널 보기 위해 불원천리를 마다하고 달려올 텐데 말이야." 예상대로 미첼은 귀가 솔깃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네크로멘서가 그렇게 악명이 높은 놈이야?" "그럼. 악명이 자자한 놈이지. 혹시 알아? 만약 놈을 잡는다면 크로센 제국에서 바로 팔라딘 자격을 부여할지……. 그렇게 되면 귀족들은 널 휘하 기사로 삼기 위해 앞을 다투어 달려올 걸?"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망설이던 미첼은 그 한마디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좋아. 참가하겠어." "탁월한 결정이야." 뜻을 이룬 율리아나는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그녀는 미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때는 오빠 동생 사이로 상당히 친하게 지냈지만 철이 들어 미첼의 본모습을 알고 나서부터는 정이 뚝 떨어져버린 율리아나였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59회 연참입니다. 연참 안하면 맞을 것 같아서.......^^ 그런데 이상하게 하이텔에 안 들어가지는군요. 왜 그럴까? **************************************************************************** 미첼은 오로지 일신의 영달만을 바라는 출세지향적인 인물이었다. 카르셀 같은 작은 왕국의 수비대원으로 지내기에는 그의 가슴속 포부가 너무 컸다. '세상에…….' 그의 속마음을 알고 나자 내심 진저리를 쳤던 율리아나였다. 미첼의 마음 속에는 반드시 제대로 된 왕국의 정식 기사가 되겠다는 출세욕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율리아나에겐 미첼이 꼭 필요했다. 비록 밥맛 떨어지는 인간성을 가졌지만 미첼은 검술실력 하나만은 발군이었다. 미첼의 아버지인 헤일즈는 상당한 실력을 가진 검사였다. 현재 카르셀 왕국의 수비대장을 맡고 있긴 하지만 그는 원래 제법 큰 왕국인 펜슬럿의 근위기사 출신이었다. 궁정에서 벌어진 권력다툼에 환멸을 느낀 그는 그만 지긋한 나이에 근위기사직을 사직하고 낙향하기로 결심한다. 고향으로 돌아가던 와중 헤일즈는 우연히 카르셀 왕국에 들르게 되고 그곳의 가족적인 분위기에 여지없이 사로잡히게 되었다. 왕국이라 하기도 부끄러운 카르셀이었지만 인심 하나는 아르카디아 제일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축제 기간이라서 우연히 들른 헤일즈는 말 그대로 성대한 환대를 받았다. 일주일 동안의 축제기간 중 마을의 분위기에 흠뻑 빠져버린 헤일즈는 마침내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곳에 눌러앉기로 마음먹었다. "잘 선택하셨소. 우리 왕국의 일원이 된 것을 축하하오." 카르셀 국왕은 마을에 남겠다는 헤일즈를 두 팔을 벌려 환영해 주었다. 일손이 항상 부족한 카르셀에서는 헤일즈 정도의 장정이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연한 기회에 검술실력이 알려지자 그는 더욱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일개 근위기사 출신이긴 했지만 그의 검술실력은 정말 발군이었던 것이다. 산간왕국인 카르셀에는 흉포한 몬스터가 다수 서식하고 있었고 그 중에는 마을 사람들을 벌써 여럿 잡아간 오우거도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헤일즈는 단신으로 산에 올라 오우거를 가차없이 처치해 버렸다. 그는 이미 오러 블레이드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실력자였던 것이다. 그 사건이 일어나자 그에겐 즉시 궁정 수비대장의 직책이 내려졌다. 모처럼 만에 추악한 권력다툼에서 벗어나게 된 헤일즈는 이렇게 해서 카르셀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늦은 나이에 아리따운 아가씨와 결혼을 해서 미첼까지 얻었으니 헤일즈로썬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었다. 40이 다 된 나이에 보게 된 어린 아들 미첼. 헤일즈는 미첼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검술을 깡그리 전수해주었다. 그 탓에 미첼은 어린 시절부터 검술만을 수련하며 자라나야 했으니……. 어쩌면 헤일즈는 권력다툼에서 밀려났다는 자괴감을 아들을 통해 충족시키려고 했는지도 몰랐다. 어린 미첼에게 그토록 혹독한 검술수련을 강요했으니까 말이다. 그의 노력이 성공했는지 미첼은 뛰어난 검술을 가진 검사로 자라나게 된다. 20세가 되었을 때에는 카르셀 뿐만 아니라 부근 5개 산골 왕국을 아울러봐도 적수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이제 60을 넘긴 아버지 헤일즈 역시 미첼을 당해내지 못했다. 비록 산골 마을의 수비대원으로 복무하고 있긴 하지만 미첼의 마음 속에는 큰 왕국으로 가서 정식 기사가 되겠다는 욕망이 자라날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미첼은 이미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검사였다. 검에 기를 불어넣어 강철로 된 방패도 단번에 자르는 놀라운 기술을 보유한 검사로써 이번 작전에는 반드시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율리아나는 계속해서 미첼의 호승심을 자극해 나갔다. "만약 이번에 네크로멘서를 처치한다면 분명히 상당한 액수의 현상금을 탈 수 있을 거야. 그것으로 너에게 마법을 막아낼 수 있는 갑옷을 사 줄게. 그렇다면 네 앞을 가로막을 만한 존재는 아무것도 없을 거야." "정말이지?" 미첼로써는 정말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그가 입고 있는 것은 아버지가 과거 입던 것을 손질해 입은 낡은 플레이트 메일에 불과했다. 물론 대마법 방어진이 그려져 있을 리가 없었으므로 항상 마법사를 경계해야 했다. 하지만 대마법 갑옷을 얻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미첼은 이미 마나를 이용해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기술을 아버지에게 모조리 배운 상태였다. "퇴직할 당시 입고 있던 대마법 갑옷은 기사단에 반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필요한 기술은 모조리 가르쳐 줄 테니 걱정할 것은 없다. 나중에 대마법 갑옷을 구할 수 있게 되면 넌 더 이상 마법 공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물론 그 전까진 마법사에 대해 상당히 조심할 필요가 있느니라." 아버지의 말을 상기한 미첼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만 가자. 서둘러 놈을 잡아야지." 보고 있던 카심은 또다시 속으로 욕을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저런 미친놈. 젊은 놈이 호승심에 사로잡혀 물불을 안 가리는군. 그리고 또 뭐야? 정말 기가 막혀서……. 현상금을 아예 자기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돈으로 생각하는군.' 통상적으로 이럴 경우 현상금은 작전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나눠 갖는 것이 관례였다. 아니 그것을 차지하고서라도 그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가능성이 정말 희박한 작전이었다. 조금 전, 고용주 율리아나를 자극해서 일을 벌이게 만들었던 자들 역시 당당한 왕국의 수련기사들로 보이는 자들이었다. 네크로멘서에게 얼마나 처참하게 당했는지 동료들이 모두 떠나가고 나서도 세바인 마을에서 6개월 동안이나 정양하고 있었던 자들 말이다. 율리아나는 바로 그들에게서 세바인 마을의 악독한 네크로멘서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자신들이 상대하려는 악당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짐작조차 하지 않은 채 율리아나는 호기 있게 몸을 일으켰다. "그럼 갈까요. 그곳까지 두 시간이나 걸린다고 하니 서둘러야겠어요." 미첼은 이미 일어나 있는 상태였고 카심은 굳은 표정으로 휘하 용병들에게 눈짓을 했다. 다소 불안스러워하긴 했지만 용병들은 두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것을 보아 얼마나 카심을 믿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긴 실낱같은 가능성만을 믿고 날 따라나선 녀석들이니…….' 율리아나가 식당을 나서자 카심은 묵묵히 뒤를 따랐다. 휘하 용병들 역시 장비를 수습하며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용병들 틈에 끼여 산길을 오르는 미첼의 가슴은 희열감에 가득 차 있었다. '드디어 내 실력을 발휘할 길이 열리는가?' 그의 시선이 앞서 가는 율리아나의 등에 가서 꽂혔다. 사실 율리아나는 무척 아름다운 소녀였다. 하늘거리는 머릿결에 별을 따다 붙인 듯한 눈망울. 결코 나무랄 데 없는 이목구비를 가졌기 때문에 보는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녀에게 호감을 갖기 마련이다. 물론 그녀의 개차반같이 더러운 성질머리를 알고 나면 호감이 싹 사라질 테지만 말이다. 비록 카르셀이라는 무척 조그마한 왕국이었지만 그래도 율리아나는 당당히 왕녀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외동딸인 때문에 카르셀 국왕은 그녀가 원하는 것은 모조리 들어 주었고 궁정의 사람들은 그녀 앞에선 설설 기었다. 그 탓에 율리아나는 고집불통에 대단한 말괄량이로 자라날 수밖에 없었다. 궁정 사람들 중에서 그녀에게 된통 혼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 사실을 떠올린 미첼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 때의 일은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아.' 미첼 역시 그녀의 마수에 걸려 여러 차례 혼이 난 상태였다. 사실 미첼과 율리아나는 한 두 차례 혼담이 오고 간 사이였다. 카르셀 왕국 제일의 검사이며 미남자이기도 했던 미첼에게 카르셀 국왕이 호감을 갖지 않았으면 거짓말이었으리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고 미첼의 아버지가 카르셀 왕국의 수비대장이라는 점 때문에 혼담은 어렵지 않게 성립될 듯 싶었다. 그러나. "결코 그럴 수 없어요." "천부당만부당한 얘기입니다." 잘 진행될 것으로 보였던 혼담은 의외로 당사자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율리아나와 미첼 모두가 펄펄 뛰며 상대를 거부했던 것이다. 결국 혼담은 없던 일로 되어버렸다. 율리아나는 미첼의 출세지향적인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반대로 미첼은 율리아나가 전혀 눈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녀와 결혼한다면 카르셀의 군주가 되는 것이 확실했지만 미첼의 야심은 카르셀 왕국으로 만족할 정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알려지지 않은 골치 아픈 문제도 있었으니……. 율리아나의 성격을 떠올린 미첼은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보나마나 뻔하지. 율리아나는 반드시 여왕이 된다고 펄펄 뛸 테니 난 그저 들러리로 전락해 버릴 터. 문제는 저 말괄량이의 성격을 받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야.' 미첼은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는 듯 몸을 떨었다. 율리아나의 성질머리는 정말 끔찍했다. 시도 때도 없이 주먹질을 해 대는 것은 그래도 양호한 편이었다. 주먹이 조금 맵긴 했지만 몇 대 맞아주면 그 뿐이었으니까. 문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꺾지 않는 쇠심줄같은 고집이었다.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율리아나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뿐더러 심한 경우 펑펑 울기까지 했다. 그래놓고 달려온 사람들에게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이미 미첼은 그런 율리아나에게 걸려 여러 번 곤욕을 치른 바가 있었다. "미첼은 날 겁탈하려 했어요. 이것 봐요." 제 손으로 찢어놓은 옷을 보여주며 말도 되지 않는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바람에 미첼은 그만 두손두발 모두 들고 말았다. 물론 달려온 사람들도 미첼의 처지를 공감했을 것이다. 카르셀 궁정 사람들은 대부분 한 두 번씩 율리아나에게 당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율리아나의 마수에 걸리지 않으려면 오로지 그녀의 눈에 띄지 않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굳은 결심에도 불구하고 미첼은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는 이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난 반드시 중앙에 진출하고야 말겠다. 내가 갈고 닦은 검술실력이라면 큰 왕국에서도 능히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 터, 분명 나의 진가를 알아보는 귀족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극히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카르셀에서 살아가며 미첼은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열심히 중앙의 정보를 긁어모았다. 물론 여행자들이 알고 있는 상식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그래도 미첼의 가슴을 부풀게 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말로만 듣던 화려한 궁정. 사치의 극에 달한 귀족들의 풍요로운 생활. 기사도에 충실한 기사들. 아름다운 레이디와의 낭만적인 로맨스.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호시탐탐 카르셀을 벗어날 방법만을 궁리하던 미첼에게 어느 날 갑자기 기회가 주어졌다. 모종의 일로 왕녀 율리아나가 크로센 제국으로 가게 된 것이다. "자네가 율리아나와 동행해 줘야겠어." 카르셀 제일의 검사였던 미첼에게 당연히 동행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미첼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승낙했다. 물론 여정 도중 율리아나에게 당하는 것은 감수해야 했지만 이번 기회는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다시 잡을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다시는 카르셀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반드시 크로센 제국에 눌러앉고 말 테니까…….' 묵묵히 다짐을 하며 미첼은 허리춤의 검 손잡이를 꼭 거머쥐었다. 적어도 검술에서만은 그 누구도 두렵지 않았던 미첼이었다. 그렇게 일행은 네크로멘서의 거처를 향해 한발한발 다가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네크로멘서가 설치해 놓은 알람마법에 걸려들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따르르릉. 귀에 익은 알람소리가 울려 퍼지자 데이몬은 빙긋이 미소를 떠올렸다. 이미 그는 거처에서 한 시간 거리에까지 알람마법을 전개해 놓았고 거기에 침입자들이 여지없이 걸려든 것이다. "애송이들이 또 기어 들어오나 보군. 심심했는데 잘 되었어." 이제 데이몬도 이 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애송이들을 혼내주기 위해 힘들여 환영미리진을 펼쳤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미 봉인구의 마력을 삼분지 일 이상 흡수한 상태였다. 봉인구의 마력을 대상으로 운기조식을 한다는 그의 계획은 마침내 성공했다. 나이델하르크가 봉인된 봉인구는 지금 데이몬의 몸 속에서 마력을 거침없이 내뿜고 있었고, 데이몬의 단전은 그 마력을 줄기차게 빨아들여 충만해진 상태였다. 그 탓에 지금까지 소환하지 못했던 마계의 마물들을 손쉽게 소환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일단 매직 미사일과 윈슬럿으로 침입한 애송이들을 제압하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런 다음 데이몬은 나이트 메어(Nightmare:夢魔)를 소환해서 애송이들에게 꼬박 일주일동안 악몽을 꾸게 했다. 효과는 정말 대단했다. 나이트 메어에 의한 악몽은 오히려 환영미리진에 의한 것보다 더한 고통을 애송이들에게 가져다주었으니까……. 게다가 이젠 놈들의 상태에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다. 악몽을 꾸는 것만으로 사람이 죽을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60회 물론 일주일동안 먹지도 못하고 악몽에 시달린 애송이들은 거의 초죽음이 되어 거처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두 번 다시 이곳에 올 마음이 사라졌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데이몬은 고개를 흔들며 혼잣말을 털어놓았다. "이제 데스 나이트들도 충분히 강화시켰으니 오래지 않아 이곳을 떠야겠군. 솔직히 이곳은 소문이 너무 많이 퍼졌어. 그러니 일단 비밀 병기만 완성시킨다면 자리를 옮겨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봉인구가 데이몬의 몸 속에 들어있는 이상 굳이 한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한가롭게 유람이나 하며 드래곤들의 추적을 피하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판단이었다. 데스 나이트들을 강화시키는 작업은 완전히 끝난 상태였다. 운기조식으로 빨아들인 마력을 끊임없이 주입해준 덕택에 그가 보유한 네 명의 데스 나이트들은 그야말로 최강의 존재가 되어 있었다. 생전의 실력이 무시할 수 없는 데다가 순도 높은 어둠의 마력을 무한정 제공받은 때문에 네 명의 데스 나이트들은 오히려 생전의 실력을 웃돌 정도로 강력해졌다. 게다가 그들이 걸친 무구는 하나같이 최상의 것들이었으니. 이 세 가지가 삼위일체가 되어 데스 나이트들은 데이몬의 가장 강력한 조력자로 탈바꿈해 있었다. 우선 그들이 보유한 무구들은 가격으로도 도저히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드래곤들이 트루베니아 전역에서 긁어모은 최상급 마법 무구들 중 최고의 것들로만 걸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데스 나이트들이 걸친 갑옷은 최고위급 마법진이 그려진 최고급품들이었고 태반이 미스릴이나 드래곤 스케일로 되어 있었다. 언데드라서 오르하리콘으로 된 갑옷을 걸칠 순 없었지만 그 정도로도 방어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게다가 하나같이 고도의 마법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대마법 방어진이 새겨져 있었다. 드래곤들이 직접 새겨 넣은 것들로만 말이다. 그들의 무기 역시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헬버트론의 검은 바로 이카롯트를 상징한다는 명검 르헤르트 세이버였다. 평범한 기사가 들더라도 무리 없이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낼 수 있다는 최상의 아티팩트. 라인델프의 무기 역시 위력 면에서는 르헤르트 세이버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이름하여 스컬 블레이드, 레드 드래곤의 비늘을 재료로 드워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검으로 예리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는 무기였다. 샤프니스(Sharpness)나 인챈트(Enchant), 그리고 각종 드래인(drain) 따위의 효과를 주는 마법들이 영구적으로 걸려있는 검으로써 벌써 일천 년 동안이나 인크레시아에서 잠을 자고 있던 아티팩트였다. 그러던 것이 라인델프의 손에 들려 세상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프림베르그의 검은 무게만 해도 범인은 들 수 없다고 알려진 자이언트 킬러(Giant killer)였다. 족히 일백 킬로그램이 넘어가는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重劍)로써 우연히 발견된 금속질 운석을 드워프들이 수백 년 동안 단금질을 거듭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전설이 있었다. 날은 별로 날카롭지 않지만 무게로 인한 파괴력이 엄청나서 이 검을 막을 방법은 거의 없었다. 어지간한 검과 방패는 부딪치는 순간 부서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생전에 중검을 즐겨 쓰던 프림베르그에겐 가장 적합한 무기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생전이었다면 아무리 프림베르그라고 해도 엄청난 무게 때문에 휘두르기조차 쉽지 않았지만 언데드가 된 이후 괴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때문에 자이언트 킬러는 프림베르그의 새로운 애병이 되어 버렸다. 사라미스의 검은 긴 샤벨이었다. 한쪽에만 날이 서 있고 완만하게 휘어져 베기에 적합한 검으로 이것 역시 드래곤의 비늘을 가공해서 만든 명품이었다. 화이트 드래곤의 비늘로 만들어진 검이라서 항상 싸늘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으므로 기질 상 사라미스와 가장 어울리는 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데스 나이트가 선택한 검들 중 유일하게 이름이 없었던 검으로 사라미스가 프로스트 소울(frost soul)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고도의 프로즌(frozen) 마법이 걸려 있어 검에 적중되면 그대로 몸이 얼어 붙어버리는 무시무시한 검이었다. 이렇게 막강한 신병이기와 어둠의 마력으로 무장한 채 데스 나이트들은 인크레시아 속에서 드래곤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가 데이몬의 체내에 있었으므로 굳이 밖에 나와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비밀 병기가 완성된다면 더 이상 드래곤을 겁낼 필요가 없어지지." 이제 데이몬은 드래곤을 상대할 힘을 얻었다고 할 수 있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그들의 지휘 하에 있는 오크들과 그들의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들이었다. 드래곤 한 마리 정도 맞닥뜨리는 것은 이젠 신경 쓸 문제도 아니었다. 네 명의 데스 나이트들과 9서클 마스터인 데이몬이라면 넉넉하게 사냥이 가능했으니까……. 거기에다 비밀병기까지 가세한다면 드래곤 두 마리까지도 맞상대가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은 드래곤들이 일대 일로 싸워준다는 가정 하에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만약 놈들의 휘하의 가디언이나 오크들을 모조리 동원한다면 상황이 조금 어려워진다. 오크 보병이나 가디언을 화살받이로 앞세워놓고 뒤에서 공격마법을 펑펑 날려댄다면 승산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져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곤란하지." 이것은 데이몬이 노스우드 결전에서 절실히 깨달은 것이었다. 용사단이 보유한 힘은 사실 결코 약하지 않은 전력이었다. 만약 정면 대결을 했더라면 충분히 드래곤 한 두 마리 잡을 수 있는 전력이라 봐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단 한 마리의 드래곤조차 잡지 못한 채 용사단 전원이 허무하게 몰살되어버렸으니……. 그 사실을 감안해 보면 어떻게 해서든 오크를 처리할 방도를 생각해 내야 할 듯 보였다. 만약 데이몬이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 넷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혼자서 달려들 드래곤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어떻게 해서든 아르카디아의 군주와 손을 잡아야겠군. 다행히 이곳 인간들의 힘은 절정에 달해 있으니 그들로 하여금 오크를 상대하게 한다면 난 마음 편하게 드래곤 사냥을 할 수 있다." 드래곤들은 분명히 아르카디아 침공을 계획할 것이다. 수면기에서 깨어나는 즉시 휘하의 오크들을 규합하여 아르카디아로 넘어온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만약 데이몬이 아르카디아의 인간들에게 가세한다면 가히 엄청난 전력이 될 터였다. 물론 그것은 이곳 병사들이 데이몬을 적대시하지 않아야 된다는 가정 하에서였다. 다시 말해 데이몬은 반드시 이곳의 군주 중 누군가와 손을 잡고 일을 벌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데이몬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결국 페르슈타인이란 작자와 손을 잡아야 하는가?" 데이몬은 손을 잡을 만한 인물로 페르슈타인 공작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크로센 제국의 병권을 절반 이상 장악하고 있는 권력자로 제국의 황제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야심가. 만약 데이몬이 그를 찾아간다면 엄청난 환대를 받을 것이 분명했다. 나인 써클의 흑마법사와 최강의 마스터급 데스 나이트 넷이라면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전력이었으므로……. 어떻게 해서든 힘을 끌어 모아야 하는 입장의 페르슈타인 공작이라면 두 팔을 벌려 데이몬을 맞아들일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를 꼬드겨 트루베니아를 침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황을 보아 오크들은 결코 아르카디아의 군대를 감당할 수 없다. 아르카디아의 군사력은 이미 트루베니아가 멸망할 당시의 전력을 열 배 이상 상회하고 있으니까……. 참전할 드래곤들도 내가 가세하면 별달리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한다. 문제는 그 이후인데……." 아르카디아의 힘이 상상외로 막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드래곤들은 다시 트루베니아로 돌아갈 것이다. 어쩌면 두 번 다시 아르카디아를 도모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데이몬이 곤란해진다. 트루베니아는 드래곤들의 안방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고, 오크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마음 편하게 드래곤을 사냥할 순 없었다. 다프네를 구해내는 일 역시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되지." 따라서 데이몬은 어떻게 해서든 페르슈타인을 꼬드겨 트루베니아 침공을 계획해야 한다. 오크들의 노예로 근근히 살아가는 트루베니아 사람들을 생각해 보더라도 이것은 반드시 해 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았으므로 데이몬의 얼굴에 고뇌가 서렸다. "골치 아프군. 페르슈타인 공작은 트루베니아 침공 자체를 불필요한 일로 간주하고 있으니……." 트루베니아 침공을 주장하는 이들은 오히려 황제파 요인들이었다. 집정관인 테오도르와 근위기사 단장인 윌리엄스만이 트루베니아 침공을 주장할 뿐이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거기에 반발이라도 하듯 침공불가라는 반대 노선을 걷고 있었다. 힘을 가진 자는 그였으므로 전쟁불가론은 거의 결론까지 먹혀 들어간 상태였다. 상황을 보아 페르슈타인 공작으로 하여금 트루베니아를 침공하도록 설득하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아 보이는 작업이었다. 머리가 아파 온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그것은 추후에 생각할 문제야. 역시 머리 쓰는 일은 내 적성에 맞지 않아." 물론 황제파 요인들과 손을 잡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것은 가능성 면에서 별로 타당하지 않았다. 일단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황제파 요인들이 악의 대명사인 흑마법사와 손을 잡을 가능성은 무척 희박했다. 더욱이 일전에 자신에 의해 크로센 기사단원들이 된통 당한 일이 있지 않았던가? 기사들 대부분이 명예를 중시하는 고지식한 작자들이었으므로 모르긴 몰라도 근위기사 단장은 자신과 손을 잡는 것을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다 세력 면에서 현격히 밀리고 있는 황제파의 상황 역시 데이몬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를 좁히고 있었다. 백 번을 생각해도 페르슈타인과 손을 잡는 것이 합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왠지 모르게 페르슈타인에 대해 꺼리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반역을 일삼는 놈과 손을 잡아야 한다니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그것은 바로 사준환으로 인한 반감 때문이었다. 그 자신이 수하의 배신으로 절대자의 자리에서 밀려난 경험이 있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데이몬은 페르슈타인 쪽으로 쉽사리 마음이 가지 않았다. 제 2의 사준환이라 볼 수 있는 놈을 도와 일을 도모해야 한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함께 싸워줄 만한 힘과 능력을 갖춘 권력자는 오로지 페르슈타인 밖에 없었으므로……. 따르르릉. 알람마법이 침입자들이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자 데이몬은 일단 생각을 접었다. "우선 놈들을 먼저 처리해야겠군. 이번에는 어떤 놈들일까?" 잠깐 마나를 재배열하자 수정구에 영상이 맺혔다. 대략 10여명 남짓한 녀석들이 조심스럽게 동굴 입구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우선 놈들의 병력구성과 실력을 살폈다. 그의 입에서 짜증스럽다는 듯한 일성이 터져 나왔다. "이건 완전히 애송이들이로군. 차림새를 보아 용병들인 것 같은데 고작 저 정도 인원으로……응?" 일행의 후미에 제법 강한 기운을 풍기는 녀석을 발견하자 데이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용모를 보아 갓 스물을 넘긴 것 같았지만 실력이 제법이었다. "기운이 잘 갈무리되어있군. 어디서 검술을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제법 단련이 잘 되어 있어. 애석한 것은 대마법 갑옷을 걸치지 않았다는 것이지. 매직 미사일로 간단히 해결될 테니 윈슬럿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겠어." 수정구슬을 유심히 살피던 데이몬의 눈에 번쩍하고 반색의 빛이 일어났다. 가장 후미에서 걸어오는 계집아이를 보고 난 뒤의 일이었다. 기대했던 일이라 데이몬의 눈빛은 금세 게슴츠레해졌다. "호오! 계집애라……. 정말 반갑군. 안 그래도 무료한 참이었는데 모처럼 실력발휘를 할 수 있겠어." 일행 중에 여자가 섞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자 데이몬의 가슴속은 희열로 차 오르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골탕먹일 대상을 찾은 것이다. 지금까지 데이몬은 여자들에게 극도로 경멸 어린 눈초리를 받아왔다. 유난히 추악한 외모 때문에. 그것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 데이몬은 침입자들 중에 여자가 있으면 유난히 혹독하게 고생을 시켰다. 마법으로 모습을 흉측하게 바꾼 음식을 먹이는 것도 모자라서 거꾸로 매달아 놓기를 밥먹듯이 해 왔던 데이몬이었다. 불쌍하게도 그녀들은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자 동료들보다 몇 배나 혼이 나야 했으니……. 데이몬의 거처에 침입했다가 풀려나는 경우 파티에 속해있던 여자들은 거의 빠짐없이 동료들의 등에 업혀서 나가야 했다. 눈을 까뒤집은 채 게거품을 물고 말이다. 정말 악취미라고 밖에 말할 도리가 없는 유희였다. "오랜만에 신나게 계집의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겠군. 내 너를 위해서 특별 요리를 준비해 두지." 신이 난 데이몬은 몸을 일으켰다. 이 정도 규모라면 산에서 나무를 하고 있는 윈슬럿을 부를 것도 없었다. 데이몬의 장기인 매직 미사일 세례가 한 차례 돌아가면 모조리 뻗어버릴 테니까……. 목적지에 도착해서 멀리 보이는 동굴입구를 쳐다보는 일행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긴장이 어려있었다. 악명이 자자한 네크로멘서를 사냥하러 왔는데 긴장하지 않을 자는 없었다. 가장 느긋한 모습을 보이는 자가 카심이었다. 용병생활로 잔뼈가 굵은 그는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았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61회 도리어 그들을 이리로 이끌고 온 율리아나가 가장 떨고 있었다. 음침하기 그지없는 동굴의 모습에 잔뜩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저곳이 네크로멘서의 거처인가요?" "그렇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아예 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군요. 이곳에만 오지 않으면 해를 입을 일이 전혀 없다니까……." 카심이 불퉁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율리아나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뒤에서는 미첼이 주섬주섬 갑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오랜 여행을 대비해서 벗어놓은 투구라든지 정강이 받이 같은 보호장구를 완벽히 갖추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 옆구리에 걸어놓은 방패를 집어들자 카심이 눈을 빛냈다. "그것은 북부의 강국인 펜슬럿 기사단의 방패로군. 자네 혹시 펜슬럿과 연관이 있나?" 힐끗 카심을 쳐다본 미첼은 별달리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과거 아버님께서 그곳의 기사이셨죠." "문장을 보니 근위기사단 소속이셨군. 대단해. 어지간한 실력으론 펜슬럿의 근위기사가 되기 힘든데 말이야." 용병대장이 정확하게 사실을 알아내자 미첼은 제법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장차 강대국의 기사가 될 자신이 용병 따위에게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미첼은 더 이상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태도로 휙 소리나게 몸을 돌렸다. 카심은 머쓱해진 채 고개를 돌렸다. '자식. 잘난 체 하기는……. 저놈도 밥맛 없기는 공주란 년이나 마찬가지야.' 뒤쪽을 쳐다보자 용병단의 가장 신참 둘이서 긴장한 채 핼버드를 꼭 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보자 카심의 얼굴에 애틋한 표정이 감돌았다. 사실 용병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저들은 아직까지 용병 생활이 어울리지 않는 어린아이들이었다. '불쌍한 녀석들. 부디 오래 살아남아야 할 텐데…….' 둘 다 앳된 기색이 역력한 소년들이었다. 갈색 머리를 한 순해 보이는 얼굴의 소년은 하인리히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다소 날카로운 인상을 하고 있는 녀석은 제럴드라 불렸다. 둘은 여행 중 만난 친구 사이였다. 카심이 처음 그들을 본 것은 용병이 되겠다고 썬더버드 용병단을 찾아왔을 때의 일이었다. 원래 용병단에서 용병을 뽑을 때는 엄격한 심사조건이 있기 마련이다. 용병계에서 초심자들이 1년을 버틸 수 있는 확률은 통상적으로 10% 미만이다. 경험부족으로 전사하던지 아니면 견디지 못해 달아나는 경우 때문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용병단에서는 입단 조건을 무척 엄격하게 적용했다. 1년 이내에 죽거나 달아난다면 용병단으로써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제럴드와 하인리히 둘은 가차없이 탈락 판정을 받았다. 하인리히는 심성이 너무 유약했고 제럴드는 절름발이에다 왼손잡이였기 때문이었다. 사정이 어쩐지는 모르지만 둘은 어떻게든 용병이 되게 해 달라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어서 용병선발 담당자는 냉혹하게 그들을 내쳤다.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둘은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용병단 정문에 주저앉아 흐느끼기만 했다. 당시 독립하기 위해 휘하 용병들을 데리고 나가던 카심이 그들을 목격했다. 애처로운 느낌을 받은 카심은 그들을 자신의 용병단에 받아들이기로 작정했다. 물론 그것은 카심의 상황에서 결코 적절한 행동이 아니었다. 소년 둘은 적어도 5년 동안은 임무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밥만 축낼 존재들이었다. 오히려 그들을 돌보기 위해 전력이 분산된다는 위험요소도 있었다. 그런 부정적인 일면이 있었지만 카심은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그들을 받아들였다. "저, 정말 고맙습니다." 소년들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고마워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여러 번이나 용병단에서 퇴짜를 맞아왔던 것이다. 하인리히와 제럴드가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 된 것은 대충 이러했다. 그리고 그들은 약 3개월 동안 같이 지내며 정이 들만큼 든 상태였다. '녀석들 부디 살아남아야 할텐데…….' 보기보다 정이 많은 성품인 듯 카심은 한참동안 두 소년들을 쳐다보았다. 그가 퍼뜩 정신이 든 것은 율리아나가 들어가자고 신호를 보냈을 때였다. "뭐해요? 해가 떨어지기 전에 사악한 네크로멘서를 잡아야지……." "그럽시다. 결과야 어떻게 되든……." 불퉁하게 대꾸한 카심은 즉시 출동 명령을 내렸다. 과거의 경험을 살려 그는 가장 효율적인 형태로 병력을 배치했다. 불과 일곱 명으로는 제대로 된 병진을 구성하기란 불가능했지만 말이다. "너, 그러고 너는 나와 함께 선두에 선다. 공주님과 기사님은 가운데에 위치해 주시고 제럴드와 하인리히는 그 뒤에 선다. 그리고 패터슨은 한 명을 데리고 뒤를 맡아라." 율리아나와 미첼을 최대한 보호하는 형태로 병진을 구성한 카심은 그래도 가장 실력이 있는 용병 둘을 데리고 선두에 섰다. 내심 기사인 미첼이 힘을 보태주기를 기대하며 말이다. 하지만 미첼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율리아나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에 카심은 바짝 약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이렇게 인원이 없는 상태에서 녀석이 외곽을 맡아준다면 많은 힘이 될 텐데…….' 하지만 미첼에게도 꿍꿍이가 있었다. 최대한 안전한 장소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가 기회가 포착되면 네크로멘서에게 가차없이 달려들어 필살의 일격을 먹이고자 하는 것이 미첼의 속셈이었다. 대마법 갑옷이 없으므로 선두에 나설 수는 없었다. 외곽의 용병들이 몸으로 때우고 있는 사이 기회를 포착할 심산이었으므로 그는 율리아나의 옆에 꼭 붙어 있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율리아나를 철저히 보호하는 척 하면서 말이다. '이깟 용병 놈들이야 죽더라도 내 알 바가 아니지. 청부금을 받았으니 몸으로라도 때워야하지 않겠어?' 그는 힐끗 율리아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도톰한 입술을 꽉 다문 채 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을 보니 겁이 나긴 나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미첼은 무척 고소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제가 제일인 줄 아는 말괄량이가 이번에는 겁을 잔뜩 집어먹었군. 카르셀 말고는 널 공주 취급해줄 데가 있는 줄 알아?' 내심 크로센 제국으로 가는 목적이 궁금해져 왔지만 미첼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떤 방법으로든 크로센으로만 가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미첼에게는 두 번 다시 카르셀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없었다. 동상이몽(同床異夢). 구성원들이 생각하는 바가 모두 다르니 정말 기괴한 패거리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앞에 어떤 위험이 닥치는 줄도 모르고 조심스럽게 동굴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침입자들이 동굴 속으로 들어온 것을 감지한 데이몬은 슬며시 마나를 끌어 모았다. 환영 인사로 장기인 매직 미사일 다발을 퍼부으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무수한 침입자들을 무장 해제시켰던 무적의 무기였다. 대상이 소드 마스터나 팔라딘이 아니라면 매직 미사일 공격은 정말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물론 지금 들어오는 패거리들 중에는 이것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내 거처에 들어온 것을 환영하지. 인사가 조금 매울 거야." 순식간에 캐스팅을 마친 데이몬. 공기가 극도로 응축되며 새하얗게 빛나는 화살의 형태로 이루어져갔다. 그의 주위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수백 줄기의 매직 미사일이 생겨났다. "가라.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니 반갑게 맞아줘야지?" 슈슈슈슛. 데이몬의 주위를 맴돌던 매직 미사일 다발들은 동굴 속이 좁다는 듯 통로를 가득 메운 채 쏘아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나타날 침입자들의 허무한 종말을 예견하듯 말이다. 침입한 패거리들이 전멸하는 데는 불과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나름대로 진용을 갖춰 진입했건만 엄청난 수의 매직 미사일이 가한 공습에는 도저히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까아악." "윽." 어린 용병들과 율리아나는 어떻게 당하는지도 모른 채 기절해 버렸고 나머지 용병들도 하나 둘씩 바닥에 쓰러져갔다. 가장 실력이 뛰어난 미첼과 카심 만이 불과 1분 가량 버텼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한계였다. 계속해서 난타해 들어오는 매직 미사일 다발들. 그것을 줄기차게 막아내던 방패가 조각나자 결국 몸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검을 이용해서 서너 발 막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 난입하는 매직 미사일은 끝이 없었다. 데이몬이 발사한 매직 미사일은 상대가 쓰러지면 더 이상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대신 방향을 바꿔 서 있는 다른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다. 저항하던 용병들이 쓰러질수록 남은 이들을 향해 날아가는 매직 미사일의 수는 증가되었다. 결국 카심이 버티다 못해 털썩 쓰러져버렸고 최후까지 분전했건만 미첼 역시 힘이 다하고 말았다. "빌어먹을……. 대마법 갑옷만 있었다면……." 미첼은 이 한마디를 겨우 토해내고 혼절해 버렸다. 침입자들이 모두 쓰러지자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던 매직 미사일들은 순차적으로 소멸되고 있었다. "크크크. 주제도 모르는 멍청한 녀석들……." 통로에 한데 엉켜 어지럽게 쓰러져 있는 애송이들을 바라보며 데이몬은 괴소를 터뜨렸다. 이들은 지금까지 데이몬의 거처를 침입한 녀석들 중 가장 약한 패거리로 볼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형편없는 전력으로 자신을 잡으려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긴 상관없지. 이런 녀석들 열 무리가 왔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테니……. 이제 취미를 즐길 시간이 돌아온 건가?" 신음을 흘리며 널브러진 용병들을 둘러보며 데이몬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동굴 입구에는 나무를 산더미처럼 짊어진 윈슬럿이 들어오다 말고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데이몬의 눈짓을 받자 윈슬럿은 지체 없이 나뭇짐을 내려놓았다. "이 녀석들을 모두 특실에다 모시도록……. 계집이 끼여 있으니 오랜만에 만찬을 준비해야 할거야." 윈슬럿이 어슬렁거리며 걸어와 늘어진 용병들을 집어드는 것을 보며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음식을 보고 파랗게 질리는 계집의 얼굴을 보는 것은 근래에 새로 생긴 가장 큰 기쁨이었으므로 데이몬은 마음이 급했다. "일단 음식을 만들어놓고 나이트메어를 불러야겠군. 어디 일주일 동안 고생을 좀 해보라고." 음침한 괴소가 흘러나왔지만 그것을 들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매직 미사일에 난타 당한 나머지 하나도 빠짐없이 의식을 잃고 있었으므로……. "룰룰룰." 데이몬은 한가롭게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양념에 버무린 야채와 고기가 기름을 두른 후라이팬에서 고루고루 잘 볶이고 있었다. 후라이팬이 어느 정도 가열되자 데이몬은 그 위에 기름을 살짝 부었다. 화르르르. 기름이 급격히 타오르며 불꽃이 솟아올랐다. 재료를 직접 불로 그슬려 풍미를 더해주는 기술. 중원의 요리가 명성을 얻게 된 배경에는 이처럼 다양한 조리기술에 기인한 바가 컸다. 그릇에 수북히 담기고 있는 음식들에 데이몬의 마법 연출이 가해지면 보기만 해도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끔찍한 모습으로 바뀔 터였다. "크크크." 계집아이에게 이것을 먹일 생각을 하니 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데이몬이었다. 커다란 그릇 두 개에 음식을 가득 담은 뒤 데이몬은 거기에다 환영마법을 전개했다. 음식은 곧 아무리 먹성이 좋은 자라도 뱃속의 것을 모조리 게워내지 않고는 못 배길 형상으로 변해버렸다. 모든 절차가 끝나자 데이몬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요리는 이쯤하면 되었고……. 애송이들의 몰골을 한 번 보러 가볼까?" 마나도 운용하지 못하는 애송이들에게 매직 미사일은 상당히 매웠을 것이다. 아직까지 혼절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테니 거기에다 대고 나이트 메어를 소환해 버리면 그 뿐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놈들은 일주일동안 악몽을 꾸느라 살이 쭉 빠져버릴 것이 분명했다. 데이몬의 관심사는 오로지 계집아이 뿐이었다. 어떻게 골탕을 먹일까 하는 생각에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지는 데이몬이었다. "성깔이 있는 계집아이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래야 골려주는 재미가 있거든……." 흉측한 괴소를 머금으며 데이몬은 침입자들이 갇혀 있는 방에 들어섰다. 데이몬의 예상대로 패거리들은 윈슬럿이 모두 거둬다 가지런히 늘어놓은 상태였다. 침입한 녀석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큰 대자로 뻗어 있었다. 오로지 계집아이만이 곱게 의자에 묶여 있을 뿐이었다. 지능이 없는 듀라한이지만 주인이 무얼 하려는지 정도는 익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릇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뒤 데이몬은 계집아이의 턱을 잡고 들어올렸다. "어디 낮짝이 얼마나 반반한지 한 번 볼까? 응." 데이몬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거처에 침입한 계집아이는 그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여인의 용모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의 몸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 이럴 수가……." 정말 똑같았다. 유일하게 그에게 관심을 가져 준 여인. 데이몬으로 하여금 생전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갖게 만든 여인. 오백 년 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도 단 한 번도 잊어본 여인의 얼굴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데이몬은 완전히 넋이 나간 듯한 모습으로 떠듬떠듬 중얼거렸다. "다, 다프네……." 놀랍게도 율리아나의 얼굴은 다프네의 모습과 한 치의 틀림도 없었다. 긴 속눈썹과 오똑한 콧날, 도톰한 입술까지, 그녀의 모습은 마치 쌍둥이처럼 다프네와 닮아 있었다. 데이몬이 일순 그녀를 다프네로 착각했을 정도로 말이다. 아무리 보아도 똑같았다. 무려 오백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데이몬은 아직까지 다프네의 영상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고 눈앞의 여인은 바로 그 기억 속의 용모를 하고 있었다. 정말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주르르. 데이몬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프네와 닮은 여인을 보자 그녀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샘솟듯 치밀어 올랐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62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려오는 기억들이었다. 이카롯트의 궁정에서 그녀와 나누던 대화. 볼에 살짝 와 닿는 입술의 부드러운 감촉. 그저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것으로 세상의 행복을 모두 가졌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었다. 서서히 치밀어 오르는 그때의 감정들. 그것들이 복수에 대한 일념으로 꽁꽁 얼어붙은 데이몬의 가슴을 서서히 녹이고 있었다. 잠시라도, 심지어 찰나의 순간이라도 그녀를 다시 보게 된다면 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그 얼마였던가? 그녀의 모습을 가슴속에만 깊숙이 간직한 채 이따금씩 떠올려 보곤 했던 데이몬. 그의 앞에 다프네와 꼭 닮은 여인이 등장한 것이다. 정말 운명의 장난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출현. 데이몬은 율리아나의 얼굴을 하염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물론 그녀가 다프네가 아니란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데이몬은 지금 그 행동말고는 할 도리가 없었다. 그의 시선은 율리아나가 깨어날 때까지 그녀의 얼굴에 못 박혀 있었다.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누, 누구시죠?" 깨어난 율리아나는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기절했다가 깨어나 보니 웬 낯선 노인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삭신이 지끈지끈 쑤셔왔지만 율리아나는 얼른 냉정을 되찾고는 상대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노인은 예상외로 평범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아르카디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그저 그런 얼굴이었다. 몸에 걸친 검은 로브가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말이다. 특이한 것은 노인의 표정이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특히 노인의 눈동자에는 격정의 빛이 격렬하게 퍼져 나오고 있었다. 거침없이 들여다보는 바람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잠시동안 노인을 관찰한 율리아나는 무척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제 얼굴을 그렇게 쳐다보시는 거죠?" 노인의 시선이 율리아나와 딱 마주쳤다. 노인은 무척 주저하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넌 누구지?" 고개를 갸웃하던 율리아나는 순순히 이름을 밝혔다. "전 율리아나라고 해요. 카르셀 왕국의 공주이기도 하죠. 그런데 왜 제 이름을……." 대답을 들은 노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실낱같은 기대를 걸었다가 여지없이 꺾여버린 듯한 형상이었다. "역시……." 참혹하게 일그러진 노인의 얼굴을 율리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이 아이는 결코 다프네가 아냐. 단지 용모가 흡사한 전혀 다른 계집아이일 뿐이지.' 마음을 거듭 다잡았지만 데이몬은 도저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냉정을 되찾는 것이 이토록 어려울 줄은 꿈에도 몰랐던 데이몬이었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다프네가 아니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환생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없었다. 다프네는 아직 죽지 않았다. 석화 마법에 걸려 돌이 된 상태로 드래곤 로드의 레어에서 영면을 취하고 있는 그녀가 아르카디아에 나타날 리가 없었으므로……. 소녀와 다프네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도저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가 쳐다보고 있는 사이 율리아나의 눈빛이 점점 날카롭게 변해가고 있었다. 정황을 미루어 데이몬의 정체를 어느 정도 판단한 것 같았다. "당신은 누구죠? 혹시 이 동굴의 주인인가요?" 데이몬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정신 없이 율리아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느라 그럴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럴수록 율리아나의 눈빛은 사나워지고 있었다. '틀림없어. 이곳은 사악한 네크로멘서의 거처가 분명해. 그렇다면 저 늙은이는…….' 단정을 내린 율리아나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굴하지 않고 맞받았다. 결코 질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던 그녀의 눈에 용병대장 카심이 고개를 드는 장면이 들어왔다. 용병 생활로 맷집이 단련된 탓에 카심은 깨어나는 것도 빨랐다. "아이고 머리야."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리는 카심에게 율리아나는 잽싸게 눈짓을 했다. 다행히 사악한 네크로멘서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카심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무기가 없었지만 카심은 맨손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하물며 대상이 마법사라면 더욱 손쉬운 상대였다. 그의 굳센 팔꿈치에 목이 휘감긴다면 제아무리 마법사라도 힘을 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애당초 희망사항에 불과한 일이었다. 등을 보이고 있는 마법사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잽싸게 목을 휘감으려던 카심은 등판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커억." 척추가 부러지는 듯한 통증에 카심은 고통에 겨운 비명소리를 토해냈다. 얼마나 세게 얻어맞았던지 카심은 마치 곤두박질치듯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의 앞으로 전투용 도끼를 치켜세운 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 데이몬을 그림자처럼 호위하는 윈슬럿이었다. 윈슬럿은 쓰러진 카심의 등판을 밟고 지긋이 힘을 주었다. "끄으으." 참을 수 없는 통증에 카심의 눈동자에서 핏발이 곤두섰다. 듀라한이 밟고 있는 곳이 정확히 허파 부분이었으므로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는 것이다. 숨통이 콱 막힌 카심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까무러쳐 버렸다. "세, 세상에……." 율리아나는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카심이 당한 것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쓰러뜨린 상대가 보기만 해도 끔찍한 괴물이었으니……. 목 위부분이 텅 비어있는 것도 모자라서 잘려나간 머리통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괴물이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옆구리에 끼여 있는 머리통이 마치 살아있는 듯 데룩데룩 눈알을 굴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더욱 소름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을 봐서 기절해야 합당한 듯 보였지만 율리아나는 역시 당찬 소녀였다. 도리어 그녀는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이제 그녀는 데이몬의 정체를 명확히 파악한 상태였다. "네놈이 바로 사악한 네크로멘서였구나?" "………." "악독한 놈. 비겁한 방법을 써서 우릴 무력화시키다니……. 하늘이 겁나지도 않느냐?" 맹랑하다고 볼 수 있는 율리아나의 반응에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비겁한 방법이라니 무슨 소리지? 난 엄연히 공격 마법인 매직 미사일을 쓴 것이거늘……." "나타나서 통성명을 하고, 싸우겠다고 선포하고 나서야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기사도 정신이다. 넌 그런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았다." 정말 얼토당토않은 억지였다. 그때서야 냉정을 되찾은 데이몬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미안하지만 난 기사가 아니야. 쓸데없는 기사도 정신 따위나 지키려다간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기 딱 알맞지." "더러운 놈. 그래서 네놈이 사악하단 말을 듣는 것이다."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욕설. 율리아나는 외모와는 달리 상당히 입이 거친 소녀였다. 한 눈에 보더라도 천방지축에다 대단한 말괄량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실 데이몬은 이런 왈가닥을 다루는데는 이골이 나 있었다. 그가 이곳에 머문 몇 년 동안 헤아릴 수 없는 패거리들이 침입을 시도했고 그 중에는 여자도 적지 않게 끼여 있었다. 사악한 네크로멘서를 사냥하러 온 여자들인 만큼 개중에서 평범한 요조숙녀는 단 하나도 없었다. 하나같이 닳고닳은 노련한 여자 용병이나 소서리스가 태반이었다. 거친 용병이나 병사들 과 오랜 시간을 보낸 여자들이라 성깔이나 성질머리들이 보통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의 성깔은 데이몬에겐 추호도 통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넋이 반쯤 나간 채 얼굴이 퉁퉁 부은 모습으로 이곳을 나섰다. 생각해 보면 지극히 합당한 일이었다. 듀라한에게 시집보내겠다는 엄포 아래 보기조차 끔찍스런 음식들을 강제로 먹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하루를 꼬박 거꾸로 매달아놓기가 일수였다. 그러면 그녀들은 죽을힘을 다해 치마가 흘러내리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어야 했다. 힘이 모조리 빠질 때까지 말이다. 이런 지경에 처하면 어떤 여자라도 필경 의지력이 꺾이기 마련이다. 일단 기세를 한 번 꺾어만 놓으면 여자들은 예외 없이 순한 양이 되었다. 하나같이 눈물을 펑펑 흘리며 제발 용서해 달라고 애걸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살려주세요. 엉엉." "제발.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흑흑." 여자들의 눈물어린 애원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눈썹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 뜻을 관철시켰다. 이곳에 들어온 여자들은 누구도 빠짐없이 데이몬이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먹어야 했으며 하루를 꼬박 거꾸로 매달려 있어야 했다. 결과는 거의가 대동소이했다. 단 하나도 예외 없이 눈을 까뒤집은 채 게거품을 물고 동료들의 등에 업혀 나가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제법 성깔이 있어 보이는 눈앞의 소녀도 그 방법을 쓴다면 똑같은 모습을 보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러고 싶지는 않았던 데이몬이었다. "그만 두자. 너에게만은 그 방법을 쓰고 싶지 않다." 그래도 율리아나는 입에 담기조차 힘든 욕설을 마구 퍼부어 대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데이몬은 화가 나지 않았다. 단지 다프네와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율리아나의 방종을 묵인할 수 있었던 데이몬이었다. 그러던 사이 미첼과 용병들이 하나 둘씩 깨어나고 있었다. "여, 여긴 어디지? 응?" 미첼의 눈이 가늘어졌다. 율리아나의 앞에 서 있는 데이몬을 발견한 것이다. 검은 색 로브. 상대는 한 눈에도 마법사란 것을 알 수 있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마법사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거의 동시에 냉랭한 경고성이 들려왔다. "그 자리에서 조금만 움직인다면 머리통이 무사하지 못할 걸……." 미첼은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물론 네크로멘서의 경고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목덜미에 와 닿는 싸늘한 금속의 느낌. 바로 그것 때문에 동작을 멈춘 것이다. 미첼은 슬며시 고개를 돌려 목을 겨냥하고 있는 자를 쳐다보았다. 그를 보자마자 미첼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헉." 아무리 남자라고 하지만 머리통이 없는 괴물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는 없다. 특히 듀라한을 본 적이 없던 미첼이라 더욱 소름이 끼쳤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이, 이건 뭐야." 의외로 대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듀라한이라 불리는 녀석이지. 전투력이 상당히 뛰어나서 상대하기가 결코 쉽지 않아. 상황을 봐서 네크로멘서의 수족으로 있는 녀석 같다." 미첼의 말을 받은 자는 카심이었다. 어느새 깨어났는지 그는 등판을 어루만지며 몹시 아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휘하 용병들도 대부분 깨어난 상태였다. 하나같이 얼굴이 우거지상이 된 채 끙끙 앓으며 전신을 주무르고 있었다. 그래도 패거리를 책임지고 있는 대장답게 카심이 용감하게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이 동굴의 주인이오?" "그렇다." "마법 실력이 대단하구려. 제대로 보지도 않고 뻗어버렸으니……. 혹시 흑마법을 익혔소?" 이리 저리 너절하게 말을 늘어놓았지만 카심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잡담을 나누다 느닷없이 달려들어 상대를 제압하려는 심산에서였다. 무기가 없는 상태에서 마법사를 제압하려면 오로지 그 방법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데이몬이 얄팍한 수에 넘어갈 리가 만무했다. 노련하기로 따지자면 이미 카심의 머리 꼭대기에 서 있던 데이몬이 아니던가? "빤히 보이는 수작이군." 짤막한 냉소와 함께 데이몬의 몸이 급격히 솟구쳤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에서 10미터 가량 떨어진 허공에 몸을 둥둥 띄웠다. 물론 일행의 손이 전혀 닿지 않는 곳이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겠지?" 데이몬의 주위로 또다시 백색 화살 다발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행들을 모조리 쓰러뜨렸던 공포의 매직 미사일 다발이었다. 그것을 본 패거리들의 눈망울엔 또다시 공포의 빛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통증 때문에 본능적으로 두려운 감정이 치밀어오른 것이다. 보다 못한 카심이 앞으로 나섰다. "자, 잠깐. 공격하지 마시오. 보다시피 우리에겐 무기가 없소." "그게 무슨 상관이지? 어차피 너희들은 엄연히 내 포로야. 각오를 단단히 하고 들어왔을 테니 죽어도 여한은 없으렷다?" 몸 주위로 매직 미사일을 빙글빙글 돌리며 하는 협박이라서 효과는 확실했다. 패거리들 대부분은 사색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매직 미사일에 여러 차례 얻어맞았던 미첼은 다리까지 후들거리고 있었다. 겁을 먹지 않는 것은 오로지 율리아나와 카심 밖에는 없었다. "이 비열한 자식. 비겁한……흡." 감정이 격양된 율리아나가 또다시 욕설을 퍼붓자 카심이 대경실색해서 율리아나의 입을 막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결코 상대를 격동시켜서는 안 되는 법이다. 어쨌거나 상대가 마음만 먹는다면 패거리가 단숨에 몰살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일단 우리들을 죽이지 않은데 대해서 감사드리오. 이렇게 가둬둔 것을 보면 뭔가 바라는 바가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무얼 원하시오." "상황판단이 빠른 녀석이군."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의자 하나가 날아와 데이몬 옆 허공에 둥둥 떴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63회 데이몬은 허공을 밟고 걸어가서 의자에 앉았다. 그런 뒤 느긋하게 아래를 내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원래는 너희들을 단단히 혼내주려고 했다. 다시는 이곳에 침입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런 것이라면 굳이 신경 쓰실 필요가 없소. 실력차이가 현저히 난다는 것을 안 이상 두 번 다시 이곳에 오지 않겠소. 그것은 내 명예를 걸고 장담하겠소." 카심은 열심히 상대를 달래려 했다. 하지만 데이몬은 별달리 수긍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어차피 1주일동안 꼬박 곤욕을 치르고 나면 두 번 다시 이곳에 올 마음이 싹 사라질 것이다. 그러기 전에 네놈들의 정체와 목적이나 알고 싶구나." 카심의 손을 풀어낸 율리아나가 냅다 고함을 내질렀다. "우린 네놈 같은 사악한 악당을 잡으러 온 정의의 기사단이다. 악은 반드시……흡." 다급하게 틀어막은 카심의 손에 의해 율리아나의 말은 또다시 끊길 수밖에 없었다. 보고 있던 데이몬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껄껄껄. 참으로 앞뒤 못 가리는 천방지축에다 건방진 계집아이로구나. 하긴 네 말이 맞기는 하다. 사실 난 원래 사악하고 잔인하기 그지없는 악당이니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카심과 미첼의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죽어들었다. 흑마법사에게 생사여탈권을 맡긴 상태에서 율리아나가 결국 일을 내고 말았던 것이다. 특히 카심의 얼굴은 눈뜨고는 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율리아나에게 으르렁댔다. "이런 빌어먹을……. 살고 싶으면 아가리 닥치고 가만히 있으시오." 진득하게 욕을 얻어먹은 율리아나가 눈에 쌍심지를 돋웠다. 욕을 먹고 가만히 있는다면 결코 그녀가 아니었다. 하지만 입이 단단히 틀어 막혀 있는지라 율리아나는 한 마디 말도 못했다.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카심을 노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데이몬은 유심히 지켜보았다. '정말 다프네와 흡사하게 생겼군. 화를 내지 않는다면 도저히 분간을 할 수 없겠어.' 물론 그는 다프네가 화를 내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프네를 떠올리자 데이몬의 머릿속엔 또다시 처연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돌이 되어 있을 다프네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려왔다. 그 탓에 데이몬은 멍청한 얼굴로 율리아나의 얼굴을 한참동안 주시했다. 마치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 모습을 보던 미첼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슬그머니 율리아나에게 다가온 미첼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귀엣말을 건넸다. "상황을 보아 놈은 너의 미색에 단단히 홀려있는 것 같다." 그 말을 들은 율리아나는 몸서리를 쳤다. 보기만 해도 가증스러운 사악한 흑마법사가 자신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니……. 착각도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니었지만 율리아나는 그것이 사실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처럼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첼이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기름을 부었다. "우리의 목숨은 모두 저놈 손에 달려있어. 그러니 미안하지만 네가 우리를 좀 살려줘야겠다. 어떻게 하겠니? 여기서 모두 떼죽음을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말이 끝나자 율리아나는 타오르는 듯한 눈초리로 미첼을 쏘아보았다. 그의 말은 자신을 팔아서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건지자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욕설을 냅다 퍼부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막힌지라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말을 용케 들은 카심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자네는 자네가 모시는 왕녀를 흑마법사에게 넘겨주고 이대로 우리만 달아나자는 것인가?"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일단 우리가 살아나야만 나중에라도 율리아나를 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떠듬떠듬 변명을 늘어놓는 미첼을 보며 카심은 율리아나의 입을 막은 손을 풀었다. 그의 얼굴엔 냉랭한 기운이 떠돌고 있었다. "자네는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난 그럴 수 없네. 밉든 곱든 간에 그녀는 내 고용주일세. 다시 말해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보호해야 한다는 뜻이지." 겨우 풀려난 율리아나는 카심에게 고맙다는 듯한 눈빛을 보낸 뒤 다짜고짜 미첼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짝. 정통으로 따귀를 얻어맞은 미첼은 얼굴을 감싸안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던 카심은 무척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 거만하게 행동하던 미첼이 결코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표독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간 율리아나는 미첼의 멱살을 부여잡고 으르렁거렸다. "너 이 자식. 돌아가는 길로 이 사실을 당장 네 아버지에게 낱낱이 고해 바칠 테다……." 그 말에 미첼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아버지인 헤일즈는 정말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고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자신은 그 즉시 초주검이 되어버릴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자신들이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가정 하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말이다. 복수(?)를 마친 율리아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데이몬을 올려다보았다. "쳇. 꼴에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하지만 헛수고야. 네놈에게 아양을 떠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말 테니까……." 퍼뜩 정신을 차린 데이몬은 고소를 머금었다.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었다. 어떻게 대꾸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돌연 카심의 의기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힘이 없어 당신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후회는 없소. 내 비록 기사는 아니지만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나이의 한 사람이오. 나를 죽이기 전에는 그녀에게 손을 댈 수 없을 테니 그렇게 아시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율리아나의 앞을 가로막은 카심의 모습에서는 사나이의 의기가 여과 없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휘하의 용병들도 부랴부랴 다가와서 율리아나를 에워쌌다. 자신의 목숨을 전혀 돌보지 않는 태도. 초록은 동색이라고 휘하 용병들조차 카심의 성격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데이몬은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이럴 경우에 대한 해법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일단 놈들을 좀 고분고분하게 만들어야 되겠군. 윈슬럿." 심령이 통하는 터라 윈슬럿은 생각만 해도 데이몬의 명령을 알아들을 수 있다. 데이몬의 뜻을 숙지한 윈슬럿이 배틀 액스를 내팽개친 채 용병들에게 다가갔다. 왼손에 들린 머리통을 마치 블랙 잭(Black Jack: 양말에 모래나 돌맹이를 집어넣어 만드는 무척 간단한 무기. 상대방의 뒤통수를 후려쳐 기절시키는데 아주 유용한 무기이다.)처럼 휘두르며 말이다. "크아아아." 머리통을 무기 삼아 달려드는 시체(?)를 본 용병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경험 많은 카심은 상대의 정체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조심해라. 저놈은 듀라한이라 불리는 언데드 몬스터다. 괴력을 가지고 있으니 결코 경시해서는 안된다. 신호가 떨어지면 일시에 달려들어 놈을 깔아뭉갠다. 알겠나?" 카심이 주의를 주자 용병들은 즉각 복명했다. "예." "좋다. 그럼 신호를 기다려라" 용병들은 잔뜩 긴장한 채 다가오는 윈슬럿을 쳐다보고 있었다. 카심의 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말이다. 마침내 카심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지금이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용병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도합 여덟 명이 깔아뭉갠다면 놈이 제 아무리 언데드라도 꼼짝할 수 없을 것이란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히 오산이었다. 비록 언데드가 되었지만 윈슬럿은 생전에 대단한 실력을 가진 용병이었고 그때 익혔던 기술은 거의 본능적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게다가 어지간한 타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방어력을 가진 언데드임을 감안하면 이것은 이미 결정된 승부였다. 퍽, 퍽, 퍽, 퍽. 윈슬럿이 휘두르는 머리통에 얼굴을 얻어맞은 용병들은 그대로 기절한 채 뻗어 버렸다. 코피를 낭자하게 내쏟으며 말이다. 듀라한의 머리통은 엄청난 강도를 지녔다. 전투를 벌일 때 방패 대용으로 사용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노릇이다. 검도 들어가지 않는 판국인데 맨 얼굴로 맞받았으니 충격이 오죽 하겠는가? 용병들은 순식간에 전멸해버리고 마지막으로 우두머리인 카심만이 남았다. 지금까지 먹은 용병밥이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을 증명하듯 카심은 윈슬럿의 일격을 가까스로 피해냈다. 틈을 발견한 카심은 강철같은 주먹을 윈슬럿의 복부에 사정없이 박았다. 퍽. 하지만 신음소리는 도리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크윽." 마치 나무둥치를 친 듯한 느낌에 카심은 주먹을 부여잡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듀라한에 대해 소문만 들어보았지 실제로 상대해 본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몸뚱이가 이토록 단단할 줄 카심은 꿈에도 몰랐다. 웬 모기가 무느냐는 듯이 가볍게 몸을 돌려 머리통을 휘둘러대는 듀라한. 몸을 날려 피해내기는 했지만 애석하게도 윈슬럿의 반사신경은 카심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납작하게 몸을 숙여 머리통을 피해낸 것은 좋았지만 다음에 가해지는 발길질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퍽. 정통으로 면상을 걷어 채인 카심은 기절한 채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완전히 큰 대자로 뻗어버린 것을 보니 당분간 일어나지는 못할 듯 싶었다. 마지막 방패막이 사라지자 율리아나는 사시나무 떨 듯 떨 수밖에 없었다. 보기만 해도 끔찍한 듀라한의 앞에 홀로 내팽개쳐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방해물을 모두 제거한 윈슬럿은 율리아나를 향해 어슬렁거리며 나아갔다. 그때 무언가가 윈슬럿의 등을 파고들었다. "이야압." 우렁찬 호통소리와 함께 둔탁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퍼퍽. 그와 함께 윈슬럿의 강인한 몸뚱이가 휘청했다.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흔들거리는 것을 보니 상당한 타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배틀 액스 하나가 윈슬럿의 등판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윈슬럿이 내팽개친 바로 그 배틀 액스였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듀라한을 보며 미첼이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이놈 맛이 어떠냐?"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이 몸으로 때우는 사이 미첼은 살금살금 걸어가 듀라한이 팽개친 전투용 도끼를 집어들었던 것이다. "되었어." 미첼은 무기를 들고나서야 용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이미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 있었고 무기만 있다면 듀라한 따위에게 겁먹을 필요가 없었다. 미첼은 도끼에 마나를 충만하게 불어넣은 뒤 율리아나에게 다가서려던 윈슬럿을 덮쳤다. 공격은 정확히 적중했고 듀라한은 거의 전투불능으로 보일 정도의 큰 상처를 입었다. 그 모습을 보던 데이몬이 눈살을 찌푸렸다. "윈슬럿에게 타격을 입히다니 제법 실력이 있는 놈이었군. 듀라한의 몸뚱이를 뚫기가 별로 쉽진 않은데 말이야. 게다가 기습을 가하는 것을 보니 정정당당한 것과는 거리가 상당히 있는 녀석 같고……." 모욕적인 말에 미첼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정당당하지 않다는 말을 듣고 그 누가 기분이 좋겠는가? 미첼은 자신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멀리서 예고도 없이 매직 미사일을 날린 당신 역시 비겁하긴 마찬가지 아니오?" "멍청하기는……. 난 마법사야. 게다가 사악하고 비열한 악당이기도 하니 수단 방법을 가릴 필요가 전혀 없지." 능글맞게 되받아 치는 데이몬의 넉살에 미첼은 말문이 딱 막혀버렸다. 스스로 악당이라고 자청하는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고개를 돌린 데이몬은 단전에서 어둠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아직까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윈슬럿을 향해 집중시켰다. 어둠의 마력은 허공을 격한 채 윈슬럿의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크아아아아." 생명의 근원이 주입되자 윈슬럿은 두 팔을 치켜들고 기성을 질렀다. 오른손을 뒤로 돌려 등에 박혀 있는 배틀 액스를 뽑아든 윈슬럿의 모습은 마치 되살아난 것처럼 활력이 넘쳤다. 비틀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쓰쓰쓰쓰. 등에 길게 패인 상처에 녹색 기운이 어리더니 급속도로 치료되기 시작했다. 듀라한이란 원래 죽어버린 시체에다 어둠의 마력을 주입해서 생명을 부여한 언데드 몬스터였다. 따라서 어둠의 마력만 충만하면 신체의 재생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진다. 언제 상처를 입었냐는 듯 미첼을 매섭게 쏘아보는 윈슬럿. 그 모습에 질리지 않았다면 인간이 아니리라……. 미첼은 파리한 안색으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의 귀로 네크로멘서가 발한 듯한 일성이 들려왔다. "도전을 받아주겠다. 검술실력에 자신이 있다면 내 듀라한과 한 번 싸워보아라." "맨손으로 말이오?" "무기와 갑옷은 돌려주지."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마자 묵직한 것이 미첼의 옆에 떨어졌다. 그것은 동굴에 들어올 당시 미첼이 입고 있던 투구와 갑옷이었다. 곧이어 그의 검이 검집에 꽂힌 채 떨어졌다. 철그렁.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검을 손에 쥐고 나서야 미첼은 용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묵묵히 갑주를 걸치기 시작했다. 먼저 건틀릿을 끼고 정강이받이를 착용한 미첼은 흉갑의 가죽끈을 잡아당겨 꼭 죄었다. 매직 미사일에 난타당한 때문에 보기 흉하게 패여 있었지만 나름대로 방어에 도움은 될 것이었다. "내가 도와줄게." 절박하기는 마찬가지였는지 율리아나도 한 손 거들었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64회. 그녀가 갑옷 입는 것을 거들어주는 것은 지금까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둘의 손발이 척척 맞는 것이다. "꼭 이겨야 해. 알겠지? 넌 카르셀 제일의 검술실력을 가지고 있는 검사야. 저까짓 언데드 몬스터를 당해내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아. 만약 네가 승리한다면 아까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할께." 무척 불안한 눈초리로 어떻게 해서든 미첼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려는 율리아나였다. 그녀에게 남은 희망은 오로지 미첼 밖에 없었다. 갑옷을 모두 착용한 미첼은 검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무기를 들자 미첼의 전신에서는 기사다운 풍모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미첼은 자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데이몬을 올려다보았다. "승부의 결과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오?" "그렇다. 내 듀라한이 이긴다면 너희들은 어쩔 수 없이 내 명령에 따라야 할 것이다." "만약 내가 이긴다면……." 데이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모조리 풀어주지. 하지만 그것은 대결에서 이길 경우에만 적용되겠지?" "알겠소." 고개를 끄덕인 미첼은 체내의 마나를 끌어올려 보았다. 아버지에게 어릴 때부터 마나 연공법을 배웠던 탓에 그가 운용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것이지만 그는 오러 블레이드를 표출할 수 있는 실력자였다. 마음만 먹으면 카이트 실드(Kite Shield : 가장 오래된 방패 중 하나로써 나무 위에 가죽을 입히고 그 테두리를 금속 테로 둘러싸는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방어구)정도는 일격에 잘라버릴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상기한 미첼은 눈빛을 빛내며 윈슬럿을 쳐다보았다. '듀라한에겐 오러 블레이드가 분명히 통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승산은 오히려 나에게 있다. 기회를 보아 오러 블레이드로 먼저 도끼를 잘라버린 뒤 놈을 두 조각 내어버리겠다.' 윈슬럿에게 한 번 치명상을 입혔던 경험 때문에 미첼은 필승을 자신하고 있었다. 아까는 급한 나머지 배틀 엑스에 오러 블레이드를 그리 많이 끌어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가진 마나를 모두 검에 불어넣는다면 아무리 단단한 듀라한의 몸뚱이라도 배겨나지 못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미첼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윈슬럿이 들고 있는 황금빛 배틀 액스는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지만 실상은 엄청난 아티팩트에 속하는 것이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무리 없이 견딜 수 있는 최상급의 신기였던 것이다. 이 도끼는 7백년 전 트루베니아 드워프족의 족장이었던 칼브룬의 독문 무기라는 이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체가 버너디움이라는 무척 희귀한 금속으로 되어 있었다. 버너디움. 운석이 떨어진 곳에서만 아주 소량 발견되는 것으로 단단하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금속이다. 운석이 작렬하는 충격과 고열로 인해 성질이 변한 철이란 설이 있으며 제련하기가 엄청나게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하지만 특유의 강도로 인해 제련만 제대로 한다면 엄청난 무기로 탈바꿈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제련된 버너디움은 오히려 드래곤 본이나 미스릴조차 능가하는 강도를 보였다. 때문에 드워프들은 버너디움을 가공하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거듭해왔다. 그 결과 탄생된 무기가 바로 윈슬럿이 들고 있는 배틀 액스였다. 오랫동안 도끼를 애용했던 칼브룬이 죽고 난 뒤 배틀 액스는 우여곡절 끝에 드래곤의 손에 넘어가 버렸고 인크레시아 속에 오랫동안 쳐 박혀 있어야 했다. 그것이 듀라한인 윈슬럿의 손에 들려서야 다시금 세상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라인델프에 의해 도끼의 유래를 알게 된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그것을 윈슬럿에게 지급했다. 팔라딘이나 소드 마스터에게 유난히 약한 면모를 보이는 윈슬럿의 단점을 보강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 도끼를 사용한다면 윈슬럿이 팔라딘 따위에게 꿀릴 일이 없다. 상대가 소드 마스터라면 조금 버겁겠지만 말이다. "준비가 모두 끝났소." 미첼이 방패를 들고 자세를 잡자 윈슬럿은 기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크아아아." 황금빛 배틀 액스가 파공성과 함께 미첼의 방패를 향해 날아들었다. 푸캉. 방패에 가해지는 충격이 예상외라서 미첼은 잠시 중심을 잃어버렸다. 그것도 방패를 비스듬히 기울여 힘을 흘려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만약 정면으로 막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던 미첼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보나마나 팔뼈가 박살이 나버렸을 테지." 하지만 딴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듀라한은 정말 무시무시한 기세로 미첼을 휘몰아쳐 오고 있었다. 등판에 도끼가 박힌 원한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 윈슬럿은 흉흉한 기색으로 미첼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미첼은 비교적 무난하게 공격을 막아냈다. 무시무시한 윈슬럿의 힘을 적절하게 흘려가며 말이다. 결투를 보고 있던 데이몬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녀석 제법이로군. 무게 중심에서부터 균형까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아. 힘을 흘려버리는 기술도 일품이고.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처음부터 제대로 배웠군." 한때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었다는 경험에 힘입어 데이몬은 비교적 정확하게 미첼의 상태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힘과 기술의 우위에서부터 예상되는 결과까지 모두 말이다. 그는 이미 미첼이 지금 필살의 일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까지 짐작하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한 판에 결판을 지을 모양이로군. 기를 모은 뒤 윈스턴의 도끼를 일검에 잘라내고 여새를 몰아 가차없이 허리를 토막낼 심산 같군. 하지만 헛수고일걸?" 데이몬의 예상대로 미첼은 열심히 공격을 막아내며 마나를 모으고 있었다. 그가 펼칠 수 있는 최강의 기술을 전개해서 상대를 무기와 함께 토막쳐버릴 생각인 것이다. 마침내 때가 왔다. 전신이 마나로 충만해지는 것을 느낀 미첼은 그것을 모조리 검에다 집중시켰다. 츠츠츠츠. 미첼의 검이 짙은 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오러 블레이드. 기를 검에 충만시켜 검의 강도를 비약적으로 높임과 동시에 그 무엇이라도 베어버리는 고도의 기술이 발휘된 것이다. 푸른빛이 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완성되지 않은 오러 블레이드(검기)로 보였지만 색이 너무나 뚜렷하고 또한 찬연했다. 검에서 일정길이 이상 솟아나야 하는 검강(완성된 오러 블레이드)에는 조금 못 미치겠지만 미첼의 검에 서려 있는 검기에는 접촉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위력이 있었다. 그러니 미첼이 승리를 확신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검에서 푸른빛을 줄기줄기 흘리며 미첼은 상대에게 벼락같이 육박해 들어갔다. 지금까지 몰린 수세를 말끔히 떨쳐버리며 말이다. "하아앗." 거센 기합소리. 예상대로 듀라한은 도끼를 모로 세워 검을 막아갔다. 과연 지능이 없는 언데드다운 행동이었다. 미첼은 검과 도끼가 작렬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푸캉. 요란한 음향과 함께 미첼의 검은 허공에서 가로막혔다. 단숨에 토막날 것이란 예상을 뒤엎고 도끼는 유유하게 검을 막아냈다. 뜻밖의 상황에 미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 세상에 한낱 도끼가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내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러 블레이드가 어떤 기술인가. 단단하기로 이름난 드래곤 본조차 일격에 잘라버리는 무적의 기술이 아니던가. 오러 블레이드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같은 종류의 오러 블레이드 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은 그것을 익힌 검사의 성취에 따라 승부가 판가름나는 것이다. 그런데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할 수 없는 듀라한 따위가 자신이 펼친 무적의 기술을 가로막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이익." 부아가 치민 미첼은 몸 속의 기운을 깡그리 검에다 불어넣었다. 츠츠츠츠. 그럴수록 검에 서린 푸른빛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허사였다. 은은한 금빛이 나는 것만 제외하면 무척 평범해 보이는 듀라한의 외날 도끼는 오러 블레이드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둘은 마치 힘 자랑이라도 하듯 무기를 맞대고서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움직인 것은 윈슬럿 쪽이었다. "크아아아." 윈슬럿은 기성을 지르며 도끼를 왈칵 밀쳐버렸다. 그 바람에 미첼은 비틀비틀 뒤로 물러나야 했다. 다시 자세를 잡기는 했지만 미첼의 얼굴에는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의 필살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이, 이럴 순 없어……." 하지만 길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상대의 공세가 마치 폭풍우처럼 휘몰아쳐 오고 있었으니까……. 미첼은 한 눈 팔 정신도 없이 격전에 몰입해야 했다. 챵챵챵챵. 무시무시할 정도로 격렬한 접전이었다. 둘은 마치 싸우기 위해 태어난 전사처럼 쉴새없이 공방을 주고받았다. 놀라운 것은 듀라한의 기술이 상상외로 엄청나다는 점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조련 받은 탓에 미첼의 검술은 평범한 기사의 수준을 상회하고 있었다. 회피기술이나 페인트 모션(허초)까지 모든 면에서 전혀 흠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기술이 뛰어나기는 상대하는 듀라한도 마찬가지였다. 윈슬럿은 아무 무리 없이 미첼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미첼이 전개하는 갖가지 기술을 한치의 빈틈도 없이 모조리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도저히 언데드로 볼 수 없는 실력이었다. 둘의 격전은 말 그대로 용호상박(龍虎相搏) 그 자체였다. 엇비슷한 실력이었으므로 어느 한 쪽도 쉽사리 승기를 잡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윈슬럿이 이긴 싸움이라 봐야 했다. "어디서 이런 녀석이 나왔지?" 미첼의 숨이 서서히 거칠어지고 있었다. 물론 언데드인 듀라한이 지칠 까닭이 없는 반면 살아 숨쉬는 인간인 미첼은 필연적으로 지치기 마련이다. 지친 몸으로는 싸우는데 한계가 있다. 꼬박 30분 가량을 정신 없이 치고 받던 인간과 언데드의 접전에서 결국 승리의 여신은 듀라한의 팔을 들어주었다. "크윽." 검과 도끼가 맹렬히 격돌하는 순간 팔에 힘이 빠진 미첼은 결국 검을 놓치고 말았다. 지칠 대로 지쳐 입에서 단내가 풀풀 날 정도였다. 내친 김에 방패까지 쳐서 떨어뜨린 윈슬럿은 도끼를 들어 미첼의 목에다 붙였다. 꼼짝도 하지 말라는 듯한 행동. "에라. 죽이려면 죽여라." 미첼은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고개를 부스스 돌리자 절망감에 젖은 여러 쌍의 눈동자가 들어왔다. "겨, 결국 지고 말았어." 어느새 깨어났는지 용병들이 접전을 관전하고 있었다. 카심 역시 핏기 잃은 모습으로 멍하니 듀라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정확히 미첼이 듀라한을 향해 필살의 일격을 날릴 때였다. "세, 세상에……." 미첼의 검에 서린 오러 블레이드를 보자 카심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경험 많은 용병인 그가 오러 블레이드를 몰라볼 리가 없었다. 아직까지 마나를 운용할 수 없었던 터라 카심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건방지고 교만한 애송이로만 보았는데 저렇게 뛰어난 검술실력을 가지고 있다니……. "끝났군." 검과 도끼가 격돌하는 순간 그는 승부가 결정된 것으로 간주했다. 오러 블레이드를 알아보았으므로 그것의 위력이 어떠한지 카심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듀라한은 무척 간단히 미첼의 일격을 막아내었고 곧이어 벌어진 접전에서도 전혀 우위를 잃지 않았다. 30분 동안이나 이어지는 접전을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관전했고 마침내 승부가 결정 나자 절망감에 사로잡혀 버린 것이다. 율리아나의 얼굴 역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카르셀 제일의 검사였던 미첼이 패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 미첼이란 인간 자체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검술실력 하나만은 마음 속으로 인정했던 율리아나였다. 그런 미첼이 패배를 하다니……. 얼어버린 그들의 귀로 사악한 흑마법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너희들의 목숨은 완전히 내 것이다. 그런 줄 알도록……." 아래를 내려다보던 데이몬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단 밤이 깊었으니 오늘은 거기서 자도록 해라. 행여나 탈출하려는 생각은 하지 말기를 권유하는 바이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듀라한은 잠을 자지 않는다. 게다가 통로에는 내가 설치해놓은 마법 트랩들이 있으니 매직 미사일 세례를 다시 한 번 받고 싶으면 탈출을 구상해 봐도 좋다." 간단하게 한 마디로 패거리들 전원을 얼어붙게 만든 뒤 데이몬은 몸을 일으켰다. 뚜벅뚜벅 그는 허공을 소리내어 걸어가기 시작했다. 불운하게도 사악한 흑마법사의 포로가 되어버린 일행들은 하염없이 흑마법사의 뒷모습만 주시하고 있었다. 잠을 자지 않는 언데드 듀라한의 빈틈없는 감시를 받으며…….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65회 "이름은?" "미첼 브루노." "나이는?" "21세." "나이에 비해선 검술실력이 제법이더군."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이자 미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듀라한에게 패한 사실로 인해 극도의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던 미첼이었다. 솔직히 상대의 칭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기분이 아니었다. '젠장.' 놀리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그는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쨌거나 그가 상대하는 자는 뼛속까지 악당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데이몬은 지금 포로들을 대상으로 심문에 열중하고 있었다.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율리아나와 미첼, 그리고 카심만을 불러놓고 그들의 신분과 목적 등을 캐묻고 있는 것이다. 졸지도 않고 지켜보는 윈슬럿의 감시 때문에 포로들은 탈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물론 통로에 설치되어 있다는 매직 미사일 다발에 더 겁을 먹었을 테지만 말이다. 심문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신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카르셀 왕국의 수비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소. 이번에 왕녀를 보필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호위 대장으로 임명된 것이오." 그 정도 실력이면 충분히 호위대장으로 발탁될 만하다는 생각에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하 기사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말이다.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채 불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용병대장을 힐끗 쳐다본 데이몬은 나름대로 정황을 상상해보았다. '혹시 녀석들이 오다가 왕녀를 노리는 무리에게 습격을 받았나? 그래서 기사들을 모두 잃고 궁여지책으로 용병들을 고용한 것인가?' 하지만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그렇다면 놈들이 어째서 날 잡기 위해 이리로 기어 들어왔지? 호위대장 하나만을 믿고 들어온 것인가? 대마법 갑옷도 없는 녀석을 믿고?' 녀석들의 저의가 의심스러워진 데이몬은 이번에는 크로센 제국으로 가는 목적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호위 대장이라는 녀석이 왜 크로센으로 가는지 이유조차 모르고 있었다. "나는 모르오. 어떤 목적으로 가는지는 오로지 왕녀님만 알뿐이오." "그것 참 기가 막히는군. 그럼 너도 당연히 모르고 있겠지?" 지명을 받은 카심 역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뿐이었다. 그가 청부받은 내용은 오직 왕녀를 크로센 제국까지 안전하게 호위하란 것뿐이었으므로……. 결국 데이몬은 의문의 열쇠를 쥐고 있는 당사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네가 토설해야겠군. 도대체 어떤 이유로 크로센 제국으로 가는 거지?" 예상대로 율리아나는 순순히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흥! 내가 그것을 대답할 것 같아? 날 죽일 순 있어도 입을 열게 하진 못할 거야." 말을 마친 율리아나는 찬바람이 돌 정도로 냉랭하게 고개를 돌렸다. 보고 있던 데이몬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젠장. 얼굴이 다프네만 닮지 않았어도……. 그렇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거꾸로 매달아놓았을 텐데. 경험으로 미루어 계집들은 하루만 매달아놓으면 있는 말 없는 말 모조리 털어놓더란 말이야.'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율리아나의 얼굴만 보면 다프네와의 추억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던 데이몬이었다. 지금도 데이몬은 율리아나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이상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히니 말이다. 물론 달콤하다고 할 수 있는, 결코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하지만 보고 있던 미첼과 카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살려달라고 빌어도 시원찮은 판국에 율리아나가 상대의 성질을 사정없이 긁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결국 카심이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내게 뭔가 짚이는 것이 있소." 데이몬의 시선이 카심에게로 쏟아졌다. 카심은 데이몬의 시선을 거침없이 맞받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 3개월 후 크로센 제국에서 어떤 행사가 대대적으로 예정되어 있는지 아시오?" 데이몬으로써는 당연히 고개를 가로 저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은 워낙 바빠서 젠가르트에게 다녀올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떨어지자 율리아나의 얼굴에 핏기가 싹 사라져버렸다. 말하지 말라는 듯 열심히 고개를 휘저으며 카심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내는 율리아나. 하지만 카심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다. 비록 고용주를 보호해야 한다는 목적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심중의 말까지 털어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어쨌거나 그에게는 악당을 달래 휘하 용병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였다. 특히 율리아나는 버릇없이 고집만 더럽게 센 계집아이가 아니던가? 비밀까지 지켜줄 의무는 없다고 생각한 카심은 율리아나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뒤 말을 이어 나갔다. "정확히 3개월하고 열흘 후에 크로센 제국에서는 성대한 잔치가 있소. 이름하여 황태자의 태자비 간택식이라고 불리지. 아르카디아에 존재하는 모든 왕국들의 왕녀를 크로센 제국으로 초대하여 성대한 잔치를 벌리고 그 과정에서 태자비를 황태자가 직접 선택하는 것이오. 물론 대다수의 왕국에서는 그저 인사치례 삼아 왕녀를 파견할 뿐이오. 이미 황태자비로 페르슈타인 공작의 영애가 간택될 것이란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들 알고 있으니 말이오. 모르긴 몰라도 카르셀의 왕녀는 그것을 노리고 있는 것 같소.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내 추측은 일단 그렇소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이유라서 데이몬은 입을 딱 벌렸다. "황태자비 자리를?"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율리아나를 보니 카심의 추론이 십중팔구 들어맞은 것 같았다. 잠시 눈을 끔뻑거리던 데이몬이 율리아나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인물은 그런 대로 인정해 주겠지만 그 성질머리로 황태자비 자리를 노린다? 허. 이해가 가지 않는군." 예상대로 율리아나는 발끈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내 성격이 어때서……." 율리아나의 격한 반응은 카심의 추론이 사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심지어 미첼조차 어이가 없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그는 그런 이유로 크로센 제국에 가는지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널리 퍼뜨릴 수 없는 내막이라서 카르셀 국왕은 미첼에게조차 비밀을 지켰던 것이다. 비로소 사정을 알게 된 데이몬이 무척 재미있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크. 재미있군. 공주를 보내서라도 크로센 황가와 사돈관계를 맺고 싶다? 무척 재미있는 국왕이군. 그런데 왜 이렇게 왕녀를 일찍 보냈지? 일주일쯤 전에 궁정마법사로 하여금 크로센으로 공간이동을 시킨다면 고생할 필요가 전혀 없잖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연신 씨근거리는 율리아나의 눈치를 슬쩍 보며 카심은 의중을 마저 털어놓았다. "카르셀 왕국에는 그럴 만한 여유가 전혀 없을 것이오. 내가 가 본 바로는 카르셀에는 궁정 마법사는 고사하고 초급이나마 마법을 쓸 줄 아는 자는 전무한 실정이지요. 생각해 보시오. 인구가 채 일만도 되지 못하는 나라에 무슨 마법사가 있겠소. 호위할 기사가 없어 용병단에게 왕녀의 호위를 맡기는 실정이니 오죽하겠소?" 미첼을 힐끗 쳐다본 카심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내친 김에 율리아나의 비위를 박박 긁어놓으며 말이다. "그런데 호위 기사의 실력은 생각 외로 제법이더군요. 검술 실력으로만 따지자면 어지간한 왕국의 근위기사 정도는 될 것 같소. 하지만 거기에 걸맞는 인격과 소양을 전혀 갖추지 못했으니 그도 평생 카르셀을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군요." "허. 참."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데이몬은 연신 혀를 내둘렀다. 우선 그렇게 작은, 국가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왕국이 있다는 것도 금시초문이었다. 그 정도라면 세바인이 속해있는 안트로스보다도 오히려 작은 나라이지 않은가? 그런 작은 왕국의 국왕이 감히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비 자리를 노리고 왕녀를 보냈다는 것에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던 데이몬이었다. 그야말로 성공할 가능성이 1할의 반에 반도 되지 않는 일이 아니던가? 데이몬은 어이가 없다는 듯 연신 혀를 차댔다. "쯔쯔쯔. 보내는 사람이나, 보낸다고 가는 사람이나……." 내친 김에 그간 쌓인 울화를 모조리 풀어버리려는 듯 카심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거의 발작하기 직전인 율리아나를 무척 고소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이다. "도박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거의 비슷하지요. 성공만 한다면 팔자 고칠 수 있다는 생각에 너도나도 달려들지만 거의 대부분은 패가망신할 수밖에 없는……." "닥쳐요. 당장 그만두지 못해요." 참다못해 율리아나가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카심을 노려보며 제법 기세 좋게 을러댔다. "계속 이러면 계약위반으로 간주할 거예요." 카심도 지지 않고 마주 고함을 질렀다. 이미 그는 참을 대로 참은 상태였다. "흥. 누구 마음대로……. 우린 청부받은 대로 사명을 다 했소. 당신의 되지도 않는 고집으로 이곳까지 들어왔다가 몽땅 사로잡혔으니 이제 직성이 풀리시오? 그런데 감히 누굴 탓하는 것이오. 아니면 당신들이 크로센 제국으로 가는 목적을 나에게 먼저 알려 주었소? 계약서에 비밀을 지키겠다고 명시한 바도 없는데 내가 왜 함구해야 하지?" "다, 당신 정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입술을 파르르 떨어대는 율리아나. 옥신각신하는 일행을 보다 못한 데이몬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닥쳐라. 이것들이 누구 앞에서……." 데이몬의 호통에 쌍방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닫았다. 악당 앞에서 싸워봐야 자신들만 손해였다. 두 패로 갈려 서로 노려보는 패거리들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고민에 사로잡혔다. '과연 이것들을 따라가는 것이 잘하는 짓일까?' 이미 데이몬은 이곳을 뜨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봉인구는 이미 몸 속에 박혀있는 상태였고 데스 나이트들도 인크레시아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떠나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오히려 거기에는 드래곤들의 추적을 피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아르카디아를 두루 여행하며 각지의 풍물을 구경하면서 짬짬이 데스 나이트를 강화시키고 비밀병기를 완성시키자는 것이 데이몬이 내린 가장 합당한 결론이었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파티에 속하는 것이 여행하기엔 훨씬 용이할 터였다. 혼자서 여행하자면 귀찮은 점이 무척 많기 때문이었다. 먹고 자는 것을 모조리 직접 해결해야 했으며 항상 여정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런 이유로 데이몬은 오래 전부터 마땅한 파티를 물색해서 합류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자신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감춘 후에 말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패거리들의 난입으로 계획이 여지없이 바뀌어 버렸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모르는 다른 파티와 합류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보고 난 뒤 데이몬은 생각을 바꿨다. 우선 이들의 목적지가 자신과 같은 크로센 제국이었고 풀어주는 조건으로 동행을 요구한다면 쉽게 먹혀 들어갈 것 같았다. 물론 율리아나의 외모가 다프네와 흡사하다는 이유가 데이몬의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다프네와 판박이인 율리아나의 얼굴을 볼 때마다 데이몬은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성질머리가 더럽고 어쩌고 간에 다프네의 얼굴만 볼 수 있다면 데이몬에게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다. 물론 그의 본심은 오로지 다프네에게 단단히 사로잡혀 있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다프네와 꼭 닮은 율리아나의 얼굴을 보며 그리움을 달래려는 것이 바로 데이몬의 속셈이었다. 그는 곧 패거리들에게 내심을 털어놓았다. "좋아. 순순히 대답해 줬으니 대신 한 가지 조건만 들어준다면 너희들 모두를 풀어주겠다." 예상치 못했던 말에 일행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상황을 보아 죽진 않겠지만 단단히 곤욕을 치른 후에야 풀려날 것을 예상했던 일행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풀어주다니……. 가장 신중한 카심이 무척 조심스러운 태도로 풀어주는 대가를 물어보았다. "조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상대가 악당임을 감안하면 조건이 그들에게 아주 버거울 공산이 컸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66회 하지만 상대의 대답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조건은 크로센 제국까지 나와 동행하는 것이다. 그것을 약속하면 너희들 모두를 무사히 풀어주겠다." "크, 크로센까지 당신과 동행하자고요?" 일행의 눈이 일시에 휘둥그레졌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조건이었다.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다. 명성을 노리는 어중이떠중이들이 하도 많이 몰려들어 이 생활도 진력이 나려던 참이다. 그래서 진작부터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너희들이 들어온 것이야. 내 목적지도 크로센 제국이니 그곳까지 나와 함께 동행하는 것이 어떠냐." 데이몬이 일행들의 면면을 한번씩 훑어보며 말을 이어나가는데 한 쪽에서 뾰쪽한 교성이 터져 나왔다. "안 돼!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 같은 악당을 데리고 갈 수 없어. 난 공주야. 그런 내가 어떻게 흑마법사 나부랭이랑 동행할 수 있겠어.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물론 율리아나였다. 카심과 미첼이 그녀에게 정말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정말 상황판단 못하는 계집애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모질게 패주고 싶은 생각이 절실했지만 둘은 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모시는 왕녀를 팰 수 없다는 것이 미첼의 이유였고 고용주를 건드릴 수 없는 것은 카심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흑마법사를 동행시키는 문제는 전적으로 율리아나의 소관이었기 때문에 둘은 묵묵히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 욕설을 있는 대로 퍼부어 가며 말이다. '어서 카르셀을 벗어나야지 저년 꼴을 두 번 다시 안보지.' '네년이 만약 내 딸이었다면 넌 내 손에 반쯤 죽었다.' 데이몬은 무표정한 얼굴로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절대로 안 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내젓는 율리아나. 하지만 데이몬은 그녀의 반응쯤은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네년이 다프네만 닮지 않았다면 한 달을 꼬박 매달아놓았을 텐데…….' 하지만 율리아나의 얼굴을 보니 또다시 마음이 포근해졌다. 분노가 흔적도 없이 사그러지는 것을 느끼자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허. 참." 단지 얼굴이 닮은 소녀에게도 화를 내지 못할 정도로 다프네에게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데이몬.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데이몬은 다프네를 위해서라면 웃으며 죽어줄 수 있었다. 다프네는 그 정도로 데이몬에게 절대적인 존재였다. 잠시 머리를 굴린 데이몬은 율리아나의 얼굴을 노려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렇다면 내 조건을 들어줄 수 없다는 뜻이냐?" 율리아나의 대답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렇다. 어떠한 경우에도 너 따위와 동행할 수는 없어." 대화가 거기까지 진행되자 미첼과 카심은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만약 살아날 수만 있다면 두 번 다시 율리아나란 계집애와 상종도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데이몬은 별반 놀라지도 않았다. 그는 도리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카심을 불렀다. "이봐 용병대장."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카심이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날 불렀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 "말씀하시오." "이곳에 있는 자들이 네 용병단의 전부냐?" 카심의 얼굴에 씁쓸한 기색이 서렸다. 휘하 용병들이 채 열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털어놓기가 지극히 부끄러웠던 것이다. "일단은 그렇소. 하지만 계속해서 용병을 모집 중이니 머지않아 수가 현저히 늘어날 거요." 그 말을 들은 데이몬은 기다렸다는 듯 팔짱을 꼈다. "혹시 용병단에 마법사가 한 명 정도 필요하지 않나?" "네?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몰라하는 카심에게 데이몬은 친절하게 추가 설명을 해 주었다. "상당히 막강한 실력을 가진 마법사야. 흑마법 계열이란 것이 조금 께름칙할지도 모르지만 알다시피 공격마법 쪽으론 흑마법이 월등하게 위력이 강하지. 덤으로 팔라딘과 싸워도 섣불리 꿀리지 않는 듀라한이 하나 따라갈 걸세. 어떤가? 자네에게 고용할 마음이 있는가?" 거기까지 설명했는데 알아듣지 못하는 자는 오크 아니면 백치였다. 카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다면 당신이 내 용병단에 들어오겠다는 뜻이오?" "바로 그렇다네. 어떤가? 용의가 있나?" 카심은 잠시 주저했다. 데이몬이 자신의 용병단에 들어오고 난 뒤의 이해득실을 명확하게 따져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결정하는데는 가장 큰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금전문제. 현재 카심 용병단의 재정상태론 1서클의 마법 수련생조차 고용할 수 없다. 마법사는 그 정도로 비싼 존재였다. 그리고 데이몬은 그것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아. 보수는 걱정하지 말게. 받은 청부금에서 적당하게 나눠주면 만족할 테니……. 실은 나에게 보수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어떤가?" 거기까지 말이 이어지자 카심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 "제의를 기꺼이 수락하겠습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부터 카심 용병단의 일원입니다. 함께 일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탁월한 판단이네." 앞으로 내민 데이몬의 손을 카심이 맞받아 마구 흔들었다. 비록 데이몬으로 인해 상당한 고초를 겪긴 했지만 카심은 지난 일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자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또한 나에게 무얼 원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아무것도 상관없다. 마법실력을 보아 이 자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나의 용병단은 그 즉시 열 배 이상 강력해지니까…….' 정황을 보아 흑마법사는 율리아나와 동행하기 위해 자신의 용병단에 들어온 것 같았다. 하지만 율리아나에게 흑심을 품고 있건 말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용병을 임명하는 것은 전적으로 용병대장의 권한이었고 용병단의 일원이 된다면 율리아나가 동의하지 않아도 동행하는데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율리아나가 돌을 씹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천방지축인 그녀라도 용병을 뽑는 것이 용병대장의 고유권한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율리아나는 암암리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미쳐버릴 노릇이군.' 심문을 받는 도중에도 그녀는 흑마법사의 기분 나쁜 시선을 계속해서 느꼈다. 음흉하고 느물느물한 늙은이의 시선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것 때문에 흑마법사의 동행을 결사적으로 반대한 것인데 이제 어쩔 수 없게 되어버렸다. 공식적으로 용병단에 받아들여진 이상 저 기분 나쁜 얼굴을 계속해서 봐야 하는 것은 현실이었다. 율리아나로써는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카심이 다가와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 "보신 바와 같이 저의 용병단에 강력한 마법사가 가세했습니다. 왕녀님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이 더욱 수월해 질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앞으로의 경호에 더욱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매섭게 노려보는 율리아나의 시선을 카심은 슬쩍 외면해 버렸다. 지금 이 순간 그의 가슴속은 벅차 오르는 희열감으로 메아리치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저자를 최대한 용병단에 붙들어둬야 한다. 저자가 천고의 악당에 살인마라도 상관없다. 저자만 있으면 카심 용병단이란 이름을 아르카디아 전역에 널리 퍼뜨릴 수 있으니 말이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카심은 자신의 명성을 널리 알리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아니 그것이 아니더라도 마법사의 가세는 모든 용병단의 단장이 꿈에라도 바라는 일이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자고로 고금을 통틀어 마법사란 최고의 고급 인력에 속한다. 자질이 없어도 노력여하에 따라 강해질 수 있는 검사와는 달리 마법이란 철저히 자질에 좌우되는 학문이다. 노력만으로써 마법을 익힐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법사는 검사에 비해 현저한 희소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용병단에서 쓸만한 마법사를 구하기란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약한 체력을 가진 마법사가 힘든 용병생활을 견뎌내기란 무척 힘든 일인 데다가 통상적으로 마법사들은 궁정이나 기사단에 소속되기를 희망할 뿐 용병단에는 좀처럼 가려하지 않았다. 별달리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물론 집단전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마법사이니 만큼 용병단에서는 거금을 미끼로 마법사를 끌어 모았다. 하지만 모이는 자들은 채 3써클도 되지 못하는 허접 쓰레기들뿐이었다. 제대로 된 마법사는 아무리 거금을 준다고 해도 용병단에는 오지 않았다. 카심이 용병단에 소속되어 있을 당시 썬더버드 용병단에는 총 네 명의 마법사가 종군하고 있었고 그 중에서 최고의 실력자가 겨우 4써클의 유저였다. 하지만 그나마도 전투에 현격한 도움이 되었기에 썬더버드 용병단에서는 거액의 봉급을 지급하며 계속 데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상기한 카심은 데이몬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별로 겪어보진 않았지만 이자는 진짜다. 최소한 6써클은 상회하는 실력자란 말이지. 이런 자를 영입하게 된 것은 내 일생 일대의 행운이다. 그것도 얼마 안 되는 봉급으로 말이야.' 휘하 용병들의 불안한 시선을 무시한 채 카심은 묵묵히 말을 털어놓았다. "그럼 준비하도록 하시오. 크로센 제국까지 갈 길이 머니……." "그러지." 흔쾌히 대답한 데이몬은 짐을 정리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윈슬럿에게 무기와 짐을 모두 돌려 받은 일행은 동굴 밖으로 먼저 나왔다. 이미 윈슬럿이 그들의 말을 모두 끌어다 동굴 입구에 묶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조금 뒤 여행 준비를 마치고 나온 데이몬을 보고 일행들은 혼비백산했다. "세, 세상에……." 데이몬은 놀랍게도 윈슬럿에게 짐을 산더미처럼 지운 채 옆에 세워놓고 있었다. 상황을 보아 짐꾼으로 데리고 갈 것 같았다. 너무도 어이가 없었기에 율리아나는 또다시 히스테리를 부렸다. "저 괴물을 데리고 돌아다니자니 도대체 제 정신인가요? 차라리 난 당신네 용병단과 계약해지를 하는 쪽을 택하겠어요. 미첼과 단 둘이서 가는 한이 있어도 저자는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겠어요." 물론 듀라한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카심도 별달리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린 아주 나쁜 악당들이오]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다니는 것과 전혀 다름없었으므로……. 사실 율리아나가 계약해지를 해 주는 것은 카심이 도리어 바라는 일이었다. 이미 청부금은 선금으로 모두 받은 상태였으므로 이대로 헤어져 다른 일거리를 찾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양심상 그럴 수 없었기에 카심은 묵묵히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이 녀석을 데리고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럴 생각이네. 뭐 문제될 게 있나?" 고개를 끄덕이는 데이몬을 보고 카심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약간 곤란할 것 같습니다. 저희들이야 뭐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무척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라서……." 듀라한을 이곳에 두고 가자는 말이 차마 카심의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데이몬을 구슬러 용병단에 남게 하는 것이 카심의 본심이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그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상 밖으로 데이몬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그렇다면 이 녀석을 사람들 눈에 띄게 하지 않게 하면 되는가?" 카심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 혹시라도 필요하시면 제가 마차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통상적으로 마법사들은 말과 그리 친하지 않은 편이다. 마법사란 족속들은 몸쓰는 일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으니……. 과거 용병단에 소속된 마법사들이 항상 마차를 타고 다녔다는 사실을 떠올린 카심은 없는 돈을 쪼개서라도 마차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데이몬은 예상외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나는 말을 잘 타는 편이니까." 카심의 얼굴이 확 펴졌다. 항상 쪼들리는 그에겐 마차를 구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더 이상 반가울 수 없는 소리였다. 물론 뛰어난 무인이었던 데이몬이 말을 못 탈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놈을 즉시 처리하도록 하지." 데이몬이 수인을 맺자 허공에 인크레시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공에 펼쳐진 일렁거리는 공간의 틈새를 보자 일행들의 얼굴이 일시에 휘둥그레졌다. "저, 저게 뭐야?" 그들은 지금까지 마법 보고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그것은 아르카디아 전역의 인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일행의 반응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데이몬은 윈슬럿에게 명령을 내렸다. "들어가라. 그리고 내가 부를 때에만 나오도록 해라." "크아아아." 알았다는 듯 기성을 지른 윈슬럿은 지체 없이 인크레시아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게 뭡니까?" 의아한 눈초리로 인크레시아에 다가가 속을 들여다보려는 카심을 보자 데이몬은 질겁을 했다. "거기에다 손을 대면 큰일나네. 그 속은 나조차도 들어갈 수 없어. 숨쉴 수 있는 공기가 전혀 없기 때문에 오직 언데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지." 깜짝 놀라 손을 움츠린 카심. 그것을 보며 데이몬은 태연하게 인크레시아를 닫았다. 그런 뒤 일행을 돌아보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임시로 듀라한을 보관해 두는 곳이라고 생각하게. 그럼 출발해 볼까?" "그, 그러죠. 그럼 저 말을 타십시오." 떠듬떠듬 대답한 카심은 짐을 집어들었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67회 데이몬이 자신의 몫으로 배정된 말에 다가가는 것을 본 카심은 지체 없이 출발 명령을 내렸다. 지긋지긋했던 이 동굴에서 한시도 지체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달랐다. 무려 5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낸 동굴에 상당히 아쉽다는 듯한 눈빛을 보낸 데이몬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이랴." 이렇게 해서 새로운, 그러나 말썽 많은 동료들을 얻게 된 데이몬은 마침내 크로센으로써의 여정을 시작했다. 어떤 고달픈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내가 바로 로메인 남작이오. 그런데 무슨 일로 날 찾아오셨는지?" 의아한 듯 눈을 치켜 뜨는 중년인을 보던 이의 눈동자에는 희열의 빛이 가득했다. "드디어 찾았군." "무, 무슨 말씀이오?" 상대의 반응에 전혀 아랑곳없이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는 자는 젊은 청년이었다. 창백한 피부가 무척 인상적이었으며 짙디짙은 흑발에 흑요석같은 검은 눈동자가 어우러져 더없이 요요로운 기운을 풍겼다. 한 마디로 귀기(鬼氣)까지 감돌 정도의 용모를 가진 절세 미남자였다. 옥에 티라면 청년의 얼굴에 한없이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이 청년의 매력을 결코 반감시키지는 않았다. 청년의 용모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바로 눈동자였다. 인간이라면 의당 떠올라 있어야 할 오욕칠정(五慾七情)의 감정이 눈빛에서 일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청년의 정체는 다름 아닌 블랙 드래곤 러셀런트였다. 데이몬을 처치하고 인크레시아를 회수할 사명을 부여받고 파견된 드래곤. 그가 마침내 아르카디아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가 있는 곳은 무척 화려하게 치장된 방안이었고 앞에 앉아 있는 자는 다름 아닌 로메인 남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젠가르트가 저주(?)에 걸려 하고 있는 모습 말이다. 러셀런트는 천신만고 끝에 데이몬을 잡을 한 가닥 실마리를 붙잡은 것이다. 러셀런트의 시선은 지금 젠가르트의 손가락에 고정되어 있었다. "틀림없군. 저 반지는 분명히 내 것이야. 인크레시아 속에 단단히 보관해 놓은……. 그렇다면 저 녀석에게 저주를 건 녀석은 분명히 찾던 놈이 맞을 것 같군." 젠가르트의 손가락에는 고색 찬연한 반지 하나가 끼어져 있었다. 움찔한 젠가르트가 얼른 손가락을 말아 쥐었지만 러셀런트는 이미 반지의 정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큼지막한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는 정말 아름다웠다. 사파이어가 박힌 링 주위의 세공이 극히 정교한 것을 보아 한 눈에 보아도 드워프의 세공품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섣불리 가치를 논할 수 없을 정도의 보물. 원래 이 반지는 데이몬이 처분하라고 넘겨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반지에 한 눈에 반한 젠가르트가 팔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대금은 로메인의 개인 금고에서 지불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필이면 원주인(?)의 눈에 띄게 되었으니……. 반지는 공교롭게도 러셀런트의 것이었다. 망각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드래곤의 기억력이었으므로 한 번 자신의 손을 거쳐간 보물을 러셀런트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또한 러셀런트가 워낙 애기중지한 나머지 도난을 막기 위해 특별히 인크레시아에 보관한 반지인 만큼 알아보지 못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 그러므로 러셀런트는 목적했던 녀석에게 한 발 다가섰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놈. 이젠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러셀런트가 데이몬의 뒤를 추격해 온 배경에는 그의 노련한 경험이 일조를 했다. 사실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아르카디아에서 인간 하나를 찾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아무리 탐지마법을 쓰더라도 상대가 기척을 감춰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러셀런트는 말 그대로 사막에서 바늘 찾기에 비유될 수 있는 임무를 맡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임무를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공통적인 행동패턴을 보인다. 그러므로 놈이 할 만한 행동을 역추적해 들어간다면 반드시 꼬리를 잡을 수 있다." 러셀런트는 드래곤의 모습으로 두 대륙 사이를 가르고 있는 바다를 날아서 건너왔다. 자신을 목격한 포경선 두 척을 단번에 침몰시켜버리는 용의주도함을 보이며 말이다. 마침내 신대륙 아르카디아에 첫발을 디딘 러셀런트. 데이몬의 종적을 찾아내기 위한 일환으로 러셀런트는 가장 먼저 도둑 길드를 찾아갔다. 도둑 길드. 어둠의 세계에 소속된 밤신사들의 집단으로 세상에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든 존재할 정도로 널리 퍼져있는 존재들이었다.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존재할 정도로 세상에 뿌리내려 있었고 직업의 특성상 엄청난 양의 정보가 거래되곤 했다. 인간세상을 많이 여행해 본 만큼 러셀런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도둑 길드의 본부를 찾아갔던 것이다. 어둠 속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것이 도둑길드의 근거지였지만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길드원으로 보이는 인간 몇을 적당히 손봐주자 도둑 길드원들은 제 발로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그들은 복수를 위해 나타난 것이었지만 결정적으로 그것이 자신들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원인이 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러셀런트는 자신을 맞이하러 온 도둑 길드원들을 적당히(?) 주물러 근거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아무리 입이 굳은 자라고 하더라도 러셀런트에게만은 통하지 않았다. 그 역시 10서클의 마스터. 베르키스만큼은 못하더라도 인간의 심지를 조종하는 정신계 마법의 달인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었으니……. 목적했던 곳을 찾아낸 러셀런트는 즉시 길드의 근거지를 찾아갔다. 물론 흉흉한 기색의 길드원들이 그를 보자마자 단검을 번뜩이며 달려들었지만 러셀런트가 전개한 고위급 마법 한 방에 태반이 재로 화해버렸다. "무, 무엇을 원하시오?" 러셀런트는 사색이 된 길드 마스터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종이에는 데이몬이 변장한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정확히 말해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 알카리스의 얼굴 말이다. "이 자를 본 적이 있는가?" 물론 길드 마스터는 고개를 가로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알카리스가 아르카디아 최강 제국의 황태자라 할 지라도 이런 변방의 길드마스터까지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는 법이다. 하물며 알카리스가 정신지체라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탓에 크로센 제국에서는 기를 쓰고 비밀을 숨길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알카리스는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런가?" 길드 마스터의 대답을 듣자 러셀런트는 머뭇거림 없이 손을 내저었다. 콰콰쾅. 도둑 길드의 근거지는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물론 길드 마스터를 비롯해 살아남은 생존자를 깡그리 집어삼킨 채 말이다. 러셀런트로서는 자신의 얼굴을 본 인간을 살려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기억을 지우는 방법이 있었지만 러셀런트는 구태여 그런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도둑 길드의 근거지를 몇 군데 초토화시킨 끝에 러셀런트는 마침내 종이의 얼굴을 보았다는 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교역도시 로르베인의 길드 마스터가 데이몬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알고 있습니다. 이 자는 몇 년 전 이곳으로 보석을 팔러 왔던 자입니다." 눈앞에서 길드원 대다수가 떼죽음을 당한 터라 길드 마스터는 부들부들 떨며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깡그리 털어놓았다. 종이에 그려진 것과 동일한 용모를 가진 자가 오래 전에 보석을 팔러왔다가 로메인 남작의 마수에 걸려 남색 노예로 팔려갔다는 사실. 물론 들어온 자와 팔려간 자는 엄연히 다른 존재였지만 길드 마스터는 그것까지 알지는 못했다. 그것도 로메인 보석상의 지배인인 안토니가 로르베인의 도둑 길드원이었기 때문에 어렵사리 얻을 수 있었던 정보였다. 하지만 원하는 대답을 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길드 마스터는 목숨을 부지하진 못했다. "그런가 고맙군." 냉랭한 음성과 함께 로르베인의 도둑 길드 근거지도 여지없이 불타올랐다. 불운한 길드 마스터의 목숨과 함께 말이다.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된 러셀런트는 즉시 로메인 남작을 찾아갔다. 놈이 어디로 팔려갔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로메인 남작을 보자마자 그가 상당한 고위급 저주에 걸려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말았으니……. 러셀런트는 팔려간 자가 자신이 찾던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하긴. 9서클의 마스터가 그리 쉽게 당하진 않을 테니……." 혼잣말을 하며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청년을 보자 젠가르트는 몹시 기분이 나빠졌다. 옷차림과 외모는 나무랄 데 없어 보였지만 하는 짓은 정신병자나 다름없었다. 무슨 일로 왔느냐는 질문에는 관심도 없었고 혼잣말을 해대며 자신을 샅샅이 관찰하는 모습에 부아가 치밀지 않았으면 거짓말이었으리라. 결국 젠가르트는 탁자 위의 벨을 눌러 버렸다. 경비병들을 불러 버릇없는 청년을 쫓아내려는 심산에서였다. 덜컥. 문이 열리고 완전무장한 십여 명의 경비병이 우루루 쏟아져 들어왔다. 데이몬을 체포했던 바로 그 경비병들이었다. 젠가르트의 눈짓을 받자 경비병들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러셀런트에게 다가갔다. 험악한 으름장과 함께 말이다. "순순히 꺼지지 않는다면 단단히 쓴맛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러셀런트의 시선이 병사들에게로 향했다. 눈빛이 싸늘히 식어 가는 것을 보니 단단히 살심을 품은 것 같았다.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한 인간을 가만히 내버려둔다는 것은 자존심 강한 드래곤으로서 결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후후후. 벌레 같은 인간들이 감히?" 러셀런트는 서서히 손을 들어올렸다. 혈관이 훤히 비쳐 보일 정도로 희디흰 손가락에는 마나가 충만히 맺혀 있었다. 그는 허공에다 대고 손을 일자로 그었다. 촤아악. 그것으로 끝이었다. 비명도 없었다. 간단한 손짓 한 번에 병사들의 몸은 순식간에 두 조각으로 나뉘어버렸다. 잘린 허리춤에서 핏줄기가 맹렬히 솟으며 병사들의 상체 부분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아직까지도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병사들의 나동그라진 얼굴에는 공포와 놀라움이 역력히 배어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젠가르트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아, 아니 이런……." 대경실색한 채 몸을 벌떡 일으키던 젠가르트. 하지만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그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이미 러셀런트의 정신계 마법이 그의 골수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던 것이다. 젠가르트의 눈빛이 점차 몽롱해지는 것을 보며 러셀런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제 넌 나의 종이다. 그러므로 네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모조리 나에게 털어놓아야 한다." 아무리 심지가 굳은 인간이라도 드래곤의 정신계 마법에는 당해낼 수 없다. 수련을 쌓은 기사들도 저항할 수 없는 판국인데 평범한 노인인 젠가르트가 버틸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그의 의식은 어느덧 아득한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놈이 현재 세바인에서 은둔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유는?"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제게 단 한번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밀려드는 잔챙이들 때문에 무척 골치가 아프다고만 했을 뿐입니다." "흠." 알아낼 것을 어느 정도 알아낸 러셀런트는 손을 가져다 턱에다 괴었다. 사실 젠가르트는 데이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진 못했다. 그저 세바인에서 은둔하며 무언가를 연구하고 있다는 것 밖에……. 하지만 러셀런트에겐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어쨌든 상관없다. 종적이 드러난 이상 놈은 이제 죽은목숨이니까……." 나지막이 지껄인 러셀런트는 고개를 돌려 젠가르트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끌어올렸는지 그의 손가락은 마나가 모여들어 빛나고 있었다. 이대로 그어버리면 젠가르트도 병사들처럼 몸이 두 조각으로 갈라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손을 움직이려던 러셀런트는 곧 생각을 바꿨다. "아니야. 만에 하나 놈이 달아날 가능성을 생각해서 이 녀석을 당분간은 살려둬야겠군. 기억을 지워버리면 그만이니 말이야." 자신을 멍청하게 쳐다보는 젠가르트를 바라보며 러셀런트는 손가락의 마나를 흩어 버렸다. 놈을 잡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종적을 찾을 수 있는 한 가닥 실마리를 열어둬야만 했다. 그것이 젠가르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리미티드 리멤버런스 실(Limited rememberance seal, 제한적 기억봉인)" 마법이 전개되자 안 그래도 흐리멍텅하던 젠가르트의 눈빛이 완전히 풀려버렸다. "이제 넌 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그러니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살아가면 된다. 물론 내가 다시 방문하기 전까지 한정된 것이겠지만 말이다." 조용히 중얼거린 러셀런트는 몸을 돌렸다. 병사들의 시체와 거기에서 흘러나온 피가 방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는 것을 보자 그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 녀석들을 괜히 죽였나? 놈이 정신을 차리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할 수 없지." 손을 한 번 휘젓자 병사들의 시체가 마치 녹아 없어지듯 바닥으로 스며들어가 버렸다. 쓰쓰쓰. 심지어 흥건한 핏물마저 분해되듯 사라지고 있었다. 작업을 마친 러셀런트는 유유히 방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데이몬이 이미 세바인을 떠났다는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젠가르트가 제정신을 차린 것은 러셀런트가 없어지고 나서 한참이 지나서였다. "이상하군. 왜 이렇게 머리가 무겁지?" 고개를 가로젓던 젠가르트는 놀랍게도 조금 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68회. 새로운 동료들을 얻게 된 데이몬은 한동안 조용히(?) 여행을 해 나갔다. 아무래도 율리아나와 미첼은 데이몬을 무시해버리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마치 소 닭 보듯, 거의 사람 취급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데이몬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다프네와 꼭 닮은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던 데이몬이었다.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던지 하등 상관없었다. 지금도 그는 율리아나의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었다. 오히려 그와 가까워지기 위해 몸이 달아있는 쪽은 용병들이었다. "말 타시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까?" 훤히 보이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다가온 녀석은 패터슨이란 이름의 용병이었다. 어떻게든 말을 붙여보려는 수작으로 보였고 체면 상 우두머리인 카심이 나설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그가 총대를 맨 것 같았다. 율리아나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데이몬이 건성으로 말을 받았다. "뭐 괜찮네. 왕년에 말을 많이 타 보았지."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마법사들은 보통 말을 타지 못하던데……." "살다보면 나 같은 별종 마법사도 있는 법이지." 율리아나를 실컷 쳐다본 데이몬이 패터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실력이 형편없다 하더라도 새로 동료가 된 녀석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면 거짓말이었으리라……. "그런데 자네들은 꽤나 별난 용병단이로군?" "네? 무슨 말씀이신지?" 데이몬은 흔들리는 말에 몸을 맡기고 있는 용병들의 면면을 슬쩍 훑어본 뒤 말을 이어나갔다. "대장의 실력도 제법이고……. 저 애송이들 둘 빼고 나머지도 제법 용병밥을 먹은 듯 보이는데 생각 외로 인원이 너무 적어.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아 그것 말이죠?" 패터슨은 쓴웃음을 지으며 제반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자신들이 원래는 제법 규모가 큰 용병단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대장 카심이 독립하겠다는 뜻을 밝힌 후 흔쾌히 따라나섰다는 사실이 데이몬에게 간략하게 설명되었다. "하인리히와 제럴드는 독립하고 난 뒤 용병으로 받아들인 녀석들이지요. 지금은 자신 몫들을 해내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것입니다." 패터슨의 말에 데이몬은 제법 깊은 감명을 받았다. "대단하군. 용병단에 남아있었다면 능히 호의호식할 수 있었을 텐데 그 모든 것을 마다하고 대장을 따라나섰다는 사실이……." "저희들이 원래 의리가 좀 있지요. 게다가 녀석들 모두는………." 패터슨은 용병들을 훑어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대장에게 적어도 한 번씩 목숨 빛을 진 녀석들이지요. 저도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고요." "그랬군. 그래서 대장을 따라 훌훌 털고 나섰던 게로군." 데이몬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의리 하나로 뭉친 녀석들이라 생각하니 그리 밉지는 않았다. 전체적인 전력이 정말 형편없더라도 말이다. 데이몬이 관심을 보이자 패터슨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그런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 정도로 강한 듀라한을 만들어내시다니……." 패터슨의 시선이 슬쩍 미첼에게로 향했다. 물론 그가 미첼에게 느끼는 감정이 그리 좋을 리가 없었다. 그는 데이몬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소곤댔다. "저 애송이가 팔라딘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상당히 놀랐습니다. 그런데 듀라한으로 팔라딘을 이기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제가 아는 상식으론 금시초문입니다." "뭐. 세상을 살다보면 예외라는 것이 있지."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일부러 미첼이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대답했다. "같은 용병이라도 실력차이는 엄연히 있기 마련이지. 이를테면 자네들 대장과 저 아이들 둘 중 하나가 붙는다고 가정해보게. 그렇다면 어떤 결과가 나겠는가?" 패터슨은 슬쩍 미첼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백 번을 싸운다 해도 대장님이 이길 테지요. 뭐." "마찬가지일세. 실력이야 어쨌든 둘은 다 용병임에는 틀림이 없지? 비록 듀라한이 팔라딘에게 약한 면모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지 않겠나? 많이 싸워본 노련한 듀라한과 갓 출도한 애송이 팔라딘과의 싸움. 어떤가? 결과가 충분히 상상되지 않나?" 말을 마친 데이몬은 슬쩍 고개를 돌려 미첼을 쳐다보았다. 물론 그의 행동에는 미첼을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생각대로 미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모습이었다. 자신을 애송이라 단정하는데 기분 나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만약 상대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흑마법사가 아니었다면 그는 분명 폭발해버렸을 것이다. 아니꼽다는 눈초리로 자신을 쏘아보는 미첼의 시선을 데이몬은 느긋하게 받아넘겼다. '건방진 녀석.' 사실 데이몬은 미첼에게 상당히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과는 상종도 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기분이 몹시 상해 있는 상태였으므로 언제고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망둥이가 뛴다고 꼴뚜기도 따라 뛰는 격이군.' 사실 율리아나가 자신을 냉대하는 것은 그런 대로 참아 줄만 했다. 말 그대로 예뻐서 봐주는 것이다. 겉모습이 다프네와 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데이몬은 율리아나에게 만은 한계에 달한 인내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미첼은 달랐다. 어디 한 구석 예쁜 구석도 없는 데다 특히 출세 지향적인 성격이 데이몬의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았다. 가만히 있더라도 눈꼴 시린 판국인데 율리아나를 따라 자신을 무시하고 있으니 당연히 고울 리가 없었다. 때문에 데이몬은 슬쩍 꼬투리를 잡아 미첼을 단단히 혼내줄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발점을 패터슨이 열어주고 있었으니 데이몬으로썬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마법사님. 목소리를 조금 낮추시는 것이……." 미첼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던 패터슨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데이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넨 내가 왜 세바인에서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했는지 아나?" "그, 글쎄요." "내가 가장 못마땅한 점은 바로 이것이네. 왜 마법사가 팔라딘이나 소드 마스터 따위에게 약하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 말일세." "그, 그건." 일순 말문이 막힌 패터슨이 떠듬거렸다. 물론 전장에서 정말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마법사였고 패터슨도 지금까지 여러 번 마법사의 위력을 체험한 바가 있었다. 비록 용병단에 소속된, 3, 4서클 남짓한 수준 낮은 수련 마법사들의 것이었지만 그 위력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전투의 판도를 송두리째 바꿔버릴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마법사와 기사간의 싸움이라면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대마법 갑옷을 걸친 팔라딘이나 소드 마스터에게 마법사는 철저히 약자일 수밖에 없다. 마법사가 마법을 전개하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반면 기사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빠르게 다가가서 검만 휘두르면 되었고 그 속도는 숙련도가 높을수록 빨라진다. 그렇다면 마법사는 주문이 완성되기도 전에 목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상대가 대마법 갑옷을 걸쳤다면 승산이 아예 없다고 판단해도 무방했다. 그 사실은 고금을 통한 진리로 인정되고 있었으므로 패터슨은 흑마법사가 난데없이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그 문제는 생각해보지 않아서 잘……." "물론 7서클 이상의 대마법사라면 여간해서는 소드 마스터에게 당하지 않는 법이야. 캐스팅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데다 7서클의 공격 마법이라면 어지간히 강한 소드 마스터가 아니고서는 막을 도리가 없다네. 하지만 언제 7서클에 오를 때까지 기다리겠나? 때문에 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랫동안 연구를 거듭해 왔다네……. 그것을 위해 이곳의 팔라딘들이 익히는 마나연공법도 여럿 수집했고." "그래서 결론을 내리셨습니까?" 바짝 다가선 패터슨의 눈망울에는 짙은 호기심이 배어있었다. 그것은 굳이 패터슨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었다.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 전부가 데이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율리아나와 미첼까지도 신경을 곤두세우며 데이몬의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문제는 모두의 공통적인 관심사였던 것이다. 데이몬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방법은 단 한 가지네. 마법사도 기사만큼이나 체력을 단련한다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야. 생각해 보게. 기사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며 마법을 전개한다면 마법사가 기사를 당해내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나." 데이몬의 대답에 듣고 있던 사람들은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뭔가 획기적인 방법을 연구한 줄 알았던 터라 실망감도 컸다. 패터슨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며 되물었다. "하지만 마법사에겐 정신 집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움직이며 마법을 전개할 수가 있습니까?" "멍청하기는……. 노력여하에 따라 평범한 사람도 충분히 소드 마스터가 되지 않나? 정답은 단 한 가지, 끊임없는 수련이야. 뼈를 깎는 수련을 통한다면 난 분명히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네. 과정이 다소 힘들긴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용병들의 얼굴에는 그다지 수긍한다는 표정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흑마법사의 심기를 가급적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엔 동감했지만 주장이 너무도 현실성이 없었던 것이다. 특히 율리아나의 얼굴에는 모종의 경멸감까지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냉랭히 고개를 돌렸다. "관심을 기울인 내가 잘못이지. 저건 완전 거짓말쟁이 늙은이잖아?" 미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네 말이 맞아. 저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린가? 말짱 헛소리에 불과하군." 하지만 사정상 용병들은 율리아나와 미첼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카심이 머뭇거리며 다가와 입을 열었다. "물론 마법사님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긴 하지만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것 같습니다. 물론 검술도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지만 마법이야말로 익히기가 극히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상식으론 몸을 움직이면 그대로 마나가 흩어져버린다는……." 데이몬은 눈을 부릅뜨고 카심을 노려보았다. "자네도 날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말에 카심은 급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물론 검을 사용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 검을 들고 마법을 펼칠 순 없는 노릇이야. 하지만 이것을 사용한다면 간단히 해결되지. 한 번 보겠나." 데이몬은 느긋한 표정으로 카심을 쳐다보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무언가를 꺼내 주섬주섬 펼치자 옅은 녹색을 띠는 건틀릿 한 켤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데이몬은 건틀릿을 집어 든 뒤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용병들을 쳐다보았다. "이것은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건틀릿이야. 보다시피 손등 부분에 수정구슬이 달려 있어 움직이면서도 마법의 전개가 가능하지. 물론 어지간한 팔라딘 따위는 마법을 쓰지 않고도 간단하게 이길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할 경우 이것을 쓰면 요긴하지." 말을 마친 데이몬은 미첼을 힐끔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저런 애송이 정도는 이것으로도 충분해. 다시 말해 마법을 전혀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그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는다면 결코 남자가 아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미첼은 데이몬을 향해 벼락같이 몸을 돌렸다. 허릿춤의 검 손잡이를 잔뜩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들 것 같은 기세였다. "이크." 카심은 자연스럽게 데이몬을 보호할 수 있는 위치로 향했다. 미첼이 검을 날릴 경우 즉각 방패로 막을 수 있는 위치 말이다. 일단 용병단의 일원이 된 이상 카심으로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흑마법사를 보호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데이몬에게 다가온 미첼은 서슬 퍼렇게 으르렁거렸다. "늙은이. 정말 듣자듣자 하니까 못하는 말이 없군." "왜?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나?" "그렇소. 솔직히 마법만 제외한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오. 심지어 어린아이조차 당신의 늙어빠진 모가지를 간단히 비틀 수 있다는 뜻이지." 입에 담기조차 힘든 모욕이었지만 데이몬은 도리어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어린아이에게도 당하는 나지만 왠지 모르게 자네에겐 자신이 있군. 아! 물론 마법을 쓰지 않고 싸운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야." 미첼의 얼굴은 삽시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살기가 치밀어오른 나머지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오르듯 보일 정도였다. "그 말을 증명할 수 있소?" "물론이지." 기다렸던 반응이라 데이몬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몬에겐 정말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 데이몬은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팔찌 두 개를 꺼냈다. "아마 이것을 본 적이 있을거야. 보다시피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팔찌라네. 이것을 하나씩 차고 결투를 벌인다면 공평한 승부가 되지 않을까 싶네. 어떤가? 나와 싸워볼 용의가 있나? 자네는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나 역시 마법을 사용하지 않기로 하고 말일세." 미첼은 두 말도 하지 않고 팔찌를 낚아챘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69회 그로서는 지금 같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상대가 얼마나 사악하고 얄미운 흑마법사였던가? 주제도 모르고 덤비는 마법사와의 결투를 미첼이 마다할 이유란 없었다. 그러면서도 걱정이 되었던지 미첼은 마법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거듭 확인했다. "당신은 분명히 마법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소. 그 약속이 분명히 지켜지리라 믿겠소." "물론.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어차피 팔찌를 찬다면 같은 입장이야. 자네는 오러 블레이드를 쓸 수 없고 나 또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으니 말일세." 말을 마친 데이몬은 하나 남은 팔찌를 찼다. 싸우기에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펑퍼짐한 로브를 벗어버린 데이몬은 꺼내 든 건틀릿을 손에 착용했다. 내심 웃음이 나왔다. '크크크. 녀석 이 건틀릿이 어떤 물건인지도 모르고…….' 그에겐 미첼이 영락없이 호랑이 코털을 건드리려는 하룻강아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순수한 맨몸으로의 결투라면 데이몬은 그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우선 그에겐 오랜 세월 갈고 닦은 체술이 있었다. 게다가 세바인에서 보낸 5년 동안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련을 해서 몸을 단련시켰다.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하지 못한다면 미첼은 결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팔찌를 미리 준비하지 않았던가? 물론 9서클의 대마법사인 데이몬에게 이까짓 팔찌가 제약요인이 될 수는 없었다. 팔찌가 마나의 응집을 방해할 수 있는 힘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는 법이다. 팔찌가 제약할 수 있는 마법은 기껏해야 6서클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에겐 마법을 사용하고픈 마음이 전혀 없었다. 원래부터 무인 출신이었기 때문에도 그런 점도 있었지만 그에겐 단단히 믿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금빛이 은은하게 도는 건틀릿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눈을 빛냈다. '놈이 설령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더라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이 건틀릿은 능히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낼 수 있으니까…….' 지금 데이몬이 차고 있는 건틀릿은 스승 도일이 만들어 준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싸움으로 많이 망가진 터라 건틀릿을 곱게 싸서 깊이 간직해 둔 데이몬이었다. 스승의 손때가 묻은 물건을 함부로 굴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대신 그는 인크레시아 속에서 건틀릿을 대체할 수 있는 무기를 찾았다. 드래곤들이 모아놓은 무수한 마법병기와 아티팩트 속에는 분명 적합한 물건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데이몬의 예상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헬버트론이 한 벌의 마법 갑옷에 포함된 건틀릿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것도 엄청난 강도를 가진 버너디움 재질의 건틀릿을 말이다. 원래 이것은 일체형의 갑주 한 벌에 포함된 것이었다. 환상의 갑옷이라는 이름을 가진, 드래곤 로드 크라누스의 수집품 중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아티팩트의 일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방어력을 가진 갑옷을 만들겠다며 크라누스가 수많은 드워프들을 동원해 무려 60년의 세월동안 만들어낸 아티팩트가 바로 환상의 갑옷이었다. 풀 플레이트 메일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전체가 미스릴로 되어 있는 말 그대로 가치를 논할 수조차 없는 보물이었다. 표면에는 크라누스가 직접 그려 넣은 대마법 방어진이 상감(문양을 파내고 그 자리에 다른 재료를 채워 넣는 기법)으로 새겨져 있었으며 건틀릿을 비롯해 힘이 작용하는 부분은 어김없이 버너디움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금속 중에서 최강의 강도와 경도를 자랑하는 버너디움으로 말이다. "정말 멋지군." 갑옷을 발견한 헬버트론은 그것을 차지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혔다. 데스 나이트에게조차 소유욕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갑옷은 훌륭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헬버트론은 갑옷을 착용하지 못했다. 상감 기법으로 대마법 방어진을 채워 넣은 재료가 다름 아닌 오르하리콘이었던 것이다. 신성력을 보유한 금속인 오르하리콘이 포함된 갑옷을 데스 나이트가 걸칠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갑옷의 재질인 미스릴도 언데드와는 그리 친하지 않은 재질이었다. 그들이 워낙 강력한 데스 나이트였기에 미스릴의 속성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어지간한 언데드가 미스릴과 접촉한다면 상당한 타격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파사(破邪)의 속성이 훨씬 강한 오르하리콘은 아무리 그들이라도 착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안타깝군." 헬버트론은 무척 아쉬워했다. 심지어 흑마법사인 데이몬조차도 역시 오르하리콘과는 가까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갑옷이 쓸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데이몬의 부탁을 받자 그는 환영의 갑옷에서 건틀릿 부분을 골라 데이몬에게 가져다주었다. 버너디움을 씌운 건틀릿은 유일하게 오르하리콘이 들어가지 않은 부위였다. 데이몬이 건틀릿을 얻게 된 배경은 대충 이러했다. "좋군." 원래 사용하던 건틀릿과 형태가 조금 틀렸지만 데이몬은 새로 얻은 무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일단 무리 없이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끌렸던 것이다. "그럼 한 바탕 몸을 풀어볼까?" 채비를 갖춘 데이몬은 느긋하게 미첼을 향해 몸을 돌렸다. 미첼은 검을 뽑아든 채 상대가 준비를 마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미첼의 옆으로 율리아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미첼을 독려했다. "이 참에 저 나쁜 놈을 사정 봐 줄 것 없이 무조건 죽여버려. 알겠지. 미첼?" 미첼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율리아나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상대를 살려두고픈 마음은 전혀 없었다. 놈으로 인해 얼마나 골탕을 먹었던가? 미첼의 눈빛은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결투로 인해 도리어 골치 아프게 된 것은 카심이었다. 그는 무척 걱정스런 눈빛으로 데이몬을 주시했다. '미치겠군. 어쩌자고 저런 엉뚱한 결투약속을…….' 물론 상대의 마법실력은 그도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이것은 순수한 힘간의 격투였다. 어떤 면을 보더라도 흑마법사가 불리했다. 일단 노인 대 청년의 싸움이었고 거기에다 장검과 무기라고 볼 수도 없는 스파이크드 건틀릿과의 대결인 것이다. 아니 모든 것을 차지하고서라도 마법사와 검사의 격투는 생각조차 해 볼 수 없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검사는 충분히 강하지만 마법사에겐 마법이 보유한 힘의 전부였다. 그 때문에 카심은 걱정이 태산같았다. 어렵사리 합류시킨 마법사를 잃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카심은 데이몬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하지 말게.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까?" 카심을 안심시킨 데이몬은 미첼을 쳐다보았다. "준비되었나?" "모두 끝났소. 어서 덤비시오." 자세를 취한 미첼을 향해 데이몬이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많이 아파?" 율리아나는 무척 걱정스런 눈빛으로 미첼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다. 정신이 완전히 나간 듯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 미첼의 얼굴은 한 마디로 가관이었다. 평소 준수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절정기의 시퍼런 멍 자국만이 얼굴에 가득했다. 눈두덩이 마치 터질 듯 부풀어올라 있는 데다 아예 찐빵이 되어버린 코와 터진 입술에서는 피가 계속 배어 나오고 있었다. 특히 오른쪽 볼에 깊이 새겨진 네 줄기의 상흔은 평생 가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엉망이 된 것은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낡긴 했지만 나름대로 손질을 잘 해서 입고 있던 플레이트 메일은 아예 걸레가 되어 있었다. 온통 찌그러지고 패여서 성한 곳이 한 구석도 없을 정도였다. 오크 보병 백 마리에게 한 시간동안 집단린치를 당하고 난 뒤 볼 수 있는 모습이라고 할까? "정신차려. 미첼. 제발……." 율리아나는 평소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미첼을 간호했다. 평소 미첼을 사갈처럼 싫어했던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변한 태도였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서 율리아나에게 자기편은 오로지 미첼 밖에 없었다. 그러니 율리아나로써는 미첼의 몸 상태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흐흐흐." 멍하니 허공을 주시하던 미첼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한 눈에 보아도 극도의 자괴감에 사로잡힌 모습이었다. 듀라한에게 패할 때도 이렇게 까지 슬프지 않았다. 하지만 필승을 자신했던, 그것도 마법을 쓰지 않은 마법사에게까지 패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익힌 검술에 대해 회의감까지 치밀어 오르게 하고 있었다. 결국 미첼은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반드시 크로센 제국의 기사가 되고 말겠다는 호기는 거듭되는 시련으로 인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울지 마. 미첼. 놈은 비열한 악당이야. 분명히 마법을 써서 널 이긴 것이 틀림없어." 율리아나가 거듭 위로를 해 왔지만 애당초 미첼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한 시간 가량 검을 섞어본 탓에 미첼은 자신이 마법에 의해 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것이 미첼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마법을 쓰지 않은 마법사에게 패했다는 것이 오히려 평범한 병사에게 패한 것보다도 더한 수모라고 생각했기에 미첼의 울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흐흐흑. 아버지……. 왜 제게 그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셨나요." 이제 미첼은 자신에게 검술을 전수해 준 아버지 헤일즈를 원망하고 있었다. 너 정도의 실력이면 어지간한 왕국의 근위기사와도 무리 없이 검을 섞을 수 있을 것이란 아버지의 격려. 이제 미첼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듀라한에게, 아니 범인보다 못한 체력조건을 가진 마법사와의 격투에서까지 패한 때문에 자신감이 완전히 꺾여버린 상태였다. 율리아나가 흐느끼는 미첼을 열심히 위로했지만 애당초 허사였다. 마치 희망을 모조리 잃어버린 사람처럼 미첼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니까……. '내가 너무했나?' 미첼과 율리아나의 모습을 보고 있던 데이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멋지게 애송이를 혼내준 것은 신나는 일이었지만 저렇게 퍼질러 펑펑 울고 있는 것을 보니 다소 계면쩍기도 했다. 그때 데이몬의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용병대장 카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 경악, 회의 같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깃들어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심은 조심스럽게 말을 늘어놓았다. "저, 정말 대단하십니다. 맨몸으로 팔라딘을 이기시다니……." "내 익히 말하지 않았나? 오러 블레이드만 아니면 팔라딘을 전혀 겁낼 필요가 없다고……. "그래도……." 카심의 심사도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는 데이몬의 승리를 전혀 점치지 않았다. 마법사에게서 마법을 제외한다면 말 그대로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법사의 체력은 평범한 병사에게조차 한참을 못 미치는 수준이었으므로……. 하지만 상황은 정말 예상 밖이었다. 접전이 벌어지는 한 시간 동안 데이몬은 말 그대로 일방적으로 미첼을 몰아붙였다. 그렇다고 마법을 사용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싸움이 순수한 체술로만 전개되었으므로……. 결투 과정을 되새겨보던 카심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헤이스트를 펼치지도 않았어. 그리고 실드 또한 마찬가지야. 내 경험에 미루어보면 저 흑마법사는 순수한 체술로써 녀석을 이긴 것이 틀림없어.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위력적인 체술로 말이야.' 데이몬의 몸놀림은 카심을 감탄하게 만들기에 추호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것은 검사와 많이 싸워본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위력적인 체술이었다. 그렇다고 상대했던 미첼이 결코 약했던 것이 아니었다. 정교한 동작과 매서운 공격, 적절한 회피동작은 보고 있던 카심에게도 절로 탄성이 튀어나오게 만들었으니까…….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첼의 기술은 카심조차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을 정도로 뛰어났다. 하지만 흑마법사가 보여주는 체술은 단연 한수 위라고 평할 수 있었다. 격투에서 그는 마치 먹이를 노리는 사자와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맹수와도 같은 감각으로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공격과 방어를 거듭하던 흑마법사. 압도적으로 짧은 무기를 가지고도 그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아니 격전 내내 일방적으로 상대를 몰아붙였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스파이크드 건틀릿의 짧은 칼날로 검을 살짝 막은 뒤 마치 미끄러지듯 검신을 타고 올라가 손을 공격하는 기술도 놀라웠고 몸을 살짝살짝 돌려 탄력을 최대한 가미한 공격 역시 탄성을 자아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퍼부어지는 절묘한 킥(kick, 발차기)은 보고 있던 카심의 간담이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다리 오금이나 복숭아 뼈 부분에 킥이 작렬하면 미첼은 예외 없이 중심을 잃고 심하게 비틀거려야 했다. 그 사실을 상기한 카심은 자신도 모르게 미첼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대결이 정상적인 싸움이었다면 미첼은 열 번 죽어도 모자랐어.' 마법사와 기사와의 검술대결이라는 말도 안 되는 격투. 물론 어느 한 쪽의 압도적인 우세일 것이라는 예상은 변하지 않았다. 문제는 승자와 패자가 서로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순수한 검술대결에서 기사를, 그것도 팔라딘 급 기사를 한시간 가까이 가지고 놀며 농락한 마법사. 그것도 여러 차례 봐 주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데이몬을 쳐다보는 용병들의 눈망울엔 경의의 빛이 짙게 배어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런 마법사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머쓱해진 데이몬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뭐하는 거야? 출발하지 않을 건가?" 둘 간의 격투로 인해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으므로 카심은 생각을 접고 조심스럽게 미첼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만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미첼을 안고 있던 율리아나가 매서운 눈빛으로 카심을 쏘아보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세상에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다니……. 저자가 대관절 사람인가요?" 화를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애궂은 카심에게 화풀이를 시도하려는 율리아나였다. 하지만 이미 율리아나에 대해 겪을 대로 겪어보았던 카심이었다. 이어지는 카심의 대답에 율리아나는 말문이 콱 막힐 수밖에 없었다. "제가 보기에 싸움은 기사가 먼저 건 것 같은데요. 뭐 마법사께서 잘못하신 것이 있습니까? 마법사도 분명한 남자입니다. 남자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수가 없지요. 아 참! 여자 분이라서 남자들의 세계에 대해선 잘 모르시겠군요." "이, 이……." 분을 참지 못해 입술을 파르르 떠는 율리아나. 카심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서둘러 다음 도시로 이동하지 않는다면 산중에서 노숙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70회 이미 쌍방 간의 감정은 격해질 대로 격해진 상태였다. 미첼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이곳에서 한 발도 움직일 수 없다는 율리아나와 고용주 신분이니까 마음대로 하라는 카심의 언쟁을 들으며 용병들은 천천히 노숙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율리아나는 그들이 지금까지 겪어보았던 고용주 중에서 가장 별난 고용주였다. 데이몬은 느물느물 웃으며 율리아나와 미첼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는 직감적으로 오늘 밤 둘이 무슨 일이 벌일 것이란 사실을 예상하고 있던 상태였다. '재미있겠군. 저것들이 과연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을까?' 결국 일행은 그곳에서 밤을 지샐 수밖에 없었다. 예기치 못했던 데이몬과 미첼의 결투, 거기에 이어진 율리아나의 고집까지 겹쳐 결국 그곳을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노숙하기로 결정되자 용병들은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노숙에 익숙할 대로 익숙했던 용병단원들인 만큼 그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제럴드와 하인리히는 식사 준비를 한다. 패터슨은 한 명을 데리고 나무를 해 와라. 그리고 나머지 둘은 근처에서 토끼나 노루 같은 것을 사냥해 오도록……." 카심의 명령이 떨어지자 용병들은 서둘러 맡은 위치로 이동했다. 물론 데이몬에게는 어떠한 지시도 내려지지 않았다. 그는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귀빈이었던 것이다. "캬! 일행들이 있다는 것이 이래서 좋군." 데이몬은 느긋하게 나뭇등걸에 몸을 묻고 물병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지만 용병들은 거기에 한 마디의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지금껏 보여주었던 놀라운 실력 때문에 그들은 이미 데이몬에게 깊이 매료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잠시 용병들이 움직이는 양을 둘러보던 카심이 조심스럽게 데이몬에게 다가왔다. 그는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런데 마법사님께 한 가지 여쭈어볼 것이 있습니다." "뭔가? 말해보게." 데이몬의 허락이 떨어지자 카심은 모종의 기대로 눈을 빛냈다. "아까 말씀하시던 와중에 팔라딘의 마나연공법을 몇 개 수집하신 것이 있다고 하신 것 같은데……. 눈치 빠른 데이몬은 카심의 내심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흠! 자네 의도는 혹시 내가 마나연공법이 적힌 종이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해서 물어보는 것인가?" "그, 그렇습니다." 카심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속셈을 들킨 것이 여간 쑥스럽지 않았지만 카심의 정신은 온통 데이몬의 대답에 쏠려 있었다. 자존심을 무릅쓸 만큼 마나연공법에 대한 매력은 컸다. 하지만 이어진 데이몬의 대답에 카심은 억지로 실망감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군. 연구를 마친 뒤 깡그리 태워버렸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네." "그, 그렇습니까?" 카심은 몹시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사실 그는 쓸만한 마나연공법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상태였다. 오러 블레이드를 연성하기 위해서는 마나연공법이 필수였고 그것을 얻는다면 강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마나를 다스리는 경지에 올라 팔라딘의 대열에 끼는 것. 이것은 전 아르카디아의 용병들이 꿈에라도 이루길 바라는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물론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할 수 있는 용병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극소수에 불과했다. 때문에 카심으로서는 데이몬이 흘린 말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나연공법이란 크로센 대제로부터 전래된 것으로서 체내의 마나를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었다. 크로센 대제가 양 대륙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기사들에게 팔라딘이나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는 길을 폭넓게 열어놓았다는 것이었고 그의 방식대로 수련한다면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경지에 오르기가 이전보다 훨씬 용이했다. 그 때문에 마나연공법은 각 왕국에서 최고의 기밀사항으로 간주되었고 그것을 외부로 유출하는 행위는 반역에 버금갈 정도의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 오로지 믿을 수 있는 기사들에게만 전수하는 것이다. 때문에 일반 용병들이 마나연공법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가히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크로센 대제가 남긴 마나연공법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일단 가장 비밀에 쌓인 첫 번째 방법은 오직 크로센의 기사단에만 전수되는 마나연공법이었다. 세 가지 마나연공법 중에서 가장 위력적인 방법으로 지금까지 크로센 제국 밖으로 유출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이것을 익히게 되면 거의 십중팔구 팔라딘이 될 수 있다고 알려졌으며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가능성도 현격히 높았다. 말 그대로 완벽에 가까운 마나연공법인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철저히 일대 일로 전수되었으며 심지어 크로센 기사단원이라 할지라도 충성심이 입증되지 않는다면 전수 받을 수 없다. 다른 두 가지 마나 연공법이 무수한 변천과 갈래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만은 원류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크로센 기사단 독문의 마나연공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방법은 크로센 대제가 동맹국의 기사들을 강화시키기 위해 제공한 것으로 첫 번째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지만 나름대로 강력한 위력을 가진 마나연공법이었다. 크로센 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왕국에서는 이것을 근위기사에게 전수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 연공법은 독자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고 많은 아류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북부의 강국인 펜슬럿의 경우에는 발전을 거듭한 나머지 크로센 제국의 것에 비해 그리 많이 뒤떨어지지 않는 완성도를 자랑했다. 물론 애초의 것보다 위력이 현저히 줄어든 것도 없다고 할 수 없었지만……. 이 방법 역시 구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연공법을 보유한 왕국에서는 국력을 기울여 연공법이 유출되는 것을 막았고 그 탓에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일반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방법이기도 했다. 세 번째의 것은 그래도 구하기가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다. 일반 병사들 중에서 마나에 자질이 있는 자를 찾기 위해 크로센 대제가 의도적으로 퍼뜨린 범용 연공법으로써 가장 폭넓게 보급되어 있을 뿐더러 많이 알려져 있었다. 중소 왕국의 기사단에서 채택하고 있는 연공법으로 웬만한 기사학부에서는 이것을 이용해서 수련생을 단련시킨다.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용병들은 대부분 이것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사례였다. 하지만 세 번째 방법은 앞의 두 가지와는 달리 일정 수준에 오르기가 극히 어려웠다. 특별히 자질이 있는 자가 아니면 경지에 오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그 때문에 강해지기를 바라는 자는 기를 쓰고 상승의 마나연공법을 구하려 했다. 심지어 목이 잘리는 것을 감수하며 크로센이나 펜슬럿의 궁정에 침입하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목적을 이룬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상승의 마나연공법은 각 왕국에서 그만큼이나 기밀사항이었고 철저히 비밀을 지켰던 것이다. 때문에 카심이 데이몬의 말에 솔깃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긴……. 마나연공법을 그리 쉽게 얻을 순 없겠지. 아마도 흑마법사가 구한 것은 십중팔구 세 번째 방법일 것이야.' 낙심한 카심은 몸을 돌렸다. 식사준비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미첼과 율리아나가 생각난 카심은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들 둘은 데이몬이 보고싶지 않다는 이유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아무리 밉더라도 밥은 먹여야 했기 때문에 카심은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한 카심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아니?" 낙심한 채 울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미첼은 이제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놀랍게도 그는 지금 마나연공을 하고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정말 기이한 자세를 취한 채 말이다. 다리를 꼬아 양 발바닥이 하늘을 보게 앉은 뒤 양손을 떠받들고 있는 포즈로 미첼은 마나연공을 몰두해 있었다. 카심이 다가가자 율리아나가 눈에 쌍심지를 켜며 앞을 막아섰다. "다가가지 말아요. 그는 지금 중요한 수련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결코 몸을 건드려서는 안 되요." 카심의 걸음이 우뚝 멈춰졌다. 아니 율리아나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카심은 마나연공 중인 기사의 몸은 어떠한 경우에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미첼의 일거수일투족에 극히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조금 뒤 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군. 그의 아버지가 펜슬럿의 근위기사이셨다니 이제 이해가 되는군. 저것이 바로 소문이 자자한 펜슬럿 기사단 독문의 마나연공법이로군." 몸을 감싸고 있던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호흡을 거듭함에 따라 서서히 미첼의 코와 입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카심은 미첼의 마나연공법이 쉽사리 볼 수 없는 상승의 연공법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카심의 얼굴에 몹시 부럽다는 빛이 떠올랐다. 미첼이 부러워 견딜 수 없었지만 그는 그저 겉으로만 툴툴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결코 자신에게 전수될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을 알기에……. "제기랄. 아비 잘 만난 덕에 쉽사리 팔라딘이 될 수 있었던 녀석이로군." 기사단에서 탈퇴를 할 경우 기사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익힌 마나연공법에 대해 철저히 함구해야 했다. 그것은 기사로서의 명예를 걸고 해야 하는 서약이었다. 만약 허락 받지 못한 자에게 전수를 할 경우 대상자는 즉시 기사로서의 자격이 박탈됨과 동시에 추살령이 떨어진다. 그 때문에 많은 기사들이 사직을 함에도 불구하고 마나연공법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예외규정이 있었다. 이것은 오로지 펜슬럿의 기사들에게만 적용되는 항목으로서 예기치 못한 일로 사직을 할 경우 대상 기사는 이례적으로 아들 한 명에게만은 마나연공법의 전수가 허락되었다. 그렇게 해서 전수받은 기사의 아들인 경우에는 펜슬럿의 팔라딘 자격심사에 우선권이 주어졌다. 그런 이유로 미첼이 만약 펜슬럿으로 간다면 상당한 우대를 받을 수 있었다. 약정된 시험을 통과하면 바로 팔라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미첼의 아버지 헤일즈는 이미 펜슬럿에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따라서 그는 아들 미첼에게 어떤 경우에도 펜슬럿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미첼 역시 자신이 전수받은 마나연공법에 대해 함구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설령 목숨이 위태롭다 하더라도 비밀만은 지켜야 했다. 만에 하나 비밀이 퍼져나갈 경우 가문의 명예가 하루아침에 바닥에 추락할 수 있었으므로……. 어느덧 대부분의 용병들이 다가와서 미첼이 마나연공법에 심취해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하나같이 부럽다는 빛이 역력했다. "저것이 바로 펜슬럿 고유의 마나연공법이래. 저것만 익힌다면 무리 없이 팔라딘이 될 수 있다는구먼." "캬! 정말 좋겠다." 데이몬도 어느덧 그 대열에 끼여 있었다.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다른 용병들과는 달랐다. 그는 미첼이 하고 있는 연공법에서 마나가 움직이는 경로를 특히 주의해서 보았다. 관찰을 통해 어떤 유파의 내공심법(마나연공법)인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결론은 오래지 않아 내려졌다. '틀림없군. 저것은 전형적인 정파의 내공심법이야. 정기신 일체를 목적으로 대자연의 기를 칠공으로 빨아들이는 속가 계열의 내공심법. 많이 변형되긴 했지만 불문(佛門)이나 도문(道門)과는 운기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 이로써 크로센 대제가 정파의 인물이란 것은 한층 더 확실해졌군.' 카심의 혼잣말로 인해 데이몬은 마나연공법(내공심법)이 아르카디아에 퍼진 유래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미첼의 마나연공법은 제법 정묘하긴 했지만 절정의 심법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구대문파의 것보다 위력 면에서 조금 떨어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중견 방파의 독문심법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속가 계열이니까 비룡궁이나 신검문, 철혈문 정도의 문파에서 유래될 법한 심법이로군. 도대체 크로센 대제의 출신 문파가 어디일까?' 물론 연공법이 펜슬럿에 전래된 과정을 생각해본다면 크로센 대제의 독문심법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단순히 동맹국 기사들을 위해 제공한 것인 만큼 대제의 독문심법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도대체 크로센 대제가 어디 계열의 내공을 익혔을까? 위력이 상당히 강맹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니 도가(道家) 계열은 아닌 것 같고……. 십중팔구 불가(佛家)의 내공이겠군. 속가의 내공은 그리 강력한 기운을 풍기지 않으니 말이야.' 물론 위력 면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마도의 내공이다. 속성 자체가 패도(覇道)를 띠고 있는 만큼 그 어떤 정파의 내공도 마도의 것보다 파괴력이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크로센 대제가 마도의 인물이 아니었기에 데이몬은 어렵지 않게 그의 무공이 불문의 것이라 단정지을 수 있었다. 절정에 오르기가 다소 힘든 편이었지만 마도의 내공심법은 일정 수준까지는 정파의 내공심법보다 성취도 빠르고 익히기도 쉬운 편이었다. '그래도 이곳에서 통용되기는 마공이 월등히 유리해. 일정 경지까지 오르는 속도에서는 정파의 내공심법과 비교조차 할 수 없으니 말이야.' 그 사실을 상기한 데이몬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부럽다는 듯 연신 미첼을 쳐다보는 용병들의 눈초리를 뒤로 한 채. 미첼의 연공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후우욱." 길게 한숨을 내쉰 미첼은 눈을 번쩍 떴다. 몸을 감돌던 아지랑이 같은 기운은 모조리 코와 입을 통해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간 상태였다. 전신이 날아갈 듯 가뿐해졌으며 온 몸이 기로 충만해진 느낌이었다. 미첼은 그때서야 마음이 다소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71회. 고개를 돌린 미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응?" 모든 용병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 선망의 빛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그 모습에 기분이 절로 우쭐해졌지만 그는 억지로 얼굴빛을 고쳤다. "뭐 구경거리가 생겼소?" 퉁명스럽게 내뱉은 미첼은 몸을 일으켜 율리아나에게로 다가갔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카심이 고개를 흔들며 말을 걸었다. "식사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생각 없소. 저 작자와 한 자리에서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으니……." 미첼의 말에 율리아나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먹지 않겠어요." 결국 카심은 용병들을 데리고 데이몬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야 했다. 속으로 재수 없는 녀석이라고 한없이 투덜거리며 말이다. "밥이다." 차려진 음식을 보자 데이몬이 반색하며 달려들었다. 용병들이 준비한 음식이라 변변찮은 것은 없었지만 한바탕 격투를 벌인 뒤라서 입맛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치우는 데이몬을 보고 하인리히가 마른 고기를 넣어 끓인 수프를 한 그릇 더 퍼 주었다. "고맙다." 사양하지 않고 그릇을 받은 데이몬은 하인리히에게 싱긋 웃어준 뒤 마저 뱃속에 그러넣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럴드가 수프가 담긴 그릇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미첼과 율리아나에게 가져다 줄 심산 같았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안 먹겠다는데 굳이 가져다 줄 필요 있나?" 난처한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한 제럴드는 그릇을 들고 둘에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절름발이라서 그런지 수프를 흘리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걸어가는 모습이 상당히 안쓰러웠다. 보고 있던 카심이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었다. "불쌍한 녀석.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 소리에 정신 없이 수프를 들이키던 데이몬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린가? 뭐가 안 된다는 거지?" 카심의 얼굴에는 무척 착잡한 빛이 서려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제럴드는 십중팔구 미첼이란 녀석에게 마나연공법을 가르쳐달라고 떼를 쓸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불가능한 얘기지만 제럴드는 지금 강해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이거든요." "무슨 사연이 있나?" "말하자면 깁니다." 카심의 말에 의하자면 제럴드는 무척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여간해서는 말하지 않으려고 하던 제럴드였지만 몇 개월을 같이 지내면서 점차 마음을 열게되고 어느 날 카심에게 신세내력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제럴드는 악덕 상인 때문에 집안 전체가 풍비박산이 난 경우였다. 제럴드는 그것 때문에 용병이 될 마음을 먹었고 강해지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소규모 용병단에서 강해지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 녀석은 북서쪽의 부유한 상업왕국 테제로스 출신입니다. 농사를 짓는 부모와 함께 제법 단란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더군요. 문제는 제럴드에게 보기 드문 미색을 가진 누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필이면 그 누이에게 호색가로 유명한 테제로스의 악덕 상인인 프록터가 눈독을 들였다는 것인데……." 제럴드 누이의 미색에 반한 나머지 프록터란 녀석은 공개적으로 혼담을 넣었다고 했다. 그 때 제럴드의 누이는 꽃다운 나이인 방년 19세였고 프록터는 마흔 다섯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벌써 다섯 명의 처를 갈아치운 전력을 가지고 있던 프록터는 몰염치하게도 제럴드의 누이를 여섯 번째 아내로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제럴드의 부모는 두 말도 하지 않고 혼담을 거절했다. 돈이나 권력에 환장한 집안이 아니고서야 프록터같은 호색가에게 딸을 줄 이유가 없었다. "제럴드 집안의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프록터는 말 그대로 법을 교묘하게 이용해가며 제럴드 집안을 괴롭혔지요. 그의 입김으로 소작도 짓지 못하고 집마저 경매에 넘어가게 되어 빚이 산더미처럼 쌓였지요. 하지만 그런 상황에 처했어도 제럴드의 아버지는 딸을 굳건히 지켰습니다." 결국 견디지 못한 것은 제럴드의 누이였다. 자기 한 몸을 희생해서 부모와 동생을 잘 살게 하겠다는 욕심에 그녀는 결국 제 발로 프록터를 찾아갔다. 하지만 제럴드 가의 불운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으니……. 프록터에게 시집갔던 누이는 1년도 되기 전에 미친 상태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변태성욕자인 프록터에게 시달리다 못해 결국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다. 그 충격에 몸져누운 제럴드의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그만 술독에 빠진 폐인이 되어버렸다. 미쳐버린 누이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싸늘한 시신이 되어버렸으니……. 그 모습을 보고 프록터에게 복수심을 품지 않았다면 사람이 아니었으리라……. 당시 열 다섯이던 제럴드는 칼을 품고 프록터의 저택에 잠입해 들어갔다. 프록터를 죽여 누이와 어머니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중무장한 수십 명의 경비병들이었다. 결국 제럴드는 말 그대로 죽을 만큼 두들겨 맞고 테제로스 수비대의 손에 넘겨졌다. 제럴드는 그 때 맞은 매의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게 된 것이다. 살인미수죄가 비록 중죄이긴 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제럴드는 다행히 2년만 복역하고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제럴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간 집과 아버지의 쓸쓸한 무덤뿐이었으니……. 결국 제럴드는 힘을 길러 복수를 꾀할 생각에 용병단을 찾았고 마침내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 되었던 것이다. 제럴드의 기구한 사연을 들은 데이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는 참 별 나쁜 놈도 많군. 테제로스 국왕은 대체 왜 그런 녀석을 살려두는 거지?" "원래 법이란 것이 힘을 가진 자의 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놈은 잘 먹고 잘 산다고 하더군요."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카심을 보니 그에게도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구태여 묻지 않았다. 사람에겐 누구나 숨기고 싶은 사연이 있는 법이다. 대신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제럴드를 쳐다보았다. 미첼과 율리아나에게 다가간 제럴드는 뭔가를 계속 간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첼이 연신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보니 일이 뜻대로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무릎까지 꿇어가며 애걸했지만 미첼의 고개는 끝내 끄덕여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카심은 혀를 찼다. "쯔쯔. 어지간하면 가르쳐줄 법도 하건만……." 그의 눈에는 힘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제럴드가 한없이 애처롭게만 보였다. 물론 힘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프록터에게 합법적인 복수를 할 수 없을 테지만 말이다. 거듭되는 거절에 제럴드는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몸을 돌린 제럴드는 힘없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의 머리 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기회를 보아 저 녀석에게 배교의 내공심법을 전수해 줘야겠군.' 사실 그에겐 이곳의 어떤 마나연공법보다 강력하다 할 수 있는 내공심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수라사령심법이었다. 수호마왕군을 탄생시키기 위해 사준환이 수십 명의 무공교두들을 시켜 완성시킨 속성이 가능한 내공심법. 내공을 모으는 속도는 지금까지 존재한 어떠한 내공심법보다도 탁월했다. 게다가 좀처럼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는 안정성까지 겸비한 때문에 역사는 짧지만 수라사령심법은 중원의 어떠한 내공심법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자부했다. 이미 수호마왕군의 활약에 의해 위력이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던가? 물론 수라사령심법 역시 절정까지의 연성이 힘들다는 마공 계열의 단점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아르카디아에서는 하등 상관없는 문제였다. 이곳에서는 절정까지 오르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명성을 날릴 수 있었으니까…….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용병들을 쳐다보았다. 상황을 봐서 나머지 녀석들에게 전수해 주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력이야 형편없지만 마음씀씀이 하나는 괜찮은 녀석들이었으니까……. '어쩌면 이들에게 가장 적합한 마나연공법이 수라사령심법일 수도 있겠군.' 수라사령심법은 효과가 탁월한 내공심법임에는 분명했지만 몇 가지 제약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반드시 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연성을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탓에 수라사령심법은 배교 무사들에게 폭넓게 보급되지 못했다. 사파 고수들은 보통 여러 가지 무공이나 내공을 섭렵한 상태로 문파에 투신하기 때문이다. 결국 수라사령심법의 진정한 효과는 지금껏 수호마왕군 무사들밖에 보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용병들이 지금껏 내공을 쌓았을 리는 없을 터. 이들에게 수라사령심법을 전수해 준다면 틀림없이 단시일내에 내가고수로 탈바꿈할 것이 분명했다. 이곳에서 말하는 팔라딘 말이다. 터덜터덜 걸어와 힘없이 주저앉는 제럴드를 보며 데이몬에겐 또다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가 알고 있는 몇 가지 안 되는 무공 중 하나가 떠오른 것이다. 그것은 제럴드에게 더 이상 적합할 수 없는 무공이었고 데이몬이 만일을 대비해 익힌 유일한 검법이었다. '그렇지. 녀석이 왼손잡이이니 수라사령심법과 더불어 좌수검법을 전수한다면 무척 훌륭하겠군. 이곳 녀석들은 좀처럼 왼손을 사용하지 않으니 예상외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겠어.' 좌수검법(左手劍法). 왼손을 쓰는 아주 변칙적인 검법으로 전혀 생각하지 못한 각도에서 검이 날아오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극히 까다로운 검법이었다. 특히 기습에 유리하기 때문에 이 검법을 익힌 검객들은 일부러 오른 손을 놔두고 왼손을 사용했다. 때문에 선천적으로 왼손잡이인 제럴드에겐 극히 적합한 검법이라 할 수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강적을 상대할 경우를 대비해 익혀는 놓았지만 데이몬은 지금까지 이 검법을 단 한번도 펼친 적이 없었다. 물론 검로나 검형(劍形) 자체는 모조리 익혀 놓았지만 말이다. 이처럼 데이몬은 뜻하지 않게 생긴 동료들에게 강력한 내공심법과 무공을 전수할 욕심에 부풀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아르카디아을 주름잡고 있는 정파 내공심법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비록 지금은 마법사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는 원래 막강한 마공을 구사하는 사파고수였고 자신이 익힌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유구한 역사를 쌓아온 중원의 사파 무공 역시 위력 면에선 정파 무공에 추호도 손색이 없었으니……. '좋아. 결심했어. 정파 무공이 판을 치는 아르카디아에 배교의 정통 마공을 전수하겠다. 크로센 대제가 성공했으니 나라고 못할 리가 없다. 우선 이들을 뿌리 삼아 아르카디아에 기필코 마공의 뿌리를 내리고야 말것이다.' 데이몬의 굳건한 결심 속에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날이 밝자 뜻밖의 사단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첼과 율리아나가 일행의 식량을 깡그리 털어 야반도주를 한 것이다. 불침번을 서던 하인리히와 패터슨을 꽁꽁 묶어놓고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입 가리개를 풀어주자 패터슨이 겨우겨우 내뱉은 일성이었다. 물론 평범한 용병에 불과한 그가 미첼의 암습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텅 비어버린 식량자루를 쳐다보던 카심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런 빌어먹을 것들이……." 이곳에서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마을까지는 이틀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미첼과 율리아나가 빵 한 조각 남겨두지 않고 몽땅 가져가 버렸으므로 다음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모두가 쫄쫄 굶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정말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율리아나는 카심에 대한 복수를 이런 식으로 해버린 것이다. 연신 웅성거리는 용병들 사이를 헤치고 데이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몹시 아픈 듯 밤새도록 묶여 있던 몸을 주무르던 패터슨과 하인리히를 쳐다보며 데이몬은 씁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야반도주를 했나보군. 젊은 청춘들이 끓는 혈기를 참지 못했나보지?" "그, 그런게 아니라……." 카심의 입에서는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상대는 복수를 위해서 이런 짓을 한 것이다. 율리아나는 정말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골치 아픈 고용주였다. 일개 왕국의 왕녀로써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다니……. "아쉽군." 데이몬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율리아나의 얼굴을 당분간 보지 못하게 된 것이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오로지 다프네와 닮은 겉모습뿐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는 이미 이런 결과를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72회 그 때문에 암암리에 둘의 몸에다 추적마법을 펼쳐놓지 않았던가? 그들 둘이 반경 일백 키로 이내에만 있다면 언제든지 찾을 수 있었던 데이몬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고생을 좀 시켜야겠군. 감히 내가 먹을 식량을 털어 달아나?' 생각을 정리한 데이몬은 연신 씨근거리는 카심을 향해 웃는 낯으로 말을 걸었다. "그래도 속이 시원하겠군. 골치 덩어리들을 식량 한 자루로 해결했으니 말일세." "………." "제발로 야반도주를 했으니 계약이 해지된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고,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할 필요가 더 이상 없지 않겠나?" 데이몬의 말에 카심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상황이 그리 쉽게 해결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 녀석들은 임무를 완수했다는 동의서에 서명도 하지 않고 사라졌으니까요……. 이것은 나중에 충분히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습니다. 나중에 나타나서 도리어 우리들이 도망쳤다고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면 결국 계약위반에 대한 책임은 우리측에서 져야 하니까요." "호오. 그런 항목도 있었나?" "그렇습니다. 용병고용에 관한 법률은 철저히 고객을 보호하게 되어 있고, 또한 고용주가 일개 왕국의 왕녀인 만큼 재판이 벌어지게 되면 우리가 이길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행실을 보아 충분히 그런 소행을 하고도 남을 것들입니다." 카심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독립해서 처음 맡은 청부가 이 지경이니 더 이상 청부를 받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에 하나 율리아나 측에서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면 카심의 재정상태로서는 도저히 배상금을 물어줄 여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으로썬 직접 불침번을 서지 않은 것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찾아 동의서에 서명을 받으면 끝나는 문제인가?" "그, 그렇습니다만." 이어진 말에 카심은 한 가닥 기대를 품고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상대는 대단한 실력을 가진 흑마법사였고 혹시라도 타개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품은 기대였다. 하지만 데이몬의 대답에서도 확실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뭐 세상이 넓다고 하지만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 그때 내가 반드시 증언을 서 주겠네." 맥이 탁 풀린 카심은 힘없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같은 용병단원들의 진술은 법정에서 증언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물론 사악한 흑마법사의 증언은 그 어떤 판사도 신뢰하지 않을 것이란 말을 카심은 입밖에 꺼내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데이몬은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구세주였다. 물론 상황판단을 전혀 하지 못하는 구세주였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시장한데 식사나 하는 게 어떤가?" 데이몬의 말에 카심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식사타령이나 하다니……. 하지만 그는 결코 데이몬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다. "저기……. 식량은 몹쓸 놈년들이 모조리………." "나에게 조금 있네. 아마 한끼 먹을 분량은 될 거야. 나중 일은 다음에 생각하고 일단은 배를 채우세나." 말을 마친 데이몬은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거무스레한 기운이 물결치듯 흔들리는 차원의 틈새가 용병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 번 보긴 했지만 신기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에 용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인크레시아에 집중되었다. "햐! 도대체 정체가 뭘까? 얼핏 듣기론 듀라한을 보관해 두는 장소라고 하던데……." "이런 것을 만들어내다니 과연 마법사들은 뭐가 달라도 달라." 용병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으며 데이몬은 윈슬럿을 소리쳐 불렀다.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윈슬럿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아아아." 며칠만에 만난 주인이 반갑다는 듯 윈슬럿은 머리통을 치켜들고 기성을 질러댔다. "그래 잘 있었느냐?" 데이몬도 반갑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용병들의 반응은 데이몬과는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저 단단한 머리통에 모질게 두들겨 맞은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의 얼굴에는 질린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꾸러미 하나를 넘겨받은 뒤 데이몬은 윈슬럿에게 다시 인크레시아 속에 들어갈 것을 지시했다. "들어가서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도록." 윈슬럿은 두말도 하지 않고 인크레시아 속으로 사라졌다. 말 하나는 철두철미하게 잘 듣는 듀라한이었다. 인크레시아를 닫은 뒤 데이몬은 꾸러미를 카심에게 넘겨주었다. "돼지고기일세. 이것으로 식사를 준비하게나. 일단 배를 채워야지 마땅한 방도가 생각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카심은 힘없는 어조로 휘하 용병들에게 식사준비를 할 것을 지시했다. 솔직히 밥이나 먹고 있을 형편이 아니었지만 별 뾰쪽한 방도가 없었다. 식사를 마친 뒤 데이몬은 용병들을 불러모았다.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 전원이 데이몬 앞에 모여 앉았다. 그들의 기대 어린 시선을 훑어보며 데이몬은 천천히 말을 늘어놓았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난 팔라딘이나 소드 마스터에 대한 연구를 오랫동안 해 왔다. 비록 지금은 모두 태워버리고 없지만 여러 가지 마나연공법도 구해서 연구한 적이 있다. 따라서 그에 관해 상당히 많은 지식을 얻은 상태이지." 흑마법사가 대관절 왜 이런 얘기를 늘어놓나 의아했지만 용병들은 묵묵히 경청했다. 이삼일 대해본 바로는 다소 괴팍하긴 했지만 본성이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았기에 용병들은 데이몬과 어느 정도 정이 든 상태였다. 데이몬은 그들의 면면을 쳐다보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알기로 마나연공법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고 들었네. 비교적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방법부터 효과는 확실하지만 구하기가 극히 힘든 방법까지……. 자네들이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지만 난 제법 많은 마나연공법을 구해 연구해왔네. 내가 왜 이런 얘기를 자네들에게 늘어놓는지 누구 아는 사람 있나?" 물론 아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데이몬의 털어놓는 얘기는 용병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들이었고 충분히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내용이라서 그들의 눈동자는 어느덧 초롱초롱해지고 있었다. 데이몬은 빙긋이 미소를 떠올렸다. "아마도 자네들은 모를 거야. 내가 지금까지 얻은 모든 마나연공법을 집대성해서 하나의 마나연공법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 용병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법사가 마나연공법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마나연공법은 어떠한 경우에도 아무나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검술의 한계를 경험한 절대자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마나연공법이었다. 지금까지 아르카디아에서 마나연공법을 만들어낸 자는 단 한 명에 불과했다. 이름하여 크로센 대제. 아르카디아와 트루베니아를 통틀어 가장 강했던 그만이 마나연공법을 손수 만들어낼 능력이 있었다. 아르카디아 대륙에는 무수한 마나연공법이 존재했다. 크로센 대제로부터 물려받은 두 번째 방법을 가지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수많은 아류가 탄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들 중에서 원래의 것보다 위력이 향상된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펜슬럿이나 테제로스 왕국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연공법들이 원래보다 위력이 떨어지거나 중대한 결함이 발견되어 연구가 중지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연구는 철저히 뛰어난 기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적어도 소드 마스터 이상의 경지에 오른 무인들만이 마나연공법에 손을 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검술에 전혀 문외한인 마법사가 마나연공법을 만들어냈다니……. 용병들로써는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눈이 휘둥그레진 카심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기사가 다스리는 마나와 마법사가 사용하는 마나는 성질 면에서 전혀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혀 다른 게 아니야. 극한까지 농축되었다 뿐이지 본래의 성질은 같은 것이라 봐야 해. 왜? 믿지 못하겠나? 하지만 사실이야. 실험을 해보지 못했다 뿐이지 이론상으론 완벽한 마나연공법이니까. 게다가 이것은 지금까지 아르카디아에 존재했던 그 어떤 마나연공법보다 위력이 뛰어나다고 장담할 수 있네. 모르긴 몰라도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경지에 오르는 시간이 파격적으로 줄어들 걸세." 데이몬이 가슴을 탕탕 쳐가며 장담했지만 용병들은 미심쩍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세상물정 모르는 자라 해도 마법을 연구하는 마법사가 기사들의 수련법인 마나연공법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쉽사리 믿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 마나연공법을 익히고 싶은 자가 있다면 전수해 주겠네. 알다시피 쉽게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야. 그럼 뜻이 있는 자는 나서게." 하지만 용병들은 선뜻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물며 만든 자가 악의 대명사인 흑마법사였으니 더욱 그러했다. 물론 그런 반응 정도는 데이몬도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녀석들. 굴러 들어온 복을 제 발로 차버리려 하는군.' 그가 거론한 마나연공법의 이름은 당연히 수라사령심법이었다. 물론 직접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그가 가장 증오해 마지않는 원수인 사준환에 의해 만들어진 내공심법. 하지만 위력만은 확실하게 증명된 상태였다. 단 10년 남짓한 기간에 수호마왕군 무사들 전원을 거의 절정에 근접한 경지에 오르게 만들었으니 더 이상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얽힌 사실을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순 없는 노릇이라 데이몬은 느긋하게 지원자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절세의 내공심법을 전수해주는데 그가 도리어 몸이 달아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신청자는 금방 나타났다. "제가 배우겠어요." 두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터져 나오는 앳된 음성. 구태여 보지 않아도 제럴드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 명 나왔군. 더 이상은 없나?" "저도 한 번 익혀보겠습니다." 두 번째로 나선 자는 의외로 카심이었다. 솔직히 그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데이몬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네가 이것을 익히겠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카심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기댈 수 있는 구석은 오로지 이것뿐이었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73회 삼류 마나연공법 정도야 어떻게든 구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 팔라딘의 경지에 오르는 가능성은 무척 희박했다. 거기에다 팔라딘이 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마나연공법을 쌓아야 한다는 제약조건이 있었다.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새로 시작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노릇. 삼류 연공법으로는 가능성 자체를 생각할 수 없었다. 물론 흑마법사가 만들었다는 마나연공법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도 모르고, 또한 성공한다는 확신도 없었다. 누가 보아도 신빙성이 결여된 사실이었지만 그는 마지막 기대를 흑마법사에게 걸 수밖에 없었다. 쉽게 말해 카심은 도박을 하는 듯한 심정으로 나선 것이다. 거기에다 카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연이 있었으니……. 결심을 굳힌 듯한 카심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용병대장이 익힌다면 나야 더 바랄 나위가 없지. 더 이상 익혀볼 마음이 있는 자가 있나?" 대장까지 나서는데 나머지 용병들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어차피 삼류 용병으로 전전하던 처지였었고 팔라딘이 될 가능성이 아예 전무하다 생각했기에 용병들은 분분히 신청하고 나섰다. 밑져봐야 본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저도 하겠습니다." "저도요." 결국 일곱 명의 용병단 전원이 수라사령심법을 익히겠다고 나섰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을 느꼈다. '녀석들. 좋은 것은 알아 가지고……. 명심해 두도록. 너희들은 지금 일생일대의 기연을 얻은 거야. 모르긴 몰라도 수라사령심법의 위력은 크로센 대제의 독문심법에 비견하더라도 전혀 떨어지지 않으니 말이야.' 데이몬은 속마음을 숨긴 뒤 수라사령심법을 익히는데 유의할 점을 설명해 주었다. "내가 만든 마나연공법에는 한 가지 제약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어떠한 마나연공법도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 하군. 모두들 마나를 연공해 본 경험이 없는 듯 보이니 말일세. 하지만 명심하게. 이 연공법을 익힌다면 이후로는 두 번 다시 다른 연공법을 익힐 수 없네. 마나의 연공 방식 자체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만일 다른 연공법을 익힐 경우 그 즉시 체내의 마나가 흩어져버릴 거야. 그렇게 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되네. 알겠나?" 만약 대상이 중원의 고수들이었다면 데이몬의 주의에 한 번쯤 생각을 해 볼 법도 했지만 용병들의 대답에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솔직히 이번 기회가 아니라면 그들이 마나연공법을 접할 기회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좋아." 용병들의 대답을 들은 데이몬은 흐뭇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아르카디아에 마공의 전수자들이 생긴 것이다. 크로센 대제가 행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자신에 의해 아르카다이 전역에 마공이 널리 퍼져나갈 것이었다. 데이몬은 먼저 카심을 쳐다보았다. 이들에게 내가기공을 전수하려면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곤란했다. 당장 먹을 것도 없는 곳에서 수련에 돌입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데이몬으로서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들에게 내공의 틀을 잡아줄 필요가 있었다. 또한 용병들이 수련에 심취해 있는 동안 그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겁도 없이 호랑이의 수염을 건드린 애송이들을 혼낼 일 말이다. '건방진 것들……. 감히 도망을 쳐? 내가 두고두고 혼내주겠다.' 바야흐로 데이몬의 악취미가 다시 한 번 발동되려 하고 있었다. 생각을 마친 데이몬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일단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식량이 없는 상태로 이곳에서 오래 있을 수 없으니 말일세." "알겠습니다. 모두 이동 준비를 서둘러라." 카심의 지시에 용병들은 부랴부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틀거리에 있는 마을에 도착하려면 조금이라도 서둘러야 했다. 짐을 모두 말에 옮겨실은 뒤 카심은 무척 미안한 듯 주뼛거리며 말을 건넸다. "시장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이틀 정도만 행군하면 식량을 구입할 수 있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카심의 말을 들은 데이몬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자네 지금 말을 타고 가려는 겐가?" "그, 그렇습니다만 뭐 잘못된 것이 있습니까?" 얼떨떨한 기색으로 반문하는 카심을 보며 데이몬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내가 누군가?" "마, 마법사 아닙니까?" "그런데 구태여 힘을 빼 가며 말을 타고 갈 필요가 있을까?" 데이몬의 말뜻을 알아차린 카심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 그렇다면……." "공간이동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야. 그러니 잔말말고 목적지의 좌표를 말하게. 다음 목적지로 예정한 곳 말일세." "그, 그래주시겠습니까?" 카심은 희색이 만연한 표정으로 지도를 꺼내 펼쳤다. 용병단에서 사용하는 지도인 만큼 정확도 면에서 일반적인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공간이동용 좌표 역시 빠짐없이 기입되어 있었다. 카심을 쳐다보던 데이몬이 다시 한 번 주의를 주었다. "정확히 공간이동용으로 명시된 좌표를 말하게. 일전에 싸구려 지도를 믿고 공간이동을 했다가 시장 한 복판에 워프한 것을 생각하면 아직까지 치가 떨려서 말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결코 싸구려 지도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카심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지금 이 순간 마법사가 용병단의 일원인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카심이었다. 한참을 찾은 끝에 카심은 한 군데의 지명을 데이몬에게 불러주었다. 그가 다음 목적지로 지목한 곳은 돈트렐이란 이름을 가진 도시였다. 제법 강력한 왕국중 하나인 테르비아의 중요 거점 도시로써 크로센 제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군사 겸 상업도시였다. 일행이 있는 곳에서 크로센 제국으로 가려면 반드시 돈트렐을 지나야 했다. 원래대로라면 열흘 남짓 여행을 해야만 돈트렐에 닿을 수 있었지만 공간이동을 시켜준다는 데이몬의 장담에 카심이 일부러 이곳을 지명한 것이다. "돈트렐에 가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버거우시면 부근의 다른 마을도 좋습니다. 돈트렐은 이곳과 상당히 먼 곳이니까요." "상관없네. 그 정도쯤이야……." "이곳에 가서 기다린다면 반드시 고용주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크로센 제국으로 가는 경로 중 이곳을 거치지 않고 가는 길은 험준하기 이를 데 없으니까요." "그런가? 알았네." 좌표를 들은 데이몬은 두말도 하지 않고 마법진을 그렸다. 파파파팟. 고위급 마법사답게 간단한 손짓 한 번으로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한 곳에 모인 일행의 주위로 마법진이 저절로 생겨난 것이다. 느닷없이 생겨난 마법진에 용병들은 무척 신기한 모양이었다. "마법진이 그리지 않아도 저절로 생겨나다니……." "놀랍군요. 이런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용병들이 대할 수 있는 마법은 대부분 수준 낮은 것들뿐이었다. 용병단에 소속된 마법사들 중 공간이동을 할 수 있는 자는 그나마 극소수에 불과했으니……. 이 중에서 유일하게 공간이동을 경험해본 용병은 오직 카심 뿐이었고 그의 뇌리 속에는 과거 근 30분 가량을 땀을 뻘뻘 흘리며 마법진을 그려나가는 마법사의 모습이 단단히 각인되어 있었다. 그나마도 근거리 이동용 마법진이었지만 마법사는 한참 공을 들인 후에야 공간이동이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용병단에 가입한 흑마법사는 돈트렐이라는, 결코 거리가 만만치 않은 곳으로 가는 마법진을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손짓 한 번으로 해결해 버렸으니……. '결코 이 마법사를 놓쳐서는 안 돼.' 카심의 뇌리 속에는 어떻게 해서든 데이몬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이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비록 이룰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지만 말이다. "그럼 워프를 시행하겠네."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행의 모습은 그곳에서 사라져버렸다.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까지 함께 말이다. 번쩍. 허공에서 빛이 번쩍 한 순간 일단의 인마가 갑자기 생겨난 것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곳은 대지에서 10미터 가량 떨어진 곳이었으니……. "으헉." 공간이동을 끝낸 순간 중력의 법칙에 의해 추락해 내리는 것을 감지하자 카심은 혼비백산했다. 하필이면 워프한 곳이 허공이라니……. 멀리 내려다보이는 땅과 제법 거리가 있었기에 카심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단련된 용병들이야 팔다리 하나 부러지는 것으로 끝날 테지만 문제는 말이었다. 운 나쁘게 말이 다리라도 부러뜨린다면 이만저만한 손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행 중에 데이몬이 있었다는 사실은 천만 다행이었다. "리버스 그래비티(Reverse gravity, 중력 역전.) " 그의 한 마디에 바닥에 곤두박질 칠 것처럼 추락하던 일행들의 몸이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에 잡힌 것처럼 멎어버렸다. 공교롭게도 바닥을 지척에 둔 상태였다. 중력이 뒤바뀐 때문에 일행의 몸이 다시 허공으로 솟구치려 하고 있었지만 데이몬이 시기적절하게 마법을 풀어버렸기에 일행은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고 대지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히히힝. 용병들은 놀란 말을 진정시킨다고 정신이 없었다. 사람이야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있었지만 짐승인 말은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겨우 정신을 차린 카심이 데이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가, 감사합니다." "자네 지도도 그리 쓸만한 것이 못되는군. 좌표를 허공으로 잡아놓다니 말일세." 데이몬의 눈총에 카심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사실 워프 좌표가 명시되어 있긴 했어도 용병들에겐 여간해서 공간이동을 기회가 없었다. 그 문제 때문에 지도를 만든 사람도 좌표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는 애궂은 지도제작자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나쁜 놈. 거금 45실버나 주고 산 지도인데……." "그만하게. 그건 그렇고 여긴 어딘가?" 주위를 두리번거려본 카심은 이곳이 돈트렐의 외곽이란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목적했던 장소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도착한 것을 확인하자 카심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정말 마법실력이 뛰어난 마법사로군. 공간이동은 거리가 멀고 인원이 많을수록 힘들다고 들었는데 정확히 돈트렐의 외곽에 도착하다니…….' "뭐하나? 들어가지 않을 텐가?" "알겠습니다." 데이몬의 말에 생각을 접은 카심은 얼른 앞장을 섰다. 용병들도 서둘러 말을 몰아 그 뒤를 따랐다. 공간이동을 통해 고용주보다 훨씬 먼저 돈트렐에 도착한 용병단은 시내의 여관에 방을 잡은 뒤, 푹 쉴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돈트렐 시내로 들어온 일행은 가장 먼저 여관을 찾았다. 오랫동안 휴대식량만을 먹어왔던 터라 제대로 된 음식을 맛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던 것이다. 제법 괜찮아 보이는 식당 겸 여관을 찾아 들어간 일행은 여러 가지 음식을 시켰다. 음식의 맛은 무척 훌륭했다. 동부의 강대국인 테르비아 왕국의 도시라서 돈트렐 시민들의 삶도 풍족한 편이었던 것이다. 오로지 데이몬만이 음식을 먹으면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용병들의 혀를 황홀하게 한 음식이었지만 데이몬에겐 전혀 직성이 차지 않았다. '역시 요리하면 중원의 것을 따라올 것이 없다니까?' 조금 뒤 일행들은 실컷 먹어 불룩 튀어나온 배를 두드리며 방에 모여 앉았다. 이제부터 그들은 며칠동안 흑마법사가 만든 마나연공법을 전수받을 계획이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데이몬이 앞으로 나서서 용병들을 둘러보았다. 어떤 방법으로 수라사령심법을 전수할 것인가는 이미 완벽하게 정립이 끝난 상태였다. 내공심법의 모든 구결은 데이몬의 뇌리에 똑똑히 기억되어 있었고 비록 오백 년 전의 일이긴 했지만 수호마왕군 무사들에게 가르친 경험도 충분히 있었다. 그 과정을 떠올린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들아. 너희들은 지금 천고의 기연을 얻고 있는 것이다. 중원 무림인 중 사승관계 없이 무공을 전수해 줄자가 단 하나라도 있는 줄 아느냐?' 물론 용병들 대부분이 나이가 많았고 내력을 돌려본 경험이 일천했지만 데이몬은 내공심법을 전수하는데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내가기공이란 대자연의 기를 다스려 몸 속에 축척시켜 공격과 방어에 사용하는 고도의 무술이다. 따라서 익히는 것이 결코 쉬울 리가 없었다. 그러나 중원 무림에서는 이 내가기공을 이용한 무술이 극도로 발달되어 있었다. 단순히 몸만을 다스리는 외공이나 초식에 치우친 무술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는 반면 내가기공은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중원에는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내가기공과 내공심법들이 존재했고 그것들은 무수한 변천사를 겪으며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중원 무림이 가진 오랜 역사는 그 내가기공들의 단점을 단계적으로 보완시켰고 수많은 완성된 내공심법을 또다시 탄생시켰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74회 데이몬이 전수하려는 수라사령심법 역시 완성도 면에서 거의 완벽하다고 칭할 수 있었다. 그런 이력을 가진 내공심법을 아무 조건 없이 전술하려니 조금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데이몬은 억지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금 그에겐 마공의 전파가 가장 급선무였다. 그래야만 아르카디아에 만연되어 있는 정파 계열 내공심법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것이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데이몬은 강의를 시작했다. "잘 새겨들어야 한다. 내가 만들어낸 마나연공법은 속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체내의 마나를 역으로 돌리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려면 일단 몸 속에다 제어할 수 있는 마나의 덩어리를 만드는 것이 가장 선결과제라 할 수 있지. 아마도 너희들 중엔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일단 그 틀을 잡아주겠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손짓으로 제럴드를 불렀다. "너 이리 오너라." 인체의 혈도도 전혀 알지 못하고 기가 흐르는 통로도 모르는 용병들에게 내가기공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오로지 실습과 직접적인 시연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것을 위해 데이몬은 제럴드에게 직접 개정대법을 시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개정대법. 역사가 깊은 문파에서 후기지수를 효과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행하는 방법이다. 적어도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문파의 어른이 자신의 내공을 이용해 후기지수의 혈맥을 뚫어주는 방법으로 이 개정대법을 받은 후기지수는 단시일 내에 내가고수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려면 강력한 내공이 필수였는데 데이몬에겐 그에 대한 적절한 해결방안이 있었다. '물론 나에게 내공이 있을 턱이 없다. 하지만 마나를 모아 응축한다면 분명히 그와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마친 데이몬은 개정대법을 위해 마나를 끌어 모았다. 쓰쓰쓰쓰. 9서클의 마스터인 만큼 주위의 마나가 급속도로 빨려들었다. 제럴드를 앞에 앉힌 뒤 데이몬은 끌어 모은 마나를 최대한 응축시켰다. "이제부터 네 몸 속에 방대한 마나의 흐름이 일정한 형식을 두고 형성될 것이다. 그러니 넌 그 경로를 빠짐없이 기억하도록 해라. 아마도 통증이 다소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넌 아무리 사소한 부분이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알겠어요." 제럴드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가족의 복수를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라도 할 수 있었던 제럴드였다. 준비를 마친 데이몬은 끌어 모아 응축한 마나를 제럴드의 몸 속에 불어넣었다. 정확히 수라사령심법의 방식대로 말이다. "흡." 무언가 엄청난 것이 몸 속을 거침없이 질주하자 제럴드는 움찔 몸을 떨었다. 이것은 지금껏 겪어본 적이 없던 생소한 경험이었다. 통상적으로 마나의 기척은 일반인이 도저히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미약했지만 제럴드의 몸 속에 들어온 마나는 한껏 응축된 것이었고 그런 것이 거침없이 혈맥을 돌아다니니 고통이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생소한, 결코 가볍지 않은 통증에 제럴드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데이몬이 다 안다는 듯 그를 다독여 주었다. "아프지만 참아야 하느니라. 조금 뒤면 마나의 흐름이 네 몸 속을 정확히 아홉 바퀴 반을 돌 것이다. 그러니 그 동안 너는 마나가 흐르는 경로를 머릿속 깊이 새겨 넣어야 한다. 알겠느냐." "예. 마법사님." 데이몬의 개정대법은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원래대로라면 불어넣어진 내공은 개정대법을 받는 자의 몸 속에 오랫동안 머물며 시술자의 내공이 자라날 기틀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데이몬이 불어넣은 것은 단순히 마나가 응축된 것에 불과했으므로 개정대법이 끝나자마자 흩어져버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상관없는 일이었다. 마나가 흐르는 경로만 정확히 기억해서 끊임없이 연공한다면 제럴드의 몸 속엔 새로운 마나의 덩어리가 생겨날 것이므로……. 마나의 흐름이 제럴드의 몸 속을 아홉 바퀴 반을 돌고 나자 꼬박 한나절이 흘러버렸다. 이미 제럴드는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비록 외부의 조력에 의한 것이었지만 제럴드는 마침내 내가기공으로 향하는 길에 첫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경로를 기억하느냐?" "예. 마법사님. 모두 기억했습니다." "아마도 내가 불어 넣어준 마나는 모두 소멸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망하지 말거라. 수련을 거듭해서 몸 속의 마나를 인식하게 되고 기억했던 경로대로 끊임없이 돌린다면 언제고 뜻을 이룰 수 있을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제럴드는 아직까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잠시 흐트러진 마나를 가다듬은 데이몬은 두 번째로 카심을 불렀다. "이번에는 자네 차례네. 제럴드에게 당부한 것을 모두 들었을 테니 긴 말 하지는 않겠네. 그러니 이리 와서 앉게." "예." 카심은 순순히 다가와 데이몬에게 등을 보이고 앉았다. 조금 뒤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개정대법. 중원의 무예 수련생들이 꿈에라도 받고 싶어하는 무상의 대법이 용병대장인 카심의 몸에 베풀어지는 것이다. 응축된 마나를 카심의 몸 속에 불어넣으며 데이몬은 쓸쓸히 머리를 흔들었다. '이 녀석은 나이가 많아 수라사령심법을 익히는 것이 그리 만만하진 않겠어. 내공이란 본시 어린 시절부터 익혀야 대성할 수 있는 법이니 말이야.' 카심이 대법을 마친 다음에는 하인리히 차례였다. 제럴드처럼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았지만 결코 입 밖으로 발설하지 않는 녀석으로 무척 앳된 용모를 가지고 있는 용병 초년병이었다. 무척 성정이 여려 사소한 일에도 눈물을 보이는 마치 여자와도 같은 성격의 보유자이기도 했다. '이 녀석은 내가 아는 누군가와 무척 닮았군. 5백년 전의 그녀석과 말이야. 용모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이름이 디트리히였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데이몬은 카심에 대한 개정대법에 몰입해 들어갔다. 이것 역시 꼬박 한 나절이나 걸리는 고된 작업이었다. 아무리 서두르더라도 하루에 두 명 이상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시간을 두고 느긋하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지." 그것도 데이몬이 마법의 힘을 빌렸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 만약 무림고수가 개정대법을 펼친다면 한 달에 한 명도 제대로 시술하기 힘들었다. 소모되는 내공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중원에서도 개정대법은 문파의 적전제자가 아니면 거의 시술하지 않았다. 그런 대법을 공짜로 해 주려니 조금 속이 쓰리기는 했지만 데이몬은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이 녀석들은 동료이고 드래곤을 잡는데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줄 수 있을 테니 내공심법을 전수해 주는 것도 그리 나쁜 것은 아냐. 대략 삼 일만 고생하면 이들 모두에게 개정대법을 끝낼 수 있을 것이고 이곳에서 당분간 수련하도록 한 뒤 고것들을 잡으러 가면 되겠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데이몬은 계속 작업을 수행해 나갔다. 용병들은 자신들이 지금 천고의 기연을 얻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채 대화에 몰두해 있었다. "정말 이 마나연공법이 효과가 있을까?" "그거야 모르지. 효과가 없다고 한들 뭐 어떤가? 어차피 우리 신세는 삼류용병으로 이리저리 부평초처럼 떠돌 신세 아니었던가?" "그건 그래." 될 대로 되라는 듯한 용병들의 대화내용을 들으며 데이몬은 카심에 대한 개정대법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한 발 늦었군." 텅 빈 동굴을 둘러보며 러셀런트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천신만고 끝에 종적을 찾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반드시 놈을 죽이고 인크레시아를 회수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했었다. 하지만 미리 짐작이라도 한 듯 놈은 가증스럽게도 감쪽같이 몸을 피한 다음이었다. 처음에는 놈이 부근에 잠깐 외출을 한 것이라 간주했다. 그 때문에 러셀런트는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동굴 주변의 알람마법을 표시나지 않게 제거해 가며 놈을 기다렸다. 하지만 허사였다. 무려 일주일을 기다렸지만 놈은 두 번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급기야 러셀런트는 땅의 정령인 노움을 불러 물어보고 나서야 놈이 완전히 이곳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 "난감하군." 러셀런트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인간들이 우글대는 아르카디아에서 어떻게 놈의 종적을 찾아야 할지 정말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놈과 연결되는 인간 하나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다는 점이다. 만약 인간을 처치해버렸다면 놈을 찾아내는 일이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동굴 내부를 샅샅이 뒤져보며 러셀런트는 눈을 빛냈다. "놈이 대관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 정도 마법실력을 가진 놈이라면 분명 인간세상에서 이름을 떨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을 터였다. 러셀런트의 생각으로도 아르카디아엔 9서클의 인간 마스터는 놈말고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놈은 전혀 의외의 행동패턴을 보였다. 극히 오지라 할 수 있는 세바인에 오랫동안 콕 박혀 있었다니…… 놈이 이곳에서 대관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동굴 내부를 둘러보며 러셀런트는 얼굴을 찡그렸다. "정말 용의주도한 놈이로군." 애석하게도 바위나 암석의 기억은 일주일을 넘기지 못한다. 따라서 노움의 입을 통해 알아낸 것이라곤 놈이 소녀 하나가 끼여있는 파티와 합류해서 이곳을 떠났다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놈은 노움의 눈이 미치지 않도록 철저하게 결계를 펼쳐놓고 작업을 해 나갔다. 때문에 놈이 이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철저히 비밀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놈은 내 손에 잡힐 테니까……." 러셀런트는 다시 로르베인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초한 바에 의하면 저주에 걸린 인간은 놈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반드시 다시 찾아갈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그곳에서 기다린다면 놈을 잡거나 최소한 숨어있는 위치라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사실을 떠올린 러셀런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방대한 수명이 약속된 드래곤인지라 참고 기다리는데는 익숙했던 러셀런트였다. "오셨습니까?" 익숙한 얼굴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 공간이동을 통해 로르베인에 온 상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로메인 남작의 행세를 하고 있는 젠가르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새로 여행을 시작했으니 노자가 적당히 필요했지만 그가 가진 돈은 모조리 젠가르트가 보관하고 있었기에 데이몬은 잠시 짬을 내어 로르베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공간이동을 통한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할 수 있었으므로…….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에게 수라사령심법을 전수해 주는 것은 일단 마무리된 상태였다. 데이몬은 꼬박 사흘동안 용병들에게 개정대법을 시술해 내력을 운기할 틀을 닦아주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용병들 중 반수 이상이 혈맥을 흘러가는 기의 존재감을 미력하나마 간파했던 것이다. 그것은 중원에서도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으므로 그 사실을 알아차린 데이몬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아무리 개정대법을 시술받았다손 치더라도 불과 하루도 안 되어 기를 느낄 수 있다니……." "하지만 느껴집니다. 무언가가 마치 미약한 물줄기와도 같이 몸의 여러 부분을 돌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의외로 마나의 흐름을 가장 먼저 느낀 자는 카심이었다. 카심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기가 느껴지는 부분을 조목조목 짚어주었다. "세상에." 그 사실을 들은 데이몬은 결국 카심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카심이 지목한 부분은 어김없이 인체의 요혈들이었고 그것은 철저히 수라사령심법에 기초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너무나도 빠른 진도에 데이몬은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들이 혹시 천고의 기재들인가? 수호마왕군들 중 가장 자질이 있는 녀석들도 한 달이 넘어서야 겨우 기의 흐름을 느꼈는데……." 믿지 못한 일을 이룬 자는 카심을 비롯해 가장 나이가 어린 제럴드와 하인리히, 그리고 헬튼이라는 이름을 가진 용병이었다. 패터슨을 비롯한 나머지 셋은 아직까지 기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기의 흐름을 느낀다는 것은 운기를 시작할 기틀이 잡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느낀 기를 의지로써 움직일 수 있다면 그때부터 운기조식이 시작되는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빠르다고 볼 수 있는 진도. 데이몬은 이유로 몇 가지를 추측해보았다. 첫 번째 이유로는 아마도 아르카디아가 보기 드물게 기가 충만한 곳이라는데 기인한 듯 싶었다. 그것은 트루베니아도 마찬가지였다. 이 양 대륙은 대기 중에 분포되어 있는 기가 중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충만한 편이었다. 그 때문에 이곳의 마법사들이 아무 무리 없이 마법을 전개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데이몬이 일정수준 이상의 마법사가 되었을 때에야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곳은 중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가 풍부해. 이 녀석들의 진도가 빠른 것이 아마도 거기에 기인한 듯 싶군." 운기조식의 요체는 대자연의 기를 몸 속으로 빨아들여 자신만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기가 월등히 많이 분포된 아르카디아에서 운기조식은 더욱 효과를 발휘할 수있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75회 두 번째 이유로 데이몬은 그것이 수라사령심법의 특성 때문이라 간주했다. 내공심법을 이용해 주위에 분포된 기를 빨아들이는 과정을 살펴보면 정파와 사파의 것은 극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정파의 것은 가급적 대자연의 조화를 깨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기를 빨아들인다. 그 때문에 극히 안정적이며 쉽사리 주화입마에 빠져들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때문에 아르카디아의 기가 아무리 충만하다 하더라도 정파의 내공심법으로는 흡수할 수 있는 양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파의 내공심법은 달랐다. 내공심법 자체가 효율성만을 극도로 강조한 방법인 만큼 자연의 조화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고 몸이 버틸 수 있는 한계까지 기를 무제한 흡수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속성이 가능한 것이며 정파의 것에 비해 주화입마의 가능성도 현저히 높았다. 하지만 대상이 기의 분포도가 극에 달한 아르카디아라면 그 차이는 극명해진다. 기가 풍부한 만큼 빨아들일 수 있는 양도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주위의 기가 아무리 충만하더라도 사파의 내공심법은 몸이 버틸 수 있는 한도까지 빨아들일 능력이 있다. 데이몬은 용병들의 진도가 빠른 것을 그런 이유 탓이라 간주했다. "하긴 수호마왕군들이 수련을 할 때도 일부러 기가 충만한 곳을 골라 다니며 운기조식을 행했으니……. 이들이 이 정도 빠른 진전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데이몬에게 돌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새로 얻은 몸으로 무공을 익혔다면 틀림없이 이들과 필적하는 발전을 보였을 것이다. 어쩌면 10년도 되기 전에 절정의 경지에 올랐을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 말하는 소드 마스터 말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오래지 않아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어차피 그의 단전은 내공 대신에 어둠의 마력이 가득 들어차 있었으므로 이제 와서 새로 무공을 연성하는 것은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에겐 충분히 강한 조력자들이 있었다. "어차피 나에겐 최상급의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 넷이 있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은 접어버려야겠군." 고개를 흔든 데이몬은 용병들에게 다음에 행할 일을 지시했다. 이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느낀 기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이제 너희들의 당면 과제는 느낀 마나를 의지로써 움직이는 것이다. 마나를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을 통제해서 기억했던 경로대로 움직이면 된다. 이것은 하루 이틀 사이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된다. 그러니 너희들은 이제부터 마나를 움직여보는데 주력해라. 물론 아직까지 마나의 흐름을 느끼지 못한 자들은 그것을 느끼는 것이 급선무다." 운기조식에 대한 방법을 세세히 설명해 준 뒤 데이몬은 용병들을 내버려둔 채 그곳을 떠났다. 공간이동을 통해 곧바로 로르베인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데이몬이 로르베인으로 오게 된 과정은 대충 이러했다. 변함 없이 반갑게 데이몬을 맞는 젠가르트. 하지만 데이몬은 젠가르트의 태도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뭔가 조금 달라진 분위기를 말이다. 그것은 눈치 빠른 데이몬이 아니었다면 결코 간파할 수 없을 만치 미약한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뭐 별 일은 아닙니다." 여운을 남기는 듯한 젠가르트의 태도에 데이몬의 눈에 호기심이 번뜩였다. "나에게 한 번 말해보게." 젠가르트는 데이몬이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사람이다. 때문에 그의 일에 대해 관심이 없을 수는 없었다. 젠가르트는 곧 고개를 주억거리며 근황에 대해 설명해나갔다. "실은 최근에 무척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상한 일이라니……." "경비병 10여 명이 갑자기 도망쳤습니다. 일언반구 통보도 없이 마치 꺼져버리듯 말입니다." "그래?" 데이몬은 고개를 갸웃했다. 경비병들이 사라진 일 따위야 별 일도 아니었다. 젠가르트가 제법 많은 봉급을 줄 테지만 사람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어진 말에 데이몬은 전신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이상한 것은 그 녀석들이 아무것도 소지하지 않은 채 도망쳤다는 점입니다. 모아놓은 돈이나 옷가지들도 챙기지 않고, 근무하던 복장 그대로 달아났으니 정말 기이한 일인 거죠. 요즘 그 문제 때문에 무척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데이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으로 턱을 괸 채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기색이었기에 젠가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깟 녀석들 흡." 태연스레 말을 이어나가던 젠가르트의 입에서 갑자기 헛바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영문도 모른 채 의식이 멀어져갔고 정신을 잃은 젠가르트의 몸은 맥없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데이몬이 달려들어 젠가르트의 몸을 사뿐히 안아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쓸쓸한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미안하네. 젠가르트." 데이몬은 불시에 매직 미사일을 전개해서 젠가르트의 혼혈을 제압했던 것이다. 검술을 전혀 알지 못하는 젠가르트가 데이몬의 기습을 막을 수 있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었다. 아니 기미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한 설명이었다. 젠가르트를 안은 데이몬의 눈에는 착잡한 빛이 가득했다. "어쩔 도리가 없었네. 내 경험에 미루어 본다면 최근 자네 신변에 크나큰 변동이 있었을 듯 싶네." 데이몬은 젠가르트가 흘러가듯 내뱉은 말에서 하나의 단서를 포착했던 것이다. 그는 온갖 귀계와 음모가 횡행하는 중원 무림계를 오랫동안 경험해온 인물이다. 사파의 절정고수로 성장해오며 데이몬은 온갖 역경과 시련을 넘어왔다. 살수들의 암습 따위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당해보았기 때문에 데이몬으로써는 아무리 경미한 일이라도 소홀히 보아 넘길 수 없었다. 경비병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심지어 지금까지 받은 봉급도 챙기지 않은 채 도망쳤다는 것은 분명히 뭔가 곡절이 있다고 봐야 했다. "아마도 경비병들은 십중팔구 죽음을 당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시체 따위야 화혈산 따위를 쓰면 금방 없앨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곳은 중원이 아닌 아르카디아이긴 하지만 그가 상대해야 하는 존재가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지금으로썬 생각해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배재하지 말아야 했다. 지상 최강의 생명체 드래곤들은 인간의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그들에겐 인간의 심지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정신계 마법이 있다. 그러므로 데이몬은 젠가르트가 십중팔구 드래곤의 정신계 마법에 당해 있는 상태일 것이라 단정했다. "어떤 놈일까? 아직까지 드래곤들의 수면기가 5년 남짓 남은 상태인데……. 혹시라도 일찍 일어난 녀석이 있었나?" 잠시 생각에 팔려있던 데이몬은 묵묵히 오른 손에다 마력을 끌어 모았다. 젠가르트의 정신세계에 한 번 침투해보려는 것이다. 물론 마법으로 드래곤의 정신마법을 파훼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드래곤이라면 틀림없는 10서클의 마스터라 봐야 했고 9서클에 달한 그의 마법실력으로도 지워진 기억을 되살리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에서 뽑아낸 방대한 어둠의 마력이 있었다. 데이몬은 그것으로 나이트메어(夢魔)를 소환할 생각이었다. 인간의 정신세계에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 나이트메어라면 마법에 의해 지워진 기억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을 듯 보였기에 데이몬은 곧 소환술을 시행했다. 쓰쓰쓰쓰. 바닥에 소환마법진이 새겨지며 푸르스름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데이몬의 마력이 집중됨에 따라 마법진은 더욱 빛을 발했다. 어느 순간 마법진은 보기에도 끔찍스런 빛을 뿜어내었다. 파파파팟. 빛이 사라지자 거기에는 희끄무레한 안개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실체가 없는 듯 이리저리 흩날리던 안개는 점차 모여들더니 인간 비스무레한 형상을 이루어갔다. 조금 뒤 그곳에는 투명한 인간의 모습을 한 나이트메어가 데이몬을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날개와 뿔을 가진 전형적인 악마의 모습을 한 투명한 나이트메어. 자신을 소환한 소환술사의 앞이라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지 평상시 몽마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게다가 데이몬은 지금까지 애송이들을 혼내주느라 여러 번 몽마를 소환했던 적이 있었다. 그 탓에 나타난 녀석은 데이몬에겐 낯이 어느 정도 익은 나이트메어였다. 물론 악몽을 꾸게 하는 것이 주목적인지라 그리 수준이 높은 몽마(夢魔)는 아니었지만 데이몬은 이 몽마로도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다. 나이트메어는 데이몬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데이몬님." 고개를 까딱한 데이몬은 지체 없이 해야 할 일을 하달했다. "너는 지금 즉시 저 인간의 정신세계에 들어가라. 그는 지금 정신계 마법에 의해 기억의 일부분이 지워진 상태이다. 그 기억을 찾아내어 나에게 전해다오." "알겠습니다." 나이트메어에게 인간의 정신세계에 침투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나이트메어는 두 말도 하지 않고 젠가르트에게 다가갔다. 투명한, 어렴풋이 형체만 보이던 그의 몸은 곧 안개의 형태로 바뀌어 코와 귀를 통해 젠가르트의 머리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과연 생각 대로였군." 젠가르트가 겪은 일을 모조리 파악한 데이몬은 또다시 고민에 사로잡혔다. 상황은 예상 대로였다. 나이트메어는 젠가르트의 기억에 침입한 다음 지워진 기억을 찾아내어 모조리 데이몬에게 전해주었다. 과연 인간의 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몽마다웠다. 데이몬은 그로 인해 드래곤 하나가 자신의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상태였다. 며칠 전 벌어졌던, 젠가르트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것들을 데이몬은 일목요연하게 파악한 상태였다. "드래곤 한 마리라……. 눈동자와 머리 색깔이 검은 빛이라니 블랙 드래곤일 가능성이 농후하군. 일이 무척 재미있게 되었어." 데이몬의 눈에 흥미롭다는 듯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드래곤 한 마리가 자신의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가 반길만한 소식이었다. 그는 이미 드래곤을 상대할 만한 충분한 힘을 보유했다. "놈은 십중팔구 세바인으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내가 무얼 했는지 밝혀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진정한 힘을 알아차리지는 못했을 터. 드래곤 하나와 대면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나에겐 차라리 잘 된 일이군. 데이몬의 시선이 부스스 젠가르트에게로 돌아갔다. 병사들과 달리 그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드래곤이 뒷일을 생각해서 그랬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자신의 뒤를 쫓을 단서를 한 가닥이나마 유지하려는 속셈일 터였다. 그렇다면 허탕을 치고 돌아온 드래곤이 또다시 젠가르트를 찾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데이몬의 얼굴에 또다시 착잡한 빛이 어렸다. "미안하지만 자네를 한 번 이용해야겠군. 어차피 우리 둘 다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 자네가 너그럽게 이해하도록 하게." 조용히 한 마디 건넨 뒤 데이몬은 젠가르트의 혼혈을 풀어주었다. 어차피 함정을 팔 필요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행선지만 일러주면 사실은 분명히 드래곤의 귀에 들어갈 터였다. 그렇다면 자신은 드래곤이 찾아올 때만 기다리면 된다. 혼혈이 풀린 젠가르트는 낮게 신음소리를 흘리며 눈을 떴다. "끄응." 젠가르트가 정신을 차리자 데이몬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무척 걱정스러워하는 듯한 표정이 얼굴에 감돌았다. 물론 꾸민 것이었지만. "자네 왜 그러나? 갑자기 쓰러지다니? 어디 아픈가?" "모,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사방이 빙 돌더니……." "경비병 문제로 너무 신경을 써서 그런 거야. 도망칠 놈들이 사라진 것이니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게." "아무래도 그래야겠습니다." 젠가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놀랍게도 그는 조금 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젠가르트에게 생각할 틈을 전혀 주지 않았다. "참. 내 정신 보게. 자네를 찾아온 용건은 바로 돈 때문이네." 난데없는 데이몬의 말에 젠가르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돈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나는 더 이상 세바인에 머물지 않을 작정이네. 워낙 적적해서 여행을 좀 떠나볼 생각이야. 그 때문에 노자가 좀 필요해서 왔네." "그런 것이라면 문제없습니다." 젠가르트는 두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재산은 모두 데이몬으로 인해 생긴 것이었으며, 그것말고도 데이몬이 맡겨놓은 돈은 상당한 액수였다.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글세? 한 이천 골드 정도? 부피가 상당할 테니 모두 골드 금화로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젠가르트는 한 쪽 벽으로 다가가 금고를 열었다. 데이몬을 맞이할 이동마법진을 설치해놓은 곳이 그의 비밀 금고가 있는 방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로메인의 것이라고 봐야 했지만. 조금 뒤 젠가르트는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데이몬에게 내밀었다. 상당한 거금이었지만 골드 금화로만 들어있었기 때문에 부피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네." 주머니를 받아든 뒤 데이몬은 젠가르트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알 듯 모를 듯 착잡한 눈빛이 섞여 있었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76회 잠시 머뭇거리던 데이몬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본격적으로 드래곤을 잡을 함정을 파는 것이다. "나는 돈트렐로 갈 생각이네. 지금은 여행 중이니 그곳까지 앞으로 한 열흘 정도 소요될 거야." "돈트렐? 테르비아 왕국의 돈트렐 말입니까?" "그렇다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젠가르트를 보며 데이몬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이만 가보겠네. 돈이 더 필요하면 다시 찾아오지." "언제든지 찾아오십시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젠가르트는 환히 웃으며 데이몬을 배웅했다. 그의 얼굴을 보며 데이몬의 마음 속에는 한 가지 각오가 다져지고 있었다. 반드시 드래곤을 죽여 젠가르트가 로르베인에서 무사히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 자신이 죽는다면 젠가르트 역시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까. '놈은 반드시 내 손에 죽는다.' 데이몬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잠시 후 그의 몸은 빛무리에 묻혀 사라져버렸다. 마치 급한 일이 있는 것 마냥 말이다. "오늘은 조금 이상하시군." 고개를 갸웃거리던 젠가르트는 곧 몸을 돌렸다. 자신을 중심으로 얽히고 설킨 일들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데이몬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돈트렐이 아니었다. 세바인에서 나흘 거리에 위치한 야트막한 야산이 바로 그의 목적지였다. 그곳은 바로 미첼과 율리아나가 식량을 가지고 도망친 곳이었다. 데이몬은 그곳에서부터 느긋하게 그들을 추적해 나갈 심산이었다. 물론 목적은 그들을 철저히 골탕먹이는 일이었다. 데이몬의 얼굴에 무척 흥미롭다는 듯한 빛이 일어났다. "용병 녀석들은 앞으로도 열흘 가량 콕 박혀 내공심법을 연마할 테고……. 그렇다면 난 느긋하게 돌아다니며 애송이들을 혼내주면 되겠군." 회심의 미소를 지은 데이몬은 즉시 추적마법을 펼쳤다. 이미 미첼과 율리아나의 몸에는 데이몬이 직접 마법을 걸어놓았기 때문에 그들이 반경 200km 이내에만 있다면 즉시 간파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아무리 빨리 움직이더라도 겨우 사흘 동안에 200km를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 멀리 가진 못했군." 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의 기척을 찾아낸 데이몬은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그러니까 지도도 함께 훔쳤어야지." 잔뜩 화가 난 듯 두 손을 허리춤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소녀. 그녀를 쳐다보는 청년 역시 부아가 치밀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둘은 미첼과 율리아나였다. 둘은 지금 낯선 산중에서 길을 잃은 상태였고 율리아나는 지금 길을 잃은 화풀이를 미첼에게 퍼붓고 있었다. "명색이 카르셀 수비대원이면서 길도 하나 못 찾아? 그러고도 네가 기사야?" 듣고 있는 미첼도 부아가 치밀기는 마찬가지였다. 말 두 마리의 고삐를 틀어쥔 주먹이 허공에서 부르르 떨렸다. '젠장…….' 애초에 일을 벌이자고 제안한 쪽은 그녀였다. 자신은 기사로써의 명예까지 잃어가며 일행의 식량을 챙겼다. 다시 말해 도둑질을 한 것이다. 그런데도 율리아나는 오로지 자기 탓만 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의 제안을 따른 것이 화근이었다.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항변하는 미첼. "식량을 챙겨서 도망치자고 제안한 것은 너잖아. 너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도둑질까지 했는데 너무 하는 것 아냐?" "그러길래 길 안내를 제대로 해야지. 길을 모르면 당연히 지도를 챙기는 것이 합당하잖아." 율리아나도 결코 만만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가 화풀이를 할 수 있는 대상이 오직 미첼 밖에 없었기에 그가 이런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미첼도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이런 빌어먹을……." 말고삐를 팽개친 미첼은 눈을 부라리며 율리아나에게 다가갔다. 두 주먹을 불끈 쥔 모습이 공주건 뭐건 가리지 않고 주먹부터 날릴 기세였다. 그 모습에 율리아나는 움찔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여자인 이상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돌파할 방법을 명확히 잘 알고 있었다. "이러면 너희 아버님께 일러버릴 거야? 일전의 일과 함께……." "크으으." 미첼의 주먹이 허공에서 멎으며 부르르 떨었다. 어떻게 된 게 아버지에게 이른다는 말만 들으면 손에서 저절로 힘이 빠지는 것이다. 아버지 헤일즈는 미첼에게 그만큼이나 절대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돌아온 율리아나를 보자 또다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년을 즉각 죽여버릴까? 그러고는 그 죄를 산적들에게 덮어씌우면…….' 얼마나 화가 났으면 살인멸구(殺人滅口)까지 생각하는 미첼이었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눈치가 무척 빠른 소녀였다. 미첼의 눈에서 번들거리는 살기를 목격하자 그녀는 눈에 띄게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너무 화는 내지 마. 길을 잃고 헤맨 게 너무 억울해서 그러니까. 그리고 일전의 일은 약속대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입 밖으로 발설하지 않겠어." "끄으응." 시기적절하게 화해를 청해오는 율리아나를 보고 미첼은 주먹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고삐를 틀어쥐었다. 그녀와 한 마을에서 태어나게 된 것은 정말 악연(惡緣)이라고 밖에 생각할 도리가 없었다. "그만 두자. 서둘러 걷지 않으면 오늘밤에도 노숙을 해야 할지 모르니……." 미첼은 힘없이 말에 오른 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몰아갔다. 율리아나는 부리나케 자신의 말에 올라타고 그의 뒤를 따랐다. "이랴." 헤어지기 전 카심이 다른 마을까지 이틀정도 걸린다고 했기 때문에 둘은 열심히 말을 몰아 왔다. 큰 마을을 찾아가서 다른 용병단을 고용하고자 하는 것이 율리아나의 속셈이었다. 물론 카심 용병단에는 톡톡하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생각이었다. 카심이 걱정하던 것이 마침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목적했던 마을은 나오지 않았다. 마을까지만 가면 길잡이를 고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에겐 맥이 풀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벌써 이틀을 산에서 말과 함께 노숙을 해야했던 둘. 때문에 그들에겐 따듯한 스프와 편한 잠자리가 누구보다도 그리웠다. 터벅터벅 걸어가던 미첼이 말을 멈춰 세웠다. "워워." 하루종일 움직였기 때문에 시장기를 느낀 것이다. 미첼은 말 옆구리에 매인 주머니를 집어들었다. 말린 고기 몇 조각을 꺼낸 미첼은 율리아나를 돌아보았다. "먹을래?" "싫어. 말린 고기는 정말 지긋지긋해. 도대체 요리도 배우지 않고 뭘 했어? 용병들은 이런 걸로도 제법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들던데 말이야." 또다시 미첼에게 퍼부어지는 화풀이. 미첼은 두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이미 그녀에겐 단련될 대로 단련되어 만성이 되어있는 미첼이었다. 마른 고기 한 조각을 거칠게 입에 털어 넣은 미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몰았다. 질겅질겅. 마른 고기 특유의 텁텁한 맛이 입안에 가득했지만 미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마을을 찾는 즉시 율리아나를 떼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만 없다면 살 판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현명한 생각은 되지 못했다. 그녀가 세상에 살아있는 한 미첼은 항상 아버지를 겁내며 살아가야 하니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둘은 말에 몸을 맡긴 채 산길을 따라 정처 없이 움직였다. "여기 있군. 제 놈들이 도망쳐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지." 저 멀리서 터덜터덜 걸어가는 둘의 모습을 발견한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둘은 생각보다 멀리 가지 못했다. 아무래도 산에서 길을 잃고 빙글빙글 돈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방향만은 잘 잡은 듯 했다. 그들이 가는 길로 약 한나절 거리에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으니 말이다. 둘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눈을 빛냈다. "일단 놈들을 좀 걷게 해야겠군. 인비저빌러티(Invisibility) " 마법을 캐스팅하자 데이몬의 몸이 별안간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마법의 힘으로 빛을 왜곡시켜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상태로 데이몬은 냄새에다 기척까지 완전히 죽여버렸다. 상대가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팔라딘이므로 모든 일에 만전을 기해야 했다. 데이몬의 몸은 곧 후각이 뛰어난 개가 옆에 있더라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상태로 바뀌어버렸다. "크크크. 이제 작전을 시행해볼까?" 투명화된 상태로 데이몬은 둘을 향해 미끄러지듯 다가갔다. 예상대로 둘은 자신의 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데이몬이 손을 뻗으면 말 엉덩이가 만져질 거리까지 다가갔건만 둘은 묵묵히 말을 몰아갈 뿐이었다. 미첼의 눈치를 잠시 살핀 데이몬은 손을 뻗어 말 옆구리를 살짝 짚었다. 히히히힝. "어엇. 이 말이 왜 이러지?" 잘 걸어가던 말이 맥없이 그 자리에 허물어지자 미첼은 깜짝 놀랐다. 기사다운 반사신경으로 민첩하게 말에서 뛰어내린 미첼은 얼른 검을 뽑아들고 사위를 경계했다. 하지만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눈을 번뜩이며 사방을 둘러본 미첼은 조심스럽게 말에게 다가갔다. 말의 상태를 목격하자마자 그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이런……." 그가 타고 온 말은 다리를 전혀 쓰지 못했다. 바닥에 쓰러진 채 버둥거리는 모습이 아무래도 발목을 삔 것 같았다. 미첼로써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미치겠군.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난감해하며 말머리를 쓸어주던 미첼은 어쩔 수 없이 검을 치켜세웠다. 말의 숨통을 끊어주어 고통이라도 줄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미첼은 쉽사리 검을 내리치지 못했다. 타고 온 말은 카르셀 시절부터 정이 들대로 든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아 넣었다. "할 수 없군. 도저히 죽이지 못하겠어." 발목을 삐어 운신조차 하지 못하는 말을 데리고 갈 순 없는 노릇이라 미첼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말을 버렸다. 이대로 버려 둔다면 십중팔구 늑대 밥이 되어버릴 테지만 도저히 자기 손으로 죽이고 싶진 않았다. "운이 좋으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잘 있거라." 쓸쓸한 표정으로 말에게 작별을 고한 미첼은 고개를 돌려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아까의 감정이 아직 삭지 않았던지 그녀는 무척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미첼을 쳐다보고 있었다. 미첼과 눈빛이 마주치자 율리아나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내 말은 작아서 둘을 태울 수 없어. 게다가 넌 무거운 갑옷까지 걸쳤잖아." 미첼은 참다못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여기서 지쳐 죽더라도 율리아나에게 사정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태워달라고 하지도 않아." 하지만 말 등에 실려있는 많은 짐을 보자마자 미첼의 자존심은 그대로 허물어져 버렸다. "짐만 옮겨 싣도록 해. 난 걸어갈 테니……" 그것까지 마다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것쯤이야." 내키지 않는다는 듯 승낙한 율리아나는 짜증스런 표정으로 미첼이 말의 짐을 자기 말에 옮겨싣는 것을 쳐다보았다. 짐을 모조리 율리아나의 말 옆구리에 옮겨실은 미첼은 내친 김에 갑옷까지 벗으려 했다. 걷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무게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율리아나가 가차없이 그것을 제지하고 들었다. "안 돼! 갑옷까진 허락할 수 없어. 일단 말이 힘들뿐더러 넌 날 보호해야 하잖아. 늑대 무리라도 나타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러니 갑옷은 입고 있도록 해." 미첼은 부글부글 끓는 화를 진정시키며 풀어헤치려던 가슴가리개를 다시 조여맸다. 정말 자기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계집애였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77회 무거운 갑옷을 걸치고 걸을 생각을 하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사실 그가 걸친 갑옷은 기사들이 착용하는 풀 플레이트 메일이었다. 비록 정강이받이나 건틀릿 따위의 보호장구를 모두 벗은 상태이긴 했지만 그래도 무게가 결코 만만찮았다. 그런 것을 입고 걸어가라니……. '두고보자. 네년도 언젠가 눈에서 눈물이 쑥 빠질 정도로 혼날 날이 있을 테니.' 율리아나를 향해 눈을 한 번 부라린 미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미첼의 염원은 오래지 않아 이루어졌다. 공교롭게도 율리아나가 탄 말마저 발목을 삐어버린 것이다. "어떻게 해." 그녀는 쓰러져 버르적거리는 말을 두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 율리아나를 보며 미첼은 고소한 감정까지 들었다. 걸어본 적이 없는 그녀가 그것도 험한 산길을 걸어가게 생겼으니……. 그것을 생각하니 절로 코웃음이 나오는 미첼이었다. "어떻게 할까 목을 잘라 고통이라도 줄여줄까?" 천연덕스럽게 검을 뽑아드는 미첼을 노려보며 율리아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대로 내버려 둬. 네 말도 그랬잖아? 잔소리말고 짐이나 짊어지도록 해." 미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걸 전부 짊어지란 말이야?" "그럼 공주인 내가 짊어져야겠어?" 사납게 눈을 부라리는 율리아나를 보며 미첼은 다시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말이 쓰러진 것은 율리아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때문에 미첼은 힘없이 쓰러진 말에게 다가갔다. 머나먼 크로센 제국까지의 여정이라 실려있는 짐이 장난이 아니었고 그것을 모두 혼자 짊어져야 하니 맥이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괜히 용병단과 헤어졌다는 생각에 후회가 막심했다. 그랬다면 적어도 길은 잃어버리지 않았을 터였다. '미친년. 괜히 복수란 것을 한답시고…….' 그러나 생각해보니 찬성한 자신에게도 죄가 있었다. 기사로서의 명예를 버리고 일행의 식량을 깡그리 훔쳐오다니……. 미첼은 말없이 짐을 풀어헤쳤다. "무게를 줄여야 돼. 이것을 모두 짊어질 순 없어. 그러니 쓸데없는 네 장신구 따위는 모조리 버리자." "안 돼. 하나도 버릴 수 없어." "그렇다면 알아서 해. 난 여기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으니……." 벌렁 나가자빠져 버리는 미첼을 보고 율리아나는 최후의 수단까지 동원했다. "정 이러면 네 아버님께 일러버릴 테야." "고해바치건 말건 맘대로 해. 아버님께서도 이 짐을 보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실 테니까……." 미첼이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는데 율리아나도 더 이상 고집부릴 도리가 없었다. 한 치도 양보할 기세가 아니었기에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버릴 것을 추리기 시작했다. 욕심이 많은 율리아나라서 소지품을 버리기가 여간 아까운 것이 아니었다. 조금 뒤 율리아나가 추려놓은 짐을 본 미첼은 다시 드러누워 버렸다. "내가 오우거인 줄 알아? 난 사람이라고……." 율리아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짐을 추렸다. 하지만 미첼은 그 후에도 두 번이나 퇴짜를 놓았고 결국 그녀는 여행에 필요한 돈과 식량, 그리고 약간의 물품만을 남기고 모조리 버려야 했다. 짐을 세 번씩이나 추리고 나서야 미첼은 몸을 일으켰다. "그 정도는 되어야 사람이 짊어질 수 있지." 물품을 배낭에 주섬주섬 집어넣는 미첼을 보며 율리아나는 눈에 쌍심지를 돋웠다. "이대로 버릴 순 없어. 그러니 땅을 파서 묻고 가자. 나중에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파내면 되잖아?" 정말 집념이 대단한 소녀였다. 하지만 미첼은 막무가내였다. "행여나 나중에 이곳을 다시 찾아올 수 있을 것 같아?" 한 마디로 율리아나의 말을 일축한 미첼은 몸을 돌렸다. 어느덧 해가 져서 사위가 어둑어둑했으므로 겁이 더럭 난 율리아나는 미첼의 뒤를 다급하게 따랐다. "같이 가." 그곳에는 버리고 간 물품만이 남아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조금 뒤, 공간의 한 쪽이 약간 일렁이더니 일정한 형태를 이루어갔다. 쓰쓰쓰쓰. 물론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자는 데이몬이었다. 그는 낭자하게 흩어진 물품들을 보며 괴소를 지었다. "크크크. 녀석들 조금 힘들 것이야." 잠시 사방을 둘러본 데이몬은 곧장 쓰러진 말에게 다가갔다. 고통이 심한 듯 연신 버르적거리던 말이었지만 데이몬이 손을 뻗어 옆구리를 어루만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히히힝. 연신 푸레질치며 머리를 데이몬의 얼굴에 비비는 말. "가거라. 이제 다리가 멀쩡해졌으니 어렵지 않게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 데이몬이 부드럽게 말을 건네자 말은 알았다는 듯 저쪽으로 달려갔다. 정확히 둘이 걸어간 곳과 반대 방향이었다. 눈빛을 빛낸 데이몬은 또다시 인비저빌러티를 전개했다. 그의 몸은 또다시 그 자리에서 지워져버렸다. 미첼과 율리아나는 결국 산을 벗어나지 못했다. 걸어본 일이 없는 탓에 율리아나는 금방 지쳐버렸고 그로 인해 여정은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첼도 더 이상 걷는 것을 포기하고 노숙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그도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고 밤길을 걷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다. 게다가 이런 깊은 산중이라면 분명히 늑대무리가 있을 터였다. 노숙준비를 마친 미첼은 모닥불에 말린 고기를 구워 율리아나에게 건넸다. "고마워." 걷는다고 녹초가 된 율리아나는 이번에는 사양하지 않고 고기를 받았다. 지칠 대로 지쳐 입에서 단내가 풀풀 날 정도였지만 율리아나는 억지로 고기를 씹었다. 먹어야만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멀리서 그들을 쳐다보는 눈동자 하나가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눈동자였지만. "이번에는 식량을 좀 축내줄 시간인가?" 어둠 속에서 무미건조한 일성이 터져 나왔다. 해가 완전히 져서 사위가 캄캄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타고 있는 모닥불만이 어둠 속을 어렴풋이 비출 뿐이었다. 하지만 그 불빛도 한 사람의 종적만은 밝혀주지 못했으니……. 데이몬은 몸을 숨긴 상태로 둘을 지켜보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둘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율리아나야 여자의 몸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미첼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추리고 추렸다 하더라도 짊어지고 오기엔 결코 만만치 않은 짐이었으므로……. 하지만 쳐다보는 데이몬의 눈초리에는 조소만이 가득했다. "부근에 늑대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군." 나지막이 지껄인 데이몬은 느긋하게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부근의 늑대를 불러 둘을 한 숨도 자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이 데이몬의 속셈이었다. 그런 흉악한 의도를 가진 자가 지척에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인지하지 못한 채 미첼과 율리아나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바람결에 실려오는 산짐승 특유의 노린내를 감지하자 미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부랴부랴 율리아나를 깨웠다. "이봐. 어서 일어나." 쪼그리고 앉은 채 잠들어있던 율리아나가 막 짜증을 부렸다. "왜 그래?" "뭔가가 접근하고 있어. 상황을 봐서 늑대같다." 미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율리아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미 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미첼은 조심스럽게 검을 뽑아들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 뒤에 꼭 붙어있도록 해. 만약 늑대가 여러 마리라면 지체 없이 나무 위로 올라가고……." 율리아나는 겁에 질린 듯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린내가 점점 짙게 풍겨오는 것을 느끼며 미첼은 양손으로 검을 꼭 쥐었다. "몇 마리나 몰려왔을까?" 그러나 늑대무리가 모습을 보이는 순간 미첼의 뇌리에는 투지가 싹 사라져버렸다. 팔라딘 정도 되는 기사가 어떻게 늑대에게 겁을 집어먹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겠지만 상황을 보면 익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세, 세상에……." 온 숲을 그득 메우며 접근해오는 희끄무레한 그림자들. 마치 밤하늘의 별을 연상시킬 정도로 숲을 가득 메운 불빛들을 보자 미첼은 소름이 오싹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어림잡아도 몇 백 마리는 될 듯한 엄청난 늑대무리였다. 숲 속에 이렇게 많은 늑대들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른 일이었다. 검을 쥔 손에서 힘이 스르르 빠졌다. "스, 승산이 없어." 이미 율리아나는 부리나케 나무 위로 기어올라간 상태였다. 여자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빠른 몸놀림. 미첼은 결국 싸움을 포기했다. 갑옷이나마 제대로 걸쳤다면 한 번 싸워보겠건만 이미 그는 갑옷을 모두 벗어버린 상태였다. 짊어진 짐도 버거운 상황인데 갑옷까지 챙길 여유란 없었다. 지척까지 접근해온 늑대무리를 견제하며 미첼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쳤다. 이런 판국에서 짐을 챙길 정신은 없었다. 등이 나무에 닿자 미첼은 잽싸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정신 없이 나무에 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인간의 등을 보면 지체 없이 달려드는 것이 산짐승의 본능. 늑대 무리 중에서 십여 마리가 날렵하게 미첼을 덮쳤다. 하지만 그간의 수련이 헛되진 않았는지 미첼은 가까스로 늑대의 발톱을 피해 나무에 기어오를 수 있었다. 먼저 올라가 있던 율리아나가 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올려 주었다. 나무에 올라간 뒤 아래를 내려다본 미첼의 입이 딱 벌어졌다. "세, 세상에."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늑대 무리가 나무를 빙 둘러 반원형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도저히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열 마리 가량의 늑대가 나무 아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고 나머지 늑대들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나무 위의 미첼과 율리아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만해도 기가 질리는 일이었다. 미첼의 입에서 별안간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아, 안 돼." 어슬렁거리던 늑대들이 그들의 짐에다 주둥이를 들이미는 것을 보자 미첼의 안색은 금세 거무죽죽하게 죽어들었다. 그 속에는 자신들의 식량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여행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식량을 잃어버린다면……. 미첼의 애타는 심정도 모른 채 늑대들은 짐을 풀어헤친 뒤 식량을 게걸스레 먹기 시작했다. "크크크. 먹어라. 배가 터지도록." 어둠 속에서 데이몬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녀석들의 식량을 축내겠다는 그의 계획은 어김없이 성공했다. 모르긴 몰라도 두 남녀는 굶주린 늑대들이 식량을 먹어치우는 것을 보며 피눈물을 흘릴 것이 분명했다. 사실 몰려든 늑대 무리 중에서 진짜는 고작 10여 마리에 불과했다. 지금 짐에다 주둥이를 박은 채 정신 없이 마른고기를 집어삼키는 녀석들 말이다. 나머지는 모두 가짜였다. 미러 이미지(Mirror image)로 연출한 환영인 것이다. 데이몬은 마법을 사용해서 늑대 무리의 수를 수십 배나 뻥튀기한 상태였다. 미러 이미지. 마법의 힘으로 물체의 상을 허공에 투영한 것으로 중원의 사술 중 분신술(分身術)과 흡사한 효과를 주는 마법이다. 차이점이라면 분신술로 만들어낸 형상은 실체가 없어 만지면 그대로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미러 이미지에 의한 환영은 놀랍게도 실체가 있었다. 물론 물리적인 데미지를 가할 순 없지만 현실성 면에서는 분신술보다 월등한 우위를 보이는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늑대 무리들은 모두가 미러 이미지로 만들어진 환영이었다. 피 냄새를 낭자하게 풍겨 늑대 10여 마리를 끌어 모은 데이몬은 미러 이미지를 펼쳐 늑대들의 수를 비약적으로 불려놓았다. 그 수는 미첼과 율리아나를 혼비백산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식량을 모두 먹어치우는 것은 진짜 늑대 10여 마리면 충분했다. 데이몬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미첼과 율리아나가 용병단으로부터 훔쳐온 식량이 모조리 거덜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둘은 결국 밤새도록 나무 위에서 뜬눈으로 지샐 수밖에 없었다. 나무를 포위한 늑대 무리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물러갔고 미첼과 율리아나는 그때서야 나무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삭신이 쑤신 나머지 율리아나는 그대로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밤새도록 나무등걸을 부여잡고 있느라 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시, 식량이 하나도 남지 않았어. 부랴부랴 짐을 뒤져본 미첼이 뼈저린 탄식성을 토해냈다. 이젠 그들이 쫄쫄 굶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용병단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맥이 탁 풀릴 수밖에 없었다. 식량을 살 수 있는 마을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그 동안 꼬박 굶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망연자실한 채 그 자리에 맥없이 주저앉아 있던 미첼과 율리아나. 그 모습을 데이몬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둘은 그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데이몬이 세 번째로 벌인 작전은 그들의 돈줄을 말리는 작업(?)이었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78회 그곳에서 머물러봐야 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곧 길을 떠났다. 얼마 남지 않은 물로 목을 축인 미첼과 율리아나는 서둘러 마을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데이몬은 인비저빌러티를 펼친 상태로 그들의 뒤를 졸졸 따라가고 있었다. 데이몬은 조심스럽게 미첼의 뒤로 접근했다. '조심해야겠군. 그래도 미첼 녀석, 명색이 팔라딘인데 말이야.' 하지만 접근은 의외로 쉬웠다. 밤을 꼬박 지샌 데다가 극도로 지쳐 미첼은 꾸벅꾸벅 졸며 걸어가고 있었다. 미첼의 뒤에 바짝 붙은 상태로 데이몬은 탐색마법을 펼쳤다. 짐 속에서 돈이 들어있는 위치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돈은 배낭 제일 아랫부분에 들어있었다. 나름대로 잃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신경을 쓴 듯 하지만 애석하게도 데이몬에게 걸려든 것이 그들에겐 가장 큰 불행이었다. '크크크. 이것쯤이야.' 작은 소도 하나를 꺼내든 데이몬은 거기에다 샤프니스(Sharpness)를 걸었다. 소도는 곧 면도날을 능가하는 날카로움을 지니게 되었다. 데이몬은 그것을 이용해 배낭의 아랫부분을 솜씨 있게 베어내기 시작했다. 손놀림이 얼마나 섬세했는지 미첼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이크.' 배낭이 베어짐에 따라 돈주머니가 툭 하고 떨어져 내렸고 데이몬은 얼른 그것을 받아들었다. 돈주머니가 제법 묵직했기 때문에 소리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절그렁. 돈 부딪치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오자 미첼은 걸음을 뚝 멈췄다. "무슨 소리지?" 데이몬은 돈주머니를 얼른 품속에다 집어넣었다. 그러자 돈주머니는 삽시간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대신 옆에서 걸어가던 율리아나가 몹시 피곤한 기색으로 짜증을 부렸다. "또 무슨 일이야."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쇳소리 같은 것이……." 미첼은 미간을 지긋이 모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교롭게도 그때 배낭의 찢어진 부분을 통해 물건 몇 개가 우루루 쏟아져 내렸다. "이, 이런." 뒤를 돌아본 미첼은 급히 배낭을 벗었다. 길게 찢어진 부분이 눈에 들어오자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그는 다급하게 돈주머니를 찾았다. 그러나 이미 데이몬의 품속에 들어있는 돈주머니가 눈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그들의 여행경비가 든 돈주머니는 감쪽같이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둘의 안색이 삽시간에 파리해졌다. "크, 큰일이군." 돈주머니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식량을 잃은 것보다도 더한 충격을 둘에게 가져다주었다. 식량은 마을을 찾아 사면 해결되지만 이번에는 식량을 살 돈마저 깡그리 잃어버린 것이다. "어떻게든 찾아야 되." 미첼과 율리아나는 부랴부랴 몸을 돌렸다. 온 길을 되짚어 가며 떨어뜨린 돈주머니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돈주머니는 이미 데이몬의 품속에 단단히 보관되어 있었다. 돈주머니를 되찾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도 모른 채 둘은 눈에 불을 켜고 온 길을 거꾸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숲 속을 열심히 헤집어보고 오도록. 본좌는 느긋하게 낮잠을 자고 있을 테니…….' 데이몬은 적당한 나무를 골라 위로 올라갔다. 어차피 둘에게는 탐색 마법이 걸려있었으므로 뒤를 따라갈 필요는 없었다. 보나마나 허탕을 치고 올 것이 뻔했으니까……. 꼬박 한 나절을 숲 속에서 헤맸지만 둘은 결국 돈주머니를 찾지 못했다. 둘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상태로 맥없이 길을 떠났다. 이젠 크로센 제국으로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이 상태론 용병단도 고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고 심지어 먹고 자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다시 카르셀로 돌아가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카르셀을 떠나온 지 벌써 한달 남짓한 시간이 흘렀고 여비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돌아갈 길이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율리아나는 그에 대한 화풀이를 미첼에게 퍼부어 댔다. "이런 병신 같은 놈. 돈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하지만 미첼도 이젠 만만히 당하지만은 않았다. 이미 참을 만큼 참아왔으므로 더 이상 욕을 먹는 것도 지겨웠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미첼은 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검을 보고 뒤로 주춤 물러선 율리아나를 노려보며 미첼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한 번만 더 더러운 주둥이를 나불댔다간 단칼에 모가지를 잘라버리겠다." 난생 처음 미첼에게서 험악한 욕설을 들은 율리아나는 눈에 쌍심지를 켰다. 율리아나에게 그것은 정말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이 있는데……. 예기를 줄기줄기 흘리는 검을 보자 율리아나는 극도로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하지만 그녀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까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왔던 협박을 시작한 것이다. "이, 이 사실을 네 아버님께……." "빌어먹을……. 이르려면 일러!" 미첼은 이제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이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 버릇없는 계집아이의 입만은 막아버리고 싶었다. "이 자리에서 널 죽여버리면 과연 사실이 아버지에게 들어갈까? 나에겐 전혀 상관없는 문제야. 어차피 돌아갈 길도 막막한 판국인데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네년의 모가지를 잘라버리고 도적단(Bandits)에 투신해버리겠어. 그렇다면 아버지도 결국 날 찾아내지 못할 테니까……." 율리아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어, 어찌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왜 못할 것 같아? 그렇군. 죽여버리는 것보다 노예로 팔아버리는 것도 좋겠어. 돈을 받은 뒤 이름을 바꾸고 숨어산다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니까 말이야." 율리아나는 결국 파리한 얼굴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미첼은 시퍼런 검날을 그녀의 가녀린 목덜미에 바짝 붙인 채 사납게 을러댔다. "한 번만 더 입을 연다면 정말 그렇게 할 지도 몰라. 그러니 가급적 날 자극하지 않도록 해." "아, 알았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율리아나를 노려보며 미첼은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어차피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가한 협박이었지만 생각해보니 효과는 만점이었다. 자신의 말을 들은 자는 오로지 율리아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까지 온갖 거짓말로 자신을 중상모략해 왔으므로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말을 믿어줄 것이다. 다시 말해 증거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미첼은 바로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자가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미첼이란 녀석. 이젠 이판사판으로 나가는군.' 바로 옆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본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보면 미첼의 입장을 이해할 만도 했다. 율리아나는 그가 지금까지 겪어본 계집아이들 중에서 가장 성질이 더러웠으므로……. 자신이라면 오히려 더 했을 것이다. 한 달을 밥도 주지 않고 거꾸로 매달아서라도 성질머리를 뜯어고쳤을 것이 분명했다. 데이몬에게는 분명히 자신이 있었다. 세바인에서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말괄량이들을 순한 양으로 바꾼 경험이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데이몬은 율리아나에게만은 그럴 수 없었다. 단지 다프네와 닮았다는 사실만으로 손끝 하나 댈 수 없었던 데이몬이었다. '어찌 보면 미첼이란 녀석이 내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고 있는지도 몰라.'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던 데이몬은 둘이 걸음을 옮기자 다급하게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그는 미첼이 한 말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소라고둥을 품속에다 집어넣었다. 그것은 미첼을 꼼짝못하게 할 결정적인 증거였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이용하는 것이 데이몬의 평소 지론이었으므로. 하루를 쫄쫄 굶은 끝에 둘은 마침내 산 속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의 앞에 넓게 초지와 드문드문한 인가들이 펼쳐졌다. 그렇게 찾아다니던 마을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둘은 신이 나서 멀리 보이는 마을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들에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배가 무척 고픈 상태였으므로 마을에 들어간 미첼과 율리아나는 그대로 식료품 상점으로 향했다. 일단은 뭐든지 먹어야만 될 것 같았다. 특히 율리아나의 경우 배고픔을 더더욱 참지 못했다. 곱게만 자랐던 그녀가 언제 굶주려보았을까. 식품점에 들어가자마자 율리아나는 진열대에 놓여있는 검은 빵을 집어들어 다짜고짜 먹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호밀 빵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자고로 시장기보다 더한 반찬은 없었으니까.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본 미첼은 조심스럽게 주인에게 걸어갔다. 물론 돈이 있을 턱이 없었으므로 가진 물건과 먹을 것을 바꾸려는 심산에서였다. 미첼은 불안한 눈초리로 둘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던 주인에게 주뼛거리며 말을 걸었다. "이해하십시오. 꼬박 이틀을 굶은 나머지……. 그만 도적들에게 당해 돈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대신 가진 것들을 드릴 테니 먹을 것과……." "무척 험한 꼴을 겪으셨군요." 주인은 생각 외로 인심이 좋은 편이었다. 그는 두 말도 하지 않고 선뜻 물품과 음식을 바꿔주었다. 물론 배낭 속에서 돈 될만한 것은 모조리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며칠 분 식량을 모든 소지품과 바꾼 둘은 빵을 씹으며 식품점 밖으로 나왔다. 미첼이 율리아나를 돌아보았다. "이젠 어떻게 할거야." "뭘 말이지?" "돈도 하나도 없고……. 이대로는 크로센 제국으로 갈 수도 없잖아. 예복마저도 모조리 산에다 버리고 왔으니……." 율리아나는 빵을 씹는 것을 멈추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니. 물론 카르셀로 돌아가는 것 역시 여의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장 며칠 먹을 것은 준비되었지만 그 이후가 문제인 것이다. 둘은 맥없이 길가에 앉아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율리아나는 일단 목적했던 크로센 제국까지 가자는 의견을 내어놓았다. 그 말을 들은 미첼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미쳤군. 크로센 제국까지는 앞으로도 두 달은 걸어야 도착할 수 있어. 당장 먹을 것도 없는 판국인데 어떻게……." "그럼 넌 다시 카르셀로 돌아갈거야?" 율리아나의 대꾸에 미첼은 말문이 콱 막혀버렸다. 그는 이미 두 번 다시 카르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상태가 아니었던가? 카르셀로 돌아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크로센 제국으로 가야할지 막막하기만 했으니. 맥없이 자리에 앉은 미첼을 향해 율리아나가 은근하게 말을 걸었다. "어차피 네 마음은 알고 있어. 그럴 듯한 왕국에 가서 기사가 되는 것. 그러려면 어떻게 해서든 크로센 제국으로 가야 할 테지? 물론 나 역시 아무 소득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기는 싫어. 그러니 나에게 한 가지 방법이 있어." "무슨 방법이지?" 율리아나의 제안을 들은 미첼은 머리가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율리아나는 지금 그에게 강도짓을 할 것을 제안하고 있었다. 참지 못한 미첼은 또다시 몸을 일으켰다. "뭐라고?" "쉿 목소리가 커. 누가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일단 내 말이나 들어봐." 율리아나의 채근에 미첼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시금 엉덩이를 묻었다. "조금만 더 가면 큰 관도가 나올 거야. 물론 부유한 장사치들도 그 길을 이용하겠지? 그러니까 딱 한 건만 하자. 어차피 우리에겐 돌아갈 여비도 없잖아? 물론 장사치들에게 호위무사들이 딸려있겠지만 그들 정도는 네 실력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테니……." "나, 난 못해. 명예로운 기사로써 어찌 그런 짓을……. 혹시라도 이 일을 아버님께서 알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미첼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집요하게 채근해왔다. "그럼 이대로 돌아갈거야? 그건 너도 바라는 바는 아니잖아? 그러니 눈 딱 감고 한 건만 벌이자. 내가 함구한다면 네 아버지가 어찌 알겠어? 어차피 넌 도둑질도 한 번 했잖아?" "하지만……." 거듭 고개를 가로젓는 미첼을 보며 율리아나는 마지막 수단을 동원했다. "좋아. 이번 건만 성사시켜 크로센 제국에 무사히 도착한다면 널 자유롭게 풀어줄게. 돌아가서 네 아버지께 좋게 얘기해 줄 것을 약속해주지. 게다가 지금까지 네가 나에게 했던 불미스러운 일들 역시 덮어두겠어."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더 이상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어차피 돌아가는 여비도 없긴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결국 미첼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좋아. 하겠어. 하지만 이번 단 한 번 뿐이야." 어쩔 수 없다는 듯 승낙하는 미첼을 보며 율리아나는 얼굴을 활짝 폈다. "잘 생각했어." 미첼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이건 지금까지 줄곧 생각했던 것이지만……." "것이지만?" "넌 정말 무서운 아이야.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나 무서운 것 이제 알았어?" 태연스레 내뱉은 율리아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 서두르자. 복면을 하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테니까……." 자기들 딴에는 아무도 듣지 못한 밀담이라 생각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의 모의는 누군가의 귀에 정통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그들은 누군가가 바짝 붙어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에서 강도 모의를 한 것이었다. 물론 그 누군가는 인비저빌러티를 펼치고 있던 데이몬이었다. 대화내용을 들은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절박하긴 했군. 강도 짓까지 생각하다니 말이야." 이미 데이몬의 머릿속에는 둘을 골탕먹일 좋은 생각이 떠올라 있었다. 두 번 다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크크크. 이놈들 어디 한 번 죽어봐라." 그는 곧 율리아나와 미첼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79회 둘은 계획을 곧바로 착수하지 않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외진 산골 마을이었고 그런 곳을 적당한 물주(?)가 나다닐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둘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큰 도로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이 정도면 되겠군." 거친 흑빵을 씹어가며 여정을 이어나간 둘은 마침내 목적했던 곳에 이를 수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잘 다져진 넓은 관도였다. 가에 경계석을 세우고 가운데 자갈을 채운 다음 무거운 롤러 따위로 눌러 다진 도로. 한 눈에 보아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세워진 관도(官道)임을 알 수 있었다. 적당한 곳에 도착하자 둘은 곧 거사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준비기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얼굴을 가리기 위한 복면을 만든 다음 옷을 뒤집어 입기만 하면 끝났으니까 말이다. 범행에 사용할 도구도 만들었다. 미첼에게는 검이 있었지만 율리아나에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럴 듯한 몽둥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미첼과 율리아나는 길 옆 으슥한 곳에 숨어 적당한 사냥감이 도착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정말 말도 안 되는군. 강도짓을 하자고 제안하는 왕녀나 그것에 동의한 호위기사나…….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 헬버트론을 보며 데이몬은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표정이 없는 데스 나이트라고 하나 동작을 보면 어느 정도 감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말이 돼. 왜냐하면 내가 며칠 따라다니며 괴롭혔거든……." "하긴 네 녀석 손에 걸렸다면."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헬버트론. 그의 옆에는 라인델프가 서 있었다. 데이몬은 짜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데스 나이트 둘을 인크레시아에서 불러낸 상태였다. 미첼과 율리아나를 확실하게 골탕먹일 계획 말이다. 묵묵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라인델프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우린 무얼 하면 되지?" 데이몬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계획은 간단해. 우린 먼저 놈들이 노림직한 사냥감으로 변장한 채 접근하는 거야. 부유한 상인 정도면 적당하겠군. 물론 너희들은 내 호위 역할을 맡아야겠지?" "호위가 데스 나이트라면 조금 이상하지 않을까?." "멍청한 녀석. 그러니까 모습을 바꿔야지. 데스 나이트는 흑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하던데 무슨 상관이야." 데이몬의 말에 헬버트론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우리들이 쓸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5서클 정도가 한계야. 모습이야 가까스로 바꿀 수 있다 하더라도 분위기나 기운 때문에 바로 탄로나 버릴 거야."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도와줄 테니……." 결국 헬버트론과 라인델프는 데이몬의 계획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헬버트론이 어이가 없다는 듯 툴툴거렸다. "젠장. 이런 일을 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살다보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기 마련이지. 그럼 난 마차를 준비해 오겠어. 그러니 준비 단단히 하고 있도록 해." 말을 마친 데이몬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공간이동을 통해 적당한 복장과 마차를 준비하러 간 것이다. 데스 나이트들은 툴툴거리며 모습을 바꿀 준비를 시작했다. 어차피 그들에겐 마법이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캐스팅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온다." 관도 끝 부분을 쳐다보던 미첼은 눈을 빛냈다. 벌써 여러 대의 마차가 지나갔지만 그들의 식성에 맞는(?) 사냥감은 단 하나도 지나가지 않았다. 대부분 농사꾼의 우마차가 아니면 이, 삼십명의 용병들이 호위하는 거상의 행렬이었다. 비록 실력이 있다지만 목격자가 많은 것은 결코 좋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그들 둘은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작정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구미에 딱 맞는 사냥감이 어슬렁어슬렁 접근하고 있었다. "마차를 보니 전형적인 장사치 같군. 대도시로 뭔가를 사러 가는 것 같은데?" "잘 되었어. 호위하는 녀석이 둘밖에 없으니 말이야." 둘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복면을 뒤집어썼다. 그들의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사냥감이 나타난 것이다. 이리로 다가오는 마차는 전형적인 사두마차로써 뒤에 물품을 싣기 위한 수레가 달려 있었다. 수레가 텅 비어있는 것을 보아 대도시로 물품을 사러 가는 상인의 마차가 분명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말을 몰고 있는 중늙은이는 상인의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 끄덕끄덕 졸고 있는 덩치 좋은 녀석들은 한 눈에 보기에도 호위를 맡은 용병들이 분명했다. 그 모습을 보고 율리아나는 눈빛을 빛냈다. "잘 되면 충분한 여비를 건질 수 있겠어." "이번 한 건만이야. 두 번 다시 이런 일엔 동참하지 않을 테니……." 미첼의 다짐에 율리아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런 경험은 한 번이면 족했다. 만약 이 사실이 카르셀에 알려진다면 그녀는 두 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호위하는 녀석이 고작 용병 둘이니 실패할 확률은 없겠지?" "걱정하지 마. 저런 녀석들은 눈감고도 때려눕힐 수 있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두 명의 초보 도적(?)들은 긴장한 채 마차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멈춰라." 기세 좋게 뛰어나와 길목을 막은 복면인 두 명을 보자 상인은 즉시 마차를 멈췄다. "응?" 달아날 것을 대비해서 말을 베어버릴 채비를 갖추고 있던 미첼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말에 채찍질을 해서 강행 돌파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깊이 생각할 계제가 아니었다. 용병 둘이 날렵하게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자 그는 자세를 잡고 상인과 용병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폈다. 상인은 무척 평범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4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얼굴에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중늙은이로 눈알을 재빨리 굴리는 모습이 한 눈에 닳고 닳은 상인임을 알 수 있었다. 용병들 역시 평범하긴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당당한 체구를 하고 있었으며 약속이라도 한 듯 구레나룻을 짙게 기른 모습이 아무래도 형제 같았다. 미첼과 율리아나를 보자 상인은 기세 좋게 고함을 질렀다. "웬 놈들이냐?" "누구긴 누구야. 강도님들이지." 꾸민 듯한 둔탁한 음성이 미첼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여자란 것이 탄로 날까봐 율리아나는 일언반구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녀의 역할은 오로지 머릿수를 채우는 것뿐이었다. 혼자 강도짓을 하는 도적은 그리 흔치 않으니까 말이다. 물론 용병 둘 처리하는 것 정도는 미첼에겐 일도 아니었다. 잽싸게 제압해버린 다음 상인에게서 돈만 빼앗아 사라지면 되니까 말이다. "꼼짝 마라." 그 사실을 떠올린 미첼은 불문곡직하고 용병들에게 덮쳐 들어갔다. 저 정도 상대라면 굳이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릴 필요도 없었다. 물론 자신이 팔라딘이라는 증거를 남길 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러므로 서너 차례 검을 나누다 기회를 보아 제압해버리면 그만이었고 미첼에겐 충분히 그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만만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웃." 회심의 공격이 아주 간단히 가로막히자 미첼은 침음성을 내질렀다. 놀랍게도 용병들의 수준은 기대 이상이었다. 검을 뽑지도 않고 자신의 공격을 가볍게 퉁겨냈으니 말이다. 물론 그 뒤로도 미첼의 공격이 계속 이어졌다. 다급한 나머지 그는 사력을 다해 공격하고 있었다. 빨리 일을 마치고 사라져야 했으므로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평범해 보이는 용병들은 놀랍게도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어가며 미첼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냈다. 도저히 용병으로 볼 수 없는 실력이었다. "이건 뭐야? 애송이잖아?" "이 정도 실력으로 도적질을 하려고?" 기가 찬 나머지 말도 나오지 않았다.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 장담했던 미첼의 공격을 용병들은 간단한 검놀림으로 모조리 차단했다. 그것을 보면 용병들은 보기와는 달리 엄청난 검술실력의 소유자들이 틀림없었다. 아니면 자신의 실력이 수준 이하던가. "이익." 결국 부아가 치민 미첼은 오러 블레이드를 있는 대로 끌어올렸다. 지금까진 목숨을 빼앗을 생각이 없었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살인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의 생각으로 평범한 용병들이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낼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보자 용병들은 눈에 띄게 긴장했다. 하지만 둘 다 검을 뽑아들지도 않았다. "오러 블레이드라……. 제법 한 가닥 하는 녀석이로군." "이런 녀석이 왜 도적질을 하지?" 용병들이 오러 블레이드를 보고도 전혀 겁을 먹지 않자 미첼은 기가 막혔다. 그가 아는 상식으론 용병들이 시퍼렇게 질려 꽁무니를 빼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용병들은 나름대로 파훼법까지 대화해가며 도리어 자신에게 접근해 들어오고 있었으니…….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검과는 결코 부딪혀서는 안 돼. 그대로 검이 잘려버리거든." "철저히 피해야 돼. 그러고 난 뒤 기회를 봐서 애송이를 제압하자고……." 미첼로써는 화가 나서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치밀어 오를 지경이었다. '이것들이 오러 블레이드를 뭘로 보고?' 미첼의 머리 속에는 건방진 용병 둘을 단칼에 두 조각 내어버리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었다. 용병들이 지척까지 다가오자 미첼은 거센 기합성을 토해내며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이야압." 검에 서린 오러 블레이드가 용병들의 무기와 함께 몸마저 두 토막 낼 것임을 꿈에도 믿어 의심치 않으며……. 하지만 일은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비록 오러 블레이드가 모든 것을 잘라버리는 신기의 기술이라고 하나 명중되지 않으면 허사였다. 용병들은 놀라운 기술로 미첼의 오러 블레이드를 피해냈다. 하나는 거의 자신의 키만큼 도약해버렸고 나머지 하나는 몸을 납작 숙이며 피해냈다. 아니 피해낸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납작 엎드린 용병은 몸을 돌리며 미첼의 발목을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발목에 강한 충격을 받은 미첼의 몸이 휘청했고 그 틈을 타서 뛰어오른 용병의 공격이 이어졌다. 퍽. 검집에 뒤통수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미첼은 그대로 꼬꾸라져 버렸다. 정말 놀라운 실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용케 정신을 잃지 않은 미첼이 버둥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싸늘한 예기를 풍겨내는 검날이 목덜미를 지긋이 누르고 있었으니……. 왼쪽의 용병이 싯누런 이를 드러내며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어떻게 할래? 여기서 목이 잘릴래? 아니면 돈트렐에 가서 재판을 받고 목이 잘릴래?" 미첼로써는 뭐라 말할 도리가 없었다. 솔직히 자신의 패배가 아직까지 믿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얼떨떨해하는 미첼을 보고 오른 쪽 용병이 몸을 일으켰다. "자네는 이 녀석을 포박하라고……. 난 나머지 강도 놈을 잡아올 테니." "그러지." 눈 깜짝할 사이에 용병들에게 제압된 미첼을 보자 율리아나는 반사적으로 줄행랑을 쳤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선 도망치는 것만이 능사였다. 하지만 그녀는 채 몇 걸음 달아나기도 전에 용병의 손에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이것 놔." 뾰쪽한 교성과 함께 율리아나는 필사적으로 손에 든 몽둥이를 휘둘렀다. 여기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로잡히는 것은 피해야만 했다. 하지만 미첼도 당해내지 못한 상대가 그녀의 몽둥이질에 당할 리가 만무했다. 뿌직. 몽둥이가 힘없이 부러져나가고 율리아나는 그만 용병의 굳센 손아귀에 잡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처지가 되었다. 용병이 강제로 복면을 벗겨내자 율리아나는 얼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용병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것 봐 헬버. 강도가 계집인걸?" "계집이 강도짓을 하다니 놀랍군. 라인. 그년을 이리로 데리고 와." "알았어." 불쌍하게도 율리아나는 용병의 팔뚝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마차로 압송되는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미첼은 이미 꼼짝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결박된 상태였다. 여자라고 사정 봐주지 않는 성격인 듯 용병들은 율리아나마저도 단단히 결박했다. 손을 뒤로 돌린 뒤 굵은 동아줄로 단단히 틀어 매고 발목에 쇠고랑을 채운 용병들은 이를 누렇게 드러내며 웃었다. "멍청한 녀석들. 노릴 것을 노려야지 하필이면 우리 마차를 습격해?" "그럼. 우리들이 얼마나 경험 많은 용병인데……." 둘이 완벽하게 제압되자 이번에는 상인이 다가왔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80회 그는 개기름이 주르르 흐르는 얼굴을 숙여 둘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겁도 없는 애송이들이로군. 백주대낮에 강도 짓을 하다니……. 얼씨구? 또 하나는 계집일세. 낯짝이 제법 반반한 년이 강도 짓을 모의하다니 정말 세상 말세로군." 이죽거리는 상인의 말을 듣고도 둘은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사로잡힐 것이라곤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특히 율리아나는 조금 전의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이 마차를 습격하기로 한 것부터 애초에 강도짓을 구상한 것까지 전부 말이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 이제 어떻게 해? 이 사실이 카르셀에 알려진다면…….' 그녀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죽고 싶은 심경이었다. 이런 처지에 놓이다니……. 그녀는 이제 자신의 운명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대도시로 가서 재판을 받고 목이 잘리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신분만은 털어놓지 않을 작정이었으니 말이다. ―카르셀의 왕녀가 호위기사와 함께 강도 짓을 하다 사로잡혔다.― 만약 이 사실이 카르셀이나 주변국에 알려지면 상상도 못할 결과가 초래될 것이었다. 국가 이미지 실추는 불 보듯 뻔했다. 또한 안 그래도 심장이 좋지 않은 아버지가 큰 충격을 받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율리아나는 이를 악물며 미첼을 쳐다보았다. '앞으로 어떤 지경에 처하더라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 신분만은 숨겨야 해.' 무언의 약속이었지만 미첼은 용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마찬가지 입장에 놓여 있었다. 자신 하나만 믿고 있는 아버지 헤일즈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당장 식음을 전폐하실 것이 분명했다. 성공을 확신하며 시도한 강도짓이었지만 결과는 너무 허무했다. 아직까지 패배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미첼의 얼굴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을 쳐다보던 상인은 혀를 쯔쯔 찼다. "불쌍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군. 목적지인 돈트렐에 가서 재판에다 넘겨야 되겠어. 그 전에 이름이나 알아둘까? 이봐 헬버. 녀석들의 이름과 신분이나 파악해보도록……." "알겠습니다." 헬버라고 불린 용병이 다가와 문초를 시작했다. "이봐. 이름이 뭐야." "………." "어디 출신이지?" 헬버의 질문이 이어졌지만 둘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헬버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말을 하지 않는뎁쇼" "그래? 그렇다면 방법이 있지." 상인은 무척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마차 뒤에 매달린 수레에서 긴 판자조각을 꺼낸 상인은 둘을 수레에다 싣고 단단히 결박해놓으라고 지시했다. "튼튼하게 묶어놓게. 결코 도망치지 못하도록……." "염려 붙들어놓으십시오." 용병들이 달려들어 둘을 하나씩 들쳐 맨 뒤 수레에다 실었다. 그리고는 둘의 손목과 발목을 튼튼하게 고정했다. 수레는 아무래도 노예 이송용으로 만들어진 듯 했다. 쇠고랑을 고정시킬 수 있는 고리가 좌석마다 몇 개씩 박혀 있었으니 말이다. 수레에 묶이면서도 율리아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체념한 듯한 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떠올라 있었다. "크크크. 이 정도면 되겠군. 어떤가? 훌륭하지 않나?" 조금 뒤 상인이 의기양양하게 들어올린 판자를 보자 율리아나는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내용이 판자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설픈 도적단. 백주대낮에 마차를 털려다 실력부족으로 사로잡힌 애송이 강도들.] 대충 이런 어귀가 큼직하게 판자에 새겨져 있었다. 상인의 의도를 알아차린 율리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안 돼! 그러지 말아요." "얼씨구? 벙어리는 아니군. 좋아. 팻말을 달고 싶지 않으면 어디 이름과 신분을 솔직하게 털어놔 보실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름과 신분을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묵묵부답이던 둘을 쳐다보던 상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좋아. 어차피 재판에 회부되어 목이 잘릴 것들이니 상관없지. 혹시 모르잖아? 돈트렐에 가는 도중에 알아볼 녀석들이 있을지……." 상인은 무정하게도 판자를 수레 옆면에다 못질해서 붙였다. 미첼과 율리아나가 묶여있는 부분 아래에다 정확히 말이다. 그것을 보며 미첼과 율리아나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오. 신이시여' 결국 율리아나는 평소 찾지 않던 신까지 들먹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지경에서 만에 하나 자신들을 알고 있는 자와 마주친다면…….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했다. 더군다나 그들이 버리고 온 용병들과 마주친다면 그보다 더한 창피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곤경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율리아나는 다급하게 마차에 오르려는 상인을 불렀다. "저, 저기요." "무슨 일이지?" 율리아나는 억지 웃음을 지어가며 상인에게 애걸을 했다. "죄송하지만 저희를 풀어주면 안되나요? 두 번 다시 강도짓을 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상인은 애석하게도 애원이 먹혀드는 인물이 아니었다. 한 눈에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림없는 소리. 소행을 보아 강도짓을 벌써 여러 번 한 놈들로 보이는데 그럴 순 없지. 함부로 타인의 재물을 빼앗으려는 녀석들은 반드시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해." "저, 저희는 이번이 처음인데요?" "그걸 어떻게 믿어? 혹시 모르지. 이름과 신분을 솔직히 토설한다면 한 번 생각해 볼지도……." 하지만 그들에게 이름과 신분은 어떠한 경우에도 숨겨야 하는 사항이었다. 말문이 막혀버린 율리아나를 매섭게 흘겨보며 상인과 두 용병은 묵묵히 마차에 올랐다. "이랴." 조금 뒤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미첼과 율리아나는 불쌍하게도 수레에 실려 돈트렐로 이송되는 처지에 놓였다. 강도짓을 모의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말이다. 수레의 옆면에 더 이상 부끄러울 수 없는 어귀가 새겨져 있었으므로 둘은 고개를 푹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너도 참 사악한 인간이다. 어떻게 그런 짓을……." 털북숭이 용병의 말에 상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뭐가 말이야?" "그래도 명색이 왕녀인데 저런 창피를 당하고도 살려고 그럴까?" 상인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저렇게 성격이 괄괄한 계집아이는 처음 보았으니까. 이번 기회에 단단히 버릇을 고쳐놓아야만 저 성질머리가 좀 수그러들 거야." "하긴 네 손에 벌써 여러 여자들이 길들여져 순한 양이 되어버렸지." 그럴 듯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텁석부리 용병은 실상 인간이 아니었다.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살아있는 것이 아닌, 영혼을 매개로 저주받은 몸을 가진 죽음의 기사였던 것이다. 그는 바로 데이몬에 의해 생명을 얻은 데스 나이트 헬버트론이었다. 옆에서 재미있다는 듯 대화를 경청하는 자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라인델프였다. 그것은 '헬버'와 '라인'이라는 급조한 이름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미첼이 당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 지라도 아르카디아를 통틀어 충분히 열 손가락 안에 낄 수 있는 실력을 가진 데스 나이트들에겐 당할 수밖에 없었다. 둘은 지금 전혀 의심할 여지없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바로 데이몬의 탁월한 솜씨에 의해서.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상인의 정체는 역체변용술로 모습을 바꾼 데이몬이었다. 헬버트론이 놀랍다는 듯 데이몬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런데 쳐다볼수록 놀라워. 어떻게 그렇게 전형적인 상인의 모습을 할 수 있었지?" "의외로 간단해. 왜냐하면 이것은 실존 인물의 모습이기 때문이지." 데이몬은 우습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사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용모는 바로 로르베인의 보석상 지배인 안토니의 것이었다. 상인으로 변하고자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용모가 안토니의 것이었고 기억에 남아있는 이상 변장은 식은 죽 먹기였다. 게다가 로르베인과 이곳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만큼 알아볼 만한 자는 거의 없었다. 얼마나 완벽했는지 미첼과 율리아나마저 감쪽같이 속아넘어갈 정도였으니…….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라인델프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놀랍군. 저 계집아이는 보면 볼수록 예전의 성녀와 닮았어. 미리 말하지 않았다면 착각할 뻔했으니 말이야." "너도 속을 뻔했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두 명의 데스 나이트를 보며 데이몬은 조용히 상념에 빠져 들어갔다. 대화에서 이름이 거론되기만 해도 다프네에 대한 추억이 물밀 듯 밀려 들어왔다. 자신이 이토록 다프네에게 빠져 있을 줄은 몰랐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 귓가에 속삭이던 상냥한 어조. 그리고 볼에 와 닿던 부드러운 입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 올랐다. 비록 그것이 500년 전의 추억이긴 하지만 데이몬에겐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뭔가 생각이 난 것처럼 라인델프가 고개를 돌리다가 바로 얼어붙었다. "그러고 보니 넌 성녀를 상당히……." 추억에 사로잡혀 있던 데이몬을 보자 라인델프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다급하게 손가락을 입에다 댄 헬버트론의 행동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헬버트론이 목소리를 낮춰 주의를 주었다. "쉿. 조용히 해. 녀석과 성녀와의 관계가 어떤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잖아." "하긴." 추억에 빠져든 데이몬을 대신해 말고삐를 받아든 헬버트론은 조용히 마차를 몰았다. 데스 나이트의 몸이긴 해도 마차를 모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수레에 묶여 끌려가던 미첼과 율리아나는 오래지않아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마음이 다소 진정되자 상대방에 대해 화가 극도로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멍청한 녀석. 그까짓 용병들 하나 제대로 처치 못해?" 미첼도 지지 않겠다는 듯 마주 고함을 질렀다. "빌어먹을. 저들은 결코 평범한 용병이 아니야. 고르려면 제대로 골라야지. 아무튼 네 말대로 했다가 결과가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다니까." "그래도 입만 살아 가지고……. 따지고 보면 그럴 법도 해." 율리아나의 눈에는 묘한 광기가 돌고 있었다. "듀라한에게 당한 것도 그렇고, 게다가 넌 마법사와의 격투에서도 졌잖아? 그러니 용병에게 진 것도 충분히 일리가 있어. 네 실력을 진작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이런 썅." 눈이 뒤집힌 미첼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율리아나가 이판사판으로 따지고 들자 마침내 울화가 폭발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추호도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차라리 평범한 카르셀의 수비대원을 데리고 올 걸 그랬어. 너보단 백 배 나았을 거야." "닥쳐." 연신 옥신각신하던 둘을 보다못해 헬버트론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것들아. 조용히 해." 하지만 보이는 것이 없어진 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단히 결박되어 있어만 않았어도 달려들어 사생결단을 낼 듯한 태도였다. 결국 둘은 데이몬이 개입하고 나서야 싸움을 멈췄다. 데이몬은 일부러 험악하게 눈을 부라리며 둘을 쏘아보았다. "이런 건방진 것들이 도적질을 하다 잡히고 나서도 싸움질이야. 당장 그치지 않겠다면 둘 다 홀랑 벗겨서 마차 뒤에 매달고 갈 테다." 아주 적절하다고 볼 수 있는 협박에 둘은 찔끔할 수밖에 없었다. 상인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라 생각했기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닫았다. 그런 둘을 향해 데이몬은 거듭해서 으름장을 놓았다. "조금 더 가면 노예 시장이 있다. 계속 떠든다면 구태여 데리고 갈 것 없이 그곳에서 팔아버릴 테니 알아서들 해." 말을 마친 데이몬은 음흉한 눈빛으로 둘의 전신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미첼과 율리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상인은 손으로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군. 계집은 제법 반반하니 창부로 팔면 제법 값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사내 녀석은 검을 쓸 줄 아니 북부의 노예병으로 팔아버리면 그만이겠군. 어디 그렇게 한 번 해 볼까?" 너무나도 소름끼치는 말에 둘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정말 큰일이었기 때문에 미첼과 율리아나는 두 번 다시 입을 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정말 걸려도 더러운 놈에게 걸렸다고 속으로 수없이 투덜대며 말이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81회 수레에 묶여 있는 둘이 싸움을 그치자 마차 위의 일행들은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물론 수레에서 들리지 않도록 모종의 결계를 치고 난 뒤에 말이다. "그런데 저들을 어떻게 할거야?" 헬버트론의 질문에 데이몬은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돈트렐까지 끌고 갈 생각이야. 물론 갖은 구박을 좀 퍼부어가며 말이지. 돈트렐엔 용병들이 있으니까 우연을 빙자해서 만나게 하면……. 크크크. 그것 상당히 재미있겠어." "너무 하는 것 아냐?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 녀석들은 너와 용병들을 두 번 다시 보려하지 않을 텐데……." "뭐. 마차에 묶인 상태로 대면시킬 생각은 없어. 일단 돈트렐까지 가서 적당히 기회를 보아 풀어줄 작정이야. 물론 녀석들이 제 발로 탈출하게끔 기회를 만들어줘야겠지?" "사악한 녀석." 헬버트론은 혀를 끌끌 찼다. 생전에도 결코 착하게 보이지 않았던 녀석이지만 지금은 더했다. 힘을 가진 지금은 그 힘을 아주 적절히 이용해서 눈에 거슬리는 녀석들을 완전히 폐인으로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트루베니아에는 언제 건너갈 작정이야? 우린 지금 드래곤과 싸우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해 죽겠다고……." "조금만 기다려. 머지않아 좋은 사냥감이 생길 테니……." 드래곤 한 마리가 자신의 뒤를 쫓고 있다는 말에 헬버트론은 반색을 했다. "그것 정말 반가운 소리로군. 그 때가 기다려지는 걸?" "놈과 맞닥뜨리면 실수나 하지 말도록 해. 드래곤을 상대하는데 있어 실수는 바로 죽음과 직결되니까 말이야. 너희들이 아무리 데스 나이트라도 전신이 산산조각 나면 되살리기 힘들어." "걱정하지 마. 우린 자나깨나 그 날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헬버트론과 라인델프의 눈에는 분노의 광망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드래곤이란 존재에 대한 순수한 분노였다. 돈트렐로 향하는 일주일의 여정동안 미첼과 율리아나는 상당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나마 낮에는 도저히 얼굴을 들고있을 수도 없었다. 그게 모두 다 저주받은 팻말 때문이었다. 드넓은 관도라서 오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데다 붉은 글씨로 큼지막하게 써 붙인 팻말 때문에 그들은 하루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옷자락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을 수밖에. "저것 봐. 뭐라고 적혀 있지? 어설픈 도적단? 쯔쯔쯔 보아하니 젊은 녀석들 같은데 불쌍하군." "하나는 계집아이 같은데 맞나? 보아하니 남자한테 단단히 반한 년 같군. 보나마나 남자녀석에게 푹 빠져 범행을 저질렀을 테지?" "저런 녀석들은 절대로 사정 봐주지마슈. 단단히 콩밥을 먹여야지." 오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이 한 마디씩 내뱉는 말에 미첼과 율리아나는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지간한 율리아나라도 상인에겐 제대로 항변 한 마디 하지 못했다. 우선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운데다 그들을 압송해 가는 상인이 말 그대로 칼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비칠 냉혈한으로 보였던 것이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율리아나도 그 괄괄한 성질 한 번 부리지 못하고 순순히 압송당하고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상인은 결코 자신의 투정을 받아 줄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강도질하다 잡힌 처지이니 더욱 그러했다. "자 먹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용병으로 짐작되는 녀석이 음식 한 접시를 탕 소리내며 내려놓았다. 율리아나는 고개를 수그린 채 그것을 집어들었다. 하도 배가 고파서 체면 가릴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말라비틀어진 빵과 고기가 전부였지만 율리아나는 군소리하지 않고 입 속에 집어넣었다. 묵묵히 씹고 있자니 저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엄마. 흑흑."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왜인지? 그녀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었다. 차라리 카르셀을 떠나지 말 것을……. 아니 용병단에게 복수한다며 식량을 챙기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처지에는 놓이지 않았을 것이다. 놀랍게도 율리아나는 지금 용병대장인 카심을 걱정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잘못했지. 그 정도로 임무에 충실한 사람은 드물 테니까. 불쌍한 용병들이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할 테지? 그 산간벽지에서 식량을 깡그리 챙겨 왔으니…….' 사람이란 본시 위기에 처하게 되면 시야가 넓어지는 법이다. 때문에 그녀는 지금 자신이 해 왔던 소행에 대해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자기 고집대로만 행동했던 것,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던 것 모두가 절실히 뉘우쳐졌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엎질러진 물에 불과했다. 그녀는 이제 자신들이 돈트렐에 가서 목이 잘릴 날만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카르셀의 왕녀란 사실을 밝히지 않을 거야. 죽어도 아버님의 왕국에 폐를 끼칠 수는 없어.' 율리아나는 묵묵히 다짐하며 빵을 집어삼켰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이다. 미첼 역시 정신이 반쯤 나가긴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굳은 결심으로 카르셀을 떠났건만 거듭되는 시련으로 인해 그의 자신감은 완전히 꺾여 버렸다. 물론 거기에는 평범한 용병에게도 패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아버지…….' 지금 그는 고향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금 따분하긴 하지만 나름대로 임무에 충실한 수비대원들. 거의 매일이다시피 자신에게 추파를 보내는 마을 처녀들. 심지어 미첼은 아버지의 매질까지도 그리워하고 있었다. 강한 기사로 키우겠다는 명목아래 미첼을 유난히도 혹독하게 단련시켰던 아버지 헤일즈였다. 수련을 조금만 게을리 하면 불호령과 함께 호된 매질이 이어졌다. 어린 시절 그런 아버지가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하지만 지금 미첼에게는 그 모든 것이 그리웠다. '만약 카르셀로 돌아갈 수 있다면 두 번 다시 헛된 망상을 품지 않겠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말이다.'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는 미첼이었다. 그런 둘을 싣고 마차는 묵묵히 돈트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돈트렐은 테르비아 왕국에서 수도 다음의 위치에 놓여있는 도시였다. 그런 만큼 상주하는 인구가 어마어마했다. 또한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보니 드나드는 사람의 행렬 역시 잠시도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동부 해안지방에서 서부의 크로센 제국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했기에 돈트렐의 성문은 항상 북적북적하게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돈트렐은 일반적인 도시가 아닌 테르비아 왕국의 주요 거점도시였다. 때문에 다른 도시에 비해 검문이 상당히 엄격한 편이었기에 돈트렐의 성문에는 항상 검문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대열과 마차의 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 있었다. 입성(入城)하려는 자는 신분이 특별한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이상은 누구를 막론하고 검문을 받아야 했다. 따라서 돈트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이미 기다리는데 만성이 된 듯 사람들은 짜증도 부리지 않고 조용히 자기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누군가가 길게 늘어선 줄을 본체만체하며 곧장 성문으로 다가갔다. 무료하게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일제히 집중되었다. "누구지? 어지간한 신분으론 바로 들어가지 못할 텐데……." "복장이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귀족 같기는 한데 왜 수행원이 하나도 없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가며 성문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자는 흑발을 길게 기른 청년이었다. 한 마디로 절세 미남자라 칭할 수 있는 용모. 주위 사람들에게 일체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성문으로 다가가는 이는 바로 러셀런트였다. 데이몬을 잡기 위해 트루베니아에서 파견된 에인션트 급 드래곤. 그가 마침내 돈트렐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정지." 그가 다가가자 성문 수비병들이 창을 십자로 교차해서 앞을 가로막았다. 다소 신분이 높아 보이는 병사 하나가 얼른 그에게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성문 수비병 부대장 정도의 직책을 맡은 병사 같았다. 러셀런트를 아래위로 한 번 훑어본 병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신분을 밝혀 주시겠습니까?" 러셀런트의 시선이 힐끗 병사에게 돌아갔다. 그 상태로 그는 잠시동안 병사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흑발의 청년이 곧 성문에서 쫓겨날 것이라 간주했다. 테르비아 왕국은 강력한 법치국가였고 어지간한 신분이 아니면 여간해서는 특혜를 받기 힘들었다. 차림새는 그럴 듯 했지만 수행원이 전혀 없는 것을 보니 청년은 그리 높은 신분의 귀족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병사의 반응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곤혹스러워했던 병사는 러셀런트의 눈에서 모종의 빛이 번쩍 하자마자 태도가 싹 바뀌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일국의 군주에게나 보일 법한 경의를 표시하며 병사는 러셀런트를 공손히 성문으로 안내했다. 부대장이 그런 행동을 보이는데 휘하 병사들이 이견을 제시할 리가 만무했다. 결국 러셀런트는 전혀 검문을 받지 않고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러셀런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도 부대장은 마치 뭔가에 홀린 듯 멍하니 성문 안쪽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한 병사 하나가 그에게 다가갔다. "부대장님. 그가 대관절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기에 무사 통과를 시켰습니까?" 그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부대장의 눈빛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그건……나도 모르겠다." 떠듬떠듬 대답한 부대장은 성문 앞에 길게 늘어선 행렬을 보자 지체 없이 병사들을 다그쳤다. "지금 그런 문제로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다. 네 눈엔 저기 늘어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느냐? 서둘러라." 결국 병사들은 의문을 가슴속에 묻어버린 채 다시 검문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현혹마법을 사용해서 간단히 돈트렐에 들어온 러셀런트는 느긋하게 시내를 돌아보았다. 주위에는 수많은 돈트렐 시민들이 생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과거 트루베니아의 일류 급 도시에 능히 비견될 수 있었다. 신대륙의 인간들이 이 정도나 번영을 구가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러셀런트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인간들의 저력이란 과연 무섭군. 불과 500년 사이에 이런 번영을 이룩했으니 말이야." 500년 전에 벌어진 종족전쟁에서 드래곤들은 의도한 바를 이룰 수 있었다. 인간을 트루베니아의 주인 자리에서 밀어냈으니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하지만 엄연히 따지자면 그것은 반쪽 짜리 승리일 뿐이었다. 쫓겨난 인간들이 어느새 신대륙에다 트루베니아에 못지 않을 정도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을 줄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골치 아프군." 데이몬을 찾아 신대륙의 곳곳을 돌아다닌 탓에 러셀런트는 아르카디아의 힘이 트루베니아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물론 기사들의 수나 수준 따위의 세세한 것까지는 간파하지 못했지만 언뜻 살펴본 인구와 거기에서 뽑아낼 수 있는 병력을 감안했을 때 아르카디아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 때문에 러셀런트는 이곳으로 오는 내내 혀를 내둘러야 했다. 드래곤에게 이곳의 인간들이란 단지 멸종시켜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는 즉시 이 사실을 베르키스님께 보고 드려야겠군. 아르카디아를 도모하는 일은 결코 서둘러서는 안되겠어. 준비를 차근차근 한 다음에……." 나지막이 중얼거린 러셀런트는 돈트렐 시가지를 느긋하게 돌아보았다. 분명 저 속엔 자신의 동족을 죽이고 마법 보고를 훔쳐간 가증스러운 인간이 있을 터였다. 수 만 명의 인간 중에서 하나를 찾아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러셀런트는 그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놈은 마법사다. 돈트렐 전역에서 이루어지는 마법의 캐스팅을 모조리 추적해 들어간다면 반드시 놈의 종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느긋하게 생각하기로 작정한 러셀런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돈트렐 시가지로 진입해 들어갔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82회 러셀런트가 시가지를 수색하고 있는 사이 데이몬 역시 돈트렐로 접근하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마차를 타고 오며 데이몬은 미첼과 율리아나에게 온갖 수모를 안겨주었고 그 때문에 둘은 완전히 기가 꺾여 있는 상태였다. 풀죽은 기색의 둘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이제 슬슬 그들을 풀어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 고생시켰으니 화는 어느 정도 풀렸고……. 한나절 정도면 돈트렐에 들어갈 테니 이쯤에서 녀석들을 풀어주는 게 낫겠군.' 사실 데이몬은 둘을 크로센 제국까지 데리고 갈 작정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주일 가량을 허비해가며 둘을 잡아다 돈트렐로 끌고 올 필요가 없었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율리아나 였다. 물론 다른 생각은 일절 없었다. 그의 마음은 오로지 다프네에게만 사로잡혀 있었고 율리아나에게 다른 마음을 먹을 이유란 없었다. 오로지 다프네와 닮은 모습을 살짝살짝 훔쳐보며 그리움을 달래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데이몬의 그런 꿍꿍이 때문에 둘은 불쌍하게도 모진 고초를 겪어가며 돈트렐로 오게 된 것이다. 부끄러운 팻말 때문에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있는 둘을 다시 한 번 쳐다본 데이몬은 조용히 라인델프를 불렀다. "이번에는 네가 수고를 좀 해줘야겠다." 라인델프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지금껏 데이몬은 헬버트론과 함께 둘을 무던히도 골탕먹였다. 잔뜩 굶겨놓고 지저분한 음식을 먹이거나 목이 마른 상태에서 입을 대고 마시던 수통을 건네는 일 따위 말이다. 하지만 라인델프는 철저히 열외였다. 그들에게 접근도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는 수레의 둘과 제대로 대화도 나눠본 적이 없었다. "내가 뭘 하면 되지?" "악역은 우리 둘이 맡았으니 선행은 네가 하도록 해. 그러니까……." 데이몬의 설명을 들은 라인델프는 무척 재미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그 정도야 식은 죽 먹기니까." "믿겠어. 눈치가 상당히 빠른 계집아이니까 조심하도록 하고." 미첼과 율리아나는 풀이 완전히 죽은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돈트렐에 거의 도착했으니 이제 재판을 받고 목이 잘릴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르카디아에서 강도 짓은 상당한 중죄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왕국에서는 강도짓을 하다 잡힌 범인에게 무척 혹독한 형벌을 가했다. 손목을 잘라버리는 것은 기본이었고 심할 경우 사형에 처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물론 모든 왕국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부 노예제도가 허용되는 국가에서는 범인을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테르비아 정도의 강대국이라면 노예 제도를 승인할 리가 없을 터. 둘은 자신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단단히 묶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겠다는 생각에 율리아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마차가 멎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수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금세 처연한 기색이 서렸다. "그래도 다행이야. 노예로 팔리는 것보다는 목이 잘리는 게 훨씬 낫지." 지금까지 압송되며 그녀는 자신의 결정을 수없이 후회하고 또 뉘우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정이 바뀌지는 않았다. 재수 없이 피도 눈물도 없는 상인에게 걸린 것을 한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의 성질은 이제 많이 죽어 있었다. 자신이 처한 절박한 상황 때문에 많은 것을 깨우친 것이다. 저벅저벅 누군가의 걸음소리가 들려오자 율리아나는 얼른 고개를 수그렸다. 어차피 돈트렐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처형당할 테지만 그 전까지는 얼굴을 팔고 싶지 않았다. 걸음소리는 바로 자신들의 앞에서 멈췄다. 동시에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쯔쯔쯔. 불쌍한 것들……." 어느 정도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상인과 결코 그에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얄미운 용병의 것은 아니었다. 한 가닥 기대감으로 인해 미첼과 율리아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게 앞날이 창창한 사람들이 왜 강도짓을 모의했어? 한심한 것들." 그들을 쳐다보며 혀를 차고 있는 자는 미첼을 제압했던 용병 중 하나였다. 상인과 함께 자신들을 무던히도 괴롭혔던 용병의 동생으로 짐작되는, 그리고 좀처럼 그들에게 다가오지 않았던 말수가 적은 용병. 그는 수염투성이 얼굴에 측은한 표정을 떠올린 채 연신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그의 모습에서는 자신들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생에 대한 한 가닥 기대를 떠올린 율리아나는 모기 소리 만한 목소리로 애원을 했다. "사, 살려주세요. 저희들이 잘못했어요." "아마 죽지는 않을 거야. 상인 녀석은 너희들을 재판에 회부하지 않을 테니 말이야. 녀석은 너희들을 북부로 데리고 가서 팔아버릴 생각이니까……." 용병의 말이 끝나자마자 미첼과 율리아나는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아르카디아에서 노예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고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귀결되는지는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다. 때문에 둘은 극도로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마치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 둘을 쳐다보며 용병은 거듭 혀를 찼다. "쯔쯔쯔 비록 고용주 입장이긴 하지만 저 녀석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작자야. 너희 같이 앞길 창창한 젊은이들을 노예로 팔아버릴 생각을 하다니……." 안됐다는 듯 고개를 흔드는 용병. 미첼과 율리아나는 본능적으로 자신들의 운명이 눈앞의 용병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상인과는 달리 눈앞의 용병은 적어도 사정이 통하는 인물인 것이다. 때문에 둘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기 시작했다. "제발 저희들을 풀어주세요. 앞으로 두 번 다시 나쁜 짓을 하지 않을게요." "저희들을 살려주신다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용병은 여간해서는 마음을 돌릴 기색이 아니었다. "너희들의 사정도 안되었다만 나 역시 밥줄이 걸려있는 문제야. 미우나 고우나 내 고용주니까……. 미안하지만 안되겠는걸?" 고개를 가로젓는 용병을 보고 둘은 애가 탔다. 마음 같아서는 카르셀로 데리고 가서 돈을 듬뿍 안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신분을 밝히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피해야 한다. 결국 그들은 인정에 호소하기로 마음먹었다. "제발……. 아저씨에게도 저 같은 딸이 있잖아요? 그러니 한 번만……." "젊은 사람 살려주신다 생각하고 한 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그러시면 정말 착하게 살겠습니다." 착잡한 듯 둘을 쳐다보던 용병은 마침내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보였다. "좋다. 너희들이 노예로 팔리는 것을 그저 두고볼 수는 없구나." 용병의 말에 둘의 안색이 확 펴졌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거듭 감사를 표하는 둘을 쳐다보며 용병은 짐짓 안색을 굳혔다. "하지만 많은 것을 해 줄 수는 없다. 단지 너희들을 묶은 오랏줄과 쇠고랑만 표시 나지 않게 풀어주겠다. 그러니 도망치는 것은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말을 끊은 용병은 슬쩍 뒤를 쳐다보더니 음성을 더욱 낮췄다. "조금만 더 가면 돈트렐 시 외곽에 도착한다. 그 때쯤이면 상인과 헬버 녀석이 깊은 잠에 빠져들 것이다. 그 때를 틈타 도망쳐라. 그리고 돈트렐 시내로 숨어들어라. 난 너희들이 지금까지 온 길로 달아났다고 말하겠다. 어차피 말도 없는 너희들이 마차를 피할 순 없는 노릇.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 좋을 듯 싶다." 미첼과 율리아나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어렸다. 체념한 상태에서 다시금 생의 희망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름을 알려주세요. 나중에 꼭 보답할게요." 하지만 용병은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나쁜 상황에서 만난 인연이니 나중에 만나더라도 서로 난처할 수밖에 없을 터. 그냥 잊어라. 그리고 앞으론 나쁜 짓일랑 하지말고 살도록 해라." 감격에 겨운 나머지 율리아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용병의 마음씀씀이가 너무도 고마웠다. 때문에 그녀는 용병이 철저히 상인의 지시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주위를 살피며 수레 위로 올라온 용병은 단도를 꺼내 둘의 오랏줄을 끊어주었다. "끊은 부분을 잘 잡고 있도록 해라. 상인이나 헬버의 눈에 띄면 곤란하니까 말이다." "알겠습니다." 용병은 내친 김에 둘의 손목과 발목을 속박하고 있던 쇠고랑까지 벗겨냈다. 꼬박 일주일을 묶여 있었기 때문에 온 몸이 저려왔지만 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는 증거였다. 작업을 마친 용병은 수레를 내려가며 둘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조금 뒤 저들이 잠들면 내가 신호를 해 주겠다. 신호는 음……. 조용히 휘파람을 불겠다. 그 때 도망치도록 해라." "그럴 게요." "저, 정말 고맙습니다." 둘은 멀어져 가는 용병에게 고개를 숙여 진심으로 사의를 표했다. 그들의 상황에서 용병은 더 이상 고마울 수 없는 은인이었다. 물론 그가 인간이 아니란 사실을 둘은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끝났어?" "그럼. 내가 누군가? 이래뵈도 난 소싯적에 수많은 연극을 섭렵한 몸이라고……. 그 정도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라인델프에게서 조금 전의 상황을 전해들은 데이몬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데스 나이트치고는 제법인걸? 수고했어." "뭐 수고랄 것까지야." 이제 데이몬에게 유희의 시간은 끝났다. 조금 후면 미첼과 율리아나는 탈출할 것이다. 어차피 그들이 갈 곳은 돈트렐 밖에 없었다. 뻥 뚫린 관도에서 사람이 마차보다 빨리 달릴 수는 없으므로……. 별도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십중팔구 돈트렐에 숨어들 것이 분명했다. "용병 녀석들이 어느 정도 내가기공에 맛을 들였을 터. 일이 예정대로 진행되면 먼저 그들을 데리고 와야겠군." 의자 좌석에 느긋하게 몸을 묻은 채 데이몬은 잠을 자는 척 했다. 그래야만 미첼과 율리아나가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직 라인델프만이 깨어있는 상태로 수레의 둘에게 신호를 보낼 때를 기다렸다. 어느 정도 때가 무르익자 그는 행동에 나섰다. "휘-휙." 휘파람을 불자 잔뜩 준비하고 있던 미첼과 율리아나는 잽싸게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그들은 고삐를 잡은 라인델프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낸 뒤 몸을 날렸다. 정확히 돈트렐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 라인델프는 데이몬을 깨웠다. "이봐. 성공했어." 라인델프는 맡은 바 임무를 깨끗이 완수한 것이다. 데이몬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수고했어. 너희들은 다시 인크레시아에 들어가 있도록 해. 준비 단단히 해야 할거야. 너희들이 다시 나올 때는 반드시 드래곤과의 접전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지." 헬버트론과 라인델프는 두 말도 하지 않고 인크레시아에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데이몬은 다시 본래의 용모를 회복했다. 뒤쫓는 드래곤이 자신의 용모를 파악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갔지만 데이몬은 굳이 다른 모습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만나는 순간 사생결단을 내야 할 테니까 말이다. "이곳에서 마차를 버려야겠군." 마차에서 내린 데이몬은 묶여 있는 말 중에서 제일 힘이 좋아 보이는 말 한 필을 끌러냈다. 제법 많은 돈을 주고 산 마차였지만 굳이 가지고 갈 필요는 없었다. 이곳에 두고 간다면 반드시 새로운 주인이 생길 테니 말이다. "이랴." 말에 올라탄 데이몬은 고삐를 잡아당겼다. 데이몬을 태운 말은 멀리 보이는 돈트렐을 향해 기세 좋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헉, 헉." 둘은 말 그대로 사력을 다해 달렸다. 조금이라도 지체된다면 추격을 받게 될 것 같았으므로 그들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달리고 또 달렸다. 물론 추격해오는 자가 있을 리가 없었지만 둘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결국 둘이 달리는 것을 그만둔 것은 멀리 돈트렐의 성문이 보일 즈음에서였다. "휴." 그때서야 둘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숨이 턱 밑까지 차 올랐지만 둘은 목숨을 건졌다는 기대로 인해 힘든 것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율리아나가 정말 끔찍했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내 평생 그렇게 잔악무도한 상인 녀석은 처음 보았어." 미첼 역시 이를 부드득 갈며 말을 받았다. "글쎄 말이야. 언제고 한 번 마주친다면 반드시 갈가리 찢어 죽여버리고 싶은 놈이야."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미첼에겐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었다. 상인은 자신들 최대의 약점을 쥐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83회 그 약점이란 게 결코 퍼져나가서는 안될 비밀인 만큼 그와 다시 대면하는 일은 결단코 피해야 했다. 그래야만 율리아나와 자신이 행한 짓이 카르셀에 알려지지 않을 것이었다. 때문에 둘은 오로지 상상으로써만 상인에 대한 울화를 풀어야만 했다. "수비대원들을 풀어 놈을 몰래 카르셀로 잡아올까? 놈의 눈을 멀게 한 뒤에 잡아온다면 우리가 누군지 눈치채지 못할 테니 말이야. 그렇게 해 놓고 분풀이를 하면……." "그것보다는 어새신 용병단에게 부탁하는 것이 낫지 않겠어? 그들은 돈만 충분하면 그 누구든 죽여준다니까 말이야. 놈을 그냥 깨끗이 죽여 없애는 것이 나아." 하지만 생각은 생각으로만 끝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상인이 누군지, 또 어디에 사는지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상인에 대해 욕설을 늘어놓던 율리아나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일단 돈트렐에 들어가도록 하자. 배도 고프고, 여기 있다간 놈들의 눈에 뜨일 수도 있으니 말이야." "그런데 음식을 사먹을 돈이 있어?" 미첼의 반문에 율리아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물론 그들에게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가증스런 상인이 검을 비롯해 남은 짐들을 모조리 빼앗아버렸기 때문에 둘은 말 그대로 빈털터리 신세였다. 게다가 지금 상황으로썬 돈트렐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통행증이 없었다. 상인의 마차를 덮치기 전, 둘은 통행증이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모든 서류들을 헝겊에 싸서 근처 풀숲에 묻어두었다. 만약을 위해 그런 것이었다. 그 덕택에 신분이 탄로나는 것은 면했지만 돈트렐로 들어가려니 이번에는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물론 일반적인 도시나 교역도시라면 통행증이 없어도 입성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검사를 하지 않는 도시가 태반이었고 있다 해도 형식적으로 끝날 뿐이었다. 하지만 돈트렐은 자타가 공인하는 테르비아의 거점도시였고 통행증이 없으면 십중팔구 입성이 허용되지 않을 터였다. 그 사실을 떠올린 미첼이 안색을 구겼다. "미치겠군. 어떻게 하지?" 다시 그곳으로 가서 통행증을 파내어 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꼬박 일주일 동안을 수레에 실려 압송되어 왔으니 다시 돌아가는 것은 생각조차 해 볼 수 없었다. 그들에겐 그럴 만한 여비나 식량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율리아나가 짜증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어쩔 수 없잖아? 일단 부딪혀 봐야지. 신분을 밝힌다면 아마도 들여 보내줄 거야." 상인의 눈에 뜨일까 두려웠는지 율리아나는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미첼은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눈을 부라렸다. '쳇. 무작정 부딪히는 방법이 카르셀에서나 통하지 여기서도 통하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첼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그녀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금 뒤 둘은 마침내 돈트렐의 성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문 앞에는 입성하기 위한 목적의 대열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서 있었다. 러셀런트가 보았던 사람과 마차의 대열 말이다. 그 모습에 둘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햐! 이게 모두 다 돈트렐에 들어가려고 줄 서있는 사람들이야?" "정말 엄청나군." 사람들의 대열을 힐끔 쳐다본 율리아나는 줄을 무시한 채 성문으로 직행했다. 카르셀의 왕녀라는 자신의 신분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쉽사리 통과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미첼도 부랴부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줄 서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어김없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러셀런트와는 사못 달랐다. "저건 뭐야? 웬 상거지들이?" "경비병에게 동냥을 얻으려고 하나?" 둘의 외모가 워낙 남루했기 때문에 사람들로써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옷을 뒤집어 입은 데다 꼬박 일주일 동안 수레를 타고 왔기 때문에 둘은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결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차림새. 그런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미첼과 율리아나는 마침내 성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지." 수비병들이 창을 십자로 교차시켜 앞을 막았다. 그들 중 상당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둘이 마치 거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지저분한 몰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임자를 부를 필요도 없다는 듯 한 수비병이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냐? 입성할 생각이면 통행증을 들고 줄을 서라." 카르셀 왕국에서의 경험으로 율리아나는 강하게 나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녀는 호통을 치는 것에 익숙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행동할 경우 수비병들은 의례 주눅이 들기 마련이다. 먼지투성이의 얼굴에 노기를 가득 머금은 율리아나는 거침없이 호통을 쳤다. "나는 카르셀 왕국의 왕녀다. 이리로 오는 도중 도적단을 만나 호위기사들을 모두 잃었느니라. 그러니 어서 성문을 열도록 하라." 수비병들의 얼굴에 당혹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외견상 빌어먹는 거지로밖에 보이지 않은 계집아이가 기세 좋게 호통을 쳐대고 있는 것이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도저히 이해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수비병은 결국 수문부장(守門部將)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검문에 열중하던 부장이 한달음에 다가왔다. 수비병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부장은 의심스런 눈빛으로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귀족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다소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했다. "카르셀의 왕녀이시라고요?" 부장의 반응에 기가 산 율리아나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잔인한 도적단에게 기사들을 모두 잃고 나와 기사대장만 겨우 도망쳐왔느니라." "그렇다면 카르셀이라는 왕국에서 발급 받은 통행증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부장의 반문에 율리아나는 말문이 턱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 그것은 도적단에게 빼앗겨서……." 그것을 들은 부장의 얼굴에 조소가 서렸다. 이미 그는 이런 경우를 많이 겪어본 상태였다. 성문을 빨리 통과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작자들 말이다. 이럴 경우 대응할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그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태도를 싹 바꾸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세상에 통행증을 빼앗는 도적단이 있나? 내가 알기론 이 부근에는 도적단은 전혀 없어. 그러니 거짓말도 좀 그럴 듯하게 하시지. 북부나 서부면 몰라도 이곳에서 도적단이라……. 햐!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오는군." "사, 사실이다. 우린 분명히……." 인상을 찡그린 부장은 율리아나와 미첼의 차림새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게다가 난 지금까지 카르셀이란 왕국의 이름을 단 한번도 들은 적이 없어. 난 이미 10년 가까이 성문 수비병을 맡고 있는데도 말이야. 게다가 한 가지 더, 당신들은 도저히 도적단의 습격을 받은 몰골이 아냐. 세상에 아무리 다급하다고 옷을 뒤집어 입는 경우가 있던가?"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려가지 않자 율리아나는 애가 탔다. "정말이다. 난 분명히 카르셀의 왕녀로써, 이 기사는 나의 경호를 책임진……." "세상에 검도 없는 기사라……. 웃기는 군." 부장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부하들을 불렀다. "이들을 포박하라. 신분을 사칭한 죄로 재판에 처할 것이다." "자, 잠깐만……." 사색이 된 둘에게 수비병들이 달려들어 사납게 창을 들이댔다. 이미 이런 경우를 많이 겪어본 듯 수비병들은 추호도 틈을 주지 않았다. "손을 들고 돌아서라." 어지간한 미첼도 검이 없는 탓에 결국 제압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먹지 못한 데다 극도로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팔라딘다운 면모를 전혀 보이지 못한 것이다. 수비병에게 단단히 제압된 둘을 보며 부장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끌고 가서 우선 잡범들을 수용하는 감옥에 집어넣어라." "가자." 수비병들이 거칠게 잡아당기자 둘은 맥없이 딸려갈 수밖에 없었다. 하도 곡절을 많이 겪은 탓에 둘에겐 더 이상 항변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둘은 조용히 수비병들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뜻밖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아니 율리아나 공주님?" 난데없이 옆에서 터져 나오는 음성에 율리아나의 고개가 뺨이라도 맞은 듯 세차게 돌아갔다. 그녀의 눈에 금세 눈물이 가득 괴었다. 이름을 부른 자는 그녀에겐 더 이상 반가울 수 없는 인물이었다. 비록 외딴 산중에다 버려 두고 오긴 했지만 더 이상 믿음직할 수 없는 존재. 그를 보자 감정이 북받쳐 올라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엉엉엉. 카심." 마음 같아서는 달려가서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포승에 묶여 있는 터라 그럴 수도 없었다. 율리아나의 이름을 부른 자는 놀랍게도 카심이었다. 돈트렐 시내의 여관에 박혀 마나연공법을 수련하고 있어야 할 그가 이곳에 홀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응?" 그 모습에 놀란 것은 부장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카심과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급하게 카심에게 다가온 부장은 눈을 치켜 떴다. "카심. 혹시 아는 사람인가?" 카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녀는 카르셀 왕국의 왕녀야. 일전에 그녀의 호위를 맡았다가 모종의 일로 헤어졌는데 여기서 다시 만날 줄은 정말 몰랐군." 이번에는 부장이 놀랄 차례였다. "그, 그 말이 정말인가?" "그렇다네. 모습을 보니 무척 험한 일을 겪은 것 같군.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청년은 카르셀 왕국에서 따라온 호위기사라네. 그런데 어쩌다 검까지 잃어버렸지?" 부장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반문했다. "확실한 사실인가?" "그럼! 그는 오러 블레이드까지 시전할 수 있는 팔라딘인걸? 내가 확실하게 확인했어." 부장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일개 왕국의 왕녀와 그녀의 호위기사, 그것도 팔라딘 급의 기사를 묶어 감옥에 집어넣으려 했다니……. 도저히 믿기 어려웠지만 그는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카심이 인정했다면 모든 것이 사실이라 봐야 했다. 몇 해 전. 카심이 썬더버드 용병단의 일원이었을 시절 둘은 함께 싸웠던 전력이 있었다. 당시 테르비아 왕국은 부근의 탄블렛 왕국과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크로센 제국이 개입하기 전에 최대한 영토를 확장할 생각으로 테르비아 왕국은 당시 대대적으로 용병들을 고용했다. 그 때 썬더버드 용병단은 부장이 소속된 부대와 합동작전을 벌였고 그 때문에 부장은 카심과 일년 남짓을 함께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부장은 카심이 무척 용맹할 뿐더러 강직하고 또 정직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카심이 보증한다면 틀림없겠군.' 부장은 서둘러 수비병에게 포승을 풀라고 명령했다. 그런 다음 율리아나를 향해 허리를 직각으로 꺾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부디 저희들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눈물로 젖은 율리아나의 고개가 슬며시 부장에게 돌아갔다. 그녀의 눈에서 뭔가 빛이 일어나는 것을 감지하자 카심은 바짝 긴장했다. '안 돼!' 그가 파악한 율리아나의 성미로는 다짜고짜 부장의 따귀를 날리고도 남았다. 그토록 자존심 강하고 괄괄한 공주를 포박해서 감옥에 집어넣으려 하다니……. 그렇게 되면 문제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약소국인 카르셀의 왕녀를 테르비아에서 인정해 줄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판이하게 빗나가버렸다. 워낙 혹독하게 고생을 한 탓에 기가 완전히 꺾여 버렸는지 그녀는 의외로 관대한 반응을 보였다. "모르고 한 일이니 문제삼지 않겠어요. 그럼 우린 이만……." 카심은 천만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얼른 그녀를 안내했다. "일단 저희들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가시지요. 공주님." 그러면서도 부장에게 수고하란 한 마디는 잊지 않는 카심이었다. "나는 이만 가보겠네. 그럼 수고하게." "잘 가게나." 부장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카심은 미첼과 율리아나를 데리고 돈트렐 시내로 향했다. 부장은 아직까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84회 셋은 한동안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비록 성문에서는 편을 들어주었지만 묵은 앙금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탓인지 카심의 표정은 이제 냉랭하게 돌변해 있었다. 미첼과 율리아나 역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지라 묵묵히 카심의 뒤를 따랐다. 묵고 있는 여관을 향해 걸어가던 카심의 눈에 갑자기 곤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반가운 손님이란 게 이들을 칭하는 건가?' 사실 그는 데이몬의 지시로 성문에 간 것이었다. 흑마법사 데이몬은 자신들을 꼬박 열흘동안 돈트렐의 여관에 박아두었다. 그 탓에 카심과 휘하 용병들은 오랜만에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결코 쉴 겨를이 없었다. 흑마법사에게서 전수받은 마나연공법을 익히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얼마나 위력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반응 하나는 정말 빠른 마나연공법이었다. 난생 처음 몸 속의 마나를 느낄 수 있었기에 그것을 움직여 보는데 정신이 팔려 용병들에게 열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수련할수록 움직여지는 마나의 양이 조금씩 늘었기에 연공하는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걸어가던 와중 카심은 조용히 머리를 흔들었다. '과연 이 연공법이 효과가 있을까?' 비록 확신이 서진 않았지만 그들에겐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었다. 비록 그것이 마법사가 만든 마나연공법일지라도 용병들은 어쩔 수 없이 그것만 수련해야 했다. 하지만 재미는 무척 쏠쏠한 편이었다. 흑마법사가 시키는 대로 하니 몸 속의 마나를 점차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카심은 이제 그것을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된 상태였다. 물론 기억했던 경로대로 돌리는 것은 아직까지 무리였지만 마나는 조금씩 그의 통제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흑마법사의 말이 정말 신통하게도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부디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기대에 부풀어 걸어가는데 돌연 옆에서 모기소리 만한 음성이 들려왔다. "돈트렐엔 언제 들어왔어요?" 그것이 율리아나의 것이란 것을 알아차린 카심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알 것 없소이다." "미안해요." 평소답지 않고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율리아나였다. 먹을 것을 가지고 간 자신들도 이렇게 고생을 했는데 용병들이 식량도 없이 이곳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미안해서 말을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뭔가가 생각이 난 듯 율리아나가 갑자기 눈빛을 반짝였다. "곤경에서 구해주어서 고마워요. 그런데 성문에는 무슨 일로 왔어요?" 일순 카심의 말문이 콱 막혀버렸다. 성문에 가면 반가운 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란 흑마법사의 장담 때문에 반신반의하며 달려왔는데 미첼과 율리아나를 만나다니……. 이들과 대면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카심이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순 없었으므로 카심은 얼렁뚱땅 둘러댔다. "실은 그 부장 녀석과 조금 안면이 있습니다. 때문에 둘러앉아 옛날 얘기라도 나눌까 하고 갔었지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부장과 아는 사이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근무시간에, 그것도 검문에 몰두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부장과 한가롭게 잡담을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그것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정말 공교롭군요. 우리에겐 더 없는 행운이지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카심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들과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투였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에 잠겨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라진 흑마법사가 이들을 따라다녔단 말인가?' 정황을 보아 그것이 합당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흑마법사가 열흘 가량 사라진 것은 아마도……. 우뚝 걸음을 멈춘 카심이 고개를 돌려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찔끔한 율리아나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혹시라도 식량을 가지고 간 사실을 들먹일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율리아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 카심이 다시 몸을 돌렸다. '설마 흑마법사가 저 성질 더러운 공주에게 연정을?' 어이가 없는 추측 같았지만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고위급 마법사이니 추적 마법을 펼친다면 충분히 저들을 찾아낼 수 있을 터였고 뒤를 계속 미행하다 돈트렐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에게 통보한 것일 수도 있었다. 카심은 자신의 추측이 정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제법 골치 아픈 문제였기에 카심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젠장. 그렇다면 임무를 끝까지 완수해야 하잖아? 흑마법사가 공주에게 마음이 있으니 말이야.' 흑마법사가 공주를 사랑하건 말건 자신과는 하등 상관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데이몬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주를 붙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대관절 무슨 까닭으로 가입했는지는 모르지만 흑마법사는 자신의 용병단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주고 싶은 것이 카심의 심정이었다. 만약 공주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상황에서 계약해지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사실 그는 율리아나를 보는 순간 계약 해지서에 도장을 찍게 한 뒤, 인연을 끊어버리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심은 흑마법사의 입장을 감안해 마음을 바꿨다. 고개를 돌린 카심은 은근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지난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겠소.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공주.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소? 계약대로 크로센 제국까지 우리와 동행하시겠소? 아니면 계약 해지서에 서명을 하고 헤어지겠소?" 단도직입적으로 나오는 카심의 태도에 다소 얼떨떨해 했지만 율리아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선택할 방법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현재로써는 믿고 기댈 구석이 용병단 밖에는 없었다. 그렇지 않는다면 당장 먹고 자는 것부터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물론 계약대로 행동해야겠지요? 잠깐 산책을 나갔다가 헤어진 것 때문에 계약을 해지하는 것은 도무지 말이 안되잖아요?" 카심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식량을 훔쳤다는 사실은 입에 담지도 않는 율리아나. 저 철부지 공주는 끝까지 자신의 범행을 시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흑마법사를 잡기 위해서라도 계약내용을 유지하는 것이 합당해 보였기 때문에 카심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안전한 경호를 위해 오늘 이후부터는 제 말에 철저히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위약금을 물더라도 제 쪽에서 계약 해지를 생각할 테니까요." 제법 당차게 나오는 카심의 태도에 율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럴께요." 사실 일이 이렇게 무마된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천만 다행이었다. 계약해지를 하게 될 경우 그들은 이곳에서 오도가도 못할 처지에 놓이기 때문이었다. 안색이 핀 율리아나는 연신 재잘대기 시작했다. 여전히 침통한 낯빛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미첼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언제 들어왔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질문을 퍼붓는 율리아나를 보고 카심은 한숨을 내쉬었다. 철면피도 이런 철면피가 없었다. 그러나 결정을 내린 이상 그녀는 변함 없이 자신의 고용주였고 서로 불편하게 대해서 좋을 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순순히 털어놓았다. "우린 이곳에서 정확히 열흘을 머물렀습니다." 율리아나의 눈이 커졌다. 열흘이라면 자신들과 헤어진 바로 다음날이었기 때문에 그녀로써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그런 일이……." "처음엔 저도 답답했지요. 하지만 흑마법사 데이몬이 공간이동을 시켜주어서 쉽사리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 와서 열흘동안 정말 잘 푹 쉬었지요." 사실을 들은 율리아나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기껏 식량을 훔쳐 도망쳤건만 용병들은 정작 하나도 고생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 아까워서 견딜 수 없었다. 자신들이 온갖 고초를 겪는 동안 용병들이 이곳에서 푹 쉬었다는 생각을 하니 저절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율리아나는 한 마디 내쏘고 말았다. "그래요? 편하게 와서 좋았겠네요?" 말을 마친 율리아나는 냉랭하게 입을 닫아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심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돌렸다. 미첼만이 정신이 반쯤 나간 모습으로 뒤를 따를 뿐이었다. 기세 좋게 들어서는 미첼과 율리아나를 보자 용병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용주를 또다시 만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용병들이었다. 오직 데이몬만이 조금도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진행될 것이란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데이몬이었다. 카심을 성문으로 보낸 뒤 데이몬은 이곳에 머무르며 용병들의 성취를 살펴보던 참이었다. 모든 것이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모여든 용병들은 서둘러 카심에게 연유를 물었다. "대장.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들을 대관절 어디서?" "운이 나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으니 임무를 완수해야 하지 않겠어?" 태평스런 카심의 대답에 용병들은 인상을 구겼다. 모든 게 제멋대로인 데다 고집불통인 계집아이를 또다시 모셔야 한다는 생각에 맥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용병들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율리아나는 천연덕스럽게 내실로 향했다. "몹시 피곤해요. 들어가서 씻고 올 테니 식사를 부탁해요." 율리아나가 들어가자 미첼은 맥없이 바닥에 철버덕 주저앉았다. 오랫동안 먹질 못해 기력이 없는 탓이었다. 그를 본체만체 하며 용병들은 카심에게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하지만 미첼은 그것을 듣지 못했다. 주저앉은 순간 곯아 떨어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이건 정말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식량을 깡그리 털어 달아난 것만 해도 용서받지 못할 일인데……." 카심은 침통한 표정으로 용병들의 불평을 묵살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계약 내용을 지키는 것은 용병단의 철칙. 비록 사람이 밉다하나 일단 맡은 임무는 완수해야 한다." 말을 마친 카심은 데이몬을 쳐다보며 눈을 찡긋했다. 눈치 빠른 데이몬은 대번에 카심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녀석. 머리 굴리는 것이 제법 쓸만한 걸? 동료로 삼기에 추호도 모자람이 없겠어.' 데이몬의 반응에 카심은 자신의 예상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용병들에게 서둘러 식사준비를 할 것을 지시했다. "하인리히와 제럴드는 아래층에 가서 먹을 것을 가져오도록 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떠날 채비를 갖추도록……. 내일부터 다시 여정이 시작된다." "알겠습니다." 비록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대장의 지시라서 용병들은 분분히 복명하고 몸을 일으켰다. 할 일이 없는 자들은 다시 바닥에 주저앉아 열흘 전부터 익힌 마나연공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체내의 마나를 통제할 수 있다는 재미 때문에 그들은 이제 틈만 나면 마나연공에 몰두하는 상태였다. 데이몬이 미소를 흘리며 카심에게 다가갔다. "자네 눈치가 꽤 쓸만하구먼." "제가 눈치는 좀 빠른 편이거든요." 쑥스럽다는 듯 웃음을 흘리는 카심을 보며 데이몬은 안색을 굳혔다. "그런데 부하들이 정말 대단하더군. 용병들 대부분이 마나를 미약하게나마 통제할 수 있었어. 제럴드와 하인리히 녀석이 가장 진도가 빠른 편이고……. 자넨 어떤가?" "아직까지 경로를 타고 돌리는 것은 무리이지만 어느 정도 움직일 수는 있습니다." 놀라울 정도의 성취였기에 데이몬은 혀를 내둘렀다. 중원에서도 이렇게 빠른 성취를 보인 무사는 없었다. 수라사령심법은 아르카디아에선 대체할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위력적인 내공심법이었다. 중원보다 열 배 이상 충만한 대자연의 기를 모조리 소화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놀라워하는 데이몬을 보며 카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방법대로만 수련하면 팔라딘이 될 수 있긴 합니까?" 카심으로서는 당연히 떠오른 의문이었다. 마법사가 만든 마나연공법인 만큼 충분히 일리 있는 의문이었다.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날 믿나?" "그,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날 끝까지 믿고 수련에 몰두하게. 노력하는 자에겐 반드시 대가가 따르는 법이니 말일세." 아직까지 자신에게 베풀어진 기연을 눈치채지 못하는 카심에게 찡긋 눈짓을 한 뒤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조금 있으면 율리아나가 멀끔해진 모습으로 나올 것이다. 다프네와 꼭 닮은 얼굴을 보리란 기대로 그의 마음은 벌써부터 부풀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85회 차례대로 씻은 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미첼과 율리아나는 둘러싼 용병들이 놀라 자빠질 정도의 식욕을 보였다. 와구와구. 제럴드와 하인리히가 준비해 온 음식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동이 나 버렸다. 둘은 불쌍하게도 아래층을 여러 번 왕복하며 계속해서 음식을 날라야 했다. 마치 게눈 감추듯 음식을 뱃속으로 쓸어 담는 미첼과 율리아나. 그동안 먹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둘의 식욕은 엄청나기 그지없었다. 결국 10인분이라는 방대한 분량을 먹어치운 뒤에야 둘은 배를 두드리며 뒤로 나앉았다. "휴. 이제 살 것 같군." "잘 먹었어요."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율리아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태도에 용병들은 혀를 내둘렀다. '정말 철판이로군.' '어지간한 강심장이야. 웬만한 사람이라면 미안해서 아는 체도 하지 못했을 텐데…….' 하지만 용병들의 지레짐작과는 달리 율리아나의 심사는 그리 편치 못했다. 욕실을 나온 이후부터 집요하게 자신을 따라다니는 마법사의 느물거리는 시선 때문이었다. '정말 밥 맛 없는 작자야. 어떻게 저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볼 수 있지?' 벌써 여러 번이나 눈총을 주었지만 마법사는 막무가내였다. 아예 대놓고 쳐다보는 시선에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입장이 입장인지라 거칠게 항의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속으로 꾹 눌러 삼킬 수밖에……. '두고보자. 어떻게 해서든 네놈의 능글맞은 눈알을 빼버리고 말 테니까…….' 율리아나는 용병단과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것이 모두 데이몬 탓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이놈만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무척 평탄히 여행을 즐길 수 있었을 거야.' 애초에 불행의 씨앗이 자신의 고집에서부터 비롯된 줄도 모르고 율리아나는 모든 것을 데이몬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율리아나. 그녀는 혼이 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마치 철부지의 표본과도 같은 소녀였다. 율리아나가 이를 갈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데이몬은 정신 없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기에 바빴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다프네와의 정다웠던 추억 속에 잠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이몬의 행동은 용병들의 오해를 사기에 추호도 모자람이 없었다. '이런. 흑마법사가 저런 성질 더러운 공주에게?' '성질도 개차반인 데다가 어림 잡아도 나이가 손녀 뻘일 텐데…….' 하지만 용병들은 누구 하나 참견하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어떻게 해서든 흑마법사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어떻게 보면 카심과 동일한 심정을 가지고 있었고, 비록 효과가 입증되지는 않았을지언정 자신들에게 마나연공법을 전수해 준 은인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용병들은 데이몬의 어울리지 않는 연정(?)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먹었다. 흑마법사가 율리아나가 아니라 크로센의 왕녀에게까지 눈독을 들인다 하더라도 전혀 관여하지 않기로. 식사를 마친 뒤 율리아나와 미첼은 용병들과 둘러앉았다. 물론 데이몬은 뒷자리에서 율리아나의 얼굴을 훔쳐보고 있었다. 시선이 사뭇 따가웠지만 율리아나는 신경 쓰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럼 이후의 진로에 대해 결정하기로 해요. 과거를 덮어버리자는 대장의 당부가 있었으니 지난 일은 일절 거론하지 않겠어요." 당돌하다고 볼 수 있는 반응에 용병들은 터져 나오는 욕설을 억지로 집어삼켜야 했다. '이런 빌어먹을…….'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이렇게 뻔뻔스런 계집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용병들의 속도 모르는지 율리아나는 태연스레 말을 이어나갔다. "대장이 모든 것을 밝혔으니 더 이상 감추지 않겠어요.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비 간택식이 두 달도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야 해요." 카심이 걸쭉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기일은 충분합니다. 여기서부터 당분간은 치안이 잘 유지되는 관도를 통해 갈 생각이니까요……. 두 달이면 충분하고도 남지요." 카심을 힐끔 쳐다본 율리아나는 손가락을 뻗어 미첼을 가리켰다. "그리고 계약 내용을 조금 변경하겠어요. 이곳으로 오는 도중 불운한 일을 겪어 내 호위기사 미첼이 갑옷과 검을 모두 잃었어요. 게다가내가 크로센에서 입을 예복까지 모조리 도난당해서 이대로는 크로센 제국으로 갈 수 없어요." "………." "그러니 그것을 장만할 비용을 용병단의 재정으로 좀 충당해 줬으면 해요. 아! 추가되는 비용은 추후에 이자를 넉넉히 얹어서 치르겠어요." "그건 뭐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 카심은 흔쾌히 승낙했다. 솔직히 용병단 재정이 그리 넉넉지 않았지만 그 정도야 충분히 들어줄 수 있었다. 게다가 그에겐 반드시 율리아나와 동행해야 한다는 사명 같은 것이 있었다. 바로 흑마법사 데이몬 때문에. 그런 카심의 꿍꿍이를 꿈에도 눈치채지 못한 채 율리아나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출발은 언제쯤 할 작정이에요?" "뭐 급할 것은 없지 않습니까? 한 모래 정도?" 새로 얻은 마나연공법에 한창 재미를 붙인 판이라 카심은 당연히 돈트렐에 더 머물고 싶어했다. 그것은 용병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였다. 시간만 나면 마나연공에 빠지는 것이 이젠 용병들의 일상사가 되어버렸으므로. 하지만 미첼과 율리아나에겐 이곳에 머무는 것이 그리 달가울 리가 없었다. 만에 하나 간악한 상인의 눈에 띈다면 그 무슨 창피를 당할지 몰랐다. "그냥 내일 떠나도록 해요. 굳이 이곳에 더 머무를 필요가 없잖아요?" 카심이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반문했다. "그래도 상관없지만 시간이 충분한데 굳이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요?" "부탁해요. 이곳을 가급적 빨리 떠나고 싶어요." 다급한 김에 속내를 내비친 율리아나. 카심은 별안간 둘이 지금까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 궁금해졌다. 처음 봤을 때 느낀 뒤 잊고 있었던 의문점이 떠오른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말과 모든 짐을 잃었으며 먼지투성이에 옷까지 뒤집어 입은 채 돈트렐에서 맞닥뜨리다니……. 결국 참지 못한 카심은 입을 열고야 말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혹시 도적떼라도? 아니야. 테르비아의 군사력이 워낙 막강해서 부근에는 변변찮은 도적단도 없는데……." 미첼과 율리아나의 안색이 삽시간에 경직되었다. 그 때의 일은 떠올리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 둘은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런데 말과 짐은 어디 갔습니까? 게다가 옷은 또 왜?" 집요하게 파고드는 카심. 결국 율리아나는 궁여지책으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데 왜 그래요?" 찔끔할 것으로 예상했었지만 카심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율리아나에 대해 겪을 대로 겪었던 카심이었다. "아무래도 늑대 떼를 만났나 보군요?" 카심의 추측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서 그것은 더 이상 적합할 수 없는 상황설명이었다. "마, 맞아요. 늑대! 늑대 때문에 말과 짐을 모두 잃었어요." "늑대 떼를 피해 도망치느라 검과 갑옷을 모두 버릴 수밖에 없었소." 하지만 카심의 의구심은 아직까지 가시지 않았다. 늑대를 만났다손 치더라도 말이나 식량을 잃어버렸을지언정 나머지 짐까지 잃었다는 것은 왠지 모르게 어폐가 있었다. 하지만 굳이 추궁할 사항이 아니라서 그는 납득한 척하며 일어서려 했다. 그 때 옆에서 걸쭉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봐. 대장. 그것은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질 않은가? 자기들이 늑대를 만났건, 아니면 강도짓을 하다가 붙잡혀 두들겨 맞았든 아무 상관없는 일일세. 우린 그저 임무에만 충실하면 될 터. 더 이상 캐묻지 말게." 데이몬의 넉살에 용병들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강도짓을 하다 붙잡혀 두들겨 맞았다는 대목이 무척 우스웠던 것이다. 하지만 미첼과 율리아나에게 그것은 도저히 웃어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그들은 가장 아픈 부분을 정통으로 찔려버린 것이다. 율리아나는 소리를 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예욧!"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율리아나는 몸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미첼 역시 두 눈에 살기를 진득하게 머금은 채 데이몬을 쏘아보았다. 뜻밖의 반응에 놀란 것은 오히려 카심이었다. "진정하시오. 농담으로 한 소리가지고 왜 그렇게 화를 내시오?" "아무리 농담이래도 어떻게 그런 소리를 입에다 담을 수 있죠?"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시선이 데이몬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태연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면 말고……. 아니라면 그렇게 과민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잖아?" "말이면 다인 줄 알아요?" 양손을 허리춤에 올린 채 매섭게 데이몬을 쏘아보는 율리아나. 주위의 용병들이 이상하게 여길 즈음, 눈치를 챈 미첼이 율리아나의 팔을 슬쩍 잡아당겼다. "자, 자, 그만해. 농담으로 그런 거라고 하잖아?" "네겐 그 말이 농담으로 들려?" 고개를 돌린 율리아나에게 미첼이 짐짓 눈을 찡긋했다. 더 이상 반응한다면 도리어 의심을 살 수 있었다. 미첼은 연신 눈짓을 해 대자 율리아나는 겨우 상황을 알아차렸다. "흥. 사악하고 비열한 악당 주제에……." 냉랭하게 내뱉고 내실로 들어가 버리는 율리아나였다. 미첼도 데이몬에게 눈총을 한 번 준 뒤 그녀를 따라 내실로 들어갔다. 용병들은 그때서야 편하게 발을 뻗을 수 있었다. 입담 좋은 패터슨이 내실을 쳐다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지랄같은 성질하고는……. 운이 좋아 황태자비로 뽑혔다 치더라도 저런 성질머리로는 단 하루만에 소박맞을걸?" "아냐. 뽑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거야. 크로센 제국이 뭐가 아쉬워서 저런 공주를 황태자비로 삼겠어?" 용병들은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데이몬도 거기에 끼여 웃음을 흘렸다. 익히 예상하긴 했지만 율리아나의 성격은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살짝 떠본 것으로 욕을 진득하게 얻어먹었으니 말이다. "누가 데리고 살지 정말 의심스럽군." "혹시 알아요? 자기랑 똑같은 남자 만나서 오순도순 살지도?" 오랜만에 터져 나오는 하인리히의 익살에 장내는 일시에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 "하하하하."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율리아나는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얼굴에 노기를 가득 떠올린 채 따라 들어온 미첼을 불러 앉혔다. "아무래도 안되겠어. 저 흑마법사 녀석을 단단히 손봐줘야겠어." 미첼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에겐 힘이 전혀 없었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도대체 무엇으로 손을 봐 준단 말이야? 놈의 실력을 몰라서 그래?" "방법은 분명히 있어." 미첼에게 바짝 붙어 앉은 율리아나는 눈을 빛냈다. 곧이어 그녀는 미첼의 귀에다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귀엣말을 들은 미첼의 얼굴에 그럴 듯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도 괜찮겠군." "이 방법으로 흑마법사 놈을 떼어놓고 용병단만 데리고 가자. 어때?" "좋아." 그토록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두 남녀의 모의는 또다시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계획의 실행을 위해 둘은 서둘러 외출할 채비를 갖추었다. 무척 한가로운 오후였다.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돈트렐에 파견 나온 마법사 베르텍은 느긋하게 한낮의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태평세월이라서 여간해서는 그가 나설 일이 없었다. 돈트렐이 속한 테르비아 왕국은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한 강대국이었다. 비록 크로센 제국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테르비아 왕국은 북방의 강국 펜슬럿과 더불어 당당한 2인자의 자리를 굳히고 있는 국가였다. 그 이유는 테르비아 왕국이 뛰어난 마나연공법을 보유한 데 기인했다. 크로센 대제로부터 전래된 마나연공법.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왕국들이 이 마나연공법을 전수받은 뒤 독자적으로 계승 발전시켜왔다. 하지만 마나연공법의 보완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떤 왕국도 펠젠틴과 테르비아 만큼의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두 왕국이 보유한 마나연공법은 여타 왕국의 것보다 위력이 뛰어날뿐더러 훨씬 안정적이었다. 제대로 익히기만 한다면 일정 수준에 오르는 것이 시간문제일 정도로 말이다. 물론 거기에서 크로센 제국은 엄연히 제외해야 하지만. 그런 이유로 테르비아 왕국은 강력한 기사단을 보유할 수 있었다. [다크메이지] 6장 골치아픈 동료들 186회 군대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누가 뭐래도 기사단과 마법 부대였다. 하지만 마법사의 수준은 각 왕국별로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익히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왕국에 소속된 마법사의 수준은 거의 국력에 영향을 받는 편이었다. 하지만 기사단은 달랐다. 뛰어난 마나연공법을 보유한 때문에 테르비아는 주변국들을 여러 차례 물리치고 당당하게 강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강력한 기사단과 우수한 기사들을 보유한 덕분에. 여러 왕국과의 분쟁을 성공리에 끝낸 테르비아는 그 댓가로 방대한 영토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한 산물(産物)로 나날이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베르텍은 자신이 테르비아에 소속된 마법사란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테르비아 왕국은 기사나 마법사에 대한 대우가 정말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원래부터 테르비아 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르텍은 테르비아에 충성을 다 바치고 있었다. 그의 직책은 다름 아닌 워 메이지였다. 전쟁이 일어날 때 마법 부대의 중심 역할을 맡지만 평시에는 6개월 간격으로 주요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마법 경보망을 점검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돈트렐이 상당히 매력적인 도시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거점도시인 만큼 경계망이 잘 갖춰져 있었고 도시 자체가 상당히 부유했기 때문에 근무하기가 무척 편했다. 파견되는 곳이 소규모 도시라면 마법사는 그리 편하게 근무할 수 없었다. 머리가 좋다는 이유 때문에 행정의 일부를 맡아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이다. 하지만 돈트렐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파견된 관리들이 모든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마법사는 느긋하게 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애석하군. 보름 뒤면 돈트렐을 떠나야한다는 사실이……." 돈트렐은 테르비아에 소속된 모든 마법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도시였다. 그런 만큼 어지간한 실력의 마법사는 이곳에 파견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난 상관없지. 곧 있으면 대마법사란 칭호를 들을 수 있는 6서클의 마스터이니 말이야." 베르텍은 상당한 야심가였다. 고국인 쉘브런 왕국을 미련 없이 버리고 테르비아에 몸담은 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어떻게 하면 공을 세워 직위를 높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직위 향상에는 전쟁에 참가해서 공을 세우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평화로운 시기였기에 기회를 잡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베르텍은 나직이 각오를 되새겼다. "하지만 난 어떻게 해서든 궁정 마법사가 될 것이다." 과거였다면 6서클의 마스터인 그의 실력으로도 충분히 궁정마법사가 될 수 있다. 500년 전 멸망한 트루베니아의 경우라면 마법사가 6서클에만 올라서면 어지간한 강대국의 궁정 마법사가 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르카디아는 사정이 달랐다. 기회의 대륙답게 이곳에서는 귀족이 아니더라도 교육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자질만 있다면 능히 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마법사들의 전반적인 실력은 향상될 수밖에 없었다. 작금에 와서는 궁정마법사=7서클이란 공식이 거의 절대적으로 적용되고 있었다. 물론 자그마한 왕국이라면 베르텍의 실력으로도 충분히 궁정 마법사 자리를 꿰어찰 수 있겠지만 테르비아 정도의 강대국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우선 그에겐 경쟁자가 다섯이나 있었다. 같은 서클의 워 메이지가 말이다. 하지만 불타는 야심가인 베르텍은 반드시 꿈을 이루겠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똑똑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베르텍은 얼른 생각을 접었다. "무슨 일인가?" 문 밖에서 걸걸한 음성이 들려왔다. 익히 알고 있는 경비병의 목소리였다. "저 헤일러입니다. 현관에 마법사님을 뵙고자 하는 이들이 도착해 있습니다." "누구라던가?" "자칭 카르셀의 왕녀와 호위기사라는 신분을 밝혔사온데……." 베르텍의 얼굴에 짙은 의혹이 서렸다. 우선 카르셀이란 국명을 들어본 적이 없었거니와 일국의 왕녀가 자신을 찾아올 까닭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내 명성을 듣고 카르셀이란 왕국으로 초빙하려고 왔나?'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머리만 복잡해질 뿐이었다. 결국 베르텍은 그들을 불러 대화를 나눠보기로 작정했다. "만나보겠다. 들여보내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조금 뒤 집무실로 안내되어 온 이들은 아름다운 소녀와 젊은 청년이었다. 베르텍은 날카로운 안목으로 인해 청년이 팔라딘이란 사실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항상 탐색 마법을 전개해보는 습관 때문에 파악할 수 있었던 사실이었다. '왕녀의 호위기사라면 팔라딘인 것이 당연하지.' 고개를 끄덕인 베르텍은 고즈넉이 입을 열었다. "내가 바로 돈트렐에 파견 나와 있는 워 메이지 베르텍이오. 그래 무슨 일로?" 소녀와 청년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스쳤다. 그것은 목적했던 자를 찾은 기쁨에 기인한 것이었다. 둘의 정체는 다름 아닌 미첼과 율리아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비밀리에 베르텍을 찾아온 것이다. 율리아나는 베르텍을 쳐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몇 가지 여쭈어 볼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베르텍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셀이라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왕국의 왕녀에게까지 예의를 지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말씀하시오." "마법사께서 혹시라도 흑마법을 익히지는 않으셨습니까?" 베르텍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그게 대관절 무슨 소리요." 흑마법을 익히지 않았느냐는 소리는 마법사에게 있어 대단히 실례되는 말이었다. 마왕과의 계약 하에 어둠의 마나를 사용하는 흑마법. 마법사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극도로 경원시 되는 것이 바로 흑마법사였다. 특히 마법사들의 흑마법에 대한 반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신관이나 마법사는 흑마법을 악(惡) 자체로 간주하고 극도로 배척하고 또 경멸했다. 그런 만큼 베르텍의 반응은 지극히 합당한 것이었다. "나는 돈트렐을 책임지는 워 메이지요. 그러니 예의를 지켜주시기 바라오. 물론 본인은 흑마법 따위는 지금껏 구경도 하지 않았소이다." 베르텍의 거센 반발에 율리아나는 자신이 찾던 인물을 정확히 찾아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무례를 저질렀다면 머리 숙여 사과 드리겠습니다. 사실 저희는 상당한 악명을 떨치는 흑마법사가 돈트렐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찾아온 것입니다." "오! 그렇소?" 베르텍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것은 베르텍에 있어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토록 잡기 힘든, 공을 세울 기회가 펼쳐진 것이다. 과거 베르하젤에 대한 신앙심이 무척 돈독했던 대륙 트루베니아에서는 흑마법사를 죽여도 전혀 죄가 되지 않았다. 흑마법을 익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중죄였기 때문이었다. 사정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아르카디아에서도 흑마법사는 여전히 경원시되는 존재였다. 왜냐하면 흑마법을 익힌 마법사들 대부분이 마왕의 영향을 받아 극도로 사악하고 잔인한 심성을 띠기 때문이다. 물론 흑마법을 익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르카디아의 왕국들은 대부분 엄격한 법치국가였으므로 법의 테두리 내에서만 형을 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흑마법사라면 거의가 알게 모르게 악행을 자행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잡아넣고 추궁한다면 반드시 죄를 밝혀낼 수 있다. 베르텍이 반색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흑마법사 놈들은 마법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사람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을 즐겨 행한다. 그 놈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잘 되었군.' 모처럼 공을 세울 기회를 잡았기 때문에 베르텍의 눈은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그 놈이 지금 어디에 있소?" "그건 잠시 후에 알려드리겠어요." 미소를 지은 율리아나는 슬며시 협상에 들어갔다. "먼저 놈에게 현상금이 걸렸는지를 알아봐야겠어요." "이름을 한 번 말해보시오. 어지간한 흑마법사는 대부분 본국의 정보망에 파악되어 있으니까……." 초조한 듯 율리아나를 채근하는 베르텍. 하지만 율리아나의 설명을 듣자마자 그의 눈은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그는 세바인에서 일년 가량 활약한 흑마법사예요. 이름이 아마 데이몬인가 그럴 거예요." 말이 끝나자마자 베르텍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그가 지금 어디에 있소?" 얼마나 놀랐는지 베르텍의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바인의 흑마법사라면 이미 각 국의 정보망에 비밀리에 회자되고 있는 이름인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세바인의 흑마법사가 크로센 기사단에서 파견한 토벌대를 한 방에 박살내어버린 사실이었고 파악된 것은 오직 이것 하나 뿐이었다. 흑마법사의 마법 실력이나 출신, 격파된 토벌대의 규모 등 이외의 것들은 하나도 파악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도 크로센 제국에 상주해 있는 첩자를 통해 어렵사리 알아낸 정보인 것이다. 물론 토벌대가 실패한 탓에 크로센 제국에서 자세한 정황을 밝히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파견한 첩자 때문에 세바인의 흑마법사는 여러 왕국에서 확실하게 주목받고 있었다. 그런 요주의 인물이 돈트렐에 머물고 있다니……. 베르텍의 눈은 모종의 기대로 번들거렸다. 그를 체포하기만 한다면 승진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놈에겐 상당한 액수의 현상금이 걸려 있소." "대략 얼마 정도이지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적어도 일백 골드 이상인 걸로 알고 있소." "햐!" 율리아나와 미첼은 입을 딱 벌렸다. 일백 골드라면 정말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 정도라면 카심 용병단에 청부한 금액의 열 배가 넘는 거금이었다. 물론 신분이 신분인지라 돈에 그리 궁색하지 않은 그들이지만 지금은 돈이 절실히 필요했다. 목적을 이루려면 크로센 제국에 가서 상당히 많은 물품을 구입해야 했기 때문에 일백 골드란 돈에 군침이 돌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거처를 제보하는 것만으로도 현상금을 탈 수 있나요?" "물론이오. 그러니 그의 거처를 알려 주시오. 일단 정체가 확인된다면 확실하게 현상금이 지급될 수 있도록 조처해 드리겠소." 베르텍의 대답에 율리아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흑마법사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더불어 현상금이라는 추가 소득도 함께……. 율리아나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데이몬의 거처를 털어놓았다. "그는 지금 돈트렐 시내의 푸른 비둘기 여관에 묵고 있어요." "확실하군." 율리아나와 함께 한 달음에 푸른 비둘기 여관으로 달려온 베르텍은 희열감에 온 몸을 떨었다. 상대가 확실히 세바인의 흑마법사인지는 몰랐지만 일단 거물임에는 틀림없었다. 전율할 정도로 퍼져 나오는 강력한 흑마법의 기운. 이것은 오직 마법사나 신관이 아니라면 파악할 수 없는 기운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놀랍게도 베르텍조차 마법 실력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을 능가하는 고위급 흑마법사라는 사실은 탐색마법으로 상대의 서클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베르텍이 데이몬이 묵고 있는 방에 한정해서 탐색마법을 펼쳤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데이몬이 제럴드에게 추가로 개정대법을 펼치고 있을 때였다. "놀랍군. 저런 녀석이 돈트렐 시내에 어슬렁거리고 있다니……." "놈이 맞죠? 그럼 현상금을 탈 수 있나요?" 옆에서 터져 나온 음성에 베르텍은 고개를 돌렸다. 유난히 초조해 보이는 율리아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한시라도 빨리 돈트렐을 떠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지만 베르텍이 그 까닭을 알 수는 없었다. "물론. 현상금은 예정대로 지급될 것이오. 하지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소? 대관절 놈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소?" "그, 그건……." "솔직하게 말해 주시오. 그래야만 놈을 체포할 수 있으니……." 율리아나는 결국 데이몬을 만난 과정을 세세히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의기의 발로로 놈을 잡으러 갔다가 거꾸로 사로잡힌 일이며, 흑마법사가 자신의 파티에 합류하게 된 경위 등이 낱낱이 설명되었다. "놈은 우습게도 나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틈만 나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곤 해요. 정말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이죠." 설명을 들은 베르텍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사가 용병단에 가입해서 파티가 되었다는 대목을 듣자 베르텍의 눈빛이 갑자기 번쩍였지만 율리아나는 미처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던 베르텍은 다시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정황을 보니 확실할 것 같구려. 그런데 혹시 놈을 체포하는데 도움을 줄 마음은 없소?" 율리아나의 얼굴에서 의혹의 빛이 번져갔다. "무슨 뜻이죠?" "당신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려는 것이오. 놈을 잡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사들의 조력이 필요하오. 하지만 부근의 요새에 연락을 취해 기사가 파견되기까지는 다소의 시간이 걸리지. 당신의 말을 들어보니 놈이 내일 정도면 떠날 생각 같은데 그렇다면 시간이 촉박하오. 하지만 당신이 나서 준다면 일이 의외로 잘 풀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율리아나의 얼굴에 곤혹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물론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놈의 실력을 아는지라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첼이 그 잔악한 놈에게 얼마나 혹독하게 당했던가?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거, 검술도 배우지 않은 제가 뭘?" "아주 쉬운 일이오." 베르텍의 얼굴에는 가식적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이미 율리아나를 이용해 흑마법사를 잡을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지금으로썬 베르텍이 택할 방법은 오로지 그것밖에 없었다. 마법사의 대결은 철저히 마법 수준에 의해 좌우된다. 그 사실을 베르텍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보다 윗줄의 마법사. 베르텍이 직접 나선다 하더라도 쉽사리 체포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때문에 반드시 소드 마스터나 상급의 팔라딘을 대동해야만 놈을 체포할 수 있다. 하지만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전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율리아나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것이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평소 지론이었기에 베르텍은 은근한 어조로 율리아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애석하게도 놈의 써클을 간파할 수 없소. 다시 말해 놈은 나보다 실력이 높은 마법사요. 하지만 잡지 못할 바는 아니오. 문제는 소집령이 떨어지고 나서 기사들이 투입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오. 테르비아엔 강력하고 우수한 기사들이 충분하지. 하지만 그들이 당도하기 전에 놈이 달아난다면 헛일이니 당신의 조력이 필요한 것이오. 물론 거기에는 합당한 보상이 있을 것이오." "제가 뭘 도우면 되죠?" 상대가 미끼를 덥석 물자 베르텍은 이때다 하고 설명을 해 나갔다. "일단 당신은 그 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시오. 그런 다음 어떻게든 놈을 유인해서 내가 지정한 장소로 데리고 오도록 하시오. 지금부터 나는 그곳에다 놈을 잡을 함정을 파 놓도록 하겠소. 놈을 그곳까지만 데리고 오면 당신의 임무는 끝나는 것이오." "별로 어렵진 않군요." 율리아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별달리 어렵진 않았다. 보기만 해도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놈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일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놈의 얼굴을 두 번 다시 보지 않아도 된다. 그 사실 하나로 율리아나는 베르텍의 제안을 선뜻 승낙하고 나섰다. "알겠어요. 하겠어요." "모쪼록 부탁하오. 그럼 조금 뒤에 봅시다. 미리 준비를 끝내 놓을 테니……." 두 시간 뒤를 약속시간으로 잡은 뒤 율리아나는 몸을 일으켰다. 두 번 다시 흑마법사의 능글맞은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베르텍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미처 보지 못했다. "어딜 갔다 오셨습니까?" 외출했던 율리아나와 미첼이 들어오자 카심은 의아한 듯 눈을 치떴다. 그들이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에 카심은 지금까지 계속 둘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냥 산책을 좀……." "앞으로 외출하시려면 미리 얘기를 해 주십시오." "알았어요." 율리아나는 최대한 친근하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 뒤 일어날 일을 대비해서 최대한 용병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말아야 했다. "피곤하네요. 올라가서 쉴게요." 내실로 들어가는 둘을 쳐다보며 카심은 눈매를 좁혔다. 그들의 태도가 평소와 조금 틀렸던 것이다. 하지만 별달리 의심할 만한 점이 없었기에 그는 다시 마나연공에 들어갔다.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에게 마나연공은 이제 일상사가 되어 있었다. 내실로 들어간 율리아나는 약속시간이 올 때까지 초조하게 기다렸다. "지루하군." 두 시간 뒤면 흑마법사를 반드시 약속 장소로 데려가야 했기에 그녀로썬 안절부절할 수밖에 없었다. 흑마법사가 지금 아래층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 사실은 들어오며 파악했었기에 현재로썬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드르렁.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코고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둘은 마음을 졸였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지 마침내 약속시간이 다가왔다. 율리아나는 묘한 눈빛으로 미첼을 쳐다보았다. "네가 가서 놈을 데리고 올래?" 말이 끝나자마자 미첼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 난 싫어. 놈의 얼굴만 봐도 오한이 치솟는단 말이야." "하긴." 심정을 익히 짐작한다는 듯 율리아나가 몸을 일으켰다. 현재로썬 자신이 직접 가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네가 따라간다면 경계할 수도 있으니까 넌 이곳에 있도록 해." 미첼을 두고 혼자서 아래층으로 내려간 율리아나는 곧바로 데이몬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아직까지 낮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데이몬을 깨웠다. "이봐요." 하지만 깊은 잠에 빠진 데이몬은 여간해서는 깰 기색이 아니었다. 여러 번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반응을 보이지 않자 율리아나는 결국 소리를 빽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봐요. 일어나욧!" 그 통에 부스스 눈을 뜬 데이몬. 자신을 쳐다보는 율리아나를 보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 자신과는 상대도 하지 않으려는 율리아나가 지금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영문을 몰라하는 데이몬에게 율리아나가 말을 걸었다. 평소보다는 약간 누그러진 어조였다. 퉁명스럽긴 마찬가지였지만.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나에게 할 말이?" 별일도 다 있다는 듯 데이몬은 얼른 자리를 고쳐 앉았다. 지금까지 눈빛조차 마주치기 싫어했던 것이 평소 그녀의 태도이고 보면 분명 평범한 일은 아닐 듯 싶었다. "무슨 일이지?" "이곳에서는 곤란해요. 그러니 자리를 옮겨서 하는 게 어때요?" 꾸민다고 꾸몄지만 율리아나의 말투는 여전히 냉랭하고 퉁명스러웠다. 데이몬에 대한 반감이 이미 골수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보면 율리아나에게는 다행이라 볼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데이몬에게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었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 탓에 데이몬은 율리아나에게 조금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 단지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뭐 나야 아무 상관없지." 냉큼 대답한 데이몬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훔쳐보는 것도 좋지만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하는 것도 색다른 경험일 것 같았으므로 마음이 들뜰 수밖에 없었다. 몸을 돌린 율리아나는 출입구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내실로 가지 않는 거야?" "밖에서 얘기해요." 문을 열고 나가는 율리아나를 보자 데이몬도 얼른 뒤를 따랐다. 6장 끝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187회. 숙소에서 나온 율리아나가 조금 떨어진 건물로 들어가는 것을 보자 데이몬은 어리둥절해졌다. "어디로 가는 거지?" "가 보면 알아요." 질문을 짧게 일축해버린 율리아나는 서슴없이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벽돌로 지어져 무척 단단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데이몬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은 건물로 들어간 직후였다. '이것은?' 데이몬의 눈에 모종의 빛이 일어났다. 들어온 건물이 평범한 용도로 지어진 것이 아니란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벽이 두터운 데다 창문이 협소하고, 거기에다 두터운 쇠창살이 쳐진 것을 보니 일반적인 저택은 결코 아니었다. 아무래도 도둑 길드나 국가정보기관 따위에서 비밀리에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이 틀림없었다. '재미있군.' 데이몬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율리아나가 말을 걸어가면서까지 자신을 이곳까지 끌고 온 것을 보면 뭔가 곡절이 있는 것 같았다. 평소 얼굴을 마주치기조차 싫어했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아무래도 파 놓은 함정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위험이 있다고 회피할 데이몬이 아니었다. 평소 성격대로 데이몬은 일단 부딪혀 보기로 작정했다. "이리로 오세요." "그러지." 율리아나의 안내를 받으며 데이몬은 점점 건물 깊숙이 들어갔다. '그렇군. 목적이 이거였군. 날 사로잡으려는…….' 율리아나가 안내한 방 앞에서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방안에서 느껴지는 마법진의 기척으로 말미암아 율리아나의 의도를 짐작한 것이다. 은폐마법으로 가리긴 했지만 나인 서클의 이목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방안에는 분명 마법진이 그려져 있을 것이었고 그것은 십중팔구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종류가 분명할 터였다. 율리아나가 말을 건 것이 자신을 유인하기 위해서란 게 밝혀지자 데이몬은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물론 그녀에게 관심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방안에 들어간 율리아나는 데이몬을 손짓해 불렀다. "안 들어오고 뭐해요?" 방문 앞에서 데이몬은 잠시 갈등에 휩싸여야 했다. 이대로 발길을 돌릴지, 아니면 그녀의 계략에 넘어가 줄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물론 이 정도 마법진 따위가 데이몬을 속박할 수는 없었다. 제법 잘 만들어졌지만 이 정도는 고작해야 7서클 이하의 마법사에게나 효과가 있을 뿐이었다. 마법이란 재배열되는 횟수가 증가한다면 적은 마나로도 캐스팅이 가능한 법이다. 비록 마나를 흩어버리는 마법진 위에 서 있더라도 데이몬 정도의 마법사라면 마법의 시전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것을 믿은 데이몬은 계략에 순순히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를 괴롭힌 데 대해 다소 미안한 감정도 있었고 또한 자신의 실력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들어가지." 데이몬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예상대로 방안에는 커다란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널빤지 같은 것으로 덮어 위장하긴 했지만 데이몬은 마법진에서 풍기는 기운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예상대로 마법진은 마나를 흩뜨리는 종류의 것이었다. 방안의 마나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희박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방안에 들어간 데이몬은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평소의 장난기를 깡그리 지워버린 진지한 눈빛이었다. "내게 할 말이 뭐지?" "그, 그건……." 율리아나는 말을 떠듬거렸다. 솔직히 그녀에게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약속대로 데이몬을 유인해 왔지만 마법사 베르텍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가 가슴 조이고 있을 때 갑자기 사방의 벽이 활짝 열렸다. 덜컥. 그리로 완전 무장한 기사 십여 명이 우루루 쏟아져 들어왔다. 하나같이 푸른 기가 감도는 장검을 빼어들고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가 서려있는 검을 보니 모두가 의심할 나위 없는 팔라딘들이었다. 그 속에는 베르텍의 자신만만한 모습도 끼여 있었다. 기사들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검을 뻗어 데이몬의 몸을 겨냥했다. 챠챵. 데이몬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 당해 버렸다. 전혀 저항할 생각이 없는 듯 데이몬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검을 한 치만 들이민다면 그대로 산적꽂이가 되어버릴 듯한 형상. 그 모습을 보자 베르텍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저항하지 않는 것을 보니 너도 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나보지?" "………." "모르고 들어왔겠지만 이 방에는 마나를 흩어버리는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니 쓸데없는 발악은 하지 않도록……." 다가온 베르텍은 주머니 속에서 여러 개의 팔찌를 꺼내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철컥.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팔찌가 데이몬에게 주렁주렁 채워졌다. 상대의 수준을 고려해서 베르텍은 흑마법사의 양팔에다 빽빽이 팔찌를 채웠다. 그러는 동안 데이몬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묵묵히 채워지는 팔찌를 쳐다볼 뿐이었다. 조금 뒤 그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율리아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증오라던가 분노 따위의 감정이 떠오를 법도 한데 데이몬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고즈넉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것이 네 의도였나?" 율리아나는 잠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무리 그녀였지만 이런 상황에선 입이 열 개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법이다. 미안한 감정이 전혀 들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런 감정을 떨쳐버리려는 듯 율리아나는 데이몬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너 같은 악당은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해. 넌 그동안 우리들을 수도 없이 괴롭혀 왔잖아?" "적어도 너에게만은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지지 않겠다는 듯 계속 꼬투리를 잡는 율리아나. "음흉한 시선으로 계속 날 쳐다봤잖아?" "단순히 쳐다 본 것도 죄인가?" 그 말에 율리아나는 말문이 콱 막혀 버렸다. 사실 흑마법사는 집요하게 쳐다본 것말고는 자신에게 잘못한 것이 전혀 없었다. 머뭇거리던 그녀를 보다 못해 베르텍이 앞으로 나섰다. "잡담은 이따가 하고, 먼저 확인할 것이 있다. 네가 세바인에서 온 것이 확실한가?" 부인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상대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렇다. 그곳에서 5년 남짓 머물렀지." 대답을 들은 베르텍은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크로센 제국의 토벌대를 격파한 것도 당연히 너겠지." "물론. 그 녀석들 부끄러워 소문내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테르비아까지 소문이 나 다니……." "솔직해서 좋군." 베르텍의 머리 속은 희열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크로센 토벌대를 격파한 거물을 사로잡은 것이다. 자백까지 받았으니 베르텍은 이제 승진이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테르비아 국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반드시 큰상을 내릴 것이 분명했다. 양팔에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팔찌를 주렁주렁 매단 채, 마법진 위에 서 있는 흑마법사의 모습은 베르텍에게 확실한 미래를 확신시켜 주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지급이오. 지금 즉시 마법사 호송용 마차를 이리로 가져오도록 하시오. 충분한 기사가 모이면 바로 수도로 압송할 테니……." 마법사 호송용 마차에도 어김없이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지금 그들이 들어있는 방의 바닥에 그려진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베르텍은 그 마법진을 손수 보강해서라도 흑마법사를 호송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두르시오. 한시가 급하니……." "알겠습니다." 전령 역할을 맡은 기사가 서둘러 달려나갔고 남은 기사들은 지체 없이 달려들어 데이몬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불쌍한 데이몬은 손가락 굵기의 포승줄에 꽁꽁 묶여 버렸다. 기사들이 묶는 것을 묵묵히 쳐다보던 데이몬은 고개를 돌렸다. "날 어쩔 생각이지?" "아마 수도에 가서 재판을 받아야 할거야. 네 녀석을 튼튼하게 수감한 다음 세바인에 사람을 파견해 차근차근 증거를 수집할 생각이지. 빠져나갈 길이 전혀 없을 테니 포기하는 게 좋아." 말을 마친 베르텍은 데이몬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캐스팅을 원천 봉쇄하려는 의도에서였다. 6서클이 넘어가는 마법사는 의지만으로도 캐스팅이 가능했다. 하지만 직접 주문을 외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힘들 수밖에 없었으므로 베르텍은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되었군. 후후후" 영락없이 미이라가 되어버린 흑마법사를 보며 베르텍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창창한 미래가 바로 눈앞에서 아른거렸기에 기분이 고조된 베르텍은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만 기다리게. 일단의 기사들이 네 동료들을 체포하러 갔으니 머지 않아 대면할 수 있을 것이야. 아마도 심문 받는 데 그리 심심하진 않을 거야." 베르텍의 말에 놀란 것은 오히려 율리아나였다. "도, 동료들을 체포하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죠?"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린 베르텍은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용병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용병단에 가입했으니 그들 역시 죄가 있습니다. 이자를 받아들였으니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지요." "그, 그것은 얘기가 다르잖아요." 베르텍의 말에 율리아나는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용병들까지 체포될 것이라곤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용병들이 없다면 당장 곤란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녀는 필사적으로 베르텍을 설득하려 했다. "흑마법사를 넘겨주었으니 되었잖아요. 죄가 없는 용병들까지 체포할 필요가 있나요?" "죄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른 바 공범(共犯)들이니까요. 흑마법사를 받아들인 것 자체가 죄를 지은 것입니다. 뭐 주범인 이 녀석보다는 가볍겠지만 재판에 회부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단호한 베르텍의 말에 율리아나는 맥이 탁 풀렸다. 괜히 제보했나 하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용병들도 모두 수도로 압송될 것이란 말에 율리아나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도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안하긴 했지만 이젠 용병들과 헤어질 도리밖에 없었다. '할 수 없군. 현상금을 받은 뒤 다른 용병단을 고용해서 크로센으로 갈 수밖에…….' 생각을 마친 율리아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베르텍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전 제 호위기사를 데리고 가겠어요. 그러니 약속했던 현상금을 지급해 주셨으면 해요." 하지만 베르텍의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다. 베르텍은 얼굴의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말을 늘어놓았다. "현상금을 지급하는 것은 시일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도 함께 수도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하니까요." "그, 그게 무슨 소리죠?" 율리아나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자신도 수도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니……. 느물느물하게 이어지는 베르텍의 설명에 그녀는 분기가 충천하는 것을 느꼈다. "일단 당신은 용병단의 고용주입니다. 다시 말해 흑마법사가 용병단에 가입하는 것을 방조한 책임이 있다는 뜻이죠. 하지만 그리 큰 죄가 되지 못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간단한 조사만 마친 뒤 풀려나실 수 있을 테니까요." "이런 나쁜 자식." 화를 참지 못한 율리아나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베르텍의 태도에 특유의 성질이 폭발했던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베르텍은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 역시 마법을 사용할 수 없긴 마찬가지였으므로 미리 기사 두 명을 율리아나에게 붙여두었던 것이다. 철컹. 율리아나의 손은 덧없이 기사에게 잡혀버렸다. 배치된 기사들 모두가 팔라딘들이었으므로 그녀의 손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목적을 이룰 순 없었다. 기사 둘이 달려들어 율리아나를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붙잡았다. "그러지 마십시오. 그런 행동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으니까요." 느긋하게 대답한 베르텍은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압송하라. 레이디임을 감안해서 최대한 정중하게 모시도록……." "알겠습니다." 율리아나는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베르텍을 쏘아보며 끌려나갔다. 그녀의 시선을 슬쩍 받아넘기며 베르텍은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흑마법사를 체포한 공로로 받게 될 보상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절로 벅차 올랐다. 어쩌면 필생의 꿈인 궁정 마법사에 오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호송하는데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겠군." 무표정하게 묶여 있는 흑마법사를 쳐다보며 베르텍은 호송용 마차가 도착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기사들은 율리아나를 데리고 돈트렐의 시청으로 향했다. 그곳은 시장 및 주요 요인들이 기거하는 곳과 동시에 법 집행 같은 시의 주요 사안들이 실행되는 장소였다. 시청에 도착한 기사들은 율리아나를 곧장 지하로 데려갔다. 놀랍게도 그곳은 감옥이었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188회. 오리알 굵기의 철창이 죽 늘어선 지하 감옥으로 들어서자 율리아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왜? 이리로 오는 거죠?" "………." 난데없는 질문에 기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설명을 서로에게 떠넘기려는 듯한 투였다. 율리아나는 더 이상 가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팔짱을 꼈다. "난 이리로 가기 싫어요. 그러니 다른 길로 안내해 줘요." 그녀가 고집을 부리자 압송하던 기사 하나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인상이 상당히 험악해 보이는 기사였다. "다른 길은 없소. 당신이 있을 곳이 바로 이곳이니."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율리아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설마 자신을 감옥에 수감할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도리질을 쳤다. "마, 말도 되지 않아요. 제가 왜 감옥엘 가야 하죠?" "죄를 지었으면 수감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말을 마친 기사는 율리아나의 팔을 잡고 거칠게 잡아끌려 했다. 율리아나는 매몰차게 손을 뿌리치며 소리를 빽 질렀다. "함부로 손대지 말아요. 난 카르셀의 왕녀. 예의를 지켜주길 바래요." 말이 끝나자마자 기사들의 얼굴에 조소가 서렸다. 이미 그들은 모든 것에 대해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흥. 인구가 고작 팔천 사백 명인 곳이 왕국인가? 웃겨서 말이 안 나오는군. 돈트렐의 인구만 해도 그것의 열 배가 넘어. 그러니 쓸데없는 자존심 따윈 내세우지 않는 게 좋을걸? 그런 왕국이라 부를 수조차 없는 곳의 왕녀 따윈 쳐주지도 않으니 말이야." 판이하게 바뀐 말투. 다짜고짜 으르렁대는 어조에 율리아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까지 파악했다면 상대가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불길한 기분에 그녀는 정신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 난 흑마법사를 제보한 사람이에요. 세상에 제보자를 가두는 곳이 어디 있어요?" "제보자? 우리는 모르는 일이야. 아무튼 당신은 범인의 동료이므로 수감되는 것이 당연하지." 율리아나의 말을 냉랭하게 일축한 기사는 눈짓을 했다. 그러자 두 명의 기사가 달려들어 율리아나의 양팔을 꽉 붙들었다. "이것 놔!." 필사적으로 팔을 휘저었지만 힘센 기사들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들은 율리아나를 번쩍 들어올린 상태로 감옥으로 걸어갔다. 발버둥을 쳐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율리아나는 목청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이 사실을 크로센 제국에서 안다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후후. 한낱 죄인의 말을 누가 믿을까? 도망칠 수 있다면 가서 일러보지 그래?" 느물거리는 기사의 대꾸에 율리아나는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너희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아버님께 일러 카르셀의 모든 병사들을 끌고 올 거야. 그리고 네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거야." 기사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맺혔다. "그것 재미있겠군. 인구가 팔천이면 병사라고 해 봐야 기껏 일천 명 안팎일 테고……. 돈트렐 수비대 1개 지단만 동원하면 간단히 해결되겠군. 아! 참고로 알아두도록. 1개 지단은 각각 1천 5백 명의 병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돈트렐엔 총 15개 지단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율리아나는 말을 잃었다. 적어도 이들은 자신의 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비로소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실감한 율리아나. 그녀는 이제 고함을 지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르카디아에서 카르셀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이 정도밖에 안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맥이 탁 풀렸던 것이다. 사실 도박이라고 생각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율리아나는 크로센 황태자비로 간택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자신은 당당한 일국의 왕녀였으며 적어도 다른 왕국의 왕녀들과 공정한 경쟁을 벌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사들의 반응을 보니 그것은 애당초 일장춘몽에 불과했다. 카르셀 정도의 소국은 왕국으로 치지도 않는다는 기사의 대답. 율리아나의 자부심은 거기서 송두리째 꺾여버리고 말았다. 발악하던 율리아나가 잠잠해지자 기사들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얼른 감옥 속에 수감했다. 철컹. 율리아나를 구석진 곳에 위치한 독방에 수감한 기사는 손을 툭툭 털었다. "자 그럼 좋은 꿈꾸고 있으라고……. 내일쯤이면 소버린 요새에서 소드 마스터이신 윌커슨 경이 도착하실 테고, 그 때 너희들과 흑마법사를 수도로 압송할 계획이니까 푹 자두는 것이 좋을 거야." 말을 마친 기사는 더 이상 용무가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털썩. 얼이 빠진 율리아나는 그 자리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잘못했어. 제보를 하는 것이 아니었어."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착잡한 감정에 율리아나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깊숙이 묻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허황된 욕심을 부리지 말고 차라리 카르셀에 남아 있을 것을……. 애당초 좁은 카르셀에 진력이 난 것이 화근이었다. 그것 때문에 황태자비 간택식을 빌미로 카르셀을 미련 없이 떠나오지 않았던가? 율리아나에겐 모든 것이 후회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녀를 편히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고발한 사람이 당신이었군." 난데없이 터져 나온 음성에 율리아나는 고개를 들었다. 건너편 철창 속을 쳐다본 순간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그녀의 얼굴엔 어느새 절망감이 서려 있었다. "카, 카심." 놀랍게도 건너편 감옥에는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기사들은 잔인하게도 율리아나를 용병들을 수감한 바로 맞은 편에 가뒀던 것이다. 카심의 얼굴에는 냉랭한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진상을 알아차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마치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쏘아보는 카심의 눈빛을 견디다 못해 율리아나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카심은 휘하 용병들과 함께 숙소에서 마나 연공을 하고 있었다. 워낙 재미가 쏠쏠했기에 틈나는 대로 수련하는 마나연공에 시간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덜컥. 난데없이 문이 열리며 수백 명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불문곡직하고 용병들을 체포하려 했다. 워낙 수가 많았기에 용병들은 저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마나연공에 몰두하느라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오랏줄에 꽁꽁 묶인 카심은 거세게 항의를 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우릴 체포하는 이유를 밝히시오?" 하지만 병사들은 체포 이유를 순순히 밝히려 하지 않았다. "일단 시청으로 가면 죄명을 알게 될 것이오." 짧게 일축한 병사들은 용병들을 지체 없이 시청으로 연행했다. 물론 미첼도 함께 체포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저항하지 않은 것은 용병들과는 경우가 조금 달랐다. 율리아나와 베르텍 사이에 오고간 밀담을 익히 알고 있는지라 그는 순순히 저항을 포기했다. 곧 풀려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은 시청의 지하감옥에 수감되게 되고 지금까지 체포된 이유를 머리가 빠져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율리아나의 등장과, 그녀와 기사들 사이에 오간 대화내용을 통해 체포된 이유가 명백히 밝혀졌으니……. 카심은 마치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율리아나를 노려보았다. "당신 정말 몹쓸 사람이군." "……." "세상에 동료를 팔아 넘기다니? 당신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진작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카심의 질책에 율리아나는 고개를 더욱더 깊이 수그렸다.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미안하단 말을 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목구멍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카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흑마법사가 당신에게 무얼 잘못했기에 팔아 넘길 생각을 했소?" "………." "내가 알기로 그가 잘못한 것은 당신을 빤히 쳐다본 것뿐이었소. 그게 그렇게도 싫었소." 결국 율리아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만, 제발 그만해요. 나도 괴로워서 미치겠어요." 눈물을 줄줄 흘리는 율리아나. 그러나 카심은 추궁을 그칠 기세가 아니었다. "흑마법사의 시선이 싫었다면 깨끗하게 계약해지를 하지 그랬소? 그러면 더 이상 그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지 않소? 당신이 계약철회서에 서명을 했더라면 난 분명히 청부금의 일부를 돌려주었을 것이오. 그럼 우린 갈 길을 가면 되고 당신은 그 돈으로 다른 용병단을 고용하면 되잖소?" "………" "비록 돈에 팔려 다니는 용병이긴 해도 난 긍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오. 당신처럼 동료를 팔아먹는다는 생각은 해 본적도 없고 앞으로도 절대로 없을 것이오." 율리아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은 채 묵묵히 흐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카심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미첼이 사색이 된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율리아나가 수감되었다는 사실에 완전히 얼이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 하나만을 믿고 저항을 포기했던 미첼이었다. 조금만 있으면 자신 혼자만은 꺼내줄 줄 알았던 것이다. 잠시 미첼을 쳐다보던 카심은 다 안다는 듯 안색을 굳혔다. "아마 자네는 그녀와 얘기가 다 되어있었겠지? 병사들이 들이닥치는 순간 저항을 포기하는 것을 보고 대충 짐작했네. 자네는 자네 왕녀와 한 통속이 되어 동료를 팔아 넘겼어." 미첼은 카심의 시선을 감히 맞받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자신을 항변하려 했다. "난 흐, 흑마법사가 결코 동료가 아니라고 생각하오." "물론 당신들은 그렇게 생각했겠지? 하지만 우린 아냐. 언젠지 모르겠지만 약식 심문이 있을 터 그때 행동을 보면 우리 마음을 알 수 있을 거야." 말을 마친 카심은 몸을 돌렸다. 마치 미첼과는 잠시라도 함께 있기 싫다는 듯 감옥 끝 부분으로 간 카심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책상다리를 하고 주저앉았다. 함께 수감된 용병들도 카심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물론 미첼과 율리아나에게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고 용병들도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었다. 결국 침묵을 깬 것은 수다쟁이 패터슨이었다. "그런데 대장.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가?" 패터슨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건너편 감옥을 쳐다보았다. "우리야 체포되는 것이 이상할 게 없다 치더라도 저들까지 체포된 것은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이상한가?" "저들은 고자질을, 아니 제보를 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감옥에다 수감하지요?" 카심의 눈동자에 쓸쓸한 빛이 떠올랐다. 세상 경험이 많은 만큼 그는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원래 법이란 것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도 하지. 법이란 게 돈 있는 자의 편이란 말이 그래서 나온 거야. 상황을 넓은 안목으로 보면 대충 짐작이 되지." 잘 이해하지 못했는지 패터슨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저, 저는 잘." "잘 듣게. 저 카르셀의 왕녀는 애당초 우리와 함께 갈 마음이 없었어. 여기서 우릴 떼버린 다음 흑마법사를 제보한 현상금을 받아 다른 용병단을 고용한다는 것이 저들이 애초에 꾸민 계획이었을 거야. 뭐, 우리들의 안위야 안중에도 없었을 테고……." 그 말을 들은 율리아나는 고개를 발딱 들었다. "아니에요. 제겐 추호도 그런 마음이 없었어요. 난 단지 흑마법사를, 흑마법사만 떼어놓으려는 의도로 그랬을 뿐이에요. 그만 없었다면 평탄하게 크로센 제국으로 갈 수 있지 않았나요?" 카심이 냉랭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당신의 말은 틀렸소. 공주. 사실 난 흑마법사를 용병단에 받아들인 순간부터 죄를 범한 것이었소. 만약 그가 세바인에 머물면서 죄를 지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도 엄격히 소급되어 적용되지. 다시 말해 공범이 된다는 뜻이라 생각하시오. 이것은 대부분의 왕국에서 적용되는 항목이오. 따라서 우린 이미 흑마법사와 한 배를 탄 운명이었소." "그, 그런데 왜 흑마법사를 받아들였지요?" 카심의 얼굴에 착잡한 표정이 감돌았다. "그것까진 알 필요 없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책임을 끝까지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지. 당신도 명목상 우리 용병단의 고용주이니 의당 책임을 져야 하오. 하지만 당신은 흑마법사를 제보한 공로가 있소. 다시 말해 공범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는 뜻이지." "………"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사안은 대부분 법을 집행하는 자의 아량에 달려 있소. 당신이 제보한 자가 나쁜 마음을 먹을 경우 당신도 책임을 회피하지 못할 수도 있소." "나, 나쁜 마음?" 카심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말하자면 공을 독차지하려는 마음 말이오. 깊이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거요. 제보에 의해 체포한 것과 독자적으로 체포한 것과는 보상에 있어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까……. 게다가 현상금을 독식할 수 있다는 불로소득도 있을 수 있고." "그, 그렇다면……." 율리아나의 얼굴에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빛이 일어났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189회. 그녀를 쳐다보며 카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것이 분명할 것 같소. 솔직히 그가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 자세히 알진 못하지만 대충 상황은 이렇게 흘러갈 것 같소. 제보한 사실을 감쪽같이 숨기고 도리어 당신을 일당으로 몰아 재판에 회부하는 것. 그렇게 되면 흑마법사를 체포한 공로는 단 한사람에게 돌아가게 되지. 당신이 제보했던 바로 그 사람 말이오." "세, 세상에……. 말도 되지 않아요." "말이 되오. 혹시 당신이 제보할 때 다른 사람이 있었소? 시청에 소속된 서기라든지 공증인 말이오?" 율리아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니요. 나와 미첼 밖에는 없었어요." "그렇다면 상황은 명백하오. 제보를 받은 자는 십중팔구 공을 독식하려 할 것이 틀림없소. 게다가 당신은 제 3자가 아닌 같은 일행이었으니 일을 꾸미는 것이 더욱 쉬울 테고……." 카심의 말이 끝나자 율리아나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어들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번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경솔하게 행동했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파고들어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카르셀을 나선 이후 자신의 고집대로 해서 제대로 된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비로소 떠올랐다. 자신은 철저히 우물안 개구리였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율리아나는 울먹이며 사과 한마디를 겨우겨우 내뱉었다. "미, 미안해요. 흐흑." "미안하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오. 지금 우리 실정으로썬 흑마법사가 세바인에서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길 절실히 바라는 수밖에 없소." "흑흑흑." 눈이 빨갛게 부어오른 채 계속해서 흐느끼는 율리아나. 그녀가 다소 측은했던지 카심이 다소 누그러진 어조를 내었다. "내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소." 율리아나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카심은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어나갔다. "재판에 회부되면 이렇게 진술하시오. 체포되기 전에 미리 우리 용병단과 계약을 해지했다고 말이오. 그렇게 되면 비교적 경미한 처벌을 받을 수 있을 것이오. 물론 제보했다는 사실은 지금 이 순간부터 잊어버리시오. 굳이 밝히려 하다간 더 큰 곤욕을 치를 수 있으니까……." 율리아나의 눈이 커졌다. "그, 그럼 당신들은 어떻게 되죠?" "어떻게 되긴. 운에 맡길 수밖에……. 만에 하나 흑마법사가 많은 사람을 죽였다던가 생체 실험을 했다는 등의 중죄를 저질렀다면 우리 모두는 평생을 감옥에서 썩어야 하오. 아무래도 십중팔구 그렇게 될 것 같소."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잖아요." 카심은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놈이 당신에게 한 것을 생각하면 모르겠소? 그는 어떻게 해서든 흑마법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도 남을 작자요. 죄가 없다면 만들어내서라도 걸겠지? 그래야만 자신의 공로가 올라가니 말이오." "세, 세상에……." 바깥세상의 매운 인심을 실감한 율리아나가 입을 딱 벌렸다. 미첼 역시 벌린 입을 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순박한 카르셀에서 살아온 그들에겐 너무도 벅찬 상대였다. 율리아나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흘려냈다. "그, 그렇다면 당신들도 흑마법사가 용병단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건가요?" 카심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순 없소. 우린 이미 그를 동료로 받아들였소. 지금에 와서 그를 부인할 수 없다는 뜻이지. 동료란 게 원래 그런 것이오. 좋고 나쁘고 힘들고 괴롭고 기쁜 일을 모두 공유하는 것이 바로 동료라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을 수 있는 존재라면 이미 동료가 아니라고 봐야지." 말을 마친 카심은 착잡한 기색으로 휘하 용병들을 둘러보았다. "너희들 중에서 만약 죄를 면하고 싶은 녀석이 있으면 이따가 있을 심문에서 이미 용병단을 탈퇴했다고 진술하라. 내가 그것을 인정해 주겠다. 서로의 진술이 일치한다면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갈 것이다. 아마 죄를 완전히 면하긴 힘들어도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순 있을 것이다. 알겠느냐?" 가벼운 술렁임이 있었지만 동요는 전혀 없었다. 서로의 눈을 잠시 쳐다본 용병들은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로 패터슨이 입을 열었다. "그럴 녀석이 없다는 것은 대장도 아시잖습니까?" "최악의 경우 평생을 감옥에서 썩을 수도 있다. 그러니 심사숙고해서 결정하라." 하지만 용병들 중에서 나서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하나같이 굳은 표정으로 눈을 꼭 감고 벽에 등을 기댈 뿐이었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 죽음일지라도 달게 받아들이겠다는 듯한 모습. 그들을 지켜본 카심은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며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적어도 내가 데리고 있는 대원들은 동료애란 게 무엇인지 아는 녀석들인 것 같소. 심문 받는 과정에서 확실하게 판가름되겠지만 말이오." 율리아나와 미첼은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수그렸다. 동료를 팔아 넘긴 자신들과는 너무나 상반되는 마음들이었다. 동료란 것이 그런 의미를 지니는지 지금껏 생각조차 해 본적 없던 그들이었다. 그 뒤로 계속해서 침묵이 이어졌다. 카심도 입을 닫았고 미첼과 율리아나도 묵묵부답이었다. 용병들만이 착잡한 시선으로 천장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약식심문이 시작될 때를 기다리며……. "흠! 이름은 카심. 현재 32세로 개인 용병단의 대장이라……." 굴비두릅 묶듯 묶여 있는 죄수들을 앞에 두고 베르텍은 손에 든 수첩을 읽어나갔다. 그것은 바로 용병길드에서 발급 받은 카심의 용병수첩이었다. 현재 모든 용병들의 용병수첩이 베르텍의 수중에 있었다. 용병들은 수첩뿐만 아니라 무기를 비롯한 모든 소지품을 압수 당한 상태였다. '소드 마스터 윌커슨 경과 휘하 기사들이 도착하려면 아직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흑마법사를 압송할 호송대가 도착할 때까지 베르텍은 약식이나마 심문을 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그것을 위해 베르텍은 돈트렐에 소속된 10여 명의 팔라딘을 모조리 소집해 놓았고 그들은 이곳을 철통같이 경비하고 있었다. 때문에 죄수가 달아날 걱정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죄상과 처벌은 재판에서 결정될 것이지만 죄수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해 두려는 것이 베르텍의 의도였다. 그것을 위해 베르텍은 모든 죄수들을 심문실에다 모아둔 상태였다. 물론 거기에 미첼과 율리아나도 빠질 리가 없었다. 둘은 입도 뻥긋하지 않은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율리아나를 눈여겨보던 베르텍이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눈치가 빠른 계집이면 좋겠는데 말이야.' 생각을 얼른 접은 베르텍은 카심을 쳐다보았다. 이미 수첩에 적힌 내용은 그의 머리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는 상태였다. "썬더버드 용병단에서 10년 남짓 활약하다 4개월 전 개인 용병단을 창설해서 독립했다, 재미있는 전력을 가진 녀석이군. 큰 용병단에 있는 것이 벌이가 백 번 나을 텐데." "사람에겐 누구나 생각이 있는 법이오. 구태여 그것까지 물어볼 필요는 없지 않소." 카심의 대답은 무척 퉁명스러웠다. 율리아나가 처한 상황으로 미루어 상대의 인간성을 어느 정도 파악했기 때문에 가는 말이 고울 리가 없었다. 상대의 성질을 긁어서 좋을 것은 없었지만 고운 말이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베르텍은 카심의 반응에 별달리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것을 보아 용병들을 자신의 출세를 위한 도구 정도로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럼 일단 대면을 시켜볼까?" 베르텍은 묵묵히 앉아 있는 카심을 쳐다보며 손뼉을 쳤다. 짝짝. 신호를 보내자 기사 하나가 한쪽 벽에 쳐져있는 휘장을 젖혔다. 그 뒤로 마치 번데기처럼 묶여 있는 사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데이몬이었다. 전신을 꽁꽁 묶인 채 입에 재갈이 물려있는 모습. 양팔에 대여섯 개의 팔찌를 주렁주렁 매단 채 마법진 한가운데의 의자에 묶여 있는 모습이 상당히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를 보자 장내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엇갈렸다. 용병들의 얼굴에는 낙심, 절망 같은 것들이, 반대로 베르텍의 얼굴에는 희열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볼 엄두도 나지 않는 듯 미첼과 율리아나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베르텍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용병들과 데이몬의 얼굴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겨, 결국.' 빈틈없이 묶여 있는 흑마법사를 보자 카심의 얼굴에 절망감이 스쳐지나갔다. 사실 그는 흑마법사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 정도 실력의 흑마법사라면 쉽사리 당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흑마법사의 몰골을 보자 그 희망은 덧없이 꺾여 버렸다. 이제 그와 휘하 용병들은 꼼짝없이 압송되어 재판 받을 때만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과연 내 판단이 잘하는 짓인가?' 이미 처벌을 각오하고서라도 흑마법사를 동료로 인정하겠다고 마음먹은 카심. 하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하자 갈등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다. 상황을 보니 재판에 회부되어 처벌받는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었고 흑마법사를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처벌이 다소 경감될 가능성이 조금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카심의 성미에 결코 맞지 않는 일이었다. 평소 동료애를 극도로 강조했고 스스로 사나이라고 자부해 왔기에 위기에 처했다고 동료를 버린다는 것이 카심에게 결코 내키지 않는 일임에는 분명했다. 게다가 카심의 심사를 복잡하게 하는 것은 한 가지 더 있었다. 율리아나를 체포한 것을 미루어 다소 짐작하고 있었지만 자신들을 심문하는 마법사는 한 눈에 보기에도 출세지향적인 성격의 인물이었다. 심문하는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를 테면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주변 모든 것을 짓밟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부류인 것이다. 미첼 역시 비슷한 부류였지만 정도로 따진다면 마법사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할 것 같았다. 자신들은 정말 고약한 놈에게 걸린 것이다. 카심은 암암리에 이를 지긋이 악물었다. '정말 골치 아프군.' 만에 하나 흑마법사를 용병단에 받아들인 사실을 부인한다 하더라도 그리 먹혀 들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하나를 잡는 것보다 일당을 몽땅 잡는 것이 훨씬 공이 크다는 사실은 고금을 통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놈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을 공범으로 옭아매려 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카심의 행동은 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할 수 없다. 어차피 한 배에 탄 몸. 차라리 의리를 지키는 쪽을 택하겠다.' 마음을 정한 카심은 고개를 들었다. 베르텍의 번들번들한 눈동자가 어느새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카심은 지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정면으로 맞받았다. "그럼 심문을 시작하겠다." 겁도 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용병대장을 쳐다보며 베르텍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상대의 태도가 다소 불손하긴 했지만 상관할 것은 없었다. 이미 그는 용병 모두를 공범으로 몰아붙여 재판에 회부할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평생 감옥에서 썩을 것이 조금 불쌍하긴 하지만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심문내용을 머리 속으로 정리한 베르텍은 손가락을 뻗어 데이몬을 가리켰다. "저자는 악명이 파다한 세바인의 흑마법사다. 이미 본국의 정보부에서 저자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 상태이니 조만간 죄상이 밝혀질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성심성의껏 심문에 응해주기 바란다. 그래야만 법의 테두리 내에서 선처가 베풀어질 것이다." 말을 끊은 베르텍은 카심을 쳐다보았다. "우선 대장인 너에게 묻겠다. 저 자가 네 용병단의 구성원이 맞느냐?" 이미 베르텍의 머리 속에는 상대가 부인할 것에 대비한 반론이 준비되어 있었다. 머리 좋은 마법사들 중에서도 베르텍의 머리는 특히 비상한 편이었고, 상대를 꼼짝달싹 못하게 옭아매는 말재주 역시 겸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덧없이 빗나가 버렸다. "그렇소. 그는 틀림없는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오. 정확히 십이일 전에 내가 직접 그를 우리 용병단에 받아들였소." 뜻밖의 반응에 베르텍은 잠시 멍해졌다. 이럴 경우 죄수는 대부분 관련된 사실을 부인하기 마련이다. 절박한 지경에 몰린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이랄까? 죄를 조금이라도 경감 받을 수 있다면 죄수들 대부분은 동료를 팔아 넘기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상식을 깨는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베르텍은 확인이라도 하듯 되물었다. "확실한가?" "그렇소." "네 자백으로 인해 중형이 구형될 수도 있다. 그래도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없는가?" 미리 준비해놓은 반론이 아까웠는지 베르텍은 거듭 되물었다. 하지만 카심의 대답은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용병단의 일원이오. 그에게 죄가 있다면 대장인 나도 의당 대가를 함께 치를 것이오." 뜻밖의 반응에 베르텍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재미있는 녀석이군. 그럼 다른 녀석들은 어떤지 볼까?" 이번에는 카심 휘하 용병들에게 심문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너희들에게 묻겠다." 그들에게 흑마법사가 동료인지, 또 카심 용병단의 구성원이 맞는가 하는 종류의 질문이 퍼부어졌다. 하지만 결과는 카심과 다르지 않았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190회 카심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용병들 대부분이 동료를 버리는 것보다 의리를 지키는 쪽을 택했다. 비록 데이몬이 자신들을 호되게 혼낸 적이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비교적 잘 지내왔으며, 특히 그에겐 자신들에게 마나연공법을 전수해 준 은혜도 있지 않았던가?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맞습니다. 그는 동료이고 우리는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 분명합니다." "카심 용병단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것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베르텍은 그들의 뜨거운 동료애에 전혀 감명 받지 않았다. '끌끌끌. 골빈 녀석들.' 물론 순순히 자백한 만큼 베르텍에게 나쁠 것은 전혀 없었다. 도리어 밤새워 반론을 준비했던 것이 아까워 견딜 수 없었던 베르텍이었다. 이대로 끝내기가 싱겁다고 느꼈는지 그는 용병들 중에서 가장 어린 제럴드와 하인리히를 붙잡고 늘어졌다. "잘 생각해 보아라. 너희들은 아직 앞길이 창창하다. 양심상 도저히 너희들을 감옥에서 평생 썩게 할 순 없구나. 그러니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 확실한지 그것만 대답하라." 제럴드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사실을 시인하고 나섰다. "틀림없습니다. 전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고 흑마법사는 분명한 제 동료입니다." 어차피 홀로 풀려난다 하더라도 집안의 복수는 꿈도 꾸지 못했기 때문에 제럴드는 차라리 동료들과 함께 행동하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노련한 베르텍의 입담에 심성이 유약한 하인리히가 조금 머뭇거렸다. 처벌받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약해진 것이다. 흔들리는 것을 간파한 베르텍이 계속 하인리히를 자극했다. "깊이 생각하기 바란다. 너에겐 의당 부모와 형제가 있을 것이다. 대답 한 번 잘못해서 그들을 평생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느냐?" "나, 나는……." 하인리히는 계속해서 머뭇거렸다.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발설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동료들에게 정말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보다 못해 카심이 나섰다. 일부러 퉁명스럽게 꾸민 음성이었다. "넌 이미 저번에 탈퇴서를 제출하지 않았느냐? 서둘러 대답해라. 넌 이미 카심 용병단원이 아니다." 용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인리히에게 집중되었다. 놀랍게도 그 시선에는 질시나 분노 따위의 감정이 전혀 깃들지 않았다. 오히려 하인리히를 격려하려는 듯 용병들은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너라도 부인해서 형을 경감 받으라는 무언의 동료애. 그 모습에 하인리히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드디어 마음을 정한 것이다. 하인리히는 베르텍을 쳐다보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전 카심 용병단의 일원입니다. 그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이런." 베르텍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결국 준비했던 반론이 깡그리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죄수들 모두가 죄를 시인했으니 더 이상 심문은 진행되지 않았다. 카심과 용병들은 하인리히에게 애석하다는, 한편으로는 기특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하인리히 역시 뿌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고 나니 속이 정말 시원했던 것이다. 이제 하인리히는 처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테르비아의 수도로 가서 재판을 받는 일 뿐이었다. 서기가 질문과 답변을 빠짐없이 기록한 것을 확인한 베르텍은 이번에는 시선을 미첼과 율리아나에게로 돌렸다. 그들은 아직까지 고개를 푹 수그린 상태였다. "이번에는 당신들에 대한 심문을 시작하겠소. 하지만 그리 걱정하지는 마시오. 당신들은 용병단의 구성원이 아닐뿐더러 이미 용병대장이 당신들과의 계약을 철회했다는 사실을 밝혔으니 간단한 조사만 받으면 풀려날 수 있을 것이오." 베르텍의 말에 율리아나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마치 세상을 살 의욕을 모두 잃어버린 듯한 표정. 예상대로 베르텍은 율리아나의 제보사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쳐다보며 베르텍은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용병대장이 계약철회사실을 밝혔으니 그것을 인정한다면 당신들의 혐의는 풀리는 것이오. 대신 용병들이 구금되는 관계로 위약금을 지불할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해서 본 돈트렐 시에서는 위약금의 일부를 시에서 대신 지불하기로 결정을 내렸소. 계약서에 따르면 당신들과 카심 용병단은 10골드에 계약을 체결했더군. 그러니 수도에 가서 조사를 받고 온다면 당신들에게 위약금 10골드를 지불하도록 하겠소. 그러니 당신들은 우리 시의 관용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오." 말을 마친 베르텍은 율리아나의 얼굴을 지긋이 응시했다. 그녀의 대답 여부에 따라 기소내용을 달리 작성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제보 사실을 들먹인다면 그는 추호도 사정보지 않고 그녀를 한 패거리로 옭아매어 버릴 생각이었다. 일단 공범으로 만들어버린다면 그녀의 진술내용은 별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주제에 맞게 행동한다면 당연히 선처를 베풀 용의가 있지.' 상황이 생각대로 진행된다면 10골드로 입막음을 하고 나머지 현상금을 착복할 수 있다. 불로소득에 대한 기대로 베르텍의 얼굴은 유난히 번들거렸다. 게다가 그에겐 흑마법사를 체포한 대가로 내려질 보상 또한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카르셀의 왕녀는 자신의 예상대로 돌아가는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것 같았다. 제보한 사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말이다. '다행이군.'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둘에 대한 심문을 시작했다. "이미 용병대장이 계약해지사실을 진술하였소. 거기에 동의하시오?" 하지만 모기 소리만 하게 들려온 대답은 베르텍의 예상을 송두리째 뒤엎어버렸다. "동의하지 않아요. 난 카심 용병단과 계약을 해지한 기억이 없어요." "뭐라고?" 깜짝 놀란 베르텍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카르셀 왕녀의 대답은 정말 뜻밖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는 다시 한 번 캐물었다. "정말이오? 잘 생각해서 대답하시오." "다시 말해도 마찬가지예요. 난 카심 용병단과 계약을 해지하지 않았어요. 따라서 계약은 아직까지 유효해요. 물론 흑마법사가 용병단에 가입한 사실 또한 빠짐없이 목격했으니 나도 죄가 있어요." 베르텍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된 게 이 패거리는 용병단이나 고용주나 하나같이 해괴하기 그지없는 인물들인 것이다. 빠져나갈 길을 주려는데 굳이 마다하는 죄수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어이가 없는지 베르텍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 놀란 것은 베르텍 뿐만이 아니었다. 맥없이 주저앉아 있던 미첼 역시 율리아나의 대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안한 감정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는 있었지만 머지않아 풀려날 것을 확신하고 있던 미첼이었다. 그런데 철없는 율리아나가 또 사고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안 돼! 나, 난 아니야.' 하지만 그 절규는 속으로만 퍼져나갈 뿐이었다. 항변해보아야 소용없다는 사실을 미첼은 잘 알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그랬다. 왕녀가 자백한 사실을 호위기사가 번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베르텍은 미첼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물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미치겠군.' 결국 미첼은 속만 끙끙 태울 수밖에 없었다. 용병들도 전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특히 카심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율리아나를 지켜보았다. 때마침 율리아나도 고개를 돌렸고,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카심에게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라도 미안하다는 뜻을 전하려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했다. 그 모습에 카심은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것이 어느 정도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본바탕까지 나쁘지는 않았나 보군.' 하지만 속마음을 겉으로 표출할 수는 없었다. 자신들이야 이미 정해진 운명을 걸어야 하지만 살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했기 때문에 카심은 계속해서 눈짓을 했다. 진술을 번복해서 자신들만이라도 풀려나라고 말이다. 하지만 율리아나의 고집은 역시 고래심줄이었다. 듣지 않겠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율리아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르텍은 혀를 찼다. "할 수 없군. 모조리 수도에 압송해서 재판에 회부할 수밖에……." 베르텍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들을 모두 투옥하시오. 내일 윌커슨 경이 도착하는 대로 압송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기사들은 용병들을 잡아 거칠게 일으켰다. "가자. 소란 피우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 용병들은 하나씩 끌려나갔다. 하지만 그들의 눈동자에서 후회의 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율리아나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미첼 만이 다소 허탈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재판 때 봅시다." "그 때까지 잘 지내요. 데이몬." 용병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데이몬을 향해 인사말을 건넨 후 끌려나갔다. 미첼과 율리아나만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직까지 그들 사이엔 감정의 앙금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두 끌려나가고 심문실 안에는 마침내 베르텍과 데이몬만 남게 되었다. "정말 대단한 동료들을 뒀군. 하나같이 의리가 있지만 멍청하기 그지없는 녀석들이지." 비릿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주시한 베르텍은 지체 없이 휘장을 닫아버렸다.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기에 그는 보고서만 작성하면 되었다. 사악한 흑마법사와 그 일당들의 죄상을 기록할 보고서 말이다. "내일 출발하려면 서둘러야겠군." 마법진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본 베르텍은 자신의 집무실로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카르셀 왕녀 일행이 감옥에 갇힌 지도 하루가 지났다. 베르텍은 기소 내용을 모두 보고서로 작성해 놓고 호송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죄수가 자신의 실력을 능가하는 마법사이니 만큼 그를 호송할 소드 마스터가 오기까진 출발할 수 없었다. "소버린 요새까진 그리 멀지 않으니 금방 도착하겠군. 사안이 사안이니 만큼……." 베르텍은 호송할 채비를 완전히 갖춰놓고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에 마침내 호송단이 도착했다. 호송 책임을 맡은 소드 마스터 윌커슨의 지휘 하에 두 명의 실력 있는 팔라딘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공손히 머리를 숙이는 베르텍을 보고 호송대장 윌커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이 오십을 훌쩍 넘긴 노검객이었다. 테르비아를 통틀어 모두 18명이 존재하는 소드 마스터 중에서도 능히 5위안에 드는 실력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 정도라면 크로센 기사의 중간 부대장 급 소드 마스터에도 뒤지지 않는 실력이었다. "그래, 세바인의 흑마법사를 직접 잡았다고……." "그렇습니다." 베르텍은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며 대답했다. 누가 뭐래도 훌륭한 전공이었기 때문에 윌커슨은 믿음직스럽다는 듯 베르텍을 쳐다보았다. 물론 그도 세바인의 흑마법사에 의해 크로센 토벌대가 격파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엄청난 거물을 잡았군. 정말 수고했네." 반백의 머리에서 세월의 풍상이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윌커슨은 강력한 기운을 풍기는 검객이었다. 벌써 40년에 달하는 세월을 검에 매진한 만큼 눈빛에서 한 자루 잘 벼려진 검을 연상시킬 정도의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래. 출발 시간은 언제인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 지금 당장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윌커슨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군. 놈이 수작을 부릴 수도 있으니 지금 바로 출발하세나. 그런데 준비한 호송대 규모는 얼마나 되나?" "이미 돈트렐 수비대에서 일류급 병사들로만 5백 명을 차출해 놓았습니다. 거기에다 돈트렐에 소속된 팔라딘 중 5명이 대기하고 있고 제가 함께 동행할 것입니다. 윌커슨 님과 두 분의 수행기사가 계시니 놈은 감히 달아날 마음을 품지 못할 것입니다." 윌커슨의 날카로운 눈빛이 다소 부담스러웠는지 베르텍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군. 사실 나와 이들 둘만 있어도 충분할 테지만 만약을 위해서 병력을 조금 데리고 가는 게 나을 테지." 사실 같은 팔라딘이었지만 돈트렐에 소속된 팔라딘들과 윌커슨이 데려온 팔라딘들은 실력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같은 팔라딘이라도 엄연히 실력차이가 있는 것이다. 윌커슨은 기사단에 소속된 소드 마스터로써 부근 요새에 파견근무를 맡고 있다. 때문에 휘하의 팔라딘들은 기사단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인재들 중에서 고르고 고른 자들이 파견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돈트렐에 소속된 팔라딘들은 그들보다 질이 떨어졌다. 돈트렐이 제 아무리 거점도시라고 하나 주요 요새보다 중요할 순 없었기에 비교적 경험 없고 실력이 떨어지는 기사들이 파견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므로 현재로썬 그들의 조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만에 하나 흑마법사가 마법진을 벗어난다면 실력이 떨어지는 자신은 물론이었고 돈트렐의 팔라딘만으론 조금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소버린 요새에 지원요청도 그 때문에 한 것이었다. 윌커슨이 당도한 이상 머뭇거릴 필요는 없었기에 베르텍은 곧 출발준비를 서둘렀다. "놈의 몰골을 한 번 보시겠습니까?"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어차피 재판에 회부되면 놈의 면상을 물리도록 봐야 할 터. 출발이나 서두는 것이 낫겠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191회 조금 뒤 돈트렐 시청 앞에는 세 대의 마차와 완전 무장한 5백 명의 병사가 도열했다. 체포한 흑마법사를 수도까지 압송하기 위한 호송대의 행렬이었다. 대상이 마법사란 점 때문에 워프를 통한 이동은 배격되었다. 그 정도 수준의 흑마법사라면 공간이동마법의 방해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으므로 시간이 걸리지만 대신 안전한 육로를 택한 것이다. 베르텍은 사로잡은 흑마법사의 수준을 7서클 남짓으로 알고 있었다. 늘어선 병사들을 사열하는 윌커슨에게 다가간 베르텍은 나지막이 말을 걸었다. "놈은 아마 7서클의 엑스퍼트 정도 될 것입니다. 아마도 마스터까지는 오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상관없네. 내가 입은 대마법 방어갑옷은 7서클의 마법정도는 막아낼 수 있으니 말이야." 윌커슨의 장담에 베르텍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물론 소드 마스터의 마법 저항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7서클의 마법까지 견딜 수 있다니……. 그렇다면 자신은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윌커슨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놀랍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베르텍은 고개를 돌려 마차를 쳐다보았다. 이미 사악한 흑마법사와 그 일행들은 마차에 단단하게 실어놓은 다음이었다. 가운데 위치한 큰 마차에 바로 흑마법사가 갇혀 있었다. 마차 세 대중 가장 크지만 속에는 단 한 사람만 들어 있는 것이다. 나머지 두 대의 마차 중 하나에는 용병과 카르셀 왕녀, 그리고 그녀의 호위기사가 갇혀 있었다. 나머지 마차는 베르텍과 윌커슨이 탈 것이었다. 가장 선두에 배치된 마차 말이다. 베르텍은 윌커슨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 마차에 타십시오. 상당히 걸리는 여정이니 말을 타고 가시는 것보다는 나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윌커슨의 반응은 조금 뜻밖이었다. 그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의 임무는 놈이 달아나지 못하게 하도록 철저히 감시하는 것일세. 그러니 난 부하들과 힘께 놈이 탄 마차 지붕에 타겠네." "그, 그러시다면……." 정말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상대가 먼저 청하니 반갑지 않을 수 없었던 베르텍. 윌커슨의 마음이 바뀔까 두려운 나머지 베르텍은 서둘러 출발 명령을 내렸다. "출발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호송단은 서둘러 위치를 잡았다. 5백 명의 병사들은 서둘러 진형을 갖춰 마차를 에워쌌고 돈트렐에 소속된 팔라딘들도 마차 주변에 튼튼하게 자리를 잡았다. 물론 가장 신경 써서 세심하게 지켜야 하는 것은 누가 뭐래도 흑마법사가 수감된 마차였다.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대국답게 테르비아의 병사들은 순식간에 배치를 마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라딘 두 명과 함께 선두의 마차에 탑승한 베르텍은 의기양양한 표정대로 호송대를 둘러보았다. 확 펴진 미래가 눈앞에 생생했기 때문에 그는 절로 기분이 우쭐해지는 것을 느꼈다. '공로를 생각하면 궁정 마법사도 영 불가능하진 않아. 후후후. 끝내주는군.' 속으로 쾌재를 불러가며 베르텍은 마차에 몸을 싣고 수도로 향했다. 그런데 호송대열을 쳐다보는 사람들 속에 유난히 빛나는 눈동자 하나가 있었다. 짙디짙은 흑발. 핏기 없이 흰 얼굴에 얼음 같은 차가움이 감도는 젊은 청년. 바로 러셀런트였다. 그는 드디어 목표물을 찾은 것이다. "놈! 도망쳐 봐야 독 안에 든 쥐 신세렸다." 그토록 찾아다녔던 가증스런 목표가 바로 저 마차 안에 있었다. 하지만 러셀런트는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무미건조한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조금만 있으면 인적이 뜸한 관도로 들어설 테지. 그 때를 노리는 것이 낫겠군." 그는 에인션트급 블랙 드래곤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다고 해서 목표물을 노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개미 같은 인간들은 아무리 많이 모여있더라도 러셀런트에겐 결코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달려들기를 주저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들의 이목 때문이었다. 조만간 가해질 드래곤들의 전면적인 침공.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인간들에게 경각심을 줄 필요가 없었다. 아르카디아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이곳의 인간들에게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을 때를 노려야 했다. 그것을 상기하며 러셀런트는 놈의 종적을 간파할 수 있었던 조금 전 일을 떠올렸다. 돈트렐 전역에 광범위한 탐지 마법을 펼쳐놓고 목표물이 걸리기를 기다리던 러셀런트에게 미약한 마법의 기척이 느껴진 것은 조금 전의 일이었다. 그의 탐지 마법이 돈트렐 시 전역을 덮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사소한 마법일지라도 그의 이목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그의 촉각에 마법의 신호가 걸려들었다. 누구에게 보내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놀라운 것은 그것이 8번의 재배열을 마친 마법 신호, 곧 8서클로 구현된 것이라는 점이다. "놈이로군." 그것을 알아차린 러셀런트는 신호를 보낸 자가 목표물임을 직감했다. 대관절 누구에게 보내는지는 모르지만 아르카디아에 8서클 이상의 마법사는 놈밖에 없을 터였다. 마침내 꼬리를 잡았다는 생각에 러셀런트는 곧장 신호의 진원지를 역추적해 들어갔고 마침내 놈이 갇힌 마차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마차를 보자마자 러셀런트는 왜 신호가 8서클로 전개되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마법진이군. 멍청한 녀석, 동족들에게 사로잡히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마법진. 마법진의 힘이 작용하는 곳에는 마나의 분포가 극히 희박하다. 때문에 어지간한 마법은 전개할 수조차 없으며 한다 해도 고서클로 돌려야만 제대로 마법이 구현된다. 워낙 마나가 희박하기 때문에 효율을 비약적으로 높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러셀런트에게도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있었다. "이상하군. 놈은 9서클의 마스터라고 했다. 그런 놈이 저 정도 수준 낮은 마법진에 구속될 리가 없을 텐데?" 그것은 마나의 응집을 제약하는 또 다른 마법무구를 착용하고 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9서클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드래곤에 비할 수는 없더라도 9서클의 마스터는 일개 왕국의 흥망을 간단히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한낱 마법진에 구속되어 있다니……. 뭔가 미심쩍은 면이 있었지만 러셀런트는 간단히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놈이 날 불러들이려고 수작을 부린 것이라면 그것은 명백히 실수한 것이다. 녀석. 드래곤이 왜 마법의 조종으로 불리는 지를 뼈저리게 실감시켜 주겠다." 9서클이 아니라 9서클 할아비라도 드래곤에게만은 통하지 않는다. 마법은 철저히 높은 서클에 눌리는 것은 고금을 통틀어 변하지 않는 진리! 때문에 러셀런트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상황을 보아 나에게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수 있는 녀석은 소드 마스터 하나 뿐이다." 나머지 녀석들은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오로지 소드 마스터만이 강철보다 단단한 자신의 비늘을 뚫을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벌 한 마리에게 급소를 쏘여 죽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소드 마스터는 드래곤에겐 마치 독을 가진 벌에 능히 비견될 만한 존재였으니. 하지만 그것도 별 문제될 것은 없었다. 한 놈뿐이니 정신계 마법으로 미리 제압해 놓고 시작하면 되니 말이다. 정신계 마법. 대략 웜급 이상 되는 드래곤이라면 충분히 시전할 수 있다. 물론 익힌 수준에 따라 위력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상이 인간 한 명이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정신계 마법에 당한 인간은 일정기간동안 드래곤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문제는 그것이 한 번에 인간 하나에게만 적용된다는 점이다. 그런 단점이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우려할 점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만한 인간은 단 하나 뿐이었다. 물론 목표물인 가증스런 마법사가 있었지만 신경 쓸 바는 없었다. 9서클의 마스터라도 마법사인 이상 그에게 조금도 위협거리가 되지 못했으므로……. 생각을 정리한 러셀런트는 흰 이를 드러내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은 관도를 따라 멀어져 가는 마차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어차피 너는 죽은목숨이다. 오늘을 넘기지 못할 테니 조금 더 살게 된 것을 행운으로 생각해라." 나지막이 지껄인 러셀런트는 건물의 그늘 사이로 조용히 사라졌다. 이미 마차에 추적마법을 펼쳐 놓았으므로 놓칠 우려는 없었다. 돈트렐의 성문을 나온 호송단은 수도를 향해 기나긴 여정을 시작했다. 500명의 보병들이 섞여 있는 탓에 이동속도가 느리기 짝이 없었지만 그 누구도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어차피 급할 것이 없었기에 베르텍은 느긋하게 좌석에 몸을 묻은 채 여행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이 가는 길은 수도까지 직통으로 연결되는 관도였다. 치안이 잘 유지되기로 정평 있는 테르비아의 영토라서 출몰할 만한 도적단도 없었고 또한 나타나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500명의 병사들은 차지하고서라도 소드 마스터 하나와 팔라딘 7명의 호위라면 아르카디아에 존재하는 어떠한 도적단이라도 덮칠 엄두를 내지 못할 테니까. 그런 까닭으로 호송대 대부분은 느긋하게 관도를 이동했다. 하지만 초대하지 않은 자가 앞을 가로막은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응?" 넓디넓은 관도 한 복판에 떡 하고 버티고 선 그림자 하나를 보자 윌커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뛰어난 소드 마스터인 만큼 그의 시력은 범인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마치 자기 집 안방 마냥 관도 중앙에 떡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윌커슨의 주름진 노안에 주름살이 그려졌다. "무슨 꿍꿍이지?" 도적단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통상적으로 도적단은 길가 풀숲에 다수의 병력을 숨겨놓고 소수의 병력만 보여 이쪽을 안심하게 한 뒤 들이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이곳은 몸을 숨길만한 곳이 전혀 없는 허허벌판이었고 관도 옆에 은폐할 만한 공간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마치 자신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길목을 막고 서 있다니……. 윌커슨이 고민에 휩싸여 있는 사이에도 마차는 꾸준히 전진을 해 나갔고 마침내 정체불명의 인물은 호송대 병사들 대부분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까지 접근했다. "뭐야?" "정신나간 놈인가?" 의아하기는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호송하는 마차에는 테르비아 왕국의 문장이 선명히 그려져 있었으므로 어지간한 담량을 가진 사람은 감히 앞을 막아서지 못했다. 그런데도 단신으로 길목을 막은 간 큰 자가 있는 것이다. 베르텍 역시 의심 섞인 눈초리로 상대의 모습을 샅샅이 살폈다. 길목을 막은 자는 젊은 청년이었다. 절세미남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수려한 용모. 짙디짙은 흑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은 어지간한 처녀들의 방심을 흔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호송대에는 여자가 속해 있지 않았기에 청년의 용모에 넘어갈 만한 자는 없었다. 길을 비키지 않을 기세였기에 결국 베르텍은 호송대열을 정지시킬 수밖에 없었다. "정지." 마차가 멎자 팔라딘 하나가 잽싸게 뛰어내렸다. 청년에게 다가가서 길을 막은 연유를 물어보려는 것이다. "무슨 일인가? 우리는 테르비아 왕실에서 파견된 호송대다. 길을 비키지 않으면 법에 따라 엄한 처벌을 받을 테니 허튼 수작하지말고 비켜라." 하지만 청년은 팔라딘의 으름장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저벅저벅. 그는 느릿하게 걸어 마차로 다가왔고 선두의 병사들은 긴장한 채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물론 혼자가 확실했기에 후미의 병사나 기사들은 아직까지 상대가 하는 양만 뚫어지게 주시할 뿐이었다. 선두의 마차 가까이 다가온 청년은 베르텍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이 대열의 책임자냐?" '네가?' 베르텍은 기가 막혔다. 어디서 나타난 지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가 대뜸 자신에게 하대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스물 남짓해 보이는 애송이였고, 제법 옷차림이 멀끔하긴 했지만 그리 신분이 높아 보이진 않았다. '이놈이' 베르텍은 본능적으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흑마법사를 체포한 공으로 조금 있으면 궁정 마법사에까지 오를 수 있다는 자부심이 울화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자넨 누군가?" "………." "무슨 이유로 대열의 앞을 가로막았는지는 모르지만 당장 비키게? 단단히 경을 치고 싶지 않으면 말일세. 우린 아주 중요한 범인을 잡아 압송중이네." 그 말을 듣자 청년의 눈에서 빛이 일어났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192회 물론 청년의 정체는 러셀런트였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마법사를 내놔라? 그렇게 한다면 네놈들의 보잘것없는 목숨 따윈 살려주겠다." 어안이 벙벙해진 것은 호송대 전원이었다. 조용한 톤으로 흘러나왔지만 내용은 정말 경악할 만한 수준이었으니……. 만약 이 말이 천 명 가량의 도적들을 지휘하는 도적대장의 입에서 나왔다면 조금이나마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단신으로 길을 막은 자의 입에서 나올 말은 결코 아니었다. 때문에 베르텍은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냉랭하게 내뱉었다. "미친놈이군. 체포하라. 함께 수도로 압송해서 법이 얼마나 준엄한지 가르쳐 줄 것이다." 베르텍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냉랭한 음성이 호송대원 전원의 귀를 날카롭게 찔렀다. "그럴 줄 알았다. 그 대답으로 너희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콰콰콰콰. 청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엄청난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청년의 몸을 축으로 해서 부채꼴 형상으로 퍼져나간 파동은 땅을 온통 뒤흔들고 있었다. 우르르르. 대지가 진동하며 비명을 질러댔고 흔들리는 몸을 가누지 못해 병사들이 여기저기서 비틀거렸다. 마차를 끌던 말들도 요동치는 대지에 놀라 난리를 피워댔다. 히히히힝 "워, 워, 진정해라." 깜짝 놀란 병사들은 말을 달래기에 바빴다. 윌커슨을 비롯한 기사들은 이미 마차에서 뛰어내린 상태였다. 그들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검을 뽑아들어 청년에게 육박했다. 상대가 만만치 않은 존재임을 직감하고 본능적으로 행한 행동이었다. 추호도 동요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과연 정예는 정예였다. 하지만 기사들의 돌격은 오래지 않아 차단되었다. "욱." 파동과 함께 퍼져 나온 빛에 하나같이 눈을 가리며 몸을 돌려야 했다. 눈부신 광구가 청년의 몸을 덮어버렸기 때문에 기사들은 채 눈을 뜨지 못했다. 물론 돌격할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빛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에 도저히 방향을 분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이변은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헉." "저, 저게 뭐야?" 겨우 사물을 식별할 수 있게 된 병사들의 눈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는 거대한 실루엣이 들어왔다. 느닷없이 나타난 것은 키가 30미터는 될 듯한 거대한 괴물이었다. 전체가 검은 빛 비늘로 덮여 있었고 거대한 날개가 몸통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었다. 뿔이 솟은 거대한 머리통에서는 날카로운 엄니가 빛을 발했다. 그리고 커다란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잔혹한 빛은 병사들의 심금을 여지없이 사로잡은 상태였다. "드, 드래곤이야." "저, 정말이군. 여기서 드래곤을 목격하다니 꿈만 같군." 병사들은 입을 딱 벌린 채 생전 처음 보는 드래곤의 위용을 감상하기에 바빴다. 드워프 뿐만 아니라 아르카디아의 드래곤들 역시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경향을 가진 탓에 지금까지 그들이 드래곤을 구경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차에 갇힌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쇠창살 사이로 용병들은 드래곤의 모습을 감상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햐! 드래곤이야." "살아 생전에 드래곤을 볼 수 있다니……." 에인션트 급 블랙 드래곤 러셀런트의 몸에서는 강력한 힘과 기운이 흘러나왔다. 어찌 보면 아름답다고 볼 수 있을 듯한 모습. "정말 멋져……." 일행 중에서 유일한 여성인 율리아나는 몽롱해진 눈빛으로 대륙 최강의 생명체인 드래곤의 모습을 정신 없이 쳐다보았다. 자신들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줄도 모르고 말이다. "전투준비. 드래곤은 호송중인 죄수를 노리고 있다. 모두 방어진을 형성하라." 오래지 않아 정신을 차린 윌커슨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정신 나간 듯 드래곤을 쳐다보던 병사들은 호통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밀집대형으로 방어준비." 그들은 곧 훈련받은 대로 마차 주변에 둥글게 포진하려 했다. 물론 실력 있는 기사들은 모조리 흑마법사를 가둔 마차에 배치했다. 하지만 인간들에게 대비할 틈을 줄 러셀런트가 아니었다. 경험 많은 그는 이미 몸 속의 기운을 있는 대로 끌어올린 상태였다. "인간들이여. 아등바등 살아가는 너희들의 비천한 목숨, 내가 손수 끊어주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지어다." 말을 마친 러셀런트는 아가리를 좍 벌렸다. 그리로 수없이 많은 미세한 물방울 같은 것이 스프레이 형태로 분출되었다. 콰콰콰콰. 마치 맹렬한 폭풍우를 만난 안개와도 같은 모습. 그것은 미처 대비할 사이도 없이 호송대 대열을 덮어버렸다. 햇빛이 쨍쨍 내려 쬐는 날이었기에 안개는 삽시간에 수많은 무지개를 만들어냈다. 탄성이 절로 일어날 정도로 아름다운 무지개군(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서운 살인안개란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크, 큭. 이것은?" "사, 산이야. 살려줘. 몸이 녹고 있어." 병사들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몸에 걸친 갑옷이 삽시간에 퇴색되며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강철 갑옷이 그 지경이니 인간의 몸은 오죽하겠는가? 병사들의 몸은 어느새 뼈가 보일 정도로 녹아 들어가고 있었다. "끄으으." 병사들은 부들부들 떨다 쓰러지기가 무섭게 몸을 축 늘어뜨렸다. 정말 가공할 만한 위력을 가진 살인안개였다. 애시드 브레스(acid breath) 블랙 드래곤만이 뿜을 수 있는 브레스로써 일대 다수의 접전에서 가히 절대적인 위력을 보인다. 대기를 온통 뒤덮으며 휘몰아치는 강산의 안개 속에서는 그 누구도 무사하기 힘들었다. 이 브레스에서 무사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마법사 아니면 팔라딘 이상 되는 기사들뿐이었다. 그 외의 병사들이 애시드 브레스를 견딜 가능성은 애당초 없었다. 호송대에 소속된 500여 병사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전멸해버렸다. 갑옷의 골조와 뼈만 남은 참혹한 모습으로……. 그 모습을 본 베르텍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세, 세상에……." 얼마나 놀랐는지 그는 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무려 500명의 병사들이 몰살되는 장면을 바로 앞에서 목격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다행히 그를 비롯한 팔라딘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것이 블랙 드래곤 특유의 애시드 브레스란 것을 파악한 순간 돈트렐에서 따라온 팔라딘들은 서둘러 베르텍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때맞춰 베르텍이 실드(Shield)를 펼쳤기 때문에 다행히 목숨을 건진 것이다. 그러나 청년에게 용건을 묻기 위해 다가갔던 팔라딘은 불행히도 목숨을 잃었다. 너무 가까이서 뿜어져 나왔기 때문에 미처 갑옷에 마나를 밀어 넣지 못했던 것이다. "이, 이런." 베르텍은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후미의 병사들 역시 전멸되는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나같이 뼈만 남긴 채 녹아버린 상태였다. 오직 무사한 것은 윌커슨과 휘하의 기사들뿐이었다. 그들은 갑옷에 마나를 집중시킨 탓에 다행히 녹는 신세에선 벗어날 수 있었다. 갑옷의 표면에 맺힌 오러의 막은 살인안개로부터 그들의 갑옷과 몸을 지켜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살인안개가 호흡기를 통해 스며들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호흡을 전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베르텍은 서둘러 손짓을 했다. "어, 어서 오십시오." 윌커슨은 휘하 기사들을 대동해 재빨리 베르텍에게 다가갔다. 쓰쓰쓰. 베르텍이 서둘러 주위에 실드를 펼쳐주자 그들은 겨우 가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있었다면 안개에 녹아버리기에 앞서 숨이 막혀 죽을 뻔했다. "헉헉. 고, 고맙다." 그들은 두려운 눈빛으로 사방을 휩쓸고 있는 살인안개를 주시했다.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브레스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마차에 갇혀 있는 죄수들의 안전을 생각하기 힘들었다. 죄수들이 십중팔구 뼈만 남기고 깡그리 녹아버렸을 터였다. 베르텍은 정황을 보아 그것이 틀림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궁정마법사가 될 것이란 꿈도 그와 함께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도, 도대체 드래곤이 왜 죄수를 노리는 거지?" "저, 전들 알겠습니까?" 생존자들은 겁에 질린 눈빛으로 안개 사이로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거대한 드래곤의 실루엣을 쳐다보았다. 말로만 들었던 드래곤의 무서운 파괴력을 그때서야 실감한 것이다. 그러던 사이 살인안개는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후우우웁. 러셀런트가 브레스를 뿜는 것을 그치자 살인안개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사방을 뒤덮은 아름다운, 그리고 끔찍하기도 한 무지개들이 순차적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닿는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애시드 브레스. 물론 러셀런트도 안개에 덮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면역성을 가진 탓에 러셀런트의 피부는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이른바 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모든 드래곤들이 마찬가지였다. 만약 자신의 브레스에 내성을 가지지 않았다면 러셀런트는 채 브레스를 뿜어내기도 전에 신체 장기가 먼저 녹아버렸을 터였다. 산성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참혹한 장내의 정경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 모습을 쳐다본 러셀런트는 포효를 내질렀다. 이름하여 승리의 로어. 콰우우우우. 러셀런트의 포효는 간신히 살아남은 몇몇 생존자의 심금을 사로잡아가며 멀리 멀리 울려 퍼졌다. 이제 남은 것은 단 일곱 명뿐이었다. 윌커슨과 베르텍은 호송대에서 살아남은 것이 자신들뿐이라고 단정했다. 평범한 용병들이 애시드 브레스를 견딜 수는 없는 노릇. 비록 거기에 팔라딘이 한 명 끼여 있긴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대마법 갑옷을 착용하지 않은 이상 산성 안개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 밖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마차 쪽을 쳐다본 베르텍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아니?" 골조만 남긴 채 녹아버렸을 것이라 생각했던 마차는 의외로 멀쩡했다. 물론 표면이 이리저리 녹아있긴 했지만 철창이 쳐진 부분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베르텍은 철창 너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그 속의 죄수들은 하나도 죽지 않았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마차를 빠져나오려 하는 죄수들을 보자 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마차를 계속 주시하던 베르텍의 눈에 마차를 뒤덮은 푸른 빛 장막이 들어왔다. 은은하게 빛나는, 제대로 식별하기조차 힘든 장막이었다. "저, 저것은 실드?" 장막의 정체를 알아차린 베르텍은 고민에 휩싸였다. 도대체 누가 실드를 전개해서 죄수를 보호했을까? 베르텍에겐 결코 그럴 여력이 없었다. 아니 마차 두 대를 통째로 실드로 덮어씌울 만한 실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러던 베르텍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혹시 드래곤이?" 고개를 돌린 베르텍의 눈에 윌커슨이 기사 두 명을 대동해서 드래곤에게 육박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죽음을 무릅쓴 용감한 행동이었지만 베르텍의 눈엔 무모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상황을 보아 자신들이 살아날 길은 윌커슨이 드래곤을 처치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베르텍의 속은 점점 타 들어가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자신도 나서서 윌커슨을 지원해야 했지만 도저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 정도 크기의 드래곤이라면 틀림없이 에인션트 급이었고 그렇다면 10서클의 마스터란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그렇다면 마법사인 자신이 드래곤에게 덤벼드는 것은 한 마디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 표현할 수 있었기에 베르텍은 부들부들 떨며 오직 윌커슨의 공격이 통하기를 염원했다. 비록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일이었지만 현재로썬 기대를 걸 만한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193회 "후후. 가소롭군." 겁도 없이 자신을 향해 육박해오는 인간 셋을 보고 러셀런트는 코웃음을 쳤다. 물론 저들 정도의 기사라면 분명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릴 수 있을 터였고 그것은 물론 자신의 단단한 비늘을 쉽사리 가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접근을 허용했을 때의 일이었다. 접근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강한 소드 마스터라도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러셀런트는 지체 없이 캐스팅에 들어갔다. 본체로 돌아온 이상 구현되는 마법은 용언 마법이었고 거기에 주문이 필요할 리가 없었다. "으앗." 윌커슨은 갑자기 허공으로 솟구치는 자신을 발견하고 혼비백산했다. 열심히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발이 땅과 떨어진 이상 달려도 소용이 있을 턱이 없었다. 놀란 윌커슨은 발버둥을 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허공에서 함께 허우적거리는 휘하 기사들을 발견하자 그의 얼굴에 암울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은 채 접근하기도 전에 드래곤의 마법에 당한 것이다. "드래곤에게 덤비는 녀석들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주지." 냉혹한 일성과 함께 윌커슨의 양옆에서 대 폭발이 일어났다. 콰콰쾅. 후끈 풍겨져 오는 열기로 눈을 질끈 감아야 할 정도의 대 폭발이었다. 눈을 뜬 윌커슨의 몸에 산산조각이 난 휘하 기사들의 살점과 갑옷조각이 와서 부딪혔다. 후두두둑. 절망감으로 인해 윌커슨의 얼굴은 삽시간에 시커멓게 변해버렸다. 말로만 들었던 드래곤의 파괴력을 절실히 실감한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무언가가 머리 속을 파고들었다. "이, 이것은 정신계 마법."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린 윌커슨은 눈을 부릅떴다. 죽을힘을 다해서라도 저항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허사였다. 허공에 고정된 채 몸부림치던 윌커슨의 동공에서는 점점 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끄, 끝이야."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르텍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기사 두 명이 허공에서 산산조각이 난 후 그는 사력을 다해 공간이동을 전개하려 시도했다. 윌커슨이야 죽던 말던 자신만 살아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공간이동은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었다. 사방을 빙 둘러 공간이동 방해장이 쳐져있었고 도저히 틈을 찾아볼 수 없었다. 윌커슨조차 당해버린 상태라서 지금으로썬 도저히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허공에서 풀려나긴 했지만 윌커슨은 검을 늘어뜨린 채 멍청히 서 있을 뿐이었다. 한 눈에 보아도 드래곤의 정신계 마법에 제압 당한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베르텍은 정말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다. 드래곤의 살기 넘치는 눈초리가 자신에게 향하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오줌을 지렸다. 주르르. 당장이라도 육중한 드래곤의 앞발이 자신을 뭉개버릴 것 같았다. 멍청하게 서 있던 윌커슨을 한 번 쳐다본 드래곤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쿵쿵쿵 걸음을 옮김에 따라 대지가 비명을 질러댔다. 육중한 드래곤의 무게를 견딜 정도로 지반이 튼튼하지 못했던지 걸음을 옮김에 따라 깊숙한 구덩이가 패였다. "사, 살려주시오." 불쌍하게도 베르텍은 걸음을 옮길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 최강의 생명체 드래곤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에 넋이 완전히 빠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드래곤은 베르텍을 목표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었다. 쿵. 금방이라도 베르텍을 밟아버릴 것처럼 보이던 거대한 발이 그의 앞에서 뚝 멈췄다. 부들부들 떠는 베르텍을 지척에 둔 상태에서. 드래곤은 그의 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베르텍 따위에겐 관심도 없는 모습이었다. 곧 벼락같은 음성이 베르텍의 귀를 자극했다. "드디어 만나게 되었군." 귀에 심각한 통증을 느낀 베르텍이 옆으로 물러나건 말건 드래곤은 상관없다는 듯 장내의 한쪽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반쯤 부서진 마차에서 걸어나오는 검은 로브의 마법사에게 말이다. 데이몬은 무표정한 눈빛으로 러셀런트를 쳐다보았다. 그의 팔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팔찌들은 이미 산산조각이 난 채 마차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물론 마법진 역시 과도한 마나의 재배열을 버티다 못해 파괴된 상태였다. 드래곤을 힐끔 쳐다본 데이몬은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푸른 빛 장막에 덮인 마차가 놓여 있었고 그 속에는 여러 개의 눈동자들이 불안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용병들이 갇혀 있는 마차에 실드를 덮어씌워 살인안개로부터 구해준 것은 바로 그였다. 베르텍이 세심하게 신경 쓰긴 했지만 애당초 그의 실력으론 데이몬을 구속할 순 없었다. 그것을 떠올린 데이몬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동료로 삼을 가치가 있는 녀석들이었어……." 사실 그는 일부러 제압된 척 한 것이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베르텍 따위는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그를 사로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일부러 체포되는 길을 택했다. 왜냐하면 그는 용병들의 마음을 한 번 시험해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은혜를 베풀어 수라사령심법의 틀을 잡아주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본시 알 수 없는 법이다. 때문에 데이몬은 일부러 위기를 만들어 용병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절박한 상황에 처한다면 사람의 본마음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법이니까……. 데이몬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용병들은 처벌을 감수해가며 자신을 동료로 인정했다. 그것이 비록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해도 데이몬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적어도 저들에게만은 뒤통수를 맞을 일이 없어 보였으므로……. 마차에 갇힌 용병들의 면면을 한 번씩 돌아본 데이몬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블랙 드래곤의 불타오르는 듯한 눈동자가 자신을 잡아먹을 듯 쏘아보고 있었다. 눈빛을 맞받으며 데이몬은 히쭉 웃었다. "여기까지 쫓아오느라 수고했어." 러셀런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상대의 태도는 도리어 자신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마치 힘을 가진 자의 여유 같은 것. 러셀런트는 고개를 흔들어 불길한 감정을 떨쳐버렸다. 저까짓 마법사 따위가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에 러셀런트는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가증스러운 놈. 인간 따위가 감히 드래곤의 마법 보고를 훔쳐 달아나다니……." "………." "인크레시아는 트루베니아의 모든 드래곤이 모은 보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만 보관해놓은 마법보고이다. 그런 인크레시아를 훔쳤으니 백 번 죽어도 여한이 없으렸다." 러셀런트의 말에 놀란 것은 도리어 용병들이었다. 세상에 드래곤들의 마법 보고를 훔칠 담량을 가진 인간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므로……. 그것은 베르텍과 긴장한 채 서 있는 네 팔라딘도 마찬가지였다. 흑마법사가 그런 짓을 했을 줄은 정녕 모르는 사실이었다. 러셀런트는 인간들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데이몬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비록 네놈의 손에 그린 드래곤 지크레이트가 죽었지만 그것은 문제삼지 않겠다. 오죽 못났으면 인간 마법사 따위에게 죽음을 당했을까? 하지만 정녕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인크레시아를 훔친 죄이다. 그것은 너뿐만 아니라 네놈이 속한 종족 모두의 목숨을 바쳐도 치를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난 이 자리에서 네놈이 저지른 죗값을 받아내겠다." 추상같은 엄포였지만 데이몬은 추호도 주눅들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빙글빙글 웃으며 러셀런트를 살살 약올리고 있었다. "어떻게 받아낼 생각이지? 난 별로 부자가 아니라서 죗값을 치르기 힘들텐데……." "………." "이러면 어떨까? 인크레시아 속에 보물이 제법 많더군. 그것을 조금 꺼내 줄 테니 죗값을 치른 것으로 하면 어떨까?" 기가 막힌 나머지 잠시 말을 잊었던 러셀런트는 거세게 분노를 토해냈다. "미천한 인간 녀석이 정녕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구나. 내 당장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방종을 저지른 데 대한 응징을 하리라!" 그와 동시에 러셀런트의 몸 주위로 엄청난 마나의 파동이 휘몰아쳤다. 조금 떨어져 있는 데이몬의 로브 자락이 나풀거릴 정도로 방대한 마나의 회오리였다. 하지만 데이몬은 추호도 당황하지 않았다. 복수의 대상을 눈앞에 둔 때문인지 그의 눈빛은 더욱 가라앉고 있었으니……. "자…자…. 진정하라고. 일단 보물을 보고 흥정해야지. 성급하게 굴면 쓰나?" 말을 마친 데이몬은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마법을 전개하려던 러셀런트가 인크레시아를 보고 잠시 멈칫한 순간 데이몬은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나의 전사들이여! 복수의 시간이 돌아왔다. 너희들의 모든 것을 앗아간 원흉이 바로 앞에 있다. 어서 나와서 원한을 백 배로 갚아주어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인크레시아 속에서 네 줄기의 검은 빛이 번개처럼 튀어나왔다. 거무스름한 빛들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러셀런트를 향해 일직선으로 난입해 들어갔다. 동시에 유부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음성이 러셀런트의 귀를 파고들었다. "손꼽아 기다렸다. 이 순간을……." 소름끼치는 안광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내닫는 빛들은 바로 데스 나이트들이었다. 드래곤으로 말미암아 모시던 군주와 가족을 모두 잃고 이승을 하염없이 떠돌던 망령들. 500년의 세월동안 원한을 수도 없이 곰씹으며 복수의 날만을 기다려왔던 그들은 마침내 기회를 얻었다. 영혼을 매개로 저주받은 데스 나이트의 몸을 얻어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그들이 마침내 드래곤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꿈에라도 만나길 갈망했던 원수인지라 그들은 추호도 망설이지 않았다. 츄르르르르 이카롯트의 황가를 상징한다는 르헤르트 세이버를 꼬나 쥐고 가장 선두에서 몸을 날리는 데스 나이트는 바로 헬버트론이었다. 검신 전체를 암흑의 오러 블레이드로 뒤덮은 채 몸을 날리는 그의 눈에서는 분노의 광망이 줄기줄기 솟구치고 있었다. 그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이었던가? 모든 것을 앗아간 원흉을 보자 그의 뇌리 속에는 오로지 복수말고는 다른 생각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가는 데스 나이트는 라인델프였다. 스컬 블레이드를 움켜쥔 그의 손에는 드래곤의 머리통을 가차없이 베어버리겠다는 기백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 뒤를 거대한 자이언트 킬러를 든 프림베르그가 받쳤고 사라미스 역시 사벨의 예기를 번뜩이며 거침없이 내닫고 있었다. 데스 나이트들의 몸은 암흑의 투기를 머금어 마치 안개와도 같은 모습이 되어 드래곤을 덮쳐가고 있었다. 그것을 본 러셀런트는 깜짝 놀랐다. "저, 저것들은 데스 나이트? 그렇군. 놈이 세바인에 은거해 있던 이유가 바로 저것 때문이었군." 다소 놀랐지만 러셀런트는 얼른 냉정을 되찾았다. 덮쳐오는 상대들이 한 눈에 보아도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가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러셀런트에게 두려울 것은 없었다.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한 저들은 인간 소드 마스터와 결코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정신계 마법으로 제압할 수 없다는 것만 빼고……. 러셀런트의 동공에 비릿한 빛이 흘렀다. "멍청하군. 고작 데스 나이트 따위를 믿고 날 불러들일 생각을 했나? 그것이 오산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마." 말을 마친 러셀런트는 재빨리 마나를 재배열했다. 저 정도 데스 나이트라면 사실 아까 제압한 인간 소드 마스터보다 조금 더 위협적인 존재였기에 고서클의 마법으로 확실하게 끝내야 할 듯 보였다. "일단은 허공에 띄워야겠군. 그래놓고 라이트닝 버스트로 흔적도 없이 태워버리면 제 아무리 언데드라도 다시 살아날 수 없을 거야." 생각은 길었지만 행동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러셀런트가 손을 슬쩍 휘젓자 맹렬히 달려오던 데스 나이트들이 별안간 허공으로 슥 떠올랐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러셀런트는 라이트닝 버스트를 전개했다. 체인 라이트닝보다 족히 열 배 이상의 파괴력을 자랑하는 라이트닝 버스트. 8서클의 마법이었으므로 제 아무리 마법공격에 내성을 가진 데스 나이트라도 일격에 재가 되어버릴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데스 나이트들을 향해 쏘아지는 푸르스름한 빛을 쳐다보며 러셀런트는 자신의 예측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파파파팟. 공교롭게도 라이트닝 버스트가 작렬하기 직전 데스 나이트들은 마법에서 풀려났다. 워낙 가진 실력들이 출중한지라 데스 나이트들은 절묘한 회피동작으로 라이트닝 버스트를 피해냈다. 말 그대로 간발의 차이였다. 뜻밖의 상황전개에 잠시 멍해진 러셀런트는 이내 정황을 알아차렸다. "감히 나의 마법전개를 방해하다니………." 그는 성난 눈빛으로 한 쪽을 쳐다보았다. 그 쪽에는 가증스런 마법사가 수인을 맺은 채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데스 나이트를 허공에 고정시켰던 마법을 푼 자는 바로 그였다. "나를 잊었나 보군. 비록 널 해할 수 없다 하나 내 실력이면 네가 전개하는 마법 따윈 얼마든지 방해할 수 있어." "이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러셀런트는 덮어놓고 라이트닝 버스트를 날렸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194회 속도하면 따라올 것이 없는 것이 빛 계열 마법이라 라이트닝 버스트는 순식간에 마법사를 산산조각 내어 버렸다. 콰쾅. 마법사의 몸이 맥없이 흩어지는 것을 본 러셀런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군. 저 정도의 공격에 당할 녀석이 아닌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측면에서 걸쭉한 음성이 들려왔다. "맞았어. 소개하지. 조금 전에 당한 것은 내 분신 중 하나라네. 기문둔갑술의 일종인 분신술(分身術)이라고 하지. 미러 이미지와는 달리 실체는 없지만 워낙 순간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네 녀석의 눈을 속이기엔 모자람이 없을 거야." 대경실색한 러셀런트가 고개를 돌렸을 때 엄청난 크기의 불덩어리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절정기를 자랑하는 청백색의 불빛. 한 눈에 봐도 9서클 마법인 헬 파이어였다. 하지만 거기에 만만히 당할 러셀런트가 아니었다. 펑 러셀런트가 손을 휘젓자 날아오던 헬 파이어는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주공격이 아니었으니……. "으헉." 헬파이어를 막아냈다는 안도감도 잠시. 하반신을 향해 엄습해 오는 날카로운 기운을 감지한 러셀런트는 급히 실드를 전개하며 몸을 틀었다. 하지만 기운은 실드를 여지없이 갈라버리며 피부에 깊숙한 상처를 새기고 있었다. "이런……. 데스 나이트를 잊었군." 놈이 전개한 헬 파이어는 자신의 이목을 돌리기 위한 미끼에 지나지 않았다. 그 틈을 노려 다가온 데스 나이트들이 깊진 않지만 제법 쓰라린 상처를 남겼던 것이다. 상처를 통해 피가 주르르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자 러셀런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러셀런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앞발을 휘둘러 데스 나이트들이 있는 곳을 가격했다. 콰쾅. 땅이 깊숙이 패이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들은 하나같이 상상 이상의 실력자들이었다. 결코 느리다고 볼 수 없는 공격이었지만 하나도 당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도리어 놈들은 역으로 땅을 짚은 러셀런트의 앞발을 노리고 있었다. 러셀런트의 키가 워낙 컸기에 놈들이 노릴 곳은 오로지 네 개의 발 밖에는 없었다. "캬아아악." 앞발에서 찌릿한 통증을 느낀 러셀런트는 거세게 포효를 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에서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거침없이 발산되고 있었다. 도대체 러셀런트가 언제 통증을 느껴 보았을까. 하찮은 미물에 불과한 언데드에게 상처를 입은 탓에 러셀런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역시 노련했다. 자신이 에인션트 급이란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러셀런트는 이성을 잃기는커녕 가장 적합한 방법을 모색해 놓은 상태였다. '타임 슬립(Time sleep). 놈들을 멈춰놓고 일격에 박살을 내버릴 것이다.' 날파리처럼 자신 주위를 맴돌며 칼질을 해 대는 데스 나이트들. 그들에게 적절히 대응을 해 가며 러셀런트는 한껏 마나를 끌어 모았다. 사실 타임 슬립은 드래곤조차도 전개하기 벅찰 정도의 고서클 마법이었다. 마나가 모이자 러셀런트는 지체 없이 재배열을 했다. 이미 그의 앞발과 뒷발은 데스 나이트들의 공격에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치명상은 입지 않았지만 성가시지 않을 수 없었다. 타임 슬립을 완성한 러셀런트는 지체 없이 그것을 데스 나이트들에게 걸었다. "드래곤의 권능으로 명령한다. 시간이여 멈춰라." 뚝. 러셀런트의 몸에 거침없이 칼자국을 내고 다니던 데스 나이트들이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그들에게 한정된 시간이 더 이상 흘러가지 않게 된 것이다. "이놈들." 호통과 함께 러셀런트의 꼬리가 엄청난 파공성을 흘리며 굳어버린 데스 나이트들을 향해 내려쳐졌다. 기세로 보아 데스 나이트들은 그대로 가루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러셀런트의 시도는 또다시 빗나가버렸다. 타임 슬립을 형성하고 있던 마나와 전혀 속성이 다른 마나가 슬그머니 끼여들자 마법은 덧없이 해제되어 버렸다. 데이몬은 타임슬립에 걸려 있던 데스 나이트들에게 도리어 헤이스트를 걸어버렸다. 헤이스트는 타임 슬립과 정반대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고, 두 판이한 속성의 마나가 충돌할 경우 필연적으로 마법은 파훼될 수밖에 없다. 두 가지 모두 말이다. 콰콰콰쾅. 거대한 러셀런트의 꼬리가 대지에 깊숙이 상처를 냈지만 애석하게도 데스 나이트의 잔해는 남아있지 않았다. 꼬리질이 작렬하기 직전 타임 슬립이 풀려 버렸고 데스 나이트들은 간발의 차이로 으깨어지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살짝 피해낸 데스 나이트들은 이번에는 꼬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장검들이 꼬리를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슈각. 강철보다 단단한 비늘이 여지없이 갈라지며 핏둥치가 분출되었다. 계속되는 통증에 러셀런트는 미칠 것 같은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데스 나이트들을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생각뿐이었다. 단 한 방에 데스 나이트를 으깨버릴 힘을 가진 러셀런트였지만 그것도 명중시킬 수 있을 때 유효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는 데스 나이트를 잡을 방법은 오로지 마법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방해자에 의해 계속 차단되고 있었으니……. 러셀런트의 불타는 듯한 시선이 방해자에게로 향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의기양양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마법사. 그만 아니었다면 데스 나이트들은 벌써 박살이 나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흠모하며 쳐다볼 필요는 없어. 내 얼굴은 별로 잘 생기지 않았으니 말이야." 넉살을 떠는 마법사를 본 러셀런트는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마법사를 먼저 처치하지 않는 이상 방도가 없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데스 나이트들의 몸놀림은 그 정도로 빨랐다. 놈들을 처치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마법을 건 뒤 공격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마법사를 먼저 처단해야 했다. "이놈. 죽어라." 러셀런트는 마법사에게 타임 슬립을 걸려 했다. 시간만 멈춰 놓는다면 마법사 따위야 초급마법으로도 간단히 처치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만만히 먹혀들지 않았다. 눈치를 챈 마법사가 재배열중인 마나의 흐름에 자신의 마나를 은근슬쩍 끼워 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법사의 방해 때문에 타임 슬립은 전개될 듯 하면서도 덧없이 흩어져버렸다. 싸우는 방법을 정말 얄미울 정도로 잘 아는 녀석이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러셀런트는 입을 좍 벌렸다. 브레스를 토해내어 놈을 통째로 녹여버리려는 것이다. 촤아아악. 이미 오백 명의 병사들을 뼈로 만들어버린 공포의 살인 안개가 데이몬을 덮어씌웠다. 하지만 데이몬은 만만히 당하지 않았다. "파이어 월(Fire wall)" 화라라락. 허공에서 갑자기 발현한 화염의 벽이 살인안개를 차단했다. 러셀런트의 브레스는 데이몬의 몸에 닿기도 전에 증기로 화해버렸다. 하지만 러셀런트는 돌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놈." 러셀런트의 육중한 꼬리가 화염의 벽에도 아랑곳없이 파이어 월로 덮인 공간을 그대로 강타했다. 꼬리에 화상을 입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놈을 처치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콰쾅. 흙먼지가 자욱하게 흩날리며 화염의 벽은 퍽 하고 스러져버렸다. 데스 나이트들에게 베인 상처로 화기가 스며들어 쓰라렸지만 러셀런트는 아랑곳없이 꼬리질을 퍼부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걸리는 감각은 전혀 없었다. 마법이 전개된 흔적을 간파한 러셀런트는 이를 갈았다. "놈. 블링크를 썼군." 러셀런트의 타는 듯한 눈빛이 사방을 샅샅이 훑었다. 데스 나이트들이 다가와 검을 날려대고 있었지만 러셀런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먼저 마법사를 잡아야만 놈들을 처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데스 나이트들의 공격은 현재로썬 통증은 줄 수 있을지언정 치명상은 가할 수 없었다. "저기 있군."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빛을 발했다. 조금 떨어진 절벽 위에 놈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러셀런트는 즉시 블링크를 펼쳤다. 쓱 러셀런트의 거대한 몸이 마치 거짓말처럼 그곳에서 지워져버렸다. 그리고 데이몬의 지척에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러셀런트는 느닷없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캬아아악." 그가 모습을 드러낸 곳에는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매직 미사일이 사방을 빽빽이 뒤덮으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중 몇 개가 러셀런트의 내부를 그대로 강타했던 것이다. 이른 바 공간 계열 마법의 허점을 노린 공격이었다. 데이몬은 이미 빈틈없이 함정을 파놓고 러셀런트를 기다렸던 상태였다. 아무리 거죽이 단단하다 할지라도 내부는 약할 수밖에 없다. 블링크에 의해 겹쳐진 매직 미사일이 간이나 허파 따위의 내부 장기에 작렬했으니 러셀런트가 받은 충격은 결코 작지 않았다. 콰우우우. 순식간에 크나큰 내상을 입은 러셀런트는 몸을 구부리며 괴로워했다. 힐을 써서 내상을 치료하긴 했지만 잠시나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러셀런트였다. 물론 마법사에 신경 쓸 겨를은 전혀 없었다. 콰콰콰콰. 난데없이 청백색 화염덩어리가 러셀런트의 머리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통증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가운데에서도 러셀런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날아오는 것은 의심할 나위 없는 헬 파이어였고 아무 대비 없이 격중당한다면 제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깨끗하게 이승을 하직할 수밖에 없다. 막던가 피하던지 방도를 찾아야 했다. 러셀런트는 막기로 작정하고 실드를 펼쳤다. 파팍. 잔뜩 긴장하고 있었지만 실드를 통해 전해진 것은 아주 경미한 충격뿐이었다. 그것을 느끼자 러셀런트는 눈을 부릅떴다. 위력을 보아 저것은 결코 헬 파이어가 아니었다. 고작해야 1서클의 파이어 볼에 지나지 않는 초급 마법. 헬 파이어가 겉모습만 그럴 듯한 가짜 공격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러셀런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인간 하나에게 이렇게 농락 당해 본 것은 오천 년 세월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이놈!."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마법사를 향해 몸을 날리는 러셀런트. 또다시 헬 파이어 한 방이 정면으로 날아들었지만 그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만약을 대비해 실드는 단단히 펼쳐놓았지만 말이다. "또다시 가짜로 날 속일 생각인가……. 쿠엑." 콰콰콰쾅. 애석하게도 이번에는 진짜였다. 실드를 통해 전해지는 충격에 러셀런트의 육중한 몸이 휘청했다. 실드를 펼쳐놓기는 했지만 가짜인줄 알고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실드에 맞아 흩어진 헬 파이어의 화염은 그대로 대지를 불태우고 있었고 거기서 피어나는 연기가 사방을 뒤덮었다. 비록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폭발의 여파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러셀런트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때 연기 속에서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맛이 제법 맵지? 하나 더 줄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연기 속에서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헬 파이어. 그것은 러셀런트의 머리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들고 있었다. 콰콰콰콰 러셀런트는 고민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바로 지척에서 날아왔기 때문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파악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는 결국 피하기로 작정했다. 러셀런트가 머리를 숙이자 헬파이어는 덧없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상대가 그것을 노리고 있을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러셀런트였다. "캬아아악." 난데없이 턱과 관자놀이 부분에서 끔찍한 통증이 전해지자 러셀런트는 비명을 질렀다. 연기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데스 나이트들이 머리를 숙이자마자 가차없이 공격을 가해왔던 것이다. 완벽한 연수합격. 놈의 계략에 속아 머리를 숙인 것이 화근이었다. 그 대가로 얼굴에 큰 상처를 입어 피를 줄줄 흘려야 했던 러셀런트였으니……. 얼굴의 상처가 팔다리의 상처보다 통증이 심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놈들……." 눈이 뒤집힌 러셀런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앞발을 휘저었다. 파파팍. 에인션트 급 드래곤답게 러셀런트는 역시 노련했다. 그 와중에서도 용의주도하게 뒷발과 꼬리로 데스 나이트가 몸을 피할 공간을 차단했으니 말이다. 덜컥 하고 뭔가가 걸리자 러셀런트는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바닥에 짓눌렀다. 우두두둑. 드래곤 본 재질의 갑옷이 덧없이 으스러졌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195회. 러셀런트에게 잡힌 것은 불운하게도 헬버트론이었다. 블랙 드래곤의 관자놀이에 제법 큰 상처를 남기기는 했지만 너무 깊숙이 들어간 때문에 운 나쁘게 걸려들었던 것이다. 앞발에 잡힌 것이 하반신 부분이었으므로 헬버트론의 허리 아래 부분은 금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져 버렸다. 콰지직. 러셀런트는 내친 김에 붙잡힌 데스 나이트의 상반신까지 으깨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뭔가가 수도 없이 눈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뭐, 뭐야?" 위기에 직면하면 눈을 감는 것은 당연지사. 러셀런트는 다급히 눈을 감았고 무언가가 눈꺼풀 부분을 무수히 두드렸다. 그것은 바로 데이몬이 발사한 매직 미사일이었다. "이런." 둔탁한 통증을 느낀 러셀런트는 즉각 실드를 전개했다. 평소 매직 미사일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러셀런트였지만 눈꺼풀을 정통으로 두드리는 이상 긴장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얇은 눈꺼풀이 비늘로 덮여 있을 리가 없었으므로 러셀런트로써는 실드를 전개할 수밖에 없다. 고통에서는 벗어났지만 이번에는 다른 통증이 러셀런트를 엄습했다. 콰우우우. 발톱이 송두리째 잘려 나가는 것을 느낀 러셀런트는 눈을 부릅떴다. 매직 미사일에 신경 쓰는 사이 일단의 데스 나이트들이 달려들어 동료를 잡고 있는 발톱을 깡그리 잘라버린 것이다. 잘린 부위에서 핏줄기가 간헐적으로 분출되었다. 하반신이 으스러진 데스 나이트는 이미 자신의 손을 벗어난 후였다. 정말 손발이 척척 맞는 공조였으므로 러셀런트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아, 안 돼. 승산이 없어." 이대로 계속 싸움을 벌인다면 당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비록 치명상을 입진 않았지만 난자당한 상처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왔다. 이 상태로라면 싸울수록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도 엄연히 생명체에 속한다. 이처럼 출혈을 계속해서 방치한다면 결국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러셀런트는 생전 처음으로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하찮게만 생각했던 인간에게 이렇게까지 몰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시각각 엄습해오는 죽음의 공포에 러셀런트는 비명을 내질렀다. 캬아아아. 말로만 들었던 마법사와 소드 마스터의 조합. 정말 완벽한 조합이었다. 만약 자신이 에인션트 급 드래곤이 아니었다면 벌써 죽어도 여러 번 죽었을 것이다. 그 조합이 이토록 무섭다니……. 지금도 데스 나이트들은 자신 주변을 누비며 계속해서 몸에다 칼자국을 내고 있었다. 거듭되는 출혈로 정신이 점차 가물가물해져오는 상황. 마법사는 필경 마나를 잔뜩 끌어 모은 채 자신이 전개하는 마법을 파훼할 채비를 단단히 갖추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러셀런트는 결국 임무를 포기했다. 이대로 가다간 당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다,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해. 놈을 잡으려면 적어도 드래곤 둘 이상이 덤벼야 승산이 있어." 러셀런트는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피하는 것도 여의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방해할 수 있는 여지가 가장 높은 공간이동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놈의 실력을 감안해 봐도 더욱 그러했다. 결국 러셀런트는 날아올라 몸을 피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려면 먼저 준비할 절차가 있었다. "에잇." 러셀런트의 손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빛줄기와 불덩어리들이 퍼져 나왔다. 콰콰콰콰. 파이어 볼이나 라이트닝 볼트 따위의, 설마 드래곤이 전개했으리라고 믿어지지 않는 초급 마법들이 사방을 온통 뒤덮은 것이다. 차마 그럴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데이몬과 데스 나이트들은 분분히 몸을 날려 피해야 했다. 물론 거기에 당할 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초급 마법이라도 드래곤이 전개한 것인 만큼 위력이 만만치 않았으므로 맞아줄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본 러셀런트는 재빨리 에이비에이션(Aviation: 비행마법)을 시전했다. 자력으로 날아오를 수도 있었지만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고 만에 하나 데스 나이트들이 날개를 노린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노린 것이었다. 에이비에이션은 중급 마법이라서 방해가 이루어질 여지가 무척 적다. 또한 그와 병행해서 마법 공격을 계속해서 퍼붓고 있었으므로 그의 시도는 성공할 것 같았다. 예상대로 그것을 확인한 마법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놈. 도망치려는가?" 여기서 드래곤을 놓치면 안 된다. 자신의 전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면 놈들을 상대하는 일이 더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에 반드시 이 자리에서 잡아죽여야 했다. 어떻게 해서든 보유한 전력을 감춰야 하는 것이 데이몬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러셀런트는 이미 자기 키 높이만큼 허공에 떠 있는 상태였다. 그 정도라도 충분히 데스 나이트의 접근은 봉쇄할 수 있었다. 그것을 본 라인델프가 서둘러 고함을 질렀다. "어서 유령군마(phantom steed)를 소환해 다오." 유령군마는 하늘을 날 수 있다. 그 사실을 떠올린 데이몬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즉각 유령군마 셋을 소환했다. 하지만 데이몬은 이것으로 드래곤의 도주를 막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이미 다른 해결책을 궁리하고 있는 상태였다. 쓰쓰쓰. 허공에 뼈만 남은 형상의 유령군마 셋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언가를 공격하거나 할 순 없었지만 이동할 때는 유용하게 쓰이는 승용 소환수였다. 데스 나이트들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유령군마에 올라탔다. 하지만 날아오르던 러셀런트는 유령군마를 보고 도리어 코웃음을 치고 있었으니……. "고작 유령군마? 멍청한 녀석들……. 디스펠(Dispell)." 데스 나이트들을 태운 상태로 기세 좋게 날아오르던 유령군마들은 난데없이 퍽 하고 사라져버렸다. 러셀런트의 디스펠에 의해 다시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데스 나이트 셋은 볼썽 사납게 바닥에 쳐 박힐 수밖에 없었다. 쿵. 흙먼지를 뒤집어 쓴 상태로 몸을 일으킨 라인델프가 부드득 이를 갈았다. 또다시 디스펠 되더라도 시도는 해야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놈을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봐. 차라리 우리에게 에이비에이션을 걸어………." 다급하게 말을 걸던 라인델프가 입을 닫았다. 데이몬이 이미 모종의 작업에 들어간 것을 보고 난 뒤의 일이었다. "자신 있겠어? 일이 잘못되면 드래곤과 겹쳐져서 소멸되어버릴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널 두 번 다시 못 살린다고……." "괜찮아. 어차피 그렇게 되면 드래곤 녀석도 큰 타격을 받잖아? 드래곤 한 놈과 같이 가는 저승길이라면 결코 섭섭하진 않을 거야."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앞에는 하반신만 남은 헬버트론이 르헤르트 세이버를 움켜쥔 채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데이몬은 지금 헬버트론을 공간이동 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물론 좌표가 정해지지 않은, 그저 어림잡아 하는 공간이동이었으므로 위험도가 무척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써 하늘높이 날아오른 러셀런트를 잡을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데이몬이 별안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빌어먹을 비밀병기가 완성되었더라면 놈의 도주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으로썬 위험하지만 이 방법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헬버트론도 이미 동의한 사항이었으니……. 몸의 반이 날아가 버린 탓에 무게가 줄어 있었지만 그래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헬버트론은 소멸되더라도 드래곤 하나만은 반드시 잡겠다는 각오에 불타고 있었다. "좋아. 그럼 시행하겠어." 마음을 정한 데이몬은 지체 없이 남은 데스나이트들을 불러 논의를 시작했다. 순식간에 까마득한 허공으로 날아오른 러셀런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손놓고 멍하니 있는 데스 나이트들을 보자 그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굳이 도망칠 필요가 없겠군. 이곳에서 마법공격을 퍼부으면 되니 말이야." 아까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이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유를 갖게 되자 러셀런트는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자 그의 눈동자에는 또다시 살기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으니. "일단 몸을 치료해야겠군. 그런 다음 놈들을 깡그리 날려버려야겠어" 왜 진작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놈들의 힘이 닿지 않는 하늘에서 마법공격을 퍼부었다면 제 아무리 마법사와 소드 마스터 조합이라 해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허공에서 마법을 퍼붓는다면 마법사의 방해에도 한계가 있었다. 드래곤과 인간 마법사 사이에는 분명히 서클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유령군마 따윌 소환해봐야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디스펠 한 방이면 놈들은 허공에서 꼼짝없이 곤두박칠 쳐야 할 테니 말이다. 물론 마법사가 여럿이라면 하늘도 그다지 안전하진 못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상대해야 할 마법사는 단 하나였다. 러셀런트는 고개를 돌려 몸을 살펴보았다. 온통 피투성이가 된 몸을 보자 분노가 샘솟듯 치밀어 올랐다. "이놈들! 박살을 내놓을 테다……." 러셀런트는 지체 없이 힐링을 시전했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던 피가 멎으며 통증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고개를 돌려보자 마법사 녀석이 또다시 유령군마 셋을 소환해 놓은 장면이 들어왔다. 그것을 보자 러셀런트의 뇌리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유령군마가 가까이 다가오면 디스펠 해버려야겠군.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제 아무리 단단한 언데드 놈들이라도 무사할 수 없을 테니……." 계속 몸을 치료해 나가던 러셀런트는 날개를 퍼덕거리며 데스 나이트들이 탄 유령군마가 가까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러셀런트가 치료에 몰두하는 사이 하반신이 으스러진 놈을 제외한 나머지 데스 나이트들은 또다시 유령군마에 올라타고 날아올랐다. 물론 목표는 러셀런트였다. 오러 블레이드가 선렬히 맺힌 검을 마구 휘두르며 유령군마를 타고 날아오르는 데스 나이트들의 모습. 마치 사생결단이라도 낼 듯한 태도였다. "멍청한 녀석들……." 하지만 러셀런트는 도리어 코웃음을 치며 치료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워낙 상처가 많았기 때문에 치료하는 것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유령군마들의 속도는 제법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러셀런트의 지척에 당도한 유령군마와 데스 나이트들. 그들이 가까이 접근하자 러셀런트는 지체 없이 디스펠을 전개했다. 파파팍. 유령군마들은 삽시간에 사라져버렸다. 그와 함께 유령군마에 타고 있던 데스 나이트들이 팔다리를 맹렬히 휘저으며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을 만치 땅을 향해 추락하고 있는 데스 나이트들.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결코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꼴 좋다. 이놈들……." 러셀런트는 마법사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마법을 방해할 차례였다. 놈이 페터 폴이나 리버스 그래버티 따위로 데스 나이트들을 보호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생각대로 놈이 마법을 전개하자 러셀런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재배열되는 마나에다 자신의 마나를 끼워 넣었다. "후후후." 생각대로 마법사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추락하던 데스 나이트들은 오히려 속도가 붙어 더욱 빨리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보던 러셀런트의 얼굴에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데스 나이트들이 무력화되고 나면 마법사 따위야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제 아무리 9서클이라도 정면 대결로는 드래곤에게 승산이 없을 터이므로……. 퍽. 추락하던 데스 나이트 셋은 바닥에 부딪히자마자 거의 2미터 가까이 위로 퉁겨졌다.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퉁겨졌다 떨어진 놈들의 몸이 바닥에 반이나 틀어박힐 정도였다. 상황을 봐서 한동안 달려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우선 네놈을 갈가리 찢어 죽일 것이다." 러셀런트는 내려갈 채비를 갖췄다. 데스 나이트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먼저 마법사를 처치해야 했다. 하나씩이라면 결코 무서울 것이 없는 놈들이었지만 조합을 이룬다면 그조차 감당하기 힘들었다. 러셀런트가 막 내려가려는데 그때 바로 머리 위에서 갑자기 모종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것은 바로 공간이동이 발현되는 듯한 기척이었다. 그것을 감지하자 러셀런트는 혼비백산했다. "이, 이런……. 공간이동." 유령군마를 탄 데스 나이트에 정신이 팔려 공간이동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만약 싸우는 와중이었다면 상대가 공간이동을 전개하려는 기척을 러셀런트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멀리 떨어진 상태라서 마나의 흐름을 느낄 수 없었고 치료에 몰두하며 데스 나이트들을 상대하느라 더욱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설마 놈이 전투불능이라 간주했던 나머지 데스 나이트를 워프시킬 줄은 전혀 몰랐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196회 하반신이 으스러진 녀석까지는 전혀 계산에 넣지 않았기에 러셀런트는 황급히 블링크를 펼치려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의 몸이 사라지기 직전 무언가가 러셀런트의 머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푸우욱. 그와 동시에 뜨거운 것이 러셀런트의 머리뼈를 가차없이 뚫고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오러 블레이드를 충만히 머금은 장검이었다. 헬버트론의 애검인 르헤르트 세이버. 이 천고의 아티팩트가 가진 기다란 검신은 러셀런트의 두개골을 가차없이 파고 들어온 뒤, 뇌 한가운데에 깊숙이 박혀 버렸다. 콰우우우. 뇌가 뚫린 생물이 살 수 없다는 것은 고금을 통틀어 변하지 않는 진리. 드래곤이 아무리 강인한 생명체라도 뇌를 파괴당하고는 더 이상 버틸 도리가 없었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러셀런트는 의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 이럴 수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죽음이었다. 족히 오천 년 이상 살아온 에인션트 급 블랙 드래곤 러셀런트는 이렇게 허무하게 최후를 마쳤다. 임무를 완수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드래곤의 거대한 동체는 이제 맥없이 땅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쿵. 생명이 사라진 에인션트 급 드래곤의 몸은 굉음을 내며 대지를 파고들었다. 워낙 높은 곳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러셀런트가 추락한 곳에는 순식간에 너비 일백 미터 정도의 구덩이가 패여 버렸다. 그에 따라 먼지 구름이 뭉클뭉클 피어났다. 바닥에 구겨진 러셀런트는 이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수리에 장검을 깊숙이 박은 상태로 완전히 절명해버린 것이다. 러셀런트와 함께 떨어져 내린 헬버트론은 바닥에 작렬하는 충격으로 저만큼 퉁겨져 나갔다.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흙바닥을 깊숙이 파고 들어갔지만 다행히도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바닥에 반쯤 몸을 박은 채 빠져나오려고 꿈틀거리는 헬버트론의 모습은 마치 언데드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듯 했다. 하늘 높은 곳에서 추락한 세 명의 데스 나이트 역시 무사했다. 가장 둔한 프림베르그만이 한쪽 팔과 다리 한 쪽이 떨어져나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어둠의 마력을 충분히 공급받는다면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 "이봐 괜찮아?" 비교적 몸이 멀쩡한 라인델프가 저벅저벅 걸어가서 만신창이가 된 헬버트론의 몸을 수습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사라미스가 프림베르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동료들을 수습한 데스 나이트들은 바닥에 쳐 박힌 러셀런트에게로 다가갔다. 마치 죽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려는 듯 검을 들이댔지만 드래곤의 죽음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끝났군." 그들은 혀를 빼어 문 드래곤의 거대한 머리통을 앞에 두고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자신들이 처치한 것이 믿어지지 않는 듯 말이다. 그들의 뒤로 데이몬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사위는 일시에 조용해졌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베르텍은 아예 턱이 빠져버린 듯 입을 딱 벌리고 있었고 살아남은 4명의 팔라딘들조차 석상이 되어버린 듯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실드로 튼튼히 보호받고 있던 용병들 역시 경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생전 처음 드래곤을 대해본 것도 잠시. 곧이어 이어진 전율할 만한 드래곤의 파괴력에 말을 잊었던 그들이었다. 에인션트 급 드래곤의 파괴력은 정말 가공했다. 중무장한 보병 500명을 일시에 몰살시킨 것도 모자라 뒤이어 터져 나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고서클 마법들. 마법을 제외하더라도 드래곤은 감히 대적할 엄두가 나지 않는 강력한 생명체였다. 오러 블레이드 이외에는 통하지 않는 단단한 비늘만 봐도 가히 무적이라 일컬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 전설을 목격했다. 드래곤이란 생물의 실체를 보게 된 것도 놀라운데 그런 드래곤을 잡아죽이는 인간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 하나와 데스 나이트 넷. 장내의 인간들은 전설을 이룬 마법사와 데스 나이트들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세, 세상에……." 베르텍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자신이 잡아 압송하던 흑마법사. 그가 이 정도나 가공할 만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니……. 흑마법사의 활약은 마치 드래곤을 상대할 때 마법사가 반드시 숙지해야 할 교본 같은 것이었다. 적절하게 마법을 방해해서 곤경에 빠진 기사들을 구해내고 그들이 공격할 틈을 찾을 수 있도록 드래곤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기술은 정말 환상적이라 표현할 수 있었다. 특히 데이몬이 타임 슬립을 파훼할 당시 베르텍은 눈이 쑥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타임 슬립은 누구나 공인하는 9서클의 마법. 그것을 파훼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9서클에 올라있는 대마법사라는 것을 증명한다. 아니 그것이 아니더라도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파멸의 불꽃인 헬 파이어를 전개했다는 것만으로도 의심할 나위가 없는 일이었다. 데스 나이트들과 절묘하게 공조하며 드래곤을 밀어붙이던 놀라운 실력. 실로 눈으로 보지 못했다면 실로 믿지 못할 뻔한 일이었다. 그렇게 장내의 사람들은 믿지 못할 일을 해낸 존재들을 쳐다보며 놀라움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조금 뒤 그 적막을 깨는 한 존재가 있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당최 모르겠다는 듯 표정으로 죽은 드래곤을 쳐다보는 눈동자 하나가 있었다. 러셀런트의 정신마법에서 풀려난 윌커슨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드래곤과 데스 나이트를 번갈아 쳐다보던 윌커슨은 오래지 않아 자신의 임무를 떠올렸다. 그는 벼락같이 검을 뽑아들며 고함을 질렀다. "이놈! 감히 탈옥을 하다니……. 순순히 잡히지 않으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데이몬의 시선이 슬그머니 윌커슨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귀찮다는 듯 사라미스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해결해. 단 죽이지는 말고……." 사라미스는 검을 뽑아든 상태로 윌커슨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본 윌커슨은 바짝 긴장했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데스 나이트와 싸워본 적이 없었다. 아르카디아에는 오랫동안 언데드의 준동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윌커슨은 데스 나이트가 결코 만만치 않은 강적이란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의 패배를 추호도 예견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노익장을 과시하듯 버럭 고함을 질렀다. "죽어 저승에도 가지 못한 저주받은 존재들이여……. 내가 너희들의 부정한 삶에 종지부를 찍어 주겠노라." 한 마디 내뱉은 뒤 기세 좋게 달려든 윌커슨. 뒤이어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챵챵챵. 윌커슨은 상당한 실력을 가진 소드 마스터였다. 검에서 1피트 높이로 솟아오른 오러 블레이드가 그것을 확실하게 증명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상대하는 사라미스는 윌커슨을 훨씬 능가하는 실력자였다. 기본적인 검술실력도 그랬고 오러 블레이드의 위력 역시 더욱 강력했다. 사라미스의 사벨에서는 거의 3피트에 가까운 오러 블레이드가 맺혔고 그것은 애검 프로스트 소울 내뿜은 냉기와 더불어 무시무시한 위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사라미스는 생전에 트루베니아를 대표하는 4인의 실력자 중 하나였다. 게다가 데스 나이트가 되어 충분한 어둠의 마력을 공급받은 덕분에 그는 생전보다 두 배정도 웃도는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애당초 윌커슨에게 전혀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승부는 오래지 않아 판가름났다. 나이가 많은 윌커슨은 금세 지쳐 검로가 무뎌져 버렸지만 언데드인 사라미스가 지칠 턱이 없었다. "헉." 수중의 장검이 맥없이 두 동강이 나는 것을 느낀 윌커슨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뒤로 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상대의 사벨은 어느새 윌커슨의 심장 부위를 겨냥하고 있었으니……. 놀랄 겨를도 없었다. 데스 나이트가 이렇게 강할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 윌커슨. 하지만 상대의 검에서 풍겨 나오는 냉기가 흉갑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으니 자신의 패배를 의심할 수가 없었다. 마음을 정리한 윌커슨은 비장한 표정으로 눈을 꼭 감았다. "죽여라. 내 비록 힘이 미치지 못해 죽음을 달게 받아들이지만 국왕 폐하께서 이 원한을 반드시 갚아주실 것이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는 검을 앞으로 들이밀지 않았다. 철컹. 검을 검집에 꽂아 넣은 데스 나이트는 몸을 빙글 돌려 데이몬 쪽으로 걸어갔다. 눈을 뜬 윌커슨은 어안이 벙벙했다. 정신을 추스른 그는 흑마법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금 상황에선 데스 나이트보다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데스 나이트를 부리는 자가 바로 그였으므로……. "왜 날 죽이지 않는 거지?" "그럼 왜 널 죽여야 하지?" 곧바로 터져 나오는 마법사의 반문에 윌커슨은 말문이 콱 막혔다. "그, 그야……." "데스 나이트를 부리는 사악한 흑마법사니까 당연히 널 죽여야 한다 이건가?" "………" 윌커슨은 차마 말을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를 한 번 쳐다본 데이몬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내가 치사하고 비열한 악당인 사실은 맞아. 하지만 말이야. 난 살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믿거나 말거나 나는 아르카디아에 온 뒤 단 한 사람도 죽인 적이 없으니까……." 그 말을 들은 윌커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그는 당혹한 표정으로 데스 나이트와 데이몬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네가 믿건 말건 상관할 것은 없어. 내 목적은 오로지 드래곤 사냥이니까 말이야. 다른 일 따윈 일체 관심이 없어. 알겠어?" 확실한 물증(?)을 앞에 두고 하는 말이라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힘으로도 제압할 수 없는 상황이라 윌커슨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소." 그를 잠시 쳐다본 데이몬은 고개를 돌렸다. 쓰쓰쓰쓰. 그의 옆으로 거무스름하게 물결치는 공간의 틈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마법보고 인크레시아였다. 데이몬은 죽은 러셀런트의 시체를 인크레시아에 넣어두려는 것이다. 약속된 방식대로 신호를 보내자 인크레시아는 급격히 커지기 시작했다. 슈우욱. 삽시간에 사방 30미터 크기로 늘어난 인크레시아는 마치 파리를 잡아먹는 두꺼비 마냥 죽은 러셀런트의 몸을 덥석 집어삼켜 버렸다. 그 거대한 덩치가 가볍게 인크레시아로 빨려 들어갔다. "세, 세상에……." 놀라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윌커슨의 입이 딱 벌어졌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벌릴 입도 없었다. 하나같이 입을 딱 벌린 채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러셀런트의 시체를 삼킨 인크레시아는 다시 원래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마법 보고에다 죽은 드래곤을 수납한 뒤 데이몬은 데스 나이트들을 돌아보았다. 거의 만신창이가 된 헬버트론과 사지 두 개가 떨어져나간 프림베르그. 만약 인간이었다면 죽어도 벌써 죽었을 몸이었다. 하지만 언데드라는 장점 때문에 그들은 아직까지 살아있었고 어둠의 마력만 공급해 준다면 언제든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잠시 그들을 쳐다본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 모두들 수고 많았어. 처음이라 다소 어설픈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이대로 계속 나가면 드래곤을 처치하는데 더욱 요령이 붙을 테니……." 데이몬의 치하를 듣자 헬버트론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맺혔다. "수고라니? 네가 아니었다면 놈을 처치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텐데." 사실 블랙 드래곤을 잡는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이가 바로 데이몬이었다. 만약 그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네 명의 데스 나이트들은 소멸되어도 벌써 소멸되었을 것이다. 드래곤을 사냥하는데 마법사의 조력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뼈저리게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정면으로 드래곤에 맞설 수는 없지만 마법사는 드래곤 사냥에 있어 결코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마법사가 없으면 드래곤에게 접근조차 할 수 없으므로. 데이몬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과 나, 둘 중 하나만 없었어도 이번 사냥은 실패했어. 그러니 이제부턴 상대를 조금씩 인정해주기로 하자. 너희들도 앞으론 나에게 너무 기어오르지 말고……." 데스 나이트들의 얼굴에 쑥스럽다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뭐 인정하고 자시고 할 것까진 없지. 우린 더 없이 완벽한 조합이잖아? 그래도 드래곤 하나를 처치하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하군. 드래곤이란 놈들 강하긴 정말 끔찍하게 강한 족속들이야." "맞아." 고개를 끄덕이는 데이몬의 얼굴에도 미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조금 고전하기는 했지만 일단 목적은 이뤘다고 봐야 했다. 에인션트 급 드래곤 하나를 잡았으니 말이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데이몬은 라인델프를 쳐다보았다. "네가 이들을 데리고 먼저 인크레시아에 들어가 있어. 지금은 정신이 하나도 없으니 추후에 어둠의 마력을 모아 몸을 복원해 주도록 하지." "뭐. 편할 대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라인델프는 둘을 데리고 인크레시아로 들어갔다. 호위역으로 사라미스만 남겨 둔 데이몬은 곧 인크레시아를 닫았다. 쓰쓰쓰쓰. 드래곤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킨 인크레시아는 곧 그곳에서 사라져버렸다. 그것을 확인한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197회 가장 먼저 윌커슨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옆에 팔라딘 넷이 모여있는 것을 보니 그 동안 그들에게 제반 상황을 설명들은 모양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베르텍이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한참동안 데이몬을 쳐다본 윌커슨은 입을 열었다. "도대체 당신의 정체는 무엇이오?" "………." 데이몬 뒤에 서 있는 사라미스를 슬쩍 쳐다본 윌커슨은 정색을 했다. "내 지금껏 저토록 강한 데스 나이트가 있으리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소. 저들은 대관절 누구요? 내가 아는 상식으론 마왕이 아니고서는 저토록 강한 데스 나이트를 탄생시킬 수 없소. 그러니 내 질문에 반드시 대답해 주시오." 아무래도 데스 나이트에게 패한 충격이 무척 컸던 모양이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답변을 받아내겠다는 윌커슨의 태도에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지. 저들은 과거 트루베니아에서 가장 강했던 기사들이었으니까……. 데스 나이트는 본바탕이 강할수록 실력이 향상된다. 난 드래곤 사냥을 위해 저들을 되살렸다. 다시 말해 영혼을 매개로 데스 나이트의 육체를 부여했던 것이지." "그, 그 말이 사실이오?" 그 질문에는 사라미스가 대신 대답했다. "그렇다. 우린 원래 이카롯트의 명예로운 기사들이었다. 드래곤들에 의해 조국과 가족을 잃고 이승을 정처 없이 방황하다가 복수를 위해 데스 나이트가 되는 길을 택한 것이지. 드래곤에게 복수만 할 수 있다면 영혼이 영원히 구원받지 못해도 좋아. 복수를 위해 우린 모든 것을 감수했으니……." 윌커슨의 얼굴에 다행이라는 표정이 어렸다. 저들이 정말로 트루베니아에서 가장 강했던 기사들이라면 자신의 패배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사실 테르비아에서만 열 손가락 안에 들 뿐 아르카디아 전체를 따진다면 백 위 안에도 들지 못하는 것이 윌커슨의 실력이었다. 게다가 저들이 데스 나이트가 된 과정 역시 충분히 이해할 만 했다. 자신 역시 저들의 처지에 놓였다면 두말하지 않고 영혼을 팔아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의문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당신은 무슨 이유로 돈트렐 수비대의 손에 체포된 것이오?" "………." "운이 나빠 잡혔다는 말은 하지도 마시오. 솔직히 당신 정도의 실력자를 베르텍 따위가 체포할 가능성은 아예 없으니 말이오." "눈치가 제법 빠른 녀석이군."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는 음흉한 눈빛으로 베르텍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그는 베르텍을 단단히 혼내주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용병들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율리아나가 제보한 사실을 숨겨 현상금과 공로를 독식하려 한 죄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소행을 보아 단박에 죽여버려도 시원치 않을 놈이었지만 불행히도 데이몬은 살인을 할 수 없는 몸. 하지만 굳이 죽이지 않더라도 놈을 혼내주는 일은 무척 간단한 일에 속했다.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데이몬은 베르텍을 똑바로 노려보며 호통을 쳤다. "멍청한 놈. 그깟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나?" "무, 무슨……." 잔뜩 주눅이 들어있던 베르텍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베르텍의 면전에 대고 데이몬은 서슬이 퍼렇게 호통을 쳐 댔다. "넌 분명히 소드 마스터 다섯과 오천 명의 병사들을 동원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이냐? 고작 늙어빠진 소드 마스터 하나에 브레스 한 방에 몰살해버린 허약한 놈들을 동원해놓고 그렇게 큰 소리를 쳤단 말이냐? 드래곤이 한 마리였기에 망정이지 둘 이상이었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느냐?" "………." 밑도 끝도 없는 소리에 베르텍은 오직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흑마법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그 정도로 엉뚱했다. 하지만 윌커슨의 반응은 달랐다. 그의 눈동자에서 모호한 빛이 일어나는 것을 확인한 데이몬은 이때다 하고 결정타를 날렸다. "쓸모 없는 놈. 일 처리를 그렇게 해 놓고 일천 골드나 되는 거금을 요구했더냐? 어림없는 소리. 네놈에게는 단 한 푼도 줄 수 없다." 그때서야 상황을 알아차린 듯 베르텍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데이몬은 때를 놓치지 않고 베르텍의 입을 막아버렸다. "구구한 변명 따윈 듣고 싶지 않다. 사일런스(silence)." 베르텍이 변명할 여지를 완벽하게 막아버린 데이몬은 몸을 빙글 돌렸다. 그의 뒤에는 사라미스가 시퍼런 광망을 토해내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 잠깐만……." 예상대로 윌커슨이 다급하게 데이몬을 잡았다. 그러면서 그는 팔라딘들에게 눈짓을 해서 베르텍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조처했다. 팔라딘들이 다가가서 베르텍을 제압하는 것을 한 눈으로 흘겨보며 데이몬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가?" "말씀을 들어보니 베르텍과 모종의 거래를 하신 것 같은데. 맞습니까?" "물론 했지." 이때다 하고 냉큼 대답하는 데이몬을 보고 윌커슨은 눈빛을 빛냈다. "혹시 무슨 거래였는지 제게 가르쳐주실 수 없습니까?" "뭐 못 가르쳐 줄 것은 없지." 화가 난 듯한 표정을 떠올린 데이몬은 각본대로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저들에게 들어 내 정체를 파악했으리라 생각되니 길게 설명하진 않겠네. 난 트루베니아에서 드래곤 한 마리를 처치한 뒤, 놈들의 마법 보고를 빼앗아 아르카디아로 건너왔네. 때문에 지금 트루베니아의 전 드래곤들이 내 뒤를 쫓고 있는 실정이지." "그, 그렇습니까?" 어쨌거나 상대가 바로 조금 전 드래곤 하나를 처치한 것은 사실이다. 기사들에게서 드래곤과 흑마법사 사이에서 오간 말을 들었기 때문에 윌커슨으로서는 오직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바로 문제였어. 한 마리 정도야 어려울 것이 없지만 두 마리 이상이 덤벼들 경우 상당히 골치가 아파질 수밖에 없지. 나와 데스 나이트들이 상대할 수 있는 드래곤은 한 번에 한 마리 뿐이야. 때문에 나로서는 오로지 놈들의 이목을 피해 다닐 수밖에 없었어." 윌커슨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소름이 오싹 끼치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전 죽은 드래곤도 전율스러운 느낌이 들 정도로 강했다. 자신들이 제대로 접근도 하기 전에 제압 당했을 정도였으니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드래곤들이 둘 이상 나타나서 공격을 해 온다면……. '아마도 우리 왕국은 거의 멸망에 가까운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겠지?' 몸을 부르르 떤 윌커슨은 조용히 흑마법사의 말을 경청했다. "원래 난 크로센 제국으로 갈 생각이었어.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강한 크로센 제국이라면 충분히 놈들을 분산시킬 능력이 있지 않겠나?" "그, 그렇긴 하지요." "그런데 저 녀석이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날 찾아온 거야. 놈은 이렇게 제안하더군. 제가 힘을 써서 병력을 동원해 드리겠습니다. 적어도 소드 마스터 열과 5천 이상의 병력을 끌어들일 테니 일단 테르비아로 가 주십시오. 테르비아는 드래곤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강력한 왕국입니다. 이렇게 말이야." "그, 그가 정녕 그랬습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하는 윌커슨.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은 나라 전체를 통째로 말아먹을 생각이 아니라면 결코 입 밖에 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저 녀석이 무슨 속셈으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나에겐 결코 불리한 것이 없는 조건이었어. 결국 난 승낙했지. 때문에 죄수라는 말도 안 되는 신분으로 위장해야 했지만 말이야. 놈이 그렇게 해야만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고 했거든……." 데이몬은 모호한 눈빛으로 베르텍을 쳐다보았다. 불쌍하게도 사일런스 마법이 걸린 베르텍은 한 마디 항변도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 녀석의 목적을 나중에 알게 되었어. 놈은 오로지 돈만 노리고 있었네. 그렇게 해 주는 대가로 녀석은 나에게 일천 골드를 요구하더군." 말을 마친 데이몬은 윌커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지 않나? 고작 일천 골드로 나라를 팔아먹으려 하다니 말이야. 뭐 일천 골드 정도야 마법 보고에 들어있는 보물을 감안하면 많지도 않은 금액이라서 난 별로 생각도 하지 않고 승낙했지. 하지만……." 말을 잠시 끊은 데이몬은 윌커슨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놈이 동원한 병력이 이렇게 적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드래곤 한 마리도 감당하지 못하고 전멸될 병력이었다면 난 생각도 하지 않고 놈의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네. 이게 저 녀석과 나 사이에 오간 거래의 전부일세." 그 말에 베르텍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용병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자신이 완벽한 함정에 빠진 것이다. 흑마법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거짓이란 것을 증명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 아니야. 결코 그렇지 않아.' 베르텍의 말은 오로지 입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9서클이 전개한 사일런스 마법이었기에 그는 결코 걸린 마법을 풀 수 없는 상태였다. 냉랭한 눈빛으로 베르텍을 한 번 쏘아본 윌커슨은 다시 데이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 하신 말씀이 모두 사실입니까?" "그럼 아니라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자네 생각에 내가 저따위 수준 낮은 마법사에게 사로잡힐 것이라 생각했었나보군. 난 9서클의 마스터이네. 게다가 내가 데리고 있는 데스 나이트들의 실력은 자네도 익히 겪어보지 않았는가?" 윌커슨은 말을 잊었다. 상황을 보아 베르텍은 돈을 노리고 국가를 팔아 넘긴 것이 분명했다. 테르비아 왕국이 실로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일천 골드를 노리고 자신과 병사들을 죽음의 함정에 빠뜨리려 한 가증스런 마법사. 이미 베르텍의 계략에 의해 500명의 죄 없는 병사들이 허무하게 몰살했다. 충직했던 두 명의 휘하 팔라딘과 함께 말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베르텍에 대한 엄격한 치죄 뿐이었다. 심지어 살아남은 팔라딘들조차 성난 눈빛을 베르텍에게 보내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작자." "앞으로 네놈은 평생을 빛도 들지 않는 감옥에서 보내야 할 것이다." 한 마디씩 내뱉는 팔라딘들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유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속이 다 후련하군.' 하지만 내심을 겉으로 내비칠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데이몬은 억지로 표정관리를 했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자네는 이제 어쩔 생각인가?" 상대를 체포할 명분도 실력도 없는 판국이었다. 섣불리 행동하다간 남은 인원도 모조리 잃을 수 있었다. 그와 팔라딘 넷 정도로는 안광을 내뿜고 있는 데스 나이트 하나도 감당하지 못했으므로 그는 눈물을 머금고 흑마법사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에겐 베르텍에 대한 치죄가 가장 우선이었다. "워,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고맙군." 고개를 끄덕인 흑마법사가 마차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쳐다본 윌커슨은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베르텍을 즉각 포박하라." "옛." 살아남은 팔라딘들이 달려들어 베르텍을 결박했다. 그는 한 마디 항변도 하지 못한 채 꽁꽁 묶일 수밖에 없었다. 흑마법사가 걸어놓은 침묵 마법이 아직까지 풀리지 않았기에 베르텍은 눈물을 글썽이며 오직 눈빛으로만 애원했다. 그러나 그를 쳐다보는 윌커슨의 눈빛은 추상같았다. "너는 대역죄를 저질렀다. 이미 500명의 병사가 네놈 하나로 인해 목숨을 잃었으니 최소한 종신형은 각오해야 할 것이다." 말을 마친 윌커슨은 시선을 마주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살아남은 팔라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500명의 병사를 잃었지만 호송은 계속된다. 우리 다섯이서 대역죄인 베르텍을 수도로 호송하기로 한다. 반드시 기한 내에 도착해서 놈을 재판에 걸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수도로 향하던 테르비아의 호송대는 이렇게 해서 죄수를 전혀 엉뚱한 인물로 바꾼 채 다시 목적지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사소한 욕심을 부린 죄로 베르텍은 그만 대역 죄인이 되어 수도로 압송되는 처지에 놓여 버렸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198회. 베르텍을 체포한 윌커슨이 휘하 기사들을 데리고 떠나는 것을 확인한 뒤 데이몬은 천천히 마차로 다가갔다. 그 속에 용병들이 갇혀 있었던 것이다. 오리알 굵기의 쇠창살이 쳐져있는 마차 표면에는 은은한 푸른빛의 실드가 쳐져 있었다. 그것이 바로 블랙 드래곤의 애시드 브레스로부터 용병들의 생명을 지켜준 장막이었다. 하지만 실드가 쳐진 부분은 오로지 마차뿐이었다. 마차를 끌던 불행한 말들은 이미 뼈만 남아 널브러져 있었으니까……. 마차에서 실드를 거둔 데이몬은 사라미스를 돌아보았다. "마법을 전개할 힘이 없군. 네가 좀 힘을 써줘야겠는데……." 사라미스는 두 말도 하지 않고 마차로 다가갔다. "모두들 반대편으로 바짝 붙어라. 재수 없으면 몸통이 토막 날 수도 있다." 유부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데스 나이트의 으름장에 용병들은 질겁을 한 채 후닥닥 반대편으로 붙어 앉았다. 그것을 확인한 사라미스는 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사벨에서 묵빛의 광채가 불쑥 솟아올랐다. 검은 빛을 띠는 암흑의 오러 블레이드는 삽시간에 3피트 길이로 솟구쳤다. 사라미스가 사벨을 가볍게 휘두르자 쇠창살들은 마치 삶은 무처럼 간단하게 토막이 나버렸다. 투투툭. 잘린 쇠창살 조각들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사라미스는 다시금 데이몬의 뒤에 가서 시립했다. 조금 있자 용병들이 하나 둘씩 마차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데이몬을 쳐다보는 그들의 눈동자에는 하나같이 경악의 눈빛이 떠올라 있었다. 마치 사람이 아닌 마치 절대적인 존재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마지막으로 미첼과 율리아나가 마차를 나섰다. 그들 역시 경계의 빛이 가득한 눈초리로 데이몬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말문을 연 자는 카심이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 데이몬과 그의 뒤에 시립해 있는 사라미스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던 카심은 뭔가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안색을 굳혔다. "당신의 진정한 정체를 밝혀주십시오. 저희들을 여전히 동료라고 생각하신다면 말입니다." 데이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다. 심문 받을 당시 날 부정하지 않은 순간부터 너희들은 영원한 내 동료다." 카심의 얼굴에도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지만 그것은 나타난 것보다 더 빨리 사라져버렸다. "서로간에 숨기는 것이 없을 때 진정으로 동료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당신은 결코 평범한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대관절 무슨 이유로 저희들과 동행하실 생각을 했는지……. 또한 어찌하여 제 용병단에 들어왔는지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정체를 속이신 이유까지 함께 말입니다." 데이몬은 딱 잘라 말했다. "난 정체를 숨긴 적이 없다. 혹시라도 너희들이 지금껏 나의 과거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느냐?" 데이몬의 반문에 카심은 말문이 턱 막혔다. 사실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심은 만만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저희들을 동료로 거두셨습니까? 마법사님에 비하면 극히 하잘것없는 능력을 가진, 마치 벌레와도 같은 저희들을 말입니다." 말을 마친 카심은 데이몬의 뒤에 서 있는 사라미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휘하에 부리고 계시는 죽음의 기사들. 저들만 해도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는 존재들이지요. 마음만 먹는다면 일개 왕국을 송두리째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저희들 같은 힘없는 동료들이 필요했습니까?" 카심의 말은 마치 절규와도 같았다. 상대의 힘을 보고 난 뒤 그는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묵묵히 말을 듣고 있던 데이몬은 카심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힘을 가진 자들만 동료가 될 자격을 갖추는 건가?" "그, 그렇진 않습니다만." "난 이미 충분한 힘을 가졌네. 이들 데스 나이트들만 해도 결코 모자람이 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료가 필요하지 않으라는 법이 있는가?" "………." 데이몬의 얼굴에 쓸쓸한 기색이 감돌았다. 험난한 복수의 길을 걷기 위해 오랫동안 홀로 힘을 길러왔던 데이몬이었다. 그러므로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난 진심으로 동료들을 원했네. 힘이 조금 없더라도 항상 서로를 격려해주고 위해주며 챙겨주는 동료들 말일세. 그런 동료들을 찾는데 과연 내가 실력을 감안해야 할까?" 카심은 묵묵히 데이몬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자네들을 처음 보았을 때 정말 놀랐지. 동료애가 통상적인 수준을 넘었거든……. 자네들을 심문하며 난 어렵지 않게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었네. 이 정도라면 충분히 동료로 삼을 가치가 있다고……."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듣기로 마법사님의 목적은 드래곤 사냥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에겐 지금 드래곤은커녕 와이번 한 마리도 사냥할 능력이 없습니다." 카심의 말을 들은 데이몬의 얼굴에 모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사람아. 사람의 능력이란 결코 한정된 것이 아닐세. 노력여하와 수련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는 것이지. 소드 마스터들이 태어날 때부터 실력을 타고나는 것인가? 그건 결코 아니야. 그들 역시 수련과 노력에 의해 힘을 얻은 것이라네. 자네들이라고 그러지 못한다는 법이 도대체 어디에 있나?" "………." "난 이미 자네들을 동료로 인정했네. 평생을 감옥에서 썩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날 부정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일거야. 실력이 모자란다면 키워주면 그만인 거야? 이제 알겠나? 내 마음이 어떤지를?"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마자 용병들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카심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떠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러시다면 저희들에게 전수해주신 마나연공법은……." "이제부터 그 연공법에 대한 유래를 설명해주겠네. 모두 이리 와서 둘러앉게." 데이몬과 용병들은 곧 바닥에 주저앉아 긴 대화에 들어갔다. 오로지 미첼과 율리아나만이 어정쩡하게 서서 대화를 듣고 있었다. 데이몬은 용병들의 얼굴을 하나씩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들은 혹시 크로센 대제가 이 세상의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무려 500년 전의 일이었지만 크로센 대제 자체가 워낙 위대한 인물이었기에 용병들은 나름대로 그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르카디아와 트루베니아 두 대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존재가 이곳이 아닌 이계에서 온 존재라는 사실까지 모두 말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네. 오직 나만 아는 사실이지. 그러니 정신차려 듣도록 하게." 말을 마친 데이몬은 머리 속으로 할 이야기를 정리했다. 액면 그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으므로 어느 정도는 꾸밀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자신에 대한 것은 더욱 숨겨야 했다. 정리를 마친 데이몬은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세인들은 이계에서 넘어온 존재가 오로지 크로센 대제 혼자일 것이라 상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 크로센 대제가 살던 세계에서 넘어온 실력자가 사실은 한 명 더 있다네. 그것은 이곳에서 아무도 모르는, 오직 나만 아는 사실이야. 게다가 그 이계 실력자는 크로센 대제에 결코 뒤지지 않은 실력을 가진 인물이었지. 그의 실력에 대해서는 결코 의심할 필요가 없네." 전혀 뜻밖의 사실에 용병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크로센 대제는 이 세계에 정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영웅이었다. 이곳 기사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검술실력을 가진 영웅. 그런 크로센 대제와 같은 세상에서 온, 그것도 실력이 비등하다는 존재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었다니……. 가장 성급한 패터슨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야 말았다. "그, 그런데 왜 그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까?" "이제부터 설명할 테니 잘 듣게. 실상 크로센 대제는 운이 좋은 편이었어. 인간과 연이 닿아 보유한 엄청난 무위를 아낌없이 펼칠 수 있었으니 말일세. 하지만 내가 거론하는 실력자는 운이 정말 없었지. 하필이면 드래곤의 레어 부근에 떨어져서 그만 드래곤의 손에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일세." 용병들은 눈을 크게 뜨고 데이몬이 풀어나가는 이야기를 경청했다. 흥미를 유발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용병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초롱초롱해져 있었다. 미첼과 율리아나 역시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 실력자는 불행히도 드래곤의 레어에서 생을 마쳐야 했네. 가지고 있던 무위를 전혀 뽐내보지 못한 채 말이야." "그, 그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참다못해 질문을 퍼붓는 카심. 데이몬은 그의 얼굴을 지긋이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도 익히 들었겠지? 내가 트루베니아에서 드래곤 한 놈을 처치하고 놈들의 마법 보고를 훔쳤다는 것 말일세.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사실이네." 카심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렇다면 듀라한을 보관해 둔 것이……." "바로 그렇다네. 그게 바로 드래곤들의 마법 보고인 인크레시아일세. 그 때문에 트루베니아의 드래곤들이 눈을 시뻘겋게 뜨고 날 찾아다니고 있지." 용병들은 닥친 상황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았다. 만약 그것이 드래곤의 입으로 확인된 것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데이몬은 그런 용병들의 면면을 느긋하게 둘러보았다. "그 마법보고를 훔치기 위해 나는 드래곤의 레어 깊숙이 들어갔지.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곳에서 일기장 한 권을 발견하게 된 거야. 그것은 바로 이계의 인물이 직접 적은 일기장이었어. 그 불운한 이계의 실력자는 결국 드래곤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지. 하지만 그는 그냥 세상을 떠나지 않았어. 죽더라도 이름을 남기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고나 할까? 그는 자신의 사정을 세세하게 적은 일기장을 드래곤의 레어에 남겼네. 나는 바로 그 일기장을 통해 이계 실력자의 존재를 알게 된 거야." 사정을 알게 된 용병들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미첼과 율리아나마저 눈빛을 빛내며 데이몬의 입을 주시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이계의 실력자가 바로 그들의 눈앞에 있는 자라는 사실은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놀랍군요. 그래서 그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군요."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를 회상하는 듯 그의 눈빛은 점점 몽롱해져가고 있었다. "그렇다네. 일기장에 따르면 그 실력자는 단 한 번이라도 크로센 대제와 검을 나눠보고 싶어했지. 만약 드래곤에 구금되어 있던 처지가 아니었다면 둘은 반드시 대면해서 겨뤄봤을 지도 몰라." "그런데 과연 그자의 실력이 크로센 대제만큼이나 강했을까요? 전 도무지 믿어지지가……." 용병들의 반응은 지극히 합당한 것이었다. 크로센 대제라면 이곳에서는 거의 신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오기가 슬며시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으며 데이몬은 억지로 표정관리를 했다. "일기장에 적힌 바로 그 자는 자신이 살던 곳에서 적어도 일만 명이 넘는 무사들을 통솔하는 절대자였다고 하네. 휘하에 팔라딘 정도의 기사를 무려 오백 명을 두었다더군." "세, 세상에……." 용병들은 입을 딱 벌렸다. 일만 명의 무사들도 믿을 수 없는 판국인데 오백 명의 팔라딘이라니……. 계속해서 이어지는 충격적인 사실에 그들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생전 처음 드래곤과, 그 드래곤을 어렵지 않게 잡아죽이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보게 되고, 게다가 오백 년 전의 비사까지 듣게 되자 마치 자신들이 딴 세상에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용병들을 보며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턴 그들의 기분을 조금 띄워줄 차례였다. "사실 내가 자네들에게 한 가지 속인 게 있어." "소, 속인 것이라니요?" 데이몬은 용병들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들에게 전수해 준 마나연공법은 정확히 따지자면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냐? 그 마나연공법은 바로 그 이계 절대자의 것이네. 오래 전에 잊혀진 비운의 이계 절대자 말일세. 일기장의 뒷부분에 자네들에게 전수해 준 마나연공법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네." 쾅. 용병들은 머리 속을 마치 벼락이 관통하는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자신들이 크로센 대제와 쌍벽을 이뤘다는 이계 절대자의 마나연공법을 전수받다니…….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199회. 그것은 말 그대로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그 누구도 잡을 수 없는 행운을 용병들은 한 손으로 거머쥔 것이다. 물론 흑마법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크로센 대제와 그 이계 절대자는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했으므로 둘 중 누가 강했는지 지금으로는 알 길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크로센 대제와 동일한 곳에서 온, 그것도 일만의 무사를 거느렸다는 절대자의 마나연공법이니 결코 평범하진 않을 터였다. 적어도 크로센 대제가 남긴 첫 번째 방법과 쌍벽은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믿을 수 없어하는 용병들을 둘러본 카심은 정색을 했다. "그 말씀이 정녕 사실입니까?" "그렇다마다. 사실 난 마법사이기 때문에 마나연공법이 전혀 필요가 없어. 그 때문에 자네들에게 전수해줄 마음을 먹은 것이지." 말을 마친 데이몬은 의기양양하게 용병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내가 만약 자네들을 동료로 여기지 않았더라면 난 결코 그것을 전수해주지 않았을 거야. 생각해보게. 이 마나연공법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 지를……. 이것을 국력은 강하지만 기사단이 약한 왕국에다 팔아 넘길 수도 있었어. 그렇다면 엄청난 거금을 손에 쥘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았네. 자네들을 동료로 여겼었기에 난 아무 조건 없이 이 마나연공법을 넘겨준 거야. 동료로 삼은 이상 자네들의 실력이 조금이라도 늘어나길 기원하며 말일세." 이제 용병들의 눈빛은 판이하게 바뀌어 있었다. 데이몬을 위해서라면 죽음이라도 불사할 듯한 눈빛. 그들은 지금 데이몬을 동료로 인정했던 어제의 결정에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어.' '흑마법사를 동료로 삼은 것은 내 일생일대의 행운이야.' 용병들의 표정을 보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음을 직감한 데이몬은 카심을 쳐다보았다. "이젠 자네들이 결정을 내릴 차례일세. 익히 말했다시피 난 무척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어. 트루베니아의 전 드래곤이 눈을 시뻘겋게 뜨고 날 쫓고 있는 판국이니 아마도 조금 전과 같은 싸움을 수시로 치러야 할거야. 내가 데리고 있는 데스 나이트들은 언데드라서 전신이 산산조각 나지 않는 이상은 죽지 않지만 자네들은 결코 그렇지 않네. 인간은 몸이 토막 나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지. 그러니 나와 함께 하려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해." "………." "어떤가? 목숨을 걸더라도 날 한 번 따라다녀 보겠는가? 아니면 이대로 삼류 용병의 삶을 이어나가겠는가?" 카심은 추호도 망설이지 않았다. 도리어 이런 기회를 목이 빠져라 기다렸던 카심이 아니었던가? 명성을 날리기 위해서라면 목숨 따윈 웃으며 버릴 수 있는 게 카심의 진심이었다. 그는 데이몬을 향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전 사나이입니다. 사나이라면……." 그 뒷말은 용병들이 이구동성으로 받았다. 하나같이 상기된 표정으로 데이몬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한 자,한 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결코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죠." 카심은 비장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저희 모두는 흑마법사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비록 드래곤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마나연공법을 저희들에게 베풀어주신 것만 해도 저희들은 마법사님께 큰 빚을 진 상태이니까요." "정녕 후회하지 않겠나?" "후회하지 않습니다. 사나이로 태어났으니 큰 일에 목숨을 한 번 걸어 봐야죠. 드래곤 사냥. 전 충분히 목숨을 걸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용병들의 뜻을 전해들은 데이몬은 만족스럽다는 듯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파티에 가입하게 된 것을 환영하네. 카심 용병단은 오늘 이후부터 일절 청부를 받지 않을 것이네. 앞으로 우리의 목적은 오로지 드래곤 사냥뿐이니 말일세." "와아아!" 용병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기쁘기가 정말 한량없었다. 삼류용병으로 근근히 생활하던 그들이 드래곤 사냥을 주목적으로 하는 엄청난 파티에 끼게 되었으니……. 비록 지금은 드래곤을 상대할 실력이 없었지만 그들은 추호도 걱정을 하지 않았다. 크로센 대제와 쌍벽을 이룬다는 이계 절대자의 마나연공법을 익히고 있으니 언제고 힘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몇 명되지 않는 용병들의 환호성이었지만 넓디넓은 평원은 마치 떠나갈 듯 시끌벅적해졌다. "그런데 아까는 정말 후련했습니다." 용병들의 환호성이 조금 가라앉고 난 뒤 카심이 내뱉은 일성이었다. 데이몬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뭐가 말인가?" 카심은 얼굴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욕심쟁이 마법사를 옭아맨 일 말입니다. 정말 잘 하셨습니다. 그놈처럼 자신의 출세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거리낌없이 제물로 삼는 녀석은 단단히 혼이 나야 하죠." 데이몬의 얼굴에 쑥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자네들도 들었나?" "네. 사실 마법사님의 음성이 크긴 했죠. 저희들 모두가 똑똑히 들었으니……. 아무튼 정말 잘 하셨습니다. 마치 속이 확 풀리는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카심의 말이 끝나자 용병들 역시 통쾌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텍의 소행에 대해서 누구하나 분통을 느끼지 않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장 통쾌해야 할 미첼과 율리아나는 그저 불안한 듯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일행도 아니고 남도 아닌 어정쩡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테르비아의 법 집행은 유난히 혹독하죠. 모르긴 몰라도 그 마법사 녀석은 평생을 감옥에서 썩어야 할 것입니다. 운이 나쁘면 바로 교수형에 처해질 지도 모르지만." "그렇겠군. 멍청한 소드 마스터 녀석이 반역죄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아무튼 눈에 상당히 거슬리는 녀석이었어." "그 때문에 순순히 잡혀주신 것입니까?" 데이몬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저항하지 않고 사로잡힌 데에는 드래곤을 유인하려는 의도가 절대적이라 말할 수 있었지만 내심을 솔직히 밝힐 순 없는 노릇이다. "뭐 그런 점도 없잖아 있지. 그토록 거리낌없이 타인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녀석은 자신이 직접 누명을 써 봐야 해. 그래야만 당하는 사람의 심정을 알지." "이를 데가 있겠습니까?" 카심은 유쾌하다는 듯 가슴을 폈다. 그런 카심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정색을 했다. "그리고 해결할 것이 한 가지 더 있네." "무, 무엇입니까?" 카심이 의아한 듯 눈을 치켜 뜨자 데이몬은 손가락을 뻗어 엉거주춤 서 있는 미첼과 율리아나를 가리켰다. 감정이 아직까지 삭지 않았는지 데이몬의 표정은 비교적 냉랭하게 변해 있었다. "우선 저 카르셀 왕녀 일행을 처리해야 하지 않겠나?"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 카심의 얼굴에 다소 곤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사실 소행을 생각하면 여기서 인연을 가차없이 끊어 버리는 것이 합당했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체포되는 것까지 감수한 율리아나에게 결코 함부로 대할 순 없는 노릇이다. 자신들이 데이몬을 부정하지 않은 것처럼 저들 역시 카심 용병단을 부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흑마법사가 철없는 카르셀의 왕녀에게 단단히 빠져 있으니 지금으로썬 그가 나서서 왈가왈부할 처지가 아니었다. "저들에 대한 일은 마법사님께 일임하고 싶습니다만……."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카심. 하지만 데이몬은 그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닐세. 사실 자네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네. 자네들은 아마도 내가 저 카르셀의 왕녀에게 연정을 품었으리라 짐작했겠지?"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카심은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수긍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부인할 수도 없는 딜레마. 용병들의 얼굴에도 곤혹스러움이 가득했다. 데이몬은 그런 용병들의 면면을 하나씩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닐세. 난 무척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마법사일세. 백년의 세월을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로……. 내가 아무리 악당이래도 손녀의 손녀 뻘도 되지 않는 어린아이에게 흑심을 품을 정도까진 아냐. 설사 마음이 동한다 하더라도 몸뚱이가 따라줄 지도 의문이고……." 데이몬의 넉살에 용병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지도 못하게 주인공(?)이 되어버린 율리아나만이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을 뿐이었다. "하하하." 데이몬은 무표정한 얼굴로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그녀 역시 평소와는 달리 데이몬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오로지 저 왕녀의 용모뿐이라네. 그 외의 것은 관심조차 없다는 것이 정확한 내 본심이라고나 할까. 이제부터 그 내막에 대해 설명하겠네." 용병들의 시선은 또다시 데이몬을 향해 집중되었다. 율리아나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일세. 수백 년 전이라 생각해도 무방하지. 당시 한 소녀가 있었네." 과거의 추억을 상기하자 데이몬의 눈빛은 어느덧 몽롱해져가고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청순한 소녀였지. 단 한 번 본 순간 내 마음을 여지없이 사로잡아버릴 정도로……. 물론 내 생각일 뿐이지만 그녀는 세상에서 감히 비견할 여자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네. 그녀는 그 정도로 착하고 사랑스러웠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마음 속에 단단히 각인되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일세." 난데없이 흘러나오는 흑마법사의 사랑타령. 하지만 설명해나가는 데이몬의 어조가 너무도 절절했기에 용병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난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그녀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네." 이야기가 거기까지 진행되자 참다못해 패터슨이 불쑥 끼여들었다. "혹시 죽었습니까?" 데이몬의 얼굴에 쓸쓸한 감정이 서렸다. "많은 것을 알려 하진 말게. 그 이후로 난 그녀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했으니 말일세. 이것은 그저 내가 가슴속에 곱게 묻어놓은 추억일 뿐이라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율리아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그저 마음속에 묻고만 살아왔다네. 정말 오랜 세월 동안 말일세. 하지만 나는 저 카르셀의 왕녀를 보고 나서 엄청나게 놀랐다네. 왜냐하면 왕녀의 용모가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녀의 모습과 정말 똑같았기 때문이었네. 지금까지 줄곧 왕녀의 얼굴을 쳐다봤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일세.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오래 전 추억이 치밀어 올라 그 순간만은 잠시 행복할 수 있으니 말일세." "그, 그랬었군요." 비로소 곡절을 알게 된 용병들은 심정을 익히 짐작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형적인 신파조의 사랑타령이었지만 데이몬의 말투에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역력히 묻어 나오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보지 못한다는 것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슬픈 일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용병들은 데이몬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데이몬은 카심을 향해 부스스 고개를 돌렸다. "사실 자네들과 동행하기로 마음먹은 것에는 그런 곡절이 숨어있었네. 그 때문에 그동안 왕녀의 방종을 너그러이 묵인할 수 있었던 것이고……." 말을 마친 데이몬은 율리아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여기서 끝맺겠네. 어차피 카르셀의 왕녀는 나에겐 단지 얼굴만 닮은 타인일 뿐이야. 자네들을 동료로 인정한 이상 그 동안 행해졌던 유희를 깨끗이 접어버리겠네. 그러니 다시는 왕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데이몬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옴에 따라 율리아나의 안색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 중대한 착각을 한 것이다. 흑마법사가 자신을 사모하고 있다는 크나큰 착각.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라 견딜 수 없었다. 그런 율리아나를 쳐다보며 데이몬은 결론을 내렸다. "모두가 알다시피 저 카르셀의 왕녀가 우리 용병단에 끼친 손실은 결코 적지 않아. 이제 내 관심은 그녀에게서 완전히 사라졌으니 이곳에서 그녀의 거취에 대한 결론을 내리도록 하는게 어떤가?" 말을 마친 데이몬은 카심을 쳐다보았다. "자네가 결정을 내리도록 하게. 계획대로 임무를 완수하던지 아니면 여기서 계약을 파기하고 갈 길을 떠나던지, 둘 중 하나를 택일하게. 만약 헤어지는 길을 택한다면 위약금은 내가 부담하겠네. 그동안 즐거웠던 추억을 되새기게 해 주었던 보답으로라도 충분한 돈을 지불할 테니."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 카심의 얼굴에 상당히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것은 분명 쉽지 않은 결정임에 틀림없었다. 심문 받을 당시 율리아나가 자신들과 헤어졌다는 진술만 했더라도 이것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고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처벌받을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용병단과의 계약해지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200회. 그러므로 아직까지는 계약이 유효하다 봐야 했다. 결국 카심은 율리아나에게 직접 의향을 물어보기로 작정했다. "율리아나 공주. 당신은 이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이오. 당신의 대답 여하에 따라 거취를 결정할 테니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주기 바라오." 정색을 하며 질문하는 카심을 쳐다보며 율리아나는 무언가를 결정한 듯 안색을 굳혔다. "아직까지 계약은 유효한 거죠?" "크로센 제국에 도착할 때까지는 유효합니다." 카심의 대답에 그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임무를 완수해주길 바래요. 나 역시 다른 용병단을 고용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용병들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저 돼먹지 않은 계집아이를 또다시 모셔야 한다니.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곤욕을 치러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용병들은 카심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물론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카심 역시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기사는 아니었을망정 카심은 명예와 약속을 중시하는 사나이였으므로. "일단 율리아나 공주는 심문과정에서 우릴 부정하지 않았다. 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이다. 그러므로 우린 계속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이견이 있는 사람 있나?" 극도로 실망한 눈치였지만 용병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같은 대장의 결정이었기에 불만이 있건 없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카심은 휘하 용병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확실한 통솔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진로가 결정되자 카심은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이와 같이 결정이 났습니다. 마법사님께 혹시라도 이견이 있으십니까?"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내심으론 기쁘기 한량없었던 데이몬이었다. 비록 겉으로 마음을 돌렸다고 말하긴 했지만 율리아나의 용모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면 그것 또한 거짓말이었으므로……. 하지만 어느 정도 딴지를 걸어놓을 필요는 있었다. "대장이 결정을 내렸다면 나도 순순히 따르겠네. 하지만 저들에게 단단히 서약을 받아야 할거야. 계속 말썽을 부리고, 혹시라도 날 또다시 제보할 지도 모르니 말이야. 사실 난 감옥에 갇히는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아. 욕설을 들어먹는 것은 더더욱 싫고." 데이몬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아차린 듯 카심은 율리아나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만약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있을 때에는 가차없이 계약을 해지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용병단원들의 안전에 해가 되는 행동 모두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동의하시겠습니까?" 제법 강하게 나가는 카심의 태도에 약간 골이 난 듯 보였지만 율리아나는 비교적 선선히 요구를 응낙했다. "알겠어요." "그리고 앞으론 마법사께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저 분은 우리 용병단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건 저 작자가 앞으로 날 어떻게 대하는지 봐서 결정할 문제예요. 그 문제에 대해선 당신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는 것 같군요." 생각보다 당찬 율리아나의 대꾸에 카심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무튼 성격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강한 율리아나 공주였다.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 카심은 몸을 돌렸다. 이젠 출발할 시간이었다. 워낙 끔찍했던 경험 탓에 더 이상 돈트렐에 머물고 싶지 않은 것이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의 심정이었다. "출발한다. 모두 채비를 갖추어라." 압수 당했던 짐이 모두 마차에 실려 있었던 터라 구태여 돈트렐로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묵묵히 짐을 수습한 용병단은 도보로 걸음을 옮겼다. 말을 찾아와야 했지만 용병들 중에서 돈트렐로 다시 돌아가고픈 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것은 미첼과 율리아나도 마찬가지였기에 일행은 그대로 여정을 시작하기로 작정했다. 지도를 들여다 본 카심이 가야 할 길을 정했다. "일단 관도로 해서 일주일 정도 걸어간 뒤 서쪽으로 빠진다. 다음에 경유하는 도시에서 말을 장만하기로 하자." 용병들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제 삼류 용병의 신세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기대로 그들의 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도보로 여행을 시작한 일행은 만 하루만에 돈트렐을 벗어날 수 있었다. 워낙 지긋지긋했던 경험이었으므로 돈트렐의 경계를 지나며 모두들 후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이 차칫 잘못되었다면 평생을 감옥에서 썩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완만한 산등성이에 도착하자 카심이 잠시 휴식할 것을 지시했다. "여기서 쉬었다 간다. 두 시간 정도 머물 작정이니 준비를 하도록 하라." 용병들은 부산하게 휴식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각자 역할을 분담해서 음식을 만들고 나무와 사냥을 하러 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현저한 변화가 있었다. 과거에는 철저히 이인 일조로 역할을 분담했지만 지금은 한 가지 일을 딱 한 사람이 맡았다. 그렇게 해서 남은 사람들은 마나연공법을 수련하기로 했다. 이것은 모든 용병들간에 암묵적으로 합의된 사항이었다. 특히 데이몬으로부터 마나연공법의 유래를 들은 다음에는 용병들은 틈만 나면 마나연공에 몰두했다. 그것은 바로 강해지기 위한 유일한 지름길이었으므로……. "이번에는 네가 수고해. 다음 차례엔 내가 일을 할 테니……." "그러지." 용병들은 선선히 맡은 바 임무를 하러 떠났다. 남은 이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자리에 걸터앉아 마나연공에 몰두했다. 그런 점에서 카심은 행운아라 할 수 있었다. 대장을 맡은 덕택에 쉴 때마다 마나연공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데이몬은 나뭇등걸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사위를 둘러보았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녀석들 꽤나 열심히 하는군." 그로써는 용병들이 열심히 수련에 몰두하는 것이 대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시간과 공간이 전혀 다른 차원의 인물들이 출신 문파 배교의 수라사령심법에 심취하고 있는 만큼 자부심이 없을 수는 없었다. 크로센 대제가 전수한 정파 내공심법이 판을 치는 곳에서 바야흐로 마공이 뿌리를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율리아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장면을 쳐다보았다. 며칠 전 일을 계기로 그녀의 성격은 판이하게 바뀌어 있었다. 주제넘게 나서지도 않았고 고집을 피우는 일도 없어졌다. 말수도 극히 줄어 여정 내내 묵묵히 지낼 뿐이었다. 한 가지 더 달라진 점은 그녀가 이따금 데이몬을 뚫어져라 응시한다는 점이다. 데이몬이 그녀에게 별달리 시선을 보내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입장이 판이하게 뒤바뀌었다 봐야 했다. 물론 데이몬으로써는 송두리째 굴러 들어온 넝쿨이 아닐 수 없었다. 시선만 돌리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그는 마법을 사용해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훑고 있었으니까……. 미첼은 무척 곤혹스런 표정으로 용병들이 마나연공에 빠져있는 것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그는 용병들이 익히는 마나연공법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어. 흑마법사가 거론한 이계 절대자의 마나연공법이 크로센 대제가 전수한 첫 번째 방법과 버금간다니…….' 물론 그가 익힌 펜슬럿 고유의 마나연공법은 크로센 기사단의 연공법과는 어느 모로 보나 차이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위력 면에서 상당히 뒤떨어진다고 봐야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오랜 시절 보완해 왔지만 펜슬럿은 아직까지 크로센 기사단의 마나연공법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기사들의 수준이다. 크로센 기사단 구성원들의 실력은 그만큼이나 강했다. 평범한 기사가 펜슬럿 근위기사를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보나마나 허풍이겠지? 맞아. 그럴 리가 없어.' 미첼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흑마법사가 부스스 몸을 일으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용병단의 막내인 제럴드에게 다가갔다. "마나연공을 멈추고 일어나거라." 데이몬의 말에 제럴드는 즉시 마나연공을 멈췄다. 이미 그에게 데이몬이란 존재는 거의 절대적인 우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상태였다. "네, 마법사님." 얼른 몸을 일으키는 제럴드를 보며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에게 한 가지 더 전수해 줄 것이 있다. 이것은 오직 너만이 익힐 수 있는 것이다." 데이몬은 이 자리에서 제럴드에게 좌수검법을 전수해 줄 작정이었다. 좌수검법(左手劍法)이 보유한 36개의 검형(劍形)과 72로의 검로(劍路),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응용초식을 모조리 말이다. 좌수검법은 선천적으로 왼손잡이인 제럴드에게는 더 이상 적합할 수 없는 검법이었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방향에서 쏘아지는 좌수검법의 궤이신랄한 초식들은 이곳에서 정말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 틀림없었다. 극히 정형화된 이곳의 검술에 비교해 본다면 좌수검법은 말 그대로 파격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도리가 없었으므로……. "네게 전수해 줄 것은 바로 검법이다. 왼손으로 전개하는 검법이므로 네가 익히기에 가장 적합할 것이다. 참고로 이 검법은 일전에 내가 얘기했던 그 이계 절대자에게서 흘러나온 것이기도 하지." "저, 정말입니까?" 제럴드의 눈이 커졌다. 전설적인 존재인 크로센 대제와 쌍벽을 이뤘다는 이계 절대자의 검법을 전수받게 되다니……. 기쁜 나머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제럴드의 사의가 조금 쑥스러웠는지 데이몬은 다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고마울 것 없다. 그저 네가 왼손잡이라서 전수해 주는 것이니까……." 그러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사실 그가 유독 제럴드에 신경 쓰는 이유는 바로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동질성 때문이었다. 과거 그는 키가 작고 꼽추였다는 이유로 무공을 익히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 때문에 왼손잡이에 절름발이인 제럴드의 애환을 잘 알고 있었고 특히 그의 기구한 사연을 듣게 되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어차피 아르카디아에 사파의 검술 하나 남기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정확히 따지자면 좌수검법은 배교 고유의 무공이 아니었다. 대개의 사파 무공들이 그러하듯 좌수검법의 시초는 강호를 방랑하는 이름 없는 어느 낭인에 의해 유래되었다. 제럴드처럼 왼손잡이였으리라 짐작되는……. 하지만 좌수검법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가며 차츰 가다듬어졌기 때문에 지금은 대부분의 사도 문파에서 알고 있는 검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데이몬이 전수하는 좌수검법은 조금 달랐다. 총사였던 사준환이 수라사령심법을 만들어내면서 수십 명의 무공교두를 통해 보완해 낸 강력한 무공 중 하나였으므로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했다. 특히 기습에 적합한 검법이었으므로 수호마왕군들 대부분이 이 검법을 익혔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목숨을 건지는데 대단한 역할을 했다. 그런 좌수검법의 유래를 잠시 떠올려 본 데이몬은 제럴드로 하여금 자세를 잡게 했다. "이제부터 네게 검로와 검형을 가르쳐 주겠다. 그러니 네가 지금까지 익힌 검술은 깡그리 잊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마법사님." 제럴드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제럴드는 지금껏 익힌 검술이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잊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카심 용병단에 받아들여진지 고작 5개월 남짓. 카심에게서 기본기와 자세는 배웠지만 본격적인 검술은 맛도 보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익숙하지 않은 오른손으로 검술을 익혔으니 동작이 무척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네 검을 다오." 제럴드는 긴장한 표정으로 허릿춤의 검을 데이몬에게 건넸다. 시골마을 대장간에서 산 싸구려 검이었지만 그동안 무척 정성 들여 닦아왔으므로 제법 서늘한 예기를 발하고 있었다. "잘 보아라." 검을 받아든 데이몬은 너울너울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제럴드가 똑똑히 알아볼 수 있도록 초식을 일부러 천천히 전개하며 말이다. 비록 펼쳐본 적은 없었지만 좌수검법의 요체는 모두 데이몬의 머리 속에 들어있었다. 그것은 데이몬의 과거 경험과 맞물려 제럴드에게 똑똑히 전달되고 있었다. "이 검법의 요체는 의외로 간단하다. 치고 찌르고 후리며 최대한 방어와 견제동작을 하다가 틈을 발견하면 공세로 돌변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우선 몸을 최대한 낮추는 것이 선결과제이며 불필요한 동작을 최대한 자제하며 점과 점을 일직선으로 연결하는 선에 가장 유의해야 한다. 비록 정파 무공에는 못 미치겠지만 사파의 주요검법중 하나인 만큼 좌수검법은 충분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검법이었다. 극쾌(極快)를 요체로 하는 만큼 무거운 장검이나 낭창낭창한 연검을 쓰지 못하고 비교적 적당한 길이의 가벼운 검을 사용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지만 적어도 아르카디아에서는 별달리 문제가 없었다. 대부분의 검사들이 극히 정형화된 장검을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거기에 합당한 기술만 전수해 주면 되는 것이다. 중원에는 정말 방대한 무기가 존재했다. 황실 근위병에게조차 18반 병기에 대한 무예를 전수할 정도였으니 그 외 외문병기의 수는 간략히 생각해봐도 상상을 초월했다. 도(刀) 검(劍) 창(創) 모(矛) 극(戟) 과(戈) 등 기본적인 무기의 종류만 해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물론 좌수검법의 구결에는 그 모든 무기에 대한 대처법이 존재했다. 하지만 제럴드에게 그 모든 것을 전수해 줄 필요는 없었다. 장검이나 창에 대한 몇 가지 기술만 전수하면 되었기에 데이몬은 제럴드가 오래지 않아 좌수검법의 검형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뒤에는 거듭되는 수련을 통해 응용동작이나 숙련도를 쌓아 가면 되는 것이다. 제럴드는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데이몬이 펼쳐 보이는 동작을 머리 속에 새겨 넣는데 주력했다. 이것만 철저히 익힌다면 집안의 복수가 이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으므로……. 용병들은 이제 마나연공을 마친 상태였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와 데이몬이 펼치는 검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데이몬의 검무를 쳐다보던 카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생소한 검법이로군. 왼손을 사용하는 검법이라……." "과연 효과가 있을까요?" "모르지." 짧게 내뱉은 카심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데이몬이 펼쳐내는 검무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실전무예의 대가인 탓에 카심은 검술의 위력을 대번에 꿰뚫어보고 있었다. '정말 놀랍군. 검의 방어동작이 거의 모든 종류의 공격에 대처하게 되어 있어. 음.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는군. 거기에다 틈틈이 뻗어 나오는 공격은 모두가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어. 막아내기가 무척 까다롭다는 뜻이지. 정말 한 번 싸워보았으면 원이 없겠군.' 만약 데이몬이 정통으로 검을 익힌 검사였다면 카심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대련을 신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에게 검술대결을 신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정도로 좌수검법의 완성도는 뛰어났다. 하지만 카심에겐 굳이 그 검법을 익히고 싶다는 욕망은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가 지금까지 익혀왔던 검술을 모조리 버려야 했으며 또한 익숙하지 않은 왼손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단련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때문에 감탄은 오직 감탄으로만 끝내야 한다는 사실을 카심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용병들에겐 데이몬의 검무가 그저 생소한 움직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검무의 비밀은 오로지 고수의 눈에만 그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으니까. 여기서 카심 못지 않게 충격을 받은 이가 또 하나 있었으니……. '정말 놀랍군.' 입을 딱 벌린 채 정신 없이 검무에 심취해 있는 이는 바로 미첼이었다. 상당한 고수에 속하는 그인지라 좌수검법의 위력 정도는 한 눈에 간파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매를 맞아가며 혹독하게 단련된 터라 미첼은 검술을 보는 안목에 상당히 조예가 있었다. 그런 그의 눈으로 봤을 때 마법사가 전개하는 검법은 결코 소홀히 볼 것이 아니었다. '놀랍군. 저 검법과 붙는다면 상당히 고전을 면치 못하겠어. 틈을 쉽사리 찾을 수 없어 방어동작을 쉽사리 허물어뜨리지 못하는 데다 공격의 경로가 통상적인 상식을 벗어나고 있으니…….' 물론 검법이 탐나기는 하나 익히지 못한다는 것은 미첼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이유는 카심과 마찬가지였다. 자고로 사람에겐 오래된 습관을 바꾸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감탄 어린 눈빛과 나머지 용병들의 곤혹스런 눈빛을 받으며 데이몬은 검무를 마쳤다. "초식을 모두 눈에 익혔느냐?" "아, 아직……. 워낙 동작이 많아서……." 당황한 듯 고개를 내젓는 제럴드를 보며 데이몬은 이해한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럴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전수해 줄 테니……. 일단 기억한 것만 연습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다음에 하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는 제럴드를 흘겨보며 데이몬은 또다시 나무등걸에 걸터앉았다. 제럴드는 곧 수련에 들어갔고 나머지 용병들도 분분히 제 위치로 돌아갔다. 데이몬의 검무를 훔쳐보느라 식사준비가 상당히 늦어졌기 때문에 하인리히는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식사당번을 함께 맡은 제럴드가 검술수련을 하고 있으니 그 혼자서 모두의 식사를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201회. 조금 뒤 식사를 마친 일행들은 나뭇등걸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했다. 휴식 이래봐야 여전히 마나연공에 몰두하는 녀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느긋하게 용병들을 둘러보던 데이몬의 눈에 이채가 맺혔다. "응?" 식사를 마친 율리아나가 어느새 자신의 앞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이다. 재미있다는 듯 그녀의 시선을 맞받던 데이몬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왜 날 찾아왔지?" "할 말이 있어요." 거침없이 내뱉는 그녀의 태도에 데이몬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나에게 할 말?" "그래요." 또 무슨 사고를 치려하나 싶어 카심이 얼른 다가왔다. 그에게 율리아나란 존재는 이미 화약고 속의 불씨처럼 위험하기 그지없는 존재로 간주되어 있었다. 용병들의 시선도 일제히 이쪽으로 쏠려 있었다. "재미있군. 그래 할 말이 뭐지?" 데이몬의 눈을 들여다보던 율리아나는 손가락을 들어 카심을 가리켰다. "일전에 용병대장에게 들은 말이 있어요. 그에 따르면 당신은 큰 실수를 한 것이 확실해요." "실수?" 율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요. 원래대로라면 용병단에서는 구성원 중 한 명이 진귀하거나 값나가는 몬스터를 잡을 경우, 그것은 엄연히 용병단의 전체재산이 된다고 하더군요. 전 분명히 들었어요. 물론 분배할 경우에 직접 잡은 용병에게 가장 많은 몫이 돌아가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용병대장과 다른 용병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관례예요." "………." "하지만 당신은 그 법칙을 어겼어요. 비록 당신과 휘하 데스 나이트들이 드래곤을 잡았다 치더라도 그 시체를 당신 혼자서 독차지할 수는 없다는 뜻이죠. 일단 당신이 용병단의 소속인 이상 관례를 따라야 하는 것이 합당한 듯 싶네요. 그게 바로 내가 할 말이에요." 데이몬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너와 네 호위기사도 끼여들어 한 몫 단단히 챙기겠다 그건가?" 예상 밖으로 율리아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건 아니에요. 그럴 만큼 제 낯짝이 두껍진 않거든요. 제 몫을 요구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미첼도 마찬가지이구요. 하지만 당신에겐 동료 용병들이 있어요. 드래곤의 시체를 동료들과 어느 정도 나눠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뜻밖의 태도에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렇다면 너는 지금 다른 용병들을 배려하고 있는 건가?"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좋아요. 하지만 드래곤의 시체를 당신 혼자 독차지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말을 마친 율리아나는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갔다. 마치 할 말을 다했다는 듯한 태도였다. 데이몬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카심을 쳐다보았다. "대장. 그녀의 말이 과연 맞는 말인가?" 카심 역시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마 율리아나가 저렇게 당돌한 요구를 할 줄은 몰랐다. 물론 그런 관례가 없진 않았다. 용병단의 결속을 강화한다는 원래의 목적이 아니더라도 개인이 사냥한 몬스터는 소속된 용병단 전원이 나눠 가진다는 것은 관례로 분명히 존재하는 일이었다. 물론 몬스터의 반은 엄연히 사냥한 당사자에게 돌아가지만 말이다. 하지만 카심은 드래곤 사냥을 지켜보며 추호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드래곤의 위력은 그 정도로 강력했고 데이몬이 없었다면 용병단 전원은 드래곤의 손짓 한 방에 몰살했을 것이 분명했다. 사실 드래곤의 시체가 가지는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감히 값을 논할 수 없을 정도의 가치를 가진 드래곤 하트를 비롯하여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비싼 값에 팔리는 드래곤 본과 스케일, 심지어 고기와 피도 마법사들에겐 중요한 연구재료가 되었다. 그 탓에 데이몬이 잡은 에인션트 급 드래곤의 시체는 말 그대로 엄청난 재산이라 표현할 수 있었다. 물론 카심도 사람인지라 거기에 대한 탐욕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니……. 하지만 카심은 어렵지 않게 마음을 비울 수 있었다. "그런 관례가 있긴 하지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희야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지요. 저희에겐 도저히 드래곤을 잡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노획물을 마법사님께서 가지시는 것이 가장 합당합니다." "그건 아닐세."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는 조직의 생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관례가 있으면 따르는 것이 합당했다. 비록 그가 아니었다면 잡을 수 없었다고 하나 동료는 엄연히 동료였다. 만약 드래곤의 시체를 자신이 독차지해버린다면 여타 용병들의 신뢰를 얻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마나연공법을 전수해 주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데이몬은 용병들을 쳐다보며 계면쩍게 웃었다. "그런 관례가 있는 줄은 몰랐군. 용병단에 소속되어 본 것이 생전 처음이라 알지 못했네." 카심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희는 거기에 대해 추호도 섭섭한 마음이 없습니다." 카심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용병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들에겐 마나연공법을 얻은 것 자체만으로도 데이몬에게 큰 은혜를 입은 것이었기에……. 하지만 데이몬은 쉽사리 뜻을 꺾지 않았다. "아니야. 용병단원으로써 규칙을 어긴다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야. 나도 엄연한 용병단원이니 가급적 규칙을 지키고 싶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손을 가져다 턱에 대었다. "흠. 그런데 어떻게 하지? 저 드래곤의 시체는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인데……. 가만있자. 이러면 어떨까?" 데이몬은 카심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 드래곤의 가치가 얼마나 될 것 같나?" "그, 글쎄요?" 카심으로써는 오로지 고개를 가로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아르카디아에서 에인션트 급 드래곤이 잡힌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웜 급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운 나쁜 천살 안팎의 어린 드래곤만 서넛 잡혔을 뿐이었다. 그런 작은 드래곤이라 해도 족히 일천 골드는 받을 수 있었다. 카심의 입장에서는 실로 천문학적인 액수인 것이다. 드래곤이 나이에 비례해서 성장하는 생물임을 감안하면 에인션트 급 드래곤의 시체는 그것보다 족히 몇 배는 더 나간다고 봐야 했다. 덩치가 그 정도나 더 컸으니 말이다. 하지만 카심에게는 애당초 데이몬의 비위를 거스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푼돈(?)을 얻으려다 마법사의 마음을 놓치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은 것이 그의 순수한 속마음이었다. "이건 진심입니다. 저희는 결코 드래곤의 시체에 관심이 없습니다." "어허. 이 사람이. 딴 소리 말고 가치가 어느 정도 되는지 말해보게." 참다못한 데이몬이 역정을 내자 그때서야 카심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밝혔다. "대, 대략 사천 골드 정도……." 액수를 듣자 데이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렇다면 절반은 내 몫이라 했으니 자네들이 나머지 절반을 나눠주면 되는 것이로군." "과, 관례를 따지자면 그렇습니다만." 데이몬은 오른 손을 불쑥 품속에 집어넣었다. 조금 뒤 그의 손에는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 하나가 들려 나왔다. "이것을 받게. 2천 골드일세. 원래는 드래곤의 시체를 처분해서 나눠 가지는 것이 합당하겠지만 내게 꼭 필요한 것이니 양해를 부탁하네." 데이몬은 젠가르트에게서 받은 2천 골드를 미련 없이 카심에게 건네주었다. 돈에 그리 미련이 없는 데이몬인데다 인크레시아 속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보물들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아까울 것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용병단 전체가 사용하는 경비인 만큼 건네줘도 무방할 듯 싶었다. 데이몬에겐 그다지 돈이 필요 없었으니까. 게다가 데이몬은 2천 골드보다는 용병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카심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주머니를 건네 받았다. 설마 이 조그만 주머니 속에 2천 골드나 되는 거금이 들어있으랴,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주머니를 풀어헤친 카심은 눈이 불쑥 튀어나왔다. 주머니 속에는 정확히 금화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놀랐는지 카심은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이런 거금은 처음 만져보았다. "저, 정말이셨군요." "조금 무거워서 경량화 마법을 걸어두었지. 아마도 액수는 정확할 걸세."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머니가 급격히 무거워졌다. 무게로 인해 체격 좋은 카심의 덩치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뜻밖의 일에 카심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이러시면……." "괜찮네. 난 어차피 물욕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게다가 마법보고 인크레시아 속에는 그 돈의 수십, 수백 배가 넘는 보물이 들어있으니 말일세. 어차피 그 돈 자체가 보고 속의 보물 몇 가지를 처분한 것이야. 이래뵈도 난 상당한 부자거든." 말을 마친 뒤 씩 미소를 짓는 데이몬. 뜻밖의 횡재에 용병들조차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미첼도 마찬가지였고 율리아나 역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패터슨이 딱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말을 걸어왔다. "마법보고 속에 그렇게 보물이 많습니까?" "당연하지 않겠나? 탐욕스러운 드래곤들이 수천 년 동안 긁어모은 것들 중에서 최고의 것들만 들어있으니 말일세. 게다가 보물들 대부분이 드워프의 세공품이더군." 드워프의 세공품이 엄청나게 비싸다는 것은 용병들도 대부분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저 사악한 흑마법사로만 생각했던 데이몬이 그런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니……. 황당해하는 용병들을 둘러보며 데이몬이 짐짓 인상을 썼다. "그렇다고 내 보물창고를 노리지는 말게. 인크레시아는 훔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마법보고이니까. 나도 드래곤 놈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겨우 빼앗았다네. 알겠나?"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자네들은 믿겠네."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상을 풀었다. 그때서야 마음을 추스른 카심이 금화가 든 주머니를 주섬주섬 챙겼다. "그러시다면 이 돈을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뭐 어차피 자네들 돈이니까 감사할 필요는 없네. 그 정도면 용병단 재정에 제법 도움이 될 거야." '되지요. 되고 말고요.'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말을 가까스로 집어삼킨 카심은 희열감으로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말이 2천 골드이지 정말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정도라면 아르카디아에 존재하는 용병단 전부를 족히 1년 동안은 고용할 수 있는 거액이었다. '정말이지 흑마법사를 맞이하게 된 것은 내 필생의 행운이야.' 크로센 대제와 맞먹는 실력을 가졌다는 이계 절대자의 마나연공법을 얻게 되고 더불어 2천 골드라는 거액을 챙겼으니 카심으로서는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는 것이다. "감사히 쓰겠습니다. 일단 이 돈은 임무가 끝날 때까지 용병단의 공동재산으로 보관하겠습니다." "뭐 그것은 대장이 알아서 하게." 당분간 용병단의 공동재산으로 보관하겠다는 말에도 용병들은 누구하나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만큼 카심을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 굳이 그것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펼쳐질 자신들의 미래를 더욱 신뢰한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눈앞의 거금에 눈이 멀어 큰 일을 망칠 이들은 없었으니까……. 용병들은 곧 환호성을 질렀다. '잘 생각했어.' 거금 2천 골드를 동료들의 신뢰와 바꾼 데이몬은 무척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데이몬과 그의 동료들이 기뻐하고 있는 사이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한 사내가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다. 그것도 한 나라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중요한 직책에 있는 이가 말이다. "정말 걱정이군." 길게 한숨을 내쉰 사내는 착잡한 눈빛으로 창 밖을 내다보았다. 돌연 꺼질 듯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추진하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나머지 새어나오는 한숨이었다. 사내의 모습은 마치 불가항력의 벽에 부딪힌 사람의 그것과 하등 다름이 없었다. "역부족이야. 더 이상 해 볼 도리가 없어." 사내의 이름은 바로 테오도르였다. 점점 허물어져 가는 황권을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크로센 제국의 집정관. 하지만 그는 지금 크나큰 벽에 부딪힌 상태였다. 페르슈타인이라는 결코 뛰어 넘을 수 없는 벽에 말이다. 테오도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정말 존경스럽소. 페르슈타인 공작. 나름대로 머리 쓰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는 나를 이렇게 궁지에 몰아넣다니 말이오. 만약 당신이 황권만 노리지 않았더라면 난 당신을 가슴깊이 존경했을 것이오. 적어도 당신의 능력은 나 따위론 발치도 따라잡을 수도 없으니 말이오." 말을 이어나갈수록 뼈저린 패배감이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집정관이라는 감투를 뒤집어쓰고 황실에 뛰어들 당시에만 해도 그는 반드시 허물어진 황권을 복원하겠다는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이제 대부분 꺾인 상태였다. 귀계에 능한 페르슈타인 공작은 정말 철두철미하게 테오도르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가 추진하던 모든 계획들은 페르슈타인 공작의 방해에 의해 깡그리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지금껏 추진한 일 중 성공한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진정으로 크로센 제국을 생각하는 두 충신들의 희생으로 페르슈타인 공작의 야망을 어느 정도 지체시킨 것. 다시 말해 차도살인지계로 알카리스 왕태자를 없앤 일 말이다. 당시 테오도르는 상황을 무척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밀던 알카리스 황태자가 죽었으니 유일한 대안은 둘째 황자인 드비어스 밖에 없었고 그렇다면 공작의 야망을 분쇄할 날도 머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오산이었다. 계략의 천재답게 페르슈타인 공작은 어렵지 않게 돌파구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새로이 황제가 될 드비어스 황자를 철저히 허수아비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의 계략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불어난 물에 치마가 젖듯 야금야금 실권을 빼앗기던 황태자는 마침내 크로센 기사단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만 남기고 모조리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물론 아무리 페르슈타인 공작이라 하더라도 그것만은 빼앗을 수 없었다. 전통적으로 크로센 기사단은 황제와 그의 뒤를 이을 황손에게만 충성을 서약하기 때문이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202회. 그것을 막아보려고 줄곧 애를 썼지만 테오도르는 결국 역부족임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페르슈타인 공작과의 능력 차이만을 뼈저리게 느낀 채. "이미 페르슈타인 공작은 크로센 제국의 전체 병권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다. 주요 사령관들이 모조리 그의 심복들로 채워진 상태이니……. 기사단만으로는 도저히 전세를 뒤집을 수 없어." 이미 크로센 제국의 군대는 황제의 명령을 듣지 않게 된지 오래였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용의주도하게 심복들을 군의 요직에 심어두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페르슈타인 공작의 탁월한 능력이 여실히 드러났다. 심복들의 능력이 하나같이 기대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완벽하게 군의 통솔력을 장악한 상태였다. 하나같이 지휘력이나 통제력, 조직 관리에 능한 전문가들이었고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가슴 깊이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인재를 모으고 그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공작의 능력에 오직 감탄을 금치 못했던 테오도르였다. 애석하게도 그들이 황권을 노리는 반역도당의 무리란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미 테오도르는 사람을 시켜 지휘관들 중 몇과 접촉을 시도해 보았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자신의 모든 것은 엄연히 페르슈타인 공작의 것이라며 들은 척도 하지 않거나 냉랭히 축객령을 내리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답답하군." 테오도르는 참다못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혀 왔으므로 이곳에 더 이상 머물기 싫었다. 비록 다시 돌아올망정 잠시나마 머리를 식히고 싶은 심정이 절실했다. "스승님을 잠시 뵙고 와야겠군." 결국 그는 출타할 생각을 굳혔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스승을 만나 뵙고 조언을 듣고 와야겠다는 것이 그의 결심이었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부관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마차를 준비하라. 아버님 댁에 잠시 다녀올 생각이다." 부관의 눈에 모호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므로 테오도르는 미처 그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공손히 대답하는 부관의 말을 흘려들으며 테오도르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두두두두. 화려하게 치장된 팔두마차가 관도를 맹렬히 질주하고 있었다. 일국의 대소사를 책임지는 집정관의 마차인 만큼 호화로움이 극에 달한 모습이었다. 도합 이십 명에 가까운 기사들이 마차를 철통같이 에워싼 채 호위에 열중했다. 테오도르는 흔들리는 마차 좌석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착잡한 감정이 아직까지 가시지 않았는지 눈꼬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지금 아버지인 네르시스 공작의 저택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양부(養父)말이다. 네르시스 공작. 한 때는 당당한 권력자의 일인이었지만 지금은 낙향해서 초야에 묻힌 몰락한 귀족가문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테오도르라는 걸출한 인재를 맞아들여 황궁에 들여보낸 탓에 조금 빛을 발할 수는 있었지만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에는 아직까지 역부족이었다. 그야말로 가문의 사활을 테오도르 하나에 걸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네르시스 공작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평민 신분의 자신을 받아들여 집정관이 될 수 있게 한 은혜는 잊을 수 없지만 그것이 철저히 이해타산에 의한 선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오도르가 가문을 찾아가는 목적은 오히려 다른 데 있었다. 사실상 네르시스 공작가에 연금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어머니와 두 동생, 그리고 자신에게 기회를 부여한 스승을 만나보고자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네르시스 공작과의 만남을 중재해 고급 귀족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비밀리에 발렌시우스 황제를 독대할 수 있게 배려해서 그에게 집정관이란 지고한 지위를 선사한 스승 말이다. 하지만 스승을 떠올리자 테오도르의 얼굴엔 측은한 빛이 떠올랐다. "불쌍하신 분." 테오도르의 생각에 그의 스승은 정말 불행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 비운의 인물.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이 아니라고 표현해야 했지만 테오도르는 스승을 가슴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그의 엄청난 지식과 배려가 아니었다면 테오도르가 이런 위치에 오르기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므로……. 스승을 떠올린 테오도르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두렵군. 스승님이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집정관의 시름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차는 기세 좋게 네르시스 공작가를 향해 열심히 내달리고 있었다. "어서 오너라. 내 아들아." 자신을 향해 달려나오며 두 손을 활짝 펴는 늙은 귀족을 바라보며 테오도르는 얼른 얼굴빛을 고쳤다. 그는 바로 자신의 양부인 네르시스 공작이었다. 꿍꿍이가 어떻든 간에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은인임에는 분명했기에 예의는 깍듯이 지켜야 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아버님. 워낙 공무에 매여서 자주 찾아뵙지 못한 점 용서하십시오." "무슨 소리냐? 가문의 영광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네게 용서라니……. 그런 소린 하지도 말거라." 얼토당토않은 소리라는 듯 테오도르의 몸을 덥석 끌어안는 네르시스 공작. 비록 피가 섞이지 않을지언정 겉보기에 둘은 영락없는 부자사이였다. 테오도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공작에게 몸을 내맡겼다. "그래 일은 어떻게 진행되어가고 있느냐?" 노귀족의 탐욕 가득한 얼굴을 쳐다보며 테오도르는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 모습에 네르시스 공작의 얼굴빛이 싹 바뀌어버렸다. "자, 잘 안되고 있느냐?" "죄송합니다. 아버님." 테오도르의 대답에 연신 안절부절못해하는 네르시스 공작. 그 모습은 패가망신한 채 복권 한 장에 목을 매단 늙은이의 모습과 하등 차이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테오도르는 짐짓 안색을 굳혔다. "실은 스승님께 여쭈어볼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잘 계시겠지요?" 네르시스 공작의 말투는 다소 퉁명스럽게 변해있었다. 그것을 봐서 성격이 극도로 단순함을 알 수 있었다. "물론이다마다. 그 사람 같지도 않은 녀석은 여전히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살고 있지." "어머님과 동생들은 무고한지요." "뭐, 변함 없이 밥을 축내고 있으니 걱정할 것은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테오도르는 씁쓸한 표정으로 꾸벅 절을 한 뒤 걸음을 옮겼다. 착잡한 기분을 도무지 감출 길이 없었다. 네르시스 공작은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줄곧 테오도르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머님." "오. 왔느냐? 흐흐흑." 테오도르를 보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는 늙은 어머니. 그것을 봐서 네르시스 공작가문에서의 삶이 그리 평탄치 않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비록 겉모습은 나무랄 데 없는 귀족부인이었지만 눈가의 주름이 많이 는 것을 보니 마음고생이 무척 심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테오도르는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주 찾아오지 못한 절 용서하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냐. 이렇게 널 보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하거늘……." 테오도르를 부여잡고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 그 모습에 테오도르는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차라리 집정관 자리를 팽개치고 어머니와 두 동생들을 대동해 멀리 떠나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테오도르의 머리 속에 단단히 각인되어 있던 가문의 복수는 많이 희석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테오도르는 그것이 단순한 망상이란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테오도르에게 이를 박박 갈고 있는 페르슈타인 공작이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지금껏 방패막이가 되어 주던 집정관 자리를 팽개치고 나면 테오도르는 평민이 되어 버릴 테고 그렇게 되면 페르슈타인 공작의 마수를 피할 길이 없다. 게다가 네르시스가를 버린다면 가족들은 그 즉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음을 당해버릴 것이 분명했다. 페르슈타인 공작뿐만 아니라 네르시스 가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는 것이다. 이래저래 빠져나갈 방법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잠시 해후를 나눈 모자는 그간의 그리움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한참동안 서로의 얼굴을 매만졌다.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 테오도르는 무척 어렵게 입을 뗐다. "저는 이제 궁정에 들어가 봐야 합니다. 그 전에 스승님을 잠시 만나 뵙고 싶습니다만." "어서 가보거라." 어머니는 오히려 발길을 떼기 어려워하는 테오도르의 등을 떼밀었다. 얼굴을 뒤덮은 눈물을 억지로 훔치며. 저벅저벅. 테오도르는 침통한 얼굴로 어두컴컴한 지하계단을 내려갔다. 놀랍게도 그의 스승이 기거하는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그는 드문드문 횃불이 밝혀져 있는 계단을 한참동안 내려가야 했다. 또옥. 똑. 여기 저기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지하 통로는 무척 음산했다. 금방이라도 유령이 나타날 것만 같은 스산한 통로. 통로의 끝에는 조그마한 철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녹이 슬어있었지만 워낙 두텁게 만들어진 탓에 감옥의 문이라는 제 역할은 충분히 해 낼 듯 보였다. 철문 앞에 버티고 선 테오도르는 묵묵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때 철문에서 진동과 함께 굉음이 들려왔다. 콰쾅. 마치 잔뜩 성난 맹수가 육탄으로 철문에 부딪힐 때 나는 듯한 음향. 그와 동시에 사나운 울부짖음이 통로 내부를 가득 메웠다. "캬아아아." 하지만 테오도르는 추호도 놀라지 않았다. 상황을 보아 이런 경험을 여러 번 겪어본 듯 했다. 그는 묵묵히 준비해 온 가죽 주머니를 들어올렸다. 그 속에는 피가 가득 담겨 있었다. 조금 전 그와 두 동생의 몸에서 빼낸 혈액. 그것은 스승을 제정신으로 되돌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테오도르는 철문의 하단에 난 조그마한 구멍을 통해 가죽 주머니를 밀어 넣었다. 그 와중에서도 기성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불쌍하신 분." 테오도르의 얼굴에 안타깝다는 기색이 서렸다. 이렇게 해서라도 목숨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스승의 운명이 너무나도 안쓰러웠던 것이다. 그의 스승은 사람이 아니었다. 뱀파이어(Vampire). 즉 흡혈귀인 것이다. 피를 흡수해서 목숨을 이어나가는 저주받은 생명체. 놀랍게도 테오도르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뱀파이어를 스승으로 인정한 상태였다. 꿀꺽꿀꺽. 가죽 주머니 속의 피를 게걸스레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늙수그레한, 무척 힘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테오도르구나. 지금 왔느냐?" "그렇습니다. 스승님." 테오도르는 묵묵히 고개를 조아렸다. 비록 만인의 지탄을 받는 뱀파이어일망정 감옥 속의 사람은 그에겐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스승이었다. 그에게 기회와 지식을 제공해 준 은인인 것이다. 이미 그는 스승의 얼굴을 보지 못한 지 거의 10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10년 전 테오도르가 집정관의 신분으로 황궁에 들어갈 당시 스승은 자의로 이 지하감옥에 들어갔다. 밤만 되면 피를 찾아 헤매는 뱀파이어의 본능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수감될 것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 10년 동안 스승은 감옥 밖으로 단 한 발도 나오지 않았다. 행여나 테오도르의 앞날에 누를 끼칠까봐 자신을 희생했던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것은 테오도르의 동생들이 매일매일 넣어주는 짐승의 피였다. 하지만 영기가 부족한 짐승의 피로 뱀파이어의 본성을 완전히 잠재우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 그 때문에 스승은 평상시에는 광인이 되어 있었다. 인간의 피에 굶주려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그가 제정신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인간의 피를 들이키는 것뿐이었다. 지금처럼 테오도르와 동생들의 몸에서 조금씩 빼낸 피를 들이키는 방법. 그 탓에 스승은 정말 오랜만에 제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말투를 들어보니 일이 뜻대로 잘 안 되는 것 같구나?" 그 말에 테오도르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렇습니다. 저로써는 도저히 페르슈타인 공작의 능력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감옥 속에서는 익히 예상했다는 듯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그럴 것이다. 페르슈타인은 정말 걸출한 인물이야. 그러니까 거대한 크로센 제국을 도모할 마음을 먹었겠지." 순간 테오도르의 주먹이 불끈 쥐어진 채 부르르 떨렸다. 사실 그와 페르슈타인 공작간에는 이미 가문간의 오랜 원한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제게 있어 반드시 복수해야할 원수입니다. 헬프레인 가문으로 인해 저희 가문은……." 테오도르의 말꼬리를 자르며 이어지는 스승의 말에는 짙은 회한이 깃들여 있었다. "그와 네 가문간에 얽히고 설킨 일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도 꽤나 오래 살아왔구나. 인간에게 허용된 수명을 몇 배나 어겨가며……." "………." 테오도르는 묵묵히 스승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미 스승의 사연에 대해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던 테오도르였다. 그의 스승이야말로 정말 절박한 사연의 소유자였다. 과거에는 촉망받는 성직자의 신분이었지만 목적을 위해 뱀파이어가 되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 그의 목적은 오로지 한 가지 뿐이었다. 엄청나게 성장한 아르카디아의 군사력을 이용해서 트루베니아 사람들을 오크의 노예 신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 스승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테오도르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어림짐작으로 수백 년 이상 살아왔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다름 아닌 흡혈로 영원한 생명력을 얻는 뱀파이어의 특성 때문에. 그가 묵묵히 듣고 있는 사이 스승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현재 아르카디아의 군사력은 정말 비약적으로 불어나 있다. 과거 트루베니아가 멸망할 당시를 열 배 이상 상회할 정도로……. 하지만 안타깝구나. 같은 동족으로써 트루베니아 사람들이 오크 족의 노예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것을 그냥 좌시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따지고 보면 아르카디아의 원류는 엄연히 트루베니아일진데……." "하지만 이곳 귀족들은 트루베니아에 대해 별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럴 것이다. 과거 트루베니아의 군주들이 얼마나 못난 짓을 해 왔는지는 나만큼 알고 있는 자가 드물 테니……." "………." "어떻게 해서든 뜻을 이루겠다는 목적으로 널 궁정에 들여보냈지만 결국 페르슈타인 공작의 아성을 넘어서지 못하는구나." "죄송합니다." 테오도르는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스승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사실 이것은 스승의 염원만이 걸린 것은 아니었다. 가문의 숙원도 함께 걸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껏 테오도르는 정말 무단히도 노력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결국 페르슈타인이라는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심정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스승은 따뜻한 말로 그를 위로했다. "죄송할 것은 없다. 애당초 내가 너에게 너무 과중한 짐을 지워주었을 지도 모르니……." "제겐 페르슈타인 공작만큼 인재를 끌어들이는 포용력이 없습니다. 그는 조직관리에 대해서는 정말 철두철미한 인물이더군요. 비록 원수이긴 하지만 능력 하나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 스승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어쩌면 뱀파이어가 되면서까지 이루려던 염원이 덧없이 꺾인 데 대한 상심일 지도 몰랐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음을 느낀 테오도르는 묵묵히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궁정에 들어갈 시간이군요. 사태의 추이를 보아가며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크으으. 그러려무나. 너, 너무 조급하게 행동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테오도르는 묵묵히 몸을 돌렸다. 뱀파이어로써의 본능이 치밀어 오르는지 감옥 속 스승의 신음 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203회. 일행은 한창 산길을 넘어가고 있었다. 산 하나만 넘으면 곧바로 테르비아의 수도 바얀카가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하지만 카심은 바얀카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엄연히 크로센 제국이었으므로 바얀카를 우회하는 도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향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물론 바얀카에 들러서 물품구입을 하거나 휴식을 취해도 되었지만 카심은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돈트렐에서 받은 대접이 있는지라 테르비아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소드 마스터인 윌커슨을 만나는 것도 지금으로썬 경계해야 할 일이었다. 며칠 전에는 힘이 없어 흑마법사를 그냥 놓아보냈지만 수도에서 맞닥뜨린다면 어떻게 나올지 도무지 짐작하지 못했다. 본시 사람의 마음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법이니까. 그런 까닭에 일행들은 제법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말없이 넘어가고 있었다. 한껏 들뜬 기색으로 데이몬과 함께 걸어가던 카심이 고개를 돌렸다. "정말 꿈만 같습니다." "뭐가 말인가?" "제가 드래곤 사냥을 목적으로 하는 파티의 일원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솔직히 아직까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데이몬은 히쭉 웃었다. "날 때부터 드래곤을 잡는 녀석이 세상에 있나? 모든 것은 경험이야. 잡다보면 요령도 늘어날 걸세." "과연 그럴까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심을 보며 데이몬은 자신이 동료 하나는 잘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비록 지금은 힘이 되지 못하는 녀석들이지만 어차피 드래곤의 침공은 대략 5년 후의 일이었다. 그 때쯤이면 이 녀석들도 상당한 실력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발전속도를 감안하면 충분했다. 게다가 그가 상대할 적은 드래곤뿐만이 아니었다. 드래곤 휘하의 가디언이나 중형 몬스터,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오크 보병 등 적은 많고도 많았다. 아마도 이들이 드래곤 사냥에 합세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그런 조무래기들을 처리하는데는 충분할 터였다. 게다가 용병들을 팔라딘 정도의 실력으로만 키워 놓으면 베르키스 휘하의 리치들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터였다. 어차피 인크레시아 속에는 일개 기사단에게 입히고도 남을 대마법 갑옷들이 들어있으니까. 그것도 최고급품으로만. '게덴하이드는 힘들겠지만 남은 리치들 쯤이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카심이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데스 나이트들이 과거 트루베니아에서 가장 강했던 기사였다면서요." "그랬지. 그들은 최후의 결전에서 드래곤 놈들의 계략에 속아 노스우드에서 떼죽음을 당한 용사대의 일원이었어. 원통해서 이승을 떠나지도 못하고 방황하던 망령들을 붙잡아 데스 나이트로 만든 거지. 그러니까 강할 수밖에 없는 거겠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듀라한도 엄청나게 강했는데 그보다 훨씬 강한 데스 나이트가 넷이나 된다니……."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는 카심을 보며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앞으론 그들과 무척 친하게 지내야 할거야. 아마도 그 녀석들이 자네들을 단련시키는 교관 역할을 할 테니까……." "엑!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눈이 휘둥그레진 카심은 이내 데이몬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들을 대련상대로 해서 수련을 쌓으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비록 데스 나이트일망정 그들은 엄청난 수련을 쌓아온 실력 있는 기사들일세. 자고로 실력은 고수와 싸워야만 느는 법이야. 그들을 상대로 대련을 거듭한다면 실력이 나날이 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네." "햐. 이거 긴장되는군요. 한 대륙의 절대자였던 자들을 대련상대로 삼는다니……." 카심의 상기된 얼굴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아직까진 아니야. 일단 자네들이 대련상대로 삼을 녀석은 바로 윈슬럿이니까." "윈슬럿? 듀라한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솔직히 말해 검술실력 면에서 자넨 아직까지는 그 녀석에게 못 미치네. 나머지 용병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 인적이 드문 곳을 지날 때 틈틈이 그 녀석을 불러내 주겠네. 그러니 한 번 원 없이 싸워보게. 알겠나?" "알겠습니다."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인 카심은 곧 골똘히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듀라한의 이름이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뒤 그는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데이몬을 돌아보았다. "호, 혹시 윈슬럿이라면……. 10여 년 전 전 대륙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크로우 용병단의 용병대장이 아닙니까? 무려 500명의 수급을 잘라냈다는 사상 초유의 살인마. 그, 그렇군요. 도끼를 사용한다는 점과 도저히 듀라한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한 실력을 감안하면……." 이번에는 데이몬이 어리둥절할 차례였다. "윈슬럿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나?" "모, 모르셨습니까? "글세? 윈슬럿은 원래 세바인에 원래 살던 네크로멘서 녀석이 가지고 있었어. 놈을 내쫓고 동굴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얻은 것이지. 워낙 원념이 짙어서 과거가 범상치 않을 것이라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전력을 가진 녀석일 줄은……." "제가 막 용병단에 발을 들인 10년 전에는 윈슬럿 때문에 세상이 무척 떠들썩했었습니다. 그 때가 놈이 막 잡혀 목이 잘린 때였거든요." 카심은 흥분된 기색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윈슬럿의 엄청난 과거 무용 때문이었다. 마나를 다스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열이 넘는 팔라딘과 겨뤄 목을 잘라낸 가공할 실력의 소유자. 악명 때문에 다소 퇴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윈슬럿은 실력 하나는 정말 대단한 용병이었다. 그 때문에 카심이 이리 기뻐하는 것이다. 듀라한이 되어 이성은 사라졌을망정 윈슬럿은 그 때의 검술실력을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윈슬럿과 대련을 거듭해 나간다면 실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거 기대되는군요. 그 유명했던 윈슬럿이 제 대련상대가 될 줄은……." "그 녀석은 당분간 자네뿐 아니라 모든 용병들의 대련상대가 되어 줄 걸세. 사정을 봐 줄 녀석이 아니니 마음 단단히 먹도록 하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조용히 해 봐요." 율리아나의 음성이었다. 데이몬과 카심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우선 미첼이 심각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이 들어왔고 율리아나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미첼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안 들리지만 조금 전에 분명히 들었어. 틀림없이 아기의 울음소리였다고……. 그것도 극도로 기진맥진한." 인적이 드문 산길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릴 턱이 없었으므로 용병들의 눈이 삽시간에 휘둥그레졌다. 카심이 얼른 미첼에게로 나아갔다. "이곳에 아기가 있을 리가 없는데? 틀림없는가?" "그렇소. 조금 전에 분명히 들었소." 팔라딘들의 청각은 범인과 틀리다. 보유한 마나에 힘입어 팔라딘들은 월등히 밝은 청각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미첼이 들었다면 엄연한 사실이라고 봐야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지금은 들려오지 않소." "가만히 있어보게." 마침내 데이몬이 나섰다. 마법을 사용한다면 미첼이 잡아내지 못한 소리라도 충분히 잡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나를 재배열해서 주위의 소리를 끌어들인 데이몬이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미첼의 말이 맞았어. 저쪽 절벽 아래에 두 사람의 숨소리가 아주 가냘프게 들려오고 있어. 그 중 하나는 아기야." 데이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든 용병들이 절벽 쪽으로 달려갔다. 산길이라서 관도 답지 않게 길이 무척 험준한 편이었으므로 불운한 누군가가 이곳을 지나다 발을 헛디딘 모양이었다. 일단 사람을 살려야 하는 일이 우선이었으므로 용병들은 일제히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밝은 미첼이 가장 먼저 신음소리의 주인을 찾아냈다. "저기 있어." 신음소리의 주인은 절벽 중간에 자라난 나무에 걸려 있었다. 그리 높지 않은 절벽이었지만 경사가 상당했다. 게다가 바닥이 돌로 덮여 있어 맨몸으로 떨어졌다면 도저히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정도였다. 멀어서 제대로 분간할 순 없었지만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위태해 보였다. "내가 내려가겠다." 카심이 서슴없이 몸에 걸친 갑주를 풀었다. 몸을 가볍게 한 뒤 카심은 용병들이 건넨 밧줄을 허리에 단단히 동여맸다. 용병들은 무척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바닥에 말뚝을 박아 밧줄을 동여맨 것을 확인하자 카심은 조심스럽게 절벽을 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아 그가 불행에 빠진 사람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심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뒤에서는 데이몬이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저 녀석은 내가 마법사란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나봐. 마법을 쓰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일을……." 성급하게 생각해서 고생을 사서하는 격이 되었지만 그래도 카심의 마음씀씀이가 밉지는 않았기에 데이몬은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마나를 재배열하기 시작했다. 제법 거리가 있었기에 카심은 한참만에 나무에 다다를 수 있었다. 예상대로 나무에 걸린 이는 젊은 여인과 아기였다. 여인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까무러쳐 있었다. 행여나 놓칠세라 아기를 단단히 품속에 안고 있는 모습에서는 모성애가 역력히 배어 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군." 맥을 살짝 짚어본 카심은 일단 몸을 고정시킨 뒤 허리의 밧줄을 풀었다. 일단 여인과 아기를 먼저 묶은 뒤 절벽 위로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그때 바로 뒤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게 묶으면 안 되지. 늑골이 부러진 상태에서 허리를 묶는다면 부러진 뼈가 폐를 찔러 즉사할 수도 있어." 깜짝 놀란 카심이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데이몬이 허공에 둥둥 뜬 채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마법은 뒀다가 뭐할 건가? 제발 부탁이니 날 좀 마법사로 대접해 주게." 카심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워낙 경황이 없었기에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하도 급해서……." "여인을 죽일 생각이 아니거든 줄을 다시 풀게. 음. 우선 자네가 안는 게 좋겠군. 늑골이 부러진 상태니 조심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카심은 조심스럽게 여인을 안아들었다. 그 상태 그대로 카심의 몸이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흑마법사의 마법이란 것을 알아차린 카심은 놀라지 않고 느긋하게 공중부양을 즐겼다. 그들은 오래지 않아 절벽 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카심이 여인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자 용병들이 달려들어 치료한다고 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카심이 아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죄송하지만 치료 마법을 좀 전개해 주시겠습니까?" "진작 그럴 것이지." 얼굴을 푼 데이몬은 곧 힐링(healing)을 시전했다. 인체의 자연치유력을 극대화시켜 원상태로 돌이키는 힐링은 서클이 높을수록 뛰어난 효과를 보인다. 이미 9서클의 데이몬인 만큼 대상이 죽은 시체만 아니라면 그 어떤 상태라도 원래대로 돌이킬 수 있었다. 여인은 상당한 중상을 입고 있었다. 영양결핍 상태에서 무리하게 여행을 했는지 신체의 저항력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거기에다 절벽에서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늑골 세 대가 나가고 다리뼈마저 골절된 상태였다. 물론 절벽에 부딪히며 입은 타박상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거기에 비하면 아기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였다. 아기를 다치지 않게 애쓴 여인의 모성애가 돋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의 상세는 데이몬의 힐링에 의해 금세 정상을 되찾아갔다. 마나가 재배열됨에 따라 부러진 뼈가 이어지며 상처가 흔적도 없이 아물었다. 잠시 후 데이몬은 치료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되었네. 하지만 이 여인은 현재 심각한 영양실조상태라네. 그러니 먹을 것을 좀 준비하는데 좋을 듯 싶네." 그 말에 카심은 즉시 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제럴드와 하인리히. 너희들이 수프를 좀 끓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행은 예상치 못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물론 여인이 깨어날 동안 제럴드와 하인리히를 제외한 용병들이 마나연공에 들어갔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놀라운 것은 율리아나의 태도였다. 생각보다 동정심이 많은 성격인 듯 율리아나는 옆에 찰싹 붙어 그녀를 간호했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204회. 수건으로 여인의 얼굴을 닦아주고 옷을 갈아 입혀 준 율리아나는 아기가 깨어나자 다정하게 얼러주었다. 평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까꿍." 얼러주자 아기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무척 귀여운 아기였다. 채 1살이 되지 않아 보이는 사내아이였지만 뚜렷한 이목구비를 볼 때 멋진 젊은이로 자라날 공산이 컸다. "이렇게 귀여울 수가?" 아기를 꼭 끌어안고 연신 입맞춤을 퍼붓는 율리아나를 보고 용병들은 혀를 내둘렀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그녀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는 사이 여인이 눈을 떴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용병들을 본 그녀는 힘없이 입을 열었다. "여, 여기는 어디죠? 그리고 티미는?" 그것을 보아 아기의 이름이 티미인 것 같았다. 율리아나가 방긋이 웃으며 아기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아긴 무사해요. 걱정하지 말아요." "오. 내 아가. 흑흑흑." 여인은 아기를 얼싸안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상황을 보아 분명한 곡절이 있는 것 같았다. 여인은 한동안 서럽게 흐느끼기만 했다. 하인리히가 수프를 끓여 가지고 왔지만 도저히 권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율리아나가 손을 뻗어 다정하게 여인의 어깨를 쓸어주었다. "너무 울지 말아요. 아기의 이름이 티미인가요?" "네. 흐흑." "수프를 좀 끓여왔어요. 그만 울고 이것을 좀 먹도록 해요." 하지만 여인은 도무지 먹고싶은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무척 배가 고팠을 텐데도 그저 고개만 가로 저을 뿐이었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생각보다 총명한 소녀였다. 여인의 모성애를 가볍게 자극해서 수프 접시를 받아들도록 했으니 말이다. "먹고 싶지 않아도 먹어야 해요. 티미가 몹시 배가 고픈 듯 한데……. 엄마가 먹어야만 아기가 젖을 빨 수 있을 것 아니에요." 결국 여인은 수프 접시를 받아들었다. 구수한 냄새를 맡자 입맛이 동했던지 그녀는 허겁지겁 수프를 먹어치웠다. 보고 있던 하인리히가 수프 한 접시를 더 떠서 건넸고 여인은 그것마저 깨끗이 비웠다. 식사를 마친 뒤 율리아나가 건넨 손수건으로 입을 닦은 여인은 쓸쓸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제 이름은 케이트예요." 묵묵히 보고 있던 카심이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런데 어쩌다가 절벽에서 떨어졌습니다. 그곳은 아기를 데리고 가기가 결코 쉽지 않은 곳인데……." 그 말에 케이트의 얼굴이 극도로 무거워졌다. 과묵한 편인 카심에게 율리아나같이 말하는 요령을 기대하긴 힘든 것이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케이트는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사실 전 아기와 함께 목숨을 끊으려고 했었어요. 흐흐흑." 말을 마친 케이트는 얼굴을 가린 채 또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물론 듣고 있던 용병들이 큰 충격을 받았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기와 함께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결코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아기가 채 젖을 떼지 못한 젖먹이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서럽게 흐느끼는 케이트에게 차마 물어볼 엄두를 가진 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율리아나를 제외하고는……. "티미라, 아주 예쁜 이름이군요. 아이의 아빠가 지어준 이름인가요." 케이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아빠가 알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런 결정을 내리셨나요. 아이 아빠가 슬퍼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나요." "아, 아이 아빠는 모를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떠나왔기 때문이죠." 뜻밖의 일에 용병들은 또다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떤 곡절이 있었기에 아이 아빠가 모르게 아기와 함께 목숨을 끊을 생각을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용병들은 오직 율리아나만 응시했다. 오직 그녀만이 케이트의 입을 열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사정을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저희가 혹시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을지 모르니……." 케이트는 야윈 얼굴에 처연한 미소를 떠올렸다. "말씀은 고맙지만 도와주실 방법이 없을 거예요" "그러지 말고 말해줘요. 아이를 아빠 없이 키울 순 없는 노릇이잖아요." 케이트는 결국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율리아나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조금 뒤 케이트는 그간의 사정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율리아나의 특기가 오랜만에 빛을 발한 것이다. 케이트의 말에 따르면 티미의 아빠는 필립이라는 이름을 가진 테르비아의 근위기사라고 했다. 평민 출신으로써는 보기 드물게 근위기사에까지 오른 필립은 검술실력이 매우 뛰어난 기사였다. 그야말로 전도가 창창한 젊은이였던 것이다. 케이트는 그가 수습기사 시절 만나 오랫동안 사랑을 키워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홀로 자란 케이트는 그야말로 마음속 깊이 필립을 사랑했다. 필립 역시 사랑스럽고 다정한 케이트를 자신의 몸보다도 오히려 더 아꼈다. 수습기사 시절 고된 수련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도 케이트를 만나 밤새도록 사랑을 속삭일 정도였다. 필립이 정식 기사로 임용되고 얼마 되지 않아 불행히도 케이트의 모친이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다. 케이트는 하루아침에 사고무친의 고아가 되어버렸고 필립은 그런 케이트에게 청혼을 했다.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조를 했던 것이다. 작고 아담한 집에 살림을 차린 두 사람. 비록 돈이 없어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진 못했지만 하루하루를 신혼의 단꿈에 젖어 살던 두 사람이었다. 그 이듬해 티미가 태어났고 때마침 필립이 검술실력을 인정받아 근위기사에 임명되는 일이 일어났다. 다시 말해 경사가 거듭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애초부터 불행의 씨앗이었음은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필립을 근위기사에 임명한 사람은 바로 기사단의 부단장을 맡고 있는 에드워드 후작이었다. 그는 사실 모종의 꿍꿍이가 있어 필립을 근위기사에 임명했던 것이다. 근위기사 자리는 실력이 있다고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연줄이 전혀 없다면 제 아무리 검술실력이 뛰어나도 근위기사에 오를 수 없는 것이 테르비아의 현실이었다. 필립이 근위기사가 된 지 6개월 되던 날 에드워드 후작은 마침내 수작을 걸어왔다. 그것은 바로 필립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이었다. 에드워드 후작에게는 얼굴은 아름답지만 방종한 성격을 가진 딸 일라이저가 있었다. 숱한 귀족 청년들과 염문을 뿌린 나머지 에드워드 후작이 제대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때문에 그는 큰마음을 먹고 일라이저를 시집보내기로 작정한다. 물론 근위기사단의 부단장이라는 신분상 아무나 사위로 삼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상당히 공을 들여 젊은 기사들 중 사윗감을 물색했다. 그리하여 선택된 것이 바로 필립이었다. 에드워드 후작은 검술실력보다도 필립의 자상함과 강직한 성격을 높이 샀던 것이다. 비록 필립이 케이트와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후작에게는 별 문제는 되지 못했다.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지 않은 이상 아무 것도 걸릴 것이 없었으므로. 사윗감으로 필립을 내정한 에드워드 후작은 넌지시 딸을 불러 의향을 물어보았다. 뜻밖에도 일라이져는 무척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그녀도 필립이 자상한데다 무척 잘 생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필립 정도라면 두 말 없이 시집가겠어요." 한시름 던 에드워드 후작은 지체 없이 필립을 불러들였다. 자초지종을 전해듣자 필립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 하지만 제겐 아내와 자식이 있습니다." "정식으로 혼례식을 올린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여자하나 때문에 인생을 망칠 작정인가?" "하, 하지만……." "잘 생각하게. 이것은 아무나 잡을 수 없는 기회야. 만약 승낙하면 자네를 그 즉시 근위기사 단 분대의 분대장으로 임명하겠네. 일라이저와 결혼식을 올린 뒤 총 분대장으로 승격시켜줄 것을 약속하지. 언젠가는 부단장인 내 자리를 이어받을 테고……. 그러니 잘 생각해 보게." "그래도……." 거듭 망설이는 필립이었지만 에드워드 후작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자네는 아마 순수한 실력으로 근위기사에 올랐다고 생각하나보군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오산이야. 내 명령 한 마디면 자네는 그 즉시 일반 기사로 좌천된다네. 원래대로 말일세. 어쩌면 산간 벽지에 파견될 수도 있어. 사실 내 추천장이 아니었다면 자넨 백년이 지나도 근위기사가 될 수 없었네. 그러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약 내 딸 일라이저와 부부의 연을 맺는다면 자네의 앞날은 그야말로 탄탄대로가 될 것임을 보증하지." 무척 결정을 내리기 힘든 제안이었다. 필립이라고 가슴속의 야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명예롭게 이름을 날리고 싶은 것은 전 테르비아 기사들의 염원이었다. 그 때문에 필립은 심각한 갈등에 휩싸여야 했다. 비록 케이트와 어린 아이 티미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출세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금 박봉에 근무여건도 열악한 일반 기사로 돌아가기는 정말 싫었다. 게다가 에드워드 후작의 협박대로 산간벽지로 좌천된다면……. 아마도 그의 야망은 영원히 접어버려야 할 지도 몰랐다. 결국 필립은 바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일단 생각을 좀 해 보겠습니다." "잘 생각하게. 자네의 미래가 걸려있는 일이야. 자식이야 또 낳으면 되지만 한 번 지나간 기회는 두 번 다시 잡을 수 없네." 에드워드 후작의 앞을 물러 나온 필립은 그 즉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케이트를 불러놓고 자초지종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오늘 이런 일이 있었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케이트로써는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홀어머니를 여읜 채 오직 필립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단란한 가정을 송두리째 풍비박산내려는 에드워드 후작이 너무도 야속했다. 하지만 그가 남편의 운명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으므로 케이트로써는 오로지 남편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작정이에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통 모르겠어. 하지만 난 도저히 당신과 티미를 버릴 수가 없어." 필립의 말에 겨우 가슴을 쓸어 내린 케이트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으니……. 며칠동안 별 탈 없이 귀가하던 필립은 이후로는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드디어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이다. 케이트를 볼 낯이 없었던지 필립은 일절 집에 오지 않았다. 그저 편지 한 장으로 자신의 뜻을 밝혔을 뿐이었다. [미안하오. 나를 용서하시오. 케이트.] 짤막한 글귀에는 필립의 뜻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그는 야망을 위해 아내와 어린 자식을 서슴없이 버린 것이다. 그 이후로 케이트는 6개월 동안이나 홀로 티미를 키우며 필립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필립은 두 번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꼬박꼬박 가져다주던 봉급조차 뚝 끊겨버린 터라 케이트는 무척 어렵게 살아야 했다. 어린 티미 때문에 제대로 된 일자리도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식량이 모조리 떨어지자 케이트로썬 더 이상 버틸 도리가 없게 되었다. 며칠을 굶다 못해 그녀는 결국 용단을 내렸다. 어린 티미를 데리고 바얀카를 떠나가기로……. 하지만 영양실조로 약해진 그녀가 힘든 여행을 하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이곳에서 힘이 빠진 그녀는 세상을 비관하며 절벽으로 몸을 날렸던 것이다. 자초지종을 설명한 케이트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래도 그 사람을 원망하진 않아요. 그런 상황이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니까요." 케이트의 사연을 모두 들은 용병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을 깬 자는 율리아나였다. 예쁜 입술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험악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개자식."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는지 그녀는 계속 씨근거렸다. "고작 그런 이유로 아내와 자식을 버려? 천하에 나쁜 자식. 아니 어떻게 그런 자식을 가만히 내버려둬요?" "………." "왜 그냥 떠나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시장바닥에 퍼질러앉아 소문이라도 퍼뜨려야지요. 그 자식이 바얀카에서 도저히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하게……. 출세를 위해 아내와 자식을 버리는 그런 놈은 완전히 사회에서 매장시켜버려야 해요." 뜻밖의 반응에 케이트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율리아나는 지금 분을 참지 못해 폭발할 지경이었다. "만약 내가 그런 상황에 놓였으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예요." "어떻게 할 건데……." 불쑥 끼여드는 데이몬을 노려보며 율리아나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죽여버려야죠. 그런 놈은 살 가치도 없는 놈이에요." 살기가 주렁주렁 묻어 나오는 소름끼치는 말에 용병들은 하나같이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율리아나의 말투를 보아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하지만 케이트는 도리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수그렸다. "도저히 그렇게 할 수는 없더군요. 그래도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이 너무도 행복했거든요. 그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조용히 떠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흥! 그래서 그놈 좋으라고 자살을 결심한 것이로군요. 그게 그놈의 의도대로 되는 것임을 정녕 몰랐어요. 아니 어쩌면 그렇게 사람이 멍청해요?" 율리아나는 이제 케이트에게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케이트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쏟아지는 비난을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인간 말종 같은 놈. 내 어떻게든 그놈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야 말겠어." 듣다 못한 케이트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나서야 율리아나의 입이 닫혔다. "그, 그만해요. 그래도 그는 티미의 아빠인걸요. 나 하나 사라져서 그가 행복할 수 있다면 난 충분히 그러겠어요. 흐흐흑." 또다시 오열하는 케이트. 용병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녀의 애절한 사연에 동정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205회. 잠시 그녀를 쳐다보던 율리아나가 카심에게로 고개를 팩 돌렸다. "카심. 도저히 이대로 갈 수가 없군요. 우린 케이트를 도와야 해요." 카심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동정이야 충분히 가지만 도저히 도와줄 처지가 아니었다. 한 나라의 근위기사단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한낱 용병단이 간섭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으므로……. 카심은 무척 조심스럽게 율리아나를 달랬다. "공주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희 역시 그 작자를 잡아죽이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없으면 만들어내야지요. 설마 케이트를 두고 그냥 떠나자는 것은 아니겠지요?" 율리아나가 또다시 고집을 부리자 카심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지금의 사정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케이트를 위해서는 여비를 좀 보태주는 것이 가장 나을 듯 싶습니다. 그녀가 조용한 마을에 가서 걱정 없이 티미를 키울 수 있도록 적당한 금액을 용병단의 재정에서 지원하겠습니다." 카심으로썬 상당히 마음을 쓴 기색이 역력한 제안이었지만 율리아나는 그것조차도 매멸차게 거부했다. "그건 말도 되지 않아요. 그렇다고 케이트가 행복해할 것 같아요? 게다가 티미는 또 어쩌고요.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아빠 없이 자라게 할 생각인가요."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카심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말싸움으론 도저히 율리아나를 제압할 도리가 없었다. 이제 율리아나는 에드워드 후작의 딸에게까지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감히 아내가 있는 남자를 노리다니……. 천하의 나쁜 년. 보나마나 그년은 싸가지가 하나도 없는, 고집만 부리는 못된 년이 틀림없어. 죽일 년 같으니라고……." '그건 바로 너잖아?'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미첼은 사력을 다해 입술을 억눌렀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뱉는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도무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율리아나가 고개를 팩 돌려 미첼을 노려보았다. 지은 죄가 있는지라 미첼은 간담이 서늘할 수밖에 없었다. "왜, 왜 날 보는 거지?" "아무래도 너와 내가 나서야겠어." 거침없이 내뱉는 것을 보니 뭔가 결정을 내린 듯 싶었다. 율리아나는 곧 심중의 말을 남김없이 미첼에게 털어놓았다. "내 생각에 모든 것의 시초는 바로 그 일라이전가 하는 년이야. 그러니 그년을 먼저 처리해야겠어. 그래야만 천하에 나쁜 필립이란 놈이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사람은 밉지만 그래도 티미의 아빠이니……." "하, 하지만 근위기사단 부단장의 딸을 무슨 수로……." 조금 뒤 율리아나의 설명을 들은 미첼은 머리털이 송두리째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미남계를 써야 할 것 같다. 일단 이 중에서 가장 인물이 나은 게 바로 너야. 그러니 네가 테르비아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 일라이전가 뭔가 하는 년을 꼬시도록 해봐. 그년은 보나마나 머리에 똥만 찬 멍청한 계집일거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꼬시지 못할 리가 없어. 그렇게 해서 그년의 마음이 돌아선다면 필립이란 작자가 다시 케이트에게 돌아올지도 몰라." "미, 미쳤군.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내 정신은 지금 지극히 맑아. 명심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이후로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아무도 몰라. 알다시피 네 아버님은 내 말이라면 결코 의심하지 않으니까." 졸지에 빼도 박도 못하게 된 미첼은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나의 제안은 용병들조차 실소를 금치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오갈 데 없는 여인을 돕겠다는 취지는 좋았지만 방법이 워낙 극단적이라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미첼이 안됐다고 느꼈는지 카심이 조심스럽게 둘 사이에 개입했다. "하지만 공주님.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실현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물론 미첼이 실력이 있는 기사란 것은 인정하지만 근위기사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자고로 실력과 함께 충성심이 입증되지 않은 자는 결코 궁정에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몰래 잠입해서라도 일을 성사시켜야 해요." 다짜고짜로 고집을 부리는 율리아나. 보다 못해 케이트까지 나섰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성의는 고맙지만 그만 하세요. 그렇게 마음 써주신 것만으로도……." "아니에요. 이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에요. 당신은 잠자코 가만히 있어요." 냉랭하게 케이트에게 쏘아붙인 율리아나는 데이몬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더니 허리에 손을 척 올린 채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뭐 말인가?" "출세 때문에 아내와 자식을 버린 빌어먹을 작자와 그래도 그놈을 못 잊어하는 불쌍한 케이트를 위해 마법을 한 번 써 줄 생각 없어요." "………." "당신의 실력이라면 미첼의 얼굴을 그 어떤 여자도 반하게끔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믿어요."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고집불통인 점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불쌍한 여인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 주려는 율리아나의 마음씀씀이가 그리 밉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끼를 덥석 물 데이몬이 아니었다. 데이몬은 도리어 은근히 율리아나의 성질을 박박 긁고 있었다. "캬! 정말 아름다운 순정이야. 자신과 아이를 버린 남자를 미워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위해 희생할 생각을 하다니……." "………." "케이트란 여인의 마음가짐은 전 아르카디아의 여인들이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남자에게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여자들의 가장 큰 덕목이지. 암 그렇고 말고……." 율리아나의 눈초리에 서서히 쌍심지가 돋워졌지만 데이몬은 모른 척 넉살좋게 말을 이어나갔다. "케이트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간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지. 그렇게 되면 그녀의 고결한 희생정신이 도리어 희석되어버릴 테니……." "이런 빌어먹을 작자." 참다못한 율리아나가 손을 날렸다. 흑마법사고 뭐고 다짜고짜 따귀를 올려붙여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순순히 당할 데이몬이 아니었다. 율리아나의 손은 데이몬의 뺨에 채 닿기도 전에 덥석 잡혀버렸다. 율리아나는 고함을 빽 질렀다. "이것 놔!." 잡힌 손을 빼려고 악을 썼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맥문을 정통으로 잡힌 이상 전혀 힘을 쓸 수 없는 것이다. 데이몬의 능청스러운 말이 그녀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따귀는 별로 효과적인 수단이 아냐. 맞아봐야 별로 아프지 않거든. 내가 한 수 가르쳐 줄 테니 팔을 들어봐." 율리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데이몬이 잡은 손을 치켜든 것이었지만. 데이몬은 다른 손을 뻗어 율리아나의 겨드랑이 밑 오목한 곳의 중간 부분을 가리켰다. "사람의 몸에는 많은 급소가 있어. 같은 힘으로 치더라도 정확히 급소를 가격하면 효과가 훨씬 크지. 이를테면 이곳도 맞으면 무척 아픈 급소 중 하나야. 힘이 약한 여자들은 오로지 이런 급소를 노려야만 사내를 금방 무력화시킬 수 있지. 한 번 체험해 보겠나?" 말을 마친 데이몬은 율리아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 부분을 사정없이 쥐어박았다. 물론 상대가 여자임을 감안해서 힘을 어느 정도 조절했지만 말이다. "꺄아악." 데이몬이 가격한 곳은 바로 액내혈(腋內穴)이었다. 심경의 요혈로서 극천이라고도 불리는 이 혈도는 치명적이진 않지만 엄청난 통증을 유발하는 급소 중 하나였다. 율리아나는 삽시간에 양팔을 감싸쥐고 주저앉았다. 얼마나 아팠던지 닭똥 같은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태어나서 이렇게 아픈 적은 처음이었다. 그 상태로 율리아나는 한참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조금 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율리아나는 표독스런 눈초리로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여전히 넉살을 떠는 데이몬. "어때 효과가 확실하지? 앞으론 구태여 따귀를 날리는 것보다 급소를 노리는 것이 좋을 거야. 시간이 나면 인체의 급소를 하나씩 가르쳐 주지." 선심이나 쓰듯 내뱉는 말투였지만 율리아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몸을 돌린 율리아나는 미첼에게로 똑바로 걸어갔다. "안되겠어. 방법은 한 가지 뿐이야. 네가 그 얼굴 그대로 미남계를 써야 할 것 같다." 미첼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자존심 때문이라도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제안이었다. 미남계를 펼친다는 것은 명예로운 기사가 할 행동이 절대로 아니었으므로……. "아무래도 안되겠어. 가능성 여부를 떠나 그런 짓은 결코 할 수 없어." 미첼을 노려보는 율리아나의 눈빛은 점점 짙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불쌍한 여인을 그냥 내버려두자는 말이구나." "사정은 측은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한 발 앞으로 다가선 율리아나는 미첼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할 수 없다는 뜻이야?" 미첼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나의 손길을 막을 만반의 채비를 갖춘 채 말이다. 경험에 따르면 이럴 경우 그녀는 십중팔구 따귀를 날릴 것이 분명했다. "이 나쁜 자식." 미첼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율리아나의 손이 파공성과 함께 허공을 가르자 미첼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얼굴을 덮은 손위로는 어떠한 감각도 전해지지 않았다. 도리어 통증은 겨드랑이에서 전해졌다. 그것도 지금껏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통증이. 참을 수 없는 통증에 미첼은 입을 딱 벌렸다. "커어억." 숨통이 콱 막히는 듯한 통증이었다. 율리아나는 따귀를 날리려다 말고 데이몬에게서 배운 급소를 그대로 질러버린 것이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탓에 겨드랑이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총명한 율리아나라서 그녀의 주먹은 정통으로 미첼의 액내혈을 가격했다. 애석하게도 갑옷을 입지 않은 상태라서 미첼은 통증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삽시간에 두 팔을 감싸안고 바닥에 주저앉은 미첼.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끙끙 앓는 모습은 조금 전 율리아나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율리아나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이것 꽤 쓸만한 기술이네?" 그 소리에 용병들은 소름이 오싹 끼치는 느낌이 들었다. 비록 맞아보진 않았지만 미첼의 모습을 보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아프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또한 성격을 보아 상대를 가릴 율리아나가 아니었기에 용병들은 하나같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마치 철없는 개구장이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쥐어준 것과 다름없는 격이었다. 그런 용병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율리아나는 이번에는 카심에게 다가왔다. "할 수 없군요. 부득이 대장이 수고할 수밖에 없네요. 미첼보다 용모가 좀 떨어지지만 대장도 나름대로 남자다운 매력이 있으니 한 번 시도해 볼 만 해요." 카심은 본능적으로 양쪽 겨드랑이를 가렸다.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소립니다. 나에겐 그 어떤 여자도 넘어오지 않을 겁니다. 눈이 삔 여자가 아닌 이상." "해 보지도 않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둘의 말싸움. 느긋하게 듣고 있던 데이몬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헛수고야 그만 하도록 해." 율리아나의 눈썹이 급격히 휘어졌다. 하지만 데이몬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보기엔 여기에서 필립이란 녀석의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만에 하나 근위기사단 부단장 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더라도 그녀석이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 율리아나는 말문이 콱 막혔다. 데이몬의 말은 지극히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들에겐 고유의 자존심이 있다. 특히 기사라면 정도가 더 심하겠지? 버림받았다고 자신이 한 번 내친 여자를 다시 받아들인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어. 상황을 보니 그 녀석은 필경 결심을 단단히 했을 거야."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보자는 말인가요?" "방법은 분명히 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임은 분명하지만." 데이몬의 장담에 율리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 무슨……." 용병들의 시선도 일제히 데이몬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은 이미 필립과 케이트를 재결합시키는 일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지어놓은 참이었다. 케이트 역시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못했는지 애절한 표정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런 일행을 둘러보며 데이몬은 가슴을 쭉 폈다. "내가 나선다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야. 알다시피 난 9서클의 마스터. 불가능한 일도 충분히 가능하게 만들 능력이 있지." "저, 정말인가요?" "그럼. 하지만 문제가 있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사실 그것은 나로써도 상당히 힘을 들여야 하는 일이야. 엄청난 심력과 마나를 소모해야 하고 땀을 엄청나게 흘려야 성사시킬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 "케이트란 여인은 오늘 처음 본 여인이다. 나로써는 힐링을 펼쳐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데……." 비로소 데이몬의 속마음을 깨달은 율리아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대체 사람이 왜 그래요? 케이트가 불쌍하지도 않나요?" "불쌍한 것과 도와주는 것은 별개의 일이야. 사정이 딱하기는 하지만 엄청난 노력을 들여 도와줘야겠다는 필요성을 도무지 느끼지 못하겠군." "빌어먹을 늙은이." 결국 율리아나는 막 욕설을 퍼부어 대었다. 그래도 과거보다 많이 누그러진 것은 데이몬의 엄청난 능력을 실감한 때문인 듯 싶었다. "그래서 당신이 사악한 악당이라 불리는 거예요." "맞아. 난 엄청 나쁘고 사악한 악당임에 틀림이 없지." 가슴을 쭉 편 데이몬은 카심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이는 카심을 한 번 쳐다본 데이몬은 음흉한 눈빛으로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206회. 그녀는 오랜만에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왜, 그, 그런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거죠?" "하지만 상황은 항상 변하는 법이야. 만약 네가 내 요구를 하나 들어준다면 케이트를 도와줄 수도 있지."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떠올린 율리아나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지금 불길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설마 이 일을 미끼로 내 몸을 요구하려는…….' 소름이 오싹 끼쳐왔다. 때를 놓치지 않고 케이트가 울먹이며 고함을 질렀다. "아니에요. 그렇게 마음써주신 것만 해도 전 더 이상 여한이 없답니다. 그러니 제발 그만하세요. 결코 요구를 들어주지 말아요." 고개를 돌려 케이트를 힐끔 쳐다본 율리아나는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미 그녀는 단단히 결심을 하고 있었다. "요구조건이 도대체 뭐죠?" "조건은 간단해." 데이몬의 요구조건을 들은 율리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용병들과 케이트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아침 내 볼에 입을 맞춰주며 최대한 상냥하게 날 불러주는 거야 '아저씨' 라고 말이야. 어때?" "미, 미쳤군." 율리아나는 도리질을 치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물론 몸을 요구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조건이 너무 엉뚱했다. 게다가 그것은 율리아나에겐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생각만 해도 전신에 소름이 돋아 오르고 있었다. "나, 난 못해. 죽어도……." 세차게 도리질치는 율리아나를 데이몬은 무표정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겉과 속이 다른 모양이군.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필사적으로 케이트를 도와주려 하더니……. 미첼과 카심에게 미남계까지 시키려 하면서 자기는 그런 작은 일조차 할 마음이 없는 건가?" "그, 그게 작은 일이에요?" "그럼 큰 일인가?" 말을 마친 데이몬은 용병들을 죽 둘러보았다.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불행에 빠진 여인을 도와주는 대가로 매일 아침 입맞춤 한 번이 그리 큰 일인가? 그것도 입술이 아닌 볼에 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서야 눈짓의 진의를 알아차린 카심이 너스레를 떨었다. "뭐 그 정도야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죠. 누가 뭐래도 흑마법사님은 할아버지 뻘이잖습니까. 만약 저희들이라면 하루에 백 번이라도 해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만 ……." 이번에는 데이몬이 전신에 소름이 돋아 오를 차례였다. 험상궂은 용병들의 키스를 받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이…….' 하지만 그는 내색을 하지 않고 이번에는 케이트를 돌아보았다. "이것 봐. 케이트 내 조건이 무리한 조건인가?" 케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데이몬이 제시한 조건은 결코 무리하다 볼 수 없는 요구였으니까. "싫으면 할 수 없고……. 어차피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 잘 되었군." 미련 없이 몸을 돌리는 데이몬. 용병들은 슬그머니 율리아나를 긁기 시작했다. 아주 지능적으로 말이다. "뭐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그 정도로 불쌍한 케이트를 도울 수 있다면 난 백 번이라도 하겠는데……." "아마 그건 흑마법사님께서 거부하실 걸? 자네 얼굴이 오죽 험상궂어야지." "이 사람아 그것은 피차 일반 아닌가?" 두런대는 용병들의 대화를 들으며 율리아나는 결국 마음을 굳혔다. "반드시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 거죠?" 데이몬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하지." "만약 못할 때에는 어떻게 하겠어요." "그때는 네가 시키는 것은 뭐든지 해 주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 적어도 내일 이내에 필립이란 녀석을 한달음에 달려와서 케이트 앞에 무릎 끓도록 할 테니까. 제발 날 용서해 달라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말이야." "정말이죠?" "물론." 데이몬의 호언장담을 들으며 율리아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매일은 죽어도 못하겠어요. 그러니 딱 한 번으로 끝내는 게 어때요?" "그럴 순 없지. 정 못하겠다면 시한을 한 달로 정하는 게 어떨까? 30번." "싫어요. 일주일 이상은 절대로 용납 못해요." 옥신각신 하던 둘은 마침내 기한을 열흘로 못박았다. 소기의 성과를 거둔 데이몬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얼굴을 쭉 내밀었다. "그럼 오늘 첫 번째 입맞춤을 한 번 받아볼까? 최대한 애교를 부려 날 기쁘게 해 주도록……." 율리아나는 질린 듯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미쳤군요.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무릇 일을 청부할 때는 선금이란 게 있는 법이야. 이를테면 계약금이라고도 부르지. 나는 지금 계약금을 받으려 하는 거야. 여보게들. 사실이 그렇지 않나?" 용병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데이몬에게 호응해왔다. 정말 손발이 척척 맞아떨어지는 파티였다. "맞아. 암. 계약금도 없이 일을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선금이 없다면 거래가 이루어질 턱이 없지요." 용병들이 일제히 데이몬을 두둔하고 나서자 율리아나는 울상을 지었다. 케이트 때문에 승낙하긴 했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고작 열 번이야. 열 번만 하면 그만해도 된다고……. 오직 불쌍한 케이트만 생각해야 해.' 율리아나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데이몬의 볼을 향해 쭈뼛쭈뼛 입술을 가져갔다. "얼굴이 그게 뭐야? 상냥하게 하랬잖아?" "이게 최대한 상냥한 거라고요."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율리아나. 결국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데이몬의 볼에 쪽 소리나게 입을 맞췄다. "좋아. 이번에는 아저씨라고 할 차례야." "아, 아저……." 기어 들어가는 율리아나의 목소리에 데이몬은 눈을 부라렸다. "점심도 못 먹었나? 최대한 상냥하게 하라고 했잖아?" "아, 아저씨" "상냥하지 않아. 다시!" "아저씨." 이를 악문 율리아나가 최대한 상냥하게 부르자 데이몬은 그때서야 흡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좋아. 좀 어설픈 감이 없지 않았지만 용서해 주겠어. 앞으론 계속 이렇게 해 주길 바란다." 말을 이어나가는 데이몬의 눈동자엔 모호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어쩌면 그는 대리만족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율리아나의 얼굴을 보며 다프네와의 옛 추억을 되새기는 대리만족 말이다. 잠시 눈을 감고 입술의 감촉을 음미하던 데이몬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다급하게 손수건을 꺼내 입술을 박박 문지르는 율리아나를 본체만체 하며 데이몬은 카심을 쳐다보았다. "좋아. 대장. 이곳에다 한 이틀 머물 채비를 갖추게. 나는 그동안 필립이란 녀석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한 준비에 착수할 테니……." 말을 마친 데이몬은 산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카심은 무척 곤혹스런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쩌시려고……." 카심의 생각으로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고로 돌리기 힘든 것이 여자의 마음이라고 하지만 남자의 마음은 돌리기가 더욱 힘들었다. 더구나 일국의 당당한 근위기사를 강압적인 방법으로 굴복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라 카심의 의구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할 수 없지. 이곳에다 천막을 친다. 모두들 천막을 칠 준비를 하라." 용병들 역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데이몬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필립의 마음을 돌려놓을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케이트. 당신은 나와 한 천막을 써요." 우거지상을 한 채 다가온 율리아나가 케이트에게 다가와 티미를 받아들었다. 케이트는 자신도 모르게 꾸벅 절을 했다. "미안해요. 괜히 저 때문에……." "괜찮아요. 미친개에게 한 번 물린 셈치죠. 뭐." 잔뜩 찡그린 율리아나의 얼굴은 방긋 웃는 티미를 보자마자 환하게 밝아졌다. "조금만 기다리렴. 티미. 저 흑마법사가 사악하고 못된 것은 확실하지만 실력 하나는 틀림없는 작자이니 반드시 아빠를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케이트의 얼굴에도 의구심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 역시 남편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일행들과 떨어져 인적이 드문 산 속으로 들어온 데이몬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큰 소릴 쳐놓기는 했는데 과연 가능할까?" 아내와 자식을 버릴 정도라면 분명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고 봐야 했다. 그런 필립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데이몬에겐 자신이 있었다. 지금껏 겪어온 경험에다 그가 가진 흑마법의 힘을 감안하면 충분히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 터였다. "그럼 시작해 볼까?" 데이몬이 가볍게 손짓을 하자 바닥에 난 잡초들이 삽시간에 재로 변했다. 화르르르. 그곳엔 금세 기괴하게 생긴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버린 재가 모여들어 형성된 마법진은 다름 아닌 소환마법진이었다. 데이몬은 몽마를 이용해서 필립의 마음을 돌리게끔 하려는 것이다. "평범한 나이트 메어론 불가능해. 몽마들의 군주라 불리는 인큐버스 정도만이 이 일을 해 낼 수 있어." 인큐버스(Incubus). 몽마들의 군주로써 거의 마왕 급에 근접한 존재였다. 인간의 정신세계에 침입하는 능력이 일반 몽마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고 그런 만큼 소환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의 마력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데이몬인 만큼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나이델하르크는 인큐버스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력한 마왕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데이몬은 소환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이처럼 데이몬이 일행과 떨어져서 소환을 행하는 이유는 인큐버스 자체가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일행들이 인큐버스의 영향을 받는다면 상당히 골치 아픈 문제라서 데이몬은 부득이 인적이 드문 산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콰콰콰콰. 소환마법진에 마력이 집중되며 소름끼치는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어둠의 마력은 언데드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마계의 존재를 소환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조금 뒤 마법진은 가공할 만한 광망을 토해내었고 그와 동시에 소멸되어버렸다. 마력의 소모가 극심했으므로 데이몬의 낯빛은 조금 초췌하게 변해 있었다. "되었군." 한숨을 내쉰 데이몬은 몽마들의 군주인 인큐버스가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렸다. 인큐버스 역시 평상시에는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조금 뒤 허공에서 음산한 음성이 메아리쳤다. "나를 부른 자가 너인가? 하찮은 네크로멘서 따위가 날 불러내다니 놀랍군." 그 말을 듣자 데이몬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이미 그는 소환마물에겐 항상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미천한 것이 감히 누구 안전에서……." 인큐버스의 태도는 금세 돌변했다. 데이몬의 몸 속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원천을 파악하고 난 뒤의 일이었다. 네크로멘서의 몸에서는 방대한, 그리고 순도 높은 어둠의 마력이 분출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대마왕 급에 필적하는 마력이었다. "이, 이 기운은……." "건방을 떤 죄로 인간계에서 소멸되고 싶으냐? 과연 내게 그럴 힘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인큐버스는 주저 없이 모습을 드러내어 부복했다. 적어도 마계의 생물들은 철저히 힘의 논리에 승복하는 존재들이었다. "용서하십시오. 제가 미처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모습을 드러낸 인큐버스는 상당히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207회. 유리처럼 투명한 몸에 요요로움이 흘러나오는 벌거벗은 젊은 남성의 모습, 머리와 몸을 둘러싼 뿔과 날개만 아니었다면 영락없는 귀공자의 형상이었다. 그는 절대 복종을 뜻하는 오체투지로 데이몬에게 경의를 표시했다. "나이델하르크 님의 힘을 얻으셨을 줄 미처 몰랐습니다. 미천한 종에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인큐버스의 지극한 태도에 데이몬은 안색을 풀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 네가 몽마들의 군주라는 인큐버스가 맞느냐?" "그렇습니다." 인큐버스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머리를 조아렸다. 네크로멘서의 몸에서 느껴지는 방대한 어둠의 마력. 만에 하나 네크로멘서가 마음을 먹는다면 자신 따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소멸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그런 인큐버스를 보며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 시킬 일이 있다." "무엇이든 하명하십시오." 하지만 조금 뒤 데이몬의 말을 들은 인큐버스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그, 그런 일을 제게 시키시다니……." "할 수 없다는 뜻이냐?"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명령이 너무 뜻밖이라서……." 인큐버스는 인간에겐 악명 높은 존재다. 인간의 정신세계에 침투해서 광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그의 주요 장기요 취미였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을 황폐화시켜 망가지는 과정을 감상하는 것은 인큐버스의 가장 큰 유희였다. 그런데 네크로멘서는 지금껏 생각지도 못한 일을 자신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껏 그가 즐겨왔던 유희에 철저히 괴리되는 일이었다. 인큐버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일을 하게 되리리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가능하겠느냐?"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는 네크로멘서의 시선에 인큐버스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즉시 소멸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라지고 나면 거의 동시에 새로운 인큐버스가 마계에 생겨나겠지만 그래도 소멸되는 것은 그리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지엄하신 명령, 어김없이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구체적인 방법을 이제부터 일러주도록 하겠다. 그러니 너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 일을 수행해야 하느니라." "알겠습니다." 데이몬이 해야 할 일을 설명하는 동안 묵묵히 듣고 있던 인큐버스의 얼굴은 곤혹감으로 일그러져갔다. 네크로멘서가 시키는 일이 마계의 존재로서는 내키지 않는 선행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테르비아의 수도 바얀카. 강대국의 수도답게 바얀카는 방대한 인구와 규모를 보유한 도시였다. 테르비아의 국력을 상징하듯 바얀카 중심에 위치한 황궁은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완전무장을 한 채 석상처럼 늘어선 근위병들의 모습에서도 강렬한 힘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황궁의 동쪽에 위치한 별궁. 그 한쪽에는 근위기사들의 숙소가 있다. 아직까지 혼인을 하지 않은 독신 근위기사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난데없이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휴우…… 과연 이게 잘하는 짓일까?" 침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채 한숨을 몰아쉬는 젊은 기사의 각진 얼굴에서는 강직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금방 교대를 마치고 나온 듯 갑주에 먼지가 수북이 내려앉아 있었지만 닦을 마음은 전혀 없는 듯했다. 젊은 기사의 이름은 필립 로렌스, 당당한 테르비아 근위기사단의 일원으로 전도유망한 기사였다. 그는 며칠 후 근위기사단 부단장인 에드워드 후작의 딸 일라이저와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식을 치르고 나면 곧바로 분대장으로 승격한다는 사실은 어지간한 근위기사는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걱정이라곤 있을 것 같지도 않은 필립의 얼굴에는 짙은 수심이 맺혀 있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날 용서하시오." 그는 얼마 전 버린 부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혼인식을 올리진 않았지만 그는 이미 한 여인과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 약속은 가슴속의 야심 때문에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말았으니……. 필립은 입술을 악문 채 몸을 일으켰다. "어쩔 수 없다. 나로서는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칠 수가 없으니……." 어린 아들 티미의 얼굴이 떠올라 다시금 우울해졌지만 필립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며칠 전 부하의 보고로 케이트와 티미가 바얀카를 떠났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필립은 착잡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자신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케이트와 티미를 버린 사실에 양심의 가책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홀가분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진심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보다 좋은 사람 만나 잘 살기를 바라겠소." 나지막이 지껄인 필립은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돌렸다. "누구요?" "저예요. 당신의 약혼녀." 아리따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필립은 벌떡 일어나서 문으로 다가갔다. 덜컥 문을 열자 그곳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필립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일라이저, 어쩌자고 이곳까지 왔소?" "약혼자가 보고 싶어서 왔지요." 일라이저는 다짜고짜 달려들어 필립의 입술에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복도에 서 있던 기사들이 얼굴을 붉히며 외면했지만 일라이저는 막무가내였다. 난처하긴 했지만 혹시라도 일라이저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필립은 묵묵히 그녀의 키스를 받아내고 있었다. 조금 뒤 일라이저는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필립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저녁에 시간을 좀 내줘요. 당신과 함께 바얀카의 야경을 구경하고 싶군요." "그, 그건……." 필립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가득해졌다. 이미 그에겐 야간근무가 내정되어 있었다. 엄격한 근무수칙을 떠올린 필립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설득했다. "그것은 조금 힘들 것 같소. 오늘밤에는 근무가 있어서……." "괜찮아요. 아빠에게 얘기해서 근무에서 빼달라고 할게요." 순간 필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안 될 말이오. 그렇게 되면 나 대신 다른 동료가 근무를 서야 하오. 명예로운 근위기사로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임무를 동료에게 떠넘길 수는 없소." "쳇! 고지식한 사람." 일라이저는 잔뜩 골이 난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토라진 얼굴로 고개를 팩 돌렸다. "모처럼 시내에 좋은 자리를 예약해 뒀는데……. 관둬요. 당신 아니면 갈 사람이 없는 줄 알아요?" "미, 미안하오. 내일은 근무가 없으니 당신에게 충실할 수 있을 것이오." "내일까지 어떻게 기다려요!" 잔뜩 토라진 기색의 일라이저를 필립은 열심히 달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의 노력이 성과가 있었던지 일라이저는 마침내 얼굴을 풀었다. "좋아요. 그럼 내일을 기대할게요." 생긋 미소를 떠올린 일라이저는 필립의 입술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춘 뒤 그의 방을 빠져나갔다. 복도에 서 있는 기사들이 다급하게 얼굴가리개를 내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필립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당돌한 아가씨야." 근위기사들의 숙소는 철저히 금녀의 구역이다. 원래대로라면 일라이저는 결코 이곳까지 들어올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후광을 적절히 이용해 벌써 여러 번 필립을 찾아왔었다. 그럴 때마다 필립이 이처럼 곤욕을 치러야 했지만 말이다. "햐! 좋았겠는데?" "바얀카에서 으뜸가는 미인의 애정공세를 한 몸에 받다니……. 부러워서 잠이 안 올 지경이야." 근무 서던 동료들의 부러움 섞인 놀림을 받자 필립은 어깨를 으쓱했다. "놀리지들 마. 그만 하라고." 일라이저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매일매일 우유 목욕을 한다는 소문이 사실인지는 몰라도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피부에 칠흑같이 새까만 눈동자, 붉은 입술은 항상 필립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케이트도 그리 못난 용모는 아니었지만 일라이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미인을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었으니 필립의 가슴이 벅차오를 법도 했다. 하지만 무언가 공허한 것이 항상 가슴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필립도 잘 알고 있었다. "야간 근무를 하려면 눈을 좀 붙여둬야겠군." 항상 따라다니는 종자를 불러 갑옷을 벗기게 한 뒤 필립은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다가갔다. 꼬박 여섯 시간동안 서야 할 근무를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잠을 자야 할 듯했다. 하지만 이 수면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에 엄청난 변화가 생길 것이란 사실을 필립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듭되는 근무가 무척 고단했던지 필립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요즘 들어 생각이 많았으므로 피곤함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필립은 오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났다.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진 만큼 주위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척을 금방 감지했던 것이다. 필립은 충혈된 눈빛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놀란 음성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헉!"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누군가가 침상 가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머리맡에 놓아둔 검을 잡으며 필립은 의문의 불청객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불청객은 사십이 훨씬 넘어 보이는 중년의 기사였다. 주름잡힌 얼굴에는 세월의 풍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필립은 우선 그의 복장을 유심히 살폈다. 상대의 정체를 간파하는 데는 복장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 금세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상대는 뜻밖에도 근위기사단 부단장의 제복을 걸치고 있었다. 현 근위기사단 부단장은 바로 에드워드 후작이다. 그 말고는 누구도 부단장의 제복을 입을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필립은 벼락같이 검을 뽑아들려 했다. 모르는 사람이 부단장의 제복을 입고 있다면 오직 한 가지, 스파이란 뜻이었다. "이런 발칙한……. 감히 부단장님으로 위장하려 하다니…… 헉." 필립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머리맡에 놓아둔 검이 도무지 잡히질 않는 것이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다시 한 번 검의 손잡이를 쥐려 했지만 허사였다. 놓여져 있는 검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물건처럼 손에 걸리지 않았다. 뜻밖의 상황에 필립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묵묵히 보고 있던 불청객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걸걸했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은 음성이었다. "헛수고일세. 자네는 이 방 안의 물건들을 하나도 잡을 수 없네." 마침내 검을 잡는 것을 포기한 필립은 불청객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너, 너는 누구냐? 왜 허락도 없이 내 방에 들어와 있는 거지?" "자네 방이라……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엄연히 따지면 내 방이라 보는 것이 옳을 듯싶네. 주위를 한번 둘러보겠나?" 불청객의 말에 필립은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곤 곧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놀랍게도 이곳은 자신의 숙소가 아니었다. 이곳은 그가 원래 쓰던 숙소보다 족히 네 배는 커 보이는 거대한 집무실이었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장식품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고, 창가에는 커다란 책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필립은 본능적으로 책상 위의 명패를 살폈다. 명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테르비아 근위기사단 부단장 필립 드 로렌스 백작] 이해할 수 없는 일에 필립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필립 로렌스라면 분명히 자신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귀족들만이 가질 수 있는 가운데 성과 근위기사단 부단장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신분이라니……. "굳이 이해하려 하지 말게. 어디 내가 누군지 자세히 한번 살펴보겠나?" 불청객의 말이 떨어지자 필립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처음에는 의심 섞인 눈빛이었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경악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다, 당신은……." 처음에는 다소 낯설어 보였지만 불청객의 모습은 살펴보면 볼수록 자신과 똑같았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208회. 주름살에 덮여 있긴 하지만 얼굴의 전체적인 윤곽과 눈매, 그리고 콧날의 선이 거울 속에서 본 자신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몇 십 년 후에 볼 수 있을 듯한 자신의 얼굴이 눈앞에 서 있었다. "정식으로 날 소개하지. 나는 테르비아 근위기사단의 부단장을 맡고 있는 필립 드 로렌스 백작이라고 하네. 정확히 말하자면 이십 년 후의 자네이기도 하지." "미, 믿을 수 없소. 어떻게 이런 일이……." 로렌스 백작은 쓸쓸한 표정으로 필립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짙은 우수가 깔려 있었다. "물론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이것은 세상의 순리를 철저히 거역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나는 자네에게 뭔가를 보여 주기 위해 이런 일을 벌였다네." "……." "자네는 지금 영혼만이 존재하고 있다네. 간단히 말하자면 실체가 없는 망령이라고 할까? 이곳은 자네가 살던 시대로부터 이십 년 후의 미래고, 난 흑마법의 힘을 빌려 자네의 영혼을 잠시 동안 이리로 불러왔다네." "도, 도대체 왜?" 입을 다물지 못하는 필립을 보며 로렌스 백작은 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굳이 이해하려 하지 말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난 그저 몇 가지를 자네에게 보여 주고 싶을 뿐이야. 이십 년 전의 나에게 말이지." 필립은 서서히 이성을 되찾아갔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상대의 말에 서서히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좋소. 그렇다면 당신이 이십 년 후의 나라고 합시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이유로 날 불렀소?" 자신을 쏘아보는 필립의 시선을 맞받으며 로렌스 백작은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혈기왕성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의 침착성이로군. 내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정말 놀라워." "말 돌리지 말고 속 시원하게 설명을 해 주시오. 도대체 날 부른 이유가 뭐요?" "굳이 설명을 들을 생각 따윈 하지 말게. 그저 날 따라다니며 보고 느끼면 되는 일이니까." "뭘 느낀다는 것이오?" "이제부터 시작될 걸세. 자네에게 허용된 시간은 정확히 네 시간이니까 그동안 많이 보고 듣고 그리고 느끼도록 하게." 일방적으로 말을 끊은 로렌스 백작은 곤혹스러움이 가득한 필립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몸을 돌렸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자네가 이곳에서는 단순히 망령에 불과하다는 점일세. 나를 제외하면 이곳의 그 누구도 자네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네. 물론 말하는 것도 듣지 못하지. 자네를 볼 수 있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는 오직 나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게." "아, 알겠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는 몰랐지만 필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렌스 백작은 머뭇거림 없이 몸을 돌렸고, 필립은 집무실을 나서는 그의 뒤를 다급히 뒤따랐다. 이곳이 근위기사단 부단장의 집무실이란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여러 차례 에드워드 후작을 알현한 경험으로 말미암아 필립의 눈에 낯이 익은 장소였던 것이다. 과거와 동일한, 그러나 세월의 풍상이 어느 정도 느껴지는 장소를 둘러보며 필립은 집무실을 나섰다. 그의 기억대로라면 집무실 밖에는 부관이 머무는 책상이 놓여 있어야 했다. 놀랍게도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특이한 것은 부관 자리에 앉아 있는 이가 필립에게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부관의 얼굴을 본 필립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 로널드……." 자리에 앉아 서류 뭉치에 파묻혀 있는 중년인은 바로 자신의 동료 기사인 로널드였다. 얼굴이 온통 주름살에 덮이고 콧수염을 길렀지만 필립은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에게 로널드는 오랜 친구와도 같은 동료였기에 몰라볼 리가 없었다. 필립은 자신도 모르게 로렌스 백작을 쳐다보았다. "로널드를 부관으로 삼았소?" "그렇다네. 기사들 중에서 유일하게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녀석이지. 충실한 심복이라고 할까?" 로렌스 백작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로널드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부단장님?" "아닐세. 그냥 혼잣말이야." 로널드는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금 일에 몰두했다. 로렌스 백작의 옆에 버젓이 서 있는 필립은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때서야 필립은 자신이 로널드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정말이었군요. 이곳에서 내가 망령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렇긴 하지만 너무 걱정하진 말게. 네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말을 마친 로렌스 백작은 로널드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결재서류는 모두 완비되었나?" "조금 있으면 끝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금 기다리셨다가 직접 가셔서 결재를 맡으시겠습니까?" "아닐세.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나? 수고스럽겠지만 서류가 완성되는 대로 자네가 가서 맡도록 하게." 로널드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필립은 로널드의 눈가에 스쳐 지나가는 측은함을 용케 간파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그가 아는 상식으론 조금 이상했기 때문에 필립은 문을 나서는 로렌스 백작을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입니까?" "뭐가 말인가?" "제가 알기론 기사단 단장과 부단장이 결재하는 서류는 엄격히 구분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단장이 결재를 받다니요? 도대체 누구에게 받는 것입니까? 혹시라도 결재 방식이 바뀐 것입니까?" 로렌스 백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필립을 쳐다보며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무척 쓸쓸한 느낌을 주는 미소였다.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난 이곳에서 철저히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네. 대외적으론 근위기사단 부단장을 맡고 있지만 사실은 실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정확하지." "어,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럼 도대체 결재를 누구에게……." "에드워드 공작일세. 나의 장인 말이지. 아! 자네는 아마도 후작으로 알고 있겠구먼." 필립은 입을 딱 벌렸다. "그렇다면 에드워드 후작께서 결재권을 직접 행사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그분께서 뒤에 버티고 있으니 난 허울 좋은 부단장에 지나지 않아." 부끄러웠던 모양인지 로렌스 백작은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문을 나섰다. 필립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부랴부랴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집무실을 나선 뒤 로렌스 백작이 향한 곳은 과거 에드워드 후작이 살던 저택이었다. 로렌스 백작과 필립은 화려한 팔두마차를 타고 대로를 질주했다. 두두두두 마차를 타고 대로를 달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고급 귀족에게만 한정된 특혜였다. 필립은 의혹 가득한 얼굴로 달라진 기운이 역력한 바얀카 시내를 둘러보았다. 기억에 있는 건물들은 세월의 흐름을 겪은 기색이 역력했고 못 보던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차 있었다. 테르비아의 국력을 과시하듯 바얀카는 더욱 번창하고 활기찬 모습을 필립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멀리서 아름다운 저택이 모습을 드러내자 로렌스 백작은 필립을 쳐다보았다. "저곳이 내가 사는 저택일세. 근사하지?" 필립은 얼떨떨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군요." 아닌 게 아니라 저택은 정말 훌륭했다. 테르비아에서 지체 높은 귀족들만 사는 주택가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화려하고 웅장한 저택이었다. 워낙 집값이 비싸기 때문에 어지간한 귀족들은 이곳에 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자신이 장차 이런 멋있는 저택에서 살게 되다니……. 그러나 필립의 상기된 표정을 들여다보며 로렌스 백작은 씁쓸히 고개를 흔들었다. "좋은가 보군. 하지만 너무 기대하진 말게. 어차피 한여름 밤의 꿈일 뿐이니……."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닐세. 그럼 들어가 볼까?" 거대한 철제 정문 앞에 마차가 서자 문지기인 듯한 병사 둘이 다급하게 달려 나왔다. 그들의 얼굴엔 깜짝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어인 일로 이리 일찍 오셨습니까? 서둘러 안에 통보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렌스 백작은 딱 잘라 거절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어서 문이나 열도록 하게." "그, 그래도……." 마치 지은 죄라도 있는 듯 문지기들은 계속 쭈뼛거렸다. "어허! 감히 내 명령을 거부할 생각인가?" 결국 그들은 로렌스 백작의 호통이 떨어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문을 열어 젖혔다. 백작은 굳은 표정으로 집 안으로 마차를 진입시켰다. "이랴!" 마차는 돌이 깔린 길을 따라 거침없이 내달렸다. 마차로 한참을 달려야 할 정도로 정원은 넓었다. 필립이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을 감상하는 사이 마차는 거대한 저택의 현관에 가 멎었다. "빨리 따라오게." 마차에서 뛰어내린 로렌스 백작은 빠른 걸음으로 저택에 들어갔다. 필립도 부랴부랴 뒤를 따랐다. 저택 안에 들어간 백작은 곧장 이 층으로 올라갔다. 놀란 기색의 경비병들이 부동자세를 취했지만 로렌스 백작은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화려한 문이 앞을 가로막자 로렌스 백작은 거침없이 문을 열어 젖혔다. 덜컥 문이 열리자 안의 장면이 적나라하게 둘의 눈에 들어왔다. 너무나도 뜻밖이라 필립은 또다시 눈이 휘둥그레져야 했다. 벌거벗은 남녀 몇이 서둘러 이불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비릿한 육향이 감돌고 있는 것을 보니 한눈에 보아도 난교 파티를 벌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난데없이 근위기사단 부단장의 침실에서 벌어지는 난교 파티라니……. 어안이 벙벙한 나머지 입을 벌리고 있던 필립의 귀에 찢어지는 듯한 기성이 들려왔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온다면 기별이라도 전하고 와야 할 것 아니에요! 이게 도대체 무슨 경우죠, 노크도 없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이는 여인이었다. 이불 속에 파고 든 이들과는 달리 그녀는 벌거벗은 몸을 훤히 드러낸 채 잔뜩 화가 난 듯이 허리춤을 짚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필립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그녀는 바로 일라이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 세상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일라이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세월의 흐름이 조금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녀는 틀림없는 일라이저였다. 팍 늙어 버린 로렌스 백작과는 달리 그녀는 거의 나이를 먹지 않은 듯 보였다. 아직까지 탱탱한 피부와 미모는 로렌스 백작과 너무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돌연 옆에서 분기충천한 로렌스 백작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잘들 하는구려. 이번에는 하인들과 난교 파티라니…… 부끄럽지도 않소?" "흥! 꼴에 자존심은……." 일라이저는 적반하장 격으로 대들고 있었다. "진즉에 당신이 날 만족시켰으면 내가 이랬을 것 같아요? 고작해야 오 분도 가지 못하는 토끼만도 못한 주제에……." 로렌스 백작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허리춤의 검을 잡았다. 자존심을 가진 남자로서 도저히 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심지어 보고 있던 필립조차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하지만 일라이저의 태도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어디 벨 테면 베어 봐요!" 해보라는 듯 목을 들이미는 일라이저였다. 시퍼렇던 서슬과는 달리 로렌스 백작은 힘없이 검 자루를 놓았다. "그만 둡시다." "흥! 그럴 용기도 없는 작자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친 일라이저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눈만 빠끔히 내놓은 남녀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이만 물러가라." "네." 그들은 이불로 몸을 가린 채 다급하게 물러났다. 남자 셋에 여자 하나였고 집어든 복장을 보아 시종과 시녀가 분명했다. 특히 시종들은 하나같이 열다섯 살을 넘어 보이지 않는 어린 녀석들이었다.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흘겨보던 일라이저가 성난 눈빛으로 로렌스 백작을 노려보았다. "오늘의 무례를 결코 간과하지 않겠어요. 반드시 아버지의 질책이 있을 테니 각오해요." 말을 마친 일라이저는 옷을 집어 들고 내실로 들어갔다. 그리곤 화풀이라도 하듯 문을 꽝 닫아 버렸다. 엉거주춤 선 로렌스 백작의 얼굴은 허탈함으로 가득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필립이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 '거짓말이야. 설마 일라이저가 이럴 리가 없어.'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내심과는 딴판이었다. "믿을 수 없군요. 이,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납니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로렌스 백작은 몸을 빙글 돌렸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투였다. 필립은 별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저택을 나선 로렌스 백작은 조용히 마차에 다시 올라탔다. 그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내가 무척 측은하겠지?" "……." "하긴 자네에겐 남의 일이 아닐 테지.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펼쳐질 자네 모습일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묵묵히 듣고 있던 필립은 안색을 굳혔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왜 이런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는 거죠? 도대체 무슨 의도로?" 너무도 충격적인 장면에 이제 로렌스 백작까지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필립이었다. 하지만 로렌스 백작은 도무지 속 시원하게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네. 난 자네에게 이 상황을 믿으라고 부른 게 아냐. 그저 보고 느끼라는 것이지." "저, 전 도저히 작금의 일을 믿을 수 없습니다." "굳이 믿을 필요는 없네. 그저 자네가 보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만족하니까 말이야." 그 후로 얼마간 침묵이 이어졌다. 충격이 적지 않은 탓에 필립은 말을 잊었고 로렌스 백작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필립이었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뭔가 말하게." "자식들은 어디에 있죠? 이십 년이 흘렀다면 분명히 장성한 아들이나 딸이 있을 텐데……." 행여나 자식들이 어미의 방종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하지만 로렌스 백작은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슬하엔 자식이 없다네. 일라이저에겐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이 없어. 그녀는 몸이 늙는다는 이유로 자식을 낳는 일을 극구 피하지." "어, 어떻게 그런……." "사실이네. 자네도 익히 보지 않았나? 그녀가 나이답지 않게 무척 젊다는 사실을.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미모와 몸매를 유지하는 것뿐일세. 내 수입의 팔십 퍼센트는 그녀의 미모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지." "……." "어린 시종들과 동침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네. 늙지 않는 모습을 보니 효과는 어느 정도 있는 것 같더군." 필립은 또다시 말을 잊었다.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미래였다. '아니야. 믿을 수 없어. 이것은 분명히 몽마의 농간으로 인한 악몽일 거야. 내 미래는 결코 이렇지 않아.' 거듭 부정해 보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부정하면 할수록 조금 전의 일이 더욱 사실로 인지되는 것이다. 몽마에 의한 악몽은 이렇게 생생하지 않다. 나이트 메어가 꾸민 세상이기 때문에 어딘가 모르게 빈틈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완벽했다.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이 맞아떨어지는 상황 전개와 정황들. 게다가 몽마의 농간이라면 구태여 이런 악몽을 꾸게 할 이유가 없었다. 정신나간 몽마가 아닌 다음에는. '미치겠군.' 몸을 꼬집는다면 악몽에서 바로 벗어날 수 있겠지만 필립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더 알고 싶었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209회.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바얀카의 외곽이었다. 황실의 사냥터와 함께 외국의 국빈들을 맞이하는 영빈관들이 줄지어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로렌스 백작이 향한 곳은 사냥터가 아니었다. 그는 영빈관 중에서 가장 큰 영빈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외국의 중요한 귀빈을 만나러 가는 모양이었다. 필립은 의구심을 감춘 채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말이다. 마차는 영빈관의 정문에 가 멎었다. 그러자 중무장한 십여 명의 경비병이 검문을 위해 다가왔다. 외국의 귀빈이 묵는 영빈관인 만큼 경계가 삼엄했다. "신분을 밝혀 주십시오." 로렌스 백작은 묵묵히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근위기사단 부단장이란 말에 경비병들은 일제히 부동자세를 취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곳엔 무슨 일로……." "크로센 제국에서 오신 토머스 남작을 뵈러 왔다." "그렇습니까? 토머스 남작님께서는 뒤뜰에서 검술 수련에 심취해 계십니다." "알겠다." 그곳부터는 마차가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로렌스 백작은 마차에서 내렸다. 필립이 다급하게 뒤를 따랐지만 경비병들 중 누구 하나 그에게 눈길을 주는 자는 없었다. 로렌스 백작은 바로 뒤뜰로 향했다. 필립이 부랴부랴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이번에 만나려는 자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그 말에 걸음을 멈춘 로렌스 백작은 처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만나보면 금방 알게 될 걸세." 짧게 대답한 백작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넓게 펼쳐진 영빈관의 뒤뜰이었다. 경비임무로 한 번 들어와 본 적이 있었기에 필립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장소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거친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하앗 핫!" 바람을 가르는 파공성 소리가 함께 터져 나오는 것을 보아 누군가가 검술수련을 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가 토머스 남작이라 불리는 인물인 모양이었다. 로렌스 백작이 대관절 왜 그를 만나려는지 모르지만 필립은 묵묵히 뒤를 따랐다. 조금 뒤면 이유를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토머스 남작이라 짐작되는 자를 본 순간 필립은 너무도 놀라고 말았다. 장내의 상황이 너무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평생에 걸쳐 놀랄 일을 단 하루 만에 모두 겪는 듯한 느낌이었다. 뒤뜰의 넓은 연무장에는 한 청년이 웃통을 벗은 채 검을 들고 서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훌쩍한 키, 청년은 한눈에 보아도 완벽하게 균형 잡힌 탄탄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는 얼굴은 조각상처럼 수려했다. 하지만 필립이 놀란 것은 정작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청년의 검, 무척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검에는 삼 피트 가량 되는 푸른빛의 기운이 불쑥 솟아올라 있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빛을 발하는 기운의 정체를 필립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저, 저것은 완성된 오러 블레이드? 그, 그렇다면……." 옆에 서 있던 로렌스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는 의심할 나위 없는 소드 마스터야. 그것도 엄청난 실력을 가진." "노, 놀랍군요. 저렇게 젊은 나이에 소드 마스터에 오를 수 있다니……." 필립은 혀를 내둘렀다. 그도 그럴 것이 테르비아를 통틀어 소드 마스터는 고작 열여덟 명이 전부인 데다가 그들 대부분이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긴 노기사들이란 점을 감안하면 청년의 자질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봐야 했다. 크로센 기사단이 익히는 마나연공법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저 나이에 소드 마스터에 오른다는 것은 노력만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필립은 몹시 부러운 눈초리로 청년을 쳐다보았다. 완성된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하는 것은 필립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었다. 연신 감탄을 발하는 그를 무거운 눈으로 쳐다보던 로렌스 백작이 묵묵히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들을 잘 관찰하도록 하게. 절대로 놀라서는 안 되네." 말을 마친 로렌스 백작은 묵묵히 청년에게로 걸어갔다. 필립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로렌스 백작이 다가가자 청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로렌스 백작은 무표정한 청년의 눈을 들여다보며 고즈넉이 입을 열었다. 두 눈에 격정의 빛을 가득 담은 채. "방해를 해서 미안하오, 토머스 남작." "별 말씀을……. 그런데 어인 일로 절 찾아오셨습니까?" 특이한 것은 청년의 눈빛에서 적의 같은 것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백작을 대하는 청년의 태도는 사뭇 도전적이었다. 아마도 로렌스 백작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로렌스 백작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난 공무로 찾아온 것이 아니오. 솔직히 말하면 사적으로 당신을 찾은 것이지." "사적으로 제게 무슨 볼 일이 있다고 찾아오셨습니까?" 청년은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필립은 숨을 죽인 채 둘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로렌스 백작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표정이랄까. 그는 콱 잠긴 목소리를 겨우겨우 토해냈다. "토머스…… 아니, 티미…… 이렇게 불러도 되겠니?" 순간 필립은 머리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청년의 이름이 티미라면……. 정신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 청년의 냉랭한 대꾸가 필립의 귀에 들려왔다. "부르지 마십시오. 당신에겐 그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으니까." "하, 하지만 나, 난……." "내 아버지란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게로군요.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제겐 아버님이 단 한 분뿐이니까요." 필립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그때서야 청년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청년은 바로 자신의 아들이었다. 그와 케이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티미. 숨을 죽인 채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필립의 얼굴에는 경악감만이 가득했다. 토머스 남작, 다시 말해 티미는 로렌스 백작에게 줄곧 냉랭한 태도만을 견지했다.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이 골수 깊이 맺혔을 것이었다. "일단 절 낳아주신 데 대해서는 고마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뿐입니다. 전 이미 길러주신 아버님만을 진정한 아버지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 "아버님은 버림받은 우리 모자를 거두어 끔찍이도 아껴주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성장하는 데 온갖 조력과 노고를 아끼지 않아 주셨지요. 그런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절 티미라 부르시는 것입니까?" "나, 난……." "저에게 티미란 아명을 부를 자격이 있는 분은 오직 아버님뿐입니다. 물론 제가 말하는 아버님은 크로센에 계신 브루노 백작님을 말하는 것이지요." 로렌스 백작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티미는 추호도 동요하지 않았다. "돌아가십시오. 제게 아버님은 단 한 분뿐입니다. 두 번 다시 사적으로는 절 찾아오지 마십시오." 티미는 우두커니 서 있는 로렌스 백작을 남겨두고 몸을 빙글 돌렸다. 그의 뒤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나쁜 자식아!" 필립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다 못해 분통을 터뜨린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로렌스 백작은 이십 년 후의 자신이었다. 그러니 도저히 그냥 보아 넘기지 못했던 것이다. 필립은 냅다 달려들어 티미의 멱살을 부여잡으려 했다. "그래도 네 아버지다. 널 낳아준 아버지란 말이다. 그런데 네놈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지만 잡히는 것은 허공뿐이었다. 티미가 바로 눈앞에 있었지만 그는 심지어 옷깃 하나도 건드릴 수 없었다. 격정에 치우친 나머지 자신이 망령이란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었다. 티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용히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로렌스 백작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필립에게 힘없이 다가왔다. "그만 하게." "어떻게 저럴 수 있습니까?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아버지를 부정하다니……." "난 그 아이와 어미를 버렸네. 그러니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내가 무슨 낯짝으로 그 아이에게 아버지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겠나?" 로렌스 백작의 눈은 여전히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억지로 울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듣고 있던 필립도 말을 잊었다. 로렌스 백작의 과오는 엄연히 따지자면 자신의 과오이기도 한 것이다. 착 가라앉은 표정의 필립을 향해 로렌스 백작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것은 무척이나 긴 이야기였다. "아마 자네는 잘 알고 있을 거야. 케이트와 티미를 버린 내막을 말일세." 묵묵히 이어지는 로렌스 백작의 말은 필립의 가슴속을 사무치도록 파고들고 있었다. "내가 무려 육 개월 동안을 찾아가지 않자 두 모자는 결국 바얀카를 떠날 수밖에 없었네. 자네도 알겠지만 난 무정하게도 생활비조차 부쳐주지 않았지. 결국 케이트는 어린 티미를 안고 먼 여행길에 올랐네. 천애고아인 그녀에게 찾아갈 친척이 있을 턱이 없었지. 하지만 그녀는 그리 멀리 가지 못했어. 돈이 없으니 가고 싶어도 못 갔겠지. 그녀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네. 티미를 안고 절벽에서 뛰어내렸던 거지. 어쩌면 그녀는 그런 방법으로라도 해서 내 앞길을 가로막지 않으려 했을지도 몰라." 백작의 말을 듣고 있던 필립의 눈동자도 서서히 충혈되고 있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케이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네. 절벽에 자라난 나무에 걸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거지. 때마침 지나가던 용병단이 그녀를 살려냈다네." "그렇다면 티미의 아버지라는 작자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브루노 백작을 말하는 게로군. 좋아, 설명해 주지. 케이트를 구해낸 용병단은 당시 어떤 요인의 호위를 맡고 있었어. 바로 카르셀이란 왕국의 왕녀와 그 호위기사를 크로센 제국까지 보필하는 일이었지. 카르셀 왕녀를 호위하는 기사의 이름이 바로 미첼 브루노였어. 당시 상당한 검술실력을 보유한 팔라딘이었다고 하네." "그, 그럼 그가 케이트를……." 로렌스 백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예상이 맞아. 용병단은 오갈 데 없는 케이트와 티미를 크로센 제국까지 함께 데려가기로 결정 내렸네. 그 여정 동안에 브루노란 작자와 케이트 사이에 사랑이 싹튼 거지. 결국 두 사람은 크로센 제국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어. 정확히 따지자면 이것은 자네에겐 머지않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기도 하지." "미, 믿을 수 없군요." "다시 강조하지만 난 자네에게 믿을 것을 강조하진 않아. 그저 보고 느끼기를 바랄 뿐이지. 아무튼 그 브루노란 작자는 크로센 제국에서 어렵지 않게 팔라딘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지. 검술 실력이 대단했었거든. 크로센 기사단에 받아들여진 것은 그 이후의 일이고……." "……." "그는 케이트와 티미를 무척 아꼈네. 어쩌면 티미가 저토록 강력한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브루노의 조력이 절대적이었을지도 몰라. 현재 티미는 크로센 근위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다네. 그것도 기사단 분대를 맡고 있는 분대장으로 말일세. 그는 지금 공무로 잠시 테르비아에 파견 나와 있는 것일세." 아까 본 티미의 실력을 감안하면 충분하고도 남았기에 필립은 그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출세를 위해 미련 없이 버린 아들이 이 정도로 엄청난 존재로 자라났다니…….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한데 필립의 가슴속에는 대신 답답함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까 본 로렌스 백작의 웃지 못할 처지와 맞물려 머리를 더욱 아프게 하고 있었다. 그때 돌연 필립의 머릿속에는 로렌스 백작이 어떻게 이런 세세한 사안까지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용솟음쳤다. 사람을 시켰다 하더라도 이렇게 자세히 알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의심 섞인 눈빛으로 로렌스 백작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이토록 내막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것이죠?" 백작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들의 과거를 직접 봤으니까 알 수 있었다네." 필립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번져갔다. "직접 보았다고요?" 로렌스 백작의 얼굴은 극도로 무거워져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고뇌를 홀로 짊어진 듯한 표정이었다. "조금 있으면 자네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갈 걸세. 그런 다음 나는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어야 하네." "……." "조금 전 설명한 일을 알기 위해, 그리고 자네를 이리로 불러오기 위해 난 흑마법사에게 영혼을 팔았다네. 이것은 오직 자네에게만 털어놓는 일이야."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필립은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흑마법사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것이 무얼 뜻하는지 익히 알기 때문이었다. 기사가 흑마법사에게 영혼을 파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바로 데스 나이트가 되는 것. 그렇게 되면 저주받은 육신이 소멸될 때까지 영원히 흑마법사나 마왕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그것은 영원히 구제받지 못하는 암흑의 구렁텅이에 떨어지는 것과 같았다. 쉽게 말하면 기사들의 최후 중 가장 비참한 최후인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필립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 도대체 왜 그런 결심을……." "자네도 아까 보지 않았나? 자네라면 그런 삶을 견딜 수 있겠는가? 아내가 눈앞에서 스스럼없이 다른 사내를 끌어안는 모습을 보면서 말이야. 게다가 아들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네. 겉모습뿐인 삶을 사는 것도 이제 지쳤어. 아무 권한도 없는, 그저 허울만 좋은 근위기사단 부단장 로렌스 백작의 삶은 이제……." "……." "토머스 남작이 내가 버린 아들 티미란 사실을 알았을 때 난 주저 없이 흑마법사를 찾아갔다네. 그리고 영혼을 매개로 계약을 했지. 이십 년 전, 케이트를 버릴 당시의 내 영혼을 이리로 잠시만, 아주 잠시만 불러와 달라고 말이야. 그것이 자네가 날 보게 된 이유일세." 필립은 충격으로 넋이 나간 것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로렌스 백작, 이십 년 후의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그런 필립을 향해 로렌스 백작은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다고 자네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것은 결코 아니야. 그저 내가 처한 처지와 심정을 있는 그대로 알리고 싶은 것뿐이라네." "……." "미래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야. 자네의 행동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수백 수천이 넘는 자네 미래의 모습 중 단지 하나일 뿐이라네. 알겠나?" "……." "부디 자네가 내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라겠네. 나중에라도 영원히 저주받은 삶을 살아야 할 데스 나이트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면 말이야." 로렌스 백작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져가고 있었다. 아마도 약속한 시간이 끝난 모양이었다. "잘 있게. 이만 헤어질 시간이 되었군." 필립은 핏발이 가득 선 눈빛으로 이십 년 후의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조금 뒤 그는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나는 결코 당신처럼 살지 않을 것이오! 절대로!" 그와 함께 정신이 아득해져갔다. "이, 이봐. 무슨 일이야?" 눈을 뜬 필립은 이를 악문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동료인 로널드의 얼굴이었다. 콧수염을 기른 사십대 후반의 부관 로널드가 아닌 동료 근위기사인 로널드 말이다. 완전무장 차림의 그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필립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악몽을 꿨나 보군. 갑자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기에 들어와 봤어. 때마침 복도에서 근무 중이었거든." 필립은 아무 말도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있는 곳은 친숙한 자신의 방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케이트와 티미를 버린 이후 줄곧 기거하던 숙소 말이다. 필립은 자신이 이십 년 후의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안도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로널드에게 필립의 시선이 향했다. "나, 난 괜찮아." "쯔쯔쯔, 케이트 때문에 마음고생이 무척 심했나보군.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도록 해. 한 시간 뒤면 네 근무시간이 돌아오니까 조금 더 눈을 붙여둬." 필립은 막 나가려던 로널드를 다급하게 붙잡았다. "자, 잠깐." "무슨 일이야." 필립은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 채 로널드를 쳐다보았다. "부탁 하나만 하자, 로널드. 미안하지만 내 근무를 대신 서 줄 수 있겠어?" "뭐, 뭐라고……." 로널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210회 그가 아는 필립은 결코 대리근무를 부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설사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에게 배정된 근무시간만은 꼭 지키는 그였기에 로널드가 그토록 놀랐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비상이 걸려 있는 시기였다. 중요한 임무 때문에 근위기사단장이 기사단 전력 거의 대부분을 데리고 외부에 나가 있는 탓에 남은 근위기사들이 평소의 몇 배가 넘는 근무를 서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대리근무를 하는 것은 결코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필립 역시 필사적이었다.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워낙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러니 부탁을 들어주길 바란다. 물론 네가 대신 근무한다는 사실을 부단장님께 내가 직접 얘기 드리겠어." "그, 그러지 뭐." 필립의 표정이 너무도 절박해 보였는지 로널드는 선뜻 부탁을 들어주었다. 꼬박 여덟 시간 동안 근무를 서는 것이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으로 보아 둘 사이의 우정이 얕진 않은 듯했다. 필립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정말 고맙다." "뭘, 나중에 술이나 한잔 사. 복장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으니 난 바로 근무지로 가면 되겠군." "그럼 부탁해." 로널드가 나간 뒤 필립은 곧바로 종자인 지미를 불러들였다. 그는 근위기사가 되기 전부터 데리고 있던 종자라서 필립에겐 충실한 심복이나 다름없었다. 조금 뒤 지미가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비비며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요." 필립은 즉시 명령을 내렸다. "너는 이 길로 에드워드 후작가로 가거라. 그리고 일라이저에게 내가 조금 후 찾아갈 것이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전해라." 그러나 지미는 우물쭈물할 뿐 곧바로 복명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뭔가 속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이놈, 냉큼 달려가지 않고 뭘 하는 것이냐?" 필립의 눈썹이 휘어지며 노성이 터져 나오자 그는 급히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가, 갑니다요. 하, 하지만 헛걸음할 것이 분명합니다. 일라이저 아가씨는 십중팔구 집에 없을 테니 말입니다." 필립의 눈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그런 얘길 하는 것이냐?" "시, 실은 제가 아까 시내 중심부에 나갔다가 일라이저 아가씰 보았거든요." "시내 중심부에서 일라이저를 보았다고?" "그, 그렇습니다. 일라이저 아가씨는 아까 베이스톤 가의 데이빗 공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베이스톤 가의 데이빗이라면 바람둥이로 유명한 호색한이었다. 필립의 눈에 서린 이채가 더욱 짙어졌다. "그래? 둘이 무얼 하고 있더냐?" "두, 두 분은 최고급 레스토랑인 드 마르셀에서 야경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요. 두 분 사이가 아주 다정해 보이던데……." "음……." 필립은 두말도 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에드워드 후작가에 갈 필요가 없다. 대신 지금 즉시 마구간에 가서 말에다 마구를 갖추도록 하라. 마갑은 필요 없다. 안장 등 기본적인 마구만 갖춰 둔 뒤 언제든지 출발할 준비를 해 두어라" "아, 알겠습니다요." 필립은 우물쭈물하는 지미를 남겨두고 숙소를 나섰다. 그가 찾아간 곳은 바로 옆 건물에 위치한 근위기사단의 부단장실이었다. 비상 시기라 에드워드 후작은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집무실에 있었다. 단장이 외부에 나가 있는 탓에 그의 서류까지 모두 후작이 결재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덜컥 필립은 서슴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필립을 보자 에드워드 후작이 반색을 하며 맞았다. "오오, 자네 왔는가?" 필립은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입을 열었다. "실은 부단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지?" 필립은 단도직입적으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추호도 뒷일을 생각지 않는 태도였다. "일전에 말씀하신 일에 대해 드디어 결정을 내렸습니다. 일라이저와 결혼을 하라고 하신 제의 말입니다." "그것이라면 이미 승낙한 것이 아닌가?" 의아한 듯 눈을 둥그렇게 뜨는 에드워드 후작을 쳐다보며 필립은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아닙니다.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제겐 일라이저 아가씨를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도저히 아내와 아이를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뜻밖의 반응에 에드워드 후작은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이미 쌀이 익어 밥이 되었다고 생각한 일이 아니던가? 그런데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당사자의 마음이 돌변하다니……. "지, 진정인가?" 필립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진정입니다. 설사 이 일로 인해 일반기사로 좌천되어도 좋습니다. 산간벽지로 파견된다 하더라도 감수하겠습니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 아내와 아이를 지킬 생각이니까요." "……." "제 용무는 이게 전부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내와 자식을 데려오기 위해 부득이 동료기사 로널드에게 오늘 밤 대리근무를 부탁했습니다. 물론 그에 대한 책임은 모두 제가 지겠습니다. 그럼 이만."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린 뒤 필립은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그의 모습에서는 후회라는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에드워드 백작은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대관절 저 녀석이 왜 마음을 바꾼 거지?" 에드워드 후작은 이제 딸자식을 걱정하는 어버이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안타깝군. 저만한 녀석을 찾기가 그리 쉽진 않은데 말이야. 그런데 어디 가서 일라이저의 배필을 찾는다?" 마지막 단계에서 일을 송두리째 망쳐 버린 필립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아내와 자식을 위해 미련 없이 호기를 포기한 필립의 당당한 모습은 에드워드 후작의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필립이 자신의 사위가 되었다 하더라도 느끼지 못했을 감정일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필립이란 놈, 멋진 녀석이군. 지극히 기사다운 행동이고 말고, 암." 에드워드 후작의 입가에는 어느덧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후작의 집무실을 나온 필립은 곧장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종자인 지미가 곧장 출발할 수 있도록 말에다 마구를 갖춰둔 상태였다. "수고했다." 필립은 지체 없이 말에 올라탔다. "이랴!" 말은 기세 좋게 마구간을 달려 나갔다. 필립은 연신 박차를 가하며 서쪽 관도 쪽으로 말을 몰아갔다. 두두두두 한밤중에 난데없이 시내 중심부를 질주하는 단기의 기병 때문에 사람들은 분분히 몸을 날려 피해야 했다. 하지만 기수가 정복을 차려입은 근위기사라서 아무도 불평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저 공무 때문에 급히 달려가는 것이려니 생각할 뿐이었다. 전력으로 질주한 덕분에 필립은 오래지 않아 서쪽 관도로 나가는 성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을 열어라." 필립의 복장을 확인한 수문 병사들은 두말 하지 않고 성문을 열어 젖혔다. 근위기사라면 수문 병사들 따위는 감히 범접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존재였다. 필립은 열린 성문 사이로 쏜살같이 말을 달려 나갔다. 그의 얼굴에는 서쪽 관도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케이트를 찾아내겠다는 각오가 충천해 있었다. "기다리시오, 케이트. 내 두 번 다시 당신을 울리지 않을 것이오." "어떻게 되었나?" 데이몬의 질문에 인큐버스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하명하신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했습니다." "녀석이 눈치 채진 못했겠지?" "물론입니다. 전 몽마들의 군주인 인큐버스입니다. 그러니 통상적인 몽마의 수준으로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전 철저히 필립이란 놈의 기억을 토대로 완벽한 세상을 만들어냈고, 제가 직접 놈의 이십 년 후의 모습으로 변해 연기를 했습니다. 아마도 놈은 그 어디에서도 어색한 부분을 찾아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설정이었습니다." "좋아. 그럼 그때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재현해 보도록." "알겠습니다." 필립이 꾸었던 네 시간 가량의 악몽을 손수 체험해 본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이트 메어의 군주임을 입증하듯 인큐버스는 완벽한 연출을 해 냈다. 그가 보기에도 허점이 전혀 드러나지 않을 정도였다. 데이몬이 꾸민 계획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필립에게 현실로 각인되었다. 이제 놈이 찾아오기만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훌륭하군. 수고했어." "마음에 드신다니 영광입니다." "좋아, 그럼 돌아가도록. 이따금 부르면 와서 지금처럼 실력을 뽐내주기 바란다." "아, 알겠습니다." 인큐버스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사실 하급 마왕에 속하는 인큐버스가 이런 일을 하고 기쁠 턱이 없었다. 그가 가진 최대의 유희는 인간의 고통을 즐기는 일이었고, 지금같이 한 사람의 마음을 돌리는 따위의 일은 결코 바라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힘을 가진 자는 바로 눈앞의 네크로멘서였으니까.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좋아. 지금 즉시 마계로 돌아가는 마법진을 열어주지." 인큐버스 정도 되는 마왕이라면 자력으로도 충분히 마계에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데이몬은 어둠의 마력을 어느 정도 소모해가며 인큐버스를 강제로 귀환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만에 하나 놈이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분탕질을 친다면 데이몬으로서는 상당히 골치가 아파지기 때문이다. 인큐버스가 사라진 뒤 데이몬은 서둘러 마법진을 흩어 버렸다. "놈이 또다시 필립과 케이트 사이에 끼어들면 곤란하지. 마계 족속들은 하나같이 종잡을 수 없으니……." 데이몬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둠의 마력을 과도하게 소모한 탓인지 현기증마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도리어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도 그 자존심 강한 율리아나 계집애의 입맞춤 열 번이면 밑지는 장사는 아냐." 데이몬의 가슴은 내일 아침에 받을 율리아나의 입맞춤에 대한 상상으로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녀의 입맞춤은 다프네와의 달콤했던 추억을 현실처럼 되살려주었다. 데이몬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피로에 지친 나머지 용병들이 있는 곳으로 가 쓰러지고 싶었다. 산 아래로 내려가는 그의 머리를 달빛이 밝게 비춰주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늦으셨군요." 밤늦게 돌아온 데이몬을 카심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된 것을 보니 잠도 자지 않고 데이몬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일은 잘 되었습니까?"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어느 정도는. 내 생각이 맞는다면 내일 분명히 필립이란 녀석이 찾아올 걸세. 하지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네. 어쩌면 그 녀석이 미첼에게 심한 적개심을 드러낼지도 모르네. 그때 자네가 나서서 잘 조율하도록 하게. 난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깊이 잠들어 있을 테니." "아, 알겠습니다." 카심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자러 들어가겠네." 데이몬은 졸린 눈을 비비며 자신에게 배정된 천막을 찾아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고 나서도 카심은 한참동안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도대체 어떤 방법을 썼을까? 내 판단으론 이것은 이루기가 불가능한 일 같은데……." 하지만 카심은 오래지 않아 생각을 접어 버렸다. 데이몬은 그가 아는 상식으론 설명하기 힘든 인물이다. 그가 된다면 되는 일인 것이다. 드래곤을 잡은 이후부터 카심은 데이몬을 거의 맹신하고 있었다. "뭐 내일이 되면 결정 날 일이니……." 고개를 내저은 카심은 옆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한 녀석을 깨워 불침번을 넘겨준 뒤 곯아떨어질 작정이었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211회. 늦게 잠들었지만 카심은 오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새벽녘에 난데없이 들이닥친 한 기의 기마병 때문이었다. 기마병은 정확히 용병들의 캠프를 목표로 달려오고 있었다. 두두두두 전력으로 달려온 한 필의 말이 바로 캠프 앞에서 푸레질을 하며 멈춰 서자 불침번을 서던 패터슨이 긴장하며 검 자루를 꼬나 쥐었다. 돈트렐에서의 일 때문에 매사에 조심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말에 탄 기사는 온통 먼지를 뒤집어 쓴 상태였다. 한눈에 보아도 밤새 말을 타고 달린 것이 분명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기사는 패터슨을 향해 떠듬떠듬 말을 건넸다. "혹시 카르셀 왕녀 일행을 호위하는 용병단이 아니오?" 상대가 느닷없이 자신들의 정체를 정확히 짚어내자 패터슨의 눈에 경계심이 서렸다. 만에 하나 테르비아에서 자신들을 붙잡기 위해 파견한 부대의 정찰병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패터슨은 구태여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에인션트 급 드래곤까지 사냥한 데이몬의 실력을 깊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데스 나이트들의 힘이라면 사단 급 병력이라도 감히 앞을 가로막지 못할 터였다. "그렇긴 한데 무슨 일이오?" "드디어 찾았군." 기사는 그 즉시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 모습에 패터슨은 긴장한 채 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상대에게는 싸울 의향이 전혀 없는 듯했다. 두 손을 펴서 무기가 없다는 것을 표시하니 말이다. "경계할 필요 없소. 먼저 소개를 하지. 난 테르비아의 근위기사 필립 로렌스라 하오." 뜻밖의 일에 패터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흑마법사 데이몬의 장담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상대의 의도가 아직까지 정확히 파악된 것이 아니기에 패터슨은 조심스럽게 카심을 불렀다. "대, 대장님. 잠시만 나와 보십시오." 카심은 이미 잠에서 깨어 있었다. 말 한 필이 전력 질주하는 소리를 듣고도 한가로이 잠에 빠져 있을 그가 아니었다. 천막 밖으로 뛰쳐나온 카심의 눈은 경악에 물들어 있었다. 반신반의했던 일이 눈앞에 현실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정말이었나? 도대체 어떻게?' 억지로 얼굴빛을 고친 카심은 그대로 먼지투성이 기사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용병단의 대장을 맡고 있는 카심이오. 그런데 테르비아의 근위기사께서 무슨 일로 저흴 찾아오셨소?" 모르는 척 너스레를 떠는 카심을 쳐다본 기사는 부랴부랴 머리에 쓴 투구를 벗었다. 붉게 상기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케이트를 찾아 밤새도록 관도를 뒤진 탓에 얼굴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나, 난 이곳에 있다는 내 아내를 찾으러 왔소." "아내? 당신 아내가 대체 왜 여기에? 음…… 혹시 케이트를 말하는 것이오?" 그 말에 필립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그, 그렇소. 그녀를 데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구려." 필립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고함을 질렀다. "케이트! 케이트! 어디에 있소. 나요. 나 필립이오. 당신에게 용서를 구하고자 이렇게 달려온 것이오!" 필립은 천막 사이를 정신 나간 사람처럼 돌아다니며 고함을 질러댔다. 하나둘 천막에서 나온 용병들은 곤혹스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데이몬의 장담대로 필립이란 자가 찾아올 줄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율리아나의 천막이 열리고 마침내 케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듯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녀를 본 필립의 눈동자에서 불똥이 튀었다. "오오, 케이트……." 필립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얼떨떨한 기색의 그녀를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내가 잘못 생각했소, 케이트. 난 정말 나쁜 놈이오. 세상에 당신과 티미를 버릴 마음을 먹었다니……. 정말 씻을 수 없는 죄인의 몸이지만 진심으로 당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어서 이렇게 달려왔다오." 필립은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케이트에게 애원했다. "제발 날 용서해 주시오. 내 두 번 다시 나쁜 마음을 먹지 않겠소." "나, 난……." 너무도 판이하게 변한 필립의 태도에 케이트는 본능적으로 겁을 먹었다.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을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티미와 자신의 생활비조차 사정없이 끊어 버린 남편이 아니던가? 하지만 필립은 말 그대로 필사적이었다. 스릉 그가 난데없이 검을 뽑아들자 용병들은 긴장한 채 그를 막아서려 했다. 하지만 필립은 뽑은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검을 바닥에 푹 박아 넣은 채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어떻게 하면 내 잘못을 용서해 주겠소? 내 당신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미련 없이 바칠 수 있소. 이미 난 에드워드 후작에게 진심을 낱낱이 밝히고 왔소.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과 티미를 버릴 수 없으니 혼담을 없던 일로 해 달라고……." "……." "앞으론 평생 당신만 바라보며 살겠소. 굳이 기사의 신분이 아니라도 좋소. 당신과 티미를 데리고 살 수 있다면 한낱 농사꾼의 삶이라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소. 그러니 제발 날 용서해 주시오." 부들부들 떨던 케이트의 몸이 눈에 띄게 진정되어갔다. 필립의 눈에 배어 있는 진심을 마침내 읽은 것이다. 그녀의 눈에서도 어느새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필립은 다시 다정하고 자상했던 예전의 남편으로 돌아와 있었다. 케이트는 흐느끼며 필립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여, 여보…… 흐흐흑……." 눈물 젖은 필립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드디어 케이트가 자신을 용서한 것이다. "고, 고맙소 여보. 앞으로는 평생을 당신과 티미만 생각하며 살겠소. 이것은 내가 백 번 죽는다 해도 변하지 않을 다짐이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인연을 이어간 두 부부는 단단히 얼싸안은 채 서로의 몸을 정신 없이 어루만졌다. 그 모습을 용병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쳐다보았다. 재결합한 부부의 앞날에 서광이 비치길 기원하면서. "그, 그런데 티미는 어디에 있소?" 필립이 눈물 젖은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리자 율리아나가 말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품속에 고이 안고 있던 티미를 필립에게 내밀었다. 티미는 아직까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티미는 여기 있어요." 필립에게 가졌던 격한 감정은 이미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무릎까지 꿇어가며 케이트의 용서를 얻고자 하는 모습에 감정의 앙금이 스르르 녹아 버린 것이었다. 율리아나는 영리한 소녀였다. 굳이 다른 말을 해서 일을 그르치는 것은 그녀도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티미를 건네받자 필립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오, 티미……." 필립은 정신 없이 티미에게 얼굴을 비벼댔다. 그 통에 티미가 잠에서 깨어났다. 곤히 자다 일어났으니 울음을 터뜨릴 법도 했는데 티미는 도리어 방긋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란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빠빠빠빠……." 티미의 미소를 접하자 필립은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밀려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 티미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의 아들로 돌아온 것이다. 그 누구도 빼앗아가지 못할. "미안하다, 티미. 정말 미안하다." 거듭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던 필립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케이트를 쳐다보았다. "내 두 번 다시 당신과 티미를 슬프게 하지 않겠소. 이것은 진심이오." 그 말을 들은 케이트도 눈물 젖은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완전히 잃어버렸다 생각했던 행복을 다시 찾았다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라 견딜 수 없었다. "저, 정말 고마워요, 여보." "고맙다니. 오히려 고마워 견딜 수 없는 것은 나요. 그런 큰 잘못을 저지른 나를 용서해 주다니, 난 이제 근위기사 자리에 아무런 미련이 없소. 설령 산간벽지의 수비병으로 파견된다 해도 상관하지 않겠소. 퇴근하여 당신과 티미의 웃는 얼굴만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니……." "다, 당신 정말 날 감격시키는군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진 케이트는 필립을 다시 한 번 힘차게 끌어안았다. 필립의 눈동자는 다시 찾은 가정을 지키겠다는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티미의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춘 필립은 티미를 케이트에게 넘겨주었다. "이제 돌아갑시다. 소박한 우리의 보금자리로 말이오. 참, 그러기 전에 할 일이 있소." 바닥에 박아놓은 검을 슬며시 뽑아든 필립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죽 늘어선 용병들을 둘러보았다. "혹시 이 중에 미첼 브루노란 사람이 있소?" 필립이 난데없이 이름을 부르자 미첼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 난데 왜 그러시오?" 미첼을 보자마자 필립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아내와 자식을 빼앗아 갈 뻔한 범인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되찾긴 했지만 그에 대한 감정이 고울 리 없었다. 미첼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필립은 자신도 모르게 검 자루를 불끈 쥐었다. "당신이 바로 미첼 브루노였구려." 상대가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자 미첼 역시 바짝 긴장하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그렇소만." 미첼은 질 수 없다는 듯 눈빛을 정면으로 맞받으며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에 필립은 상대가 상당한 실력의 팔라딘이란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물 흐르는 듯한 몸놀림에 민첩한 동작을 보니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로렌스 백작의 말은 정말 귀신같이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필립은 자신에게 모든 것을 알려준 로렌스 백작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데스 나이트가 되어 버렸을 테지만. '정말 고맙소, 로렌스 백작. 아주 적절한 순간에 내 잘못을 깨우쳐 주었으니 말이오.' 둘의 눈싸움은 일촉즉발 그 자체였다. 용병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들로서는 난데없이 적의를 드러내는 필립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케이트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당신, 왜 그래요? 저분들은 절 구해주신 분이에요." 순간 필립의 손에서 힘이 쭉 빠졌다. 어쨌거나 케이트와 티미를 빼앗아간 것은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지금 상황에서 상대는 자신에게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더 이상 적의를 드러내는 것은 명백한 무례였기에 그는 억지로 얼굴빛을 고치며 고개를 숙였다. "제 아내와 자식을 돌봐 준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자신의 아내와 자식이란 부분을 유난히 강조하는 필립이었다. "아, 예……." 미첼도 얼떨떨한 기색으로 마주 예를 취했다. 잡아먹을 듯 적의를 드러내다가 갑자기 예를 취하니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계적으로 사의를 표시한 필립은 그와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카심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용병대의 대장이시오?" "그렇소만." 카심을 대하자 비로소 필립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빛이 어렸다. "제 아내를 구해주신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진심이 역력히 묻어 나오는 감사에 카심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부군께서 마음을 돌리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만약 케이트와 티미를 잃었다면 저 역시 살아갈 희망을 잃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제 가족 모두를 구해주신 은인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지……." 필립은 또다시 무릎을 꿇었다. 일국의 근위기사로서 한낱 용병대장에게 서슴없이 무릎을 꿇는 것을 보니 그가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당황한 카심은 얼른 다가가서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 두 분께서 다정하게 살아가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인지 필립은 거듭 허리를 숙였다. 만에 하나 그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케이트와 티미는 절벽에서 덧없이 생을 마쳤을 것이고, 그랬다면 필립은 평생을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가야 했을 터였다. 카심은 웃으며 케이트를 데리고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이만 부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마음고생 탓인지 부인께서 몸이 많이 약해지셨더군요." "아, 알겠습니다." 필립은 부랴부랴 말을 끌고 왔다. 케이트를 손수 안아 말에 태운 필립은 따듯한 눈빛으로 아내와 자식을 쳐다보았다. "집으로 갑시다. 좁지만 더 없이 소중한 우리 집으로." "그래요, 여보." 고개를 끄덕인 케이트는 용병들 하나하나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비록 남편의 마음을 돌리는 데 가장 역할을 했을 은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형언할 수 없는 눈빛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일일이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용병들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필립은 그곳을 떠났다. 케이트와 티미를 말에 태운 채 흔들리지 않도록 고삐를 단단히 잡고 걸어가는 모습에서는 그가 아내와 자식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가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참으로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일행들은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 손을 흔들었다. 미첼의 느닷없는 불평이 터져 나올 때까지 말이다. "뭐 저런 자식이 다 있어." 미첼은 분을 참지 못하고 씨근거렸다. 조금 전 필립의 태도가 눈에 거슬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는 것도 모자라 검까지 뽑을 기세였다니……. 왜 그랬는지 영문도 몰랐기에 더 화가 나는지도 몰랐다. "빌어먹을 자식. 차라리 속 시원하게 한판 붙어볼 걸 그랬나?" 미첼의 심사는 거의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지금껏 겪었던 고초로 인해 울화가 골수까지 차 있던 와중이라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필립이 거기에 불을 지를 뻔했던 것이다. 만약 케이트와 티미가 없었다면 도리어 미첼이 먼저 싸움을 걸었을지도 몰랐다. 눈이 뒤집힌 탓에 그는 상대가 테르비아의 근위기사건 말건 상관하지 않을 각오였다. "개자식, 한번만 더 마주쳤단 봐라." 필립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며 계속 씨근거리는 미첼을 용병들은 쓴웃음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보다 못해 율리아나가 앞으로 나섰다. "그만 해, 미첼. 필립이 늦지 않게 마음을 돌렸으니 잘 된 일이잖아?" "그런데 자식이 왜 나에게 적의를 보이느냔 말이야. 기분 나쁘게. 내가 그놈에게 뭘 잘못한 게 있다고……." 미첼의 화풀이는 그칠 줄을 몰랐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은 아직까지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필립 부부가 사라지고 나니 비로소 이 상황에 의구심이 생긴 것이다. "도대체 필립이란 자가 어떻게 마음을 돌렸을까?" "글세, 직접 보니 아주 강직한 사람 같은데……. 내 경험에 미루어 본다면 그런 사람은 절대로 강제적인 방법으로 뜻을 꺾을 수 없어. 도대체 어떤 방법을 썼을까?" "난들 알겠어요." 설왕설래가 무수히 오고갔지만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이 이미 불가능한 일이라 치부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의외의 반전이었다. 그런데 그 반전의 열쇠를 쥐고 있는 당사자는 지금도 잠에 빠져 있었다. 피곤한 안색의 데이몬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천막을 나설 때까지 용병들은 눈이 빠지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으하함! 잘 잤다. 케이트가 없는 걸 보니 녀석이 왔다 갔나보군." 율리아나가 눈을 비비는 데이몬에게 얼른 다가갔다.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쓴 거죠?" "……." "어떻게 필립의 마음을 돌려놓았어요? 그리고 그가 왜 미첼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거죠?"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구태여 알 필요가 있나?" "궁금해서 그래요. 도대체 어떻게 한 거죠." 하지만 데이몬은 도무지 속 시원하게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알려고 하지 마. 그것보다도……." 데이몬은 돌연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보고 있던 율리아나가 소름이 오싹 돋아 오를 정도의 음흉한 눈빛이었다. "아침이 밝았으니 즐거운 시간이 돌아왔군. 그럼 어디 내 볼에다 입을 한번 맞춰 보실까. 최대한 다정하게 아저씨라 부르며." 이제 다급해진 것은 율리아나였다. "자, 잠깐만요. 아직 밥도 안 먹었잖아요? 뭐가 그리 급해요." "밥보다 그게 더 급해. 보다시피 난 계약조건을 훌륭하게 완수했거든.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그, 그래도……." "정당한 계약을 어길 작정인가?" 결국 율리아나는 약속대로 데이몬의 볼에 입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어제보다 거부감이 덜한 것은 아마도 케이트의 행복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애퇘퇘! 세수라도 하고 올 것이지." 오만상을 찌푸리며 달려가는 율리아나를 보며 데이몬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며 용병들은 느긋하게 아침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은 그들에겐 유난히 상쾌했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212회. 머나먼 아르카디아에서 덧없이 죽음을 맞이한 블랙 드래곤 러셀런트. 다른 드래곤들이 그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러셀런트의 가디언들이 주인의 죽음을 다른 드래곤들에게 전했기 때문이었다. 마법이란 그것을 건 당사자가 살아 있을 때에만 효력을 유지한다. 캐스터가 죽는다면 그가 걸어놓은 마법들은 자연적으로 풀려 버리는 것이다. 영구적으로 걸어놓은 마법의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런 이유로 러셀런트가 데이몬과 데스 나이트의 손에 죽은 이후 그의 레어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중 첫번째가 바로 스톤 골렘들의 소멸이었다. 가디언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스톤 골렘들은 창조주의 죽음과 동시에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원래의 형태인 돌로 다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것은 러셀런트에게 복종하고 있던 중형 몬스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신을 옥죄고 있던 마법이 풀린 탓에 원래의 흉성이 되살아난 것이다. 몇몇 중형 몬스터들은 그대로 달아났고 나머지는 이빨을 드러내어 지금껏 그들을 지휘하던 고블린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힘과 체력에서 열세인 고블린들이 오우거와 트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끔찍한 살육전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고블린들이 죽었다. 굴을 파고 숨은 몇몇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고블린들이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죽은 고블린들의 시체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중형 몬스터들은 그곳을 떠나갔다. 가디언이라는 지금까지의 본분을 깡그리 망각한 채. 그 중에서도 몇몇 중형 몬스터들은 지금까지의 노역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레어의 곳곳을 무참히 파괴해 버렸다. 이렇게 해서 러셀런트의 레어는 무참히 황폐화되어 버렸다. 러셀런트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목숨을 위협하던 중형 몬스터들이 사라지자 굴을 파고 숨은 고블린들은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건진 고블린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지금까지 방패막이 되어 주던 러셀런트가 죽었으니 그들 또한 나름대로 살길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그들이 향한 곳은 바로 다른 드래곤의 레어였다. 그들에겐 우선 주인의 죽음을 전할 의무가 있었고, 혹시라도 다른 드래곤들이 가디언으로 받아 줄지 모른다는 기대 또한 없지 않았다. 오랜 세월동안 평온한 가디언의 생활에 젖은 고블린들에게 거친 황야에서의 생활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그 때문에 고블린들은 목숨을 걸고 머나먼 여정을 결정한 것이었다. 중형 몬스터에게 혹은 오크 사냥꾼들에게 하나씩 사냥 당하면서도 고블린들은 끈질기게 드래곤의 레어로 여행을 해나갔고, 그들 중 하나가 마침내 베르키스의 레어가 있는 펠루시아 산맥에 도착하게 되었다. 상처투성이가 된 채 도착한 고블린은 레어를 지키던 게덴하이드에게 러셀런트의 죽음을 전했다. "세, 세상에……." 놀라운 소식을 접한 게덴하이드는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한낱 마법사 하나에게 에인션트 급 드래곤이 당하다니……. 베르키스에게 사로잡히는 과정에서 에인션트 급 드래곤의 무서운 파괴력을 실감했던 게덴하이드에겐 결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네 말이 정녕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스톤 골렘들이 모조리 소멸되어 버린 데다 저희들의 지시를 받던 오우거나 트롤들이 돌변해서 저희들을 공격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동료들 대부분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것으로 보아 러셀런트 님께서 불행한 일을 당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 같습니다." 먼지와 피로감에 덮인 모습으로 말을 이어나가는 비쩍 마른 고블린을 보며 게덴하이드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두 기의 스톤 골렘이 돌로 돌아갔다면 우연찮게 마법이 풀린 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레어의 모든 스톤 골렘들이 소멸되었다는 사실과 중형 몬스터들이 그들을 통제하는 고블린들을 습격했다면 해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미치겠군." 골머리를 앓던 게덴하이드는 결국 베르키스를 깨우기로 마음먹었다. 에인션트 급 드래곤의 죽음은 그 정도로 중요한 문제였다. 그것도 러셀런트는 베르키스가 모종의 지시를 내렸던 드래곤이 아니던가. 그가 어떤 이유로 죽임을 당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베르키스에게 보고를 해야 할 사항이었다. "그래, 수고했다. 처소를 마련해 둘 테니 쉬도록 해라." 놀라운 사실을 전한 고블린에게 응분의 보상을 한 뒤 게덴하이드는 지체 없이 베르키스의 처소로 향했다. 데이몬이란 인간 하나 때문에 주인이 또다시 수면 도중에 깰 수밖에 없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처소에 도착한 게덴하이드는 정해진 절차대로 그곳을 경비하는 아이언 골렘에게 주인을 깨워줄 것을 청했다. 수면 중인 베르키스에게는 가디언 우두머리인 게덴하이드마저도 접촉이 봉쇄되어 있었다. 쉽게 잠에서 깨지 못하는 드래곤의 특성상 게덴하이드의 귀에 베르키스의 음성이 울려 퍼진 것은 그로부터 하루 뒤의 일이었다. "무슨 일이냐?" 다소의 짜증이 배어 있는 음성이었다. 곤히 자다 깨어났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게덴하이드는 큰 죄라도 지은 듯 고개를 수그린 채 조심스럽게 보고를 시작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러나 사안이 사안인지라 부득이 죄를 범했습니다. 실은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어제 도착한 러셀런트 님의 가디언으로부터 전해진 사실입니다." 게덴하이드로부터 러셀런트가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베르키스는 무척 놀란 듯했다. "그게 정말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모든 스톤 골렘들이 돌로 돌아가고 중형 몬스터들이 흉성을 되찾았다면 이유는 단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게덴하이드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추측을 늘어놓았다. "노, 놀랍군." 잠에서 덜 깬 나머지 정신이 혼미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르키스는 등골이 서늘함을 느껴야 했다. 에인션트 급 드래곤이 한낱 마법사에게 죽음을 당하다니…….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접한 탓인지 떠듬거리는 음성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러, 러셀런트라면 충분히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저, 저도 놀랍습니다." 벽 너머의 베르키스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조금 뒤 한탄하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실수다. 러셀런트에게 널 딸려 보냈어야 하는 건데." "……." "라이프 포스 베슬이 나에게 있으니 리치의 특성상 소멸되더라도 널 되살릴 수 있다. 그랬더라면 당했더라도 내막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 아니냐? 놈이 어떤 방법으로 러셀런트를 죽였는지 말이다." "그, 그렇군요." 게덴하이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백 년 전 펠드리안에 난입했을 당시에도 게덴하이드는 본체가 소멸되는 운명을 맞았다. 그때도 가증스러운 존재 데이몬의 손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라이프 포스 베슬이 베르키스의 손아귀에 있었기 때문에 게덴하이드는 오래지 않아 되살아날 수 있었다. 물론 그 대가로 수백 명의 인간 노예가 생명력을 빨려 처참한 죽음을 맞아야 했지만. 만약 게덴하이드가 러셀런트와 동행했더라면 그간의 상황은 고스란히 베르키스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데이몬의 뒤를 쫓던 러셀런트가 죽임을 당한 것은 현실로 다가왔고, 그가 당한 과정은 철저히 어둠 속에 묻혀졌다. 그가 데이몬의 손에 당했는지, 아니면 인간 기사들의 합공에 생명을 잃었는지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베르키스는 깊은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러셀런트는 제법 노련한 드래곤이다. 따라서 드래곤 슬레이어들에게 당했을 가능성은 무척 희박하다. 그렇다면 흉수는 데이몬이란 녀석밖에는 없지. 문제는 놈이 어떻게 러셀런트를 죽였는가 하는 것인데…….'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마법의 특성상 9서클에 머물러 있는 인간이 10서클의, 그것도 에인션트 급 드래곤을 죽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을 설명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놈이 상당한 실력을 가진 소드 마스터와 합세해서 러셀런트를 상대했다는 것. 하지만 그것 역시 생각하기 힘든 가정이었으니……. '놈은 흑마법사다. 다시 말해 인간들에게 극히 경원되는 존재라 할 수 있지. 그런 놈이 실력 있는 소드 마스터를 끌어들일 가능성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 정도 실력이 있는 녀석들은 대부분 큰 왕국의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을 테니…….' 베르키스는 비로소 데이몬에게 경계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크레이트를 죽였을 때에는 단지 방심과 운 탓으로 치부했던 그였다. 하지만 에인션트 급인 러셀런트까지 잃고 나자 그는 데이몬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러셀런트를 죽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사실은 이제 더 이상 그를 얕봐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성급히 굴어서는 안 되겠군. 일단 모든 드래곤들이 잠에서 깨어난 뒤 철저한 계획을 세워 인크레시아를 회수해야겠군." 놈의 모든 것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데이몬이 네크로멘서가 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인간과 언데드가 워낙 상극이라서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베르키스는 생각을 굳혔다. "할 수 없지. 우선 너는 레어의 경비에만 주력하도록 해라. 놈을 처치하는 것은 오 년 후로 미루도록 하겠다." "알겠습니다." 게덴하이드는 공손히 대답한 뒤 몸을 돌렸다. 아이언 골렘들의 육중한 동체를 힐끔 쳐다본 게덴하이드는 물 흐르듯 계단으로 몸을 움직였다. 벽 저쪽에서는 베르키스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시 잠들기까지는 적어도 이틀이란 시간이 걸릴 터였다. 레어로 올라간 게덴하이드 앞에는 아주 기괴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그들에겐 사냥감이라 할 수 있는 인간 하나가 베르키스를 만나겠다고 찾아온 것이다. 휘하 리치들이 인간을 엄밀히 포위한 채 게덴하이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불문곡직하고 죽여야 했지만 게덴하이드가 없는 탓에 리치들은 그에 대한 처형을 잠시 미룬 상태였다. 리치 하나가 음산한 음성으로 게덴하이드에게 보고를 올렸다. "이놈은 베르키스 님을 뵙겠다고 찾아온 놈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게덴하이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인간을 노려보았다. 그는 겁도 없이 주위를 포위한 리치들을 느긋하게 돌아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게덴하이드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지금껏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인간이 단신으로 드래곤을 만나겠다고 찾아오다니……. 게덴하이드의 옆에는 십여 명의 리치들이 지옥의 업화 같은 안광을 내뿜으며 인간을 직시하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간이 바짝 오그라들 법도 한데 놀랍게도 그는 조금도 주눅 든 눈치가 아니었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느긋하게 돌아볼 뿐이었다. 드래곤의 레어를 찾아온 인간은 평범한 외모를 가진 사내였다. 사십이 갓 넘어 보이는 강퍅한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매, 그리고 관자놀이가 불쑥 튀어나온 것으로 보아 상당한 실력을 가진 기사로 보였다. 하지만 그에겐 무기는 물론 몸에 착용한 갑옷조차 없었다. 종자도 없이 달랑 혼자 와 리치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겁을 먹지 않는 것을 보니 담이 상당히 큰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기이한 안광을 내뿜으며 사내의 모습을 샅샅이 훑어보던 게덴하이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녀석이 우리가 모시는 베르키스 님을 뵈러왔다고 그랬느냐?" "그렇소. 이곳이 에인션트 급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의 레어라면 바로 찾아온 것이오. 우리 정보부의 판단이 정확하다면 말이오." "……." "내 이름은 모리스, 바다 건너 아르카디아에서 왔소. 내가 모시는 주군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이 먼 길을 온 것이오." 게덴하이드의 안광에는 곤혹스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아르카디아에서 사신이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런 터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게덴하이드는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생각이 짧군. 이곳이 어디인 줄 알았더냐? 사신으로 왔다고 해서 순순히 살려 보낼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지금껏 이곳을 밟은 인간 중 살아 돌아간 놈은 단 하나도 없다." 그러나 게덴하이드의 으름장에도 모리스라 이름을 밝힌 사내는 두려워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소. 내 임무는 오로지 하나뿐, 이곳의 주인에게 주군의 밀명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임무를 위해서는 목숨 따위는 웃으며 버릴 수 있을 듯한 기백이 모리스의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주군에 대한 충성심이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 모습에 게덴하이드는 또다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인간들 중 이런 부류의 녀석들이 가장 골치가 아프단 말이야.' 만일 모리스란 녀석이 며칠 전에만 왔더라도 이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지금껏 해 왔던 대로 가차 없이 죽여 버리면 그뿐이었다. 놈에게 어떤 용건이 있건 상관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놈이 아무리 귀가 솔깃한 제안을 가지고 왔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게덴하이드에겐 애당초 베르키스의 잠을 깨울 만한 담량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베르키스는 이미 잠에서 깬 상태가 아닌가. 모리스라는 작자는 공교롭게도 때를 너무나 잘 맞춰 온 것이다. 아마도 우연의 일치이긴 하겠지만. 곧바로 수면에 들어가지 못하는 드래곤의 특성상 베르키스는 아직까지 깨어있었고, 그 때문에 모리스는 바로 죽임을 당하는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모리스에겐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게덴하이드는 그것 때문에 꽤나 고심을 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할 것도 없이 놈을 즉시 죽여 버려야 합당할 듯하지만 베르키스 님의 생각을 모르니…….' 일단 베르키스가 깨어난 이상 레어에서 일어나는 일의 결정권은 게덴하이드의 손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니 아무래도 베르키스에게 보고하는 것이 옳을 듯싶었다. 모리스의 얼굴을 슬쩍 훑어본 게덴하이드는 안광을 짙게 내뿜었다. '하지만 그게 너에겐 더 불행일 수도 있지. 나에게 당하는 죽음은 순간적으로 끝나지만 베르키스 님은 그렇지 않아. 그분은 인간을 한계에 이를 때까지 고문하는 취미를 가지고 계시거든.' 무표정한 모리스의 얼굴을 보며 게덴하이드는 마침내 생각을 굳혔다. "좋다. 일단 베르키스 님께 여쭤 보겠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도록." 리치들에게 사내를 감시하라 명령한 뒤 게덴하이드는 또다시 베르키스의 처소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절차가 비교적 간단했다. 베르키스가 깨어 있으므로 아이언 골렘에게 구태여 깨워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또 무슨 일이냐?" "죄송합니다만 인간 하나가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바다 건너 아르카디아에서 온 인간인데, 꼭 베르키스 님을 뵈어야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나를?" "그렇습니다. 놈이 모시는 주인의 명령을 가져왔다 합니다." 석벽 저편의 베르키스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 모습에 게덴하이드는 괜히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냥 처치해 버릴 걸 그랬나? 혹시라도 베르키스 님의 노여움을 사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뒤이어 들려오는 석벽 저편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전혀 깃들어 있지 않았다. "재미있겠군. 놈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알겠습니다." 다행이라 생각한 게덴하이드는 얼른 몸을 돌렸다. [다크메이지] 7장 에피소드-1. 213회. 레어로 나온 게덴하이드는 서둘러 모리스에게 다가갔다. 그는 아직까지 리치들의 포위망에 갇혀 있었다. 게덴하이드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모리스를 쳐다보았다. "일단 네놈을 베르키스 님께 안내해 주겠다." 모리스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고맙소." 그러나 모리스가 답례를 하기도 전에 게덴하이드의 손에서 소름이 끼치는 광휘가 일어났다. 파츠츠츠 그의 임무는 주인의 안전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안의 소지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했다. 어쨌거나 상대는 마나를 다루는 능력자니까. 게덴하이드는 검게 물든 손을 들어 모리스의 어깻죽지를 짚었다. "명령을 전하는 데 팔 따위는 필요 없겠지?" 동시에 터져 나오는 짧은 비명소리. "크윽……." "걸어야 하니 다리는 남겨두겠다." 극심한 고통에 모리스는 눈을 부릅떴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지만 양팔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신음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랍게도 그의 팔은 뼈만 앙상할 정도로 검게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생명력을 모조리 말려버리는 죽음의 손길(hand of death)에 당한 흔적이었다. 그러나 게덴하이드는 그마저도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우두두둑 검게 타 버린 형상의 양팔이 어깻죽지에서부터 뽑혀졌다. 그러나 뽑힌 자리에서는 피 한 방울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죽음의 손길에 당한 순간 살과 함께 혈관을 돌던 피마저 순식간에 말라 버렸기 때문이었다. 통증으로 모리스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겁먹은 기색은 아니어서 마치 참을성과 기개가 남다름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는 얼굴 근육을 푸들거리며 억지로 표정을 고쳤다. "이, 입장료가 조금 비싸구려." 게덴하이드는 묵묵히 모리스의 얼굴을 쳐다보다 몸을 돌렸다. "따라 오라." 모리스는 후들후들 떨리는 발을 추슬러 그의 뒤를 따랐다. 리치들의 물샐틈없는 포위망 속에 갇힌 채였다. 극심한 통증으로 말미암아 모리스는 걸음을 겨우겨우 내딛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열망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곳은 사지(死地)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죽을지도 모르는 곳에 그를 보낸 자는 놀랍게도 모시는 주군이었다. 어찌 보면 가혹하다고 볼 수 있는 명령이지만 모리스는 도리어 이를 굳게 악물었다. '기필코 임무를 완수하고야 말겠다.' 나름대로 참을성이 있다고 자부했건만 어깻죽지의 통증은 엄청났다. 말로만 들었던 리치의 잔인성을 여실히 실감한 순간이었다. 어쩌면 다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리스에게 중요한 것은 목숨 따위가 아니었다. 임무를 완수하는 것, 그 하나를 위해서라면 목숨 따위는 웃으면서 버릴 수 있었다. '이로써 페르슈타인 공작 전하께 입은 은혜를 갚게 되는군. 난 믿는다. 비록 내가 죽더라도 공작 전하께서는 내 가족들을 남부럽지 않게 보살펴 주실 테니까.' 모리스는 페르슈타인 공작의 명령 하나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공작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익히 짐작할 만했다. 나직이 각오를 다져가며 모리스는 베르키스가 있는 곳으로 묵묵히 걸음을 내디뎠다. 모리스가 안내된 곳은 깎아지른 듯 서 있는 거대한 벽이었다. 청동으로 된 거인상들이 죽 늘어서 있었고 가운데는 신장이 거의 10미터는 됨직한 거대한 거인상 둘이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통증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에서도 모리스는 주위를 면밀하게 살폈다. '아무래도 가운데의 거인상은 철로 주조된 것 같군. 무슨 용도로 만들어놓은 것일까?.' 묵묵히 주위를 돌아보고 있는데 갑자기 벽 저편에서 굵직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래 날 보겠다는 이유가 뭐지?" 대뜸 질문을 퍼붓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리치들에게 자신에 대한 일을 낱낱이 보고 받은 것 같았다. '잘 되었군. 구태여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으니.' 모리스는 주저 없이 심중의 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드래곤을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추호도 주눅들지 않는 모습이었다. "난 아르카디아에서 왔소. 크로센 제국의 권력자 페르슈타인 공작 전하의 명령을 받잡아 이곳의 지배자인 당신에게 그분의 뜻을 전달하러 온 것이오." 모리스가 거리낌없이 당신이라 칭하자 게덴하이드가 눈을 부라렸다. "이런 발칙한 놈이……." 하지만 벽 저편의 베르키스는 별달리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다. "재미있군. 아르카디아의 인간 따위가 나에게 전할 말이 있다는 것이……. 멍청하게도 네 주인은 네가 순순히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나보군." "날 죽이건 살리건 상관없소. 내 임무는 오로지 당신에게 밀명을 전하는 것뿐이니까……." 드래곤의 소굴에서도 태연히 할 말을 털어놓는 것을 보아 담이 이만 저만 큰 사내가 아니었다. 쉽게 말하면 이런 종류의 임무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만에 하나 적의 손에 붙잡힌다 하더라도 결코 입을 열지 않을 자였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베르키스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내의 주군이 보냈다는 밀명에 관심을 가진 모양이었다. 좋다. 어디 한 번 말을 해 보아라." 모리스는 곧 의중의 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페르슈타인 공작이 드래곤들의 실질적인 통솔자인 베르키스에게 전하는 하나의 제안이었다. "내 주인의 제안은 간단하오. 아르카디아에 와서 한 사람을 죽여달라는 것이오." "뭐라고?" 듣고 있던 베르키스는 기가 차는 것을 느꼈다. 감히 드래곤에게 살인을 청부하는 인간이 있다니? 지금껏 생각조차 해 본적 없던 일이라 베르키스는 떠듬거리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나보고 아르카디아에 와서 고작 인간 하나를 죽여달라는 말이냐." "그렇소.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오. 우리가 청부하는 인간은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강력한 크로센 제국의 황위를 물려받을 황태자이니까……." "………." "페르슈타인 공작님께도 충분히 그를 제거할 능력이 있소. 명령만 내리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기사들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널려 있으니. 하지만 우리는 결코 황태자를 죽일 수 없소. 황태자의 죽음이 결코 우리와 연관되어선 안되기 때문에 이렇게 당신에게 청부하는 거요."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베르키스의 음성에는 노기가 충만히 깃들어있었다. "하찮은, 미천한 인간들의 권력다툼에 감히 드래곤을 끌어들이려 하다니 정말 용서할 수 없군." 그러나 드래곤의 분노 섞인 음성에도 모리스는 추호도 동요하지 않았다. "이것을 단순한 권력다툼으로 보면 곤란하오. 왜냐하면 황태자는 군대를 일으켜 트루베니아를 정벌하려는 마음을 먹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오." "트, 트루베니아를 정벌하겠다고?" "그렇소. 이미 아르카디아는 오백 년 전 멸망한 트루베니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소. 당신들이 결코 쉽게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뜻이지. 황태자는 대대적으로 군대를 동원해 드래곤들을 트루베니아에서 몰아낸 뒤 이곳을 다시 인간의 영역으로 만들려는 뜻을 가진 인물이오. 그러니 당신들에겐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고 봐야 하오." "………." "하지만 페르슈타인 공작전하의 뜻은 그들과 전혀 다르오. 인간은 아르카디아에, 드래곤과 오크는 트루베니아를 영역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뜻이오. 그 때문에 그분은 지금껏 트루베니아와의 전쟁을 반대하고 나섰지. 하지만 그것도 이미 한계에 달한 상황이오. 머지 않아 아르카디아의 병사들이 트루베니아 정벌을 위해 대대적으로 소집될 거요. 페르슈타인 공작전하는 그것을 막기 위해 날 이곳으로 파견하신 것이오." 모리스의 말은 거의 10분 가까이 이어졌다. 그의 말 대부분이 황태자를 암살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서였다. 모든 말을 듣고 난 베르키스는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해할 수가 없군. 페르슈타인이라는 작자 또한 인간 일진데 그런 제안을 해 오다니……." "공작 전하께서는 이것이 서로에게 이득을 주는 윈윈게임(win-win game)이라고 하셨소. 전하께서는 결코 전쟁을 원치 않으시오. 따라서 계약이 성립된다면 우리도 좋고 당신들에게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오. 게다가 공작전하는 그 대가로 상당한 금은보화를 지불할 마음을 먹고 계시오." 말을 마친 모리스는 답을 받아내려는 듯 가슴을 죽 폈다. 마치 할 말을 다했다는 태도였다. 벽 너머의 베르키스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평소의 그였다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모리스를 죽여버렸을 것이다. 수천 년이 넘게 살아온 드래곤에게 인간의 제안은 속이 뻔히 보일 수밖에 없었다. '페르슈타인이란 녀석이 아마도 아르카디아 제국의 황위를 노리나 보군. 드래곤으로 하여금 황태자를 살해하게 한 뒤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인간 특유의 세력다툼 말이야. 정말 생각할수록 가소롭기 그지없군.' 상황을 보아 페르슈타인 공작이란 자는 드래곤의 의도를 잘 모르고 있는 듯 했다. 드래곤들의 계획이 원천적으로 모든 대륙에서 인간이란 종족 자체를 멸종시킨다는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아르카디아의 황제 자리에 누가 오르던가 간에 드래곤에겐 하등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모두가 죽여 없애야 할 존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르키스는 상대의 제안을 묵살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죽이기 전에 눈앞의 인간을 통해 아르카디아의 전력을 어느 정도 가늠해볼 필요가 있었지만 말이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제안인 것 같군. 네 녀석을 심문해서 아르카디아의 전력에 대해서나 알아봐야겠어." 모리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그는 거기에 대한 준비를 하고 온 상태였다. "상관없소. 날 통해 알아낼 것이 그다지 많지 않을 테니. 난 별로 지위가 높지 않은 자요. 때문에 정신마법으로 날 제압한다 하더라도 그다지 쓸모 있는 정보를 알아낼 순 없을 것이오." "………." "만에 하나 살아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난 내 의사와 상관없이 가족과 함께 외딴 시골에 칩거해야 하오. 이것은 공작전하께서 미리 지시해 놓으신 일이지. 정신마법으로 날 현혹시킨다 하더라도 당신에게 정보를 보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뜻이라 생각하시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 따윈 하지 않기를 권유하는 바요."1 베르키스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재미있군. 그것을 알면서도 왔다는 말이냐." "그렇소. 공작전하의 명령은 내 목숨보다 지엄한 것이니까." 말을 마친 모리스는 입을 닫았다. 몸을 갈기갈기 찢는다고 해도 입을 열지 않을 듯한 기세였다. 베르키스는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것까지 감안해서 보냈다고 하면 페르슈타인이란 자는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이처럼 부하들이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게 만드는 것만 보아도 결코 쉽게 볼 수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건방진 인간을 가차없이 소멸시킨 뒤 다시 수면에 빠져드는 것이 가장 합당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베르키스의 머릿속에는 도리어 기발한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잘 되었군. 이 기회를 틈타 아르카디아 인간들의 힘을 가늠해 볼 수 있을지도 몰라.' 만약 며칠 전이었다면 페르슈타인이란 자의 제안을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베르키스의 목적은 오로지 인간의 말살뿐이었으므로.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약간 다르다고 봐야 했다. 그들에겐 데이몬이란 미지의 강력한 적이 생긴 것이다. 벌써 드래곤 둘의 목숨을 앗아간 강적이. 그런 데다 베르키스는 아르카디아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몰랐다. 아르카디아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곳 인간들의 힘을 파악해 낼 필요가 있었다. 뜻하지 않게 잡은 인간들의 세력다툼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그들의 힘을 현저히 약화시킬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오랫동안 인간이란 종족에 대해 연구해왔던 베르키스였기에 인간의 생리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짧은 수명과 약하디 약한 신체에 비해 가진 욕심이 놀라울 정도로 큰 종족이다. 그렇기에 같은 인간을 상대하기 위해 감히 드래곤과 손을 잡을 생각을 품었는지도 모르지만. 베르키스는 꽤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 동안 석벽 저편의 모리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이 들려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드래곤의 대답 여하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옆에서는 게덴하이드가 양손에 마나를 잔뜩 응축시킨 채 처형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르키스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모리스를 소멸시켜버리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베르키스님께서 이 건방진 인간을 살려두실 이유가 없어.' 베르키스를 비롯한 드래곤들의 의도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게덴하이드였기에 내려질 명령에 대해 모종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보나마나 베르키스는 인간을 죽여버리라고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베르키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석벽 너머에서 울려 퍼지는 나지막한 대답에 게덴하이드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좋다. 돌아가서 너의 주인에게 전해라.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의당 죽여버리라는 명령을 내릴 것이라 짐작했지만 게덴하이드는 그만 헛물을 켜고 말았다. 반면 모리스의 무표정한 얼굴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목숨을 걸었던 임무가 바야흐로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격정을 이기지 못했는지 그의 음성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트, 틀림없이 그리 전하겠소." "하지만 시일이 너무 촉박하다. 아무리 궁리해도 그 날짜에 약속을 이행할 수 없을 것 같다. 우리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 말이다." 모리스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때가 아니면 기회를 잡을 수 없소. 황태자는 반드시 많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죽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황태자비 간택식이 벌어지는 순간을 노려야 하오. 그리고 그를 죽이는 존재는 반드시 드래곤이어야 하오. 그래야만 페르슈타인 공작전하께서 근위기사단을 장악할 수 있소." "드래곤들에 대한 분노를 적절히 이용해서 말이냐?" 모리스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래야만 페르슈타인 공작전하께서 트루베니아 침공을 막을 수 있소." 그의 말을 들은 베르키스가 눈빛을 번뜩였다. "만약 페르슈타인이란 작자가 제국을 장악한 다음 또다시 트루베니아 침공을 결심하면 우린 헛품만 파는 셈이 아니냐?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렇지 않소. 공작전하께서는 근위기사단을 장악하는 즉시 아르카디아의 통일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실행하실 것이오. 강력한 군대로 하여금 주변국들을 순차적으로 토벌하여 아르카디아를 하나의 제국으로 만들려는 것이 그분의 계획이오. 그런데 굳이 트루베니아를 침공할 이유가 있겠소?" "………." "트루베니아는 영원히 드래곤들의 영토로 남을 것이오. 원하신다면 문서로 보증해 드릴 수도 있소." 베르키스는 마침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좋다. 하지만 역시 그 날짜는 곤란하다. 네 주인에게 능력이 있다면 시일을 얼마간 연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그러면 언제." "시일을 약속했던 날로부터 일년 뒤로 잡아라. 그 때 반드시 그 황태자 녀석을 처치해 주겠다. 대가는 추후에 요구하도록 하겠다." 베르키스의 말을 듣자 모리스의 얼굴이 확 펴졌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능력을 감안하면 그 정도는 충분히 이행할 수 있었다. 다짐을 받으려는 듯 드래곤의 음성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드래곤들은 약속의 소중함을 알지. 네 녀석의 주인 역시 약속을 지키리라 믿는다." "공작전하께서도 역시 약속의 소중함을 아시는 분이오. 부디 걱정하지 않으시길……." 임무의 성공으로 인한 환희에 차 있는 모리스의 모습. 얼떨떨한 기색으로 서 있는 게덴하이드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그 녀석을 보내주어라. 타고 온 배가 있는 곳까지 정중히 데려가도록……." "아, 알겠습니다." 게덴하이드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모리스를 잡아끌었다. "가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모리스는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끌려나갔다. 두 팔을 잃은 것쯤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통로를 걸어 올라가며 게덴하이드는 거듭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하시려는지 원.' 아무리 생각해도 베르키스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기에 그저 답답하기만 했던 게덴하이드였다. 하지만 석벽 저 편의 베르키스는 무척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 되었군. 이참에 페르슈타인이란 놈을 이용해서 아르카디아 인간들을 적당히 상잔시켜야겠어. 황태자를 처치해버리면 페르슈타인이란 놈이 왕좌를 차지할 것이고, 놈이 아르카디아를 통일시키겠답시고 정복전쟁을 일으킨다면 인간들의 힘은 극도로 약화될 수밖에 없을 터. 그 때를 노려야겠군. 드래곤들이 모두 깨어날 때쯤이면 무리 없이 아르카디아를 도모할 수 있을 테지. 제 꾀에 넘어가 멸종을 자초하는 인간들이 우습기 그지없군. 후후후." 못 참겠다는 듯한 비웃음소리가 베르키스의 거처에서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14회. "이건 아닌데……." 데이몬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뭔가 예상이 빗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주위는 마치 폭풍이 할퀴고 지나간 듯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전신이 걸레가 된 용병들이 부서진 무기와 함께 이리저리 나자빠져 있었고 신음소리가 계속 터져 나왔다. "크으으." "제길 어디 한 군데 단단히 부러진 것 같아. 으윽." 용병들이 널브러져 있는 한 가운데에는 누군가가 배틀 엑스를 꼬나쥔 채 철탑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머리통이 없는 언데드인 듀라한 윈슬럿이었다. 상황을 보아 용병들을 때려눕힌 장본인은 바로 그 녀석인 것 같았다. 주인의 명령을 완수한 것이 기쁘다는 듯 윈슬럿은 가슴을 두드리며 거세게 기성을 내질렀다. "크아아아." 참다 못한 데이몬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시끄러워. 이 녀석아. 대련상대로 네놈을 불러낸 것인데 완전히 박살을 내놓으면 어떻게 하란 말이냐?" 데이몬의 호통에 찔끔한 윈슬럿이 슬며시 배틀 엑스를 쥔 손을 내렸다. 주인의 반응이 낯선 듯 눈알을 데룩데룩 굴리는 모습이 여간 우습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데이몬은 혀를 끌끌 찼다. "하긴 네 녀석에게 많은 것을 기대 했던 내가 바보지." 어이가 없었는지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율리아나와 미첼이 널브러진 용병들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 벌어진 윈슬럿의 무자비한 린치로 인한 충격이 아직까지 가시지 않은 눈빛이었다. 용병들의 신음소리는 그칠 새 없이 흘러나왔다. "역시 언데드는 언데드야." "사람을 어떻게 저토록 참혹하게 두들겨 팰 수가 있지?"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둘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흘겨본 데이몬은 말없이 힐링 마법을 캐스팅했다. 일단 이들을 치료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윈슬럿을 상대하는 것은 아직까지 이들에겐 무리로군." 힐링을 캐스팅하며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용병들이 마나연공법의 기틀을 어느 정도 잡은 것을 확인하자 데이몬은 그들의 검술실력을 단련시켜주려는 마음을 먹었다. 비록 그들이 천고의 내공심법인 수라사령심법을 익혔지만 초식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한때 절세 고수였던 데이몬의 안목으로 보면 용병들의 검술실력은 정말 형편없었다. 대장인 카심의 실력이 용병들 중에서는 가장 나았지만 그나마도 오십보 백보였다. 데이몬의 눈에는 전혀 차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상태론 카심이 전력을 다해봐야 오우거 한 마리 잡을 수 없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다. 물론 수라사령심법을 대성한 경우라면 결과가 다르긴 하겠지만. 데이몬에겐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단련시켜야 하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있었다. 일단 동료로 삼은 이상 그에 걸맞게 실력을 키워줘야 했다. 그 방법의 일환으로 데이몬은 오래 전부터 윈슬럿과의 결투를 계획했다. "검술실력을 늘이기 위해서는 목숨을 건 싸움을 거듭해서 실전경험과 싸우는 요령을 터득해야 한다." 사파고수 출신답게 데이몬은 무예 수련에 대해 지극히 단순한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고수에게 처참히 얻어터지며 대련을 거듭하다 보면 싸우는 기술이 저절로 몸에 밴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초식의 정교함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변칙적이고 효율적인 철저한 실전무예가 그가 추구하는 무도였으니까. 게다가 데이몬은 적절한 대련상대를 구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에겐 충분히 고수라 볼 수 있는 윈슬럿이 있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은 곧 계획의 실행에 나섰다. "예전에 얘기했던 대로 윈슬럿과 대련하며 검술 실력을 늘이는 것이 어떤가?" 데이몬이 의중을 털어놓자 용병들은 두말할 것도 없다는 듯 찬성하고 나섰다. "좋습니다."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하네. 결코 사정 봐줄 녀석이 아니니 말일세." "죽지만 않는다면 괜찮습니다." 그리하여 용병들과 윈슬럿의 격투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실력차이를 고려해서 데이몬은 1대 7의 격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말 허망했다. 카심 용병단의 완벽한 패배. 용병 일곱 명이 눈 깜짝할 사이에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불과 10분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도 대장답게 카심이 가장 오래 버텼지만 그도 결국 전신이 떡이 되어 쓰러지는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용병들 모두가 덤벼도 윈슬럿의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즐비하게 늘어진 용병들을 보며 데이몬은 뭔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사(戰士)로써는 더할 나위 없는 윈슬럿이었지만 검술교관으로는 전혀 맞지 않았다. 이유는 윈슬럿에게 사고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은 혀를 끌끌 차며 되뇌였다. "이렇게 실력차이가 나는 줄 몰랐어. 윈슬럿에게 지성이 있다면 어느 정도 사정을 봐 주며 대련을 했겠지만 말이야. 애석하게도 멍청한 듀라한에게 그것까지 기대할 수 없지." 듀라한은 전투력이 뛰어난 반면 사고능력은 거기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적을 쓰러뜨리라고 지시하면 그저 맹목적으로 명령을 수행할 뿐이다. 데이몬이 내릴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하나, 적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뿐이었다. 그 때문에 윈슬럿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용병들을 공격했고 그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쓰러져야 했다. 윈슬럿은 일체 사정을 봐 주지 않았다. 윈슬럿이 용병들을 쓰러뜨린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괴력을 적절히 이용한 공격으로 무기를 단숨에 날려버린 윈슬럿은 용병들의 급소를 인정사정 없이 가격해 단숨에 무력화시켰다. 한 마디로 용병들에겐 저항할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교관으로는 완전히 낙제점이로군." 캐스팅을 마친 데이몬은 용병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힐링을 펼쳐 주었다. 신음소리가 잦아들며 용병들은 비틀거리며 하나 둘씩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카심이 질린 듯한 표정으로 윈슬럿을 쳐다보았다. "정말 끔찍할 정도로 강하군요. 어떻게 당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과연 대륙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은 살인용병답군요." 하나같이 치가 떨린다는 얼굴이었다. 대련이라서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은 면도 없잖아 있었지만 윈슬럿의 단순하고 무식한 공격에는 도저히 감당할 도리가 없었다. 아니 윈슬럿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고 해도 그들이 감당하기 힘든 상대였다. 카심이 겁먹은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윈슬럿과 또다시 싸워야 합니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용병들이 진저리를 치는 것을 보니 겁을 단단히 먹은 모양이었다. 치료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데이몬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닐세. 자네들에게 어느 정도 실력이 붙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군."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얼른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카심도 겁을 나는 모양이었다. 한심하다는 듯 그를 한 번 쳐다본 데이몬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어떻게 해서 이 녀석들을 단련시킨다? 이 상태론 수라사령심법을 대성한다 해도 뚜렷한 성과를 기대하기 힘들어.' 사실 아무리 위력이 뛰어난 내공심법을 익혔다 해도 그에 걸맞는 기본기가 없으면 말짱 헛수고였다. 검술에서 기본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고금을 통틀어 정해진 진리였다. 문제는 데이몬에게 용병들의 기본기를 단련시킬 뚜렷한 방법이 없다는데 있었다. "그렇다고 데스 나이트들에게 부탁할 수도 없고……." 그가 보유한 데스 나이트들은 과거 트루베니아에서 제일가는 절대자들이었다. 그런 자부심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지독히도 데이몬의 말을 듣지 않는 놈들이다. 그런 녀석들이 마나도 운용할 줄 모르는 용병들의 대련상대가 되어 줄 리가 만무했다. 그것은 용병들이 마나를 다스릴 수 있게 되고 또한 일대 일로 윈슬럿을 상대할 수 있을 때에야 생각해 볼 수 있는 방법이었다. 데이몬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이봐요." 고개를 돌리자 율리아나의 새침한 얼굴이 들어왔다. 데이몬이 짐짓 인상을 썼다. "이봐요가 뭐야? 아저씨라 부르라고 했잖아?" 율리아나는 정신 나갔느냐는 듯 눈을 부라렸다. "미쳤어요? 난 분명히 약속대로 10번을 마쳤어요. 그런데 왜 그 짓을 또다시 해야 하죠? 생각만 해도 닭살이 돋는데……." "흠흠. 그거야 뭐……." 헛기침을 하며 떠듬거리는 데이몬을 보며 율리아나가 눈빛을 빛냈다. "상황을 보니 저 듀라한이 검술교관을 맡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을 것 같군요." 데이몬은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글세 말이야. 그렇다고 다 만들어진 듀라한에게 지성을 부여할 도리가 없으니……." "방법은 있어요." "뭐라고?"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에게 난국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니……. 율리아나는 슬며시 웃으며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미첼이 있잖아요. 비록 듀라한보다는 못하겠지만 그에겐 충분히 용병들을 교육시킬 실력이 있어요. 제 생각으로 듀라한보다는 훨씬 잘 가르칠 것 같은데……." 데이몬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미첼을 쳐다보았다. "저놈이 과연 하려고 할까?"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지만 데이몬의 생각으로 미첼은 결코 그럴 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자신은 물론이었고, 용병들과의 관계도 전혀 평탄하지 않으니 말이다. 물론 실력만은 데이몬도 능히 인정하는 바였다. 기본기를 무척 탄탄히 닦은 녀석이므로 어떤 면에선 교관을 맡기에 가장 적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검술이란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가르칠 수 없는 법.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데이몬을 보며 율리아나가 방긋 웃었다. "멍청하긴. 머리를 써야죠." "응? 머리?" 율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미첼은 무척 계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으니 미첼의 성격을 나만큼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걸요? 미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반대급부예요. 다시 말해 뭔가 대가를 약속하기만 하면 그는 분명히 용병들을 가르치겠다고 나설 거예요." "대가?" "그래요. 그가 지금 제일 원하는 것은 검과 갑옷이에요. 물론 대마법 방어갑옷이면 금상첨화겠죠? 당신에겐 엄청난 돈이 있으니 구하는데는 문제가 없을 터. 그러니 대마법 갑옷을 조건으로 그를 한 번 회유해 봐요." "그럴까?" 데이몬은 율리아나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마법 갑옷 정도야 데이몬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살 필요조차 없었다. 인크레시아 속에 널려 있는 것이 대마법 갑옷이었고 그것도 최고 상등품뿐이었다. 그 갑옷 중 하나를 건네주고 대신 용병들에게 검술을 가르치게 한다면 결코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옆에서 율리아나가 주의를 주었다. "보기엔 저래도 미첼은 상당히 눈이 높은 편이에요. 그러니 쓸만한 물건으로 회유하는 것이 효과가 클 거예요." "크크크. 그건 걱정하지 마. 놈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물건을 꺼내놓을 테니." 데이몬은 음침한 괴소를 흘리며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이미 그는 적절한 갑옷 하나를 염두에 둔 상태였다. '환상의 갑옷을 주면 적격이겠군. 어차피 오리하르콘이 포함되어 있어서 데스 나이트들이 걸치지 못하니 말이야.' 환상의 갑옷. 드래곤 로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대마법 갑옷이다. 그런 만큼 시장에 나온다면 갑옷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러나 환상의 갑옷은 데이몬에겐 애당초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표면에 상감된 오리하르콘 때문에 데스 나이트들이 전혀 착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데이몬은 원래 그것을 카심에게 주려고 마음먹었다. 물론 그가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룰 능력을 얻은 후에 말이다. 그러나 덩치가 당당한 카심에게 환상의 갑옷은 한 눈에 보기에도 맞지 않았다. 드래곤 로드 크라누스가 환상의 갑옷을 만든 이유는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를 할 때 사용하기 위해서였으며 드래곤들은 보편적으로 호리호리한 체격의 미남 검사나 마법사의 모습을 하고 다니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그런 체격에 맞춰 만든 환상의 갑옷을 근육질의 카심에게 입힐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연찮게 환상의 갑옷을 쓸 수 있는 방도가 생겼으니……. '어차피 팔아서 돈으로 바꿀 만큼 금전적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니…….' 데이몬은 묵묵히 환상의 갑옷이 보관되어 있는 좌표를 머리 속으로 떠올렸다. 인크레시아의 보물들은 대부분 데이몬에게 좌표가 파악되어 있었다. 데스 나이트들이 불철주야 고생한 끝에 이루어낸 성과였다. 쓰쓰쓰쓰. 인크레시아의 표면이 물결치듯 움직이더니 곧 무언가를 뱉어냈다. 한 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게 보이는 갑주 한 벌이 나무 인형에 착용된 채 모습을 드러냈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15회. 그것이 바로 환상의 갑옷이었다. 드래곤 로드가 만들어낸 회심의 역작으로 전체가 미스릴과 오리하르콘, 버너디움 등의 비싸기 짝이 없는 금속으로 이루어진 풀 플레이트 메일 말이다. 환상의 갑옷은 미스릴 특유의 순백색 광채가 감도는 매우 아름다운 갑옷이었다. 몇 백 년 전에 만들어진 만큼 고전적인 트루베니아의 형식을 따르고 있었지만 철저히 실용성만을 추구한 아르카디아의 갑옷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우아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게다가 표면의 마법진에 상감된 오리하르콘의 은은한 황금빛은 갑옷의 풍모를 단연 돋보이게 해 주고 있었다. 환상의 갑옷은 건틀릿 부분만 제외하면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갑옷의 모습에 반했는지 보고 있던 율리아나가 짧게 탄성을 내질렀다. "우와. 정말 멋진 갑옷인걸요?"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지. 이놈은 전체가 미스릴로 되어 있거든. 게다가 마법진을 드래곤이 직접 그려 넣었고 채워 넣은 원료가 오리하르콘이야. 따라서 마법을 방어하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율리아나는 입을 딱 벌렸다. 미스릴과 오리하르콘이 엄청나게 비싼 금속이라는 사실은 그녀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옷 전체가 미스릴로 되어 있다니 얼마나 비쌀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어, 엄청나게 비싸겠군요. 그런데 미첼에게 이걸 주려고요?" "그럼. 내가 원래 쓸 때는 화끈하게 쓰는 성격이거든. 이 정도라면 미첼이란 녀석이 두말없이 용병들을 지도해 주겠지?" 율리아나는 정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예요. 내가 봐도 멋진데 미첼이 직접 본다면……. 그런데 왜 건틀릿 부분이 없죠?" "팔아먹었어." 짧게 일축한 데이몬은 미첼에게 손짓을 했다. 때마침 미첼도 데이몬을 쳐다보고 있었다. 손짓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미첼은 느릿하게 데이몬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왔다. "날 불렀소?" 건들거리는 미첼의 태도에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데이몬은 꾹 눌러 참았다. 지금 상황에서 아쉬운 것은 자신이었다. "부탁이 있네."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 미첼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대충 짐작하고 있었소. 아마도 용병들이 듀라한을 대적할 수 있을 때까지 검술을 지도해 달라. 대충 이런 것 아니오?" "그, 그렇지." 떠듬떠듬 대답하는 데이몬을 흘려보며 미첼의 고개가 슬그머니 환상의 갑옷으로 향했다. 갑옷을 보는 순간 그의 얼굴엔 놀란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아니?" 환상의 갑옷이 주는 매력은 그 정도로 강렬했다. 그는 지금까지 이렇게 화려하고 우아한 갑옷을 본 적이 없었다. 정신 없이 갑옷을 들여다보던 미첼의 눈동자에 갈등이 서렸다. 마침내 결정을 내렸는지 그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후. 이것이 용병들을 지도하는 대가로 준비한 것이오?" "그렇다네. 어떤가? 쓸만하지 않은가? 이 갑옷은 드래곤이 만든 것이야. 전체가 미스릴로 되어 있지." 갑옷에 대한 설명이 주절주절 흘러나왔지만 미첼은 별달리 귀담아듣지 않는 눈치였다. 옆에 있던 율리아나조차 미첼의 반응에 얼떨떨해 해 할 정도였다. 데이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갑옷이 별로 탐나지 않나 보군." 놀랍게도 미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가 바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오." 이번에는 율리아나가 놀랄 차례였다. "미, 미첼 이런 갑옷은 돈주고도 살 수 없는 보물이야. 넌 평소 대마법 갑옷을 갖기를 절실히 갈망해 왔잖아. 그런데 이런 훌륭한 기회를 왜?" "마음이 바뀌었어." 짧게 대답한 미첼은 데이몬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솔직히 갑옷이 탐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따로 있소. 그것을 들어준다면 내 성심껏 용병들을 지도해 주리다. 듀라한을 상대할 수 있을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말이오." 데이몬은 눈매를 지긋이 모았다. 미첼이 설마 다른 조건을 내걸 줄은 꿈에도 몰랐다. 환상의 갑옷이 지닌 매력은 기사라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그런데 환상의 갑옷이 눈에 차지 않다니…… 사실 검술실력 하나만을 본다면 미첼의 실력은 윈슬럿에 비해 결코 약하지 않았다. 체력만 받쳐준다면 윈슬럿과 꼬박 하루를 싸워도 밀리지 않는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다. 때문에 그가 지도해 준다면 용병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여전히 욕심이 목구멍까지 차 있는 녀석이로군.' 마음을 정리한 데이몬은 자신을 쏘아보는 미첼의 시선을 조용히 맞받았다. "그래 대가로 무얼 원하지?" 미첼의 대답은 정말 뜻밖이었다. "나는 데스 나이트와의 대련을 원하오." "뭐, 뭐라고?"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미첼이 설마 그런 조건을 내걸 것이라곤 전혀 상상하지 않았다. 그저 갑옷과 함께 질 좋은 장검이나 한 자루 요구하려니 생각했는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버렸던 것이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해서 데이몬은 다시 한 번 반문했다. "데스 나이트와 대련을 하고 싶다는 말인가?" "그렇소. 일전에 내가 듣기로는 그들이 과거 트루베니아에서 제일가는 기사들이라고 했소. 그 사실이 틀림없소?" "그, 그렇긴 하지만. 네 실력으로는 무리일텐데?" 미첼의 눈동자는 모종의 열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데이몬에겐 무척 익숙한 눈빛이었다. "상관없소. 상대가 되지 않을지언정 강자와 검을 섞을 수 있다는 것은 검사의 길을 걷는 자에겐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오.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아무리 좋은 갑옷이라 해도 눈에 들어올 턱이 없지. 나는 데스 나이트와 싸우고 싶소. 정확히 말해 과거 트루베니아 제일의 기사들이었던 자들과 싸워보고 싶다는 뜻이오. 어떻소? 내 부탁을 들어주시겠소?" 데이몬은 얼떨떨한 기색으로 미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미첼의 눈빛은 순수하게 무를 추구하는 무도자의 것이 틀림없었다. 한때 무인이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어렵지 않게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미첼에 대해 느꼈던 선입견이 바야흐로 송두리째 바뀌는 순간이었다. 데이몬은 암암리에 혀를 내둘렀다. '놀랍군 출세만을 노리는 기회주의자로 평가했는데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미첼에게서 눈빛을 거둔 데이몬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갑옷을 갖지 못하게 되어도 후회는 없겠지." "물론이오. 이따금 내가 부탁할 때 데스 나이트를 불러준다면 그것으로 족하겠소."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을 수락하지. 하지만 갑옷은 자네가 가지게. 변변찮은 갑옷 없이 데스 나이트와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아니 그것까지는 바라지 않소." 데이몬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갑옷 없이 싸운다는 것은 내 데스 나이트들에 대한 모욕으로 볼 수 있어. 흠 그러고 보니 쓸만한 검도 한 자루 필요하겠군. 싸구려 검으론 데스 나이트들이 걸친 갑옷에 흠집도 내지 못할 테니……." 말을 마친 데이몬은 아직까지 열려 있는 인크레시아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이봐. 거기 누구 없어?" 조금 뒤 인크레시아 속에서 걸쭉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야?" "거기 헬버트론 좀 밖으로 나오라고 그래. 쓸만한 장검 한 자루 가지고 말이야." "알았어." 조금 뒤 데스 나이트 하나가 용병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헬버트론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몸은 상처 하나 없이 완전한 상태를 하고 있었다. 며칠 전 데이몬이 어둠의 마력을 아낌없이 제공해서 복원시켜 주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인크레시아 속에 널린 것이 무구였으므로 헬버트론은 중장갑주 한 벌을 새로 차려입은 상태였다. 새 갑옷은 데스 나이트의 몸에 배어있는 마력의 간섭을 받아 소름끼칠 정도의 칠흑색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여전히 르헤르트 세이버가 예기를 빛내고 있었고 왼손에는 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미첼은 눈을 빛냈다. 그의 가슴속에는 순수한 승부욕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광망을 빛내며 주위를 돌아보던 헬버트론은 음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왜 날 불렀지?" "시킬 일이 있어서……." 짧게 대답한 데이몬은 손가락을 뻗어 미첼을 가리켰다. "저 녀석과 한 번 싸워줬으면 해. 아르카디아 기사의 자존심을 걸고 너와 한 번 싸워 보겠다는군." 헬버트론의 고개가 느릿하게 미첼에게로 향했다. 소름끼치는 안광이 집중되자 미첼은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데스 나이트의 안광은 그 정도로 강렬했다. 미첼을 잠시 관찰한 헬버트론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애송이로군. 제법 기본기가 탄탄하긴 하지만 아직까지 내 적수가 못돼." 그 말을 들은 미첼은 반사적으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당신의 적수가 못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나는 진정으로 당신과 싸워보고 싶소." "………." "한 수 가르쳐 주시오. 검의 길을 함께 걷는 무인으로써 부디 내 마음을 헤아려주길 바라겠소." 헬버트론의 눈에는 의외라는 듯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얼마 전 용병으로 변장해서 대했던 미첼과는 전혀 딴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의 초라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미첼의 전신에서는 무의 길을 걷는 무도자의 풍모가 역력히 배어 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 헬버트론은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보다는 마음가짐이 출중한 녀석이로군. 그 정도라면 충분히 나와 싸울 자격이 있지. 좋아. 이 검을 받아라." 말을 마친 헬버트론은 가지고 나온 여분의 장검을 미첼에게 던졌다. 생각 없이 검을 받아든 미첼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이, 이 검은?" 그 역시 기사였으므로 미첼에게 검을 보는 안목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 데스 나이트가 던진 검은 한 눈에 보아도 평범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드래곤의 머리 형상으로 만들어진 검병(검의 손잡이)에서부터 고아한 느낌을 주는 검집의 조각까지. 이것은 결코 범상한 검이 아니었다. 미첼은 자신도 모르게 검을 뽑았다. 스릉. 가벼운 금속음과 함께 뽑혀진 검은 눈부신 예기를 줄기줄기 발했다. 시릴 정도의 푸른빛이 미첼의 눈을 자극했다. 게다가 손에서 전해지는 가벼운 무게감은 이 검이 결코 철 따위의 흔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려주었다. 넋이 빠진 듯 검을 쓸어보는 미첼의 귀로 무감각한 헬버트론의 음성이 전해졌다. "블루 드래곤의 비늘을 마법의 불꽃으로 녹여 만든 검이다. 오리하르콘 코팅이 되어 있어서 언데드를 상대할 때 특히 효과적이지. 그 정도라면 날 상대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미첼은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뭔가를 갈구하는 듯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이 검을 준다는 뜻이오?"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더불어 저 갑옷까지 너에게 준다. 데스 나이트를 상대하려면 서둘러 착용하도록." "정말 고맙소." 형언할 수 없는 눈빛으로 데이몬을 응시한 미첼은 주섬주섬 갑옷을 차려입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환상의 갑옷은 미첼의 몸에 딱 맞았다. 형태가 달라서 입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갑옷 입는데 익숙한 미첼에게 그리 어렵진 않았다. 마지막으로 투구를 눌러쓰자 미첼의 모습은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 마치 천상의 기사와도 같은 풍모로 변모한 채 서 있었던 것이다. 지옥의 전사라고 표현할 수 있는 헬버트론과 더없이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미스릴의 순백색과 오리하르콘의 황금빛이 미첼의 준수한 얼굴과 어우러져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16회. 미첼은 말없이 얼굴가리개를 눌러쓰며 갑옷과 한 벌인 방패를 들어 앞을 가렸다. 방패 역시 두께에 비해 무게가 가벼운 것을 보니 드래곤 본 재질인 것 같았다. "준비가 모두 끝났소." "그럼 어디 아르카디아 기사의 실력을 한 번 볼까?" 말을 마친 헬버트론은 검을 뽑아들었다. 르헤르트 세이버에서 뿜어내는 예기가 미첼의 눈을 날카롭게 자극했다. 미첼은 바짝 긴장한 채 새로 얻은 장검을 꼭 쥐었다. "먼저 공격하겠소. 하아앗." 미첼의 장검이 대기를 사정없이 가르며 헬버트론의 목으로 뻗어갔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단련된 검술실력이 유감 없이 발휘된 일격이었다. 상대가 피할 수 있는 방위를 모조리 사정거리에 둔 채 가해지는 찌르기. 막지 않는 이상 피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과거 트루베니아에서 제일가는 검사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헬버트론은 간단한 몸놀림으로 미첼의 일격을 피해냈다. "제법 쓸만한 공격이로군. 하지만 초식이 너무 단조로워." "얕보지 마시오. 아직까지 밑천을 드러낸 것이 아니니까." 미첼의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치고 찌르는 기본 공격에서부터 후리고 지르는 변칙공격까지 수많은 검격이 헬버트론에게 퍼부어졌다. 아버지로부터 배운 기술을 모조리 쏟아 붇고 있는 것이다. 미첼의 실력을 가늠해 보려는 듯 헬버트론은 반격하지 않는 상태로 방어에만 주력하고 있었다. 극히 제한적인 몸놀림으로 가해지는 공격을 슬쩍슬쩍 피하다가 간간이 방패 모서리로 미첼의 검격을 막아내는 모습. 회피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최소한의 동작으로 공격을 피해내는 모습은 헬버트론이 어째서 과거 트루베니아의 절대자로 불렸는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상대가 피하던 말던 미첼은 계속해서 공격을 해 나갔다. 지칠 때까지 끊임없이 말이다. "헉헉." 공격에 몰두하던 미첼의 숨결이 급격히 거칠어지자 헬버트론은 뒤로 슬쩍 물러났다. "이쯤에서 잠깐 멈추지."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공방을 멈췄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미첼은 헬버트론에게 기대 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것은 실력 있는 기사에게 자신의 실력을 검증 받으려는 수련기사의 눈빛과 다름없었다. "어, 어땠습니까?" 헬버트론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괜찮은 공격이었다. 사라미스 녀석의 말대로 아르카디아의 검술은 화려하면서도 충분히 위력적으로 변했어. 변칙공격이 다양한데다 트루베니아의 검술교본엔 없는 검로가 무척 많이 추가된 것을 보니 500년 동안 엄청난 발전이 있었군. 한 마디로 네 검법은 초식 면에서는 트루베니아의 검술보다 한 수 위라고 볼 수 있다." "그, 그렇습니까?" 미첼의 얼굴에는 득의한 빛이 번뜩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헬버트론의 말은 그의 자부심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있었다. "애석한 것은 너의 숙련도가 많이 뒤떨어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초식이 훌륭하더라도 숙련도가 뒤떨어진다면 제 위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게다가 넌 실전경험이 너무 미천하다. 때문에 검술의 위력이 반에 반도 발휘되지 않았어." "………." "검술대결이 초식만으로 판가름되는 것은 아니다. 숙련도와 실전경험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 변초와 거기서 파생되는 검로가 아무리 다양하다 해도 기본기는 결코 변하지 않는 법. 비교적 위력이 떨어지는 초식을 사용한다 해도 숙련도가 높으면 능히 그 약점을 극복할 수 있다." "………." "뭐라 그럴까? 아르카디아의 검술은 조금 가벼운 면이 있다. 물론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할 수 있는 자가 늘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넌 아직까지 애송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어." 이어지는 헬버트론의 혹평에 슬며시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미첼이었다. 그것을 간파한 헬버트론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제부터 내가 공격을 시도하겠다. 어디 한 번 막아보아라." 잠시 쉰 덕에 기력을 되찾은 미첼이 바짝 긴장하며 방패를 끌어당겼다. 미첼이 자세를 잡자 헬버트론이 가차없이 달려들었다. 파파파팟. 르헤르트 세이버가 대기를 가르며 미첼의 몸을 쪼개어갔다. 가해지는 풍압에 몸이 부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물론 대련이라서 오러 블레이드가 깃들어있진 않았지만 허용한다면 치명상을 입을 것이 틀림없었다. 미첼은 잔뜩 힘을 주어 검이 날아오는 경로에 방패를 가져다 댔다. 상대의 검에 실린 힘을 효과적으로 분산시킬 각도로 말이다. 하지만. 쾅. "크윽." 불가항력이라 볼 수 있는 힘의 집중에 미첼은 그만 방패를 놓치고 말았다. 무슨 까닭인지 검에 실린 힘을 전혀 흘려보내지 못한 것이다. 깜짝 놀란 미첼은 다급히 검을 곧추세워 방어자세를 취하려 했다. 그러나 상대의 장검은 어느덧 미첼의 투구와 흉갑이 이어지는 부분을 겨누고 있었다. 미첼은 검이 날아오는 기미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이, 이럴 수가?" 허무한 패배를 믿을 수 없어하는 미첼의 귀로 냉혹한 헬버트론의 음성이 들려왔다. "방패의 경사면을 이용해 힘을 분산시키려는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적의 검이 항상 예정된 방향으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라. 나는 공격도중에 검로를 네 방어의 가장 취약한 부분으로 바꾸었다." "하, 하지만 그런 짧은 순간에 어떻게……." "그러니까 숙련도와 실전경험이 소중한 것이다. 이것은 결코 검술교본으로 익힐 수 없는 것이므로 실전을 통해 철저히 몸으로 익혀야 한다. 상대의 허점을 간파하는 것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납득하는 미첼을 보며 헬버트론은 슬며시 검을 거뒀다. "네 두 번째 단점은 방패를 전혀 활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방패는 엄연히 따지면 공격수단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방어와 동시에 반격을 가할 수 있는 훌륭한 무기지. 하지만 넌 방패를 단순한 방어도구로만 생각하고 있다." "………." 헬버트론은 묵묵히 자세를 취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공격을 하겠다. 방패를 집어라. 부디 나와의 대련에서 많은 것을 얻기 바란다." 미첼은 다급히 뛰어가서 방패를 집어들었다. "준비되었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헬버트론의 몸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미첼은 지금껏 익힌 모든 기술을 동원해 방어자세를 취했다. 상대의 공격을 차단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방어자세를 취한 미첼은 온 신경을 곤두세워 헬버트론의 공격에 대비했다. 푸캉. 십자(十)로 가로지르며 두드리는 헬버트론의 공격에 미첼의 방패가 맹렬히 진동했다. 요행히도 방패를 놓치지 않았지만 진동으로 손이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서둘러 균형을 잡은 미첼은 사력을 다해 반격을 가했다. 물론 제대로 된 반격이 아닌 무턱대고 상대의 방패를 가격하는 형국이 되었지만 말이다. 챙. 헬버트론은 방패 상단의 모서리를 이용해 미첼의 공격을 가볍게 가로막았다. 그 상태에서 그는 방패를 죽 훑어 내리며 강하게 비틀었다. 그러자 오각형 방패의 모서리가 미첼의 검 손잡이의 아랫부분을 정통으로 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검을 잡은 미첼의 자세가 여지없이 무너져버렸고 뒤이어 둔탁한 타격음과 신음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퍽. "크윽." 육중한 방패가 검 손잡이를 쳤으니 충격이 보통이 아니었고 자세를 잡기 위해 팔을 드는 순간 방패 모서리가 정통으로 미첼의 겨드랑이로 파고들었다. 물론 그곳은 갑옷이 보호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통증이 보통이 아니라서 미첼은 몸을 웅크린 채 끙끙 앓아야 했다. 무표정한 눈빛으로 미첼을 내려다보던 헬버트론이 묵묵히 검을 검집에 꽃아 넣었다. "오늘 대련은 여기까지다. 방패 공격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실감했겠지? 다음 대련 때까지 방패 활용도와 기본기에 대해 심사숙고하기 바란다. 나아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경우 너와의 대련은 없는 일로 할 테니까……." 미첼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진심으로 감복한 듯한 모습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헬버트론은 묵묵히 인크레시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데이몬의 앞으로 걸어간 헬버트론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물론 데이몬에게만 들릴 정도의 음성이었다. "제법 쓸 만한 녀석이군. 충분히 가르쳐 볼 만한 가능성이 있어." 데이몬은 입을 삐쭉였다. "데스 나이트가 인간 제자를 두게 되어 좋겠군. 누가 볼 지도 모르니까 빨리 들어가." "그러지." 헬버트론이 들어간 뒤 데이몬은 윈슬럿마저 인크레시아 속으로 구겨 넣었다. "쓸모 없는 녀석. 어서 들어가지 못해." 인크레시아를 닫은 데이몬은 아직까지 통증으로 얼굴을 구기고 있는 미첼에게로 다가갔다. "소원대로 데스 나이트와 싸우게 해 줬으니 약속은 틀림없이 지키겠지?" 미첼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툴툴대던 말투는 이제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매일 한 사람에 한 시간씩 직접 검술지도를 하겠습니다. 성심성의껏 가르칠 테니 대신 제가 요구할 때마다 데스 나이트를 불러 주십시오." "걱정하지 마라. 싸울 녀석이 넷이나 있으니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 미첼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갑옷과 검을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미첼의 변한 태도가 다소 쑥스러웠는지 데이몬은 코웃음을 쳤다. "큼! 그 녀석 인사성 하나는 밝군. 네 녀석에겐 조금도 어울리지 않으니 평소 하던 대로 해." 미첼을 비롯한 용병들은 결국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뒤 식사를 마친 용병들은 한데 둘러앉았다. 미첼으로부터 검술교습을 받기 위해서였다.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은 전장에서 뒹굴던 직업 군인 출신이다. 그런 만큼 검술에 대한 조예가 없을 수는 없었다. 특히 카심은 거의 미첼에 필적할 정도의 실전무예를 보유한 검사였다. 하지만 카심은 지금 그런 것을 깡그리 잊어버린 상태로 마치 검술을 처음 배우는 학생처럼 미첼 앞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도 기본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용병이란 직업의 특성상 카심이 익힌 검술은 난전이나 집단전에 극히 적합한 검술이다. 정면대결보다는 변칙공격이나 상대의 실수를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데 주안점을 두는 검술인 셈이다. 기형검의 일종인 소드 브레이커를 쓰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기본적인 검술실력이 뒤지는 탓에 상대에게 익숙지 않는 기형 무기를 사용해서 조금이나마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실전 무예에는 크나큰 단점이 있었다. 하수나 엇비슷한 실력의 검사를 상대로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며 실력이 조금 뛰어난 고수에게도 어지간하면 밀리지 않는 것이 실전무예의 특징이었다. 검로 자체가 파격적이며 뚜렷하게 정형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뛰어난 실력자를 만날 경우였다. 기본기가 탄탄한 기사를 상대할 경우를 가정하면 카심이 익힌 실전무예는 크나큰 허점을 드러내게 된다. 쉽게 말하면 실전무예가 지닌 자체적인 한계에 봉착하는 것이다. 실전 무예는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에게 거의 통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미 카심은 그런 경우를 여러 번 경험했다. 10년 이상 용병 생활을 하며 카심은 자신만의 검술을 구축한 실력 있는 용병들을 무수히 만나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전투에서 허망하리만큼 허무하게 패하는 것도 목격해야 했다. 그들의 상대는 십중팔구 기사들이었고 용병들은 몇 번 검을 나눠보지도 못한 채 최후를 맞이했다. 전장에서 오래 살려면 기사와 마주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용병들에겐 정설로 내려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용병단에서 비싼 봉급을 지불해가며 기사단에서 쫓겨난 기사들을 영입하려는 경향도 생겨났다. 하지만 대상이 기사라면 이야기가 틀려진다. 기본기가 탄탄한 기사는 어지간히 강한 상대와 맞서더라도 쉽게 무릎을 꿇지 않는다. 실전무예를 익힌 용병과는 달리 어느 정도까지는 버틸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바로 기본기가 가진 위력이었다. 쉽게 말해 제대로 된 저항이라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카심은 미첼에게서 기본기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17회 검술의 이론에 대해 강의를 시작하려는 미첼을 쳐다보며 카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펜슬럿의 근위기사였다면 기본기 하나는 확실하겠군.' 카심은 미첼의 검술실력을 추호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것은 그가 윈슬럿과 장장 30분간의 혈투를 벌일 때 확신할 수 있었다. 카심은 윈슬럿의 배틀 액스 아래 단 십 초도 버티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카심은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무릅쓰면서까지 미첼에게 기본기를 배우려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 미첼의 설명을 빠짐없이 머리 속에 새겨 넣고 있었다. "제가 설명하려는 검술은 펜슬럿의 근위기사들이 익히는 검술입니다. 크로센 제국의 것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위력이 있는 검술이죠. 이 검술은 제 아버지이신 헤일즈에게서 전수받았습니다. 모든 기술을 가르쳐 드릴 수 없으니 그 중에서 줄기가 되는 기초 공격과 방어기술에 대해서만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대련은 그 뒤에 하겠습니다." 미첼의 설명이 이어졌고 용병들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설명을 경청했다. 검술에 관심이 없는 탓에 율리아나는 따분하다는 듯 연신 하품을 해 대다가 자기 천막을 찾아 들어갔다. 펠젠틴의 검술에 대해 호기심이 동했는지 데이몬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미첼의 설명을 훔쳐듣고 있었다. 물론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했지만. '아무리 뛰어난 검술이라고 해도 감히 중원의 검술과 견줄 순 없지. 크로센 대제가 이곳에서 천하무적으로 군림한 것만 보아도 익히 알 수 있지 않겠어? 안타깝군. 내가 검을 익힌 검사였다면 크로센 대제에 전혀 못지 않은 무위를 날릴 수도 있었을 텐데…….' 이곳으로 넘어와서 데이몬이 가장 절실히 느낀 것은 검술에 대한 현저한 위력 차이였다. 솔직히 말해 검술의 정묘함이나 위력은 중원의 것이 비교도 할 수 없게 강했다. 그것은 바로 발전과정의 차이 때문이었다. 트루베니아나 아르카디아의 검술은 개개인의 대결보다는 집단적인 전투에 극히 적합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물론 대결 위주로 만들어진 검술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철저히 기사계층 이상의 상류층에 한정된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중원은 달랐다. 일단 무술의 역사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데다 중원 무림 산하의 무수한 문파들로 인해 검술과 내가기공이 극단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아주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문파를 빛내고 이름을 떨치겠다는 목적아래 수많은 무사들이 검술을 갈고 닦았고 그들의 깨달음은 고스란히 후진들에게 전수되었다. 그러면 그 후진들은 전수받은 검술을 끊임없이 보완해서 또다시 후진에게 물려주었다. 그런 과정을 되풀이하며 중원 검술의 위력은 비약적으로 강력해졌다. 줄기를 이루는 각종 검술의 종류만 해도 아르카디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쾌(快), 환(幻), 패(覇), 사(死), 사(邪), 살(殺), 황(荒), 등 헤아릴 수 없는 검형이 생겨났고 알려지지 않은 갈래들도 적지 않게 파생되었다. 무수한 검도 고수들과 대결해 보았던 탓에 데이몬은 어렵지 않게 그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아르카디아의 검술은 상당히 단조롭다고 볼 수 있었다. 어찌 보면 힘을 추구하는 패검(覇劍)과 흡사한 것이다. 또한 중원과는 달리 아르카디아의 검술은 나라간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 조금 전 헬버트론과 미첼의 대련을 지켜보았던 데이몬은 그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500년 이라는 시간과, 다른 대륙이라는 공간의 차이가 있음에도 둘의 검형은 거의 비슷했다. 초식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공격과 방어기술의 큰 줄기는 동일했던 것이다. 각 문파 간에도 현격한 초식과 검형의 차이가 존재하는 중원과는 정말 큰 차이였다. 그 때문에 미첼의 설명을 들어나가던 데이몬은 오래지 않아 싫증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요는 실전경험과 숙련도로군. 기술의 차이가 그다지 나지 않으니 수시로 윈슬럿과 붙인다면 강해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겠어. 수라사령심법을 전수해 주었으니 팔라딘이 되는 것도 시간 문제겠고……." 용병들이 미첼의 설명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을 힐끔 쳐다본 데이몬은 말없이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설명이 끝나고 대련까지 마치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에 그 동안 낮잠이라도 즐기려는 것이다. 데이몬이 천막에 들어가고 나서도 미첼의 강의는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감옥이란 원래 죄를 지은 죄수를 가두는 곳이다. 그러므로 빠져나가기 힘든 지하 깊숙한 곳에 만드는 것이 상례였다. 석벽과 철창을 이용해서 외부와 완벽히 격리시켜 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감옥도 있었다. 이송용으로 마차에다 만들어놓은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하지만 여기에 그런 감옥의 용도를 완전히 벗어난 경우가 있었다. 그것도 크로센 제국의 수도 펠젠틴에서 가장 화려한 장소에 말이다. 사방 10 평방미터 되어 보이는 비교적 작은 감옥은 놀랍게도 사방이 훤히 터진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외부와의 격리라는 감옥의 목적에 가장 괴리되는 위치인 것이다. 게다가 부근의 정경은 감옥이라고는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수려했다. 화려한 갑주를 걸친 기사들이 벽에 일렬로 늘어서 있었고 조각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과 우단으로 된 휘장은 호사의 극치를 달리는 모습이었다. 이곳은 누가 보더라도 범상치 않은 권력자의 공간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황제나, 아니면 그에 필적하는 권력자. 감옥 안에는 한 사람이 갇혀 있었다. 통상적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의 눈빛은 극도의 절망감이나 자신의 운명에 대한 회의가 서려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이례적으로 이 죄수의 얼굴에는 그런 표정을 도무지 찾아보기 힘들었다. 도리어 뭔가를 충족시켰다는 뿌듯함과 자부심이 얼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죄수는 바로 모리스였다. 단신으로 드래곤의 레어를 찾아가서 드래곤과 담판을 짓고 돌아온 간 큰 사내. 그 과정에서 두 팔을 잃었지만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성취감은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감옥 주위에는 중장 갑주를 갖춰 입은 기사들이 촘촘히 경비를 서고 있었다. 상당히 화려한 갑주를 걸쳤지만 문장을 보니 근위기사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페르슈타인 공작의 사설 기사단인 듀크 나이츠의 기사들이었다. 듀크 나이츠(Duke Knights). 페르슈타인 공작이 개인적으로 창설한 기사단이었다. 막대한 금력을 바탕으로 전 아르카디아에서 실력 있는 기사들을 대대적으로 끌어 모은 페르슈타인 공작은 크로센 기사단을 대적하기 위해 듀크 나이츠를 만들었다. 물론 개개인의 실력 면으로는 크로센 기사들을 따라잡기가 불가능했지만 전체 인원이 300에 가깝기 때문에 어지간한 왕국의 기사단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물론 크로센 기사단과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반드시 필패(必敗)하겠지만 말이다. 그 힘의 우열은 바로 소드 마스터의 수에 의해 판가름되었었다. 불과 120명이라는 적은 인원에도 불구하고 크로센 기사단이 무적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그 구성원이 전원 소드 마스터였기 때문이었다. 반면 듀크 나이츠에서 마스터 급은 고작 30명에 불과했다. 그런 까닭에 크로센 기사단과 정면으로 붙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크 나이츠는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기사단이었다. 아르카디아에서 두 번째 강대국 자리를 놓고 다투는 펜슬럿이나 테르비아 왕국의 근위기사단과는 충분히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전력이었다. 그리고 조직관리에 능통한 페르슈타인 공작은 이미 듀크 나이츠의 전폭적인 충성을 받고 있었다. 기사단원 개개인이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맹세한 상태였다. 물론 모리스 역시 듀크 나이츠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큰공을 세운 모리스가 왜 철창 속에 갇혀 있을까? 해답을 풀어줄 자는 머지 않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뚜벅뚜벅. 발자국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왔다. 뒤로 절그렁거리는 갑주 소리가 이어지는 것을 봐서 기사들의 삼엄한 호위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모습을 드러낸 자는 반백의 머리를 늘어뜨린 초로의 귀족이었다. 날카로운 눈빛이 무척 인상적인. 그가 바로 페르슈타인 공작이었다. 타고난 능력으로 황권을 잠식해 들어가 작금에 와서 크로센 제국의 대부분을 장악한 불세출의 야심가가 바로 그였다. 공작은 지긋한 눈빛으로 철창 속에 갇혀 있는 모리스를 쳐다보았다. 조금 뒤 나지막한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용서하게. 모리스. 자네에게 이런 대접을 해야 하는 나를 말일세." 페르슈타인 공작을 보자마자 모리스는 반사적으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과분한 임무를 맡겨 주신 것만으로도 제겐 무한한 영광입니다." "아닐세. 큰공을 세운 자네를 철창 속에 가둬두다니……. 정녕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무릎을 꿇은 모리스는 감격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말씀 거두어 주십시오. 인지하지 못하지만 이미 전 드래곤의 정신 마법에 당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공작 전하께서는 극히 합당한 결정을 하신 것입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임무를 완수했다고?" "그렇사옵니다. 레드 드래곤은 공작 전하의 제의를 달게 받아들였습니다. 단지……." "단지?" "거사일을 일년 뒤로 미루어달라고 했습니다.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이미 귀족원의 의원 90% 이상이 나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으니……. 귀족회의에서 사안이 통과되면 능히 황태자비 간택식을 미룰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페르슈타인 공작의 눈가에는 모종의 희열감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반신반의하며 모리스를 파견했는데 그가 뜻밖의 대어를 낚아온 것이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솔직히 모리스가 임무를 성공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실낱같은 가능성을 믿고 보냈는데 뜻밖에도 일이 잘 풀려버린 것이다. '드래곤의 손에 의해 황태자가 죽고 나면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다. 크로센 대제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손은 오직 드비어스 황태자 밖에 없으니 크로센 기사단은 조만간 충성할 대상을 잃어버릴 터. 그들의 드래곤에 대한 복수심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어렵지 않게 충성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가장 걱정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크로센 기사단이란 집단.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집단인 크로센 기사단은 지금까지 사사건건 그의 발목을 붙잡아 왔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포용력과 조직관리도 크로센 기사단원들에게만은 먹혀들지 않았다. 적어도 그들은 철저히 황제에게 목숨을 바친 골수분자들이었던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듀크 나이츠를 결성하긴 했지만 크로센 기사단의 아성을 넘보기에는 어림없었다. 그의 능력으로도 크로센 기사단에 맞먹는 무력집단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크로센 기사단은 그가 제국을 장악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 때문에 페르슈타인 공작은 드래곤과의 연수라는 어이없는 책략을 계획했다. 크로센 대제의 마지막 후손이 만인이 보는 앞에서 드래곤에게 살해당한다면 계획이 순탄히 풀려갈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되면 제국의 황위가 헬프레인 가문으로 넘어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억지로 기쁜 표정을 감추었다. '일이 성공리에 성사된다 해도 난 결코 황위에 오를 수 없다. 그랬다간 엄청난 혼란이 초래될 것이니까. 그러나 나의 자손만은 반드시 크로센 제국의 황제로 만들 것이다. 주변국들을 정복해 아르카디아 전역을 영토로 삼은 다음 만들어질 거대한 제국의 황제로 말이다. 물론 통일과정에서 악역은 철저히 내가 맡아야 하겠지? 그래야만 헬프레인 가문이 영원히 아르카디아 대륙을 지배할 수 있으니까.' 생각을 거듭하던 페르슈타인 공작의 귀로 모리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전하. 어떤 일이 있어도 드래곤에게서 경계심을 늦추시지 마십시오. 그들은 트루베니아를 멸망시킨 무서운 존재들입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시선이 모리스에게로 향했다. 그의 얼굴은 오직 충성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페르슈타인 공작과 만날 수 없을 것을 감안해서 마지막 조언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비록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하나 그들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트루베니아를 멸망시켰던 것처럼 드래곤들은 오크들을 규합해서 아르카디아로 건너올 수도 있습니다." 공작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드래곤의 의도 정도는 나도 잘 알고 있다. 모리스. 아마도 그들은 아르카디아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미 나는 거기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둔 상태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모리스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그러시다면 소신에겐 더 이상 걱정이 없습니다. 공작 전하. 부디 대업을 이루시길……." "널 잊지 않겠다. 모리스. 대업이 성공한다면 반드시 널 복권시킬 것이니까. 넌 대업을 이루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공신이니까." 모리스의 얼굴에는 또다시 감격의 빛이 일렁였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잘 가거라. 유배지로 정한 곳이 외지긴 하지만 가족들과 지내기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전하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거듭 고개를 조아리는 모리스를 잠깐 응시한 페르슈타인 공작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이제 모리스는 가족과 함께 멀리 떠나야 한다. 그것은 드래곤의 정신 마법을 염려한 페르슈타인 공작의 안배였다. 이미 그는 트루베니아가 멸망한 전모에 대해 상세히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 '정신 마법의 무서운 점은 당해도 당사자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다는 것이지. 그것 때문에 드래곤들이 트루베니아의 기밀과 방어상태를 낱낱이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고. 하지만 난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드래곤들도 언젠가는 내가 상대해야 할 적이기 때문이다.' 쿠르르르. 모리스가 갇힌 감옥이 통째로 밀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제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나야 한다. 다시 말해 세상과 완벽히 격리되는 것이다. 그것을 떠올린 페르슈타인 공작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나저나 아깝군. 충성심만큼은 일품인 녀석이었는데. 실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것이 문제지만 말이야.' 이미 모리스에 대한 생각은 뇌리에서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충성심이 아무리 강한 부하라도 그에겐 단순히 수단에 불과할 뿐이었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18회. 집무실에 올라온 페르슈타인 공작은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그는 크로센 제국을 장악하는데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의 혈관 속을 돌고 있는 가문의 피 때문일지도 몰랐다. 충성을 받기를 원할 뿐 충성을 바치지는 못하는 헬프레인 가문 특유의 기질 말이다. 생각에 팔려 있던 페르슈타인 공작은 돌연 얼굴을 찡그렸다. "그나저나 주위에 너무 인물이 없군. 하나같이 쓸모 없는 녀석들뿐이니……." 50만 대군과 300명에 달하는 개인 기사단, 그리고 귀족원 귀족들의 대다수를 장악하고 있는 공작의 입에서 나왔을 것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적절한 이유가 있었다. "실력자가 너무 없어. 적어도 일대 일로 월리엄스를 상대할 수 있는 녀석이 하나는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머리수로는 충분하지만 개개인의 실력차이가 너무 많이 나니……." 사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제국이 가진 힘의 90% 이상을 명실상부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미홉하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초절정 고수의 부재 때문이었다. 당장 그에겐 아직까지 윌리엄스 후작을 상대할 무사가 없었다. 크로센 기사단장인 윌리엄스 후작은 명실상부한 아르카디아 제일의 실력자였다. 솔직히 말해 공작이 보유한 기사 중 최고의 실력을 가진 기사도 엄연히 따지면 크로센 기사단 서열의 5위 밖으로 밀려나야 했다. 크로센 기사단에는 그만큼 강자가 많았다. 때문에 기사는 많지만 진정으로 강한 실력자가 절실히 아쉬웠던 페르슈타인 공작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돈과 권력을 매개로 끌어들일 수 있는 기사의 수준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다. 무의 궁극을 추구하는 무도자는 대부분 명리에 초월하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페르슈타인 공작은 윌리엄스 후작을 회유하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여왔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사였다. 윌리엄스 후작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크로센 황가에 대한 충성심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 목숨은 오직 크로센 황가의 것이오. 그분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이 아니면 그 누구도 나의 충성을 받지 못할 것이오." 윌리엄스 후작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어지간한 페르슈타인 공작도 눈물을 머금고 포기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때문에 만약 일대 일로 윌리엄스를 상대할 수 있는 검사가 있다면 페르슈타인 공작은 그 어떤 조건을 감수하더라도 끌어들이겠다고 작정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초고수는 찾아내기조차 불가능했다. 그때 공작의 얼굴에 몹시 아쉽다는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젠장. 그때 세바인의 흑마법사와 접촉할 수 있었다면 이런 걱정 따윈 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야." 페르슈타인 공작의 뇌리에는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데스 나이트를, 그것도 넷이나 보유하고 있다는 미지의 흑마법사가 떠오르고 있었다. 공작이 그 소식을 접한 것은 그리 머지 않은 과거의 일이었다. 세바인의 간악한 흑마법사를 토벌하러 떠난 근위기사 엘케인이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무참히 패배했다는 사실. 정황을 보고 받은 윌리엄스 후작은 그것을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하지만 비밀은 오래지 않아 페르슈타인 공작의 귀에 들어갔다. 이미 크로센 제국의 정보부는 공작의 수중에 완벽하게 장악되어 있었던 것이다. 엘케인이 패배한 과정을 보고 받은 공작은 손뼉을 쳤다. "되었어. 엘케인을 가지고 놀 정도의 실력을 가진 데스 나이트가 넷이라면 충분히 윌리엄스를 상대할 수 있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흑마법사를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겠군." 페르슈타인 공작은 즉시 흑마법사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돈과 권력을 매개로 흑마법사를 회유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입이 무거운 심복을 골라 낸 공작은 다수의 호위기사를 붙여 세바인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그것이 공작의 결정적인 실책이었으니……. 만약 그가 무장을 하지 않은 사신 한 명만 보냈다면 틀림없이 데이몬과 대화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을 생각해 다수의 호위기사를 딸려보낸 것이 가장 큰 화근이었다. 중무장한 기사들이 동굴에 들어서자 데이몬은 그들을 단순한 토벌대로 간주했다. 그래서 줄곧 해왔던 대로 매직 미사일 세례와 윈슬럿의 마무리를 이용해서 사절단 모두를 깨끗하게 처리해 버렸다. 그러니 공작의 심복에겐 데이몬의 얼굴조차 대면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기절한 상태로 일주일 동안 꼬박 악몽을 꾸고 난 사절단은 진저리를 치며 동굴을 떠났다. 나이트 메어로 인한 악몽은 임무에 대한 생각이 깡그리 달아날 정도로 끔찍했다. "죄송합니다. 저희들은 흑마법사의 얼굴도 보지 못했습니다." 심복으로부터 임무를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은 공작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무려 다섯 번에 걸쳐 사절단을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항상 똑같았다. 여섯 번째의 사절단이 실패하고 나서야 비로소 페르슈타인 공작은 마음을 달리 먹었다. 이번에 그는 단 한 명의 심복만을 세바인에 파견했다. 목이 잘리더라도 입을 열지 않을 정도로 충직한 심복 모리스를 말이다. 하지만 모리스 역시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갔을 때는 데이몬이 이미 세바인을 떠난 다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페르슈타인 공작으로써는 흑마법사를 영입하지 못한 것이 정말 아까울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아까워. 헬 파이어를 전개했다면 분명히 9써클의 마스터일 테고 그렇다면 전력에 엄청난 도움이 될 텐데. 물론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데스 나이트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 흑마법사를 어디 가서 찾는다?"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다급한 음성이 문 밖에서 들려왔다. "고, 공작님. 급보입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방해받은 탓에 페르슈타인 공작은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인가? 그렇게 호들갑을 떨 정도로 중요한 사안인가?" "그, 그렇습니다. 테르비아로부터 들어온 첩보입니다. 일전에 공작님께서 찾으시던 흑마법사의 종적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공작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정말 기다리던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인가? 어서 들어 오라." 덜컥. 문이 열리고 부관이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섰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다짜고짜 흑마법사가 있는 곳을 물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 얼마나 급했던지 부관은 말까지 더듬으며 보고를 시작했다. "야, 약 보름 전에 돈트렐 부근에서 그를 보았답니다. 모, 목격자는 테르비아의 소드 마스터 인 윌커슨과 돈트렐에 소속된 팔라딘들입니다." "천천히 전모를 얘기해 보게." "아, 알겠습니다." 잠시 숨을 가라앉힌 부관은 조금 전 보고 받은 사실을 낱낱이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테르비아의 궁정에 잠입해 있는 첩자로부터 전달된 첩보였다. 세바인의 흑마법사가 9서클이라는 전인미답의 경지에 오른 마법사이며, 거기에다 소드 마스터조차 감당할 수 없는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 넷을 보유했다는 사실에 테르비아의 궁정은 이미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그리고 흑마법사와 데스 나이트들이 테르비아의 팔라딘들이 보는 앞에서 에인션트 급 드래곤을 사냥했다는 대목에 이르자 어지간한 페르슈타인 공작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그런 일이……. 지금까지 에인션트 급 드래곤을 사냥했다는 기록은 역사를 뒤져봐도 전무한 실정이거늘……." "하지만 사실입니다. 그것보다도 더욱 놀라운 것은 그 흑마법사가 이미 트루베니아에 건너가서 드래곤 하나를 처치하고 그가 관리하던 드래곤의 마법보고를 빼앗아 왔다는 사실입니다. 테르비아의 팔라딘들이 죽은 에인션트급 드래곤의 입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하니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그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가 있을 것이라곤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 그래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다고 하던가? 윌커슨이란 자가 흑마법사를 만난 경위를 처음부터 설명해 보게." "전모는 대충 이렇습니다." 부관의 입에서는 데이몬이 날조한 사실이 하나 둘씩 흘러나왔다. 돈트렐에 파견 나와 있던 베르텍이라는 이름의 마법사가 돈에 눈이 팔린 나머지 세바인의 흑마법사를 죄수로 위장해 테르비아의 수도 바얀카로 데리고 가려는 계획을 꾸몄는데 그것이 드래곤의 습격으로 인해 결국 무산되어 버렸고, 그 과정에서 호송병력 500과 팔라딘 하나가 목숨을 잃었으며 드래곤은 결국 흑마법사와 데스 나이트에 의해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 상황이 종료된 뒤 성난 흑마법사의 항의로 베르텍의 꿍꿍이를 윌커슨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는 내막이 낱낱이 설명되었다. 설명을 마친 부관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베르텍이란 마법사는 바로 어제 처형되었습니다. 흑마법사의 마법에 걸려 항변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처형장으로 향했다고 하더군요." 설명을 모두 들은 페르슈타인 공작은 이맛살을 지긋이 모았다. "그런데 과정이 좀 석연치 않군. 베르텍이란 마법사의 행동에 당위성이 너무 없어. 단순히 돈 문제로 그랬다고는 생각하기가 조금 힘들군." "테르비아의 왕실에서도 그 문제로 일말의 의구심을 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병사 500명과 팔라딘 한 명이 죽은 것만은 확실했기 때문에 결국 국왕의 칙령으로 사형을 선고했다고 합니다." "그렇겠지." 페르슈타인 공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 가는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당사자가 이미 처형되었다니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흑마법사의 행방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를 끌어들어야겠다는 결심이 확실하게 굳어졌던 것이다. "그래 흑마법사는 어디로 갔다던가?" "그의 행로에 대해서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테르비아의 왕실에서도 지금 그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럴 테지. 흑마법사를 끌어들인다면 엄청난 전력증강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감히 크로센 제국을 넘볼 수는 없을지라도 앙숙인 펜슬럿이나 테제로스 정도는 어렵지 않게 굴복시킬 수 있을 테지. 그러니 테르비아 놈들은 기를 쓰고 흑마법사를 회유하려고 할거야. 하지만 어림없다. 흑마법사는 반드시 우리편이 되어야 하니까."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에는 테르비아와 전쟁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흑마법사를 끌어들이겠다는 각오가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그것말고는 밝혀진 사실은 없나?" "별로 많진 않습니다. 드래곤의 브레스에 맞아 보고서가 모조리 녹아버렸다고 하더군요. 다만 그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어느 용병단에 소속되어 있고 카르셀이란 이름을 가진 왕국의 왕녀를 우리 제국까지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는 말이 있던데 별로 신빙성은 없습니다. 그 정도 실력의 흑마법사가 고작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데다 그 사실은 이미 처형된 마법사 베르텍이 조사해놓은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하긴 그렇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현실성이 없어. 그래도 모르니 카르셀이란 왕국에 대해 한 번 조사해 보도록." 공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관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카르셀에 대해서는 이미 조사가 끝난 상태입니다." 서류를 훑어본 공작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뭐, 뭐야. 인구가 팔천 사백 명이면 거의 작은 마을 수준의 국가잖아? 게다가 엘리시아 산맥에 위치해 있다면 대륙의 동남쪽 끝 부분에 위치한, 극히 변방이라 볼 수 있는 곳인데……." "그렇습니다. 정확히 따지자면 왕국이란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곳이죠." 미심쩍은 눈빛으로 서류를 훑어보던 공작은 뭔가 결심을 했는지 고개를 들었다. "혹시 모르니 카르셀로 사신을 파견하도록 하게. 언변 좋은 녀석을 파견해 카르셀과 동맹을 맺어 놓도록. 흑마법사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이라도 놓쳐서는 안 돼. 상황을 보아 카르셀의 왕녀라는 계집이 흑마법사와 함께 다닐 가능성이 무척 높으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어김없이 시행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부관은 즉시 자리를 떴다.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은 공작은 조용히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그 흑마법사만 끌어들인다면 크로센 제국을 장악하는데 걸릴게 아무것도 없어. 드래곤도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에인션트 급 드래곤을 사냥한 것이 사실이라면……." 공작의 눈동자는 모종의 기대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반드시 흑마법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19회. 데이몬을 회유하려는 마음을 먹은 자는 다른 곳에도 있었다. "뭐라고? 흑마법사의 종적을 전혀 찾지 못했단 말이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소?" "죄송합니다. 수도가 걱정되어 부득이 회군을 결심했습니다." 당황한 기색으로 거듭 머리를 조아리는 자는 풍채가 당당한 노검객이었다. 지긋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잘 벼른 한 자루 검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눈빛의 노인. 그는 바로 테르비아의 근위기사단장인 필베르그였다. 부단장인 에드워드와 더불어 막강한 테르비아의 근위기사단을 이끄는 주축인물인 셈이다. 그런 그가 이렇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앞에 앉아 있는 자가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눈앞의 인물은 다름 아닌 테르비아의 국왕 로시무스 1세였다. 테르비아를 아르카디아 제 2의 자리로 승격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야심 많은 국왕이 바로 그였다. 잔뜩 화가 난 듯 로시무스 1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경은 200명의 근위기사들을 동원해 꼬박 일주일 동안 흑마법사의 수색에 나섰소. 본국이 보유한 근위기사단 전력의 3분지 2를 가지고 말이오. 그러고도 흑마법사를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 도대체 말이나 되오?" "죄, 죄송합니다." 필베르그는 거듭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사실 그것 때문에 남은 근위기사들이 상당한 고초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부단장인 에드워드 후작 이하 남은 근위기사들은 지금 평소의 몇 배가 넘는 근무를 서야 했다. 그가 200명이나 되는 근위기사를 수색에 동원한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공염불에 불과했다. 돈트렐 부근을 샅샅이 뒤졌건만 흑마법사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흑마법사가 다른 곳으로 이동한 듯 싶었기에 그는 결국 수색을 포기하고 수도로의 귀환을 결심했다. 200에 달하는 근위기사들이 오래 수도를 비우는 것이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만 그 결정 때문에 로시무스 1세의 분노에 직면할 줄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때문에 필베르그가 이처럼 쩔쩔매는 것이다. 로시무스 1세는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필베르그를 쏘아보았다. "그 흑마법사는 우리 테르비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인물이오. 그를 우리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한다는 가정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소." "하, 하지만 그는 사악한 흑마법사입니다. 그를 받아들인다면 타국의 지탄을 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로시무스 1세는 눈을 부라렸다. "듣기 싫소. 어찌 그리 생각이 없소? 혹시라도 이런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않았소? 흑마법사가 펜슬럿이나 테제로스와 손을 잡고 우리를 공격해 올 가능성 말이오. 멍청한 베르텍이란 놈 때문에 그 흑마법사는 필경 우리에게 앙심을 품고 있을 것이오. 9서클의 흑마법사와 막강한 데스 나이트를 앞세운 펜슬럿이나 테제로스의 대군이 몰려온다면 경은 과연 막을 자신이 있소?" 필베르그의 안색이 확 변했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펜슬럿이나 테제로스는 테르비아와 쉽사리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강대국이다. 팽팽한 힘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에인션트 급 드래곤을 사냥한 흑마법사가 어느 한 쪽에 가세한다면 균형은 금세 깨져버릴 것이다. 흑마법사가 보유한 전력은 그 정도로 강력했다. 필베르그는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꺾었다. "소, 소신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저를 벌해주십시오." "경을 벌할 시간도 없소. 그러니 서둘러 흑마법사를 찾아내시오. 물론 목적은 철저히 그를 회유하는 것임을 명심하시오. 그러니 찾아낼 경우 최대한 예의를 갖춰 그를 수도로 데리고 오시오." "알겠습니다." "어서 나가보시오." "옛." 필베르그 단장이 부랴부랴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휘하의 근위기사 중 하나인 필립이 이미 흑마법사와 접촉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나간 직후 화려한 복장을 걸친 중년인 한 명이 로시무스 1세에게 다급하게 다가왔다. 바로 테르비아의 총리를 맡고 있는 겔리오네스 공작이었다. 하지만 로시무스 1세는 그에게도 어김없이 화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경은 도대체 무슨 면목으로 다시 궁정에 들어온 것이오. 두 번 다시 궁정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일렀거늘……." 겔리오네스 공작 역시 조금 전 필베르그 단장과 마찬가지로 쩔쩔 맬 수밖에 없었다. "하, 하오나, 저는 죄인 베르텍의 처형이 완료되었다는 사실을 보고 드리기 위해……." 로시무스 1세는 떠듬거리는 겔리오네스 공작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듣기 싫소. 당분간 경의 낯짝을 보기 싫으니 일주일 동안 자택에서 근신하도록 하시오." "아, 알겠습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뒷걸음질쳐 나가는 겔리오네스 공작. 로시무스 1세는 무척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사실 겔리오네스 공작은 로시무스 1세에게 무척 큰 죄를 지은 상태였다. 돈트렐에 파견 나가 있던 베르텍의 보고를 받은 뒤, 생각 없이 체포한 흑마법사를 수도로 압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죄 말이다. 그것 때문에 흑마법사가 테르비아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생각만 해도 분통이 터졌다. 그러나 질책을 받는 겔리오네스 공작에게도 엄연히 할 말이 있었다. '젠장. 흑마법사가 그토록 엄청날 줄 누가 알았나? 난 정해진 절차에 따라 결정을 했던 것 뿐이라고…….' 겔리오네스 공작은 속으로 연신 투덜거리고 있었다.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베르텍이 지은 죄도 사형에 처할 정도는 아니었다. 국가의 법에 따라 사악한 흑마법사를 체포한 행위는 지극히 합당한 일이었고 그로 인해 많은 병사를 잃기는 했지만 임무수행 과정에서 발생한 것인 만큼 정상참작의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베르텍의 음모론에 대해서는 이미 상당한 격론이 오고간 상태였다. 우선 윌커슨이 들었다는 흑마법사의 말은 신빙성이 현격히 결여되어 있었다. 베르텍이 어떻게 해서 흑마법사의 존재와 실력에 대해 알고 미리 접근했는가 하는 부분부터가 허점투성이였던 것이다. 세바인의 흑마법사가 그 정도로 엄청난 실력을 가졌을 것이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저 운이 좋아 크로센의 토벌대를 격파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이것은 그가 에인션트 급 드래곤을 사냥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몰랐을 사실이었다. 테르비아의 판관들도 바보가 아닌 만큼 겔리오네스는 베르텍에 대해 재조사가 벌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로시무스 1세가 개입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반전되었다. "중요한 죄를 범한 베르텍을 왕명으로 즉각 처형한다." 로시무스 1세의 칙령이 떨어졌고 불쌍하게도 베르텍은 그 날로 광장에서 목이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뚜렷한 죄상도 밝혀지지 않은 채 말이다. 그러나 총리를 맡고 있는 만큼 겔리오네스 공작은 내막을 잘 알고 있었다. 로시무스 1세의 앞을 물러나며 겔리오네스 공작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흑마법사의 반감을 가라앉히려는 목적으로 휘하의 마법사를 처형하다니……. '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흑마법사는 테르비아에 있어 그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왕국의 흥망을 한 순간에 결정지을 수 있는……. 겔리오네스 공작은 한숨을 내쉬며 자택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홀로 남은 로시무스 1세는 정신 없이 생각에 팔려 있었다. '어떻게 해서 흑마법사를 우리편으로 끌어들인다? 드래곤들의 마법보고를 가지고 있다니 돈으로는 회유할 수 없을 테고……. 권력이라면 혹시 가능할까?' 흑마법사를 영입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아깝지 않다는 것이 로시무스 1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흑마법사는 로시무스 1세에겐 그 정도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윌커슨은 우리나라에서 서열 10위안에 드는 소드 마스터다. 그런 윌커슨이 채 5분도 버티지 못하고 패배했다면 데스 나이트들은 정말 어마어마한 초고수로라고 봐야 한다. 게다가 윌커슨의 말이 정확하다면 그들의 정체는 과거 이카롯트의 4대 기사가 확실하다. 그렇다면 기사단장인 필베르그보다 강하다는 결론이 나오지. 정말 긴장되는군. 그런 존재들이 우리편에 선다면……. 아니, 9서클의 흑마법사 하나만 가세한다 해도 펜슬럿이나 테제로스 따위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정말 미치겠군. 어떻게 해서든 흑마법사를 우리편으로 끌어들여야 할 텐데.' 몸을 벌떡 일으킨 로시무스 1세는 연신 안절부절못해 했다. 그의 입장으론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에 하나 흑마법사가 경쟁국인 펜슬럿이나 테제로스와 손을 잡는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기 때문에 로시무스 1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 돼." 그런 결과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했다. 그것은 테르비아의 멸망을 가져올 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현재 아르카디아의 정세는 무척 불안했다. 크로센 제국이 더 이상 아르카디아의 판관 노릇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르카디아의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으로 크로센 제국은 지금까지 각 왕국과의 분쟁을 조율해 왔다. 소규모 국지전은 허용할지언정 대규모 전면전이 벌어지는 것은 철저히 막아왔던 것이다. 그 때문에 아르카디아는 오랫동안 큰 전쟁 없이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제국이 보유한 압도적인 무력은 그것을 충분히 가능하게 했다. 제국이 보유한 50만 대군, 굳이 그것이 아니더라도 막강한 크로센 기사단의 이름 앞에는 그 어떤 왕국도 전쟁을 고집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아르카디아에 인구 5만 미만의 소규모 왕국이 무수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균형은 바야흐로 깨어지려 하고 있었다. 크로센 제국에서 벌어지는 황제와 귀족간의 세력다툼 때문에 말이다. 크로센 제국의 실권이 거의 대부분 페르슈타인 공작의 손에 넘어가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왕국 정보부들이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각 왕국들은 기회만 되면 전쟁을 일으켜 영토를 넓히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중 가장 적극적인 국왕이 바로 로시무스 1세였다. 그런 때문에 이처럼 흑마법사를 끌어들이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것이다. 야망의 실현을 위해 흑마법사는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었다. 로시무스 1세는 초조한 기색으로 옥좌 주위를 맴돌았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야심이 많은 인물이다. 권력을 잡을 경우 우리 테르비아를 침공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반드시 흑마법사를 영입해야 한다. 그만 우리 쪽에 서 준다면 상대가 크로센 제국이라 해도 두렵지 않다." 로시무스 1세는 나직이 각오를 다졌다. 다른 왕국에서 내막을 알아차리기 전에 반드시 흑마법사를 끌어들이겠다며. 멀리 떨어진 두 국가가 자신 때문에 발칵 뒤집힌 줄도 모르고 데이몬은 한가롭게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팬 속에는 갖가지 양념을 버무린 야채와 고기가 한데 섞여 볶이고 있었다. 향긋한 냄새가 퍼져나가자 데이몬은 코를 벌름거렸다. "캬. 죽이는군." 정말 오랜만에 하는 요리였다. 세바인에 은거해 있을 때는 거의 매일 요리를 해야 했지만 용병단에 들어오고 나서 데이몬은 단 한 번도 요리를 해 본적이 없었다. 우선 열 명분이 넘는 요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가장 부담이 되었고 또한 요리당번인 제럴드와 하인리히의 요리 솜씨가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참고 먹어줄 정도는 되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굳이 자신이 실력발휘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이 그가 요리를 하게 만들게끔 돌아가고야 말았으니. 용병들은 지금 하나같이 넉다운이 되어 있었다. 미첼과의 대련이 그 정도로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로부터 혹독하게 단련된 탓에 미첼 역시 용병들을 말 그대로 무자비하게 교육시켰다. 한 사람에 꼬박 한 시간씩 한계에 달할 정도의 혹독한 대련이 이어졌고 용병들은 하나같이 파김치가 되어 늘어져 있었다. 물론 용병들 전부를 상대한 미첼도 성할 리가 없었다. 모두가 시체나 다름없는 모습이 되어 끙끙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부득이 데이몬이 요리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요리당번인 제럴드와 하인리히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들에게 힐링을 펼쳐 요리를 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데이몬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오랜만에 자신이 만든 요리를 즐기고 싶었고 또한 용병들이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옆에는 율리아나가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과연 요리를 할 줄 알아요?" "일단 한 번 먹어봐. 틈만 나면 나에게 요리를 해 달라고 할 테니." "피.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데이몬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허. 참. 내 요리실력을 무시하다니……." 하지만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는 것은 율리아나 뿐이 아니었다. 늘어져 있는 용병들도 하나같이 불안한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세바인에서 처음 데이몬에게 당했을 당시 그들이 갇혀 있던 곳에 놓여있었던 음식접시 때문이었다. 그 속에는 데이몬이 마법을 펼쳐 연출한 흉물스런 음식이 가득 차 있었다. 통째로 삶은 뱀에서부터 구더기 볶음까지 모두가 보기만 해도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음식들이었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20회. 그런 까닭에 용병들은 지금 데이몬의 요리과정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혹시라도 이상한 재료를 넣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잘 봐야 돼. 흑마법사의 식성은 정말 엽기적이니…….' '아무리 배가 고파도 지네나 구더기를 먹을 순 없어.' 하지만 요리하는데 정신이 팔린 데이몬은 미처 그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조금 뒤 요리를 마친 데이몬은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팬을 내려놓았다. 극히 평범한 재료와 양념을 썼지만 조리방법의 차이 때문에 요리는 상당히 먹음직스런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향을 음미하던 데이몬은 접시를 집어들었다. "다 되었다. 각자 와서 퍼먹도록 해." 용병들이 하나 둘씩 기어와서 접시를 집어들었다. 끙끙거리며 식기를 집어드는 모습이 여간 안쓰럽지 않았다. 그 모습을 흘려보며 데이몬은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캬! 역시 요리하면 중원의 것을 따라올 것이 없다니까……." 감탄사를 연발하던 데이몬은 삽시간에 접시를 비웠다. 하지만 용병들은 선뜻 요리를 입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하나같이 포크를 이용해 식기에 담긴 요리를 뒤적이고 있었으니까. 마치 요리 속에서 뭔가를 찾아내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눈치가 빠른 데이몬은 금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녀석들이?' 그러는 이유가 익히 이해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감히 자신이 만든 요리를 무시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데이몬은 홧김에 마나를 재배열해 버렸다. "먹기 싫다 이거지? 알았어." 그가 손을 휙 내젓자 팬에 담겨 있던 요리의 모습이 삽시간에 변해버렸다. 세바인 동굴에서 보았던 것과 한 치도 다름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기와 야채였던 것은 벌레와 뱀 따위로 변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멀쩡했던 요리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보기만 해도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모습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깜짝 놀란 용병들은 경악성을 토해냈다. "헉." "아니?" 심지어 비위가 약한 율리아나가 그대로 헛구역질을 할 정도였으니 요리의 모습이 어떤지 익히 짐작할 만 했다. 심술을 부린 데이몬은 인상을 구기며 몸을 일으켰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나에게 요리를 부탁하지 말도록……." 냉랭하게 내뱉고는 휑하니 사라지는 데이몬. 남은 용병들은 하나같이 곤혹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것이 마법에 의한 연출이란 것을 알아차렸지만 도저히 요리에 눈길을 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곤 오로지 식기에 조금씩 퍼온 요리뿐이었다. 오직 그것만은 모습이 변하지 않았다. 결국 용병들은 몸을 돌린 채 식기의 음식만을 조심스럽게 입 속에 집어넣어야 했다. 워낙 배가 고팠기 때문에 당장 허기를 때워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응?" 고기 한 점을 입 속에 집어넣은 카심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혀를 통해 전해지는 감각이 너무도 오묘했기 때문이었다. 고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녹아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그러나 그 맛은 혀에다 짙은 여운을 남겼다. 황홀하다고까지 표현할 수 있는 맛. 카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식기에 머리를 박았다. 와구와구. 접시의 음식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을 드러냈다. 어떻게 먹었는지 분간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요리였다. 카심은 지금껏 이토록 맛있는 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식도락에 대해 무감각한 편이었던 카심이 여지없이 반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접시에 묻은 소스까지 남김없이 핥아먹은 카심이 부스스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용병들은 하나같이 대동소이한 모습이었다.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모습. 한 눈에 보아도 요리에 완벽히 매료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말 맛있어요." "어, 어떻게 이런 맛이?" "혹시 마, 마법을 쓴 것이 아닐까요?" 한 마디씩 내뱉는 용병들의 시선이 예외 없이 팬에 담긴 요리에게로 향했다. 탐욕에 가득한 시선이 요리로 집중되었다. 하지만 요리를 보자 용병들은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껴야 했다. "왜액." 비록 그것이 마법으로 연출된 것이란 사실을 알긴 했지만 요리의 모습은 너무도 흉측했다. 아직까지 죽지 않은 듯 구더기와 뱀이 연신 꿈틀거리고 있었고 벌레의 터진 배에서 누런 진액이 흘러나오는 요리의 모습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쳐다볼 수조차 없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요리의 맛에 매료된 용병들은 하나같이 거기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감히 퍼올 엄두를 낼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코끝을 맴도는 요리의 향은 더없이 매력적이었다. 결국 참지 못한 카심이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섰다. 눈을 질끈 감은 카심은 마치 최면술이라도 걸려는 듯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요리를 향해 슬며시 포크를 뻗었다. "거짓이야. 단지 마법에 의한 연출일 뿐이라고." 포크에 뭔가가 꽂히자 카심은 얼른 그것을 입 속에다 집어넣었다. 쩝쩝 혀를 통해 어김없이 전해지는 오묘한 맛. 그것이 조금 전 먹어보았던 맛과 일치하자 카심은 마침내 이성을 잃어버렸다. 팬으로 달려든 카심은 아예 요리에다 고개를 박아버렸다. 그 상태로 정신 없이 요리를 집어삼키는 카심. 우적우적 그 모습을 보자 용병들도 자제력을 잃어버렸다. 카심처럼 눈을 질끈 감은 채 요리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치사해요 대장." "같이 먹읍시다." 그곳은 곧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조금이라도 요리를 더 집어먹으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체면을 잊어버릴 정도로 요리의 맛이 훌륭했기 때문에 용병들은 말 그대로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김없이 율리아나와 미첼도 끼여 있었다. 팬 속의 요리는 삽시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팬과 식기는 설거지를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깨끗이 닦여 버렸다. 식기에 붙은 고기조각과 국물을 남김없이 핥아먹은 용병들은 몹시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워낙 맛있었기 때문에 미련이 남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했던 행동이 이토록 후회될 줄은 몰랐다. 선입견 때문에 초특급 요리사의 비위를 거스른 것이 못내 아쉬웠던 용병들이었다. '하긴, 그런 반응을 보였으니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하지.' '큰 실수를 했어. 장인에겐 특유의 자존심이 있는 법인데 말이야.' 이런 훌륭한 요리를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이미 그들은 식도락의 길에 막 첫걸음을 내디딘 상태였다. 미각의 즐거움이 이토록 황홀할 줄 지금껏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대로는 안 돼.' '어떻게 해서든 그의 마음을 돌려놓아야 해. 그래야만 이따금 요리를 얻어먹을 수 있어.' 용병들의 눈빛은 이제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데이몬의 기분을 풀어 요리를 얻어먹어야겠다는 생각. 모르고 있었다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일단 맛을 한 번 본 이상 유혹을 도통 견디기 힘들었다. 요리의 맛은 그 정도로 훌륭했다. 카심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허. 참. 믿을 수 없군. 내 마음이 고작 요리 때문에 흔들리다니……." 그러나 한 번 맛본 데이몬의 요리는 용병들에겐 마치 끊을 수 없는 마약과도 같았다. 때문에 용병들은 곧 숙의에 들어갔다. 데이몬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어떻게 할까? 그를 달래야 한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하겠지." "당연하죠." 용병들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첼과 율리아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누구 뾰쪽한 방법 있어?" 카심이 입을 열자 용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사람에게 향했다. 아직까지 입맛을 다시고 있던 율리아나였다. 시선이 집중되자 그녀는 극도로 당황했다. "왜 날 쳐다보는 거죠." 카심이 그녀를 쳐다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 중에서 데이몬의 기분을 풀어 줄 사람은 왕녀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섰다간 괜히 역효과만 불러올 것 같군요." 율리아나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데이몬을 달래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했지만 직접 나서고 싶은 마음은 꿈에도 없었다. "시, 싫어요. 나더러 그 작자에게 마음에도 없는 애교를 부리란 말인가요?" 연신 도리질치며 뒤로 물러나는 율리아나. 하지만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서 떠나갈 줄을 몰랐다. "두 번 다시 요리를 맛보지 못한다 해도 괜찮습니까?" "………." "방법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지만 불행히도 저희들에겐 능력이 없군요. 그 능력은 오직 왕녀님만 보유하고 있으니까……." "하, 하지만……." 이젠 미첼도 용병들 편에 서 있었다. 용병들 편을 들어 율리아나를 마구 압박하고 있으니 말이다. "넌 충분히 가능하잖아? 저번처럼 볼에 입을 맞추며 아저씨, 하고 애교를 부리면 흑마법사가 충분히 넘어오지 않을까?." "뭐라고?" 율리아나의 눈빛이 갑자기 사나워졌다. 용병들이 그러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미첼까지 가세하는 것은 도저히 보아 넘길 수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자신의 호위기사가 아니던가? 율리아나는 허리에 손을 척 올린 채 미첼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도대체 넌 누구편이야. 갑옷과 검 때문에 흑마법사에게 붙은 건 아니겠지?" "그, 그건 아니지만." 반사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진 미첼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때 돌연 율리아나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미첼의 뒤쪽을 쳐다보았다. "어머. 저것 봐!" 미첼은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미첼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 돋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서, 설마…….' 미처 생각이 끝나기도 전해 왼쪽 겨드랑이에서 극통이 치밀어 올랐다. "크억." 숨이 턱 막힌 미첼은 당했다는 생각을 하며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율리아나의 속임수에 정통으로 속아넘어간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상태로 미첼은 끙끙 앓기 시작했다. 정말 참기 힘든 통증이었기에 미첼은 율리아나에게 급소를 가르쳐 준 데이몬을 끝없이 저주할 수밖에 없었다. "짜식. 까불고 있어." 율리아나는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주먹을 흔들었다. 그녀는 데이몬에게 배운 대로 미첼의 액내혈을 정통으로 가격했던 것이다. 미첼을 속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미첼을 수도 없이 골탕먹여 왔으니까. "나에게 또 할 말 있는 사람 있어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리는 율리아나. 용병들은 하나같이 겨드랑이를 가린 채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질린 기색이 역력한 채로 말이다. 율리아나의 미소는 그들에게 마녀의 미소나 다름없었다. "아, 아닙니다." "없습니다." 연신 뒤로 물러나는 용병들을 보며 율리아나는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걸음을 옮겼다. "내가 어떻게 해결하는지 한 번 지켜봐요." 그 말에 용병들의 시선이 또다시 그녀에게 집중되었지만 누구 한 사람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21회. 데이몬은 천막 앞 풀밭에 누워있었다.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데이몬. 그의 옆으로 다가간 율리아나는 발로 데이몬의 다리를 툭툭 찼다. "일어나 봐요." "어허. 건방지게 잠자는 어른의 다리를 걷어차다니……." 눈을 뜨지 않은 채 호통을 치는 데이몬. 하지만 거기에 눈 하나 깜짝할 율리아나가 아니었다. "안 자는 것 알아요. 그러니 빨리 일어나 봐요." 계속해서 다리를 건드리는 통에 데이몬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찾아온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갔지만 데이몬은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적당히 짜증을 섞어가며 말이다. "왜 난데없이 어른의 단잠을 깨우는 거야?" "대접을 받으려면 어른답게 행동해요. 그게 뭐예요? 사소한 일에 삐쳐 가지고 말이야. 나이를 먹었으면 그에 걸 맞는 너그러움을 좀 가져봐요." "………." 하도 어이가 없어 실소를 짓는 데이몬이었다.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다프네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어휴. 이걸 그냥? 얼굴이 다프네만 닮지 않았다면…….' 그런 데이몬에게 율리아나는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뭐, 뭔데?" 난데없이 얼굴을 들이민 때문에 데이몬으로써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처녀 특유의 풋풋한 방향이 바로 코앞에서 풍겨오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아까 그 요리 말이에요." "요리가 왜?" 율리아나의 얼굴에는 확신의 빛이 번뜩였다. "마법을 써서 맛있게 만든 것이죠? 그렇죠?" "뭐가 어쩌고 어째?" 결국 데이몬은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자신의 요리솜씨를 의심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갈고 닦아왔던 요리실력이었던가? 그것을 단순한 마법의 연출로 치부해 버리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기가 막혀 말이 안나오는군. 그러니까 요리를 마법으로 만들었다 이건가?" "그래요. 난 지금까지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어요. 따라서 그것은 마법으로 연출한 것이 분명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황홀한 맛을 낼 수 있겠어요?" "미치겠군." 데이몬은 난감한 기색이었다. 일단 요리가 맛있다고 인정하니 그 부분에서는 만족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실력이 아닌 마법에 의한 것으로 간주해 버리니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데이몬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감히 내 요리실력을 무시하다니……." 율리아나는 이때다 하고 적시타를 날렸다. "억울하면 한 번 증명해 봐요. 이번에는 다른 요리로 말이에요. 마법을 쓴 것이 아니라면 분명 요리의 맛이 다를 거예요." 데이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다. 내 요리실력을 확실하게 증명해 주지." 그는 요리도구가 있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재료와 양념이 허락하는 한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 실력을 검증 받겠다고 거듭 다짐하며. 팬에다 재료를 쏟아 부은 뒤 기름을 두르는 데이몬. 그를 쳐다보던 율리아나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멍한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용병들의 시선과 마주치자 율리아나는 살짝 눈짓을 했다. 마치 '내 실력이 어때요?' 하고 물어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용병들은 하나같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정말 놀랍군.' '사람을 저렇게 가지고 놀 수 있다니……. 정말 무서운 여자야.' 정말 여우가 따로 없었다. 데이몬의 비위를 적절히 긁어 두 말 없이 요리를 하게 만든 실력은 한 마디로 말해 일품이었다. 심지어 고통에서 막 벗어난 미첼조차 혀를 내두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정말 율리아나의 수단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도리가 없군. 흑마법사 데이몬조차 농락할 수 있다니…….' 미첼에게 혀를 낼름 내민 율리아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요리를 다시 맛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감돌고 있었다. '호호호. 흑마법사라고 별 수 있겠어? 원래 한가지에 뛰어나면 그만큼 자부심도 높은 법이니까.' 조금 전에 했던 율리아나의 행동은 철저히 계산된 것이었다. 애교를 부리기가 죽기보다 싫었던 탓에 율리아나는 정반대의 전략을 구사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어김없이 먹혀 들어갔다. 데이몬이 연신 씨근거리며 요리에 몰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일행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데이몬은 요리에 열중해 있었다. '두고 보자. 네년의 혼을 빼놓을 정도의 요리를 만들어 대령할 테니…….' 사실 아까 만든 요리는 대충 만든 것에 불과했다. 단순히 한끼 끼니를 때울 목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데이몬은 재료가 허락하는 한 최고의 요리를 만들 생각이었다. '재료가 몇 가지 없어서 아쉽군. 양념 몇 가지만 더 있었다면 헬버트론을 반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황실요리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데이몬이 지금 만드는 요리의 재료는 반쯤 말린 양고기였다. 특유의 노린내가 있는 탓에 양고기로는 담백한 황실요리를 만들 수 없었다. 강한 맛을 내는 소스로 노린내를 없애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떠올리며 데이몬은 팬에다 기름을 살짝 부었다. 화르르르. 기름이 맹렬히 타오르며 양고기에 불이 붙었다. 재료가 적당히 그을린 것을 확인한 데이몬은 거기에다 양념을 첨가했다. 그의 오른 손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움직이며 요리의 간을 맞춰나갔다. 양념의 배합, 조리시간, 화력의 세기 등이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요리가 서서히 완성되는 것을 지켜보며 데이몬에게 별안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가만?" 혹시 자신이 율리아나의 계교에 넘어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감돌았다. 용병들의 애를 태우겠다는 것이 원래의 목적이었다. 따라서 그는 당분간 요리를 해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요리에 몰두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할수록 기이할 수밖에 없었다. 정황이 무척 미심쩍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데이몬은 미간을 지긋이 좁혔다. "그러고 보니 저년이?" 데이몬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율리아나의 동정을 살폈다. 요리를 뚫어져라 주시하던 율리아나는 얼른 딴청을 피웠다. 비로소 당했다는 사실을 직감한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나는 바로 자신의 장기인 격장지계를 거꾸로 자신에게 펼친 것이다. 장기에 도리어 넘어간 격이라서 데이몬은 인상을 구겼다. "당했군. 당돌한 계집."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요리실력을 검증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증명을 해야 했기 때문에. "다 되었다." 탕 소리나게 팬을 내려놓은 데이몬은 신경질적으로 율리아나를 쏘아보았다. 당했다고 생각하니 속이 조금 쓰렸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요리에서 풍기는 향긋한 냄새는 주위의 용병들을 여지없이 매료시키고 있었다. 맡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갈 정도의 향이었다. 요리를 보며 율리아나는 눈빛을 빛냈다. "그럼 시식을 한 번 해 보도록 하죠. 만약 마법이 아니라면 아까 먹은 요리와는 분명히 맛이 틀릴 테니 말이에요." "물론이다. 솔직히 말해 아까 만든 것은 끼니를 때우기 위해 대충 만든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것은 온갖 솜씨를 부려 만든 것이니 당연히 맛이 틀릴 것이다." "좋아요. 어디 먹어볼까요?" 율리아나가 식기를 들고 냉큼 팬 앞으로 붙어 앉았다. 식기 한 가득 요리를 덜어낸 율리아나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요리 한 점을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용병들은 긴장하며 율리아나의 반응을 살폈다. 쩝쩝. 요리를 씹던 율리아나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감돌았다. 뭔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 그것은 바로 요리에 대한 순수한 감탄이었다. 그녀는 지금껏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아까 먹은 요리도 맛있었지만 이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조리했는지 양고기 특유의 노린내가 전혀 나지 않았고 부드럽게 씹히는 촉감은 이것이 과연 고기일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혀의 오감은 그야말로 완벽히 충족되고 있었다. 씹는지 삼키는지 분간도 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녀의 얼굴에는 감탄의 빛이 역력히 배어 나왔다. '어, 어떻게 이런 맛을…….' 사실 율리아나는 요리가 아무리 맛있더라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그래야만 데이몬이 또다시 솜씨를 발휘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리의 맛 앞에서 율리아나의 다짐은 물거품처럼 스러져버렸다. 그녀조차 인정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요리의 맛은 훌륭했다. 정신 없이 식기의 음식을 퍼서 입으로 가져가는 율리아나. 데이몬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율리아나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500년 전 다프네에게도 이처럼 요리를 해 준 적이 있었지.' 뭔가를 회상하는 듯 데이몬의 눈에는 아득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당시 다프네는 자신이 만든 요리를 먹지 않았다. 오로지 과일만 먹어야 한다며 미소짓던 다프네의 서글픈 표정. 데이몬은 결국 만든 요리를 놔두고 그녀와 함께 과일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데이몬은 또다시 아련한 추억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그녀와 똑같이 닮은 율리아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주시하며……. 데이몬과 율리아나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던 용병들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요리를 향해 달려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애석하게도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 만든 요리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자신들에게 돌아올 몫이 없어 보였기에 애가 탈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율리아나는 또다시 팬 속의 요리를 식기에 옮겨 담고 있었다. 벌써 세 번째였고 요리는 이제 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정신 없이 먹는데 열중하는 율리아나의 귀에 데이몬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떤가? 먹을 만 해?" 고개를 끄덕이려던 율리아나의 머리 속에 갑자기 일말의 경고가 떠올랐다. 그것은 이렇게 쉽게 항복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데이몬의 요리를 앞으로 계속 즐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여지를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율리아나의 머리는 부산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몇 번 더 먹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잔머리를 쓴다고 썼지만 애석하게도 두 번 당할 데이몬이 아니었다. 그 역시 잔머리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었고 경험으로 미루어봐도 율리아나에게 뒤질 턱이 없었다. "그런가? 할 수 없지." 저벅저벅 걸어온 데이몬은 미련 없이 팬을 집어들었다. 음식을 먹던 율리아나는 깜짝 놀랐다. "아, 아직 다 먹지 않았는데……." "세 접시면 충분히 먹었잖아? 다른 녀석들에게 한 번 물어봐야겠어." 단호하게 몸을 돌린 데이몬은 팬을 들고 용병들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비로소 마음이 급해진 율리아나는 입 속의 음식을 다급하게 집어삼켰다. 팬을 다시 빼앗아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데이몬은 벌써 용병들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팬을 보고 눈빛을 빛내는 용병들을 향해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이번에는 너희들에게 기회를 주겠다. 요리를 한 점씩 맛보고 이것이 과연 마법으로 연출한 것인지, 아니면 순수한 요리실력인지를 분간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맛이 어떤지도 함께 말이다." 용병들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들로써는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22회. 순식간에 팬을 향해 쇄도하려는 용병들에게 데이몬은 따끔하게 주의를 주었다. "일렬로 줄을 서도록……. 차례를 어기는 녀석들에겐 기회가 없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용병들은 날렵하게 줄을 섰다. 물론 대장임을 입증하듯 카심이 가장 탁월한 몸놀림으로 맨 앞에 섰지만 말이다. 음식을 다 먹은 율리아나가 그때서야 달려와서 항의를 해 왔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먹던 음식을 가져가다니……." "맛보라고 준 것이지. 먹으라는 뜻은 아니었어. 더 먹고 싶다면 너도 줄을 서라."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마자 용병들은 율리아나의 얼굴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냥 내버려뒀다면 그녀는 분명히 음식을 깡그리 먹어버렸을 터였기에 용병들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그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입을 모았다. "그럼. 차례를 지켜야지." "그렇게 먹고도 모자란가?" 자신을 향해 퍼부어지는 시선을 견디다 못해 율리아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줄의 맨 뒤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율리아나가 해결되자 카심이 제일 먼저 팬 앞에 달라붙었다. 그는 기대 어린 시선을 빛내며 포크를 쭉 뻗었다. 물론 그 중에서 가장 큰 덩어리를 찍은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포크를 입 속에 집어넣은 카심은 심각한 표정으로 요리를 씹기 시작했다. 쩝쩝. "맛이 어떤가?" 데이몬의 질문이 이어졌지만 카심은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감히 할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판단이었다. 혀를 휘감으며 입안으로 번져나가는 요리의 오묘한 맛. 아까 먹어본 요리도 맛있었지만 이번 것은 더욱 훌륭했다. 간단히 말해 숨이 턱턱 막혀 올 정도로 황홀한 맛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맛이 없나보군." 귓가로 데이몬의 무미건조한 음성이 들려오자 카심은 정신 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제 생각에 크로센 제국의 황실 요리사도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마법으로 연출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나?"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아까와 맛이 똑같았겠지요. 정말 요리실력이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훌륭한 요리를 만드실 수 있다니……." 카심은 정신 없이 찬사를 쏟아냈다. 아까 범했던 실수를 만회하고 이따금 그의 요리를 맛보고 싶은 열망 때문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데이몬은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자네는 내 요리를 인정해 주는군. 다음." 카심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물러나자 미첼이 기대 가득한 시선으로 섰다. 개개인의 실력차이가 있는 만큼 줄을 서는 것도 철저히 실력 순이었다. 극도로 지친 탓에 카심에게만은 순번이 밀렸지만 말이다. 그를 보며 데이몬은 눈을 빛냈다. "자네 왕녀의 반응을 보니 카르셀 인들의 식성이 조금 남다른 것 같군. 자네는 과연 어떨지 모르겠어. 그러니 한 번 먹어보겠나?" 미첼은 대꾸도 없이 포크를 내밀었다. 코끝을 감도는 먹음직스러운 냄새 때문에 그는 이미 입맛이 잔뜩 동해 있는 상태였다. 검술실력을 과시하듯 미첼이 슬쩍 포크를 움직여 표시 나지 않게 요리 두 덩이를 찍었다. 여지없이 목격했지만 데이몬은 그냥 못 본 척 했다. 나름대로 꿍꿍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리를 입안에 넣은 미첼은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맛이 어떤가? 먹을 만 한가?" 형언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신 없이 입을 오물거리는 미첼.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엄지손가락을 불끈 치켜세웠다. "최곱니다. 아마도 아르카디아 전역을 통틀어도 이보다 맛있는 요리를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이런 요리는 마법으로도 만들 수 없지요. 암 그렇고 말고요." 카심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찬사가 입에서 흘러나오자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카르셀 인의 식성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자네를 보니 그렇지는 않은 것 같군." "그럼요. 얼마나 맛있는데요." "그렇다면 자네 왕녀의 미각이 조금 이상하다고 봐야겠군. 그녀 혼자만 맛을 모르겠다고 하니 말일세." 율리아나를 슬쩍 쳐다본 미첼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아시다시피 그녀에겐 조금 남다른 구석이 있거든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뒤통수가 뜨거워졌지만 미첼은 억지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중에 그녀에게 당하는 한이 있어도 일단 흑마법사를 달래놓아야 한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따금 그가 만든 요리의 맛을 보기 위해선 말이다. 물론 그것은 용병들의 공통적인 각오이기도 했다. 그가 시식을 마치자 용병들이 차례대로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 데이몬의 요리솜씨에 또다시 찬사가 집중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정말 맛있습니다." "마법의 연출이 아니고 말고요." "이런 요리를 먹어보고도 마법 운운하는 자는 아마도 정신이 나간 자일 겁니다." "신이 아니면 감히 이런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데이몬은 그때서야 어깨를 으쓱했다. 마치 상처받은 자존심이 치유된 듯한 눈빛이었다. 요리는 공교롭게도 율리아나의 차례 바로 앞에서 동이 났다. 그녀의 앞에 서 있던 하인리히가 마지막 요리 덩어리를 먹어치웠던 것이다. 그녀는 결국 텅 빈 팬 앞에서 씨근거려야만 했다. "치사하게 몽땅 먹어치우다니……." 그런 그녀를 보고 데이몬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넌 이미 충분히 먹었잖아. 어림잡아도 절반은 먹은 것 같은데……." "아직까지 확실하게 맛을 보지 못했단 말이에요. 따라서 이번 것은 무효예요. 요리를 평가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다음으로 미뤄야겠어요." "그런가? 할 수 없지." 데이몬은 추호도 미련이 남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짐짓 용병들을 쳐다보며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왕녀가 아직까지 맛을 모르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군. 따라서 앞으로는 자네들에게만 요리를 해 주겠네. 자고로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죽는 법이야. 때문에 맛을 인정해주는 자네들말고는 내가 만든 요리를 먹을 자격이 없어. 그렇지 않은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기에 용병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럼요.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런 오묘한 맛을 느끼지 못하는 종족은 오크 아니면 오우거밖에 없죠." "그렇게 생각하지?" 그것보라는 듯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편 데이몬은 율리아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보다시피 더 이상 요리를 평가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 다른 녀석들이 깡그리 인정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니까 말이야." 졸지에 닭 쫓던 개꼴이 되어버린 율리아나는 그저 입술만 꼭 깨물 수밖에 없었다. 데이몬에겐 한 번 쓴 수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실감한 채 말이다. 식사를 마친 일행들은 서둘러 여장을 꾸렸다. 크로센 제국까지의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데이몬과 율리아나는 멍하니 서서 용병들이 숙련된 솜씨로 캠프를 철거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막을 얼마나 자주 접고 폈는지 손놀림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조금 특이한 것은 미첼이 짐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는 점이다. 검술대련을 하며 정이 들었는지 이례적으로 용병들의 일손을 거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카심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미첼을 쳐다보았다. "고맙군." "뭐. 별 말씀을……." 미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천막을 접어 배낭 속에 집어넣었다. 극도로 거만했던 처음의 모습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한 태도였다. 그가 거든 덕에 짐 정리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카심이 데이몬에게 다가가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이제 열흘 정도만 지나면 여정이 끝납니다. 한나절 정도만 걸어가면 크로센 제국의 관문도시인 레이토나가 나오거든요. 거기서부터는 아르카디아 전역에서 모인 왕녀들과 함께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타국으로부터 오는 공간이동 마법진이 그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레이토나는 상당히 큰 도시죠. 그곳에서 말을 장만하여 열흘만 이동한다면 크로센 제국의 수도인 펠젠틴에 쉽사리 도착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왕녀들이 함께 가는 만큼 여정 동안에 위험할 것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죠." 카심의 말을 들은 데이몬은 모호한 눈빛으로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머지않아 헤어져야겠군. 고운 정보다는 주로 미운 정이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헤어진다니 조금 섭섭한 걸?." "………." 율리아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불퉁한 표정으로 바닥만 내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봐서 용병들과 헤어진다는 것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카르셀 왕국과 카심 용병단과의 계약은 엄연히 편도로 이루어졌다. 치안이 잘 유지되는 펠젠틴에서 굳이 용병들을 거느리고 다닐 필요가 없으므로 그곳에서 한 동안 머무른 뒤 돌아올 때 다른 용병단을 고용하려는 것이 율리아나의 원래 의도였다. 하지만 열흘 후면 헤어진다고 하니 그리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카심에게 더 없이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드디어 천고의 골치 덩어리를 떼버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미첼과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별로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며칠 동안 땀을 흘리며 검을 섞어 왔던 탓에 조금이나마 정이 든 터라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 카심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물론 거기엔 검술교습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아직까진 윈슬럿을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솔직히 미첼의 교습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아쉽군. 대략 2개월 정도만 더 교습 받는다면 윈슬럿과도 한 판 붙어볼 수 있을 텐데.' 카심은 미첼의 교습으로 인해 상당히 실력이 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나름대로 기본적인 공격과 방어에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미첼에게서 배운 기본기는 그보다 더 정묘했다. 펜슬럿의 근위기사단이 사용하는 검술인 만큼 완성도가 무척 뛰어났던 것이다. 때문에 미첼이 가르쳐주는 방법이 공격과 방어에 더 효과적이며 또한 힘이 덜 들어간다는 사실을 카심은 가슴속까지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사정이 있었기에 아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열흘 뒤 크로센 제국의 수도에 도착하면 그들 사이의 인연은 완전히 끝난다. 그때부터는 각자 갈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떠올린 카심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돈을 좀 넉넉히 쥐어줘야겠군. 카르셀로 돌아갈 때 쓸만한 용병단을 고용할 수 있게 말이야. 그녀에겐 분명 돈이 없을 테니.' 그렇게 따지면 첫 번째 청부는 이익이 전혀 나지 않는, 오히려 손해라고 볼 수 있는 임무였다. 하지만 카심은 하나도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청부 덕택에 자신들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때문에 카심은 그가 받은 청부금보다 오히려 더 많은 금액을 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솔직히 10골드 정도로는 쓸만한 용병단을 고용하기 힘들어. 적어도 15∼20골드 정도는 있어야 10명 가량의 용병 호위대를 고용할 수 있지. 게다가 여정 동안의 경비를 지불하려면 돈이 어느 정도 더 있어야 할 테고…….' 솔직히 말해 카심이 받은 10골드의 청부금은 용병단 관례상 말이 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그것도 일행의 숙식을 모조리 용병단에서 책임지는 불리한 조건 아니던가? 첫 청부라는 사실로 인해 받아들였지만 그 금액 정도라면 어떤 용병단도 고용할 수 없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지. 앞으로 우린 일절 청부를 받지 않을 테니. 우리의 목적은 오로지 드래곤 사냥이니까 말이야.' 터덜터덜 걸어가는 둘에게 시선을 보낸 카심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머지않아 헤어진다는 사실에 그들도 맥이 빠진 모양이었다. 용병들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조용하게 길을 걸어갔다. 물론 속으로는 기쁘기 한량없었지만 겉으로 드러낼 순 없는 노릇이니까. "잠깐." 데이몬의 경고성이 들려오자 용병들은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이미 세 번째로 겪어보는 일이라 누구 하나 놀라지 않았다. 데이몬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한 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한 손으로 수인을 맺고 있는 것을 보니 이미 탐색마법을 전개해 본 모양이었다. 데이몬은 이미 상당한 규모의 병력이 이리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상태였다. "토벌대로군. 팔라딘 급만 2백이 넘어. 테르비아 놈들, 우릴 잡으려고 아예 작정을 한 모양이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카심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그를 비롯한 용병들은 조금도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물론 팔라딘 급이 200명이면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전력이 아니지만 그들은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23회. 용병들은 그 정도로 데이몬을 믿고 있었다. 그들이 아는 데이몬의 실력이라면 팔라딘 200정도는 찜 쪄 먹고도 남을 정도였다.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놈들. 벌써 세 번째로군. 우리를 잡기 위해 아예 발악을 하는데?" "글세 말입니다. 팔라딘 급만 200명이면 근위기사단이 총출동을 한 것 같은데……." "고작 저 전력으로 날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보군. 어이가 없어서 원." 데이몬은 심사가 상당히 뒤틀린 모양이었다. "분통 터지는데 그냥 한 판 벌여버릴까?" 화가 치미는지 몸을 부르르 떠는 데이몬. 그를 쳐다보던 용병들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사실 그랜드 소드 마스터 급에 오른 데스 나이트 넷과 9서클의 마스터라면 200명의 팔라딘과도 충분히 겨룰 만 한 전력이었다. 자신들이 돕지 않는다 해도 승산은 이쪽에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은 데이몬이 걸려 있는 금제 칠종단금술에 대해서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쯔쯔. 그만두는 게 낫겠군. 아무리 날 잡으려 하는 놈들이라고 해도 죽이는 것은 그리 내키지 않아." "탁월하신 판단입니다." 용병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힘을 가진 자가 이처럼 자비심을 보이는 것은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경우였다. 물론 살인을 할 수 없다는 데이몬의 제반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고 말이다. 데이몬은 마나를 끌어 모으며 일행을 쳐다보았다. "모두 한데 모이게. 결계를 펼쳐 다시 한 번 저놈들 눈을 속일 터이니……." "알겠습니다." 용병들은 부랴부랴 데이몬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이미 세 번째로 겪는 일인만큼 움직임이 제법 일사분란했다. 모두 모여든 것을 확인하자 데이몬은 슬쩍 손짓을 했다. 쓰쓰쓰쓰. 일행을 축으로 마법진이 생겨나며 결계가 생겨났다. 결계는 일행들의 모습을 삽시간에 감춰버렸다. 마치 공간의 틈새로 꺼진 듯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상태로 일행들은 숨을 죽이며 토벌대가 속아넘어가기만을 기다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일단의 기마대가 이곳으로 들이닥쳤다. 두두두두. 일행이 몸을 숨긴 곳 부근에서 도착한 기마대는 일단 그곳에서 말을 세웠다. 가장 선두에 선 기사가 손을 뻗어 얼굴가리개를 치켜올렸다. 드러난 얼굴은 바로 테르비아의 근위기사단장인 필베르그의 것이었다. 그의 얼굴은 지금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곳도 아니로군. 그렇다면 혹시 반대쪽으로 갔나? 이상하군. 그쪽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는데.' 정찰병의 보고로 캠프의 흔적을 찾아낸 필베르그는 급히 뒤를 쫓아왔다. 테르비아 국왕의 지시대로 반드시 흑마법사를 회유하겠다는 다짐을 되새겨가며 말이다. 하지만 흑마법사와 그 일행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계속 탐문해가며 뒤를 쫓았지만 종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기에 필베르그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미치겠군. 어떤 일이 있어도 그를 찾아야 하는데 말이야. 일단 이곳까지 오지 않은 것은 확실한 것 같군.' 그가 서 있는 곳은 야트막한 산의 등성이 부분이었다. 산 아래로 관도가 쭉 뻗어 있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관도 위를 지나가는 물체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상인보다 훨씬 뛰어난 필베르그의 시선이 관도 위를 낱낱이 훑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그는 흑마법사 일행이 부근에 몸을 숨기고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할 수 없군.' 다른 곳을 수색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필베르그는 얼굴가리개를 다시 눌러썼다. "돌아간다. 이번에는 서북쪽 관도를 수색하기로 한다. 이랴." 히히히힝. 필베르그의 말이 푸레질을 하며 내닫기 시작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휘하의 근위기사들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근위기사단 전력의 3분지 2가 출동할 정도라면 이것은 정말 엄청난 임무였다. 그런 만큼 누구 하나 불평을 털어놓지 않았다. 두두두두. 이백에 달하는 기마병은 흙먼지를 맹렬히 풍기며 달려갔다. 그들이 찾는 자가 바로 지척에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쓰쓰쓰쓰. 일행은 그들이 사라지고 난 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멀어져 가는 먼지구름을 슬쩍 훑어본 데이몬은 몸을 빙글 돌렸다. "이만 출발하지." "알겠습니다." 카심의 지시에 따라 용병단은 이동을 시작했다. 반나절 거리에 위치한 크로센 제국의 관문도시 레이토나를 향해서 말이다. 한나절동안의 행군을 통해 일행은 마침내 레이토나의 지척까지 올 수 있었다. 카심이 얼른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저 고개만 넘어가면 레이토나입니다. 아마 저곳에는 각국의 왕녀들이 대거 머물고 있을 것입니다. 뭐 율리아나 왕녀와 같은 목적으로 모였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그들이 데리고 온 호위기사들까지 합치면 사람이 바글바글할 정도로 많을 것입니다." "왕녀를 호위하는 기사의 수는 얼마나 되지?" 카심은 미간을 지긋이 모았다. "대중없습니다만 강대국의 경우는 보편적으로 일백 명 내외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규모가 작은 왕국도 이십에서 오십 정도는 데리고 다니죠." "그렇게 많지는 않군." 카심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순수한 호위기사의 수를 칭한 것입니다. 기사들의 종자나 마부, 그리고 일반 호위병사까지 합친다면 인원수가 족히 세 배에서 다섯 배까지는 늘 것입니다." "그런가?" "예. 아마도 타국의 왕녀들은 시일에 맞춰 레이토나로 직접 공간이동을 해 왔을 겁니다. 그곳이 공식적으로 공간이동을 할 수 있는 장소이니까요. 레이토나에서 펠젠틴까지 정확히 일주일 거리이므로 아마도 내일쯤 출발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모두 모여 출발한다면 위험도가 그만큼 적으니까요." "하긴 호위기사들이 모두 모이면 수가 엄청날 테지……." 말을 마친 데이몬은 슬쩍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와 미첼은 묵묵히 짐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으니 카르셀의 문장이라던지 깃발 같은 것을 챙기는 모양이었다. 한데 모여 가는 것이기 때문에 소속 국가를 증명하는 문장이 필요한 법이었다. "여기 있군." 미첼이 짐 속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깃발이었다. 잘 접혀 있긴 했지만 꺼내어 펼치자 심하게 구겨진 부분이 한 눈에 보였다. 억지로 펴려고 했지만 구겨진 부분은 잘 펴지지 않았다. 인구 1만 미만의 소국답게 카르셀의 깃발은 상당히 수수한 편이었다. 비상하는 독수리의 형상이 아로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 카르셀이라는 국가명이 평범한 글씨체로 수놓아진 상태였다. 드문드문 금실이 보이는 것을 보니 시골 영지의 영주 정도가 문장으로 삼을 법한 평범한 깃발이었다. 깃발을 들여다보던 미첼이 난감한 듯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예복을 어떻게 하지? 율리아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뭐 산중에서 잃어버렸으니 할 수 없잖아? 그대로 갈 수밖에 없지. 궁정에 입궐할 때나 한 벌 장만하도록 해야지. 뭐." "그럴까?" 마뜩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율리아나도 난감하긴 한 모양이었다. 여러 왕녀들을 만나는 자리에 낡은 평상복을 입고 가야 하니 말이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측은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녀가 예복을 잃어버린 이유는 바로 자기 때문이었으므로. '예복도 갖추지 못하고, 거기에다 달랑 호위기사 하나에다 나머지는 모두 용병이라니……. 다른 왕녀들이 업신여길 것이 불 보듯 뻔하군.' 그것은 언뜻 생각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거대 제국 크로센으로 왕녀를 보내는 입장이라 각 왕국에서 준비를 가볍게 할 리가 만무했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돋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국가 전체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었기 때문에 호위 기사에서부터 복장, 병사들, 심지어 타고 가는 마차에까지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번쩍번쩍하게 차려입고 올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율리아나의 형편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후줄근하게 때가 탄 평상복에 마차도 없이, 게다가 호위 기사가 아닌 용병들의 호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왕녀들이 알게 된다면 한 마디로 웃음거리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을 떠올린 데이몬은 미소를 머금었다. '가관이겠군. 저 성질에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참아 넘길 턱이 없으니…….' 그런 데이몬의 내심도 모른 채 율리아나와 미첼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는데 바빴다. 머리와 옷의 매무새를 대충 정리한 뒤 미첼은 깃발을 들고 몸을 폈다. "이만 출발해 볼까?" 미첼을 쳐다본 율리아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왜 갑옷을 안 입어? 넌 흑마법사에게서 훌륭한 갑옷을 얻었잖아?" "한심하기는……. 왕녀가 평범한 차림인데 호위기사의 차림새가 훌륭하면 되겠어? 난 나름대로 생각해서 안 입은 거라고……." "하긴……."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율리아나는 말없이 몸을 돌렸다. "출발할까요?" 보고 있던 카심은 묵묵히 출발명령을 내렸다. 일행은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산등성이만 넘어가면 바로 레이토나가 보일 터였다. "레이토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정중하게 말을 걸어오는 병사를 쳐다보며 카심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초강대국 크로센의 수문 병사답게 체격이 무척 당당했으며 동작에 절도가 배어있었다. "펠젠틴에서 벌어지는 황태자비 간택식에 참석하기 위해 온 것이오. 우린 왕녀님의 호위를 맡은 용병들이고." "그, 그렇습니까?" 병사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움이 가득했다. 지금까지 무수한 왕녀 일행이 들어갔지만 이렇게 초라한 행렬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식에 참가하는 왕녀들은 하나같이 최고급 옷과 마차로 치장했고 심지어 호위병의 복장까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말 그대로 한껏 멋을 내고 온 것이다. 지금껏 지나간 행렬 중 가장 규모가 작은 경우도 총 인원이 백 명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기록을 갈아치우게 생겼으니……. 마차도 없이 호위를 용병들에게 맡긴 경우는 맹세코 처음이었기에 병사는 마뜩찮은 눈빛으로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일행 중 유일한 여성이었으니 그녀가 분명히 왕녀일 터였다. 용모는 별도로 치더라도 왕녀라 하기엔 차림새가 너무 초라했다. 조금 전 통과했던 무리의 시녀가 입고 있는 복장도 그녀보다는 화려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애당초 왕녀의 차림새에 왈가왈부할 신분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병사는 별 의심 없이 그들을 통과시켰다. 어차피 검문이 목적이 아니었으니 절차는 무척 간단했다. 저벅저벅. 용병들은 천천히 성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문 안쪽에는 상당히 많은 병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의 놀란 눈빛이 집중되었지만 율리아나는 꿋꿋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내심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라 돌아버릴 지경이었지만. 조금 걸어가자 일행들의 앞에 시원스레 뻗어나간 레이토나의 시가지가 펼쳐졌다. 크로센 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도시답게 레이토나는 시가지가 잘 정돈된 수려한 도시였다. 지저분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을 보니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로변에는 무수한 식당과 여관들이 밀집해 있었다. 새로 지은 듯한 건물들이 많이 보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황태자비 간택식에 참가하는 왕녀들을 목적으로 새로 개업한 여관인 듯 했다. 하나같이 꽃단장을 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갖춰 놓은 상태였으니 말이다. '상술은 중원이나 이곳이나 별반 차이가 없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데이몬은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선두에 서서 걷던 카심의 걸음이 뚝 멈춰졌다. "뭔가 이상한데요?" "뭐가 말인가?" 카심은 손가락을 뻗어 늘어선 여관 쪽을 가리켰다. "거리가 너무 한산하지 않습니까? 이미 수십 개 왕국에서 많은 왕녀들이 와서 머물고 있을 텐데……. 마차는 뒤에다 대어놓았다 쳐도 기사들이 타고 온 말은 십중팔구 여관 앞에 묶어 놓았을 겁니다. 마굿간에 보관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여관 앞이 너무 허전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랬다. 앞에다 말을 묶어놓은 여관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여관들이 허전할 정도로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카심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쯤은 모든 여관들이 사람들로 바글바글해야 정상입니다. 사실 전 방을 잡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최악의 경우 마굿간에서 자는 것도 예상했었죠. 그런데 저것 보십시오. 지금 점원들이 손님을 붙잡기 위해 대거 나와있지 않습니까?" 일리가 있다는 듯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손님이 꽉 차 있다면 점원들이 호객할 엄두를 내지 못할 테지. 접대하기에도 바쁠 테니 말이야." "벌써 떠나지는 않았을 텐데 이상하군요. 빨리 갈 필요가 없을 텐데……." 카심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24회. 멀뚱멀뚱 서 있는 일행을 보고 점원 몇 명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레이토나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희 여관은 완벽한 단장을 마치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새로 지었기 때문에 결코 후회하시진 않으실 겁니다." 점원들은 각기 소속된 여관의 이름를 들먹여가며 호객하는 데 바빴다. 그것을 보아 손님이 없다는 것이 사실 같았다. 카심이 나서서 모르는 척 이유를 물어보았다. "무슨 일인가? 왕녀들이 벌써 펠젠틴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겠지?" "그, 그건……." 점원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모두가 주저하며 얼른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영악해 보이는 점원 하나가 능글맞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먼 길을 오셨을 텐데 일단 들어가서 피로를 푸시지요. 식사를 마친 뒤 시청에 가보신다면 모든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얼렁뚱땅 얼버무리려는 것을 보니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카심은 고개를 돌려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일단 시청에 가서 사정을 알아보시지요. 뭔가 변동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럴까요?" 일행은 즉각 시청 쪽으로 향했다. 변동사항이 있다면 빨리 알아보는 것이 상책이었다. 호객에 실패한 점원들은 일행의 뒤를 쳐다보며 속으로 온갖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제길. 또 실패로군. 그런데 저것들도 왕녀 일행인가?' '설마 아니겠지? 용병들이 섞여 있는 것을 보니 평범한 여행자인 것 같군. 그러나 저러나 우리 주인은 이제 난리 났군. 전 재산을 털어 여관을 개업했는데 말짱 물거품이 되어버렸으니 말이야.' 시청은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다. 그리고 카심이 기대했던 장면은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각 국에서 모여든 왕녀들이 호위기사들과 함께 진을 치고 있는 장면 말이다. 놀랍게도 그들은 여관에 묵지 않고 시청 앞 광장에 운집해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선 마차의 행렬에 일행은 입을 딱 벌렸다. "햐." "정말 많군." 시청 앞 광장은 온통 마차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같이 화려하게 장식된 고급 마차들이었다. 왕녀의 호위기사로 보이는 기사들이 화려한 갑옷을 걸친 채 마차 옆에 도열해 있었다. 실력보다는 용모를 보고 뽑았는지 하나같이 미남이 아닌 자가 없었다. 잘 생긴 얼굴을 과시하려는 듯 기사들은 하나같이 얼굴 가리개를 올리고 있었다. 아예 투구를 쓰지 않은 녀석들도 있었다. 그들을 둘러보던 카심이 율리아나를 돌아보았다. "안쪽에 줄이 쳐진 것을 보니 마차는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저희에겐 마차가 없으니 그냥 들어가도 될 듯 싶군요." "그래요." 율리아나의 승낙이 떨어지자 일행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와 늘어선 기사들 사이를 지나 시청 쪽으로 걸어가는 일행을 보자 늘어선 호위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저히 그렇게 보이지 않는 자들이 안쪽으로 들어가니 어안이 벙벙했던 모양이었다. "저들은 누구지? 설마 간택식에 참가하려는 왕녀는 아니겠지?" "글쎄? 깃발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카르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왕국이잖아?" "모두 용병들이로군. 기사로 보이는 녀석은 단 하나 뿐인데? 그것도 갑옷도 입지 않은." "허. 참. 기가 막혀서. 이런 경우도 있나……." 기사들은 비웃음 섞인 표정으로 한 마디씩 뱉어냈다. 노골적으로 손가락질을 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용병들이 호위를 맡는 왕녀 사절단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용병들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이런 반응쯤은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율리아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니 부아가 극도로 치밀어 오른 모양이었다. 모멸감은 이미 그녀가 참을 수 있는 한계에까지 달해 있었다. 기색을 간파한 카심이 적절하게 주의를 주었다. "참으십시오. 아랫것들의 말에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쨌거나 당신은 당당한 카르셀의 왕녀입니다." "그, 그래도……." "괜히 반응했다간 고작해야 카르셀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격이 됩니다." 카심의 조언이 효과가 있었던지 율리아나는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론 기사들이 손가락질을 하건 말건 과감히 무시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동안 카심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마차에 걸린 문장들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생각보다 마차가 그리 많지는 않군.' 이곳에 모인 마차의 수는 카심의 예상보다 적은 편이었다. 그나마도 어지간히 이름이 알려진 왕국의 문장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마차에 군소왕국의 문장이 걸려 있었다. 10년에 가까운 용병생활로 인해 카심은 각 왕국의 문장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전쟁이 직업인 용병이 적국이 될 지도 모르는 나라의 문장을 모른다면 말이 되지 않는 법이었으므로……. 그런데 문장을 눈여겨보던 카심은 뭔가 이해할 수 없었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강대국의 문장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거지?" 그것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열심히 걷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을 길게 할 순 없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일행은 마침내 앞 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위의 시선에 시달리느라 거리가 더욱 길게 느껴졌지만 말이다. 정확히 줄이 쳐진 곳부터 마차의 대열이 끝나 있었다. 대신 그곳에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아름다운 여인들과 멋들어진 갑옷을 걸친 기사들이 이리저리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표정들이 심각한 것을 보니 뭔가 고민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을 둘러보던 카심이 안색을 굳혔다. "저들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군요." "무슨 일일까요." 의아한 듯 되묻는 율리아나의 반문에 카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아직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저 앞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빨리 가요. 저것들의 눈빛은 더욱 기분 나쁘니까." 아닌게 아니라 상황은 더욱 절박하게 변해 있었다. 이리저리 모여 회의를 하던 왕녀들의 시선이 일행들에게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 "재들은 뭐지?" "설마 우리와 같은 목적으로 오지는 않았겠지?" 모인 왕녀들은 하나같이 휘황찬란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평민들은 감히 구경도 할 수 없는 비싼 옷감으로 만든 옷을 걸친 데다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들 정도로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단 모습이 마치 인형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구름처럼 틀어 올린 머리에는 예외 없이 귀금속이 빛나고 있었다. 심지어 드레스 자락에 빼곡이 보석을 박아놓은 경우도 있었다. 말 그대로 사치의 극치를 달리는 차림새들인 것이다. 심지어 그녀들의 뒤에 시립해 있는 시녀들의 복장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한 마디로 율리아나가 하고 있는 차림새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왕녀들의 비웃는 듯한 시선을 받고 있으니 율리아나로써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참지 못한 율리아나는 소리를 빽 질렀다. "뭘 봐! 이것들아." 그녀의 반응에 대경실색한 카심이 다급하게 말리려 들었지만 율리아나는 도무지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아까는 아랫것들이라서 참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라요. 나도 저것들과 똑같은 왕녀란 말이에요." 대답할 말을 잃어버린 카심이 입을 다물자 율리아나는 더욱 기세 등등하게 행동했다. 쳐다보는 왕녀들의 시선을 고스란히 맞받으며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 처음 보냐? 내가 뭐 우리 안의 고블린으로 보여? 확 눈깔을 뽑아버릴까 보다." 율리아나의 기세에 찔끔한 왕녀들은 결국 시선을 돌렸다. 화가 치밀었는지 옆에 시립해 있는 기사들이 검자루를 불끈 쥐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설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왕녀를 모욕한 자가 남자였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달려들었겠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일행이 지나가고 나자 뒤에 남은 왕녀들은 그때서야 온갖 욕설을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뭐 저리 교양 없는 계집이 다 있지?"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한 모양이군." 그녀들의 화풀이에는 휘하 기사들까지 가세했다. "참으십시오. 왕녀님. 상대할 가치도 없는 계집입니다." "보나마나 산골 무지렁이가 분명합니다. 보나마나 도박하는 심정으로 달려들었겠지요." 이런저런 곡절을 거쳐가며 일행은 마침내 목적했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탁자 몇 개가 놓여 있었고 사무관으로 보이는 중년인 몇이 피곤한 기색으로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카심이 그것을 보고 눈을 빛냈다. "이곳에 임시 사무실을 차렸나 보군요. 저기에다 참가신청을 하는 것 같습니다. 우선 저곳으로 가시지요." 일행은 묵묵히 책상이 놓여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그들을 향해 또다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놀람과 비웃음이 섞여 있는 반응은 아까와 동일했다. 하나같이 우습다는 표정으로 일행을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황태자비 간택식에 참가하러 온 왕녀는 아니겠지? 하는 듯한 눈빛. 율리아나는 그런 시선들의 기대를 꺾어버리려는 듯 비어있는 책상으로 곧장 나아갔다. 일행이 찾아간 책상에는 나이가 지긋한 늙은이가 앉아 있었다. 가슴팍에 새겨진 문장을 보니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 같았다.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아 업무에 무척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율리아나가 냉큼 의자에 앉자 그는 전혀 뜻밖이라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차림새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전혀 왕녀로 보이지 않는 소녀가 의자에 앉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곧 질문이 퍼부어졌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 자리는 아무나 앉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 말에 율리아나의 눈썹이 급격히 휘어졌다. "이 자리가 도대체 무슨 자리죠?" 율리아나의 반문에 늙은 관리는 눈을 끔뻑거렸다. "그, 그야 황태자비 간택식에 참가하려는 왕녀님들을 위해 마련한 자리이지요." "그런데도 내가 온 이유를 모르겠어요? 난 간택식 참가신청을 하러 온 카르셀의 왕녀예요." "그, 그렇습니까?" 관리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허름한 차림새의 소녀가 왕녀라는 말이 전혀 뜻밖이었던 것이다. 허겁지겁 서류를 준비하려던 그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지금까지 카르셀이란 국명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기에 다시 한 번 확인하려는 것이다. "죄송하지만 카르셀 왕국에서 발급 받은 문장을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율리아나는 말문이 탁 막혔다. 잃어버린 문장을 내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그건 잃어버렸는데……." 관리의 얼굴이 갑자기 냉랭하게 변했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서류를 덮었다. "신분이 확인되지 않는다면 내막을 설명해 드릴 수 없습니다." 율리아나로써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카심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신분에 대해서는 내가 보증하겠소. 난 그녀의 호위를 맡은 용병단의 대장이오. " 관리의 시선이 슬그머니 카심에게로 향했다. 왕녀의 호위를 용병단에게 맡긴다는 말이 금시초문이긴 했지만 그래도 용병대장의 보증이라면 어느 정도는 신빙성이 있다고 봐야 했다. 물론 용병길드에 소속된 자여야 하지만 말이다. 카심의 말을 확인하려는 듯 관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길드에 등록된 용병단이겠지요?" "그렇소. 여기 용병수첩이 있소." 카심의 용병수첩을 받아든 관리는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카심은 수첩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베르텍에게 빼앗긴 용병들의 소지품은 그들이 수감된 마차의 뒤에 실려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드래곤의 브레스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차에서 빠져나온 카심은 가장 먼저 그것부터 챙겼다. 영업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용병수첩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훑어본 관리는 용병수첩을 다시 카심에게 내밀었다. "흠. 좋소." 의심이 사라졌는지 관리는 다소 조심스런 태도로 율리아나에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럼 설명 드리겠습니다. 실은 저희 쪽에서 먼저 용서를 구할 부분이 있습니다." 카심의 보증으로 궁지에서 벗어난 율리아나가 얼른 되물었다. "뭐죠?" 그러나 자초지종을 듣고 난 율리아나는 깜짝 놀랐다. 관리는 지금 불가피한 사정으로 황태자비 간택식이 연기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열흘 후로 예정된 황태자비 간택식은 1년 후로 연기되었습니다. 저희 쪽에 불가피한 일이 생겨서 부득이하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었기에 그녀는 황당해 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그렇다면 미리 통보를 했어야지요." "며칠 전 마법 통신을 통해 모든 왕국에 빠짐없이 통보를 했습니다. 저희들은 그전에 출발하신 분들을 위해 파견 나온 것이지요." "아무리 그래도……." 율리아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5년 전부터 예정되었던 황태자비 간택식이 이렇게 갑작스레 연기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25회. 공식적으로 각 왕국에 통보된, 그것도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비를 맞아들이는 간택식이 이처럼 갑자기 연기되는 일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국가 이미지를 생각하더라도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현실로 다가온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마법 통신으로 통보했다고 하니 걸어오느라 받지 못한 잘못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말의 책임감을 느꼈는지 관리는 거듭 고개를 조아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대신 돌아가실 여비를 저희 쪽에서 준비했사오니……." 그 말에 율리아나가 발끈했다. 관리를 상대로 단단히 화풀이를 하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지금 돈이 문제예요?" 언성이 높아지자 또다시 시선이 집중되었다. 대부분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왕녀들의 비웃음 섞인 시선이었다. 그것을 느낀 카심이 묵묵히 율리아나를 달랬다. "그만 하십시오. 왕녀님. 어차피 그의 잘못이 아니잖습니까? 그는 단순히 윗사람의 지시를 따를 뿐입니다." 율리아나는 그 말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그녀는 카심에게만은 함부로 하지 못했다. 여러 번 신세를 졌다는 것도 있었지만 일행 중에서 카심의 판단력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후 율리아나는 카심의 판단을 단단히 신뢰하고 있었다. "알았어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율리아나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보자 관리가 다급하게 서류를 펼치며 그녀를 불렀다. "여, 여비를 받아 가십시오." "필요 없어요." 딱 잘라 거절한 율리아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자신을 향해 집중되는 시선을 느끼자 또다시 부아가 치밀었지만 그녀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두 번 다시 이런 자리에 온다면 성을 갈겠어' 용병들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했지만 너무나도 허무한 결말이었다. 카심이 조용히 그녀를 달랬다. "일단 여관에다 방을 잡고 이후의 일에 대해 의논하기로 하죠." "그래……요." "돌아가시는 길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제가 충분히 신경을 써 놓았으니까요." 율리아나는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여정의 허무한 말로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 상태로 율리아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올 때까지. "이게 도대체 뭐 하자는 것이오?" 책상이 있는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크나큰 항의소리. 이유가 대충 짐작되었지만 워낙 목소리가 컸기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책상 쪽으로 집중되었다. 떠나려던 율리아나와 용병들도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호리호리한 체격의 기사 하나가 관리를 향해 기세 좋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통보를 했다면 다요? 불원천리 먼 걸음을 했거늘 막상 도착하고 나서 식이 연기되었다니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요?" 화가 잔뜩 난 듯 눈을 부라리고 있는 사내는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미남자였다. 전신에 화려한 갑옷을 걸치고 있었고 한 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고급 장검을 허리에 매달고 있었다. 투구를 쓰지 않아 수려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마치 깎아만든 조각상처럼 흠잡을 데 없이 잘생긴 얼굴에다 놀랍게도 머리색이 백발이었다. 노인들의 것처럼 꺼칠한 백발이 아니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보기 좋은 백발을 허리어림까지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머리색이었기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조금 뒤 왕녀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머! 정말 잘생겼네?" "어느 누구의 호위기사일까? 도대체 어떻게 해서 저렇게 멋진 사람을 구했을까?" 몇 몇 왕녀들의 시선은 벌써 몽롱해져 있었다. 백발 기사의 용모는 그 정도로 멋들어졌다. "허. 참." 상담을 맡은 관리는 상당히 난감한 기색이었다. 모시고 온 왕녀는 식이 연기되었다는 말에 별달리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정작 그녀가 데리고 온 호위기사가 더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잘못을 이쪽에서 범했으므로 예의를 지켜 사과를 거듭했지만 백발의 호위기사는 막무가내였다. 묵묵히 듣고 있어도 화가 치밀어 오를 정도로 말이다. '젠장. 아까는 촌뜨기 계집이 난리를 피우려하더니 이번에는 웬 천둥벌거숭이가?' 그렇다고 가볍게 볼 수 없는 강대국의 호위기사도 아니었다. 테렌베티라는 북부의 인구 10만 남짓한, 별로 강하지 않은 왕국에서 온 기사였다. 관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어지간한 강대국들은 간택식을 연기하겠다는 통신을 받고 왕녀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보유한 마법사가 충분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왕녀 일행을 출발시키지 않았고, 그 때문에 헛걸음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군소 왕국이었다. 그 정도 왕국에서는 수십에서 백 명에 달하는 인원을 동시에 출발시킬 정도의 실력의 마법사를 보유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런 왕국에서는 매일 몇 명씩 공간이동을 시키던지, 아니면 마차로 이동하는 따위의 방법으로 출발을 시켰다. 그 때문에 마법통신을 받고도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상당히 많은 왕국의 왕녀들이 이곳까지 와서야 식이 연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식이 연기된 데 불만을 품은 왕녀들이 없진 않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초강대국 크로센 제국에서 결정된 일이기 때문에 드러나게 항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불만을 품은 경우라 해봐야 고작해야 통보를 해 준 관리를 대상으로 화풀이를 할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그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자가 있었으니……. 그것도 왕녀 본인이 아닌 그녀를 호위해 온 호위기사에 불과한 자가 말이다. 그는 지금도 말도 되지 않는 요구를 늘어놓고 있었다. "책임지시오. 당신네들이 1년 동안 우리에게 머물 거처를 마련해주고 지루하지 않도록 여흥을 마련해 주어야 하오. 그래야만 용납할 수 있소." 말이 되지 않는 요구라서 관리는 속을 부글부글 끓여야만 했다. 상대는 도대체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자였다. "그런 요구는 불가하오.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돌아가는 경비를 지원해 주는 것뿐이오." "흥. 그깟 푼돈으로 무마하려는 것이 말이나 되오? 테렌베티에서 이곳까지 얼마나 먼지 한 번 생각 해보았소?" 결국 관리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윗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듯 그는 왕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테렌베티의 왕녀는 갓 스물이 넘어 보이는 상당히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여타의 왕녀와 마찬가지로 온갖 귀금속과 장신구로 치렁치렁 치장한. 특이한 것은 그녀가 무척 불안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고 특히 백발의 기사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극도의 공포감이 담겨 있었다. 놀랍게도 휘하의 기사에게 겁을 먹은 것같이 말이다. 하지만 관리는 미처 그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왕녀님의 생각도 휘하 기사님과 같으십니까?" "나, 난……." 우물쭈물하던 왕녀는 기사의 눈총을 받자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아요. 그의 뜻이 곧 바로 나의 뜻이에요." 그녀의 말을 듣자 관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없군요. 일단 상부에다 보고를 올려보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결정이 어떻게 내려질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분히 엄포가 깃들어있는 발언을 내뱉은 뒤 관리는 몸을 돌렸다. 뒤에 대기하고 있는 마법사를 통해 수도로 마법 통신을 취해 보려는 것이다. 소동을 보고 있던 왕녀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너무 무리한 요구 아닐까요?" "글쎄요. 어찌 보면 합당하긴 한데……. 애초에 약속을 어긴 것은 크로센 제국 측이니 말이에요." "그나저나 테렌베티의 왕녀도 담력이 대단하군요. 크로센 제국을 상대로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다니……." "무엇보다 멋진 것은 그녀의 호위 기사예요. 어쩌면 저렇게 당당한 태도로 거침없이 요구조건을 제시할 수 있죠?" "글세 말이에요." 놀랍게도 대부분의 왕녀들이 백발의 기사 편을 들고 있었다. 잘 생긴 용모와 거침없는 언변이 그녀들의 마음을 여지없이 사로잡은 탓이었다. 보고 있던 율리아나도 한 마디 내뱉었다. 물론 여타의 왕녀들과는 반응이 판이하게 달랐지만. "무척 잘난 척 하는 녀석이군요.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을 거침없이 늘어놓으니……." "글세 말입니다. 제국 측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뻔한데다 뒷일을 생각하면 결코 저렇게 나갈 수 없을 텐데……. 카심도 이해할 수 없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치가 빠른 그는 테렌베티 왕녀의 수상쩍은 태도에 이미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군요? 이상하게도 저 왕녀가 휘하 기사를 두려워한다는 느낌이 드니 말입니다." "설마. 왕녀가 어찌 휘하의 호위기사를 두려워하겠어요. 미첼같은 녀석이 아닌 다음에야……." 말을 마친 율리아나는 샐쭉한 눈빛으로 미첼을 쳐다보았다. 용병들과 헤어졌을 때 산 속에서 당했던 일이 비로소 떠올랐던 것이다. 지은 죄가 있는지라 미첼은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 때의 일이 밝혀진다면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 일을 발설하진 않겠지?' 영문을 모르는 용병들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 때 데이몬의 경고성이 들려왔다. "모두 조용히 해라." 그 말에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데이몬에게 집중되었다. 놀랍게도 그의 얼굴은 지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뭔가를 발견한 듯한 눈빛. 그의 시선은 지금 백발의 기사에게로 꽂혀 있었다. 아무래도 그에게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 같았다. 카심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하지만 데이몬은 묵묵부답 대꾸가 없었다. 그저 잔뜩 긴장한 채 백발의 기사를 뚫어지게 주시할 뿐이었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기사도 고개를 돌려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기사의 얼굴에 놀랍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틀림없군." 데이몬은 심각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정황을 보아 상대는 사람이 아니었다. 강력한 마법으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대륙 최강의 종족. 데이몬은 지금 상대가 드래곤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드래곤 말이다. 처음 봤을 때에는 별달리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의심을 품은 것은 조금 전 모종의 기운이 자신을 휩쓸고 지나갔을 때였다. 그 때 데이몬은 등골이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탐색마법의 기척이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데이몬은 잔뜩 긴장한 채 주위를 면밀히 살폈다. 자신에게 탐색 마법을 전개한 존재를 찾으려는 것이었다. 조금 전 그를 핥고 지나간 탐색마법의 재배열횟수는 언뜻 보아도 인간의 수준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대충 살펴보아도 8서클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드래곤이 아니라면 결코 그 정도의 마나 배열을 할 수 없었다. '날 잡으러 트루베니아에서 건너 온 녀석인가?' 주위를 면밀히 살피던 데이몬의 시선이 가서 멎은 곳은 한참 난리를 피운 뒤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백발의 기사였다. 공교롭게도 둘의 시선이 딱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백발의 기사는 이미 데이몬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데이몬은 기사의 눈초리에서 놀란 듯한 빛을 간파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것을 뜻한다. '저놈이로군.' 데이몬은 역으로 상대에게 탐색 마법을 펼쳤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26회. 결과는 놀라웠다. 데이몬은 상대의 수준을 전혀 간파하지 못했다. 그것을 보아 백발의 기사는 분명히 평범한 자가 아니었다. 어지간한 수준의 기사라면 분명히 몸 속에 마나를 축척해 놓았을 테지만 상대에게서는 마치 안개에 휩싸인 듯한 모호한 반응만 감지되었다. 자신보다 수준이 높은 마법사에게서 느낄 법한 반응이었기에 데이몬은 결국 결정을 내렸다. '잘 되었군. 속전속결. 다른 녀석들이 끼여들기 전에 빨리 끝내야겠군. 일단 부근의 드래곤은 한 놈 뿐인 것 같으니…….' 그는 고개를 돌려 용병들을 쳐다보았다. "모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도록 해라." "무, 무슨 뜻인지?" 영문을 모른 용병들은 눈빛만 희번덕거릴 뿐이었다. "아무래도 저 자는 인간이 아닌 것 같다." 데이몬의 설명에 용병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발의 기사는 아무리 봐도 잘 생긴 미남에 불과했다. 백발이 조금 이질적일 뿐이었다. 그런 자가 인간이 아니라니……. 카심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기사를 쳐다보았다. "그럼 뭐죠? 혹시?" 데이몬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저 녀석은 아무래도 드래곤일 가능성이 높다.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드래곤 말이다. 머리색을 보니 화이트 드래곤 같군. 아닐 수도 있지만." 용병은 순식간에 등골이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난데없이 드래곤이라니……. 보통 사람은 평생 가도 드래곤의 모습을 구경할 기회가 없다. 그런데 한 달도 되지 않는 동안에 두 마리의 드래곤을 보게 되다니……. 눈치 빠른 카심이 얼른 짐을 내려놓았다. "저희가 어떻게 대처하면 됩니까?"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데이몬은 용병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이곳에 있도록 해라. 저놈은 데스 나이트들과 내가 처리하겠다." "아, 알겠습니다." 아직까지 드래곤을 상대할 실력이 없었으므로 용병들은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심하도록." 말을 마친 데이몬은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백발의 기사를 향해서 말이다. 데이몬이 자신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자 백발의 기사는 조금 당황한 듯 했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은 채 주위를 느긋하게 둘러보았다. 그의 몸에서는 당당함이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지상에서 제일 강력한 종족이었기 때문이었다. '놀랍군. 인간들 사이에 9서클의 마스터가 있다니……. 하지만 상관없지. 날 위협할 존재는 이 중에서 하나도 눈에 띄지 않으니. ' 데이몬의 예상대로 그는 드래곤이었다. 카트로이라는 이름을 가진 웜 급 화이트 드래곤이었고 아르카디아 북부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다 이번에 인간 세상에 내려오게 된 것이다. 아르카디아를 거의 점령하다시피 한 인간이란 종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일종의 유희를 즐기고 있는 셈이다. 트루베니아처럼 아르카디아에도 상당수의 드래곤이 거주하고 있었다. 수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들은 대륙 최강의 존재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레어에 콕 틀어박혀 다른 종족과 일체 교류를 하지 않았다. 트루베니아의 드래곤과는 달리 여간해서는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들과의 접촉이 극히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아르카디아에 인간이 살게 된 것이 불과 500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대륙에 살면서도 두 종족은 거의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오랫동안 많은 인연들, 주로 악연을 쌓아왔던 트루베니아와는 경우가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아르카디아의 드래곤들은 인간이란 종족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드래곤들은 인간에 대한 관심을 끊고 자신만의 철옹성인 레어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지만 거기에도 예외가 있었으니……. 카트로이는 아르카디아에서 인간들이 번창하는 동안 줄곧 수면기에 빠져 있던 드래곤이었다. 잠을 자는 동안 성룡으로 성장한 것이다. 수면을 마치고 일어난 카트로이에게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인간이라는 하찮은 종족이 아르카디아를 거의 장악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휘하의 가디언으로부터 그 사실을 전해들은 카트로이는 인간에 대해 상당한 호기심을 가졌다. 신경도 쓰지 않는 다른 드래곤들과는 달리 카트로이는 호기심이 무척 많았던 것이다. "놀랍군." 카트로이는 마침내 인간이란 종족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카트로이는 부근의 주민들을 상당수 잡아다 심문을 통해 인간에 대한 지식을 쌓아나갔다. 그 과정에서 카트로이는 상당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개개인으로 따진다면 극도로 약한 종족이었지만 힘을 합칠 경우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탄탄한 조직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단합된 힘은 단연 놀라울 정도라 할 수 있었기에 카트로이는 마침내 인간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 때문에 이번 유희를 결정하게 된 것이다. "좋아. 인간이 어떤 종족인지 자세히 한 번 알아봐야겠군." 카트로이는 즉시 레어를 나섰다. 인간 세상을 두루 여행하며 견문을 쌓아나가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공교롭게도 길을 나선 그가 가장 처음 마주친 것이 테렌베티의 왕녀를 모시고 크로센으로 가는 사절단이었다. "드, 드래곤이야." 테렌베티의 사절단은 카트로이를 보고 그대로 얼어 붙어버렸다. 그들은 생전 처음 드래곤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담이 큰 기사 몇몇이 용감하게 덤벼들었지만 카트로이의 손짓 한 번에 고스란히 얼음덩이로 변해버렸다. 그들도 고르고 고른 기사들이었지만 드래곤의 가공할 파괴력 앞에서는 덤벼봐야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던 것이다. 사절단은 결국 전의를 상실하고 드래곤에게 목숨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카트로이는 그들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조건 하나를 내걸었다. "내 유희를 도와준다면 너희들을 죽이지 않겠다. 어떻게 하겠나?" 카트로이의 꿍꿍이를 들은 테렌베티 사절단은 조건을 수락해야 했다. 거절한다면 그대로 얼음덩이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로써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대답을 들은 카트로이는 곧 인간의 모습으로 변용했다. 지금 하고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다. "좋아. 그럼 목적지로 출발해 볼까?" 테렌베티 사절단에게는 바야흐로 공포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인간의 모습을 한 드래곤과 함께 여행을 하게 되었으니 무섭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상 최강의 종족이라는 자부심 때문인지 카트로이는 사절단의 일원들을 마치 벌레 대하듯이 대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른 자는 예외 없이 얼음덩이가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그 탓에 일행들은 하루하루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여행을 해 나가야 했다. 그리하여 테렌베티 사절단 일행은 마침내 크로센 제국의 관문도시인 레이토나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간택식의 연기로 인해 화이트 드래곤의 분노가 여지없이 폭발하고 말았으니. '크, 큰일이야.' 카트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던 테렌베티 왕녀의 속은 바짝바짝 타 들어가고 있었다. 벌써 수십 명의 일행을 얼음덩이로 만들어버린 잔혹한 드래곤이 어떻게 나올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드래곤의 조건을 크로센 제국에서 받아들일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가 드래곤이란 사실은 자신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제국 측에서 거절한다면 아무래도 드래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싸워봐야 전혀 승산이 없어.' 그녀는 이곳에 모인 기사들이 모조리 덤빈다 하더라도 드래곤을 상대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일전에 체험해 본 드래곤의 파괴력은 그 정도로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늙은이 하나가 화이트 드래곤에게 다가가는 것을 무척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무슨 일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부디 그들이 드래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를 바라며 말이다. 카트로이의 지척에 도착한 데이몬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더 이상 딴청을 피울 수 없게 된 카트로이는 모호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데이몬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상대의 아래위를 샅샅이 쳐다볼 뿐이었다. 잠시 후 그는 상대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틀림없군.' 마법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수준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을 보니 상대는 이미 10서클에 오른 드래곤이었고 9서클의 탐색마법으로도 수준을 파악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상대의 기질을 유심히 관찰했다. 인간이라면 빠짐없이 풍겨져 나오는 모종의 기운 말이다. 하지만 상대에게서는 좀처럼 그런 기운이 풍겨져 나오지 않았다. 마치 마법으로 깡그리 없애버리기라도 한 듯 말이다. 게다가 상대의 눈빛은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마음을 굳힌 데이몬은 드래곤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인크레시아를 목적으로 찾아온 것인가?" 밑도 끝도 없는 소리에 카트로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라고?"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지 않나? 인크레시아는 나에게 있다. 다시 말해 너희들이 찾던 존재가 바로 나라는 뜻이지." 카트로이의 눈에 의혹의 빛이 가득 찼다.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인간의 저의가 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물론 그는 인크레시아에 대해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트루베니아의 드래곤과는 거의 교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혹시 미친 것은 아니겠지?" 카트로이의 반문에 데이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대의 반응을 보아 꾸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트루베니아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란 말인가?" 카트로이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는 아르카디아의 북부………." 부들부들 떨며 서 있는 테렌베티의 왕녀를 힐끔 응시한 카트로이는 뒷말을 이어갔다. "테렌베티에서 왔다. 트루베니아는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이번에는 데이몬이 곤혹스러울 차례였다. 상대를 자신을 찾아 트루베니아에서 건너온 드래곤으로 간주하고 있었는데 예상이 여지없이 빗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데이몬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넌 지금까지 줄곧 아르카디아에서 살아왔다는 뜻인가?" "그렇다."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카트로이. 하지만 상대의 눈에서 살기가 번져 나오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하찮은 인간의 눈빛이 이토록 강렬할 줄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런 카트로이를 향해 데이몬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트루베니아에서 건너왔던, 아니면 아르카디아에서 살았건 상관할 것은 없다. 문제는 네놈이 드래곤이란 사실이지. 용서할 수 없는 종족인 드래곤 말이다."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마자 장내는 적막감에 젖어들었다. 데이몬이 백발의 기사를 드래곤으로 간주하자 모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슨 근거로 그를 드래곤으로 단정하는지 모르지만 쉽사리 보아 넘길 수가 없는 문제였다. "미치광이로군. 완전히 돌았나봐." 싸늘한 냉소를 머금는 자들은 이미 카트로이에게 마음을 빼앗긴 왕녀들이었다. 마음에 두고 있는 멋쟁이 기사에게 함부로 대하는 추레한 늙은이가 결코 고울 리가 없었던 것이다. 휘하의 기사들조차 노골적으로 데이몬을 조롱하고 있었다. "미친놈." 멀쩡한 사람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드래곤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밑도 끝도 없는 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테렌베티 사절단 일행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헉." "어, 어떻게 그 사실을……." 깜짝 놀라던 그들은 카트로이의 싸늘한 눈총을 받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에 카트로이의 경고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정체를 밝힐 경우 남김없이 얼음덩이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경고 말이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27회. 공포감을 조성해서 테렌베티 사절단의 입을 막아버린 카트로이는 안색을 굳히며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재미있군. 어떤 근거로 날 드래곤으로 간주하는 거지?" "말장난 할 필요 없다. 드래곤. 이미 난 너의 정체를 명확히 꿰뚫어보고 있다." "………." "나만큼 드래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에게 드래곤이란 종족은……." 데이몬은 느릿하게 손을 들어 카트로이를 가리켰다. "보는 족족 죽여 없애야 하는 사냥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광오하기까지 한 말에 듣고 있던 사람들은 입을 딱 벌렸다. 드래곤에게 저토록 깊은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다니……. 비록 백발의 기사가 드래곤인지 아닌지는 몰랐지만 늙은이의 입에서 나온 말 하나만으로도 놀라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드래곤이라는 강력한 존재를 끝없이 증오하는 자는 쉽게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듣고 있는 카트로이에겐 보통 문제가 아니었으니……. 싸늘히 식은 눈빛으로 데이몬을 노려보던 카트로이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한 가지 묻자.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토록 드래곤을 증오하는 거지?" "왜냐하면……." 말을 이어나가며 데이몬은 서서히 주변의 마나를 재배열하기 시작했다. "내가 바로 트루베니아 사람이기 때문이지. 트루베니아는 드래곤들의 손에 의해 멸망당했다. 난 그 때의 참혹했던 상황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세상의 드래곤을 모조리 죽여버리기로 작심한 몸이다." 데이몬이 트루베니아 사람이란 말에 용병들은 깜짝 놀랐다. 범상치 않은 과거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그가 옛 트루베니아 사람이었다니……. 트루베니아가 멸망한 상황을 목격했다면 적어도 500년 이상을 살았다고 봐야 했기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정을 들은 카트로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가 없군. 고작 그런 이유로 모든 드래곤들을 사냥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나? 난 트루베니아의 멸망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들과는 전혀 별개란 뜻이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마치 얼어붙는 듯한 감정을 느껴야 했다. 백발기사의 말은 자신이 드래곤이란 사실을 인정하는 발언이었다. 특히 테렌베티의 사절단들은 완전히 사색이 되어 있었다. 드래곤의 정체가 밝혀졌으니 무사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끄, 끝이야.' '이젠 꼼짝없이 죽었군.'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데이몬은 할 말을 계속해서 해 나갔다. "물론 네가 트루베니아 멸망에 관여했건 하지 않았건 상관없다. 드래곤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충분히 죽어야 할 이유가 되니까 말이다." "어이가 없군." 카트로이는 툴툴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하찮은 인간이 감히 드래곤을 벌하겠다고 하는데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드래곤의 관점에서 인간이란 마치 하찮은 벌레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보잘것없는 종족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 어떤 방법으로 날 죽일 생각이지?" "………." "그런 말은 능력이 있을 때나 하는 말이야. 그런데 내가 보기에 너에겐 그럴 능력이 전혀 없을 것 같군." "과연 없다고 생각하나?" 카트로이는 슬그머니 살기를 피워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물론 인간의 몸으로 9서클의 경지에 올랐다는 점에는 경의를 표한다. 수명이 짧은 인간으로써는 정말 놀라운 일이지. 하지만 난 벌써 오래 전에 10서클을 마스터한 몸이다. 마법의 특성상 넌 어떤 일이 있어도 날 해하지 못한다." 데이몬이 9서클의 마스터란 말에 용병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드래곤이 인정했다면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로 봐야 했다. 추레하기 그지없는 늙은이가 아르카디아 역사상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은 9서클의 마스터라니……. 하지만 데이몬은 도리어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예로부터 전략의 핵심은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이길 수 있는 법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지금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끝없이 얕잡아보고 있었으며 데이몬에겐 이미 드래곤과 싸워본 경험이 있었다. 그것도 에인션트 급의 블랙 드래곤을 상대로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웜 급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화이트 드래곤 따위가 적수가 될 리가 없었다. 물론 애송이 드래곤은 꿈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내 실력이 의심스러운가 보군." 카트로이의 눈가에는 살기가 자욱하게 번져가고 있었다. "솔직히 그렇다. 무모한 용기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너에겐 날 이길 가능성이 터럭만큼도 없다. 물론 이제 와서 살려달라고 빌어도 소용없다는 점을 밝힌다. 드래곤을 능멸한 죄로 난 널 얼음덩이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상당한 악취미로군." 카트로이는 서서히 마나를 재배열하기 시작했다. 10서클의 마스터인 만큼 마나가 재배열되는 수준이 데이몬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데이몬의 눈가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그 상태로 싸우겠다는 뜻인가?" "물론. 너 정도는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상태에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후회할 텐데……." "아니 후회는 없다. 그렇다고 결과가 변하진 않을 테니." 데이몬은 자신을 한없이 얕보는 애송이 드래곤을 쳐다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물론 드래곤 사냥을 위해서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지금이 가장 적기였다. 가진 힘을 모두 발휘할 수 없는 때를 노려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때 무인이었던 데이몬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인간의 모습으로 생을 마감할 경우 시체를 손에 넣을 수 없다는 문제도 있었다. 일단 죽은 다음에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우선 녀석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만들어야겠군.' 생각 끝에 그는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의아한 듯 쳐다보는 카트로이를 흘겨보며 데이몬은 냅다 고함을 질렀다. "이봐 헬버트론. 잠깐 나와보겠나?" 조금 뒤 인크레시아 속에서 걸쭉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인가? 또 미첼이란 녀석과 대련을 해야 하나?" "아니야. 일단 나오도록 해." "그러지." 조금 뒤 헬버트론이 인크레시아에서 튀어나왔다. "헉." 멍하니 공간의 틈새를 쳐다보고 있던 카트로이는 깜짝 놀랐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골똘히 고민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그 속에서 데스 나이트 하나가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한 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녀석이었기에 카트로이는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라면 인간으로 따져 최상급의 소드 마스터로 볼 수 있는 놈이었다. "응?" 인간계에 모습을 드러낸 헬버트론은 불타는 듯한 안광을 카트로이에게 고정시켰다.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던 것이다. 데이몬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이야. 트루베니아에서 건너온 놈이 아닌 아르카디아의 토종 드래곤 녀석이지. 그러니 슬슬 사냥을 준비하도록 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그런데 왜 아직까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우릴 상대하는데 폴리모프한 상태에서도 충분하다고 하더군. 가소롭다고 생각하지 않아?"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마자 헬버트론의 투구가리개 사이에서는 소름끼칠 정도의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르헤르트 세이버를 슬며시 뽑아들었다. 스릉 유부에서 들려오는 듯한 으스스한 목소리가 카트로이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이봐. 애송이 드래곤. 쓴 맛 보기 전에 본체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걸?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우린 결코 사정을 봐주지 않아." 이미 헬버트론은 데이몬의 내심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인크레시아 속에서 제조중인 비밀병기를 감안하더라도 그들에겐 반드시 드래곤의 시체가 필요했다. 그래야만 더욱 많은 드래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카트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설마 상대가 데스 나이트를 보유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저 정도 데스 나이트라면 충분히 위협적이라 볼 수 있었다. 장검에 서린 오러 블레이드는 얼마든지 자신의 드래곤 스케일을 가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쉽사리 생각할 수 있는 적이 아니란 뜻이었다. 하지만 카트로이는 아직까지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데스 나이트를 동원하다니 생각 외로군. 정말 놀라워." "말장난 할 생각 없다. 본체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면 지금 즉시 공격하겠다." "잠깐만." 카트로이는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상황을 보아 본체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합당할 듯 싶었다. 상대가 데스 나이트와 마법사라면 가볍게 볼 적이 아니었고,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상태에서는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때문에 카트로이는 본체로 돌아가기 위해 마나를 재배열하기 시작했다. "설마 폴리모프를 하는 도중에 공격하거나 그러지 않겠지?" "물론. 네놈의 시체를 얻기 위해서라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무척이나 건방진 놈이군."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카트로이는 서둘러 마나를 재배열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꾹 눌러 참으며 말이다. 콰콰콰콰. 그의 몸을 축으로 눈부신 빛이 폭사되었다. 데이몬과 헬버트론 이외에는 모두가 고개를 돌려야 할 정도였다. 카트로이의 몸은 빛무리 속에서 급격히 커지고 있었다. 그 광경을 장내의 사람들은 침을 삼키며 쳐다보고 있었다. "저, 정말 드래곤이었어." "믿을 수 없군." 운집한 왕녀들과 호위기사들은 입을 딱 벌린 채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난생 처음 드래곤의 실체를 보게 된 것이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는 화이트 드래곤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하늘을 찌를 듯 뻗어 있는 뿔에서는 당당함이. 기다란 목에서는 우아함이 느껴졌고 전신을 백색 비늘로 빈틈없이 감싼 커다란 몸에서는 강력한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대륙 최강의 종족이라는 명칭에 충분히 걸맞는 모습이었다. 데이몬은 눈을 빛내며 드래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화이트 드래곤이라서 그런지 일전에 죽인 블랙 드래곤과는 모습이 많이 다르군." 화이트 드래곤은 전체적으로 날씬한 유선형의 몸을 가지고 있었고 목과 꼬리가 훨씬 길었다. 몸집의 크기로는 러셀런트에 현저히 뒤졌지만 전체적인 길이는 오히려 그를 능가하는 것이다. 잠시 후 카트로이는 기다란 목을 치켜들고 포효를 했다. 캬오오오. 멍하니 서 있던 왕녀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귀를 막을 정도로 큰 포효성이었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28회. 오랜만에 마음껏 포효를 내지른 카트로이는 커다란 머리통을 데이몬에게 돌렸다. 번들거리는 눈동자에는 기묘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공격하지 않는 걸 보니 약속을 잘 지키는 녀석이로군. 별로 죽이고 싶지 않은데……. "………."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감히 드래곤을 능멸한 녀석을 살려둘 수는 없으니까. 크게 벌린 카트로이의 입안에서는 하얀 안개 같은 것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브레스를 뿜을 준비를 하려는 것이다. 극도로 추운 곳에 사는 화이트 드래곤의 브레스는 극저온의 아이스 브레스였다.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아이스 브레스는 마치 액화질소처럼 닿는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얼려버린다. 반경 30미터 정도를 완전히 얼음지옥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묵묵히 보고 있던 데이몬이 불쑥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름이 뭐지?" 카트로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죽음에 직면한 인간이 이름을 물어본다는 사실에 황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얼른 냉정을 되찾았다. -후, 못 가르쳐 줄 것도 없지. 내 이름은 카트로이다. 뭣 때문에 묻는 거지? "알 필요 없어." 냉랭하게 일축한 데이몬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가고 있었다. 이미 그는 화이트 드래곤을 사냥해서 비밀병기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들고 나서 부를 이름이 있어야 했기에 일부러 이름을 물어본 것이다. 마치 윈슬럿처럼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카트로이는 도리어 데이몬의 이름을 물어보고 있었다. -네놈의 이름을 가르쳐 다오. 묘비에다 적으려면 필요할 테니 말이야.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짐작하지 못한 채 여유를 부리는 카트로이가 무척 우스웠던 것이다. "내 이름은 데이몬. 자랑스런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다." -용병단? "그렇다. 드래곤 사냥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용병단이지. 사정이 생겨 부득이 카르셀 왕국의 왕녀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말이야."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 카심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했다. 왕녀들이 운집한 앞에서 카심 용병단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니 감정이 고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카심의 내심을 나는지 모르는지 카트로이는 냉소를 쳤다. -애석하군. 목적을 이루지도 못하고 용병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생겼으니 말이야. "걱정하지 마. 출발이 무척 순조로우니까 말이야. 우린 이미 드래곤 두 마리를 사냥했어. 그 중 하나는 에인션트 급 블랙 드래곤이었지." 느긋한 데이몬의 대답에 카트로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커다란 대가리를 휘휘 내저었다. -허풍이 이만저만한 놈이 아니로군. 이봐. 그런 말을 누가 믿겠나? "믿거나 말거나 상관할 건 없지. 그런데 말싸움만 하고 있을 작정이야?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바라던 바다. 드래곤과 인간의 치열한 말싸움을 그 자리에 모인 왕녀들은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그 중에서 가장 불안한 것은 바로 테렌베티의 왕녀였다. 이미 그녀는 드래곤에 의해 휘하 기사 수십 명을 잃은 상태였다. 때문에 그녀는 불안한 듯 연신 눈을 희번덕거렸다. '저 드래곤은 이 자리에 모인 기사들이 모두 덤빈다고 해도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냐.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피해야 할 텐데.' 그러나 피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드래곤의 손아귀에서는 아무리 날뛰어봐도 벗어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리로 오던 도중 그녀는 한 번 탈출을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붙잡혀야 했다. 충성스런 기사 몇 명이 그녀의 죄를 대신 덮어쓴 뒤 산 채로 얼음덩이가 되고 나서야 드래곤의 분노가 풀렸고 그 이후로 그녀는 감히 탈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쉽사리 이곳을 뜰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때 그녀의 귀로 나지막한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드래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미치광이 마법사의 일행으로 보이는 자들이었다. "대장. 조금 떨어지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재수 없이 브레스를 덮어쓸 수도 있잖아요." "걱정하지 마. 데이몬의 실력이 어떤지 다들 알고 있잖아? 덩치를 보니 저 화이트 드래곤은 고작해야 웜 급을 넘어선 녀석이야. 그 정도야 별로 어려운 상대가 아니라고 봐야지. 게다가 통상적으로 화이트 드래곤은 블랙 드래곤보다 비교적 위력이 약해." "하긴 에인션트 급도 잡았는데, 고작해야 웜 급 정도라면 데이몬에겐 식은 죽 먹기겠지요. 그런데. 대장. 보지도 않고 어떻게 저놈이 웜 급이라고 단정할 수 있어요?" "멍청하긴……. 넌 책도 안보냐? 몬스터 도감에 엄연히 드래곤에 관한 내용이 나와 있어. 몸길이가 25미터 정도면 웜 급이라고 적혀있었단 말이야." "하긴."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테렌베티 왕녀는 입을 딱 벌렸다. 드래곤을 저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줄은 금시초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일행을 완전히 돌아버린 미치광이로 단정하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완전히 맛이 간 사람들이군. 결과가 보나마나 뻔하겠어.' -그럼 죽을 준비를 하라. 최후의 경고를 마친 카트로이는 공격할 채비를 갖추었다. 브레스를 내뿜어 꽁꽁 얼려버리겠다는 것이 그가 준비한 전략이었다. 물론 언데드인 데스 나이트에겐 큰 효과가 없겠지만 마법사를 없애버리기엔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데스 나이트 따위야 마법사를 없애고 나서 처리해도 되겠지.' 생각을 마친 카트로이는 있는 힘껏 숨을 빨아들였다. 그것을 몸 속에 저장된 냉기(冷氣)의 정(精)과 섞어 내뿜는다면 아이스 브레스가 되는 것이다. 위력이 미치는 범위를 제한시켜 위력을 강화시켰기 때문에 그는 인간 마법사가 자신의 브레스를 견딜 수 없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스프레이 형태로 넓게 퍼뜨린다면 실드로 막을 수 있겠지만 어림없다. 목표제한으로 네놈이 있는 곳만 완벽히 얼려버릴 테니까……. 상대가 공간이동을 할 수 없도록 카트로이는 주변에 공간이동 왜곡장을 설치했다. 그런 다음 브레스를 뿜는다면 동작이 느린 마법사가 피할 수 없을 것이란 게 그의 계산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상대의 속셈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멍청하긴. 블링크를 전혀 감안하지 않았군." 공간이동이란 마나의 재배열을 이용해 공간을 왜곡시키는 마법이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동하는 만큼 반드시 이동할 좌표가 필요했고 방해할 여지가 무척 높았다. 때문에 공간이동 왜곡장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블링크는 달랐다. 보이는 장소를 향해 순간적으로 워프하기 때문에 방해할 여지가 희박했다. 물론 좌표 따위를 계산하지 않기 때문에 공간이동 왜곡장 따위로 막을 수도 없었다. 서클이 높은 마법이라 어지간한 마법사는 시전조차 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말이다. 드래곤의 반응이 생각 외로 엉성하자 데이몬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르카디아에서 평온히 살아온 녀석이라 싸우는 방법을 잘 모르는군. 트루베니아의 드래곤 녀석들은 인간과 싸우는데 도가 텄는데 말이야." 상대의 브레스가 완성될 기미를 보이자 데이몬은 얼른 다른 데스 나이트들을 불러냈다. 어쨌거나 상대는 다 자란 성룡이었으므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었다. "다들 나와라. 드래곤 사냥의 시간이 돌아왔다. 다시 한 번 승리의 달콤함을 만끽할 때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 줄기의 검은 그림자가 인크레시아에서 튀어나왔다. 둘 사이에 오간 대화를 듣고 대충 상황을 짐작했던 그들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반응은 신속했다. "드래곤이다." 카트로이를 보자 데스 나이트들의 눈빛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가족과 조국을 깡그리 앗아간 범인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비록 트루베니아 멸망에 관여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카트로이 역시 드래곤임에는 틀림없었다. 그 때문에 데스 나이트들은 덮어놓고 몸을 날렸다. 드래곤의 몸뚱이를 가차없이 양단해버릴 기세를 물씬 풍기며. -뭐, 뭐야. 막 브레스를 날리려던 카트로이는 혼비백산했다. 하나인 줄 알고 있었던 데스 나이트가 셋이나 더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곧 냉정을 되찾았다. 저따위 너절한 언데드 따위가 위대한 종족인 드래곤에게 위협이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마법사를 먼저 처치하고 봐야겠군. 생각을 마친 카트로이는 벼락같이 브레스를 내뿜었다. 콰콰콰콰. 새하얀 원기둥이 마치 라이트닝 볼트처럼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범위를 제한시켜 파괴력을 비약적으로 늘인 화이트 드래곤 특유의 아이스 브레스였다. 빠른 속도로 날아간 아이스 브레스는 정확히 데이몬이 서 있던 곳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쩌저정. 그곳은 삽시간에 얼어붙어 버렸다. 바닥에 깔린 석판에 금이 쩍쩍 가더니 그대로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극한의 온도차에 석판의 분자구조가 견디지 못한 것이다. 단단한 돌이 그 지경이 되었으니 인간의 몸뚱이 정도야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브레스가 작렬할 때 마법사가 피하지 않은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카트로이는 상황이 머지 않아 종결될 것으로 단정했다. 데스 나이트만 처리하면 끝나는 것이다. -역시 입만 번드르르한 놈이었군. 일격에 골로 간 것을 보니…… 헉. 카트로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자신의 아이스 브레스가 휩쓸고 지나간 곳에 멀쩡히 서 있는 마법사를 보고 난 뒤의 일이었다. 놀랍게도 상대는 멀쩡했다. 극한의 온도를 자랑하는 아이스 브레스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심지어 머리카락이나 옷자락조차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라 카트로이는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대답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왔다. "왜냐하면 그것이 허상이기 때문이다. 미러 이미지와는 달리 실체가 없기 때문에 네 녀석의 브레스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지." 카트로이의 커다란 대가리가 마치 따귀라도 맞은 듯 팩 돌아갔다. 그곳에 멀쩡히 서 있는 마법사를 발견하자 카트로이는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인간과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는 것 같군. 블링크를 펼치는 기미도 눈치채지 못했으니 말이야." -브, 블링크를 썼다고? 카트로이는 등골이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허상을 주시하느라 살펴볼 겨를도 없었지만 자신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블링크를 성공시켰다는 것은 상대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의 귀로 마법사의 얄미운 이죽거림이 계속 들려왔다. "실전경험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솔직히 말해 넌 트루베니아의 드래곤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 그들은 많이 싸워보았기 때문에 인간을 상대하는 방법을 확실히 알지." -이놈. 눈이 뒤집힌 카트로이는 덮어놓고 몸을 날렸다. 브레스를 다시 뿜으려면 다소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거대한 몸을 믿고 육탄돌격을 시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채 몇 발짝 전진하기도 전에 몸 아랫부분에서 심각한 통증이 밀려왔다. 너무도 생소한 통증이라 카트로이는 거세게 비명을 내질렀다. -캬아악. 카트로이의 순백색 동체에는 어느새 보기 흉한 줄이 죽죽 가 있었다. 가까이 접근한 데스 나이트들이 사정없이 난자한 자리였다. 믿었던 드래곤 스케일은은 데스 나이트들의 오러 블레이드 앞에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삶은 무를 베듯 비늘을 가볍게 가르고 지나간 것이다. 높은 신장 때문에 상처를 입은 곳이 하체에 불과했지만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카트로이에게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충격이었다. -이놈들. 감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카트로이는 마법사에 대한 일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낸 얄미운 데스 나이트들에게로 표적을 돌린 것이다. 카트로이는 데스 나이트들에게로 가차없이 달려들었다. 네 발과 기다란 꼬리가 연신 데스 나이트들이 있는 곳을 강타했다. 쾅쾅쾅쾅. 하지만 헛수고였다. 애꿎은 석판만 쩍쩍 갈라졌을 뿐 데스 나이트들은 이미 그곳에서 사라진 다음이었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29회. 과거 트루베니아의 절대자였던 과거답게 데스 나이트들의 몸놀림은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수준이었다. 카트로이의 공격경로를 정확히 예측하여 가정 적절하게 피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슬쩍슬쩍 달려들어 카트로이의 몸에 칼자국을 내고 있었다.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통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캬아아악 카트로이는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지금껏 살아오며 몸에 상처가 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분노로 인해 거의 이성을 잃어버린 카트로이였다. 지상최강의 존재 드래곤에게 겁도 없이 칼질을 하다니……. 카트로이는 데스 나이트에게 분노를 거듭 표출했다. 꼬리질과 발길질로 말이다. 콰콰쾅. 끊임없는 공격으로 인해 석판이 가루가 되고 있었다.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붓는 카트로이는 지칠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드래곤의 엄청난 스태미너를 보여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상대하는 데스 나이트들 역시 지칠 까닭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지축을 뒤흔드는 공격을 슬쩍슬쩍 피해내며 계속해서 반격을 가하고 있으니 말이다. -안되겠군.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카트로이는 동작을 멈추고 아가리를 좍 벌렸다. 브레스를 뿜어 데스 나이트들을 얼려버릴 생각인 것이다. 벌려진 아가리를 통해 브레스가 자욱하게 뿜어져 나왔다. 카트로이가 사는 북부의 한기가 잔뜩 응축된 브레스가 내뿜어진 것이다. 그것은 데스 나이트들이 피할 수 없도록 비교적 넓은 범위로 뿜어졌다. 쩌저저정. 석판이 가차없이 얼어붙으며 금이 갔다. 이런 극저온 브레스를 정통으로 맞는다면 인간은 결코 생존하지 못한다. 그대로 얼어붙은 채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것은 빗겨 맞아도 마찬가지였다. 철제 갑옷에 살결이 달라붙어 파열되거나 호흡기로 냉기가 스며들어 숨을 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상대는 인간이 아니었다. 언데드란 특성상 한기에 별달리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인크레시아 속의 초저온에 단련될 대로 단련된 탓에 데스 나이트들은 아이스 브레스를 덮어쓰고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다. 갑주 또한 하나같이 드래곤 본이나 미스릴이었기에 얼어붙지도 않았다. 그들은 거침없이 다가와 카트로이의 하체 부분을 또다시 난자했다. 파파팍. 피하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데스 나이트들은 마치 향유고래를 사냥하는 범고래처럼 날렵하게 움직이며 드래곤의 단단한 피부를 여지없이 갈라놓고 있었다. 카트로이는 결국 물리적인 공격을 포기해야 했다. 마법 공격이 아니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한 것이다. -무서운 놈들이군. 계속되는 출혈로 정신이 가물가물했지만 카트로이는 결사적으로 캐스팅에 들어갔다. 장기인 마법이 아니면 난국을 타개하기가 힘들어 보였다. 마법이 준비되자 카트로이는 지체 없이 공격을 가했다. -이놈들. 먹어라. 상대가 마법 공격에 내성이 있는 언데드임을 감안해서 그는 최고 써클의 공격마법인 헬 파이어를 날렸다. 제아무리 데스 나이트라 해도 헬 파이어에 격중된다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타버릴 터였다. 콰콰콰콰. 시퍼런 불덩어리 두 개가 광망을 내뿜으며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닿는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버리는 파멸의 불꽃인 헬 파이어였다. 이것 한 방이면 저주받은 데스 나이트를 영혼까지 소멸시킬 수 있으리라 자신하며.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 데스 나이트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헬 파이어의 위력이 데스 나이트를 소멸시키기에 충분하다 하나 그것은 엄연히 적중될 경우의 일이었다. "어림없다." 데스 나이트들은 쇄도하던 두 발의 헬 파이어를 가볍게 피해냈고 카트로이의 공격은 애꿎은 석판만 태워버렸다. 화르르르. "이런." 대경한 카트로이는 마법의 위력을 현저히 낮추었다. 데스 나이트의 몸놀림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명중시키기 위해서는 위력을 낮춘 다수의 마법을 난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마법의 조종답게 순식간에 여러 발의 공격마법이 캐스팅되었다. 파파파팍. 대략 5∼6서클 정도로 재배열된 플레임 스트라이크나 라이트닝 버스트 다발이 사방으로 난사되었다. 피할 방위를 모조리 차단하며 날아가는 광범위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데스 나이트들은 중급 공격마법마저도 먹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난사된 마법을 슬쩍슬쩍 피해냈고 피하기 힘들 경우 방패의 경사를 이용해 여지없이 퉁겨 버렸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잘 싸우는 녀석들이었다. 결국 카트로이는 데스 나이트들을 잡기 위해서는 상대의 몸놀림을 먼저 차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처럼 마구 마법을 난사하다간 주변의 마나가 몽땅 고갈될 우려가 있었다. -그렇게 되면 끝장이지. 카트로이는 서둘러 데스 나이트들에게 동작둔화마법을 걸었다. -슬로우(Slow).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전장을 누비던 데스 나이트들의 몸놀림이 급격히 둔화되었다. 헤이스트와 정반대 속성을 가진 슬로우는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처럼 데스 나이트들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옥죄고 있었다. 카트로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인딩(binding)을 시전했다. 쓰쓰쓰쓰. 바닥에서 넝쿨 같은 것이 뻗어 나와 데스 나이트들을 바닥에 묶어 버렸다. 그때서야 카트로이는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꼼짝 못하게 된 상대를 보자 분노가 샘솟듯 치밀어 올랐다. -가루로 만들어버리겠다. 카트로이는 그가 전개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대인 공격마법을 또다시 캐스팅했다. 그러면서 왜 진작 이렇게 하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랬다면 전신에 쓰라린 상처를 입지 않아도 되었을 터였다. 데이몬의 예상대로 카트로이에겐 인간을 상대로 싸워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를 대하는 인간들은 예외 없이 공포에 질렸고 간혹 덤비는 녀석들은 간단한 빙계 마법에도 그대로 얼음덩이가 되어버렸다. 지금껏 그에겐 인간이란 신경 쓸 필요도 없는 하찮은 미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들은 달랐다. 드래곤 앞에서도 추호도 주눅들지 않는 데다 그것도 모자라 강렬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잡아먹을 듯 덤비는 놈들이었다. 게다가 실력 또한 평범한 인간 기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무수한 마법 공격을 가했지만 한 차례도 적중시키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지." 네 발의 헬 파이어를 만들어낸 카트로이는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데스 나이트들은 아직까지 슬로우와 바인딩에 묶여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트로이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헬 파이어를 날렸다. 한 놈에 한 발씩 선사할 생각인 것이다. -우선 네놈들을 없애 버린 뒤 마법사를 마저 처치하겠……응? 기세 좋게 지껄이던 카트로이는 깜짝 놀랐다. 헬 파이어는 예상대로 데스 나이트를 향해 정확히 폭사되었다. 그런데 격중되기 바로 직전 데스 나이트들이 마법에서 풀려난 것이 아닌가? 속박에서 벗어난 데스 나이트들은 민첩하게 몸을 굴려 헬 파이어를 피해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트로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어찌 이런……. 걸어놓은 슬로우와 바인딩이 자연적으로 풀릴 리가 없는데……. "물론 자연적으로 풀린 것이 아니지. 내가 파훼하지 않았으면 풀리지 않았을 테니." 갑자기 들려온 마법사의 말에 카트로이는 고개를 팩 돌렸다. 느물거리는 인간 마법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데이몬은 카트로이를 쳐다보며 혀를 쯔쯔 차고 있었다. "바보 같은 녀석. 상대를 제압했으면 가차없이 끝낼 생각을 해야지 여유를 부려? 어이가 없을 만큼 멍청한 드래곤이로군." -네, 네가 바인딩을 파훼했단 말이냐? "물론이지. 드래곤을 사냥할 때 내 역할이 바로 그것이니까. 나 역시 9서클의 마스터. 어지간한 마법은 모조리 파훼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도록……. -이익.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카트로이는 덮어놓고 마법공격을 가했다. 조금 전까지 데스 나이트를 노렸던 각종 중급 공격마법이 이번에는 데이몬에게로 집중되었다. 파파팟. 하지만 통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데이몬은 블링크와 실드를 적절히 구사해가며 가해진 마법 공격을 피하거나 막아냈다. 그것도 느긋하게 여유를 부려가며 말이다. "일전에 상대한 에인션트 급 블랙 드래곤에 비하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약하군." 계속 터져 나오는 상대의 이죽거림. 이제 카트로이에게는 화를 낼 만한 여유도 남아있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강적임을 깨달은 것이다. 평소 하찮게만 생각했던 인간에게 이렇게 휘둘릴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실수다. 저 녀석의 말은 사실이었어. 상대를 경시했던 조금 전이 뼈저리게 후회되었다. 상황을 보아 자신이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거듭된 출혈로 정신이 가물가물해져 오는 상황이었다. 괴력의 데스 나이트를 제압할 엄두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마법을 걸어 잡는다고 해도 인간 마법사가 깡그리 파훼해 버리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카트로이는 결국 싸움을 포기했다. -승산이 없어. 이대로 있다간 이대로 생을 마감해야 할지도 몰라. 생각은 길었지만 행동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네 발로 땅을 강하게 박찬 카트로이는 날개를 활짝 펼쳐 맹렬히 휘저었다. 유희를 포기한 채 도주를 결심한 것이다. 상대에 대한 분노는 머리 속에서 씻은 듯 사라진 다음이었다. 휘이이잉. 카트로이의 몸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로 솟구쳤다. 몸매가 날씬한 화이트 드래곤이라서 마법을 쓰지 않아도 순간적으로 날아오를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결사적으로 날개를 퍼덕인 때문에 카트로이는 곧 데스 나이트들의 손이 닿지 않는 창공으로 솟구칠 수 있었다. -무, 무서운 놈들.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는 데스 나이트들을 보며 카트로이는 치를 떨었다. 정말 끔찍할 정도로 강력한 조합이었다. 인간 따위가 이렇게 무서울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허공에서 공격 마법을 몇 발 퍼부어 화풀이를 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카트로이는 마음을 돌렸다. 그것보단 몸의 치료가 급선무였다. 이미 유희에 대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깡그리 사라진 상태였고 서둘러 레어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카트로이는 얼른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무언가 거대한 것이 바로 위에서 달려들 줄 카트로이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헉. 시커먼 그림자가 바로 뒤에서 덮쳐들자 카트로이는 경악성을 내뱉었다. 무언지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거의 자신과 필적할 정도로 거대한 괴물이었다. 충돌한다면 도저히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기에 카트로이는 필사적으로 선회를 하려 했다. 그러나 애초부터 노리고 들어온 듯 검은 그림자는 집요하게 방향을 바꾸며 따라붙고 있었다.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카트로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콰쾅. 엄청난 충격과 함께 카트로이는 그대로 균형을 잃어버렸다. 옆구리 부분으로 심각한 통증이 전해지자 카트로이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내질렀다. -캬아아악. 거대한 몸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 카트로이는 그대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데스 나이트에게 몸이 만신창이가 된 터라 더 이상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떨어져 내리는 와중에 카트로이는 겨우 자신을 습격한 존재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이럴 수가? 본 드래곤이라니? 순간 그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떴다. 조금 전 자신을 공격한 것은 뼈만 남은 드래곤의 형상을 한 괴수인 본 드래곤이었던 것이다. 본 드래곤(bone dragon)이란 마치 스켈레톤처럼 뼈로 이루어진 언데드 몬스터이다. 지고한 존재인 드래곤의 시체를 재료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흔하게 볼 수 없는 괴물이었다. 프로스트(frost)계열의 브레스를 뿜을 수는 있지만 마법을 쓸 수는 없고, 보편적으로 스켈레톤이 인간병사보다 약한 것처럼 살아있는 드래곤보다 강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않고 신체의 재생이 가능하다는 언데드 특유의 장점이 고스란히 살아있어 드래곤과 대적이 가능한 유일한 언데드 몬스터인 것이다. 드래곤의 강력한 파워를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는 데다 어지간한 마법 공격이 통하지 않는 마법 저항력을 보유하고 있어 드래곤조차 꺼려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존재가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30회. 본 드래곤은 카트로이의 옆구리를 깊숙이 물고 있었다. 뼈에서 녹색 빛이 은은하게 도는 것을 보니 생전에 그린 드래곤이었던 것 같았고 카트로이보다 덩치가 약간 작은 것을 봐서 웜 급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본 드래곤이 된 것이 분명했다. -캬아악. 카트로이는 빠져나오기 위해 기를 쓰며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허사였다. 데스 나이트들과의 싸움에서 워낙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빠져나올 기력이 없었다. 게다가 본 드래곤의 발톱이 날개를 잔뜩 그러쥐고 있었기 때문에 추락하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이, 이런. 당황한 카트로이가 연속적으로 부양마법을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마나가 좀처럼 재배열되지 않는 것을 보니 인간 마법사가 계속해서 방해를 하는 것 같았다. 카트로이의 얼굴빛이 시커멓게 죽어들었다. -끄, 끝이야. 마법사가 설마 본 드래곤을 보유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상황을 보니 드래곤을 사냥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바닥이 급격히 가까워지자 카트로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뒤이어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충격이 이어졌다. 콰콰쾅 화이트 드래곤의 몸뚱이는 본 드래곤과 뒤엉킨 상태로 정통으로 바닥에 쑤셔 박혔다. 산산이 부스러진 석판 조각이 사방으로 퉁겨졌고 그 자리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푹 패였다. 구덩이의 중심부에 떨어져 버르적거리던 카트로이는 오래지 않아 기다란 목을 축 늘어뜨렸다. 바닥에 격돌한 충격으로 그대로 기절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본 드래곤은 혼절하지 않았다. 언데드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듯 본 드래곤은 얼른 몸을 일으키더니 기절한 카트로이를 사정없이 덮쳤다. 기괴한 포효성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콰루루루. 자신의 몸으로 카트로이를 빈틈없이 깔아뭉갠 본 드래곤은 아가리를 좍 벌려 화이트 드래곤의 기다란 목을 덥석 물었다. 이제 어금니에 힘만 주면 화이트 드래곤 카트로이는 깨끗하게 이승을 하직할 터였다. 그런 다음 본 드래곤은 명령을 기다리려는 듯 한 쪽을 쳐다보았다. "성공이로군."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세 번째 드래곤 사냥도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이번에는 꼭꼭 숨겨두었던 비밀병기까지 동원한 접전이었다. 데이몬이 만들던 비밀병기는 바로 본 드래곤이었다. 지크레이트를 죽인 직후 데이몬은 그의 시체로 하여금 언데드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지크레이트의 시체를 인크레시아 속에 집어넣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사실 데스 나이트와의 조합으로 드래곤을 상대하는 방법은 그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미 에인션트 급 블랙 드래곤 러셀런트를 사냥했으니 조합의 효과는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봐야 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크나큰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공중공격에 대한 취약성이었다. 드래곤에겐 자유자재로 날아다닐 수 있는 날개가 있다. 만약 드래곤이 날아올라서 마법 공격을 해 온다면 그들은 여지없이 어려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수준차이 때문에 데이몬의 원거리 마법 공격은 거의 효과를 보지 못할 터였고 비행마법이나 팬텀 스티드 따위를 이용한다 하더라도 디스펠 한 방이면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야 했다. 때문에 데이몬과 데스 나이트에겐 디스펠이 통하지 않는 탈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물론 강력한 전투력과 방어력을 겸비한다면 금상첨화였지만 말이다. 그런 까닭으로 데이몬은 세바인에 거주하고 있을 때부터 지크레이트의 시체를 이용해서 본 드래곤을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본 드래곤으로 드래곤을 맞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본 드래곤이 아무리 강력한 언데드 몬스터라도 드래곤과 일대 일로 싸울 수는 없었다. 강력한 파워와 마법 면역력이 있다고는 하나 자유자재로 마법을 시전하는 드래곤에게만은 역부족이다. 이것은 마치 스켈레톤 하나가 인간 병사 하나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이치와 같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모든 것의 초점을 본 드래곤의 공중전 능력에 맞추고 있었다. 본 드래곤은 날아다닐 수 있는 언데드 몬스터였고 뼈만 남은 상태라 동체가 무척 가벼웠기 때문에 비행속도가 드래곤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물론 공격 무기가 날카로운 이빨과 프로스트 브레스밖에 없기 때문에 마법으로 무장한 드래곤과 공중전을 벌이기는 무리였지만 데이몬은 그 부분에 대해서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에겐 드래곤의 강인한 비늘을 간단히 꿰뚫을 수 있는 강력한 전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본 드래곤의 등에 데스 나이트를 태운다면 아주 훌륭하겠어. 이른 바 드래곤 라이더로 만드는 거지. 철저히 언데드로 이루어진……."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드래곤과의 공중전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본 드래곤을 타고 날아오른 뒤, 마법공격에 대한 방어는 자신이 맡고 공격을 데스 나이트가 담당한다면 상대가 아무리 에인션트 급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했다. 게다가 드래곤 하트를 사용해서 본 드래곤의 마법저항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다면 어지간한 마법공격 정도는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대마법 방어장을 친 본 드래곤이 방패 역할을 해 주는 것이다. "좋아." 데이몬은 그 때문에 만들어질 본 드래곤에 큰 기대를 가졌다. 제일 처음 얻은 지크레이트의 시체는 이미 오래 전에 본 드래곤이 된 상태였다. 지크레이트가 비교적 젊은 드래곤이었기에 만들어진 본 드래곤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지금쯤 인크레시아 속에는 에인션트 급 블랙 드래곤의 시체가 본 드래곤으로 변하고 있을 터였다. 죽은 러셀런트가 본 드래곤이 된다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본 드래곤을 만드는 것은 그리 여의치 않는 일이었다. 제조방법을 확실하게 숙지하고 있었고 어둠의 마력 역시 충분했지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극한의 냉기(冷氣)였다. 본 드래곤 자체가 프로스트의 속성을 가진 언데드 몬스터였고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냉기가 필요했다. 냉기를 충분히 흡수해야만 본 드래곤이 프로스트 브레스를 쏘아낼 수 있을뿐더러 태양빛 아래에서도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었다. 원래 데이몬은 그것을 인크레시아가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마법보고 속의 초저온이 본 드래곤 제조에 필요한 냉기를 넉넉히 공급해 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오산이었다. 비록 초저온을 유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인크레시아 속에는 냉기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대자연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그저 공간의 왜곡된 틈새에 불과했던 인크레시아라서 온도는 낮지만 본 드래곤에게 흡수시킬 수 있는 냉기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이럴 수가? 그토록 온도가 낮은데도 본 드래곤에게 흡수시킬 냉기가 없다니……." 하지만 본 드래곤이 좀처럼 완성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비밀병기의 완성은 그 때문에 상당히 미뤄질 수밖에 없었고 지금 모습을 드러낸 본 드래곤 지크레이트는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은 존재였다. 지크레이트를 쳐다보던 데이몬은 혀를 찼다. "서둘러 인크레시아 속에다 집어넣어야겠군. 태양 빛 때문에 겉 부분이 녹고 있어." 아닌게 아니라 카트로이를 누르고 있는 지크레이트의 전신은 서서히 녹아 들어가고 있었다. 표면이 점차 녹아 들어가며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는 모습. 아직까지 흡수한 냉기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데이몬은 얼른 데스 나이트를 쳐다보았다. "녀석을 제압해 놓도록. 단 죽이지는 말고. 난 서둘러 본 드래곤을 인크레시아 속에 집어넣어야겠어." "그러지." 본 드래곤의 상태는 그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데스 나이트들은 두말 하지 않고 카트로이에게로 다가갔다. 챠챵. 네 자루의 장검이 오러 블레이드를 잔뜩 머금은 채 카트로이의 머리통에 겨누어졌다. 사라미스와 라인델프의 장검은 양쪽 눈에 나눠 대어져 있었다. 프림베르그의 거검은 카트로이의 기다란 목을 누르고 있었고, 화이트 드래곤의 머리통 위에 뛰어 올라간 헬버트론은 뇌가 있는 부분에 장검의 끝 부분을 살짝 찍은 상태였다. 헬버트론이 장검을 그대로 쑤셔 박는다면 카트로이는 러셀런트처럼 뇌가 파열되어 깨끗이 세상을 하직해야 할 터였다. 카트로이가 빈틈없이 제압된 것을 확인한 데이몬은 지크레이트를 인크레시아 속에 집어넣었다. 슈우욱. 크기가 급격히 커진 인크레시아는 지크레이트의 거대한 몸을 삽시간에 집어삼켜 버렸다. 그 상태로 데이몬은 화이트 드래곤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장내는 일시에 조용해졌다. 마법사와 데스 나이트 대 화이트 드래곤의 엄청난 접전을 관전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딱 벌린 채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조금 전 목격한 장면은 그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충격이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완벽한 드래곤 사냥 장면을 목격했던 것이다. 싸움이 시작될 무렵,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절대적으로 화이트 드래곤의 승리를 예상했었다. 그들이 아는 드래곤이란 종족은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였기에……. 특히 카트로이의 힘을 실감했던 테렌베티 사절단 일행은 그 사실을 아예 확신했었다. 마법사 하나와 데스 나이트로 화이트 드래곤을 잡는 것은 아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그들의 예상을 송두리째 뒤엎어 버렸다. 난데없이 세 명의 데스 나이트가 나타나서 돌격해 갈 때까지도 그들은 화이트 드래곤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뒤이어 벌어지는 접전은 한쪽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데스 나이트들은 압도적으로 화이트 드래곤을 밀어붙였다. 이미 동료들 수십 명을 얼음덩이로 화하게 했던 공포의 마법은 데스 나이트들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사방을 종횡무진하며 화이트 드래곤의 피부를 갈가리 찢어발기는 데스 나이트들의 실력에 사람들은 그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 앞에서 저토록 침착하고 냉정하게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사가 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데스 나이트가 아니면 그 어떤 기사도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조금 뒤 데스 나이트들이 마법에 걸려 그 자리에 못 박혔을 때 사람들은 아쉬운 탄성을 내질렀다. 가공할 위력을 보인 데스 나이트들이 곧 소멸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마법사의 개입으로 데스 나이트들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고 견디다 못한 화이트 드래곤이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장면에서부터 사람들의 벌린 입가에서는 침이 흐르기 시작했다. 평생 처음 보는 장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절정은 본 드래곤의 등장에서부터였다. 마법사의 옆에서 공간의 틈새가 활짝 열리며 그 속에서 뼈만 남은 괴수, 본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아예 넋이 나가버렸다. 데스 나이트에 이어 본 드래곤까지 동원된 것이다. 하나 하나가 쉽게 볼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껏 이토록 엄청난 전투를 볼 기회가 없었다. 놀라운 속도로 날아올라 화이트 드래곤을 추월한 본 드래곤은 허공에서 그대로 내려 꽂혔다. 이후의 결과는 그들이 본 대로였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사람들은 말을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입을 쩍 벌린 채 멍청히 서 있는 테렌베티 왕녀의 귀로 잡담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미치광이로 단정했던 자들의 대화소리였다. "햐! 이번에는 본 드래곤이로군요. 다음에는 뭐가 나올지 정말 궁금해요." "그래서 데이몬에게 드래곤의 시체가 필요했던 것이로군. 본 드래곤을 만들려면 반드시 드래곤의 시체가 필요하지." "그런데 저 본 드래곤은 일전에 사냥한 드래곤보다 훨씬 작지 않아요?" "그렇군. 아무래도 저 녀석은 데이몬이 트루베니아에 건너가서 잡았다는 드래곤 같군. 화이트 드래곤보다 작은 걸로 봐서 아직까지 웜 급에 미치지 못한 녀석 말이야." "우와. 그렇다면 저번에 잡은 블랙 드래곤으로 본 드래곤을 만들 경우 엄청나게 큰 녀석이 만들어지겠군요." "그렇지. 본 드래곤은 생전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니까 말이야. 책에는 덩치가 클수록 파워와 마법저항력이 더 강해진다고 써 있더군" 대화를 듣고 있는 테렌베티 왕녀는 완전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세상에 이런 엄청난 용병단이 존재하고 있었니…….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필적하는 데스 나이트 넷과, 9서클의 마스터 그리고 본 드래곤을 보유한 용병단이라면 어림잡아도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이라 봐야 했다. 그 어떤 기사단에도 꿀리지 않는 전력인 것이다. 게다가 드래곤이란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강력한 크로센 기사단이라 할지라도 결코 가볍게 여길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저 용병단원들은 드래곤을 한낱 동네 강아지처럼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결국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저들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아니면 아까처럼 무시해야 할지를 말이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그들의 대화내용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끄으으. 깨어난 카트로이는 괴로운 듯 머리를 슬며시 들었다. 순간 귓전으로 날카로운 음성이 파고들었다. "죽고 싶다면 대가리를 움직여도 좋다. 어차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네놈의 시체뿐이니 말이다." 그와 동시에 목과 정수리 부분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졌다. 머리를 움직임에 따라 데스 나이트들의 장검이 살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또 다른 장검 두 자루가 눈에 닿아있는 것을 알아차리자 카트로이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평소 하찮게만 생각했던 인간들에게 사냥 당하는 수모를 겪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괜히 유희를 결정했다는 후회가 물밀 듯 치밀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는 이제 꼼짝없이 죽을 때만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저벅저벅. 카트로이의 머리통 옆으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왔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31회. 눈알을 굴리자 인간 마법사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카트로이의 머리 속은 이제 죽음에 대한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껏 아무 거리낌없이 인간을 얼음덩이로 만들어왔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인간들에게 사로잡혀 죽음을 맞이해야 할 운명에 처한 것이다. 입가에 모호한 미소를 머금은 데이몬은 포획된 화이트 드래곤 카트로이의 눈을 지긋이 들여다보았다. "기분이 어때?" -………. "이제 우리가 드래곤 슬레이어란 사실을 확실히 믿겠나? 카트로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말 그대로 완벽한 드래곤 사냥꾼들이었다. 공포를 모르는 데스 나이트 넷과 9서클의 대마법사, 그리고 본 드래곤을 보유한 드래곤 슬레이어 파티는 지금까지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카트로이는 설사 에인션트 급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이들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놀랍군. 본 드래곤을 보유하고 있다니…….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 정도로 놀랄 것까지는 없어. 나에겐 그보다 더 강력한 에인션트 급 본 드래곤도 있으니까……. 저번에 사냥한 블랙 드래곤의 시체로 한창 제조중이지." 이제 카트로이는 마법사의 말을 믿어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이미 그는 저들의 엄청난 힘을 온몸으로 실감한 상태가 아니던가? 저들의 실력이라면 에인션트 급 드래곤을 사냥하고도 남았기에 카트로이의 커다란 눈망울에 공포의 빛이 짙게 드리워졌다. -이제 날 어쩔 생각인가? 데이몬의 대답에는 추호도 거리낌이 없었다. "물어보나마나 아닌가? 사로잡아야 할 필요가 없으니 죽일 생각이야. 드래곤의 시체는 상당히 비싸게 팔리거든. 아니면 본 드래곤으로 제조해도 되고……." 듣고 있던 카트로이는 등골이 오싹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곧 이승을 하직할 것이며 시체마저 본 드래곤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두려움이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인간이 죽음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보다 훨씬 컸다. 드래곤 자체가 천적이 없다시피 한 강력한 종족이었고 수천 년을 살아온 만큼 생명에 대한 애착이 인간보다 수십 배 강할 수밖에 없었다. 카트로이는 결국 드래곤의 자존심을 버리고 목숨을 애걸하기 시작했다. -살려다오. "………." -돈이 목적이라면 얼마든지 주겠다. 나의 레어에는 엄청난 보물이 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줄 테니 날 죽이지 말아다오. 데이몬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칭 지상최강의 종족이라고 으스대는 드래곤의 비굴한 모습을 보니 뭔가 가슴이 확 트이는 것을 느꼈다. 평소 인간을 벌레처럼 여기고 아무 거리낌없이 목숨을 빼앗던 드래곤이 아니던가? 트루베니아 드래곤들의 소행을 떠올린 데이몬은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우린 이미 두 마리의 드래곤을 사냥하며 엄청난 돈을 벌었어. 네깟 녀석이 평생 모은 보물이라고 해 봐야 나에겐 푼돈에 불과해." -그렇지 않다. 내가 사는 북부는 엄청난 귀금속 광석이 묻혀 있다. 추위 때문에 인간의 발이 닿지 못하기 때문이지. 나는 드워프들로 하여금 광산을 개발하게 해서 엄청난 보물을 모을 수 있었다. 그 보물을 모두 너에게 주겠다. 아마 내 시체를 판다해도 그만큼 받지 못할 것이다. 카트로이가 열과 성의를 다해 설득했지만 데이몬은 조금도 납득한 기색이 아니었다. 화이트 드래곤이 아무리 많은 보물을 모았다 하더라도 인크레시아 속의 보물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할 터였고 결정적으로 데이몬에겐 물욕이 전혀 없었다.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 조건이로군. 나에겐 그깟 보물보다도 복수심을 충족하는 것이 더 중요해. 너희 드래곤들은 엄청난 트루베니아 사람들을 학살했다. 마치 벌레를 밟아 죽이듯 말이야. 널 살려둘 마음이 전혀 없으니 이만 마음의 정리를 하도록." -나, 난 트루베니아의 멸망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트루베니아 사람들을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는데 왜 내가 죽어야 하지? "왜냐하면……." 데이몬의 눈동자는 복수심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네놈이 드래곤이기 때문이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죽을 이유가 된다. 또한 네놈이 지금껏 인간을 죽인 일이 없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네놈과 함께 온 저들의 반응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지." 데이몬은 손가락을 뻗어 테렌베티 왕녀와 그 일행을 가리켰다. "처음 대했을 때 저들의 눈빛에는 공포가 역력히 배어있었다. 다시 말해 네놈의 손에 다수의 동료들이 당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지." 카트로이의 눈망울에 절망감이 배어 나왔다. 설득해 볼 여지가 이젠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데이몬의 말은 사실이었다. 카트로이는 이곳으로 오며 다수의 테렌베티 기사들을 얼음덩이로 만들어버렸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결국 카트로이는 죽음을 기정사실화 한 채 고개를 푹 수그렸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모습. 그를 지켜보던 데이몬은 데스 나이트를 향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명령만 내리면 화이트 드래곤 카트로이는 깨끗하게 이승을 하직하게 될 터였다. "그럼 잘 가라." 데이몬이 막 명령을 내리려던 찰나 누군가가 그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자, 잠깐만요." 데이몬은 말을 하려다 말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와 카트로이 사이로 끼여든 자가 율리아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뭔가 결심했다는 듯한 빛이 어려 있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율리아나는 성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이건 도대체 말이 되지 않아요." "………." "단순히 드래곤이란 이유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이유가 대관절 어디에 있어요." "또 시작이군." 데이몬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떠올랐다. 덮어놓고 끼여드는 율리아나의 괴벽이 또다시 발동된 것이다. 그녀는 카트로이의 커다란 머리통 앞에 버티고 서서 데이몬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당신의 사정은 들었어요. 그런 원한이 있다면 갚는 것이 당연하겠죠. 하지만 대상이 틀렸어요. 원한을 갚으려면 죄를 범한 트루베니아 드래곤에게 갚아야지 엉뚱한 드래곤을 대상으로 갚는다는 것은 화풀이밖에 되지 못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데이몬은 얼굴을 찡그리며 이 사태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율리아나의 되지도 않는 궤변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이놈은 사냥감이야. 사냥하는데도 이유가 있나? 노루나 토끼 같은 것을 사냥했을 때 넌 가만히 있었잖아?" "사냥이란 그것으로 인해 확실한 이익이 발생했을 때 비로소 사냥이라 말할 수 있어요. 그런 맥락에서 보면 드래곤을 죽이는 것은 결코 온당치 못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멍청하게 반문하는 데이몬을 보며 율리아나는 허리에 손을 척 걸쳤다. "이 화이트 드래곤은 몸값을 지불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것도 몇 배나 말이에요. 그렇다면 몸값을 받고 살려주는 것이 가장 합당하지 않나요? 구태여 목숨까지 빼앗을 것은 없다고 봐요." 골치가 아파진 데이몬은 머리를 짚었다. 율리아나를 설득할 일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던 것이다. 죽음을 각오했던 카트로이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목적이 뭔지는 모르지만 인간하나가 자신을 살리고자 노력하는데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순 없었다. 어쨌거나 목숨이란 누구에게도 소중한 것이니 말이다.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율리아나는 계속해서 자기 주장을 늘어놓았다. "당신은 지금 전 트루베니아 드래곤들에게 쫓기고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또다시 아르카디아의 드래곤 모두를 적으로 만들고 싶은가요? 이 화이트 드래곤을 죽인다면 아르카디아에 살고 있는 드래곤들마저 당신을 쫓아다닐지도 모르잖아요."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야. 트루베니아의 드래곤들이 날 쫓고 있는 것은 내가 놈들의 마법보고를 강탈했기 때문이지 동족을 죽여서 그런 것은 아냐. 드래곤이란 족속들은 철저히 개인 생활을 하는 놈들이지. 따라서 동족의 죽음에 슬퍼하거나 복수를 꾀하거나 하지는 않아. 모르긴 몰라도 이놈이 죽는다면 아르카디아의 드래곤들은 이렇게 생각할걸? 병신 같은 놈, 얼마나 멍청했으면 인간 따위에게 목숨을 잃었을까? 잘 죽었어, 이렇게 말이야." 데이몬의 말이 이어지자 카트로이의 얼굴에 다시 절망감이 배어 나왔다. 마법사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이었다. 마법사는 한 마디로 드래곤의 속성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자였다. 하지만 율리아나 역시 필사적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저 드래곤을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단순한 복수심 때문에? 아니면 본 드래곤을 더 만들기 위해서?" "………." "무작정 죽이는 게 능사가 아니에요. 드래곤들과 원한을 맺을 수도 있지만 좋은 인연을 맺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죠." 참지 못한 데이몬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도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드래곤을 살리는 것이 목적인가?"???????? 율리아나는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몸값을 받고 풀어주세요. 어차피 당신에겐 본 드래곤이 둘이나 있잖아요. 충분한 몸값을 받는다면 굳이 죽일 필요가 없지 않겠어요?" "그럴 수는 없어. 모르긴 몰라도 이놈은 이곳으로 오며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 거야. 함께 온 사람들의 표정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고." "그거야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잖아요?" 율리아나는 고개를 돌려 테렌베티 왕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집중되자 멍청히 서 있던 왕녀가 당황한 채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나, 난……." 율리아나는 정색을 하며 물었다. "당신들이 이 드래곤과 같이 온 사람들이죠? 한 가지 묻겠어요. 저 드래곤이 이곳까지 오며 당신 일행을 죽인 일이 있나요?" "………." "솔직하게 말해줘요. 드래곤의 생사가 달린 문제니까……." 테렌베티 왕녀의 얼굴에 갈등이 어렸다. 물론 드래곤의 손에 여러 명의 기사들이 죽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 합당했다. 하지만 왕녀는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거기에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이었다. 드래곤들이란 엄청난 파괴력과 거기에 걸 맞는 높은 자부심을 가진 종족이기 때문에 은원 관계가 확실하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원한을 맺은 인간이라면 세상 끝까지 따라가서 갚아주고, 은혜를 입었다면 확실하게 베푸는 것이 드래곤의 성정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드래곤이 이대로 죽게 내버려두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했다. 기사들은 이미 죽은 상태였고, 한 번 죽은 자들을 되살릴 수 없는 법이니 드래곤이 죽고 나면 모든 것이 그대로 끝나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약간 돌려보면 또 다른 해결방법이 있었다. 테렌베티 왕녀에게는 충분히 그것을 감안할 만한 지혜가 있었다. 여기서 드래곤에게 은혜를 베푼다면, 그리하여 드래곤이 살아난다면 그 파급효과는 무궁무진할 터였다. 목숨을 살려준 은혜로 드래곤은 테렌베티 왕국에 확실한 반대급부를 보장할 것이 틀림없었다. 얼음덩이로 변한 기사들의 일을 묻어주기만 한다면 드래곤은 반드시 은혜를 갚을 것이다. 그것을 떠올린 테렌베티 왕녀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드래곤은 이곳까지 오며 단 한 명의 일행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데이몬은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뭐라고?" 그녀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은 휘하 사절단 개개인의 반응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같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왕녀를 주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테렌베티 왕녀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이곳까지 오며 몇몇 기사들이 죽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죽은 이유는 다름 아닌 눈사태 때문입니다. 드래곤은 오히려 그들은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요. 하지만 힘이 닿지 않아 그들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테렌베티 왕녀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데이몬을 향해 공손한 태도로 예를 올렸다. "저 역시 간청 드리겠습니다. 제발 드래곤을 살려주십시오."?? 그녀의 대답에 율리아나는 그것 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는 무척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것이다. "그것 봐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이 드래곤을 죽인다면 밝혀지는 사실은 한 가지 밖에 없어요." "그게 뭔데?" "당신이 피도 눈물도 없는 살육자라는 게 증명되는 것이지요." "정말 어이가 없군." 기가 막힌 나머지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드래곤을 괜히 포획했나, 하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떨어지자마자 생각할 것도 없이 죽여버렸다면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하다 못해 데이몬은 데스 나이트들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할까?" "글쎄?" 데스 나이트들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난감한 기색을 짓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32회. 물론 그들 역시 드래곤에 대해 크나큰 원한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포획해 놓은 화이트 드래곤이 복수의 대상이 아니란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의 원수는 엄연히 트루베니아를 멸망시킨 드래곤들이었다. 포획해 놓은 애송이 드래곤을 죽여 봐야 원한을 갚는데 별달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데이몬은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좋다. 네 녀석이 지불할 수 있는 몸값이 얼마나 되지?" 고맙다는 눈빛으로 연신 율리아나와 테렌베티 왕녀를 쳐다보고 있던 카트로이에겐 귀가 확 트이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족히 20톤 정도는 될 것이다. 정련된 금궤로 말이다. "금궤라고? 젠장. 황금은 무게가 많이 나가잖아? 그것말고 값나가는 보석 종류는 없어? 쓸만한 아티팩트도 괜찮고……." 카트로이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황금을 마다하는 인간을 처음 보았던 것이다. 그는 난처하다는 듯 눈을 내려 깔았다. -보석 종류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광산에서 채굴되는 것이 모두가 금 종류이니 말이다. "젠장 쓸모 없는 금붙이 따위를 어디다 쓰지? 나에겐 그것보다 드래곤 하트가 훨씬 필요한데 말이야." 데이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황금을 보고 쓸모 없다고 하는 사람은 역사를 뒤져봐도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한다?" 데이몬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카트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물론 카트로이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의 입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결정 여하에 따라 목숨이 좌우되기 때문이었다. "이봐. 대장." 데이몬이 부르자 카심이 얼른 다가갔다. "부르셨습니까?" "황금 20톤 정도면 골드화로 따져서 얼마나 되지?" 한동안 머리를 굴린 카심은 겨우 금액을 추정해 낼 수 있었다. "대략 2만 골드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얼마 되진 않는군." 데이몬의 말에 카심은 입을 딱 벌렸다. 말이 2만 골드이지 정말 천문학적인 액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거금을 두고 얼마 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다니……. "자네 생각은 어떤가? 2만 골드 받고 풀어주는 게 나을까? 아니면 그냥 죽여버릴까? 난 잘 모르겠으니 대장이 결정을 내리도록 하게. 어쨌거나 명령권자는 대장이니 말이야." 카심의 얼굴에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데이몬은 지금 많은 왕녀들이 모여 있는 곳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저들의 머리 속에는 카심 용병단이란 명칭이 뚜렷하게 새겨질 것이 분명했다.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지만 카심은 억지로 얼굴표정을 고쳤다. 물론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이 나왔지만 말이다. "크흠, 흠. 그 정도면 충분한 몸값이라고 생각됩니다만." 데이몬은 두말하지 않았다. "뭐 대장이 결정했는데 내가 할 말이 있겠나? 그렇게 하지. 하지만……." 말을 마친 데이몬은 카트로이를 쳐다보았다. "조건이 한 가지 더 있어. 그것은 나중에 얘기하지. 물론 들어주겠지?" 카트로이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이 걸린 일이니 만큼 그 어떤 조건이라도 거부할 수 없었다. -내 힘이 닿는 한 들어주겠다. 카트로이가 승낙하자 데이몬은 그리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데스 나이트들을 쳐다보았다. "풀어줘라." 데스 나이트들은 거칠게 으름장을 놓으며 검을 거뒀다. "애송이 드래곤. 운 좋은 줄 알아라." 스릉. 데스 나이트들이 뒤로 물러나자 카트로이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몸을 겨누고 있던 네 자루의 장검 때문에 그 얼마나 가슴을 조였던가? 얼마나 긴장했던지 전신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은 냉랭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 "힐링으로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허락하겠다. 시간이 없으니 지금 즉시 실행하라." -알겠다. 카트로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찮게만 생각했던 인간에게 명령을 받아야 하는 것이 그리 달갑진 않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힘을 가진 자는 자신이 아닌 인간이었으므로. 치료에 몰두하는 카트로이를 쳐다보며 데이몬은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잘 되었군. 이 참에 극한지인 북부에 가는 것이 낫겠어. 그곳의 냉기라면 본 드래곤을 충분히 완성시킬 수 있을 테니까…….' 사실 데이몬은 꿍꿍이가 있어 화이트 드래곤을 살려둔 것이었다. 합당한 이유가 없었다면 아무리 율리아나가 만류했다 하더라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화이트 드래곤의 목을 잘라냈을 것이다. 드래곤과의 두 번에 걸친 접전. 거기에서 데이몬은 공중전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와 데스 나이트들의 조합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공중에서 가해지는 공격에는 약점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다 유일한 해결책이라 할 수 있는 본 드래곤은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데이몬으로써는 서둘러 본 드래곤을 완성시킬 필요가 있었고 화이트 드래곤을 살려준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화이트 드래곤의 서식지는 만년설로 뒤덮인 극히 추운 지방이다. 그곳이라면 본 드래곤을 완성시킬 냉기가 충분히 존재하고 있을 터였다. 본 드래곤에게 냉기를 충분히 흡수시킨다면 더 이상 태양 빛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더욱 빠르고 높이 날 수 있을뿐더러 프로스트 브레스의 위력도 더 강해지는 것이다. 그 정도라면 에인션트 급 드래곤과 공중전을 벌이더라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게다가 그 동안 화이트 드래곤의 레어에서 용병들을 수련시킬 수도 있었기 때문에 데이몬으로써는 일거양득이라 할 수 있는 결정이었다. 물론 생명이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화이트 드래곤은 데이몬의 요구를 섣불리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데이몬의 노림수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철저히 개인적인 목적이었지만 말이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카트로이가 치료를 마쳤다. 통증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긴 했지만 데스 나이트에게 입은 상처는 대부분 아문 상태였다. 상처를 치료한 카트로이는 형언할 수 없는 눈빛으로 테렌베티 왕녀를 쳐다보았다. -고맙다. "별 말씀을……."???? -날 구해준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다. 드래곤의 진심 어린 감사표시에 테렌베티 왕녀는 슬쩍 얼굴을 붉혔다. 앞으로 드래곤에게서 받을 보상을 생각하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였다. 이제 그녀가 소속된 테렌베티 왕국은 앞으로 영원히 드래곤의 보살핌 속에 놓이게 될 터였다. 드래곤의 손에 죽은 기사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의 죽음을 달게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내심을 짐작이라도 하듯 카트로이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몸값이 해결되는 즉시 테렌베티 왕국으로 찾아가서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도록 하겠다. 그러니 돌아가서 부탁할 소원을 생각해 놓거라. "알겠습니다." 카트로이는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그녀 역시 자신을 살린 일등 공신 중 하나였다. -너도 왕녀의 신분을 가지고 있느냐? "그래요. 엘리시아 산맥에 위치한 카르셀 왕국의 왕녀랍니다." -엘리시아 산맥이라면 무척 먼 곳이로군. 날 구해주었으니 그 대가로 너에게도 역시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겠다. 단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것은 드래곤의 약속이므로 한 번 맹세한 이상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질 것이다. 율리아나의 얼굴에 함지박 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드래곤이 들어주는 소원이라면 결코 가볍게 생각할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알겠어요. 호의에 감사드려요" 말을 마친 카트로이는 커다란 눈동자를 돌려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하겠는가? 지금 나와 함께 가서 몸값을 받아가겠는가?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해결할 문제가 하나 남았거든……."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몸값을 받으러 가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하나 있군." "그게 뭐죠?" 의아한 듯 반문하는 율리아나를 보며 데이몬은 간단한 손짓으로 주위에 결계를 쳤다. 둘은 곧 외부와 완벽히 차단되어 버렸다. 그것을 확인한 데이몬은 느긋하게 작업(?)에 들어갔다. "난 네 요구대로 드래곤을 살려줬다. 그러니 너도 내 요구를 하나 들어줘야 하지 않겠나?" 데이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율리아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감정을 느껴야 했다. 흑마법사의 요구가 뭔지 듣지 않아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서, 설마……." 데이몬은 파랗게 질린 율리아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맞았어. 매일 아침 볼에다 뽀뽀 한 번과 '아저씨' 알지?" "미, 미쳤군요. 나더러 그런 소름끼치는 짓을 또다시 하란 말이에요. 난 못해요." "정말이냐?" "그래요. 죽어도 못해요." 율리아나는 완강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데이몬의 얼굴이 별안간 냉랭해졌다.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이 드래곤을 죽여야겠군. 이봐. 지금 즉시 놈의 모가지를 잘라내." 고개를 돌려 데스 나이트를 부르려는 찰나에 율리아나가 다급하게 데이몬의 소매를 부여잡았다. 물론 결계 때문에 음성이 전해질 턱이 없었지만 율리아나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정말 이러기예요. 정말 치사해요." "내가 치사한 줄 이제 알았어?" 눈을 치켜 뜨며 항의하던 율리아나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당신은 천고의 악당이에요. 무지무지 비열한 악당." "고마워. 비열한 악당이란 말은 나에게 있어 최고의 찬사 중 하나야." 느물느물 흘러나오는 데이몬의 대답에 율리아나는 결국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적어도 데이몬은 그녀에게 있어 철저한 천적이었다. 이제 그녀는 꼼짝없이 아침마다 데이몬의 볼에 입을 맞추며 상냥하게 '아저씨'라 불러야 하는 것이다.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그녀가 거절한다면 드래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약속 또한 물거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마음을 정리한 율리아나는 선심이라도 쓰듯 한 마디 내뱉었다. "좋아요. 저번처럼 열흘동안만 할 게요. 괜찮죠?" 데이몬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게는 안되지. 아무리 양보해도 1년 동안은 받아야겠어." "미쳤어요? 보름 이상은 어떤 일이 있어도 허락할 수 없어요." "좋아. 6개월." 지루한 협상의 시간이 지나가고 마침내 기한은 1달로 결정되었다. 율리아나는 풀죽은 기색으로 떠듬떠듬 내뱉었다. "좋아요. 하지만 내일부터 시작할게요.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죽어도 못하겠으니." "뭐, 그러던지." 소기의 성과를 거둔 데이몬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율리아나가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데이몬의 뒷모습을 쏘아보고 있었지만. 일을 끝낸 데이몬은 결계를 걷은 뒤 늘어선 용병들에게 고함을 쳤다. "자 모두들 드래곤의 등에 탑승하라. 몸값을 받으러 가야지." 그 말에 놀란 것은 카트로이였다. -나, 날 타고 가겠단 말인가? "왜? 싫어." -그, 그건 아니지만……. "네놈을 어떻게 믿고 공간이동을 맡기겠어? 그러니 잔말말고 우릴 태우도록……." 용병들을 한 번 둘러본 데이몬은 내친 김에 으름장을 놓았다. "언제든지 본 드래곤을 꺼낼 수 있으니 행여나 우릴 떨굴 생각은 하지 말라고……. 알겠나?" -물론이다. 난 드래곤. 한 번 약속한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어기지 않는다. "좋아." 데이몬은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화이트 드래곤의 등에 올라탔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33회. 그의 뒤를 이어 데스 나이트가 하나씩 탑승했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인크레시아에 들어가지 않고 동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용병들은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했다. 드래곤의 등에 탄다고 생각하니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뭐 하는 거야. 안 갈 거야" "네, 네 갑니다." 카심이 후닥닥 달려와 드래곤의 등에 뛰어올랐다. 대장으로써 모범을 보여야 했기에 겁이 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율리아나는 별 거부감 없이 탔고 미첼을 비롯한 나머지 용병들도 하나 둘 몸을 움직였다. 그들은 결국 드래곤의 등에 모두 몸을 실어야 했다. 멍하니 쳐다보던 사람들을 둘러보며 데이몬이 기세 좋게 고함을 질렀다. "그럼 출발. 어디 한 번 드래곤의 몸값을 받으러 가볼까?" -날아오르겠다. 떨어지지 않도록 잘 붙잡아라. 말을 마친 카트로이는 그대로 날아올랐다. 워낙 덩치가 컸기에 일행을 태우고도 전혀 힘겨워하지 않았다. 화르르 날개를 활짝 펼친 화이트 드래곤은 허공을 한 바퀴 선회하더니 곧장 북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햐. 상쾌하군." "내 평생에 드래곤의 등에 타 볼 줄이야." 용병들은 얼굴에 와서 부딪히는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며 생전 처음 행하는 비행을 즐겼다. 그들의 목적지는 일년 내내 만년설에 뒤덮여 있는 북부였다. 순식간에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는 그들을 사람들은 눈도 떼지 않고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일이 믿어지지 않는 듯 멍한 표정으로 말이다. "세, 세상에……." 노관리의 눈은 찢어질 듯 부릅떠져 있었다. 카르셀 왕녀 일행을 접대했던 바로 그 관리였다. 그는 지금 일생에 걸쳐 놀랄 일들을 단 하루에 겪고 있었다. 생전 처음 드래곤을 상대해 보았고, 그 드래곤이 사냥 당하는 장면을 빠짐없이 지켜본 그는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몸값을 받아내기 위해 드래곤의 등을 타고 떠나는 장면까지 목격해야 했다. 그것만해도 놀랄 일이었는데 이번에는 그의 앞에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신분의 권력자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것도 위험하기 그지없는 공간이동을 통해. 마법진을 이용하기 때문에 다소 안정성이 있긴 하지만 고위 인사들에겐 보편적으로 공간이동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만큼 안전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들 중에서도 단연 최고위급이라 칭할 수 있는 이가 공간이동을 통해 온다고 하니 노관리의 얼이 빠질 법도 했다. '서, 설마 내 보고 때문에 온 것일까?' 운집한 왕녀들과 마찬가지로 펠젠틴에서 파견 나온 관리들 역시 드래곤 사냥 장면을 끝까지 목격했다. 물론 대부분의 관리들이 정신 없이 사냥장면을 감상하기 바빴지만 그들 중엔 임무수행에 투철한 자가 전혀 없진 않았다. 지금 마법진 앞에 서 있는 노관리가 바로 그였다. '이, 이 일은 반드시 수도에 알려야 해.' 사냥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정신이 번쩍 든 노관리는 항상 휴대하는 수정구슬을 통해 마법통신을 시도했다. 마법통신의 시전이 가능한 초급 마법사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벌어지는 드래곤 사냥은 일목요연하게 펠젠틴에 알려졌다. "서, 설마 그런 일이……." 통신을 받은 펠젠틴의 마법사는 그 사실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 물론 노관리 역시 상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드래곤 사냥은 직접 눈으로 보지 않는다면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통신담당자는 그리 탐탁지 않은 눈치로 통신을 끊었다. "일단 보고는 올려보겠습니다. 물론 이 사실이 거짓으로 판명될 경우 엄중한 문책을 각오하셔야 할 것입니다." "걱정 마시오. 나말고도 많은 목격자들이 있으니 말이오." 노관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통신을 접었다. 하지만 상황은 예상 밖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니……. 통신을 마친 노관리가 몸을 돌리려던 찰라 다시 수정구에서 빛이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노관리가 얼른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자 그곳에는 아까의 마법사가 얼이 반쯤 빠진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나 급했는지 그는 말까지 더듬어가며 의사를 전달했다. "지, 지급이오. 바, 바로 지금 페르슈타인 공작전하께서 직접 그곳으로 가신다고 하오. 호위 기사와 마법사까지 합치면 모두 일백 명 가까이 될 테니 맞을 채비를 하도록 하시오." "페, 페르슈타인 공작전하라고요?" 노관리는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이라면 명실상부한 크로센 제 1의 권력자였다. 이미 그의 명성은 식물인간 상태로 있는 발렌시우스 황제나 조만간 황제 자리를 물려받을 드비어스 황태자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황제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크로센 기사단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실질적인 크로센 제국의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때문에 노관리는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 몸까지 꼬집어봐야 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마법진을 정비하는 것이었다. 이곳에는 수도인 펠젠틴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고 노관리는 그려진 좌표가 어긋나지나 않았는지 빠짐없이 점검했다. 쓰쓰쓰. 펼쳐진 마법진에서 강렬한 빛무리가 일어나자 노관리는 바짝 긴장했다. "드디어 오시려나 보군." 혼잣말이 끝나자마자 마법진은 눈부신 광망에 휩싸였다. 번쩍. 빛이 사라지자 거기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운데에는 화려한 복장을 걸친 노인 한 명이 서 있었고 그 주위를 완전 무장한 기사들이 빼곡이 메우고 있었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했는지 기사들은 전투준비를 완전히 갖춘 다음이었다. 뽑아든 검에서 솟아오른 푸른 기운을 보아 하나같이 소드 마스터가 아닌 자들이 없었다. 아무래도 듀크 기사단에 소속된 소드 마스터를 모조리 데리고 온 듯 싶었다. 게다가 실력이 뛰어나 보이는 마법사들도 대거 공작과 동행한 상태였다. 궁정마법사들은 아니었지만 실력만큼은 그들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 높은 마법사들. 그들은 바로 페르슈타인 공작의 개인 마법사 군단이었다. 듀크 기사단이 아직까지 크로센 기사단을 감당할 수 없는 것과는 달리 공작이 보유한 마법 군단의 규모는 이미 궁정마법사 집단을 추월한 상태였다. 물론 대마법사 필라모네스에 필적하는 실력자는 없었지만 그 외의 전력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비교가 되지 않았다. 헬프레인 가(家)의 재력은 이미 황실을 능가한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통상적으로 마법사들은 같은 소속의 마법사들에 대해 낱낱이 알고 있다. 노관리 자신도 낮은 서클의 마법사였기 때문에 그들의 정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공작을 호위하는 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7서클을 능가하는 고위급 마법사였다.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호위라고 볼 수 있었다. 그것을 간파한 순간 노관리의 무릎은 자신도 모르게 꿇려졌다. 상대는 자신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엄청난 신분을 가진 이였다. "고, 공작전하를 뵈옵니다." 마법진에 모습을 드러낸 자는 다름 아닌 페르슈타인 공작이었다. 안전에 특히 신경을 쓰는 그가 공간이동을 통해 레이토나에 나타난 것이다. 주위를 슬쩍 훑어본 페르슈타인 공작은 다짜고짜 노관리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누, 누구 말씀이신지?"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에 짜증기가 어렸다. "드래곤 슬레이어들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흑마법사와 데스 나이트들. 어째서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놀랍게도 페르슈타인 공작의 목적은 흑마법사였다. 흑마법사를 회유하기 위해 그가 직접 온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한 발 늦고 말았으니……. 노관리는 마치 죄라도 지은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이미 드래곤의 등에 타고 이곳을 떠났습니다." "드래곤의 등에 타고?" 페르슈타인 공작의 눈이 커졌다. 설마 드래곤을 타고 이곳을 떠났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노관리가 보고가 들어갔던 시점은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이 사냥을 막 끝마친 때였으므로 공작은 슬레이어 일행이 아직까지 이곳에 있을 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부근의 병력을 움직여 데이토나 부근을 에워싸긴 했지만 공중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공작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난감하군. 지금쯤이면 그들이 한창 드래곤의 시체를 해체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들은 드래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노관리의 말에 페르슈타인 공작은 깜짝 놀랐다. "사, 사냥에 실패했단 말이냐?" "그것이 아니오라……." 자초지종을 들은 페르슈타인 공작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세상에, 몸값을 받고 풀어주다니……. 비록 2만 골드가 거금이긴 하지만 드래곤의 사체는 충분히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 텐데……." 페르슈타인 공작의 생각은 극히 지당한 것이었다. 이미 그는 크로센 제국 제일의 재력가였으므로 2만 골드 정도는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 있다. 1년에 거둬들이는 소작료만 하더라도 그 액수를 능가하는 것이다. 공작에겐 황금보다는 고급무기를 만들 수 있는 드래곤 본이나 드래곤 하트가 더욱 필요했기 때문에 좀처럼 아깝다는 생각을 금치 못했다. "아쉽군. 웜급 드래곤 한 마리 분량의 드래곤 본이면 많은 기사들을 무장시킬 수 있을 텐데……. 실력이 떨어지니 무기라도 좋아야지. 그건 그렇고. 그들은 어디로 갔나?" "죄송하지만 자세한 것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북부에 위치한 화이트 드래곤의 레어로 갔으리라는 짐작 밖에는……." "하긴, 날아서 갔다면 뒤쫓을 방법이 없겠지." 페르슈타인 공작은 낙심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반드시 흑마법사를 회유하겠다는 각오로 오긴 했지만 당사자들이 사라진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몸값을 받고 나면 그들은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 때를 노려야겠군.' 마음을 정한 페르슈타인 공작은 다시 마법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돌아간다." "옛." 복명한 기사들이 주위를 둘러싸자 공작은 느긋하게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그것을 보던 마법사들이 지체 없이 워프를 전개했다. 혹시라도 행해질지도 모르는 마법방해를 위해 여러 명의 마법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공간이동을 캐스팅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마법진에서는 눈부신 광망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쓰쓰쓰. 조금 뒤 공작일행의 모습은 그곳에서 지워져버렸다. 사람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아르카디아 제일의 권력자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드래곤과 마찬가지로 페르슈타인 공작 역시 쉽게 보기 힘든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그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하나 둘씩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놀랍군." "페르슈타인 공작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사람들은 아직까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이 놀라운 사실을 하루라도 빨리 본국에 알려야겠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34회. 수많은 왕녀들이 운집한 곳에서 벌어진 드래곤 사냥. 그 일을 해 낸 카심 용병단에 대한 소문은 발 없는 말을 타고 아르카디아 전역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워낙 목격자들이 많았기에 소문이 퍼져나가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것이 사실이야?" "그렇다니까……. 카심 용병단원들은 수많은 왕녀들과 그 호위기사들이 보는 앞에서 웜급 화이트 드래곤을 사냥했다고……. 그 뿐인 줄 알아? 완벽히 포획한 상태에서 드래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엄청난 액수의 몸값을 지불한다고 하자 그들은 미련 없이 드래곤을 살려줬다고 하더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딱 벌려야 했다. "말도 안 돼. 그렇다면 드래곤을 결코 요행으로 잡은 것이 아니란 말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말이 돼. 왜냐하면 그들은 최상급의 소드 마스터에 준하는 데스 나이트 넷과 거대한 본 드래곤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네. 게다가 9서클의 대마법사가 용병단의 구성원이야. 그 정도면 제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충분히 사냥할 수 있지 않겠나? 손발이 척척 맞았다는 것을 보니 벌써 드래곤을 여럿 사냥한 모양이야. 본 드래곤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 않겠어?" "노, 놀랍군. 세상에 그런 용병단이 있다니……."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오직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로 엄청난 용병단이 출현한 것은 아르카디아 역사상 전무했다. 심지어 역사가 깊은 트루베니아에서조차 이런 용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정도 전력이라면 그 어떤 왕국의 근위기사단과도 맞붙을 수 있는 전력이었다. 때문에 아르카디아에 존재하는 모든 왕국의 국왕들은 카심 용병단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 용병단만 고용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무서운 것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애가 타는 국왕은 단연 테르비아 국왕이었다. 진작에 흑마법사를 끌어들였다면 이처럼 전 대륙의 관심이 집중되는 일이 없었을 터였다. 지금에 와서 흑마법사를 회유한다면 주변국들이 바짝 긴장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아깝군. 정말 아까워." 하지만 테르비아 국왕은 그래도 흑마법사를 회유할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그의 야심을 충족시켜 줄만한 인물은 오직 흑마법사 뿐이었다. "대륙의 패권에 관심이 있는 국왕이라면 지금쯤 흑마법사를 끌어들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손을 써야 한다. 아르카디아 전역에 파견된 정보망을 총 동원하라. 다른 일에 가장 우선해서 흑마법사의 종적을 찾아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데이몬과 카심 용병단은 아르카디아 제일의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페르슈타인공작 뿐만 아니라 테르비아, 펜슬럿, 테제로스 등 쟁쟁한 강대국들의 정보부에서 대거 그들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태풍의 눈으로 자리잡은 데이몬과 카심 용병단원들은 지금 척박한 북부의 오지에서 한창 고민에 사로잡혀 있었다. 말썽꾸러기 고용주를 떼어놓을 찰나에 뜻밖의 일이 생겨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1년 뒤, 황태자비 간택식이 거행될 때까지 저희들의 호위를 받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율리아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하는 카심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어깨를 폈다. 이미 각오를 단단히 한 듯한 모습이었다. "바로 그래요. 내가 요구하는 것은 철저히 계약서 내용에 기초한 것이에요. 그러니 당신들은 반드시 이행해야 해요." '미치겠군.' 카심은 얼굴을 팍 구겼다. 율리아나의 억지에 어느 정도 단련이 되었다고 생각했건만 그것은 큰 오산에 불과했다. 그녀는 전혀 얼토당토않은 억지로 카심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내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계약서에 명시된 기한은 분명히 내가 식에 참가할 때까지예요. 그러니까 계약은 1년 뒤 황태자비 간택식이 벌어질 때가 되어야 종료되는 거죠. 알겠어요?" "그것은 명백한 억지입니다. 그 어떤 용병단도 그런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황태자비 간택식이 저희 때문에 미루어진 것은 아니잖습니까? " 카심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황당함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율리아나가 전혀 뜻밖의 일을 들먹이며 계약기간을 연장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둑해진 재정으로 말미암아 여분의 돈까지 주어가며 율리아나를 떼어놓으려고 했던 카심이었다. 지금껏 이리로 오며 그녀의 고집 때문에 얼마나 곤욕을 겪었던가? 비록 그녀 덕택에 흑마법사 데이몬의 일행이 되긴 했지만 다시 동행하는 것은 카심이 전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율리아나는 그 정도로 골치 덩어리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로 계약기간이 연장되게 생겼으니…….??율리아나는 계약서에 기한이 명확히 명시되지 않은 것을 빌미로 계약기간을 내년까지 끌고 가려 하고 있었다.?? "아무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난 내년까지 경호를 받아야겠어요. 황태자비 간택식이 다시 열릴 때까지 말이에요." '골치 아파 죽겠군.' 할 말이 없어진 카심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율리아나의 요구가 어처구니없기는 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계약서 작성을 꼼꼼하게 하지 않은 것이 그가 범한 최대의 실수였다. 계약서에 뚜렷한 기한 없이 그저 황태자비 간택식에 참가할 때까지라고만 명시되어 있었으므로 율리아나는 그 문제를 집요하게 걸어 넘어지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썬더버드 용병단에 있을 때 계약하는 요령을 좀 알아둘 걸 그랬군.' 자고로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이미 늦어버린 법. 큰 용병단에는 전문적으로 계약을 담당하는 이가 있었으므로 일선용병 부대장인 카심이 계약을 해 본 일도 없을뿐더러 계약 요령에 대해 알 턱이 없었기 때문에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는 데이몬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둘의 논쟁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는 듯한 표정. 그것을 본 카심의 심사는 더욱 복잡해졌다. '골치 아프군. 데이몬은 분명히 그녀와 함께 있는 쪽을 원할 테니까…….' 따지고 보면 이번 문제는 전혀 골머리 썩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그녀에게 상당한 돈을 줄 생각이었으므로 깨끗하게 계약해지를 해 버리면 그 뿐이었다. 10골드에 계약을 맺었으니 그 세 배인 30골드만 주면 그들 사이의 계약관계는 그대로 사라져버린다. 그런 다음 서로 갈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카심이 봉착한 최대의 고민은 바로 데이몬 때문이었다. 관심이 있건 없건 간에 데이몬의 주 관심사는 율리아나의 얼굴을 관찰하는 것이고, 그녀도 이제 만성이 되었는지 그의 집요한 시선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다시 말해 냉정하게 그녀를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이 카심이 처한 입장이었다. '할 수 없지. 앞으로 또 얼마나 당할지는 모르지만…….'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년 황태자비 간택식이 열릴 때까지 왕녀님을 계속 호위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율리아나는 의당 그래야 한다는 듯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옆에는 미첼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 그를 슬쩍 쳐다본 카심은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건진 것이 전혀 없진 않으니 말이다. '그래도 미첼의 검술교습을 계속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썩 나쁘진 않군.' 논쟁이 끝나자 데이몬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얘기가 끝났나?" "예." "1년 더 데리고 있기로?" "그렇습니다. 첫 청부인지라 깔끔히 처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는 카심을 보며 데이몬은 혀를 찼다. "쯔쯔. 엄청나게 손해보는 장사로군. 단돈 10골드로 저 골칫덩어리를 1년 넘게 떠맡아야한다니 말이야." "뭐가 어째욧." 화가 났는지 율리아나는 허리에 손을 척 걸친 채 눈에 쌍심지를 켜고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엄포에 쉽사리 겁먹을 데이몬이 아니었다. "솔직히 10골드론 너희들이 1년 동안 먹을 밥값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나? 대장이란 녀석 마음만 무진장 좋지 너무 물러서 탈이라니까……." "흥.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밥벌이는 우리가 할 테니까……." 비록 요구조건은 관철시켰지만 그리 떳떳하지는 못했던지 율리아나는 눈총만 주고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왠지 모르게 데이몬에게만은 함부로 하지 않는 율리아나였다. 그녀의 뒷모습을 슬쩍 쳐다본 데이몬은 카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음 써 준 것은 좋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보나마나 자넨 나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계약 연장을 했겠지?" 카심의 얼굴에 쑥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아, 알고 계셨습니까?" "앞으론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저 계집아이에겐 용모말고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 말이야. 알겠나?" 데이몬은 무표정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틈나는 대로 율리아나를 쳐다보긴 했지만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외모뿐이다. 두 번 다시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섭섭할 것은 없었다. 다프네와 율리아나는 그저 생김새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존재란 사실을 데이몬은 잘 알고 있었다. 난처해진 카심이 떠듬떠듬 핑계거리를 늘어놓았다. "뭐, 그것보다도 계약을 연기하게 되면 부하들이 미첼에게 검술교습을 더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있지 않습니까? 전 바로 그 문제 때문에……." "하긴 그럴 수도 있겠지?" 데이몬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세한 것까지 신경 써주는 카심의 마음씀씀이가 가슴 깊이 와 닿았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따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인정에 휘둘리는 경향이 다소 있긴 했지만 카심은 정말 훌륭한 리더라고 봐야 했다. 항상 구성원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그의 능력은 데이몬도 익히 인정한 상태였다. '하긴 그 때문에 내가 동료로 삼았으니까…….' 고개를 뒤흔든 데이몬은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자네 생전 처음 드래곤의 레어에 와 본 소감이 어떤가?" "그, 그렇군요." 카심은 그때서야 이곳이 어디인지 자각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계약 문제로 입씨름을 벌였으니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있을 턱이 없었다. 카심은 상기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훑어보았다. 순식간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 이곳이 마, 말로만 듣던 드래곤의 레어라니……" 북부의 오지에 위치한 화이트 드래곤의 레어는 카심의 얼을 빼 놓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드래곤의 위용을 과시하려는 듯 방대한 규모로 지어진 레어는 전체가 얼음으로 되어 있었다. 가히 얼음궁전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일행들은 이미 사방으로 흩어져 생전 처음 보는 드래곤의 레어를 관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드래곤의 레어는 인간들에겐 철저히 금역(禁域)인 곳이었으므로 호기심이 없을 수가 없었다. 드래곤의 등에 탑승한 상태로 레이토나를 떠나온 일행들은 제법 오랫동안 비행해야 했다. 척박한 오지인 북부는 그 정도로 멀었다. 꼬박 하루를 비행하고 나서야 일행들은 눈과 얼음으로 이루어진 북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신의에 충실한 종족이란 것을 증명하듯 카트로이는 아무런 수작도 부리지 않고 일행을 레어로 고이 안내했다. 레어로 데리고 가서 몸값만 지불하면 지긋지긋한 사냥꾼들이 곧 떠날 것이라 철석같이 믿으며. 수 천년 동안 살아온 자신의 레어에 도착한 카트로이는 일행을 내려준 뒤 다시 날개를 활짝 펼쳤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라. 광산에 가서 금궤를 가지고 오도록 하겠다. "금궤를 보고(寶庫) 속에 보관한 게 아니었어?" 카트로이는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무겁기 때문에 금궤를 이곳에 보관하지 못한다. 바닥이 금궤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할 수 없지. 그동안 네 녀석의 레어나 감상해야겠군." -좋을 대로. 말을 마친 카트로이는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올랐고 일행은 이렇게 드래곤의 레어에 남겨지게 되었다. 평생에 한 번 잡을까 말까 한 기회였기 때문에 용병들은 정신 없이 드래곤의 레어를 감상하는데 바빴다. 물론 도착하자마자 입씨름에 들어간 카심과 율리아나를 제외하고……. "캬. 정말 멋지군. 어떻게 이런 장관을 연출할 수 있지?" "오직 북부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로군." 어른 열 명이 손을 잡아도 에워싸지 못할 듯한 거대한 얼음 기둥들이 천장을 단단히 떠받들고 있었고 온갖 몬스터나 유사종족을 조각해 놓은 얼음 상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깎아지른 듯 한 벽과 족히 50미터는 될 듯한 천장은 한 눈에 봐도 인간들은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할 것 같았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35회. 수다쟁이 패터슨이 몸을 덜덜덜 떨며 카심을 쳐다보았다.?? "이, 이 모든 것을 드, 드래곤이 만들었겠지요?" "그, 그렇진 않을 거야. 아, 아마도 드워프를 시켰겠지." 카심 역시 이를 딱딱 부딪히며 몸을 떨고 있었다. 드디어 추위를 느끼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이곳은 북부 깊숙한 곳이었고 숨결이 얼어 콧수염에 달라붙을 만큼 추운 곳이었다. 바람만 불지 않을 뿐이지 제대로 된 보호장구 없는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말 그대로 전무했다. 그들은 지금껏 드래곤의 등을 타고 날아오며 전혀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데이몬이 화이트 드래곤의 등에 바람과 추위를 막아주는 실드를 설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드래곤은 날아가 버렸고 일행은 북부의 에는 듯한 추위에 그대로 노출되어 버렸다. 처음에는 버틸 만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냉기가 뼛속 깊이 파고 들어오고 있었다. 제대로 된 방한장비를 갖출 틈이 없었으므로 용병들은 심각하게 추위를 느껴야 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느낀 데이몬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많이 추운가 보군." "그, 그렇습니다. 이, 이곳은 정말 춥군요." 아닌게 아니라 용병들의 몰골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숨결이 얼어붙어 콧수염에 얼음덩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떠는 모습은 추위가 참기 힘들 정도란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멀쩡한 것은 오로지 데이몬과 데스 나이트들뿐이었다. 언데드인 그들이 추위를 느낄 턱이 없었고 데이몬은 이미 마법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미첼은 그래도 참을 만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수준에 오르지 못한 용병들에게 추위는 결코 참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율리아나는 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길게 한숨을 내쉰 데이몬이 잠자코 마나를 재배열했다. "할 수 없지." 그 때 카심이 다급하게 데이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무슨 일이지?" 시퍼렇게 언 얼굴이었지만 카심의 얼굴에는 심각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혹시 결계를 치시려는 것 아닙니까?"???? "그렇네. 일단 추위는 막아야 하지 않겠나?" "그것은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 바닥을 보십시오." 카심의 말에 일행은 일제히 바닥을 쳐다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단단한 얼음덩이 같았지만 자세히 쳐다보니 얼음 저편으로 물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얼음이 워낙 두터웠기 때문에 유심히 쳐다보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것을 간파한 순간 데이몬은 등골이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이 레어는 호수 위에 지어놓은 것이로군.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어." 원래 그는 결계를 치고 그 속에다 화염의 마나를 재배열해서 공기를 데우려고 했었다. 만약 그랬다면 온기에 얼음이 녹아버렸을 터였고 일행은 큰 곤경에 처했을지도 몰랐다. 뼛속조차 얼릴 정도로 차가운 물에 그대로 곤두박질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카심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이 금궤를 이곳에 두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가 보군. 아무튼 뭔가 방도를 찾아야겠어." 상황은 무척 심각했다. 용병들은 하나같이 얼싸안고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녹이려 하고 있었다. 심지어 율리아나조차 미첼과 꼭 껴안은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허사였다. 극도의 한기 때문에 드러난 피부가 거무스름하게 죽어들고 있었다. 데이몬은 결국 그들을 레어 밖으로 인도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레어에서 나가는 게 낫겠군. 물이 없는 곳에다 결계를 쳐야 하니……."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추위가 얼마나 혹독했던지 발이 얼어 하나같이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데이몬은 데스 나이트들에게 조력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군. 너희들이 저들을 좀 부축해 줘야겠어." "빌어먹을……. 창고지기도 모자라서 이젠 짐꾼으로 부리기냐?" 헬버트론이 툴툴거리며 다가와서 카심을 들쳐업었다. 나머지 데스 나이트들도 거의 실신 상태인 일행을 하나씩 어깨에 둘러맸다. 그들은 그 상태로 레어 밖으로 나왔다. "이, 정도면 되겠군." 탐색 마법을 펼쳐 물 위가 아닌 곳을 찾아낸 데이몬은 즉시 결계를 쳤다. 쓰쓰쓰쓰. 푸른 빛 장막이 일행의 주위를 외부의 공기와 빈틈없이 차단했다. 그것을 확인한 데이몬이 수인을 맺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결계 속에 존재하는 화(火)의 속성을 가진 마나가 데이몬의 의도대로 재배열되기 시작했다. 재배열 된 마나는 내부의 공기를 급속도로 데우고 있었다. 화르르르. 공기의 온도가 올라감에 따라 바닥의 얼음덩이가 녹기 시작했다. 그러나 물 위가 아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일행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카심이 고마움을 밝혔다. "고맙습니다. 이제 살 것 같습니다." "어지간한 대장이라도 추위만은 못 견디나 보군." 카심은 쑥스러운 웃음을 떠올렸다. 북부의 추위가 이토록 매서울 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런 곳에서는 전투보다도 생존이 우선이었다. "북부가 왜 죽음의 오지로 남아있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이렇게 추운 곳에서는 인간은 제대로 활동하기 힘들죠. 그 때문에 다수의 아이스 트롤들이 서식할 수 있는 것이고요." "아이스 트롤이라고?" 아이스 트롤이란 말에 데이몬은 눈을 빛냈다. 물론 그가 아이스 트롤을 모를 리가 없었다. 500년 전 용사대와 함께 베르하젤 신전을 찾아갈 때 맞닥뜨린 몬스터가 바로 아이스 트롤이고 당시 용사대는 이 교활한 몬스터에게 다수의 기사를 잃어야만 했다. "자네 혹시 북부에 와 본적이 있나." 카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에 임무수행을 위해 한 번 온 적이 있습니다. 북부의 초입에 위치한 카토 왕국의 청부 때문이었죠. 그 때 카토 정규군과 합동으로 아이스 트롤 토벌전을 벌였습니다. 이곳만큼은 아니지만 그곳도 상당히 추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토벌은 성공했나?" 카심은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이스 트롤은 상당히 교활한 몬스터입니다. 전투력 자체도 만만히 볼 수 없지만 워낙 치고 빠지는데 능한 놈들이라……." "전사자가 많았는가?" "예. 출동한 용병들 중 삼분지 일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로 북부에서의 청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받지 않는 것이 썬더버드 용병단에겐 철칙이 되었지요." 카심은 묵묵히 그 때의 상황을 털어놓았다. "사상자들 대부분은 아이스 트롤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추위 때문에 당했습니다. 이곳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거든요. 카토 왕국의 정규군을 처음 보았을 때 무척 놀랐습니다. 금속제 갑주를 걸친 자가 하나도 없었고 대부분의 병사들이 털가죽으로 몸을 칭칭 감싼 상태였거든요. 심지어 방패도 나무에 가죽을 두른 것이었습니다." "하긴 그럴 만도 하군. 추운 지방에서 금속제 갑주는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지. 기껏해야 살가죽이 달라붙어 찢기지 않으면 다행이니 말이야. 게다가 냉각된 상태에서 금속갑옷은 잘 깨어지는 경향이 있어. 자칫 잘못하면 날카로운 파편 때문에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지." "어? 알고 계셨습니까?" 데이몬이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 듯 정확히 짚어내자 카심은 적잖이 놀랐다. 직접 전투를 치러본 자신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데이몬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둘러댔다. "오래 살았으니 그만큼 아는 게 많아야겠지? 그건 그렇고 아이스 트롤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보게." "예." 카심은 아이스 트롤에 대해 알고 있는 상식을 주섬주섬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 중에서 데이몬이 관심을 가진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은 보온효과가 무척 뛰어납니다. 하지만 구하기가 극히 어렵죠. 워낙 교활한 놈들이라 쉽사리 잡히지 않거든요. 때문에 카토 왕국에서도 지휘관 급에게나 겨우 지급한다고 들었습니다. 일반 병사들은 구하기 쉬운 곰이나 여우의 털가죽을 걸치고 있더군요." "그래? 잘 되었군. 이 참에 아이스 트롤이나 몇 마리 사냥해 올까? 마냥 결계 속에서만 생활할 수 없는 노릇이니 가죽을 벗겨 입을 옷을 만들면 되겠군. 남으면 카토 왕국에다 팔면 될 테고……." 데이몬의 말에 카심은 반색을 했다. "훌륭하신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곳에서 견디기가 훨씬 괜찮을 테지요." 아이스 트롤이 비록 잡기 힘든 몬스터라고 하나 데이몬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카심은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고도의 마법사이므로 아이스 트롤이 눈 속에 몸을 숨겨봐야 헛일인 데다가 그에겐 막강한 언데드 전사들이 있다. 데스 나이트가 아니라 듀라한인 윈슬럿만 내세워도 아이스 트롤은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언데드는 아무리 춥더라도 몸이 얼거나 동작이 둔화되는 일이 없다. 이른바 언데드가 가진 최고의 장점인 것이다. 데이몬도 그 점에 있어서는 동의하고 있었다. "아이스 트롤이 빠르다고 하나 언데드에겐 통하지 않을 거야. 안 그런가?"?? "그렇죠."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헬버트론이 안광을 짙게 내뿜었다. "우리를 행여나 아이스 트롤 사냥에 투입할 생각 따윈 하지 말기 바란다. 사냥꾼 역할까지 하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지 않아." "흥. 꼴에 자존심은 있어 가지고……. 걱정하지 마. 아이스 트롤 따위는 윈슬럿만 내세워도 충분히 사냥할 수 있으니까."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마침내 카트로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어 밖에 결계를 친 채 옹기종기 모여 앉은 일행을 쳐다 본 카트로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밖에 나와있는 거지? 데이몬의 얼굴에 성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드래곤만 대하면 괜히 부아가 치미는 데이몬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녀석. 보나마나 네놈은 우릴 수장시킬 계획이었지? 사냥 당한 데 대한 보복으로 말이야." 카트로이에겐 전혀 뚱딴지같은 소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이토록 추운 곳에서 우릴 호수 위에다 올려놓는다면 뻔한 것 아니겠어? 추우니까 결계를 친 뒤, 보기 좋게 물 속으로 가라앉으라고 말이야." 그때서야 이유를 알아차린 카트로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인간이 추위에 약하다는 생각을 미처 못했군.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하지만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냐. 보다시피 북부에서 이처럼 평평한 곳은 얼어붙은 호수 위밖에는 없으니까 말이야. "거짓말하지 마라. 네놈은 분명 우리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드래곤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종족이다. 그리고 난 벌써 3천년 전에 이곳에 자리잡았다. 아마도 네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일 것이다. 네가 아무리 오래 살아왔다 하더라도……. 묵묵히 늘어놓는 카트로이의 대답에 데이몬은 말문이 콱 막힐 수밖에 없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런 맥락으로 데이몬이 아무리 쏘아붙인다 해도 카트로이가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니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만 두자. 벨 없는 드래곤과 입씨름하고 있을 시간이 없으니……." -그런데 넌 왜 드래곤을 그토록 미워하는 거지? 눈치 없이 질문을 늘어놓는 카트로이에게 데이몬은 싸늘한 눈총을 보냈다. 움찔한 카트로이가 입을 닫자 데이몬의 얼굴에 비로소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잔말말고 가지고 온 보물이나 풀어보도록……." -알았다. 카트로이는 들고 온 나무상자들을 내려놓았다. 드래곤의 덩치가 워낙 거대해서 작아 보일 뿐이지 상자의 크기는 상당히 큰 편이었다. 사방 1평방미터 크기의 상자 40여 개를 바닥에 사뿐히 내려놓은 카트로이는 묵묵히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상자 하나에 황금 반 톤씩 들어있다. 도합 40개이니 정확히 황금 20톤이지. 이로써 내 몸값은 모두 지불한 셈이다. 경량화 마법을 걸어놓았으니 들고 가기가 그리 힘들진 않을 것이다. 데이몬은 상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냉랭하게 대꾸했다. "알았어. 그건 그렇고 올려다보려니 머리가 아프군. 아까처럼 인간의 모습을 하는 게 어때?" -내게 볼일이 더 있는가? "물론이다." 데이몬의 대답에 카트로이는 머리를 한 번 뒤흔든 뒤 마나를 재배열했다. 화이트 드래곤의 거대한 몸뚱이가 곧 눈부신 광휘에 휩싸였다. 파파파팟. 빛이 사라지고 나자 드래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곳에는 은발을 한 잘 생긴 기사가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36회.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잡담을 좀 늘어놓으려고 합니다. 다크 메이지를 여러 사이트에 연재하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 소엠 카페와 라니안의 독자들이 비평에 가장 열성적이시군요. 그리고 북박스 독자들은 도배(?)에 일가견이 있으시고요.^^ 물론 독자들이 올려주시는 리플이 내용전개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노파심에서 한 마디 드리려고 합니다. 라니안에 올라오는 리플은 하나도 빠짐없이 읽고 있습니다. 답글을 달지 않는 이유는 성격 탓도 있지만 저보다도 더 답변을 잘해주시는 독자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또다시 벌어지는 리플란의 논쟁을 보니 상당히 안타깝군요. 물론 과도한 비평에 때론 마음상하기도 하지만 그게 모두 다 다크메이지를 아끼기 때문이란 사실 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번에도 말했듯 겸허하게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논쟁의 골이 너무 깊어지더군요. 하나의 리플에 대한 논쟁이 끝없이 격화되고, 급기야 인신공격까지 번지는 경향까지 생깁니다. 이러다가는 어렵게 허락 받은 리플란이 또다시 폐쇄될까 두렵습니다. 그러니 리플난의 논쟁을 가급적 적당한 선에서 그쳐주셨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램입니다. 다소 과도한 비평이 올라와도 정면으로 대응하지 말아 주십시오. 사람의 생각이란 모두 다른 법, 제가 알아서 거를 것은 거르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겠습니다.(웬 건방?)?? 그리고 두 번째로 북박스 독자들께 당부드리고 싶은 말은 도배를 자제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몇몇 분들께서 정말 엄청난 수고와 시간을 낭비해가며 2000에 육박하는 댓글을 달아주셨습니다. 물론 그 노력에 찬사를 드리고 싶지만 다른 독자들께서는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저 역시 그러실 필요가 없지 않나 생각됩니다. 세 번째는 연재 시간인데,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 8시를 전후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일정하게 올리려 노력하지만 일이 있는 경우 조금 늦어지기도 합니다. 미리 올리는 경우는 외출할 경우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중국 가기 전에 8장을 마치려고 마음먹고 있는데 쉽진 않군요. 밤 공기가 차니 모두들 감기 조심하시길. 이만.^^ ***************************************************************************** 레이토나에서 본 모습과 한치의 틀림도 없었다. 그를 보던 데이몬은 인상을 구겼다. "꽤나 잘 생긴 얼굴이로군. 어째서 드래곤들은 미남의 얼굴을 선호하는 건지 모르겠어." "이 얼굴에 불만이 있나?" "아니 그렇지 않아. 그럼 용건을 얘기하겠다." 데이몬은 카트로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원래 난 네 레어에서 당분간 신세를 지려고 했었다. 그러나 상황을 보니 조금 힘들 것 같군." 카트로이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내, 내 레어에서 신세를 지려 했다고?"???? "그렇다. 이곳에서 할 일이 있었거든……. 하지만 네 녀석의 레어가 호수 위에 있어서 그럴 수 없게 되었으니 너에겐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해야 하나?" "해야 할 일이 뭐지?" "알 필요 없어. 좌우지간 우리가 이곳에서 머물만한 곳을 책임지고 물색해 줘야겠다. 내가 원하는 곳은 두 군데다. 인간이 무리 없이 살 수 있을 만한 곳과 이곳에서 추위가 가장 혹독한 곳, 두 군데를 안내해 주기 바란다." 이해할 수 없는 데이몬의 요구에 카트로이는 미간을 지긋이 좁혔다.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아무튼 좋다. 그리 어렵지 않은 조건이니 들어주마. 추위가 가장 혹독한 곳이야 널려 있으니 걱정할 것 없지만 인간들이 생존할 수 있을 만한 장소라면 찾기가 그리 쉽지 않겠군." 턱을 괴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카트로이가 별안간 손뼉을 쳤다. "그렇지. 그곳이면 되겠어." 빙그레 미소를 머금은 카트로이는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커다란 동굴이 있다. 동굴 아래로 용암이 흐르기 때문에 그렇게 춥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속에는 천연 온천도 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기에 데이몬은 얼굴을 폈다. "용암이 분출할 위험은 없는가?" "물론이다. 무척 오랫동안 존재해온 동굴이니 당분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한가지 문제가 있는데 동굴 속의 온천을 많은 몬스터들이 찾는다고 알고 있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인데 상관 없느냐?" "어떤 종류의 몬스터이지." "뭐, 여러 종류지만 가장 많은 것이 아이스 트롤이다. 이곳에서 무척 흔하게 볼 수 있는 놈들이지." "잘 되었군."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안 그래도 그는 아이스 트롤을 이용해서 용병들을 단련시키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실력을 늘이기 위해서는 실전을 방불케 하는 혹독한 훈련이 능사라고 생각하는 데이몬이었다. 그런데 아이스 트롤이 제 발로 찾아오는 장소를 숙소로 삼는다면……. 데이몬은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곳으로 정하겠다. 그러니 지금 즉시 그리로 안내해다오." "이 황금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카트로이가 얼떨떨한 기색으로 쳐다보았다. 엄청난 양의 황금을 어떻게 옮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경량화 마법을 걸어놓았다 하더라도 인간 열 명이 옮길 수 있는 분량이 아니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 문제를 간단한 손짓 한 번으로 해결했다. 쓰쓰쓰쓰. 공간의 보고인 인크레시아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카트로이의 몸값인 황금 20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인크레시아 속에 수납되었다. "어때? 간단하지?" 데이몬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쳐다보던 카트로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편리한 보고로군. 좋다. 아까 말한 장소로 안내해 주겠다. 따라 오라." 카트로이는 별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평소 하찮게만 생각했던 인간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데도 카트로이에겐 별달리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의 진정한 능력을 실감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능력이 있는 자를 달게 인정하는 것이 드래곤의 습성이었으므로……. 조금 뒤 카트로이가 안내한 장소는 말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잠깐 동안의 행군으로 또다시 빈사상태에 빠진 용병들은 동굴 속에 들어서자마자 탄성을 내질렀다. "노, 놀랍군." "극한지인 북부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동굴 속은 의외로 따듯한 편이었다. 바닥에서 은은하게 지열이 전해지는 것을 보니 아래로 용암이 흐르는 것이 사실인 듯 싶었다. 습기가 많은 모양인지 용병들이 걸친 갑옷의 표면에는 금세 물방울이 맺혔다. 공기 중에 포함된 습기가 냉각된 금속갑옷과 닿자 그대로 물방울이 되어버린 것이다. 입구가 그리 크지 않은 동굴이었지만 속은 의외로 넓었다. 10여명이 아니라 백 명이라도 무리 없이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용병들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을 눈여겨보던 카트로이가 한 마디 뱉었다. "인간들은 꽤나 추위에 약한 종족인가 보군. 북부에서는 전혀 맥을 추지 못하니 말이야." "네까짓 녀석이 상관할 바가 아냐." 데이몬의 퉁명스런 대답에 쓴웃음을 지은 카트로이는 손을 들어 동굴 내부를 가리켰다. "조금만 들어가면 온천이 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거야. 이곳은 이른바 아이스 트롤들이 휴식처로 삼는 곳이니까……. 알고 있겠지만 아이스 트롤은 영역에 상당히 민감한 몬스터, 너희들이 있는 것을 알게 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빌 테니 바짝 긴장하는 게 좋아." "걱정 붙들어매도록……. 드래곤도 잡은 마당에 아이스 트롤 따위가 위협거리가 될 것 같아?" 계속 쏘아붙이는 데이몬의 말투에 카트로이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하긴 그럴지도 모르겠군. 네가 보유한 데스 나이트만 풀더라도 아이스 트롤에겐 최악의 재앙일 테니까……. 그건 그렇고 이만 관계회복을 하는 게 어때? 몸값도 지불했고 이웃사촌이 된 마당에 서로 얼굴 붉힐 건 없잖아? 앞으로 친하게 잘 지내보자고……." 뜻밖의 제의에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잘 지내자고? 너하고 내가……." "그렇다. 비록 네가 드래곤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엄연히 트루베니아 드래곤들에게 국한된 것이다. 트루베니아의 멸망에 전혀 관여하지 않은 나에게 적의를 드러낼 것까진 없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그 녀석들은 신의 섭리를 거역하는 녀석들. 이곳의 드래곤들도 그들의 소행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 "지금은 거의 희석되었지만 드래곤들에겐 원래 중도를 걸으며 각 종족간의 분쟁을 조율해야하는 사명이 있다. 그들처럼 한 종족의 편을 들어 다른 종족을 멸망시키는 것은 엄격히 금지된 일이지." 데이몬은 상대의 내심을 파악하려는 듯 카트로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만약 아르카디아가 침공을 받을 경우 인간의 편을 들어 트루베니아 드래곤들과 싸워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가?" 카트로이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는 않다. 같은 드래곤과의 싸움은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는다. 때문에 인간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는 없을 것 같다. 이곳에서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우린 엄격히 중립을 지킬 테니까." 카트로이의 대답을 들은 데이몬은 냉소를 쳤다. "흥. 과연 입만 번드르르한 소리에 불과했군. 그건 그렇고 왜 그토록 우리와 관계 개선을 위해 애쓰는 거지?" 카트로이는 심유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드래곤의 지혜가 빛나고 있었다. "뭐, 별건 아니야. 너란 존재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다고나 할까? 인간이란 무척 불가사의한 종족이더군. 하나하나는 더없이 약하지만 뭉치면 비약적으로 강해지고, 게다가 인간들 중에서 너처럼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존재도 나오잖아? 난 인간이란 종족의 불가사의에 대해 연구해 보고 싶다." "옆에 두었다가 기회를 보아 기습으로 최대의 강적을 없애려는 의도로 그러는 것은 아니고?" "전혀 그렇지 않다. 이미 밝혔듯 드래곤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종족이다. 그저 널 통해서 인간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이 정확한 내 의도이다."?? 거듭 진심을 밝히는 카트로이의 태도에 데이몬도 가슴속의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는 것을 느꼈다. 드래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똑같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좋다. 그런 뜻이라면 네 제의를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네게 뭔가를 해 줄 수는 없다. 그저 네가 우릴 대하며 알아서 파악하도록 해라. 알겠느냐?" 데이몬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트로이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잘 생각했다. 허락했으니 이따금 찾아오도록 하지." "뭐, 그러던지……. " 이렇게 해서 드래곤과 인간 용병단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들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갈지 아무도 모르지만 일단은 그들 사이에 우호적인 관계가 수립된 것이다.?? 이른바 자고 나면 세상이 온통 뒤바뀌어버렸다는 말이 있다. 별 볼 일 없던 신세에서 하루아침에 주목받는 위치에 놓인 경우가 바로 그런 것이다. 지금 이곳에도 그런 행운을 겪은 사람이 있었다. '어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다니…….' 앞에 놓인 값비싼 예물을 보며 숨을 죽이는 노인은 바로 카르셀의 국왕이었다. 인구가 채 일만도 되지 않는 국가로써 아르카디아에 말 그대로 헤아릴 수조차 없이 존재하는 군소 왕국 카르셀의 국왕. 이런 왕국이 존재하는 이유는 주변의 강대국들이 관심을 전혀 갖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런 왕국들은 대부분 사람의 발길이 닿기 힘든 산간 벽지나 오지에 위치해 있기 마련이었고 병력을 동원해서 쳐봐야 얻을 것도 없었기 때문에 주변국들은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두고 있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사소하나마 메리트가 생긴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금광이 발견되거나 울창한 숲이 있어 주변국에서 벌목의 필요성을 느낄 경우 금방 먹혀버리는 것이 이런 왕국의 운명이었다. 이런 이름 없는 군소 왕국 중 하나인 카르셀은 변방인 엘리시아 산맥에서 제법 오랫동안 역사를 이어왔다. 바로 산맥 너머에 제법 군사력이 강한 왕국인 타르판이 버티고 있었지만 말이다. 카르셀 왕국은 전형적인 산골 왕국이었다. 주민들 대부분이 화전과 사냥으로 생계를 이어나갔고 광산이라던지 울창한 수림 따위의 메리트가 전혀 없기에 타르판 왕국에서는 카르셀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 때문에 카르셀의 국왕과 주민들은 무척 평온하게 하루 하루를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그들에게 이변이 닥쳤다. "전하께서 만약 저희 왕국과 동맹을 맺으신다면 더 이상 왕국의 안위에 신경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귀국이 타국의 침공을 받을 경우 협정에 따라 저희 테르비아에서는 그 즉시 대군을 파견할 것입니다." "………." 자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가는 중년인은 휘황찬란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뒤에 시립해 있는 기사들조차 카르셀 국왕을 능가하는 복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아르카디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 중 하나인 테르비아의 사절단이었기 때문이다. 사신으로 온 사람은 테르비아의 총리인 겔리오네스 공작이었다. 저번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그가 직접 카르셀로 파견된 것이다. 생각에 잠겨 있는 카르셀 국왕을 쳐다보며 겔리오네스 공작은 씁쓸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제길, 평소였다면 이런 산골짜기 마을 촌장 따위에게 고개를 굽실거릴 필요가 없을 텐데…….'?? 테르비아 왕국의 관점에서 카르셀은 말 그대로 산골짝의 마을에 불과했다. 평소라면 거들떠볼 필요조차 없는 약소국. 하지만 카르셀은 이제 섣불리 얕잡아볼 왕국이 아니었다. 흑마법사 일행이 카르셀 왕녀를 호위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 아르카디아에 밝혀진 순간부터 카르셀은 테르비아에 있어 더 없이 중요한 존재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겔리오네스 공작은 묵묵히 로시무스 1세의 당부를 되새겼다. -어떤 일이 있어도 카르셀과 동맹 협정을 체결해야 하오. 그래야만 흑마법사와의 관계개선을 꾀할 수 있소. 상황을 보아 카르셀의 왕녀와 흑마법사 사이에는 분명히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 같소.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능력자가 굳이 카르셀 왕녀의 경호를 맡을 까닭이 없지 않소? 우리 같은 강대국이 자진해서 동맹을 맺자고 나서는 이상 카르셀 국왕도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오. 그러니 경은 예물을 아끼지 않고 가지고 가서 카르셀 국왕의 신뢰를 얻도록 노력하시오. 임무를 떠올린 겔리오네스 공작은 간곡한 어조로 설득을 시작했다. "앞으론 타르판 따위는 과감히 무시하십시오. 만약 병사 한 명이라도 귀국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생긴다면 타르판 왕국은 그 날로 아르카디아의 지도에서 지워지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비록 타르판 왕국이 이곳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테르비아의 상대는 아니었다. 대충 잡아도 군사력이 열 배 이상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겔리오네스 공작이 열과 성의를 다해 설득했지만 카르셀 국왕은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공작의 애가 타건 말건 말이다. 그동안 공작이 데리고 온 기사들은 카르셀 왕국의 방비상황을 낱낱이 살피고 있었다. 테르비아의 정예들인 그들이 보기에 카르셀은 한 마디로 왕국으로 볼 수 없는 곳이었다. '어찌 이런 곳과 동맹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무질서하게 늘어선 카르셀 경비병들을 둘러본 테르비아 기사들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들의 눈엔 제대로 된 병사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장비를 제대로 착용한 자는 하나도 없었고 농사를 짓다가 소집되었는지 병사들의 옷에는 흙먼지와 지푸라기가 자욱하게 묻어 있었다. 근무를 서는 태도도 제각각이었다. 무료한지 하품을 늘어지게 하는 놈, 창이 무거운지 어깨에 대충 기대어 세워놓은 놈, 심지어 벽에 기대어 조는 놈들도 있었다. 군기가 혹독하기로 유명한 테르비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부분이 직업군인인 테르비아 병사들은 먹고 자는 시간 이외에는 오로지 훈련에만 매진한다. 봉급이 충분히 나오기 때문에 다른데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카르셀은 사정이 달랐다. 대부분의 병사들에게 생업이 있었고 한가할 때에나 훈련을 실시하기 때문에 숙련도에 있어서 테르비아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경비상황을 대충 파악한 테르비아 기사들은 암암리에 혀를 찼다. '젠장. 우리만 나서더라도 반나절이면 깨끗이 정리하겠군.'???????? '전하께서 어찌 이런 쓸모 없는 왕국에 관심을 가지셨는지…….' 기사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겔리오네스 공작은 좀처럼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미끼를 덥석 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카르셀 국왕이 좀처럼 의사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손으로 턱을 괸 채 골똘히 생각에 몰두하는 카르셀 국왕. 잠시 후 결정을 내렸는지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일단 우리 카르셀에 관심을 가져주신 점에 대해서는 감사 드리겠소. 하지만 동맹을 맺는 문제는 아무래도 어렵겠소이다." "거, 거절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겔리오네스 공작의 눈이 커졌다. 카르셀이 동맹 요청을 거절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동맹 요청은 어느 모로 보더라도 테르비아의 명백한 손해였다. 우선 동맹을 체결해봐야 카르셀 왕국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도리어 테르비아에는 협정에 따라 카르셀을 보호해 주어야 할 의무까지 생기는 판국이었다. 게다가 가지고 온 예물의 수준도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어림잡아도 카르셀 왕국의 1년 예산을 능가하는 예물을 가져와 내밀었는데 카르셀 국왕이 동맹 요청을 거절하다니……. 겔리오네스 공작은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동맹을 맺음으로써 카르셀이 손해보는 일은 없을 텐데 말입니다." "미안하오. 우린 이미 타국과 동맹을 체결한 상태라오. 때문에 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다는 뜻을 밝히는 바요." 카르셀 국왕의 대답에 겔리오네스 공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어떤 국가와 동맹을 체결하셨습니까?" 겔리오네스 공작의 머리 속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카르셀과 동맹관계를 맺고야 말겠다는 다짐이 새겨지고 있었다. 동맹을 맺은 왕국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카르셀과의 관계개선은 설사 전쟁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뤄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카르셀 국왕의 대답이 이어지자 겔리오네스 공작은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우린 크로센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오. 크로센의 실질적인 지도자라 할 수 있는 페르슈타인 공작께서 친히 사신을 보내 오셨지. 그래서 한 달 전에 협정서에 조인을 했다오. 우린 이제 크로센 제국의 동맹국이라오." "크, 크로센 제국이라구요?" 크로센 제국이라면 테르비아로써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강대국이다. 겔리오네스 공작의 얼굴색은 어느새 암울한 빛으로 바뀌어 버렸다. '과연 페르슈타인 공작이로군. 대륙 제일의 전략가답게 벌써 손을 써 놓다니…….' 어찌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은 겔리오네스 공작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37회. 오늘은 조금 일찍^^ 도리어 그가 데리고 온 기사들이 바짝 긴장하며 싸울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카르셀 같은 소국이 감히 테르비아의 동맹 요청을 거부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므로 십중팔구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부터 전쟁에 돌입할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추호도 걱정하지 않았다. 겔리오네스 공작이 데리고 온 병력은 팔라딘으로 이루어진 근위기사 1백 여명이었고 그들만으로 카르셀을 멸망시키는데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 때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뛰어들어왔다. "그, 급보입니다." 다급하게 달려 들어오는 자는 반백의 머리를 한 늙수그레한 기사였다. 체격이 당당했으며 가슴팍에 아로새겨진 문장을 보니 카르셀의 궁정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자였다.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투박한 갑주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눈빛이 형형한 것이 예사 실력자로 보이지 않았기에 싸울 채비를 하고 있던 테르비아 기사들은 바짝 긴장했다.???? '놀랍군. 카르셀 따위에 저 정도 수준의 기사가 있다니…….' '결코 우리의 아래가 아냐. 적어도 둘은 달라붙어야 감당할 수 있겠군.' 같은 길을 걷는 자들은 능히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다. 예상치 못한 카르셀 궁정경비대장의 실력에 테르비아 기사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그가 가세한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변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경비대장은 테르비아 기사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곧장 국왕에게로 나아갔다. 그는 바로 미첼의 아버지인 헤일즈였다. 벌써 30년 동안이나 카르셀의 궁정 경비를 맡고 있었지만 오늘 같은 일은 처음이라 무척 당황한 상태였다. "저, 전하. 큰일났습니다." 타국에서 온 사신 앞이라 헤일즈는 평소와는 달리 예의를 갖추었다. 평상시에는 형님, 동생하며 허물없이 지냈지만 이런 자리에서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카르셀 국왕은 미간을 지긋이 모았다. 벼락이 떨어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헤일즈가 이처럼 허둥대는 장면은 여간해서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오?" "드, 드, 드……." 테르비아 사신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수 없다는 생각에 카르셀 국왕은 짐짓 짜증을 부렸다. "정신 차리고 똑바로 말해보시오." "드, 드래곤이 찾아왔습니다. 화이트 드래곤이온데 전하를 뵙겠다고……." 이번에는 카르셀 국왕이 놀랄 차례였다. 크로센 제국의 사신에 이어 테르비아의 총리가 찾아오고, 그것도 모자라 드래곤까지 찾아오다니……. 정신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 헤일즈의 뒤를 이어 누군가가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백발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잘 생긴 기사. 겁먹은 기색이 역력한 경비병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카르셀 국왕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백발의 기사는 바로 카트로이였다. 북부에서 살아가던 화이트 드래곤 카트로이가 놀랍게도 카르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를 쳐다보며 카르셀 국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대는 누구인가?" 헤일즈가 다급하게 끼여들었다. "그, 그가 바로 드래곤입니다. 바로 제 앞에서 모습을 바꾼 것이지요." 장내의 사람들은 바짝 긴장했다. 여간해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존재인 드래곤이 왕궁에까지 들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겔리오네스 공작을 비롯한 테르비아 기사들도 바짝 긴장한 채 검 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난생 처음 드래곤을 보는 테르비아 기사들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백발의 기사가 진정으로 드래곤이 맞다면 오늘 부로 이승을 마감해야 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카르셀 국왕의 얼굴에는 공포감은커녕 짙은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드래곤이라……. 놀랍구려. 내가 살아 생전 드래곤을 보게 되다니……." 카트로이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인간이 드래곤을 접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지. 드래곤들은 여간해서 인간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없으니까……." 카르셀 국왕의 얼굴에 떠오른 호기심이 더욱 짙어졌다. "보기에는 인간과 똑같아 보이는데……. 혹시 본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소?" "불가하오. 이처럼 좁은 내부에서 본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그 즉시 궁성이 무너져버릴 테니 말이오." 고개를 가로젓는 카트로이를 보는 카르셀 국왕의 얼굴에는 안타까운 표정이 떠올랐다. "아쉽구려. 모처럼 드래곤의 실체를 볼 기회였는데……." 겁도 없이 드래곤과 담소를 나누는 카르셀 국왕의 담력에 겔리오네스를 비롯한 테르비아 기사들은 혀를 내둘렀다. 어지간한 국왕이라도 드래곤 앞에서는 저처럼 평온을 유지하기 힘들다. 만약 드래곤이 정신계 마법을 전개한다면 꼼짝없이 꼭두각시 신세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카르셀 국왕은 겁도 없이 드래곤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카트로이 역시 카르셀 국왕의 태도가 의외이긴 마찬가지였다. '과연 그 딸에 그 아버지로군.' 그는 수천 년을 살아온 드래곤이었고 지금껏 그 앞에서 이처럼 태연할 수 있는 인간은 겨우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는 단 며칠 사이에 두 명씩이나 보게 된 것이다. 카트로이가 율리아나의 본성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카심 용병단의 임시 근거지가 레어 바로 옆에 자리잡았으므로 카트로이는 틈나는 대로 그곳을 찾아갔다. 자신을 무참히 패배시킨 자들이었지만 드래곤 특유의 호기심은 그것을 잊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에겐 인간이라는 불가사의한 존재의 정체를 밝힌다는 필생의 과제가 생긴 것이다. 카트로이는 그곳에서 모르고 있던 사실을 한 가지 더 알게 되었다.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율리아나의 새로운 면모를 말이다. 비록 패배하기는 했지만 카트로이는 여전히 용병들에겐 범접하기 힘든 존재였다. 드래곤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가볍게 볼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 탓에 용병들은 카트로이를 무척 어려워할 수밖에 없었고 카트로이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물론 자신을 사냥한 흑마법사 데이몬만은 예외였지만. 그런데 드래곤을 꺼려하지 않는 인간이 흑마법사 말고도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은 카트로이에겐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신기하군.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겠어.' 카트로이를 대하는데 있어 율리아나는 놀라운 태도를 보였다. 카트로이가 인간이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 거리낌없이 대하는 것이다. 마치 카트로이가 드래곤이란 사실을 깜빡 잊은 듯. 스스럼없이 장난도 치고 이따금 쥐어박기도 하는 등. 그런 율리아나에게 카트로이는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특히 놀라운 것은 그녀가 흑마법사에게 된통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시비를 건다는 점이다. 카트로이에겐 정말 이상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이 조직은 정말 괴상하군. 지금까지 연구한 인간사회에서 이런 조직은 없었어.' 카트로이의 관점에서 보면 카심 용병단의 조직체계는 정말 특이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가장 실력이 뛰어난 흑마법사가 무리의 리더를 맡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이 조직은 그게 아니었다. 카심이라는 이름의, 카트로이에겐 피라미로밖에 보이지 않는 용병이 무리의 리더를 맡고 있었고 흑마법사는 그의 지휘에 두말없이 순응했다. 게다가 조직 내에서 율리아나가 차지하는 위치 또한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카트로이가 보기에 그녀는 대단한 악동(惡童)이었다. 검술 수련에 몰두하는 용병들을 골탕먹이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였고 특히 미첼이라는 기사가 당하는 장면은 카트로이조차 저절로 불쌍한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그녀는 드래곤이라고 해서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웃는 얼굴로 다가온 뒤 느닷없이 겨드랑이를 쥐어박는 해프닝이 이따금 벌어졌다. 물론 카트로이가 인간이었다면 게거품을 물고 엎어졌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드래곤은 인간과 혈도가 달랐다. 카트로이에겐 별 통증을 주지 못했지만 얻어맞은 용병들의 반응을 보니 무척 아플 것 같았다. '정말 특이한 계집아이로군. 두고두고 연구해 봐야겠어.' 카트로이는 이렇게 해서 율리아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면에 호기심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카르셀에 와 보니 그녀의 아버지 역시 자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혈통은 속일 수 없는 것인가' 카트로이는 묵묵히 카르셀 국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찌해서 우리 카르셀에 찾아오셨소? 대관절 무슨 볼 일이 있으시기에……." 카트로이는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난 당신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고자 왔소. 원래는 당신 딸의 소원을 들어줘야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부탁하더구려. 카르셀로 가서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라고……. 난 그래서 이곳으로 온 것이오." "소, 소원을 말이오?" 깜짝 놀란 카르셀 국왕이 반문하자 카트로이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녀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소원을 한 가지 들어준다고 약속했지. 그녀의 부탁에 따라 약속의 수혜는 당신이 누리게 되었소. 그러니 소원을 말해 보시오. 단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을 말해야 하오." 카르셀 국왕으로는 전혀 뜻밖의 소식이었다. 난데없이 드래곤이 나타나서 소원을 들어주다니……. 갑자기 소원을 생각해 내려니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보다 못한 카트로이가 인간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원하리라 생각되는 소원을 하나 하나 제시했다. "황금을 원하시오? 캐는데 조금 시간이 걸리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오." "화, 황금은 그다지 필요 없는데……." 황금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에 카트로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황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인간을 또다시 보게 된 것이다. "원한다면 드워프를 동원해 당신 궁전을 으리으리하게 꾸며줄 수도 있소. 스톤 골렘으로 하여금 당신의 궁전을 영원히 지키도록 해 줄 수도 있고, 당신의 기사들에게 마법 무구를 만들어 줄 수도 있소." "구, 궁전은 이대로도 괜찮소. 스톤 골렘이나 마법 무구도 별로 소용이 없을 것 같소이다." 카르셀 국왕에게 욕심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카트로이는 난감해졌다. 결국 그는 마지막으로 아껴두었던 조건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의 왕국의 수호룡이 되어 줄 수도 있소. 단 한 번에 국한된 일이기는 하지만." 말을 마친 카트로이는 바짝 긴장한 채 서 있는 테르비아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만약 누군가가 카르셀을 침공하는 일이 생긴다면 국가는 나의 분노를 사게 되오. 나의 아이스 브레스는 그들을 응징하는데 추호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오." 전쟁을 예상하고 있던 테르비아 기사들에겐 정말 간담이 서늘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 드래곤을 상대로 싸워야 할 경우가 생길지도 몰랐다. 비록 그들이 혹독한 훈련으로 단련된 정예라고는 하나 드래곤과 싸우는 일은 결코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우선 엄청난 덩치를 가진 드래곤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부터가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바짝 긴장하고 있는 테르비아 기사들을 카트로이는 마치 무력시위라도 하듯 묵묵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귀로 카르셀 국왕의 음성이 들려왔다. "화이트 드래곤이시라면 아마도 북부에서 사실 테지요. 이곳과 북부는 무척 먼 곳입니다. 저흴 지켜주시기가 그리 쉽지 않을 텐데요." "상관없소. 소원으로 그걸 택한다면 난 여기에다 마법진을 하나 설치한 다음 당신에게 연락용 스크롤을 주겠소. 도움이 필요할 때 그것을 찢는다면 바로 이리로 올 수 있을 것이오. 공간이동으로 올 생각이니 시간이 거의 걸리지 않소." "놀랍구려. 그런 방법이 있다니……." 카르셀 국왕의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비록 욕심이 없는 담백한 성격이라고는 하나 한 가지 문제만은 예외였다. 카르셀 왕국의 안위는 그가 항상 걱정하고 있던 문제였던 것이다. 보유한 군사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는 머뭇거릴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소원으로 그것을 선택하겠소이다." "알겠소." 고개를 끄덕이는 화이트 드래곤을 보며 겔리오네스 공작은 일이 글렀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최악의 경우 무력시위까지 염두에 두었지만 이젠 그나마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드래곤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결코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비록 흑마법사 일행에 의해 둘이나 사냥 당한 전례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드래곤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드래곤을 사냥하겠다고 떠났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기사들의 수를 헤아려보던 겔리오네스 공작은 맥빠진 음성으로 명령을 내렸다. "철수한다. 모두 돌아갈 준비를 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바짝 긴장하고 있던 테르비아 기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38회. 오랜만의 연참입니다. ****************************************************************************** 드래곤과 싸우지 않게 된 것만 해도 그들에겐 천만 다행이었다. 겔리오네스 공작은 카르셀 국왕을 쳐다보며 공손히 예를 올렸다. "전하의 의중을 파악했으니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동맹관계를 맺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편한 관계로 지내는 것은 저희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예물을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저희들의 바램을 부디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과연 한 나라의 총리를 맡을 만한 그릇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게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겔리오네스 공작은 상대가 테르비아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지지 않도록 최대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속으론 울화가 부글부글 치밀었지만 말이다. "뭐 그러시다면 예물을 감사히 받겠소이다." 예물을 공짜로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에 카르셀 국왕은 조건을 달게 수락했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용무를 마친 겔리오네스 공작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돌아가서 질책을 받을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지만 그렇다고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를 따라나가는 테르비아 기사들의 걸음걸이에는 왠지 모르게 힘이 빠져 있었다. 카트로이는 동작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들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화이트 드래곤 카트로이가 궁정에 공간이동용 마법진을 설치하고 떠나간 직후 카르셀 국왕은 신하들을 모조리 불러모았다. 신하들이라 해 봐야 경비대장인 헤일즈와 재상인 도미니크 외 몇몇 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자 그럼 논의에 들어갑시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우리나라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모르겠구려. 아르카디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들이 대관절 무슨 이유로 우리와 동맹을 맺으려 하는지, 누구 이유를 아는 사람 있소?" 카르셀 국왕으로써는 당연한 의문일 수밖에 없었다. 카르셀이 아르카디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가장 잘 아는 자였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물론 그것은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카르셀이 워낙 궁벽한 시골인지라 얻을 수 있는 정보력에 한계가 있었다. "혹시 엘리시아 산맥에 비밀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미스릴 광산이라던지 그밖에 귀금속 광산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잘 보이려는 것일 수도……." "그것은 아닌 것 같소. 그럴 것 같으면 가차없이 군대를 동원해 침공하겠지? 지금처럼 동맹을 맺자고 나설 가능성은 거의 없소. 반드시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오." 중신들의 갑론을박이 계속 이어졌지만 누구 하나 속시원한 해답을 내놓지 않았다. 전형적인 무인인 헤일즈만이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율리아나가 모종의 일에 휩쓸린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벌어질 까닭이 없지?' 카르셀 국왕은 조금 전 드래곤이 남긴 말을 떠올려보고 있었다. 율리아나로 인해 목숨을 건졌기 때문에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는 말에는 아직까지 의문점이 존재하고 있었다. '도대체 율리아나가 어떤 방법으로 드래곤의 목숨을 살려주었을까?' 비록 황태자비 간택식이 벌어지는 크로센 제국으로 외동딸을 보내기는 했지만 카르셀 국왕은 거기에 전혀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저 말썽꾸러기 딸에게 대륙 유람의 기회를 줄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카르셀 제일의 검사인 미첼이 동행하고 있었지만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법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소식을 듣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행여나 나쁜 일을 겪진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는데 이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답답해진 국왕은 경비대장인 헤일즈를 쳐다보았다. "헤일즈. 자네가 한 번 나가봐야겠네. 도대체 대륙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말이야. " "하, 하지만 그렇게 되면 궁정이 비질 않습니까?" "상관없네. 드래곤을 불러들일 수 있는 스크롤이 생겼으니 자넨 아무 걱정말고 다녀오게. 가능하다면 그 아이들의 소식까지 알아왔으면 좋겠군." 카르셀 국왕의 음성에는 자식에 대한 걱정이 소록소록 배어 나오고 있었다. 헤일즈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었으므로 두말하지 않고 명령을 받들었다. 하나 뿐인 아들 미첼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헤일즈를 보는 카르셀 국왕의 얼굴은 어느새 딸을 아끼는 어버이의 그것으로 변해 있었다. 북부는 일년 내내 만년설에 덮여 있는 지역이다. 수천 년의 세월동안 단 한번도 물로 변해본 적 없는 눈과 얼음들이 북부를 두텁게 덮고 있었다. 이런 혹독한 환경을 유지할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추위였고 이로 말미암아 북부는 아직까지 인간의 지배를 허락하지 않는 지대로 남아있었다. 오로지 추위에 강한 몬스터만이 북부를 활보할 수 있는 것이다. 북부에서 가장 큰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는 몬스터는 단연코 아이스 트롤이었다. 트롤 특유의 재생력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아이스 트롤은 두터운 털가죽과 지방층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추위에 아주 강한 몬스터였다. 게다가 군집생활을 하며 상당한 지능을 보유했기 때문에 명실상부한 북부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북부에서 아이스 트롤의 적수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록 곰이 아이스 트롤보다 힘과 파워에서 앞서기는 하지만 집단적으로 사냥을 하는 아이스 트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아이스 트롤을 보기만 해도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것이 현실이었고 아르카디아 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인간 역시 북부에서만은 아이스 트롤의 적수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북부를 인간의 세력권에 편입하기 위해 수많은 토벌전이 벌어졌다. 북부는 엄청난 자원의 보고였고 광석이나 목재를 구하기 위해 많은 국가의 토벌군이 북부의 땅을 밟았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스 트롤에겐 최대의 동맹군이지만 인간에게는 가장 무서운 적인 추위 때문에 많은 토벌대들이 처참하게 패퇴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북부는 아직까지 인간에겐 난공불락의 철옹성으로 남아 있었다. 게다가 북부는 인간 여행자들의 발길을 전혀 허락하지 않았다. 추위도 추위였지만 주된 이유는 조직적으로 사냥에 나서는 아이스 트롤들 때문이었다. 아이스 트롤은 상당한 지능을 가진 교활한 몬스터였고 오랫동안 인간과 싸워오며 많은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인간을 상대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여행자들에겐 적은 인원이던 많은 인원이던 간에 북부를 여행하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라고 알려져 있었다. 아이스 트롤은 자신의 영역에 상당히 민감한 몬스터였고 침범하는 생물은 대상이 힘센 곰이라고 해도 거침없이 덤벼드는 경향이 있다. 그런 까닭으로 여행자들에게 북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들어가서는 안 될 금지(禁地)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그런 수칙을 깡그리 잊어버린 두 여행자가 있었다. 터벅터벅. 두터운 털가죽으로 몸을 감싼 여행자 두 명이 허벅지까지 차 오른 눈을 헤치고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는 북부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을 단 둘이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선두에 서서 걷고 있는 자는 상당히 장대한 체구를 가진 여행자였다. 덩치에 비해 키가 약간 작아 보이긴 했지만 털가죽에 덮인 당당한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뒤에 따라가는 여행자는 비교적 왜소한 체구였다. 동료가 헤치고 간 뒤를 말없이 따라가는 모습은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위태위태한 모습이었다. 눈만 빠끔히 내놓은 차림새라서 나이나 성별 따위를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아이스 트롤의 영역 깊숙한 것을 걸어가는 것을 봐서 평범한 여행자는 아니었다. 물론 그들의 종적은 이미 아이스 트롤의 감각에 포착된 지 오래였다. "크르르르." 십여 마리의 아이스 트롤들이 눈에 몸을 은폐한 채 조심스럽게 여행자들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여행자들은 말 그대로 별미(別味)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북부에서 인간 둘이 걸어간다는 것은 아이스 트롤에겐 한 마디로 날 잡아 잡수시오, 하는 뜻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고기는 특히 아이스 트롤이 무척 좋아하는 별식이었고 여간해서는 맛볼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녀석들에겐 일종의 행운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접근하는 아이스 트롤들은 쉽사리 덤벼들지 않았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저 뒤만 따라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뭔가가 꺼림칙한 듯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인간의 모습을 포착한 즉시 덤벼들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쉽사리 그럴 수 없는 이유는 선두에 서서 걸어가는 인간에게서 몹시 낯선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아이스 트롤의 후각은 몹시 예민한 편이다. 그런 녀석들의 코에 몹시 역한, 쉽게 맡아볼 수 없는 기이한 냄새가 풍겨왔다. 때문에 아이스 트롤들은 코만 킁킁거릴 뿐 쉽사리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나 용감한 녀석들이 하나씩은 있는 법. 식욕을 참지 못한 아이스 트롤 하나가 나지막한 포효소리와 함께 뒤에 따라가는 인간을 덮쳤다. "캬르륵." 한 놈이 덤비자 나머지 녀석들도 동시다발적으로 몸을 날렸다. 놈들의 뇌리 속에는 인간을 갈기갈기 찢어 우적우적 씹어먹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아이스 트롤의 날카로운 손톱은 목표물을 적중시키지 못했다. 허공을 짚어버린 아이스 트롤들은 일시에 균형을 잃어버렸다. "크크크. 걸려들었군." 외마디 비웃음소리와 함께 왜소한 여행자의 신형이 그대로 사라졌다. 마치 그 자리에서 지워져버린 듯한 모습. 목표를 잃고 비틀거리는 아이스 트롤의 목을 향해 뭔가가 날아든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케르륵." 단말마 소리와 함께 더운 피가 눈 위에 확 뿜어졌다. 아이스 트롤의 머리통 두 개가 그대로 떨어져나갔고 머리 잃은 동체가 비틀거리다 바닥에 푹 꼬구라졌다. 앞서가던 여행자가 기다렸다는 듯 배틀 액스를 꺼내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크아아아." 그는 기성을 지르며 달려들어 배틀 액스를 종횡무진 휘둘렀다. 퍽. 아이스 트롤 한 마리의 머리와 몸통이 또다시 분리되었다. 당한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떨어져나간 머리통에는 놀랍다는 표정이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추운 곳에서 인간의 몸놀림은 극도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체내에 보유한 에너지 대부분을 추위를 견디는데 써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행자는 자연의 법칙을 완벽하게 거스르는 자였다. 추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여행자는 정말 놀라운 몸놀림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을 파악하지 못한 아이스 트롤 세 마리가 전혀 예기치 못하게 비명횡사하는 처지에 놓여버렸다. 그때서야 상황을 파악한 아이스 트롤들이 다급하게 눈 속으로 몸을 은폐하려 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한 마리는 미처 눈 속으로 파고 들어가지 못했다. 아니 파고들기는 했지만 그것은 머리 잃은 몸통뿐이었다. 데구르르. 희디흰 눈밭을 머리통 하나가 선혈을 흘리며 굴러갔다. 하지만 나머지 아이스 트롤들은 눈에다 감쪽같이 몸을 숨긴 상태였다. 아이스 트롤들은 그 상태로 여행자의 이목을 속이며 기습할 순간을 기다렸다. 사실 놈들이 인간을 상대하는 전법은 바로 기습공격이었다. 아이스 트롤의 희디흰 털가죽은 눈과 거의 분간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거의 절대적으로 먹혀드는 방법이었다. 인간의 감각으로 아이스 트롤의 기척을 간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크르르르." 나지막이 기성을 지르며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아이스 트롤들. 이런 지경에 처한다면 십중팔구 자신들의 승리로 끝난다는 사실을 아이스 트롤들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두터운 털옷을 걸쳤더라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면 인간의 체온은 서서히 저하된다. 그렇게 되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의식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반면 아이스 트롤은 몇날 며칠을 눈 속에 파묻혀 있어도 능히 견딜 수 있다. 눈 속이 바깥보다 덜 춥다는 것도 있지만 두터운 털가죽과 지방층이 워낙 두터웠기 때문에 오래 버틸 수 있는 것이다. 녀석들은 그 사실 하나만을 믿으며 인간이 제풀에 쓰러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조금 달랐다. "크롹." 아이스 트롤 한 마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기성을 질렀다. 바짝 긴장한 채 사방을 살펴야 하는 것이 기대했던 인간의 반응이었거늘 이번 사냥감은 전혀 다른 행동을 하고 있었다. 인간은 느긋하게 돌아다니며 동료들의 털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쓱쓱싹싹. 두툼한 털가죽이 통째로 벗겨지며 시뻘건 속살이 드러났다. 추위에 강한 아이스 트롤이라도 속까지 강하진 못했는지 드러난 살이 금세 얼어붙기 시작했다. 흘러나온 피는 채 김도 뿜어내지 못하고 얼어붙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아랑곳없이 동료의 가죽을 벗기는데 몰두했다. 마치 그것이 필생의 과제인 것처럼. 조바심을 참지 못한 아이스 트롤들은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퍼퍼퍽. 눈 부스러기를 사방으로 뿌리며 튀어나온 아이스 트롤들이 인간을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덮쳐들었다. 세 마리는 정면으로, 나머지는 뒷 부분을 향해 덮쳐드는 모습에는 일정한 진형이 갖추어져 있었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39회. 북부로 파견되는 인간 토벌대 중에 실력자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심심찮게 팔라딘도 투입되었고 드문 경우지만 소드 마스터가 오는 경우도 있었다. 통상적인 몬스터를 상대로는 말 그대로 무적(無敵)이라 자부할 수 있는 무예의 달인들. 하지만 그들의 위용도 북부에서만은 통하지 않았다. 토벌대 중에 강력한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아이스 트롤은 전략을 바꿨다. 추위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는 수법. 그것은 바로 동료 몇을 희생시켜 상대의 옷을 찢어 버리는 방법이었다. 아무리 팔라딘이라도 북부에서는 중장 갑주를 착용할 수 없다. 고작해야 가죽갑옷이나 얇은 사슬갑옷을 걸치고 그 위에 두터운 털가죽을 걸쳐야만 북부의 추위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털가죽에는 조그마한 틈새도 있어서는 안 된다. 파고든 냉기가 서서히 그 부분을 마비시켜 결국 세포를 괴사시키기 때문이다. 아이스 트롤은 바로 그 점을 노렸고 결과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옷이 찢긴 기사는 서서히 전투력을 상실했고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까닭에 많은 팔라딘들이 목숨을 잃고 아이스 트롤의 위장에서 소화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소드 마스터도 당했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위력적인 수단인지 익히 알만 했다. 그들이 추위에 견디는 힘이 평범한 병사보다 강하긴 했지만 아이스 트롤만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탓에 북부에는 더 이상 고급 기사들이 파견되지 않게 되었다. 북부를 토벌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크긴 하지만 팔라딘을 잃는 것은 결코 그에 못지 않은 손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아이스 트롤들이 쓰려하는 방법도 바로 이것이었다. 지금껏 수십 명의 팔라딘들이 당한 적 있는 공포의 대처법이었고 거의 먹혀들 것처럼 보였다. "케륵." 베틀 엑스에 아이스 트롤 두 마리의 목이 그대로 달아났다. 하지만 아이스 트롤 한 마리가 용케 뒤로 접근해서 손톱을 휘두를 수 있었다. 찌직. 날카로운 손톱에 두터운 털가죽이 그대로 찢겨져나갔다. 물론 성공한 녀석은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목이 달아나는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이스 트롤의 계책은 성공한 셈이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말이다. 아이스 트롤들은 또다시 눈 속으로 몸을 은폐하려 했다. 찢긴 부위를 통해 인간의 생명력이 서서히 빠져나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하지만 그들은 몸을 감춘 인간의 존재를 간과했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외마디 노성과 함께 허공에서 눈부신 빛 무리가 생겨나 눈밭을 향해 폭사되었다. 정확히 아이스 트롤들이 숨어있는 곳이었고 고통에 겨운 비명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케륵."?? 눈 위에 붉은 선혈이 점점이 배어나며 털가죽이 찢어진 아이스 트롤들이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추위에 강하다고 하나 가죽에 구멍이 뚫린 이상 계속 눈 속에 숨어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털가죽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진 아이스 트롤은 더 이상 추위에 강하지 않은 존재였고 그 증거로 녀석들의 몸놀림은 서서히 느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덮쳐 가는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캬아아아."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인영 하나가 도망치려는 아이스 트롤을 향해 달려들며 배틀 엑스를 휘둘렀다. 털가죽이 벗겨지며 드러난 모습은 바로 윈슬럿이었다. 과거 대륙을 떠들썩하게 했던 명성을 입증이라도 하듯 윈슬럿은 아이스 트롤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살육을 벌였다. 퍼퍽. 마치 과일꼭지 따듯 머리통을 잘라내는 모습은 숙련된 장인의 손길을 방불케 할 정도였고 아이스 트롤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 마침내 마지막 아이스 트롤의 머리통 없는 몸뚱이가 바닥에 풀썩 쓰러지고 나서야 윈슬럿은 움직임을 멈췄다. "크아아아." 오랜만에 즐기는 살육이 기쁘다는 듯 윈슬럿은 널린 아이스 트롤의 시체 사이에서 연신 기성을 내질렀다. "시끄러워. 이 녀석아." 옆 공간이 흐릿해지더니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윈슬럿과 마찬가지로 털가죽으로 전신을 감싼 인영.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용모였지만 음성을 들어보니 데이몬이었다. 그는 이리저리 널린 아이스 트롤의 시체를 쳐다보며 짜증 섞인 음성을 토해냈다. "젠장 털가죽에 상처가 났잖아? 이래서 어지간하면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널려있는 아이스 트롤의 시체 중 태반이 털가죽에 구멍이 나 있었다. 데이몬이 발사한 아이스 볼트(ice bolt)에 적중된 상처들이었다. 아이스 트롤의 도주를 막기 위해 퍼붓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털가죽에 흠집이 생겨버렸으니 기분이 썩 좋을 리가 없었다. 윈슬럿이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을 벗겨내는 것을 보던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괜히 아이스 볼트를 썼나? 차라리 다른 마법을 썼더라면 털가죽이 상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극한지인 북부답게 대기 중에는 얼음의 속성을 가진 마나가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그 때문에 데이몬은 빙계 공격마법을 즐겨 애용하는 편이었다. 물론 9서클의 마스터인 만큼 마음먹는다면 다른 마법도 전개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가장 편했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은 할 수 없다는 듯 옷자락을 여몄다. "어쩔 수 없지. 흠집난 가죽으론 장갑이나 모자 따윌 만들면 될 테니까……. 그래도 열 마리나 잡은 게 어디야?" 아이스 트롤이 잡기 힘든 몬스터란 것은 허언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데이몬도 처음에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으니까……. 데이몬은 원래 윈슬럿을 이용해서 아이스 트롤을 사냥하려고 했었다. 주위의 환경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언데드인 윈슬럿은 이런 상황에서 가장 훌륭한 사냥꾼이었다. 데이몬과 용병들은 윈슬럿이 많은 아이스 트롤을 사냥해 올 것이란 사실을 추호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사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예민한 후각을 가진 아이스 트롤은 윈슬럿이 인간이 아니란 사실을 단숨에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아이스 트롤들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기에 윈슬럿은 매번 허탕을 쳐야 했다. "이래선 안되겠어. 이 상태론 동굴 밖으로 발도 내밀지 못하니 원." 결국 일행은 거기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해야 했다. 현재 용병들은 동굴 밖으로 한 발짝도 내밀지 못하는 상태였고 이따금 데이몬이 마법을 걸어 외출하기는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마실 물과 땔감을 구하고, 먹을 사냥감을 잡아오기 위해서는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으로 된 옷이 반드시 필요했다. 때문에 일행은 거듭해서 머리를 짜냈고 마침내 한 가지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었다. 이것은 대장인 카심이 내놓은 의견이었다. "아이스 트롤은 후각이 몹시 발달한 몬스터입니다. 일전에 듣기로는 5Km 밖의 피 냄새도 맡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때문에 지금으로썬 윈슬럿이 발하는 언데드 특유의 냄새를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거야 간단한 문제로군." 데이몬은 즉각 마법을 사용해서 윈슬럿에게서 냄새를 없애려고 했다. 그러나 카심이 얼른 그것을 만류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더 좋은 해결책이 있습니다." 카심이 제시한 해결책은 바로 용병들의 몸 냄새를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매일매일 혹독한 수련에 몰두하는 까닭에 용병들의 속옷은 땀과 체취에 흥건히 절어 있었고 그것을 윈슬럿에게 입힌다면 언데드 특유의 냄새를 확실하게 없앨 수 있으리란 것이 카심의 지론이었다. "윈슬럿 혼자서 보내도 되겠지만 확실한 사냥을 위해서는 사람이 하나 따라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위기상황에서 쉽게 몸을 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지요." 그 말을 들은 데이몬은 얼굴을 팍 구겼다. "결국 나보고 가라는 뜻이로군. 늙은이를 부려먹다니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능력이 있는 이는 오로지 데이몬 뿐이었으므로. 그는 이렇게 해서 아이스 트롤을 유인하는 미끼 신세가 되어버렸다. 아무튼 사냥은 성공리에 끝났고 데이몬은 아이스 트롤의 가죽 10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가죽을 벗기고 있는 윈슬럿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본 드래곤은 얼마나 완성되었는지 궁금하군." 카트로이의 레어 부근에 자리를 잡은 직후 데이몬은 카트로이에게 북부에서 가장 추운 곳이 어디냐고 물어 그곳을 찾아갔다. 본 드래곤을 완성시키기 위한 것이 그 이유였다. 카트로이가 가르쳐 준 곳은 레어에서 10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거대한 협곡이었다. 거대한 산봉우리가 햇살을 가로막은 데다 싸늘한 칼바람이 그칠 새 없이 불기 때문에 체감온도가 무척 낮은 곳이기도 했다. "이 정도면 훌륭하겠군." 냉기가 충만하다는 것을 확인한 데이몬은 인크레시아에서 본 드래곤을 꺼냈다. 냉기를 얼마나 흡수해야 할지 몰랐지만 완성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곳에 본 드래곤을 위협할 만한 존재는 없었다. 적어도 드래곤이 아니라면 본 드래곤의 적수는 없는 것이다. 때문에 데이몬은 아무 걱정 없이 본 드래곤 두 마리를 풀어놓을 수 있었다. "이곳은 카트로이 녀석의 영역이니 다른 드래곤들이 살 우려는 없겠지? 걱정되는 것은 오로지 눈사태뿐이로군." 산봉우리에 두텁게 덮인 눈을 보니 조금 걱정이 되었다. 눈사태가 일어나서 본 드래곤이 묻혀 버린다면 큰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은 본 드래곤에게 눈사태가 일어날 경우의 대처방법을 단단히 각인시켰다. "눈사태가 일어날 경우 너희들은 즉각 날아올라라. 그리고 위험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다음 다시 이곳에 와서 냉기를 흡수하라. 알겠는가?" 콰루루루루. 이미 데이몬의 충실한 종이 되어버린 본 드래곤 지크레이트와 러셀런트는 나지막한 포효로 화답했다. 지능이 없는 존재지만 본 드래곤에게 그 정도의 명령수행능력은 있었다. 모든 것을 마친 데이몬은 홀가분함까지 느끼며 산을 내려왔다. 저들이 완성된다면 드래곤과의 싸움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크아아아." 아이스 트롤의 가죽을 모두 벗긴 윈슬럿이 기성을 지르자 데이몬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쉴새없이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느꼈군." 오한이 드는 것을 느낀 데이몬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두터운 곰의 털가죽으로 몸을 감쌌지만 혹독한 추위에는 역부족이었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혈액순환이 곤란해지는 것이다. 급한 김에 그는 마법을 사용해서 몸을 데웠다.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으로 옷을 해 입기 전까지는 조심해야겠군." 얼어붙은 발에서 서서히 감각이 전해지는 것을 느끼자 데이몬은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윈슬럿이 작업을 마쳤다. 녀석은 아이스 트롤에게서 벗겨낸 털가죽을 산더미처럼 짊어지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가볼까?" 윈슬럿을 앞장세운 데이몬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털가죽을 짊어졌지만 윈슬럿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눈을 헤쳐나갔다. 데이몬은 비교적 수월하게 뒤를 따랐다. 목적지는 본 드래곤을 풀어놓은 협곡이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데이몬은 마침내 목적했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대한 협곡이 그의 앞에 펼쳐졌다. 눈에 덮인 깊은 골짜기에서는 바람 소리가 그칠 새 없이 들려왔다. 마치 악마의 호곡성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휘이이잉. 에일 듯한 바람이 파고드는 것을 느낀 데이몬은 옷깃을 여기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추위를 느끼다니……. 나도 이제 늙었는가?"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언데드 하나와 나란히 서서 끝이 보이지도 않는 절벽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불연 듯 서글픈 생각이 밀려왔다. 그것은 바로 복수의 일념으로 점철된 생애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영위해 온 파란만장한 생애.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이어온 끝에 데이몬은 마침내 이 자리에까지 섰던 것이다. 이것은 일행들과 함께 있을 때는 결코 느끼지 못할 감정이었다. 유쾌한 용병들의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면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고 특히 율리아나와 티격태격하는 시간은 과거를 잊는데 가장 확실한 효과를 보였다. 그것을 떠올린 데이몬은 입가에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녀석들과 일행이 되지 않았으면 무척 고독했을 것 같군. 덕분에 마음에 위안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야." 고개를 뒤흔든 데이몬은 지체 없이 본 드래곤을 불렀다. 구태여 소리를 칠 것까지도 없었다. 이미 그는 정신감응만으로도 본 드래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콰루루루. 끝이 보이지도 않는 골짜기 아래에서 본 드래곤이 화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즈넉한 포효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시 후 데이몬의 앞에는 뼈로 된 거대한 괴수 두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골짜기에서 날아오른 본 드래곤들은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날개를 휘저으며 공포스런 위용을 만천하에 과시하고 있었다. 손짓을 하자 본 드래곤들은 데이몬의 옆에 사뿐히 착지했다. 데이몬의 입가에는 또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이군. 잘 있었느냐?" 콰루루루. 복종을 표시하려는 듯 본 드래곤들은 거대한 대가리를 연신 조아렸다. 한 때 그들은 데이몬이 감히 범접하지 못했던 존재인 드래곤이었다. 하지만 이제 입장은 판이하게 바뀌었다. 데이몬의 손에 의해 명을 달리한 뒤, 그들의 육체는 고스란히 본 드래곤으로 바뀌어 자신들을 죽인 존재에게 끝없는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데이몬의 명을 받들어 지금까지 동족이었던 드래곤들에게 가차없는 살수를 가할 것이다.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새로 만들어진 본 드래곤 러셀런트를 쳐다보았다. 블랙 드래곤이어서 그런지 뼈에는 은은한 검은 빛이 감돌고 있었는데 크기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지크레이트를 훨씬 압도하고 있었다. 그 거대했던 지크레이트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가슴팍에는 커다란 붉은 구슬이 박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러셀런트의 목뼈에서 빼낸 드래곤 하트였다. 본 드래곤의 전신에 새겨진 대마법 방어진에다 마나를 공급할 매개체로써 마법저항력을 강화시키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러셀런트의 상태를 유심히 쳐다보던 데이몬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과연 에인션트 급 드래곤은 다르군." 웜 급이 되지 못한 지크레이트와 이미 에인션트 급에 들어선 러셀런트는 덩치뿐만 아니라 드래곤 하트의 크기와 용량부터 달랐다. 지크레이트의 드래곤 하트는 아슬아슬하게 마법진을 발동시킬 정도의 마나를 보유한 반면 러셀런트의 드래곤 하트는 지크레이트보다 족히 열 배가 넘는 마나를 보유하고 있었다. 드래곤 하트를 반으로 쪼개어 탑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공급하는 마나량이 마법진을 돌리는데 필요한 양을 훨씬 능가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 정도라면 9서클의 공격마법도 한 두 번 정도는 방어가 가능하지." 러셀런트를 본 드래곤으로 만들고 난 뒤 데이몬은 지크레이트에 부착해 놓았던 드래곤 하트를 빼내고 그 자리에 러셀런트의 나머지 반쪽 드래곤 하트를 장착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본 드래곤의 대마법 저항력을 강화시키는 일이었으므로 드래곤 하트를 아낄 이유가 없었다. 지크레이트의 드래곤 하트는 만일을 위해 인크레시아 속에 보관했다. 그렇게 해서 본 드래곤의 마법 저항력을 강화시키는 작업이 모두 끝났다. 이젠 남은 것은 본 드래곤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본 드래곤의 상태를 살펴본 데이몬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멀었어. 덩치가 커서 그런지 필요한 냉기의 양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군." 본 드래곤을 이곳에다 박아둔 지 벌써 6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본 드래곤은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존재하는 냉기의 양을 볼 때 머지않아 완성될 것 같았기에 데이몬은 조용히 손짓을 했다.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서 또다시 냉기를 흡수하도록 해라." 콰르르륵. 알겠다는 듯 고개를 조아린 본 드래곤들은 날개를 활짝 펼쳐 날아올랐다. 협곡 아래로 곤두박질치듯 강하하는 본 드래곤을 보며 데이몬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적어도 드래곤들이 깨어나기 전까지 준비는 완료되겠군. 놈들을 상대할……." 드래곤들이 깨어나면 데이몬을 위시한 용병들은 힘겨운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할 터였다. 트루베니아의 드래곤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베르키스의 레어에서 500년을 보냈던 탓에 데이몬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베르키스는 러셀런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오래 전에 에인션트 급이 되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놈은 인간과 싸우는 방법을 잘 아는 노련한 드래곤이다. 어쩌면 놈은 나와 데스 나이트, 본 드래곤이 협공하더라도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사실 카트로이와의 접전은 싸움이라 볼 수도 없었다. 실전경험이 없는 탓에 카트로이는 가진 힘의 반에 반도 발휘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패배한 것이다. 러셀런트 역시 이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싸웠으므로 능력을 모두 발휘했다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트루베니아에 남아있는 드래곤들은 달랐다. 그들은 인간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싸워왔으므로 인간을 상대하는 방법을 깊이 숙지하고 있을 터였다. 적어도 카트로이처럼 방심하는 일은 없을 것이기에 데이몬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과연 복수를 이루는 것과 다프네를 구해내는 일이 성공할 수 있을까?" 비록 힘을 얻었다고 자부했지만 아직까지 가능성은 희박하긴 마찬가지였다. 비록 드래곤 둘을 사냥하긴 했지만 아직까지 드래곤은 여섯이나 남아있는 데다 면면을 따져보아 그 중에서 러셀런트보다 약한 녀석이 없었다. 특히 가장 강한 베르키스와 크라누스에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조차 결여되어 있으니 가능성이 낮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드래곤들에겐 막강한 가디언 군단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오크 병사들이 있다. 그가 보유한 전력으로 정면 대결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억지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 일이다. 갈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가 볼 수밖에……." 아직까지 드래곤의 수면기가 얼마간 남아있었으므로 데이몬은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마음먹었다. 윈슬럿을 앞세운 데이몬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럼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볼까?" 놀랍게도 데이몬은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을 진정한 동료로 인정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전력에 별달리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 하나만으로도 데이몬에겐 절실히 필요한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 지내는 순간만은 복수심으로 얼룩진 끔찍한 과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베르키스의 레어에서 보냈던 500년의 세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이었고 데이몬에겐 생각하기조차 싫은 세월이기도 했다. "아마도 복수라는 한 가지 목적이 없었다면 난 미쳐버렸을지도 몰라. 제정신을 유지한 채 리치들 사이에서 500년을 보낼 인간은 없으니까……." 그때는 실력을 기르겠다는 일념 하나로 500년을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힘을 얻은 지금은 용병들이 그 역할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이름 없는 용병들에 불과한 그들이었지만 적어도 데이몬에겐 더 없이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눈과 얼음에 덮인 길을 조심조심 내려가던 데이몬은 갑자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빌어먹을 율리아나 계집애도 나에겐 많은 도움이 되지. 그년과 아웅다웅거리는 것이 이젠 일상사가 되어버렸으니……." 데이몬의 관점에서 율리아나는 정말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벌써 여러 번 쓴맛을 보았지만 그녀의 성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떠올린 데이몬은 진저리를 쳤다. "아마도 그년은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을 거꾸로 매달아놓아도 정신차리지 못할 거야."???? 사실 이곳에서 가장 할 일이 없는 사람이 바로 율리아나였다. 용병들처럼 검술수련에 매진하는 것도 아니고, 미첼처럼 매일매일 데스 나이트와 겨루지도 않으니 지겨울 만도 했다. 물론 데이몬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곳에서 보낸 6개월 동안 데이몬은 소환술(Necromency)에 깊이 심취했다. 마법 방면으론 더 이상 발전이 없는 까닭에 대신 소환술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는 것이다. 마계의 강력한 마물들을 소환한다면 드래곤과의 싸움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능성은 그리 밝지 않았다. 어지간히 강한 마물이 아니면 드래곤의 손짓 한 번에 강제 귀환될 수 있었고 마왕이 아닌 이상 데이몬에게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 때문에 데이몬은 데스 나이트와 본 드래곤에 가장 큰 기대를 걸어야 하는 것이다. 쓸모가 있건 없건 본 드래곤이 완성되어 이곳을 떠날 때까지 데이몬의 연구는 계속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미첼의 검술교습에서 졸업한 용병들은 이제 동료들을 상대로 대련하는데 하루를 꼬박 새웠다. 수라사령심법도 매일매일 연공해 나갔으므로 그들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었다. 예전에는 일곱 명 모두가 덤벼도 윈슬럿을 감당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둘이서도 무리 없이 싸울 수 있었다. 정말 놀라울 정도의 성취인 것이다. 미첼 역시 데스 나이트와의 대련으로 하루의 시작과 끝을 맺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나아진 이가 바로 카심과 제럴드였다. 카심은 이제 데스 나이트를 상대로 대련을 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미첼에게서 배운 기본기와 수라사령심법,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실전경험이 하나로 아우러져 가장 월등한 실력향상을 보이고 있었다. 제럴드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발전을 보였다. 집안의 복수에 불탄 나머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수련에 몰두하는 데다, 왼손잡이에게 가장 적합한 검법인 좌수검법이 제럴드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단 하나 율리아나만은 하루 하루가 무료할 수밖에 없었다. 검술에는 관심도 없었고, 한 때 마법을 배우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마법이란 참을성이 없는 그녀가 배울 수 있는 학문이 아니었다. 물론 순순히 가르쳐 줄 데이몬도 아니었지만. 결국 율리아나는 무료함을 특유의 악취미로 달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동료들을 골탕먹이는 것이었고 거기에는 데이몬에게서 배운 급소 가격법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때문에 용병들은 수련에 몰두하면서도 극도로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언제 율리아나가 나타나서 급소를 후려갈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 중에서 그녀에게 한 두 번씩 당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용병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기습공격에 대한 대처법을 익히게 된 것이다. 그녀는 상대가 누구라도 가리지 않았다. 겁을 상실했는지 화이트 드래곤 카트로이에게도 그 방법을 사용할 정도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인간과 드래곤의 혈도가 다른 탓에 그녀의 기습은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자 율리아나는 표적을 데이몬에게로 돌렸다. 데이몬에게서 인체의 혈도를 몇 개 더 알아낸 그녀는 거꾸로 그것을 데이몬에게 써먹기 시작했다. 물론 쉽사리 당할 데이몬이 아니었기에 그녀의 시도는 대부분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그 대가로 율리아나는 벌써 여러 번이나 거꾸로 매달리는 처지가 되었다.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는 명목 하에 데이몬은 그녀를 꼬박 하루동안 거꾸로 매달아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허사였다. 지금까지 수많은 말괄량이를 길들였던 데이몬의 독문수법은 적어도 율리아나에겐 통하지 않았다. 꼬박 하루동안 곤욕을 치르고 나서도 그녀의 괴벽은 사라지지 않았고 시도 때도 없는 기습에 데이몬조차 때때로 겨드랑이를 끌어안고 주저앉아 끙끙 앓아야 했다. 정신 없이 소환술을 시연하고 있는데 기습을 받는다면 아무리 9서클의 마스터라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럴 경우 데이몬은 결코 순순히 넘어가지 않았다. '이런 죽일 년.' 버릇을 단단히 고쳐야겠다고 생각한 데이몬은 율리아나에게 혹독한 체벌을 가했다. 홧김에 분근착골까지 퍼부었으니 데이몬으로썬 할 만큼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으로도 율리아나의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큰 맘 먹고 두들겨 패도 소용없고, 흉측한 음식을 만들어놓아도 맛나게 쩝쩝 먹어대는 데 더 이상 해 볼 방도가 없는 것이다. 결국 데이몬은 두손 두발 다 들고 말았다.?? '죽이지 않으면 버릇을 못 고치겠군.' 결국 그는 율리아나를 길들이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그녀의 장난이 괴로운 과거를 망각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오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500년 전 다프네와 함께 있을 때처럼 말이다. 방법은 다르지만 효과는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데이몬은 이제 율리아나의 기습을 즐기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물론 기습이 성공할 경우 분풀이를 확실하게 하지만 말이다. 율리아나를 떠올린 데이몬은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그년은 나에게 맞으며 쾌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게 아닐까?" 변태성욕자 중에 그런 놈들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데이몬은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아무튼 별난 년인 것은 틀림없어."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을 산더미처럼 짊어진 윈슬럿은 거침없이 눈을 헤치며 길을 만들었고 데이몬은 연신 고개를 흔들며 윈슬럿의 뒤를 따랐다. 동굴로 돌아온 데이몬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앞에 어이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황당하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이게 다 뭐야?" 동굴 속은 온통 시체 천지였다. 죽어 나자빠진 아이스 트롤의 시체로 말미암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따라 들어온 윈슬럿 역시 어이가 없는 듯 짊어지고 온 털가죽을 내려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림잡아도 30여 마리가 넘는 아이스 트롤들이 동굴 속에서 죽어 있었다. 전혀 뜻밖이었기에 데이몬은 멍하니 아이스 트롤의 시체를 지켜보았다. "이제 오셨습니까?" 전신에 피칠갑을 한 카심이 데이몬에게 다가왔다. 전신이 상처투성이였고 뽑아든 검에서는 아직까지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크고 작은 상처로 전신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고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다행히 생명이 위태로운 녀석은 없어 보였기에 데이몬은 카심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스 트롤들이 아예 작정을 한 듯 떼거지로 밀어닥치더군요. 정신 없이 싸우다 보니 겨우 물리치기는 했는데……." 카심의 대답에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아이스 트롤이 이처럼 대대적인 습격을 가해올 줄은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이스 트롤이 괜히 북부를 주름잡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카트로이 녀석의 말이 맞긴 하군." 처음의 경고와는 달리 아이스 트롤은 동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6개월 동안 한 번의 습격도 없었던 탓에 마음을 푹 놓고 있었는데 이번에 데이몬이 외출한 틈을 타서 급습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용병들이 아이스 트롤의 습격을 물리쳤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는지 데이몬은 동굴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는 프림베르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데스 나이트들이 순번을 정해 미첼이나 카심과의 대련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에 한 명씩은 동굴 속에 대기하고 있었다. "네놈 짓이냐?" 프림베르그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상처를 보면 알 것 아닌가? 내 자이언트 킬러에 당한 상처가 저렇게 생겼을 것 같나? 난 이곳에서 손끝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다." 아닌게 아니라 그러했다. 아이스 트롤의 시체에는 검에 찔리거나 베어진 상처들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프림베르그의 엄청난 힘과 자이언트 킬러의 무게를 감안한다면 결코 저런 상처가 날 리가 없었기에 데이몬으로써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네놈의 무식한 공격은 베는 게 아니라 아예 박살내는 수준이지." 고개를 돌린 데이몬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용병들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결국 너희들이 해낸 게로군." "그렇습니다. 운이 좋았죠."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카심.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비약적으로 늘어난 검술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역력히 배어 있었다. 그것은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당적하기 힘들다고 알려진 아이스 트롤을 한 사람이 두세 마리씩 베어 넘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놀랍군. 이놈들을 상대하기가 그리 쉽진 않았을 텐데……." "동굴 속에서는 그래도 싸울 만 하더군요. 놈들의 몸놀림이 생각보다 빠르진 않았습니다. 게다가 미첼이 거의 십여 마리의 아이스 트롤을 처치해 주어서 상대하기가 비교적 편했죠." "그래?"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할 수 있는 미첼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게다가 눈과 추위가 없는 곳에서는 아이스 트롤이 그리 위협적이지 않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추위로 몸이 언 상태에서는 아이스 트롤의 몸놀림이 비례적으로 빨라 보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눈 속에 은신할 수 없기 때문에 놈들의 장기인 기습공격 또한 위력이 없었다. 게다가 승리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용병들의 실력향상이었다. 불리한 여건이라 치더라도 아이스 트롤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몬스터였고 예전의 실력이었다면 이길 가능성이 희박했다. "이 정도면 제 몸 하나 건사는 할 수 있겠군." 한시름 던 듯한 표정이 데이몬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곧이어 벌어질 드래곤과의 전투. 정신 없이 싸우는 와중에서 용병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있을 턱이 없을 테니 이처럼 자신을 방어할 실력만 된다면 그로써는 큰 시름을 덜 수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아이스 트롤을 더 이상 사냥할 필요가 없겠군." 그가 사냥해 온 것과 이곳에 널려있는 것을 합치면 털가죽은 충분했다. 일행이 입을 옷 정도는 넉넉히 만들 수 있을 듯 보였다. 용병들은 곧 아이스 트롤의 시체를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그것을 지켜보던 카심이 조심스럽게 데이몬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이건 꽤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것인데……" "뭔가 말해보게." 카심은 무척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일전에 말씀하신 내용인데 트루베니아의 드래곤들이 지금 수면기에 들어가 있다고 하신 게 사실입니까?" 6개월을 함께 기거하는 동안 그들 사이에는 많은 대화가 오갔다. 데이몬이 용병들에게 그리 많은 것을 얘기해 주지는 않았지만 단 한가지 그가 500년 전 종족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8장 북부로의 여정 241회. 오늘로써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8장이 끝났습니다. 가장 힘들게 쓴 장이기도 하고 독자들의 비평을 가장 많이 받은 장이기도 합니다. 물론 공감한다는 것이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쓰고 나니 후회가 무척 많이 남는군요. 이렇게 어렵게 쓴 적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원래 전 비축분을 잔뜩 쌓아놓고 써야 술술 풀리는 타입입니다. 소엠 시절부터 적어도 반 권에서 한 권 가량 비축분을 두고 연재를 해 왔습니다. 그때는 리플에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올라와도 글에 거의 반영을 못했습니다. 이후의 내용이 이미 완성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그동안 그게 조금 안타까워서 7,8장에서는 방법을 조금 바꿔봤습니다. 하지만 리플이란 게 순기능도 있는 반면 역기능도 적지 않더군요. 스토리 전개에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여러 독자들의 의견을 조금씩 참조하다보니 애초의 설정이 많이 희석된 것 같습니다. 처음에 전개하려고 했던 내용과 많이 달라지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예전의 방법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이렇게 쓸데없는 잡담이 길어지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연중기간이 무척 길어질 것 같다는……. (어디서 돌 날아오는 소리가?) 북경에 다녀온 다음 9장에 대해 준비를 단단히 할 생각입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탄탄하게 구상해서 적어도 9장의 대부분을 쓰고 난 뒤 연재를 시작할 생각입니다. 그래야만 제 페이스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지금처럼 써서 바쁘게 올리는 것은 저나 독자들에게 모두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연중기간은 적게 잡아도 한 달 이상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이상이 걸릴 지도 모르고요. 글의 완성도를 높이고, 또한 양보다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 같으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19일 새벽에 출국 예정이고, 중국에 가 있는 동안 8권이 나올 것입니다. 그 때문에 내일 저녁( 18일)에 통신에 올라와 있는 분량을 삭제할 예정입니다. 분량은 8장 전체입니다. 그럼 이만.?? **************************************************************************** 리치의 몸으로 드래곤의 레어를 지켰다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기에 용병들은 그저 데이몬이 극한의 마법을 익혀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잠시 그 사실을 떠올려 본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네. 500년 전 2차 종족전쟁이 끝난 직후 드래곤들은 곧바로 수면기에 들어갔지. 깨어나려면 아직까지도 몇 년 남았을 거야." 그 말을 들은 카심은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놈들이 잠을 자는 지금이 사냥하기에 가장 적기가 아닐까요? 책에서 읽기로 드래곤들은 잠에서 깨어나도 바로 활동할 수 없다고 하던데……." 그 질문은 카심 뿐만이 아니라 용병들 전부의 관심사이기도 한 모양이었다.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럴 만도 했다. 활동중인 곰보다 동면중인 곰을 사냥하는 게 훨씬 수월하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이었고, 그런 맥락으로 설명하면 잠들어 있는 드래곤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해 드래곤이 잠들어 있는 레어를 찾아내기만 하면 사냥이 그대로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데이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가 없군. 한 마디로 드래곤이란 종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물론 그라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꼬박 500년 동안 가디언 신분으로 레어를 지켜본 경험에 의하면 그것은 애당초 실현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그 때문에 데이몬도 일찌감치 포기하지 않았던가.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로 드래곤은 외부와 완벽히 차단한 처소에서 수면을 취한다. 베르키스의 경우 용암으로 둘러싸인 곳에 처소가 설치되어 있었고 드나드는 것은 철저히 공간이동에 의존했다. 그러므로 공간이동이든 직접 침투이든 간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드래곤이 펼쳐놓은 공간이동 왜곡장이 설치되어 있는 곳에는 같은 드래곤조차 공간이동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곳은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조차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용암으로 둘러싸인 곳을 뚫고 들어갈 방도도 없었다. 다른 드래곤들의 레어 사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보나마나 난공불락의 철옹성임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자신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드래곤들이 허술하게 대처해 놓았을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그들의 가디언들도 경계해야 할 대상임은 틀림없었다. 일전에 데이몬은 베르키스의 레어를 급습하는 경우를 한 번 상상해 본 적이 있었지만 결과는 정말 허망했다. 게덴하이드 휘하의 리치 가디언은 결코 얕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과 혈전을 치른다 하더라도 빠른 시간 내에 제압하기는 힘든 데다가 시간이 조금만 지체된다면 부근의 부족에서 중무장한 오크 보병들이 마치 개미떼처럼 몰려올 터였다. 게다가 베르키스의 거처를 지키는 아이언 골렘과 브론즈 골렘들은 데이몬조차 미처 위력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을 상대하는 사이 베르키스는 충분히 깨어날 시간을 벌 수 있다. 데이몬이 본 드래곤과 데스 나이트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베르키스는 주위의 드래곤들을 끌어 모을 것이 분명했다. 만약 두 마리 이상의 드래곤이 모여들면 상황은 완전히 종결된다. 그때는 도망치는 것마저 불가능한 것이다. 데이몬이 했던 것처럼 드래곤도 충분히 마법방해를 할 수 있다. 단지 필요가 없어서 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공간이동을 통한 도주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본 드래곤을 이용한 탈출 역시 여의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본 드래곤 두 마리와 데스 나이트 넷으로 대적할 수 있는 드래곤의 수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데이몬은 섣불리 트루베니아로 건너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노려야 하는 것은 철저히 각개격파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인 선결 과제가 있었다. 이곳의 권력자와 힘을 합해서 그의 군대와 합동작전을 벌이는 것. 그것만이 데이몬이 노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카심이 아무것도 모르고 팔자 편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니 데이몬의 심사가 사나워질 수밖에 없었다. 데이몬은 퉁명스럽게 한 마디 내뱉었다. "트루베니아에는 베르키스란 레드 드래곤이 있지. 혹시 그놈의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들에 대해 들어보았나?" 물론 카심이 거기에 대해 알 턱이 없었다. 고개를 가로젓는 카심을 보며 데이몬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알기론 그곳의 가디언은 전원 리치로 구성되어 있다. 6서클을 상회하는 놈들로만 대략 60명 정도 되지. 특히 그것들을 지휘하는 녀석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어. 왜냐하면 그놈은 9서클의 엑스퍼트이니까……." 용병들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이 그 정도로 엄청나다는 사실은 전혀 금시초문이었다. 6서클의 리치 60명이라면 어지간한 왕국쯤은 삽시간에 초토화시킬 수 있는 전력이다. 게다가 우두머리마저 9서클의 엑스퍼트라니……. 그 정도라면 본 드래곤과 데스 나이트가 모두 덤비더라도 섣불리 승산을 장담하기 힘들었다. 내친 김에 겁을 더 줘야겠다고 생각한 데이몬이 짐짓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드래곤의 가디언이 모두 리치인 것은 아냐. 하지만 다른 놈들도 상대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거야. 대부분이 스톤 골렘으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그래도 중형 몬스터는 상대하기가 비교적 나은 편이지. 마법이 걸려 있어 유사시 버서커(狂戰士) 모드로 돌입하는 것이 조금 골치 아프지만 말이야." "주, 중형 몬스터라면……." "대부분 오우거야. 트롤은 약하다는 이유로 드래곤 놈들이 가디언으로 잘 쓰지 않지. 같은 오우거라도 힘 좋은 트윈헤드를 더 선호하는 판국이니 느려빠진 트롤 따윌 쓰겠어?" 용병들은 하나같이 등골이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비록 아르카디아에 중형 몬스터의 씨가 말랐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기사들에게 한정된 것이었고, 용병들에게 오우거는 아직까지 상대하기 힘든 몬스터였다. 그런데 버서커 마법이 걸려있는 오우거라니……. 카심이 치를 떨며 떠듬떠듬 말을 이어나갔다. "대, 대체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이 몇 마리나 됩니까……." "잘은 모르지만 일전에 처치한 놈의 레어를 보기로 들어보겠네. 그때 스톤 골렘이 대략 50여 기 정도 있었고 중형 몬스터가 한 200마리 되더군. 독침을 날리는 고블린들이 꽤 있던데 그놈들이야 신경 쓸 필요도 없겠지? 웜 급에 들지 못한 놈이 그 정도야. 그러니 다른 놈들은 더 많다고 봐야지?"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듯 용병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수면중인 드래곤을 노리려는 계획은 이미 뇌리에서 깡그리 사라진 다음이었다. 카심이 아무래도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서, 설마 그 정도까지 되려고요? 카트로이의 레어에는 가디언이 전혀 없었는데……." 데이몬은 그게 아니라는 듯 손가락을 흔들었다. "자네, 그놈의 레어에서 허공을 받치고 있는 얼음기둥들을 본 적 있지? 이상한 마법진이 새겨진 육중한 얼음기둥 말이야." "예. 보긴 했습니다만." "그게 다 가디언이야. 이름하여 아이스 골렘(Ice Golem)이지. 물론 스톤 골렘보다 현저히 약한 놈들이지만 덩치는 훨씬 크지. 만약 자네들이 무단으로 놈의 레어를 침범했다면 아마도 그놈들의 열렬한 환영인사를 받아야 했을 거야." 데이몬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듣고 있는 용병들에겐 결코 웃으며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얼음기둥이 줄잡아 백여 개는 있었는데……. 세상에 그게 다 아이스 골렘이라면…….' 드래곤이란 존재의 실체에 대해 실감하게 되자 용병들은 자부심이 꺾이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데이몬을 무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드래곤에게도 데이몬에 못지 않을 수준의 조력자들이 있었다. 어느새 어깨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하는 용병들. 데이몬은 얼굴의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트루베니아에서 드래곤 한 마리를 처치한 것은 말 그대로 요행이었어. 놈들의 안방인 트루베니아에서 드래곤을 상대하는 것은 무척 어리석은 짓이지. 게다가 트루베니아를 지배하고 있는 오크들도 상대해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라고 봐야지." "그렇다면 드래곤들을 철저히 이곳으로 끌어들여야만 승산이 있겠군요."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지. 나에게 생각이 있으니 그것은 추후에 알려주도록 하겠네. 우선 자네들에게 필요한 것은 실력을 최대한 키워야 하는 일일세. 앞으로 스톤 골렘과 중형 몬스터는 물론이고 6서클의 리치까지 상대해야 할지도 모르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데이몬은 용병들의 면면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겁나는 녀석들은 언제든지 빠져도 좋아. 앞으로의 일은 목숨이 몇 개가 붙어있어도 부족할지 모르니 말이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용병들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고 있었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미 저희들은 목숨을 내놓은 상태입니다." "어차피 한 번은 죽어야 할 터, 드래곤과 싸우다 죽는다면 더 없는 영광이지요." "지긋지긋한 삼류용병으로 돌아갈 바에야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한마디씩 내뱉는 용병들을 보며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역시 동료로 삼을 만한 녀석들이었다. "그런 마음자세라면 좋아. 우리 멋지게 한 번 이름을 날려보자고……." "와아아아." 용병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이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맥이 빠질 법도 했는데 그들은 도리어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것은 앞으로 더욱 수련에 정진하여 실력을 키우겠다는 각오였다. 더불어 자신들에게 이런 기회를 준 데이몬에 대한 감사 표시이기도 했다. 연신 환호성을 내지르는 용병들의 뒤에서는 미첼이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간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존재하는 조직이 있다. 이름하여 도둑길드. 어둠의 영역에 속해 있는 자들에겐 안식처이며 법 집행을 하는 자들에겐 반드시 뿌리뽑아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도둑 길드란 사회가 지속되는 한 영원히 존재하는 조직이라고 볼 수 있다. 발본색원을 거듭해도 잡초처럼 또다시 생겨나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 아르카디아의 도둑길드들은 연속적인 수난을 겪고 있었다. "요, 용무가 끝났으면 어서 날 죽여주시오." 애꾸눈 사내 하나가 사색이 된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안대를 찬 얼굴에 보기에도 섬뜩한 흉터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아 범상치 않은 인생역정을 겪어온 자가 분명했다. 세상의 단맛과 쓴맛을 겪을 대로 겪어본 듯한 사내. 제필드란 이름을 가진 사내는 테르비아 도둑 길드의 총수로써 어둠의 대부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거물이었다. 온갖 역경을 겪어가며 이 자리에까지 오른 만큼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야 할 그가 지금은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앞에 표표히 서 있는 존재들은 통상적인 상식이 통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필드의 옆에는 정체불명의 물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반쯤 부스러진 채 바짝 말라붙은 미이라 같은 물체들. 그것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생히 살아 숨쉬던 인간들이었다. 바로 테르비아 도둑 길드의 주요 간부들이었고 로브를 뒤집어쓴 자의 손짓 한 번에 이 모양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어지간한 제필드도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간부들과 모여 앉아 상납금의 분배 여부를 놓고 숙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치안병사들이 들이닥치는 일 따윈 문제도 아니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몸을 뺄 만반의 준비를 완벽히 마쳐둔 상태였으니까.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심복들이 길목을 막는 사이 비밀통로를 통해 미로 같은 뒷골목으로 빠져나간다면 그들을 잡을 자는 없었다. 고향과도 같은 어둠이 그들의 존재를 완벽히 숨겨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상황이 달랐다. 꽈당. 문이 예고도 없이 부서져나가자 그들은 항상 해 왔던 대로 대응을 시작했다. 단검을 꼬나든 도둑들이 문을 향해 육박함과 동시에 제필드를 비롯한 간부들은 반사적으로 비밀통로로 향했다. 상납금은 탁자 위에 고스란히 남겨둔 상태였다. 치안병사들의 추적을 지연시키는데 가장 효과가 있는 방법이었고 지금까지 여러 번 위기에서 회피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푸학. 비명도 없었다. 바짝 마른 갈대 잎을 모닥불 속에 던져 넣을 때 날 법한 소리가 몇 번 들린 뒤 제필드는 달랑 혼자가 되어버렸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상황이 종결되어버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들려온 섬뜩한 음성. 제필드에게 그것은 악마의 소리와 다름없었다.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확실하게 말려주겠다." 눈 깜짝할 사이에 미이라로 변한 채 부스러지고 있는 간부들의 모습에 제필드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피가 흐르고 살점이 튀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였지만 벌어지는 상황은 그를 완벽하게 공포에 몰아넣고 있었다.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 그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누, 누구요. 대체 왜? 끄아악." 채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 오른팔이 순식간에 말라 들어가며 시커멓게 변하는 모습에 제필드는 눈을 부릅떴다. 유부에서 들려오는 듯한 으스스한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묻지 않은 말을 할 경우 이렇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라." 제필드는 얼른 입을 닫았다. 상식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던 것이다. 그는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난입한 자들의 모습을 살폈다. 상대는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 쓴 세 명이었고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제필드의 직감은 선두에 선 자가 두건을 뒤로 넘기자마자 증명되었다. "헉." 두건 아래로 드러난 것은 살이 하나도 붙어있지 않은 해골이었다. 눈구멍 사이로 스산한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묘하게 생긴 관 같은 것을 쓰고 있는 것을 보니 스켈레톤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도둑길드의 총수답게 제필드는 상대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리, 리치." 간신히 한 마디 내뱉기는 했지만 대가가 정말 컸다. 남은 왼팔마저 오른팔과 같은 신세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양쪽 어깨 죽지를 움켜쥔 채 간신히 신음소리를 집어삼킨 제필드의 귀에 예의 그 음성이 들려왔다.?? "너에게 하나 물어볼 것이 있다. 순순히 대답하면 깨끗하게 죽여줄 것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 발끝부터 서서히 말라 들어가는 고통을 겪어야 할 것이다."???? 제필드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상대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경우 상상도 못할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무,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곧 질문이 퍼부어졌고 다행히도 질문내용은 제필드가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흑마법사에 대한 내용이었으니 제필드로썬 다행이라면 다행인 셈이다. 제필드는 알고 있는 사실들을 정신 없이 털어놓았다. 그런 다음 가슴을 졸이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상대는 한 번 내뱉은 말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였다. "수고했다." 비명도 없었다. 육신이 삽시간에 말라비틀어지며 제필드는 마침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죽은 자는 고통을 느낄 수 없으니 말이다. 털썩. 제필드의 미이라가 쓰러지는 모습을 쳐다보던 음성의 주인은 흥미롭다는 듯 내뱉었다. "역시 인간을 끝내는데는 호리드 윌팅이 가장 극적이지." 회심의 미소를 떠올리는 해골바가지의 정체는 바로 게덴하이드였다. 베르키스의 레어를 경비하는 가디언 우두머리가 테르비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탓에 게덴하이드는 상당히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이로써 명령을 어김없이 완수한 셈이로군. 러셀런트 님이 데이몬이란 놈에게 당한 이유를 파악했으니 말이야." 수면에 빠져들기 전 베르키스는 게덴하이드를 불러 모종의 명령을 내렸다. 아르카디아로 건너가서 데이몬에 대한 소식을 수소문하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게덴하이드는 명령에 따라 아르카디아로 건너왔고 마침내 데이몬이 보유한 전력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대단하군. 마스터급 데스 나이트와 본 드래곤이라……. 그 정도라면 단신으로 건너오신 러셀런트님이 당할 만 하지……."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데이몬이란 놈의 밑천을 파악한 이상 걸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주인은 러셀런트와는 달랐다. 데스 나이트나 본 드래곤 따위에 당할 존재가 아니었다. 게덴하이드의 생각으로 베르키스는 세상에서 적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드래곤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드래곤 로드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으니까……. "노력이 가상하다만 어림없다. 봉인구를 통해 나이델하르크의 마력을 얻은 모양인데 역부족이야. 베르키스 님은 나이델하르크와 일대 일로 싸우더라도 능히 이길 수 있는 분이니까." 굳이 심령금제를 당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제압되는 순간 게덴하이드는 베르키스의 진정한 힘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임무를 완수했다고 판단한 게덴하이드는 데리고 온 두 명의 리치를 돌아보았다. "돌아간다. 지금 즉시 공간이동 마법진을 설치하도록."???? "알겠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리치들을 보며 게덴하이드는 소름끼치는 안광을 피워 올렸다. "앞으로 일년 후면 인간들의 종말을 알리는 시간이 도래하겠군. 크로센 황제의 척살을 필두로 인간멸살전쟁(人間滅殺戰爭)이 시작될 테니까……." 이미 베르키스는 고도의 마법을 이용해 수면기에서 깨어날 시기를 앞당기는 경지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그것을 떠올린 게덴하이드는 유쾌하다는 듯 광소를 터뜨렸다. "인간들이여. 시시각각 다가오는 종말의 순간을 손꼽아 기다려라. 크하하하하." 길드원들의 말라붙은 시신들은 게덴하이드의 광소로 인해 완전히 가루가 되고 있었다. ??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42회. 아르카디아의 최북단에는 카토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 불모지인 북부에 가장 인접해 있는 국가로써 인구 10만 남짓한 그만그만한 국가 중 하나였다. 북부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카토 왕국의 자연환경은 비교적 척박한 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활용해서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었다. 카토 왕국은 결코 부유한 국가가 아니다. 추운 날씨로 경작이 불가능한데다 아이스 트롤의 출몰 때문에 상업조차 발달하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국민들 대다수가 어업을 생업으로 삼고 있었다. 물론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가는 상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했다. 혹독한 추위 때문에 바다마저 얼어붙는 판국이니 배를 띄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주민들에겐 그저 얼어붙은 호수표면에 구멍을 뚫은 뒤 낚시로 식구들이 먹을 생선을 낚아 올리는 것이 생계를 이어나가는 것의 전부였다. 카토 왕국의 산물이라고 해봐야 몇 종류의 생선과 털가죽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의 발걸음은 카토 왕국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아이스 트롤의 위협을 감수하며 까지 찾아오는 것을 보면 카토 왕국에 쉽사리 생각할 수 없는 메리트가 있음이 확실했다. 이를테면 지금 막 이곳에 도착한 일행들 역시 그런 메리트를 노리고 온 상인들이었다. 다각다각. 마차 한 대가 느릿하게 마을 어귀에 들어섰다. 말이 걸음을 멈춘 곳은 눈에 반쯤 덮인 건물이었다. 두툼한 털옷으로 빈틈없이 몸을 감싼 서너 명의 상인들이 진저리를 치며 마차에서 내렸다. "여관에 도착했으니 일단 몸을 좀 녹이도록 하자." 다 쓰러져 가는 나지막한 건물이 부근에서 유일한 여관이란 사실을 웬만한 상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간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상인 하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떨리는 음성을 토해냈다. "후. 정말 춥군. 벌써 여러 번이나 찾아왔지만 이곳의 추위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아." 얼마나 추웠는지 얼굴을 감싼 털가죽 사이로 하얀 김이 훅훅 뿜어지고 있었다. 추위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마차를 모는 말들도 마찬가지였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두터운 모포를 동여매 놓았지만 말들은 연신 푸레질을 하며 안절부절못해 했다. 추위 때문에 몸이 식어 가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그 모습을 보던 사내가 혀를 끌끌 찼다. "일단 말들을 풀게. 마굿간에 넣지 않으면 내일부턴 우리가 마차를 끌어야 할지도 몰라." 늙수그레한 음성을 보니 이곳 경험이 많은 자인 것 같았다. 상인들은 군소리 없이 말과 마차를 분리했다. 손님이 도착했으니 점원이 나올 법도 한데 건물 안에서는 전혀 기척이 없었다. 마치 알아서 말을 묶고 들어오라는 듯이……. 상인 하나가 건물 쪽을 쳐다보며 눈을 부라렸다. "허 참. 점원 녀석들이 게을러 터져 가지고……" 리더인 듯한 상인이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뿐만 아니라네. 생각해 보게. 누가 이런 추위 속에서 손님을 맞으려고 하겠나? 돈도 좋지만 얼어죽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싫은 법이야." "하긴……." 상인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잠자코 풀어낸 말을 여관의 뒤편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거친 통나무로 만든 널찍한 마구간이 위치해 있었다. 말을 마구간에 묶은 사내들은 서둘러 몸을 돌렸다. 몸이 얼어있는 터라 따뜻한 스프 생각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삐꺽. 문을 열고 들어간 상인들은 실내를 휘휘 둘러보았다. 투박하지만 두터운 문 때문인지 실내는 제법 훈훈한 편이었다. 다 쓰러져 가는 외모와는 달리 여관건물은 내부를 혹독한 추위에서 잘 지켜주고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추위를 차단하는데는 일품인 건물이었다. 손님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여행자나 상인이 아닌 다음에야 여관에 투숙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상인들이 들어서자 난로가에서 끄덕끄덕 졸던 점원이 그때서야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어서 오십시오." 잠에서 덜 깬 듯한 목소리를 듣고 한 상인이 혀를 쯔쯔 찼지만 나머지 일행들은 군소리 없이 난로가에 가서 앉았다. 이번 여정이 초행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는 것이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시킨 상인들은 난로불에 둘러앉아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털외투를 벗자 일행의 면면이 하나씩 드러났다. 노인 하나에 중년인 둘, 나머지는 채 스물이 되지 않아 보이는 청년이었다. 공통적인 것은 무언가 기대에 차 있는 듯한 눈빛뿐이었다. 한 눈에 보아도 뭔가를 노리고 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가장 젊어 보이는 청년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몇 장이나 구할 수 있을까요." "글쎄다." 마뜩찮은 눈빛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다. 세파에 찌들대로 찌든 얼굴이었지만 나름대로 날카로운 눈빛이 인상적이었고 말투에서 상인들의 리더라는 것이 은연중 드러났다. "아이스 트롤이 원래부터 잡기 힘든 몬스터지만 요즘 같은 겨울에는 사냥하기가 더욱 어렵지. 난다긴다하는 아이스 트롤 사냥꾼들도 겨울에는 일체 사냥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어쩌면 허탕칠지도 모르니 마음들 단단히 먹도록 하게." 이런 일에 익숙했는지 두 중년인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젊은이는 참지 못하고 계속해서 질문을 퍼부었다. 젊은 혈기로 말미암아 호기심을 주체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왜 여행을 결심하셨습니까? 헛걸음하는 것보다 내년 봄에 오는 것이 백 번 나을 텐데……." "허허. 그 녀석……." 집요한 질문이 그리 싫지 않은 듯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상도(商道)라는 것은 그리 간단히 생각할 수 없는 문제란다. 고객이 원한다면 설사 그곳이 세상 끝이라 하더라도 가서 물건을 구해와야 하는 것이 상인의 사명이지. 이 할애비가 그토록 많은 단골을 가지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란다." 말투를 들어보니 둘이 조손지간인 듯 했다. 아르카디아에서 선대의 직업을 물려받는 것이 보편적으로 만연한 일이란 것을 감안하면 노인은 청년을 후계자로 선택하고 경험을 길러주기 위해 동행시킨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의 호기심은 충족되지 않은 듯 했다.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이 고생을 무릅쓸 정도로 가치가 나갑니까?" "물론." 단호하게 대답한 노인은 청년의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은 이곳에서도 비싸지만 대도시에 가지고 가면 말 그대로 부르는 것이 값이란다. 이곳에서 매입한 가격보다 족히 백 배는 더 받을 수 있지. 털이 그리 부드러운 것은 아니지만 희소성 때문에 귀족부인들은 이것을 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단다." 말을 마친 노인은 여관 내부를 휘휘 둘러보았다. 무언가 정보를 캐내고자 하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했다. 하지만 여관 내부에 있는 손님들에게서 뭔가를 알아내기는 힘들 듯 보였다. 대부분이 얼음 낚시를 마치고 목을 잠깐 축이러 온 어부들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보를 얻기가 쉽진 않겠군.' 생각다 못한 노인이 점원을 부르려는 순간 문이 덜컥 열렸다. 휘이이이. 눈보라가 파고들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여몄다. 충분히 몸을 데운 상태였지만 북부의 칼바람은 닿기만 해도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점원이 서둘러 문으로 뛰어갔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하지만 문은 쉬이 닫히지 않았다. 온통 털가죽을 덮어쓴 인영들이 꼬리를 물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열 명이 넘어 보였기 때문에 상인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들어올 것이지.' 하지만 불평을 입 밖으로 내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그들은 처세술을 깊이 있게 터득한 경험 많은 상인들이었으므로……. 들어온 사람들은 한 마디씩 내뱉으며 탁자로 다가갔다. "햐! 스프 냄새를 도대체 얼마 만에 맡는 거지?" "꼬박 1년 동안 느글거리는 고기만 먹었으니 반가울 만도 하지." 한 마디씩 내뱉은 사내들은 뒤집어쓰고 있던 털가죽을 하나씩 벗어 던졌다. 순간 이상야릇한 냄새가 여관 내부를 가득 채웠다. 식초처럼 톡 쏘는 냄새가 콧속을 파고드는 순간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코를 틀어쥐었다. 스쳐지나가듯 맡았을 뿐인데 냄새는 금방 오장육부를 뒤집어놓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냄새지?" "우왜액." 통상적으로 카토 왕국의 사람들은 목욕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난방에 쓰기에도 모자란 연료로 물까지 데울 수 없기 때문에 목욕이란 오로지 상류층에 한정된 사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곳을 방문한 타지인들은 먼저 사람들의 몸에서 나는 이상야릇한 냄새에 익숙해져야 했다. 하지만 저 사내들에게서 풍기는 냄새는 도를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토박이인 점원마저 코를 틀어쥐고 있는 것을 보니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 할 수 있었다. 일행들의 반응을 보았는지 사내들은 겸연쩍은 표정들을 지었다. "냄새가 조금 지독한가 보군. 하긴 꼬박 1년을 씻지 않았으니……." "큰일이로군. 이곳에선 목욕을 하지 못할 텐데……." 냄새를 풍기는 것이 미안했는지 사내들은 다시 외투를 주섬주섬 걸쳤다. 점원의 반응을 봐서 자칫 잘못하면 여관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순간 노인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서, 설마……." 얼마나 놀랐는지 그는 말까지 떠듬거리고 있었다. "트, 틀림없어. 저, 저것은 아, 아이스 트……." 말을 이어나가려던 노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몇십년 동안 장사를 하며 다진 안목에 의하면 사내들이 걸친 것은 틀림없는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이었다. 이번 여정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에 노인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노, 놀랍군. 그것도 이어 만든 게 아닌 통짜 가죽이야. 대, 대체 저 사람들은 누구야?" 노인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들에게 접근했다. 다가갈수록 악취가 더욱 심하게 풍겨왔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시, 실례합니다." 노인이 인사를 건네자 사내 중 하나가 앞으로 쓱 나왔다. 덩치가 무척 당당한 사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사냥꾼이십니까?" 노인의 말에 사내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마치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하하. 우린 사냥꾼이 아니라 용병들이라오. 몰골이……." 일행을 돌아본 사내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좀 신통치 않기는 하지만……." 용병이란 말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노인이 아니었다. "보아하니 몸에 걸치신 것이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인 듯 싶은데……." 사내는 그때서야 노인의 꿍꿍이를 알아차린 듯 했다.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은 척박한 카토 왕국에서조차 귀중품에 속하는 물건이다. 누구라도 탐내지 않을 수 없었다. "맞소. 우린 꼬박 1년을 이곳에서 살았지. 땀에 절어 냄새가 좀 나긴 하지만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인 것은 틀림없소." 사내의 말이 아니더라도 노인의 안목은 충분히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을 판별할 수 있었다. 노인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우리에게 파십시오. 값은 충분히 쳐 드리겠습니다." 사내는 일순 당황했다. "지, 지금 당장 말이오?" "그렇습니다. 저희는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을 구하기 위해 펜슬럿에서 온 상인들입니다. 충분히 매입할 여력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길……."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에 눈독을 들인 것은 노인 일행뿐만이 아니었다. 구석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어부들도 눈이 휘둥그레진 채 이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루 종일 얼음 위에서 추위와 싸우며 낚시를 하는 그들에게도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은 말 그대로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심지어 점원과 여관주인조차 하던 일을 팽개치고 다가오는 판국이었다. "저, 정말이군. 그것도 통짜 가죽이야." 사내가 입고 있던 털가죽을 만져본 여관 주인도 지체 없이 흥정에 가세했다. 임자만 잘 만난다면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은 부르는 것이 값이었다. 그것도 흠집이 없는 통가죽이 아닌가? 단지 돈이 없어 보이는 어부들만이 흥정에 가세하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에게 파시오. 부르는 대로 드릴 테니……." "나에겐 단 한 장만 파시오. 돈이 모자란다면 원하는 대로 숙식을 제공해 주겠소." 묵묵히 말을 듣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그쪽에는 다소 왜소한 몸집을 가진 사람 하나가 의자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요?" 사내의 질문에 그는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대장이 알아서 하게. 어차피 이제부터는 우리에게 필요 없는 물건 아니겠나?" 그의 말에 사내는 마음을 굳힌 모양인 듯 느릿하게 외투를 벗었다. 외투와 붙어있는 모자를 벗자 부리부리한 눈과 짙은 눈썹을 가진 지극히 사내답게 생긴 얼굴이 드러났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43회. 그는 바로 카심이었다. 북부의 중심부에서 수련에 몰두하던 카심 용병단원들이 마침내 카토 왕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외투를 벗자 이상야릇한 냄새가 더욱 짙어졌지만 이젠 누구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땀 냄새에 절어있기는 했지만 외투는 자체가 값을 논할 수 없는 보물이었기 때문에……. 카심은 고개를 돌려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래. 털가죽 값으로 얼마를 생각하고 있소?" 카심을 마주본 노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부터가 그에게 가장 중요한 고비였다. 자고로 상인의 사명이란 싸게 싸서 비싸게 파는 게 아니던가? 그러므로 가능한 한 값을 후려쳐서 싸게 사들이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그 사실을 떠올린 노인은 협상을 시작했다. 이럴 경우 제일 먼저 상대가 생각하는 가격을 알아야 하는 것이 상례였다. "얼마를 원하시오?" "………." "원하시는 가격을 말해보시오. 적절한 가격이면 당장 매입하리다." 노인의 눈을 들여다본 카심은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이미 그는 노인의 꿍꿍이를 알아차린 상태였다. 이럴 경우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카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제법 상술이 뛰어난 듯 보이오만 그것도 상대 나름이라오. 난 10년 이상 용병으로 굴러먹었지. 용병계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오. 상단의 호위도 적지 않게 맡았기 때문에 거래요령에 대해 어두울 것이라 생각하지 마시오." "………."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을 이곳에서 처분하려는 이유는 단지 하나 귀찮기 때문이오. 만약 당신이 적절한 가격을 제시하지 않을 경우 더 이상의 거래는 없소. 그럴 경우 우린 예정대로 펜슬럿이나 크로센 제국으로 가서 처분할 생각이니까. 물론 당신이 제시한 가격보다 더 받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러니 알아서 적당한 가격을 제시하기 바라오." 노인은 맥이 탁 풀렸다. 10년 이상 용병으로 굴렀다면 섣불리 대할 상대가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도 높았다. 결국 그는 마음 속으로 생각해 둔 최종가격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한 장당 100골드씩 지불하겠소. 물론 흠집이 없는 통가죽에 한정해서……." 카심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싼 가격이로군. 하지만 터무니없이 후려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거래 할 만 하구려. 물론 통가죽을 100골드에 넘길 생각은 없소. 100골드에 팔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흠집 있는 가죽뿐이오." 그 말을 들은 노인은 눈빛을 빛냈다. 흠집이 있는 가죽이라도 100골드에 살 수 있다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성과였다. 하지만 확실히 해 둘 것은 있었다. "흠집이라면 도대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오." "간단하오. 검에 뚫린 자국이지. 놈들이 워낙 빨라서 흠집을 낼 수밖에 없었소. 가죽 하나에 대략 하나에서 셋 정도 검 자국이 뚫려 있을 거요. 물론 조각난 가죽들은 예외요." 카심의 말을 들은 노인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장에서 구멍 한 두개 정도는 흠집으로 칠 수도 없었다. 가죽에 흠집을 내지 않으려면 오로지 일격에 아이스 트롤의 목을 날려야 했고 그러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이것은 이미 끝난 이야기라고 봐야 했다. 행여나 상대의 마음이 변할세라 노인은 얼른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좋소. 거래는 성립되었소. 지금 즉시 대금을 지불할 테니 가지고 있는 털가죽을 모두 내놓으시오." 이번에는 카심이 어리둥절해 할 차례였다. 그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반문했다. "도대체 돈을 얼마나 가지고 왔기에……." "충분할 것이오. 내 수중엔 현재 1500골드가 있소이다. 당신들이 입고 있는 털가죽을 모두 사기에 추호도 모자람이 없지." "후후후." 그 말을 들은 사내들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웃겨서 참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카심이 빙글빙글 웃으며 앞으로 나왔다. "아마 불가능할 거요. 우리가 보유한 털가죽을 모두 사려면 적어도 그 열 배가 있어야 하오. 흠집이 없는 것도 일괄적으로 100골드로 쳐서 말이오." 노인은 아연해졌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을 최소한 150장 이상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그 잡기 힘든 아이스 트롤을 무려 150마리나 잡았다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노인은 일행의 면면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도, 도대체 어떻게 잡았기에……." 카심은 고개를 흔들며 몸을 돌렸다. "알 필요 없소. 거래를 할 생각이면 밖으로 나오시오. 털가죽을 썰매에다 실어놓았으니까……." "아, 알겠소." 상인들은 부랴부랴 카심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무로 짜 만든 커다란 썰매 위에는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이 산더미처럼 실려 있었다. 날카로운 손톱과 발톱이 그대로 달려있는 통짜 털가죽이었다. 사내 하나가 썰매를 지키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덩치에 비해 키가 조금 작아 보이는 사내는 상인들이 다가가자 적의를 드러내려 했다. 왠지 모르게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괜찮아. 윈슬럿" 카심이 손을 흔들자 윈슬럿은 들어올리려는 배틀 액스를 늘어뜨렸다. 두터운 털외투를 덮어씌운 상태였기에 그가 언데드란 사실을 상인들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눈을 소복이 덮어쓴 윈슬럿을 본 상인들은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 세상에……. 이처럼 추운 날씨에 파수를 세우다니……." "다, 당신은 춥지도 않소?" 카심이 얼른 나서서 윈슬럿을 가렸다. 상인들이 윈슬럿의 정체를 알게 되면 조금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괜찮소. 북부 토박이인 데다가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을 걸치고 있기 때문에 능히 견딜 수 있소. 그건 그렇고 원하는 털가죽을 골라보시오." "알겠소." 상인들은 묵묵히 썰매로 다가가서 털가죽을 골랐다. 그러면서도 내심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 15장이라면 그들이 목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100장이 넘게 쌓여 있는 털가죽 중에서 달랑 15장만 고르려니 아깝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깝군. 이럴 줄 알았다면 돈을 모조리 털어 오는 건데……." 비교적 흠집이 적은 가죽 15장을 골라낸 노인은 몹시 아쉽다는 표정으로 손짓을 했다. 그러자 중년인 하나가 큼지막한 상자 하나를 가지고 왔다. "여기 1500골드가 있소. 확인해 보시오." 상자 속에는 금화와 은화가 뒤섞여 있었다. 액수를 확인한 카심은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상적으로 금화보다는 은화가 사용하기에 훨씬 편했기 때문이었다. "맞구려. 그럼 거래는 끝났소." 상자를 닫은 카심이 고개를 돌리자 노인이 얼른 그를 잡았다. "혹시 이것을 가지고 펜슬럿으로 오실 용의는 없소? 모두 매입할 의사가 있는데……. 그 때는 100골드 이상 쳐서 후하게 드리리다." 카심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것은 카토 왕국에서 모두 처분할 생각이오." "할 수 없구려." 노인은 아쉬움이 남는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골라낸 털가죽을 모두 마차에 실어라. 일을 마쳤으니 내일 돌아가기로 한다." "알겠습니다." 서둘러 마차에 짐을 싣는 상인들을 흘겨보며 카심은 다시 여관으로 들어갔다. 잠시 머문 사이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젠장. 외투를 벗었더니 더럽게 춥군." 투덜거리며 들어온 카심에게 누군가가 얼른 다가왔다. 여관 주인이었다. 그는 주뼛거리며 카심에게 말을 걸었다. 기세 좋게 흥정에 가세하던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변한 모습. 아무래도 상인이 부른 가격에 잔뜩 주눅이 든 모양이었다. "미, 미안하지만 조각난 가죽이라도 조금 팔 수는 없는지요?" "………." "솔직히 말해 제겐 100골드라는 거금이 없습니다. 그러니 자투리 가죽이 있으면 조금만 팔아주십시오." "자투리 가죽으로 도대체 뭘 하려고 그러시오." 되묻는 카심을 보며 여관 주인은 안색을 굳혔다. "아시다시피 북부는 토박이인 우리들에게도 무척 추운 곳입니다. 자투리 가죽으로 모자나 신발을 만들면 추위를 견디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두 번째 흥정에는 어부들도 가세했다. "저도 신발을 만들 정도만 사고 싶습니다. 하루 종일 얼음 위에서 고기를 잡아야 하니 제발 부탁드립니다." "원하신다면 대신 생선이라도 드릴 테니 조금만……." 그들의 얼굴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 이쪽이 덩치 좋은 용병들이 아니었다면 덤벼들어 강탈이라도 할 듯한 얼굴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은 보온성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물건이었다. 카토 왕국에서도 고위급 귀족이나 걸칠 엄두를 낼 정도였으니 평범한 사람들에겐 귀하기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다. 잠시 그들을 쳐다본 카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렇다면 가진 돈을 모두 꺼내보시오." 그 말에 사람들은 주섬주섬 돈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부들 중 몇 명은 집에 가서 돈을 가져오겠다고 여관을 나섰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을 탐내는지 익히 짐작할 만 했다. 그러나 욕심과는 달리 나온 돈은 형편없는 액수였다. 여관주인이 금고를 탈탈 털어 계산해 본 뒤 몹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머무시는 동안 숙박비를 받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깎아 주십시오." 여관 주인이 내민 돈은 도합 15골드였다. 그 밖의 사람들 중에는 채 1골드도 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니 얼마나 궁핍한지 익히 알 만 했다. 그들의 얼굴을 슬쩍 훑어본 카심은 그들을 일렬도 도열시켰다. "모두 줄을 서시오." 그러는 동안 소문이 퍼졌는지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여관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을 사려는 일념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은화 몇 닢을 꼭 그러쥔 소년도 끼여 있었다. 그들은 곧 용병들의 통제하게 길게 줄을 섰다. 카심은 가장 앞에 선 여관주인을 쳐다보았다. "15골드라……. 혹시 당신에게 가족이 몇이나 되오?" 뚱딴지같은 질문이었지만 여관주인은 공손히 대답했다. 털가죽 조각을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는 상대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있었다. "아내와 아들 하나 그리고 네 딸이 있습니다. 점원 녀석이 바로 제 아들이지요." "가족이 많군요." "그렇습니다. 아내가 워낙 추위를 많이 타서 그녀에게 장갑과 신발이라도 만들어주려고 금고를 털었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카심은 여관주인이 내민 15골드를 챙긴 뒤 정색을 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소. 일행의 목욕물을 데워주면 가죽을 좀 더 드리겠소. 어떻소?" 여관주인의 얼굴이 확 펴졌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조건이었다. 목욕물을 데운다는 것이 그리 쉽진 않았지만 겨울나기용 장작을 모두 땐다면 가능했기 때문에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작이야 어떻게든 구할 수 있겠지만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은 평생 가도 다시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관주인이 승낙하자 카심은 소리쳐 패터슨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대장." "썰매에 가서 털가죽 두 장을 가지고 오도록 해라. 15골드에 두 장이면 좀 싸지만 어쩔 수 없다." "두, 두 장이나요?" 깜짝 놀랐지만 패터슨은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한 달음에 썰매로 가서 털가죽 두 장을 가지고 들어온 그는 그것을 여관 주인에게 건넸다. 손톱, 발톱이 그대로 달려있는 통가죽 두 장을 받아든 여관 주인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자투리가죽이나 조금 얻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두 장이나 주다니. "이, 이렇게나 많이 주셔도 됩니까? 제, 제겐 15골드가 전부인데……." 여관주인의 감격한 듯한 눈빛을 맞받으며 카심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당신들에게 더욱 절실한 물건 같소. 우리에겐 돈이 그리 필요치 않으니 거래는 이것으로 성사되었소. 그럼 다음 사람." 카심은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을 닥치는 대로 팔아 넘겼다. 가격도 제각각이었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44회. 사람들이 얼마를 내밀던 간에 무조건 털가죽을 넘겨주었다. 심지어 단돈 5실버에 털가죽 두 장을 판 경우도 있었다. 아버지의 외투를 만들어주겠다면 소년이 내민 1실버짜리 은화 다섯 닢을 받은 카심은 두말도 하지 않고 털가죽 두 장을 내주었다. "저, 정말 고마워요. 이젠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 외투도 만들 수 있겠어요." 기뻐서 달려나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카심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이렇게 해서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 150장은 삽시간에 팔려나갔다. 그 모습에 기가 막힌 것은 마차에 짐을 싣고 들어온 상인 일행이었다. "어찌 이런 경우가 있소? 우리에겐 1백 골드에 팔고 어찌해서 저들에겐 터무니없는 가격에 넘기는 거요." 눈을 치뜨며 항의하는 상인들에게 카심은 한 마디로 일축했다. "난 저 사람들의 전 재산을 받고 털가죽을 판 거요." "아무리 그래도……." "장사란 오로지 파는 사람 마음이오. 당신도 원한다면 전 재산을 주시오. 그럼 털가죽 한 장을 드리리다." 말문이 막힌 노인이 침묵을 지키자 카심은 손을 탈탈 털고 일어났다. 아직까지 털가죽을 사지 못한 사람들의 얼굴이 들어왔다. 집에 갔다온다고 늦었거나 아니면 돈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당신들도 털가죽이 필요하오?" 카심의 말에 비쩍 마른 사내 하나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보아도 궁기(窮氣)가 주르르 흐르는 사내였다. "그,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겐 돈이 하나도……." "돈이 없으면 물건도 좋소. 옳지. 그러면 되겠군. 당신은 지금 즉시 집으로 가서 가장 좋은 외출복을 한 벌 가지고 오시오. 그런 다음 우리와 바꿔 입으면 거래가 성립되는 것이오. 냄새가 조금 나긴 하지만 흠집이 하나도 없는 통가죽이니 세탁한다면 그런 대로 쓸 만 할거요." 사내의 얼굴이 확 펴졌다. "아, 알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옷을 만들어서라도 가져오겠습니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여관을 달려나갔다.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카심 용병단이 보유한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은 입은 것까지도 모조리 팔려나갔다. "이제 모두 처리했군." 카심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털가죽을 조금 황당하게 팔아버렸지만 용병들 중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단 대장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있는데다가 카심 용병단의 재정상태가 지극히 풍족했기 때문이었다. 데이몬도 카심의 결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과연 대장이군. 잘 했어." 카심의 결정으로 용병들은 마을사람들의 열렬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뜻하지 않게 횡재한 마을 사람들이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아껴두었던 물건들을 하나씩 가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궁핍한 형편과는 달리 마음씀씀이 하나만은 무척 넉넉한 사람들이었다. "목욕하시려면 장작이 필요할 것 같아서 가지고 왔습니다." "이것 좀 잡숴보시구려. 딸아이 결혼식에 쓰려고 눈에 묻어놓았던 건데." 사람들이 가지고 온 생선과 장작, 옷 따위가 여관 홀에 수북히 쌓였다. 보온성이 뛰어난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은 그들에게 정말 절실한 것이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은인들을 위해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아내를 데리고 와서 시중을 들게 하려는 이도 있을 정도였다. 아무튼 용병단원들은 오랜만에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넉넉하게 장작을 때서 데운 물로 목욕을 하고 새로 지은 옷으로 갈아입은 용병들은 여관 주인내외가 성심껏 마련한 저녁을 먹은 뒤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다. 그것은 1년 가까운 기간 동안의 고된 수련을 잊게 할 정도로 꿀 같은 단잠이었다. 하루를 꼬박 자고 일어난 용병들은 지체 없이 한 자리에 모였다. 소기의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으니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논의할 차례였다. 데이몬은 판이하게 변한 일행의 면면을 하나씩 둘러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떠올렸다. "수고들 많았어. 북부에서 보낸 11개월 동안 모두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군." 아닌게 아니라 1년 가까운 세월을 북부 중심부에서 보내며 일행들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대부분의 용병들이 초보적인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실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매일 매일 이어진 혹독한 수련과 함께 끊임없이 연공한 수라사령심법 덕택에 용병들은 이제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물론 통상적인 팔라딘에 비하면 손색이 있겠지만 발전속도를 보면 머지않아 근위기사에 못지 않은 수준까지 오를 것이 확실했다. 게다가 이따금 벌어진 아이스 트롤과의 접전은 그들의 실전경험을 더욱 키워주었다. 바야흐로 아르카디아에 전원 팔라딘으로 이루어진 용병단이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데이몬은 우선 카심을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대장의 집념은 알아줄 만 하군. 헬버트론과도 싸워도 너끈히 10분을 버티는 판국이니 이젠 어지간한 팔라딘과 싸워도 섣불리 지지 않겠어." 카심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과찬입니다. 그거야 헬버트론 님께서 봐주시니까 그런 거지요." "아니야. 일전에는 헬버트론이 감탄하더군. 대장 특유의 변칙적인 무예가 막기 힘들다며 말이야. 그런데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토록 실력을 키우는 데 집착하는 거지?" 데이몬의 질문이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애틋한 빛이 카심의 눈동자를 스쳐 지나가는 것을 간파한 데이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말못할 사연이 있는 모양이로군. 내 더 묻지는 않겠네." "감사합니다." 카심은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잠시 지켜본 데이몬은 이번에는 제럴드에게 시선을 던졌다. "제럴드. 이제 네가 우리 용병단에서 두 번째 실력자다. 물론 미첼을 제외하고 말이다." 묵묵히 앉아있는 미첼을 슬쩍 흘겨본 데이몬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네 좌수검법은 거의 완성된 상태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결코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될 것이다. 좌수검법의 완성을 위해서는 풍부한 실전경험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제럴드는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는 데이몬을 필생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데이몬이 아니었다면 그는 아직까지 풋내기 용병으로 대륙을 떠돌아다니고 있을 터였고 복수는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몸 속을 헤집으며 용솟음치는 기운은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설사 팔라딘이 앞을 가로막더라도 당당히 맞서 싸울 자신감이 있었다. 비록 늘어난 검술실력으로도 합법적인 복수를 할 수 없을 테지만 힘을 얻었다는 데에서 많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안 그래도 조용한 편이었지만 좌수검법을 익힌 다음 제럴드는 더욱 과묵해졌다. 마치 잘 벼려놓은 한 자루 검과 같은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모습. 제럴드를 잠시 쳐다본 데이몬은 나머지 일행들에게도 시선을 던졌다. 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입담 좋고 쾌활한 패터슨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제 제법 남자다운 티가 흐르는 하인리히를 비롯하여 헬튼, 비에리, 잭슨 등 나머지 용병들을 데이몬은 하나씩 돌아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내공을 익힌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난 상태였다. 유난히 반질반질한 그들의 태양혈(관자놀이)은 내공이 완성될수록 눈에 띄게 도드라질 것이며 일정경지를 통과한다면 그들의 얼굴은 다시 평범한 상태로 복귀할 것이다. 이른 바 절정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인종은 틀렸지만 내공에 의한 신체의 변화는 거의 동일했다. 데이몬은 그 시점을 소드 마스터와 팔라딘을 가르는 경계라 생각하고 있었다. '절정의 경지에 오른다면 어렵지 않게 강기를 구사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발전속도를 가늠해 본다면 이들은 적어도 5년 이내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것이다. 물론 그 이상은 마공 특유의 한계상 힘들겠지만…….' 과거 그의 휘하에 있던 수호마왕군 무사들도 대부분 절정의 경지에 머물러 있었다. 병기에다 강기를 응축시킬 수 있는 단계. 그들은 단 10년 만에 절정고수가 되었고 그 모든 것이 속성이 가능한 수라사령심법의 덕이었다. 단시일 내에 1천 명의 절정고수를 키워낸 이 천고의 내공심법은 데이몬의 동료용병들을 팔라딘의 경지에 올려놓았다. 충분한 실전경험만 받쳐준다면 그들은 당당히 제 몫을 해 낼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떠올린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갈 수 있는 곳까지는 가본다. 이들과 함께라면 복수의 길이 그리 외롭지는 않을 테니까…….' 생각을 마친 데이몬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미첼과 율리아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찌 보면 북부에서 보낸 1년여의 세월동안 가장 얻은 것이 없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선 무위도식하다시피 한 율리아나가 얻은 것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놀라운 점은 데이몬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1년 동안 판이하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시시각각 장난을 걸다가 흠씬 얻어터지는 것은 변함 없었지만 데이몬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뭔가 기이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가 데이몬에게 장난을 거는 횟수는 줄어들었으며 데이몬이 소환술 연구에 심취해 있는 동안 그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장면도 벌써 여러 번 목격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보여준 태도를 생각하면 놀랄만한 변화였다. 율리아나가 그럴수록 데이몬은 그녀를 더욱 냉랭하게 대했다. 이미 그의 가슴속에는 다프네 외의 다른 여자가 들어올 여지가 전혀 없었을 뿐더러 원천적으로 그는 율리아나에게 관심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다프네와 닮은 외모만을 제외하고는……. 데이몬이 쳐다보자 율리아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받았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을 견디다 못해 데이몬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속으로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종잡을 수 없는 년이로군. 설마 이제 와서 나에게 관심을 가지진 않았을 텐데? 하긴 그래봐야 헛수고겠지만…….' 데이몬은 마지막으로 미첼을 쳐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는 그의 전신에서는 쓸쓸함이 가득 묻어 나오고 있었다. 물론 북부에서 보낸 세월동안 그가 얻은 것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아니, 데스 나이트들과의 대련을 통해 실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다. 자고로 고수와의 대결은 실력을 키우는데 가장 효과적인 법. 그는 적어도 카르셀을 나설 때보다 두 배 이상 강해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첼의 얼굴에는 항상 쓸쓸함이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용병들의 실력에 대한 상대적인 박탈감 때문이리라. 속성 내공심법을 익힌 용병들과는 달리 미첼은 평범한 펜슬럿의 내공심법을 익혔다. 그런 만큼 용병들만큼의 내공증진을 기대할 수 없음이 당연했고 점점 좁혀져 가는 실력차이는 그가 지금껏 익힌 검술에 대한 회의까지 들게 만들었다. 이를 악물고 수련했지만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것처럼. 그를 지켜보던 데이몬은 암암리에 혀를 찼다. '멍청한 녀석. 자신이 익힌 내공심법에 회의를 갖다니…….' 정파 내공심법이 마공에 비해 연성속도가 느리기는 하지만 절정의 경지를 넘어 최절정으로 오르는데는 더욱 뛰어난 위력을 보인다는 사실을 떠올린 데이몬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할 수 없는 일이지. 떠나기로 마음먹었으니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일행들을 죽 둘러본 데이몬은 카심을 쳐다보았다. "그럼 대장이 한 마디 하게. 이제부터 시작될 여정에 대해 말이야." 카심은 마다 않고 몸을 일으켰다. 일일이 체면을 살려주는 데이몬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는 억지로 마음을 억눌렀다. 이미 그는 데이몬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각오를 굳힌 상태였다. 중원에서 수호마왕군의 마음을 여지없이 사로잡았던 데이몬의 특기가 바야흐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데이몬은 뒤로 나앉는 것을 쳐다본 카심은 고즈넉이 말문을 열었다. "이제 우린 여정을 시작한다. 목적지가 크로센 제국이기는 하지만 연기된 간택식이 열리기까진 아직까지 1개월 남짓 남았으니 그 기간동안 아르카디아 북단을 두루 여행할 계획이다. 몇 가지 처리할 일이 있으므로 도보로 여행할 것이니 지휘에 잘 따라주기 바란다." 말을 마친 카심은 미첼을 쳐다보았다. 카심의 얼굴에는 왠지 모르게 애틋한 빛이 서려있었다. "제일 먼저 갈 곳은 펜슬럿이다. 우린 그곳에서 미첼과 헤어질 것이다." 카심의 말이 끝나자 용병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미첼에게 검술교습을 받으면서 적지 않게 정이 쌓였기 때문에 하나같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만했던 첫인상과는 달리 지내면서 미첼에 대한 나쁜 인상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그의 진면모를 알게 된 터라 아쉬움이 짙을 수밖에 없었다. 만류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용병들은 차마 그 말을 입밖에 낼 수 없었다. 그들의 마음을 파악한 듯 카심은 나지막이 말을 이어나갔다. "이미 미첼과 얘기가 끝난 상태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펜슬럿의 근위기사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 말을 듣자 용병들은 맥이 탁 풀렸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45회. 미첼의 실력이라면 펜슬럿에서 충분히 근위기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감히 용병단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카심 용병단이 앞으로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을 할 계획이긴 하지만 용병기사와 근위기사 사이에는 애당초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하긴. 그의 실력이라면 근위기사가 되고도 남음이 있지.' '바보가 아니고서야 누가 용병으로 남으려 하겠어.' 묵묵히 듣고 있던 미첼의 얼굴에도 고뇌가 서려있었다. 사실 그가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었다. 용병들의 지도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떠날 것이란 마음을 먹지 않았다. 용병단의 일원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곧 바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배경에는 용병들의 남다른 성장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가는 용병들의 실력. 비례적으로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는 자신에 비하면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성취였다.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수련을 시작한지 무려 8년이 지나서야 초보적인 오러 블레이드를 구사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철저한 개인교습 하에 뼈를 깎는 수련을 했어도 그 정도였지. 하지만 이들은 단 1년 만에 그 경지에 올라섰다. 아직은 내가 이들보다 강하지만 머지않아 추월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유달리 자존심이 강한 미첼로써는 견디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데스 나이트들과의 대련으로 실력이 늘기는 하지만 용병들의 성취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미첼은 데이몬을 찾아갔다. 자존심을 모두 버린 채 용병들이 익히는 마나연공법을 전수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냉랭한 거절이었다. "이제 와서 네가 이걸 익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이 마나연공법은 아무것도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만 익힐 수 있다." 데이몬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판단이었지만 미첼에겐 야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미첼은 용병단을 떠날 생각을 굳혔다. 이미 율리아나에게 허락을 받은 터라 그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들과 어울려 드래곤 사냥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렇게 한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초라해지는 날 감당해야 한다.' 비록 아버지인 헤일즈가 펜슬럿에 가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준 상태였지만 미첼은 그것을 과감히 묵살했다. 지금 상황에게 그가 근위기사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펜슬럿으로 가는 것뿐이었다. 그곳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자격시험을 통과한다면 능히 근위기사가 될 수 있었으므로……. 미첼은 착잡한 얼굴을 억지로 폈다.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나와 이들과는 생각하는 바가 틀리니까.' 미첼의 표정을 본 카심은 그의 결심이 굳었음을 알아차렸다. 이미 여러 번 회유했지만 듣지 않았던 터라 카심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보아하니 마음을 굳힌 모양이군. 하지만 명심하게. 우리 용병단의 문은 언제라도 열려 있으니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받아 주겠네." 미첼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맙소.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소." "……." 고개를 끄덕인 카심은 용병들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제일 먼저 갈 곳은 펜슬럿이다. 그곳에서 미첼을 보낸 뒤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나기로 한다. 그간의 정리 때문이라도 그가 근위기사가 되는 것을 보고 출발해야 할 것 같다. 그 뒤의 여정은 그 때 알려주겠다." 용병들은 섭섭함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은 사람을 더 이상 잡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율리아나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이미 넌 카르셀에 있을 때부터 근위기사가 되길 갈망했었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아버지께는 잘 얘기해 줄게. 넌 충분히 펜슬럿의 근위기사가 될 수 있을 거야." "고맙군. 크로센 제국까지 동행하지 못해 미안해. 그리고 너도 부디 뜻하는 바를 이뤘으면 좋겠어." 미첼은 조용히 대답했다. 지금껏 그녀에게 지겨울 만큼 당해왔지만 머지않아 헤어진다고 하니 조금 섭섭했다. 그는 모호한 눈빛으로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어찌 보면 그만큼 율리아나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없을 터, 율리아나가 변하는 모습을 가장 이상하게 생각했던 이가 바로 그였다. 틈만 나면 데이몬을 멍하니 쳐다보던 율리아나의 모습을 떠올린 미첼은 묵묵히 되뇌였다. '너보다 몇 십 배나 더 산 흑마법사에게 대관절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는 모르지만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라겠어. 한때나마 모신 왕녀에 대한 내 배려라고 생각해.' 이야기를 마치지 카심이 손뼉을 쳤다. "아침식사를 마친 뒤 떠나기로 한다. 아직까지 북부의 추위가 매섭지만 모두가 마나를 운용할 수 있으니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이 없더라도 능히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그럼 회의는 이것으로 마친다." 회의가 끝나자 용병들은 하나씩 몸을 일으켰다. 지금쯤 아래층에는 주인 내외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이 차려져 있을 것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구수한 수프냄새가 풍겨왔고 입맛을 동한 용병들은 서둘러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사를 마친 뒤 용병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데이몬이 카심에게 다가갔다. "이 길로 곧장 펜슬럿으로 갈 작정인가?" "그렇습니다." "길은 잘 알고 있겠지?" "예. 상단의 호위를 맡느라 몇 번 오간 경험이 있습니다." 거침없이 대답하는 카심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시 헤어져야겠군." 생각을 마친 뒤 데이몬이 내뱉은 말에 카심은 깜짝 놀랐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데이몬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어딜 좀 다녀와야겠어. 아무래도 1년 동안 아르카디아에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이곳에 심어놓은 정보원이 하나 있거든……." 카심은 그때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데이몬과 헤어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대마법사인 데이몬이니 공간이동을 사용한다면 자신들보다도 먼저 펜슬럿에 도착할 공산이 컸다. "여기서 펜슬럿까지는 저희끼리 가도 별 위험이 없을 것 같습니다. 대략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으니 안심하고 다녀오십시오." "고맙네. 그럼 펜슬럿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지." 고개를 끄덕이던 데이몬은 돌연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데 안전한 공간이동 좌표가 문제인데 말이야. 엉터리 좌표에 한 번 당했더니 놀란 가슴이 영 진정되지 않는군." 카심이 빙그레 웃으며 품속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걱정 마십시오. 이미 레이토나에서 공간이동 전용 좌표책자를 사 두었으니까요."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카심이 벌써 거기까지 신경을 써 두었을 줄 몰랐던 것이다. "언제 이것을……." "무지막지하게 비싸더군요. 재정이 넉넉하지 않았으면 아마도 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겁니다." "아무튼 고맙네. 과연 대장이라니까……." 그는 흡족하다는 표정으로 카심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정말 준비성 하나는 철저한 카심이었다. "그럼 다녀오겠네. 사람들이 놀랄 테니 침실에다 마법진을 그려 바로 출발할 생각일세. 그러니 자네들도 곧 출발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올라간 뒤 용병단원들은 출발준비를 했다. 아직까지 1개월이란 여유가 있었지만 들러야 할 곳이 많았기 때문에 다소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여관을 나선 용병들의 눈이 별안간 휘둥그레졌다. "아니?" "저들은 뭐야?" 여관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눈보라를 덮어쓴 상태에서 그들은 환히 웃으며 용병들을 맞이했다. 겨울을 따듯하게 보낼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을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에 얻은 터라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마중 나왔던 것이다. 그들의 손에는 말린 생선이나 물병 따위의 물품들이 수북하게 들려 있었다. 고마움의 표시로 그들 나름대로 여행에 쓸모가 있을만한 물건들을 장만해 온 것이다. "벌써 가시다니 섭섭합니다." "다음에라도 시간이 있으면 저희 마을을 방문해 주십시오." 풍족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나갈 때는 많은 사람들의 환송을 받게 된 것이다. "고맙소." 마을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용병들은 크로센 제국으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어느 정도 힘을 얻은 터라 그들의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단 한 사람의 모습만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공간이동으로 멀리 떠나간 상태였기 때문에……. 아르카디아 서남단에 위치한 교역도시 로르베인은 오늘도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해안과 내륙의 접경지에 위치한 천혜의 조건은 날이 갈수록 로르베인을 부유하게 만드는데 모자람이 없었다. 로르베인의 남쪽에는 거대한 주택가가 위치해 있었다. 부유한 이들만 모여 사는 부촌(富村)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저택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로르베인 제일의 부자인 로메인 남작의 저택이었다. 시내 중심가의 상권 절반 이상을 한 손에 그러쥔 천문학적인 부를 소유한 재력가 로메인 남작. 그런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로메인 남작은 근래 로르베인에서 가장 많은 화제를 불러모은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사실 그는 예전에 꽤 악명을 떨쳤던 인물이었다. 모두가 꺼려하던 노예매매를 거리낌없이 행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형적인 악덕상인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자였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 그 때문에 피눈물을 흘렸고 그를 향해 쏟아지는 원성이 끝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원성은 지금에 와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불과 6년이라는 짧은 세월. 그 기간동안 로메인 남작은 마치 다른 사람이라 착각할 정도로 변모한 모습을 보였다. 그 변화는 한 마디로 개과천선(改過遷善)이라 표현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시청을 찾아간 로메인 남작은 시장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이 한마디를 던졌다. "지금껏 재산을 모으기 위해 못할 짓을 많이 했지. 모을 만큼 모았으니 이젠 착한 일을 좀 하고 싶구려." 믿을 수 없어하는 시장을 뒤로 하고 나온 이후 그는 대대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로르베인의 유일한 오점(汚點)으로 남아있는 빈민가에 대한 정비에 들어간 것이다. 아무리 부유한 도시라고 해도 빈민가가 없을 수는 없었다. 로메인 남작은 하층 인생들, 다시 말해 온갖 허드렛일을 맡아하는 빈민들이 모여 사는 곳에 대대적으로 재산을 쏟아 붓기 시작한 것이다. 다리를 놓고, 어지럽게 널린 폐가를 정비하며 고치거나 새로 짓는 등, 로르베인의 빈민가에 엄청난 규모의 토목공사가 벌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에 동원된 인부들은 바로 그곳에 사는 빈민들이었다. 일당을 받으며 자신이 살던 집을 고치는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생긴 것이다. 물론 거기에 소요되는 건축자재는 모두 로메인 남작이 제공했다. "별일이군." "살다보니 이런 일도 다 있군 그래." 빈민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열심히 일을 했다. 사는 집을 고치는 일이니 어떠한 경우에도 손해볼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로르베인의 빈민가는 말끔하게 정비되었다. 로메인 남작의 재산 중 반이 투입될 정도였으니 얼마나 방대한 공사인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로메인 남작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지금껏 쌓아온 악명이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었다. "뭐 바라는 게 있었으니 그 놈이 이런 일을 벌였겠지." "간악한 놈의 수작에 넘어가서는 안 돼." 기껏 선행을 하고도 욕을 얻어먹은 판국이 되었지만 로메인 남작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두 번째 계획에 착수했다. "이젠 상단을 정비해야 할 때다. 앞으로는 정정당당한 상술로써 승부한다." 로메인 남작은 보유한 상점과 상단을 과감히 개편했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46회. 지금껏 로메인 상회는 독점(獨占)과 매점매석(買占賣惜)으로 이윤을 남겨왔다. 다른 상회들과 연합해서 한 가지 물품을 집중적으로 매입, 가격을 확 올린 뒤 되파는 수법으로 부를 축척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남작은 그런 지금까지의 관행을 과감히 타파하고 공정한 경쟁을 할 것을 천명했다. 항상 앞장서서 매점매석을 부추기던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변한 모습이었다. "앞으로 우리 로메인 상회는 무한 경쟁을 시작할 것이오. 더 싼 가격에 더 좋은 물건을 공급하도록 노력할 테니 앞으론 독점이익을 절대 기대하지 마시오." 그 계획의 일환으로 로메인 남작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산지에 가서 물건을 구매해오는 상단의 규모를 열 배로 늘인 그는 대신 지금껏 독점을 가능하게 했던 점포의 수를 반 이하로 줄여버렸다. 거리마다 하나씩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조리 처분해버린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로메인 상회의 변화에 다른 상회들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미친 놈. 망하려고 작정했구먼. 언제까지 가는지 두고보자." 하지만 로메인 상회는 망하지 않았다. 비약적으로 수가 불어난 상단이 아르카디아 구석구석을 돌며 양질의 상품을 사들이고, 그것을 적정한 마진만을 붙인 싼값에 팔자 사람들의 발길은 점차 로메인 상회로 몰리기 시작했다. 좋은 물건을 싸게 파니 고객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로메인 상회의 매출액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고 다른 상회들도 결국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도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신용을 단단히 쌓은 로메인 상회를 따라잡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상회의 생명은 신용이다. 정직하게 고객을 대해야만 번영할 수 있다." 로메인 상회의 박리다매 전략으로 인해 오히려 득을 본 것은 로르베인이었다. 다른 상회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로메인 상회를 벤치마킹하다 보니 로르베인 자체의 상권이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게 커져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힘들여 산지로 가지 않았다. 로르베인으로 가면 모든 것을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로메인 상회는 아르카디아 제일의 상회가 될 수 있었다. 아르카디아에 존재하는 국가들 중 로메인 상회의 분점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장사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로메인 남작은 천문학적인 부를 축척할 수 있었다. 3년 전 빈민가를 정비하려고 쏟아 부은 금액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제 두 번째 선행을 시작할 때인가?" 로메인 남작은 또다시 재산을 풀기 시작했다. 그것은 과거 그의 손을 통해 팔려나갔던 노예들에 대한 보상이었다. 상단을 대거 투입해 과거 팔아 넘겼던 노예들을 다시 사들인 로메인 남작은 그들을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었다. "내가 많이 밉겠지만 너그럽게 용서해 주기 바라오. 이 돈은 그간의 고생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하시오." 뜻하지 않게 자유의 몸이 된 노예들에게는 귀가 번쩍 트이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비록 자신들을 팔아 넘긴 장본인이었지만 자유의 몸이 된 기쁨은 증오를 잊어버리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가족들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거금을 손에 쥐어주지 않았던가? 그들은 무척 기뻐하며 고향으로 떠났다. "고, 고맙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가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팔려간 노예들을 모두 거두기란 애당초 불가능했다. 이미 죽은 자들도 있었고 다른 곳으로 팔려간 노예들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유의 몸이 되길 원하는 노예는 머뭇거리지 말고 로메인 상회의 문을 두드리시오. 그러면 원하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 로메인 남작의 손에 의해 많은 노예가 해방되었다. 그 과정에서 천문학적인 재산이 소진되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단지 뿌린 것을 거둔다는 한 마디로 내심을 밝힌 그는 세 번째 선행으로 트루베니아 사람들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다. 하층인생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트루베니아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보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로르베인으로 가면 트루베니아 사람들도 마음놓고 살 수 있다는구먼……." "그곳에서는 그 누구도 어수룩하다고 이용하려들지 않는다지?" 소문을 들은 트루베니아 사람들이 대거 로르베인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로메인 상회의 고용인이 되거나 혹은 그들의 보호아래 제 2의 인생을 시작했다. 로메인 남작에 대한 칭송이 시작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정말 놀랍군. 이렇게 변하다니……." "세상은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로메인 남작은 그 뒤로도 해마다 거둬들이는 막대한 이익금을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했다. 그에 대한 악명은 이렇게 해서 잊혀졌고 그 자리를 끝없는 칭송이 채워나갔다. 이렇게 해서 로메인 남작은 로르베인 최대의 기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화제의 주인공인 로메인 남작은 지금 고용인들과 함께 한창 월말결산에 몰두하고 있었다. "피곤하지 않은가?" "괜찮습니다. 남작님께서 오히려 더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결산은 저희들이 마칠 테니 들어가서 좀 쉬십시오." 선한 눈빛이 인상적인 중년 사내는 빙긋 웃으며 남작에게 들어가 쉴 것을 종용했다. 마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는 얼마 전 로메인 상회의 문을 두드려 자유의 몸이 된 노예 출신이었다. 이재에 밝아 상회의 고용인이 된 마틴은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한 덕택에 남작의 신임을 단단히 얻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잠시 떠올려 본 로메인 남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아닌게 아니라 오늘은 조금 피곤하군." "머지 않아 끝날 테니 걱정 마시고 푹 쉬십시오." "그럼 부탁하겠네." 서류뭉치를 넘긴 로메인 남작은 지친 몸을 일으켰다. 계산을 맞추기 위해 하루를 꼬박 새웠던 터라 몸이 물먹은 솜처럼 노곤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보자 고용인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남작님." "뒷일은 저희들에게 맡기십시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고용인들은 로메인 남작에게 극도의 경의를 표시하고 있었다. 얼마만큼 그를 존경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내실에 들어온 로메인 남작은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휴! 무척 피곤하군." 주위를 살짝 돌아본 남작은 별안간 쓴웃음을 지었다. '저주로 몸을 바꿨어도 체력은 바뀌지 않았는가 보군. 허허허.' 눈코뜰새 없이 보냈던 6년 간의 세월이 주마등같이 스쳐지나가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로메인이란 녀석이 워낙 악명을 떨쳐놓아서 수습하기가 쉽지 않았어. 이제 그것도 일단락되었으니……. 그런데 은인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 근래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으셔서 조금 섭섭하군.' 그는 한 사람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자신의 인생에 일대 변혁을 가져다 준 인물. 젊은 청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뒤, 자신의 얼굴을 가지고 떠난 대마법사. 젠가르트가 아닌 로메인 남작의 삶을 살면서 그는 단 한번도 은인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로 인해 자신은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로메인 상회는 명실상부한 아르카디아 제일의 상회가 되었다. 젠가르트 상회라 이름지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생각에 잠겨있던 그의 귀에 그윽한 음성이 들려왔다. "뭘 그렇게 깊이 생각하고 있어요?" 고개를 돌리자 한 여인이 쟁반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고생을 많이 한 것처럼 보였지만 눈매가 더할 나위 없이 선한 여인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녀는 바로 1년 전 맞아들인 그의 아내 제인이었다. "이것 좀 드시고 하세요. 요즘 과로하시는 것 같아 상당히 안타깝습니다." "고맙소 부인." 젠가르트의 말에 제인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고맙긴요. 오히려 제가 고마워서 견딜 수가 없는걸요?" "무슨 소리." 자리에서 일어난 젠가르트는 다가가서 슬쩍 얼굴을 붉히는 제인을 살며시 보듬어주었다. "들어가서 쉬도록 해요. 난 더 생각할 것이 있으니 조금 있다가 자리다." "네.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한 제인은 부끄럽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젠가르트의 눈매에는 따듯함이 가득 차 있었다. 사실 제인은 그와 같은 트루베니아 인이었다. 그리고 무척 기구한 인생을 살아온 여인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트루베니아 인들이 그러하듯 몬스터 사냥을 나선 기사들에게 구해져서 동생 둘과 함께 아르카디아에 오게 된 제인은 이후로 무척 힘들게 살아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밑바탕 인생부터 새로 시작했던 것이다. 삯바느질부터 고된 식당일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어린 동생 둘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나이가 되었지만 결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노예 상인 하나가 다가왔다.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속아넘어간 제인은 동생들을 두고 노예상인의 마차에 올랐다. 그리하여 해안도시로 팔려가기 위해 이곳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뒤늦게 자신이 창부로 팔려갈 것이란 사실을 알아차린 그녀는 깜짝 놀랐다. "해안도시로 팔려 가면 두 번 다시 바깥 세상을 볼 수 없대요." 함께 팔려가던 여인들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그녀는 탈출을 결심했다. 그녀가 가지 않는다면 남은 동생들은 험한 세상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질 것이었다. 어쩌면 굶어 죽을지도 몰랐기에 그녀는 목숨을 걸고 마차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지리에 어두운 탓에 숨을 곳이 없었으므로 그녀는 오래가지 못하고 붙들릴 수밖에 없었다. 노예상인들에게 얻어맞으며 끌려가던 그녀는 때마침 지나가던 로메인 상단의 눈에 띄게 되었고 사정을 들은 젠가르트는 많은 돈을 주고 그녀를 노예상인으로부터 사들였다. "이젠 걱정할 것 없소. 당신은 이제 동생들과 함께 이곳에서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 트루베니아 사람들의 고충을 젠가르트만큼 아는 이는 없었다. 그는 곧 사람을 시켜 제인의 동생들을 로르베인으로 데리고 오게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아늑하게 살아갈 터전을 제공해 주었다. 뜻밖의 호의에 제인은 감격해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지금껏 그들에게 이토록 마음써 준 사람은 없었다. 결국 그녀는 하녀를 자청하고 젠가르트의 저택에 들어왔다. "평생 은혜를 갚겠습니다. 제 진심이니 뿌리치지 말아 주십시오." 이후 제인은 젠가르트를 정성으로 모셨다. 마치 오랫동안 함께 산 조강지처처럼 알뜰하게 뒷바라지를 해 준 것이다. 정성껏 음식을 마련하고 일일이 건강을 챙겨주는 그녀에게 젠가르트는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평생 홀로 살아온 젠가르트가 정숙하고 다정한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거짓말이었으리라. 제인에 대한 애정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났고 결국 그는 어느 날 견디지 못하고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말았다. "나와 결혼해 주시오. 이건 진심이오." "그, 그건 안될 말입니다. 어찌 저같이 미천한……." 제인이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젠가르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미 그는 제인이란 여인을 가슴 깊이 각인시켜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거듭되는 청혼에 제인은 승낙할 수밖에 없었고 둘은 마침내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늦은 나이였지만 젠가르트는 결국 아내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제인이 들어간 방문을 부드럽게 쳐다보던 젠가르트는 묵묵히 되뇌였다. '당신의 고생은 이제 끝났소. 내가 한없이 행복하게 해 주리다.' 그 때 뒤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랜만이로군." 깜짝 놀란 젠가르트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쓴 인영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뉘, 뉘신지……." 눈매를 가늘게 좁히던 젠가르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사람이 바로 그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는 바로 자신에게 새로운 인생을 부여한 은인이었다. 젠가르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다가가서 허리를 굽혔다. "이, 이제야 오셨군요. 무척 많이 기다렸답니다." "정말 잘 살고 있더군." 데이몬은 조용히 젠가르트를 쳐다보았다. 아르카디아에 건너와서 처음 인연을 맺은 자가 바로 그였기 때문에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젠가르트.' 이곳에 온 뒤 데이몬은 바로 젠가르트를 찾아오지 않았다. 이미 드래곤의 마수가 한 번 뻗은 터라 조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러셀런트 녀석이 죽이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러셀런트가 찾아냈다면 다른 드래곤들이 찾아내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기에 데이몬은 일부러 로르베인의 외곽으로 공간이동 해 왔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47회. 좌표책을 가지고 있었기에 공간이동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런 다음 데이몬은 조심스럽게 젠가르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오래지 않아 깜짝 놀라야 했다. "놀랍군." 판이하게 달라진 로메인 남작의 평판은 데이몬을 놀라게 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별 생각 없이 베푼 일이었지만 젠가르트는 새로운 삶을 정말 훌륭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데이몬으로써는 흡족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살펴본 결과 다른 드래곤의 손이 뻗은 징후도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바로 죽은 러셀런트의 용의주도함 때문이었다. 데이몬의 종적을 파악한 러셀런트는 심문한 길드원들을 하나도 살려두지 않았다. 다시 말해 젠가르트의 비밀을 아는 자들을 깡그리 저승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뒤이어 아르카디아로 건너온 게덴하이드도 그 때문에 젠가르트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했다. 로메인 남작의 진정한 정체는 젠가르트와 데이몬만의 비밀로 완벽히 묻혀버렸던 것이다. 그것을 파악한 데이몬은 지체 없이 젠가르트를 찾아왔고 이렇게 대면하게 된 것이다. "결혼을 했나보군?" 젠가르트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 그렇습니다." "나이 차가 꽤 나는 것 같던데 능력이 좋군. 하긴 껍데기는 그리 늙지 않았으니……." "모두가 은공 덕택이지요." 몸둘 바를 몰라하는 젠가르트를 보며 데이몬은 실소를 흘렸다. 따지고 보면 젠가르트보다 더한 도둑놈이 바로 자신이었다. 다프네를 만날 당시의 나이 차이를 떠올려보던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젠 괜찮겠군. 둘 다 500살이 넘었으니……." 젠가르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아닐세. 그건 그렇고 정말 대단한 일을 했더군. 자네 칭송이 로르베인에 자자하던데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가?" "뭐 별 거 아닙니다. 새로운 삶을 주셨으니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했기에 열심히 노력했을 뿐입니다." "아무튼 보기가 무척 좋더군. 역시 나에겐 사람 보는 눈이 있단 말이야." "감사합니다." 고개를 든 젠가르트는 돌연 정색을 했다. "그런데 이미 소문이 아르카디아 전역에 두루 퍼졌던데요?" "엥? 그게 무슨 말이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쳐다보는 데이몬을 보고 도리어 어리둥절해진 것은 젠가르트였다. "모르셨습니까? 세바인의 흑마법사가 데스 나이트와 본 드래곤을 대동해서 드래곤 사냥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대륙 전역에 파다한데……." "소문이 그리 빨리 퍼졌단 말인가?" 믿을 수 없어하는 데이몬의 반응을 본 젠가르트는 그때서야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의문의 흑마법사는 바로 자신의 은인이었다. 워낙 유명했기에 그럴 것이라 추측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던 젠가르트였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 막강하다는 존재인 드래곤을 사냥하시다니……." "별로 막강하진 않았어. 지금껏 잡은 놈들은 잔챙이들뿐이니까……." 입을 딱 벌리는 젠가르트를 보며 데이몬은 안색을 굳혔다. "그건 그렇게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북부에 1년 가까이 박혀 있다보니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겠더군. 자네에게 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고." 젠가르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뭐 대단히 떠들썩하지요. 왜 그런지 이유는 알고 계시겠지요?" "………." "현재 아르카디아의 왕국들은 발칵 뒤집힌 상태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왕국의 군주들이 근위 기사단을 대거 풀어 데이몬의 종적을 찾고 있답니다." 테르비아 근위기사단이 뒤를 쫓던 일을 떠올린 데이몬은 눈매를 지긋이 모았다. "그놈들이 대관절 무엇 때문에 날 쫓고 있는 거지?" 젠가르트는 얼굴에 서린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모르셨나 보군요. 그들은 바로 데이몬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찾는 거랍니다." "날 끌어들이기 위해?" "그렇습니다. 현재 아르카디아에는 전운이 팽배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크로센 제국을 장악한 페르슈타인 공작 때문입니다. 그가 오래지 않아 정복전쟁을 일으킬 것이란 추측이 각국의 정보망에 은밀히 돌고 있는 실정이지요. 데이몬을 끌어들이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나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문하는 데이몬을 보며 젠가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셨습니까? 데이몬님이 보유한 데스 나이트와 본 드래곤의 힘이라면 족히 몇 개 기사단 이상의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대륙 최강인 크로센 기사단과도 자웅을 겨룰 수 있다는 소문도 떠돌고 있지요. 그런데 어느 왕국의 군주가 가만히 보고 있겠습니까? 게다가 거기에는 세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도 얽혀 있답니다." 젠가르트는 테르비아와 펜슬럿, 테제로스 3국의 사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지금은 서로가 팽팽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데이몬이 가세할 경우 우열이 금방 가려진다는 사실을 설명들은 데이몬은 비로소 테르비아 근위기사단이 자신을 쫓아다닌 연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알아차린 데이몬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쯔쯔.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것들.' 물론 데이몬은 그들에게 회유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보유한 전력을 결코 약하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들 사이의 전쟁에서는 전혀 보탬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데이몬은 칠종단금술로 인해 살인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데스 나이트와 본 드래곤을 동원할 수도 없었다. 시험해 보진 않았지만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는 자체가 칠종단금술을 발동시킬 수도 있었다. 데이몬은 어이가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병신 같은 놈들이로군. 머지않아 드래곤의 침공이 시작될 텐데 말이야.' 상념에 빠져 있는데 젠가르트가 솔깃한 얘기를 해 주었다. "아르카디아 제일의 권력자인 페르슈타인 공작도 데이몬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답니다. 제가 듣기로 일전에 레이토나에서 화이트 드래곤을 한 마리 사냥한 뒤 몸값을 받으러 떠나셨다면서요?" 얼른 생각을 마친 데이몬이 급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데이몬님이 떠난 직후 페르슈타인 공작이 레이토나에 도착했답니다. 그가 데이몬님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지요." "그런가?" 데이몬은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손을 잡을 만한 사람은 오로지 페르슈타인 공작뿐이었다. 오직 그만이 드래곤에 맞설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 물론 인간들간의 전쟁에서는 힘이 되어 줄 수 없었지만. "잘 되었군. 어차피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날 찾고 있었다니……." "네? 페르슈타인 공작과 손을 잡으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네.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와 손을 잡을 생각을 하고 있었지." 잠시 데이몬을 쳐다본 젠가르트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머지 않아 아르카디아 전체가 페르슈타인 공작의 손아귀에 들어가겠군요. 지금도 무적(無敵)인데 데이몬님이 가세하면 거칠 것이 전혀 없을 테니 말입니다." 젠가르트의 얼굴에는 수심이 옅게 서려 있었다. 데이몬이 가세한다면 페르슈타인 공작에겐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쟁 억지력이 사라진 이상 정복전쟁은 오래지 않아 일어날 터였고 그렇다면 아르카디아 전역이 전화에 휩쓸릴 것이 틀림없었다. 교역도시이긴 하지만 전략상 요충지에 위치한 로르베인도 전화를 피해가지 못할 것이라서 젠가르트로썬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 어렵게 얻은 행복이 산산조각 나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젠가르트는 감히 그 말을 입밖에 낼 수 없었다. 그의 행복은 모두가 데이몬으로 인해 얻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젠가르트의 마음을 짐작한 듯 데이몬은 미소를 짙게 머금었다. "내가 왜 페르슈타인 공작과 손을 잡으려는지 알겠나?" "………." "왜냐하면 그에겐 힘이 있기 때문이지. 트루베니아를 지배하는 드래곤과 오크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 말이야." 눈치 빠른 젠가르트는 데이몬의 말뜻을 금세 깨달았다. "그, 그렇다면……." "나 역시 트루베니아 인일세. 오크의 노예로 어렵게 살아가는 동포들을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은 결코 없다네. 또한 트루베니아와의 전쟁은 내가 추구하는 바와 부합되는 일일세. 그러므로 난 어떻게 해서든 그를 부추겨 트루베니아를 침공할 생각이네." "가, 가능할까요? 페르슈타인 공작은 야심이 많은 인물입니다. 그를 설득하는 일이 결코 쉽진 않을 텐데요." "안 된다면 흑마법의 힘을 빌어서라도 성사시킬 것이야. 설사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나?" 젠가르트의 얼굴에 열망의 빛이 번뜩였다. 데이몬이 말한 것은 그가 지금껏 수없이 상상했지만 결국 이룰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했던 일이었다. 오크 족의 노예로 힘겹게 살아가는 트루베니아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일. 그가 꿈에라도 이루고자 갈망했던 일이 아니던가? 감정이 격양된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절 동참시켜 주십시오. 한낱 병졸의 신분으로도 참전하고 싶습니다." "힘들텐데……. 자넨 늙어서 헬버드도 들지 못하잖아?" "죽을힘을 다해서라도 들겠습니다. 안되면 화살이라도 나를 생각입니다." 열망에 가득 찬 젠가르트의 눈을 들여다보던 데이몬은 손을 뻗어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사람들에겐 누구나 장기가 있는 법이야. 병졸 노릇은 자네에겐 어울리지 않으니 차라리 보급과 병참을 맡아 주는 게 어떤가? 자네라면 잘 할 것 같네." 젠가르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를 때가 있겠습니까? 원하신다면 제 재산을 깡그리 털어서라도 군자금에 보태겠습니다." 데이몬은 흡족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중에 때가 되면 연락하겠네. 자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생업에 열중하게. 혹시라도 날 뒤쫓는 드래곤이 자넬 찾아올지도 모르니 모든 일은 극비에 붙여야 해. 페르슈타인 공작과의 접촉은 내가 알아서 하겠네." "알겠습니다." 몸을 일으키려던 데이몬은 뭔가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돌렸다. "참. 그리고 보석을 좀 넘길 테니 팔아놓도록 하게. 자고로 난세에는 귀금속과 황금의 가치가 치솟기 마련이니 지금 팔면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거야. 금궤도 꽤 있지. 한 20톤 될 거야." 젠가르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말로만 듣던 드래곤의 몸값이로군요. 알겠습니다. 모조리 현금으로 바꿔 놓겠습니다." "좋아. 그럼 보고로 안내하게." 젠가르트의 비밀 보고에 들어간 데이몬은 방대한 양의 보물을 풀어놓았다. 카트로이의 몸값으로 받은 황금 20톤 외에 상당한 양의 보석을 인크레시아에서 꺼내놓았던 것이다. 보석들이 하나같이 드워프의 세공품들이라 젠가르트는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르카디아 제일의 부자는 바로 데이몬님이셨군요. 설사 페르슈타인 공작이라 해도 이렇게 많은 보물을 소유하진 못했을 겁니다." 난처했는지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도 군소리가 늘었군. 나에겐 별달리 쓸모 없는 물건이니 몽땅 팔아버리게. 트루베니아 침공 때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거야." "염려 놓으십시오." "그럼 난 가보겠네." 말을 마친 데이몬은 비밀금고 귀퉁이에 설치된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잘 있게. 틈틈이 찾아오겠네." "자주 오십시오." 알았다는 듯 손을 흔드는 데이몬의 몸이 곧 광휘에 휩싸였다. 번쩍. 데이몬의 몸은 곧 언제 있었냐는 듯 그 자리에서 꺼져버렸다. 그 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보던 젠가르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토록 엄청난 일을 계획하고 계시다니 정말 존경할 만한 분이시군요. 당신을 만났다는 사실은 제게 있어 필생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모실 수 있다는 것은 더 없는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 묵묵히 되뇌이고 있는데 마법진에서 또다시 광휘가 치솟았다. 그 기척을 알아차린 젠가르트는 얼른 마법진으로 다가갔다. 그것은 바로 무언가가 공간이동을 해 오는 현상이었다. "뭔가 잊은 것이 있으신가 보군." 광휘가 사라지자 젠가르트는 얼른 허리를 굽혔다. 그러면서 그는 공간이동 해온 자가 데이몬이 분명할 것이라 생각했다. "다시 오셨군요. 헉." 깜짝 놀란 젠가르트가 뒷걸음질을 쳤다. 워프 해온 자가 데이몬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젠가르트는 등골이 오싹했다. 데이몬에게 들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누, 누구요. 서, 설마 드래곤?" 상대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젠가르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젠가르트에게 상대의 싸늘한 음성이 전해졌다. "조금 전 9서클의 흑마법사 한 명이 이곳에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젠가르트는 더욱 긴장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데이몬님에 대한 사실을 숨겨야 해. 그 어떤 고문을 당하더라도 말이야.' 하지만 그는 드래곤이 정신계 마법의 전문가라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48회. 마음만 먹는다면 그 어떤 인간의 생각이라도 읽어낼 수 있는 10서클의 마법 말이다. '정신 차리자. 어떤 일이 있어도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젠가르트는 우선 상대의 모습을 살폈다. 도저히 인간의 머리색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눈부신 백발에 잘생긴 용모를 보니 상대는 드래곤이 틀림없어 보였다. 경비병을 불러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젠가르트는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 젠가르트를 쳐다보던 은발의 사내는 인상을 찡그렸다. "잡아먹지 않을 테니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다." 젠가르트에게서 시선을 거둔 사내는 고개를 돌려 옆에 쌓여 있는 금궤를 쳐다보았다. "과연 이곳에 왔다 갔군. 말도 없이 떠나다니……. 치사한 자식. 금궤에 걸어놓은 탐지마법이 아니었다면 종적도 찾을 수 없을 뻔했군." 거듭 분통을 터뜨리는 사내는 바로 카트로이였다. 데이몬 일당에게 사냥 당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이웃이 된 그가 이곳에 찾아온 것이다. 입을 꽉 다물고 있는 젠가르트를 슬쩍 쳐다본 카트로이는 실소를 지었다. "네 녀석이 입을 다문다고 내가 놈의 종적을 찾아내지 못할 것 같나? 마법진에 남은 흔적을 조사하면 어디로 갔는지 금세 알아낼 수 있지. 적어도 마법방면으로는 그 녀석보단 내가 윗줄이야." 카트로이가 마법진으로 다가가려 하자 젠가르트는 사색이 되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몸을 날리려 했지만 그는 어느새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카트로이가 한 발 앞서 손을 쓴 것이다. 그 상태로 마법진을 자세히 살펴본 카트로이는 오래지 않아 데이몬이 간 곳을 파악할 수 있었다. "펜슬럿으로 갔군. 놓치면 안되니 서둘러 따라가야겠어." 카트로이는 마나를 모으려다 말고 젠가르트를 쳐다보았다. 손을 한 번 내저어 마법을 풀어준 카트로이는 인상을 쓰며 으르렁거렸다. "노파심에서 말하는데 흑마법사 녀석을 해치려고 따라가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말도록. 뭐, 나에게 당할 놈도 절대 아니지만 말이야. 난 단지 내 유희의 완성을 위해 그와 동행하려는 것이다. 알겠는가?" 말을 마친 카트로이는 젠가르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워프를 실행했다. 그의 몸은 곧 광휘에 휘감겼고 조금 뒤 그곳에는 젠가르트만 남게 되었다. 그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알만 데룩데룩 굴렸다. 잠시 후 그는 겨우 한 마디를 내뱉을 수 있었다. "부디 데이몬님에게 별 일이 없어야 할 텐데……." 펜슬럿 외곽으로 워프해 온 데이몬은 느긋하게 도로를 걷고 있었다. "좌표책자가 비싼 값을 하긴 하는군. 그래도 좌표를 제대로 잡아놓았으니 말이야." 안전을 위해서인지 좌표가 강 위로 잡혀있긴 했지만 데이몬에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강물에 빠져 옷을 적시는 것은 하급 마법사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이었으므로……. 느긋하게 걸어가던 데이몬은 한가롭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독보강호라……. 이곳이 강호가 아니긴 하지만 홀로 걸어가는 것도 색다른 맛이 있군." 멀리 보이는 산에는 아직까지 푸른 기가 남아있었다. 온통 하얀 눈과 얼음 천지였던 북부와는 사뭇 다른 정경이었다. 멀리 펜슬럿의 수도 코르도가 눈에 들어왔다. 강대국의 수도라서 그런지 코르도는 화려하면서도 상당한 규모를 가진 도시였다. 데이몬이 돌연 얼굴을 찡그렸다. "그나저나 미첼 녀석과 헤어지려니 조금 섭섭하군. 그럴 줄 알았다면 내공이라도 좀 쌓아줄 걸 그랬나?" 비록 용병들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긴 했지만 미첼을 따라가려면 아직까지 멀었다. 미첼은 거의 절정에 근접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데이몬은 미첼이 가까운 시일 내에 소드 마스터가 될 거라 추측했다. 비록 미첼이 익힌 내공심법이 비교적 더딘 연성속도를 보이긴 하지만 데이몬이 마나를 모아 불어줄 경우 미첼에겐 그것을 충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능력이 있다. 하지만 데이몬은 귀찮다는 이유로 그럴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1년 남짓 북부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어느 정도 정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뭐 그 녀석 정도라면 펜슬럿의 근위기사들 중에서도 능히 두각을 발휘할 거야. 조만간 헤어질 녀석이니 이만 관심 끊어야겠군. 그나저나 율리아나 계집애가 상당히 심심해지겠어. 가장 만만한 밥이 사라질 판국이니." 비 맞은 돌 중 마냥 중얼거리던 그의 얼굴이 별안간 경직되었다. 뒤에서 풍겨지는 마나의 기척 때문이었다. "이, 이 기척은……." 풍겨온 기운은 공간이동이 이루어지는 기척이었고 마나의 재배열 정도를 측정해보니 결코 인간의 수준이 아니었다. 대경한 데이몬은 급히 인크레시아를 열어젖혔다. "드래곤이로군. 일찍 깨어난 녀석이 더 있었나?" 긴장한 채 몸을 돌린 그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나타난 존재가 드래곤인 것은 맞았지만 결코 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공간이동을 해 온 이는 바로 카트로이였다. 북부에서 지내는 동안 어느 정도 교분을 쌓은 화이트 드래곤 카트로이가 데이몬의 뒤를 쫓아온 것이다. 목적을 달성한 카트로이는 데이몬을 향해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치사한 녀석. 아무 말도 없이 떠나기냐?" 말없이 인크레시아를 닫은 데이몬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결코 고운 소리가 아니었다. "미친놈. 그럼 내가 네놈에게 일일이 보고를 하고 다녀야 하나?" "그래도 임마. 갈 때는 간다는 기별이라도 해야 할 것 아냐?" "왜? 따라오려고?" "그래. 임마." 카트로이의 대답을 들은 데이몬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와 동행하겠다는 말이냐?" 카트로이는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연구대상이 떠나는 마당에 레어에 콕 쳐박혀 있을 이유가 없지 않나? 이미 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불가사의를 깊이 연구하겠다고 마음먹은 몸이다. 그러니 어떠한 경우에도 날 떨칠 순 없다." 카트로이의 말을 들은 데이몬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치겠군. 드래곤 슬레이어 파티에 드래곤이 끼여 있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나?" 카트로이는 잠시 뭔가를 생각한 뒤 대답했다. "드래곤을 사냥할 땐 잠시 빠질 생각이야. 동족을 사냥하는데 가담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 외의 시간에는 따라다녀도 무방하겠지?" "………"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군. 네놈들을 따라다니며 저번에 못 다한 유희나 마무리지어야겠어." 이미 카트로이는 결심을 단단히 굳힌 듯 보였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기가 막혔다. '이 자식은 나와 어울리더니 말하는 게 아예 시정잡배가 되어버렸군. 그래도 처음에는 근엄한 면이 없잖아 있었는데…….' 북부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데이몬은 카트로이를 결코 지고한 종족으로 대접해 주지 않았다. 반말은 기본이었고 때때로 쥐어박으며 갖은 욕설까지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카트로이가 거기에 영향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카트로이의 말투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고 이젠 데이몬의 말투와 전혀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동안 자신이 퍼부은 욕설이 고스란히 되돌아오는 판국이라 데이몬조차도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젠장맞을. 아무튼 드래곤은 종잡을 수 없는 종족이라니까……. 처음부터 이놈과 상종을 말았어야 했어.' 골치가 아파진 데이몬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따라오든 말든 마음대로 해. 경고하겠는데 행여나 드래곤 사냥을 훼방놓을 생각은 버리도록……. 거치적거리면 너도 함께 사냥해 버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 드래곤과 맞닥뜨릴 경우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없어져주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카트로이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의 뇌리에 불연 듯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어떻게 날 찾아냈지? 혹시 네 녀석……." 카트로이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금궤에 걸린 탐지마법을 추적했지. 뭐 이런 경우를 생각해서 한 것은 아냐. 만약을 위해 예전에 걸어놓았던 것인데 널 찾아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지. 그건 그렇고, 정말 대단한 심복을 뒀더군. 널 위해 죽음까지 불사할 표정이던데……." 데이몬의 눈빛이 별안간 싸늘해졌다. "설마 젠가르트에게 손을 댄 것은 아니겠지?" 카트로이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 "맹세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어. 잠시 마법을 걸긴 했지만 금방 풀어줬으니 아무 일 없을 거야." 데이몬의 입에서 살기가 뚝뚝 묻어나는 음성이 새어나왔다. "만약 젠가르트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가만두지 않겠어." "진짜 손대지 않았다니까 그러네." 카트로이가 질린 듯한 기색으로 주춤 물러서자 데이몬은 흡족하다는 듯 얼굴을 폈다. 데리고 다니려면 기선제압을 확실하게 해야 했다. 그래야만 기어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좋아. 믿겠어." 처량해진 드래곤의 위상을 실감한 카트로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위대한 종족인 드래곤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거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던 카트로이는 뭔가 생각이 난 듯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다른 놈들은 어디로 간 거야. 함께 오지 않았어?" "그놈들은 걸어오기 때문에 며칠 걸릴 거야. 난 볼 일이 있어서 먼저 온 거지." 말을 마친 데이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고민이로군. 오랜만에 계집질이나 좀 해보려고 했는데 네놈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통에 그러지 못하게 되었으니……." "계집질이라니?" "멍청한 녀석. 계집질도 몰라? 하긴, 암수 구분이 없는 놈들이니 음양조화(陰陽調和)의 오묘한 이치에 대해 알 리가 없겠지. 주둥이 닥치고 조용히 따라와." 데이몬은 더 할 말 없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음양조화의 뜻이 뭔지 골똘히 생각하던 카트로이도 급히 뒤를 따랐다. 느긋하게 코르도를 향해 걷던 둘의 앞에 일단의 인물들이 길을 막은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형제여. 잠시만 걸음을 멈추시게." 제법 살벌한 외모를 가진 사내 다섯이 우아한 몸놀림으로 둘을 포위했다. 시퍼렇게 날이 선 비수를 빙글빙글 돌리는 폼이 이런 일에 경험이 많은 자들이란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카트로이를 노리고 모여든 듯 했다. 저번과는 달리 귀공자 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트로이는 한 눈에 보아도 돈 많은 물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제법 삭막하게 생긴 사내가 으름장을 놓았다. "형제여. 혹시라도 주머니가 무겁지 않은가? 우리가 자비심을 발휘해서 주머니의 무게를 좀 덜어주려고 하는데 말이야." "………." 영문을 모른 카트로이가 눈만 끔뻑이고 있자 사내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쳇. 낭만을 전혀 모르는 놈이로군. 알아듣기 쉽게 말하지. 우리가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바란다면 지금 당장 주머니에 있는 것을 모조리 꺼내도록." "주머니에 있는 것을 왜 꺼내야 하지?" 멍청하게 반문하는 카트로이를 본 사내들은 기가 막혔다. 차림새는 그럴 듯 했지만 말하는 것만 봐서는 영판 바보에 불과했다. 성질이 급한 사내 하나가 달려들어 비수를 카트로이의 목에 들이댔다. 슥 펜슬럿은 치안이 무척 탄탄한 나라였다. 잡히지 않으려면 순식간에 털고 바람처럼 사라져야 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사내는 급히 동료들에게 눈짓을 했다. "치안병사가 올지도 모르니 어서 주머니를 뒤져. 으헉." 기세 좋게 지껄이던 사내는 깜짝 놀랐다. 비수를 쥔 손에서 갑자기 냉기가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뒤로 주춤 물러선 사내의 눈은 경악으로 인해 찢어져라 부릅떠져 있었다. "어, 어찌 이런 일이……." 비수를 쥔 손은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아니 손이 얼음덩이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동료들을 돌아본 사내는 등골이 써늘해지는 감정을 느꼈다. 동료들이 모두 자신과 같은 몰골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의 등판으로 무표정한 음성이 전해졌다. "이제 알겠군. 너희들이 바로 도둑이었군."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일이 글렀다는 것을 실감한 사내들은 즉시 몸을 날리려 했다. 건드려서는 안될 사람을 골랐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49회. 그러나 결과적으로 말해 그들은 결코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사, 살려줘." 사내들은 사색이 되어 연신 발을 휘저었다. 그러나 걸리는 것은 허공뿐이었다. 그들은 이미 카트로이의 마법에 당해 허공에 떠 있는 상태였다. 허우적거리는 그들을 향해 카트로이가 느긋하게 다가갔다. "이놈들이 말로만 듣던 도둑들이었군." "아니 네 말이 틀렸어. 정확히 말하면 그놈들은 도둑이 아니라 강도라고 해야겠지?" 자신들을 띄워놓고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는 둘을 쳐다보며 사내들은 기가 막혔다. 겉모습은 그럴 듯 했지만 말하는 모습을 봐서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생각할 여유란 없었다. "사, 살려주시오. 사람을 잘못 보았소." 구슬프게 애걸하는 사내들을 힐끔 쳐다본 데이몬은 카트로이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만 마무리를 짓는 게 어때?" "마무리를 짓다니……." 사내들을 훑어보는 데이몬의 얼굴에는 흥미롭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감히 우릴 털려고 덤빈 놈들인데 가만히 둘 수가 있나? 네 장기인 빙계 마법으로 얼음덩이를 만들어버리거나 아니면 태워버려. 그렇지! 산채로 땅 속에 파묻어 버리는 게 가장 깔끔하겠군. 아니면 간식으로 먹어버리던지……." 뜻밖의 반응에 카트로이는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이들은 너와 같은 인간이잖아." "무슨 상관이야. 이놈들은 상대를 잘못 골랐으니 죽어도 싸." 언제 사람을 죽여봤는지 이젠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직접 죽일 수 없는 바에야 간접적으로라도 인간이 죽는 모습을 감상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마음이 동했는지 데이몬은 연신 카트로이를 채근했다. "좋은 방법 하나 가르쳐 줄게. 얼렸다가 태워 버리는 게 무척 재미있을 것 같군." 그럴수록 사내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럴 수 없어. 내가 네놈의 술수에 말려들 줄 알아?" 금방이라도 마법을 전개할 것 같았던 카트로이는 손을 털며 뒤로 물러났다. 데이몬의 저의가 심히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애가 탄 것은 도리어 데이몬이었다. "못하겠으면 내가 하지. 잘 봐." 화르르르. 데이몬의 손위로 시퍼런 불덩어리가 생겨났다. 최강의 대인공격마법인 헬 파이어였다. 완전히 모습을 갖춘 헬 파이어를 빙글빙글 돌리며 데이몬은 사내들의 면면을 하나씩 쳐다보았다. "자고로 인간을 없애는데는 화염계 공격마법이 가장 제격이야. 헬 파이어 한 방이면 저놈들이 세상에 존재했던 흔적까지 깡그리 없앨 수 있지. 한 번 해 보겠어?" 카트로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만든 김에 네가 처리해." "아냐. 오늘은 왠지 살인을 하고 싶지 않군. 그러니 네 마법실력을 한 번 보여줘." "제기랄. 도대체 네놈의 진의가 뭐냐?" 옥신각신하는 둘을 쳐다보던 사내들은 하나씩 바지에 오줌을 지리고 있었다. 헬 파이어의 열기로 머리털과 눈썹이 서서히 타 들어가는 상황에서 저런 말을 듣고 정신이 멀쩡할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왕 끝날 목숨이라면 빨리 죽고 싶은 것이 그들의 심경이었다. 어쩌자고 저런 엄청난 인간들을 건드렸을까. 사내들은 그들을 어마어마한 마법실력을 가진 고위급 마법사로 단정했다. 사람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잔인한 마법사 말이다. 데이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트로이는 결국 술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네놈이 처리하지 않겠다면 나도 내버려두겠다." 말을 마친 카트로이는 사내들을 속박하던 마법을 가차없이 풀어버렸다. 털썩. 풀려나긴 했지만 사내들은 감히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생명이 경각에 처했다는 생각에 그들은 즉시 무릎을 꿇고 애걸하기 시작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눈이 어두워 감히 하늘을 몰라 뵈었습니다." 그들을 쳐다보던 데이몬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젠장. 오랜만에 피를 보고 싶었는데 저 멍청한 녀석 때문에 글러버렸군." 싸늘한 눈빛으로 카트로이를 노려보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눈앞의 사내들을 이용해서 여흥을 즐겨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렇지. 몰골을 보아하니 저놈들은 십중팔구 도둑길드에 소속되어 있을 테고……. 그렇다면 밤의 생리에 대해 훤하겠군. 좋아.' 생각을 마친 데이몬은 즉시 마나를 재배열해서 사내들을 귀머거리로 만들어버렸다. 카트로이와 밀담을 나누려면 그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소리가 들리지 않아 허둥대는 도둑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데이몬은 음흉한 눈빛으로 카트로이를 쳐다보았다. "이봐. 혹시 여색에 관심이 있나?" "무슨 소리지?" "이를테면 인간들이 즐기는 유희의 일종이야. 인간에 대해 알려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관문이기도 하지. 한 번 즐겨보겠나?" 잠시 생각해보던 카트로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 것 한 번 해보지. 뭐."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어. 앞으로 내가 하는 말에 결코 토를 달지 마라. 무조건 내가 시키는대로 해야만 일이 순탄히 풀릴 거야. 알겠어." "알았다." 카트로이의 대답을 들은 데이몬은 사내들에게 건 마법을 풀어준 뒤 나지막하게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우리들이 누구인지 아느냐?" 물론 사내들이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자, 잘 모르겠습니다." "잘 들어라. 우린 바로 드래곤이다. 인간에 대해 조사할 것이 있어서 이리로 내려온 것이다. 알겠느냐?"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 사내들의 입을 딱 벌렸다. 그들은 지금껏 드래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멀쩡한 사람으로 보이는 자들이 자신들을 말로만 듣던 드래곤이라고 소개하니 그들로써는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사내들의 반응을 익히 짐작했다는 듯 데이몬은 미소를 지으며 카트로이를 쳐다보았다. "폴리모프를 잠시 풀고 네 본 모습을 보여주도록……." "꼭 그래야 돼?" "어허. 토를 달지 말라고 했지?" 카트로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마나를 재배열했다. 화이트 드래곤의 웅장한 자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띌까 두려웠는지 카트로이는 모습만 살짝 보여준 뒤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떤가? 이젠 믿겠는가?" 사내들은 하나같이 눈을 찢어져라 부릅뜬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생전 처음 드래곤을 대한 충격은 그 정도로 컸다. 때문에 그들은 데이몬마저 드래곤으로 간주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드래곤에게 이처럼 막 대하는 존재를 감히 인간이라 생각할 순 없는 노릇이다. 사내들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미, 미천한 인간이 위, 위대하신 존재를 뵙습니다." 그들의 귀로 데이몬의 느물느물한 음성이 전해졌다. "우린 인간들이 좋아한다는 여색을 한 번 즐겨보려고 왔다. 그게 대관절 어떤 것이기에 인간 수컷들이 그리도 밝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사내들은 여색을 즐겨보려는 드래곤을 쳐다보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생전 처음 대해본 드래곤이었지만 한 마디로 별종이라 표현할 수 있었다. 통상적인 드래곤에 대한 상식을 여지없이 타파하는 별종 드래곤. 데이몬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만약 너희들이 우릴 만족시킬 경우 합당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드래곤은 원래 은원관계가 확실한 종족이지.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데이몬은 들고 있던 헬 파이어를 슬쩍 집어던졌다. 쏜살같이 날아간 헬 파이어는 큼지막한 바위에 정통으로 격중되었다. 화르르르. 바위는 그대로 불타올랐다. 연소 자체가 불가능한 바위가 그대로 재로 변하는 장면을 쳐다보던 사내들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들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간략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이렇게 해결할 생각이니 잘 생각해서 선택하도록……."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내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그들에게 달리 선택할 길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저희들이 목숨을 걸고 모시겠습니다." 데이몬은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 놈만 남고 나머지는 돌아가서 우릴 접대할 채비를 갖추도록." 대장인 듯한 사내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거침없이 다른 사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급이다. 너희들은 지금 즉시 길드로 돌아가서 이 사실을 마스터에게 보고하라. 이분들을 맞이할 채비를 갖추라고 말이다." "옛." 사내들은 머뭇거림 없이 몸을 날렸다. 데이몬의 예상대로 그들은 펜슬럿에 위치한 도둑길드의 길드원들이었다. 남은 사내는 극도의 경의를 표하며 허리를 굽혔다. "절 따라오십시오. 충분히 만족하실 수 있도록 알아서 조처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우릴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 길드 자체를 깡그리 쓸어버릴 생각이니까……." 데이몬의 말을 들은 사내의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오래 전에 미제로 묻혀버린 의문의 사안을 떠올리고 있었다. '로르베인과 테르비아의 길드본부가 의문 속에 사라진 것이 아무래도 이들의 소행인 듯 싶군. 큰일났어. 자칫 잘못하면 우리 펜슬럿의 길드 본부도 날아가게 생겼으니…….' 몸을 부들부들 떨며 둘을 안내하던 사내는 어떻게 해서든 드래곤들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로르베인과 테르비아 도둑 길드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말이다. 그 날 펜슬럿의 도둑길드에는 대대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아르바이트(?)를 나갔던 길드원들이 돌아와서 전한 사실 때문에 길드 전체가 발칵 뒤집힌 것이다. 새파랗게 질린 길드 마스터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너희들은 즉시 나가서 길드의 영향력이 미치는 업소들 중 가장 화려한 곳을 말끔하게 단장해라. 그곳에다 각 업소에 소속된 미녀들 중에서 1급으로만 골라 깡그리 모아라. 이번 일은 우리 길드의 존폐가 달린 일이다. 사타구니에서 방울소리가 날 정도로 바삐 움직여라." 도둑들은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길드 마스터는 애가 탔다. '로르베인은 모르지만 테르비아의 길드 본부는 규모가 결코 적지 않다. 아니, 우리보다 한 수위라 봐도 될 정도다. 그런데도 생존자 한 명 없이 사라졌다면 드래곤은 우리가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마음이 급해진 길드 마스터는 부하 하나를 불렀다. "넌 지금 즉시 내 전용 마차를 타고 각 업소를 순회해라. 숨겨둔 최고급 명주(名酒)를 깡그리 털어서 단장중인 업소에 비치해야 한다. 어서 서둘러라." "옛." 부하가 긴장한 표정으로 달려나갔지만 길드 마스터는 여전히 안절부절 못해했다. "후. 미치겠군. 드래곤들의 취향이 어떤지 알아야지 적절한 미녀를 준비하지." 길드 마스터가 애를 태우는 사이 그의 부하들은 드디어 생애 최악의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총 동원된 길드원들이 허리를 직각으로 꺾었다. 그 사이를 데이몬과 카트로이가 한가롭게 걸어 들어갔다. 주위를 둘러본 데이몬이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흠. 분위기는 그런 대로 괜찮군." 그 말에 안내하는 사내는 희열을 느꼈다. 장소가 마음에 들었다고 하니 한 시름은 덜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드래곤들의 주목적이 여색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사내는 얼른 종업원 한 명을 불러 귓속말을 했다. "애들 교육은 잘 시켜놓았나?" "걱정 마십시오. 최상급으로만 골라 정신교육을 확실하게 시켜놓았습니다." "애들이 너무 긴장하면 안 될텐데……. 만약 한 년이라도 실수를 한다면 우리 길드는 그 날로 끝장이다." "애들에게 다시 한 번 숙지시켜 놓겠습니다." 종업원의 대답을 들은 사내는 더 이상 공손할 수 없는 태도로 허리를 꺾었다. "이리로 오십시오." 데이몬과 카트로이는 곧 커다란 방으로 안내되었다. 호화롭게 치장된 화려한 밀실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요리들이 놓여 있었는데 한쪽에 놓여 있는 술들은 하나같이 값비싼 명주들뿐이었다. 그들이 푹신한 자리에 앉자 곧 미녀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하나같이 절색이 아닌 이들이 없었다. 단단하게 정신교육을 받은 미녀들은 요염한 미소를 흘리며 둘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만나뵈어 반가워요." "정말 멋진 분들이시군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들은 다시 한 번 허리를 꺾었다. 이쯤 되면 자리를 피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사내들이 우루루 밀려나간 뒤 밀실에는 데이몬과 카트로이, 그리고 미녀들만 남게 되었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50회. '이건 아닌데…….' 데이몬은 공허한 눈빛으로 밀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에 회포를 풀기 위해 찾아왔건만 정작 육욕(肉慾)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펜슬럿의 길드 마스터가 꽤 공을 들인 모양인지 들어온 여인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미녀들이었다. 누구하나 떨어지는 용모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데이몬은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미녀들이 필사적으로 교태를 부리며 전신을 더듬고 있었지만 데이몬의 머릿속은 점점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역시, 다프네에 대한 그리움을 이런 방법으로 희석시키려 한 자체가 잘못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미녀 하나의 얼굴이 들어왔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려 넣은 듯한 이목구비에 흠잡을 곳이란 하나도 없었다. 호수 같은 푸른 눈망울에 도톰한 입술, 새하얀 살결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의 미소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데이몬은 다프네의 얼굴과 일치시키려 노력해보았다. 하지만 모든 게 허사였다. 다프네의 해맑은 미소를 그 어떤 것으로도 흉내낼 수 없다는 사실만 절감했을 뿐이다. 마음까지 이미 완벽히 다프네의 포로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재미없군."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 미녀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져버렸다. 그녀들은 이미 자신들이 모시는 손님의 정체를 들은 상태였으므로 본능적으로 공포심이 밀려왔다. 바짝 긴장해 있는 미녀들의 귀에 데이몬은 착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만하고 자리에 앉거라." 그의 말이 끝나자 미녀들은 후다닥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지금 그들이 모시는 손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비위를 거슬러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데이몬은 묵묵히 건너편에 앉아 있는 카트로이를 쳐다보았다. "이게 바로 여색이란 것이다. 경험해보니 느낌이 어때?" 카트로이는 상당히 심사가 뒤틀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굳이 얘기하자면 한 마디로 불쾌해. 이것에게서 풍기는 비릿한 냄새도 이상하고 아까부터 몸을 마구 비벼대는 것이 특히 마음에 들지 않아.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모르겠군. 인간들은 이런 것을 유희라고 하는 건가?" "이 아이들이 예쁘지 않은가?" "예쁘다는 것이 무얼 뜻하는지 알긴 하지만 나에겐 모두가 똑같은 인간 암컷으로 보일 뿐이다." 카트로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데이몬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클클클. 풍류를 모르는 드래곤이로군. 하긴 암수 구분이 없는 네 녀석이 음양의 오묘함을 알 리가 없지." 카트로이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데이몬을 쏘아보았다. "내가 보기에 너도 그리 즐겁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정곡을 찔린 데이몬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어색함에서 벗어나려는 듯 데이몬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한 잔 하겠나?" 잔이 비자 옆에 앉아 있던 미녀가 얼른 술병을 들어 술잔을 채웠다. 마치 그것이 필생의 소명이라는 듯이 말이다. 카트로이는 못마땅하다는 듯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올렸다. "곡물을 발효시켜 만든 인간 특유의 음료수로군. 알콜 작용으로 대뇌를 자극해서 쾌감을 유발한다고 들었다. 애석하게도 술의 특성은 드래곤에겐 적용되지 않아. 그런 관점에서 이것은 나에게 맛이 조금 이상한 물과 다를 바 없다." 술잔을 거침없이 입 속에 털어놓은 카트로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맛은 그런 대로 괜찮은 편이로군. 몇몇 드래곤이 즐긴다는 말을 듣긴 했어도……." 장난기가 동한 데이몬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술잔을 비웠으면 안주를 먹어야지?" "응 안주?" "옆에 앉아있는 애들 중 가장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것으로 하나 골라봐. 좋은 안주는 취기를 효과적으로 중화시켜 주지." 미녀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 어렸을 적 옛날 이야기에서나 들었던 사람 잡아먹는 드래곤을 떠올린 그녀들은 급기야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잡혀 먹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는 그녀들의 노력은 척 보기에도 애처로울 정도였다. 카트로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게슴츠레 떴다. "네놈의 장난은 정말 못 말릴 수준이로군. 걱정하지 마라. 비린내나는 인간 암컷 따위를 잡아먹을 생각은 없다. 난 이미 웜 급에 든 드래곤이다. 마나만 흡수해도 충분히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빌어먹을 녀석.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해 먹지." 취기가 서서히 올라오는 것을 느낀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여색의 과정이 아직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드래곤이 즐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야. 그러니 오늘은 느긋하게 술이나 즐기자." "넌 가능하잖아?" 데이몬은 멍청한 표정으로 반문하는 카트로이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쥐어박았다. "이 자식아. 나도 드래곤이잖아? 이게 술에 취했나?" "그, 그랬었지." 카트로이는 머리통을 움켜쥐고 울상을 지었다. 그때서야 데이몬의 주의가 떠오른 것이다. 저 빌어먹을 인간 녀석은 아주 확실하게 드래곤을 사칭하고 있었다. 불연 듯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진 카트로이는 술병 하나를 통째로 집어들었다. "그래. 이참에 드래곤이 술에 취하는지 한 번 실험해보자." 꿀꺽꿀꺽 병나발을 부는 카트로이를 힐끔 쳐다본 데이몬은 느긋하게 술병을 잡았다. "너희들도 한 잔씩 해라." 하지만 미녀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누구하나 술잔을 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나같이 도수가 센 명주들인지라 노파심으로 마시지 않는 것 같았다. 만에 하나 취해서 실수를 할 경우 세상과 깨끗이 이별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데이몬이 서슬 퍼렇게 엄포를 놓자 미녀들은 마치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술을 입 속에 털어 넣었다. "마시지 않는 년은 술안주로 삼아버리겠다." 독한 술을 급히 마신 탓에 숨이 막혔지만 누구하나 기침을 하지 않았다. 결사적으로 식도를 누르고 있었기에 몇몇 미녀들은 이미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데이몬은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미녀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이것들에게 내 예전의 용모를 보여준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반응이 궁금해진 데이몬은 지체 없이 역체변용술을 전개했다. 쓰쓰쓰. 데이몬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술에 취했지만 정신만은 맑았기에 그는 순식간에 예전의 용모를 복원할 수 있었다. 중원 배교의 교주이자 수호마왕군의 총수였던 독고성의 얼굴 말이다. 변용을 마치자 숨가쁜 경악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헉." "세상에……."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눈치챈 미녀들이 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데이몬은 그녀들의 반응을 확실하게 살필 수 있었다. 그것은 데이몬에겐 무척 익숙한 반응이기도 했다. 경악으로 시작해서 서서히 경멸로 변해 가는 눈빛. 그것을 간파한 데이몬은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내 진면목을 보고도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역시 한 사람 뿐이로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데이몬은 미녀들의 얼굴을 느릿하게 둘러보았다. "한 가지 묻겠다. 너희들은 이 얼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잘 생겼느냐? 아니면 소름끼칠 정도로 추악하느냐?" 미녀들은 오직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이 던진 질문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답이 쉽사리 나오지 않자 데이몬은 이번에는 카트로이를 쳐다보았다. "넌 어떻게 생각하나?" 연신 술병을 집어 들이키던 카트로이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멍청한 질문을 계속 하는군. 이미 대답하지 않았는가? 조금 특이하긴 하지만 나에겐 단순한 인간 수컷의 모습일 뿐이다." "후후후." 실소를 지은 데이몬은 다시 용모를 변화시켰다. 이번에는 그가 차지하고 있는 육체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크로센 제국의 제 1황자인 알카리스의 모습 말이다. 순식간에 준수함의 극치를 달리는 미남자의 모습으로 변한 데이몬은 다시 한 번 미녀들을 돌아보았다. "이 얼굴은 어떠냐?" 미녀들의 눈빛이 삽시간에 몽롱해졌다. 데이몬은 그녀들이 지금까지 보았던 사람들 중 단연코 제일이라고 손꼽을 수 있는 미남자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준수함에 넋이 나가지 않은 미녀들이 없었다. '세, 세상에 저렇게 멋진 사람이 있다니…….' '한 번이라도 품에 안겨봤으면 원이 없겠어.' 그녀들의 감정을 읽은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때서야 자신을 확실하게 추스를 수 있었다. 단순한 외모의 변화였지만 미녀들의 반응은 판이하게 달랐다. 다시 말해 자신의 내면을 보아주는 사람이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이란 사실을 데이몬은 절감했다. '다프네…….' 애틋한 표정을 지은 데이몬은 다시금 용모를 변화시켰다. 지금까지 하고 있던 평범한 노인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를 쳐다보던 카트로이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방법으로 폴리모프가 가능하다니 정말 놀랍군. 그건 통상적인 마나 배열에 철저히 괴리되는 움직임이야." "왜냐하면 이건 마법이 아니니까." 짧게 일축한 데이몬은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자, 여색에 대해 즐길 만큼 즐겼으니 이제 일어나자고……."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고 주위의 미녀들에게서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카트로이에겐 더 없이 반가운 소리였다. "좋아." 그는 반색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미녀들을 힐끔 쳐다본 데이몬이 선심이라도 쓰듯 한 마디 내뱉었다. "별달리 만족스럽진 못했지만 노력만은 가상하다고 본다. 해서 거기에 합당한 보상을 해 주려 한다. 무얼 원하느냐? 소원을 말해 보거라." "………." 당황한 미녀들은 침묵을 지켰다. 갑자기 소원을 떠올리려니 생각날 턱이 없는 것이다. 때를 놓칠세라 데이몬이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인간들이 통상적으로 원하는 소원이 황금이라고 알고 있다. 그것을 주면 되겠느냐?" 그녀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밝아졌다. 자고로 황금을 마다하는 인간은 없다. 목숨을 건지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불로소득까지 생기게 되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감히 입밖에 낼 수 없어서 미녀들은 그저 고개만 미미하게 끄덕일 뿐이었다. "좋다." 데이몬은 카트로이에게 간략하게 한 마디 던지는 것으로 그것을 해결했다. "지불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카트로이의 반응은 데이몬이 익히 짐작한 것이었다. "같이 즐겼는데 왜 나만 지불해야 해?" "여색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배운 수업료야." 짧게 일축한 채 휘적휘적 걸어가는 데이몬의 등을 카트로이는 잡아먹을 듯한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아무튼 저놈에겐 당해낼 재간이 없다니까……." 카트로이는 묵묵히 황금을 보관해놓은 보고의 좌표를 머리 속에 떠올렸다. 지금껏 모아놓은 황금을 몸값으로 깡그리 날린 뒤 그는 드워프들을 협박해서 다시금 보고를 채우기 시작했다. 얼마 모으지도 못했는데 또다시 날리게 생겼으니 결코 속이 편할 리가 없었다. "목표물 소환." 주문영창을 마치자 밀실 안에 큼지막한 상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깝다는 눈빛으로 상자를 쓸어본 카트로이는 미련을 떨쳐버리려는 듯 한 마디 내뱉었다. "황금 1톤이다. 설마 모자라진 않겠지?" 모자랄 턱이 없었다. 황금 1톤이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1천 골드를 훌쩍 넘어서는 금액이다. 6개월 봉급을 꼬박 모아야 고작 1골드 정도 만질까말까 하는 미녀들에겐 말 그대로 접할 기회조차 없는 거금이 아닐 수 없었다.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하는 미녀들을 보며 카트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자라진 않은가 보군." 고개를 뒤흔든 카트로이는 지체 없이 데이몬을 따라 나갔다. 그들이 나간 직후 우루루 밀려들어온 길드원들도 그 자리에 얼어 붙어버렸다. 만약 앞서나간 데이몬이 주의를 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생각할 것도 없이 미녀들을 처치해버린 다음 상자를 챙겨 달아났을 터였다. "상자 속의 황금은 모두 미녀들의 몫이다. 술값은 네놈들의 목숨을 살려준 것으로 치도록 해라. 만약 내 말이 이행되지 않을 경우 길드 전체를 깡그리 날려 버릴 테니 알아서 행동하도록……." 그것은 바로 미녀들에 대한 데이몬의 배려였다. 그녀들은 데이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일깨워주었고 황금이 바로 그 대가였다. 카트로이의 황금으로 데이몬은 생색 한 번 확실하게 낸 셈이 되었다. 이후 펜슬럿의 주요 야간업소에서는 이런 풍문이 은밀히 퍼져나갔다고 한다. -인간의 모습을 한 드래곤이 찾아올 경우 열과 성의를 다해 최대한 정중히 접대하라. 그러면 그 대가로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될 것이다. 물론 이후로 찾아오는 드래곤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51회.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은 만 4일만에 펜슬럿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공을 연마하고부터 여간해서는 지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일행의 행보는 무척 빨랐다. 물론 율리아나는 그렇지 못했지만 카심은 말을 한 필 사서 그녀를 태우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정보다 이틀 앞당겨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었다. 수도인 코르도 시가지에 들어선 카심은 묵묵히 약속장소를 떠올렸다. "만나기로 한 장소가 파라다이스 여관이었지?" 약속장소를 굳이 그곳으로 정한 이유는 코르도에서 이름을 아는 곳이 오직 그곳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카심이 가진 지도책 뒷장에는 각지의 유명 업소가 소개되어 있었고 코르도의 명소로 파라다이스가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이면 만나면 되겠군요." 지도를 살펴보던 카심은 머뭇거림 없이 그곳을 약속장소로 잡았다. 용병단에 있을 당시 펜슬럿에 온 적이 몇 번 있긴 했지만 코르도에서 머문 경험은 없었다.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 코르도라서 당시 용병단원들은 노숙으로 숙박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파라다이스가 문을 닫지 않은 이상 데이몬은 분명히 그곳에서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일단 그곳을 찾아가야겠군." 파라다이스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을 정도였으니 코르도에서 가장 유명한 여관이라 볼 수 있는 곳이다. 몇몇 사람들에게 물은 탓에 일행은 오래지 않아 파라다이스 여관을 찾을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도착하자 제복을 차려입은 점원이 달려나왔다. 이곳에 올 손님으로 보이지 않았는지 조금 이상하게 쳐다보긴 했지만 점원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고삐를 주십시오. 말은 제가 마구간에 보관하겠습니다." 점원에게 말고삐를 넘긴 일행은 거침없이 여관으로 들어섰다. '낙원'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듯 파라다이스는 무척 호사스럽게 치장된 여관이었다. 과거였다면 감히 올 엄두를 내지 못했을 정도로 숙박비가 비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카심 용병단은 이제 돈 걱정을 일체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재정상태가 넉넉했다. 하나같이 고급 옷을 걸친 손님들 사이를 지나친 일행은 카운터로 곧장 다가갔다. 최고급 여관답게 제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지배인이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숙박을 하시겠습니까?" "그렇소. 여성이 끼여 있으니 1인실 하나와 다인실 하나를 주시오." 재정이 풍족해지긴 했지만 카심의 몸에는 검소함이 단단히 배어 있었다. 그러나 지배인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이곳에는 1인실과 2인실밖에 없습니다. 규정상 3인 이상의 성인에게는 방 하나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의외라는 듯 카심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럼 2인실 넷과 1인실 하나를 주시오. 미첼. 당신은 나와 방을 함께 씁시다." "난 상관없소." 하지만 지배인은 섣불리 열쇠를 내주려 하지 않았다. 추레한 일행의 차림새를 보아하니 방 값을 지불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선불이 원칙인지라……." 지배인의 반응을 본 카심은 대번에 상황을 깨달았다.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카심은 묵묵히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차림새가 말끔하지 않은 이상 감수해야 할 대우인 듯 싶었다. "방 값이 얼마요?" "모두 다 해서 하루에 50실버입니다." 방 하나의 하루 숙박비가 10실버라면 엄청나게 비싼 금액이었다. '더럽게 비싸군.' 혀를 내두른 카심은 품속에서 조그마한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주머니를 풀자 찬란한 빛이 눈을 찔렀다. 데이몬에게서 받은 돈이었고 속에는 1골드 짜리 금화가 가득 차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지배인은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손님이 의외의 거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카심은 금화 하나를 집어 내밀었다. "이틀 묵겠소." "알겠습니다." 판이하게 태도가 변한 지배인이 얼른 방 열쇠를 내밀었다. 열쇠를 받아든 카심은 뭔가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들을 처음 맞이한 점원이 말을 마구간에 넣은 뒤 들어와 있었다. 카심은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손님." 카심은 달려온 점원에게 1골드 짜리 금화 한 닢을 내밀었다. "팁이네. 우릴 정중히 맞아주고 말을 보관해 준데 대한 보상이라 생각하게. 자넨 적어도……." 카심은 금화를 들고 어쩔 줄 몰라하는 점원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손님 받는 태도가 훨씬 낫군. 돈을 못 낼까봐 선불을 요구하는 지배인보다는 말일세. 그럼 우릴 방으로 안내해 주겠나?"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1년 치 봉급을 훌쩍 뛰어넘는 거금을 손에 쥔 점원은 깍듯한 태도로 일행을 안내했다. 그 뒤에는 지배인이 똥 씹은 듯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장사로 단련된 눈치가 이번에는 독이 된 것이다. '제길. 제대로 대접받으려면 차림새를 그렇듯 하게 하고 오던가?' 하지만 생각할수록 점원이 부러웠기 때문에 지배인은 한숨만 푹푹 내쉴 수밖에 없었다. 걸어가던 도중 카심은 점원에게 데이몬에 대한 것을 물어보았다. "이곳에 우리 일행이 묵고 있는데 혹시 자네가 알지 모르겠군." "말씀해 보십시오. 묵고 있는 손님들의 얼굴은 제가 거의 알고 있습니다." 카심은 즉시 데이몬의 인상착의에 대해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점원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검은 로브를 입은 노인이라면 특실에 머물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께는 동행이 있으시던데요?" "동행이라니……." "눈부신 백발을 한 귀공자 분이십니다. 무척 잘 생기신 분이시더군요." 점원의 설명을 들은 카심은 오래지 않아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인간들 중에 백발머리의 청년이 결코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카트로이 님인가? 그 분이 어떻게 데이몬님을 만났지? 일단 만나봐야겠군. 우릴 그리로 안내해 주겠나?" "알겠습니다." 카심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방안에 들어서자 데이몬과 카트로이가 한창 말싸움에 열중하고 있는 장면이 들어왔다. 말싸움을 훔쳐들은 카심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논쟁의 주제는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이 과연 인간 여성과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였다. "미친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내 생각으론 충분히 가능해. 마법을 사용한다면 못할 일이 없다고……." "네놈이 직접 한 번 실험해볼래?" "아니. 사양하겠어. 인간 암컷과 벌거벗고 뒹구는 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니."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린 데이몬이 카심을 발견했다. "이제 왔는가?" "예. 그런데 카트로이님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카트로이를 쳐다보는 카심에게 데이몬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우리 용병단에 합류하겠다더군. 정말 미친놈이지. 명색이 드래곤이란 놈이 어디 할 일이 없어서 감히 드래곤 슬레이어 파티에 가담을 해?" "사냥할 때는 빠지면 되잖아? 이미 동의해 놓고 왜 잔소리야?" 언쟁을 듣고 있던 카심은 쓴웃음을 지었다. 모양새가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막강한 드래곤이 파티에 합류한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카심 용병단에 가입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뜻하신 바를 이룰 때까지 카트로이 님을 임시 대원으로 대우하겠습니다." 카심의 말에 카트로이는 얼굴을 활짝 폈다. 데이몬과 논쟁해봐야 얻을 것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그런 대로 말이 통하는 카심을 만난 것이 그에겐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사냥할 땐 도움이 되어줄 순 없지만 가급적 좋은 동료가 되도록 노력하겠네." "네까짓 녀석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일단 말싸움을 잠재워야겠다고 생각한 카심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일단 저희들의 당면과제는 미첼을 궁성으로 들여보내는 일입니다. 그것 먼저 상의를 하는 것이……." 눈치 없는 미첼이 나서서 초를 쳤다. "아니 그것까지 신경 쓰실 필요는 없소. 아버님의 문장을 가지고 있으니 궁성에는 나 혼자 들어가겠소. 오늘 신청서를 제출하면 내일쯤이면 심사를 받을 수 있을 터. 나 혼자 가도 문제없을 것 같소." "그래도 되겠소?" "신경 써 주셔서 고맙소. 이제 내 문제는 내가 처리하리다." 말을 마친 미첼은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이미 그는 이리로 오며 궁성의 위치를 수소문해놓은 상태였다. 맥이 풀린 카심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 있는데 카트로이가 다가왔다. "자네가 날 좀 재워주게. 저 자식과 삼일을 함께 보냈더니 아주 미칠 지경이야."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던 터라 카심은 얼른 못을 박았다. "그럼 데이몬 님은 미첼과 한 방을 쓰십시오. 카트로이 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러지 뭐." 이렇게 해서 분쟁은 깨끗이 해결되었다. 다시 만난 용병들과 재회인사를 나눈 데이몬은 피곤하다며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난 한숨 자야겠어. 저놈 때문에 잠도 못 자고 꼬박 3일을 시달렸더니……." 카트로이를 데리고 방을 나선 카심은 우선 율리아나에게 방을 안내해 주었다. "왕녀님은 이 방을 쓰십시오." "알았어요." 데이몬이 눈길조차 주지 않은 탓에 다소 의기소침해진 율리아나는 말없이 방문을 닫았다. 각자의 방을 찾아 들어간 용병들은 지체 없이 마나 연공법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마나연공법은 말 그대로 생활의 일부였다. 미첼은 조용히 코르도 시내를 걷고 있었다. 용병단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다소 무거웠지만 그는 억지로 가슴을 폈다. "어차피 내 꿈은 그럴 듯한 왕국의 근위기사가 되는 것이었어. 용병들과 미련 없이 인연을 끊는 것이 나에겐 득이 될 거야." 하지만 생각할수록 회한이 밀려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용병들 개개인과 정이 들대로 든 상태인데다 동료애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느꼈기 때문에 아쉬움이 쉽사리 가시지 않는 것이다. 저런 동료들을 또다시 만날 수 있을지 확신도 서지 않았다. 착잡함을 떨쳐버리려는 듯 미첼은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근위기사가 되면 동료들이 많이 생길 테니 이젠 잊어야겠군." 생각에 잠겨 걷다보니 어느덧 궁성 앞에 도착해 있었다. 미첼은 지체 없이 수문 병사들에게로 다가갔다. "정지. 무슨 일이오." 강대국답게 당당한 덩치에 화려한 갑주를 차려입은 근위병들이 숙련된 동작으로 창을 겨누었다. 수상한 짓을 할 경우 가차없이 꿰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 차림새를 훑어본 미첼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림새를 좀더 그럴 듯하게 하고 올 것을." 그가 입고 있는 옷차림은 카토 왕국에서 아이스 트롤의 털가죽과 바꿔 입은 그대로였다. 거기에다 여정을 통해 온통 먼지를 뒤집어 쓴 상태였으니 별로 봐 줄만한 차림새는 아니었다. 원래 미첼은 상당히 깔끔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아무래도 용병들과 생활하며 많이 무뎌진 모양이로군.' 급한 대로 먼지를 툭툭 턴 미첼은 고개를 들었다. "난 근위기사단의 부단장님을 뵈러 왔소." "부단장님을? 무슨 일이오." 미첼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근위병들은 별로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눈엔 미첼이 영락없이 시골에서 상경한 촌놈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정을 들어보니 섣불리 내칠 수는 없어 보였다. "아버님께서 이곳의 근위기사셨다면 문장을 가지고 있겠구려." "여기 있습니다." 미첼이 내민 문장을 주의 깊게 살펴본 근위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기다리시오. 일단 부단장님께 보고를 올려 볼 테니……." "부탁드리겠습니다." 근위병들은 미첼을 궁성 안쪽의 초소로 안내해 주었다. 남루한 차림새의 미첼이 궁성 정문에서 어슬렁거리는 장면이 포착된다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52회. 그곳에서 미첼은 꽤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통보가 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만나보시겠답니다. 절 따라오십시오." "고맙습니다." 공손히 머리를 숙인 미첼은 지체 없이 근위병의 뒤를 따랐다. 카르셀을 떠나올 때와는 달리 미첼은 상당히 과묵하고 침착해져 있었다. 펜슬럿의 궁성은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웅장한 건물들이 곳곳에 지어져 있었고 곱게 가꾸어놓은 정원에서는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때가 초겨울임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마법을 사용해서 연출해 놓은 장면 같았다. 근위병은 미첼을 궁성 뒤쪽으로 안내했다. 육중한 성문을 여러 개 지나자 여기저기서 기합소리와 함께 칼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근위기사들이 연무를 하고 있나 보군." 기사들의 검술실력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쉽게도 연무장은 담 너머에 위치해 있었다. 훔쳐 배우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인 것 같았다. 한참을 걸어 들어간 근위병은 커다란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이곳이 근위기사단 본부 건물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다른 사람이 안내를 할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공손히 대답하는 미첼을 근위병은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힐끔 쳐다보고는 몸을 돌렸다. 이곳까지 들어온 자들은 하나같이 주눅이 잔뜩 들어있어야 하는데 방금 안내한 촌뜨기가 그런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그는 촌뜨기가 드래곤의 레어에까지 들어간 경험자라는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사라지고 난 뒤 누군가가 나타나서 미첼에게 손짓을 했다. "날 따라오시오." 화려하게 장식된 투구와 풀 플레이트 메일을 보니 아무래도 근위기사 같았다. 앞으로 동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첼은 공손히 인사를 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전 미첼이라고……." "인사는 나중에 하시오. 건물이 무척 넓으니 잘 따라오지 않으면 길을 잃을 것이오. 그 때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소." 거드름을 피우며 몸을 돌리는 근위기사의 태도에 미첼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한 때 저런 적이 있었지.' 미첼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회랑을 한참동안 걸어 들어간 근위기사는 큼지막한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 앞에는 근위기사 두 명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들어가 보시오. 부단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감사합니다." 미첼이 다가가자 근위기사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미첼은 잠자코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한 사람이 등을 보인 채 책상에 앉아 있었다. 도합 네 명의 기사들이 방안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는데 미첼이 다가가자 걸쭉한 음성이 들려왔다. "자네가 미첼인가?" 미첼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헤일즈 브루노의 아들이란 말이지." 근위기사단 부단장이 정확히 아버지의 이름을 거명하자 미첼은 상당히 반가웠다. 혹시라도 부단장과 아버지 사이에 친분이 있다면 그로써는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부단장은 몸을 돌렸다. 50정도 되어 보이는 초로의 노기사였는데 상당히 간교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그리 호감이 가는 얼굴이 아니었다. 게다가 미첼을 쳐다보는 부단장의 얼굴에는 뜻 모를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헤일즈 브루노의 아들이 날 찾아오다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군." 부단장의 시선에서 왠지 모를 적의를 느낀 미첼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곧이어 부단장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미첼은 전신의 털이 거꾸로 치솟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내 이름은 라일리 프리즈먼이라네. 익히 들어보았겠지?" 미첼은 자신도 모르게 맥이 빠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러면서 그는 펜슬럿의 근위기사가 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왜냐하면 라일리는 그의 아버지인 헤일즈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악연으로 점철된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미첼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동안 아버지인 헤일즈는 펜슬럿에 있었던 시절에 대해서는 일체 입밖에 내지 않았다. 따라서 미첼로써는 그 시절이 단지 행복하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한 헤일즈가 비틀거리며 다가와 미첼을 불러냈다. 그는 술 냄새를 푹푹 풍기며 과거의 신세내력에 대해 낱낱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왜 펜슬럿의 근위기사 자리를 팽개치고 이곳에 정착했는지 아느냐?" 술 냄새 때문에 얼굴이 찡그려졌지만 미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 그 점을 가장 궁금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린 미첼이 생각하기에도 강대국 펜슬럿의 근위기사와 카르셀의 궁정경비대장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헤일즈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자신의 지나온 자취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는 결코 네 엄마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 아비의 첫사랑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헤일즈 브루노와 라일리 프리즈먼은 같은 기사학교를 수료한 동기생 사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사이가 무척 좋지 않은 앙숙이기도 했다. 헤일즈와 라일리는 정말 판이하게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학부시절부터 둘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융합되지 못하고 끝없는 반목을 벌여왔다. 헤일즈의 가문은 이름 없는 시골의 몰락한 귀족집안이었다. 반면 라일리는 당당한 권세를 자랑하는 명문가 프리즈먼 가문의 독자로써 가문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라일리가 헤일즈를 깔보게 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라고 볼 수 있었다. 자존심 강한 헤일즈는 라일리에게 결코 숙이고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내가 기대할 것은 오로지 실력뿐이다." 라일리에게 밀리지 않으려는 일념으로 헤일즈는 목숨을 걸고 검술수련에 매진했다. 라일리처럼 가문의 후광과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라서 오로지 실력으로만 승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노력 때문인지 헤일즈는 학부시절 내내 수석을 독차지해왔다. 꼭두새벽부터 심야까지 쉬지 않고 수련에 몰두하는 헤일즈를 따라갈 학부생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헤일즈를 라일리는 결코 곱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찮은 시골뜨기 녀석이 자존심은 있어 가지고……." 수석을 거듭 독차지하는 헤일즈에게 시기심을 가진 라일리는 사사건건 그를 괴롭혔다. 용병들을 고용해서 집단 린치를 가한 적도 있었고 담당 교관에게 뇌물을 주어 성적을 조작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헤일즈는 기사 학부를 당당히 수석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당시 기사 학부의 수석졸업생은 자동으로 근위기사단의 수습기사로 임용되는 관례가 있었고 헤일즈는 그에 따라 수습기사가 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실력이 증명해 주지 않겠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는 헤일즈의 모습에 라일리는 이를 악물었다. 어떠한 수단을 강구해서라도 헤일즈를 파멸시켜 버리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그는 가문의 지원을 적절히 이용해서 수습기사 자격을 얻었다. 아무것도 없는 헤일즈에 뒤쳐질 수 없다고 독기를 품은 것이다. 수습기사 시절에도 둘의 악연은 끝나지 않았다.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헤일즈는 수습기사들 사이에서도 능히 두각을 나타냈다. 헤일즈에겐 항상 1등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고 모든 평가에서 수석을 독차지했다. 하지만 라일리는 그렇지 못했다. 자질과 노력 모든 면에서 헤일즈에게 뒤졌던 것이다. 결국 헤일즈는 수련기사과정을 무사히 끝마치고 당당히 근위기사로 임용되었다. 자신보다 한 발 앞서 정규 근위기사가 된 헤일즈를 라일리는 아니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어디 네놈이 잘 되는지 한 번 두고보자." 이를 악문 라일리는 수습기간을 마치자마자 근위기사단에 자격심사 신청서를 넣었다. 수석을 차지한 헤일즈와는 달리 그는 가문의 후광을 적절히 이용해야만 근위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러 방면의 인맥을 동원한 끝에 라일리는 마침내 근위 기사단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헤일즈를 몰락시킬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며……. 근위 기사단에 들어간 뒤, 탄탄대로를 내달리던 헤일즈에게 사랑이 다가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훈련소를 찾아온 수석교관의 딸 엘리스를 본 순간 헤일즈는 생전 처음 사랑을 느꼈다. 엘리스 역시 헤일즈가 그리 싫지 않은 눈치라서 둘의 사랑은 금방이라도 무르익을 듯 보였다. 둘은 그렇게 사랑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여기에 라일리의 방해가 끼여들 줄은 아무도 몰랐다. 고된 수련 뒤에 틈틈이 시간을 내어 데이트를 즐기던 두 사람.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며 하나가 될 순간만을 기다리던 두 사람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라일리의 본가인 프리즈먼 가문에서 엘리스의 집안에 공개적인 청혼을 해왔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라일리가 꾸민 수작이었다. 아름다운 엘리스를 라일리 역시 호시탐탐 눈독을 들여왔던 것이다. 넉넉지 않은 귀족가문인 엘리스의 집안에서 그 청혼을 마다할 리가 없었다. 프리즈먼 가문이라면 펜슬럿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였기에 엘리스의 아버지는 그 즉시 헤일즈와 엘리스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는 울며 매달리는 엘리스를 탑에 가두면서까지 프리즈먼 가문과의 혼사를 추진했다. 프리즈먼 가문과 인연을 맺는 순간이 당당히 명문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이럴 수가……." 헤일즈는 낙담했다. 그로써는 사랑을 여지없이 깨어버린 라일리가 더할 나위 없이 미울 수밖에 없었다. 집요한 회유에 견디다 못한 엘리스는 마침내 라일리와 혼인식을 치렀고, 그 날 헤일즈는 술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다음날 사고를 저질렀다. 술김에 프리즈먼 가문으로 찾아간 헤일즈는 라일리를 불러내어 반쯤 죽도록 패버렸던 것이다. 갑옷도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행한 일이었지만 사고의 여파는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프리즈먼 가문에서 근위기사단에 공식적으로 공문을 보내 항의를 해 온 것이다. - 근위기사 헤일즈 브루노가 검과 갑주로 완전 무장한 채 프리즈먼 가문에 난입했다. 그는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본가의 후계자인 라일리 프리즈먼을 살해하려 했으며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아내인 엘리스를 겁탈하려 했다.- 헤일즈로써는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정황증거가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미 프리즈먼 가문의 모든 고용인들은 암암리에 입을 모은 상태였다. "맞습니다. 그는 장검뿐만이 아니라 헬버드와 단검까지 소지했었습니다." "우리 앞에서 라일리 내외를 깡그리 죽여버리겠다고 공언까지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엘리스의 판이하게 변한 모습이었다. "그는 날 겁탈하려 했어요. 만약 남편이 아니었다면 난 저 짐승에게 가차없이 능욕 당했을 거예요." 재판정에서 거침없이 증언하는 엘리스의 모습을 보고 헤일즈는 피눈물을 흘렸다. 그 착했던 엘리스가 벌써 돈과 권력에 물들어 버리다니……. 변심한 연인을 앞에 둔 헤일즈에겐 더 이상 자신을 변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헤일즈는 유죄가 인정되었고 처벌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 당시에는 살인미수 한 가지만 하더라도 상당히 큰 중죄에 속했다. 만약 그를 아끼는 근위기사 단장과 기사학부 학장의 청원이 아니었다면 헤일즈는 평생을 감옥에서 보냈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는 아까운 인물입니다. 이렇게 쉽게 잃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청원으로 중대한 처벌은 면하게 되었지만 내려진 판결은 그래도 헤일즈에겐 혹독하기 짝이 없었다. -헤일즈에게서 5년 간 근위기사 자격을 박탈한다. 그 기간 동안 수습기사 신분을 유지하며 공을 세우도록 하라.- 하루아침에 수습기사로 강등된 헤일즈. 이미 그에게 펜슬럿에 대한 애정은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이후 헤일즈는 아무런 의욕도 목표도 없이 5년 동안 묵묵히 수습기사 생활을 해 나갔다. 이삼일에 한 번씩 라일리가 찾아와서 집요하게 괴롭혔지만 헤일즈는 묵묵히 참아가며 5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약정된 5년이 지나자 헤일즈는 아무 미련 없이 근위기사단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5년을 채웠으니 근위기사 신분이 다시 복원될 터였지만 그는 추호도 미련을 두지 않았다. 당시 라일리는 근위기사단 부대장이 되어있었고 평기사 신분으로 그의 마수를 벗어날 길이란 없었다. 무엇보다도 헤일즈를 실망시킨 것은 실력도 통솔력도 없는 라일리가 단지 가문의 후광만 가지고 높은 직책에 올랐다는 점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이미 제 마음은 정해졌습니다." 아쉬운 눈길을 날리는 근위기사 단장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린 헤일즈는 미련 없이 펜슬럿을 떠났다. 자유기사로써 정처 없이 대륙을 여행하던 헤일즈. 그러다가 결국 카르셀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과거를 남김없이 고백한 헤일즈는 무거운 낯빛으로 미첼을 와락 끌어안았다. "펜슬럿으로 가지 말라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라일리의 가문은 펜슬럿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맞서봐야 버틸 승산이 전혀 없다. 그러니 넌 결코 펜슬럿에 가서는 안 된다." 그 이후로 미첼은 아버지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53회. '정말 공교롭군.'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려보던 미첼은 기가 막혔다. 하필이면 라일리가 근위기사단의 부단장이라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아버지와 끝없는 악연으로 점철된 라일리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미첼은 정신마저 아찔해졌다. 그런 미첼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라일리는 음흉한 미소를 떠올렸다. "자네도 알다시피 펜슬럿 근위기사단은 개나 소나 들어오는 곳이 아냐." "………." "시골 촌구석에서 어줍잖게 배운 검술 따윈 이곳에선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모멸감으로 인해 미첼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확실하게 모욕을 주기로 작정한 듯 라일리는 계속해서 미첼을 조롱했다. "헤일즈 녀석에게서 배웠다면 뭐 볼 필요도 없겠군. 실력이 모자라서 근위기사단을 탈퇴한 녀석이니 말이야." 미첼의 입술에서 착 가라앉은 음성이 새어나왔다. "경고하겠소. 아버지를 모욕하지 마시오." "얼씨구. 아비와 똑같은 녀석일세 그려." 라일리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차피 그에겐 미첼의 실력 따윌 보고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단지 헤일즈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에겐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근위기사가 되고 싶어 찾아온 용기 하나만은 가상하군. 하지만 애석하게도 근위기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냐. 어중이떠중이들이 심사를 받겠다고 일년에도 수백 명씩 찾아오는 판국이니 말이야." 미첼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아니 필사적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다. "애석하지만 어쩔 수 없지. 동기생의 자식이라 특별대우를 해 주고 싶어도 부단장이란 직책이 허락하지 않는군. 정 심사를 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신청서나 한 번 작성해보게." 라일리가 가볍게 손짓을 하자 구석에 서 있던 근위기사 한 명이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심사신청서를 미첼에게 내밀었다. 그의 투구가리개 사이에서 안됐다는 눈빛이 흘러나왔다. 라일리의 눈밖에 났으니 이미 탈락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그는 성의 없이 설명을 마쳤다. "대충 알아서 기재하시오." 이를 앙 다문 미첼은 신청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기재란을 하나도 빠짐 없이 채워 넣은 미첼은 잘못된 부분이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여기 있소." 미첼이 내민 신청서를 받아든 근위기사는 그것을 라일리에게 전해 주었다. 순간 미첼의 눈동자에 분노의 빛이 솟구쳤다. 신청서를 받아든 라일리가 보지도 않고 그것을 좍좍 찢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익.' 아래로 늘어뜨린 주먹이 꽉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렸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아 보였는지 구석에 있는 근위 기사들이 일제히 미첼에게로 다가왔다. "경고하건 데 경거망동할 생각 따윈 하지 마시오." 근위 기사들이 빈틈없이 앞을 가로막은 것을 확인한 라일리는 느물거리는 음성으로 내뱉었다. "심사에서 통과되었는지를 알고 싶다면 내일 이맘때쯤 다시 찾아오게. 그 때 심사 여부를 통보해 주겠네." 신청서를 찢어버린 뒤 심사여부를 알아보러 다시 오라니 미첼로써는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미첼은 핏발선 눈빛을 희번덕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귀로 라일리의 이죽거림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참고로 얘기하지만 심사참가 여부는 전적으로 내 관할 하에 있네. 그러니 행여나 요행 따위는 바라지 않기를 권유하는 바이네." 모멸감 때문에 미첼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왜 이곳을 찾아왔는가 하는 회의가 뇌리 속에 밀려들었다. 급기야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뜨거운 눈물이 미첼의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이후 미첼은 궁성을 나설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미첼이 파라다이스 여관에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다음이었다. 미첼은 술에 떡이 된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여관에 들어섰다. "아니? 손님." 점원 하나가 깜짝 놀라 미첼을 부축했다. 카심으로부터 거금을 팁으로 받은 그 점원이었다. "바, 방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점원은 미첼을 부축한 채 방으로 올라갔다. 거처가 바뀐 줄 몰랐기 때문에 점원은 미첼을 카심의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아니 미첼." 미첼을 받아든 카심은 깜짝 놀랐다. 함께 지냈던 1년 동안 미첼은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항상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만 보였으므로 카심으로써는 이 자가 진정 미첼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곤드레가 된 미첼은 마치 주정이라도 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대, 대장이오? 대장?" "그렇소. 나 카심이오." 카심을 쳐다보는 미첼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대장. 제발 날 좀 받아주시오." "………." "내, 내가 별달리 해 준 것은 없어도 끅. 나, 나름대로 검술지도에는 열과 성의를 다했잖소." "나도 알고 있소. 미첼." "대장이 한 말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소. 어, 언제든지 돌아오면 받아준다는 말 말이오." "………." "바, 받아주시오. 이곳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면 나, 난 더 이상 갈곳이 없으니까……." 카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은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오." 미첼의 일그러진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 고맙소. 대장. 아, 앞으로 잘 하리다." 모습을 보니 뭔가 곡절이 있는 듯 했기 때문에 카심은 일단 미첼을 부축해서 데이몬의 방으로 걸어갔다. 자세한 것은 미첼이 술에서 깨어난 내일 얘기해야 할 듯 싶었다. "많이 취하셨구려. 일단 자도록 해요. 나머지는 내일 얘기합시다." 연신 흐느적거리는 미첼을 데이몬의 방으로 데리고 간 카심은 그를 조용히 침대에 눕혔다. 깊은 잠에 빠진 듯 데이몬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미첼이 흐릿한 눈을 들어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데이몬?" "맞소. 오늘은 데이몬 님과 함께 자도록 해요." 이불을 끌어다 덮어준 카심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미첼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만 기억하시오. 당신에겐 동료들이 있다는 사실 말이오." "도, 동료?" "그렇소. 우린 이미 당신을 진정한 동료로 생각하고 있소." 말을 마친 카심은 계속해서 동료란 말을 되뇌이는 미첼을 두고 방을 나섰다. 그러나 미첼은 쉽사리 잠들지 않았다. 한참동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미첼은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잠시 망설이던 미첼은 나지막이 데이몬을 불렀다. "데, 데이몬." "듣고 있어. 말해" 뜻밖에도 데이몬의 대답은 바로 터져 나왔다. 자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 안 잤소?" "빌어먹을……. 드래곤 녀석이 사흘동안 날 못 자게 하더니 이번에는 네 녀석까지 술 주정을 해서 내 수면을 방해하는군." 데이몬은 나지막이 욕설을 퍼부으며 몸을 일으켰다. "미, 미안하오." "미안할 건 없어. 원래 나이를 먹으면 잠이 없어지니까……. 그래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술을 퍼먹었나?" "나, 난."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보였지만 혀가 꼬부라진 탓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술에서 깨게 해 줄까?"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던 미첼을 본 데이몬은 한숨을 내쉬며 마나를 재배열했다. 마법이 구현되자 미첼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몸 속의 알콜 기운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비록 완전히 깬 것은 아니었지만 듣고 말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제 정신이 든 미첼은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미, 미안합니다. 하도 울적해서……." "근위기사가 되겠다며 기세 좋게 나간 녀석이 왜 곤드레가 되어 들어온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용병단에 다시 들어오겠다고 하는 거지?" 카심과의 사이에서 오간 얘기를 모두 알고 있는 것을 보니 벌써 오래 전부터 깨어있었던 것 같았다. "근위기사가 되는데 무슨 문제가 있었나?" 순식간에 어두워진 미첼의 안색을 본 데이몬은 그에게 뭔가 사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구태여 물으려 하지 않았다. 사람에겐 누구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 하나씩은 있는 법. 이미 데이몬 자신도 엄청난 비밀을 가슴속에 품고 있지 않던가? "원한다면 근위기사가 되게 해 줄 수 있다. 어떤가?" "아닙니다. 이젠 근위기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미첼은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출세하는 데 순수한 실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미 펜슬럿이란 국가에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라일리 같은 인물을 근위기사단 부단장으로 삼았다면 나머지는 안 봐도 뻔했기에 미첼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내심을 털어놓았다. "더 이상 허영심에 사로잡혀 살긴 싫습니다. 앞으론 한 명의 용병으로 본분을 지키며 열심히 살고 싶습니다." 데이몬은 미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이 이렇게 변해버렸을까. 호기심이 치밀어 오른 데이몬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다. "무슨 일을 겪었는지 나에게 얘기해 줄 수 있나?" "………." "가능한 일이라면 내가 도움이 되어 주지." 미첼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그는 뭔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죠. 뭐. 동료가 된 마당에 숨기는 게 있어서는 안 될 테니." 미첼은 곧 그의 아버지와 라일리에 얽히고 설킨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선대에 맺은 악연을 남김없이 털어놓은 미첼은 조금 전 겪었던 일까지 모두 얘기해 주었다. 끝으로 그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직책이 순수한 실력이 아니라 가문의 후광에 결정되는 곳이라면 몸을 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이제 전 카심 용병단의 대원으로 만족하겠습니다." "흠. 그런 일이 있었군." 사정을 모두 들었지만 데이몬의 얼굴에는 표정변화가 전혀 없었다. 잠시 후 그는 손을 뻗어 미첼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일단 동료가 된 것을 환영한다. 그러니 그동안 내가 괴롭혔던 것은 깨끗이 잊어버려." 미첼이 어색한 웃음을 떠올렸다. "무슨 말씀을……. 그땐 제가 정말 못되게 굴었죠." "아냐. 사실 난 네 녀석에게 못할 짓을 정말 많이 했지. 뭐 사연을 설명해 줬으니 나도 비밀을 하나 얘기해 줄까? 이것 한 번 들어보겠나?" 품속에서 뭔가를 꺼낸 데이몬은 그것을 미첼에게 넘겨주었다. 그것은 어른 주먹만한 소라 껍질이었다. 영문을 몰라하는 미첼에게 데이몬은 사용법을 설명해 주었고 그것을 귀에 댄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가 율리아나에게 했던 험악한 말이 고스란히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이, 이것은?" "그 때 너희들이 겪은 것은 모두 내 연출이었다. 늑대 떼도 그랬고 돈을 잃어버린 것도 그랬고……. 그때 난 너희들을 단단히 혼내주려고 작정했었거든." "세, 세상에……." "네 사연을 설명해 준데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도록. 이것만 없앤다면 그때의 일은 완전히 묻혀버릴 테니까……."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던 미첼은 곧 냉정을 되찾았다. 퍽. 손에 마나를 모아 소라껍질을 부숴 버린 미첼은 쓴웃음을 지었다. "데이몬도 참 사악하십니다. 세상에 그런 일을 계획하실 수 있다니……." "원래 내가 좀 사악한 면이 있는 편이지. 그건 그렇고 한 번 돌아앉아 보겠나?" 미첼은 영문도 모르고 돌아앉았다. 순간 그의 명문혈로 데이몬의 장심이 밀착되었다. "그 때의 일을 사과하는 뜻으로 네 연공을 좀 도와주겠다. 지금 즉시 익히고 있는 마나연공법을 운용하도록 해라." "네?" "시간이 없어. 마나를 끌어다 불어 넣어줄 테니 전력으로 연공을 시작해야 해." 데이몬의 의도를 알아차린 미첼은 즉시 연공을 시작했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54회. 그의 단전에 뭉쳐져 있던 마나가 전신혈맥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인 헤일즈로부터 전수받은 펜슬럿 고유의 마나연공법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다. 명문혈을 통해 정제되지 않은 마나가 물밀 듯 파고들기 시작했다. 데이몬 이 끌어 모은 마나를 줄기차게 주입하고 있는 것이다. 데이몬의 얼굴에는 진 지함이 가득 차있었다. "네가 익힌 것이 정파 내공심법이라서 얼마만큼 효과를 볼지는 의문이다. 하 지만 주입하는 것이 순수한 대자연의 마나이고 네 녀석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기 때문에 어쩌면 예상치 못했던 큰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 내가 불러주는 무리(武理)를 머릿속에 새겨듣도록 해라." 미첼에게는 미처 대답할 여유도 없었다. 등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노도같은 마나의 물결을 제어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9서클의 대마법사인 데이몬이 전력으로 끌어 모아 불어 넣어주는 마나의 양은 심히 방대했다. 아니 그것은 여타의 마법사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한 때 고도의 내가 고수였던 마법사가 아니라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심지어 마법의 조종인 드래곤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몸 속을 흐르는 미묘한 마나의 흐름을 읽고 조종할 수 있는 자는 두 대륙을 통틀어봐도 오직 하나 데이몬 뿐 이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미첼의 귀에 데이몬의 중얼거림이 들 려왔다. "무(武)의 극의(極意)는 곧 깨달음이다. 각 무도의 끝은 오로지 하나로 귀일(歸 一)된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닌 바. 정(正)과 사(邪)는 비록 추구하는 바가 다르지만 정점(頂點)에 이르면 일체의 차이가 없다." 데이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바로 무의 극의였다. 과거 마공의 고수였던 데이몬이 정종내공심법을 익힌 미첼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뿐이었다. 바로 깨달음이 그것이었다. 미첼 같은 고수는 이제 수련만으로는 쉽사리 실력을 올리기 힘들다. 오로지 깨달음을 얻어 벽을 깨뜨려야만 더 높은 경지에 쉽게 올라설 수 있는 것이다. 데이몬은 과거 느꼈던 경험을 바탕으로 미첼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노력하 고 있었다. 수많은 고수들과 싸우며 얻었던 경험을 모조리 전수해주고 있는 것이다. "검을 단순한 도구로만 생각하지 마라. 검은 곧 손이며 또한 뼈의 연장된 부분 이라 생각하라. 검에다 기를 채워 넣을 수 있으면 그 나머지 것에도 능히 가능 한 법, 생각하라. 허공 역시 기를 응축시킬 수 있는 통로일 뿐이다. 그것을 행 하는 것이 바로 강기의 발현이다." 미첼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다. 알아듣기 힘든 주문처럼 들 려오는 데이몬의 말이 점점 머릿속 깊이 스며들며 눈앞에 뭔가를 보여주고 있 었다. 아직까지는 흐릿한 안개 같은 것에 싸여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그 형상 은 점점 명확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미첼이 형상의 정체를 파악한 순간 벼락 치는 듯한 음향이 머리 속에서 터져 나왔다. 푸우. 미첼은 분수처럼 선혈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의식을 사 라지기 전 미첼은 용케도 데이몬의 혼잣말을 들을 수 있었다. 마치 기력을 모 조리 소진해 버린 듯한 맥빠진 음성이었다. "그, 그 녀석 정말 대단하군. 반신반의했는데 결국 깨달음을 얻다니……. 후, 무척 힘들군. 아무튼 절정의 경지에 올라선 것을 축하한다. 이놈아. 넌 이제부 터 소드 마스터다." '소, 소드 마스터?'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미첼의 의식은 아득한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다. 다음날 미첼은 해가 중천에 떴을 때에야 깨어날 수 있었다. "응?" 상체를 반쯤 일으킨 미첼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룻밤 사이에 마치 몸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가뿐했다. 어리둥절해진 미첼은 몸 속의 마나를 한 번 돌려보았다. 순간 이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 던 방대한 마나가 그의 통제대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실로 엄청난 변화 였기에 미첼은 입을 딱 벌렸다. "도, 도대체 무슨……." 돌연 저쪽에서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 고개를 돌리자 용병들이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미첼을 쳐다보고 있었다. 카심 이 빙글빙글 웃으며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소드 마스터가 된 것을 축하하네. 미첼." 얼떨결에 내민 손을 맞잡은 미첼의 귀로 용병들의 환호소리가 이어졌다. "정말 축하하오 미첼." "이젠 미첼에게 감히 못 개기겠군. 소드 마스터에게 어찌 개길 수 있겠어?" 미첼은 실감이 나지 않아서 눈만 끔벅거리다. '내가 정말 소드 마스터가 된 걸까?' 이번에는 데이몬이 다가왔다. 어제의 일로 상당한 기력을 소진한 듯 얼굴이 많이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정신이 번쩍 든 미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데, 데이몬. 어,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이놈아. 고마우면 알아서 기어. 너 때문에 내 수명이 10년은 축났겠다. 임마." "저, 정말 고맙습니다."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자신의 성취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용병들의 마음이 가슴속 깊이 와 닿았고 이런 동료들이 여덟이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못내 뿌듯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데이몬의 걸쭉한 입담 도 지금 이 순간 그토록 정겨웠다. "원. 사내녀석이 울긴 왜 울어. 임마. 그만 울고 짐이나 챙겨." "떠, 떠나는 겁니까?" "가야지. 하지만 그러기 전에 펜슬럿 궁정에 잠시 들러야겠다." "구, 궁정에는 왜?" "네가 말한 라일리란 녀석을 손봐주고 가야하지 않겠나? 이미 그놈을 단단히 혼내주기로 모두의 의견이 통일되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미첼이 안색을 굳혔다. "그냥 떠나면 안되겠습니까? 그래도 펜슬럿은 아버님의 조국이었습니다. 그곳 에 피해를 입히긴 싫……윽."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데이몬이 미첼의 머리를 냅다 후려갈겼다. "걱정하지 마라. 이 녀석아. 펜슬럿엔 조금의 피해도 주지 않고 라일리란 녀석 만 혼내줄 생각이니까……. 응?" 미첼의 머리에서 전해지는 반탄력이 상상 이상이자 데이몬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네놈은 확실하게 소드 마스터가 되었군. 몇 마디 불러준 말에 깨달음을 얻다 니 네놈도 참 어지간한 놈이다." "저, 정말 제가 소드 마스터가 된 겁니까?"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하지만 자만하지 마라. 이들 역시 적어도 5년 이내에 너와 같은 경 지에 오를 테니까. 저들이 익힌 마나연공법이 비록 속성이 가능하긴 하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절정, 즉 소드 마스터 이상의 경지를 초월하 기가 현저히 힘들다는 점이다. 하지만 넌 달라. 차근차근 수련에 몰두하면 어 쩌면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될 가능성도 있어."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지만 미첼은 결코 겉으로 내색하려 하지 않았 다. 어느새 그는 동료들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용병들은 데이몬의 말에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에이. 그래도 소드 마스터가 어딘데요? 1년 전까지만 해도 우린 3류 용병이었 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소드 마스터만 되어도 여한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 이 상은 언감생신 바라지도 않습니다. 사람이란 자고로 분수를 알아야 하는 법입 니다." 입담 좋은 패터슨이 너스레를 떨자 일행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에 휩쓸린 미첼도 따라 웃고 있었다. 오늘따라 마음이 그토록 편할 수가 없었다. 하하하 일행이 웃음을 그치자 카심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자 그럼 빨리 계획에 착수하자. 이미 데이몬께서 계획을 세우셨다고 하니 우 린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짐을 챙겨든 용병들은 일제히 여관을 나섰다. 펜슬럿 근위기사단의 부단장인 라일리는 한가롭게 차를 즐기고 있었다. 문득 어제 찾아온 헤일즈의 아들 녀석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돌연 통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그 녀석이 나갈 때의 표정이 정말 볼만하던데 말이야. 정말 멍청한 놈 이야.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찾아오다니……." 과거 헤일즈를 몰아내고 난 뒤 그는 말 그대로 탄탄대로를 내달렸다. 아내가 근위기사단 수석교관의 딸이었기 때문에 그는 해마다 치러지는 자격심사에서 매번 수석을 차지했다. 물론 거기에 불만을 가진 자가 없진 않았지만 그는 가 문의 후광을 이용해 불만을 쥐도새도 모르게 무마했다. 적어도 그의 관점에서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란 없었다. 그 결과 이처럼 근위기사단 부단장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헤일즈 녀석이 조금이라도 돈에 욕심이 있었다면 그 지경이 되진 않았을 텐 데 말이야. 그런데 그놈은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상관할 바가 없다고 생각한 라일리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나저나 헤일즈의 아들 놈,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다면 찾아오지는 않겠지?" 그의 독백이 끝나기도 전에 문 밖에서 근위기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부단장님. 어제의 신청자가 자격심사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찾아왔답니다." 라일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 눈앞에서 신청서를 찢어버리는 것을 봤으면서 또다시 찾아오다니……. "그놈, 혹시 바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찾아왔다니 만나보긴 해야 할 것 같아서 라일리는 거만하게 명령을 내렸다. "데리고 와라." 잠시 후 미첼은 또다시 라일리와 대면했다. 라일리는 징그러운 미소를 흘리며 미첼을 쳐다보았다. "그래 자격심사 여부를 알아보러 왔다고?" 미첼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소." "애석하군. 자네의 심사신청은 자격미달로 반려되었네. 먼길을 왔는데 헛걸음 을 시켜서 미안하군." 하지만 미첼은 추호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격미달로 심사가 반려되었다는 사실을 문서로 증명해줄 수 있 소?" "그거야 뭐 어렵지 않지." 라일리는 즉시 펜을 집어들었다. 기사 지망생들의 자격심사 여부는 전적으로 부단장의 권한이기 때문에 그에겐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었다. 문서를 작성한 라일리는 친절하게도 그것을 읽어주는 여유까지 보였다. "잘 듣게. 당 지망생은 현격한 결격사유 때문에 근위기사단 자격심사 신청서 를 반려한다. 인품과 검술실력, 용모 등 모든 면에서 기준에 미달하기 때문에 도저히 본국의 근위기사가 될 수 없다고 판단된다. 이에 근위기사단 부단장인 라일리 프리즈먼의 권한으로 직접 신청서를 반려하는 바이다. 이 정도면 되겠 는가?" "충분하오." 상대가 의외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라일리는 문서를 옆에 대기하고 있던 근위기사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곧 문서를 미첼에게 넘겼다. 문서를 접어 품 속에 집어넣은 미첼은 라일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부탁이 하나 있소." "뭔가 말해보게." "혹시 근위기사들의 연무장을 한 번 구경할 수 있겠소?" "뭐 그 정도쯤이야 어렵지 않지. 물론 참관에 한정된 것이네." 라일리는 즉시 서류를 작성했다. 바로 연무장을 참관할 수 있는 서류였다. 그 러면서 그는 속으로 냉소를 짓고 있었다. '흐흐흐. 기사들을 상대로 실력을 증명해서 눈에 띄어보려는 속셈인 것 같은 데 철저한 오산이야. 참관을 허락 받은 자가 기사들에게 시비를 건다면 그 즉 시 법에 의해 체포될 테니까……. 그럴 경우 내가 감옥에 가둬놓고 차근차근 요리해 주지.' 그런 꿍꿍이도 모르고 미첼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내겐 동료가 있소. 모두 여덟 명이니 그들에게도 참관을 허락해 주었으면 하 오." "그거야 문제없지." 라일리에게는 더욱 반가운 소리였다. 떼거지로 몰려들어 소란을 피운다면 죄 가 더욱 커지는 것이다. 순식간에 여덟 명의 참관증을 완성한 라일리는 그것 을 미첼에게 전하게 했다. "그럼 잘 가게. 부디 무운을 비네." 미첼은 대답도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라일리는 음흉한 눈빛 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55회. 집무실을 나선 미첼은 곧장 궁성의 정문으로 갔다. 일행들이 그곳에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문을 지키는 수문 병사들에게 참관증을 건네자 그들은 두말하지 않고 문을 열어주었다. "확인되었습니다. 기사 지망생 미첼 외 여덟 명에게 연무장 참관을 허락하겠 습니다." 카심 용병단 일행은 곧 펜슬럿 궁성에 들어섰다. 그들은 수문병사의 안내 하 에 곧장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 입구도 정문과 마찬가지로 강철로 보강되 어 있었고 다수의 수문병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조금 뒤 그들은 참관증 을 제시하고 연무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멀리서 근위기사들이 땀을 흘리며 훈련에 몰두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상당히 규모가 큰 연무장이었는데 기사들이 무기와 갑주를 착용하지 않은 것으로 봐 서 기초체력만을 단련하는 장소 같았다. 미첼에게 행여나 숨겨진 검술실력이 있을지도 몰라서 라일리는 참관장소를 이곳에 한정해 놓았다. 안내를 마친 수문병사는 연무장의 한 쪽을 가리켰다. "이곳에서 참관하시면 됩니다." 병사가 안내를 마치고 나가자 데이몬이 우두둑거리며 손마디를 꺾었다. "그럼 이제부터 슬슬 몸을 풀어볼까?" 말을 마친 데이몬은 지체 없이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미첼이 걱정스러운 표정 으로 다가왔다. "도대체 어떻게 하시려고……." "잔말말고 싸울 채비나 갖춰라. 데스 나이트 넷을 꺼내줄 테니 지금껏 해왔던 대로 한 판 붙으면 된다. 한 단계 올라섰으니 이젠 그놈들과 제법 오랫동안 싸 울 수 있을 것이다." "………." 영문을 몰라하는 미첼에게 데이몬이 눈을 부라렸다. "멍청한 녀석. 신나게 싸우고 있으면 펜슬럿의 고위층들이 모두 몰려오지 않 겠나? 그놈들도 눈이 있을 테니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겠지? 그들 앞에서 네 진정한 실력을 뽐내보란 말이다. 그리고 뭐가 걱정이냐? 합법적인 참관증 을 가지고 들어와서 우리끼리 대련하는데 말이야." 비로소 데이몬의 의중을 알아차린 미첼이 손뼉을 딱 쳤다. "세상에……. 그런 생각을 해내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까불지 말고 갑주나 차려입어라. 데스 나이트 놈들도 지금쯤 몸이 근질근질 할 테니……." "알겠습니다." 미첼은 두말도 하지 않고 짐을 풀었다. 오랜만에 환상의 갑주를 착용하는 것 이다. 데이몬은 그 모습을 보지도 않고 인크레시아에 대고 냅다 고함을 질렀 다. "모두 집합!" 잠시 후 데스 나이트 넷과 듀라한 하나가 펜슬럿 궁성의 근위기사단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어젯밤 데이몬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터라 헬버트 론이 눈빛을 빛내며 미첼에게 다가갔다. "크크크. 오랜만이로구나 애송아.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 만 그렇다고 날 얕봐서는 곤란하지." "오늘은 조금 힘겨우실 겁니다." 갑주를 다 차려입은 미첼이 미소를 띄우며 검을 곧추세웠다. 미첼의 변화가 기대되었는지 헬버트론은 가차없이 달려들었다. 장검에다 데스 블레이드 (Death blade: 어둠의 오러 블레이드)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말이다. 마주쳐 가 는 미첼의 장검에도 선열한 오러 블레이드가 맺혀 있었다. 검에서 족히 1미터 이상 솟아오른 미첼의 오러 블레이드는 한 눈에 보기에도 완벽하게 완성된 것 이었다. 잠시 후 펜슬럿의 궁성은 발칵 뒤집혔다. 연무장에서 인간과 언데드가 혈투를 벌이고 있다는 보고는 곧장 펜슬럿 국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느닷없이 데스 나이트가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혼비백산한 근위기사들이 그 사실을 즉 시 기사단장에게 보고했고 급기야 펜슬럿 국왕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갔던 것 이다. "어, 어찌 이런 일이……. 데스 나이트가 본국의 궁성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내 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당장 근위 기사들을 파견해야 합니다. 그놈들을 깡그리 잡아죽여야만 본국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사들의 의견은 문관들과는 사뭇 달랐다. 의중을 묻는 국왕의 질문에 근위기사 단장이 고즈넉이 의견을 밝혔다. "제 생각에 그들은 아무래도 말로만 들었던 드래곤 슬레이어들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소문이 자자한 카심 용병단이란 말이오?" 깜짝 놀란 것은 펜슬럿 국왕이었다. 테르비아 국왕과 마찬가지로 그도 벌써 오래 전부터 카심 용병단을 끌어들이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비록 그가 호 전적이거나 정복욕에 사로잡힌 국왕은 아니었지만 전쟁억지력 때문에라도 카 심 용병단은 반드시 끌어들여야 하는 존재였다. 이미 그는 카심 용병단이 테제로스나 테르비아에 가세할 경우에 벌어질 위협 을 확실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펜슬럿 국왕은 더 이상 생각 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근위기사들을 소집하시오. 그리로 가봐야겠소." 그 말에 문관들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국왕이 가는데 자신들이 동행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전하 위험하옵니다. 그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도 모르는데……" "듣기 싫소. 이건 우리에게 천고의 기회라고 할 수 있소. 테제로스나 테르비아 에 앞서 그들을 회유할 수 있는 기회 말이오." 펜슬럿 국왕은 휑하니 몸을 일으켰다. 이미 기사단장은 근위기사들을 소집하 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나간 상태였다. "저기 오는군." 연무장으로 오는 화려한 행렬을 발견한 데이몬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흐흐흐. 라일리란 녀석 어디 한 번 맛 좀 봐라." 이미 미첼은 헬버트론과의 접전을 마치고 한창 라인델프와 검을 섞고 있었다. 단 하루만에 이룬 성취였지만 미첼의 발전은 정말 눈부신 지경이었다. 10분 넘게 풀 파워의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했지만 아직까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 을 정도였다. 상대하던 라인델프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요 애송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발전을 했지?" 물론 그랜드 소드 마스터 급인 그들에겐 못 미치는 수준이었지만 같은 나이또 래에서 미첼 만큼의 성취를 이룬 기사는 두 대륙을 모두 뒤져보아도 없을 것 이었다. "하하하. 자 갑니다." 미첼의 낭랑한 고함소리와 함께 두 자루의 장검이 허공에서 연속으로 부딪혔 다. 자욱한 스파크를 튀기며 장검들은 정신 없이 공방을 주고받았다. 이미 수 없이 대련을 치러본 만큼 둘은 서로의 검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이것은 약식대결이나 다름없었다. 자세만 봐도 어디로 검을 날릴지를 훤하게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실전에서는 다르겠지만……. 그러나 제 3자가 보기에 둘의 대결이 더없이 험악한 결투임에는 틀림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자는 바로 펜슬럿의 근위기사 단장이었다. 멀리 서 결투를 지켜보던 그는 입을 딱 벌렸다. "저, 정말 엄청난 실력을 가진 데스 나이트로군요. 가히 그랜드 소드 마스터 급 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게다가 상대하는 기사도 대단하긴 마찬가지입 니다. 소드 마스터로 보이는데 데스 나이트에 한 치도 밀리지 않는군요." "데스 나이트의 그렇게 실력이 강하오." "그, 그렇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보다 훨씬 강할 것 같습니다." 데스 나이트와 맞붙는 자신을 상상해보던 근위기사 단장은 몸을 가늘게 떨었 다. 그 역시 소드 마스터이긴 하지만 데스 나이트에겐 도저히 맞서 싸울 자신 이 없었다. 같은 길을 걷는 자가 서로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그는 이미 벌어지 는 공방을 통해 상대의 수준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그는 침통한 표정 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 저런 무시무시한 데스 나이트가 넷이라면 역부족입니다. 거기에다 본 드 래곤이 가세한다면……. 아무래도 동원중인 병력을 철수시키는 게 나을 것 같 습니다." 그 말에 펜슬럿 국왕은 침음성을 내질렀다. 회유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병력동원령을 내려놓았는데 뜻밖에도 근위기사 단장이 맥빠진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어려울 것 같소?" "그렇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근위기사단 전체가 몰살할 수도 있습니다." 안색이 대변한 국왕은 즉시 병력을 철수시킬 것을 명했다. 기사 한 명이 즉시 명을 받들기 위해 달려갔다. 접전이 벌어지는 곳에서 시선을 거둔 기사단장은 이번에는 그들의 일행이 있는 곳을 살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우두커니 서 있는 세 명의 데스 나이트였다. 그 옆에 는 머리통이 없는 시체(?) 한 구가 버티고 서 있었는데 아무래도 언데드의 일 종인 듀라한 같았다. 남은 사내들은 의외로 평범한, 대륙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용병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관자놀이가 두드러지 게 튀어나온 것을 봐서 모두가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 같았다. '놀랍군. 용병단 전체가 팔라딘이라니……." 그들 중에서 기사단장의 시선을 가장 사로잡은 자는 바로 검은 로브를 걸친 노인이었다. 한참동안 그를 살펴본 기사단장은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차림새를 보니 저자가 바로 소문의 흑마법사 같습니다. 제가 한 번 찾아가 대 화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허락하겠소. 부디 조심하도록 하시오." 국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사단장은 열 명의 근위기사를 대동한 채 그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근위기사 10여 명이 접근하고 있었지만 일행은 그저 못 본체 했다. 이미 데이 몬이 단단히 주의를 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펜슬럿 기사단장이 지척에 접근 할 때까지 일행들은 누구 하나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기사단장이 먼저 말을 걸어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단 두 명이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돌린 자들 중에 다행히 흑마법사로 짐작되 는 노인이 끼여 있었다. 기사단장은 흑마법사를 똑바로 쳐다보며 자기 소개를 했다. "전 펜슬럿 왕국의 근위기사 단장인 카르수스 드 스콜세지라 합니다. 펜슬럿 으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뭔가 심사가 편치 않은 듯 노인은 잔뜩 골이 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 뒤 퉁명스런 대답이 들려왔다. "환영한다니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구려." 별로 호의적인 반응이 아니었지만 기사단장으로써는 대화의 물꼬를 튼 것만 으로도 다행이었다. 기사단장 카르수스는 때를 놓치지 않고 말문을 이어나갔 다. "실례지만 당신들이 우리 펜슬럿 왕국에 온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어찌하여 본국 궁성의 연무장에서 결투를 벌이는 것인지 무척 궁금하군요" 노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소?" "………." "우린 합법적인 참관증을 가지고 이곳으로 들어왔소. 게다가 귀국의 기사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대련을 하는 것이므로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들은 기사단장은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누가 저들에게 참관증을 발급했지?' 하지만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죄송하지만 신분을 밝혀줄 수 있겠습니까?" 안영진 대답은 기사단장의 예상 대로였다. "우린 카심 용병단의 소속원들이오. 들어봤는지 모르겠지만 드래곤 사냥만을 도맡아 하고 있다오." "아. 그랬군요. 혁혁한 명성 많이 들어왔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기사단장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사실이 확인된 이상 이젠 어떻게 해서든 저들을 회유해야 할 때였다. 이미 무력(武力)으로 회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에게 남 은 것은 최대한 정중하게 대해서 호감을 사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소 드 마스터와 데스 나이트가 대결을 마쳤다. 실컷 싸웠는지 접전을 멈추고 물 러나는 둘을 힐끔 쳐다본 기사단장은 은근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원하신다면 더 넓고 시설이 잘 된 연무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곳은 저들 정도의 실력자가 싸우기에 비좁은 것 같군요." "아니 괜찮소." 노인은 딱 잘라 거절했다. "우린 단지 검술교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대련을 벌이는 것뿐이라오. 땀 을 충분히 흘렸으니 기분이 다소 풀렸을 터. 이젠 갈 길을 가야지." 노인의 말에 다급해진 것은 오히려 기사단장이었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56회. 어떻게 해서든 이들을 머물게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쉬지 않고 질문을 퍼 부었다. "데스 나이트의 실력이 정말 놀랍습니다. 저런 실력자들을 어떻게 구하셨습니 까?" "저들은 바로 500년 전 멸망한 이카롯트 제국의 4대 기사들이라오. 드래곤에 대한 불타는 복수심으로 데스 나이트가 될 것을 자청한 것이지." 거기까지는 이미 각 왕국의 정보망에 알려진 사실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사단장의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런데 저 소드 마스터도 귀 용병단의 일원입니까? 정말 실력이 대단하군요." 그의 말이 이어지자 노인의 눈에 강렬한 빛이 일어났다. "지금 날 놀리는 거요?"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찔끔한 기사단장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무슨 말실수 를 했는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한 마디 로 신랄한 추궁에 가까웠다. "흐흐흐. 대 펜슬럿의 근위기사 단장이라면 데스 나이트 넷이 덤벼도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을 테니 굳이 위로해줄 필요는 없소. 우린 우리 처지를 누구보 다 잘 알고 있으니까." "저,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카심 용병단의 위명은 전 대륙에 쩌 렁쩌렁하게 퍼져있는 상태입니다." 영문을 모르는 기사단장은 쩔쩔 매며 변명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모르지만 일단은 노인을 진정시켜야 했다. 그의 노력이 통했는지 노인은 오래지 않아 안색을 풀었다. "솔직히 난 심사가 그리 편하지 않소. 거의 폭발할 지경이지만 당신의 얼굴을 보아 참겠소. 게다가 우리 검술교관이 단단히 당부한 말이 있으니……." "무엇 때문에 노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기사단장이 조심스럽게 연유를 물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노인은 느릿하 게 손을 들어 저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 데스 나이트와 혈투를 벌이던 소드 마스터가 나무등걸에 앉아 쉬고 있었다. 투구를 쓴 상태였기 때 문에 용모나 나이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저 기사가 누군지 혹시 짐작하시겠소?" 기사단장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혹시 귀 용병단의 검술교관이 아닙니까?" "맞소. 그럼 당신은 저 기사의 실력에 대해 어떻게 느꼈소?" 기사단장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엄청난 실력을 가진 기사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펜슬럿의 근위기사들 중 에서도 저 기사와 맞서 싸울만한 기사는 몇 명 되지 않을 것 같군요." 물론 상대의 기분을 띄워주기 위한 아부성 발언에 가까웠지만 어느 정도는 사 실이었다. 펜슬럿 근위기사들 중 소드 마스터는 도합 서른 둘 뿐이었고 그들 말고는 아무도 저 자와 맞서 싸우지 못했다. 소드 마스터와 싸울 수 있는 자는 오직 소드 마스터뿐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 말에 또다시 심기가 상했는지 얼굴에 노기를 짙게 떠올렸다. "계속 날 놀릴 생각이오?" "아, 아닙니다." "자격미달로 근위기사단 자격심사조차도 받지 못하게 해 놓고 이제 와서 띄워 주니 도대체 나더러 어느 장단에 맞추란 말이오?" 기사단장에겐 말 그대로 뚱딴지같은 소리일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 소드 마 스터가 뭐가 아쉬워서 자격심사를 신청할 것이며 게다가 자격미달이라니… …. "죄송하지만 자세한 정황을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전 도저히 이해를……." "내가 한 말은 모두가 사실이오. 우리 검술교관은 오래 전부터 펜슬럿의 근위 기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소. 용병단에 남아달라고 아무리 회유해도 소용없었지. 그 때문에 우리 용병단 전체가 이리로 오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오." "………." "바로 어제, 검술교관은 이곳을 찾아와서 자격심사 신청서를 제출했소. 귀국 의 근위기사가 되기 위해서 말이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신청서가 보기 좋게 반려되었소.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실력미달 때문에 탈락한 것으로 알고 있소." 얼마나 놀랐는지 기사단장은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생각 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그건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소드 마스터라면 굳이 자격심사를 받을 필요도 없는데 어찌?" "어쨌든 검술교관이 떠나가지 않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우리 용병단으로써 는 무척 잘 된 일이오. 하지만 문제는……." 노인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기사단장을 쳐다보았다. "우리의 실추된 자존심이라오. 검술교관은 우리 용병단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 할을 맡고 있소. 데스 나이트와 더불어 드래곤의 목숨을 끊는 일을 도맡아하 고 있으니 말이오. 게다가 그는 우리 대원들에게 검술을 가르치고 있소. 다시 말해 우리 중 최고의 검술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지. 그런데 말이오." 감정이 격양되었는지 노인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우리 검술교관이 어째서 자격심사조차 받을 자격이 없는 거요? 그래도 명색 이 소드 마스터 아니오? 그러고 보니 귀국의 근위기사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랜드 소드 마스터로 채워져 있겠구려? 그렇지 않고서야 소드 마스터가 자격 심사에 탈락할 이유가 없지 않소?" 기사단장은 어찌 해야 할 바를 몰랐다. 상대의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책임지고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이만 노여움 을 푸십시오." "풀고 자시고 할게 어디 있소. 기가 막혔는지 검술교관이 탈락사유를 아예 문 서로 받아왔소이다. 심사를 한 자가 자필로 작성한 것이니 조사해 볼 필요조 차 없을 것이오." 그 말에 기사단장의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도, 도대체 누가 그를 심사했답니까?" "잘 기억나지 않소. 대충 듣기로 귀국의 근위기사단 부단장이라고 하던데, 이 름이……." "알겠습니다. 지금 즉시 알아보겠습니다." 기사단장은 가까스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아무래도 이것은 부단장인 라일리를 불러 추궁해본 뒤 결정해야 할 사안 같았다. 급히 몸을 돌리려던 기 사단장은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해보시오." "귀 용병단의 검술교관께서 왜 펜슬럿의 근위기사가 되려하는지 혹시 이유를 아십니까?" "잘은 모르지만 교관 아버지의 당부 때문이라고 들었소. 그의 아버지가 과거 이곳의 근위기사였다고 하던데……." 그 말에 기사단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검술교관의 아버지가 펜슬럿의 근위 기사였다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평기사로 시작해서 각고의 노력 끝에 기사단장까지 오른 그가 아니었던가? "혹시 그분의 이름을 아십니까?" 거듭되는 질문에 짜증이 난 듯 노인은 역정을 부렸다. "검술교관을 불러 직접 물어 보시구려." "아, 알겠습니다." 잠시 후 밝혀질 일이라서 기사단장은 다급하게 몸을 날렸다. 그에게 가장 급 한 것은 라일리에게 어떻게 된 연유인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펜슬럿 국왕에게 다가간 기사단장은 둘 사이에 오간 대화를 낱낱이 고했다. 그 말을 들은 국왕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런 일이 있었다니……."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의문을 풀어줄 자는 오직 부단장인 라일리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위기사들이 모두 출동한 상 황이었기 때문에 부단장인 그도 단단히 무장을 하고 나와있는 상태였다. 돌아 가는 상황을 깨달았는지 라일리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기사단장이 날 카로운 눈빛으로 추궁을 시작했다. "프리즈먼 부단장.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그, 그게……." 라일리로써는 눈앞이 깜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출동 명령이 떨어졌을 때부터 기분이 조금 이상했는데 이곳에 와보니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헤일즈의 아들이 설마 그 유명한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었다니. 머뭇거리며 쉽 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라일리의 태도에 기사단장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 다. "어허! 감히 국왕 전하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을 셈이오?" 묵묵히 지켜보던 펜슬럿 국왕이 둘 사이에 개입했다. "잠깐 기다리시오. 카르수스 공. 아무래도 그 용병단의 검술교관을 불러 자세 한 연유를 물어보는 것이 나을 듯 싶소." "탁월하신 판단이십니다. 전하."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대질심문이 가장 확실했기 때문에 기사단장은 즉 시 몸을 돌렸다. 그러기 전 그는 부관에게 눈짓으로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라 일리가 도주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지키라는 지시였다. 미첼은 곧 펜슬럿 국왕 앞으로 안내되었다. 확실한 효과를 위해 데이몬이 동 행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만약을 위해서인지 국왕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춘 기사단장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미첼을 쳐다보았다. 과거 근위기 사였다는 자의 아들이라 생각하니 결코 외인(外人)으로 생각되지 않았던 모양 이었다. "투구를 좀 벗어보시겠소?" "알겠습니다." 미첼은 묵묵히 투구를 벗어들었다. 순간 근위 기사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드러난 미첼의 얼굴이 너무나 젊었기 때문이었다. 결코 서른이 되어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세, 세상에 저렇게 젊은 자가 소드 마스터라니……." 기사단장도 적이 놀랐다. 펜슬럿 근위기사단의 소드 마스터들은 하나같이 장 년, 아니면 중년이었다. 기사단장 역시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었다. 혹시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외모를 가진 자가 아닐까 해서 기사 단장은 나이를 물어보았다.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오?" "올해로 정확히 스물 여섯입니다." "파, 팔목을 잠시 만져봐도 되겠소?" 미첼은 아무 머뭇거림 없이 팔을 내밀었다. 기사단장이 뭘 하려 하는지 잘 알 고 있기 때문이다. 소드 마스터들, 특히 일국의 기사단장을 맡을 정도의 기사 라면 능히 마나의 종류를 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익힌 마나연공법이 펜슬럿의 것인지를 감별하려는 것이다. "트, 틀림없군. 이것은 분명히 펜슬럿 고유의 연공법으로 생성된 마나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근위 기사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갔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기사단장의 중얼거림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까지 펜슬럿의 기사들 중에서 30대 이전에 소드 마스터가 된 경우는 단 하나 도 없었다. 그들은 바야흐로 새로운 역사가 써지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것 이다. '세상에 자질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저 나이에 소드 마스터라면 어쩌면 그랜드 마스터 급도 가능하겠군.'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 기사단장이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아버님의 존함을 가르쳐주시겠소?" 나지막하지만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미첼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 다. "아버님께서는 헤일즈 브루노란 이름으로 불리십니다. 전 그 분의 외아들인 미첼 브루노라고 합니다." 기사단장은 돌연 손뼉을 쳤다. 태도를 보니 헤일즈를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지. 헤일즈가 아니고서야 누가 이런 기사를 키울 수 있겠나?" "아버님을 아십니까?" 기사단장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에 헤일즈가 속해 있던 분대를 지휘했었소. 당시 내가 분대장이었으니 헤일즈에겐 직속상관이라 볼 수 있지. 정말 과묵하고 책임감 있는 기사였는데 하필이면 그 일 때문에……." 기사단장은 말꼬리를 슬며시 흘렸다. 나머지 말은 결코 흘려서는 안될 비사였 다. "이럴 게 아니라 국왕전하께 갑시다. 전하를 뵙고 직접 말씀드리는 편이 나을 것 같소." 헤일즈의 아들이라면 믿을 수 있겠다 싶었는지 기사단장은 미첼의 손을 잡아 끌고 국왕에게로 향했다. 데이몬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57회. 오늘은 오랜만에 연참하겠습니다.^^ *************************************************************************** "전하. 그는 과거 근위 기사단의 일원이었던 헤일즈 브루노의 아들이라고 하옵 니다." "오오. 그렇소?" 펜슬럿 국왕은 유난히 반갑게 미첼을 맞았다. 어떻게 해서든 카심 용병단을 회 유하려고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다. 용병단의 검술교관이 과거 펜슬럿 근위기사 의 아들이라면 그에게 더 이상 반가운 일이 없었다. 쉽게 말해서 다른 왕국에 앞서 확실하게 카심 용병단을 회유할 고지를 점령한 셈이다. 국왕을 대면한 미 첼이 공손히 예를 올렸다. "국왕 전하를 뵈옵니다." "만나서 반갑소. 이렇게 찾아와 줘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오." 펜슬럿 국왕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연했다. 그 모습을 본 기사단장이 때를 놓칠 세라 못을 박았다. "그는 아버지의 당부에 의해 펜슬럿의 근위기사가 되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하 옵니다. 근위기사직을 떠났어도 충성심이 남아있다니 이것은 정말 전하의 인자 하심에 의한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오. 정말 기쁜 일이지. 암 그렇고 말고." 묵묵히 그 말을 듣고 있던 미첼이 고즈넉이 입을 열었다. 꾸며놓은 말이 술술 풀려 나오는 것을 보니 자질이 일급 배우 뺨칠 정도였다. "비록 몸은 떠나오셨지만 아버님의 마음만은 한시도 펜슬럿을 떠난 적이 없사 옵니다. 절 교육시키는 와중에도 아버님께서는 항상 강조하셨습니다. '부디 내 가 못 다한 충성을 네가 맡아 다하도록 해라. 그래야만 국왕전하께서 베풀어주 신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 전 대륙을 떠도는 동안 그 말씀을 단 한 순 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만약 카르셀에 있는 헤일즈가 듣는다면 눈이 뒤집힐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펜슬 럿에 환멸감을 느끼고 떠난 그가 어찌 그런 말을 했겠는가. 하지만 듣고 있는 펜슬럿 요인들의 얼굴에는 감격의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바야흐로 대를 이 어 충성하는 충신이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카심 용병단과 약속한 1년이 지난 후 전 아버님의 말씀을 이행하기 위해 이곳 에 찾아왔습니다. 아버님의 뒤를 이어 전하께 충성을 바치기 위해서였습니다 ." 그 말을 들은 기사단장은 바짝 긴장했다. 조금 전 들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 다. 그의 예상대로 미첼의 얼굴이 갑자기 착잡해졌다. 이미 그는 얼굴 표정까지 마음대로 바꾸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하지만 전 아버님의 말씀을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애석하게도 실력미달로 인 해 자격심사조차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착오인 것 같소. 당신 정도의 기사에게 자격심사 따윈 필요 없소." 기사단장이 급히 손을 내저었지만 미첼은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품속에 들 어갔다 나온 미첼의 손에는 문서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부단장인 프리즈먼 경께서 직접 서명하신 문서입니다. 제 신청서가 왜 반려되 었는지 그 이유가 낱낱이 적혀 있습니다." "어, 어디 한 번 봅시다." 문서를 받아든 기사단장은 재빨리 읽어보았다. 곧 노성이 터져 나왔다. "인물과 검술실력, 용모 등 모든 면에서 기준에 미달한다니 라일리 부단장! 당 신 도대체 정신이 있는 사람이오, 없는 사람이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망발을 거침없이 문서로 작성할 수 있다는 말이오. 필적을 보니 당신의 것이 분 명한 터.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필경 엄중한 추궁을 각오해야 할거요." 기사단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여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라일리에게로 집중되었다.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라일리의 얼굴은 이미 시 커멓게 죽어 있었다. 다리를 후들후들 떠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실신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미쳤지.' 어제의 결정을 수없이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런 순간에 직면 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문서 내용이 어땠는지 펜슬럿 국왕도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짐에게 문서를 한 번 줘보시겠소." 근위기사를 통해 문서를 받아든 국왕의 입에서 어처구니없다는 말투가 흘러나 왔다. "이게 정말 말이나 되는 소린가? 대를 이어 충성하려는, 그것도 이토록 젊은 나 이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훌륭한 기사가 기준 미달이라는 것은 짐의 상 식으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 그렇고 말고……." 노기 띤 표정으로 라일리를 한 번 쏘아본 국왕은 기사단장을 불렀다. "카르수스 공. 공에게 이 일에 대한 조사를 일임하겠소. 라일리 부단장이 어찌 하여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공께서 책임지고 확실하게 밝혀내도록 하시오." "어김없이 봉행하겠나이다." 내친 김에 국왕은 허리춤에 찬 홀까지 풀어 건네주었다. 분노한 카심 용병단을 달래기 위해 그는 최대한의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어명이오. 기사단장의 조사에 그 누구라도 협조를 아끼지 않아야 하오. 방해하는 자가 있을 시에는 가차없이 역적으로 간주될 것이오." 그 말을 들은 라일리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어명까지 떨어졌으니 그의 가문은 더 이상 방패막이 되어줄 수 없었다. 아무리 명문 가문이라도 어명만은 거역하 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그는 꼼짝없이 처벌받을 순간만을 기다려야 했다. 곧 기사단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펜슬럿 근위기사단 단장의 권한으로 프리즈먼 가문의 라일리에게서 부단장 직 위를 박탈한다. 죄인의 신분이 된 그를 지금 즉시 투옥하고 그 누구와도 접촉하 지 못하게 하라." "알겠습니다." 근위 기사들이 달려들어 라일리를 체포했다.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사색이 된 라일리를 쏘아본 기사단장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급한 일을 처리했으니 이젠 미첼을 달래야 할 차례였다. "보시다시피 이번 문제는 우리 쪽의 착오로 드러났소. 죄를 저지른 라일리 프리 즈먼을 법에 따라 엄중하게 처벌할 것이니 이만 마음을 푸시기 바라오." "현명하신 판단에 감사 드립니다." 기사단장은 때를 놓칠세라 재심사를 권유했다. "소드 마스터인 이상 심사를 받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굳이 받길 원하신다면 지 금 당장 재심사를 실시하겠소. 더 이상의 실수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기사단 장인 내가 직접 심사하겠소." 미첼은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고마운 말씀이지만 한 발 늦었습니다. 전 이미 카심 용병단의 입단서에 서명을 마친 상태입니다.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제겐 택할 길이 그것밖에 없었 습니다." "미, 미첼. 아버님의 당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오. 기사단장은 필사적으로 미첼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그는 곧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전 이미 기사로써의 서약을 마쳤습니다. 그게 어떤 것인지 단장님께선 누구보 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기사로써의 서약. 그것은 바로 목숨보다 소중한 명예와 직결된 것이었다. 물론 한낱 용병단에 적용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지만 기사단장에게 그들은 결코 평범 한 용병단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설득이 불가능함을 직감한 기사단장은 끌려 나가는 라일리를 다시 한 번 쏘아보았다. '빌어먹을 자식.' 펜슬럿을 끝없이 부강하게 만들 수 있는 순간이 라일리 하나 때문에 무산되려 하는 것이다. 묵묵히 듣고 있던 데이몬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이제 누가 뭐래도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오. 용병단이 해체되는 순간까지 그는 우리와 함께 드래곤 사냥을 해 나갈 것이오." "………." "원래 난 펜슬럿이란 국가에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소. 검술교관이 대를 이 어 충성을 맹세할 정도의 국가라면 충분히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지." 말을 마친 데이몬은 죽 늘어선 펜슬럿 요인들을 느릿하게 둘러보았다. "우리 용병단이 비록 소수정예이긴 하지만 병력의 필요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 니오. 그러므로 우린 진작부터 강대국과 손을 잡을 생각을 하고 있었고 때마침 검술교관이 펜슬럿으로 떠난다고 해서 우리도 함께 동행했소. 펜슬럿 정도의 강대국과 협력할 수 있다면 서로가 좋은 일이라 생각했던 거지." 사람들은 묵묵히 데이몬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들은 우리 검술교관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엄청난 모욕만 주 었소. 비록 일개 용병단이라고는 하지만 우린 실력만큼은 최고라고 자부하오. 그런 우리의 검술교관이 근위기사 자격심사조차 받지 못한다니 우리에겐 실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소." "그, 그것은 모두 착오입니다." 기사단장으로써는 오로지 착오라는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말에 하나도 틀린 점이 없는 데다 잘못은 모두 라일리가 저지른 일 뿐이었다. 데이몬 은 냉정하게 말을 맺었다. "그의 자격심사가 반려된 이상 펜슬럿과 우리의 인연은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 오." 짧게 내뱉은 데이몬은 느릿하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데스 나이트들이 서 있는 쪽의 공간이 활짝 열리며 그 속에서 뭔가 거대한 것이 솟구쳤다. 완벽한 마무리 를 위해 인크레시아에서 본 드래곤들을 꺼낸 것이다. 콰루루루. 괴성과 함께 육중한 몸체를 드러낸 두 마리의 본 드래곤은 날개를 퍼득이며 연 무장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한 연출이었는데 효과는 확실했 다. "보, 본 드래곤이야." "엄청나게 크군." 근위기사들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번져 가는 것을 간파한 데이몬은 속으로 냉 소를 쳤다. '크크크. 이 정도면 섣불리 덤벼들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병력의 우위는 펜슬럿에 있다. 최악의 경우 순순히 보내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데이몬은 암암리에 무력시위를 계획한 것이다. "우린 가겠소. 떠나는데 혹시라도 이의가 있소?" 카르수스 기사단장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그랜드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 넷과 두 마리의 본 드래곤이 상대라면 펜슬럿이 보유한 모든 병력을 쏟아 부어 도 섣불리 승산을 점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근위기사단 전체가 몰살할 수도 있는 문제였고 무의미한 일에 병력을 소모하는 일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었기에 그는 오래지 않아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떠나시는 것을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 미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떠나시는 것을 잠시만 보류해 주시겠습니까?"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소." 데이몬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사단장은 착잡한 안색으로 미첼에게 다가왔다. 공 적이 아닌, 사적으로 옛 부하의 아들을 대한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이례적으로 하대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 유감일세. 모든 게 내 불찰이야. 그러니 이번 일에 대해 서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었으면 하네. 프리즈먼의 추궁은 내 명예를 걸고 행하겠네." 미첼 역시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아버지의 상관이었던 이에게 함부로 할 수 없 는 노릇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을 보니 기사단장은 라일리와는 비 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인품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미첼은 이미 그에게 짙은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음 써 주신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비록 떠날지언정 영원히 펜슬럿 과 단장님을 잊지 않겠습니다." 미첼의 진심을 느꼈는지 단장의 얼굴에서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돌연 음성을 낮췄다. 미첼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낮게 속삭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네에게 한 가지 더 약속할 것이 있네." "………." "자네 아버지가 떠나게 된 사연에 대해 난 잘 알고 있네. 분대장으로써 직속 부 하의 일을 모른다면 말이 되지 않겠지? 당시 난 상당히 안타까웠지. 헤일즈의 정직한 성품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의 결백을 믿었다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일대 분대장에 불과했던 내가 막강한 프리즈먼 가문의 압력에 정면으 로 맞설 수는 없었으니까……." 미첼은 깜짝 놀랐다. 의외로 기사단장이 아버지의 일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미 어명까지 내려진 마당이니 이참에 자네 아버지의 일까지 함께 파헤칠 생 각이네. 이미 난 근위기사들을 보내 당시 증인들의 신병을 확보하도록 조처했 네. 헤일즈가 그토록 펜슬럿에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니……. 지금 난 부하의 명예를 지켜주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네. 그리고 기사단 장이 되고 나서도 그 일을 묻어둔 것이 정말 후회스럽다네. 그러니 펜슬럿의 근 위기사단장으로써 반드시 자네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킬 것을 약속하겠네." 기사단장의 진지한 얼굴을 쳐다보던 미첼의 가슴속에는 뭔가 뭉클한 것이 치밀 어 올랐다. 드디어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할 길이 열린 것이다. 카르셀에 있는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누구보다도 기뻐할 것이 분명했다. "저, 정말 고맙습니다. 기사단장님의 은혜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는 미첼을 보던 기사단장의 얼굴에도 후련하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58회.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조금 일찍 올립니다.^^ ************************************************************************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해야 할 말을 떠올린 그의 얼굴에 착잡한 빛이 감돌았다. "미안하지만 자네에게 부탁이 하나 있네." "말씀하십시오." "호, 혹시라도 카심 용병단이 다른 왕국과 손을 잡게 될 경우 말일세. 그, 그럴 경우 그 왕국에서 우리 펜슬럿을 침공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부디 자네가 그것을 마, 막아 줄 수 있겠나?" 기사단장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옛 부하의 아들에게 이런 부 탁을 해야 하는 것이 여간 부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펜슬럿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을 떠올린 기사단장은 열과 성의를 다해 미첼을 설득했다. 그의 내심 을 알아차린 미첼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마십시오. 펜슬럿은 다름 아닌 제 아버님의 조국입니다. 그리고 전 이미 단장님의 인품에 깊이 감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가 펜슬럿에 검을 겨눌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없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단장 님께서 말씀하신 일이 생길 경우 제가 목숨을 걸고라도 막겠습니다." 기사단장의 얼굴이 확 펴졌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미첼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저, 정말 고마우이." 묵묵히 듣고 있던 데이몬이 심드렁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 미첼의 위상을 띄워 주고 라일리에 대한 처벌을 확실하게 마무리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이미 그는 입단 조건으로 그 문제를 확답 받은 상태라오. 그 것을 약속하지 않으면 절대로 가입하지 않겠다고 하길래 어쩔 수 없이 허락했 소." "………." "앞으로 카심 용병단은 펜슬럿을 적대하지 않을 것이오. 또한 귀국의 기사나 병 사를 살상하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없을 것이오. 검술교관 미첼과 맺은 약속 에 의해서." 칠종단금술의 제약을 받고 있는 까닭에 데이몬은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무 거리낌없이 약속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 약속이 펜슬럿 국왕에게 미친 여파는 지대했다. 정복욕이 그리 강하 지 않은 펜슬럿 국왕에겐 말 그대로 가장 우려했던 문제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 문제만 해결된다면 그에게 카심 용병단이란 힘이 별달리 필요가 없 었다. 상대가 크로센 제국이 아닌 이상 펜슬럿에 위협을 가할 힘을 가진 왕국은 없었으므로. 물론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 당사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기사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선 펜슬럿 국왕은 미첼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펜슬럿의 안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그대의 노고는 짐이 영원히 잊지 않 을 것이다. 그 보답으로 그대에게 작위를 하사하는 바이며 펜슬럿에 돌아올 경 우 언제든지 효력을 발할 것을 약속한다." 눈치 빠른 기사단장이 허릿춤의 검을 뽑아든 뒤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쳐들었다. 검을 받아든 펜슬럿 국왕은 미첼에게 다가갔다. "무릎을 꿇으시오." 기사단장의 말이 떨어지자 미첼은 즉시 한 쪽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펜슬럿 국왕은 검을 들어 미첼의 양어깨에다 차례로 대었다. "그대에게 남작의 작위를 내리겠다. 비록 지금은 높지 않은 작위이지만 그대가 펜슬럿으로 돌아올 경우 그에 어울리는 작위와 영지를 하사할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대에게 일체의 심사를 받지 않고 근위기사단의 일원이 될 수 있는 특혜 역시 약속하겠다." 국왕의 말에는 반드시 펜슬럿으로 돌아오라는 간접적인 권유가 깃들어있었다. 솔직히 그에게 소드 마스터 한 명이 탐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소드 마스터는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수백 명의 팔라딘 중 극 소수만 소드 마스터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미첼처럼 젊은 나이 에 소드 마스터가 된 자라면 말 그대로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탐나 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 기색을 눈치채지 못할 미첼이 아니었다. "전하의 은혜에 심히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용병단의 사명이 끝난다면 전하 의 후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반드시 펜슬럿으로 돌아오겠나이다." 어릴 때부터 엄히 교육받은 탓에 미첼의 태도는 예의에 한치도 어긋나지 않았 다. 국왕은 흡족한 표정으로 검을 다시 기사단장에게 건네주었다. "미첼 남작. 경의 활약을 주시하겠소. 앞으로 카심 용병단의 일원으로써 명성을 사해에 떨치길 바라며 언제 어느 자리에서도 경이 누구인지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오." "전하의 말씀. 각골 명심하겠나이다." "그럼 떠나도록 하시오. 내 근위병들로 하여금 그대들을 환송하도록 하겠소." 말을 마친 국왕은 몸을 돌렸다. 펜슬럿에 가해질 위험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기사단장이 미소 띤 얼굴로 다가왔다. "근위병들을 시켜 환송식을 열어드리겠습니다. 부디 앞으로 많은 드래곤을 사 냥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소이다." 데이몬은 다소 공손해진 태도로 그를 맞았다. 그 역시 기사단장인 카르수스 공 작의 태도에 상당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실력에서 인품, 충성심까지 한 나라의 근위기사 단장으로써 부족함이 없군.' 구태여 이목을 끌어 모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조용히 떠나기로 마 음먹었다. "우린 먼 곳으로 떠날 계획이오. 때문에 본 드래곤에 타고 이동하겠소이다. 대 신 기사단장의 호의에는 감사를 표하는 바요." "무슨 말씀을……. 부근을 지나실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들러주십시오." "그러지요." 일(?)을 마친 용병들은 하나 둘씩 본 드래곤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타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주저하지 않았다. 단 한사람만 빼고 말이다. 카트로이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데이몬에게 다가왔다. "난 타고싶은 생각이 없다. 이런 저주받은 마물에 몸을 싣는다는 것은 도저히 자존심이 용납지 않아." 데이몬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럼 알아서 따라와." "그렇게 하겠다." 많은 근위병들 앞에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카트로이는 말없이 비행마 법을 캐스팅했다. "에이비에이션(Aviation)." 주문영창이 끝나자마자 그의 몸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하늘로 치솟았다. 그 모 습을 데이몬은 혀를 끌끌 차며 지켜보았다. "쯔쯔. 꼴에 드래곤이라고 동족의 시체를 타고 싶진 않나 보군."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기사단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자 데이몬의 머릿속엔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 되었다. "혹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구려. 저 녀석은 바로 레이토나에서 사로잡은 화이 트 드래곤이라오. 몸값을 받았기 때문에 목숨만은 살려주었지. 사실 웜 급밖에 안 되는 드래곤은 거의 쓸모가 없소. 때문에 본 드래곤을 만드는 것도 아까워서 그냥 끌고 다니고 있지. 쯔쯔. 약해빠진 녀석이 자존심만 강해 가지고……. " "………." "데리고 다니다 까불면 확 없애버릴 생각이라오. " 기사단장은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웜 급에 이른 드래곤을 사로잡은 것도 놀라운데 그것도 모자라 강제로 끌고 다니다니……. 그는 겨우 이 말만을 내뱉을 수 있었다. "저, 정말 대단하십니다." 데이몬은 본 드래곤에 오르며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대단할 거 없소. 드래곤은 잘만 상대하면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본 드래곤이 날개를 퍼덕이기 시작했다. 늘어선 근위 기사들이 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릴 정도로 강한 날개짓이었다. 콰루루루루. 두 마리의 본 드래곤은 기성을 내지르며 비상하기 시작했다. 10여 명의 인간들 을 태우고도 전혀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지 본 드래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삽시간에 두 개의 점이 되어 사라지는 카심 용병단을 기사단장을 비롯한 펜슬 럿 근위기사들은 말없이 올려다볼 뿐이었다. 한참만에 기사단장이 탄성을 내뱉 었다. "후. 정말 대단한 용병단이로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던 기사단장은 문득 뭔가가 생각났는지 늘어선 근위 기사 들을 죽 둘러보았다. 행여나 근위기사들의 머릿속에서 자라날 지도 모르는 허 황된 생각을 지워야만 했다. "저들 말대로 방법만 잘 알면 드래곤을 사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것은 오로지 저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지금껏 무수한 기사들이 드래곤을 사냥하겠다고 떠났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오늘 의 일 때문에 드래곤을 얕보고 덤비거나 사냥을 나서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없어야 한다. 알겠는가?" "넷." 기사들이 입을 모아 복명하자 단장은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헤일즈가 있는 곳을 물어보지 못한 점이 조금 아쉽군. 오랜만에 그를 만나 회 포를 풀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말이야. 도대체 헤일즈가 아들을 어떻게 수 련시켰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군." 묵묵히 되뇌이는 기사단장의 머리 위로 구름이 유유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먼 곳에 가겠다는 말과는 달리 카심 용병단은 오래지 않아 대지에 발을 디뎌야 했다. 본 드래곤의 등판이 너무나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일행들 대부분이 마나 를 다스릴 수 있었기에 추위에 견디는 능력이 비약적으로 강해졌지만 단 한 사 람만은 예외였다. 율리아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계속 칭얼댔기 때문에 데 이몬은 용단을 내려야 했다. "추워서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골치 덩어리로군." 한숨을 내쉰 데이몬은 본 드래곤을 착륙시켰다. 어차피 다음 목적지가 인접한 테제로스 왕국이었으므로 걸어가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율리아나에게 마법을 걸어주면 어떨까 생각하던 데이몬은 곧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도 역시 하늘을 나는 것보다는 경치를 감상하며 유유자적 걸어가는 게 더 기꺼웠기 때 문이었다. 콰루루루. 본 드래곤 두 마리는 기성을 토해내며 대지에 안착했다. 제일 먼저 뛰어내린 데 이몬이 유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은 역시 땅을 밟고 살아야 한다니까." 율리아나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얼른 뛰어내렸다. "휴, 차라리 얼음 위에 앉는 것이 낫지." 1년 가까이 북부의 냉기를 들이마신 탓에 본 드래곤의 몸체는 한 마디로 냉기 덩어리 그 자체였다. 그의 뒤를 이어 용병들이 하나 둘씩 바닥에 내려섰다. 사 뿐히 착지하는 미첼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혀를 끌끌 찼다. "이 녀석아. 쓸개빠진 놈처럼 뭘 그렇게 헤실헤실 웃고 있는 거냐?" 미첼은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아버님의 명예가 회복될 것이라 생각하니 기뻐서 그렇습니다. 모처럼 효도를 해 드린 셈이 되었거든요." "허허. 그 녀석. 하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효심은 있군." "제가 원래 인간성이 좀 좋은 편이지요……아이쿠." 데이몬이 냅다 쥐어박으며 눈을 부라리자 미첼은 울상을 지으며 머리를 감싸안 았다. "갑자기 때리면 어떻게 합니까?" "실력만 는 줄 알았는데 넉살은 더욱 더 늘었군. 아무래도 실력이 주둥이로만 몰려버린 모양이야." 잠시 미첼을 노려보던 데이몬은 안색을 굳혔다. "좌우지간 잘 된 일이야. 그래도 네놈이 나중에 몸을 의탁할 곳이 생겨서 말이 야." 미첼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결코 카심 용병단을 떠날 마음이 없습니다." 데이몬은 슬며시 시선을 하늘에 던졌다. "트루베니아에 있는 드래곤을 모조리 잡는다면 우린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지겠 지. 물론 목적을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긴 하지만……." 말을 마친 데이몬은 용병들의 얼굴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만에 하나 드래곤 사냥을 하다가 내가 죽는다면 그 즉시 달아나서 용병단을 해 산해라. 데스 나이트와 본 드래곤이 가진 힘의 원천은 바로 나, 때문에 내가 죽 을 경우 그들의 생명 역시 사라진다. 그 때는 더 이상 드래곤 사냥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데이몬의 얼굴에는 어느새 착잡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번 문제를 무척 잘 처리했다고 생각한다. 미첼이 몸을 의탁할 곳 을 얻은 이상 나머지 녀석들 거취 문제도 차근차근 풀어나갈 생각이다." 그 말을 마치자마자 미첼의 강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있을 수 없는 얘기입니다. 만에 하나 데이몬이 불행한 일을 겪는다면 저 역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우린 생과 사를 함께 하는 동료입니다." 미첼의 말에 용병들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합니다."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는 날은 같아야 할 것입니다."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녀석들……." 따지고 보면 이들의 마음가짐은 수호마왕군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아르카디 아 대륙에서 또 다른 수호마왕군들이 탄생한 것이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59회. 중원에 있을 때 그와 수호마왕군의 관계 역시 이와 다름없었다. 정파 무림과의 혈전 동안 그는 수하들을 아꼈고 항상 배려해주었다. 단 한 명 의 수하라도 위기에 처할 경우 데이몬은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혼신의 노 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기를 10여 년, 데이몬은 마침내 그들의 진심 어린 충 성을 얻을 수 있었다. 최후의 순간 그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목숨을 초개같이 생각하며 몸을 던진 수호마왕군들 때문이었다. 그 일을 떠올리던 데 이몬의 눈가에는 회한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좌우지간 내가 한 말을 머릿속 깊이 새겨놓도록 해라.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다. 드래곤이란 너희들이 섣불리 복수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뭔가가 쏜살같이 날아와 데이몬의 옆에 안착했다. 먼저 출발한 카트로이였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녀석. 착륙하려면 미리 얘기라도 하던가……. 그건 그렇고 뭐가 복 수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거지?" 데이몬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검지를 들어 카트로이를 가리켰다. "이 녀석만 빼고……." 용병들 사이에서 폭소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 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긴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기를 쓰고 웃음 을 참는 용병들을 쳐다보며 카트로이는 연신 고개만 흔들 뿐이었다. 의문을 풀어줄 자는 오직 데이몬 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얘길 한 거지?" "알 필요 없어." 짧게 일축한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본 드래곤을 집어넣기 위해 인크레시아를 연 데이몬은 카심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대장. 다음 목적지는 어디야?"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 살펴본 카심은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테제로스를 거친 뒤 관도를 통해 레이토나로 곧장 갈 생각입니다. 그런 데……."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카심은 잠시 머뭇거렸다. "뭔가? 말해보게." "가는 길에 잠시 어디 한 군데 들르면 안되겠습니까? 제법 많은 거리를 돌아가 야 하기 때문에 말씀드리기가……." 말하기가 난처했는지 카심은 주뼛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곳이 어딘데?" "바, 바로 제 고향입니다." 카심의 말을 들은 데이몬은 추호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이 사람아. 자넨 명색이 카심 용병단의 대장 아닌가? 대장이 가자고 하는데 부하들이 안 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지 않은가?" 넌지시 동의를 구하자 용병들도 흔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하죠. 평소에 대장 고향이 어디인지 무척 궁금했었는데……." "고향이 어디인지 밝히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나보 죠?" 수다장이 패터슨이 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지만 카심의 눈에 순간적으로 애틋 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눈빛이 워낙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에 아무도 눈치채 지 못했다. "그래 자네 고향이 어딘가?" "아르네입니다. 펜슬럿 최남단에 위치한 아름다운 영지이지요. 전 그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대장의 고향이라니 기대되는군.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카심의 얼굴에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걸어서 가면 아마도 보름 이상 걸릴 겁니다. 펜슬럿에 속한 영지이긴 하지만 극히 변방이거든요." 보름 정도 걸린다는 말에 데이몬은 생각할 것도 없이 인크레시아를 닫았다. 그 정도 거리라면 본 드래곤을 타고 가는 것이 훨씬 나았다. 본 드래곤의 활강 속도를 감안하면 도착하는데 채 하루도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날아서 가도록 하지. 대장의 고향이니 며칠 머물러야 할 듯 싶으니 까……." "괘, 괜찮습니다. 잠시 시내만 둘러보면 될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 그곳에 살지 않는가?" 카심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부모님은 이미 오래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쯔쯔. 그것 안되었구먼." 고개를 내저은 데이몬은 잠자코 율리아나에게 다가갔다. 아까부터 그녀는 데 이몬의 모습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만 쳐다봐라. 계집애야. 얼굴 닳겠다." 율리아나는 지지 않겠다는 듯 냉소를 쳤다. "흥. 그 몰골에 닳아봐야 별 수 있으려구요? 차라리 그게 더 나을 수도 있겠 네?" "이놈의 계집애가?" "흥. 쳐봐요. 누가 무서울 줄 알고……." 당돌하기 그지없는 율리아나의 태도에 데이몬은 머릿속이 상당히 복잡해졌 다. "그만 두자. 너와 다퉈봐야 얻을 게 없으니까……. 마법을 걸어줄 테니 춥다고 칭얼거리지나 말아라." 그 말에 율리아나는 함박 웃음을 떠올렸다. "정말이에요?" 조금 전 냉랭하게 쏘아대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혀를 끌끌 차며 마나를 재배열했다. '조금만 관심을 보여줘도 이 모양이라니까.' 여자는 역시 요물이라는 생각을 되새긴 데이몬은 사납게 으름장을 놓았다. "징징거릴 경우 본 드래곤 위에서 사정보지 않고 집어던져 버릴 테니 각오해 라." "알겠어요." 데이몬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자. 출발하자." 용병들은 다시 본 드래곤에 탑승했다. 그 옆에서는 카트로이가 툴툴거리며 비 행마법을 캐스팅하고 있었다. "미친 놈. 이럴 걸 왜 내려왔어?" 콰루루루. 일행을 모두 태운 본 드래곤이 세차게 날개 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그 바람에 기껏 끌어 모아 놓은 마나가 흩어지자 카트로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헬 파이어를 한 방 먹여버리고 싶군." 하지만 그것을 생각만으로 끝내야 한다는 사실을 카트로이는 잘 알고 있었다. 본 드래곤에는 드래곤 하트에서 뽑아 올린 마나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대마법 방어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카트로이는 이미 사실을 이미 파악한 바 있었다. 헬 파이어 한 두 방 정도로는 끄떡도 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 하고 있는 것이다. "서둘러야겠군." 비행마법의 캐스팅을 마친 카트로이는 즉시 날아올랐다. 일행을 태운 본 드래 곤은 벌써 까마득한 점으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데이몬의 예상대로 아르네까지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정오 정도에 출발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음날 새벽에 아르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일행 모두가 차가운 본 드래곤의 등판에서 밤을 꼬박 새웠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데이몬은 본 드래곤을 인적이 드문 야산 부근에 착륙시켰다. 바짝 따 라왔기 때문에 카트로이는 이번에는 일행을 놓치지 않았다. "조금 피곤하군." 일행이 모두 내린 것을 확인한 데이몬은 인크레시아를 열어 본 드래곤을 집어 넣었다. 용병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시퍼렇게 얼어 있었다. 비록 기공을 익힌 상태였지만 얼음보다도 차가운 본 드래곤의 등판에서 꼬박 하루동안 버틴다 는 것은 정말 끔찍한 경험이었다. 저번과는 달리 데이몬이 일체 실드를 전개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세찬 바람을 맨몸으로 받아야 했다. "자고로 혹독한 환경은 수련에 최고의 조건이라 할 수 있지." 데이몬의 이런 터무니없는 논리 때문에 일행은 하나같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 마법의 힘으로 보호받은 때문에 충분히 자고 깨어난 율리아나만 멀쩡한 모습 을 보였다. "이곳인가? 대장." 데이몬의 질문에 카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먼저 여관에 투숙해서 쉬어야 할 것 같으니 제가 안내 하겠습니다." "그러게." 일행은 카심의 안내를 받으며 조용히 아르네 시가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선두에 서서 걸어가는 카심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수심이 깃들어있었다. 두리 번거리며 아르네의 정경을 살피는 모습에서는 초조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데이몬이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왜? 고향에 돌아오니 감회가 새로운가?" "솔직히 그런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불쑥 끼여든 패터슨의 말에 카심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뭐가 그리 궁금한가?" "대장의 과거 말입니다. 과연 이곳에서 대장이 무슨 일을 했을까? 평소에 그게 가장 궁금했거든요. 10년 가까이 함께 지내면서 단 한번도 밝힌 적이 없잖습 니까? 고향이 아르네란 것도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된 겁니다." 패터슨의 말에 호기심을 가진 이는 일행 전부였다. 데이몬마저 궁금해 못 견 디겠다는 표정으로 카심에게 과거를 밝힐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괜찮다면 사실을 알고 싶군." 쓴웃음을 지은 카심은 결국 과거에 대해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뭐 별 거 아닙니다. 전 원래 이곳의 영지 경비병이었지요. 한 3년 정도 근무했 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영지 경비병? 그렇다면 대우가 제법 괜찮았을 텐데 왜 힘든 용병의 길을 선택 했지?" "뭐 데이몬을 만나 드래곤 사냥을 하려고 그랬나 보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얼버무렸지만 데이몬은 용케도 카심의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가는 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큰 아픔을 겪은 자의 눈빛이었다. '대장에게 뭔가 밝히기 힘든 과거가 있나보군.' 뭔가 연유가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데이몬은 입을 다물었다. 굳이 비밀을 밝 히려 하는 것은 결코 데이몬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패터슨이 몇 가지 질문을 퍼부었지만 카심은 능구렁이처럼 은근슬쩍 넘겨버렸다. 아무래 도 그 방법으로 10년 동안 과거를 묻어버렸던 모양이었다. 어지간한 패터슨도 결국 두손두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후. 역시 대장에게는 못 당하겠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들은 어느새 아르네 성문 가까이 도착해 있었 다. 성문을 통과한 일행들은 아르네 시가지를 한 번 둘러보았다. 아르네는 상당히 아름다운 도시였다. 잘 정돈된 시가지가 더 없이 수려했고, 늘어선 건물의 모 양새를 보니 농경과 목축을 주축으로 하는 영지임을 알 수 있었다. 물건을 파 는 점포가 드문 것을 보니 상업은 그리 번창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데이몬 은 한 눈에 영지의 사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긴 외진 곳에 있으니 상업이 발달할 리가 없을 테지. 사람들의 표정이 밝은 것을 보니 살기가 그런 대로 좋은 것 같군." 아닌게 아니라 아르네는 상당히 풍족해 보이는 영지였다. 제법 큰 강이 성 바 로 옆을 지나가고 있었으니 물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데다 날씨가 따듯한 편 이었기 때문에 농경과 목축에는 더 없는 천혜조건을 가진 영지인 것이다. "한 마디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영지로군." 외부인이 잘 찾아오지 않는지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일행을 쳐다보 았다. 영지 대부분이 평야인 아르네에서 용병들의 일거리가 있을 턱이 없었 다. 치안이 잘 유지되는 펜슬럿에 속해 있고 몬스터들이 전반적으로 험준한 산악을 배경으로 활동하는 것을 감안하면 아르네에서 용병을 보기란 말 그대 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고용할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행들은 본의 아니게 사람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아야 했다. 데이몬 조차 사람들의 시선에 부담을 느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거야 원, 우리 안의 고블린도 아니고……. 대장.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 디 여관을 찾아 들어가자고." "그럴까요?" 카심은 일행을 데리고 시가지 중심부로 들어갔다. "아르네에는 여관이 하나밖에 없는 걸로 기억합니다. 여행자들이 찾아오는 일 이 무척 드물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을 되살리며 설명을 시작하던 카심이 채 말을 마치지 못했다. 그 들의 앞에 큼지막한 여관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파라다이스에 비견 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규모가 큰 여관이었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60회. 내일과 모래는 올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모임에서 야유회를 가거든요. 야유회 다녀온 뒤 연참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3연참까지 기대하셔도 될 듯 합니다. @도배 때문에 삭제하고 다시 올립니다. ******************************************************************* 새로 칠한 지붕과 벽을 보니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것을 쳐다보 며 카심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떠난 사이 생겼나 보군요. 장사가 잘 되진 않을 텐데……." "잘 되었군. 저곳에서 묵자고……. 난 지금 아르네의 요리가 어떤지 가장 궁금 하네." 몹시 시장했던 모양인지 데이몬은 거침없이 여관을 향해 다가갔다. 뭔가 말을 꺼낼 듯 말 듯 하던 카심은 곧 한숨을 내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아무래도 뭔가 꺼리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여행자신 것 같은데 아르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젊은 점원의 안내를 받은 일행은 제일 먼저 식당으로 향했다. 꼬박 하루동안 건 포만 먹어왔기 때문에 따뜻한 음식이 가장 그리웠다. 아직 식사시간이 되지 않 아서 그런지 식당 내부는 한산한 편이었다. 카심은 주문을 받으러 온 점원에게 말을 건넸다. "여기는 생긴지 얼마 되지 않는 모양이지?" 열 대여섯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어린 점원은 웃는 낯으로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대략 한 달쯤 전에 완성되어 영업을 시작했지요." "여행자들이 그리 많지 않은 아르네에서 과연 유지가 잘 될까?" 점원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르네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몇 번 들러본 적이 있지." 뜻밖에도 카심은 자신이 이곳 출신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일행들이 그 사 실을 이상하게 생각할 무렵 점원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이 여관은 영주님께서 직접 지으신 것이랍니다. 바로 내일 있을 행사 때 문이지요. 아마 그 행사를 치르고 나면 마을 회관으로 활용될 겁니다." "행사라니?" 아차 싶었는지 점원은 이마를 딱 쳤다. "참. 여행자시라 모르시겠군요. 아르네에는 성대한 잔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내일은 바로 영주님의 따님이 시집가시는 날이거든요. 관례에 따라 결혼식을 이곳에서 치러야 하기 때문에 이 건물을 지은 거랍니다. 신랑측 손님들이 묵어 야 할 숙소가 필요하거든요." "………." "여러분들은 때를 참 잘 맞춰 오신 것 같네요. 내일은 이곳에서 제공되는 음식 이 모두 무료랍니다." 말을 이어나가려는 점원은 깜짝 놀랐다. 상대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 었다. "소, 손님." 카심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여진 눈동자에는 경악의 빛이 가득했다. 마치 큰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어디 아프십니까?" "아닐세.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주문은 되었네. 그만 가보게." 점원은 이상하다는 듯 머리를 한 번 뒤흔들며 몸을 돌렸다. 카심은 딱딱하게 굳 은 표정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죄송하지만 자리를 옮기면 안되겠습니까?" 뭔가 곡절이 있는 것 같았기에 데이몬은 두말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하지." 그런데 일행이 막 나서려던 찰나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여관으로 들어섰다. 공 교롭게도 그들은 딱 마주쳤다. 순간 카심의 입에서 헛바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헉."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은 카심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외면하며 미첼의 뒤로 몸 을 숨기는 것을 보니 누군가를 꺼리는 것이 분명했다. 의아해진 데이몬은 마주 친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자는 화려한 복장을 하고 선두에 서 있는 젊은이였다. 제법 그럴 듯한 용모였지만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간 모습이 상당히 야비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 었다. 당시 결혼하는 신부의 나이가 평균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임을 감안하 면 상당히 나이가 든 신부라 할 수 있었다.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가 시종과 호 위병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아 제법 지체 높은 귀족의 행차인 것 같았 다. '카심이 도대체 누굴 겁내는 거지? 설마 이 젊은 녀석인가?' 손을 봐 줄까 말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젊은 여인의 교성이 울려 퍼졌다. "카심? 역시 당신이었군요." 여인의 음성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카심이 엉거주춤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 어 있었다. "마, 마틸다 아가씨." 여인의 아름다운 눈망울에는 쌍심지가 한껏 돋아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 와서 카심의 앞에 섰다. 영문을 몰랐기 때문에 일행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여인의 시선이 견디기 힘들었는지 카심은 몸 둘 바를 모르고 쩔쩔 매기만 했다. "결국 돌아왔군요. 카심." "그, 그렇습니다. 아가씨." "비겁한 사람. 남자가 그렇게 용기가 없어요? 그러고도 당신이 남자라고 할 수 있나요?" "………." "당신 같은 사람을 10년 가까이 기다린 날 도저히 용납할 수 없군요. 도대체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될 정도예요." "아, 아가씨." "어차피 잘 된 일이에요. 늦었지만 내 위치를 찾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지금 의 난 10년 전의 철부지 마틸다가 아니에요.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모르지만 지 금 당장 아르네 영지에서 떠나주기 바래요." 할 말을 마친 듯 여인은 냉랭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이 반대쪽 으로 걸어갔다. 당혹한 기색으로 서 있는 청년에게 한 마디 던진 채. "저 먼저 가겠어요. 저자를 보니 식욕이 딱 떨어졌군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카심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곧이어 청년이 다 가와 카심에게 말을 걸었다. 귀족 신분인지 그는 대뜸 하대를 했다. "자네가 말로만 들었던 그 카심이로군." "………." "소문이 자자했었지. 마틸다 양의 마음을 빼앗아간 경비병이라……. 언젠가 한 번 꼭 만나보고 싶었지." 청년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런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그녀는 이제 내 약혼녀가 되었거든. 우린 내일 성대한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야. 그러니 결혼식에 부디 자네가 참석해 주었으 면 하네. 그래야만 내 약혼녀가 쓸데없는 과거 따윌 기억에서 깡그리 지워버릴 수 있을 것 같네." 말을 마친 청년은 시종에게 손짓을 했다. "이 자에게 초청장을 주도록……." 시종이 다가와서 카심에게 초청장을 내밀었다. 말없이 받아드는 손이 부들부 들 떨리는 것을 보니 적지 않게 충격을 받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무나 초청하는 장소가 아니니 감사히 생각해야 하네. 초청장 한 장으로 두 명만 참석할 수 있으니 잘 생각해 보도록……. 후후후후." 냉소를 터뜨린 청년은 냉랭히 몸을 돌렸다. 야비하게 생긴 인상에 너무도 걸맞 는 행동이었다. 보다못한 미첼이 주먹을 불끈 쥐고 앞으로 나섰다. "이런 빌어먹을……." 저 건방진 녀석을 흠씬 두들겨 패 줘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카심이 묵묵 히 손을 뻗어 미첼을 제지했다. "그만 내버려두게. 미첼." "그, 그래도……." "부탁일세." 카심의 간곡한 부탁에 미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짧은 시간에 마음을 정리한 듯 카심은 일행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된 마당에 굳이 떠날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그럼 모두들 들어가서 식 사를 하도록 하지요." 말을 마친 카심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일행은 묵묵히 뒤를 따랐 다. 식사를 주문한 뒤 일행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카심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무도 그럴 엄두를 내지 않았다.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 마냥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카심에게 도저히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요리가 나왔고 일행은 묵묵히 식사를 시작했다. "자네도 시장할 텐데 좀 먹지 그러나?" 하지만 카심은 도무지 식욕이 없는 모양이었다. 묵묵히 고개를 가로젓는 카심 을 보며 데이몬은 혀를 찼다. '쯔쯔.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길래…….' 하지만 당사자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입맛이 있을 턱이 없었기에 일행은 음식을 두고 그저 깨작거리기만 했다. 요리의 질이 그런 대로 괜찮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일행이 식사를 거의 마쳐갈 무렵 누군가 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쇠사슬 갑옷을 걸친 경비병 차림의 사내였는데 데이몬은 그가 아까의 일행에 끼여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카심의 옆으로 다가온 사내는 나지막이 이 름을 불렀다. "카심." 느릿하게 고개를 든 카심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테일러." 둘은 곧 손을 맞잡았다. 그것을 봐서 어린 시절의 친구이거나, 그 이상의 관계 인 것 같았다. 테일러라 불린 사내의 얼굴에는 안쓰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동안 잘 지냈나? 카심.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이지?" "그런 대로 잘 지낸 편이야. 테일러 너도 나이를 꽤 먹었군. 내가 기억하던 풋내 기 경비병의 모습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으니 말이야." "후후. 그건 피차 마찬가지 아냐? 차림새를 보니 용병이 되었나보군." "그렇게 되었어." 다소 안색이 나아진 카심이 일행에게 소개를 했다. "참 인사드리게. 이들은 내 동료라네. 참, 제 친구이자 동료였던 테일러라고 합 니다. 제겐 절친한 친구나 다름없는 녀석이죠." 일행은 곧 테일러와 인사를 나눴다. 통성명이 끝나자 카심은 부스스 몸을 일으 켰다. "옛 친구와 잠시 얘기를 좀 나누겠습니다. 먼저 식사하고 계십시오." "그렇게 하게." 테일러의 손을 잡은 카심은 식당에서 제일 구석진 자리를 찾아가서 앉았다. 아 무래도 일행들에게 들려주기 힘든 대화를 나누려는 듯 싶었다. 일행들을 한 번 쳐다본 카심은 테일러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마틸다 아가씨가 아직까지 시집을 가지 않았다니… …. 몇 년 전 용병단으로 날아온 서신을 보고 난 이미 그녀가 결혼을 한 줄 알았 어." 테일러는 무거운 낯빛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영주님께서 짜낸 계책이라네. 자네를 포기하게 하기 위한……." "난 이미 이곳을 떠날 때 모든 것을 포기했었네. 그 때문에 지금껏 아르네에 발 을 들여놓지 않았던 것이고……." "하지만 아가씨는 포기하지 않았어. 아가씬 자네 아니면 영원히 결혼을 하지 않 을 거라 단언하셨지. 자네도 아가씨의 고집을 익히 알고 있지 않나? 아가씨가 고집을 부리자 영주님도 어쩔 수 없으셨지." 그 말을 들은 카심의 얼굴에는 회한이 가득 차 있었다. "내일 식을 올린다는 말을 들었네. 어찌 된 거지? 그 밥맛 없는 녀석은 또 누구 야." "자네도 그렇게 느꼈나?" 테일러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그것을 보아 그도 신랑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튜드렛 백작가문의 모르세르 공자라네. 코르도에서 제법 권세를 자랑하는 명 문가의 외아들이지." 카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정략 결혼이로군." "나이가 아가씨보다 다섯 살이나 아래야. 뭐 목적은 우리 아르네 영지가 아니겠 나? 영주님께 자식이라곤 무남독녀인 아가씨밖에 없으니까 결혼만 하면 훗날 영지가 송두리째 굴러 떨어질 것이 아닌가? 그 때문에 집요하게 청혼을 넣어왔 던 것이고……" 테일러는 그리 편치 않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고집 부리던 아가씨도 결국 포기하셨네. 이대로 가문의 대를 끊어야겠냐는 영 주님의 회유가 제대로 먹혀 들어간 거지. 모르세르 공자를 만나본 아가씨는 기 꺼이 결혼할 것을 승낙하셨네. 이것은 이미 1개월 전에 일어난 일이야." "………." 카심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설마 마틸다 아가씨가 자신을 10년씩이나 기다 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터라 마음이 더욱 착잡했다. 말없이 그를 지켜보던 테일러가 고즈넉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정말 시기가 좋지 않을 때 찾아왔군. 친구로써 권유하겠는데 아무래도 지금 당장 아르네를 떠나는 게 나을 것 같네. 그래야만 나중에 찾아오더라도 마 음이 편할 게 아닌가?" "영주님은 건강하신가?" "물론이지. 새로 맞이하게 된 사윗감이 마음에 드셨는지 아예 웃음을 입가에 걸 고 사신 다네." "………." "난 이만 가보겠네. 지금은 공녀님을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라 가봐야 할 것 같네. 나중에 찾아오거든 그 때 회포를 풀도록 하지." "알겠네." 할 말을 마친 테일러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떠나갔지만 카심은 한참동안 몸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금 뒤 자리에 찾아온 카심을 일행은 반갑게 맞았다. "요리를 조금 시켜 놓았네. 일단 배를 좀 채우도록 하게." "그럴까요?" 마음의 정리를 끝낸 모양인지 카심은 말없이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일행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입을 닦은 카심은 일행을 둘러보았다. "사소한 일로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니 부디 묻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카심의 반응을 익히 예상했다는 듯 데이몬은 싱긋 웃으며 점원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술 좀 가져다 주겠나? 최고급으로만 골라 열 병 정도 가져오게. " 말을 마친 데이몬이 금화를 한 잎 내밀자 점원은 마치 불에라도 덴 듯 화들짝 놀라 주방으로 달려갔다. "아, 알겠습니다." 주문을 마친 데이몬은 묘한 미소를 띠며 카심을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동료들과 술을 한 잔 나누고 싶군. 모두들 어떤가?"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심의 이마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비로 소 데이몬이 고도의 마법사란 것을 자각한 것이다. 어쩌면 그가 마법을 사용해 서 자신과 테일러 사이에 오간 대화를 모두 들었을 수도 있었다. "저, 전 술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안될 말이지. 평소에 대장의 주량이 무척 궁금했었거든." 한 마디로 잘라버린 데이몬은 손가락을 뻗어 미첼을 가리켰다. "저 녀석은 생긴 것보다 술이 약하더군. 그래서 오늘은 대장을 대상으로 한 번 실험해 보려고 하네." 미첼이 슬며시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입니다. 오늘은 저도 원 없이 술을 마셔보고 싶군 요." 물론 나머지 용병들이 술을 마다할 리가 만무했다. 1년 동안 북부에서 고된 수 련에 열중하느라 구경조차 해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같이 술이 그리울 수밖에 없었다. "한 잔 먹어봅시다.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이오?" "오랜만에 코가 삐뚤어질 정도로 마셔봅시다." 거기에는 불과 얼마 전에 술맛에 눈뜬 카트로이도 가세했다. "드래곤이 얼마나 술을 잘 마시는 가를 증명해 보이겠다." 일행이 모두 찬성하는데 카심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구석진 자리 를 찾아간 일행은 곧 술판을 벌였다. 얼마나 질펀했는지 점원이 가져온 열 명의 술은 눈 깜짝할 사이에 동나버렸다. 데이몬이 금화 몇 닢을 집어던지며 고함을 버럭 질렀다. "술 창고를 깡그리 털어다 가지고 오너라." 점원들은 말 그대로 바닥이 닳도록 술 창고를 드나들어야 했다. 빈 술병이 하나 둘씩 늘어갈수록 일행의 얼굴에는 벌겋게 취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예상과는 달리 술자리에서 카심에 대한 얘기는 일체 나오지 않았다. 일행은 각 기 과거의 경험을 하나 둘씩 털어놓았고 그럴 때마다 요란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용히 술잔을 비우는 것은 오직 카심과 카트로이 뿐이었다. 카심은 조용히 술을 즐겼다. 술잔이 비면 옆에 앉은 용병들이 잽싸게 잔을 채웠 고 카심은 잔을 들어 묵묵히 들이켰다. 카심의 주량은 상당한 편이었다. 혼자서 거의 열 병 가까이 마셨지만 전혀 취한 기색이 보이지 않으니 말 그대로 덩치에 어울리는 주량이라 표현할 수 있었다. 우연찮게 술에 맛을 들이게 된 카트로이 역시 뒤질세라 술병을 비워나갔다. 꿀꺽꿀꺽 "크으……. 정말이지 마실 만 하군." 카트로이 앞에 어지럽게 널린 술병을 본 데이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작작 좀 쳐 마셔라. 이놈아. 네놈에겐 술이 아깝다." "임마. 술값을 주면 될 것 아냐?" "취하지도 않는 녀석이 웬 술을 그리도 밝히는지……." 혀를 끌끌 차고 있는데 카심의 음성이 들려왔다. "제 얘기가 듣고 싶으십니까?" 장내는 일시에 조용해졌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마 음을 정리한 듯 카심은 붉게 충혈된 눈을 들어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이미 들으신 것 같으니 더 이상 숨기지 않겠습니다. 동료에게까지 비밀을 지킨 다는 것은 저도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니까요." "잠시만 기다리게." 데이몬은 지체 없이 수인을 맺어 일행 주위에 결계를 쳤다. 식당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고 그들이 듣게되면 별로 좋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 이었다. 외부와 빈틈없이 격리된 것을 확인한 데이몬은 카심을 쳐다보았다. "자네 얘기를 우리만 들을 수 있도록 조처했으니 어디 한 번 얘기해보게." "감사합니다." 머리를 끄덕여 고마움을 표시한 카심은 곧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61회. 절단마공이란 오명을 씻기 위해서 연참 들어갑니다.^^ **************************************************************************** 카심은 불과 열 한 살에 부모와 형제를 잃고 천애고아가 되었다. 돌림병으로 인 해 그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하루아침에 외톨이가 되어 버린 카심. 돌림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므로 어린 카심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카심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어준 이는 다름 아닌 아르네의 영주였다. 돌림 병의 피해를 조사하러 나왔던 영주가 외톨이가 된 카심을 보고 거두기로 작정했 던 것이다. 아르네 영주는 이미 인자함으로 영지 주민들에게 널리 소문이 나 있 었다. 이후 카심은 영주의 저택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성장하게 된다. 당시 아르네 영주에겐 여섯 살 먹은 무남독녀가 있었다. 보기 드물게 붉은 전갈 좌의 해(당시 아르카디아에서 붉은 전갈좌는 백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해이다. 그리고 그 해에는 사람들이 자식을 낳지 않는 경향이 있다. 불길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에 타고난 소녀로써 마틸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꺼리 는 붉은 전갈좌 태생답게 마틸다는 고집이 세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그 때문 에 카심은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려 다 뱀에 물리기도 하고 나무에서 떨어져 다리를 부러뜨리는 일이 하루가 멀다하 고 일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마틸다가 천성적으로 착하고 다정다감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카 심은 그녀를 마치 친동생처럼 생각했다. 어쩌면 마틸다를 돌림병으로 죽은 여동 생 대신이라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녀 역시 카심을 친오빠처럼 스스럼없이 따 랐다. "벌꿀이 먹고 싶어." 그 한 마디에 벌에 쏘여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벌집을 가져와 내밀던 카심이 어 린 마틸다에겐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카심은 마틸다의 부탁이라 면 그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를 업은 채 하루종일 망루 계단을 오 르내려도 힘든 기색하나 보이지 않았고 갖고 싶다는 것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 라도 구해서 가져다주었다.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이야." 그 한 마디에 어린 카심은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만큼이나 기뻐했다. 그리고 그 런 모습을 영주 내외는 무척 기꺼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형제가 없는 마틸다에 게 카심이 더할 나위 없는 친구가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카심이 들어온 이후 로 마틸다는 더욱 밝고 명랑한 소녀로 자라났다. 하지만 둘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것은 또 다른 고민거리가 되어버렸다. 이 미 카심의 말이라면 뭐든지 믿고 따르는 마틸다였다. "자라서 반드시 카심 오빠에게 시집갈 거예요." 행여나 둘 사이에 다른 감정이 끼여들면 안되겠다고 판단한 영주는 어려운 용단 을 내렸다. 열 다섯 살이 되던 날 카심을 경비대원으로 차출해서 성에서 내보냈 던 것이다. 둘 사이를 떼어놓으면 자연적으로 해결될 문제로 생각했던 모양이었 다. 열 다섯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건장한 체격을 가진 카심은 그 날부터 아르네 영지의 수습 경비병이 되었다. 타고난 체력을 바탕으로 고된 훈련을 고스란히 소화해낸 카심은 오래지않아 정식 경비대원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어린 마틸다가 비밀리에 성을 빠져나가 카심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고된 훈련으 로 몸이 녹초가 된 상태에서도 카심은 그녀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물론 영주는 그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영리한 마틸다가 적당한 핑계를 대어 부모 를 속여넘겼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녀는 이미 부모가 카심을 멀리한 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둘은 어린 시절부터 싹틔워 온 애정을 무럭무럭 키워나갔다. 건장 한 청년이 된 카심과 아리따운 아가씨가 된 마틸다는 신분상의 괴리마저 극복한 채 애정을 서서히 사랑으로 승화시켜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마틸다 아가씨와 함께 있기만 해 도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분이었으니까요." 용의주도한 마틸다는 카심과의 사이를 감쪽같이 숨겼다. 카심 역시 둘 사이가 밝혀지면 안 되는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동료 경비대원에게 조차 철저한 비밀로 행했다. 마치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이어나가던 둘 사 이의 사랑. 하지만 그것은 우연찮은 기회로 그만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당시 아르네 영주는 상당한 고민거리를 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를 이을 아 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인자한 영주로 탄탄하게 기반을 쌓아놓긴 했지만 그것은 당대에 한정될 뿐이었다. 작위를 세습할 아들이 없으므로 그가 죽는다면 아르네 영지는 다시 국가로 귀속될 것이 분명했다. 그 때문에 해결책을 찾던 영주는 급기야 정략결혼으로 문제를 해결하리라 결심 했다. 영지를 가지지 못한 수도의 귀족청년 중 적당한 자를 마틸다와 맺어주어 후계자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인 것이다. 때마침 마틸다도 꽃다운 17세의 소녀 로 자라나 있었기에 거리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음을 굳힌 영주는 마틸다 를 불러 그 사실을 넌지시 물어보았다. "이러이러해서 널 결혼시킬 생각이란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틸다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전 카심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시집가지 않겠어요. 오직 그만이 내 낭군이 될 자격이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영주는 대경실색했다. 마틸다와 카심이 벌써 그런 관계에까지 이 르러 있다니……. 물론 영주에게 그것은 결코 용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평민 신분인 카심과의 결혼을 허락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만약 그 결혼이 성사된다면 후사를 잇는 것은 더 이상 생각할 수도 없었다. 평민에겐 작위가 세 습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영주는 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두 번째 계획의 실행에 들어갔다. 후 사를 이어야겠다는 일념 하에 영주는 집요하게 마틸다를 회유했다. "마틸다. 생각해보아라. 넌 지금 아비가 평생을 걸쳐 이룩해 놓은 것을 물거품으 로 만들고 있다. 아르네 영지가 다른 귀족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용납할 수 있다 는 말이냐?" "미안해요. 아빠. 전 도저히 카심을 포기할 수 없어요." 이미 마틸다의 고집은 정평이 나 있던 상태였다. 달래도 보고 꾸짖어도 보았지 만 그녀는 결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녀의 고집에 영주 내외는 결국 설득을 포 기할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군."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은밀하게 카심을 저택으로 부른 영 주는 이번에는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자네와 마틸다와의 사이가 그 정도로 진전될 줄은 몰랐군. 카심."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바짝 얼어있던 카심은 고개를 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단 단히 먹은 상태였다. 이미 그는 마틸다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그 어떤 질책도, 심지어 호된 매질까지도 달게 감수하겠다고 각오하고 있 었던 것이다. 이미 둘 사이에 신분상의 벽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뗄 레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리한 영주는 그에게 그 어떤 협박도 가하지 않았다. 도리어 영주가 조 용조용히 내뱉은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카심의 가슴을 사정없이 파고들었 다. "자네와 결혼할 경우 마틸다가 과연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나?" "………." "물론 자네가 마틸다에게 더 없이 잘 해준다는 것은 아네. 하지만 그 아이가 과 연 평범한 평민의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 "자네와 결혼하는 순간부터 마틸다 역시 평민이 되네. 또 내가 죽고 난 뒤 아르 네 영지는 자동적으로 다른 귀족의 손에 넘어가게 되지. 그렇게 되면 내가 마틸 다에게 물려줄 재산은 아무것도 없네. 모조리 국가로 귀속될 테니까. 그런 다음 그 아이는 평범한 평민의 아낙으로 평생을 뼈빠지게 일하며 살아야 하네. 하루종일 밭에 나가 일을 하고 저녁에는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실을 잣는 것이 기본이겠지? 물론 시녀와 유모가 없을 테니까 집안 일과 육아도 모두 그 아이가 떠맡아야 하겠군. 그렇게 되면 마틸다가 과연 행복할까?" 얼굴빛이 시커멓게 변한 카심은 일언반구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사랑이란 감정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가네. 마틸다도 그 때가 되면 자네와 결혼 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네. 귀족부인으로써 풍요롭게 삶을 영위할 기회를 자네 때문에 박탈당한 셈이니까……." "………." "잘 생각해서 결정하도록 하게. 어떤 선택이 마틸다에게 최선일지 말이야. 부디 현명한 결정을 기대하겠네." 할 말을 다한 영주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카심을 두고 몸을 일으켰다. 그 뒤로도 카심은 한참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몸을 일으킨 카심은 그 길 로 숙소에 가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과거를 떠올리던 카심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날 전 경비대에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아르 네를 떠나왔지요. 영주님의 말씀이 백 번 옳았습니다. 마틸다 아가씨의 행복을 위해서는 제가 떠나는 것이 최선이었고 그 마음은 아직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카심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눈가에 눈물이 글썽글썽한 것을 보니 술 기운이 턱 밑까지 치밀어 오른 모양이었다. 일행들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 다. 뭔가 사연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설마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아무도 몰 랐다. 조금 뒤 적막을 깬 것은 뜻밖에도 율리아나였다. "그건 카심이 옳지 못해요." "………."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것만이 행복의 필요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 서 카심은 선택을 잘못한 것 같아요." 카심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공주님은 평민 아낙의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르십니다. 어릴 때부터 보아온 것이 어머니의 삶이었습니다. 제 어머니는 정말 힘들게 사셨지요. 바로 그것 때문에 전 떠나올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이젠 괜찮잖아요. 이제 카심은 그 어떤 강대국도 무시하지 못하는 용병단의 대 장이에요. 그녀를 맞이할 충분한 자격이 있지 않겠어요." 카심은 붉게 충혈된 눈을 들어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그녀의 마음은 이제 제게서 떠나갔습니다. 아니 그것 이 아니더라도 전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용병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율리아나가 단호하게 카심의 말을 잘랐다. "그건 단지 핑계에 불과해요. 아니면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던가……." 쾅 카심이 돌연 탁자를 강하게 내려쳤다.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굳게 움켜쥔 주먹 이 탁자 위에서 부들부들 떨렸다. "전 지금까지 단 한시도 그녀를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게 있어 그녀는 내 전 부입니다. 그런 말씀은 부디 말아 주십시오." 율리아나는 입을 닫았다. 지금껏 그녀는 카심에게서 이토록 격양된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잠시 후 카심은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무례에 대해 사과 드립니다." 일행은 다시금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율리아나가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그녀 는 기대에 찬 눈초리로 데이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시선을 견디지 못한 데 이몬이 소리를 빽 질렀다. "이 계집애야. 뭘 그렇게 들여다보는 거야?" "데이몬. 당신에겐 이것을 해결할 능력이 있다고 믿어요."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가 어째? 내가 신이냐?" "신은 아니지만 신에 가까이 근접했다 봐요. 일전에 케이트의 남편 필립의 마음 을 바꿔놓았듯 이번에는 마틸다의 마음을 한 번 조종해봐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카심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결계를 쳐놓지 않았다면 식당 안에 있는 사람의 시선을 모두 사로잡을 정도의 고함소리였다. "그만하시오. 그녀에게 손대는 것은 내가 용납지 못하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곤두선 수염까지 푸들푸들 떨릴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본 율 리아나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더 이상 나서서는 안될 자리란 걸 직감한 것이다. 데이몬이 빙글빙글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 "계집얘야. 나설 자린지 아닌지를 잘 분간해야지. 마음 씀씀이는 그런 대로 마음 에 든다만 방법이 틀렸어." "………." "게다가 그 방법은 적합하지 않아. 카심의 사정을 들어보니 이것은 마틸다의 마 음이 바뀌더라도 해결하기 힘든 문제인 것 같군. 영주 내외의 마음을 바꾸는 것 부터 시작해서 이미 결정된 결혼식까지, 거기에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장의 의 지라고 생각해." 말을 마친 데이몬은 미첼을 쳐다보았다. "넌 오늘 저 빌어먹을 드래곤 녀석과 자도록 해. 오랜만에 대장과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으니까……." "뭐가 어쩌고 어째?" 카트로이의 노성이 바로 귓가에서 터져 나오는 것을 느끼며 미첼은 쓴웃음을 지 었다. "알겠습니다." 데이몬은 몸을 일으켜 카심에게 다가갔다. "대장은 오늘 나와 함께 자도록 하지.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이만 일어나는 것이 어때?" "예." 카심은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62회. 방안에 들어간 카심은 술에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심하게 데이몬의 잠자리 를 챙겨주었다. "고맙군." "고맙긴요 뭘." 침대에 걸터앉은 데이몬은 카심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네 사정을 들어보니 꽤나 기구하더군. 사랑하는 사람을 본의 아니게 떠나 보내야 한다니 말일세." 카심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는 이불을 덮어쓰며 대꾸했다. "이미 잊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추태를 많이 보였는데 내일부턴 언행에 주의 하도록 하겠습니다." "굳이 내심을 숨길 필요는 없네. 카심." 데이몬은 쓸쓸히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의 음성에서 묻어 나오는 애틋함을 느 낀 카심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래도 자넨 의지로써 그녀를 보낼 수 있으니 말일세.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 하는 사람도 있다네." "………." 데이몬은 슬며시 시선을 카심에게로 던졌다. "혹시 내가 일전에 한 말 기억하나? 율리아나와 닮은 소녀 이야기 말이야." "기,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솔직히 얘기하겠네. 그녀가 바로 내 첫사랑이자 내 생애에 있어 유일한 여인 이라네." 난데없이 데이몬의 사랑타령을 듣게 되자 카심은 귀가 솔깃했다. 지금까지 그 는 자신의 슬픔을 이해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의 아픔이 란 오로지 겪어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법이다. "믿어지지 않는 얘기겠지만 그녀는 아직까지 살아있다네." 카심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데이몬이야 극한에 이른 마법실력으로 500년의 세 월을 살 수 있다고 하지만 평범한 사람은 결코 그럴 수 없었다. "어, 어떻게……. 그렇다면 그분 또한 마법사입니까?" "아니야.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잠들어있는 신세라네." 데이몬의 입에서 다프네에 대한 일이 술술 흘러나왔다. 데이몬이 진정으로 사 랑하는 여인이 드래곤 로드의 손에 의해 돌이 된 채 잠들어있다는 사실. 그 말 에 카심은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 그렇다면 데이몬은 500년 동안 그녀를 기다려왔다는……." "그렇다네. 사실 그녀를 구해낼 수 있는 가능성은 무척 희박하지. 아무리 마법 실력을 갈고 닦더라도 드래곤 로드가 걸어놓은 마법을 파훼할 순 없지 않겠 나?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아. 그 어떤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그녀를 구해내고 말 테니까……." 데이몬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는 굳은 각오가 뚝뚝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 모 습에 카심은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데이몬은 자신보다 훨씬 절 실한 사정을 가지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배부른 소릴……." "아니야. 둘 다 어렵긴 마찬가지일세. 문제는 의지에 달려 있어. 자네가 그녀를 얼마나 절실히 원하는지가 관건이지." 잠시 머뭇거리던 카심은 결국 내심을 털어놓았다. "솔직히 말해 이제라도 그녀를 잡고 싶은 것이 제 심정입니다. 용병으로 떠돌 아다니던 10년 동안 전 단 한 순간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제 생 애에 있어 전부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카심의 눈동자에서 붉은 기가 서서히 번져가고 있었다. "전 그녀가 이미 시집갔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여자의 마음이란 변하기 쉬운 법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절 잊고 다른 사람과 결혼했을 것이라 짐작했었지 요. 따라서 전 그녀를 가슴속에 고이 간직한 채 평생을 혼자 살리라 생각했습 니다. 설마 절 10년 동안 기다려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린 다면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무릎꿇고 애걸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절 받 아달라고……." 카심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것은 뜨거운 사나이의 눈물이 었다. "하지만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이제 와서 제가 어떻게 하기엔 상황이 너무 악 화되었군요. 비록 그녀가 마음을 돌린다 하더라도 이미 결정된 결혼식을 어떻 게 취소시킬 것이며, 영주님 내외분의 마음을 돌리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분들은 제게 은인이나 다름없는 분들, 결코 그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때문에 현재로썬 제가 조용히 떠나는 것이 상책 일 뿐입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데이몬이 한 마디 내뱉었다.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문제야. 어렵군 어려워. 하지만 낙심하지 말게. 하늘은 노력하는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않는 법. 자네에겐 아직까지 노 력할 여지가 조금은 남아있어." "………." "내일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봐야 하지 않겠나?" "그래봐야 그녀의 마음만 혼란스러워지지 않겠습니까?" "아니야. 사람의 일이란 모르는 법. 약속하게.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해서 마지 막까지 지켜보겠다고……." 조용히 듣고 있던 카심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결혼식에 참석하겠습니다." "좋아." 입가에 미소를 떠올린 데이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향해 곧장 걸어가는 모습에 카심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 가십니까?" "바람을 좀 쐬려고……." 짧게 일축한 데이몬이 문을 열고 나갔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심은 침 대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지칠 대로 지친 데다 술기운이 올라왔기 때문에 카 심은 금세 잠들어버렸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카심의 얼굴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 무렵 아르네 영주의 저택에서는 누군가의 괴소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후후후. 내일 일만 잘 치르면 아르네 영지가 송두리째 내 것이 되겠군." 무척 흡족한 듯 함박 웃음을 머금고 있는 자는 바로 내일의 신랑인 모르세르 였다. "아르네 영지가 괜찮다는 소릴 듣긴 했지만 와 보니 상상 이상이로군. 잘 하면 제법 많은 재산을 긁어모을 수 있겠어." 생전 처음 와 본 아르네 영지는 모든 것이 풍족했다. 영지 주민들 얼굴에서는 생기가 넘쳐흘렀고 하나같이 부지런히 생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영지 주민들 이 이처럼 넉넉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모습은 그의 아버지의 영지인 튜드렛에 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모르세르는 돌연 눈살을 찌푸렸다. "아르네 영주는 재산 모으는 방법에서는 영 젬병이로군. 인두세며 다리세 등 돈이 나올 만한 곳이 천지인데 말이야. 게다가 소작료를 고작 30%만 받고 있 다니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린가? 50%를 거둬들여도 쓰기에 빠듯한 실정인데 말이야. 하긴 이런 궁벽한 시골에서 돈 쓸 곳이 제대로 있기나 하겠어?" 비록 아르네의 영주 자릴 노리고 있긴 하지만 모르세르에게 이곳에서 살고싶 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런 촌구석에서 산다면 아마 1년도 되지 않아 미쳐버릴 거야." 물론 방법은 있었다. 여타의 귀족들처럼 대리인을 시켜 영지를 관리하게 한 뒤 수도인 코르도에다 화려한 저택을 얻어 거주하면 깨끗하게 해결되는 문제 였다. 비싼 코르도의 물가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영지 주민들에게 세금과 소작 료를 지금보다 훨씬 많이 거둬들여야 하지만 말이다. 모르세르는 돌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마틸다의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니던데 순순히 말을 들을까? 하긴 어느 여자건 수도의 화려한 생활에 맛들이게 되면 두 번 다시 이런 촌구석으 로 오려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할 건 없겠군."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하자 저절로 가슴이 뿌듯해져왔다. 결혼한 뒤 얼마간은 코르도에서 장인이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하면 될 터였고, 장인이 죽어 영주 자리가 자신에게 넘어올 경우 적당한 관리인을 구해 내세우면 그만이었다. 영 지 관리인으로 적합한 자는 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았고 하나같이 영지 주민들에게서 돈을 긁어내는데 도가 튼 자들이었다. 모르세르는 코르도 에 남겨두고 온 애인들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나저나 애인들을 만나지 못해 애석하군. 특히 크리스틴 그년이 가장 그리 워." 이미 그는 코르도에 세 명의 애인을 두고 있었다. 아버지인 튜드렛 백작이 보 내주는 돈으론 솔직히 셋을 유지하기에도 벅찼다. 그러나 금전적인 문제만 허 락된다면 그 이상을 거느리고 싶다는 것이 모르세르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나 이가 들긴 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마틸다의 얼굴을 떠올리며 모르세르는 괴 소를 지었다. "초야가 어떨지 정말 궁금해 죽겠군. 그토록 몸을 사리는 것을 보니 경험이 없 는 게 분명해. 쯔쯔. 어쩌다 그 나이 될 때까지 시집을 못 갔는지……." 날이 새기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는지 모르세르는 연신 안절부절못해 했다. 여 건만 허락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안고 싶었다. 그동안 마틸다를 집요하게 유 혹했지만 번번이 헛물만 켰기 때문이었다. "내일까지 참자. 느긋하게 행동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테니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모르세르는 조용히 침대로 다가갔다. 그의 뒷모습을 달빛이 밝게 비추어주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카심은 숙취 때문인지 조금 늦게 깨어났다. "이런, 이런. 대장으로써 늦잠을 자다니……."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카심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미첼이었다. 그는 깨끗하게 다려놓은 옷 한 벌을 카심에게 내밀었다. "이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제가 말끔히 다려놓았습니다." "미, 미안하군." 미첼은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대장을 따라 결혼식에 참석하기로 결정되었는데 괜찮으시 겠지요? 아시다시피 인물이 받쳐주는 자가 저밖에 없어서……쿠엑." 딱. 머리를 감싸안고 주저앉는 미첼의 뒤로 주먹을 움켜쥔 데이몬의 모습이 보였 다. 그는 미첼을 향해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이놈. 하루라도 맞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하냐?" "이러지 마십시오. 무력(武力)으론 결코 진실을 가릴 수 없는 법입니다." "한 대 더 맞고도 그 소리가 나오는지 보자." "농담입니다." 데이몬과 미첼의 드잡이질을 보고 있던 카심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얼마 전의 관계에 비추어보면 정말 보기 좋게 변한 모습이었다. 악의 없는 장난을 주고받으니 말이다. 미첼에게서 시선을 거둔 데이몬은 카심을 쳐다보며 어색 하게 웃었다. "그래도 일행 중에서 가장 덜 험상궂게 생긴 놈이 이놈이니 데리고 가게." "알겠습니다." 옷을 갈아입은 카심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마음 한켠에 무거운 짐 이 놓여 있었지만 그는 억지로 내색을 하지 않으려 했다. "우린 낚시를 한 번 즐겨볼 생각이네. 본 드래곤을 타고 날아오며 보니 강에 물 고기가 많은 것 같더군. 우린 한가롭게 그곳에서 낚시나 하고 있을 테니 자넨 그 동안 미첼을 데리고 결혼식에 다녀오게." "아르케 강 말씀이시군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카심을 보며 데이몬은 품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그런데 자네가 이걸 좀 맡아주겠나? 낚시를 하다 물에 빠뜨리면 안되니 말일 세." "이, 이게 뭐죠?" 카심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데이몬이 내민 것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데이몬 의 손에는 눈부신 광채를 내뿜는 붉은 보석과 이상하게 생긴 조그마한 홀이 놓여 있었다. 왕이 사용하는 홀과 모양이 비슷하긴 했지만 크기가 현저히 작 았다. 데이몬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설명을 시작했다. "별 거 아닌 것 같아 보이겠지만 사실은 어마어마한 보물이라네. 일단 붉은 구 슬은 다름 아닌 드래곤 하트라네. 내가 트루베니아에 건너가서 잡은 웜급 드 래곤의 것이지." "드, 드래곤 하트." 카심은 눈을 부릅떴다. 그것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익히 알고 있었기에 놀 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엄청난 것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 게 손이 덜덜 떨렸다. "아마도 대장이 아니었다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을 걸세. 그리고 두 번째 는 바로 베르하젤의 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네 이것 역시 드래곤이 가지고 있던 보물이지. 언데드나 마물을 퇴치하는데 최고의 위력을 자랑하는 무기의 일종이야." 데이몬은 손을 뻗어 홀의 아랫부분을 가리켰다. "이곳에다 마나를 주입할 경우 베르하젤의 홀은 주입된 마나를 순간적으로 항 마(降魔)의 힘을 가진 신성력으로 바꾸어주네. 언데드나 마물에겐 가히 극성 이라 할 수 있는 힘이지. 이 홀의 신성력에 명중된 마물은 어지간히 강한 놈이 아니면 살아남지 못하네. 단점은 이것을 사용하는데 어마어마한 마나가 소요 된다는 점이지. 아마 어지간한 팔라딘은 엄두조차 내지 못할 걸세." 말을 마친 데이몬은 베르하젤의 홀 아랫부분과 드래곤 하트를 조심스럽게 가 져다 댔다. "하지만 이 홀이 엄청난 마나를 함유하고 있는 드래곤 하트와 결합할 경우 상 상도 못할 결과가 초래할 걸세. 드래곤 하트를 홀의 아랫부분에다 쳐서 깨뜨 린다면 모르긴 몰라도……." 데이몬은 소름이 끼친다는 듯 몸을 가볍게 떨었다. "실험해보진 않았지만 나나 데스 나이트라도 감히 생존할 수 있다고 장담을 못하네. 반경 일백 미터 이내의 마물이나 언데드는 말 그대로 흔적도 없이 날 아가 버릴 테니까……." "이, 이런 엄청난 물건을 왜 저에게 맡기시려고?" 데이몬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미리 말했지 않았나? 강에 빠뜨리면 곤란하다고……. 게다가 이것 역시 용병 단의 공동재산으로 볼 수 있는 물건이니 대장이 맡고 있는 게 가장 좋을 듯 싶 네. 특히 이건 나와 데스 나이트에겐 극성이나 다름없는 보물이야. 혹시라도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간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으니 대장이 단단히 간직해 줘야겠네. 알겠나?" 카심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좋아. 그럼 다녀오게." 데이몬은 미소 띤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미첼이 밝은 표정으로 망토를 집어 카심에게 건네주었다. "그럼 갈까요? 대장." "그러세." 카심과 미첼은 조용히 여관을 나섰다. 그들의 뒷모습을 데이몬이 뚫어지게 쳐 다보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63회. 결혼식이 벌어지는 장소인 영주의 저택은 그들이 묵던 여관에서 그리 멀지 않 았다.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기 때문에 카심은 영주의 저택으로 가는 길 을 잘 알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던 도중 카심은 아는 사람과 적지 않게 마주쳐 야 했다. "이게 누군가? 카심 아닌가?" "알프레드 아저씨." 카심은 환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 노인과 와락 끌어안았다. 반백의 머리를 한 노인은 만난 것이 반갑다는 듯 연신 카심의 등을 쓸어 내렸다. "자네가 떠나간 뒤로 꼭 10년만이로군. 사람이 무정하기는……. 한 번 찾아올 것이지 말이야. 그런데 자네 어디 가는 길인가?" "마, 마틸다 아가씨의 결혼식에……." 채 말을 마치지 못하는 카심을 들여다보며 노인은 안색을 흐렸다. 그 역시 카 심과 마틸다 아가씨 사이에 얽힌 일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자네 괜찮겠나? 하긴 결혼식에 참석해서 마음의 짐을 더는 것이 아무래도 나 을 테지." "………." "식이 끝나면 푸주간에 한 번 찾아오게. 자넬 위해 저녁을 지어놓겠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카심이 몸을 돌렸다. 헤어지기 아쉽다는 듯 연신 손을 흔드 는 노인을 쳐다보며 미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무척 소박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이군요." "아르네 영지 사람들은 나에게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야. 아마 난 영원히 이곳 을 잊지 못할 걸세." 그 이후로도 카심은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카심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빵집 아주머니에서부터 재단사 아저씨까지 모두가 카심을 반갑게 맞아주었고 또한 제 몸처럼 걱정해 주었다.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다보니 둘은 일찍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참 뒤 에나 영주의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초청장을 검사하는 병사가 바로 테일러였다. 그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카심을 맞았다. "카심. 결국 왔나?" "그렇네. 아가씨의 결혼식을 지켜보고 싶어서……." 테일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충고를 했건만……. 할 수 없지. 이왕 왔으니 들어가서 아가씨를 축하해 주도 록 하게." 테일러는 초청장을 검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카심을 입장시키려 했다. 그 때 옆에 서 있던 병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안면이 없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모 르세르가 데리고 온 병사인 듯 싶었다. 그는 사무적인 표정으로 손을 불쑥 내 밀었다. "결혼식에는 검을 가지고 입장할 수 없소. 그러니 나에게 맡겨주시오." 듣고 있던 카심은 묵묵히 허릿춤의 검을 풀어 내밀었다. '아무래도 내가 사고를 치지 않을까 경계하는 모양이군.' 카심의 검을 받아든 병사는 미첼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빛의 의미를 파악한 미첼은 투덜거리며 검을 풀었다. "젠장. 다른 사람들은 차고 입장하면서 왜 우리만……." "안전을 위해 이러는 것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검을 맡긴 두 사람은 곧 결혼식이 벌어지는 저택의 별관으로 안내되었다. 별관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하객들 중 태반이 모르는 사 람인 것을 봐서 아무래도 신랑 측 하객인 듯 싶었다. 카심은 조용히 대열 뒤로 걸어갔다. 아르네의 관습은 입장할 때 신랑, 신부, 그리고 그들의 부모와 인사 를 나눈 뒤 식장에 들어가는 것이었고 카심은 그 절차를 잘 알고 있었다. 영주 내외를 대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카심의 얼굴은 조금 경직되어 있었다. 미 첼이 빙긋 웃으며 긴장을 풀어주었다. "긴장 푸십시오. 설마 딸의 결혼식을 축하하러 온 사람에게 심한 소릴 하겠습 니까?" "그 분들의 인품은 내가 잘 알지. 결코 그러실 분들이 아니지만 문제는 내가 그 분들을 뵐 낯이 없다는 것이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카심의 차례가 왔다. "아니?" 카심을 본 영주 내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행여나 카심이 결혼식에서 소란을 피운다면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었기에 그들의 얼굴은 금세 근심으로 가득 찼다. "자, 자네가 이곳에 왜 이곳에 왔나?" 카심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 "마틸다 아가씨의 성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장담하 건데 행여나 엉뚱한 행동을 해서 영주님의 심기를 상하게 하는 일은 결코 없 을 겁니다." 카심의 진심 어린 말에 영주 내외는 비로소 얼굴을 풀었다. "그런 뜻으로 온 것이라면 환영하겠네. 어서 들어가 보게." "알겠습니다." 카심은 다시 한 번 꾸벅 절을 한 뒤 걸음을 옮겼다. 아르네 영주는 아직까지 경 계심이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카심의 뒷모습을 쓸어보았다. "코르도의 귀족들이 대거 모여있으니 도통 걱정이 가시지 않는구려." "글세 말이에요. ……. 행여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로써는 엄청난 불명 예가 아닐 수 없잖아요?" "글세 말이오. 녀석의 성품을 익히 알긴 해도……." 그러나 계속해서 사람들이 밀려들었기 때문에 영주 내외는 급급히 안색을 고 칠 수밖에 없었다. "자네 왔는가?" 거드름을 피우는 모르세르의 모습에 카심은 쓴웃음을 지었다. 현명한 자라면 조용히 입장시켰을 터였지만 모르세르는 일부러 티를 내며 카심을 불러 세운 상태였다. 모르세르의 옆에는 마틸다가 경직된 표정으로 카심을 외면하고 있 었다. 얼굴을 볼 엄두가 내지 않아 딴청을 피우던 카심은 모르세르에게 먼저 축하인사를 건넸다.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부디 오래오래 다정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걱정 끄도록……. 그럼 들어가 보게. 지체 높은 분들이 많으니 구석자리에 앉아야 하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목례를 한 카심은 조용히 식장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마틸다는 카심에게 눈 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식장에 들어간 둘은 말한 대로 구석진 자리를 찾아가 앉 았다. 미첼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주먹을 쥔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 같아서는 저 녀석을 냅다 패버리고 싶지만 아무래도 대장이 허락하지 않겠죠?" "당연하지." 냉큼 터져 나온 반응에 미첼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미워도 사랑하는 여인의 남편이라 이거죠?" "………." 서글픈 생각이 들었는지 카심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는 장면을 지켜본다는 것은 결코 유쾌할 수 없다. 그것을 깨 달은 미첼도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러는 동안 하객들이 계속해서 모여들었고 마침내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덜컹. 문이 굳게 닫히고 그 앞을 무장한 병사들이 막아섰다. 생소한 표식을 보아 대 부분 튜드렛에서 파견된 병사인 듯 싶었다. 그들을 지휘하는 기사들을 쳐다보 던 아르네 영주는 씁쓸히 고개를 흔들었다. "튜드렛이 명문가임에는 틀림없군. 말로만 듣던 팔라딘을 두 명씩이나 보유하 고 있다니……." 아르네에는 팔라딘 급 기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여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 니라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서였다. 아르네 영지는 극히 부유하고 평화로운 영지였다. 그것은 모두가 아르네 영주가 지금껏 펼친 선정 때문이었다. 적어도 아르네에서 치안병사란 주민들에게 환영받는 존재였다. 주민들과 병 사들 사이의 친분은 비교적 두터운 편이었고 그 누구도 병사를 겁내지 않았 다. 주민들이 아무 스스럼없이 병사들을 초대해서 저녁식사를 대접할 정도였 다. 때문에 아르네에는 결코 많은 병사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튜드렛은 달랐다. 가혹한 소작료와 세금 때문에 일주일이 멀다하고 폭 동이 일어났으므로 그들을 진압할 병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튜드렛 영주는 대대적으로 사병을 키워야 했고 많은 돈을 들여 팔라딘까지 고 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막을 모르는 아르네 영주로썬 튜드렛 가 문이 심히 부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팔라딘의 절도 있는 동작을 지켜보던 그는 돌연 시선을 돌렸다. 카심의 꿍꿍 이가 심히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몹쓸 짓을 할 자가 아니란 사실을 알면 서도 큰 일을 치르는 이상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이로군.' 카심이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확인한 영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틸다가 무사히 시집가고 나면 기회를 봐서 카심을 불러들어야겠군. 사람 하나는 진국이라 볼 수 있으니 원한다면 영지 병사로 받아줘도 무방하겠어. 아무래도 위험한 용병보다야 낫겠지?' 아르네 영주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결혼식이 본격적으로 진행되 고 있었다. 식을 주관하는 신관이 마침내 혼인서약을 받고 있었다. "신랑인 튜드렛 가문의 모르세르는 신부 아르네 가문의 마틸다 양을 맞아 평 생 변치 않는 마음으로 아낄 것을 약속하느뇨?" 마음이 급했는지 모르세르는 신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넷.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랑의 대답을 들은 신관은 이번에는 신부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던 카 심은 도저히 볼 수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게다가 자신을 줄기차게 주시 하는 영주 내외의 시선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이렇게 그녀를 보내야 하는가?' 카심의 애달픈 심정을 모르는 듯 신관의 말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신부는 신랑 모르세르를 맞아 영원히 내조할 것과……." 마틸다가 신관의 말을 새겨들으며 대답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문 쪽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쾅. 깜짝 놀란 사람들이 일제히 문 쪽을 쳐다보았다. 신랑 신부는 물론이었고 카 심을 주시하고 있던 영주 내외까지 혼비백산해서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식 장의 문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먼지가 풀풀 내려앉는 가운데 시커 먼 인영 하나가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마치 그 자리에서 솟아난 듯이. 하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난데없이 나타난 자는 온통 시커먼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도저히 용모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단지 로브자 락 사이로 눈빛이라 짐작되는 광망을 시퍼렇게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바로 신관이었다. "감히 저주받은 언데드 따위가……." 상대에게서 풍겨 나오는 어둠의 마력을 파악한 신관은 노성과 함께 마나를 재 배열했다. 신관은 튜드렛 백작이 특별히 코르도에서 초청해온 고위급 성직자 로써 신성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실력자였다. 주위의 마나가 맹렬하게 재 배열되었다. 곧이어 언데드에게 극성이라는 신성마법 엑소시즘이 캐스팅되었 다. "죽어 눈도 감지 못한 존재여. 무(無)로 화할 지어다." 신관의 고함 소리와 함께 한 줄기 빛이 허공에서 생겨나서 침입자에게 일직선 으로 내려꽂혔다. 펑. 엑소시즘을 정통으로 얻어맞았지만 침입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조잡한 신성마법이로군." 유부에서나 울려 퍼질법한 음산한 음성과 함께 침입자는 슬쩍 손을 내저었다. "으아아아." 신관의 몸이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에 잡아 채인 것처럼 뒤로 내팽개쳐 졌다. 한참을 날아간 신관은 뒤쪽 나무 벽에 그대로 쑤셔 박혔다. 퍽. 벽에 뒤통수를 강하게 부딪힌 신관은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그 모습을 본 경 비병들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때서야 상황을 파악했던 것이다. "마, 막아라." 임무를 떠올린 병사들은 창을 꼬나 쥐고 침입자에게 쇄도했다. 그러나 그들의 발걸음은 금세 멈춰져야 했다. 상대의 모습이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 었기 때문이었다. "어, 어디 갔지?" 침입자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한 병사가 깜짝 놀라 단상 쪽을 손 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저기다." 침입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관이 서 있던 자리에 버젓이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다. 그는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꼼짝달싹 못하는 신랑과 신부를 유심히 살폈다. 조금 뒤 쩌렁쩌렁한 광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 드디어 찾았군. 그 찾기 힘든 붉은 전갈좌의 처녀를 말이야." 그가 광소를 터뜨리는 동안 병사들은 조심스럽게 단상을 접근했다. 신랑과 신 부가 볼모로 잡혀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을 힐끔 쳐다본 침입자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로브를 벗어 던졌다. "헉." 사람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병사들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 로 단상에 시선을 고정한 채 몸을 덜덜 떨 뿐이었다. 의문의 침입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뼈만 남은 퀭한 얼굴에 눈구멍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마치 지옥의 업화같은 눈빛. 머리에 쓴 기괴한 관(冠)과 길게 뻗은 어금니는 해골의 분위기를 더욱 살벌하게 만들고 있었다. 튜드렛 가문의 하객 으로 참석한 팔라딘 중 한 명이 오래지 않아 침입자의 정체를 파악했다. "세, 세상에……. 리치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식장 내부의 사람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악(惡) 의 대명사이며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마물인 리치가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 다니……. 대관절 무슨 목적으로 찾아왔을까, 사람들이 이유를 골똘히 생각하 고 있는데 리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쉬르나크. 마계의 위대하신 군주이신 케루빔 님의 충실한 심복이 다. 내가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쉬르나크라 이름을 밝힌 리치는 음산한 눈빛을 줄기줄기 흘리며 사람들을 위 협하듯 훑어보았다. "위대하신 마왕 케루빔 전하의 1976번째 신부를 찾아 마계로 모셔가기 위해서 이다. 그분께서는 10년에 한 번씩 붉은 전갈좌를 타고난 처녀를 아내로 맞아 들이신다. 이제 붉은 전갈좌의 처녀를 찾았으니 그 분의 뜻을 받들어 내가 모 셔가도록 하겠다." 사람들은 아연해했다. 느닷없이 마왕 케루빔의 심복이라는 리치가 나타나 신 부를 납치해 가겠다고 공언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순순히 두고볼 수 없는 노릇이라서 병사들을 통솔하던 팔라딘들이 가차없이 검을 뽑 아들었다. 두려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들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순순히 뜻을 이룰 것 같으냐?" 리치라면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상대였다. 때문에 한 팔라딘이 암암리에 병 사 한 명을 불렀다. "지금 즉시 밖으로 나가서 아르네의 병사들을 깡그리 불러모아라. 리치를 상 대하기 위해서는 병력이 더 필요하다." "알겠습니다." 명을 받은 병사는 후들후들 떨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몸을 날렸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64회. 그러나 병사가 채 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쉬르나크의 손이 느릿하게 휘저었다. "어딜?" 식장의 문이 시커멓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시커먼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내리 더니 문에 뚫린 구멍을 그대로 막아버렸다. 문 전체가 시커먼 기운에 싸여버 린 것이다. "크억." 사정없이 문을 박차고 나가려 하던 병사는 고통 어린 비명과 함께 발을 틀어 쥐고 그 자리에 나동그라졌다. 문이 마치 철벽처럼 단단하게 변해버렸기 때문 이었다. 사정은 창문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악문 병사가 연신 헬버드를 들어 내리쳤지만 문은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힘이 빠진 병사는 결국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세, 세상에……." 결혼식장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외부와 완벽하게 격리 되어 버린 터라 사람들의 얼굴에는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 던 쉬르나크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검을 꼬나쥐고 있는 팔라딘들에게 시선 을 던졌다. 눈구멍에서 일렁이는 광망이 보기만 해도 오싹한 듯 팔라딘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감히 케루빔 전하의 권위에 저항하려는 자들!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쉬르나크는 느릿한 동작으로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뼈만 남은 손에서 시퍼런 불길이 일렁였는가 싶더니 급기야 거대한 빛의 광망으로 변해 사방으로 폭사 되었다. 투학. 광망이 폭사되자 식장 내부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 다. 섬뜩한 빛이 눈을 강렬하게 자극해서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기 때문이었 다. 잠시 후 눈을 뜬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넋이 나가야 했다. 말 그대 로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식장 내부의 사정은 판이하게 변해있었다. 한 마디로 절망적인 상황이라 묘사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벽을 새카맣게 메운 채 버티고 서 있는 악마들이었다. 인간과 비슷한 크기를 가진 악마들은 양옆으로 두 가닥의 휘어져나간 뿔이 돋 아난 머리통에다 단단해 보이는 투구를 쓰고 있었고 끝이 갈고리처럼 휜 기형 검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특이하게도 기형검에서 푸른 빛 불꽃이 일렁거렸으며 투구 외에 아무것도 걸 치지 않은 회백색 몸뚱이는 온통 꿈틀거리는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투구의 눈구멍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섬뜩한 눈빛은 보는 사람들의 오금을 여지없이 저리게 하고 있었다. 수는 약 백 마리 정도, 일견해도 병사들의 두 배가 넘는지 라 하객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시커멓게 죽어 들어갔다. 악마들은 누구의 출입 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창문과 문 주위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쉬르나크의 옆에서 십여 마리 정도의 악마 들이 버티고 서 있었는데 그들 중 넷은 특히 강해 보이는 놈들이었다. 다른 악 마들과 달리 긴 장검을 들고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한 눈에도 알아볼 수 있는 데스 블레이드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투구 사이로 돋아난 뿔의 길이 역시 여타의 악마들과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여러 가닥으로 휘어진 채 머리 전체 를 덮고 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게다가 쉬르나크의 양옆에 버티고 서 있는 시커먼 그림자의 정체는 생각만 해 도 끔찍했다. 그것은 바로 과거 트루베니아에서 벌어졌던 어둠의 전쟁에서 엄 청난 맹위를 떨쳤다는 공포의 마물, 다크 쉐이드였다. 4미터에 육박하는 거대 한 신장, 넓게 펼친 채 펄럭이는 날개의 가장자리에는 강철갑옷을 마치 종잇 장처럼 찢어버린다는 날카로운 손톱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손톱의 끝에는 닿 기만 해도 전신을 마비시킨다는 맹독이 배어있을 것이 분명했다. 팔라딘 두셋 정도는 한끼 식사거리로 간단히 해치워버린다는 공포의 다크 쉐 이드가 둘씩이나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의 안색은 핏기 하나 없는 백짓장처 럼 변해버렸다. 도저히 싸워 볼 전력이 아닌 것이다. 사람들의 질린 표정을 감 상하듯 둘러본 쉬르나크는 만족스럽다는 듯 괴소를 지었다. "크크크. 인간들이여. 너희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들 앞에서는 어림없을 것이다. 이들은 바로 케루빔 전하의 마왕 군단에 소속된 정예 전사들이다. 소 개가 필요한가?" 말을 마친 쉬르나크는 손가락을 뻗어 벽면을 채우고 있는 악마들을 가리켰다. "저들의 이름은 둠 워리어(Doom warrior). 새로이 마왕군단의 주력으로 떠오 른 강력한 전사들이지. 1차 암흑전쟁이 실패로 끝난 뒤 케루빔 전하께서는 강 력한 언데드 전사의 필요성을 느끼셨고 그 결과 저들 새로운 전투종족을 만들 어 내시기에 이르렀다. 둠 워리어 하나 하나가 데스 나이트에 필적하는 전투 력을 가지고 있으니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말을 마친 쉬르나크는 이번에는 주위의 악마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 다크 쉐이드는 익히 알고 있을 테니 설명을 생략하겠다. 이들 넷은 바로 마왕군단의 각급 부대장들이다. 엘리트 둠 워리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일반 둠 워리어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 마침 적당한 상대가 있으니 위용을 한 번 보여주도록 하지." 말을 마친 쉬르나크는 넋을 잃고 서 있는 팔라딘과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저들을 가볍게 제압해서 마왕군단의 힘을 보여주도록 하라. 단 이 자리가 케 루빔 전하의 신부를 맞아들이는 영광스러운 자리임을 감안해서 생명을 빼앗 지는 말도록……." "qlfdjajrdmf." 엘리트 둠 워리어 한 놈이 마계의 언어로 보이는 기괴한 소리로 화답하며 느 릿하게 걸어나왔다. 그 모습을 본 팔라딘들은 바짝 긴장했다. 한 번도 본 적 없 는 마물이긴 하지만 리치의 말을 들어보니 결코 만만히 생각할 상대가 아니었 다. 그러나 그들 역시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팔라딘, 누구도 순순히 당하리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림없다." "저주받은 육신을 가차없이 마계로 돌려보내 주겠다." 두 명의 팔라딘은 선공을 취하기로 작정했다. 수적인 우위를 최대한 이용하겠 다는 생각에 그들은 느릿하게 걸어오는 엘리트 둠 워리어의 좌우를 동시에 공 격해 들어갔다. 마나를 시퍼렇게 머금은 두 자루의 장검이 엘리트 둠 워리어 의 목과 허리를 파고 들어갔다. 그러나. 쨍. 그들의 공격은 너무도 허무하게 가로막혔다. 엘리트 둠 워리어가 뽑아 휘두른 거대한 장검에 부딪히자마자 두 자루의 검이 그대로 부스러져버린 것이다. 충 만한 마나로 보호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팔라딘들의 검은 산산조각이 나 고 말았다. "헉." 어처구니없이 검을 잃은 팔라딘들이 급급히 방패로 몸을 가렸다. 찢어진 손아 귀에서 전해지는 통증 따윈 느낄 새도 없었다. 하지만 엘리트 둠 워리어는 그 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거대한 장검이 파공성과 함께 날아들자 팔라 딘들은 사력을 다해 방패에다 마나를 밀어 넣었다. 콰쾅. 방패가 그대로 박살나며 팔라딘 한 명이 전신의 갑주가 으스러진 채 훨훨 날 아갔다. 오우거를 무색하게 할 정도의 힘이라서 의식을 잃고 바닥에 쑤셔 박 힌 팔라딘의 입에서 선혈이 자욱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래도 나머지 팔라딘은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이었다. 방패에 타격이 가해지는 순간 손잡이를 놓아버렸 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저항해볼 여지란 없었다. 방패를 쥐었던 손은 이미 강렬한 충격으로 인해 마비된 상태였고 오른 손은 호구가 찢어져 더 이 상 검을 쥘 수조차 없었다. "으으으." 겁에 질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팔라딘에게 다가간 둠 워리어는 검을 높이 치켜세웠다. 마치 세로로 쪼개버리겠다는 듯한 기세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팔라딘의 머릿속에는 죽음이란 단어가 스쳐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쉬르 나크의 음산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만! 죽이지는 말도록, 대신 남은 인간들을 제압하도록 하라. 그들 역시 명을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머지않아 피의 향연을 충분히 즐기게 해 줄 테 니 시행하라." "wpswkd"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내뱉은 엘리트 둠 워리어는 엉거주춤 서 있는 병사 들 사이를 번개같이 파고 들어갔다. 고통에 겨운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동시다 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크아악." "으윽." 병사들이 전멸하는 데에는 채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대항하려는 병사를 쓰러 뜨리는데 걸린 시간이 불과 10초였고 나머지 시간은 도망치는 병사들을 추적 해서 쓰러뜨리는데 걸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태를 진압한 엘리트 둠 워리 어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쉬르나크의 옆에 시립했다. 쉬르나크는 유쾌하다는 듯 광소를 터뜨렸다. "크크크. 인간들이여. 이제 케루빔 전하의 위대한 힘을 실감했는가?" 장내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누구하나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들리는 것이라곤 오직 널브러진 병사들의 나지막한 신음소리 뿐이었다. 새로이 마왕 군단의 주력으로 떠올랐다는 마계전사 둠 워리어가 저토록 강하다니……. 눈 깜짝할 사이에 보유한 병력이 전멸하자 튜드렛 백작의 얼굴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인간들의 질린 표정을 감상하듯 훑어본 쉬르나크는 이번에는 시선을 신랑인 모르세르에게로 돌렸다. 이미 모르세르의 얼굴에서는 핏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쉬르나크가 음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네놈이 신랑이냐?" "그, 그렇소." 모르세르는 발악이라도 하듯 고함을 질렀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이성을 유 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쉬르나크는 재미있다는 듯 모르세르를 쓸어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무척 운이 좋은 편이다." "………." "지금까지 케루빔 전하의 신부를 구하러 온 마계 사자들의 경우, 이런 상황에 처하면 신랑과 신부 둘을 한꺼번에 마계로 데리고 간다. 신부는 계획대로 케 루빔 전하와 혼약을 올리는 반면 신랑은……." 모르세르를 쳐다보며 쉬르나크는 눈구멍 사이에서 더욱 강렬한 광망을 피워 올렸다. "감히 케루빔 전하의 신부와 결혼하려 한 죄로 말미암아 연옥(煉獄)으로 끌려 가서 백대독형을 차례대로 당하게 된다. 그곳에서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 다. 죽으면 또다시 살려내어 영원히 형벌을 가하니까……." 주르르. 모르세르의 바지춤에서 누런 물이 흘러나왔다. 이미 그는 공포에 질려 이성을 반쯤 잃고 있었다. 그런데 쉬르나크의 말투가 갑자기 누그러졌다. "하지만 이번만은 경우가 다르다. 너는 다른 마족이 아닌 내가 사자로 온 것을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한때 인간이었던 나는 무식한 악마녀석들과 는 격이 틀리지. 위대하신 케루빔 전하께서 신부를 맞아들이시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불협화음이 끼여들면 안 되는 법. 그래서 나는 일을 순리적으로 해결 하려 한다." 말을 마친 쉬르나크는 뼈만 남은 손을 좍 벌렸다. 그러자 엘리트 둠 워리어 한 놈이 다가와서 리치의 손에다 장검 한 자루를 올려놓았다. 쉬르나크가 검을 쥔 채 반쯤 뽑자 눈부신 금빛 광채가 모르세르의 눈을 강렬하게 찔렀다. 스르릉. 모르세르는 엉겁결에 장검에다 시선을 던지고 말았다. "세, 세상에……." 그의 눈망울에 탐욕의 빛이 가득 차 올랐다. 한 눈에 보기에도 장검은 결코 평 범하지 않은, 한 마디로 보물이라 할 수 있는 검이었기 때문이었다. 선렬한 금빛의 검신에서는 흠집하나 찾아볼 수 없었고 검집에는 온갖 보석들 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손잡이 아랫부분에 박힌 루비는 모르세르가 확 실하게 판별할 수 있는 진품이었는데 에메랄드와 사파이어 등의 쟁쟁한 보석 들이 검집에 돌아가며 박혀 있었다. 한 마디로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보검이었다. 애인들에게 보석을 선물하기 위해 수많은 보석상을 전전했던 모 르세르가 보석의 진위를 몰라볼 리가 없었다. "세, 세상에……." 이미 모르세르는 검의 가치에 홀린 나머지 공포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 태였다. 그런 모르세르를 쳐다보며 쉬르나크는 괴소를 흘렸다. "크크크. 검이 마음에 드느냐?" "………." 비록 검이 탐나긴 하지만 섣불리 내심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기에 모르세르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설명해 주지. 이 검의 이름은 샤이어 블레이드. 한때 멸망한 트루베니아의 왕 국 트란벨의 왕가를 상징하는 검이었다. 검신 전체가 골드 드래곤의 뼈로 되 어있으며 검집은 보다시피 순수한 황금이다. 물론 박혀 있는 보석은 하나같이 진품이 아닌 것이 없지." 과거 트루베니아 제일의 부국(富國)이었던 트란벨의 상징답게 샤이어 블레이 드는 모르세르의 눈앞에서 눈부신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정신 없이 샤이어 블레이드를 쓸어보는 모르세르의 모습에 쉬르나크는 유쾌하다는 듯 광소를 터뜨렸다. "카카카. 이제 네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거래이다." "거, 거래?" 의아한 듯 되묻는 모르세르를 쳐다보며 쉬르나크는 한 자,한 자 또박또박 내 뱉었다. "이 샤이어 블레이드를 얻는 대가로 신부를 나에게 넘길 마음이 있느냐? 불협 화음을 막기 위해 난 지금까지의 관례를 깨고 너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바이 다." "………." 모르세르는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많은 사람들, 특히 아르네 영주가 있는 자리에서 내심을 털어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이 거래가 사람들의 눈이 없는 다른 자리에서 행해졌 다면 그는 생각도 할 것 없이 승낙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 마틸다는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는 수많은 미녀들 중 단지 하나에 불 과했다. 모르세르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않자 쉬르나크의 눈구멍에서 불 같은 광망이 토해졌다. "만약 거래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난 관례대로 할 수밖에 없다. 연옥으로 잡혀가서 백대독형을 겪으면서까지 신부를 지키고 싶다면 그렇게 해 주겠다." 모르세르의 안색이 삽시간에 싹 바뀌었다. "나, 날 잡아갈 것이오?" "물론이지. 지금까지 나머지 사자들은 계속 그렇게 해 왔다. 오직 나만이 관례 를 타파하려고 할 뿐이지. 케루빔 전하의 결혼식에 불협화음이 끼여들게 하지 않으려는 충성심의 발로라고 생각해라. 그럼 어떻게 하겠느냐? 검을 받고 신 부를 넘겨주겠느냐? 아니면 신부를 지키는 대가로 영원히 연옥에서 고통을 받 겠느냐?" 일이 거기까지 진행되었는데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모르세르는 겸연 쩍은 표정으로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미, 미안하오. 날 용서하시오. 마틸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틸다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결혼을 약속한 약혼자가 검 한 자루에 자신을 팔아 넘겼으니 어찌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있으 랴?. 눈앞이 캄캄해진 마틸다는 현기증에 정신마저 어찔어찔해져왔다. 그녀가 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자 옆에 서 있던 엘리트 둠 워리어가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 쉬르나크가 사나운 눈빛으로 엘리트 둠 워리어를 노려 보았다. "멍청한 놈. 위대한 케루빔 전하의 신부께서 행여나 상처를 입기라도 한다면 우리 모두는 그 날로 소멸되는 신세를 면치 못한다. 그러니 똑바로 보필하도 록……." "alclssha dmdlrm."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내뱉은 엘리트 둠 워리어는 마틸다를 조심스럽 게 안아들려 했다. 하지만 마틸다는 그 손길을 냉랭히 뿌리쳤다. "이것 놔. 이렇게 된 마당에 목적지가 마계이던 지옥이던 내 발로 당당히 가겠 어." 모르세르를 잡아먹을 듯 쏘아본 마틸다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마치 모든 것 을 포기한 듯한 모습이었다. 어쩔 줄 몰라하던 엘리트 둠 워리어가 다시 제 자 리에 버티고 서자 쉬르나크는 모르세르를 향해 느릿하게 걸어갔다. "먼저 허리에 찬 검을 버려라." 쉬르나크의 말에 모르세르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차고 있던 검을 풀어 저 만치 던져버렸다. 쨍그렁. 추호도 미련이 없는 태도였다. 쉬르나크는 만족스럽다는 듯 보검을 들어 모르 세르에게 내밀었다. 갖가지 보석으로 치장된 샤이어 블레이드를 받아드는 그 의 손은 기대감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렸다. 모르세르의 머릿속은 부산하게 돌 아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마틸다가 아깝긴 하지만 이대로 마계로 잡혀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비록 아르네 영지를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런 엄청난 보검이 생긴 이상 결코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다.' 정신 없이 검을 쓸어보는 모르세르의 귓가로 쉬르나크의 자신만만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신랑의 동의에 의해 거래는 아무 문제없이 이루어졌다. 여기에 불만이 있는 자가 있는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물론이다. 내가 살아있는 한 결코 내 딸을 마계로 데리고 가진 못할 것이다." 소리를 지른 자는 바로 아르네 영주였다. 극도로 분노한 듯 수염을 빳빳이 곤 두세운 아르테 영주는 결코 지지 않겠다는 듯 쉬르나크를 사납게 쏘아보았다. 마틸다의 어머니 역시 공포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뜻을 굽히려 하지 않았 다. 쉬르나크는 가소롭다는 듯 냉소를 쳤다. "갸륵한 아비의 마음이로군. 함께 마계로 끌려가서 백대독형을 경험하시겠다? 용기는 가상하다만 힘이 없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겠다." 그가 손을 슬쩍 휘젓자 뭔가 시커먼 것이 아르네 영주를 향해 사정없이 달려 들었다. 쐐애액. 몸을 날린 마물은 바로 다크 쉐이드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접근한 다크 쉐이드는 영주 내외를 가볍게 제압해서 들어올렸다. 말 그대로 눈 깜짝 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이놈……끄으으." 버둥거리던 영주는 곧 몸을 축 늘어뜨렸다. 다크 쉐이드의 맹독에 의해 전신 이 마비되어버린 것이다. 영주의 부인 역시 눈동자만 움직일 수 있을 뿐 손가 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다크 쉐이드는 사로잡은 영주 내외를 사뿐히 들어 다 마틸다의 옆에 내려놓았다. 쉬르나크의 섬뜩한 시선이 그들의 모습을 낱낱 이 훑었다. "그럼 마계의 연옥에서 받을 백대독형을 손꼽아 기대하도록……." 참을 수 없어진 마틸다는 그들을 끌어안으며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아, 아빠, 엄마. 왜 그랬어요?" "거, 걱정 말아라. 마, 마틸다. 내, 내 목숨이 다하는 한 널 지켜주겠다." 띄엄띄엄 말을 늘어놓기는 했지만 영주의 내심은 이미 절망감에 젖어 있었다. 이제 그들 가족은 영락없이 마계로 잡혀가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흡족 하다는 듯 그들을 쓸어보던 쉬르나크는 다시 한 번 고함을 질렀다. "이젠 불만을 가진 녀석이 없겠지." 사람들은 손가락 하나 끄덕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신랑까지 포기한 마당에 그 누가 마계로 잡혀가기를 자청하겠는가? 게다가 늘어선 마물들에 저항한다 는 것은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지나지 않았다. 두 명의 팔라딘과 50명의 병사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박살내어 버린 엘리트 둠 워리어가 넷이나 버티고 있었고 연신 날개를 퍼덕이는 두 마리의 다크 쉐 이드는 보기만 해도 끔찍스러웠다. 게다가 벽면을 가득 채운 둠 워리어는 도 대체 어떤 방법으로 상대할 것인가? 사람들은 숨까지 멈춘 채 침묵을 지켰다. 순간 외마디 음성이 장내의 적막을 송두리째 깨어버렸다. "여기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그를 향해 집중되었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곧 영주 내외와 같은 신세가 될 것이란 생각에 사람들의 시선에는 측은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65회. 내일이 수능이군요. 고 3 독자 여러분 부디 수능 잘 치르시기 바랍니다. 제 처 제도 내일 수능 보거든요. 부디 좋은 결과 있으시길……. 행여나 기다리시는 일이 없도록 연참 분량을 한꺼번에 올립니다. 오늘은 더 이상 올라오지 않을 것입니다.^^ ************************************************************************ 몸을 일으킨 것은 바로 카심이었다. 그의 뒤에는 미첼이 주뼛주뼛 몸을 일으 키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그가 달려나가려던 카심을 지금껏 붙잡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카, 카심." 마틸다의 눈에 금세 습막이 서렸다. 설마 카심이 나서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카심의 얼굴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이미 마틸다를 목숨보다도 사랑하 는 그였으므로 그녀가 마계로 잡혀가는 것을 어찌 두고만 볼 수 있겠는가? 이 미 죽음까지 각오한 카심의 얼굴에는 비장함마저 감돌고 있었다. "그녀를 데리고 가는 것을 나는 용납할 수 없다." 카심을 쳐다보던 쉬르나크의 눈구멍에서 섬뜩한 광망이 자욱하게 퍼져 나갔 다. "네놈은 누구지?" 정신 없이 샤이어 블레이드를 쓰다듬고 있던 모르세르가 화들짝 놀라 질문에 대신 대답했다. "그, 그는 신부 집안의 겨, 경비병이오. 하인이나 다름없는 놈이지" "경비병? 그런 녀석이 왜 나서는 거지? 가문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인가?" 카심은 묵묵히 걸어나오며 또박또박 대답했다. "충성심이라…….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영주님 내외분은 나에게 있어 은인 이나 다름없는 분이니까……. 하지만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에게 있어… …." 식장 복판으로 걸어나온 카심은 쉬르나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 생명보다도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난 지금껏 그녀를 단 한 순간도 생 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비록 신분상의 벽 으로 인해 맺어질 가능성이 없긴 하지만, 비록 어쩔 수 없이 그녀의 결혼식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이지만 내가 세상에서 여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오로 지 그녀뿐이니까……." 감정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카심은 의중의 말을 아무 거리낌없이 털어놓 았다. 하지만 쉬르나크는 그 말에 전혀 감동한 것 같지 않았다. "주인 아가씨와 하인의 사랑이라……. 전형적인 신파조의 사랑타령이로군. 자 청해서 연옥으로 끌려가려는 놈이 또 하나 있다니 정말 재미있는걸?" "그녀를 위해서라면 난 웃으며 연옥으로 끌려갈 수 있다. 하지만 그전에 난 목 숨을 걸고 그녀를 지킬 생각이다. 몸이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 쉬르나크는 냉랭하게 냉소를 지었다. "과연 네놈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을까?" "힘이 있건 없건 상관없다. 설사 검술을 익히지 않았다고 해도 난 아무 거리낌 없이 나왔을 테니까……." 말을 마친 카심은 벼락같이 고개를 돌렸다. "미첼." 미첼은 즉시 호응해왔다. "예. 대장." "지금 즉시 이곳을 빠져나가서 아르케 강으로 가거라. 그곳에서 낚시중인 데 이몬과 용병대원들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그들을 당장 데리고 오너라." 그 말을 들은 미첼은 잠시 머뭇거렸다. 차마 카심을 혼자 두고 떠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 하지만 대장……." 카심의 어조는 추상같았다. "이, 일은 반드시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다. 난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녀가 잡혀 가는 것을 막겠다. 그러니 서둘러라. 네 실력이라면 충분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미첼은 두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몸을 날리는 도중 미첼은 병 사들이 떨어뜨린 검 한 자루를 사뿐히 집어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쉬르 나크는 냉소를 쳤다. "미친 놈. 감히 둠 워리어와 어둠의 장막을 뚫고 달아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 었나? 헉." 미첼이 집어든 검에서 갑자기 푸른빛의 광채가 쓱 하고 솟아나자 쉬르나크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그것은 오로지 소드 마스터만이 시전할 수 있 는 완성된 오러 블레이드였다. 미첼이 접근하자 둠 워리어 서너 마리가 몸을 날려 앞을 가로막았다. 미첼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검을 맹렬히 휘둘렀다. "가소로운 어둠의 마물들 따위가 내 앞을 가로막다니……." 썽컹. 비명도 없었다. 둠 워리어 두 마리를 가차없이 검과 함께 베어버린 미첼은 여 새를 몰아 옆에서 달려드는 둠 워리어를 마저 두 조각 내어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나머지 둠 워리어들이 일제히 몰려들었지만 미첼은 이미 문에 가까이 근 접한 상태였다. 둠 워리어 하나가 문 앞에 버티고 있다가 갈고리 검을 휘둘러 왔다. 챵. 앞을 가로막은 갈고리 검을 일검에 잘라버린 미첼은 장검을 둠 워리어의 복부 깊숙이 박아 넣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한껏 머금은 검은 둠 워리어의 몸뚱이 와 함께 문을 감싼 어둠의 장막에 깊숙이 틀어박혔다. 키아아아. 괴이한 비명소리와 함께 둠 워리어는 그대로 문에 못 박혀 부들부들 떠는 신 세가 되어버렸다. 그 상태로 미첼은 마나를 검에 집중시켰다. 파츠츠츠. 검에서 눈부신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오러 블레이드가 집중됨에 따라 검을 중심으로 마치 거미줄과 같은 균열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문을 감싼 어둠의 장벽은 오래지 않아 산산이 깨어져버렸다. 검에 꿰인 둠 워리어의 몸뚱이와 함께……. 파파팍. 순간 등뒤로 엄습해 오는 기운을 느낀 미첼은 몸을 빙글 돌리며 맹렬히 검을 휘둘렀다. 슈각. 덮쳐오던 둠 워리어 두 마리가 그대로 네 조각으로 화해버렸다. 그것들의 잔 해 옆으로 네 조각으로 변한 갈고리 검이 떨어져 내렸다.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 앞에는 그 어떤 것도 버티지 못했다. "대장. 조금만 버텨요. 알겠죠?" 냅다 고함을 지른 미첼은 몸을 돌려 냅다 달려가기 시작했다.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는 그의 속도는 일견해도 잘 훈련된 준마조차 따를 수 없을 지경이었 다. 사람들은 넋이 빠진 채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쉬르나크가 다시 손을 휘저어 문에 어둠의 장막을 칠 때까지……. 스르르 어둠의 장막이 또다시 결혼식장을 외부와 격리시켰다. 쉬르나크가 놀랍다는 듯한 음성을 토해냈다. "소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군. 둠 워리어가 저토록 허무하 게 당하다니 놀라워. 저놈은 도대체 누군가? 네놈의 부하인가?" 홀로 남게 되었지만 카심은 결코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내 휘하의 용병대원이다. 하지만 난 그를 부하가 아닌 동료라고 생각하지." "용병? 내가 아는 상식으로 소드 마스터가 용병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 로 알고 있는데?" 카심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다분히 자부심이 서려있 는 미소였다. "왜냐하면 내 용병단은 좀 특별하기 때문이다. 맡은 임무가 특별하니 대원들 도 당연히 특별해야 할 수밖에 없겠지?" 쉬르나크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뒤흔들었다. "특별한 임무라……. 설마하니 드래곤이라도 잡는다는 거냐?" 카심은 정답이라는 듯 손뼉을 쳤다. "맞았어. 우리의 임무는 바로 그것이다. 바로 드래곤 사냥." 쉬르나크의 눈가에서 어이없다는 빛이 번져갔다. "미친 놈. 드래곤이 어떠한 존재인데……. 무서울 것이 없는 우리 마계 전사들 도 드래곤만은 꺼려할 수밖에 없다. 드래곤은 그 정도로 강력한 생물이다." "사실인걸 어떻게 하겠나? 우리 카심 용병단은 벌써 드래곤을 여럿 잡은 바 있 다. 그 중에는 에인션트 급 드래곤도 끼여 있다." "이해할 수 없군. 내 기억으로 그런 엄청난 용병단은 지금껏 양 대륙을 통틀어 존재한 적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믿을 수 없어하는 쉬르나크와는 달리 사람들의 얼굴에는 경악감만이 가득했 다. 하객들 중 태반이 펜슬럿의 고위귀족들이었으므로 카심 용병단에 대해 모 를 리가 없었다. 심지어 아르네 영지의 사람들조차 카심 용병단에 대한 소문 을 들은 적 있을 정도였다. "세, 세상에 저자가 그 유명한 카심 용병단의 대장이야?" "카, 카심이 설마 그 유명한……." 영주 내외와 마틸다도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믿을 수 없어하고 있었다. 카심이 그 유명한 카심 용병단의 대장이라니……. 이름이 일치하긴 했지만 설마 그럴 것이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놀라워하는 사람들의 귀로 냉랭한 쉬르나 크의 음성이 메아리쳤다. "네놈의 허풍을 들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만 돌아가야 할 시간이니 네놈 까지 마저 잡아가도록 하겠다." "순순히 잡히지는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친 카심은 뚜벅뚜벅 걸어갔다. 쉬르나크는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아 이미 상대를 사로잡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카심이 걸음을 멈춘 곳은 바로 모르세르가 던진 검이 나동그라져 있는 곳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검을 내려다보던 카심은 묵묵 히 되뇌이기 시작했다. "불쌍하게도 넌 주인에게 버림을 받았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새 주인이 되어 주겠다. 무시무시한 마계의 마물을 상대할 것이니 결코 네 명예 를 더럽히진 않을 터, 부디 주인으로 받아들여주렴." 말을 마친 카심은 허리를 굽혀 검을 집어들었다. 스르릉. 검을 뽑아든 카심은 검집을 바닥에 던졌다. 그것은 바로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검객의 마음가짐이었다. 마나를 불어넣자 검신이 삽시 간에 푸른빛으로 변해버렸다. 쓰쓰쓰. 그 모습을 지켜본 쉬르나크는 다소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네놈도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가?" "소드 마스터인 미첼보단 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 녀석은 고 맙게도 날 깎듯이 대장으로 대접해준다. 나로써는 고마울 수밖에 없지만." 카심은 검을 들어 싸울 자세를 취했다. "자 덤벼라. 설사 내가 죽어 망령이 된다 하더라도 마틸다 아가씨가 잡혀가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그녀는 내 생의 전부. 설사 내가 그녀 대신에 연옥에서 끝없이 고통받는 처지가 된다 하더라도 난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쉬르나크는 가소롭다는 듯 냉소를 쳤다. "크크크. 정말 눈물나는 순애보야. 재미있군. 내 널 가상히 여겨 특별히 엘리트 둠 워리어 넷을 붙여주겠다.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기대해 보겠다." "얼마든지. 설사 상대가 발록이라 하더라도 난 물러서지 않는다." 검 손잡이를 으스러져라 움켜쥔 카심에게 엘리트 둠 워리어 네 마리가 서서히 접근했다. 엘리트 둠 워리어들은 검에서 시퍼런 데스 블레이드를 줄기줄기 뿜 어내며 카심을 에워쌌다. 한 눈에 보아도 협공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파츠츠츠 엘리트 둠 워리어들이 뿜어내는 투기(鬪氣)로 인해 사람들은 심장이 바짝 쪼 그라드는 심정이었다. 전신을 파고드는 투기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지 경이었지만 카심의 마음은 도리어 차분히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검을 움켜쥔 채 공격의 순간을 기다리는 카심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가지 생각밖에는 없었 다. '그녀는 반드시 내 손으로 지킨다.' 지루했던 기다림의 순간이 지나가고 마침내 엘리트 둠 워리어들의 공격이 시 작되었다. 팔라딘과 병사들을 간단히 패퇴시킨 바로 그 엘리트 둠 워리어가 거대한 검을 일직선으로 휘둘러온 것이다. 카심은 바짝 긴장하며 공격을 막아 갔다. '이 놈은 정말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있다. 오로지 힘을 효과적으로 흘려버려 야만 버틸 수 있다.' 다행히 카심은 검의 각도를 효과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엘리트 둠 워리어 의 검을 정면으로 받아내고도 검을 놓치지 않았으니 말이다. 푸캉.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엘리트 둠 워리어 네 마리의 무시무시한 공 격이 카심에게로 일시에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콰콰콰콰 정신 없이 공방에 열중하던 카심의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위태했다. 때문에 싸움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손엔 땀이 서서히 맺히기 시작했다. "카, 카심." 마틸다는 애가 탔다. 용기도 없는 겁쟁이로 간주하고 잊어버리려 했던 카심이 이렇게 행동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보기만 해 도 섬뜩한 마계의 마물들과 피 튀기는 혈전을 치르고 있다니……. 눈물이 계 속 흘러내려 도저히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오, 오빠. 세상에서 제일 믿음직한 카심 오빠." 그녀의 입에서 오래 전에 잊어버렸던 호칭이 슬그머니 튀어나왔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카심을 사모했던 어린 시절의 마틸다가 되어 있었다. 검 한 자루 에 자신을 팔아 넘긴 약혼자 모르세르에 대한 생각은 이미 머릿속에서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치열하게 혈투를 벌이고 있는 카심만이 진정한 그녀 의 남자였다. 이제 마틸다는 싸움의 결말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상태였 다. 카심의 목숨이 사라지는 순간 혀를 깨물어 자결하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 이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영주 내외를 비롯한 사람들도 숨을 죽인 채 혈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카심의 몸은 말 그대로 혈인이 되어있었다. 한 손으로 여러 손을 막기 힘들다 는 것을 입증하듯 그는 이미 여러 차례의 공격을 몸에 허용한 상태였다. 하지 만 다행히도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 상대는 팔라딘조차 간단히 제압해버린 공 포의 마물, 엘리트 둠 워리어. 그들을 상대로 이처럼 분전할 수 있다는 것은 어 찌 보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토록 힘겨웠던 서전과는 달리 카심은 무척 침착하게 공방에 열중하고 있었 다. 숨 쉴 틈도 없이 뻗어오는 공격을 가로막은 뒤 반격을 가하는 것이 물 흐르 듯 자연스러웠고 엘리트 둠 워리어의 검에 실린 엄청난 파워 역시 무리 없이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피투성이가 된 채 접전에 몰입해있는 카심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가득 했다. '이상하군.' 엘리트 둠 워리어들의 검로가 카심에겐 극히 익숙했다. 그들의 검로는 그가 지금껏 무수히 대련해왔던 데스 나이트들의 그것과 조금도 차이를 보이지 않 았다. 판에 박은 듯 동일한 공격. 그 때문에 카심이 시간이 갈수록 침착해질 수 있었다. 공격이 가해지는 경로와 시점을 깡그리 알고 있으니 대적하기가 점점 쉬워질 수밖에 없었다. "데스 나이트들은 과거 트루베니아의 절대자들……. 그렇다면 이 놈들의 정체 역시 죽은 트루베니아의 기사들이었나?" 하지만 깊이 생각할 여유란 없었다. 검로와 공격방향을 모조리 꿰고 있긴 하 지만 엘리트 둠 워리어들의 연수합격은 정말 무시무시할 지경이었다. 잠시라 도 마나가 흩어질 경우 들고 있는 검은 순식간에 조각나버릴 터였고 그렇다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휘이잉. 사선으로 후려쳐 오는 검을 종잇장 한 장 차이로 피해낸 카심은 여새를 몰아 엘리트 둠 워리어의 품속을 파고 들어갔다. 데스 나이트와 대련해 본 경험에 의하면 이럴 경우 상대의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경향이 있었다. "한 놈만 잡자." 카심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 틈을 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요행 을 노린 공격이었고 다행히 엘리트 둠 워리어 역시 데스 나이트와 같은 동작 을 취하고 있었다. 허점이 포착되자 카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검을 찔러 넣었다. "에잇." 카심의 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엘리트 둠 워리어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 다. 카아아아 엘리트 둠 워리어는 세차게 몸부림을 쳤다. 그 모습에 카심은 엘리트 둠 워리 어가 데스 나이트와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거의 불사에 가 까운 존재인 데스 나이트는 이 정도 상처에 거의 타격을 받지 않는다. 몸통이 여러 조각이 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싸울 수 있다는 점이 데스 나이트가 가 진 최대의 강점이었다. 그 사실을 파악한 카심은 검을 힘껏 비틀며 앞으로 돌 격했다. 뒤에서 엄습해 오는 공격을 간파한 것이다. "이야아압." 검 두 자루가 미세한 차이를 두고 그의 몸을 스쳐지나갔다. 가슴이 꿰뚫린 엘 리트 둠 워리어를 세차게 밀어 넘어뜨린 카심은 서둘러 검을 뽑아들었다. 가 슴을 관통 당한 엘리트 둠 워리어는 생명이 다했는지 검이 뽑히는 순간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 모습에 카심은 용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한 번 해 볼 만 하다." 버럭 고함을 내지른 카심은 벼락같이 공격 자세를 취했다. 아직까지 세 마리 의 엘리트 둠 워리어가 투기를 뿜어내며 기선을 제압하고 있었다. 카심은 지 금 보유한 전투력의 몇 배에 해당하는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것은 오로 지 마틸다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발휘할 수 있는 괴력이었다. "zktla ajtwlsep." 알아들을 수 없는 기성과 함께 엘리트 둠 워리어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챵챵챵챵. 카심의 검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회전하며 날아드는 검을 쳐냈다. 복부 를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거대한 장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카심은 지체 없 이 반격을 가했다. 이미 상대가 회피하는 방위를 확실하게 파악해놓은 다음이 었다. 복부가 베어져 피가 흘러내렸지만 통증 따윈 느낄 겨를도 없었다. 키아아아. 목의 반이 베어져나가 너덜너덜해진 엘리트 둠 워리어는 끔찍한 비명을 내질 렀다. 마물이라서 그런지 한 방울의 피도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몸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니 전투력을 많이 상실한 모양이었다. 그 틈을 놓칠 카심이 아 니었다. 푸욱. 마나를 충만히 간직한 카심의 검이 심장 부위를 사정없이 헤집어버린 뒤 빠져 나가자 엘리트 둠 워리어는 저주받은 육신을 차가운 대지에 뉘인 채 몸을 푸 들푸들 떨 수밖에 없었다. "크으. 이제 둘이 남았는가?" 시야를 가리는 핏물을 훔쳐낸 뒤 카심은 사납게 포효를 했다. 남은 두 마리의 엘리트 둠 워리어는 카심의 분전에 별반 감동받지 않았는지 무심하게 공격을 날려왔다. 하지만 카심은 이제 여유를 되찾은 다음이었다. 극도로 지친 상태였지만 상대의 검로와 공격방향을 훤히 파악하고 있는 이상 무서울 것은 없었다. 이후로 이어진 치열한 혈전. 카심의 몸에 서너 번 칼자국 을 내긴 했지만 그것이 엘리트 둠 워리어들의 한계였다. 버서커(狂戰士)가 되 어버린 카심의 미친 듯한 손속에 의해 하나도 빠짐없이 저주받은 생애의 종지 부를 찍어야 했던 것이다. "허억 헉." 카심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을 돌렸다. 그의 앞에는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 한 엘리트 둠 워리어 두 마리가 몸을 푸들푸들 떨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나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옆구리까지 길게 패인 검상을, 나머지 하나는 복부에 깊숙한 관통상을 입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카심은 피로 범벅이 된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쉬르나크를 쏘아보 았다.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거듭된 출혈로 인해 정신마저 아득해져 왔지만 그는 사력을 다해 몸을 세웠다. "1차 전은 내 승리로 끝난 것 같군. 다음은 뭐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휘저은 쉬르나크는 냉소를 쳤다. "제법이로군. 엘리트 둠 워리어 넷을 박살내다니……. 하지만 거기까지가 네 한계인 것 같군. 그렇지 않나?" 쉬르나크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제 카심에겐 검 한 번 휘두를 힘조차 남아있 지 않았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설 카심이 아니었다. "난 이미 뜻을 밝혔다. 검을 휘두를 수 없다면 입에 물고서라도 싸울 것이며 걸 을 수 없다면 기어서라도 그녀가 잡혀가는 것을 막겠다." "정말 갸륵한 충절이로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마계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재롱을 보아줄 시간이 없다는 뜻이지." 쉬르나크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망이 더욱 짙어졌다. "이제 네 놈을 끝장내겠다. 힘이 다한 네놈을 처리하는데 다크 쉐이드 둘과 나 머지 둠 워리어들을 모조리 투입할 생각이니 한 번 상대해 보도록. 내 생각으 로 널 처리하는데 이들이라면 충분할 것이라 생각한다." 카심의 얼굴에 절망감이 어렸다. 지금 그의 몸 상태라면 다크 쉐이드는 고사 하고 둠 워리어 하나도 제대로 상대할 수 없었다. 도저히 마틸다가 잡혀가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케케케케. 명령이 떨어졌는지 다크 쉐이드 둘이 나지막이 기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보기 만 해도 두려운 다크 쉐이드의 모습에 카심은 어쩔 줄 몰라했다. 그 모습을 감 상하듯 지켜보던 쉬르나크는 숨조차 쉴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둘러보 았다. "너희들도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라." "………." "우릴 본 이상 살려둘 순 없는 노릇이다. 마계로 잡아가지 않는 것을 천만다행 으로 생각하도록……." 쉬르나크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저 가증스런 리치 에겐 애당초 사람들을 살려둘 마음이 전혀 없었다. 검을 소중히 어루만지고 있던 모르세르가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그, 그것은 얘기가 틀리지 않소? 이미 거래가 성립되었는데……." "거래는 거래고 입막음은 입막음이다. 지금까지 너희들은 케루빔 전하께서 인 간 여잘 신부로 맞아들이신다는 소문을 들은 적 있느냐?" 금시초문이었기에 모르세르는 고개를 가로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다 입을 효과적으로 틀어막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신부와 그의 부모, 그리고 저 머저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 자리에서 죽는다. 물론 너희들에겐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겠지? 죽음은 순간적으로 끝나지만 연옥으로 잡혀가 는 자들은 영원히 윤회되는 고통을 겪어야 할 테니까……." 말을 마친 쉬르나크는 카심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 용기는 가상하다만 이제 마지막이다. 애송아. 어디 연옥의 맛이 어떤지 한 번 경험해 보도록 해라." 쉬르나크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크 쉐이드가 카심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접근 하기 시작했다. 벽면을 가득 메운 둠 워리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에 사 람들의 머리 속엔 죽음이라는 단어가 똑똑히 각인되기 시작했다. 도저히 저항 해 볼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카심의 얼굴에는 놀랍게도 기대의 표정이 떠올 라 있었다. 공교롭게도 상황을 타개할 방법 하나가 생각난 것이다. "정말 놀랍군." 품속으로 손을 넣어본 카심의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번뜩였다. 오늘 아침 데 이몬이 건네준 물건을 비로소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효율적으로 언데드와 마물을 제압할 수 있는 신기인 베르하젤의 홀. 게다가 그것을 작동시킬 드래 곤 하트도 있었다. '어쩌면 이것으로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마음을 정리한 카심은 검을 슬며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순간 쉬르나크의 노성 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이제 와서 저항을 포기한다고 그냥 용서해 줄 줄 아느냐?" "물론 아니지. 더 효과적인 무기를 사용할 생각이거든." 카심은 자신감을 되찾은 모습으로 쉬르나크를 쳐다보았다. "알다시피 우린 드래곤 사냥을 하는 용병단이다. 오래 전에 트루베니아에 건 너가 드래곤의 레어를 턴 적도 있지. 그곳에서 얻은 물건인데 혹시 네놈이 알 지 모르겠군." 품속에 들어갔다 나온 카심의 손위에는 베르하젤의 홀이 덩그렇게 놓여 있었 다. 츠츠츠츠. 식장 내부를 가득 채운 마물의 존재감을 파악했는지 베르하젤의 홀은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예상외로 쉬르나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눈치였다. "베르하젤의 홀이로군. 1차 어둠의 전쟁에서 많이 보긴 했지만 요즘은 극히 구 하기 힘든 물건이지. 하지만 그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도록… …. 네놈 몸 상태로 보아 홀을 작동시키기도 힘들뿐더러 만약 그런다고 해도 둠 워리어 정도나 당할까, 나나 다크 쉐이드에겐 거의 타격을 입힐 수 없을 것 이니까……."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카심이 두 번째로 꺼낸 것은 바로 드래곤 하트였다. 지크레이트의 드래곤 하 트가 그의 손에 들려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쉬르나크 가 경악성을 토해냈다. "헉. 그, 그것은……. 설마 드래곤 하트?" 카심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는군. 만약 드래곤 하트에 내재되어 있는 방대한 마나와 이 베르하젤의 홀이 결합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무척 기대가 되지 않나?" 쉬르나크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고도의 지능을 가진 다크 쉐이드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아 협박이 제대로 먹혀든 것 같았다. 카심 은 이제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왜? 상황을 보니 감당하기 힘들 것 같나………." "거래를 하자." 쉬르나크의 뚱딴지같은 대답에 카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소리지?" "드래곤 하트는 마계에서도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보물. 그것을 내준다면 우 린 신부를 깨끗이 포기하겠다." "………." "그뿐 아니라 이 자리의 사람들에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원한다면……." 말을 마친 쉬르나크는 뼈만 남은 손가락을 뻗어 모르세르가 얼싸안고 있는 샤 이어 블레이드를 가리켰다. "샤이어 블레이드를 능가하는 보검 다섯 자루와 각종 마법 무구, 그리고 황금 백 톤을 주겠다. 어떤가?" 쉬르나크가 제시한 조건이 어마어마했기에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가히 엄청난 재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카심은 별로 감명을 받은 눈치가 아니 었다. "대단한 재물이로군. 하지만 말이야." 카심의 눈길이 슬며시 마틸다에게로 향했다. 그녀 역시 눈물로 범벅이 된 얼 굴로 카심을 쳐다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카심의 입에서 무 감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에게 있어 최고의 보물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다. 그 어떤 보검이나 보물 도, 설사 황금 백 톤이 아니라 만 톤을 준다 해도 마틸다 아가씨와는 바꿀 수 없다." 카심의 말이 끝나자 쉬르나크가 다급하게 고함을 질렀다. "그녀를 잡아가지 않겠다는 사실을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다. 드래곤 하트 만 넘겨주면 넌 그녀를 얻는 것과 동시에 막대한 재산을 모을 수 있다." "재산 따윈 필요 없어." 이미 작정을 한 듯 카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가씨께서 붉은 전갈좌를 타고 난 이상 오늘이 아니더라도 네놈들은 또다시 아가씰 노릴 가능성이 있을 터. 난 이 자리에서 이 모든 불안의 근원을 제거하 려 한다." "자, 잠깐 기다려라." 이제 입장이 바뀌어 다급해진 쪽은 쉬르나크였다. "드래곤 하트의 폭발력을 한낱 인간의 몸으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드 래곤 하트가 깨어지는 순간 네놈의 몸뚱이는 그대로 가루가 되어버린다." "상관없다. 아가씰 위해서라면 난 웃으며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말을 마친 카심은 드래곤 하트를 움켜쥔 오른손을 느릿하게 들어올렸다. "비록 드래곤 하트가 상상을 초월하는 보물이라고 하나 지금 이 순간 나에겐 하찮기 그지없는 물건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그 어떤 보물이라 해도 아가씨의 행복과는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알겠느냐?" 말을 마치자마자 카심은 오른손에 슬며시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 모습을 본 쉬르나크는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차원의 문을 열어라. 당장 돌아가야 한다." "이미 늦었어." 카심의 입가에 냉소가 걸렸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양손을 강하게 부 딪혔다. 쩌정. 왼손에 든 베르하젤의 홀에 부딪힌 드래곤 하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후 로 이어진 것은 엄청난 빛의 대폭발이었다. 번쩍. 식장 내부는 순식간에 강렬한 빛에 휩싸였다. 빛의 물결은 노도처럼 식장 내 부를 사정없이 휘감았고 사람이든 마물이든 예외 없이 눈을 질끈 감아야 했 다. 그 속으로 쉬르나크의 것으로 짐작되는 비명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키에에엑.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식장을 뒤덮은 빛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그 러나 그 시간은 너무나 길었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66회. 잠시 후 눈을 뜬 사람들의 얼굴에는 희열이 배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식장 내 부를 가득 채우고 있던 마물들이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리치도, 다크 쉐이드도, 심지어 카심에게 당한 엘리트 둠 워리어 의 잔해 역시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사라져버린 것이다. "모, 모두 사라졌어." "이제 살았어." 생명을 건졌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다크 쉐이드에 의한 중 독에서 벗어났는지 영주 내외도 부스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눈을 뜬 마틸 다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오빠!" 그녀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달려가는 쪽에는 카심이 큰 대자로 뻗어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사지에서는 어떠한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틸다는 카심 을 덥석 부여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떨어지며 카심의 가슴팍을 적셨다. "진작 내심을 말하지 그랬어요. 그랬다면, 그랬더라면……." 채 말을 이어나가지 못한 마틸다는 그저 흐느끼기만 했다. 카심이 죽었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세상을 살고싶은 마음이 없었다. 카심이 그토록 자신을 생 각했었다니……. 세상의 그 어떤 보물과도 자신과 바꾸지 않을 것이라 단언하 던 카심의 음성이 아직까지 귓가에 생생했고 피투성이가 된 채 마계 마물들과 혈투를 벌이던 늠름한 모습 또한 눈앞에 선했다. 이런 사람에게 자신이 냉대를 했었다니……. 어제 일이 후회스러워 도저히 자 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대로 카심을 따라 저 세상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머 릿속에 가득했기에 마틸다는 조용히 손을 뻗었다. 그곳에는 카심이 내려놓은 장검이 이가 이리저리 빠진 흉한 모습으로 놓여 있 었다. 검의 손잡이가 손에 닿자 마틸다는 카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온 통 피투성이가 된 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그 모습에 마틸다는 마음을 단단 히 먹었다. '오빠. 저 세상에서 만나 못 다한 연을 맺도록 해요.' 나직이 다짐한 마틸다는 검을 집어들어 목을 찌르려 했다. 그 때 큼지막한 손 이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 깜짝 놀란 마틸다가 고개를 돌렸을 때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사내가 눈을 뜬 채 마틸다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가씨." "카, 카심 오빠." 둘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서로 부둥켜안았다. 카심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마틸다는 연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녀에게 지금 이 순간이 세상에서 더 없이 행복한 순간이었다. "살아나셨군요. 하늘에 감사드려요. 정말로……." "걱정 마십시오. 제 명이 다하는 날까지 아가씰 지켜드리겠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둘은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포옹 을 풀지 않았다. 그 모습을 사람들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순 간 외마디 비명 소리가 장 내의 적막을 찢어놓았다. "아악. 내 검, 내 검."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모르세르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두 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빛을 발하던 샤이어 블레이드는 간 곳 없고 손가락 사이 에서 회백색 재가 힘없이 흘러내렸다. 아무래도 베르하젤의 홀이 내뿜은 신성력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였는데 그 것으로 보아 샤이어 블레이드는 애초부터 극악한 마검이었던 것 같았다.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작자로군." 연신 울부짖는 모르세르를 싸늘한 눈빛으로 응시하던 아르네 영주가 몸을 일 으켰다. 그는 부인을 부축한 채 조용히 카심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완전히 마 비에서 풀리지 않았는지 걷기가 힘겨워 보였지만 그는 열심히 발을 놀렸다. 영주가 다가가자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던 카심이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 다. "욱." 상처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는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카심은 필사적으로 영주 내외에게 예를 취하려 했다. 부드러 운 눈빛으로 카심을 쳐다보던 아르네 영주는 손을 내저었다. "괜찮네. 그냥 누워있게." "죄, 죄송합니다. 소란을 피우지 않겠다고 약속드렸는데 어쩔 수 없이……." 영주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상처가 심한 것 같군. 따라서 영주의 명령으로 예를 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 겠네." "안될 말씀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아르네 영주는 딸을 구해주어 고맙다는 소리를 입밖에 내지도 않았다. "카심 자네가 그토록 대단한 용병단의 대장일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어. 정말 놀라워." 카심은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하찮은 이름일 뿐입니다." "아니야. 도대체 카심 용병단이 어떤 용병단인지 정말 궁금했었지. 그런 용병 단의 대장이라니 세상에서 딸을 가진 부모라면 누구라도 탐낼 만한 사윗감이 겠지? 그렇고 말고." 머쓱해진 카심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아르네 영주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 갔다. "하지만 그런 조건을 깡그리 제외하더라도 자네에겐 충분히 마틸다의 배필이 될 자격이 있네. 마틸다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뛰어들었을 때 자넨 이미 충분한 자격을 얻었어." 말을 마친 영주는 냉랭한 눈빛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모르세르를 쏘아보았다. "한낱 검 한 자루에 약혼녀를 팔아 넘긴 약혼자와 자네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 지. 내가 눈이 어두웠네. 진정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견딜 수 가 없다네. " 잠시 머뭇거리던 아르네 영주는 곧 내심을 털어놓았다. "내 딸아이를 받아주겠나? 자네가 그 아일 지켜준다면 난 이제 아르네 영지를 잃는다고 하더라도 여한이 없네." 그 말을 들은 카심의 가슴속은 희열감으로 가득 차 올랐다. 드디어 사랑하는 여인을 얻을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한 자,한 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제 힘이 다하는 순간까지 마틸다 아가씰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아가씨의 행 복을 위해 그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고맙네." 목이 메였는지 영주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앉아 있던 영주 부인과 마 틸다의 눈에는 어느새 뿌연 습막이 서려 있었다. "그럼 잠깐만 기다리게." 카심에게 미소를 지어준 아르네 영주는 몸을 돌려 우두커니 서 있는 튜드렛 백작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앞에 도착한 아르네 영주는 나지막한 어조로 말문 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당신 아들은 검 한 자루에 내 딸을 팔아 넘겼소. 아마 입이 열 개 라도 하실 말이 없을 듯 싶소. 아직까지 혼인서약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난 공식적으로 파혼을 선언하는 바요." 튜드렛 백작은 입술을 악문 채 묵묵히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그의 아들이 못할 짓을 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르네 영주의 입가 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보시다시피 딸아이에겐 이제 더 없이 믿음직스러운 배필이 생겼소. 좋은 날 을 잡아 빠른 시일 내에 결혼식을 거행할 생각이오. 그러니 당신들은 이만 돌 아가도록 하시오." 아르네 영주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순간 튜드렛 백작이 한 마디 를 던졌다. "증거가 있소?" 황당해진 영주가 고개를 돌렸다. 튜드렛 백작은 뭔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요?" "보시다시피 내 아들이 얻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지 않소? 검이 재로 변했으 니 거래의 증거 또한 함께 사라진 것과 다름없소. 때문에 파혼의 책임은 전적 으로 당신에게 있다는 것을 밝히는 바요." 튜드렛 백작의 머리 속은 부산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비록 샤이어 블레이드를 건지진 못했지만 아르네 영지까지 잃을 수 없었다. 가만히 둔다면 아르네 영 지는 필경 다른 귀족의 손에 넘어갈 것이 분명했다. 마틸다가 카심과 결혼할 경우라면 틀림없었다. '저 용병 녀석 실력은 대단하지만 분명히 귀족은 아니렷다.' 평민에게 작위가 세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떠올린 튜드렛 백작은 이 일을 빌미로 아르네 영지를 집어삼켜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과연 그 아 들에 그 아비였다. "당신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파혼을 빌미로 우리 튜드렛 가문을 공개적으로 모욕했소. 그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 대전사 결투를 요청하는 바요." 대전사 결투. 그것은 트루베니아에서 시작해서 아르카디아의 각 왕국에까지 이어진 것으로 귀족가문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의 일종이었다. 귀족 가문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날 경우에는 법을 적용하기가 무척 힘들다. 법이란 한 마디로 평민들을 옭아매는 것에 불과했다. 때문에 이런 경우 각 가 문에서는 자격요건을 가진 대전사를 선출해서 서로 대결을 시켰고 그 결과를 가지고 잘잘못을 가리게 되는 것이다. 튜드렛 백작은 바로 그 대전사 결투를 제안하고 있었다. "우리 가문의 명예가 실추될 대로 실추된 판국이니 난 가진 것을 몽땅 걸 생각 이오. 튜드렛 영지 전체를 걸겠소. 어떻소? 과연 당신에게 이 대전사 결투에 동의할 마음이 있소."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 방귀뀐 놈이 도리어 성내는 판국이니 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감정이 고조된 아르네 영주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 였다. 이미 영지를 포기한 상태인 데다가 믿음직스러운 사위에 대한 기대감이 그 결정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좋소. 합시다. 까짓 것 못할 게 있겠소." 뜻을 이룬 튜드렛 백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계약이 성립되었소. 많은 분들이 공증을 서 주셨으니 행여나 부인하진 않을 것이라 믿소." "부인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나에겐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소." "그렇다면 대전사로 나서는 기사의 자격요건에 대해 잘 아시겠구려." 튜드렛 백작의 말에 아르네 영주의 안색이 갑자기 경직되었다. 비로소 대전사 는 귀족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순수한 펜슬럿 사람으로써 반드시 귀족가문의 자제여야 한다는 대전사의 자격요건을 떠올린 아르네 영 주는 땅을 쳤다. '아뿔사. 내가 이 간악한 놈에게…….' 튜드렛 백작의 계략에 넘어간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제 와서 번복할 수는 없었 다. 머지 않아 다른 귀족에게 넘어갈 아르네 영지였기 때문에 영주는 결국 마 음을 비우기로 작정했다. 믿음직한 사위를 얻은 것이 지금 그에겐 더 없는 위 안이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것이오." 침통하게 변한 아르네 영주의 얼굴을 쳐다보며 튜드렛 백작은 느물느물 웃음 을 터뜨렸다. "흐흐흐. 서둘러 대전사를 물색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참고로 우리가 내세울 대전사는 팔라딘이니 잘 고르셔야 하오." 말을 마친 튜드렛 백작은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불렀다. "휴고." 기사 한 명이 얼른 달려와서 백작 앞에 시립했다. 엘리트 둠 워리어에게 당했 던 팔라딘들 중 한 명으로써 상세가 비교적 가벼운 자였다. 붕대를 감은 오른 손 말고는 별달리 부상을 입은 기색이 없었다. 튜드렛 백작은 믿음직스럽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자네가 우리 가문의 대전사를 맡아줘야겠어. 자신 있겠지?" 그 말에 휴고는 카심이 있는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미 그는 카심이 대전사 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머뭇거림 없이 백작 의 제의를 수락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좋아. 자네만 믿겠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아르네 영주는 묵묵히 몸을 돌렸다. 그는 별 표정변화 없 이 카심에게 다가왔다. 카심과 마틸다는 아무 말도 없이 두 손을 마주잡고 있 을 뿐이었다. 대화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저 눈빛만으로도 서로간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영주가 다가가자 카심이 걱정스러운 표정 을 지었다. "여, 영주님……." 영주는 상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걱정하지 말게. 이미 다른 귀족의 손에 넘어갈 영지야. 부디 좋은 영주가 오기 만을 바랬는데 이렇게 된 마당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카심은 어쩔 줄 몰라했다. 영지를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사윗감으로 인정하 다니…….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일단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야. 리치는 도대체 어디에 있어." 제일 앞에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데이몬이었다. 그의 뒤로 미첼과 용병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카심은 쓴웃음을 지었 다. '일이 모두 끝나고 난 뒤에야 달려오다니…….' 하지만 일이 잘 처리된 터라 섭섭한 감정은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도 카심에 겐 데이몬을 대할 것이 걱정스럽기만 했다. 기껏 맡긴 베르하젤의 홀과 드래 곤 하트를 깡그리 날려버렸으니 말이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 카심은 마틸 다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저들이 바로 내 동료들이오. 잠시 다녀오겠소." "그래요." 마틸다는 활짝 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에게 목례를 건넨 카심은 조 용히 일행들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 일인가? 만신창이가 된 자네 꼴은 또 뭔가? 응 이것은……."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데이몬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돌연 그의 얼굴이 심각해지는가 싶더니 노성이 터져 나왔다. "이건 아무리 보아도 드래곤 하트의 마나인데? 이런……. 카심!" 카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넙죽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데이몬. 불가피한 일이 생겨서 그만 드래곤 하트를……." "대장 자네가 어찌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얼마나 아끼는 것인 줄 알면서……. 어휴. 속 쓰려." 데이몬은 가슴을 탕탕 치며 아까워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지라 카 심은 그저 쩔쩔매기만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봉급을 깡그리 털어서라도 반드시 갚아 드리겠습니다." 데이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그리 문제삼지는 않을 듯한 눈치였 다. "그만 두세. 드래곤 하트가 어디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인가? 그래 도대체 어 디다 썼나?" "예 설명 드리겠습니다." 카심은 곧 조금 전에 이곳에 일어났던 일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마계의 사자 가 막강한 지옥의 전사들을 데리고 마왕 케루빔의 신부로 맞이할 붉은 전갈좌 의 처녀를 구하러 왔다는 사실에 용병들은 하나같이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데이몬은 심각한 표정으로 카심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그 정도라면 사용할 만 하지. 암 그렇고 말고……. 그나저나 베르하젤의 홀이 오래되어 효과가 조금 미심쩍었는데 제 역할을 하긴 했군." "효과는 정말 확실하더군요. 다크 쉐이드를 비롯한 마물들을 깡그리 날려버렸 으니까요. 뭐 리치야 라이프 포스 베슬이 있으니 언젠가는 살아나겠지만… …." 쉬르나크가 다시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카심의 얼굴에는 걱정기가 가 득했다. 그를 쳐다보던 데이몬은 히쭉 웃었다. "걱정 마. 리치라고 불사신은 아니니까. 본체에 감당할 수 없는 타격을 입은 경 우라면 라이프 포스 베슬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니까 어쩌면 부활하지 못 할 수도 있어." "정말입니까?" 데이몬이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물론이네. 아무튼 자네가 그토록 원했던 사랑을 얻긴 했다는 뜻이로군." 카심은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그, 그렇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하네. 정말 잘 된 일이야." "축하합니다. 대장." "역시 하늘은 노력하는 자에게 보답하는 법입니다." 용병들은 이구동성으로 카심을 축하해 주었다. 양이 차지 않았는지 데이몬이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이럴 게 아니라 자네 장인어른을 한 번 만나봐야겠군. 약혼녀가 얼마나 예쁜 지 궁금해 미치겠네." "소개 드리겠습니다." 조금 뒤 아르네 영주 내외는 반갑게 용병대원들을 맞았다. "그 유명한 카심 용병단의 대원들이시라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오." "과찬이십니다. 뭐, 저희야 대장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입장이지요. 대장이 워 낙 지휘를 잘 하니까 말입니다." 아르네 영주는 용병대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그 옆에서는 카심과 마 틸다가 손을 잡고 나란히 선 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둘의 얼굴에는 마 치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영주가 자랑스럽다는 표정으 로 그들을 가리켰다. "며칠 후 저들은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라오. 물론 참석해 주시겠지요?" "이를 데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참석해야지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병사 한 명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문장을 보 니 튜드렛 영지의 병사였다. 그는 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말을 늘어놓았다. "튜드렛 백작님께서는 대전사 결투를 언제 치르실 건지에 대해 물으셨습니 다." 그 말에 아르네 영주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조금 있다 통보해 주겠네. 기다리게." "알겠습니다." 병사가 몸을 돌리자 데이몬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대전사 결투라니 무슨 소린가?"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카심이 나서서 데이몬에게 모든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다크메이지] 9장 에피소드-2. 267회. 설명을 들은 데이몬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백배 사죄해도 모자랄 판국에 대전사 결투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 로군." 데이몬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미첼에게 손을 휘저었다. "네가 나가서 깨끗이 해결해버려." 미첼 역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맡겨 두십시오. 대장님의 일이 아닙니까? 아우인 제가 가만히 두고볼 수야 없 죠. 깨끗하게 해결하겠습니다." 미첼이 가슴을 탕탕 치며 공언했지만 영주의 머릿속에는 아직까지 걱정이 사 라지지 않았다. 비록 눈앞의 젊은 기사가 소드 마스터란 사실을 알긴 했지만 대전사는 아무나 될 수 없었다. "대전사로 나설 수 있는 데에는 자격요건이 무척 까다롭소. 순수한 펜슬럿 인 으로써 귀족신분을 가지고 있어야만……." 그 말에 카심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비로소 얼마 전 수여받은 미첼의 작위 가 떠오른 것이다. "아무 걱정 마십시오. 영주님. 미첼은 이미 펜슬럿 국왕전하로부터 친히 작위 를 하사 받았습니다. 근위기사 단장인 카르수스 공작께서 직접 그 자리에 참 관하셨지요" 영주는 깜짝 놀랐다. "그, 그 말이 정말인가?" "한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아르네 영주의 머릿속에는 희열감이 가득 차 올랐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승 리는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 소드 마스터를 상대로 팔라딘이 이길 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낭보를 접한 영주는 그 즉시 일행을 데리고 튜드렛 백 작을 만나러 갔다. "이 기사가 우리 아르네 영지를 대표할 대전사라오." 영주의 소개와 함께 한 발 앞으로 내딛는 미첼을 본 튜드렛 영지의 대전사 휴 고는 금세 얼굴이 샛노래졌다. 식장을 빠져나가면서 그가 보여준 무용이 아직 까지 생생했었고 그의 검에서 솟아올랐던 완성된 오러 블레이드는 휴고가 감 히 시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팔라딘이 소드 마스터와 대결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튜드렛 백작이 어 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설마 대전사의 자격요건을 모르고 계셨소? 펜슬럿의 귀족이 아니면 그 누구 도 대전사가 될 수 없다오." 아르네 영주는 웃음 띤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물론 그는 의심할 나위 없는 펜슬럿의 귀족이오. 국왕전하께서 친히 남작의 작위를 내리셨답니다. 그렇지 않소? 미첼 경." 미첼은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 작위수여식에는 근위기사 단장이신 카르수스 공작전하께서 친히 참관하셨지요.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전 미첼 남작이라고 합니다." 이젠 튜드렛 남작의 얼굴이 싯누래질 차례였다. 미첼이 소드 마스터란 사실은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휴고가 대전사로 나서더라도 승산이 있을 턱이 없었다. "나, 난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소. 확실하게 밝혀진 일이 아닌 다음에야……." "수도에다 알아보면 될 것 아니오?" "그, 그것은 나중에 내가 알아보리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챈 데이몬이 냉소를 쳤다. "이제 와서 발을 빼시겠다? 어림없지."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인크레시아를 열어 젖혔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파파파팟. 데스 나이트와 본 드래곤이 공포스런 위용을 드러냈다. 칠흑 같은 갑주로 완 전 무장한 네 명의 데스 나이트가 검을 뽑아든 채로 자리를 잡았고 그 옆에 사 뿐히 내려앉은 본 드래곤 지크레이트와 러셀런트는 연신 기성을 질러대며 날 개를 펄럭거렸다. 콰루루루. 그 모습을 쳐다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마계 전사들에 이어 이번에는 막강한 언데드 군단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세, 세상에……." "말로만 듣던 데스 나이트와 본 드래곤이야." 튜드렛 영지 병사들의 질린 표정을 감상하듯 훑어본 데이몬은 의기양양한 표 정을 지었다. "누구든지 아르네 영지를 벗어나려는 자는 가장 먼저 저들을 상대해야 할 것 이오. 그럼 난 코르도로 공간이동 해 가서 미첼의 신분을 증명해 줄 사람을 모 셔오도록 하지. 서로의 영지가 걸린 일이니 결코 가볍게 처리할 수는 없는 노 릇 아니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데이몬의 주변으로 마법진이 생겨나더니 눈부신 광망을 토해냈다. 그의 몸은 빛 무리에 묻혀 금세 사라져버렸다. "이, 이런."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줄 몰랐으므로 튜드렛 백작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 었다. 만에 하나 저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꼼짝없이 자신의 영지까지 빼앗기게 될 형편이었다. 엄연히 따지자면 영지의 소유권은 펜슬럿 국왕에게 있다. 하지만 이처럼 양 영주의 합의에 의해 대전사 결투가 벌어질 경우 국왕의 승인절차를 거쳐 영지 의 관리권이 합의한 대로 넘어가게 된다. 결투에서 패한다면 튜드렛 백작은 수레 한 대에 한정된 짐과 함께 내쫓길 수밖에 없었다. 다급해진 튜드렛 백작 이 머뭇거리며 아르네 영주에게 다가갔다. "아, 아르네 영주." "말씀하시오." "시, 실은 생각해 보니 내가 실언을……." 아르네 영주의 반응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어차피 튜드렛 영지를 얻게 된 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별다른 소용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죽고 나면 아 르네 영지와 함께 다른 귀족의 손에 넘어갈 것이 분명했으므로 영지에 대한 욕심이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튜드렛 백작의 비열한 태도에 화 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상태였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냉랭하게 대답 했다. "국왕 전하로부터 영지의 관리권을 부여받은 영주께서 어찌 실언을 하셨겠소? 이미 많은 귀족 분들께서 공증을 마친 상태이지 않소?" "그렇지만 문서로 작성한 것도 아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두 귀로 똑똑히 들었소이다. 이제 와서 부인하지 않으시 리라 믿겠소." 튜드렛 영주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쩌자고…….' 아르네 영지를 집어삼키기 위해 욕심을 부린 것이 애초부터 화근이었다. 아르 네 영지에 대전사로 내세울 팔라딘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시작한 일이었 는데 전혀 뜻밖의 소드 마스터가 대전사로 나오다니……. 이제 튜드렛 영주에 게 기대할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젠 저 소드 마스터의 자격요건을 문제삼을 수밖에 없겠군. 누굴 데리고 올 지 모르겠지만 행여나 미심쩍은 것이 있다면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것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옆의 공터에서 눈부신 빛이 일어났다. 마법사가 사라진 뒤 바닥에 새겨져있던 마법진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번쩍. 광망이 사라지고 난 뒤 그곳에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생겨나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조금 전 떠났던 마법사였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을 쳐다보던 튜드렛 백작의 입이 딱 벌어졌다.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던 신분을 가진 자가 마법사 와 함께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카르수스 공작? 대체 근위기사 단장이 이곳엘 왜?" 마법진 위에는 펜슬럿의 근위기사단장인 카르수스 공작이 근위기사 십여 명 과 함께 서 있었다. 난데없이 아르네에 모습을 드러낸 근위기사 단장은 느릿 하게 고개를 돌리며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이미 그는 펜슬럿 국왕의 지시를 단단히 받고 온 상태였다. 그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배어 있었다. '카심 용병단에 펜슬럿 사람이 둘이나 끼여 있다니 행운도 이런 행운이 없군. 모두가 현명하고 자비로우신 우리 국왕전하 덕택이지. 암 그렇고 말고.' 그는 우선 아르네 영주에게 다가가서 극진한 태도로 예를 취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오래 전 코르도에서 뵌 뒤 정말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군요." 아르네 영주 또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 나라를 책임지는 근위기사 단 장이 궁벽한 시골이라 할 수 있는 아르네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이런 일 은 쉽사리 찾아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주 예를 취했다. "카르수스 공작전하를 뵈옵니다. 그런데 아르네엔 도대체 어인 일로……." "본관은 국왕전하의 명령을 받들기 위해 찾아왔소이다." 기사단장이 아르네 영주와 정겹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돌연 튜드렛 백작이 다가가서 고개를 꾸벅 조아렸다. "카르수스 공작전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더 없는 영광입니다. 평소에 위명 높으신 공작전하를 절실히 흠모해 왔답니다. 이렇게 뵈게 되다니 전 도저히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고개를 돌린 카르수스 공작은 가벼운 목례로 화답했다. 아르네 영주를 대할 때와는 천양지차라 볼 수 있는 태도였다. "본관을 흠모해 왔다니 고맙구려." 인사를 마친 기사단장은 냉랭히 고개를 돌렸다. 두 영주가 비록 같은 백작의 신분이긴 하지만 아르네 영주는 선정으로 영지 주민들의 신뢰를 깊이 얻고 있 는 명망 높은 영주였다. 물론 그 사실을 근위기사 단장이 모를 리가 없었다. 반 면 튜드렛 영주는 거듭된 학정으로 영지 주민들의 원성을 깊이 사고 있는 인 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카르수스 공작이 두 영주를 대하는 태도가 이처럼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그에겐 아르네 영주에게 극진히 대 해야 할 제반 사정이 있었다. '카심 용병단의, 그것도 대장이라는 자가 아르네 영주의 사윗감이라면…….' 생각을 마친 카르수스 공작은 고개를 돌려 두 영주를 쳐다보았다. "두 분께서 영지를 걸고 대전사 결투를 벌인다는 소식을 들었소이다. 이미 국 왕 전하의 승인이 떨어졌소. 게다가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본관이 친히 참관을 맡기로 했지요. 그럼 두 영지의 대 전사는 지금 즉시 앞으로 나와주시 오." 그 말에 튜드렛 영주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 들어갔다. 대 전사 결투의 참관 인으로 근위기사 단장이 나서다니……. 이젠 빼도 박도 못할 판국이 되어버렸 기에 그는 상대 대전사의 신분을 걸고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 하지만 아르네 영지의 대전사가 확실한 자격요건을 갖췄는지가 의문이라 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르수스 공작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그는 생각 할 것도 없다는 듯 미첼을 불렀다. "미첼 남작. 이리로 오시오." 미첼은 환히 웃으며 다가와 카르수스 공작에게 예를 취했다. "사흘만에 다시 뵙게 되는군요.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나 역시 반갑네."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카르수스 공작은 미첼의 어깨에 손을 척 걸 친 채 튜드렛 백작을 노려보았다. "그의 신분을 의심한다는 것은 곧 국왕전하를 모독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 을 밝히는 바요. 미첼 남작은 사흘 전 본관의 참관 하에 국왕전하로부터 친히 작위를 수여 받으셨소. 그 뿐인 줄 아시오? 심사를 받지 않고 근위기사단의 일 원이 될 수 있는 특혜도 함께 수여 받았지. 인품에서부터 실력, 그리고 충성심 까지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펜슬럿의 기사라고 할 수 있지. 그렇 지 않은가?" 말을 마친 공작은 은근한 눈빛으로 미첼을 쳐다보았다. "이미 난 그를 내 후임으로까지 생각하고 있소. 물론 근위기사단에 들어온 이 후의 일이겠지만." 미첼이 쑥스럽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숙였다. "절 이토록 생각해 주시다니 정말 어깨가 무겁습니다." 튜드렛 백작으로써는 말 그대로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상대의 말은 의심할 나위 없는 사실로 드러났고 이제 그는 꼼짝없이 영지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카르수스 공작은 더 이상의 논쟁을 불허하겠다는 듯 간략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알아본 결과 튜드렛 가문의 휴고 역시 대전사로 나서기에 전혀 결격요인이 없는 기사이더군. 그럼 이제 대결을 시작하도록 하겠소." 불쌍하게도 휴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생각에 이미 그는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그 기색을 눈치챈 데이몬 의 머릿속에 장난기가 슬며시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돌려 갑옷을 걸치고 있 던 미첼을 쳐다보았다. "미첼." "부르셨습니까?" 슬쩍 눈짓을 준 데이몬은 슬며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부탁인데, 이번 대결에서는 제발 상대를 두 토막 치지 말도록 해라……. 피바다 위에서 조각 난 시체 치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너도 잘 알잖아?" 이미 미첼은 눈빛 하나로 데이몬의 의중을 알아차리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떠듬떠듬 대답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상대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일격에 두 토막 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저승으로 보 내 주는 것이 제가 상대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이죠." 그 말을 들은 휴고의 머릿속에는 상대의 공격에 가차없이 토막 나던 둠 워리어 의 모습이 떠올랐다. 둠 워리어가 들고 있던 갈고리 검이 마치 당근처럼 쪼개버 리던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갑옷과 방패를 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완성된 오러 블레이드 앞에서는 강철갑옷과 방패도 관 뚜껑에 지나지 않았기에 그의 다리는 금세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쳐다본 튜드렛 백작은 기가 찼다. 모든 희망을 휴고 하나에 걸고 있는 데 그가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겁에 질려 있는 것이다. 휴고가 손에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그는 다급하게 카르수스에게 다가갔다. 재산을 조금이 라도 더 건지기 위해서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했다. "고, 공작전하." "무슨 일이오?" 냉랭하게 쳐다보는 기사단장의 시선을 받으며 튜드렛 백작은 최대한 냉정을 유 지하려 노력했다. "죄, 죄송하지만 이제 생각났습니다. 저희 대전사는 마계마물들을 상대로 싸우 느라 손에 심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도저히 검을 쥘 수 없는 형편이니 대전사 결 투를 며칠 미루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카르수스 공작은 고개를 돌려 휴고를 쳐다보았다. "사실인가?" "그,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검을 쥘 수조차 없는 실정입니다." 휴고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손의 붕대를 풀어 상처를 보여주었다. 그리 심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는 무척 아픈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목숨을 조금이라 도 연장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카르수스 공작은 별 표정변 화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좋소. 튜드렛 대전사의 사정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군. 그렇다면 이번 대전사 결투는 보름 뒤 코르도의 궁성 연무장에서 치르도록 하겠소. 그 정도라면 손의 상처가 낫고도 나을 테지." 말을 마친 카르수스 공작은 두 영주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대신 본관은 두 영주의 재산행사권을 동결하겠소. 이날 이후로 각 영주들께서 는 일체 영지의 재산에 손댈 수 없소. 엄선된 근위기사가 한 명씩 파견되어 그것 을 감시할 것이며 대전사 결투가 끝난 뒤 패한 영주의 영지는 이 상태 그대로 승 리한 영주에게 귀속될 것이오. 이에 동의하시오?" "동의하겠습니다." 어차피 아르네 영주에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숨겨놓은 재산도 없었고 그럴 필 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튜드렛 영주는 달랐다. 벌어놓은 시간 동안 재 산을 깡그리 빼돌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재산행사권이 동결되어버 린 것이다. 말 그대로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얼굴이 검게 변한 튜드렛 백작. 하지만 카르수스 공작의 채근이 거듭 이어지자 그도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도, 동의하겠습니다." "좋소."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기사단장은 곧 근위기사들 중에서 두 명을 선출 했다. 하나같이 물욕이 없고 공정한 자들이었다. "그대들에게 각기 한 명씩 튜드렛과 아르네 영지에 상주하며 보름동안 영주들 의 재산을 감시할 것을 명한다. 그대들은 근위기사단의 명예를 걸고 임무를 수 행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마무리를 마친 기사단장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 일에 이어 본관은 국왕전하의 명령을 한 가지 더 수행하도록 하겠소." 말을 마친 기사단장은 마틸다와 손을 잡고 서 있는 카심에게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이미 그는 미첼에게 물어 카심이 누구인지 파악한 상태였다. 그가 앞에 서자 긴장한 카심이 카르수스 공작에게 예를 올렸다. "아르네 주민 카심 플로렌스가 펜슬럿 근위기사 단장님을 뵙습니다." 카르수스 공작은 급급히 손을 휘저었다. "예를 거두시오. 이제부터 본관은 국왕전하의 명을 받들어 카심 그대에게 어명 을 전달할 계획이오." 뜻밖의 말에 카심의 얼굴이 멍청해졌다. 난데없이 펜슬럿 국왕의 어명이라니… …. 마틸다와 영주 내외 역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어떤 어명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던 것이다. 어명이 적힌 문서를 펴든 카르수스 공작은 묵묵 히 그것을 읽어나갔다. "카심 플로렌스. 그대는 아르네 출신으로써 카심 용병단을 이끌며 펜슬럿의 명 성을 아르카디아 대륙 전역에 드높였다. 그것도 모자라 불굴의 투지와 용기로 아르네 영지를 무단 침입한 마계마물들을 무찔러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냈 다. 이에 짐은 그 공을 기리기 위해 작위를 내린다. 앞으로 짐이 내린 남작의 작 위는 카심 플로렌스의 자손 대대로 이어질 것이다." 기계적인 말투로 어명을 읽어 내린 기사단장은 웃는 낯을 지었다. "카심. 만약 당신이 동의할 경우 그대는 남작의 작위를 얻을 수 있소. 그렇게 되 면 공식적으로 영지를 세습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되지. 만약 아르네 영지를 세습하게 될 경우 그대는 즉시 백작으로 봉함 받을 수 있을 것이소. 어떻소? 동 의하시오?" 카심은 꿈만 같았다. 마틸다를 얻은 것도 모자라서 아르네 영지까지 승계할 수 있다니…….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은인인 아르네 영주 가 그토록 지키고자 노력하던 영지였고 영지 주민들의 행복을 자신이 맡아 이 어나갈 수 있으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어명을 감사히 받들겠나이다." "탁월한 선택이오." 카르수스 공작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검을 뽑았다. 한쪽 무릎을 꿇은 카심 의 양어깨에 검을 가볍게 가져다 댄 공작은 근엄한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선언 했다. "본관이 국왕전하의 대리인으로 의식을 행함과 동시에 참관하였으니 경은 이제 부터 자랑스런 펜슬럿의 남작이오. 이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바요."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박수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짝짝짝짝. 용병대원으로부터 시작된 박수는 곧 모여든 아르네 영지주민들에게까지 퍼져 나갔다. "세,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마틸다와 영주 내외의 얼굴에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믿음직스러운 사윗감과 함께 영지를 승계할 후계자까지 함께 얻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여들어 환호성을 지르는 아르네 영지 주민들 사이로 튜드렛 백작 일행이 쓸 쓸히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떠나려는 것이다. 그 사이에는 어깨가 축 늘어진 모르세르가 끼여 있었다. 파견된 근위기사가 날카 로운 눈초리로 그들을 샅샅이 감시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재산을 빼돌리지 못하도록 말이다. [다크메이지] 10장 마룡 베르키스 268회. 그로부터 사흘 후, 아르네 영지에서는 카심과 마틸다의 결혼식이 대대적으로 거행되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결혼식이었다. 두 사람 다 이곳 출신이었으므로 모인 하객들 역시 아르네 주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외인이라곤 오직 카심 용병단원들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산뜻한 정장으로 차려입은 카심이 웃는 낯으로 하객들을 맞이했다. 아직까지 상처가 아물지 않았지만 그는 조금도 아픈 표정을 짓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알프레드 아저씨. 이크! 테레사 아주머니도 오셨군요." 하객들은 웃음 띤 얼굴로 카심을 축하해 주었다. "축하하네. 카심." "드디어 자네의 사랑이 이루어졌군. 진심으로 축하하네." 두 사람의 결합을 축하하러 온 아르네 주민들로 인해 영주 저택은 차마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전 아르네 주민이 몰려온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카심 용병단원들도 주민들 틈에 끼여 얼굴에 함박웃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 그럼 결혼식을 거행하겠습니다." 머리에 붕대를 두른 신관이 찡그린 표정으로 축사를 읽어나갔다. 리치에게 당해 꼬박 이틀 동안 인사불성인 상태로 누워 있던 신관은 깨어난 직후 또다시 결혼식을 주관하게 된 것이다. 신부는 그대로였지만 신랑이 바뀐 결혼식. 그간의 사정을 들은 탓인지 그는 유난히 부드러운 눈빛으로 카심을 쳐다보았다. "신랑은 불굴의 투지와 용맹으로 마계마물들과 맞서 신부를 지킨 용감무쌍한 용사요. 그가 아니라면 감히 누가 마틸다 양의 신랑이 될 자격이 있겠소? 플로렌스 남작. 그대는 아르네 가문의 마틸다 양을 맞아 평생을 아끼고 사랑할 것을 맹세하겠소?" "맹세합니다." 과묵하지만 결연한 대답을 들은 신관이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신부에게 묻겠소. 마틸다 양은 플로렌스 가문의 카심을 맞아 아내로써 평생을 함께 할 것을 약속하겠습니까?" "기꺼이 그러겠어요." 신부의 흔쾌한 대답을 들은 신관은 웃는 낯으로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공표했다. "이제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소. 평생동안 아끼고 사랑하며 서로 위해줄 것이라 믿겠소." 신관의 공표가 끝나자마자 결혼식장은 사람들의 환호성으로 떠나갈 듯 했다. 와아아아. 그 이후로 아르네 영지는 꼬박 열흘동안 잔치 분위기 속에 휩싸여 들어갔다. 근위기사 단장의 명령에 의해 아르네 영주의 재산이 쓸 수 없도록 동결된 상태였지만 잔치를 벌이는데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영지 주민들이 자진해서 술과 음식을 싸들고 왔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참석한 사람들은 꼬박 열흘동안 술독에 빠져 살아야 했다. 그것은 카심 용병단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술에 일가견이 있는 용병들이 체력의 한계를 느껴야 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어제 먹은 술이 미처 깨지도 않은 부스스한 몰골로 또다시 영지 주민들이 건네주는 술잔을 받아 들이키는 그들의 얼굴에는 이제 술이라면 신물이 난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일행들 중에서 가장 신이 난 이는 카트로이였다. 취하지도 않고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는 카트로이의 주량에 영지 주민들은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레져야 했다. 건네주는 술잔을 단 한 번도 마다하는 경우가 없었다. "세상에……. 저렇게 술이 센 사람이 있다니?" 물론 그들은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이란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아르네 영지에서 벌어진 잔치는 열흘동안 거행되었다. 거기에 휩쓸리지 않은 자는 단 둘 뿐이었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방에서 나오지 않은 율리아나와 감시를 위해 파견된 펜슬럿의 근위기사 이렇게 둘 말이다. 기사단장의 인장으로 봉인된 창고 앞에서 근위기사는 입맛만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어휴. 술 한 잔만 했으면 원이 없겠군." 하지만 그는 그것을 생각만으로 끝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펜슬럿 근위기사단의 군율은 무척 엄격한 편이었고 임무수행 중에 술을 마신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아쉽다는 듯 군침을 삼킨 근위기사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상황을 보니 굳이 감시할 필요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임무는 임무이니……." 그러나 철탑처럼 버티고 선 근위기사의 뇌리에는 임무를 마친 뒤 술 한잔 들이킬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열흘 동안 성대한 잔치를 치르고 난 뒤 카심을 비롯한 용병단원들은 아르네 영주와 함께 머나먼 여행길에 올랐다. 코르도로 가서 대전사 결투를 마무리짓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공간이동이란 편리한 마법을 통해 눈 깜짝할 사이에 코르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르네를 대표하는 대전사는 예정대로 미첼이 맡았다. 귀족의 작위를 얻어 자격을 얻은 카심이 직접 해결하겠다는 의견을 냈지만 아직까지 낫지 않은 상처 때문에 결국 미첼이 중임을 맡기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전사 결투는 시작되었다. 근위기사 단장이 앞으로 나서 결투의 시작을 알렸다. "그럼 대전사 결투를 시작하도록 하겠소." 아르네와 튜드렛에서 선출된 두 대전사는 근위기사 단장의 참관 아래 결투를 시작했다. "이미 끝났군." 연신 다리를 후들거리는 튜드렛 대전사의 모습에 사람들은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다. 그들의 예상대로 결투는 시작된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판가름이 났다. 챵챵챵 미첼의 매서운 연속 공격에 정신 없이 방어에만 열중했지만 휴고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다. 장검과 방패가 차례로 토막 나자 그는 질린 듯한 표정으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몸통이 두 조각날 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추호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하, 항복이오." 목숨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휴고의 머릿속에서 수치심은 깡그리 사라진 다음이었다. 튜드렛 영지의 대전사가 항복 선언을 하자 근위기사 단장이 머뭇거림 없이 결투 종료를 알렸다. "드디어 승부가 판가름났소." 어느 쪽이 승리했는지는 기사단장의 발표가 없어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이럴 수가……." 너무도 허무하게 끝난 결투로 인해 튜드렛 백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옆에는 망연자실한 모르세르의 모습도 보였다. 이제 그는 세 명의 애인들에게 작별을 고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냉랭한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던 카르수스 공작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대전사 결투는 아르네 영주의 승리로 끝났소. 약정에 의해 튜드렛 영지는 오늘부터 공식적으로 아르네 백작에게 귀속되었음을 밝히는 바요." 공표를 마친 근위기사 단장은 근엄한 표정으로 튜드렛 백작을 쳐다보았다. "그대는 오늘 자정까지 수레 한 대에 한정된 짐을 가지고 튜드렛 영지를 떠나야 하오. 오늘 이 시간 이후부터 튜드렛 영지의 관리권은 모조리 아르네 백작에게 넘어갈 것이오." "아, 알겠습니다." 힘없이 대답한 튜드렛 백작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백작이라는 문장 하나 뿐이었다. 지금껏 영지 주민들의 피땀으로 누려왔던 영화는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당장 내일부터는 가족의 생계를 이어나갈 것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보름 전의 결심을 수없이 뉘우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튜드렛 백작 부자가 장내에서 사라지고 난 뒤 기사단장은 아르네 영주를 찾아가서 말을 건넸다. "아시다시피 아르네와 튜드렛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소이다. 그러니 관리인을 두어 관리하시는 것이 편하실 것이오." 큼지막한 영지 하나를 얻게 되었지만 아르네 영주는 별반 기쁜 기색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여러모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 이미 선정으로 명망이 높으신 영주시니 튜드렛 영지 주민들도 두 팔을 벌려 환영할 것입니다." 아르네 영주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일국의 공작이자 근위기사단의 총수가 열과 성의를 다해 대하는데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카르수스 공작은 웃는 낯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튜드렛 백작의 학정으로 인해 주민들의 원성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소. 영주께서 부디 그들을 잘 어루만져 주셨으면 하는 것이 본관의 바램이라오." "이를 데가 있겠습니까? 아르네 주민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적합한 관리인이 있습니까? 원하신다면 본관이 몇 명 추천해 드릴 수도……." 아르네 영주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실 필요는 없으실 것 같습니다. 저희 가문의 집사가 일 처리를 잘 하는 편이니 중임을 그에게 맡겨도 될 듯 싶습니다." 말을 마친 영주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늙수그레한 육십대의 노인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서 있었다. 그가 바로 영주 가문의 집사였으며 영주의 아버지 대에서부터 아르네 가문의 대소사를 맡아 처리한 경험 많은 관리인이었다. 아르네 영주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집사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집사께서 튜드렛 영지를 맡아줘야겠습니다." "제, 제가요?" 집사는 깜짝 놀랐다. 튜드렛 영지라면 거의 아르네와 맞먹는 규모를 가진 영지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 큼직한 영지를 맡아 관리하라니 집사로서는 어리둥절해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르네 영주는 이미 마음을 단단히 굳힌 상태였다. "경험 많은 집사가 아니면 그 누가 맡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맡아 주세요. 아르네를 관리하시던 것과 똑같이 관리하시면 됩니다." 영주가 그렇게까지 청하는 데에야 더 이상 거절할 도리가 없었으므로 집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한 번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러셔야지요." 아르네 영주는 믿음직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신들 중에서도 가장 물욕이 없고 정직한 집사인지라 믿고 영지를 맡길 수 있었다. 집사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던 아르네 영주는 몇 가지 당부를 늘어놓았다. "도착하는 즉시 주민들의 소작료를 내리도록 하세요. 전임영주의 학정으로 주민들의 삶이 무척 피폐할 테니 소작료를 20%정도로 낮추는 게 좋겠군요. 당장 돈 들어갈 일이 없으니 말입니다." 아르네 영주의 말에 집사는 깜짝 놀랐다. "20%라면 너무 적지 않습니까?" "1년에서 2년 정도만 유지하면 될 것입니다. 주민들이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은 뒤에는 아르네와 같은 수준인 30%로 올리면 될 것 같네요. 그리고 창고 속의 재물 중에서 영지를 관리하는데 필요 없는 물건은 깡그리 주민들에게 나눠주세요. 아시겠지요?" "말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집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카르수스 공작은 튜드렛 영지가 머지않아 안정될 것이란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다행이로군. 튜드렛 영지에서 올라오던 수많은 민원이 이젠 깡그리 사라지겠어. 튜드렛은 영주를 무척 잘 만난 거지, 암.' 시간이 지체된 것을 알아차린 카르수스 공작은 아르네 백작에게 다가갔다. "돌아가실 때 공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하실 수 있도록 궁정마법사를 배치해 놓았습니다. 먼 거리이니 만큼 안전을 위해서 마법진을 이용하시는 것이 나을 겁니다." 아르네 영주는 공손히 예를 취했다. "이렇게까지 마음써 주시니 도저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별 말씀을……. 그리고 영지 인수를 위해서 별도의 병력을 차출해 놓겠습니다. 그들과 동행하면 관리인이 별 무리 없이 튜드렛 영지를 넘겨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본관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살펴 가십시오." 카르수스 공작이 근위기사들을 대동하고 사라지는 것을 본 아르네 영주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새로 맞이한 사위가 다정하게 딸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아르네 영주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자넨 앞으로 나에게 많이 배워야 할거야. 영지를 관리하는 것이 얼핏 보면 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거든……. 신경 쓸 것도 많고." 카심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뭐 장인어른께서 하시던 것처럼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대로만 하겠습니다." "내 방식대로 하면 별 문제는 없을 거야. 그건 그렇고……." 아르네 영주는 돌연 안색을 굳혔다. 비로소 카심의 입장이 생각난 것이다. 그는 드래곤 사냥이 주목적인 카심 용병단의 대장이었다. "자넨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저들과 같이 갈 것인가?" 영주의 말에 카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이미 전 대원들과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함께 행동하기로 맹세한 상태입니다." "그, 그런가?" "제겐 대원들을 통솔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임무를 마친 뒤 반드시 아르네에 돌아올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영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렇고 말고. 맹세란 것은 극히 중요한 것이지." 그러나 말과는 달리 영주의 머릿속에는 근심이 가득 차 있었다. [다크메이지] 10장 마룡 베르키스 269회. 드래곤 사냥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카심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머리 속에서 떠나가지 않는 것이다. "부디 몸조심하도록 하게." 아르네 영주의 진심 어린 당부에 카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돌아올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암. 그래야지." 고개를 돌린 카심이 마틸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겐 아직 마쳐야 할 임무가 남아 있소. 마틸다. 날 기다려줄 수 있겠소?" 마틸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언제까지라도 기다릴게요. 이미 10년이나 기다린 걸요?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되요?" "약속하리다." 마틸다는 고개를 끄덕이는 카심에게 달려들어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어머." 율리아나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그 장면을 외면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빙글빙글 웃으며 그 광경을 훔쳐보기 바빴다. 덩치 좋은 패터슨과 헬튼이 눈치 빠르게 달려들어 다른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려 했다. "뭘 보나?" 하지만 카심의 덩치가 워낙 당당했기 때문에 완전히 가리기란 한 마디로 불가능했다. 아쉬운 이별식이 끝나고 카심이 아르네 영주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럼 전 이만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목적지로 가려면 이곳에서 출발하는 것이 편할 것 같습니다." 아르네 영주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 "죄송하지만 사모님과 영지 주민들에게 인사하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미안하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워낙 시일이 촉박해서 말입니다." "걱정하지 말게. 잘 얘기해 놓겠네. 그럼 대원들이 기다릴 테니 어서 가 보게." "그럼 전 이만……." 카심은 묵묵히 몸을 돌렸다. 이미 일행들은 떠날 채비를 모두 갖춰놓은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마틸다를 한 번 돌아본 카심은 기세 좋게 고함을 질렀다. "출발한다. 일단 도보로 펜슬럿 경계를 지난 다음 그곳에서 다음 행선지를 결정하겠다." 카심의 명령이 떨어지자 용병들은 즉시 이동을 시작했다. 하나같이 배낭이 불룩한 것을 보니 아르네에서 많은 식량을 챙겨 온 모양이었다. 짐을 짊어지지 않은 이는 오직 데이몬과 율리아나밖에 없었다. 카심 용병단원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아르네 영주와 수행원들이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마틸다가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흑흑. 아빠." 아르네 영주가 말없이 딸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걱정 말아라. 마틸다. 한없이 믿음직한 녀석이니 반드시 돌아올 것이란다." "그건 알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원 녀석도……." 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준 영주는 고개를 돌렸다. "우리도 돌아간다. 영지를 오래 비울 수 없으니 서두르자." 수행원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을 쳐다본 영주는 집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일행과 떨어져 튜드렛으로 곧장 가야하는 처지였다. "그럼 집사께서는 수고해 주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영주님. 잘 관리하겠습니다." 예를 올리는 집사를 뒤로하고 영주 일행은 걸음을 옮겼다. 멀리 보이는 공간이동 마법진에서는 카르수스 공작이 배치해 놓은 궁정마법사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나절동안 열심히 행군한 용병단은 마침내 코르도 시내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인적이 드문 관도로 접어들자 카심이 일행을 멈춰 세웠다.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간다." 용병들은 별반 지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문제는 율리아나였다. 말을 타고 왔으면서도 그녀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그 기색을 간파한 카심이 휴식을 지시한 것이다. 짬이 나자 용병들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마나연공에 들어갔다. "고마워." 율리아나에게 물병을 건네는 미첼을 힐끔 쳐다본 카심이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때마침 데이몬도 카심을 쳐다보고 있었다. "섭섭하지 않은가?" "무슨 말씀이신지?" "신혼의 신부를 남겨두고 오는 게 말일세. 사실 난 원한다면 자네도 남겨두고 오려고 생각했었지. 힘들게 찾은 자네의 행복을 깨고 싶진 않더군." 카심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누가 뭐래도 전 대장입니다. 카심 용병단에서 대장이 빠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지요." 데이몬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자네 만한 대장을 도대체 어디 가서 찾을 수 있겠나? 하지만 항상 몸조심해야 할거야. 아리따운 신부를 울리지 않으려면 말일세." 기이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던 카심이 불쑥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쭈어볼 게 있습니다." "뭔가 말해보게." "쉬르나크란 이름은 도대체 어떻게 지으신 겁니까? 악당 이미지가 풀풀 풍기는 것이 상당히 분위기 있는 이름이던데……." 카심의 말에 데이몬의 눈이 갑자기 퉁방울만해졌다. "대관절 그게 무슨 소린가? 쉬르나크라니?" "데이몬께서 변장하신 것이 아닙니까?" 데이몬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뚱딴지같은 소린 하지도 말게. 내가 어디 할 일이 없어서 그깟 리치 나부랭이로 변장하겠나?" 데이몬의 응대를 들은 카심의 얼굴에는 걸려들었다는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상하군요. 현장에 계시지 않은 데이몬께서 어찌 리치의 이름이 쉬르나크라는 사실을 아시고 계십니까?" "그, 그건……." 데이몬은 말문이 콱 막혔다. 자신도 모르게 카심의 유도심문에 넘어간 것이다.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떠듬거리는 데이몬을 보며 카심은 추리를 계속 이어나갔다. "정신 없이 싸움에 열중할 때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유를 되찾고 나서 당시의 일을 떠올려보니 상황이 무척 이상하더군요." "………." "가장 의심을 가진 점은 엘리트 둠 워리어들이 사용하는 검술이었습니다. 그것들의 검로는 이미 여러 번 대련해 보았던 데스 나이트들과 한 치의 틀림도 없이 동일하더군요. 게다가 튜드렛 백작이 데리고 온 팔라딘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저와 거의 실력차이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팔라딘 둘을 가볍게 제압한 엘리트 둠 워리어가 저 하날 당해내지 못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것도 넷이나 덤볐지 않습니까?" "그, 그것은 자네가 목숨을 걸고 싸웠기 때문이 아닐까?" 카심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무리 목숨을 내놓고 싸운다 하더라고 그 정도 실력차이를 극복할 순 없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너무 공교롭습니다. 마왕이 100년에 한 번씩 붉은 전갈좌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인다는 사실은 지금껏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사실입니다. 게다가 하필이면 결혼식이 벌어지는 순간에 이 일이 벌어진 것과, 때마침 데이몬이 베르하젤의 홀과 드래곤 하트를 제게 맡겼다는 사실은 우연이라 치기엔 너무 앞뒤가 맞아떨어지지 않습니까?" "………." 데이몬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어느덧 용병들이 모여들어 그들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다. 카심은 데이몬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전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모든 일은 바로 데이몬께서 꾸미신 일이라고 말입니다." 듣고 있던 데이몬이 조용히 고개를 들어 카심의 시선을 맞받았다. "살다보면 반드시 우연의 일치란 것이 있기 마련이지. 내 생각에 이것은 기막힌 우연의 일치인 것 같네. 그 날 내가 자네에게 베르하젤의 홀과 드래곤 하트를 건넨 것은 아마도 자네의 운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일 거야. 흠. 그리고 리치의 이름이 쉬르나크란 사실은 아르네 주민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이야. 난 술판에서 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이라네." 데이몬의 대답은 명백한 부정이었다. 하지만 듣고 있던 카심의 얼굴에는 조금의 표정변화도 없었다. 잠시 후 그의 입술에서 결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전 데이몬을 위해서라면 결코 목숨이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 "이제 전 데이몬을 위해서 웃으며 기꺼이 죽어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 진심입니다." 한자한자 또박또박 내뱉는 카심의 다짐에 용병들은 하나같이 숙연해졌다. 묵묵히 듣고 있던 미첼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역시 데이몬에게 큰 은혜를 입은 몸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카심의 말에 그리 감명 받지 않은 것 같았다. "대장은 보기보단 멍청한 사람이군." "………." "마땅히 목숨을 바칠만한 사람이 있는데 왜 엉뚱하게 나에게 바치나? 자네 목숨은 엄연히 자네 부인에게 바쳐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소린 하지도 말게." 퉁명스럽게 내뱉은 데이몬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날 위해 죽어준다고 하면 내가 기쁠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은 명백한 오산이야. 죽은 시신은 동료들에겐 그저 슬픔만 줄 뿐이야. 살아서 동료들을 기쁘게 해 줘야지 죽긴 왜 죽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목숨만은 소중히 여겨야 해." "………." "자넨 어떻게 해서든 살아 돌아가서 부인과 행복하게 살아야 하네. 그리니 앞으로 죽는다는 말은 함부로 입밖에 내지 말게. 알겠나?" 카심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 결심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이런 고집불통을 봤나? 자넨 보기보단 외골수로군. 쯔쯔. 못난 사람." 데이몬은 혀를 차며 휑하니 몸을 돌렸다. 한 쪽으로 걸어가는 데이몬의 뒷모습을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은 형언할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 쪽으로 걸어가는 데이몬의 얼굴에는 한 대 맞았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카심이란 녀석.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단 말이야.'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던 데이몬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녀석, 눈치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아까운 드래곤 하트를 날리지 않아도 되었는데 말이야. 기껏 소환해놓은 다크 쉐이드를 잃은 것도 아깝고……. 하지만 어쩔 수 없었지. 조금만 늦었다면 나까지도 심각한 타격을 입을 뻔했으니.' 드래곤 하트를 잃긴 했지만 얻은 게 더 많았기에 데이몬은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뭔가를 떠올렸는지 그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역시 난 악역이 어울려. 진정한 악당만이 악역을 완벽히 소화해 낼 수 있단 말이야.' 구석자리에 도착한 데이몬은 조그마한 바위 하나를 깔고 앉았다. 몸을 돌리자 용병들이 부산하게 식사준비를 하는 장면이 들어왔다. 카심이 아직까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에 데이몬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집요한 녀석이로군. 어쨌거나 잘된 일이지. 녀석이 나에게 해 주는 것을 생각하면 드래곤 하트 하나쯤은 싸다고 볼 수 있지.' 팔베개를 하고 벌렁 드러누운 데이몬의 머리 위로 산들바람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10장 마룡 베르키스 270회. 식사를 마친 용병들은 앞으로의 행로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카심이 미안하다는 듯 제럴드를 쳐다보았다. "제럴드. 너에게 미안하게 되었구나. 원래는 테제로스에 가서 네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데 아르네에서 일정을 지체하다 보니 도저히 테제로스에 들릴 시간이 없다." 제럴드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복수는 제 손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니까요." "아니다. 너의 일은 곧 카심 용병단 전체의 일. 네 복수는 일단 임무를 마치고 나서 생각해 보자꾸나." 말을 마친 카심은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간택식이 열리는 날이 이제 며칠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일정을 서둘러야만 시일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은 대장이 알아서 하게." 데이몬의 대답을 들은 카심은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저희들은 레이토나까지 쉬지 않고 달릴 생각입니다. 그러니 힘드셔도 좀 참아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어요." 율리아나의 대답을 들은 카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서두르자. 데이몬께서 몸을 혹사시키는 것도 수련의 한 방편이라고 하셨으니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용병들은 두 말도 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본 카트로이가 급급히 카심을 불렀다.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나도 달려야 하나?" 카심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카트로이님께서는 데이몬과 함께 오십시오. 아마 마법을 사용하시면 편하게 오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 정말 다행이로군." 카트로이는 겨우 가슴을 쓸어 내렸다. 게으른 드래곤에게 달리는 것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무정한 데이몬이 또다시 초를 치고 나섰다. "네놈은 아무리 봐도 운동부족인 것 같다. 그러니 잔말말고 함께 뛰어! 나도 역시 함께 달릴 테니 말이다." 카트로이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이놈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니까……." 툴툴거리는 카트로이에게 짐짓 인상을 쓴 데이몬은 달리기 편하도록 로브자락을 묶었다. 그 모습을 본 카심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노구(老具)인 데이몬이 걱정된 것이다. "힘드실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체력 하나는 자신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달리다 힘들면 마법을 사용할 테니……." "아,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카심이 출발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데이몬의 몸이 실은 싱싱한 20대 청년의 것이란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출발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일행은 일제히 내닫기 시작했다. 율리아나를 태운 말이 기세 좋게 달려나갔고 용병들은 뒤질세라 몸을 날렸다. 데이몬 역시 조금도 뒤쳐지지 않겠다는 듯 열심히 달음박질을 했다. 일행의 후미에서는 카트로이가 연신 투덜거리며 뛰어가고 있었다. "정말 고생을 사서하는 놈들이군. 공간이동을 사용한다면 지극히 간단할 것을……." 일행이 열심히 달려가는 뒤로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깔리고 있었다. 크로센 제국의 수도 펠젠틴. 이 거대한 도시는 며칠 후 벌어질 축제 때문에 도시 전역이 떠들썩했다. 크로센 제국을 물려받을 황태자가 아르카디아 전역에서 모인 아가씨들을 맞아 그 중에서 황태자비를 선택하는 날이니 만큼 결코 평범한 날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신부 후보가 왕족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결혼적령기에 든 펠젠틴의 귀족 아가씨들도 하나같이 곱게 단장한 채 두근대는 가슴을 달래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의 눈빛을 한 번만 받아 보아도 원이 없을 텐데……." 하지만 대다수 귀족 아가씨들의 꿍꿍이는 따로 있었다. 간택식이 벌어지는 기간 내내 황궁에서는 거창한 무도회가 열린다. 무도회에는 황태자말고도 여러 왕국의 왕족이나 귀족 청년들도 참석했다. 그들은 왕녀를 호위한다는 미명 하에 간택식에 참가하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귀족 아가씨들의 목표였다. 크로센 제국보다 작긴 하지만 일국의 왕위를 물려받을 왕족 청년과 연분을 맺을 수 있다면 그녀들로서는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었다. 그것은 간택식에 참석하는 왕녀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태자비로 간택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막강한 크로센 제국의 저명한 귀족 자제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다면 국익에 상당한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크로센 제국에서 벌어지는 황태자비 간택식에는 많은 왕국에서 왕녀를 파견해 왔다. 그들을 맞을 채비를 갖추느라 펠젠틴 전체가 떠들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인 황태자는 지금 심사가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정해졌다는 말이구려." 눈살을 찌푸린 채 말을 이어나가는 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칠흑같이 검은 흑발에 새카만 눈동자가 인상적인 청년은 무척이나 수려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이처럼 짙은 흑발과 눈동자는 아르카디아에서는 쉽사리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바로 청년이 크로센 대제의 혈통을 정통으로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그는 바로 크로센 제국 유일의 황손인 드비어스 황태자였다. 실낱같은 숨결이 붙어있긴 하지만 이미 운명한 것이나 다름없는 발렌시우스 3세의 뒤를 이어 막강한 크로센 제국의 황위를 물려받을 행운아. 갓 스물이 넘어 보이는 나이였지만 눈빛에서 혜지가 빛나는 것을 보니 무척 총명할 것이라 생각되는 청년이었다. 그의 앞에는 두 사람이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 채 앉아 있었다. 그들 중 왼쪽에 앉아 있는 자는 백발이 성성한 노무장이었다. 강퍅한 얼굴에 아로새겨진 각종 상처들은 그가 지금까지 겪어온 역경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에서 풍겨지는 강인함이 전혀 희석되지 않았다. 그가 바로 윌리엄스 후작이었다. 대륙에서 제일간다는 크로센 기사단의 총수로써 명실상부한 아르카디아 제일의 실력자인 그는 전 대륙을 통틀어 채 다섯 명도 되지 않는다는 그랜드 마스터 중 한 명으로써 인간 세상에 나와있는 유일한 무의 절대자였다. 71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소드 마스터 1백 여명으로 구성된 크로센 기사단을 아무런 불협화음 없이 끌어가고 있는 거물. 바로 그가 황태자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윌리엄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견을 털어놓았다. "그렇습니다. 전하. 현재로써 그 방법만이 전하의 안위를 보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썩 마음이 내키지 않는구려. 페르슈타인, 그 작자가 우리 가문에 한 짓을 생각하면……." "그러나 어쩔 수 없사옵니다. 전하. 지금 그를 제지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전하의 안위를 위해서는 오로지 그 방법만이……." 침통한 어조로 말꼬리를 흘리는 자는 바로 테오도르였다. 네르시스 가문의 양자로써 집정관이라는 중임을 맡고 있는 그가 근위기사 단장인 윌리엄스 후작과 함께 배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황태자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차라리 다른 왕국의 공주를 택하면 어떻소? 펜슬럿이나 테르비아 정도의 강대국이라면 어느 정도 페르슈타인 공작을 견제할 수 있지 않겠소?" 그 말에 윌리엄스 후작의 안색이 흐려졌다. "전하. 송구스럽지만 아마도 힘들 것입니다. 펜슬럿, 테르비아, 테제로스 이 3국이 비록 우리 크로센 제국 다음가는 강대국이라고 하나 페르슈타인 공작의 막강한 힘을 견제하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합니다. 적어도 두 왕국 이상이 힘을 합쳐야만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후작의 응대에 드비어스 황태자는 낙담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작자의 힘이 그리도 강하다니……." "오로지 소신이 제안한 방법만이 황가의 혈통을 무사히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무리 야망에 불타는 페르슈타인 공작이라도 일단 혼인관계로 맺어진다면 더 이상 전하께 위협을 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드비어스 황태자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 올라갔다.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집단의 총수가 발설했으리라곤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황가의 안위를 책임진 크로센 기사단장께서 어찌 그런 맥빠진 말을 하실 수 있소?" 하지만 윌리엄스 후작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황가를 위한 충절 때문이옵니다. 그러니 부디 용서하십시오." 그 말을 들은 드비어스 황태자는 맥이 빠졌다. 물론 윌리엄스 후작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것이 하등 부질없는 짓이라는 사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젊은 혈기 때문에 도저히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진정으로 선택하고자 하는 여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경이 제일 잘 알지 않소? 그러면서도 그토록 내 마음을 아프게 해야 하겠소?" 드비어스 황태자의 말에 윌리엄스 후작의 얼굴에 쓸쓸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 표정은 떠오르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미나를 말씀하시는군요 전하. 하지만 그 아이는 어느 면으로 보아도 전하께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입니다. 전하께서 미거한 제 손녀에게 마음을 주심에 있어 신은 차마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허나 대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비 자리는 그 아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음." 드비어스 황태자의 얼굴에 침통한 기색이 어렸다. 사랑하는 여인의 조부까지 말리고 들 줄은 몰랐기 때문에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묵묵히 사랑하는 그녀를 떠올려 보았다. '미나……. 결국 그대를 보내야만 하는 거요?' 황태자인 드비어스가 미나를 만난 것은 기사학부에서였다. 전통적으로 무를 중시하는 까닭에 크로센 제국의 황위를 물려받을 황손은 의무적으로 기사학부를 수료해야 한다. 그 때문에 드비어스는 15세가 되던 날 정식으로 기사학부에 입학했다. 형인 알카리스가 의문의 사건으로 실종된 후 그가 유일한 황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입학 후 황태자가 교관에게서 들은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기사학부에서는 일체의 특혜가 없습니다. 학부생이 왕족이던 귀족이던, 심지어 평민의 아들이라도 일체의 차이가 없는 똑같은 대우를 받습니다." 그 이후로 꼬박 5년 동안 이어진 학부생활은 드비어스에겐 한 마디로 고통의 나날이었다. 어릴 때부터 책과 시를 좋아해서 학자를 꿈꿔왔던 드비어스에게 기사학부에서의 하루하루는 견디기 힘든 나날일 수밖에 없었다. 그 때 힘이 되어준 이가 바로 미나였다. 드비어스 황태자보다 1살 연상인 미나는 바로 근위기사 단장인 윌리엄스 후작의 손녀였다. 동기생으로 황태자와 함께 입학한 미나는 마치 자상한 누나처럼 황태자를 세심하게 보살펴 주었다. 그녀 덕택에 황태자는 5년 동안의 기사학부생활을 큰 어려움 없이 마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혈통을 이어받은 때문에 미나는 검술에 대단한 재능을 보였다. 노력도 모자라지 않아 그녀는 학부의 평가에서 항상 수석을 독차지할 정도였다. 하지만 드비어스 황태자는 달랐다. 검술에 대한 재능이나 열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황태자의 성적은 항상 밑바닥에서 맴돌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힘겨운 검술수련이 아니라 책을 읽거나 시를 외는 것이었고 그 때문에 황태자는 학부생활 중 여러 번이나 낙제할 위험에 처해야 했다. 그 때 황태자를 도와준 이가 바로 미나였다. 그녀는 마치 할아버지의 당부를 받기라도 한 듯 황태자의 학부생활을 성심껏 도와주었다. 어려운 검로를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해 주는 것은 기본이었고 밤이면 기숙사를 빠져 나와 고된 수련으로 뭉친 황태자의 근육을 풀어주었다. 발각되면 바로 퇴학처리 된다는 위험까지 감수하고 말이다. 드비어스 황태자가 그녀에게서 받은 도움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우등생 그룹에 속해있으면서도 불구하고 미나는 항상 황태자와 같은 그룹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배정된 과제를 주도적으로 맡아 완수했기 때문에 드비어스 황태자는 5년에 걸친 학부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사랑이 싹트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는 법. 마치 누나처럼 자상하게 돌보아주는 미나에게 연정을 느꼈던 황태자는 졸업 후에도 그녀와 계속 만나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학부생활동안 더없이 다정했던 미나는 그 문제만 거론하면 안색을 싹 바꾸었다. "전하와 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전하는 절대자의 길을, 소녀는 기사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전 결코 전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 그래야 하오? 지금 난 한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으로써 그댈 대하는 것이오." 이미 할아버지로부터 단단히 주의를 들은 듯 미나는 냉랭하게 황태자의 청을 일축했다. "전하와 전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인연입니다. 전 이미 기사의 길을 걷기로 작정한 몸. 저 말고도 어딘가에 분명 전하와 어울리는 여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다크메이지] 10장 마룡 베르키스 271회. 기사학부 수료 후 제위를 이어받기 위해 제왕학을 배우기 시작한 황태자와 근위기사의 수련기사로 들어간 미나와는 여간해서는 만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특유의 고집 때문인지 황태자의 마음은 쉽사리 변하지 않았다. 그는 틈나는 대로 미나를 찾아가서 진정을 토로했다. 여러 사람들이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였다. 그런 그의 정성에 미나도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비어스를 황태자가 아닌 한 명의 남성으로 조금씩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고 어느 날 밤에 상황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렸다. "죄송하옵니다. 소녀는 더 이상 전하를 만날 수 없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절교(絶交)를 선언하는 미나. 그 모습에 황태자는 그녀가 할아버지인 윌리엄스 후작에게 단단히 주의를 들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그럴 순 없소. 세상을 통틀어 내가 사랑하는 여인은 오직 당신 하나 뿐이오." "죄송하옵니다. 전하. 절 영원히 잊어주시옵소서."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미나는 떠났다. 그 이후로 황태자는 단 한번도 미나를 보지 못했다. 윌리엄스 후작이 미나가 섬기는 근위기사에게 오지로의 파견근무를 명했기 때문이었다. 미나 역시 그를 따라 머나먼 오지로 가야 했다. 그녀가 떠나간 것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의 일이었지만 황태자는 아직까지 미나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미나…….' 사랑하는 여인을 강제로 떼어놓은 장본인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므로 황태자에겐 윌리엄스 후작이 한없이 야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의 일이 떠오른 황태자는 참지 못하고 속마음을 내뱉고 말았다. "도대체 내가 얼마나 못났기에 공이 그토록 날 멀리하려 하시오? 한 여인을 사랑할 자격도 없는 내가 공들의 충성을 받을 필요가 있긴 한 거요?" "그렇지 않사옵니다. 전하." 대답하는 윌리엄스 후작의 얼굴에는 쓸쓸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죄송하옵니다. 전하와 제 손녀가 맺어지는 것이 저라고 어찌 싫겠습니까?. 저 역시 영명하고 사리판단 밝으신 전하가 손녀사위로 한없이 탐난답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생각을 마친 윌리엄스 후작은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영애인 셰넌 양은 펠젠틴에서도 손꼽히는 미인입니다. 정숙하고 아리따운 셰넌 양의 자태는 뭇 청년들의 가슴을 설레고 하고 있지요. 본관의 생각에 셰넌 양의 품격이라면 대 크로센 제국의 안주인이 되기에 추호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황태자의 냉소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품격이 아니라 배경 때문이겠지요. 그녀가 페르슈타인 공작의 딸이 아니라면 경들이 날 이토록 압박하지 않았을 테니……" "………." 두 충신들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어찌 보면 이것은 무척 부끄러운 일이었다. 안위를 지키기 위하여 주군을 힘을 가진 신하의 딸과 맺어주려 노력한다는 것. 이것은 과거 크로센 대제가 살아있을 때라면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막강한 페르슈타인 공작의 세력을 떠올린 테오도르는 억지로 안색을 고쳤다. '할 수 없다. 이번 결혼을 성사시키지 못한다면 황태자 전하의 안위를 결코 장담할 수 없으니…….' 페르슈타인 공작의 세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대해져가고 있었다. 제국이 보유한 군대의 각급 사단장들 중 거의 전부가 페르슈타인 공작의 명령을 받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페르슈타인 공작이 보유한 듀크 나이츠의 힘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후한 봉급과 체계적인 관리 때문에 이미 학부졸업생들은 크로센 기사단보다 듀크 나이츠를 더 선호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듀크 나이츠에는 페르슈타인 공작을 추종하는 귀족 자제들이 대거 포진한 까닭에 인맥 쌓기가 용이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선택의 자유가 있는 기사학부 졸업생들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듀크 나이츠를 택하기 십상이었다. 크로센 제국의 수련기사를 꿈꾸는 자는 오로지 검에 모든 것을 건 무골(武骨)들 뿐이었고 지망생의 수는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므로 크로센 기사단의 앞날을 쉽사리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듀크 나이츠는 양적인 면에서 크로센 기사단을 추월한지 오래였다. 아직까지 질적인 면에서는 크로센 기사단이 현격한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언제 역전될 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우열이 역전되는 순간이 바로 크로센 황가가 끝나는 날이지.' 테오도르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런 방법을 써서라도 황가의 혈통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지만 지금으로써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뜻하지 않게 페르슈타인 공작이 넣어온 청혼. 그것은 불과 3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고, 황태자비 간택식이 결정된 날 밤에 공작의 심복에 의해 비밀리에 전해졌다. -드비어스 황태자와 내 딸 셰넌을 맺어주고 싶소이다. 황태자께 의향이 있다면 부디 간택식에서 내 딸을 간택해 주셨으면 하오.- 짤막한 데다 거드름이 잔뜩 배어있는 서신이었지만 테오도르로써는 쉽사리 보아 넘길 수 없었다. 서신을 받은 테오도르는 즉시 근위기사 단장인 윌리엄스 후작을 찾아갔고 어렵지 않게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었다. -안위를 위해서는 황가와 헬프레인 가문과의 결혼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 제 아무리 야망에 불타는 페르슈타인 공작이라도 사위에게까지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 집정관 테오도르와 뜻을 같이하기로 한 윌리엄스 후작은 그 즉시 손녀인 미나를 황태자와 떼어놓았다. 때는 둘 사이의 관계가 서서히 무르익어 갈 때였다. "하, 할아버지 제발……." 이미 황태자에게 연정을 가진 미나가 눈물로 호소해 왔지만 대의를 생각한 윌리엄스 후작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둘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날 용서하거라. 황가의 존속을 위해서는 오로지 이 방법밖에는 없구나." 상황을 가까스로 납득시킨 미나를 황태자와 떼어놓기 위해 윌리엄스 후작은 미나가 섬기는 근위기사를 머나먼 오지로 좌천시켰다. 물론 수련기사인 미나 역시 동행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렇게 일을 모두 처리하고 난 뒤 윌리엄스 후작과 테오도르는 적극적으로 황가와 헬프레인 가문과의 혼사를 추진했다. 각 국 정보국에 은밀히 퍼져나간 소문은 바로 그들의 작품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완강히 거부하는 황태자를 꾸준히 설득하여 간신히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었다. 피땀어린 노력 끝에 황태자는 그들에게 거의 설득된 상태였다. 그 사실을 떠올린 테오도르가 때를 놓칠세라 못을 박았다. "헬프레인 가문의 셰넌 양은 미모도 뛰어날뿐더러 교양과 예절 면으로 펠젠틴의 영애들 중에서 단연 독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만나본 결과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더군요." 테오도르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크로센 제국 제일가는 권력자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셰넌은 결코 교만하지 않고 몸가짐을 철저히 하는 정숙한 규수였던 것이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드높은 야망만큼이나 자식교육에는 철저한 인물이었다. 공작의 슬하에는 외동딸인 셰넌 외에 총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 하나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마치 범에게서 결코 강아지 새끼가 태어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통상적으로 고위급 귀족의 아들은 망나니가 되기 쉬운 법이다. 어릴 때부터 주위의 떠받듦을 받고 자라는 데다 물질적으로 풍요하며 또한 가문의 후광에 기댈 수 있기 때문에 자신밖에 모르는 철부지로 자라날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페르슈타인 공작의 생각은 달랐다. "매를 아낀다면 자식을 제대로 교육시킬 수 없다. 자식을 나약하게 키우느니 차라리 도태시켜버리는 것이 낫다." 그의 이 비정하기까지 한 철학으로 인해 그의 세 아들들은 어린 시절부터 엄격하게 자라야 했다. 돈을 마음대로 쓰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으며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혹독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심지어 페르슈타인 공작은 가문의 집사나 하인들에게 이런 지시까지 내렸다. "내 아이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꾸짖은 자에겐 후하게 상을 주리라. 그러나 아이들의 잘못을 감싸주거나 그냥 보아 넘긴 자의 경우 엄한 처벌을 각오하라." 그런 가르침 때문인지 공작의 세 아들들은 하나도 삐뚤게 나가지 않고 훌륭하게 자라났다. 세 아들 모두가 20대 초반에 팔라딘이 될 정도였다. 특히 큰아들인 크란시아는 듀크 나이츠의 부대장으로써 휘하 기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거기에 헬프레인 가문의 후광은 일체 끼여들지 않았다. 오로지 크란시아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룬 성취였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외동딸인 셰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귀족 사회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추문에 셰넌의 이름이 단 한 번도 끼여들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테오도르는 황태자에게 아무 거리낌없이 셰넌을 추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황태자는 결코 내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맥이 빠진 듯 힘없이 내뱉었다. "결국 원수의 딸과 혼인해야 하는 것이오?" 총명한 드비어스는 아버지가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일체의 증거가 없는, 단지 심증뿐이었지만 그는 흉수가 페르슈타인 공작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무슨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페르슈타인을 거꾸러뜨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미나가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언제나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의 전형적인 여검사(女劍士)인 미나였지만 드비어스 황태자에게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어찌 보면 미나는 유약한 심성의 황태자에게 가장 어울리는 배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소 우유부단한 황태자의 단점을 잘 메꿔줄 수 있는 여인이었으니까, 그러니 이젠 잊어야 할 여인이기도 했다. 그것을 떠올린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이 그녀와 나의 관계를 전혀 용납지 않는군. 차라리 내가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가 아니라 평범한 청년이었다면 그녀와의 사랑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 텐데…….' 물론 총명한 드비어스인지라 그것을 상상으로 끝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을 정한 황태자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경들의 의견에 따라 며칠 후 벌어질 간택식에서 셰넌 양을 선택하겠습니다." 테오도르와 윌리엄스 후작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정말 영명하신 판단이십니다." 그들의 기뻐하는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황태자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저들이 저토록 추진하는 혼사가 오로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지금까지 해 왔던 소행으로 보면 저들은 오래지 않아 자신의 옆을 떠날 것이 분명했다. 뛰어난 검사인 윌리엄스 후작은 모르겠지만 문관인 테오도르 집정관은 십중팔구 숙청될 것이 확실했고 그에겐 막을 힘이 전혀 없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힘은 그 정도로 방대했다. 황태자는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 시조이신 크로센 대제께서 살아나셔서 이 자리에 오신다면…….' 상념을 마친 황태자는 묵묵히 몸을 일으켰다. "황실의 기념관에 잠시 다녀오겠소. 오늘은 왠지 조상님들을 찾아뵙고 싶군요." "알겠사옵니다." 공손히 고개를 숙인 윌리엄스 후작이 눈짓을 했다. 그러자 대기중인 근위기사들이 달려들어 그의 몸을 에워쌌다. 물샐 틈도 없을 정도였다.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들을 둘러본 황태자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테오도르와 윌리엄스 후작이 착잡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크로센 황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도 상념에 잠겨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페르슈타인 공작이었다. 뛰어난 지략으로 크로센 제국의 대부분을 장악한 야심가. 야망에 걸 맞는 탁월한 능력으로 수많은 심복들의 진심 어린 충성을 받고 있는 그가 지금 한창 고민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과연 트루베니아의 레드 드래곤이 내 뜻대로 행동해 줄까?"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에게서 확답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인간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레드 드래곤이 자신의 제의를 순순히 받아들였다는 것부터가 의문투성이였다. 이미 그는 고문서를 통해 트루베니아에서 벌어진 종족전쟁의 전모를 파악한 상태였다. 그의 명령에 따라 수백 명의 학자들이 밤을 새워 연구했기 때문에 드래곤들이 전쟁을 벌인 연유는 이미 소상히 밝혀져 있었다. 고민에 잠겨 있는 페르슈타인 공작은 미간을 가늘게 좁혔다. "놈은 십중팔구 인간들의 상잔을 통해 아르카디아의 힘을 줄여놓으려는 심산일 것이다. 그렇다면 머지않아 침공이 이루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할 터, 아마도 시기는 모든 드래곤들이 수면에서 깨어난 4년 뒤가 되겠지?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그 전에 정복전쟁을 마무리지어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공작에겐 자신이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분명히 선결과제가 있었다. 9서클의 흑마법사와 그가 거느린 본 드래곤, 데스 나이트가 반드시 자신의 편에 서 주어야 한다는 과제 말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뇌리에 문득 외동딸인 셰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눈가에 착잡한 빛이 서렸다. '불쌍한 것. 널 어쩔 수 없이 정략결혼 시켜야 하는 아비를 용서해라. 그러나 네 오빠인 크란시아를 제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부득이 널 희생시킬 수밖에 없구나.' 레드 드래곤이 공격을 가할 때 그는 딸 셰넌을 황태자의 바로 옆에 머물게 할 계획이었다. 드래곤이 범위 공격을 퍼부을 경우, 그녀가 살아날 확률은 희박했다. 하지만 공작은 야망을 위해 계획을 강행할 작정이었다. 외동딸을 잃은 자신을 드래곤을 사주한 원흉이라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고 예정대로 황태자가 딸과 함께 세상을 하직할 경우 그는 전혀 의심받지 않고 크로센 기사단을 수중에 넣을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레드 드래곤이 약정대로 행동했을 경우에 생각할 일이었다. [다크메이지] 10장 마룡 베르키스 272회. 페르슈타인 공작은 생각해 놓은 전략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았다. "일이 성공리에 끝나면 그 즉시 정복전쟁을 시작한다. 내가 보유한 모든 힘을 결집한 다음 틈을 주지 않고 테르비아를 침공한다. 테르비아의 주력 방어병력을 깨뜨린 뒤 그 즉시 모든 병력을 테제로스로 돌리고 테르비아의 남은 영토를 점령하는 것은 예비사단과 용병단에 맡긴다. 그 기간이 대략 3일이다. 내 계산이 정확하다면 테제로스 역시 3일만에 함락시키고 국왕의 목을 중앙 광장에서 자를 수 있다. 문제는 펜슬럿인데……." 대륙 전역의 정보를 훤히 꿰고 있는 페르슈타인 공작은 얼마 전 펜슬럿에서 벌어진 일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흑마법사가 속해 있는 용병단의 두 대원이 펜슬럿에서 작위를 받은 일 때문에 페르슈타인 공작은 계획을 적지 않게 변경해야 했다. "그 정보가 사실이라면 흑마법사는 대 펜슬럿 전쟁에 투입할 수 없다. 그들에게 테제로스의 잔당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긴 뒤, 크로센 기사단과 듀크 나이츠를 총 동원해서 최대한 빨리 펜슬럿의 수도인 코르도를 함락시켜야 한다. 아무리 빨리 잡아도 열흘 이상이 걸리겠지만 할 수 없다. 음. 별 수 없이 펜슬럿 국왕만은 살려두어야겠군. 흑마법사의 마음을 계속 잡아두려면 말이야." 물론 두 명의 용병 정도야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그들이 제아무리 팔라딘이라 하더라도 페르슈타인 공작의 관점에서는 하찮은 피라미에 불과했다. 문제는 그들이 흑마법사의 동료라는 점이었다. "첩보에 의하면 흑마법사는 동료를 상당히 아낀다고 했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있다." 그는 흑마법사를 회유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간주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카심 용병단의 목적과 행로를 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떠올리자 공작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그런 엄청난 흑마법사가 고작 카르셀의 왕녀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다니……생각보다 호색한 작자인가 보군. 상황을 보니 카르셀의 왕녀에게 흑심이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겠어. 그건 그렇고 용병녀석들은 무척 운이 좋았군. 카르셀 왕녀의 호위를 맡은 때문에 흑마법사의 동료가 될 수 있었으니 말이야." 이미 그는 카심 용병단 대원들의 신상정보를 훤히 꿰고 있었다. 그것은 썬더버드 용병단의 간부에게 거금을 주고 캐어낸 정보였다. "알아낸 바에 의하면 놈들은 하나같이 3류 용병 아니면 애송이에 불과하더군. 그런데 흑마법사는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팔라딘으로 키웠을까? 불과 1년 6개월 남짓한 기간에 말이야?" 모든 것이 흑마법사를 만나보면 해결될 일이라서 공작은 억지로 상념을 지웠다. 정보에 의하면 그들은 십중팔구 레이토나로 올 것이 분명했다. 그들을 맞기 위해 공작은 이미 다수의 심복을 레이토나에 파견해 놓았다. 일단 만나기만 하면 공작은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그를 회유할 작정이었다. 설사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며칠 뒤가 기대되는 군. 부디 크란시아와 크로비츠가 일을 잘 처리해야 할 텐데……." 놀랍게도 그는 흑마법사를 영접하기 위해 아들인 크란시아와 듀크 나이츠의 단장인 크로비츠를 레이토나에 급파한 상태였다. 만약 흑마법사가 황태자비 간택식에 참가한다는 확실한 정보만 없었더라도 공작은 직접 가서 흑마법사를 영접할 마음까지 먹고 있었다. "일단 그를 열과 성의를 다해 맞아들여야 한다. 지금껏 그 어떤 왕국의 사절단에게도 베푼 적이 없는 융숭한 대접으로……." 생각을 마친 공작은 창 밖을 쳐다보았다. 밤이 깊은 탓인지 시리도록 눈부신 별빛이 공작의 눈을 파고들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도 그의 염원이 실현되기를 갈망하는 것처럼……. 크로센 제국의 관문도시인 레이토나는 유난히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1년 전 간택식이 연기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북적거렸고 그들을 맞기 위한 호객행위도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거리를 나다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화려한 차림새였다. 그들 대부분은 간택식에 참가하기 위해 온 왕녀와 그 수행원들이었다. 짧게는 일주일 전부터 길게는 한달 전까지 도착한 이들 일행들은 레이토나에서 묵으며 제국의 수도, 펠젠틴으로 떠날 때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기대되는군." 왕녀들의 가슴은 부풀대로 부풀어 있었다.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초강대국 크로센 제국의 수도 펠젠틴을 볼 기회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패거리 하나가 끼여 든 것은 왕녀 일행들이 모인 두 번째 무리가 펠젠틴으로 출발하기 몇 시간쯤 전이었다. "이크." 정신 없이 달려오는 패거리를 발견한 사람들은 질겁을 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달려오는 작자들이 하나같이 먼지를 시커멓게 뒤집어 쓴 몰골이었기 때문이었다. 행여나 옷에 먼지가 묻을까봐 허둥대는 모습이 정말 가관이었다. 그 때문에 패거리들이 달려오는 부분은 마치 파도가 갈라지듯 길이 뚫리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성벽은 훤히 열려 있었고 그 때문에 패거리들은 시내 중심부까지 곧장 달려올 수 있었다. 히히힝. 가쁜 숨을 토해내며 한 필의 말이 멈춰 서자 뒤를 따라 달리던 사내들도 하나 둘씩 달리던 것을 멈췄다. 얼굴이 하나같이 먼지로 범벅이 되어 도저히 용모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얼굴을 슬쩍 훔쳤다. "헉, 헉. 드디어 도착했군." 먼지가 떨어져나가며 드러난 얼굴은 바로 카심의 것이었다. 그들 뒤로 지칠 대로 지친 대원들이 하나 둘씩 바닥에 주저앉고 있었다. "크아아. 죽겠군. 내가 왜 이렇게 달려야 하지?" 느닷없이 뒤에서 터져 나온 불평은 바로 카트로이의 것이었다. 얼마나 먼지를 뒤집어썼는지 보기 좋던 백발과 백의가 아예 회백색으로 변해 있었다. 평소의 말끔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퉁명스런 대답이 터져 나왔다. "엄살 부리지 마. 임마. 드래곤이면 드래곤답게 체통을 한 번 지켜봐." 데이몬 역시 몰골이 형편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먼지를 많이 타는 색답게 그가 걸친 검은 로브에는 먼지가 마치 눈처럼 소복하게 덮여 있었다.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숨을 고른 대원들은 서로의 몰골을 보고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후후후. 네 녀석 몰골 좀 보게." "임마. 너도 마찬가지야." 카심 용병단원들은 대로변에 그대로 주저앉아 서로의 얼굴을 가리키며 웃기 바빴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아랑곳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여든 사람들이 그들을 쳐다보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은 뭐야?" "응? 말 위에 누가 묶여 있잖아?" 아닌게 아니라 연신 헐떡거리는 말 등에는 누군가가 동아줄로 칭칭 동여매어진 채 늘어져 있었다. 가냘픈 몸매로 봐서 여자로 보였는데 마치 시체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참, 그렇지." 사람들의 시선을 눈치챈 카심이 얼른 말에 다가갔다. "으차." 그는 서둘러 말 위에 실린 시체를 끌어내렸다. 시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율리아나였고 가슴이 미미하게 뛰는 것을 보니 아직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된 계기는 바로 이러했다. 용병단원들은 꼬박 이틀동안을 죽자고 달려왔고 그런 강행군을 율리아나가 견딜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말을 타고 있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힘들다고 칭얼댔다. "힘들어요. 조금만 쉬었다 가요." 하지만 카심으로서는 결코 행군을 늦출 수가 없었다. 시일이 워낙 촉박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데이몬을 찾아가서 상황을 해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율리아나 왕녀님이라도 공간이동을 시켜 주심이……." 하지만 데이몬은 냉랭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보다 훨씬 훌륭한 방법이 있지. 슬립(sleep)." 마나가 재배열되자마자 율리아나는 그 자리에 픽 쓰러져버렸다. 마법의 힘을 이용해서 그대로 재워버린 것이다. 늘어진 율리아나를 보며 데이몬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깨끗하게 해결했지? 그럼 이 계집애를 말 등에 단단하게 묶어. 떨어지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데이몬의 기발한 해결책에 카심을 비롯한 대원들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한지라 용병들을 결국 그녀를 말 등에다 묶을 수밖에 없었다. 그 상태로 그들은 레이토나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던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려 본 카심은 율리아나의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 솔직히 말해 마구 흔들리는 말 등에 실리고도 무사할 거란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예상대로 율리아나의 얼굴에 이리저리 멍 자국과 상처가 나 있었다. 흔들리는 말 등에 계속해서 부딪힌 때문인 것 같았다. 특히 묶인 손발 부분은 보기 흉할 정도로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그 모습을 본 카심은 못 말리겠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허. 참. 데이몬도 정말 사악하십니다. 어떻게 여자에게 이러실 수가……." 뒤에서 곧 데이몬의 대꾸가 들려왔다. "사악하긴 뭐가 사악해? 그러게 누가 칭얼대라고 했어?" 카심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그나저나 큰 걱정이군요. 간택식에 참가해야 하는 상황에서 얼굴에 상처가 났으니……." "그거야 내 알 바 없지. 솔직히 말해 이 계집애가 간택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심드렁하게 대꾸한 데이몬은 손을 슬쩍 휘저었다. 그러자 율리아나가 눈을 번쩍 떴다. 순간 그녀의 입술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꺄아아악."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킬 정도로 큰 소리였다. 깨어난 율리아나는 정신 없이 온 몸을 주무르며 끙끙 앓기 시작했다. 모습을 보니 통증이 이만저만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심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아플 만도 하지. 그냥 타고 왔더라도 온 몸이 뻐근할 텐데, 말 등에 묶인 채 실려 왔으니……." 혹시나 해서 데이몬을 쳐다보았지만 허사였다. 내심 힐링을 펼쳐주기를 기대했지만 데이몬에겐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도리어 이죽거리는 데이몬의 모습에 카심은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앞으로 또다시 칭얼댈 경우 이보다 더 험한 꼴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끙끙 앓던 상황에서도 율리아나는 표독한 눈길을 날렸다. "두, 두고 봐요!." "많이, 많이 두고보도록. 참고로 나더러 두고보자는 사람은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이 많았어." 짧게 응대한 데이몬은 냉랭하게 몸을 돌렸다. 그러자 카심이 다급하게 데이몬을 잡았다. "자, 잠깐만." 데이몬이 고개를 돌리자 카심이 어색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래도 특별한 날이 아닙니까? 얼굴만이라도 힐링을 펼쳐주심이……." 데이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 저 머저리 드래곤 녀석도 있는데 왜 내가 수고를 해야 하나?" 말을 마친 데이몬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냉랭히 몸을 돌렸다. 그의 등으로 율리아나의 표독스런 눈초리가 마치 화살처럼 와서 꽂혔다. 눈빛으로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다면 아예 난도질을 칠 수도 있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머뭇거리던 카심은 결국 카트로이에게 다가가서 난처한 기색으로 부탁을 해야 했다. "저, 카트로이님……." 사정을 들은 카트로이는 다행히 카심의 청을 순순히 들어주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힐!(heal)" 마법의 조종인 드래곤이 시전한 마법이라서 율리아나의 얼굴과 몸에 난 상처와 멍 자국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얼굴이 말끔하게 변했지만 율리아나는 카트로이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불타는 듯한 눈초리로 데이몬을 노려볼 뿐이었다. 머쓱해진 카심이 다가가서 주의를 환기시켰다. "서둘러야 합니다. 늦으면 참가신청을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율리아나는 고개를 숙였다. 카심을 한 번 쳐다본 율리아나는 묵묵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와봤기 때문에 그녀는 신청장소가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다. 용병단원들도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먼지범벅이 된 몰골로 일행이 다가가자 사람들은 질겁을 하며 길을 비켜 주었다. 행여나 부딪혀서 옷에 먼지가 묻는다면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바람에 일행은 비교적 수월하게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런데 신청장소에 거의 다가갈 무렵 뜻밖의 사단이 생겨버렸다. 옆에 비켜선 사람들 사이에서 갑자기 비웃음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톤이 높은 여인의 목소리인 것을 봐서 간택식에 참가하려는 왕녀의 것으로 보였다. "정말 별일이로군요. 간택식이 아무리 개방되어 있는 축제라 하나 저런 허접 쓰레기들까지 참석시키다니 말이에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이죽거림은 일행 모두가 들을 만큼 뚜렷이 울려 퍼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호위기사로 보이는 굵직한 목소리까지 일행을 여지없이 모욕했다. "글세 말입니다. 보나마나 뭐라도 하나 주워먹으려고 참석한 작자들이겠지요? 쳐다보지 마십시오. 저런 것들 때문에 왕녀님의 아름다우신 눈이 더럽혀질까 두렵습니다." 용병들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그저 웃어넘겼다. 힘을 얻어 여유가 생겼으므로 하찮은 모욕 정도는 그냥 흘려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율리아나였다. 이미 데이몬 때문에 열이 있는 대로 받은 상태였으므로 그녀는 급기야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크메이지] 10장 마룡 베르키스 273회. 걸음을 멈춘 율리아나는 소리가 들려온 쪽을 노려보며 고함을 빽 질렀다. "어떤 빌어먹을 년이야? 혓바닥을 뽑아놓기 전에 당장 나오지 못해!" 삽시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생전 처음으로 들어보는 험악한 상소리에 왕녀들이 일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 "차, 참으십시오." 대경한 카심이 급히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카심의 손길을 냉랭히 뿌리친 율리아나는 사납게 눈을 부라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런 죽일 년. 나설 용기도 없으면서 뒤에서 호박씨나 까는 너 같은 년이 정녕 허접 쓰레기다." 율리아나의 상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결국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일단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득하게 욕을 먹은 탓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카심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어휴. 이 사고뭉치는 어딜 가나 문제를 일으키는군.' 그러면서도 그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타난 이들의 복장을 유심히 살폈다. 카심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찰나의 순간에 상대가 어느 왕국 소속인지 파악한 것이다. '다행이로군. 그래도 강대국 왕녀에게 시비를 걸지 않아서 말이야.' 사람들을 헤치고 나타난 이들은 모두 합쳐 30여명 되어 보이는 무리였다. 중앙에는 제법 아름답지만 상당히 성깔 있게 생긴 여인이 표독스런 눈빛을 뿌리고 있었다. 옆에는 화려한 갑주를 걸친 십여 명의 잘 생긴 기사들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갑옷에는 남부의 상업왕국인 세르발티 왕국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인구 20만 정도의 작은 왕국이었지만 상업이 고도로 발달했기 때문에 상당한 부유한 왕국이었다. 세르발티의 왕녀로 보이는 여인은 율리아나를 향해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정말 교양이 없는 계집애로군. 어떻게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지? 제대로 교육을 받기나 하긴 한 거야?" 애석하게도 그녀는 말싸움에 있어서 결코 율리아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말하는 것을 봐서 대충 짐작했는데 직접 보니 정말 싸가지 없게 생긴 년이로군. 병신 같은 년." "………." "너 같은 년이야말로 정녕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년이야. 집에 콕 박혀 사내 뒤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닐 것이지 여긴 왜 왔어?" 생전 처음 들어보는 험악한 욕설에 세르발티 왕녀의 말문은 콱 막힐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나는 이판사판이라는 듯 마구 욕설을 퍼부어 댔다. "왜? 할 말이 없나 보지? 겁나면 옆에 있는 똥개들이나 한 번 부추겨보지 그래? 똥개 새끼들이 생긴 것 하나는 번드르르 하군." 세르발티 왕녀의 옆에 서 있던 똥개(?)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마도 상대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가차없이 검을 뽑아들었을 터였다. 사내 하나가 이를 부드득 갈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호위기사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였는데 음성을 보아 아까 거든 자가 확실했다. 관자놀이가 불쑥 튀어나온 것을 보니 팔라딘 정도 되는 실력자 같았다. "경고하겠는데 지저분한 주둥아리 당장 닥치도록 해라. 우리 왕녀님은 너 같은 하찮은 계집이 감히 범접할 상대가 아니다." 율리아나에게 퍼부어진 험악한 말에 용병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상대 역시 율리아나를 여지없이 모욕하고 있었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별로 개의치 않은 듯한 눈치였다. "얼씨구? 똥개 새끼가 제법 기세 좋게 짖어대는데……." 율리아나의 시기적절한 대꾸에 주위 사람들이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졸지에 짖는 똥개가 되어버린 사내는 참을 수 없는 치욕에 얼굴이 울그락붉그락 했다. 건방진 계집을 당장이라도 일도양단해 버리고 싶은 듯 손이 연신 움찔거리고 있었다. "안 돼!" 그 모습을 본 세르발티 왕녀가 서둘러 둘 사이에 끼여들었다. 이곳에서 사고를 친다면 행여나 간택식에 참석하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다른 방법으로 상대를 처리할 결심을 굳혔다. 생각을 정리한 세르발티 왕녀는 타는 듯한 눈초리로 율리아나를 노려보았다. "네년도 간택식에 참석하려는 왕녀 신분이냐?" "그렇다. 왜? 이제 와서 꽁무니를 빼려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세르발티 왕녀는 간신히 마음을 추슬렀다. "네년에게 결투를 청한다." "뭐라고?" "네년은 내 명예를 심각하게 실추시켰다. 따라서 내 대리인으로 하여금 그 대가를 받아내야겠다." 말을 마친 세르발티 왕녀는 고개를 돌렸다. 율리아나의 욕설로 인해 아직까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바로 그 사내였다. "오스발 페이런 경."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부르셨습니까?" "그대를 나의 대전사로 임명하겠어요. 그러니 그대가 내가 당한 모욕에 대해 단단히 대가를 받아내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오스발이라 불린 사내는 즉시 싸울 채비를 갖췄다. 가슴보호대(護心鏡)와 어깨받이를 착용한 사내는 투구를 깊숙이 눌러 쓴 뒤 부하 기사가 건네주는 바스타드 소드를 받아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세르발티 왕녀는 맛 좀 보라는 듯 율리아나를 노려보았다. "네년도 대전사를 내세우도록 해라. 나설 자가 없을 경우 네년은 날 모욕한 대가를 목숨으로 치러야 한다." 듣고 있던 율리아나는 기가 막혔다. 말이 좀 과하기는 했지만 애당초 시비를 건 쪽은 저쪽이 아니던가?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란 말에 눈이 뒤집힌 율리아나는 세르발티 왕녀를 향해 덮어놓고 몸을 날렸다. "대리인 따윈 필요 없다. 당사자끼리 직접 한 번 싸워보자." 순간 한 줄기 싸늘한 검광이 율리아나의 가슴을 향해 쏘아졌다. 번쩍. 싸울 채비를 마친 오스발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날린 공격이었다. 적당한 이유가 있었기에 그의 손속에는 일체의 사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죽이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감히 우리 왕녀님을 암습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오스발의 공격은 정통으로 율리아나의 앞가슴을 파고들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쩌쩌쩡. 산산이 부서진 검편이 우수수 떨어졌다. 율리아나의 앞에는 어느새 먼지로 범벅이 된 인영 하나가 검을 단단히 움켜쥔 채 버티고 서 있었다. 바로 미첼이었다. 그는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오스발을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 이런." 오스발은 난감한 기색으로 오른 손을 들어올렸다.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는 이미 손잡이만 남기고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대관절 언제 끼여들었는지 기척도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상대의 몸놀림은 빨랐다. "만만히 볼 녀석이 아니로군." 부하 기사에게 새로운 검을 한 자루 건네 받은 오스발은 바짝 긴장하며 상대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먼지를 뒤집어 쓴 것만 빼고는 극히 평범한 젊은 애송이였다. 미첼의 얼굴은 지금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감히 율리아나의 목숨을 노리다니……." 비록 율리아나에게 셀 수 없이 당해온 미첼이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죽는 것만은 좌시할 수 없었다. 미운 정이지만 지금까지 함께 지내며 그 얼마나 쌓였던가? 때문에 서슴없이 율리아나에게 살수를 가한 오스발이 결코 곱게 보일 턱이 없었다. 미첼은 오스발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내가 그녀의 대 전사로 나서겠다." 말이 끝나자마자 들고 있던 검에서 푸르스름한 선이 자욱하게 뿜어져 나왔다. 선들이 모여들며 검에서 1미터 남짓한 유형의 기운이 형성되자 오스발은 눈이 불쑥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와, 완성된 오러 블레이드? 그렇다면 소드 마스터란 말인데? 세상에…….' 완성된 오러 블레이드를 확인한 순간 오스발의 투지는 그대로 꺾여 버렸다. 비록 그가 팔라딘이긴 하지만 소드 마스터에게 맞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추레한 차림새의 상대가 소드 마스터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주춤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미첼은 오스발을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당신의 왕녀 역시 내가 모시는 왕녀를 모욕한 것은 마찬가지다. 따라서 내가 널 상대해 주겠다." "………." 오스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물론 그에게 소드 마스터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있을 턱이 없었다.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뜻밖에도 누군가가 끼여들어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이번 일은 제가 한 번 해결해 보고 싶군요." 깜짝 놀란 미첼이 고개를 돌리자 제럴드의 굳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율리아나가 공격받은 일 때문에 잔뜩 화가 난 듯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모습이었다. '그렇군. 녀석의 좌수검법이라면…….' 미첼은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났다. 제럴드의 실력이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심해라. 그래도 명색이 팔라딘이니……." "알겠습니다." 오스발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연했다. '정말 다행이로군.' 걱정했던 소드 마스터가 뒤로 빠지고 웬 애송이가 그 자리에 끼여든 것이 오스발에겐 여간 반갑지 않았다. 혹시라도 상대에게 숨은 실력이 있을지 몰라 오스발은 애송이의 모습을 샅샅이 살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것이 채 스물이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년이었고 걸음걸이가 어색한 것을 보니 십중팔구 절름발이 같았다. "내가 율리아나 왕녀님의 대전사로 나서겠소. 동의하시오?" 오스발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용기가 가상해서 내가 친히 상대해 주겠다." 그는 천만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것을 보아 승리는 이미 따 놓은 당상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율리아나는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럴드가 익힌 좌수검법의 위력이 상당히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때를 놓칠세라 세르발티 왕녀가 잽싸게 결투 시작을 알렸다. "그럼 결투를 시작하겠다. 물론 결투로 인한 사상에 대해서는 피아에 어떠한 책임이 없다는 것을 밝히는 바다." 그녀의 얼굴에는 오스발이 소드 마스터와 싸우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는 표정이 역력히 감돌고 있었다. 율리아나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렇게 해서 뜻하지 않은 대전사 결투가 시작되었다. 율리아나의 대전사를 맡은 제럴드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가죽갑옷 외에 아무런 갑옷을 걸치지 않은 상태로 제럴드는 방패를 들어 몸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풀 플레이트 메일을 빈틈없이 차려입은 상대와 무척이나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그 상태로 제럴드는 묵묵히 데이몬의 조언을 머리 속에 새겨 넣었다. -좌수검법은 공격 방면이 뛰어난 반면 방어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약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너는 그 약점을 방패를 능숙하게 다룸으로써 극복해야 한다. 또한 방패를 잘 사용하면 네 공격시점을 적에게 노출시키지 않는 장점이 있다.- 제럴드에겐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미첼에게서, 그리고 데스 나이트들에게서 방패를 이용한 공격과 방어법을 충분히 교육받은 상태였고 거듭되는 대련으로 인해 기술은 완벽하게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러니 상대가 팔라딘이라 하더라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자신을 현저히 얕잡아보고 있다. 그것 하나만 감안하더라도 이것은 이미 끝난 승부나 다름없었다. '후후후. 무모한 절름발이 녀석.' 예상대로 오스발은 제럴드를 완전히 얕잡아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덩치에 있어서 두 배에 가까운 차이가 나는 데다 착용한 갑옷의 수준 역시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승부를 빨리 종결지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선제공격에 들어갔다. "이야아압."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가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제럴드의 왜소한 몸을 양단해 들어갔다. 장검의 표면에는 은은하게 오러 블레이드가 맺혀 있었다. 상대의 몸을 방패와 함께 단칼에 쪼개버릴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가볍게 몸을 날려 공격을 피해냈다.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럽게 피해내는 모습에 오스발은 조금이나마 경각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제법이로군. 과감히 나선 것을 보니 한 수가 있기는 하군.' 오스발은 병기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들고 있는 바스타드 소드는 상대의 검보다 족히 한 배 반 이상 길었다. 다시 말해 자신의 공격이 상대에게 미치는 반면 상대의 공격은 자신에게 미치지 못할 공산이 컸다. 그 사실을 떠올린 오스발은 몸을 빙글 돌리며 검을 맹렬히 휘두르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원심력을 최대한 이용한 연환공격이 제럴드의 상단과 중단, 그리고 하단을 연속해서 노렸다. 그의 장검에는 일격에 방패를 두 조각 내버릴 듯한 힘이 실려 있었다. [다크메이지] 10장 마룡 베르키스 274회. 하지만 제럴드는 별다른 대응 없이 그저 피해내기만 했다. 마치 완벽한 순간을 노리는 독사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오스발은 와락 부아가 치밀었다. "이런 생쥐 같은 녀석." 그는 휘두르는 검에 더욱 힘을 불어넣었다. 쾅, 쾅, 쾅.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가 사방을 종횡무진 내려찍었다. 반드시 한 번은 걸릴 것이란 생각에 오스발은 제럴드를 마구잡이로 몰아붙였다. 마치 일체 피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오스발의 예상대로 제럴드가 피할 방위는 점점 차단되고 있었다. 마침내 견디지 못한 듯 제럴드가 방패를 들어 바스타드 소드에 마주쳐가자 오스발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이야아압." 그는 기다렸다는 듯 혼신의 마나를 검에 불어넣었다. 바스타드 소드가 상대의 방패에 닿는 순간 오스발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끝났다. 애송아." 하지만 상황은 결코 오스발의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꽝. 굉음이 터져 나왔지만 단박이라도 두 조각 나버릴 것처럼 보였던 방패는 부서지지 않았다. 도리어 오스발의 바스타드 소드가 허공으로 퉁겨져 올라갔다. 상대의 기술에 의해 검에 실린 힘이 허공으로 분산되어버린 것이다. "이, 이럴 수가?" 공격이 실패한 것을 느낀 오스발은 눈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오스발이 생각할 수 있는 전부였다. "끄으." 섬뜩한 느낌이 목줄기를 파고드는 것을 느낀 오스발은 맹렬히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이미 경동맥은 목뼈와 함께 절단된 다음이었다. 오스발의 공격을 허공에 흘려보낸 제럴드는 지체 없이 반격을 가했다. 일격필살의 좌수검법이라 제럴드의 검은 상대의 가장 치명적인 급소를 정통으로 파고 들어갔다. 오스발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경로를 따라 말이다. 쨍그렁. 바스타드 소드가 맥없이 땅에 떨어졌다. 제럴드가 검을 뽑아들자 오스발의 몸은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마구 비틀거렸다. 목을 감싼 손아귀 사이로 핏줄기가 간헐적으로 분출되었다. 푸슛, 푸슛. 화려한 갑옷을 선혈로 물들이던 오스발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목이 기괴한 각도로 꺾인 것을 보니 즉사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사위는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결코 상대가 되어 보이지 않던 왜소한 애송이가 두 배가 넘는 덩치를 가진 팔라딘을 꺾은 충격은 그 정도로 컸다. 특히 세르발티 왕녀가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승리를 확신했던 터라 오스발의 죽음이 섣불리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떠듬거리며 어쩔 줄 몰라하는 세르발티 왕녀에게 율리아나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다가갔다. "이번 대전사 결투는 나의 승리인 것 같군." "……." "원래는 네년을 단단히 골탕먹이려고 마음먹었지만 호위기사를 잃었으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지. 앞으론 주제넘게 나서지 말도록 해라. 네년이 가만히 있었다면 불쌍한 네 호위기사가 죽지 않았을 것 아냐?" 율리아나의 말에 모멸감을 느낀 세르발티 왕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곱게 자라왔던 그녀가 어찌 이런 모욕감을 느껴 보았으랴? 하지만 패배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일언반구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가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일단의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복색을 보니 레이토나의 경비병들 같았는데 하나같이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굳은 표정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오스발의 시체를 훑어보았다.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병사 한 명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결투입니까?" 그의 말에 율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저쪽에서 먼저 결투를 청해왔어요." 둘을 번갈아 쳐다본 병사는 딱딱하게 안색을 굳혔다. "비록 결투였다고 하지만 사람이 죽은 이상 조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니 저희를 따라오십시오." 그 말에 카심이 난처한 듯 앞으로 나섰다. "그건 조금 곤란한 것 같소. 우린 아직까지 간택식에 참가신청을 하지 않았소이다. 아시다시피 시간이 무척 촉박하지 않소?" 하지만 병사는 전혀 뜻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이곳은 엄연히 크로센 제국의 영토, 따라서 이곳에서는 우리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강제로 모시기 전에 순순히 따라오십시오." 카심의 얼굴에 곤혹감이 어렸다. 조사를 받으러 간다면 참가 신청을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르발티 왕녀는 무척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참가신청을 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조사를 받아봐야 조금 늦게 출발할 뿐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었다. '호호호 그것 참 깨소금맛이로군. 잘 되었어.' 병사 우두머리는 매서운 눈빛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카심과 율리아나를 노려보았다. '백주대낮에 시가지 중심부에서 소란을, 그것도 황태자비 간택식이 열리는 시기에 살인을 하다니 감히 본국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묵묵히 지켜보던 데이몬이 불쑥 끼여들었다. "이것 봐 대장. 내가 해결할 테니 자넨 율리아나를 데리고 참가 신청을 하게."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게." 둘의 대화를 들은 병사 우두머리는 기다렸다는 듯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작자들이로군. 당신들을 체포하겠소." 그러나 달려들려던 병사들의 발걸음은 일시에 멈춰졌다. 데이몬이 짤막하게 내뱉은 한 마디 때문이었다. "우린 카심 용병단원들이라네. 카르셀 왕녀를 경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린 병사 우두머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떠듬떠듬 내뱉었다. "저, 정말입니까?" "원한다면 증거를 보여줄까?" "아, 아닙니다." 병사들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부동자세를 취했다. 지금껏 귀가 닳도록 들은 상부의 지시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지휘관 역시 페르슈타인 공작의 심복이었다. -카심 용병단원들을 만날 경우 최상의 예의로써 접대하기 바란다. 만약 실수를 하는 자가 있다면 군율에 의해 엄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몸을 부들부들 떨던 병사 우두머리는 허리를 직각으로 꺾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감히 몰라본 저희들을 용서하십시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들이 정중히 모시겠습니다." 설사 이들이 카심 용병단을 사칭하는 자들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카심 용병단원들로 짐작되는 이들에게 결례를 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목이 달아나는 지름길이었다. 사실 병사들은 상당히 울화가 쌓여 있던 상태였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레이토나에 모여들었기에 치안 유지가 벅찰 수밖에 없었고 거듭되는 격무에 극히 지친 상태였다. 때문에 누군가가 소란을 피우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판국이었다. 그들을 본보기로 삼아 모여든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그런 상황에서 결투가 벌어져 사람이 죽었으니 그들로써는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소란을 피운 당사자가 카심 용병단이라니……. 병사들이 최근 들어 가장 많이 들어본 말이 카심 용병단을 대했을 때의 대처요령이었기에 그들은 두말도 하지 않고 일행을 안내했다. "저희들이 신청장소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용병대원들은 하나같이 어안이 벙벙해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험악하게 대하던 병사들의 태도가 갑자기 180。 바뀌어 버리니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세르발티 왕녀도 마찬가지였다. "조, 조사를 받아야 하지 않나요?" 그 말에 병사 우두머리가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조사는 없소. 이 분들은 우리가 맞아들여야 할 최고의 귀빈이라오. 당신들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시오. 이분들 덕분에 조사를 받지 않아도 되니 말이오." 말을 마친 우두머리는 휘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길을 열어라. 이분들을 최대한 빨리 간택식 신청장소로 모셔야 한다. 그리고 한 명은 먼저 가서 영접할 채비를 갖추도록 상부에 보고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가벼운 갑주를 걸친 병사 하나가 서둘러 몸을 날렸다. 병사 우두머리는 그 모습을 보지도 않고 다시 한 번 허리를 꺾었다. "저희들을 따라오십시오." 용병들은 당혹한 기색으로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오직 데이몬만이 상황을 익히 짐작했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짙게 떠올리고 있었다. '페르슈타인이란 녀석, 몸이 달긴 달았나보군.' 신청장소에 도착한 용병들은 한 번 더 놀라야 했다. 그들을 맞아들이는 자의 신분이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얼굴에 한껏 웃음을 떠올린 채 달려나온 자는 화려한 갑주를 걸친 중년의 기사였다. 그의 뒤로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는 기사들이 죽 늘어선 것을 봐서 신분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전 페르슈타인 공작전하의 직속 기사단인 듀크 나이트를 책임지고 있는 크로비츠 폰 아멘가드라고 합니다. 레이토나로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듀, 듀크 나이츠의 총수시라고요?" 그의 소개에 카심은 깜짝 놀랐다. 물론 그가 듀크 나이츠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크로센 기사단의 뒤를 이어 아르카디아 제 2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강력한 무력집단 듀크 나이츠. 그곳의 총수가 친히 자신들을 영접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약과에 불과했다. 뒤이어 한 젊은 기사가 자기 소개를 하자 카심은 아예 패닉상태에 빠져버렸다. "안녕하십니까? 제 이름은 크란시아 폰 헬프레인입니다. 저는 현재 듀크 나이츠의 부대장을 맡고 있습니다." "서, 성이 헬프레인이라면……." 이해를 돕기 위해 크로비츠가 소개를 덧붙였다. "그는 페르슈타인 공작전하의 첫째 아드님입니다. 저희 듀크 나이츠에서 없어서는 안될 인재이기도 하지요." 카심은 말을 잊었다. 듀크 나이츠의 총수도 모자라서 페르슈타인 공작의 아들까지 자신들을 맞이하기 위해 레이토나로 파견되다니……. 채 말을 잇지 못하는 카심을 대신해서 데이몬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의 얼굴엔 다소 가식적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거 반갑소이다. 이처럼 쟁쟁하신 분들이 우리를 마중 나오시다니 정말 고맙기 짝이 없구려." 데이몬을 보자 크로비츠와 크란시아의 눈빛이 갑자기 빛났다. 의문에 쌓인 미지의 흑마법사가 드디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흑마법사만 가세한다면 그들의 앞길에 거칠 것이 없었기에 그들은 한껏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그들은 데이몬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했다. "만나 뵙게 되어 필생의 영광입니다." "전 대륙에 자자하신 위명을 떨치신 분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미리 예상했다는 듯 데이몬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응대했다. "영광이라니 나 역시 기분이 무척 좋소이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아직까지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그녀는 눈에 쌍심지를 켠 채 데이몬을 노려보고 있었다. 데이몬은 모르는 척 너스레를 떨었다. "아시다시피 우린 카르셀 왕녀를 간택식에 참가시키기 위해 이리로 왔다오. 이제 슬슬 참가신청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데이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크로비츠가 얼른 대답했다. "아무 걱정 마십시오. 이미 저희들이 참가신청서를 대부분 작성해 놓았습니다. 왕녀께서 마지막으로 서명만 하시면 아무 문제없이 참가하실 수 있습니다." "그랬소? 늦을까봐 부랴부랴 달려왔건만……." 크로비츠는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실 늦으실 경우엔 언제까지라도 관리들을 대기시켜놓을 작정이었습니다. 저희들은 바로 그 문제 때문에 파견된 것이지요. 그럼 이리로 오십시오. 카르셀 왕녀님과 카심 용병단원들을 위해서 특별 마차를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고맙구려." 데이몬은 당연하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용병들 역시 불안한 눈초리로 데이몬의 뒤를 따랐다. 이런 거창한 응대를 받을 줄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크로센 제국에서도 이름난 실력자들이 레이토나에 파견되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니……. [다크메이지] 10장 마룡 베르키스 275회. 일행이 크로비츠의 뒤를 따라 들어간 뒤 남은 왕녀 일행들은 부러운 눈초리만 날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듀크 나이츠 단장과 페르슈타인 공작의 큰아들이 나와 영접할 정도라면……." "저들이 정녕 카심 용병단원들이 맞다면 그럴 만도 하지." 수군대는 사람들 사이로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는 세르발티 왕녀의 모습도 보였다. 카심 용병단원들은 오래지 않아 수도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벌써 한 무리의 사람들이 떠난 다음이었고 두 번째 무리가 출발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독자적으로 여정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간택식이 열리기 전에 데이몬을 페르슈타인 공작과 만나게 하려는 속셈 같았다. 따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규모에 있어서는 먼저 출발한 무리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았다. 무려 1천여 명에 달하는 병사와 엄선된 호위 기사 2백여 명이 다섯 대의 대형 마차에 포진한 채 일행을 철통같이 호위했던 것이다. 호위 기사 중에 소드 마스터가 열 다섯이나 포함될 정도였으니 페르슈타인 공작이 데이몬에게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익히 알 수 있었다. 실질적인 카심 용병단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카심과 데이몬이 크로비츠, 크란시아와 함께 큼지막한 마차에 승차했고 미첼을 비롯한 나머지 용병들은 다음 마차에 탑승했다. 율리아나에게는 한 대의 고급 마차와 열 명의 시녀들이 배정되었다. 가장 선두 마차와 후미의 마차에는 소드 마스터들이 탑승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호위 병력 중에 200명의 기사까지 배치된 것을 감안하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호위였다. 이렇게 해서 카심 용병단원들은 크로센 제국의 수도 펠젠틴까지의 여정을 시작했다. "펠젠틴까지는 약 하루 반정도 걸릴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쉬도록 하십시오."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데이몬이 크로비츠의 말에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고맙소. 그런데 호위병력의 규모가 정말 엄청나구려. 이들 모두가 페르슈타인 공작의 개인 사병들이오?" 크로비츠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크로센 제국의 각급 사단장들은 거의 모두가 페르슈타인 공작전하의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공작전하께서 정규군까지 모두 통제하시고 있다는 뜻입니다." "놀랍구려."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야흐로 페르슈타인 공작의 숨겨진 힘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느릿하게 크로비츠 옆에 앉아 있는 크란시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지나갔다. '저 나이에 절정에 거의 근접한 경지에까지 오르다니 놀랍군.' 아무리 보아도 20대 중반을 넘어가지 않을 듯한 용모였지만 크란시아는 소드 마스터를 거의 목전에 둘 정도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미첼에 비해 별달리 손색이 없는 경지인 것이다. 대 제국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자의 아들이 이룬 성취라고 믿어지지 않았는지 데이몬은 연신 감탄성을 발했다. "대단한 성취이구려. 대체 얼마나 열심히 수련을 했기에……." 크란시아는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부끄럽습니다. 모두가 기사단의 선배님들께서 많이 도와주신 덕택이지요." 보고 있던 크로비츠가 슬그머니 끼여들었다. "그는 우리 듀크 나이츠의 기사들 중에서도 소문난 수련광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지극히 공정한 경쟁을 뚫고 부대장에 올랐다는 점입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전하께서는 그분의 아들이라고 해서 일체 특혜를 주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때문에 저희 듀크 나이츠의 기사들은 그를 동료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이오?" "그렇습니다. 실제로 선배들은 그가 잘못을 저지를 때 엄히 꾸짖습니다. 왜냐하면 잘못을 꾸짖지 않고 그냥 넘긴다면 큰 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것 역시 공작 전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크로비츠의 말에 데이몬은 입을 딱 벌렸다. 듣기엔 쉬워 보였지만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권력자는 많지 않았다. 자식사랑은 어버이의 본능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단한 인물이로군. 사자가 새끼를 키우는 방법을 실제로 재현하다니…….' 페르슈타인 공작이 생각보다 대단한 인물일 것이란 생각이 데이몬의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자식을 저 정도로 조련시키는 것을 보니 충분히 크로센 제국을 탐낼 만한 그릇이라 생각되었다. 데이몬이 침묵을 지키자 듣고 있던 카심이 입을 열었다. 놀라움이 상당부분 가셨는지 그는 이제 어느 정도 안정된 눈빛을 찾은 상태였다. "듀크 나이츠의 단장을 맡으시고 있다면 작위가……." 크로비츠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전 작위가 없습니다. 제 필생의 소망은 죽을 때까지 공작전하께 충성을 바치는 것이니까요. 그것은 듀크 나이츠의 부대장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귀족 기사들이 무도회나 연회에 참가할 시간동안 저희들은 검술 수련에 매진하기 위해 자진해서 작위를 반납했지요." 카심 역시 입이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듀크 나이츠가 머지않아 크로센 기사단의 아성을 넘어설 것이 분명했다. 더불어 이런 부하들을 거느린 페르슈타인 공작에 대해 두려움마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지금껏 페르슈타인 공작을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정말 대단한 인물이로군. 부하들에게 이 정도로 충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니 말이야.' 그들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담소를 나누었다. 엄선된 정예병 1천 명의 철통같은 호위아래 일행은 조금씩 펠젠틴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뒤에 따라가는 마차에서도 두런두런 대화소리가 흘러나왔다. "굳이 호위기사 녀석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지 않았나?" "………." 제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첼은 미간을 지긋이 모았다. "혹시 그 녀석이 율리아나를 모욕해서 죽인 것이냐?" 듣고 있던 제럴드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첼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작 그런 사소한 일로 사람을……." 제럴드는 고개를 들고 빽 소리를 질렀다. "고작 그런 사소한 일이라뇨? 교관님도 놈이 한 욕지거리를 들으셨잖아요?" "하지만 상소리는 율리아나가 먼저 시작했잖아?" "경우가 틀리잖아요. 율리아나 왕녀님은 여자라서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감히 그놈이……." 그 말에 미첼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혹시 율리아나 계집애에게?" 제럴드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마치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이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어찌 감히……." 급히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제럴드를 보며 미첼은 혀를 찼다. '이건 또 무슨 개 같은 경우야. 스무 배가 넘게 나이차이가 나는 사람을 사모하는 계집애가 있는가 하면 또 그 계집애를 짝사랑하는 녀석이 있다니……. 쯔쯔.' 미첼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한심한 녀석. 율리아나의 성질머리를 익히 겪어 보고도…….' 만약 율리아나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용병단 전체가 발칵 뒤집힐 것이 분명했다. 미첼이 아는 율리아나는 대륙에서 제일 콧대가 높은 소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데이몬에게 정체 불명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돌아누운 제럴드에게서 시선을 거둔 미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랑이라…….' 문득 미첼의 머릿속에 자신이 지금껏 단 한 번도 누굴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검술수련에 매진하느라 누굴 만날 틈이 있을 턱이 없었고, 나이가 든 뒤로는 카르셀을 벗어나기 위해 그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았던 그였다. 수많은 카르셀의 처녀들이 추파를 던져왔지만 미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와의 로맨스를 그리던 미첼에게 카르셀의 순박한 처녀들이 눈에 찰리가 없었다. 그 때를 떠올려본 미첼은 쓴웃음을 떠올렸다. '그땐 내가 정말 철이 없었지. 헛된 야망에 눈이 멀었다고나 할까?' 미첼은 묵묵히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열정을 불살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대상이 누구이던 간에 말이야…….' 창 밖으로 크로센 남부의 경치가 빠르게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크, 큰일입니다." 집무실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윌리엄스 후작은 난데없이 달려 들어온 이를 맞아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오. 테오도르 집정관." 젊은 집정관 테오도르의 얼굴에는 근심이 짙게 배어있었다. "방금 들어온 첩보에 의하면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세바인의 흑마법사와 그의 용병단이 지금 펠젠틴을 향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 그 말이 사실이오?" 윌리엄스 후작의 얼굴에 분노의 광망이 떠올랐다. 물론 그가 세바인의 흑마법사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근위기사 엘케인을 포함한 토벌대를 참혹하게 박살내어 크로센 기사단의 명성을 여지없이 실추시킨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비록 황제의 호위를 위해 복수를 나중으로 미뤄놓았지만 언제고 찾아가서 단단히 빛을 갚고 말 것이라 벼르고 있던 상대가 아니었던가? 그런 가증스런 존재가 겁도 없이 펠젠틴으로 오고 있다는 말에 윌리엄스 후작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당장이라도 찾아가서 요절내어버릴 듯한 기세였다. "그 작자는 지금 어디에 있소?" 하지만 이어진 집정관의 말에 윌리엄스 후작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그는 지금 듀크 나이츠의 단장인 크로비츠의 엄밀한 호위아래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호위병력 1천에 듀크 나이츠 200명이 그의 호위를 맡고 있다고 합니다." "크, 큰일이구려." 윌리엄스 후작의 얼굴이 삽시간에 시커멓게 죽어들었다. 비로소 상황의 심각성을 짐작한 것이다. 듀크 나이츠의 호위를 받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생각할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놈이 페르슈타인 공작과 손을 잡는 일이 벌어진다면……. 후,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려. 그랜드 마스터급 데스 나이트 넷과 본 드래곤을 부리는 그놈이 가세한다면 페르슈타인 공작에겐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소." "그렇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막아야 하는 일입니다." 테오도르의 얼굴에는 절박감이 감돌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크로센 기사단의 힘으로 페르슈타인 공작을 견제해 왔지만 일이 성사될 경우 그 균형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만다. 세바인의 흑마법사가 거느린 데스 나이트와 본 드래곤은 정말 엄청난 전력이었다. 만에 하나 그들이 듀크 나이츠와 힘을 합할 경우 크로센 기사단은 결코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황실의 안위를 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상황을 떠올려 본 테오도르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들이 페르슈타인 공작을 만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기습조를 파견해야겠습니다. 흑마법사를 죽이던지 최소한 중상을 입히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더 이상의 기회는 없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윌리엄스 후작의 얼굴에는 짙게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거기에는 동의하오. 하지만 기습에 우리 크로센 기사단원들을 동원할 수는 없소. 내 휘하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잘 알려져 있으므로 섣불리 투입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요." 물론 그것은 테오도르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기습조에 크로센 기사단원들이 끼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추후의 사건전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테오도르는 마음을 정한 듯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아무래도 비밀리에 키우고 있는 어새신들을 동원해야겠습니다." 그 말에 윌리엄스 후작은 깜짝 놀랐다. "하, 하지만 그들로는 듀크 나이츠를 감당할 수 없을 텐데……. 집정관도 아시다시피 어새신은 결코 팔라딘의 상대가 되지 못하오." "괜찮습니다. 어차피 목적이 흑마법사를 죽이거나 상처를 입히는 것이니까요." 테오도르의 얼굴에 그려진 미소가 짙어졌다. "투석기와 석궁을 이용해서 한 번 공격을 해 볼 생각입니다. 원거리 공격을 가한 뒤 퇴각하는 방법으로 치고 빠지기를 거듭한다면 호송대의 발목을 효과적으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운이 좋으면 놈을 죽일 수도 있고요." 테오도르의 말에 윌리엄스 후작은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서 그 방법이 가장 적합하구려. 그렇다면 부관을 시켜 매복에 적당한 지형을 물색해 놓겠소이다." "모쪼록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소속 부대의 문장이 찍혀있지 않는 투석기를 좀 마련해 주셨으면 합니다. 캐터필터나 발리스타 등 종류는 상관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 윌리엄스 후작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본관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소. 펠젠틴 남부에 위치한 제 13 무기보관소에는 그동안 각 국에서 압수한 대형 공성무기들이 보관되어 있소. 아마도 최소한 백기 이상의 투석기가 있을 것이오. 물론 다양한 왕국의 문장이 찍혀 있으니 기습조의 정체를 숨기기에는 안성맞춤이지요. 게다가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11 무기보관소에는 명품으로 알려진 하르젤 왕국의 석궁 500여 자루가 보관되어 있소. 아시다시피 강철갑주를 가볍게 꿰뚫을 수 있는 강력한 석궁이지요" "훌륭한 생각입니다." 테오도르 집정관의 얼굴에 감탄스럽다는 듯한 빛이 떠올랐다. 여러 왕국에서 압수한 무기이므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기습하는 데에는 더 이상 적합할 수 없는 무기들이었다. 지금껏 크로센 제국은 여러 왕국들의 전쟁을 중재해왔다. 벌어진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산될 것 같으면 크로센 제국은 즉각 대군을 투입해서 전쟁의 확산을 막았다. 강력한 크로센 제국의 군대 앞에서 계속해서 전쟁을 고집할 왕국은 없었다. 때문에 수많은 왕국의 군대가 크로센 제국에 의해 무장해제 당했고 그 과정에서 노획한 무기들은 고스란히 크로센 제국으로 옮겨졌다. 윌리엄스 후작은 바로 그 무기를 사용하자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집정관 테오도르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오늘밤 안으로 어새신 부대를 출동시켜 무기를 손에 넣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후작께서는 그곳의 방비상황을 한 번 점검해 주십시오." "대형 공성무기들이라 방어가 그리 삼엄하진 않을 것이오. 문제는 석궁이 보관된 제 11 무기보관소라오. 경비병들의 수가 제법 많을 텐데……." "기습에 능한 어새신들이니 무기를 확보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가급적 경비병들의 목숨을 빼앗지 않도록 당부해 놓겠습니다." 말을 마친 테오도르는 몸을 돌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서둘러 어새신 부대를 출동시킬 생각밖에 없었다. 홀로 남은 윌리엄스 후작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기껏 길러놓은 어새신 부대로 아군을 공격해야 하다니…….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꼬?" 심사가 착잡했는지 그의 얼굴에는 시름이 깊어지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10장 마룡 베르키스 276회. 일행이 레이토나를 떠나온 지 꼬박 하루가 지났다. 날이 저물자 그들은 페르슈타인 공작이 미리 마련해놓은 숙소에서 묵었다. 파라다이스에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의 고급 여관이었다. 좋은 음식과 푹신한 잠자리에서 하루를 보낸 일행들은 일어나자마자 또다시 길을 떠났다. 함께 마차에 타고 가던 크로비츠가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저녁 무렵이면 펠젠틴에 도착할 것입니다. 공작전하께서 친히 성문으로 나오셔서 맞이한다고 말씀하셨으니 아마도 오늘밤은 그분의 저택에서 묵게 될 것 같습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저택이라……. 무척 으리으리하겠구먼." 데이몬의 말에 크로비츠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마도 실망하실 겁니다. 공작전하께서는 생각보다 검소하시거든요. 그분은 자신을 위해서는 거의 돈을 쓰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부하를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시지요." 데이몬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솔직히 그는 페르슈타인 공작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은 상태였다. 데이몬의 입장에서 그는 사준환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역모를 꾀하는 점에 대해서는 말이다. 하지만 그의 수하들과 대화를 나눠보니 그 생각에 조금 변화가 생겼다. '생각보다 걸출한 인물이로군. 모든 것을 떠나서 수하에게 이토록 진심 어린 충성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크로센 제국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지.' 문득 데이몬의 머릿속에 500년 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영웅, 크로센 대제에 대한 생각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그의 얼굴에 호기심이 서렸다. '대체 어떤 녀석일까? 혹시 나와 동시대의 인물일까?' 만약 동시대의 인물이었다면 데이몬이 모를 리가 없었다. 가슴속에 잠자고 있는 무인(武人) 특유의 승부욕을 떠나더라도 반드시 한 번 만나 보고픈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크로센 대제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 무덤에 묻혔고 자신은 아직까지 살아 드래곤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데이몬은 크로비츠에게 고개를 돌렸다. "크로센 대제는 이곳에 묻혀 있소?" "그렇습니다. 81세로 천수를 다하신 대제께서는 펠젠틴 북쪽에 위치한 제왕의 능에서 영면을 취하고 계십니다." 크로센 대제를 거론함에 있어 크로비츠는 극도의 경의를 아끼지 않았다. 역모를 꾀하는 무리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로센 대제에게만은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적어도 크로센 제국의 기사들에게 크로센 대제란 고금을 통틀어 전무후무한 무의 절대자였다. 데이몬은 다시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제왕의 능이라……. 혹시 그곳에 크로센 대제의 소지품이 남아 있을까? 만에 하나 복수를 성공하고 난 뒤 중원으로 건너가려면…….' 데이몬의 상념은 거기에서 끝났다. 마차 밖에서 다급한 경고성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기, 기습입니다." 그와 동시에 요란한 파공성 소리가 꼬리를 물고 날아들었다. 그것은 바로 석궁 사격이 퍼부어지는 소리였다. 쐐액. 쐐애액. 화살이 대기를 가르는 소리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 소리를 듣자 크로비츠의 안색이 경직되었다. 설마 크로센 제국의 영토 안에서 기습을 받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방패를 들어 몸을 가린 크로비츠는 즉시 마차 문을 박차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곳에 계십시오. 강철로 지붕이 보강된 마차라서 석궁 사격 정도에 뚫리지 않을 것입니다." 크로비츠의 눈은 분노의 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최고의 요인을 맞아들이는 상황에서 기습을 가하다니……. 누군지 알 순 없었지만 크로비츠는 기필코 용서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마차 밖으로 나와보니 상황은 생각 외로 심각했다. 방패로 몸을 가린 병사들이 열심히 화살공격을 막고 있었지만 이미 1백 명 가까운 병사들이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크로비츠가 보고 있는 중에도 한 명의 병사가 날아온 퀘렐에 맞아 이승을 하직했다. "끄아악." 날아온 퀘렐은 강철제의 가슴보호대를 여지없이 꿰뚫어 버린 뒤, 엎어진 병사의 등판에 삐죽이 살촉을 내밀고 있었다. 정말 엄청난 위력의 석궁이었다. 핑. 날아오는 퀘렐 한 발을 방패로 퉁겨낸 크로비츠는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어들었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이것은 하르젤 왕국의 석궁이야. 상황을 보니 흉수가 누군지 대충 짐작이 가는군" 홧김에 퀘렐 살을 바닥에 내동댕이친 크로비츠는 냅다 고함을 질렀다. "모두 밀집 대형으로……. 한데 모여 화살공격을 방어한다. 그리고 소드 마스터를 제외한 모든 기사들은 지금 즉시 돌격해서 궁수를 처리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로 잰 듯 척척 들어맞는 움직임에서는 그들이 지금까지 얼마만큼 혹독한 훈련을 받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밀집대형, 밀집대형." 모여든 병사들이 사각형 방패를 일제히 포개자 거기에는 거대한 방어벽이 형성되었다. 아무리 위력이 강한 하르젤 특산의 석궁이라도 두 겹, 세 겹으로 포개진 방패의 벽을 뚫을 순 없었다. 그 사이 듀크 나이츠의 기사들이 빗발처럼 퍼붓는 화살비를 뚫고 돌격을 시작했다. 화살공격에 상당수의 말을 잃었지만 기사들이 타고 있는 말은 대부분 건재했다. 튼튼한 마갑(馬甲)을 씌운 덕분이었다. 두두두두. 기사들의 돌격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아무리 위력이 강한 석궁사격이라고 하나 팔라딘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의 돌격을 막을 순 없다. 뛰어난 몸놀림, 그리고 갑주와 방패에 밀어 넣은 마나 덕택에 팔라딘들은 어렵지 않게 날아드는 화살비를 막거나 피해내며 앞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용서할 수 없다. 단 한 놈도 살려보내지 않겠다." 크로비츠는 성난 눈빛으로 능선 너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법 거리가 멀었지만 뛰어난 시력을 보유한 덕택에 크로비츠는 어렵지 않게 습격자들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습격자들은 얼룩덜룩한 위장복을 걸치고 복면을 한 자들이었다. 열심히 석궁을 쏘아대고 있지만 밀집대형으로 방어하는 덕택에 병사들은 더 이상의 희생자를 내지 않고 있었다. 이젠 돌격해간 팔라딘들이 궁수를 처리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때 느닷없이 둔탁한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는 소리였다. 퉁. 투투퉁.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자 크로비츠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다급하게 하늘을 올려본 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투석기……. 이런 빌어먹을……." 조금 떨어진 산봉우리에서 큼지막한 돌덩이들이 맹렬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병사들이 밀집대형으로 모여있는 곳을 정확히 노리고 있었고 돌덩이뿐만 아니라 발리스타로 쏘아붙인 듯한 나무기둥들도 군데, 군데 섞여 있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오십 기 이상의 투석기가 쏘아붙인 분량이었기에 크로비츠의 얼굴은 삽시간에 검게 물들어버렸다. "크, 큰일이야. 밀집대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 투석기 공격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기에 등골이 서늘할 수밖에 없었다. 화살공격으로 상대를 모이게 한 뒤 투석기를 쏘아 적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전형적인 전장에서의 기습공격에 속했다. 하지만 크로센 제국의 영토 안에서 설마 이런 공격을 당할 줄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크로비츠는 일순 어쩔 줄 몰라했다. "안되겠어. 피해가 있더라도 병사들을 산개시켜야겠어." 하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사들을 피하게 할 순 있었지만 문제는 마차였다. 마차를 끄는 말들이 이미 화살공격에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몰살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강철로 보강된 마차라서 무게가 만만치 않았기에 병사들이 밀어봐도 느리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데다 투석 공격에 격중된다면 제 아무리 견고한 마차라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가만히 있다가 돌덩이에 정통으로 얻어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그는 서둘러 산개 명령을 내렸다. "밀집대형을 해제한다. 모든 병사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마차를 이동시켜라." 명령을 내린 뒤 그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돌격한 팔라딘들은 석궁 사격이 가해지는 곳에 거의 도착한 상태였다. 팔라딘들이 지척으로 접근하자 그들은 머뭇거림 없이 석궁을 버리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용의주도하게 말들이 속도를 낼 수 없는 길만을 골라 도주하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 팔라딘들은 즉시 추격을 개시하려 했다. 죽은 병사들의 목숨 값을 받아내려는 듯 하나같이 서슬 시퍼런 눈빛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크로비츠는 목청을 돋워 고함을 질렀다. "추격하지 마라. 대신 산등성이의 투석기 포대를 공격하라.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팔라딘들은 즉시 말머리를 돌렸다. 그들 역시 이쪽으로 가해지는 투석 공격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투석기가 위치해 있는 곳은 제법 높은 산등성이였다. 말을 타고 산등성이를 올라가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했다. 열심히 달려 근처에 도착한 기사 우두머리가 냅다 고함을 질렀다. "하마(下馬)하라. 도보로 달려 올라간다." 말에서 뛰어내린 팔라딘들은 검을 뽑아든 채 투석기가 설치된 곳을 향해 날렵하게 몸을 날렸다. 그것을 확인한 크로비츠 역시 장검을 뽑아들며 서둘러 마차 쪽으로 뛰어갔다. "부디 투석 공격이 마차에 적중하지 않아야 할 텐데……. 지금으로썬 운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 제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투석 공격까지 막을 수는 없다. 투석기 공격에 정통으로 얻어맞을 경우 소드 마스터라 하더라도 생명을 부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크로비츠는 날아드는 돌덩이들을 몸으로라도 막을 작정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흑마법사의 안전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했다. 하지만 그의 걸음은 오래가지 않아 멈춰졌다. "이, 이럴 수가?" 그는 눈을 크게 뜬 채 마차 쪽을 노려보았다. 날아든 돌덩이로 인해 희생자가 속출하고 있을 것이라 상상했었는데 상황은 전혀 예상 밖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콰콰쾅. 투석기에서 쏘아진 돌덩이가 무언가에 부딪히며 허공에서 그대로 산산조각 났다. 그것은 발리스타에서 쏘아진 나무기둥들도 마찬가지였다. 콰직, 콰지직. 나무기둥들은 허공을 날아다니는 길쭉한 빛줄기와 부딪히자마자 삽시간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스러졌다. 산산이 부서진 나무 부스러기가 돌가루와 함께 자욱하게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에 병사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장이라도 작렬해서 동료들을 납작하게 깔아 뭉개버릴 것 같았던 돌덩이들이 허공에서 맥없이 부스러지고 있는 것이다. "저, 저건 뭐지?" "매직 미사일 같은데……. 도무지 수를 셀 수도 없군." 마차 위 허공을 종횡무진 뒤덮고 있는 것은 바로 매직 미사일이었다. 대략 수백, 수천 발의 매직 미사일이 허공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올이 촘촘한 그물처럼 투석 공격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막아내고 있었다. 마치 매직 미사일 자체가 지능이 있는 것처럼 투석기 포탄에 달려들어 자폭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덕택에 투석 공격은 마차 주변으로 단 한 방도 작렬하지 않았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크로비츠의 얼굴에 감탄이 어렸다. "허공을 새카맣게 뒤덮을 정도의 매직 미사일이라니……. 9서클의 위력은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군." 매직미사일의 위세에 질렸는지 투석 공격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공격을 포기하고 퇴각하려는 모양이었다. 부아가 치민 크로비츠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반드시 잡아서 배후를 밝혀야 한다." 투석 공격 때문에 궁수들을 깡그리 놓친 상황이었으므로 그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뒤 팔라딘들은 맥없이 말을 몰아 터덜터덜 돌아왔다. 그들이 가지고 온 것이라곤 생명이 사라진 시신 몇 구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놈들의 도주가 워낙 신속해서……. 몸놀림을 보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어새신 같았습니다." 크로비츠는 눈을 부라렸다. "명색이 팔라딘이란 놈들이 단 한 놈도 생포하지 못하다니 말이나 되는 소린가?" "놈들이 워낙 신속히 도주했기 때문에……." 팔라딘들은 꿀 먹은 벙어리인양 침묵을 지켰다. 거둔 성과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크로비츠는 마뜩찮은 눈빛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놈들이 버리고 간 투석기의 문장은 조사해 놓았는가?" "여러 왕국의 것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석궁의 형태는 의심할 나위 없는 하르젤 왕국의 것이었는데 여러 왕국의 표식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본국에서 압수해 놓은 무기들 같습니다." 크로비츠는 바짝 약이 올랐다. "용의주도한 놈들이로군. 펠젠틴에 도착하면 무기보관소의 상황을 한 번 알아봐야겠어. 그럼 즉시 사상자의 수를 집계하도록 해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으니 서둘러 출발해야 한다." 명령을 내린 크로비츠는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차는 말 그대로 고슴도치가 되어 있었다. 화살 공격이 마차에게 집중적으로 퍼부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워낙 견고하게 만들어진데다 강철로 보강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안으로 뚫고 들어간 화살은 하나도 없는 듯 했다. 공격이 시작되자 병사들이 재빨리 창문을 닫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마차를 끌던 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시체가 되어있었다. 이제 인력으로 끌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크로비츠는 머릿속이 무척 복잡해졌다. "말이 모두 죽었으니 다시 보충할 때까지 시간이 상당히 지체되겠어." 생각을 마친 그는 병사들을 통솔하는 부대장 몇 명을 불렀다. "힘이 좋은 병사를 두 부대 정도만 차출하라. 그들에게 갑옷과 무장을 벗게 한 뒤 마차를 끌게 해야 한다. 가까운 보급창에 도착할 때까지는 어쩔 수 없다." 상황을 대충 정리한 뒤 크로비츠는 겸연쩍은 기색으로 흑마법사가 타고 있는 마차로 향했다. 유일하게 그 마차만이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박살나 있다고 봐야 했다. 왜냐하면 맹위를 떨친 매직 미사일이 창문을 부수고 발사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차 안으로 들어간 크로비츠는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기습을 받을 줄은 전혀 짐작하지 못한 터라……. 만약 마법사 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상당히 큰 피해를 입을 뻔했습니다." 데이몬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괜찮네. 일행들이 무사하면 다행이지." 크로비츠는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미 호위병력 중에 많은 사상자가 난 상황이었는데 일행들만 무사하면 다행이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그리 좋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표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는 급급히 얼굴빛을 고쳤다. "그런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토록 많은 매직 미사일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지. 그건 그렇고 어떤 놈들이던가? 감히 크로센 제국의 영토 안에서 우릴 공격한 놈들이……." 크로비츠는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만 단 한 놈도 생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황을 보니 누구의 소행인지 대충 짐작이 됩니다." "어느 놈인지 모르지만 간이 상당히 큰놈이로군. 이런 일을 꾸미다니 말이야." 크로비츠는 이번 습격의 배후로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페르슈타인 공작과 흑마법사가 손을 잡는 것을 꺼리는 사람은 오직 그밖에 없었다. 크로비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테오도르 집정관! 언제고 꼬리가 잡힌다면 쓴맛을 단단히 보여주마. 일이 뜻대로 될 경우 내가 직접 네놈의 처형을 주관할 테니까…….' 생각을 마친 크로비츠는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준비를 마쳤는지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크메이지] 10장 마룡 베르키스 277회. 의문의 습격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크로센 제국의 영토가 워낙 넓다보니 이따금 산길을 지날 수밖에 없었고 그럴 때마다 가차없이 화살공격이 퍼부어졌다. "윽."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여기저기서 픽픽 쓰러졌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쪽은 무장을 벗은 상태로 마차를 끌고 가던 병사들이었다. 화살공격을 막을 방패와 갑옷이 없었기에 화살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궁수들의 위치가 파악하자 팔라딘들은 반사적으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이미 크로비츠가 그렇게 하도록 지시해 놓았던 것이다. 두두두두. 널린 시신을 쓸어보던 크로비츠는 이를 악물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공간이동을 시도했을 것을……." 하지만 그러기에는 호위병력의 수가 워낙 많았다. 게다가 마법방해가 끼여들 여지가 있었으므로 도보로 이동하기로 결정한 것인데 이처럼 거듭된 기습을 당하다니……. 조만간 투석공격이 퍼부어 질 것이 확실했기에 크로비츠는 섣불리 병력을 밀집대형으로 배치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들의 임무는 엄연히 흑마법사의 호위였으므로 더 이상 그의 도움을 기대한다는 것은 기사로써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 빗살처럼 퍼붓는 화살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병사 몇 명이 풀썩 쓰러졌다. "크윽." 눈이 달려있지 않은 화살이 그들의 몸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옆의 동료들이 서둘러 방패로 가렸지만 그들은 이미 절명한 후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때마침 투석기가 작동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로 인해 병사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져 버렸다. 투투퉁. 자고로 전장에서 병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마법공격과 투석공격이다. 격중될 경우 시체조차 온전히 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겁먹은 기색으로 부산하게 산개하기 시작했다. 투석 공격에 맞고 안 맞고는 한 마디로 운에 달려있었다. 휘유우우 1차로 발사된 투석기의 포탄이 포물선을 그리며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흑마법사가 또다시 자신들을 도와줄지는 장담할 수 없었으므로 병사들은 이번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그런 병사들을 쳐다보며 크로비츠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팔라딘들이 궁수들을 처리할 때까지 조금만 버텨라. 목숨을 걸고서라도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은 아까와는 상황이 사뭇 달랐다. 적극적으로 끼여들기로 작정한 듯 흑마법사가 탄 마차에서 눈부신 빛 줄기가 무수하게 발사되었다. 콰콰콰콰. 부서져나간 마차 창문을 통해 퍼져나간 매직 미사일의 수는 아까보다도 훨씬 많았다. 사방으로 퍼져나간 매직 미사일 무리에 의해 떨어지던 투석기 포탄은 곧 흔적도 없이 분쇄되어버렸다. 그것으론 성이 차지 않는다는 듯 매직 미사일 다발은 허공에서 두 무리로 갈렸다. 마치 잘 훈련된 돌고래를 연상시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쐐애애액. 숨막히는 파공성과 함께 한 무리의 매직 미사일 다발이 근처 산등성이의, 투석기 포대가 있으리라 예상되는 지점으로 날아갔다. 나머지 매직 미사일 다발이 날아가는 곳은 화살공격이 퍼부어지는 지점이었다. "우와아악." 그곳에서 숨막히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론 비명소리가 늘어남에 따라 화살과 투석 공격이 뜸해지기 시작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본 크로비츠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되었어. 이제 이 지긋지긋한 습격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겠군."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명령을 내렸다. "각 부대장은 발이 빠른 병사를 소집해서 산등성이를 점령해라. 투석기를 발사한 놈들을 깡그리 처리해야 한다. 명심하도록. 저항하는 자는 가차없이 처치하되 포로 몇 명은 반드시 잡아와야 한다." 와아아아. 수백 명의 병사들이 산등성이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미 많은 동료의 죽음을 목격했기에 병사들의 눈동자에는 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먼저 돌격을 시작한 기사들이 적 궁수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드는 것을 확인한 상태였기 때문에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한 달음에 산등성이에 뛰어든 병사는 놀라운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져야 했다. "세, 세상에……." 상황은 이미 완전히 끝난 상태였다. 의문의 습격자들은 이미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 사방으로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 대부분 기절한 상태로 보였는데 그들의 몸 위에는 아직까지 매직 미사일 다발이 허공을 맹렬히 맴돌고 있었다.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매직 미사일 다발들은 흉흉한 기색으로 그들에게 달려들려 했다. 데이몬이 움직이는 모든 것을 공격하도록 설정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윽." 선두의 병사 한 두 명이 매직 미사일에 격중되어 풀썩 쓰러졌다. 훈련받은 대로 방패로 막으려 했지만 매직 미사일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방패를 피해 급소로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새신으로 짐작되는 습격자들이 당한 것도 그것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피해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매직 미사일 다발은 서너 명의 병사만을 쓰러뜨린 뒤 마치 그 자리에 언제 존재했었냐는 듯 픽 하고 꺼져버렸다. "다, 다행이로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병사들은 서둘러 습격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저항은 일체 없었다. 모두가 매직 미사일에 흠씬 얻어맞아 기절한 상태였기 때문에……. 궁수들에게로 돌격한 기사들도 큰 성과를 거두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나도 빠짐없이 흑마법사의 매직 미사일에 넉다운된 상태였던 것이다. 의문의 습격자들은 곧 굴비두릅 엮이듯 줄줄 묶여 본진으로 호송되는 처지에 놓였다. 병사들의 포위 하에 꽁꽁 묶여 무릎 꿇려진 포로들을 본 순간 크로비츠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가장 가까이 무릎 꿇려 있는 포로에게 다가갔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들……." 크로비츠는 머뭇거림 없이 포로의 머리통을 냅다 걷어차 버렸다. 퍽. 머리가 수박처럼 쪼개지며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생명이 사라진 시신이 맥없이 바닥에 털썩 널브러졌다. 그 모습을 보자 포로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비로소 죽음의 공포를 실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명을 본보기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크로비츠는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포로들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그럼 어디 정체를 한 번 털어놓아 보실까?" 하지만 입을 여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 그것을 보아 혹독하게 훈련받은 어새신들이 틀림없어 보였다. 크로비츠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다. "아무래도 단단히 쓴맛을 봐야 입을 열 놈들 같군." 두 번째 포로에게 다가가려던 크로비츠는 문득 무언가가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돌렸다. 화살이 자욱하게 박힌 세 번째 마차의 창문이 열려 있었고 그곳을 통해 율리아나가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본 크로비츠는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여자가 섞여 있는 귀빈들 앞에서 끔찍한 고문을 시행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이 자리에서 사실을 알아내긴 힘들 것 같군.'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크로비츠는 부관을 불러 은밀히 명령을 내렸다. 듀크 나이츠의 일원이며 소드 마스터이기도 한 기사였기 때문에 걱정할 것은 전혀 없어 보였다. "기사 20명과 병사 1백 명을 붙여 줄 테니 이곳에 남아서 놈들을 심문하라. 난 귀빈들을 모시고 출발하겠다. 단단히 명심하도록…….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놈들의 입을 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말을 마친 크로비츠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놈들 중에 반 정도는 본보기를 위해 사정보지 말고 죽여버려라. 그래야 남은 놈들의 입을 여는 것이 편할 것이다. 또 하나, 자백한 놈들은 죽이지 말고 펠젠틴으로 데리고 오도록……." 부관은 즉시 복명했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내린 크로비츠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출발한다. 시간이 무척 지체되었으니 서둘러라." 남은 병사들 중에서 또다시 수십 명이 차출되어 마차를 끌기 시작했다. 삐걱. 마차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말이 끄는 것보다 현저히 느린 속도였다. 마차가 그곳에서 사라진 직후 그곳에서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분노에 찬 병사들의 손속에 포로들이 생을 마감하며 내지르는 비명소리였다. "뭐, 뭐라고? 3개 부대가 전멸이라고?" 뜻밖의 보고를 받은 테오도르는 아연해했다. 오랜 세월 심혈을 기울여 키워놓은 어새신 부대가 거의 괴멸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힘이 빠진 듯 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5년, 5년의 세월을 투자해서 겨우 어새신 4개 부대를 키워 놓았는데 일순간에 3개 부대가 몰살당하다니……." 그의 앞에는 먼 길을 달려온 듯 전신이 먼지투성이가 된 인영 하나가 무표정한 눈빛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동료들의 처참한 죽음 때문인지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동료들은 대부분 흑마법사의 공격에 당했습니다. 흑마법사 놈이 쏘아붙인 매직 미사일 다발에 변변찮은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사로잡혔습니다." "고, 고작 매직 미사일에……." 어새신 전령은 무감각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엄청난 위력의 매직 미사일이었습니다. 단 한 방에 투석기 포탄을 가루로 만들어버릴 정도였으니까요. 게다가 수가 엄청났습니다. 족히 수백, 수천 발이 넘어 보이는 매직 미사일이었습니다." "그, 그런 일이……. 그렇다면 사로잡힌 자들은 어떻게 되었나?" "먼 곳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동료들은 대부분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전 놈들이 남은 동료들에게 고문을 가하는 것을 본 뒤 바로 빠져나왔습니다." "오! 신이시여." 갑자기 현기증이 치밀어 오른 듯 테오도르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힘들게 끌어 모아 훈련시킨 어새신들을 깡그리 잃은 것이 여간 애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흑마법사의 위력이 그렇게 강할 줄이야……. 도대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두 손을 모아 관자놀이 부분을 한참동안 문지른 테오도르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래, 코빙턴의 의중은 어떤가?" 코빙턴이란 어새신 부대를 지휘하는 우두머리의 이름이었다. 어새신 전령은 즉각 대답했다. "남은 병력으로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시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야습을 감행해볼 생각이라 하셨습니다. 마차를 끄는 말을 깡그리 죽여 행군속도를 현저히 떨어뜨렸으니 놈들은 오늘 안으로는 펠젠틴에 도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틈을 노려 시간을 더 끌어보겠다는 것이 대장의 계획입니다." 그 말에 테오도르는 불행 중 다행이란 표정을 지었다. "모처럼 고무적인 보고로군.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흑마법사 놈이 간택식이 열리기 전에는 펠젠틴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그 무렵 페르슈타인 공작 역시 전령의 급보를 받아들고 있었다. 그는 보고서를 읽자마자 와락 구겨버렸다. "이런 빌어먹을……." 그의 얼굴에는 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최후의 발악인가? 테오도르 집정관. 하지만 어림없다. 이미 난 네놈이 암암리에 어새신들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해 놓은 상태니까……." 그는 즉각 부관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지금 즉시 병력을 파견하라. 목표는 펠젠틴 남서쪽 실로프 산의 계곡. 그곳은 테오도르 놈이 비밀리에 어새신들을 교육시키던 곳이니 아직까지 잔당이 몇 놈 남아 있을 것이다. 한 놈도 놓치지 말고 잡아 오거라." "알겠습니다." "듀크 나이츠에서 기사들을 차출한 다음 출발하라. 희생 없이 놈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선 반드시 팔라딘을 파견해야 한다." 부관은 즉시 복명한 채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페르슈타인 공작은 지긋이 입술을 악물었다. "테오도르. 이미 난 네놈의 측근에다 밀정을 박아놓았다. 그의 안전을 위해서 지금껏 네놈의 방종을 묵인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보아 넘길 수 없다. 머지않아 네놈에게 날 애먹인 데 대해 적절한 대가를 치르도록 해 주겠다." 거듭 다짐을 거듭하던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에 별안간 웃음기가 감돌았다. "그건 그렇고 수천 발의 매직 미사일이라……. 말로만 들어왔던 9서클이지만 정말 무시무시하군. 어새신 3백 명을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할 정도라니……." 공작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감돌고 있었다. "그런데 한 놈도 죽이지 않았다는 점이 조금 이상하군. 통상적으로 흑마법사들은 피와 살육을 즐기는 편인데 말이야?" 공작은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그가 나와 손을 잡는다면 더 이상 두려울 것은 없다. 이미 난 야망을 위하여 딸의 목숨까지 포기한 상태이니까." 이미 그는 테오도르가 호송대의 발걸음을 지체시키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황태자가 셰넌을 간택하기 전까지 날 흑마법사와 만나지 못하게 하겠다? 좋은 계략이야. 테오도르. 허나 넌 내가 이미 셰넌을 희생시키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딸을 생각하자 공작의 얼굴에 착잡한 표정이 감돌았다. "날 용서하거라. 셰넌. 하지만 가문의, 그리고 조상들의 염원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널 희생시켜야 하는구나." 딸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공작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들어가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예상대로 호송대는 펠젠틴의 근교에도 도착하지 못한 채 밤을 맞았다. 인간의 힘으로 말이 끄는 마차의 속도를 따라잡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인 데다가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진 습격으로 많은 부상자가 생긴 상황이었으므로 행보가 더욱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크로비츠는 밤을 새워서라도 행군을 독려할 생각이었다. "서둘러라. 이 밤이 가기 전에 펠젠틴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크로비츠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횃불로 앞을 밝힌 채 관도를 터덜터덜 걸어가는 일행에게 느닷없이 화살 공격이 이루어졌다. 쐐애애액. "기습이다. 으아악." 병사들은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방어자세를 취했다. 마차를 끌던 병사들 역시 하던 일을 멈추고 방패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공격이 어디에서 이루어지는지 분간도 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마구잡이로 퍼부어진 공격이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공격은 금방 멈췄다. 그러나 화살공격으로 인해 다수의 사상자가 다수 발생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행보가 더욱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크로비츠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미치겠군. 본격적으로 행군을 방해하겠다 이건가?" 크로비츠로써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선 이런 어둠 속에서는 놈들을 추적할 수 없었다. 무리하게 기사단을 출동시켰다가는 아까운 기사들만 잃기 십상이었다. 만에 하나 기사들이 장애물에 걸려 낙마할 경우 어새신들이 가만히 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지금 상황의 유일한 돌파구는 마차 주변에 방패로 방어벽을 쌓은 뒤 느리게 행군하는 것뿐이었다. 크로비츠는 기대 어린 눈빛으로 마차를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흑마법사가 도와준다면…….' 드르렁. 기다렸다는 듯 마차 속에서 흘러나오는 코고는 소리에 크로비츠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에게 더 이상 도움을 기대한다는 것은 기사로써의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느릿하게라도 행군할 수밖에……." 방패를 든 병사들로 하여금 마차 주변에 방어벽을 쌓도록 한 뒤 크로비츠는 진군을 명했다. 호송대는 느리게, 아주 느리게 펠젠틴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다크메이지] 10장 마룡 베르키스 278회. 호송대가 어새신 습격대에 의해 밤새도록 곤욕을 치르고 있는 사이 마침내 날이 밝았다. 빵빠라빵. 아침이 되자 펠젠틴 시가지는 축제의 도가니에 접어들었다. 바야흐로 기다리고 기다렸던 황태자의 태자비 간택식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대륙 전역에서 모여든 왕녀들이 곱게 단장하고 중앙 광장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벌써 도착해서 호사스런 숙소에서 하루를 지낸 상태였다. 테오도르의 어새신 습격대들이 노리는 것은 오로지 호송대 뿐이었기 때문에 나머지 왕녀들은 예정대로 펠젠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앙 광장. 크로센 대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펠젠틴 중심부에 만들어놓은 이 거대한 광장은 지금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모두가 대륙 전역에서 모여든 지체 높은 귀족이나 왕족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기대감에 부풀어 간택식이 시작될 순간만을 기다렸다. 조금 있으면 오늘의 주인공인 황태자가 탑에서 나와 그들과 인사를 나눌 것이었다. "정말 기대되는군요. 무척 잘 생긴 분이라고 하던데……." "이런 거대한 제국을 물려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그들의 짐작과는 달리 황태자의 심사는 그리 좋지 못했다. "겉모습만 그럴 듯한 들러리라……." 비운의 황태자 드비어스는 몸에 걸친 화려한 옷차림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최고의 장인들이 최고급 옷감으로 만든 덕분에 옷에는 우아함과 품격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보석이 주렁주렁 박힌 보검을 허리에 차고 우단으로 된 망토를 늘어뜨린 그의 모습은 천상의 귀공자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우수가 짙게 깔려 있었으니……. 잠시 후 기사들의 경호 준비가 모두 끝나면 그는 탑을 나설 것이다. 모여든 왕녀들 사이를 한 바퀴 순회하며 인사를 나눈 다음 한 여인을 선택하고, 그녀와 함께 궁성으로 들어가면 마침내 무도회가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모여든 왕녀들은 조금이라도 황태자에게 눈 도장을 찍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돋보여야만 드비어스 황태자에게 기억될 테니까……. 복잡한 절차를 떠올리던 황태자는 냉소를 쳤다. "부질없는 짓이지. 마치 짜고 치는 도박이라고나 할까? 어차피 선택의 대상이 정해져 있는 바에야……."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러는 사이 휘장 저쪽에서 묵직한 음성이 전해졌다. "전하. 경호 준비가 모두 끝났사옵니다." 그 말을 들은 황태자는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솔직히 이런 거창한 경호를 받는다는 것 자체도 그리 마음에 드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경호를 맡은 기사에게 이 일은 피를 바짝바짝 말리는 작업이었다. 모여든 왕녀 일행 중에 혹시라도 불손한 뜻을 품은 자가 있을 수도 있었고 만에 하나 황태자가 상처라도 입게 되는 날에는 경호기사 모두가 목이 달아날 것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황태자를 근접 경호하는 기사들은 하나같이 소드 마스터로 이루어졌다. 물론 하나같이 크로센 기사단에서 차출된 자들이었다. "서두르시지요. 전하. 많은 사람들이 전하를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알았소." 내키지 않는다는 듯 내뱉은 황태자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 높지 않은 탑의 창문을 통해 황태자가 얼굴을 내밀자 모여든 왕녀들은 동시다발적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 황태자는 억지 웃음을 띤 채 손을 흔들었다. 가식적인 미소를 떠올리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국가의 위신이 걸린 일이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후 황태자는 탑의 계단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자신을 감싸고 있던 베일을 모두 벗은 채 각지의 왕녀들 앞에서 직접 모습을 드러내려는 순간이었다. 외곽 경계를 맡은 친위기사들은 하나같이 바짝 긴장한 채 사방을 철통처럼 경계했다. 덜컹. 탑의 문이 열리고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왕녀들의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황태자 전하." "한 번만 이쪽을 봐 주세요." 황태자는 가식적인 미소를 떠올린 채 왕녀들 사이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왕녀들은 얼굴에 최대한 아름다운 미소를 떠올린 채 돋보이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재미있는 장면이로군. 머지않아 끝나겠지만."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페르슈타인 공작이 입가에 미소를 짙게 흘리고 있었다. 그는 부관들과 함께 나와 있는 상태였다. 황태자가 배우자를 맞아들이는 경사스런 행사였기 때문에 궁정의 모든 문무백관들이 나와 행사를 주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집정관인 테오도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후후후.' 페르슈타인 공작은 미소 띤 얼굴로 테오도르 집정관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단 한 번도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공작은 냉소를 쳤다. '하긴 네 녀석에게 날 쳐다볼 용기가 있을 턱이 없지.' 상황은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크로비츠의 도착이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흑마법사는 머지 않아 이곳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었다. 이미 공작은 부관에게 1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대동시켜 그들을 마중 나가게 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앞으로 한 시간 이내에 이곳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정말 기대되는군. 아르카디아의 역사를 바꿔놓을 두 사람의 만남이 말이야." 이미 그의 딸 셰넌은 왕녀들 틈에 끼여 있었다. 왕녀들 사이를 한 바퀴 순회한 황태자는 예정된 수순대로 셰넌을 간택할 터였고 둘은 그 자리에서 팔짱을 끼고 궁정으로 향할 터였다. 그리하여 선택받지 못한 왕녀들과 함께 거창한 무도회를 열 것이다. '아마 왕녀들 중 상당수는 이 사실을 미리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테오도르 녀석이 각 국 정보부에 은밀히 흘렸기 때문에 말이야. 그나저나 드래곤이 약속을 언제 지킬지가 궁금하군.' 페르슈타인 공작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광장을 응시했다. 왕녀들 사이를 한 바퀴 돈 황태자는 마침내 그의 딸 셰넌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런데 모여들어 연신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왕녀들 사이에 슬픈 눈동자 한 쌍이 있었다. 처연한 빛이 감돌고 있는 눈동자에서 난데없이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눈동자의 주인은 투구로 얼굴을 빈틈없이 가린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얼굴 가리개 사이를 비집고 나지막한 여인의 음성이 가늘게 흘러나왔다. "전하……." 격정에 못이긴 듯 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여인은 놀랍게도 왕녀 신분이 아니었다. 은빛 갑주를 걸치고 검의 손잡이를 굳게 움켜쥔 친위기사. 혹시라도 왕녀들이 황태자에게 달려들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임무를 지닌 친위기사가 바로 음성의 주인공이 가진 신분이었다. 여타의 친위기사들이 연신 경계의 눈초리를 번뜩이는데 반해 그녀는 시선을 한 쪽으로만 고정시키고 있었다. 웃음 띤 얼굴로 왕녀들과 인사를 나누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황태자의 얼굴로 말이다. '용서하십시오. 전하.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 전하의 마지막 모습을 뵙고 싶어 법을 어겼사옵니다.' 소리 없이 울음을 삼키는 여기사의 이름은 바로 미나였다. 근위기사 단장 윌리엄스 후작의 손녀로써 황태자와 금지된 사랑을 시작한 학부 동기생. 그녀가 친위기사 신분으로 간택식장에 나와 있는 것이다. 사실 그녀는 근무지를 무단 이탈한 상태였다. 모시는 근위기사를 따라 격오지에서 파견근무에 열중하던 그녀는 황태자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이틀 밤을 꼬박 새워 말을 달려온 상태였다. 펠젠틴에 도착한 미나는 즉시 동기생인 안젤라를 찾아갔다. 간택식장의 호위기사로 그녀가 내정된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녀들 사이에서 근무하는 치안기사로는 대부분 여기사가 뽑힌 상태였다. 안젤라를 만난 미나는 간곡한 어조로 사정하기 시작했다. "부탁이야. 안젤라. 그 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그러니 제발 대신 내가 근무하게 해 주면 안되겠니?" 미나의 부탁을 들은 안젤라는 깜짝 놀랐다. "만약 이 사실이 밝혀진다면 난 즉시 기사단에서 쫓겨날 텐데……." "제발 부탁이야. 그저 전하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만 할 작정이야. 그러니 부탁해." 학창 시절 미나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던 탓에 안젤라는 결국 그녀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좋아. 하지만 매사에 조심하도록 해. 알겠지?" 결국 안젤라는 미나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미나가 안젤라 대신에 간택식장에서 근무를 서게 된 것이다. 안젤라의 갑주를 걸친 미나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투구의 얼굴 가리개를 깊숙이 눌러쓴 채 경호를 시작했다. 근무지 이탈에 대한 처벌을 각오하고 황태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 달려온 미나. 이미 황태자란 존재는 그녀의 가슴 깊이 각인된 상태였다. 미나는 조용히 황태자와의 추억을 되새겨보기 시작했다. '그 때 할아버지의 명령만 아니었더라도 이렇게 가슴이 아프진 않았을 것을…….' 기사학부에서 처음 만났을 때 황태자는 한없이 소심하고 병약해 보이는 소년에 불과했다. "명심하거라. 네 임무는 최선을 다해 황태자 전하를 보필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비록 할아버지의 엄명을 받긴 했지만 미나에겐 그 일은 그리 탐탁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부터 거친 근위기사들 사이에서 검술을 익히며 자라난 미나에게 심약하고 우유부단한 황태자가 마음에 들 턱이 없었다. 굳이 신분상의 차이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황태자의 첫인상은 오래지 않아 바뀌었다. 범 슬하에 고양이 새끼가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입증하듯 황태자는 대범한 마음씨와 풍부한 학식으로 그녀를 벌써 여러 번 놀라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제위에 올라야 하지만 난 음악과 시를 절실히 사랑하오. 아마 이 취미는 황제가 되더라도 평생 잊지 않을 것이오." 미나에게 황태자는 훌륭한 학자요 음유시인이었다. 밤이 되면 찾아와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미나에게 황태자는 직접 지은 시를 읊어 주었고 감미로운 노래도 여러 차례 불러 주었다. 처음에는 미나에게 시와 음악이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걸친 것처럼 거북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를 꿈꾸는 그녀에게 시와 음악을 접할 기회란 애당초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점점 황태자의 시와 음악에 매료되어갔다. 거친 검사들만 대하다 우연찮게 만난 황태자는 한 마디로 너무나도 낭만적인 남자였다. "그대의 눈동자는 너무나 아름답소. 마치 저 하늘의 은하수를 떼어다 그대로 박아놓은 듯이 말이오. 그대가 내 곁에 머물러 준다면 평생 원이 없을 텐데……."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할아버지의 명령을 떠올린 미나는 그때마다 청을 냉랭히 거절했다. 둘 사이에는 뛰어넘기 힘든 신분상의 벽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태자의 고백이 거듭될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약해져갔다. 매일매일 이어지는 고백에는 황태자의 절실한 진심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기사학부에서 보낸 5년여의 세월 동안 둘은 서로를 마음 속 깊이 담아놓을 수 있었다. 비록 졸업한 뒤, 서로의 길이 갈라졌어도 미나의 마음 속에 황태자는 한 명의 남자로 단단히 각인되어 있었다. 비록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일지라도……. 할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머나먼 오지로 가게 되었어도 미나는 황태자를 잊지 않았다. 물론 사랑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저 마음 속 깊이 담아두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황태자가 비를 간택하는 순간이 다가오자 미나는 견디지 못하고 근무지 이탈을 결심했다. 님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리하여 소원을 이루긴 했지만 미소 띤 황태자의 행복한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려왔다. '사랑하긴 하지만 나완 인연이 없는 분이야. 미나는 억지로 울음을 삼켰다. 이미 그녀는 황태자가 페르슈타인 공작의 딸 셰넌을 간택할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전하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여한이 없어.' 미나는 예정대로 셰넌이 간택되고 난 뒤 조용히 사라질 생각이었다. 안젤라에게 갑옷과 무기를 돌려준 뒤 밤새워 말을 달린다면 이틀 안으로 근무지에 복귀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지금쯤 그녀의 근무지 이탈이 탄로나 있을 것이 확실했다. 규율이 세기로 이름난 크로센 기사단이라서 근무지 이탈에 대한 처벌은 가혹한 편이다. 감봉은 기본이었고 5년 가량 병사로 복무하거나 아니면 정규 기사 자격취득이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나는 이미 처벌을 단단히 각오한 상태였다. '안녕 내 사랑.' 입술을 살짝 깨문 미나는 즉시 부동자세를 취했다. 이미 황태자가 셰넌의 옆에 가까이 접근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왕녀들 사이를 한 바퀴 순회한 황태자는 마침내 선택해야 할 여인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수많은 왕녀들이 아름다운 얼굴에 한껏 미소를 떠올린 채 쳐다보고 있었지만 황태자의 눈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정해진 선택. 황태자는 경직된 얼굴로 셰넌을 쳐다보았다. '이제 저 여인을 간택하기만 하면 되는 건가?' 셰넌은 무척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려 넣은 듯한 눈썹에 맑은 눈동자, 백옥같이 흰 피부는 무수한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것이 틀림없었다. 황태자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녀의 미모는 황태자에게 전혀 어필하지 못했다. 황태자에게 셰넌은 그저 황가의 안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여인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 사실이 황태자를 더욱 착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조상들이시여. 부끄러운 후손을 용서하소서.' 한 숨을 길게 내쉰 황태자는 셰넌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에 서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마침내 기다렸던 순간이로군.'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셰넌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던 황태자가 돌연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지금 옆에 서 있는 친위기사에게로 단단히 고정된 상태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근위기사는 당황한 듯 바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황태자는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간 친위기사의 눈빛에서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이런 일이……." 당혹해하던 그의 얼굴에 이내 미소가 서렸다. 마침내 친위기사가 누군지 알아차린 것이다. 자고로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은 만인 속에 숨어있더라도 능히 판별할 수 있는 법이다. 순간적으로 교차된 눈빛이었지만 황태자는 용케도 기사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껏 수많은 밤을 마주보며 각인시킨 사랑하는 여인의 눈빛을 그가 몰라볼 리가 없었다. 미나를 만나자 황태자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한낱 가문의 안위 때문에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 설사 이 일로 목숨과 제위를 빼앗긴다고 해도 달게 감수하겠어.' 생각을 굳힌 황태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쩔 줄 몰라하는 친위기사에게 곧장 걸어갔다. "고개를 들라." 황태자의 명령이 떨어지자 친위기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투구를 빈틈없이 눌러썼기 때문에 두 눈 말고는 아무것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투구를 벗어라." 예상대로 친위기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저, 전하. 지금은 근무중인지라……." 일부러 꾸민 듯한 탁한 음성이 얼굴가리개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음성을 듣자 황태자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위압적인 어조로 다시 한 번 명령을 내렸다. "명령이다. 그대는 지금 즉시 투구를 벗어라." 황태자가 그렇게까지 나오는데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미나는 어쩔 수 없이 투구를 죄고 있는 끈을 풀기 시작했다. '미안해 안젤라. 나 때문에 너까지 추궁 받게 생겼으니……' 투구를 벗자 화장기 없는 미나의 수수한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을 보자 옆에 서 있는 친위기사가 깜짝 놀랐다. "아, 아니? 넌 안젤라가 아니잖아?" 근무를 서는 기사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황태자의 옆에 서 있던 경호기사들은 즉각 검을 뽑아들었다. 그들은 생각할 것도 없이 미나에게 달려들려 했다. "체포하라." 그러나 그들의 동작은 곧 바로 이어진 황태자의 행동 때문에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내 사랑. 마침내 왔구려. 와 줘서 고맙소. 정말 고맙소." 황태자는 한 쪽 무릎을 꿇은 뒤, 건틀릿에 싸인 미나의 손을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당황한 미나의 손에서 투구가 굴러 떨어지며 저리로 굴러갔다. 텅, 데구르르 뒤이어 황태자의 절실한 심경고백이 이어졌다. "만약 그대가 오지 않았다면 나는 무척 괴로웠을 것이오. 왠줄 아시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은 세상에서 오직 그대뿐이기 때문이오. 미나." "저, 전하……." 미나는 일순 대답을 하지 못하고 허둥대기만 했다. 설마 황태자가 이렇게 나올 줄을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황태자는 즉시 허리를 펴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이제 난 마침내 내 아내 될 사람을 선택했소이다. 평생동안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껴줄 것을 여러분들 앞에 맹세하겠소. 그러니 여러분! 날 축복해 주지 않겠소?" 그 말에 셰넌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자신이 간택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황태자가 다른 여자를, 그것도 친위 여기사를 선택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왕녀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애당초 자신이 간택될 것을 기대하지 않은 데다가 황태자의 열렬한 진심고백을 들으니 자신도 모르게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 "축하해요." "황태자 전하께서 드디어 사랑을 얻으셨군요." 황태자가 배우자를 선택하자 중앙 광장은 곧 열광의 도가니에 쏟아져 들어갔다. 황태자는 마치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으로 당황한 기색의 미나를 얼싸안고 걷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둘이 걷는 곳마다 왕녀들의 박수소리와 환호성이 뒤따랐다. 그것은 마치 중앙 광장을 떠내려보낼 듯 세차게 울려 퍼졌다. 미나를 체포하려던 경호기사들은 엉거주춤 검을 뽑아든 자세로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크메이지] 10장 마룡 베르키스 279회. "이런 일이……." 테오도르와 윌리엄스 후작은 땅이 꺼진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계획이 어긋날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먼 격오지에서 근무를 하고 있어야 할 미나가 갑자기 나타나서 일을 송두리째 망쳐놓다니……. 윌리엄스 후작은 허탈한 기색으로 띄엄띄엄 말을 늘어놓았다. "이래서 사람의 일이란 하늘에 달려있다는 말이 나온 건가?" 테오도르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제 엎질러진 물이 되어버렸군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서둘러 대비책을 세워야겠군요." 자신들의 충절을 깡그리 잊은 채, 마음대로 행동한 황태자가 원망스러웠지만 테오도르는 억지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필경 페르슈타인 공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 큰일이로군.' 그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후후후." 테오도르의 예상과는 달리 페르슈타인 공작은 미소를 띄며 광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로서는 잘 되었다고 해야 하겠군. 다행히 셰넌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야." 도대체 무슨 이유로 황태자가 마음을 바꿔 먹었는지는 모르지만 아까울 것은 없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차라리 한시름 덜었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젠 예정대로 드래곤이 등장하는 순간만을 기다리면 되겠군." 물론 드래곤이 등장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계획이 틀어진 이상 무력으로 황위를 찬탈하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고 공작에게는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이미 악역을 맡기로 작정한 상황이니 욕을 더 들어먹는다 하더라도 상관없겠지?" 페르슈타인 공작은 멀리 보이는 황태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드비어스 황태자의 얼굴에는 마치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페르슈타인 공작은 묵묵히 뇌까렸다. "황태자여. 사랑 고백이 무척 감동적이었소. 그대가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구려. 그러나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소. 그대가 살아있다면 제위를 완벽하게 찬탈할 수 없기 때문이오. 하지만 단 한 가지는 약속하겠소. 그대를 사랑하는 사람과 한 곳에 묻어주겠다는 약속 말이오." 중앙 광장을 쳐다보던 페르슈타인 공작의 눈빛은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다. "저, 전하. 이, 이러시면……." 미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조용히 와서 황태자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가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뜻밖에도 일이 틀어져버린 것이다. 황태자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거침없이 사랑을 고백하다니……. 분명 기쁜 일임에는 틀림없었지만 할아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미나의 귀에 대고 황태자는 감미롭게 속삭였다. "아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대를 얻기 위해서라면 난 제위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소. 다시 말해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다는 뜻이오. 알겠소?" "저, 전하." 미나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하는 것이 그녀의 바램이었다. '저, 전하. 소녀 역시 그렇답니다. 소녀 역시 당장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습니다.' 황태자는 정을 듬뿍 담은 눈빛으로 두 손을 들어 미나의 얼굴을 감쌌다. "우린 이제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이오. 하늘이 우릴 갈라놓는다고 해도 말이오." 참을 수 없어진 미나는 그대로 황태자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황태자는 그런 미나를 포근히 안아 주었고 동시에 열렬한 박수소리가 광장을 떠내려보낼 듯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소리 속에서 두 연인은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크로센 제국의 수석 궁정 마법사인 필라모네스도 물론 간택식에 참석한 상태였다. 아르카디아 대륙에서 유일한 8서클의 엑스퍼트로써 마스터를 바로 눈앞에 두고 있는 그는 명실상부한 대마법사였다. 최근 등장한 9서클의 흑마법사 때문에 조금 빛이 바래긴 했지만 그래도 백마법 계열에서 그를 따라잡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1백 여세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그는 지금 곤혹스런 기색으로 황태자와 그가 선택한 여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테오도르 집정관의 계획이 결국 이렇게 빗나가는가?" 필라모네스 역시 크로센 황가의 편이었다. 오랫동안 크로센 황가에 충성을 바쳐온 그로써는 섣불리 페르슈타인 공작의 회유에 넘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특유의 성품으로 인해 드러나는 도움을 주는 일은 없지만 그는 음지에서 은밀히 집정관 테오도르를 지원하고 있었다. 때문에 계획이 틀어진 것이 필라모네스에겐 여간 애석하지 않았다. 그는 별안간 쓴웃음을 지었다. '하여튼 크로센 가문 특유의 고집은 한 마디로 알아줘야 한다니까…….' 현 황제인 발렌시우스 3세를 오랫동안 모셔온 경험으로 말미암아 그는 이미 이런 결과를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 한 번 뜻을 세우면 결코 꺾지 않는, 어떻게 보면 독불장군이나 다름없는 크로센 가문 사람들 특유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탓인지 그의 입가에는 짙게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나저나 기사단장이 무척 난감하겠어. 웃을 수도 없을 테고, 그렇다고 울 수도 없으니 말이야." 혼잣말을 지껄이며 고개를 흔들던 필라모네스의 얼굴이 돌연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이, 이것은……." 필라모네스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오른 손에 들고 있는 마법 지팡이에서 빛이 불규칙하게 일어나는 것을 봐서 아무래도 주변의 마나 변화를 관측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는 경악성과 함께 몸을 벌떡 일으켰다. 큰 충격을 받은 듯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세,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믿을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하던 필라모네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이럴 때가 아니다." 생각을 마친 필라모네스는 마나를 한껏 끌어 모아 고함을 질렀다. "비상사태가 벌어졌소. 모두 몸을 피해야 하오." 난데없이 퍼져나간 고함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필라모네스에게 집중되었다. 사람들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필라모네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고함을 질렀다. 음성증폭마법을 사용했기에 그의 고함소리는 모든 사람들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조금 뒤면 이곳에 유성우가 떨어질 것이오. 누군가가 이곳을 표적으로 미티어 스웜을 전개했소!" 그 말에 놀라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옆에 서 있던 궁정 마법사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필라모네스는 머뭇거림 없이 대꾸했다. "불행하지만 그렇소. 적어도 드래곤 정도 되는 존재가 전개한 미티어 스웜이오.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나조차도 측정할 수 없을 지경이오. 그러니 모두 지금 즉시 몸을 피해야 하오." 말을 마친 필라모네스는 황태자를 경호하는 경호기사들에게 다시 한 번 고함을 질렀다. "그대들은 지금 즉시 황태자 전하를 대피시키시오. 조금 있으면 지옥의 화염비가 이곳을 강타할 것이오." 경호기사들의 얼굴에 불신의 빛이 드리워졌지만 그들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경고성을 발한 당사자가 크로센 제국의 수석 마법사였으므로 감히 의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곳은 곧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공포의 유성우인 미티어 스웜이 작렬한다는 말에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중앙광장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데다 중앙 광장이 너무 넓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곳곳에서 사람과 사람들이 뒤엉켜 넘어지는 광란의 도가니가 연출되었다. 넘어진 이들은 허둥대는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히는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악." 제일 먼저 출발한 사람들이 거의 중앙 광장을 벗어날 즈음 마침내 필라모네스가 경고했던 미티어 스웜이 중앙광장을 덮쳤다. 그것을 알리는 서막은 사방이 밤처럼 온통 캄캄해지는 데에서부터 시작했다. 구름을 뚫고 떨어져 내린 불붙은 돌덩이들로 인해 하늘이 새카맣게 가려져 버린 것이다. 슈르르르. 무시무시한 파공성과 함께 첫 번째 운석 조각이 중앙 광장의 귀퉁이 부분에 작렬했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운석이 대지와 충돌했기에 필연적으로 가공할 폭발이 일어났고 그와 함께 강력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부근에 있는 사람들의 육신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켜버릴 만큼 충격파는 강렬했다. 콰콰콰콰. 비명도 없었다. 떨어져나간 팔다리가 사방을 날아다녔고 시신에서 뿜어져 나온 선혈이 내를 이룰 정도로 참혹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꼬리를 물고 떨어져 내리는 유성우의 물결. 연쇄적으로 벌어지는 폭발과 함께 펠젠틴의 중앙광장은 서서히 지옥의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공포의 미티어 스웜은 약 5분 가량 지속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 납작 엎드린 상태였다. 서 있는 사람들이 파편에 맞아 벌집이 되어버리는 장면을 몇 번 목격한 뒤 본능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다소 위험도가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폭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었다. 부근에 유성이 작렬할 경우 육체가 흔적도 없이 으스러져버릴 것이 분명했고 살고 못살고는 오로지 운에 달려 있었다.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공포의 유성우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면서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왜' 라는 하나의 의문사였다. -도대체 누가 왜 이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미티어 스웜을 전개했을까- 정말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아닐 수 없었다. 이처럼 불특정다수를 노린 광범위한 살상마법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마법사라면 결코 전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숨죽이는 공포의 시간이 지나가고 마침내 하늘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다시 햇살이 비치고 난 뒤 드러난 중앙광장은 말 그대로 지옥의 참상을 하고 있었다. 타다 남은 육편이 사방에 널려 있었고 바닥을 흥건히 메운 피와 뼛조각들은 정녕 이곳이 인세인지, 지옥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이 만들고 있었다. 아름다웠던 분수대에는 핏물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그 속에는 한 때 살아서 펄떡대던 사람의 팔다리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분수대 옆의 각종 조각상들 역시 참혹하게 파괴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껏 치장한 대륙 전역의 젊은 남녀들이 운집해서 축제를 벌이던 곳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공포의 미티어 스웜이 지나가자 살아남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단 한 사람도 성한 사람이 없었다. 팔다리가 날아간 사람, 머리에 상처를 입어 피를 줄줄 흘리는 사람. 그들은 신음소리를 흘리며 필사적으로 중앙 광장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시작했다. "어, 어찌 이런 일이……." 황태자는 눈을 찢어져라 부릅뜬 채 주위의 참상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의 품속에는 미나가 이마에 피가 흥건한 상태로 기절해 있었다. 주위에 전신이 으스러진 경호기사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상황을 보니 그들이 몸을 던져 황태자를 보호했던 모양이었다. 황태자는 시커멓게 죽어 들어간 안색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보았다. "도, 도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이런 끔찍한 만행을……" 그 대답소리는 뜻밖에도 하늘에서 들려왔다. "조금 전의 미티어 스웜은 바로 내가 전개한 것이란다.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여" 느닷없이 하늘에서 울려 퍼진 웅장한 목소리. 음성증폭 마법과 병행해서 시전된 듯 그 목소리는 장내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똑똑히 울려 퍼졌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구름 사이에서 날개를 퍼덕이는 거대한 레드 드래곤의 모습을 말이다. "드, 드래곤?" "믿을 수 없어. 드래곤이 대관절 왜?" 황태자는 간신히 마음을 추슬렀다.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인간과는 거의 교류가 없는 종족이 아니던가. 그런 드래곤이 어찌해서 이런 만행을 저질렀을까? 물론 해답은 오로지 당사자인 드래곤의 머릿속에 있을 것이었다. 그는 떨리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유를 알고 싶소." "………." "어찌하여 아무 죄도 없는 선남 선녀들을 이토록 참혹하게 죽여야 했는지 이유를 알고 싶단 말이오." 황태자의 당돌한 반응이 의외였는지 하늘 높이 떠 있는 드래곤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침묵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황태자여. 발 밑에서 어슬렁거리는 개미떼를 밟아 죽이는데 이유가 있는가?" "………." "너희들 인간은 우리 드래곤에겐 한낱 개미떼만도 못한 존재들이다. 물론 너희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 말을 들은 황태자의 눈에 분노의 광망이 솟구쳤다. "그렇다면 당신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는 말이오? 정녕 그런 것이오?" "이유야 있지." 까마득한 하늘 위에 있었지만 드래곤의 대답은 모든 사람들의 귀에 똑똑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황태자는 몸을 부르르 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유를 말해보시오." 날개를 퍼덕이던 레드 드래곤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내 소개를 하지. 내 이름은 베르키스. 널 처리하기 위해 먼 트루베니아에서 건너왔다. 만약 네가 미티어 스웜에 목숨을 잃었다면 이처럼 인간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겠지만 네 목숨이 생각보다 질기더구나. 물론 오래지 않아 스러질 목숨이지만.……" "당신은 아직까지 이유를 말하지 않았소. 이유를 대시오. 이유를." 마침내 아르카디아에 모습을 드러낸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 앞에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는 황태자의 용기가 가상했지만 애당초 거기에 감명을 받을 베르키스가 아니었다. "무척 우습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난 한 인간의 청부로 이곳에 온 것이다." "처, 청부 말이오?" 황태자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누가 드래곤에게 청부를 했단 말인가? 그가 아는 상식으로 드래곤은 결코 인간의 청부를 받을 존재가 아니었다. "그게 도대체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시오? 좋소. 그렇다면 청부를 한 인간의 이름을 밝히시오."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그 인간의 이름은 바로 페르슈타인이다. 너희들 인간의 계급으론 공작이란 신분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 바로 그가 널 죽여달라고 청부했다" 쿵.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연해 해야 했다. 명실상부한 크로센 제국의 실세라 볼 수 있는 페르슈타인 공작이 감히 드래곤에게 황태자를 살해해 달라는 청부를 하다니……. 사람들의 시선은 곧 한 쪽으로 집중되었다. 바로 페르슈타인 공작이 있는 곳이었다. '어, 어찌 이런 일이…….' 페르슈타인 공작은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약정을 맺은 드래곤이 만인 앞에서 자신의 청부사실을 적나라하게 밝힐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또다시 황태자의 분기 충천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왜? 당신은 왜 그의 청부를 받아 들였소? 대륙 최강의 존재인 드래곤이 뭐가 아쉬워서 말이오." 까마득한 하늘에서 들려오는 드래곤의 음성에는 조금의 감정도 깃들어있지 않았다. "오늘로부터 정확히 1년 전 페르슈타인은 부하 한 명을 나의 레어로 보냈다. 그를 통해 널 처리해 주면 많은 보물을 준다는 전갈을 전했지. 당시 난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찮은 벌레들의 별 볼일 없는 권력다툼에 감히 지엄한 존재인 드래곤을 이용하려 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라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구나. 하지만 난 오래지 않아 마음을 바꿨다. 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에인션트 급 드래곤, 하찮은 벌레의 어처구니없는 소원 하나 정도는 들어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지. 쉽게 말하자면 난 이번 청부를 유희로 생각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말을 마친 드래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페르슈타인 공작을 슬쩍 쳐다보았다. "물론 대가를 받을 생각은 없다. 벌레들이 모은 보물을 받아봐야 드래곤으로써의 자존심만 상할 뿐. 그러니 현재로써는 벌레 하나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준 것으로 만족한다. 이제 궁금증이 풀렸느냐?" "이……, 이……." 화가 머리끝까치 치밀어 오른 황태자는 페르슈타인 공작을 마치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일국의 공작으로써 감히 드래곤을 사주해 이런 천인공노할 일을 벌이다니……. 그것은 광장에 모인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챵. 윌리엄스 후작이 머뭇거림 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그의 뒤로 분기충천한 기색의 크로센 기사단원들이 싸울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서는 분노의 빛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당장이라도 페르슈타인 공작을 양단해버릴 기세였다. "공작 전하를 경호하라." 그에 맞서 듀크 나이츠도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사정이 어떻게 되었던 간에 그들은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바치는 자들이었다. 이대로 공작이 당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었다. 크로센 기사단과 듀크 나이츠. 아르카디아 대륙에서 가장 강하다고 볼 수 있는 두 무력집단은 곧 일촉측발의 대립 분위기로 치달아갔다. 불똥이 한 번 튀기기만 하면 그대로 피 튀기는 혈전이 시작될 듯한 기색이었다. [다크메이지] 10장 마룡 베르키스 280회. 페르슈타인 공작은 현기증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게 바로 드래곤의 꿍꿍이였군. 우릴 상잔시키기 위한……. 내가 정말 어리석었어.' 당했다는 패배감이 등골을 서늘하게 누르고 있었다. 적어도 머리 굴리는데 있어서 인간은 결코 드래곤의 상대가 아니란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드래곤의 폭로. 그것으로 인해 상황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반전되어버렸다. 사실 그는 드래곤이 이처럼 많은 사람들을 몰살시킬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가 청부한 대상은 엄연히 황태자에 국한된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한 현실로 다가왔다. 공작은 이제 야망실현이 물거품이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실감해야 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은 왕녀와 기사들의 목숨 값은 아무래도 내가 죄다 뒤집어쓰겠군.' 지금 그에게 닥친 최대의 과제는 이 자리를 무사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휘하의 듀크 나이츠가 대부분 이 자리에 운집해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크로센 기사단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대로 접전을 벌일 경우 듀크 나이츠의 전멸은 예정된 수순이었고 천신만고 끝에 이곳을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상황이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머리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부산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왕녀와 기사를 잃은 왕국들이 황태자의 편을 들어 군대를 파견할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라 봐야 할 테고, 오늘의 일이 퍼져나간다면 펜슬럿, 테제로스, 테르비아도 적이 될 공산이 크다. 미치겠군. 상황이 하루아침에 돌변해 버리다니…….' 비록 그가 크로센 제국 정규 사단의 지휘관들을 모조리 장악하고 있다고는 하나 승산을 섣불리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사실이 소리소문 없이 퍼져나간다면 중간 부대장들이나 병사들이 이탈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가 장악한 사단장들의 지휘력과 통솔력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그 이탈을 모두 막을 수는 없다. 가장 중요한 명분이 없기 때문에 군대의 사기 역시 바닥을 칠 것이 분명했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가타부타 말도 없이 침묵을 지키자 윌리엄스 후작의 눈이 쭉 찢어졌다. "이런 가증스런……. 네놈에 대한 단죄를 행하겠다. 우리가 못한다면 하늘이 심판할 것이다. 페르슈타인." 그 말을 들은 듀크 나이츠 부대장 중 한 명이 질 수 없다는 듯 앞으로 나왔다. "섣불리 단정하지 마시오. 공작 전하께서 그러셨다는 증거가 도대체 어디에 있소?" 그 말에 대한 대답은 하늘에서 들려왔다. "증거가 필요한가?" 사람들의 시선은 또다시 하늘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드래곤의 손위에 버티고 서 있는 두 팔이 없는 인간 한 명의 모습을……. 드래곤은 심드렁한 말투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자는 바로 나에게 왔던 페르슈타인의 심복이다. 듀크 나이츠의 일원으로 이름이 모리스라 하더군. 제법 용의주도하게 감춰놓았지만 어림없지. 그는 이미 정신마법에 걸려 나의 노예가 된 상태니까. 그렇지 않으냐 모리스?" 드래곤의 손위에 서서 까마득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모리스는 추호도 겁을 먹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주인님. 전 분명히 페르슈타인의 명령을 받고 주인님의 레어에 파견되었습니다." "놈이 나에게 한 청부의 내용이 뭐였지?" 모리스의 대답에는 추호도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것은 바로 크로센 제국의 드비어스 황태자를 살해하라는 청부였습니다. 페르슈타인은 그 대가로 많은 양의 황금을 약속했습니다." "좋아." 대답이 마음에 든 듯 베르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페르슈타인 공작은 또다시 눈앞이 캄캄해져야 했다. 드래곤은 말 그대로 자신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함정에 빠뜨린 것이다. '이제 상황이 끝났군. 도저히 해명할 도리가 없으니…….' 윌리엄스 후작 이하 크로센 기사단원들의 눈동자에 서린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죽일 놈!" 그와 대조적으로 듀크 나이츠는 하나같이 맥이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마음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지만 그래도 사기가 떨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명분이 가진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조금 뒤 벌어질 결과를 계산해보던 페르슈타인 공작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판사판이로군. 하지만 후회는 없다.' 검을 뽑아든 크로센 기사단원들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듀크 나이츠의 기사들 역시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순간 외마디 음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음성이 드래곤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의 귀에 똑똑히 울려 퍼졌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여전히 음흉하구나. 베르키스." 그곳에는 한 사람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검은 로브를 걸친 평범한 용모의 늙은이. 바로 데이몬이었다. 그가 마침내 이곳에 도착해서 베르키스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베르키스를 노려보는 데이몬의 눈빛은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스승과 맥밀란을 처참하게 죽였으며 자신을 다프네와 생이별을 하게 만든 당사자가 바로 베르키스였다. 노스우드 결전에서 사로잡힌 이후 베르키스에게 겪었던 각종 고문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무려 오백 년 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아오던 상대가 마침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허공에 뜬 채 중앙광장 쪽으로 다가가고 있는 데이몬의 얼굴에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복수하고 말겠다는 다짐이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베르키스 역시 분노의 광망을 떠올렸다. " 네놈이로군." "………." "레어를 경비하는 리치의 몸으로 인간의 몸에 빙의하여 도망친 것도 모자라서 감히 지크레이트를 죽이고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훔쳐 달아난 가증스러운 놈!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데이몬도 그에 맞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헛소리. 네놈은 날 강제로 리치로 만들어 레어를 지키게 했다. 그런데 내가 어째서 너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지? 한 마디로 어림없는 소리다." "………." "인크레시아는 500년 동안 네놈에게 봉사한 데 대한 간소한 대가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데이몬은 타는 듯한 눈초리를 옆으로 돌렸다. 그의 눈에 페르슈타인 공작이라 짐작되는 자가 넋이 빠진 듯 멍하니 서 있는 장면이 들어왔다. 그는 내심 혀를 찼다. '쯔쯔. 감히 드래곤에게 살인을 청부하다니……. 어리석은 작자.' 기껏해야 백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수천 년을 살아온 에인션트 급 드래곤을 이용하려 한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어떻게 해서든 그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놔둔다면 아르카디아 대륙은 두 패로 나뉘어 치열한 전쟁을 치를 것이 분명했고 페르슈타인 공작이 가진 방대한 전력을 감안한다면 그 피해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아르카디아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로. 그러니 데이몬으로써는 어떻게 해서든 일을 수습해야 했다. 아르카디아의 전력이 고스란히 보존되어야만 드래곤과 오크 연합군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공작의 죄를 부득이 내가 대신 덮어써야겠군.' 생각을 정리한 데이몬은 타는 듯한 눈초리를 베르키스에게로 돌렸다. "세인들은 말하지. 드래곤은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 존재라고……. 하지만 그것은 말짱 헛소리야. 내가 겪어본 바에 의하면 너는 인간보다도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하는 드래곤이더군." 듣고 있는 베르키스로써는 오직 황당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무슨 소리지?" "네놈은 5백년 전에도 이런 수작으로 수많은 왕국들 사이를 이간질했다. 그리하여 그들을 결국 깡그리 파탄시켰지. 5백년 전 종족전쟁에 참가했던 나는 그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다." "………." "네놈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네 손위에 앉아 있는 모리스가 이미 나의 정신마법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뚱딴지같은 말이었기에 베르키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군." 데이몬은 때를 놓치지 않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부정하지 마라. 베르키스. 난 이미 500년 동안이나 너란 놈을 겪어온 몸이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음성증폭마법에 의해 그의 음성은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귀에 똑똑히 들리고 있었다. "이제 모든 사실을 밝히겠다. 사실 모리스로 하여금 드래곤에게 황태자의 살인청부를 넣은 당사자는 페르슈타인 공작이 아니라 나다. 바로 내가 꾸민 일이란 말이다." 사람들은 일시에 조용해졌다. 드래곤이 나타나서 페르슈타인 공작을 궁지에 몰아넣은 데 이어 난데없이 나타난 마법사가 또다시 정황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드래곤의 말대로라면 그는 500년 전 트루베니아에서 벌어진 종족전쟁에 참가했다가 드래곤에 생포된 뒤, 리치가 되어 레어를 경비하다가 탈출한 존재였다.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익히 알고 있겠지만 난 드래곤 사냥을 도맡아 하는 카심 용병단의 흑마법사다. 그리고 이미 오래 전부터 페르슈타인 공작과 손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서 밝히는 바다. 드래곤에 대한 복수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권력자의 조력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공작과 나 사이의 합작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데이몬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베르키스 역시 재미있다는 듯한 눈치였다. 마치 하찮은 벌레의 발악을 감상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베르키스가 잠자코 있는 가운데 데이몬의 설명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난 지금까지 벌써 여러 번이나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간청을 해왔다. 그것은 바로 저 가증스런 베르키스 놈을 이리로 유인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물론 그것을 위해선 반드시 황태자에 대한 살인을 청부할 수밖에 없었지. 그러나 페르슈타인 공작은 매정하게도 내 요청을 번번이 거절했다. 때문에 나는 결국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손을 뻗어 드래곤의 손위에 서 있는 모리스를 가리켰다. "난 폴리모프를 이용해서 페르슈타인 공작으로 변장한 뒤 모리스에게 명령을 내렸다. 트루베니아로 건너가서 베르키스에게 황태자에 대한 살인청부를 하라고 말이다. 그 과정에서 몇 가지 정신마법을 병행해서 펼쳤기에 모리스는 나에게 완전히 세뇌된 다음 트루베니아로 건너갔다. 익히 알다시피 페르슈타인 공작의 수하들은 충성심 하나는 뛰어나지." 말을 마친 데이몬은 베르키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모리스를 보내고 난 뒤 아차 싶었다. 드래곤은 자타가 공인하는 정신마법의 전문가. 비록 내가 9서클의 마스터로써 몇 가지 정신마법을 익혔지만 드래곤을 따라잡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난 임무가 이미 실패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을 마친 데이몬은 손을 뻗어 베르키스를 가리켰다. "저 가증스러운 놈은 여기에 얽힌 비밀을 알아내고도 아르카디아로 건너왔다. 그리고 영문을 모르는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죄를 모조리 덮어씌웠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상상이 가는가? 생각해 보라. 저놈이 어찌하여 다른 사람도 아닌 왕녀들만 골라서 살해했는지. 그것은 바로 인간들을 서로 상잔시키기 위한 놈의 간교한 책략이며 이미 트루베니아에서 셀 수도 없이 자행해 온 만행 중 하나이다. 놈의 계략이 성공한다면 왕녀를 잃은 왕국들이 페르슈타인 공작을 적대시 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난 이미 저 가증스러운 놈의 수작을 부리는 것을 셀 수도 없이 겪어 보았다. 놈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세상에서 인간이란 종족의 씨를 말리는 것이 바로 저놈의 목적이다. 이미 놈은 트루베니아에서는 성공했다. 그리고 놈은 또다시 아르카디아에서 특유의 수작을 부려 인간의 씨를 말리려 한다. 그 이유가 무언지 아느냐?" 사람들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물론 그들이 이유를 알 턱이 없었다. 데이몬의 일장 연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놈은 재미로 이 일을 벌이고 있다. 다시 말해 유희란 뜻이지. 인간이란 종족을 말살시킨다는 계획은 놈에겐 단순한 유희에 불과하다. 저놈에게 있어 인간이란 아무 생각 없이 밟아 죽일 수 있는 개미만도 못한 존재이지." 말을 마친 데이몬은 서로 대치하고 있는 크로센 기사단과 듀크 나이츠를 쏘아보았다. "놈의 책략에 말려 들어가 종족 전체를 멸망시키고 싶거든 지금 즉시 싸움을 시작하라. 놈은 그 장면을 즐겁게 감상하며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역시 인간이란 가지고 놀기 딱 좋은 생물임에 틀림없어.' 알겠는가?" 대치하고 있던 크로센 기사단과 듀크 나이츠는 슬그머니 검을 내렸다. 서로 싸워 상잔하는 것이 의심할 나위없이 드래곤에게 도움을 주는 일임을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데이몬을 쳐다보는 윌리엄스 후작의 눈동자는 분노로 인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감히 네놈이 황태자 전하의 살해를 청부하다니……." 데이몬은 그 모습을 본체만체 하며 시선을 돌렸다. 일단 페르슈타인 공작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는데는 성공한 셈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베르키스가 재미있다는 듯 데이몬을 응시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추론이었어." "………." "그토록 짧은 시간 내에 지어낸 스토리치고는 상당히 괜찮군. 마음에 들어. 이제 난 확실하게 악역으로 전락한 셈인가? 네 말에 상당수 거짓이 섞여 있지만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다. 인간 따위의 벌레에게 해명한다는 것 자체가 드래곤에겐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니까." 회심의 미소를 지은 데이몬은 지지 않겠다는 듯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쨌거나 네놈을 유인하는데 성공했으니 이제 난 네 놈에 대한 사냥을 시작하겠다. 네놈은 그토록 하찮게 여겼던 인간으로부터 톡톡히 쓴맛을 보게 될 것이다." "재미있군. 쓴맛을 어떻게 보여주려는지 말이야." 데이몬을 노려보는 베르키스의 눈동자에서 서서히 살기가 번져가고 있었다. "네놈의 손에 러셀런트가 죽었을 때 조금 놀랐지. 하지만 날 러셀런트 정도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란 점을 밝힌다. 이제부터 너에게 에인션트 급 드래곤의 진정한 파괴력을 보여주겠다." 말을 마친 베르키스는 슬며시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데이몬은 바짝 긴장하며 대응할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인크레시아는 이미 그의 옆에서 활짝 열린 상태였다. 두 눈에서 광망을 활활 내뿜던 베르키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비운의 사내 모리스가 멍하니 서 있었다. 한때 죽음까지도 감수하며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충성을 바쳤던 그였지만 베르키스의 정신마법에 사로잡힌 이후 그는 완벽한 드래곤의 노예로 전락한 상태였다. 베르키스의 나지막한 음성이 곧 그의 귀에 울려 퍼졌다. "이제 네가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났군. 수고했다. 모리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주인님.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렇다면 네가 해야 할 바를 잘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모리스는 아무 머뭇거림 없이 몸을 날렸다.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뛰어내린 모리스의 육신은 가속력이 붙어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퍽. 인간 노예를 간단히 처리해버린 베르키스는 무표정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럼 어디 한 번 네 밑천을 구경해 볼까?" "그거야 어렵지 않지." 데이몬은 기다렸다는 듯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것은 바로 인크레시아 속의 데스 나이트에게 전하는 부르짖음이었다. "모두들 잘 들었겠지? 철천지원수가 바로 앞에 있다. 노스우드 결전에서 우리에게 처절한 패배를 안겼고 셀 수 없는 동포들을 학살했던, 도저히 한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는 원수 말이다. 놈에 의해 이승을 하직했던 전우와 가족, 그리고 형제들이 저승에서 이 순간을 굽어보고 있다. 알겠는가?" 기다렸다는 듯 인크레시아 속에서 걸쭉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후후후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혹시라도 짐작할 수 있겠나?" "기사로써의 영예를 깡그리 버리고 저주받은 데스 나이트가 되어야 했던 이유는 바로 이 순간을 맞기 위해서였다. 이제 묵은 숙원을 남김없이 떨쳐버려야 할 때다." "데이몬! 너에게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감사를 표한다. 우리에게 이런 기회를 준 데 대해서 말이다." "하찮은 벌레라……. 죽지 못해 꼭지가 돌아버린 벌레의 발악이 과연 어떤 것인지 네놈에게 단단히 각인시켜 주겠다." 한 마디씩 말을 던진 데스 나이트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투구 눈구멍에서는 소름끼치는 광망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데스 나이트가 되어서까지 복수하겠다고 마음먹은 당사자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인크레시아 속의 마법무구로 빈틈없이 무장한 데스 나이트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챵. 네 자루의 장검이 뽑혔지만 뽑히는 소리는 단 한 번만 들려왔다. 거의 동시라 할 수 있는 순간에 뽑아들었기 때문이었다. 검신에서는 소름끼치는 묵빛 데스 블레이드가 자욱하게 뿜어져 나왔다. 데스 나이트들이 앞에 포진하자 데이몬의 말이 이어졌다. "두 번째를 소개하지. 보다시피 하찮은 벌레의 노예가 되어버린 가련한 드래곤들이다. 한때 위대하다 불린 종족이었지만 저들은 이제 벌레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여 한때 동족이었던 너를 아무 거리낌없이 공격할 것이다." 데이몬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본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검게 빛나는 동체를 가진 러셀런트는 인크레시아에서 나오자마자 거세게 포효를 했다. 콰루루루. 뒤이어 따라나온 지크레이트도 질 수 없다는 듯이 포효성을 내질렀다. 한 차례 기성을 내지른 본 드래곤들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데이몬의 양옆에 자리를 잡았다. 마치 주인의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이 전의를 활활 불태우며. 데이몬은 무표정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카심 용병단의 대원들이 잔뜩 긴장한 채 베르키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 역시 인크레시아 속의 마법무구로 빈틈없이 무장한 상태였다. 대 마법갑옷은 기본이었고 무기 역시 명품이라 하기에 추호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들은 대부분 데스 나이트들이 쓸 수 없는 무기들이었다. 오르하리콘이 포함되어 있거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말이다. 데이몬의 소개가 또다시 이어졌다. "이들은 바로 내 동료들이다. 하나같이 네놈의 비늘을 간단히 꿰뚫을 수 있는 실력자들이지. 만만히 보다간 큰 코 다칠 것을 보증한다." 데이몬의 소개가 끝나자 베르키스가 냉소를 쳤다. "조무래기들을 제법 많이 모았구나. 하지만 헛일이야. 왜냐하면……." 베르키스의 손위에서 별안간 불덩어리가 솟구쳤다. 푸학. 500년 전 종족전쟁 당시 맹위를 떨쳤으며 헤아릴 수 없는 마법사와 병사들을 한 줌 재로 만들어버렸던 바로 그 공포의 화염마법이었다. 점점 커져 가는 불덩어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라나고 있었다. "드래곤은 지상 최강의 종족. 이제부터 너희들에게 벌레들의 발악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똑똑히 각인시켜 주겠다." 데이몬은 한껏 긴장했다. 9서클의 마스터임에도 불구하고 베르키스가 펼치는 마법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군. 헬 파이어는 분명히 아닌데? 그렇다고 파이어 블래스터로 생각할 수도 없어. 형태를 봐서는 파이어 볼과 흡사한데 위력을 계산해보니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고…….' 어쨌거나 드래곤이 전개하는 것이니 위력이 만만치 않다는 점은 분명했다. 500년 전 이 공포의 마법으로 인해 그 얼마나 많은 트루베니아의 병사들이 몰살당했던가? 데이몬은 한껏 긴장하며 마법방해를 할 채비를 단단히 갖췄다. [다크메이지] 10장 마룡 베르키스 281회. 공격을 막아내거나 피해낸 뒤에는 데스 나이트들의 반격이 가차없이 시작된다. 본 드래곤의 등에 탑승한 채 날아오른 데스 나이트들은 베르키스와 어우러져 치열한 공중전을 벌일 것이다. 데이몬은 미리 세워놓은 계획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가장 실력이 뛰어난 헬버트론이 나와 함께 지크레이트에 탑승하여 놈의 주의를 끈다. 나머지 세 녀석은 러셀런트와 힘을 모아 놈을 양쪽에서 협공한다. 본 드래곤의 속도가 빠르니 날아오르기만 한다면 섣불리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 동안 최선을 다해 놈의 마법이 데스 나이트에게 격중되는 것을 막는다. 목표는 오로지 날개. 놈의 날개를 집중공격해서 기필코 바닥에 떨어뜨려야 한다. 그렇다면 카심과 미첼을 비롯한 대원들이 즉각 공격을 감행할 테지. 모두가 팔라딘이니 베르키스의 비늘을 못 뚫을 리가 없다. 그들이 공격을 퍼붓는 사이 데스 나이트들이 마무리를 맡는다면……. 후. 부디 계획이 성공해야 할 텐데…….' 데이몬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 베르키스의 손에 들린 불덩어리가 드디어 성장을 멈췄다. 엄청난 크기로 자라난 불덩어리는 대충 살펴보아도 직경이 10미터는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였다. 불덩어리의 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붉은 색이 점점 옅어지며 백색으로 변한 불덩어리는 그것도 모자란다는 듯 청백색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헬 파이어에서나 볼 수 있는 초고온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육신 정도는 닿자마자 연기로 만들어버릴 정도의 초고온.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데이몬의 얼굴에는 초조감이 서리고 있었다. '일단 저 불덩어리가 화염계 마법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데이몬은 마법 방해를 위해 물과 얼음의 속성을 가진 마나를 최대한 끌어 모은 상태였다. 바람과 나무의 속성을 지닌 마나는 도리어 화염계 마법의 위력을 더해주지만 물과 얼음의 속성은 화염계 마법을 중화시키는 효과를 보인다. 옆에 자리잡은 본 드래곤들이 충분한 프로스트 속성의 마나를 제공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틀림없이 마법을 방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화르르르. 그들이 숨죽이고 있는 사이 불덩어리는 완연한 청색으로 변해버렸다. 시릴 듯 푸른빛을 내뿜는 불덩어리는 베르키스의 손위에서 쏘아질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 그럼 어디 내 공격을 한 번 받아보거라." 베르키스의 나지막한 일성과 함께 불덩어리가 사정없이 공간을 갈랐다. 콰콰콰콰. 데이몬은 바짝 긴장한 채 재배열해놓은 마나를 집중시켰다. "헉." 그의 입에서 다급한 헛바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베르키스의 공격이 이쪽으로 날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퍼런 불덩어리는 정확히 황태자가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황태자 주변에 포진하고 있던 경호기사들의 안색이 시퍼렇게 죽어들었다. "받은 청부는 먼저 마쳐야겠지?" 하늘 높은 곳에서 울려 퍼진 베르키스의 이죽거림에 데이몬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황태자가 이대로 세상을 하직한다면 힘들게 꾸며놓은 계략이 그만 물거품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해 자신은 물론이었고, 자신과 손을 잡았다고 알려진 페르슈타인 공작까지도 황태자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판국이었다. 전쟁이 일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데이몬의 입장으론 어떤 일이 있어도 같은 인간끼리의 상잔을 막아야 했다. 때문에 그는 사력을 다해 마나를 집중시켰다. 마법을 해제시키거나 아니면 진로를 바꿔 놓으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러나 지금껏 드래곤의 마법을 여러 번 차단시켰던 마법방해가 이번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나의 집중도를 한껏 높였어도 마찬가지였다. 불덩어리는 데이몬의 마법방해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도리어 데이몬의 마나를 빨아들여 더욱 크기가 커져가고 있었다.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데이몬의 얼굴에 절박함이 서렸다. "어, 어찌 이런 일이……." 순간 베르키스의 이죽거림이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마법방해라……. 기발한 착상이지만 통하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해츨링 시절 즐겨 가지고 놀았던 것이 마법을 방해하는 방법이었지." "이익." 질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질끈 깨문 데이몬은 마나를 더욱 집중시켰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덩어리는 점점 커져가기만 했다. "헛수고야. 네놈은 그것이 무슨 마법인줄 아느냐?" "………." "그것은 바로 파이어 볼이다. 물론 마나 배열이 조금 틀리지. 1에다 1을 더한 뒤, 그의 5배수만큼 재배열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알겠는가?" "뭐, 뭐라고?"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그토록 가공한 위력을 보인 마법이 단순한 파이어 볼이라니……. 그것보다도 데이몬을 더 놀라게 했던 것은 바로 베르키스의 뒷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2의 5배수만큼 마나가 재배열되었다면 위력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2, 4, 16, 256, 세상에……." 데이몬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 정도 횟수로 재배열된 마법이라면 마법 방해가 통할 리가 없었다. 그가 집중시키는 마나는 도리어 화염마법의 위력을 증가시켜줄 뿐이었다. 그 정도 마나 배열이라면 마나의 속성을 완전히 바꾸고도 남았으니까. 그러나 놀라고만 있을 상황이 아니라서 데이몬은 사력을 다해 마음을 추슬렀다. 이제 그에게 남은 패는 단 하나 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고함을 버럭 질렀다. "러셀런트. 육탄으로라도 황태자를 보호하라." 러셀런트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이미 화염 마법이 황태자 일행의 머리 위에 거의 육박한 상황이었다. 데이몬은 지금 러셀런트에 펼쳐놓은 대마법 방어장 하나만을 믿고 있었다. 그의 계산이라면 러셀런트의 마법 방어장은 9서클의 마법 한 두 방쯤은 능히 막아낼 수 있을 터였다. 콰루루루. 러셀런트는 기성을 지르며 화염마법과 황태자 사이를 파고 들어갔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마, 막아라." 경호 기사들이 질린 기색으로 검을 들이댔지만 러셀런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데이몬은 조마조마한 기색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육중한 동체가 황태자 일행을 완벽히 덮는 순간 공포의 화염마법이 러셀런트의 등판에 정확히 작렬했다. 콰콰콰쾅. 지축을 뒤흔드는 듯한 폭발과 함께 자욱한 연기가 사방을 뒤덮었다. 폭발과 함께 퍼져 나온 충격파로 인해 중앙광장은 또 한 번 몸살을 겪어야 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에어 블래스트를 전개했다. 러셀런트가 무사한 것만 확인하면 즉시 반격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럴 수가……." 데이몬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에어 블레스트에 의해 연기가 걷혀진 뒤 드러난 장면은 참혹 그 자체였다. 놀랍게도 본 드래곤 러셀런트는 몸이 반이나 날아간 상태였다. 그 강하디 강한 드래곤 본으로 구성된 본 드래곤이 아예 박살이 나 있는 것이다. 대마법 방어장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러셀런트는 모든 힘을 소진한 듯 뼈만 남은 대가리를 힘없이 바닥에 박고 있었다. 쿵. 길게 늘어진 러셀런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허사였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비밀병기가 베르키스의 마법 한 방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데이몬은 말을 잊었다. 9서클의 마법까지 견딜 수 있으리라 자부했던 러셀런트가 아니었던가? 그런 본 드래곤이 베르키스가 전개한 단 한 방의 마법도 견뎌내지 못하다니……. 한 가지 다행이라 할 수 있는 것은 황태자가 용케 목숨을 부지했다는 점이었다. 전신이 검댕 투성이가 된 경호기사들이 비틀거리며 러셀런트의 동체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황태자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 나오는 것을 보니 그래도 러셀런트는 임무를 완수한 셈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드래곤과 공중전을 벌일 가장 강력한 비밀병기가 무력화되어 버렸으니 데이몬으로썬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귀로 베르키스의 이죽거림이 파고들었다. "벌레가 펼쳐놓은 대마법 방어장, 그것이 드래곤에게 통할 줄 알았나?" "이익." 입술을 질끈 깨문 데이몬이 벼락같이 몸을 돌렸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한가지, 데스 나이트 전원을 남아있는 본 드래곤 지크레이트에 태워 날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의중을 알아차린 데스 나이트들이 번개같이 지크레이트의 등에 탑승했다. 콰루루루루. 지크레이트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르려는 순간 또다시 베르키스의 냉랭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내 허락 없이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뭔가가 허공에서 쏜살같이 떨어져 내렸다. 은빛을 띠고 있는 거대한 물체는 정확히 지크레이트를 목표로 강하하고 있었다. 제대로 식별할 수도 없는 빠른 속도였기에 그것을 확인한 데스 나이트들은 혼비백산했다. "피, 피해라." 그들이 몸을 날리자마자 은빛 물체가 막 날아오르려던 지크레이트의 등판에 정통으로 내려꽂혔다. 우지직 뭔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지크레이트의 동체가 휘청했다. 강하디 강한 드래곤 본으로 된 등판에 금이 갔다. 큰 충격을 받은 지크레이트는 그만 비행능력을 잃어버렸다. 본 드래곤의 거대한 동체는 곧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쿵. 자욱한 먼지 구름이 풀풀 피어났다. 바닥에 사정없이 쑤셔 박힌 지크레이트는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높은 고공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리 큰 충격을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미 의문의 은빛 물체가 지크레이트의 날개를 단단히 부여잡고 있는 상태였다. 콰직. 연신 버둥거리던 왼쪽 날개가 지크레이트의 동체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어 오른쪽 날개마저 사정없이 뜯겨졌다. 사람들은 그때서야 은빛 물체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 세상에……." 보고 있던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은빛 물체의 정체는 신장이 6미터가 넘어 보이는 거대한 강철제의 거인이었다. 벌거벗은 근육질 남성의 형상을 하고 있는 강철 거인은 한 손에는 거대한 방패를 다른 손에는 그레이트 액스를 들고 있었다. 아니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손과 팔뚝에 일체형으로 붙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았다. 기사의 투구 형상으로 조각된 머리통에서 기성이 흘러나왔다. 캬오. 강철 거인은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그레이트 액스를 휘둘러 아래 깔린 지크레이트를 내려찍기 시작했다. 족히 몇 톤이 되어 보이는 도끼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드래곤 본 파편이 자욱하게 튀어 올랐다. 크롸락. 지크레이트가 결사적으로 몸을 버둥댔지만 빠져나올 순 없었다. 엄청난 무게의 강철 거인이 목과 몸통 부분을 지긋이 눌러 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버둥대는 지크레이트의 동체는 강철 거인의 도끼에 의해 서서히 분해되고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아이언 골렘이로군." 이를 악문 데이몬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지크레이트가 더 이상 조각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서둘러라. 가장 먼저 저 아이언 골렘을 상대해야 한다." 데이몬의 지시가 아니더라도 데스 나이트들은 이미 아이언 골렘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지크레이트만은 살려야 했다. 지금 상황에서 지크레이트는 그들이 공중전을 벌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채 아이언 골렘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또다시 무언가가 그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슈르르르 쿵. 데스 나이트들이 다급하게 몸을 날렸고 뭔가 묵직한 것들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이 있던 자리에 사정없이 작렬했다. 그것들은 정확히 아이언 골렘과 데스 나이트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데스 나이트들이 잠시 주춤하자 그것들은 아이언 골렘과 마찬가지로 잔뜩 웅크리고 있던 팔다리를 쭉 뻗었다. 조금 뒤 모습을 드러낸 것은 키가 4.5미터 가량 되는 거대한 청동거인들이었다. 정확히 열 두 기의 청동거인들이 데스 나이트들의 앞을 빈틈없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캬오오. 청동거인들은 기성을 한 번 내지른 뒤 지체 없이 데스 나이트들에게 달려들었다. 크기만 조금 작았을 뿐 생김새는 아이언 골렘과 동일한 형상이었다. 다만 아이언 골렘과는 달리 거대한 장검을 들고 있었는데 움직이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웠고 또한 빨랐다. 한 마디로 스톤 골렘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데스 나이트 넷은 곧 브론즈 골렘 열 둘과 어우러져 치열한 격투를 벌였다. 하늘에서 베르키스의 보충 설명이 들려왔다. "소개하지. 내 레어를 경비하는 브론즈 골렘들이다. 데스 나이트에겐 적절한 상대가 될 것이라 자부한다. 데스 나이트 하나에 브론즈 골렘 셋을 붙였으니 오래지 않아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친 베르키스는 잔뜩 긴장하고 있는 카심 용병단원들을 쳐다보았다. "너희들에겐 애당초 리치들을 배정해 놓았다. 하지만 너희들이 인크레시아 속에서 훔쳐 입은 대마법 방어갑옷을 보니 생각이 조금 바꿨다. 네놈들에게 브론즈 골렘 다섯을 배정해 주겠다. 물론 리치도 가세할 테니 열심히 싸워보아라." 말이 끝나자마자 베르키스의 옆 공간이 활짝 열렸다. 그곳에서 청동빛 덩어리 다섯이 쏜살같이 내려꽂혔다. 쿵. 바닥에 작렬한 덩어리들은 또다시 브론즈 골렘으로 모습을 바꾸어 다급하게 몸을 날리는 카심 용병단원들에게로 짓쳐 들어갔다. 사람 키의 두 배가 넘는 장검이 어지럽게 날아들자 카심을 비롯한 용병단원들은 정신 없이 몸을 날려야 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브론즈 골렘 뿐만이 아니었다. 무려 30여 기에 달하는 리치가 열린 공간을 통해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인크레시아와 형태가 동일한 것을 보니 골렘과 리치를 효과적으로 수송하기 위해 베르키스가 만들어낸 제 2의 마법보고 같았다. 리치들은 단 한 명만 남긴 채 대지를 향해 강하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데스 나이트와 카심 용병단원들에게 마법공격을 퍼부으려는 의도 같았다. 직접적으로 격투를 벌이는 브론즈 골렘의 파괴력에다 리치의 지원사격이 가미된다면 상상도 못할 위력을 발휘할 것이 분명했다. "스, 승산이 없어." 데이몬은 맥이 탁 풀렸다. 베르키스가 이 정도로 엄청난 지원병력을 데리고 왔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1대 다수로 싸우더라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전력의 우위는 오히려 저쪽에서 잡고 있었다. 상황은 말 그대로 절망적이었다. 몸의 반이 날아간 러셀런트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지크레이트는 한창 만신창이가 되고 있었다. 가루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듯 아이언 골렘은 사정없이 도끼를 휘둘러 지크레이트의 몸뚱이를 짓이겼다. 퍽, 퍽. 그러나 데이몬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료들을 지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베르키스의 가공한 마법공격이 언제 날아들지 몰랐으므로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군. 이제 네놈을 처치해서 인크레시아를 회수할 차례인가?" 데이몬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리 순순히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베르키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절망감이 번져가고 있었다. 전력 차를 감안해보면 이것은 이미 끝난 승부나 다름없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가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과제였다. 데스 나이트들은 브론즈 골렘들과 우열을 가늠할 수 없는 혈전을 펼치고 있었다. 반면 용병대원들은 정신 없이 피하기에 바빴다. 그나마 실력이 뛰어난 미첼과 카심, 제럴드만이 간간이 반격을 퍼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 주위로 리치의 공격마법이 정신 없이 작렬했다. 번쩍, 콰쾅. 만약 마법 갑옷을 입지 않았다면 그들은 고스란히 시체로 변해버렸을 터였다. 상황을 대충 둘러본 데이몬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에인션트 급 드래곤과의 1대 1 대결이라. 승산을 생각해볼 필요가 없겠군.' 베르키스 주변으로 마나가 재배열되는 기척을 느낀 데이몬은 질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악물었다. "좋다. 어디 한 번 해 보자." 그를 향해 각종 공격마법이 집중되었다. 하나 하나가 고위급이 아닌 것이 없었고 숫자 역시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데이몬은 결코 주눅들지 않았다. 복수심으로 인해 그의 눈빛은 맹렬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콰르르르. 쾅! 브론즈 골렘 열 둘과 데스 나이트들이 벌이는 격투는 한 마디로 장관이었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몸을 날리는 데스 나이트들에게서 무시무시한 공격들이 퍼부어졌다. 검술의 정화라고 표현할 수 있는 고난도 기술들이 연속적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하는 브론즈 골렘들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스톤 골렘보다 적어도 세 배가 넘는 빠르기와 거대한 덩치, 그리고 육중한 무기를 바탕으로 브론즈 골렘들은 데스 나이트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동체는 마치 버드나무와도 같은 유연성을 자랑했고 두터운 몸체와 거대한 방패는 데스 나이트들의 공격을 허용할 경우에도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게다가 3미터에 가까운 길이의 장검은 데스 나이트에게 더 없이 위협적인 무기였다. 정통으로 격중될 경우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 했기에 데스 나이트들도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스 나이트들은 엄청난 투혼을 발휘하고 있었다. 수적으로 현저한 열세에 놓였지만 그들은 약간이나마 승기를 잡고 브론즈 골렘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벌써 두 기의 브론즈 골렘들이 생명석을 파괴당해 맥없이 널브러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데스 나이트들의 눈빛은 점점 암울해져 가고 있었다. "큰일이로군." 비록 약간의 승기를 잡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다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한다면 지크레이트가 완전히 박살날 터였고 그럴 경우 베르키스를 잡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늘 높이 떠있는 베르키스에게 다가갈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데스 나이트들은 계속해서 맹공을 퍼부으며 포위망을 뚫으려 했다. 콰직. 헬버트론의 공격에 왼쪽 가슴팍이 뚫린 브론즈 골렘이 부들부들 떨며 동작을 멈췄다. 이미 브론즈 골렘의 전신에는 보기 흉한 구멍이 여기저기 뚫려 있었다. 헬버트론이 브론즈 골렘의 몸에서 생명석이 박혀 있을 만한 곳을 마구 파헤쳤기 때문이었다. 생명석이 파괴된 브론즈 골렘은 곧 기우뚱거리며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쿵. 옆에서는 사라미스가 또 하나의 브론즈 골렘을 파괴시키고 있었다. 이번 브론즈 골렘의 생명석은 오른쪽 옆구리 부분에 박혀 있었다. 쓰러진 브론즈 골렘의 몸통은 말 그대로 벌집이 되어 있었다. 싸움은 대충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우선 브론즈 골렘들의 동체에서 생명석이 박혀있는 부분은 하나같이 틀렸다. 위치가 제각각이었기 때문에 데스 나이트들은 생명석이 박혀 있음직한 부분을 깡그리 공격해야 했다. 위치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었기 때문에 파괴시키는데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데스 나이트들의 맹공에 브론즈 골렘 넷이 파괴되었고 그로 인해 철통같은 포위망의 한 곳이 뚫렸다. 그러자 헬버트론이 거침없이 돌파를 시도했다. "나머지 놈들을 맡아 줘. 내가 아이언 골렘을 상대하겠어." 하지만 헬버트론이 미처 포위망을 뚫기도 전에 하늘에서 베르키스의 음성이 천둥처럼 울려퍼졌다. "그러면 안되지. 네놈들이 생각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감안해서 병력을 더 보충하겠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소름끼치는 파공성이 들려왔다. 슈르르르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브론즈 골렘들이 강하하는 소리였다. 쾅 굉음과 함께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퍼져나갔고 그 속에서 브론즈 골렘 다섯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다크메이지] 10장 마룡 베르키스 282회. 골렘들은 막 포위망을 돌파하려는 헬버트론을 목표로 공격을 시작했다. "이런 빌어먹을……." 헬버트론은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몸을 날렸다. 아무리 그랜드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라 하더라도 브론즈 골렘의 무시무시한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넘길 순 없었다. 또다시 이어진 혈전. 그 사이 지크레이트의 동체는 아이언 골렘에 의해 계속해서 조각나고 있었다. 카심 용병단의 상태는 한 마디로 암울했다. 브론즈 골렘 다섯을 맞아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고는 있었지만 상황이 개선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미첼과 카심, 그리고 제럴드만이 브론즈 골렘에게 위협이 될 만한 공격을 이따금 가할 수 있었을 뿐 나머지는 도망 다니기에 바빴다. 비록 그들이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할 수 있는 팔라딘이라고 하나 그것만으로 브론즈 골렘의 단단한 동체를 뚫기란 역부족이었다.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은 팔라딘들이었으므로 한참동안 마나를 끌어 모아야만 위력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민첩한 브론즈 골렘들이 그럴 만한 시간을 줄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골렘을 쓰러뜨릴 수 있는 생명석의 위치를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에 대원들은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피하기만 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미첼이나 카심에게 공격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몸을 미끼로 말이다. "이크." 브론즈 골렘 가까이 접근했던 패터슨이 기겁을 하며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장검이 와서 작렬했다. 콰쾅. 잠시라도 지체했다면 살과 뼈가 한데 뒤섞인 곤죽이 되었을 뻔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패터슨의 노력으로 미첼이 마침내 빈틈을 찾아낼 수 있었다. "차앗." 낭랑한 고함소리와 함께 미첼의 장검이 쭉 뻗어졌다. 장검에는 1미터 남짓한 오러 블레이드가 맺혀 있었다. 장검은 정통으로 브론즈 골렘의 왼쪽 가슴을 파고 들어갔다. 푸슛 공격을 성공한 미첼의 얼굴에 기대감이 서렸다. "이번에는?" 하지만 기대감은 금방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곧바로 이어지는 브론즈 골렘의 맹공에 미첼은 정신 없이 몸을 날려야만 했다. "왼쪽 가슴도 아니고……. 빌어먹을. 도대체 생명석이 어디에 있는 거야?" 골렘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원천인 생명석은 고작해야 어른 주먹정도 만한 크기였다. 신장이 4.5미터가 넘는 거대한 브론즈 골렘의 동체에서 생명석이 박혀있는 부분을 찾는다는 것은 엄청나게 시간이 요하는 작업이다. 한 마디로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몸을 날리는 브론즈 골렘을 상대하며 행해야 하는 것이므로 소드 마스터인 미첼에게도 벅찬 일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콰쾅. 미첼의 몸이 갑자기 휘청했다.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등판에 강력한 위력의 마법공격이 작렬했기 때문이었다. 보나마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리치가 가한 회심의 일격일 터였다. 대마법 방어진이 새겨진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등허리를 통해 뻐근한 통증이 전해졌다. 이미 용병단원들은 리치들의 마법 공격을 무수히 허용한 상태였다. 미첼은 몸을 돌리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한 번 잡히기만 해 봐라." 불행히도 리치는 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허공에 부유하다 틈만 나면 달려들어 가차없이 마법 공격을 퍼붓는 리치들. 잡아다 잘근잘근 씹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지만 현재로써는 허공에 떠 있는 리치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다. "이크." 허공을 향해 눈을 부라리던 미첼은 다급히 몸을 굴렸다. 그가 있던 자리에 무시무시한 공격이 와서 작렬했다. 쾅. 브론즈 골렘이 딴청을 피우는 미첼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위기를 모면한 미첼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제 남은 곳은 오른 쪽 어깨뿐이다. 이번만은 반드시 네놈을 무력화시키겠다." 공격을 준비하던 미첼의 귀로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악."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다급히 고개를 돌린 미첼은 눈을 크게 떴다. "이, 이런. 비에리……." 불행히도 용병단원 중 하나인 비에리가 브론즈 골렘의 발길질에 그대로 걷어 채여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입으로 분수 같은 선혈을 토하는 것을 보니 내장이 파열된 모양이었다. 비 이상적으로 꺾여진 등뼈는 척추가 산산조각 났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아, 안 돼. 비에리……." 미첼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상대하던 브론즈 골렘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데이몬은 말 그대로 무아지경이 되어 있었다. 쉴 새없이 날아와 작렬하는 베르키스의 각종 공격마법을 실드와 블링크 따위의 마법을 번갈아 전개하며 피해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베르키스의 마법 공격은 한 마디로 피할 수 있는 방위를 완벽하게 사정거리에 두고 있었다. 한 번 공격마법을 퍼부을 때마다 피하거나 혹은 블링크가 미칠 수 있는 범위에 여러 종류의 저급 공격마법까지 동시에 퍼붓는 것이다. 만약 데이몬이 평범한 9서클의 마법사였다면 죽어도 벌써 죽었을 터였다. 블링크로 공간전이를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날아드는 라이트닝 볼트나 에너지 캐논을 평범한 마법사는 죽었다 깨어나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데이몬은 한때 초절정 고수였던 몸. 그 때 익혔던 경험과 반사신경 덕택에 데이몬은 벌써 여러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상태였다. "정말 미꾸라지 같은 녀석이로군. 어디 얼마나 피할 수 있는지 한 번 보자." 베르키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아드는 가공한 공격마법. 데이몬은 숨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몸을 날려야 했다. 콰콰쾅. 단 한 번이라도 적중될 경우 그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데이몬은 지금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장기였던 마법 방해는 고사하고 단 한 번의 반격조차 시도할 수 없는 것이 데이몬의 현재 상태였다. 9서클과 10서클, 그것이 이토록 차이가 나리라곤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던 데이몬이었다. 절망감으로 인해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젠장. 잠깐이라도 놈의 신경을 분산시킬 수 있다면……." 하지만 데이몬은 생각을 계속 이어나갈 수 없었다. 그의 몸이 허공에서 갑자기 픽 꺼져버렸고 그가 있던 자리는 공격 마법이 작렬하여 대폭발을 일으켰다. 콰콰쾅. 블링크로 공간전이에 성공한 데이몬은 나타나자마자 다시 바닥에 뒹굴어야 했다. 기다렸다는 듯 날아드는 에너지 캐논이 그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날아드는 공격마법을 피해내기 위해 데이몬은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입을 딱 벌린 채 결투를 감상하고 있는 존재는 인간뿐만이 아니었다. 카트로이 역시 넋이 빠진 듯 정신 없이 결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벌어지는 혈투는 그에겐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트, 트루베니아의 드래곤이 저토록 강하다니……." 인간과 많이 싸워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저토록 강할 줄은 몰랐다. 카트로이는 설사 아르카디아의 드래곤 로드라도 저 레드 드래곤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조금 전, 싸움이 시작될 무렵 카트로이는 약속대로 옆으로 빠졌다. "불쌍한 레드 드래곤 하나가 또 생을 마감하겠군. 약속대로 난 방해하지 않겠다. 사냥이 끝난 뒤 다시 찾아오겠다." 에인션트 급으로 보이는 레드 드래곤이었지만 카트로이는 그가 결코 카심 용병단의 적수가 될 수 없을 것으로 단정했다. 본 드래곤 둘과 데스 나이트 넷, 그리고 얄미운 데이몬 녀석의 실력이라면 제 아무리 에인션트 드래곤이라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냥 당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오산이었다. 마법보고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는 막강한 가디언들……. 가디언 하나 하나가 카트로이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괴물들이었다. 본 드래곤 지크레이트를 한창 박살내고 있는 아이언 골렘을 비롯해서 그토록 강력하던 데스 나이트들와 어우러져 당당히 맞서 싸우고 있는 브론즈 골렘 무리. 게다가 6서클이 넘어가는 리치들의 막강한 지원사격……. 카트로이의 입에서 연신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 레어의 아이스 골렘을 깡그리 끌고 오더라도 감히 브론즈 골렘 열을 상대할 수 없겠군. 120기 모두를 투입하더라도 말이야." 브론즈 골렘들의 속도는 그 정도로 빨랐다. 덩치가 훨씬 크지만 느려터진 아이스 골렘 따위가 애당초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카트로이의 눈에 갈등이 서렸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군. 이대로 있어야 하나? 아니면 카심 용병단을 도와야 하나?" 태초부터 내려오는 드래곤의 임무는 바로 중도의 균형을 지키는 것이다. 카심 용병단원들은 이미 그와 1년 가까이 함께 지낸 동료들이었다. 비록 데이몬이란 인간 하나는 밉살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나머지 용병들에게만은 어느 정도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인간인 그들에게 동료애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카트로이는 연신 어쩔 줄 몰라했다. "균형을 맞추려면 용병들을 도와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동족을 배신하는 꼴이 된다." 그게 바로 카트로이가 갈등하는 이유였다. 동료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편에 서느냐, 아니면 같은 종족의 편을 들어 상황을 관망하느냐 하는 것이 현재 카트로이가 처한 딜레마였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오래지 않아 내려졌다. 용병 한 명이 브론즈 골렘의 공격에 적중되어 훨훨 날아가는 순간 카트로이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래. 내가 가세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한다." 카트로이는 즉시 마나를 끌어 모았다. 비록 그가 가세하더라도 얼마만큼 도움이 될지 장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마냥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콰콰콰콰. 마나가 급속히 재배열되며 그 자리에 거대한 화이트 드래곤의 모습이 나타났다. 본 모습으로 돌아온 카트로이는 즉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슈우욱. 그는 허공에 떠 있는 베르키스를 향해 곧장 날아가기 시작했다. "응?" 한창 데이몬에게 공격을 퍼붓고 있던 베르키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아까부터 싸움을 지켜보던 동족 하나가 느닷없이 본모습으로 폴리모프하여 자신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미 동족의 존재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베르키스는 그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유희중인 동족이려니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화이트 드래곤은 정확히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몸집을 보니 갓 웜급을 넘어선 듯한 어린 드래곤이었다. 데이몬에 대한 공격을 잠시 보류한 베르키스는 날아오고 있는 화이트 드래곤을 쳐다보았다. "아르카디아의 화이트 드래곤이여. 행여나 나에게 용무가 있는가?" "그렇소." 카트로이의 눈빛은 결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슨 용무인가?" "이 빌어먹을 싸움을 당장 집어치우도록 하시오. 제기랄. 그렇지 않으면 난 일체 사정 봐주지 않고 당신을 공격할 것이오." 카트로이는 아무 거리낌없이 대답했다. 그의 대꾸에는 데이몬에게서 배운 말투가 심각하게 녹아 있었다. 그 말로 인해 베르키스의 얼굴에 황당함이 아로새겨졌다. "그렇다면 넌 인간의 편을 들어 날 공격하겠다는 뜻인가?" "인간의 편을 드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드래곤의 사명은 엄연히 중도를 지키는 것이고, 이처럼 압도적인 싸움은 멈춰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지금 당장 골렘과 리치들을 뒤로 물리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정보지 않고 공격하겠소." 그 말에 베르키스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빠른 속도로 날아오른 카트로이는 베르키스가 있는 곳에 거의 접근한 상태였다. "그것 재미있구나. 중도를 지키는 것이란 그런 것이 아니란다. 어린 드래곤이여." "제기랄. 조금 전 당신은 아무 죄도 없는 인간 수백 명을 거리낌없이 한 줌 재로 만들어버렸소. 그것은 베르하젤 님의 뜻에 명백히 역행하는 행위이오." "허허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그렇다고 동족을 다치게 할 수는 없고."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뒤흔든 베르키스는 정색을 했다. "동족인 널 차마 죽일 수는 없구나. 대신 적당한 상대를 붙여줄 테니 한 번 놀아보도록 해라. 세상을 더 살아본다면 인간이란 생물이 과연 어떤 존재인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친 베르키스가 손을 슬쩍 내저었다. 그러자 까마득한 아래에서 난데없이 무시무시한 파공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쐐애애액. 파공성 소리는 정확히 카트로이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날개를 퍼덕이며 열심히 날아가던 카트로이는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무, 무슨 소리지?" 활공을 멈춘 카트로이는 기다란 목을 기울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그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아이언 골렘? 놀랍군. 날 수 있는 골렘이라니……." 파공성의 정체는 바로 아이스 골렘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소리였다. 두툼한 등 부분이 활짝 펼쳐지며 거대한 날개가 튀어나온 아이언 골렘은 베르키스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비호처럼 날아올랐다.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지크레이트를 미련 없이 내버려두고 말이다. 아이언 골렘은 카트로이를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지고 있었다. 카트로이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아이언 골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지크레이트. 정신차려라!" 카트로이 덕택에 겨우 정신을 차린 데이몬은 애타게 지크레이트를 불렀다. 하지만 만신창이가 된 지크레이트는 겨우 반응 정도만 보일 뿐이었다. 키리릭. 지크레이트가 필사적으로 목을 휘저었지만 처참하게 박살난 몸뚱이는 당최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이언 골렘의 공격에 의해 몸이 완벽히 짓이겨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날개가 떨어져나갔기 때문에 이젠 날 수조차 없었다. 다시 말해 데이몬에게 공중전을 벌인 수단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망연자실해 하는 데이몬의 귀에 잔뜩 성이 난 듯한 카트로이의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캬아아아. 베르키스에게 날아가는 것을 포기한 카트로이는 아이언 골렘을 맞아 맹렬히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한낱 가디언을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치민 듯 카트로이는 연신 무시무시한 공격을 퍼부어 댔다. 하지만 아이언 골렘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츠츠츠츠. 카트로이의 아이스 브레스를 정통으로 뒤집어썼지만 아이언 골렘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놈은 아무 거리낌없이 반격을 가했다. 잔뜩 서리가 서린 그레이트 액스가 카트로이의 몸통을 노리고 벼락같이 후려쳐 왔다. "어딜." 카트로이는 날렵하게 공격을 피한 뒤 거침없이 꼬리를 휘둘렀다. 하지만 아이언 골렘은 거대한 방패를 들어 꼬리질을 가볍게 막아냈다. 텅 묵직한 공명음과 함께 아이언 골렘의 동체가 뒤로 퉁겨졌지만 놈은 이내 균형을 바로잡았다. 몸집에 비해 현저히 빈약해 보이는 날개가 육중한 아이언 골렘의 동체를 아무 무리 없이 허공에 띄우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장면이었지만 카트로이는 곧 이유를 깨달았다. "부양 계열의 마법이 놈의 몸에 새겨져 있겠군. 그렇다면 내 마법 공격을 한 번 받아보아라." 카트로이의 양손에서 푸른 빛 불덩어리가 맹렬히 피어올랐다. 형태를 보아 의심할 나위 없는 헬 파이어였다. 이 가공할 만한 파멸의 불꽃은 곧 아이언 골렘을 향해 폭사되었다. 콰콰콰콰. 놈은 피하려 하지 않았다. 도리어 방패를 들어 방어자세를 취하는 아이언 골렘의 대응에 카트로이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멍청한 놈. 헬 파이어는 닿는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심지어 바위나 돌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네놈의 몸뚱이가 아무리 단단하다 해도 이 헬 파이어만은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카트로이의 예상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빗나갔다. 콰쾅. 두 발의 헬 파이어가 정통으로 방패에 명중했지만 아이언 골렘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방패에 새겨진 마법진이 눈부시게 빛나는가 하더니 헬 파이어의 폭발이 그대로 스러져버렸다. 그 모습에 카트로이는 맥이 탁 풀렸다. "방패에 마법 방어진이 새겨져 있었군. 헬파이어까지 막아낸다면 더 이상 마법을 써봐야 소용없겠어. 남은 건 오로지 육탄공격 뿐이로군." 마음을 다잡은 카트로이는 즉시 공격을 시작했다. 화이트 드래곤의 날카로운 이빨과 거대한 꼬리가 계속해서 아이언 골렘을 노렸다. 하지만 전체가 강철 덩어리로 이루어진 아이언 골렘을 상하게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정말 멍청한 녀석이로군. 감히 인간 편을 들다니 말이야. 만약 놈이 동족만 아니었더라도 사정 봐줄 것 없이 죽여버렸을 텐데……." 베르키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카트로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옆에서 맞장구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카디아의 드래곤들은 오랫동안 전쟁을 치러보지 못했습니다. 제 생각으로 그는 결코 아이언 골렘을 당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답한 자는 바로 게덴하이드였다. 모든 리치들이 접전에 가세한 상황이었지만 오직 그만이 베르키스의 옆에 둥둥 떠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베르키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아이언 골렘은 한 마디로 현존하는 최강의 골렘이라 할 수 있다. 헬 파이어까지 막아내는 마법방어진이 새겨져 있고 비행이 가능한 만큼 아이언 골렘을 당적할 만한 존재는 오로지 드래곤 뿐이다." "물론이지요. 베르키스님이 아니라면 감히 그 누가 저렇게 무시무시한 병기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베르키스는 슬며시 눈길을 돌렸다. "게덴하이드. 오랫동안 내 옆에 있으면서 아부가 많이 늘었군." 게덴하이드는 당황한 듯 고개를 뒤흔들었다. "결단코 아부가 아닙니다. 전 단지……." "아부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으니 말이다." 말을 마친 베르키스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이젠 흑마법사 녀석을 마무리지어야겠군." "그렇습니다. 이미 데스 나이트에 의해 브론즈 골렘이 일곱 기 가까이 파괴되었습니다. 서둘러 놈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손실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데스 나이트가 가진 생명의 원천은 바로 데이몬이란 놈에게 있습니다. 놈만 쓰러뜨린다면 데스 나이트는 다시 원래의 형태인 무(無)로 돌아가지요." 베르키스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브론즈 골렘이야 다시 만들어내면 그 뿐이다. 문제는 더 시간을 끌 수 없다는 점이지. 그랬다간 몹시 귀찮은 일이 생길 테니까. 그러니 우린 서둘러 상황을 정리한 뒤, 트루베니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 말에 게덴하이드는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곳에는 감히 베르키스 님께 대항할 만한 상대는 없는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그렇지 않다." 짧게 일축한 베르키스는 까마득한 거리에 있는 데이몬을 정확히 노려보았다. 놈이 어느 정도 마나를 모은 상태였지만 신경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자신의 탐지마법에 걸려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것을 떠올린 베르키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놈을 끝장내면 인크레시아가 내게로 돌아올 것이다. 데스 나이트의 소멸과 함께 말이다. 너는 그 순간을 노려 브론즈 골렘들을 철수시켜라. 리치들이 골렘을 하나씩 맡아 하늘로 부양시키면 될 것이다. 골렘과 너희들을 인크레시아와 새로 만든 마법보고에 보관한 뒤 즉시 트루베니아로 돌아갈 것이다." "알겠습니다." 점점 절박해져 가는 상황. 공중전을 벌일 유일한 수단을 잃어버린 데스 나이트들은 화풀이라도 하듯 브론즈 골렘들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그들의 손에 도합 일곱기의 브론즈 골렘이 파괴되었지만 베르키스가 앞서의 다섯 기에 이어 또다시 다섯 기를 충원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브론즈 골렘은 총 열 다섯 기였다. 수적인 우세로 말미암아 브론즈 골렘들은 이제 별 무리 없이 데스 나이트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필사의 사투를 벌이던 용병들도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어 보였다. 브론즈 골렘과 리치들의 협공은 그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용병들이 걸친 대마법 갑옷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갑옷에 새겨진 마법진이 붕괴되기 직전인 것이다. 만약 몸에 걸친 것이 평범한 대마법 갑옷이었다면 지금까지 버틸 수도 없었다. 그래도 인크레시아에 보관되어 있던 최고 수준의 대마법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여태껏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거의 한계에 달한 상황이었다. 물론 거둔 성과가 전혀 없지는 않아 카심과 미첼의 공격에 각각 한 기씩 브론즈 골렘이 파괴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용병들의 한계였다. 하나같이 숨이 턱밑에 차 올라 더 이상 몸을 날리기도 힘든 실정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눈동자에 슬며시 절망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제 끝인가? 아버님을 보고 갈 수 없어 안타깝군.' '마틸다. 부디 행복하시오. 약속을 지키지 못해 정말 미안하오.' '프록터. 네놈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지 못해 원통할 따름이다.' 용병들은 서서히 생의 마지막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조금 뒤면 한 사람씩 세상을 하직해야 할 터였다. [다크메이지] 10장 마룡 베르키스 283회.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카심 용병단에 가세하게 된 것을 추호도 후회하지 않았다. 하나같이 달게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3류 용병들이었던 우리들이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훌륭하다.' 그렇게 용병들이 체념하기 시작했을 때 난데없이 이변이 일어났다. 와아아아. 거센 고함소리와 함께 수백 명의 기사들이 중앙광장에 벌떼처럼 난입해 들어오고 있었다. 장검에 오러 블레이드를 한껏 끌어올린 기사들은 거침없이 골렘들을 향해 돌격했다. 동시에 그들을 지휘하는 우두머리의 것으로 생각되는 음성이 세차게 울려 퍼졌다. "골렘들을 하나도 남겨두지 말고 깡그리 파괴하라. 카심 용병단원들에게 드래곤을 상대할 틈을 주어야 한다. 크로센 기사단 돌격!" "뒤쳐져서는 안 된다. 듀크 나이츠가 결코 크로센 기사단에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서 증명해야 한다. 일제히 공격!" 기사들의 돌격을 시작으로 그들의 후미에서 무수한 공격마법이 퍼부어졌다. 콰콰콰콰. 그것들은 대부분 허공에 부유하고 있는 리치들을 노리고 있었다. 리치 두 세기가 공격 마법에 격중되어 그대로 재가 되어버렸다. 퍼퍼퍽. 6서클의 리치를 그대로 소멸시킬 정도의 마법공격이라면 공격을 가한 자가 적어도 리치를 능가하는 수준의 마법사란 사실을 의미한다. 리치들은 곧 조금 전 카심 용병단원들이 처했던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그들을 향해 퍼부어지는 화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공격마법 세례에 리치들은 반격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이젠 방어에만 열중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버렸다. "되, 되었어." 뜻하지 않은 원군에 카심 용병단원들은 열세에 몰렸던 지금까지의 상황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힘을 되찾은 그들은 이제 거침없이 공격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공격하지 못한 데 대한 화풀이를 하려는 듯이 말이다. 그 선두에는 단연 카심과 미첼이 앞장서고 있었다. 에인션트 급 레드 드래곤, 그리고 그의 가디언들에 맞서 결사항전을 거듭하는 카심 용병단원들에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물론 그 속에는 크로센 기사단을 지휘하는 윌리엄스 후작과 듀크 나이츠를 통솔하는 크로비츠도 끼여 있었다. 검을 들고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양쪽 기사들의 시선은 하나도 빠짐없이 가디언과 카심 용병단원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어가자 자연스럽게 양 우두머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윌리엄스 후작의 눈빛에 크로비츠는 오래지 않아 결정을 내렸다. 알겠다는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크로비츠는 즉시 고함을 내질렀다. "듀크 나이츠. 출동! 지금 즉시 카심 용병단을 지원해야 한다." 거의 동시라고 할 수 있는 순간에 윌리엄스 후작 역시 명령을 내렸다. "감히 황태자 전하의 목숨을 노린 레드 드래곤을 살려보내서는 안 된다. 크로센 기사단이여! 지금부터 그대들의 용맹을 만천하에 증명하도록 하라." 거기에는 궁정 마법사의 수뇌인 필라모네스도 가세했다. "펠젠틴으로 난입한 레드 드래곤과 리치에게 크로센 제국의 궁정 마법사들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할 지어다. 우리의 임무는 엄연히 기사들을 지원하는 것! 각자 해야 할 임무를 명확히 알고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궁정 마법사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그 속에는 필라모네스도 끼여 있었다. 물론 페르슈타인 공작 휘하의 마법사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흑마법사를 도와라." 페르슈타인 공작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법사들은 몸을 날렸다. 기세를 보아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섰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전장으로 나아가던 것을 보는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에는 형언할 수 없는 빛이 감돌고 있었다. '고맙소. 흑마법사.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소.' 그로 인해 야망을 접어야 할지도 몰랐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므로 페르슈타인은 당연히 데이몬에게 감사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지켜보고 있던 사이 양쪽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마침내 접전에 가세하고 있었다. 지금껏 반목과 대립을 거듭했던 양쪽 패거리들이었지만 그들 앞에는 지금 공동의 적이 대기하고 있었다. 드래곤이라는 인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적이 말이다. 뜻하지 않게 가세한 지원군으로 인해 상황은 또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었다. 콰직. 라인델프의 자이언트 킬러에 왼쪽 다리가 박살난 브론즈 골렘이 기우뚱거리며 모로 쓰러졌다. 물론 그 정도는 브론즈 골렘에겐 치명상이라 볼 수 없었다. 골렘 특유의 특성으로 인해 잘린 부분이 맹렬히 재생되고 있었다. 생명석이 건재한 이상 브론즈 골렘은 오뚜기처럼 끝없이 일어나 공격을 감행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파파파팍. 둔탁한 금속음이 연속적으로 들려온 뒤 브론즈 골렘은 움직임을 멈췄다. 넘어진 상태에서 갑자기 수십 자루의 장검이 몸통을 파고 들어온 것이다. 하나같이 생명석이 있음직한 부분이었다. 오른쪽 옆구리를 파고 들어온 검 한 자루가 정확히 생명석을 꿰뚫자 브론즈 골렘은 다시 원래의 형태인 청동 덩어리로 돌아가 버렸다. 브론즈 골렘들을 맹렬히 밀어붙이고 있던 데스 나이트들은 깜짝 놀랐다. "뭐, 뭐야?" 그들 사이에 갑자기 수백 명의 기사들이 끼여들었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은 아무거리낌 없이 브론즈 골렘을 공격해 들어갔다. 물론 데스 나이트보다 실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기사들이었지만 그들은 수십 명이 브론즈 골렘 하나씩을 맡아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브론즈 골렘들이 차지하고 있던 수적인 우세를 이번에는 그들이 누리고 있는 것이다. "으아악." 브론즈 골렘의 공격에 격중된 서너 명의 기사들이 전신이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하지만 기사들은 추호도 동요하지 않고 계속해서 포위공격을 퍼부었다. 거대한 덩치 때문에 치명상을 입히기가 좀처럼 힘들었지만 브론즈 골렘의 전신에는 점점 칼자국이 늘어나고 있었다. 뜻밖의 상황전개에 얼떨떨해 하는 데스 나이트들에게 한 명의 기사가 다가왔다. "골렘들은 우리가 맡겠소. 그러니 당신들은 드래곤을 맡아 주시오." 헬버트론의 눈구멍에서 기이한 광망이 솟구쳤다. "인간 기사들이 데스 나이트를 지원하다니 놀랄만한 일이로군. 하지만 우리에겐 드래곤을 공격할 수단이 없다. 유일한 수단인 본 드래곤이 이미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여러 명이 내지르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가 팬텀 스티드를 소환해 주겠소." 고개를 돌려보자 수십 명의 마법사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이미 허공에는 여러 마리의 팬텀 스티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법사들의 작품인 것 같았다. 그러나 헬버트론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팬텀 스티드로는 역부족이다. 드래곤이 디스펠을 시전할 경우 우린 그대로 허공에서 곤두박질치는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그 말에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마법사 한 명이 빙긋이 미소를 떠올렸다. "걱정하지 마시오. 이곳에는 팬텀 스티드를 소환할 수 있는 마법사가 적어도 수백 명이 있소이다. 디스펠되면 또다시 소환해 주겠소. 드래곤이 비록 10서클의 마스터라고 하나 우리 모두를 죽이기 전까지 팬텀 스티드는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오." "그렇다면 한 번 해볼 만 하지." 데스 나이트들은 다시 용기를 되찾았다. 수백 명의 마법사들이 지원하는데 무서울 것이 있을 턱이 없었다. 애초부터 공포감을 상실했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데스 나이트들은 거리낌없이 팬텀 스티드를 하나씩 골라 올라탔다. 슈우우욱. 데스 나이트 넷을 태운 팬텀 스티드는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그들의 뒤로 헤아릴 수 없는 팬텀 스티드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뒤따르고 있었다. 하나가 디스펠되면 즉시 그 자리를 채우겠다는 목적으로 말이다. "가장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군." 베르키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바로 인간들의 조직적인 공격이었다. 하나 하나는 약하기 그지없는 인간들이었지만 힘을 합할 경우 엄청난 파괴력을 보였다. 이미 트루베니아에서 여러 번 겪어보았던 상황이었고 그로 인해 어지간한 베르키스도 상당한 곤욕을 치른 바 있었다. 그 때문에 동조자로 오크를 끌어들이지 않았던가? 아무리 강력한 드래곤이라도 죽여도, 죽여도 몰려드는 인간들의 조직적인 공격 앞에서는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을 피해내기 위해 애당초 압도적인 전력을 투입해서 단번에 끝내버린 뒤 빠지려고 했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계략은 빗나가버렸다. 인간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공황상태에서 벗어났고 데스 나이트와 용병들의 실력은 베르키스의 상상했던 이상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데이몬의 몸놀림이었다. 최대한 빨리 죽여버릴 요량으로 거듭된 공격을 퍼부었지만 놈은 놀라운 반사신경과 실전경험으로 무려 10분 가까이 자신의 공격을 피해냈다. "애당초 1분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했건만……." 묵묵히 뇌까리는 베르키스의 뇌리로 거듭된 신호가 전해졌다. 그것은 바로 그와 심령으로 연결된 리치들이 계속해서 파괴되는 신호였다. 하나같이 6서클의 마스터에 올라 있는 리치들. 그들이 이렇게 계속 소멸될 정도라면 인간 마법사 중에 6서클을 넘어서는 실력자가 적어도 하나 이상이 포진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 사실을 깨달은 베르키스는 게덴하이드에게 명령을 내렸다. "네가 나서라. 인간 마법사들 중 최고의 실력자도 너보다는 수준이 떨어질 것이다. 리치들을 이처럼 허무하게 잃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게덴하이드는 머뭇거림 없이 몸을 날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베르키스는 다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9서클의 엑스퍼트인 게덴하이드가 가세한다면 리치들은 더 이상 밀리지 않을 터였다. 마법 대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수준이다. 탐색해 본 결과 인간 마법사들 중 최고의 실력자는 고작해야 8서클의 엑스퍼트에 지나지 않았고 게덴하이드가 가세할 경우 우열이 송두리째 뒤바뀔 것이 틀림없었다. 수백 명의 마법사가 한꺼번에 덤비더라도 게덴하이드 하나를 당해낼 수 없는 것이다. 그게 바로 마법 수준의 차이였다. "서둘러 상황을 정리하고 철수해야겠군." 고개를 돌리자 데스 나이트 넷이 팬텀 스티드에 탑승한 채, 날아오르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펜텀 스티드가 뒤따르는 것을 보니 어지간한 수준의 디스펠은 통하지 않을 듯 싶었다. 데스 나이트들을 저지하던 브론즈 골렘들은 지금 수많은 인간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험준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주변으로 헤아릴 수 없는 기사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지만 비례적으로 골렘도 하나 둘씩 파괴되고 있었다. 창공에서는 카트로이가 아이언 골렘과 어우러져 치열한 공중전을 벌이고 있었다. 최강의 종족이라는 드래곤답게 카트로이의 공격은 가공할 정도였다. 하지만 상대하는 아이언 골렘도 결코 녹록치 않은 존재였다. 둘은 섣불리 우열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베르키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멍청한 녀석 때문에 가장 강력한 아이언 골렘을 투입할 수 없다니……." 하지만 베르키스는 상황을 별로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놈만 처치한다면 데스 나이트는 자연적으로 소멸될 터." 콰콰콰콰. 베르키스의 손에서 거대한 불덩어리가 치솟았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파이어 볼이었다. 물론 평범한 파이어 볼과는 감히 수준을 논할 수 없는 가공한 공격 마법이었다. 이미 상대가 탐지마법에 명확히 걸려 있었기 때문에 발사할 경우 파이어 볼은 세상 끝까지라도 따라가서 놈을 한 줌 재로 만들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데이몬은 미동도 없이 버티고 서서 마나를 끌어 모으고 있었다. 대관절 무슨 마법을 준비하는지 몰랐지만 애당초 베르키스에겐 신경 쓸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베르키스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파이어 볼을 쏘아보냈다. "이만 끝내야겠군. 많은 골렘과 리치를 잃었지만 인크레시아를 회수한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 그가 전개한 파이어 볼은 자욱한 불똥을 흩날리며 일직선으로 내려꽂혔다. 화르르르. 놈에게 탐지 마법이 걸려 있는 이상 놈은 수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파이어 볼을 피해낼 수 없었다. 베르키스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행여나 막아낼 생각은 하지 말아라. 이 파이어 볼은 설사 드래곤이 전개한 실드라도 가차 없이 파괴시킬 수 있으니까." 놈이 피해낼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리고 9서클의 마스터에 불과한 상대에게 파이어 볼을 막을 만한 능력이 있을 턱이 없었으므로 베르키스는 곧 상황이 정리될 것이라 간주했다. 그의 예상대로 파이어 볼은 정통으로 데이몬에게 명중했다. 콰콰콰쾅. 엄청난 폭발과 함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퍼져 나온 파편들이 그대로 증발해버릴 정도로 마법의 폭발력은 뛰어났다. 이런 폭발 아래에서 상대가 멀쩡할 가능성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돌이 녹지도 못하고 증발해버릴 정도의 고온에서 인간의 육신은 말 그대로 무(無)로 화해버릴 것이 확실했으므로……. 그러나 여기에 정녕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느긋하게 쳐다보던 베르키스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뭐, 뭐야……." 놀랍게도 상대는 사라지지 않았다. 엄청난 화염의 폭발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 거대한 구덩이가 패인 가운데에 돌이 녹아 생긴 용암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자리에 상대는 표표히 서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베르키스로써는 정녕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설마 일루전(Illusion)?" 베르키스는 생각을 마치자마자 손을 내저었다.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노파심에 디스펠을 한 번 전개해 보는 것이다. 예상대로 디스펠이 전개되었지만 상대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일루전이라면 애당초 탐지마법에 걸릴 턱이 없었기 때문에 베르키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 이게 도대체 어찌된 노릇이지?" 입가에 미소를 떠올린 데이몬은 뚫어지게 베르키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의 주위로 계속해서 마나가 모여들고 있었다. "되었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은 허리를 폈다. 예상대로 사술에 접해보지 못한 베르키스는 지금 자신의 분신을 상대로 한창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베르키스가 아무리 마법의 조종이라 하더라도 판이하게 다른 이계의 사술을 금방 파악해 낼 리가 만무했다. 중원 사술의 대표적인 술법 중 하나인 분신술은 데이몬을 잠깐이나마 베르키스의 이목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물론 베르키스의 탐지마법은 데이몬의 분신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그의 앞에서는 지크레이트가 점차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데이몬은 지금 단전에 저장된 어둠의 마력을 깡그리 털어 부어 지크레이트를 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더라도 언데드인 본 드래곤은 어둠의 마력만 충원되면 언제든지 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몸통의 반이 날아간 러셀런트를 되살리기에는 다소 모자란 마력이었지만 비교적 덩치가 작은 지크레이트를 재생시키는 데는 충분했다. 파파파팟 어지럽게 널려 있던 드래곤 본 파편들이 날아들어 지크레이트의 몸에 흡수되었고 떨어져 나간 날개 역시 어깨 죽지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그 대가로 데이몬의 단전에 보관된 어둠의 마력이 깡그리 소진될 수밖에 없었지만. 순식간에 전투력의 대부분을 회복한 지크레이트는 고개를 들고 포효를 했다. 콰루루루루. 데이몬은 때를 놓치지 않고 지크레이트에 올라탔다. 조금 전의 포효성으로 베르키스가 자신의 위치를 파악했을 터. 지금으로썬 최선을 다해 놈의 공격범위를 벗어나야 했다. 그래야만 데스 나이트들이 소멸되지 않고 계속 공격을 감행할 수 있을 터였다. 상황을 눈치챈 듯 허공에서 잔뜩 화가 난 듯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놈. 감히 날 속이다니……." 그와 동시에 데이몬의 주변에서 마나가 맹렬히 재배열되었다. 마법이 구현되려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지크레이트를 이륙시켰다. 콰콰콰쾅. 맹렬한 기세로 날아오르는 지크레이트의 주변으로 각종 공격마법이 와서 작렬했다. 정통으로 명중한 것도 있었지만 다행히 지크레이트는 건재했다. 어둠의 마력이 보충된 덕택에 대마법 방어진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었고 베르키스가 창촐간에 전개한 것이라 공격 마법의 위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데이몬 역시 재빨리 지크레이트의 몸통 아래로 피신했기에 마법에 적중되는 신세에서 벗어났다. 마법 공격이 한 차례 지나가자 데이몬은 다시 지크레이트의 목 위로 올라탔다. 뭔가를 결심했는지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 상태에서 내가 할 일은 단 하나 뿐이다." 데이몬은 지크레이트를 몰아 빠른 속도로 활강을 시작했다. 탐지마법으로 짐작되는 기운이 정확히 지크레이트를 포착했지만 데이몬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만 포착되지 않는다면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쐐애애액. 되살아난 본 드래곤 지크레이트는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저공비행을 시작했다. "이런……." 베르키스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비록 본 드래곤에게 탐지마법을 고정시키긴 했지만 공격을 감행할 시간이 부족했다. 이번에는 경우가 아까와는 조금 달랐다. 러셀런트를 일격에 무력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충분히 시간을 두고 마나를 재배열해서 강력한 파이어 볼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대마법 방어진이 설치된 러셀런트를 일격에 파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흉흉한 기색으로 돌격을 거듭해오는 데스 나이트들. 그들의 장검에서는 자신의 비늘을 일격에 갈라놓을 수 있는 오러 블레이드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대마법 방어장이 작동중인 지크레이트를 파괴시키려면 마나를 재배열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데스 나이트들이 순순히 시간을 줄 리가 없었다. 현재 상황에서는 데스 나이트를 가장 먼저 처리해야 했다. 또한 뒤에 따라오는 팬텀 스티드들도 감히 무시할 수 없었다. 저 많은 팬텀 스티드를 일일이 디스펠하는 것은 드래곤이라 할 지라도 엄청나게 골머리를 앓아야 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평범한 드래곤에게나 적용되는 것이고 베르키스는 이미 평범한 드래곤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먼저 데스 나이트를 처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베르키스는 서둘러 마나를 재배열했다. "저 많은 팬텀 스티드를 모조리 없애려면 허공 전체에 대해 디스펠을 전개해야겠군. 아이언 골렘과 리치들에게까지 영향이 미치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마법의 구현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공격을 위해 마나를 한껏 모아놓았기 때문이었다. 베르키스의 손에서 빛나는 광구가 맺히는가 했더니 이내 무시무시한 빛의 파장으로 바뀌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파츠츠츠. 광구에서 쏘아진 빛은 순식간에 허공을 완전히 뒤덮어버렸다. 거의 동시라고 할 수 있는 순간이었지만 그로 인해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던 팬텀 스티드들이 흔적도 없이 싹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데스 나이트들을 태우고 가던 팬텀 스티드도 마찬가지였다. "헉." 데스 나이트들의 몸은 곧 까마득한 창공에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 높은 창공에서 그대로 바닥에 내려꽂힌다면 그들이 제 아무리 데스 나이트라도 살아날 방법은 없었다. 베르키스의 광범위한 디스펠에 영향을 받은 것은 팬텀 스티드 뿐만이 아니었다. 허공에 뜬 채 공방을 거듭하던 리치들의 몸이 난데없이 바닥에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디스펠에 의해 몸을 띄우고 있던 부양마법이 깨어져버린 것이다. 콰당. 바닥에 내팽개쳐졌지만 리치들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어지간한 충격으론 타격을 받지 않는 것이 바로 언데드의 장점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해 수십 자루의 창검이 날아오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퍼퍼퍽. 불운한 리치들은 그 공격을 피해내지 못하고 본체가 꿰뚫려 소멸되는 운명을 맞이하고 있었다. 카트로이와 싸우던 아이언 골렘 역시 부양마법이 디스펠되어 허공에서 추락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외부에서 걸어놓은 마법이었기 때문에 균형이 깨어진 부양 마법진이 효력을 다해버렸고 가공할 위력을 자랑하던 아이언 골렘은 손발을 뒤흔들며 끝없이 추락해 내렸다. 연유를 파악한 카트로이의 눈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이놈! 아예 끝장을 내주마." 날개를 접어 넣은 카트로이는 그대로 강하를 시작했다. 아이언 골렘에다 자신의 체중까지 실어 충격을 주려는 심산인 것이다. 콰직. 단단한 드래곤의 발톱이 아이언 골렘의 양어깨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 상태로 카트로이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대지를 향해 내려 꽂혔다.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아이언 골렘의 몸 속에 박힌 생명석이 무사할 리가 만무했다. 그것 하나만을 믿은 카트로이는 돌로 이루어진 바닥을 골라 가차없이 내려꽂혔다. 파르르르. 대지에 가까이 접근하자 카트로이는 날개를 활짝 펼침과 동시에 아이언 골렘을 놓아버렸다. 그가 목표로 삼은 곳은 부서진 조각상들이 널려 있는 곳이었다. 카트로이의 의도대로 아이언 골렘은 정통으로 그곳에 직격했다. 콰르릉. 굉음과 함께 아이언 골렘의 육중한 몸은 땅속 깊이 파고 들어갔다. 먼지구름이 피어올라 깊숙이 패인 구덩이를 가렸다. 반면 카트로이는 아슬아슬하게 다시 날아오를 수 있었다. 배가 땅을 가볍게 스칠 정도였으니 한 마디로 간발의 차이로 대지에 충돌하는 것을 모면했다고 볼 수 있었다. 날아오른 카트로이는 지체 없이 토네이도를 전개했다. 휘유우웅. 난데없이 피어난 회오리바람이 구덩이를 감싼 먼지 구름을 삽시간에 날려버렸다. 카트로이는 곧 직경이 30미터 가까운 구덩이의 중심부에 널브러진 아이언 골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요행히 생명석이 깨어지지 않았는지 아이언 골렘은 연신 일어나려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몸의 대부분이 땅 속에 묻혀 있는 상태였으므로 아무리 힘이 좋은 아이언 골렘도 쉽사리 빠져나오기 힘들어 보였다. 카트로이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아이언 골렘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끝내주지." 입을 좍 벌린 카트로이는 그대로 아이언 골렘을 향해 쇄도했다. 벌어진 입에서는 날카로운 어금니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헉." 필라모네스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자신을 향해 내려꽂히는 리치 하나를 보고 난 뒤의 일이었다. 리치의 주위에서는 한 눈에 보기에도 가공할 정도의 마나가 재배열되고 있었다. 도저히 수준을 분간할 수 없는 것을 보니 자신보다 훨씬 윗줄의 마법사가 틀림없었다. 도저히 당적해 낼 상대가 아니란 사실을 파악한 필라모네스는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모, 모두 피하라." 그의 옆에는 7서클의 궁정 마법사 넷이 혼비백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법 수준의 우위에 힘입어 거침없이 리치들을 소멸시키고 있던 그들이 이번에는 거꾸로 소멸될 처지에 놓여버린 것이다. 철저히 수준에 의해 판가름되는 마법의 특성상 그들의 생명은 풍전등화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필라모네스가 아무리 고위급 마법사라도 그보다 높은 수준의 마법공격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푸학. 그러나 하늘이 도왔는지 때마침 눈부신 빛무리가 허공을 뒤덮었고 금방이라도 필라모네스에게 마법을 퍼부을 것만 같았던 리치가 그만 중심을 잃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놈을 처치하라." 기다렸다는 듯 기사들이 리치가 추락하는 장소로 난입하는 것을 본 필라모네스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 다행이로군." 하지만 안도의 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기사들의 장검에 산적꽂이가 되어버릴 것 같았던 리치는 간발의 차이로 다시 허공으로 떠올랐다. 높은 서클의 마법사답게 흩어진 마나를 순식간에 재배열한 것이다. 물론 리치의 정체는 게덴하이드였다. 인간 마법사들의 수뇌를 제압할 경우 벌어지는 싸움의 우열이 뒤바뀐다는 생각에 필라모네스를 노렸던 것이다. 그런데 공격해 들어가던 그는 때마침 이루어진 베르키스의 디스펠로 인해 하마터면 당할 뻔했다가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디스펠이란 재배열된 마나를 순간적으로 원래의 형태로 돌려 이미 구현된 마법을 무효화시키는 마법이다. 따라서 디스펠이 지나간 직후라고 하더라도 수준만 높다면 다시 마법을 전개할 수 있다. 물론 9서클의 엑스퍼트인 게덴하이드에겐 충분히 그럴 만한 실력이 있었다. 그의 손에서 곧 맹렬한 빛의 방전이 시작되었다. "크크크. 애송이 놈들. 내 트레이드마크인 호리드 윌팅으로 깔끔하게 미이라로 만들어주겠다." 그 모습을 본 필라모네스의 안색이 시퍼렇게 죽어 들어갔다. "호, 호리드 윌팅이라면 9서클의 마법인데……." 그에겐 도저히 호리드 윌팅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것은 주변의 마법사들 모두가 힘을 합해 방어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자고로 7서클 마법사 1백 명이 있더라도 8서클 마법 하나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마법의 진리였다. 필라모네스의 얼굴은 삽시간에 검게 물들었다. "그, 글렀어." 필라모네스의 머릿속에는 금방이라도 미이라가 되어 부스러지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호리드 윌팅이 채 구현되기도 전에 뭔가 거대한 그림자가 게덴하이드를 덮쳤다. "헉." 게덴하이드는 완성된 호리드 윌팅을 날리지도 못한 채 다급히 몸을 날렸다. 츄르르르. 거대한 이빨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바로 본 드래곤의 좍 벌린 아가리에서 빛나고 있는 송곳니였다. 공격을 실패한 본 드래곤은 허공을 선회하여 게덴하이드를 향해 다시 덮쳐 들었다. 본 드래곤의 등위에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크크. 오랜만이군. 게덴하이드. 수준이 맞는 사람하고 놀아야지 어린애랑 장난치면 쓰나?" 그 소리를 들은 게덴하이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져버렸다. 이 상황에서 그가 가장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대와 마주친 것이다. 9서클의 엑스퍼트인 게덴하이드는 죽었다 깨어나도 9서클의 마스터인 데이몬을 상대할 수 없다. 조금 전 필라모네스가 직면했던 상황에 이번에는 게덴하이드가 처해 버린 것이다. "어, 어린애?" 졸지에 어린애가 되어버린 필라모네스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9서클의 마스터와 엑스퍼트 앞에서 그는 철저히 어린애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이차이를 따져봐도 그렇지만 말이다. "이런 젠장."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한 게덴하이드는 즉시 도주를 결심했다. 번쩍, 번쩍. 블링크를 거듭 전개하며 그 자리를 벗어난 게덴하이드는 그대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필라모네스를 처치해야한다는 생각은 이미 머릿속에서 깡그리 사라진 다음이었다. 그러나 멀리 달아나기도 전에 데이몬이 발한 듯한 걸쭉한 일성이 들려왔다. "네놈은 한 번 겪어보고도 여전히 내 매직 미사일의 위력을 경시하는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매직 미사일 다발이 날아와 전신에 작렬했다. 퍼퍼퍽. 실드를 펼친 상태였지만 충격이 만만치 않았다. 당황한 게덴하이드는 또다시 블링크를 전개했다. 그러나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날아드는 매직 미사일은 정확히 그의 복부를 파고들고 있었다. 리치인 그에게 데이몬처럼 날렵한 몸놀림을 이용해 공격을 피할 가능성은 애당초 없었다. 퍼퍼퍽. 게덴하이드는 50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허공에서 마구 춤을 추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날아든 헬 파이어 한 방이 그의 몸뚱이에 정통으로 명중했다. 물론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데이몬이 날린 헬 파이어였다. 푸학. 재가 되어 부스러져 가는 게덴하이드의 동공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빛이 서려 있었다. '데이몬이란 놈은 베르키스 님의 손아귀에서 장장 10분을 버텼다. 그런데 어찌하여 난 불과 10초도 버틸 수 없는 거지? 마스터와 엑스퍼트의 차이가 그 정도로 큰가?' 의문점 하나를 남기고 게덴하이드의 본체는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 광경을 지켜보지 않았다. 다시 날아올라서 나머지 리치들에게로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현재 상황에서 리치를 가장 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데이몬 뿐이었다. 9서클의 마스터인 데이몬에게 6서클 급의 리치는 아무리 많더라도 한끼 식사거리에 불과했다. 베르키스의 손발을 효과적으로 잘라버리기 위해 데이몬이 선택한 방법인 것이다. 크롸롸롸. 지크레이트가 막 날아오르는 리치들을 덮쳤다. 당황한 리치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불행한 리치 하나가 크게 벌린 지크레이트의 아가리에 덥석 물려버렸다. 우지지직. 강철보다 단단한 지크레이트의 이빨이 리치의 몸을 흔적도 없이 으스러뜨려 버렸다. 뒤이어 데이몬의 손에서 전개된 에너지 캐논이 나머지 리치들의 몸에 정통으로 명중했다. 7서클 급의 공격마법인 에너지 캐논은 전개된 실드를 가볍게 꿰뚫고 리치의 몸을 단번에 관통해 버렸다. 퍼엉. 본 드래곤의 이빨로부터 간신히 목숨을 건진 리치들은 불행하게도 데이몬의 공격에 재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데스 나이트들은 구사일생으로 대지에 곤두박질치는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한 마법사들이 다시 팬텀 스티드를 소환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위험천만한 순간에 적절하게 나타난 팬텀 스티드를 보자 데스 나이트들은 한 시름 덜 수 있었다. "다행이로군." 정신 없이 떨어져 내리던 헬버트론은 팬텀 스티드의 하나의 등판을 노리고 착지했다. 퍼엉. 등판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팬텀 스티드는 그대로 부서져 버렸다. 팬텀 스티드를 구성하고 있던 요소가 흩어지며 잔해가 바닥으로 추락해 내렸다. 엄청난 속도로 추락하던 데스 나이트의 체중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추락하는 팬텀 스티드의 잔해 속에 헬버트론의 몸은 섞여 있지 않았다. 그는 팬텀 스티드의 동체가 부스러지는 순간 날렵하게 몸을 날려 다른 팬텀 스티드에 탑승했던 것이다. 다행히 이번 팬텀 스티드는 별 무리 없이 그의 체중을 견뎌 주었다. 고개를 돌린 헬버트론의 눈에 동료들이 비슷한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이 들어왔다. 하나같이 고도의 실력자들이라 어렵지 않게 위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놈.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끝장을 내어주마." 헬버트론은 안광을 자욱하게 뿜어내며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머지 데스 나이트들도 즉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그들의 뒤를 따르는 팬텀 스티드는 몇 마리 되지 않았다. 마법사들은 많았지만 한 번 흩어진 마나를 빠른 시간 내에 추스를 만한 자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팬텀 스티드들은 이어진 베르키스의 디스펠 한 방에 깡그리 사라져버려야 했다. "이이익." 데스 나이트들은 또다시 손발을 내저으며 추락하는 운명에 빠져야 했다. 간신히 소환했던 마법사들에게 더 이상 팬텀 스티드를 소환할 여력은 없었다. [다크메이지] 10장 마룡 베르키스 284회. 지크레이트에 탑승한 채 리치들을 거침없이 무찔러 나가던 데이몬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우선 저들을 도와야겠군." 데스 나이트들이 추락하는 장면을 본 데이몬은 즉시 대지로 뛰어내렸다. 마법을 펼치지 않고 낙법으로 사뿐히 대지에 착지한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지크레이트에게 명령을 내렸다. "날아올라서 저들과 힘을 합하라. 반드시 베르키스의 정신을 분산시켜야만 우리가 이길 수 있다." 콰루루루루. 지크레이트는 알아들었다는 듯 기성을 한 번 내지른 뒤 날아올랐다. 데이몬은 그 모습을 보지도 않고 블링크를 전개했다. 베르키스의 공격이 날아오는 기미를 알아차린 것이다. 콰르르릉. 그곳은 눈 깜짝할 사이에 불바다가 되어버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모습을 드러낸 데이몬은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굴렸다. 나타난 곳에 난데없이 피어난 파이어 월을 피해내기 위해서였다. 화르르르. 옷이 심하게 그을린 채 몸을 일으킨 데이몬은 즉시 몸을 날렸다. 헤이스트를 펼친 때문에 달리는 모습을 제대로 식별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각종 공격마법이 날아와 작렬했지만 데이몬의 속도가 워낙 빨랐기 때문에 격중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는 베르키스가 연신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저놈은 완전히 기름에 절인 미꾸라지로군." 계속해서 공격 마법을 퍼부었지만 놈은 얄밉게도 살짝살짝 피해나갔다. 저런 몸놀림은 잘 훈련된 기사에게서나 겨우 볼 수 있었다. 9서클의 마스터에 이른 고위급 마법사가 저 정도의 몸놀림을 보인다는 것은 지금까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베르키스는 생각할 것도 없이 데이몬에게 탐지마법을 전개했다. "이놈! 흔적도 없이 태워주마." 하지만 허사였다. 모든 공격마법을 허용하면서도 단 한가지, 탐지마법에 걸리는 것만큼은 끈질기게 방해하는 데이몬이었다. 탐지마법에 포착되는 순간이 생을 마감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데이몬으로써도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걸릴 듯 걸릴 듯 하면서도 용케 빠져나가는 데이몬의 모습에 베르키스는 기가 막혔다. "저 놈만 아니었다면……." 화이트 드래곤으로 말미암아 놈에게 시간을 준 것이 화근이었다. 화풀이라도 하듯 연신 공격을 퍼붓던 베르키스의 눈에 데스 나이트들이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이 들어왔다. 이미 데스 나이트 둘이 본 드래곤의 등에 사뿐히 안착한 상태였다. 지크레이트는 나머지 데스 나이트들마저 구하기 위해 그들이 떨어지는 방향으로 활강하고 있었다. "일단 저것들을 먼저 처리해야겠군." 베르키스는 이를 부드득 갈며 몸을 돌렸다. 조금이나마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상대를 먼저 처리해야 한다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지극히 당연한 판단이었다. 9서클인 데이몬의 마법 공격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신의 실드를 뚫지 못했다. 오직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가 아니라면 그를 해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콰콰콰콰. 난데없이 날아드는 에너지 캐논에 헬버트론과 사라미스는 기겁을 하며 몸을 날렸다. 저 정도 위력의 에너지 캐논이라면 몸에 걸친 대마법 갑옷도 막아내지 못한다. 격중된다면 데스 나이트라 할지라도 그 즉시 소멸될 것이 분명했다. 데스 나이트들이 몸을 날린 직후 유유히 날아온 에너지 캐논은 정확히 지크레이트의 등판에 명중했다. 콰쾅 지크레이트의 육중한 몸이 휘청했다. 대마법 방어장이 잠시 흩어질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었다. 다행히 큰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더 이상 활강하긴 힘들어 보였다. 속도를 높이며 끈임없이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공격을 회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크롸라라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은 지크레이드는 부쩍 속도를 높였다. 끝없이 추락해 내리는 라인델프와 프림베르그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말이다. 지크레이트의 몸통 아래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데스 나이트들이 잽싸게 몸을 날려 등판에 착지했다. 떨어지는 동료들에게 시선을 준 헬버트론은 할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최대의 당면과제는 베르키스 놈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것이다. 데이몬이 무사해야만 우리 역시 생존할 수 있으니까……." 데이몬만 살아남는다면 나중에라도 되살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동료를 구하기를 포기한 데스 나이트들은 검에 한껏 어둠의 마나를 불어넣었다. 데스 나이트 둘을 등에 태운 지크레이트는 계속해서 방향을 바꾸며 베르키스에게로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었다. 카트로이는 미친 듯이 브레스를 뿜어대고 있었다. 콰콰콰콰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아이언 골렘을 부숴 버릴 생각밖에 없었다. 아이스 브레스를 뿜는 것은 카트로이가 한참을 고심한 끝에 생각해낸 해결책이었다. 조금 전 아이언 골렘을 구덩이에 박아 넣은 카트로이는 끊임없이 꼬리 공격을 가했다. 쾅쾅쾅쾅. 강력한 꼬리 공격이 쉴새없이 아이언 골렘의 동체를 강타했다. 마법 공격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기에 카트로이로써는 오직 물리적인 공격을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이언 골렘의 동체가 워낙 단단했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하반신이 묻혀 움직일 수 없는 까닭에 아이언 골렘은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방패로 상체를 가린 채 몸을 잔뜩 웅크린 상태였다. 도리어 꼬리에서 통증이 전해지자 카트로이는 결국 다른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놈 꽁꽁 얼려주겠다." 금속이 냉각되어 있는 상태일 경우 깨어지기 쉽다는 사실을 떠올린 카트로이는 즉시 브레스를 내뿜었다. 아이스 골렘을 극도로 냉각시킨 뒤 부숴 버릴 생각에서였다. 몸 속의 한기를 남기지 않고 깡그리 내뿜겠다는 듯 카트로이는 쉬지 않고 브레스를 뿜어댔다. 이미 그 시간은 한참동안 지속된 상태였다. 그 때 그의 귓가로 외마디 부르짖음이 들려왔다. "이 멍청한 놈아. 도와주려면 확실하게 도와줄 것이지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데이몬? 아직까지 살아있었냐?" 순식간에 카트로이의 옆에 도착한 데이몬은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쓸데없는 골렘 나부랭이와 실랑이나 하지말고 지금 즉시 날아올라라." "왜 그래야 하지?" 데이몬은 멍청하게 반문하는 카트로이를 마치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이런 돌대가리 드래곤을 봤나? 베르키스를 상대하려면 어떻게든 데스 나이트를 살려야 한다. 네가 아니면 저 둘을 구할 수 없어." 고개를 돌려 떨어져 내리는 두 데스 나이트를 본 카트로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이언 골렘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즉시 몸을 날렸다. "내키지는 않지만 그렇게 하겠다. 대신 나중에 술 한잔 사야 한다." "빌어먹을 놈. 이런 상황에서……." 데이몬의 욕지거리를 들으며 날아오른 카트로이는 추락하는 라인델프와 프림베르그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그들은 거의 대지에 틀어박히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날렵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듯 카트로이는 간발의 차이로 데스 나이트 둘을 낚아챘다. 휘유우웅. 떨어지는 탄성이 만만찮았기 때문에 데스 나이트들을 낚아챈 카트로이의 몸이 심하게 휘청거렸다. 하지만 카트로이는 어렵지 않게 균형을 되찾고 비상하기 시작했다. 대지와 충돌하여 짜부라지는 운명에서 벗어난 데스 나이트들이 서둘러 몸을 날려 카트로이의 등으로 뛰어올랐다. 라인델프와 프림베르그가 묵묵히 감사를 표시했다. "고맙다. 화이트 드래곤." "짜식들……. 비록 네놈들에게 한 번 당하기는 했지만 드래곤은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냐. 알겠냐?" 으스대는 카트로이의 말을 들으며 데스 나이트들은 조용히 공격할 채비를 갖췄다. 추락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손에는 장검이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나 악화되다니……." 베르키스는 미칠 것 같았다. 압도적이던 상황은 이미 역전된 지 오래였다. 서둘러 황태자와 데이몬을 처치하고 돌아가려던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목적했던 놈도 처치하지 못한 채 이젠 자신이 거꾸로 궁지에 처해버린 것이다. 심복인 게덴하이드는 이미 소멸된 상태였다. 휘하의 리치 역시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물론 라이프 포스 베슬이 건재한 이상 나중에 되살리는 것이 가능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전력이 될 수 없음은 자명했다. 공포의 브론즈 골렘 군단도 괴멸 상태에 처해 있었다. 수많은 인간 기사들 사이에 둘러싸여 분전을 거듭했지만 압도적인 수적 열세를 극복치 못하고 하나씩, 하나씩 파괴되어갔던 것이다. 아직까지 서너 기의 브론즈 골렘이 분전하고 있었지만 파괴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역시 인간들의 단합된 힘은 무섭군." 베르키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놈들의 거센 저항으로 말미암아 시간이 잠시 지체된 것이 이런 참담한 결과를 야기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 역시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를 향해 두 마리의 드래곤이 데스 나이트 둘씩 태운 상태로 쇄도하고 있었다. 하나는 살아있는 드래곤, 나머지 하나는 이미 죽은 드래곤이란 것만 틀릴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베르키스는 마음을 굳혔다. "이젠 할 수 없다. 목적했던 대로 데이몬이란 놈 한 놈만 처치하고 이곳을 떠난다." 잔뜩 끌어 모아 놓은 마나를 그대로 흩어버린 베르키스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를 향해 날아오르는 지크레이트와 카트로이, 그들의 등에 탑승한 데스 나이트를 본체 만체 하며 말이다. 마법 공격을 위해 끌어다 모아놓은 마나가 전혀 판이한 형태로 재배열되기 시작했다. "놈의 몸놀림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정신 마법뿐이다." 진작 이 방법을 썼더라면 이런 피해를 입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베르키스는 한 가지 꺼림칙한 것이 있어 정신마법을 전개하지 않았던 것이다. "놈은 내가 전개한 정신마법에서 이미 한 번 벗어났다. 만에 하나 걸려들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베르키스는 바로 그 때문에 정신마법을 펼치지 않았다. 마법 공격만으로 충분히 처치할 수 있다고 자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없이 정신마법이 성공하기만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베르키스는 있는 힘껏 정신 마법을 캐스팅했다. "허억." 데이몬은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머릿속으로 뭔가가 맹렬히 파고들고 있었다. 그것이 베르키스의 정신마법이란 사실을 깨달은 데이몬은 눈을 부릅떴다. 정신마법에 걸려든다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으므로 그는 사력을 다해 정신을 추슬렀다. "사술의 대가인 내가 이까짓 정신 마법에 걸릴 소냐?" 하지만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아득해져갔다. 그 사실을 깨달은 데이몬은 즉시 자신에게 사술을 걸었다. 정신마법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는 것이다. "으으으." 머릿속에서 두 가지 상반된 기운이 맹렬한 접전을 벌였다. 하지만 베르키스의 정신마법이 데이몬의 사술보다 위력 면에서 단연코 위일 수밖에 없었다. 먼저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듯 베르키스는 계속해서 데이몬의 정신세계를 공략해 들어갔다. 완전히 제압해서 자결을 명하던가, 그게 안되면 미치게라도 하려는 것이 베르키스의 의도였다. 쿵. 데이몬의 무릎이 힘없이 꿇려졌다. 머리를 감싸안은 상태로 데이몬은 이를 으스러져라 깨물었다. 정신세계를 보호하고 있는 장벽이 점점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건 사술이 서서히 풀리는 것을 느낀 데이몬은 절망감에 젖어 고함을 내질렀다. "아, 안 돼." 사술을 무너뜨린 베르키스의 정신마법은 거칠 것 없다는 듯 데이몬의 정신세계를 파고 들어가려 했다. 그 때 이변이 일어났다. 지금껏 데이몬이 살인을 할 수 없도록 옭죄고 있던 금제법 칠종단금술이 발동한 것이다. 정신세계가 허물어져 광인이 되기 직전에 발동된 칠종단금술은 곧 베르키스의 정신마법에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피시술자의 자아와 함께 성장하는 이 천고의 금제술은 드래곤의 정신마법에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데이몬이 필사의 역경을 딛고 지금까지 왔듯 그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칠종단금술 역시 비약적인 발전을 했던 것이다. 데이몬이 걸려 있는 칠종단금술은 처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성장한 상태였다. 쉴새 없이 정신세계를 공략하는 정신마법에 맞서 칠종단금술은 질 수 없다는 듯 방어에 몰두했다. 두 상반된 기운의 전쟁터가 된 데이몬의 몸은 마치 학질이라도 걸린 듯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역시 놈에겐 뭔가가 있었어." 상대가 쉽사리 정신마법에 걸려들지 않자 베르키스는 조바심이 났다. 이런 대치 상황이 지속될 경우 불리한 것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정신마법을 전개하는 동안은 본 드래곤과 데스 나이트들의 공격에 철저히 무방비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놈을 포기한 채 도주하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애가 탄 베르키스는 부근에서 조력자를 찾았다. 남아있는 가디언들을 동원해 무방비상태인 데이몬을 처치해버리려는 의도에서였다. 다행히 브론즈 골렘 둘이 그의 명령에 호응해왔다. 상황을 보아 남은 것은 그들뿐인 것 같았다. 캬오오오.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채 싸움을 벌이던 브론즈 골렘 둘이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공교롭게도 몸을 돌리는 순간에 생명석을 꿰뚫린 브론즈 골렘 하나가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지만 나머지 브론즈 골렘은 머뭇거림 없이 몸을 날렸다. 기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지만 브론즈 골렘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는 질주를 시작했다. "마, 막아라." 호통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지만 브론즈 골렘의 돌격을 막을 만한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치열하게 교전하는 와중에서는 틈을 노린 공격이 가능했지만 이처럼 빠른 속도로 돌격하는 브론즈 골렘을 저지할 방법은 한 마디로 존재하지 않았다. 육중한 브론즈 골렘은 한 마디로 전장에서의 전차와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것도 보병이 달리는 것보다 월등히 속도가 빠른 전차. 특유의 빠른 몸놀림 덕택에 어렵지 않게 기사들을 떨쳐버린 브론즈 골렘은 일직선으로 데이몬을 향해 질주했다. 속도가 워낙 빨랐기 때문에 데이몬의 몸은 금세라도 골렘의 발길에 짓밟혀 으스러질 것 같았다. 우지직. 질주하는 브론즈 골렘은 걸리적거리는 기사들을 그대로 걷어차거나 짓밟아 버렸다. 공교롭게도 브론즈 골렘이 질주하는 경로에 미티어 스웜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왕녀들이 숨어 있었다. 부상을 입거나 겁에 질린 등등의 이유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왕녀들은 자신들을 향해 질주하는 브론즈 골렘을 보자 동시다발적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악." "사, 살려줘요." 하지만 그들을 위기에서 구해줄 만한 존재는 없었다. 금방이라도 브론즈 골렘이 달려와 밟아버릴 것 같았기에 그녀들은 완전히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때 옆에서 벼락같은 호통이 터져 나왔다. "네놈을 이대로 통과시킬 것 같으냐?" 고함을 지른 자는 바로 미첼이었다. 기사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던 활약을 보이던 미첼은 브론즈 골렘이 달려나가는 순간 바로 놈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물론 그가 데이몬을 보호하기 위해 가차없이 몸을 날린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미첼에게 데이몬은 필요하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사력을 다해 달린 덕분에 미첼은 브론즈 골렘이 도착하기 직전에 왕녀들 앞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물론 미첼의 머릿속에는 데이몬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물론 왕녀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콰우우. 인간 하나가 앞을 가로막자 달려오던 브론즈 골렘은 가소롭다는 듯 발을 들어 미첼을 걷어차려 했다. 하지만 미첼은 지금까지 상대하던 인간 기사들과는 수준 자체가 틀렸다.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미첼은 검을 휘둘러 브론즈 골렘의 발목을 사정없이 가격했다. 골렘이 체중을 실어놓은 반대편 발목이었다. 이미 그는 끌어올릴 수 있는 마나를 깡그리 검에 불어넣은 상태였다. 썽컹. 브론즈 골렘의 발목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맹렬히 달려가던 골렘으로서는 그대로 중심을 잃을 수밖에 없는 일격이었다. 브론즈 골렘의 육중한 몸이 굉음과 함께 사정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쿵 골렘은 공교롭게도 부들부들 떨고 있던 왕녀들 바로 앞에서 하늘을 보고 길게 자빠졌다.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는 브론즈 골렘의 가슴팍 위로 누군가가 사뿐히 뛰어올랐다. "네놈의 생명석은 머리통 아니면 목에 있겠군. 이번에는 쉬운데?" 골렘의 몸에서 파헤쳐지지 않은 곳이 단 두 군데뿐이란 사실을 파악한 미첼의 눈이 희열감으로 빛났다. 생명석이 박혀 있을 만한 다른 부위는 이미 기사들의 포위공격을 받아 벌집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미첼은 머뭇거림 없이 장검을 브론즈 골렘의 동체에다 박아 넣었다. 푸슉. 미첼의 검은 브론즈 골렘의 목과 가슴이 이어지는 부분을 사뿐히 파고 들어갔다. 하지만 미첼의 첫 번째 공격은 수포로 돌아갔다. 부우웅. 거대한 장검이 미첼의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생명이 끊어지지 않은 탓에 브론즈 골렘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에잇." 미첼은 즉시 도약했다. 적중되면 인간의 몸 정도는 잘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박살나버릴 정도로 거대한 장검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그의 발치를 스치고 지나갔다. 공격을 피해낸 미첼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납작 숙였다. 휘이이잉. 방패가 달려있는 육중한 주먹이 이번에는 그의 등허리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더 없이 위력적인 브론즈 골렘의 두 번째 공격이었다. 몸을 곧추세운 미첼은 장검에 마나를 한껏 집중시켰다. 파츠츠츠. 검에 맺힌 오러 블레이드가 선열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미첼은 벼락같이 검을 휘둘렀다. "끝장을 내 주마!" 기다란 뿔이 달려 있는 투구 모서리가 썽컹 잘려 나갔다. 이어 휘두른 공격에 나머지 뿔도 투구 반쪽과 함께 브론즈 골렘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아직까지 생명석이 건재한가?" 장검을 역수로 틀어쥔 미첼은 겨우 반 정도만 남은 브론즈 골렘의 머리통 중앙에다 검을 아무 머뭇거림 없이 박아 넣었다. 활짝 펼쳐진 브론즈 골렘의 손이 뻗어오고 있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푸슉. 미첼의 이번 공격은 정통으로 먹혀 들어갔다. 머리 속에 들어있는 생명석이 여지없이 부서져 버린 것이다.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던 브론즈 골렘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미첼을 움켜쥐려던 손 역시 허공에서 멎어버렸다. 생명석이 파괴되어 원래대로 청동 덩어리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휴. 이제 끝났군." 미첼은 손을 들어 투구 아래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널브러진 브론즈 골렘의 가슴팍을 단단히 디딘 채 철탑처럼 버티고 서 있는 미첼의 모습은 영웅이라 불리기에 추호도 모자람이 없는 모습이었다. 미첼은 허리를 굽혀 잘려나간 뿔 한 조각을 집어들었다. "기념품으로 괜찮겠군." 고개를 돌린 미첼은 자신을 쳐다보는 여러 왕녀들의 경의 어린 눈빛을 목격해야 했다. 공포에 질린 상태였지만 그녀들의 눈빛에는 몽롱함이 감돌고 있었다. '저, 저렇게 용맹스러운 기사라니……. 정말 멋있어.' '나, 날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었어.' 왕녀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감격한 듯한 눈빛이 서려있었다. 머쓱해진 미첼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은 극히 위험합니다. 그러니 서둘러 대피하십시오." 고개를 돌린 미첼은 뒤이어 달려온 기사들이 눈에 띄자 머뭇거림 없이 명령을 내렸다. "그대들은 이 레이디들을 지금 즉시 안전한 장소로 대피시키도록 하시오. 난 우리 마법사를 돕겠소." "알겠습니다." 기사들은 즉시 대답했다. 비록 자신들의 상급자는 아니었지만 그동안 보여준 활약으로 인해 기사들은 이미 미첼에게 깊이 매료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불굴의 투지, 안전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용맹으로 인해 미첼의 활약은 기사들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기사들이 왕녀들을 부축해서 물러나는 것을 확인한 미첼은 즉시 데이몬 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쪽을 본 순간 미첼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안 돼! 데이몬!" 완전히 무방비 상태인 데이몬은 지금 극히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마지막 브론즈 골렘의 생명이 사라지자 베르키스는 즉각 두 번째 계획을 시행했다. 카트로이와 지크레이트가 거의 근접해 온 상황이었지만 그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쿠르르릉. 구덩이에 박힌 채 꽁꽁 얼어붙어 있던 아이언 골렘이 느릿하게 육중한 동체를 일으켰다. 몸의 반이 땅에 묻혀 있는 상태였지만 이번에는 어렵지 않게 몸을 빼낼 수 있었다. 카트로이가 내뿜은 아이스 브레스로 인해 땅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고 아이언 골렘이 몸을 움직이자 누르고 있던 바위가 맥없이 부서져버린 것이다. 자유로워진 아이언 골렘은 아주 느리게 데이몬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쩌저정. 아이언 골렘의 몸은 계속해서 금이 가고 있었다. 카트로이가 사정없이 퍼부은 아이스 브레스로 인해 아이언 골렘의 몸은 극도로 냉각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움직였으니 몸을 구성하고 있는 강철이 배겨날 리가 없었다. 후두두둑. 걸어가는 아이언 골렘의 몸에서는 깨어진 강철조각이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언 골렘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데이몬을 향해 계속 접근해 갔다. 애당초 데이몬이 구덩이에 근접해 있는 상태에서 당했기 때문에 아이언 골렘은 오래지 않아 목적했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첼은 바로 그 장면을 본 것이다. "데, 데이몬." 미첼은 계속 고함을 지르며 질주했다. 이미 카심과 제럴드, 남은 대원들도 역시 그 장면을 보고 몸을 날리는 상태였다. 하지만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아이언 골렘이 공격하기 전에 도착할 수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데이몬의 이름을 거듭 부르짖으며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간신히 데이몬 앞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아이언 골렘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극도로 냉각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움직이다보니 불운하게도 생명석이 깨어져버린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생명이 없는 강철 덩어리가 되어버린 아이언 골렘. 그 거대한 동체는 데이몬 앞에 철탑처럼 버티고 선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가공할 만한 무위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언 골렘의 허무한 최후였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베르키스는 도리어 쾌재를 불렀다. "되었어." 펼치던 정신마법을 거둔 베르키스는 아가리를 좍 버렸다. 그리로 레드 드래곤 특유의 화염 브레스가 맹렬히 뿜어졌다. 화르르르. 비록 아이언 골렘이 막고 있는 탓에 브레스가 데이몬에게 미칠 수는 없었지만 베르키스가 의도하는 바는 따로 있었다. "극도로 냉각된 상태에서 갑자기 고열이 가해질 경우 금속은 그대로 깨어져버린다. 날카로운 금속파편이라면 놈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데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정신마법을 거뒀지만 놈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할 터. 이번에는 놈을 확실하게 끝낼 수 있겠군." 브레스를 내뿜은 뒤 베르키스는 허공에서 급선회를 시도했다. 덤벼드는 본 드래곤과 데스 나이트의 공격을 피해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접근을 너무 허용했기 때문에 베르키스는 그만 데스 나이트의 공격을 허용해야 했다. 고공에서 몸을 날린 네 명의 데스 나이트들이 검과 하나가 되어 육탄으로 내려꽂히고 있었다. 푸슛. 네 자루의 장검이 베르키스의 비늘과 살을 사정없이 헤집은 뒤 빠져나갔다. 하지만 거대한 베르키스에게 치명상을 입히기는 힘든 공격이었다. "이것이 통증이라는 것인가?" 옆구리와 허벅지에서 저미는 듯한 통증이 전해졌지만 베르키스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목적을 달성한 터라 더 이상 이곳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쓰쓰쓰. 레드 드래곤의 거대한 몸이 허공에서 그대로 지워져 버렸다. 블링크를 써서 그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어디 갔지?" 복수심에 불타는 네 데스 나이트가 안광을 내뿜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베르키스의 모습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그들의 몸을 카트로이와 지크레이트가 사뿐히 받아들었지만 그들의 시선은 계속해서 허공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베르키스가 내뿜은 브레스는 정통으로 아이언 골렘의 등판에 명중했다. 콰르르르. 아이언 골렘의 몸체에 균열이 일어나더니 그대로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극도로 냉각된 상태에서 열기가 가해지자 금속을 구성하던 분자구조가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아이언 골렘의 동체는 곧 헤아릴 수조차 없는 날카로운 금속 파편으로 바뀌어 사방으로 비산하기 시작했다. 바로 앞에 웅크리고 있는 데이몬이 파편 세례를 피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파파파팍. 정신 마법의 후유증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데이몬의 주위로 날카로운 금속 파편이 날아와 땅을 파고들었다. 갑옷을 걸치지 않은 데이몬이라서 그의 몸은 금세 난자되어버릴 것 같았다. 우르르르. 때마침 완전히 박살이 난 아이언 골렘의 동체가 마치 모래성 무너지듯 허물어졌고 데이몬의 몸은 금세 금속 파편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지축을 울리는 굉음 속에 간발의 차이로 그곳에 도착한 카심 용병단원들의 비통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데, 데이몬!" 그들의 부르짖음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10장 마룡 베르키스 285회. "데, 데이몬." 카심 용병단원들은 하염없이 울부짖으며 그곳을 수색했다. 하나같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이다. "죽어서는 아니 되오. 난 반드시 당신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단 말이오." "나 역시 마찬가지요. 당신은 내 허락 없인 죽을 수 없소." 눈에 불을 켜고 수색을 거듭했지만 데이몬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아이언 골렘이 남긴 잔해가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편들이 하나같이 날카로웠기 때문에 수색하던 카심 용병대원들은 손은 금세 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듯 수색을 잠시도 그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전신이 피로 물든 기사들이 하나 둘씩 그들에게 다가왔다. 싸움에 가담하여 승리를 거둔 크로센 기사단과 듀크 나이츠들이었다.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그들이었지만 함께 혈전을 치른 탓에 관계가 상당히 호전된 모습이었다. 부상당한 기사를 서로를 부축해 주는 모습이 더 없이 친밀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우두머리의 관계는 그리 쉽사리 호전되지 못했으니…….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된 윌리엄스 후작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에는 결연한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모두 비켜라. 수색은 우리 크로센 기사단에서 맡아야한다." 그 말에 카심이 냉랭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것은 엄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이오. 그러나 돕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소." "내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군." 윌리엄스 후작은 검의 손잡이를 불끈 움켜쥐었다. 그 모습에 카심은 바짝 긴장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카심의 호통에 윌리엄스 후작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흑마법사는 감히 황태자 전하의 살인을 청부했던 불측한 대역 죄인이다. 그는 크로센 제국의 법에 의해 준엄하게 심판 받아야 한다. 설사 죽었다고 해도 대역죄를 벗을 수 없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카심 용병단원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마나가 집중된 장검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파츠츠츠 마치 크로센 기사단 전체와도 맞서 싸울 법한 기세였다. 카심이 윌리엄스 후작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심판은 아마도 우리 모두를 시체로 만든 후에나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에 윌리엄스 후작이 눈썹을 곤두세우는 순간 뭔가 거대한 것이 그리로 날아들었다. 난데없이 엄습하는 세찬 바람에 기사들은 다급히 몸을 웅크려야 했다. 쿵. 둔중한 충격과 함께 거대한 본 드래곤의 동체가 바닥에 내동댕치쳐지며 먼지를 자욱하게 일으켰다. 본 드래곤 지크레이트는 마치 죽은 것처럼 맥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 옆으로 화이트 드래곤 한 마리가 사뿐히 착지했다. 상황을 보아 그가 본 드래곤을 내동댕이친 장본인인 것 같았다. 카심이 그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카트로이님." 카트로이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지크레이트를 가리켰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데스 나이트들을 태우고 함께 날아오는데 이놈이 갑자기 힘을 잃고 추락하는 거야. 가까스로 낚아채긴 했지만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더군." 카트로이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지크레이트에게로 집중되었다. 카트로이의 말대로 지크레이트는 사지를 맥없이 대지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마치 시체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뭔가를 들고 있던 카트로이는 그것마저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놈들도 마찬가지야." 카트로이가 내려놓은 것은 바로 데스 나이트들이었다. 하나같이 시체처럼 힘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카트로이의 설명이 이어졌다. "멀쩡히 등에 타고 있던 녀석들이 갑자기 쓰러지며 바닥으로 추락하더군. 내 몸놀림이 빠르지 않았다면 이놈들은 지금쯤 땅과 부딪혀 박살이 나버렸을 거야." 카트로이의 설명을 들은 용병대원들의 얼굴에 망연자실한 표정이 떠올랐다. "어찌 이런 일이……." 한 달음에 데스 나이트들에게로 다가간 카심은 엎어져 있는 헬버트론을 반듯하게 뒤집었다. 비록 모두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안면을 익혀 왔던 탓에 카심은 데스 나이트들을 용케 분별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헬버트론은 죽지 않은 상태였다. 마치 중병을 앓고 있는 병자처럼 투구 눈구멍 사이에서 분별하기 힘든 희미한 안광이 흘러나왔다. "어, 어찌 된 일입니까? 헬버트론 님." 잠시 후 헬버트론에게서 힘겨운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데, 데이몬에게서 저, 전해지는 어…둠의 마력이 끄, 끊겼다. 그, 그 때문에 우린 힘을 모조리 상실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카심의 얼굴에 비통함이 서렸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깡그리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 그렇다면 데이몬은 이미……." "그…렇지는 않다. 노, 놈이 죽었다면 그 즉시 우리의 육신마저 함께 사, 사라졌어야 옳다. 사, 상황을 보니 그, 그는 빈사상태의…… 중상을 입고 정신을 잃은 것 같다." 그 말을 듣자 카심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번뜩였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데이몬이 묻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봐. 데이몬이 살아있어. 서둘러 구해야 해." 하지만 카심의 앞길을 윌리엄스 후작이 가차없이 막아섰다. 이미 그는 뽑아든 장검에다 오러 블레이드를 시퍼렇게 뿜어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카심의 눈에 불똥이 튀겼다. "비키지 않으면 공격할 것이오." 그 말에 윌리엄스 후작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하는 소리냐?" "물론이오. 윌리엄스 후작 나리. 대 크로센 기사단의 총수를 그 누가 모르겠소. 하지만 말이오……." 결심을 증명하려는 듯 카심은 눈에 불을 켠 채 한자, 한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설사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와 그의 가디언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더라도 난 공격을 감행할 것이오. 앞을 가로막은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내겐 하나도 중요하지 않소." "물러서지 않으면 넌 내 손에 죽는다." 윌리엄스 후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미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카심 용병단의 목숨은 엄연히 하나요. 우리 모두의 숨통을 끊기 전까지 당신은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이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윌리엄스 후작은 느릿하게 손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보자 크로센 기사단원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검을 들어올렸다. 그들에게 윌리엄스 후작의 추상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모두 체포하라. 대역죄인을 옹호하는 자들에게 일체의 용서란 없다. 저항할 경우 가차없이 처치하라." 하지만 기사들은 머뭇거리기만 할 뿐 좀처럼 나서려 하지 않았다. 함께 힘을 합쳐 싸운 용병대원들을 도저히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카심 용병단원들의 용맹스러운 활약상은 이미 그들의 머리 속에 단단히 각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윌리엄스 후작의 호통에 그들은 결국 검을 움켜쥐며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보니 싸움을 피할 수 없겠군." 카심은 재빨리 일행의 상태를 살폈다. 하나같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있었지만 치명상을 입은 자는 없었다. 단지 두 명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대치하는 와중에서도 그들은 지금 정신 없이 데이몬을 덮고 있는 파편을 치우고 있었다. '비에리는 아까 당했고……. 헬튼도 모르는 사이에 당했나보군.' 카심은 고즈넉이 그들을 불렀다. "아무래도 한 바탕 싸워야 할 것 같다." 카심의 말에 고개를 돌린 용병대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데이몬을 지킬 듯한 기세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손은 연신 파편을 집어들고 있었다. 마음이 편해진 카심은 묵묵히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말한 대로 우린 최후의 일인까지 그를 수호할 것이오." 각오를 밝힌 카심은 싸울 자세를 취했다. 그 때 누군가가 그들 사이로 끼여들었다. "함께 싸운 동료끼리 어찌 이럴 수 있나? 싸우기 전에 먼저 흑마법사를 구해내는 것이 순리 아닌가?" 끼여든 자는 다름 아닌 페르슈타인 공작이었다. 암암리에 지시를 내려놓은 듯 듀크 나이츠들이 검을 들어 싸울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윌리엄스 후작의 기세는 결코 누그러지지 않았다. "페르슈타인 공작. 당신 역시 책임을 면할 수 없소. 비록 당신의 지시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다는 것은 자체로도 중죄에 속하오. 더 이상 관여할 경우 당신 역시 대역죄인으로 간주하겠소." 페르슈타인 공작의 눈썹이 역 팔자로 휘었다. "보자, 보자 하니 너무 하는군. 윌리엄스 후작." 하지만 윌리엄스 후작은 눈썹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다. "흑마법사를 옹호하는 자는 신분이 어떠하던 간에 크로센 기사단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오. 거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없소." 그 말이 끝나자마자 큼직한 음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예외가 없다면 나까지 포함되겠군. 정녕 그런가? 인간이여."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자 카트로이의 무표정한 눈빛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지간한 윌리엄스 후작이라 하더라도 드래곤 앞에서는 주춤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일단 도와주신 데 대해서는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히 크로센 제국의 명예가 달린 일입니다. 위대한 화이트 드래곤이여. 그대가 만약 방해하려 한다면 우린 부득이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 역시 의심할 나위 없는 카심 용병단의 일원. 동료들을 공격한다면 나 역시 싸울 수밖에 없다. 이미 동족인 드래곤까지 적으로 돌린 마당에 가릴 것이 있을 것 같나? 하지만……." 카트로이는 거대한 눈을 들어 윌리엄스 후작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먼저 데이몬부터 구해내는 것이 순리 아닐까? 이후의 일은 그를 구해내고 난 뒤 논의해야 할 것 같은데……." 드래곤까지 나서자 윌리엄스 후작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뜻을 꺾지 않겠다는 듯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대신 흑마법사의 신병은 반드시 우리 크로센 기사단이 맡아야 하오. 대신 그의 상처는 우리가 책임지고 치료하겠소. 재판에 걸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그를 살려야 할 테니까……." "그렇게 하지." 서둘러 윌리엄스 후작의 조건에 동의한 페르슈타인 공작이 휘하의 듀크 나이츠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흑마법사를 구출하라. 무너지지 않도록 파편을 조심스럽게 제거해야 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듀크 나이츠의 기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들은 한창 파편을 제거중인 카심 용병단원들을 도와 파편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크로센 기사단원들 역시 뒤질세라 달려들었다. "모두 건틀릿을 벗은 상태로 파편을 제거하라. 충격을 덜기 위해 손에 마나를 집중시키는 것 역시 허용하지 않겠다." 기사들이 힘을 합쳐 산더미처럼 쌓인 파편을 제거하는 장면을 지켜보던 페르슈타인 공작은 슬며시 카심에게 다가갔다. 결연한 표정으로 눈빛을 빛내고 있던 카심이 고개를 돌렸다. "그대가 대장인 카심인가?" "그렇소." 다소 퉁명스러운 대답이 들려왔지만 페르슈타인 공작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일단 당신들의 뜨거운 동료애에 진심으로 찬사를 보내는 바다. 내 신분은 익히 알고 있을 테니 길게 말하지 않겠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카심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카심. 당신들의 심정을 익히 알고 있지만 더 이상의 상황악화를 위해 조금만 참아주지 않겠나? " "………." "흑마법사는 내가 반드시 구해내도록 하겠다. 그는 나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은혜를 베푼 은인. 그러므로 나 역시 그가 죽는 것을 가만히 좌시할 수 없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드러나지 않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내가 거느린 전력을 깡그리 투입하여 전쟁을 치르는 한이 있어도 그의 목숨을 살려내겠다. 그러니 잠시만 뒤로 물러나 주겠나? 더 이상의 상황 악화를 막기 위해서 말이다." 카심의 타는 듯한 눈초리가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그 역시 윌리엄스 후작의 고집이 보통이 아니란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잠시 후 카심이 불쑥 한 마디를 내뱉었다. "당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소?" "물론이다." 머뭇거림 없이 대답하는 페르슈타인 공작을 보던 카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으로써는 그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리다." 카심은 서둘러 동료들에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페르슈타인 공작 역시 서둘러 수색현장으로 향했다. 수많은 기사들이 힘을 합친 덕택에 아이언 골렘의 파편은 눈에 띌 정도로 줄고 있었다. 수색에 동원된 기사 하나가 손을 쳐다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상처투성이가 된 손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복장을 보니 듀크 나이츠에 소속된 기사였다. "이렇게 날카로운 파편에 묻혀 있는데 과연 그가 살아있을까?" 듀크 나이츠의 부대장 표식을 단 기사 하나가 그를 향해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잡담할 시간이 있으면 파편 하나라도 더 치워라." 부대장의 손 역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파편 더미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기사들은 하나같이 건틀릿을 벗은 상태로 파편을 치우고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찔끔한 기사는 서둘러 일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파편이 치워진 뒤 드러난 것은 장대한 체구를 지닌 시신 한 구였다. 중장갑주를 입고 있는 것을 봐서 데이몬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상당히 튼튼해 보였지만 날카로운 파편 조각들이 갑주를 사정없이 뚫고 들어간 상태였다. 갑주에 싸인 몸은 보나마나 끔찍하게 난자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사지 부분은 아예 걸레가 되어 있었다. "영차." 기사들이 시신을 들어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비통한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해, 핼튼. 너, 너였구나?" 카심 용병단원들이 마치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행 중 가장 덩치가 컸던 헬튼. 제일 과묵하며 또한 순박했던 이가 바로 헬튼이었다. 상황을 보아 그가 몸을 던져 데이몬을 보호한 것이 틀림없었다. 아이언 골렘이 부서지기 시작했을 때 그가 가장 근접한 거리에 접근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의 얼굴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파편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네가 대표해서 해 냈구나." 상처로 엉망이 된 헬튼의 얼굴에는 아직까지 웃음기가 지워지지 않았다. 마치 목숨을 바쳐 데이몬을 구해낸 것이 자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핏기 없는 얼굴을 쓸어보던 카심이 묵묵히 중얼거렸다. "잘 가라. 헬튼. 우린 널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곧 슬픔을 삭인 뒤 다시 시선을 돌렸다. 지금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데이몬의 생사였다. 예상대로 헬튼의 시신 아래엔 한 사람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을 보자 카심 용병단원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아니?" 당연히 데이몬일 것이라 짐작했는데 전혀 다른 사람이 누워있었기 때문이었다. 핏기가 하나도 없는 창백한 얼굴. 누워있는 자는 결코 데이몬이 아니었다. 잘 생긴 금발 청년 하나가 마치 죽은 듯이 그 자리에 누워있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로브만이 데이몬의 것과 같을 뿐이었다. 헬튼이 육탄으로 보호했던 때문인지 청년의 몸에 별다른 상처가 나 있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일에 용병대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그 때 갑자기 윌리엄스 후작의 외마디 일성이 터져 나왔다. "어, 어찌 이런 일이……. 아, 알카리스 전하." 윌리엄스 후작의 눈은 찢어질 듯 크게 뜨여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누워 있는 청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오래 전에 실종되었던 크로센 제국의 제 1황자였다. 트루베니아로 유인되어 실종된 뒤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된 알카리스 황태자가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윌리엄스 후작이 어릴 때부터 보호해 온 알카리스의 얼굴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상당한 세월이 지났지만 그는 알카리스를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그의 뒤로 궁정마법사 필라모네스가 넋이 빠진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퍼뜩 정신이 든 그는 서둘러 힐링을 캐스팅했다. 휘르르르. 필라모네스가 펼친 힐링이 알카리스 황태자의 몸을 완전히 뒤덮었다. 8서클의 엑스퍼트가 펼친 힐링이라 치료효과에 있어서 평범함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카리스 황태자는 전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필라모네스는 다급히 윌리엄스 후작을 돌아보았다. "이럴 것이 아니오. 우선 알카리스 황태자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하오." "당연히 그래야지요." 어찌 된 영문인지 알 턱이 없었지만 윌리엄스 후작은 지금 상황에서 가장 급한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알카리스 황태자를 안아든 윌리엄스 후작은 주위의 기사들을 향해 고함을 버럭 질렀다. "제 1지단에서 5지단까지는 날 따르라. 황태자 전하를 궁정으로 모셔야 한다. 나머지 지단은 흑마법사의 자취를 계속 수색하라."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머뭇거림 없이 복명하자 윌리엄스 후작은 즉시 궁정으로 향했다. 오로지 크로센 황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불타는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무슨 일이 초래될지 일체 계산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알카리스를 보호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그가 사라지자 나머지 크로센 기사단원들은 또다시 수색에 돌입했다. 이미 카심 용병단원들과 듀크 나이츠들이 정신 없이 수색에 몰두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파편이 모두 치워졌음에도 불구하고 흑마법사는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수색은 중단되었다. 흑마법사의 자취가 오리무중이었으므로 크로센 기사단원들은 결국 임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리 윌리엄스 후작으로부터 단단히 지시를 받은 부단장이 기사들에게 데스 나이트의 신병을 확보할 것을 명했다. "데스 나이트들을 지하감옥으로 옮겨라. 이미 신관들이 그들의 힘을 무력화시킬 마법진을 설치하고 있을 것이다. 조금 뒤 병사들이 도착하면 본 드래곤 역시 황궁의 지하광장으로 옮길 것이다." 물론 가만히 보고 있을 페르슈타인 공작이 아니었다. 그의 지시를 받은 듀크 나이츠의 단장 크로비츠가 거세게 항의하고 나섰다. "그럴 순 없소. 데스 나이트들은 우리 듀크 나이츠에서 인수하겠소." 그러나 크로센 기사단 부단장 카시모프는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뒤흔들었다. 그 역시 오래 전에 소드 마스터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었다. "동의할 수 없소. 본 드래곤과 데스 나이트는 대역죄인인 흑마법사의 심복이오. 따라서 크로센 기사단에서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오." 그 말에 크로비츠가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그는 잔뜩 화가 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대들이 정녕 우리 듀크 나이츠를 무시할 생각이오? 드래곤을 물리치기 위해 우린 당신들보다 훨씬 많은 희생을 치렀소. 그들의 고귀한 희생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듀크 나이츠는 결단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 그 말을 듣자 카시모프 부단장은 난감한 기색을 떠올렸다. 크로비츠의 말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브론즈 골렘을 상대함에 있어 전반적인 실력이 떨어지는 듀크 나이츠의 기사들이 크로센 기사단원들보다 많은 사상자를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할지 몰라 당혹해하는 카시모프에게 페르슈타인 공작이 다가갔다. "그럴 게 아니라 처음부터 공동 경비를 맡는 게 좋겠군. 크로센 기사단원과 듀크 나이츠를 각각 반씩 투입해서 데스 나이트와 본 드래곤을 경비하도록 하지. 어떤가? 물론 그들을 가두는 장소는 자네의 뜻에 따르겠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카시모프는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동료들을 잃고 흥분해있는 듀크 나이츠를 계속 자극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합의가 도출되자 기사들이 늘어진 데스 나이트들을 들어올렸다. 마치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데스 나이트들을 옮기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들의 뒤를 엄선된 수십 명의 듀크 나이츠가 따랐다. 그들이 바로 크로센 기사단원들과 함께 데스 나이트를 지킬 기사들이었다. 그들이 멀어지자 잔뜩 긴장한 채 검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던 카심 용병단원들이 울분을 터뜨렸다. "제기랄. 나쁜 놈들." 만약 경비병력에 듀크 나이츠가 포함되지 않았다면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혈전을 벌였을 것이다. 공포의 상징인 데스 나이트였지만 그들에겐 생사를 같이 하는 동료나 다름없었다. 다가온 페르슈타인 공작이 그들을 달랬다. "실력이 가장 뛰어난 듀크 나이츠들을 파견했으니 데스 나이트들은 안전할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날 따라오라. 그대들에겐 지금 치료와 휴식이 절실히 필요하다. 변변치 않지만 내가 쉴 곳을 마련해 주겠다." 카심은 그때서야 공손히 예를 올렸다. "페르슈타인 공작전하의 후의에 감사 드립니다." 솔직히 말해 대원들은 심신 양면으로 한계에 달한 상황이었다.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긴장이 풀린 탓에 도저히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기색을 알아차린 페르슈타인 공작이 남은 듀크 나이츠를 둘러보며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이들은 한 마디로 진정한 영웅이오 용사들이다. 이들의 용맹과 투지는 듀크 나이츠가 앞으로 영원히 본받아야 할 귀감이 된다. 이들을 부축해서 나의 저택으로 모셔라." "알겠습니다." 명을 받은 듀크 나이츠들이 지체 없이 다가와 대원들을 부축했다. 크로센 기사단원들과 마찬가지로 듀크 나이츠들 역시 대원들에게 깊이 감명 받은 상태였다. 실력 면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지만 이들의 투지는 그들로써는 감히 흉내조차 내지 못했다. "마차를 대기시켜라." 기사들은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인 카심 용병단원들을 부축해서 페르슈타인 공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사태가 해결된 것을 확인한 카트로이는 다시 인간으로 모습을 바꿔 그들을 따라갔다. 그러나 페르슈타인 공작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함께 떠나지 않았다. 난데없이 벌어진 끔찍한 참사. 크로센 제국의 수뇌부들은 곧 중앙 광장에서 벌어진 혈겁에 대한 수습에 들어갔다. 레드 드래곤과 그의 가디언으로 인해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이승을 하직했다. 그들 대부분은 간택식에 참가하기 위해 왔던 왕녀와 그 호위기사들이었다. 부상자는 빠짐없이 치료를 위해 안전한 장소로 옮겨졌다. 널린 시신들 역시 고이 거둬졌다. 그 작업을 위해 수도 경비사단이 깡그리 투입된 상황이었다. 사망자와 부상자의 신원이 속속 확인되었고 시체를 남기지 못한 사망자들의 신원은 목격자들에 대한 탐문을 통해 조금씩 파악해 나갔다.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하루 이틀 사이에 마무리지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수만 명의 병사들이 중앙광장을 온통 헤집으며 시체조각을 찾아내는 사이, 이 놀라운 소식은 곧 마법통신을 통해 아르카디아 전역으로 전해졌다. 왕녀의 죽음을 확인한 왕국의 궁성에서는 처절한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바로 딸을 잃은 국왕의 비통한 부르짖음이었다. 물론 그들은 페르슈타인 공작이 아닌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데이몬의 시기 적절한 대응에 의해 말이다. [다크메이지] 10장 마룡 베르키스 286회.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세상은 온통 고요한 적막감에 싸여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보이는 것이란 오로지 어둠뿐이었다. 감각 역시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데이몬은 멍하니 어둠 저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정녕 죽은 것일까? 마침내 이승의 경계를 넘어 저승으로 발을 디딘 것일까' 하지만 정황을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베르키스의 정신마법에 맞서 사투를 벌이던 사실과 지금껏 그에게 벗을 수 없는 족쇄였던 칠종단금술이 발동되던 순간을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그를 향해 무너져 내리던 헤아릴 수 없던 아이언 골렘의 파편. 파편 하나, 하나가 살이 아니라 뼈마저 그대로 꿰뚫어버릴 정도로 날카로웠다. 당시 데이몬은 죽음을 곧 당면할 현실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정신마법에서 풀리긴 했지만 후유증으로 인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마법전개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파편을 고스란히 뒤집어쓴다면 살아날 가능성은 한 마디로 전무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는 오직 죽음이란 단어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복수를 하지 못하고 이렇게 생을 마쳐야만 하는가? 다프네를 구해내지도 못하고…….' 데이몬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쏟아지는 파편 더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때 갑자기 시커먼 그림자가 그의 몸을 덮쳤다. 데이몬은 창촐간에 누군가에게 깔려버렸다.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데이몬."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투구 가리개 사이로 번뜩이는 눈빛이 들어왔다. 순박함이 가득한 눈빛. 데이몬에겐 무척이나 낯익은 눈빛이었다.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린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핼, 핼튼. 위험해." 그러나 데이몬을 감싸안고 있는 핼튼은 도리어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데이몬, 당신을 만나게 된 것은 제 생애 최대의 행운입니다. 다른 동료들의 마음도 저와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무시무시한 파편 더미가 그들을 덮쳤다. 물론 그것은 데이몬을 감싸안고 있던 헬튼이 고스란히 덮어써야 했다. 닿아 있던 헬튼의 가슴팍을 통해 파편이 작렬하는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로 인해 건장한 헬튼의 몸이 쉴새없이 들썩거렸지만 그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퍼퍼퍼퍽. 몸을 뜨겁게 적시고 있는 것은 아마도 헬튼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이리라. 데이몬은 피눈물을 흘렸다. "고맙다. 헬튼. 너의 마음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 그리고 다짐하겠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너의 목숨 값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것을……." 파편이 작렬하는 충격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헬튼의 피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상태로 데이몬은 끝없이 복수를 다짐했다. 그리고 곧 까무러쳐 버렸다. 둘의 몸을 완전히 뒤덮은 엄청난 파편의 무게. 그것으로 인해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데이몬의 머리 속에 남아있는 기억의 전부였다. '맥밀란에 이어 헬튼. 너까지도 나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놓았군.'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들을 수조차 없는 상태였지만 데이몬은 묵묵히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다른 대원들은 무사할까? 비에리가 골렘에게 당하는 것은 보았지만…….' 지금쯤 저승에 있을 비에리를 생각하자 데이몬에겐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등뼈가 부러졌으니 살아났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봐야 했다. '날 만나지 않았다면 죽진 않았을 텐데……. 데스 나이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정신을 잃었으니 그들 역시 힘을 상실했을 텐데…….' 불연 듯 베르키스에 대한 공포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한 마디로 러셀런트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드래곤이었다. 마법 실력에서부터 휘하의 가디언들까지, 데이몬은 그가 그토록 강할 것이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이언이나 브론즈 골렘의 위력에 비하면 6서클의 리치들은 말 그대로 한낱 경비병 정도에 불과했다. 예상치 못했던 카트로이의 도움과 크로센 기사들의 가세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카심 용병단원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날 수 없었을 것이었다. '베르키스놈.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 강하더군. 하지만 다시 붙는다면 이번처럼 맥없이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번 상대해 본 경험이란 것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니까.' 이후로도 데이몬은 계속 생각에 잠겨있었다. 잠시 후 그는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다. 몸을 치유하는 데에는 잠이 최고란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으므로…….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데이몬은 시간의 흐름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눈을 떴다. 순간 주위에서 낯선 목소리가 호들갑스럽게 터져 나왔다. "깨, 깨어나셨사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정신을 차렸사옵니다." 말투를 보아 귀족 가문에서 시중을 드는 시종 같았다. 데이몬의 눈에 의아한 듯한 빛이 퍼져나갔다. '황태자? 웬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늙수그레하면서도 격정이 잔뜩 배어 있는 음성이 바로 귓가에서 들려왔다. "저, 전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소신. 전하를 다시 뵙게 되어 감히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그 음성 역시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윙윙거리는 음성이었지만 아는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누굴까?' 영문을 모른 데이몬은 그저 눈만 끔뻑거렸다. 아직까지 사물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애를 썼지만 콱 잠긴 목구멍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리고 이곳은?' 데이몬은 꾹 참고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어야만 주위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 가슴팍으로 뭔가 묵직한 것이 짓눌러왔다. 그리로 뭔가 뜨거운 느낌이 전해지는 것을 보니 감각이 서서히 살아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예의 그 음성이 또다시 들려왔다. "불충한 신을 벌해 주십시오. 황가를 수호하는 기사단장으로써 전하를 호위하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소신을 말입니다." 데이몬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만히 듣고 있는 것이 최선일 듯 싶었다. 음성의 주인은 계속해서 울부짖으며 속마음을 토로했다. "간악한 루드비히 놈이 감히 부단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 전하를 사지로 인도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놈을 믿고 전하의 호위를 맡긴 것은 명백한 제 실수입니다. 전 지금껏 그때의 결정을 수없이 후회해 왔사옵니다." 음성의 주인이 넋두리를 늘어놓는 사이 시력이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데이몬의 눈에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노인의 얼굴이 비쳐졌다. 아직 영상이 흐릿했지만 데이몬은 상대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윌리엄스 후작?' 대관절 그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데이몬은 묵묵히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윌리엄스 후작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전하께서 다시 돌아오신 일로 소신은 마침내 무거운 짐을 덜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7년 전 그 일 이후 전 단 하루도 편히 잠을 이뤄본 적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이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시다니……. 소신의 가슴은 지금 희열감으로 인해 터질 것 같사옵니다." 데이몬의 머리는 부산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7년 전이라면 베르키스의 레어에서 막 빠져나올 때 같은데……. 그렇다면?' 데이몬의 눈빛이 갑자기 빛났다. 비로소 몸의 원주인에 대한 궁금증이 떠오른 것이다. 머리를 심하게 다쳐 의식불명인 상태로 데이몬과 몸을 바꾼 금발의 청년. 애초부터 백치가 아니었을까 짐작되는 청년의 신분은 데이몬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름조차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전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육체를 바꿨기 때문이었다. 뭘 하는 자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도저히 생각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그냥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데이몬으로 하여금 묻어두었던 의문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으니……. '그렇다면 몸의 원주인이 혹시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 상황을 보니 그럴 가능성이 현저히 높았다. 하지만 섣불리 행동할 수는 없어 보였다. '정녕 크로센 기사단장이라면 황태자의 살해청부를 한 날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아무래도 윌리엄스 후작은 아직까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황태자의 육신에 전혀 다른 영혼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데이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윌리엄스 후작이 하는 양을 계속 살폈다. "이젠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소신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그 누구도 전하의 목숨을 노릴 수 없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윌리엄스 후작은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아까부터 문에서 계속 나고 있는 노크 소리 때문이었다. 민첩한 동작으로 문으로 다가간 윌리엄스 후작은 노성을 질렀다. "감히 황태자 전하께서 계신 곳에서 소리를 내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냐?" 청력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는지 데이몬은 용케도 문 밖에서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페르슈타인 공작 전하께서 듀크 나이츠 1백 명을 대동한 채 기다리고 계십니다. 반드시 황태자 전하를 뵈어야겠다고 고집하시는 통에 어찌해야 할 지……. " "어허!" 윌리엄스 후작의 고리눈에 분기가 충천했다. "이미 그 누구의 출입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지시하지 않았더냐? 황태자전하의 안전을 위해서 그 누구도 이곳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심지어 페르슈타인 공작이라 해도 말이다." "하, 하오나 공작 전하의 의지가 워낙 굳건하신 지라……." 부관의 처지를 생각해본 윌리엄스 후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단장도 아닌 일개 부관이 크로센 제국 제일 가는 권력자의 앞을 막는다는 것은 한 마디로 어불성설에 불과했다. "알겠다. 내가 나가서 처리하겠다." 윌리엄스 후작은 고개를 돌려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바로 처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윌리엄스 후작이 나간 사이 데이몬은 사방을 샅샅이 살폈다.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몰랐으므로 대비책을 세워두려는 심산에서였다. 우선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커다랗게 새겨진 마법진이었다. 마법진의 도형을 면밀히 살펴본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신성력이 가미된 마법진이라……. 흑마법에는 한 마디로 상극이겠는걸? 그것을 보니 나에 대해 경계를 하고 있긴 하나 보군.' 방안의 경계는 무척 삼엄했다. 줄잡아 30여 명의 기사들이 벽면에 죽 늘어서서 경비하고 있었다. 하나 하나가 소드 마스터가 아닌 자가 없었다. '과연, 크로센 기사단원 1백 여명 전부가 소드 마스터라더니…….' 억지로 머리를 든 탓에 목이 뻐근해져왔다. 아직까지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데이몬은 다시 침상에 드러누웠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침실이었지만 애당초 그것이 데이몬의 관심을 자극할 까닭이 없었다. 침대에 몸을 뉘인 데이몬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윌리엄스 후작. 지금 즉시 길을 열기 바라오." 페르슈타인 공작은 타는 듯한 눈초리로 윌리엄스 후작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의 뒤에는 듀크 나이츠 1백 여명이 긴장한 채 검 손잡이에 손을 얹고 있었다. 듀크 나이츠에 소속된 소드 마스터 서른 두 명이 모두 포함된 것을 보아 휘하의 실력자들을 깡그리 모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윌리엄스 후작은 눈썹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다. "불가하오. 황가를 수호하는 크로센 기사단의 이름으로 황태자 전하께서 완쾌될 때까지는 그 누구의 출입도 허락할 수 없소." 페르슈타인 공작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다. "내가 누군지 모르고 하는 소리요? 난 알카리스 황태자의 후견인이었소. 다시 말해 그의 보호자나 다름없는 존재란 말이오." "그런 분께서 어찌 알카리스 황태자 전하가 7년 전에 실종되도록 좌시하셨소?" 윌리엄스 후작의 냉랭한 대꾸에 페르슈타인 공작은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어쨌거나 거기에는 공작의 책임도 전혀 없지 않았다. 곧 페르슈타인 공작의 반박이 이어졌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 난 황태자 전하를 구해내기 위해 트루베니아에 많은 기사를 파견했소. 그들 중 대부분이 전사했다는 사실은 공도 알고 있잖소?" 윌리엄스 후작은 어림없다는 듯 팔짱을 굳게 꼈다. "아무튼 출입은 허용할 수 없소. 황족에 대한 호위는 전통적으로 크로센 기사단이 맡아왔소. 그 사실은 공도 익히 알고 계실 것이오. 황태자 전하는 현재 철저한 안정이 필요한 상태요.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떠한 신분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접견을 허용할 수 없소." "이, 이……." 페르슈타인 공작은 주먹을 불끈 쥔 상태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애당초 알카리스 황태자를 유인해서 트루베니아로 데리고 간 자가 크로센 기사단의 부단장 중 하나인 루드비히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윌리엄스 후작은 일체 논쟁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 화가 저절로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습에 뒤에 시립해 있는 듀크 나이츠들이 바짝 긴장했다. 최악의 경우 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공작은 의외로 빨리 이성을 되찾았다. '참자. 성급히 행동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알카리스 황태자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만큼 일을 순리대로 풀어가야 한다. 비록 그의 진정한 정체가 누구이던 간에 말이다.' 이미 그는 알카리스 황태자에 대해 일말의 의심을 품고 있었다. 치열한 혈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난데없이 나타난 알카리스 황태자. 정황을 보아 그는 흑마법사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흑마법사의 흔적이 일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더라고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마음을 단단히 굳혔다. '어떻게 해서든 알카리스의 신병을 우리 쪽에서 인수해야 한다. 그리고 철저히 보호해야 한다.' 그에게 이번 일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1황자인 알카리스를 이용해서 눈엣가시였던 2황자 드비어스를 합법적으로 몰아낼 수 있는 길이 마침내 생긴 것이다. 이미 귀족원의 위원들 중 90%가 그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일은 성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만약 알카리스 황태자의 정체가 페르슈타인 공작이 생각했던 바로 그 사람이라면……. 공작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것은 내 뜻대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한 마디로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알카리스 황태자에 대한 철저한 보호가 필수였다. 만에 하나 알카리스 황태자가 나쁜 일을 당하기라도 한다면 공작의 계획은 고스란히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일이 그렇게 진행된다 하더라도 야망이 송두리째 꺾이지는 않겠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크로센 기사단을 흡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였다. 듀크 나이츠와 크로센 기사단. 페르슈타인 공작이 꾀하는 바는 두 강대한 무력집단의 전력을 고스란히 유지시키는 것이었다. 알카리스 황태자에게 행여나 나쁜 일이 생긴다면 두 무력집단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십중팔구 둘 다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바로 그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상잔을 막고 크로센 기사단의 전력을 고스란히 얻기 위해 그토록 알카리스 황태자의 신병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계획을 점검해본 페르슈타인 공작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난 알카리스 황태자를 철저히 경호하기 위해 왔소. 다른 뜻은 일체 없으니 쓸데없는 생각 따윈 하지 않기를 바라오. 공이 정 날 들여보내지 않겠다면 난 여기서 황태자 전하의 몸이 완쾌될 때까지 기다리겠소. 물론 듀크 나이츠를 대동한 이유는 황태자 전하의 철저한 경호 때문이오. 알겠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리엄스 후작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런 뜻이라면 머무시는 것을 허용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별궁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늘이 뒤집혀도 그 사실은 변함 없습니다. 듀크 나이츠들 역시 외곽 경계만을 허용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페르슈타인 공작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렇게 하겠소." 고개를 돌리자 듀크 나이츠들의 울분 섞인 표정이 들어왔다. 외곽경계나 맡으라는 말에 하나같이 자존심이 상한 모습들이었다. 눈짓으로 그들을 진정시킨 페르슈타인 공작은 차분하게 명령을 내렸다. "다들 들었겠지? 이제부터 듀크 나이츠는 외곽을 맡는다. 내부는 크로센 기사단에서 철통같이 경호한다고 하니 별 일 없을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듀크 나이츠들은 제 위치를 찾아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페르슈타인 공작 역시 외곽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며칠 밤을 새는 일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알카리스를 만나고 말겠다는 기세였다. 윌리엄스 후작은 의심 섞인 눈초리로 공작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골치 아프군. 나 또한 이 자리를 떠날 수 없게 되었어. 남은 일은 오로지 테오도르 집정관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겠군.' 현재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테오도르 집정관 밖에 없었다. 크로센 황가에 자신 만큼 충성하는 자는 오직 그 뿐이었다. '드비어스 황태자 전하를 생각하는 것을 보면 그만은 믿어도 되겠군.' 그러나 그는 테오도르 집정관의 속마음이 어떠한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검 손잡이를 불끈 움켜쥔 자세로 경비에 열중하는 크로센 기사단과 듀크 나이츠 사이에는 묘한 알력이 생겨나 있었다. 그 날 밤 크로센 제국의 별궁에서는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건진 간택식 참가자들을 위한 파티였다. 하루아침에 끔찍한 경험을 해야 했던 그들의 마음을 위로한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참석한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크로센 기사들이 참석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저 예의상 참석한 기사단 부대장 서너 명이 전부였다. 나머지 참석자들은 대부분 타국에서 온 왕녀와 호위기사들이었다. 부상당하지 않은 자들만 참석한 상태였는데 끔찍한 기억을 떨쳐버리려는 듯 모두가 술과 댄스에 심취해 있었다. 때문에 파티 분위기가 금세 무르익었다. "호호호. 건배." "하하하. 감히 춤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레이디."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란 사실을 증명하듯 그들은 모든 것을 잊고 음주가무를 열중했다. 황실의 배려로 말미암아 고급술과 음식이 무제한 제공되었기 때문에 파티는 밤을 너끈히 새울 것 같았다. 그런데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었을 때 파티장의 문이 빠끔히 열렸다. "크로센의 밤은 몹시 싸늘하군." 몹시 추운 듯 손을 호호 부는 이는 아름답게 치장한 묘령의 아가씨였다. 화려한 예복에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단 아가씨는 한 눈에 보아도 간택식에 참석한 왕녀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세를레네. 아르카디아 남부의 쿠스밀라 왕국에서 온 왕녀로써 지옥의 도가니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녀는 끔찍한 기억을 떨쳐버리기 위해 파티에 참석한 상태였다.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막 파티장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다소 가무잡잡한 얼굴에서 빛나는 눈빛에는 남부 여인 특유의 정열이 역력히 배어 나오고 있었다. 술에 몹시 취한 듯 얼굴엔 붉게 홍조가 돌고 있었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뭔가를 결심한 듯한 눈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를 꼭 만나봐야겠어. 그는 내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기에 앞서 너무 멋진 용사였으니까." 세를레네의 머릿속에는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멋진 용사의 영상이 그려지고 있었다. 무지막지한 브론즈 골렘의 돌격으로 모두가 공포에 잠겨 있었던 상황. 그 때 브론즈 골렘의 앞을 당당히 막아서던 한 용사가 있었으니, 피로 물든 채 이리저리 우그러진 갑주를 걸친 용사의 위용은 한 마디로 무적이라 일컬을 수 있었다. 세를레네는 용사의 모습에서 옛날 이야기에서 듣던, 드래곤을 처치하고 공주를 구해내는 진정한 용사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저 곱게 치장한 멋쟁이 근위기사만을 봐왔던 세를레네에게 용사의 무용은 한 마디로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보기만 해도 끔찍스러운 괴물인 브론즈 골렘. 그러나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우던 용사의 용맹무쌍한 모습. 천신만고 끝에 골렘을 쓰러뜨린 뒤 그 위에서 승리의 함성을 내지르던 용사의 모습을 세를레네는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다. 비록 투구 가리개에 가려 얼굴이나 나이, 용모를 전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는 위용만으로도 더 없이 멋진 용사였다. 애당초 그 용사를 만나기 위해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파티에 참석할 것을 결심했던 세를레네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어. 파티에 참석한 작자들 모두가 겉모습만 번드르르한 겁쟁이일 뿐이야. 난 반드시 그를 만나봐야겠어. 오직 그만이 진정한 용사일 뿐이야.' 마음을 굳힌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심 용병단원이라 했던가?' 세를레네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용사를 만나야겠다는 일념 밖에 없었다. 그러나 크로센 궁정의 경비가 삼엄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멈추십시오. 어디로 가십니까?"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갑주를 보니 근위병이 아닌 경비기사 같았다. 그녀는 얼굴에 한껏 미소를 떠올린 채 말을 걸었다. "혹시 카심 용병대원들이 묵고 있는 숙소를 아시나요?" "………." 가로막은 기사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어렸다. 공교롭게도 그는 듀크 나이츠에 소속되어 있는 기사였다. 때문에 카심 용병단원들이 묵고 있는 숙소를 잘 알고 있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만약 크로센 머저리 놈들에게 물었다면 보나마나 모른다고 했을 테지?'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던 그는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는 손가락을 펴서 저쪽을 가리켰다. "이 길을 쭉 따라가십시오. 아마 서너 번의 검문이 더 있을 것입니다. 목적을 밝히신 뒤, 제 4별관을 찾아간다고 하면 아마 통과시켜 줄 것입니다. 길 끝에서 왼쪽으로 틀면 큼직한 건물이 나오는데 카심 용병단원들은 바로 그곳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곳이 제 4 별관이지요." "알겠어요.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 드려요." 세를레네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기사에게 다가갔다. 쪽 투구의 얼굴가리개에 입술 자국을 뚜렷이 새긴 채 어쩔 줄 몰라하는 기사를 남겨 둔 채 세를레네는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기사에게서 아쉽다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젠장. 이럴 줄 알았다면 얼굴 가리개를 올리고 있는 건데……." 아깝다는 듯 한숨을 한 번 더 내쉰 기사는 다시 자신의 근무위치로 돌아갔다. 물론 그는 손수건을 꺼내 투구에 난 입술자국을 지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듀크 나이츠의 군기는 크로센 기사단에 전혀 못지 않을 정도로 혹독했고 만에 하나 입술자국이 탄로 난다면 엄중한 처벌을 각오해야 했다. 손수건으로 투구를 박박 문지르며 기사는 또다시 탄식을 터뜨렸다. "빌어먹을 얼굴 가리개만 들고 있었다면 지우지 않아도 되는 건데 말이야……. 몹시 아깝군." 경비기사가 말한 대로 세를레네는 몇 번의 검문을 더 거쳐야만 했다. 하지만 모두 듀크 나이츠 소속이었는지 경비기사들은 순순히 세를레네를 통과시켜 주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침내 목적했던 제 4 별관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응?" 도착한 세를레네의 눈에 의아함이 가득 그려졌다. 별관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여자들이었고 하나같이 화려한 차림새에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세를레네는 곧 그녀들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것들이?' 세를레네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쌍심지가 돋워졌다. 모인 여인들은 하나같이 안면이 있는 왕녀들이었다. 그것도 위험을 함께 겪으면서 가까워졌던 인연들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들은 모두가 세를레네가 찾아왔던 용사로 인해 목숨을 건진 왕녀들이었다. 모습을 보니 그녀들 역시 용사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세를레네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적의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흥! 그렇다고 내가 양보할 줄 알고…….' 세를레네는 별관의 문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왕녀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한 가닥 희망이 모락모락 자라나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찾아온 용사의 이름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었다. '용사의 이름이 아마도 미첼이라고 했었지. 카심 용병단원에게 직접 물어본 것이니 틀림없을 거야.' 마지막 브론즈 골렘이 파괴된 뒤 왕녀들은 즉시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용케 상처를 입지 않았던 세를레네는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아마도 카심 용병단원이 아닐까 짐작되는) 사내에게 용사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혹시 저 분의 이름을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브론즈 골렘을 쓰러뜨린 분 말이에요." 상당히 입담이 좋게 생긴 사내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그의 이름은 미첼입니다. 미첼 브루노. 제 이름은 패터슨이구요." 하지만 세를레네에게 사내의 이름 따위가 귀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안전한 곳으로 안내된 뒤, 그녀는 어렵게 알아낸 용사의 이름을 가슴속 깊이 고이 간직했다. 이유는 한 가지, 나중에라도 용사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얼굴을 모르니 이름이라도 알아야 찾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 탓에 세를레네는 지금 다른 왕녀보다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일 앞줄에 나서자 별관의 문이 나왔는데 기사 두 명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세를레네는 즉시 경비기사에게 다가갔다. "저…. 누굴 찾아왔는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비기사에게서 즉각 대답이 터져 나왔다. "실례지만 브론즈 골렘을 쓰러뜨린 용사를 찾아오신 분이지요? 하지만 죄송합니다. 이 안에 있는 분들은 모두가 브론즈 골렘 한 두 기씩은 쓰러뜨린 분들입니다. 때문에 찾아드리지 못함을 저 역시도 무척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지극히 기계적인 대답. 그로 인해 세를레네는 왕녀들이 왜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름이라도 알아야 불러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지만 세를레네에겐 꺼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난 너희들과 달라. 멍청한 계집애들아.' 회심의 눈길로 왕녀들을 한 번 쓸어본 세를레네는 경비기사에게 상냥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전 카심 용병단원들 중에서 미첼 브루노란 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제 목숨을 구해주셨기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고 말이에요." 경비기사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정확히 이름을 거론하는 사람에게 딱히 거절할 명분을 찾긴 힘들었다. 결국 그는 안에 대고 노크를 했다. 잠시 후 문 안쪽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기사는 더없이 공손한 어조로 용무를 밝혔다. "실례지만 아름다우신 레이디 한 분이 미첼 브루노란 이름을 가진 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숨을 구해준 데 대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고 오셨다는 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문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누군가가 문을 향해 다가서는 듯한 기척이 들려왔다. 덜컥. 문이 열리자 모인 왕녀들의 시선이 일시에 집중되었다.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멋진 용사의 모습을 보고자 하는 열망이 그녀들의 눈빛에 역력히 서려 있었다. 문을 열고 나온 자는 바로 미첼이었다. 보기 흉하게 패이고 찌그러진 것도 모자라 이리 저리 피가 말라붙어 있는 갑옷을 그대로 걸친 미첼이 머리가 심하게 헝클어진 상태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잠을 전혀 자지 못한 듯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감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것이 잘 생긴 미첼의 용모를 감소시키지는 못했다. 얼굴에 희미하게 아로새겨진 흉터가 말라붙은 피와 함께 미첼의 용모를 더 없이 인상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는 다소 놀란 듯한 눈빛으로 모인 왕녀들을 둘러보았다. "제가 미첼입니다만 누가 절 찾아오셨는지?" 미첼을 본 왕녀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몽롱해졌다. 그토록 용맹스럽던 용사가 저렇게 젊고 잘 생긴 젊은이라니……. 음성을 들어보니 동일인이 틀림없었다. 브론즈 골렘의 잔해 위에서 호탕하게 웃던 용사의 음성과 똑같이 일치했던 것이다. '과연 기대했던 대로였어.' 세를레네의 얼굴에 기대감이 짙게 떠올랐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용맹스러움에다 멋까지 겸비한 젊은이라니……. 심지어 격전의 흔적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찌그러진 갑옷조차도 그녀에겐 야성미로 각인되고 있었다. 세를레네의 머릿속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용사의 마음을 사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단단히 굳혀지고 있었다.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이 머리를 숙였다. "소녀는 오늘 용사님 덕택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래서 감히 한 번 뵙고 싶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직접 찾아보니 더 없이 멋진 분이시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목적을 밝힌 세를레네는 머뭇거림 없이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이, 이런…….' 상대의 당돌함에 다소 당황한 듯 미첼은 잠시 머뭇거리다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세를레네가 내민 손에 살짝 입을 맞춘 미첼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영광이라니요. 전 제가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했을 뿐입니다." 조용히 흘러나오는 음성. 세를레네의 얼굴에는 득의한 빛이 일렁였다. 수많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용사와 춤을 출 수 있는 기회를 제일 먼저 선점한 것이다. 물론 보고 있던 왕녀들의 눈동자에는 안타까움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여우같은 계집애.' '파티장에서 만은 기필코 용사님을 빼앗고 말겠어. 가무잡잡한 네년보다는 내 미모가 훨씬 낫지 않겠어?' 여러 왕녀들의 질시 어린 시선을 받으며 세를레네는 의기양양하게 팔을 뻗었다. "함께 파티장으로 갈까요? 그대에게 감히 춤을 청할 수 있는 영광을 선사하고 싶군요." 고금을 통틀어봐도 레이디가 먼저 청한 춤을 마다하는 기사는 없다. 때문에 세를레네는 상대가 망설이지 않고 팔짱을 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미첼은 그러지 않았다. 별안간 냉랭해진 눈빛으로 돌변한 미첼은 뚫어지게 쳐다보는 왕녀들의 시신을 하나하나 맞받았다. "모두 제게 춤을 청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까?" 미첼의 말이 끝나자 왕녀들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번뜩였다. 필시 저 용사에게 남쪽에서 온 가무잡잡한 계집애가 눈에 차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한 왕녀들은 생각할 것도 없이 한 마디씩 내뱉고 나섰다. 당혹해하는 세를레네의 모습이 여간 통쾌하지 않았다. "저 역시 춤을 청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어요." "함께 파티장으로 가서 즐기는 게 어때요? 당신은 제 목숨을 구해준 용사예요." 왁자지껄한 왕녀들의 목소리를 뚫고 미첼의 음성이 뚜렷하게 울려 퍼졌다. "죄송하지만 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미첼이 거절하자 좌중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전 여러분들에게 춤을 청하지도, 그리고 파티장에 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만 돌아들 가십시오." 냉랭하게 의사를 밝힌 미첼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콰당. 미첼이 들어간 뒤 별관의 문은 굳건하게 닫혔다. 왕녀들은 망연자실한 기색으로 문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연유에서 거절했을까? 혹시 이 중에서 마음에 차는 여인이 하나도 없어서일까? 그녀들이 골똘히 이유를 생각하고 있는데 의문은 경비를 서는 기사가 풀어주었다. "레이디들께서는 애석하게도 때를 잘 못 고르셨군요." "………." "카심 용병단원들이 지금 이 안에서 오늘 죽은 두 명의 동료들을 추도하고 있습니다. 상황을 보니 밤을 꼬박 새워 슬퍼할 것 같군요. 무척 절친했던 동료가 죽은 것 같습니다. 아실 지 모르겠지만 기사에게 전우의 죽음은 더 없이 슬픈 것이랍니다. 그런 상황에서 춤을 청하시다니……. 만약 제가 같은 입장에 처했어도 당연히 거절합니다. 동료의 죽음을 추도하는 상황에서 파티에 참석해 즐기다니요? 그것은 한 마디로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라고 할 수 있죠." 경비 기사의 설명을 들은 왕녀들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성급했다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왕녀들은 하염없이 별관의 문을 응시하며 조금 전의 경솔함을 뼈저리게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중에서 세를레네의 후회가 가장 절실했다. [다크메이지] 10장 마룡 베르키스 287회. 데이몬이 눈을 뜬 지 만 하루가 지났다. 그의 몸은 상당히 호전되어 있었다. 아직까지 걷거나 일어서진 못했지만 침상에서 상체를 일으켜 말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 회복된 것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지금까지 단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행여나 말실수를 해서 꼬투리가 잡힐 것을 염려한 것이다. 그는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 몸 상태를 고려해서 궁정 요리사가 특별히 만든 영양만점의 수프였는데, 턱받침을 한 채 시녀가 떠먹여 주는 스프를 한 숟가락씩 받아먹는 데이몬의 모습이 여간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젠장맞을…… 어린 아이도 아니고.' 내심 울화가 치밀었지만 경거망동할 때가 아니라서 데이몬은 조용히 받아먹기로 작정했다. 수프 한 접시를 깨끗이 비우자 시녀가 냅킨을 들어 그의 턱을 닦아주었다. "더 드시고 싶으시옵니까?" 데이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시녀는 식기를 챙긴 뒤 뒷걸음질로 조용조용 물러났다. 식사를 마친 데이몬은 다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투구가리개를 빈틈없이 눌러쓴 삼십여 명의 기사들이 벽면을 막고 있는 장면은 어제와 마찬가지였다. 방바닥에 뚜렷이 설치된 마법진 역시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굳이 이것이 아니더라도 난 마법을 전혀 쓸 수 없다. 베르키스의 정신마법, 과연 무서웠어.' 베르키스의 정신마법으로 데이몬의 정신세계는 이미 크나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회복될지 그조차도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게다가 바닥에 설치된 마법진의 위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설사 대상이 9서클의 마스터라 하더라도 상당한 제약을 가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을 노리고 설치해 놓은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 마법진의 중첩도를 눈여겨보던 데이몬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걱정이로군. 녀석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덜컥 낯선 두 명의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하나는 서른을 갓 넘었음직한 젊은 사내였고 나머지 하나는 사십대 후반의 강퍅한 얼굴을 가진 사내였다. 관자놀이가 전혀 튀어나오지 않았지만 몸에서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 아마도 소드 마스터가 아닐까 생각되는 실력자였고, 태도를 보니 젊은 사내를 보필하는 신분을 가진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걸어온 사내들은 데이몬 앞에서 공손히 허리를 꺾었다. "드디어 전하를 뵙게 되는군요. 집정관 테오도르가 알카리스 황태자 전하께 인사드리옵니다." 데이몬은 사내의 소개를 새겨들으며 마주 목례를 했다. '이자가 페르슈타인 공작의 앙숙이라 했던 젊은 집정관이었던가?' 데이몬은 아르카디아의 정세에 훤했다. 모든 것이 젠가르트로부터 전해 받은 정보 덕택이었다. 한 나라를 맡기엔 너무 젊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며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마주하게 된 집정관 테오도르는 데이몬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절 기억하시겠습니까?" "……." "어린 시절 제가 전하께 목말과 무등을 무던히도 많이 태워드렸죠. 그 때 전하께서는 제가 세상에서 제일이라 하셨는데……." 데이몬에겐 무척 곤혹스러운 순간이었다. 아무튼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기에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랬었지. 기, 기억나오." 백치란 것을 감안해서 데이몬은 일부러 말을 더듬는 재치까지 보였다. 순간 테오도르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나지막이 속삭였다. "전하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긴요한 이야기이오니 잠시 호위기사들을 물려도 되겠습니까?" 데이몬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낮은 음성이었다. 집정관의 말에 데이몬은 바짝 긴장했다. "기, 긴요한 이야기라니……." "별 것 아니옵니다.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용병들에 대한 처리 문제입니다." 데이몬은 침묵을 지켰다. 설마 상대가 이처럼 단도직입적으로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테오도르는 빙글빙글 웃는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놈의 꿍꿍이가 도대체 뭘까?' 데이몬은 금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바로 고난을 정면으로 헤쳐 나가는 특유의 저돌적인 성격에 기인한 것이었다. "좋소. 호위기사들을 물리도록 하시오." 테오도르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그려졌다. 그는 이내 호위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잠시 자리를 비워 주겠소? 전하와 긴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참인데 그대들이 결코 들어선 안 될 이야기이기 때문이오." 호위기사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그들은 윌리엄스 후작으로부터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리를 비우지 말라는 엄명을 받고 있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와 난색을 표했다. 그는 바로 크로센 기사단 부단장 중 하나인 카시모프였다. "하, 하오나 저희들은 이 자리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섣불리 자리를 비울 수가 없습니다." 테오도르는 부드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내가 누군지 그대들은 이미 잘 아시지 않소? 또한 크로센 황가를 향한 내 충성심이 어떠한지까지도 말이오. 게다가 이미 황태자 전하의 승낙이 떨어졌소이다." 카시모프의 시선이 잠시 데이몬에게 향했다. 데이몬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잠시 나가 있으라. 내 지, 집정관과 옛이야기를 하려 하니 말이다." 데이몬의 말을 들은 카시모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도 테오르드 집정관이 윌리엄스 후작과 뜻을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크로센 황가에 대한 집정관의 열렬한 충성심은 기사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오래지 않아 망설임을 접어버렸다. "그러시면 알겠습니다. 용무가 끝나시는 대로 다시 들어오겠습니다." 호위기사들은 우르르 몰려나갔다. 막 방을 나가려던 카시모프가 우두커니 서 있는 테오도르의 부관을 보고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대는 나가지 않는가?" 때를 놓치지 않고 테오도르가 끼어들었다. "내 부관은 입이 무척 무겁소.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라도 함께 있는 게 나을 것 같소. 알다시피 그는 뛰어난 실력의 소드 마스터요." 테오도르의 말에 카시모프는 극도로 자존심이 상한 표정이었다. 이 자리의 기사들 중 소드 마스터가 아닌 자가 대관절 누가 있던가? 게다가 하나같이 입이 무겁다고 자부하는 기사들 아니던가? '빌어먹을! 누군 되고, 누군 안 되나?' 안색을 급급히 지운 카시모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이미 이리로 오며 수많은 몸수색과 마법 검색을 받았을 터, 더 이상 검문할 필요는 없었다. 상대가 진짜 테오도르 집정관과 그의 부관이 아니었다면 감히 이리로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저희들은 그만 나가있겠습니다." 그들이 나간 뒤 문이 쿵 하고 닫혔다. 넓디넓은 방 안에는 오직 데이몬과 테오도르, 그리고 그의 부관만이 남게 되었다. 자신들 외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테오도르가 데이몬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 청을 받아주셔서 감사드리옵니다, 황태자 전하." "괘, 괜찮소. 그것보다 난 감옥에 갇힌 용병들의 소식이 무척 궁금하오만……." 테오도르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전하께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 "알카리스 황태자 전하라 불러야 합니까? 아니면 카심 용병단의 흑마법사님이라 불러야 합니까?" 익히 예상했던 일이라 데이몬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테오도르의 눈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먼저 입을 연 쪽은 테오도르였다. "혹시 용병들과 데스 나이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으시다면 정체를 솔직히 밝혀 주십시오. 솔직히 말씀하신다 하더라도 전하께 위해를 가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궁정 수석마법사이신 필라모네스 경이 일차로 살펴보신 데다 황실 기념관에 이차로 확인을 마친 결과 의심할 여지없이 알카리스 황태자 전하라는 결론이 난 상태입니다." 그러나 데이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테오도르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머뭇거림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황실 기념관에는 오직 크로센 황가의 피를 이어받은 자만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있습니다. 크로센 대제께서 승하하신 이후 그분의 업적을 기리는 뜻으로 전 대륙의 마법사들이 합심해서 만든 방이지요. 저희들은 이미 전하의 혈액을 채취하여 기념관 정문의 수정구슬에 떨어뜨려 보았습니다. 고도의 마법이 걸려 있는 수정구슬은 피의 주인이 크로센 대제의 혈통을 이었는지를 판별해서 결과에 따라 문을 열어줍니다. 확인해본 결과 놀랍게도 기념관의 문이 열렸습니다. 다시 말해 전하께서 의심할 나위 없이 크로센 대제의 핏줄을 이어받은 후손이라는 뜻이지요." "……." "그러므로 전하께 위해를 가할 만한 자는 감히 없습니다. 남아 있는 것이 비록 알카리스 황태자 전하의 육신뿐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데이몬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마침내 테오도르는 꼭꼭 감춰두었던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고야 말았다. "카심 용병단원들, 그리고 데스 나이트, 본 드래곤 한 마리와 잔해는 이미 모종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그들의 소식에 대해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테오도르의 예상대로 데이몬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데이몬에겐 정문일침(頂門一鍼)의 한 마디였다. 굳게 닫혀 있던 데이몬의 입이 슬그머니 열렸다. "바닥의 마법진을 보고 익히 짐작했었지. 그리고 이 순간이 올 것이란 사실도."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정녕 카심 용병단의 흑마법사란 말씀이시군요."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솔직히 몸의 원주인이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일 것이라곤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물론 알았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겠지만." 테오도르는 예상했던 결과라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군요. 한 육체에 전혀 다른 영혼이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금시초문이었습니다. 영혼을 교환하는 일은 오로지 신의 영역이라 알고 있었습니다만." "세상에는 사람의 이치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많이 벌어지는 법이다. 굳이 설명을 하자면 며칠 밤을 꼬박 새워도 모자랄지 모르니 간략하게 말하겠다. 벌써 확인을 마쳤다니 이 몸의 원주인이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란 사실이 아마 틀림없겠지? 하지만 원주인의 영혼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몸에 남은 영혼은 오로지 나 하나뿐이다." 테오도르의 얼굴에서 이채가 빛났다. "그렇다면 당신이 알카리스 황태자 전하를 죽이고 몸을 빼앗았다는 결론이 나오는군요."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는 않다. 내가 처음 보았을 당시 이 몸은 가디언들의 공격으로 초주검이 된 상태였다. 의식불명인 상태였으니 내버려두었다면 그대로 세상을 하직했을 것이다." "굳이 변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만에 하나 알카리스 황태자 전하께서 당신의 손에 죽었다 하더라도 문제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현재 알카리스 황태자 전하는 바로 당신이니까요." "……." "전 단지 자세한 사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앞으로 제가 모셔야 할 분이니까 말입니다. 충성을 바치기 전에 당신의 진정한 정체와 신분, 그리고 이리로 온 목적을 명확하게 알고 싶습니다." 데이몬은 집요하게 과거를 캐묻는 집정관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모종의 목적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그러기에 상대의 눈은 너무나 맑고 투명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킨 데이몬은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좋다. 말해주겠다." 데이몬의 입에서 흘러갔던 과거가 하나씩 흘러나왔다. 물론 상당부분은 제외한 과거였다. "난 원래 종족전쟁에 참가했던 트루베니아의 워 메이지였다. 흑마법 계열이었고 노스우드 결전에까지 참전했던 경력이 있다." 술술 흘러나오는 데이몬의 비사. 노스우드 결전에서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에게 생포되어 강제로 리치가 된 뒤 그의 레어에서 9서클의 마스터가 된 일 하며, 알카리스 황태자를 구해내어 몸을 바꾸었던 제반 사정이 낱낱이 설명되었다. 테오도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데이몬의 말을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 "베르키스의 마수에서 벗어난 이후 난 드래곤이란 족속에 대해 불타는 복수심을 가지게 되었지. 때문에 노스우드로 가서 데스 나이트 넷을 일깨웠고 드래곤들의 수면기를 노려 놈들의 마법보고까지 손에 넣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전력으로 드래곤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 때문에 난 아르카디아로 건너왔다. 이곳의 주요 권력자와 손을 잡은 뒤 전면전을 통해 드래곤의 씨를 말려버리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 "힘을 가진 권력자라면 난 그 누구라도 손을 잡을 용의가 있다. 나와 함께 드래곤과 싸워준다면 말이다. 알겠는가?" 말을 마친 데이몬은 테오도르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원래 난 조력자로 페르슈타인 공작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그가 가장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 염원을 달성하게 도와준다면 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너희들을 도와줄 용의가 있다. 내가 가진 전력을 총동원한다면 적어도 드래곤 한 마리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테니까." "……." "솔직히 말하지. 난 크로센 제국의 황좌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내가 차지한 몸이 크로센 제1황자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내 유일한 관심사요 목표는 오로지 드래곤에게 복수하는 것뿐이다.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테오도르를 보며 데이몬은 다급하게 동료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물었다. "약속대로 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이젠 네가 약속을 지켜야 할 때다." 테오도르는 무거운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심 용병단원들은 현재 페르슈타인 공작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귀빈 대접을 받고 있다고 알고 있으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곧 데이몬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너, 넌 분명 그들이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하지 않았더냐?" "거짓말이었습니다. 지하 감옥에는 데스 나이트들과 본 드래곤만이 갇혀 있습니다." "날 속인 것을 보면 네게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잠시 침묵을 지킨 테오도르에게서 흘러나온 말은 동문서답이었다. "정말 기구하신 운명을 살아오신 분이군요. 드래곤의 노예가 되었다가 천신만고 끝에 탈출해 복수를 꿈꾸시다니……. 의문점이 적잖이 있지만 전 믿겠습니다." "……." "하지만 그 복수는 애석하게도 이제 접으셔야 합니다." 테오도르의 말뜻을 알아차린 데이몬의 안색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날 죽이겠다는 뜻이냐?" 테오도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애당초 알카리스 황태자를 트루베니아로 보낸 사람은 바로 저입니다. 두 분의 거룩한 희생 덕택에 그 일을 이룰 수 있었지요." 데이몬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 상황은 쉽사리 빠져나갈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테오도르는 묵묵히 천장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전횡을 막기 위해 정말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황가의 혈통을 이은 황자를 사지로 보내겠다는 결정. 비록 황가에 대한 열렬한 충성심으로 내린 결정이었지만 저 역시 무척 괴로웠답니다." "네 말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 황가에 충성하는 자가 어찌 황자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말이냐? 혹시 네가 모시는 황자를 황제로 삼기 위함이냐?" 테오도르는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시다시피 알카리스 황태자는 정박아입니다. 한 마디로 백치란 뜻이지요. 꼭두각시를 제위에 앉혀 놓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페르슈타인 공작의 전횡을 막기 위해선 오로지 그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데이몬은 비로소 당시의 의문을 풀 수 있었다. 현저히 열세인 전력으로 베르키스의 레어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가 전멸했던 인간기사들의 진정한 목적을 말이다. 데이몬은 푸들푸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나 역시 살아남지 못하겠구나? 몸도 제대로 운신하지 못하는 데다 마법조차 쓸 수 없으니 말이다." "이해하십시오. 황가의 존속을 위해선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테오도르는 품속에서 조그마한 갑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집정관의 권위를 상징하는 인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망설임 없이 인장을 집어 탁자 위에 내려놓은 테오도르는 갑의 안쪽을 잡아당겼다. 잠시 후 그의 손에는 길쭉한 바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끝 부분이 묵빛으로 빛나는 것을 보아 극독이 묻어 있음이 분명했다. 테오도르는 바늘 끝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고블린의 신경독에다 히드라의 체액을 섞은 독액입니다. 장담하건데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저승으로 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당신에게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로지 대의를 위해 이러는 것이니 너그럽게 이해하십시오." "이런," 데이몬은 낙담했다. 상황으로 보아 빠져나갈 방법은 전혀 없어 보였다. 테오도르를 단단히 믿고 있는 듯 문 밖의 기사들에게는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제대로 운신조차 못하는 몸으로 독살을 피해 낼 가능성은 전혀 없었고, 무엇보다도 테오도르의 뒤에 철탑처럼 시립한 소드 마스터를 감당해 낼 방법이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테오도르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을 보면 이미 집정관과 생사를 같이 하기로 한 충실한 심복임이 틀림없었다. 귓가로 테오도르의 음성이 고즈넉이 울려 퍼졌다. "저승길이 외롭진 않을 것입니다. 저도 곧바로 따라갈 것이니까요." "감동이로군. 목숨을 바쳐 황가에 대해 충성하다니……." "감사합니다." 옅은 미소를 떠올린 테오도르는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뒤를 쳐다 보았다. 부관이 무표정하게 테오도르의 시선을 받았다. "알렉스, 자네를 저승길로 동행시켜서 미안하군. 주군을 잘못 둔 죄라 생각하게." 부관인 알렉스의 대답은 의외로 시원스럽게 터져 나왔다. "이미 제가 청한 일입니다. 어차피 전 일가친척이나 피붙이가 하나도 없는 몸 아닙니까?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대로 전 집정관님과 마지막을 함께 하겠습니다." "하긴, 자네의 가족과 일가친척들은 모조리 페르슈타인 공작에 의해 처형당했지.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군." "신경 쓰지 마십시오." 고개를 돌린 테오도르는 데이몬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을 저승으로 보내드린 뒤 알렉스과 함께 뒤를 따르겠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체포되어 죗값을 치러야 하지만 가진 비밀이 너무 많아 그럴 수 없군요. 그럼 이만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이렇게 끝내긴 너무 한이 많은 인생이야. 정말 안타깝군." 데이몬의 넋두리에 테오도르는 딱딱하게 안색을 굳혔다. "고르지 말아야 할 몸을 선택했다고 생각하고 체념하십시오. 그럼 이만." 테오도르의 손을 쭉 내밀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극독이 묻은 바늘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바늘은 꼼짝도 할 수 없는 데이몬의 몸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데이몬에겐 위기를 모면할 방법이 없었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288회. 절체절명의 순간. 데이몬으로써는 서서히 다가오는 바늘을 물끄러미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테오도르가 바늘을 조금만 더 들이민다면 그는 깨끗하게 이승을 하직해야 했다. 아무리 대마법사의 몸이라 하더라도 독에 내성을 가지고 있을 턱이 없는 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법마저 전개할 수 없는 몸이 아니던가? 제대로 운신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죽음을 곧 다가올 운명으로 생각해야 했다. 그 때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크윽." 묵직한 신음소리와 함께 바늘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뭐, 뭐야?" 손목을 움켜쥔 테오도르가 놀란 눈빛으로 옆을 쳐다보았다. 부관인 알렉스가 주먹을 불끈 거머쥔 채 테오도르를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를 단단히 결심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문 모습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발을 날려 독 묻은 바늘을 멀리 차내 버렸다. "쨍그렁" 테오도르의 노성이 반사적으로 터져 나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이제 그만 하십시오. 더 이상 황태자 전하를 놀라게 하는 것은 명백한 실례입니다." "너…너?" 테오도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알렉스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알렉스는 어느새 테오도르와 데이몬 사이를 파고 들어온 상태였다. 황태자를 빈틈없이 경호하겠다는 듯 둘 사이를 완전히 가로막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테오도르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너? 이제 와서 알카리스 황태자의 편에 붙으려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알렉스의 얼굴에는 모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왜 아니겠습니까? 황태자 전하는 조만간 제위에 오르셔야 합니다. 크로센 제국의 기사로써 황태자 전하를 보호하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입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전하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무척 기뻐하시겠군요." 테오도르는 생각보다 빨리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알렉스를 노려보았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명령으로 내 휘하에 잠입했는가?" 알렉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테오도르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는지 테오도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놀랍군. 설마 그럴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어. 설마 네놈이 페르슈타인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니……."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집정관 님께서 황가에 끝없이 충성하시듯 저 역시 공작전하께 진심으로 충성을 바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집정관 님을 속인 점, 용서하십시오." 알렉스의 대꾸를 들은 테오도르는 맥이 탁 풀렸다. "정녕 페르슈타인 공작인가? 정말 놀랍소. 수하들에게 이런 충성심을 받아낼 수 있는 당신의 능력이 말이오." 마음을 정리한 테오도르는 알렉스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페르슈타인 공작의 명에 의해 네 일가족이 깡그리 처형당한 것도 모두 꾸민 일이겠군." 알렉스의 얼굴에 착잡한 빛이 서렸다. "그렇습니다. 집정관 님을 속이고 휘하에 잠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죠. 제겐 가족의 목숨보다도 공작 전하의 명령을 완수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충격 때문인지 테오도르의 얼굴은 아예 백짓장이 되어 있었다. "정말 놀랍군. 부하에게 그런 충성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희생을 감수한 끝에 집정관 님의 신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활약을 할 수 있게 되었지요. 정말 다행입니다." 알렉스를 쳐다보던 테오도르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러나 상황을 헤쳐나갈 방도는 없었다. 문관에 불과한 그가 소드 마스터인 알렉스와 맨손으로 싸워 제압할 수 있는 길은 전무했다. 데이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만 포기하십시오. 집정관 님의 노력이 가상하긴 하나 페르슈타인 공작전하에겐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그 분의 계획은 한치의 어김도 없이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테오도르의 얼굴에는 낙담한 듯한 빛이 떠올랐다. 윌리엄스 후작까지 속여가며 마지막으로 추진했던 계획은 여지없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정체를 숨기고 잠입한 페르슈타인 공작의 심복 때문에 말이다. "신께서 정녕 날 버리시려나보군." 현기증이 일어났는지 몸이 맥없이 비틀거렸다. 알렉스는 그런 테오도르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경비병!" 마나가 실려 있는 외침은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의 귀에 정통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경비 기사들이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방안의 상황을 살펴본 순간 기사들은 깜짝 놀랐다. 팔뚝을 움켜쥔 채 망연자실해 하는 집정관과 알카리스 황태자 앞에 버티고 선 채 상관을 노려보는 부관의 모습은 언뜻 보아서는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사정을 물어보려는 듯 책임자인 카시모프가 앞으로 나섰다. 바짝 긴장한 기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카시모프의 질문에 알렉스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내뱉었다. "역모요. 테오도르 집정관이 독이 묻은 바늘을 숨겨 들어와서 황태자 전하의 목숨을 노렸소." 말을 하면서도 알렉스의 시선은 테오도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어떤 수상한 행동이라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뭐, 뭐라고 하셨소?" 카시모프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충성심이 깊기로 소문난 테오도르 집정관이 황태자의 목숨을 노리다니……. 카시모프로써는 부관의 말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증거는 오래지 않아 발견되었다. "바닥에 보면 독이 묻은 바늘이 나뒹굴고 있을 것이오.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차낸 것이오." 그 말에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수색을 시작했다. "여기 있습니다." 기사 한 명이 조심스럽게 바늘을 집어들었다. 극독이 묻어있다는 것을 반증하듯 바늘 끝이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카시모프는 노련하게 기사들을 배치시켰다. 다섯 명의 기사를 시켜 테오도르 집정관을 포위하게 한 뒤 그는 알카리스 황태자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알렉스에게로 다가갔다. "지금 즉시 바닥에 엎드리시오. 황태자 전하에 대한 호위는 지금부터 우리가 맡겠소." 알렉스는 두 말도 하지 않고 바닥에 엎드렸다. 곧 열 명의 기사가 달려들어 데이몬이 누워있는 침상을 빈틈없이 에워쌌다. 침상이 바늘 하나도 통과할 수 없도록 완벽하게 격리된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카시모프는 알렉스를 일어나게 했다. "이만 일어나도 좋소." 말을 마친 카시모프는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부관의 말이 사실입니까?" 테오도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카시모프의 눈이 자연스럽게 침상 쪽으로 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데이몬이 누워있는 곳 말이다. "황태자 전하. 부관의 말이 사실인지 감히 여쭤봐도 되겠습니다." 늘어선 기사들 사이에서 힘없는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 그렇다. 집정관은 날 죽이려 했다. 다행히 부관 덕택에 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지." 대답을 듣자마자 카시모프의 안색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테오도르 집정관이 설마 알카리스 황태자의 목숨을 노리다니……. 그럴 것이라곤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던 카시모프였다. 만약 일이 잘못되었더라면……. 그 사실을 떠올려본 카시모프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자신들이 도리어 암살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준 격이 되어버렸으므로 처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한 마디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로군.'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테오도르 집정관을 체포하라. 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도록 단단히 포박해야 한다." 기사들은 곧 명령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테오도르 집정관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기사들의 손에 몸을 순순히 내맡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시모프의 시선이 알렉스에게로 향했다. "당신 역시 당분간 이곳을 떠날 수 없소. 모든 사실을 밝혀 낼 때까지 말이오. 그러니 순순히 협조해 주기 바라오." 알렉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협조하겠소. 황태자 전하를 구해낸 것만으로 맡은 바 소임을 다한 것이라 생각하오." "정말 고맙소." 감격한 듯한 눈초리로 알렉스를 쳐다보던 카시모프는 즉시 몸을 돌렸다. 부관 알렉스는 그들에겐 한 마디로 생명의 은인이었다. "기다려라. 섣불리 처리할 일이 아니니 기사단장님을 모셔와야겠다. 너희들은 이 자리를 철통같이 지켜야 한다." "알겠습니다." 놀라운 사실을 보고 받은 윌리엄스 후작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저, 정녕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이미 황태자 전하께서 사실을 증명하셨사옵니다. 만일 부관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부단장 카시모프의 말을 들은 윌리엄스 후작은 아연해했다. 그는 지금까지 테오도르 집정관의 충성심을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평소 드비어스 황태자를 대하는 태도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알카리스 황태자의 목숨을 노리다니……. "일단 그를 만나봐야겠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날렸다. 멀리서 페르슈타인 공작이 듀크 나이츠를 대동한 채 다가오고 있었지만 윌리엄스 후작에게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란 없었다. 방안에 들어간 윌리엄스 후작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한 번 둘러본 것만으로도 그는 정황을 대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빈틈없이 포박되어 있는 테오도르를 노려보며 노성을 내질렀다. "테오도르 집정관. 다, 당신이 어, 어찌 이럴 수 있소?" 격정이 치밀어 올랐는지 후작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껏 침묵으로만 일관하던 테오도르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윌리엄스 후작을 쳐다보는 눈동자에는 착잡한 빛이 가득 차 있었다. "용서하십시오. 후작님. 그러나 제겐 이것이 최선이었습니다." "당신이 가, 감히 황태자 전하의 목숨을 노리다니……." 윌리엄스 후작은 도저히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토록 믿었던 집정관에게 여지없이 배신당한 꼴이 되고 말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말을 잇지 못하는 후작에게 카시모프가 다가와 뭔가를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증거입니다. 테오도르 집정관은 바로 이것으로 황태자 전하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독 묻은 바늘을 힐끔 쳐다본 윌리엄스 후작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냉랭히 대꾸했다. "집정관을 지하감옥에 수감하라. 국법에 의해 엄격히 처벌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막 테오도르를 데리고 나가려는 순간 굵직한 음성이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럴 순 없지." 놀란 기사들이 고개를 돌리자 페르슈타인 공작이 듀크 나이츠를 대동한 채 문가에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윌리엄스 후작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페, 페르슈타인 공작." 페르슈타인 공작은 냉랭한 눈빛으로 윌리엄스 후작을 쳐다보았다. "철통같이 호위할 것이라 장담하더니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오. 자객을 순순히 황태자 전하께로 안내하는 꼴이라니…….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요?" "………." 윌리엄스 후작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테오도르 집정관을 들여보낸 장본인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그를 향해 페르슈타인 공작의 추궁이 계속 이어졌다. "더 이상 크로센 기사단을 믿을 수 없소. 이제부터 내실의 경계는 우리 듀크 나이츠에서 맡아야겠소." "그럴 순 없소." 발작적으로 고개를 치켜든 윌리엄스 후작의 얼굴에는 노여움이 가득했다. "황가 요인에 대한 호위는 전통적으로 크로센 기사단이 맡아왔소. 비록 내가 실수한 점은 인정하지만 더 이상의 직권남용은 용납하지 못하오." 더 이상 논쟁을 거부하겠다는 듯 냉랭하게 고개를 돌린 윌리엄스 후작은 기사들에게 추상같이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테오도르 집정관을 압송하라. 법에 따라 엄히 처벌할 것이다." 하지만 페르슈타인 공작이 즉시 말을 가로막았다. "그럴 순 없지. 그는 나에게 큰 죄를 지었으니까……. 어새신들을 파견해 내 휘하의 병사 179명을 살해한 죄가 있는데 그리 순순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나?" 그 말에 윌리엄스 후작은 가슴이 뜨끔했다. "그, 그게 대관절 무슨 소리요." 페르슈타인 공작은 표정조차 바꾸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이미 파견되었던 어새신 몇과 그들을 교육시켰던 교관을 체포해 수감해 놓은 상태요. 그들은 모든 죄를 자백했지. 따라서 테오도르 집정관의 신병은 내가 인수해야겠소. 죽은 병사 179명의 목숨 값을 그에게 받아내야 하니까……." 순순히 따를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윌리엄스 후작은 억지로 항변했다. "그것은 추후에 조사해 볼 문제요. 일단 그의 신병만은 우리 쪽에서 맡아야겠소." 페르슈타인 공작은 익히 짐작했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혹시 공은 테오도르 집정관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소?" 뚱딴지같은 공작의 말에 윌리엄스 후작의 눈에 의혹이 어렸다. "그, 그게 무슨……." "잘 들으시오. 그는 바로 7년 전 궁정 마법사 페이런과 크로센 기사단 부단장인 루드비히를 시켜 알카리스 황태자를 트루베니아로 유인해 살해하려 했던 장본인이오. 이미 난 그에 대한 증인과 증거를 확보한 상태라오." "서, 설마 그런 일이……." 윌리엄스 후작의 얼굴에 불신의 빛이 드리워지자 페르슈타인 공작은 묵묵히 고개를 돌렸다. "증인을 보여드리지. 알렉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알렉스가 바람처럼 달려와 시립했다. "부르셨습니까?" "증거를 확보했겠지?" "물론입니다." 알렉스는 머뭇거림 없이 품속에서 소라껍질을 꺼냈다. 마법이 걸려 있는 소라껍질은 조금 전에 이곳에서 벌어진 대화를 고스란히 토해냈다. 물론 데이몬이 신세내력을 털어놓은 전반부가 제외된 상태였고, 오직 테오도르 집정관의 독백이 담겨있는 후반부의 내용만이 담겨 있었다. 테오도르 집정관의 육성을 직접 들은 윌리엄스 후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세,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그는 마치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묵묵히 서 있는 테오도르 집정관을 노려보았다. 생각만 해도 분이 치밀어 오르는 듯 그는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침묵만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손을 들어 알렉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미 난 오래 전부터 테오도르 집정관에 대해 모종의 의심을 가지고 있었소. 이럴 경우를 대비해 알렉스를 침투시켜 놓았는데 그가 이번에 정말 큰 일을 해 냈구려." 말을 마친 페르슈타인 공작은 손가락을 들어 테오도르를 가리켰다. "테오도르의 신병은 내가 인수하겠소. 거기에 더 이상 이의가 없으리라 생각하오." 하지만 윌리엄스 후작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289회. 비록 큰 죄를 지었을망정 테오도르가 페르슈타인 공작의 손에 넘어가는 것만은 막아야 할 듯 싶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정적에게 유난히 혹독한 권력자였다. 아마도 집정관이 살아날 가능성은 전혀 없을 터였다. 보나마나 갖은 고문을 가한 뒤 잔인하게 처형할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에 윌리엄스 후작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지금까지의 정리를 생각해서라도 내가 깨끗이 명을 끊어주는 게 낫겠군.' 생각을 마친 후작은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비록 대역죄인일망정 그래도 그는 한 나라의 집정관이었소. 본관은 그에 적합한 예우를 해 주고 싶소이다. 게다가 신분이 아무리 높다 해도 사적으로 귀족을 처벌할 수는 없소." "그는 이제 귀족이 아니오."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네르시스 공작은 조금 전 테오도르와의 인연을 공식적으로 끊었소. 정확히 말하자면 부자의 연을 완전히 끊어버린 것이지. 그는 더 이상 네르시스란 성을 쓸 수 없으며 또한 귀족의 신분도 아니오. 다시 말해 평민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니 내가 그를 처벌하는데 아무런 걸림돌이 없소. 그의 가족들은 이미 체포되어 감옥에 구금된 상태요." 윌리엄스 후작은 눈을 부릅떴다. "가, 가족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우리 크로센 제국은 연좌죄를 인정하지 않소. 그런데 어찌하여 그들을 구금했소?" 그러나 페르슈타인 공작의 반론은 물 흐르듯 거리낌이 없었다. "당연히 죄가 있으니 체포한 것이오. 그들이 사육하던 사악한 뱀파이어가 바로 그 증거이지. 테오도르의 형제들은 가증스럽게도 자신들의 피를 뽑아 뱀파이어를 사육했었소. 무슨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일을 저지르기 전에 체포한 것이 한 마디로 다행임에는 틀림이 없지. 증거인 뱀파이어 역시 확보해서 감옥에 가둬놓은 상태요." "후우." 윌리엄스 후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더 이상 해 볼 방법이 없었다. 테오도르 집정관이 두 차례에 걸쳐 황태자를 암살하려 한 대역죄인이었고 심지어 그의 형제들은 사악한 뱀파이어까지 사육했다니……. 지금껏 테오도르를 믿었던 것이 후회가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축 늘어진 후작의 어깨가 더 없이 처량해 보였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때를 놓치지 않고 결정타를 날렸다. "이제 알카리스 황태자의 신변은 우리가 맡겠소. 크로센 기사단은 드비어스 황태자의 경호에나 신경 쓰도록 하시오. 알겠소?" "아, 알겠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윌리엄스 후작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집정관의 신병을 넘겨주어라." 테오도르를 지키던 기사가 주뼛거리는 사이 크로비츠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테오도르를 묶은 오랏줄을 낚아챘다. 그의 얼굴에는 희열감이라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드디어 네놈이 내 수중에 들어왔구나.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방법이 너무 많아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닌걸? 아무튼 손꼽아 기대하도록.' 그 모습을 확인한 윌리엄스 후작은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럼 우린 가겠소. 부디 알카리스 황태자 전하를 잘 경호해 주시기 바라오." "걱정 마시오." 윌리엄스 후작이 나간 뒤, 크로센 기사단원들도 하나씩 뒤를 따랐다. 하나같이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듀크 나이츠들은 통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흐흐흐. 그것 쌤통이군.' '이렇게 고소할 수가.' 크로센 기사단원들이 나간 뒤 방안에는 페르슈타인 공작과 알렉스, 듀크 나이츠 그리고 데이몬만 남게 되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추상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사방을 철통같이 경계하라." 듀크 나이츠들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크로센 기사단원들이 경비하던 자리에 버티고 서서 경계를 시작했다. 데이몬은 꼼짝도 하지 않고 돌아가는 상황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우선 알렉스로부터 그간의 정황을 전해듣고 있었다. 얼굴이 점차 밝아지는 것을 보니 일이 뜻대로 풀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모든 상황을 전해들은 페르슈타인 공작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알렉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수고했다. 네가 정말 큰공을 세웠구나." 알렉스는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큰공이라뇨? 전 공작 전하의 명을 완수하게 된 것이 가장 기쁠 따름이옵니다." "임무를 완수했으니 이제 그만 듀크 나이츠로 복귀하거라. 널 위해 부대장 자리 하나를 비워 놓았다." "공작 전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알렉스가 물러난 뒤 페르슈타인 공작은 테오도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진득한 미소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장장 10년을 끌어온 싸움이 결국 나의 승리로 끝났군." 페르슈타인 공작의 말에 테오도르는 머뭇거림 없이 대꾸했다. "축하드려야 합니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곧 세상과 작별할 자네에게까지 축하 받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제가 많이 미우신가 보군요." 페르슈타인 공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다네. 자네 때문에 상당히 골머리를 앓아야 했지. 자넨 머리가 정말 비상하더군. 날 그토록 골탕먹이다니 말일세." "뭐 그래봐야 공작전하에 비하면 조족지혈이겠지요." 언뜻 보면 둘의 대화가 더 없이 정겨워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정적(政敵)이었고 둘 중 하나는 조금 있으면 세상과 영원히 작별해야 했다. "크로비츠가 자네에게 상당히 이를 갈고 있더군. 아마 그의 손맛이 꽤 매울 거야." "기대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테오도르를 쳐다보던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엔 모호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테오도르 집정관. 아니 이제부턴 테오도르 브로큰하트라고 불러야겠지?"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라 기대했던 페르슈타인 공작이었지만 예상 밖으로 테오도르는 별다른 표정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예상대로 알고 계셨군요. 익히 그럴 것이라 짐작했었습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테오도르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의 시간이 지나간 뒤 먼저 입을 연 자는 페르슈타인 공작이었다. "따지고 보면 자네 가문과 우리 헬프레인 가문 사이의 인연이 정말 각별하더군. 무려 500년의 시간을 두고 이어져 내려온 원한관계란 말일세. 기구하기가 정말 이를 데 없어. 이제 내 대에서 그 관계가 완전히 해소되겠군." "………." "브로큰하트 가문은 조만간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걸세.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말이야. 그게 바로 내가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지. 혹시라도 노모와 동생들의 생명을 구걸할 생각일랑은 하지 말게. 나도 사람인지라 애걸한다면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으니 말일세." "그런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습니다." 애석하게도 테오도르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가문이 완전히 끝장난다고 생각하니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냉랭히 손을 흔들었다. "그럼 잘 가게." 명령이 떨어지자 크로비츠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줄을 잡아끌었다. 테오도르의 몸이 맥없이 딸려왔다. "기대하고 있었다니 반갑기 이를 데 없군. 아마 네놈의 기대보다 훨씬 더 매울 테니 마음 단단히 먹도록. 알겠나?" 테오도르는 질 수 없다는 듯 마주 쏘아보았다. "기대할 정도의 손맛일지 궁금해 미치겠군." 테오도르가 크로비츠의 손에 이끌려 나간 뒤 페르슈타인 공작은 데이몬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데이몬 역시 페르슈타인 공작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힘을 가진 두 거인(巨人)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데이몬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데이몬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시선을 맞받고 있었다. 잠시 후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만나게 되었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데이몬의 얼굴에도 서서히 미소가 번져갔다. "나 역시 반갑소. 부하들을 대해본 뒤 많이 놀랐는데 직접 만나보니 생각보다 걸출한 인물이구려." "칭찬이 과하십니다. 대단하기로는 엄연히 당신이 한 수 위일 것 같습니다. 나 역시 카심 용병단원들을 본 뒤 당신이 부러워 견딜 수 없었으니까요……." 데이몬의 눈에 이채가 번져갔다. "듣자하니 내 동료들이 당신의 보호아래 있다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그들의 투지와 용맹을 듀크 나이츠가 본받아야 할 귀감으로 삼기 위해 실례를 무릅쓰고 제 저택에서 모시고 있지요." "헬튼은 어떻게 되었소?" 페르슈타인 공작은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최후의 순간에 당신을 대신해 죽은 용사를 말씀하시는군요. 그의 최후는 아마 짐작하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데이몬의 눈가에 쓸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불쌍한 녀석. 어쩌다 나와 동료가 되어 가지고……." "사람들에겐 누구나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뜻한 바를 이뤘으니 그도 별달리 원통해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위로에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데스 나이트와 본 드래곤은 어디에 있소?" "그들은 황궁의 지하광장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진 마십시오. 엄선된 듀크 나이츠들이 파견되어 그들을 철통같이 보호하고 있으니까요." 그 말에 데이몬은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여러 가지로 신경 써 줘서 고맙소이다." "뭘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데 말입니다." 일말의 대화가 지나간 뒤 그들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먼저 입을 연 자는 이번에도 페르슈타인 공작이었다. "알렉스로부터 대충 들은 것이 있습니다. 따라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손을 잡읍시다. 절 도와주신다면 아르카디아를 통일한 뒤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 당신의 복수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제 이름을 걸고 드릴 수 있는 약속입니다." 그 말에 데이몬의 미간이 지긋이 모아졌다. "당신도 목격했다시피 드래곤의 힘은 엄청나게 강하오. 그런 상황에서 정복전쟁을 벌인다면 놈들을 상대할 병력이 많이 소모될 텐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르카디아는 힘의 논리가 엄격히 성립되는 대륙입니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놈들의 주력군만 깨부순다면 나머지 병력은 고스란히 흡수할 수 있습니다. 병력 손실은 그리 크지 않을 것입니다. 통일을 이룬 직후 즉시 당신의 복수를 위해 대군을 동원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음." 데이몬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솔직히 말해 칠종단금술의 제약을 받고 있는 그가 섣불리 도와주겠다고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적어도 그는 인간끼리의 전쟁에서 철저히 무용지물이었다. 그때 페르슈타인 공작이 귀에 솔깃한 제안을 해 왔다. "원래 전 당신과 데스 나이트를 앞세워 적국의 기사단을 깨부수려고 작정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 페르슈타인 공작은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을 뻗어 데이몬을 가리켰다. "당신이 가진 육체는 의심할 나위 없는 크로센 제국의 제 1황자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에겐 크로센 기사단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크로센 제국의 황제자리에 그 누구라도 올려놓을 수 있는 힘이 당신에게 있겠지요?" 데이몬의 대꾸에 페르슈타인 공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센 기사단만 손에 넣는다면 당신께서 전장에 참전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 데스 나이트를 비롯한 전력을 트루베니아의 드래곤을 상대하기 위해 아껴놓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당신이 황궁에 있는 사이 전 크로센 기사단과 듀크 나이츠, 그리고 제 명령을 따르는 50만 대군을 총동원하여 정복전쟁을 시작하겠습니다. 아르카디아 전역을 정복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결코 2년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드래곤들이 깨어나기 전에 일을 모두 마무리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페르슈타인 공작의 계획을 들은 데이몬은 입을 딱 벌렸다. "놀랍구려. 벌써 그런 원대한 계획을 세워놓으셨다니……." "전 자신이 없으면 일을 벌이지 않습니다. 제 계획이 먹혀 들어갈 가능성은 거의 100%에 가깝습니다." 데이몬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럴 것 같구려. 크로센 기사단과 듀크 나이츠, 이 두 연합세력에 대적할 기사단은 양 대륙을 통틀어 존재하지 않을 테니……." "어떻습니까? 저와 손을 잡으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페르슈타인 공작은 상대가 틀림없이 제의를 수락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두 사람은 한 마디로 서로의 약점을 교묘하게 채워주는 공생관계였다. 합작이 이루어진다면 페르슈타인 공작은 강력한 크로센 기사단을 손에 넣을 수 있고 데이몬에겐 드래곤에 맞서 싸워 줄 엄청난 병력이 생기는 것이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290회. 공작은 합의가 오래지 않아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데이몬은 좀처럼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페르슈타인 공작으로써는 조바심이 치밀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달리 바라시는 것이 있습니까?" "아니오. 난 단지, 하나를 걱정하는 것뿐이라오." 페르슈타인 공작은 데이몬 앞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데이몬은 얼굴에 묘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살던 곳에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이 있소. 말뜻을 정확히 풀이하자면 토끼가 사라진 뒤 필요가 없게된 사냥개가 결국 가마솥에서 삶긴다는 뜻이지요." 페르슈타인 공작은 금세 데이몬의 저의를 깨달았다. "그렇다면 제가 나중에 당신을 제거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점을 걱정하시는 것이군요." "그렇소. 난 지금 크로센 제 1황자의 모습을 하고 있소. 자고로 권력을 장악하려면 황족들에 대한 철저한 숙청이 뒤따라야 하는 법. 난 그것이 가장 걱정이라오." 페르슈타인 공작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뒤흔들었다. "전 결코 부하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말입니다. 부하들이 제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믿어도 되겠소?"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특히 당신은 마법 방면으론 감히 적수를 찾을 수 없는 절대자가 아닙니까? 마법을 써서 예전의 용모로 돌아가신다면 제가 당신을 제거해야 할 이유가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데이몬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방법도 있겠구려." "부디 도와 주십시오. 제겐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부와 명예, 권력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말입니다. 물론 그것은 당신의 복수와는 별도로 약속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흠." 데이몬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이참에 다짐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재차 협력을 권유했다. "부디 대답해 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돌리던 데이몬이 갑자기 머리를 짚었다. 모습을 보아 갑자기 현기증이 치밀어 오른 모양이었다. 잠시 후 그는 떠듬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미, 미안하지만 그 대답은 내일 해드리면 안 되겠소? 말을 많이 했더니 저, 정신을 차릴 수가 없구려……." 페르슈타인 공작은 머뭇거림 없이 몸을 일으켰다. 지금 상황에서 성급하게 행동할 필요는 없었다. 설사 거절하더라도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설득할 생각이 아니었던가. "알겠습니다. 대답을 듣는 것을 내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좋은 결과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고, 고맙소." 몸을 일으킨 페르슈타인 공작은 주위의 듀크 나이츠에게 서슬 퍼렇게 명령을 내렸다. "그대들은 목숨으로써 알카리스 황태자 전하를 수호해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머리를 짚고 있는 데이몬을 힐끔 돌아본 페르슈타인 공작은 조용히 방을 나섰다. 이미 그는 어떻게 해서든 상대의 협력을 얻어내겠다고 단단히 다짐한 상태였다. 싸움이 끝난 지 꼬박 이틀이 흘렀다. 그러나 카심 용병단원들은 여전히 제 4별관을 떠나지 않았다. 드래곤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은 동료를 추모하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그리 크지 않은 방의 중앙에는 두 개의 관이 놓여 있었다. 뚜껑이 덮여 있지 않아 시체의 모습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말끔한 모습으로 단장한 채 누워있는 그들의 모습은 잠자는 것과 진배가 없었다. 단 한가지, 영원히 깨어날 수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우측의 관에는 비에리의 시신이 담겨져 있었다. 동료들에게 공격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브론즈 골렘에게 접근하다 그만 치명상을 입었던 비에리. 골렘의 발길질에 정통으로 격중당한 비에리는 척추가 완전히 으스러져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헛되이 죽은 것이 아니었다. 비에리가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 탓에 공격할 틈이 생겼고 카심이 머뭇거리지 않고 공격한 탓에 막강한 브론즈 골렘 한 기를 쉽사리 파괴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전과(戰果)도 동료를 잃은 슬픔을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관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카심 용병단원들은 하나같이 동료를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왼쪽 관에는 바로 헬튼의 시신이 담겨 있었다. 데이몬을 구해내기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헬튼.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해 낸 동료의 시체 앞에서 대원들은 간신히 눈물을 삼켜야 했다. 날카로운 파편이 전신을 난자하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데이몬을 보호하려 노력했던 헬튼을 생각하니 도저히 치밀어 오르는 오열을 참을 수가 없었다. 헬튼은 지금 생전의 순박했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관속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대원들은 모두 격전 당시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듀크 나이츠들이 가져다놓은 새 옷이 구석에 놓여 있었지만 누구 하나 옷을 갈아입은 이가 없었다. 하나같이 피와 먼지가 범벅이 된 옷 위에 찌그러진 갑옷을 뒤집어쓰고 있는 상태였다. 시체를 들여다보던 패터슨이 묵묵히 입을 열었다. "핼튼 녀석. 이럴 줄 알았다면 대화라도 더 나눠보았을 것을……." "녀석이 워낙 과묵했잖아? 심하게 장난을 쳐도 그냥 씩 웃어버리던 녀석이었어. 정말 말수가 없는 놈이었는데." "정말 순박했었지." 조용히 앉아 있던 대원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돌연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패터슨이 카심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대장.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가?" 패터슨의 얼굴에는 다소 심각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크로센 기사단장에 데리고 간 젊은이의 정체가 데이몬이 틀림없겠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헬튼이 목숨을 바쳐 보호했을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아마 틀림없을 거야." 카심은 묵묵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았다. "데이몬은 한 마디로 양파와도 같은 사람이야. 아무리 꺼풀을 벗겨도 밑에 또 다른 비밀이 도사리고 있단 말이지. 그에 대해 대충 안다고 자부했건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아무튼 상관없다. 세상이 뒤집어진다고 해도 그가 우리의 동료란 점만은 변하지 않으니까. 알겠나?" 카심의 말에 용병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습니다." "만약 핼튼과 같은 경우에 처한다면 이 중에서 목숨을 바치지 않을 녀석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수줍음을 많이 타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나서지 않는 하인리히까지 한 마디 거들고 나섰다. "그러고 보니 헬튼 형님이 조금 밉군요. 제가 해야 할 일을 형님이 대신 했으니 말입니다." 카심은 관속에 누워 싸늘하게 식어있는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이들에 대한 성대한 장례식을 약속했다. 용맹을 기리기 위해 듀크 나이츠 다수를 장례식장에 참석시킨다고 했으니 이들도 마음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도 이들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자. 비록 함께 행동하지는 못하지만 헬튼과 비에리는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 것이다." 동의한다는 듯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심의 눈에서 갑자기 이채가 빛났다. "그나저나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겠군. 데이몬과 크로센 제국 황태자가 동일인물이라면……."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다는 듯 카심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 때 패터슨이 미첼을 쳐다보며 묘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나저나 미첼 교관님도 정말 냉정하군요. 그 많은 귀족 아가씨들의 춤 요청을 그토록 단호하게 거절하다니 말입니다. 하나같이 눈알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미인들이던데……." "글쎄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난처해진 미첼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패터슨 특유의 입담은 계속 이어졌다. "따지고 보면 제 탓도 크지요. 어제 그 아가씨에게 교관님의 이름을 가르쳐 준 사람이 바로 저였거든요." "그랬습니까?" 패터슨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이 막 끝났을 때 그 아가씨가 제게 다가오더군요. 한껏 매료된 눈빛으로 교관님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친절히 가르쳐 줬지요 뭐." "패터슨도 참……. 왜 그랬어요?" 미첼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얼굴엔 겸연쩍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아마 예전의 나였다면 아마도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겠지? 옛날이었다면 반드시 내가 찾아가서 춤 신청을 했거나 먼저 구애를 했을 테니 말이야.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와의 로맨스는 어릴 때부터 항상 생각해 왔던 소망이었으니.' 하지만 지금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고작해야 2년도 안 되는 짧은 세월동안 미첼은 변해도 정말 많이 변해 있었다. 보고 있던 카심이 빙그레 웃으며 대화에 끼여들었다. "미첼. 자네도 슬슬 짝을 찾아야지? 스물 셋이면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지. 암 그렇고 말고. 보아하니 자네를 마음에 두고 있는 아가씨가 하나 둘이 아니던데 그 중에서 느긋하게 고르면 되니 정말 행복하겠어?" 카심의 공격에 즉각 반격하지 않는다면 결코 미첼이 아니었다. "뭐, 대장님도 서른을 훌쩍 넘긴 상태에서 결혼하셨는데 제가 어찌 감히 추월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건 한 마디로 하극상입니다. 카심 용병단원으로써 그런 무례를 저지를 순 없습니다." "이, 이 사람아. 나, 나야 경우가 다르지." 정통으로 한 방 얻어맞은 카심이 떠듬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미첼은 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아마도 데이몬같은 사랑은 이루기 불가능하겠지요? 하지만 대장님 같이 열렬한 사랑은 한 번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생에 한 번 하는 결혼인데 말입니다." "자, 자네……." "멋지게 사랑을 불태울 수 있을 때까지 한 번 기다려 보겠습니다. 서슴없이 목숨을 바쳐 보호할 만한 상대가 나올 때까지 말입니다." 카심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마음가짐이 멋지군. 좋아. 내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네. 쉬르나크까지는 힘들겠지만 밴디츠 마스터(Bandits master: 도적단 우두머리) 정도라면 충분히 변장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그런데 한가지만 부탁하겠네. 그 땐 절대로 살살 해야 하네? 난 도저히 자네의 검술실력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카심의 말이 끝나자마자 용병들은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패터슨의 걸쭉한 입담이 이어졌다. "맞아! 대장은 도적단 우두머리로 변장하면 제격이야. 생긴 모습이 완전히 산도적 저리 가라 잖아? 대장. 이참에 직업을 한 번 바꿔 보는 것이 어때요? 카심 밴디츠의 대장으로." 카심이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예끼 이 녀석! 할 말이 따로 있지?" "하하하." "후후후. 대장님이 패터슨에게 정통으로 한 방 맞았어." 미첼도 한데 어우러져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동료들을 만나게 된 것이 정말 천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거대한 아르카디아 대륙 전체를 통틀어봐도 이런 동료들은 정말 흔치 않았다. 한참 웃고 있는데 갑자기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미첼이 서둘러 문을 향해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문 밖에서 경비기사로 보이는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실례합니다만 누가 찾아오셨습니다." 미첼의 얼굴이 별안간 냉랭해졌다. "찾아오신 분이 여자입니까?"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냥 돌아가라고 전해주십시오." 미첼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 밖에서 앙칼진 음성이 울려 퍼졌다. "미첼. 너 죽을래? 그동안 혼나지 않아서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거야?" 음성을 듣자마자 미첼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미첼이었지만 단 한사람만은 예외였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미, 미안해 율리아나. 넌 줄 몰랐어." 어쩔 줄 몰라하는 미첼을 왈칵 밀쳐내며 율리아나가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용병들의 눈빛이 멍청하게 변했다. "세, 세상에……." 화려하게 차려입은 율리아나의 모습은 한 마디로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 평소의 화장기 없는 모습으로도 어디 한 군데 빠지지 않는 용모였지만 제대로 치장하니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지금껏 율리아나가 이렇게 아름다울 것이라곤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별관에 들어서자마자 겉옷을 벗어 사정없이 내동댕이쳤다. "어휴! 거추장스러워. 이런 것을 걸치고 어디 걸을 수가 있어야지?" 틀어 올린 머리를 풀어버린 율리아나는 주렁주렁 달려있던 장신구까지 아낌없이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카심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율리아나 왕녀님이 이렇게 아름다우실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헛소리 말아요. 카심. 결혼하더니 쓸데없는 소리가 많이 늘었군요." 율리아나가 사정없이 쏘아붙이는 바람에 카심은 머쓱해졌다. "그런데 이곳엔 무슨 일로……." "긴말 할 것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어요." 율리아나의 눈빛이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카심은 한껏 긴장해야 했다. '이 사고뭉치가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카심의 짐작대로 율리아나의 말은 모두의 예상을 송두리째 뒤집어놓고 있었다. "난 카심 용병단에 가입하려고 찾아왔어요." "………." 할 말이 없어진 용병들은 그저 눈만 끔뻑거렸다. 일순 멍청해진 용병들의 귀로 율리아나의 음성이 계속 울려 퍼졌다. "다시 말해 용병이 되겠다는 뜻이죠. 뭐 세상에 여자 용병도 많잖아요? 임무를 무리 없이 완수한 것을 보니 카심 용병단이 꽤 쓸만한 용병단이라 생각되더군요. 때문에 대원이 되어도 괜찮겠다 생각했어요." "………." "반드시 날 받아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모두의 얼굴에는 황당함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임무를 마친 이후 율리아나를 두 번 다시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환호성까지 내질렀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런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악녀(惡女)가 이번에는 용병단에 가입해서 두고두고 괴롭히겠다니……. 찰거머리도 이런 찰거머리가 없었다. '안 돼!' 용병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291회. 행여나 카심이 율리아나의 계략에 넘어갈까 봐 그들은 하나같이 무언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고개를 열심히 흔들며 말이다. 물론 카심이 그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늘이 뒤집어져도 받아들이면 안 돼!' 카심은 경직된 안색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죄송하지만 왕녀님을 용병단에 가입시키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군요." 율리아나는 무표정하게 카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째서 불가능하죠?" "우리 용병단의 임무는 드래곤을 사냥하는 것입니다. 위험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죠. 다시 말해 최악의 상황에서 자신을 지킬 실력이 없는 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대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어진 율리아나의 대꾸에 카심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저번에 데이몬 영감탱이가 이렇게 말한 것 같은데……. '꼭 실력이 있어야만 동료가 될 자격이 있냐고…….' 그 때 대장은 이렇게 대답했죠.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이에요." 카심은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쩔쩔매야 했다. "그, 그건……." "영감탱이는 또 이렇게 말했죠. '실력이 모자란다면 키워주면 되지 않겠냐고.' 혹시 기억나지 않아요?" "그 그랬습죠. 분명히 그랬습니다." 카심은 똥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데이몬을 만날 당시 그들의 실력이 형편없었다는 점은 사실이었다. 그런 기억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율리아나가 그 문제를 걸고넘어지니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내 실력이 모자란다면 모두가 합심해서 키워주면 되잖아요? 그럼 그 문제는 깨끗이 해결되었죠?" 말싸움에서 졌지만 순순히 물러날 순 없었기에 카심은 안간힘을 쓰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 하지만 카심 용병단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성원들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왕녀님을 받아들이고 싶지만 대원들이 반대한다면 저 역시 어쩔 수 없군요." "뭐, 그 정도는 예상했어요. 그래 몇 명이나 찬성하면 되는 거죠?" "그거야 뭐 과……." 과반수란 말을 하려다 뒤를 돌아본 카심의 눈가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대원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것은 명백한 거부의 표현이었다. 그들 중에서 미첼이 가장 열심히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지금껏 율리아나에게 가장 혹독하게 당한 이가 바로 미첼이 아니었던가? 그 모습을 쳐다본 카심은 마음을 굳혔다. '그래. 설사 저 악녀에게 과반수 이상이란 조건을 내걸어도 섣불리 받아들일 리가 없겠지?' 고개를 돌린 카심은 정색을 했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한 가지를 조건으로 내걸겠습니다. 만약 대원들 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찬성한다면 왕녀님을 카심 용병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거부할 경우 저도 더 이상 어쩔 수 없군요. 어떠십니까.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그 말에 율리아나의 눈동자에서 희망의 빛이 번뜩였다. "단 한 명만 찬성하면 된단 말이죠?" "그렇습니다. 물론 대장인 저와 병상에 누워있는 데이몬의 의견은 표결에서 제외하겠습니다. 남은 대원들 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찬성하고 나올 경우 전 깨끗이 승복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왕녀님을 제 용병단에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죠. 그러나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을 경우, 이번에는 왕녀님께서 승복하셔야 합니다. 우리 용병단에 가입하시려는 생각을 깨끗이 포기하시라는 뜻이죠. 어떻습니까? 제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율리아나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하겠어요." 행여나 일어날 뒤탈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듯 카심은 다시 한 번 못을 박았다. "혹시라도 번복하시는 일은 없으시겠죠?" 율리아나는 아무 거리낌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카르셀 왕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어요.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하겠다고……." "좋습니다. 이제부터 표결에 들어가겠습니다." 몸을 돌린 카심은 목청을 돋워 소리를 질렀다. "이제부터 율리아나 왕녀님을 용병단에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한 표결에 들어가겠다. 혹시라도 찬성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라." 물론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행여나 손을 든 것으로 오해할까봐 하나같이 무릎을 단단히 움켜 쥔 채 차렷자세로 앉아 있었다. 미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예 손을 허벅지 아래에 깊숙이 끼워 넣은 상태였다. 딴청을 피우는 미첼의 모습을 보자 율리아나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미첼. 너 이 자식. 죽고 싶어?" 하지만 미첼은 도리어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이 떠오르고 있었다. '후, 후환이 두렵지만 참자. 단 한 번만 호되게 당해준다면 그 다음부터는 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 더, 더 이상 율리아나 계집애에게 당하지 않아도 된다고…….'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율리아나의 살벌한 눈빛이 뚜렷이 떠올랐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미첼은 사력을 다해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 순간만 지난다면 율리아나의 마수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러나 미첼의 필사적인 노력은 뒤에서 터져 나온 한 마디 때문에 여지없이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전 찬성합니다." 용병들의 고개가 마치 따귀라도 맞은 듯 돌아갔다. 소리가 들려온 쪽을 쏘아보는 그들의 눈에는 살기 비슷한 것이 번뜩이고 있었다. '설마 농담이겠지?' '찬성한 녀석은 분명 헬튼 아니면 비에리일거야. 그들이 아니고서야 감히 찬성할 까닭이 없지. 죽은 자라면 저 악녀를 겁낼 필요가 없잖아?'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송두리째 빗나가버렸다. 뒤에 앉아 있던 제럴드가 쏟아진 시선을 받고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의 왼손은 이미 번쩍 들린 상태였다.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한 대원들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제럴드. 너 제정신이냐?" "설마 동료의 죽음 때문에 정신이 완전히 돌아버린 것은 아니겠지?" 제럴드는 묵묵히 고개를 뒤흔들었다. 쏟아지는 시선으로 인해 얼굴이 따가웠지만 그는 결코 고개를 돌리려 하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전 율리아나 아가씨를 카심 용병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데 찬성합니다." 그 말에 용병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우거지상으로 바뀌어 버렸다. 얼굴 표정이 가장 참혹하게 변한 것은 바로 미첼이었다. '제, 제럴드 저 자식. 드, 드디어 사고를 쳤군. 이럴 줄 알았다면 내가 먼저 손을 들어버릴 것을……. 나, 난 이제 죽었다. 아마 오늘을 넘기지 못할 거야.' 율리아나에게 당할 것을 생각하니 현기증마저 치밀어 오르는 미첼이었다. 곧 카심의 어이없다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제럴드.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도록 해라. 너는 율리아나 아가씨가 용병단의 일원이 되는데 찬성하느냐?" 제럴드는 추호도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카심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 이건 재앙이야. 아주 끔찍한 재앙' 현기증이 치밀어 올랐는지 카심의 육중한 덩치가 연신 휘청거렸다. 미첼은 아예 정신이 완전히 나간 상태였다. 브론즈 골렘의 육중한 주먹에 정통으로 한 방 얻어터진 것 같은 표정을 한 카심의 옆으로 의기양양한 율리아나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호호호. 고마워. 제럴드.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어. 그럼 여러분들 앞으로 잘 부탁해요." 가입인사를 건넨 율리아나는 미첼을 노려보며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미첼. 넌 조금 있다 보자!" '오. 신이시여.' 용병들은 하나같이 머리를 감싸안았다.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도대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잠시 후 용병들은 모여들어 귀엣말을 나눴다. 그들의 눈빛에는 굳은 결의가 담겨 있었다. "저 둘을 꽁꽁 묶어다 헬튼, 비에리와 함께 묻어버리자" "그래 땅을 아주 깊숙이 파고 묻어버린다면 우린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러지 말고 저 악녀를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에게 선물해 버리는 게 어때? 장담하건데 베르키스 놈은 채 일 주일도 넘기지 못하고 울화통이 터져 죽어버릴 거야." "맞아. 네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 무수한 해결책이 제시되었지만 하나같이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의견들뿐이었다. 다음날 페르슈타인 공작은 날이 밝자마자 별궁을 찾았다. 알카리스의 모습을 하고 있는 흑마법사에게서 대답을 듣기 위해서였다. 별궁에 들어서던 그는 때마침 식기를 들고 나오는 시녀를 불러 세웠다. "황태자 전하의 몸 상태는 어떠한가?" 감히 범접조차 할 수 없는 권력자와 마주치자 시녀는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마, 많이 회복되시었사옵니다. 거동하시는데 별다른 불편함이 없어 보였사옵니다." "그래?"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었기에 건강에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즉시 황태자의 방으로 다가갔다. 그가 다가가자 복도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들이 공손히 예를 취해왔다. "공작 전하를 뵈옵니다." 하나같이 듀크 나이츠들이었다. 손을 들어 화답한 페르슈타인 공작은 바삐 걸음을 옮겼다. 크로비츠를 위시한 30명의 기사들이 그 뒤를 바짝 붙어 뒤따랐다. 덜컹.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창가에 서서 멍하니 밖을 내다보고 있는 금발청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척을 듣고 고개를 돌린 청년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오셨소?" "밤새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당최 잠을 이루지 못했소이다. 자고로 나이를 먹다보면 생각이 많아지기 마련이지요." 외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다. 갓 스물을 넘었음직한 청년의 말투는 세상의 쓴맛을 모조리 겪어본 듯한 노련함이 배어 있었다. 조급함을 감추지 못한 페르슈타인 공작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그럼 어제 드린 제의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만." "당연히 그래야죠. 그런데……." 이맛살을 지긋이 모은 데이몬은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옛 말에 귀가 많으면 일이 제대로 성사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눈치 빠른 페르슈타인 공작은 금세 데이몬의 의중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크로비츠를 쳐다보았다. "경비하는 기사들을 모두 내보내라. 지금 즉시 말이다." "알겠습니다." 크로비츠가 눈짓을 하자 기사들이 우루루 밖으로 달려나갔다. 곧 방안에는 페르슈타인 공작과 크로비츠, 그리고 데이몬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데이몬의 이맛살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여전히 크로비츠에게 머물러 있는 것을 확인한 공작은 그에게도 축객령을 내렸다. "크로비츠. 자네도 나가 있어야겠네." "하, 하오나 전 전하의 안전을……." 페르슈타인 공작은 오직 크로비츠만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괜찮네. 필라모네스를 위시한 궁정마법사들이 이곳에다 신성력이 가미된 마법진을 설치해 놓았네. 심지어 필라모네스 본인이라 하더라도 이곳에선 마법을 쓸 수 없다고 하네. 그러니 자넨 아무 걱정말고 나가 있도록 하게." 귀엣말을 마친 공작은 짐짓 언성을 높였다. "난 그를 절대적으로 믿고 있다. 그러니 그를 의심하는 듯한 말투는 어떠한 경우에도 삼가기 바란다.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이곳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크로비츠는 두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데이몬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방안에는 오직 페르슈타인 공작과 데이몬만이 남게 되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기대 어린 표정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자, 보시다시피 이곳에는 당신과 저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데이몬은 엉뚱한 대답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로잡힌 집정관인가 하는 작자가 떠오르는구려. 하마터면 어제 그놈에게 죽을 뻔했지. 혹시 놈을 죽여버렸소?" 페르슈타인 공작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 죽이진 않았습니다. 놈을 며칠동안 가두어두기로 결심했거든요."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 그런 것이구려. 그렇다면 그의 가족들도 그렇게 조처하셨소?" "그, 그렇습니다만. 그런데 그것은 왜?" "그것 정말 잘 되었구먼." 말을 마친 데이몬의 표정이 갑자기 돌변했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292회. 그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페르슈타인 공작." "무, 무슨 말씀이신지?" 영문을 몰라하는 페르슈타인 공작의 안색이 별안간 경직되었다. 데이몬이 난데없이 그를 덮쳐왔기 때문이었다. 슈우욱. 손가락을 좍 펼친 데이몬의 손이 공작의 목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들었다. 제대로 식별조차 할 수 없는 속도였다. 그러나 페르슈타인 공작은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회피했다. 비록 마나를 다루는 경지에 오르지는 못했을망정 페르슈타인 공작은 뛰어난 실력을 가진 검객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검술 수련을 했던 탓에 몸놀림이 범인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 탓에 공작은 데이몬의 기습을 용케 피해낼 수 있었다. 곤경에서 벗어난 페르슈타인 공작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검 손잡이를 움켜쥐려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 불행히도 페르슈타인 공작은 미처 말을 끝맺지 못했다. 피해 낸 것으로 간주했던 상대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기괴한 각도로 구부러지더니 벼락같이 목 줄기를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커억." 데이몬의 손가락은 페르슈타인 공작의 목젖을 마치 갈고리처럼 단단히 움켜쥐었다. 이어 그의 손이 허리춤 부위를 몇 차례 짚고 지나가자 순식간에 공작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버렸다. 순식간에 아혈과 마혈이 제압되어버린 페르슈타인 공작은 한 마디 말도 못한 채 눈만 데룩데룩 굴리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공작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데이몬의 얼굴에는 착잡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정말 미안하게 되었군.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날 용서하라." 페르슈타인 공작의 눈동자는 경악으로 인해 크게 뜨여 있었다. 협조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상대가 느닷없이 몸을 날려 자신을 제압하다니……. 방안에 설치된 마법진만 믿고 방심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마법이 아닌 전혀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제압했다. 소드 마스터에 필적하는 몸놀림으로 말이다. 의문이 가득 차 있는 공작의 눈을 들여다보던 데이몬은 망설임 없이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뒤이어 들려나온 것은 흉측하게 생긴 기괴한 벌레였다. 송충이 비슷하게 생겼지만 몸통이 짙은 핏빛을 띠고 있었고 전신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나 있는 털은 마치 자체가 생명체인 듯 끊임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곧 데이몬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 벌레의 이름은 종속(從俗)의 혈충(血蟲)이라고 하지. 혹시 들어보았나?" 그 말이 끝나자마자 공작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크게 뜨여진 눈망울에는 경악이 가득했다. 마혈이 제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작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끊임없이 후들거렸다. 종속의 혈충. 마계에서만 서식한다는 벌레의 일종으로 사람의 의지를 제압하는 능력을 가진 가공할 마물이다. 이 혈충에 감염된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시술자의 뜻에 거역하지 못한다. 만약 거역할 경우 상상도 하기 힘든 고통을 겪은 뒤 백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종속의 혈충에 당할 경우 그 사람은 한 마디로 시술자의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 효용성 때문에 지금까지 인간계에 강림한 마왕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종속의 혈충을 지참했다. 일국의 군주나 그에 준하는 권력을 가진 인간에게 종속의 혈충을 시술할 경우 파급효과가 무궁무진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들은 이 종속의 혈충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믿고 따르던 군주나 지휘관이 하루아침에 마왕의 심복이 되어버린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과거 트루베니아에서는 마왕군에 사로잡혔다가 풀려난 자의 경우,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권한을 깡그리 박탈한 뒤 격리시켰다. 언제 마왕의 심복으로 바뀌어 적대행위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물론 페르슈타인 공작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 이럴 수 없어. 이, 이건 꿈이야.' 그러나 저주받아 마땅한 종속의 혈충이 바로 눈앞에서 꿈틀거리고 있는데 도무지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문밖의 부하들을 부르기 위해 공작은 열심히 고함을 질렀다. '나, 날 구해다오. 크로비츠. 듀크 나이츠.' 그러나 아혈이 제압된 탓에 목소리는 일체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열심히 몸을 뒤틀려 했지만 그것 역시 바램뿐이었다. 잠시 후 데이몬의 무표정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 놈을 구하기 위해 북부에서 꼬박 6개월을 고생했네. 종속의 혈충은 마계에서도 그리 쉽게 찾을 수 있는 놈이 아니거든. 다행히 하급 마왕 한 놈이 용케 이것을 구해왔지." 데이몬의 음성은 페르슈타인 공작에겐 악마의 음성과 진배없었다. 종속의 혈충을 집어든 손가락이 서서히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로 향했다.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목의 근육은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데이몬은 공작의 턱을 쥐고 입을 벌렸다. "내가 몹시 밉겠지? 하지만 그 감정은 곧 사라질 걸세."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종속의 혈충을 페르슈타인 공작의 입 속에 집어넣었다. 공작은 눈을 찢어져라 부릅뜬 채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쉬라락. 자유의 몸이 된 종속의 혈충은 서슴없이 공작의 목구멍을 파고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통증을 느꼈는지 공작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데이몬의 음성은 계속해서 귓가로 울려 퍼졌다. "복용했으니 조금 있으면 효력이 나타날 걸세. 노파심에서 간략히 설명해주지. 종속의 혈충을 복용했으니 이제 자넨 꼼짝없이 나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네. 종속의 혈충은 나와 심령이 통해 있는 상태이지. 만약 자네가 나에게 불손한 뜻을 품던가, 혹은 배신하려는 마음을 먹을 경우 종속의 혈충은 즉시 자네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가할 걸세. 듣기로는 인간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고통이라 하더군. 그것은 내가 직접 명령을 내려도 마찬가지야. 그럴 경우 자네는 일각을 넘기지 못하고 백치가 되고만다네. 물론 죽지야 않겠지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생을 마감할 경우 심령이 통해 있는 탓에 종속의 혈충은 바로 발작을 시작하지. 그럴 경우 자넨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릴 수밖에 없네. 생각해 보게. 종속의 혈충에게 뇌를 파 먹힌 인간이 생존할 가능성이 있겠나?" 페르슈타인 공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데이몬의 말을 듣고 있었다. 데이몬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뻗어 공작의 머리를 매만졌다. "녀석이 단단히 자리를 잡았나 모르겠군." 한참동안 공작의 머리를 매만져본 데이몬은 손을 뻗어 공작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이미 페르슈타인 공작의 눈동자는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머리 속에서 이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말을 할 수 있게 된 공작은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퍼부었다. 물론 그것은 문 밖으로 전달되지 않을 정도로 미약했다. "크, 크큭. 도, 도대체 왜?" "………." "왜 이러는 거요? 도, 도대체 뭘 얻으려고……." 데이몬의 쓸쓸한 눈빛이 공작의 얼굴로 쏟아졌다. "별 것은 아니라네. 굳이 말하자면 자네와 나의 뜻하는 바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호, 혹시 나 대신 크로센 제국의 황제가 되고 싶어서 이런 것이오?"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뒤흔들었다. "자넨 이미 나에게 일인지상 만인지하(一人之上 萬人之下)의 자리를 약속했네. 물론 난 그것으로 만족하네. 아니 그보다 낮은 자리라 해도 관심이 없어. 왜냐하면 난 권력 따위에 전혀 욕심이 없으니 말일세. 내 관심사는 오로지 드래곤에 대한 복수 뿐이야." "그, 그런데 왜 이런 짓을?" 데이몬은 묵묵히 몸을 돌려 뒷짐을 졌다. 솔직히 말해 페르슈타인 공작이 그에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동료들을 보살펴 준 은혜가 있었다. 그런 공작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으니 도저히 눈빛을 맞받을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알 수 있을 걸세." 시뻘겋게 충혈된 눈빛이 서서히 옅어지는 것을 보니 종속의 혈충이 마침내 제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크로센 제국 제 1의 권력자인 페르슈타인 공작이 바야흐로 데이몬의 노예로 전락해버리는 순간이었다. "난 필요하다면 자네 부하들에게도 종속의 혈충을 투입할 생각일세. 자네의 세력을 완벽한 내 힘으로 바꾸기 위해." "가, 감히 그런 짓을……. 끄으으." 입술을 악물던 페르슈타인 공작이 갑자기 고통에 겨운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데이몬은 그 모습을 보지도 않고 냉랭히 대꾸했다. "이미 경고했듯이 자넨 어떠한 경우에도 경거망동하지 말게. 자넨 이제부터 날 하늘처럼 떠받들어야 할 테니 말이야. 자네 부하들이 자네에게 충성하듯이 자네 역시 나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해야 할걸세." 페르슈타인 공작은 이제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훌떡 뒤집어져 백안이 되어버린 눈동자가 서서히 제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조금 뒤 페르슈타인 공작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제 끝났군." 공작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어본 데이몬은 지체 없이 마혈을 풀어주었다. "내가 몹시 밉겠군." "그, 그렇지 않습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간신히 대답하는 공작의 모습은 데이몬이 예상했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데이몬은 착잡한 표정이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공작을 쓸어보았다. "크로비츠를 부르게." "………." "그로 하여금 테오도르 집정관을 즉시 이리로 대령시키도록 하게." 잠시 머뭇거리던 공작은 할 수 없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크로비츠. 자네 잠시만 들어와 보겠나?"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크로비츠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잔뜩 긴장한 채 방안의 정경을 살폈다. 하지만 수상한 기미는 전혀 없었다. 단지 페르슈타인 공작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것만 빼고……. "어디 편찮으십니까?" 크로비츠의 질문에 공작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뒤흔들었다. "아닐세. 갑자기 두통이 치밀어 올라서 말이야. 참, 자네에게 시킬 일이 있어서 불렀네." 크로비츠는 차렷 자세를 취했다. "명령하십시오." "지금 즉시 저택의 지하감옥에 수감해 놓은 테오도르를 이리로 데리고 오게." 크로비츠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번져갔다. 처형하기 위해 수감해 놓은 테오도르를 데리고 오라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테오도르를 말입니까?" "그렇네 지금 즉시 말일세." 고개를 갸웃거리던 크로비츠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공작의 태도가 평상시와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크로비츠는 미리 공작과 약속해 놓은 밀어(암호)를 떠올렸다. 만에 하나 공작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암암리에 약속해놓은 밀어 말이다. 그는 손과 검 손잡이와의 거리를 가늠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녀가 지금 음료수를 준비하고 있사온데 차로 올릴지 포도주로 올릴지 여부를 여쭈어 왔습니다. 어떻게 전할까요." 공작이 만약 차라고 대답한다면 크로비츠는 그 즉시 데이몬의 몸과 머리통을 분리시킬 작정이었다. 그것은 바로 페르슈타인 공작이 상대에게 위협을 받고 있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공작의 대답은 크로비츠를 안심시켰다. 물론 차를 대령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겠지만 정작 페르슈타인 공작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소리는 딴판이었다. "포도주를 준비하게." "알겠습니다." 의심을 완전히 접은 크로비츠는 즉시 몸을 돌렸다. 그가 밖으로 나간 뒤 데이몬이 빙글빙글 웃으며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다가갔다. "조금 전의 말은 아무래도 비밀암호로 보이는군. 생각보다 조심성이 많은 편인데?" "………." 페르슈타인 공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노예 신세로 전락해 버린 자신의 신세가 서글펐기 때문이었을까. 데이몬이 딴 생각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같이 식사라도 할까? 힘을 썼더니 배가 고프구먼." 페르슈타인 공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기사 하나를 불렀다. "음식을 준비하라." 그곳에는 곧 풍성한 식탁이 차려졌다. 데이몬은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음식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공작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자네도 좀 들지 그래?" 그러나 페르슈타인 공작의 입장에서 입맛이 있을 턱이 없었다.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기에 앉기는 했지만 말이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293회. 테오도르는 정확히 한 시간만에 그 자리에 끌려왔다. 모진 고초를 겪은 듯 얼굴이 몹시 초췌했다. 고문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인지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었다. 포승줄에 꽁꽁 묶인 채 크로비츠의 손에 질질 끌려들어온 테오도르는 방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사이좋게 식탁에 앉아있는 데이몬과 페르슈타인 공작을 발견하자 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입술을 비집고 냉소가 터져 나왔다. "보아하니 이미 손을 잡으신 것 같은데 제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 부르셨습니까. 혹시 화풀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눈살을 찌푸린 페르슈타인 공작은 크로비츠를 쳐다보았다. "그 녀석의 포승을 풀어준 뒤 잠시 나가있도록 하게." "괘, 괜찮으시겠습니까?" "닭 모가지 하나 비틀 힘도 없는 문관 녀석이야.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알겠습니다." 크로비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테오도르의 포승을 풀었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크로비츠가 나간 뒤 데이몬이 빠른 걸음으로 테오도르에게 다가갔다. 몹시 아픈 듯 저린 몸을 주무르던 테오도르가 데이몬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을 만큼 단단히 묶여 있었던 모양이었다. "제게 죽을 뻔했던 데 대한 화풀이가 하고 싶으시면 얼마든지 받아드리겠습니다. 흑마법사 나리." 데이몬은 착잡한 눈초리로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하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하진 마십시오." 계속 이죽거리는 테오도르였지만 데이몬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네 성이 브로큰하트가 맞느냐?" "………." 상대가 느닷없이 성을 물어오자 테오도르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뒤이어 이어진 데이몬의 음성에는 애절함이 배어 있었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 무척 중요한 것이란다. 그러니 부디 성심껏 대답해 주겠니? 네 성이 정녕 브로큰하트가 맞느냐?" "그, 그렇습니다만." 대답이 끝나자마자 데이몬의 몸이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격정이 가득한 얼굴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스, 스승님. 드디어 당신의 후손을 찾았습니다. 불초 제자가 마침내 스승님의 유지를 이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자리에 주저앉아 연신 부르짖는 데이몬. 페르슈타인 공작과 테오도르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참동안 눈물을 쏟아낸 데이몬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먼저 페르슈타인 공작을 쳐다보았다. "크로비츠에게서 당신 아들의 성을 들었을 때 상당히 고민을 했지. 스승님께 들은 헬프레인 가문과 자네 가문이 동일한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거든. 하지만 난 바로 어제 두 가문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네." 말을 마친 데이몬은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형언할 수 없는 빛이 서려 있었다. "난 네 가문, 그러니까 브로큰하트 가문과 정말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넌 추호도 나를 경계할 필요가 없다. 알겠느냐?" "………." 테오도르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느닷없이 바뀐 상대의 태도에 경계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혹시 넌 브로큰하트 가문의 시조가 누구인지 아느냐?" 잠시 머뭇거리던 테오도르가 마음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조나단 브로큰하트이십니다. 500년 전 단신으로 아르카디아로 건너오신 조나단이 바로 브로큰하트 가문의 시조이시지요." 데이몬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뒤흔들었다. "그게 아니란다. 브로큰하트 가문의 진정한 시조는 트루베니아에서 생을 마치셨단다. 혹시 조나단 브로큰하트에게 아버님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느냐? 조나단에게 브로큰하트란 성을 지어준 아버지 도일 브로큰하트말이다." 테오도르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가문에 오랫동안 비밀로 전해져 내려오는 비사를 알고 있는 외인이 있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는 도일 브로큰하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가문의 수치라 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외부에 일체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도일 브로큰하트는 암흑의 전쟁 당시 마왕군 편에 서서 인간과 맞서 싸웠던 흑마법사였다. 그 때문에 브로큰하트 가문의 사람들에게 도일이란 이름은 섣불리 드러낼 수 없는 치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외인이 난데없이 그런 도일을 거론하다니……. 테오도르의 눈가에 서서히 호기심이 번져갔다. "혹시 그…분을 아십니까?"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그 분의 제자였던 내가 어찌 스승님을 모르겠느냐?" "저, 정말이십니까?" 과거를 떠올려보는지 데이몬의 눈빛이 별안간 아득해졌다. "정말이고 말고. 난 그분에게서 마법을 배웠다. 그리고 여분으로 생명까지 얻었지. 종족전쟁당시 그 분은 날 살리기 위해 아무 거리낌없이 죽음의 길을 택하셨다." "………." "도일 스승님은 내겐 한 마디로 아버지나 다름없는 분이다. 엄청난 은혜를 베푸신 거지." 말을 마친 데이몬은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날 대신해서 돌아가시는 순간 스승님은 나에게 한 가지를 당부하셨다. 그것은 바로 오랫동안 내버려두었던 그분의 아들을 보살펴달라는 부탁이었다. 30년이란 세월을 감옥에 갇혀 계시느라 그분은 도저히 아들을 만날 수 없으셨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난 그 부탁을 이행하지 못했다. 뒤이어 벌어진 노스우드 결전에서 드래곤에게 사로잡혀 강제로 리치가 되어야 했으니 말이다. 이후 500년의 세월이 흘러 드래곤의 노예 신세에서 벗어났지만 난 스승님의 당부를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브로큰하트가 결코 흔한 성이 아니기 때문에 후손이라도 돌봐 주는 것이 스승님에 대한 도리를 지키는 것이라 생각했고 때문에 틈나는 대로 수소문하려 했다." "………." "그런데 이렇게 우연찮은 기회에 스승님의 후손을 만나게 되었으니 도저히 기쁨을 주체할 수 없구나. 이제 난 널 돌봐줄 생각이다. 스승님의 아들이라 생각하고 말이다. 알겠느냐?" 테오도르의 눈에서도 어느덧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세, 세상에……." 한 마디로 모든 것을 포기했던 순간이었다. 머지않아 브로큰하트 가문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구원자가 나타나 돌봐주겠다고 하니 북 받혀 오르는 눈물을 차마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홀로 외로운 투쟁을 거듭했던 터라 테오도르의 심신은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테오도르는 데이몬을 얼싸안고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죄, 죄송합니다. 전 그런 줄도 모르고……." 데이몬은 얼싸안은 테오도르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아니다. 설사 네가 날 죽였다 하더라도 난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내 목숨은 바로 스승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쿵. 듣고 있던 페르슈타인 공작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비로소 흑마법사가 자신을 노예로 만든 연유를 알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흑마법사는 브로큰하트 가문의 일원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브로큰하트 가문 시조의 제자이니 말이다. 하지만 공작은 그저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몸과 마음이 완벽하게 데이몬의 노예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잠시 후 울음을 그친 테오도르는 페르슈타인 공작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페르슈타인 공작을 설득하셨기에……." 데이몬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이미 나의 노예로 전락한 신세란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넌 내 전공이 흑마법이란 것을 아직까지 모르는구나? 페르슈타인 공작은 지금 내가 시술한 종속의 혈충에 감염되어 있는 상태란다." 테오도르의 눈에 경악감이 치밀어 올랐다. 물론 한 나라의 집정관이었던 그가 종속의 혈충이 어떤 것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렇단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결코 내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다. 물론 그의 부하들도 마찬가지겠지?" 말을 마친 데이몬은 정색을 하며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이제 난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루어 줄 생각이다. 내가 보유한 전력도 무시할 수 없는 데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세력까지 가세하면 세상에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본다. 자, 테오도르 브로큰하트. 무얼 원하느냐? 네가 원한다면 크로센 제국의 황제 자리에도 올려줄 수도 있다. 그렇게 해 주길 바라느냐?" 테오도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전 이미 크로센 황가에 진심으로 충성을 바치고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크로센 황가의 존속뿐입니다. 지금껏 페르슈타인 공작과 대립해온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지요."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갸륵하기는 하지만 어리석은 생각이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따로 있더냐? 네가 승낙하기만 한다면 크로센 제국의 황제자리를 대대손손 브로큰하트 가문이 이어나갈 수 있다." 테오도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마음 써 주심은 감사하지만 전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데이몬께서 도일 선조님께 은혜를 입으셨듯이 저 역시 발렌시우스 황제폐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전 부디 그 은혜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부디 드비어스 황태자를 제위에 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데이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좋다. 네가 원하는 것을 이뤄주겠다. 네가 크로센 황가의 존속을 원한다고 했으니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페르슈타인 공작을 쳐다보았다. "페르슈타인 공작에 대한 처분은 네게 맡기겠다. 네 말 한 마디면 공작은 그 날 중으로 백치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공작의 세력을 단계적으로 흡수하려면 당분간 그대로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제 그의 생사여탈권을 네게 일임하겠다." "도대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모르던 테오도르는 고개를 돌려 페르슈타인 공작을 쳐다보았다. 하루아침에 뒤바뀌어버린 입장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공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테오도르가 고즈넉이 말을 건넸다. "상황이 이렇게 변할 줄 나도 짐작 못했소. 심사가 무척 복잡하겠구려." "그렇군. 주객이 완전히 전도되어버렸어." 안절부절못해하던 페르슈타인 공작의 눈빛이 눈에 띄게 안정되어갔다. 무언가 결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끄아아아……."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페르슈타인 공작의 몸이 그 자리에 맥없이 허물어졌다. 몸이 정신 없이 뒤틀리는 것을 보니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기세였다. 바닥에 쓰러진 뒤에도 공작은 끊임없이 몸을 비비꼬았다. 엄청난 고통을 겪는 듯한 모습이었다. 테오도르는 깜짝 놀랐다. "무, 무슨 일이오?" 그에 대한 대답은 데이몬이 해 주었다. "녀석은 멍청하게도 종속의 혈충에 저항하고 있단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지. 인간의 의지로는 결코 종속의 혈충을 거부할 수는 없다." "그, 그렇습니까?" 그 때 바닥에 쓰러져 버르적거리던 페르슈타인 공작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코와 입을 통해 핏줄기가 가늘게 흘러나왔고 벌겋게 핏발이 선 눈에서 도무지 흰자위를 찾아볼 수 없었다. "미, 미안하지만 내, 내가 그리 쉬, 쉽게 당할 것 같소? 나, 난 차라리 백치가 되는 길을 택하겠소. 꼬, 꼭두각시 노릇보다야 그게 훨씬 낫지 않겠소?" "………." "저, 적어도 난 효, 효웅이라 자부하는 몸이오. 따, 따라서 구차한 삶보다는 죽음을 택할 것이오." "페, 페르슈타인 공작." 테오도르는 연신 안절부절못해 했다. 설마 공작이 이렇게 나올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데이몬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놈이 백치가 되어버려도 헤쳐나갈 방법은 있다. 난 9서클의 마스터. 놈이 백치가 되더라도 내 임의대로 조종할 수 있다. 만약 그 일이 여의치 않더라도 해결책은 있다. 시간이 조금 걸리는 일이지만 놈의 심복을 깡그리 모은 다음 그들에게 종속의 혈충을 투여하면 해결할 수 있다. " 그러나 테오도르는 데이몬의 말에 별달리 수긍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잠시 후 그는 뭔가를 작정한 듯 고개를 돌려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혹시 종속의 혈충을 잠시 진정시킬 수 있습니까?" "가능하다만 무슨 일로 그러느냐?" "공작과 긴히 나눌 말이 있습니다." 잠시 테오도르를 응시한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마. 페르슈타인 공작의 머릿속에 자리잡은 종속의 혈충을 잠시동안 가사(假死)상태로 바꾸어 놓겠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버르적거리던 페르슈타인 공작의 몸이 축 늘어졌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294회. 몸에서 힘이 깡그리 빠져나간 듯 그는 신음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잠시 후 고개를 쳐든 페르슈타인 공작은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종속의 혈충이 가사상태에 빠진 탓에 이제 데이몬에 대해 적개심을 표시할 수 있는 것이다. "내, 내가 죽고 난 뒤 추, 충성스런 내 부하들이 다, 당신과 테오도르를 가만히 놔둘 것 같소? 겨, 경고하건데 내 모습으로 폴리모프할 새, 생각일랑은 꿈에도 하지 마시오. 미, 밀어를 모를 경우 부하들이 가차없이 고, 공격하도록 지시해 놓았소. 알겠소?" 데이몬은 묵묵히 페르슈타인 공작의 독기 어린 눈빛을 받아냈다. 어쨌거나 그에게 미안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사이 테오도르가 조용히 공작에게 다가갔다. 공작의 적의 어린 시선이 이번에는 테오도르에게로 쏠렸다. "그래 내게 할 말이 뭐냐? 범은 결코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 법. 행여나 날 회유할 생각은 하지 마라." 테오도르는 쓸쓸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비록 적일망정 당신은 제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그 말에 페르슈타인 공작은 한 방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속이 뻔히 보이는 말이다만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구나." "아니 진정입니다. 당신을 상대하며 전 몹시 힘들었습니다. 만약 제가 발렌시우스 황제페하께 먼저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면 전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당신을 섬겼을 것입니다." "………." "당신의 심계, 전략, 조직장악력, 그리고 부하의 마음을 휘어잡는 능력, 그 모든 것에 전 탄복을 금치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전 당신의 발끝조차 따라갈 자신이 없습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사납게 고함을 질렀다.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결코 수작이 아닙니다. 전 지금 저의 진심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테오도르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을 보니 거짓은 아닌 것 같군. 하지만 이제 와서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이유가 뭐지? 날 동정해서 하는 소린가?" "그렇지 않습니다. 전 단지 당신과 진솔한 대화를 하려 하는 것뿐입니다. 지금껏 수없이 생각했던 것이지만 그럴만한 상황을 만들기가 처음부터 불가능했지요. 이렇게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 그래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들은 페르슈타인 공작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종속의 혈충에 당한 후유증은 그 정도로 컸다. 겨우겨우 걸음을 옮긴 공작이 의자에 털썩 몸을 묻었다. "좋다. 들어줄 용의가 있으니 한 번 말해 보아라." 테오도르는 머뭇거림 없이 반대편 의자에 가서 앉았다. 데이몬 역시 묵묵히 다가가 합석했다. 테오도르는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당신이 가진 전력은 한 마디로 대륙 최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상태로도 충분히 크로센 제국과 아르카디아를 장악할 수 있는 전력이지요." 페르슈타인 공작은 거친 숨을 토해내며 그 말을 받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랬지. 하지만 이젠 아니다. 저 빌어먹을 흑마법사 놈의 계략에 당해 곧 백치로 변할 몸이니까.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고 용건이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라." 테오도르는 서글픈 시선으로 공작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어찌해서 아르카디아 대륙에만 관심을 두십니까. 시선을 한번 넓혀 보십시오." "무슨 헛소리냐?" 연신 숨을 헐떡거리는 공작의 음성은 차라리 비명에 가까웠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추호도 동요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이 정복욕을 굳이 아르카디아에만 국한시키지 마십시오. 당신의 야망을 충족시키는 데는 바다 건너 트루베니아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습니까? 트루베니아는 넓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오크 족의 노예로 힘겹게 살아가는 많은 인간들이 있습니다. 오크의 노예 신세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면 그들은 당신을 기꺼이 황제로 여길 것입니다. 그것도 진심으로 말입니다." "………." "지금은 아르카디아의 모든 힘을 한 데 결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드래곤의 속셈을 각 국 군주들에게 널리 알린다면 그들은 기꺼이 군대를 파견해 줄 것입니다. 전 백만 명 이상의 대군을 모으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드래곤의 마수로부터 아르카디아를 구해내고 더불어 트루베니아까지 해방시키는데 충분한 병력이지요." 하지만 페르슈타인 공작은 쉽사리 테오도르의 말을 듣지 않았다. "흐흐흐. 예상대로 네놈의 속셈은 결국 날 회유하려는 것이었군." 쾅. 테오도르가 느닷없이 탁자를 내려쳤다. 그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편협하게만 생각하십니까? 트루베니아의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대관절 알고는 있으십니까?" 묵묵히 듣고 있던 데이몬이 한 마디 거들었다. "나는 많이 겪어보았다. 트루베니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한 마디로 가축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지. 오크를 위해 뼈빠지게 경작과 목축을 거듭하다 나이가 들면 식량이 되어 오크의 배를 채워주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그뿐인 줄 아느냐?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트루베니아 전역에서 어린 소년, 소녀들이 대대적으로 차출되고 있을 것이다. 펠젠틴 전투에서 소멸된 리치를 되살리기 위해서 말이다. 리치 한 놈을 되살리기 위해 적어도 백 명 이상의 소년, 소녀들이 필요하다. 애당초 그들은 생명력을 깡그리 빨리고 무참히 죽어가야 할 제물에 불과하다. 난 이미 그런 광경을 무수히 목격한 바 있다." 데이몬의 말에 테오도르와 페르슈타인 공작은 입을 딱 벌렸다. 트루베니아 사람들이 그토록 참혹하게 살아가고 있었다니.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이 연신 실룩대고 있었다. 그 역시 인간인지라 오크에 대한 증오심이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공작에게로 시선을 돌린 테오도르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아르카디아에 존재하는 모든 왕국의 힘을 한데 결집시켜 주십시오. 당신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모인 군대의 선봉에 서서 당신의 능력을 발휘해주십시오. 제 생각으로 트루베니아 정벌군의 총사령관이 될만한 재목은 오로지 당신밖에 없습니다. 오직 당신이 아니면 그 많은 병력을 불협화음 없이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당신은 원하는 것을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트루베니아 전체를 통치하는 황제 자리를 얻어 자자손손 이어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당신과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부하들의 힘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지원을 원하신다면 할 수 있는 것은 제가 뭐든지 해드리겠습니다." 장문의 설명을 들었지만 페르슈타인 공작은 눈을 희번덕거릴 뿐이었다. "개수작하지 말아라. 내가 도대체 왜 그래야 하지?" 그래도 아까보다는 현저히 누그러진 듯한 말투였다. 테오도르의 눈에 희망의 빛이 번뜩였다. "서로에게 좋은 일입니다. 전 계속해서 크로센 황가를 수호할 수 있고, 당신은 백치가 되는 신세에서 벗어나 야망을 계속 펼쳐나갈 수 있지 않습니까?" "젠장. 그렇다고 해도 종속의 혈충 때문에 난 저 빌어먹을 흑마법사의 노예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 꼭두각시가 되어 구차하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묵묵히 듣고 있던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트루베니아 정벌이 성공할 경우 널 자유의 몸으로 풀어줄 것을 약속한다. 다시 말해 네 머릿속에 자리잡은 종속의 혈충을 완전히 제거해 주겠다는 뜻이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흥. 그 말을 어떻게 믿지?" 하지만 이어진 데이몬의 말에 공작은 말문이 콱 막혀버렸다. "내 스승이신 도일 브로큰하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500년의 시공을 초월한 스승의 후손에게까지 저렇게 대할 정도라면 흑마법사가 스승에게 가지는 마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각별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스승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면……….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페르슈타인 공작은 데이몬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진정이시오?"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비록 자네에게 종속의 혈충을 시술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자네가 충분히 일국의 황제가 될 만한 재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 만약 테오도르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면 난 기꺼이 자네와 힘을 합했을 것이다. 아마 부하가 되는 것도 감수했겠지? 자네에겐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악당에게서 듣는 찬사지만 그리 기분 나쁘지만은 않구려." 데이몬 역시 빙그레 웃고 있었다. "맞아. 난 악당임에 틀림없어. 하지만 단 한가지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한다. 어떤가 테오도르의 제의에 동의하겠는가? 만약 동의한다면 대신 내가 한 가지 선물을 줄 용의가 있다." "무슨 선물이오?" 데이몬은 짧게 잘라 말했다. "드래곤에게서 빼앗은 보물. 애초에 트루베니아 인간들의 것이었으니 다시 돌려 줄 생각이었다.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려면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할 터. 제국 건설에 요긴하게 쓰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 역시 스승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 기대되는구려." "제국 하나를 일으키는데 전혀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드래곤들이 모아놓은 최고의 보물들이니 말이다. 제의에 응한다면 마법보고 속의 보물을 깡그리 건네주겠다. 물론 용병단 동료들을 위해서 조금은 남겨두어야겠지만." 페르슈타인 공작은 이제 평온을 되찾은 상태였다. 상대의 제의가 충분히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물론 공작도 지금까지 트루베니아 정벌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워낙 방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데다 드래곤을 상대해야 하는 위험성 때문에 일찌감치 이룰 수 없는 일이라 간주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요인은 이제 말끔히 사라진 상태였다. 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자금과 드래곤을 상대해 줄 드래곤 슬레이어 용병단이 가세했으니 가능성은 충분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데이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겠소?" "물론이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즉시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오로지 공작 자신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그 동안 데이몬과 테오도르는 긴장한 채 공작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대답여하에 따라 모두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잠시 후 페르슈타인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의를 수락하겠습니다." 백치가 되느냐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야망을 펼치느냐 하는 기로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뻔했다. 게다가 얼마 전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에게서 겪은 일도 페르슈타인 공작의 결정에 일조를 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를 쳤던 가증스러운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에 대한 분노가 전혀 없을 수는 없었다. 얼굴이 환해진 테오도르가 페르슈타인 공작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당신은 정말 탁월한 선택을 하신 겁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어색한 웃음을 떠올렸다. "이거 자네와의 관계개선이 너무 갑자기 되는 것 아닌가? 어제까지만 해도 난 자넬 결코 살려두지 않으려 했는데……." 테오도르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어제까지는 적이었지만 이제부턴 동지입니다. 당신과 함께 일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전혀 거리감을 두지 않는 테오도르의 반응에 페르슈타인 공작은 결국 쓴웃음을 지어버렸다. "하긴 그렇네 그려." 데이몬이 웃으며 그들 사이에 끼여들었다. "일이 잘 풀려서 나도 기쁘군. 그 보답으로 자네의 머릿속에 있는 종속의 혈충을 영원히 가사상태로 만들어주겠네. 날 죽이려 하지 않는 이상은 깨우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만약 그럴 생각이 있다면 한 가지만 명심하게. 내가 눈치챌 겨를도 없이 죽여야만 자네 머리 속에 있는 종속의 혈충이 가사 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을 것이네." 페르슈타인 공작은 미간을 지긋이 모았다.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군요. 9서클의 마스터를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뭐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 물론 가르쳐 줄 순 없지만." 데이몬의 너스레에 테오도르와 페르슈타인 공작은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295회. 데이몬은 굳게 움켜쥐고 있는 두 사람의 손위로 자신의 손을 슬며시 포갰다. "그럼 이로써 협력관계가 시작된 것인가?" 테오도르가 그 말을 받았다. "그렇군요. 세 사람이 힘을 합한 이상 트루베니아는 반드시 정벌될 것입니다." 페르슈타인 공작도 뒤질세라 한 마디 덧붙였다. "비록 길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야망을 불태울 수 있으니 섭섭하진 않을 것 같소." 말을 마친 공작은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자넨 항상 긴장해야 하네. 트루베니아의 황제가 된 다음 내 정복욕이 또다시 아르카디아로 뻗칠 지도 모르니 말이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땐 순순히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에겐 못 미치지만 저 역시 어느 정도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몸입니다." "어디 한 번 기대해 볼까?" 데이몬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거 동업자들의 대화가 너무 살벌하지 않나?" 시대를 영도하는 세 거인(巨人)의 손이 이렇게 해서 한데 포개지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인연으로 손을 잡게 된 세 사람. 그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적이었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해 나갔다. "트루베니아 토벌군을 끌어 모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공문에다 크로센 제국 황제의 옥새와 함께 내 문장을 찍어 발송한다면 펜슬럿을 위시한 강대국 셋도 아무런 이견 없이 기사단과 군대를 차출해 줄 것이다." "군소 왕국에서도 빠짐없이 토벌군을 파견할 것입니다. 특히 베르키스에 의해 왕녀를 잃은 왕국에서는 더욱 그러하겠지요?" 그 말을 들은 페르슈타인 공작은 쓴웃음을 지으며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난 데이몬 당신에게 무척 고마워했었소. 이번 참사에 대한 책임을 내가 고스란히 뒤집어쓸 줄 알았는데 당신이 나서서 감쪽같이 무마해 줬으니 말이오."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지금은 전혀 고맙지 않다는 뜻인가?" "내 뒤통수를 하도 호되게 후려갈겼기 때문에 깡그리 잊어버렸소. 솔직히 말해 지금은 고맙지도 않고 그렇다고 밉지도 않은 그런 상태요." 데이몬은 히쭉 웃었다. "동업할 때는 그런 마음가짐이 가장 이상적이지. 그 마음 영원히 변치 말도록 하게." 슬며시 끼여든 테오도르가 페르슈타인 공작을 쳐다보았다. "그건 그렇고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다소 멋쩍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토벌군의 지원을 받기 위해선 드비어스 황태자 전하의 대관식을 치르는 것이 가장 관건입니다. 아시다시피 황제폐하가 직접 보내는 공문과 대리인이 보내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요. 물론 공작전하께서 모르실 리가 없으시겠지만." "그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기분이 조금 이상하네 그려." 고개를 끄덕이는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지금까지 드비어스 황태자가 황제 자리에 오르는 것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해 왔다. 영명한 드비어스 황태자에게 실권을 주지 않겠다는 의도에서였다. 물론 테오도르는 명백히 반대입장에 서 있었다.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테오도르였지만 애석하게도 페르슈타인 공작의 방해로 말미암아 그의 시도는 벌써 여러 번이나 수포로 돌아간 상태였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는지라 둘 다 입장이 난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애당초 사소한 감정 따위로 대의를 망칠 페르슈타인 공작이 아니었다. "알겠네. 그렇다면 이틀 뒤 벌어지는 귀족회의에서 자네가 직접 대관식에 대한 얘기를 꺼내도록 하게. 그 때 내가 전력으로 지지해 줄 테니……. 귀족위원들의 동의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네. 조금 이상하게 여기겠지만 그들은 내 명령이라면 아무 망설임 없이 찬성표를 던져줄 것이니까." 테오도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제 처지를 아시지 않습니까? 귀족 신분이 아니므로 지금쯤 집정관 자리도 박탈당했을 것입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 정도야 내가 간단히 처리해 주지. 작위를 얻는 것부터 집정관 자리를 되찾는 것까지 모두 말이야. 일을 처리하려면 자네가 집정관으로 있는 편이 훨씬 나을 테니." "하긴 귀족원의 위원들 중 과반수 이상의 동의를 얻는다면 못 이룰 것이 없지요. 이미 공작전하께서 그들의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지 않습니까?" 테오도르의 말에 페르슈타인 공작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 내가 왜 이래야 하는지 아직까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 귀족원 의원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거야.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났던 우리 사이가 하루아침에 호전되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동업자가 된 이상 뒤를 봐주는 것이 합당할 테니 적절히 조처해 주겠네." 말을 마친 페르슈타인 공작은 이맛살을 지긋이 모았다. "그런데 윌리엄스 후작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가? 알다시피 그는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네. 그런데다 데스 나이트와 본 드래곤의 신병을 처리하는 문제도 있으니 상당히 골치가 아프구먼. 자네도 알다시피 그는 끝없이 우직하기만 한 고집불통 벽창호일세. 내 말이라면 밀가루로 빵을 만든다고 해도 믿지 않을 정도니 말일세. 그렇다고 크로센 기사단의 총수인 그를 트루베니아 침공에 제외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난 도저히 그를 납득시킬 자신이 없으니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 테오도르의 대답에는 추호도 망설임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그를 찾아가서 윌리엄스 후작을 설득하겠습니다." "마땅히 설득할 방법이 있나?" 테오도르는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사실을 적당히 날조해야겠지요? 이렇게 말입니다. 알카리스 황태자의 몸에 빙의하고 있던 흑마법사의 영혼은 이미 드래곤의 정신마법에 의해 소멸되었다. 하지만 그가 황태자 전하의 몸에 불어넣은 어둠의 마력이 남아있기 때문에 데스 나이트와 본 드래곤은 여전히 황태자 전하를 따른다. 난 황태자 전하의 정체가 크로센 황실을 위협하려는 흑마법사라고 생각하고 죽이려 했다. 그 과정에서 오해가 생겨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체포된 것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물론 나머지 문제는 페르슈타인 공작전하께서 해결해 주셔야 하겠지요?" 그 말에 페르슈타인 공작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단한 상상력이로군. 그런 머리로 날 여태껏 골탕먹였으니 골치를 썩을 만 하지. 아무튼 그를 설득할 자신은 있는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원만 잘 해주신다면 반드시 그를 설득시키겠습니다." "좋아. 내 친히 윌리엄스를 찾아가서 그간의 일이 모두 오해였다고 밝히겠네. 그나저나 자네 계략에 의해 죽은 내 병사 179명만 원통하겠구먼." 테오도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해하십시오. 저 역시 공들여 키운 어새신 3백을 깡그리 잃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제부터 어떤 일이 있어도 상잔을 피해야 합니다. 드래곤과 오크 연합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단 한 명이라도 병력을 아껴야 합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아. 그럼 난 가서 일을 추진하도록 하겠네. 그나저나 휘하의 사단장들이 골치 깨나 썩겠군. 지금껏 구상해 온 전략전술을 깡그리 버리고 새로이 오크족을 상대할 방법을 구상해야 할 테니……." 그 말에 테오도르의 눈빛이 번뜩였다. "별로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일단 데이몬께서 500년 전 종족전쟁에 참전하신 경험이 있는 데다 그 당시 트루베니아의 수뇌부에 소속되어 전쟁을 치른 이가 한 분 더 있습니다." 그 말에 데이몬과 페르슈타인 공작은 깜짝 놀랐다. 테오도르의 말대로라면 그도 데이몬과 마찬가지로 500년의 세월을 살아왔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었다. 인간에게 허용된 수명을 극복한 존재가 또 하나 있다니……. 하지만 이어진 테오도르의 말에 페르슈타인 공작은 비로소 의문점을 해소시킬 수 있었다. "그는 바로 공작전하의 저택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제 동생들과 함께 말입니다." "뱀파이어 말인가? 그렇다면 이해가 되는군. 사람의 피만 섭취한다면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것이 뱀파이어의 특징이니……. 그나저나 반가워. 자네 말대로 뱀파이어가 종족전쟁 당시 트루베니아의 수뇌부에 있었다면 각급 사단장들이 전략전술을 짜기가 훨씬 수월할 테니 말이야." 공작의 말은 사실이었다. 현 아르카디아의 사단장들 중에는 오크에 맞서 싸워본 경험이 있는 자는 전무했다. 물론 과거의 기록을 토대로 전략을 세울 순 있겠지만 직접 싸워본 경험에 기초한 전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도 전략을 세우는 수뇌부에 소속되어 있던 자라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뱀파이어를 즉시 풀어줘야 하나?" 테오도르는 묵묵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섣불리 풀어주기엔 그는 너무 위험한 존재입니다. 제가 가서 먼저 대화를 나눠보겠습니다. 그러니 공작전하께서는 그럴 수 있도록 조처만 취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네." 말을 마친 페르슈타인 공작은 몸을 일으켰다. 야망을 이룰 방법이 바뀌었기 때문에 준비할 것이 너무 많았다. 지금껏 아르카디아를 정복하기 위해 짜 놓은 전략을 깡그리 수정해야 했던 것이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일단 자네가 당부해 놓은 것은 모두 조처해 놓도록 하지. 도움이 필요하면 따로 이야기하게. 자네와 관계개선이 되었다는 사실을 당부해 놓을 테니 듀크 나이츠가 섣불리 자넬 적대할 일은 없을 거야." "배려에 감사 드립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페르슈타인 공작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방안에는 데이몬과 테오도르만이 남게 되었다. 테오도르가 형언할 수 없는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일이 정말 이상적으로 풀려버렸군요. 이 모두가 데이몬 덕분입니다. 도대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데이몬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무슨 소리. 난 자넬 도와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더없이 기쁠 뿐이야. 물론 이것으로도 스승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의 백분지 일도 갚을 수 없을 테지만……." 스승에 대한 데이몬의 마음이 와 닿았는지 테오도르는 숙연해졌다. 그런 테오도르를 쳐다보며 데이몬이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자넨 정말 대단한 인물이로군. 그토록 오래 대립해 왔던 정적을 눈 깜짝할 사이에 동업자로 만들다니 말이야. 난 지금 자네에게 일말의 두려움까지 느끼고 있네." 테오도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정말 걸출한 인물입니다. 비록 정적의 입장이었지만 그의 능력만은 항상 존경해 왔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자네 능력이 더 뛰어나더군. 지금까지의 대립관계를 완전히 무(無)로 돌린 채 세 치 혀로 그를 간단히 설득시켰으니 말이야.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흔치 않지." 테오도르는 난처하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그런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데이몬께서 긴히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뭔가?" 테오도르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와 함께 궁정에 들어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드비어스 황태자 전하를 만나 뵈어야 하거든요. 아시다시피 데이몬께서는 드비어스 황태자 전하를 형님 자격으로 대하셔야 합니다." 데이몬은 다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내가 그 녀석을 만나볼 필요가 있을까?" "아닙니다. 황태자 전하는 형님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자 제위에 오르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으십니다. 평상시에도 제위에 욕심이 없으셨지만 이번에 일어난 일로 인해 결심을 더욱 굳히신 것 같습니다." "여자 문제인가?" 불쑥 내뱉은 데이몬의 말에 테오도르의 눈이 퉁방울 만해졌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젊은 놈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 여자말고 또 뭐가 있겠나? 자고로 여자란 영웅의 마음을 흐리는 요물 같은 존재이지. 알겠네. 자네 부탁이니 가서 드비어스란 놈을 만나보겠네. 말을 안 듣는다면 두들겨 패서라도 뜻을 관철시킬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게." "때, 때리시는 것은 조금……." 데이몬은 결코 고집을 꺾지 않을 태세였다. "자고로 매 앞에는 장사 없는 법이야. 황족이라 맞아본 일이 없을 테니 일이 더욱 쉽게 풀리겠군. 앞장서게." 부스스 몸을 일으키던 데이몬은 불연 듯 뭔가가 생각났는지 눈빛을 빛냈다. "참 종족전쟁을 치러보았다는 그 뱀파이어 녀석의 이름이 뭐라고 하던가?" 테오도르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 저도 잘 모릅니다. 벌써 오래 전에 역사의 뒤안길 속으로 묻어버렸다며 도무지 이름을 가르쳐 주시지 않던 통에……."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나와 동시대의 인물이라……. 부디 아는 녀석이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데이몬은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테오도르는 걱정스러움이 가시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296회. 문을 나서자 여러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경비를 서고 있던 듀크 나이츠들이었는데 그들의 눈빛에는 곤혹스러움이 짙게 배어있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테오도르를 쳐다보는 그들의 표정은 당혹 그 자체였다. 테오도르는 모르는 척 그들에게 다가갔다. "수고가 많군." 인사를 건네자 듀크 나이츠들이 일제히 차렷 자세를 취했다. "집정관님을 뵙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페르슈타인 공작이 남긴 지시가 떠올라 있었다. -난 테오도르 집정관과 손을 잡기로 했다. 그러므로 이후로는 그에게 결코 결례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에게 날 대하는 것과 동일한 예우를 해 주어라. 알겠는가?- 결코 이해하기 힘든 명령이었다. 지금껏 10년 가까이 공작의 계획을 방해했기 때문에 듀크 나이츠들은 테오도르를 마치 원수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껏 테오도르 집정관에게 단 한 번도 예를 취한 기사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공작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를 취하는 듀크 나이츠의 얼굴에 다소의 떨떠름함이 배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용케 그것을 눈치챈 테오도르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계속 수고하도록 하게." "옛. 살펴 가십시오." 깍듯이 머리를 숙이는 듀크 나이츠들 사이로 테오도르는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데이몬 역시 빙글빙글 웃으며 듀크 나이츠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흐흐흐. 요놈들 표정 한 번 볼 만 하군.' 별궁을 나선 테오도르는 곧장 황궁을 향해 나아갔다. 크로센 제국의 황궁은 여러 개의 별궁에 둘러싸여 호위를 받고 있는 듯한 형상이었고 그 안에는 식물인간 상태인 발렌시우스 1세와 유력한 황위계승자인 드비어스 황태자가 살고 있었다. 황궁 주변에는 수많은 근위병들이 눈에 불을 켜고 경비에 열중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일어난 드래곤의 습격 때문에 경비가 한 층 강화된 모양이었다. 테오도르는 데이몬과 함께 황궁의 정문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데이몬을 보자 경비하는 기사들이 바짝 긴장한 채 예를 올렸다.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그런데 뒤에 따라오는 테오도르를 보자 우두머리로 보이는 기사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공교롭게도 그는 바로 크로센 기사단의 부단장인 카시모프였다. 테오도르의 반역을 가장 먼저 발견했던 그가 하필이면 그 날의 궁정 경비를 맡고 있었으니…….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니 이미 페르슈타인 공작으로부터 모종의 언질을 받은 모양이었다. 테오도르의 예상대로 부단장 카시모프는 지금 속으로 고약하다고 수없이 소리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골치 아픈 경우야? 조금 전에는 페르슈타인 공작이 집정관의 혐의가 모두 오해였다고 주장하며 지나가더니 이번에는 집정관이 알카리스 황태자 전하와 사이좋게 걸어오는 모습을 볼 줄이야.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로군.' 원칙적으로는 테오도르 집정관을 체포해야 했다. 하지만 상황을 보니 조금 기다려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이미 페르슈타인 공작이 윌리엄스 후작을 만나기 위해 들어간 상황이었다. -머지 않아 테오도르 집정관이 오해를 풀기 위해 윌리엄스 후작을 만나러 올 것이오.- 페르슈타인 공작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터라 감히 체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황태자까지 사이좋게 동행하는 판국이니 카시모프로써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결국 출입을 허락했다. "들어가십시오. 기사단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수고가 많소." 고개를 끄덕인 테오도르는 늘어선 창검 사이를 헤치고 걸음을 옮겼다. 데이몬 역시 카시모프를 향해 뜻 모를 미소를 날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황궁을 들어선 그들은 화려하게 치장된 긴 회랑을 걸어 들어갔다. 회랑 곳곳에는 창검을 치켜든 근위병들이 버티고 서서 경비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데이몬을 보자마자 부동자세를 취했다. "황태자 전하를 배알하나이다." 일일이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한참을 걸은 끝에 그들은 목적했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갈림길이 나오자 테오도르가 걸음을 멈춰 섰다. "이곳에서 헤어져야겠습니다. 전 이 길로 곧장 윌리엄스 기사단장님을 만나겠습니다. 그러니……." 주위를 둘러보다 근위병이 가까이 있는 것을 발견한 테오도르는 호칭을 바꿨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동생이신 드비어스 전하를 만나 뵙도록 하시옵소서. 저 앞에 보이는 문으로 들어가시면 되옵니다." 테오도르의 변한 태도에 데이몬도 즉각 연기를 시작했다. "알겠느니라. 그대의 수고에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치는 고마움을 금치 못하겠노라." 거드름이 잔뜩 배어있는 데이몬의 대꾸에 테오도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재미있으신 분이로군.' 데이몬이 휘적휘적 걸어가자 테오도르는 급히 생각을 지우며 허리를 꺾었다. "그럼 살펴 가시옵소서." 다시 고개를 들자 경비기사들이 정중하게 데이몬을 맞아들이는 장면이 들어왔다. 잠깐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테오도르는 몸을 돌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외골수인 윌리엄스 후작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가득 차 있었다. 덜컥. 육중한 문이 열리고 데이몬이 안으로 들어섰다. 긴 복도가 펼쳐졌고 복도 끝에 큼지막한 문이 보였다. 아마 저 방안에는 크로센 제국의 제 2황자인 드비어스가 형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복도를 느릿하게 걸어가는 데이몬의 얼굴에 고민이 스쳐지나갔다. '젠장. 드비어스란 놈을 도대체 어떻게 구워삶아야 한다? 테오도르의 말을 들어보니 상당히 골치 아픈 녀석 같은데 말이야. 미친놈. 한낱 계집 하나 때문에 대의를 포기하려 하다니…….' 지금껏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애송이였지만 그 형의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죄 때문에 데이몬은 이제부터 그를 동생으로 대해야 한다. 그 때문에 데이몬은 골치가 아파 미칠 지경이었다. 만약 테오도르가 아니었다면 데이몬은 결코 이런 부탁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결국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미첼 녀석과 똑같은 방법으로 대할 수밖에 없겠군. 수틀리면 사정없이 쥐어 박아가며……." 가까이 다가가자 문가에 서 있는 기사들이 일제히 예를 취해왔다. "제 1황자이신 알카리스 전하를 뵙습니다." 데이몬은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었다. "되었다. 문이나 열어라." "옛. 전하." 기사들은 즉시 문을 열었다. 데이몬은 열린 문 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 들어갔다. 드비어스 황태자는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고개를 돌린 드비어스는 형을 보자 얼굴에 반색의 빛을 떠올렸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이쪽으로 바삐 걸어왔다. "오셨습니까. 형님." "큼, 크흠. 그래 왔다." 짐짓 헛기침을 하던 데이몬이 어떤 말을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이변이 일어났다. 다가온 드비어스가 갑자기 그를 와락 껴안아버린 것이다.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형님." "이, 이것 놔라. 이 녀석이 망측하게…" 깜짝 놀란 데이몬은 가차없이 드비어스를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버둥거리던 데이몬의 몸이 별안간 굳어버렸다. 어깨로부터 전해지는 뜨거운 감촉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드비어스는 울고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와 데이몬의 어깨어림을 계속해서 적셨다. "전 정말 외로웠습니다. 형님.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어깨를 내려 누르는 중압감을 저 혼자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단 말입니다. '이, 이 녀석이…….' 데이몬으로써는 당혹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일단 달래야겠다는 생각에 데이몬은 드비어스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그래. 형이 여기 있다. 이제 울음을 멈추거라. 알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비어스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자 그 동안의 울분이 한꺼번에 치밀어 오른 모양입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형님. 이 아우에게 모든 짐을 깡그리 지워놓은 채 떠나시다니요. 이제 돌아오셨으니 짐을 도로 가져가십시오." 드비어스의 넋두리는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데이몬은 묵묵히 넋두리를 들으며 페르슈타인 공작에게서 들은 사실을 떠올렸다. 어릴 때부터 철저히 격리되어 자란 탓에 드비어스는 형에 대한 사실을 별달리 모른다는 것과 철이 든 후로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데이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족의 삶이 기구한 것은 중원이나 여기나 다를 바가 없군.'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데이몬은 드비어스를 왈칵 밀쳐버렸다. "혀, 형님." 눈물로 얼룩진 드비어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데이몬은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못난 놈." "………." "사내 대장부가 그토록 마음이 약했더냐?" "혀, 형님." 드비어스는 놀란 눈빛으로 데이몬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눈빛에 추호도 동요하지 않았다. "넌 머지않아 이 거대한 제국의 황제가 될 몸이다. 그런 녀석이 어찌하여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느냐?" "아닙니다. 제겐 황제가 되고픈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형님께서 돌아오셨으니 이제……." "갈!" 데이몬은 고함을 지르며 드비어스의 멱살을 와락 움켜쥐었다. 서슬 퍼런 음성이 드비어스에게 퍼부어졌다. 이미 그는 드비어스를 구워삶을 계책을 머리 속에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상태였다. "7년 전 난 너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곳을 떠났다. 오로지 널 훌륭한 황제로 만들기 위한 일념으로 말이다. 그런데 네놈이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 드비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게 무슨 말씀……." "긴 말 하지 않겠다. 크로센 황제자리는 반드시 네가 올라야 한다. 내가 겪은 7년 간의 고초를 깡그리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거든 말이다." "………." "넌 지금껏 자라오며 내가 백치였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어, 어린 시절 여러 번 들어보았습니다. 물론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하지만 이토록 멀쩡하신 것을 보니 그 때 믿지 않았던 것이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데이몬의 머리는 드비어스를 설득하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페르슈타인이란 놈을 속여넘기기 위해 그랬던 것이다. 당시 난 그놈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였다. 그 사실은 너도 익히 알고 있겠지?" 드비어스의 눈에서 갑자기 분노의 광망이 솟구쳤다. "형님께서도 아시겠지만 그놈은 우리 가문에 있어서 철천지원수입니다. 힘이 없어 놈을 제거하지 못한다는 것이 오직 원통할 뿐입니다." "네 마음 나도 이해한다. 나 역시 놈을 죽여버리고 싶으니까. 하지만 이젠 아니다. 놈은 이미 나의 흑마법에 심령이 제압되어 있는 상태이니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드비어스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데이몬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난 이미 마왕과 계약을 맺은 상태다. 정확히 말해 마왕과 계약을 맺은 흑마법사를 나의 몸에 빙의할 수 있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혹시 넌 어제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와 맞서 싸우던 흑마법사를 기억하느냐?" 드비어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의 대부분을 목격했던 그가 흑마법사를 못 보았을 리는 없었다. 흑마법사 덕택에 그가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지 않았던가. 데이몬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이 사실은 오직 너만 알고 있어야 한다. 당시의 흑마법사는 바로 나였다. 정확히 말하면 흑마법사가 내 몸에 빙의한 상태로 드래곤과 맞서 싸웠던 것이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에 펼쳐진 드래곤의 정신마법으로 의해 흑마법사의 영혼은 그만 소멸되어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나의 영혼과 그가 남긴 어둠의 마력뿐이다. 알겠느냐?" "어, 어떻게 그런 일이……." 드비어스는 입을 딱 벌린 채 놀라워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형 알카리스가 그런 일을 겪었을 줄은 지금껏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비록 흑마법사의 영혼이 소멸되었지만 내 몸 속에는 아직까지 그가 남긴 어둠의 마력이 존재하고 있다. 난 그것을 이용해 페르슈타인 공작을 현혹시키는데 성공했다. 다시 말해 그의 심령을 조종해서 트루베니아의 드래곤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적의를 불러일으켰던 것이지. 페르슈타인 공작은 이제 더 이상 크로센 제국의 황제자리에 연연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트루베니아로 건너가서 드래곤과 일전을 벌이는 것뿐이니까……. 알겠느냐?" "………." 드비어스는 도저히 입을 열지 못했다. 형이 걸어온 행로가 너무나 기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넘을 수 없는 벽으로만 여겼던 페르슈타인 공작이 놀랍게도 형의 흑마법에 현혹되다니……. 그것 역시 쉽게 믿기 힘든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런 드비어스의 귓가로 데이몬의 음성이 계속해서 전해졌다. "조만간 트루베니아와의 전쟁이 터질 것이다. 아마도 그 싸움을 통해 아르카디아의 흥망이 결정되겠지. 난 그 전쟁에 참전할 생각이다. 그러므로 크로센 제국의 황제 자리는 반드시 네가 맡아야 한다." 그 말에 드비어스는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뒤흔들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형님께서는 그토록 힘들게 살아오신 데 대한 보상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 전쟁엔 제가 대신 참전하겠습니다. 그러니 형님께서 황제로 즉위하십시오." "안 될 소리다. 흑마법사의 수족이었던 본 드래곤과 데스 나이트는 지금 상황에선 한 마디로 엄청난 전력이라 할 수 있다. 난 그들을 트루베니아 침공전쟁에 투입할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가 전장에 나가야 한다." "………." "네가 황제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내 몸 속에는 마왕으로부터 부여받은 어둠의 마력이 똬리를 틀고 있다. 다시 말해 언제 마왕의 화신으로 바뀔지 모른다는 뜻이다. 그런 내가 감히 크로센 제국의 황위에 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한 마디로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다. 그러므로 오직 너만이 황제가 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알겠느냐?" 데이몬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드비어스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어떻게 해서든 형에게 황좌를 넘길 생각이었지만 모든 사실을 알고 나니 계속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297회. 수백만에 달하는 방대한 인구를 보유한 초강대국 크로센 제국. 그 황제자리를 마왕의 꼭두각시가 차지하는 일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했다. 지금은 더 없이 믿음직한 형이었지만 언제 마왕의 꼭두각시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마음을 정리한 드비어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정히 뜻이 그러시다면 형님의 뜻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진작 그래야지." 데이몬은 흡족하다는 듯 드비어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테오도르의 입지를 굳건하게 만들기 위한 공작에 들어갔다. "테오도르 집정관의 충성심이 정말 각별하더구나. 널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목숨을 내놓을 듯한 마음가짐이던데……. 내가 보기에 그는 너에겐 결코 없어서는 안될 충신이더구나." 드비어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그를 전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페르슈타인이라는 거대한 벽에 막혀 제대로 발휘하진 못했지만 능력 하나는 정말 걸출하니까요." 일이 생각대로 풀려나가자 데이몬은 쾌재를 불렀다. "이제 넌 테오도르와 힘을 합쳐 이 크로센 제국을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형이 페르슈타인과 함께 트루베니아 정벌에 나설 동안 말이다." 데이몬의 말에 드비어스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께서 그런 고초를 겪으셨는데 제가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번 같은 수모는 한 번 뿐입니다. 페르슈타인 같은 무도한 역적이 다시는 황실을 넘보지 못하도록 황권의 기틀을 단단히 다질 생각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는 데이몬은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흐흐흐. 페르슈타인 녀석. 모르긴 몰라도 귀가 간지러워 미칠 지경일거야. 지금쯤 테오도르도 네 녀석 욕을 신나게 퍼붓고 있을 테니…….' 서둘러 생각을 지운 데이몬은 정색을 하고 드비어스를 쳐다보았다. "테오도르에게 한 가지 들은 소문이 있다. 네가 요즘 여자 하나 때문에 골치를 썩히고 있다는데 그것이 사실이냐?" 드비어스의 얼굴에 슬며시 홍조가 떠올랐다. "죄,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사실 전 그녀를 위해 황제자리까지 포기하려고 생각했습니다."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라 짐작한 드비어스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미나 생각을 하자 또다시 마음이 아려왔다. 미나는 이미 그와 떨어져 모종의 장소에 연금된 상태였다. 윌리엄스 후작이 근무지 무단 이탈의 죄를 물어 엄하게 벌을 내렸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심한 부상을 입지 않았다면 볼 것도 없이 지하감옥에 수감되었을 것이다. 심하게 다친 연인의 병 문안조차 가볼 수 없었기 때문에 드비어스의 가슴속은 지금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형은 불호령을 내리지 않았다. 의아해진 드비어스가 고개를 들자 형이 빙글빙글 웃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혀, 형님." "멍청한 녀석. 여자 하나를 얻는데 황제자리를 왜 포기한단 말이냐? 그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냐?" "………." "지금부터 네가 처한 처지를 낱낱이 고해보도록 해라. 형이 깨끗하게 해결해 주겠다." "아, 알겠습니다." 잠시 어리둥절해 했지만 드비어스는 곧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나타난 형은 한 마디로 드비어스에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지주였다. 그와 미나가 외줄 타기 하듯 이어온 사랑은 남김없이 데이몬의 귀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저희는 또다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달려가서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윌리엄스 후작의 뜻이 워낙 확고한지라……." 사정을 모두 들은 데이몬은 무표정한 눈빛으로 드비어스를 쳐다보았다. 딱. 눈에서 별이 번쩍 하는 것을 느낀 드비어스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얼떨떨해 하는 그의 귓가로 데이몬의 성난 음성이 토해졌다. "멍청한 녀석. 그렇게 둔해서야 어디 크로센 제국을 잘 이끌어갈 수 있겠느냐?" "혀, 형님……." "제왕의 권위는 지엄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넌 그것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는구나. 비록 윌리엄스 후작이 고집불통이라고 하나 엄연히 따지자면 네 신하에 불과하다." "………." "이제부터 내가 방법을 일러주겠다. 너는 내가 나가는 즉시 윌리엄스 후작을 네 앞으로 불러들여라." 몹시 아픈 듯 머리를 감싸안은 드비어스는 열심히 데이몬의 말을 경청했다. 데이몬의 말이 이어질수록 드비어스의 얼굴이 밝아지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용기를 되찾았다는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상당히 간단한 문제였군요. 제가 어찌 그런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어떠냐? 형의 능력이……." 자신만만해 하는 데이몬을 쳐다보던 드비어스가 갑자기 머리를 감싸안았다. 기쁨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통증이 다시 느껴진 것이다. "저,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건 그렇고 형님 주먹이 정말 맵군요. 몹시 아픕니다." 데이몬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내 주먹이야 이미 맵기로 정평이 나 있지. 그나저나 대관식준비를 하려면 무척 바쁠 것이다. 조만간 귀족회의에서 너의 대관식 문제가 상정되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하, 하지만 대관식은 페르슈타인 그놈의 반대 때문에 번번이 무산되었는데……." 데이몬은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가락을 펴서 흔들었다. "이번에는 틀림없다. 앞으로 그놈에 대한 생각은 깡그리 머릿속에서 지워버려라. 페르슈타인 녀석을 상대하는 것은 내가 모두 맡을 테니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드비어스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난 이만 가보겠나. 할 일이 태산같구나." 드비어스가 다급히 데이몬의 발길을 부여잡았다. "혀, 형님. 함께 식사라도 하고 가심이……." "아니다. 너무 바쁘구나. 너 역시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우선 내가 일러준 방법을 시행해야 하지 않겠느냐? 여자를 얻으려면 말이다." 드비어스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형님. 그럼 살펴 가십시오." "오냐." 손을 흔든 데이몬은 문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얼굴에 홀가분하다는 듯한 빛이 떠올라 있었지만 드비어스는 미처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잠시 후 데이몬이 문을 열고 나간 후 드비어스의 얼굴에 빙긋이 미소가 떠올랐다. "철든 후로는 한 번도 만나 뵙지 못한 형님이지만 정말 대단하시군.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사안들을 이처럼 간단히 풀어버리시다니……." 그러나 그는 형의 몸 속에 전혀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곧 시종을 불러 데이몬이 일러준 계획에 대한 실행에 들어갔다. "지금 즉시 윌리엄스 후작을 들라고 일러라." "알겠사옵니다. 전하." 데이몬은 아까 헤어졌던 갈림길에서 테오도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나의 연기는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힌단 말이야. 악역을 맡지 못해 유감이지만 그래도 테오도르 녀석의 부탁을 깔끔하게 들어준 셈이니…….' 그는 느긋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더할 나위 없이 여유로운 태도였다. 하지만 바로 데이몬 옆에 서 있는 두 명의 경비기사는 한 마디로 죽을 맛이었다. 감히 범접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존재가 바로 옆에 버티고 서 있으니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지만 닦을 수도 없었다. 한참동안 부동자세를 취한 탓에 좀까지 쑤셔왔지만 차마 몸을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장차 크로센 제국의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이가 옆에 있는데 감히 책을 잡힐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사적으로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을 알았는지 곧 구원자가 나타났다. "많이 기다리셨사옵니까?"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테오도르가 공손히 예를 올렸다. 데이몬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응대했다. "한참을 기다렸노라. 감히 황태자를 기다리게 하다니……. 큰 죄를 내려야 마땅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너그럽게 묵인하도록 하겠노라." 고개를 숙인 테오도르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전하의 하해 같은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 드리옵니다." "그럼 가볼까?" "이리로 오시옵소서." 테오도르가 공손히 데이몬을 안내하여 사라지자 곧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곤혹스러운 표정이 얼굴에 가득한 윌리엄스 후작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테오도르에게 설득된 그는 갑작스레 당도한 드비어스 황태자의 호출 때문에 방을 나온 상태였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 윌리엄스 후작은 곧 드비어스 황태자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불행한 경비기사들은 그가 들어갈 때까지 부동자세를 풀지 못했다. 그들에겐 황태자보다 기사단장이 오히려 더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부르셨사옵니까? 전하." 문을 열고 들어선 윌리엄스 후작을 보자 드비어스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침착해야 한다. 드비어스.' 그는 해야 할 말을 머릿속에다 하나씩 그렸다. 윌리엄스 후작은 평소와는 달리 조금 얼이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 어떤 것도 드비어스의 관심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우선 그는 반갑게 윌리엄스 후작을 맞았다. "어서 오시오. 긴히 의논할 일이 있어서 오시라 했소." "무, 무슨 일을 의논하시려고 신을 부르셨습니까?" 드비어스의 얼굴에 뭔가를 단단히 결심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것은 오직 공에게만 하는 비밀얘기요. 그러니 결코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서는 아니 될 것이오." 그 말에 윌리엄스 후작은 부동자세를 취했다. "소신의 목숨이 붙어있는 그 날까지 비밀을 엄수할 것을 맹세합니다." 윌리엄스 후작에게 가까이 다가간 드비어스는 나지막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미 난 형님과 이야기를 마친 상태요." "무, 무슨 이야기를……." "크로센 제국의 황좌에 내가 오르기로 결론이 났소. 이것은 형님과의 합의 하에 결정된 사실이오." "저, 정말이십니까?" 윌리엄스 후작의 얼굴에 반색이 떠올랐다. 그에게 이것은 한 마디로 낭보라고 할 수 있었다. 비록 그가 크로센 황가에 진정으로 충성하고 있긴 했지만 알카리스가 황위에 오르는 것은 왠지 모르게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백치인데다 진정한 정체를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테오도르 집정관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까지 데이몬의 정체에 대해 미심쩍어하고 있었다. 그가 흑마법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가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드비어스의 결정에 한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정말 잘 결정하셨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크로센 국민 전체의 홍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드비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말인데……. 이미 난 하나의 결심을 굳힌 상태요." "………." "앞으로 난 황제의 위엄을 굳건히 다질 생각이오. 그래서 페르슈타인 같은 역적무리가 다시는 발호하지 않도록 할 작정이라오. 아시겠소?" 그 말에 윌리엄스 후작의 주름진 노안에 격정의 빛이 떠올랐다. 그것이야말로 윌리엄스 후작이 가진 필생의 소원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그가 못내 바래왔던 일을 드비어스 황태자가 거론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 감격에 겨운 나머지 후작의 눈에서 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말 훌륭하신 판단을 하셨사옵니다.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전하의 뜻을 받들기 위해 소신은 뼈가 가루가 될 때까지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겠사옵니다." "형님께서는 머지 않아 페르슈타인을 대동해서 트루베니아 침공에 나설 것이오. 나는 그 틈을 타서 제국을 안정시키고 황제의 위엄을 되찾을 생각이오. 물론 거기에는 공과 테오도르 집정관의 조력이 절실히 필요하오. 부디 나를 도와주시겠소?" 윌리엄스 후작은 추호도 머뭇거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염원을 이루시는데 있어 필요하다면 소신의 목숨이 몇 개이더라도 가차없이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대답에 만족한 듯 드비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이제부터 공에게 한 가지 명령을 하달하겠소. 황제의 위엄을 되찾기 위한 첫 번째 명이니 공께서는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것이오. 알겠소?" 어명이란 말에 윌리엄스 후작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무릎을 꿇었다. "크로센 기사단장 윌리엄스. 전하의 어명을 받드옵니다. 신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어명을 완수할 것을 약속드리옵니다." 드비어스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좋소. 그럼 이제부터 어명을 하달하겠소." 윌리엄스 후작은 잔뜩 긴장한 채 드비어스의 말을 경청할 채비를 갖췄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298회. 하지만 어명을 듣자마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어명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즉시 공의 손녀인 미나를 연금에서 풀어주어 황궁으로 데리고 오시오. 나는 그녀를 황후로 맞아들일 생각이오. 나의 우유부단함을 채워 줄 수 있는 여인은 오직 그녀뿐이오. 공은 지금 즉시 어명을 받들어야 할 것이오." 얼마나 놀랐는지 윌리엄스 후작은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저, 전하 그, 그것만은……." 드비어스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서는 노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허! 감히 어명을 거역할 작정이오. 난 분명 이 명령이 황제의 위엄을 되찾기 위한 첫 번째 명이라 했소. 그런데 그 첫 어명을 거역할 작정이오?" "………." "어명을 거역하는 자가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말해 보시겠소?" 윌리엄스 후작은 당혹함을 감추지 못한 채 떠듬떠듬 내뱉었다. "대, 대역죄로 관직이 삭탈된 후, 수감됩니다." "그런데도 감히 어명을 거역하려 하시오? 영예로운 경의 명예에 오점을 남기실 생각이란 말이오?" 윌리엄스 후작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가 아무리 크로센 기사단의 총수더라도 감히 어명을 거역할 순 없는 노릇이다. 드비어스 황태자가 이토록 강하게 나올 줄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그는 결국 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소신 틀림없이 어명을 거행할 것을 약속드리겠나이다." 그 말에 드비어스는 쾌재를 불렀다. 얼마나 기뻤던지 얼굴에 희열감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과연 경이오. 난 경이 어명을 받아들일 줄 익히 짐작하고 있었소." 윌리엄스 후작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어나갔다. "어명을 달게 거행하겠사옵니다. 하오나……." "하오나?" "황가의 위엄을 되찾으시겠다는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주시기 바라옵니다." 드비어스는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난 거기에 내 모든 것을 걸 작정이라오. 더불어 황좌에 오른 뒤 백성들을 내 몸처럼 아낄 것 또한 약속드리겠소. 크로센을 끝없이 부강한 제국으로 이끌기 위해 필요한 기틀을 처음부터 철저히 다질 생각이니까……." "전하의 하해 같은 은혜에 감히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격정이 치밀었는지 엎드린 윌리엄스 후작이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목적을 달성한 드비어스는 웃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테오도르도 지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막 데이몬으로부터 일의 경과를 전해들은 다음이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잘 처리하셨군요. 정말 놀랍습니다."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 정도야 식은 죽 먹기라고 할 수 있네. 내 연기력은 한 마디로 신화경의 경지에 올라 있지. 이미 여러 번의 실습을 통해 완숙의 경지에 들어섰다고나 할까……." "시, 실습이라뇨?" 테오도르의 반문에 데이몬은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알 것 없네. 그건 그렇고 자넨 어떤가? 과연 윌리엄스란 녀석을 잘 설득했는가?" 테오도르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납득시키는데는 성공했습니다. 의심을 완전히 풀어주진 못했지만 일을 거행하는데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데이몬은 엄지손가락을 냅다 치켜세웠다. "자네 역시 훌륭한 연기자가 될 자격이 있네. 그 고집불통 벽창호를 설득시키는 것을 보면 충분하지. 암 그렇고 말고………." 데이몬의 적절한 비유에 테오도르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런 점이 없잖아 있기는 하지만 윌리엄스 후작은 한 마디로 진정한 충신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크로센 황가에 대한 열렬한 충정만이 들어차 있습니다." "그거야 내가 알 바 없지. 그건 그렇고 그 녀석 앞에서 계속 백치 시늉을 해야 한다니 무척 골치 아프구먼……." "데이몬이시라면 충분히 잘 해내실 것 같습니다." "물론 잘 해내고 말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이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런데 자네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인가?" "페르슈타인 공작의 저택으로 가는 길입니다. 만나봐야 할 사람……은 아니지만. 아무튼 누굴 만나 뵈어야 할 것 같아서……." "혹시 그 뱀파이어 녀석을 말하는 것인가?" 테오도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지금쯤 그 분은 흡혈욕구 때문에 거의 빈사상태에 처해 있을 것입니다. 우선 그분을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트루베니아를 침공할 때 그의 경험이 큰 역할을 할 테니……. 그나저나 궁금해 미치겠군. 도대체 어떤 녀석일지 말이야." 테오도르가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만나보시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군." 둘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멀리 페르슈타인 공작의 저택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저택에 들어선 테오도르는 또다시 듀크 나이츠의 당혹한 눈빛을 받아야 했다. 저택을 경비하던 듀크 나이츠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러나 겉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한 태도로 그들을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은 우선 데이몬에게 공손히 예를 표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부대장 표식을 한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와 그들에게 허리를 굽혔다. "어서 오십시오. 이미 공작전하께서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제가 뱀파이어가 갇혀 있는 지하감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테오도르는 미소띤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부득이 수고를 부탁해야겠소." "가, 감사합니다." 부대장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하 감옥으로 안내했다. 아무래도 돌연한 상황변화에 쉽사리 적응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테오도르가 갑자기 그를 불러 세웠다. 뭔가가 생각난 듯 얼굴에 걱정스런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런데 드미트리와 랜돌프는 지금 어디에 있소?" 부대장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네? 누구 말씀이시온지?" 테오도르는 눈썹을 지긋이 모았다. "내 동생들 말이오. 나와 함께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때서야 기억난 듯 부대장은 손뼉을 딱 쳤다. "그들은 조금 전 수감상태에서 풀려났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부대장은 즉시 기사 하나를 불러 지시를 내렸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기사는 곧 저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테오도르의 얼굴에 서린 근심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나의 모친께서 어디 계신지 혹시 아시오? 건강이 그리 좋지 않으신 편이라서 무척 걱정이 되는구려." 부대장은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집정관님의 모친께서는 내실에서 가료 중이십니다. 여러 명의 신관들이 동원되어 간호 중이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정말 다행이구려." 테오도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그는 페르슈타인 공작의 철저한 일 처리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것을 보니 페르슈타인 공작의 능력은 한 마디로 범인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내가 그런 사람과 10년 가까이 싸워 왔었다니…….' 잠시 후 청년 두 명이 조금 전 뛰어갔던 기사와 함께 헐레벌떡 뛰어왔다. 테오도르를 보자 청년들의 수척한 얼굴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혀, 형님. 무사하셨군요." "저, 정말 다행입니다." 테오도르의 얼굴에도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늙은 어머니와 함께 형제 셋이 깡그리 처형되었어야 할 상황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고 크로센 제국의 황가에 대해 충성을 계속 해 나갈 수 있게 되었으니……. 데이몬에 대한 고마움이 절로 치밀어 올랐다. 격정이 치밀어오른 테오도르는 동생들을 와락 껴안았다.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아라.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으니……." 드미트리와 랜돌프의 얼굴에는 아직까지 풀려난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연유를 물어보려는 듯 랜돌프의 입술이 달싹거리자 테오도르가 손가락을 들어 입에 가져다댔다. "쉿, 자세한 것은 나중에 얘기하겠다. 일단 스승님을 만나러 가자." "네 형님." 고개를 끄덕인 둘의 시선이 데이몬에게 향했다. "그런데 저 분은……." 테오도르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데이몬을 소개했다. "인사 드려라. 크로센 제국의 제 1황자이신 알카리스 전하이시다." 테오도르의 말에 드미트리와 랜돌프는 머뭇거림 없이 예를 올렸다.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감히 용안을 허락해 주시니 미천한 평민에겐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옵니다." "예를 거두라." 손을 내젓는 데이몬의 얼굴에 머쓱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에게 황태자 대접은 마치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말해 거추장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살며시 기사들의 동태를 살핀 테오도르가 바짝 다가가서 귀엣말을 속삭였다. "이 분의 존함은 데이몬이시다. 우리에게 시조나 다름없으신 분이며 또한 우리 가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주신 은인이기도 하지. 자세한 것은 나중에 얘기해 주겠다. 그러니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해야 하느니라." "예 형님." 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테오도르가 부대장을 쳐다보았다. "그럼 안내를 부탁드리오." "알겠습니다. 절 따라 오십시오." 그들은 지체 없이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는 통로를 향했다. 좁은 통로를 걸어 내려가는 테오도르의 얼굴에 기이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바로 어제 죄인의 신분으로 이 통로를 끌려 내려왔다.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살아서 이 통로를 올라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목숨을 건진데 이어 가문의 존속 역시 가능해졌고 무엇보다도 크로센 황가에 계속 충성을 바칠 수 있게 되지 않았던가? 그것도 얄미운 네르시스 공작의 양자 신분이 아니라 브로큰하트 가문의 이름 하에 당당하게 말이다. 네르시스 공작을 떠올리자 테오도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네르시스 공작의 속이 무척 쓰리겠군.' 네르시스 공작. 한 때 양부였던 자였지만 테오도르에겐 그리 정이 가지 않는 자였다.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자신을 철저히 이용하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아무 거리낌없이 버렸던 자에게 좋은 감정이 남아있을 리가 만무했다. 테오도르는 묵묵히 각오를 다졌다. '브로큰하트 가문을 반드시 크로센 제국에서 손꼽히는 가문으로 만들고 말리라.' 굳게 다짐한 테오도르는 듀크 나이츠의 안내를 받으며 지하 감옥 깊숙이 들어갔다. 감옥 대부분은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복도 끝 부분의 감옥에는 주인(?)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으르렁거리는 울부짖음을 봐서 인간이 아닐 것이라 짐작되는 죄수였다. "캬아아." 찢어지는 듯한 기성이 연이어 들려왔다. 그러나 울부짖음이 띄엄띄엄 들리는 것을 봐서 무척 기진맥진해 있는 상태 같았다. 헐떡이는 호흡소리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급박해 보였다. 테오도르가 다급히 부대장을 돌아보았다. "혹시 뱀파이어에게 사람이나 짐승의 피를 공급해 준 적이 있소?" "그, 그런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부대장이 고개를 가로젓자 테오도르의 얼굴이 갑자기 경직되었다. 그는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아들며 동생들을 쳐다보았다. "서둘러 피를 뽑아야겠다." "알겠습니다." 드미트리가 기다렸다는 듯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299회. 옆에 놓여 있는 나무통을 집어들어 드미트리의 팔 밑에 댄 테오도르는 그대로 손목을 그었다. 혈관이 베어지며 피가 주르르 흘러나왔다. 어느 정도 피를 받은 테오도르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되었다. 지혈하도록 해라. 다음은 렌돌프 네 차례다." 랜돌프 역시 머뭇거림 없이 팔을 들이댔다. 옆에서는 드미트리가 지혈을 하고 있었다. 손놀림이 능숙한 것을 보아 이런 일을 많이 겪어본 것 같았다. 묵묵히 보고 있던 부대장이 앞으로 나섰다. "중요한 일입니까?" 테오도르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내뱉었다. "그렇소. 뱀파이어의 생사는 곧이어 벌어질 종족전쟁의 성패를 가름할 정도로 중요하오." "그렇다면 저도 뽑겠습니다." 부대장은 서슴없이 팔을 걷어붙였다. 따라온 기사들도 피를 뽑을 준비를 하는 것을 보자 테오도르의 입가에 미소가 짙게 그려졌다. 지금까지 적이었을지언정 듀크 나이츠 역시 진정한 크로센 제국의 기사들임에는 틀림없었다. "정말 고맙소." 나무통은 곧 여러 사람들의 피로 그득해졌다. 그러자 테오도르는 감옥의 하단에 위치한 음식투입구로 나무통을 밀어 넣었다. "캬아." 창백한 피부에 손톱이 길게 자라난 손이 튀어나와 다급히 나무통을 끌어당겼다. 곧 나무통 속의 피를 정신 없이 들이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꿀꺽꿀꺽. 일행은 묵묵히 뱀파이어가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감옥 안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극도로 기력이 쇠한 노인의 음성이었다. "밖에 있는 분들이 도대체 뉘시오?" 스승의 음성을 듣자 테오도르의 눈빛이 빛났다. 고개를 돌린 그는 팔목을 감싸쥔 채 서 있던 부대장을 쳐다보았다. "문을 따 주신 뒤 잠시 감옥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부대장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위,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황태자 전하께서도 계신데……." "괜찮소.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니 부탁하겠소." "알겠습니다." 부대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가서 자물쇠를 열었다. 덜컥. 테오도르는 이어 동생들도 쳐다보았다. "너희들도 나가 있도록 해라. 알겠느냐?" "예 형님." 드미트리와 랜돌프도 아무 말 없이 부대장을 따라 나갔다. 그들이 사라진 뒤 복도에는 오직 데이몬과 테오도르만 남게 되었다. 그는 말없이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정식으로 소개시켜드리겠습니다. 이 분은 바로 저의 스승님입니다. 발렌시우스 황제폐하로부터 집정관으로 임명받은 것도 바로 스승님 덕택입니다."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스승님이라고?" "그렇습니다." 테오도르는 묵묵히 감옥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끼리릭.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감옥의 문이 활짝 열렸다. 잠시 후 감옥 안에서 예의 그 음성이 흘러나왔다. 기력이 하나도 없는 노인의 음성이었다. "테오도르. 너냐?" "그렇습니다. 스승님." 테오도르는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더할 나위 없이 지극한 태도였다. 어둠 속에서 음성은 계속 흘러나왔다.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보니 복도에서 어른거리는 횃불을 꺼려하는 모양이었다. "네가 다시 찾아올 줄은 몰랐구나. 병사들이 들이닥칠 때 이미 일이 글렀음을 직감했는데……." 어둠 속을 응시하는 테오도르의 얼굴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표정이 서려 있었다. "스승님." "말하거라. 테오도르." "이제 아무런 걱정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 "상황은 정말 이상적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어둠 속의 음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상적이라니……. 무슨 말인지 당최 이해를 못하겠구나?" 테오도르는 즉각 설명을 시작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아르카디아 통일의 꿈을 깡그리 접었습니다. 또한 아르카디아의 연합군을 이끌고 트루베니아 정벌의 선봉에 설 것을 맹세했습니다. 다시 말해 오크 족의 노예로 힘겹게 살아가는 트루베니아 사람들이 해방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스승님의 염원이 바야흐로 실현되려 하는 순간이란 말입니다." 어둠 속에서 놀란 듯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 그 말이 사실이냐?"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토록 멀쩡한 것을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이미 저는 페르슈타인 공작과 손을 잡은 상태입니다. 그는 지금쯤 열심히 트루베니아 정벌 계획을 짜고 있을 것입니다." "오, 신이시여." 어둠 속의 목소리는 격정으로 떨리고 있었다. 저주받은 존재인 뱀파이어가 신을 찾고 있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불쑥 드러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피부에다 입가를 비집고 자라난 날카로운 송곳니, 핏발이 벌겋게 서 있는 눈동자는 전형적인 뱀파이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늙수그레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두 팔과 다리에는 무척 튼튼해 보이는 쇠고랑이 채워져 있었다. 몸에 걸친 누더기가 다 헤어져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였지만 뱀파이어는 아랑곳없이 테오도르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그, 그 일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느냐? 정녕 믿어도 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스승님. 그 모든 것은 바로 이분 덕택에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테오도르의 말에 뱀파이어의 핏발 선 눈에 데이몬에게로 향했다. 순간 뱀파이어의 눈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혹시 제 1황자인 알카리스 황태자가 아니냐? 7년 전 트루베니아로 건너갔다가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테오도르가 뭐라고 하기 전에 데이몬이 앞으로 쓱 나섰다. 그의 눈동자에도 역시 형언할 수 없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다니……." "………." "여기서 당신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소. 정녕 당신과 나 사이의 인연은 정말 각별하기 그지없구려." "나 날 아시오?" 뱀파이어는 당혹한 음성으로 떠듬거렸다. 박쥐의 모습으로 떠돌며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었지만 알카리스 황태자가 자신을 알 턱이 없었다. 데이몬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날 모르시겠소?" "………." "당신이 내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소? 데이몬 솔로라는 이름을 말이오. 그렇지 않소? 슈렉하이머 대신관?" 뱀파이어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믿을 수 없었던지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뱀파이어가 되기 전 그의 이름은 바로 슈렉하이머였기 때문이었다. "데, 데이몬?" 데이몬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슈렉하이머. 나 데이몬이오. 500년 전 당신은 베니테스와 함께 차원이동으로 중원에 건너왔었지. 그리고 날 이곳으로 데리고 오지 않았소? 꼽추에다 흉측한 몰골을 한 이방인, 그게 바로 나요. 비록 지금은 알카리스의 껍데기를 덮어쓰고 있지만 말이오." "………." 뱀파이어가 된 슈렉하이머는 말을 잊었다. 오래 전에 죽었거니 생각했던 자가 멀쩡히 살아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으니 쉽사리 수긍이 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500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후가 아니던가? 잠시 침묵을 지키던 슈렉하이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떠듬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설마 당신이 500년의 시공을 초월해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나 역시 마찬가지요. 5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설마 당신을 만날 줄은 나 역시 짐작할 수 없었지." 대화를 듣고 있던 테오도르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드리워졌다. 동시대의 인물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대화를 들어보니 더할 나위 없이 각별한 사이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는 섣불리 끼여들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해후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은 슈렉하이머의 창백한 몸을 둘러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뱀파이어가 되어서까지 트루베니아를 구하려 하다니 당신의 집념은 정말 알아줄 만 하구려." 슈렉하이머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 역시 마찬가지 아니오? 풍겨오는 기운을 보니 엄청난 실력의 흑마법사가 된 것 같은데? 나 정도는 감히 범접도 할 수 없는……."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얘기는 이따 하기로 합시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해서 노스우드 참사에서 몸을 피할 수 있었소? 난 당신이 다른 용사들처럼 그곳에다 뼈를 묻은 줄 알았는데……." 슈렉하이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베르하젤 님의 보살핌이셨지요. 격전 와중에 전 우연히 생긴 공간왜곡장의 틈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틈을 발견한 순간 즉시 공간이동을 시도했습니다. 이 사실을 연합군 수뇌부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나의 흐름이 극도로 불규칙한 노스우드라 실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지만 공간이동은 성공했습니다. 저는 다행히 노스우드 평원을 벗어난 곳에 워프할 수 있었습니다."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려. 정말 다행이었구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해서 노스우드 평원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까? 당시 기억으로 당신은 두 팔을 전혀 쓰지 못했고 마법조차 시전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하는 슈렉하이머를 쳐다보며 데이몬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불행히도 나는 놈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소. 그 가증스런 베르키스 놈에게 포로가 되어버렸으니 말이오. 놈의 레어로 끌려간 나는 놈에게 모진 고문을 받았지. 정신마법까지 건 끝에 놈은 결국 날 리치로 만들어버렸소. 영원히 놈의 레어를 지키라고 말이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난 정신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었소. 이후 500년은 나에겐 한 마디로 기회의 시간이었지. 그 시간동안 마법에 정진하여 9서클의 마스터가 될 수 있었으니 말이오." 슈렉하이머는 입을 딱 벌렸다. "세, 세상에 그런 일을 겪으셨을 줄이야……. 정말 놀랍습니다." "뭐 놀라울 것도 없소.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이후 난 드래곤들에 대한 복수를 결심했소. 그 노력의 일환으로 난 노스우드 평원에 가서 데스 나이트 넷을 만들었지. 아마 그들이 누군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이카롯트의 4대 기사였던 헬버트론, 라인델프, 프림베르그, 사라미스가 지금은 데스 나이트가 되어 내 명령에 따르고 있다오." "………." "전과가 전혀 없진 않았지. 그린 드래곤 지크레이트를 죽이고 마법보고 인크레시아를 손에 넣은 데다 과거 암흑의 마룡이라 불리던 러셀런트까지 이승을 하직하게 만들었으니 말이오. 난 내친김에 그 놈들의 시체를 본 드래곤으로 만들어버렸소. 드래곤 놈들과 효과적인 공중전을 벌이기 위해 말이오." 슈렉하이머는 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데이몬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자신이 데려와서 이름을 지어주었던 이방인. 모든 힘을 상실한 탓에 전혀 희망을 갖지 않았던 그가 그런 엄청난 역경을 겪어 왔으며, 자신으로썬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전과를 거뒀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손에 의해 둘이나 되는 드래곤이 생을 마감했다니……. "저, 정말 놀랍습니다." 슈렉하이머의 창백한 얼굴에는 경악감이 떠올라 있었다. 더불어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자괴감까지 치밀어 올랐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300회. 트루베니아를 구하기 위해 뱀파이어가 되는 것까지 감수해가며 동분서주했지만 슈렉하이머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슈렉하이머의 귀로 데이몬의 음성이 메아리쳐졌다. "혹시 당신 사연을 들려줄 수 있겠소? 난 지금 궁금해 미칠 지경이라오." "너무나 보잘것없어 감히 밝힐 자신이 없지만 설명 드리겠습니다." 슈렉하이머는 곧 자신이 걸어온 길을 데이몬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노스우드에서 탈출한 뒤 저는 일의 전모를 연합군 수뇌부에 전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보로도 밀리는 전황을 역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도리어 용사대가 전멸되었다는 소식은 수뇌부의 사기만 떨어뜨리는 결과를 야기했다. 각급 기사단에서 차출한 정예들이 깡그리 궤멸된 탓에 전력이 한 마디로 오합지졸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기에 인간들은 패배를 예상한 채 전투를 벌여야 했다. 말 그대로 모탈 컴뱃(matal combat: 죽어야 할 운명의 전투)인 것이다. 이후 벌어진 5년 간의 전투. 승리는 결국 인간의 패배로 끝났고 트루베니아는 결국 오크족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당시 트루베니아의 멸망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던 슈렉하이머는 처참한 패배에 피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저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르카디아로 건너가서 투쟁을 계속하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당시에는 아르카디아로 건너가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우선 탈 수 있는 배가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몸을 피할 수 있는 이는 오직 고위급 귀족뿐이었다. 그나마 탔다 하더라도 아르카디아에 도착한 배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드래곤 로드인 크라누스가 수면기에 들어갔지만 그가 연출해놓은 거센 폭풍과 풍랑이 상당기간동안 효력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간신히 탈출한 배들 중 상당수가 대해를 건너지 못하고 침몰하고 말았다. 바다의 지배자인 서펜트의 먹이가 된 인간들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게다가 공간왜곡장의 효력도 상당기간 유지되었기 때문에 공간이동조차 시전할 수 없었다. 당시를 회상한 슈렉하이머의 눈에 착잡함이 스쳐지나갔다. "저는 대해를 건너기 위해 모진 고생을 했습니다. 팬텀 스티드를 타고 날아가다 효력이 떨어지면 물위에 떠 있는 나뭇조각에 의지해서 휴식을 취하며 다시 마나를 재배열하고……." 당시 슈렉하이머에게 대해를 건널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에이비에이션(비행마법)은 마나도 많이 들뿐더러 비행속도도 떨어졌기 때문에 그가 기댈 방법은 오로지 팬텀 스티드 뿐이었다. 물론 잠자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상어와 서펜트 때문에 물 속에 오래 머물지 못했으므로 슈렉하이머는 계속해서 팬텀 스티드를 소환해야 했다. 그러기를 보름여, 마침내 아르카디아에 도착한 슈렉하이머는 지친 몸을 이끌고 크로센 제국을 찾아갔다. 크라누스가 펼쳐놓은 폭풍과 공간왜곡장의 효력이 다하기를 기다렸다가 트루베니아를 탈환하기 위함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르카디아의 지원군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크로센 대제는 이미 천수를 다해 세상을 타계한 상태였으니……. 제위를 물려받은 황제 크로센 2세는 슈렉하이머에게 쌀쌀맞게 축객령을 내렸다. "신의를 어긴 트루베니아가 멸망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오. 아르카디아엔 아직까지 개척하지 못한 땅이 많이 남아 있소. 때문에 난 굳이 트루베니아로 건너가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 냉담한 반응에 슈렉하이머는 어쩔 수 없이 크로센 2세의 앞을 물러나야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대응일지도 몰랐다. 트루베니아의 군주들이 크로센 대제에게 지은 죄가 그 정도로 컸다. 그러나 슈렉하이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트루베니아를 구하겠다는 열망으로 그는 마침내 성직자의 신분을 포기할 마음까지 먹었다. "전 염원을 이루기 위해 뱀파이어가 될 것을 마음먹었습니다. 한정된 수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그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르카디아 대륙을 샅샅이 뒤진 끝에 전 마침내 한 마리의 뱀파이어를 찾아낼 수 있었지요." 고도의 신성력을 가진 대신관 앞에 선 뱀파이어는 파들파들 떨었다. 슈렉하이머의 손짓 한 번이면 저주받은 생애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슈렉하이머는 신성마법을 쓰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뱀파이어에게 순순히 몸을 맡겼다. 뱀파이어의 송곳니가 목덜미 깊숙이 파고들 때까지 말이다. 당시를 회상한 슈렉하이머의 눈가에 형언할 수 없는 빛이 스쳐지나갔다. "결국 저는 뱀파이어가 되어 영원한 수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베르하젤 님께서 제게 허용하신 신성력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지요. 밤만 되면 흡혈욕구에 미쳐버리는 뱀파이어의 생을 살아오며 전 어떻게 해서든 트루베니아를 재건하리라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저주받은 존재인 뱀파이어에게 그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500년에 가까운 시간은 그렇게 하릴없이 흘러갔습니다." 말을 마친 슈렉하이머는 고개를 돌려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그러던 차에 전 우연한 기회에 테오도르를 만나게 되었지요. 화전민으로 힘겹게 생을 꾸려 가는 브로큰하트 가문 사람들을 말입니다. 테오도르에겐 대단한 학문의 자질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저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에게 지식을 전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물론 제 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때에만 전수할 수 있었지만 말입니다." 슈렉하이머는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테오도르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그에겐 테오도르를 고위급 관료로 만들기 위한 충분한 지식이 있었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우칠 정도로 지능이 뛰어난 테오도르는 슈렉하이머의 가르침을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그렇게 테오도르에게 모든 지식을 전수한 다음 슈렉하이머는 목숨을 걸고 크로센 제국의 황제를 만나러 갔다. 테오도르가 배운 학문을 펼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였다. 박쥐로 변해 겹겹이 쳐진 황궁의 방어벽을 넘은 그는 천신만고 끝에 크로센 제국의 황제인 발렌시우스 1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발렌시우스 1세는 이미 정상이 아닌 상태였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독약에 당한 크로센 제국의 황제는 고작해야 하루에 한 시간 남짓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슈렉하이머는 감시의 눈길을 피해가며 황궁의 대들보에 매달린 채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황제가 정신을 차리는 시간만을……. 그리하여 운명적인 만남은 이루어졌다.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 뱀파이어를 보자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발렌시우스 황제는 결국 슈렉하이머의 말을 들어주었다. "크로센 대제의 후손은 역시 현명했습니다. 발렌시우스 황제폐하께서 제 청을 받아들이신 것이지요. 그 분께서는 테오도르에게 페르슈타인 공작을 견제할 수 있는 직함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평민 신분인 테오도르에겐 애당초 궁정의 요직에 오를 수 있는 자격 자체가 없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던 슈렉하이머는 당시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네르시스 공작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미 페르슈타인 공작에 의해 숙청된 상태였고 목숨의 위협까지 심각하게 받고 있었다. 네르시스 공작을 만난 슈렉하이머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협조를 구했다. "이런 이유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오. 어떻게 하겠소?" "알겠소. 그가 만약 나의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아준다고 약속한다면 내 그를 양자로 맞아들이리다." 절박한 상황이었기에 네르시스 공작은 기꺼이 그 청을 수락했다. 테오도르는 그 다음날 네르시스 가문의 양자로 받아들여졌고 뒤이어 이어진 황제의 명령 덕택에 집정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묵묵히 슈렉하이머의 말을 듣고 있던 테오도르가 갑자기 대화에 끼여들었다. "스승님께서는 절 집정관으로 만드신 뒤 자청해서 지하감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제 앞날에 누를 끼치지 않으시려는 일념이셨지요. 가축의 피로 목숨을 연명하시면서도 스승님께서는 제 앞날과 트루베니아를 걱정하셨습니다." 모든 사정을 알게 된 데이몬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정말 기구하구려. 당신 역시 평범하지 않은 사연을 가지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소." 모든 사정을 털어놓은 슈렉하이머가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데이몬께서는 어떻게 해서 테오도르를 도와주시게 되었습니까?" 데이몬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그것 또한 기막힌 인연이었소." "이, 인연이라니요?" "혹시 당신은 500년 전 나에게 흑마법을 처음 가르쳐 주신 스승이 누구인지 알고 있소?" 슈렉하이머는 잠시 기억을 되새겨보았다. 대답은 오래지 않아 터져 나왔다. "워 메이지인 도일로 알고 있습니다만……." 슈렉하이머는 대답하다 말고 갑자기 손뼉을 쳤다. 뭔가를 떠올렸는지 얼굴이 환히 밝아진 상태였다. "그렇군요. 그의 성이 바로 브로큰하트였었지. 내가 왜 그 사실을 미처 몰랐을까……." 데이몬은 얼굴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도르를 도운 것은 바로 스승님의 당부 때문이었소. 원래는 아들을 돌봐 주라 하셨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했지. 때문에 난 후손이라도 돌봐주기로 마음먹었던 것이오. 결과가 잘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오." 모든 사정을 들은 슈렉하이머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세상일은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군요. 사실 난 당신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500년 전에 당신의 능력은 극히 하잘 것 없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전혀 상상 밖이로군요. 그 숱한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힘을 되찾으시다니……. 그것도 검술이 아닌 마법으로 말입니다. 지금 전 당신에게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나오고 있습니다." 슈렉하이머의 찬사에 데이몬은 머쓱해졌다. "늙으면 말이 많아진다니 당신도 예외는 아니로군. 그건 그렇고……." 데이몬은 슈렉하이머의 몸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내가 알기로 당신은 상당히 수준 높은 신관으로 알고 있었는데……." 슈렉하이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암흑의 존재인 뱀파이어가 된 탓에 전 신성력을 깡그리 상실했습니다. 고작해야 초보적인 마법 정도나 쓸 수 있을까." 데이몬은 신경쓸 것 없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상관없소. 당신에게서 필요한 것은 마법실력이 아니라 풍부한 경험이니 말이오. 오크에 맞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아르카디아 각급 사단장들에게 당신의 경험을 모두 전수해 주어야 할 것이오. 당시 트루베니아 군의 전략, 전술이나 오크 군대의 장단점에 대해서 모조리." 슈렉하이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냉큼 대답했다. "이를 데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요." "하지만 뱀파이어는 환경의 제약이 상당히 많지. 흡혈 문제도 골치 아프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낮에 전혀 활동할 수 없다는 점이지." 데이몬은 슈렉하이머의 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어떻소? 원한다면 당신을 리치로 만들어 줄 수 있소. 아무래도 뱀파이어보다는 리치가 활동하기에 훨씬 편하지 않겠소?" 슈렉하이머의 얼굴에 다소 떨떠름한 표정이 떠올랐다. "리, 리치요? 그러나 뱀파이어의 몸을 리치로 바꾸기가 쉽진 않을텐데요? 뭐 저주받은 존재란 것은 둘 다 마찬가지니 상관은 없습니다만……." 데이몬은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걱정할 필요 없소. 내 몸 속에는 어둠의 마왕 나이델하르크가 잠들어있는 봉인구가 있소. 그의 마력이라면 뱀파이어라도 충분히 리치로 만들 수 있소. 물론 상당한 실력향상을 기대해도 될 것이오. 당신이 상실한 신성력대신 내가 불어 넣어주는 어둠의 마력을 이용한다면 단숨에 7서클로 도약할 수 있을 테니. 아시다시피 한 번 갔던 길에 도달하기는 무척 쉬운 법이오." 데이몬의 말을 듣자 슈렉하이머는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신성마법 대신 흑마법을 사용한다면 충분히 예전 수준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 …….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소."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잠시 나가 있겠느냐? 네 스승을 리치로 만들려면 약 한 시간 정도가 소요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둘 사이의 대화를 모두 들은 테오도르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테오도르로써는 스승이 흡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꺼운 일이었다. 어차피 리치나 뱀파이어, 둘 다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존재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뱀파이어는 생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람이나 짐승의 피를 섭취해야 한다. 하지만 리치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물론 크나큰 타격을 입을 경우 부득이 인간의 생명력을 빨아들여야 할 경우는 있었지만……. 덜컥. 문이 닫힌 뒤 그곳에는 오직 데이몬과 슈렉하이머만이 남게 되었다. 데이몬은 눈을 빛내며 슈렉하이머를 쳐다보았다. "그럼 대법을 시작하겠소." 그가 손을 내젓자 바닥에 마법진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데이몬은 이제 어느 정도 마법실력을 회복한 상태였다. "마법진 위에 올라서시겠소?" 슈렉하이머는 머뭇거림 없이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그것을 본 데이몬은 잠자코 어둠의 마력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이미 데스 나이트까지 만들어 본 그에게 리치 정도 만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에 지나지 않았다. 어둠의 마력이 집중되자 마법진은 소름끼치는 빛을 줄기줄기 뿜어내기 시작했다. 대법에 열중하는 데이몬의 얼굴에는 무척 재미있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흑마법사에다 데스 나이트, 본 드래곤에 이어 리치의 가세라……. 이거야 원, 완전히 인간과 언데드의 연합군이잖아? 봉인구 속에서 잠자고 있는 나이델하르크가 이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기가 막혀 땅을 칠 노릇이겠군.' 눈부시게 빛을 내뿜는 마법진 속에서 슈렉하이머의 몸은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301회. "들어와도 좋다." 감옥 안에서 기다렸던 음성이 들려오자 초조하게 기다리던 테오도르의 얼굴에 반색이 떠올랐다.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데이몬의 모습이 보였다. "많이 기다렸느냐?" 데이몬은 미소를 지으며 앞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테오도르의 시선이 앞에 서 있던 그림자에 가서 멎었다. 그의 얼굴에 깜짝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스, 스승님." 스승인 슈렉하이머의 모습은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스승은 비록 뱀파이어의 모습이었을망정 인간의 형태만큼은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나는 백골 한 구가 테오도르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송곳니가 유독 길게 자라난 백골이었고 누더기 사이로 앙상한 골격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가 바로 슈렉하이머였다. 스승은 이제 완연한 리치가 되어 있었다. 조금 힘이 들었던지 숨을 가다듬은 데이몬이 떠듬거리는 어조로 소개를 시작했다. "대법은 잘 시행되었다. 몰골이 조금 형편없게 변했지만 네 스승은 이제 흡혈의 욕구에서 벗어난 상태다. 물론 대낮에도 아무 무리 없이 나다닐 수 있을 테지. 물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로브를 뒤집어씌워야겠지만" 테오도르는 아직까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스승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잠시 후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가장 먼저 몸을 가릴 옷이 필요하시겠군요." 슈렉하이머의 텅 빈 동공에 괴이한 빛이 떠올랐다. 아마도 미소를 지으려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뼈만 남은 얼굴로는 도저히 인간의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그래야겠구나. 이 몰골로는 황궁을 돌아다닐 수 없을 테니……." 음성 역시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 리치 특유의 찢어지는 듯한 저음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옷을 준비시키겠습니다." 데이몬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사제지간에 나눌 대화가 많을 테니 난 이만 실례하겠다." "어, 어디로 가시려고……." "동료들을 만나봐야겠다. 듣자하니 그들이 페르슈타인의 저택에 머물고 있다 하더구나." 데이몬의 대꾸에 테오도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게 조금 있다 모시러 가겠습니다. 아까 그 부대장에게 말씀하시면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모셔다 드릴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그럼 스승과 많은 얘길 나누도록……." 가볍게 손을 흔든 데이몬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감옥 안에는 테오도르와 슈렉하이머만 남게 되었다. 마주보고 있던 테오도르의 얼굴에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비록 저주받은 뱀파이어에서 이젠 리치로 변했지만 슈렉하이머는 그에게 기회를 준 스승임에는 틀림없었다. "스승님……." "그래. 테오도르. 정말 수고가 많았다." 슈렉하이머의 음성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스승과 제자 사이에 나눌 대화는 많고도 많았다. 복도를 걸어가는 데이몬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지금 부대장을 앞장세운 채 동료들을 찾아가고 있었다. '슈렉하이머가 아직까지 살아있다니……. 정말 놀랄 일이로군. 보통 인연이 아닌걸?'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사람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사실에 데이몬은 가슴이 설레고 있었다. 쉽게 말해 자신이 다시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데리고 왔으니 가는 방법 역시 잘 알고 있을 터. 하늘까지도 나의 복수를 돕고 있나 보군." 물론 데이몬에겐 사준환에 대한 앙갚음보다 시급한 것이 있었다. 바로 베르키스를 비롯한 드래곤에 대한 복수와 다프네를 구해내는 일이었다. 데이몬은 마침내 복수에 대한 서막을 연 상태였다. '결국 아르카디아의 대군을 트루베니아로 보낼 수 있게 되었어.' 목적했던 일을 이뤘기 때문에 데이몬의 가슴속은 희망으로 차 오르고 있었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아르카디아의 인간들. 잘 훈련된 100만의 군대라면 오크들은 결코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인간에겐 발전이 있지만 오크에겐 그것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500년의 세월동안 발전되고 단련된 아르카디아 인간들의 힘은 과거 트루베니아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터였다. 때문에 걸어가는 데이몬의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웠다. 카심 용병단원들은 이제 동료를 잃은 슬픔을 어느 정도 가라앉힌 상태였다. 아직까지 제 4별관을 떠나지 않은 상태였지만 헬튼과 비에리가 들어있는 관은 이제 뚜껑이 덮인 상태였다. 슬픔을 삭인 용병들은 피와 먼지로 얼룩진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들은 지금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그들에게 있어 최고의 화젯거리는 단연코 율리아나가 용병단에 가입한 사건이었다. 우거지상이 된 패터슨이 옆에 앉아 있는 카트로이를 쳐다보았다. 용병들과는 달리 카트로이는 추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주긴 했지만 드래곤인 카트로이에게 죽은 인간동료에 대한 추도까지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대신 그는 꼬박 사흘동안 술독에 박혀 있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그에게 무제한으로 술을 제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카트로이의 모습에서 술에 취한 기색이 일체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패터슨은 혀를 내둘렀다. '정말 대단하군. 소문으로는 대형 술통 스무 개를 깡그리 비웠다고 하던데 이토록 멀쩡할 수 있다니…….' 하지만 해야 할 말을 떠올린 패터슨은 급급히 얼굴빛을 고쳤다. "그런데 카트로이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말인가?" 카트로이가 대답하는 순간 패터슨의 몸이 화살이라도 맞은 듯 휘청거렸다. 카트로이의 입이 열리자 숨쉬기조차 곤란할 정도로 술 냄새가 풍겨왔기 때문이었다. 다급히 코를 틀어막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패터슨이었다. 코를 움켜쥔 패터슨의 입에서 코맹맹이 소리가 흘러 나왔다. "저기 카트로이 님께서는 율리아나 아가씨가 용병단에 가입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카트로이의 눈이 별안간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인가?" "그,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패터슨을 보자 카트로이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네들에겐 정말 큰일이겠군. 나야 뭐 큰 상관이 없겠지만." "그럼요. 이만 저만 큰일이 아니죠?" 패터슨이 다급히 맞장구를 치는데 옆에서 난데없이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완연한 여인의 음성이었다. "패∼터∼슨. 지금 뭐라고 했죠?" 패터슨의 얼굴에서 별안간 핏기가 싹 사라져버렸다. 그의 얼굴은 마치 베르키스와 정면으로 맞닥뜨린 것과 같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패터슨은 정신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제, 제 말인 즉슨 율리아나 아가씨가 저희 용병단에 가입하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란 뜻입니다. 암요. 그렇고 말고요." 율리아나의 음성에는 일체의 억양변화가 없었다. "정말인가요? 그런 뜻이 아닌 것 같은데?" "트, 틀림없는 사실입니다요." 삽시간에 거무죽죽해진 패터슨의 얼굴을 쳐다보며 용병들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우리처럼 가만히 있을 것이지.' 적막을 깨고 다시 율리아나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좋아요. 믿겠어요. 그 마음이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라 믿어요." "그, 그럼요. 이를 데가 있겠습니까?" 우거지상이 된 패터슨이 고개를 떨궜다. '으이그. 요 입이 방정이지.' 그 때 문이 활짝 열렸다. 덜컥. 용병들의 시선이 일시에 문 쪽으로 집중되었다. 그들의 시선에는 어리둥절함이 배어 있었다. 낯선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와 자신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타난 자는 무척 잘 생긴 젊은 청년이었다. 금발이 보기 좋게 하늘거리고 있었고 푸른 눈동자는 마치 에메랄드를 박아놓은 듯 요요롭게 빛나고 있었다. 대리석으로 깎아놓은 듯한 콧날과 갸름한 얼굴 선을 보니 한 마디로 천상의 미남이라 표현할 수 있을 법한 용모였다. 청년은 느릿하게 일행의 면면을 둘러본 뒤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에는 부대장의 표식을 단 듀크 나이츠 하나가 떡 버티고 있었다. "수고했네. 자넨 이제 가보도록 하게." "호, 호위가 필요하시지 않겠습니까?" 청년은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호위는 필요 없네. " "아, 알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깍듯이 예를 올린 듀크 나이츠는 공손히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던 청년은 쾅 소리나게 문을 닫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패터슨이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누, 누구신지?" 하지만 청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데이몬이었다. 하지만 용병들은 누구하나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깨끗하게 단장한 데이몬의 모습에서 며칠 전 헬튼에게 깔려 있던 피투성이 청년을 떠올린다는 것은 한 마디로 무리였다. 시선이 가운데 놓인 관에 닿는 순간 데이몬의 얼굴에 비통한 표정이 떠올랐다. "헬튼, 비에리……." 격정이 치밀어 오른 나머지 데이몬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필사적으로 감정을 참고 있는 것이 용병들에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카심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한참동안 데이몬을 쳐다보던 카심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데이몬이십니까?" 데이몬의 시선이 느릿하게 카심에게로 돌아갔다. 판이하게 다른 용모였지만 카심은 용케도 낯익은 눈빛을 판별해 낼 수 있었다. 그의 귓가로 청아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많이 놀랐겠군. 카심." 음색이 전혀 달랐지만 말투에서 그가 누구란 것이 역력히 드러났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설명해 주지. 그건 그렇고 죽은 동료들의 얼굴을 한 번 보여주지 않겠나? 헬튼과 비에리,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네." 카심은 두 말도 하지 않고 관 뚜껑을 열었다. 곧 헬튼과 비에리의 모습이 드러났다. 고도의 보존마법으로 처리된 때문에 둘의 모습은 생시와 거의 다름이 없었다. 잠자는 듯한 고요함이 그들의 몸을 조용히 덮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자 데이몬의 눈시울이 금세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조용히 죽은 동료의 이름을 불렀다. "헬튼, 비에리. 이렇게 자네들을 보내야 하는 건가?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죽어 동료들을 슬프게 하지말고 어떻게든 살아 남으라고 말이야. 정말 나쁜 사람들이로군. 이렇게 동료들을 슬프게 할 수 있는 건가?" 별관을 덮고 있는 적막 속에 데이몬의 음성이 고즈넉이 퍼져나갔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302회. 헬튼을 쳐다보는 데이몬의 눈가에서 눈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날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리다니……. 헬튼. 정말 어리석은 일이야. 지금 내 마음이 어떤지 자넨 아는가? 설사 자넬 데스 나이트로 만들어서라도 다시 보고싶을 따름이라네……." 듣고 있던 카심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핼튼은 결코 원통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들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헬튼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 떠올라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저희 모두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데스 나이트로 만드는 것은 헬튼도 원하지 않을 거야. 그의 영혼까지 저주받게 만들 순 없는 노릇이지." 데이몬의 시선이 이번에는 비에리에게로 향했다. 물론 그는 비에리가 어떻게 해서 죽었는지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하찮은 브론즈 골렘 하나를 파괴하기 위해 자네의 고결한 목숨을 버리다니…….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없군." 눈동자가 벌겋게 충혈된 채로 고개를 흔드는 데이몬을 향해 카심이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데이몬을 와락 껴안았다. "살아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데이몬. 만약 제 허락 없이 돌아가셨다면 전 아마 지옥 끝까지라도 데이몬을 따라갔을 것입니다." 떨리는 음성에서는 카심의 진심이 줄기줄기 묻어 나오고 있었다. 보고 있던 용병들도 하나 둘씩 몸을 일으켰다. 형언할 수 없는 눈빛을 한 미첼이 다가와 데이몬의 어깨를 감쌌다. "데이몬.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당신은 바로 제 존재의 이유입니다. 그 어딜 가셔도 절 떨치진 못할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에는 제럴드가 두 팔을 벌려 그들을 감쌌다. 패터슨도 하인리히도 하나같이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카심 용병단원들은 곧 한 덩어리가 되어 동료를 잃은 슬픔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끼여들지 않은 이는 오직 카트로이와 율리아나 뿐이었다. 잠시 후 고개를 돌린 데이몬이 카트로이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다소 멋쩍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고맙다. 카트로이." "………." "네가 아니었다면 결코 이 정도 희생으로 끝낼 수 없었을 것이다. 네게 진심으로 고맙단 말을 전하고 싶다." 의혹 어린 표정으로 데이몬의 얼굴을 노려보던 카트로이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저번에 술집에서 봤던 얼굴이로군. 그나저나 네놈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어색하다. 그리고 내게 굳이 감사를 표할 필요는 없다. 드래곤이란 원래 중도와 균형을 지키는 존재이니까……. 권고하겠는데 평소처럼 행동하기를 바란다." 그 말에 데이몬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녀석.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꼭 초를 쳐야겠냐? 임마. 넌 그래서 멍청하다는 소릴 듣는 거야. 폼을 잡으려면 자리를 제대로 살펴야지." 불의의 일격을 당했지만 카트로이의 얼굴에 도리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역시 넌 그래야 어울려. 이 빌어먹을 자식아!" "이런 썩어 문드러질 드래곤 나부랭이가……." 험악하게 인상을 쓰던 데이몬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문득 그의 눈동자에 멍청하게 서 있는 율리아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데이몬의 얼굴에 별안간 의혹이 어렸다. "저 계집애는 왜 여기에 있어. 퇴짜 맞았는데도 아직까지 카르셀로 돌아가지 않았어?" 그 말에 용병들의 얼굴이 별안간 경직되었다.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 다시 떠올랐던 것이다. 카심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다가가 데이몬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저, 데이몬. 정말 큰일났습니다." "큰일이라니……." "유, 율리아나 왕녀님의 저희 용병단에 그만 가, 가입을……." 데이몬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표정이 아로새겨졌다. "저 계집애를 어디다 써먹으려고 대원으로 받았나? 자네도 알다시피 써먹을 구석이 하나도 없는 계집애 아닌가?" "시, 실은……." 카심은 묵묵히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상황을 들었음에도 데이몬의 얼굴에는 표정변화가 전혀 없었다. 잠시 후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대로 잘 된 일이로군. 제럴드와 하인리히가 마침내 막내 신세에서 벗어났으니 말이야. 이봐 카심." "예. 데이몬." "카심 용병단에서는 여자에게 일체 특혜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리 설명해 줬겠지?" "예? 아, 그렇군요. 그건 제가 미처……." 눈치 빠른 카심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몬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이제부터 제럴드와 하인리히가 맡고 있던 식사당번을 깡그리 저 계집애에게 넘긴다. 물론 설거지도 마찬가지야. 카심 용병단의 위계질서는 자네도 알다시피 철저히 서열에 따르네. 따라서 하극상이 있을 경우 내가 직접 처벌을 하겠네. 알겠나?" 카심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번뜩였다. 역시 율리아나를 감당할 수 있는 임자는 단 한 사람 뿐이었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냉큼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동할 때 여자라고 짐을 덜어주는 경우는 어떠한 경우에도 허락하지 않겠네. 그리고 저 계집애의 체격에 맞춰 체인메일에다 하프 플레이트 아머까지 한 벌 맞추게. 실력이 형편없으니 방어를 위해 튼튼한 갑옷이라도 입혀야 하지 않겠나? " 예상치 못했던 데이몬의 반응에 카심은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는 데이몬의 의중을 대번에 알아차린 상태였다. 데이몬의 말대로 하면 율리아나는 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는 생소하기 그지없는 데이몬의 새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말하는 투를 보니 틀림없는 데이몬이 맞군.' 고개를 끄덕이는 카심을 보며 데이몬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빛나고 있었다. '네년이 아무리 까불어도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지. 과연 네년이 몇 시간이나 버틸지 궁금하군. 흐흐흐' 고개를 돌리자 잔뜩 쌍심지를 켠 율리아나의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데이몬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바짝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데이몬이 깜짝 놀라는 순간 옆구리에서 극통이 치밀었다. 참을 수 없는 통증에 데이몬은 고통에 겨운 비명을 내질렀다. "크으윽." 옆구리를 감싸쥔 데이몬이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가해진 불의의 일격이었다. 어지간한 데이몬이라도 액연혈(腋淵穴)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이상 견딜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공교롭게도 그 혈도는 데이몬이 직접 시연해가며 가르쳐 준 것이었다. 자신이 가르쳐 준 한 수에 정통으로 당해버린 데이몬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용병들은 하나같이 몸서리를 쳤다. '역시…….' '데이몬조차도 저 악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군.' 잠시 후 통증을 가라앉힌 데이몬이 독기 어린 눈빛을 번들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런 빌어먹을 년. 감히 날 암습하다니……. 으읍."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율리아나가 불의의 입맞춤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입술이 겹쳐지자 잔뜩 틀어쥔 주먹에서 저절로 힘이 스르르 빠졌다. 경악으로 인해 데이몬의 동공은 극도로 확대된 상태였다. 정신이 멍해진 상태에서 율리아나가 바로 귓전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음성이 들려왔다. "살아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에요. 데이몬.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이, 이 계집애가?" 참을 수 없어진 데이몬은 율리아나를 왈칵 밀쳐버렸다. 그러나 율리아나의 얼굴을 적시고 있는 눈물을 보자 다시금 마음이 약해져왔다. 데이몬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역시 계집애란 요물이야. 그…런데 입술은 정말 부드럽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율리아나가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잠시 후 평정을 되찾은 듯한 음성이 들렸다. "그런데 그 재수 없는 얼굴은 뭐죠? 정말 밥맛 떨어지게 생겼네. 이봐요. 영감탱이. 얼굴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는 게 어때요. 옛날 얼굴이 훨씬 나았단 말이에요." 데이몬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냐?" 율리아나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말하면 잔소리죠. 그게 뭐예요? 기생오라비도 아니고…….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네." 그 말에 데이몬의 머릿속에 장난기가 동했다. "그렇다면 이 얼굴은 어떠냐? 솔직히 말하면 이것이 바로 내 진면목이다." 데이몬의 얼굴이 일그러지지 시작했다. 마나의 형태를 변화시켜 역체변용술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데이몬의 모습은 500년 전 수호마왕군의 총수였던 독고성의 모습을 완벽히 재현하고 있었다. 늘어선 용병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헉. 그 얼굴은 뭐죠?" "맙소사. 데, 데이몬." 완벽히 독고성으로 돌아간 데이몬은 괴소를 흘리며 용병들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음성 역시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 "흐흐흐. 녀석들아. 나의 원래 모습은 바로 이랬었다. 드래곤의 손아귀에 잡혀 리치가 되기 전까지 말이다. 내 본 모습을 본 소감이 어떠냐?" "………." 용병들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침묵을 지켰다. 데이몬은 느릿하게 용병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내가 크로센 제국 황태자의 용모를 하고 있는데 대한 설명을 시작하겠다." 데이몬은 용병들에게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난 꼬박 500년을 베르키스 놈의 레어를 지키는 리치로 살아왔다. 이미 베르키스 놈에게 들었으니 어느 정도 짐작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살 수 없었겠지. 아무리 마법실력이 고강하더라도 인간이 500년을 생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용병들은 드디에 의문을 풀 수 있었다. 하나같이 그 점을 궁금하게 생각해왔던 것이다.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난 그 기간동안 베르키스 놈이 걸어놓은 정신마법을 파훼한 뒤 마법에 대한 연구를 거듭했고, 그 결과 9서클의 마스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 리치로 있는 동안 난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호시탐탐 틈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알카리스 황태자와 그의 친위기사들이 베르키스의 레어 가까이 접근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게덴하이드를 위시한 리치들에 의해 하나도 남김없이 일망타진되었지. 하지만 난 용케도 알카리스 황태자를 구해낼 수 있었다." 데이몬은 용병들의 얼굴을 하나씩 둘러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난 의식불명 상태인 알카리스 황태자와 영혼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베르키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직 그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에 용병들은 깜짝 놀랐다. "여, 영혼을 바꾸신다고요?" 그들 역시 영혼을 바꾸는 것을 오직 신의 영역으로 알고 있었다. 때문에 쉽사리 믿을 수 없어 하는 것이다.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다. 시간이 많이 걸릴뿐더러 이해하기도 힘들 테니까……. 아무튼 중요한 것은 영혼교환이 결국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몸을 바꾼 즉시 난 베르키스의 레어를 빠져나왔다. 인크레시아를 얻고 데스 나이트 넷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그 이후의 일이었다. 그런 다음 난 아르카디아로 건너왔다가 급기야 너희들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알겠느냐?" 우여곡절을 들은 용병들의 얼굴에는 경악의 빛이 번져 있었다. 한 인간에게 이처럼 기구한 사연이 있을 수 있다니……. 데이몬의 얼굴에 쓸쓸한 빛이 서렸다. "너희들에게 굳이 숨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할 기회가 전혀 없었지. 게다가 너희들이 믿을지도 의문이었고……." "아닙니다. 데이몬의 말씀이시라면 저희는 믿습니다." 카심의 말에 데이몬의 표정이 밝아졌다. 말투 역시 온화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군. 솔직히 말해 아직까지 자네들에게 밝히지 않은 것이 또 있네. 그다지 밝히고 싶지 않은 과거이지만 원한다면 얘기해 주겠네. 듣고 싶나?" 그 말에 용병들은 스스럼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밝히고 싶지 않다면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어쨌거나 데이몬은 저희들에겐 부정할 수 없는 동료입니다. 그 점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후훗. 역시 동료로 삼을만한 녀석들이었어.' 생각을 마친 데이몬은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303회. 그녀는 지금 데이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려가며 말이다. "어떠냐? 계집애야. 내 몰골이 상당히 흉측하지? 아마 밥맛이 싹 달아날 것이다." 하지만 율리아나의 대답은 데이몬의 예상을 송두리째 뒤집고 있었다. "그런 대로 볼만한 걸요?" "………." "솔직히 말해 내가 지금껏 본 세 얼굴 중에서 제일 낫군요. 특히 조금 전의 계집애 같은 모습보다는 훨씬 말이에요." 데이몬은 멍청한 표정으로 율리아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는 데이몬이었다. "너 지, 지금 제 정신이냐?" "그럼요. 제 정신은 지극히 맑아요. 자세히 보니 더욱 괜찮은 얼굴인데요? 흔하지도 않을 뿐더러 개성이 뚜렷해서 더욱 마음에 들어요." 데이몬은 지금 혼란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저 종잡을 수 없는 계집애가 결국 돌아버렸나? 설마 이 얼굴이 괜찮다고?' 설마 역체변용술이 잘못되진 않았나 싶어 데이몬은 마법을 써서 허공에다 자신의 얼굴을 투영해 보았다. 하지만 허공에 비친 모습은 더 없이 익숙한 자신의 옛모습이었다. 쭉 찢어진 가느다란 눈에 보기 흉하게 굽은 매부리코, 심지어 들여다보는 데이몬 자신조차도 역겨움이 치밀어 오를 정도였다. 그런 얼굴이 괜찮다니……. 데이몬의 눈가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율리아나의 진심을 한 번 시험해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에게 키스를 해 줄 수 있느냐?" 말을 끝낸 데이몬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리 제멋대로인 율리아나라도 감히 키스까지는 할 순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데이몬의 예상은 이번에도 빗나가버렸다. "흡." 급작스레 와서 닿는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에 데이몬의 눈이 부릅떠졌다. 전신에 힘이 쭉 빠지며 정신마저 혼미해져왔다. 뭔가 물컹한 것이 입술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느낀 데이몬은 와락 율리아나를 밀쳐버렸다. "그, 그만……." 하늘이 빙빙 도는 듯한 기분이었기에 데이몬은 정신 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껏 살아온 500년을 통틀어 이런 황당함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잠시 후 정신을 수습한 데이몬은 사납게 율리아나를 노려보았다. 그녀 역시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년. 도대체 무슨 속셈이냐? 데이몬의 호통에 율리아나는 뽀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별꼴이네? 키스해 달라고 해서 해 줬더니 뭐가 어째요?" 어이가 없었는지 데이몬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얼굴이 네 마음에 든단 말이지?" 말을 마친 데이몬은 지체 없이 역체변용술을 전개했다. 흉측했던 독고성의 모습이 사라지고 곧 알카리스의 수려한 얼굴이 나타났다. 데이몬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율리아나를 쏘아보았다. "흐흐흐. 내가 쉽게 네 계략에 넘어갈 것 같나? 계집애야. 난 네가 가장 싫어하는 얼굴을 하고 다닐 생각이다. 적어도 네년이 좋아하는 꼴은 죽어도 못 보지." 그 말을 들은 율리아나는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지나갔다. "어머?" 그녀는 데이몬의 어깨 너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뭐, 뭐야?" 인기척을 느낀 데이몬이 고개를 돌렸다. 공교롭게도 뒤에서 검은 로브로 전신을 휘감은 흑포인이 날카롭게 눈빛을 빛내며 데이몬을 쳐다보고 있었다. 데이몬의 얼굴에 반갑다는 빛이 스쳐지나갔다. "슈렉하이머 왔……끄으." 하지만 그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항문 부근에서 급작스럽게 치밀어 오르는 통증 때문이었다. 데이몬은 순식간에 바닥에 쓰러져 버르적거리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게거품을 물고 정신 없이 몸을 비트는 모습을 볼 때 그가 지금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뒤로 한없이 앙칼진 음성이 울려 퍼졌다. "흥! 영감탱이 주제에……. 죽고싶어서 아예 환장을 했군." 두 눈에 잔뜩 쌍심지를 켠 율리아나가 데이몬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횡하니 몸을 돌렸다. "앙갚음하고 싶으면 나중에 해요. 얼마든지 받아줄 용의가 있으니까……." 하지만 데이몬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회음혈을 정통으로 걷어차인 탓에 정신이 완전히 오락가락하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그는 똥침을 정확히 맞은 상태였다. "데이몬은 정말 다방면으로 달인이시군요. 마법이면 마법, 연애면 연애." "노, 놀리지 마라. 카심. 아이쿠, 아파라." 데이몬은 얼굴이 우거지상이 된 채 끙끙 앓고 있었다. 하지만 회음혈을 정통으로 가격 당한 통증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신경이 극도로 밀집되어 있는 요혈이라서 걸음조차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데이몬의 눈가에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 이놈의 계집애를……. 크윽." 그러나 일어나자마자 치밀어오른 극통 때문에 데이몬은 또다시 엉덩방아를 찧어야 했다. 카심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주머니 하나를 건네주었다. "참으십시오. 데이몬. 뭐 저희들이 하루 이틀 당했습니까? 저희들은 이젠 만성이 되었습니다. 뭐 우리야 당해도 싸지만 설마 데이몬까지 당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카심의 뒤에는 용병단원들이 파리하게 질린 표정을 하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굳게 믿었던 데이몬마저 당했다는 사실에 그들은 지금 극도로 낙심한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년은 천부적으로 살수(殺手)의 소질이 있어. 그토록 감쪽같이 암습을 가할 수 있다니 말이야. 끄으응. 그, 그런데 그건 뭔가?" 데이몬이 건네주는 주머니를 가리키자 카심은 히죽 웃었다. "얼음주머니입니다. 데이몬의 딱한 사정을 보다 못해 카트로이 님께서 얼음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찜질이라도 하시라고 말입니다." "당장 이리 줘봐." 주머니를 다짜고짜 잡아챈 데이몬은 그것을 깔고 앉았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지금은 통증을 삭히는 것이 가장 시급했다. 얼음찜질의 효과가 있었던지 고통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후. 이제 살 만하군." 길게 한숨을 내쉬는 데이몬의 귓가에 찢어지는 듯한 저음이 울려 퍼졌다. "천하의 데이몬에게도 임자가 있었군요. 이건 제가 꿈에도 몰랐던 사실입니다." 데이몬이 독기 어린 표정으로 슈렉하이머를 노려보았다. "슈렉하이머. 불난 집에 계속 부채질 할 거요?" "놀리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전 이제 감정을 표현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시선을 거뒀지만 데이몬은 화를 참지 못하고 계속 씨근거렸다. '그년을 도대체 어떻게 죽이지?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패버려? 아니야. 그년은 아무래도 나에게 맞으며 쾌감 같은 걸 느끼는 것 같더군. 그럴 수야 없지. 이거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카심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런데 데이몬. 이 분은 누구시지요? 아직까지 저희들에게 소개를 해 주시지 않으셨는데……." 그 말에 데이몬은 비로소 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율리아나에 대한 복수를 잠시 접어 넣은 데이몬은 슈렉하이머를 쳐다보았다. "테오도르는 어디로 갔소?" "작전회의를 준비하겠다며 먼저 황궁으로 갔습니다. 절 이곳으로 안내해 준 뒤에 말입니다." "하긴……. 리치인 당신을 섣불리 황궁으로 데리고 갈 순 없는 노릇이지."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이 용병들을 둘러보았다. 통증 때문에 그는 아직까지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자 소개하겠네. 그는 우리 카심 용병단에 입단을 원하는 지망생이네." 그 말에 슈렉하이머가 깜짝 놀랐다. "요, 용병단 지망생이라고요." 데이몬은 슈렉하이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리치인 당신이 몸담을만한 곳은 아마 이곳 밖에는 없을 거요. 아시다시피 언데드는 쉽사리 인간들 사이에 섞이기 힘들지. 하지만 카심 용병단은 다르오. 데스 나이트에다 본 드래곤, 듀라한까지 있으니 리치 한 명쯤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지." "하긴 그렇겠군요." 현명한 슈렉하이머는 상황을 금방 납득했다.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 되는 게 그에겐 가장 현명한 처신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놀란 것은 도리어 카심을 비롯한 용병들이었다. 며칠 전 베르키스의 가디언들에게 엄청난 곤욕을 치렀기 때문에 리치란 말만 들어도 오한이 치솟는 그들이었다. "리, 리치라고요?"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원래는 뱀파이어였지만 조금 전에 내가 리치로 탈바꿈시켜 주었다. 원래 그는 종족전쟁 당시 나와 몹시 밀접한 관계에 있던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그 역시 500년 동안 살아온 존재라고 할 수 있지." "세, 세상에……." 용병들은 입을 딱 벌렸다. 500년의 시간을 초월한 사람이 데이몬도 모자라 또 하나가 더 있다니……. 멍청해진 용병들을 쳐다보며 데이몬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나와 함께 다니니까 이해하기 힘든 일이 많겠군. 하지만 사실이라네. 7서클의 엑스퍼트인 흑마법사니까 제 몫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네."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 슈렉하이머가 앞으로 나섰다. "데이몬께서 설명하셨듯이 전 리치로써 슈렉하이머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뱀파이어였던 것도 사실이지요. 하지만 이제부터 여러분들의 동료가 되고자 합니다. 부디 받아주시겠습니까?" 카심은 추호도 머뭇거리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데이몬께서 추천하신 분인데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카심이라 불러주십시오. 전 현재 용병단의 대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럴 만한 능력이 안되지만 데이몬께서 믿어주신 덕택에 용케 요직을 꿰차고 있습니다." 슈렉하이머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카심이 내민 손을 잡았다. 손에서 에일 듯한 냉기가 엄습해 왔지만 카심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환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무슨 말씀을……. 저희들에겐 이미 언데드 동료들이 많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은 이미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에게서 검술을 배웠습니다. 그들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저희들의 동료입니다." 슈렉하이머가 카심과 악수를 마치자 나머지 용병들이 번갈아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슈렉하이머로써는 정말 의외였다. 용병들이 리치인 자신을 아무 거리낌없이 환영하다니……. 그들의 태도에는 전혀 가식이 섞여 있지 않았다. 세상에 대한 경험이 많은 슈렉하이머는 그 사실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이런 일이 있다니…….' 뱀파이어였던 시절의 경험 탓에 슈렉하이머는 솔직히 용병들의 환대를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과거 자신을 보기만 해도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도망치기 바빴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척 서글펐었지. 곧 만성이 되었지만.' 슈렉하이머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뭉클하게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오랫동안 홀로 외로이 투쟁해왔던 그에게 마침내 동료가 생긴 것이다. 그는 율리아나를 제외한 모든 구성원들과 악수를 나눴다. 카트로이가 그를 쳐다보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빌어먹을 놈 때문에 리치와도 동료가 되어 보는군. 아무튼 반갑다. 명색이 리치니까 머리 하나는 잘 돌아가겠군. 싸움만 잘하는 돌대가리 데스나이트들보다는 훨씬 재미있겠어." 대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슈렉하이머의 동공에는 기이한 빛이 서려 있었다. '이들의 결집력은 정말 대단한 수준이로군. 테오도르의 말이 사실이었어. 하나같이 동료가 위기에 처할 경우 서슴없이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자들이야. 훌륭하오. 데이몬. 강해지신 데 이어 이런 동료들까지 만들어냈다니…….' 슈렉하이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이몬은 무심하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데스 나이트 녀석들의 안위가 궁금하니 황궁으로 가 볼 생각일세. 자네들은 계속 헬튼과 비에리의 옆을 지켜주게."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십시오." 데이몬의 말에 용병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데이몬은 몸을 일으켰다. "슈렉하이머. 당신은 나와 함께 갑시다. 녀석들이 당신을 보면 무척 반가울 것이오." "그럴까요? 저 역시 그들이 보고싶습니다." 둘은 몸을 돌려 문으로 다가갔다. 용병들이 그들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304회. 데이몬과 슈렉하이머는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슈렉하이머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두 눈만 빠끔히 내놓은 차림새가 되어 있었다. 물론 경비병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충분한 모습이었지만 누구 하나 제지하는 자가 없었다. 함께 가는 이가 크로센 제국의 제 1황자였으니 그 누가 앞을 가로막겠는가? 그러나 데이몬의 얼굴에는 짜증이 짙게 서려 있었다. 경비병들의 인사에 일일이 답례하는 것이 여간 성가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문을 통과한 데이몬은 푸념이라도 하듯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저놈들은 허리도 아프지 않나?" 뒤따라가던 슈렉하이머가 데이몬의 말을 받았다. "여전히 털털하시군요. 제 기억으론 데이몬께서 500년 전과 전혀 변함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몰골이야 많이 변했지." "그런데 아까 그 소녀 말입니다." 슈렉하이머의 말에 데이몬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율리아나를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그 소녀는 그 누군가와 외모가 정말 똑같더군요. 자칫 잘못했으면 저도 착각할 뻔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데이몬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닮은 것은 오로지 생김새 뿐이오. 그것 말고는 둘 사이에서 비슷한 점을 찾아볼 수 없지." "대리만족 때문입니까?" 데이몬의 시선이 느릿하게 돌아갔다. "제가 보기에 저 소녀는 데이몬을 무척………." "그만하시오. 더 이상은 허용하지 않겠소. 단지 심심풀이로 데리고 있는 계집아이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없소. 그러니 쓸데없는 비약은 삼가도록 하시오." 데이몬이 냉랭하게 말을 자르자 슈렉하이머의 눈구멍에게 기괴한 안광이 솟구쳤다. "여전히 성녀님을 사랑하시는군요."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소?" 히쭉 웃은 데이몬은 지체 없이 감옥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질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머리를 흔든 슈렉하이머는 서둘러 뒤를 따랐다. 데스나이트들이 갇혀 있는 곳은 황궁 지하에 위치한 거대한 감옥이었다. 주로 대역죄인들이 갇히기 때문에 감옥의 방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견고했다. 3면이 석벽으로 되어 있었으며 감옥의 입구에는 어른 팔뚝 굵기의 쇠창살이 촘촘히 쳐져 있었다. 하지만 감옥 대부분은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쇠창살을 온통 뒤덮고 있는 거미줄은 실추될 대로 실추된 크로센 제국의 황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 했다. 데이몬과 슈렉하이머는 근위병의 안내를 받으며 감옥 내부로 들어섰다. 저벅저벅. 걸어가는 발걸음소리가 석벽에 공명되며 마치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걷는 듯한 착각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데이몬은 느릿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텅 비어 있는 감옥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적막감이 느껴지자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만약 크로센의 황권이 강했다면 지금쯤 페르슈타인 공작과 그 부하들이 이 감옥을 가득 채우고 있었을 텐데 말이야. 벌써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수도 있고…….' 늘어서 있는 감옥의 수는 상당히 많았다. 그것을 보아 옛 크로센 황제들의 힘이 상당히 막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감옥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백 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걷기가 지루했던지 데이몬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다. "얼마나 더 가야 하나?" 그 말에 안내하던 경비기사가 허리를 팍 꺾었다. "조금만 가시면 당도하실 수 있사옵니다. 전하." "알았네." 퉁명스러운 대답에 경비기사는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다시 안내를 시작했다. 감옥 사이를 걸어 들어간 일행의 앞에 커다란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체가 강철로 주조된 문에는 각종 기하학적인 형상이 양각되어 있었다. 문양을 살펴보던 데이몬의 눈이 빛났다. '공간이동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마법진이로군. 6서클 정도의 대마법방어진이 새겨져 있고 락(lock)이 제한적으로 걸려 있는…….' 상황을 보니 마법사를 가두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감옥 같았다. 물리적인 힘 외에 흑마법까지 쓸 수 있는 데스 나이트들을 구속하기 위해서는 더 없이 적합한 감옥이었다. 데이몬이 물끄러미 감옥문을 쳐다보자 안내해 온 기사가 다가가서 문을 두드렸다. 똑똑. 대답은 즉각 터져나왔다. "무슨 일이오?" "알카리스 황태자 전하를 모시고 왔소. 어서 문을 여시오." "잠시만 기다리시오." 그러나 열린 것은 문이 아니라 문 상단에 나 있는 조그마한 창이었다. 그 사이로 번뜩이는 눈빛 한 쌍이 나타나 일행들의 모습을 샅샅이 훑었다. 상당히 용의주도한 경계였다. 신분이 확인되었는지 곧 자물쇠 푸는 소리가 들렸다. 덜컹. 그와 동시에 문에 새겨진 마법진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니 마법진이 순차적으로 해제되는 모양이었다. 문이 열리자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기사들의 복명소리가 감옥 내부에 울려퍼졌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감옥 안에 들어간 데이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죽 늘어선 기사들의 대열이었다. 중무장을 갖춘 기사들이 일제히 한 쪽 무릎을 꿇은 상태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복색이 틀린 것을 보아 왼쪽에 포진한 이들이 크로센 기사단, 오른 쪽에 포진한 자들이 듀크 나이츠인 듯 싶었다. 마법진을 해제했을 것이라 짐작되는 5서클 정도의 애송이(데이몬의 관점에서는) 마법사 서너 명도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데스 나이트들은 그들 바로 뒤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곳은 마법진의 힘을 가장 많이 받는 장소였다. 데스나이트들은 큰 대(大)자로 바닥에 고정된 채 육중한 쇠사슬에 칭칭 감겨 있었다. 몸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감겨 있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인간이었다면 벌써 압사하고도 남았겠군.' 그들을 슬쩍 쓸어본 데이몬은 가장 선두에 선, 통솔자로 짐작되는 기사들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난 데스나이트들을 회수하러 왔다." 그 말에 기사 둘이 예를 취한 상태로 몸을 일으켰다. 데이몬의 안목에 의하면 상당한 실력을 가진 기사들이었다. 데스나이트가 가진 실력을 감안한 때문인지 소속된 기사단에서 적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들이 경비기사들은 통솔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그대들의 임무는 모두 끝났다. 데스나이트는 내게 맡기고 이만 나가보도록." 이미 페르슈타인 공작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던지 듀크 나이츠의 우두머리는 두 말도 하지 않고 복명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크로센 기사들의 통솔자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괘,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데스나이트들은 엄청나게 강력한 존재들입니다. 행여나 전하의 안전에 위협이……." 데이몬은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걱정할 것 없다. 이미 난 완벽하게 이들을 지배하고 있으니까……. 비록 저주받은 존재들이지만 이 데스나이트들은 앞으로 벌어질 3차 종족전쟁에서 크나큰 역할을 할 것이다." 걱정스런 눈빛을 한동안 보내던 크로센 기사단 통솔자는 결국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로브를 뒤집어 쓴 자가 조금 수상하긴 해도 그에겐 황태자의 명을 거부할 만한 담량이 없었다. "명을 거행하겠나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임무는 끝났다. 이만 철수한다." 듀크 나이츠들은 이미 철수준비를 하고 있었다. 장비를 챙긴 크로센 기사단원들은 하나씩 데이몬에게 예를 취하며 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의혹어린 눈빛으로 슈렉하이머를 한 번씩 쳐다보고 나가는 것을 보니 의심이 완전히 가시지 않는 것 같았다. 덜컹. 마지막 경비기사가 나가자 데이몬은 문을 닫았다. 비록 몸이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지만 락(lock) 정도는 어렵지 않게 문에다 걸 수 있었다. 감옥 안에는 곧 데이몬과 슈렉하이머, 그리고 데스나이트만 남게 되었다. 느긋하게 고개를 돌리던 데이몬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아차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데스나이트를 묶고 있는 쇠사슬의 열쇠를 미처 받지 않은 것이다. "이런 실수가……." 그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할 수 없지. 알아서 빠져나오라고 해야겠군." 데이몬이 정신을 차렸기 때문에 데스나이트들은 원래의 힘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자력으로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전문적으로 어둠의 마력을 차단하는 신성마법진 위에 갇혀 있는데다 몸을 칭칭 감고 있는 쇠사슬은 한 눈에 보기에도 오우거 포획용으로 사용하는 특제품이었다.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제 아무리 데스나이트라도 끊을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육중한 쇠사슬이었다. 처량한 데스나이트의 몰골을 쳐다보던 데이몬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잘들 있었나?" 아까부터 데이몬을 쳐다보고 있던 헬버트론의 눈에 기이한 광망이 번뜩였다. "노스우드 평원에서 본 얼굴이로군. 하지만 네놈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용모야. 적어도 악당이란 그에 걸맞는 외모를 가져야 하는 법이다." 데이몬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육시랄 놈. 이런 상황에서도 날 능멸하다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우릴 풀어다오." "시끄러워." 데이몬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마법진의 중추를 향해 걸어갔다. 이미 그는 마법진의 구성을 모두 분석해놓은 상태였다. 마법진을 설계했던 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인간임에는 분명할 터, 어지간한 인간 마법사는 결코 데이몬의 성취를 따라잡을 순 없었다. 수명의 한계를 극복하지 않은 이상에는……. 중추가 되는 마법진에 다가선 데이몬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영구적으로 설계된 마법진이라서 일시해제가 가능하니 다행이로군. 지금 내 몸상태로 이 정도 마법진을 완전히 해제하기는 힘들지." "이 빌어먹을 놈아. 빨리 풀어다오." 프림베르그의 것으로 짐작되는 고함소리가 들려왔지만 데이몬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데스나이트들을 향해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시끄러운 놈들." 짧게 내뱉은 데이몬은 손을 뻗어 마법진의 한 부분을 짚었다. 정확히 마나의 흐름이 교차되는 곳이었다. 손가락에 마나를 불어넣자 그 부분이 서서히 지워지기 시작했다. 마법진의 음각도형이 그대로 메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마법진을 따라 돌고 있던 마나의 움직임이 순차적으로 더뎌지고 있었다. 데이몬은 조심스럽게 마법진을 도는 마나의 흐름을 차단해버렸다. 파츠츠츠. 눈부시게 빛나고 있던 마법진은 외줄기 빛을 내쏘더니 효력을 상실해버렸다. 데스나이트들의 힘을 속박하고 있던 신성력 역시 소멸되었다. 데이몬은 손을 들어 뺨으로 흘러내린 땀방울을 훔쳤다. "되었다. 쇠사슬은 네놈들이 알아서 풀어." "썩어 문드러질 놈." 반사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왔지만 데스나이트들은 순순히 쇠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제 아무리 견고한 쇠사슬이라도 신성력이 사라진 이상 데스나이트들을 속박할만한 힘이 없었다. 섬뜩한 빛과 함께 건틀릿에 데스 블레이드가 맺혔다. 그러자 쇠사슬은 마치 썩은 동아줄처럼 맥없이 끊어져버렸다. 어지간한 소드마스터도 흉내내기 힘든 비기를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투투툭. 쇠사슬을 끊어낸 데스나이트들이 하나씩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곧 자신들의 병기를 수습하기 위해 벽쪽으로 걸어갔다. 며칠을 꼬박 묶여 있었지만 그들의 몸놀림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날렵하고 민첩했다. 마력병기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데스나이트들의 무기는 탁자 위에 고이 올려져 있었다. 기사라면 그 누구라도 욕심을 낼 법한 최고급 아티팩트들이었지만 규율이 엄격한 크로센 기사들은 무기들을 그저 탁자 위에 가지런히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305회. 르헤르트 세이버를 집어든 헬버트론이 검을 살며시 뽑았다. 스릉.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거무튀튀한 예기가 흘러나왔다. 원래는 찬란하게 빛났어야 할 예기가 데스나이트의 마력에 침습되어 기괴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별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헬버트론은 검을 허리에 차며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힘을 되찾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투구 사이에서 섬뜩한 데스나이트 특유의 눈빛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나저나 네놈의 명은 꽤나 질긴 편이군. 그런 상황에서도 살아나다니 말이야." "베르키스 놈을 처치하지 못했는데 먼저 죽을 순 없지." 데이몬이 대꾸하자 헬버트론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이지. 그건 그렇고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주겠나?" "뭐가?" "경비하던 애송이들이 너에게 황태자라 부르던데 대관절 이유가 뭐지?" 데이몬은 손을 내저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별 거 아니야. 베르키스 놈의 레어에서 탈출하려고 구한 육체가 공교롭게도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 것이었거든……."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대답이었지만 헬버트론으로써는 결코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놀랍군. 그렇다면 네가 장차 크로센 제국의 황제가 되는 건가?" 데이몬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다. 내 염원은 오로지 복수에 국한되어 있을 뿐이다. 제 아무리 거대한 제국의 황제 자리도 감히 내 마음을 붙들진 못한다." "하지만 네놈이 크로센 제국의 황제가 된다면 복수의 길이 한층 수월해질 텐데?" 데이몬은 히쭉 웃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지 않아도 아르카디아의 정예병 백만이 우리의 복수를 도와주기 위해 대륙 전역에서 모여들 테니까……." 그간 있었던 일들을 간단히 설명해 주자 헬버트론을 위시한 데스나이트들은 얼이 빠진 듯한 반응을 보였다. "네놈은 정말 대단한 놈이로군. 그런 행운까지 거머쥘 수 있다니……. 그건 그렇고." 타오르는 듯한 헬버트론의 시선이 데이몬의 등뒤로 꽂혔다. 드디어 슈렉하이머에게 눈길이 닿은 것이다. "저 너절한 리치 나부랭이는 뭐지? 네놈을 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보아 적은 아닌 것 같고……. 설마 베르키스를 상대하려고 리칠 만든 것은 아니겠지?" 데이몬은 짐짓 인상을 썼다. "정말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이로군. 비록 과거의 일이지만 베르하젤의 고위급 성직자에게 그런 망발을 퍼붓다니 말이야." 헬버트론의 얼굴에 얼떨떨하다는 빛이 번져갔다. "고위급 성직자? 리치가?" "그렇다. 그것도 너희들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 그런 일이……." 데스 나이트들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그럴 것이 그들을 아는 자들은 거의 대부분 노스우드 평원의 망령이 되어 있었다. 동료, 부하 할 것 없이 모두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영혼조차 안식을 취하지 못하고 영원히 떠돌아다녀야 하는 신세가 아니던가.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슈렉하이머는 앞으로 나섰다. 리치라는 특성상 겉으로 감정을 드러낼 순 없었지만 슈렉하이머는 지금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한때 막강한 이카롯트 제국을 이끌어 가는 지체 높은 수뇌부의 일원이었다. 비록 길은 다르지만 그들은 서로의 성취를 존중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저주받은 언데드가 되어 머나먼 아르카디아에서 조우하고 있었다. 기가 막힌 운명인 것이다. 먼저 말을 꺼낸 자는 슈렉하이머였다. "반갑습니다. 500년이 지난 지금 그대들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 "혹시 슈렉하이머란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그때서야 상대를 알아본 듯 데스나이트들의 눈에서 강렬한 광망이 솟구쳤다. "슈렉하이머? 정녕 슈렉하이머 대승정이란 말이오?" 슈렉하이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승정께서 리치가 되시다니……." 데스나이트들은 말을 잃었다. 명예를 추구하는 최고의 기사들이 데스나이트가 된 것도 땅을 쳐야 마땅한 일인데 신앙심이 독실한 대승정마저 저주받은 어둠의 존재로 화할 줄이야…….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많이 놀라셨겠지만 사실입니다." 그들을 쓸어보며 슈렉하이머는 자신이 이렇게 된 연유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노스우드 평원을 빠져나온 데서부터 데이몬의 손에 의해 리치가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간략하게. 데스나이트들은 놀라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하며 열심히 경청했다. 슈렉하이머의 설명을 모두 들은 사라미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이제 대승정께서 리치가 되신 데 대해 이해가 됩니다." 살아있을 때 독실한 베르하젤의 신자였던 사라미스는 슈렉하이머 대승정에게 상당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자들에 비해 유독 공손하게 대하는 것을 보니 죽어 언데드가 되었다 해도 존경심만은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헬버트론이 슈렉하이머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환영합니다. 저희들과 슈렉하이머 님과는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는 점에서 처지가 같습니다. 함께 힘을 합쳐 기필코 복수를 성공시킵시다." "당연히 그래야 지요." 슈렉하이머는 묵묵히 내민 손을 잡았다. 뼈마디가 앙상한 리치의 손과 거무튀튀한 건틀릿에 싸인 데스나이트의 손이 힘차게 합쳐졌다. 둘의 악수가 끝나자 기다리고 있던 라인델프가 또다시 손을 내밀었다. "저 역시 대승정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비록 언데드가 되어 만나긴 했지만 생전에 교분이 있던 자를 대하는 것이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게다가 앞으로 힘을 합쳐 싸워야 할 동료가 되지 않았던가? 슈렉하이머는 데스나이트들의 면면을 하나씩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비록 옛날처럼 축복을 내려드릴 수는 없지만 싸우실 때 어느 정도 지원은 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성력 대신에 어둠의 마력으로 무장한 상태이니 별달리 부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추호도 부족하지 않지요. 7서클 마법의 지원사격이라면 무서울 게 없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해후를 나누던 장면을 지켜보던 데이몬이 앞으로 나섰다. "자 해후는 이것으로 끝내자. 할 일이 많으니 너희들은 서둘러 인크레시아에 들어가도록 해라." 데스나이트들에게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솔직히 말해 마법진에서 일어나는 신성력은 그들에겐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신성력이란 인간에겐 생명력을 북돋워주는 축복이었지만 언데드에겐 치명적인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감옥 속의 신성력은 상당히 강력한 편이었다. 그들이 워낙 강력한 언데드라서 견딜 수 있었지 만약 좀비나 스켈레톤 따위의 하급 언데드였다면 지금쯤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을 터였다. 마법진이 해제되어 더 이상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지 않는다고 하나 남아있는 신성력이 계속해서 고통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데이몬이 인크레시아를 열어제치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법보고 인크레시아가 입구를 드러내자 데이몬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상처의 복원은 추후에 해 줄 테니 모두들 들어가라." "그렇게 하지." 고개를 끄덕인 헬버트론이 슈렉하이머의 팔을 잡아끌었다. "인크레시아를 처음 보시겠지만 생각보다 지내기가 편합니다. 언데드에겐 아늑한 보금자리나 마찬가지지요. 그럼 들어갑시다. 서로 나눠야 할 대화가 무척 많을 것 같군요." 하나같이 눈빛을 빛내는 것을 보니 아마도 가족들의 소식에 관해 물어보려는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정말 특이한 언데드라 할 수 있었다. 의도적이긴 했지만 데이몬이 생전의 지성을 최대한 허락한 때문에 인간보다 오히려 더 인간다운 데스나이트가 된 것이다. 마음이 급했는지 그들은 서둘러 슈렉하이머를 끌고 인크레시아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바램에 불과할 뿐이었다. 데이몬은 냉정하게 그들 사이에 끼여들었다. "들어가는 것은 너희들뿐이다. 슈렉하이머 대승정은 나와 함께 해야 할 일이 있다." 무표정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힐끔 쳐다본 헬버트론이 욕설을 퍼부었다. "치사한 놈. 우리 잘되는 꼴은 죽어도 못 보지?" "당연하지." 냉큼 대답한 데이몬이 슈렉하이머를 잡아끌자 데스나이트들은 할 수 없다는 듯 인크레시아 속으로 사라졌다. 데스나이트들이 모두 들어가자 데이몬은 인크레시아를 닫았다. 묵묵히 보고 있던 슈렉하이머가 데이몬에게 한 마디 던졌다. "그런데 데이몬. 전 이제 대승정이 아닙니다. 사악한 리치에게 대승정이란 호칭은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데이몬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나나 데스나이트들에게 있어 당신은 영원한 대승정이오. 비록 베르하젤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오." "………."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한 그 어떤 신관이라 해도 당신만큼 트루베니아 사람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졌던 자는 없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슈렉하이머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데이몬이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이만 갑시다. 지하 광장에 보관되어 있는 본 드래곤을 회수하고 황궁으로 들어가야 하니 시간이 없소." 데이몬이 걸음을 옮기자 슈렉하이머는 묵묵히 뒤를 따랐다. 본 드래곤을 수습하는 것은 더욱 수월했다. 이미 지시가 내려져 있었는지 광장을 경비하는 기사들은 벌써부터 철수준비를 하고 있었다. "본 드래곤을 풀어주어라." 기사들은 데이몬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크레이트를 감싸고 있던 쇠사슬을 벗겨 주었다. 풀려난 지크레이트는 데이몬을 보자 반갑다는 듯 포효를 내질렀다. 콰루루루. 사방이 막힌 지하광장에서 울려 퍼진 포효소리는 상당히 컸다. 경비기사들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귀를 틀어막아야 할 정도였다. 한차례 포효를 내지른 지크레이트는 거대한 대가리를 공손히 조아렸다. 절대 복종을 뜻하는 태도. 데이몬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나도 반갑다. 하지만 해후는 나중에 하자꾸나." 머뭇거림 없이 지크레이트를 인크레시아에 수납한 데이몬은 러셀런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잔해(殘害)라고 밖에 표시할 수밖에 없는 러셀런트의 동체 역시 쇠사슬로 빈틈없이 동여매어져 있었다. 데이몬이 눈짓을 하자 기사들이 달려들어 쇠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데이몬은 혀를 찼다. "과연 어둠의 마력을 얼마나 쓸어 부어야 복원될지……. 쯔쯔." 러셀런트의 처참한 몰골을 보자 불과 얼마 전에 치른 혈투가 떠올랐다. 막강한 베르키스의 전투력은 떠올리기만 해도 진저리가 쳐질 정도였다. 믿었던 러셀런트가 단 한 방에 박살이 나 버릴 정도라니……. 조바심을 떨쳐버리려는 듯 데이몬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래도 다행이로군. 기사들이 러셀런트의 잔해를 깡그리 수거해 놓았으니.' 명령을 내리자 인크레시아는 즉각 러셀런트를 집어 삼켰다. 천고의 마법보고는 단 한 조각의 잔해조차 남겨두지 않았다. 제대로 복원시키기 위해서는 한 조각이라도 놓쳐서는 안되기 때문에 데이몬은 세심하게 신경 써서 잔해를 수습했다. 공중전을 벌이려면 반드시 러셀런트를 복원시켜야 했고 그로 인해 방대한 어둠의 마력이 소모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작업을 마친 데이몬은 슈렉하이머를 쳐다보았다. "되었군. 갑시다." "알겠습니다." 슈렉하이머는 묵묵히 데이몬의 뒤를 따랐다. 그의 등판으로 경비기사들의 의혹 어린 시선이 집중되었다. 검은 로브로 감쌌지만 기사들은 슈렉하이머가 인간이 아니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있었다. 급한 일을 처리한 데이몬은 지체 없이 황궁으로 향했다. 트루베니아 침공을 논의하기 위한 회합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테오도르는 그 회합의 준비 문제로 정신 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데이몬과 동행하지 못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전하." 화려한 갑주로 치장한 경비기사가 데이몬을 안내했다. 잘 훈련된 수십 명의 근위병들이 숙련된 동작으로 둘을 에워쌌다.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몇몇 근위병이 힐끔거리며 슈렉하이머를 쳐다보았지만 그것뿐이었다. 감히 황태자와 동행하는 자를 검문할 만한 담량을 가진 자는 근위병 중에 없었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306회. 데이몬과 슈렉하이머는 근위병들의 철통같은 경호를 받으며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끝없이 늘어선 회랑과 전각을 쳐다보던 데이몬이 눈살을 찌푸렸다. '더럽게 넓군. 과연 초강대국의 황궁다워.' 과거 크로센 대제가 트루베니아의 군주들로부터 받았던 대접을 치욕이라 생각한 크로센 제국의 역대 황제들은 엄청난 자금과 인력을 투입하여 황궁을 정비했다. 트루베니아에 존재했던 그 어떤 제국의 황궁보다 크고 호화롭게 말이다. 그 탓에 데이몬이 이처럼 곤욕을 치러야 했으니……. 어쨌거나 데이몬과 슈렉하이머는 한참을 걸어서야 목적했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바로 페르슈타인 공작의 집무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테오도르가 깍듯한 태도로 데이몬을 맞았다. 집무실에 들어선 데이몬은 주위를 살폈다. 탁자에는 집무실의 주인인 페르슈타인 공작과 크로센 기사단의 총수인 윌리엄스 후작이 착석해 있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옆에는 크로비츠가 착석해 있었고 크로센기사단의 부단장인 카시모프의 얼굴도 보였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데이몬의 얼굴이 흐리멍텅하게 변했다. 요인들, 특히 윌리엄스 후작이 있으니 부득이 백치 시늉을 해야 했던 것이다. 집무실 안에는 그 외에도 여러 명의 요인들이 착석해 있었다. 얼굴은 모르지만 크로센 제국을 이끌어나가는 대귀족들임에는 틀림없었다. 무표정하게 데이몬을 응시하던 페르슈타인 공작이 금세 시선을 거뒀다. 그러나 윌리엄스 후작을 비롯한 요인들이 데이몬과 슈렉하이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집중되자 데이몬은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속으로는 죽을 맛이었지만 그런 기색이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데이몬에게 살짝 눈짓을 한 테오도르가 짐짓 슈렉하이머를 쳐다보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비밀병기들을 잘 수습하셨습니까?" 미리 말을 맞춰 놓았는지 슈렉하이머는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그렇소. 데스나이트 넷과 본 드래곤 둘을 마법보고에 집어넣은 것을 틀림없이 확인했소이다."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테오도르가 고개를 돌렸다. "정식으로 소개 드리겠습니다. 슈렉하이머 님은 500년 전 베르하젤 교단의 대승정이셨던 분입니다. 트루베니아 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자청해서 뱀파이어가 되셨고 이번에 황태자 전하께 어둠의 마력을 얻어 리치의 몸을 얻으셨습니다." 테오도르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이미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소개가 끝나자 슈렉하이머가 목례를 했다. "처음 뵙겠소이다." 공손히 인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인들의 반응은 그리 좋지 못했다. 페르슈타인 공작을 따르는 자들은 별반 티를 내지 않았지만 나머지 요인들의 얼굴에는 기이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마치 흉측한 벌레를 보는 듯한 표정. 그들의 시선에는 경멸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것은 슈렉하이머에게 극히 익숙한 반응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그들은 저주받은 언데드와 자리를 함께 한다는 사실을 수치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느낀 슈렉하이머는 착잡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들은 카심 용병단원들과는 사뭇 다르군.' 다행히 슈렉하이머의 내심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리치가 지을 수 있는 표정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어색함을 느낀 듯 테오도르가 끼여들었다. "비록 슈렉하이머 님께서 리치라고는 하나 우리에겐 없어서는 안될 분이십니다. 500년 전 트루베니아에서 벌어진 2차 종족전쟁 당시 슈렉하이머 님은 트루베니아 군의 수뇌부에 소속되어 전쟁을 치르신 분입니다. 슈렉하이머 님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략을 짠다면 앞으로 벌어질 종족전쟁을 우세하게 치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이 분을 동료로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윌리엄스 후작이 퉁명스럽게 한 마디 내뱉었다. "그렇다면 저 리치를 우리 수뇌부에 넣겠다는 말이오?" 테오도르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익히 예상은 했지만 고위급 귀족들이 그의 스승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이런 일을 염려했기 때문에 스승이라는 사실까지도 밝히지 못한 것이다. 철저히 외곬수적인 기질을 가진 윌리엄스 후작은 스승을 단지 저주받은 언데드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일례로 그의 손은 지금 허리춤의 검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색을 보일 경우 인정 사정없이 베어버릴 듯한 기세였다. 테오도르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슈렉하이머 님은 이미 카심 용병단의 단원이 되셨습니다. 단지 궁정에 머물며 전략수립만을 도와주실 뿐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요인들의 얼굴에 다행이라는 빛이 스쳐지나갔다. 저주받은 언데드 따위와 동료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 내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있던 데이몬은 분통이 터졌다. '젠장맞을……. 슈렉하이머 대승정이 언데드가 된 연유를 알고도 저 모양이니…….' 테오도르가 요인들을 둘러보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럼 회합을 시작하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자리에 앉아 주시겠습니까?" 데이몬은 멍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쉴새없이 딴청을 피우는 모습은 영락없는 백치였다. 그동안 갈고 닦은 연기력이 바야흐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앉을 필요가 없는 슈렉하이머는 데이몬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테오도르의 낭랑한 음성이 집무실 내부로 울려 퍼졌다. "그럼 지금부터 회합을 시작하겠습니다." 테오도르의 주재아래 마침내 회합이 시작되었다. 참석한 요인들은 품고 있던 의견을 하나씩 제시했고 그에 대한 반론이 거듭 제기되었다. 첫 번째 주제는 대관식 문제였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의견이 한 차례 오고 간 듯 싶었다.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중년귀족 하나가 자신만만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우리 크로센 제국은 아르카디아 제일의 강대국이오. 따라서 드비어스 황태자 전하의 대관식은 철저한 준비를 통해 그 어떤 왕국도 흉내내지 못할 만큼 성대하게 거행해야 하오." 그의 말에 몇몇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럴 순 없소. 우린 지금 엄청난 전쟁을 준비하고 있소. 아르카디아의 운명 전체가 걸려 있는 전쟁을 목전에 두고 허례허식으로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은 한심한 일이오." "허례허식이 아니라 크로센 제국 황제폐하의 위엄을 만천하에 떨치자는 것이오." 논쟁이 거듭되는 동안 데이몬은 계속 딴청을 피웠다. 속으로는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젠장. 왜 내가 이런 한심한 회합에 참석해야 하는 거지?' 지금 벌어지는 회합에서 그와 슈렉하이머는 철저히 국외자였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를 백치로 알고 있는 이상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상책이었다. 하지만 지금 회합에서 논의되는 사안들은 그의 관점에서 하등 필요 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효율성을 최고로 생각하는 무림인, 그것도 사파고수 출신인 그가 의식의 절차 따위로 설왕설래하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심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테오도르가 논쟁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했다. "그 사안은 귀족회의를 통해 다수결에 붙이는 게 낫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대 트루베니아 전쟁에 대한 사안을 협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잠시 끊은 테오도르가 페르슈타인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간 전쟁을 반대하셨던 페르슈타인 공작전하께서 동참하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선 대 트루베니아 전쟁의 선포와 함께 토벌군의 모집에 대해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는지 테오도르의 말이 끝나자마자 페르슈타인 공작이 입을 열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본인은 그간 트루베니아와의 전쟁을 극구 반대해 왔소. 그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며, 또한 전쟁수행으로 인해 민생이 극도로 피폐해질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소. 드래곤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현명하고 생각이 깊은 종족. 그런 강력한 존재에게 굳이 전쟁을 거는 것이 인간에겐 하등 불필요한, 도리어 멸망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했소." 말을 마친 공작은 요인들의 면면을 느릿하게 둘러보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소. 여기 이 자리에서 내 생각이 틀렸음을 명백히 밝히는 바요." 그 말에 요인들은 깜짝 놀랐다. 보유한 권력만큼이나 자존심도 드높은 페르슈타인 공작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실수를 거리낌없이 밝히다니……. 놀란 표정으로 수군거리는 요인들의 귀로 공작의 음성이 똑똑히 울려 퍼졌다. "그동안 우린 드래곤들의 꿍꿍이에 대해 전혀 생각지 못했소. 놈들의 목적은 트루베니아에 이어 아르카디아에 살고 있는 인간의 씨를 깡그리 말리는 것이었소. 본인은 어리석게도 중앙광장에서의 참사를 겪고 나서야 그런 드래곤들의 속셈을 알게 되었소." 좌중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드래곤들은 애당초 평화로운 공존 따윈 염두에도 두지 않았소. 알아본 바로 펠젠틴에 난입했던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는 2차 종족전쟁 당시 드래곤과 오크 연합군의 전략을 진두지휘했던 지휘관 격인 드래곤이었다 하오. 놈은 가증스럽게도 날 이용해 크로센 제국의 분열을 꾀했소. 만약 놈의 계략이 성공했었다면 크로센 기사단과 듀크 나이츠는 고스란히 상잔했을 것이고 대 크로센 제국은 뼈저린 내전을 치러야 했을 것이오. 그 일이 불발로 끝난 것이 우리에겐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소." 페르슈타인 공작이 잠시 말을 끊자 테오도르가 때를 놓치지 않고 끼여들었다. "그렇습니다. 비록 계략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드래곤들은 분명히 제2, 제3의 계획으로 아르카디아를 도모하려 할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 먼저 선제공격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놈들에겐 극히 호전적이고 잔인한 수백만의 오크 전사들이 있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윌리엄스 후작이 한 마디 내뱉었다. "오크 나부랭이 따위야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소. 그까짓 미개한 놈들은 잘 훈련된 아르카디아 병사들에겐 전혀 상대가 되지 못하오. 변변찮은 공성장비조차 가지지 못했으니 오크 놈들은 성 하나조차 제대로 점령하지 못할 거요." 순간 찢어지는 듯한 저음이 집무실 내부에 울려 퍼졌다. 슈렉하이머의 음성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2차 종족전쟁 당시 수많은 트루베니아의 성들이 오크군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아무리 견고한 성도 오크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전쟁 말기에는 일부러 성을 비우고 산악전을 전개하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순간 윌리엄스 후작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들지 않는 리치가 함부로 끼여드는 것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슈렉하이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디서 그런 망발을 내뱉는 건가? 자고로 성이란 인간이 만든 최고의 방어벽이다. 그런 방어벽을 버리고 도리어 오크에게 유리한 산악전을 전개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정신나간 전략이다. 그런 전략을 채택했기에 트루베니아가 멸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슈렉하이머는 눈썹하나도 까딱하지 않았다. "전쟁 초기에는 트루베니아의 지휘관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드래곤 앞에서 성을 이용한 방어전은 일절 통하지 않더군요. 생각해 보십시오. 수많은 병사들이 운집한 성을 목표로 드래곤이 전개한 미티어 스웜이 떨어진다는 가정을 말입니다." 윌리엄스 후작의 안색이 갑자기 경직되었다. 불과 얼마 전에 중앙광장에 퍼부어진 미티어 스웜의 위력을 직접 목격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상상만 해도 몸이 떨려왔다. 슈렉하이머는 태연히 말을 이어나갔다. "보호마법이 걸려 있는 성벽도 미티어 스웜에는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성은 완파되고 성안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은 태반이 몰살당했습니다. 남은 자들은 부상을 입어 전의를 깡그리 상실했지요. 뒤이어 오크 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엄청난 대군을 막아낼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울프 라이더의 추격 때문에 퇴각조차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트루베니아 군이 성을 버리고 산악전을 벌여야 했던 이유입니다." 슈렉하이머의 말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벌판에서의 전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인간 군대가 가진 최고의 힘은 각 병과의 역할을 바탕으로 한 밀집대형입니다. 하지만 전투에서 트루베니아 병사들은 섣불리 밀집대형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드래곤의 공격마법에 의해 일시에 몰살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입니다." 뒤이어 튀어나온 윌리엄스 후작의 말은 한 마디로 비명에 가까웠다. "그, 그런 일이……. 그렇다면 어찌해서 드래곤을 먼저 처리하지 않았나? 그런 상황에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드래곤을 먼저 없애야 한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승산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저희 지휘관들도 물론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안전한 후방에 위치한 채 엄청난 오크 대군의 호위를 받는 드래곤을 무슨 수로 없앨 것입니까? 게다가 놈들은 상황이 불리해지면 아무 거리낌없이 도망칩니다. 마법을 사용하던 날아오르던 잡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윌리엄스 후작은 말을 잊었다. 그것은 요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오크 따위가 적이 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전투를 들어보니 결코 만만한 적이 아니었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307회. 드래곤과 오크의 조합은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가공했다. 슈렉하이머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드래곤과 오크 연합군. 물론 한 종족씩만 상대했다면 트루베니아는 결코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희들에겐 드래곤의 몸에 검을 박아 넣는 대가로 초개처럼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한 수많은 용사들이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드래곤이 끼여들지 않은 전투에서는 대부분 트루베니아 군이 승리를 거뒀습니다. 드래곤이 없는 오크군은 아무리 수가 많더라도 두렵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이 두 종족의 힘이 합쳐지자 그 위력은 몇 배나 불어났습니다. 접전이 시작되면 드래곤들이 이쪽의 마법군단과 궁수대를 가장 먼저 날려버립니다. 그 때문에 트루베니아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오크보병들과 어울려 난전을 벌여야 했습니다. 마법공격에 당하지 않으려면 불리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드래곤들이 끌어들인 중형 몬스터 역시 전쟁의 판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놈들로 인해 중장기사단이 좀처럼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지요." 듣고만 있을 수 없었던지 윌리엄스 후작이 딴죽을 걸었다. "중형 몬스터라면 오우거와 트롤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걱정할 것 없다. 아르카디아에서 그깟 중형 몬스터들은 기껏해야 사냥감에 지나지 않으니까." 슈렉하이머는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록 아르카디아 기사들의 실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긴 했지만 그리 쉽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전쟁에서는 일대 일로 싸우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형 몬스터 한 기당 평균 10∼20마리의 오크보병들이 붙어 있습니다. 중형 몬스터가 취약한 배후를 공격받는 것을 막기 위해 섭니다." "허. 놀랍군." 윌리엄스 후작은 조용히 입을 닫았다. 트루베니아의 오크들이 그렇게 지능적으로 싸웠다는 점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비록 아르카디아 기사들이 중형 몬스터 사냥에 일가견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수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리치의 말대로 호위병력이 붙어있는 중형 몬스터라면 상대하기가 극히 난해할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어 고맙다." 슈렉하이머를 보는 윌리엄스 후작의 눈빛은 이제 판이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슈렉하이머가 제공한 정보는 수천, 수만의 병사를 살릴 수 있는 훌륭한 정보였다. 때문에 그는 슈렉하이머에 대해 일말의 고마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슈렉하이머는 가벼운 목례로 화답했다. "별 말씀을……. 동포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할 것입니다." 윌리엄스 후작의 눈동자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동포라니……." 듣고 있던 테오도르가 재빨리 나섰다. "트루베니아를 침공해야 하는 당위성은 그것말고도 더 있습니다. 트루베니아에 아직까지 상당수의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몬스터 사냥을 떠났던 기사들의 손에 다수의 트루베니아 인이 건너왔지만 그곳에는 아직까지 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오크 족의 노예로 가축보다도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이며 그 수가 상당하다는 것입니다." 말을 마친 테오도르가 슈렉하이머를 쳐다보았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슈렉하이머는 곧 설명을 시작했다. 그의 입을 통해 트루베니아 인들의 처참한 삶이 하나씩 흘러나왔다. 거기에는 데이몬이 겪었던 경험도 적지 않게 섞여 있었다. 섣불리 발언하지 못하는 데이몬 대신 슈렉하이머가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오크 족의 노예로 힘든 노역에 시달리다 나이가 들면 놈들의 식량이 되어야 하는 불쌍한 사람들의 사정을 깡그리 말이다. 트루베니아 인들의 삶을 듣고 있던 요인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기구한 운명을 가진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슈렉하이머가 설명을 마치자 테오도르가 나섰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기필코 그들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그 일은 바로 적의 보급로를 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장거리 원정을 나선 우리 정벌군의 보급 문제를 해소시켜 줄 수 있습니다. 그들 중에서 병력을 충원할 수도 있지요." 테오도르의 말이 끝나자 황제를 받드는 요인들의 표정은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 지금껏 전쟁을 주창해왔던 그들이었지만 정작 싸워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그리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정치적인 이유로 전쟁을 지지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왜 싸워야 하는지를 확실하게 깨달은 그들의 눈빛은 지금 트루베니아에 대한 전의로 불타고 있었다. 그것은 페르슈타인 공작 측 요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정치적 이유와 가문의 안위를 위해 전쟁에 반대해 왔지만 자세한 상황을 듣고 나니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이 서지 않았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요인들 사이로 페르슈타인 공작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중앙광장의 참사로 인해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소. 그 도발은 바로 인간에 대한 선전포고요. 이미 난 마음을 굳혔소. 날 따르는 기사단과 군대는 하나도 빠짐없이 트루베니아 정벌에 동원될 것이오." 테오도르가 눈치 빠르게 끼여들었다. "다행히도 페르슈타인 공작전하께서 트루베니아 정벌군의 사령관을 맡아주시겠다고 공언하셨고 드비어스 황태자 전하께서도 윤허하셨습니다. 워낙 전략전술에 정통하신 분이니 다른 왕국의 지휘관들도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크로센 기사단을 비롯해 모든 기사단의 명령권 역시 공작전하께 부여될 것입니다." 말을 마친 테오도르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윌리엄스 후작을 쳐다보았다. 자존심 강한 그가 순순히 페르슈타인 공작의 휘하에 들어가려 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으로썬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윌리엄스 후작님. 거기에 동의하십니까? 테오도르를 잠시 쳐다본 윌리엄스 후작은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훌륭한 방법인 것 같군. 정벌군의 총사령관을 맡을 사람은 페르슈타인 공작 단 한 사람밖에 없지. 좋소. 날 위시한 크로센 기사단원들은 총사령관의 명령을 충심으로 받들 것이오. 단 정벌군이 트루베니아 땅을 밟은 이후에 말이오." 페르슈타인 공작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비록 정적의 입장이었지만 조금 전의 발언은 윌리엄스 후작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더 이상 반대가 없는 것 같군. 그럼 테오도르 집정관은 서둘러 대관식을 준비하도록 하시오. 대관식의 규모나 절차는 귀족회의에서 결정하기로 합시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소. 그러니 최대한 빨리 다른 왕국들을 설득해서 기사단과 군대를 끌어 모아야 할 것이오." 테오도르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2차 종족전쟁 당시 드래곤들은 마법을 이용해서 트루베니아와 아르카디아 사이의 바닷길을 막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드래곤이 깨어나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물자와 함께 정벌군을 트루베니아에 상륙시켜야 합니다. 바닷길이 차단되면 보급물자의 추가수송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급 없이 싸워야 하니 무척 어려운 싸움이 되겠군. 시간이 없으니 이만 회합을 마치도록 하지. 구체적인 사항은 대관식이 끝난 뒤에 다시 논의해야 할 것이오." 말을 마친 페르슈타인 공작이 슈렉하이머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나와 함께 갑시다. 내 휘하의 참모와 사단장들에겐 당신의 풍부한 경험이 절실히 필요할 것 같소. 난 당신의 경험을 모두 문서화해서 군단에 돌릴 생각이오." 슈렉하이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회합이 끝나자 요인들이 하나씩 몸을 일으켰다. 테오도르가 데이몬에게 다가왔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데이몬은 가타부타 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와 테오도르가 집무실을 나서자 페르슈타인 공작이 슈렉하이머를 대동한 채 몸을 돌렸다. 남은 요인들도 하나씩 방을 나서기 시작했다. "앞으론 날 그런 쓸데없는 곳에 데리고 다니지 말도록……." 데이몬의 퉁명스런 말에 테오도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스승님을 데리고 들어올 방법이 없었거든요." "그 문제는 이제 해결되었군. 요인들이 슈렉하이머 대승정의 진가를 알아차렸으니 말이야. 그건 그렇고 대관식은 언제 거행할 생각인가?" 데이몬의 말에 테오도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일 귀족회의에 그 문제가 논의됩니다. 빠르면 일주일 후에 대관식을 거행할 생각입니다." "너도 규모나 절차 따위나 중시하는 머저리 놈들의 의견에 따를 생각이냐?" 테오도르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귀족회의에서 다수결이란 곧 페르슈타인 공작의 의견이 채택된다는 뜻입니다. 귀족원 의원들 대부분이 공작의 심복이라 할 수 있지요. 모르긴 몰라도 대관식은 최대한 간소한 방향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들은 지금 집정관의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음미하던 테오도르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페르슈타인 공작과 손을 잡으니 일이 정말 잘 풀리는군요. 한 마디로 능력 하나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데이몬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야망이 큰 만큼 능력이 있어야겠지. 그는 한 마디로 걸물임에는 틀림없는 자야. 문제는 항상 그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야. 어이없는 곳에서 뒤통수를 맞을 가능성도 있어. 우리가 한 방 날렸니 아무래도 앙심을 품고 있겠지?" "이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도 그리 쉽게 당하진 않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건 그렇고……." 데이몬의 눈동자에 모호한 빛이 떠올랐다. "어디 가 있을 만한 곳이 없겠나? 자네도 알다시피 황제의 형이 대관식 기간 동안 황궁에 머물러 있는 다는 것은 그리 모양새가 좋지 않아. 그것도 백치가 아닌가. 그러니 내가 잠시 떠나 있다가 드비어스 녀석이 황제자리에 오르고 정벌군이 대부분 구성된 다음에 돌아오는 것이 좋을 듯 싶네." 예상외로 테오도르는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적당한 곳이 없습니다. 경호상의 문제도 있는 데다 뜻밖의 사태가 일어날 경우……." 말을 흐렸지만 데이몬은 테오도르의 내심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렇겠군. 베르키스 녀석이 수뇌부들을 노리고 다시 난입할 가능성이 있으니……. 놈이 공간왜곡장을 쳐 놓으면 워프로 돌아올 수도 없을 테니 부득이 내가 수도에 있어야겠군." 내심을 들킨 테오도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것은 없어. 자넨 그저 조용한 장소나 하나 물색해 주게." "조용한 장소라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야 하네. 난 그곳에서 마력을 뽑아내어 본 드래곤을 복원할 생각이니 말이야. 자네가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 주게. 어둠의 기운을 감추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지하가 낫겠군." 데이몬은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를 쳐다보던 테오도르가 넌저시 운을 뗐다. "마침 좋은 장소가 있습니다." "외인의 출입이 전혀 없어야 하네." "물론입니다. 그곳은 데이몬과 드비어스 황태자 전하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곳은 바로 크로센 대제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황실의 기념관이니까요. " "크로센 대제라고?" 데이몬의 눈에 호기심이 짙게 떠올랐다. 같은 중원출신이라고 알고 있는 크로센 대제에 대해 흥미가 없다면 그게 바로 거짓말이었으리라. "들어가 본 적이 있나?" 테오도르는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오로지 대제의 직계후손에게만 있습니다. 그러니 데이몬께서는 아무 무리 없이 들어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안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나?" "잘은 모르지만 그 분이 걸어오신 발자취와 함께 후손에게 남겨진 말이 있다고 합니다. 저도 드비어스 황태자전하께 간략하게 들었을 뿐입니다." "그래? 잘 되었군. 대관식 기간동안 그곳에서 기거하면 되겠군." "그곳에는 과거 연무장으로 사용했던 거대한 지하석실이 여럿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본드래곤이 무리 없이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관리하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타인의 눈을 피하기에는 최고의 장소일 것입니다. 고도의 보존마법이 걸려있어 내부가 항상 청결하게 유지된다고 들었습니다." 마음을 정했는지 데이몬이 얼굴을 폈다. "좋아. 난 그곳에 머물러 있겠네. 어차피 내가 할 일은 거의 없을 테니 한 두달 정도 그곳에 박혀 있어야겠군." "그러시는 게 좋겠습니다. 불편하신 점이 없도록 준비를 해 놓겠습니다." "좋아." 마음이 급했는지 데이몬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의 마음 속에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크로센 대제의 모든 것을 보고싶은 마음뿐이었다. 황궁에서의 화려한 생활 따윈 그에겐 거북하기만 할 뿐이었다. "당장 들어가 볼 생각이네. 그러니 날 그리로 안내해 주게." 테오도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308회. 트루베니아 대륙 동남쪽에는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쳐 있는 거대한 펠루시아 산맥이 있었다. 트루베니아에서 가장 높은 산맥으로 험준하기가 이를 데 없는 천험의 오지였다. 펠루시아 산맥은 명멸을 거듭한 여러 종족의 애환이 서려 있는 산맥이었다. 1차 종족전쟁 당시 패배해서 뿔뿔이 흩어진 오크 족은 이 산맥을 최후의 피난처로 삼았다. 워낙 험준하고 척박했기 때문에 인간들은 감히 이곳을 토벌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덕에 오크 족은 명맥을 겨우 유지할 수 있었고 급기야 대반격으로 2차 종족전쟁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둠의 전쟁에서 패배한 대마왕 나이델하르크도 이곳을 거점으로 반격을 꾀했다. 최후의 순간 드래곤의 개입으로 물거품이 되긴 했지만 나이델하르크가 이곳에 산재한 여러 종족들의 고분을 깨울 수 있었다면 승리의 향방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역사를 간직한 펠루시아 산맥은 지금도 구름을 이마에 얹은 채 트루베니아 대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까마득히 높은 산정에 그림자 하나가 버티고 서 있었다. 이미 트루베니아의 주인 자리에서 밀려나 오크 족의 노예로 하루를 영위하는 종족, 인간이었다. 감히 인간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수려한 얼굴에다 보기 좋은 적발을 휘날리며 서 있는 늠름한 모습은 무수한 처녀들의 방심을 뒤흔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런데 적발청년의 입에서 갑자기 탄식소리가 튀어나왔다. "결국 실패로 돌아갔는가?" 청년의 입가에는 씁쓸함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데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지금껏 살아온 8천년의 세월동안 마음먹어 이루지 못한 일이 단 하나도 없었는데……." 청년의 정체는 바로 베르키스였다. 휘하의 가디언을 대거 동원해서 펠젠틴을 공습했던 장본인. 강력한 가디언들을 대거 동원해서 무수한 인간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기는 했지만 그가 입어야 했던 피해는 엄청났다. 우선 심혈을 기울여 만든 아이언 골렘이 파괴되었고 동원된 브론즈 골렘 22기 중 단 하나도 회수하지 못했다. 게덴하이드를 위시한 리치 군단은 아예 완전히 궤멸되어 버렸다. 동원했던 병력을 하나도 건지지 못한 채 완벽히 잃어버린 것이다. 베르키스는 한심하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고도 인크레시아를 회수하지 못하다니……." 베르키스의 목적은 오로지 인크레시아였다. 데스나이트들의 맹공을 피해 도주하면서도 그는 마지막에 가한 일격이 성공했으리란 사실을 추호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상황에서 가증스러운 데이몬 놈이 빠져나올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트루베니아로 돌아오는 와중 베르키스는 데이몬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당연히 왔어야 할 인크레시아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데이몬이 아직까지 살아있음을 반증한다. 당시 베르키스는 심각한 고뇌에 사로잡혔다. 위험을 무릅쓰고 돌아가서 데이몬을 끝장내고 싶었지만 데스나이트를 비롯한 무수한 인간기사들의 존재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인간 마법사들과 자신을 적대하는 아르카디아의 멍청한 화이트 드래곤도 꺼림칙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대 1로는 결코 적수가 되지 못했지만 인간들과 합세할 경우 승부를 쉽사리 낼 수 없을 터였다. 결국 베르키스는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거기에는 위험을 철저히 회피하는 드래곤 특유의 본능이 작용했다. 그 때를 떠올려본 베르키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한 부작용 때문에 원래의 실력을 내지 못한 것이 아쉽군. 아까운 수명을 헛되이 날려버렸어." 강대한 힘과 뛰어난 지능을 보유한 만큼 드래곤은 반드시 수면을 통해 몸의 균형을 맞춰야 했다. 그래야만 거대한 몸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베르키스는 그것을 거부했다. 고도의 마법을 사용해서 몸을 속였기 때문에 베르키스는 수면기에 움직이는 유일한 드래곤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해진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었고 편법은 반드시 부작용을 초래한다. 그 때문에 베르키스는 정해진 수명을 상당히 잃은 상태였고 몸의 균형도 상당부분 깨어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키스가 무리하게 공습을 강행한 것은 바로 인크레시아의 중요성 때문이다. 그 속에는 결코 인간들의 손에 들어가서는 안될 물건이 있었다. 베르키스는 눈빛을 빛냈다. "워낙 철저히 위장해 놓았기 때문에 놈이 쉽사리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놈이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리기 전에 반드시 회수해야만 한다." 만약 인크레시아만 되찾았더라면 가디언들의 피해는 그냥 잊어버려도 무방했다. 그의 마법실력이라면 가디언들을 빠른 시일 내에 원상태로 복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디언들을 희생시키고도 목적했던 것을 되찾지 못했으니 베르키스로써는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베르키스에게 남은 것은 아이언 골렘 하나와 브론즈 골렘 여덟 뿐이었다. 인간노예들을 대대적으로 끌어 모아 소멸된 리치들을 부활시키고는 있었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을 떠올려보던 베르키스의 눈썹이 갑자기 꿈틀했다. "멍청한 게덴하이드 녀석. 그렇게 허무하게 당하다니……." 가증스러운 데이몬 놈이 자신의 손아귀에서 장장 10분을 버텨냈다. 하지만 게덴하이드는 그러지 못했다. 제대로 된 저항 한 번하지 못하고 소멸된 게덴하이드를 떠올리자 또다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지금 베르키스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존재가 바로 그였다. 지금으로썬 게덴하이드의 조력이 절실했다. 그 때문에 베르키스는 게덴하이드를 되살리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조만간 3차 종족전쟁이 터지겠군. 쓸데없이 아르카디아의 인간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준 꼴이 되고 말았으니……." 최악의 경우 아르카디아에서 선제공격을 가해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베르키스는 일체 걱정을 하지 않았다. 트루베니아에 도착한 직후 드래곤 로드에게 찾아가서 모종의 조처를 취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인간들이 아무리 빨리 움직인다 하더라도 준비하는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크라누스의 안배가 발동하는 것은 한 달이면 충분하다." 비릿한 미소를 지은 베르키스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크라누스의 레어에서 보았던 하나의 석상이었다. 무척 아름다운 소녀,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소녀 하나가 석상이 된 채 크라누스의 레어 한 쪽에 놓여 있었다. 물론 베르키스는 석상의 정체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아쉽군. 그것을 이용한다면 놈을 유인할 완벽한 함정을 팔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드래곤 로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일을 벌인 베르키스를 엄격하게 책망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베르키스의 눈에 분노의 광망이 번뜩였다. 퍼부어지는 질책을 꾹 눌러 참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분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만약 드래곤 로드가 나이순으로 정해지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현재의 드래곤로드 자리는 자신이 맡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힘과 마법 어느 면을 따지더라도 크라누스는 베르키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장장 1만년을 살아온 노룡 크라누스. 하지만 별달리 호전적이지 못한데다 특유의 게으른 성격 때문에 크라누스가 이룬 성취는 이미 베르키스에게 추월된 지 오래였다. 바로 자질과 노력의 차이 때문에……. 인간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차이가 드물게나마 드래곤에게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드래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지간한 노력과 자질 없이는 세월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고 그것을 넘어선 드래곤은 베르키스가 유일했다. 2천년을 더 산만큼 크라누스의 덩치는 베르키스보다 훨씬 컸다. 그리고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의 드래곤인 실버 일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키스는 충분히 크라누스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만약 다른 드래곤의 눈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베르키스는 벌써 힘으로 크라누스를 제압했을 터였다. 그 사실을 떠올린 베르키스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다행히 크라누스가 내 계략에 넘어가 주어서 수월하게 유희를 치를 수 있었다. 유희를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해서는 계속 그를 이용해야 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가 크라누스를 추월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인간들에게 배운 것들이 큰 역할을 했다. 베르키스는 묵묵히 2차 종족전쟁을 획책했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들의 근성, 집요한 노력, 잔인함은 처음 유희를 나선 베르키스에겐 하나의 충격이었다. "정말 재미있는 생명체로군." 고심 끝에 베르키스는 인간의 모든 것을 알기로 작정했다. 인간들과의 유희에 광적으로 심취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후 베르키스는 여러 부류의 인간으로 모습을 바꿔 인간 사회에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여러 부류의 삶을 살아보며 인간이란 종족이 가진 비밀을 연구하는데 매진했던 것이다. 그것은 여타의 드래곤들이 즐기는 유희의 몇 십 배에 달할 정도였다. 그런 과정을 통해 베르키스는 인간들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베르키스를 비약적으로 강하게 만들었다. 이른바 인간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드래곤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들에겐 돌이킬 수 없는 불행으로 다가왔다. 실력 면에서 크라누스를 추월한 것을 확신하자 베르키스는 마지막 유희를 결정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주었던 인간이란 종족을 세상에서 영원히 말살시키는 것이었다. "비록 인간들이 날 강하게 만들었지만 놈들이 다른 드래곤에게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후로 나보다 강한 드래곤이 탄생하는 것을 원천 봉쇄해야 한다." 인간을 멸종시킬 것을 결심한 베르키스는 그를 믿고 따르는 네 마리의 드래곤을 불러모았다. 아르카디아에서 생을 마감한 러셀런트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강해도 방대한 인간을 모두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베르키스는 드래곤 로드를 끌어들이기로 결심했다. 당시를 떠올리자 베르키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인간들에게서 배운 방법이 크라누스를 동참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지." 유희를 통해 인간에 대해 통달하게 된 베르키스는 드래곤들의 약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드래곤 하나하나는 감히 당적할 종족이 없을 정도로 강력했지만 수적으로 너무나 열세였다. 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베르키스는 거의 멸망해 가는 오크 족을 끌어들였다. 그의 안배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차근차근 실행되어 갔다. 그 결과 트루베니아의 주인 자리에서 인간들을 끌어내리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비록 다수의 인간들이 살아남았지만 오크의 노예신세인 그들은 어떤 드래곤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가 획책했던 유희가 이로써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다. 과정을 떠올려본 베르키스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순 없지. 아르카디아의 인간들이 남아있는 이상 내 유희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절벽 가장자리에 다가간 베르키스는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멀리 떨어진 협곡의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식별조차 할 수 없을 거리였지만 베르키스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그곳은 바로 그의 레어였다. 새로 탄생시킨 가디언들이 레어를 빈틈없이 지키고 있었다. 급조한 스톤 골렘과 서둘러 끌어 모은 중형 몬스터들이 태반이었지만 인근 부락에서 끌어들인 다수의 오크 보병들이 있으니 레어의 안위에 대해서는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베르키스의 얼굴에 갑자기 피로감이 떠올랐다.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부득이 수면에 들어가야겠군. 아르카디아와 트루베니아를 가르고 있는 바다는 머지않아 죽음의 절지로 변할 터, 단 한 척의 배도 트루베니아에 도착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베르키스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을만한 존재는 오직 데이몬뿐이었다. 놈이 보유한 본 드래곤이라면 충분히 대해를 건너올 수 있으니까……. 하지만 베르키스는 도리어 놈이 자신의 레어를 급습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베르키스에겐 인크레시아를 회수할 절호의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아이언 골렘 하나와 브론즈 골렘 여덟, 거기에다 스톤 골렘 50과 200여에 달하는 중형 몬스터, 그리고 1천 명의 오크 보병이라면 놈들의 진입을 어느 정도 지체시킬 수 있을 것이다. 모종의 마법을 걸어놓았으니 깨어나는데 반나절이면 충분할 터. 이번 기회에 반드시 인크레시아를 회수하겠다." 마음을 정리한 베르키스는 그대로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절벽 아래로 하강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도 베르키스의 머리는 원활히 돌아가고 있었다. 2년 후면 모든 드래곤들이 잠에서 깨어날 터, 베르키스 역시 그 때를 맞춰 수면을 접을 생각이었다. 유희를 완벽하게 마무리짓기 위해서………. "이곳입니다." 데이몬은 입을 딱 벌렸다. 황실 기념관의 크기가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테오도르와 집무실을 나선 그는 곧장 황실기념관으로 향했다. 크로센 대제에 대한 호기심은 그 정도로 지대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데이몬은 한참을 걸어서야 기념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황실기념관의 규모가 그가 상상했던 것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으니……. 데이몬은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더럽게 크군. 멍청한 놈들. 일개 기념관을 이렇게 웅장하게 지어놓다니……." 보고 있던 테오도르가 난처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잘은 모르지만 지상에 드러난 부분보다 지하에 감춰진 부분이 훨씬 넓다고 들었습니다." "………." 멍해진 표정으로 눈알을 굴리는 데이몬을 보고 테오도르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시다시피 크로센 대제는 아르카디아에서는 신과 마찬가지입니다. 기념관도 작다고 증축하자는 논의도 심심찮게 벌어지지요." "미친놈들." 냉랭하게 내뱉은 데이몬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경비하는 기사들이 일제히 예를 취해왔지만 데이몬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완전히 무시해버리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거대한 규모만큼이나 정문의 크기도 엄청났다. 완전 무장한 병사 십여 명이 횡대로 서서 행군해도 무리 없이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문 앞에 버티고 선 데이몬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문을 여는 장치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손잡이도 없고……. 어떻게 들어가는 거지?"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테오도르가 문의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영롱한 빛을 발하는 수정구슬 하나가 문에 박혀 있었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309회. 품속에 손을 넣은 테오도르는 조그마한 바늘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것으로 손가락을 따십시오. 수정구슬에다 피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됩니다. 고도의 마법이 걸려 있기 때문에 크로센 대제의 후손이 확인될 경우 자동으로 문이 열립니다." 바늘을 받아든 데이몬이 농담을 걸었다. "자네가 바늘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나는군. 혹시 독이 묻어있지는 않겠지?" "물론입니다." 테오도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데이몬이 바늘로 손가락을 찌르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또옥. 피 한 방울이 떨어졌지만 수정구슬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표면을 타고 흘러내려야 할 피가 구슬 속으로 스며든다는 점이다. 피는 곧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구슬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수정구슬이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자 테오도르의 안색이 환히 밝아졌다. "승인이 된 모양입니다. 잠시 후 문이 열릴 것입니다." 테오도르의 말대로 문에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드르르릉. 데이몬의 눈가에 실망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문 전체가 열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수정구슬의 바로 옆에 구멍이 입을 벌렸다.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만큼 협소한 문이었다. "뭐야. 왜 이리 작지? 전체가 열리는 것이 아니었어?" 데이몬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문하자 테오도르가 얼른 손짓을 했다. "문이 금방 닫히니 서둘러 들어가십시오." "혹시 같이 들어갈 생각은 없나?" 테오도르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 속에는 오직 크로센 대제의 후손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껏 수많은 시종들이 황손을 따라 들어갔지만 나온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수많은 마법트랩이 설치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이 걸음을 옮겼다. 크로센 대제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생각에 그의 눈은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문가에 선 데이몬이 고개를 돌려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동료들에겐 자네가 해명해 주게. 난 이 속에서 느긋하게 본 드래곤이나 고치고 있겠네." "예. 근위병들에게 식사와 갈아입으실 옷을 대령하도록 당부해 놓겠습니다." "부탁하네." 그 말을 끝으로 데이몬의 몸은 사라져버렸다. 그가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그곳은 곧 언제 문이 있었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테오도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난 대관식에만 신경 쓰면 되는 건가?" 문을 한 번 더 쳐다본 테오도르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대단하군. 수백 년 동안 방치되었어도 먼지 하나 없다니……." 데이몬은 거듭 감탄사를 토하며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정문에서와 같은 절차를 세 번이나 더 반복한 뒤에야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를 맞은 것은 끝이 보이지도 않는 긴 복도였다. 아래쪽으로 경사가 진 것을 보니 아무래도 지하로 들어가는 통로 같았다. "지상에는 별달리 볼 것이 없군." 데이몬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복도를 걸어 내려갔다. 이미 그는 지상에 위치한 서너 군대의 별관을 다녀온 다음이었다. 그곳에는 크로센 대제의 업적을 칭송하는 조각이나 그림 따위가 진열되어 있었다. 분명 아르카디아에서 제일가는 조각가나 화가가 그렸을 테지만 애당초 그것들은 데이몬의 발길을 잡지 못했다. 그것보다도 데이몬의 흥미를 끄는 것은 복도를 따라 늘어선 그림들이었다. 그곳에는 크로센 대제의 일대기를 묘사해놓은 그림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한마디로 크로센 대제가 지금까지 걸어온 발자취라 할 수 있었다. 데이몬의 걸음이 복도의 초입에 걸려있는 커다란 그림 앞에서 멈췄다. 그곳에는 용맹스러운 기사 하나가 백마를 탄 채 검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는 장면이 화폭에 담겨 있었다. 더 없이 화려한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치켜세운 검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지는 것을 보니 오러 블레이드를 묘사해 놓은 것 같았다. 생동감이 생생히 넘쳐흐르는 것을 보니 대단한 실력을 가진 화가의 작품 같았다. 데이몬의 시선이 옆의 그림으로 옮겨갔다. "이 작자가 크로센 대제인가." 그곳에는 검을 든 남자 하나가 전장의 폐허 위에 버티고 서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검은 머리칼, 검은 눈동자를 한 남자는 무척 생소한 복색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크로센 대제가 이곳에 처음 도착한 순간을 묘사해 놓은 듯 했다. 그것을 본 순간 데이몬의 눈이 빛났다. "청의 장삼이로군. 역시 그는 무림출신이었어." 혹시나 크로센 대제의 정체를 알 수 있을 지도 몰라서 데이몬은 그림을 샅샅이 살폈다. 하지만 소득은 전혀 없었다. 얼굴 부분이 그리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의 얼굴에 언뜻 실망감이 스쳐지나갔다. "하긴 이곳 녀석들의 안목으론 중원 인들이 모두 다 비슷해 보일 테지? 들고 있는 검은 패검(覇劍) 종류로 보이는군. 중이나 도사가 아닌 것은 분명한데 말이야." 데이몬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뒤의 그림들은 크로센 대제의 이후 행로들을 묘사해 놓았다. 대부분 데이몬이 슈렉하이머에게 들어 알고 있는 행적들이었다. "멍청한 녀석들. 그냥 글로 새겨 놓았다면 석판 한 장이면 넉넉할 텐데……." 투덜거리면서도 데이몬의 시선은 쉴새없이 그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기록을 읽는 것보다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었다. 혈혈단신으로 트루베니아에 나타나서 아르카디아를 건국한 입지전적인 인물, 크로센 대제. 그러나 그의 시작은 의외로 초라했다. 이유는 바로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에 대해 느끼는 인간 특유의 시샘 때문이었다. 그림에는 크로센 대제가 그 때 겪었던 어려움 들이 낱낱이 묘사되어 있었다. 그림을 둘러보던 데이몬은 혀를 찼다. "멍청한 자식. 여기가 중원과 같은 줄 알았나 보군. 대결을 벌였으면 사정 볼 것 없이 죽여버릴 것이지 쓸데없는 자비심이나 베풀다니……. 패한 놈들이 중원처럼 곱게 승복할 줄 알았나보지?" 데이몬의 예상은 사실이었다. 공교롭게도 이곳에 도착한 뒤 크로센 대제가 가장 먼저 만난 자들은 용병들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용병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후 크로센 대제는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비무를 벌였다. 그 과정들이 그림에 세세히 묘사되어 있었다. 무수하게 벌어진 비무에서 크로센 대제는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문제는 비무에서 패한 기사들이 곱게 승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약 크로센 대제가 지체 높은 귀족이나 국왕의 임명을 받은 기사였다면 문제가 틀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출신도 모르는 떠돌이 용병이었기 때문에 패한 기사들이 곱게 물러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극히 간교하고 비열한 자이다. 차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치사한 방법을 써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난 결코 패배를 용납할 수 없다.』 『그는 나에게 패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 뒤 등뒤에서 느닷없이 암습을 가해 중상을 입었다.』 크로센 대제에게 패한 자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크로센 대제를 헐뜯었다. 그 수는 비무가 거듭될수록 늘어만 갔다. 그 소문으로 인해 크로센 대제에게 관심을 가졌던 몇몇 군주들의 이목을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지는 계속해서 좁아졌다. 게다가 크로센 대제는 중원에서처럼 주로 인적이 없는 곳에서 1대 1 비무를 벌였다. 때문에 증인이 있을 턱이 없었다. 당시 크로센 대제가 처한 상황을 떠올려본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곳의 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니 해명할 도리가 없었겠군." 소문이 퍼지자 이젠 비무 조차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비무첩을 받은 기사들은 보지도 않고 거절하던가, 아니면 비밀리에 한다는 조건 하에 비무에 응했다. 그럼에도 크로센 대제는 그 모든 비무를 승리로 장식했고 패한 기사들은 예외 없이 중상모략에 가담했다. 비로소 상황을 알아차린 크로센 대제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비무를 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거기에 응하는 기사는 하나도 없었다. 이미 상황이 그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크로센 대제는 드높은 무예실력에도 불구하고 이름 없는 용병으로 대륙을 정처 없이 떠돌아야 했다. 그러던 사이 종족전쟁이 터졌다. 전쟁의 참화는 삽시간에 트루베니아 대륙을 뒤덮어버렸다. 크로센 대제 역시 인간의 편을 들어 전쟁에 참전한다. 그러나 평범한 용병신분인 그가 거둘 수 있는 전과는 엄연히 한정되어 있었다. 아무리 무예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난전에서 돋보일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로센 대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성실히 해 나갔다. 일반 병사들에겐 공포의 대상인 중형 몬스터만을 골라 전문적으로 명줄을 끊어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맹활약도 시기하는 기사들의 농간으로 전혀 상부에 전해지지 않았다. 운명을 건 전쟁이었지만 하찮은 인간의 시기심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종족전쟁은 인간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서서히 치달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크로센 대제는 인생의 일대 변환 점을 맞게 된다. 우연히 중형 몬스터 부대에 포위되어 섬멸될 위기에 처한 크로세나 왕국의 국왕을 만나게 된 것이다. 당시 크로센 대제는 뛰어난 검술실력을 발휘해서 무려 칠십여 마리나 되는 중형몬스터를 단신으로 처치해 버렸다. 크로세나 국왕이 그의 활약상에 매료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크로센 대제는 드디어 그의 진가를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게 되었다. 그림을 훑어보던 데이몬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슈렉하이머의 얘기와는 조금 다르군. 비무로 만난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다니." 크로세나 국왕은 크로센 대제에게 운명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왕국 크로세나는 이미 오크군의 손아귀에 무참히 유린된 상태였다. 왕궁은 처참히 파괴되었고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크로세나 국왕에게 남은 전력은 고작해야 기사 오십 명과 5백 명의 병사가 전부였다. 크로세나 국왕은 자신의 모든 것을 크로센 대제에게 맡겼다. 더불어 아름다운 자신의 딸 발레리와 함께 말이다. "그대에게 내 모든 것을 걸겠소. 부디 내 왕국의 백성들을 구해주시오." 크로센 대제는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당시는 그가 어눌하게나마 이곳 말을 할 수 있을 시기였다. 마침내 기회를 잡은 크로센 대제는 휘하에 들어온 병사들에게 무공을 전수하기로 마음먹는다. "전쟁에서는 한 명의 초절정고수보다 수백 명의 평범한 고수가 낫다. 내 이들을 기필코 절정으로 키우고 말겠다." 단단히 마음먹은 크로센 대제는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는 병사들에게 그가 가진 최고의 검술과 내공심법을 전수했다. 무공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법. 크로센 대제는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무력시범을 통해 병사들에게 반드시 강해질 수 있다는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의 의도는 먹혀 들어갔고 병사들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갔다. 당시를 상상해 본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얘기야. 이곳의 풍부한 마나와 중원의 수준 높은 내공심법이 결합된다면 금세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지." 크로센 대제의 이후 행적은 슈렉하이머에게 들은 것과 별달리 차이가 없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트루베니아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무려 2백 5십 명의 소드 마스터와 그에 별달리 뒤떨어지지 않는 고급기사 3백으로 구성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기사단이 트루베니아에 출현한 것이다. 물론 그들은 크로센 대제에게 직접 사사 받은 크로세나 왕국의 병사들이었다. 크로센 대제는 그들을 바탕으로 전설의 서막에 돌입한다. 그림을 훑어보며 복도를 걷던 데이몬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타고난 전략가였어. 모르긴 몰라도 중원에 있을 때 조직을 책임지는 수장이거나 일 문의 문주였을 것이라 짐작되는군.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통솔력을 보일 수 없지." 데이몬은 이후의 행적이 묘사된 그림을 훑어보며 거듭 발걸음을 옮겼다. 신화라 불릴 수 있는 크로센 대제의 일대기를 여과 없이 감상하며 말이다. 크로센 대제가 이룬, 한 마디로 전설이라 표현할 수 있는 업적들을 관람하느라 데이몬은 피로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림은 종교분규 때문에 시작된 아르카디아로의 진출을 묘사하고 있었다. 개척자들은 크로센 대제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신화를 차근차근 이룩해 나갔다. 그 노력이 아르카디아가 이처럼 발전할 수 있었던 초석이 되었으리라. 크로센 대제는 정녕 대인(大人)이었다. 자신을 무참하게 내쳤던 장본인이었지만 트루베니아가 암흑 군대의 침공으로 위기에 처하자 그는 머뭇거림 없이 병력을 일으켰다. 그리고 트루베니아를 결국 나이델하르크의 손아귀에서 구해내었다. 그림 하나하나를 감상할 때마다 감탄사가 거듭 터져 나왔다. "인간으로써 이런 삶을 살 수 있다니……. 정녕 영웅이라 일컬을 만한 인물이로군." 정말 파란만장한 생애였다. 개인적으로 이런 길을 걸었던 크로센 대제가 부럽기까지 했다. 만약 자신이 과거의 무공을 보유한 채 크로센 대제 대신 이 땅에 떨어졌더라면……. 생각해보던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난 결코 그와 같은 업적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보다 무공이 월등히 강했더라도 마찬가지다. 나에겐 그를 따라갈 만한 포용력과 지도력, 인망이 없으니까……." 데이몬에게 문득 한신의 고사가 떠올랐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란 말이 적용되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 수천, 수만의 병사의 마음을 휘어잡아 불협화음 없이 통솔할 수 있는 그는 능히 한신에 비견될 만한 명장이오 또한 현명하고 사려 깊은 군주이기도 했다. 데이몬은 고소를 머금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병사는 고작해야 천 명 안팎일 테지. 10만을 지휘할 수 있는 유방보다도 못한 그릇이지." 능력의 차이를 절감했지만 데이몬의 안색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그만큼 크로센 대제에게 매료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연 그가 중원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을까? 궁금해 미칠 지경이로군." 정신 없이 그림을 감상하는 사이 데이몬은 어느새 복도의 끝에 도착해 있었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310회. 끝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긴 복도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지나온 것이다. 데이몬의 시선이 마지막 그림에 가서 멎었다. 그 그림에는 크로센 대제가 눈을 감은 채 평온히 누워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었다. 백발에다 길게 자라난 수염 그리고 얼굴에 가득한 주름살을 보니 크로센 대제도 천수를 맞은 모양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슬퍼하며 침상 주위에 모여 있었다. 보고 있던 데이몬은 숙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 아무리 영웅이라도 천수를 거역하진 못하는군. 이로써 내가 크로센 대제보다 나은 것이 한 가지 증명된 건가? 난 천수를 거역하고 500년을 살아왔으니까……. 삼천 갑자를 살았다는 동방삭 이래로 처음일 테지." 느릿하게 중얼거리던 데이몬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복도의 끝에는 무척 튼튼해 보이는 문이 위치해 있었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문가로 다가갔다. 그곳에 분명 문을 여는 수정구슬이 위치해 있을 터였다. 이미 여러 번 겪어왔던 일이기 때문에 데이몬은 무의식적으로 들고 있던 바늘을 손가락에 가져다댔다. 츠츠츠. 선혈을 머금은 수정구슬이 빛을 내쏘기 시작했다.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감쳐졌던 문이 열렸다.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다. 데이몬은 묵묵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 안쪽에는 또다시 긴 복도가 늘어서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피로감이 극심히 몰려오는 것을 느낀 데이몬이 쓴웃음을 지었다. "한 마디로 던젼 탐사라 표현할 수 있겠군." 복도를 걷고 있으니 띄엄띄엄 마법의 기척이 느껴졌다. 허락 받지 않고 들어온 자를 노리는 마법 트랩 같았다. 아니 이곳뿐만이 아니라 지금껏 걸어 들어온 곳에서도 어김없이 마법트랩이 설치되어 있었다. 시종들이 나오지 못한 것이 바로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하지만 이 정도 마법트랩 따위가 데이몬에게 해가 될 수는 없었다. 그가 이룬 마법의 경지는 현존하는 인간 최고라고 봐도 무방했다. 복도 중간 중간에 문이 위치해 있었지만 데이몬은 한 군데를 들어가 본 뒤 다른 방에 들어갈 생각을 버렸다. 방에는 대부분 크로센 대제의 업적을 칭송해 놓은 예술작품들이 진열되어 있을 뿐 데이몬이 찾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복도는 그리 길지 않았다. 복도 끝에 위치한, 화려하게 치장된 문을 보는 순간 데이몬은 긴장했다. "이곳이 가장 중요한 곳인가 보군." 진득한 마법의 기운이 감지되었다. 문 전체에 마법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굳이 마법을 파훼하려 하지 않았다. 가장 확실하고도 간단하게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쿠르르릉. 이번에는 예전과는 달리 전체가 열리는 문이었다. 데이몬은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주위를 둘러본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뭐, 뭐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기사들이 완전히 무장한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수백에 달하는 방대한 무리들이었다. 데이몬은 곧 그것들이 생명이 없는 목상이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무로 깎아 만든 기사의 형상에다 진짜 무기와 갑옷을 입혀 놓았기 때문에 잠시 착각했던 것뿐이었다. "세상에……. 목상에다 갑옷을 착용시키다니 장인들이 무척 고생했겠군." 투구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살아있는 사람과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했다. 데이몬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목상의 면면을 샅샅이 훑었다. 목상의 수는 5백을 조금 넘어서는 수준이었고 보존마법이 걸려 있는지 손상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들이 신화를 이뤘던 초대 크로센 기사단원들인 것 같군. 크로센 대제와 함께 활약했던……." 데이몬의 시선이 병진의 중심부에 서 있는 목상에 가서 멎었다. "이 자가 한창때의 크로센 대제인가 보군.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데……." 데이몬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들쳐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얼굴 윤곽을 정교하게 깎아 놓았지만 완벽히 흉내내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인상을 똑똑히 각인시키는 것은 바로 눈빛이다. 결론적으로 목상에는 눈빛이 없었다. 데이몬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들어가 보면 알 수 있겠지?" 데이몬은 묵묵히 목상 사이를 걸어 들어갔다. 실제 기사들과 흡사한 목상들 사이를 걷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스산함이 전해져 왔다. 당장이라도 수백 자루의 검이 몸뚱이를 파고들 것같이 느껴졌기 때문에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들이 만약 소림사의 백 팔 동인들처럼 움직인다면 정말 무시무시하겠군." 목상의 무리를 지나친 데이몬의 앞에 세 개의 커다란 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왼쪽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수천 명의 병사를 동시에 수용할 만한 거대한 지하광장이 위치하고 있을 뿐이었다. 벽면에 설치된 병기대가 이곳이 무얼 하는 장소인지 가르쳐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기사들을 수련시키는 연무장인 것 같군. 잘 되었어. 이곳에다 러셀런트를 보관하면 되겠군."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은 몸을 돌렸다. 러셀런트의 복원은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된다.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어둠의 마력을 주입해야만 원래의 위력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오른쪽 문 역시 지하광장이었다. 슬쩍 훑어본 뒤 다시 문을 닫은 데이몬은 가운데 문 앞에 버티고 섰다. 가장 화려하게 꾸며진 것을 보니 크로센 대제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는 마지막 문 같았다. 데이몬의 가슴은 기대감으로 설레고 있었다. "드디어 크로센 대제를 만나게 되는가?" 비록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단지 그가 남긴 물건을 대하는 것이었지만 데이몬은 떨리는 감정을 쉽사리 주체하지 못했다. 크로센 대제가 남긴 물건이 있다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중원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중원이 반갑다거나 특히 보고싶은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중원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기억들로만 가득 찬 곳이었다. 도리어 그에겐 이곳이 더 친숙했다. 그가 중원으로 가고자 하는 이유는 단지 복수 때문이었다. 요행히 살아남은 수호마왕군이 있다면 거둘 목적도 있었다.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기는 하지만……. 복수를 마친다면 데이몬은 미련 없이 이곳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사준환을 떠올려 본 데이몬의 입가에 냉혹한 미소가 걸렸다. "칠종단금술 때문에 놈을 죽일 수는 없겠지만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지. 난 흑마법의 대가. 살아있으되 산 것이 아닌 상태로 억겁의 시간동안 고통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이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생각해 놓았으니……." 하지만 사준환에 대한 복수 이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드래곤에 대한 복수였다. 그리고 다프네를 구해내는 것 역시 더 없이 중요하긴 마찬가지였다. 비록 이룰 수 있을지 아직까지 자신이 없었지만. 데이몬의 입가에 재미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만약 크로센 대제를 데스 나이트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랬다면 정말 엄청난 전력이 될 텐데 말이야." 하지만 그것은 실현가능성이 터럭만큼도 없는 일이었다. 데스 나이트는 한을 품고 죽은 기사의 영혼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한이 아무리 깊어도 기사의 영혼이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카롯트의 4대 기사들을 데스 나이트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영혼이 벗어나지 못하는 노스우드 평원의 특성 때문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천수를 다하고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한 크로센 대제의 영혼이 아직까지 이승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생전에 이룬 업적을 인정받아 신계로 승천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데이몬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만약 영혼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데스 나이트가 되려고 할 턱이 없겠지?" 데이몬은 느릿하게 손을 뻗어 수정구슬을 짚었다. 손가락에 힘을 주자 선혈 한 방울이 비어 나왔다. 쿠르르릉. 문이 열리자 데이몬은 조용히 크로센 대제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했다. 석실 안에 들어간 데이몬을 맞은 것은 수십 개의 석판이었다. 높이 2미터, 폭 1미터 남짓한 석판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앞쪽 석판에는 빼곡하게 글이 새겨져 있었다. 슬쩍 훑어본 데이몬은 그것이 바로 크로센 대제의 일대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미 그림으로 보았으니 더 볼 필요가 없겠군." 시선을 거둔 데이몬은 묵묵히 뒷열의 석판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크로센 대제가 후손에게 남기는 말이 적혀 있었다. 크로센 대제가 후손들에게 남긴 말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제왕으로써의 몸가짐과 백성들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무도인의 마음가짐에 대한 당부들이 석판에 세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데이몬에게는 다소 진부하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남긴 말을 보니 정파의 인물이 확실하군." 고개를 돌린 데이몬이 순간적으로 멈칫 했다. 석판 뒤에 배치된 수정관 몇 개를 보고 난 다음이었다. 수정관 안에는 각기 한 가지씩의 물건들이 들어있었는데 데이몬에겐 더 없이 낯익은 것들이었다. 서둘러 수정관 앞에 선 그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형언할 수 없는 빛이 감돌고 있었다. "패검이로군. 중원의 장검이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어." 수정관 안에는 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고색 창연한 수실이 달린 전형적인 중원식 장검이었다. 이곳의 롱소드에 비해 길이가 조금 짧고 가늘었지만 검신에 배인 예기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혈조가 패여 있지 않은 검신은 찌르기뿐만 아니라 베기에도 효율적인 병기라는 것을 반증한다. 데이몬의 시선이 검 손잡이로 향했다. 그곳에는 데이몬에겐 더 없이 반가운 중원의 문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철혈검(鐵血劍)이라." 데이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무림 고수들 중 패검을 사용하는 무림인을 떠올려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500년의 세월이 지난 만큼 쉽사리 기억해 낼 순 없었다. "패검을 사용하는 놈들이 하나 둘이어야지. 정파 놈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게 장검이니 말이야."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옆의 수정관에는 중원식 옷 한 벌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데이몬은 그것이 그림에서 본 청의장삼이란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 역시 중원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옷 중 하나였다. 혹시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해서 데이몬은 옷의 소매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통상적으로 무림 방파에서 소매의 표식으로 신분을 나타낸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허사였다. 수정관 속의 옷은 저자거리에서 산 것 같은 평범한 청의장삼에 불과했다. "어렵군. 어려워." 데이몬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걸음을 옮겼다. 다음 수정관에는 다 헤어진 가죽신이 고이 간직되어 있었다. 그것 역시 평범하긴 마찬가지였다. 수정관을 훑어보던 데이몬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크로센 대제의 신분을 알아낼 수 있을 만한 물건들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할 수 없지. 어쨌거나 이것들을 이용한다면 중원으로 돌아가는데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데이몬은 조용히 수정관을 지나쳤다. 순간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수정관 뒤에 하나의 석판이 서 있었는데 그곳에 낯선 문자가 빼곡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데이몬에겐 결코 낯설지 않은 문자였다. 바로 중원의 문자였으니까. 데이몬의 눈동자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이것을 읽을 수 있는 자는 오직 나뿐이다. 나 외에는 그 누구도 읽을 수 없지." 데이몬은 서둘러 석관으로 다가가서 새겨진 글을 정신 없이 읽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얼굴에 경악감이 번져가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온 뒤 평생을 아르카디아에 바친 지도 어언 오십 년이 흘렀다. 이제 나는 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려 한다. 그러나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글을 남긴다. 그것은 바로 나의 근본을 그대로 묻어버려야 하는데 대한 안타까움 때문일 것이다. 아마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자는 나와 같이 중원에서 온 동향인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 자는 중원의 문자를 읽을 수 없다. 만약 인연이 닿지 않는다면 나의 근본은 이대로 묻혀지리라. 요행히 이 글을 접한 그대에게 한 가지를 당부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나 크로센의 잊혀졌던 이름과 고향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내 이름은 영호명. 중원의 검술문파인 철혈문의 9대 문주가 바로 나의 신분이었다.」 쾅. 영호명이란 이름 석자를 읽은 순간 데이몬의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영호명은 자신과 단순히 친분관계를 넘어서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얽히고 설킨 악연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쉽게 말해 자신을 한 하늘을 두고 숨쉴 수 없는 원수나 다름없는 자인 것이다. 데이몬의 얼굴에 허탈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영호명. 그 빌어먹을 녀석이 크로센 대제였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서인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311회. 데이몬은 영호명을 처음 본 순간을 떠올려 보았다. 소림사에서 갖은 구박을 받으며 보냈던 어린 시절. 당시 영호명은 당당한 속가제자로써 성승에게 직접 사사를 받고 있었다. 데이몬은 영호명을 먼발치에서 보며 무척 부러워했다. 어린 마음에 신분상의 차이로 특혜를 받고 있는 영호명을 미워하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그 우열은 곧 뒤바뀌었다. 소림사를 탈출한 뒤 그는 칠종단금술의 금제를 파훼하기 위해 천자혈마공을 익혔다. 천 명의 목숨을 매개로 극악무도한 마공을 얻은 그는 단숨에 개세고수가 될 수 있었다. 당시 영호명이 얻었던 성취를 몇 단계나 뛰어넘었던 것이다. 곧이어 벌어진 정사대전. 정도의 촉망받는 후기지수인 영호명과 마도의 떠오르는 살성(煞星) 데이몬과의 대결은 어찌 보면 숙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대결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로가 그토록 갈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던 중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영호명의 아버지인 철검자(鐵劍子) 영호충이 이끄는 철혈문의 무사들이 막 출도한 데이몬의 수호마왕군과 맞닥뜨리는 일이 일어났다. 배교의 총사였던 사준환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만큼 수호마왕군의 신위는 엄청났다. 그들의 맹공에 철혈문 무사들은 허무하게 무너졌고 그 과정에서 문주인 영호충이 목숨을 잃는 일이 일어났다. 그 때를 떠올려본 데이몬이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난 영호충을 죽이지 않았다. 그는 퇴각하던 도중 퇴로를 막은 음명당주 곽세기에게 당한 것이다. 가증스러운 사준환 놈이 사실을 왜곡했지만 당시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영호충과 맞닥뜨렸다 해도 아무 거리낌없이 심장에 호조를 박아 넣었을 테니까." 훗날 영호명이 이를 갈며 자신을 찾아다닌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데이몬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당시 그는 마성에 심각하게 사로잡혀 있던 시기였다. "크크크. 하룻강아지 녀석 만나기만 하면 산 채로 심장을 뽑아버리겠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후에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면은 공교롭게도 사준환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데이몬이 무림공적으로 몰려 쫓기던 시기에 일어났다. 데이몬이 중상을 입고 포위된 상태에서 영호명과 만나게 된 것이다. "하필이면 힘이 없을 때 네놈을 만나게 되다니……." 참담한 운명을 한탄하며 절벽으로 몸을 던진 데이몬. 하지만 영호명은 그것마저도 용납하지 못했다. "네놈을 놓칠 것 같으냐?" 머리채를 잡힌 채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데이몬은 마침내 영호명과 눈빛을 마주칠 수 있었다. 한없는 증오심과 살심으로 가득한 영호명의 눈동자. 이후 데이몬은 한동안 그 눈빛을 잊어버리지 못했다. 트루베니아에 오고 난 후에도 한참동안 말이다. 그런데 그 영호명이 바로 크로센 대제였다니. 데이몬은 비로소 영호명이 이곳에 온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놈은 분명히 내 뒤를 쫓아왔을 것이다. 날 따라 차원이동 마법진에 뛰어들었다면 정황이 확실해진다. 그런데 어째서 놈이 나보다 50년이나 먼저 트루베니아에 도착한 거지? 슈렉하이머가 중원으로 올 때 사용했던 매개체는 틀림없이 놈의 물건이었을 터. 어떻게 그런 일이……." 한참동안 골머리를 앓았지만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차원이동이란 밝혀진 것보다 밝혀지지 않은 것이 훨씬 많은 마법이었다. 데이몬이 아무리 9서클의 마스터라도 명확한 이유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차원과 시간의 괴리로나 설명할 수 있으려나? 아무튼 어렵군. 어려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던 데이몬이 다시 석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읽어나가는 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었다. 「난 한 사람을 쫓다가 영문도 모른 채 이곳으로 왔다. 그의 이름은 독고성. 배교의 실각한 교주로써 마성에 사로잡힌 극악무도한 살인마이다. 그는 또한 나의 아버지와 스승을 시해한 불공지대천의 원수이기도 하다. 난 독고성을 죽여 복수를 마무리하기 위한 일념으로 아무 거리낌없이 빛 무리에 뛰어들었다. 그것이 차원이동이 발동된 마법진이란 사실을 전혀 모르고 말이다.」 "예상이 맞았군." 영호명이 이곳으로 온 과정이 추측과 맞아떨어지자 데이몬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설명할 순 없지만 영호명은 자신을 이동시킨 차원이동 마법진에 편승해서 이곳으로 온 것이 틀림없었다. 단지 뭔가가 어긋나서 50년 전의 세상으로 떨어졌을 뿐이었다. "아마도 놈은 눈에 불을 켜고 날 찾아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헛물만 켰을 테지. 이후 50년 동안 난 그곳에 없었을 테니까……." 데이몬은 조소를 머금으며 석판에 시선을 던졌다. 「빛 무리 속에 들어간 순간 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형언할 수 없는 압력이 몸을 눌렀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칠공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감히 인간의 육신으로 버틸 수 없는 끔찍한 압력이었다. 나중에 알아본 바로 그것은 차원이동 마법이 발현되고 난 뒤 마법진의 마나가 폭주할 때 뛰어들어서 생긴 압력이었다고 한다. 사람의 몸뚱이 정도는 금세 갈가리 찢어버릴 정도로 가공할 만 했다. 하지만 난 요행히 죽지 않았다. 소림성승께서 물려주신 내공과 의지력으로 압력을 당당히 버텨내었고 그것을 견뎌낸 순간 난 기연을 얻게 되었다. 압력을 버텨내는 과정에서 성승의 심후한 내공이 내 몸과 완전히 합일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난 성승께서 물려주신 내공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 대목을 읽은 데이몬은 입을 딱 벌렸다. 그의 경험으로 미루어 쉽사리 납득가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무림에서는 천수를 다한 전대고수가 자신의 내공을 후대에게 전수하고 입적하는 일이 아주 이따금 벌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한 마디로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었다. 산술적인 측면으로 보면 물려받은 내공과 본신의 내공이 합쳐져야 합당하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만에 하나 물려받은 내공이 본신의 내공보다 많을 경우에는 십중팔구 주화입마에 걸린다. 같은 내공심법을 통해 키웠더라도 본신이 키운 내공과 전수 받은 내공의 속성이 완벽하게 같지 않기 때문이었다. 전수 받은 내공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본신의 내공과 섞이지 못하고 전신혈맥을 따라 흘러 다닌다. 때문에 시술 받은 자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두 내공을 합일시켜야 했고 천신만고 끝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흡수할 수 있는 내공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내공전수는 10할 정도만 흡수하더라도 훌륭하게 성공한 것으로 봐야 했다. 나머지는 혈맥을 따라 흘러 다니다 그냥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나마 다른 내공심법으로 익힌 이종(異種)의 내공이 합쳐지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채음보양이나 흡정술 따위를 익힌 자들 중에 고수가 드문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내공의 전수는 그처럼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영호명이 소림성승에게서 전수 받은 내공을 완벽히 융합시켰다니……. "소림성승은 소림사에서 제일 심후한 내공을 지니신 분이다. 그런 분의 내공을 완벽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면……. 후. 놈은 예전보다 적어도 세 배는 강해졌겠군." 한숨을 길게 내쉰 데이몬의 눈길이 다시 석판으로 향했다. 「그 순간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마치 억겁과도 같았던 고통의 시간. 마침내 그 시간이 지나가고 난 낯선 트루베니아 대륙에 내팽개쳐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환골탈태를 했다. 초절정의 경지를 넘어서 마침내 꿈의 경지인 현경에 돌입한 것이다. 만약 이 기연을 얻지 못했다면 난 결코 아르카디아를 건국하지 못했을 것이다. 」 "서, 설마……." 데이몬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현경. 그것은 기나긴 무림 역사상 채 열 명도 이루지 못했다는 지고한 무의 경지였다. 의형살인(意形殺人). 즉 뜻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반선(半仙)의 경지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마도 영호명은 그 기연으로 인해 전설을 이룰 수 있었으리라. 천자혈마공으로 인해 절정기에 오른 데이몬도 현경과는 거리가 멀었던 경지였다. 마도의 고수들이 현경에 오르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어려웠기에……. 허탈감으로 인해 데이몬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반드시 한 번 만나 자웅을 겨뤄보고 싶다는 호승심이 여지없이 깨어져버린 것이다. 현경에 오른 영호명이라면 설사 그의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 하더라도 감히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와 자신과는 차원 자체가 다른 고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데이몬은 메마른 음성 한 마디를 간신히 토해냈다. "정말 기구한 운명의 장난으로밖에 볼 수 없군. 난 힘을 깡그리 잃고 이곳에 왔건만 놈은 도리어 이곳에 오는 과정에서 비약적으로 강해지다니……. 그러고 보면 각기 다른 시간대에 떨어진 것이 나에겐 천만다행이야. 목숨 따위야 아까울 게 없지만 놈에게 내 처량한 몰골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야." 석판의 글은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가 어쩌면 나의 불공지대천의 원수인 독고성일 수도 있다. 그 역시 중원의 문자를 알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겠다. 스승과 아버지를 죽인 원수이지만 나는 생의 마지막을 관조하며 그에 대한 복수심을 마음 속에서 깡그리 지워버렸다. 그 역시 음모에 휘둘려 제 삶을 살지 못한 불쌍한 중생에 불과하니까. 오히려 난 그에게 일말의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날 이곳으로 인도하여 현경에 들게 하고 또한 무(武)의 본의를 유감 없이 펼칠 수 있게 한 은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검을 든 무사로써 정말 만족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한다. 일개 문파의 문주였던 나에게 종말로 치달아 가는 무수한 인간들을 구원할 기회를 제공하고 신대륙을 개척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나에게 기회를 준 독고성에게 하나를 남기고 싶다. 그것은 바로 그가 걸려있는 금제법인 칠종단금술의 비밀과 그의 강제발동주문이다. 이것은 내가 소림사의 장문인으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것이다. 물론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 순간 데이몬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오랫동안 그의 일부로 변해온 칠종단금술의 베일이 바야흐로 벗겨지려는 순간이었다. 「칠종단금술은 원래 고승이 고행하는 과정에서 심마에 드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전래된 불문 고유의 정신금제법이다. 시술자의 내공과 의지가 시술 받은 자의 정신으로 파고 들어가 그 일부로 화하기 때문에 고도의 정신금제를 가할 수 있다. 정신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칠종단금술은 피시술자의 정신이 성장하는 만큼 똑같이 발전한다. 아마도 독고성이 천자혈마공으로 칠종단금술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금제가 초기단계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칠종단금술이 어느 정도 성장할 경우에는 천자혈마공보다 더욱 극악한 마공도 그 금제를 무력화시킬 수 없다. 칠종단금술의 발동조건은 원천적으로 중생, 즉 인간에 대해 살심을 품었을 경우이다. 피시술자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칠종단금술을 속일 수 없다. 왜냐하면 금제 자체가 정신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금제를 당하고도 살인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피시술자가 살인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넘어간 경우 하나 뿐이다.」 칠종단금술의 비밀을 읽고 있는 데이몬은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정신의 일부였기에 몸을 바꿨어도 칠종단금술이 작용할 수 있는 것이로군." 글을 읽어 나갈수록 데이몬은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비밀대로라면 칠종단금술은 그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천형의 굴레였다. 정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칠종단금술을 파훼하는 방법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단 하나 생을 마칠 경우를 제외하고는……. 「애석하게도 장문인께서도 칠종단금술에 대해 더 이상은 알지 못하셨다. 피시술자의 발전에 따라 끊임없이 성장하는 금제법인 만큼 이후의 경과는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다. 해서 여기에 칠종단금술의 강제발동주문을 남긴다. 피시술자가 살심을 품지 않았더라도 금제를 발동하게 하는 주문이며 주문을 피시술자앞에서 큰 소리로 읊을 경우 그 즉시 효과를 보인다. 그렇게 된다면 피시술자는 정신세계에 크나큰 타격을 입게 되고 십중팔구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글 아래에는 주문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어찌 보면 불경의 한 구절과도 같은 어귀였다. 주문을 읽은 데이몬은 그것을 머릿속에 똑똑히 새겨 넣었다. 석판의 글을 지워버릴 생각이었지만 만약을 위해 주문을 기억해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배어 나왔다. "후후후. 나에게 치명적인 조문이 생겨버린 격이로군." 석판의 글은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비록 원한을 떨쳐버리기는 했지만 난 여전히 독고성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천륜을 무참히 저버린 천고의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도 모르고 스승이신 혜정 선사님을 잔인 무도하게 시해했다. 비록 칠종단금술이란 금제를 가하긴 했지만 그 분께서는 독고성을 마음 깊이 걱정하고 또한 사랑하셨다. 따지고 보면 독고성이 절박하게 나마 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선사님 덕분이다. 만약 선사님의 보살핌이 없었더라면 그는 소림사에서 불과 삼 년을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아는가? 독고성. 너에게 시해 당하기 보름 전. 선사께서는 나에게 본신의 내공을 깡그리 전수해 주시며 입적할 채비를 갖추셨다. 그 때 나에게 하신 말씀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분께서 더 이상 널 보살필 수 없으니 내가 대신 거두어 평생 보살피라고 말이다. 난 그 말을 각골명심한 채 전수 받은 내공을 융합시키기 위한 폐관수련에 들어갔다. 그런데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네가 선사님을 시해하는 일이 벌어질 줄이야…….」 데이몬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격정으로 인해 그의 눈동자는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난 결코 성승을 시해하지 않았어. 만약 그랬다면 난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야." 데이몬의 말은 사실이었다. 칠종단금술에 걸려 있는 그가 성승을 시해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312회. 하지만 영호명은 흉수로 자신을 정확히 지목하고 있었다. 「칠종단금술이 완전히 자리잡지 않은 틈을 타서 요행히 선사님을 시해할 수 있었겠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란 것을 명심해라. 독고성. 인간의 수명은 유한한 법. 너는 억겁의 세월동안 윤회하며 선사의 은혜를 저버린 죄를 씻어야 할 것이다.」 석판의 글은 거기에서 끝났다. 데이몬의 얼굴에는 광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뚫어지게 석판을 노려보던 데이몬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파츠츠츠. 그의 양손에서 마나가 맹렬히 재배열되었다. 대기가 급속히 응축되며 수십, 수백 개의 길쭉한 빛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매직 미사일이었다. 매직 미사일은 곧 석판을 목표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퍽 퍼퍽. 석판이 무참히 깨어지기 시작했다. 영호명이 남긴 중원의 문자 역시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매직 미사일의 공격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석판의 잔해는 자갈이 되었다가 모래로 화하고 그것도 모자라 고운 가루로 변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야 했다. 데이몬은 핏발이 가득 선 눈을 희번덕거리며 끊임없이 되뇄다. "크크크. 은혜를 저버린 파렴치한이라……. 말을 쉽게 하지만 네놈이 내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나? 나 역시 성승에게 마음 속 깊이 감복하고 있었단 말이다. 적어도 네놈이 존경했었던 이상으로 존경했었다. 아는가? 훗날 성승께서 시해되셨단 말을 들은 나는 한 달 동안 침식을 잊었다. 성승께서 돌아가시게 된 원인이 나라고 끊임없이 자책하며 말이다. 충격을 떨치고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를 너는 아는가? 그것은 바로 복수 때문이었다." 데이몬이 넋두리를 늘어놓는 동안에도 매직 미사일은 계속해서 석판을 파괴하고 있었다. "당시 난 일을 저지른 백면염라 도위청을 복수의 목표로 삼았다. 당시에는 사준환이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난 결국 복수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온 다음에 가장 먼저 한 일이 도위청을 산채로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것이었으니까……. 당시 마성에 사로잡혔던 나는 당시 날 구하러 왔던 무사들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깡그리 죽여버렸다. 하지만 그것 또한 사준환이 획책한 일이었을 줄이야. 놈은 아무거리낌 없이 도위청의 생사여탈권을 나에게 맡겼다. 내가 천자혈마공을 대성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 내가 도위청보다 훨씬 쓸모 있다고 판단한 것이지." 석판은 이제 흔적조차 알아볼 없는 고운 가루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매직미사일 다발은 여전히 흉흉한 기색으로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핏기하나 없이 창백해진 얼굴로 데이몬은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내가 사준환에 대한 복수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날 이용한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감히 성승을 시해하란 명령을 내린 것만은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는가? 영호명!" 데이몬이 고개고래 질러대는 고함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지하광장을 마구 누볐다. 외침은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심력이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끊임없이 말이다. 털썩. 기력을 잃은 데이몬이 바닥에 맥없이 쓰러졌다. 엄청난 심적 충격을 받은 때문이었다. 폭주하던 그의 의식은 곧 꿈의 형태로 수백 년 전의 숭산 소림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소림성승 혜정이 시해되던 날, 다시 말해 데이몬이 소림사를 벗어나던 그 날 밤으로 말이다. "서, 성승." 데이몬은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허공에 치솟는 피보라가 시리도록 눈을 파고들었지만 데이몬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딘 칼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고 있는 성승을 보고도 나설 수 없다는 것이 한스럽기만 했다. 그는 정신을 잃은 채 맥없이 한쪽에 널브러진 독고성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일어나라. 일어나란 말이다." 하지만 독고성은 그저 맥없이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과거에 벌어진 일, 한없는 회한을 품게 했던 당시의 사건을 접하자 무력감이 전신을 감싸고돌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단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도 연신 도를 내려찍는 도위청의 손속을 멈추게 하진 못했다. 성승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확인한 도위청이 수하들을 둘러보았다. "확실하게 끝냈군. 철수한다." 데이몬은 도위청이 어린 시절의 자신인 독고성을 들쳐업고 그곳을 빠져나가는 장면을 망연자실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꿈이었군."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데이몬이 넋두리라도 하듯 메마른 음성을 내뱉었다. 안색이 무척 초췌했고 눈빛이 마치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처럼 희미했다. 오랫동안 잊고자 노력했던, 그러나 잊을 수 없었던 일을 접하자 마음이 극히 무거워졌다. 죽어가던 성승의 눈빛이 시리도록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자신을 전혀 원망하지 않는 눈빛이었기에 마음이 더욱 아플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날 원망하셨더라면……. 너 때문에 죽어야 했다고 꾸짖기라도 하셨더라면……." 씁쓸한 기색으로 고개를 젓던 데이몬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그것은 벌써 수백 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가루로 향했다. 그것을 보자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날 용서했다니 다행이로군. 하지만 영호명 너에게 과연 날 용서할 자격이 있을까? 차라리 네놈이 살아있었다면. 그리고 내 처지를 들었다면……."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호명, 즉 크로센 대제 역시 수백 년 전에 이승을 떠난 사람이었다. 그 때의 일을 기억하는 자는 이제 데이몬밖에 남지 않았다. "아무튼 축하한다. 같은 중원 무림 인으로써 전설을 이룬 너에게 말이다. 칠종단금술의 비밀을 가르쳐 준 보답으로 너에게 하나를 약속하겠다. 성승의 시해를 배후 조종한 사준환, 그놈을 반드시 응징하고야 말 테니까……." 묵묵히 말을 늘어놓던 데이몬이 별안간 푸들푸들 웃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너와 나는 사형제지간이 되는 건가? 넌 무공을, 난 불법을 배웠다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게다가 난 지금 네 후손의 몸을 빌어 널 대하고 있다. 후후후. 이거 정말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얽힌 인연이지 않나?" 한참동안 뜻 모를 웃음을 터뜨린 데이몬이 비틀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토록 원했던 크로센 대제의 정체를 알아내긴 했지만 생각만큼 후련하진 않았다. "일단 좀 쉬어야겠어. 그런 다음 느긋하게 러셀런트를 복원시키는 것이 낫겠지?" 목상들 사이를 걸어나오는 데이몬의 얼굴은 잔뜩 찡그러져 있었다. 드비어스 황태자를 제위에 올리는 대관식 문제는 일사천리로 처리되었다. 지금껏 수도 없이 보류되고 유보된 사안이었지만 페르슈타인 공작이 지지하고 나서자 상황은 급 반전되었다. 소집된 귀족회의에서 신황제 즉위를 위한 대관식이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빠른 시일 내에 최대한 간소하게 대관식을 치르기로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지금껏 귀족회의에 거론된 사안들 중 이처럼 신속하게 처리된 예는 전혀 없었다. 황태자가 제위에 오르는 지고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식물인간 상태로 투병 중이던 발렌시우스 1세는 귀족회의를 통해 폐위가 결정되었다. 반대표는 단 한 표도 나오지 않았다. 노황제는 기식이 엄엄한 상태로 누워있은 지 10년이 넘었다. 때문에 그의 영향력은 전혀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기간동안 황제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었다는 점이다. 국정은 대부분 귀족회의를 통해 페르슈타인 공작의 뜻대로 결정되었고 궁정의 잡무는 테오도르 집정관이 홀로 맡아 처리해 왔기에 크로센 제국에서 황제는 이미 상징적인 의미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로센 제국의 황제가 백성들과 아르카디아의 왕국들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강했다. 대제의 후손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들은 크로센 황제에게 끝없는 존경과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오랫동안 국정을 좌지우지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페르슈타인 공작이 섣불리 황제를 폐위시키지 못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대관식은 귀족회의에서 승인된 날로부터 정확히 이틀 뒤에 거행되었다. 드비어스 황태자가 폐위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발렌시우스 2세에 등극하는 대관식은 백성의 열렬한 환영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데이몬이 황실기념관에 들어간지 정확히 8일 만의 일이었다. 수만의 펠젠틴 시민들이 황궁 주위에 몰려들어 새로운 황제를 반겼다. "황제폐하 만세." "크로센 제국이여 영원하라……. 대제시여, 폐하를 영원히 보살펴 주소서." 대관식을 먼발치에서 보고 있던 페르슈타인 공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새 황제와 그리 감정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무수한 황족을 암살한데다 아버지까지 식물인간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에 드비어스 황태자는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거의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니 페르슈타인 공작 역시 새 황제에 대해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드넓은 야심만큼이나 자기관리에 철저한 인물이었다. 대업을 생각해서 새 황제와의 충돌을 최대한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쓸데없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대관식에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보고 있으니 공작도 그리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정말 열렬한 환영이로군.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렸지만 백성들은 아직까지 황제에게 진정으로 충성을 바치고 있어." 펠젠틴 시민들이 새 황제에 바치는 충성심은 한 마디로 맹목적이라 표현할 수 있었다. 단지 크로센 대제의 후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와 같은 추앙을 받는 것이다. 서글픔을 느낀 페르슈타인 공작은 묵묵히 뇌까렸다. "이곳에는 크로센 대제의 그림자가 너무 짙게 드리워져 있어. 만약 내가 황제를 실각시키고 그 자리에 등극했더라면……." 생각해 보던 페르슈타인 공작은 씁쓸히 고개를 흔들었다. "백성들의 환영은커녕 각지의 민란을 진압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겠지. 아무리 선정을 베풀더라도 백성들은 날 단지 제위를 찬탈한 역적으로밖에 보지 않을 테니까. 그것 때문에 제위에 오르는 것을 계속 미뤄오다가 이런 지경에 처해버렸지만."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그라 하더라도 아르카디아 전체에 드리워진 크로센 대제의 그림자를 지운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크로센 대제는 아르카디아 사람들에겐 한 마디로 신과 동일한 반열에 올라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지울 수 있을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페르슈타인 공작에겐 마음 속에 품고 있는 하나의 희망이 있었다. 그 희망은 불과 얼마 전에 생겨난 것이었다. 공작의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아르카디아는 불가능하지만 트루베니아는 사정이 다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트루베니아 사람들을 오크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켜 줄 경우 내가 제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내가 가진 능력을 십분 발휘해 국가를 정비하며 새로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다면……. 어쩌면 나도 먼 훗날 트루베니아 사람들에게 크로센 대제에 버금갈 정도로 추앙 받을 수도 있겠지? 후후. 기대되는군. 트루베니아에 제 2의 크로센 대제가 탄생하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이루기가 전혀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희열감으로 인해 페르슈타인 공작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껍데기뿐인 크로센 제국의 황제자리를 찬탈하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나았다. 비록 흑마법사 데이몬에게 종속의 혈충을 시술 당해 강제로 목표를 바꿔야 하긴 했지만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목표는 오히려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더욱 뚜렷한 목표의식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제위에 올라 능력을 발휘해서 제국을 건국하는 것. 그리고 헬프레인 가문이 대대손손 트루베니아 백성들의 추앙을 받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뿌듯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상념에 잠겨 있던 공작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런. 아직까지 전쟁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헛된 망상이나 품고 있다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에 불과하군. 아직까지 명리에 초연할 수 없으니 말이야." 공작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뒤흔들었다.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트루베니아 침공을 승리로 이끄는 일이다. 그것은 내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이뤄내고 말 것이다." 굳게 움켜쥔 공작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313회. 신 황제의 대관식 절차는 차질 없이 차근차근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발렌시우스 2세는 가장 먼저 귀족원 의원들에게 충성서약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형식에 불과할 뿐이었다. 귀족의원들의 90%를 장악하고 있는 페르슈타인 공작이 충성서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발렌시우스 2세도 굳이 공작의 충성서약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받고 싶은 생각조차 없다는 것이 신 황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짐은 크로센 제국의 주인으로써 백성들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할 것을 맹세한다. 또한 귀족들을 존중하고 기사들을 아껴 크로센 제국이 끝없이 번영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서약을 마친 신 황제는 옥새를 넘겨받는 의식에 들어갔다. 극히 순리적인 정권교체였기에 그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옥새의 소유권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신황제는 감회 어린 눈빛으로 옥새를 어루만졌다. "내가 옥새를 만져볼 수 있게 되다니……." 전체가 미스릴로 주조된 옥새는 아르카디아에 사는 인간, 그 누구에게도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것은 타국의 군주들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선조들이 크로센 대제에 행한 충성서약 때문이었다.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아르카디아에 왕국을 건설한 군주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크로센 대제에게 충성서약을 했다. 그것은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한 군주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대제가 죽은 뒤 그 충성서약은 그가 남긴 옥새를 매개로 이어졌다. 세월이 흘러 더 이상 충성서약을 하는 군주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어도 선대 군주들이 한 서약 때문에 옥새는 아직까지 아르카디아의 왕국들에게 무한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제 아무리 군사력이 강력한 강대국의 군주라도 옥새가 찍힌 크로센 황제의 부탁을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그것이 국가의 멸망을 초래하는 것이 아닌 한 말이다. 비록 페르슈타인 공작의 사람들에겐 크게 어필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옥새의 영향력은 결코 쉽게 생각할 수준이 아니었다. 테오도르의 음성이 옥새를 감싸쥔 채 상념에 팔려 있는 발렌시우스 2세를 일깨웠다. "폐하. 국민들이 폐하의 존안을 뵙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겠소." 옥새를 아무 거리낌없이 테오도르에게 건네준 발렌시우스 2세가 발코니 쪽으로 다가갔다. 얼마나 테오도르를 믿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가진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옥새는 결코 아무에게나 맡길 성질의 물건이 아니었다. 이미 친위기사들이 요소요소애 매복해 있었고 궁정마법사 필라모네스가 만약을 위해 발코니 전체에 실드를 펼쳐놓은 상태였다. 창가로 향하는 황제의 뒤를 가녀린 인영 하나가 뒤따랐다. "와아아아." "황제폐하 만세." 새로 등극한 황제가 드높은 발코니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시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발렌시우스 2세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손짓 여하에 따라 백성들은 거듭 열광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그들은 진심으로 젊은 황제를 축복하고 있었다. 신 황제 발렌시우스 2세의 옆에는 미나가 곱게 치장한 채 아리따운 자태를 백성들에게 뽐내고 있었다. 얼굴에 미소를 가득 떠올린 채 말이다. 아직까지는 황제의 연인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머지 않아 크로센 제국의 황후가 될 터였다. 펠젠틴 시내는 지금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얼싸안은 채 젊은 황제의 등극을 축하했다. 대로는 인파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고 주점이라 이름 붙은 곳은 사람들로 가득 차 미어 터질 듯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머지 않아 벌어질 트루베니아와의 전쟁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 갈 것이며 또한 그 전쟁으로 인간의 존망이 결정될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휴. 이제 일단락 된 건가?" 테오도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것은 장장 하루 동안 치러진 대관식을 차질 없이 처리한 데 대한 안도의 한숨이었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일렀다. 이제부터 준비해야 하는 일은 결코 차질이 빚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무사히 등극하셨고 옥새도 차질 없이 인수하셨으니 이제는 외교적인 것만 남았군. 트루베니아 정벌을 위한 대군을 서둘러 끌어 모아야 하니까……. 페르슈타인 공작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서둘러야겠어." 옥새를 집어든 테오도르는 서둘러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피곤했지만 휴식할 엄두는 전혀 내지 못했다. 아르카디아의 왕국들에게 트루베니아 정벌을 위한 병력을 지원 받으려면 반드시 옥새가 필요했고 이미 거기에 대한 발렌시우스 2세의 윤허가 떨어진 다음이었다. 어지간한 군주라면 신하에게 옥새를 맡기는 것을 꺼림칙하게 생각했을 테지만 테오도르에 대한 발렌시우스 2세의 신임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서류를 가져가 도장을 맡아오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통째로 내어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대신 옥새를 보호하기 위해 30여 명의 친위기사가 따라붙긴 했지만. 두두두두. 황궁을 나선 마차 한 대가 친위기사 30명의 호위를 받으며 관도를 질주했다. 마차가 향하는 곳은 바로 페르슈타인 공작의 저택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쉽사리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다. 시내 도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 대관식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대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비키시오. 우린 공무로 이동하는 친위기사들이오. 한 시가 급하오." 선두에 선 친위기사들이 거듭 고함을 질렀지만 요지부동이었다. 피할래야 피할 만한 곳이 없는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본 친위기사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야 오늘 밤 안에 도착하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군." 테오도르 집정관을 태운 마차는 사람들의 인파에 둘러싸인 채 느리게, 느리게 나아갔다. "자 기사양반 당신도 한 잔 하시오."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술잔을 내밀었지만 공무수행중인 탓에 친위기사들은 불행히도 거기에 응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야 사람들과 어우러져 질펀하게 술판을 벌이고 싶었지만 말이다. "늦었군." 테오도르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예. 길이 워낙 막힌 탓에……." "그럴 만도 하지. 나도 저택으로 돌아오며 상당히 곤욕을 치렀으니 말일세. 그런데 그것이 옥새인가?" 페르슈타인 공작의 시선이 테오도르가 들고 들어온 함에 쏟아졌다. 테오도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준비는 대부분 끝난 셈이로군. 가능한 한 병력을 많이 모으도록 해야 할걸세. 정벌군에 대한 편제와 조직구성에 관한 것은 모두 각급 사단장들에 맡길 생각이니까……. 유능한 자들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건 그렇고……." 페르슈타인 공작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자네의 일 처리 능력은 가히 범인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더군. 하나 하나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아무런 차질 없이 확실하게 끝맺은 것을 보니 말이야." 테오도르의 입가에 쑥스러운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솔직히 말해 왜 자넬 진작 내 사람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치밀어 오르네. 발렌시우스 1세를 만나기 전에 자넬 끌어들였다면 내 부담을 많이 덜 수 있었을 테니 말이야." 테오도르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전 브로큰하트 가문의 사람입니다. 두 가문 사이의 관계가 어떻다는 것은 공작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자넨 그런 가문의 숙명을 벗어 던지더라도 얻고 싶은 인재임에는 틀림없지. 하긴 황제자리까지 마다한 사람에게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우선 앉게." 페르슈타인 공작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테오도르는 마다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공작이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병력의 수일세.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그것도 잘 훈련된 정예병력으로 끌어 모아야 한다는 점일세. 비록 귀족회의에서 약속하긴 했지만 나의 통제 하에 있는 병력 모두를 투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네도 익히 짐작하고 있을 걸세." "대충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테오도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의 말에는 한 치도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크로센 제국은 무려 오십 만이나 되는 정규군을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페르슈타인 공작의 사병이 십 만 남짓 있었다. 모두가 직업군인으로써 훈련도 충실하고 장비도 잘 갖춰진 그야말로 정예 중의 정예병들이었다. 하지만 트루베니아 정벌에 그들 모두를 투입할 수는 없었다. 드래곤의 역습에 대비해 주요 거점을 지킬 병력을 따로 빼 두어야 하는 것이다. 자고로 본국의 치안이 튼튼해야만 원정 나간 병사들이 마음놓고 싸울 수 있는 법. 치안을 담당하는 지역 방위군이 다수 있긴 하지만 그들로 드넓은 제국 전역을 지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부득이 15만 정도는 남겨둬야 할걸세. 그렇다면 침공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줄잡아 45만 정도밖에 되지 않아." 말을 마친 페르슈타인 공작이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다른 왕국에서 최소한 그 이상을 모아야 한다네. 그것도 잘 훈련된 정예병으로만 말이야." "그렇겠군요. 보급 물자의 추가지원이 막막할 테니 말입니다. 워낙 어려운 상황이라 정예가 아니면 도저히 전쟁을 수행해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자신의 의중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침공군이 트루베니아에 상륙할 경우 드래곤들은 십중팔구 바다를 차단해버릴 걸세. 500년 전에 벌어진 2차 종족전쟁에서 그랬듯 말이야. 때문에 우린 1차로 최대한 많은 병력과 물자를 트루베니아에 상륙시켜야 하네."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 두셨습니까?" 공작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많은 첩자들을 트루베니아에 파견해놓았네. 각지의 지형, 오크 부족의 배치도, 그리고 상륙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서 말이야." 테오도르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서렸다. "상당히 위험한 임무일텐데……." "실력 있는 기사와 마법사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임무수행에는 별 무리가 없을 거야. 드래곤들의 수면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세." "과연 공작님이시군요." 테오도르는 혀를 내둘렀다. 공작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건 그렇고 병력을 끌어 모을 방도나 상의하도록 하지. 우선 좋은 소식을 하나 전해 주겠네." "무엇입니까?" "몇몇 왕국에서 예상 보다 많은 병력을 파견하겠다고 약속했네. 어느 왕국들인지 짐작이 가는가?" "혹시 트리아노나 세르발티 같은 왕국들 아닙니까?"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갔다. "그렇다네. 중앙광장의 참사로 왕녀와 호위기사를 잃은 왕국들이지. 딸을 잃은 탓에 그 국왕들은 드래곤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지. 그래서 내가 넌지시 의중을 떠보았는데 황제의 친서를 정식으로 보낼 경우 주력병력을 깡그리 파병하겠다고 나서더군." 테오도르의 미간이 지긋이 모아졌다. "하지만 저희들에겐 잘 훈련된 정예병만 필요합니다. 게다가 적어도 그 병력들이 6개월 이상 버틸 수 있는 보급물자도 필요하고요." "보급물자는 내가 어떻게든 조달해 보겠네. 필요하다면 황실의 재산도 조금 갖다 써야겠지? 그렇지 않나?" "그렇긴 합니다만……." 거의 비어버린 황실보고를 떠올려본 테오도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으로써 가장 중요한 문제는 펜슬럿과 테제로스, 그리고 테르비아 이 세 왕국에서 병력을 지원 받는 문제야. 자기 딴에는 강대국이라고 콧대를 세우고 있는 형편이거든. 다른 왕국들이야 뭐 사신이나 마법 통신을 통해 전갈하면 그만이지만 이들 나라에게는 적용할 수 없네. 보나마나 무시당했다고 펄펄 뛸 테지?" "그렇겠군요. 마땅한 사람을 물색해 두셨습니까?" 테오도르의 얼굴에 긴장된 기색이 떠올랐다. 세 나라가 보유한 병력을 감안한다면 상당한 고위인사를 보내야 할 터였다. 하지만 페르슈타인 공작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테오도르는 마음이 편해졌다. [다크메이지]11장 반전의 시작. 314회. 그가 물색했다면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난 카심 용병단원들을 최대한 이용해 볼 생각이야. 당장 할 일이 없다고 놀려둘 굳이 필요가 없지 않겠나?" 생각 밖의 일이라서 테오도르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들은 귀족도 아닌 일개 용병단원들이 아닙니까? 신분상 그런 중임을 맡기에는……." 페르슈타인 공작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닐세. 그들 중에서 대장을 맡고 있는 카심이란 자와 미첼이란 젊은 기사는 이미 펜슬럿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상태이네. 첩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펜슬럿 국왕이 그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 특히 미첼이란 기사는 펜슬럿 근위기사 단장이 암암리에 후임으로 내정해 놓은 것 같다는 보고가 올라왔네" 테오도르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그렇다면 가능하겠군요. 놀랍습니다. 어떻게 그러실 생각을……." "그들을 사신단의 일원으로 삼고 적당한 예물을 들려보낸다면 펜슬럿은 분명히 충분한 병력과 물자를 제공해 줄 걸세.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말일세."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펜슬럿은 해결되었고 테르비아에는 누굴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아시다시피 테르비아의 로시무스 1세는 상당히 다루기 힘든 인물입니다. 극히 호전적인데다 정복욕이 강한 탓에 쉽사리 병력을 내놓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테오도르의 분석에 동의한다는 듯 페르슈타인 공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비교적 정확한 판단이로군. 자네 말이 맞아. 그는 결코 정예를 내놓으려 하지 않을 걸세. 모르긴 몰라도 트루베니아 정벌이 시작되면 그는 꼭꼭 숨겨놓은 병력으로 펜슬럿이나 테제로스를 도모하려 할걸세." "그럴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주력군 빠져나간 그때가 영토를 늘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니까요. 펜슬럿과 테제로스도 그 점을 충분히 감안하고 있을 것입니다." "맞아. 아마도 두 왕국은 테제로스가 지원한 병력의 규모에 따라 파병규모를 결정할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 병력을 모으기 위해서는 테제로스에서 가능한 많이 끌어내야 할 테지." 테오도르의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물색해 놓은 자가 있습니까?" 페르슈타인 공작의 대답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튀어나왔다. "내 생각에 로시무스를 상대할 만한 자는 윌리엄스 후작 한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하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테오도르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동의합니다. 현재로썬 그가 가장 적임자이지요. 타협이나 회유가 통하지 않는 분이니 아무리 교활한 로시무스 1세라도 두손 두발 다 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크로센 기사단원들을 반정도 데리고 가는 게 좋겠군. 그 정도 전력이라면 충분히 무력시위가 가능할 테지. 힘으로 누를 수도 없으니 로시무스 1세에겐 도리가 없을 거야." "알겠습니다. 테르비아에 대한 일은 제가 황제폐하께 주청해서 성사시키겠습니다." "그래야지. 그 고집불통은 오직 황제의 말밖에는 듣지 않으니 말이야. 그건 그렇고 테제로스가 남았는데……. 자네 의견을 듣고 싶군." 테오도르는 뚫어져라 쳐다보는 페르슈타인 공작의 시선을 조용히 맞받았다. "테제로스 국왕은 유난히 검술을 중시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검술실력이 뛰어난 사람을 보내야 하는데 문제는 크로센 기사단의 부대장들을 보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실력들이야 충분하지만 문제는 윌리엄스 후작께서 테르비아로 간다는 점입니다. 휘하의 기사가 테제로스로 온다면 분명히 국왕의 심기를 거스를 우려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3국 사이에는 미묘한 자존심의 기류 같은 게 흐르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네 말의 요점은 뭔가?" "공작님의 사람을 쓰는 게 낫겠습니다. 듀크 나이츠의 총수를 보낸다면 테제로스 국왕도 그리 섭섭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크로비츠 말이로군. 역시 자네로군. 사실 나도 암암리에 크로비츠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네. 단지 내 사람이라 내세우기가 꺼림칙해서 자네에게 물어보았던 거지. 결론적으로 나는 자네 의견에 찬성하네. 그만한 적임자가 없지." "크로비츠 단장에게 붙여보낼 만한 사람을 물색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카심 용병단원들을 보내는 문제는 일단 대장인 카심과 한 번 상의해 보겠습니다. 아마 반대는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럴 걸세. 참. 황실기념관에 틀어박혀 있는 흑마법사에게도 의견을 한 번 들어보게. 워낙 괴팍한 작자라서 미리 얘기하고 일을 추진하는 게 나을 것 같네." 테오도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일을 추진하도록 하겠네." 말을 마친 페르슈타인 공작이 몸을 일으켰다. 주인이 먼저 몸을 일으키니 테오도르도 그냥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전 이만……." "살펴가도록 하게. 마중은 나가지 않겠네." "네." 저택을 나선 테오도르는 곧장 카심 용병단원들을 만나러갔다. 사정을 솔직히 털어놓고 협조를 구하려는 심산에서였다. 용병대원들은 듀크 나이츠의 연무장에서 한창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듀크 나이츠의 안내를 받아 연무장에 도착하자 거센 기합소리와 검 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챙. 챙.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연신 검을 날리는 용병대원들을 본 테오도르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데이몬의 동료들이라 생각하니 결코 외인으로 생각되지 않았고 열심히 수련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니 앞으로 벌어질 전쟁에서 큰 힘이 되어줄 것 같았다. 종족전쟁이 벌어질 경우 카심 용병단원들의 활약이 가장 중요했다. 그들이 효과적으로 드래곤들을 제압해 주어야만 승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본 드래곤과 데스 나이트가 주력이겠지만 저들의 역할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테오도르가 다가가자 카심이 검을 거두고 반갑게 그를 맞았다. "안녕하십니까. 집정관님께서 여긴 웬일이십니까?" "부탁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부탁이라뇨?" 테오도르는 곧 페르슈타인 공작과 오간 대화내용을 들려주었다. 사정을 들은 카심은 무척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저희들에겐 사절이란 중임을 맡을 경험과 지식이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저와 미첼은 펜슬럿에서 이미 작위를 받았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펜슬럿 국왕전하께서 두 분을 각별히 생각하신 다니 별 어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전문적인 외교관이 동행할 것이니 외교적인 문제는 그에게 전적으로 일임하시면 됩니다. 그저 펜슬럿 국왕전하께 인사를 드린다 생각하고 맡아주십시오." 카심의 안색이 살짝 펴졌다. 일이 성사된다면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볼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카심은 역시 신중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볼 문제이군요. 일단 데이몬께 먼저 말씀드리고 허락을 얻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명목상 제가 대장이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분께서……." 테오도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당연한 절차이니까요." 테오도르의 말을 들은 카심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몬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미첼이란 분은……." "아. 그는 누군가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갔습니다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도 반대하진 않을 테니까요. 원하신다면 제가 미리 얘기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테오도르는 예를 취한 채 몸을 돌렸다. 카심은 미소를 가득 떠올린 채 한참동안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마틸다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로 가슴이 터져 나갈 듯 했기 때문에……. "젠장. 누가 찾아온 거지? 이곳엔 날 아는 사람이 없을 텐데……." 미첼은 연신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수련을 방해받은 탓인지 방문자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미첼은 인상을 쓰며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통보해준 경비병이 무척 겸연쩍은 기색으로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여자였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내쫓았을 텐데……." 경비병에 의하면 찾아온 자는 나이가 지긋한 중년사내라고 했다. 한 번 만나보긴 해야 할 것 같아서 나서긴 했지만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여행자 차림이라고 하니 자신에게 줄을 놓아보려는 왕녀의 고용인 따윈 아닌 것 같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미첼이 갑자기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콧대가 높아진 거지?" 미첼은 관심을 가지는 왕녀들에게 유독 냉랭하게 대했다. 과거를 생각해보면 정말 경이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름다운 귀족아가씨와의 로맨스를 꿈꿔왔던 미첼이 아니었던가? 그를 연모하는 귀족아가씨들이 줄을 섰지만 미첼에겐 섣불리 사랑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특별한 여인. 카심이나 데이몬처럼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킬 수 있는 여인을 만나 멋지게 사랑을 시작하고픈 것이 미첼의 생각이었다. 물론 구애하는 귀족 아가씨들 중에 미첼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인은 단 하나도 없었다. 미첼은 쓴웃음을 지었다. "모두 허영에 가득 찬 여인들뿐이었어. 이거 데이몬을 따라다니다 보니 안목이 상당히 높아진 것 같군." 걷다보니 어느덧 저택의 정문에 도착해 있었다. 카심 용병단원들이 묵고 있는 페르슈타인 공작의 저택은 주인이 가진 권세만큼이나 넓디넓었다. 듀크 나이츠들 중 반수 이상이 저택에서 기거하고 있으니 얼마나 넓은지 익히 알 만 했다. "이리로 오십시오." 미첼을 안내하던 병사가 정문 옆에 달린 조그마한 쪽문 쪽으로 다가갔다. 경비하는 병사들이 미첼을 보자 부동자세를 취했다. 덜컥. 문이 열리자 미첼은 잠자코 걸음을 옮겼다. 찾아온 사람은 미첼에게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다.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아, 아버지." 찾아온 사람은 바로 미첼의 아버지인 헤일즈였다. 카르셀 왕국의 경비대장인 아버지 헤일즈가 지친 듯한 기색으로 그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헤일즈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갔다. "건강한 널 보니 정말 반갑구나. 미첼." "아버지." 미첼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아버지를 덥석 껴안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 난데없이 만나게 되니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뜨거운 부자간의 해후를 경비병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 중에서 특히 가슴을 쓸어 내리는 경비병이 있었으니 바로 미첼을 안내해 온 자였다. '천만 다행이로군. 워낙 복색이 남루해서 그냥 돌려보내려다 마음을 바꿨는데 말이야. 그랬다면 정말 큰일날 뻔했군. 감히 미첼 용사님의 아버지를 냉대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는지 경비병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 아버지 여긴 어인 일로……." 미첼의 질문에 아버지 헤일즈의 눈빛이 별안간 서늘해졌다. 순간 미첼은 소름이 오싹 끼치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가 이런 눈빛을 보일 때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휙. 주먹을 불끈 쥔 헤일즈는 불문곡직하고 미첼의 머리통을 향해 냅다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이미 소드 마스터의 반열에 오른 미첼은 마음이 몸을 움직이는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게다가 그동안 율리아나의 암습에 골탕먹으며 반사신경이 그 얼마나 향상되었던가? 허공을 후려갈긴 헤일즈의 몸이 휘청했다. "엇. 이 녀석이……." 미첼은 손을 내밀어 쓰러지려는 아버지를 부축했다. 그의 입가에는 모호한 미소가 배어 있었다. "이버지 다 큰자식에게 폭력이 무슨 말입니까." "이 자식이 머리통이 컸다고 감히 아버지의 주먹을 피해?" 짐짓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헤일즈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머나먼 크로센 제국을 찾아오며 겪어야 했던 고생이 사르르 잊혀지는 순간이었다. 펠젠틴으로 동안 헤일즈는 거의 귀가 빠지도록 카심 용병단의 무용담에 대해 들어야 했다. 벌써 두 마리의 드래곤을 처치했으며 펠젠틴에 난입한 에인션트 급 드래곤에 맞서 싸워 당당히 물리친 카심 용병단의 무용담은 이제 전설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들 미첼이 그런 엄청난 용병단의 구성원이라니……. 기사가 되지 못한 게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헤일즈는 마음을 비웠다. 어리게만 보았던 아들이 당당히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것을 보니 가슴이 뿌듯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이 담뿍 담긴 눈빛으로 미첼을 쳐다보던 헤일즈가 말문을 열었다.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게 사실이냐?" "네. 아버지." "네가 이룬 성취를 한 번 보여줄 수 있겠느냐?" 미첼은 두 말도 하지 않고 검을 뽑아들었다. 파츠츠츠. 마나를 불어넣자 검이 파르스름하게 물들었다. 잠시 후 눈부신 빛이 검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다. 오로지 소드 마스터만이 시전할 수 있다는 완성된 오러 블레이드였다. 그것을 보자 헤일즈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많이 컸구나. 미첼." 미첼은 헤일즈에게 진심으로 머리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모두가 아버님 덕분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혹독하게 수련 받지 않았다면 전 결코 지금의 경지를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어렸을 땐 아버지의 엄한 교육이 무척 원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아닙니다. 전 지금 아버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 약속드리겠습니다. 지금의 성취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수련에 정진해서 기필코 그랜드 마스터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아버님께 보여드리겠습니다." 미첼의 진정 어린 말에 헤일즈는 급기야 울먹이기 시작했다. "녀석. 실력만 는 줄 알았더니 수양이 더욱 늘었어. 솔직히 말해 널 떠나보낼 때 못내 안타까웠단다. 실력은 충분했지만 정신적인 수양이 심히 부족하다 판단했던 거지. 하지만 그건 단지 아비의 오산에 불과했구나. 심신 양면으로 전혀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검사가 되었으니……." 미첼은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를 꼭 껴안았다.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시지요. 아버님께 꼭 드릴 말이 있는 데다 동료들도 소개시켜드려야 하니 말입니다." "동료들 얘긴 들었다. 어디 한 번 보자꾸나." 미첼은 자랑스레 대꾸했다. "서로를 위해 거리낌없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동료들입니다. 만나보면 만족하실 겁니다." "오냐, 오냐." 감정을 좀처럼 삭이지 못했는지 헤일즈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미첼은 아버지를 얼싸안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눈치 빠른 경비병 몇이 달려들어 헤일즈의 짐을 받아들고는 뒤를 따랐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15회. 미첼의 아버지란 말에 용병단원들은 반갑게 헤일즈를 맞았다. 마치 자신들의 친아버지를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카심이 공손히 머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진작 찾아뵈었어야 하는 건데……." 헤일즈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아니오. 미첼의 말대로 정말 용맹스러운 용사들이구려. 우리 미첼을 동료로 맞아 주셔서 정말 고맙소이다."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도리어 저희들이 미첼에게 큰 은혜를 입었지요." 용병단원들의 태도에 헤일즈는 그들이 미첼을 진정한 동료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녀석. 특유의 출세욕 탓에 좋은 인간관계를 맺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괜한 우려에 불과했어. 이렇게 멋지게 성장해 주다니…….' 헤일즈의 상념은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려온 고함소리 때문에 끝나버렸다. "헤일즈 아저씨." 왜소한 인영 하나가 바람처럼 달려와 헤일즈를 얼싸안았다. 율리아나였다. 그녀를 본 헤일즈의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 차 올랐다. "무사했군요. 율리아나 아가씨." "아저씨. 엉엉엉." 헤일즈를 보자마자 율리아나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럴 것이 헤일즈는 어릴 때부터 그녀를 돌봐준 믿음직한 카르셀의 경비대장이었고 그 관계는 가히 친 숙부 이상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간의 서러움이 모두 북받쳐 올랐는지 율리아나의 울음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 탓에 난처해진 것은 헤일즈였다. 그는 조용히 율리아나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그만 우십시오. 아가씨." "흐흐흑." 하지만 율리아나의 울음은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그녀를 달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헤일즈의 안색이 갑자기 돌변했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미첼을 쳐다보았다. "혹시 네가……." 사색이 된 미첼이 손을 절래절래 흔들며 뒤로 물러났다. "아, 아닙니다. 전 결코 무례를 범한 일이 없습니다." "네가 버릇없이 굴지 않았다면 아가씨가 왜 이렇게 슬퍼하겠느냐? 잔소리말고 이실직고하지 못하겠느냐?" "저, 전 결백합니다. 정말입니다." 헤일즈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어허. 이 놈이 그래도………. 아무래도 몽둥이 타작을 해야만 솔직히 고할 것 같구나? 지금 당장 몽둥이를 찾아 대령하도록 하라." 미첼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해후의 반가움도 잠시 뿐이었다. 여우같은 율리아나 때문에 결국 아버지의 불같은 성질이 폭발하고 말았으니……. 미첼에겐 아버지의 화를 가라앉히는 것이 가장 시급했고 그러려면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그는 맥없이 몸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몽둥이를 찾아오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헤일즈는 울퉁불퉁한 근육을 과시하며 연신 손마디를 꺾었다. 오랜만에 만난 아들이었지만 잘못을 그냥 보아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평소 헤일즈의 지론이 자식교육에 매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것 아니었던가? 그 때 뜻밖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놀랍게도 구원자는 율리아나였다. "아니예요. 아저씨. 전 미첼 때문에 운 게 아니에요. 그냥 반가워서 그랬어요. 미첼은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어요." "네?" 헤일즈는 깜짝 놀랐다. 틈만 나면 미첼에게 누명을 덮어씌워 곤욕을 치르게 하던 율리아나 아니던가. 때문에 헤일즈는 아들이 무고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엄하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뜻밖에도 미첼을 두둔하고 나서다니……. 헤일즈로써는 당연히 믿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저 녀석은 필경 버릇없이 아가씨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안 봐도 뻔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도리어 그는 위기에 빠진 절 여러 번 구해준 걸요? 미첼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 말문이 콱 막힌 헤일즈를 쳐다보며 율리아나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아저씬 제 성격 아시잖아요. 만약 미첼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제가 가만히 있을 사람인가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헤일즈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분노는 어느 정도 누그러진 상태였다. 잠시 후 그는 어느 정도 누그러진 눈빛으로 어정쩡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미첼을 쳐다보았다. "몽둥이는 놔두거라. 아가씨 말을 들어보니 네가 별달리 잘못한 것이 없는 것 같구나. 너에 대한 치죄는 일단 보류하겠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미첼이 그때서야 가슴을 쓸어 내렸다. 율리아나가 대관절 무슨 이유로 자신을 두둔해 준지 모르지만 일단 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미심쩍은 눈빛으로 율리아나를 한 번 쳐다본 미첼이 조심스럽게 아버지에게 다가왔다. 그런 미첼에게 헤일즈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좀 성급했구나. 이해하거라." 미첼의 말투는 다소 불퉁하게 변해 있었다. "아버진 원래 그러시잖습니까? 앞뒤 가릴 것 없이 일단 무지막지하게 패고 보는 것이 아버지 특유의 방법이지요." "지금 뭐라고 했느냐?" 헤일즈의 눈빛이 갑자기 사나워지자 미첼은 찔끔했다. 더 이상 아버지를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미첼은 잽싸게 화제를 바꿨다. "그냥 혼잣말이었습니다. 그건 그렇게 이곳엔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다행히 헤일즈는 더 이상 문제삼지 않을 듯한 눈치였다. "난 너와 아가씨의 소식을 알아보려 나왔단다. 최근 카르셀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거듭 일어났기 때문에 전하께서 알아 보라 하셔서 말이다." "그래도 병사를 데리고 오셨어야지요. 혼자 다니시다가 나쁜 일이라도 당하시면 어쩌시려고……." 헤일즈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미첼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녀석.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고 아비를 무시하는 게냐? 이래뵈도 아빈 한 때 당당한 펜슬럿의 근위기사였다. 산적 나부랭이들이 여러 번 날 노렸지만 덕택에 노자를 두둑하게 마련할 수 있었지." "하하하 아버지도……." 용병단원들도 미첼을 따라 호탕하게 웃었다. 펜슬럿의 근위기사였다는 전력으로 조심스럽게 대했지만 미첼의 아버지는 생각보다 소탈했다. 그리고 소드 마스터인 아들에게 아무 거리낌없이 매질을 하려고 하는 것을 보니 미첼이 충실한 기본기를 보유한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암. 저런 아버지 밑에서 엄하게 자랐기에 그토록 기본기가 탄탄한 거지…….' 웃음이 한 바탕 돌아가자 미첼이 헤일즈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니요? 카르셀에 무슨 변고가 있습니까?" "실은……." 헤일즈는 최근 들어 카르셀에서 일어난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평소 카르셀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강대국들이 거듭 동맹을 맺자고 사신을 보낸 일과 단 한 번에 국한된 일이기는 하지만 화이트 드래곤 카트로이가 카르셀의 수호룡이 되었다는 일이 낱낱이 설명되었다. 미첼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트로이 님께서 그러신 것은 이해가 갑니다. 아버진 잘 모르시겠지만 카트로이님도 저희 용병단의 일원이시거든요?" 이번에는 헤일즈의 눈이 휘둥그레질 차례였다. "화이트 드래곤이 카심 용병단의 단원이라고?" "그렇습니다. 드래곤 슬레이어 용병단에 드래곤이 낀 게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사실입니다. 조금 있으면 그 분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워낙 술을 좋아하셔서 한 잔 걸치러 가셨거든요." 아직까지 적응이 되지 않는지 헤일즈가 떠듬떠듬 되물었다. "어떻게 드래곤을 동료로 맞아들일 수 있었느냐?" "율리아나 덕택이지요. 걔가 나섰기 때문에 카트로이님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 큭." 딱 소리와 함께 미첼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헤일즈가 인정사정보지 않고 후려갈겼기 때문이었다. "이 자식이? 왕녀님께 존칭을 붙여도 모자랄 판인데 걔라니 그 무슨 버릇없는 말버릇이냐?" 머리를 감싸쥔 미첼이 울상을 지었다. '젠장. 데이몬에 이어 아버지까지…….' 반사적으로 내 머리가 동네북이냐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그는 결사적으로 입을 닫았다. 자존심은 무력(武力) 앞에는 철저히 무력(無力)할 수밖에 없었다. "하, 하지만 율리아나는 이미 카심 용병단의 단원이 되었는걸요? 예전의 신분이 어땠던 간에 일단 카심 용병단원이 된 이상 서로 동등하게 대해야 합니다." 헤일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엥? 그게 무슨 소리냐?" 율리아나가 나서서 설명을 시작했다. "미첼의 말은 사실이에요. 전 카심 용병단원이 되기로 자청했어요."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곱게 자라신 왕녀님께서 용병이 되시다니요? 만약 이 사실을 카르셀에 계시는 전하께서 아시게 된다면……." "아셔도 상관없어요. 솔직히 말해 카르셀이 왕국인가요? 타국의 일개 산골마을에 지나지 않는 카르셀의 왕녀보다 오히려 카심 용병단원이 훨씬 좋은 대우를 받을 거예요. 여러 강대국들이 카르셀과 동맹을 맺자고 나선 것도 바로 나와 미첼이 카심 용병단원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아시겠어요?" "허. 이런 일이……." 헤일즈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물론 율리아나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의 눈에도 카르셀은 왕국이 아닌 그저 살기 좋은 산골마을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비대장인 그가 쉽사리 사실을 시인하고 나설 수는 없는 법. 헤일즈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세상의 쓴맛을 많이 겪으셨나 보군. 정말 변하셨어.' 율리아나와 미첼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둘이 카르셀을 떠나던 때와 많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침착하고 대범하게 변한 미첼은 차지하고서라도 율리아나의 변화는 확연했다. 다시 말해 철없던 과거의 율리아나가 아니었다. 특유의 고집은 여전했지만 말이다. "아버지께 전해 주세요. 전 이미 카심 용병단원과 생사를 같이하겠다고 결심했어요. 익히 알고 계시듯 제 고집은 결코 꺾이지 않을 거예요." "아, 알겠습니다." 율리아나의 고집이 확고한 것을 느낀 헤일즈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이 일을 어떻게 국왕에게 보고해야 할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생각을 거듭하던 헤일즈는 매서운 눈빛으로 미첼을 쳐다보았다. "앞으로 넌 목숨을 걸고 율리아나 왕녀님을 보호해야 한다. 알겠느냐?" '오히려 보호받아야 할 사람은 저인걸요?'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미첼은 결사적으로 억눌렀다. "각골 명심하겠습니다." "믿겠다." 뿌듯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지를 보며 미첼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 때 머리 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참 아버지. 좋은 일이 있습니다." "뭐냐? 말해보아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아버지의 눈빛을 맞받으며 미첼이 가슴을 쭉 폈다. "제가 원래부터 효자란 사실은 잘 아시고 계시겠지요? 이 아들이 모처럼 아버님을 위해 좋은 선물을 준비해 놓았답니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미처 말로는 다 설명을 드릴 수 없군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버님께서 극히 기뻐하실 것이란 사실입니다. 캬! 세상에 이런 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효자가 따로 없지요." 넉살 좋게 자화자찬을 늘어놓는 미첼을 보며 율리아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미첼이 어쩌면 저렇게 데이몬을 닮아 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16회. 만성이 되었는지 용병단원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헤일즈도 마찬가지였다. 이유가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아들아……." "네 아버님." 헤일즈의 말은 짧고도 단호했다. "간략하게 털어놓겠느냐? 아니면 맞고 말하겠느냐." "………." "널 보니 그동안 매질이 심히 부족했다는 점을 절감한다. 널 위해 아비가 부득이 매를 들어야……." 미첼은 벼락처럼 헤일즈 앞에 붙어 앉았다. "지금 즉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첼의 입에서 펜슬럿에서 일어난 일들이 하나 둘씩 흘러나왔다. 심드렁하던 헤일즈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변해갔다. 그에겐 정말 놀라울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다. 아들인 미첼이 근위기사단 부단장이 된 예전의 원수 라일리 프리즈먼에게 멋지게 복수를 성공시킨 뒤 근위기사 단장 카르수스 공작으로부터 직접 헤일즈의 명예를 복권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점. 그리고 펜슬럿 국왕으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은 경과를 설명 듣자 헤일즈의 얼굴에는 경악감이 역력히 맺혀 있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카르수스 분대장님이 날 믿고 있었다니 정말 놀랍구나. 게다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다니." "정말 인품이 훌륭하신 분이셨습니다. 라일리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지요." "그럴 게다. 그 분은 분대장 시절부터 근위기사들의 귀감이 되신 분이지. 한 마디로 명예로운 기사의 표상이라 볼 수 있는 분이야. 아무튼 고맙다. 네가 그토록 아비의 명예를 생각했을 줄이야." 헤일즈는 그윽한 눈빛으로 미첼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난 네가 이렇게 커 준 것이 더욱 가슴 뿌듯하단다. 아비는 명예 따위에 전혀 연연하지 않는다. 알겠느냐?" "그래도 전 통쾌했습니다. 아직까진 그럴 마음이 없지만 훗날 용병단의 임무가 모두 끝날 경우 펜슬럿의 명예로운 기사로 복무하고 싶습니다. 아버님께서 그러셨듯이 말입니다." "녀석." 헤일즈는 슬며시 눈시울을 붉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훌쩍 커버린 아들이 여간 자랑스럽지 않았다. "참 그리고 카르수스 공작께서 아버님을 꼭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밤을 새워 술을 마시며 옛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시다고 말입니다." "나도 그러고 싶구나. 하지만 펜슬럿까지 거리가 워낙 멀어서……." 그 때 카심이 끼여들었다. 잠시 잊고 있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때마침 좋은 기회가 생겼습니다. 어쩌면 저와 미첼이 사절단의 일원으로 펜슬럿에 가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 아버님도 함께 동행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엥?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는 미첼에게 카심은 테오도르의 제안에 대해 들려주었다. 사절단의 일행으로 펜슬럿에 가서 병력지원을 요청하라는 말을 듣자 미첼은 거리낌없이 찬성하고 나섰다. "좋은 생각입니다. 이참에 전하와 카르수스 공도 뵙고, 게다가……." 미첼의 눈빛이 갑자기 음침해졌다. "형님께서는 정말 좋으시겠군요. 아르네에 들러 형수님을 뵐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전 지금 외로워서 돌아버릴 지경인데……." 때마침 헤일즈가 나서서 미첼의 입을 막아버렸다. "외롭다니 그것 잘 된 일이구나. 안 그래도 방앗간 집에서 혼담이 들어왔었는데……. 그 집 큰딸인 엘레나는 주근깨가 좀 많은 편이지만 너도 알다시피 상당한 미인이란다. 잘 되었구나.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용무를 마친 뒤 바로 카르셀로 가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어떠냐?" 괜히 장난을 걸었다가 본전도 못 찾은 미첼이 서둘러 사태를 수습했다. "농담이었습니다. 제 주제에 무슨 결혼입니까? 그럴 시간 있으면 검이나 한 번 더 휘두르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율리아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미첼이 제 꾀에 넘어갔군. 호호호. 재미있어라." "하하하." 연무장에 난데없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속에는 헤일즈의 너털웃음도 끼여 있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데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습니까?" 테오도르의 걱정스런 질문에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 게야.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게." "너무 무리하진 마십시오." "알겠네. 그런데 자네 얼굴도 초췌하긴 마찬가지네. 많이 바쁜가보군." 테오도르는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그는 지금 황실기념관 앞에서 데이몬을 면회하고 있었다. 황실기념관 속엔 먹을 것이 없었기에 데이몬은 하루에 한 번씩 입구에 나와 경비병들에게 음식과 갈아입을 옷을 받아가곤 했다. 잠은 기념관 안에서 해결했고 그 외의 시간은 어둠의 마력을 뽑아내어 러셀런트를 복원하는데 매진했다. 테오도르는 그 시간에 맞춰 기념관을 방문했고 마침내 데이몬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안색이 영 안 되어 보였는지 테오도르가 거듭 질문을 던졌다. "지내시긴 어떠십니까? 불편하신 점은 없습니까?" "그런 대로 괜찮은 편이네. 귀찮게 구는 녀석들이 없으니 마음 푹 놓고 본 드래곤을 복원시키고 있지. 복원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정말 다행이군요." 데이몬이 조용히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날 찾아온 이유가 뭔가? 보나마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분명히 뭔가 일이 있어서 날 찾아왔을 테지?" 테오도르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내심을 여지없이 들켜버린 것이다. "사실은……. 그렇습니다. 한 가지 여쭈어 볼 게 있어서." "말해보게." 테오도르는 곧 페르슈타인 공작 사이에 오간 대화를 털어놓았다. 펜슬럿 국왕의 신임을 받고 있는 미첼과 카심을 사절단에 포함시켜 보내자는 말을 들은 데이몬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테오도르는 조심스럽게 데이몬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제 생각엔 그 편이 나을 듯 싶은데……." 의외로 데이몬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로군. 둘이 동의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게. 그리고……." 테오도르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말씀하십시오." "테제로스엔 누굴 보내기로 했나?" 테오도르는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듀크 나이츠의 총수인 크로비츠가 가기로 했습니다. 윌리엄스 후작께서 테르비아의 로시무스 1세를 맡기로 했던 탓에……." "부탁 한 가지만 해도 되겠나?" 테오도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말씀하십시오." "내 동료들 중에 제럴드란 아이가 있네. 나이는 어리지만 검술실력은 제법 뛰어나지. 혹시 그 아이를 테제로스로 가는 사절단에 끼워줄 수 있겠나?" "가능하긴 하지만 왜……. 연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데이몬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별 문제는 아니야. 그 녀석이 테제로스의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있거든. 그 아이에게 이렇게 전하도록 하게. 빚을 받아내야 할 때가 된 것 같은데 한 번 혼자 해결해 볼 생각이 없냐고……." 테오도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슈렉하이머는 지금 뭘 하고 지내는가?" "스승님께서는 각급 사단장들이 전략을 짜는 것을 도우시느라 무척 바쁘십니다." "한가해지면 날 한 번 보러 오라 이르게."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의혹 어린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테오도르를 보며 데이몬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난 이만 들어가 보겠네. 할 일이 많아서 그러니 이해하게." "사, 살펴 가십시오." 테오도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데이몬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념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토록 안색이 어두우실까?" 하지만 테오도르가 그 연유를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듀크 나이츠의 단장인 크로비츠는 오늘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트루베니아 침공 때문에 페르슈타인 공작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공작의 호위 책임자를 맡고 있는 크로비츠 역시 함께 바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크로비츠에겐 상당한 고역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듀크 나이츠 내에서도 소문난 수련광이었기 때문이었다. "검을 휘두르지 못하니 몸이 근질근질해 죽겠군." 그런 크로비츠의 염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그에게 조금의 시간이 주어졌다. 거듭된 격무로 피로를 느낀 페르슈타인 공작이 한나절 가량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크로비츠는 모처럼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애당초 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한 번 통쾌하게 검을 휘둘러야겠군." 그는 지금 검을 들고 수련장에 나가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연무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먹고 자고 임무를 수행하는 시간 외에는 오로지 연무장에서 생활했던 크로비츠였다. 검술수련에 매진하느라 크로비츠는 아직까지 독신이었다. 50이 다 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크로비츠가 연무장에 도착해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한창 수련에 몰두해야 할 기사들이 검을 휘두르지 않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지 않은가? 하나같이 맥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영락없는 패잔병 몰골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자식들이?' 크로비츠의 눈썹이 역 팔자로 휘어졌다. 수련할 시간에 딴청을 피운다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듀크 나이츠의 단장으로써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질적인 면에서 듀크 나이츠는 아직까지 크로센 기사단원들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마나연공법의 수준차이 때문이었다. 크로센 대제가 익혔던 전설의 마나연공법, 그것은 오직 크로센 기사단에만 전수되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 연공법만은 빼내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듀크 나이츠가 크로센 기사단의 수준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단 한가지 방법 밖에 없었다. 오로지 철저한 수련만이 유일한 돌파구였던 것이다. 그것 때문에 분대장 이하 간부들이 귀족작위마저 포기하며 수련에 매진하는 것 아닌가? 그 때문에 크로비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상태였다. 크로비츠가 다가오는 것을 본 듀크 나이츠들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단장님을 뵙습니다." 분통이 터진 크로비츠는 다짜고짜 고함을 질렀다. "도대체 뭐 하는 건가?" "………." "내가 자리를 비웠다고 수련을 게을리 하다니. 듀크 나이츠의 기강이 그 정도로 해이해진 건가?" 기사들 중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분대장이 난처한 기색으로 떠듬떠듬 대꾸했다. "그, 그게 아니라……." "뭐가 아니란 말인가? 내 필시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크로비츠의 언성이 한층 높아지자 부대장은 조심스럽게 상황설명을 시작했다. "단장님께서 안 계신다고 수련을 게을리 할 기사는 아무도 없습니다. 단지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대책마련을 위해 모여있는 것뿐입니다." "골치 아픈 일이라니……." "실은……." 분대장의 설명을 들은 크로비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대장인 알버트가 카심 용병단원과의 친선대결에서 패했다고?" "그, 그렇습니다." 크로비츠는 생각에 잠겨 들었다. 알버트라면 듀크 나이츠에 소속된 기사들 중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보유한 소드 마스터였다. 그의 정교한 초식과 과감한 공격은 크로비츠도 익히 인정하는 바였다. 그런데 그가 카심 용병단원에게 패하다니……. 비록 투지가 놀랍다고는 하나 크로비츠는 카심 용병단원들의 실력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들 중에 마스터 급은 단 하나밖에 없었고 나머지 단원들은 아직 팔라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17회. 크로비츠는 알버트가 카심 용병단의 소드 마스터에게 패했다고 단정해 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카심 용병단의 소드 마스터가 알버트보다 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해야겠지?" 그 말에 분대장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만 알버트는 소드 마스터에게 패하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팔라딘에게 그만……." "그, 그것이 사실이냐?" 크로비츠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분대장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드 마스터와 팔라딘과의 차이는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라 볼 수 있었다. 팔라딘까지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가능하지만 소드 마스터는 거기에다 자질과 운까지 더해져야 겨우 이룰 수 있는 경지인 것이다. 지금도 무수한 팔라딘들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침식을 잊고 수련에 몰두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 극소수의 기사만 마스터의 영예를 거머쥘 수 있는 것이다. 크로비츠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뇌까렸다. "세,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니? 아무리 대련용 목검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런 일이……." 소드 마스터와 팔라딘의 차이는 오러 블레이드의 완성 여부에 의해 판가름된다. 단지 검에 응축시키기만 하는 팔라딘과 검에서 일정길이 이상 뽑아낼 수 있는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는 위력 면에서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때문에 둘 사이에 친선대결이 벌어질 경우 오러 블레이드를 발산할 수 없는 목검을 사용하는 것이 철칙이었다. 검기가 아닌 순수한 검술실력만으로 승부를 가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드 마스터가 지는 경우는 여태껏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소드 마스터가 되기 위해서는 팔라딘보다 몇 배에 달하는 고된 수련과 뛰어난 자질, 거기에다 운이 보태져야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크로비츠가 이토록 놀라워하는 것이다. '듀크 나이츠의 명예가 땅에 떨어져버렸군. 만약 이 사실이 퍼진다면…….' 그는 이를 지긋이 악물었다. 안 그래도 듀크 나이츠를 업신여기는 크로센 기사단원들이었다. 그런데 만약 듀크 나이츠의 소드 마스터가 용병단 소속 팔라딘에게 패한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십중팔구 놀림거리가 되고 말겠지?' 모멸감으로 말미암아 크로비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크로비츠는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알버트는 어디에 있나?" "여, 여기 있습니다." 기사들 사이를 헤치고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구레나룻을 길게 기른 강인한 인상의 중년 기사였다. 핼쑥한 표정을 보니 마음고생을 단단히 한 모양이었다. 그를 보는 크로비츠의 눈빛은 극도로 차가웠다. "그대에게 부여된 부대장자격을 지금 이 시간 부로 박탈하며 더불어 6개월 동안 외출금지를 명한다. 뼈를 깎는 수련을 거듭해 실추된 듀크 나이츠의 명예를 직접 회복시키도록 하라." 알버트는 두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조아렸다. "명심하겠습니다." "패한 이유를 듣고 싶군. 자네 정도의 기사가 어떻게 해서 팔라딘에게 패했는지 말이야." 잠시 머뭇거리던 알버트는 조심스럽게 설명을 시작했다. "차마 밝히고 싶지 않은 심정이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대련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팔라딘이라 했지만 상대가 왼손잡이에다 그것도 절름발이인 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워낙 간곡히 청하는 바람에……." 알버트는 한 수 가르쳐 준다는 심정으로 대결에 응했다. 물론 실전에서는 제 아무리 뛰어난 팔라딘이라 할지라도 알버트의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소드 마스터의 완성된 오러 블레이드는 어렵지 않게 팔라딘의 검을 산산조각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선비무였기 때문에 그들은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릴 수 없는 목검을 들고 대련에 돌입했다. 보고 있던 듀크 나이츠들은 알버트가 어리고 왜소한 소년 용병을 압도적으로 몰아붙일 줄 알았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진행되어갔다. 알버트는 무거운 낯빛으로 상황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사정을 봐 주며 하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제 우위는 불과 몇 분도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전 제가 가진 모든 실력을 발휘하고도 그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크로비츠는 입을 딱 벌렸다. "어, 어떻게 그런 일이……." "소년 용병의 검술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왼손을 사용하는 검술이라서 무척 생소했던 데다 검로 자체가 정말 괴이신랄했습니다. 한 번도 대해본 적 없는 검술이라서 전 무척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形)을 여지없이 깨뜨린 파격적인 검술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문제는 그의 검술이 생소할 뿐만 아니라 놀라울 정도의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 흐르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환공격은 정교할뿐더러 충분히 위력적이었습니다. 전 계속 방어에 열중하다 결국 수세에 몰려 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럴드의 맹공을 정신 없이 막기만 하던 알버트는 결국 패배를 선언했다.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상대의 검이 자신의 몸을 여러 번 강타했기 때문이었다. 공격은 급소인 갑주의 이음새 부분에 집중적으로 퍼부어졌다. 실전이었다면 벌써 여러 번 죽었어도 모자랐을 정도였다. 물론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렸다면 상황이 진즉에 달라졌겠지만……. "전 그렇게 해서 패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일개 용병에게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알버트의 얼굴에서 상대에 대한 반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실력차이에 따른 패배를 순순히 인정한 것이다. 단지 듀크 나이츠의 위신을 추락시킨 데 대한 부끄러움이 짙게 배어있을 뿐이었다. 과거 크로센 대제와 싸웠던 트루베니아의 기사들과는 사뭇 다른 마음가짐이었다. 설명을 마친 알버트는 크로비츠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실력을 길러서 반드시 도전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추락한 듀크 나이츠의 위신을 반드시 되찾아오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역시 듀크 나이츠답군." 크로비츠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불어 알버트를 패배시킨 제럴드란 용병의 검술에 대해 짙은 호기심이 생겨났다. "도대체 어떤 검술이기에……." 크로비츠의 상념은 별안간 웅성거리는 듀크 나이츠들 때문에 지워졌다. "무슨 일인가?" "저, 저기……." 부대장 하나가 난처한 기색으로 떠듬거리는데 누군가가 듀크 나이츠들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연무복을 걸친 왜소한 체구의 소년이었다. 다리를 심하게 저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위태해 보였다. "그대는 누군가?" "그, 그가 바로……." 분대장이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열려는데 소년이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전 카심 용병단의 단원으로 제럴드라 합니다." 크로비츠의 눈가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자네가 바로 제럴드였군." 보면 볼수록 어리고 약해 보이는 용모였다. 하지만 크로비츠는 상대의 외모를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의 뇌리 속엔 브론즈 골렘을 상대로 종횡무진 활약하던 제럴드의 모습이 단단히 각인되어 있었으니까……. '그땐 검술실력이 어떤지 볼 겨를도 없었지. 단지 몸놀림과 반사신경이 대단하다고 느꼈을 뿐…….' 생각을 마친 크로비츠는 그윽한 눈빛으로 제럴드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날 찾아왔는가?" 제럴드는 무표정한 눈빛으로 크로비츠를 쳐다보았다. "전 단장님께 대결을 청하러 왔습니다." "대, 대결을 청하러 왔다고?" "그렇습니다. 부디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제럴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늘어선 듀크 나이츠들의 얼굴에 분노의 눈빛이 서렸다. 상대의 대련 요구가 심히 무례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페르슈타인 공작이 사사로운 목적으로 설립하긴 하지만 듀크 나이츠는 엄연한 정규 기사단이다. 그것도 3대 강대국의 근위기사단과 맞먹는 강력한 기사단인 것이다. 그런 듀크 나이츠의 총수에게 다짜고짜 대결을 청하는 것은 규정과 절차를 깡그리 무시한 무례한 행동이었다. 정규 기사단의 기사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알버트의 패배 때문에 이미 기사들의 자존심은 이미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우리 듀크 나이츠를 그토록 만만하게 보았나?'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했다면 알버트 부대장님은 결코 너에게 지지 않았어.' 객관적으로 듀크 나이츠는 카심 용병단보다 상위의 조직이다. 아니 양보해서 동등한 조직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일개 단원인 제럴드는 결코 카심 용병단을 대표하지 못한다. 반대로 크로비츠는 듀크 나이츠를 책임지는 명실상부한 총수의 신분이다. 그러므로 실력을 떠나 제럴드가 크로비츠에게 도전하는 것은 명백히 예의에 어긋났다. 기사들은 하나같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있었다. 규율이 엄격했기 때문에 나서지 않았을 뿐 허락이 떨어지면 자신이 대신 대결에 나서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무례한 건지, 아니면 뭘 모르는 건지.' 크로비츠 역시 부아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일개 기사단을 책임지는 만큼 크로비츠에겐 충분한 자제력이 있었다. 심호흡을 한 번 내쉰 크로비츠는 냉랭한 눈빛으로 제럴드를 쳐다보았다. "알버트를 상대해 보니 듀크 나이츠 단장도 별것 아니라 생각되던가?" "………." "체면 때문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네. 난 듀크 나이츠를 책임지는 총수이기 이전에 검도를 추구하는 검사이기도 하네. 자네가 절차와 예의를 깡그리 무시하고 나에게 도전한 것은 내가 지휘하는 듀크 나이츠를 그만큼 얕보고 있다는 뜻이겠지? 하긴 어쩔 수 없겠군. 알버트가 자네에게 패한 것이 엄연한 사실이니 말일세." 크로비츠의 말이 끝나자 제럴드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생각 없이 단순한 대련욕심에 대결을 신청했는데 그것이 그토록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니……. 대련 욕심 때문에 앞뒤 가리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당황해하던 제럴드는 곧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저는 단지……." 하지만 크로비츠의 말투는 여전히 냉랭했다. "구구한 말 따윈 할 필요 없지 않겠나? 난 말이 많은 사람을 싫어하네. 그러니 대화는 이제부터 검으로 나누는 게 어떤가?" "………." "자네의 도전을 받아주겠다는 뜻이네. 지금 당장 시작하는 게 좋겠군." 크로비츠는 제럴드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몸을 돌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건방진 애송이 용병을 혼내주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듀크 나이츠를 키우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므로 그런 듀크 나이츠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가만히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단단히 혼을 내줘야겠군. 두 번 다시 듀크 나이츠를 얕보지 못하도록 말이야.' 그는 부대장에게서 검 두 자루를 받아 들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리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대련 전용 목검이었다. 하지만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졌고 가운데에 마법진이 그려진 철심이 박혀 있기 때문에 쉽게 생각할 병기가 아니었다. 정통으로 맞는다면 어디 한 군데 단단히 부러질 것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자 받게." 크로비츠는 검 한 자루를 제럴드에게 던져주었다. 제럴드는 당황해하며 검을 받아들었다. 경험이 없는 탓에 생각지 못한 무례를 범했지만 상대에겐 그것을 이해해 줄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크로비츠를 쳐다보던 제럴드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실력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겠군.' 검을 쥐자 투지가 맹렬히 치밀어 올랐다. 상대가 듀크 나이츠의 총수였지만 제럴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설사 상대가 전설의 크로센 대제이더라도 꿀리지 않을 기세였다. 그의 귀로 크로비츠의 음성이 들려왔다. "준비가 되었는가?" "그렇습니다." 담담히 대꾸하는 제럴드를 보며 크로비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선공을 하도록 하게. 도전자가 먼저 공격하는 것은 크로센 대제 때부터 내려오는 관례이니 거부할 생각은 하지 말게. 그것 역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니까." "알겠습니다." 제럴드는 망설임 없이 공격을 시작했다. 일단 싸움이 시작된 이상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럴드의 평소 지론이었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18회. 파파파팟. 제럴드의 검이 길게 호선을 그리며 크로비츠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공격은 예의를 지키기 위해 형식적으로 가한 것이 분명했다. 크로비츠는 검을 일직선으로 세우며 가볍게 공격을 가로막았다. 모자람도 없고 지나침도 없는 적절한 방어동작이 그가 이룬 검의 경지를 대충 짐작케 했다. 두 자루의 검이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토해냈다. 딱. 크로비츠의 눈빛은 유난히 번들거렸다. 바로 듀크 나이츠의 명예를 능멸한 상대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상대를 단박에 거꾸러뜨리고 싶었지만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상대의 손에 알버트가 당한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크로비츠는 어떠한 경우에도 상대를 경시하는 법이 없었다. 온갖 연줄을 배재한 채 오로지 본신의 실력만으로 지금에 오른 크로비츠가 아니던가? 심호흡을 길게 내뱉은 크로비츠가 마침내 공격을 시작했다. "조심하게." 경고성이 아니더라도 제럴드는 이미 방어자세를 취한 상태였다. 좌수검법(左手劍法). 이름 없는 낭인에 의해 창안된 사파의 검법이지만 오랜 세월 보완된 탓에 중원의 어느 명문검술에도 손색없는 완성도를 보유했다. 일격필살(一擊必殺)의 위력에 이어 한 번 기회를 잡으면 상대에게 틈을 전혀 주지 않는 연환공격이 바로 좌수검법이 가진 최대의 장점이었다. 하지만 이 기술이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좌수검법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상대의 빈틈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다. 찾아낸 틈을 마치 먹이를 노리는 살모사처럼 집요하게 파고들어야 상대를 완벽하게 끝장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방어에 몰두하며 상대의 빈틈을 간파해야 했다. 그런 좌수검법의 요체에 따라 방어자세를 단단히 갖춘 제럴드는 목검 손잡이를 꽉 틀어쥐었다. 노도 같은 공격이 전신을 마구 난도질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듀크 나이츠의 단장이로군. 과연 틈을 찾아낼 수 있을까?' 제럴드는 더 이상 생각을 잇지 못했다. 크로비츠의 맹공이 숨을 몰아쉴 틈도 없이 퍼부어졌다. 파파파팍. 듀크 나이츠의 단장답게 크로비츠의 공격은 마치 폭풍우를 연상시킬 정도로 맹렬했다. 바위라도 일격에 쪼개어버릴 힘이 깃들어있는 것은 물론이오 공격 하나,하나가 자로 잰 듯 정교하며 날카로웠다. 목검이 바람처럼 움직이며 제럴드의 몸 요소요소를 파고들었다. 반격을 우려했는지 짧게 끊어 치는 공격이 태반이었다. 제럴드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그 공격을 하나하나 피해냈다. 피할 수 없는 것은 검과 방패를 이용해 차단했다. 방어자세가 지극히 자연스러웠고 힘을 흘려보냄에 있어 추호도 균형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모습은 제럴드가 이미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일견해도 크로비츠의 덩치는 제럴드의 두 배에 가까웠다. 특히 공격할 때 순간적으로 힘을 집중시키는 기술이 일품이었다. 비록 오러 블레이드가 깃들어 있지 않았지만 평범한 기사라면 감히 받아낼 엄두를 내지 못할 공격이었다. 하지만 제럴드는 그 어떤 공격도 무리 없이 받아넘겼다. 방패와 검의 각도를 적절히 이용해 힘을 흘려버리는 기술은 이미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바로 지금껏 치러온 데스 나이트들과의 대련경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무수히 치러왔던 대련으로 인해 제럴드의 몸놀림은 비약적으로 향상된 상태였다. 공격이 연거푸 수포로 돌아가자 크로비츠의 눈가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제법이로군. 기본기가 상당히 탄탄한걸'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그냥 놔둘 크로비츠가 아니었다. 듀크 나이츠의 명예를 실추시킨 상대에게 크로비츠는 단단히 쓴맛을 보여주겠다고 작정한 상태였다. 한 차례의 공방이 지나가자 크로비츠의 공격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짧게 끊어 치는 공격이 통하지 않으니 공격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파파팟 목검이 무시무시한 파공성과 함께 제럴드의 옆구리로 쇄도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충분한 힘이 깃들어진 공격이었다. 위력을 느낀 제럴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섣불리 방어했다간 낭패를 볼 것이란 사실을 직감한 것이다. '정말 대단하군. 몸을 회전시키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 힘을 실을 수 있다니…….' 갑옷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아르카디아의 검술은 대체적으로 힘을 바탕으로 한 패검(覇劍)의 형식을 따르고 있었다. 그래야만 상대가 걸친 갑옷을 부수고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근육이 낼 수 있는 힘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는 법. 따라서 아르카디아에는 몸을 회전시키며 체중을 실어 타격력을 강화시키는 기술이 잘 발달되어 있었다. 이른바 원심력을 이용한 공격인 셈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중대한 약점이 있었다. 몸을 회전시키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빈틈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그 때 공격받는다면 허무하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1차로 갑주가 막아주겠지만 거기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회전공격을 할 때에는 특히 방어에 신경을 써야 했다. 하지만 크로비츠의 기술은 달랐다. 살짝 팔을 비틀면서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거기에 무시 못할 힘이 실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제럴드가 길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우욱." 검과 검이 격돌하자 제럴드의 왜소한 몸이 주르르 뒤로 밀려갔다. 예상치 못한 공격이라 힘을 완전히 흘려보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균형은 잃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데스 나이트들과의 대련을 통해 무수히 겪어보았기 때문에 다행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균형을 잃는 것이 패배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제럴드는 잘 알고 있었다. 몸을 추스른 제럴드는 다시금 방어자세를 취했다.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대련에 있어 데스 나이트들은 결코 사정을 봐주지 않았지. 거의 실전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한 번 대련을 하고 나면 전신이 온통 멍 투성이가 되어야 했어. 그 탓에 강해지긴 했지만.' 회심의 일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크로비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틀림없이 균형을 잃어버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상대는 의외로 공격을 잘 받아넘겼다. 이 일격으로 말미암아 크로비츠의 머릿속에서 상대를 경시하는 생각이 싹 사라져버렸다. 만만치 않은 상대란 것을 파악한 것이다. 생각을 마친 크로비츠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방어만 하며 끝낼 작정인가?" 사선으로 몸을 날린 크로비츠가 연거푸 공격을 날렸다. 찍고 베고 후려치는 세 가지 공격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크로비츠의 장기인 근육을 비틀어 힘을 싣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비틀거리면서도 악착같이 공격을 막아냈다. 크게 휘청거리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을 보니 상당히 수련을 쌓은 모양이었다. 크로비츠의 미간이 역 팔자로 휘어졌다. '의외로군. 채 스물이 안되어 보이는데 이 정도 기본기라니…….' 놀란 탓인지 크로비츠의 움직임이 잠시 느려졌다. 순간 제럴드의 눈빛이 빛났다. 드디어 빈틈을 찾아낸 것이다. 입술을 비집고 거센 기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야압." 마침내 제럴드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손에 든 목검이 크로비츠의 겨드랑이를 향해 일직선으로 찔러 들어갔다. 지금껏 방어에만 열중하던 제럴드가 마침내 공세에 나선 것이다. 중원의 좌수검법이 바야흐로 제럴드의 손에서 펼쳐지려는 순간이었다. "헛." 다급한 헛바람 소리와 함께 크로비츠가 결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상대의 검은 놀랍게도 빈틈을 정통으로 파고 들어오고 있었다. 검으로 막을 수 없는 급소였기에 그는 사력을 다해 방패를 비틀며 자세를 낮췄다. 파팍. 다행히 검은 방패 모서리에 빗겨 맞고 퉁겨 올라갔다. 본능적으로 움직인 탓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크로비츠였다. 무수한 실전경험에 의한 반사신경이 아니었다면 결코 막을 수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몸의 균형이 약간이나마 무너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으니……. 제럴드의 공격은 쉴새없이 퍼부어졌다. 한 번 기선을 잡자 마치 봇물이 터지듯 공세가 이어지는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보완되어 완성된 좌수검법이었기에 연결동작에 조금도 어색함이 없었다. 그 탓에 크로비츠는 상당히 곤욕을 치러야 했으니……. 파파파팍. 목검과 목검, 목검과 방패가 무수히 부딪히며 나무 부스러기를 흩뿌렸다. 나무로 된 방패가 보기 흉하게 패여 들어갔다. 막기에 바빠 크로비츠는 미처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상대의 연환공격은 그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제럴드가 들고 있는 목검이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원활히 움직이며 크로비츠의 전신을 노렸다. 문제는 검로 하나, 하나가 크로비츠에겐 극히 생소하다는 점이다. 지금껏 본 적도 없는 방향으로 공격이 가해졌기 때문에 크로비츠는 사력을 다해 방어에 열중해야 했다. 그의 눈동자는 지금 경악으로 인해 찢어질 듯 부릅떠져 있었다. '세상에 이런 공격법이 있다니…….' 비로소 알버트가 당한 것이 이해가 갔다. 이런 생소한 공격을 받는다면 그 누구라도 당황해서 손발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크로비츠는 알버트와는 달랐다. 생소한 공격에 당황해서 흔들린 알버트와는 달리 크로비츠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차근차근 공격과 방어를 거듭해 나갔다. 썩어도 준치라도 듀크 나이츠의 단장자리를 그냥 얻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연신 휘청거리면서도 크로비츠는 사력을 다해 공격을 받아넘기며 상대의 검로를 열심히 관찰하고 분석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결코 만만히 봐선 안될 검술이로군' 상대의 검술은 아르카디아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검술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괴이신랄하고 파격적이면서도 또한 일체의 빈틈이 없었다. 한 마디로 완성도가 극에 달한 검술인 것이다. 공방을 거듭하면서도 크로비츠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젠장 어디서 이런 검술이…….' 그러던 사이 상대가 전개하는 검법의 검로가 조금씩 눈에 익기 시작했다. 검로가 변하는 순간에 드러난 빈틈을 거의 본능적으로 파악한 크로비츠가 입술을 악물고 반격을 가했다. 아무래도 검술 자체의 빈틈이라기보다는 상대가 완전히 숙달하지 못해 드러난 약점 같았다. 팍. 둔중한 타격음과 함께 공격의 흐름이 끊겼다. 하지만 크로비츠는 섣불리 반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공격의 맥을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몸의 균형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 흐르듯 뒤로 물러나며 자세를 잡는 상대를 보며 크로비츠는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만만히 봐선 안될 상대란 생각이 또다시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잠시 숨을 고른 크로비츠는 자세를 잡으며 한 마디를 던졌다. "놀랍군. 자넨 충분히 나에게 도전할 자격이 있어." "감사합니다. 헉, 헉." 제럴드는 연신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한참동안 맹공을 가한 탓에 미처 호흡을 조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넘긴 상대는 자신에 비해 비교적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제럴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역시 듀크 나이츠의 단장다운 실력이로군. 아까 싸웠던 소드 마스터는 연환공격의 절반도 막아내지 못했는데…….' 제럴드의 연환공격은 이미 데스 나이트들 사이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랜드 마스터급인 데스 나이트들도 제럴드와 대련하고 나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정도였다. 비록 단 한 번도 공격을 성공시킨 적이 없었지만 좌수검법의 위력만은 그들도 익히 인정하는 바였다. 그런데 연환공격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또 다른 상대가 생겼으니……. 어느 정도 숨을 고른 제럴드가 자세를 잡았다. "계속 할까요?" 크로비츠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도리어 그가 바라던 바였다. "물론이지.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나?" 상대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웠는지 크로비츠가 도리어 서두르고 있었다. 이미 상대를 혼내주겠다는 생각은 뇌리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상대는 한 마디로 오만함에 걸맞는 실력을 보유한 강자였다. "매운 공격을 맛보게 해 주었으니 적절하게 답례를 해 주겠네." 일직선으로 찔러 들어간 크로비츠의 공격을 제럴드가 방패 모서리를 이용해 허공에 흘려버렸다. 둘은 또다시 어우러져 공방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데스 나이트들에게 혹독하게 단련된 탓에 제럴드는 아무 무리 없이 크로비츠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데스 나이트 하나, 하나가 크로비츠를 능가하는 실력자들이었으니 제럴드가 쉽사리 공격을 허용할 까닭이 없었다. 극히 위력적인 공격을 연거푸 퍼부었지만 상대는 어렵지 않고 공격을 차단했다. 게다가 간간이 퍼붓는 반격은 크로비츠가 깜짝 놀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둘의 얼굴에 서서히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훌륭하군." 크로비츠는 한껏 흥분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듀크 나이츠의 단장이 된 이후 이처럼 통쾌하게 싸워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로 검을 섞을 수 있는 상대라면 밤을 새워 싸워도 모자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크로비츠는 승부에 목마른 상태였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19회. 지금껏 크로비츠에겐 마땅한 대련상대가 단 하나도 없었다. 물론 크로센 기사단에는 그를 능가하는 실력자가 다섯이나 존재했지만 두 집단이 서로 반목하는 상황에서 대결해 볼 방법은 전무했다. 만약 검을 나눌 기회가 생긴다면 그것은 상대의 목숨을 끝내기 위한 목적의 대결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혼신을 다해 싸우고 있는 크로비츠는 지금 한껏 신이 나 있는 상태였다. '정말 좋군. 지금껏 부대장들과 한 대련과는 질적으로 달라.' 물론 진정한 실력 면에서 상대는 휘하의 부대장들에게 전혀 미치지 못했다. 크로비츠의 안목으로 상대는 고작해야 중급 팔라딘 정도밖에 되지않는 실력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최상급 소드 마스터인 자신과 한 치의 밀림도 없는 공방을 나누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크로비츠에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단지 낯선 왼손 검법의 위력에 기인한 것이라 간주할 뿐이었다. 하지만 싸움을 거듭해 나가면서 크로비츠는 한 가지를 더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정말 놀라운 몸놀림이군. 어지간한 실전경험이 없이는 저런 반사신경을 보이는 것이 불가능할 텐데?' 하지만 크로비츠는 몰랐다. 지금 싸우는 상대가 그랜드 마스터급 데스 나이트들과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싸워보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헉헉, 졌습니다." 연신 숨을 헐떡거리던 제럴드가 마침내 패배를 선언했다. 특유의 투지로 분투했지만 결국 듀크 나이츠 단장의 아성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대결은 예정대로 크로비츠의 승리로 끝났다. 알버트가 그랬던 것처럼 제럴드 역시 치명적인 급소 부분에 여러 번 공격을 허용한 뒤 무릎을 꿇어야 했다. 살짝 두들기는 수준에서 끝났지만 실전이었다면 결코 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단단히 혼을 내주겠다는 다짐과는 달리 크로비츠는 철저한 친선대결로 마무리를 지었다. 크로센 제국의 수만 기사들 중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자인 크로비츠를 상대로 검술을 배운지 몇 년 되지 않은 제럴드가 무려 한 시간 가까이 싸웠다는 것은 어찌 보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제럴드가 바친 노력과 땀은 여타의 기사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좌수검법의 위력에다 데스 나이트들과의 무수한 대련경험으로 말미암아 제럴드는 이런 믿지 못할 일을 해 낸 것이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제럴드의 얼굴은 유난히 밝았다. 그것은 바로 크로비츠의 실력이 깨끗하게 승복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데스 나이트가 아닌 대련상대, 그것도 뛰어난 실력의 소드 마스터와 검을 섞어볼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았다. 크로비츠의 실력은 정말 대단했다. 정교한 초식과 힘, 공격과 방어 어디에서도 흠을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생소하지만 위력적인 좌수검법이 상대였지만 크로비츠는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공방을 거듭하며 좌수검법의 검로를 파악했고 마침내 파훼법을 찾아낸 것이다. 승리를 거둔 크로비츠의 얼굴에도 만족스럽다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근래 보기 드물 정도로 멋진 대결이었으며 상대도 훌륭했다. '투지와 검에 대한 열정,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가 없군. 장차 훌륭한 기사로 성장하겠어.' 제럴드에 처음 느꼈던 선입견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단순한 공명심이나 자만심이 아닌, 순수한 무에 대한 열정으로 도전했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뛰어난 성취를 보인 후배에게 탄복이 절로 흘러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단 한 가지 그가 휘하의 기사가 아닌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크로비츠를 보며 제럴드는 진심으로 머리를 숙여 사죄했다. "아까 제가 범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단장님께 한 수 가르침을 받고 싶은 마음에 앞뒤 가릴 것 없이………. 하지만 다른 생각은 일체 없었습니다." 크로비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게. 자넨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당황해 하는 제럴드에게서 시선을 거둔 크로비츠는 알버트를 쳐다보았다. "알버트. 자네에게 아까 내린 징벌을 철회하겠네. 그는 자네가 감당하기 힘든 검술을 보유하고 있었어. 자네는 최선을 다했을 테지만 아마도 역부족이었을 거네." "아, 아닙니다. 전……." "아냐. 모르긴 몰라도……" 크로비츠는 늘어선 부대장들을 돌아보았다. "여기 모인 부대장들 중에서 이 소년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걸세. 물론 처음 싸울 경우에 말이야." 늘어선 듀크 나이츠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왜소한 소년 용병이 단장조차 찬사를 퍼부을 정도의 검술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니…….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서 질시나 적개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언젠가 제럴드와 한 번 대련해 보겠다는 열망만이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크로비츠가 자신이 겪어본 제럴드의 검술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싸워본 결과 극히 뛰어난 검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왼손으로 전개하는 탓에 생소할뿐더러 검로 자체가 극히 파격적이라 막기가 무척 까다로웠다. 게다가 완성도가 극히 뛰어나다. 한 마디로 그 어떤 검술에 견주어 보아도 손색이 없다고 말할 수 있지." 크로비츠가 고개를 돌려 제럴드를 쳐다보았다. "이 검술은 자네가 직접 창안한 건가?" 물어보긴 했지만 크로비츠는 그의 추정이 거의 정확할 것이라 단정하고 있었다. 고금을 통틀어봐도 왼손잡이를 위해 만든 검법은 없다. 또한 기사단에서도 왼손잡이를 받아들이는 경우도 없다. 때문에 기사가 되고 싶다면 오른손 검법이나 쌍수검법을 익히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아예 두 자루의 검을 사용하던가……. 크로비츠의 눈동자는 모종의 기대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저 소년은 검술에 대단한 재능을 가졌을 거야.' 잠시 당황해하던 제럴드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좌수검법을 전수해주며 데이몬이 한 당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혹시 누가 검법에 대해 물어온다면 그냥 네가 창안한 것이라 해라. 크로센 대제와 함께 왔던 이계 절대자에 대한 일은 아무래도 묻어두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렇다고 흑마법사에게 전수 받았다는 말은 더더욱 하지말고.] 데이몬의 당부를 떠올린 제럴드는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습니다." 크로비츠는 탄성을 내질렀다. "놀랍군. 정말 놀라워. 자네가 이 정도로 엄청난 검술을 창안해 내다니……. 앞으론 왼손잡이가 기사가 되는 것도 영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 같군." 크로비츠는 잠시 고민에 사로잡혔다. 생각할수록 눈앞의 소년이 탐났기 때문이었다. 검술에 대한 열의에서부터 자질까지 추호도 모자람이 없었다. 게다가 제럴드란 소년은 아무리 봐도 스물이 되지 않아 보이는 소년이었다. 어린 나이에 이 정도의 성취라면 앞으로의 발전가능성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크로비츠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정말 아깝군. 이 소년이 우리 소속이라면 장래에 듀크 나이츠에서 그랜드 마스터급이 나올 가능성도 있을 텐데……. 크로센 기사단만이 유일하게 보유한 그랜드 마스터급을 말이야.' 그 때 뭔가가 크로비츠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듣기로 카심 용병단원 중 두 명이 이미 펜슬럿에서 작위를 받았다고 했는데…….' 호기심을 지우지 못한 크로비츠가 입을 열었다. "혹시……." 질문을 들은 제럴드는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사실입니다. 카심 대장님과 미첼 교관님은 펜슬럿 국왕전하로부터 직접 작위를 하사 받으셨습니다." "조금 이상하군. 카심 용병단원이면서 펜슬럿의 기사 신분이라니……." 제럴드는 빙그레 웃으며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작위를 하사받긴 하셨지만 그분들은 아직까지 펜슬럿 기사단 소속은 아닙니다. 저희 용병단이 임무를 끝마치고 해산할 경우에 적용되는 것이지요. 그럴 경우 카심 대장님은 아르네로 돌아가실 것이며 미첼 교관님은 펜슬럿 근위기사단에 들어가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전까진 엄연히 카심 용병단원이지요." 그 말을 듣자 크로비츠의 눈동자에서 빛이 일어났다. "혹시 자네, 정규 기사단의 기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나?" "네? 무슨 말씀이신지?" 영문을 모른 제럴드가 의아한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안달이 난 크로비츠는 서둘러 속내를 털어놓았다. "우리 듀크 나이츠에 들어올 생각이 없냐는 뜻이지. 비록 크로센 기사단보다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나머지 그 어떤 근위기사단에 비춰봐도 전혀 손색이 없는 1류 기사단일세." "………." "솔직히 말해 난 자네가 탐나네. 자넬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다는 것이 내 진심이야." 제럴드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물론 그것은 제럴드가 꿈에도 바라는 소망이었다. 당당한 정규 기사단의 기사가 되는 것. 아마 검을 수련하는 자라면 거의 모두가 그런 꿈을 가지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일장춘몽으로 끝나는 일이었다. 정규 기사단의 기사가 될 수 있는 계층은 엄연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재력이 받쳐주는 부자나 권세 있는 귀족 가문의 자제가 아니면 기사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물론 평민이라고 해서 기사가 되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거의 10년에 가까운 학부생활을 거쳐야 했다. 기사 학부의 학비는 어지간한 평민 집안에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데다 검과 장비를 갖추는 데에도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기 때문에 부유하지 못한 평민이 기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물론 기사들 중에 평민 출신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뛰어난 자질과 뼈를 깎는 수련으로 장학금을 받아가며 기사가 된 자들도 상당수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대부분의 평민 수련생들은 엄청난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기사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영지 경비병이나 용병으로 눈길을 돌려야 했다. 그것이 바로 아르카디아 평민들의 현실이었다. 제럴드도 어릴 적에 기사가 되는 것을 꿈꾼 적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민아이들이 그러하듯 나이가 들자 그 꿈을 깨끗이 접어버려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카심 용병단에 들어오게 되고 강력한 검술을 얻었지만 제럴드는 아직까지 어릴 적의 꿈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야흐로 꿈을 이룰 기회가 펼쳐지려는 것이다. 하지만 제럴드는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자신을 지금의 위치에까지 밀어주고 끌어준 동료들을 생각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있었을까. 생각해본 제럴드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카심 대장님이 날 받아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들판에서 굶어죽었겠지.' 생각에 잠긴 제럴드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크로비츠는 한껏 애가 달았다. "혹시 우리 듀크 나이츠가 눈에 차지 않아서 그런 건가?" "………." "외국인이 크로센 기사단에 들어가기는 상당히 힘드네. 그곳은 오로지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확인된 크로센 사람만 받아들인다네. 하지만 우리 듀크 나이츠는 달라. 국적이 어떠하던 간에 실력만 있으면………." 제럴드는 조용히 크로비츠의 말을 끊었다. "아닙니다. 단장님. 눈에 차지 않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도리어 받아주신다는 말씀에 저는 감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 그렇게 생각한다니 정말 고맙네." 제럴드는 조용히 시선을 하늘로 던졌다. "어릴 때부터의 꿈이 정규 기사단의 기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듀크 나이츠라면 제게 정말 과분한 기사단입니다. 그렇고말고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기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저는 카심 용병단원입니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죽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때문에 감히 단장님의 제의를 거절해야 하는 절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카심과 미첼은 펜슬럿에서 작위를 받지 않았는가?" "그분들은 카심 용병단을 이끌어나가는 수뇌부입니다. 하지만 전 일개 단원에 불과하지요. 따라서 대답을 드리기가 무척 어렵군요. 하지만 단장님의 후의만큼은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제럴드는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동료들이 기다릴 것 같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럼……." 목례를 한 제럴드가 몸을 돌렸다. 크로비츠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부대장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 역시 크로비츠와 같은 마음을 먹고 있었다. '저 정도 실력이라면 탐날 만도 하지.' '아무리 드래곤 슬레이어라도 용병보다는 정규 기사가 나을 텐데…….' 제럴드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크로비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뜻을 완전히 꺾은 것은 아니었다. '저 아이는 반드시 우리가 잡아야 해.' 생각을 정리한 크로비츠는 몸을 돌렸다. 그가 가는 곳은 페르슈타인 공작의 저택이었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20회. "그렇게 실력이 뛰어나던가?" "그렇습니다. 이미 알버트가 그에게 패했습니다. 저 역시 한 시간 가까이 싸워 겨우 제압했을 정도였으니까요." 크로비츠의 말에 페르슈타인 공작은 다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놀랍군. 자네 정도의 실력자가 한 시간동안 싸우고 나서야 제압했다니……. 설마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겠지?" 크로비츠는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전력을 다했습니다." "아무리 친선 대결이라도 평범한 팔라딘이 최상급 소드 마스터와 한 시간 가까이 싸우다니……. 도대체 이걸 믿어야 하는지 원." 투덜거리는 페르슈타인 공작을 보며 크로비츠는 정색을 했다. "그의 검술은 그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그 소년과 처음 싸워보는 경우라면 설사 소드 마스터라도 섣불리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왼손 검법은 그 정도로 파격적이며 위력적입니다. 아마도 실전에 투입한다면 더욱 놀라운 위력을 발할 것입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실소를 머금었다. "자네가 누굴 그토록 극찬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데……." "솔직히 전 그가 탐납니다. 불과 스물도 안된 나이에 중급 팔라딘이 되어 자신만의 검술을 창안했다는 것은 한 마디로 검술에 엄청난 자질이 있다는 뜻이지요. 모르긴 몰라도 그랜드 마스터 급에 오를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그랜드 마스터라……." 페르슈타인 공작은 조용히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심혈을 기울여 키웠지만 그의 듀크 나이츠는 감히 크로센 기사단의 아성에 도전하지 못했다. 소드 마스터의 수도 그랬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랜드 마스터인 윌리엄스 후작 때문이었다. 그를 상대할 만한 무사를 찾아내기 위해 공작은 지금껏 천문학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그랜드 마스터급에 오른 절대자들은 좀처럼 인간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 모든 욕념을 누르고 끝없이 수련에 정진해도 그랜드 마스터급에 오르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따라서 그런 경지에 오른 무사는 인간세상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으며 도한 돈과 명예에 굴복하지 도 않았다. 때문에 페르슈타인 공작도 어쩔 수 없이 그랜드 마스터 급 무사를 찾는 것을 포기해야 했으니……. 그런 상황에서 그랜드 마스터 급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인재를 찾았으니……. 생각을 마친 페르슈타인 공작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알겠네. 반드시 그를 회유해서 자네 휘하에 넣어주겠네." 그 말에 크로비츠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 탁월하신 판단입니다. 하지만 그리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동료애가 정말 대단하더군요. 죽어도 동료들과 함께 죽겠다는……."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에 빙긋이 미소가 떠올랐다. "걱정하지 말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이 바로 내 장기 아닌가?" "아, 알겠습니다." 크로비츠는 두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닫았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끌어들여 충성을 받아내는 공작의 능력은 이미 크로비츠도 인정하고 있었다. 크로비츠 역시 그런 경우가 아니었던가. 크로비츠는 조용히 페르슈타인 공작의 뒤를 따랐다. 회랑을 걸어가는 페르슈타인 공작의 머릿속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허허. 나에게 종속의 혈충을 심은 흑마법사의 동료를 내 사람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니.' 하지만 별달리 거부반응이 일지 않았다. 비록 종속의 혈충이라는 극악한 마물을 심기는 했지만 흑마법사는 도리어 자신에게 다른 목표를 정해 주었다. 오히려 원래의 목표보다 더욱 근사한 목표를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흑마법사와는 대립관계를 조성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했다. 그가 종속의 혈충을 없애 주어야만 목표의 성취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아 보였다. 공작은 묵묵히 흑마법사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보기보다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이 강하더군. 일이 그리 어렵진 않겠어.' 인재를 끌어들이는데 탁월한 공작답게 누굴 먼저 만나야 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 상태였다. 카심은 몹시 안절부절못해 하고 있었다. 수련도중에 사라진 제럴드가 뜻밖에 엄청난 사고(?)를 치고 왔기 때문이었다.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 왔다. "망할 녀석. 구석에 박혀 수련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하필이면 듀크 나이츠의 단장에게 대련을 청하다니……. 미치겠군." 제럴드와는 달리 경험이 많은 카심은 그것이 예의에 몹시 어긋나는 행동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약 미리 알았다면 발벗고 나서서 말렸을 터였다. "듀크 나이츠 단장의 성격이 그리 너그러워 보이지는 않던데……. 큰일이로군." 모르긴 몰라도 단장은 무척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한낱 용병대원이 감히 정규 기사단의 단장에게 도전하는 일은 제 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걱정스러운 나머지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그리 심각하게 문제삼진 않겠지만 아무튼 골치 아프군." 제럴드는 크로비츠가 듀크 나이츠에 들어오라고 회유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저 듀크 나이츠 단장에게 도전했다가 패했다고 간략히 말했을 뿐이다. 카심은 성난 눈빛으로 제럴드를 쏘아보았다. 단순무식한데다 과감하기만 한 수련광은 지금 눈치도 없이 구석에서 마나연공법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카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으로썬 듀크 나이츠 단장이 너그럽게 넘어가 주기만을 기대할 수밖에……." 인상만 북북 쓰고 있는데 난데없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요." 문밖에서 낯익은 경비병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페르슈타인 공작전하께서 카심 대장님을 만나기 위해 방문하셨습니다. 듀크 나이츠 단장님도 함께 오셨습니다." 경비병의 말을 듣자마자 카심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결국 일이 터져 버렸군. 큰일났어. 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한다…….' 태평하게 마나연공에 몰두하는 제럴드를 쏘아보는 카심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필경 제럴드의 무례에 대해 따지러 왔을 터였다. '하는 수 없지. 대장인 내가 해결해야지.' 한숨을 길게 내쉰 카심이 묵묵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조심스럽게 문을 연 카심은 뚱딴지같은 공작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럴드의 무례에 대해 따지러 온 줄 알았는데 공작의 방문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긴 말 하지 않겠네. 제럴드를 나에게 주게." "제, 제럴드를 달라니요?" 뜻밖의 말에 카심이 떠듬떠듬 내뱉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심유한 눈빛으로 카심을 쳐다보았다. "제럴드란 이름을 가진 귀 용병단의 대원을 내가 맡아 듀크 나이츠의 정규 기사로 키워주겠다는 뜻이네. 듀크 나이츠 정도라면 그 어떤 기사단에 비추어봐도 손색이 없지 않겠나?" "그,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는……." 카심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공작은 잘 알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게. 귀 용병단의 임무수행에 어떠한 차질도 주지 않을 테니……. 즉 카심 용병단원으로써 동료들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지만 신분만은 듀크 나이츠 소속으로 만들고 싶다는 뜻이네." "………." 말문이 막힌 카심을 쳐다보며 공작이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와 미첼이 펜슬럿에서 작위를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네. 임무를 끝마치고 용병단을 해산할 때부터 펜슬럿의 기사가 된다며?" "그렇습니다만." "내 제의도 똑같네. 제럴드를 듀크 나이츠의 기사로 만든 다음 카심 용병단이 임무를 마치고 해산한 다음에 기사단에 복귀시킬 생각이네. 책임지고 그를 뛰어난 기사로 키워줄 것을 약속하네. 어떤가?" 카심은 고민에 빠져 들어갔다. 하지만 제럴드의 장래를 위해서는 페르슈타인 공작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합당해 보였다. 아무리 드래곤 슬레이어 용병단이라 하더라도 용병은 용병이었다. 정규 기사단의 기사와는 신분이나 사회적 인식 자체가 틀린 것이다. 아무리 변변찮은 기사라도 경험 많은 용병보다 사람들에게 훨씬 좋은 평가를 받는다. 생각에 잠겨 있는 카심에게 페르슈타인 공작의 회유가 이어졌다. "드래곤 사냥이 끝나고 나면 뭘 할건가? 요인의 호위? 몬스터 사냥? 제럴드 정도의 인재를 고작 그 정도에 쓸 생각인가? 그런 것은 내가 용납하지 못하네.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을 순 없지 않겠는가?" "………." "펜슬럿에서 두 명이나 확보했으니 제럴드는 우리에게 양보하도록 하게. 그래야 형평성이 맞지 않겠는가?" 카심은 이제 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생각을 정리한 카심이 페르슈타인 공작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좋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공작 전하의 제의에 찬성합니다. 듀크 나이츠라면 아무 걱정 없이 제럴드를 맡길 수 있습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카심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먼저 데이몬의 의견을 한 번 들어봐야겠군요. 아마 반대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저희들이 펜슬럿 기사가 된 것을 무척 기뻐하신 분이거든요." "좋아. 조처를 해 놓을 테니 흑마법사를 한 번 만나보고 오게. 좋은 소식 기다리겠네. 결정되면 제럴드를 즉시 크로비츠에게 보내게. 성대하게 입단식을 치러줄 테니……." "알겠습니다." 공손히 예를 올리는 카심을 보며 페르슈타인 공작이 몸을 일으켰다. 몸을 돌리는 그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배어 있었다. 몸이 달았는지 크로비츠가 카심에게 한 마디를 더 던졌다. "제럴드를 입단시킬 채비를 모두 갖추어 두겠소. 그러니 날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마시오." "노력해 보겠습니다." 페르슈타인 공작과 크로비츠가 나간 뒤 카심은 쓴웃음을 지었다. 우려했던 일이 뜻밖에도 잘 풀려버린 것이다. "서둘러 데이몬을 만나봐야겠군." 마음이 급했는지 카심이 서둘러 별관을 빠져나갔다. 별관의 연공실 안에는 무아지경에 빠진 제럴드가 마나연공에 몰두하고 있었다. 물론 카심과 페르슈타인 공작 사이에 오간 대화는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데이몬을 만나고 온 카심은 제럴드와 하인리히를 불렀다. 마나연공을 마치고 수련에 빠져있던 제럴드와 하인리히가 카심에게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카심은 정색을 한 채 둘을 쳐다보았다. "너희들은 지금 즉시 듀크 나이츠의 본부로 가거라. 크로비츠 단장님이 너희들을 입단시킬 채비를 하고 계실 것이다. 참. 하인리히 너는 아마도 입단심사를 먼저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진 마라. 실력이 조금 떨어지지만 나이가 어리니 무리 없이 입단시켜 줄 것이다." 뜻밖의 명령에 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정을 대략 짐작한 제럴드가 도리질을 쳤다. "그럴 수 없습니다. 전 카심 용병단원으로 죽을 생각입니다." 카심이 짐짓 인상을 썼다. "멍청한 녀석. 드래곤을 모두 사냥한 뒤 용병단이 해산되었을 경우는 어떻게 할 작정이냐?" "대장님을 따르면 되지 않겠습니까."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 너희들도 알다시피 난 아르네의 영주 자리를 물려받을 계획이다. 내 밑에서 영지 경비병이나 할 생각이냐?" "그, 그래도……." 카심의 음성이 별안간 부드럽게 변했다. "이미 데이몬께서도 흔쾌히 찬성하셨다. 너희들의 장래를 위해서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라 하시며 말이다. 물론 걱정할 것은 없다. 우리 용병단이 해산한 다음에나 생각해 볼 일이니까 ." "………." 카심이 손을 뻗어 병기대를 가리켰다. "장비를 잘 챙겨서 가도록 해라. 그리고 하인리히. 최선을 다해 심사에 임해야 한다. 넌 다 좋은데 아직까지 마음이 너무 여려. 하긴 데스 나이트들에게 호되게 당하며 조금 독해지긴 했지만……. 아무튼 건투를 빈다." 영문을 모른 하인리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너라." 카심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뒤에는 제럴드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규 기사가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조금씩 부풀고 있는 제럴드였다. 하인리히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21회. "피로하군." 테오도르는 두 팔을 치켜올리고 기지개를 켰다.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느라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왔다. 뻐근한 목을 풀기 위해 이리저리 돌려보던 테오도르가 난데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책상 위에 쌓인 일거리들이 도무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일들이 과연 어느 세월에 끝날지……." 집무실 안에는 테오도르 말고도 여러 명의 관리들이 책상에 앉아 서류검토에 몰두하고 있었다. 결재에 미비한 점을 1차로 가려내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꼬박 이틀 밤을 새웠기에 그들의 얼굴에도 예외 없이 피로감이 감돌고 있었다. 결재해야 할 서류의 양을 가늠해본 테오도르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집정관이 된 후로 결재해 온 서류보다 최근 한 달간 처리한 분량이 더 많겠어." 조금 전 결재를 마친 것들은 원래는 페르슈타인 공작이 처리해야 할 서류였다. 그러나 그는 트루베니아 침공전략을 구상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부득이 테오도르가 대신 맡아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페르슈타인 공작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몇 가지 사안만을 맡겼다. 그러나 테오도르의 일 처리가 무척 깔끔할 뿐더러 빈틈이 전혀 없는 것을 알게 된 뒤 페르슈타인 공작은 아예 자신의 일거리를 테오도르에게 깡그리 넘겼다. 그 탓에 테오도르가 이처럼 과중한 업무에 파묻혀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정벌준비에 몰두하기 위해서 소소한 일은 테오도르가 맡아서 처리해줘야 했다. "휴. 오늘 중으로 반은 처리해야 할 텐데……." 길게 한숨을 내쉰 테오도르가 서류더미 하나를 더 집어들었다. 그 때 문 밖에서 근위병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군가가 집정관님을 찾아오셨습니다만……." 테오도르는 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누구라고 하던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면 그냥 돌려보낼 심산이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누굴 면회할 시간조차 부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경비병의 설명이 이어지자 테오도르는 검토하던 서류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네르시스 남작님께서 직접 방문하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테오도르의 눈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방문자의 이름이 주는 의미는 그 정도로 지대했다. 네르시스 남작. 원래는 페르슈타인 공작과 버금가는 권세를 자랑하던 고급 귀족이었다가 이제는 권력다툼에서 완전히 밀려난 비운의 인물이었다. 한 때는 공작이었지만 이젠 변두리의 조그마한 영지만을 남긴 보잘것없는 시골 귀족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가장 낮은 귀족인 남작(baron)으로……. 네르시스 가문은 완전히 몰락한 상태였다. 한 때 테오도르를 발판으로 중앙정계로의 복귀를 꾀했던 야망을 가졌지만 위기에 처하자 그는 아무 거리낌없이 테오도르와의 관계를 끊었다. 비록 페르슈타인 공작의 강요로 그리 된 것이었지만 그 때 만약 의절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테오도르는 아직까지 그를 아버지로 모셔야 했을 터였다. 테오도르와 의절한 대가로 네르시스 남작은 간신히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페르슈타인 공작이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 던져준 시골영지에 내려간 뒤 여생을 마쳐야 했다. 그런 네르시스 남작이 웬일로 테오도르를 찾아온 것이다. 고민에 잠겨있던 테오도르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응접실로 모셔라." "알겠사옵니다." 서류를 간단히 정리한 뒤 테오도르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 때 의부였던 자를 만나기 위해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오. 아들아." 테오도르가 들어서자 네르시스 남작이 벌떡 일어섰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다가와서 테오도르를 얼싸안았다. 얼굴이 몹시 수척해진 모습을 보아 상당한 고생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비대한 몸집은 어디 가지 않았지만. 테오도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네르시스 남작에게 몸을 내맡겼다. 그리 정이 가는 작자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때 의부였던 자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집정관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극히 사무적으로 예를 올렸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네르시스 남작님." 네르시스 남작의 얼굴에 안타까운 표정이 어렸다. "사적으로 널 만나러 온 것인데 옛날처럼 아버님이라 부르면 안되겠니? 테오도르 폰 네르시스." 테오도르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마음 같아서는 나와 의절하지 않았냐며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그에게 은혜를 입은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되찾은 성만은 밝혀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공무수행중입니다. 그리고 제 성은 더 이상 네르시스가 아닙니다. 본래의 성을 되찾았으니 이제부터 테오도르 폰 브로큰하트라고 불러주십시오." 그 말에 네르시스 남작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그 말은 테오도르가 이제 네르시스 가문을 인연으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궁한 쪽은 자신이었기 때문에 네르시스 남작은 간곡한 어조로 사정을 시작했다. "테오도르. 그 때는 정말 미안했단다. 하지만 가족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단다. 1백 명의 듀크 나이츠들이 저택에 난입해서 무수한 경비병들을 죽였다. 그리고 너와의 관계를 끊지 않으면 하나도 살려두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난 가족을 살리기 위해 부득이……." "………." "이해해 다오. 네 어머니는 그때 입은 충격으로 아직까지 병상에 누워있단다." 테오도르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어머니가 아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테오도르는 차마 그 말을 입밖에 낼 수가 없었다. 네르시스 남작부인. 한 때는 공작부인이라 불렸던 그녀는 지금껏 테오도르에게 한 마디도 따듯한 말을 해주지 않았다. 하찮은 평민 출신이라며 대놓고 모멸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그것도 모자라 테오도르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마치 하인처럼 부려먹었다. 때문에 그녀에 대한 테오도르의 감정이 그리 좋을 리가 없었다. 그것은 네르시스 남작의 아들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형적인 귀족가문의 망나니들인 그들은 테오도르를 형제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귀족 특유의 뿌리깊은 자부심 때문인지 심지어 한 마디 대화조차 나누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테오도르의 귀로 네르시스 남작의 음성이 계속 울려 퍼졌다.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알자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도와다오. 테오도르. 시골에서의 삶이 너무 고달프구나. 저택은 좁아 터졌고 시종은 고작 두 명이 전부란다. 한 때 공작이었던 아비가 이렇게 살아야겠느냐?" 어떻게든 테오도르를 설득시키려는 듯 네르시스 남작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불쌍하게도 네 누나들은 집안 일을 거들고 있다. 형들은 매일매일 나무를 패고 청소를 하고 있으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냐? 세상에 이런 일이 우리에게 생길 줄이야……." 네르시스 남작은 몹시 괴롭다는 듯 머리를 짚었다. "도와다오. 도저히 시골에서는 살지 못하겠구나. 우린 펠젠틴에서 살고 싶다. 집정관인 네 능력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느냐? 생각해 보거라. 우리 가문이 아니었다면 네가 어떻게 집정관이 될 수 있었겠니? 넌 우리 가문에 정말 큰 은혜를 입은 것이란다." 그 때 문 쪽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보기에 은혜는 당신이 입은 것 같은데……." 네르시스 남작의 고개가 뺨이라도 맞은 듯 문 쪽으로 돌아갔다. 곧 숨이 막힐 듯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페, 페르슈타인 공작……." 남작의 얼굴은 삽시간에 시커멓게 죽어 들어갔다. 가장 꺼려하는 인물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것이다. 문가에는 페르슈타인 공작이 팔짱을 낀 채 네르시스 남작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크로비츠가 검 손잡이를 움켜쥐고 싸늘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잠시 어쩔 줄 몰라하던 네르시스 남작이 떨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며 예를 올렸다. "공작전하를 뵙습니다." 네르시스 남작을 한참동안 노려보던 페르슈타인 공작이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네르시스 남작.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나 보구려. 살고 싶으면 영지를 한 발짝도 벗어나지 말라고 단단히 경고했거늘……." "그, 그게 아니라……." 페르슈타인 공작은 냉랭하게 남작의 말을 끊었다. "내 경고를 무시했으니 응분의 대가를 각오했을 터. 크로비츠." "예." "네르시스 남작을 죽여라." 페르슈타인 공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크로비츠는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사색이 된 네르시스 남작이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성큼성큼 걸어온 크로비츠가 검을 들어올리자 갑자기 비릿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극도로 겁에 질린 네르시스 남작이 참지 못하고 방뇨를 해버린 것이다. "이런 지저분한……." 크로비츠가 얼굴을 찡그린 채 검을 휘두르려 하자 테오도르가 잽싸게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만하게." 크로비츠를 물러나게 한 페르슈타인 공작이 미간을 찌푸리며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가?" "그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입술을 꼭 깨문 채 말을 이어나가는 테오도르를 보며 페르슈타인 공작이 혀를 끌끌 찼다. "자넨 생각보다 마음이 여리군. 저런 작자는 살려둬 봐야 백해무익한 인물이야. 이참에 깨끗이 처리하는 것이……." "그래도 한 때 제 의부였습니다. 부디 자비를……." "쯔쯔.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 했거늘." 페르슈타인 공작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네르시스 남작을 쏘아보았다. "만약 당신이 앞으로 계속 테오도르 집정관에게 은혜 운운한다면……." "………." "그대로 혓바닥을 뽑아버릴 것이오. 그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아직까지 살아있지도 못했소." "네……네……." 극도로 겁에 질린 네르시스 남작은 거듭 고개를 조아렸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정적을 살려두지 않지. 만약 집정관의 청원이 아니었다면 당신과 당신 식솔들은 이미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없어졌을 것이오. 네르시스 영지에 도착하기 전에 말이오. 그런데도 건방지게 은혜 운운하다니 기가 막혀서 도대체 말이 안나오는군." 네르시스 남작은 파랗게 질린 얼굴을 바닥에 박은 상태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의 귀로 페르슈타인 공작의 서슬 시퍼런 엄포가 이어졌다. "만일 또다시 영지를 벗어나는 일이 생긴다면 그땐 결코 용서하지 않겠소. 당신뿐만 아니라 식구들 모두가 살아남지 못할 줄 아시오. 알겠소? 꼴도 보기 싫으니 이 자리에서 당장 꺼지시오." "예, 예." 네르시스 공작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문을 향해 달음박질했다. 비대한 몸집에서 나오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속도였다. 쾅. 네르시스 남작이 사라진 뒤 페르슈타인 공작이 웃는 낯으로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모름지기 장부란 독할 때 한없이 독해야 하는 법이네. 오늘 일은 전혀 자네답지 않았어." 테오도르는 씁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전 결코 지금의 위치에 오지 못했을 겁니다." "자넨 생각보다 은혜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로군. 하지만 목숨을 살려준 것만으로도 자네가 입은 은혜는 모두 갚은 것이네. 네르시스 남작은 이제 더 이상 자넬 귀찮게 하지 못할 걸세. 그러니 더 이상 그 작자에 대해 생각하지 말게." "그럴 생각입니다." 테오도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차마 하지 못하던 일이었는데 뜻밖에 페르슈타인 공작의 도움으로 인해 깨끗이 해결할 수 있었다.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정벌 준비는 잘 되십니까?" 테오도르의 질문에 페르슈타인 공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 쉽지는 않네. 정벌군의 편제와 각 사단의 운용전략은 대충 짜 놓았지만 문제는 보급문제야. 1백만이 넘는 대군이라서 소요되는 보급물자가 엄청나게 많더군." "각 왕국에서 일정분량의 보급물자를 지원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페르슈타인 공작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뭐 펜슬럿이나 테제로스 같은 강대국들이야 충분한 보급물자를 마련할 수 있겠지만 군소왕국들의 형편은 그렇지 못하네. 특히 왕녀를 잃어 능력 이상의 병력을 파병한 왕국들의 사정은 더욱 그러하지. 게다가 그 방대한 보급물자를 책임지고 맡아 관리할 사람도 마땅치 않고……." 페르슈타인 공작은 쓴웃음을 지으며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사실 난 자네에게 보급물자 관리를 떠넘기려고 왔다네. 하지만 사정을 보아하니 그럴 형편이 전혀 못되어 보이는군." 살짝 화두만 꺼냈는데도 파랗게 질려버리는 테오도르를 보며 페르슈타인 공작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아무래도 다른데서 적당한 사람을 찾아봐야겠군. 그건 그렇고 윌리엄스 기사단장은 테르비아로 출발했는가?" "그렇습니다. 지금쯤 로시무스 1세와 협상을 벌이고 있을 것입니다." "후후. 로시무스 1세 놈. 지금쯤 안색이 볼만하겠구먼. 그와는 상극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사신으로 왔으니……. 내가 그에게 선물을 조금 줘 보냈지?" 테오도르의 눈가에 의아한 빛이 번져갔다. "선물이라니요?" "알 필요 없네. 아무튼 테르비아에서 파병하는 병력이 기대 이하일 경우 말일세." 페르슈타인 공작의 눈가에 기이한 빛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출정하기에 앞서 테르비아부터 싹 쓸어버릴 생각이네. 로시무스 1세 놈이 숨겨놓은 병력으로 후방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말일세. 놈은 충분히 그럴 짓을 하고도 남을 놈이야." "………." 테오도르는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한 나라를 쓸어버린다는 말을 이처럼 아무 거리낌없이 내뱉을 수 있는 페르슈타인 공작이 별안간 무서워졌던 것이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22회. 하지만 전쟁을 벌이기 전에 로시무스 1세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점은 그도 공감하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그도 테르비아를 통째로 쓸어버린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고개를 돌린 공작이 굳어있는 테오도르를 보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을 걸세. 로시무스 1세는 한 마디로 승냥이 같은 위인이지. 강한 자에겐 약하고 약한 자에겐 한없이 강한……. 내 계책이 성공한다면 놈은 숨겨놓은 병력까지 깡그리 내놓을 것이 틀림없어. 내 장담하지." "모쪼록 그러길 바랄 뿐입니다. " 테오도르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운명을 건 전쟁을 앞두고서도 영토확장 따위에 욕심을 부리는 로시무스 1세의 야망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큰 전쟁을 앞두고 인간끼리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한 마디로 불길한 징조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대업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돌리려는 듯 페르슈타인 공작이 화제를 돌렸다. "펜슬럿으로 가는 사절단은 어떻게 되었나? 출발했나?" 창 밖을 한 번 쳐다본 테오도르가 조용히 대답했다. "조금 전 공간이동을 마쳤으니 지금쯤 도착해서 영접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펜슬럿 국왕은 그래도 머리를 쓸 줄 아는 군주일세. 아마 별 이견 없이 병력을 내어줄 걸세." 말을 마친 페르슈타인 공작이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크로비츠 자네도 테제로스로 갈 채비를 갖추게. 아마 집정관이 준비를 모두 마쳐두었을 거야. 그나저나 당분간 자네 호위를 받지 못해 유감이로군. 참 이번에 입단한 신참 둘을 데리고 간다며?" "그렇습니다." "잘 다녀오게. 무운을 비네." "알겠습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크로비츠를 남겨두고 몸을 돌렸다. 문 밖에는 크로비츠를 대신할 듀크 나이츠 부대장 네 명이 공작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크로센 제국의 동남쪽에 위치한 테르비아 왕국은 풍요로운 도레인 평원을 가지고 있어 상당히 부유한 왕국이었다. 과거 크로세나 기사단의 단장이며 크로센 대제의 오른팔인 파미레이드 공이 세웠다는 유래를 가지고 있으며 건국 초기에 크로센 제국에서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다시 말해 건국시기가 크로센 제국과 동일한 것이다. 그런 유구한 역사를 가진 테르비아였지만 애석하게도 작금의 국왕 로시무스 1세는 시조인 파미레이드의 후손이 아니었다. 로시무스 1세의 할아버지인 스코필드 1세가 쿠데타를 통해 왕위를 찬탈한 뒤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어왔던 것이다. 스코필드 1세는 상당히 현명한 군주였다. 정통성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백성들에게 거듭된 선정을 베풀었고 주변국과의 유대관계에도 세심하게 신경 썼다. 그리하여 원 주인인 파미레이드 가문의 영향을 완벽히 없애고 테르비아의 새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뒤를 이은 스코필드 2세(로시무스 1세의 아버지이다) 역시 백성을 아끼는 현명한 군주였다. 상업을 장려하고 체제를 잘 정비한 탓에 테르비아의 국력은 비약적으로 강해졌다. 이 두 군주 덕분에 테르비아는 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펜슬럿과 테제로스를 따라잡을 만큼 부강해질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들 때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대의 군주인 로시무스 1세에 이르러 사정이 약간 달라졌다. 로시무스 1세는 호전성과 정복욕을 타고난 야심 많은 군주였다. 방대한 국토를 가진 테르비아도 성에 차지 않아 영토를 늘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로시무스 1세가 즉위한 뒤 테르비아의 국민들은 암울한 세월을 겪어야 했다. 비약적으로 늘어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세금을 물어야 했으며 건장한 청년들은 거의 반강제적으로 군대에 징집되었다. 사실 로시무스 1세는 순리적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인 스코필드 2세는 후계자로 첫째인 로시무스 1세를 택하지 않았다. 성품이 온유하고 현명한 셋째 왕자인 권터스를 차기 군주감으로 내정한 것이다. 야심 많은 로시무스 1세가 왕좌에 오른다면 테르비아 국민이 엄청난 고통을 겪으리란 사실을 일찌감치 눈치챘던 것이다. 하지만 야망의 화신인 로시무스 1세가 순순히 물러설 리는 만무했다. 그는 아버지가 승하한지 채 사흘도 되지 않아 난을 일으켰다. 휘하에 키워놓은 사병들을 왕궁에 대대적으로 투입해 골육상쟁(骨肉相爭)을 일으킨 것이다. 왕자의 난이라서 테르비아의 근위기사단은 엄중히 중립을 지켰다. 거듭된 혈투 끝에 세자인 권터스 왕자는 결국 형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으며 테제로스의 왕관은 마침내 로시무스 1세의 손에 넘어갔다. 바야흐로 테르비아 국민들의 불행이 시작된 것이다. 왕위에 오른 로시무스 1세는 대대적인 군사력 증강사업에 들어갔다.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모두 테르비아 국민들이 부담해야 했다. 반대하는 자는 가차없이 처형했기 때문에 불평불만이 터져 나올 여지도 없었다. 그리하여 테르비아의 군사력은 비약적으로 강해졌다. 하지만 로시무스 1세는 섣불리 정복전쟁을 시작하지 못했다. 위기감을 느낀 펜슬럿과 테제로스 왕국이 테르비아를 견제하기 위해 서로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군사력이 늘어났지만 두 왕국 모두를 도모하는 것은 아직까지 역부족이라서 로시무스 1세는 야망을 잠시 접어둔 채 정복전쟁을 일으킬 시기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크로센 제국이 황제와 페르슈타인 공작과의 권력다툼으로 인해 주위에 눈을 돌릴 수 없는 현재의 상황이 로시무스 1세에겐 더할 나위 없는 호기였다. 그렇게 전쟁준비에 광분하고 있던 로시무스 1세의 왕궁에 어느날 크로센 제국의 사자가 도착했다. 그로 인해 로시무스 1세의 야망이 물거품으로 화할 위기에 처했으니……. '미치겠군. 하필이면 이 작자를 보내다니…….' 로시무스 1세는 지금 골을 싸매고 있었다. 얼마나 당황했으면 크로센 제국의 사자를 보고 난 직후부터 두통이 사라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럴 것이 크로센 제국에서 파견된 사자는 로시무스 1세에겐 철저히 상극이라 볼 수 있는 존재였다. 회유가 통하지 않고 엄포를 놔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는 철석간담의 무장. 그런 자가 사신으로 왔기 때문에 로시무스 1세가 골치 아파하는 것이다. 사신은 크로센 기사단의 총수인 윌리엄스 후작이었다. 아르카디아에서 제일 강력한 무력집단의 총수이며 인간 세상에 나와있는 유일한 그랜드 마스터는 지금 고리눈에 잔뜩 힘을 준 채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제국은 모든 힘을 기울여 트루베니아를 정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페르슈타인 공작전하께서 친히 정벌군의 사령관을 맡기로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동안 제국을 뒤흔들었던 권력투쟁이 모두 해소되었다는 뜻이지요.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만 트루베니아 정벌을 성공시킬 수 있기에 테르비아도 동참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모였습니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로시무스 1세가 위로라도 하듯 말을 받았다. "펠젠틴 중앙광장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소. 지상최강의 종족인 드래곤이 그런 일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소. 아무래도 뭔가 착오가……." 윌리엄스 후작의 화법은 한 마디로 직설적이라 표현할 수 있었다. 화제를 딴 곳으로 돌리려고 애쓰는 로시무스 1세의 노력을 깡그리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니까 말이다. "드래곤들의 목적은 인간을 아르카디아 대륙에서 깡그리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멸망을 막기 위해서는 오로지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바로 아르카디아 대륙이 가진 힘을 한 자리에 모아서 선제공격을 해야 합니다." "하, 하지만……." 윌리엄스 후작은 타는 듯한 눈빛으로 로시무스 1세를 노려보았다. "트루베니아 정벌이 실패할 경우 아르카디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테르비아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드래곤의 엄호아래 개미떼같이 몰려오는 오크 대군을 테르비아 왕국 혼자의 힘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음. 아무래도 힘들겠구려." 로시무스 1세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회담에 임하고 있긴 하지만 그는 속으로 다른 궁리를 하고 있었다. 다수의 병력이 트루베니아 정벌에 동원된다면 아르카디아의 왕국들은 국방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호시탐탐 눈독을 들여오던 펜슬럿과 테제로스, 두 왕국의 영토를 손에 넣기에 적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로시무스 1세는 때를 놓치지 않고 두 왕국을 침공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미 그는 마음을 굳힌 상태였고 그 계획의 일환으로 십만 명의 병력을 모처에 숨겨놓았다. 그러므로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는 테르비아에서 정벌군에 차출될 병력을 조금이라도 줄여야 했다. 생각에 잠겨 있는 로시무스 1세의 귀로 윌리엄스 후작의 음성이 계속 울려 퍼졌다. "여러 왕국에서 최대한 많은 병력과 보급물자를 지원해 주셔야만 정벌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도 테르비아의 정예병을 지원해 주십시오. 후방을 맡을 예비병력을 제외한 나머지 사단이 모두 필요합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로시무스 1세는 미리 계산해 놓은 파병 병력의 수를 떠올렸다.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병력은 정예로만 따지면 20만 정도요. 테르비아의 국토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거기서 5만 가량 남겨두고 싶소. 그 정도는 이해해 줄 것으로 알겠소. 남은 병력 15만은 모두 지원해 주겠소이다. 남은 5만까지 원한다면 할 수 없지만." 로시무스 1세의 말이 끝나자 윌리엄스 후작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대답을 익히 짐작했다는 태도였다. 그는 잠자코 봉투 하나를 꺼내들었다. 뭔가 중요한 기밀 문서가 들어있을 것 같아보이는 봉투였다. "전 이리로 오는 도중에 정보부에서 이것을 받아왔습니다. 전하께서 아시다시피 본국의 정보부는 모두 두 군데지요. 이것은 페르슈타인 공작이 관할하는 부서에서 받은 문서입니다. 속에 테르비아의 병력 규모와 최근 1개월 간의 병력이동현황이 들어있더군요. 그런데 전하께서 말씀하신 테르비아의 병력 규모가 서류와는 많이 다르군요. 탈보트 산맥에 주둔중인 10개 사단을 거론하지 않으신 것 같은데?" 그 말을 듣자마자 로시무스 1세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병력을 감춰둔 사실이 이처럼 간단하게 들통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당황한 나머지 로시무스 1세는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야 했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정보부는 놀라운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었다. 유명무실한 신세로 전락한 황제 산하 정보부와는 차원이 달랐으며 명실상부하게 대륙 제일이라 일컬어지는 정보수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테르비아의 각급 사단에도 페르슈타인 공작의 끄나풀이 잠복해 있을 터였다. 색출할 방법이 없어 손을 쓰지 못하는 판국이었는데 이런 일이 터진 것이다. 놀랍게도 페르슈타인 공작의 정보부에서 테르비아의 병력상황을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정보부에서 지금까지 대립관계였던 윌리엄스 후작에게 정보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로시무스 1세의 얼굴에 갑자기 노기가 서렸다. 난감한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비겁하게 본국에서 알아낸 기밀사항을 가지고 협박하려는 거요 뭐요?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당황함을 감추기 위해 화가 난 척 하긴 했지만 윌리엄스 후작은 눈썹하나도 까딱하지 않았다. 애당초 겁을 상실한 위인이 아니던가. "화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 단지 일 처리를 확실하게 하려는 것뿐이니까요. 그리고 페르슈타인 공작께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말해보시오." "아르카디아의 군주 중에서 분명히 정벌군이 빠져나간 빈틈을 타서 영토확장을 노리는 승냥이 같은 작자가 있을 것이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후방이 탄탄해야 하는 법. 트루베니아 정벌을 성공시키려면 동원된 병사들이 마음놓고 싸워야 한다. 때문에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뭣이." 로시무스 1세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대놓고 승냥이 같은 작자라 일컫는데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로시무스 1세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말이면 다인 줄 아시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곤두선 수염이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배석해 있던 테르비아 근위기사 단장이 바짝 긴장하며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명령이 떨어진다면 즉시 달려들 기세였다. 하지만 윌리엄스 후작이 대동한 크로센 기사단원들이 흔들림 없이 싸울 채비를 갖추는 것을 보자 몸에서 저절로 힘이 빠졌다. 도합 50명의 크로센 기사단원들이 윌리엄스 후작의 호위를 맡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소드 마스터였다. 테르비아 근위기사단 전체가 덤비더라도 당해 낼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윌리엄스 후작은 느긋한 자세를 견지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왜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페르슈타인 공작은 전하를 지칭해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혼세를 노려 영토를 확장하려는 어이없는 마음을 먹은 승냥이 같은 군주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혹시 전하께서 그런 마음을 먹고 계신 것입니까?" "끄응." 로시무스 1세는 신음소리를 내며 자리에 도로 앉았다. 과민반응으로 말미암아 도둑이 제발 저린 셈이 되고 만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흥분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윌리엄스 후작은 머뭇거림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아시다시피 전하의 결정에 따라 펜슬럿, 테제로스 두 왕국의 파병규모가 결정될 것입니다. 그들 역시 자국을 지킬 병력을 남겨두려 할 테니까요. 게다가 우리 제국에서도 내전억지를 위해 일정병력을 남겨둘 것입니다. 소중한 병력을 전장으로 투입시키지 못하니 이만저만한 손실이 아니지요. 그러니 전하께서 부디 현명하신 판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로시무스 1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상대는 협상이 아니라 협박을 하러 온 것이다. 쟁쟁한 크로센 기사단의 반수 이상이 온 것만 보더라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딴 마음을 먹을 순 없었다.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온 상태에서 로시무스 1세가 당해낼 방법은 없었다. 이 자리에 모인 근위기사단과 궁정 근위병을 모두 동원해도 역부족이긴 마찬가지였다. 저들의 입을 완전히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로시무스 1세는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실수다. 저들 모두를 회견장에 들이지 않는 건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23회. 윌리엄스 후작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대동한 크로센 기사단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회견장에 동석했다. 물론 만약을 위해 테르비아 근위기사단도 총 출동한 상태였지만. 로시무스 1세는 묵묵히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놈의 말대로 크로센 황가와 페르슈타인 공작이 손을 잡았다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의 야망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아무리 군비를 증강시켰다 하더라도 영토가 몇 배가 넘는 강대한 크로센 제국을 상대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당장 눈앞에 버티고 있는 크로센 기사단원 50명을 감당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소드 마스터는 그 정도로 위력적인 존재였다. 만에 하나 독이라든지 기타 등등의 방법을 써서 이들 모두를 몰살시키는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승산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노에 찬 크로센 기사단원들과 듀크 나이츠(테르비아 근위기사단 전체의 힘과 맞먹는다고 평가받는)가 합세해서 쳐들어온다면 테르비아는 별 수 없이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크로센 제국이 보유한 50만 대군 역시 감당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로 암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충분한 병력을 파견하지 않는다면……. 최악의 경우 선제공격을 당할 수도 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지.' 생각을 마친 로시무스 1세는 허탈한 눈빛으로 윌리엄스 후작을 쳐다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에는 싸늘한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테르비아 근위기사들과 크로센 기사단원들이 일촉측발의 상황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공격명령을 내리고 싶었지만 로시무스 1세는 감히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테르비아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결정을 내린 로시무스 1세가 힘없이 내뱉었다. "알겠소. 병력을 내어 주리다." 윌리엄스 후작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파병규모를 얼마정도로 생각하십니까." "정예 30만을 모두 드리겠소. 탈보트 산맥 주둔군까지 합쳐서 말이오. 예비 병력도 필요하면 말씀하시오" 상상외의 병력이었기 때문에 윌리엄스 후작은 혀를 내둘렀다. '공작은 대략 25만 정도를 예상했는데…….' 그 정도라면 페르슈타인 공작이 예상한 수준을 훨씬 웃돌고 있었기에 윌리엄스 후작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대신 그 병력들을 1년 가량 유지시킬 수 있는 보급물자도 마련해 주셔야 합니다." 그 말에 로시무스 1세의 안색이 더욱 참담해졌다. 야망의 실현을 위해 비축해 놓았던 전쟁물자를 깡그리 털릴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러나 로시무스 1세는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국가 존망의 기로에서 그가 택할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이었다. "알겠소. 마련해 주리다." 대답을 듣자 윌리엄스 후작의 입가에 흡족하다는 미소가 떠올랐다. "국왕전하의 후의에 황제 폐하를 대신해서 감사 드립니다. 트루베니아 정벌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자 바짝 긴장하고 있던 양측 기사단원들이 서서히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전쟁을 피하게 된 테르비아 근위기사 단원들은 암암리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비록 반쪽뿐이긴 하지만 크로센 기사단과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테르비아 근위기사단은 전멸할 것이 분명했다. 승산 없는 싸움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사들의 얼굴이 밝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크로센 기사단원들은 지금 로시무스 1세에게 냉소를 날리고 있었다. 잔혹한 폭군으로 명성을 날리는 로시무스 1세의 다른 면모를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한없이 강한 성품이라……. 승냥이가 따로 없군.' '역시 로시무스 1세를 요리하는데 기사단장님 만한 사람이 없어.' 여러 기사들의 상념 속에 테르비아 궁정에 소속된 서기가 조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살벌한 분위기 아래 협상이 진행되는 테르비아 궁정과는 달리 펜슬럿의 궁정에서는 화기애애함이 감돌고 있었다. 근위기사 단장이 환히 웃으며 들어서는 크로센 사절단을 맞았다. 사절단의 선두에는 미첼과 카심이 앞장서서 들어왔다. 그들은 공간이동 마법진을 통해 펜슬럿의 수도에 도착한 상태였다. 대제국 크로센의 사절단인 만큼 근위기사 단장인 카르수스 공작이 그들을 마중 나와 있었다. 미첼이 공손히 예를 올렸다. "단장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카르수스 공작은 빙긋이 웃으며 미첼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서 오게. 미첼 자네가 펠젠틴에서 정말 혁혁한 무위를 떨쳤다고 들었네." 미첼이 빙긋 웃으며 화답했다. "별 말씀을……. 모두가 동료들 덕택이지요." "아니야. 공포의 브론즈 골렘을 인정사정 없이 때려잡았다며? 이미 자네의 무용이 대륙 전역에 자자하더군. 게다가 간택식에 참석하신 많은 왕녀들이 자네 활약상을 보고 반해서 졸졸 따라다녔다는 소문이 이곳까지 퍼져있지." 카르수스 공작의 눈동자에 별안간 장난기가 어렸다. "그런데 자네 눈이 상당히 높은가 보군. 그녀들을 모두 퇴짜놓았다며?" "………." 미첼은 갑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소문이 벌써 그렇게 퍼졌을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어쩔 줄 몰라하던 미첼을 보고 있던 카르수스 공작의 시선이 슬며시 뒤로 향했다. 순간 그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미첼의 뒤에 서 있던 헤일즈를 발견한 것이다. "아니 자넨?" "안녕하셨습니까. 분대장님." 헤일즈의 얼굴에는 격정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카르수스는 헤일즈가 근위기사로 복무하던 시절 무척 존경했던 상관이었다. 특유의 뛰어난 인품과 부하를 아끼는 마음으로 카르수스는 당시 근위기사단의 분대장들 중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비록 라일리의 흉계로 말미암아 근위기사단을 떠나긴 했지만 헤일즈는 적어도 카르수스에게만은 섭섭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그만큼 모범적인 상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관을 몇십 년 만에 만나게 되니 반갑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연신 얼굴을 실룩이던 헤일즈가 공손한 태도로 예를 올렸다. "카르수스 분대장님을 뵙습니다. 아니 지금은 단장님이 되셨다지요?" "정말 반갑네. 헤일즈.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성큼성큼 다가온 카르수스가 손을 내밀었다. 헤일즈는 묵묵히 내민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옛 상관을 대하고 있으니 오래 전 근위기사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헤일즈는 웃는 낯으로 말을 걸었다. "국왕전하께서 극히 합당한 결정을 하셨군요. 분대장님이 아니면 도대체 그 누가 펜슬럿 근위기사단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 탁월한 판단이시지요." "허허. 이 사람이……." 카르수스 공작은 쑥스럽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헤일즈도 덩달아 웃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대단하더군." "뭐가 말입니까?" "자네 아들 미첼 말일세. 어떤 방법으로 저렇게 훌륭한 기사로 키울 수 있었나? 정말 부럽기 그지없네." 헤일즈는 씩 웃었다. 미소에는 자부심이 짙게 배어있었다. "아직 어려서 모자란 점이 많습니다." "좌우지간 고마우이. 못 다한 충성을 마무리하기 위해 아들을 펜슬럿으로 보내다니 말일세. 빌어먹을 라일리 때문에 다소 불협화음이 있었지만 잘 해결되었다네. 그리고 걱정하지 말게. 미첼은 책임지고 내 후임으로 키워주겠네. 충분하고도 남을 실력이지. 암 그렇고 말고. 참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낭보가 하나 있네." 카르수스는 눈을 찡긋했다. 헤일즈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낭보라니요?" "자네 누명이 깨끗이 벗겨졌다네. 다시 말해 라일리란 놈이 저지른 음모의 전모가 밝혀졌다는 뜻일세." "………." 카르수스 공작은 손을 뻗어 헤일즈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당시 증언했던 하인들을 체포해서 심문을 했네. 어명이 떨어졌기 때문에 프리즈먼 가문은 그들을 순순히 내놓을 수밖에 없었지. 그들의 입을 통해 일의 전모에 대한 자백을 받아내었고 모든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네." "………." "라일리 프리즈먼은 부인, 고용인과 작당하여 동료를 음해한 죄로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네. 근위기사 자격은 자동적으로 박탈되었지. 위증죄를 범한 그의 부인과 고용인들도 합당한 처벌을 받았다네. 물론 사실을 은폐하려 한 프리즈먼 가문에게도 적절한 대가를 치러주었지. 그런다고 자네 마음에 얼마나 위안이 될는지 모르겠네만 이제 그만 섭섭함을 풀도록 하게." 카르수스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헤일즈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강대한 프리즈먼 가문의 위세 때문에 라일리에게 형편없이 당했던 옛날을 떠올리자 감회가 새로웠다. 오랫동안 잊어버리려 노력했던 기억이 아니던가? 엘리스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근위기사 자격을 잃은 사실과 5년 동안 수습기사로 있으며 라일리에게 받았던 온갖 괴롭힘과 모욕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 일로 인해 펜슬럿에 환멸을 느끼고 떠날 마음을 먹지 않았던가? 그런데 25년 만에 모든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다니……. 그 때의 기억을 모두 떨쳐버리려는 듯 헤일즈는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뒤흔들었다. "제 명예를 회복시켜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아냐. 자네 아들이 아니었다면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을 것이네. 어명이 떨어졌기 때문에 진실을 밝힐 수 있었지." 이어진 카르수스의 말에 헤일즈는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어명이 아니었다면 사실을 쉽사리 밝힐 수 없었을 터였다. 막강한 프리즈먼 가문이 아들이 처벌받을 것을 알면서 고용인들을 순순히 내놓을 리가 만무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25년이나 지난 과거의 일이었다. 어명으로 인해 죄의 소멸시효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라일리의 처벌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카르수스 공작이 밝은 표정으로 헤일즈를 잡아끌었다. "어서 들어가세.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네." "알겠습니다." 카르수스 공작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알현을 마치면 우리 코가 삐뚤어지게 한잔하도록 하세. 그때의 분대원들을 모두 소집해 놓았다네. 아마 그들은 자넬 무척 반가워할 거야." "그러죠." 카르수스의 인도아래 크로센 사절단들은 황궁으로 향했다. 궁정에 들어가자 펜슬럿 국왕은 환한 표정으로 카심과 미첼을 맞았다. "어서들 오시오. 그대들의 놀라운 무용은 짐이 익히 들었소이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카심과 미첼이 공손히 예를 올렸다. 흡족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던 펜슬럿 국왕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가 의도적으로 퍼뜨린 탓에 카심 용병단의 대장과 검술교관이 펜슬럿의 기사라는 사실은 이미 아르카디아 전역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반드시 펜슬럿으로 돌아오라는 무언의 협박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대들이 막강한 레드 드래곤의 공습을 막아내었다는 소식을 들었소. 빼어난 용기와 기상으로 펜슬럿 기사들의 의기를 만천하에 떨치다니 기뻐서 도저히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구려. 정말 수고들 많았소."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고개를 조아린 카심과 미첼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국왕은 자신들을 아예 펜슬럿의 기사로 간주하고 있었다. 카심 용병단이 아직까지 해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앞으로 펜슬럿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열과 성의를 다해 국왕을 대했다. "모든 것이 전하의 은덕이 아니었다면 이루지 못했을 것이었사옵니다." "펜슬럿은 영원히 번영할 것이옵니다." 기분이 좋았는지 국왕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때 카르수스 공작이 앞으로 나서서 헤일즈를 소개했다. "전하. 이 기사가 바로 헤일즈이옵니다. 미첼의 아버지로써 라일리의 비열한 책략으로 부득이하게 본국을 떠나야 했던 바로 그 근위기사가 전하를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헤일즈는 즉시 예를 올렸다. 한 때 근위기사였던 만큼 예를 올리는데 있어 추호도 모자람이 없었다. 헤일즈를 본 국왕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오오. 그대가 바로 근위기사 헤일즈였구려. 이렇게 반가울 데가……. 정말 고맙소. 그런 불미스런 일을 겪고도 대를 이어 충성을 바치기 위해 아들을 보내주다니……." 헤일즈는 얼굴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미첼에게 제반 정황을 들었던 터라 대답하는데 전혀 머뭇거림이 없었다. "천만의 말씀이옵니다. 전하. 비록 동료의 모함으로 부득이하게 펜슬럿을 떠나야 했지만 전하께 충성을 바치지 못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사옵니다. 나이를 먹어 몸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탓에 달랑 아들만 보냈사온데 이런 천고의 불경을 저지른 신을 부디 벌해 주시옵소서." 미첼의 놀라운 연기실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는 대답이었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24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미첼은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물론 헤일즈의 평소 모습이 어떠했는지 아는 자는 오로지 미첼 밖에 없었다. '펜슬럿의 기사가 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신 아버지의 입에서 저런 말씀이 나오시다니…….' 그러나 미첼과는 달리 펜슬럿 국왕은 퍽 감명 받은 모양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게요. 난 지금 옛날 일을 후회하고 있소. 그대와 같은 충신이 펜슬럿을 떠나도록 방치하다니……. 범인은 이미 엄벌을 받았으니 부디 섭섭함을 풀기 바라오." "전하의 성은에 감히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헤일즈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렸다. 헤일즈를 한참동안 쳐다보던 펜슬럿 국왕이 그때서야 크로센 사절단에게 시선을 던졌다. 사절단의 우두머리가 공손히 예를 올렸다. "그래 트루베니아를 정벌할 병력을 얻으러 오셨소?" "그렇사옵니다. 전하. 트루베니아의 드래곤들은……." 펜슬럿 국왕은 신경쓸 것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본국은 이미 파병할 것을 결의한 상태요. 밖에 총리가 대기하고 있소. 병력규모나 보급물자 따위의 세부사항은 그와 논의하기 바라오."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미 파병결정이 내려졌다는 말에 사절단 우두머리는 당황해서 거듭 머리를 조아렸다. 벌써 결정을 내려놓다니…….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펜슬럿 국왕은 카심과 미첼, 그리고 헤일즈를 쳐다보았다. "내실에다 연회 준비를 갖춰 두었소. 오늘같이 기쁜 날 술과 음식이 빠질 수가 없지 않겠소? 진부한 협상거리는 관리들에게 일임하고 우린 식사나 하도록 합시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라서 일행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허 참 이렇게 난감할 데가……." 크로비츠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공간이동 마법진을 통해 막 테제로스에 도착했는데 곤란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테제로스의 근위기사단 단장이 영접 나온 것까지는 짐작했었는데 뜻밖에 그는 일행을 궁정으로 안내하지 않았다. "사절단 여러분. 오늘은 영빈관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하십시오. 회담은 아마 내일 열리게 될 것입니다." 크로비츠는 황당한 감정을 느껴야 했다. 오후였긴 하지만 시간이 아직 일렀기 때문에 바로 회담에 들어갈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는 크로비츠에게 기사단장이 부연설명을 했다. "전하께선 몸이 좋지 않으셔서 오늘따라 일찍 침상에 드셨사옵니다. 따라서 저희도 부득이 회담 일정을 내일로 잡아놓았습니다." "아, 알겠소."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크로비츠는 왠지 심사가 편치 않았다. 회담이 내일로 연기된 이유가 익히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안내를 받아 영빈관 쪽으로 향하며 그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크로센 기사단장이 테르비아로 갔다는 소문을 들었나보군. 그런데 테제로스엔 한 수 아래인 듀크 나이츠 단장이 와서 기분이 몹시 상했다 이건가?' 기분이 나빴지만 할 수 없었다. 크로센 기사단은 어느 면으로 보아 듀크 나이츠보다 한 수 위로 평가받는 무력집단이었다. 특히 크로센 기사단의 단장은 전설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아니던가? 따라서 크로비츠로써는 지금껏 수없이 해 온 자신과의 약속을 마음 속으로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크로센 기사단의 아성을 반드시 무너뜨리고야 말 것이다. 진정한 실력으로 말이다.' 크로비츠의 뒤에는 30여 명의 듀크 나이츠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대장의 심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짐작한 듯 하나같이 안색이 경직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속에 유달리 체격이 왜소한 기사 둘이 끼여 있었다. 제럴드와 하인리히였다. 그들은 기이한 눈빛으로 테제로스의 수도를 훑어보고 있었다. 애초에 테제로스 출신이었기 때문에 시가지 풍경이 낯설 턱이 없었다. 그들은 지금 몸에 꼭 맞는 듀크 나이츠의 정복을 입고 있었다. 회백색의 수수한 제복은 철저히 실용적으로 재단되어 있었다. 정규 기사임을 증명하는 문장을 가슴팍에 수놓은 그들은 음성을 낮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듀크 나이츠의 입단심사에 통과하다니……. 정말 꿈만 같아." "아니야. 하인리히. 모르고 있겠지만 네 실력은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었어. 어딜 가더라도 정규 기사가 될 수 있었을 거야." 그 말을 들은 듀크 나이츠 하나가 빙그레 웃으며 하인리히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입단 심사 때 하인리히와 대련했던 기사로써 페이디언이란 이름을 가진 소드 마스터였다. "제럴드의 말이 맞다. 하인리히. 넌 뛰어난 실력을 가진 기사야. 그 점은 내가 보증하지." "저, 정말입니까?" "물론이지. 우리 듀크 나이츠의 입단심사는 철저히 실력으로 행해진다. 연줄 따위는 전혀 통용되지 않아. 뭐 나이가 어린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실력이 일정 수준이상으로 인정받지 않았다면 결코 듀크 나이츠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도 너와 겨루며 상당히 놀랐단다." "가, 감사합니다." 하인리히는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듀크 나이츠는 능히 강대국의 근위기사단 급으로 분류되는 1류 기사단이다. 그런 듀크 나이츠의 기사가 된 것이 아직까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는 바로 어제 듀크 나이츠의 정규 기사가 된 상태였다. 크로비츠와의 대련으로 입단심사가 면제된 제럴드와는 달리 그는 정식절차대로 심사를 받아야 했다. 실력을 입증하지 못하면 정규 기사가 될 수 없다는 듀크 나이츠의 엄격한 규칙 때문이었다. 대련 상대로는 분대장 중 하나이자 소드 마스터인 페이디언이 내정되었다. 그리하여 하인리히는 페르슈타인 공작과 크로비츠가 보는 앞에서 입단을 결정짓는 대련을 벌이게 된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하인리히는 페이디언을 상대로 당당히 자신의 실력을 입증할 수 있었다. 비록 좌수검법 같은 위력적인 검술을 익히진 못했지만 하인리히에겐 데스 나이트들과 무수히 싸워본 경험이 있었다. 그 경험으로 말미암아 하인리히의 몸놀림과 반사신경은 비약적으로 향상된 상태였다. 한 마디로 적을 맞아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확실하게 배운 것이다. 사실 그가 정식 기사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데스 나이트들의 덕이 컸다. 대련이라 해서 결코 사정을 봐주지 않는 데스 나이트들. 그들에게 혹독하게 얻어터지며 단련된 탓에 하인리히는 최대의 약점이던 여린 마음을 충분히 단련시킬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하인리히는 소드 마스터인 페이디언을 상대로 쉽사리 밀리지 않았다. 페이디언과 어우러져 밀고 밀리는 공방을 벌인지 20분이 지나자 크로비츠가 마침내 대련을 중지시켰다. 마침내 합격 판정을 내린 것이다. "그만. 기사 지망생 하인리히를 이제부터 듀크 나이츠의 정규 기사로 인정한다. 수습기간을 거칠 필요도 없다." 정식 기사가 되어 뛸 듯이 기뻐하는 하인리히를 제럴드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둘도 없는 단짝 친구였던 그들이 급기야 한 기사단에 소속된 동료가 된 것이다. 소정의 입단식을 거쳐 듀크 나이츠의 정식 기사가 된 둘. 그들은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크로비츠를 따라 테제로스로 향해야 했다. 제럴드의 숙원, 즉 묵은 빛을 해결하기 위해서 말이다. 영빈관은 의외로 가까웠다. 오는 내내 벌레 씹은 표정을 풀지 못하던 크로비츠는 목적지에 도착하자 기사들을 도열시켰다. "오늘은 이곳에서 쉬기로 한다. 부득이한 일이 아닌 이상 외출은 허락하지 않겠다." 말을 마친 크로비츠는 제럴드를 쳐다보았다. 눈동자에 뿌듯한 빛이 감돌고 있는 걸로 봐서 제럴드를 휘하에 받아들인 것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모양이었다. "제럴드와 하인리히. 예외로 너희들에게만은 외출을 허락한다. 시한은 오늘 자정까지다. 듣기로 이곳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며?" "그렇습니다. 단장님."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모쪼록 잘 처리하기 바란다. 부디 듀크 나이츠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행동하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대장님." 둘은 공손히 예를 올렸다. 크로비츠는 남은 기사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비록 타국의 수도에 와 있긴 하지만 수련은 거르지 않는다. 오늘 일로 다들 느낀 것이 있을 줄 안다. 알겠는가?" 도열한 듀크 나이츠들은 머뭇거림 없이 복명했다. "알겠습니다. 단장님." "영빈관이라 마땅한 수련장이 갖춰져 있을 것이다. 다들 들어가서 수련복으로 갈아입도록 하라." 크로비츠의 말이 끝나자마자 듀크 나이츠들은 우루루 영빈관 안으로 몰려들어갔다. 막 들어가려던 크로비츠가 고개를 돌려 둘을 쳐다보았다. "너희들이 보았다시피 듀크 나이츠의 수련시간은 여타의 기사단과 비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도록 해라." 제럴드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대장님. 저희들은 먹고 자는 시간까지 아껴 수련할 정도입니다." "그 점은 나도 인정한다." 크로비츠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동안 함께 생활한 탓에 크로비츠는 카심 용병단원들이 얼마만큼 수련광들인지 잘 알고 있었다. 듀크 나이츠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크로비츠가 들어간 뒤 영빈관 앞에는 제럴드와 하인리히만 남았다. "그럼 우리도 가볼까?" "그래. 사실 난 꿈만 같아. 당당한 정규 기사가 되어 테제로스로 돌아오다니 말이야……." 둘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시내 중심부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태어나서 자란 곳이었기에 시가지 풍경이 둘에게 낯설 턱이 없었다. 하인리히가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걸었다. "그런데 프록터 놈에게 어떻게 복수할 생각이야? 다짜고짜 쳐들어가서 죽여버릴 수는 없잖아." 제럴드가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며 대답했다. "정식으로 찾아가서 결투를 청할 생각이야. 신분이 신분인 만큼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야 할 것 같아." "하지만 놈은 상인이야. 놈은 당연히 대전사를 내세울 테고, 네가 이기더라도 제대로 된 복수는 불가능할 텐데." 제럴드의 낯빛이 착잡해졌다. "그렇겠지? 상인이니까 결투에서 지더라도 돈으로 보상하면 그만일 테니……. 마음 같아서는 놈을 산채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어. 하지만 내 개인적인 복수 때문에 카심 용병단, 그리고 우릴 받아준 듀크 나이츠의 명예를 함께 실추시킬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제럴드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이 시리도록 눈을 파고들었다. "데이몬께서 직접 해결해 보라 하셨으니 한 번 시도해 봐야지. 제대로 복수를 할 수 없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거야. 한 가지 생각해 놓은 것이 있지만 통할 지는……." "일단 노력해보자." 하인리히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제럴드를 위로해 주었다. 제럴드는 묵묵히 메고 있던 배낭을 풀었다. 그 속에는 용병단 시절에 입고 다녔던 낡은 외투가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일부러 챙겨온 상태였다. "크로비츠 단장님께는 조금 미안하지만 옷을 갈아입도록 하자.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는 놈에게 우리가 듀크 나이츠란 사실을 숨겨야 해." "알았어." 북부에서부터 죽 입고 다니던 낡은 외투와 바지를 꺼낸 둘은 인적이 없는 구석으로 갔다. 옷을 갈아입고 나자 단정하던 그들의 차림새는 판이하게 변해버렸다. 얼굴만 가린다면 영락없이 경험 많은 용병이었다. "그럼 가볼까?" "그래." 그들은 테제로스에서 알아주는 대상인(大商人) 프록터의 저택을 향하기 시작했다. "흐흐흐. 이번 분기 수입도 무척 짭짤하군." 화려하게 치장된 집무실에서 갑자기 괴소가 터져 나왔다. 늙은이 하나가 우단으로 덮인 안락의자에 앉아 활짝 웃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커다란 상자가 놓여 있었는데 놀랍게도 상자 속에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교활해 보이는 눈매와 쭉 빠진 하관이 왠지 모르게 음침한 인상을 주는 늙은이였다. 몸에 걸친 옷이나 장신구가 극히 고급스러운 것을 보아 사치를 즐기는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프록터. 테제로스에서 제일가는 상단(商團)의 총수로써 상당한 부를 보유한 거상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다. 그의 부가 정상적인 상행위가 아니라 노예매매 같은 음성적인 거래로 축척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르카디아 대륙에서 상당한 악명을 날리는 노예매매업자였다. 한 때 노예매매의 양대 축으로 거론되는 로르베인의 로메인 상회가 뜻밖에 개과천선(?)을 한 뒤 그의 프록터 상단은 현재 최대의 절정기를 맞은 상태였다. 그 사실을 떠올려보던 프록터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번져갔다. "도대체 로메인 남작 놈이 어떤 이유로 마음을 고쳐먹었을까?" 과거 로메인 남작은 세인이 치를 떠는 악덕상인이었다. 그 악명은 프록터조차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로메인 남작의 상회는 지금 탈태환골에 비견될 정도로 변화한 상태였다. 세상에 악명을 널리 떨친 로메인 남작은 이제 노예매매를 깨끗이 포기하고 극히 정상적인 상행위로 돈을 벌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25회.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프록터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로메인 상회는 명실상부한 대륙 제일의 상단으로 부상했다. 그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특유의 전략인 박리다매와 신용엄수로 말미암아 그 어떤 상단도 뒤따를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프록터는 로메인 남작의 방법을 따라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놈이 어떤 선택을 하던 간에 난 노예매매가 좋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업종변환을 하지 않을 것이니." 사실 프록터가 벌이는 노예매매사업은 과거 로메인 남작의 경우처럼 짭짤하지는 못했다. 북쪽에 치우친 테제로스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해안도시로 노예를 팔아 넘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예매매의 백미는 단연 여자노예거래이다. 남자노예보다 팔기도 편할뿐더러 이윤도 훨씬 많았다. 여자노예에 대한 최고의 수요처는 해안에 위치한 도시들이었다. 하지만 노예매매를 금지하는 로투스, 페어놀드, 안드레아 이 세 왕국이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로 공급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했다. 그 탓에 프록터는 남자노예를 사들여 북부의 용병으로 팔아 넘기는 거래를 주력으로 삼아야 했다. 그것이 주 수입원임에도 불구하고 프록터의 관심사는 단연코 여자노예에게 있었다. 병적인 프록터의 성욕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노예를 통한 방법 밖에 없었다. 그는 변태성욕자였다. 구타를 통한 극히 가학적인 방법으로 성욕을 충족시켰기 때문에 정상적인 여자는 불과 한 달도 견디지 못했다. 때문에 프록터는 팔리든 팔리지 않던 간에 계속해서 여자를 사들이고 있었다. "보름 정도 가지고 놀다가 팔아버리는 데에는 노예 계집이 제일 좋지." 음침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킨 프록터는 금화가 든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방구석에 설치된 비밀금고 문을 연 프록터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문을 닫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문 밖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안에 계십니까?" 프록터에겐 극히 익숙한 총지배인의 음성이었다. "무슨 일인가?" "누군가가 찾아왔습니다. 주인님을 꼭 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어찌 해야 할지." 프록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찾아올 예약손님은 없는데……. 차림새가 어떠하던가?" "전형적인 용병 차림새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 프록터는 묵묵히 몸을 일으켰다. 용병 차림새를 한 고객이라면 만나볼 필요가 있었다. 용병단은 그의 최대 고객이었다. 용병으로 팔아 넘길 수 있는 건장한 남자노예는 이미 충분히 확보해 둔 상태였다. "금방 나가겠다." 응접실로 나간 프록터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다리고 있는 손님을 보고 난 뒤의 일이었다. '이건 뭐야 스물도 안 되는 애송이들이잖아?' 용병으로 쓸 남자노예를 구매하러 온 용병단 사람으로 알았는데 예상이 깨끗이 빗나가버렸다. 프록터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소년들의 차림새를 살폈다. 일단 겉에 걸치고 있는 복장은 용병들이 즐겨 입는 외투였다. 두터워서 습기가 잘 통하지 않고 보온력이 좋은 외투는 노숙을 즐겨하는 용병들이 특히 선호하는 물품이었다. 이리저리 헤어지고 색이 바랜 것을 보니 용병생활을 상당히 오래 한 자들 같았다. 나이가 상당히 어리다는 점이 조금 어색했지만 말이다. 그것 외에는 별달리 특이한 점이 없었다. 바지 역시 외투에 비견될 정도로 낡았다. 단지 신발이 상당히 고급이라는 점 빼면 험하게 굴러먹던 용병이 틀림없어 보였다. 기사들이 즐겨 신는 가죽단화와 비슷하다고 생각한 프록터는 암암리에 코웃음을 쳤다. '용병 주제에 저런 고급 신발을 입고 다니다니…….' 서둘러 안색을 바꾼 프록터가 웃는 낯을 지었다. 그것은 닳고닳은 상술에 기인한 가식적인 미소였다. "반갑소. 그래 무슨 일로 오셨소?" 프록터가 말을 꺼내자 왼쪽의 소년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순간 프록터는 소름이 오싹 끼치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을 향해 쏘아진 눈빛이 극히 살벌했기 때문이었다. 깜짝 놀란 프록터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순간 귀로 스산한 음성이 파고 들었다. "날 기억하지 못하는가? 프록터." "누, 누구요?" "하긴. 그럴 것이다. 네놈에게 나와 내 누나는 기억할 필요조차도 없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할 테니까." 프록터의 눈동자에 황당하다는 빛이 서렸다. 일면식도 없는 애송이 용병이 대뜸 반말을 지껄이는 데다 말투를 보니 명백히 시비를 걸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통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를 정도로 화가 치밀었지만 프록터는 역시 노련했다. 대꾸하는 대신 그는 상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상대의 얼굴이 상당히 낯익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응? 너, 너는……." 소년 용병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이제 알아 차렸나보군. 생각보다 머리가 나쁜 녀석인 걸?" 프록터는 당황했던 마음을 간신히 추스를 수 있었다. 냉정을 되찾은 그는 슬쩍 손짓을 했다. 벽면에 늘어서 있던 경비병들이 다가와 소년 용병들을 에워쌌다. 또한 일단의 병사들이 재차 응접실로 들어오자 프록터는 간신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제 봤더니 오래 전 저택에 침입해서 날 죽이려 했던 일리나의 동생 놈이었군. 첫눈에 알아보지 못해 미안한걸? 몰골을 보니 용병이 되었나보군." "아니 미안할 건 없어. 네놈 따위에게 기억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도전적인 자세를 견지하던 제럴드가 계속 반말 짓거리를 내뱉자 프록터도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다. 나이가 삼분지 일밖에 되지 않는 애송이에게 반말을 듣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님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노련한 상인인 프록터는 제대로 받아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버르장머리가 없는 놈이로군. 그래도 네놈의 누나는 그런 대로 괜찮은 계집이었는데……. 특히 나에게 얻어맞으며 질러대는 비명소리가 일품이었지." 제럴드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런 개자식."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의 검을 잡아가는데 하인리히가 차분히 제럴드를 제지했다. "참아. 제럴드. 우리가 온 목적을 생각해야지." 간신히 자신을 추스른 제럴드가 타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난 네놈에게 결투를 청하러 왔다." "결투?" "그렇다. 우리 가족은 네놈 때문에 풍비박산이 났다. 난 그 대가를 받아내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프록터는 재미있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비천한 용병 녀석이 결투를 청해오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노릇이로군." "용병이라서 결투신청을 받지 않겠다는 뜻이냐?" "아니 받아주겠다. 대신 검술을 모르는 날 대신하여 대전사를 내세워도 무방하겠지?" 익히 예상한 반응이었기에 제럴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뭔가 마음을 정한 듯 프록터의 눈동자엔 기이한 빛이 서려 있었다. "혹시 무슨 용병단에 소속되어 있는지 물어도 되겠나?" "아마 말해도 모를 것이다. 대원이 일곱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 용병단이니까……." 프록터의 입가에 진득하게 미소가 걸렸다. "좋아. 그런데 결투를 벌이기로 했으면 요구 조건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네놈은 결투의 대가로 나에게 뭘 바라나?" "………." "죽은 네놈 가족에 대한 보상을 원하나?"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조건이었지만 제럴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같아서는 놈의 목숨을 요구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검술을 익힌 상대였다면 의당 목숨을 요구할 수 있겠지만 상대는 상인이었다. 상인에게 받아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돈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목숨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놈이 대결에 응할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 제럴드가 승낙하자 프록터의 입가에 극히 잔인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보상이라……. 좋아. 보상해 주지. 얼마를 요구하던 간에 말이야. 대신 나도 조건을 내걸겠다." "말하라." 프록터는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느릿하게 내뱉었다. "내가 승리했을 경우 네놈의 두 팔을 내놓아라. 그렇게 한다면 네놈이 더 이상 날 귀찮게 하지 못하겠지? 마음 같아서는 다리 두 쪽까지 요구하고 싶지만 그쯤에서 참겠다." "뭐라고?" 뜻밖의 요구조건에 제럴드는 깜짝 놀랐다. 검사에게 있어 목숨보다 중요한 두 팔을 요구하는데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칼자루를 쥔 쪽은 프록터였다. "싫다면 결투에 동의하지 않겠다. 어떻게 하겠느냐?" 치를 떨던 제럴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나 지금이나 간악하기 그지없는 놈이로군. 좋다. 조건을 수락하겠다." "좋아. 결투는 내일 이 시간에 벌이도록 하겠다. 뭐 참관인 따위야 필요 없을 테니 준비하지 않을 생각이다." "물론이다. 나 역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럼 내일 오너라. 옛 아내의 동생임을 감안해서 깔끔하게 팔을 잘라 줄 테니……."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프록터를 노려보던 제럴드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내일 오겠다." 원수의 집에서 잠시도 머무르기 싫다는 듯 제럴드는 휑하니 몸을 돌렸다. 프록터의 얼굴을 힐끔 쳐다본 하인리히가 그 뒤를 따랐다. 프록터는 특유의 눈빛을 번들거리며 둘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제럴드와 하인리히가 나가자 프록터는 지체 없이 총지배인을 불렀다. "지금 즉시 로투스 용병단에 연락을 해서 대장인 티나르에게 휘하 용병 1백을 모두 데리고 오라고 일러라." 로투스라면 프록터 상단이 직접 운영하는 용병단이다. 정확히 말하면 용병단이기보다는 폭력조직에 가깝다고 봐야 했다. 프록터가 운영하는 업소의 일에 폭력을 행사해 주고 일정한 보수를 받아 생활하는 자들이었는데 때때로 프록터의 명을 받아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치안대에 줄이 닿아 있는 프록터 덕에 일을 저질러도 처벌을 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법망을 교묘히 이용하는 것이 프록터의 장기였고 때문에 살인사건이 벌어져도 수사는 시작 단계에서 봉쇄되거나 시작되어도 흐지부지 끝나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로 인해 로투스 용병단원들은 프록터에게 열렬히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프록터는 그런 로투스 용병단 전원을 불러들여 제럴드를 상대하려는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총지배인이 다소 불안한 듯 프록터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놈에게 보상을 해 주실 생각이십니까?" 프록터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을 치켜 떴다. "미쳤나? 어떻게 벌은 돈인데 그깟 거지같은 놈에게 보상을 해 준단 말인가?" "하지만 티나르 대장의 검술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 놈이 경험 많은 용병이라면 질 가능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걱정하지 말게. 결투는 그저 형식적으로 치르는 것이니까……." 프록터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번져갔다. "티나르는 용병이기보다는 전문적인 싸움꾼이야. 상대를 확실하게 죽여버리는데 그 이상 적합한 인물이 없지. 그리고 결투 여부를 떠나서 두 애송이 놈은 결코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없을 걸세. 인원이 일곱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 용병단 소속이라 하니 뒤처리하는 것도 비교적 수월할 테고……." "아, 알겠습니다." "자넨 두 놈을 감쪽같이 묻어버릴 장소나 물색해 놓도록 하게." 말을 마친 프록터는 휑하니 몸을 돌렸다. 이게 바로 프록터가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었다. "잘 되었군. 그 때 놈을 확실하게 처리하지 못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이 참에 뒤탈 없도록 깨끗이 해결해야겠군."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26회. "프록터란 자가 순순히 결투에 응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하인리히의 말에 제럴드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모호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건 내 직감인데 놈은 틀림없이 모종의 흉계를 꾸며놓을 거야. 우릴 죽여 없애려 할 것이 틀림없다고……" 하인리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을 알면서도 결투에 응했단 말이야?" "그것 때문에 신분을 밝히지 않은 거야. 놈이 마음놓고 함정을 팔 수 있도록 말이야." 귀를 통해 하인리히의 걱정스런 음성이 파고들고 있었다. "위험하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우린 카심 용병단원이며 또한 듀크 나이츠의 정규 기사야. 그까짓 상인 놈이 파놓은 함정 따윈 정면 돌파해야 하지 않겠어?" 제럴드는 차갑게 미소지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과거의 일이 일목요연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누나의 죽음에 분개해 비수를 들고 프록터의 저택에 침입하던 때의 일 말이다. 경비병에게 그만 붙잡힌 제럴드는 프록터의 명령으로 혹독한 매질을 당했다. 그 후유증으로 영원히 다리를 절게 되었을 정도였다. 만약 이웃집 아저씨의 신고가 아니었다면 제럴드는 그때 인생을 접어야 했을 것이다. 신고를 받고 프록터의 저택에 도착한 치안대원들은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제럴드의 상태를 보고 경악했다. 이후 제럴드가 감옥에 갇혀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프록터는 끊임없이 재판부에 입김을 넣었다. 눈엣가시나 다름없는 제럴드에게 사형이 언도되게 하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의 적극적인 증언으로 말미암아 정상 참작이 된 제럴드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때의 일을 떠올린 제럴드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놈은 법의 허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놈이야. 그러니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함정을 파야 해." "그래야지. 내가 최대한 도와줄게." 제럴드는 빙그레 웃으며 하인리히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너도 해결해야 할 일이 있잖아?" "………." "무작정 피하기보다는 정면으로 헤쳐나가는 것이 나아. 내키지 않겠지만 집에 들어가도록 해.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으니 아버님도 무척 걱정하셨을 거야." 하인리히는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그 분은 결코 날 아들이라 생각하지 않아. 아마 내 걱정 따윈 추호도 하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 않아." 하인리히를 쳐다보는 제럴드의 눈동자에는 애틋한 빛이 서려 있었다. 카심 용병단원들 중에서 유일하게 그만이 하인리히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신의 신상에 대해 밝히려 하지 않은 하인리히였지만 제럴드에게만은 예외였다. 진정한 친구로 생각했는지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던 것이다. '불쌍한 녀석.' 하인리히가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이유를 십분 이해하는 제럴드였다. 아마 자신에게 사정을 밝히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제럴드는 묵묵히 하인리히에 대한 사실을 떠올려 보았다. 자신의 운명도 기구했지만 하인리히 결코 자신에게 못하지 않은 처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인리히의 집안은 놀랍게도 테제로스에서도 알아주는 명문 귀족가문이었다. 과거 근위기사단 분대장을 지낸 파리온 백작이 바로 그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전형적인 무가에다 드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선택받은 태생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그 혜택에서 철저히 열외가 되어야 했다. 서자(庶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첩의 자식은 어딜 가나 인정받지 못한다. 그것은 테제로스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게다가 하인리히는 평범한 케이스도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는 첩도 아닌 단순히 몸을 팔러 나온 거리의 여인에 불과했다. 하인리히가 태어날 당시는 대륙 전역에 흉년이 들어 평민들이 살기가 무척 곤란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많은 여자들이 몸을 팔기 위해 거리를 떠돌았다. 하인리히의 어머니 역시 동생들이 굶는 것을 보다 못해 거리로 나온 여자들 중 하나였다. 그녀는 우연히 술 취한 파리온 백작과 관계를 맺어 하인리히를 잉태했다. 그러나 거리를 떠돌던 그녀에게 자식을 키울 능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고민 끝에 그녀는 갓 낳은 하인리히를 파리온 백작의 저택 정문 앞에 버렸다. 사정을 적은 종이 한 장과 함께. 하인리히가 파리온 백작의 슬하에서 자라나게 된 계기는 대략 그러했다. 그래도 파리온 백작에게 생각 없이 흘린 핏줄에 대한 책임감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다. 하지만 하인리히가 파리온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한 마디로 요원한 일이었다. 파리온 백작부인과 그의 아들들, 심지어 파리온 백작 본인조차도 하인리히를 가족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비록 거두긴 했지만 자신의 핏줄이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 탓에 하인리히는 어릴 적부터 철저히 눈칫밥을 먹으며 자라야 했다. 아마도 하인리히의 자신감이 결여된 심약한 성격은 그때부터 길러진 것이리라. 아들로 인정받지 못하고 가문의 일원으로 등재조차 되지 못하던 상황. 거듭된 구박에 시달리던 하인리히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가출을 결심한다. 어쩌면 그것은 파리온 가문에서 먼저 바랬던 일일지도 몰랐다. 봇짐 하나를 달랑 짊어지고 집을 나온 하인리히는 여행 도중에 제럴드와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 되었고 지금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하인리히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하인리히는 쓸쓸한 눈빛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차피 그들은 날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아."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잖아? 떠나온 지 어언 4년이 넘었어. 네 아버진 틀림없이 널 보고싶어 하실 거야." 하지만 하인리히의 그늘진 얼굴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진짜 아버지가 아닐지도 몰라. 어머니가 거리의 여자이셨으니 말이야." "용기를 내. 하인리히. 밑져봐야 본전이잖아. 본체만체하면 다시 나오면 그뿐이라고……. 이곳까지 왔는데 집에 한 번 들러보지도 않을 거야?" 하인리히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그는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긴. 밑져야 본전이겠지. 네 말이 맞아." "집에 들르는 거지?" "그래. 한 번 가보자. 내쫓기는 한이 있어도 말이야." "좋았어. 짜식." 제럴드는 손을 들어 하인리히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성격과 성장과정이 판이하게 달랐지만 어려운 시절을 함께 헤쳐나갔기 때문인지 둘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단짝친구가 되어 있었다. 어깨동무를 한 둘은 파리온 저택이 위치한 방향으로 힘껏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파리온 저택의 정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이 의아한 듯 눈을 치켜 떴다. 용병 차림새를 한 사내 두 명이 신나게 달려오다가 저택의 정문 바로 앞에서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뛰어온 듯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경비병이 용무를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한참을 헉헉대며 숨을 고르던 하인리히가 경비병을 보고 어리둥절해 했다. "어? 정문 경비는 핸더슨 아저씨가 서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경비병은 웃는 낯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 그분은 경비병을 총괄하는 분대장으로 승격했습니다. 핸더슨 분대장님은 더 이상 정문 경비를 서지 않습니다." "아 그렇군요." 겨우 숨을 가다듬은 하인리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파리온 백작님을 뵈러 왔습니다." "미리 약속을 하셨습니까?" "약속은 되어있지 않습니다. 근처를 지나다 잠시 들른 것이거든요."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하인리히는 잠시 고민에 사로잡혔다. 아들이란 사실을 밝혀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오지 않았던가? "여행 중인 넷째 아들이 아버지를 뵈러 왔다고 전해 주십시오." 미심쩍은 듯 눈살을 찌푸리던 경비병은 이어진 하인리히의 대답을 듣자 깜짝 놀랐다. 정문 경비병인 자신이 모르는 아들이 있다니……. 당황해 하던 경비병은 서둘러 몸을 돌렸다. "이 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별을 넣어드리겠습니다." 하인리히와 제럴드는 남은 경비병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을 받으며 그곳에서 잠시 기다렸다. 긴장이 되었는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과연 날 만나 주실까?'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신분을 명확히 밝힌 것이 잘한 것 같았다. 경비병의 대답 여하에 따라 아버지의 생각을 바로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들이라 인정한다면 만나려 할 것이며 그렇지 않는다면 출입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에 잠겨있던 하인리히는 갑자기 쓴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홀가분하군.' 잠시 후 경비병이 달려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인리히는 바짝 긴장한 채 문 쪽을 쳐다보았다. 문이 열리고 경비병이 다소 허둥대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백작님께서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하인리히는 긴장이 절로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아들로 인정한 모양이었다. 제럴드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것 봐. 잘 왔잖아. 어서 들어가 봐." "너는……." "나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잖아? 가족 상봉에 불청객이 낄 순 없는 노릇이지. 먼저 숙소에 가 있을 테니 늦지 않게 들어와." 하인리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건투를 빈다." 빙그레 웃어준 제럴드가 몸을 돌렸다. 뒷모습을 보고 있던 하인리히는 경비병의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하인리히가 경비병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에는 한 남자가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왔느냐." 느릿하게 울려 퍼지는 묵직한 음성에 하인리히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애증이 쉴새없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지만 아버지를 직접 만나게 되자 왠지 모르게 기이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여직 느끼지 못했던 생소한 감정이었다. 한스러웠던 어린 시절에 대한 반항심이라고 할까.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공손한, 그러나 감정이 여지없이 배어있는 음성이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파리온 백작이 조용히 몸을 돌렸다. 드러난 아버지의 얼굴에는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하지만 강퍅한 얼굴은 변함 없이 그대로였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굳게 닫힌 입술이 극히 고집스러운 일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하인리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많이 늙으셨군요." "………." "솔직히 전 아버질 만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굳게 다물어져 있던 파리온 백작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내게 많이 서운했나 보구나." 하인리히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예. 섭섭했습니다." 과거였다면 이런 말대답을 감히 하지 못했을 하인리히였다. 하지만 카심 용병단원들과 생사를 건 사투를 거듭하며 하인리히의 여렸던 심성은 많이 변해 있었다. 게다가 마공인 수라사령심법을 익혔기 때문에 성정이 다소 거칠어진 것도 무시 못했다. 하인리히의 대응에 파리온 백작은 다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많이 컸구나. 반항할 줄도 알고……." "………." 파리온 백작은 하인리히가 서 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하인리히는 꼿꼿이 몸을 세웠다. 아버지의 몸에서 항상 풍겨지던 위압감은 예전 그대로였다. 하인리히의 앞에 선 파리온 백작은 아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회한이 어려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27회. 약속이 있어서 오늘은 조금 일찍 올립니다. *************************************************************************** 잠시 후 그는 아들을 덥석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하인리히." 순간 하인리히는 눈물이 핑 돌았다. 살아생전 아버지에게 안겨볼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항상 강철같이 차갑고 냉정할 것이라 생각했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이런 일면이 있었다니……. 눈물이 흘러내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가운데 아버지의 회한 어린 음성이 조용히 메아리쳤다. "항상 네가 마음에 걸렸다. 막상 떠나고 나니 너에게 매정하게 대했던 것이 정말 후회가 되더구나. 애당초 네 잘못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 아버지……." 하인리히는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말없이 눈물을 삼켰다. 아버지가 이처럼 반겨줄 줄은 꿈에도 짐작 못했다. 왜 진작 찾아오지 못했는지 후회하는 하인리히였다. "네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너에게 진정으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더구나." 목이 메어와 입을 열 수도 없었다. 그저 아버지의 품에 파묻혀 소리 없이 흐느낄 수밖에……. 파리온 백작은 조용히 하인리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많이 컸구나. 어릴 땐 몰랐는데 자라고 나니 날 쏙 빼 닮았어. 네 얼굴을 보면 스텔라도 딴소리하지 못할 것이다. 넌 내 아들이야.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내 아들……." 하인리히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파리온 백작부인 스텔라는 지금껏 자신을 무던히도 괴롭혀 왔다. 그녀는 하인리히가 파리온 백작의 핏줄이란 것을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하인리히는 지금껏 그녀에게서 '천한 창녀가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씨를 받아 낳은 놈'이란 소리를 수도 없이 들어왔다. 어쩌면 아버지가 유난히 차갑게 대한 것도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마도 아버진 자신 하나 때문에 단란한 가정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려 하지 않았을 터였다. 파리온 백작은 조심스럽게 아들의 얼굴을 매만졌다.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고생이 정말 많았겠구나. 지내기는 어땠느냐?" 하인리히는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좋은 동료들을 만나 잘 지냈습니다. 아버님." "아무튼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맙다. 이제 힘든 기억일랑 모두 잊어버리거라. 두 번 다시 널 버리지 않겠다. 앞으로 난 가족들이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닙니다. 아버님." 하인리히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제 그는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아버님께서 절 인정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암요. 충분하고 말고요." 파리온 백작의 눈가에 애틋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보아하니 용병이 된 것 같구나. 그렇다면 어느 정도나마 검을 쓸 수 있을 터. 아비가 어디 경비병 자리라도 알아봐 주겠다. 위험한 용병생활보다는 이곳에 정착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아버님. 제겐 훌륭한 동료들이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절 인정해주신 것만으로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제 전 아무런 후회 없이 떠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하인리히는 조용히 결심을 털어놓았다. "아마도 어머님과 형님들은 제가 돌아오는 것을 그리 반기지 않을 것입니다. 괜히 저 때문에 단란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군요. 그냥 떠나겠습니다. 이따금 아버질 뵈러 찾아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 파리온 백작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마음 같아서는 돌아온 아들을 데리고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그의 소망일 뿐이었다. 아내와 자식들이 배다른 자식인 하인리히를 달가워하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어릴 때부터 일부러 하인리히에게 차갑게 대했던 파리온 백작 아니었던가? 생각을 거듭하던 백작이 결국 결정을 내리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굳이 떠나겠다면 말리지 않으마. 대신 자주 찾아와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예. 아버님." "널 보니 네 어미가 생각나는구나?" "어머닐……. 기억하십니까?" "기억하다마다. 정말 착한 여자였는데……. 함께 지낸 지는 고작해야 한달 남짓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내가 힘들었던 시기에 많은 위안을 주었단다. 지금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지……." 추억을 떠올리려는 듯 모호한 표정을 지은 파리온 백작은 곧 안색을 바꿨다. "참. 이것은……." 그는 묵묵히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후 그의 손에 조그마한 문장이 하나 들려나왔다. "받거라. 파리온 가문의 문장이니라. 네가 없을 때 난 이미 널 가문의 일원으로 등재시켜 놓았다." 문장을 받아든 하인리히가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는 공식적으로 파리온 가문의 일원이 된 것이다. 한참동안 문장을 들여다보던 하인리히가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가족들이 많이 반대했을 텐데……." "그래도 네가 내 아들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앞으로 어딜 가더라도 넌 파리온 가문의 일원이란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아버님." 파리온 백작은 다정하게 아들을 잡아끌었다. "이만 들어가자. 4년 만에 돌아온 아들에게 따듯한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싶다. 형들을 모두 불러놓았단다. 분위기가 다소 어색하더라도 조금만 참거라. 알겠느냐?" 하인리히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십 수년간을 참고 참았던 하인리히가 아니었던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님." "녀석." 파리온 백작이 대견하다는 듯 머리를 쓸어 주었다. 내실로 들어가며 두 부자는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관심사는 단연코 가족에 관한 사항이었다. 검술에 특히 뛰어난 재능을 가진 큰 형을 떠올린 하인리히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집안의 대들보로 평가받는 파리온 가문의 맏아들 마르타가 바로 그의 큰형이었다. "그런데 큰형은 지금쯤 근위기사가 되어 있겠군요. 학부에서 매번 수석을 다투셨으니 틀림없겠지요?" 파리온 백작은 착잡한 듯 안색을 굳혔다. "불행히도 네 형은 근위기사단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녀석은 지금 와이번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다." 하인리히는 깜짝 놀랐다. 와이번 기사단이라면 근위기사단과는 상당한 수준차이가 있는 2류 기사단이었다. 군주의 호위를 맡는 근위기사단은 그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가장 정예로 간주된다. 테제로스도 그와 다르지 않아 근위기사단에는 가장 뛰어난 기사들만을 엄선해서 배속시켰다. 그러므로 테제로스의 기사들에겐 근위기사단에 들어가는 것이 필생의 소망일 수밖에 없었다. 불행히도 근위기사가 되지 못한 기사들은 중앙(Central) 기사단이나 수도(Capital) 기사단을 선택했다. 그곳의 기사만 되어도 가문을 빛내고 명예를 떨치는데 모자람이 없었다. 그곳의 심사마저도 떨어진 기사들이 가는 곳이 바로 와이번 기사단이었다. 강력한 비행 몬스터의 이름을 따서 각기 와이번(Wyvern), 그리폰(Griffon), 이글(Eagle), 팰콘(falcon) 기사단이라고 이름지어진 4대 기사단. 명칭이 거창하긴 했지만 세간의 평가는 고작해야 2류에 지나지 않는 기사단들이었다. 그러므로 하인리히가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충분히 근위기사단에 들어갈 것이라 평이 자자했던 큰 형이 고작해야 와이번 기사단의 기사로 복무하고 있다는 말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노, 놀랍군요. 전 지금쯤 큰 형이 근위기사일 줄 알았습니다." 파리온 백작이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녀석. 근위기사단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느냐? 전국에서 내노라하는 기사들이 수도 없이 모여들어도 그 중에서 극소수만 뽑히는 곳이 근위기사단이란다. 마르타는 이미 다섯 번이나 심사에 탈락했다. 이젠 나이 제한에 걸려 수습 기사도 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와이번 기사단에 몸을 담은 것이지." 하인리히의 얼굴에 경악이 번져갔다. "그렇다면 형이 수도 기사단이나 중앙 기사단 심사에도 탈락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단다. 와이번 기사단 심사도 두 번 만에야 겨우 합격할 수 있었지." "다, 다른 형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파리온 백작의 얼굴이 더욱 무거워졌다. "그들은 아직까지 수습과정을 밟고 있다. 아직까지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팔라딘이 되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야. 만약 마르타가 심사 때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릴 수만 있었다면 무리 없이 중앙 기사단의 수습기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헌데 고작해야 열 번 시도해서 한 두 번 가량 성공할 수 있으니……. 심사운이 없었다고 봐야겠지." 하인리히는 잠깐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세 형들이 모두 근위기사가 되어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가장 늦게 시작한 자신도 무리 없이 팔라딘이 되었으니 안 봐도 뻔했다. 그런데 형들이 단 하나도 팔라딘이 되지 못했다니……. 불연 듯 익히고 있는 마나연공법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데이몬이 전수해준 마나연공법의 위력이 정말 대단하군. 연공법을 익힌 지 고작 2년도 지나지 않아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하인리히가 침묵을 지키자 파리온 백작이 가볍게 그의 등을 두드렸다. "녀석. 뭘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형들은 그리 오래지 않아 정규기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큰형이 와이번 기사단에 있으니 잘 이끌어줄 게 아니겠느냐?" 하인리히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예? 예. 아버님." "들어가자. 정말 오랜만에 가족이 모두 모여 저녁을 먹겠구나." 잠시 후 부자는 화려하게 장식된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식탁 위에는 음식이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다. 서너 명의 하인들이 바삐 돌아다니며 음식접시를 나르고 있었다. 파리온 백작이 직접 의자 하나를 빼 주었다. "이리 앉거라. 큰형이 아직 안 온 모양이다. 부득이 조금 기다려야겠구나." 잠자코 자리에 앉으려던 하인리히가 움찔했다. 건너편에서 갑자기 표독한 눈빛이 쏘아졌기 때문이었다. 바로 맞은편 자리에는 파리온 백작부인이 앉아 있었다. 스텔라는 몹시 못마땅하다는 듯 하인리히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형인 페테르와 말라키가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아예 하인리히에게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아버지 체면을 생각해 어머니란 말을 붙이려고 했지만 도무지 목구멍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보나마나 퉁명스러운 대꾸를 받을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보다 못한 파리온 백작이 한 마디 거들었다. "왜 그러시오. 부인. 그래도 4년 만에 보는 하인리히가 아니오? 다정하게 대해주시오." 파리온 백작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파리온 백작이 단단히 당부해 놓은 모양이었지만 얼음장같은 얼굴은 도무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파리온 백작은 난처한 듯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하인리히는 오늘 중으로 떠날 것이오. 동료들과 함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구려." "흥. 용병 나부랭이에게 수행할 임무가 있겠어요?" 한 마디 표독하게 쏘아붙이긴 했지만 백작부인의 얼굴이 약간 풀리는 것 같았다. 떠난다는 말에 기분이 나아진 모양이었다. 예전과 다름없는 차가운 대접에 하인리히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버지를 본 즉시 떠날 것을 하는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순 없었다.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이 마침내 형들의 시선이 하인리히에게 와서 멎었다. 마치 소 닭 보듯 하는 시선이었다. 둘째 형 패테르가 못마땅하다는 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허, 참. 우리 가문에서 용병이 배출될 줄이야." "신경 쓰지 말아요 형. 오늘 중으로 떠난다고 하잖아요." 잔뜩 주눅이 든 하인리히는 그저 테이블만 쳐다보았다. 뜻밖의 상황에 파리온 백작은 어쩔 줄을 몰랐다. 단단히 당부해 놓았는데도 부인과 아들은 아직까지 하인리히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화가 절로 치밀어 올랐다. '정말 너무 하는군.' 하지만 자신이 화를 낸다면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질 것이 확실했기에 파리온 백작으로썬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사이 맏아들인 마르타가 들어왔다. 막 퇴근한 듯 기사단 제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어? 넌 하인리히 아니냐?" 뜻밖에도 마르타는 하인리히에게 아는 체를 했다. 하인리히는 공손히 인사를 했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형님?" 눈을 둥그렇게 뜨던 마르타는 아버지의 눈총을 받자 조용히 자리에 가서 앉았다. 기사가 된 뒤 제법 소양을 쌓은 모양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모이자 파리온 백작은 상석에 가서 앉았다. "오늘은 모든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는구려. 하인리히가 무려 4년 만에 집을 찾았다오. 그러니 모두들 다정하게 대해주기 바라오. 알겠소?" "………." 모두들 침묵을 지켰다. 얼굴에 불만이 가득해 보였지만 하인리히가 오늘 중으로 떠난다고 하니 간신히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28회. 하인리히 역시 불편한 시간이 지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마르타가 눈살을 찌푸리며 하인리히를 쳐다보았다. "그 먼지투성이 외투는 벗는 게 어떠냐? 용병들 사이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예의를 지켜야지." "예." 하인리히는 조용히 일어났다. 외투를 벗자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다가와서 받아들었다. 하인리히가 다시 자리에 앉으려는데 별안간 마르타의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억! 저 제복은?" 마르타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그는 지금 하인리히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하인리히는 지금 듀크 나이츠의 정복을 착용하고 있는 상태였다. 몸에 꼭 맞는 은회색 제복에다 가슴팍에 수놓인 문장이 어우러져 하인리히의 분위기를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바꿔놓고 있었다. "그, 그건 크로센 제국의 듀크 나이츠 제복이 아니냐? 네, 네가 어떻게……." 물론 마르타가 듀크 나이츠의 제복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정규 기사가 타국 기사의 복장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 법이다. 수수하기로 악명 높은 듀크 나이츠의 제복. 철저히 실용적인 면만을 추구해 멋없기로 소문이 나 있지만 이 제복을 입은 기사는 누구도 무시하지 못했다. 철저히 실력만을 추구하는 수련광들의 집단인 듀크 나이츠는 단연 1류 기사단이었다. 3대 강대국의 근위기사단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같은 기사라도 크로센 제국의 기사는 달랐다. 실력 면에서 더욱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니 마르타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집을 나갔다가 갑자기 나타난 하인리히가 소문이 자자한 듀크 나이츠의 정복을 입고 있다니……. 참지 못한 마르타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너……. 그 제복 어디서 났느냐?" "지급 받은 것입니다만 뭐 잘못된 것이 있습니까?" 태연하게 반문하는 하인리히를 보며 마르타는 말을 잊었다. 듀크 나이츠라면 한 마디로 그가 소속된 와이번 기사단과는 격이 틀린 기사단이었다. 감히 수준 자체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경악한 나머지 마르타는 띄엄띄엄 말을 이어나갔다. "그, 그러니까……. 네 말인 즉슨 네가 듀, 듀크 나이츠가 되었다는 뜻이냐?" 하인리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혹시 수, 수련 기사로 들어갔느냐?" "아닙니다. 정규 기사입니다." 말을 마친 하인리히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문장을 풀어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하인리히의 이름과 함께 듀크 나이츠의 정규 기사임을 증명하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문장을 받아든 마르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 어떻게 해서 듀, 듀크 나이츠에 들어갈 수 있었느냐?" 냉정을 되찾은 하인리히의 대답은 물 흐르듯 머뭇거림이 없었다. "정식 절차를 밟아 입단했습니다. 소드 마스터이신 페이디언 부대장님과 대련을 해서 실력을 검증 받았지요. 듀크 나이츠의 단장께서 직접 심사에 참관해서 합격 판정을 내리셨습니다." "나, 난 믿을 수 없다. 네, 네가 어떻게……." 마르타의 몸이 마치 학질이라도 걸린 듯 연신 비틀거렸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하인리히의 실력은 자신을 능가할 것이 틀림없었다. 듀크 나이츠의 입단심사는 철저히 실력으로 행해진다는 사실은 이미 대륙 전역에 익히 알려진 상태였다. 다시 말해 듀크 나이츠에는 연줄이나 인맥으로 입단 자체가 불가능했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던 파리온 백작이 떨리는 음성으로 하인리히를 불렀다. "하인리히." "네. 아버님." "듀크 나이츠가 된 것이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파리온 백작은 아직까지 수긍하지 못하겠는지 거듭 질문을 퍼부었다. "내가 알기로 듀크 나이츠는 규율이 몹시 엄격하며 여간해서는 휴가를 받지 못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해서 이 먼 테제로스로 올 수 있었느냐?" 하인리히는 아버지의 눈을 쳐다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단장님과 동료 30명이 지금 영빈관에 머물고 있습니다. 파병요청을 위한 사절단 임무를 맡아 정식으로 테제로스에 파견되신 것이지요. 전 그 분의 수행원 신분으로 왔습니다. 다행히 단장님께서 허락해 주셔서 집에 잠시 들를 수 있었습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파리온 백작이 하인리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렇다면 팔라딘이 되었겠구나." 하인리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비에게 너의 오러 블레이드를 한 번 보여주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하인리히는 앞에 놓인 나이프 한 쌍을 집어들었다. 마나를 집중시키자 오른손에 든 나이프가 순식간에 시퍼렇게 물들었다. 하인리히에겐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는 작업이었다. 그는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린 나이프를 휘둘러 나머지 나이프를 자르기 시작했다. 썽컹. 썽컹. 금속으로 된 나이프가 가볍게 잘려나갔다. 마치 무 썰어지듯 맥없이 동강나는 모습에 마르타의 얼굴이 시퍼렇게 물들어갔다. 마르타는 아직까지 오러 블레이드를 자유자재로 운용하지 못했다. 열 번 시도해도 고작해야 두세 번 정도 끌어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기껏 끌어올리더라도 하인리히처럼 저렇게 단시간에 그리고 간단하게 전개하기란 불가능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이프 한 자루를 여러 토막으로 썰어버린 하인리히는 조용히 오러 블레이드를 거둬들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파리온 백작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장하다. 하인리히." "………." "네가 이처럼 훌륭하게 성장해 주다니……. 정말 고맙다." 파리온 백작은 울고 있었다. 집을 나간 채 소식조차 없던 막내아들 하인리히가 이름도 드높은 듀크 나이츠에, 그것도 당당하게 실력으로 입단했다는 사실에 목이 메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파리온 백작은 자랑스런 눈빛으로 아내를 쳐다보았다. "보시오. 스텔라. 이래도 하인리히가 내 아들이 아니라 말할 것이오?" "………." 파리온 백작부인 역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겐 지금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금을 들여가며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지만 마르타는 고작해야 2류에 속하는 와이번 기사단의 말단 기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가족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은, 단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은 하인리히는 당당히 1류로 평가받는 듀크 나이츠의 기사가 되어 돌아왔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하인리히에게 마르타에 준하는 뒷바라지를 했더라면……. 아마도 테제로스 근위기사단에 들어가서 가문을 빛냈을 것이라 생각하는 백작부인이었다. 하지만 하인리히가 타국의 기사가 된 이상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파리온 백작은 그윽한 눈빛으로 하인리히를 쓸어보았다. "네가 테제로스가 아니라 크로센의 기사가 된 것이 조금 섭섭하구나. 하지만 난 상관하지 않겠다. 난 네가 이토록 훌륭하게 커준 것만으로도 여한이 없다. 아까 말한 대로 네가 어디에 있든지 파리온 가문의 일원이란 사실을 잊지 말도록 해라. 알겠느냐?" "네 아버님. 각골 명심하겠습니다." 하인리히는 형들의 경의 어린 시선을 받으며 가슴을 쭉 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에게 인정받은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런 승리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동료들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마 하인리히는 오늘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부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한 마르타의 시선. 과거 구박했던 것을 후회하는 듯한 파리온 백작부인의 표정. 경악이 극에 달한 두 형 페테르와 말라키의 얼굴. 지금 이 순간 하인리히는 통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허파에 바람 빠진 녀석처럼 왜 그렇게 웃고만 있어?" 제럴드의 질문에도 하인리히는 슬슬 웃고만 있었다. 마치 원하는 것을 얻은 사람처럼 웃음기가 마냥 입에 걸려 있는 것이다. 제럴드는 오래지 않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제 일이 잘 되었나 보구나. 축하해." "고마워 제럴드. 다 네 덕이야." 아침 일찍 일어난 둘은 지금 열심히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가족과의 식사를 마친 하인리히는 즉시 숙소로 돌아왔고 한 차례 검을 휘두른 다음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테제로스 국왕을 알현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난 상태였다. 일국의 군주를 만나러 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들은 신경 써서 몸을 치장했다. 그들은 지금 지급 받은 듀크 나이츠의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하고 있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기사단인 만큼 듀크 나이츠에 대한 대우는 훌륭했다. 훈련량이 여타의 기사단보다 훨씬 많은 대신 보급 역시 풍족했던 것이다. 따라서 제럴드와 하인리히가 지급 받은 갑옷도 상당한 고급품이었다. 질 좋은 와이번 본으로 코팅이 되어있었고 표면의 경면처리 역시 나무랄 데가 없었다. 특히 눈에 뜨는 것은 갑옷에 새겨진 대마법 방어진이 상당한 고급이라는 점이다. 6서클급 공격마법까지 막을 수 있으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통상적인 대마법 갑옷이 4서클, 제한적으로 5서클까지 막도록 설계된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준의 대마법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멋은 없었다. 미적 감각이 결여된 점(듀크 나이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이 문제였지만 타국의 근위기사단이 착용하는 플레이트 메일보다 질적인 면으로 훨씬 뛰어났다. 어지간한 왕국의 근위기사들이 착용하는 갑옷의 마법방호력은 고작해야 5서클이 한계였다. 하지만 둘은 별다른 감흥 없이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이미 그들은 인크레시아 속에 보관되어 있던 최고 수준의 갑옷을 착용해 본 경험이 있었다. 다소 구식이었지만 화려함과 품위 면에서 입고 있는 갑옷은 감히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것들은 대부분 7서클급의 마법방호력까지 갖춘 명품들이었다. 중앙광장의 접전에서 부서져서 못쓰게 되어버린 것이 그저 아까울 따름이었다. 가슴 보호대를 바짝 조이던 제럴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철저히 실용적인 면만 추구해서 그런지 멋이 없긴 하군." "하지만 활동하기가 편한걸? 저번에 부서진 갑옷은 다소 불편했는데 말이야." "그건 안 맞는 것을 억지로 맞춰 입어서 그런 거야. 플레이트 메일은 원래 맞춤식 갑옷이지." 짧게 내뱉은 제럴드는 투구를 눌러썼다. 치수를 재어가서 그런지 머리에 딱 맞았다. "그나저나 놀랍군. 입단식을 마친 뒤에 몸의 치수를 재어갔는데 단 하루만에 갑옷이 완성되다니……." 둘은 서로의 차림새를 살펴 주었다. 유난히 안색이 밝아진 하인리히가 농담을 걸었다. "산뜻하게 차려입으니 사람이 달라 보이는데? 평소의 네가 아닌 것 같아." "까불래?" 장난으로 투닥거리고 있는데 문 밖에서 페이디언의 음성이 들렸다. 둘은 페이디언의 분대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그가 직접 둘을 챙기고 있었다. "준비가 다 끝났느냐?" "예." 채비를 마친 둘은 문 쪽으로 향했다. 잠시 후 낯익은 페이디언의 얼굴이 보였다. "걱정했는데 무척 잘 차려입었구나." 둘의 차림새를 훑어본 페이디언이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가자. 지금쯤 모두 모여있을 것이다." "네. 분대장님." 갑옷과 투구를 갖춘 30명의 듀크 나이츠들은 크로비츠의 인솔 아래 영빈관 뜰에 서 있었다. 이제부터 그들은 테제로스 국왕을 알현하러 가는 것이다. 마갑을 착용한 서른 필의 말이 화려하게 치장한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승마(乘馬)" 크로비츠의 명령이 떨어지자 듀크 나이츠들은 일제히 말에 올랐다. 제럴드와 하인리히도 배정된 말을 골라 올라탔다. 분대장인 페이디언이 세심하게 신경 써 주었으므로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출발." 명령이 떨어지자 듀크 나이츠들은 말에 탄 채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하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 궁정까지 행진해 가는 것이다. 엄선된 테제로스의 수도기사단원들이 바깥쪽에 배치되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약자(弱者)들이 강자(强者)를 호위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곳으로 파견된 듀크 나이츠들은 반수 이상이 소드 마스터로 구성되어 있었다. 팔라딘이라 해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이들이 태반이었다. 전반적으로 크로센의 팔라딘들이 타국보다 훨씬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을 감안하면 수도기사단원보다 한 수위라 봐야 했다. 테제로스로 파견된 듀크 나이츠들은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궁정으로 행군을 시작했다. 대로에 늘어선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그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29회. "저기 온다." 투구와 갑옷을 착용한 기사 하나가 다가오는 대열을 보고 바짝 긴장했다. 가슴보호대에는 와이번 기사단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바로 하인리히의 큰 형인 마르타였다. 테제로스 궁정에서는 듀크 나이츠의 호위에 특히 신경 쓰고 있었다. 만에 하나 듀크 나이츠 단원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경우 잘못하면 외교 문제로 비화될 우려도 있었다. 때문에 한 개 기사단이 시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와이번 기사단이 선택되었다. 그들은 불순분자가 수상한 행동을 할 수 없도록 시민들 사이에 섞여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마르타도 거기에 끼인 것이다.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쥔 채 대열을 주시하던 마르타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내뱉었다. "결코 아닐 거야. 하인리히 그 겁쟁이 녀석이 어떻게 듀크 나이츠의 정식 기사가 될 수 있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지." 뒤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그의 말을 받았다. "맞아요. 형. 어제 보여준 오러 블레이드는 뭔가 수작을 쓴 게 틀림없을 거예요." 동생인 페테르의 음성이었다. 그 옆에는 말라키가 눈을 크게 뜬 채 대열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하인리히가 확실히 듀크 나이츠인지를 확인하러 나온 것이다. 문장을 보긴 했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마르타가 호위를 맡은 것을 빌미로 소속된 기사단에 출근도 하지 않고 거리로 나온 상태였다. "하인리히 놈은 틀림없이 거짓말을 했을 터예요. 기사 학부도 다니지 못한 놈이 도대체 무슨 수로……." "문장은 위조한 것이 분명할 거예요." 마르타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어 동생들을 진정시켰다. "조금 기다리면 모든 것이 확실해 질 것이다. 저 대열에 하인리히가 없다면 너희들은 즉시 아버지에게 가서 이 사실을 고해라." "그래야죠. 아버지는 놈에게 감쪽같이 속은 거 분명해요." 두런대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듀크 나이츠의 대열이 가까이 다가왔다. 마르타를 위시한 두 동생들은 바짝 긴장하며 듀크 나이츠의 면면을 살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경악성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저, 정말이었어." 마르타는 맥빠진 듯한 음성을 토해냈다. 대열의 중간 부분에서 하인리히의 얼굴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투구 가리개를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타는 동생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갑옷과 투구를 갖춰 입은 하인리히가 듀크 나이츠들과 함께 당당히 행진하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그 모습을 본 페테르와 말라키도 넋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하인리히의 시선이 우연히 그리로 향했다. 형들을 본 하인리히는 빙긋이 웃으며 목례를 했다. 얼굴에 자부심을 가득 떠올린 채. 하지만 그 때문에 문제가 일어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듀크 나이츠 하나의 시선이 바깥쪽으로 향하자 그 옆에 서 있던 수도기사단의 분대장 하나가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공교롭게도 마르타를 볼 수 있었다. 분대장의 눈에 비친 것은 외곽 경계를 맡은 와이번 기사단원이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보기 흉한 모습이었다. 신분이 낮은 평기사의 문장을 달고 있었기에 분대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저런 머저리 같은 놈이 있나? 감히 듀크 나이츠들 앞에서 저런 꼴을 보이다니…….' 분대장은 이 일을 결코 간과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와이번 기사단장이 그의 동기였기 때문에 임무수행을 게을리 한 평기사 하나 혼내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테제로스 국왕에게 안내된 크로비츠는 공손히 예를 올렸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테제로스 국왕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았다. "어서 오시오. 어제는 정말 미안했소. 갑자기 몸이 아파서……." 사소한 자존심으로 말미암아 회담을 연기한 것 때문에 테제로스 국왕은 밤새도록 불안해 했다. 듀크 나이츠라면 테제로스 근위기사단과 맞먹는 강력한 무력집단이다. 비록 크로센 기사단보다는 한 수 아래란 평가를 받기는 해도 듀크 나이츠의 주인은 대륙 제일의 권력을 보유한 페르슈타인 공작이다. 그런 면에서 크로센 기사단장보다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데 사소한 자존심 때문에 그만 일을 그르쳐버린 것이다. '괜한 일을 벌인 게 아닐까?' 어제 일 때문에 테제로스 국왕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만에 하나 이 일로 페르슈타인 공작의 진노를 사게 된다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테제로스 국왕은 유난히 살갑게 크로비츠를 맞았다. "어서 들어갑시다. 회담 준비를 모두 마쳐놓았소이다." 크로비츠는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안색이 무척 좋지 않으시군요. 과로하시는 것은 건강에 해가 되옵니다만……." 테제로스 국왕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잠을 이루지 못해 얼굴이 초췌한 것이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괜찮소. 듀크 나이츠의 단장이 직접 찾아왔는데 몸이 불편한 것이 대수겠소?"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크로비츠는 국왕의 뒤를 따라 회담장으로 향했다. "그래 트루베니아를 정벌할 것이란 소식을 들었소. 페르슈타인 공작전하께서 총사령관을 맡으셨다면서요?" "그렇사옵니다. 드래곤들의 야욕이 만천하에 알려진 이상 아르카디아의 힘을 한데 모아야만 인간의 멸망을 막을 수 있다고 하셨사옵니다." 테제로스 국왕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우리 테제로스도 당연히 병력을 파병할 생각이오.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소." "말씀하십시오." "병력을 보내주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닌데 테르비아가 조금 걸리는구려. 경도 알다시피 로시무스 1세는 야심이 많은 인물이오. 그리고 테르비아는 우리 테제로스와 가까이 위치해 있소. 때문에 로시무스 1세가 나쁜 마음을 먹지 않도록 병력을 조금 남겨두어야 할 것 같소이다." 크로비츠는 빙긋 웃었다. 그 정도는 이미 예견하고 있는 문제였다.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전하. 페르슈타인 공작전하께도 그 문제를 감안하시고 있으시옵니다.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크로센 기사단장을 테르비아로 보내신 것입니다. " "오. 그렇소?" "어제 마법통신을 통해 낭보가 전해졌습니다. 윌리엄스 후작이 테르비아에서 무려 30만이나 되는 대군을 지원 받았사옵니다. 테르비아에는 이제 타국을 침공할 만한 여력이 없사옵니다." 테제로스 국왕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그것 정말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제국에서는 정병 15만을 남겨놓을 생각이옵니다. 정벌을 나선 틈을 타서 영토확장을 꾀하는 군주는 반드시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을 수 있구려. 좋소.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깡그리 지원하겠소." 테제로스 국왕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센 제국에서 그 정도 대책을 세워놓았다면 충분히 믿을 만 했다. 만약 다른 왕국이 15만이나 되는 병력을 남겨둔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 대상이 크로센 제국이라면 달랐다. 아르카디아에 존재하는 모든 왕국들의 종주국이며 또한 구국의 영웅 크로센 대제의 후손이 황제로 있지 않았던가? 테제로스 국왕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병력 지원을 약속했다. "본국의 정예병력은 도합 22만이오. 짐은 그 중에서 20만을 지원해 줄 수 있소." 크로비츠의 얼굴에 만족감이 번져갔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예상한 파병규모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면 목표량은 달성했다고 볼 수 있었지만 얻어낼 것은 더 있었다. "전하의 후의에 감히 몸 둘 곳을 모르겠나이다. 하지만 전하. 그 병력을 1년 동안 유지할 수 있는 보급물자도 또한 필요하옵니다." 테제로스 국왕이 미간을 지긋이 모았다. "그건 조금 어려울 것 같구려. 요즘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이 그리 좋지 않아서……." "하지만 이것은 아르카디아의 운명이 걸린 일이옵니다." "후!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좋소.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련해 보겠소." 국왕이 승낙하자 크로비츠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폐하와 페르슈타인 공작전하께서는 전하의 도움을 영원히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테제로스로써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오. 그건 그렇고……." 고개를 돌린 테제로스 국왕은 단상 아래에 도열한 듀크 나이츠를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저들이 말로만 듣던 듀크 나이츠들이구려. 듣자하니 훈련량이 엄청나다고 하던데. 참. 페르슈타인 공작전하의 아드님도 듀크 나이츠에 소속되어 있다면서요?" "분대장인 크란시아를 말씀하시는군요. 사실이옵니다. 그러나 듀크 나이츠에서는 모든 것을 실력으로 결정하옵니다. 실력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공작전하의 아드님이라도 듀크 나이츠가 될 수 없었을 것이옵니다." "놀랍구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던 테제로스 국왕의 눈에서 갑자기 이채가 빛났다. 그의 시선은 듀크 나이츠가 도열한 곳의 오른쪽에 쏠려 있었는데 그곳에는 유달리 체격이 왜소한 기사 두 명이 서 있었다. 다른 기사들의 체격이 워낙 우람했기 때문에 눈에 확 띈 모양이었다. "저들도 듀크 나이츠요?" "그렇사옵니다. 전하." 테제로스 국왕의 시선은 구부정한 자세를 한 기사 하나에게 못 박혀 있었다. 모든 듀크 나이츠들이 검집을 왼쪽에 차고 있었지만 유일하게 그만이 반대쪽에 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왕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빛이 번져갔다. "설마 왼손잡이는 아니겠지요?" "왼손잡이가 맞사옵니다. 전하의 통찰력이 정말 놀라우시군요." 크로비츠의 대답에 테제로스 국왕은 의아한 듯 눈을 치켜 떴다. "왼손잡이 기사라니 놀랍구려. 지금껏 기사단에 왼손을 쓰는 기사가 있다는 사실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크로비츠는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듀크 나이츠는 모든 것을 실력으로 증명하옵니다. 실력만 있다면 오른손이든 왼손이든 가리지 않사옵니다." "하지만 왼손으로 쓰는 검술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지 않겠소?" 크로비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테제로스 국왕은 지극히 통상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주었다. 그 때문에 제럴드의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제럴드와 검을 섞어본 크로비츠는 그의 검술이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왼손잡이라고 얕보고 덤비는 기사가 있다면 어떤 꼴을 당할지 익히 짐작이 갔다. "전하. 그는 저희 듀크 나이츠의 숨겨진 실력자 중 하나입니다. 아직까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진 못했지만 검술실력만은 마스터에 버금갑니다. 이미 그의 손에 듀크 나이츠 소속의 마스터 한 명이 패배한 상태입니다." "그, 그것이 사실이오?" 테제로스 국왕은 경악했다. 왼손검술로써 마스터를 꺾을 수 있다는 말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듀크 나이츠의 단장이 직접 인정하고 나오니 의심할 수도 없었다. "그렇사옵니다. 그의 검술실력은 저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한 번 보고싶구려." 테제로스 국왕은 맹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마스터를 꺾었다는 왼손 검술이 도대체 어떤 검술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인 것이다. 그는 검술을 극히 중시하는 국왕이었다. 오래 전부터 검술실력이 뛰어난 기사를 우대하는 정책을 펼쳐왔고 또한 뛰어난 실력을 가진 기사를 불러다 검술 대련을 펼치게 했다. 그런 국왕의 취미가 바야흐로 발동되려 하는 것이다. 그 기미를 눈치챈 크로비츠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제럴드에게 한 번 실력발휘를 하도록 해야 할 것 같군.' 크로비츠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제럴드의 실력이라면 그 누구와 싸우더라도 지지 않을 것을 말이다. 그 대상이 소드 마스터라 하더라도 처음 싸워보는 한 제럴드의 파격적인 왼손검법을 감당하기 힘들 터였다. 물론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지 않는 친선대결에 한정된 일이겠지만 말이다. 만약 제럴드가 승리한다면 그가 소속된 듀크 나이츠의 위상이 높아질 터였으므로 크로비츠는 슬며시 미끼를 던졌다. "그의 검술실력이 보고 싶으시옵니까?" 우물쭈물 하던 테제로스 국왕이 속내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솔직히 그렇소. 궁금해 미치겠구려." "그렇다면 친선 대결을 벌여보는 것은 어떻사옵니까? 전하께서 상대를 골라주신다면 저 기사로 하여금 실력을 입증해 보이도록 조처하겠사옵니다." "음." 테제로스 국왕은 침묵을 지켰다.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만에 하나 패배한다면 테제로스 기사단의 위상에 금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30회. 하지만 그는 치밀어 오르는 호기심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다. 마스터를 꺾었다는 왼손 검법을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인 것이다. 결국 결정을 내린 국왕은 정색을 하며 크로비츠를 쳐다보았다. "마스터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쪽에서 마스터 급을 내보내도 되겠구려?" 크로비츠는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사옵니다." "좋소. 그럼 친선 대결을 한 번 벌여봅시다." "알겠사옵니다." 크로비츠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이미 그는 제럴드의 승리를 확신한 상태였다. '체면 때문에라도 널리 알려진 마스터를 내세우진 못할 터. 제럴드는 이미 알버트를 꺾은 상태다. 따라서 승리는 우리 것이다.' 크로비츠는 이번 대결의 승리로 말미암아 한껏 고조될 듀크 나이츠의 위상을 생각하며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난 테제로스 근위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라인베커 가문의 미르트라고 하오. 좋은 승부를 바라겠소." "제럴드라 불러주십시오. 성은……… 없습니다." 근위기사 미르트는 제럴드의 대답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듀크 나이츠의 선발기준이 철저히 실력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그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상대가 심지어 노예 출신이나 외국인이라 해도 놀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테제로스의 평민들도 반 이상은 성이 없었다. 미르트는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목검을 집어 들었다. 이미 그는 단단히 각오를 다진 상태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겨야 한다. 국왕전하께서 친히 관전하시는 앞에서 패한다면 앞으로 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근위기사단에서도 촉망받는 소드 마스터 중 하나였다. 마흔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마스터에 올라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력 하나는 진짜였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지나온 행적을 더듬어보았다. 부유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가문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검에 매진한 지 어언 25년이 흘렀다. 검에 대한 자질과 뼈를 깎는 노력도 필요했지만 무엇보다도 가문의 후원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오르기란 불가능했으리라……. 미르트가 지금의 위치에 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족들의 헌신적인 희생이 뒤따랐다. 미르트를 근위기사단에 집어넣기 위해 그의 아버지는 재산을 절반 이상 쏟아 부었다. 부유하기로 소문났던 집안이 눈에 띄게 기울어질 정도로 막대한 재산을 말이다. 그리하여 근위기사단에 들어가는데 성공하고 꿈에도 그리던 테제로스 고유의 마나연공법을 익힐 수 있게 되자 그 다음의 몫은 미르트의 것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련하여 두각을 나타내어야만 자신을 위해 바친 가족의 희생에 보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미르트의 옆에는 같은 생각을 한 많은 근위기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미르트의 손을 들어주었다. 소드 마스터의 길은 자질과 노력만으로는 얻을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 정도로 힘들다는 뜻이다. 하지만 미르트는 우연히 깨달음을 얻어 마스터의 길에 접어들 수 있었다. 피나는 노력도 있었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 다음에 펼쳐진 길은 탄탄대로였다. 미르트가 테제로스에 고작 스물 아홉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마스터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자 막대한 부와 권세가 라인베커 가문으로 집중되었다. 지금껏 거들떠보지도 않던 명문가에서 앞을 다투어 라인베커 가문과 친교를 맺으려 했고 무수한 공직자들이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자진해서 편의를 봐 주었다. 라인베커 가문은 미르트가 소드 마스터가 된 지 불과 몇 년 만에 예전의 부(副)를 되찾을 수 있었다. 미르트에게 투자했던 금액이 두 배 이상 불어나서 되돌아왔던 것이다. 미르트는 이제 의심할 나위 없는 라인베커 가문의 대들보가 되어있었다. 그런 그가 지금 일생일대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기이한 왼손검술을 사용한다는 눈앞의 듀크 나이츠를 꺾어야만 가문의 번영이 계속 지속될 수 있었기에 미르트는 묵묵히 마음을 다잡았다. '결코 상대를 경시해서는 안 된다. 이번 기회에 반드시 이겨서 국왕 전하의 마음에 들어야 하니까 말이다.' 이번 대결은 미르트에게 있어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패할 경우 가문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물론 국왕의 눈밖에 날 터였다. 그럴 경우 승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반대로 이길 경우에는 미르트에게 확실한 대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테제로스 근위기사단의 위상을 높인 대가로 승진이라는 풍성한 열매가 주어질 것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분대장으로 임명될 지도 몰랐다. 때문에 미르트는 조용히 결투 시작을 알리는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감하군." 제럴드는 미르트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난데없이 벌어진 대결을 마다할 제럴드가 아니었다. 소드 마스터와의 대결은 평소에도 바랬던 일이었기에 제럴드는 기쁘게 대결에 임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제럴드에게 크로비츠가 조금 어이없는 당부를 했다. "소신껏 싸우거라. 하지만 상대를 너무 어이없이 패배시키는 말거라. 가장 좋은 것은 우세를 점한 상황에서 무승부로 승부를 끝맺는 것이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거든 쓰러뜨려도 무방하다." 그 말을 들은 듀크 나이츠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소드 마스터와 대결을 벌이려는 팔라딘에게 사정을 봐 주며 싸우라는 말을 하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크로비츠는 그 정도로 제럴드의 검술실력을 믿고 있었다. "물론 나도 압도적으로 이기길 바란다. 하지만 병력을 청하러 온 상황에서 테제로스의 위신을 추락시킬 경우 모양새가 그리 좋지 않다. 넌 그냥 듀크 나이츠의 수준을 저들에게 보여준다는 심정으로 대결에 임해라. 알겠느냐?" 크로비츠의 당부를 떠올린 제럴드는 묵묵히 목검 손잡이를 쥐었다. 일단 검을 쥐고 나니 투지가 물밀 듯 치밀어 올랐다. 테제로스 국왕과 크로비츠는 상석에서 한창 관전준비를 하고 있었다. 테제로스 국왕이 신호를 하면 대결이 시작되는 것이다. 대결장에는 많은 기사들이 운집해 있었다. 사절단으로 온 듀크 나이츠는 물론이었고 근위기사들과 호위를 맡은 일부 수도기사단원들도 관전에 참가할 수 있는 행운을 얻은 상태였다. 긴장된 신색으로 대결장을 쳐다보던 테제로스 국왕이 마침내 신호를 했다. "대결을 시작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나팔소리가 대결장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마침내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미르트가 자세를 잡으며 조심스럽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보통 이런 대결에서는 고수가 하수에게 선공을 양보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미르트에겐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일단 타국 기사와 벌이는 대결인 데다가 극히 생소하고 위력적인 왼손 검술을 보유한 상대라고 하니 꺼림칙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정적으로 제럴드가 바라던 일이었다. '잘 되었군. 굳이 형식적인 공격을 할 필요가 없으니…….' 제럴드는 방어 후 역습을 노린다는 좌수검법의 도리에 따라 차분히 대응자세를 취했다. 전신의 근육이 팽팽히 당겨졌고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그런 제럴드를 향해 미르트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조심하시오. 공격하겠소." 제럴드의 체격은 상당히 왜소한 편이었다. 통상적으로 기사들이 잘 단련된 탄탄한 체격을 보유한 것을 감안하면 도저히 기사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냘픈 것이 사실이었다. 거의 머리 하나는 커 보이는 미르트가 힘으로 우직하게 밀어붙일 경우 도저히 버티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르카디아의 기사들은 통상적으로 먼저 근육을 단련시킨 뒤 일정 수준에 오르고 나서야 내가기공, 즉 마나연공법을 연마한다. 그 전까지는 열심히 근육을 단련해 힘을 키우는 것이다. 하지만 제럴드가 검술을 익힌 과정은 그와 많이 달랐다. 철저히 중원의 명문 문파에서 제자를 키워내는 방법, 즉 근육을 단련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내공을 이용한 상승검법을 익히기 때문에 체격이 다소 왜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될 것은 전혀 없었다. 기(氣), 즉 내공을 능숙히 사용한다면 충분히 근육의 힘을 대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럴드는 데이몬에게 직접 개정대법을 시술 받았기에 마나의 운용능력이 통상적인 수준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제럴드는 미르트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냈다. 푸캉. 체중이 거의 두 배나 차이나는 만큼 감당하기 힘들어 보이는 공격이었지만 제럴드는 힘을 흘려보낼 생각도 하지도 않고 정면으로 공격을 막았다. 첫 번째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미르트는 적이 놀랐다. 자신이 가진 힘이라는 유리함을 최대한 활용한 공격이었지만 상대는 너무도 가볍게 그것을 막아냈다. 자세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저 왜소한 체구에서 이 정도 힘을 낼 수 있다니…….' 놀라움을 지운 미르트는 동요 없이 공격을 재개했다. 겉으로는 한없이 약해 보이는 상대였지만 미르트는 상대를 결코 얕봐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상대는 일단 듀크 나이츠가 된 것만으로도 실력이 증명된 수준 높은 기사였다. "이야압." 맹렬한 고함소리와 함께 미르트의 공격이 퍼부어졌다. 어릴 때부터 수없이 휘둘러왔던 만큼 그의 검로는 흠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매서웠다. 강력한 힘이 담긴 것은 기본이었다. 하지만 제럴드는 흔들림 없이 미르트의 맹공을 받아넘겼다. 소드 마스터의 공격이라 더 없이 위력적이었지만 이미 제럴드는 듀크 나이츠의 단장과도 겨뤄본 경험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랜드 마스터 급인 데스 나이트들과 헤아릴 수 없는 대결을 펼쳐본 탓에 제럴드의 몸놀림과 반사신경은 소드 마스터를 상회할 정도였다. 제럴드는 묵묵히 공격을 받아 넘겨가며 반격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결을 관전하던 크로비츠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흠. 알버트보다는 한 수위라 볼 수 있는 자로군. 이름이 미르트라고 했던가? 돌아가는 즉시 정보부에 알려야겠군.' 정보부에서 파악하지 못한 숨은 실력자의 존재를 알아냈다는 사실은 생각지 못한 소득이었다. 자국에서 보유한 뛰어난 소드 마스터에 대한 정보는 어떤 왕국을 막론하고 최고의 기밀사항에 속한다. 반대로 정보부에서는 어떤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타국 소드 마스터의 실력이나 경지를 알아내려 노력했다. 만에 하나 전쟁이 일어날 경우 숨겨진 소드 마스터의 위력은 경시하지 못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비록 듀크 나이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제럴드의 존재를 드러내긴 했지만 대신 소드 마스터 하나를 파악할 수 있었기에 크로비츠는 그리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냉철하게 테제로스 근위기사의 검술 실력을 가늠해 보고 있었다. '여간해서는 빈틈을 보이지 않겠군.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겠어. 제럴드의 방어기술은 나도 인정하는 바이니…….' 크로비츠는 제럴드가 쉽사리 당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직접 싸워본 경험에 의한 확신이었다. 최고 수준의 소드 마스터에 속하는 크로비츠가 한시간 가까이 싸우고 나서야 겨우 파훼법을 찾아낼 수 있었을 정도니 더 이상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대결을 벌이고 있는 근위기사의 실력이 제법 쓸만하긴 했지만 자신에 비해서는 두세 단계 아래라 볼 수 있었다. 크로비츠는 힐끔 고개를 돌려 테제로스 국왕을 쳐다보았다. 열심히 대결을 관전하는 크로비츠 국왕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처음 제럴드가 방어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 국왕의 얼굴에는 희열감이 가득 떠올랐다. 자기 편 기사가 승기를 잡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오래지 않아 바뀌었다. 연신 맹공을 퍼붓고는 있지만 테제로스 기사에게는 실속이 전혀 없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연신 공격을 퍼붓고도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이다. 반면 상대하는 듀크 나이츠는 아주 효율적으로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적절한 동작에 최소한의 힘을 들여 공격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저런 자가 팔라딘이라니…….' 검술대련을 즐겨 봐온 탓에 테제로스 국왕은 듀크 나이츠의 몸놀림이 통상적인 수준을 상회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상대하는 소드 마스터에 견주어 추호도 뒤지지 않았다. 반대로 자기 편 기사는 약간이나마 지친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제발 이겨야 할텐데…….' 테제로스 국왕은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긴장으로 인해 손에서 식은땀이 맺혀 있었지만 국왕은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31회.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나?' 미르트는 화가 모락모락 치밀어 올랐다. 상대가 지금껏 단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전혀 없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상대가 전혀 공격하지 않고 방어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공격에 제대로 탄력이 실릴 턱이 없었다. 상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일부러 몇 번이나 빈틈을 드러냈지만 상대는 생각보다 노련했다. 거기에 전혀 말려들지 않으니 미르트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정말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방어만 하다 끝내려는 속셈인가?' 정신 없이 공격을 퍼붓는 것처럼 보였지만 미르트는 정작 방어에 세심하게 신경 쓰고 있었다. 국왕 앞에서 패할 순 없다는 생각에 공격보다는 방어에 초점을 뒀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의 방어가 워낙 탄탄해서 기껏 가한 공격이 오히려 힘만 빼는 꼴이 되고 말았으니……. 어떻게든 상대를 쓰러뜨려야겠다는 생각에 미르트는 숨을 고른 뒤 또다시 공격을 준비했다. 목검을 손에 든 것이 지금 이 순간 그토록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적어도 상대는 순수한 검술실력 면에서는 추호도 자신에게 뒤지지 않았다. '오러 블레이드만 끌어올릴 수 있다면 놈을 단 칼에 쪼개버렸을 텐데…….' '이때다.' 제럴드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빛났다. 상대가 공격을 시작하려는 찰나에 그토록 고대하던 빈틈을 찾아낸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빈틈을 찾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럴드는 공격하는 것을 이내 포기했다. 바로 데스 나이트들과의 접전으로 얻은 경험 때문이었다. 일부러 드러낸 빈틈이란 사실을 눈치챈 제럴드는 거기에 말려들지 않고 계속 방어에 열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격할 순간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단 빈틈을 파악하자 제럴드는 머뭇거림 없이 공격을 시작했다. "헉." 상대의 검이 공격의 맥을 교묘하게 끊고 들어오자 미르트는 경악했다. 자신조차 생각 못했던 빈틈을 이토록 절묘하게 찾아내어 파고들다니……. 하지만 생각할 시간 따윈 없었다. 미르트의 몸은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휘이잉. 몸을 돌려 공격을 회피하긴 했다. 하지만 자세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그 틈을 타서 제럴드의 공격이 물 밀 듯 쏟아져 들어왔다. 크로비츠조차 쩔쩔매게 만들었던 공포의 연환공격이었다. 미르트는 얼마 전 알버트가 그랬던 것처럼 정신 없이 방어에만 열중해야 했다. 하지만 점점 허물어지는 자세에 신경 쓸 틈이란 없었다. "이럴 수가……." 테제로스 국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어에만 몰두하던 듀크 나이츠가 공세에 나선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자기편 기사가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공격받고 있는 점은 아까의 경우와 다름없었지만 문제는 과정이었다. 자기편 기사는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비틀거리며 힘겹게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몸이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위태했고 자세는 이미 완벽하게 허물어져 있었다. 쉽게 말해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는 것이다. '안 돼. 이겨야 해.' 테제로스 국왕은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대결을 관전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테제로스 근위기사단 단장은 국왕과는 달리 듀크 나이츠가 사용하는 검술을 정신 없이 관찰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휘하의 소드 마스터가 밀리는 이유를 그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국왕께 미르트를 천거한 자가 그였기 때문에 부하의 실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래지 않아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입술을 비집고 거듭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세, 세상에 저런 검술이 있다니……. 놀라워. 정말 놀라워." 기사들의 대결에는 일정한 형식과 법도가 있는 법이다. 기사들이 사용하는 검술은 오래 전 부터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정형화되어왔다. 그러므로 틀을 벗어나는 법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대결을 벌이는 듀크 나이츠의 검술은 그 틀을 여지없이 깨뜨려버리고 있었다. 파격적일뿐더러 전혀 정형화되어 있지 않았으며 또한 검술의 완성도가 극히 뛰어나 보였다. 그러니 소드 마스터인 미르트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몸놀림과 반사신경이 결코 미르트의 아래가 아니야. 저런 자가 아직까지 마스터가 되지 못한 사실이 놀랍군." 테제로스 근위기사단 단장은 지금 타국의 기사에게 깊이 탄복하고 있었다. 정신 없이 싸우던 제럴드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참 적당히 끝내라고 하셨지?' 승부는 거의 기울어진 상태였다. 조금 전 가한 공격으로 말미암아 테제로스 기사의 방어동작은 완전히 허물어져버렸다. 마치 술 취한 듯 비틀거리는 상대는 살짝 밀어도 쓰러질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제럴드에겐 연환공격의 초식이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알버트보다 실력이 조금 나아 보이기는 해도 아직까진 좌수검법의 상대가 아닌 것이다. 이쯤에서 끝내야겠다고 생각한 제럴드는 검을 거두며 물 흐르듯 뒤로 물러났다. 이 정도면 듀크 나이츠의 위상을 증명하는 데는 충분했다. '다, 다행이야.' 상대가 공격을 거두고 물러나자 미르트는 다행이라는 듯 얼른 자세를 잡았다. 마치 천길 벼랑에서 떨어졌다가 간신히 나뭇가지를 잡은 듯한 심정이었다. 이미 그는 패배했다는 사실을 시인한 상태였다. 상대가 공격을 거두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볼썽사납게 넘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상대는 마지막 순간에 인정을 베풀었고 미르트는 겨우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간신히 숨을 고른 미르트는 상대에게 감사의 눈길을 던졌다. '정말 고맙소.' 만약 패배했다면……. 생각해 보던 미르트는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팔라딘에게 패한 소드 마스터. 만약 그랬다면 자신의 인생은 그 날로 끝장이었다. 가문의 명예 역시 형편없이 실추될 것이 분명했기에 미르트는 검 자루를 굳게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정말 놀라운 검술이로군. 하지만 상대의 검로를 어느 정도 파악했으니 조금 전처럼 맥없이 당하진 않을 것이다.' 미르트는 말없이 투지를 불사르며 상대가 자세를 잡기만을 기다렸다. 그 역시 뛰어난 실력을 보유한 소드 마스터. 한 번 당한 공격에 또다시 당할 자가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상대의 괴이신랄한 공격을 막아낼 여러 가지 방법이 떠올라 있었다. 한 번 호되게 당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 낸 방법인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재 대결은 일어나지 않았다. "계속 하시겠습니까?" 크로비츠의 질문에 테제로스 국왕은 불에라도 덴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그만 합시다. 이 정도면 충분하오." 그의 마음속엔 오직 대결을 멈춰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자기편 기사에 대한 믿음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는 듀크 나이츠의 실력을 충분히 관전했다. 왜소한 듀크 나이츠는 정말 놀라운 검술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자기편 소드 마스터를 압도적으로 밀어붙일 정도였으니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만약 듀크 나이츠가 봐주지 않았다면 승패는 이미 갈렸을 터였다. 계속 대결을 시켜 낭패감을 맛보고 싶지 않은 것이 테제로스 국왕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어차피 이겨도 본전인 대결이었다. 팔라딘과 소드 마스터의 대결에서 팔라딘이 패한 들 부끄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소드 마스터가 패배한다면…….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테제로스 근위기사단의 위상이 형편없이 실추될 것이 분명했기에 국왕은 잠정적으로 대결을 멈출 것을 결심했다. "귀 기사의 실력을 충분히 보았소. 더 이상 볼 필요가 없을 것 같소." 그 말에 크로비츠는 진득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이미 이런 상황을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빵빠라빵. 대결 종료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자 미르트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싸운다면 아까처럼 낭패한 꼴을 보이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느닷없이 대결이 끝나버린 것이다. 그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단상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다시 싸우게 해 달라는 열망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근위기사 단장은 냉랭한 눈빛으로 그의 요청을 묵살했다. "대결은 무승부로 결론지어졌다. 모두 수고했소." 그의 말이 떨어지자 미르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실추된 체면을 되찾아올 방법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는 할 수 없다는 듯 제럴드를 쳐다보았다. "정말 놀라운 검술실력이었소. 내 진심으로 탄복했소이다." "과찬이십니다. 도리어 제가 쩔쩔 맬 수밖에 없었지요." 미르트는 두 눈에 모종의 열망을 담아 제럴드를 쳐다보았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나에게 다시 한 번 검을 섞을 기회를 주지 않겠소? 내 당신과 한 번 사심 없이 싸워보고 싶구려." 제럴드는 조용히 미르트의 시선을 맞받았다. "기회가 된다면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고맙소." 목례를 취한 미르트는 맥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제럴드는 말없이 장비를 챙겼다. 듀크 나이츠와 테제로스 근위기사와의 대결은 무승부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관전하던 기사들은 누가 우세를 점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승부는 결정되지 않았지만 대결은 듀크 나이츠의 확실한 우세였다. 그 결과 듀크 나이츠들의 눈동자에는 뿌듯한 자부심이, 반면 테제로스 기사들의 얼굴에는 망연자실함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대결을 벌였던 두 기사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테제로스 국왕이 자리한 단상에 다가갔다. 테제로스 국왕의 치하를 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테제로스 국왕의 관심사는 단연 제럴드에게 쏠려 있었다. "정말 대단한 검술실력이었다. 그 검술은 그대가 창안한 것인가?" 순간 얼굴이 벌개졌지만 데이몬의 당부를 떠올린 제럴드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오오. 놀랍군. 그런 위력적인 검술을 그대가 창안하다니……." 옆에 앉아 있던 크로비츠가 한 마디 거들었다. "전하. 그는 불리한 신체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그만의 독자적인 검술을 만들었사옵니다. 저 검술을 익힌다면 앞으로는 왼손잡이도 충분히 기사가 될 수 있사옵니다." "그렇겠구려." 테제로스 국왕은 그럴 듯 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상 왼손잡이가 기사단에 들어가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고 인식되고 있었다. 물론 오른손을 쓰는 법을 익히면 가능하겠지만 사람의 습관이란 그처럼 쉽사리 바꿀 수 없는 법이다. 위력적인 검술을 직접 창안했다는 말을 듣자 테제로스 국왕은 제럴드에게 상당한 호감을 느꼈다. "그래. 그대는 어디 출신인고?"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지만 전 테제로스에서 태어났사옵니다." 곧이어 이어진 제럴드의 대답에 테제로스 국왕은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토록 뛰어난 본국 젊은이가 테제로스가 아닌 타국 기사가 되었으니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라도 테제로스의 근위기사로 삼고 싶었지만 국왕은 그것이 애당초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서약을 한 기사는 소속 기사단이 동의하지 않는 한 결코 타국의 기사단으로 옮겨갈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런 훌륭한 기사를 듀크 나이츠에서 순순히 내놓을 리가 만무했다. '정말 아깝군. 저토록 뛰어난 기사를 눈 버젓이 뜨고 듀크 나이츠에 빼앗기다니…….' 어찌하여 테제로스의 기사가 아니라 듀크 나이츠가 되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국왕은 차마 그 말을 뱉어내지 못했다. 듀크 나이츠의 총수 앞에서 감히 내뱉어선 안될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국왕은 탄식을 하며 속에 없는 말을 지어내야 했다. "테제로스 인으로써 듀크 나이츠가 되어 본국의 위상을 높이다니 도저히 기쁨을 주체할 수 없구나. 뛰어난 검술실력을 보여준 그대에게 약소하나마 상을 주고 싶다." 고개를 돌린 국왕이 손짓을 하자 궁내대신 한 명이 달려왔다. "저 듀크 나이츠에게 1백 골드를 하사하도록 하라. 훌륭한 왼손검술을 짐에게 보여준 대가이다." "알겠사옵니다. 전하." 테제로스 국왕은 슬며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을 내려도 괜찮겠냐는 무언의 질문이었다. 명목상 타국의 기사였기에 의당 거처야 하는 절차였다. 시선을 받은 크로비츠는 빙그레 웃으며 제럴드를 쳐다보았다. "무얼 하는 게냐? 큰 은혜를 내리신 국왕전하께 예를 올리지 않고……." 제럴드는 공손히 예를 취했다. 이리로 오는 도중 분대장인 페이디언으로부터 소정의 예절교육을 받았으므로 다행히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답례할 수 있었다. "전하의 하해 같은 은혜에 감히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테제로스 국왕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궁으로 돌아갑시다." 하지만 국왕은 제럴드 옆에 시립하고 있는 근위기사 미르트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불쌍한 미르트는 어찌할 바를 몰라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32회. 숙소로 돌아온 하인리히는 웃으며 제럴드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정말 잘 싸웠어. 제럴드 네가 소드 마스터와 겨뤄 우세하게 싸울 수 있었다니 말이야." 제럴드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그는 듀크 나이츠 30명 전원에게 실컷 축하를 받고 온 상태였다. 크로비츠 역시 함박웃음을 지으며 제럴드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잘 했다. 넌 듀크 나이츠의 명예를 한껏 드높였다. 단장으로써 네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런 상태에서 친구에게까지 칭찬을 들으니 왠지 모르게 쑥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뭔가를 생각해보던 제럴드는 정식을 하며 하인리히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너 혹시 데스 나이트들과의 대련 기억하니?" 하인리히는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정말 많이 싸웠고 또한 엄청나게 얻어터졌지. 무엇보다도 윈슬럿이 제일 지독했어. 놈에게 맞고 나면 며칠 동안 삭신이 쑤셔왔으니까……. 이젠 1대 1로 싸우더라도 맞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말이야." 제럴드는 조용히 음성을 낮췄다.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지만 그 대련이 우리에겐 큰 도움이 된 것 같아. 아까 한 대결에서 난 상대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었어. 다시 말해 어떻게 공격하고 어떻게 회피할지가 훤히 보였다는 뜻이지." 하인리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이야?" "그럼. 정말이고 말고……. 모르긴 몰라도 데스 나이트와 행했던 무수한 대련이 우릴 엄청나게 강하게 만들었나 봐. 기억나지 않아? 처음에는 데스 나이트들의 공격을 파악하지도 못하고 기절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피하며 간간이 반격도 하잖아?" "하긴 그렇지. 요즘도 맞긴 하지만 쉽게 당하지 않잖아? 특히 처음처럼 어떻게 공격당했는지 모르고 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제럴드는 눈빛을 빛냈다. "데스 나이트들은 오늘 싸운 소드 마스터보다 훨씬 강했어. 더 빠르고 정교하며, 또한 머뭇거림이 없었지. 그런 강자들과 싸우다보니 우리도 덩달아 강해진 것 같아." "그래?" "정말이야. 데스 나이트와 대련한다고 생각하니 상대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어. 기껏해야 윈슬럿보다 강한 수준이더군." "하지만 실전에서는 소드 마스터를 당해낼 수 없잖아? 우린 아직까지 완성된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할 수 없으니까……." 제럴드는 빙긋이 웃었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도 마스터급이 되는 경우를 생각해 봐. 일단 방어만 할 수 있다면 그 누구라도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지 않겠어? 순수한 검술실력 면에서 우린 소드 마스터에 그다지 뒤떨어지지 않아." "그런가?" 하인리히의 얼굴에 희색이 만연했다. 솔직히 그들은 지금껏 자신들이 이룬 경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듀크 나이츠가 되며 두 번의 대련을 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이 결코 무시 못할 실력을 보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절로 어깨가 으쓱해왔다. "마스터가 되기만 한다면……." 기대에 부풀어 있는 하인리히를 보며 제럴드가 슬며시 주의를 주었다. "그렇다고 너무 자만하지 마. 지금껏 온 길보다 가야 할 길이 더욱 험난하니까……. 데이몬께서 말씀하셨어. 일정 경지에 오르면 실력을 늘리기가 더욱 힘들어진다고……." "그래 맞아. 앞으로도 계속 수련에 정진해서 기필코 마스터가 되어야지." 둘은 묵묵히 각오를 다졌다. 하인리히가 뭔가 생각난 듯 제럴드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외출 허가는 받았어? 프록터 놈과 결투를 해야 하잖아?" "응. 받았어." "어제처럼 신분을 속일 거야?" 제럴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프록터를 생각하자 유쾌했던 마음이 싸늘히 식었다. 뭔가 결정을 내린 듯 제럴드는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혼자 가겠어. 아무래도 그게 나을 것 같아." 하인리히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소리야? 우린 친구잖아." "하지만 놈은 분명히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았을 거야. 독이라도 사용한다면 네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어." "그런 소린 하지도 마. 우린 친구야. 그리고 함께 죽기로 약속한 카심 용병단원이기도 하고……." "하지만……." 하인리히는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만류한다면 날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겠어. 어서 가보자. 참. 단장님께 결투한다는 말씀을 드렸니?" "아니. 분대장님께만 간단히 말씀드렸어." 고개를 끄덕인 하인리히는 외투가 담긴 가방을 집어들었다. 둘은 곧 숙소를 나섰다. 프록터의 저택에 가서 제럴드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이놈들이 왜 이렇게 안 오지?" 조바심이 나는지 프록터는 연신 인상을 썼다. 시간이 되었는데 애송이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연신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가늠하던 프록터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키가 2미터가 넘는 거구의 사내 하나가 무척 두터워 보이는 체인메일을 걸친 채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울퉁불퉁한 근육이 체인메일 틈으로 비어져 나올 것처럼 꿈틀대는 근육질 사내였는데 얼굴에 나 있는 칼자국이 더 없이 살벌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티나르였다. 벌써 여러 명 이상 사람을 죽여본 경험이 있는 인간 백정이기도 했다. 원래 티나르는 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될 운명에 처한 죄수였다. 그런데 프록터가 손을 써서 감옥에서 빼낸 것이다. 그 보답으로 티나르는 프록터에게 목숨을 다한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 말고도 주위에는 험상궂은 사내들이 각종 병장기를 들고 서성대고 있었는데 수는 약 백여 명 정도 되어 보였다. 그들이 바로 로투스 용병단원들이었다. 명색이 용병단이었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용병단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프록터의 명을 받고 살인, 납치와 고문, 그리고 증거 인멸을 행하는 것이 그들이 주임무였다. 하나같이 그 방면으로 전문가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을 보고 있던 프록터는 믿음직스럽다는 듯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애송이 놈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 준비는 되어 있겠지?" 인상을 쓰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티나르가 텁텁한 음성을 토해냈다. "걱정 마십시오. 한 시간 이내로 놈들이 세상에 존재했던 흔적을 깨끗이 지워버리겠습니다." "자네만 믿겠네."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갑자기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정문을 지키는 경비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이 왔습니다. 지금 정문에 있습니다." 프록터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눈짓을 했다. 티나르가 서둘러 부하들을 둘러보며 지시를 내렸다. "모두 위치로……." 로투스 용병단원들은 서둘러 산개했다. 건물 틈새에 몸을 숨긴 용병들은 숨을 죽인 채 불쌍한 희생물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준비는 되어 있겠지?" 도착한 제럴드를 보자 프록터는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다." "널 대신해 싸울 전사는?" 제럴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티나르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나다. 애송아." 티나르를 보자 제럴드의 눈이 둥그래졌다. 상대의 덩치가 생각보다 컸기 때문이었다. 카심보다도 훨씬 크고 우람했기에 제럴드는 한참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더럽게 크군. 설마 검술 실력이 아니라 덩치를 보고 뽑은 것은 아니겠지?" "크흐흐. 애송이 녀석이 말이 많군." 티나르는 음침하게 괴소를 흘리며 무기를 집어들었다. 제럴드의 키와 맞먹는 길이의 소드 브레이커(Sword breaker)였다. 검신이 마치 톱날같이 생긴 기형검으로써 상대의 검을 부러뜨릴 수 있는 묘용이 있긴 하지만 극히 잔인한 병기에 속했다. 이 병기에 의해 상처를 입을 경우 살이 곱게 베어지는 게 아니라 송두리째 뜯겨버리기 때문에 치료하기가 극히 까다로웠었다. 통상적으로 용병들이 애용하긴 했지만 사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리 널리 사용되는 병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제럴드에겐 그리 낯선 병기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소드 브레이커는 대장인 카심이 예전에 애용했던 무기였기 때문이었다. 카심은 소드 브레이커를 능숙히 사용해서 용병계에서 상당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검술을 익히기 시작하며 그는 병기를 바꾸어야 했다. 바로 데이몬의 권유 때문이었다. "기형검은 상승검술을 익히는데 그리 좋지 않아. 초식을 전개하는데 제약이 많을뿐더러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리는 것도 힘이 배나 들지." 그것은 데이몬의 경험에 의한 충고였다. 외문병기인 호조에 강기를 끌어올리는 것이 장검보다 훨씬 힘들었다는 경험을 떠올린 데이몬이 조언을 했고 카심은 오랫동안 애용해 온 소드 브레이커를 버렸다. 그런데 이곳에서 또다시 소드 브레이커를 보게 되다니……. 제럴드는 오래 전에 카심에게서 흘려들은 말을 떠올렸다. "혹시라도 소드 브레이커를 사용하는 적을 상대하게 될 경우 소드 브레이커의 톱니에 검날이 끼이지 않도록 주의해라. 자칫 잘못할 경우 검이 부러지거나 혹은 놓칠 위험이 있다." "팔라딘이 된 다음에도 조심해야 합니까?" "그……렇진 않다.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린 검이라면 도리어 소드 브레이커가 부서져버릴 테니까." 카심의 당부를 떠올린 제럴드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집어들었다. "구구한 말 할 것 없이 바로 대결에 들어가도록 하지." 티나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성질 급한 애송이놈이로군. 좋다. 날 따라와라." 티나르는 몸을 돌려 뒷마당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제럴드와 하인리히는 머뭇거림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걸어가던 프록터가 슬그머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담장 위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조심스럽게 이동하는 것을 본 프록터의 입가에 짙게 미소가 깔렸다. '흐흐흐. 애송이 놈. 세상에서 깨끗이 없어질 날이 멀지 않았다.' 제럴드와 하인리히가 안내된 곳은 사방이 높은 벽으로 둘러쳐진 뒷마당이었다. 여러 가지 물건들이 쌓여 있는 것을 봐서 창고로 사용하는 장소 같았다. 사방을 둘러보던 제럴드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역시 생각 대로였어.' 마나를 운용할 수 있게 된 이후 제럴드의 시력과 청력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그런 그의 귀에 수십 명의 숨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발자국 소리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우렁차게 들려오고 있었다. 딴에는 조심조심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제럴드의 귀를 피할 순 없었다. 하지만 제럴드는 모른 체 눈앞의 티나르를 쳐다보았다. "그럼 시작해 볼까?" 티나르는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애송아." 티나르가 보기에도 흉측한 소드 브레이커를 들어올리는 것을 보자 제럴드도 슬며시 검을 뽑아들었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33회. 챙그렁. 육중한 소드 브레이커가 맥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며 굉음을 토해냈다. 뒤이어 묵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크으으……." 오른쪽 어깨를 움켜쥔 티나르가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통증으로 인해 얼굴이 잔뜩 찡그러진 상태였다. 그의 앞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검을 늘어뜨린 제럴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었다. 승리에 대한 도취감이 전혀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오만상을 찌푸린 티나르가 의외란 듯 제럴드를 쳐다보았다. "애, 애송이 녀석. 대, 대단하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는 상대를 보며 티나르는 진저리를 쳤다. 애송이란 생각에 얕보고 덤벼들다 크게 낭패를 본 것이다. 상대는 검을 휘두름에 있어 추호도 인정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낭자하게 피를 흘리며 악귀처럼 달려드는 티나르 특유의 투혼에도 일체 흔들리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티나르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마, 많이 싸워본 솜씨로군. 놀라워." 사실 티나르는 전문적으로 검술을 익힌 적이 없었다. 단지 타고난 싸움기술을 발휘해서 수도의 암흑가를 평정했을 뿐이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집요한 투혼이었다. 피로 전신을 물들인 채 악귀같이 달려드는 것이 그의 장기였고 상처를 입어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지금껏 싸워온 상대들은 그런 티나르의 투혼에 질려 물러서기 일쑤였다. 자고로 싸움에 임해서 기선을 제압 당한다는 것은 곧 패배와 직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여럿 이겨온 원동력은 바로 티나르의 타고난 투혼과 참을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티나르는 오늘 진정한 임자를 만났다. 선혈로 온 몸을 적신 채 악귀처럼 마구 달려들었지만 상대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고 냉혹하게 공격을 가했다. 게다가 검술실력이 티나르가 상대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티나르가 걸치고 있던 체인메일은 지금 걸레가 되어 있었다. 지금껏 수없이 티나르의 몸을 보호해 주었던 보호장구였지만 이번 대결에서 체인메일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상대는 치거나 베기에는 강하지만 찌르기에는 약한 체인메일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했고 그 탓에 티나르의 몸은 거의 벌집이 되어 있었다. "이익."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나르는 질 수 없다는 듯 계속 발악을 했다. 하지만 상대는 기다렸다는 듯 티나르의 오른 팔을 못쓰게 만들어버렸다. 장검이 어깨 관절을 그대로 꿰뚫어버린 것이다. 저항 불능상태가 되어버린 티나르는 그저 이만 바득바득 갈며 상대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티나르를 쳐다보던 제럴드가 냉소를 쳤다. "검사라기보다는 쓰레기로 봐야겠군." 수도에서 유명한 싸움꾼이었지만 결코 제럴드의 상대는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용병보다도 검술실력이 못한 티나르가 팔라딘의 경지에 오른 제럴드의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한 마디로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릴 필요도 없는 상대였다. 게다가 드래곤과의 혈투까지 치러본 제럴드가 상대의 투지 따위에 당황할 이유란 없었다. 제럴드는 그저 드러난 틈을 망설임 없이 공격을 가했고 그 결과 상대는 완벽히 무력화되어버렸다. 하지만 제럴드는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이것이 끝이 아니란 사실을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프록터의 흉측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대단한 실력이로군. 복수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나 보지?" 제럴드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이글거리는 눈빛이 프록터에게로 쏟아졌다. 하지만 프록터는 동요 없이 할 말을 늘어놓았다. "미안하군. 그간의 노력이 여기에서 끝나게 생겼으니……." 제럴드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네 대전사가 진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쿡쿡쿡. 대전사라……." 프록터는 징그럽게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미안하지만 내 대전사는 티나르 하나가 아니었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단의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은 삽시간에 장내를 완벽히 포위해버렸다. 그들을 슬쩍 훑어본 제럴드가 바짝 긴장했다. '조심해야겠군.' 들어온 사내들이 하나같이 기괴한 병기를 들고 있었다. 대부분 자루가 기다란 삼지창이었는데 간혹 가다 철사로 짜서 만든 그물을 들고 있는 자도 있었다. 그물에는 낚시바늘처럼 생긴 갈고리가 수도 없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10여명 가량은 검사에겐 지극히 치명적인 무기인 석궁을 들고 있었다. 보고 있던 하인리히도 바짝 긴장하며 허릿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조심해." 하지만 제럴드의 입가에는 도리어 차가운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날 살려보내지 않겠다는 뜻이로군."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나?" 프록터는 빙글빙글 웃으며 다가왔다. "소개하지. 로투스 용병단이라네. 뭐 주 임무가 탈출한 노예를 잡아 압송하는 일이니까 네놈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제압할 거야. 알다시피 한 손으로 여럿을 막을 수 없는 법이니까……." 제럴드는 이를 부득 갈았다. "여전히 간악하군. 프록터." "흐흐흐. 곧 죽어 땅에 묻힐 녀석이 말이 많군." 말을 마친 프록터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손을 들어올렸다. "놈들을 잡아라." 명령이 떨어지자 사내들이 우르르 덤벼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프록터는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검술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로투스 용병단원들은 이런 일에 이력이 난 상태였다. 반수 가량의 용병들은 자루가 긴 삼지창으로 능숙하게 상대를 견제한다. 삼지창의 창날 사이로 상대의 검을 꿰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면 나머지 사내들은 사정보지 않고 그물을 던진다. 그것이 그들이 지금껏 수없이 연습했던 역할이었다. 그러면 끝장이었다. 그물에 뒤덮인 상대는 금세 저항할 능력을 잃는다. 그런 다음 용병들의 창대아래 곤죽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미 이런 방법으로 탈출한 노예들이 수도 없이 잡혀왔다. 노예야 다시 팔아야 하기 때문에 죽일 필요가 없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흔적도 남지 않도록 없애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때 용병들이 틈을 발견했는지 그물을 던졌다. 프록터는 진득한 미소를 머금었다. "끝났군." 이미 그물이 두 애송이를 덮어버리는 것을 목격한 다음이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10여 명이 뒤에서 석궁을 겨누고 있으니 더 이상은 볼 필요도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시선에 티나르가 들어왔다. 피가 흘러내리는 어깨를 움켜쥔 티나르는 그물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빛을 봐서 사로잡힌 애송이를 어떻게 요리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프록터는 쓴웃음을 지었다. "악이 받혀있으니 마무리는 잘 해 주겠군. 간만에 산 채로 포를 뜨는 장면을 구경하겠어." 하지만 그의 예상은 오래지 않아 판이하게 빗나가버렸다. 번쩍. 검에서 푸른빛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그물이 순식간에 조각나며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철사를 엮어 만든 그물이 마치 썩은 동아줄처럼 잘려 나간 것이다. "이, 이런." 창대를 움켜쥐고 달려들려던 용병들이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물을 빠져나온 그림자 두 개가 번개처럼 몸을 날려 멍청히 서 있는 사내들 틈을 파고들었다. 당황한 사내들이 삼지창을 내밀었지만 빛이 번쩍 하는 순간 창날이 모조리 잘려버렸다. "아, 아니?" 깜짝 놀란 사내들이 어이없다는 듯 잘려나간 창대를 쳐다보았다. 지금껏 수도 없이 장검을 잡아 비트는 연습을 해 왔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멍청히 버티고 서 있을 정도로 상황이 만만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끄아악." 단말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사내들이 우수수 넘어졌다. 잘린 팔과 다리를 통해 선혈이 낭자하게 뿜어져 나왔다. 선두의 사내들이 채 쓰러지기도 전에 그림자들은 나머지 사내들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놀라운 속도였기 때문에 경로에 있는 사내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곧 일방적인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느긋하게 장내를 지켜보던 프록터는 기겁을 했다. 그물로 제압한 애송이들을 티나르의 손에 맡겨 천천히 처리해버릴 생각이었는데 상황은 전혀 뜻밖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로투스 용병단원들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검광이 번뜩하는 순간 한두 명의 사내들이 돼지 목따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맥없이 나가자빠졌다. 팔다리를 감싸안고 고통 어린 비명을 질러대는 것을 보아 목숨을 잃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싸우기는 힘들어 보였다. "어찌 이런 일이……." 경험 많은 상인답게 프록터는 재빠른 판단을 내렸다. 그는 우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뭇대는 궁수들에게 냅다 고함을 질렀다. "쏴라. 석궁을 쏘란 말이다." 궁수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하지만 동료들이 뒤섞여 있는데……." "상관없다. 쏘아라. 뒷일은 모두 내가 책임지겠다." 이어지는 프록터의 채근에 궁수들은 어쩔 수 없이 석궁의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그들은 명령을 내린 프록터가 조심스럽게 장내를 빠져나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슈슈슉. 10여 발의 쿼렐이 제럴드와 하인리히의 몸을 목표로 집중되었다. 서로 뒤엉켜 있는 탓에 불운한 용병 셋이 쿼렐에 맞아 바닥에 나동그라졌지만 남은 쿼렐들은 정확히 제럴드와 하인리히의 몸을 파고 들어갔다. "어딜." 예기를 느낀 하인리히가 그대로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자루의 퀘렐이 검에 맞아 퉁겨나갔다. 이어 하인리히는 슬쩍 몸을 젖히며 쿼렐 한 발을 피해냈다. 모로 틀어쥔 검이 또다시 날아드는 퀘렐을 막아냈다. 거의 환상적인 몸놀림이었다. 하인리히는 이미 그간의 대련을 통해 화살공격을 방어하는 법을 완벽히 숙지한 상태였다. 자고로 검을 든 검사에게 가장 신경을 써야 할 존재가 바로 궁수들이었다. 빗발치는 화살 이 갑옷틈새를 파고들 경우 여지없이 전투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 탓에 아르카디아의 검사들에게는 화살공격을 피하는 요령을 배우는 것이 필수였다. 그것은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풀 플레이트 메일을 걸치고 있더라도 빗발치는 화살공격을 완벽히 막아낼 순 없었다. 눈구멍이나 갑옷이음새 부분은 화살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사들은 경면처리된 갑옷의 표면을 이용해 화살공격을 퉁겨내는 연습과 함께 소리를 듣고 화살공격을 막거나 피하는 요령을 추가적으로 수련해왔다. 물론 제럴드와 하인리히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갑옷을 입진 않았지만 화살공격에 대처하는 요령은 기본적으로 숙지한 상태였다. 그 탓에 하인리히는 어렵지 않게 화살공격을 피해내고 궁수들에게 쇄도할 수 있었다. 싸움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궁수를 잡는 것은 기본이다. 석궁사격을 가한 궁수들은 오래지 않아 하인리히의 공격에 무력화되어 버렸다. 하나같이 오른 팔을 잘린 채 울부짖으며 바닥을 뒹구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치사한 놈들." 바닥에 침을 뱉은 하인리히가 몸을 돌렸다. 삼지창과 그물을 든 사내들도 제럴드의 손에 깡그리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제럴드를 본 하인리히의 눈동자가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쿼렐 한 발이 제럴드의 몸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힌 부위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 아니 제럴드……." 깜짝 놀란 하인리히가 서둘러 제럴드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쿼렐이 박힌 부위를 본 하인리히는 오래지 않아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쿼렐은 생명에 지장이 없는 허벅지에 꽂혀 있었던 것이다. 하인리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뒤흔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너 정도의 실력자가……." 그 까짓 엉성한 쿼렐 공격을 피하지 못할 제럴드가 아니었기에 하인리히는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자신도 피한 퀘렐 공격을 실력이 더욱 뛰어난 제럴드가 피해내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화살을 뽑으려 했지만 제럴드는 손을 흔들어 만류했다. "아니. 그냥 내버려둬." "설마……. 너 일부러 맞아준 것은 아니겠지?" 빙그레 웃어준 제럴드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이미 그는 프록터가 도주하는 모습을 포착해놓은 상태였다. "이런 미친 놈." 하인리히가 어울리지 않는 욕설을 퍼부으며 뒤를 따랐다. 상황을 보아 제럴드는 일부러 화살을 맞은 것이 틀림없었다. 상대에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함정을 뒤집어씌우기 위해.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34회. 정신 없이 저택에 달려 들어온 프록터는 서둘러 지배인을 찾았다. 이미 그는 지배인에게 모종의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어떻게 되었나?" "발빠른 녀석 둘을 치안대로 보냈습니다. 치안관님이 자리에 계시다면 늦어도 10분내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프록터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치안관이 온다면 해결되겠어. 감히 치안대 병사와 싸울 순 없을 테니까……." 프록터는 난데없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놈의 검술실력이 그토록 뛰어나다니……." 하지만 길게 생각할 틈은 없었다. 로투스 용병단이 무너지는 속도를 볼 때 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저택으로 난입할 것이 틀림없었다. 프록터는 지배인을 쳐다보았다. "비밀금고 속에 숨어 있을 테니 너는 최대한 시간을 끌어라. 그리고 치안대가 도착하면 즉각 통보하도록 하고." 뭔가를 생각해 본 프록터가 거듭 명령을 내렸다. "치안관이 오거든 몰래 전해라. 놈을 재판에 회부되지 못하게 처리해 줄 경우 올해 바친 상납금의 세 배를 내놓겠다고…….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지배인을 본 프록터는 허둥지둥 몸을 날렸다. 비밀금고라면 밀월관계에 있는 치안관이 도착해 일을 처리해 줄 때까지는 무리 없이 그를 숨겨줄 터였다. 프록터가 2층으로 올라가고 난 뒤 오래지 않아 굉음과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쾅. 활짝 열린 문을 통해 검을 든 젊은이 둘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들은 노기 어린 눈빛으로 저택 내부를 샅샅이 훑었다. 특히 허벅지에 화살을 박고 있는 젊은이의 눈빛은 정말 살벌했다. 마치 눈빛만으로 살인을 할 수 있을 법한 눈빛이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지배인이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프록터에게 받고 있는 넉넉한 봉급을 생각하니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 말에 제럴드와 하인리히의 시선이 총지배인에게로 쏠렸다. "당신은 뭐요?" 치안관이 오기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던 총지배인이 떠듬거리며 대답했다. "저, 저는 고용인입니다. 무슨 일로 제가 관리하는 저택에 침입하셨는지 알고 싶군요." "조금 전 당신의 고용주가 이리로 들어왔을 텐데……." "예? 오시지 않았는데요?" 제럴드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거짓말을 하고 있군. 놈은 보나마나 밀실에 콕 틀어박혀 있을 테지. 비켜라." 와락 밀치자 총지배인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제럴드는 2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올라가며 하인리히에게 손짓을 했다. "넌 1층을 수색해 봐. 난 2층을 살펴볼 테니……." "알았어." 둘이 저택을 헤집고 다니는 사이 경비병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대상인의 저택이라 그런지 경비병들의 수가 제법 많았다. 그들 중 몇은 달려들어 하인리히를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총지배인이 손을 내저어 그들을 만류했다. '실력이 대단한 용병들이라니 법을 이용해 처리하는 것이 옳을 거야. 치안관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으니 그대로 해야지.' 2층으로 올라간 제럴드는 눈에 불을 켜고 수색을 시작했다. 스무 개가 넘는 방문을 일일이 열어보고 다녔지만 프록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비겁한 자식. 넌 남자도 아냐." 욕설을 퍼부어 가며 종적을 찾아다니는데 갑자기 아래층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수십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집안에 들이닥치는 소리란 걸 눈치채자 제럴드의 눈빛이 미묘하게 빛났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계단으로 향했다. "생각대로 놈이 치안대를 불렀나보군. 어디 한 번 내려가 볼까?" 상황은 예상 대로였다. 대략 50명 정도 되어 보이는 치안병사들이 저택내부에 우루루 쏟아져 들어와 있었다. 그들 앞에는 비대한 체구를 지닌 중년 사내 하나가 눈동자에 노기를 가득 담은 채 하인리히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법 멋드러진 제복을 걸친 것을 보니 그가 치안관인 모양이었다. 그는 불문곡직하고 냅다 호통을 쳐댔다.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인가? 감히 백주대낮에 검을 들고 남의 저택에 침입하다니……." 하인리히는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우린 대전사 결투에서 비열한 짓을 저지른 저택 주인을 찾고 있소. 그는……." 중년 사내는 하인리히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고함을 버럭 질렀다. 이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치안관인 그는 이미 총지배인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상태였다. "어허. 현행범으로 포착된 강도 주제에 말이 많구나. 여봐라. 저놈을 당장 체포해라." 명령이 떨어지자 치안 병사들이 달려들어 하인리히를 체포하려 했다. 하지만 하인리히가 검을 휘두르며 방어자세를 취하자 병사들은 섣불리 접근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치안관은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감히 법을 집행하는 치안병사에게 대항하려 하다니? 추호도 사정을 보아줄 수 없는 놈이구나. 인정사정보지 말고 즉결처분해버리는 수밖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계단 쪽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이곳의 치안관이오?" 치안관의 시선이 계단 쪽으로 향했다. 계단 위쪽에 제럴드가 서 있었다. "누구지? 차림새를 보아하니 네놈 역시 강도의 한 패가 분명하겠군." "강도라……. 후후후." 제럴드는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검을 뽑아들고 있던 치안병사들이 조심스럽게 그의 퇴로를 차단했다. 마음이 급했는지 총지배인이 치안관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조심하십시오. 검술실력이 대단한 놈들입니다." "걱정하지 마라." 짧게 일축한 치안관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제럴드를 쏘아보았다. "네놈들에게 테제로스의 법이 얼마나 준엄한지 가르쳐 주겠다." "………." 제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가왔다. 그가 어느 정도 걸어오자 계단 위쪽에서 다급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오오. 오셨군요. 대장님. 얼마나 놀랐는지……." 프록터였다. 거듭된 수색에도 나타나지 않은 그가 제 발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치안관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저, 저놈들이 제 저택을 무단 침입하여 경비병 100여 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가진 돈을 모두 내놓으라고 협박을……." "닥치시오. 어디서 그런 망발을……." 하인리히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비열한 프록터의 작태를 더 이상 보아 넘길 수 없었는지 눈에서 분노의 광망이 쏟아지고 있었다. 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하인리히에겐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하지만 프록터는 머뭇거림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저놈들에게 국법의 준엄함을 가르쳐 주십시오. 놈들은 세상에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놈입니다. 저놈들의 손에 이미 100명의 경비병들이……." 치안관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걱정 마시오. 테제로스의 법은 저런 녀석들을 내버려둘 정도로 호락호락 하지 않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또다시 일단의 병사들이 들이 닥쳤다. 도합 백 명이 넘는 치안병사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들은 머뭇거림 없이 제럴드와 하인리히를 포위했다. 치안관은 진득한 미소를 흘리며 둘에게로 다가갔다. 이미 언질을 들었기 때문에 둘을 살려두고픈 마음이 없었다. '상납금의 세 배라면……. 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군.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다.' 생각을 마친 치안관은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놈들을 체포하되 조금이라도 반항한다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처치해 버려라. 알겠느냐?" "옛." 병사들이 다가오자 하인리히는 바짝 긴장하며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법을 집행하는 치안병사들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 제럴드가 한 발 앞으로 나갔다. 그는 치안관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도대체 당신들이 무슨 자격으로 우릴 체포하려는지 알고 싶소. 대답해 줄 수 있소?" 치안관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물론이다. 너희들은 현행범으로 포착된 강도들이다. 게다가 치안병사에게 대항하려 했으니 재판 없이 현장에서 즉결처분할 수 있는 죄까지 범했다. 그러니 이만 살 생각을 버리도록 해라." "증거가 있소?" 치안관은 징그럽게 웃었다. "증거라. 굳이 밝히자면 내 눈을 증거라고 할 수 있지. 내가 직접 목격한 이상 증거 따위는 전혀 필요 없다. 그럼 흉악범들을 사정 볼 것 없이 처치해버리도록 하……." 막 공격명령을 내리려고 할 때 제럴드가 느닷없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바로 듀크 나이츠임을 증명하는 문장이었다. "우린 크로센 제국의 기사들이오. 제 아무리 치안대라 하더라도 타국의 정규 기사를 체포할 수는 없소. 설마 치안관이 그 사실을 모르진 않겠지?" "뭐라고?" 치안관의 눈에 곤혹감이 가득 차 올랐다. 하찮은 용병으로 간주했던 애송이들이 정규 기사, 그것도 초강대국 크로센 제국의 기사라니…….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함을 버럭 질렀다. "어디서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냐? 네놈들에게 치안관에 대한 모독죄까지 추가하겠다." 막 말을 이어나가려던 치안관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둘이 외투를 벗자 속에서 듀크 나이츠의 정복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정규 기사임을 증명하는 문장이 가슴팍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문장을 보고도 못 믿는다니 정말 멍청한 작자로군……. 못 믿겠다면 궁정에 사람을 보내어 확인해 보시오. 우리가 소속된 듀크 나이츠 단원들이 그곳에 머물고 있으니……." "세, 세상에……." 치안관은 입을 딱 벌렸다. 물론 그에게 타국의 정규기사를 체포할 권한이 있을 리가 없었다. 상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안은 그가 무마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고 잇는 그에게 이번에는 하인리히가 다가갔다. 제럴드의 책략을 어느 정도 짐작했는지 입가에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하인리히 역시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문장 하나를 꺼냈다. "우리가 듀크 나이츠 대원임을 믿지 못하겠으면 이것으로 증명하겠소. 난 파리온 백작가문의 넷째 아들인 하인리히 파리온이오. 설마 아버님인 파리온 백작을 모른다고 하진 못할 테지?" 그 말에 치안관은 더욱 경악했다.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그가 물론 파리온 백작가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 그런 일이……. 파리온 백작님께 아들은 세 분뿐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의심된다면 파리온 백작가에 사람을 보내 물어보아도 되지 않겠소?" 상대의 머뭇거림 없는 응대에 치안관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뒤에 서 있던 프록터는 현기증으로 말미암아 눈앞이 아찔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만약 애송이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의 인생은 종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반 용병과 정규기사는 신분상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용병이야 죽여서 슬쩍 묻어버려도 되지만 기사는 달랐다. 속한 기사단에서 눈을 시뻘겋게 뜨고 기사의 사인을 규명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초강대국인 크로센의 듀크 나이츠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물론 발각되지 않으면 그만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악화된 이상 도저히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치안관의 능력으로도 어림없는 것이다. 그는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도망가야 해. 금고에서 돈을 챙겨 잠적해야만 살 수 있어.' 프록터는 조심스럽게 계단으로 움직였다. 치안관의 출현으로 비밀금고에서 나왔던 것이 그토록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제럴드가 이미 프록터의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으니……. "끄아아악." 끔찍한 비명 소리가 저택 내부에 울려 퍼졌다. 프록터가 허벅지를 움켜쥔 채 마구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슬그머니 몸을 빼려는 프록터를 보자 제럴드가 불문곡직하고 검을 던져버린 것이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35회. 날아간 장검은 프록터를 대들보에 그대로 못박아버렸다. 연신 비명을 질러대는 프록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제럴드가 말을 이었다. "의심스럽다면 지금 즉시 사람을 궁정으로 보내 우리 신분을 확인해 보시오. 우린 듀크 나이츠 소속의 제럴드와 하인리히요." 갈피를 잡지 못한 치안관은 결국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진정 듀크 나이츠라면 자신이 함부로 처리할 수 없었다. 자세한 것을 알아본 뒤 행동하는 것이 백 번 옳았다. "아, 알겠소." 치안관은 걸음이 빠른 병사하나를 불러서 지시를 내렸다. 거칠 것 없어 보이던 기세는 이미 한 풀 꺾인 상태였다. 잠시 후 궁정에 다녀온 병사는 낮은 음성으로 보고를 시작했다. 보고를 듣던 치안관의 안색은 눈에 띄게 창백해지고 있었다. "정식 사절단으로 방문한 듀크 나이츠 중에 분명히 제럴드와 하인리히란 이름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볼 일이 있어 외출한 상태라 하더군요." "사,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특히 제럴드란 기사는 국왕전하께서 친히 관전하시는 앞에서 친선대결까지 벌였다 합니다. 국왕전하께서는 제럴드란 기사의 검술실력을 치하하시며 친히 상금을 내리셨습니다." "세, 세상에……." 치안관은 입을 딱 벌렸다. 허름한 차림의 애송이 둘에게 그런 내력이 있을 지는 꿈에도 몰랐다. 병사는 조심스런 표정으로 보고를 계속 이어나갔다. "자초지종을 듣자 수도 기사단의 담당관이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쯤 수도 기사단장님께서 이리로 오시고 계실 것입니다." 치안관은 겨우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담당관의 반응에 익히 이해가 갔다. 듀크 나이츠라면 톱 클래스에 속하는 일급 기사단이다. 일반적으로 정규 기사가 타국에서 상처를 입거나 목숨을 잃는 일은 외교문제로 비화할 우려까지 있는 큰 일이었다. 특히 초강대국 크로센 제국의 기사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담당관의 목이 성할 리가 없었다. 물론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상황을 파악한 치안관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조금 전의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치안관은 비굴한 표정까지 지으며 손을 싹싹 비볐다. "시, 신분이 확인되었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그럼 제반 사정을 제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하인리히는 느닷없이 바뀐 치안관의 태도에 다소 얼떨떨해 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들을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던 상대의 태도가 180。바뀌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제럴드는 머뭇거림 없이 응대했다. 이미 그는 병사의 보고내용을 훔쳐들은 상태였다. "자초지종은 귀국의 수도기사단 단장께서 도착하신 뒤 밝히겠소." 치안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조금 전의 행동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부디 조금 전의 무례에 대해 용서해 주십시오. 치안업무를 수행하느라 부득이…….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선 자초지종을 파악할 필요가 있으니 부디 부탁드립니다." 제럴드는 무표정한 시선으로 치안관을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더라도 상관없소. 우린 믿을 수 있는 사람 앞에서 정황을 밝힐 생각이니까……." 치안관의 표정이 애타게 변했다. 이제 칼자루를 쥔 쪽은 저쪽이었다. 만에 하나 프록터와의 밀월관계가 탄로 난다면 목이 달아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는 어쩔 줄 몰라했다. 생각을 거듭하던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프록터를 노려보았다. "감히 사실을 왜곡하다니……. 여봐라. 저 가증스러운 놈을 당장 체포하라." 하지만 치안병사들은 섣불리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기에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평소 프록터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아왔다. 하루가 멀다하고 술과 음식을 대접받아 왔기에 쉽사리 손을 쓸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치안관의 눈에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빌어먹을……. 당장 체포하지 못할까?" 마음이 급해진 치안관은 직접 프록터에게로 다가가려 했다. 그때서야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고통으로 몸을 파들파들 떨고 있는 프록터의 손발을 오랏줄로 꽁꽁 묶기 시작했다. 한 병사가 허벅지에 깊숙이 박힌 검을 뽑아주자 프록터는 겨우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겨우 상황을 가늠할 수 있게 되자 프록터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치안병사들이 자신을 결박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프록터였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치안관을 쳐다보았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짓?" "닥쳐라 이놈." 치안관은 눈을 부라리며 프록터를 노려보았다. 자신을 이런 위험한 일에 끌어들인 프록터가 미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입을 아예 틀어 막아버리려는 듯 그는 거듭 고함을 질러댔다. "대제국 크로센 제국의 정규 기사님들을 감히 강도라고 신고하다니……. 네가 정녕 죽고싶은 모양이로구나.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망발을 할 수 있더냐?" "나, 나는……." "그래도 이놈이……." 치안관이 한껏 눈을 부라리는 사이 일단의 병력이 허겁지겁 저택으로 들어왔다.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들이었는데 그 중에는 테제로스 수도기사단의 단장이 끼여 있었다. 물론 대결을 관전했던 그가 제럴드의 얼굴을 모를 리가 없었다. "무슨 일이오? 아니?" 수도기사단장은 깜짝 놀랐다. 제럴드의 허벅지에 쿼렐이 박혀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화살을 맞다니……." 기사단장의 안색이 삽시간에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듀크 나이츠의 정규 기사가 테제로스에서 화살을 맞았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 중대한 외교문제로까지 비화할 소지가 충분한 것이다. 다급해진 마음에 그는 서둘러 제럴드에게로 다가갔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소?" 기사단장을 힐끔 올려다본 제럴드는 조용히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먼저 프록터와의 구원(舊怨)을 털어놓은 제럴드는 프록터가 대전사 결투에서 1백 명의 용병을 동원했고 자신들을 감쪽같이 죽여 묻어버리려 했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놈은 궁수를 시켜 우리의 등판에 대고 사격을 가했습니다. 용병들과 한데 어우러져 싸우던 상황이라 도저히 피할 수 없었습니다." 제럴드의 설명을 들은 기사단장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자국인이 듀크 나이츠 둘을 죽일 생각으로 함정을 파고 그것도 모자라 석궁 사격을 가했다는 사실은 정말 중대한 문제였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이 일을 알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이미 공작은 휘하의 기사들을 끔찍이 생각하기로 평판이 나 있었다. 증거가 확실했기 때문에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휘하의 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저 간악한 놈을 당장 포박하라. 국법에 따라 엄중히 처리할 것이다." "옛." 기사들이 날렵히 달려들었다. 치안병사들에게 1차로 포박된 프록터는 불쌍하게도 기사들의 매서운 손속에 재차 결박되는 운명에 처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는 프록터를 기사들은 인정사정 없이 묶고 또 묶었다. "나머지는 뒷마당으로 가서 놈의 하수인들을 체포해 오너라. 특히 석궁 사격을 가한 궁수들은 단 한 놈도 놓치면 안 된다." 일단의 기사들이 서둘러 뒷마당 쪽으로 달려갔다. 일단 급한 불을 끈 기사단장의 시선이 이번에는 치안관에게로 향했다. 멍하니 서 있던 치안관이 부동자세를 취했다. 수도기사단 단장이라면 그가 감히 얼굴조차 마주볼 수 없는 상급자였다. "네놈이 이곳의 치안관이냐?" "그, 그렇습니다." "네놈의 관할구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옷 벗을 각오는 되어 있겠지?" 치안관은 감히 대답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때 하인리히가 조심스럽게 기사단장에게 다가갔다. "단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보시오." 기사단장에게 하인리히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치안관이 그들에게 범했던 무례한 행동이 낱낱이 설명되었다. "그는 우릴 보자마자 불문곡직하고 체포하려 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일체 묻지 않더군요." "그랬소?" "또한 치안병사에게 대항했다는 이유로 저희들을 가차없이 죽이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것을 보아 치안관은 분명 프록터와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하인리히의 설명을 들은 기사단장은 매서운 눈빛으로 치안관을 노려보았다. 이미 치안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는 상태였다. 하인리히는 그를 쳐다보며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사단장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명령을 내렸다. "저놈 역시 체포하라." 기사들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달려들었다. 불운한 치안관은 변명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프록터와 같은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둘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죄인들을 지금 즉시 치안대의 지하감옥으로 압송하도록 하라. 내가 친히 놈들을 문초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처리를 마친 기사단장이 서둘러 제럴드에게 다가왔다. 제럴드는 그때서야 허벅지에 박힌 쿼렐을 빼내고 응급처치를 하고 있었다. 일단 달래야겠다는 생각에 기사단장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이런 불미스런 일이 벌어진데 대해 소관이 대신 사과를 드리겠소. 정말 미안하오." "아닙니다. 귀국의 영토에서 일을 벌인 저희들이 도리어 죄송할 따름이지요." 비록 테제로스 인이었지만 듀크 나이츠란 이유 때문에 기사단장은 타국 기사로 간주하고 최대한 예의를 다하고 있었다. "아니오. 사정을 들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 사정이 있었다면 저라도 틀림없이 결투를 청했을 것입니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놈은 정식 대결에서 암수를 쓴 저것들입니다. 저것들은 제 명예를 걸고 엄중히 문초하겠습니다." 하지만 제럴드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프록터의 퇴로를 완벽히 막기 위한 회심의 일격이기도 했다. "하지만 프록터란 놈은 수단이 정말 비상한 놈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듣기로 치안대를 통째로 좌지우지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이 일을 상부에 보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러자 급해진 것은 수도기사단 단장이었다. 이 일이 알려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반드시 자기 선에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거듭 제럴드를 달랬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다니……. 그것은 테제로스의 기사단장으로써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놈을 치안대가 아니라 수도기사단 본부로 압송해서 조사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치안대원들 전체를 조사할 용의가 있습니다." 말을 마친 기사단장은 제럴드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고개를 돌렸다. "치안병사들을 모두 기사단 본부로 데려가라. 엄중히 조사할 것이다." 달려온 치안병사들 역시 무장해제 당한 채 수도기사단 본부로 압송될 처지에 놓여버렸다. 상대가 수도기사단의 기사들인지라 그들은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제럴드는 그때서야 얼굴을 풀었다. "기사단장님의 빈틈없는 일 처리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별 말씀을……. 모든 사실은 제 명예를 걸고 밝혀내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본부로 가서 치료를 받으심이 어떻겠습니까?" "아닙니다.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 하지만……." 기사단장은 연신 안절부절 못해했다. 만약 이 사실이 듀크 나이츠 단장의 귀에 들어간다면 수습하기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마음을 짐작한 듯 제럴드가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이 일은 문초 결과가 나올 때까지 당분간 보고하지 않겠습니다. 놈이 적절한 처벌을 받게 된다면 영원히 비밀로 묻어둘 용의가 있습니다." 그 말에 기사단장의 얼굴이 확 펴졌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놈들을 국법에 따라 엄중히 문초하고 적절하게 처벌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제럴드와 하인리히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화살을 맞은 자리에서 통증이 전해졌지만 걷는데 별달리 불편한 점은 없었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36회. 제럴드는 시선을 돌려 프록터를 쳐다보았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말미암아 프록터의 얼굴은 아예 사색이 되어 있었다. 곧 조사에 들어갈 치안대는 그에게 더 이상 방패막이가 되어 줄 수 없었다. 이미 치안관마저 굴비두릅 묶이듯 포박된 상황이 아니던가. 통쾌하다는 눈빛으로 프록터의 얼굴을 쓸어본 제럴드가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의 등으로 초점 잃은 프록터의 시선이 와서 꽂히고 있었다. "너도 꽤나 대단한 놈이다." "뭐가?" "증거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쿼렐에 맞다니……. 도대체 제정신 가진 놈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제럴드는 투덜거리는 하인리히를 보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크게 다치진 않았잖아. 뼈나 근육은 괜찮아. 그저 살집 많은 곳에 구멍 하나 뚫린 정도인데 뭘."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그나저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프록터 놈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제럴드는 차갑게 미소지었다. "상황이 그 정도로 악화되었으니 아마 무사하지 못할 거야. 운 좋게 목숨을 건진다 하더라도 평생을 감옥에서 썩어야겠지?" "하긴 그렇겠어." 제럴드와 하인리히는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숙소로 향했다. 프록터에 대한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수도기사단 단장이 직접 취조에 나섰다. 물론 프록터는 특유의 입담으로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려 했다. 하지만 어지간한 프록터도 오래지 않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혹독한 취조에 그만 고용인들이 먼저 자백해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이미 오래 전에 사형이 언도되었던 티나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프록터와 치안대와의 밀월관계가 널리 알려지자 테제로스의 수도는 발칵 뒤집혀 버렸다. 사실을 보고 받은 테제로스의 총리는 대경실색을 했다. "그런 죽일 놈들이 있나? 본보기를 위해서라도 관련된 자들을 사정보지 말고 사형에 처하라." 물론 듀크 나이츠를 무마하기 위한 의도도 어느 정도 반영된 판결이었다. 또한 판결을 계기로 수도의 치안대에 전폭적인 물갈이가 벌어졌다. 체포된 악덕상인 프록터와 그의 하수인 티나르. 그리고 치안관에 대한 재판은 서둘러 속개되었다. 증거가 확실했기 때문에 판결은 금방 내려졌다. [크로센 제국의 정규기사를 유인, 살해하려 한 죄로 악덕상인 프록터를 사형에 처하고 재산을 모두 몰수한다.] 티나르 역시 사형이 선고되었다. 더불어 프록터에게 금품을 받고 비리를 저지른 치안관은 2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수인이라 할 수 있는 로투스 용병단원들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특히 석궁 사격을 가한 궁수들은 평생을 감옥에서 썩어야 했다. 형량이 선고되자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속개되었다. 제럴드에게 직접 보여주기 위해 단 이틀만에 형을 시행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프록터와 티나르는 결국 중앙 광장에서 목이 매달리는 처지에 놓여버렸다. "집행." 집행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형이 집행되었다. 목에 동아줄이 감겨 정신 없이 버둥대는 프록터의 모습을 지켜보는 차가운 눈동자 한 쌍이 있었다. "결국 합법적인 방법으로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군." 제럴드의 시선은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죽은 채 혀를 길게 빼어 무는 프록터의 얼굴로 쏠려 있었다. 이로써 원통하게 죽은 아버지와 누이의 넋이 위로될 수 있으리라……. 우르르르 쾅. 집채만한 파도가 사방을 강타했다. 강풍에 휘날린 물보라가 새하얀 속살을 드러내며 사납게 요동치고 있었다. 망망대해.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육지의 그림자도 볼 수 없는 바다는 지금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를 떠다니고 있는 세 척의 범선이 있었다. 전형적인 아르카디아의 양식으로 만들어진 용골(龍骨) 구조의 포경선은 집채만한 파도의 연이은 공격에도 겨우겨우 전복되지 않고 힘겹게 맞서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범선이 버틸 수 있는 힘은 이제 한계에 달해 있었다. "이건 악몽이야. 악몽." 포경선 프린스턴 호의 일등 항해사인 레이몬드는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옆에는 선원 세 명이 힘을 합쳐 요동치는 조타륜을 단단히 부여 쥐고 있었다. 바다에서 단련된 선원들이었지만 파도가 워낙 거세기 때문에 요동치는 타륜을 고정시키는 것이 무척 힘겨워 보였다. 그 때 뭔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폭풍우를 뚫고 울려 퍼졌다. 우지직. 레이몬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범선의 이물에 위치한 보조 마스트가 강풍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져나간 것이다. 범선의 방향을 잡아주는 돛대였다. 프린스턴 호는 그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옆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런 바람 속에서 키만으로는 배의 방향을 제대로 지탱하지 못했다. 레이몬드는 목이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타륜을 전력으로 돌려라. 배가 기울어지는 반대방향으로." 명령을 내린 레이몬드는 서둘러 갑판으로 기어갔다. 하지만 바람이 워낙 거세게 불었기 때문에 기어가는 것이 결코 쉽진 않았다. 프린스턴 호의 책임자인 선장도 바로 조금 전 강풍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그 탓에 일등 항해사인 레이몬드가 프린스턴 호를 맡게 된 것이지만……. 레이몬드는 허리를 붙들어맨 밧줄에 의지하여 겨우겨우 갑판으로 갈 수 있었다. 이미 모든 선원들이 강풍에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몸을 밧줄로 선체에다 고정시킨 상태였다. 선원들 대부분은 갑판 위에서 사력을 다해 구조물에 달라붙어 있었다. 레이몬드는 그들을 향해 냅다 고함을 질렀다. "메인 마스트의 돛을 펼쳐라. 배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 하지만 레이몬드의 고함소리는 폭풍우 속에서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레이몬드가 거듭 고함을 지르고 나서야 선원들은 겨우 명령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런 강풍 속에 나서서 돛을 펼칠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레이몬드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곳에서 모두 물귀신이 되고 싶으냐? 이대로 가다간 깡그리 수장될 수밖에 없다." 선원들은 그때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판장이 선원들을 독려해서 메인 마스트로 기어갔다. 그 와중에 한 명의 선원이 바람에 휘말려 날아올랐다. "으아아아." 팽팽히 당겨진 동아줄이 맥없이 끊어졌다. 몸을 지탱해주던 밧줄이 끊어지자 거친 바다가 선원의 몸을 단숨에 삼켜버렸다. 남은 선원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하지만 남은 선원들은 사력을 다해 마스트에 달라붙었다. 돛으로 방향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침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선원들이 몸을 최대한 낮춘 채 돛을 고정시킨 밧줄을 풀려고 했지만 몸을 가누기도 힘든 판국이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각다 못해 갑판장이 도끼를 들어 동아줄을 내리쳤다. 다행히 팽팽히 당겨져 있던 밧줄은 도끼질 한 번에 맥없이 끊어졌다. "당겨" 갑판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선원들은 일제히 밧줄을 당기기 시작했다. 목숨이 걸려 있는 문제라서 선원들은 말 그대로 젖 먹던 힘까지 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불운한 선원 한 명이 또다시 날아가는 운명에 처했지만 다행히 돛은 펼쳐졌다. 어느 정도 올라가자 돛은 바람을 받아 찢어질 듯 활짝 펼쳐졌다. 파르르. 돛이 팽팽히 당겨지자 거의 뱃전 가까이 기울었던 프린스턴 호가 안정을 되찾았다. 레이몬드는 기를 쓰며 배의 이물을 파도가 오는 방향으로 인도했다. 파도를 정면으로 맞받아야만 배가 뒤집히지 않는 것이다. 파도가 선수에 부딪히며 선원들에게 물보라를 안겨줬지만 프린스턴 호는 다행히 전복될 위기에서 벗어났다. 위기를 넘긴 레이몬드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쳐지나갔다. "큰 파도가 치지 않아서 다행이로군." 문득 다른 배들이 걱정된 레이몬드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배보다 훨씬 큰 파도 속이라 도저히 사물을 식별할 수 없었다. 이대로는 항구로 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파도가 오는 방향으로 선수를 돌리며 폭풍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레이몬드는 잠자코 출항하게 된 계기를 떠올렸다. 생각이 미친 순간 입술을 비집고 욕설이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선주놈. 우릴 이런 지옥 같은 폭풍 속으로 내몰다니……. 돌아가면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겠다." 폭풍 때문에 아르카디아의 포경업은 거의 폐업 직전에 달해 있었다. 얼마 전부터 일기 시작한 폭풍우로 헤아릴 수 없는 포경선이 침몰했기 때문에 더 이상 바다로 나가는 범선이 없었다. 선원들은 한사코 바다로 나가기를 마다했다. 돈도 좋지만 목숨은 더욱 소중하기 때문이다. 폭풍우 속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선원들은 아예 선원생활을 깨끗이 청산해버렸다. 그 때문에 페이류트에는 지금껏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선원부족현상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프린스턴 호의 선주는 배를 항구에 가만히 놀려놓을 수 없었다. 프린스턴 호를 장만하며 엄청난 빛을 진 상태였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배를 출항시키려 했다. 자고로 쓸 수 없는 물건은 가치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출항하지 못하는 탓에 포경선의 값이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졌기 때문에 프린스턴 호를 팔더라도 빛을 갚을 길이 요원했다. 반대로 고래의 값은 사상초유로 치솟아 있었다. 고래 한 마리의 값이 예전의 열 배까지 뛴 상태였기 때문에 선주는 필사적으로 선원들을 설득했다. 거기에는 같은 처지에 놓인 여러 선주들이 가세했다. "이대로 놀고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비록 폭풍우가 거세긴 하지만 프린스턴 호는 최신형 대형 선박이야. 게다가 경험 많은 자네들이 있으니 어지간한 폭풍우 정도는 견딜 수 있을 것이라 믿네." 프린스턴 호의 선장은 당연히 출항을 거부했다. "하지만 프린스턴 호와 같은 대형선들도 여럿 침몰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겐 선원들의 생명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배들은 경험 없는 신출내기들이 몰았던 경우야. 인생의 반을 바다에서 보낸 자네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지. 만약 자네들이 고개를 잡아온다면 내 자네들에게 크게 한 턱 쓰겠네. 음 그게 좋겠군. 잡은 고래에서 자네들 몫을 두 배로 올려주겠네." "하지만……." "세 배면 어떤가?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나? 게다가 나말고도 여러 선주들이 배를 출항시키기로 했네. 만에 하나 폭풍우를 만나 배가 침몰하더라도 그 배들의 구조를 받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선주의 집요한 설득에 선장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선원들을 불러 설득한 끝에 마침내 프린스턴 호는 항구를 나설 수 있었다. 같은 처지에 놓인 세 척의 포경선과 선단을 이루고 말이다. 항해의 시초는 비교적 순탄했다. 별다른 폭풍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기에 선단은 용기를 내어 먼바다를 향했고 얼마 가지 않아 디커버리 호가 대형 향유고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어 포경선 네 척의 합동작전이 벌어졌고 향유고래는 수십 발의 작살을 얻어맞고 숨통이 끊어졌다. 그리고 처음 발견한 디커버리 호의 옆구리에 단단히 묶이는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으니……. 고래사냥의 성공에 고무된 포경선단은 먼 대양을 향해 조금 더 나왔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금껏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엄청난 폭풍우였으니…….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37회. 가장 먼저 침몰한 것은 디커버리 호였다. 거대한 고래를 옆구리에 매단 탓에 무게중심이 어긋나 있던 디커버리 호는 거대한 파도에 옆구리에 얻어맞자마자 그대로 전복되어 버렸다. 강풍과 파도 때문에 나머지 배들은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바람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뒤집힌 디커버리 호에 접근하다간 남은 배까지 무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세 척의 배는 단 한 명의 선원도 구하지 못하고 디커버리 호가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무심히 쳐다보아야만 했다. 그들은 눈물을 삼키며 뱃머리를 항구 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폭풍우는 그들마저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항구로 향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폭풍우에 시달린 지도 벌써 한 나절이 지났다. 레이몬드는 뱃전에 몸을 고정시킨 채 열심히 폭풍 속을 살폈다. "다른 배들은 과연 무사할까?" 함께 출항했던 레졸루션과 어벤져 호의 선원들은 프린스턴 호의 선원들 못지 않게 경험 많은 수부들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강력한 폭풍우 속에서는 감히 생사를 장담하지 못했다. 원양으로 나오는 배인 만큼 하나같이 복층구조의 대형 선박들이었지만 대자연의 힘을 극복하기엔 아직까지 역부족이었다. 열심히 파도 사이를 살피던 레이몬드의 얼굴이 암울하게 물들었다. "겨, 결국……." 파도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나무기둥. 크기나 형태를 보아 그것은 바로 범선의 메인 마스트가 틀림없었다. 아마도 레졸루션이나 어벤저 호의 것으로 짐작되는……. 메인 마스트를 잃은 배는 폭풍우를 견딜 수 없다. 조향 능력을 잃었으니 선체의 방향을 유지하지 못해 빙글빙글 돌다 옆구리에 파도를 얻어맞고 그대로 뒤집혀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 배의 선원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 때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려왔다. 뿌지직. 순간 레이몬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배를 지탱하고 있던 메인 마스트가 눈에 띄게 휘어지다 마침내 부러지려는 것이다. 질 좋은 삼나무로 만든 튼튼한 마스트였지만 워낙 강한 바람이라 견디지 못한 것 같았다. "아, 안돼." 레이몬드의 절규 어린 외침에도 불구하고 마스트는 중간 부분이 맥없이 부러지며 돛과 함께 흔적도 없이 바람에 날려가 버렸다. 조향 능력을 잃은 프린스턴호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 배를 넘을 듯한 크기의 파도가 프린스턴 호의 뱃전을 그대로 강타했다. 콰르르 프린스턴 호는 육중한 선체가 무색하게 벌렁 뒤집혀버렸다. 목숨을 걸고 버티던 선원들은 결국 바다 속으로 빠져드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목숨에의 애착 때문인지 몇몇 선원이 열심히 헤엄을 쳤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프린스턴 호가 침몰하며 생겨난 소용돌이는 선원들을 깡그리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갈 테니까……. 물 속으로 잠겨들던 레이몬드가 별안간 미소를 머금었다. "우린 비록 죽지만 프린스턴 호를 잃었으니 빌어먹을 놈의 선주는 확실하게 파산하겠군." 그 생각을 끝으로 레이몬드의 몸은 차가운 바다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눈이 부시군." 데이몬은 인상을 쓰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념관 속에 틀어박혀 있는 탓에 외출할 때마다 얼굴을 찡그려야 하는 것이 별달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태양광선이 닿지 않는 기념관 속에서 생활하는 탓에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하기 위해 데이몬은 하루에 한 번씩 밖으로 나와야 했다. 평상시에는 병사들이 준비해놓은 음식과 옷을 받아 들어가면 그만이었는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테오도르가 아침나절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몬은 빙그레 웃으며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날 찾았나?" 다소 초췌해진 모습을 보니 거듭된 격무로 많이 피로한 모양이었다. 테오도르는 씁쓸히 웃었다. "본 드래곤의 복원은 어느 정도 되었습니까?" "거의 다 되었어. 충분히 실전에 투입할 수 있을 정도로……." "반가운 소식이군요." 테오도르가 돌연 정색을 했다. "오늘은 저와 함께 궁정으로 가시지요. 예기치 않은 상황이 생겼는데 데이몬께서 회의에 참석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기치 않은 일이라니……." "자세한 일은 페르슈타인 공작께서 설명하실 것입니다." 데이몬은 짐짓 인상을 썼다. "또 백치 시늉을 해야 하는가?" "아닙니다. 윌리엄스 후작은 테제로스에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데이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보아 백치 시늉을 하는 것을 고역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그럼 한 번 가볼까?" 둘은 천천히 궁정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벌준비는 잘 되고 있는가? 얼굴을 보니 일이 많은 모양이군." 테오도르는 씁쓸히 웃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페르슈타인 녀석도 그 정도로 바쁜가?" "그분도 나름대로 바쁘십니다. 얼마 전에는 보급문제 때문에 도움을 청하러 왔다가 제 몰골을 보고는 그냥 가시더군요." "보급문제라니……." "트루베니아 침공에 쓰일 보급물자를 관리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 말입니다. 100만이 넘는 대군이 쓸 보급물자이다 보니 물량이 엄청나서 적당한 적임자가 없는 모양입니다. 아시다시피 전쟁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원활한 보급이므로 소홀히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들은 데이몬의 눈에 모호한 빛이 떠올랐다. "그 문제라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네." 테오도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적당한 사람을 하나 알고 있어. 그라면 아무리 많은 보급물자라도 무리 없이 관리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테오도르는 쉽사리 동의하지 못했다. "하지만 보급관리는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체계적이고 정확한 보급을 하지 않는다면 전쟁수행에 상당한 무리가 따릅니다." 데이몬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뒤흔들었다. "그래 어떤 사람이면 되겠나?" 잠깐 뭔가를 생각해 본 테오도르가 대답했다. "규모가 큰 상단의 관리책임자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방대한 보급물자를 차질 없이 보급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혹시 자네 로메인 남작이라고 들어보았나?" 테오도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그가 대륙에서 제일가는 상단의 총수를 모를 리가 없었다. "로르베인의 로메인 남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난 바로 그를 거론한 것일세." 테오도르는 정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하지요. 그라면 충분하고 말고요. 하지만 그 정도로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이 굳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정벌군의 보급담당을 맡으려 하겠습니까?" "그는 내 말 한마디면 당장 달려올 걸세. 그럼 자세한 얘기는 회의시간에 하도록 하지" 말을 마친 데이몬이 앞장서서 휘적휘적 걸어갔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테오도르가 곧 정신을 차리고 뒤를 따랐다. "어서 오십시오." 집무실에 들어서자 페르슈타인 공작이 반갑게 데이몬을 맞았다. 데이몬도 빙긋 웃으며 화답했다. "그래 수고가 무척 많다고 들었네." "별 말씀을……. 그건 그렇고 휘하 용병단원 둘을 나에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훌륭히 키워드릴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뭐 고마울 것까지야 있나? 둘의 미래를 생각하면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지." 간략하게 대꾸한 데이몬이 방안을 살폈다. 안에는 낯선 인물 몇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슈렉하이머가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웬일인지 크로비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들은 누구지?" 데이몬의 눈길이 닿자 페르슈타인 공작이 소개를 시작했다. "우선 이들은 내가 보유하고 있는 정보부의 요인들입니다.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기에 부득이 오시라 그랬습니다. 그러니 너그럽게 이해하시길……." "뭐 이해할 것까지야 있겠나?" 데이몬과 테오도르가 의자에 앉자 회의가 시작되었다. 테오도르가 심각한 표정으로 데이몬과 페르슈타인 공작을 쳐다보았다. "병력을 지원 받는 문제는 별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선 테르비아의 로시무스 1세가 예상보다 많은 30만을 파병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반색을 했다. "낭보로군. 윌리엄스 후작이 생각보다 맡은 역할을 잘 해 냈어. 역시 로시무스 1세는 회유보다 협박이 잘 먹혀드는 인물이지." 테오도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로시무스 1세는 근위기사단을 포함한 10개 기사단과 보급물자를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펜슬럿에서도 정병 25만을 파병하겠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역시 10개의 기사단과 보급물자를 약속했습니다." "테제로스는 어떻게 되었나?" "테르비아의 파병규모를 밝히자 테제로스 역시 충분한 병력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정예 사단 22만과 8개 기사단, 그리고 보급물자를 순차적으로 보내준다 하더군요. 그밖에 군소왕국에서 약속한 병력을 합하면 정벌군 규모는 최소한 150만이 넘을 것 같습니다." "그것 정말 반가운 소리로군." 하지만 페르슈타인 공작의 음성은 왠지 모르게 맥이 빠져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테오도르가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데이몬께서 보급물자를 관리할 사람을 물색해 주신다 하셨습니다. 로르베인의 로메인 남작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하던데……. " 그 말에 페르슈타인 공작은 귀가 번쩍 트였다. 지금껏 그가 가장 골머리를 앓아온 문제가 바로 보급담당 문제였다. 자질 있는 보급담당관을 선임해야만 무리 없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껏 그는 여러 상단에 사람을 파견해 적합한 사람을 물색했다. 하지만 상인들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안전이었고 그런 자들이 자청해서 위험한 전쟁에 나설 리가 만무했다. 때문에 페르슈타인 공작은 상당히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대륙에서 제일가는 상단의, 그것도 관리책임자가 아닌 총수가 보급을 맡아준다면……. 로메인 남작의 능력이라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150만에 달하는 대군의 보급물자를 적재적소에 분배하고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겐 확실하게 있는 것이다. 하지만 페르슈타인 공작은 역시 신중했다. "좋은 소식이긴 하지만 그가 과연 정벌군의 보급책임을 맡으려 하겠습니까? 보유한 재산도 이미 천문학적인 수준이라 하던데 굳이 위험한 전쟁에 참전할 필요가?" 데이몬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걱정하지 말게. 그는 트루베니아 출신이야. 고향을 되찾는데 나서지 않을 순 없지." "예? 로메인 남작이 트루베니아 출신이란 사실은 금시초문입니다만……." "굳이 알려고 하지 말게. 이미 그는 트루베니아를 정벌하는데 한 손 거들겠다는 의사를 밝혔네. 모르긴 몰라도 상당한 군자금을 준비해 놓았을 걸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요. 그가 가세한다면 보급담당관 선임문제와 모자라는 군자금문제는 깨끗하게 해결되겠습니다. 하지만……."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것을 보아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것 같았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38회. 데이몬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문제가 생겼지?" "예.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 생겼습니다. 최악의 경우 트루베니아 침공을 시도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조심스럽게 뜻밖의 상황을 설명했다. 뜻밖의 소식이라 듣고 있던 데이몬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트루베니아 대륙 사이의 해역에 현재 엄청난 폭풍우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수한 소용돌이와 광풍, 높은 파도가 바다를 지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가히 죽음의 바다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미 폭풍에 휩쓸려 많은 포경선이 침몰했습니다. 간신히 살아 돌아온 선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복층구조의 대형 포경선도 폭풍을 견디지 못했다더군요." "………." "제 생각입니다만 아무래도 500년 전 실버 드래곤의 저주가 재현된 것 같습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말이 끝나자 좌중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것은 한참 달아오르고 있는 정벌계획에 찬물을 끼얹는 소식이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대형 포경선이 폭풍우에 견디는 힘은 각급 전함보다도 뛰어납니다. 물론 선원들 또한 전함의 승무원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경험이 많지요. 그런 포경선이 침몰되었다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트루베니아와의 해로는 이제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말이 끝나자 데이몬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폭풍우가 벌써 발동되었다면 베르키스는 십중팔구 돌아가자마자 드래곤 로드를 부추겨 마법을 실행한 것이 틀림없었다. "빌어먹을……정말 용의주도한 놈이로군." 도저히 어찌해야 할지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백 오십만에 달하는 대군을 모아놓으면 무슨 소용이랴. 바다를 건널 방법이 없는데……. 아연한 데이몬의 얼굴을 쳐다보며 페르슈타인 공작은 조심스레 말을 이어나갔다. "경험 많은 선원들을 다수 물색해서 해로를 한 번 뚫어보라고 시켰습니다. 하지만 바다를 건너가며 어느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듣고 있던 테오도르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포경선이 침몰될 정도의 폭풍우라면 희생이 얼마나 클지 익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배가 뒤집히면 무장을 갖춘 병사는 빠져죽는 수밖에 없다. 허우적거리다 물 속에 잠겨드는 무수한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기에 테오도르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차라리 나중을 기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병력을 그토록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페르슈타인 공작은 냉정하게 테오도르의 말을 잘랐다. "안될 말이네. 놈들은 아마도 폭풍우를 믿고 별다른 대비를 하고 있지 않을 것이야. 그 때를 노려야만 트루베니아 정벌을 성공시킬 수 있네. 선단의 반, 최악의 경우 반에 반만 살아남아 트루베니아에 상륙하더라도 가능성은 있네. 하지만 놈들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아르카디아로 건너온다면 그때는 승산을 장담할 수 없어." "하지만 타국의 군주들도 바보는 아닙니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파악한다면 순순히 병력을 내놓으려 하겠습니까? 뻔히 죽을 줄 알면서 병사를 내놓으려는 군주는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파병요청을 받아들였네. 그러므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들이 약속한 병력을 받아낼 것이네. 필요하다면 전쟁까지 불사해야겠지?" 테오도르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방법이 조금 과격하긴 하지만 전시 상황인 만큼 총사령관의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했다. 누가 뭐래도 이 중에서는 페르슈타인 공작의 판단이 가장 정확할 터였다. 하지만 바다를 건너다 덧없이 죽어 가야할 병사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런 테오도르를 달래려는 듯 페르슈타인 공작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내키지는 않는다네. 세인들이 나더러 냉정하다 말하지만 이번 경우는 아니야. 정벌군 병사들은 엄연히 내 부하야. 내가 부하를 얼마나 아끼는지 자네도 익히 알고 있지 않는가?" "………." "정벌군 150만의 대부분을 잃게 되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야. 그로 인해 수많은 아르카디아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면 난 의당 그렇게 할 것이네." 장내는 또다시 숙연해졌다. 그 때 찢어지는 듯한 기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바로 슈렉하이머의 음성이었다. "방법은 있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슈렉하이머에게로 쏠렸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일 터였다. "병력을 단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무사히 트루베니아에 내려놓을 방법이 있습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다급하게 말을 받았다. 만약 150만 대군 전부를 무사히 트루베니아로 보낼 수 있다면 전쟁은 이미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슨 방법인가?" 슈렉하이머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로브자락 사이에서 사이하게 빛나는 눈빛이 데이몬을 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데이몬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정예로 구성된 특공대, 아, 카심 용병단 정도면 충분하겠군요." 잠시 말을 끊은 슈렉하이머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데이몬과 카심 용병단, 그리고 제가 트루베니아로 먼저 건너가야 합니다. 본 드래곤을 타고 간다면 무리 없이 대륙을 건너갈 수 있습니다." 조바심이 치밀었는지 테오도르가 재촉을 했다. "거, 건너가서 어떻게 하겠다는 뜻입니까?" "트루베니아 동남쪽에는 험준한 펠루시아 산맥이 있습니다. 그 뒤에는 금단(禁斷)의 구역인 엘프의 숲(Elven forest)이 위치하고 있지요. 과거 인간들이 번성했을 시기에도 엘프의 숲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어진 페르슈타인 공작의 말은 절박한 그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듯 했다. "그것이 어떻다는 거요? 제발 부탁이니 요점만 말씀해 주시오." "엘프의 숲 건너편에는………." 길게 이어진 슈렉하이머의 설명이 끝나자 사람들은 길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슈렉하이머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계획을 제시했던 것이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믿기 어렵다는 듯 재차 질문을 던졌다. "가능성이 있소?" "물론입니다. 전 오래 전에 엘프의 숲을 건너가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먼발치이지만 그곳을 보고 온 적도 있습니다." "뱀파이어가 되고 나서 말이오?" 슈렉하이머는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언데드는 엘프의 허락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때는 제가 신관이던 시절이었지요. 보편적으로 엘프는 베르하젤 교단의 성직자에게 관대하기 때문에 전 엘프 장로의 허락을 얻어 숲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착하긴 했지만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아르카디아의 지원군을 끌어들이려는 생각에서 갔었지만 부득이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지요. 제 능력으론 역부족이었습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탄성을 토해냈다. "놀랍소. 그런 계획까지 세웠다니……. 그래 지금은 가능할 것 같소?" 슈렉하이머는 데이몬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데이몬께서 도와주신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본 드래곤과 데스 나이트를 이용한다면 충분히 그곳의 방어벽을 깨뜨릴 수 있지요. 뿐더러 데이몬의 흑마법 실력이라면 가동시키는 것도 가능하지요. 한 번 시도해 볼 만한 계획 같은데 데이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데이몬은 두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대승정의 제안에 동의한다. 충분히 실현가능성이 있는 계획이야. 길게 생각할 것 없다. 난 카심 용병단과 함께 트루베니아에 건너가겠다." 테오도르가 슬며시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병력의 지원 없이 오크가 우글대는 트루베니아에 건너간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데이몬은 간단하게 테오도르의 말을 잘랐다. "어차피 우리에게 달리 선택할 방법이 있나?" "………." 테오도르의 입을 간단히 막아버린 데이몬은 페르슈타인 공작을 쳐다보았다. "자네는 병력을 정비하며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게. 여러 왕국에서 모인 병력들인 만큼 원활히 통제할 수 있도록 조련시켜야 할 테니 말일세. 걱정하지 말게. 반드시 임무를 성공시킬 테니." "괜찮으시겠습니까?" 데이몬은 가슴을 탕탕 치며 페르슈타인 공작을 쳐다보았다. "내가 누군가? 그 빌어먹을 베르키스 놈의 레어에서도 빠져나온 몸이 아닌가? 걱정일랑 붙들어 매놓고 기다리게. 반드시 좋은 소식을 전해 줄 테니……." 페르슈타인 공작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좋습니다. 뒷일은 제게 맡기시고 트루베니아로 건너가십시오. 대신 임무를 반드시 성공시키셔야 합니다." 잠시 말을 끊은 페르슈타인 공작의 눈망울에 괴이한 빛이 일렁였다. "부디 보중하십시오. 아시다시피 제 목숨은 데이몬께 달려있지 않습니까?" "종속의 혈충 말이로군. 걱정하지 말게. 난 결코 죽지 않는다네. 복수를 성공시키기 전까지는 말일세." 말을 마친 데이몬은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너는 페르슈타인 공작과 힘을 합쳐 정벌군을 조련시키도록 해라. 내가 임무를 성공시킬 경우 즉각 투입할 수 있게 말이다." "알겠습니다." 테오도르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의 어른이나 다름없는 데이몬이었기 때문에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도리어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카심 용병단이 드디어 힘을 발휘할 때가 되었군. 슈렉하이머 당신도 우리 카심 용병단의 일원이오. 우리 한 번 멋지게 해 봅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 때 페르슈타인 공작이 데이몬을 불렀다. "데이몬께 부탁 한 가지만 드리겠습니다." "뭔가?" 공작의 부탁은 전혀 뜻밖이었다. "제 아들인 크란시아를 데리고 가 주십시오. 그 녀석의 실력이라면 짐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소린가? 감히 생환을 장담할 수 없는 위험한 임무이네. 그런데 자네 뒤를 이을 큰아들을 사지로 보내겠다는 뜻인가?" 하지만 페르슈타인 공작의 결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녀석의 경험을 키워주고 싶습니다. 갖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어야만 제 뒤를 이을 자격이 생기지요. 그리고 전 데이몬을 믿습니다." '이런 능구렁이를 봤나?'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공작이 이렇게 나오는 저의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는 자신과의 관계개선을 꾀하려는 것이다. 그가 품은 야망의 성취여부는 오로지 데이몬의 마음에 달려 있었으므로……. 페르슈타인 공작은 계속해서 데이몬을 설득했다. "어차피 데이몬께서 위험에 처한다면 저 역시 무사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카심 용병단에는 이미 듀크 나이츠가 둘이나 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크란시아는 트루베니아에 대한 경험이 있습니다." "트루베니아에 대한 경험이라니?" 페르슈타인 공작은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팔라딘 자격심사 때 크란시아는 두 번이나 트루베니아에 다녀왔습니다. 장담하건데 전력에 보탬이 되면 되었지 짐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네. 승낙하겠네." 데이몬의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슈타인 공작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감사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 결정은 크란시아에게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자고로 인간이란 고난을 이겨내며 성장하는 법 아니던가? 결정이 내려지자 그들은 분분히 준비에 들어갔다. 데이몬을 위시한 카심 용병단원들이 마음놓고 활약할 수 있도록 제반 물품을 마련해주어야 했던 것이다. 슈렉하이머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준비할 것이 많고도 많았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39회. 우르르르 쾅. 먹구름이 가득 끼여 있는 하늘을 뚫고 외줄기 번개가 내려꽂혔다. 번개에 언뜻 비친 바다의 모습은 평소에는 보기 힘든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포세이돈(바다의 신)의 분노가 닿았음일까……. 강풍이 맹렬히 휘몰아치며 엄청난 크기의 파도를 수도 없이 만들어냈다. 성난 파도는 바다를 샅샅이 헤집고 다녔다. 희생물을 집어삼켜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로 인해 헤아릴 수 없는 뱃사람들이 수장되어야 했으니……. 엄청난 수의 배를 침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는 아직까지 모자란다는 듯 미쳐 날뛰고 있었다. 하지만 먹이는 이제 쉽사리 걸려들지 않았다. 고래나 서펜트들은 깊은 바다 속에 꼭꼭 숨어버렸고 물고기들 역시 좀처럼 해면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운 나쁜 몇몇 바다 생물들만이 암초에 내동댕이쳐져 으스러졌을 뿐, 주목표인 아르카디아의 배들은 이미 파도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피해 있었다. 벌써 침몰되었거나 아니면 항구에 단단히 정박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파도는 정박중인 배도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는 듯 맹렬히 들이치고 또 들이쳤다. 마치 인간의 손길이 닿은 모든 것을 파괴시켜버리겠다는 듯이. 정박해놓은 배가 몇 척 부서지자 인간들은 아예 배를 육지에 끌어올려 버렸다. 자연의 분노에 정면으로 저항이라도 하려는 듯이 말이다. 폭풍의 여파는 트루베니아 대륙에도 미쳤다. 하지만 트루베니아는 대조적으로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물을 싫어하는 종족인 오크에겐 보유한 배가 한 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의 노예로 힘겹게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도 배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물을 찾아 날뛰는 거친 파도는 트루베니아 대륙의 서쪽 해안마저 연이어 강타하고 있었다. 종족전쟁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던 500년 전과 동일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그림자들이 수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과 동일한 실루엣이었지만 키가 작고 옆으로 퍼진 외형이 왠지 모르게 이질감을 주는 종족들. 푸르스름한 피부가 비에 젖어 번들거렸고 노란 눈동자는 뱀의 눈알을 연상시킬 정도로 소름끼쳤다. 떡 벌어진 어깨에 울퉁불퉁한 근육이 꿈틀거렸고 주먹으로 날이 시퍼렇게 선 무기를 불끈 움켜쥐고 있었다. 그들은 500년 전에 트루베니아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극한 종족인 오크였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오크 전사들이 해안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포진해 있는 것이다. 운집한 오크 전사들은 하나같이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조악하지만 체격에 딱 맞는 갑옷. 나무에 쇠테를 두른 방패. 뿔이 솟아난 투구와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글레이브는 인간노예의 손길이 닿아 만들어졌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전투의 종족이라는 별칭답게 오크 전사들은 싸울 준비를 빈틈없이 갖춘 채 혹시 건너올지도 모를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주둔한 곳은 과거 이름난 항구도시 중 하나였던 메르카 시(市)였다. 과거에는 이름난 해상교역도시로써 천문학적인 부를 축척했다고 전해지는 메르카였지만 5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저 흉물스러운 잔해만이 남아 이곳이 한 때 도시였다는 사실만을 간신히 일깨워주고 있었다. 대로를 따라 늘어선 건물들은 태반이 허물어져 있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까닭에 주거지는 도로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고 허물어진 상태였다. 오크 전사들은 건물들 사이, 비가 들이치지 않는 곳에 주둔해 있었다. 단단히 자리를 잡은 것을 보니 이곳에서 제법 오래 머물 작정인 것 같았다. 그들은 바로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의 명령에 의해 각 종족에서 차출되어 해안방어에 나선 병력들이었다. 만에 하나 상륙할지도 모를 아르카디아의 정벌군을 맞아 궤멸시키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비바람 사이를 뚫고 난데없이 음산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기괴한 저음을 보아 인간이라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의 음성이었다. "이로써 아르카디아 인간들이 상륙할 만한 거점은 모두 점령했다. 놈들은 결코 트루베니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음성의 주인은 바로 게덴하이드였다. 크로센 제국 공습에 나섰다가 데이몬의 손에 호되게 당해 본체를 잃은 그가 되살아나서 오크 방어군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묵묵히 폭풍을 응시하던 게덴하이드는 머리를 흔들었다. "상황을 보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정벌군 함대가 이런 험악한 폭풍우를 뚫고 올 가능성은 거의 없을 테니.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이런 폭풍우 속에 배를 띄울 리가 없지." 게덴하이드의 눈빛이 별안간 빛났다. "만에 하나 허점을 노린다 하더라도 걱정할 것은 없다. 무려 100만에 가까운 대군을 해안에 포진시켜 놓았으니 인간 놈들은 상륙도 못해보고 떼죽음 당할 것이다." 준비는 완벽히 끝났다. 백만의 해안 방어군은 드래곤들이 모두 깨어날 때까지 해변을 물샐틈없이 봉쇄할 것이다. 진형을 둘러보던 게덴하이드의 눈동자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데이몬이란 놈에게 두 번이나 당하다니……."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려왔다. 명색이 9서클의 엑스퍼트이면서도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소멸되는 꼴이라니……. 생각이 미치자 자신도 모르게 데이몬에 대한 두려움이 치밀어 올랐다. 보편적으로 언데드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리치와 데스 나이트는 일반적인 언데드와는 조금 달랐다. 특히 리치는 몇 가지에 있어서는 거의 인간과 맞먹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분노와 증오, 그리고 두려움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때는 고작해야 3서클에 지나지 않는 햇병아리였지만 지금은 자신을 훌쩍 능가해버린 가증스런 존재, 데이몬에 대해 게덴하이드가 느끼는 감정은 단 하나 두려움이었다. 엄습해오는 두려움을 떨쳐버리려는 듯 게덴하이드가 고개를 내저었다. "놈은 철저히 베르키스 님께서 맡으실 것이다. 난 그저 명령만 수행하면 된다. 이까짓 미개한 오크 놈들을 통제해서 해안 방어진을 구성하는 것은 나에겐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으니까……." 베르키스가 서둘러 게덴하이드를 부활시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한 때 인간이었던 게덴하이드에겐 해안봉쇄에 들어갈 천문학적인 병력을 효과적으로 통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특히 그는 과거 암흑 군대의 참모까지 맡은 적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전투의 종족이라 일컬어질 만큼 오크는 용맹스럽다. 하지만 약점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생각이 단순한 탓에 마구 돌격해서 닥치는 대로 때려부술 수는 있을지언정 우회작전 같이 머리를 쓰는 전술을 쓸 수 없는 것이 최대의 약점이었다. 그 약점은 2차례에 걸친 종족전쟁에서도 여러 번 증명되었다. 수적으로 훨씬 우세를 점했지만 효과적인 인간군대의 작전에 휘말려 부대 전체가 맥없이 전멸해버린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쉽게 말해 전투는 치를 수 있을지언정 전쟁을 치르기엔 역부족인 종족이 오크였다. 베르키스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게덴하이드를 파견했다. 한 때 인간이었던 게덴하이드에겐 오크의 대군을 효과적으로 통솔할 수 있는 지성이 있었다. 게덴하이드를 부활시킨 뒤 베르키스는 단 가지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바로 차출된 오크 사단을 진두지휘해서 아르카디아에 접한 해안을 봉쇄하라는 명령이었다. "널 믿겠다. 아르카디아 정벌군을 단 하나라도 트루베니아에 발을 들여놓게 해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한 때 암흑군대의 참모를 했던 게덴하이드인 만큼 베르키스는 추호도 걱정하지 않고 수면에 들어갔다. 그리고 게덴하이드는 봉쇄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휘하 리치 다섯과 함께 동쪽 해안으로 향했다. 이미 베르키스의 명에 의해 트루베니아의 각 오크 부족에 대대적으로 동원령이 내려져 있던 상태였다. 게덴하이드는 오십만에 달하는 오크 대군을 거느리고 보무도 당당하게 행군을 시작했다. 각 부족에서 지원한 병력이 꾸역꾸역 서쪽 해안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에 해안방어병력은 어느덧 백만을 훌쩍 넘겨버렸다. 하지만 거기에 문제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보급 문제였다. 백만의 오크대군이 하루에 먹어치우는 식량은 실로 방대했다. 각 부족에서 병력에 딸려보낸 식량으로는 불과 한 달도 지탱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르카디아의 정벌군이 언제 몰려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릴 비울 순 없었기 때문에 게덴하이드로서는 뭔가 대비책을 세워야 했다. "부득이 인간들의 흉내를 내야겠군." 게덴하이드는 과거의 경험을 살려 대규모의 보급부대를 편성했다.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풍족한 종족을 찾아다니며 식량을 긁어보아 동부 해안으로 보내는 부대였다. 게덴하이드는 보급부대에다 정예로만 구성된 대규모 호위대를 붙였다. 각 부족이 반발할 경우 사정없이 찍어누르기 위해서였다. 오크라는 종족을 다루기 위해서는 무력이 필수라는 사실을 게덴하이드는 잘 알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대규모 보급부대가 돌아온다면 보급사정은 눈에 띄게 좋아질 터였다. 게덴하이드의 예상은 적중했다. 보급부대가 긁어모아온 식량으로 인해 장기 주둔할 준비는 오래지 않아 완비되었다. 이 정도 추세라면 드래곤이 깨어날 때까지 충분히 방어진을 유지할 수 있을 터였다. 편성이 어느 정도 끝나자 게덴하이드는 호위대를 지휘하는 대장에게 모종의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인간 노예들의 조직적인 반란을 조기에 차단하기 위한 명령이었다. 아르카디아의 기사들이 잠입해서 인간 노예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농후했다. 이미 헤아릴 수 없는 아르카디아 인들이 트루베니아에 다녀가지 않았던가. 비록 바다가 봉쇄되긴 했지만 게덴하이드는 미약한 가능성도 간과하려 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공간이동에 성공한 놈들이 있을 수도 있다. 혼란의 소지는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낫지." 지금 상황에서 인간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면 이만저만 큰 일이 아니었다. 보급로가 차단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게덴하이드는 아르카디아에서 잠입한 자들과 접촉한 노예는 단 하나도 살려두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본보기로 몇 명을 처치한 뒤 나머지는 식량으로 삼기 위해 모두 끌고 오라.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산 채로 끌고 오는 것이 나을 것이다." 후방의 혼란방지와 식량확보를 염두에 둔 명령이었다. 명을 받은 오크 부대장들은 희희낙락하며 출발을 서둘렀다. 여간해서는 맛보기 힘든 인간의 고기를 먹어볼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제 되었군." 만반의 준비를 마친 게덴하이드에게 남은 것은 아르카디아 정벌군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게덴하이드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처럼 험한 폭풍우를 뚫고 상륙할 아르카디아 선단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미쳐 날뛰는 바다. 폭풍우가 휩쓸고 있는 바다 위에는 바다새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강풍에 휘말리거나 깃털이 젖을 경우 바다에 익숙한 갈매기도 날아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들은 폭풍우를 피해 둥지 깊숙이 틀어박힌 상태였다. 하지만 폭풍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다 위를 날아가는 겁없는 날짐승(?) 몇 마리가 여기에 있었으니……. 우르르르 쾅. 강풍과 함께 벼락줄기가 여기저기 내려꽂혔지만 날짐승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하늘을 활강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들은 생명체가 아니었다. 드래곤과 흡사하지만 뼈만 앙상하게 남은 동체를 가진 언데드 몬스터. 이리저리 구멍 뚫린 날개를 퍼덕이는 것들은 바로 본 드래곤이었다. 죽은 드래곤의 사체로 만들어낸 마물인 본 드래곤이 거친 바다 위를 날아가는 것이다. 새들이 감히 날지 못할 정도로 혹독한 환경이었지만 본 드래곤들은 유유히 바다 위를 활강하고 있었다. 깃털이 젖을 이유가 없고 강력한 힘으로 날개를 휘저을 수 있었기에 강풍 사이를 비행하는데는 아무런 무리가 없어 보였다. 제일 앞에는 비교적 작은 덩치의 본 드래곤이 날아가고 있었다. 머리에서 꼬리 끝까지 대략 30미터 가량 되는 큰 덩치였지만 뒤에 따라가는 본 드래곤이 워낙 거대했기에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것이다. 뒤에 따라가는 본 드래곤은 정말 거대했다. 길이가 50미터를 훌쩍 뛰어넘을 것 같았고 연신 퍼덕이는 날개짓도 무척 힘찼다. 거무스름한 빛이 도는 동체는 살아있을 때 블랙 드래곤이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게 했다. 또다시 그 뒤에 바짝 붙어 날아가는 하얀 색 실루엣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살아있는 드래곤이었다. 은빛과 확실히 구별할 수 있는 하얀색 동체는 그것이 극 한랭지에서 서식하는 화이트 드래곤이란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중앙에 위치한 가장 큰 본 드래곤의 등판에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비에 흠뻑 젖은 상태였는데 바람에 날려가지 않기 위해 본 드래곤의 동체와 연결된 동아줄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다. 힘이 드는 모양인지 하나같이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모습이었다. 도합 일곱 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유독 힘들어하는 자가 눈에 띄었다. "원 참. 살아 생전에 본 드래곤을 타보게 될 줄은……." 얼굴을 찡그린 채 동아줄을 단단하게 틀어쥔 자는 삼십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수려한 기사였다. 잘 단련된 체격, 각진 얼굴에 꽉 다물어진 입을 보아 의지가 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크란시아. 초유의 권력자인 페르슈타인 공작의 맏아들로써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카심 용병단과 동행하고 있는 처지였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자식을 키움에 있어 사자가 새끼를 키우는 방법을 그대로 적용해서 키웠다. 그 탓에 크란시아는 결코 평탄치 않은 성장과정을 거쳐야 했다. 여타의 기사들과 어우러져 험하게 생활하고 수련한 그는 어지간한 고난 정도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참을성이 거의 한계에 달할 정도로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엄청난 고역이로군." 본 드래곤과 맞닿은 엉덩이에서 뼈를 엘 듯한 한기가 몰려왔고 연신 들이치는 비바람으로 말미암아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실정이었다. 맹렬히 불어대는 바람이 흠뻑 젖은 몸에서 사정없이 체온을 빼앗아갔기 때문에 크란시아는 계속해서 마나를 운용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체온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강풍으로 계속해서 밀리는 몸을 열심히 지탱하던 크란시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머지 사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지만 자신과는 달리 그리 힘겨워하진 않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크란시아는 혀를 내둘렀다. "대단한 자들이로군." 그가 탄 거대한 본 드래곤에는 카심 용병단의 대장과 검술교관이하 단원들이 타고 있었다. 하나같이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지탱하는 것을 보니 이런 경험을 많이 해 본 것 같았다. 얼마 전에 듀크 나이츠에 들어온 신임 기사 둘이 눈에 띄자 크란시아는 반색을 했다. "저들과 대화나 좀 나눴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런 강풍 속에서는 고함을 질러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터였다. 몸이 얼어오는 것을 느낀 크란시아는 서둘러 마나를 운용했다. "열흘 걸린다고 했으니 앞으로도 한참 남았군. 과연 내가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 하지만 선두의 지크레이트에 탑승한 사람들은 러셀런트에 타고 있는 사람들과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지크레이트의 등판에는 데이몬과 슈렉하이머, 그리고 율리아나가 탑승한 상태였는데 러셀런트와는 달리 지크레이트에는 바람과 비를 막아주는 실드가 설치되어 있었다. 데이몬은 의도적으로 검사들을 깡그리 러셀런트에 몰아넣었다. 체력단련을 빌미로 일체의 방어막을 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비바람에 노출된 검사들이 이처럼 곤욕을 치르는 것이다. 그들은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트루베니아로 건너가고 있었다. 목적은 아르카디아에 모인 대군이 바다를 건널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데이몬은 미간을 찌푸린 채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를 쏘아보고 있었다. "정말 엄청난 폭풍우로군. 배가 남아나지 않을 만도 하군." 옆에 앉아 있던 슈렉하이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정통으로 걸린다면 단 한 척의 배도 살아남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리로 가는 것이 맞습니까? 전 도저히 방향을 짐작할 수가 없군요." "방향은 틀림없소. 이미 난 한번 건너온 경험이 있소." "그런데 데이몬께서는 어떻게 해서 바다를 건너셨습니까?" 데이몬은 슬며시 웃으며 제반 정황을 설명해 주었다. 킹 서펜트를 현혹시켜 건너왔다는 말을 듣자 슈렉하이머는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전 팬텀 스티드밖에 생각하지 못했는데……." "감히 접근하는 놈이 없는 걸 보니 킹 서펜트가 바다의 제왕이란 말이 실감나더군요." 말을 이어나가던 데이몬이 갑자기 인상을 쓰며 고함을 질렀다. "어딜 만지는 거야? 손떼지 못해." 뒤에 바짝 붙어 앉아 있던 율리아나가 무슨 생각인지 데이몬의 가슴팍을 더듬고 있었다. 연신 고함을 질렀지만 그녀는 손을 빼려 하지 않았다. 윽박지른다고 순순히 물러날 율리아나가 아니었다. "왜 고함을 지르고 그래요? 잡을 게 없어서 잡은 건데." "바닥을 잡으면 되잖아?" "차가워서 싫어요. 더 좋은 게 있는데 왜 그걸 잡아요? 좀 잡으면 안 되요?" 데이몬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져 올라갔다. "이놈의 계집애를……. 바다에다 그냥 집어 던져버린다." "그런다고 누가 겁먹을 줄 알아요?" 아랑곳없이 말대답에 열중하는 율리아나를 노려보던 데이몬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율리아나를 처리해버릴 방법이 없었다. 칭얼거릴까봐 지크레이트에 태운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그만 두자."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용기를 얻은 율리아나가 아예 팔을 둘러 데이몬의 허리를 감았다. 그러자 데이몬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펄쩍 뛰었다. "이게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데이몬은 성난 눈빛으로 율리아나와 폭풍우가 치는 바다를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수틀리면 그대로 집어 던져버릴 기세였다. 보고 있던 슈렉하이머가 점잖게 말렸다. "그만 하시지요. 그런데 제게 하실 말씀이란 게 무엇입니까." 시기 적절하게 말머리를 돌린 탓에 데이몬의 주의가 슈렉하이머에게로 쏠렸다. 매서운 눈빛으로 율리아나를 한 번 쏘아본 데이몬이 슈렉하이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당신에게 할 말이 있었지." 등판에 얼굴을 붙이고 있는 율리아나를 흘겨본 데이몬이 말없이 마나를 재배열했다. 이제부터 나눌 대화는 누가 들어서는 안될 성질의 것이었다. "슬립." 잠들어버린 율리아나를 살짝 뉘어놓은 데이몬이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골치 덩어리라니까……. 이럴 줄 알았다면 용병단에 받아들이지 않는 건데." "제가 보기엔 데이몬께서 그녀가 장난치는 것을 즐기시는 것 같습니다만……." "그만 합시다. 당신 앞에선 도무지 말을 못하겠소." 손을 내젓던 데이몬이 돌연 정색을 했다. "대승정께선 혹시 날 데려왔을 때 사용한 차원이동 마법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소?" "그렇습니다만." 슈렉하이머의 대답에 데이몬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그 때 나를 다시 내가 살던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소?" "고향이 그리우신가 보군요." 데이몬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단지 복수해야 할 놈이 있어서 그런 거요. 놈을 손봐준 뒤 난 다시 이리로 돌아올 것이오. 적어도 나에겐 중원보다 이곳이 더 친숙하니까." "………." "필요한 것은 뭐든 준비할 수 있소. 드래곤 하트야 걱정할 필요가 없고……. 게다가 난 크로센 대제의 기념관에서 그의 소지품을 몇 가지 발견했소. 놀라운 비밀과 함께 말이오." 슈렉하이머의 눈가에 이채가 서렸다. "놀라운 비밀이라니요?" "당신은 혹시 크로센 대제의 정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소?" 데이몬의 말에 슈렉하이머는 고개를 저었다. 데이몬과는 달리 크로센 대제는 단신으로 트루베니아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르긴 몰라도 크로센 대제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 이는 본인말고는 없을 터였다. 데이몬은 조용히 크로센 대제의 정체에 대해 말해 주었다. "당신이 날 구했을 당시 추적자들 중에 영호명이란 놈이 있었소. 바로 그놈이 크로센 대제였소." 데이몬의 설명이 이어지자 슈렉하이머는 깜짝 놀랐다. "데이몬을 따라 들어왔던 이가 과거에 떨어져서 크로센 대제가 되다니……. 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소지품을 이용해 주인을 데리고 왔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습니까? 상식적으로 그런 일은……" "하지만 사실이오. 기념관 속에서 난 그가 직접 남긴 글을 읽었소. 그 역시 이유를 모르고 있더군." "놀랍군요.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것이 차원이동 마법이지만 그런 일까지 벌어질 수 있다니…….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데이몬의 실력이 크로센 대제보다 강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데이몬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중원에 있었을 때라면 가능한 일이었지. 그땐 충분히 놈을 이길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차원이동을 하는 과정에서 놀라울 정도로 강해졌소. 대승정이 알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른 무사는 단순한 깨달음만으로도 큰 성취를 얻을 수 있소. 그가 정녕 현경에 올랐다면 난 죽었다 깨어나도 그를 이길 수 없소." 슈렉하이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알기론 제대로 차원이동의 절차를 밟지 않을 경우 육신이 그대로 분해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례로 데이몬을 데리러 갔을 당시 총 6개조가 떠나갔습니다만 돌아온 조는 저희밖에 없습니다. 당시 저희들은 그들이 차원이동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소멸되었을 것이라 추정했습니다." "바로 그 압력으로 인해 놈이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이오. 압력을 견디는 과정에서 그는 적어도 열 배 이상 강해졌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군요."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크로센 대제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아니었다. "기념관에서 생활하며 나에게 한 가지 의문이 생겼소." "그것이 무엇입니까?" 데이몬은 어두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지만 실드에 가로막혀 헛되이 흘러내릴 뿐이었다. 떨어지는 물방울을 쳐다보며 데이몬은 고즈넉이 말을 이어나갔다. "현경에 오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오. 이른바 인간의 경지를 훌쩍 넘어선 반선의 경지란 말이오. 내가 알기로 현경에 오른 무인은 수백 년에 달하는 수명을 보유할 수 있다고 하오. 그런데 그런 경지에 오른 크로센 대제가 고작해야 팔십 일세를 일기로 세상을 타계하다니. 대승정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소?" 슈렉하이머의 눈구멍에 괴이한 빛이 일렁였다. "데이몬께서는 대제가 살아있다고 추정하시는 것입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소. 내가 생각하기로 그는 다시 중원으로 돌아간 것 같소." "………." "어차피 그는 목적을 모두 이뤘소. 아르카디아 대륙을 개척해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으니 그에겐 더 이상 바랄 것이 있을 턱이 없지. 게다가 80세라면 함께 활약했던 심복이 하나씩 세상을 떠날 시기요. 반생을 같이 했던 아내도 마찬가지겠지? 게다가 그는 나와는 달리 중원에 자신의 근원이 있소. 다시 말해 그가 통솔하던 문파가 있다는 뜻이지. 모르긴 몰라도 그는 죽음으로 위장하고 다시 중원으로 돌아간 것 같소." 슈렉하이머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센 대제라면 충분히 가능하셨을 것입니다. 그 분이라면 고위급 마법사와 드래곤 하트 정도는 어렵지 않게 구하실 수 있으셨을 테니까요. 어쩌면 저처럼 차원이동작전에 참여했던 마법사들이 아르카디아에 건너가 크로센 대제께 도움을 드렸을 지도 모르고……."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준비된다면 다시 한 번 중원으로 갔다 올 수 있겠소?" 슈렉하이머는 뼈만 남은 손가락을 들어 머리를 가리켰다. "장담은 드릴 수 없지만 시도는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차원이동의 공식은 모두 제 머릿속에 들어있으니까요." "모쪼록 부탁하오. 일단 종족전쟁을 성공리에 마치고 난 후의 일이겠지만 말이오." "알겠습니다. 어차피 전 데이몬께 종속되어 있는 몸.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슈렉하이머의 얼굴에 괴이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다분히 미소로 짐작되는 빛이었다. "데이몬께서 제 라이프 포스 베슬을 쥐고 협박하신다면 전 꼼짝없이 복종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당신의 라이프 포스 베슬은 나도 어디 있는지 모른다오. 데스 나이트를 시켜 인크레시아 깊숙이 박아두라고 했으니 말이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던 데이몬이 전방을 쳐다보았다. 율리아나가 날려가지 않게 부축하던 슈렉하이머가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바람이 이렇게 강한데 대원들이 무사할지 걱정이군요." "괜찮을 거요. 카트로이 놈이 뒤따르며 떨어지는 놈을 챙길 테니까……. 멍청한 자식. 그냥 편하게 러셀런트에 타고 갈 것이지 쓸데없는 똥 고집을 부려 고생을 사서 하다니……." "그런데 전 카트로이 님께서 동행하시는 것이 정말 의외입니다. 드래곤과의 싸움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설마 트루베니아까지 따라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데이몬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걸렸다. "관여하기 싫어도 해야 할 게요. 보나마나 베르키스는 놈에게 이를 박박 갈고 있을 테니 말이오. 죽기 싫으면 함께 싸워야 할 테지?" "아시면서 데리고 오셨습니까?" "놈이 자청한 일이오. 그나저나 그 녀석이 인간에 대해 얼마나 공부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인간에겐 배워도 괜찮을 게 있고 배워선 안될 게 있는데……" "카심 용병단과 함께 다닌다면 아무래도 인간의 좋은 면만 배울 것 같습니다만……. 동료애나 의리 같은 것 말입니다."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말은 틀렸소. 놈은 운이 없는 편이지. 하필이면 인간들 중에서 나 같은 천고의 악당을 만나 고생을 해야 하다니……." "………." 슈렉하이머가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두 마리의 본 드래곤과 한 마리의 화이트 드래곤은 강풍을 가르며 어두운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러셀런트에 탄 대원들의 고역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폭풍 속을 날아가는데 진력이 난 카트로이가 마침내 러셀런트에 타고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젠장맞을……. 위대한 종족인 드래곤이 이런 저주받은 뼈다귀 따위에 몸을 내맡겨야 한다니……." 툴툴거리긴 했지만 앞으로도 열흘 가까이 날아가야 한다는 말에 카트로이는 두말하지 않고 러셀런트 위에 내려앉았다. 그 덕에 편해진 것은 용병단원들이었다. 마법 방면으론 데이몬보다 한 수 위라고 볼 수 있는 카트로이가 러셀런트의 등판에 아주 튼튼한 방어막을 펼쳐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거의 그로기 상태에 이르렀던 크란시아도 기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휴. 이제 살 것 같군." 쏟아지는 비바람에서 자유로워진 대원들은 이번에는 심각한 허기를 느꼈다. 날려가지 않으려고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몸을 지탱했기 때문이었다. 눈치를 챈 하인리히가 배낭을 풀어 먹을 것을 꺼냈다. 본 드래곤 위에서 불을 피울 순 없었기 때문에 준비한 식량은 말린 고기 따위의 건량이 대부분이었다. 한 덩이의 식량을 제럴드에게 건네준 하인리히가 크란시아에게 다가왔다. "좀 드시겠습니까?" "고맙군." 마침 시장하던 참이라 크란시아는 마다하지 않고 말린 고기를 받아들었다. 건량을 우적우적 씹는 크란시아를 쳐다보며 하인리히가 예를 올렸다. "정식으로 인사를 못 드렸군요. 크란시아 분대장님. 저는 페이디언 님의 분대에 소속되어 있는 하인리히입니다." 정신 없이 먹던 와중에서도 크란시아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만나서 반갑네. 대단한 검술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네." "과찬이십니다. 그저 운이 좋아서……." "아니야. 듀크 나이츠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실력밖에 없어. 실력이 뒷받쳐주지 않는 운으론 역부족이지." 크란시아의 말에 하인리히는 얼굴을 붉혔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아들이라는 어마어마한 배경을 지닌 듀크 나이츠의 분대장마저 자신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수줍음이 많은 신임 기사를 쳐다보며 크란시아는 기분이 다소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적들이 우글거리는 트루베니아에서 활동할 것을 감안하니 같은 기사단 소속의 동료들이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난 드래곤 사냥을 해 본 적이 없네. 그러니 자네가 많이 조언해 줘야 할 것 같네." "조언해 드릴 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드래곤을 상대하는 역할은 철저히 데이몬과 데스 나이트들이 맡거든요. 어쩌면 소드 마스터이신 미첼 교관님도 가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크란시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왔다. 당당한 덩치의 사내. 용병단의 대장인 카심이었다. 막 식사를 마쳤는지 입가에 고기 부스러기를 묻힌 채로 카심이 손을 내밀었다. 레이토나에서 오며 크란시아와 안면은 익혔지만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서둘러 출발하느라 인사가 늦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무슨 말씀을…….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크란시아는 웃는 낯으로 카심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벌써 하루 가까이 날아왔지만 서로 인사를 나눌 짬은 없었다. 각 왕국에 파견되었던 카심 용병단원들은 돌아오자마자 황궁의 뒤뜰로 불려갔고 그런 다음 대기하고 있던 본 드래곤을 타고 날아올랐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동료들과 해후를 할 틈이 있을 턱이 없었다. 카심이 인사를 마치자 이번에는 미첼이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전하의 아드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이제부턴 카심 용병단원이지요. 모자란 게 많으니 많이 도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씩 웃는 크란시아를 보며 미첼은 왠지 모르게 친밀감을 느꼈다. 페르슈타인 공작이라는 희대의 권력자의 아들이지만 크란시아는 생각 외로 소탈했다. 다시 말해 고위귀족 가문의 도련님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만함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미첼과 인사를 마치자 크란시아는 나머지 용병들에게 다가가서 먼저 인사를 청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무, 무슨 말씀을……." 페터슨과 잭슨이 허둥대며 인사를 받았다. 크란시아 같은 거물의 아들이 먼저 인사를 청해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인사를 마친 크란시아의 시선이 제럴드에게 닿았다. "자네가 테제로스에서 듀크 나이츠의 명예를 한껏 드높였다는 바로 기사로군. 만나서 반갑네." "별 말씀을……." 쑥스러워하는 제럴드의 어깨를 두드려준 크란시아가 카심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카심 대장님." "예? 예." 크란시아가 거리낌없이 대장님이라 부르자 카심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혹시 트루베니아에서 무슨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글쎄요? 저도 아무런 언질을 받지 못했습니다. 데이몬께서는 도착한 뒤에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거든요. 아무래도 비밀 유지 때문에 그러신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크란시아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막강한 본 드래곤과 데스 나이트가 동원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인원으로 어떤 임무를 수행할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용병들도 그 점이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말수가 적은 잭슨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밝혔다. "혹시 수면 중인 드래곤을 암살하려는 임무가 아닐까요?" 잭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심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일전에 데이몬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아무래도 그 임무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오크 족의 노예가 된 트루베니아 사람들을 해방시켜 반란을 일으키게 하려는 것 아닐까요." 이어진 패터슨의 의견은 의외로 크란시아가 받았다. "그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전 이미 두 번이나 트루베니아에 건너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트루베니아 사람을 몇 명 보았죠." 크란시아의 얼굴이 별안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들은 오크에게 완벽히 길들여져 있습니다. 뼈 속까지 오크 족의 노예가 되어버린 거죠. 제 생각으로 그들을 설득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 그런 일이……." 용병들은 깜짝 놀랐다. 오크의 노예로 길들어져버린 인간. 도대체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패터슨이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그런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그들의 사고방식은 우리와는 많이 틀립니다. 마을 사람들이 오크에게 잡혀가도 그들은 일체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잡혀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할 뿐이지요. 그리고는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을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크란시아의 말에 용병들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크란시아의 말대로라면 트루베니아 사람들은 모습만 인간일 뿐 오크의 가축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앞으로 벌어질 3차 종족전쟁의 향방에 따라 아르카디아의 사람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몸을 부르르 떤 카심이 겨우 한 마디를 토해냈다. "기필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겠군요. 우리의 후손들이 그런 처지에 놓이지 않게 하려면 말입니다." "당연히 이겨야지요." 크란시아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용병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열흘동안의 지겨운 비행은 마침내 끝났다. 멀리 육지가 보이자 용병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한껏 성난 바다만 보다가 모처럼 만나는 육지가 그토록 반가울 수 없었다. "땅이다."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육지냐? 한달 이상을 바다에서 보내는 뱃사람들이 정말 존경스러워." 크란시아가 잔뜩 신이 난 용병들을 쳐다보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배를 타고 왔을 때 저희들은 백일 가까이 육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 정도면 무척 빨리 도착한 것이지요." 물론 배를 탔다면 트루베니아에 접근할 수도 없었을 터였다. 휘몰아치는 폭풍우는 거의 열흘 가까이 이어졌고 그 어떤 거선이라도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뒤집혔을 터였다. 본 드래곤을 타고 오는 동안 바다가 잔잔한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용병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오래 전에 잊혀진 대륙 트루베니아를 쳐다보았다. "저곳이 몬스터의 천국인 트루베니아인가?" "아르카디아에서는 볼 수 없는 오크가 바글거린다며?" 목을 빼고 쳐다보는 사이 트루베니아 대륙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 때 앞쪽에서 기성이 울려 퍼졌다. 지크레이트가 날아가는 방향에서 나는 소리였다. 쐐애애액. 그것이 데이몬의 트레이드마크인 매직 미사일이 날아가는 소리란 것을 알아차린 카심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적의 출현인가?" 매직 미사일이 날아가는 쪽에 새처럼 보이는 물체가 하늘에 떠 있었다. 눈에 마나를 집중한 카심은 오래지 않아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와이번이로군. 그런데 데이몬은 어떻게 저것들을 먼저 볼 수 있었지." 카심이 쳐다보는 사이 매직 미사일 다발은 와이번들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트루베니아 대륙이 보이자마자 탐지 마법을 전개했다. 적지에 들어선 만큼 경계에 만전을 기해야 했던 것이다. 그 탓에 와이번의 출현을 먼저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와이번들은 정찰을 맡은 드래곤의 끄나풀일 가능성이 높았다. 적을 발견하자마자 캐스팅해 놓은 매직 미사일이 반사적으로 날아갔다. 난데없이 매직 미사일 다발이 날아들자 와이번들은 사력을 다해 회피했다. 몬스터 특유의 야성으로 인해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추적하는 매직 미사일의 속도는 와이번보다 몇 배나 빨랐다. 공기가 잔뜩 응축된 매직 미사일 다발은 와이번 세 마리의 몸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케르륵 고통 어린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추락하는 와이번은 하나도 없었다. 워낙 거죽이 단단한 탓에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추락할 정도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매직 미사일은 주공(主攻)이 아니었다. 시간차를 두고 발사한 에너지 볼트가 와이번 두 마리의 몸통을 사정없이 꿰뚫고 지나갔다. 파파팍. 와이번들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낭자한 피를 쏟아내며 아래로 떨어졌다. 요행히 살아난 한 마리의 와이번이 결사적으로 날개를 퍼덕이며 도주했다. 에너지 볼트가 아슬아슬하게 몸통을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은 혀를 찼다. "빗나갔군. 본 드래곤을 복원하느라 그 동안 수련을 하지 않았더니……." "저놈은 제가 맡겠습니다." 옆에 있던 슈렉하이머가 수인을 맺었다. 마나가 재배열되더니 한 가닥의 뇌전 줄기가 창공을 갈랐다. 라이트닝 계열이라 날아가는 속도가 엄청났다. 파지지직. 라이트닝 버스트. 라이트닝 볼트보다 월등한 파괴력을 지닌 강력한 공격마법에 명중한 와이번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시커멓게 그은 거죽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뜻밖의 위력에 슈렉하이머도 놀란 눈치였다. "놀라운 위력입니다. 역시 공격력에선 흑마법 계열을 따라잡을 것이 없군요." "정작 놀라운 것은 당신이오. 어둠의 마력을 벌써 이렇게 능숙하게 사용하다니 말이오." 슈렉하이머는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실 계획이십니까?" "계획했던 대로 해야지. 일단 놈들을 좀 혼란시킬 필요가 있지 않겠소?" "교란작전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부근의 노예 마을을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트루베니아에 도착한 본 드래곤들은 착륙하지 않았다. 대신 산의 능선을 따라 낮은 고도로 날며 무언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40회. 수색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본 드래곤들은 내륙 쪽으로 한 나절 가량 수색을 거듭하며 날아갔다. 본 드래곤의 등판 위에서 대원들은 낯선 트루베니아의 풍경을 여과 없이 감상했다. 잊혀진 대륙 트루베니아의 정경은 아르카디아와 별달리 차이가 없었다. 단지 인간의 모습을 보기 힘들다는 점이 유일한 차이였다. 대신 그 자리를 몬스터들이 채우고 있었다. 심심찮게 모습을 드러내는 몬스터들을 보며 대원들은 연신 손가락질을 해 댔다. "정말 몬스터들의 천국이로군. 놀라운 일이야 오우거들이 이처럼 대놓고 대로를 활보하다니……." "글세 말입니다. 아르카디아에 이런 곳이 있다면 각지의 사냥꾼들이 죄다 몰려들겠는데요?" 그 때 패터슨이 갑자기 호들갑을 떨었다. "저것 좀 봐. 이상한 몬스터 한 마리가 있어. 고블린 무리와 싸우고 있는데?" 카심이 유심히 살펴본 뒤 설명을 해 주었다. "뇰이라는 몬스터야. 사람과 형태가 비슷하지만 머리통이 늑대의 모습이지. 오크보단 힘이 조금 세지만 군집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아." "우와. 언제 보셨어요. 전 지금까지 한 번도 뇰을 본 적이 없는데……." 카심이 인상을 쓰며 패터슨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독서 좀 해라. 임마. 몬스터 도감에 다 나와 있는 내용이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앞서 날아가던 지크레이트가 급격히 하강했다. 착륙하려는 모양이었다. 이어 러셀런트도 급강하를 시작했기에 대원들은 다급히 몸을 고정시켰다. "드디어 착륙하는군." 땅을 밟는다는 생각에 대원들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잔뜩 어려 있었다. 본 드래곤들이 착륙한 곳은 산과 산 사이에 둘러싸인 평지였다. 본 드래곤 두 마리가 서서히 날개를 접으며 착륙을 시도했다. 무릎 높이로 쌓여 있는 낙엽을 자욱하게 날리며 본 드래곤들이 사뿐히 대지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탑승했던 대원들이 분분히 땅으로 뛰어내렸다. 얼굴에 생기가 감도는 것을 보니 착륙한 것이 무척 좋은 눈치였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땅인가? 역시 사람은 땅을 밟으며 살아야 해."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은 서둘러 본 드래곤을 수습했다. 덩치가 거대한 만큼 눈에 띌 우려가 높았다. 적지인 만큼 매사에 조심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각자 갑옷과 무기를 점검하도록……. 이제부터 오크 놈들과 신물나게 싸워야 할 것이다." 데이몬의 명령에 대원들은 긴장하며 싸울 채비를 갖췄다. 가장 먼저 그들은 갑주를 착용했다. 입을 갑주는 각자 완벽히 준비해 온 상태였다. 크란시아를 비롯한 제럴드와 하인리히는 준비해 온 듀크 나이츠의 갑주를 착용했고 나머지 용병들은 데이몬에게 지급 받은 갑옷을 입었다. 물론 그것들은 인크레시아에서 골라낸 최고수준의 대마법 갑옷이었다. 미첼에겐 갑주를 지급할 필요가 없었다. 펠젠틴 공습 때 부서지긴 했지만 미첼이 보유한 환상의 갑옷에는 드래곤 로드가 직접 걸어놓은 복원마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미첼이 꺼낸 환상의 갑주는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브론즈 골렘과 싸우며 부서진 부분이 완벽히 복원된 것이다. "오랜만이로군." 모처럼 환상의 갑주를 입게 되어서인지 미첼은 한껏 신이 나 있었다. 드래곤 로드가 만든 갑옷이라 그런지 여타의 갑옷과는 수준자체가 틀렸다. 미첼은 휘파람을 불며 환상의 갑옷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무기와 갑주의 점검이 끝나자 데이몬이 검사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오크를 상대할 때의 요령을 설명해 주려는 의도에서였다. "이제부터 너희들이 주로 싸울 상대는 오크다. 지금껏 한 번도 오크와 싸워본 적이 없을 테니 내 말을 잘 듣도록 해라." 패터슨이 나서서 너스레를 떨었다. "제가 듣기로는 용병보다도 약하다고 하던데요. 윽."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패터슨의 이마에서 불꽃이 튀었다. 말을 끊었다는 이유로 데이몬이 사정없이 쥐어박았던 것이다. 머리를 감싸쥐고 울상을 짓는 패터슨을 노려보며 데이몬이 말을 이어나갔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으면 오크에게 된통 당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비록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기는 하지만 원천적으로 오크는 맹수나 다름없다. 따라서 오크를 상대할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조금이라도 방심할 경우 뜻밖의 역습을 당할 수도 있으니 사정보지 않고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놓도록. 종족전쟁 당시 난 어설프게 오크를 대하다가 참담하게 당한 애송이를 여럿 목격한 적 있다." 데이몬의 말에 일행은 침묵을 지켰다. 지금껏 오크와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기에 어떻게 싸워야 할지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주위의 눈치를 살피던 크란시아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제가 한 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좋다." 데이몬이 승낙하자 크란시아는 일행을 둘러보며 말문을 열었다. "데이몬께서 말씀하셨듯이 오크는 결코 만만히 볼 적이 아닙니다. 저번에 건너왔을 당시 함께 왔던 일행들은 오크와 접전을 치렀습니다. 처음에는 만만히 보고 달려들었는데 생각과는 많이 틀리더군요. 놈들의 포위공격으로 말미암아 함께 온 수련기사들이 다수 목숨을 잃었습니다. 맹수라고 표현하신 데이몬의 말씀은 틀림없습니다. 놈들은 겁을 먹지 않으며 추호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오크를 상대할 때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합니다." "과연 경험자는 틀리군." 손을 뻗어 크란시아의 어깨를 두드려 준 데이몬이 손가락을 뻗어 산마루 쪽을 가리켰다. "일단 우리가 갈 곳은 저곳이다. 본 드래곤 위에서 파악한 바로는 인간들이 거주할 것이라 짐작되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우린 그곳에서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인간들이 사는 마을로 간다고 하자 카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이곳 인간들을 포섭해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입니까?"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일단은 그렇다. 이미 난 슈렉하이머 대승정과 함께 계획을 짜 두었다. 그러니 내 지시대로 따르기 바란다." "알겠습니다." 대원들은 조용히 데이몬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뒤따르던 크란시아의 얼굴에는 의혹이 떠올라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곳 인간들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불가능할 텐데…….' 하지만 크란시아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임무 수행 중에는 철저히 리더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법이다. 대원들은 넓게 산개한 채 조심스럽게 마을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갔다. 각자 자신을 지킬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간격을 제법 넓게 유지했다. 행군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미첼이 뭔가를 발견했다. "정지." 경고성이 들리자 대원들은 일제히 은폐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미첼이 뭔가를 발견한 것 같았다. 카심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이유를 물어보았다. "무슨 일인가?" "뭔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미첼은 조심스럽게 검을 뽑아들었다. 기름칠을 해 두었기 때문에 검 뽑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러던 사이 수상쩍은 소리는 점점 커졌다. 귀를 기울이고 있던 카심이 조심스럽게 소리의 정체를 유추해 보았다. '아무래도 두 발로 걷는 몬스터인 것 같군. 발소리가 가벼운 것을 보니 고블린이나 어린 오크 정도 될 것 같군.' 숨을 죽이고 있는 사이 풀숲 사이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놀랍게도 튀어나온 것은 인간이었다. 그것도 열 서너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준비하고 있던 카심이 잽싸게 소년의 허리를 낚아챘다. 깜짝 놀란 소년이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노련한 카심이 이미 입을 틀어막은 다음이었다. "읍. 읍." 소년이 기성을 지르며 연신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카심의 강철같은 팔뚝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카심은 조심스럽게 소년을 데리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려 했다. 그 때 카심의 귀에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다른 자가 또 있어." 그 말에 미첼과 크란시아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당도하기도 전에 풀숲을 헤치고 그림자 서넛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년과 같은 인간이었는데 스물이 넘어 보이는 건장한 청년들이었다. "으헉." 그들은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일행을 보자마자 달아나는 것이다. 엉거주춤 서 있던 미첼이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잡아올까요?" "아니 내버려 둬. 하나 잡았으니 다른 녀석은 필요 없어." 고개를 흔든 데이몬이 카심에게로 다가갔다. 카심은 한창 소년을 달래고 있었다. "해치지 않는다. 뭔가 물어볼 것이 있어서 그런 것뿐이니 소리 지르지 말거라. 고함지르지 않겠다면 손을 때 주겠다." 살며시 손을 뗐지만 소년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듯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카심은 먼저 소년의 차림새를 샅샅이 살폈다. 피골이 상접한 몸에는 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고 제대로 씻지도 않은 듯 얼굴이 전신에 얼룩투성이였다. 한눈에 보아도 힘들게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카심은 최대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뭐니?"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일행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볼 뿐이었다. 그 때 데이몬이 다가왔다.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소년의 것으로 짐작되는 꾸러미를 집어들었다. 제압 당하는 과정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 꾸러미를 풀어본 데이몬의 눈가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라……. 몰골을 보아하니 마을에서 도망쳐 온 것 같구나." "………." "도망친 녀석들은 널 잡으러 온 것 같은데 마을에서 왜 도망쳤느냐?" 소년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데이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데이몬이 익숙한 트루베니아 억양으로 말을 건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백 년 동안 단절된 만큼 트루베니아와 아르카디아 사이에는 엄연히 언어의 괴리가 존재했다. 독자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아르카디아의 언어는 억양이나 어조가 트루베니아의 말과는 사뭇 달랐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질감을 확실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 경계심을 푼 듯 소년은 데이몬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당신은 누구죠?" "………." "말투를 보니 트루베니아 사람 같은데 맞나요?"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그런데 왜 아르카디아 인들과 함께 다니는 거죠?" "할 일이 있어서 그렇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마을에서 도망친 거냐?" 소년의 눈가에 별안간 눈물이 맺혔다.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소년은 소리 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난 저항군에 가입하기 위해서 마을을 탈출했어요. 죽어도 마을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이곳에 저항군이 있느냐?" 소년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급했는지 데이몬이 재차 채근했다. "저항군은 어디에 있느냐?" "나도 잘 몰라요. 일전에 듣기로 델로크 산맥에 저항군이 살고있다고 들었거든요." 듣고 있던 슈렉하이머가 앞으로 나섰다. "델로크 산맥이라면 이곳에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걸어서 한 달이 넘게 걸리는 곳이지. 설마 너 혼자 그곳을 찾아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슈렉하이머의 기괴한 음성에 놀랐는지 소년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 데이몬이 소년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주었다. "왜 저항군이 있는 곳으로 가려 하느냐?" 잠시 머뭇거리던 소년이 마침내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놈들이 아버지를 잡아갔어요. 사냥하시다 다리를 다친 아버지를 말이에요. 그 간악한 놈들은 작년에 어머니마저 잡아갔어요. 이젠 저 혼자밖에 없어요. 흑흑흑." "………."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도리어 아버지를 놈들의 마을까지 데려다주기까지 했어요. 그래서 전 마을을 빠져나왔어요. 저항군에 가입해서 오크 놈을 하나라도 죽이려고요." 대원들은 침묵을 지켰다. 소년의 절박한 사정이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아까 그들은 왜 널 잡으러 왔느냐?" "제가 탈출하면 다른 사람이 대신 잡혀가기 때문에 잡으러 온 것이죠." 데이몬은 손을 뻗어 그렁그렁한 소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네 힘으론 델로크 산맥까지 가지 못한다. 대신 우리를 도와주지 않겠느냐?" 소년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네가 살던 마을로 우릴 안내해 다오. 너의 안전은 우리가 책임지겠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소년의 안색이 딱딱하게 질렸다. "그건 안 되요. 마을 사람들은 결코 당신들을 마을에 들여놓지 않을 거예요." "그것은 왜 그렇지?" "마을 사람들은 아르카디아 사람들을 극히 싫어해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괜찮다. 우린 뛰어난 실력을 가진 기사들이다. 그러니 아무 걱정말고 우릴 네가 살던 마을로 안내해 다오." 하지만 소년은 여간해서는 고개를 끄덕이려 하지 않았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41회. 보고 있던 크란시아가 말없이 배낭을 풀었다. "이것 좀 먹어보겠니?" 크란시아가 내민 것은 건량으로 준비해 온 말린 고기였다. 그것을 보자 소년의 눈빛이 빛났다. 오크의 노예로 살아오던 소년에게 고기란 무척 귀한 물건이었다. 힘들게 기른 가축을 고스란히 오크부족에 바치기 때문에 인간 노예들은 오로지 곡물과 채소만 먹어야 했다. 그러나 단백질을 보충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크의 눈을 피해 이따금 아주 이따금 고기를 맛보곤 했다. 그 탓에 소년은 고기의 맛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던 크란시아가 가장 효과적인 미끼를 제시한 것이다. 주저하던 소년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먹어도 되나요?" 크란시아는 소년의 손이 닿지 않게 고기를 든 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네가 살던 마을로 우릴 안내해 준다면 주겠다." 소년은 심각한 갈등에 휩싸였다.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 싫긴 했지만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고기를 보니 마음이 점점 약해졌다. 보고 있던 데이몬이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만약 우릴 마을로 안내해 준다면 말린 고기 한 덩이를 더 주겠다." 그 말이 결정타였다. 군침을 삼키던 소년이 마침내 승낙했다. "좋아요. 마을로 안내하겠어요." "잘 생각했다." 고개를 끄덕인 크란시아가 들고 있던 고기를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상당히 배가 고팠는지 소년은 고기를 받자마자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절 따라오세요." 말린 고기를 입에 문 채로 소년이 몸을 돌렸다. 일행은 조용히 소년의 뒤를 따랐다. 마을은 그리 멀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일행의 행보는 상당히 더뎠다. 사람 사는 마을이라면 소로 정도는 있을 법도 했지만 길 비슷한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마을 밖으로 출입이 전혀 허용되지 않나 보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소년의 뒤를 따르던 일행의 앞에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초라한 귀틀집이 백여 채 정도 모여있는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마을 외곽에는 통나무를 잘라만든 목책이 세워져 있었다. 몬스터의 습격으로부터 마을사람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세운 듯 했다. 일행은 소년을 앞세운 채 조심스럽게 마을로 걸어 들어갔다. 그 때 목책 위에서 갑자기 고함소리가 들렸다. "멈춰라." 목책 위로 사람들의 머리통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수는 약 이백 명 정도……. 그들은 적의 어린 표정으로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가 남자들이었다. "더 이상 접근하면 사격하겠다." 자세히 보니 마을 사람들은 일행들에게 활을 겨누고 있었다. 대나무로 만든 듯한 조악한 활이었다. 그 모습을 본 일행은 걸음을 멈췄다. 하나같이 갑주를 단단히 차려입고 있었기 때문에 저따위 엉터리 활 따위엔 신경 쓸 필요도 없었지만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행은 순순히 지시에 따랐다. 주위를 둘러본 카심이 앞으로 나갔다. "우린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오. 그저 대화를 나누고자 왔을 뿐이오." "개수작부리지 마라. 만약 대화를 하고 싶으면 톰을 이리로 보내라." 크란시아가 고개를 돌려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데이몬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크란시아는 말린 고기를 씹고 있던 소년을 불렀다. "네 이름이 톰이니?" 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사람들이 널 보내지 않으면 대화를 나누지 않겠다고 하는구나. 어떻게 할까?" 크란시아의 얼굴을 힐끔 쳐다본 톰이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고기를 더 준다면 마을로 들어갈게요. 까짓 것 나중에 또 도망쳐 나오면 되니까." "괜찮겠니?" "예. 몇 대 때리고 말겠죠. 뭐." 아연한 표정을 지은 크란시아는 마음을 굳힌 듯 말린 고기 한 덩이를 꺼내어 톰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따가 마을에 들어간 뒤 한 덩이 더 주마." 고기를 받아든 톰은 희희낙락해 하며 마을 쪽으로 뛰어갔다. 그 와중에서도 말린 고기를 꾸역꾸역 입 속에 밀어 넣으며 말이다. 톰이 다가가자 목책의 문이 열렸다. 청년 둘이 달려나와 톰의 몸을 낚아챈 뒤 서둘러 몸을 돌렸다. 톰의 모습이 사라지자 문 사이로 장년의 사내 하나가 걸어나왔다. 조금 전에 들린 음성의 주인으로 짐작되는 이였다. 일행 쪽으로 다가온 사내는 거리를 둔 채 걸음을 멈췄다. "그래 무슨 일로 오신 거요." 카심이 앞으로 나섰다. "당신이 이 마을의 촌장이오?" "그렇소." 사내는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지만 눈빛이 형형한 것을 보아 꽤나 강단이 있어 보이는 사내였다. 잠시 촌장의 모습을 관찰하던 카심이 말문을 열었다. "왜 우릴 적대하는 거요? 우린 당신들을 도우러 왔소." "흥. 도움?" 촌장은 코웃음을 쳤다. 그것을 보아 아르카디아 사람에게 그리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서슬 퍼런 독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래 무슨 도움을 주러 왔소? 진정으로 우릴 돕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이곳에서 사라져 주시오. 그게 돕는 것이오." "………." "당신들이 하는 일이야 뻔하지 않소? 쓸데없이 오크 부족이나 들쑤셔 놓아 우리에게 고스란히 보복이 돌아오게 하는 일 아니면 순진한 마을 처녀들이나 건드리는 것이 당신들이 즐겨 하는 짓 아니오? 당신들이 한 번 다녀가면 얼마나 많은 마을 사람들이 죽어나가는지 혹시 아시오? 마을 청년들에게 쓸데없는 생각을 불어넣어서 떼죽음 당하게 만들면 그렇게 속 시원하시오?" 촌장의 냉소에 카심은 말문이 콱 막혔다. 트루베니아 사람들이 이토록 아르카디아 사람을 싫어할 줄은 지금껏 짐작도 못했다. "우린 나름대로 오크와 공존하고 있소. 부디 그 균형을 깨지 마시오." 카심은 질 수 없다는 듯 항변하려 했다. "공존하는 것과 노예로 살아가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제 생각으론……." "그것은 당신들의 생각일 뿐이오. 우리에겐 우리만의 방법이 있소." 카심은 맥이 탁 풀렸다. 트루베니아 사람들이 노예생활에 이토록 길들여져 있다니……. 넋 나간 듯한 카심의 모습에 기가 살았는지 촌장의 독설은 계속되었다. "당신들이 뭘 하러 건너왔는지는 모르지만 조용히 사라져 주시오. 그게 우릴 돕는 길이오." "하, 하지만……." 촌장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경고하겠소. 참고로 우린 당신들을 마을 안으로 한 발짝도 들일 생각이 없소. 순순히 물러나지 않으면 사정보지 않고 공격을 가하겠소." 촌장이 손을 들자 목책 위에 포진한 사람들이 일제히 활을 겨누었다. 수틀리면 사정없이 사격을 가할 기세였다. 카심은 어찌 할 바를 몰라 쩔쩔 맸다. 물론 저따위 화살공격이 정예로 구성된 일행에게 해를 끼칠 순 없을 테지만 애초에 싸우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때 데이몬이 앞으로 나섰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앞으로도 계속 오크의 노예로 살아가겠다는 뜻인가?" 촌장의 시선이 데이몬에게로 쏠렸다. "그렇소. 우린 우리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이 있소. 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말고 떠나주는 게 우릴 돕는 것이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데이몬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가자. 우리가 잘못 찾아온 것 같다." 일행의 얼굴에 얼떨떨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렇게 쉽게 포기하다니……. 촌장도 꽤나 당혹했던 모양이었다. 한바탕 일전을 각오했는데 상대가 의외로 쉽게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바라던 일이라 촌장은 냉정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잘 가시오. 그리고 두 번 다시 이곳으로 오지 마시오." 촌장의 배웅을 받으며 일행들은 조용히 데이몬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모습은 오래지 않아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일행이 묵묵히 온 길을 되짚어 돌아가는데 크란시아가 별안간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이곳 사람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저희들이 맡은 임무가 맞습니까?" 데이몬의 시선이 슬며시 크란시아에게로 향했다. "일단은 그렇네." "제 생각으론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타성에 깊이 젖어있지요. 모르긴 몰라도 반란을 일으킨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데이몬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톰이란 소년은 거리낌없이 저항군에 가입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어린 마음에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면 생각이 틀려지기 마련이지요." 크란시아는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이곳에 온 아르카디아 기사들에게도 잘못이 없진 않습니다. 오크 족의 노예라고 깔보고 업신여기는 것이 기본이니 트루베니아 사람들이 악감정을 품을 만 하지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트루베니아 사람들은 저희들과는 사고방식 자체가 틀립니다. 제 생각으론 계획을 대폭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크란시아를 응시하던 데이몬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자네 생각이 틀렸네. 난 단지 접근하는 방법이 틀릴 뿐이라고 생각하네." 그러나 크란시아는 쉽게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 "저번에 왔을 때 저희들도 최대한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보려 했습니다. 오크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싸우다 죽는 쪽을 택하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먹혀 들어갔나?" "씨알도 먹히지 않더군요. 그들은 나름대로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쪽을 택했습니다. 완전히 타성에 젖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지요." 데이몬은 고개를 흔들며 크란시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역시 방법이 틀린 거야. 내 방식대로 한 번 해결해 볼 테니 한번 지켜보겠나?" "………." 침묵을 지키는 크란시아에게서 시선을 거둔 데이몬은 슈렉하이머를 쳐다보았다. "대승정. 마을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는 오크 부족이 어디쯤 있었소?" "산아래 평야 지역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별로 규모가 크지 않은 부족이던데……." 그 말을 들은 데이몬은 대원들을 불러모았다. "이제부터 임무를 하달하겠다." 데이몬은 대원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어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 어려운 임무는 아니니까 긴장 풀도록 하라. 이번 임무에는 검사들만 동원할 테니 각자 장비를 챙긴 뒤 준비를 서두르도록……." 카심이 의혹 어린 표정을 지었다. "무슨 임무입니까?" "탐색전 삼아 오크 부족에 쳐들어가서 한 바탕 휘젓고 오는 것이다. 부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적당히 싸우다가 기회를 봐서 빠져나오도록 하라. 오크와의 첫 전투이니 만큼 각별히 신경 쓰도록……." 영문을 몰랐지만 대원들은 묵묵히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일행의 능력을 견주어볼 때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다크메이지] 12장 대륙 침공의 서막. 342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은 율리아나를 데리고 근처 나무둥치로 다가갔다. "생각 같아선 너도 함께 딸려보내고 싶지만 참는다. 짐이 될 게 뻔하니까……." 생각대로 율리아나가 발끈했다. "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영감탱이가 봤어요?" "하긴 널 겪어본다면 오크들도 울화통이 터져 자살해버릴 테지?" 데이몬의 익살에 대원들은 쿡쿡쿡 웃으며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율리아나의 독기 어린 눈빛이 쏘아졌지만 데이몬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저기가 오크 부족이로군." 카심이 눈을 빛내며 목책을 노려보았다. 오크의 마을 주위에는 상당히 규모가 큰 목책이 빙 둘러 쳐져 있었다. 형태가 비슷한 것을 보니 노예들이 동원되어 지은 것 같았다. 카심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대원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목책을 노려보고 있었다. 패터슨이 카심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할까요? 보초들을 먼저 처리할까요?" 용병 시절의 경험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카심이 한심하다는 듯 패터슨을 노려보았다. "절그렁거리는 중장갑주를 입고 놈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나? 오크는 우리보다 청각과 후각이 월등히 발달되어 있다고 들었다. 그러니 우린 그저 정면으로 밀고 들어가서 마주나오는 놈들을 흠씬 두들긴 뒤 퇴각해야 한다." 말을 마친 카심이 크란시아를 불렀다. "혹시 오크 전사를 상대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까? 아시다시피 저희들은 오크와 한 번도 싸워보지 않았습니다." 크란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놈들과 싸울 때는 포위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오. 힘이나 싸움실력은 별 볼일이 없지만 난전을 기가 막히게 잘 치르는 놈들이오. 서슴없이 등에다 칼을 꽂는 놈들이니 서로의 배후를 잘 지켜주어야 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설명을 들은 카심이 몸을 일으켰다. "자. 공격." 중장갑주로 무장한 일곱 명의 결사대(?)는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오크 부족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그들을 발견한 오크 보초병이 다급하게 뿔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전과는 어떤가?" 카심이 피곤한 표정으로 보고를 시작했다. "대원들의 보고를 합쳐보니 대략 백 마리 정도 처리한 것 같습니다. 부상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크란 놈들 정말 잘 싸우더군요. 마치 버서커(狂戰士)나 다름없는 놈들이었습니다. 크란시아님의 조언이 없었다면 상당히 곤욕을 치를 뻔했습니다." "대단하군. 일인당 열 이상을 처치했으니……." 카심은 빙긋 웃었다. "뭐 패터슨 같은 녀석이야 오크 서너 마리 갖고도 쩔쩔 맺지만 다른 사람들이 잘 싸웠지요. 특히 미첼과 제럴드가 맹활약을 했습니다. 각기 스무 마리씩은 잡은 것 같습니다." "수고들 했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패터슨을 쳐다보며 데이몬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이곳에서 노숙하도록 하지. 내일 마을에 찾아갈 테니 모두들 푹 쉬도록 해." "아, 알겠습니다." 도저히 데이몬의 속을 모르겠다고 속으로 투덜대며 카심이 몸을 돌렸다. 오크 부족을 왜 습격했는지 대원들은 아직까지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취익. 그렇다면 토르 부족을 습격한 놈들이 아르카디아의 인간들이 확실하단 말이냐?" "췩. 그렇습니다. 전사들이 외부에 나가있었기 때문에 놈들을 미처 잡지 못했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분기를 참지 못하고 몸을 바르르 떠는 이는 우람한 체구의 오크 부대장이었다. 게덴하이드의 명에 따라 보급부대 호송의 책임을 맡아 토르 부족으로 파견된 오크 부대장은 크르흐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크르흐는 평범한 오크보다 머리 하나가 클 정도로 덩치가 당당했다. 그리고 덩치에 충분히 걸맞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오크 세계에서는 힘이 곧 법이었기 때문에 부대장은 부하들을 찍어누를 만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크르흐는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부대장이었다. 그는 광기가 흐르는 눈빛으로 토르 부족장을 쳐다보았다. "췩. 놈들이 노예들이 사는 마을 쪽에서 접근한 게 확실한가?" 멍청한 부족장은 자신의 대답이 미칠 파장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취익. 그렇습니다. 그것을 보아 놈들은 분명히 노예들의 마을에 갔다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취익. 지금까지 여러 번 쓴맛을 보았으니 노예들은 결코 아르카디아 놈들과 상대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취익. 판단은 내가 한다." 크르흐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사령관인 게덴하이드는 이미 아르카디아의 인간과 접촉한 노예를 하나도 살려두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두 압송해서 해안방어병력의 식량으로 삼겠다는 명령이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노예 마을을 폐쇄하겠다. 이것은 사령관님의 명령이다." "취익? 무슨 말씀이신지?" "노예는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우리가 데려가겠다. 해안으로 끌고 가서 식량으로 삼을 생각이다. 그리고 토르 부족의 전사들도 모두 우리가 데리고 간다." 깜짝 놀란 부족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취익. 안 됩니다. 그렇다면 저희들이 당장 굶게 됩니다." "명령을 받들지 않는다면 토르 부족을 몽땅 쓸어버리겠다. 토르 부족 전체가 노예 대신 죽고 싶으냐?" 부족장은 어쩔 줄 몰라했다. 보급부대장인 크르흐가 데려온 병력은 도합 일천 명. 하나같이 잘 단련된 전사들이었고 또한 싸움에 능숙한 칸타르 부족 출신이었다. 하지만 토르 부족이 보유한 전사는 고작해야 사백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토르 부족은 전투에 능숙한 부족이 아니었다.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토르 부족이 전투에 능숙할 턱이 없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원칙에 따라 부족장은 크르흐의 명령을 달게 받들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취익. 잘 생각했다." 선심이라도 쓰듯 한 마디를 내뱉은 크르흐는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인간 고기를 맛본다 생각하니 마음이 급했다. 대동한 병력 1천과 토르 부족에서 차출한 전사 4백을 합하면 인간 마을을 쓸어버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땡땡땡. 중무장한 오크 전사들이 떼를 지어 다가오자 마을에는 비상이 걸렸다. 하지만 아르카디아 기사들이 접근했을 때와는 마을 사람들의 대응이 판이하게 틀렸다. 목책의 문이 활짝 열렸고 마을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게 목책 밖으로 달려나왔다. 대부분 남자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기르던 가축이 한 마리씩 끌려오고 있었다. 촌장이 채 매무새도 갖추지 못한 채 달려나왔다가 크르흐와 함께 걸어오는 토르 부족장을 보자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넙죽 엎드렸다. 촌장의 입에서 유창한 오크의 언어가 흘러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부족장님." 토르 부족장의 험상궂은 얼굴에 안타까운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그의 부족이 지금껏 풍족하게 살수 있었던 것은 모두 노예 덕택이었다. 그런 충실한 노예들을 눈 버젓이 뜨고 빼앗기게 생긴 것이다. "할 수 없지. 다른 부족에서 인간 아이 몇 명을 데려와서 키운 다음 노예로 부리는 수밖에……." 생각을 정리한 부족장이 촌장을 노려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취익. 내가 알기로 어제 아르카디아 인간들이 마을에 다녀갔다고 하던데 사실이냐?" 촌장의 얼굴이 삽시간에 파랗게 질렸다. 사실이 탄로난 이상 무사히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보나마나 마을 사람 서너 명이 화풀이로 잡혀갈 것이 분명했기에 촌장은 등골이 서늘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그들을 내쫓아버렸습니다. 맹세코 마을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 "췩 변명하지 마라." 마을 사람들의 안색도 새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오크 말을 알고 있었으므로 상황의 심각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또 몇 명이 잡혀가겠군.' '제발……. 난 제외되어야 할 텐데.' 부족장은 성난 눈빛으로 노예들을 쓸어보았다. 시선을 받은 마을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지명되어 오크 부족에 끌려간 사람은 두 번 다시 마을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러니 겁에 질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촌장이 앞으로 나섰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대신 기른 가축을 모두 바치겠습니다." "췩. 그것으론 모자란다." 촌장의 안색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저들은 마을 사람들을 원하는 것이다. 그는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겁에 질려 있는 마을 사람들을 쓸어보았다. 부족장이 뽑아 가는 것보다 자신이 골라주는 것이 나았다. 선택 방법은 여자와 아이를 제외한 어른들 중에서 나이 많은 사람 순으로 추려내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마을의 노동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촌장의 시선이 사십 정도 되어 보이는 수척한 장년인에게 닿았다. 촌장의 얼굴에 미안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레빈 이리 나오시오." 레빈이라 불린 장년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그는 곧 체념한 듯 비틀거리며 걸어나왔다. 이번에는 그가 희생될 차례였다. 마을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촌장이 다음 희생자를 물색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취익. 고를 필요 없다. 모두 다 데리고 갈 생각이니까." 부족장과 함께 온 험상궂은 오크 부대장의 음성이었다. 깜짝 놀란 촌장이 몸을 돌렸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촌장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어느새 중무장한 오크 전사들이 마을 사람들을 포위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섬기는 토르 부족의 오크 전사보다 덩치도 훨씬 크고 흉포해 보였다.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오크 전사들에게 포위되어버렸다. 그리고 나머지 400마리 정도의 오크 전사가 목책 속으로 우루루 쏟아져 들어갔다. 그들은 토르 부족에서 차출된 전사들이었다. 집안에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숨어 있었기 때문에 촌장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제, 제가 가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자비를……." "취익. 물론 가야지. 이 마을에 사는 노예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와 간다. 그러기 전에 먼저 처리해야 할 게 있겠군." 일단의 오크 전사들이 달려들어 이십여 명의 마을 사람들을 끌어냈다. 하나같이 젊고 건장한 청년들이었다. 저항할 여력이 있는 청년들을 먼저 처치하는 것은 예정된 수순. 그들을 대상으로 본보기를 보이려는 것이 크르흐의 생각이었다. 물론 시장한 배를 채울 속셈도 없다고 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던 촌장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대, 대체 뭘 하려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외마디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끄아악." 오크 전사 한 놈이 끌려나온 청년의 뒷머리를 도끼로 그대로 찍어버린 것이다. 쩍 갈라진 두개골에서 피와 뇌수가 낭자하게 뿜어져 나왔다. 비명을 시발점으로 여기 저기서 청년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서 친구가 죽어 나자빠지는데 청년들은 벌벌 떨기만 할 뿐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십 명의 청년들은 순식간에 생명이 없는 시신이 되어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바로 눈앞에서 같은 마을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촌장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한 마디를 간신히 토해냈다. "우, 우린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크르흐가 촌장의 멱살을 틀어쥐고 으르렁거렸다. "취익. 잘못이 있건 없건 상관없다. 너희들은 단순한 노예일 뿐이다." 오크 전사들에게 물샐틈없이 포위 당한 사람들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다음이 누구 차례일지 모르기 때문에 그저 벌벌 떨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마을 속으로 들어간 오크 전사들이 어린 아이와 여자들을 끌고 나왔다. 우악스럽게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오는 것이다. 여자들은 처참하게 나자빠진 시신을 보자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악." 그대로 의식을 잃고 혼절하는 이도 있었다. 크르흐가 여자들을 둘러보며 명령을 내렸다. "마을에 불을 질러라." "그,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습니까? 마을은 남겨두십시오." 당황한 부족장이 앞으로 나섰지만 크르흐는 사납게 그를 노려보았다. "취익 날 막을 생각이냐?" "다시 노예를 키워내려면 마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크르흐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도끼를 휘둘렀다. 취에엑.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졌다. 목이 거의 반이나 잘려나간 부족장이 몸을 비비꼬다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부족장이 목숨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토르 부족 출신 전사들은 일체 반발을 하지 않았다. 강자존의 법칙이 철저히 적용되는 오크 사회의 일면을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오크 전사 두 명이 달려들어 부족장의 시체를 죽은 마을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져다 놓았다. 크르흐는 입맛을 다시며 시체 더미를 쳐다보았다. 불쌍한 인간들은 그저 파들파들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제 잔치를 벌일 시간이군." 크르흐는 분대장급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이젠 죽은 인간들의 고기를 먹어치울 차례였다. 조금 전 죽인 부족장의 고기까지 함께 말이다. 감칠맛 나는 인간의 고기를 맛보는 것은 분대장급 이상에 한정되었다. 마을 사람들을 포위한 하급 전사들의 부러움 섞인 시선을 받으며 그들은 느긋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널브러진 사체의 허벅지 부위를 먹기 좋게 잘라낸 크르흐는 그것을 게걸스럽게 입 속에 집어넣었다. "맙소사."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몸서리를 쳤다. 특히 여자들은 대부분 혼절한 상태였다. 바로 눈앞에서 사람을 먹어치우고 있으니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촌장 역시 넋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잡혀간 사람들이 잡아먹힌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적어도 조금 전 죽은 토르 부족장은 사람들에게 이런 광경을 결코 보여주지 않았다. 적어도 노예의 기분을 생각해줄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달랐다. 머뭇거림 없이 참혹한 광경을 보여주는 것을 볼 때 자신들도 머지않아 같은 처지에 놓일 것이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 대항하려는 마음을 먹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그 정도로 노예생활에 길들여져 있었다. 사람 이십 명과 오크 하나의 사체는 곧 뼈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만찬에 참여한 오크 분대장들은 질긴 근육과 가죽까지 모조리 뱃속에 그러넣었다. 사람들은 이제 완전히 체념한 모습이었다. 오크의 뱃속에 들어가는 것은 하늘이 뒤집혀도 변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었다. 그들을 둘러보던 크르흐는 그득한 배를 두드리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취익. 역시 인간의 고기는 감칠맛이 있어. 이참에 몇 놈 더 먹어버릴까?" 그의 시선을 받은 마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가늘게 떨어야 했다. 하지만 크르흐에겐 그럴 생각이 별로 없는 듯 했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식사를 마친 분대장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노예들을 압송할 준비를 갖춰라. 먼 동부까지 가려면 시간이 없다." 그 때 바로 뒤에서 걸쭉한 음성이 들려왔다. "식사를 모두 마쳤나?" 들려온 말은 유창한 오크의 언어였다. [다크메이지 13장 343편] 깜짝 놀란 크르흐는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직되었다. "취익. 뭐, 뭐냐?" 놀랍게도 열다섯 정도의 인간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수풀 속에서 갑자기 뛰어나온 인간들은 마치 소풍을 나온 것 같은 유유자적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두 종족 사이의 관계를 떠올려 볼 때 분명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하나같이 금속제 갑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봐서 아르카디아에서 건너온 인간들이 틀림없었다. "놈들이 숨어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혼란스러워하던 크르흐의 눈동자에 서서히 긴장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짧은 경고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취익. 아르카디아 놈들이다." 경고 소리를 듣자 제일 앞에서 걸어오던 젊은 인간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굳이 소개하지 않아도 되겠군. 그건 그렇고 소화하는데 방해를 해서 미안하네.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볼일만 간단히 보고 나면 조용히 사라져줄 테니 말이야." 넉살 좋게 말을 늘어놓는 이는 데이몬이었다. 푸른 눈동자와 하늘거리는 금발이 인간세상에서 여간해서는 찾아보기 힘든 미남이란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하지만 그의 용모는 불행히도 오크에겐 전혀 어필하지 못했다. 기이한 것은 그의 반응이었다. 조금 전 인간이 잡혀 먹히는 광경을 보았을 터였지만 별달리 감정을 가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상황이 이해하기 힘들었는지 크르흐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인간이로군." 하지만 데이몬을 따라오는 대원들의 반응이 달랐다. 바로 눈앞에서 사람이 먹히는 광경을 목격한 탓에 오크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증오심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가증스러운 놈들." 대원들은 하나같이 입술을 질끈 깨문 채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만약 데이몬의 만류가 아니었다면 참지 못하고 벌써 달려나갔을 터였다. 하지만 미리 언질을 받았기에 그들은 간신히 발작을 자제할 수 있었다. 그런 대원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이몬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볼일 좀 봐도 되겠지? 오크 대장."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정리되자 크르흐는 안정을 되찾았다. 그와는 달리 부하들은 이미 싸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특히 조금 전의 만찬에 참석한 분대장들은 벌써 입맛부터 다지고 있었다. 아르카디아에서 건너온 인간이라면 살려둘 이유가 없었고 따라서 다시 한 번 포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될 터였다. 크르흐가 재미있다는 듯 말을 받았다. "취익. 무슨 볼일인지 물어도 되겠나?" 데이몬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설명을 이어나갔다. "생각보다 신중한 오크 대장이군. 뭐 별 일은 아니야. 이곳에 사는 톰이란 소년에게 약속한 것이 있어서 말이야." "약속?" 데이몬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제 톰에게 자진해서 마을에 들어가면 그 대가로 말린 고기를 준다고 약속했네. 그런데 마을에 들어가지 못해 애석하게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그래서 다시 온 거야. 자네가 허락한다면 우린 톰에게 약속을 지키고 싶네." 크르흐가 재빨리 염두를 굴렸다. 무슨 의도에서인지는 모르지만 1천 4백 명의 용맹스런 전사들 앞에서 얄팍한 수작이 통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중갑주를 걸친 것을 볼 때 저들은 분명 기사라 불리는 인간들이었다. 실력이 뛰어난 자들이라 도망치는 것을 막기란 그리 쉽지 않을 터였다. 퇴로를 확실하게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크르흐는 오크답지 않게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취익. 좋다. 약속을 지키는 것을 허락하겠다." 그가 손짓을 하자 앞을 막고 있던 오크 전사들이 길을 열어주었다. 노예들에게 접근한다면 그들 역시 포위될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면 확실하게 퇴로를 막을 수 있었기 때문에 크르흐의 눈망울엔 회심의 미소가 번뜩였다. "고맙군." 데이몬은 빙그레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잔뜩 긴장한 대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창검을 움켜쥔 오크 전사들에게 자진해서 포위되려는 것이다. 그들이 지나가자 오크 전사들은 약속이라도 하듯 길을 막기 시작했다. 카이트 실드와 글레이브를 꽉 움켜쥔 채 일행이 들어왔던 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그곳에는 이중 삼중의 포위망이 형성되었다. 그런데 인간들이 막 지나간 직후 한 오크 전사가 코를 킁킁대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인간들 사이에 기괴한 냄새가 풍겨왔기 때문이었다. 기분이 몹시 나쁜 냄새였다. "취익. 무슨 냄새지?" 얼굴을 찡그린 오크 전사의 시선이 인간들을 샅샅이 훑었다. 냄새는 인간들 사이에 섞여 있는, 시커먼 갑옷을 두르고 있는 네 명에게서 풍겨지고 있었다. 도저히 참기 힘들 정도의 악취였기에 오크 전사는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만약 경험이 많은 오크 전사였다면 냄새의 정체가 고위급 언데드인 데스 나이트의 것이란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그에겐 그럴 만한 경험이 없었다. 오크 전사는 그들을 그저 몸 냄새가 특이한 인간이라 단정해 버렸다.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 쓴 인간 둘에게도 독특한 냄새가 풍겼는데 그 중에서 땅딸막한 인간에게서는 특히 역한 냄새가 풍겨졌다. 마치 썩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듯한 냄새였다. 하지만 오크 전사는 오래지 않아 생각을 지웠다. "취익. 천 사백의 정예 오크 전사들 앞에서는 그 어떤 수작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오크 전사들이 살기를 떠올리며 노려보는 동안 일행은 마침내 노예들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넋 나간 듯한 표정을 하고 있던 촌장의 시선이 데이몬에게 닿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신적인 충격이 그 정도로 컸던 모양이었다. 데이몬은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본의 아니게 마을에 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구먼. 부탁인데 톰을 불러주겠나?" 촌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삶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쯔쯔. 완전히 넋이 나갔군." 데이몬이 혀를 끌끌 차며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오래지 않아 사람들 사이에서 잔뜩 겁에 질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 있었구나. 옜다. 어제 약속한 것이다." 데이몬이 다가가서 건량을 내밀었지만 톰은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생명이 경각에 처했는데 먹을 것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눈살을 찌푸린 데이몬이 말린 고기를 강제로 톰의 품속으로 구겨 넣었다. "이제 약속을 지켰군. 이제 떠날 차롄가?" 안색을 활짝 펴며 고개를 돌린 데이몬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들어온 길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오크 전사들의 포위망이 이중 삼중으로 쳐져 있었다. "아니 왜 길을 막은 건가? 우리에게 볼일이 있나?" 크르흐가 자욱한 살기를 떠올리며 다가왔다. 그의 뒤로 분대장 급들이 입맛을 다시며 따라붙었다. "취익. 이제 장난은 끝났다." "장난이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크르흐가 손짓을 하자 포위망을 갖춘 오크 전사들이 무기를 들어올렸다. 명령이 떨어지는 즉시 공격할 기세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원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이미 데이몬에게 단단히 지시를 받은 상태였으므로. 도리어 데이몬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어서 길을 열게. 우린 갈 길이 바빠." 크르흐는 데이몬을 노려보며 똑똑히 내뱉었다. "취익. 너희들은 나갈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자리에서 죽어야 하니까." 그 말을 들은 데이몬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죽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앞길을 막겠다는 뜻인가?" "두말하면 잔소리겠지?" 크르흐의 눈동자에 서서히 살기가 떠올랐다. 반대로 데이몬의 눈동자는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한 번 더 묻겠다. 우릴 막을 생각이 틀림없는가?" 짜증이 치밀어 오른 크르흐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취익. 인간. 개수작부리지 마라.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지만 용맹스러운 오크 전사들에게는 그 어떤 속셈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한번만 더 묻자. 후회하지는 않겠지?" 크르흐는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인간.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릴 거듭하지 마라." 조금 있으면 인간의 고기를 또다시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크르흐의 입가에서 절로 군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벼락같은 음성이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것으로 너희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냉혹한 일갈과 함께 데이몬이 수인을 맺었다. 콰콰콰콰 그의 몸을 축으로 열 가닥의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나가 일시에 재배열되며 가공할 만한 위력의 에너지 볼트로 변모한 것이다. 이미 데이몬은 한껏 마나를 끌어 모은 상태였다. 마나가 잔뜩 응축된 에너지 볼트는 앞을 가로막는 오크 전사들을 사정없이 꿰뚫고 지나갔다. 취에에엑. 선렬한 피보라와 함께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연거푸 터져 나왔다. 포위망이 두텁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엄청났다. 데이몬이 발사한 에너지 볼트는 포위망을 구성한 오크 전사 십여 명을 그대로 관통해 버렸다. 대원들조차 전율을 금치 못했을 정도로 위력이 강력했다. 갑옷에 주먹만한 구멍이 뻥뻥 뚫린 오크 전사들은 피를 낭자하게 쏟아내며 어지럽게 널브러졌다. "감히 우리의 앞길을 막겠다고?" 데이몬은 연거푸 마법을 전개했다. 이번에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매직 미사일 다발이 생겨나서 오크 전사들에게 쏘아져 들어갔다. 파파파팟.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매직 미사일이 사방으로 쏘아졌다. 그것들은 허둥대는 오크 전사의 급소를 정확히 강타했다. 갑옷을 두른 오크 전사가 단 한 발로 피를 토하며 널브러질 정도였으니 매직 미사일의 위력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크하하하. 이런 버러지 같은 놈들……." 모처럼 칠종단금술의 제약에서 벗어난 탓에 데이몬은 한껏 신이 나 있었다. 오랜만에 살육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오크는 아무리 죽여도 칠종단금술이 발동하지 않는다. 거칠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신들린 듯이 오크 전사들을 때려잡는데 몰두했다. 오랫동안 칠종단금술에 억눌려온 데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한 모양이었다. 선제공격을 당한 충격이 워낙 컸기 때문에 오크 전사들은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취췩. 막아라." 연이은 공격에 위기감을 느낀 오크 전사들은 본능적으로 한데 모여들었다. 방패를 맞대어 매직 미사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때를 놓치지 않고 데이몬의 에너지 볼트가 또다시 불을 뿜었다. 가공할 위력의 에너지 볼트는 한데 운집한 오크 전사 수십 마리를 한꺼번에 꿰뚫고 지나가 버렸다. 이른바 9서클의 마스터에 이른 대마법사의 위력이 여실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뒤이어 슈렉하이머가 따라붙어 캐스팅해 놓은 공격마법을 퍼부었다. 그 역시 7서클의 엑스퍼트. 데이몬의 위용에 비하면 손색이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오크에게 크나큰 재앙이긴 마찬가지였다. 파지지직. 여러 줄기의 체인 라이트닝이 오크 전사들을 덮쳤다. 적중당한 오크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들부들 떨다 픽 쓰러졌다. 체인 라이트닝의 강력한 에너지는 오크 전사의 뇌수와 내장을 그대로 태워버렸다. 그 증거로 나자빠진 오크 전사들의 칠공에서는 역한 냄새와 함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단 두 사람의 마법공격으로 인해 오크 전사들 중 반수가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다크메이지 13장 344편] 느닷없이 벌어진 참사에 넋이 나가버린 오크 전사들. 채 정신도 차리지 못하던 상태에서 이번에는 데스 나이트들이 그들을 강타했다. 데이몬이 네 명의 데스 나이트들을 미리 인크레시아에서 꺼내 일행들 사이에 배치해 놓았던 것이다. 그들은 소름끼치는 빛을 머금은 데스 블레이드를 뿜어내며 오크 전사들 사이를 파고 들어갔다. "기가 막히는군. 겨우 오크 나부랭이나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이……." "빨리 끝내자고……." 그랜드 마스터 급이란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데스 나이트들은 오크 전사들을 사정없이 베어 넘겼다. 밀집해 있던 오크 전사들이 마치 풀 베어지듯 우수수 쓰러지고 있었다.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오로지 조각난 시체밖에 남지 않았다. 몇 몇 오크 전사들이 방패로 막으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데스 나이트의 검에 서린 데스 블레이드는 가로막는 방패와 함께 갑옷까지 깔끔하게 베어버렸다. 칼질 한 번에 오크 전사 서너 마리의 몸이 동강나는 실정이었다. 물론 갑옷 아래의 몸뚱이도 잘린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용기 있는 몇몇 오크 전사들이 글레이브를 뻗었지만 최고급 아티팩트로 보호받는 데스 나이트의 몸에는 아무런 위협을 줄 수 없었다. 그 뒤에는 윈슬럿이 배틀 액스를 종횡무진 휘두르며 오크 전사의 목을 따고 있었다. 오랫동안 활약하지 못한데 대한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 맹활약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데스 나이트 정도의 위력을 보일 순 없었지만 도끼질 한 번에 정확히 오크 전사의 머리통 하나가 잘려나가 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은 한 마디로 장관이라 표현할 수 있었다. 놀랍도록 정교하고 매서운 몸놀림으로 날뛰는 윈슬럿의 위용은 상대하는 오크 전사들이 질려 반격할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다. 대원들도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들 역시 미친 듯이 날뛰며 오크 전사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감히 사람을 먹어치우다니……." "거기에 대한 보답이다." 그들은 연신 매서운 공격을 퍼부었다. 그들의 공격에 또다시 무수한 오크 전사의 몸통이 토막 났다. 어제의 습격과는 달리 이번 싸움의 위험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데이몬과 슈렉하이머의 마법 공격이 휩쓴 곳을 데스 나이트와 윈슬럿이 재차 헤집고 지나갔기 때문에 그들에겐 그저 숨이 붙어 있는 오크 전사를 정리하는 정도의 간단한 임무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일방적인 학살이라 표현할 수 있었지만 싸움은 제법 오래 끌었다. 오크의 병력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 사백에 달하는 병력은 오래지 않아 궤멸될 수밖에 없었다. 데이몬과 슈렉하이머의 선제 공격으로 일시에 반이 날아간데다 데스 나이트와 윈슬럿이 대열을 완전히 뒤흔들어놓았기 때문에 오크 전사들은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몰살당하고 있었다. 전황이 압도적으로 밀리자 후미에 위치한 오크 전사들은 마침내 싸움을 포기했다. "취익. 퇴, 퇴각하라." 그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정신 없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행들에게 그들을 추적해 척살할 여유는 없었다. 맞서 싸우는 오크 전사를 베어 넘기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반격하는 오크 전사의 수는 계속해서 줄고 있었다. 싸움은 오래지 않아 종결되었다. 일천 사백에 달했던 오크 전사들 중 서 있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오크의 대군이 삽시간에 궤멸되어버렸고 극소수만이 도망친 것이다. "이제 끝인가?" "전투가 이토록 지겨울 줄은 몰랐어." 대원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숨을 골랐다. 하나같이 피를 흠뻑 뒤집어써서 혈인(血人)이 되어 있었다. 반면 데스 나이트와 윈슬럿은 그다지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피범벅이 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언데드라는 특성상 지칠 까닭이 없는 것이다. "힘들군." 데이몬 역시 눈에 띄게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제 아무리 9서클의 대마법사라도 이처럼 거듭해서 마법을 시전하는 것이 손쉬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내색을 하지 않고 전장의 한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곳에는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는 오크 전사 50여 명이 멀뚱멀뚱 서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대장인 크르흐가 끼여 있었다. 그는 접전 초기에 데이몬의 매직 미사일에 혈도가 제압되어 뻣뻣하게 굳어 버린 상태였다. 함께 인육파티를 벌인 분대장 급 50마리와 함께 말이다. "이제 처형의 시간이 돌아왔는가?" 데이몬이 느긋하게 크르흐를 내려다보았다.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우자 크르흐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그의 눈동자에 떠오른 감정은 다름 아닌 공포였다. 삽시간에 일천 사백을 쓸어버린 상대에게 공포를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취췩.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데이몬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크르흐를 노려보았다. "멍청한 녀석. 그러게 순순히 보내줬다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아도 되잖아." 데이몬이 슬쩍 손짓을 하자 대원들과 윈슬럿이 어슬렁거리며 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우리의 앞길을 막은 데 대한 책임을 묻겠다. 죽을 각오는 되어 있겠지?" 크르흐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크 전사답게 그는 이미 생을 마감할 채비를 갖춘 상태였다. "취익. 죽여라." 제법 당당하게 소리를 쳤지만 데이몬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오크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고이 죽일 생각은 없다. 앞길을 가로막은 대가를 받아내야 하니까. 음. 어떻게 할까? 그렇지. 네놈을 살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하게 만들어버리면 되겠군." 비릿한 미소를 지은 데이몬이 단검을 꺼내들었다. "샤프니스(Sharpness)" 칼날을 날카롭게 하는 마법을 건 뒤 데이몬은 서슴없이 크르흐의 전신을 헤집기 시작했다. 취에에엑. 크르흐의 비명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솜씨 좋게 살점을 발라내는데 견딜 도리가 없었다. 데이몬은 이른바 능지처참(陵遲處斬)의 형을 시행하고 있었다. 예리한 칼로 전신의 살점을 한 점씩 발라내어 죽을 때까지 처절한 고통에 시달리게 하는 끔찍한 형벌. 주요 혈관과 급소를 최대한 피해서 오랫동안 살아있게 하여 고통을 가하는 것이 능지처참의 요결이었고 데이몬에겐 충분히 그것을 시행할 능력이 있었다. 중원에 있을 때부터 각종 고문기술에 통달한 상태였으며 또한 인체의 구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크르흐를 해체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크르흐의 양팔은 오래지 않아 앙상한 뼈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혈이 제압된 탓에 크르흐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극통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했다. 정말 끔찍한 고통이었기에 크르흐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는 점차 신음소리로 바뀌고 있었다. 잘린 혈관에서 피가 간헐적으로 분출되었다. 푸슛, 푸슛 거듭된 출혈로 말미암아 크르흐의 의식은 서서히 혼미해지고 있었다. 오크 전사들의 분대장들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데이몬의 매직 미사일에 마혈이 제압된 상태였다. 애당초 데이몬에겐 인간을 잡아먹은 놈들을 순순히 죽일 생각이 없었다. 제압된 오크 분대장 오십 마리를 슬쩍 훑어본 데이몬은 혼자선 역부족이란 사실을 느꼈다.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데이몬이 데스 나이트들에게 눈짓을 했다. "너희들도 좀 거들어라." 우두커니 서 있던 데스 나이트들이 다가와서 오크 해체(?)에 동참했다. 그들 역시 한 때 인간이었으므로 인간을 잡아먹은 오크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비록 데이몬보다 실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실력을 발휘해서 오크 분대장들의 해체에 들어갔다. 숨통이 끊어지지 않게 최대한 주의하며 살점을 발라내는 것이다. 곧이어 그곳에는 오크 분대장들의 비명 소리가 합주곡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대원들이 윈슬럿을 주축으로 뒤처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데이몬의 매직 미사일에 당한 오크 전사들 중 일부가 목숨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기 때문에 대원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확인사살에 몰두했다.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널브러진 오크 전사의 심장에 시퍼런 장검이 꽂혔다. 부들부들 떨던 오크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명을 거둔 대원들은 돌아다니며 또 다른 희생물을 물색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윈슬럿의 일 처리가 가장 확실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널브러진 오크 전사의 목을 사정없이 떼어 내어 한곳에 쌓고 있는 것이다. 시체건 부상을 입은 놈이건 가릴 것 없이 말이다. "그것 괜찮은 방법이로군." 그 모습을 본 대원들도 윈슬럿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체 사정을 보아주지 않았다. 인간을 잡아먹은 오크에 대한 분노는 그 정도로 컸다. 마을 한 쪽에는 곧 오크의 수급이 산더미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뼈를 고스란히 외부로 드러낸 크르흐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맥없이 머리를 떨궜다. 전신의 피가 모두 몸밖으로 빠져나와 바닥이 온통 흥건했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데이몬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강단을 봐서 꽤나 버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약골이로군." 솜씨 차이인지 데스 나이트들은 벌써 둘을 해치운 뒤 세 번째 해체작업에 들어가 있었다. 데이몬이 그들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이봐 능지처참이란 것은 오래 살려둘수록 효과가 있는 법이야." "빌어먹을 자식. 우린 최선을 다하고 있단 말이야.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너 혼자 다해." 진득하게 욕을 얻어먹은 데이몬은 쓴웃음을 지으며 제압된 다른 분대장에게 다가갔다. 데이몬 앞에 선 오크 분대장은 사색이 되었다. 대장인 크르흐가 산채로 해부되는 모습을 보았기에 정신이 완전히 나간 상태였다. "취 취익, 살려다오." 데이몬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다. "이런 빌어먹을 놈이 감히 반말을?" 데이몬은 생각할 것도 없이 해부에 들어갔다. 예리한 단검이 살을 파고들자 오크 분대장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하필이면 데이몬의 손에 걸린 탓에 불운한 오크 분대장은 동료들보다 훨씬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전장을 정리하던 대원들의 질린 듯한 시선이 쏟아졌지만 데이몬은 개의치 않고 해채작업에 몰두했다. "다음은 이놈인가?" 데이몬 앞에 선 세 번째 분대장은 상당히 고분고분해져 있었다. 적어도 앞의 분대장이 범한 잘못을 따라하지 않을 정도의 지능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제, 제발 사, 살려주십시오. 취익." 데이몬은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은 그런 대로 태도가 되었군. 그래 넌 내가 왜 이런 수고를 하고 있는지 아느냐? 이유를 맞추면 특별히 널 살려주겠다." 오크 분대장은 재빨리 눈알을 굴렸다. 자세히 보니 고문을 당하고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마을사람을 먹은 분대장급들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오크 분대장은 솔직히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진 오크라서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취, 취익. 인간을 먹었기 때문에?" "틀렸군. 너희들이 고문을 당하는 이유는 간단해. 감히 우리의 앞길을 막았기 때문이지." 고개를 뒤흔든 데이몬은 즉시 해체에 들어갔다. 먼저 갑옷을 벗겨내 알몸으로 만든 데이몬은 오크 분대장의 가슴팍에 머뭇거림 없이 단검을 찔러 넣었다. 교묘하게 신경이 밀집된 부분만을 골라 헤집는 데이몬의 실력에 오크 분대장은 앞서 당한 동료들처럼 목청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정리는 깔끔하게 끝났다. 일천 사백에 달하던 오크 전사들은 하나같이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는 신세에 놓여 버렸다. 머리통은 따로 골라 한데 쌓였고 몸통은 마을 주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오십 명에 달하는 오크 분대장들 역시 뼈와 신체장기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절명한 상태였다. 인간을 먹은 대가를 정말 톡톡히 치른 것이다. 손과 얼굴에 묻은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내던 데이몬이 일행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피를 흠뻑 뒤집어 쓴 상태였고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가득했다. "모두 다 끝났나?" "예. 깨끗이 처리했습니다. 머리통을 세어보니 정확히 천 삼백 칠십 일개이더군요. 30마리 정도는 도망친 것 같습니다." "좋아. 정말 멍청한 녀석들이로군. 자청해서 죽음을 원하다니." 데이몬은 일부러 마을 사람들이 있는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이만 가자." 그 때 다급한 음성이 데이몬의 발목을 잡았다. 촌장의 음성이었다. "그, 그냥 가실 겁니까?" 일행이 오크 전사들을 처리하는 과정을 마을 사람들은 경악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벌어지는 일은 그들에겐 하나의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오크 전사들이 얼마나 강하고 잔인한지 잘 알고 있었다. 얼마나 두려워했으면 마을 사람들이 잡혀가도 감히 거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금껏 오크에게 반란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바로 눈앞에서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세, 세상에……." 그토록 두려워했던 오크 전사들은 무적(無敵)이 아니었다. [다크메이지 13장 345편] 천 명이 넘는 오크 전사들이 고작해야 열 다섯에 불과한 아르카디아 기사들에게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섬멸되어버렸다. 그들이 맥없이 몰살되는 모습을 마을 사람들은 바로 목전에서 똑똑히 목격했다. 눈으로 직접 보고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껏 그들은 오크 전사들의 잔인한 면을 극히 두려워했었다. 오크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사람을 죽인다. 하지만 그런 오크의 잔인성도 눈앞의 아르카디아 사람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그들은 사로잡은 오크 분대장들을 산채로 살을 발라냈다. 그것도 빙글빙글 웃으며. 분대장들이 죽어가며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아직까지 마을 사람들의 귓전에 맴돌 정도였다. 그것은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신음소리를 흘리는 오크 전사의 목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잘라내어 한 쪽에 쌓는 저들의 잔인성에 비하면 오크 전사들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사람을 잡아먹은 오크에 대한 증오심에 기인한 줄도 모르고 말이다. 촌장은 어쩔 줄 몰라하다가 데이몬에게 넙죽 절을 했다. 오랜 노예생활로 인해 마을사람들에겐 강자에게 복종하는 버릇이 깊이 배어 있었다. "저, 저희들을 데리고 가 주십시오." 데이몬은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어째서?" "이곳에 남아 있을 경우 저희들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틀림없이 오크 전사들의 보복이 가해질 것입니다." "노예 생활에 만족한다며? 마을에 남아 있다가 놈들이 보복을 가하면 받으면 되지 무슨 상관인가?" 촌장의 얼굴에 절박함이 어렸다. 잡혀 먹힐 운명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보니 목숨에 대한 애착이 그만큼 절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눈치 빠른 마을사람들은 여자들이 주축이 되어 기사들에게 달라붙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강자에게 빌붙으려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마을 사람들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제발 저희들을 살려주십시오.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 촌장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간곡하게 사정했다. "그래도 저희들은 같은 인간이지 않습니까?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데이몬은 냉랭하게 촌장의 말을 잘랐다. "아니야. 겉모습만 비슷할 뿐 실상은 결코 그렇지 않아." "………." 데이몬은 비릿하게 웃으며 마을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우린 인간이야. 구차하게 다른 종족의 노예로 살아가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한 마디로 자존심이 살아있는 인간이란 뜻이지. 하지만 너희들은 아니야. 내가 보기에 너희들은 단지 오크가 기르는 가축에 불과할 뿐이야." 촌장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어, 어찌 그런 말씀을……." "너희들이 가축과 다른 게 뭐야? 먹이를 주면 넙죽넙죽 받아먹다 때가 되면 잡혀 먹히는 너희들이 대관절 가축과 뭐가 다르지?" 촌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실상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데이몬의 음성이 조금 누그러졌다. "머지않아 아르카디아의 대군이 트루베니아에 건너올 것이다. 인간을 노예로 부리고 잡아먹는 오크 놈들의 씨알을 말려버리기 위해서……." 데이몬은 손가락을 뻗어 산더미처럼 쌓인 오크의 수급을 가리켰다. "머지 않아 트루베니아의 오크는 한 놈도 빠짐없이 저런 신세가 될 것이다. 우린 그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미리 건너온 것이다. 이곳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써의 자존심을 일깨워주려는 일념으로. 하지만 어제 말했듯 우린 마을을 잘못 찾아온 것 같군. 이 마을에는 인간이 하나도 없었어. 그저 가축만 버글거릴 뿐이야." 말을 마친 데이몬이 냉랭하게 몸을 돌렸다. "가축은 가축다운 삶을 살아야 하는 법. 한 가지 알려줄까? 진정한 인간이라면 죽어도 이런 삶은 살지 않아. 대항할 여력이 없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적어도 오크의 보급 줄이라도 끊을 수 있을 테니 말이야. 하지만 너희들은 결코 그러려고 하지 않겠지? 어제 보니 너희들은 우리에게 서슴없이 활을 겨누더군. 그 활을 오크에게 겨누려 하지 않는 이상 너희들은 엄연히 가축이야. 가축." 사정없이 퍼부은 데이몬이 냉정하게 몸을 돌렸다. "우린 가겠네. 이미 가축의 길을 택했으니 여한이 없을 줄 아네." 데이몬이 몸을 돌리자 대원들은 옷자락을 부여잡는 마을 사람들의 손을 단호히 뿌리치며 데이몬의 뒤를 따랐다. 이미 지시를 내려놓았기에 대원들은 일부러 냉정하게 행동했다. 마을 사람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풀숲 사이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얼이 빠진 듯 멍하게 서 있던 촌장에게 톰이 다가갔다. "촌장님." 하지만 촌장은 듣지 못한 듯 멍하니 한 마디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인간다움……. 자존심……." 톰이 재차 부르자 촌장은 그때서야 정신을 차렸다. 톰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촌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린 이제 어떻게 하죠?" 톰의 질문을 들은 촌장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촌장은 마음을 굳힌 듯 마을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여러분들께 묻겠소. 혹시 인간답게 살고 싶은 생각이 있소?" 뚱딴지같은 촌장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촌장이 결연한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뒷산에 들어갑시다. 저들 말대로 우리가 사라지면 우릴 노예로 부리던 토르 부족은 심각한 식량 부족에 직면할 것이오. 밭을 갈아 엎어버린 뒤, 가축을 모두 끌고 산으로 들어가 버린다면 토르 부족의 식량 줄은 완전히 끊어질 것이오."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 그렇다면 반란을 일으키자는 뜻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토록 강하고 잔인한 오크 전사들을 감당할 수가……." 촌장은 머뭇거림 없이 쌓여 있는 수급의 산을 가리켰다. "그토록 강하고 잔인하던 토르 부족의 전사들이 바로 우리 눈앞에서 저 모양 저 꼴이 되었소. 다시 말해 제 아무리 오크라도 화살에 맞으면 죽는다는 뜻이지. 그들은 결국 무적(無敵)이 아니었소. 게다가 우리 마을 사람들은 특히 사냥에 능숙하오. 험준한 뒷산 깊숙이 숨어 활로 대항한다면 쉽사리 토벌되지는 않을 것이오. 내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촌장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침묵을 지켰다. 타성에 깊이 젖어있었기 때문에 감히 반란을 일으킬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촌장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그럼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놈들에게 순순히 잡혀 먹힐 생각이오? 죽은 청년 스무 명처럼 말이오?" 사람들은 그때서야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결코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오크 전사들 일천 사백이 떼죽음 당하는 장면을 보고 나니 없던 용기가 새록새록 솟아올랐다. 같은 인간들 열 다섯 명이 해 낸 일인데 자신들이 못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데이몬이 내뱉은 가축이란 말이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잠재해 있던 자존심을 일깨웠다. "좋소. 합시다. 어차피 잡혀 먹힐 운명이라면 놈들과 한 번 싸워보겠소." "이제 놈들에게 마을 사람들을 잃는 것이 신물이 나오. 차라리 싸우다 죽겠소." 촌장은 빙긋이 미소짓고 있었다. 드디어 인간다운 삶을 살아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서둘러 마을로 돌아가서 짐을 쌌다. 오크 족이 먹을 것을 남겨두지 않기 위해 가축은 모조리 끌고 나왔다. 덩치가 커서 끌고 갈 수 없는 것은 아예 도살해 버렸다. 이제부터 그들은 토르 부족의 식량 줄을 끊을 계획이었다. 자신들을 노예로 부렸던 데 대한 보답으로 말이다. 마을 사람들이 짐을 챙겨 나오자 촌장은 손수 목책에 불을 놓았다. 마을을 송두리째 잿더미로 만들어버리면 토르 부족이 먹을 것도 함께 사라질 터였다. 화르르르. 기세 좋게 타오르던 불꽃을 한참동안 응시하던 촌장이 몸을 돌렸다. "뒷산으로 갑시다. 인간다운 삶을 한 번 살아봅시다." 촌장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 마을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서서히 자존심이 살아나고 있었다. 설령 오크 토벌대에 잡혀 죽는다고 해도 후회는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오크에게 잡혀 먹힐 운명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엄연한 사람에게 가축이라니?" 데이몬은 빙그레 웃으며 크란시아를 쳐다보았다. "일종의 충격요법이라 생각하게. 타성에 깊이 젖어 있으니 한 번 충격을 줄 필요성이 있었지." 멀리 떠난 것처럼 보였던 일행은 의외로 멀리 가지 않았다. 그들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숨어 동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데스 나이트와 윈슬럿은 어둠의 마력이 간파 당할 것을 우려해서 인크레시아 속에 집어넣은 상태였다. 그들은 데이몬처럼 능숙하게 어둠의 마력을 은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머지 않아 마을에서 치솟는 불길이 일행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자 데이몬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일단 성공한 것 같군. 마을에 불을 놓았다는 것은 더 이상 오크의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크란시아는 쉽사리 수긍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증명된 것이 아니잖습니까." "기다려보게. 미첼이 살펴보러 갔으니……."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마자 미첼이 돌아왔다. 그는 빙긋 웃으며 보고를 시작했다. "틀림없더군요. 마을 사람들이 짐을 싸서 손에 손을 잡고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가축을 모두 끌고 말입니다. 촌장이 직접 마을에 불을 지르더군요." 보고를 받은 데이몬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크란시아를 쳐다보았다. "어떤가? 내 방법이……." 크란시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방법이 다소 거칠고 과감하긴 했지만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오크에 맞서 싸울 생각을 불어넣는 일. 크란시아가 불가능하다고 치부해버렸던 일을 성사시켰으니 말이다. "놀랍군요. 전 그런 방법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간단하네. 마을 사람들에게 힘의 논리를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지. 그들은 지금까지 오크를 무척 두려워했네. 그런 오크 전사들이 고작 인간 열 다섯에게 떼죽음을 당했으니……. 모르긴 몰라도 그들은 더 이상 오크를 두려워하지 않을 걸세." 묵묵히 듣고 있던 크란시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데 마을 청년들이 잡혀 먹히는 것을 방치한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는군요. 미리 나섰다면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데이몬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사파 출신답게 그의 논리는 지극히 간단명료했다. "대를 위해선 소의 희생이 불가피한 법이야. 자네 아버지가 즐겨 써먹는 방법이기도 하지. 지금은 마음이 그리 편치 않겠지만 나중에 생각하면 오늘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말을 마친 데이몬이 몸을 돌렸다. "이만 가 보자고……. 카트로이와 율리아나 계집애가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조용히 듣고 있던 카심이 딱딱한 표정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대원들의 표정이 약간 굳어 있었다. "그런데. 정말 놀랐습니다." "뭐가 말인가?" "데이몬께서 그토록 냉혹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수백 마리의 오크를 단숨에 쓸어버리는 것도 모자라 살아있는 오크를 산 채로 살을 발라내시다니……" 데이몬은 별안간 가슴속이 뜨끔했다. "그게 대수인가?" "평소 살인을 싫어하시는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그게 아닌 것 같군요. 아까는 피와 살육에 완전히 도취되신 것 같았습니다. 저희들은 지금껏 그런 데이몬의 모습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사, 사람을 잡아먹은 놈들이야. 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지." 당혹해진 데이몬이 떠듬거리며 대꾸했다. 칠종단금술의 금제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살육을 만끽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게 대원들에게 충격을 주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칠종단금술에 대한 내력을 설명할 순 없는 노릇이라 데이몬은 급히 몸을 돌렸다. "사람에겐 누구나 살육의 본능이 있지. 그게 제대로 발동되었다고 생각하게." 몸을 돌리는 데이몬의 옷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기이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던 대원들이 하나 둘씩 그의 뒤를 따랐다. [다크메이지 13장 346편] "왔냐? 욱."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데이몬을 보자 카트로이가 별안간 코를 움켜쥐었다. "뭐야? 웬 피를 이렇게 뒤집어썼어?" 데이몬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오크 놈들 손 좀 봐줬지. 천 사백 정도 쓸어버렸나?" 카트로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마법사 맞냐?" "무슨 소리지?" "혹시 쟤들처럼 칼 들고 설친 것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피범벅이 될 까닭이 없잖아?" 데이몬은 인상을 쓰며 카트로이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오크 나부랭이랑 싸우기 싫다고 빠진 놈이 말이 많군. 이만 철수하자. 조금 있으면 오크 수색대가 들이닥칠 테니……." 고개를 돌리던 데이몬은 율리아나가 눈에 들어오자 갑자기 사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 계집애를 데리고 갈 걸 그랬나? 산채로 포를 뜨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면 날 조금이나마 두려워할 텐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짐이 될 게 뻔해서 카트로이에게 맡기고 간 것이 화근이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데이몬의 시선을 맞받으며 율리아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가 없기 때문에 오크의 통신수단은 철저히 전령에게 맡겨진다. 따라서 인간의 군대에 비하면 극히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그 점을 간파한 게덴하이드는 휘하의 리치들을 이용해서 기초적인 마법 통신망을 구축해 놓았다. 하지만 인간에 비해 엉성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크르흐의 보급부대가 궤멸된 소식은 부근의 오크 부족 2개가 추가로 초토화되고 나서야 게덴하이드의 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도 참사에서 살아남은 오크 패잔병들이 꽁지 빠지게 통신을 맡은 리치에게 달려갔기에 전달될 수 있었다. 비보를 전해들은 게덴하이드는 경악해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라고?" 모든 드래곤들이 수면에 빠져 있었으므로 게덴하이드가 임시 총사령관을 맡고 있었다. 따라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가 져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나다니……. 수정구에 모습을 드러낸 리치는 무감각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살아남은 자들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겨우 열 다섯 정도였다고 합니다. 마법사로 짐작되는 인간 둘의 선제 공격으로 천 사백에 달하는 병력 중 절반이 비명횡사했습니다." "그, 그런 일이……." 게덴하이드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그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물론 거리를 두고 광범위한 마법공격을 펼친다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바로 눈앞에 위치한 오크의 대군을 단순한 대인공격용 마법으로 몰살시킨다는 것은 게덴하이드조차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드래곤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그런 위용을 보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뭔가를 떠올려 본 게덴하이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럴 만한 놈이 하나 있긴 하지. 아무래도 바닷길이 막히자 데이몬이란 놈이 직접 건너왔나 보군." 데이몬의 실력이라면 그 정도의 전과를 올리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다. 오크 패잔병들의 보고를 조합해보면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인간 마법사는 하얀 빛줄기를 수도 없이 발사하여 동료들을 쓰러뜨렸습니다." 물론 게덴하이드는 하얀 빛줄기의 정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매직 미사일. 일대 다수의 접전에서 그놈이 전개한 매직 미사일만큼 위력을 떨치는 대인공격마법도 없지. 게다가 얼마 전 동부 해안을 정찰하던 와이번 세 기가 격추된 것을 감안하면 분명하겠군. 놈이 트루베니아에 건너와 있는 것은 이제 기정사실로 봐야 한다. 그건 그렇고 놈의 목적이 뭔지가 문제인데……." 게덴하이드의 눈구멍에게 기괴한 광채가 번뜩였다. 노예 마을이 세 군데나 털렸다는 것은 상당히 중대한 문제였고 놈의 목적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놈의 목적은 오크의 보급줄을 끊으려는 것이 틀림없다. 노예가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킨다면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없는 오크 족은 곤란에 처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어림없다. 이미 난 거기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으니까……." 게덴하이드는 즉시 지도를 훑어보았다. 이후로 보급부대가 괴멸된 위치를 살펴보니 데이몬이은 토르 부족을 축으로 북서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위치를 파악한 게덴하이드는 즉시 명령을 내렸다. "보급부대의 대부분을 북서쪽으로 모아라. 그리고 그들에게 이동하는 경로의 오크 부족에게 전사들을 차출하게 하라. 현재 운용하는 보급부대는 모두 마흔. 이만에 달하는 대군이라면 어렵지 않게 놈들을 포위할 수 있을 것이다. 제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라도 쉬지 않고 싸울 수는 없는 법. 희생을 감수하고 계속해서 전사들을 투입하면 놈도 결국 지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덴하이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떠올렸다. 오크 부족에 남아도는 것이 전사였고 그들을 끊임없이 투입한다면 제 아무리 데이몬이라도 어쩔 수 없을 터였다. 물론 정예로 구성된 인간들을 다수 데려왔을 테지만 죽여도, 죽여도 꾸역꾸역 몰려드는 오크 전사들을 상대하려면 역부족일 터였다. 자고로 인간이라면 지치기 마련인 법이었고 드래곤이 인간을 두려워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 때 수정구에서 수하 리치의 대답이 들려왔다. "만약 놈이 또다시 노예 마을을 습격할 경우에는 어떻게 대비해야 합니까?" 게덴하이드의 대답은 조금의 머뭇거림이 없었다. 이미 그는 인간의 생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놈이 향하는 경로의 노예 마을에 정예 전사들을 다수 파견하라. 그들로 하여금 마을의 계집과 얘들을 인질로 잡게 한다면 노예들도 어쩔 수 없이 놈들과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보급부대가 궤멸될 경우 인질로 잡은 인간들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몰살시키라고 명령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추적대를 파견해서 마을에서 사라졌다는 노예들을 끝까지 추적하라. 도망친 노예들을 한 놈도 남김 없이 잡아 죽여야 한다." "예." 공손히 머리를 조아린 리치의 모습이 곧 수정구에서 꺼졌다. 게덴하이드는 재차 통신마법을 전개했다. 이번에 연결된 곳은 바로 베르키스의 레어였다. 임시로 레어의 경비책임을 맡고 있는 리치가 나오자 게덴하이드는 머뭇거림 없이 명령을 내렸다. "부활한 리치는 얼마나 되나?" "이제 열 정도가 생명력을 되찾았습니다." 게덴하이드는 머뭇거림 없이 명령을 내렸다. "널 포함한 레어의 리치들을 모두 수색에 동원하겠다. 그들로 하여금 어둠의 마력이 느껴지는 곳을 대대적으로 수색하도록 하라. 본 드래곤은 방대한 어둠의 마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 어둠의 마력이 발산되는 곳만을 집중적으로 검색한다면 오래지 않아 놈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에 수정구 속의 리치는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베르키스 님의 경호는 어떻게……." "걱정하지 마라. 놈이 제정신이라면 섣불리 베르키스님의 거처를 습격하지 못할 것이다. 대신 부근의 오크 부족에서 전사들을 다수 차출해 경비 임무에 투입하라. 통신을 위해 리치 하나를 남겨두면 될 것이다. 만에 하나 놈이 침입할 경우 가디언들과 오크 전사들을 동원해 시간을 벌고 그 사이 모든 리치들을 공간이동으로 투입하면 될 것이다." 착착 들어맞는 게덴하이드의 설명에 리치는 납득한 듯 고개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수정구에서 사라지는 리치의 모습을 응시하며 게덴하이드는 머리를 흔들었다. "놈. 네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해도 통하지 않는다. 이미 바닷길은 완벽히 막힌 상태. 1년 후 드래곤들이 수면에서 깨어난다면 아르카디아의 인간들은 트루베니아와 마찬가지로 처참한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덴하이드는 유쾌한 듯 괴소를 흘리고 있었다. 게덴하이드의 명령으로 토르 부족이 위치한 곳 북서쪽으로 다수의 오크 보급부대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는 경로에 위치한 부족에게서 강제로 전사들을 차출하며 이동했다. 그런 까닭에 보급부대는 점점 그 수가 불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데이몬 일행과 마주친 부대는 하나도 없었다. 왜냐하면 데이몬과 카심 용병단원들은 세 번째 노예마을을 습격한 뒤 곧바로 남하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본 드래곤도 타지 않고 공간이동 마법도 쓰지 않은 채 도보로 이동했기 때문에 그들은 열흘이 지나서야 펠루시아 산맥 북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잠시 쉬었다 간다." 휴식을 지시하자 대원들은 살 것 같다는 표정으로 여기저기에 주저앉았다. 강행군을 한 탓에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다. 그 때 뒤에서 맥빠진 음성이 들려 왔다. "나, 날 좀 내려줘요." 율리아나였다. 그녀는 놀랍게도 윈슬럿의 어깨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물론 그녀에게 강행군을 견딜 만한 체력이 없었으므로 데이몬이 강제로 윈슬럿 위에 태운 것이다. 카심이 쓴웃음을 지으며 다가가 그녀를 안아다 내려주었다. 그녀는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한 번 노려본 뒤 말없이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어휴 차가워서 혼났네." 생각보다 팔팔한 모습이라서 카심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래도 윈슬럿의 무등을 타고 왔으니 저희보다 훨씬 편했겠군요." "그런 말 말아요 카심. 얼마나 흔들리는지 알아요?" 투덜대던 율리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머리통이 없는 놈이니 그런 대로 탈만은 하더군요." 그 모습에 크란시아는 혀를 내둘렀다. 예쁘장하게 생긴 계집아이로만 보았는데 보기만 해도 끔찍한 언데드 몬스터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타고 오다니……. 머리통을 떡 하니 옆구리에 끼고 있는 듀라한이라면 평범한 여자는 보기만 해도 기절해 버릴 터였다. 하지만 나머지 대원들은 별달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눈치였다. 그들은 이미 율리아나란 소녀에 대해 만성이 된 상태였으므로……. 데이몬은 느긋하게 사방을 둘러보다가 남쪽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산맥 남단으로 한참 내려가면 베르키스 놈의 레어가 있다. 물론 그곳엔 가디언들이 우글우글하겠지?"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 대원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 들어갔다. 패터슨이 호들갑을 떨며 몸을 일으켰다. "서, 설마 그곳을 칠 생각은 아니겠지요?" 데이몬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놈의 레어를 칠 생각은 없으니까……." "그럼 왜 이리로 오셨습니까?" 데이몬이 패터슨을 향해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할 일이 있어서 왔지 뭐하러 왔겠어?" 크란시아가 두 눈에 기대감을 가득 떠올린 채 말을 걸었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인 임무가 시작되는 것입니까?" "그렇다. 자세한 것은 슈렉하이머가 설명해 줄 것이다." 데이몬이 말을 마치자 슈렉하이머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리치 특유의 기괴한 음성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모두들 궁금해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지금까지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해야 할 임무는 그 정도로 기밀 엄수를 요하는 것입니다." 대원들이 눈동자에 호기심을 가득 떠올린 채 모여 앉았다. 도대체 무슨 임무이기에 지금까지 비밀을 지켰을까? 슈렉하이머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산맥 너머에는 1차 종족전쟁에서 패배한 오크 족들이 숨어살았던 근거지가 있습니다. 아마 아직까지도 많은 수의 오크 족이 거주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뒤에는 방대한 넓이의 숲이 펼쳐져 있습니다. 아직까지 태고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그곳은 세인들에게 엘프의 숲(Elven forest)으로 불려집니다. 다수의 엘프 족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성질 급한 패터슨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임무는 엘프 족을 만나는 것입니까? 설마 엘프와 동맹을 맺어 함께 오크를 정벌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슈렉하이머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뒤흔들었다. "반은 맞습니다. 저희들은 기필코 그들 엘프와 동맹을 맺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거쳐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엘프의 숲 건너에는 더 큰 비밀이 숨어 있으니까요." "비밀이라면." 슈렉하이머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빛났다. "엘프의 숲 너머에는 다름 아닌 다크 포탈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바로 그것을 재 가동시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일행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크 포탈(Dark potal). 현신한 마왕이 마계(魔界)에 있는 수하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만든 차원이동 게이트를 뜻한다. 마계는 인간계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다. 그 방대한 시공간과 차원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 마왕이 직접 만든 차원이동의 게이트가 바로 다크 포탈인 것이다. 암흑전쟁 당시 수도 없는 마계의 괴수와 마족들이 다크 포탈을 통해 인간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헤아릴 수도 없는 사람을 무참히 살해하고 그 시체를 이용해 언데드 병사를 만들어냈다. 그 만행은 나이델하르크가 패퇴하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다크메이지 13장 347편] 그런 내력을 알고 있는 대원들은 깜짝 놀랐다. 카심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 그렇다면 데이몬께서는……. 설마 다크 포탈을 통해 마계의 마족들을 불러내어 드래곤에 대항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대답은 슈렉하이머의 몫이었다. "그것은 아닙니다. 다크 포탈은 이미 500년 전 마룡 베르키스와 그를 따르는 드래곤들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 어떤 마족도 자력으로 포탈을 탈 수 없습니다." "그, 그렇다면 왜?" "500년 전 저는 우연한 기회에 다크 포탈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포탈 주변을 미미하게 감돌고 있는 암흑의 힘이 바로 그 증거이지요. 말하자면 마계의 마기가 실낱같은 틈을 통해 이곳으로 밀려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슈렉하이머의 말뜻을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기에 대원들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마침내 슈렉하이머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크 포탈은 자체가 시공간의 괴리를 극복하는 차원이동 마법진입니다. 다시 말해 공간이동 마법진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뜻이지요. 전 다크 포탈을 개조해서 아르카디아에 있는 정벌군을 이리로 불러들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대원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슈렉하이머의 말대로 다크 포탈을 개조하여 아르카디아와 연결한다면 150만 대군이 건너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폭풍우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 마계는 아르카디아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다. 다크 포탈은 그토록 먼 마계에서도 무수한 괴수와 마족을 불러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런 만큼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문제였다. 묵묵히 듣고 있던 데이몬이 말문을 열었다. "포탈의 개조는 그리 불가능한 게 아냐. 문제는 포탈에 새겨진 마법진이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냐는 것이지. 좌표설정 마법진만 되살린다면 충분히 공간이동 게이트로 활용할 수 있어." 격정을 참지 못한 크란시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백 오십만 대군이 무사히 트루베니아에 건너올 수 있다면 이것은 이미 이긴 싸움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생각할 게 아냐. 트루베니아에 살고 있는 오크는 줄잡아 오백만이 넘는다. 오크란 놈들은 거의 전부가 숙달된 전사나 다름없지. 우리에겐 무엇보다도 드래곤과의 싸움을 어떻게 풀어나가는가가 관건이다. 만약 웜급 이상의 드래곤이 셋 이상 뭉친다면 우리는 감히 상대할 없다. 그러므로 철저히 각개격파를 해야만 승부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대원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이미 두 마리나 죽었으므로 이곳의 드래곤들도 어느 정도 대비책을 세워놓고 있을 터였다. 특히 드래곤이란 인간보다 월등히 현명하다고 알려진 존재가 아니던가? 침묵을 깬 것은 슈렉하이머의 음성이었다. "우린 우선 엘프의 숲을 통과해야 합니다. 다크 포탈이 엘프의 숲 너머에 위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엘프의 허락을 받을 필요 없이 본 드래곤을 타고 숲을 건너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크란시아의 의견에 슈렉하이머는 느릿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안될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한다면 무리 없이 숲을 건널 수 있겠지만 문제는 훗날 포탈을 타고 건너올 아르카디아의 대군의 안전입니다. 엘프의 허락 없이는 단 한 명의 병사도 숲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질문을 건넨 패터슨은 입을 딱 벌렸다. "엘프의 숲이 그 정도로 무섭습니까?" "그렇습니다. 엘프가 길을 열어주지 않을 경우 그 속에 갇힌 사람은 끝없는 미로에서 헤매다 결국 탈진해서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엘프와의 동맹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들의 협조를 얻어야만 정벌군이 무사히 전장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고한 엘프들이 쉽사리 동맹을 맺으려 하겠습니까?" "잘 설득해야지요. 엘프와의 동맹 여부가 가장 중요한 관건입니다." 설명을 들은 대원들은 그럴 듯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을 가늠해 본 데이몬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이럴 시간이 없다. 이동하자." 잠시 휴식을 취한 덕분에 기력을 회복한 대원들이 하나 둘씩 몸을 일으켰다. 유일하게 율리아나만이 일어나지 않고 투정을 부렸다. "좀 더 쉬었다가요. 아직까지 피로가 풀리지 않았어요." 데이몬은 윈슬럿에게 눈길을 한 번 날리는 것으로 율리아나 문제를 깨끗이 해결했다. 성큼성큼 다가온 윈슬럿이 우악스러운 손길로 율리아나를 들쳐 메었다. "이 못된 놈아. 내려놓지 못해?" 율리아나가 연거푸 주먹을 휘둘렀지만 윈슬럿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주먹이 맵다고 하나 언데드인 윈슬럿에게 먹힐 턱이 없었다. "데이몬. 이 나쁜 영감탱이. 죽여버릴 거야." 일행은 거푸 터져 나오는 율리아나의 고함소리를 양념 삼아 행군을 시작했다. 무료하게 행군을 거듭하던 대원들이 점차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율리아나는 지쳐서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런데 엘프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요?" 패터슨의 질문에 카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용모가 인간과 거의 틀리지 않다고 들었어. 몬스터 도감에는 긴 귀가 특징인 아름다운 종족이라고 적혀 있더군. 적어도 천년 이상의 수명을 가지고 있는, 한 마디로 신비에 쌓여 있는 종족이지." 듣고 있던 대원들은 입을 딱 벌렸다. "우와 천 년이나 살아요?" "정말 오래 사는 종족이로군요." 듣고 있던 슈렉하이머가 쓴웃음을 짓더니 대화에 끼여들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장로들 중에서 드물게 팔백 세 이상 사는 자도 있지만 엘프의 평균 수명은 기껏해야 오백 년 남짓합니다." 슈렉하이머의 말을 들은 패터슨은 눈을 가늘게 뜨며 카심을 쳐다보았다. "그것 봐요. 이번에는 대장이 틀렸잖아요? 만날 잘난 체만 하더니……." 머쓱해진 카심이 실소를 흘렸다. "허허. 그거야 내가 틀린 게 아니고 책이 틀린 거지." 대원들은 곧 엘프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르카디아엔 엘프가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껏 엘프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책을 통해 단편적인 지식 정도는 갖고 있었기에 대화가 막히는 일은 없었다. 입담 좋은 패터슨이 너스레를 떨었다. "엘프가 그렇게 아름답다면 이참에 하나 잡아다 마누라로 삼아야겠군. 그렇게 한다면 평생동안 늙지 않는 마누라를 가질 수 있을 것 아냐?" "내가 알기론 하프 엘프(Half elf)가 더 아름답다고 하던데……." 그 말을 듣자 슈렉하이머의 눈구멍에서 갑자기 소름끼치는 빛이 떠올랐다. "경고하건데 추호도 그런 행동을 할 생각 마십시오. 엘프는 극히 자존심이 강한 종족입니다. 대부분의 엘프 여인들은 몸을 더럽힐 위기에 처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겁탈한 자는 전 엘프의 집요한 추적을 받아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말입니다." 깜짝 놀란 패터슨이 입을 다물었다. 생각 없이 꺼낸 말인데 슈렉하이머가 그토록 심각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준엄한 꾸짖음은 계속 되었다. "행여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엘프와 동맹을 맺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일행의 실력을 감안하면 엘프의 손에 쉽사리 당하지는 않을 테지만 모르긴 몰라도 죽을 때까지 엘프의 숲을 맴돌아야 할 것이 분명합니다." 조심스럽게 슈렉하이머의 눈치를 보던 패터슨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농담이었습니다. 앞으로 그런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조금 심했다고 느꼈는지 슈렉하이머의 말투가 다소 누그러졌다. "하나 가르쳐 드리지요. 하프 엘프는 원천적으로 엘프와는 다른 종족입니다. 인간과 엘프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인간과 거의 다름없다고 보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간혹 가다 엘프의 아름다운 외모와 긴 귀를 타고나는 하프 엘프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 그렇습니까?" 엘프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풍부한 지식을 보유한 슈렉하이머의 말이라서 대원들의 관심이 일시에 집중되었다. 슈렉하이머는 조용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엘프의 피는 인간에 대해 철저히 열성입니다. 그 탓에 태어나는 하프 엘프는 거의 대부분이 인간의 특성을 가지고 태어나지요. 간혹 가다 외형이 엘프를 닮은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지만 신체적 특성은 인간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알아야 할 점은 인간 사회에 섞인 엘프는 오래지 않아 인간화(人間化) 된다는 점입니다. 종족의 특성을 대부분 잃어버린다는 뜻이지요. 인간사회에서 살아가는 엘프의 수명은 고작해야 200년 남짓입니다." 카심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이상한 일이군요. 단순히 인간과 섞인다고 종족의 특성을 잃어버린다니……." "엘프들은 깊은 숲 속에서 오로지 자신들만의 생활을 영위합니다. 인간처럼 감정에 충실하지 않고 희로애락을 최대한 억제하며 생활하는 것이지요. 제 생각에 엘프들의 긴 수명은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들과 섞인 엘프들은 인간들 특유의 격렬한 감정변화를 거듭 대하다 보니 오래지 않아 종족의 특성을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카심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제가 읽은 책에 따르면 상당히 많은 엘프가 인간과 결혼해서 오랫동안 살았다고 하던데……. 혹시 책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엘프란 종족은 쉽사리 늙지 않지요. 젊음을 오랫동안 간직하기 때문에 겉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어쨌든 인간들보다 두 배 이상 오래 사는 것은 기정사실이니까요." 과거를 떠올리려는 듯 슈렉하이머는 모호한 눈빛을 번뜩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인간과 결혼한 엘프들은 대부분 강제로 납치 당한 경우입니다. 대부분의 엘프 여성들은 몸을 더럽힐 위기에 처한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하지만 잉태가 되었을 경우 모성애 때문에 자결을 포기하지요. 그리고 인간들 틈에서 생활하며 서서히 엘프로써의 정체성을 잃어 가는 것이지요. 인간과 결혼해 살았던 엘프는 거의 모두가 그런 경우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드물게 있지만……." 묵묵히 듣고 있던 크란시아가 입을 열었다. 과거 트루베니아에서 대부분의 왕국이 노예제도를 합법화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트루베니아에는 엘프를 대상으로 한 사냥이 무척 성행했겠군요." "불행히도 그랬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멸망을 초래할 것이란 사실을 모른 채 말입니다." "인간의 멸망을 초래하다니요?" 슈렉하이머의 시선이 크란시아에게로 향했다. "만약 종족전쟁에서 엘프가 인간의 편을 들어주었다면 그토록 쉽게 밀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엘프의 숲은 펠루시아 산맥 너머 위치한 오크의 배후에 위치해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인간과 협력하여 오크의 배후를 견제해 주었다면 제 아무리 드래곤이 가세했다 하더라도 그토록 쉽사리 패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듭되는 노예사냥에 분노한 엘프 족들이 인간과의 연계를 거부했고 그 탓에 오크 족이 전력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트루베니아가 오크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되었던 데에는 그런 속사정이 있지요."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비화를 듣게 되자 대원들의 얼굴에는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그렇다면 엘프족은 애초부터 오크와 그리 친하지 않았던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1차 종족전쟁이 끝난 뒤 숨어 들어간 오크들은 수시로 엘프의 숲을 침입해 사냥을 벌였습니다. 영역을 지키려는 엘프와는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 탓에 두 종족간의 감정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크란시아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만약 영역을 보존해 준다고 약속하면 엘프와 동맹을 맺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겠군요." "엘프가 어떻게 나올지 전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노력해 볼 따름이지요." 슈렉하이머의 대답을 들으며 대원들은 열심히 걸음을 재촉했다. "뭔가 이상하군요." 슈렉하이머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행의 앞에는 황량한 황무지가 펼쳐져 있었다. 잡초만 듬성듬성 나 있을 뿐 숲 비슷한 것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슈렉하이머가 눈빛을 번뜩이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분명히 여기서부터 엘프의 숲이 펼쳐져 있었는데……." 조금 전 그들은 오크족의 서식지를 피해 왔다. 부족원이 족히 이삼 만은 될 것 같은 대규모 마을이었다. 마을 곳곳에 번뜩이는 감시망이 펼쳐져 있었지만 데이몬이 적절하게 탐지마법을 사용하여 무사히 마을을 우회해 올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을의 경계점을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엘프의 숲은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래도 뭔가 변화가 있는 것 같군요." 사방을 둘러보던 데이몬이 능선 저쪽으로 손가락질을 했다. "일단 더 가보는 게 어떻겠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대원들은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멀리서 번뜩이는 오크 경계병의 시선을 피해서 가느라 행군속도는 지루할 정도로 느렸다. 엘프의 숲이라 짐작되는 곳이 모습을 드러낸 때는 능선을 서너 개나 지나친 다음이었다. 울창한 숲이 모습을 드러내자 대원들의 얼굴에는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을 듯한 원시림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곳이 엘프의 숲인가 보군요." 하지만 슈렉하이머는 아직까지 뭔가가 석연치 않은 모양이었다. 조심스럽게 사방을 둘러보던 슈렉하이머가 난데없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른 대원들은 그저 슈렉하이머가 하는 양을 우두커니 지켜볼 뿐이었다. 잠시 후 땅을 파던 슈렉하이머의 손에 뭔가가 들려나왔다. 그것은 시커멓게 타버린 나무의 뿌리 부분이었다. 나무뿌리를 한참동안 뒤집어보던 슈렉하이머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엘프의 숲에 변고가 생긴 것 같군요." "변고라니?" "누군가가 갈수기를 틈타 엘프의 숲에 불을 질렀습니다. 나무뿌리까지 타버린 것을 보아 의도적으로 지른 불이 분명합니다." "누가 그런 짓을?" 의아한 듯 되묻던 카심이 입을 닫았다. 트루베니아에서 엘프의 숲에 불을 지를 만한 존재는 오로지 한 종족뿐이었다. "오크가? 놈들이 대관절 왜?" "엘프와 오크는 예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두 종족 사이에 알력이 생긴 것 같습니다. 숲 속에서만큼은 사나운 오크 전사도 엘프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당해내지 못하자 오크들이 홧김에 불을 지른 것 같군요." 말을 마친 슈렉하이머는 나무뿌리를 저만큼 던져버렸다. "어쩌면 동맹을 맺는 일이 어렵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엘프들은 자신들의 숲을 망가뜨린 종족에겐 엄청난 원한을 가지니 말입니다." 슈렉하이머는 앞에 보이는 숲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대원들이 서둘러 뒤를 따랐다. [다크메이지 13장 348편] 숲 언저리에 접어들자 슈렉하이머가 경고성을 발했다. "조심하십시오. 어쩌면 오크 사냥꾼이 잠복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미첼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엘프의 숲에 오크 사냥꾼이라니요?" "이곳은 엘프의 숲이 아닙니다. 그저 완충지로 조성해 놓은 숲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진짜 엘프의 숲은 한참 들어가야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미첼을 보며 슈렉하이머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완충지를 지나면 넓은 벌판이 나옵니다. 그곳을 지나야 엘프의 숲이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말을 끊은 슈렉하이머는 뭔가가 떠올랐는지 재차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 숲에는 오크 사냥꾼말고도 센티널(sentinel, 파수꾼)이라 불리는 엘프들이 함께 잠복해 있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 그들을 발견할 경우 결코 해를 끼쳐서는 안됩니다. 최대한 정중하게 저에게 데려와 주십시오. 엘프는 예의바르게 나오는 상대에게 결코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대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원들은 넓게 산개한 채 엘프들이 조성해 놓은 완충지 숲을 수색해 들어갔다. 숲 속에는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들이 살고 있었다.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고블린의 습격을 받는 일이 있었지만 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습격해 온 고블린들만이 허무하게 전멸되었을 뿐이었다. 그만큼 일행 각자의 실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숲의 종족이라는 엘프는 쉽사리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깊은 숲 속. 햇빛조차 들지 않아 어둑어둑할 정도로 울창한 숲 속이었다. 떨어진 낙엽이 무릎 깊이로 쌓여 있었고 사방은 온통 아름드리 나무들 천지였다. 사라라락. 바람이 불었는지 나무들이 잠시 요동을 쳤다. 그 틈으로 파고든 한 줄기 빛이 나무 사이를 희미하게 비추자 어둠 속에서 뭔가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놀랍게도 여러 개의 그림자가 나무그늘 아래 은신해 있었다. 그들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버릴 정도로 감쪽같이 은폐하고 있었다. 바로 숲의 종족이라 일컬어지는 엘프였다. 다섯 명의 엘프가 나무그늘 아래 숨어 있는 것이다. 희미하게 드러나는 몸의 굴곡을 보니 전원 여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류미너스 일족의 4계급 전사로써 숲을 감시하는 센티널(파수꾼:sentinel)의 임무를 맡아 파견 나와 있는 일루미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살포시 눈을 감았다. 숙련된 센티널인 그녀는 굳이 숲을 돌아다니며 정찰할 필요가 없었다. 나무의 속삭임이 그녀에게 침입자의 존재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눈을 떴다. 놀랍게도 일루미나의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분노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침입자가 있군." 그 말을 듣자 휘하의 센티널 아처들이 말없이 메고 있던 활을 풀어 손에 들었다. 침입자의 정체를 알아차린 이상 그녀들에겐 침입한 자의 규모와 정체를 파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나무의 속삭임은 오로지 침입자의 유무만을 가르쳐 줄뿐이었고 나머지는 오로지 센티널들의 몫이었다. 그녀들은 잠자코 일루미나의 지시를 기다렸다. "자매들이여. 가도록 해요." 일루미나의 지시가 떨어지자 휘하의 센티널들은 조심스럽게 나무가 알려준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무 아래를 바람처럼 달리는 일루미나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다. "침입한 자들이 누굴까? 또 파타르 부족의 오크일까?" 돌연 그녀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그럴 것이 그녀가 소속된 류미너스 일족은 부근의 오크 족과 오랫동안 지루하게 싸워왔기 때문이었다. 엘프와 오크 사이의 악연은 비교적 깊었다. 두 종족의 분규가 시작된 시기는 1차 종족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시작된다. 패전한 채 펠루시아 산맥 너머로 숨어 들어온 오크 패잔병과 영역을 지키려는 엘프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분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먹을 것을 찾아 무수한 오크 전사들이 숲을 침입해 왔다. 하지만 엘프는 그들을 용서하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많은 오크 전사들이 엘프의 화살에 싸늘한 시신이 되었다. 오크 전사들 역시 굶주리는 배를 채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엘프의 공격에 맞서 싸워야 했다. 그 분쟁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고 많은 오크와 엘프가 서로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 때문인지 두 종족사이의 감정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비록 2차 종족전쟁에서 엘프가 인간의 편을 들진 않았지만 오크들은 그 점을 결코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다. 도리어 오크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엘프에게 본격적으로 앙갚음을 시작했다. 인간에게서 빼앗은 풍족한 식량으로 말미암아 전사의 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난 것을 이용해서 오크들은 끊임없이 엘프의 숲을 침범했다. 그 선봉을 맡은 부족이 바로 파타르 부족이었다. 오크 족의 옛 영토를 근거지로 삼은 파타르 족은 무척 호전적인 종족이었다. 인간을 노예로 부리지 않고 오로지 사냥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파타르 족은 끊임없이 전사들을 엘프의 숲에 들여보냈다. 그 결과 다수의 전사들이 숲에서 생을 마쳤지만 그들의 반격으로 엘프 센티널들의 희생도 컸다. 거의 매일같이 한 두 명의 센티널들이 죽어나갔던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려보던 일루미나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절친한 친구였던 세이렌, 레시모나도 결국 신의 품으로 돌아갔지." 파타르 족은 죽임을 당한 엘프의 시신마저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의 눈엔 인간도 엘프도 단지 배를 채울 식량에 지나지 않았다. 일루미나도 지금껏 여러 번이나 오크에게 잡아먹혀 뼈만 남은 동료의 유골을 수습해야 했다. 그 때문인지 일루미나가 오크 전사에게 느끼는 적의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녀는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소중한 우리의 숲을 훼손하고 동료를 잡아먹은 놈들……. 용서하지 않겠어." 아무리 잔인하고 흉포한 오크 전사라도 숲 속에서만큼은 엘프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엘프 한 명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열 명에 가까운 오크 전사가 죽어야 한다. 생각보다 희생이 크자 파타르 족은 마침내 엘프의 숲을 불태워버릴 계획을 세웠다. 엘프를 보호해주고 숨겨주는 엘프의 숲이 파타르 부족에겐 가장 큰 걸림돌이었기 때문이었다. 계획의 실행에 들어간 그들은 갈수기가 되면 어김없이 숲에다 불을 질렀다. 숲을 목숨보다 귀중하게 생각하는 엘프에겐 한 마디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온 힘을 다해 불을 진화했지만 갈수기에 벌어진 일이라서 불을 끌 물이 부족했다. 결국 엘프는 넓은 면적의 숲을 잃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엘프들이 목숨을 잃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날 이후 불로 인해 숲과 동료를 잃는 일은 아예 엘프 일족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파타르 족이 해마다 같은 만행을 되풀이했던 것이다. "나쁜 오크놈들." 일루미나는 말없이 분노를 삼키며 침입자가 감지된 곳을 향해 소리 없이 달려갔다. 나무의 속삭임이 알려준 곳에 도착한 일루미나는 깜짝 놀랐다. "오크가 아니잖아?" 넓게 산개한 채 숲을 수색하는 자들은 오크가 아니었다. 엘프와 그리 다르지 않은 외모를 가진 종족이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채 숲 속을 조심스럽게 걸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라고 해서 일루미나에게 달가울 리가 없었다. 인간 역시 엘프에겐 적일 뿐이었다. "저들 역시 오크와 다를 바 없는 놈들이지." 일루미나는 잠자코 몇 해 전 일어난 일을 떠올렸다. 트루베니아의 인간들은 여간해서는 엘프의 숲으로 접근하는 일이 없다. 마을을 벗어난 노예는 가차없이 죽음을 당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몇 해 전에 엘프의 숲으로 들어온 인간들은 아르카디아의 기사들이었다. 몬스터 사냥을 하러 바다를 건너온 아르카디아 인들이 엘프의 숲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들은 숲에 들어간지 오래되지 않아 엘프 센티널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인간을 대하는 탓에 센티널들이 예의를 가지고 그들을 맞이했다. 하지만 엘프의 미모에 눈이 휘둥그레진 아르카디아 기사들은 예의를 덧없이 저버렸다. 그들은 흑심을 품고 엘프 센티널들을 거침없이 제압해서 능욕했다. 일루미나의 절친한 친구였던 이리스도 그 때 당했던 경우였다. 욕망을 채운 아르카디아 기사들은 사로잡은 엘프들을 끌고 그곳을 떠났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들은 숲을 벗어나지 못했다. 분노한 엘프 전사들이 동료를 구출하기 위해 추적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엘프의 숲은 그들이 들어온 길을 막아버렸고 아르카디아 기사들은 미로로 변해버린 숲을 끝없이 맴돌아야 했다. 결국 그들은 단 한 명도 숲을 벗어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해야 했다. 엘프의 분노는 무서웠다. 그들은 항복한 기사마저 용서 없이 처형해버렸다. 하지만 복수를 했어도 불행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겁탈을 당해 잉태를 한 몇몇 센티널들 때문이었다. 달이 차자 그녀들은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이를 키울 수는 없었다. 하프 엘프는 결코 엘프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인간의 피는 결정적으로 엘프에 대해 우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종족의 정체성이 흐려질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장로들은 아이를 버릴 것을 명했다. 때문에 그녀들은 눈물을 머금고 갓 낳은 아이를 떠나보내야 했다. 당시 일루미나는 넋을 잃고 우는 이리스를 밤새도록 달랜 경험이 있었다. 갓 낳은 핏덩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오죽하랴. 그 때문인지 일루미나에겐 숲을 침입한 인간들이 결코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인간들의 수를 헤아려보았다. "열 명 이상이니 우리가 감당할 수 없겠군." 일루미나는 즉시 휘하의 센티널 두 명을 불렀다. "자매들은 지금 즉시 마을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이 사실을 마을에 전하세요." "알겠습니다." 두 명의 센티널이 소리 없이 떠나간 뒤 일루미나는 침입자들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겐 증원군이 올 때까지 침입자의 동태를 살필 의무가 있었다. "젠장. 이젠 몬스터도 보이지 않는군." 미첼은 연신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둘러봐도 똑같은 숲 속이라 수색하는 것이 무료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 주변을 살폈다. 엘프의 숲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엘프의 안내를 받아야 했다. "만약 엘프 센티널이 숨어있다면 대단한 은폐술을 보유한 자들 일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기척이라도 감지했을……." 미첼의 안색이 갑자기 경직되었다. 뭔가 기이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는 듯한 느낌. 미첼은 눈에 마나를 모아 주위를 면밀히 살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로군. 분명 뭔가가 느껴졌는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던 미첼이 별안간 눈을 감았다. 잘 단련된 청각을 믿어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눈을 지긋이 감은 채 귀를 기울이던 미첼의 감각에 뭔가가 걸려들었다. 미첼은 정신을 집중해서 소리의 정체를 가늠하려 애썼다. "가느다란 호흡소리. 전방일까 측방일까?"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호흡소리가 너무도 가늘었기에 좀처럼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숨어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기에 미첼은 최대한 정신을 집중했다. "오른쪽이다." 미세한 기척을 용케 잡아낸 미첼이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는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동자 한 쌍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둠 속의 눈동자는 금세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미첼은 이미 그곳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엘프의 안내를 받아야만 엘프의 숲에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에 미첼로써는 필사적이었다. "이런." 일루미나는 적이 당황했다. 흩어져 있던 인간 중 하나에게 가까이 접근하긴 했지만 그녀에겐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녀의 은폐술이라면 아무리 시력이 뛰어난 존재라도 쉽사리 발견할 수 없다. 그 점을 철석같이 믿고 가까이에서 인간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탄로나 버린 것이다. 입술을 지긋이 깨물던 일루미나는 철수 명령을 내렸다. "마을로 돌아가서 경과를 보고하세요. 저 자는 내가 맡겠어요." 대동한 센티널들은 모두가 경험이 없는 신참들이었다.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자칫 잘못하면 포로가 될 우려도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돌아가란 명령을 내린 것이다. 명령이 떨어지자 센티널 둘은 머뭇거림 없이 몸을 돌렸다. 일루미나는 그 모습을 보지도 않고 전통에서 화살을 꺼내 활에다 쟀다. 이제부터 센티널들이 빠져나갈 길을 열어주어야 했다. 숙련된 동작으로 시위를 당긴 일루미나는 육박해오는 인간 기사의 목 부위를 겨냥했다. 갑옷을 입은 오크들과 오랫동안 싸움을 치러왔기 때문에 그녀는 적의 어느 부분을 겨냥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쐐애액. 날카로운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동시에 인간 기사의 헛바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헉." 인간 기사가 급히 몸을 뒤틀었다. 육중한 갑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몸놀림이 상당히 민첩했다. 오크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 탓에 날아간 화살은 인간 기사의 목 보호구에 맞고 헛되이 퉁겨 나가버렸다. 쨍. 그 모습에 일루미나는 적이 놀랐다. 그녀가 사용하는 화살의 촉은 미스릴로 제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지간한 강철 갑옷 정도는 가볍게 뚫어버릴 위력이 있었다. 비록 빗겨 맞기는 했지만 저처럼 맥없이 퉁겨 나가다니……. 일루미나는 놀라움을 접고 또다시 화살을 메겼다. 슈슉. 미스릴 촉을 단 화살이 대기를 가르며 인간 기사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그녀의 이번 공격도 무위로 돌아갔다. 인간 기사는 검집을 휘둘러 화살을 가볍게 퉁겨내고 계속 접근하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13장 349편] 대단한 실력을 가진 기사였다. 입술을 지긋이 깨문 일루미나는 또다시 화살을 걸어 시위를 당겼다. 인간 기사는 이미 지척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쐐애애액. 화살이 바로 코앞에 다가온 기사의 투구를 향해 날아갔다. 거리가 가까웠기에 투구 사이로 드러나는 기사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검으로 막기가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기사는 급히 머리를 돌렸다. 핑. 화살은 또다시 기사의 투구에 빗겨 맞고 퉁겨져 나왔다. 우연인지 의도적인지 모르지만 화살과 접촉한 투구의 면이 적절한 경사를 이뤘기 때문에 나온 결과였다. 아무래도 미스릴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 강도가 뛰어난 금속으로 만든 투구 같았다. 놀란 듯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기사가 재차 몸을 날리자 일루미나는 또다시 전통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미처 화살을 시위에 먹일 틈이 없었다. 다가온 기사가 검집을 그대로 휘둘러 활을 든 일루미나의 손을 가격해버렸던 것이다. "악." 짧은 비명성과 함께 손에 힘이 풀리며 활이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입술을 깨문 일루미나는 전통에서 빼낸 화살을 휘둘러 기사의 옆구리에 꽂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기사의 손이 일루미나의 팔뚝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달려오던 기사의 기세에 밀린 일루미나는 그만 뒤로 넘어져 버렸다. 이미 기사의 육중한 몸이 그녀를 꼼짝도 하지 못하게 깔아뭉갠 상태였다. "헉, 헉." 인간 기사의 거친 숨소리가 바로 귓전으로 토해지자 일루미나는 정신이 아찔해왔다. 의도했던 대로 휘하의 센티널들은 피신시킬 수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생포되고 만 것이다. 눈을 꼭 감은 일루미나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불길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도 결국 이리스처럼 몸을 더럽히게 되는 건가.' 결사적으로 화살을 쥔 손을 들어올리려 했지만 강철같은 기사의 팔뚝은 요지부동이었다. "헉헉. 십년 감수했군." 미첼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숨을 헐떡거렸다. 덮어놓고 달려오다가 당한 화살 공격은 정말 위력적이었다. 모처럼 발견한 엘프 여전사가 그토록 냉정하고 망설임 없이 공격을 가하다니……. 자칫 잘못했으면 영문도 모르고 저승으로 갈 뻔했기에 미첼은 한참동안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숨을 가다듬은 미첼은 쓴웃음을 지으며 포로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자세가 무척 묘하군." 포로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미첼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포로의 용모가 숨이 콱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에, 엘프가 이렇게 아름답다니……." 미첼은 넋이 나간 듯 정신 없이 포로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손을 대면 그대로 묻어날 듯한 하얀 피부, 꼭 감은 채 부르르 떨리는 속눈썹. 유난히 돋보이는 붉은 입술은 미첼의 가슴을 점점 설레게 하고 있었다. 한참동안 포로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미첼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입맞춤을 할 뻔했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던 미첼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당신을 해칠 생각은 없습니다. 공격을 막기 위해 부득이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 공격하지 않는다면 풀어드리겠습니다." "………." 대꾸는 없었다. 포로는 눈을 꼭 감은 채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 모습에 미첼은 애가 탔다. "미치겠군. 설마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건가?" 미첼은 다시 한 번 설득을 시작했다. "저 역시 당신을 풀어드리고 싶지만 그럴 순 없습니다. 만약 절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풀어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포로가 슬며시 눈을 떴다. 순간 미첼은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포로의 눈동자가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포로는 미첼의 멍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미첼의 눈동자가 점차 몽롱해지고 있었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정신 없이 고개를 흔든 미첼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포로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마음을 굳힌 미첼이 몸을 일으켰다. "일단 풀어줘야겠군." 미첼은 풀어주기 전에 포로의 손에 들린 화살을 빼앗는 것을 잊지 않았다. 땅에 떨어진 활까지 집어 든 미첼은 완전히 무장 해제된 포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까지 포로의 팔뚝은 미첼의 손에 굳게 붙들려 있었다. "보아하니 인간의 말을 모르시는 것 같으니 당신을 제 일행에게로 모셔야겠습니다. 일행 중에는 당신과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그 말을 듣자 놀랍게도 포로가 입을 열었다. 그리 유창하진 못했지만 미첼은 확실히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잘 알겠어요. 순순히 따라갈 테니 팔을 놓아주시겠어요." 깜짝 놀란 미첼이 손을 풀었다. 처음 만난 엘프 여전사가 인간의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미첼은 엘프 여전사를 쳐다보며 정신 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이,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군요." 일루미나는 몹시 아픈 듯 팔뚝을 어루만지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조금이지만 배웠어요. 4계급 전사에겐 제한적으로나마 배우는 것이 허용되어 있거든요." 그녀의 팔뚝에 뚜렷하게 손자국이 난 것을 발견하자 미첼의 얼굴에 계면쩍은 표정이 떠올랐다. "미, 미안합니다. 저, 정신이 없어서……." "괜찮아요. 도리어 무턱대고 공격을 퍼부은 잘못이 저에게 있는 걸요?" 어쩔 줄 몰라하던 미첼이 들고 있던 활과 화살을 일루미나에게 얼른 내밀었다. "이것은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나저나 정말 혼났습니다. 하마터면 꼬치가 될 뻔했으니 말입니다." 일루미나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무기를 받아들었다. 지금 맞닥뜨린 적은 오크와는 달리 이성이 통하는 상대였다. "이해하세요. 오랫동안 오크 사냥꾼들과 전투를 치러오느라……." 그 때 사방이 부산해지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심이었다. 보이지 않자 미첼을 찾으러 온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무척 걱정했잖아." 미첼을 보고 반색하던 카심의 눈이 갑자기 퉁방울만 해졌다. 미첼 앞에 서 있는 일루미나를 본 것이다. 멍청하게 그녀를 쳐다보던 카심이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기가 막히게 예쁘군. 엘프가 이렇게 예쁠 줄은 꿈에도 몰랐어." 한참동안 일루미나를 쳐다보던 카심이 채근하는 듯한 눈빛으로 미첼을 쳐다보았다. "진작 신호를 할 것이지. 그건 그렇고 설마 이 엘프 아가씨에게 무례를 범하진 않았겠지?" 미첼로써는 난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 큰 무례를 범하진 않았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 엘프 아가씬 우리말을 할 줄 알더군요." 행여나 있을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내뱉은 말이었지만 카심은 가슴이 뜨끔해졌다. 조금 전의 실언이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급히 표정을 바꾼 카심이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죄송하지만 저희와 동행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저희들은 귀 부족을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왔습니다." 일루미나가 어눌한 억양으로 말을 받았다. "무슨 용무인지 물어도 되겠어요?" "자세한 것은 제가 아닌 다른 분께서 설명해 주실 것입니다." 카심과 미첼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던 일루미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무례한 분들은 아닌 것 같으니 따라가겠어요." 천신만고 끝에 엘프와 접촉하게 되자 카심과 미첼은 서둘러 그녀를 일행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카심과 미첼의 뒤를 따라오는 엘프를 보자 일행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 대하는 엘프 여인의 미모가 상상 밖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멍청하게 일루미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두 명만은 예외였다.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뜨며 일루미나를 쳐다보던 카트로이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무척 오랜만에 엘프를 보는군."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탓에 일루미나는 카트로이의 진정한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일루미나의 미모에 영향을 받지 않은 또 다른 이는 바로 슈렉하이머였다. 리치인 데다가 이미 엘프를 접해본 탓에 놀랄 까닭이 없는 것이다. 일루미나의 옷차림을 살펴본 슈렉하이머는 유창한 엘프의 언어로 말을 걸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일루미나의 수려한 아미가 찡그려졌다. 상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어둠의 마력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한 눈에 상대가 인간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깜짝 놀란 그녀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어, 어떻게 언데드가 이곳에……." 슈렉하이머의 동공에 괴이한 빛이 일렁였다. 엘프 여인이 눈에 띄게 자신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오백 년 전 들어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전 지금 마왕의 영향을 받고 있지 않으니까요." "………." "인간들과 한 편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전 단지 당신 일족의 대장로님을 만나 뭔가를 상의하러 왔을 뿐이니까요." 머뭇거리던 일루미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사실을 어떻게 믿죠?" 슈렉하이머는 난감해졌다. 그녀의 말대로 사실을 입증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카트로이가 나서서 풀어주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란다. 엘프 여인이여." 일루미나의 시선이 카트로이에게로 향했다. 순간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경악의 빛이 가득 차 있었다. 카트로이의 눈빛을 보고 나서야 그가 인간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다, 당신은……." 카트로이는 그녀의 예상이 맞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리치는 현재 인간과 협력하고 있다." 일루미나는 가까스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녀가 지닌 엘프로써의 감각은 상대의 정체를 능히 짐작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그녀가 카트로이를 보는 눈빛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놀랍군요. 드래곤께서 저희 엘프의 숲을 찾아주시다니……." "우리를 네 일족의 대장로에게 안내해 줄 수 있겠나?" 하지만 일루미나는 어렵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제 독단으론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전 단순히 하급 센티널들의 통제를 맡는 4계급 전사일 뿐이니까요." 카트로이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다. 감히 엘프가 드래곤의 부탁을 거절할 줄은 몰랐다. 제 아무리 엘프라도 드래곤의 관점에서는 인간과 다름없는 하찮은 피조물일 뿐이었다. 카트로이의 분노를 짐작했는지 일루미나가 가늘게 몸을 떨며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럴 만한 권한을 가진 분을 머지않아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제가 여러분들에 대한 통보를 했으니 올리비에 단장님께서 센티널 전단을 이끌고 숲의 초입에서 대기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 분께 직접 말씀드리는 것이 여러모로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눈빛이었지만 카트로이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위대한 종족인 드래곤이다. 그리고 모든 종족이 두려워하는 강력한 존재였다. 비록 데이몬이란 빌어먹을 놈도 있긴 하지만 그를 제외한 아르카디아의 모든 종족들은 드래곤을 두려워했다. 존재감만 살짝 드러내더라도 부들부들 떨며 부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엘프 여인은 그렇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는 다분히 도전적인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지 카트로이는 혀를 찼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드래곤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오자 일루미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때 바로 옆에서 기괴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럼 우리를 그 분께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일루미나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슈렉하이머를 쳐다보았다. "굳이 안내할 것까진 없을 것 같네요. 이대로 죽 가면 공터가 나옵니다. 공터의 끝에 바로 엘프의 숲이 위치하고 있는데 올리비에 대장님께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곳까지라도 괜찮다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호의에 감사 드립니다." 슈렉하이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엘프들을 설득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엘프가 오크에게도 밀릴 정도로 힘이 약해진 것은 바로 언데드 때문이다. [다크메이지 13장 350편] 엘프들이 언데드를 증오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고 외견상 슈렉하이머는 변명할 여지없는 언데드였다. '하긴 암흑전쟁 당시 엄청난 엘프들이 죽었으니…….'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지운 슈렉하이머는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일단 이 숲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지." 승낙이 떨어지자 일행은 다시금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일행은 여전히 눈을 둥그렇게 뜨고 앞서 가는 일루미나를 훑어보았다. '정말 예쁘군.' '엘프가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몰랐어.' 묵묵히 걸어가던 미첼이 걸음을 재촉해서 일루미나 곁으로 다가갔다. 기척을 들은 일루미나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가요?" 미첼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아까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사과하고 싶군요. 이해하십시오. 워낙 경황이 없어서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괜찮습니다. 마음에 두지 마세요." 일루미나가 슬며시 미소를 짓자 미첼은 갑자기 눈앞이 아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붉은 입술 사이로 드러난 하얀 치아. 그녀의 미소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한 마디로 살인적인 미소로군.' 일루미나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미첼은 다급해졌다. 뭐라도 화젯거리를 만들어 대화를 계속 나누고 싶은 것이 미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활 솜씨가 정말 훌륭하더군요. 제 생전 그렇게 빠르고 정확한 활 솜씨는 보지 못했습니다." "절 제압했으니 그……쪽의 실력이 더욱 뛰어난 거죠." 일루미나가 어정쩡하게 호칭을 부르자 미첼은 이때다 하고 이름을 밝혔다. "제 이름은 미첼 입니다. 앞으론 제 이름을 불러주십시오." "좋아요. 미첼님. 제 이름은 일루미나랍니다." 이름을 밝힌 일루미나가 빙긋 미소를 지었고 미첼의 얼굴에는 또다시 넋 나간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일행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카심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였다. "아무래도 미첼이 저 엘프 아가씨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 같은데……." "그런 것 같네요. 그토록 도도하던 미첼 교관님이 엘프 아가씨에게 관심을 가지다니 말입니다. 하긴 예쁘긴 예쁘네요." 율리아나도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짜식. 눈은 높아 가지고……. 하지만 애당초 종족이 다르잖아요. 아무래도 이루기가 불가능한 사랑 같은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데이몬." 데이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며칠 전 오크 분대장들을 대상으로 행했던 행동에 대해 심각히 고민하고 있었다. '이상하군. 과거였다 해도 며칠 전과 같은 짓은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그리고 마을 청년들 스무 명이 죽게 내버려두지도 않았을 테고…….' 천자혈마공에 휩싸여 있을 때도 그는 적에게 쓸데없는 고문 따위는 한 적이 없었다. 깨끗하게 저 세상으로 보냈으면 보냈지 필요 없이 고통을 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피와 살육을 만끽했던 당시를 떠올리자 데이몬의 미간이 갑자기 좁혀졌다. 러셀런트를 복원시키느라 어둠의 마력을 과다하게 뽑은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마왕의 마력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혹시라도 마왕이 깨어난 것은….'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마왕이 깨어났다면 의식이 마왕의 일부로 흡수되어버렸을 것이고 몸마저도 완벽히 나이델하르크의 것이 되어버렸을 터였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옆구리가 따끔해졌다. 그로 인해 데이몬은 겨우 뇌리를 얽어매고 있던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뭐, 뭐야." 통증이 제법 심했기에 데이몬이 다급하게 옆구리를 어루만지며 고개를 돌렸다. 율리아나의 화난 얼굴이 보였다. 데이몬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녀가 냅다 옆구리를 꼬집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예요? 내 말이라면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모양이죠?" "무, 무슨 소릴 한 거지?" 막상 용건을 듣자 데이몬의 안색이 사나워졌다. "이런 빌어먹을 계집애야. 미첼 녀석이 누굴 사랑하듯 무슨 상관이냐? 그게 도대체 나에게 물어볼 문제냐? 차라리 네년에게도 쓸 만한 오크 한 마리 잡아줄 테니 한 번 사랑해 볼래?" 말을 마친 데이몬은 잽싸게 방어자세를 취했다. 예상대로 율리아나의 주먹이 날카롭게 급소를 파고들었다. 데이몬은 여유만만하게 율리아나의 팔목을 잡아 꺾기 시작했다. "흐흐흐. 네년에게 한 두 번 당하는 게 아니지." "아악. 놓지 못해요. 악" 실랑이를 벌이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일행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트로이는 한심하다는 듯 한 표정을 지었고 비명소리에 뒤돌아본 일루미나도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저 흑마법사도 당신 일행인가요." "그렇습니다. 저분께서 우리들의 실질적인 리더를 맡고 있지요." 일루미나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드래곤께서 리더를 맡고 계신 게 아닌가요?" 미첼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카트로이 님은 단지 임시 대원일 뿐입니다. 그 분도 데이몬의 지시를 받아야 하지요." 이해할 수 없었던지 일루미나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카트로이의 얼굴은 팍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는지 그는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일루미나는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저로써는 이해할 수 없군요. 드래곤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인간이라니……." "저희들을 좀 더 접해 보시면 놀라실 것입니다. 그런데 제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일루미나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미첼의 시선을 받았다. "뭐가 궁금한가요?" "엘프의 검술이 어떤지 무척 궁금합니다. 혹시 엘프 중에 검을 쓰는 전사가 있습니까?" 일루미나는 미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희 엘프 센티널들은 오로지 활만 사용합니다. 물론 2계급 이상의 장로 분들께서는 활 대신 마법을 사용하시지만……." 미첼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활만 사용한다면 적과 근접시 어떻게 대응하지요? 저로써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신께서 엘프에게 허용하신 무기는 오로지 활과 화살뿐입니다." 간단하게 한 마디로 일축하는 일루미나를 쳐다보며 미첼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활만으로는 제대로 된 병진을 구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일루미나가 미첼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그런데 검술의 조예가 대단히 뛰어나시군요. 지금까지 제 화살을 세 번이나 받아낸 존재는 없었거든요." "하하. 그거야 뭐……." 우쭐해진 미첼이 슬며시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대단히 젊어 보이는군요.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여쭤 봐도 실례가 되지 않을지……." 일루미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4계급 전사들 중에서는 어린 편이에요. 고작 백년하고 2십 년을 더 살았으니까요." 미첼은 입을 딱 벌렸다. 채 스물도 되어 보이지 않는 일루미나가 자신보다 다섯 배 가까이나 많이 살았다니……. 황당한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일루미나가 질문을 던져왔다. "그런데 미첼 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죠." 머리를 흔들어 마음을 진정시킨 미첼이 황급히 대답했다. "저, 전 이십 오 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럼 백 스물 다섯?" "그, 그런 셈이지요." 미첼은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일루미나가 자신의 나이를 알면 상대도 하지 않을 것 같아서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뒤에 있던 율리아나가 산통을 다 깨어버리고 있었으니……. "거짓말 마. 미첼. 스물 다섯에서 백을 더 보태는 이유가 뭐야? 네 말이 사실이라면 넌 이미 관에 들어간 시체라고 봐야겠네?" '이런 젠장.' 미첼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 초를 치는 율리아나의 악취미는 변함이 없었다. 일루미나의 놀란 듯한 시선이 눈에 들어오자 미첼은 도무지 어찌 해야 할 바를 몰라 쩔쩔맸다. 한동안 미첼을 쳐다보던 일루미나가 말문을 열었다. "스물 다섯? 정말 놀랍군요." "………." "그 나이에 그런 놀라운 검술실력을……. 정말 수련을 열심히 하셨나 보군요." "그, 그런 셈이지요." 다행히 일루미나가 나이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이자 미첼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그는 성난 눈으로 율리아나를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 미첼에게 율리아나는 통쾌하다는 듯 혀를 길게 내밀었다. "그것 쌤통이다." 그 때 슈렉하이머의 나지막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제 도착했습니다." 숲은 그곳에서 끝나 있었고 적막한 벌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벌판의 끝에는 푸르게 우거진 숲이 끝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펼쳐져 있었다. 그들이 통과해 온 숲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울창했다. 길 비슷한 것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일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대체 어디로 들어가는 거지?" 일행은 풀이 무성하게 자라난 벌판으로 조심스럽게 진입했다. 일루미나가 손가락을 뻗어 숲을 가리켰다. "저곳이 바로 엘프의 숲이에요. 아마 저곳엔 올리비에 님께서 센티널들과 함께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 일루미나의 설명에 슈렉하이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에게 우리의 의도를 말해 주시겠소?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말이오." 그 말에 일루미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전 올리비에 님께 보고를 올릴 수 있는 신분이 되지 못합니다. 전 오직 제가 속한 센티널 지단의 3계급 전사에게만 보고를 할 수 있습니다." 엘프의 사회에 대해 다소나마 지식이 있는 탓에 슈렉하이머는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알겠소. 내가 직접 말해 보리다." 일행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했는지 데이몬이 슈렉하이머에게 말을 걸었다. 소리가 일루미나에게 들리지 않도록 둘 사이의 공간을 마법으로 차단한 채로. "조금 이상하군요. 명색이 경비조 책임자인데 어찌 우두머리에게 보고할 권한이 없는 거요?" "엘프 사회는 철저히 계급에 의해 움직입니다. 각 계층간의 역할이 엄격히 정해져 있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센티널을 이끄는 대장이라면 십중팔구 남성입니다. 엘프 중에서 남성을 대할 수 있는 계급은 엄격히 정해져 있습니다." "놀랍구려. 엘프가 그토록 폐쇄적인 사회를 가지고 있다니." 슈렉하이머는 무감각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엘프의 성비는 극도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백 명의 아이 중에서 남성으로 태어나는 엘프는 고작해야 하나 둘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여성이므로 무척 기형적인 사회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지요. 모르시고 계시겠지만 엘프 사회에서는 아이를 잉태하는 것도 계급이 정해져 있습니다. 적어도 3계급 이상의 혈통을 가진 엘프 여성만이 아이를 가질 수 있지요." 데이몬은 입을 딱 벌렸다. "세, 세상에 그런 일이……. 그렇다면 엘프의 결혼생활은 어떻소?" "엘프는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아내와 남편이란 개념이 없지요. 나이가 찬 일정 신분 이상의 엘프는 1년에 한 번씩 남성 엘프와 관계를 맺어 아이를 잉태합니다. 태어난 아이는 철저히 여성이 돌보지요. 그러므로 엘프는 철저히 모계 사회를 이루며 살아간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데이몬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복을 타고난 놈들이로군. 이 사실을 안다면 달려들 남자 놈들이 우글우글 하겠어." "하지만 엘프 여성은 여간해서는 인간에게 호감을 갖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경우가 전혀 없진 않지만……응?" 슈렉하이머는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숲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다크메이지 13장 351편] 음성증폭 마법을 사용했는지 음성은 일행의 귀에 똑똑히 울려 퍼졌다. "멈춰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일행은 걸음을 멈췄다. 슈렉하이머가 얼른 앞으로 나섰다. "공격하지 마시오. 우린 결코 나쁜 뜻으로 온……." 슈렉하이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숲 속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거리가 멀었음에도 슈렉하이머의 정체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저주받은 리치 따위가 감히 숲에 다가오다니. 당장 꺼지지 않으면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격한 반응에 슈렉하이머는 난감해졌다. "우, 우린……." "당장 저주받은 몸을 끌고 이곳에서 사라져라. 지체될 경우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버릴 것이다." 난감해하던 슈렉하이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카트로이를 쳐다보았다. 말을 들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 부득이 카트로이의 위용이라도 빌려야 할 것 같았다. 눈빛을 받은 카트로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갔다. "네가 일족의 우두머리인가?"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음성에는 마나가 충만하게 깔려 있었다. 그 한 마디로 인해 웅성거리던 숲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카트로이의 정체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카트로이는 득의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언데드이기에 앞서 나의 일행이다. 내치더라도 일단 사정을 들어보는 게 낫지 않겠느냐?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리 나오너라." 침묵을 지키던 숲이 부스럭거리더니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하늘한 옷차림을 한 엘프 사내였다. 치렁치렁 늘어뜨린 금발, 어디 한 군데 나무랄 데 없는 준수한 외모를 가진 엘프 사내는 머뭇거림 없이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엘프로군.' 카트로이는 호기심 섞인 표정으로 엘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엘프는 다분히 도전적인 눈빛으로 카트로이의 시선을 받아넘겼다. "위대하신 분께서 무슨 이유로 누추한 저희 숲을 찾아주셨는지는 모르지만 명령을 내리진 말아 주십시오. 제 아무리 위대한 종족이라도 엘프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은 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 카트로이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자신을 대하는 엘프의 말투에는 적의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 어찌 보면 비꼬는 것 같기도 한 말투였기에 황당해진 카트로이가 떠듬떠듬 내뱉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쉽게 말씀드리지요. 저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란 뜻입니다." 결국 카트로이도 부아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어찌 이리 무례한가? 종족을 조율하는 존재인 드래곤에게 이런 무례를 범해도 되는 건가?" 엘프 사내는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만약 드래곤들께서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셨다면 저희도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드래곤들이 종족을 조율하시는데 충실하셨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엘프 사내는 서슬 퍼렇게 말을 이어나갔다. "오크와 힘을 합쳐 인간을 멸망시켜버린 것까지는 이해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크를 부추겨 저희들의 보금자리를 계속해서 앗아가는 것만은 참을 수 없습니다. 인간에 이어 엘프까지 대륙에서 없애실 생각이십니까?" "………." "과거에는 이러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저희 영역만큼은 인정해 주셨죠.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오크들에 의해 매일같이 일족들이 죽어나가고 해마다 숲이 불타오릅니다. 드래곤들이 부추기고 용인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엘프 사내의 눈동자에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비록 당신들이 최강의 존재들이라고는 하지만 저희도 가만히 앉아 당할 생각은 없습니다."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하던 카트로이가 겨우 입을 열었다. "가만히 당하지 않겠다면……." "싸울 것입니다. 설사 종족 전체가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말을 마친 엘프 사내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숲을 헤치고 무수한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장에 긴 활을 든 엘프 전사들이었는데 태반이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채 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차라라락. 수십, 수백 발의 화살이 일행을 향해 겨누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엘프 사내는 냉랭한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저들말고도 숲 속에는 많은 전사들이 매복해 있습니다. 일족 모두를 죽이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저희 숲에 발길을 들여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허, 참." 카트로이는 기가 찼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엘프들이 힘을 합쳐 드래곤을 공격하려 한다는 것은 지금껏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일행들의 안색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특히 엘프의 화살 공격을 직접 받아본 미첼은 더욱 질려 있었다. 만약 엘프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기에 미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엘프의 활은 위력이 정말 강했다. 정통으로 명중한다면 아무리 질이 좋은 갑옷도 뚫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미첼은 일제 사격에서 살아날 수 있는 존재가 데이몬과 카트로이 정도밖에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나같이 파랗게 질려 있는데 느닷없이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데이몬이었다. "그래서? 길을 비키지 못하겠다는 뜻이냐?" 엘프 사내의 시선이 데이몬에게 향했다. 엘프에 전혀 뒤지지 않는 준수한 용모에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음성은 여전히 냉랭했다. "그렇다. 인간이여. 숲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를 죽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할 수 없겠군." 데이몬은 갑자기 수인을 맺었다. 그의 손을 축으로 느닷없이 눈부신 광망이 터져 나왔다. 콰콰콰콰. 소름끼치는 빛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시력을 그대로 앗아가 버릴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윽, 이, 이런……." 창촐간에 눈앞이 깜깜해진 사내는 침음성을 울렸다. 상대가 이렇게 기습적으로 공격을 가할 줄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이쪽을 쳐다보던 궁수들도 모두 시력을 잃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엘프 수뇌부 중에서도 알아주는 마법사. 사내는 재빨리 마나를 끌어 모아 재배열시켰다. "디스펠." 사내의 주문영창이 터져 나오자 또 다른 빛이 장내를 감쌌다. 시력을 돌아오는 것을 느낀 사내는 궁수들을 쳐다보았다. 장님이 되어 허둥대던 궁수들이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이런 가증스러운……." 사내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공격 명령을 내리려 했다. 그런데 막 명령을 내리려던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아니?" 잠시 시력을 잃은 사이 장내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다. 콰루루루. 뼈만 남은 거대한 드래곤 두 마리가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쩍 벌어진 입에서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빛났고 눈구멍에서는 소름끼치는 광망이 뿜어지고 있었다. 활을 겨누고 있던 엘프 전사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본 드래곤의 높은 키와 거대한 동체는 쳐다보던 엘프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세상에 본 드래곤이라니……." 본 드래곤들은 이미 인간들을 빈틈없이 에워싼 상태였다. 다시 말해 화살 공격을 막을 채비가 완벽히 갖춰진 것이다. 본 드래곤 앞에는 그림자 다섯이 표표히 서 있었다. 검은 색 갑주, 투구 사이로 새어나오는 소름끼치는 빛을 본 엘프 사내의 얼굴이 극도로 무거워졌다. "데스 나이트. 그것도 엄청난 고위급 데스 나이트로군. 화살 공격이 통할 리가 없겠어. 응?" 난데없이 데스 나이트들의 중앙에서 엄청난 마나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 기운을 느낀 엘프 사내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마나의 폭풍은 중앙에 서 있는 젊은 청년에게서 풍겨지고 있었다. 아까 자신과 대화를 나눴던 청년. 그의 손에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푸른빛의 불덩어리를 발견하자 그의 눈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고위급 마법사인 그는 상대가 무슨 마법을 시전하려 하는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헤, 헬 파이어. 이, 이건 악몽이야." 데이몬은 회심의 미소를 지은 채 얼어붙어 있는 엘프 전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길을 열지 않겠다면 뚫고 지나가는 수밖에 없지." 이미 그는 엘프를 죽여도 칠종단금술이 발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한 상태였다. 카트로이가 엘프 사내와 설전을 벌이는 사이 그는 암암리에 엘프를 대상으로 살심을 떠올려 보았다.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외모가 비슷했지만 엘프와 인간은 원천적으로 다른 종족이었고 그 탓인지 칠종단금술은 발동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데이몬의 의식이 엘프를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칠종단금술의 금제에서 벗어난 것을 확인하자 데이몬의 살심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치밀어 올랐다. 또다시 피와 살육을 흠뻑 만끽하고 싶은 생각에 데이몬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잔뜩 핏발 선 눈으로 번들거리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감히 길을 막겠다고 공언했으니 죽어도 후회는 없겠군. 가로막는 놈은 사정 봐주지 않을 생각이다. 이참에 엘프의 숲이 헬 파이어에 견딜 수 있는지 한 번 실험해 봐야겠군." 안색이 파랗게 질렸지만 엘프 사내는 결코 굽히려 들지 않았다. "헬 파이어를 시전할 수 있다면 9서클의 마스터로구려. 하지만 길을 열 수는 없소. 우린 일족 모두가 죽을 때까지 길을 열지 않을 것이오." "마지막 경고다. 길을 열지 않는다면 이 숲에 살고 있는 엘프는 모두 죽는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격화되자 슈렉하이머는 난감해졌다. 애당초 동맹을 맺을 목적으로 왔는데 엘프들의 반응은 이토록 싸늘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데이몬마저 저토록 강경하게 나오다니. 물론 본 드래곤과 데스 나이트, 거기에다 카트로이의 힘이 더해진다면 제 아무리 숲의 종족이라 하더라도 앞을 막을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숲 속으로 뿔뿔이 흩어진 엘프들이 조직적으로 유격전을 펼치며 일행의 발목을 잡는다면 문제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다크 포탈을 통해 건너온 정벌군 병력에도 엄청난 위협이 될 터였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슈렉하이머는 그저 안절부절못해 할 뿐이었다. 뜻밖의 상황전개에 얼떨떨하던 대원들이 하나 둘씩 전투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상황을 보니 엘프와 한 바탕 일전을 벌여야 할 것 같았다. 패터슨이 투덜거리며 검을 뽑아들었다. "싸우긴 싸워야 할 텐데……. 도대체 엘프를 어떻게 죽이지?" "글세 말이야. 그것도 아름다운 여자들을……." 미첼 역시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대로 지속되면 엘프와의 전쟁은 불가피했다. 그렇다면 일루미나와도 싸워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그들은 적이었으니……. 마음을 정리한 미첼은 일루미나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지금 즉시 일족들에게로 돌아가도록 해요." 일루미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순순히 보내주는 것이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미 볼모나 다름없는 신세였고 싸움이 벌어지면 제일 먼저 죽음을 당할 터였다. 때문에 일루미나는 이미 마음을 정리한 상태였다. 어리둥절해 하는 그녀를 향해 미첼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상황을 보니 당신들과 싸워야 할 것 같소. 솔직히 내키지 않지만 명령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소." 미첼이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일루미나의 눈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은 것이 내 진심이오. 그러니 전투가 벌어질 경우 결코 나에겐 다가오지 말도록 해요." 굳은 표정으로 미첼을 쳐다보던 일루미나가 몸을 돌려 숲으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일행은 누구 하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일루미나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 눈치였다. 그러는 사이 상황은 점점 종말로 치닫고 있었다. 마음을 정리한 엘프 사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죽어도 길을 열 수 없소. 우린 최후의 한 명까지 분전할 것이오." "그렇다면 협상은 끝났다." 데이몬 역시 안색을 굳히고 있었다. 싸움이 시작되면 그는 머뭇거림 없이 마법 공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물론 선제공격을 가하더라도 퍼부어지는 화살공격을 모두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데이몬은 본 드래곤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것들이 날개를 활짝 펼쳐 1차로 날아오는 화살 공격을 차단해 주면 그 즉시 데스 나이트들이 돌격해서 궁수들을 학살하기 시작할 것이다. 뒤를 이어 그의 두 번째 공격인 에너지 볼트와 매직 미사일이 작렬하고 또한 대원들이 돌격해 공격을 퍼붓는다면 오로지 궁수들로만 구성된 엘프 전사들은 견디지 못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데이몬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13장 352편] 막 마법 공격을 퍼부으려는 찰라 갑자기 늙수그레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잠깐만 기다려주시겠소?" 그 한 마디로 인해 일촉측발의 상황이 잠시 진정되었다. 모두의 시선이 음성이 들려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숲을 헤치고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세월의 풍상이 느껴지는 주름진 얼굴에 심유한 눈빛을 흘리고 있는 엘프 노인이었다. 그를 보자 외마디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 대장로님." 일족의 제일 높은 어른이 직접 나올 줄은 몰랐는지 엘프 사내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이곳은 극히 위험합니다. 어서 마을로 돌아가십시오." 하지만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저들이 보유한 힘을 보니 마을이나 이곳이나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요. 올리비에 대장." "………." 올리비에라 불린 엘프 사내는 침묵을 지켰다. 사실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싸움이 벌어진다면 패배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본 드래곤과 데스 나이트라는 강력한 마물들을 막아낼 방도가 없는 것이다. 모습을 드러낸 류미너스 부족의 대장로는 그윽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인간이여. 어찌하여 이처럼 강력한 힘을 가지고도 뭐가 부족해서 우리 부족을 적대하는 것이오?" 데이몬이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먼저 싸움을 건 쪽이 그쪽 아니었나? 이쪽의 사정을 들어보지도 않으니 어쩔 수 없지 ."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 엘프들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일족의 최고 어른에게 거리낌없이 하대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바로 슈렉하이머였다. "안녕하십니까. 슈나이더 님. 정말 오랜만이로군요." 난데없이 리치 하나가 아는 체를 하고 나서자 대장로의 얼굴에 의혹이 서렸다. 저주받은 리치 따위가 자신을 알고 있을 턱이 없었지만 상대는 정확히 자신의 본명을 불렀다. 모르는 자가 슈나이더라는 이름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대장로는 경계하는 듯한 눈빛으로 슈렉하이머를 쳐다보았다. "그대는 누군가?" "몰라보시는 게 당연합니다. 오백 년 전, 슈나이더님을 뵈었을 때는 인간이었으니까요." "………." 의혹 어린 시선을 지우지 못하는 슈나이더 대장로를 쳐다보며 슈렉하이머가 소개를 시작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500년 전 그러니까 종족전쟁이 끝났을 때 베르하젤 교단의 신관 한 명이 류미너스 부족을 찾아왔었지요. 그 때 슈나이더님께서는 일족의 안위를 책임지는 수비대장이셨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장로의 안색이 갑자기 경직되었다. "그, 그렇다면 그대는……." "그렇습니다. 제가 그 때 대장로님의 허락을 얻어 숲을 통과했던 베르하젤 교단의 승정 슈렉하이머입니다." 대장로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빛이 번져갔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뇌리엔 슈렉하이머가 똑똑히 기억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고위급 성직자였던 자가 리치가 되다니 나로써는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구려." "하지만 사실입니다. 한정된 수명을 극복하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이니까요." 대장로는 심유한 눈빛으로 슈렉하이머를 노려보았다. 잠시 후 그는 기가 막힌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의 운명을 구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당신의 정성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소. 그때 힘이 되어 주지 못한 것이 상당히 안타까웠지. 하지만 당신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영원히 저주받는 언데드의 길을 선택할 줄은 몰랐소. 정말 놀라운 사람이구려. 순리대로 생을 마쳤다면 베르하젤의 전당에서 영원히 축복 받는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사람의 뜻이라는 게 모두가 같은 것이 아니지요." 안타깝다는 듯 슈렉하이머를 쳐다보던 대장로가 얼굴빛을 고쳤다. "당신이라면 굳이 경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소. 그래 이번에는 무슨 일로 우리 일족을 찾았소?" "전 류미너스 일족, 아니 트루베니아에 살고 있는 모든 엘프와 인간과의 동맹을 요청하러 왔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함께 힘을 합쳐 오크를 몰아내자는 제안입니다." 뜻밖의 제안이었는지 대장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오? 트루베니아 대륙의 오크 족은 지금 절정기에 달해 있소. 전사만 해도 수백만이 넘게 보유한 오크를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그리고 그들을 전폭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드래곤들은 무슨 수로 상대할 생각이오?" "저희들은 이미 자세한 전략을 수립해 놓았습니다. 일단 아르카디아엔 잘 훈련된 1백 50만의 병력이 대기중입니다. 명령만 떨어지면 즉시 투입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드래곤들은……." 잠시 말을 끊은 슈렉하이머가 손을 뻗어 데이몬을 가리켰다. "저분을 위시한 일행들이 상대할 계획입니다." 데이몬을 쳐다본 대장로는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9서클의 마스터와 데스 나이트 그리고 본 드래곤이라……. 어쩌면 가능도 하겠구려. 일단 본 드래곤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드래곤 둘을 처치했다는 뜻이니까……." 슈렉하이머는 다시 카트로이를 소개했다. "그리고 카트로이 님도 조력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소개 드리지요. 아르카디아의 북단에 사시는 화이트 드래곤으로써 저희 일행이십니다. 이미 저희에게 크나큰 도움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잔뜩 골이 나 있던 카트로이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내뱉었다. 엘프의 무례한 대접으로 인해 마음이 잔뜩 상해있는 모양이었다. "비록 카심 용병단의 단원이긴 하지만 드래곤을 상대할 땐 나서지 않을 생각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 엘프의 대접이 정말 인상겹더군. 이번 일로 인해 엘프에 대한 환상이 깨끗하게 깨져버렸어." 그 말을 듣자 대장로가 공손히 예를 취했다.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부족원들이 경험이 없는 탓에 위대하신 분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위대하신 분께서 아르카디아에서 건너오셨을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트루베니아의 드래곤들에게만 섭섭해할 뿐입니다." 대장로의 성의 어린 사과에 다소 화가 풀린 듯 카트로이가 다소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그래도 어른이라 태도가 조금 낫군." 쓴웃음을 지은 대장로는 슈렉하이머를 향해 손짓을 했다. "함께 마을로 가시겠소? 자세한 것은 마을에 가서 의논하는 게 좋을 것 같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대장로가 엉거주춤 서 있는 올리비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올리비에 대장. 센티널들을 철수시키시오. 나는 이들을 우리 일족의 손님으로 맞아들일 생각입니다." 올리비에는 깜짝 놀랐다. "하, 하지만 저들 중에는 언데드가 있습니다. 리치와 데스 나이트를 어찌……." "괜찮소. 이미 그는 500년 전 대장로님의 허락을 얻어 숲을 통과한 일이 있소.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고 손님 맞을 채비를 갖추도록 하시오." 마을의 최고 어른이 이렇게까지 나서는 데야 올리비에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명령을 내렸다. "철수한다." 진형을 형성하고 있던 엘프 전사들이 물이 빠지듯 모습을 감추었다. 마치 물이 빠져나가듯 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데이몬은 본 드래곤과 데스 나이트를 수습하기 위해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살육을 만끽하지 못한 것이 왠지 모르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억지로 마음을 억눌렀다. 그러면서도 기이한 기분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군. 정말 나답지 않아.' 고개를 돌려보니 일행들이 희색이 만연한 표정으로 각자의 무기를 수습하는 장면이 들어왔다. 엘프와 싸우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었다. 데이몬은 묵묵히 슈렉하이머에게로 걸어갔다. 때마침 대장로가 데이몬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제해 주신데 대해 감사 드립니다." "고마울 것 없소. 길을 열어준다면 애당초 싸울 필요가 없었으니……." 퉁명스럽게 내뱉은 뒤 머리를 흔드는 데이몬을 슈나이더 장로는 기이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는 슈렉하이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갑시다. 올리비에 대장이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을 거요." "알겠습니다." 일행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장로가 다가가자 빽빽하던 숲이 열렸다. 마치 누군가가 기다렸다가 문을 열어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일행은 적이 놀라워했다. "정말 신기하군."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몰라 한창 골머리를 앓던 참이었다. 일행의 모습은 곧 숲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스르르르 모두가 들어가자 숲은 다시금 원래의 형태로 닫혀 버렸다. 일촉측발의 상황까지 치달았다가 간신히 수습된 인간과 엘프와의 싸움은 애석하게도 그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누군가에게 간파되었다. 베르키스의 레어 가까운 산정에서 기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충만한 어둠의 마력……. 규모와 집중도를 보아 본 드래곤이 분명하군." 기괴한 저음은 생명체의 것이 아님이 확실했다. 예상대로 산정에 모습을 드러낸 자는 리치였다. 시커먼 로브자락 사이로 드러난 두개골의 눈구멍에서는 소름끼치는 광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즉각 게덴하이드님께 보고해야겠어."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통신마법진을 그렸다. 잠시 후 그의 음성은 마법의 힘을 빌어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동부 해안으로 전달되었다. "뭐라고?" 보고를 받은 게덴하이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구멍에서는 당혹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북단으로 이동하는 줄 알고 그쪽에 병력을 급파해 놓았는데……. 정말 교활한 녀석이로군." 게덴하이드는 곤혹스럽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대부분의 병력이 북부 쪽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시일 내에 이동시키기란 불가능했다. "엘프의 숲이라……. 놈이 대관절 왜?" 놈의 예측할 수 없는 행보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엘프의 숲으로 갔을까? 혹시 엘프와 동맹을 맺으려는……." 게덴하이드의 동공에 맺힌 안광이 급격히 짙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수정구슬을 쳐다보았다. 보고를 한 리치는 아직까지 그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프의 숲 가까이 오크 부족이 있나?" 수정구슬 속의 리치는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펠루시아 산맥 너머 옛 오크 족의 영토에 파타르 부족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것 잘 되었군. 넌 지금 즉시 파타르 부족으로 가서 모든 전사들을 동원해 엘프의 숲을 공격하라고 일러라. 머지 않아 지원병력을 파견해 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수정구슬 속의 리치가 사라졌다. 다시금 의자에 몸을 묻은 게덴하이드는 나지막이 뇌까렸다. "이번 기회에 엘프 일족도 깡그리 쓸어버려야겠군. 어차피 베르키스 님이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놈들이니……. 놈들을 없애기 위해서는 드래곤 로드가 잠자고 있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엘프에 대한 드래곤들의 반응은 판이하게 달랐다. 우선 드래곤 로드를 비롯한 비교적 온건한 성향의 드래곤들은 가급적 엘프를 보호하려 애썼다. 조화를 깨지 않는 종족인 엘프를 아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베르키스와 그를 따르는 드래곤들은 달랐다. [다크메이지 13장 353편] 인간과 외모가 닮아서인지 그들은 엘프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일부러 오크를 부추겨 분쟁을 일으키곤 했다. 전투력이 뛰어난 파타르 부족을 옛 오크의 영토에 배치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탓에 게덴하이드는 엘프의 숲을 침공하는 것을 그리 꺼려하지 않았다. "놈들이 가세한다면 파타르 부족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 하지만 파타르 부족이 시간을 끄는 사이 계속해서 병력이 충원될 테니 걱정할 것은 없겠군." 그는 잠자코 휘하 리치들에게 통신을 시도했다. 북단 쪽으로 진군하고 있는 보급부대를 모두 엘프의 숲으로 투입하기 위해서였다. 엘프의 마을은 상당히 멀었다. 대장로가 앞서서 걸어가고 일행이 조심스럽게 뒤따르는 형국이었다. 놀라운 것은 대장로가 앞장서자 저절로 길이 열린다는 사실이었다. 숲이 워낙 울창해서 길이 없다고 판단했던 일행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과연 숲의 종족답군." "엘프의 안내가 없다면 숲을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말을 실감하겠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걸은 지 한 시간 가량이 지나자 대장로의 걸음이 멈췄다. "이곳이 바로 류미너스 일족의 마을입니다." 일행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마을 비슷한 것이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방은 온통 아름드리 나무들 천지였다. 무성한 나뭇잎에 가려 하늘마저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연신 두리번거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마을이 있다는 거죠?" 미미하게 미소지은 대장로가 손을 들자 바로 옆에 서 있던 나무줄기가 스르르 열리더니 몇 명의 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경계 어린 눈빛으로 일행을 훑어보며 대장로에게 다가왔다. 놀랍게도 나무줄기 속이 엘프들의 거처인 모양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이들에게 쉴 곳과 음식을 대접하도록 하시오." 지시를 내린 대장로는 슈렉하이머를 쳐다보았다. "그럼 날 따라오시겠소? 자세한 일을 논의해 보도록 합시다." "잠깐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슈렉하이머는 먼저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일행의 리더격인 그가 당연히 회담에 참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예상 밖으로 데이몬은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가 너무 아프구려. 그러니 동맹을 맺는 일은 대승정께서 알아서 하도록 하시오. 음, 카심과 크란시아를 데리고 가는 게 좋겠군요." 일순 당황했지만 슈렉하이머는 데이몬의 말대로 따르는 것이 현명할 것임을 직감했다. 조금 전의 일로 말미암아 데이몬의 엘프에 대한 감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뜻하지 않는 분규가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가 빠지는 것이 여러모로 바람직해 보였다. 슈렉하이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난 괜찮소."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이 카트로이를 쳐다보았다. "네놈은 나랑 같이 노는 게 어떠냐?" "빌어먹을 놈 내가 네까짓 녀석과 놀게 생겼냐?" 느닷없이 터져 나온 카트로이의 욕지거리에 엘프들은 무척 놀란 모습이었다. 특히 대장로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카트로이가 정녕 드래곤이 맞는지 의심하는 듯한 눈빛인 것이다. 엘프들이 바라보거나 말거나 데이몬은 카트로이의 팔을 잡아끌고 숲 한쪽으로 걸어갔다. "같이 가요." 율리아나가 잰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잠시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대장로가 몸을 돌렸다. "일단 내 거처로 갑시다." "알겠습니다." 슈렉하이머가 눈짓을 하자 카심과 크란시아가 따라 붙었다. 그들은 대장로를 따라 조금 떨어져 있는 거대한 나무줄기를 향해 다가갔다. 조금 전과 같이 나무줄기가 열렸고 대장로와 슈렉하이머, 카심과 크란시아의 모습이 그곳에서 사라졌다. 엘프 몇 명이 일행에게 다가왔다. 그 중에는 일루미나의 모습도 보였다. 그녀는 기이한 눈빛으로 미첼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일루미나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절 따라오세요." 일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루미나의 뒤를 따랐다. 대장로의 거처에는 뜻밖에도 올리비에가 기다리고 있었다. 적의 어린 눈빛이 그대로였기에 카심과 크란시아는 억지로 그의 눈빛을 피했다. 물론 이유 없는 냉대에 슬며시 부아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언제 봤다고 우릴 미워하는 거지?' 그들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리에 앉은 대장로는 슈렉하이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래 이길 가능성은 있을 것 같소?" "확실히 단정지을 수 없지만 엘프의 힘이 더해진다면 가능성은 분명히 높아집니다. 저희들은 종족의 운명을 걸고 이번 전쟁에 임할 생각입니다." "당연한 얘기요. 패한다면 우리 엘프의 운명 역시 정해질 테니까." 대장로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 류미너스 일족은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파타르 부족과의 계속된 분쟁으로 영역과 인구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다. 이대로 상황이 지속된다면 일족의 존망 자체가 위태로운 실정이었으므로 뜻하지 않은 인간들의 동맹 제의가 더없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세한 실정을 밝힐 수 없었기에 대장로는 내색하지 않고 슈렉하이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전 이미 정벌군의 총사령관인 페르슈타인 공작전하로부터 전권을 위임받고 왔습니다. 그분께서는 동맹의 대가로 엘프의 영역을 지켜드리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엘프의 입장에서는 가장 군침 도는 조건이었다. 그들에겐 숲을 가꿀 영역이 가장 절실히 필요했고 슈렉하이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페르슈타인 공작의 입장에서도 별달리 무리라고 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예상대로 슈나이더 대장로는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렇소?" "그렇습니다. 엘프의 영토가 정해진다면 그곳으로의 인간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될 것입니다." 슈렉하이머가 제시한 조건을 듣자 슈나이더 대장로는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의 성패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슈렉하이머는 간곡한 어조로 슈나이더 대장로를 설득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5백년 전, 인간들이 트루베니아에 번성했을 당시 인간과 엘프 사이에 사소한 분쟁은 있었을지언정 대규모 영역침범은 없지 않았습니까? 적어도 인간은 엘프를 존중할 줄 아는 종족입니다. 인간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엘프를 존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지만 인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 않소? 내가 알기로 선한 인간이 많은 반면 악한 인간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소."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약 엘프의 영역을 침범하는 인간이 있을 경우 법에 의해 엄격히 처리할 것입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협상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올리비에가 한 마디 내뱉었다. "숲을 침범한 인간은 오로지 엘프의 방식으로 처단할 것이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오. 그리고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 언데드인 당신에게 과연 인간을 대표할 자격이 있는지가 궁금하구려." 순간 좌중이 조용해졌다. 올리비에의 무례한 말로 인해 분위기가 극도로 가라앉은 것이다. 슈나이더 대장로가 책망하는 듯한 눈빛으로 올리비에를 쳐다보았다. "그만 하시오. 대장. 이번 협상은 오히려 우리에게 더 절실한 것이오. 계속해서 오크에게 밀려나는 우리 일족의 형편을 대장이 모르지는 않지 않소?" 그때서야 상황을 알아차린 듯 올리비에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 하지만……." "인간은 적이 아니오. 그러니 동맹군의 일원으로 봐 주기 바라오." 말을 마친 슈나이더가 계면쩍은 표정으로 일행을 쳐다보았다. "올리비에 대장에겐 그럴 만한 사연이 있으니 부디 이해해 주기 바라오. 과거 그 일만 아니었다면 대장도 인간들에게 적개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오." 슈렉하이머가 기이한 눈빛을 떠올렸다. "그 일에 대해 알 수 있겠습니까?" 잠시 주저하던 대장로는 곧 사실을 털어놓았다. "올리비에 대장에겐 라이나라는 이름의 누이동생이 있었소. 참 사이좋은 오누이였지.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엘프들은 결혼을 하지 않소. 때문에 형제자매간의 정이 참으로 돈독하지. 그런데 말이오." 뒤이어 흘러나오는 말에 일행의 안색이 서서히 경직되었다. "대장의 동생이 아르카디아에서 건너온 인간들에게 해를 입었소. 라이나가 그들에게 겁탈 당해 아이를 가졌던 것이오. 타 종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일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엘프의 율법에 따라 라이나는 아이를 떠나보내야 했소. 결국 라이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소. 바로 그 때문에 올리비에 대장이 인간들을 미워하는 것이오." "………." 일행은 침묵을 지켰다.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머뭇거리던 크란시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제가 인간들을 대표해서 사과 드리며 추후에 범인들을 반드시 응징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듣고 있던 올리비에가 냉랭하게 내뱉었다. "그럴 필요 없소. 놈들은 이미 엘프의 율법에 따라 처단되었으니까……." 적개심이 어려있는 올리비에의 눈동자를 보며 크란시아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내심 정벌군 병사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야겠다는 사실을 굳히고 있었다. 행여나 정벌군 병사들이 엘프의 미모에 혹해 실수를 범한다면 여파가 상상이상으로 불거질 터였다. 잠시 후 침묵을 깬 이는 슈나이더 대장로였다. "그런데 병력을 어떻게 수송할 생각이오? 내가 알기론 드래곤 로드의 마법에 의해 두 대륙 사이의 해로가 완전히 막힌 것으로 알고 있는데……." 슈렉하이머는 의외라는 눈빛을 떠올렸다. "알고 계셨습니까?" "우리 엘프는 마나에 민감한 종족. 조화를 깨는 일을 모를 리가 없지요." 슈렉하이머는 조심스럽게 준비해 놓은 계획을 설명했다. "저희들은 엘프의 숲 너머에 위치한 다크 포탈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그것을 이용한다면 아르카디아의 대군이 용이하게 건너올 수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오크의 주력은 동쪽 해안에 배치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포탈을 통해 오크의 배후를 들이친다면 전쟁의 승산이 훨씬 높아질 것입니다." 예상대로 대장로는 깜짝 놀랐다. "다크 포탈을 이용하겠다는 말이오? 그런 어처구니없는……." "충분히 가능한 이론입니다. 저희 일행 중 한 분인 데이몬은 9서클의 마스터입니다. 그러므로 충분히 다크 포탈을 개조할 능력이 있습니다." 듣고 있던 올리비에가 끼여들었다. "안될 말입니다. 저들이 다크 포탈을 이용해 마계로의 연결을 꾀할지 어찌 장담할 수 있습니까? 비록 인간이 몇 끼여있긴 하지만 저들은 대부분 흑마법사에 데스 나이트, 리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 결코 저들을 믿을 수 없습니……."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장로가 냉랭하게 올리비에의 말을 잘랐다. 눈동자에서 분노의 광망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난 저들을 믿소. 경고하겠는데 더 이상 저들에게 무례를 범하지 말도록 하시오. 올리비에 대장. 아시겠소?" "………." 올리비에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는 지금껏 대장로가 이처럼 분노하는 광경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를 날카롭게 쏘아본 대장로가 슈렉하이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슈렉하이머 당신의 말이라면 신용할 수 있소. 그래, 당신들의 계획을 한 번 설명해 보시겠소?" 침묵을 지키는 올리비에를 쳐다보며 슈렉하이머가 말을 이어나갔다. "다크 포탈은 반쯤 파괴된 상태입니다. 때문에 마계로 통하는 길은 완벽히 차단되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파괴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르카디아로의 공간 게이트를 여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슈나이더 대장로는 다소 미심쩍은 눈빛으로 재차 물었다. "확실하오?" "그렇습니다. 이미 전 500년 전에 다크 포탈의 상태를 대충 파악했습니다." "음." 장로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2차 암흑전쟁 당시 엘프족은 언데드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 때 줄어든 인구를 아직까지 복원하지 못하는 판국이었다. 물론 오크와의 분쟁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지만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은 그때였다. 때문에 일족의 입장으론 다크 포탈을 되살리겠다는 의견을 쉽사리 용납하기 힘들었다. [다크메이지 13장 354편] 결정을 내리지 못한 장로가 결국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일단 그 사안은 장로회의를 통해 결정해야겠소. 대답은 추후에 알려드리지요." "모쪼록 부탁드립니다." 서둘러서 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슈렉하이머는 차분히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대장로가 몸을 일으키자 잔뜩 인상을 찌푸린 올리비에가 그의 뒤를 따랐다. 데이몬은 기이한 표정으로 카트로이를 쳐다보았다. 졸졸 따라다니던 율리아나는 이미 수면마법을 걸어 재워놓은 다음이었다. 정신을 잃고 늘어진 율리아나를 보며 카트로이가 혀를 끌끌 찼다. "쯔쯔. 대단한 열성이로군. 저 계집애는 도대체 네놈이 뭐가 좋다고 기를 쓰고 따라붙는 거지?" 데이몬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냐. 너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 카트로이가 의외라는 듯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뭐가 궁금하지?" "혹시 넌 지금껏 마왕과 계약을 맺어 힘을 얻은 흑마법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나?" "………." "물론 마왕이 강림할 경우 저항하지 못하고 꼭두각시가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시기가 언제냐 하는 것이다. 오래 살아온 드래곤인 만큼 뭔가 아는 게 있을 텐데……." 조용히 듣고 있던 카트로이가 데이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다. 너도 알다시피 500년 전에는 아르카디아에 인간이 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마왕이 강림하는 것은 확률상 매우 드물다고 들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이미 마왕인 케루빔과 계약을 맺은 지 500년이 지난 상태이고 또한 나는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몸 속에 보관하고 있어. 그런데 아직까지는 아무 일이 없더군." 데이몬의 말에 카트로이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놀랍군. 그런데 그런 비밀을 나에게 털어놓는 이유가 뭐지?" "요즘 들어 나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어. 뭐 네놈과의 사이가 그리 좋지는 못하지만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면 얘기해 주겠다." 잠시 뭔가를 생각해 보던 카트로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의 이름을 걸고 발설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한다."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은 수인을 맺어 결계를 만들었다. 그와 카트로이, 그리고 곯아떨어진 율리아나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대화를 듣지 못하게 말이다. "좋아. 일단 나의 비밀에 대해 한 가지 가르쳐 주지. 사실 난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을 할 수 없는 몸이다. 오래 전 누군가에게서 받은 금제 때문이지. 그 탓에 난 결코 사람을 죽일 수 없다. 물론 몬스터는 예외이지. 아까 경험해 본 바에 따르면 엘프도 금제의 대상이 되지 못하더군." 우연한 기회에 듣게 된 데이몬의 비밀이 카트로이에겐 상당히 흥미로운 것 같았다. "네놈에게 그런 비밀이 있었을 줄은 몰랐군." "문제는 최근에 일어났다. 며칠 전 난 오크와 싸우며 이유 없는 살의를 느꼈다. 그것은 바로 피가 흐르는 생물에 대한 원천적인 적의였다. 금제가 걸려있지 않았다면 인간이라도 거침없이 죽였을 것 같은 살의였다. 뭐 예전에 사람을 죽여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로 인간에겐 어느 정도 살육의 본능이 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아닐까?" "아니야. 기억을 되짚어보아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말인데……." 데이몬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혹시 내가 지금 마왕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 "그로 인해 이유 없는 살의를 떠올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나와 계약을 맺은 마왕 케루빔은 분명 인간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살의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묵묵히 듣고 있던 카트로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네 말은 틀렸어. 비록 만나본 적은 없지만 마계의 생물들은 뚜렷한 살의를 가지고 살육을 행하는 게 아니야. 우두머리 격인 마왕이라면 그 차이가 더욱 극명하겠지. 그것들은 아무 생각 없이 웃으며 인간의 생명을 거둔다. 다시 말해 살인에 대한 죄책감이 전혀 없다는 뜻이지. 살의를 느낀다는 것은 조금이라도 살생에 꺼림이 있다는 뜻이니까." "그럴까?" "쓸데없는 걱정이다. 만약 네가 마왕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고 있다면 엘프들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들은 마나에 극히 민감한 종족. 마왕에게 조종 받는다는 사실을 모를 까닭이 없으니까." "그렇다면 지금껏 금제에 억눌려 있었기 때문에 이유 모를 살의가 떠올랐던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지." 별로 만족할 만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는지 데이몬은 쓸쓸히 고개를 흔들었다. 문득 대화가 길었다는 생각에 그는 고개를 돌려 율리아나를 살폈다. 깊이 잠든 것을 확인했는지 그는 안심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데이몬의 시선이 떠난 직후 그녀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데이몬이 깨울 때까지 그녀는 미동도 없이 늘어져 있었다. 일행들 중 회담에 들어가지 않은 이들은 엘프들에게 소박한 접대를 받고 있었다. 나무줄기 속에 위치한 엘프의 거처를 본 일행은 무척 신기해했다. 겉보기와는 달리 나무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벽과 바닥은 더 없이 매끈했고 방 구석구석에는 나무로 된 집기들이 놓여 있었다. 특히 나무 특유의 냄새가 더없이 싱그러웠다. 탁자 위에는 간단한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과일과 채소, 그리고 과일의 즙으로 짐작되는 음료가 놓여 있었다. 일행들은 무척 신기해하며 이것저것 만져보기 바빴다. "과연 이 나무가 살아있을까?" "글쎄요? 속이 비었으니 살 수 없지 않을까요?" 일행들이 연신 큰 소리로 떠들었지만 인간의 말을 모르는 듯 엘프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미첼만은 말이 통하는 엘프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대화상대는 일루미나였다. "당신과 싸우지 않아 무척 기쁘군요." 미첼의 말에 일루미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지요?" 미첼은 일순 말문이 콱 막혔다. 그의 유창한 말솜씨로도 이유를 밝히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답하는 대신 그는 일루미나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만약 싸움이 벌어졌다면 당신은 나에게 화살을 쏘았겠지요?" 일루미나는 추호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명령이 떨어졌다면 의당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아직 이유를 밝히지 않았어요." 미첼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감정이 일방통행, 즉 짝사랑이 아닌지 심각히 의심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일루미나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질 까닭이 없었다. 이미 한바탕 싸웠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둘은 같은 종족이 아니었다. 외모는 비슷하지만 둘은 지금까지 판이하게 다른 환경과 사회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난 왜 이 엘프 여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걸까?' 생각에 열중하던 미첼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글쎄요? 아무래도 당신이 너무 아름다워서 맞서 싸우고 싶지 않았나 생각되는군요." 미첼의 대답에 일루미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름답다는 말은 꽃에나 쓰지 않나요?" "당신은 꽃보다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미첼이 용기를 내어 말했지만 일루미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인간 여인이었다면 틀림없이 기뻐했을 테지만 그녀는 고개만 끄덕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머쓱해진 미첼이 화제를 돌렸다. "보아하니 다른 분들은 인간의 언어를 모르는 것 같군요." "인간의 언어를 아는 일족은 그리 많지 않아요. 전 어머니에게서 인간의 말을 배웠지요." 그 말을 들은 미첼의 눈이 번뜩였다. "그런데 엘프는 언제 결혼을 하나요?" 일루미나의 대답은 간단했다. "엘프는 결혼을 하지 않아요." 그녀의 대답에 일행 전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들이 결혼을 하지 않다니……. 당황한 미첼이 떠듬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그렇다면 후사는 어떻게 잇지요?" 심유한 눈빛으로 미첼을 쳐다본 일루미나가 곧 설명을 시작했다. 엘프 특유의 방법은 일행을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결혼하지 않고 1년에 한 번 남성 엘프와 관계를 가지며, 또한 3계급 이상의 귀족들만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말에 일행은 말을 잊었다. "세, 세상에 그런 일이……. 그렇다면 일루미나도?" 미첼의 말뜻을 깨달았는지 일루미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석하지만 그렇답니다. 저 같은 4계급 센티널들은 남성 엘프와 손을 잡는 것도 금지되어 있지요." 하마터면 아이를 갖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지만 미첼은 결사적으로 입을 막았다. 엘프의 입장에서 그런 말은 명백한 무례였다. 동맹을 청하러 온 입장에서 무례를 범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떠올린 미첼은 가까스로 혼란스런 감정을 수습했다. "놀랍군요. 엘프들은 인간과는 정말 다른 형태의 사회를 이루고 있어요." 이번에는 일루미나가 호기심을 보였다. "인간들은 어떻게 생활하나요?" 미첼은 조용히 인간들의 관습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남성과 여성이 결혼을 통해 부부로 맺어져 아이를 낳고 함께 힘을 합쳐 키운다는 말을 일루미나는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었다. 인간의 풍습도 엘프의 입장으로 낯설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상당히 신기하군요. 그러기엔 남자가 모자라지는 않나요?" "그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뭐 큰 전쟁이 벌어지면 그럴 수도 있고 드물게 여러 명의 여성을 아내로 맞아들이는 남성도 있지만 대부분은 일대 일로 남편과 아내의 인연을 맺지요." "그럼 미첼 님께는 아내가 있나요?" 미첼은 슬며시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아직까진 없습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일루미나가 돌연 정색을 했다. "사실 전 인간에 대해 그리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어요. 제 친구인 이리스가 인간들로 인해 크나큰 아픔을 겪었거든요." 뒤이어 그녀의 입에서는 일행들에겐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이 흘러나왔다. 설명이 이어질수록 일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일루미나가 말을 마치자 미첼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 나쁜 놈들이 있나? 그런 녀석들은 저희들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제가 듣기론 인간들의 성격은 모두 다르다고 들었어요. 다행히 여러분들은 좋은 쪽인 것 같군요. 그렇죠?" 일루미나의 질문에 미첼은 난감해졌다. 대놓고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참동안 머리를 짜낸 미첼이 간신히 대답했다. "그렇게 좋은 사람은 못되지만 그렇다고 나쁘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럼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요?" 당돌한 질문에 미첼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그렇다는 얘기죠." 미첼이 곤욕을 치르는 사이 류미너스 부족의 장로회의가 끝났다. 회의를 마친 슈나이더 대장로는 서둘러 슈렉하이머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올리비에 대장은 이번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회의 결과에 불만을 품은 모양이었다. 들어서는 대장로를 슈렉하이머가 반갑게 맞았다. "결정이 내려졌습니까?" 슈나이더 장로는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장로회의에서 인간들과 동맹을 맺기로 결론이 내려졌소. 우리의 영역을 인정해 주는 대신 우리 류미너스 부족에서는 센티널들을 지원하겠소. 수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하나같이 실력이 뛰어난 궁수들이오." "훌륭하신 결정입니다." 리치라는 특성상 표정변화가 없는 슈렉하이머와는 달리 카심과 크란시아의 얼굴엔 희색이 만연했다. "하지만 다크 포탈을 재가동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 같소. 장로들이 그 문제를 가장 염려하고 있더구려." "어떻게 결정이 내려졌습니까?" 슈나이더 장로는 조용히 일행의 얼굴을 쓸어보았다. "당신들에게 올리비에 대장을 위시한 센티널들을 동행시킬 생각이오. 다크 포탈이 있는 곳까지 말이오." "다크 포탈을 재가동시키는 것을 감시하겠다는 뜻이군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슈렉하이머는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딴 마음을 먹지 않았으니 꺼릴 것이 있을 턱이 없었다. 결정이 내려지자 슈렉하이머는 한시가 급하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희는 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소. 우리도 채비를 갖추도록 하리다." 슈렉하이머는 카심과 크란시아를 대동하고 서둘러 그곳을 나섰다. [다크메이지 13장 355편] 엘프와 동맹을 맺었다는 말을 전해듣자 일행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다크 포탈을 재 가동시키기만 하면 150만에 달하는 정벌군이 건너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일행은 각자의 장비를 챙긴 뒤 한 자리에 모여들었다. 함께 갈 센티널들도 채비를 마치고 모여든 다음이었다. 올리비에 대장이 여전히 못마땅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사정을 들은 일행은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슈나이더 대장로의 안색이 어두웠기에 슈렉하이머가 다가갔다. "걱정되는 일이 있으십니까?" "그렇소. 센티널로부터 조금 전 들어온 급보인데 파타르 족이 헤아릴 수 없는 전사들을 마을 외곽에 모아놓고 있다는구려. 머지 않아 엘프의 숲을 들이칠 것 같소. 아무래도 당신들과 동맹을 맺었다는 것을 오크 수뇌부가 알아차린 모양이오." 그 말을 들은 슈렉하이머는 깜짝 놀랐다. 오크가 이토록 빨리 반응해 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세상에 그런 일이……. 그렇다면 일행 중 몇 명이 남아 돕겠습니다." 대장로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걱정할 필요 없소. 우린 오랫동안 놈들을 막아왔소. 우린 놈들에게 감히 엘프의 숲을 침입한 데 대한 대가를 치러 줄 생각이오." "하, 하지만 희생이 클 텐데……." "센티널 하나가 신의 품으로 돌아갈 때 오크는 열 이상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버릴 것이오. 적어도 숲에서만큼은 엘프를 당해낼 종족은 없소. 갈수기가 아니니 숲에다 불을 지르지도 못할 터. 인간들의 군대가 건너올 때까지 충분히 막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떠나시오." 주저하던 슈렉하이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숲의 도움을 받는다면 센티널들이 쉽사리 당하지 않을 터였다. 그 모습을 여러 번 보아왔던 터라 그는 걱정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출발합시다." 냉랭한 눈빛으로 그를 힐끔 쳐다본 올리비에가 센티널들을 먼저 출발시켰다. 궁수로 구성된 센티널들이 날랜 몸놀림을 자랑하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다가가자 빽빽이 자라있던 숲이 움직이며 길을 열어주었다. 고개를 돌린 올리비에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우릴 따라오시오. 숲이 끝나는 곳까진 우리가 앞장서겠소." 슈렉하이머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따랐다. 일행들도 서둘러 뒤를 따랐다. 특히 센티널들 중에 일루미나가 포함된 것을 발견한 미첼의 눈이 유독 빛났다. 엘프들이 이동하는 속도는 눈부실 정도였다. 열심히 따라붙었지만 두 무리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센티널들이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기다려 주지 않았다면 일행은 벌써 낙오해 버렸을 터였다. "헉헉, 정말 빠르군. 엘프가 왜 숲의 종족인지 알 것 같아." 숲 속에서 달리는 것은 평지에서 달리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일단 발목까지 낙엽이 쌓여있는 데다 나무뿌리들이 곳곳에 숨어 있어서 신경 써서 달리지 않는다면 볼썽사납게 엎어지기 일수였다. 게다가 나무의 잔가지들도 충분히 위협적인 복병이었다. 금속제 갑옷으로 가리지 않았다면 일행의 전신은 벌써 시퍼렇게 멍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엘프들은 달랐다. 갑주를 전혀 걸치지 않았으면서도 그들은 바람처럼 숲을 갈랐다. 마치 나무들이 엘프의 몸을 피해주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들의 날렵하고 민첩한 몸놀림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일행은 열심히 발을 놀려야 했다. 지루하고 힘든 행군이 끝난 것은 달린 지 두세 시간 가량 지나서였다. 잠시 쉬어가려는 듯 센티널들이 진군을 멈추자 일행은 살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마지막 힘을 짜냈다. "다, 다행이로군." 대원들은 극도로 지쳐 있었다. 센티널들과는 달리 숲에 익숙하지 못한 데다 무거운 중장갑주까지 걸쳤기 때문에 힘이 배나 들 수밖에 없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연신 숨을 헐떡이는 대원들을 보자 센티널 몇 명이 다가와서 과즙으로 짐작되는 음료를 건넸다. "고맙소." 감사의 인사를 전했지만 알아듣지 못하는지 센티널들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표정변화가 없었다. 미첼은 우습게도 일루미나가 자신이 아닌 패터슨에게 음료를 건넸다는 사실에 낙심하고 있었다. 아쉬웠는지 그는 음료 주머니를 건네 받는 일루미나에게 다가갔다. "센티널 중에서 인간의 말을 아는 엘프는 당신밖에 없나요?" 일루미나의 시선이 미첼에게로 향했다. 눈동자에 경계의 빛이 서려 있는 것을 보니 계속해서 접근하려는 미첼이 의심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리 많지는 않지만 몇 명 있긴 해요. 일단 올리비에 대장님도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걸요." 그래도 섭섭했는지 미첼이 계속해서 일루미나에게 말을 걸었다. 휴식을 취하는 대원들을 쳐다보던 올리비에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런 형편없는 체력으로 오크와 싸울 수나 있겠소?" "………." "조금 있으면 아주 위험한 지역에 들어갈 것이오. 그곳은 우리 엘프에게도 출입이 금지된 곳이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할거요." 말을 마친 올리비에가 휑하니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착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단지 숲에서 잘 달릴 수 있다는 이유로 잘 싸운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고개를 돌리자 젊고 잘생긴 금발청년의 얼굴이 들어왔다. 9서클의 마스터라는 대마법사였다. 데이몬을 보자 올리비에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일족 전체를 쓸어버리겠다던 호언장담이 아직까지 귀에 생생했기에 좋은 감정이 떠오를 리가 없었다. "나에게 무슨 말이 하고 싶소?" 데이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왔다. 올리비에 대장을 위시한 센티널 30여 명을 느릿하게 쓸어보던 데이몬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만약 너희들이 숲 속에서 싸운다면 잘 훈련된 오크 전사를 몇이나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나?" 영문을 모른 올리비에는 그저 눈만 끔뻑거렸다. "오크 전사 일천 이상을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처치할 수 있나?"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 올리비에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요? 아무리 숲에서 싸우더라도 그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오. 보아하니 당신은 오크 전사와 단 한 번도 싸워보지 않은 것 같구려." 데이몬은 눈썹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 일행들은 그 일을 해 낸 자들이다. 각각 천이 넘는 오크 보급부대 셋을 깨끗하게 전멸시켰지. 그 과정에서 희생은커녕 단 한 명도 부상을 입지 않았다. 쉽게 말해 그만큼 정예로 구성되어 있다는 뜻이지." 말을 마친 데이몬은 싸늘한 눈빛으로 올리비에를 쏘아보았다. "동맹을 맺었으면 그에 합당한 예우를 하라. 조금 전과 같은 무례는 내가 더 이상 용납하지 못한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휑하니 몸을 돌렸다. 믿을 수 없는 전과에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올리비에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듯 슈렉하이머를 쳐다보았다. "그게 사실이오?" 슈렉하이머는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희들은 이미 오크의 주의를 돌리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총 세 부대의 오크 보급부대를 전멸시켰습니다. 그 중에는 천 사백이 넘는 대부대도 있었지만 대원들의 분투로 궤멸시킬 수 있었지요." 슈렉하이머의 확인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에의 의구심은 풀리지 않았다. 보다 못한 카트로이가 나서고 나서야 그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사실이다. 이들은 평범한 인간의 수배에서 수십 배에 달하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 올리비에는 입을 딱 벌렸다. "아무리 본 드래곤을 투입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놀라운 전과를……." "본 드래곤은 꺼내지도 않았다. 단지 이들에다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 하나가 가세했을 뿐이지." "저, 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카트로이는 매서운 눈빛으로 올리비에를 쏘아보았다. "비록 너희들이 드래곤이란 종족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지만 우린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많은 싸움이 있을 테니 직접 확인하면 되지 않는가?" "알겠습니다." 올리비에는 질린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몇 명 되지도 않는 인간들이 그토록 엄청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니……. 인간의 언어를 모르는 탓에 센티널들은 그저 멀뚱멀뚱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올리비에는 조용히 입을 닫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센티널 중에서 알아듣지 못한 자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루미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미첼을 쳐다보았다. "그의 말이 사실인가요?" 미첼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주요 전과는 데이몬과 데스 나이트들이 거뒀다고 봐야 합니다. 오크 전사들 대부분은 그들이 궤멸시켰습니다. 실상 저희들이 쓰러뜨린 오크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정말 대단하군요." 일루미나의 경의 어린 시선을 받으며 미첼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하는 것을 느꼈다. 행군은 계속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올리비에가 일행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달라졌다. 그렇다고 눈에 띄게 잘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비꼬거나 냉소 짓는 일은 없어졌다. 센티널들의 안내를 받으며 일행은 계속해서 숲을 통과해 나갔다. 또 한 번의 휴식이 더 있었고 무한할 것 같았던 엘프의 숲도 서서히 끝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자리에 멈춰선 올리비에가 슈렉하이머를 쳐다보았다. "이곳이 엘프의 숲 끝단입니다. 이곳 이후부터는 엘프들도 들어가지 못하는 금지입니다. 저희들의 안전하게 안내할 수 있는 곳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이후부터는 독자적으로 뚫고 지나가야 합니다." 아직까지 빽빽하게 숲이 이어졌기에 슈렉하이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500년 전의 기억을 유추해 보면 엘프의 숲 끝단은 이곳이 아니었다. 당시 엘프들은 그를 숲이 완벽히 끝나는 곳까지 안내해 주었다. 반면 이곳은 숲이 계속 이어지는 곳이었다. 슈렉하이머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올리비에를 쳐다보았다. "이곳은 오백 년 전과 다른 장소 같은데?" 올리비에의 얼굴에 침중한 빛이 서렸다. "사실 이곳의 나무들은 정상이 아닙니다. 저희들에게 속삭임을 전해주지 않을뿐더러 길도 열지 않습니다. 게다가 수많은 센티널들이 이곳에 들어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 이후로 저희들은 이곳으로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슈렉하이머의 동공에 기이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놀랍구려. 엘프의 숲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저희들의 추측으로는 나무들이 다크 포탈에서 새어나오는 마력에 영향을 받아 변형된 것 같습니다. 그 이후부터 저희들은 이곳을 죽음의 숲으로 부르고 있지요." "………." "죽음의 숲은 매년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로썬 속수무책입니다. 이유를 조사하기 위해 센티널들을 들여보내도 족족 사라져버리니 저희들로썬 도저히 어찌해 볼 방도가 없습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슈렉하이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한 번 조사해 보면 되겠구려. 그래 넓이가 얼마나 되오?" "전체 숲의 1%가량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범위가 상당히 넓었기에 슈렉하이머의 동공에 놀라움이 번뜩였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뚫고 가야 했기 때문에 그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한 번 가 봅시다." 머뭇거리던 센티널들 사이로 대원들이 끼여들었다. 따로 떨어져 무리를 이루고 가던 전과는 달리 인간과 엘프는 한 덩이가 되어 조심스럽게 죽음의 숲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다크메이지 13장 356편] 일행에게 위험이 닥친 것은 죽음의 숲 초입에서부터였다. 탐지마법을 펼치며 걸어가던 데이몬이 벼락같이 고함을 지르며 손가락질을 했다. "조심해." 검을 뽑아든 카심이 즉각 몸을 날렸다. 그도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센티널 하나가 영문을 모른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카심은 불문곡직하고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난데없이 공격을 받자 센티널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들려온 것은 파육음(破肉音)이 아니라 뭔가 단단한 것이 베어지는 소리였다. 퍽. 마나가 응축된 카심의 장검이 어른 허리 두께의 나무넝쿨을 통째로 잘라냈다. 나무넝쿨이 구렁이처럼 원활히 움직이며 센티널의 목을 휘감으려던 순간이었다. 잘려나간 넝쿨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몸을 비비꼬았다. 인상을 찌푸린 카심이 검을 휘둘러 여러 토막으로 쪼개놓고 나서야 넝쿨은 움직이는 것을 멈췄다. 카심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조각난 넝쿨을 살펴보았다. "뭐 이런 게 다 있지?" 영문도 모른 채 딸려갈 운명에서 벗어난 센티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엘프의 말이라서 카심은 알아듣지 못했다. 보고 있던 데이몬이 흥미롭다는 듯 눈빛을 빛냈다. "말로만 듣던 식인목(食人木)이로군." "예? 식인목이라니요?" 슈렉하이머의 반문에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일전에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 마계에서 서식하는 나무의 일종으로 살아있는 생물을 잡아 그 체액을 먹이로 삼는다는 괴목(怪木)이지. 힘이 엄청나서 어지간한 마물도 잡혀 먹힌다고 적혀 있었네. 그런데 식인목의 다른 곳도 아닌 엘프의 숲에 서식하고 있다니……." 듣고 있던 슈렉하이머가 걱정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암흑전쟁 당시 건너온 것이 아닐까요?" 데이몬은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마계의 식물은 이곳과는 번식방법이 판이하게 달라. 마치 엘프가 인간과 다른 것처럼 말일세. 내 짐작으론 이곳의 나무들이 마계에서 흘러나온 마력에 영향을 받아 식인목으로 바뀐 것 같네. 실낱같은 마력이라도 계속해서 흘러나온다면 나무를 감염시키기엔 충분하지." "마력이 새어나올 정도라면 다크 포탈이 아직까지 작동하고 있다고 봐야겠군요." "그렇지. 포탈의 좌표를 아르카디아로 돌린다면 마력은 더 이상 새어나오지 않을 걸세. 그렇다면 이곳의 나무들도 원래대로 돌아가겠지. 아무래도 이곳에서부터는 데스 나이트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군." 데이몬은 말없이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곧 그곳에서 네 명의 데스 나이트, 헬버트론과 라인델프, 프림베르그, 사라미스가 뛰어 나왔다. 뒤를 이어 윈슬럿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다분히 도전적인 눈빛으로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임무이지? 설마 아까처럼 쓸데없이 불러낸 것은 아니겠지?" "걱정하지 마라. 이번에는 한 바탕 싸울 수 있을 거야." 말을 마친 데이몬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대승정. 포탈 주변에 상당수의 언데드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오?" 슈렉하이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마족이나 다크 쉐이드 따위의 마계에서 온 마물들은 돌아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울이나 와이트, 따위의 언데드들은 마계로 가지 못하고 포탈 주변을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리 강한 놈들은 아니지만 수가 제법 많았습니다. 500년 전에 들어가지 못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아마 그것들은 포탈에서 흘러나오는 어둠의 마력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외 다른 것들은 없었소." 잠시 주저했지만 슈렉하이머는 오래지 않아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실은 포탈 주변에 데스 나이트도 몇 있는 것 같았습니다. 먼발치에서 봤기 때문에 확실하진 않지만……." 데이몬은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 재미있겠군. 놈들은 분명 나이델하르크에 의해 생명을 얻었을 터. 내가 운용하는 나이델하르크의 마력을 접한다면 어떤 태도로 나올지 궁금하군. 일단 적대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해야겠지만." 듣고 있던 헬버트론이 말문을 열었다. "그깟 놈들은 걱정하지 말아라. 우린 현존하는 최강의 데스 나이트들이다. 적어도 언데드 중에서 우리의 적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쯔쯔. 그놈의 자존심은……." 혀를 찬 데이몬은 조용히 병력을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단 올리비에를 비롯한 센티널들을 일행의 가운데에 배치했다. 예상대로 올리비에가 거세게 항의를 해 왔다. "우리들의 전투력을 무시하는 거요? 류미너스 부족의 센티널들은 결코 약하지 않소." 데이몬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항의를 묵살했다. "쓸데없는 아집이야. 적어도 맨몸으로 싸우는데 있어 궁수들은 백 번 죽었다 깨도 검사들을 따르지 못한다. 그러니 너희들은 뒤에서 지원사격이나 충실히 해 주는 게 나아." "그럴 수 없소. 우린 우리 나름대로 싸우는 요령을 발견시켜왔소. 게다가 데스 나이트 따위의 호위를 받고싶은 생각도 없소." 계속 고집을 피우는 올리비에를 쳐다본 데이몬은 두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럼 너희들이 알아서 싸우도록……. 우린 우리 방식대로 숲을 빠져나가겠다." 데이몬은 데스 나이트들을 일행의 가장자리에 배치했다. 후미는 윈슬럿에게 맡겼다. "그럼 출발한다. 엘프들은 알아서 따라올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들어간다." 일행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센티널들을 한 번 쓸어본 뒤 걸음을 옮겼다. 검을 뽑아든 채 방패를 단단히 틀어쥐고 죽음의 숲에 뛰어든 것이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올리비에가 서둘러 몸을 날렸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로군.' 우두커니 서 있던 센티널들이 소리 없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죽음의 숲은 오래지 않아 역습을 시도해 왔다. 탐색하려는 의도였는지 한 동안 일행을 공격하지 않던 식인목들이 한꺼번에 공격을 시작해 왔던 것이다. 슈르르르 헤아릴 수 없는 식인목의 넝쿨이 일행을 노리고 일시에 뻗어왔다. 마치 수십, 수백 마리의 구렁이가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듯한 형국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철저하게 생물만을 노렸다. 다시 말해 외곽을 맡고 있는 데스 나이트와 윈슬럿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것이다. 그것이 식인목들이 범한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번쩍. 허공에서 소름끼치는 검광이 연신 번뜩였고 덮쳐들던 나무 넝쿨들은 송두리째 잘려 바닥에 나뒹굴었다. 데스 나이트들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검을 휘둘러 넝쿨을 절단했던 것이다. 그들의 검에 서린 데스 블레이드는 단단한 식인목의 넝쿨을 마치 무 가르듯 잘라버렸다. 키에에에 절단면에서 시커먼 수액이 뿜어져 나왔다. 넝쿨이 잘려나간 식인목들은 마치 생물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놈들은 모처럼 들어온 먹이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잘려나가면서도 거듭 넝쿨을 뻗어 일행을 낚아채려 하니 말이다. 마침내 몇몇 나무 넝쿨들이 데스 나이트의 방어막을 뚫고 일행에게로 엄습해 왔다. 하지만 일행 중에서 만만히 당할 이는 하나도 없었다. "타앗." 우렁찬 고함소리와 함께 검광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간신히 뚫고 들어온 식인목의 넝쿨들은 오러 블레이드가 서린 장검에 격중되어 갈가리 찢겨져버렸다. 햇살이 들지 않아 어둑어둑한 죽음의 숲 내부에서는 난데없이 오러 블레이드와 데스 블레이드의 합주곡이 울려 퍼졌다.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는 대원들의 오러 블레이드가 어둠을 찢어발겼고 뒤를 이어 거무스름한 빛을 띠는 데스 블레이드가 뻗어오는 식인목의 넝쿨을 사정없이 잘라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이 말없이 마나를 재배열했다. "일단 길을 내야겠군." 공기의 속성을 가진 마나가 맹렬히 재배열되었지만 생겨난 것은 매직 미사일이 아니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아가는 바람의 칼날인 윈드 커터(Wind cutter)가 실현된 것이다. 도합 십여 개의 윈드 커터가 맹렬히 회전하며 앞으로 쏘아졌다. 콰콰콰콰. 윈드 커터는 넝쿨이 달려 있는 식인목의 줄기들을 사정없이 베고 지나갔다. 보고 있던 슈렉하이머도 그에 가세했다. 그 역시 윈드 커터를 시전해 길을 내는데 주력했다. 도무지 길이 없어 보이던 죽음의 숲 속에 뻥 뚫린 길이 만들어졌다. 윈드 커터에 잘려나갔음에도 나무줄기들은 쉽사리 죽지 않았다. 증거로 줄기에 달려있는 넝쿨이 계속 꿈틀거리고 있었다. 윈드 커터가 지나가며 만들어진 길 위에는 잘려나간 넝쿨과 나무줄기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데이몬은 이번에는 불의 기운을 가진 마나를 재배열했다. "확실하게 구워버려야겠군." 재배열이 끝나고 쏘아진 것은 가장 기초적인 마법인 파이어 볼이었다. 불이 잘 붙지 않는 식인목이라고는 하나 본체에서 잘려나간 탓에 나무줄기들은 오래 견디지 못하고 화염에 휩싸였다. 키이이익.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나무줄기들이 비명을 지르며 거세게 몸부림을 쳤지만 오래 견디지 못하고 불타올랐다. 하지만 불은 살아있는 식인목에는 붙지 않았다. 오로지 잘려나간 넝쿨이나 줄기만 태워버릴 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죽음의 숲을 통과하기에는 충분했기에 데이몬의 얼굴에 득의한 빛이 떠올랐다. "잘 되었군. 길을 내는데 무리가 없겠어." 그는 앞으로 달려나가며 재차 윈드 커터를 전개했다. 죽음의 숲 복판에다 아예 길을 내버릴 생각인 것이다. 또다시 수십 그루의 식인목들이 윈드 커터에 잘려나갔다. 뒤이어 슈렉하이머가 쏘아낸 파이어 볼이 작렬하자 잘려나간 나무줄기에 불이 붙었다. 화르르르. 일행을 향해 덮쳐들던 식인목들의 공격은 거센 저항으로 말미암아 기세가 죽어 있었다. 일행의 분전으로 잘려나간 나무 넝쿨과 줄기들이 사방 50평방미터 정도의 공터에 자욱하게 쌓여 있었다. 길을 만들어낸 데이몬이 서둘러 일행을 불렀다. "모두 이리로 와." 일행이 공터를 벗어나자 데이몬은 생각할 것도 없이 마나를 재배열했다. 화아아악. 조금 전만 해도 일행들이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던 곳에 고써클의 화염계 마법인 플레임 스트라이크(flame strike)가 작렬했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식인목의 줄기들이 일시에 불타올랐다. 무시무시한 광경에 질렸는지 식인목들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급속도로 물러가는 식인목 넝쿨들을 보고 데이몬이 만족하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크. 건방진 것들. 상대를 보고 건드려야지." 잘려나간 식인목의 넝쿨과 줄기들은 10분 가량 타오르다 재로 화해버렸다. 하지만 뒤따르던 센티널들은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래도 식인목의 공격에 발목이 잡혀 있는 모양이었다. 슈렉하이머가 걱정스러운 듯 머리를 흔들었다. "엘프들을 도와주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데이몬은 어림없다는 듯 말을 잘랐다. "그럴 필요 없소. 이참에 엘프가 얼마나 잘 싸우는지 한 번 살펴 볼 생각이니까." 그는 몸을 돌리려다 말고 카심을 쳐다보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무래도 엘프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대장. 공터에 머무른다면 식인목들이 더 이상 습격하지 않을 것이네. 그러니 대장이 이곳에 남아 엘프들을 기다려 주게. 난 대승정과 함께 계속 길을 뚫겠네. 엘프들을 만나면 우릴 따라오게." 카심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때 미첼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죄송하지만 저도 남아있으면 안되겠습니까?" 데이몬은 능글맞게 웃으며 미첼을 쳐다보았다. "엘프 아가씨가 걱정되나 보군. 그렇게 하도록 하게. 끌끌. 물불 가리지 않는 것을 보니 청춘이 좋긴 좋군." 미첼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우린 길이나 뚫겠네." 카심과 미첼을 남겨둔 데이몬은 데스 나이트들을 앞장세우고 진군을 시작했다. 앞을 가로막은 나무들을 마법으로 쓰러뜨린 뒤 불태워 길을 만든다는 비교적 단순하면서도 무지막지한 전략이었다. 윈드 커터나 파이어 볼이 비교적 수준이 낮은 마법이었기 때문에 마나가 딸릴 이유가 없었다. 죽음의 숲에는 곧 거대한 길이 뚫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길을 통해 머지않아 아르카디아의 대군이 진군해 올 터였다. [다크메이지 13장 357편] "엘프들은 괜찮을까요?" 숲을 쳐다본 카심은 어렵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그들이 들어온 숲은 나가지 못할 정도로 단단히 막혀 있었다. 되짚어보면 엘프들이 나올 곳도 이런 식으로 막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식인목들이 의도적으로 일행을 갈라놓은 것 같았기에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쉽진 않을 거야. 넝쿨이나 줄기를 통째로 잘라버려도 움직이는 놈들이야. 그러니 화살 한두 방 박혀봐야 별달리 타격을 입진 않을 것 같군." "하지만 엘프의 활은 정말 위력이 강합니다." "활은 위력이 아무리 강해도 식인목에는 극히 비효율적인 무기라고 볼 수 있지. 내 생각으론 센티널들 중에 반드시 희생자가 있을 것 같네." 미첼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일루미나의 안전이 걱정된 것이다. "그나저나 엘프 대장의 고집이 상당하더군요. 앞으로도 많은 충돌이 예상될 것 같습니다." "글세? 천천히 풀어나가야겠지?" 시커멓게 타버린 잿더미에서는 아직까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하지만 식인목들의 추가적인 습격은 없었다. 반경 50미터가 완벽히 공터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공격범위가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사위를 경계하며 주위를 살펴보는데 갑자기 숲의 한 쪽이 맥없이 쓰러졌다. 우수수수 고개를 돌린 카심의 얼굴에 반색이 떠올랐다. "저기 오는군." 식인목들이 쓰러진 곳으로 무거운 표정을 한 올리비에 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센티널들이 비틀거리며 걸어왔는데 놀랍게도 수가 판이하게 줄어 있었다. 깜짝 놀란 카심이 서둘러 그들을 마중 나갔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카심을 쳐다본 올리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는 센티널들은 원래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열 다섯 명의 센티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나머지는 어디에?" 주저하던 올리비에가 마침내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무 넝쿨의 공격을 받았소. 화살로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었소.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동료 몇이 잡혀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소." 센티널 중에 일루미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 미첼이 성난 음성을 토해냈다. "그렇다고 동료들을 사지에 버려 두고 왔단 말이오?" 올리비에의 지친 듯한 시선이 미첼에게로 향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오. 그들을 구하려다간 남은 센티널의 안전마저 보장할 수 없소." 미첼의 눈빛이 싸늘히 가라앉았다. "그러고도 당신이 대장을 맡을 자격이 있소?" "………." "우리 인간들은 결코 동료를 버리지 않소. 설사 일행 전체가 위험에 처하더라도 말이오." 뜻밖의 반응에 올리비에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미첼을 쳐다보았다. 미첼은 등에 메고 있던 배낭을 풀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방패 역시 한 쪽에 풀어놓았다. "내가 그들을 구해오겠소. 그들이 죽는 것을 좌시할 수 없소." 한 마디를 남긴 채 미첼이 숲으로 달려들었다. 그의 장검에서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쑥 솟구쳐 올라왔다. 파파파팟 검을 휘두르자 앞을 가로막은 나무들이 우수수 베어졌다. 뜻밖에 뛰어든 먹이가 반갑다는 듯 식인목들의 넝쿨이 연달아 뻗어져왔지만 종횡무진 휘두르는 미첼의 장검에 맥없이 잘려나갈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깜짝 놀랐지만 카심은 그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서둘러 구해오게. 난 데이몬을 데리고 오겠네." 말을 마친 카심은 올리비에를 쳐다보았다. 그러는 사이 미첼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시오. 난 길을 뚫고 있는 동료들을 불러오겠소." 신기한 눈빛으로 공터를 둘러보던 올리비에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흔들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소. 이미 그들은 죽었을 터, 시간을 낭비할 필욘 없을 것 같소." 이번에는 카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우린 동료의 죽은 시체를 보기 전까진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소. 비록 다른 종족이지만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이상 엘프도 우리 동료라 할 수 있소. 도와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 그냥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시오." 말을 마친 카심은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그 모습을 올리비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적어도 엘프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인간을 그가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젠 끝인가?" 온 몸을 조여드는 나무넝쿨을 쳐다보며 일루미나가 묵묵히 내뱉었다. 항상 친구로만 여겼던 나무에게 공격을 받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이미 동료 몇 명이 나무의 공격에 목숨을 잃었다. 체액이 모두 빨려 뼈와 껍질만 남아버린 참혹한 모습으로. 그리고 동료 하나가 한창 나무에 체액이 빨리고 있었다. 불행한 희생자가 연신 발버둥을 쳤지만 몸을 단단히 감싼 나무넝쿨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녀의 드러난 얼굴과 손에서 핏기가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잠시 후 생명이 완전히 사라진 엘프의 주검이 맥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일루미나 바로 옆에 묶여 있던 센티널 하나가 허공에 달려 올라갔다. 이제 그녀도 조금 전 달려 올라간 동료와 같은 운명을 맞을 터였다. 쉬르르르. 화살 서너 개가 박힌 너무 넝쿨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몇 발이 화살이 관통했는지 넝쿨 군데군데에는 구멍이 뚫려 시커먼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센티널들이 얼마만큼 분전했는지를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애석하게도 화살은 식인목에겐 그리 효율적인 무기가 아니었다. 죽음의 공포로 새파랗게 질려 있던 센티널의 몸을 여러 가닥의 나무넝쿨이 파고 들어갔다. "흑."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달려 올라간 센티널의 얼굴이 급격히 탈색되기 시작했다. 입술이 점차 납빛으로 변해갔고 눈동자에서 총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체액은 계속 해서 식인목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잠시 후 껍질만 남은 그녀의 시신이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으직. 골수마저 빨렸는지 떨어지자마자 뼈가 으스러졌다. 그 소리를 듣자 생존자들이 몸서리를 쳤다. 일단의 넝쿨이 이번에는 일루미나를 목표로 뻗어왔다. 마음을 정리한 일루미나는 옆의 동료에게 시선을 던졌다. "자매들이여. 이제 안녕을 고해야겠군요. 먼저 가서 기다릴게요." 새파랗게 질려 있던 두 명의 센티널이 미미하게 미소를 떠올렸다. 생존자는 오직 그들뿐이었다. "부디 신의 가호를……." 고개를 끄덕인 일루미나의 몸이 허공으로 휙 달려 올라갔다. 이어 여러 동료들의 목숨을 앗아간 넝쿨들이 가까이 접근하자 일루미나는 눈을 꼭 감았다. 이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 때 그녀의 귀에 외마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일루미나." 그 음성이 함께 왔던 인간 기사의 것임을 알아차린 일루미나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일루미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드디어……." 뻗어오는 나무넝쿨을 사정없이 베어 넘기던 미첼의 눈동자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드디어 일루미나를 찾아낸 것이다.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희열이 북받혀 올랐다. 하지만 참혹한 모습으로 나무줄기 아래 널브러진 엘프의 모습을 본 미첼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이런 가증스러운……." 미첼은 마치 풍차처럼 검을 휘두르며 일루미나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식인목의 역습이 곧바로 이어졌다. 모처럼 얻은 먹이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식인목들이 일제히 넝쿨을 내밀어 미첼을 옭아매려 했다. 하지만 쉽사리 당할 미첼이 아니었다. "에잇." 종횡무진 휘두르는 미첼의 장검에는 오러 블레이드가 자욱하게 맺혀 있었다. 뻗어오던 나무넝쿨들이 우수수 잘려 떨어졌다. 하지만 밀려드는 넝쿨의 무리는 끝이 없었다. 미첼은 정신 없이 넝쿨을 베어 넘기며 일루미나가 있는 쪽으로 접근해갔다. 하지만 달려드는 넝쿨이 워낙 많았기에 그녀가 매달려 있는 식인목으로 쉽사리 다가갈 수 없었다. 살아남은 두 명의 엘프 센티널은 그 광경을 보면서도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 나무넝쿨에 휘감겨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번쩍.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빛을 내뿜자 나무넝쿨들이 맥없이 잘려나갔다. 잘려나간 나무넝쿨이 계속해서 움직이며 미첼의 발을 옭아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수 없는 싸움으로 단련된 미첼은 민첩한 몸놀림으로 계속해서 위기를 넘겨가며 식인목으로 접근했다.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미첼은 마침내 목적했던 나무로 다가갈 수 있었다. 목적지에 이르자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마나를 검에다 불어넣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불어넣은 마나가 검 속에서 형태를 변화시켰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오러 블레이드가 검에서 솟아올랐다. 오러 블레이드가 3미터 가까이 자라나자 미첼은 식인목 줄기를 목표로 검을 휘둘렀다. 키에에엑. 식인목줄기는 허무하게 잘려나갔다. 잘린 곳을 통해 피와 흡사한 체액이 분수처럼 뿜어졌다. 그 속에는 희생된 엘프의 체액도 섞여 있을 것이 분명했다. 힘의 원천이 끊기자 일루미나를 휘감고 있던 넝쿨에도 힘이 빠졌다. 미첼이 재차 검을 휘둘러 줄기를 토막내자 넝쿨은 완전히 힘을 잃어버렸다. 미첼은 두 팔을 벌려 추락하는 일루미나의 몸을 사뿐히 받아들었다. "으차." 일루미나를 바닥에 내려놓은 미첼은 마치 등에 눈이 달려있다는 듯 몸을 돌리며 공격을 퍼부었다. 틈을 노리고 뻗어온 몇 가닥의 넝쿨이 맥없이 잘려나갔다. "헉, 헉." 미첼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을 훔쳤다. 계속해서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한 탓에 미첼은 심하게 지친 상태였다. 마나의 고갈까지 느끼고 있었지만 미첼은 검강을 시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형언할 수 없는 빛을 담은 일루미나의 눈동자가 들어왔다. "우릴……. 구하러 오셨나요." "그렇소. 헉헉. 생존자는 당신뿐이오?" 일루미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에는 두 명의 엘프 센티널들이 나무 덩쿨에 묶인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먹이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식인목은 막 그녀들의 몸을 허공으로 들어올리고 있었다. 미첼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날 따라오시오." 요행인지 미첼은 센티널들이 높이 달려 올라가기 전에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그만 늦었다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올라갔을 터였다. "에잇." 미첼은 불문곡직하고 검을 휘둘렀다. 그의 장검에는 아직까지 2미터 남짓한 길이의 오러 블레이드가 뿜어지고 있었다. 파파파팟. 나무넝쿨들이 어지럽게 흩뿌려지며 기괴한 비명을 토해냈다. 미첼은 내친 김에 부근에 위치한 식인목의 넝쿨과 줄기를 가리지 않고 사정없이 잘라버렸다. 검붉은 체액이 뿜어지며 센티널들을 속박하고 있던 넝쿨에 점차 힘이 빠졌다. 곧이어 거의 정신을 잃은 센티널들의 몸이 하염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첼에겐 그녀들까지 받아들 정신이 없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넝쿨들이 그를 목표로 뻗어왔기 때문이었다. 쿵 다행히 높은 곳에서 떨어지지 않은 때문에 센티널들은 별달리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일루미나가 서둘러 다가가서 그녀들을 부축했다. "괜찮아요? 자매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살아난 탓에 긴장이 풀렸는지 그녀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고개를 든 일루미나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보이는 숫자의 식인목 넝쿨이 그들을 목표로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별로 좋지 않군." 미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계속해서 넝쿨을 베어나갔지만 몰려드는 넝쿨은 끝이 없었다. 마나가 거의 바닥났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의 검에서 뿜어지는 오러 블레이드는 길이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대로 나간다면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마나가 고갈되면 모든 게 끝장이야." 그 전에 구원의 손길이 디밀어지지 않는다면 미첼 역시 당할 공산이 컸다.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미첼은 거듭해서 분투를 해 나갔다. 일루미나를 위시한 두 명의 엘프 센티널들은 오들오들 떨며 미첼의 뒤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이미 동료들마저 자신들을 포기한 상태. 넝쿨에 달려 올라가던 자신들을 두고 그곳을 떠나던 올리비에 대장의 모습에 그녀들은 이미 생을 정리한 상태였다. 그런데 인간 기사가 그들을 구하기 위해 지옥 같은 곳을 제 발로 걸어 들어오다니……. 어떻게든 돕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크메이지 13장 358편] 식인목에게 사로잡히는 과정에서 힘을 빼앗겼기 때문에 제대로 걸음을 옮기기도 힘들었다. 힘이 있다고 해도 무기가 없을 뿐더러 그녀들의 장기인 화살 공격은 식인목에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오로지 인간 기사가 사용하는 다소 무식하고 과격한 방법만이 더 없이 공포스러운 식인목의 넝쿨을 침묵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 기사의 분투도 거의 한계에 달해 있었다. "헉, 헉." 숨이 턱 밑에까지 차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미첼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몸이 잔뜩 물먹은 솜처럼 노곤했다. 하지만 넝쿨의 공격이 계속해서 뻗어왔기 때문에 쉴 틈이란 없었다. 그런 미첼의 노력에 질렸는지 넝쿨들의 공격이 잠시 주춤했다. 슈르르르. 빽빽하던 넝쿨들이 물이 빠지듯 물러가기 시작했다. 마치 공격을 포기한 듯한 형상이었다. 하지만 미첼의 얼굴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비록 넝쿨들은 물러갔지만 대신 식인목이 줄기를 움직여 그들을 빙 둘러싸 버렸기 때문이었다. 퇴로가 완전히 차단되었고 기력 또한 한계에 달한 탓에 미첼은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우릴 찾지 못하는 모양인가 보군." 지금쯤이면 일행들이 벌써 구원을 왔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죽음의 숲이 워낙 광활해서 수색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열심히 숨을 가다듬던 미첼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세 쌍의 눈동자를 발견하자 그는 빙긋이 미소를 지어주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인간은 결코 동료를 버리지 않아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머지않아 살아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일루미나는 미첼의 말에 별달리 수긍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어째서 우릴 구하러 왔나요?" "………." "어리석은 행동이에요. 그 때문에 미첼 님까지 위험에 처하게 되었잖아요." 미첼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엘프는 동료를 쉽사리 포기하나 보죠?" "………." "하지만 인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통상적으로 인간들은 동료를 구하기 위해 위험에 빠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우리 일행들은 특히 더 그럴 것입니다." 일루미나는 모호한 눈빛으로 미첼을 쳐다보았다. 오히려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는 센티널들이 어리둥절해 할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또다시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첼은 바짝 긴장하며 검을 치켜세웠다. "또다시 몰려올 모양이군." 한껏 마나를 밀어 넣었지만 오러 블레이드는 솟아오르지 않았다. 마나가 고갈된 탓에 고작해야 검에 살짝 맺힐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식인목 넝쿨을 자르는 것이 충분했기에 미첼은 두 손으로 검 손잡이를 잔뜩 틀어쥐었다. 슈르르르 예상대로 헤아릴 수 없는 넝쿨의 무리가 그들을 향해 덮쳐오고 있었다. 글렀다는 것을 느낀 일루미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때 엄청난 폭음과 함께 거센 화염이 바로 지척에서 터져 나왔다. 콰콰쾅. 군집된 식인목들의 일각이 일시에 터져 나갔다. 화염으로 급격히 달궈진 공기 때문에 미첼을 비롯한 센티널들은 얼른 눈을 감아야 했다. 화염은 금방 사라졌다. 그리고 화염이 작렬해 뚫린 곳을 통해 여러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워낙 어두워서 누가 누군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선두에 선 자가 고함을 지르자 미첼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미첼 괜찮아?" 카심의 음성이었다. 미첼이 죽었다 살아난 심정으로 마주 고함을 질렀다. "괜찮아요. 빨리 우릴 구해줘요. 힘이 다 빠졌어요." 이번에는 데이몬의 음성이 뒤를 이었다. "그 자리에 꼼짝 말고 있거라. 우리가 그리로 갈 테니……." "알겠습니다. 데이몬." 없던 힘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 미첼이 검을 휘둘러 지척에 접근한 넝쿨들을 베어 넘겼다. 센티널들의 얼굴이 밝아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인간들이 이렇게 반가울 줄은 미처 몰랐어.' 그녀들이 보고 있는 사이 인간 기사들이 서서히 다가왔다. 놀랍게도 선두에 선 자들은 데스 나이트들이었다. 거무스름한 빛을 토해내는 그들의 장검은 식인목을 마치 썩은 짚단처럼 베어 넘기고 있었다. 그 뒤에는 낯익은 미첼의 동료들이 분투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활약으로 인해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 같던 식인목의 넝쿨이 어지럽게 베어지며 흩어졌다. 길을 막은 식인목 줄기들은 차츰 지리멸렬해가고 있었다. 미첼과 세 명의 엘프 센티널이 일행의 보호아래 놓이자 데이몬의 눈빛이 반짝했다. "이제 저 빌어먹을 것들을 쓸어버려야겠군." 고개를 돌리자 슈렉하이머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몬과 슈렉하이머는 거의 동시에 마나를 재배열했다. 콰콰콰콰. 데이몬의 윈드 커터가 사방의 식인목을 줄기이건 넝쿨이건 가리지 않고 헤집고 지나갔다. 뒤를 이어 퍼부어진 슈렉하이머의 파이어 볼이 떨어져 나온 식인목의 넝쿨을 사정없이 불살랐다. 키이이익. 두 고위급 마법사의 효과적인 합공에 식인목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의 마법이 지나간 곳에 위치한 식인목들은 완전히 초토화되어버렸다. 공격 역시 통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데스 나이트와 인간 기사들이 버티고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간 넝쿨은 예외 없이 베어져 나뒹굴었으니까……. 감당할 수 없는 상대란 것을 깨달은 식인목들은 결국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데이몬과 슈렉하이머는 그것마저도 내버려두지 않았다. 화르르르. 그들의 공격이 끝난 것은 반경 1킬로미터 남짓한 공터가 생기고 나서였다. 역겨운 냄새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본 데이몬이 몸을 돌렸다. "미첼을 구했으니 되었다. 이만 가자." 넝쿨들은 벌써 타서 재가 되어버렸지만 굵은 줄기 부분은 아직까지 타오르고 있었다. 일행은 식인목의 타다 남은 잔해를 짓밟으며 올리비에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극도로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미첼은 일루미나를 살포시 부축한 채 걸어가고 있었다. 나머지 두 명의 센티널은 하인리히와 잭슨이 부축했는데 그들의 입가에는 함박 웃음이 걸려있었다. 아름다운 엘프 여인들의 몸에서 피어나는 체향이 그들의 정신을 아찔하게 했다. '흐흐흐. 이게 웬 떡이냐?' 그들의 얼굴로 행운을 잡지 못한 동료들의 시기 어린 눈빛이 와서 꽂히고 있었다. '젠장. 좋겠다.' 인간들이 세 명의 센티널을 구해 돌아오자 올리비에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인간들이 엘프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쓸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휘하 센티널들은 살아 돌아온 동료들을 보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달려나가 인간들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는 동료들을 맞이했다. "애석하게도 다른 사람들은 구하지 못했습니다." 미첼은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 엘프에게 조용히 일루미나를 넘겼다. 하지만 일루미나의 눈동자는 계속 미첼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기이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하인리히와 잭슨 역시 부축해 오던 센티널을 그녀의 동료들에게 넘겼다. 동료들과 해후한 센티널들이 기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었지만 엘프의 언어였기에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묘한 표정을 지으며 엉거주춤 서 있던 올리비에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데이몬에게 다가왔다. 그 역시 부하들이 살아난 것이 기뻤지만 왠지 모르게 데이몬에게 말을 걸기가 껄끄러웠기 때문에 참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은혜를 입은 이상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다. 올리비에는 굳은 표정으로 데이몬에게 말을 걸었다. "제 부하들을 구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울러 앞서 행했던 제 무례에 대해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데이몬은 뜻밖이라는 듯이 올리비에를 쳐다보았다. 인간이라면 자존심 때문이라도 이렇게 나오지 않았을 테지만 엘프는 달랐다. 엘프 대장의 눈빛에서 진심으로 고마워한다는 감정을 읽은 데이몬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엘프는 의외로 솔직담백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에 두지 말게. 동료를 구하는 것은 일종의 의무라고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저희는……." 데이몬은 조용히 올리비에의 말을 잘랐다. "엘프는 이제 인간들의 동맹군일세. 앞으로도 엘프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마다 않는 인간을 종종 보게 될 거야. 물론 그렇지 않는 놈들도 분명히 있겠지만……." 말을 마친 데이몬은 올리비에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이제 인간들이 접근전에 얼마나 능숙한지 알아차렸겠지? 그러니 인간들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게. 자네들이 뒤에서 화살로 엄호해 준다면 충분할 거야." 올리비에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좋아." 말을 마친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올리비에가 지시를 내리자 센티널들은 머뭇거림 없이 그들의 위치로 이동했다. 그들은 이제 대열의 중간에서 대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이동하다 적과 조우할 경우 활을 이용해서 대원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었다. 서로의 앙금을 어느 정도 씻어버린 엘프와 인간들은 또다시 죽음의 숲으로의 행군을 시작했다. 그 무렵 엘프의 숲 속에서는 치열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2만에 달하는 파타르 부족의 전사들이 엘프의 숲에 진입했기 때문이었다. 가히 부족 전체가 동원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껏 분쟁을 거듭해 왔지만 이 정도 규모의 병력이 침공한 적은 없었다. 총사령관인 게덴하이드의 명인지라 파타르 부족장은 보유한 모든 전사들을 엘프의 숲에 투입했다. 하지만 류미너스 일족은 이미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울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대장로 슈나이더의 지휘 아래 센티널들은 숲의 비호를 받으며 조직적으로 오크 전사들을 요격하기 시작했다. 쿠어어. 오른쪽 눈에 화살이 깊숙이 박힌 전사 하나가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화살촉이 이미 뇌 속을 휘저어놓은 상태라서 오크 전사는 오래지 않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뒤이어 따라오던 오크 전사 두 명이 또다시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화살은 정확하게 목젖과 안면 부위에 박혀 있었다. 놀라울 정도의 사격술이었다. 불의의 기습으로 세 명을 잃자 오크 분대는 서둘러 흩어졌다. "취익. 화살을 쏜 엘프를 잡아라." 성난 전사들이 방패로 몸을 가린 채 숲 속을 샅샅이 수색했다. 그 와중에 서너 명의 전사가 화살에 맞아 절명했지만 공격에 나선 엘프 센티널도 무사하진 못했다. 활 이외의 무장이 없는 궁수는 위치가 발각되면 그대로 끝장이었다. 오래지 않아 한 명의 센티널이 오크에게 붙들려 나무 위에서 끌어내려졌다. "아아악." 그녀는 곧 성난 전사들의 칼질에 짓이겨진 고깃덩이로 변해버렸다. 싸움은 극히 전형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엘프의 놀라운 사격술과 강력한 화살의 위력에 무수한 오크 전사들의 숨통이 끊어졌지만 비례적으로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는 센티널도 늘어만 갔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데 열중하는 소모전 양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혈전의 와중에서도 숲은 열심히 센티널들을 보호했다. 넝쿨을 이용해 오크 전사의 발을 거는가 하면 도주하는 센티널의 배후를 차단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병력의 차이가 애당초 너무 압도적이었다. 오크 전사 열과 센티널 하나의 명을 맞바꾸더라도 엘프의 패배는 필연적이었다. 이렇게 엘프의 숲에는 생명이 사라진 두 종족의 시신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일행들 역시 정신 없는 싸움에 몰두해 있었다. 데이몬과 슈렉하이머의 활약으로 어렵지 않게 죽음의 숲을 돌파한 일행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언데드 무리였다. 암흑전쟁 당시 살아남아 퇴각한 패잔병이라 짐작되는 언데드 병사들이 맹공을 가해왔던 것이다. 숲을 빠져나왔다는 기쁨도 잠시, 일행은 정신 없이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일행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인 데이몬은 지금 그들을 도울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새카맣게 몰려오는 언데드 군대를 본 데이몬은 그것들을 전멸시키는 것보다 통제하는 것이 수월하겠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마음을 굳힌 데이몬은 즉시 부유마법을 시전해서 허공에 떠올랐다. "방어에 몰두하며 위치를 사수하라. 나는 그 동안 어둠의 마력을 이용해 저것들의 통제해 보겠다." 몰려오는 언데드 군대는 애당초 나이델하르크의 마력으로 생겨난 놈들이다. 때문에 데이몬의 몸 속에 간직된 어둠의 마력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통제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다크메이지 13장 359편] 허공에 솟구쳐 오른 데이몬은 즉각 어둠의 마력을 광범위하게 퍼뜨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언데드 군단 모두를 장악하는 동안 일행이 버틸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데이몬은 그 문제에 있어 별달리 걱정하지 않았다. "대부분 스켈레톤이나 구울이나 따위의 하급 언데드들이니 신경 쓸 필요 없겠군. 스펙터와 듀라한이 몇 보이긴 하지만 데스 나이트에겐 어림없지……." 데스 나이트들을 선두에 세운 일행은 둥그렇게 방진을 친 채 언데드 군단의 내습에 대비했다. 곧 그들과 언데드 군단과의 일대 사투가 벌어졌다. 콰직 카심이 휘두른 장검에 두 마리의 구울이 허리가 잘려 널브러졌다. 하지만 언데드는 몸이 조각나더라도 전투력을 잃는 존재가 아니다. 상반신만 남은 구울이 날카로운 손톱을 뻗어 카심의 다리를 할퀴려 했다. 하지만 노련한 카심은 몸을 살짝 돌리며 구울의 머리통을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퍽. 걷어 채인 구울이 한참 날아가다 접근하던 스켈레톤과 부딪히며 나뒹굴었다. 그 옆에서는 미첼이 종횡무진 검을 휘두르며 와이트 두 마리를 조각 내고 있었다. 이미 바닥에는 부러지고 잘려나간 언데드의 잔해가 새카맣게 깔려 있었다. 그것들은 대부분 데스 나이트들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같은 암흑 계열이었지만 언데드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데스 나이트와 윈슬럿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전투력 차이가 워낙 월등했기 때문에 달려드는 족족 파괴되어 나뒹굴 뿐이었다. 튼튼한 갑주를 바탕으로 몸으로 때우고 있는 대원들 뒤에서는 센티널들이 지원사격에 열중하고 있었다. 쐐애애액. 쉴새없이 쏘아지는 화살은 구울과 스켈레톤의 머리통을 정확히 꿰뚫었다. 하지만 언데드는 머리가 박살나도 금세 죽지 않는다. 머리통에 화살 두 세 자루를 박은 채 달려드는 구울을 보자 센티널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하지만 구울들은 일행의 방어진을 뚫지 못하고 힘이 다해버렸다. 물론 몇몇 대원들이 구울이나 스켈레톤의 공격을 허용했지만 갑주가 워낙 튼튼하기 때문에 상처를 입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카심은 갑주가 만능이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모두들 포위되지 않게 주의하라. 아무리 갑주가 튼튼해도 놈들에게 포위 당해 쓰러지면 끝장이다." 카심의 주의가 아니더라도 일행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갑옷 틈새에 정확히 검을 찔러 넣는다면 제 아무리 전투력이 약한 스켈레톤이라도 소드 마스터를 죽일 수 있다. 그 사실은 오랜 전쟁을 통해 증명되어 왔고 때문에 전장의 병사들에겐 같은 편에 속한 고급기사들의 배후를 지켜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 도리에 따라 대원들은 서로를 엄호하며 연신 언데드 군단을 밀어붙였다. "에잇." 구울 하나를 세로로 양단한 미첼이 여새를 몰아 횡으로 검을 휘둘렀다. 거기에 걸린 와이트의 허리가 뎅겅 잘려나갔다. 잘려나간 와이트의 황동빛 몸체에서 역겨운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미첼은 신경 쓰지 않고 다음 목표물을 찾았다. 그 때 그의 귀에 낯익은 경고 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해요." 깜짝 놀란 미첼이 몸을 돌리자 듀라한 하나가 막 검을 찔러오는 모습이 들어왔다. 듀라한이 휘두른 장검은 정확히 어깨 죽지의 갑옷 이음새에 닿아 있었다. 오랜 실전경험으로 단련된 미첼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며 반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듀라한의 추가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뒤에서 날아온 화살이 정확히 머리통을 파고들자 듀라한의 몸이 잠시 굳어졌다. 미첼이 때를 놓치지 않고 듀라한의 몸을 사선으로 쪼개어버렸다. 퍽. 고개를 돌리자 일루미나가 초조한 표정으로 화살을 시위에 메기고 있었다. 땀으로 얼룩진 미첼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맙소. 일루미나." 빙긋이 웃어준 일루미나는 숙련된 동작으로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크란시아의 배후를 노리던 와이트의 미간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첼이 또다시 접전에 가세했다. 하나 하나만 따지면 약하기 그지없는 언데드 군단이었지만 워낙 수가 많았기 때문에 벅찰 수밖에 없었다. 일행은 서서히 지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데이몬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평소와는 달리 음산한 느낌을 주는 음성이 적절한 시기에 장내를 뒤덮었다. "어둠의 권능으로 명령한다. 어둠의 군대여 나의 명령을 따를지어다." 외침이 끝나자마자 소름끼치는 빛이 사방을 덮었다. 빛이 워낙 강렬해서 일행은 서둘러 눈을 가려야 했다. 잠시 후 대원들이 눈을 뜨자 상황은 완전히 끝나 있었다. 흉흉한 기색으로 맹공을 가해오던 언데드 군단이 드디어 공격을 멈춘 것이다. 날카로운 손톱을 뻗어오던 구울은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고 한 손엔 머리통, 다른 손엔 시뻘겋게 녹슨 장검을 들고 발악하던 듀라한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침묵의 시간이 지나가고 언데드 군단은 질서정연하게 도열하기 시작했다. 끼이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행은 한 숨을 내쉬며 무장을 수습했다. 아직까지 다수의 언데드들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오는 족족 데이몬의 마력에 제압되고 있었다. 그들은 대열을 이룬 언데드 군단의 뒤에 가서 도열했다. 수가 워낙 많았기에 보고 있던 대원들이 거듭 혀를 내둘렀다. "말로만 듣던 언데드와 싸워보다니……." "하나 하나는 별 볼일 없는데 워낙 수가 많으니 상대하기가 버겁군." 그 말을 듣고 있던 슈렉하이머가 한 마디 내뱉었다. "이 정도는 약과입니다. 암흑전쟁 당시 어둠의 군대가 보유한 각 지단은 이보다 수십 배 이상 많았습니다. 여러분들의 실력이 워낙 출중해서 못 볼 꼴을 보지 않은 게 다행이지요." 크란시아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번져갔다. "못 볼 꼴이라뇨?" "암흑 전쟁 당시 병사들의 사기를 가장 떨어뜨렸던 것은 죽임을 당한 아군 병사들이 언데드로 변해 달려드는 것입니다. 막 언데드가 되었기 때문에 전투력이 비교적 뛰어난 데다 조금 전까지 동료였기 때문에 병사들도 어지간히 마음을 먹지 않고는 베기가 힘들지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몸이 뒤틀려 구울로 변하지만 말입니다." 듣고 있던 대원들은 입을 딱 벌렸다. "그,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슈렉하이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몰려드는 언데드는 대부분 제압되었다. 모두 제압한 것을 확인하자 데이몬이 핼쑥해진 표정으로 바닥에 내려섰다. "후. 힘들군. 제 아무리 변변찮은 놈들이라도 수가 워낙 많으니……. 어둠의 마력이 만만치 않게 소모되었군." 데이몬은 한숨을 내쉬며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언데드 군단을 쳐다보았다. 대충 세어보아도 이만은 족히 될 것 같았다. 보고 있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언데드들이 몰려들고 있으니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군세라고 봐야 했다. "그래도 같은 계열의 마력이라서 통제하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았어." 고개를 뒤흔들던 데이몬의 옆으로 슈렉하이머가 다가왔다. 언데드 군단을 힐끔 쳐다본 슈렉하이머가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저것들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뭔가를 생각하는지 데이몬이 대답하지 않았다. 참지 못한 슈렉하이머가 재차 질문을 했다. "어둠의 마력을 회수하기엔 수가 너무 많은 것 같군요. 또한 그럴 만한 시간도 없고." 고개를 돌린 데이몬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소." 데이몬은 올리비에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는 두 말도 하지 않고 데이몬에게 다가왔다. "지금쯤 류미너스 일족은 한창 오크와 싸움을 벌이고 있겠지?" 올리비에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지금 즉시 슈나이더 대장로에게 연락을 취하게. 싸움을 멈추고 퇴각하라고 말일세." 데이몬의 말을 듣자 올리비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부심 강한 엘프에게 전쟁터에서 퇴각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 그럴 순 없습니다. 저희 엘프들은……." 데이몬은 단호하게 올리비에의 말을 잘랐다. "내가 살던 곳에 이이제이(以夷制夷)란 말이 있네. 말뜻인 즉 오랑캐를 이용해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뜻이지. 쉽게 가정하면 몬스터를 이용해 몬스터를 제압한다고 생각하면 되네." 뭔가 깨달은 듯 올리비에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그렇다면 저 언데드들을 이용해서 오크를 상대하게 하시려는……." 데이몬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다네. 어차피 저것들을 처리하기가 곤란한 참이었네. 때마침 오크 놈들이 침공해 왔으니 잘 된 일이지. 그러니 자넨 대장로와 연락해서 병력을 물리도록 하게. 저것들과 오크들이 머리통 터지게 싸우는 동안 휴식을 취하고 그런 다음 전장을 정리한다면 류미너스 일족의 희생을 최소화 할 수 있지 않겠나?" 올리비에가 정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지금 즉시 대장로님과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그는 냉큼 수정구슬을 꺼내들고 통신을 시도했다. 올리비에에게서 시선을 거둔 데이몬이 이번에는 데스 나이트들을 불러모았다. "너희들은 저것들을 통솔해서 엘프의 숲을 침범한 오크 놈들을 혼내주도록 해라." 듣고 있던 헬버트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저 따위 너절한 언데드를 지휘해서 고작 냄새나는 오크 무리와 싸우란 말이냐?" 어차피 같은 언데드 계열 아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데이몬은 꾹 참고 그들을 구슬렸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저것들에겐 적과 아군을 가릴 만한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행여나 엘프를 공격하지 않도록 너희들이 통제해 줘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멍청한 윈슬럿에게 맡길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 "제길 알았어." 데스 나이트들이 연신 투덜거리며 언데드 군단을 행해 걸어갔다. 보고 있던 데이몬은 언데드 군단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들은 이제 데스 나이트들을 사령관으로 인식하고 명령을 받들 터였다. 잠시 후 올리비에의 음성이 들려왔다. "연락을 마쳤습니다. 센티널들을 수습해서 철수하시겠다고 합니다." "좋아." 빙긋이 미소를 지은 데이몬이 몸을 돌렸다. 이미 데스 나이트들은 언데드 군단을 통솔해서 이동을 시작한 상태였다. 모두가 언데드로 구성되어 있으니 적어도 죽음의 숲에 당할 일은 없어 보였다. 식인목들이 먹을 수 없는 언데드를 노릴 까닭이 없을 테니까……. "가급적이면 저것들을 이용해서 죽음의 숲에 난 길이나 확실히 넓혀 놓도록 해." "빌어먹을. 알았다." "그럼 멋지게 한 판 싸워보도록……." 퉁명스럽게 내뱉은 데스 나이트들의 모습이 곧 죽음의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 뒤를 이어 언데드 병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숲으로 뛰어들었다. 그 대열은 일행이 정비를 마치고 다크 포탈 쪽으로 이동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법 통신에 의해 오크전사들을 요격하던 센티널들이 조직적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기척도 남기지 않고 물러갔지만 오크 전사들은 그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뜻밖의 사태에 파타르 부족장은 얼떨떨해 했다. 방어진을 뚫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르던 참이었는데 엘프들이 제 발로 물러나다니. 하지만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었기에 그는 지체 없이 진군 명령을 내렸다. "취췩. 진격하라." 엘프의 숲 깊숙이 위치한 류미너스 부족을 쓸어버리기 위해서는 방어진을 돌파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센티널들이 철수한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명령을 받은 파타르 부족의 전사들은 흉흉한 기색으로 숲을 파고들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엘프의 숲은 그들의 발길을 막지 않았다. 나무를 쓰러뜨려야 하는 수고를 덜게 된 오크 전사들은 빠른 속력으로 숲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들어가지 못하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적과 맞닥뜨려야 했다. "적이다. 취에에엑." 숲 속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언데드 병사들을 보자 오크 분대장 하나가 경고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선두에 선 듀라한이 녹슨 검을 휘둘러 목덜미를 후려치자 경고성은 금세 비명으로 변해버렸다. 그 뒤를 이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언데드 병사들이 숲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은 머뭇거림 없이 전진하고 있던 오크 전사들의 측면을 강타했다. 쾅 콰쾅. 숲 속은 곧 오크와 언데드의 일대 접전장으로 변해 버렸다. 스켈레톤의 녹슨 검과 구울의 날카로운 갈고리 손톱이 오크 보병들의 갑옷을 가르고 살을 찢어발겼다. 뜻밖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선두에 선 오크 전사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기습에 당황했지만 오크 전사들은 곧 전열을 갖추고 반격을 시도했다. [다크메이지 13장 360편] 개개인의 전투력이 언데드 병사들보다 월등한 만큼 오크 전사들은 힘겹게나마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뛰어난 전투력을 증명하듯 그들은 서서히 언데드 군단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뜻밖의 사태에 파타르 부족장은 황당해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이지?" 언데드는 이미 대륙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생각도 하지 못했던 언데드 병사들이 하필이면 엘프의 숲 속에서 맞닥뜨리다니.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길게 생각할 여유란 없었다. 적으로 판명된 이상 분쇄해야 하는 것은 기정 사실이었다. 언데드 병사들이 계속해서 숲에서 튀어나왔지만 파타르 부족의 정예 전사들은 별 어려움 없이 그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주력이 구울이나 스켈레톤 같은 최하급 언데드로 구성된 탓에 정예 오크 전사들을 상대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파타르 부족장은 적이 안심했다. "취익. 큰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하지만 그가 가슴을 쓸어 내리기 전에 전황이 바뀌고 있었다. 거센 저항에 부딪혀 밀려나고 있던 언데드 병사들 사이에서 난데없이 시커먼 그림자 넷이 튀어나와 오크 전사들 사이에 뛰어들었다. "캬악." 검은 그림자들이 난입한 곳에 위치한 오크 전사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 떨어졌다. 소름끼치는 빛이 번뜩임과 동시에 전사들이 말 그대로 떼죽음 당하고 있었다. 데스 블레이드가 서려 있는 장검은 가로막는 것은 방패든 갑옷이든 가리지 않고 쪼개버렸다. 그로 인해 튼튼하던 오크의 방어진의 곳곳이 순식간에 뚫려 버렸다. 기세가 살아난 언데드 군단이 뚫린 방어진 속을 사정없이 난입해 들어갔다. "뭐, 뭐야?" 파타르 부족장은 깜짝 놀랐다. 난데없이 가세한 데스 나이트들로 인해 전세가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가 보고 있는 와중에도 전사들의 진형은 불어난 물에 둑 터지듯 허물어지고 있었다. 퍽, 퍼퍽. 오크와 언데드의 접전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글레이브에 몸통을 뚫린 구울이 기성을 지르며 발광을 했고 그 뒤에서는 스켈레톤의 녹슨 검이 오크 전사의 등판을 파고 들어갔다.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와이트가 돌아다니며 오크 전사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파헤쳤다. 몇 되지 않는 스펙터는 오크 전사들이 특히 상대하기 힘든 마물이었다. 검은 안개 같은 스펙터의 몸은 오로지 신성력이 깃든 무기가 아니면 타격을 입히기 힘들었다. 하지만 타고난 전투종족인 오크 전사들은 별다른 동요 없이 언데드를 막아나갔다. 그러나 그들에게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맹위를 떨치는 데스 나이트들이었다. 그들이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주요 거점을 전문적으로 무너뜨리는 탓에 오크 전사들은 죽을 맛이었다. 그들로 인해 언데드 군단은 더욱 기가 살아 날뛰고 있었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들의 전투력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막을 방도란 없었다. 유일하게 데스 나이트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중형 몬스터는 이번 전투에 동원되지 않았다. 울창한 숲 속이라 운신하기도 불편했을 뿐더러 중형 몬스터는 놀라운 사격술을 가진 엘프에게 쉽사리 약점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파타르 부족의 전사들은 힘겹게 악전고투를 해 나가야 했다. 그러나 당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파타르 부족장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놈들을 잡아라. 제 아무리 데스 나이트라도 수십 명이 덮쳐 누르면 처치할 수 있다." 부족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소드 마스터라도 발휘할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해 수십 명의 오크 전사들이 붙들고 늘어진다면 꼼짝하지 못할 터였고 그렇게 된다면 쉽사리 끝낼 수 있다. 지금껏 수많은 소드 마스터들이 이런 방법으로 말미암아 무력화되었다. 그 때문에 인간 병사들은 아군 소드 마스터가 포위되지 않도록 엄호하는데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다. 명령이 떨어지자 오크 전사들이 데스 나이트들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방패로 몸을 가린 채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려든 것이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들은 오크에겐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취에엑." 검은 빛의 데스 블레이드가 번뜩이자 한 쪽 방향에서 몰려들던 오크 전사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던 오크 전사들이 일제히 포위망을 메꿨지만 데스 나이트는 이미 그곳을을 벗어난 상태였다. 오크 전사들이 도저히 따라잡기 힘들 정도의 빠른 몸놀림이었다. "후후후. 약삭빠른 놈들이군." 포위망을 벗어난 헬버트론이 비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수십 명의 오크 전사에게 깔린다면 제 아무리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라도 무사할 수 없다. 이쯤 활약했으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그는 언데드 병사들이 운집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나머지 데스 나이트들도 마찬가지로 언데드 진영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들의 신형은 곧 운집해 있는 언데드 병사들 사이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파타르 부족장은 바짝 약이 올랐다. "이런 젠장……." 괴력을 떨치던 데스 나이트들은 이제 헤아릴 수 없는 언데드 병사들의 엄호를 받으며 싸우고 있었다. 오크 전사들이 기를 쓰며 달려들었지만 포진한 언데드 병사들의 공격에 헛되이 쓰러져갈 뿐이었다. 놈들은 얄밉게도 안전한 언데드 본진 속에 머무르다 기회를 포착하면 벼락같이 달려들어 오크 전사들을 베어 넘겼다. 그것도 철저히 분대장 급들만 노리고 있는 것이다. 눈이 뒤집힌 파타르 부족장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수적으로 우리가 앞선다. 저주받은 언데드 놈들을 하나도 남겨두지 마라." 엘프의 숲 속에서 느닷없이 벌어진 공방전. 오크와 언데드로 이루어진 양쪽 병사들은 끝없이 소모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곳이 다크 포탈인가?" 일행의 시선은 벌판 구석에 쓸쓸히 서 있는 기괴한 구조물에 닿아 있었다. 거대한 거울 형상의 석제 구조물에는 세월의 풍상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었다. 구조물을 이루고 있는 돌은 형편없이 부서지고 무너져 있었다. 구조물에서 미약하게 풍겨 나오는 으스스한 분위기로 인해 일행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다크 포탈.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에 의해 만들어져 수많은 마물들을 인간계로 옮겨놓았던 이 공포의 구조물을 앞에 두고 일행은 그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구조물의 작동 여부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데이몬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다크 포탈이 작동하는 것이 사실인가?" "그그렇렇습습니니다다. 미미약약하하게게 새새어어나나오오는는 마마력력으으로로 말말미미암암아아 저저희희들들이이 아아직직까까지지 생생명명을을 유유지지하하는는 것것입입니니다다." 묘하게 공명하는 데스 나이트 특유의 음성이 터져나왔다. 놀랍게도 데이몬의 옆에는 십여 명의 데스 나이트가 한 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바로 암흑 전쟁 당시 언데드 군단의 지휘관을 맡았던 데스 나이트들이었다. 나이델하르크에 의해 생명을 얻은 그들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이다. 데이몬은 미묘한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공격해 올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이었어.' 덮어놓고 공격을 가한 언데드들과는 달리 데스 나이트들은 서슴없이 복종을 맹세했다. 10여 명 정도 되는 데스 나이트들은 데이몬이 나타나자마자 모습을 드러내어 예를 취해왔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너무나도 순순히 복종했기에 싸울 채비를 갖추던 대원들의 맥이 풀릴 정도였다. 데이몬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데스 나이트들을 쳐다보았다. "어째서 날 주인으로 인정하는 거지?" 데스 나이트들의 대답은 머뭇거림이 없었다. "저저희희들들은은 나나이이델델하하르르크크님님에에 의의해해 생생명명을을 얻얻었었습습니니다다. 주주인인님님께께서서는는 바바로로 나나이이델델하하르르크크님님의의 마마력력을을 품품고고 있있으으십십니니다다. 따따라라서서 영영원원한한 충충성성을을 약약속속드드립립니니다다." "너희들이 전부냐?" "그그렇렇습습니니다다. 마마족족과과 다다크크 쉐쉐이이드드는는 마마계계로로 돌돌아아갔갔지지만만 저저희희들들은은 불불행행히히 그그러러지지 못못하하고고 포포탈탈에에서서 새새어어나나오오는는 실실낱낱같같은은 마마력력에에 의의존존하하며며 하하루루하하루루 삶삶을을 연연명명해해 왔왔습습니니다다. 이이제제 저저희희들들을을 거거두두어어 주주십십시시오오." "음." 데스 나이트들의 말을 들은 데이몬은 생각에 잠겼다. 일단 풍겨오는 기운을 보아 10여 명 전부가 마스터 급으로 보였다. 4대 기사들에 비하면 형편없이 약하다고 볼 수 있었지만 나름대로 데스 블레이드를 전개할 수 있는 놈들이므로 드래곤과 싸우는데 다소나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특히 몸이 조각나도 재생이 가능한 언데드라는 것이 가장 큰 강점이었다. 결정을 내린 데이몬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너희들을 거두겠다." "충충심심으으로로 받받들들겠겠나나이이다다." 데스 나이트들은 기쁜 듯 머리를 조아렸다. 데이몬은 그들로 하여금 다크 포탈로 안내할 것을 명했고 일행은 마침내 목적했던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데이몬은 무심하게 다크 포탈을 쳐다보았다. 외견상으로는 철저히 파괴된 것으로 보였지만 그는 다크 포탈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부서진 구조물 사이로 흘러나오는 순수한 어둠의 마력.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몸 속에 품고 있었기에 데이몬은 마력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서서히 흥분되는 것을 느꼈다. "정말 순수한 어둠의 마력이군." 데이몬은 기이한 눈빛으로 다크 포탈을 내려다보았다. 과거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의 손으로 만들어진 다크 포탈. 이것은 데이몬에겐 엄청난 의미를 주고 있었다. 복수를 위해,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매진했던 500년의 세월. 그의 계획에 가장 큰 힘을 불어 넣어줄 구조물이 바로 눈앞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한참 동안 다크 포탈을 내려다보던 데이몬이 이윽고 걸음을 옮겼다. 10여 명의 데스 나이트들이 그 뒤를 바짝 붙어 뒤따랐다. 대원들은 바로 앞에서 걸어가는 데스 나이트들을 미심쩍은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미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것들을 믿을 수 있을까요." 슈렉하이머가 묵묵히 그 말을 받았다. "별로 걱정할 것은 없어 보입니다. 데스 나이트는 고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울 따위와는 달리 데이몬이 보유한 어둠의 마력을 절실히 느꼈을 것입니다. 물론 기댈 곳이 없는 그들로써는 복종을 맹세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하긴 드래곤을 상대하는데 데스 나이트가 가장 제격이지요." 대원들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데이몬의 뒤를 따랐다. 포탈 앞에 도착한 데이몬이 슬며시 손을 들어올렸다. 일단 포탈의 표면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았다. 휘이이잉. 마나가 맹렬히 재배열되며 예의 윈드 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윈드 커터는 식인목을 쓰러뜨릴 때와는 달리 저속으로 회전하며 다크 포탈을 덮은 이끼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포탈을 뒤덮고 있던 이끼들이 맥없이 떨어져나가고 그 자리에 기괴한 도형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끼를 정리한 데이몬은 한동안 도형을 살피기 시작했다. 잠시 후 들떠있는 듯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다행이로군. 좌표를 설정하는 마법진이 파괴되지 않았어." 데이몬의 말에 일행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이제 150만 대군을 트루베니아로 건너올 수 있는 기반이 완비된 것이다.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슈렉하이머를 데이몬이 쳐다보았다. "대승정. 당신은 지금 즉시 크로센 제국과 연락을 취하도록 하시오. 약속해 놓은 마법진을 목표로 공간이동 게이트를 생성시킬 테니 병력을 투입할 채비를 갖추라고 말이오." 슈렉하이머는 두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는 지체 없이 마법 통신을 준비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데이몬이 눈을 감고 어둠의 마력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그는 다크 포탈을 재가동하여 아르카디아 대륙과 연결하는 공간이동 게이트를 만들어내야 했다. 어둠의 마력이 집중되며 사방의 대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에서 끌어올린 어둠의 마력이 순차적으로 주입되자 오래 전에 작동을 멈춘 차원이동의 게이트는 서서히 눈을 뜨고 있었다. 표면에 새겨진 마법진이 눈부시게 빛을 발했다. 다크 포탈은 마치 용트림이라도 하듯 기괴한 음성을 거듭 토해냈다. 잠시 후 다크 포탈은 그 육중한 석제 동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마법진이 빼곡이 새겨진 원형의 석륜(石輪)이 묵직한 소음과 함께 천천히 회전을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석륜 사이에서 파도처럼 일렁이는 파동이 생성되었다. 그것이 바로 공간의 괴리를 극복하는 게이트였다. 데이몬은 눈을 빛냈다. "작동되었다. 이제 좌표를 잡아야 할 때다." 데이몬은 다시금 정신을 집중해서 포탈의 좌표를 설정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지금쯤 페르슈타인 공작이 펠젠틴 근교에 건설해 놓았을 좌표설정 마법진이었다. [다크메이지 13장 361편] 어둠의 마력이 집중됨에 따라 여러 겹으로 구성된 다크 포탈의 석륜이 이리저리 회전하며 좌표를 잡고 있었다. 그 과정을 일행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특히 올리비에를 비롯한 센티널들의 시선은 좌표설정용 석륜이 가리키는 좌표에 고정되어 있었다. 만에 하나 마계로 연결될 가능성을 생각해야 했기에 그들은 정신을 집중해서 감시했다. 다행히 그들의 우려와는 달리 좌표설정용 륜은 인간계의 어느 곳에서 멈췄다. 다분히 아르카디아로 짐작되는 좌표였다. 센티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데이몬의 경고성이 울려 퍼졌다. "되었다. 모두 이곳을 벗어나라. 다크 포탈이 곧 가동될 것이다."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일행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공간이동 게이트가 생성될 때 몰아치는 강력한 폭풍에 휘말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전거리로 물러난 일행들은 숨을 죽이며 다크 포탈을 응시했다. 그들이 보고 있는 사이 다크 포탈은 눈부신 빛을 내뿜으며 빠른 속도로 회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콰콰콰콰. 계속해서 강도를 더해 가는 빛으로 인해 일행이 일제히 눈을 가렸을 때 다크 포탈을 축으로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쳤다. 충분히 물러났지만 폭풍이 워낙 거셌기 때문에 일행은 잠시동안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대었다. 폭풍 속으로 데이몬의 자신만만한 광소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 이제 되었다. 드디어 공간이동 게이트가 활성화되었다." 일행은 실눈을 뜨고 여전히 눈부신 빛을 뿜어내며 돌아가는 다크 포탈을 살폈다. 그 와중에서도 슈렉하이머는 아르카디아와의 통신에 열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연락이 왔습니다. 잠시 후 공간이동 게이트가 열릴 것이란 암호 통신입니다." 부관의 통보에 페르슈타인 공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꼽아 기다리던 반가운 소식이 마침내 날아든 것이다. 격정으로 인해 얼굴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드디어……." 오랫동안 꿈꿔왔던 야망. 그 서막이 바야흐로 그의 앞에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공작은 생각할 것도 없이 명령을 내렸다. "펠젠틴 외곽에 주둔중인 1군단을 좌표설정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집결시켜라. 그들에게 처음으로 트루베니아 땅을 밟는 영광을 누리게 할 것이다." 1군단은 공작의 사병들로 이루어진 최정예 군단이었다. 10만의 병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충실한 훈련과 풍족한 보급으로 말미암아 사기는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그들 정도의 정예라면 오크 전사들의 방어진을 파죽지세로 뚫을 수 있을 것이라고 공작은 믿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부관이 집무실을 빠져나갔고 공작도 서둘러 출정 준비를 했다. 계획을 떠올려보던 공작의 얼굴엔 긴장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각 왕국에서 보내온 최고의 정예들이 모두 펠젠틴에 운집해 있다. 빠른 시일 내에 그들 모두를 트루베니아 땅에 내려놓아야 한다." 사실 병력을 끌어 모으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실버 드래곤의 저주가 바다를 휩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각 군주들은 병력을 파견하는 것을 연기하려 했다. 그 어떤 군주도 자국의 병사들을 배에 태워 폭풍우 속으로 집어넣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페르슈타인 공작은 특유의 뚝심을 발휘하여 반강제적으로 병력을 끌어 모았다. 무력사용까지 불사하겠다는 공작의 강력한 의지에 각 국 국왕들은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해안 지방이 아닌 크로센 제국의 수도인 펠젠틴 근교에 보낸다는 단서를 붙인 뒤 병력을 출발시켰다. 물론 각급 지휘관들에겐 암암리에 밀명이 내려졌다. 그것은 바로 배에 태워질 경우 항명을 불사하라는 명령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차로 건너갈 정벌군 50만이 보급물자와 함께 펠젠틴 외곽에 집결했다. 이제 공작에겐 그들을 트루베니아에 투입할 일만 남은 것이다. 출정준비를 서두르던 공작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맺혔다. "가장 걱정했던 보급문제도 해결되었으니 이제 싸울 일만 남은 건가?" 데이몬이 천거했던 로메인 남작. 그로 인해 보급에 관한 사항은 깨끗이 해소되었다. 남작의 능력은 그 정도로 뛰어났다. 자타가 공인하는 아르카디아 제일의 상회를 만들어내고 관리해 온 명성이 역시 명불허전이 아니었던 것이다. 공작의 연락을 받은 로메인 남작은 두 말도 하지 않고 요청을 수락했다. "알겠습니다. 전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입니다." 그는 상회 산하의 관리인들을 모두 이끌고 정벌군에 합류했다. 150만이라는 엄청난 대군의 보급문제를 맡은 그는 말 그대로 초인적인 능력을 보였다. 각급 병과에서 필요한 보급물자를 산출해서 사들이고 또 그것을 각 부대에 정확히 배분하는 능력에 페르슈타인 공작은 탄복을 금치 못했다. "로메인 상회가 왜 대륙 제일이라는 명성을 떨치는지 익히 알만하군." 놀랍게도 그는 지금껏 벌어들인 천문학적인 재산의 대부분을 군자금으로 제공했다. 페르슈타인 공작조차 짐작하지 못했을 정도로 많은 액수였다. 이래도 되냐는 공작의 말에 로메인 남작은 한 마디로 대답했다. "제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데이몬께서 이뤄주신 것입니다. 그분께서 요청하시니 당연히 드릴 수밖에 없지요." 그는 전적으로 신뢰를 보내는 공작에게 자신의 비밀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젠가르트라는 본명을 비롯해서 데이몬 덕택에 로메인 남작의 삶을 대신 살게 되었다는 사실이 공작에게 낱낱이 설명되었다. 그가 원래 트루베니아에서 건너온 사람이란 설명을 들은 페르슈타인 공작은 비로소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가 적극적으로 트루베니아 정벌에 나서는 이유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말없이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알겠소. 하지만 혼란을 막기 위해 당신의 진정한 신분은 당분간 감춰두도록 합시다. 젠가르트란 이름은 나 혼자만 알고 있겠소이다." 젠가르트가 그간 보여준 능력으로 말미암아 공작은 이미 그를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일 생각을 굳힌 상태였다. 정벌을 성공시킨 뒤 새로 만들어진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젠가르트 같은 천고의 관리자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 때의 일을 떠올려 본 공작은 눈빛을 빛냈다. "그는 나에게 정녕 없어서는 안될 인재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내 사람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복장을 갖춘 공작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부관이 들어와서 좌표설정 마법진이 위치한 곳에 공간이동 게이트가 열리고 있다는 보고를 해 왔다. 데이몬을 위시한 대원들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다크 포탈을 쳐다보고 있었다. 포탈이 활성화된 지도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이미 슈렉하이머가 마법통신으로 사실을 알렸으므로 머지않아 아르카디아의 선발대가 포탈에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대원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초조함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기다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법진을 살피던 데이몬의 눈이 빛났다. "이제 오는가?" 데이몬의 혼잣말이 있고 그리 오래지 않아 포탈 중심부의 파장이 눈에 띄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돌풍이 부는 곳의 수면처럼 포탈 중심부가 세차게 일렁이는 것이다. 잠시 후 파장을 통해 뭔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갑옷과 투구로 빈틈없이 무장하고 방패로 앞을 가린 한 명의 인간 병사였다. "왔다." 대원들은 초조한 눈빛으로 모습을 드러낸 병사를 쳐다보았다.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병사의 시선이 대원들에게 멎었다. 차림새를 보아 일반 병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대원들의 면면을 훑어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카심 용병단원들이십니까?" 초조하게 기다리던 크란시아가 앞으로 쓱 나섰다. "그렇다. 그대의 소속과 신분을 밝혀라." 병사는 크란시아를 보자마자 부동자세를 취했다. 선발대는 페르슈타인 공작의 사병으로 이루어진 1군단이다. 그러므로 1군단의 부대장 중 하나인 그는 크란시아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전 1군단에서 차출된 선발대의 제 101부대장 윌머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크란시아와 병사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서도 포탈을 통해 병사들이 꾸역꾸역 밀려 나왔다. 윌머라는 이름의 부대장이 눈짓을 하자 병사들은 질서정연하게 도열했다. 그것을 보아 그가 직접 지휘하는 부대인 것 같았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병사들이 밀려나왔다. 하나같이 무장이 충실한 중갑보병들이었다. 포탈 주변이 그리 넓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은 곧 포화상태가 되어버렸다. 크란시아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손가락을 들어 뒤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면 넓은 초원이 나온다. 병력을 그곳에다 정렬시켜라." "알겠습니다." 윌머는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그는 포탈을 통해 빠져나오는 병사들에게 이동명령을 내린 뒤 일행을 쳐다보았다. "혹시 마법통신을 담당하시는 분이 어떤 분입니까?" 슈렉하이머가 앞으로 쓱 나갔다. "내가 통신 담당이오." 리치가 나선 것이 뜻밖인 모양인지 윌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미리 교육을 받았는지 그는 머뭇거림 없이 예를 취했다. "죄송하지만 펠젠틴에 연락을 취해 주십시오. 선발대가 무사히 도착했다고 보고를 드려야 합니다." "알겠소." 슈렉하이머는 말없이 통신마법을 전개했다. 통신이 연결되자 윌머가 다가가서 보고를 시작했다. 미리 약속한 암호를 읊은 윌머는 곧이어 절차에 따라 선발대가 무사히 도착했음을 밝혔다. 그의 철저한 보안정신에 대원들은 적이 놀라워하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보고를 마친 윌머가 사무적인 표정으로 크란시아를 쳐다보았다. "곧이어 1군단장님께서 이동해 오실 것입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전하께서는 1군단과 함께 오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하긴, 솔선수범 하시는 분이니 이상할 게 없지." "그럼 전 병력을 정돈시키겠습니다." 꾸벅 목례를 한 윌머가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포탈을 통해 계속해서 병사들이 쏟아졌지만 분대장급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통솔했기에 혼란은 없었다. 엘프 센티널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동작을 맞추어 이동하는 모습은 그들이 평소 얼마만큼 혹독한 훈련을 받아왔는지 알 수 있게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카심이 혀를 내둘렀다. 한 때 중견 용병대장이었던 카심인 만큼 병사들의 훈련도가 얼마나 충실한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적어도 군기 면에서는 용병들과 비교가 안 되는군." 대충 헤아려 보니 선발대의 수는 1천명 남짓 되는 것 같았다. 중갑보병들의 물결이 끊어지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마갑과 플레이트 메일로 빈틈없이 무장한 중장기사단이었다. 절그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사들이 포탈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앞서 행군하는 중장보병들의 뒤를 따라 그곳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사들 중 가장 선두에 선 자가 일행에게로 다가왔다. 화려한 갑옷과 문장을 보니 상당히 신분이 높은 기사 같았다. 말에서 내린 기사는 투구를 벗어들었다. 투구 아래로 50전후로 보이는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중후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크란시아에게 공손히 허리를 꺾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 1군단을 맡고 있는 미하일 자작입니다. 일단 위험을 무릅쓰고 임무를 완수하신 것을 축하드립……." 크란시아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데이몬을 가리켰다. "보고는 내가 아니라 이분께 드려야 합니다. 소개 드리지요. 카심 용병단의 실질적인 책임자이신 데이몬입니다. 다크 포탈의 재 가동은 전적으로 이분 덕택에 이룬 것입니다." 미하일 자작은 머뭇거림 없이 예를 올렸다. "데이몬 님이시군요. 평소에 말씀 많이 들어왔습니다." 데이몬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예를 받았다. 옆에 서 있던 슈렉하이머가 눈빛을 번뜩이며 다가갔다. "오랜만이군요. 미하일 자작님." 슈렉하이머를 보자 뜻밖에 미하일 자작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를 비롯한 군단장들은 하나같이 슈렉하이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슈렉하이머로부터 일정기간동안 오크를 상대할 전략을 교육받았기 때문에 몰라볼 리가 없었다. 그는 상대가 리치라는 사실을 잊기라도 한 듯 반색을 했다. "무사하셨군요. 슈렉하이머님." "예 덕분에……." 슈렉하이머의 소개로 미하일 자작은 카심 용병단원들과 하나씩 인사를 나누었다. 대원들을 쳐다보는 자작의 얼굴에는 경의의 눈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래곤과 오크가 우글거리는 트루베니아로 건너와서 한 명의 희생도 없이 어려운 임무를 완수했으니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중장기사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포탈에서 쏟아져 나왔다. 주위를 둘러본 카심이 쓴웃음을 지었다. "구태여 좁은 곳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 이동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렇게 할까?" 일행들은 느긋하게 담소를 나누며 걸음을 옮겼다. 조금 떨어진, 언데드 병사들의 습격이 가해진 곳은 상당히 드넓은 평원이었다. 그러므로 병력을 집결시키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터였다. [다크메이지 13장 362편] 벌판에는 벌써 수천 명으로 불어난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그런데 일행들이 그곳에 도착하자 뜻밖의 손님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데드 군단과 함께 보냈던 4대 데스 나이트들이었다. 미리 교육을 받았는지 병사들은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단지 포탈 쪽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차단했을 뿐이었다. 괜히 시비를 걸 필요가 없기 때문에 4대 기사들은 그곳에서 순순히 데이몬을 기다리고 있었다. 데이몬을 보자 헬버트론이 눈빛을 번뜩이며 다가왔다. "오크의 수가 생각보다 많아서 물리치지 못했다. 엘프의 숲 속에 아직까지 일만 남짓 남아있을 것이다." "데리고 간 언데드 병사들은?" "퇴각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니 전멸했을 거야. 그건 그렇고 그 너저분한 놈들은 뭐지?" 헬버트론의 시선이 대원들의 뒤에 시립해 있는 데스 나이트들에게 향했다. 4대 기사의 막강한 기세에 눌렸는지 데스 나이트들은 움찔하며 한 발씩 뒤로 물러났다. 자신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데이몬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과거 암흑전쟁 당시 나이델하르크를 추종하던 놈들이야. 날 따르겠다고 하더군." 헬버트론의 투구 사이에서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부하가 생긴 건가? 잘 되었군. 윈슬럿이란 놈이 하도 멍청해서 골치를 썩히던 판국인데." 데이몬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수고했어. 이 녀석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쉬도록 해." "그래야 하겠군. 새로 맞은 부하들에게 교육을 시키려면……." 4대 기사들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데스 나이트들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같은 데스 나이트라도 격이 틀렸기 때문에 4대 기사들은 그들을 무리 없이 통제할 수 있을 터였다. 주뼛거리며 다가오는 데스 나이트들을 힐끔 쳐다본 데이몬이 잠자코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4대 기사를 비롯한 10여 명의 데스 나이트들의 모습은 곧 그곳에서 사라졌다. 인크레시아를 닫은 데이몬이 슈렉하이머를 쳐다보았다. "일단 남은 오크 놈들을 먼저 처리해야겠군." 고개를 끄덕인 슈렉하이머가 서둘러 미하일 자작에게 다가갔다. "죄송하지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병력을 동원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미하일 자작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숲 속에 있다는 오크 놈들 말이군요. 알겠습니다. 숲 속이니 지금 도착한 경기병대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천인대 열을 투입하면 희생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필요한 경우 엘프 궁사들이 지원을 해 줄 것입니다." 미하일 자작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 기회에 1군단 경기병대의 위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미하일 자작의 말에 슈렉하이머는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울창한 숲에 중장기사들을 들여보낼 수 없으니 경기병들이 가장 적합하겠군요." 미하일 자작이 손을 들자 일단의 경기병들이 다가왔다. 비교적 가벼운 갑옷을 착용했기 때문에 방어력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손실을 민첩한 기동력으로 보충하는 병과였다. 그들은 싸울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창과 중검, 가죽 방패를 장비하자 무장이 모두 끝났다. 묵묵히 보고 있던 올리비에가 앞으로 쓱 나섰다. "안내는 저희들이 맡겠습니다. 엘프의 숲은 저희들의 안내 없이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모쪼록 부탁드립니다." 그 때 크란시아가 다가가서 미하일 자작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병사들이 행여나 엘프의 미색에 혹해서 일을 벌이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서 건네는 조언이었다. 말을 들은 미하일 자작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1군단은 아르카디아에서 제일 군기가 엄중합니다." "그렇다면 안심이 됩니다만……." 이번에는 슈렉하이머가 나섰다. "숲으로 가기 전에 식인목이 다수 서식하고 있습니다. 길을 뚫어놓기는 했지만 다시 막혔을 수도 있으니 경기병대에 다수의 마법사들을 동행시키십시오. 식인목들은 화염 계열의 마법에 약합니다."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미하일 자작이 명령을 내리자 막 도착한 마법사들이 분분히 경기병대에 합류했다. 준비를 마치자 그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행군을 시작했다. 올리비에를 비롯한 센티널들이 선두에 서서 그들을 인도하고 있었다. 물론 일루미나도 거기에 끼여 있었다. 모호한 표정으로 그 쪽을 응시하던 미첼이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나중에 봐요. 일루미나." 그 소리를 들었는지 일루미나가 고개를 돌렸다. 미첼에게 살포시 미소를 건넨 그녀의 모습은 곧 숲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미첼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사라진 숲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뒤로 헤아릴 수 없는 경기병들이 속속 뛰어들고 있었다. "취익. 이제 끝났는가?" 파타르 부족장은 피로감이 가득한 눈을 들어 전장을 쓸어보았다. 시체와 부서진 병기가 어지럽게 널린 숲 속은 한 마디로 난장판이었다. 죽어 넘어진 오크 전사들의 피투성이 시체와 언데드 병사들이 남긴 잔해가 한데 어우러져 엘프의 숲을 완벽히 죽음의 숲으로 바꿔 놓았다. 엘프의 숲에서 벌어진 전투는 결국 오크의 승리로 끝났다. 네 명의 데스 나이트가 끝까지 투혼을 발휘했지만 끝내 전투력과 병력수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난입한 언데드 병사들은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데스 나이트들은 전세가 판이하게 기울자 미련 없이 전장을 이탈했다. 언데드 군단이 전멸하기 바로 직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오크 전사들은 그들을 추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워낙 심각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우선 전열을 재정비해야 했던 것이다. 전장에서는 간헐적으로 부상자들의 비명과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파타르 부족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 "취익. 부상자들을 처리한다. 다소의 희생이 있었지만 엘프 부족을 치는 것은 예정대로 행할 것이다." 그 말에 전사들이 머뭇거림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크가 부상자를 처리하는 방법은 무척 간단했다. 제 발로 움직일 수 있는 자들만 추려 별도의 부대를 구성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죽여 없애는 것이다. "취에에엑." 그곳에는 곧 죽어 가는 오크 부상병들의 비명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출생율과 성장율이 워낙 높은 탓에 오크에겐 이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었다. 부상자 정리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고 숲 속에는 시체로 이루어진 동산이 여러 개 생겨났다. 한 때 동료였지만 이제부터 부족의 배를 채워줄 식량이 되어버린 것이다. 파타르 부족장은 별도의 부대를 시켜 시체들을 부족으로 옮기도록 명했다. 경상자들로 구성되어 전투를 치르기 힘든 부대라서 그들이 없어도 전력의 손실은 크지 않았다. 그런 다음 파타르 부족장은 남은 전사들을 동원해서 예정대로 엘프 마을을 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전열을 정비하는 도중에 난데없이 숲 속에서 들려온 말발굽소리 때문이었다. 두두두두.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에 오크 전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도대체 수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취익. 이, 인간이다." 말을 타고 싸우는 종족은 오로지 인간 밖에 없다. 오크에게 말이란 짐승은 단지 배를 채울 식량에 지나지 않았다. 뜻밖의 사태에 오크 전사들은 혼비백산했다. 이런 울창한 숲 속에서 기병대와 맞닥뜨리게 생겼으니 당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선 그들에겐 기병대를 상대할 만한 무기가 없었다. 활과 화살이 주력인 엘프 센티널과 싸우러 왔기 때문에 기병대를 상대할 장병기를 미처 장비하지 못한 것이다. 전사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고 있는 사이 마침내 기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서둘러 전열을 정비하고 있는 오크 전사들을 사정없이 들이쳤다. 오와 열을 맞춰 질서정연하게 돌격해 오는 모습은 보고 있는 오크 전사들의 심금을 저리게 할 정도였다. "캬아아악." 창날에 꿰뚫린 오크 전사들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기병이 휘두른 중검에 맞아 목이 달아난 오크 전사의 수도 부지기수였다. 한 개 대열이 휩쓸고 지나간 다음에는 다음 대열이 들이닥쳤다. 연이은 공격에 오크 전사들은 변변찮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우수수 쓰러졌다. 기병대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았다. 몇몇 오크 전사들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전의를 불태웠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들이 준비한 짧은 자루의 글레이브는 말에 올라탄 기병들에겐 철저히 무용지물이었다. 거추장스러울 것을 염려해서 준비해 온 단병기가 오히려 전사들의 명을 단축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이닥치는 기병대의 물결에 오크 전사들은 결국 전의를 잃어버렸다. 1군단 소속의 경기병들은 특유의 기동력을 활용해서 우왕좌왕하는 오크 전사들을 사정없이 쓰러뜨렸다. "취익. 후, 후퇴하라." 기를 쓰고 질러대는 파타르 부족장의 부르짖음도 천지를 뒤흔드는 말발굽소리에 덧없이 스러져버렸다. 대열이 계속해서 흐트러졌고 결국 전의를 잃은 오크 전사들이 뿔뿔이 흩어져 퇴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퇴각하는 것도 여의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기동력이 훨씬 뛰어난 기병들. 달아나려 해도 도망갈 길이 있을 턱이 없었다. 잘 훈련된 기병들은 전장을 종횡무진 누비며 달아나는 오크 전사들의 등판에 사정없이 창날을 박아 넣었다. 파타르 부족의 전사들은 막강한 크로센 제국의 기병대의 공격에 순차적으로 궤멸되고 있었다. 병력이 1만에 달했지만 엘프와 언데드의 연이은 공격으로 인해 지쳐있던 탓에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당한 것이다. 잊혀진 대륙 트루베니아에서 처음으로 전투를 치르게 된 1군단의 기병대. 그들은 정예라는 별칭이 무색하지 않게 첫 싸움을 대승으로 장식할 수 있었다. 그 무렵 데이몬과 그 일행들은 포탈을 통해 건너온 페르슈타인 공작과 대면하고 있었다. 만면에 웃음을 가득 머금은 페르슈타인 공작이 그들의 공을 치하했다. "그토록 어려운 임무를 완수하다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뭐 수고랄 게 있겠소? 포탈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었지요." "아닙니다. 데이몬과 카심 용병단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거듭된 칭찬에 데이몬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고 공작의 말대로 이번 임무에 크란시아가 많은 도움이 되었소. 임무를 마쳤으니 그를 이만 원대복귀시키는 것이 나을 것 같소." 페르슈타인 공작은 빙그레 웃으며 크란시아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데이몬이 인정하는 만큼 가슴이 더욱 뿌듯할 수밖에 없었다. "수고했다. 조금 있으면 듀크 나이츠가 건너올 것이다. 그때 복귀하도록 하라." 크란시아는 머뭇거림 없이 복명했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고개를 돌린 페르슈타인 공작의 시선이 이번에는 슈렉하이머에게 향했다. 시선을 받자 슈렉하이머가 공작에게 다가갔다. 그에겐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말씀드린 대로 엘프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정벌군의 든든한 동맹군이 되어 줄 것입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미리 설명은 들었지만 말로만 듣던 엘프와 동맹을 맺게 될 줄은……. 그런데 단순히 영역을 지켜주는 것만으로 동맹을 맺을 수 있었소?" "그렇습니다. 엘프에겐 숲을 가꿀 땅이 가장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껏 오크에게 많은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약속을 지켜준다면 그들은 앞으로 벌어질 종족전쟁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나는 약속의 중요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소.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반드시 엘프의 영토를 보전해 주도록 하리다." 말을 마친 페르슈타인 공작은 대원들의 얼굴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큰 일을 해 냈으니 그대들은 당분간 쉬도록 하시오. 오크 족을 상대하는 것은 모두 내가 책임지겠소. 그대들은 휴식을 취하며 힘을 비축하다 필요할 때 나서 주시오." 카심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드래곤이 출현했을 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소. 그들만 막아준다면 난 충분히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소."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때 문 밖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공작전하. 선발대로 나선 경기병대가 대승을 거뒀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대략 오크 수급 일만 가량을 거뒀다고 하옵니다." 공작은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이미 그는 슈렉하이머를 통해 제반 상황을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 즉시 경기병대에게 마법통신을 보내어 전령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오크 족의 마을을 빈틈없이 포위하도록 하라. 그리고 공성무기를 갖춘 중장보병들을 출동시켜 마을을 쓸어버리도록 하라. 단 하나의 오크도 놓쳐서는 안 된다." "알겠사옵니다." 부관은 공손히 대답한 뒤 물러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데이몬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되는 것을 느꼈다. '역시 철저한 인물이로군. 사람 하나는 확실하게 선택한 것 같아.' 다크 포탈을 가동시킴으로써 데이몬의 안배는 모두 끝났다. 목적했던 대로 아르카디아의 대군을 트루베니아에 건너오게 하는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이젠 데이몬에겐 복수의 시간만이 남았다. 트루베니아에서 오크의 입지가 줄어들수록 복수를 이루고 다프네를 구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500년 동안 이어졌던 그의 노고를 치하라도 하듯 포탈을 통해서 거듭 병력이 쏟아지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13장 363편] 2차 종족전쟁이 오크의 승리로 끝난 지 정확히 499년 만에 트루베니아에서는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름하여 3차 종족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흑마법사 데이몬과 카심 용병단원들의 활약으로 다크 포탈이 재가동되었고 마침내 양쪽 대륙을 연결하는 공간이동 게이트가 생겨났다. 그곳을 통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병력이 트루베니아로 쏟아져 들어왔다. 크로센 제국을 주축으로 여러 왕국들이 힘을 합친 대규모 연합군이 트루베니아 정벌의 서막을 연 것이다. 동원된 병력은 천문학적인 규모였다. 각기 십만으로 구성된 다섯 개의 군단, 총 5십만의 병력이 일시에 투입되었다. 각각 소속 국가에서도 내노라하는 정예들로 구성된 군단들이었다.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최고의 정예가 필요했기에 그들이 먼저 투입된 것이다. 남은 1백만의 병력들은 순차적으로 자국을 출발해서 크로센 제국으로 향했다. 그들은 도착하는 즉시 공간이동 게이트를 통해 트루베니아로 투입되었다. 아르카디아 정벌군은 가히 파죽지세로 진군을 시작했다. 곳곳에 산재한 수많은 오크 부족이 그들의 군홧발아래 맥없이 궤멸되었다. 주력 병력을 모두 서쪽 해안에 보낸 탓에 오크 족에겐 정벌군을 막을 채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정벌군의 총사령관을 맡은 페르슈타인 공작은 역시 타고난 전략가였다. 그는 각 왕국에서 파견된 기사들을 한데 끌어 모아 각각 1만으로 구성된 무적의 중장기사단을 만들어냈다. 그들을 주축으로 전격적인 돌파작전을 계획한 것이다. 그의 전략은 주효해서 정벌군은 곳곳에 산재한 오크 부족을 무인지경으로 휩쓸 수 있었다. 두터운 갑옷과 방패를 가진 중장기사단으로 하여금 적의 대오를 흩뜨린 뒤 뒤따르던 보병대로 전장 정리를 하는 것은 지극히 전통적인 전략이었지만 문제는 진격 속도였다. 중장기사단이 적의 진형을 휩쓴 다음 오크 보병들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냥 휩쓸고 지나가는 것이 페르슈타인 공작이 구상한 전격전의 특징이었다. 그들이 지나간 뒤에는 궁수와 중갑보병대가 뒤따르며 살아남은 오크의 잔존병력을 처리했다. 그리고 기동력을 갖춘 경갑보병들이 후미에 대기하고 있다가 후퇴하는 오크의 패잔병을 추격함과 동시에 정찰을 맡은 경기병은 적의 전령을 조직적으로 사냥해서 소식이 다른 부족에게 전해지는 것을 막는 지극히 효율적이면서도 정형화된 전략인 것이다. 모든 작전이 순조롭게 수행되었고 정벌군의 점령지는 계속해서 넓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벌군이 진군하는 경로는 종족전쟁 당시 오크의 침공로와 한 치의 틀림도 없이 동일했다. 엘프의 안내를 받아 숲을 건너온 정벌군 병사들은 500년 전 오크 전사들이 몰려왔던 길을 따라 전격적인 진군을 시작했다. 옛 카르나틱 왕국의 영토가 수복되었고 뼈대만 남은 밀튼과 하르멜 성에 연합군의 깃발이 나부꼈다. 중장기사단의 강행돌파에 뒤따른 보병단의 초토화 작전으로 말미암아 하루에도 수십, 수백의 오크 부족이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포탈을 통해 매일같이 병력과 보급물자가 쏟아져 들어왔기에 정벌군의 사기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갔다. 두두두두. 드넓은 평원을 수많은 기마병들이 돌격하고 있었다. 번뜩이는 갑옷을 입고 방패로 앞을 가린 기사들은 랜서를 앞으로 겨누며 맹렬히 달리고 또 달렸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가 많았지만 기마병들의 오와 열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자욱한 말발굽소리에 이어 기마병들의 함성이 하늘을 찌를 듯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 기마병들이 돌격해 가는 곳에는 약 이만 가량 되어 보이는 오크 전사들이 바짝 긴장한 채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 수적으로 두 배 가량 많아 보였지만 두터운 갑주를 걸친 채 말과 한 몸이 되어 달리는 기마병들의 기세에 견주어보면 극히 볼품 없었다. 게다가 오크 전사들은 변변찮은 대기병(對騎兵) 방어구조차 갖추지 못했다. 고작해야 방패를 늘어 세운 뒤 긴 창을 비스듬히 세워놓은 것이 전부였다. 그럴 것이 그들은 제대로 된 전투부대가 아니었다. 게덴하이드의 명에 의해 보급활동에 전념하다 인근 부족의 전사들을 끌어 모아 급조한 부대였기에 대기병 방어구를 제대로 장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급격히 거리를 좁혀 오는 기마병들을 쳐다보던 오크 전사들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인간 기마병과 상대해 본 경험이 없었으므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과거 트루베니아를 휩쓸었던 선조들의 전투 경험은 500년이 지난 지금에는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던 사이 기마병들의 제 1진이 운집해 있는 오크 진형을 파고 들어갔다. 콰콰쾅. 기마병과 맞닥뜨리는 순간 오크 군의 전열은 그대로 허물어졌다. 말과 사람의 무게에 갑옷의 무게까지 더한 강력한 돌격을 어설픈 방어진으로 막는다는 것은 한 마디로 어불성설이었다. 박살난 방패와 함께 숨이 끊어진 오크 전사의 시신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오크 군 진형으로 뛰어든 기마병들의 1진은 거치적거리는 것을 무자비하게 짓밟으며 진격해 들어갔다. "케륵." 말발굽에 짓밟힌 오크 전사의 머리통이 퍽 하고 터져 나갔다. 막 글레이브를 내지르려던 오크 전사는 랜서에 몸뚱이가 꿰뚫려 처절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전장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화해 버렸다. 오크 진형을 강타한 중장기사단의 1진은 접전을 벌이지 않고 속도를 유지하며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오크 전사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제 2진이 뛰어들었다. 1차 돌격으로 말미암아 전열이 완전히 흐트러진 오크 전사들은 그야말로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었다. 곳곳에서 렌서에 꿰인 오크 전사들이 단말마의 비명을 질러댔다. 경보병들로만 구성된 탓에 중장기사단의 돌격에는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오크 전사들은 어떻게 해서든 저항하려 발버둥쳤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빈약한 무기로는 두터운 갑옷과 방패를 장비한 중장기사들을 상하게 할 수 없었다. 2진이 지나가고 또다시 3진이 난입해 들어오자 오크 전사들은 이미 전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중장기사들의 뒤를 이어 수많은 인간 보병들이 진군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이미 끝난 전투라고 봐야 했다. 전황은 2차 종족전쟁과 판이한 양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우선 500년 전에는 인간 기마병들을 오우거나 트롤로 구성된 중형 몬스터 군단이 막아주었다. 드래곤의 마법공격에 통째로 소멸된 중장기사단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오크들은 아직까지는 드래곤의 도움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들이 참전하기 전까진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힘만으로 정벌군의 진군을 저지해야 했던 것이다. 문자가 없어 오로지 구전(口傳)으로만 지식을 전하는 탓에 오크의 지식전수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오크 최대의 약점이었다. 선대 오크 전사들이 500년 전 인간 기마병을 상대하며 쌓아놓은 무수한 지식들이 단 하나도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인간들의 전투기술은 오크와는 반대로 비약적으로 향상되어 있었다. 전세가 판이하게 기울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러서는 오크는 없었다. 타고난 전사라는 것을 입증하듯 오크들은 단 하나도 등을 돌리지 않고 용감히 맞서 싸웠다. 하지만 그 수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각각 1천명씩 무려 10번에 걸쳐 오크 진형을 짓밟은 중장기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나갔다. 그 자리에는 부서진 병기와 갑옷, 그리고 숨이 끊어진 오크 전사들의 시신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오크 전사들이 여기저기서 몸을 일으켰다. 질긴 게 생명이라고 생각보다 많은 수가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목숨을 건진 분대장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재정비에 몰두했다. "취익. 움직일 수 있는 놈은 모두 일어서라. 인간들의 공격이 또다시 이어질 것이다." 살아남은 오크 전사들은 비틀거리며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중장기사들에겐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접근하고 있는 인간 보병들에겐 꿀릴 것이 없었기에 그들을 대상으로 복수를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오크 전사들은 특유의 흉성을 드러내며 전투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까이 접근한 인간 보병들은 지척에서 진군을 멈췄다. 하나같이 중무장을 한 중장보병단으로 두터운 갑옷과 방패를 장비했기에 방어력이 뛰어나지만 기동력에서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병과. 오크 전사들은 바짝 긴장하며 전투가 벌어질 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 날아온 것은 전면적인 돌격이 아니라 하늘을 빽빽이 뒤덮은 화살비였다. 중장보병단의 바로 뒤에는 석궁을 든 궁수들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콰라라락. 소름끼치는 파공성과 함께 날아든 화살비는 밀집해 있던 오크 진형을 그대로 쓸어버렸다. 석궁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한 발의 쿼렐이 오크 전사 두 셋을 한꺼번에 꿰어버릴 정도였다. 방패도 소용없었다. 나무로 만들어 겉에 얇게 쇠를 입힌 그들의 방패는 석궁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번의 일제사격으로 오크 전사들은 거의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화살이 꽂힌 채 이리저리 널브러진 부하들을 쳐다보던 오크 지휘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런 약삭빠른 인간 놈들……." 하지만 대답이라도 하듯 또 한 번의 일제사격이 날아들었다. 숙련된 석궁수들이 거의 동시에 화살을 쏘아붙인 것이다. 퍼퍼퍼퍽. 중장보병들은 적이 저항할 여지를 완전히 꺾어놓고 나서야 진군하기 시작했다. 갑주를 절그렁거리며 접근하는 중장 보병들을 보자 간신히 목숨을 건진 오크 전사들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확실하게 확인사살을 하라. 숨이 붙어 있는 놈이 단 한 놈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시체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전장에는 병사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숨이 붙어있는 오크들의 숨통을 끊고 있었다. 병사들은 머뭇거림 없이 쓰러진 오크의 목과 심장에 창검을 박아 넣었다. 일체의 자비심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정벌군 병사들은 이미 이번 전쟁의 의미가 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크들이 인간을 노예로 부리며 또한 잡아먹기까지 한다는 사실을 잘 숙지하고 있었다. 이른바 페르슈타인 공작의 정신교육이 제대로 먹혀든 것이다. 약 2만 정도로 추산되는 오크의 부대는 이번 전투로 말미암아 완전히 궤멸되었다. 마지막에 퇴각 명령이 떨어지긴 했지만 전장을 이탈한 패잔병은 얼마 되지 않았다. 경갑보병들의 추격이 곧바로 시작되었고 오크의 퇴로는 이미 경기병들이 빈틈없이 차단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짧은 시간동안 최대의 전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정벌군의 출현을 최대한 숨겨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분대장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서둘러라. 중장기사단을 따라잡아야 한다." 병사들은 피로감에 젖은 얼굴로 쉬지 않고 임무를 수행해 나갔다. 이런 일방적인 전투는 트루베니아 동남부를 중심으로 거듭 벌어지고 있었다. 500년 만에 일어난 인간들의 전격적인 침공. 정벌군의 경기병들이 눈에 불을 켜고 수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식은 결국 게덴하이드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급보를 받은 게덴하이드는 아연해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기다렸던 아르카디아의 정벌군이 전혀 방비가 되어있지 않은 동쪽에서 몰려들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투입했던 보급 부대가 전부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게덴하이드는 말문을 잊었다. 그로써는 한 마디로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그로 하여금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있었다. "인간 놈들은 중장기사단을 중심으로 효과적인 전투를 하고 있다. 중형 몬스터가 없으면 놈들의 기사단을 막기가 힘들 것이다." 그는 우선 해안 봉쇄에 나선 병력을 모두 내륙 쪽으로 진군시켰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든 오크 부족에게 널리 통보했다. 한데 뭉치지 않는 이상 오크는 결코 인간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때문에 게덴하이드는 오크 부족장들로 하여금 강력한 부족을 주축으로 전사들을 한데 모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아르카디아의 정벌군을 막으려면 대륙 전역에 흩어진 부족의 전사들을 요소요소에 결집시켜야 했다. 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부족했다. "어쩔 수 없군." 그는 휘하의 리치들을 대거 드래곤의 레어로 파견했다. 인간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드래곤의 조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드래곤들의 수면기가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소식을 듣는다면 드래곤들은 십중팔구 깨어나서 전쟁에 참전할 터였다. 잇몸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 드래곤이 보유한 엄청난 파괴력이 힘을 발휘하려면 오크 전사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정말 기가 막히는군. 드래곤들이 깨어나기 전에 선제 공격을 받다니……." 하지만 게덴하이드는 상황을 그리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드래곤들이 참전한다면 인간들은 결코 적수가 되지 못한다." 그는 그 사실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진군하는 오크의 대군을 쳐다보며 게덴하이드는 섬 뜩한 눈빛을 내뿜었다. "5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틀림없이 인간의 씨를 말릴 수 있을 것이다." [다크메이지 13장 364편] 정벌군의 경이로운 진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르카디아의 인간들이 침공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대경한 오크 부족들이 마침내 힘을 합치기 시작한 것이다. 대부대로 편성된 오크 전사들이 길목을 막자 거칠 것이 없어 보이던 정벌군의 진격속도가 현저하게 줄기 시작했다. 전황을 보고 받은 페르슈타인 공작은 그쯤에서 진군을 중지시켰다. 이미 트루베니아 영토의 10분의 1가량을 점령한 다음이었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기습의 묘미를 살렸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볼 수 있지. 이제부턴 방어에 신경 써야겠군." 비록 엄청난 지역을 점령하고 또한 수많은 오크 부족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렸지만 남아있는 오크의 수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라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전격전에 맞춰 구성된 병력배치를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머지않아 가해질 오크 군의 반격에도 대비를 해야 했다. "놈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정벌군의 규모를 훨씬 웃돌 것이다." 공작으로써는 가장 중요한 드래곤의 개입에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작이 고뇌에 고뇌를 거듭한 끝에 짜낸 전략은 마법 통신과 전령을 통해 각지에 흩어진 사단으로 전달되었다. 2차 종족전쟁은 무려 10년에 걸쳐 전개되었고 그것을 감안해 보면 이번 전쟁 역시 장기전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므로 공작으로써는 거기에 대한 대비를 해야 했다. 각 종족의 운명을 건 전쟁은 이렇게 해서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고요한 공간이었다. 사방이 온통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고 간간이 새어드는 바람소리만이 고요를 깨트릴 뿐이었다. 이곳은 거대한 대전이었다. 아름드리 석주(石柱)들이 벽을 따라 늘어서 있고 천장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높았다. 완전 무장한 병사 10만 명 이상을 수용할 정도로 넓은 대전. 비릿한 소금 냄새가 풍겨오는 것을 보아 바다와 가까이 위치한 곳 같았다. 그 한 복판에 십여 명 가량의 그림자가 태산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마치 피조물인양 움직이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그림자들. 인간의 모습을 하긴 했지만 그들의 몸에서는 만물을 꿇어 엎드리게 할 위압감이 새록새록 흘러나오고 있었다. 침묵의 시간이 한참동안 흐른 뒤 정적을 깨고 창노한 음성이 대전 전체로 울려 퍼졌다. "베르키스는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았는가?" 입을 연 이는 은발에 은빛 수염을 탐스럽게 기른 노인이었다. 더없이 자애로운 용모를 하고 있는 은발 노인은 놀랍게도 눈썹까지 은은한 은빛을 띠고 있었다. 잠시 후 옆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베르키스님은 아마 조금 늦을 것입니다. 로드께서 아시다시피 그분께서는 수면기를 제대로 채우지 못한 터라……." "하긴 그렇겠군." 노인의 음성에는 왠지 모를 여운이 짙게 깔려 있었다. 뭔가 고뇌하는 듯한 눈빛. 노인의 정체는 놀랍게도 드래곤 로드인 크라누스였다. 최고령의 실버 드래곤으로써 트루베니아 대륙에 살고 있는 모든 드래곤들의 정신적인 지도자가 바로 그였다. 트루베니아의 드래곤들과 오크를 진두지휘하여 인간이란 종족을 멸살시켜 버린 존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용모였다. 그는 심유한 눈빛으로 늘어서 있는 그림자들을 하나 하나 훑어보았다. 늘어선 자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대부분 인간, 그것도 극히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남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트롤이나 오우거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도 있었다. 결코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없는 종족이 섞여 있었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서로를 전혀 경계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진정한 정체는 드래곤이었기 때문이었다. 보이는 겉모습은 단지 폴리모프로 만든 형상에 지나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무려 10여 명이 넘는 드래곤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는 것이다. 그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훑어본 크라누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익히 알다시피 아르카디아의 인간들이 트루베니아를 침공했다." "………." 드래곤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 사실은 이미 모든 드래곤들이 알고 있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수면기를 마저 채우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던가. 그들은 대책 마련을 위해 드래곤 로드의 처소에 한데 모인 상태였다. 그리고 마지막 드래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전략을 담당하는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가 도착해야 회의가 시작되기 때문에……. 늘어선 드래곤들은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았다. 철저히 독립된 생활을 영위하는 종족이기 때문에 서로간에 나눌 만한 대화가 있을 턱이 없었다. 게다가 이처럼 모이는 기회는 여간해서는 오지 않았다. 제 3차 종족전쟁이라는 중대한 사안이 아니었다면 모일 이유 자체가 없는 것이다. 크라누스는 재미있다는 듯한 눈빛으로 드래곤들을 쳐다보았다. "인간의 말살을 결정한 존재들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 무척 재미있군. 그러고 보니 나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구먼.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크라누스의 말에 몇몇 드래곤들이 실소를 지었다. 사실 그들이 생각해봐도 우스꽝스러웠던 것이다. 그간 드래곤들은 별 생각 없이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 해 왔다. 과거 대륙 전역에 가장 널리 분포했던 종족이 인간이었고 유희를 즐기기 위해선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린 크라누스가 한 드래곤을 쳐다보았다. 데저트(사막) 트롤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하고 있는 그는 트루베니아 중부의 사막에서 살고 있는 블루 드래곤이었다. 데미트리우스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성정이 다소 온후한 편이었다. 크라누스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데미트리우스.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지리멸렬해서 아르카디아로 쫓겨난 인간들이 불과 500년 만에 트루베니아를 다시 침공한 일에 대해서 말일세." 미간을 좁히며 뭔가를 생각해보던 데미트리우스가 조용히 대답했다. "인간들은 보기보다 끈질긴 종족입니다. 제 생각으로 500년의 세월이 흘렀다면 인간들은 과거의 힘을 거의 되찾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째서 그런가?" 머리를 뒤흔들던 데미트리우스가 설명을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인간들은 이해하기가 무척 힘든 종족입니다. 엄밀히 따져서 인간들은 자연에 대한 적응력이나 저항력이 오크에 비해 현저히 떨어집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500년 전에 인간들이 사막에 거주했다는 점입니다. 자연환경이 더없이 열악한 사막인데도 인간들은 그런 대로 잘 살아가더군요. 전 수면기에 들어가며 오크들이 멸망한 인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것이라 예측했습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이곳으로 오며 살펴본 결과 사막에서 오크의 모습을 단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데미트리우스의 말이 끝나자 누군가가 그의 말을 받았다.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눈부신 백발이 더 없이 요요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디모네스란 이름의 그녀는 노스우드 남단의 극한지에 살고 있는 화이트 드래곤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해요. 적어도 500년 전에는 노스우드 근교에서 인간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이곳으로 오며 눈을 씻고 찾아봐도 오크를 볼 수 없더군요. 그들은 환경이 좋은 초원이나 숲 근처에만 살고 있었어요." 크라누스는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 참 재미있군. 오크는 분명히 인간보다 환경에 견디는 힘이 강하다. 그리고 번식률도 뛰어나고 성장도 빠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 드래곤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사실 그것은 드래곤들이 인간에게 가진 가장 큰 의문점이었다. 수명이 짧고 체력이 약한데다 출생율이 낮으며 성장과정 역시 여타의 종족보다 훨씬 긴 인간이란 종족이 대륙 전역에 뿌리를 내리고 살 수 있는 이유를 알고 있는 드래곤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크라누스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굳이 설명해 줄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인간들에겐 바로 사회가 있기 때문이지. 하나하나는 약한 인간이지만 뭉치면 비약적으로 강해지는 것은 그들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기 때문이지. 물론 오크도 집단생활을 하지만 그것을 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네. 그저 군집이라고 표현하면 적절할까…….' 상념에 잠겨 있는데 굵직한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베르키스 님께서 오셨습니다." 크라누스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거대한 대전을 가로질러 걸어오고 있었다. 타는 듯한 적발에 대리석으로 깎아만든 듯한 잘 생긴 얼굴. 나타난 드래곤 역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크라누스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가장 적극적으로 인간을 말살하려 하는 베르키스도 결국 인간의 모습을 버리지 못하는군.' 다가오는 베르키스의 얼굴은 무척 수척했다. 본체의 모습이 폴리모프한 형상에서도 투영되는 것을 보니 몸 상태가 극히 좋지 않은 것 같았다. 크라누스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마법을 이용해 몸을 속인 후유증이로군. 그나마 수면기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으니…….' 베르키스가 다가오자 세 명의 드래곤이 반색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비교적 젊은 드래곤으로써 베르키스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베르키스에게 끝없는 존경과 추앙을 바치고 있었다. 베르키스가 추구하는 강력한 힘의 논리에 매료된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크라누스는 조용히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정확히 따지자면 저들은 가장 인간화된 드래곤들이라고 봐야겠지.' 짧은 수명을 가졌지만 인간은 정말 놀라운 욕심을 가진 종족이다. 무한정에 가까운 인간의 욕심에는 드래곤조차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크라누스가 종족전쟁에 동의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인간의 욕심에 대한 우려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선봉에 선 베르키스가 인간과 가장 닮은 드래곤이었으니……. 조용히 걸어온 베르키스가 크라누스에게 예를 취했다. "로드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500년만인가?" "그렇군요." 그들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윽한 표정으로 베르키스를 쳐다보던 크라누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 부탁대로 마법을 사용해서 두 대륙 사이에 격리시켰네. 그런데 인간들은 결국 트루베니아로 건너오고 말았더군." 그 말에 베르키스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인간들은 그가 전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바다를 건너왔다. 이곳에 오기 전 베르키스는 인간들이 어떤 방법으로 대륙을 건넜는지 조사에 들어갔고 마침내 비밀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평정을 되찾은 베르키스는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살펴본 결과 가증스럽게도 인간들은 나이델하르크가 건설해 놓은 다크 포탈을 이용해서 트루베니아로 건너왔습니다. 포탈의 좌표를 아르카디아에 고정해서 양 대륙 사이에 공간이동의 게이트를 만들어 낸 것이지요." "다크 포탈은 암흑전쟁 당시 파괴되지 않았나?" 베르키스는 묵묵히 고개를 뒤흔들었다. "애석하게도 완벽히 파괴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자네 불찰이군. 당시 포탈의 파괴를 자네가 맡았으니 말이야." "………." 베르키스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어쨌거나 크라누스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책임지길 원하신다면 지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시급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먼저 해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 크라누스에겐 포탈 문제에 대해 별달리 추궁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생각해 놓은 계획이 있나?" 베르키스는 모인 드래곤들을 하나씩 둘러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가장 우선적으로 포탈을 파괴해버려야 합니다. 살펴본 결과 포탈을 통해 계속해서 인간들의 병력과 보급물자가 밀려들고 있더군요. 그러므로 인간들의 보급줄을 먼저 끊어야 할 것 같습니다. " "그거야 어려운 문제가 아니로군. 어차피 위험한 물건이니 반드시 파괴시켜야 할 터……." "이번 작전에는 다수의 드래곤이 힘을 합쳐야 합니다. 많은 인간들이 포탈을 지키고 있을 것이 분명하며 또한 그들에게는 드래곤 슬레이어가 있습니다." 베르키스의 말에 크라누스는 흥미를 보였다. "지크레이트를 죽인 다음 인크레시아를 훔쳐 달아났다는 인간 말이로군. 이름이 데이몬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인크레시아를 회수하기 위해 아르카디아로 건너간 러셀런트도 놈의 간악한 술수에 당해 그만 목숨을 잃었습니다. 가증스럽게도 놈은 지크레이트와 러셀런트의 시체를 본 드래곤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있어서는 안될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치를 떠는 베르키스와는 달리 크라누스의 반응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허. 대단한 인간이로군. 에인션트급 드래곤이 인간의 손에 당한 것은 지금까지 전례가 없는 일이야. 훌륭한 드래곤 슬레이어로 봐야겠군." 동족이 목숨을 잃었고 시체마저 본 드래곤이 되었지만 정작 크라누스는 인간에게 경탄을 표하고 있었다. 듣고 있던 베르키스의 검미가 역팔자로 휘어졌다. "드래곤은 위대한 종족입니다. 그런데 그런 드래곤이 한낱 인간의 손에 목숨을 잃고 시체마저 모욕당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 베르키스의 격양된 음성에도 크라누스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드래곤은 위대하네. 그러므로 드래곤 슬레이어 역시 위대할 수밖에 없는 법이지." "……." 어이가 없었는지 베르키스는 멍하니 크라누스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아무튼 포탈을 파괴한 다음에 바로 놈을 처리해야 합니다. 다행히 저는 놈의 가장 큰 약점을 알고 있습니다." 말을 마친 베르키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여러 개의 석상이 놓여 있었는데 베르키스의 시선은 가운데 놓인 석상에 고정되어 있었다.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아름다운 소녀가 두 손을 맞잡고 무릎을 꿇은 채 굳어 있는 석상이었다. [다크메이지 13장 365편] 베르키스의 눈동자에 회심의 빛이 일어났다. "성녀의 석상을 저에게 주십시오. 놈은 성녀를 깊이 연모하고 있으므로 석상을 이용한다면 효과적으로 놈을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크라누스는 베르키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은 안 될 말이네. 비록 세상과의 인연을 끊으셨지만 성녀는 세상에 남아있는 베르하젤 님의 눈과 귀라 할 수 있네. 그 점에 대해서 난 동의할 수 없네." "단순히 이용하는 것뿐입니다. 성녀의 신상에는 아무런 위해가 없을 것입니다." 크라누스는 지긋한 눈빛으로 베르키스를 쳐다보았다. "드래곤 슬레이어를 겁내는 건가?" 베르키스는 일순 말을 잃었다. 사실 그러했다. 아르카디아에서 도망치듯 돌아오며 그는 데이몬이란 인간에게 서서히 치밀어 오르는 공포를 느꼈다. 그의 집념과 집요함에 베르키스는 자신도 모르게 치를 떨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사실을 순순히 시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침묵을 지키는 베르키스를 향해 크라누스의 음성이 계속 울려 퍼졌다. "자네 말대로 드래곤은 위대한 종족이네. 그러니 성녀를 이용한다는 치졸한 계략 따윈 쓰지 않기를 권고하네. 드래곤이 존중받기 위해서는 드래곤 슬레이어도 마땅히 존중받아야하네. 알겠는가?" 베르키스는 아무런 대답 없이 크라누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별달리 수긍할 수 없는 의견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기도 힘들었다. 드래곤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 뒤 먼저 입을 연 드래곤은 베르키스였다. "좋습니다. 로드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포탈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여러 드래곤들의 조력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도와주시겠습니까?" 하지만 크라누스는 그 요청마저도 거절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난 늙어서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네. 그리고 자네에겐 자넬 따르는 세 드래곤이 있지 않나? 제 아무리 드래곤 슬레이어라도 드래곤 넷을 막을 순 없다고 생각하네." "………." 크라누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베르키스의 눈빛을 맞받았다. "뿌린 씨는 직접 거두는 법일세. 드래곤 슬레이어를 만들어 낸 것이 애당초 자네가 아니던가? 그러니 이번 일은 자네와 자넬 따르는 드래곤들이 맡는 게 옳을 것 같군." 베르키스의 타는 듯한 시선이 크라누스에게 향했다. "오크 족은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들의 힘만으론 인간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서둘러 돕지 않는다면 트루베니아는 다시 인간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500년 전 그토록 힘들게 없애야 했던 인간이란 종족에게 말입니다." 크라누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늘어서 있는 드래곤들을 가리켰다. "자넨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나에겐 애당초 드래곤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이 없네. 단지 조언만을 할 수 있을 뿐이지. 500년 전에는 이 자리에 있는 드래곤들이 내 조언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종족전쟁에 참가했던 것이야. 물론 동의하지 않은 드래곤도 많았지만……." "하지만 로드의 조언이 드래곤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 않습니까?" 크라누스는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조언은 조언으로 끝나야 하네. 결정은 엄연히 드래곤들이 내리는 것이지. 500년 전 자넨 인간과의 싸움에 나서지 않겠다는 드래곤들을 맹렬히 비난했지만 원래는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야. 의견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몰아세우는 것은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라네." "………." "난 5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번 전쟁에 대한 참전 여부를 각 드래곤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맡길 생각이야. 다시 말해 그때와는 다른 사안으로 삼겠다는 뜻이지." 듣고 있던 베르키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 일어난 전쟁은 엄연히 500년 전 종족전쟁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반드시 인간을 말살………." 크라누스는 단호히 베르키스의 말을 잘랐다. "나나 자네나 다른 드래곤의 행동을 강제할 권한은 없네. 참전하고 말고는 오로지 드래곤들이 직접 판단할 문제야. 난 이번 사안을 그들 자율에 맡길 생각이네. 알겠나?" 베르키스는 입을 닫았다. 이미 뜻을 확고하게 굳힌 드래곤 로드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절 따르는 드래곤들과 함께 우선 다크 포탈을 파괴시키겠습니다. 그러니 결정된 사안을 신속히 알려주십시오." 크라누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이만 가보겠습니다." 베르키스는 예를 취하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크라누스는 심유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베르키스는 세 명의 드래곤을 데리고 크라누스의 레어를 걸어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회의과정을 지켜본 뒤 출발하고 싶었지만 다크 포탈을 없애는 일은 한 시가 급한 일이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라서 베르키스는 우선 급한 불부터 끄기로 마음먹었다. "더 많은 병력과 물자가 건너오기 전에 포탈을 파괴해야 한다." 같은 레드 일족인 류시케가 조심스럽게 그를 위로했다. 붉은 머리의 풍만한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류시케는 아직까지 에인션트 급에 접어들지 못한 젊은 드래곤이었다. "정말 분통 터지지 않아요? 늙다리 드래곤들이 몸을 사리는 모습이 정말 눈꼴……." 베르키스는 매서운 눈빛으로 류시케를 쳐다보았다. "그런 말은 삼가도록 하라. 드래곤 로드는 모든 드래곤들의 정신적인 지주이다. 그를 모욕하는 것은 내가 용납하지 못한다." 류시케는 샐쭉한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수긍하지 못한다는 빛이 역력했다. 잠시 후 푸른 머리의 청년이 베르키스를 쳐다보았다. 뮤시우스란 이름을 가진 블루 드래곤으로써 가장 나이가 어렸다. 그 역시 베르키스를 따르는 네 드래곤 중 하나였다. "그런데 데이몬이란 인간이 그토록 강합니까? 전 한낱 인간이 그토록 강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베르키스가 조용히 말을 받았다. "인정해야 한다. 뮤시우스. 놈은 드래곤에 맞서 싸우는 법을 철저히 알고 있는 놈이다. 그러므로 혼자서 인간을 공격할 생각은 버려라. 알겠느냐?" "………." "놈이 보유한 본 드래곤과 데스 나이트의 위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얕잡아볼 수 없다. 이미 러셀런트가 놈에게 당해 본 드래곤이 되지 않았느냐?" "아,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베르키스는 바로 옆에서 걸어가던 금발 청년을 쳐다보았다. 머리색과 눈동자를 보아 골드 드래곤으로 짐작되는 이였다. "레니우스. 이번 일에는 네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넓게 포진한 인간들을 일시에 몰살시키기 위해서는 류시케의 화염 브레스에 너의 바람이 잘 조화되어야 한다. 알겠느냐?" 레니우스라고 불린 골드 드래곤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500년 전에 류시케와 여러 번 손발을 맞춰보지 않았습니까?" "널 믿겠다." 베르키스는 믿음직스럽다는 듯 레니우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번 수면기를 통해 에인션트 급에 접어든 레니우스는 베르키스를 제외하면 가장 나이가 많았다. 불연 듯 베르키스의 눈가에 아쉽다는 듯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러셀런트가 당하지 않았다면 그의 맹독 브레스가 많은 도움이 되었을 텐데.' 크라누스의 레어에서 10여 명의 드래곤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지만 베르키스는 그들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500년 전 종족전쟁 당시 그들의 태도는 천차만별이었다. 크라누스처럼 전폭적으로 개입한 드래곤도 있었지만 건성으로 싸우는 시늉만 낸 드래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참가하지 않고 레어에 콕 박힌 드래곤도 있었지만……. 드래곤들 중에서 베르키스를 비롯한 네 드래곤들이 가장 열정적으로 종족전쟁에 참전했다. 인간들의 서약석을 빼앗아 온 것도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므로 베르키스로써는 그들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다크 포탈을 파괴시키고 나면 드래곤들도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모인 드래곤들 중 반 정도만 참전하더라도 인간의 멸망은 기정 사실이 된다." 가장 신중해 보이는 레니우스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드래곤 로드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겠군요." "걱정할 것 없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는 인간으로 말미암아 해츨링을 잃었다. 이미 폭풍으로 두 대륙을 격리시켰으니 그로써는 당연히 참전할 수밖에 없지." 말을 마친 베르키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인간을 상대하는 것은 그들에게 맡긴다. 그리고 우린 모든 일에 앞서 데이몬이란 놈을 찾아 없애야 한다." 뮤시우스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성녀의 석상을 손에 넣었다면 놈을 쉽사리 유인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다크 포탈을 파괴시키는 과정에서 놈이 나타난다면 쉽게 해결되겠지만 아마도 놈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놈은 아마도 우릴 철저히 각개격파할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까." 베르키스의 눈동자는 모종의 결심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엘프의 숲 근교에는 정벌군의 대규모 기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에는 무려 10만 명의 대군이 포탈의 경비를 맡아 불철주야 지키고 있었다. 데이몬과 카심용병단원은 바로 그 정벌군 기지에서 머물고 있었다. 한동안 휴식을 취하며 드래곤과의 전투에 투입될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명목상으로는 공로에 대한 보상 명목의 휴식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페르슈타인 공작의 다른 뜻이 숨어 있었다. 정벌군에게 가장 중요한 다크 포탈을 근접 경호하게 하는 것이 공작의 의도였고 데이몬을 비롯한 대원들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르카디아에서 병력과 물자를 들여올 길은 오직 포탈밖에 없기 때문에 정벌군에겐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페르슈타인 공작은 가능한 한 많은 마법사와 궁수들을 포탈 주변에 배치시켜 놓은 상태였다. 데이몬은 그들과 함께 포탈을 지키며 드래곤을 상대하기 위한 재충전에 몰두해 있었다. 물론 대원들은 예전과 변함 없이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그들에겐 새로운 대련상대가 생겨난 상태였다. "하앗." 묵직한 기합소리와 함께 갑주가 부서지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옆구리를 부여잡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이는 놀랍게도 인간이 아니었다. 거무튀튀한 갑주, 투구 가리개 사이로 흘러나오는 소름끼치는 안광, 데스 나이트였다. 어둠의 존재란 것을 증명하듯 부서진 갑주가 서서히 제 모습을 찾고 있었다. 상처를 완전히 복원시킨 데스 나이트는 눈빛을 빛내며 싸울 채비를 갖췄다. 하지만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것을 보아 상당한 타격을 입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하하. 데스 나이트도 별 거 아니잖아?" 낭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검을 종횡무진 휘두르는 이는 미첼이었다. 상대가 방어 자세를 취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맹공을 퍼부었다. 정교한 초식에 매서운 손속, 거기에다 지금까지 겪은 무수한 실전경험이 가미된 미첼의 날카로운 공격에 데스 나이트는 쩔쩔 매며 연신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공포의 대명사인 데스 나이트가 미첼에게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미첼의 우세는 한참동안 이어졌다. 계속 찌그러지던 데스 나이트의 방패가 더 이상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질 때까지……. 방패가 완전히 부서진 데스 나이트는 들고 있던 손잡이를 버렸다. 그리고 두 손으로 검을 쥐며 쌍수검 자세를 취했다. 그 때 묵직한 음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만." 얼굴이 붉게 상기된 미첼이 숨을 고르며 뒤로 물러났다. 땀으로 얼룩진 얼굴에는 자신감이 배어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림자 하나가 그에게 다가갔다. 조금 전 대련을 중지시켰던 자로써 그 역시 데스 나이트였다. 기괴한 눈빛으로 미첼을 쳐다보던 데스 나이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쉬운 상대였나 보군." 미첼이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을 했다. "뭐 상대라고 볼 수도 없죠. 헬버트론 님께서 대련을 중지시키지 않았다면 벌써 끝났을 것입니다." "데스 나이트 정도는 네 녀석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 말인가?" "………." "할 수 없군. 데스 나이트의 진정한 위력을 내가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허리춤을 더듬어 검 손잡이를 잡는 헬버트론을 보자 미첼은 다급해졌다. [다크메이지 13장 366편] 아직까지 그는 헬버트론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제럴드와 합세해도 지는 판국에서 혼자서 싸워 이길 가능성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대련에 들어갈 경우 빈집 벽 털듯 두들겨 맞을 것이 뻔했기에 미첼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헤헤헤. 데스 나이트도 나름이죠. 팔라딘에도 갓 자격을 취득한 애송이와 톱 클래스의 차이가 있는데 데스 나이트의 경우에도 당연히 그렇지 않겠습니까? 헬버트론님 정도면 누가 뭐래도 톱 클래스라 할 수 있죠." "녀석 아부는……." 퉁명스럽게 내뱉은 헬버트론이 멍하니 서 있는 데스 나이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는 새로 맞아들인 10명의 데스 나이트 중 하나로써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데이몬이 일부러 대원들과 대련을 붙였던 것이다. 헬버트론의 눈빛이 쏘아지자 그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것을 보아 헬버트론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만 들어가도록……." "알알겠겠습습니니다다." 공손히 예를 취한 데스 나이트가 몸을 돌렸다. 그의 모습은 곧 데이몬 옆에 입을 벌리고 있는 인크레시아 속으로 사라졌다. 데스 나이트가 들어가자 데이몬이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보다 실력이 별로야. 드래곤과의 싸움에서 그다지 도움이 되진 못하겠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느릿하게 다가온 헬버트론이 특유의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저놈들의 실력은 그리 나쁘지 않아. 단지 어둠의 마력이 충분하지 못해서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을 뿐이지. 만약 네가 충분한 어둠의 마력을 제공해 준다면 놈들은 상당히 강해질 거야. 뭐 그래봐야 미첼과 비슷한 정도겠지만……." "하지만 꿍꿍이를 모르는 놈들에게 어둠의 마력을 주입할 순 없잖아?" 데이몬은 새로 맞이한 데스 나이트들을 그리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이델하르크를 따르던 놈들이란 사실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데이몬에게서 시선을 거둔 헬버트론이 느릿하게 인크레시아 쪽으로 걸어갔다. "대련이 끝났으니 난 이만 들어가 보겠다." "그러도록……."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은 헬버트론이 들어가자 인크레시아를 닫았다. 그 때 그를 향해 뛰어오는 다급한 걸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경비병 하나가 붉게 상기된 표정으로 헐떡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저…….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날 찾아올 만한 손님이 있었나? 하긴 만나보면 알 수 있겠지. 이리로 안내하라." 데이몬은 별 생각 없이 손님을 맞아들이게 했다. 하지만 잠시 후 안내되어 들어온 자를 보자 데이몬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혀 생각지 못한 손님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슈나이더 장로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찾아온 손님은 류미너스 부족의 대장로인 슈나이더였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예를 올렸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뭐 그렇지요. 어서 들어오십시오." 데이몬은 반색을 하며 맞아들였다. 옆에 서 있던 슈렉하이머도 대장로를 향해 공손히 예를 올렸다. 그런데 슈나이더 대장로를 따라 땅딸막한 노인이 함께 걸어 들어왔다. 난쟁이로 밖에 볼 수 없는 땅딸막한 노인이었다. 데이몬의 눈가에 의혹이 서렸다. 그것을 간파했는지 슈나이더 대장로가 조심스럽게 설명을 시작했다. "소개 드리겠습니다. 그의 이름은 브루어스. 드워프 일족의 족장이십니다." "드, 드워프라구요?"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난데없이 드워프가 엘프 장로와 함께 나타나다니……. 대원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타난 드워프의 족장을 쳐다보았다. 외견상 보기에도 드워프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경비병의 허리에 겨우 닿을 정도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드워프 족장의 덩치는 당당했다. 굵은 목과 허리, 그리고 땅딸막한 체구에는 단단한 근육이 붙어 있었으며 무성한 수염과 눈썹에 가린 갈색 눈동자는 의지가 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데이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데이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유창한 드워프 언어였다. 베르키스의 가디언으로 있을 당시 데이몬은 여러 종족의 언어를 익힌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드워프 언어도 끼여 있었던 것이다. 상대가 정확히 자신들의 언어로 말을 걸어오자 드워프 족장의 눈가에 이채가 떠올랐다. "놀랍구려. 우리의 말을 알고 있다니……. 외모를 보니 나이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은데……." 묵묵히 듣고 있던 슈렉하이머가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외모로 그를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는 500년 전 종족전쟁 당시 활약했던 노마법사입니다. 그러니 드워프 언어를 알고 있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지요." 슈렉하이머 역시 또박또박한 드워프 언어로 말을 걸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드워프 족장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인간들의 군대에 언데드가 가세하고 있다는 말이 사실이었군. 아무튼 반갑소. 슈나이더 늙은이가 제대로 통역할지 의문이었는데 다행히 당신들이 드워프 언어를 알고 있으니……." "별 말씀을……. 그런데 무슨 일로 저희들을 찾아오셨습니까?" 데이몬의 질문에 드워프 족장은 정색을 했다. "우린 당신들과 동맹을 맺고 싶소." "예?"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데없이 찾아온 드워프 족장이 꺼낸 동맹 요청이 낯설었던 모양이었다. 그를 쳐다보며 드워프 족장은 비분강개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동맹군으로 종족전쟁에 참가하고 싶다는 뜻이요. 그 빌어먹을 오크 놈들을 대륙에서 몰아내기 위해서 우리 드워프들은 그 어떤 피해도 감수할 수 있소." "드워프도 오크에게 해를 입었습니까?" 드워프 족장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그의 입을 통해 드워프의 고충이 하나 둘 흘러나왔다. 트루베니아를 지배하는 종족이 바뀜에 따라 드워프의 생활 역시 판이하게 변해버린 것이다. 한 마디로 오크 지배하의 드워프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우린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 독자적인 사회를 이루며 살고 있소. 거기에는 그 누구도 간섭하지 못하오. 500년 전에는 모두가 우리의 전통을 인정해 주었지. 인간들을 포함해서 말이오. 하지만……." 주먹을 불끈 움켜쥔 드워프 족장의 눈가에는 분노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멍청한 오크 놈들은 우리의 전통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소. 놈들은 우릴 잡아다 노예로 부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지. 하지만 어림없는 소리요. 우린 노예로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종족이니까……." 트루베니아 전역을 손아귀에 넣은 오크 족의 힘은 드워프 마을에까지 뻗쳤다. 오크들은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드워프들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서슴없이 죽였고 죽은 드워프의 시신은 부족원들이 보는 앞에서 참혹하게 먹어치웠다. 극도로 강경한 방법으로 드워프를 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워프들은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 노예로 살아갈 바에야 죽음을 당하겠다고 서슴없이 목을 내밀었던 것이다. 상황이 그쯤 되면 한 발 물러서야 하지만 애석하게도 오크는 이성적인 대화가 통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복종 아니면 죽음이라는 기치 아래 무수한 드워프들이 목숨을 잃었고 부족의 보고는 여지없이 약탈당했다. 창고를 턴 오크들은 금붙이나 보석 종류는 모조리 드래곤에게 바치고 아티팩트나 무기 종류는 모두 자신들의 부족으로 옮겨갔다. 간신히 오크의 손을 벗어난 드워프들은 살기 위해 험준한 광산으로 숨어 들어가야 했다. 오크의 손이 닿지 않는 장소는 오로지 그곳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트루베니아에서 인간 다음으로 번성을 누렸던 드워프의 수는 현저하게 줄어버렸다. 험준한 산으로 숨어든 드워프들로 인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묵묵히 듣고 있던 슈렉하이머가 불쑥 한 마디 내뱉었다. "그렇다면 드워프들은 왜 500년 전 인간들의 편을 들지 않았습니까? 만약 드워프가 도와주었다면 인간들이 그토록 참담하게 밀리진 않았을 텐데……" "휴. 그것은 드래곤의 협박 때문이었소. 그 빌어먹을 레드 드래곤의 협박만 아니었다면 우린 머뭇거림 없이 인간을 도왔을 것이오." 드워프 족장의 얼굴에 수심이 서렸다. 사실 그의 선조들은 오크들이 인간이 사라진 빈자리를 메워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도리어 인간보다는 보물에 대한 욕심이 없는 오크가 차라리 나을 것이라 간주했다. 하지만 그것은 드워프가 행한 크나큰 착각이었으니……. 드워프는 옛날부터 드래곤의 착취대상이 되어 왔다. 드래곤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보물은 오로지 드워프 밖에 만들지 못했다. 그 때문에 보고를 채우려는 드래곤들은 즐겨 드워프 부족을 방문해왔다. 물론 드래곤들이 대화와 타협으로 보물을 손에 넣을 필요는 없었다. 그 탓에 드워프로써는 드래곤을 가장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드워프가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의 엄포에 찔끔해서 중립을 지킨 배경에는 거기에 대한 공포감이 한 몫을 했다. 한숨을 내쉰 드워프 족장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젠 드래곤이고 뭐고 상관할 것 없소.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나으니까……." "………." "우리가 오크에게 앙심을 품은 이유는 단순히 동족들을 죽여서 만은 아니오. 그대들도 알다시피 우린 타고난 장인들이오. 따라서 우리가 만든 물건에 대한 애착은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지. 500년 전 인간들은 적어도 우리가 만든 물건을 많든 적든 대가를 지불하고 가지고 갔소. 하지만 오크 놈들은 달랐소. 놈들은 보물을 손에 넣으려고 아무 거리낌없이 부족 전체를 학살……. 후, 그만 합시다. 어쨌거나 이번에는 우리 드워프들도 결정을 내렸소. 적극적으로 인간들을 도와 전쟁에 참가하기로……." 묵묵히 듣고 있던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찌 되었건 간에 동맹군이 느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생각을 마친 그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훌륭한 결정을 내리셨군요. 드워프의 참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족장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비록 우리들이 직접적인 전투에서 큰 도움이 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얕보지는 마시오. 우리가 만든 병기는 하나같이 아티팩트라 자부할 수 있는 명품들이오. 이미 우린 천 자루의 장검을 만들어 왔소. 무게가 만만치 않아 엘프의 마을에 두고 왔으니 예물이라 생각하고 받아주시오."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정작 예물을 받을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데이몬이 고개를 흔들자 족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누구에게?"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정벌군의 본영에 전 병력을 총지휘하는 사령관이 있습니다. 족장께서는 일단 그분을 만나보신 뒤 자세한 얘기를 나누도록 하십시오. 물론 그분께서는 족장님의 제의를 쌍수를 들어 환영하실 것입니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손을 들어 병사를 불렀다. 병력을 적당히 차출해서 드워프 족장을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안내할 생각에서였다. "500명의 병사를 차출해서 호위할 채비를 갖추도록 하라." 지시를 내린 데이몬은 고개를 돌려 슈나이더 대장로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대장로께서 통역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저희들은 포탈의 안전 때문에 이곳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슈나이더 대장로는 순순히 제의를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다크메이지 13장 367편] 드워프 족장과 슈나이더 대장로는 500명 남짓한 호위병력과 함께 페르슈타인 공작이 있는 본영으로 떠났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진 뒤 데이몬은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멍청한 오크 놈들이 500년 동안 많은 종족의 분노를 샀군. 그게 제 무덤 파는 일인 줄 모르고 말이야." 슈렉하이머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크에게는 원천적으로 타 종족을 아우르는 개념이 없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힘이 있었다면 설사 상대가 드래곤이라도 서슴없이 이빨을 드러냈을 것입니다." "그나저나 놈들의 단순함 때문에 일이 비교적 잘 풀리겠어. 500년 전에는 인간만의 힘으로 힘들게 싸워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약간 다르니 말이야." 데이몬과 슈렉하이머가 담소를 나누며 웃고 있는데 갑자기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의 내습이 있을 시에 울리는 비상 종소리였다. 땡땡땡땡. 슈렉하이머의 얼굴에 심각한 빛이 떠올랐다. "종소리의 위치와 방위를 보아 포탈 주변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데이몬은 이미 싸울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드디어 드래곤 놈들이 일을 벌렸나 보군. 과연 몇 마리나 왔을까?" 카심을 비롯한 용병대원들 역시 출동할 채비를 서둘렀다. 종소리는 그때까지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서둘러 포탈로 이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종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을 보니 강적이 출현한 것 같군요." 데이몬과 슈렉하이머는 이미 몸을 날리고 있었다. "십중팔구 드래곤일 걸세. 문제는 습격한 놈들의 숫자야. 세 마리 이상이면 힘들 텐데……. 일단 숲에 숨어 적의 규모를 살펴본 뒤 결정하기로 한다." 카심 용병단원들은 정신 없이 포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기지의 병사들이 무기를 꼬나쥐고 뒤를 따랐다. 정벌군에게 가장 중요한 장소인 만큼 다크 포탈 주변에는 삼엄한 방어진이 쳐져 있었다. 방어 병력들 대부분이 대공방어(對空防禦)를 염두에 두고 포진되어 있었는데 왜냐하면 포탈이 위치한 곳이 육로로는 공략하기가 극히 힘든 험지였기 때문이었다. 전면을 엘프의 숲이 가로막고 있고 후면은 감히 기어오르기도 힘든 험준한 산맥이 버티고 있었으며 양옆에는 정벌군 병사들이 곳곳에 산성을 쌓아 방어진을 형성해 놓았기 때문에 육상병력에겐 가히 난공불락이라 표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벌군에게는 드래곤이라고 하는 날아다니는 가공할 적이 존재했다. 그 탓에 이처럼 대공방어에 신경 써야 하는 것이다. 포탈 주변에는 수백 명의 마법사가 상주하며 교대로 실드를 펼치고 있었다. 병력이 이동할 때를 제외하면 포탈은 여러 겹의 포스 실드(Force shield)로 보호받는 상태였다. 그리고 포탈 주변 요소요소에 쌓아놓은 망루에는 숙련된 궁수들이 배치되어 만에 하나 있을 공습에 대처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인간들의 노력도 드래곤이라고 하는 강력한 존재 앞에서는 그리 힘을 발휘하지 못했으니……. 포탈 주변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화르르르 튼튼하게 쌓아 올린 망루들은 태반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열심히 쇠뇌를 쏘아 올리는 대공진지들도 순차적으로 무력화되고 있었다. 그 모든 참사는 고공 높이 선회하며 공격마법을 퍼붓는 세 마리의 드래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었다. 그들의 연환공격에 병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쏴라. 쏘란 말이다." 분대장들이 돌아다니며 독려했지만 애석하게도 화살 공격은 드래곤에게 통하지 않았다. 워낙 높이 날고 있었기 때문에 닿는 화살도 드물었지만 설사 명중한다 하더라도 강철보다 단단한 드래곤의 비늘을 뚫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병사들은 드래곤의 날개를 집중적으로 사격했다. 날개를 맞아 격추된 드래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틈을 타서 기사들이 공격한다면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허사였다. 드래곤들은 용의주도하게 쿼렐이나 쇠뇌의 사정거리 밖에서 공격마법을 펑펑 날렸기 때문이었다. 화살공격이 거듭해서 무위로 돌아갔고 마법사들의 마법공격 역시 드래곤에겐 통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포탈을 사수하고 있는 자들을 제외한 모든 마법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마법을 쏘아 올렸지만 드래곤들의 몸을 감싸고 있는 실드를 뚫을 수는 없었다. 드래곤들은 가해지는 공격을 유유히 허용해가며 방어진을 차근차근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토, 통하지 않아." 병사들은 맥이 빠졌다. 드래곤이 왜 최강의 생명체인지를 여지없이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처음 트루베니아에 도착해서 산재한 오크 부족을 파죽지세로 밀고 나갈 때만 하더라도 그들은 드래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도리어 오크에게 패한 트루베니아 인들을 대놓고 조롱하는 자들마저 있었다. "고작 이런 놈들에게 패해 대륙을 내주었단 말야?" 하지만 막상 드래곤의 파괴력을 실감하자 단련된 병사들도 공황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옜 트루베니아 병사들이 느낀 공포감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에겐 드래곤 슬레이어가 있다. 그러니 조금만 버텨라." 분대장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독려했고 병사들은 또다시 효과 없는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고공에서 활약하는 드래곤의 공격도 먹히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선 드래곤들은 저공비행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비록 강철보다 단단한 비늘이 몸을 덮고 있었지만 날개마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화살공격에 날개를 상해 추락한다면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 터였다. 그렇게 되면 끝장이란 사실을 드래곤들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공중 공격은 곳곳에 설치된 대공진지에만 유효할 뿐 정작 포탈에는 아무런 피해를 입힐 수 없었다. 포탈 주위에는 수십 겹의 실드가 전개되어 있었고 인간 마법사들이 사력을 다해 실드를 지키고 있었다. 드래곤의 공격으로 한 두 개의 실드가 파괴되어도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즉각 달려들어 새로운 실드를 펼쳤기 때문에 포탈에 대한 공격은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다. "이런 벌레 같은 인간들이……." 부아가 치밀었는지 레드 드래곤 한 마리가 입을 좍 벌렸다. 화르르르. 맹렬한 화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드래곤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권능인 브레스였다.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는 포탈을 덮고 있던 실드를 정통으로 직격했다.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십여 명의 마법사들이 뒤로 나뒹굴었다. 실드에 가해진 브레스의 압력으로 큰 충격을 입은 모양이었었다. 과도한 마나의 운용으로 말미암아 쓰러진 마법사의 코와 입에서는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브레스 공격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달려들어 금세 빈틈을 메꿨기 때문이었다. 레드 드래곤은 성난 눈빛으로 마법사들을 노려보았다. "저놈들을 먼저 없애야만 포탈을 파괴시킬 수 있을 텐데……." 하지만 흩어져 있는 마법사들을 공중공격만으로 섬멸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곳곳에 설치된 진지에 몸을 숨기고 있는 마법사들은 오직 지상에서만 처치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땅에 내려간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드래곤들은 별수 없이 별다른 효과를 기대하기 힘든 공중공격에만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포탈에 도착한 카심 용병단원들은 숲에 은폐한 채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함께 온 기사들은 서둘러 동료들을 지원하러 달려나갔지만 그들은 섣불리 전선에 나서지 않았다. 데이몬이 눈을 가늘게 뜨고 창공을 올려다보았다. "흠 세 마리라……." 바짝 붙어 앉은 슈렉하이머가 분석된 상황을 설명했다. "몸집을 보니 에인션트 급 골드 드래곤 하나에 웜 급이 둘이로군요. 특히 블루 드래곤은 웜 급에 접어든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상황을 보니 조금 힘들겠군." 데이몬이 수심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뒤흔들었다. 왜냐하면 카심 용병단원들이 감당할 수 있는 드래곤은 고작해야 둘이 한계였다. 하늘에서 공격을 퍼붓는 드래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공중전을 벌여야 하지만 대원들을 태우고 공중전을 벌일 수 있는 본 드래곤은 단 둘 뿐이었다. 그나마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드래곤과는 달리 본 드래곤에 탄 데스 나이트들은 철저히 근접전을 펼쳐야 했다. 때문에 3대 2라는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기란 여간해서는 힘들어 보였다. 생각을 거듭하던 데이몬은 결국 카트로이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고개를 돌린 데이몬이 은근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이번엔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카트로이는 데이몬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기지의 술 창고에 박혀 있다가 강제로 끌려온 탓에 심사가 그리 좋지 않은 모습이었다. "벌써 잊었나? 난 드래곤과의 싸움에는 절대로 가세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미 그는 카트로이를 요리할 계책을 떠올려 놓은 상태였다. "드래곤 중에서 가장 빨리 날 수 있는 놈이 블루 드래곤이라고 들었는데 그 말이 사실이냐?" 예상대로 카트로이는 발끈했다. "미친 놈. 블루 드래곤이 제법 빠르긴 하지만 화이트 드래곤도 만만치 않아. 단지 기회가 없어 증명하지 못할 뿐이야." "그렇다면 이 참에 한 번 증명해 보겠나?" 카트로이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무슨 소리지?" 데이몬은 손가락을 뻗어 막 브레스를 쏘아내고 있는 블루 드래곤을 가리켰다. "마침 적당한 놈이 있군. 덩치가 비슷해서 섣불리 꿀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한 번 해 보겠나? 싸우지 않겠다고 했지만 멀리 유인해 줄 수는 있겠지? " 눈매를 모아 블루 드래곤을 쳐다보던 카트로이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왠지 그러고 싶지가 않군." "나중에 드래곤들에게 잡혀 혼날까봐 두려운 거로군" "뭐가 어쩌고 어째?" 데이몬은 계속해서 카트로이의 자존심을 긁었다. "솔직히 말해 봐. 네놈은 블루 드래곤을 유인할 자신이 없는 거지? 가장 빨리 날 수 있는 드래곤은 역시 블루 드래곤이었군." 카트로이는 결국 데이몬의 꼼수에 넘어가고야 말았다. "빌어먹을 놈. 이번 기회에 네놈에게 확실하게 보여 주지. 적어도 비행능력에서 화이트 드래곤이 결코 블루 드래곤에 못하지 않다는 사실을……." "어디 한 번 증명해 봐." "좋다." 카트로이는 데이몬의 수작에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기세 좋게 몸을 일으켰다. 폴리모프를 시전하자 화이트 드래곤의 거대한 위용이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대원들은 웃음을 참으려고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평소에 현명하다 자부하면서도 데이몬의 얄팍한 수에 넘어가는 카트로이가 못 견딜 정도로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막 날아오르려던 카트로이를 향해 데이몬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놈을 적당히 자극해서 유인하도록 해. 너무 깊이 들어가서 멍청하게 당하진 말고……." "걱정하지 마라. 넌 네놈 일이나 신경 써." 냉랭하게 일축한 카트로이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그는 외곽에서 연신 공격마법을 쏟아 붇는 블루 드래곤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다크메이지 13장 368편] 맹렬히 날아오는 화이트 드래곤을 보자 드래곤들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응 저놈은?" 그들은 카트로이가 트루베니아의 드래곤이 아니란 사실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트루베니아의 드래곤 중에서 화이트 드래곤은 도합 넷 뿐이었고 그 중에서 갓 웜 급이 된 어린 드래곤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같이 나이가 든 고룡들이었던 것이다. 골드 드래곤 레니우스의 눈가에 긴장이 스쳐지나갔다. "저놈이 드래곤 슬레이어들을 돕는다는 멍청한 아르카디아의 드래곤이로군요. 어떻게 할까요?" 뜻밖에 대답은 바로 목 뒤에서 들려왔다. 자세히 보자 골드 드래곤의 목 뒤에는 적발이 인상적인 청년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바로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였다. 카트로이를 살펴본 베르키스의 눈가에 진득한 살기가 떠올랐다. "아르카디아에서 내 계획을 훼방놓았던 머저리 녀석이 확실하군. 그렇다면 놈들이 근처에 숨어있다는 뜻인데……." 생각을 거듭하던 베르키스는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놈들이 보유한 본 드래곤은 모두 둘. 상황을 보니 놈들은 뮤시우스를 유인한 뒤 일대 일로 공중전을 벌이려는 심산 같군. 후후후. 얄팍한 수단이지." 고개를 돌린 베르키스가 지시를 내렸다. "뮤시우스에게 전하라. 일단 놈에게 유인 당하는 척 하며 끝까지 추적해서 처치하라고……." 레니우스는 깜짝 놀랐다. "아르카디아의 드래곤을 죽이란 말입니까?" "물론. 드래곤의 긍지를 잊고 인간들의 발바닥이나 핥는 저런 녀석은 살아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니 뮤시우스에게 틀림없이 명령을 전하도록 하라." "그래도 웜 급으로 보이는데 뮤시우스가 위험하지 않을까요?" 베르키스는 어림없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비록 웜 급이라 해도 놈에겐 실전경험이 거의 없다. 다시 말해 효과적으로 싸우지 못한다는 뜻이지. 반면 뮤시우스는 인간들과 싸우며 무수한 실전경험을 쌓았다. 때문에 난 뮤시우스가 압도적인 우세 하에 이길 것이라 확신한다." "알겠습니다." 레니우스는 두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키스의 지시는 곧 드래곤 고유의 의사소통 방법인 텔레파시를 통해 뮤시우스에게 전해졌다. 명령을 받은 뮤시우스는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지 않아도 자신에게 접근하는 화이트 드래곤을 어떻게 대하나 고민하던 판국이었다. "알겠습니다. 깨끗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난생 처음 동족을 죽인다는 사실에 긴장했는지 뮤시우스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금지된 일을 행한다는 사실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뮤시우스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실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베르키스 님의 명령이니까 깊이 생각할 필요 없다." 생각을 마친 뮤시우스는 날개를 활짝 펼치며 속도를 높였다.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이트 드래곤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마주 날아갔다. 목적했던 블루 드래곤이 도리어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카트로이는 바짝 긴장했다. "반응이 상당히 빠르시군." 상대를 유인한다는 목적을 너무도 쉽게 이룬 것이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카트로이는 길게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한 차례 광소를 내지른 카트로이는 즉각 선회하며 보란듯이 속도를 높였다. "크하하하. 한 번 잡아봐라. 이놈아." 그 말에 부아가 치민 듯 블루 드래곤은 부쩍 속도를 올렸다.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는 화이트 드래곤이 목표였다. 카트로이를 쳐다보는 뮤시우스의 눈동자는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화이트와 블루, 두 드래곤의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빠르기로 정평 있는 블루 드래곤이었지만 동체가 가벼운 화이트 드래곤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두 드래곤은 눈 깜짝할 사이에 구름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그곳을 쳐다보던 베르키스의 눈빛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후. 뮤시우스를 유인했으니 놈이 나타나겠군." "놈이 나타나는 순간에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겠군요." 쓸데없이 마법공격만 펑펑 날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레니우스가 돌연 유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그들은 지상의 인간들을 궤멸시킬 만반의 채비를 갖춘 상태였다. 듣고 있던 베르키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나타나면 마법보고에 넣어 온 골렘과 리치들을 전투에 투입시킬 것이다. 그런 다음 본체로 돌아가서 놈을 처리할 테니 너와 류시케는 전력으로 나를 도와라. 인간 나부랭이쯤이야 골렘과 리치들이 잘 요리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레니우스는 이번 싸움을 반드시 이길 것이라 단정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르키스가 보유한 마법보고 속에는 무려 200여 기에 달하는 골렘들이 탑재되어 있었다. 그들이 보유한 스톤 골렘을 모조리 가지고 온 것이다. 생명체를 집어넣을 수 없었기 때문에 골렘 종류만 가지고 왔지만 여건이 허락된다면 중형 몬스터도 동원하고 싶은 것이 그들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마법보고 속의 골렘들은 대부분 스톤 골렘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는 베르키스가 만들어 낸 회심의 역작인 아이언 골렘과 브론즈 골렘이 끼여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모두 출동한다면 지상 병력과 함께 실드를 펼치고 있는 인간 마법사쯤은 어렵지 않게 궤멸시킬 수 있다. 생각을 마친 레니우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되면 포탈의 운명도 끝장이겠지요?" 에인션트 급인 자신과 류시케, 그리고 베르키스가 합세한다면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제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적수가 되지 못했다. 때문에 레니우스는 건성으로 마법공격을 쏘아대며 드래곤 슬레이어 일당들이 나타날 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슈렉하이머가 기쁜 듯 소리를 질렀다. "카트로이 님께서 마침내 성공하셨군요." "그렇군." 목적을 이뤘지만 데이몬의 안색은 여전히 어두웠다. 블루 드래곤이 순순히 유인된 것이 뭔가 꺼림칙했던 모양이었다. 도리어 옆에 서 있던 카심이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병력의 희생이 너무 큽니다. 서둘러 가세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만히 있게." 카심의 채근을 한 마디로 일축한 데이몬이 손을 가져다 턱을 괴었다. 카심용병단이 반드시 나서야 할 상황이었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베르키스 놈이 이렇게 허술하게 일을 꾸밀 턱이 없는데……. 분명히 뭔가가 있을 것 같군.' 하지만 상황은 그가 생각에 빠져 있을 정도로 여유 있게 돌아가지 않았다. "벌써 궁수대의 반이 궤멸되었습니다. 서둘러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슈렉하이머의 채근에 데이몬이 고개를 돌렸다. 슈렉하이머를 쳐다보는 데이몬의 눈빛은 왠지 모르게 착 가라앉아 있었다. "할 수 없군." 열심히 쇠뇌를 쏘아붙이던 병사 하나가 신경질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젠장. 도대체 드래곤 슬레이어들은 언제 오는 거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왔다. 드래곤 슬레이어들이야." "뭐? 정말이야?" 깜짝 놀란 병사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머리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날아가고 있었다. 뼈만 남은 동체를 가진 거대한 본 드래곤이었다. 쐐애애액. 본 드래곤이 지나가며 남긴 충격파에 몇 몇 병사들이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희열감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드디어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미 병사들은 드래곤 슬레이어들의 혁혁한 명성을 귀가 따갑게 들어왔다. 고착된 상황을 타개할 원군이 왔다는 생각에 병사들의 사기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치솟고 있었다. 엘프의 숲을 박차고 날아오른 본 드래곤은 하늘 높이 솟구쳤다. 콰루루루. 거듭 기성을 내지르던 본 드래곤은 속도를 올리며 드래곤들이 있는 곳을 향해 쇄도했다. "놈. 드디어 나왔는가?" 베르키스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는 우선 시력을 집중해서 본 드래곤에 타고 있는 자들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잠시 후 희열 어린 음성이 터져 나왔다. "데스 나이트 넷에 로브를 뒤집어 쓴 녀석 하나라……. 덩치가 작은 것을 보니 지크레이트인가 보군. 놈이 틀림없어." 베르키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나를 재배열했다. 놈을 확인했으니 이젠 마법보고를 열어 골렘과 리치들을 투입시킬 차례였다. 그런 다음 본체로 돌아가서 나머지 두 드래곤과 힘을 합쳐 놈을 상대한다면 승리는 이미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런데 마법보고를 열던 베르키스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나머지 본 드래곤은 어디로 갔지?" 그가 알기로 데이몬이란 놈이 보유한 본 드래곤은 모두 두 마리였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한 마리 뿐이었다. 그러나 베르키스는 길게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일전에 펠젠틴에서 파괴된 러셀런트를 미처 복구하지 못했나보군. 하긴 내가 생각해도 처참하게 박살내어버렸으니……." 아래를 내려다보니 엘프의 숲에서 일단의 인간들이 뛰어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대마법 갑옷을 걸친 것을 보니 아무래도 드래곤 슬레이어 일당들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르키스는 마법보고를 활짝 열었다. "인간 조무래기들아. 오늘이 아등바등 살아가는 너희들의 마지막 생이 될 것이다." 활짝 열린 마법 보고를 통해 무수한 바윗덩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슈르르르르. 강렬한 파공성과 함께 바윗덩이들이 땅을 향해 사정없이 내려꽂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던 병사들의 얼굴은 삽시간에 흙빛이 되어버렸다. "피, 피해라." "으악." 운 없는 병사 수십 명이 작렬하는 바위에 맞아 으스러졌다. 충격파로 인해 적중 당하지 않은 병사들조차 피를 토하며 나동그라질 정도였다. 포탈을 경비하던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충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그들은 오래지 않아 놀라운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동료들을 여지없이 깔아뭉갠 바위덩이들이 난데없이 거대한 거인으로 변해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또다시 여러 명의 병사가 육중한 돌주먹에 맞아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스, 스톤 골렘이다." "막아라." 뜻밖의 강적이 출현했지만 병사들은 동요 없이 스톤 골렘을 향해 달려들었다. 특히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팔라딘들은 빠짐없이 스톤 골렘에 대한 요격에 나서고 있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포탈의 경비에 최정예들만 배치했기에 골렘 요격에 나설 기사들은 충분했다. 정벌군 수뇌부들이 다크 포탈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노리는 것은 스톤 골렘 뿐만이 아니었다. 화르르르. 스톤 골렘을 에워싸고 있는 병사들에게 각종 공격 마법들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고공에 떠 있는 드래곤들에게서 가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부유마법으로 몸을 띄운 채 날아드는 리치들을 발견한 기사들이 경고성을 발했다. "리, 리치다." "마법사들을 보호하라." 리치들의 손에서 각종 공격마법이 발사되어 병사들의 생명을 여지없이 앗아갔다. 파이어 볼에 명중되어 불덩이가 된 병사들이 길길이 날뛰었고 라이트닝 볼트에 맞아 내장이 타버린 병사들이 맥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놀란 부대장들은 궁수들로 하여금 리치를 겨냥하게 했다. "리치를 잡아라." 하지만 이미 드래곤들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대공 진지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리치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리치의 몸을 감싼 실드에 맞아 허무하게 떨어질 뿐이었다. 난입한 스톤 골렘들은 최우선적으로 대공진지를 노렸다. 쾅, 콰쾅. 그 때문에 리치를 향해 화살을 날리던 진지들은 하나 둘씩 파괴되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가세한 스톤 골렘과 리치로 인해 포탈 주변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병사들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스톤 골렘 뿐만이 아니었다. "맙소사. 저게 뭐야?" 바로 지척에서 몸을 일으키는 강철 거인을 본 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그 말이 병사가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 되고 말았으니……. 퍽. 병사를 하늘 높이 날려버린 아이언 골렘이 두 팔을 쫙 펴며 포효했다. 그 옆에는 함께 낙하한 브론즈 골렘들이 서둘러 싸울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아이언 골렘이 하나, 브론즈 골렘이 여덟이었다. 베르키스는 남아있는 고급 골렘을 모두 포탈 파괴에 투입한 것이다. 수가 열도 되지 않았지만 그것들의 파괴력은 스톤 골렘 50기와 맞먹을 정도였다. "크아악." 그것을 증명하듯 달려들던 병사들이 맥없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날아가는 자들 중에는 기사단에 소속된 팔라딘들도 끼여 있었다. [다크메이지 13장 369편] 드래곤의 공중공격으로 시작된 전투는 치열한 지상전으로 번져갔다. 정벌군의 생명줄인 포탈을 지키기 위해 병사들은 사력을 다해 싸웠다. 하지만 아이언, 브론즈 골렘이 포함된 스톤 골렘 군단은 결코 만만한 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황은 점점 암울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 본 분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드, 드래곤이 하나 더 가세했어. 그것도 엄청나게 큰놈으로……." 그 말에 몇몇 병사들이 시선을 하늘로 던졌다. 그들의 눈에 지금까지 싸우던 드래곤들보다 훨씬 큰 드래곤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 들어왔다. 몸 전체가 붉은 빛을 띠고 있는 레드 드래곤이었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베르키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나를 재배열했다. "놈. 이번 기회에 완전히 끝장내어 주마." 돌진해 오던 본 드래곤이 혼비백산해서 방향을 돌렸지만 베르키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상대는 베르키스의 탐지 마법에 완전히 걸려든 다음이었다. "네 놈답지 않군. 내가 나타날 것이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모양이지?" 화라라락. 허공에 거대한 불덩어리가 생겨났다. 베르키스의 트레이드마크인 파이어 볼이었다. 마법 자체는 기초적인 마법이되 엄청난 재배열과정을 거쳐 헬 파이어보다 훨씬 강력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베르키스 독문의 파이어 볼. 이 파멸의 마법은 계속해서 마나를 빨아들여 몸집을 불려나갔다. 거듭 마나를 집중시키는 베르키스의 눈에 류시케와 레니우스에 의해 진로가 막혀 허둥대는 본 드래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들은 효과적으로 본 드래곤의 진로를 차단하며 요격에 나서고 있었다. 본 드래곤에 탄 마법사와 데스 나이트들은 두 드래곤의 연이은 마법 공격을 막아내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류시케와 레니우스는 상대의 장기가 마법방해라는 사실을 베르키스로부터 들어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 때문에 그들은 연사가 가능한 저급 마법으로 상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퍼붓고 있었다. 파이어 볼이 완성된 것을 확인하자 베르키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놈! 완전히 끝장내어주마." 맹렬히 회전하고 있던 파이어 볼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졌다. 그것은 분전을 거듭하고 있던 본 드래곤을 향해 정통으로 날아갔다. 베르키스의 공격이 시작되자 치열하게 교전하던 류시케와 레니우스가 얼른 안전 거리로 물러났다. 파이어 볼의 폭발에 휘말린다면 그들도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그 사이를 가공한 파멸마법이 뚫고 지나갔다. "헉." 파이어 볼을 본 마법사는 혼비백산해서 본 드래곤의 속도를 높였다. 콰우우우. 본 드래곤은 지크레이트는 따라붙은 파이어 볼을 뿌리치기 위해 연신 방향을 바꾸며 회피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미 베르키스의 탐지마법에 포착된 상태였으므로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파이어 볼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계속해서 지크레이트를 쫓아다녔다. 아무리 노력해도 뿌리칠 수가 없었다. 휘익. 상황이 절망적으로 변해가자 본 드래곤에 타고 있던 데스 나이트 하나가 검을 움켜쥔 채 몸을 날렸다. 모양새를 보아 파이어 볼을 육탄으로 저지하려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베르키스의 눈동자에 비웃음이 스쳐지나갔다. "멍청한 놈. 나의 파이어 볼이 그 정도로 만만해 보이나 보지?" 몸을 날린 데스 나이트가 휘두른 검이 정통으로 파이어 볼에 충돌했다. 장검을 휘둘러 파이어 볼을 베어 버리려고 한 모양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검은 파이어 볼을 쪼개기도 전에 녹아버렸다. 화아악. 파이어 볼에 접촉하자 데스 나이트의 육체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애석하게도 그의 투혼은 파이어 볼의 기세를 별달리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파이어 볼은 조금도 영향 받지 않았다는 듯 계속해서 본 드래곤을 쫓고 있었다. 위기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자 나머지 데스 나이트들도 나섰다. 그들은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이 파이어 볼을 향해 몸을 던졌다. 파이어 볼을 양단해 버리겠다는 듯 장검에 데스 블레이드를 줄기줄기 뽑아 올리며……. 화아악. 또 한 명의 데스 나이트가 사라져버렸다. 이번에는 충격이 적지 않았는지 파이어 볼의 속도가 판이하게 줄어들었다. 그것을 확인하자 데스 나이트들은 또다시 파이어 볼을 향해 육탄 돌격을 준비했다. 소멸된 데스 나이트들의 분투가 헛되지 않았는지 파이어 볼의 기세가 점차 죽어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데스 나이트가 소멸되며 발산한 어둠의 마력에 영향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르키스는 코웃음을 쳤다. "용기가 가상하군. 하지만 파이어 볼을 소멸시키더라도 역부족일 것이다. 데스 나이트를 모두 잃어버리면 네놈은 손발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레니우스와 류시케가 있는 이상 네놈은 결코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베르키스의 예상대로 파이어 볼은 본 드래곤을 끝장내지 못하고 힘을 잃어 버렸다. 하지만 사라지기 전에 데스 나이트 하나를 더 집어삼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네 명의 데스 나이트 중 셋을 집어삼키고 나서야 파멸의 불꽃이 겨우 수그러든 것이다. 파이어 볼의 추격에서 간신히 벗어난 마법사는 본 드래곤을 전속력으로 몰아 전장에서 이탈하려 했다. 그의 뒤에는 데스 나이트 한 명만이 초라하게 남아 배후를 엄호하고 있었다. "도망칠 수 없다." 버럭 고함을 지른 베르키스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허공에서 내려꽂혔다. 본 드래곤과 마법사는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가겠다는 듯 필사적으로 방향을 회피했다. 하지만 레니우스와 류시케가 이미 본 드래곤 가까이 접근해서 진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본 드래곤에 탑승한 마법사의 눈망울에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카트로이와 뮤시우스는 쫓고 쫓기는 공방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달아나던 카트로이는 이미 숨이 턱에 치달아 있는 상태였다. "헉, 헉, 그놈 더럽게 빠르군." 비행에 일가견이 있다는 블루 드래곤의 명성은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체중이 비교적 가볍다는 이점을 바탕으로 도주에 도주를 거듭했지만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상대의 거친 숨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려올 정도였다. "게다가 끈질기기도……." 더 이상 날개를 퍼덕일 힘도 없었기에 카트로이는 마침내 도주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블루 드래곤을 이곳까지 유인한 것만으로 그는 맡은 바 소임을 다한 것이다. "후후후. 이 정도면 데이몬이란 놈의 코가 납작해 졌을 터." 포탈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유인했기 때문에 더 이상 불필요하게 힘을 뺄 필요가 없었다. 거기에는 상대에 대한 방심이 큰 역할을 했다. "덩치를 보아하니 나이를 비슷하게 먹었을 터. 일단 대화를 나누다가 틈을 보아 몸을 빼야겠군." 카트로이는 한숨을 길게 내쉰 뒤 몸을 돌렸다. "이봐. 쓸데없는 추격은 그만하도록 하지." 하지만 블루 드래곤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계속해서 육박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카트로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원. 녀석. 귀머거리는 아닐 텐데……." 카트로이는 쇄도해 오는 블루 드래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상대가 접근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살짝 피한 뒤 방향을 바꿔 다시 도주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상대는 카트로이의 대응과 상관없이 빠른 속도로 계속 접근해왔다. "이 때다." 블루 드래곤이 지척에 이르자 카트로이는 재빨리 날개를 접고 중력강화의 마법을 펼쳤다. 상대를 머리 위로 지나치게 한 뒤 상황을 보아 몸을 뺄 심산이었는데 애석하게도 카트로이의 얄팍한 수작은 먹혀들지 않았다. 카트로이의 몸이 급격히 강하하자 그 위로 지나치던 블루 드래곤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공교롭게도 둘의 시선이 마주쳤는데 블루 드래곤의 이마에 난 뿔에서 자욱한 스파크가 튀는 것을 본 카트로이는 깜짝 놀랐다. "헉. 브레스를……." 모든 드래곤은 입을 통해 브레스를 뿜는다. 하지만 거기에는 유일한 예외가 있었는데 바로 블루 드래곤의 경우였다. 특이하게도 블루 드래곤은 입이 아닌 이마에 난 뿔로 전격(電擊)브레스를 뿜는다. 상대의 이마에 난 세 개의 뿔 사이에서 튀기는 자욱한 스파크는 바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파지지직.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브레스가 뿜어졌다. 강렬한 전류가 카트로이의 몸을 그대로 관통해 버렸고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쿠엑." 강력한 전기 충격으로 카트로이는 전신의 힘이 쭉 빠져 버렸다. 더 이상 날개를 놀릴 수 없게 된 카트로이의 몸은 맥없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 뒤를 블루 드래곤이 바짝 붙어 뒤따랐다. 블루 드래곤이 어느새 선회를 마치고 카트로이를 따라잡은 것이다. "으으으." 무시무시한 속도로 추락하던 카트로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상태로 지면에 쑤셔 박힐 경우 무사하지 못할 것임을 직감한 것이다. 카트로이는 서둘러 마나를 재배열했다. 일단 떨어지는 속도를 줄여야 했다. "페더 폴(feather fall)" 하지만 뒤에 바짝 붙어 뒤따르던 블루 드래곤이 디스펠을 걸어버렸기에 카트로이의 마법은 덧없이 해제되어 버렸다. 마음이 급해진 카트로이가 연거푸 마법을 걸었지만 그 때마다 블루 드래곤의 개입으로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부아가 치민 카트로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날 죽일 생각인가?" 블루 드래곤 뮤시우스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아로새겨졌다. "잘 아는군. 멍청이." 카트로이의 눈이 커졌다. "나, 날 죽인다고?" 깜짝 놀라는 카트로이의 귓전에 스산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베르키스 님의 행사를 방해한 것만으로도 넌 이미 죽을죄를 지었다. 난 이미 베르키스님으로부터 네놈을 확실하게 끝내란 당부를 받고 왔다." "미, 미쳤군. 같은 드래곤을 죽이려 하다니……." 추락하는 와중에도 카트로이는 치를 떨었다. 바야흐로 지금껏 벌어진 적도 없고, 또 벌어져서는 안될 일이 일어나려 하는 것이다. 종족을 조율하는 존재인 드래곤이 동족을 죽이려 하다니……. 등골이 싸늘하게 식어 가는 것을 느낀 카트로이가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는 듯 날개를 활짝 펼쳤다. 전격 브레스로 인한 충격이 어느 정도 사라진 상태였고 마법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날개를 이용해야 했다. 하지만 뮤시우스는 이미 카트로이의 행동을 예상하고 있었다. "캬아아악." 카트로이의 입이 벌어지며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그의 날개가 갈가리 찢어져 너덜대고 있었다. 바짝 붙어 뒤따르던 뮤시우스가 뒷발을 쭉 뻗어 발톱으로 카트로이의 날개를 난자해버린 것이다. 얇은 피막으로 구성된 날개가 날카로운 드래곤의 발톱에서 무사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극심한 통증으로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카트로이의 몸은 속도가 붙어 더욱 빠르게 추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으니……. "이놈! 쉽사리 당할 것 같으냐?" 돌연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카트로이의 눈동자에는 분노의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거대한 입이 좍 벌어지며 새하얀 기류가 뿜어져 나왔다. 화아아악. 화이트 드래곤 특유의 아이스 브레스가 쏘아진 것이다. 하지만 블루 드래곤은 별달리 놀라지도 않고 가볍게 브레스를 피해냈다. 창촐간에 뿜은 것이라 브레스가 일직선으로 날아갔기 때문에 피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했다. "멍청한 녀석이 제법 반항 할 줄도 아는군." 브레스를 피해 낸 블루 드래곤은 머뭇거림 없이 카트로이를 따라잡으려 했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71회. 크르르륵. 뮤시우스는 입을 벌려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성대에서 일어난 소리는 애석하게도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허무하게 잘려나간 목구멍에서 새어나올 뿐이었다. 데구르르. 세 개의 뿔이 달린 머리통이 혀를 길게 빼 문 채로 한참을 굴러가다 바위에 부딪혀 멈춰 섰다. 그 뒤로 머리통이 떨어져 나간 블루 드래곤의 동체가 맥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쿵. 질펀한 먼지구름이 풀썩 일어났다. 위대한 종족인 드래곤의 마지막인 것이다. 블루 드래곤의 목 부근에는 데스 나이트 하나가 소름끼치는 데스 블레이드를 뿜어내며 표표히 서 있었다. 상황을 보아 블루 드래곤의 목을 자른 것이 그의 소행인 것 같았다. 예기치 못하게 최후를 맞은 블루 드래곤 뮤시우스. 치열한 접전을 치렀음을 보여주듯 그의 몸은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강인하던 꼬리는 세 토막으로 잘려 있었고 단단한 비늘로 덮여 있던 동체는 곳곳에 자상(刺傷)을 입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날개와 다리도 성한 것이 없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몸통에서 잘려나가 볼썽 사납게 나뒹굴고 있는 것이다. 데스 나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손에 이승을 하직한 드래곤의 시체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옆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수고했어 헬버트론. 이로써 두 마리의 드래곤을 네가 직접 처치한 셈이 되는가?" "사냥할 드래곤은 아직까지 많이 남았어." 퉁명스럽게 내뱉은 헬버트론은 조용히 검을 수습하고 몸을 돌렸다. 그가 걸어가는 방향에는 세 명의 데스 나이트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나같이 피를 흠뻑 덮어쓰고 있는 자들, 상황을 보아 블루 드래곤을 죽인 장본인이 그들임을 잘 알 수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거대한 화이트 드래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치료하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목숨을 건진 카트로이였다. 거듭 힐링을 시전했지만 상처가 워낙 심했기 때문에 쉬이 낫지 않았다. 그런데 그를 향해 다가서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큰소리 탕탕 치더니 이게 무슨 꼴이야. 하마터면 좋아하는 술도 먹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갈 뻔했잖아?" 퉁명스런 말투와는 달리 데이몬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카트로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 으르렁거리는 사이였지만 이처럼 빈사상태의 중상을 입은 것을 보니 못 견디게 마음이 아파 왔다. "………." 평소 같았으면 반박하고도 남았을 카트로이였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글픈 눈빛으로 상처 치료에 몰두할 뿐이었다. 잠시 후 카트로이의 입이 열리며 침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뭐가?" "포탈을 수비해야 할 너희들이 왜 내 뒤를 따라온 거지?" 카트로이의 질문에 데이몬이 안색을 굳혔다. 모르긴 몰라도 포탈은 지금쯤 완벽히 파괴되어 버렸을 터였다. 데이몬은 한숨을 길게 내쉰 뒤 설명을 시작했다. "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포탈을 지키려 하다간 우리까지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데이몬의 얼굴에 갑자기 분노의 빛이 일렁였다. 그것은 베르키스라는 이름의 레드 드래곤에게 발산하는 원초적인 분노였다. "그곳에는 놈이 우릴 완전히 궤멸시키기 위해 함정을 파놓고 있었어.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을 말이야." "누가?" "베르키스." 이름을 듣자 카트로이의 안색이 딱딱하게 질렸다. 뮤시우스와 나눈 대화로 인해 그는 이미 베르키스란 드래곤에게 원인 모를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어떻게 놈의 이목을 속이고 빠져나왔지?" 데이몬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뒤흔들었다. "처음에는 나도 나가서 싸우려고 했어. 하지만 아무래도 뭔가 찜찜하더군. 그래서 미끼를 먼저 내세우기로 작정했어. 슈렉하이머와 포탈에서 거둔 데스 나이트 넷을 지크레이트에다 태운 뒤 먼저 내보낸 거야. 상황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해서 말이야." "그래서." "지크레이트가 나가자 아니나다를까 베르키스 놈이 바로 나타나지 않겠어? 놈은 다짜고짜 마법보고를 열어 스톤 골렘을 떼거지로 쏟아 붇더군. 아이언 골렘과 브론즈 골렘이 섞여 있는 것을 보니 아예 작정을 하고 함정을 판 것 같았어. 그래서 나중을 기약하기 위해 부득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어." 베르키스를 보고도 나서지 않았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데이몬은 말꼬리를 흘렸다. 하지만 듣고 있던 카트로이에겐 놀랄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슈렉하이머와 본 드래곤이 무사하지 못할 텐데……." 데이몬의 얼굴에 걸린 착잡한 표정이 더욱 짙어졌다. "할 수 없었어. 다행히 슈렉하이머는 라이프 포스 베슬이 있으니 되살릴 수 있겠지만 지크레이트와 데스 나이트 넷은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봐야지." "그렇다면 그곳을 빠져나온 뒤 곧바로 날 뒤따라 온 거야?"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포탈이 파괴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지만 당하고만 있을 순 없잖아? 드래곤 하나라도 대신 잡아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아서……." 카트로이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데이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절체절명에 처했던 조금 전의 순간이 마치 지금 겪고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드래곤 하트가 뽑히려는 순간 카트로이는 깨끗하게 미련을 버렸다. 하지만 그 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구원의 손길이 뻗어왔으니…….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뮤시우스가 고개를 돌렸지만 눈을 감고 있던 카트로이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드래곤 하트를 움켜쥐고 있는 앞발에서 힘이 빠지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응?" 카트로이는 무슨 일인가 싶어 살포시 눈을 떴다. 그의 눈에 비친 광경은 낯익은 네 명의 데스 나이트가 블루 드래곤을 포위한 채 사정없이 난자하는 장면이었다. 퍼퍼퍽. 피가 사방으로 튀고 있었다. 블루 드래곤은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하고 비명만 질러대었다. 푸른빛이 서린 검이 마치 무 가르듯 블루 드래곤의 비늘과 살을 가르고 뼈를 끊어냈다. 그랜드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들이 끌어올린 데스 블레이드의 위력은 정말 가공했다. 불시에 가해진 습격으로 말미암아 뮤시우스는 팔 하나와 다리 하나를 잃어야 했다. 데스 나이트들은 용의주도하게도 카트로이의 드래곤 하트를 움켜쥔 팔을 가장 먼저 끊어냈다. 쿠어어어. 전신을 관통하는 통증에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댔지만 데스 나이트들은 조금도 머뭇거리 지 않고 블루 드래곤의 몸을 난자했다. 급하게 펼쳐 올린 실드도 데스 나이트의 데스 블레이드를 막아내지 못했다. 견디다 못한 뮤시우스가 데스 나이트를 막기 위해 반격에 나섰다. 몇 가지 공격마법이 용언마법으로 캐스팅되었다. "이놈들……." 하지만 실행되는 마법은 하나도 없었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데이몬이 캐스팅되는 마법을 기다렸다가 족족 풀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던 사이 다리 하나가 또다시 잘려 나갔다. 정확히 무릎 어림에서 깨끗이 절단되어 버린 것이다. 데스 나이트들은 뮤시우스를 대상으로 쌓인 울분을 마음껏 표출하고 있었다. 마치 베르키스와 싸우지 못한 한을 풀려는 것처럼. "크으으." 거듭된 출혈로 정신마저 혼미해졌지만 뮤시우스는 결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적어도 땅에서는 데스 나이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에 뮤시우스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며 데스 나이트들을 뿌리쳤다.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뮤시우스는 마침내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베르키스가 그랬던 것처럼 완벽한 함정을 파 놓은 상태였다. 고공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본 드래곤 러셀런트. 한 때 동료였던 사이였지만 러셀런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솟구치는 뮤시우스를 찍어눌렀다. 쿵. 날개가 갈기갈기 찢어진 뮤시우스는 카트로이가 그랬던 것처럼 볼썽사납게 바닥에 쑤셔 박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헬버트론이 가차없이 달려들어 뮤시우스의 목을 잘라냈다. 블루 드래곤 뮤시우스가 생을 마감하게 된 과정은 대충 이러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카트로이가 조용히 뇌까렸다. "그토록 힘을 숭상하던 너도 결국 인간들에게 사냥 당하는 신세가 되어버렸군." 쓸쓸한 눈빛으로 뮤시우스의 시신을 쳐다보던 카트로이가 고개를 돌렸다. "다른 녀석들은 어디에 있지?" "일단 류미너스 부족으로 가서 엘프들을 피신시키라고 했어. 인간과 엘프가 서로 손을 잡은 사실을 베르키스가 알고 있으니 숲을 공격할 가능성도 배재할 순 없지. 그건 그렇고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할 것 같다." 데이몬은 초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베르키스 놈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바로 추격해 올 테니 그 전에 이곳을 피해야 해." 말을 마친 데이몬의 시선이 뮤시우스의 주검에 가서 닿았다. "생각 같아서는 잃어버린 지크레이트 대신 저놈을 본 드래곤으로 만들고 싶군. 하지만 시간이 없는 데다 멍청한 데스 나이트 놈들이 토막을 쳐 놓았으니……. 하지만 드래곤 하트는 수습해야겠지?" 시선이 닿자 라인델프가 알았다는 듯 블루 드래곤의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익숙한 솜씨로 드래곤 하트를 빼내는 것을 지켜보던 데이몬이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빨리 들어가라. 블루 드래곤의 드래곤 하트는 잘 보관해 두도록. 그리고 인크레시아 속을 뒤져서 일전에 넣어 둔 슈렉하이머의 라이프 포스 베슬을 찾아놓도록 해라." "제기랄. 요구하는 것도 더럽게 많군." 투덜거리던 데스 나이트들의 모습이 곧 인크레시아 속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데이몬은 옆에서 기성을 질러대던 러셀런트마저 쑤셔 넣었다. 거대한 본 드래곤의 동체가 거짓말처럼 그곳에서 사라졌다. "되었군." 인크레시아를 닫은 데이몬은 카트로이를 쳐다보았다. "인간으로 모습을 바꾸도록 해. 일단 몸을 피한 뒤 상처를 치료해 줄 테니……." 카트로이는 두 말도 하지 않고 폴리모프를 시전했다. 거대한 화이트 드래곤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피로 물든 은발의 청년만이 남았다. 데이몬은 카트로이를 안아든 채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추적을 염려해 마법 종류는 일체 시전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조각난 뮤시우스의 시체만이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데이몬과 카트로이가 사라지고 채 십 분도 되지 않아 거대한 그림자들이 그곳에 들이닥쳤다. 토막 난 뮤시우스의 시체를 보자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뮤, 뮤시우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베르키스를 따르던 네 드래곤 중에서 가장 젊은 뮤시우스가 영원히 대답할 수 없는 시체가 되어 대지 위에 나뒹굴고 있는 것이다. 동료의 처참한 시체를 본 레니우스와 류시케는 말을 잊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생히 살아있던 뮤시우스가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것이다.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은 세 드래곤은 동료의 시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뮤시우스가 이처럼 처참하게 생을 마감할 줄은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잠시 후 류시케의 눈동자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가증스러운……. 당장 놈을 추격하죠. 놈을 갈가리 찢어 버려야만 직성이 풀리겠어요." 하지만 베르키스는 이미 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럴 필요 없다. 놈은 이미 이곳에서 멀리 도망쳤을 테니까……. 그처럼 교활한 놈이 쉽사리 꼬리를 잡힐 턱이 없다." 베르키스는 조용히 뮤시우스를 쓸어보았다. "포탈이 파괴되었으니 인간들의 병력은 더 이상 보충되지 않는다. 이젠 드래곤과 오크의 힘을 한데 결집해 인간들의 군대를 박살 낼 차례다. 그건 그렇고……." 베르키스의 시선이 뮤시우스의 몸에 아로새겨진 자상(刺傷)에 닿았다. "불행히 데스 나이트들이 아직까진 건재한 것 같군. 아무래도 놈이 우릴 교란시킨 것 같다. 저것을 보아라." 베르키스가 가리킨 곳은 뮤시우스의 목이 떨어져 나간 부분이었다. "드래곤의 목을 일격에 자르는 기술은 평범한 데스 나이트는 꿈도 꾸지 못한다. 다시 말해 놈이 데리고 있던 최고급 데스 나이트들을 따로 빼돌렸다는 뜻이지." 레니우스가 그럴 듯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러셀런트를 죽였다는 데스 나이트들의 실력이 소문에 비해 비교적 약했습니다. 본 드래곤 하나만 뺀다면 놈은 전력을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군요." "그렇지. 하지만 상관없다. 이제부터 우린 한데 뭉쳐 다니며 인간들의 주요 거점을 차례차례 박살낼 것이니까……. 가장 먼저 없앨 곳은 감히 인간과 손을 잡은 엘프 부족이다. 놈들에게 인간과 손을 잡은 것이 애초부터 잘못된 결정이란 사실을 뼈저리게 보여 줄 생각이니까……" 베르키스는 조용히 마나를 재배열했다. 죽은 뮤시우스의 시체를 태워버릴 생각에서였다. 드래곤은 위대한 종족이다. 그러므로 죽은 시체라도 몬스터 따위에 의해 훼손되는 것은 막아야 했다. 또한 뮤시우스의 시체가 본 드래곤이 되어 자신들에게 덤비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 생각을 마친 베르키스는 묵묵히 파이어 볼을 전개했다. 푸학. 뮤시우스의 시체는 덧없이 불타올랐다. 드래곤 스케일에 싸여 있는 몸뚱이였지만 베르키스의 파이어 볼에는 저항하지 못했다. 세 드래곤은 동료의 시체가 타오르는 장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고 있었다. 동료를 죽인 인간에 대한 복수심을 묵묵히 불태우며……. 뮤시우스의 장례를 치른 세 드래곤은 곧장 엘프의 숲을 향해 날아갔다. 인간을 도운 엘프 부족에 대한 응징이 그들의 주된 목적이었다. 엘프의 숲 상공에 도착한 드래곤들은 지체 없이 마나를 재배열했다. 드래곤의 분노를 알았는지 엘프의 숲은 부르르 떨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잠시 후 베르키스의 입에서 천둥 같은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증스러운 엘프들이여. 이제부터 너희들의 숲에 드래곤의 분노가 작렬할 것이다. 이것은 너희들의 잘못된 판단에 대한 응징일지어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르르릉. 순식간에 사위가 어두워졌다. 아무리 올려다보아도 구름 한 점 없던 쾌청한 하늘이 느닷없이 검게 물든 것이다. 잠시 후 뭔가가 하늘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그것은 바로 유성의 비(雨)였다. 드래곤들은 엘프의 숲을 목표로 미티어 스웜을 전개한 것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타는 유성들이 엘프의 숲에 사정없이 내려꽂히고 있었다. 연이은 유성의 폭격에 가지가 잘려나가고 잎이 불타올랐다. 오래 묵은 거목들도 유성우의 습격에 견디지 못해 쓰러지고 있었다. 미티어 스웜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드래곤들은 엘프의 숲에 있는 나무를 하나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유성공격을 퍼부었다. 마치 숲 전체를 쑥밭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듯 한 차례 유성우가 지나가면 드래곤들은 또 다른 유성우를 소환해서 숲을 불살랐다. 꼬박 한 나절 동안 미티어 스웜을 시전한 세 드래곤은 그때서야 직성이 풀리는 듯 마법을 거뒀다. 이미 유성공격으로 인해 엘프의 숲 전역이 불타고 있었다. "인간들과 손을 잡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해야 할 것이다." 불타는 숲을 본 베르키스가 만족한 미소를 떠올리며 몸을 돌렸다. 레니우스와 류시케가 얼른 뒤를 따랐다. 드래곤들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엘프의 숲은 계속해서 불타올랐다. 광범위한 지역에 펼쳐져 있던 숲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멀리서 그 불길을 쳐다보며 피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있었다. "우리의 숲이 불타고 있어." 말없이 눈물을 삼키고 있는 이는 센티널들의 대장인 올리비에였다. 그의 뒤에는 엘프들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계속해서 훔치고 있었다. 마치 생의 의미를 모두 잃은 것처럼 말이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72회. 엘프에게 숲은 한 마디로 모든 것이었다. 그런 숲이 불타고 있는데 흔들리지 않을 엘프는 없었다. 다행히 류미너스 부족은 드래곤들의 공격에 휘말리지 않았다. 카심을 비롯한 용병단원들이 재빨리 부족에 달려와 그들을 피신시켰기 때문이었다. 사실을 듣자 올리비에 대장은 재빨리 부족원들을 통솔해서 안전한 장소로 대피했다. 슈나이더 대장로가 출타 중이었기 때문에 그가 부족원을 책임져야 했다. 그들은 엘프의 숲 바로 옆에 자리잡은 깊숙한 계곡으로 몸을 피했다. 그곳이 엘프의 전통적인 피난처였다. 계곡 속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엘프들은 타오르는 숲을 보며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보다 못한 카심이 다가가서 올리비에를 위로했다. "뭐라고 위로를 드려야 할지……. 일단 이것은 드래곤을 막아내지 못한 저희들 책임입니다." 올리비에는 눈물을 훔쳐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오. 이것은 그대들과 동맹을 맺을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오. 베르키스는 애당초 우릴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했었소. 그러므로 언젠가는 닥칠 일이 조금 빨리 다가온 것뿐이오." "지금으로썬 드릴 말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인간이 승리하게 된다면 반드시 엘프의 숲을 복원시켜 드리겠습니다." "………." "혹시 부족원들이 피해 있을 만한 곳이 있습니까?" 올리비에는 묵묵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엘프는 숲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종족이었으므로 숲이 사라진 이상 갈 만한 곳이 있을 턱이 없었다. 카심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가실 만한 곳이 없다면 일단 저희 군대에 합류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희들이 책임지고 부족원들을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올리비에는 가타부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인간들과 섞이는 것은 고고한 엘프에겐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일단 출타 중이신 대장로님께서 돌아오신 뒤 거취를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이곳의 위치를 알고 계시니 반드시 돌아오실 것입니다." 카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사실 엘프와 인간이 섞이다보면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때문에 적극적으로 합류를 권유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 데이몬에 대한 걱정이 태산같았다. '도대체 어찌 되었을까? 무사하실까?'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슈렉하이머가 데이몬으로 변장한 채 지크레이트를 타고 날아오르던 장면뿐이었다. 베르키스가 모습을 드러내자 데이몬은 즉각 그들에게 그 자리를 벗어날 것을 명했다. "너희들은 즉시 류미너스 부족으로 가라. 숲에 들어가면 센티널들이 너희들을 안내해 줄 것이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그곳으로 가서 올리비에 대장에게 전해라. 머지 않아 드래곤이 보복하러 올지 모르니 부족원들을 피신시키라고……." 카심은 데이몬의 명령을 쉽사리 납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포탈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수많은 병사들을 두고 어떻게……." "어차피 포탈이 파괴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병사들의 희생이 마음 아프긴 하지만 우리로썬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서둘러라." 결국 카심은 미첼을 위시한 대원들을 데리고 그것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숲에 들어간 그들은 오래지 않아 센티널들과 조우했고 그들의 안내를 받은 끝에 마침내 올리비에 대장을 만날 수 있었다. 때문에 현재로써는 카심이 데이몬의 안위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무래도 정벌군 본영으로 가 봐야겠군.' 생각을 마친 카심이 올리비에 대장에게 다가갔다. "저희들은 이만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본영에 가서 포탈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올리비에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십시오. 저희들은 대장로님께서 오시는 대로 거취를 결정하겠습니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목례를 한 카심이 신호를 했다. 그러자 흩어져 있던 대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들었다. 그런데 미첼의 옆에 전혀 생각지 못한 누군가가 서 있었다. 바로 일루미나였다. "저도 따라가겠어요." 부족에 남아있어야 할 그녀가 활과 화살을 소지한 채 미첼을 따라나서려 하고 있었다. 카심이 깜짝 놀라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니 일루미나." 일루미나의 얼굴에는 결연한 빛이 서려 있었다. 단단히 각오를 한 모양이었다. "지켜야 할 숲을 잃었으니 센티널의 임무 역시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할 일이 없어졌으니 당신들과 동행하겠어요." "그, 그것은……." 카심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쩔쩔 맸다. 이것은 그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생각다 못한 그는 올리비에에게 문제의 해결을 넘겼다. 카심의 눈빛을 받은 올리비에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올리비에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일루미나에게 다가갔다. 그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생명의 빚을 갚을 생각인가?" 우물쭈물하던 일루미나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꽃잎 같은 입술이 벌어지며 모기 소리 만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네."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 만약 인간을 따라나선다면 두 번 다시 류미너스의 일원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숲으로 돌아올 수도 없다." "감수하겠어요. 어차피 미첼 기사님이 아니었다면 죽음의 숲에서 마쳤어야 할 생이니까요." 올리비에는 묵묵히 일루미나를 내려다보았다. 눈동자에 고뇌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뜻을 잘 알겠다." 말을 마친 올리비에는 카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루미나를 데리고 가시오. 생명의 빚을 갚겠다는 뜻을 밝혔으니 그녀는 이제 류미너스 일족이 아니오." "생명의 빚이라니요?" 올리비에는 머뭇거림 없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엘프에겐 목숨을 구해준 자에게 생명으로 보답한다는 철칙이 있소. 빚을 갚겠다고 나선 이상 그녀는 더 이상 엘프가 아니오. 류미너스 일족의 제 4계급 센티널인 일루미나는 이제 우리 부족에 없소." 올리비에는 당혹해 하는 카심을 두고 몸을 돌렸다. "그럼 조심해서 가도록 하시오. 거취가 결정되면 마법 통신을 통해 전달하리다." 올리비에의 말이 끝나자 숨을 죽이고 있던 엘프들이 일루미나에게 눈빛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눈시울이 달아올랐지만 일루미나는 끝끝내 울음을 참았다. 보고 있던 미첼이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후회하지 않겠소?" "후회하지 않아요." 간신히 대답한 일루미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미첼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잠시 후 카심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럼 출발한다. 목적지는 정벌군 본영이다." 카심 용병단원들은 말없이 행군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본영이 있는 곳까지 위험한 행군을 해야 할 터였다. 그들은 엘프들의 배웅을 받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카심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가는 율리아나의 얼굴에는 수심이 짙게 배어 있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처럼……. 엘프의 숲에서의 패전과 포탈의 파괴로 말미암아 정벌군 본영의 분위기는 극도로 저하되어 버렸다. 단 한 번의 패전이 승승장구하던 정벌군의 사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포탈의 파괴는 정벌군에게 그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었다. 특히 총사령관인 페르슈타인 공작의 실망은 그 누구보다도 컸다. 최후의 순간에 날아온 보고,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드래곤 셋의 합공으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페르슈타인 공작은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아 한없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맥이 쭉 빠진 듯 공작은 계속해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포탈이 파괴된 것은 익히 예상했던 일이다. 하지만 드래곤 슬레이어를 잃었다는 사실은 승리에 대한 희망이 깡그리 날아간 것이나 다름없다. 아마도 이번 정벌은 아르카디아엔 돌이킬 수 없는 참사로 결말지어질 것이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전사로 말미암아 정벌군에서 드래곤을 상대할 수 있는 존재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제 드래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공작은 도무지 어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제 찾아온 드워프 족장의 동맹 제의로 의기양양했던 것도 잠시, 오늘 전해진 소식으로 말미암아 공작은 마치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진 듯 눈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는 법. 때마침 들어온 부관의 보고를 들은 공작의 심경은 한 마디로 기사회생(起死回生) 그 자체였다. "카심 용병단의 데이몬 님께서 지금 도착하셨습니다." 얼마나 급했는지 페르슈타인 공작은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어, 어서 드, 들라 해라. 아, 아니다 내가 나가보겠다." 허둥대다 책상에 걸려 넘어졌지만 아픈 것도 모를 정도였다. 정신 없이 응접실로 달려나간 공작의 눈에 태연히 앉아 있는 데이몬의 모습이 들어왔다. 공작은 불문곡직하고 질문을 퍼부었다. "어, 어찌 된 일이오. 내 분명 당신과 데스 나이트들이 드래곤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데이몬은 태연히 말을 받았다. "전사한 것은 내가 아니라 슈렉하이머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라이프 포스 베슬을 찾아놓았으니 다시 되살릴 수 있소." "그, 그렇다면 데스 나이트들은……." 데이몬은 조용히 그간의 경과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황이 이어지자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색이 점차 변해갔다. 희망이 다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설명을 마친 데이몬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애석하게도 포탈을 지키지 못했소. 죽어 가는 병사들을 보면서 나중을 기약하기 위해 물러설 수밖에 없었으니……." 페르슈타인 공작은 조용히 데이몬의 말을 잘랐다. "정말 잘 하신 일입니다. 병사들이야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지만 드래곤 슬레이어는 천금을 주더라도 구할 수 없지요. 단언하건데 데이몬께서는 정말 탁월한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게다가 블루 드래곤 하나를 처치하는 전과를 올리지 않으셨습니까." 데이몬은 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면목 없소. 기껏 가동시킨 포탈마저 잃지 않았소?" 페르슈타인 공작은 신경쓰지 말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포탈을 잃는 일은 익히 예견되었던 일입니다. 대신 50만이 넘는 병력이 트루베니아에 건너오지 않았습니까? 전 이미 포탈이 파괴되었을 때를 가정한 전략을 짜 놓았습니다." 그 말을 듣자 데이몬의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공작께서 대책을 새워놓았다니 정말 반갑구려." 페르슈타인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계획해 놓은 전략을 즉각 시행시키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다른 대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카심을 비롯한 대원들에겐 숲으로 가서 류미너스 일족을 대피시키라고 일렀소. 카심 녀석 머리가 비교적 잘 돌아가는 편이니 아마 이곳으로 찾아올 거요. 그리고 카트로이는 이리로 오는 도중 아르카디아로 떠났소." 공작의 눈이 커졌다. "예? 무, 무슨 일로……." "아르카디아의 드래곤들을 만나보러 간다고 했소. 뭐 전해야 할 말이 있대나? 아무튼 본 드래곤 하나와 데스 나이트들은 아직까지 건재하니 드래곤 하나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소." "듣던 중 반가운 말씀이군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행동에 만전을 기하십시오. 데이몬은 이제 정벌군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십니다." "후후후. 요인이라고 하니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구려." 실소를 흘리던 데이몬이 갑자기 정색을 했다. "그런데 군중에 혹시 포로가 있소? 오크 말이오." 뚱딴지같은 질문에 공작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네? 오크를 포로로 생포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린놈으로 백 마리 정도가 필요하오. 슈렉하이머를 부활시키는데 필요한 생명력을 조달해야 하니 말이오." 이유를 들은 공작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즉각 잡아다 대령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아마 한 시간 내로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낀 데이몬이 몸을 일으켰다. "좋소. 그럼 난 좀 쉬도록 하리다. 마련하면 연락 주시오." "알겠습니다." 데이몬이 나가던 것을 지켜보던 공작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에겐 다시 승리에 대한 희망이 생긴 것이다. 데이몬의 생존으로 말미암아…….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73회. 드래곤의 개입으로 인해 전세는 극도로 불투명하게 전개되었다.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와 그를 따르는 두 드래곤으로 인해 며칠 사이에 중장기사단 셋이 전멸했고 각지의 근거지가 매일같이 격파되었다. 그들 때문에 정벌군의 전략은 대폭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각 병과의 조합에 따른 효율적인 전투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르카디아의 정벌군은 과거 트루베니아 군대가 그랬던 것처럼 소규모 부대로 쪼개져 드래곤의 공습에 대응해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500년 전처럼 여러 전장에서 동시에 공습이 이뤄지는 경우가 없다는 점이다. 드래곤 슬레이어를 경계한 드래곤들은 반드시 셋이 한 조가 되어 정벌군 사단을 기습했다. 뮤시우스처럼 각개격파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벌군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소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물론 드래곤의 공격을 받는 사단은 궤멸되는 것을 각오해야 했지만 다른 사단들은 공습 걱정을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작전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벌군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보급 문제였다. 대륙 사이의 바다에서는 여전히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으므로 보급줄은 완전히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장은 곤란하지 않았지만 머지 않아 식량과 물자가 떨어질 것은 불 보듯 뻔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그런 보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획기적인 전략을 각 사단에 내려보냈다. 그것은 바로 소수의 정예부대를 이용, 오크 족 치하의 인간 노예들을 구해 와서 정벌군의 보급줄로 삼는다는 계획이었다. 계획의 실행을 위해 각급 기사단의 고급 기사들이 대대적으로 차출되었다. 작전은 일사천리로 실행되었다. 오크에게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 트루베니아 남단에 위치한 옛 트란벨 왕국의 영토, 500년 전에는 트루베니아 제일의 부국(富國)이었던 트란벨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지금은 황폐한 폐허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비옥한 토지는 변하지 않았기에 이곳에는 여러 개의 오크 부족이 단단히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하나같이 인간 노예들을 대대적으로 사육하여 번성을 구가하는 종족이었다. 영토 중앙을 관통하는 로아르 강은 주인이 바뀌었음에도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강기슭에 수십 명의 그림자가 한 데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검댕을 칠한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고 병기에도 재를 칠해 예기를 발산하지 않게 한 자들이었다. 그 중 한 명이 그림자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이 확실한가?" 옆에 서 있던 갈색 머리의 중년인이 냉큼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정보에 의하면 이곳에 위치한 오크 부족이 약 천 명 가량의 노예를 거느리고 있다고 합니다." "틀림없는가?" "그렇습니다. 이것은 불과 몇 년 전 본국의 기사들이 조사해 온 내용이고 오크라는 종족이 여간해서는 영역을 바꾸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흠." 침음성을 내지르는 자는 자토르만이라는 이름을 가진 테제로스 출신의 근위기사였다. 선발대로 포탈을 통해 트루베니아로 투입된 그는 이번 작전에 차출되어 습격대의 지휘를 맡고 있었다. 갈색 머리의 참모 역시 테제로스 인이었고 습격조 역시 테제로스의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순탄한 작전수행을 위해 각각 100명씩으로 이루어진 습격조는 대부분 한 국가 출신의 기사들로 이루어졌다. 그래야만 원활한 호흡과 사기진작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한숨을 길게 내쉰 자토르만은 곧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부하들의 사기를 돋우고 그들에게 목적의식을 불어 넣어주기 위한 연설이었다. "이번 임무는 정벌군 전체의 생존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작전이다. 이미 알고 있듯 포탈의 파괴로 말미암아 우리의 보급줄은 완전히 끊겼다. 퇴로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번 작전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우리 모두는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 혹시 이 중에서 가족이 없는 자가 있는가?" 하지만 손을 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고아 출신이 아닌 다음에야 가족이 없는 자가 있을 턱이 없었다. 자토르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끝을 맺었다. "살아 돌아가서 가족을 보려면 반드시 임무를 성공시켜야 한다. 알겠나?" "옛." "그럼 작전에 돌입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기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죽 갑옷을 입은 데다 방패에도 가죽을 씌웠기 때문에 소리는 일체 나지 않았다. 정규 기사단에 소속된 기사들이어서 움직임이 더할 나위 없이 민첩했다. 그들이 접근하고 있는 곳은 오크가 관리하는 한 노예 마을이었다. 오크에게 쿠이렉이라 불리는 부족의 산하에 있는 이 마을에는 300여 명의 전사들이 파견되어 인간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지금은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녘이었고 야행성인 오크도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기였다. 습격조들이 침투하기에는 최적의 시간대라고 할 수 있었다. 습격조들은 최대한 몸을 은폐하며 마을 외곽의 초소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외곽의 초소에서 숨이 끊어지는 소리가 미약하게 터져 나왔다. "끄륵." "킥." 습격에 나선 기사들이 최대한 소리나지 않게 신경 써서 보초의 숨통을 끊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오크의 감각은 인간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옆 초소에서 들려온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보초 하나가 습격자들을 보자 지체 없이 경고성을 내질렀다. "적이다. 인간이 습격해왔다." 습격자들은 머뭇거림 없이 몸을 드러내어 돌격하기 시작했다. 종적이 발각된 이상 속전속결만이 타개책이었고 투입된 기사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뿌우우. 뿔 나팔 소리가 숨가쁘게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마을을 에워싼 목책의 문이 굉음과 함께 닫혔다. 쿵. 집의 문이 열리며 오크 전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무랄 데 없는 대응이라 볼 수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습격자들의 실력은 오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제일 앞에서 달려가던 자토르만이 불문곡직하고 검을 휘둘렀다. "켁." 목책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던 오크 전사 두 명이 썩은 짚단처럼 쓰러졌다. 자토르만은 여새를 몰아 전사 하나를 더 쓰러뜨린 뒤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린 장검을 다짜고짜 목책 문에다 꽂아버렸다. 퍽. 군데군데 쇠로 보강된 견고한 문이었지만 오러 블레이드에는 저항하지 못했다. 목책문은 허무하리 만큼 쉽게 부서져 나갔고 그곳을 통해 습격자들이 봇물 터지듯 밀려들어갔다. 뒤로 이어진 것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습격에 투입된 기사들은 반 이상이 오러 블레이드를 구사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다. 그런 고급 기사들이 100명이나 몰려들었으니 고작해야 300 남짓한 오크 전사들에게 막아낼 도리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오크 전사들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마치 어른과 어린아이가 싸우는 듯한 형국이었다. 글렀다는 것을 알아차린 오크 전사 몇이 슬그머니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부족에 가서 지원을 청하려는 심산에서였지만 애석하게도 자토르만의 날카로운 이목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한 마리도 놓치면 안 된다. 모조리 죽여야 한다." 그 말에 서너 명의 기사들이 싸우던 상대를 내버려두고 몸을 날렸다. 하나같이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도주하던 오크 전사와의 거리는 급격히 좁혀들었다. 거리가 가까워진 것을 알아차린 기사 하나가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힘껏 집어 던졌다. "킥." 목 뒷부분에 단검이 박힌 오크 전사가 그대로 꼬꾸라졌다. 동료의 죽음에 멈칫 했던 옆의 오크 전사에게도 어느덧 죽음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었다. 검광이 번쩍 하는 순간 달리는데 전념하던 오크 전사의 허리가 뎅겅 잘려나갔다. 상체는 그 자리에 쑤셔 박혔고 하체는 몇 걸음 더 나아가고 나서야 풀썩 쓰러졌다.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던 오크 전사 둘 역시 기사들의 손에 생을 하직했다. 오크 전사들을 처리한 기사가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보니 상황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300에 달하던 오크 전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피바다 위에 나자빠져 있었다. 자토르만이 굳은 표정으로 피해 보고를 듣고 있었다. "사망 한 명, 그리고 중상이 둘입니다. 경상자가 다섯 있기는 하지만 싸울 수는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를 잃다니 안타깝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계획했던 대로 임무를 수행하라." "알겠습니다." 기사들 뒤를 따라온 마법사들이 바닥에 공간이동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이동하는지는 오로지 마법사들만 알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피를 흠뻑 덮어쓴 기사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집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들은 굳게 잠겨 있었다. "열어라. 열지 않으면 부수고 들어가겠다." 그러나 열리는 문이 없었기에 기사들은 어쩔 수 없이 문을 부순 다음 노예들을 끌어내야 했다. 피골이 상접한 노예들이 벌벌 떨며 기사들의 손에 이끌려 나왔다. 자토르만은 우선 그들을 한데 끌어 모으게 했다. 공포에 질린 노예들의 시선이 자토르만에게 집중되었다. '노예 생활에 익숙해진 자들이니 엄하게 다루라고 하셨지.' 페르슈타인 공작의 당부를 떠올린 자토르만은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오늘 부로 우리 아르카디아 정벌군에 차출되었다. 이제부턴 오크가 아니라 우리 정벌군 병사들을 위해 일해야 할 것이다." 모여든 노예들은 웅성거리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노예들 사이에서 중년 사내 하나가 걸어나왔다. 적의 어린 눈빛을 흘리는 것을 보니 아르카디아 사람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린 거기에 동의할 수 없소. 지금까지 아르카디아 사람들과 어울렸다가 목숨을 부지한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소." 자토르만은 옆에 서 있던 기사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퍽. 중년 사내는 복부를 움켜쥐고 그대로 꼬꾸라졌다. 마나가 실린 일격을 얻어맞았으니 배겨날 도리가 없었다. 자토르만은 손가락을 뻗어 어지럽게 널린 오크 전사의 시체를 가리켰다. "명령을 듣지 않거나 계속해서 오크의 노예로 살고싶다는 자는 저 꼴로 만들어 주마. 어차피 너희들에게 선택권은 없다. 죽고싶지 않다면 무기한동안 무보수로 우릴 위해 일해야 한다." 그 때 중년 사내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들었다. 곧 쥐어짜는 듯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우릴 노예로 부리겠다는 뜻이구려. 그렇다면 당신들 역시 오크와 다를 바가 없는 자들이오." 자토르만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한 가지는 다를 것이다. 적어도 우린 인간을 잡아먹지는 않으니까……." 자토르만의 한 마디에 중년 사내의 말문이 콱 막혀 버렸다. 그러던 사이 마법사들이 공간이동 마법진을 완성했다. 도합 열 군데였다. "다 되었습니다." "이동한다." 자토르만은 두 말도 하지 않고 지시를 내렸다. 명령을 받은 기사들은 거칠게 노예들을 밀어붙였다. 중년 사내는 자토르만이 직접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자 움직여라. 꾸물거리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 "모두 마법진에 올라서라." 기사들의 거친 손짓에 노예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마법진 위에 올라서야 했다. 빠진 자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자토르만이 손짓을 했다. 그것을 본 마법사들은 지체 없이 공간이동 마법을 실현시켰다. "워프." 마법진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고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은 빛무리와 함께 사라졌다. 워프를 시행시킨 마법사들은 지체 없이 자신들을 위한 마법진에 올라섰다. 그들의 모습 역시 그곳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이런 일은 트루베니아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난생 처음 공간이동을 해 본 노예들이 도착한 곳은 산등성이 외진 곳에 마련된 외딴 마을이었다. 물론 정벌군에 의해 점령된 지역이기도 했다. 그곳에는 그들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피골이 상접한 몸에 누더기를 걸친 몰골을 보니 다른 곳에서 잡혀 온 노예들인 것 같았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기사들은 잡혀 온 노예들 중에서 젊은 청년만을 따로 추려냈다. 청년들의 수는 의외로 얼마 되지 않았다. 700명에 가까운 노예들 중에 청년은 고작해야 일백 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오크들이 틈만 있으면 반란의 소지가 있는 젊은이들을 추려서 잡아갔기 때문이었다. 노예들은 대부분 중장년이었고 여자가 훨씬 많았다. 기사들은 추려낸 젊은이들을 옆으로 끌어 모았다. 미리 추려진 듯한 50명 가량의 청년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분류작업이 끝나자 자토르만은 뚜벅뚜벅 걸어가서 책임자로 보이는 장교에게 서류를 건넸다. "난 89 습격대를 맡고 있는 자토르만이오. 임무를 완수했지만 노예가 정보부에서 파악했던 것보다 많지 않았소. 잡아온 노예는 도합 육백 구십 삼 명. 그 중에 남자가 이백 구십 일명, 나머지는 여자와 아이들이오. 징집된 청년은 모두 백 사명. 해야 할 일이 많으니 빠른 확인을 바라오." 장교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넘겨받은 뒤 노예들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74회. 그 동안 청년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들의 운명을 추측해 보기 시작했다. 이들이 왜, 무슨 이유로 자신들을 따로 추려냈는지 알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확인을 마친 장교가 자토르만에게 군례를 올렸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육백 구십 삼 명의 노예를 확실하게 인수했습니다." 자토르만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난 다른 임무를 하달 받으러 가겠소. 대신 사망자의 시신과 부상자의 치료를 당신들에게 일임하겠소." "알겠습니다." 모든 것을 넘긴 자토르만이 몸을 돌렸다. 다시 본영에 돌아가서 새로운 임무를 하달 받아야 했기 때문에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비롯한 습격조 기사들은 청년들을 데리고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자신들만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려하자 청년들이 불안한 듯 주춤거렸다. 하지만 그때마다 기사들이 사납게 눈을 부라리며 밀쳤기 때문에 청년들은 어쩔 수 없이 마법진 위에 올라설 수밖에 없었다. 놀라운 점은 그 과정에서 아무런 반항이 없다는 점이다. 청년들은 체념한 듯한 눈빛으로 순순히 지시에 따랐고 마을 사람들도 웅성거리기만 할 뿐 한 명도 나서서 제지하려 하지 않았다. 노예 생활에 얼마나 길들여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인원을 점검해 본 자토르만이 명령을 내렸다. "출발한다." 100명의 기사들과 150 남짓한 청년들은 눈부신 광휘와 함께 공간이동 마법진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장교는 잡혀 온 노예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장교말고도 100명 가량의 병사들이 창검을 움켜쥔 채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곧 장교의 일장연설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곳 143 집단 보급촌을 책임지고 있는 하벨이라고 한다. 그대들을 환영한다. 우리 정벌군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할 것이며 생활은 당분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 오크를 위해 해 왔던 대로 우릴 위해 열심히 일하면 된다." 그 때 노예들 사이에서 불쑥 음성이 터져 나왔다. 자토르만에게 대들었던 바로 그 중년 사내였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요? 볼 일을 마치고 나면 그냥 내버려두어 오크의 보복 대상이 되라는 뜻이오?" 하벨이라 이름 밝힌 장교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중년 사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중년 사내는 추호도 물러서지 않고 눈빛을 맞받았다. 하벨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우리의 임무는 트루베니아에서 오크의 씨를 말리는 것이다. 같은 인간들이 오크의 노예로 힘들게 살아가다 때가 되면 잡아먹히는 것을 묵과할 수 없기 때문에 페르슈타인 공작전하께서는 친히 트루베니아 정벌을 결정하셨다. 이미 그 계획의 실현을 위해 50만에 달하는 대군이 트루베니아에 건너온 상태다." 중년 사내의 눈이 커졌다. 물론 그는 대규모 정벌군이 트루베니아에 건너왔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동의 자유가 없는 데다 노예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오크들이 사실을 엄중히 비밀로 붙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을 잡아온 기사들을 단순히 몬스터 사냥을 위해 건너온 자들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르카디아에서 자신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무려 50만에 달하는 대군을 투입하다니……. 중년 사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떠듬거렸다. "그, 그 말이 사실이오?" "그렇다. 이번 전쟁에는 아르카디아에 있는 모든 왕국들의 정예들이 투입되었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트루베니아에는 그대들에게 보복할 오크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 "하지만 전쟁의 결말이 누구의 승리로 끝날 지는 아직까지 불투명하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대들이 열심히 일할수록 우리가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이 끝날 경우 우린 어떻게 되는 것이오." 하벨은 짧게 잘라 말했다. "그 때는 노예가 아닌 자유신분으로 돌아간다. 아마도 트루베니아에 새로 건국되는 국가의 국민으로 살게 되겠지? 오크에게 잡혀 먹히는 것을 겁내지 않고 자유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우릴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 물론 기한은 정해지지 않았고 보수도 없다. 단 그대들이 먹고 입을 것만은 책임지고 보장하겠다." "그렇다면 아까 데리고 간 청년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오." "그들은 정벌군 병사로 징집되었다. 소정의 훈련과정을 마친 뒤 오크와의 전투에 투입될 것이다." 하벨의 설명을 들은 중년 사내는 생각에 잠겼다. 깊이 생각해보면 꼭 불행이라고 볼 수 없었다. 희망이 없는 오크의 노예 생활에 길들여진 마을 사람들. 그들이 자유를 되찾는 것은 중년 사내가 꿈에도 바라마지 않던 일이었다. 하지만 강력한 오크의 대군과 그들의 뒤를 돌봐주는 드래곤을 생각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50만이라는 대군이 건너왔다고 하지만 오크의 수는 그 몇 배가 넘었다. 특히 사내는 드래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전무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강제로 끌려왔다고 애걸하더라도 오크는 분명히 우릴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 이들에게 기대는 수밖에…….' 결정을 내린 사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겐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었다. "좋소. 협조하겠소." "그대의 이름은?" "바르톨로라고 부르시오. 지금은 아니지만 얼마 전까지는 우리 마을의 촌장을 맡고 있었소" 하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지금 이 시간부터 그대를 마을 사람들을 총괄하는 책임자로 임명하겠다. 이곳에는 그대들말고도 다른 마을에서 잡혀 온 사람들 삼백여 명이 있다. 그러니 그대가 모든 사람들을 맡아 불협화음 없이 잘 통제해 주기 바란다." 뜻밖의 제의에 잠시 망설이던 바르톨로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전쟁이 어떻게 결정될 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적어도 마을 사람들이 오크에게 잡혀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에겐 더 이상 바라는 바가 없었다. "알겠소. 적극적으로 협조하리다." "병자가 생기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도록……. 통신과 마법진 관리를 위해 마법사 두 명이 상시 배치되어 있으니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알겠소." 바르톨로의 눈동자에는 묘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일말의 희망이었다. 이것은 승률이 극히 희박한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실패하면 죽을 테지만 성공한다면 노예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이길 가능성이 희박한 전쟁이긴 하지만. 그는 불안해하는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마을로 들어갔다. "어서 새로운 거처로 들어갑시다." 다른 노예들이 살던 마을인 듯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가족들을 데리고 바르톨로 촌장이 지정해주는 집을 하나씩 찾아 들어갔다. 초창기의 분전으로 말미암아 정벌군은 상당히 넓은 영토를 점령한 상태였다. 그 최전선에는 가장 먼저 투입된 크로센 제국의 1군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의 강을 사이에 두고 오크의 대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거의 매일같이 강을 건너온 오크 전사들과 접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최고의 정예인 1군단 병사들은 번번이 오크 습격대를 격퇴시켰다. 아직까지 드래곤의 공습은 가해지지 않아 전력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1군단장을 지휘하는 미하일 자작의 산하에는 모두 10개의 사단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단들 중 안티노프 남작이 지휘하는 제 4사단에 어느 날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다소의 물자와 함께 보충병이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정작 지휘관인 안티노프 자작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충병들의 수준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허. 기가 막히는군." 그의 앞에는 500명 정도의 청년들이 오들오들 떨며 서 있었다. 하나같이 피골이 상접한 몸을 보니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잔뜩 겁에 질려 있는 청년들의 모습을 본 안티노프 자작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도대체 이것들 가지고 어떻게 전투를 치르라고……." 그들은 바로 잡아온 노예들 중에서 차출한 청년들이었다. 보급줄이 막혔기 때문에 소모되는 병력을 보충하는 방법은 오직 이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페르슈타인 공작은 노예 징집병들을 모두 크로센 제국 출신의 사단에 배치했다. 훗날을 기약하기 위한 안배였는데 정작 지휘관들이 그들 때문에 한창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니……. "어떻게 해서든 이놈들을 훈련시켜 쓸 만한 병사로 만들어야 한다. 전쟁에서 이긴다면 타국의 군대는 모두 아르카디아로 돌아갈 테니 말이다." 하지만 한숨이 계속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 남작은 지체 없이 부관을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저들에게 갑옷과 무기를 지급한 뒤 예비대에다 배치하라. 당분간은 전투에 참가시키지 말고 훈련만 열심히 시키도록……. 잘 먹여 살이 오른다면 그런 대로 병사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안티노프 남작의 눈빛이 번뜩였다. 페르슈타인 공작에게서 직접 내려온 명령이 떠오른 것이다. "오랫동안 노예로 살아왔던 탓에 저들은 오크에 대해 본능적인 공포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저들에게 전투가 끝난 뒤 전장을 정리하는 임무를 맡겨라. 부상 입은 오크를 계속해서 처치하다보면 공포심도 자연히 사라질 테니까……." "예." 뭔가를 생각해 보던 남작이 재차 명령을 내렸다. "저들에게 잘 훈련된 병사들을 하나씩 붙여 주도록……. 제대로 병사노릇 할 때까지 그들로 하여금 이끌게 해야 할 것 같다. 아무리 간단한 임무라도 저들만으로는 안될 테니 말이다." 부관은 공손히 예를 취한 채 물러났다. 공포에 질려있던 보충병들도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그곳을 떠났다. "지금은 비록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지만 용감무쌍한 1군단 병사들과 함께 어울리며 싸우다 보면 단련되지 않을 수가 없겠지?"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리라 마음먹으며 안티노프 남작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과연 이번 전쟁의 향방이 어떻게 결정될지……." 인간의 불확실한 미래를 보여주려는 듯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여 있었다. "정신이 드시오?" 마치 꿈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에 슈렉하이머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낯익은 데이몬의 얼굴이었다. "데이몬?" 데이몬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갔다. "그렇소. 대승정을 다시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구려. 지금 생각하니 당신을 리치로 만든 게 정말 잘한 것 같소. 그렇지 않고서야 당신을 다시 부활시킬 수 있었겠소?" "………." 슈렉하이머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몸 속에 생명력이 충만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다른 누군가의 생명력을 꽉꽉 채워 넣은 것 같았다. 그의 눈구멍에 괴이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절 소생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인의 생명력이 필요한데……." 데이몬이 재빨리 그의 말을 받았다. "포로로 잡은 오크를 사용했지. 베르키스 놈의 레어에서 신물나게 봐온 광경이었기 때문에 별달리 어려운 것은 없었소." 말을 마친 데이몬이 바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뼈와 가죽만 남은 오크의 시체가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 몸집이 작은 것을 보니 어린놈들만 골라 투입한 것 같았다. 슈렉하이머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뒤흔들었다. "오크의 생명력으로 되살아나다니 어이가 없군요. 아무튼 데이몬을 다시 만나게 되어 저 역시 반갑습니다." "천만에요. 대승정의 희생 덕분에 베르키스 놈이 파놓은 함정을 피해갈 수 있었지요. 덤으로 블루 드래곤 하나를 처치할 수 있었고……." 슈렉하이머의 눈에 가볍게 놀람이 스쳐지나갔다. "드래곤을 처치 하셨다구요?" "그렇소. 그 자리를 빠져나온 뒤 카트로이가 유인해간 블루 드래곤을 쫓아가서 숨통을 끊어버렸지. 아마 놈들은 당분간 혼자서는 나다닐 수 없을 것이오." "잘 하셨군요." 슈렉하이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몬과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베르키스의 파이어 볼에 맞아 소멸되던 때가 떠올랐다. 정말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끔찍한 기억이었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75회. 기억을 떨쳐버리려는 듯 슈렉하이머가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일행들은 무사합니까?" "카심을 비롯한 대원들은 무사히 본영에 도착했소. 뭐 꼬리가 하나 달리긴 했지만……." "꼬리라니요?" 데이몬은 미소를 지으며 일루미나가 미첼을 따라 본영에 왔다는 사실을 일러 주었다. 그리고 일루미나의 미모로 인해 미첼이 전 정벌군 병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 또한 말해 주었다. "미첼 녀석이 드디어 소원을 이룬 게지. 그토록 열심히 쫓아다니더니……." "그럴 것입니다. 일루미나 양은 아름답기로 소문난 엘프 중에서도 특히 아름다운 여성이니까요." 슈렉하이머는 잘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와 인간이 맺어지는 것을 그토록 경계하던 그였지만 미첼의 경우는 예외였다. 그라면 부족을 떠난 일루미나를 잘 보살펴 줄 수 있으리라. 그 때 슈렉하이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떠올랐다. "그런데 포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데이몬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애석하게도 파괴되었소." 그 말을 듣자 슈렉하이머의 눈빛이 풀렸다. 크게 낙심한 모양이었다. 데이몬이 부드러운 어조로 그를 위로했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용의주도하게 대비책을 세워놓았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어떤 대비책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데이몬의 입에서 설명이 흘러나왔다. 오크의 관리하는 인간 노예들을 빼돌려 그들의 노동력으로 식량을 마련하고 또한 병력도 상당수 충당한다는 설명에 슈렉하이머는 그럴 듯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의 상황에선 최선의 선택이로군요." "게다가 무기 종류는 드워프들이 공급해 주기로 약조가 되었소. 물론 대가는 전쟁에서 승리한 뒤 치른다는 조건으로 말이오. 참 그러고 보니 당신에게 알려줄 것이 있소." "무엇입니까?" "간악한 베르키스 놈이 류미너스 부족의 숲을 깡그리 태워버렸소." 슈렉하이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그런 일이……." "엘프에겐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숲을 태워버리다니 정말 잔인무도한 놈들이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드워프들이 당분간 류미너스 일족에게 거처를 제공하기로 했소. 그리고 페르슈타인 공작도 약조를 했소.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펠루시아 산맥 동쪽을 모두 엘프의 영토로 인정해 주기로……." 슈렉하이머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그것 참 잘 된 일이군요. 다른 종족들과의 협력은 전쟁수행 뿐만 아니라 후에도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튼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만 모든 것이 현실이 될 수 있소." 데이몬은 눈빛을 번뜩이며 구상해놓은 계획을 털어놓았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드래곤 로드를 처리하는 것이오. 그를 없애 실버 드래곤의 저주를 풀어야만 아르카디아에 대기 중인 100만 대군을 불러들일 수 있소. 생각 같아서는 베르키스 놈과 한 판 붙고 싶지만 참아야 할 것 같소. 놈이 정벌군의 근거지를 계속 기습하는 동안 우린 모든 힘을 모아 드래곤 로드를 처리해야 하소." 슈렉하이머는 데이몬의 의견에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몬의 말씀대로 드래곤 로드를 처리하는 것이 더욱 시급한 것은 사실입니다." "공습에 나선 드래곤이 의외로 많지 않다는 것이 현재로써는 천운이오. 베르키스를 위시한 세 놈이 날뛰고 있긴 하지만 피해는 생각보다 크지 않으니 꾹 참고 기다립시다. 놈들이 참지 못하고 분산할 때를 노려야 하오." "알겠습니다."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둘의 눈동자에는 결의의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 무렵 베르키스는 오크 군의 본영에서 게덴하이드를 만나고 있었다. 레니우스, 류시케와 함께 정벌군의 근거지 몇 개를 박살낸 그는 곧장 오크의 본영으로 날아왔다. 게덴하이드는 이미 해안봉쇄에 나선 백만의 병력을 불철주야 움직여 전장 근처에 집결시켜 놓은 상태였다. 그들이 가세한다면 전세는 판이하게 바뀔 것이 분명했다. 난데없이 드래곤 셋이 나타나자 오크 전사들은 부들부들 떨면서 그들을 게덴하이드에게로 안내했다. 오랜만에 주인을 만난 게덴하이드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는 듯 고개를 수그렸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비록 인간들의 기세가 드높긴 하지만 주인님께서 도착하셨으니 머지않아 놈들을 일패도지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베르키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게덴하이드를 쳐다보았다. "시킨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주제에 말이 많군. 게덴하이드." 그 말에 게덴하이드는 움찔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했건만 베르키스는 전혀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요, 용서하십시오. 속하의 능력이 미천해서……." "흥. 미천한 것을 아는 녀석이 일을 그 따위로 처리해?" 냉랭하게 코웃음을 친 베르키스가 저벅저벅 걸어갔다. 하지만 게덴하이드는 일언반구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용기를 낸 게덴하이드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주인님께서 오셨으니 이제 제게서 무거운 짐을 덜어 주십시오. 수백만 오크 전사들을 총괄하는 자리는 제겐 너무 버겁습니다." 베르키스는 냉랭하게 말을 잘랐다. "아직은 아니다. 나에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당분간 자리를 유지하라. 그건 그렇고 인간들이 대대적으로 노예들을 빼내간다고?" "그렇습니다. 놈들이 뛰어난 실력을 가진 기사들을 대거 투입했기 때문에 많은 노예들을 잃었습니다. 적어도 놈들은 병력의 질에서만큼은 500년 전의 트루베니아 놈들보다 월등합니다." 베르키스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최후의 발악이로군. 하긴 보급물자를 장만하기 위해서는 고양이 손이라고 빌려야 할 테지." 베르키스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아직까지 드래곤 로드로부터 연락이 없었기 때문에 그라도 나서서 인간들의 기세를 꺾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병력을 출정시켜라. 목표는 강 건너편에 진을 치고 있는 아르카디아의 선발대다." "예? 아직까지 준비가 끝나지 않았……." 베르키스의 서늘한 눈길을 느낀 게덴하이드는 두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수그렸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사들에게 내가 지원할 것이라 일러라." "알겠습니다." 게덴하이드는 두 말도 하지 않고 복명했다. 드래곤들이 가세한다면 이것은 이미 이긴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인간들의 군대가 아무리 정예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말이다. "오는군." 백발이 지긋한 노무장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의 이름은 페다인. 테르비아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4군단을 책임지는 총 사령관이었다. 그는 도강해오는 수많은 오크 전사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거리가 제법 멀었지만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그에겐 강을 건너오고 있는 오크들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가까이 보였다. 오크의 진군을 보면서 페다인 사령관은 뭔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상하군. 단 하루 사이에 강의 수위가 저토록 낮아지다니……." 오크 대군과 4군단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강은 그리 깊지 않았다. 하지만 맨몸으로 건널 수 있을 만큼 얕은 것도 아니었다. 건너기 위해서는 헤엄을 쳐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경계선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오크들은 마치 투신 자살이라도 하려는 양 일제히 물로 뛰어들고 있었다. 유심히 쳐다보았지만 물 속으로 잠겨드는 오크는 없었다. 인간보다 키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강폭이 그리 넓지 않았기 때문에 오크의 선진이 어느새 이쪽 강기슭에 도착하려 하고 있었다. "이상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군." 페다인 사령관은 생각을 접고 명령을 내렸다. "각 병단은 싸울 채비를 갖추어라. 공격은 놈들의 1진이 강을 건너왔을 때 시작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4군단 병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시무스 1세의 야망에 의해 조련된 테르비아의 병사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역만리 머나먼 트루베니아 대륙에서 오크와 싸워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하지만 페다인 사령관은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인간과 싸우는 것보다는 오크를 죽이는 것이 백 번 낫지." 건국이래 아르카디아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전쟁이 벌어졌고 그로 말미암아 인간에게는 엄청난 전쟁경험이 축척되었다. 특히 테르비아는 유독 전쟁을 많이 치른 왕국이었다. 그 때문에 4군단 병사들은 혹독하게 단련된 정예중의 정예라고 볼 수 있었다. 오크를 맞을 채비를 갖추는 부관들을 둘러보며 페다인 사령관은 심호흡을 하며 작전을 설명했다. "선봉은 중장기사단이 맡는다. 그들로 하여금 적의 진형을 깨뜨린 뒤 순차적으로 돌격할 것이다. 중장기사들이 제 역할을 해 준다면 오크 놈들을 모두 강물 속에 박아 버릴 수 있다. 중장기사들에겐 오크의 전열을 무너뜨린 뒤 강을 통해 빠져나가도록 일러라. 오크가 건너올 수 있을 정도로 강이 얕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작전의 개요를 들은 부관이 즉시 복명했다. "알겠습니다." 오크 전사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강을 건너오고 있었다. 녹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병기를 한껏 치켜든 볼썽사나운 모습이었다. 1차로 투입된 오크 선진이 어느덧 강기슭에 올라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그 뒤로 강을 건너온 오크 전사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페다인 사령관은 중장기사단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기사단은 전원 진격하라. 저주받은 오크 무리를 깡그리 물 속에 박아버리도록 하라." "와아아아." 명령이 떨어지자 중장기사들이 일제히 돌격을 시작했다. 두두두두. 철갑을 두른 채 오와 열을 맞춰 돌격하는 중장기사단의 모습은 마치 검은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가공할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오크의 전열을 깨뜨린 무시무시한 기마 군단은 아직 채비도 갖추지 못한 오크 전사들을 향해 사정없이 쇄도해 들어갔다. "취익." 난폭하게 쇄도해 들어오는 중장기사단을 보자 오크들이 눈에 띄게 술렁거렸다. 험악한 기세에 겁을 먹었는지 서너 명의 전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칠 정도였다. 말 탄 기마병은 그 높은 키만으로도 보병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압감을 주는 법이다. 그 때 분대장 급으로 보이는 오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취익. 겁먹지 마라. 베르키스 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분께서 돌보시는 이상 인간은 결코 우릴 이기지 못한다." 그 말을 듣자 오크 전사들의 눈에서 흉포한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취익. 그렇다. 500년 전 우리의 선조들도 해 냈는데 우리라고 못해낼 리가 없다." 전사 하나가 동조하고 나서자 분대장은 더욱 기가 살았다. "췩. 인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죽여버리고 그 고기로 떠들썩하게 향연을 벌이자. 싸우자. 용맹스러운 타쟈르의 전사들이여." 전의에 휩싸인 오크 전사들은 서둘러 대 기병 방어진을 갖추기 시작했다. 중장기사단의 돌격을 저지하기 위해 준비해 온 나무 말뚝을 45°각도로 치켜세운 뒤 일단의 전사들이 달라붙어 그것을 튼튼하게 지지했다. 그 뒤에서는 막 건너온 궁수들이 조악한 활의 시위를 한껏 당겨 화살을 먹였다. 통나무를 엮어 만든 대기병 장애물이 곳곳에 설치되었다. 앞서 궤멸 당한 오크 부대와는 달리 이들은 조악하나마 대기병 방어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달려오는 중장기사들의 눈빛에는 가소롭다는 듯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고작 저 따위 대기병 방어진이라니……." "이렇게 약해빠진 놈들이 어떻게 트루베니아를 점령했지?" 오크 전사들이 나름대로 사력을 다해 세운 방어진이었지만 중장기사들은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저 정도라면 어렵지 않게 돌파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전투에 이골이 난 기사들이었다. 게다가 아르카디아에서 싸울 때에는 오크들이 펼친 것보다 훨씬 위력 있고 까다로운 대기병 방어구를 수도 없이 돌파한 전례가 있었다. 물론 피해 없이 돌파할 수는 없었지만 중장 기사들은 오크의 전열이 단 일격에 흐뜨러질 것이란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리더로 보이는 중장기사가 창을 휘저으며 고함을 질렀다. "테르비아의 명예로운 기사들이여 오크의 방어진을 단숨에 꿰뚫어버리자!." 선두에 선 중장기사들이 자세를 낮추며 오크의 진형에 난입할 채비를 갖췄다. 창과 말발굽으로 가로막은 오크들을 사정없이 짓밟을 각오로 말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일어나는 법이다. 콰르르릉. 난데없이 굉음이 일어나며 지축이 흔들렸다. 하지만 질주하는 기사들은 그 기미를 금세 눈치채지 못했다. 말발굽과 중장갑주가 내는 소음과 진동이 워낙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상의 징후를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76회. 선두에서 달리는 기사들의 눈망울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세, 세상에……." 오크의 진형을 바로 눈앞에 둔 상황에서 무언가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것은 바로 땅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방벽이었다. 두께 1미터는 될 듯한 방벽이 땅에서 솟아 나와 중장기사들의 앞에 펼쳐진 것이다. 방벽은 끝을 분간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길었다.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기사들은 도리어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피할 수 없으니 도약해서 뛰어넘어야 한다." 속도를 줄이더라도 충돌을 피할 수 없어 보였기 때문에 그들로써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벽은 계속해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중장기사들을 태운 전마가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이까지……. 중장 기사들의 눈망울에 서서히 절망의 빛이 번져갔다. "부, 불가능해."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기사들이 말고삐를 잡아챘지만 헛수고였다. 마갑과 중갑주의 무게가 더해진 만큼 멈추는 것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난데없이 솟아오른 거대한 장벽은 시시각각 가까워졌고 돌격하던 중장기사들은 결국 방벽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콰콰쾅. "으아악."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창과 방패가 어지럽게 튀어 올랐다. 두텁게 두른 마갑 때문에 방벽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히히히힝 구슬픈 비명소리와 함께 방벽에 충돌한 전마들이 그대로 떡이 되어 버렸다. 말에 타고 있던 기사들의 몸은 충돌과 동시에 가랑잎처럼 날아갔다. 관성을 이기지 못해 방벽 너머로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그것은 중장기사들에게 또 다른 불운으로 다가왔다. 오크의 진형 바로 앞에 나가떨어졌으니 싸울 채비를 갖추고 있던 오크들에겐 난데없이 먹음직스러운 떡이 굴러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취익. 놈들을 죽여라." 굳이 명령이 아니더라도 오크 전사들은 이미 중장기사들을 덮쳐가고 있었다. 널브러진 채 신음을 흘리고 있던 기사들의 갑옷 틈새로 글레이브가 푹푹 박혀 들어갔다.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재빨리 정신을 수습한 중장기사들이 서둘러 일어나 저항하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두터운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움직임이 원활하지 못했는데 오크전사들이 그 점을 최대한 이용했던 것이다. 전사 몇이 달려들어 내려 누르자 중장기사들은 꼼짝달싹 하지 못하게 제압되었고 그들의 갑옷 틈새로 싸늘한 병기가 파고들었다. "크으윽." 숨이 끊어진 중장기사 주위로 계속해서 동료들이 날아와 내동댕이쳐지고 있었다. 내동댕이쳐진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들은 오크 전사들의 손쉬운 사냥거리에 불과했다. "이, 이런……." 페다인 사령관은 뜻밖의 사태에 경악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가롭게 방벽이 생겨난 연유나 생각할 시간이 아니었다. "지금 즉시 뿔 나팔을 불어 중장기사단을 불러들여라. 저대로 가다간 전멸할 수밖에 없다." 이미 10개의 대(隊)로 구성된 중장기사단의 반이 전멸한 상황이었다. 후진의 기사들은 다행히 방벽에 부딪히기 전에 멈췄지만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갈팡질팡할 뿐이었다. 그들을 향해 오크 전사들이 새카맣게 접근하고 있었다. 달리지 못하는 중장 기사들은 결코 오크의 적이 될 수 없다. 때문에 페다인 사령관은 서둘러 퇴각 결정을 내려야 했다. 곧이어 퇴각을 알리는 뿔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뿌우우.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자 중장기사들은 겨우 혼란을 수습할 수 있었다. "퇴각한다." 지휘관의 한 마디에 그들은 미련 없이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비록 동료들을 적의 손에 남겨두고 가는 것이 애석하긴 하지만 서두르지 않는다면 그들마저 같은 처지에 놓일 우려가 있었다. 4군단의 중장 기사들은 돌격할 때와 달리 오와 열을 유지하지도 못한 채 앞을 다투어 후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그곳을 벗어나기도 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번쩍. 중장기사들이 달리는 중앙부에서 눈부신 빛이 일어났다. 빛은 기하급수적으로 퍼져나가 중장기사들의 대열을 그대로 집어 삼켜버렸다. 뒤이어 일어난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대 폭발이었다. 콰콰콰쾅. 뜨거운 화염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거기에 휘말려 퉁겨져 나온 투구와 방패는 흉측할 정도로 녹아 있었다. 강철이 녹아버릴 지경이었으니 거기에 싸인 말과 인간의 육신은 오죽하랴. 가공할 마법으로 말미암아 퇴각하던 중장기사들은 일시에 소멸해 버렸다. 그것을 애도하듯 주인 잃은 갑옷과 무기들이 부근에 우박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페다인 사령관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막강한 중장기사단이 일시에 전멸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하지만 짐작 가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페다인 사령관이 이글거리는 눈빛이 한 사람에게 향했다. 4사단에 소속된 수석 마법사였다. 마법의 위력에 전율을 금치 못한 듯 몸을 부르르 떨던 마법사는 곧 사령관의 질문에 대답했다. "5서클 마법인 파이어 버스트(暴炎魔法)입니다. 하지만 위력으로 보아 인간이나 리치가 전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드래곤이 시전한 것이 확실합니다." 마법사의 대답을 들은 페다인 사령관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결국 드래곤이 개입했군." 가장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가 생각에 빠져 있을 만큼 호락호락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또 다른 폭염마법이 바로 지척에서 작렬했던 것이다. 콰르르르. 화염이 지나가고 나자 페다인 사령관은 1천 명으로 구성된 궁수대 1개 전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두 가지 선택뿐이었다. 드래곤 공습을 받을 경우를 대비해서 각 사령관들에겐 상황에 따른 대처방법이 숙지되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전면적인 퇴각이다. 드래곤의 마법공격을 피하기 위해 전군이 뿔뿔이 흩어져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첫 번째였다. 그 와중에서 마법사들은 드래곤이 펼쳐놓은 마법봉쇄망을 재주껏 빠져나와 본부에 이 사실을 알린다. 그러면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즉각 출동하여 드래곤을 상대한다는 계책이었다. 하지만 페다인 사령관이 당면한 상황에서 그 방법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가 지키고 있는 곳은 오크 군대와 대치한 최전선. 이곳에서 밀린다면 바로 옆에 위치한 군단들이 위험해 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페다인 사령관은 목청을 돋워 고함을 질렀다. "전군 돌격. 우리에게 퇴로는 없다. 오로지 진격만이 있을 뿐이다." 병과 구분 없이 일제히 진격해서 오크와 난전을 벌인다는 것이 바로 페다인 사령관의 선택이었다. 잠시 술렁이긴 했지만 병사들은 오래지 않아 명령을 받들었다. 부대장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병사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돌격하라. 어떠한 경우에도 후퇴는 없다." 4군단이 진군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이리로 진군하고 있는 오크의 대군이었다. 중장기사들을 궤멸시켰던 의문의 방벽은 소기의 목적을 마치자 다시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 탓에 오크 군의 진군에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말을 달려나가며 페다인 사령관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오크와 한데 섞여 버리면 드래곤들이 섣불리 공격을 퍼붓지 못할 것이다. 비록 병과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4군단에 소속된 10만의 병력이 함성을 내지르며 진군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다시 한 번 파이어 버스트가 작렬하여 일천에 달하는 병사가 소멸되었지만 4군단은 아랑곳없이 진격하고 있었다. 사령관을 위시한 수뇌부들 역시 함께 돌격하고 있었는데 그를 보호하기 위해 수석 마법사가 바짝 따라붙어 있었다. 수뇌부들은 한데 몰살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군단 곳곳에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위력이 엄청난 마법이라 제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캐스팅하는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전에 오크 무리와 섞여야 합니다." 수석 마법사의 분석을 들은 사령관 페다인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병력의 손실이다. 우리보다 수가 많은 오크와 난전을 벌인다면 병사들의 희생이 엄청날 테니까……." 맹목적인 돌격을 감행하던 4군단 병사들은 폭염마법에 두 번 더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오크의 선진과 조우할 수 있었다. 이미 4군단을 넘어서는 오크의 병력이 강 이쪽에 건너온 상태였다. 두 종족은 곧 피가 튀고 육편이 날아다니는 처절한 혈투를 치르기 시작했다. "약삭빠른 녀석들이로군." 베르키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래쪽에는 인간과 오크의 군대가 한데 뒤엉켜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쌍방 모두가 제대로 진형을 갖추지도 못한 채 어지럽게 난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공격을 피하기 위해 오크 족과 섞일 생각을 하다니 역시 인간들이란……." 옆에 떠 있던 류시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놈들은 500년 전의 인간들과는 사뭇 다른 것 같아요. 난전을 벌임에도 불구하고 오크를 압도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잖아요." "그럴 것이다. 500년 전과는 달리 저놈들은 대부분 직업군인들이니까 대부분 징집병들로 이루어졌던 트루베니아 인간들보다는 강할 수밖에 없겠지."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2차 종족전쟁 때와는 달리 인간은 서른 명 남짓 되는 소규모 병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오크를 상대하고 있었다. 궁수 열을 중장보병 열이 호위하듯 에워싸고 군데군데 창병을 끼워 넣은 병진은 난전으로부터 동료를 효과적으로 엄호해 주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수가 배 이상 많음에도 불구하고 오크는 쉽사리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벌군에는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고급 기사들이 무척 많았다. 그들은 병사들의 철저한 호위를 받으며 무인지경으로 오크 전사들을 베어 넘겼다. 특히 그들은 오크의 분대장급들을 보기만 하면 철저히 죽여 없앴다. 그 때문인지 오크의 명령체계는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전황을 보고 있던 류시케의 얼굴에 다급함이 떠올랐다. "이대로 가다간 전멸하겠어요.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걱정할 필요 없다. 난 이미 놈들이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으니까……." 베르키스는 그윽한 눈빛으로 영문을 몰라하는 류시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오크가 병력이 세 배 가량 많지만 역부족일 것이다. 난 오늘 전투에서 인간들이 이길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더더욱 도와야지요?" "굳이 도와줄 필요까진 없다. 난전을 벌이는 이상 인간들도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나의 노림수는 바로 그것이다." 류시케는 여전히 베르키스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베르키스는 빙그레 웃으며 설명을 해 주었다. "트루베니아에서 동원할 수 있는 오크 전사는 줄잡아 수백만에 달한다. 그러므로 저들이 전멸되더라도 다시 투입할 병력이 무궁무진하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보급로가 끊긴 인간들은 그렇지 못하다. 계속해서 난전을 벌인다면 인간 병사는 계속해서 줄어드는 반면 오크 전사는 끊임없이 보충되지. 제 아무리 정예라도 압도적인 병력차만은 극복할 수 없다." "그, 그렇군요." 뭔가를 깨달은 듯 류시케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베르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오크란 종족의 번식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종족전쟁 당시의 경험을 미루어보면 오크가 이번 전쟁에서 잃은 병력을 보충하는데 고작해야 1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원천적으로 병력보충이 불가능하지. 500년 전 종족전쟁의 성패를 판가름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알겠느냐?" "………." "그러나 우리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오크는 패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미개한 지능과 전술로는 효율적으로 싸우는 인간을 감당할 수 없으니까. 그러므로 반드시 드래곤이 지원해야만 오크가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걸림돌이 있다." 그 말을 듣자 류시케의 눈동자가 빛났다. "드래곤 슬레이어들 말이로군요." "그렇다. 놈들이 있는 이상 드래곤들은 500년 전처럼 대륙 전역에 퍼져 싸울 수 없다. 놈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둘 이상의 드래곤이 함께 다녀야 하지. 그렇게 된다면 광범위한 전장을 모두 지원할 수가 없게 된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고 마침내 해결책을 생각해 냈다." "해결책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류시케가 바짝 다가왔다. 베르키스의 얼굴에는 득의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바로 지금처럼 인간과 오크의 군대를 난전으로 몰아넣는 것이지.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어 마법공격을 한 두 방 퍼붓는다면 교활한 인간 놈들은 오크를 방패막으로 삼기 위해 한데 뒤섞여 싸우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승리한다 하더라도 사상자가 많을 수밖에 없지." "하지만 인간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는 길을 택한다면 어떻게 하지요?" 베르키스는 류시케의 반문을 간단히 일축했다. "놈들에겐 애당초 퇴로가 없다. 트루베니아에서 영원히 도망 다니기는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 우린 그저 마법공격 한 두 방으로 드래곤이 참전했다는 사실만 인간들에게 각인시킨 뒤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된다. 이기든 지든 마무리는 오크에게 맡기고 말이다." 그 말을 듣자 류시케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게 된다면 광범위한 지역을 모두 지원할 수 있겠군요. 정말 놀라워요." 베르키스의 얼굴에는 자신의 전략에 대한 자부심이 떠올라 있었다. "놈들이 궁여지책으로 노예들을 빼돌리고 있지만 오래는 못 견딜 것이다. 노예를 통해 조달하는 병력보다 난전으로 잃는 병력이 훨씬 많을 테니까……. 게다가 노예들의 전투력은 오히려 오크보다도 못할 것이다." 혈투를 벌이고 있던 양군을 힐끔 내려다본 베르키스는 말없이 마나를 재배열했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77회. 마법사들의 공격으로 많은 오크 전사들이 몰살당하고 있었기에 도와줘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마법사들만 쓸어버린 뒤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차라리 소드 마스터들을 처리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류시케의 말에 베르키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불필요한 일이다. 소드 마스터는 마법사보다 수십 배 이상 날렵하고 민첩하기 때문에 잘 탐지되지 않는다. 차라리 오크에게 맡기는 것이 효과적이다." "알겠어요." 류시케는 두 말도 하지 않고 마나를 재배열했다. 그 동안 베르키스는 탐색마법을 펼쳐 전장에 퍼져있는 마법사들의 기척을 감지했다. 마법사들은 병사들의 철통같은 호위를 받으며 오크와 싸우는데 여념이 없었다. 정신을 집중시키자 그들의 기척은 오래지 않아 감지되었다. 마나의 흐름이 외부로 노출되기 때문에 마법사들 대부분은 베르키스의 이목에 걸려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목표로 파이어 볼을 전개하며 베르키스가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일반 마법사들은 이렇게 쉬운데 데이몬 그놈은 어째서 탐지하기가 그토록 힘든지……."　 푸념을 털어놓은 베르키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렸다. 화르르르. 그가 전개한 파이어 볼이 전장의 곳곳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 끝에는 사색이 된 인간 마법사들이 있었다. 파이어 볼을 피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겐 살아날 방도가 전혀 없었다. "어서 오시오." 작전상황실로 들어서는 데이몬을 보자 페르슈타인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데이몬은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에 침울한 빛이 서려 있는 것을 용케 간파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소?" 페르슈타인 공작은 묵묵히 고개를 내저었다. "별일은 아닙니다." 공작의 눈치를 살피던 데이몬이 불쑥 한 마디 내뱉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슈렉하이머와 만났기 때문에 그는 이미 공작이 고뇌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3일 전부터 전면적인 전투가 벌어졌다면서요." "그렇습니다." "병력 손실이 상당히 크다고 들었는데……." 데이몬의 말에 페르슈타인 공작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강을 경계로 오크와 대치하고 있던 4군단을 시발점으로 대대적인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모두 일곱 곳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였지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병사들의 분전으로 침공해 온 오크를 섬멸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손실입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전사자와 부상자가 천문학적으로 발생했습니다." "뜻밖이구려." 공작의 얼굴이 더욱 침울해졌다. "뜻밖의 사실은 전투가 벌어진 일곱 곳 모두 드래곤이 개입했다는 것입니다. 가장 최전선인지라 지휘관들은 후퇴하지 않고 오크와 섞여 난전을 치르는 길을 선택했고 그 때문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데이몬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비열한 베르키스 자식. 병력조달이 힘든 정벌군의 약점을 집중적으로 노리려는 게로군." "드래곤에겐 최선이겠지만 우리에겐 한 마디로 최악의 전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세가 계속해서 난전으로 지속될 경우 우린 곤란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크는 거의 무한하게 병력이 충원되지만 저흰 그렇지 못하니까요." 급격히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인지 데이몬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카심 용병단 때문에 단독작전을 하지 못하는 약점을 이런 식으로 메꾸려 하는군." "전세가 이런 추세로 진행된다면 어렵습니다. 최대한 빨리 타개책을 찾아야 합니다." 데이몬의 시선이 공작에게로 향했다. "그래 뭐 생각해 놓은 비책이라도 있소?" 페르슈타인 공작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썬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 "아르카디아에 대기중인 백만의 병력을 불러들어야 합니다.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말입니다." 그 말에 데이몬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병력을 태운 선단을 폭풍우 속으로 집어넣자는 말이오?" "희생이 크겠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참전하지 않은 드래곤들마저 가세한다면 배겨날 도리가 없으니까요. 이대로 가다간 점령지를 지키는 것도 어렵습니다." "흠." 데이몬은 눈살을 지긋이 모았다. 본 드래곤을 타고 바다를 건너온 탓에 그는 폭풍우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겪어본 바로는 아무리 큰배라도 폭풍을 견딜 수 없다. 생각을 마친 데이몬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계획은 보류하는 게 좋겠소. 상황이 아무리 시급하더라도 백만의 병력을 고스란히 수장시킬 수는 없지 않소? 내가 겪어본 바로는 아무리 큰배로도 폭풍우를 극복할 수 없소." "하지만 그것말고는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전무한 실정입니다." 데이몬의 얼굴에 뜻 모를 미소가 떠올랐다. "나에게 한 가지 방법이 있소." 데이몬의 한 마디에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그만큼 데이몬을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도대체 어떤 방법입니까?" "간단하오. 폭풍우의 원인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이오. 폭풍우는 실버 드래곤의 저주로 발현되었소. 다시 말해 그 실버 드래곤만 처치한다면 폭풍우는 사라지지 않겠소?" 깜짝 놀란 공작이 눈썹을 모았다. "그, 그렇다면 드래곤 로드를 처치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어차피 드래곤들이 떼로 뭉쳐 다니는 마당이라 카심 용병단이 섣불리 나설 수도 없소. 따라서 온 힘을 모아 드래곤 로드의 레어를 공격하는 것이 나을 것 같소." "하지만 명색이 드래곤 로드인데……." 이미 마음을 굳힌 듯 데이몬은 느릿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백만 대군을 폭풍 속으로 집어넣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상대가 단 하나라면 제아무리 강한 드래곤이라도 난 자신 있소. 게다가 놈들은 설마 우리가 드래곤 로드의 레어를 노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페르슈타인 공작은 숙연해졌다. 데이몬의 말대로 실행된다면 전황은 판이하게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터였다. 하지만 드래곤 로드를 죽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드래곤 로드의 레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이다. "공작께서는 정보부 요원들을 총동원해서 드래곤 로드의 거처를 파악해 주시오. 빠르면 빠를수록 좋소. 나머지 드래곤들이 참전하기 전에 놈을 쓰러뜨려야 하오." "꼭 그 방법밖에 없겠습니까?" "지금으로썬." 묵묵히 데이몬을 쳐다보던 공작이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난 만반의 채비를 갖춰 두도록 하겠소." "……." 공작은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나가는 데이몬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위험천만한데다 실현될 가능성이 극히 낮은 일이었지만 지금으로썬 데이몬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베르키스는 본체로 화신한 채 드래곤 로드의 레어로 날아가고 있었다. 전황이 순조롭게 풀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유쾌한 상태였다. "판단이 주효했어." 베르키스의 새로운 전술로 말미암아 정벌군의 각 군단은 엄청난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다. 드래곤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 지휘관들은 어쩔 수 없이 오크와 섞여 난전을 벌이는 길을 택했다. 그렇게 대처하지 않는다면 공중에서 가해지는 드래곤의 마법공격을 고스란히 허용해야 했으므로 손실이 커진다. 따라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것 밖에 없었다. 아니면 뿔뿔이 흩어져 퇴각하던가. 인간과 오크가 난전을 벌이는 모습을 유유하게 지켜본 베르키스는 머뭇거리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다시 일을 벌였다. 그 탓에 그는 여러 전장을 어지러운 난전으로 이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오크가 패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난전이라고는 하나 오크의 힘만으론 오랫동안 전쟁을 준비해온 아르카디아 정벌군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베르키스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전투에 투입할 오크 전사들은 넘쳐났고 머지않아 중형 몬스터들이 투입될 예정이었기에 전세는 오래지 않아 뒤집힐 터였다. "이제 인간의 멸망은 기정 사실이 될 것이다. 문제는 드래곤이 몇이나 참전하는가 하는 것이지. 그들이 가세할수록 인간의 멸망이 빨라질 테니까……." 베르키스의 눈동자에 뜻 모를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현재 상태라면 다른 드래곤의 손을 빌리지 않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나와 레니우스, 그리고 류시케가 거든다면 오크의 힘만으로도 인간 정벌군을 궤멸시킬 수 있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아르카디아 침공때 발생한다. 오크 전사들을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많은 드래곤의 조력이 필요하니까." 지금쯤이면 로드의 레어에서는 이미 결정이 내려졌을 터였다. 그 중에는 참전하지 않겠다고 할 드래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들을 생각하자 베르키스의 눈망울에 분노의 빛이 번뜩였다. "뭐가 중요하고 뭐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녀석들……. 내 지금은 그냥 넘어가지만 추후에는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로드가 된 다음에는 말이다." 놀랍게도 베르키스는 드래곤 로드 자리를 탐하고 있었다. 그럴 것이 로드인 크라누스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드래곤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실질적인 파워가 이미 로드를 능가한 상태였긴 하지만 그래도 드래곤 사회에서 연륜을 무시하진 못했다. 만약 현재의 로드인 크라누스가 사라진다면 베르키스가 자동적으로 로드 자리를 물려받게 되는 것이다. 베르키스의 입가에 흉측한 미소가 걸렸다. '후후후. 로드. 내 계획이 성공한다면 해츨링을 만날 수 있을 것이오. 저승에서 말이오.' 베르키스는 괴소를 흘리며 힘차게 날개를 휘저었다. 로드의 레어가 자리잡은 크레아 섬이 멀찍이 보이고 있었다. 크레아 섬 상공에 도착한 베르키스는 날개를 접었다. 레드 드래곤의 거대한 동체가 땅에 내려앉자 흙먼지가 풀썩 하고 피어올랐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베르키스는 모습을 바꾸었다. 그곳에는 곧 적발을 가진 잘 생긴 청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폴리모프를 마친 베르키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인간을 멸망시키려는 내가 나도 모르게 인간으로 폴리모프를 하다니 정말 웃지 못할 노릇이로군." 하지만 베르키스에겐 인간말고는 폴리모프를 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미개한 오크로 모습을 바꾸는 것은 그리 내키지 않았고 그렇다고 저능한 중형 몬스터는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직 인간의 모습말고는 택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머리를 내저은 베르키스는 섬 중심부를 향해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조금 걸어 들어가자 거대한 동굴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이 바로 크라누스가 살고 있는 레어였다. 레어의 입구는 평소에는 외부와 완벽히 차단되어 있다. 마법 방어벽까지 갖춰져 있어 공간이동으로도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레어의 입구는 활짝 열려 있었다. 대륙 전역에서 오는 드래곤들을 맞이하기 위해 일부러 열어놓은 것 같았다. 베르키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레어 속을 걸어 들어갔다. 레어 내부는 극히 적막했다. 가디언이라도 나와 손님을 맞음직도 한데 눈에 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크라누스의 레어에는 가디언이 없었다.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는 성격 탓인지 크라누스가 생명체로 된 가디언은 일절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단지 얼마의 스톤 골렘만이 레어의 경비를 위해 배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스톤 골렘들도 평상시에는 조각상의 형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레어가 한없이 적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긴 통로를 걸어 들어가며 베르키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이상하군. 레어가 수중동굴 속에 있어 누가 감히 침입할 수 없다 하더라도 레어의 관리를 위해 가디언 우두머리 정도는 있어야 할 텐데……." 하지만 베르키스는 곧 생각을 지웠다. 다른 드래곤, 특히 드래곤 로드의 취향에 그가 간섭할 이유가 없었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크라누스는 실버 드래곤이다. 필요하다면 씨 엘리멘탈(sea elemental) 따위의 수계(水系) 정령을 얼마든지 소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베르키스는 레어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78회. 크라누스의 레어에는 뜻밖의 손님이 와 있었다. 크라누스와 나란히 서서 담소를 나누는 중년인을 보자 베르키스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처음 보는 놈인데 누구지?' 콧수염이 인상적인 뛰어난 용모의 중년인이었는데 베르키스는 그가 드래곤이며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머리색을 보니 골드 드래곤인 듯 싶었다. 그러나 풍겨오는 기운을 보아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드래곤은 아니었다. '에인션트 급은 분명하지만 고룡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군.' 문제는 그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드래곤이라는 점이다. 드래곤은 하나같이 특유한 기운을 풍긴다. 살아온 환경이 틀리고 겪어온 경험이 다른 만큼 각기 다른 분위기를 풍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눈앞의 중년인은 베르키스가 지금껏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다시 말해 처음 만나는 드래곤이라는 뜻이었다. 뭔가를 깨달았는지 베르키스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혹시 아르카디아에서 건너온 놈이 아닐까?' 생각을 접은 베르키스는 크라누스에게 공손히 예를 취했다. "로드를 뵙습니다." "어서 오게." "그런데 옆에 계시는 분은 누구시지요?" 베르키스의 의중을 알아차린 듯 크라누스가 소개를 시작했다. "그는 아르카디아에 살고 있는 드래곤들의 로드인 페드리어스일세. 무려 3천년만에 트루베니아를 방문했다네. 우리에겐 최고의 귀빈이라고 할 수 있지." "로드라구요?" 베르키스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상식적으로 아르카디아에 로드가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럴 것이 아르카디아에 살고 있는 드래곤은 트루베니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다. 대부분이 트루베니아에서 건너간 드래곤들이었는데 사정은 간단했다. 드래곤은 해츨링 시기를 벗어나는 즉시 독립을 한다. 그 기간동안 어린 드래곤들은 어른들의 도움 없이 철저히 자신의 힘만으로 영역과 레어를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그 시기가 어린 드래곤들에겐 가장 위험한 시기였다. 해츨링을 벗어났으므로 다른 드래곤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데다 마법실력이 낮고 체력이 약해서 드래곤 슬레이어를 꿈꾸는 인간들에겐 그만 최상의 목표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린 드래곤들이 영역으로 삼을 안전한 장소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마나가 풍부하며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장소는 이미 대부분의 드래곤이 선점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역을 구하지 못한 드래곤들이 궁여지책으로 아르카디아를 선택했다. 하지만 아르카디아는 전속력으로 날아도 열흘이나 걸리는 머나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때문에 건너가려고 해도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했다. 그런 이유로 아르카디아로 건너간 드래곤들은 대륙에 남아있는 드래곤들과 자연스럽게 단절되었다. 그러므로 드래곤들의 입장에서 아르카디아는 일종의 개척마을이라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의 드래곤들이 자체적으로 로드를 뽑다니……. 베르키스의 심정을 이해한 듯 페드리어스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로드께서는 단순히 예의상 로드라 지칭하신 것입니다. 전 그저 아르카디아 드래곤들을 대변하는 자일뿐입니다." 하지만 페드리어스를 쳐다보는 베르키스의 시선은 그리 곱지 못했다. "아르카디아의 로드께서 이곳을 방문해 주시다니 뜻밖이군요. 하지만 잘 되었습니다. 마침 로드께 따져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예상한 대로 페드리어스는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트루베니아의 레드 드래곤이 자신에게 따질 일이 있다니……. 베르키스는 서늘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아르카디아의 젊은 드래곤 하나가 트루베니아에 건너온 사실은 알고 계시겠지요?" "대충 알고는 있습니다만……." 베르키스는 잘 되었다는 듯 거친 숨결을 토해냈다. "그렇다면 이것도 아시겠군요. 그가 드래곤 슬레이어의 일원이 되어 현재 드래곤 사냥을 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 당혹해 하는 페드리어스를 노려보며 베르키스가 눈에 힘을 주었다. "이미 그는 인간들과 힘을 합쳐 이곳의 드래곤 하나를 사냥했습니다. 갓 웜 급에 오른 블루 드래곤으로 뮤시우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요. 내가 직접 그의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시신을 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깜짝 놀랄 것이라 짐작했었지만 예상과는 달리 상대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것은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크라누스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마친 베르키스는 매서운 눈빛으로 페드리어스를 쳐다보았다.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황해 하는 것처럼 보이던 상대는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잘 알지 못하겠군요. 자초지종을 자세히 알아본 뒤 적절한 조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초지종 따윈 조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베르키스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허공에 하나의 영상이 맺혔다. 목과 사지가 잘린 채 피바다 속에 누워있는 뮤시우스의 처참한 모습이 영상 속에 펼쳐져 있었다. 베르키스는 이미 시체를 없애기 전 마법의 힘으로 그곳의 참혹한 장면을 영상에 담아놓은 상태였다. 베르키스는 손가락을 뻗어 뮤시우스의 목에 난 매끄러운 절단면을 가리켰다. "이 상처는 인간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에 의한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인간의 손에 죽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그를 유인해 간 것은 바로 화이트 드래곤입니다. 동족을 사냥하는데 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뜻이지요. 아시겠습니까?" 서슬 퍼런 베르키스의 질책에도 페드리어스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었다. 도리어 옆에 서 있던 크라누스가 앞으로 나섰다. "그만하게. 베르키스. 먼 길을 온 손님에게 그 무슨 결례인가?" "결례란 것은 알지만 따질 것은 따져야 할 것 같아서……." 크라누스는 고개를 흔들어 베르키스의 말을 잘랐다. 그리곤 페드리어스를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트루베니아를 방문해 주신데 대해 무척 고맙게 생각하오. 용무를 마쳤으니 당신은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소?" 베르키스를 힐끔 쳐다본 페드리어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말을 이어나가는 페드리어스의 입가에 미미하게 미소가 맺혔다. "역시 로드의 말씀에는 한 치의 틀림도 없군요.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르키스에게 살짝 목례를 한 페드리어스가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레어 밖으로 나간 뒤 본체로 현신하여 아르카디아로 돌아갈 모양이었다. 페드리어스의 모습은 오래지 않아 그곳에서 사라졌다. 곱지 않은 눈빛으로 페드리어스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베르키스의 시선이 슬그머니 크라누스에게 돌아갔다. 잔뜩 격양되어 있던 눈빛은 어느새 평정을 회복한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뮤시우스를 잃은 나머지 너무 흥분해서……." "아닐세. 자네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네. 그건 그렇고 뮤시우스가 죽었다는 것이 사실인가?" 베르키스의 얼굴에 비통한 빛이 어렸다. "그렇습니다. 놈들의 간계에 속아 어처구니없게 당해버렸습니다. 포탈을 파괴하느라 저는 미처 그런 기미를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말을 이어나가던 베르키스가 돌연 정색을 했다. "놈은 극히 위험한 존재입니다. 제 짐작으론 아마도 놈에게 단신으로 맞닥뜨려서 살아 돌아올 수 있는 드래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그렇게 강한가?" 베르키스는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놀랍군." "포탈을 파괴시키는 과정에서 저희들은 놈의 본 드래곤을 하나 파괴시켰습니다. 하지만 놈에겐 본 드래곤이 하나 더 있습니다. 또한 그랜드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도 네 마리나 보유하고 있지요.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은 놈의 마법 운용능력입니다. 놈은 드래곤의 마법도 파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파훼라면 디스펠을 말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디스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마나를 은근슬쩍 끼워 넣어 마법의 발현을 근원적으로 훼방놓는 것이지요. 어린애 장난으로 볼 수 있겠지만 방법이 하도 교묘해서 결코 얕봐서는 안됩니다. 로드께서는 그놈의 손에 벌써 드래곤 셋이 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십시오." "흠." 로드는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베르키스는 슬며시 속으로 생각해 놓은 요구조건을 떠올렸다. 로드가 틀림없이 들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말이다. "로드께 부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뭔가?" "500년 전에 그러셨던 것처럼 로드께서 다시 한 번 나서서 드래곤들을 설득해 주십시오. 드래곤이 몇이나 참전을 결정했는지 모르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드래곤의 조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인간들 정벌군을 깨끗이 섬멸하고 가증스런 드래곤 슬레이어들을 세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 "인간들이 사라지고 나면 트루베니아와 아르카디아에는 그 간악한 종족 대신 충실한 오크족이 번성할 것입니다. 오크는 인간과는 원천적으로 다른 종족입니다. 오크가 트루베니아를 장악할 경우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명성을 노려 해츨링을 사냥하는 따위의 일은 앞으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베르키스는 용의주도하게 크라누스의 역린(逆鱗)을 건드리고 있었다. 망각이란 것이 없는 드래곤의 특성상 크라누스는 해츨링을 잃은 것을 아직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흐음." 예상대로 크라누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인간의 손에 의해 처참하게 난자된 해츨링의 모습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지켜보던 베르키스는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후후후. 내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을 순 없을 것이다.' 잠시 후 로드가 얼굴을 폈다. 베르키스는 기대 어린 표정으로 크라누스의 입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미안하지만 자네 요구는 들어줄 수 없네." 베르키스는 일순 당황했다.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앞서 말한 것처럼 나에겐 드래곤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이 없네. 모든 것은 각 드래곤들이 자유롭게 결정해야 하네. 싸우고 싶다면 참전할 것이며 싸우고 싶지 않다면 개입하지 않는 것, 그 모든 것이 각자의 판단에 달려있네 . 난 그들의 결정을 좌지우지할 만한 권한도 없고 그러고 싶은 의향도 없네." "하, 하지만 500년 전에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크라누스는 심유한 눈빛으로 당황해 하는 베르키스를 쳐다보았다. "그 당시 내가 참전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인간들의 무한한 욕심 때문이었네. 물론 해츨링을 잃은 것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지만 결정적으로 난 끝이 없는 인간들의 욕심을 더 우려했던 것이네." "………." "하지만 난 그 때의 결정을 후회하고 있네. 모든 것은 순리에 맡겨야 하는 법인데 노파심에 그만 베르하젤 님의 뜻을 어기고 말았구먼." 깎은 듯이 수려한 베르키스의 얼굴이 서서히 상기되고 있었다. "조금 전 아타시누스가 다녀감으로써 드래곤들의 결정이 완전히 결론지어졌네. 이제 자네에게 그들의 결정을 일려 주겠네." 베르키스는 묵묵히 크라누스의 눈빛을 맞받았다. "날 제외한 드래곤들은 이번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결론지었네. 각자 자유의사로 내린 결정이며 그들은 인간을 멸망시키는 일에 동의하지 않네." 그 말을 듣자 베르키스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쿵.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로드를 제외한 모든 드래곤들이 참전하지 않기로 하다니……. 당황한 나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79회. 크라누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500년 전의 결정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어. 드래곤들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네. 해츨링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성을 잃은 나머지 성급하게 결정했을 때부터 단추는 잘못 채워진 거지." 베르키스가 발작적이라도 하듯 고개를 들었다. 태도와는 달리 음성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다면 로드께서도 인간과의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실 겁니까?" 크라누스는 묵묵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미 말하지 않았나? 난 아직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았네. 결론짓기가 정말 어렵더군. 사실 실버 드래곤의 저주를 발현시킨 이상 개입한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말일세. 하지만 머지않아 결정을 내릴 생각일세. 누군가를 한 번 만나본 뒤에 말이야." "도대체 누구를 만나실 생각입니까?" 대답을 듣자 베르키스의 눈망울이 퉁방울만 해졌다. 로드의 말이 전혀 뜻밖이기 때문이었다. "난 인간들의 총사령관과 자네가 말한 드래곤 슬레이어를 한 번 만나볼 생각일세. 결정은 그들을 만나본 뒤 내릴 생각이네." 베르키스의 음성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들이 로드와 순순히 대화를 나눌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그거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들이 날 대하는 태도에 따라 결론이 내려진다는 사실일세." 베르키스는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엉뚱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어이가 없어진 모양이었다. 그를 지켜보던 크라누스가 고개를 슬며시 흔들었다. "전쟁에 참가하겠다고 나선 드래곤은 이제 자네와 자넬 따르는 이들이 전부일세. 음! 뮤시우스가 죽었으니 자네와 레니우스, 그리고 류시케만 남았겠군." "한 가지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 말해보게." "도대체 무슨 이유로 드래곤 전체가 참전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크라누스가 눈매를 지긋이 모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일세. 일단 가장 많은 의견으론 유희를 제대로 즐길 수 없다는 점을 꼽을 수 있네. 자네도 알다시피 드래곤들은 폴리모프한 모습으로 인간과 섞여 유희를 즐기기를 좋아한다네. 하지만 인간들이 사라질 경우 유희는 깨끗이 접어야 하지 않겠나? 대부분의 드래곤이 그런 이유 때문에 참전하기를 포기했어." 베르키스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유희는 오크들 사이에서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그들도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유희를 한답시고 오크 사회에 들어간 드래곤들이 몇 있었는데 금세 흥미를 잃고 유희를 포기했네. 전혀 재미가 없었다고 하더군." "그러나 옛날에는 오크로 폴리모프하고 유희를 즐긴 드래곤이 많지 않았습니까?" "그땐 인간들이 대륙에 존재하고 있을 때야. 인간들이 없어지니 유희의 재미가 완전히 떨어졌다고 하네." 베르키스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정말 한심하군요. 이런 상황에서 한낱 유희문제 때문에 일을 그르치다니……." "자넨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어. 드래곤의 삶에 있어 유희란 한 마디로 삶의 일부라 할 수 있네. 그래야만 수천 년에 달하는 생을 무리 없이 영위할 수 있지 않겠나?" 베르키스는 질 수 없다는 듯 맞받았다. "인간이 없어도 유희는 할 수 있습니다. 전 그들의 결정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네의 생각일 뿐이네. 아무튼 드래곤들은 그런 이유로 이번 전쟁에 불참을 선언했다네. 그리고 못 다한 수면기를 채우기 위해 레어로 돌아갔지." "그렇다면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크라누스는 손가락을 들어 베르키스를 가리켰다. "바로 자네 때문일세." 베르키스의 얼굴에 얼떨떨한 표정이 떠올랐다. "저……때문이라구요?" "그렇네. 나머지 드래곤들은 자네에 대해 일말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 "………." "정확히 말하자면 변해 버린 자네 모습 때문이지. 자신을 한 번 관조(觀照)해 보겠나? 아마 자넨 느끼지 못할 걸세. 자넨 그토록 증오해서 없애려 하는 인간과 점점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당치않은 말씀입니다. 어찌 그런……." 크라누스는 조용히 베르키스의 말을 끊었다. "난 그들의 판단이 정확하다고 생각하고 있네. 자넨 고금을 통틀어 가장 인간화(人間化)된, 그리고 인간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드래곤이야." "………." 크라누스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베르키스가 불쑥 한 마디 내뱉었다. "혹시 아르카디아에서 건너온 골드 드래곤에게서 무슨 말을 들으셨습니까?" "무슨 뜻인가?" "뮤시우스가 동족을 죽이려 들었다고 말하던가요?" "………." "그래서 아르카디아의 드래곤들이 협박하던가요? 인간의 편을 들어 우릴 공격하겠다고?" 크라누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예상은 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베르키스의 사고방식은 크라누스가 놀랄 정도로 인간과 닮아 있었다. "그렇지 않네. 그는 단지 사실을 알고 싶어 건너왔을 뿐이라네. 아르카디아의 드래곤들은 일이 어떻게 진행되던 간에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조용히 지낼 것이라고 했네." "하지만 골드 드래곤이 밝힌 내용 때문에 드래곤들의 결정이 영향 받았다는 사실은 로드께서도 부정하지 못하겠지요?" "그 점은 인정하네." 크라누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베르키스가 정색을 했다. "그렇다면 로드께서는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저와 절 따르는 드래곤들이 인간들을 더 이상 적대하지 않기를 바라십니까?" "자넨 여전히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군. 익히 말했다시피 드래곤은 그 어떤 굴레와 억압에서도 자유로운 종족이라네. 인간과 싸우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면 될 뿐이네. 그 누구도 거기에 간섭하거나 강제할 순 없네." "………." "마찬가지로 자네도 역시 다른 드래곤의 행동에 관여해서는 안되네. 그것이 바로 드래곤의 삶과 철학이라네. 알겠는가?" 베르키스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붉게 달아오른 눈동자가 유난히 번들거리고 있었다. 크라누스는 할 말을 다했다는 듯 몸을 돌렸다. "난 이제 인간들을 만나보러 갈 걸세. 드래곤들이 내린 결정을 통보해 주었으니 볼 일은 끝났네. 내가 앞으로 내릴 결정은 마법 통신으로 일러주겠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말하게." "바다에 펼쳐놓은 실버 드래곤의 저주를 거두실 생각이십니까?" "아직까진 아니네. 미리 말했듯 난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았네." 크라누스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베르키스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로드의 의향을 충분히 파악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난 이만 나가보겠네." 그 말을 마친 크라누스는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갔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를 거듭 희번덕거리던 베르키스가 얼른 뒤를 따랐다. 레어의 주인이 외출하는데 손님이 계속해서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깥으로 통하는 통로를 걸어나왔다. 굴을 나서자 눈부신 햇살이 둘의 눈을 파고들었다. 크라누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가 무척 좋군." 말을 마친 크라누스는 조용히 마법을 전개했다. 마나가 재배열되며 그의 주위에 눈부신 마법진이 생겨났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자네도 살펴 가도록 하게." 베르키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크라누스가 마법의 시동어를 외쳤다. "워프!" 크라누스의 몸은 곧 빙글빙글 돌아가는 광휘에 휩싸여 그곳에서 사라졌다. 크라누스가 사라졌지만 베르키스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분을 참지 못하는 듯 몸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계획이 어긋나 버렸으니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크라누스의 레어 쪽을 쳐다보았다. "멍청한 드래곤들……. 수천 년의 삶을 보장받았으면서도 결국 타성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다니……." 베르키스의 눈동자는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인간화 된 드래곤이라……. 웃기는구려 로드. 난 나태하고 무기력한 삶을 거듭하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오" 베르키스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당신은 운이 좋은 줄 알아야 하오. 바다에 펼쳐놓은 저주가 나에게 필요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벌써 내 손에 죽었을 터요." 베르키스의 전투력은 이미 크라누스를 능가한지 오래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고 크라누스를 죽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어 베르키스는 섣불리 손을 쓰지 못했다. 그 첫 번째는 크라누스를 죽일 경우 바다에 펼쳐진 저주가 자동적으로 사라진다는 점이다. 물을 다스리는 것은 전적으로 실버 드래곤의 권능이다. 본신의 실력이 아무리 강해도 레드 드래곤인 베르키스는 바다의 저주를 발현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다른 드래곤들의 이목이었다. 크라누스는 많은 드래곤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드래곤 로드였다. 만약 베르키스의 손에 크라누스가 죽임을 당한다면 다른 드래곤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 많은 드래곤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수는 없는 법. 때문에 크라누스를 처리하는 일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베르키스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계획을 세워야겠군. 크라누스와 함께 확실하게 인간들을 처리할 수 있는 계획을 말이야." 생각에 잠겨 있는 베르키스의 머리 위로 무심하게 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워프를 발동시킨 크라누스가 목표로 삼은 곳은 레어에서 멀리 떨어진 대륙의 동남부였다. 정벌군의 주둔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사실 그는 정벌군의 총사령관이 어디에 머무는지 알지 못했다. 총사령관의 위치를 알게 될 경우 드래곤들의 공습이 가해질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정벌군 총사령관이 머무르는 곳은 2중, 3중의 보안 속에 철저히 은폐되어 있었다. 때문에 크라누스가 선택한 방법은 부근의 정벌군 주둔지를 찾아 사령관이 있는 곳을 물어보는 것이었다. 공간이동을 마친 크라누스는 멀리 보이는 인간 병사들의 주둔지를 향해 유유자적하게 걸어갔다. "허허. 인간들이 과연 날 어떻게 대할지……." 걸어가던 크라누스가 별안간 조소를 머금었다. 따지고 보면 트루베니아의 인간들이 멸망한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드래곤이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이 저주를 발현시켜 두 대륙 사이를 격리시키지 않았다면 트루베니아의 인간이 그토록 허망하게 멸망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십중팔구 자신에게 무한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과연 정벌군의 총사령관을 만나러 가는 것이 옳은 일일까?" 거듭 생각해 봐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만 해도 베르키스의 주장대로 인간들을 없애버려야겠다고 생각했던 크라누스였다. 그것 때문에 실버 드래곤의 저주를 500년 만에 다시 발현시키지 않았던가? 하지만 크라누스의 마음은 거듭되는 이변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인간들이란 정말 불가사의한 종족이로군. 포탈을 파괴시키면 간단하게 끝날 줄 알았는데……." 포탈이 파괴됨으로써 보급줄이 완전히 끊어졌지만 인간들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크 족의 노예로 살고 있는 인간들을 구출해내는 방법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냈다. 그 끈질김에는 크라누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레어에 콕 박혀 있는 것 같았지만 그도 암암리에 대륙의 정세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크라누스는 500년 전 내렸던 결정에 약간의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지상최강의 종족인 드래곤이 개입했지만 인간들은 마치 잡초처럼 끈질기게 삶을 탐하고 있었다. "역시 순리를 거스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로군." 그때까지만 해도 크라누스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80회. 하지만 대부분의 드래곤들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리고 또한 아르카디아의 드래곤 로드가 놀라운 소식을 가지고 방문하자 크라누스는 결국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페드리어스는 크라누스가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을 가지고 트루베니아로 건너왔다. "내 대에 동족을 죽이려는 드래곤이 나오다니……." 크라누스의 얼굴에 착잡함이 어렸다. "가장 우려했던 인간들의 욕심이 드래곤의 마음까지 물들일 줄은 몰랐어. 드래곤들이 더 이상 인간들의 영향을 받기 전에 순리에 역행하는 일을 그만둬야겠군. 이미 물들대로 물든 베르키스와 그를 따르는 드래곤들은 어쩔 수 없겠지만……." 통상적인 상황이라면 드래곤은 인간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애초에 인간을 하찮은 미물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인간과 어우러져 전면적인 전투를 벌인다면 드래곤들은 자신도 모르게 인간에 대해 뭔가를 느낄 수밖에 없다. 하찮게만 생각했던 인간이 기대 이상의 선전을 해 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드래곤들은 이미 인간이란 종족에 대해 일말의 놀라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쟁을 더 이상 지속시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아 보였다. "순리대로라면 오크는 인간에게 밀려 사라져야 할 종족이다. 이미 정해진 결과를 뒤바꾸는 일은 더 이상 행해져서는 안 된다." 마음을 정한 크라누스는 멀리 보이는 주둔지를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으하암. 피곤하군." 완전 무장한 병사 하나가 하품을 하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옆에는 같은 복색의 병사 하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들은 8군단에 소속된 외곽 경계병이었다. 8군단은 펜슬럿 출신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주 임무가 병참지원인 예비부대였다. 또한 곳곳에 설치된 노예 마을을 총괄해서 관리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전장과 상당히 떨어진 곳에 주둔해 있었지만 8군단의 병사들은 사위경계에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펜슬럿 역시 여타의 강대국과 마찬가지로 군기가 엄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들은 거듭된 근무로 무척 지쳐있는 상태였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교대하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전방에서의 잇따른 병력손실로 말미암아 많은 병사들이 차출되었기 때문에 근무시간이 배 이상 늘어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병사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불확실한 전황이었다. 전방을 주시하고 있던 병사가 고개를 돌렸다. "과연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요?" 기지개를 켜고 난 병사가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말투를 보아 그가 선임병인 것 같았다. "그게 무슨 소린가? 저까짓 허약한 오크 나부랭이에게 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포탈의 파괴로 보급사정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지 않습니까? 예비부대란 이유로 보급이 절반 이상 줄어들었습니다." "보급이야 점차 개선될 걸세. 이번 위기만 넘기면 말이야." "하지만 드래곤이 가세한 뒤로 병력손실이 엄청나다고 들었습니다. 상황을 보니 저희들도 머지않아 전방으로 배치될 것 같습니다만……." 선임병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관절 그걸 어떻게 알았지?" "얼마 전 이곳으로 호송된 부상병 중에 제 고향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녀석 말이……." 그는 냉랭하게 후임병의 말을 끊었다. 그 사실이 퍼져나간다면 8군단 전체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행여나 그런 소리는 입 밖으로 꺼내지 말게. 감찰부의 귀에 들어간다면 크게 경을 칠 테니……." 호되게 그를 질책한 선임병이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깜짝 놀라던 그는 지체 없이 창을 들어올렸다. 난데없는 선임병의 태도에 고개를 돌린 후임병의 눈동자에도 놀라움이 번져가고 있었다.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누군가가 그들 가까이 접근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타난 자는 다행히도 그들이 싸워야 할 적이 아니었다. 은발에 은염을 탐스럽게 기른 늙수그레한 노인이 그들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경계의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정벌군 병사가 아닌 다른 인간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선임병의 고함소리가 호기 있게 울려 퍼졌다. "누군가? 정체를 밝혀라." 노인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난 누군가를 만나러 이곳에 왔다네. 그러니 날 자네들의 사령관에게로 안내해 줄 수 있겠나?" 선임병의 눈동자에 당혹한 빛이 떠올랐다. 갑자기 나타난 노인이 느닷없이 사령관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달라니……. 선임병은 고뇌했다. 원칙대로라면 불문곡직하고 노인을 체포해야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전시상황에서 정체를 모르는 노인을 사령관에게로 안내한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선임병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닥친 상황이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트루베니아에서 만날 수 있는 인간은 정벌군 병사 아니면 오크의 노예뿐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눈빛과 차림새를 보니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선임병이 슬그머니 창을 내렸다. "혹시 드래곤이십니까?" 노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선임병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혹시나 했던 예상이 정확히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즉시 상부에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좋도록 하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노인을 본 선임병은 서둘러 몸을 돌렸다. 이 사실을 급히 사령관에게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8군단을 책임지고 있는 사령관은 펜슬럿의 명망 높은 귀족인 트렐류드 후작이었다. 경비 병사의 보고를 들은 그는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도대체 드래곤이 왜 날 만나려 하는 거지?" 도열한 무장들의 반응은 사뭇 호전적이었다. "드래곤의 요청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혹시라도 사령관님을 암살하려는 목적인지도 모릅니다." 트렐류드 후작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네. 최강의 종족인 드래곤이 뭣하러 그런 수고를 하겠나?" "하지만 정신계 마법을 써서 사령관님을 제압하려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다음 8군단을 이용해 다른 군단을 공격시키려 한다면……." 트렐류드 후작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정신마법에 대한 대비책은 이미 완벽하게 세워져 있네. 내가 이상한, 그리고 이치에 맞지 않는 명령을 내릴 경우 8군단의 지휘권은 자동적으로 부사령관에게로 넘어가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드래곤이 그렇게 나올 것이라곤 짐작되지 않아." 말을 마친 트렐류드 후작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일단 한 번 드래곤을 만나보도록 하지. 상대가 대화를 원하는데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지만 무장들은 쉽사리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팔라딘과 마법사를 다수 배치해 놓겠습니다." "그건 자네들이 알아서 하게." 크라누스는 8군단의 본진 깊숙이 안내되었다. 트렐류드 후작이 미리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을 본 후작은 공손히 예를 올렸다. 비록 서로 맞서 싸우는 적이었지만 지상 최강의 종족에 대한 예우는 어느 정도 필요했다. "위대하신 분을 뵙습니다." 트렐류드 후작이 공손히 예를 올리자 크라누스는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크와는 달리 인간은 이성이 통하는 종족이었다. 오크에게는 결코 이런 태도를 기대하지 못한다. 오크를 상대하는 방법은 오로지 힘을 보여주어 굴복시키는 것뿐이었다. 크라누스의 심유한 눈빛이 후작에게 쏟아졌다. "그대가 아르카디아에서 건너온 병력을 총괄하는 자인가?" 트렐류드 후작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아닙니다. 전 단지 이곳에 있는 병력을 책임지는 사령관일 뿐입니다. 정벌군의 총사령관은 따로 있습니다." "날 그에게로 안내해 줄 수 있겠나?" 노인의 말에 트렐류드 후작은 미간을 좁혔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정벌군에게 있어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 만에 하나 그가 살해된다면 정벌군의 명령체계는 엄청난 혼란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드래곤의 요구를 쉽사리 수용할 수 없었기에 후작은 묵묵히 고개를 내저었다. "죄송하지만 제겐 그것을 결정할 만한 권한이 없습니다." 크라누스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그는 눈앞의 인간 사령관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네. 인간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도 있는……. 그리고 나에겐 자네들의 총사령관을 적대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게." 드래곤의 말이었기에 거짓이 없을 테지만 트렐류드 후작의 우려는 그래도 가셔지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로 그분을 만나시려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크라누스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한 마디에 트렐류드 후작은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난 트루베니아의 드래곤 로드일세." 한참동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트렐류드 후작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즉시 이 사실을 본부에 통보하겠습니다." 고개를 돌린 트렐류드 후작은 통신을 담당하는 마법사에게 눈짓을 했다. "알겠습니다." 마법사는 즉시 수정구슬을 꺼내 본부와의 통신을 시도했다. 나머지 마법사들은 드래곤이 마법통신을 행하는 곳의 좌표를 감지하지 못하도록 그의 주위에 마법방어벽을 겹겹이 쳤다. 운집한 기사들과 병사들은 생전 처음 보는 트루베니아의 드래곤 로드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비쳐지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은발 노인일 뿐이었다. 8군단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오자 정벌군 본영은 발칵 뒤집혔다. "이것은 음모입니다. 보나마나 공작전하를 암살하여 정벌군의 명령체계를 마비시키려는 계략이 분명합니다." "지금 즉시 8군단 사령관에게 척살령을 내려야 합니다. 그곳에는 솜씨 좋은 기사와 마법사들이 수두룩하므로 드래곤 로드를 처치할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지금이 더할 나위 없는 적기입니다." 각양각색의 의견이 나왔지만 페르슈타인 공작은 거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드래곤 로드가 단신으로 와서 나와 대화를 나누겠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드래곤 로드의 의도를 짐작해 내기 위해 이미 그의 머리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가 집무실로 달려 들어왔다. 쾅 문을 박차고 들어온 데이몬이 숨을 헐떡이며 고함을 질렀다. 그 뒤를 슈렉하이머가 따라 들어왔다. "드래곤 로드란 놈이 단신으로 8군단에 와 있다는 것이 사실이오?" 데이몬을 보자 페르슈타인 공작이 몸을 일으켰다. "그렇습니다." "그것 잘 되었군. 지금 즉시 그를 불러들이시오. 혼자 온 것이 사실이라면 명년 오늘이 놈에겐 대대로 제삿날이 될 것이오?" 데이몬의 중원식 표현을 알아듣지 못한 공작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쉽게 말해 놈이 오늘 죽는다는 뜻이오. 그러니 어서 그를 불러들이시오." 데이몬의 눈가에는 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아 이번 기회에 확실히 드래곤 로드를 처치해버리려는 것 같았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81회. 어제 드디어 워3 배틀넷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동안 어둠의 경로(?)로 입수한 게임을 하다 큰맘 먹고 정품을 구입했거든요. 역시 컴퓨터보다는 사람이 훨씬 잘 하더군요. 여섯 번 싸워서 한 번 이기고 나머지는 패했습니다. 그래도 워3는 나은 편이군요.^^ 스타크래프트는 첫 승을 거두기 위해 무려 백 번 이상 패했는데…… 현재 배틀넷 전적이 98승 478패 정도 될 것입니다. 워3는 과연 어떻게 될지……. 컴퓨터와 할 땐 휴먼이 제일 만만했는데 배틀넷에서는 사정이 다르더군요. 뭐 전 데이몬처럼 언데드를 주 종족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 지금껏 그는 드래곤 로드의 레어를 찾아내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막상 당사자가 와 있다는 말을 듣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뒤따라 들어온 슈렉하이머는 조금 다른 의견을 개진했다. "단신으로 와서 대화를 청했으니 일단 들어보는 것이 어떨까요?" 데이몬은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필요는 없소. 우린 놈만 처치하면 실버 드래곤의 저주가 사라진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하오. 나와 본 드래곤, 그리고 데스 나이트가 가세한다면 놈을 반드시 죽일 수 있소." "하지만 상대는 드래곤 로드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다수의 드래곤들이 호위하고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합니다." 데이몬의 눈동자에는 핏발이 곤두서 있었다. "어차피 드래곤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오? 그들이 두려워 물러선다면 전쟁에서 어찌 이길 수 있겠소? 이왕 벌어진 일이니 총력전으로 나가야 하오." 고개를 돌린 데이몬이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페르슈타인 공작을 쳐다보았다. "난 카심 용병단과 함께 출동해서 드래곤 로드를 처치하겠소. 그 동안 당신은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팔라딘과 소드 마스터들을 모두 불러들이시오. 만약 다른 드래곤이 나타난다면 그들로 투입시켜 상대하게 하시오. 마법사들이 소환한 팬텀 스티드에 태우거나 아니면 직접 비행마법을 걸어 벌떼처럼 포위 공격을 가한다면 놈들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소." 페르슈타인 공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드래곤이 디스펠을 건다면 동원된 고급기사들은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너무 위험한 작전입니다. 그것은 최악의 경우에나 선택할………." "어차피 이판사판이오. 목적을 위해서는 다소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오. 내가 알기로 이것은 당신의 평소 지론인 것 같은데?" 데이몬의 눈빛을 받은 페르슈타인 공작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물론 그렇게 한다면 드래곤 하나 둘은 잡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일이 잘못된다면 정벌군에 소속된 고급기사들을 모두 잃어버릴 우려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끝장이었다. 그 때문에 공작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이상하군. 아무래도 데이몬의 태도가 평소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 같군. 드래곤에 대한 적개심이 워낙 깊어서 그런 건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공작의 귀에 리치 특유의 음성이 전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슈렉하이머가 은근한 어조로 데이몬을 달래고 있었다. "일단 드래곤 로드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처치하는 것은 상대의 말을 듣고 나서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놈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소." 거듭 씨근거리는 데이몬을 보며 슈렉하이머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도 데이몬의 태도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데이몬은 이처럼 쉽게 흥분하지 않는 사람인데…….' 일단 달래야겠다는 생각에 슈렉하이머는 데이몬에게만 들릴 수 있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데이몬. 그를 죽인다면 성녀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석상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데이몬은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그 말에 데이몬은 겨우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크라누스는 바로 다프네를 돌로 만든 존재였다. 그를 죽인다면 그는 영영 다프네를 만날 수 없게 되어버릴 터였다. 슈렉하이머의 한 마디로 인해 데이몬은 흥분상태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다프네에 대한 마음이 그만큼 지극했기 때문이었다. 현기증이 치밀어 오른 듯 데이몬이 머리를 짚었다. '이렇게 쉽사리 흥분하다니……. 정말 내가 왜 이러지?' 고개를 돌려보자 정벌군 수뇌부들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장면이 들어왔다. 생각을 거듭하던 데이몬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좋소. 그렇다면 놈의 말을 한 번 들어봅시다." 그러자 페르슈타인 공작이 반색했다. "드래곤 로드에게 좌표를 일러주어 이곳으로 올 수 있게 하겠습니다." "아직까지 놈의 꿍꿍이를 모르니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게 나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고급기사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려놓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공작이 부관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명을 받은 부관은 서둘러 그곳을 달려나갔다. 본부로부터 전갈을 받은 트렐류드 후작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만나려 할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함께 있으니 별 일은 없을 테지만…….' 억지로 표정을 감춘 후작이 크라누스에게로 다가갔다. "총사령관께서 위대하신 분을 만나시겠다 하옵니다. 좌표가 도착했으니 마법사들로 하여금 공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해 출발하십시오." 크라누스는 고개를 흔들어 트렐류드 후작의 말을 잘랐다. "그럴 필요 없네. 좌표만 알려주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갈 수 있으니 말일세." 후작은 조용히 입을 닫았다. 상대는 마법의 조종인 드래곤. 그에게 마법사를 붙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좌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크라누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고맙군." 좌표를 건네 받은 크라누스는 즉시 공간이동을 전개했다. 번쩍. 워프를 마친 크라누스의 눈에 들어온 장면은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벌판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대군이 주둔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보이는 인간이라고는 오직 마법진 위에 서 있는 두 명의 마법사뿐이었다. 그들은 크라누스를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마나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탓에 마법사들은 드래곤 로드의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방대한 마나의 기운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기분이 그리 좋지 못했는지 크라누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좌표를 일부러 이곳으로 일러준 것인가?" 그 말을 듣자 마법사 하나가 입을 열었다. 다분히 떨리는 음성이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나머지 위대하신 분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본영의 좌표를 알고 있으니 절 따라오십시오. 그곳으로 가는 마법진이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알겠네." 크라누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내심 인간들의 철저한 준비성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걸어간 크라누스가 마법진 위에 서자 마법사들은 즉시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텔레포트(teleport)." 크라누스와 마법사들의 모습은 금세 그곳에서 사라져버렸다. 크라누스는 이후로도 서너 차례나 더 다른 곳을 경유해야 했다. 드래곤들에게 총사령관의 거처를 알리지 않으려는 인간들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하지만 크라누스는 묵묵히 마법사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이러는 이유가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나로 인해 트루베니아의 인간들이 멸망했으니…….' 지루함을 참으며 기다린 끝에 그는 마침내 정벌군 본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번쩍. 마지막 공간이동을 마치고 모습을 드러낸 크라누스의 눈에 끝없이 늘어선 병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채 크라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선두에 서 있는 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고급 기사들이었다. 그들의 수가 상상이상이었기에 크라누스는 혀를 내둘렀다. "놀랍군.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인간들이 저렇게 많다니……. 과거 트루베니아 전체를 통틀어봐도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던 크라누스는 이윽고 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사들의 경호가 그쪽에 집중되어 있는 데다 그곳에서 9서클의 마스터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그곳에는 페르슈타인 공작과 데이몬이 위치해 있었다.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차림새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래곤 로드가 정확히 자신들을 지목하자 공작은 적이 놀랐다. '역시 드래곤 로드답군.' 드래곤 로드가 접근하자 기사들은 바짝 긴장하며 언제든지 검을 뽑을 채비를 갖췄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비롯한 수뇌부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특히 기이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드래곤 로드는 이미 수백만의 인간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존재다. 원래대로라면 그에게 끝없는 증오심을 느껴야 정상일 텐데…….' 끔찍한 참사를 야기한 존재였지만 이상하게도 증오심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대가 마치 대자연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들이 쳐다보는 사이 드래곤 로드는 가까이 다가왔다. 각각 인간과 드래곤의 절대자들이 한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순간이었다. 드래곤 로드의 시선이 페르슈타인 공작에게로 향했다. "그대가 인간들의 총사령관인가?" 페르슈타인 공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분이여……." 크라누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정벌군의 총사령관도 역시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그가 익히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 '역시 인간은 절제할 줄 아는 종족이야. 오크였다면 상대가 누구이던 간에 대뜸 욕설을 퍼부으며 덤벼들었을 텐데…….' 생각에 잠겨 있는 크라누스의 귀에 공작의 음성이 전해졌다. "갑작스레 찾아주신 관계로 적절한 영접을 하지 못한 점을 용서하십시오. 그런데 위대하신 분께서는 무슨 일로 이곳에 왕림하셨는지요?" 크라누스는 그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재미있다는 듯한 눈빛으로 공작의 옆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데이몬이 팔짱을 낀 채 크라누스를 향해 도전적인 눈빛을 날리고 있었다. "인간 중에서 9서클의 마스터는 단 한 명밖에 없겠지? 그대가 바로 드래곤 슬레이어였군." "………." "놀라워. 벌써 드래곤을 셋이나 신의 품으로 돌려보내다니 말이야." 데이몬은 느긋하게 팔짱을 풀었다. 그의 눈동자에 서서히 살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과정이 궁금하다면 한 번 보여드릴 수 있소. 앞으로도 드래곤 서넛 정도는 충분히 신의 품으로 돌려보낼 여력이 있으니 말이오." 데이몬의 말에 페르슈타인 공작의 안색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데이몬이 드래곤 로드 앞에서 저처럼 광오하게 행동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나설 상황이 아니라서 그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크라누스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데이몬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에게 감정이 무척 많은가 보군." "굳이 당신뿐만이 아니오. 난 드래곤이란 종족 전체를 증오하고 있소. 능력만 닿는다면 모조리 죽여 없애고 싶은 것이 내 솔직한 심경이라오." 데이몬의 한 마디에 장내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서늘해졌다. 수뇌부와 그들을 경호하는 기사들의 얼굴에도 예외 없이 황당함이 감돌고 있었다. 드래곤 로드 앞에서 저처럼 거침없이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정신이 나간 자가 아니라면 저럴 수는 없었다. 하지만 크라누스는 데이몬의 말에 별달리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자넨 앞으로도 계속 드래곤 사냥을 할 생각이겠군." 데이몬의 대답은 역시 냉담했다. "당연한 질문을 쓸데없이 되풀이하는구려. 그거야 물어보나 마나 아니겠소?" "허허. 무척 재미있는 인간이로군." 어이가 없었는지 크라누스는 실소를 지었다. 지금껏 그에게 이처럼 무례하게 나온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설사 드래곤조차 이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상대는 아무 거리낌없이 자신에게 적의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로드에게는 생소한 대접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 기분이 좋진 않군." 크라누스의 시선이 데이몬 뒤쪽으로 쏠렸다. 그곳에는 카심 용병단원들이 바짝 긴장한 채 검 자루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크라누스는 바로 그들 중 누군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환상의 갑옷을 차려입고 있는 미첼이었다. "내가 만든 갑옷이로군." 그 말을 듣자 데이몬의 눈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혹시 인크레시아를 되찾아가기 위해 온 것이오?" 크라누스는 묵묵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진 않네. 나이가 들다보니 이젠 그다지 보물에 집착하지 않아." 데이몬은 코웃음을 쳤다. "정말 웃기는구려. 드래곤에게 보물에 대한 탐욕이 없다니……. 그 말을 내가 믿을 것이라 생각했었소?" 거듭되는 데이몬의 이죽거림에 크라누스도 결국 부아가 치밀어 오른 모양이었다. "자네 태도가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나?" "당신들 드래곤들이 나, 아니 트루베니아의 인간에게 한 짓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오." 크라누스의 눈동자가 서서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당초 원인제공을 한 것은 너희들이야. 만약 인간들이 나의 해츨링을 죽이지 않았다면 500년 전의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말에 늘어선 기사들은 깜짝 놀랐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82회. 페르슈타인 공작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껏 드래곤이 한낱 유희 때문에 인간들을 멸망시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이 드래곤, 그것도 로드의 해츨링을 사냥했었다니……. 이만저만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크라누스의 격양된 음성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해츨링을 죽인 존재는 의당 전 드래곤의 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 때문에 트루베니아의 인간들이 멸망한 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이야." 그 말에 데이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크라누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드래곤 슬레이어를 꿈꾸는 족속들이 나의 해츨링을 무참히 죽이고 난 뒤, 나는 복수를 위해 백방으로 범인들을 찾으러 다녔다. 하지만 놈들은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감쪽같이 숨어버렸다. 그래서 난 마음을 굳혔다. 범인들을 잡지 못한 대신 놈들이 소속된 종족 자체를 상대로 복수하겠다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데이몬의 입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아악. 일부가 저지른 잘못을 종족 전체에 물을 만큼 인간이 그리 하찮게 보였나?" 바야흐로 데이몬의 감정이 막 폭발하려는 찰나였다. 그 때 옆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페르슈타인 공작이었는데 그가 적절하게 내지른 일성으로 인해 데이몬은 발작하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로드께서는 복수의 방법을 잘못 선택하셨군요." 절묘하게 끼여든 덕분에 크라누스의 관심이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쏠렸다. 하지만 공작을 보는 로드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못했다. "네놈이 감히 나의 선택에 대한 잘못을 따지려는 것이냐?" 호통이 이어졌지만 페르슈타인 공작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자신에게 맡겨 달라는 듯 데이몬의 어깨를 지긋이 짚은 뒤 머뭇거림 없이 크라누스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습니다. 로드께서는 사실 그런 수고를 하실 필요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 활활 타오르는 드래곤 로드의 시선을 공작은 무리 없이 받아넘기고 있었다. "좋다. 거기에 대한 설명을 해 보아라." "일단 인간으로 말미암아 해츨링을 잃으신 점에 대해서는 인간을 대신해서 사과 드립니다. 그렇지만 로드께서 선택한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의견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냐?" 페르슈타인 공작은 눈빛을 반짝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만약 로드께서 복수에 앞서 먼저 인간에게 경고를 하셨다면 최악의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좋은 결과 역시 도출해 낼 수 있었음도 밝힙니다." "자세히 말해 보아라."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페르슈타인 공작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제가 만약 로드의 입장에 서 있었다면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먼저 각 왕국의 군주들을 찾아가서 자세한 정황을 설명합니다. '인간들이 나의 해츨링을 무참하게 죽였다. 따라서 난 거기에 대한 책임을 놈이 소속된 종족인 인간들에다 물으려 한다.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 말입니다." "………." 크라누스는 미동도 하지 않고 페르슈타인 공작의 말을 듣고 있었다. "만약 그러셨다면 각 왕국의 군주들은 대륙 전체를 헤집더라도 틀림없이 범인을 찾아 로드 앞에 대령시켰을 것입니다. 종족 전체의 멸망을 막기 위해 말입니다. 그러셨다면 서로에게 좋지 않았겠습니까? 로드께서는 해츨링을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고 또한 인간들은 멸망을 피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반드시 범인을 잡아 대령시킨다는 보장이 없질 않느냐?" 페르슈타인 공작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제가 만약 당시의 군주 중 하나였다면 반드시 범인을 로드 앞에 대령했을 것입니다. 찾지 못한다면 설사 만들어서라도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묵묵히 듣고 있던 크라누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네 말이 재미있구나. 범인을 만들어서 대령한다니……." "인간이란 종족은 자신의 희생으로 종족 전체의 멸망을 막을 수 있다면 서슴없이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설명을 듣고 나자 크라누스의 눈빛은 어느새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 하구나. 내가 직접 찾아다니는 것보다는 그 편이 훨씬 효과적이었겠구나." "그렇게 말씀하시니 감사합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공손히 예를 올렸다. 적어도 지금은 로드를 적대할 때가 아니었다. '데이몬이 나선다면 로드를 죽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찾아왔다. 그런 관점에서 경솔히 행동할 때가 아니다. 드래곤 로드가 뭔가를 안배해 놓았을지도 모르니까…….' 마음을 차분히 정리한 공작은 드래곤 로드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로드께서는 무슨 일로 이곳을 찾으셨는지요." 공작을 지긋이 응시하던 로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너희들에게 한 가지를 통보해 주려고 이곳에 왔다." "무엇입니까?" 로드의 대답을 듣자 공작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로드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사실은 그로썬 더 이상 반가울 수 없는 낭보였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끝난 드래곤들의 회합에서 내린 결정이다. 앞으로 드래곤들은 더 이상 인간들을 적대하지 않을 것이다." "지, 진정이옵니까?" 페르슈타인 공작은 떨리는 심신을 제대로 주체하지 못했다. 드래곤들이 참전하지 않는다면 승리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수는 적지만 잘 단련된 정벌군을 오크의 힘만으론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드래곤이 전쟁에서 손을 뗀다면 아르카디아에 대기중인 백만 대군을 불러들일 수도 있다.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공작을 보며 크라누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이다. 하지만 너무 좋아하진 말아라. 드래곤이 모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죄송하지만 참전을 결정한 드래곤이 얼마나 되는지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크라누스는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와 그를 따르는 두 드래곤은 계속해서 인간을 공격할 것이다. 다른 드래곤들은 거기에 일절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로드께서는 어떻게 하실 예정이십니까?" 크라누스는 조용히 머리를 뒤흔들었다. "나는 아직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너희들을 한 번 만나보고 결정을 내릴 생각이었으니까……" 페르슈타인 공작이 얼른 대답했다. "어떤 결정을 내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약속드리겠습니다. 로드께서 중립을 지키신다면 저희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로드께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글세……."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던 크라누스의 시선이 데이몬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크라누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크라누스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나에겐 달리 선택의 길이 없을 것 같군. 중립을 선언하고 레어로 돌아가더라도 저 녀석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 말을 듣자 페르슈타인 공작은 다급해졌다. 지금 정벌군이 당면한 상황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이 바로 실버 드래곤의 저주였다. 그 저주만 풀리더라도 공작으로써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데이몬의 동의가 필요했다. 하지만 인상을 잔뜩 찌푸린 기색을 보니 쉽사리 승낙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공작은 어떻게 해서든 설득하려 입을 열었다. "저……데이몬." 데이몬은 냉랭하게 페르슈타인 공작의 말을 잘랐다. "이 문제는 이번에는 나에게 맡겨 주시겠소?" "………." 더 이상 설득해볼 여지가 사라지자 페르슈타인 공작은 쓴웃음을 지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데이몬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정말 웃기는군." "………." "마음대로 전쟁을 시작해서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이제 와서 손을 떼겠다는 고약한 심보는 도대체 뭐요?" 크라누스의 얼굴에도 서서히 노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드래곤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불만이 있느냐?" "불만이 많을 수밖에……. 당신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소. 그들의 가족이 겪어야 할 고통에 대해서 지금껏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소?" 그 말에 크라누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날 순순히 놓아주지 않겠다는 뜻이로군.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는가?" 크라누스는 심유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미안하지만 종족전쟁을 일으킨 데 대해 사과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드래곤은 그만큼 자유롭고 고귀한 존재이니까……." 그 말을 듣자 데이몬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빌어먹을……. 누가 사과하라고 했소? 난 단지……. 그만둡시다. 당신에겐 어차피 쇠귀에 경 읽기일 테니까……." "………." 감정이 치밀어 올랐는지 데이몬은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른 데이몬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제 내 조건을 얘기하겠소. 만약 당신이 나의 조건을 들어준다면 나 역시 한 가지를 약속하겠소." 크라누스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게 무엇이냐?" "간단하오. 이번 전쟁에 참전하지 않는 드래곤들에겐 복수를 포기하겠다는 것이오.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약속은 지켜질 것이오. 물론 베르키스 그 놈과 놈을 따라다니는 드래곤들은 예외겠지만……." "조건이 뭐지?" 데이몬이 내세운 조건은 간단했다. "500년 전 당신이 돌로 만든 성녀를 원래대로 돌려주시오." 뜻밖의 제안이었는지 크라누스의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이미 그는 데이몬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이 쉽사리 들어주기 힘든 조건을 제시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것……뿐이냐?" "그렇소. 내 조건은 그것이 전부요." 그는 기이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잠시 후 크라누스는 페르슈타인 공작을 쳐다보았다. "이제 확실하게 결정을 내렸다." 공작이 차분한 신색으로 드래곤 로드의 말을 받았다. "말씀하십시오." "난 인간들을 더 이상 적대하지 않을 생각이다. 다시 말해 이번 전쟁에 참전하지 않겠다는 뜻이지. 그에 대한 약조로 바다에 펼쳐진 폭풍우를 해제시켜 줄 것을 약속한다." 쾅. 페르슈타인 공작의 얼굴에 희열감으로 물들었다. 늘어선 정벌군 수뇌부들 역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암울하던 그들의 앞날에 일시에 서광이 비친 것이다. 이제 그들은 승리에 대한 희망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83회. 하지만 데이몬과 슈렉하이머의 얼굴에는 전혀 표정변화가 없었다. 기쁘긴 했지만 슈렉하이머는 리치인 탓에 내색을 하지 못했고 데이몬은 그저 인상을 찡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을 둘러보며 크라누스는 말을 이어나갔다. "수천 년 동안 보아왔지만 인간들은 참 이해하기 힘든 종족이더군.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켜 서로 죽이고 죽이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나름대로 질서를 지키며 번영을 누리다니……. 정말 납득하지 못할 노릇이지." 페르슈타인 공작이 얼른 말을 받았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법과 규범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 점에 있어서는 공감한다. 사실 이 결정에는……." 크라누스는 손가락을 뻗어 데이몬을 가리켰다. "저 녀석의 태도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용서와 관용을 보일 수 있는 인간은 충분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흥. 괜히 띄울 생각하지 마시오." 데이몬이 냉랭하게 쏘아붙였지만 로드의 얼굴에 서린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내 볼일은 모두 끝났다. 뜻을 밝혔으니 난 레어로 돌아가서 그 동안 못 이룬 잠이나 청하도록 하겠네." 페르슈타인 공작이 서둘러 말을 받았다. 그만큼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었다. "로, 로드……. 바다에 펼쳐진 저주는?" "걱정할 것 없다. 바다에 펼쳐진 저주는 이미 이곳으로 오며 풀어버렸으니까……." 크라누스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그대들과 싸우게 되었더라도 저주는 풀어줄 생각이었다. 500년 전의 소행에 대한 일종의 보답이라고나 할까? 그럼 난 이만 가볼 테니 잘들 있게나." 그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정벌군 수뇌부들을 남겨두고 몸을 돌렸다. "아 참. 그렇지." 뭔가가 떠오른 듯 고개를 돌린 크라누스가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할 텐가?" "뭐가 말이오?" "성녀는 나의 레어에 있어. 그녀를 넘겨받으려면 날 따라오게나. 베르키스가 호시탐탐 그녀를 노리고 있으니 자네가 직접 인수받는 편이 나을 걸세."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소. " "좋네. 그럼 워프를 준비하겠네." 크라누스가 마나를 재배열하는 사이 카심 용병단원들이 하나 둘 데이몬의 옆으로 집결했다. 성녀를 데리러 가는 일이라 카심 용병단 전체가 출동해야 했던 것이다. 대원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기대감으로 번들거렸다. 카심이 미소를 지으며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기대 되시겠습니다." "뭐가?" "그토록 갈구하시던 사랑을 되찾게 되셨으니 말입니다." "아직까진 모르네." 심드렁하게 대꾸한 데이몬이 몸을 돌렸다. 그런데 제일 뒤에 서 있는 율리아나의 표정이 왠지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넋이 빠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미첼이 잡아끌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뭐 하는 거야? 서둘러야지." "아, 알았어." 퍼뜩 정신을 차린 율리아나가 서둘러 대원들을 뒤따랐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대원들이 모두 마법진 위에 올라서자 크라누스가 즉각 마법을 발현시켰다. "그럼 워프를 시행하겠네." 번쩍. 눈부신 빛무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잠시 후 빛무리가 사라졌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떠들썩한 환호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기쁨을 이기지 못한 정벌군 기사들과 병사들이 일제히 내지르는 함성이었다. 그들은 이제 승리에 대한 희망을 되찾은 상태였다. 드래곤이 가세하지 않는 한 오크는 결코 그들의 적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드디어 야망을 이룰 길이 보이려 하는가?" 페르슈타인 공작 역시 한없이 들뜬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상황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반전되고 있었다. 크라누스와 카심 용병대원들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외딴 섬이었다. 그곳은 바로 크라누스의 레어가 위치한 크레아 섬이었다. 섬을 둘러본 데이몬은 얼굴을 찡그렸다. 섬의 모습이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본 크라누스가 미소를 지었다. "왜? 드래곤 로드가 사는 레어 치고는 볼품이 없어서 그런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소." "나의 레어는 이 섬의 지하에 있는 수중 동굴 속에 위치해 있네. 보여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이 유감이야." "나도 굳이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소. 그러니 성녀나 빨리 돌려주시오." "그러지." 고개를 끄덕인 크라누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걸어가는 방향에는 야트막한 절벽이 위치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크라누스가 손을 내젓자 절벽에는 커다란 동굴 입구가 마치 거짓말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쿠르르릉. "자네들은 여기서 잠시 기다리게. 성녀를 되살린 뒤 데리고 나올 테니 말이야." "알겠소." 고개를 끄덕이는 데이몬을 본 크라누스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의 몸은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동굴 입구를 응시하고 있던 데이몬의 눈동자에는 형언할 수 없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드디어 다프네를 만나게 되는가? 무려 500년 만에…….' 기대감 때문인지 몸이 부르르 떨렸다. 또한 그녀와 함께 했던, 결코 길지 않은 시간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일목요연하게 떠올랐다. 무려 5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데이몬은 다프네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눈, 코, 입에서부터 가슴 떨리는 미소까지……. 침묵을 지키는 데이몬을 쳐다보며 대원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햐! 정말 기대되는군. 데이몬이 500년 동안 기다려 온 여인이 과연 어떻게 생겼을지……. 엄청나게 아름답겠지요?" 넉살좋게 말문을 여는 페터슨을 카심이 말없이 흘겨보았다. "그런 소리하지 말아라. 사랑에 있어 용모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법이다." "대장님 말이 조금 이상하잖아요. 형수님은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미인이던데……." "이 녀석이?" 카심이 사납게 눈을 부라리자 패터슨이 찔끔했다. 둘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던 미첼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한없이 아름다운 일루미나의 얼굴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녀 역시 카심 용병단의 임시 대원으로 함께 행동하고 있었다. 일루미나를 쳐다보던 미첼이 돌연 한쪽 눈을 찡긋했다. "500년 동안 떨어져야 했던 데이몬이 드디어 사랑을 이루게 되었군요. 일루미나는 어떻게 생각해요?" "수명이 짧은 인간에게 500년을 이어온 사랑이 있을 수 있다니 정말 놀라워요." 일루미나의 반응은 다른 대원들과는 사뭇 달랐다. 아직까지 감정을 절제하는 엘프의 습성이 남아있는 탓에 데이몬의 사정이 아직까지 가슴 깊이 와 닿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지금껏 이성을 사랑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당면한 상황을 상당히 혼란스러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한 마디로 조금씩 변해 가는 마음을 표현했다. "하지만 미첼을 500년 동안 만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슬플 것 같아요." 일루미나의 말에 미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속마음을 들으니 마치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내심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시뻘겋게 달아있는 율리아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너………." 눈을 크게 뜨던 미첼이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녀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안쓰러운 눈빛으로 율리아나를 쳐다보던 미첼이 혀를 찼다. '쯔쯔. 그러게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왜?' 그녀가 안되었다는 생각에 미첼은 조용히 머리를 흔들었다. 동굴에 들어선 크라누스는 곧장 레어를 향해 걸어갔다. "성녀를 넘겨주고 난 다음 베르키스에게는 마법 통신으로 결정된 사항을 알려줘야겠군." 결정을 내리고 나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했다. 뭔가 어긋났던 것을 바로잡은 듯한 기분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크라누스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앞으론 모든 일이 순리대로 돌아갈 것이다." 주신인 베르하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쪽 세계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베르키스처럼 힘을 숭상하는 드래곤이 생겨난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원상태로 돌아갈 터였다. 트루베니아가 어느 종족의 손에 장악되던 간에 크라누스는 이제 전혀 상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베르키스의 지원을 받는 오크족이 이기던 아니면 드래곤 슬레이어가 활약하는 인간이 이기든 말이다. 생각에 팔려 걷는 사이 그는 어느새 자신의 레어에 도착해 있었다. "성녀를 넘겨주는 즉시 외부로 통하는 통로를 폐쇄해야겠군. 당분간 드래곤들을 만날 일이 없을 테니 말이야." 그 때 크라누스의 뇌리에 뭔가가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드래곤 로드 자리를 넘겨주는 문제였다. 크라누스는 이미 천수를 거의 다한 상태, 따라서 수면에 들어가기 전에 후사를 결정지어야 했다. 원래대로라면 가장 나이가 많고 강력한 드래곤인 베르키스에게 로드 자리를 넘겨주어야 했다. 하지만 크라누스는 그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힘만을 숭상하는 베르키스가 드래곤 로드가 된다면 트루베니아는 앞으로 결코 편한 나날을 보낼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그는 이미 암암리에 후임자를 물망에 올려놓은 상태였다. 크라누스는 잠자코 후계자로 내정된 드래곤에게 마법 통신을 시도했다. 그를 불러들여 자신이 내린 결정을 일러준 뒤 수면에 들어갈 생각에서였다. "이제 되었군." 일을 마친 크라누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걸어가는 방향에는 여러 종족의 석상이 놓여 있었다. 가운데에는 두 손을 맞잡고 기도하는 듯한 소녀의 석상이 놓여 있었다. 크라누스는 착잡한 눈빛으로 석상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이 일로 인해 벌써 베르하젤 님의 진노를 샀을지도 모르겠군. 할 수 없는 일이지." 한 숨을 길게 내쉰 크라누스는 잠자코 마나를 재배열했다. 500년 전 그는 무척 세심하게 신경 써서 성녀를 돌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생각대로라면 성녀는 아무 무리 없이 부활할 수 있을 터였다. "500년 동안 돌이 되어 있던 것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을 테지ㅁ반……." 혼잣말을 내뱉은 크라누스는 지체 없이 마나를 재배열했다. "스톤 투 플레쉬(stone to flesh)" 눈부신 광휘가 레어 속으로 퍼져나갔다. 화라라락. 소녀의 석상을 중심으로 번져나가는 빛은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동시에 석상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진동하기 시작했다. 500년 동안 잠들어있던 성녀가 다시 인간으로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크라누스는 거듭 마나를 불어넣어 대법을 진행시켰다. 500년 동안 석화마법을 지속시키면서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은 마법의 조종인 드래곤에게도 쉽지 않은 작업이다. 주기적으로 마나를 불어 넣어주지 않는다면 석화된 존재는 도저히 생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또한 석화마법을 해제하는 것은 오직 대법을 시전한 드래곤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 유일하게 크라누스만이 돌이 된 성녀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대법이 진행됨에 따라 석상의 표면에 서서히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또르르르. 석상의 얼굴에 맺힌 눈물이 물이 되어 주르르 흘러내렸다. 동시에 피부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돌로 조각되어 있던 흉부에 서서히 기복이 일기 시작했고 되살아난 심장이 혈액을 힘차게 내뿜었다. 그러는 동안 오색영롱한 빛은 계속해서 석상을 감싸고 있었다. 크라누스가 끊임없이 힐링을 전개하여 몸의 회복을 돕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눈부신 빛이 레어 내부를 다시 한 번 뒤덮었다. 번쩍.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84회. 빛이 사라진 자리에 석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소녀 하나가 힘없이 널브러진 채 사지를 꿈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동안 소녀를 내려다보던 크라누스가 고즈넉이 입을 열었다. "정신이 드느냐?" 그 말에 소녀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500년 만에 살아난 성녀 다프네는 눈물이 그렁한 눈을 들어 크라누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힐링마법이 계속해서 그녀를 감싸며 몸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제, 제가 되살아난 것인가요?" "그렇단다." 성녀는 드래곤 로드를 똑바로 쳐다보며 질문을 퍼붓고 있었다. "세상은 어떻게 되었나요?" "네가 돌이 된 이후 무려 500년의 세월이 흘렀단다." 다프네의 눈가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대충 짐작은 했었지만……. 그렇다면 제가 알던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군요." 크라누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테지." "트루베니아에서 결국 인간이 멸망했나요?" "500년 전에는 그랬다. 하지만 아르카디아로 건너간 인간들이 다시금 번영을 되찾아 다시 트루베니아를 수복하겠다고 건너왔더구나." "그, 그런 일이……." 말을 잇지 못하는 성녀를 쳐다보며 크라누스가 거듭 말을 이어나갔다. "잠들어있는 동안 베르하젤 님께 뭔가 계시를 받은 것이 있느냐?" 다프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반응에 크라누스는 다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나의 행동으로 인해 베르하젤 님께서 많이 진노하셨느냐?" 다프네는 크라누스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분께서는 로드께 많이 실망하셨습니다." 크라누스의 얼굴에 자조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럴 테지. 그렇고 말고." "그런데 왜 절 다시 부활시키셨나요?" 크라누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가 아는 한 인간이 나에게 내건 조건 때문이었다. 날 죽이지 않는 대신 널 인간으로 되돌려 달라고 하더구나?" "그, 그게 무슨?" 다프네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드래곤 로드의 목숨을 담보로 그런 조건을 내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하지만 사실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는 충분히 날 죽일 수 있다." "그, 그가 도대체 누구인가요?" 크라누스의 대답을 듣자 다프네의 눈가에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데, 데이몬 아저씨가? 믿을 수 없어요. 아저씨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지요? 또한 로드께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실 만큼 강해졌다니……." "하지만 사실이다. 그는 정말 기구한 삶을 살아왔단다. 고금을 통틀어봐도 그와 같은 삶을 산 사람은 그 외에는 단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아저씬 지금 어디에 있나요?" "이제 널 그에게 데려다 주겠다." 말을 마친 크라누스는 저벅저벅 걸어와서 다프네를 안아 일으켰다. 그녀를 부축해 몸을 돌리려던 크라누스는 뭔가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돌렸다. "네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계시는 받았겠지?" "예." 고개를 끄덕이는 성녀를 본 크라누스는 알았다는 듯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갑자기 나타나 앞을 가로막은 그림자 때문이었다. 너무나 뜻밖이었기에 크라누스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아, 아니 자네는?" 나타난 이는 그가 가장 경계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바로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이었던 것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베르키스는 팔짱을 낀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크라누스를 쏘아보고 있었다. 얼떨떨해 하던 크라누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자네가 여기 웬일인가?" 크라누스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곳은 내 허락이 없으면 들어올 수 없는 곳이야. 그런데 어찌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나?" 베르키스가 느긋하게 팔짱을 풀었다. "잊으셨습니까? 적어도 마법 방면으론 제가 로드보다 윗줄입니다. 레어에 펼쳐놓으신 보호마법 따윈 눈 깜짝할 사이에 풀 수 있습니다." 무척 불손한 언사였기에 크라누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베르키스는 여전히 도전적인 눈빛으로 크라누스를 쏘아보고 있었다. "결국 바다에 펼쳐진 저주를 풀어버리셨더군요.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는지 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냉정을 되찾은 크라누스가 조용히 대답했다. "원래대로 돌아간 것뿐일세. 아무리 드래곤이 신께 권능을 허락 받았다고는 하나 이처럼 무단으로 두 대륙 사이를 차단시키는 것은 순리에 어긋나는 일이야." "로드께서 언제부터 그렇게 순리를 따지셨는지 모르겠군요." 퉁명스럽게 내뱉던 베르키스의 시선이 로드 옆에 바짝 붙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성녀에 가서 닿았다. 베르키스의 눈동자에 어린 빛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제가 그토록 청했건만 넘겨주지 않았던 성녀를 결국 인간으로 되돌리셨군요." "………." "데이몬이란 놈에게 넘겨주실 생각입니까?" 크라누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그가 내건 조건은 바로 성녀를 돌려주는 것이라네." "후후후.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고작해야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내건 조건을 받아들이시다니……." 실소를 흘리던 베르키스가 돌연 정색을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성녀를 제게 넘겨주실 수 없습니까?" 크라누스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 순 없네."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태연한 베르키스의 반응을 본 크라누스는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 무단으로 나의 레어에 침입한 이유를 알고 싶네." "뭐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따지자면 좋은 의도라고 볼 수 있겠군요." "………." "로드께 500년 전에 이승을 하직한 해츨링을 만나게 해드리려 왔으니 말입니다." 베르키스의 말뜻을 알아차린 크라누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날…… 죽이려고 왔다는 뜻인가?" 베르키스는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하신 보답으로 제가 직접 로드를 신의 품으로 돌려보내 드릴 생각입니다." "어처구니가 없군. 어찌 드래곤으로써……." 질린 표정으로 주춤 뒤로 물러서는 크라누스를 향해 베르키스가 한, 자 한, 자 똑바로 내뱉었다. "그따위 낡은 고정관념은 버리십시오. 드래곤은 드래곤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옛 말입니다." 크라누스를 쳐다보는 베르키스의 눈빛이 미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 가지 가르쳐 드리지요. 500년 전 로드의 해츨링은 바로 제가 사주한 인간들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전 기밀엄수를 위해 해츨링을 해친 인간들을 제 손으로 처리했습니다. 로드께서 범인을 잡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지요." 크라누스의 눈이 커졌다. "세, 세상에……." "이제 드래곤들의 삶에서 낡은 관습과 전통은 모조리 사라질 것입니다. 차기 로드인 제가 그렇게 바꿀 생각이니까요." 크라누스는 이를 갈며 내뱉었다. "자네가 쉽사리 로드가 될 수 있을 것 같은가?" "왜 아니겠습니까? 로드가 될 만한 드래곤들을 모조리 죽여버린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말을 마친 베르키스가 진득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제가 너무 말이 많았나요?" 베르키스는 슬쩍 손을 치켜들었다. 손에서 눈부신 광휘가 일어나자 크라누스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마법실력 면에서 베르키스가 윗줄이란 사실을 크라누스도 익히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마법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옆에서 뭔가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손이 허전해 진 것을 느낀 크라누스는 깜짝 놀랐다. "아, 아니?" 어느새 성녀는 크라누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었다. 갑옷과 투구를 걸친 인간 하나가 빠른 몸놀림으로 달려들어 성녀를 낚아채어 간 것이다. 뽑아든 장검에서는 눈부신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치고 있었으며 투구의 안면가리개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상당한 실력을 가진 인간 기사였다. 그를 본 크라누스는 낙담한 듯 떠듬떠듬 중얼거렸다. "정신계 마법으로 현혹시킨 인간이로군." "그렇습니다. 인간들 중에서도 상당히 강한 실력자이더군요. 저놈을 생포하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썼습니다." 베르키스의 정신마법에 현혹된 기사를 쳐다보던 크라누스에게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자네 혹시 저자를 이용해서……." 베르키스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는 로드의 죽음을 철저히 인간의 짓으로 위장할 것입니다.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드래곤들이 결정을 번복할 가능성이 조금은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가증스런……." 치를 떠는 크라누스를 노려보며 베르키스가 유유히 내뱉었다. "이것 역시 인간들에게서 배운 계략입니다. 인간들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방법으로 말미암아 대륙에서 사라지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말을 마친 베르키스는 느릿하게 손을 들어올렸다. "이만 끝낼 시간이로군요. 옛 정을 생각해서 본체로 돌아갈 시간을 드리지요." 크라누스는 마음이 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제 베르키스와의 일전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자네가 강하다는 것은 인정하네. 하지만 얕보지는 말게. 나도 순순히 당할 생각은 없으니……" "당연히 그래야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유들유들하게 대꾸하는 베르키스를 노려보며 크라누스는 잠자코 폴리모프를 전개했다. 그의 몸은 눈부신 광휘에 휩싸여 서서히 본체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85회. 데이몬을 위시한 카심 용병단원들은 레어 바깥에서 크라누스가 나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드래곤 로드는 도무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데이몬은 점차 조바심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왜 이렇게 안 나오지? 혹시 다프네를 되살리는 일이 잘 안 되는 것 아닐까?" 다프네를 떠올리자 마음이 급해졌다. 그만큼 그녀는 데이몬에게 있어 절실한 존재였다. 안절부절못해 하던 데이몬을 보다 못해 슈렉하이머가 위로를 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오. 500년 동안 돌이 되어 있던 사람을 되살리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알고 있소. 하지만……." "그는 가장 나이가 많은 드래곤 로드 아닙니까. 반드시 성녀를 만날 수 있을 테니 마음 편히 가지십시오." "………." 데이몬은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모락모락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은 도무지 가셔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카심 용병단원들이 마나연공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들에게 수련은 이미 일상사에 속했다. 만약 이곳이 드래곤 로드의 레어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벌써 검술대련을 시작했을 터였다. 대원들을 느릿하게 둘러본 데이몬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순간 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이, 이 기척은?" 데이몬의 고개가 팩 돌아갔다. 눈동자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부릅떠졌다. 동굴 입구에 표표히 버티고 서 있는 인영을 발견하고 나서였다. "이, 이런……." 데이몬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두 존재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는 감히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불공지대천의 원수였고 다른 하나는 그가 자신의 생명보다도 더 아끼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가 다프네를 부축한 채 서 있었던 것이다. 인간으로 폴리모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베르키스를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500년 전 저 모습을 한 베르키스에게서 갖은 고문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아, 아저씨." 다프네를 본 데이몬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베르키스를 본 대원들은 술렁거리며 데이몬 옆으로 다가왔다. 인간의 모습을 한 베르키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미처 동굴 입구에 서 있는 청년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베르키스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번져갔다. "이럴 줄은 몰랐나 보군." "………." "성녀를 구하러 왔나 본데 헛수고를 했군. 드래곤 로드에겐 애당초 성녀를 넘겨줄 마음이 없었으니까……." "그, 그게 사실이냐?" "그럼.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어떻게 성녀를 데리고 있겠나?" 데이몬은 이를 악물었다. "이런 빌어먹을……." "자, 자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네놈의 행동 여하에 따라 사랑하는 여인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으니까……." 달려들려던 데이몬이 멈칫했다. "그녀를 도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냐?" 베르키스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훌륭한 미끼가 생겼으니 원래는 완벽한 낚시를 해볼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어. 일단 성녀를 나의 레어로 데리고 갈 생각이야." 데이몬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순순히 그녀를 데리고 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상황을 보니 내가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은데?" 베르키스는 빙그레 웃으며 마나를 재배열했다. 그의 주변으로 눈부신 마법진이 생겨났다. 공간이동을 실현시키는 마법진이었다. "그럼 난 가보겠다. 행여라도 공간이동을 훼방놓을 생각은 하지 않도록……. 성녀를 살리고 싶으면 말이야." 베르키스는 손가락을 뻗어 동굴 입구를 가리켰다. "동굴 속에 크라누스가 있으니 따지고 싶으면 그에게 따지도록……." 베르키스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눈부신 광휘가 둘을 감쌌다. 번쩍. 잠시 후 레드 드래곤과 성녀의 모습은 그곳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데이몬은 미동도 하지 않고 몸을 떨고 있었다.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그의 앞에 벌어진 것이다. "크으으으." 잔뜩 움켜쥔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데이몬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줄도 모른 채 거듭 치를 떨고 있었다. 보다 못한 슈렉하이머가 데이몬을 위로했다. "로드에게 먼저 가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단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 침묵을 지키던 데이몬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베르키스 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드래곤 로드는 오늘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인크레시아를 열어 젖혔다. 카심 용병단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전력인 데스 나이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4대 기사를 위시하여 다크 포탈에서 거둔 6명의 데스 나이트가 무장을 갖춘 채 도열했다. 카심 용병단은 그들의 물샐틈없는 호위를 받으며 조심스럽게 동굴 속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동굴 속을 걸어 들어가는 데이몬의 눈동자는 분노로 인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드래곤 로드의 레어로 내려가는 통로는 상당히 길었다. 데이몬을 위시한 카심 용병단원들은 바짝 긴장한 채 조심스럽게 통로 내부로 진입해 들어갔다. 다른 곳도 아닌 드래곤 로드의 레어였기 때문에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데이몬의 표정은 마치 시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눈동자에서는 분노의 광망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베르키스와 크라누스를 향해 발산하는 원초적인 분노였다. 되살아난 다프네를 잠깐이나마 목격했기 때문에 더욱 분노하는 지도 몰랐다. 다프네는 데이몬에게 있어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 다프네를 다른 이도 아닌 철천지원수 베르키스에게 넘겼다니……. 데이몬은 조용히 뇌까렸다. "사실이 확인된다면………." 만약 그렇다면 그는 크라누스를 결코 살려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묵묵히 각오를 다져가며 데이몬은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어두운 통로를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갔다. 통로에 진입한지 일각 가량 지났을 때 선두에서 들어가던 헬버트론이 경고성을 울렸다. "모두 조심해라. 상황이 심상치 않다." 경고성을 들은 데이몬은 헬버트론의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가디언이 나타났나?" "아무래도 이곳에서 엄청난 싸움이 벌어진 것 같다. 사방에 스톤 골렘들의 잔해가 널려 있다. 골렘들은 모조리 파괴된 상태다." "파괴된 상태라고?" 깜짝 놀란 데이몬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앞에 처참한 장면이 펼쳐졌다. 드래곤 로드의 레어는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대리석 벽면에서 늘어선 기둥까지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그 사이사이에 형편없이 부스러진 돌덩이들이 널려 있었다. 형태를 보아하니 한 때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이었을 법한 스톤 골렘이었다. 그나마 살아있는 스톤 골렘은 단 하나도 없었다. 모조리 파괴된 채 볼썽 사납게 널브러져 있는 것이다. 보고 있던 데이몬의 눈동자에 의혹의 빛이 번져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혹시 정벌군에 소속된 기사단이 이곳을 습격한 것인가?" 그가 생각에 팔려 있는 사이 데스 나이트들이 서둘러 레어 내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보고 있던 카심 용병단원들도 수색에 가담했다. 파괴된 스톤 골렘을 살펴본 카심이 인상을 찡그렸다. "상황이 조금 이상하군요." "뭐가 말인가?" "제가 보기에는 스톤 골렘들은 서로 상잔한 것 같습니다. 파괴된 부분이 거의 가루가 되어있는 것을 보니 십중팔구 그런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카심이 검을 휘둘러 스톤 골렘의 잔해 일부분을 가격했다. 카가각. 날카로운 마찰음 소리와 함께 돌가루가 사방으로 튀었다. 카심은 손가락을 들어 스톤 골렘의 동체에 새겨진 칼자국을 가리켰다. "보십시오. 인간과 싸웠다면 스톤 골렘의 동체에는 이런 칼자국이 무수히 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의 부서진 부분은 칼자국은커녕 아예 짓이겨져 있지 않습니까?" 카심은 이맛살을 찡그린 채 설명을 이어나갔다. "팔라딘이나 소드 마스터라면 동체에 난 상처를 더욱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오러 블레이드는 순간적으로 파고들기 때문이죠." "이상하군. 가디언들이 왜 서로 상잔했을까?" 그 때 미첼이 데이몬을 소리쳐 불렀다. "이리 잠깐 와보시겠습니까?" 미첼의 옆에는 완파된 스톤 골렘 한 기가 맥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데이몬이 다가가자 미첼은 스톤 골렘의 부서진 머리통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를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데이몬의 시선에 뭔가가 잡혔다. 뭔가가 상처에 묻어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금속으로 보이는 파편이었다. 격전을 벌일 당시 병기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 같았다. 데이몬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뻗어 파편을 집어 올렸다. "이것은 청동(브론즈:Bronze)인데? 세상에 무른 청동으로 병기를 만들어 쓰는 놈들이 있나?" 데이몬의 안색이 별안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혹시……." 그는 비로소 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청동으로 된 병기를 사용하는 존재는 하나 뿐이었다. "그랬군 스톤 골렘들은 베르키스의 브론즈 골렘과 싸워 파괴된 것이로군. 그렇다면 이것은 베르키스 놈의 소행이 틀림없어." 그 때 헬버트론의 음성이 레어 내부에 울려 퍼졌다. "이리 좀 와보겠나?" 대원들은 일제히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헬버트론이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본 뒤 하나같이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세, 세상에……."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대원들의 눈은 크게 부릅떠져 있었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86회.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드래곤이 피바다 속에 누워있었다. 머리통은 통째로 떨어져 나갔고 피부 곳곳에 흉측한 상처가 패여 있었다. 상처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은은한 은빛의 동체와 앞 뒷발 대신 나 있는 큼지막한 지느러미는 이 시체가 생전에 실버 드래곤이란 사실을 말해주었다. 이 정도 덩치라면 에인션트 급은 오래 전에 넘어섰을 터였다. 이곳은 다름 아닌 드래곤 로드의 레어. 상황을 보아 죽어 있는 드래곤이 레어의 주인이 확실해 보였기에 데이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드래곤 로드가 여기에 죽어 있다니……." 드래곤의 시체를 쳐다보는 대원들은 말을 잊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드래곤 로드가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의 레어에서 죽어 있는 것일까. 하지만 질문에 대답해 줄만한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침묵의 시간이 지나가고 데이몬이 착 가라앉은 음성을 토해냈다. "상황을 보니 아무래도 드래곤 로드는 베르키스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 같군." 슈렉하이머 역시 상황을 이해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런데 베르키스가 왜 우릴 이곳으로 들어오도록 유인했을까요?" 데이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우린 함정에 빠진 것 같소." "함정이라면……."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 게요. 재수 없으면 우리가 드래곤 로드를 죽인 범인으로 몰릴 것 같소. 저것을 보시오." 데이몬이 가리킨 곳은 크라누스의 몸에 난 상처였다. 대원들은 그 상처가 오러 블레이드에 의한 상처임을 한 눈에 알아차렸다. 강철보다 단단한 드래곤 스케일이 매끄럽게 잘려나가 있었는데 오러 블레이드가 아니고서는 저런 상처를 낼 수가 없었다. "베르키스의 짓이 확실한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 때 데이몬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뭔가 은빛 광채를 내는 것이 시체의 앞발에 깔려 있었다. 데이몬의 눈빛을 받은 카심이 조심스럽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이, 이럴 수가?" 카심의 고함소리에 일행은 재빨리 그곳으로 다가갔다. 카심은 질린 듯한 표정으로 드래곤 로드의 앞발에 깔린 물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행의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의문의 물체는 바로 갑옷을 걸친 기사의 으스러진 시체였다. 문제는 기사의 신분을 대원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데 기인했다. "카, 카시모프 경" 놀랍게도 시체의 정체는 크로센 기사단의 부단장 카시모프였다. 막강한 크로센 기사단의 자타가 공인하는 제 2인자가 참혹한 시체가 되어 드래곤 로드의 레어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다. 상황을 보아 드래곤 로드의 몸에 난 상처는 바로 카시모프의 솜씨인 것 같았다. 상급의 소드 마스터인 그는 고강도의 드래곤 스케일이라도 충분히 찢어발길 수 있었다. 보고 있던 데이몬은 인상을 찡그렸다. "상황을 보니 베르키스의 정신계 마법에 당한 것 같군." 데이몬의 말에 일행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의 정신마법은 제 아무리 의지력이 강한 인간이라도 저항할 수 없다. 카시모프는 십중팔구 베르키스의 마법에 현혹되어 제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드래곤 로드와 싸웠을 터였다. 하지만 드래곤 로드가 카시모프에게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오러 블레이드에 의한 상처는 대부분 피부에 나 있었으며 오직 하나 마지막으로 목을 잘라낸 것이 결정타일 뿐이었다. 물론 드래곤 로드가 순순히 목을 내밀었을 리는 없었기 때문에 카심이 조심스럽게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 보았다. "보시다시피 목이 아래쪽으로 비스듬히 베어져 있지 않습니까? 살아있을 때는 상처가 결코 이렇게 나지 않지요. 상황을 보니 카시모프 경은 드래곤 로드가 죽은 다음에 목을 잘라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카시모프는 드래곤 로드가 아니라 베르키스 놈에게 죽임을 당했겠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카시모프 경의 몸에 난 상처를 보니 더욱 확실해 지는군요." 데이몬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베르키스! 정말 끝없이 간악하게 나오는 놈이로군." 데이몬은 서둘러 명령을 내렸다. "카시모프의 시체를 서둘러 수습하라.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상황을 보니 다른 드래곤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 듯 싶었다. 물론 카시모프의 시신을 이곳에 남겨둬서는 안 된다. 공감하고 있었던지 대원들이 서둘러 시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시신이 드래곤 로드의 앞발에 꽉 짓눌려 있었기 때문에 수습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대원들은 필사적으로 시체를 수습했다. "응?" 그 때 당황한 듯한 미첼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작업을 하다 말고 놀란 듯한 표정으로 카시모프의 시체 옆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이게 뭐지?" 미첼이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어들었다. 미심쩍은 눈빛으로 들여다보았지만 쉽사리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때 미첼의 뒤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 그것은……." 슈렉하이머의 눈구멍사이에서 강렬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정신 없이 다가와 미첼의 손에서 그 물체를 낚아챘다. "이, 이게 어디 있었소?" "카시모프 경의 시체 옆에 놓여있었습니다만……." "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슈렉하이머는 거듭 아연해 했다. 일행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의문의 물체에게로 향했다. 어른 몸통 정도 크기의 타원형 물체였는데 언뜻 봐서는 뭔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행이 물체의 정체를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크기만 현저히 작을 뿐 처참하게 잘려나간 채 옆에 널브러져 있는 크라누스의 머리통과 형태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물체의 정체는 바로 어린 드래곤의 몸통에서 떨어져 나온 머리통이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한 데이몬이 떠듬떠듬 내뱉었다. "그, 그렇다면 이것은 해츨링의?" 슈렉하이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리치가 아니었다면 표정이 가관이었을 터였다. "상황을 보니 드래곤 로드가 500년 전 낳았다는 해츨링의 것 같습니다." "맙소사. 그렇다면 500년 전의 종족전쟁은 베르키스가 의도적으로 유발시켰다는 말이 되잖아? 이런 빌어먹을……." 갑자기 현기증이 치밀어 오른 듯 데이몬이 머리를 짚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슈렉하이머 역시 베르키스에 대해 걷잡을 수 없는 증오심을 느끼고 있는 눈치이었다. "놀랍군요. 드래곤으로써 어떻게 이런 가증스러운 짓을 할 수 있을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던 데이몬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지. 일단 나가도록 하자. 여기 계속 있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겠어." 데이몬은 미첼을 슬쩍 쳐다본 뒤 몸을 돌렸다. "그 머리통을 원래 있던 대로 놓아두고 카시모프의 시체만 수습하고 이곳을 뜨……." 애석하게도 데이몬의 말은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통로 입구에 표표히 선 채 일행을 쏘아보고 있는 인영들 때문이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기미조차 느끼지 못했다. 데이몬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몸을 돌린 대원들은 그때서야 상황을 알아차렸다. "이런……." 나타난 자들은 하나같이 조각해 놓은 듯 수려한 용모를 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가운데에는 누르스름한 피부의 데저트(사막) 트롤이 하나 서 있었는데 그는 유독 날카로운 눈빛으로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데이몬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좋지 않군. 베르키스의 함정에 정통으로 걸려들었어." 나타난 자들은 다름 아닌 드래곤들이었다. 모습을 드러낸 드래곤들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크라누스의 시체와 대원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눈빛이 착 가라앉아 있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데이몬은 침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젠장맞을……. 빼도 박도 못하게 정통으로 걸려들었군.' 겉으로 드러난 상황이 워낙 명약관화해서 섣불리 나서서 해명하기도 쉽지 않았다. 하나같이 그들에게 불리한 정황뿐이었다. 대원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데이몬은 냉철하게 승산을 따져보았다. '모두 다섯이니 놈들이 본체로 돌아가기 전에 기습공격을 가한다면…….' 생각해 보던 데이몬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제 아무리 선제공격을 가한다고 해도, 그리고 상대가 폴리모프한 상태라고 해도 드래곤이 다섯이라면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일행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해명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카심이 앞으로 나섰다. "상황에 대해 설명 드리겠……." 말을 끝맺기도 전에 데저트 트롤의 모습을 한 자가 스산한 어조로 카심의 말을 끊었다. "그대들이 드래곤 슬레이어들인가?" "그렇습니다만." "놀랍군. 벌써 드래곤 셋을 사냥한 데 이어 로드마저 신의 품으로 돌려보내다니…….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닌 로드의 레어에서 말이야." 그 말을 듣자 대원들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상대의 말투에서 그가 드래곤 로드를 가슴 깊이 존경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라 카심은 계속해서 변명을 시도했다. "드래곤 로드를 죽인 범인은 저희들이 아닙……." 그러나 상대는 카심으로 하여금 상황을 설명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대들 인간들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종족들이로군. 이렇게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도 거짓말을 늘어놓으려 하다니 말이야." "………." "인간들이 거짓말을 곧잘 한다는 사실을 우린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더 이상 추악한 모습을 보이지 마라." 카심은 조용히 입을 닫았다. 설명을 들어주려고 하지 않으니 마땅히 해명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대신 옆에 서 있던 슈렉하이머가 앞으로 나섰다. 리치 특유의 찢어지는 듯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것은 명백한 음모입니다. 저희들은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가 파 놓은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로드와 해츨링을 해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그의 짓입니다." 데저트 트롤의 시선이 슬며시 슈렉하이머에게 향했다. 물론 쏟아지는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내가 리치 나부랭이의 말을 들을 것이라 생각했는가?" 데저트 트롤은 슈렉하이머의 설명을 숫제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데스 나이트를 하나 하나 둘러보았다. "드래곤 사냥에 언데드까지 대대적으로 가세할 줄은 몰랐군. 로드를 해하기에 추호도 모자람이 없는 실력들이야. 충분히 드래곤 슬레이어라 인정할 만 하다는 뜻이지." 그러나 슈렉하이머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저희들에게 장내의 상황을 해명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보이던 데저트 트롤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거짓말일 것이 뻔하지만 한 번 들어주마. 어디 한 번 해명해 보아라." 슈렉하이머는 뼈만 남은 손가락을 뻗어 옆에 놓여 있는 카시모프의 시신을 가리켰다. "드래곤 로드의 몸에 난 상처는 죽은 기사의 소행입니다. 하지만 그는 베르키스의 정신마법에 현혹되어 있는 상황이라서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시신에 남은 흔적을 조사해 본다면 상황을 유추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데저트 트롤은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쓸데없는 일이야. 죽은 시체에는 정신마법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 게다가 저 인간이 정신마법에 현혹되었다고 한들 작금의 상황을 뒤엎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슈렉하이머가 아니었다. "하지만 의식을 되살린 다음 말을 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를 언데드로 만든다면 저간의 사정을 모두 알 수 있습니다만……." 데저트 트롤이 냉정하게 슈렉하이머의 말을 잘랐다. "쓸데없는 일이다. 언데드로 만들더라도 사실을 털어놓는다는 보장은 있는가? 어차피 언데드의 말과 행동은 그를 되살린 자에 종속되어 있다. 신빙성 자체를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본 데저트 트롤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정령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너희들이 벌써 그들까지 소멸시켜 증거를 인멸한 모양이구나." 그 말에 대원들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들은 회피할 수 없는 함정에 빠져버린 것이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87회. 꼼짝없이 드래곤 로드를 살해한 범인으로 몰려버린 탓에 일행들은 어찌 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들을 궁지에서 벗어나게 할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게다가 맞서 싸우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상대가 분노한 드래곤 다섯이라면 싸워 이길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하지만 데이몬은 용케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입술을 비집고 착 가라앉은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우리에게 로드의 목숨 값을 받아내겠다는 뜻이냐?" 데저트 트롤의 시선이 데이몬에게 향했다. 도전적인 어조가 다소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데이몬을 한참동안 쳐다보던 데저트 트롤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로드의 목숨 값이라……. 너희들 모두의 목숨으로 로드의 목숨 값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데이몬을 노려보던 데저트 트롤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복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시 말해 로드를 죽인 것을 전혀 문제삼지 않겠다는 뜻이지. 하지만……." 데저트 트롤은 손가락을 들어 한 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미첼이 해츨링의 머리통을 든 채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해츨링을 해한 죄는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되지 않는다. 500년 전 트루베니아의 인간들이 멸망했던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드래곤들의 눈동자는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제 보니 500년 전 드래곤 로드의 해츨링을 살해하여 종족전쟁을 유발했던 인간이 바로 너였구나. 가증스러운……. 용케 500년 동안 생을 이어왔지만 이제 그 운도 마지막이다. 이제 너에게 지금까지의 죄를 모두 묻도록 하겠다." 데저트 트롤의 시선이 뒤에 서 있는 대원들에게 향했다. "인간들은 수명이 짧지. 그런 탓에 500년 전의 일에 비록 너희들은 관여하지 않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해츨링을 죽인 종족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응징 받을 이유가 되니까……." 데저트 트롤의 눈동자에서는 서서히 살기가 돌고 있었다. "원래 우리들은 이번 종족전쟁에 참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작금의 사태를 보니 부득이 결정을 번복해야겠구나. 인간은 해츨링에 이어 드래곤을 대표하는 로드까지 레어에 침입해서 죽이고 정령까지 없애 증거를 인멸할 정도로 영악하다. 그런 종족이 번성하게 된다면 앞으로 트루베니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 "우린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양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는 인간을 말살해야 한다고 말이다." 데저트 트롤은 마치 토해내듯 한, 자 한, 자 똑똑히 내뱉었다. "날 비롯한 이 자리의 드래곤들은 오늘 부로 종족전쟁에 참전할 생각이다.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나머지 드래곤들도 망설이지 않고 참전할 것이 틀림없다. 너희들의 죽음을 시작으로 인간들의 종말을 알리는 서전이 시작될 것이다." 쿵. 대원들의 얼굴은 아예 사색이 되어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누명을 뒤집어썼지만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 때 데이몬의 분기충천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싸우자고 하면 누가 겁낼 줄 아느냐? 흐흐흐. 내 머리통이 네놈들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이 오산임을 깨닫게 해 주마. 모두 쳐라!"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데스 나이트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드래곤들을 향해 바람처럼 쇄도했다.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상태라는 약점을 노리려는 것이다. 뽑아든 장검에는 데스 블레이드가 소름끼치는 빛을 내뿜고 있었다. 데이몬 역시 마나를 한껏 끌어 모아 마법 방해를 준비했다. "어차피 싸울 것이라면 속전속결이다. 한 번 해 보자." 보고 있던 대원들도 서둘러 싸울 채비를 갖추었다. 오해를 풀 길이 없으니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데스 나이트들은 이미 드래곤들의 목전까지 육박해 들어간 상태였다. 하지만 드래곤들은 기다렸다는 듯 실드를 친 뒤 물 흐르듯 뒤로 물러났다. 노도처럼 돌격해 들어가던 데스 나이트들은 그만 실드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번쩍. 데스 블레이드가 빛나는 동시에 실드가 갈가리 찢겨졌지만 드래곤들은 이미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애초의 호기와는 달리 드래곤들은 일제히 레어 바깥쪽으로 몸을 날렸다. 추호도 머뭇거리지 않고 줄행랑을 치는 것이다. 그 광경을 보자 데이몬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이런 빌어먹을……." 비교적 좁은 레어 속에서 싸울 경우 덩치가 작고 날렵한 데스 나이트들이 유리하다. 그런 이유로 선제 공격을 가했는데 그것이 그만 실패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드래곤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장소에서 싸움을 치르려는 것 같았다. 레어 밖 섬에서 싸운다면 드래곤이 훨씬 유리했다. 그렇다고 공간이동을 할 수도 없었다. 섬 전체에 공간이동을 차단하는 왜곡장이 펼쳐져 있음은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데이몬은 맥빠진 표정으로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이곳을 쉽게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으냐?" 머뭇거리던 카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퇴로가 없다면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식량이 없는 상태에서 이곳에 계속 죽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주위를 슬쩍 둘러본 카심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소리를 들어보니 이곳은 수중동굴입니다. 만약 드래곤들이 외부에서 레어에 충격을 가해 파괴시킨다면 저희들은 영락없이 수장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겠지." 어두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너희들에게 미안하구나. 내 개인적인 용무 때문에 너희들 모두를 이런 지경에 몰아넣다니……." 그 말에 미첼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카심 용병단은 한 몸입니다. 그리고 데이몬을 위해서라면 저희들은 웃으며 죽어드릴 수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데이몬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지 않았습니까?" 입담 좋은 패터슨이 거기에 빠질 리가 없었다. "비록 다수의 드래곤이 상대라고 하나 쉽게 당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카심 용병단이 녹록치 않다는 것만은 드래곤에게 각인시켜 주겠습니다." 대원들이 나서서 한 마디씩 하자 데이몬은 다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좋다. 마지막 싸움일지도 모르지만 한 바탕 후련하게 싸워보도록 하자." 싸울 채비를 빈틈없이 갖춘 대원들은 조심스럽게 레어 외부로 걸어나갔다. 동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거대한 본 드래곤이 위압적인 동체를 자랑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활약을 기대한다는 듯 러셀런트는 거대한 입을 벌려 포효성을 내질렀다. 크롸롸롸. 만반의 준비를 마친 데이몬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오래지 않아 암울하게 젖어들었다. "역시………." 드래곤들의 준비는 전혀 빈틈이 없었다. 하나같이 본체로 현신하여 공중에 떠 있었으며 마법공격을 퍼부을 채비를 완벽히 마친 상태였다. 섬에는 몸을 숨길만한 엄폐물이 거의 없었다. 한 마디로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었기에 데이몬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철저하게 걸려들었군." 이런 상태에서 본 드래곤을 타고 날아오른다면 지상에 남은 대원들은 희망이 없었다. 공중에 떠 있는 드래곤들에겐 먹음직스럽게 차려진 밥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비록 대원들이 대 마법 갑옷을 걸치고 있긴 했지만 상대는 드래곤이다. 제 아무리 좋은 대 마법 갑옷이라도 한 방에 박살나 버릴 것이 분명했다. 또한 날아오른 데이몬에게도 뾰쪽한 수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다섯이나 되는 드래곤들에게 포위공격을 당한다면 제 아무리 데이몬이라도 배겨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데이몬은 서서히 마음을 정리했다. "여기서 최후를 맞게 될 줄은 몰랐군." 사색이 되어 있던 대원들도 이제 포기한 모양이었다. 순순히 죽어주진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체념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래곤들은 쉽게 공격을 가해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데이몬이 본 드래곤을 타고 날아오를 때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에게는 그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희망이 없으므로 대원들과 운명을 함께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일촉측발의 대치상황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잠시 후 가장 가까이 선회하고 있던 거대한 블루 드래곤이 입을 열었다. 에인션트 급을 넘어선 듯한 고룡급으로 보였다. "왜 본 드래곤을 타고 날아오르지 않는 건가?" "어째서 내가 날아올라야 하지?" "………." 말문이 막힌 듯 블루 드래곤은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노성이 터져 나왔다. "무슨 간악한 꿍꿍이를 꾸미는 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늘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느닷없이 먹구름이 생겨나서 하늘을 뒤덮어버린 것이다. 그것을 본 데이몬이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모두 러셀런트 밑으로 몸을 피해라. 뇌격(雷擊)계 공격마법이 가해질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대원들은 두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러셀런트의 몸에는 대마법 방어장이 감돌고 있으니 어느 정도 방어막이 되어줄 터였다. 대원들이 몸을 피한 직후 하늘에서 수십 줄기의 뇌전이 내려 꽂혔다. 뇌전 줄기는 정통으로 러셀런트를 직격했다. 콰콰쾅. 벼락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러셀런트의 육중한 동체가 들썩했다. 충격이 대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였다. 드래곤 본이 원천적으로 전도체가 아니기 때문에 다행히 대원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포의 뇌격마법을 고스란히 덮어쓴 탓에 러셀런트는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뇌전 줄기가 격중한 곳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러나 공격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나머지 네 드래곤들도 자신들이 장기로 삼는 주력 공격마법을 순차적으로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서막을 장식한 것은 빙계 공격마법이었다. 드래곤 중에 화이트 드래곤이 끼여 있었던지 원추형의 얼음기둥이 무수히 생겨나서 하늘에서 내려꽂혔다. 콰콰콰콰. 프로스트 계열의 본 드래곤이라 냉기에는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물리적인 타격이 엄청났다. 대원들을 보호하느라 러셀런트는 공격을 고스란히 덮어쓸 수밖에 없었다. 이어 날아든 바람의 칼날이 러셀런트의 날개를 사정없이 난도질 쳐버렸다. 이제 날아오를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다음에 이어진 것은 수계(水系)공격마법. 이것 역시 위력이 만만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러셀런트의 강인한 동체에 구멍이 숭숭 뚫려버렸으니 말이다. 마무리는 헬 파이어였다. 드래곤 하나 당 한 발씩 무려 다섯 발의 헬 파이어가 발사되어 러셀런트를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드래곤 다섯이 단 한 번씩 가한 마법공격으로 말미암아 러셀런트는 전투력을 모조리 상실했다. 빈사상태의 중상을 입은 러셀런트는 더 이상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모로 쓰러져버렸다. 쿵. 러셀런트가 쓰러짐으로써 대원들은 드래곤의 공격범위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조금 전과 같은 공격이 한 번 더 이어진다면 카심 용병단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이곳에 뼈를 묻어야 했다. 다가가서 러셀런트의 상태를 살펴본 데이몬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복원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당했군." 반격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9서클의 마스터에 이른 그였지만 마법공격만으론 드래곤의 비늘 하나도 건드릴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의외로 차분한 신색을 한 대원들의 얼굴이 하나 둘 눈에 들어왔다. 아내인 마틸다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게 될 지도 모르지만 카심은 데이몬에게 싱긋이 미소를 지어 주었다. 데이몬을 결코 원망하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원하는 사랑을 찾은 미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루미나의 몸을 꼭 끌어안은 상태로 미첼은 데이몬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어진 것은 입담 좋은 패터슨의 너스레였다. "데이몬. 우리 저승에서 다시 또 뭉치는 것이 어때요?" 그 말을 제럴드가 받았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저승에 사냥할 만한 드래곤이 있을까요?" "드래곤이 없으면 마왕이라도 사냥하지 뭐……. 흐흐흐." "맞아. 마왕이 차라리 사냥하는 재미가 더 쏠쏠할 거야 크크크" 그 말에 왁자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멍청할 정도로 우직한 녀석들……." 데이몬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동료들과 마지막을 함께 장식한다니 그리 섭섭하지만은 않았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88회. 데스 나이트들은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애당초 어둠의 존재인 그들은 죽음이란 단어에 거의 동요하지 않았다. 조용히 미소짓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의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드래곤의 공격이 시작되려는 징조였다. 급속히 재배열되는 마나의 기척을 느끼며 데이몬이 나지막이 뇌까렸다. "이제 끝이로군." 드래곤들의 공격이 가해진다면 자신을 비롯한 대원들 전부는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 터였다. 데이몬은 눈을 꼭 감았다. "다프네. 널 구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 서운하구나. 제 아무리 베르키스라도 성녀인 널 쉽게 죽이지는 못할 터…….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 때 뭔가가 데이몬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율리아나였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들어 데이몬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데, 데이몬……." 전혀 뜻밖이었기에 데이몬은 눈을 크게 떴다. 순간 율리아나의 얼굴이 급격히 접근해 들었다. 입술이 포개지는 순간 데이몬은 정신이 아찔해 지는 것을 느꼈다. "이, 이런……." 귓가로 율리아나의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그래도 다행이군요. 성녀에게 당신을 빼앗기지 않아서 말이에요." 말문이 막힌 탓에 데이몬은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 때 주위의 마나가 급격히 달궈졌다. 드래곤들이 마침내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데이몬은 사력을 다해 대원들 주위로 실드를 전개했다. "소용없을 지는 모르지만 힘이 닿는 한 포기하지 않는다." 감당하기 어려운 마나의 파동이 밀려들었지만 데이몬은 묵묵히 실드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한 번의 공격 정도는 막을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더 이상은 역부족이었다.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실드를 펼친 다음 데이몬은 눈을 꼭 감았다. 이어 강렬한 충격이 그가 펼친 실드에 여지없이 작렬했다. 콰콰콰쾅. 끌어 모아 놓은 마나가 허무하게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데이몬은 정신을 잃었다. 의식이 사라지기 전에 멈추라는 고함소리를 어슴푸레하게 들은 것 같기도 했지만 워낙 강력한 충격이 가해진 탓에 데이몬은 더 이상 정신을 지탱하지 못했다. "멈추시오." 난데없이 허공에서 울려 퍼진 고함소리에 제일 먼저 영향을 받은 것은 드래곤들이었다. 공격을 재차 준비하던 블루 드래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음성증폭마법? 수준을 보아 인간이 전개한 것은 아닌데……." 고개를 돌리자 멀리서 뭔가가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금빛이 은은하게 도는 것을 보니 골드 드래곤 같았다. "무슨 일일까?" 블루 드래곤 데미트리우스는 공격하는 것을 잠시 보류했다. 무슨 이유로 멈추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골드 드래곤이 도착하면 이유를 확실하게 알 수 있을 터였다. 고개를 돌린 데미트리우스는 우두커니 서 있는 인간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망연자실한 표정이 가득했다. 조금 전 흑마법사가 쓰러짐으로써 드래곤 슬레이어들에겐 저항할 능력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우선 흑마법사가 혼절하자 데스 나이트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쓰러졌고 빈사상태의 중상을 입은 본 드래곤 역시 기다린 목을 맥없이 늘어뜨렸다. 남은 것은 인간들과 리치 하나 뿐이었다. 그 정도는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소멸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데미트리우스는 느릿하게 드래곤들을 쳐다보았다. "일단 공격을 보류하도록 하시오. 저 골드 드래곤이 우리에게 뭔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소." 그 말에 드래곤들은 공격을 위해 끌어 모아 놓은 마나를 흩뜨려버렸다. 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공격을 퍼부을 태새를 갖춘 상태였다. 드래곤들은 노기 어린 눈초리로 인간들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 어떤 수작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러는 사이 골드 드래곤이 마침내 가까이 다가왔다.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린 데미트리우스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 넌 레니우스?" 나타난 드래곤은 베르키스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레니우스였다. 전속력으로 오랜 시간동안 날아온 듯 레니우스는 숨을 헐떡이느라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드래곤들은 잠자코 레니우스가 기운을 되찾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하지만 레니우스를 쳐다보는 대원들의 눈빛은 그다지 곱지 못했다. 베르키스와 함께 포탈을 파괴시켰던 골드 드래곤이 등장했다는 자체가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 레니우스는 안정을 되찾자마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쓰러져 있는 데이몬을 보자 그의 음성이 별안간 다급해졌다. "드, 드래곤 슬레이어를 죽였습니까?" 데미트리우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까지 죽진 않았다. 곧 죽겠지만 말이다." 그 말에 레니우스는 천만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휴.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했군요." 하지만 데미트리우스의 냉랭한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래 무슨 이유 때문에 멈추라고 했느냐?" 고개를 돌린 레니우스는 데미트리우스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저들을 죽여선 안됩니다. 전 그것을 막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베르키스의 독선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저들뿐입니다." 이번에는 데미트리우스가 놀랄 차례였다. 베르키스를 끝없이 신봉하며 따르는 레니우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눈치를 챈 듯 레니우스는 머뭇거림 없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저는 원래 베르키스가 주창하는 힘의 논리를 깊이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힘의 논리가 아니라 독단이오 독선입니다. 전 이미 더 이상 베르키스를 따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이제부터 모든 것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레니우스는 손을 뻗어 맥없이 늘어진 데이몬과 그의 몸을 감싸안고 있는 카심 용병단원들을 가리켰다. "드래곤 로드를 시해한 자는 저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해츨링 역시 저들이 죽이지 않았습니다." "………." 뜻밖의 말에 데미트리우스의 미간이 가늘게 좁혀졌다. 증거가 저토록 확실한데 범인이 아니라니……. 하지만 이어진 레니우스의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드래곤 로드와 해츨링을 살해한 범인은 바로 베르키스입니다. 전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먼 길을 날아온 것입니다." 데미트리우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확실한가?" 드래곤의 말이라서 데미트리우스는 증거를 보이라는 따위의 말을 하지 않았다. 비록 베르키스를 신봉하기는 했지만 레니우스는 현명하기로 정평 있는 골드 드래곤이다. 거짓을 말할 리가 없었다. 레니우스는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조금 전 저는 베르키스를 따라 이곳에 왔습니다. 오는 도중에 그는 인간 기사 하나를 정신마법으로 현혹시켰지요. 이곳에 도착한 다음 그는 저에게 오크의 본영으로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명령했습니다." 레니우스의 음성은 서서히 고조되고 있었다. "하지만 저는 가지 않았습니다. 비록 베르키스를 신봉하긴 했지만 크라누스 님 또한 마음 깊이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베르키스의 표정이 왠지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전 이곳에 몸을 숨긴 채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미 전 베르키스의 행동에 대해 모종의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말을 마친 레니우스가 손가락을 뻗어 카심 용병단원들을 가리켰다. "베르키스가 크라누스 님의 레어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로드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저들과 함께 공간 이동해 오셨지요. 이후 저자들은 이곳에 남고 레어에는 로드 혼자서 들어가셨습니다. 걱정이 된 저는 실피드 하나를 살짝 불러내어 맹약을 맺은 뒤 레어로 들여보냈습니다." 듣고 있던 데미트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을 다루는 골드 드래곤이라면 바람의 중급정령인 실피드와 맹약을 맺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레니우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맹약을 맺은 덕분에 전 레어 속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베르키스와 크라누스 님이 나누는 대화까지 모두 말입니다. 그 덕에 전 중요한 사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베르키스가 인간을 사주해 해츨링을 해치고 또한 증거를 직접 인멸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는 그 끔찍한 사실을 크라누스님께 아주 태연히 밝히더군요." 말을 마친 레니우스는 격정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결국 크라누스 님은 베르키스에 의해 생을 마치셨습니다. 크라누스 님의 가디언들은 베르키스가 마법보고에서 불러낸 아이언과 브론즈 골렘에 의해 전멸했습니다." "세, 세상에……." 드래곤들은 말을 잃었다. 그들의 로드가 베르키스에 의해 목숨을 잃다니……. "이후 베르키스는 레어 속의 정령을 모조리 소멸시켰습니다. 제가 들여보낸 실피드 역시 그때 소멸되었지요. 이후 전 그곳을 떴습니다. 실피드의 존재로 말미암아 꼬리가 잡힐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까지 말을 이어나간 레니우스는 돌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전 베르키스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멀리 아르카디아로 도망치려고까지 했습니다. 로드까지 죽인 마당인데 베르키스에겐 저 하나 죽이는 것은 문제도 아니겠지요. 그러나 제가 이대로 사라지고 나면 베르키스의 독선이 극에 달할 것이 분명하기에 다시 마음을 바꿨습니다. 이 사실을 알려 베르키스의 독주를 막기로 말입니다. 다행히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말을 마친 레니우스는 카심 용병단원들을 재차 가리켰다. "현재로썬 저들만이 베르키스를 막을 수 있습니다. 이유는 데미트리우스님께서도 익히 짐작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네 말이 맞다." 데미트리우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는 심유한 눈빛으로 레니우스를 쳐다보았다. "레니우스." "말씀하십시오." "위험을 무릅쓰고 사실을 밝힌 너의 용기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다. 네가 아니었다면 우린 큰 실수를 할 뻔했구나." 말을 마친 데미트리우스가 주위의 드래곤들을 쳐다보았다. "레니우스가 늦지 않게 도착하여 정말 다행이구려. 서둘러 내려가서 드래곤 슬레이어를 치료하도록 합시다." "알겠습니다." 드래곤들은 두 말도 하지 않고 날개를 접었다. 드래곤 여섯은 맹렬한 바람을 일으키며 섬으로 내려앉았다. 드래곤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카심은 마치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에 서 꼼짝없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골드 드래곤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사태가 극적으로 해결되다니……. 그것도 베르키스와 함께 포탈을 파괴했던 골드 드래곤이 아니던가? 갈등이 해소되긴 했지만 대원들은 아직까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여전히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하나 둘 내려앉는 드래곤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섬에 착륙한 드래곤들은 곧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를 시전했다. 특히 블루 드래곤 데미트리우스는 데저트 트롤이 아니라 푸른 머리를 한 중년인의 모습을 선택했다. 사정을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밀어붙였던 독단을 조금이나마 사과하려는 마음에서 선택한 모습인 것 같았다. 폴리모프를 마친 데미트리우스는 지체 없이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정신을 잃은 데이몬의 몸은 카심 용병단원들이 빈틈없이 에워싼 채 보호하고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켜 주겠나? 그를 치료해 주겠다." 하지만 대원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적의 어린 눈빛으로 데미트리우스를 쏘아볼 뿐이었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89회. 인간들이 순순히 말을 듣지 않자 데미트리우스는 혀를 찼다. "시간이 없다. 더 이상 방치하면 그를 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 말에 슈렉하이머가 고개를 들었다. 리치는 원천적으로 힐링마법을 시전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역시 섣불리 손을 쓰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참이었다. 슈렉하이머는 조심스런 어조로 대원들을 설득했다. "일단 드래곤에게 데이몬의 치료를 맡깁시다. 그래야만 데이몬을 살릴 수 있소." 대원들은 그때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 몸을 일으키자 데이몬의 모습이 드러났다. 혼절한 상태였는데 코와 입에서 피가 낭자하게 번져 나온 참혹한 모습이었다. "상세가 제법 엄중하군." 데미트리우스는 쭈뼛거리며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대원들은 여전히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수상한 행동을 할 경우 가차없이 베어버리겠다는 듯 검에 오러 블레이드를 최대한 끌어올린 상태로 말이다. 그 옆에는 힘을 잃은 데스 나이트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치료가 끝났지만 데이몬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법을 거둔 데미트리우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마나의 폭주로 인한 충격이 상상외로 컸다. 깨어나는데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다." 데미트리우스는 슈렉하이머를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이 인간을 제외하면 네 신분이 가장 높은 것 같은데 맞느냐?" "………." "드래곤 슬레이어들을 대변할 자격이 있느냐는 뜻이다." 슈렉하이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신분이 높은 것은 아니지만 대변할 수는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데미트리우스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일단 사정을 알아보지 않고 성급히 손을 쓴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도록 하겠다." 그 말에 대원들은 깜짝 놀랐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존재인 드래곤이 저토록 순순히 사과를 하다니……. 드래곤에게 사과를 받아보았다는 사람은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생겨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데미트리우스에게도 사정이 있었다. 드래곤들에겐 지금껏 일어나지도 않았고 일어나서도 안될 엄청난 위기가 닥쳐버렸기 때문에 자존심을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면한 위기는 자신들의 힘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다. 오직 드래곤 슬레이어들만이 해결할 수 있었기에 이처럼 저자세로 나가야만 했다. 데미트리우스는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이해해 다오. 로드의 죽음으로 인해 내가 필요 이상으로 흥분했었구나. 해츨링의 시체 때문에 달리 생각할 틈이 없었다." 데미트리우스의 진심 어린 사과로 인해 대원들의 마음은 어느 정도 풀렸다. 슈렉하이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리치인 탓에 말투에는 감정변화가 전혀 녹아있지 않았다. "조금 전의 행동은 전혀 드래곤답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정중히 이해를 구하시니 더 이상 문제삼지 않겠습니다." "고맙구나." 데미트리우스의 입가에 자조의 미소가 떠올랐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에게 용서를 구한 드래곤이 되고 말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벌어진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설마 베르키스가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런 짓을 한 드래곤이 지금까지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희 역시 베르키스에 대해 한없는 증오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모략으로 인해 트루베니아에서 살던 수백만의 목숨이 사라졌습니다." 데미트리우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500년 전 종족전쟁에 참전한 드래곤이었기 때문에 변명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아까 내가 했던 말은 잊어주기 바란다. 사실이 드러난 만큼 드래곤들은 앞으로 더 이상 종족전쟁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 "너희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 슈렉하이머가 조용히 말을 받았다. "무엇입니까?" 그러나 데이트리우스의 부탁을 들은 슈렉하이머는 화들짝 놀랐다. 전혀 생각지 못한 부탁이었기 때문이었다. "베르키스를 저희들의 힘으로 처리해 달라니 이해하기가 힘들군요. 엄연히 드래곤들의 일인데 어찌 우리들에게……." "물론 드래곤들의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데미트리우스의 얼굴이 별안간 착잡해 졌다. "우리에겐 베르키스를 벌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부득이 너희들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슈렉하이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이신 드래곤들이 힘을 합한다면 베르키스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 다섯이 힘을 합한다면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율법 이다. 드래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드래곤을 상하게 할 수 없다. 고대부터 이어져 온 율법이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로썬 감히 그것을 어길 수가 없구나." "………." 데미트리우스의 얼굴에는 부끄럽다는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자신들의 일을 인간에게 떠넘겨야 하니 당연히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율법을 어긴 베르키스를 벌하려면 우리 역시 율법을 어겨야 한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너희들에게 부탁하는 것이니 부디 거절하지 말아다오." 슈렉하이머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 때 뒤에서 힘없는 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 부탁을 들어주겠소." 깜짝 놀란 데미트리우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데이몬이 상체를 반쯤 들어올린 상태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원들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특히 율리아나는 울음부터 터뜨렸다. "흑흑흑." 카심이 얼른 다가가서 데이몬을 부축했다. "일어나셨군요." "내가 아직까지 죽을 명운(命運)이 아닌가보구나." 아직까지 통증이 남아있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데이몬은 정색을 한 채 데미트리우스를 쳐다보았다. "베르키스를 처치하는 일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소. 당신들이 부탁하지 않더라도 난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작정이오." 말을 마친 데이몬은 데미트리우스 뒤에 서 있는 레니우스를 쳐다보았다. "상황을 보니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군. 원래 난 당신을 비롯해 포탈을 파괴했던 드래곤들을 하나도 살려두지 않으려 했소. 하지만 부득이 마음을 바꿔야겠군. 우릴 구해준 답례로 당신만은 예외로 치도록 하겠소." 레니우스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인간에게 목숨을 허락 받는 처지가 되었으니 달가울 리가 없었다. "고맙소." "고마울 것 없소. 그렇다고 해서 드래곤들에 대한 선입견이 하루아침에 바뀌진 않을 테니……." 데이몬은 조심스럽게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정신을 차리자 데스 나이트들도 다시 힘을 되찾았다. 데이몬의 시선이 만신창이가 된 러셀런트에게로 향했다. 맥없이 널브러진 러셀런트의 입에서 힘겨운 포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주인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데이몬의 얼굴에 착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정말 처참하게 당했구나. 복원시킬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던 데이몬은 인크레시아를 열어 러셀런트를 집어넣었다. 지금의 몸 상태론 복원이 힘들었기 때문에 나중을 기약하려는 것이었다. 인크레시아를 보자 드래곤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속에 들어있는 자신들의 보물을 생각하니 아무래도 속이 쓰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냥 못 본체 해 버렸다. 어쨌거나 인크레시아의 현 소유주가 자신임에는 틀림없었었다. 엉거주춤 서 있던 데스 나이트들까지 모두 집어넣은 뒤 데이몬은 인크레시아를 닫았다. "그럼 우린 이만 가보겠소." "벌써 갈 생각인가? 할 얘기가 아직 남아있다."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걱정하지 마시오. 이미 난 로드와 약정을 했소. 베르키스와 그를 따라다니는 드래곤 외에는 그 누구도 건들지 않겠다고 말이오. 그러니 오늘 일로 나에게 보복 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도 좋소. 대업을 위해서 너그럽게 묵과할 테니……" 잠시 침묵을 지키던 데미트리우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너에게 한 가지만 더 부탁하겠다." "말해 보시오." "베르키스를 추종하는 드래곤은 이제 단 하나만 남았다. 아직 어려서 상황판단을 잘 하지 못하는 레드 드래곤이지. 그의 이름은 류시케. 부탁하건데 류시케에게 일말의 자비를 베풀어 줄 수 있겠나?" "………." "트루베니아에 존재하는 레드 드래곤은 이제 베르키스와 류시케 둘밖에 없다. 둘이 죽고 나면 트루베니아에서 레드 드래곤이 모두 사라진다는 뜻이다.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레드 일족의 대가 끊기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구나." 듣고 있던 데이몬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내가 어째서 그런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구려. 당신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소? 날 죽이려 드는 , 그것도 막강한 힘을 보유한 드래곤에게 자비를 베풀라니……." "그러니 이처럼 간곡히 부탁하는 것 아니냐? 만약 류시케에게 자비를 베풀어준다면 훗날 네가 원하는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마.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겠다." 데미트리우스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데이몬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가능하다면 들어주도록 노력하겠소." "고맙다." 데미트리우스의 얼굴에는 쑥스러움이 배어있었다. 인간에게 어려운 부탁을 해야 하니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이제 얘기가 끝났으니 앞으로는 피차 얼굴 볼 일이 없겠군. 당신들도 그러하겠지만 나 역시 드래곤이란 족속들과 대면하고 싶은 생각이 없소. 그럼 잘 있으시오." 말을 마친 데이몬은 냉랭히 몸을 돌렸다. 통쾌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대원들이 서둘러 뒤를 따랐다. 섬 한쪽으로 걸어간 데이몬은 지체 없이 공간이동 마법진을 그렸다. 러셀런트가 제대로 운신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부득이 공간이동을 이용해야 했다. 혹시라도 베르키스의 방해가 끼여들지 몰라서 데이몬은 세심하게 신경 써서 이동 마법진을 그렸다. 드래곤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드래곤 슬레이어 일당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껏 그들은 이처럼 무례하며 또한 자신감에 차 있는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데이몬이 그리고 있는 이동 마법진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데미트리우스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 정도 수준의 이동 마법진으로는 무사히 워프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너희들을 데려다주겠다." 데이몬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코웃음을 쳤다. "날 무시하는 거요? 이래 뵈도 난 9서클의 마스……." 하지만 이어진 데미트리우스의 말에 데이몬은 말문이 콱 막혀버렸다. "섬 주변으로 광범위한 공간이동 왜곡장이 쳐져 있다. 잘은 모르지만 베르키스의 소행으로 보인다. 그가 펼쳐놓은 왜곡장을 돌파할 자신이 있느냐?" "………." "자신이 없다면 나에게 맡겨라. 책임지고 너희들을 안전하게 데려다주겠다." 말을 마친 데미트리우스가 뚜벅뚜벅 걸어와서 데이몬이 그려놓은 이동 마법진을 손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일행들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데이몬을 비롯한 일행은 데미트리우스의 도움으로 무사히 정벌군 본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본영은 이미 축제분위기였다. 드래곤이 손을 떼겠다고 선언한 이상 오크는 더 이상 적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병사들은 트루베니아 정벌을 확신하고 있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훑어본 데이트리우스가 다시금 마나를 재배열했다. "나는 이만 가보겠다. 이곳은 내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구나." "좋도록 하시오." 데미트리우스는 그윽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부디 약조를 지켜주기 바란다." "걱정 마시오. 놈을 처치하는 것은 내 숙명이나 다름없으니……." "믿겠다." 말을 마친 데미트리우스의 몸이 광휘에 휩싸였다. 잠시 후 그의 몸은 그곳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일행들은 그 즉시 수뇌부들이 기거하는 천막으로 향했다.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저간의 사정을 알려야 했던 것이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90회. 사정을 들은 페르슈타인 공작은 화들짝 놀랐다. "그, 그런 일을 겪으셨다니……." 공작은 모골이 송연해 오는 것을 느꼈다. 하마터면 트루베니아의 드래곤 전체를 상대로 싸울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었다면 승산이 있을 턱이 없었기에 그는 간신히 가슴을 쓸어 내렸다. "골드 드래곤이 등장해서 천만 다행이군요. 만약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무척 어려운 싸움을 겪어야 했을 거요. 그건 그렇고……." 데이몬의 눈동자에서 분노의 광망이 활활 타올랐다. "이제 그 가증스러운 베르키스 놈을 처치해야 할 때요. 이젠 꺼릴 것이 없으니 놈을 제거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하오." 그 의견에는 페르슈타인 공작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 역시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베르키스가 곱게 보일 턱이 없었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희생이 아무리 크더라도 드래곤 둘만 잡으면 모든 것이 끝날 테니까요.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을 모두 투입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이 조심스럽게 구상해 온 계획을 설명했다. "우선 놈의 레어를 없애야 할 것 같소. 놈이 머무르고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보금자리를 없애버린다면 놈을 조금이나마 조급하게 할 수 있을 것이오." 페르슈타인 공작은 두 말도 하지 않고 동의했다. "기사단 하나와 1개 사단의 병력을 내어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레어에 가디언이 아무리 많더라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 없소. 놈의 레어를 습격하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 "펠드리안 산맥 부근에는 7군단이 머무르고 있습니다. 워프로 이동하신 뒤 병력을 그곳에서 차출하십시오. 명령서를 써드리겠습니다." "좋소. 그럼 난 카심 용병단원들을 데리고 놈의 레어로 가리다." 말을 마친 데이몬이 이맛살을 지긋이 모았다. "그런데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놈이 본영을 기습할 가능성이 있을 텐데……. 놈은 분명히 내가 공간이동으로 돌아올 수 없도록 공간 왜곡장을 쳐놓을 것이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법사와 기사들로 구성된 척살조를 대기시켜 놓을 생각입니다. 마법사들로 하여금 팬텀 스티드를 소환시키던지 아니면 기사들의 몸에 직접 비행마법을 걸어 공격을 가한다면 제 아무리 에인션트 급 레드 드래곤이라도 오래 버티진 못할 것입니다." "그렇겠지." 일리가 있다는 듯 데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벌군 본영이니 만큼 고급 기사와 마법사의 수는 충분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재배열시킬 수 있는 마나에는 한계가 있는 법. 그 많은 기사들과 마법사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생각을 접은 데이몬은 냉큼 몸을 일으켰다. "그럼 다녀오리다. 마음이 급했던지 데이몬은 서둘러 천막을 나섰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한시라도 빨리 베르키스를 처치하고 다프네를 구해 낼 생각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늦었군." 데이몬은 미간을 찌푸렸다. 최대한 신속하게 급습했건만 베르키스의 레어는 텅 비어있었다. 심지어 레어를 경비하고 있던 가디언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데이몬 역시 한 때 이곳을 지키던 가디언. 그런 탓에 그는 오랜 기억을 뒤적여 레어의 모든 곳을 수색했다. 하지만 발견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베르키스가 수면을 취하던 처소마저도 텅 비어있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놈이 일찌감치 거처를 바꾸었나 보군." 데이몬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옆에는 7군단에서 차출된 병사와 기사들이 레어 내부를 샅샅이 뒤집어엎고 있었다. 하지만 나오는 것은 먼지밖에 없었다. 베르키스가 레어에 있는 모든 것을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 같았다. "혹시?" 본영이 걱정된 데이몬은 즉시 마법통신을 시도했다. 자신이 이리로 온 틈을 타서 베르키스가 본영을 들이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본영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답신이 왔기에 데이몬은 이맛살을 지긋이 모았다. "이 자식이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베르키스가 간 곳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데이몬은 결국 병사들에게 베르키스의 레어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돌로 되어있는 레어라서 파괴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지만 데이몬은 그나마 고이 남겨둘 생각이 없었다. 쾅, 콰쾅. 베르키스의 레어는 처참하게 짓밟혔다. 병사들이 파괴시킬 수 없는 것은 고급기사들이 나서서 오러 블레이드로 해결했다. 기둥을 부수고 벽을 허물어뜨리는 등 병사들은 드래곤의 레어를 풀 한 포기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파괴했다. 작업이 끝난 뒤 데이몬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듯 레어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 정도면 베르키스 놈의 속을 어느 정도 뒤집을 수 있겠지?" 데이몬은 병사들을 데리고 그곳을 물러 나왔다. 하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짙게 배어있었다. 드래곤들이 참전 포기를 선언한 뒤 전세는 정벌군에게 눈에 띌 정도로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우선 각 군단들은 더 이상 드래곤의 개입에 신경 쓰지 않고 병과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전투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 그에 힘입어 정벌군의 각 군단들은 거듭해서 연전연승을 해 나갔다. 전투에서 소모되는 병력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었고 징발된 노예 청년들도 연이은 격전을 치르면서 서서히 경험 많은 병사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보급사정이 아직까지 어려운 점은 사실이었지만 정벌군에 소속된 병사들은 용기를 잃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보급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기가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아르카디아에서는 이미 대 선단이 출발한 상태였다. 각 선단마다 지원병과 보급물자를 가득 실은 채 말이다. 아직까지 바다에서 거친 풍랑이 일고 있었지만 절박한 트루베니아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테오도르는 서둘러 선단을 출발시켰다. 아르카디아가 보유한 대형 선박들 거의 대부분이 트루베니아로 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레어를 파괴한 이후 베르키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단 한 번 바다에 모습을 드러내어 트루베니아로 향하는 선단을 하나를 침몰시킨 이후 두 번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유가 궁금했지만 정벌군 수뇌부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단 두 마리의 드래곤이 할 수 있는 일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쉴 틈 없이 병력을 투입해서 오크를 밀어붙였다. "오크를 모조리 섬멸시킨다면 놈들은 더 이상 발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데이몬을 비롯한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특별히 드래곤 척살조로 구성된 고급기사와 마법사들이 뒤를 받치고 있었다. 때문에 페르슈타인 공작은 오크와의 싸움에 전념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놈이 도대체 어디로 숨어버렸을까?" 데이몬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단 하나의 문제가 그를 고뇌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프네에 대한 걱정이었다. "제 아무리 베르키스라도 성녀인 다프네에겐 함부로 할 수 없을 테지만……." 전황은 극히 희망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각 군단들은 연전연승을 거듭하고 있었고 수복된 영토는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드래곤의 힘을 빌지 않은 오크 족은 결코 정벌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유일하게 발목을 잡고 있는 보급 문제도 아르카디아를 출발한 선단이 도착하면 깨끗이 해결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역시 베르키스였다. 데이몬은 지긋이 이맛살을 모았다. "놈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까?" 그 때 문가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도 되나요?" 율리아나였다. 생각 없이 몸을 일으키려던 데이몬이 멈칫했다. 며칠 전 위기에 처했을 때의 상황이 떠오른 것이다. 기분이 미묘해진 데이몬은 짐짓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이 야심한 밤에 웬일이냐?" "할 말이 있어요." 잠시 뭔가를 생각해 보던 데이몬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율리아나가 들어왔다. 그녀가 들어옴과 동시에 짙은 주향(酒香)이 코끝을 파고들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손에는 큼지막한 술병이 하나 들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웬 술을 이렇게 먹었느냐?" 율리아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데이몬에게로 걸어왔다. 그 모습을 데이몬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조용히 다가온 율리아나는 들고 온 술병을 데이몬에게 내밀었다. "한 잔 할래요?" 율리아나의 얼굴과 술병을 번갈아 쳐다보던 데이몬이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꿀꺽꿀꺽. 독한 브랜디가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술병의 반을 비운 데이몬은 손등으로 입가를 슬쩍 훔쳤다. "크으, 정말 오랜만에 먹으니 술맛이 기가 막히는군." 마법사가 된 이후 술을 마셔본 기억은 거의 없었다. 마법이란 고도의 정신집중을 요하는 학문. 따라서 마법을 익히는 자에겐 술을 마시는 것이 거의 금기(禁忌)나 다름없었다. 원래 두주불사(斗酒不辭)하던 데이몬이었지만 마법을 익힌 이후 술 마시는 일을 극도로 자제해 왔다. 하지만 오늘만은 왠지 모르게 진탕 취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적한 심사를 술의 힘을 빌어서라도 극복하고 싶었던 것이다. "잘 마시는군요." 이번에는 율리아나가 손을 뻗어 술병을 받아들었다. 그녀가 병에 남은 술을 들이키는 것을 본 데이몬이 놀랍다는 듯 한 마디 내뱉었다. "너 역시 잘 마시는군."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몰래 마셨거든요." 텅 빈 병을 내려놓은 율리아나는 홍조 어린 얼굴을 데이몬에게로 돌렸다. "할 말이 있어요." "말해 보거라." "성녀를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가 뭐죠?" "………." "정말 놀라워요. 당신 같은 사람이 한 여인을 그토록 절실히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에요." 데이몬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왜? 나 같은 사람은 누굴 사랑하면 안 되느냐?" "솔직히 그래요. 당신은 누굴 사랑하거나 사랑 받는다는 것이 도통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에요. 적어도 제가 보기엔………." 다분히 무례한 말이었지만 데이몬은 화를 내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수긍한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애당초 난 평생 사랑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갈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데이몬의 눈동자에 모호한 빛이 떠올랐다. 마치 자신의 생애에 있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유일하게 날 따뜻한 눈빛으로 쳐다봐 준 사람이었다. 날 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그 어떤 질시와 모멸감도 들어있지 않았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율리아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의 진정한 용모를 넌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누가 봐도 추악한 모습임에는 틀림이 없지. 천형(天刑)이라 할 수 있는 몰골로 말미암아 난 지금껏 헤아릴 수 없는 멸시와 냉대를 받았다. 그 대접에서 벗어나기 위해 난 기필코 강해지리라 마음먹었지. 그러나 강해지는데 성공했지만 대접은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날 쳐다보는 눈빛에 공포라는 감정이 하나 더 추가되었을 뿐이지." 데이몬의 눈빛이 다시금 애틋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다프네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게 변함 없는 눈빛을 보내주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지금껏 입었던 마음의 상처가 모두 치유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난 결심했다. 내 힘이 닿는 한 영원히 그녀의 곁에 머무르겠다고……." 말을 마친 데이몬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하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더구나. 최후의 순간 우린 드래곤들의 손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그녀는 돌이 되고 난 강제로 리치가 되어 500년 동안 가증스런 베르키스 놈의 레어를 지키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탈출했지만 난 지금껏 살아오며 단 한 번도 그녀를 잊어본 적이 없다. 솔직히 말해……." 감정이 치밀어 올랐는지 데이몬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녀를 구해낼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중첩된 복수마저도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것이 내 솔직한 심경이다. 알겠느냐?" 율리아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데이몬의 말을 듣고 있었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91회. 데이몬의 넋두리는 계속 이어졌다. "솔직히 난 진정한 사랑이란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녀를 살리는 길이라면 설사 수백 번 죽어 영혼마저 영원히 연옥에서 고통받게 되더라도 달게 감수할 수 있으니까……." "놀랍군요. 당신에게 그런 면이 있었다니……." 율리아나의 입가에 싱긋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치기 어린 아이와도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성녀잖아요? 잘은 모르지만 책에서 읽은 바로는 성녀란 세상 모든 사물을 사랑하는 존재라고 들었어요. 당신에게 정겹게 대하는 것이 그런 이유 때문일 수도……." 데이몬은 조용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문제는 내 마음이니까. 그녀의 옆에 머물 수만 있다면 난 그 어떤 대가도 감수할 것이다." "………." 율리아나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데이몬의 외곬수적인 사랑 방식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모양이었다. 그런 율리아나를 향해 데이몬이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무슨 이유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 내 마음을 밝히고 싶다. 내 마음 속에는 다프네 외에 다른 여인이 끼여들 여지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율리아나의 눈동자에 쌍심지가 돋아 올랐다. "흥! 누가 끼여들고 싶대요? 당신은 정말 여자의 마음에 대해 모르는군요." "………." 서슬 퍼런 기색과는 달리 율리아나의 볼에는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니에요. 난 뭐 자존심이 없는 줄 알아요?" 눈물을 보자 데이몬이 멈칫했다. "미안하구나." "미안하면 다인가요?" 율리아나는 소매를 들어 눈가를 훔쳤다. 그리곤 데이몬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솔직히 말해 당신 첫인상은 정말 끔찍했어요. 사악한 악당에다가 냉혈한이고 게다가 기사도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추레한 늙은이가 당신이었으니까요."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은 모두 사실이다." "하지만 그거 알아요?" 율리아나는 눈물 젖은 눈동자를 들어 데이몬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당신 같은 악당에게 연정을 품었단 말이에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율리아나의 사랑고백을 데이몬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물론 나이차이가 500살 이상 난다는 것도 알아요.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다는 것도 그동안 누누이 들어왔지요. 또한 당신은 나에게 전혀 잘 대해주지도 않아요. 그런데 왜 내가 당신에게 호감을 가진 걸까요?" 붉게 충혈된 율리아나의 눈동자가 데이몬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난 지금 성녀에 대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질투를 하고 있어요. 정말 우습죠?" "………." 율리아나의 음성이 점점 고조되었다. "그녀 대신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가고 싶어 죽을 지경이란 말이에요." "그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그만 포기하거라." 단호한 데이몬의 대답에 율리아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럴 줄 알았어요. 하지만 어쩌죠? 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더라도 당신 마음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걸요? 그거 알아요? 내가 당신의 비밀을 한 가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이어진 율리아나의 말을 듣자 데이몬의 얼굴이 굳어졌다. 오직 그와 카트로이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것이다. "그, 그 사실을 어떻게………." "예전부터 이상하게 생각했었어요. 당신처럼 냉정하고 잔인한 이가 사람 죽이는 것을 그토록 꺼려한다니 말이에요." 데이몬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카트로이에게서 들었느냐?" "알 필요 없지 않아요?" 데이몬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지만 율리아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표정을 보니 날 죽여 입을 막으려는 것 같군요. 그래요. 날 죽여요. 성녀에게 당신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당신 손에 죽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데이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두자. 술 취한 계집애하고 이 무슨 입씨름이냐?" "걱정 말아요. 좀 취하긴 했지만 제 정신은 극히 맑아요." 율리아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동자를 들어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난 당신이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받아주길 바래요." "………." "정녕 불가능한 일인가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데이몬을 보자 율리아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귓전으로 데이몬의 음성이 고즈넉이 전해졌다. "만약 내가 다프네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네 마음을 받아들였을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넌 나의 진면모를 보고도 마음을 준 여인이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구나. 500년이란 세월이 흘렀어도 다프네에 대한 내 마음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 같구나." 율리아나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정말 지극한 순정이군요. 한 여인을 수백 년 동안이나 연모할 수 있다니……." "이유는 나도 모른다. 아무튼 네 마음만은 고맙게 받겠다." 잠시 고뇌의 빛이 떠올랐지만 데이몬은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대신 너에게 한 가지 선물을 주겠다." "………." 데이몬의 말을 들은 율리아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생사여탈 주문이다. 이 주문을 너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과연 옳은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네 마음을 나에게 준 데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라." "새, 생사여탈 주문이라고요?" "그렇다. 만약 내 앞에서 이 주문을 큰 소리로 외울 경우 난 십중팔구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내가 살인을 할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주문과 연관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무튼 난 이 주문을 너에게 알려주고 싶구나." 율리아나가 도리질을 치며 뒤로 물러났다. "나, 난 받지 않겠어요."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난………." 데이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미 500년 전 마왕 케루빔과 어둠의 계약을 맺었다. 케루빔은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 이미 난 나이델하르크가 봉인된 구슬을 몸 속에 품고 있다. 그러므로 내 앞날은 그 누구도 점치지 못한다. 네게 이 주문을 가르쳐 주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데이몬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율리아나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만약 내가 이상해지거든, 혹시라도 마왕에게 몸을 빼앗긴 것 같거든 네가 직접 날 끝내다오.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오직 이것 밖에 없구나." 데이몬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도 너에게 내 운명을 맡기게 되어 기쁘구나. 세상을 통틀어 나에게 마음을 준 두 번째 여인이 바로 너다. 그런 만큼 충분히 내 운명을 맡을 자격이 있다." 침묵을 지키던 율리아나가 한 마디 내뱉었다. "하지만 내가 다른 생각을 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 "성녀를 만나게 된다면 당신은 한없이 행복해하겠죠? 그런 당신이 미운 나머지 내가 주문을 읊는다면, 두 사람을 갈라놓기 위해 말이에요. 만약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난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 후회할 짓은……." "아니 후회하지 않는다." 데이몬의 얼굴에는 결연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달게 감수하겠다." 데이몬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율리아나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몬은 그녀에게 영호명이 남긴 주문의 어귀를 천천히 읊어주었다. 율리아나가 명확히 기억할 수 있도록 한자씩 또박또박……. 주문을 머릿속에 새겨 넣은 율리아나가 형언할 수 없는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이제 전 당신의 생명줄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는 셈이 되었군요." "그렇구나." 율리아나의 눈동자에 별안간 묘한 빛이 떠올랐다. "만약 제가 이 주문을 빌미로 성녀와 헤어질 것을 주문한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데이몬의 대답은 추호도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 목숨보다도 중요한 존재다." 대답을 들은 율리아나는 고개를 숙였다. "잘 알겠어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살펴가거라. 배웅하지 않겠다." 율리아나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축 늘어진 어깨가 더 없이 슬퍼 보였다. 문을 열고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데이몬은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도 처연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녀가 완전히 나가자 데이몬은 넋두리처럼 조용히 중얼거렸다. "너에게 정말 미안하구나." 막상 그녀가 나가자 괜한 짓을 한 것 아닌가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데이몬은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카심이나 미첼에게 알려주려고 했던 주문이니……." 최근 들어 데이몬은 계속해서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유 없이 떠오르는 살의도 그랬고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는 것도 전혀 자신답지 않았다. 데이몬은 그것이 몸 속에 품고 있는 나이델하르크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었다. "그가 되살아난다면 난 꼼짝없이 그에게 복속되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데이몬은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영호명의 주문을 누군가에게 전수시켜놓으려 했다. 물론 4대 기사와 슈렉하이머는 주문을 전수할 대상으로 부적합했다. 마왕이 자신의 몸을 차지할 경우 그들 역시 마왕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데이몬은 전수자로 암암리에 미첼이나 카심을 물망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보니 율리아나에게 그만 주고 만 것이다. 아무튼 주문을 알려주고 나니 데이몬은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꼈다. "과연 주문이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검증되지 않은 주문이었지만 소림사 속가제자인 영호명이 가지고 온 주문이니 효과가 없을 리가 없었다. 데이몬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지. 러셀런트를 복원할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슬슬 시작해 볼까?" 며칠동안 봉인구에서 뽑아낸 어둠의 마력을 끌어올린 다음 데이몬은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묵직한 괴성과 함께 러셀런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머무는 거처는 본 드래곤을 통째로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컸다. 데이몬이 고뇌하는 동안 시간이 덧없이 흘러갔다. 그 동안 트루베니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주목할 점은 아르카디아에서 출발한 대 선단이 백일 동안의 항해를 마치고 트루베니아에 도착했다는 점이다. 강한 폭풍과 바람에 몇 척의 배가 침몰했고 베르키스의 공습에 의해 한 개 선단이 전멸했지만 나머지 배들은 무사히 트루베니아의 동쪽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 아무리 날아다니는 드래곤이라도 분산된 수십 개의 선단을 모두 감당할 수는 없었다. 오랜 항해를 마친 배들은 마법통신을 이용해 정벌군에 의해 장악된 해변으로 향했다. 바닷가에 정박한 수백 척의 대형 범선은 물경 30만에 달하는 대군과 함께 천문학적인 분량의 보급물자를 내려놓았다. 그로 인해 정벌군의 보급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거듭되는 전투에 지쳤던 병사들은 교대병력이 도착함에 따라 모처럼 쉴 수 있게 되었으며 선단이 운송해 온 방대한 보급물자는 그 동안 병사들이 겪었던 갈증과 배고픔을 깨끗이 해결해 주었다. 선단의 도착으로 인해 전방에 위치한 각 군단들의 사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를 정도로 치솟았다. 반면 정벌군의 노예 빼내기 작전에 시달려 보급마저 원활하지 못하게 된 오크족은 거듭해서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식량이 부족하다보니 전투에서 소모된 전사를 보충하는 일조차 여의치 않았다. 도리어 부족한 식량을 차지하기 위해 부족끼리 싸우는 일까지 벌어졌으니……. 정벌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해 들어간 덕택에 본영은 트루베니아 중심부에 자리잡을 수 있었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92회. 이처럼 3차 종족전쟁은 500년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반전되는 전황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의 심사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흔적도 없이 숨어버린 베르키스에 대한 증오와 다프네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는 하루, 하루를 애만 태우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정벌군 본영에 한 명의 여인이 찾아왔다. 그로 인해 정벌군 본영은 발칵 뒤집혀 버렸다. "그대가 인간 군대를 지휘하는 총사령관인가?" "그렇습니다." 공손히 예를 취하는 이는 바로 페르슈타인 공작이었다. 그의 앞에는 타는 듯 붉은 머리를 휘날리는 여인 한 명이 오만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 풍만한 몸에 색기가 풀풀 풍기는 농염한 여인이었다. 환락가에 가면 흔히 만나볼 수 있을 법한 여인이었지만 그녀를 쳐다보는 기사들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럴 것이 상대는 결코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드래곤이었다. 이곳을 직접 찾아온 여인은 머뭇거림 없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고 그 탓에 본영에는 대대적으로 비상이 걸려버렸다.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회의에 참석해 있던 페르슈타인 공작이 부랴부랴 달려나와 그녀를 영접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공작은 열과 성의를 다해 맞이했고 여인의 모습을 한 드래곤은 당연하다는 듯 응대를 받았다. 잠시 후 페르슈타인 공작의 음성이 이어졌다. "그런데 위대하신 분께서 무슨 일로 절 찾으셨는지요?" "물론 할 말이 있어서 왔지 내가 무얼 하러 왔겠나?" 여인의 음성에는 거드름이 잔뜩 배어 있었다. 눈살을 찌푸린 공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제가 알기로 드래곤들께서는 이번 종족전쟁에 참여하지 않으신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 말에 여인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애석하지만 그 범주에는 내가 포함되지 않는 것 같군. 난 베르키스 님을 모시고 있다. 레드 드래곤 류시케가 바로 내 이름이니까……." 깜짝 놀란 페르슈타인 공작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설마 적대하는 드래곤이 찾아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공작으로써는 이처럼 신분을 밝히기 전에는 드래곤의 정체를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바짝 긴장한 기사들이 검 손잡이를 움켜쥘 즈음에 여인의 음성이 또다시 터져 나왔다. "잡아먹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난 사신의 자격으로 이곳에 왔으니까." "사, 사신이라니……." "난 베르키스 님의 뜻을 너희들에게 전하기 위해 왔다." 말을 마친 여인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데이몬이라는 이름의 드래곤 슬레이어는 어디에 있나?" 그 말이 끝나자마자 착 가라앉은 음성이 기사들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난 여기에 있다." 기사들의 대열이 좌우로 갈라지며 데이몬의 모습이 드러났다. 드래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만사 제쳐놓고 이곳으로 왔다. 그의 뒤에는 카심 용병단원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데이몬을 보자 류시케의 눈빛이 빛났다. "네가 바로 드래곤 슬레이어였군. 베르키스 님이 그토록 경고하던 인간……." 데이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도대체 무슨 소식을 가지고 왔느냐?" 대뜸 퍼붓는 반말 짓거리가 마음이 들지 않았는지 류시케의 아미가 급격히 휘어졌다. 그녀가 가진 드래곤으로써의 자부심은 하찮은 모욕 하나라도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었다. "예의가 없는 인간이로군. 위대한 종족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를 권유하는 바이다." 하지만 역시 데이몬의 반응은 냉담했다. "흥. 위대한 종족? 꼴 갑 떨고 있네." "뭐, 뭐라고?" 깜짝 놀란 류시케가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데이몬의 독설은 계속 이어졌다. "암수 구분이 없는 도마뱀 나부랭이가 계집의 모습을 한 것부터가 눈꼴 시린데 꼴에 위대한 종족이라 으스대다니……. 기가 차서 말이 안나오는군." "………." "미친 짓도 가려가며 하도록……. 내가 보기에 드래곤이란 과대망상증에 빠진 비대한 도마뱀 나부랭이일 뿐이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데이몬의 이죽거림에 류시케는 결국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뭣이? 이런 비천한 벌레 같은……." 류시케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마나를 재배열하려 했다. "이런 모욕을 참을 수 없다. 모조리 쓸어버리겠다." 순간 그녀의 귓전으로 스산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마법을 쓴다면 그 즉시 네년의 팔다리가 모조리 잘려나갈 것이다. 내기를 걸어도 좋다." 흠칫 놀란 류시케가 움직임을 멈췄다. 정확히 말하면 어깨와 허벅지 어림에서 순간적으로 감지된 예기 때문이었다. 예기의 정체를 파악한 류시케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떠졌다. "이, 이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네 자루의 장검이 그녀의 몸에 닿아 있었다. 장검에서 솟아오르는 데스 블레이드는 보기만 해도 섬뜩했다. 자세히 보니 거무스름한 갑주를 걸친 데스 나이트 넷이 자신의 전후좌우를 포위하고 있었다. 기척조차 알아차리지 못했기에 류시케는 등골이 서늘한 것을 느꼈다. "어, 언제?" "경험 없는 드래곤들을 사냥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지. 있는 폼 없는 폼 잡으며 깝죽거리는 데 정신이 팔려 쉽사리 틈을 내주거든. 이봐 애송이." 겁에 질린 류시케의 시선이 자동적으로 데이몬에게로 향했다.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상태에서 드래곤은 떨어지는 낙엽도 주의해서 살펴야 해. 안 그러면……." 데이몬은 손가락을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취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가는 수가 있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한 자루의 장검이 류시케의 목에 와서 닿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느낀 류시케의 눈동자는 어느덧 겁에 질려 있었다. "나, 날 어떻게 할 생각이냐?" "지금 고민 중이야. 네년의 말을 들어보고 죽일지, 아니면 그냥 죽여버릴지 말이야." "나, 난 사자로 왔다. 고, 고금을 통틀어 사자는 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주, 죽이지 않는 법이다." 죽음의 공포로 인해 류시케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데이몬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사자도 사자 나름이지. 한 가지 알려줄까? 네년이 신봉하는 베르키스란 놈이 우리가 보낸 사자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 "놈은 간악하게도 우리가 보낸 사자 모리스를 정신마법으로 제압했다. 그리고는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뜨려 시체조차 온전하게 보전할 수 없도록 만들었지. 물론 베르키스는 그 사실을 감안하고 널 보냈을 것이다. 네년 정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테니까……." "거, 거짓말이야. 그, 그럴 리가 없어." 결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젓는 류시케를 보자 데이몬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미 그는 이럴 경우를 대비해 이간책을 꾸며놓은 상태였다. 데미트리우스가 신신당부한대로 류시케를 살리기 위해서는 오직 이 방법 밖에는 없었다. "너는 골드 드래곤 레니우스가 베르키스를 배신한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고 있느냐?" 물론 류시케가 그 이유를 알고 있을 턱이 없었다. 고개를 가로젓는 류시케를 보며 데이몬은 꾸며놓은 말을 술술 풀어놓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이라고 보기는 힘든 말이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베르키스가 드래곤 로드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베르키스는 레니우스를 죽여 입을 막으려 했지. 물론 넌 그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겠지? 레니우스는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주할 수 있었다. 그는 베르키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아르카디아로 피신하려는 생각까지 가졌지. 하지만 아르카디아로 가더라도 베르키스의 마수를 완벽히 피할 수 없는 법. 레니우스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다른 드래곤들을 찾아 사실을 밝히는 길을 택했다. 나와 드래곤들 사이에 얽힌 오해는 그 탓에 풀린 거지." 류시케는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거, 거짓말이야. 믿을 수 없어." "믿거나 말거나 사실이다. 궁금하면 레니우스에게 가서 직접 물어보면 되지 않겠나? 내 듣기로 드래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 "드래곤 로드에 이어 휘하의 드래곤까지 죽여 입을 막으려고 했던 베르키스가 과연 너처럼 어리고 약한 드래곤 하나의 목숨에 연연해하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가 생환을 기대하며 널 보냈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었다." "나, 날 죽일 생각이냐?"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니겠나? 네년을 놓아주면 필시 베르키스에게 돌아갈 테고……. 귀찮은 짐이 하나 생길 테니 이참에 깨끗하게 해결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류시케는 이제 완전히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말투를 보니 반드시 자신을 죽여 없애려는 것 같았다. "베, 베르키스 님의 뜻을 전해 듣고 싶지 않은가?" 데이몬은 냉랭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딴 것 들을 필요도 없고 생각도 없어. 어차피 네년을 처치하고 난 다음 베르키스 놈만 잡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니까 말이야. 자고로 어지럽게 꼬인 매듭은 단칼에 베어버리는 법이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데스 나이트를 쳐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죽이라는 말이 떨어질 것 같아 류시케의 얼굴빛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그 때 옆에서 날카롭게 찢어지는 듯한 기성이 울려 퍼졌다. "그래도 뜻이 뭔지 일단 한 번 들어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슈렉하이머였다. 이미 그는 데이몬의 꿍꿍이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대뜸 맞장구를 치는 그의 연기는 일류배우에 비해봐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데이몬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필욘 없을 것 같소. 죽으라고 보냈으니 죽여주는 것이 당연지사가 아니겠소?"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사신은 가급적이면 죽이지 않는 법입니다." "가급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는 법. 놈이 예전에 우리 사신 모리스를 죽였으니 이번에는 우리가 놈의 사신을 죽일 차례요." "그렇다면 죽이기 전에 뜻을 들어보는 것이 어떨까요. 일단 말을 들어보고 나서 처치해 버려도 큰 문제는 없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목숨을 놓고 벌이는 인간들의 설전. 기가 막혔지만 류시케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처할 줄 어찌 짐작했으랴! 극도로 겁에 질린 류시케는 데이몬과 슈렉하이머의 말 한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고 있었다. 희비가 거듭 교차하는 류시케의 얼굴을 본 데이몬은 슬슬 때가 무르익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확실하게 걸려들었군.' 데이몬은 슬그머니 류시케를 옭아매고 있는 그물을 풀기 시작했다. "좋다. 그놈의 뜻이 무언지 한 번 털어놔 보아라." 내심과는 달리 데이몬은 귀찮다는 듯 내뱉었다. 하지만 류시케로써는 낭떠러지에서 동아줄을 잡은 심정이었다. "말한다면 날 죽이지 않을 건가요?" 그녀의 말투가 어느덧 공손한 경어체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류시케 자신도 미처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한 번 생각해 보고……." 심드렁한 데이몬의 대꾸에 류시케는 더욱 애가 탔다. "날 죽일 작정이라면 말하지 않겠어요." 데이몬은 추호도 머뭇거리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그럼 지금 죽던지……. 이봐. 그년의 사지를 당장 잘라내. 아니 목을 잘라내는 게 낫겠군." 류시케의 얼굴이 썩은 돼지간 빛이 될 즈음 이번에는 페르슈타인 공작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만 참으시지요. 데이몬. 아무래도 사신을 죽이는 것이 그리 내키진 않는군요." 얼굴에 머쓱한 표정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뭔가 언질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의 옆에는 슈렉하이머가 리치 특유의 무표정함을 간직한 채 서 있었다. 겁에 질려 있는 탓에 류시케는 전혀 그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정벌군의 최고 총수인 페르슈타인 공작이 영락없이 연기자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드래곤 아닙니까? 사신으로 왔으니 죽일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아니오. 이년은 명백한 우리의 적이오. 죽으라고 보냈는데 살아 돌아온다면 베르키스 놈이 우릴 비웃지 않겠소?" 페르슈타인 공작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저희들은 이미 오랫동안 베르키스의 책략에 휘말려 왔습니다. 한 번쯤 그것을 거부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만……." 거듭되는 논쟁을 듣고 있던 류시케의 뇌리에 슬그머니 회의가 떠올랐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93회. 물론 그럴 리가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지만 거듭되는 말에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인간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논쟁을 벌일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던 류시케였다. '설마 베르키스 님이 그런 의도로?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세차게 도리질을 쳤지만 의구심은 모락모락 자라나고 있었다. 특히 베르키스가 드래곤 로드를 죽이고서도 자신에게 아무 말을 하지 않은 것이 결정타였다. '레니우스를 찾아가서 한 번 물어볼까?'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레니우스가 제 아무리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드래곤이라고 해도 데이몬의 말에 특별히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데이몬의 말은 엄연히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녀가 들을 수 있는 것은 드래곤 로드가 확실하게 베르키스에 의해 이승을 하직했다는 사실 정도일 터였다. 또한 류시케가 레니우스에게로 간다면 데미트리우스가 그녀를 순순히 베르키스에게 돌려보낼 리가 없었다. 레드 일족의 대가 끊기는 것을 우려하는 만큼 무슨 수를 쓰더라도 류시케를 설득할 터였다. 하지만 류시케는 자신을 두고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떻게 하지?' 그녀가 고민에 잠겨 있는 사이 마침내 논쟁이 끝났다. 페르슈타인 공작이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결론을 지었다. "이것은 정벌군의 총사령관으로써 내린 결정입니다. 사신을 살려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젠장.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데이몬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데스 나이트들도 류시케의 몸에 닿아 있는 검을 거뒀다. 하지만 언제든지 달려들어 사지를 잘라낼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한 채였다. 데이몬은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멍청한 드래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레드 드래곤은 필시 목숨을 살려준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고마운 감정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모르긴 몰라도 두 번 다시 인간을 적대할 생각을 하지 않을 터였다. 데이몬에게 이것은 꿩 먹고 알 먹기나 다름없었다. 큰 힘 들이지 않고 데미트리우스에게 생색을 낼 수 있는 데다 베르키스의 수족 하나를 잘라버린 셈이 되었으니 말이다. 생각대로 류시케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페르슈타인 공작을 쳐다보았다. "절……살려주셔서 고마워요." "별 말씀을……. 그럼 베르키스의 뜻을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위대하신 분께서 무사히 돌아가실 수 있도록 조처하겠습니다." 인간에게 이런 말을 평상시에 들었다면 그녀는 필경 불같이 화냈을 터였다. 하지만 류시케는 애석하게도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진정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데이몬의 공작이 정통으로 먹혀든 것이다. 질린 듯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한 번 쳐다본 류시케는 조용히 베르키스의 말을 꺼냈다. "베르키스 님께서는 최후의 결전을 제안하셨습니다." "최후의 결전이라고요?" "그렇습니다. 각각 정예들을 모아 노스우드 평원에서 일전을 벌이자고 하셨습니다. 인간과 오크 두 종족의 운명을 그곳에서 결론짓자는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류시케는 조심스럽게 날짜와 장소를 밝혔다. "시일은 오늘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후, 장소는 500년 전 종족전쟁의 결말을 맺었던 곳입니다. 베르하젤의 신전이 있는 곳이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노스우드 평원이라…….' 데이몬의 얼굴에 온갖 감회가 스쳐지나갔다. 다프네를 업고 넘어갔던 험준한 산길이며, 아이스 트롤의 습격, 그리고 베르키스의 농간으로 인한 기사들의 상잔. 그 때의 일들이 바로 어제 일어났던 것처럼 뚜렷하게 떠올랐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놈이 필경 함정을 깔아놓았음은 의심할 필요가 없을 텐데.' 지금 상황에서 굳이 베르키스의 제의를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다. 전황은 극히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으므로 아쉬울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트루베니아에서 오크의 씨가 마른 다음이라면 베르키스로써는 더 이상 해 볼 도리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데이몬에게 있어 가장 큰 약점을 쥐고 있다. 이어지는 류시케의 말이 그것을 증명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그곳에서 승리한다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제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순간 데이몬은 속이 뜨끔했다. '상황을 보니 이년은 베르키스가 다프네를 데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군. 하긴 드래곤 로드를 죽였다는 사실을 백일하에 밝힐 수는 없었을 테지……. 다프네를 데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로드를 해쳤다는 것을 뜻하니까.' 생각에 잠겨 있는데 류시케가 대답을 재촉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베르키스 님의 제의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페르슈타인 공작이 곤혹스러운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물론 제의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는 입장이었지만 데이몬의 의견을 감히 무시할 수 없었다. "데이몬.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한 가지를 결정지었으니 이번에는 데이몬의 뜻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소?" 공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얼른 생각을 접은 데이몬이 표정을 굳히며 류시케를 쳐다보았다. "좋다. 베르키스 놈에게 가서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전해라. 베르키스와 네년의 운명 또한 그곳에서 결정지어질 것이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미묘한 표정으로 류시케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잘 되었군. 그곳에서는 확실하게 네년의 팔다리를 잘라낼 수 있겠어. 깔끔하게 손질한다면 장식물로는 그만이겠는데?" 데이몬의 눈빛을 받은 류시케는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인간이란 존재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것은 지금껏 처음이었다. 드래곤에게 이처럼 아무 거리낌없이 협박을 할 수 있는 인간은 맹세코 저자밖에 없을 터였다. 하지만 류시케로써는 대접을 달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저자의 손에 의해 셋이나 되는 드래곤이 생을 마감하지 않았던가. 데이몬의 소름끼치는 눈빛을 받으며 류시케는 굳게 다짐했다. '베르키스님께 소식을 전한 뒤 곧바로 레니우스에게 가서 사실을 물어봐야겠어. 만약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더 이상 베르키스 님을 따라다닐 수 없겠어. 저자는 웃으며 내 사지를 잘라내고도 남을 위인이니까…….' 생각을 마친 류시케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처음 도착했을 때의 오만함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럼 뜻을 전했으니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뜻은 반드시 베르키스 님께 전하겠습니다." 공작이 즉각 나서서 그녀를 배웅했다. "그럼 살펴가도록 하십시오. 격식을 갖추지 못함을 부디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류시케는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용서라니요. 도리어 제가 큰 은혜를 입은 걸요. 마음 같아서는 소원을 한 가지……." 말을 잠시 끊은 류시케가 슬그머니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들어드리고 싶지만 힘들 것 같군요. 그럼 전 이만……." 몸을 돌린 류시케는 급히 마나를 재배열했다. 올 때는 공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했지만 갈 때는 아니었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혹시라도 공간이동을 방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본체로 폴리모프하고 있었다. 농염한 여인의 모습이 빛 무리 속에 묻혀버렸고 그곳에는 곧 커다란 레드 드래곤의 모습이 생겨났다. 캬오오오. 한 바탕 기성을 내지른 레드 드래곤은 고맙다는 듯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목례를 했다. 그리고는 급히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떠올랐다. 날갯짓으로 인한 바람에 병사 몇 명이 뒤로 나동그라졌지만 그들은 급히 몸을 일으켜 대열을 유지했다. 드래곤 앞에서 약한 꼴을 보이지 말라는 공작의 엄명 때문이었다. 레드 드래곤 류시케는 잠시라도 머무르고 싶지 않다는 듯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떠올랐다. 인간에게 농락당한 줄도 모른 채 류시케의 신형은 구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데이몬을 위시한 정벌군 수뇌부들의 시선은 하늘로 고정되어 있었다. 류시케가 떠나간 뒤 본영에는 대대적으로 대책회의가 열렸다. 회의의 주제는 단연 베르키스의 제안에 관해서였다. 거기에서 데이몬은 자신이 홀로 노스우드 평원으로 가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성녀를 구해내는 일은 철저히 내 사적인 일이오. 본 드래곤 러셀런트의 복원을 거의 마쳤으니 나만 가겠소. 데스 나이트들을 데리고 갈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한 번 가 본 만큼 데이몬은 죽음의 절지인 노스우드 평원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정벌군과 카심 용병단원들을 이곳에 남겨두려고 했다. 어차피 연전연승을 거듭하고 있는 정벌군으로써는 베르키스의 제안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다. 다프네를 구해내는 목적이기 때문에 혼자 가야 한다는 것이 데이몬이 주장하는 요지였다. 하지만 의리로 똘똘 뭉친 카심 용병단원들이 그 말을 들을 리가 만무했다. "저희들이 남아있지 않을 거란 사실을 데이몬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데이몬의 일은 곧 저희들의 일입니다. 그 어떤 말씀으로도 저희들을 떼어놓으실 수 없으실 것입니다." 카심 용병단원들의 완강한 거부는 데이몬이 익히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페르슈타인 공작 역시 반론을 제시해 왔다. "베르키스는 정말 머리가 비상한 드래곤입니다. 놈은 필시 그곳에다 죽음의 함정을 파놓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스우드 평원은 너무 위험한 곳이오. 이미 500년 전 그곳에서 400에 달하는 트루베니아의 용사단이 전멸한 전례가 있소." 페르슈타인 공작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인간에게 경험이란 위기를 넘기는 데 있어 무척 중요한 것입니다. 저희에겐 이미 노스우드를 경험해본 분이 둘이나 있지 않습니까?" "………." "안 그래도 저는 돌아가는 전황에 뭔가 미심쩍은 것이 있어 골머리를 앓아왔습니다." "뭐가 미심쩍다는 말이오." 페르슈타인 공작이 데이몬에게 바짝 당겨 앉았다. "오크 부족 중에서 가장 강력한 몇개 부족이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정보부에 따르면 그 부족의 전사들은 통상적인 오크보다 힘도 세고 덩치도 월등히 크다고 합니다. 상황을 보니 아무래도 베르키스가 그들을 빼내어 모종의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 같습니다." "놈이 무슨 계략을 꾸미던 간에 신경 쓰지 말고 오크를 모조리 쓸어버리면 되지 않소?" 페르슈타인 공작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트루베니아의 오크를 모두 쓸어버리는 데에는 아무리 짧게 잡아도 10년은 족히 걸립니다. 오크란 종족은 그만큼 번식력과 생존력이 뛰어나지요. 지금은 전면전이라 상대하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지만 전세가 기울어 놈들이 치고 빠지는 유격전을 펼친다면 상당히 골치가 아파질 수밖에 없습니다." 데이몬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500년 전 종족전쟁 당시에도 오크 유격병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큰 타격을 입었던가. 오크란 종족은 태생적으로 타고난 유격병들이었다. 차라리 지금처럼 전면전을 펼치는 오크가 상대하기에 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비록 지금은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오크란 종족은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는 종족입니다. 그러므로 불안의 소지는 애초에 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럴 듯도 하구려." "각 기사단에 소속된 고급 기사들을 대대적으로 차출해 드리겠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가십시오. 그리고 이번 기회에 베르키스 놈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주셨으면 합니다." 페르슈타인 공작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데이몬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반드시 베르키스의 머리통을 들고 오리다." "어려운 부탁을 거듭 드려서 죄송합니다." "무슨 소리! 오히려 공작의 전폭적인 후원에 내가 몸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데이몬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공작이 그 손을 잡아 힘차게 흔들었다. 두 사람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94회. 베르키스의 제의로 인해 또다시 용사단이 결성되었다. 5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용사단은 노스우드라는 죽음의 절지를 돌파해야 했다. 그곳에서 마룡 베르키스와 최후의 결전을 벌여 두 종족의 운명을 결정지어야 하는 것이다. 이번 용사단은 여러 가지 면에서 500년 전의 1차 용사단을 능가하고 있었다. 용사단에 차출된 기사는 도합 400여 명. 모두가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고급 기사로써 각급 기사단에서 실력 순으로 차출된 자들이었다. 반 정도가 소드 마스터였으니 1차 용사단보다 훨씬 강한 전투집단으로 볼 수 있었다. 또한 용사단에는 듀크 나이츠의 단장인 크로비츠가 가세했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그가 빠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노스우드 평원으로의 여정을 준비하는 데에는 데이몬과 슈렉하이머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 "갑옷과 투구는 여정 내내 짐이 될 것이오. 그러니 기사들에게 갑옷 대신 추위를 막을 수 있는 털외투와 가죽갑옷을 장비하게 하시오." "하지만 최후의 결전에서 드래곤과 리치를 상대하려면 마법 갑옷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걱정 마시오. 대마법 갑옷은 인크레시아 속에 넣어 가면 되니까……." 데이몬은 마나를 다스릴 수 없는 자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용사단에서 제외시켰다. 마나를 운용할 수 있어야만 노스우드의 혹한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 여정이니 만큼 준비해야 할 것이 많고도 많았다. 하지만 기사들이 여정에 필요한 짐을 직접 짊어져야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법보고 인크레시아가 그 문제를 깨끗이 해결해 주었던 것이다. 준비는 데이몬과 슈렉하이머의 요구대로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채비를 마치고 용사단이 도열했을 때 페르슈타인 공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관이로군." 털외투에 털모자를 쓰고 그 위에다 무두질한 가죽갑옷을 걸친 용사들의 모습은 기사가 아니라 마치 사냥꾼 집단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의 운명이 걸린 성전을 치르러 가는 용사들이었다. 페르슈타인 공작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후후후."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황량한 산의 정상에서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였다. 웃음을 터뜨린 주인공은 잘 생긴 적발 청년이었다. 너무나도 준수하여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청년이 산 정상에 우뚝 서서 이유 모를 미소를 흘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인간에겐 마룡(魔龍)이라 불리는 레드 드래곤 베르키스였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죽음의 절지인 노스우드. 아이스 트롤 외에는 그 어떤 생명체에게도 침입을 허락하지 않는 혹한지에 베르키스가 직접 와 있는 것이다. 그는 뜻 모를 미소를 머금은 채 산봉우리의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보라 때문에 정경을 제대로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드래곤의 시야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잠시 후 베르키스의 입술이 벌어지며 조용한 독백이 흘러나왔다. "류시케. 너도 결국 타성을 벗어나지 못했구나." 뭔가 여운을 남기는 음성. 내용과는 달리 베르키스의 얼굴에는 담담함이 가득했다. 마치 모든 것에 달관한 초월자의 표정이라고나 할까. "무척 흐린 날씨로군. 마치 드래곤들의 불투명한 앞날을 예고하는 것처럼 말이야." 베르키스의 눈동자에 서린 빛이 점점 짙어가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 류시케가 남기고 간 말을 곰씹어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인간을 멸종시키지 못해 안달이 나 있죠? 베르키스님은 인간에게 해를 입은 일이 전혀 없잖아요. 전 가겠어요. 그리고 두 번 다시 베르키스 님을 찾지 않겠어요.' 류시케는 그 말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크라누스의 죽음과 거기에 얽힌 과정을 베르키스에게 직접 듣고 난 다음의 일이었다. 베르키스는 떠나가는 그녀를 잡지 않았다. 뿐더러 그녀에게 그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류시케는 자신 외에 유일한 레드 일족이었고 베르키스에게는 애당초 그녀에게 위해를 입힐 생각이 전혀 없었다. 류시케가 두 번 다시 자신을 보지 않겠다며 떠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후 베르키스는 황량한 산봉우리에서 한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 후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류시케. 너는 모른다. 우리 드래곤이란 종족의 운명이 이미 멸종으로 결론지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장한 어조와는 달리 베르키스의 눈동자는 심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인간이란 정말 무서운 종족이란다. 그들의 지식 습득과 발전속도는 그 어떤 종족도 따르지 못할 정도지. 비록 지금은 드래곤이 인간에게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지만 우세는 오래 가지 못한다. 내 짐작대로라면 드래곤들은 머지않아 인간에게 밀려 설 땅을 잃어버릴 것이다. 물론 다른 종족도 함께 멸망의 길을 걷겠지만……." 베르키스는 지금 눈보라에 묻혀 희미해진 정경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이 속한 종족의 불투명한 미래를 관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발전하는 종족이다. 또한 발전된 지식을 후대에 전수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드래곤들은 그렇지 못하다. 이처럼 발전 없이 정체를 거듭하다 보면 드래곤은 언젠가 인간에게 추월될 수밖에 없다." 베르키스의 눈동자에 문득 안타까움이 서렸다. "인간을 연구하고 그들의 장점을 배우는데 평생을 바쳤다. 모든 것을 깨달은 뒤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해 수백년 동안 동분서주했지만 결과가 이런 꼴이라니……." 하지만 베르키스의 표정에서 한 점의 후회도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인간과는 달리 드래곤에겐 자신들의 노력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까……." 베르키스는 조용히 레니우스를 떠올려 보았다. 한 때 자신을 믿고 따랐지만 최후의 순간에 배신한 골드 드래곤 레니우스. 그로 인해 오랫동안 공들인 계획이 결정적인 순간에 와해되어 버렸지만 베르키스는 레니우스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것이 조금 섭섭할 뿐이었다. "비록 로드를 이용하고 죽인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사심은 전혀 없었다. 머지않아 인간에게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날 것이 분명할 드래곤의 운명을 바꿔보려 한 것이니까. 다름 아닌 인간에게서 배운 방법으로 말이다." 인간이란 종족을 떠올려 보자 베르키스의 표정이 서서히 상기되고 있었다. "인간이란 정말 놀라운 종족이로군. 신체적인 조건에서 뭐하나 내세울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날 놀라게 하다니 말이야. 아르카디아로 건너간 소수의 인간들은 트루베니아의 인간들이 수천 년에 걸쳐 이룩한 것을 단 오백 년 만에 이루어냈다. 아니 더욱 발전시켰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겠지? 난 인간들의 저력이 무섭다. 또한 인간들로 인해 머지않아 대륙에서 사라질 우리 드래곤의 운명 역시 안타깝다. 하지만 내 능력이 모자라서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 베르키스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북쪽을 쳐다보았다. 멀리서 희미하게 베르하젤의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베르키스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주신인 베르하젤이 모든 종족을 버려 두고 세상에 관심을 끊은 것은 바로 인간 때문이다. 더 이상 인간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신도 어쩔 수 없이 세상을 버린 것이지. 하지만 드래곤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른다. 그저 운명의 테두리를 맴돌며 낡은 전통에 집착하다 인간에게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생각을 거듭하던 베르키스의 눈동자에 별안간 광망이 치솟았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진 않는다. 비록 버림받긴 했지만 내가 속한 종족의 운명을 그대로 좌시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베르키스의 시선은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베르하젤의 신전에 못 박혀 있었다. 그가 마지막 안배를 계획해 놓은 곳이기도 했다. "이제 인간을 멸망시키는 것은 내 능력을 벗어났다. 하지만 내가 아니더라도 인간을 멸망시킬 수 있는 또 다른 힘이 존재한다. 비록 나와 목적이 다르지만 그들 역시 호시탐탐 인간계를 노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위험부담이 크긴 하지만 그를 이용한다면 인간을 멸망시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베르키스의 눈동자가 서서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마지막 싸움에서 내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내 종족, 드래곤의 미래를 위해서는 언제든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 인간들에게서 배운 것 중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 이것이지만 어쩔 수 없다. 머지않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드래곤에게 내가 유일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날 먼저 버렸을지언정 난 결코 내 동족들을 버릴 수 없으니까……." 비장함이 감돌고 있는 베르키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마도 계획이 실행되는 과정에서 드래곤 몇이 희생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남은 드래곤들은 인간이 멸망한 땅 위에서 다시금 절대적인 존재로 자리잡을 수 있다." 베르키스는 불타오르는 듯한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찌푸린 하늘은 좀처럼 맑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베르키스는 그런 하늘을 쳐다보며 준비해 놓은 계획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짐작대로라면 놈은 반드시 노스우드로 온다. 결코 성녀를 버릴 수 없을 테니까……." 데이몬을 떠올리자 베르키스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놀라운 놈. 네놈을 살려둔 것이 내 일생일대에 범했던 최고의 실수다. 네놈 하나로 인해 순탄히 진행되던 계획이 송두리째 파탄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격정이 치밀어 올랐는지 베르키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수백 년 동안 계획했던 일을 인간 하나로 인해 그르쳤으니 밉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증오심만큼이나 탄복이 치미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복수를 위한 데이몬의 집요한 노력과 위기극복능력만은 베르키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와 자신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적임에는 분명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놈의 숨통만은 끊어야 한다. 그래야만 드래곤이 영원한 세상의 지배자로 남을 수 있다." 나직이 되뇌이는 베르키스의 얼굴에는 반드시 계획을 실행시키고 말겠다는 다짐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었다. 그 무렵 데이몬은 2차로 결성된 용사단과 함께 험한 준령을 넘어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와 보는 길이었지만 경로는 이미 데이몬의 뇌리에 똑똑히 기억되어 있었다. 하지만 길은 몇 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바람이 워낙 강하게 불고 눈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길이 변하는 일은 노스우드에서는 비일비재했다. 그 탓에 일행은 무척 힘들게 산을 넘어가야 했다. 하지만 500년 전과는 달리 추위로 용사들을 잃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차와는 달리 준비를 철저히 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용사들은 철제 갑옷을 착용하지 않았다. 철저히 보온에 신경을 써서 차림새를 갖추고 그 위에 무두질한 가죽 갑옷을 걸쳤기 때문에 추위에 시달리는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용사단은 예외 없이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고급 기사들로만 구성되었기에 얼어죽을 우려는 없었다. 또한 갑옷과 보급물자를 모두 인크레시아에 넣은 상태였기 때문에 용사들의 발걸음은 비교적 가벼운 편이었다. 선두에는 특별히 실력이 뛰어난 기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사방을 면밀히 수색하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이스 트롤의 습격이 가해질 가능성을 데이몬이 미리 경고했기 때문에 그들은 바짝 긴장한 채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 때 한 기사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뭔가 이상징후가 있다는 신호였다. 그 모습을 본 크로비츠가 즉시 행군을 중지시켰다. 용사대의 우두머리는 임시로 그가 맡고 있었다. "정지. 무슨 일인가?" "또다시 오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약 백여 구 가량의 시신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아이스 트롤의 습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 크로비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오크의 시체를 발견한 것은 이번이 열 번째였다. 차림새와 덩치를 보아 정예로 보이는 오크 전사들의 시체가 또다시 무더기로 발견한 것이다. 오크의 시체를 처음 발견한 곳은 얼음 호수였다. 무수한 오크 전사들이 하반신이 얼음에 묻힌 채 얼어죽어 있었다. 덕분에 용사들은 수월하게 얼음호수를 건널 수 있었다. 오크의 시체가 없는 곳이 비교적 단단히 얼어있는 곳이었다. 산을 넘어오면서도 용사들은 무수한 오크의 시체를 발견했다. 얼어죽은 놈도 있었고 아이스 트롤의 공격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시체도 있었는데 고개를 넘어갈 때마다 눈에 띌 정도였다. 통상적으로 아이스 트롤이 사냥물을 눈 속에 묻어둔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크의 사상자는 발견한 시체의 몇 배를 상회한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오크들이 왜 혹한지인 노스우드에서 떼죽음을 당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대규모의 오크 전사들이 불과 얼마 전에 이 길을 지나갔다는 점이다. "베르키스 놈이 도대체 무슨 함정을 파 놓았을까?" 데이몬은 경계 어린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에 팔려 있던 데이몬에게 크로비츠가 다가왔다. "발자국과 흔적으로 보니 족히 일만에 가까운 대규모 병력이 이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껏 발견한 시체를 제외하더라도 놈에겐 아직까지 많은 병력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그나저나 베르키스란 놈, 간악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군. 자신을 받드는 오크 족마저 노스우드에 몰아넣어 떼죽음 당하게 하다니………." "아무래도 무슨 흉계를 꾸며놓은 것 같습니다만 걱정하진 마십시오. 오크 전사가 아무리 많더라도 감히 용사단의 적수가 되진 못할 테니까요." 크로비츠의 말에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마 놈들이 정면으로 붙는 일은 없을 것이오. 베르키스는 무척 영리한 놈이지. 눈에 뻔히 보이는 함정을 파놓을 놈은 분명히 아니오." "………." "일단 병력을 출발시킵시다. 놈이 어떤 함정을 파놓았던 간에 우린 정면으로 돌파해야 하오." 크로비츠는 두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95회. 그토록 우려했던 아이스 트롤의 기습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크의 고기로 충분히 배를 채운 탓인지 아이스 트롤들이 용사들에게 전혀 눈독을 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용사들이 가파른 산 중턱을 넘어갈 즈음 아이스 트롤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기습이 가해졌다. 쿠르르르. 난데없이 들려오는 굉음에 데이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미 그는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눈사태가 일어났다. 모두 몸을 절벽 쪽으로 붙여라." 용사들은 두 말도 하지 않고 지시에 따랐다. 노스우드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오로지 데이몬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명령을 내린 데이몬은 정작 절벽에 붙지 않고 부양마법을 써서 허공에 떠올랐다. 눈사태가 인위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콰르르르. 잠시 후 엄청난 눈사태가 그들이 있던 곳을 강타했다. "으아아."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용사 몇이 눈사태에 휩쓸렸다. 수백 톤의 눈이 산중턱을 휩쓸고 지나가는 장면을 언뜻 쳐다본 데이몬은 지체 없이 산정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눈동자는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오크들을 데려온 이유가 눈사태를 일으키기 위해서였군. 빌어먹을……." 데이몬의 몸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솟구치고 있었다. 눈사태가 계속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산 정상에서 눈사태를 일으키고 있는 오크들을 최우선적으로 처치해야 했던 것이다. 산정에 도착하자 백여 명의 오크 전사들이 열심히 눈덩이를 뭉쳐 아래로 굴리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데이몬을 발견하자 오크 전사들은 깜짝 놀라 병기를 움켜쥐었다. "취익. 인간이다. 죽여라." 일단의 전사들이 데이몬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순순히 당할 데이몬이 아니었다. "이런 가소로운 놈들……." 데이몬은 지체 없이 끌어 모아놓은 마나를 재배열했다. 고위급 마법으로 충격을 준다면 또 다른 눈사태를 유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일부러 매직 미사일을 전개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오크전사 일백 명을 전멸시키는 것은 충분했다. 퍽, 퍽, 퍽, 퍽. 오크 전사 일백 명이 모두 눈밭에 드러눕는데는 채 일분도 걸리지 않았다. 하나도 남김없이 마혈이 제압당한 상태였다. 데이몬은 성난 눈빛으로 그들을 쓸어보았다. "자비를 베풀어 숨통을 끊어주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머지않아 아이스 트롤들이 찾아와서 명줄을 끊어줄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데이몬은 눈동자만 데룩데룩 굴리는 오크 전사들을 남겨둔 채 다시 부유마법을 시전했다. 아이스 트롤들이 깔끔하게 마무리해 줄 것이기 때문에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산 중턱에 내려와 보니 용사들이 정신 없이 동료들을 구해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법사들까지 동원되어 눈에 파묻힌 동료들을 구출해 내고 있었다. 보다 못해 데이몬이 가세했지만 눈의 양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파묻힌 기사들을 구해내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약 한 나절이 지나서야 용사들은 겨우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사망 십 명에 행방불명이 십 팔 명입니다. 찾지 못한 기사들은 아마도 숨이 막혀 죽었을 것입니다." 상황을 보고 받은 크로비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눈사태 때문에 허무하게 기사들을 잃었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작 적과는 싸워보지도 못한 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화만 내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노스우드로 이어지는 산 정상에는 예외 없이 오크 전사들이 매복하고 있을 터였다. "상황을 보니 눈사태를 이용한 공격이 계속 이어질 것 같습니다. 뭔가 해결책을 강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데이몬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해결하겠소. 눈사태에 대해서는 크로비츠 대장이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대신 팬텀 스티드 소환에 능숙한 마법사를 열 명만 차출해 주시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시려고?" "내게 맡겨 두시오." 말을 마친 데이몬이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데스 나이트 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곧이어 완전히 복원이 끝난 러셀런트마저 위용을 자랑하듯 거대한 동체를 드러냈다. 콰루루루루. 그 모습을 본 크로비츠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본 드래곤의 복원을 마치셨군요. 그렇다면 산 정상에 매복한 오크를 효과적으로 없앨 수 있겠습니다." "직접적인 공격을 가할 순 없소. 눈사태는 미세한 충격으로도 일어나니까……. 그러므로 매복한 오크 놈들을 데스 나이트들에게 맡기되 마법사들로 하여금 그들을 보조하게 해야 하오." "알겠습니다. 지금 즉시 마법사들을 차출하겠습니다." 신이 난 크로비츠가 마법사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동안 데이몬은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 역시 데스 나이트들을 보조해야 했던 것이다. 데이몬은 차출된 마법사들과 함께 러셀런트에 탑승했다. 바람이 강했지만 러셀런트는 무리 없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생전 처음 본 드래곤에 타는 탓에 다소 겁에 질렸지만 마법사들은 맡은 바 임무를 그럭저럭 수행해 냈다. 하나같이 6서클을 상회하는 고위급 마법사들이라서 탐색마법으로 오크를 찾아낸 뒤 팬텀 스티드를 소환해 데스 나이트를 강하시키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활약 덕분에 곳곳에 매복해 있던 오크 전사들은 순차적으로 정리되었다. 다만 감쪽같이 숨어있던 한 부대의 오크 때문에 또다시 몇십 명의 기사를 잃는 일이 생겨났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희생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색을 마친 데이몬은 마법사들과 함께 다시 용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데이몬의 노고를 치하한 크로비츠는 다시금 행군을 지시했다. 오크의 매복으로 인해 시간이 어느 정도 지체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준령을 넘은 용사단의 앞에 이번에는 안개의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환상을 일으키는 마법이 걸려 있어 일행을 서로 상잔하게 만드는 죽음의 안개였다. 이미 안개의 비밀을 알고 있는 탓에 데이몬은 용사들에게 마음을 단단히 먹도록 지시했다. "정신 바짝 차려라. 저 안개에는 고도의 환상마법이 걸려 있다. 안개 속에서는 동료들이 예외 없이 적으로 보인다. 상황에 따라 언데드, 혹은 오크의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으니 적을 발견했다고 해서 섣불리 살수를 가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그 때 슈렉하이머가 끼여들었다. "하지만 이미 수천에 달하는 오크 전사들이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준령을 넘어갔습니다. 그들이 안개 속에 매복해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생각을 거듭하던 데이몬은 결국 슈렉하이머와 데스 나이트들을 선두에 세우기로 했다. 언데드가 어지간한 환상마법에 현혹되지 않는다는 점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용사들에게는 단단히 주의가 주어졌다. 명백하게 적이라고 판명되지 않을 경우 살수를 가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진 것이다. 400에 달하는 용사단은 데스 나이트들을 앞세운 채 조심스럽게 안개의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용사들은 바짝 긴장한 채 안개의 바다 속을 전진해 들어갔다. 하지만 그토록 우려했던 기습은 없었다. 대신 각양각색의 모습을 한 시체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진 채 그들을 맞이했다. 오크의 모습을 한 시체도 있었고 구울이나 와이트의 모습을 한 시체도 간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데이몬은 시체의 정체가 자신들보다 한 발 앞서 들어간 오크 전사들이란 사실을 간파했다. "오크 역시 환영 마법에 걸려들었군." "단순한 놈들이라 앞뒤 가릴 것 없이 싸웠을 것입니다. 동료란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크로비츠의 말에 데이몬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각별히 조심해야 할거요. 잠깐 한 눈을 판 사이 동료의 모습이 바뀌니 말이오. 500년 전 트루베니아의 용사단도 이 환영마법 때문에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소." "알겠습니다. 기사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내려놓겠습니다." 데이몬의 우려대로 용사들은 순차적으로 환영마법에 걸려들었다. 잠깐 고개를 돌린 사이 옆에서 걷고 있던 동료가 은근슬쩍 오크 전사로 탈바꿈해버린 것이다. 그 일은 용사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일어났다. 마음을 읽어 동료를 적으로 보이게 하는 마법이라 그런지 탈바꿈한 기사들은 대부분 중형 몬스터나 오크 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데이몬이 단단히 주의를 주었기 때문에 동료들끼리 상잔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사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오크 전사와 먼저 대화를 나누는 방법으로 적아를 구분했다. "이봐. 넌 누구지?" "취익. 난 펜슬럿 근위 기사단 출신의 스티브인데 너야말로 누군가? 취익. 설마 오크는 아니겠지?" 고도의 환영마법이라 들려오는 음성에도 오크 특유의 콧소리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대화를 먼저 나눈 덕분에 칼을 섞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안개의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그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고 마침내 용사들 전원의 모습이 바뀌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고개를 돌려본 데이몬이 쓴웃음을 지었다. "젠장맞을……." 사방은 온통 번들거리는 녹색 피부를 가진 오크와 중형 몬스터 천지였다. 자신이 마치 폴리모프하여 오크 무리로 섞여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누가 누군지 분간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데이몬은 조용히 크로비츠를 불렀다. "크로비츠 대장. 나 데이몬이오. 지금 어디에 있소?" 그 말이 끝나자 덩치가 우람한 트윈헤드 오우거 하나가 데이몬에게 다가왔다. 험상궂은 얼굴에 근육이 울퉁불퉁 비어져 나온 트윈헤드 오우거는 덩치에 어울리는 거대한 그레이트 액스를 들고 있었다. "크로비츠입니다. 혹시 데이몬이십니까?" "그렇소." 트윈헤드 오우거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소. 그런데 대장의 눈에 나도 오크로 보이오?" "아닙니다. 데이몬께서는 지금 리치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데이몬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마도 크로비츠의 의식이 리치를 적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환영일 터였다. 데이몬은 나직이 투덜거렸다. "리치로 보이다니……. 그렇다면 슈렉하이머는 어떻소." 그 말에 트윈헤드 오우거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죄송하지만 슈렉하이머께서 어디 계신지 분간이 잘………." "저는 여기 있습니다." 앞으로 쓱 나서는 슈렉하이머를 보자 데이몬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래도 당신은 형태가 바뀌지 않았구려. 차림새가 베르키스 놈의 가디언이라서 문제지만……." 카심 용병단원들 역시 하나도 예외 없이 몬스터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데스 나이트들은 크로비츠와 마찬가지로 트윈헤드 오우거의 모습이었다. 소드 마스터인 미첼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머리가 하나 달렸다는 점만 다를 뿐이었다. 카심과 제럴드는 트롤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 밖의 대원들은 영락없는 오크 전사의 몰골이었다. 데이몬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모습이 철저히 실력 순으로 바뀌는군. 그렇다면 율리아나는 어떨까?" 장난기가 돈 데이몬이 소리쳐 율리아나를 불렀다. "저는 여기 있어요." 다가온 율리아나를 보자 데이몬이 폭소를 터뜨렸다. "어울리지 않는 고블린이 여기 하나 있군. 고블린 치고는 제법 귀엽게 생겼는걸?" 의외로 율리아나는 성깔을 부리지 않았다. 단지 미심쩍은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녀의 눈에 데이몬이 뭘로 보이는지는 오직 율리아나만 알뿐이었다. 대원들을 한번씩 둘러본 데이몬이 다시 행군할 것을 명했다. "서둘러 출발합시다. 가능한 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하오." "알겠습니다." 공손히 머리를 조아린 트윈헤드 오우거가 진군을 명했다. 각종 몬스터로 구성된 병단은 지시에 따라 죽음의 안개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도 오크의 기습은 없었다. 그럴 것이 안개 속으로 들어온 오크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널브러진 형상을 보아 대부분 상잔으로 쓰러진 것 같았다. 용사들은 발견한 오크의 시체를 하나하나 헤아리며 진군하고 있었다. 앞서 가던 슈렉하이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하군요." "뭐가 말이오?" "앞서 준령을 넘어간 오크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죽은 것 같습니다. 그것을 보아 오크들은 안개의 비밀에 대해 모르고 들어온 것이 분명합니다." 슈렉하이머의 말에 데이몬도 뭔가가 석연치 않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렇구려. 이곳의 마법진에 손을 대어 개조해 놓은 놈인데 어째서 오크들이 상잔하도록 방치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소.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구려." "아무튼 이곳을 통과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렇겠지?" 고개를 뒤흔든 데이몬이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광활한 죽음의 안개지역도 서서히 끝이 보이고 있었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96회. 용사들은 마침내 죽음의 안개지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안개지역을 벗어나는 순간 용사들은 서서히 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동료들이 한 명씩 원래대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며 용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인지 동료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긴장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던 참이었다. 안개지역을 빠져나온 용사단의 앞에 광활한 평원이 펼쳐졌다. 500년 전 1차 용사단이 전멸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곳에서 용사단은 최후의 결전을 위해 전열을 재정비했다. 주위를 면밀하게 살펴본 데이몬이 인크레시아를 열었다. 속에 넣어온 병기와 대마법 갑옷으로 용사들을 무장시켜야 했던 것이다. "헬버트론 부탁한다." 데이몬의 말에 헬버트론을 위시한 데스 나이트들이 툴툴거리며 인크레시아로 다가갔다. "젠장맞을……. 또 짐꾼 역할이야?" 하지만 인크레시아 속에 보관된 갑옷과 병기를 꺼낼 수 있는 이는 오직 그들뿐이었다. 최후의 결전을 바로 앞에 둔 탓인지 4대 기사는 별 말 없이 인크레시아 속의 물자를 나르기 시작했다. 다크 포탈에서 거둔 데스 나이트들과 윈슬럿도 가세해서 갑옷과 무기를 꺼냈다. "내 갑옷." 성급하게 자신의 무구로 다가가려는 용사들에게 데이몬이 경고를 했다. "갑옷과 투구가 몹시 차가울 것이다. 그러니 조금 시간을 두고 착용하라." 데이몬 역시 싸울 채비를 갖추었다. 육박전이 벌여야 할지도 몰랐기에 데이몬은 무척 오랜만에 스파이크드 건틀릿을 착용했다. 꾸준히 관리해 왔기에 건틀릿을 구성하고 있는 버너디움은 전혀 광채를 잃지 않았다. 옆을 둘러보니 카심 용병단원들 역시 준비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환상의 갑주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미첼의 모습에 일루미나가 감탄을 했다. "정말 멋져요. 미첼." 머쓱해진 미첼이 어깨를 으쓱했다. 드래곤 로드의 마법이 걸려 있는 탓에 환상의 갑옷은 평소 관리하지 않아도 항상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심을 위시한 나머지 대원들은 새 갑주를 말끔하게 차려입었다. 인크레시아 속에 넘쳐나는 것이 대마법 갑옷이었기에 아낄 이유가 없었다. 다소 구형이긴 하지만 다른 용사들이 착용한 것보다는 고급품이었다. 특히 대마법 방호력에 있어서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준비가 거의 끝나 가는 것을 본 데이몬이 고개를 돌렸다. 베르하젤의 신전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 왔다. "드디어 결전이로군." 오백 년 전에 벌어진 결전은 인간의 참패로 끝났다. 하지만 데이몬은 이번에는 경우가 다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다프네와 헤어졌었지." 그 때의 급박했던 순간이 떠올랐는지 데이몬의 눈가에 우수가 어렸다. 이곳에서 데이몬은 목숨보다도 사랑하는 다프네와 이별을 해야 했다. 이후 그는 500년 동안 다프네를 만나지 못했다. 천신만고 끝에 드래곤 로드를 설득시켜 그녀를 인간으로 되돌리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이어진 베르키스의 개입으로 또다시 생이별을 해야 했기 때문에 데이몬에겐 이 장소에 대해 한없는 애환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슈렉하이머 역시 감회가 새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의 패전으로 말미암아 트루베니아의 인간들은 참혹한 패전의 길을 걸어야 했던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2차 용사단을 결성하여 이곳까지 왔지만 그 때의 처참했던 상황들이 일목요연하게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동안 주위를 살피던 데이몬이 조심스럽게 진군을 명했다. "돌무더기가 쌓여 있는 곳은 특히 신경 써야 하오. 언제 스톤 골렘으로 탈바꿈할지 모르니 말이오." 싸울 준비를 완전히 갖춘 용사들은 사방을 면밀하게 살피며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걸어가던 데이몬에게 불연 듯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군. 베르키스 놈이 어찌해서 리치들을 동원하지 않았지? 놈에겐 아직까지 리치가 많이 남아있을 텐데……." 슈렉하이머 역시 그 점이 석연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준령을 넘어올 때 리치의 습격을 받았다면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텐데 말입니다." 사실 데이몬이 가장 걱정했던 것이 게덴하이드를 위시한 리치 군단이었다. 추위를 전혀 타지 않는 데다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마법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만큼 리치의 공격은 충분히 위력적이라 볼 수 있었다. 그 점을 감안해서 6서클 이상의 고위급 마법사를 다수 대동하고 오긴 했지만 완벽하게 막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차라리 산 정상에 매복했던 오크 전사들이 상대하기가 더욱 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곳까지 오며 리치는 단 하나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데이몬은 베르키스의 꿍꿍이가 뭔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현재로써는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놈이 무슨 계략을 꾸몄는지 일단 맞닥뜨려보면 알게 될 터."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용사들을 진군시켰다. 멀리서 안개에 싸인 베르하젤의 신전이 어렴풋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용사들을 맞은 것은 500년 전 이곳에서 벌어졌던 결전의 흔적들이었다. 걸어갈 때마다 시뻘겋게 삭아버린 병기와 갑옷, 투구들이 발길에 채였다. 중형 몬스터가 사용했을 법한 거대한 병기에서부터 오크 보병의 전통적인 뿔 달린 투구, 각종 글레이브와 장검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병기 주인의 육신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칼자국이 아로새겨진 채 널브러진 돌무더기의 정체는 스톤 골렘이리라……. 주위를 살피며 걸어가던 크로비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50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철로 된 병기가 아직까지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니 말입니다." 데이몬이 그 말을 받았다. "신의 힘이 작용하는 곳이라서 그렇소. 이곳에서 죽은 자는 심지어 영혼조차 빠져나갈 수 없소. 평안을 취하지 못하고 영원히 이곳을 맴돌아야 하지." 말을 마친 데이몬이 손가락을 뻗어 4대 데스 나이트를 가리켰다. "저들의 영혼 역시 500년 동안을 이곳을 정처 없이 배회하다 나를 만나 데스 나이트가 된 것이라오." 그 말에 헬버트론이 고개를 돌려 데이몬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세, 세상에……." 듣고 있던 용사들은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을 느꼈다. 비록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들이었지만 영혼마저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말에 두려움이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두려움을 떨쳐버리려는 듯 크로비츠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죽은 자의 육신이 흔적조차 남지 않은 것도 그 때문입니까?" "그렇소. 이곳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신의 노여움을 산 것이니까……." 용사들은 일시에 숙연해졌다. 지금껏 신의 보살핌을 받지 않고 살아온 아르카디아 인들이었지만 신의 노여움을 산다는 것이 결코 달가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묵묵히 각오를 다졌다. 용사들은 이미 자신들이 속한 나라와 국왕, 그리고 가족을 위해 목숨을 바칠 작정을 하고 온 자들이었다. 그렇게 용사단은 베르하젤의 신전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었다. "정지." 데이몬이 손을 들자 용사들이 일시에 진군을 멈췄다. 데이몬의 시선은 윤곽만 희미하게 보이는 베르하젤의 신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안개가 가득 끼여 있어 사물을 제대로 식별하기 힘들었다. 데이몬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상하군. 원래 이곳에는 안개가 끼여 있지 않았는데……." 문제는 안개뿐만이 아니었다. 데이몬은 안개 속에서 스멀거리고 피어나는 살기를 읽고 용사단을 정지시킨 것이다. "아무래도 안개 속에 베르키스 놈의 안배가 자리하고 있을 것 같군." 데이몬은 슬며시 조바심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상황을 알아보고 난 뒤 진입해야 마땅할 듯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안개 속에 대해 전혀 탐색이 되지 않았다. 한 두 번 탐색마법을 전개해본 데이몬은 내부를 살피는 것을 깨끗이 포기해야 했다. "베르키스 놈이 수작을 부려놓았군. 제 아무리 마나의 흐름이 불규칙적이라 해도 이 정도로 탐색이 되지 않을 리가 없으니……." 그 때 안개 속에서 굵직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용사들 모두가 똑똑히 알아들을 만큼 큰 소리였다. "후후후. 드디어 드래곤 슬레이어가 도착했는가? 이 곳에 온 것을 환영한다." 순간 데이몬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음성의 주인은 의심할 나위 없이 베르키스였다. "이런 썩어문드러질 자식………. 너 잘 만났다." "자자. 진정하라고……. 큰 싸움을 앞두고 흥분하면 쓰나?" 데이몬은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다. 굳이 베르키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지금은 결코 흥분할 상황이 아니었다. 다프네를 구해내고 베르키스의 계략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냉정해야 했다. 하지만 베르키스가 안개 속에 있다고 생각하니 흥분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연신 씨근거리는 데이몬의 귀로 베르키스의 유들유들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드 마스터 400이라……. 제법 준비를 철저히 했군 그래?"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데이몬이 질 수 없다는 듯 맞받았다. "네놈을 이곳의 귀신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전력이지. 걱정하지 말도록. 내가 대대로 제사는 잘 지내줄 테니까……." "제사?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아무튼 그 정도 전력으로 날 감당할 순 없을 것 같은데?" "개소리!" 데이몬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하늘이 뒤집히더라도 네놈은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없다.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끝장 낼 작정이니까……." 거듭 욕설을 퍼부었지만 베르키스는 별달리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여타의 드래곤과는 확실히 다른 반응이었다. "그래? 한 번 기대해 보지. 용기가 있다면 안개 속으로 한 번 들어와 보도록……." "흐흐흐. 누가 그 말에 겁먹을 줄 아는가?" 거칠 것 없다는 호언장담과는 달리 데이몬은 크로비츠에게 조심스럽게 귀엣말을 건넸다. "혹시라도 놈이 안개 속에서 독을 이용한 공격을 가할 지도 모르오. 아니 안개 자체가 스팅킹 클라우드일수도 있소. 그러니 마법사들로 하여금 용사들을 철저히 보호하게 하시오. 용사 다섯에 마법사 하나를 붙이면 될 것이오. 카심 용병단원들은 내가 직접 보호하겠소."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성난 눈빛으로 안개 속을 쏘아보았다. "지금 들어갈 테니 모가지를 깨끗이 씻고 기다려라. 데스 나이트들이 네 목을 잘라 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 "그까짓 언데드 놈들의 무딘 칼날로는 힘들 텐데? 아무튼 기다리지." 그 말을 끝으로 안개 속의 음성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용사들은 마법사들의 엄호를 받으며 조심스럽게 안개 속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진입해 들어갈수록 안개는 짙어졌다. 종국에는 채 1미터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점점 짙어지는 안개를 본 데이몬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수작이지? 혹시 죽음의 안개를 이곳에다 다시 펼쳐놓은 것 아닐까?" "그럴 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법 실력 하나만은 드래곤들 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베르키스니까요." "하지만 살기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 뭔가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을 정한 듯 데이몬이 크로비츠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아무래도 뭔가가 미심쩍소. 그러니 기사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도록 하시오. 적이 출현할 경우 상대의 검술을 잘 살피라고 말이오." "무, 무슨 말씀이신지?" 크로비츠가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안개의 정체가 아직까지 모호하오. 만에 하나 우리가 통과했던 환영마법이 걸린 안개일 수도 있소." "동료를 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죽음의 안개 말씀이시군요." "그렇소. 모두들 경험 많은 기사들이니 적이 사용하는 검술이 오크의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것인지 충분히 판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오. 그러니 안개 지역을 통과할 때처럼 적을 맞이함에 있어 주의를 기울일 것을 당부해 주시오." 그 말에 크로비츠가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기습이 가해질 경우 한가롭게 대화나 나눌 수는 없지 않습니까? 목숨이 위태로운 판국인데……" "일단은 맞서 싸워야지요. 그런 다음 검술이 눈에 익을 경우 대화를 나누면 되지 않겠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살을 찌푸렸지만 크로비츠는 별다른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크로비츠의 명령은 순차적으로 용사들에게 전파되었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판국에 적의 검술이나 판별해야 한다니……." 명령에 다소 불만이 있었지만 용사들은 받들 수밖에 없었다. 500년 전 1차 용사단이 상잔으로 인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궤멸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사들은 바짝 긴장한 채 안개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진군해 들어갔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97회.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안개의 중심부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맹렬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워어어억. 동시에 들려온 북소리. 오크 전사들의 돌격을 알리는 징조였다. 거기에는 오우거와 트롤같은 중형 몬스터의 거친 숨소리도 섞여 있었다. 용사들은 바짝 긴장한 채 맞서 싸울 채비를 갖췄다. "적의 공격이다." "진형을 유지하라." 데이몬 역시 주먹을 불끈 쥔 채 안개 속을 노려보았다. 시계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고 따라서 적의 규모와 편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놈이 도대체 무얼 준비해 놓았을까?"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데이몬은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그러는 동안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글레이브를 움켜쥔 오크 보병들이었다. 투박하지만 튼튼해 보이는 갑주를 걸친 오크 전사들이 안개 속에서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일견해도 엄청난 수효였다. 놈들은 핏발 선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용사단에 덮쳐들었다. 슈캉 슈캉. 처절한 접전이 벌어졌다. 도처에서 병기가 서로 격돌했고 붉은 피가 확 뿜어졌다. 생명이 사라진 시신들이 여기저기서 픽픽 쓰러졌다. 쓰러지는 이들은 대부분 오크 전사들이었다. 고급 기사들 중에서 고르고 고른 용사들이었으므로 뜻밖의 기습을 당했어도 쉽사리 당하지 않았다. 쿠어어어. 몸통이 토막난 오크 전사들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그럼에도 몰려드는 오크 전사의 대열은 끝이 없었다. 이어 들이닥친 것은 중형 몬스터였다. 거대한 배틀 엑스를 거머쥔 오우거와 트롤 군단이 용사단의 측면을 강타했고 그로 인해 용사단에서 첫 희생자가 발생했다. "크아악." 거대한 배틀 엑스에 격중된 용사 하나가 허리가 기괴한 각도로 꺾인 채 훨훨 날아갔다. 대 마법 갑옷도 중형 몬스터의 중병기에는 무용지물이었다. 안개 속은 곧 피가 튀고 살점이 비산하는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짙은 안개로 인해 피아를 구분하기 힘든 난전이 벌어진 것이다. 카심 용병단원들 역시 난전에 휘말려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용사들은 두세 명씩 나뉘어 서로를 엄호하면서 정신 없이 혈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데이몬 역시 예외일 수가 없었다. "에잇." 눈부신 빛줄기가 쏜살같이 쏘아졌다. 빛줄기는 막 배틀 엑스를 들어올리는 트롤의 미간을 파고 들어갔다. 뇌에 큰 충격을 입은 트롤은 그대로 절명했고 거대한 몸뚱이는 맥없이 바닥에 꼬꾸라졌다. 트롤 하나를 처치한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몸을 날리며 매직 미사일을 연속으로 퍼부었다. 퍼퍼퍽. 득달같이 달려들던 오크 전사 둘이 매직 미사일에 격중되어 쓰러졌다. 데이몬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역시 베르키스로군. 고위급 마법을 쓸 수 없는 상황에 몰아넣다니……." 이처럼 적아가 뒤엉킨 상황에서는 에너지 볼트나 헬 파이어 따위의 고급 마법을 쓸 수 없었다. 아군에게도 피해가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데이몬은 오크 전사들에게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막 쓰러뜨린 오크 전사의 눈을 까뒤집어 본 데이몬은 머리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버서커(Berseker)로 만들었군. 이런 가증스러운……." 달려드는 오크와 중형 몬스터들이 모두 버서커(狂戰士)라면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고르고 고른 용사들이라도 고통을 느끼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드는 광전사에게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버서크(Bersek) 마법. 이것은 대상을 이지를 상실한 광전사로 만드는 마법이다. 상처를 입어도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고 생명력이 다할 때까지 끝없이 병기를 휘두르는 광전사. 한 마디로 시술받은 자를 살인 병기로 전락시켜 버리는 끔찍한 마법이었다. 마법의 효력이 다할 경우 광전사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체내의 잠력을 일시에 소진해 버리기 때문이었다. 과거 트루베니아의 몇몇 왕국에서 휘하 기사들에게 버서크 마법을 걸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례가 있긴 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관점에서 그것은 결코 승리라 볼 수 없었다. 버서크 마법이 걸렸던 기사들은 마법이 풀리자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난 자도 더 이상 검을 쓸 수 없는 폐인이 되어버렸다. 전력의 대부분을 허무하게 잃은 왕국은 그대로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버서크 마법은 오래 전부터 금기에 속하는 마법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바로 그 버서크 마법이 놀랍게도 드래곤에 의해 재현된 것이다. 달려들던 오크전사 하나를 파이어 볼로 태워버린 데이몬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베르키스. 도대체 얼마만큼 간악해야 속이 시원하겠나?" 오크 전사 모두를 버서커로 만들었다는 말은 곧 저들의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을 퍼붓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안개 속에서 연이은 폭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쾅, 콰콰쾅. 폭발의 중앙에는 분명히 아군과 적군이 뒤섞여 있을 것이 분명했다. 불운한 용사들은 오크 전사와 함께 어우러져 정신 없이 싸우다 영문도 모른 채 생을 마감했을 터였다. 데이몬의 눈동자는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겁도 없이 달려들던 오우거 하나를 간단히 처리한 다음 데이몬은 인크레시아를 활짝 열어 젖혔다. 콰루루루. 대기하고 있던 러셀런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헬버트론을 위시한 4대 데스 나이트가 안개를 뚫고 다가왔다. 심령이 통해 있는 탓에 구태여 말로 부를 필요가 없었다. "우선 베르키스 놈의 관심을 나에게 돌려야 해." 그러는 동안에도 안개 속에서는 계속 폭음이 터져 나왔다. 모르긴 몰라도 베르키스의 마법 공격에 의해 용사들이 계속해서 죽어나가고 있을 터였다. 데스 나이트들을 데리고 러셀런트에 탑승한 데이몬은 지체 없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베르키스의 관심을 자신에게 끌어야만 용사들의 희생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하늘로 날아올랐지만 여전히 보이는 것은 없었다. 지상 전체가 안개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끔씩 폭음과 함께 화염이 치솟는 것을 봐서 베르키스의 공격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음성증폭 마법을 전개한 데이몬은 힘껏 고함을 질렀다. "베르키스. 더 이상 추잡한 짓 하지말고 이곳에서 결판을 내자. 용기가 있다면 날아올라라." 하지만 들려온 것은 싸늘한 비웃음뿐이었다. "미안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군. 결판내는 때는 조무래기들을 모두 쓸어버린 다음이다." "빌어먹을 놈. 네까짓 놈을 어찌 드래곤이라 칭할 수 있더냐? 위대한 종족이라 자처하면 그에 걸맞게 행동하라." 하지만 베르키스는 데이몬의 꾐에 호락호락 넘어오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장난 따윈 나에게 통하지 않는다. 네놈이 뭐라고 하던 간에 난 이곳에서 싸우겠다." 데이몬은 결국 지상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보아 베르키스는 이곳에 모인 용사들을 모두 죽이려는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분노로 인해 데이몬의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렇다면 오크 나부랭이를 먼저 쓸어버리겠다." 러셀런트와 함께 돌진하려는데 난데없이 안개 속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둔탁한 금속음. 데이몬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소리였다. "브론즈 골렘을 투입한 모양이로군." 브론즈 골렘이 왔다면 아이언 골렘 역시 왔을 터였다. 상황을 알아차리자 데이몬은 데스 나이트들을 그쪽 방향으로 보냈다. "부탁한다." 브론즈 골렘이라면 몰라도 아이언 골렘은 용사들이 상대하기 벅찼다. 그랜드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인 저들이 아니고서야 적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떠나간 뒤 데이 몬은 러셀런트에 탑승한 상태로 안개 속을 종횡무진 휘젓기 시작했다. "비켜라." 거대한 본 드래곤이 기성을 지르며 달려들자 정신 없이 싸우던 용사들이 급히 몸을 날렸다. 안개 속에서 난데없이 거대한 괴물이 튀어나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맞서 싸우던 버서커 군단은 그렇지 않았다. 마법에 걸려 이지를 상실한 버서커들은 겁도 없이 러셀런트를 향해 덤벼들었다. 당랑거철(螳螂拒轍), 그 이상 적합한 표현이 없었다. 물론 용기가 가상하긴 했지만 애당초 적수가 될 수는 없는 법. 러셀런트는 달려드는 오크 전사들을 사정없이 짓밟고 꼬리로 후려쳐 버렸다. 우지직. 맹렬히 휘두른 꼬리에 격중된 오크 전사들은 전신이 으스러지며 훨훨 날아갔다. 에인션트 급 드래곤을 베이스로 만든 만큼 러셀런트의 파괴력은 상상을 불허했다. 육중한 체중이 고스란히 실린 꼬리에 격중될 경우 트윈헤드 오우거도 무사하지 못했다. 러셀런트의 머리 위에 자리 잡고 매직 미사일을 난사하던 데이몬이 거듭 고함을 질러댔다. 용사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함이었다. "재주껏 몸을 피하라. 너희들까지 돌볼 여유가 없다." 그 말을 들은 용사들은 사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하나같이 고르고 고른 용사들이라서 몸놀림 하나는 정말 민첩했다. 싸우던 상대를 잃은 오크 전사나 중형 몬스터를 향해 날아든 것은 러셀런트의 뼈만 남은 거대한 꼬리였다. 퍽, 퍼퍽. 전장을 미친 듯이 활보하는 러셀런트와 데이몬 덕분에 용사단은 겨우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거치적거리는 것은 모조리 짓밟거나 꼬리로 후려치는 러셀런트 앞에서는 버 서크 마법이 걸린 오크 전사도 무력했다. 앞을 가로막는 오우거 하나를 그대로 짓밟아 짜부러뜨린 러셀런트는 아가리를 좍 벌렸다. 화아아악. 뿜어진 프로스트 브레스가 옹기종기 모여있던 오크 한 부대를 그대로 얼려 버렸다. 러셀런트의 활약은 오히려 베르키스의 마법 공격보다도 더 위력적이었다. 오크의 진형 전 체를 통째로 뒤흔들어버리고 있으니 말이다. 마법 공격에 열중해 있던 베르키스도 오래지 않아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후후후. 역시 드래곤 슬레이어답군." 상황을 타개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베르키스는 한 기 남은 아이언 골렘을 러셀런트에게로 보냈다. 전력 중에서 본 드래곤을 상대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아이언 골렘 뿐 이었다. 브론즈 골렘들은 지금 데스 나이트들과 어우러져 정신 없는 박투를 벌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겨우 평수를 이루고 있었는데 아이언 골렘이 빠진다면 결과는 뻔했다. 하지만 베르키스로써는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쿵쿵쿵쿵. 안개 속에서 둔탁한 발걸음소리가 접근해 오자 데이몬은 바짝 긴장했다. "아이언 골렘이로군. 선제 공격을 퍼부어야겠어." 명령을 내리자 러셀런트가 몸을 돌리며 꼬리를 맹렬히 휘저었다. 감히 막을 자가 없어 보이던 꼬리 공격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이번에는 먹히지 않았다. 철컹. 강철로 된 거대한 손이 러셀런트의 꼬리를 덥석 거머쥐었던 것이다. "드디어 지크레이트의 복수를 할 시간인가?" 데이몬은 생각할 것도 없이 러셀런트의 머리 위에서 뛰어내렸다. 러셀런트는 이미 꼬리를 휘어 감은 아이언 골렘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고 있었다. 골렘 기술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아이언 골렘과 에인션트 급 드래곤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본 드래곤 러셀런트의 혈투가 마침내 시작되었다. 아이언 골렘과 본 드래곤과의 싸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아르카디아에서 아이언 골렘에 의해 본 드래곤 지크레이트가 빈사상태에 이르도록 짓이겨진 전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러셀런트는 아이언 골렘에 견주어봐도 결코 만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지크레이트에 비해 힘과 덩치가 월등한 만큼 러셀런트는 아이언 골렘 을 맞아 한 치도 밀리지 않는 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러셀런트가 제일 먼저 퍼부은 것은 프로스트 브레스였다. 화르르르. 아이언 골렘에게는 별달리 소용이 없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러셀런트의 몸통 박치기로 인해 아이언 골렘은 단단히 거머쥐고 있던 꼬리를 놓쳐버렸다. 이어 러셀런트 의 무자비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쾅, 쾅, 쾅, 쾅. 거듭되는 꼬리와 발톱 공격을 아이언 골렘은 거대한 방패를 효과적으로 기울여 막아냈다. 하지만 꼬리공격에 실린 강력한 힘을 이겨내지 못했는지 조금씩 뒷걸음질 칠 수 밖에 없었다. 싸우는 광경을 보고 있던 데이몬이 몸을 날렸다. "상황을 보니 쉽게 결판나진 않겠군. 이만 용사들을 지원해야겠어." 몸으로 때우고 있는 오크와 중형 몬스터를 모조리 섬멸시킨다면 베르키스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제 아무리 마법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드래곤 하나가 발휘할 수 있는 파괴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데이몬이 직접 접전에 가세하려는 것이다. 달려가는 데이몬의 몸을 축으로 수십, 수백 발의 빛줄기가 형성되었다. 난전에서 더 없이 효과적인 매직 미사일이었다. 파파파팟. 쏘아진 매직 미사일은 용사들과 맞서 싸우던 오크 전사들의 갑옷 틈새를 정통으로 파고 들어갔다. 버서커로 변한 오크 전사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굳어버렸다. 그리 고 맞서 싸우던 용사의 검에 최후를 맞이했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98회. 데이몬은 지극히 효과적인 방법으로 오크 전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가 난사하는 매직 미사일은 정확히 오크와 중형 몬스터의 마혈만을 노렸다. 마무리는 오로지 맞 서 싸우는 용사의 몫이었다. 중형 몬스터들 역시 예외가 없었다. 케륵. 용사들에게 포위 당한 상태로 분투하던 오우거와 트롤들이 데이몬의 공격으로 하나씩 무력화되기 시작했다. 전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데이몬의 모습은 마법사가 아니라 경 험 많은 소드 마스터 같았다. 하지만 몰려드는 중형 몬스터와 오크 전사는 끝이 없었다. 거듭 공격을 퍼부어 대던 데이몬이 이맛살을 지긋이 모았다. “이상하군. 왜 이렇게 많은 거지?” 그 때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크 전사 한 마리가 매서운 기세로 데스 나이트 하나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데스 나이트의 반응이었다. 그는 공격을 퍼 붓는 오크 전사를 공격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이리저리 회피하기에 바빴다. 포탈에서 거둔 녀석이라 실력이 약간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였다. 그런 녀석이 오크 전사 하나에게 밀리다니■■. 데이몬은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을 느꼈다. “혹시?” 조금 전부터 베르키스의 마법 공격이 가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린 데이몬은 서둘러 오크 전사에게 접근했다. 그는 우선 오크 전사가 사용하는 검술을 유심히 살폈 다. 잠시 후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이런! 환영마법이로군. 베르키스 놈이 또다시 수작을 부렸어.” 오크 전사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아르카디아의 검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환영마법에 걸린 용사란 뜻이다. 데이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매직 미사일을 날렸다. 슈슈슛. 데이몬이 미리 명령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데스 나이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용사들을 공격할 수 없다. 그 탓인지 데스 나이트는 전혀 반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데 이몬이 쏘아붙인 두 발의 매직 미사일은 환영마법에 걸린 용사의 마혈을 향해 날아갔다. 파파팍. 하지만 갑옷에 닿자마자 매직 미사일은 허무하게 흩어져버렸다. 대마법 갑옷 때문에 혈도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고위급 마법을 쓸 수 없었다. 대마법 갑옷을 파괴시킬 수 있더라도 용사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데이몬은 할 수 없이 데스 나이트에게 반격할 것을 명했다. “가급적 죽이지 말고 제압하도록■■.” 그러자 데스 나이트의 투구 가리개 사이에서 소름 끼치는 빛이 일어났다. 끼아아악. 지금껏 당한 것이 원통하다는 듯 데스 나이트는 기성을 지르며 반격을 개시했다. 방어에만 몰두하던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 모습을 지 켜보지 않았다. 사실을 깨달았으니 조처를 취해야 했던 것이다. 데이몬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전장을 누볐다. “크로비츠. 지금 어디에 있소?”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가는 곳마다 오크 전사와 중형 몬스터들이 흉흉한 눈빛을 번들거리며 덮쳐올 뿐이었다. 용사들의 모습은 가물에 콩 나듯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고 그나마 몬스터들의 거센 포위 공격을 받고 있었다. 생각다 못한 데이몬이 데스 나이트들을 불러들였다. “모두들 모여라.” 명령을 내린 뒤 데이몬은 다시금 고함을 질렀다. 한시라도 빨리 크로비츠를 찾아야만 상잔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베르키스의 용의주도함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간악한 놈. 난전으로 유도한 뒤 은근슬쩍 환영마법을 걸다니■■.” 미리 대비를 했었지만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버서크 마법이 걸린 중형 몬스터와 오크 전사들을 투입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싸움이 한참 무르익을 즈음에 환영마 법을 걸었기 때문에 용사들에겐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전투에 몰두하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의 검술이나 살필 여유는 애당초 없었다. 그러는 동안 데스 나이트 하나가 다가왔다. 헬버트론인 것 같았는데 험한 싸움을 겪었는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다가온 헬버트론이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브론즈 골렘과 싸우느라 바쁜데 무슨 일이야?” 데이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장을 가리켰다. 데이몬이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본 헬버트론이 깜짝 놀랐다. “어째서 서로 싸우는 거지? 그렇군. 환영마법이 걸려 있나보군.” “최대한 빨리 크로비츠를 찾아야 해. 그러니 날 엄호해 주도록■■.” 데이몬은 서둘러 싸움의 중심부로 이동했다. “크로비츠. 어디에 있소?” 오크 전사들과 중형 몬스터들이 새카맣게 달려들었지만 헬버트론에 의해 가로막혔다. 환영마법에 걸리지 않은 탓에 헬버트론에게는 능히 상대의 정체를 판별할 능력이 있었다. 그는 오크와 중형 몬스터는 일검에 양단해 버리고 용사들은 그저 기절만 시켰다. 그랜드 마스터 급인 그에겐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다. 그러는 동안 크로비 츠의 대답이 들려왔다. “누가 날 부르는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데이몬의 눈이 퉁방울만해졌다. 거대한 브론즈 골렘이 도끼를 치켜든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크로비츠 맞소?” “그렇습니다만■■. 혹시 데이몬?”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음성증폭 마법을 걸어줄 테니 지금 즉시 싸움을 중지시키시오. 우린 지금 환영마법에 걸려 있소.” “그, 그런 일이■■.” 잠시 떠듬거렸지만 크로비츠는 지체 없이 고함을 질렀다. 그의 음성은 데이몬이 전개한 음성증폭마법에 의해 광범위한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나 크로비츠다. 모든 용사들은 지금 즉시 공격을 멈추고 방어에 전념하라. 상대를 죽이는 것은 지금부터 허용하지 않는다” 그 말에 몇몇 오크 전사와 중형 몬스터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쳐다보는 눈동자에는 불신이 어려 있었다. 그 기미를 간파한 크로비츠는 지체 없이 설명을 늘어놓았다. “우린 죽음의 안개지역에서 겪은 것과 동일한 환영마법에 걸려 있다. 지금 싸우고 있는 상대가 적이 아니라 동료일 수도 있다. 그러니 내 휘하의 용사들은 지금 즉시 싸움을 멈추고 내가 있는 곳으로 모여라.” 크로비츠의 말이 통했는지 여기저기서 벌어지던 난전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각양각색의 몰골을 한 용사들이 크로비츠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후퇴하는 것도 쉬운 일 이 아니었다. 진짜 오크 전사와 중형 몬스터들이 사이사이에 끼여들어 매서운 공격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맞서 싸워야 할지 공격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용사들은 우선 방어에 만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보다 못한 데이몬이 헬버트론으로 하여금 상대의 정체를 판별하도록 명령했다. “저쪽에서 트윈헤드 오우거 한 마리가 밀고 들어오고 있다.” 헬버트론이 손가락질을 하자 용사들이 그 쪽으로 새카맣게 달라붙었다. 크워어어. 트윈헤드 오우거는 오래지 않아 전신이 난도질당해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다. 트윈헤드 오우거를 쓰러뜨린 용사들은 다시금 헬버트론의 지시를 기다렸다. “이번에는 저쪽이다.” 헬버트론이 가리키는 오크 전사나 중형 몬스터는 예외 없이 용사들의 집중공격을 받아야 했다. 그러는 동안 슈렉하이머가 가세했다. 그 역시 환영마법에 걸린 용사와 오크 전사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데이몬의 당부로 그는 그동안 싸움에 가세하지 않고 율리아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가 가세하자 적과 아군이 서서히 가려지기 시작했다. 용사들이 싸움을 멈추고 한 쪽으로 물러나자 버서커 군단은 이번에는 자기네들끼리 상잔을 벌였다. 그들 역시 환영마법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브론즈 골렘 군단을 전멸시킨 나머지 데스 나이트들이 혈로를 뚫고 가세했다. 그들은 헬버트론과 합세해서 굳건한 벽을 만들었다. 버서커 군단과 용사들 사이에는 곧 뚫을 수 없는 방어진이 형성되었다. 용사들은 피로에 젖은 눈빛으로 버서커 군단 이 서로 싸우는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베르키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까지가 버서커들의 한계인가?” 한숨을 내쉰 베르키스는 환영마법을 거두었다. 어차피 살아남을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그래도 자기들끼리 싸워 전멸하는 것은 피해야 할 것 같았다. 마법이 풀리자 모습 이 변한 용사들이 서서히 본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어우러져 치고 받던 버서커 군단도 싸움을 멈췄다. 충혈된 눈빛을 번들거리며 싸울 상대를 찾던 버서커 군단이 급기야 용사들이 운집한 곳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수는 판이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크크크. 역부족이란 것을 알았나보군.” 데이몬이 괴소를 흘리며 돌격을 명했다. 베르키스를 처치하기 위해서는 그의 수족인 버서커 군단을 섬멸시켜야 했던 것이다. 크와아악. 수가 현저히 줄어든 버서커 군단은 용사들의 돌격에 맥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헬버트론을 위시한 4대 데스 나이트들이 선두에 서서 오크 전사와 중형 몬스터를 사정없이 베어 넘겼다. 거기에는 포탈에서 거둔 데스 나이트들도 가세했다. 용사들과의 혈투로 둘을 잃었지만 아직까지 데스 나이트 넷이 건재했다. 용사들의 분전으로 인해 전세는 눈에 띄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분노한 용사들은 사정 볼 것 없이 버서커의 육신을 양단했다. 번쩍. 버서커의 수는 하나 둘 줄어들었다. 제 아무리 광전사라도 기본적인 실력차이는 극복할 수 없었다. 콰우. 마침내 마지막으로 남은 트롤이 차가운 대지에 몸을 눕혔다. 베르키스가 투입한 버서커 군단이 단 하나도 남지 않고 차가운 대지에 몸을 눕혔다. 상황이 종료되자 안개 속 에서 또다시 베르키스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역시 버서커로는 역부족이로군. 과연 인간의 저력이란 놀라워.” 그 말을 듣자 데이몬이 앞으로 쓱 나섰다. “네가 준비한 패가 이것뿐만이 아닐 텐데■■.” “물론 아니지.”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베르키스의 음성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사방을 둘러싼 안개가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크로비츠가 피로감이 가득한 얼굴로 용사들을 독려했다. “모두 전열을 재정비하고 피해상황을 보고하라.” 언뜻 가늠해 본 것으로도 피해는 엄청났다. 약 일백 여명 가량의 용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특히 마법사들은 절반 가량이 싸늘한 시신으로 화해 있었다. 체력이 약하고 굼뜬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난전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피해상황을 보고 받자 크로비츠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토록 대비했건만 상잔을 피할 수 없었다니■■.” 제 아무리 버서커 군단이라도 용사들이 감당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베르키스가 은근슬쩍 전개한 환영 마법으로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버렸다. 많은 용사들이 동료들의 손에 의해 시체가 되어버렸다. 이기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데이몬이 맥빠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차라리 카심 용병단원들만 데리고 왔다면 이런 피해를 입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랬다면 버서커 군단을 감당할 수 없었을 터였다. 게다가 베르키스가 숨겨 놓은 패가 더 있을지도 몰랐기에 데이몬은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마지막 결전이다. 앞으로의 일만 생각하자.’ 전열을 재정비하는 동안 안개가 완전히 걷혔다. 드러난 상황은 참상 그 자체였다. 숨이 끊어진 용사와 오크 전사, 중형 몬스터의 시체가 사방에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 다. 신체 일부분이 떨어져나간 시체도 부지기수였고 흘러나온 피가 도랑을 이룰 정도였다. 그 사이사이에는 참혹하게 부서진 브론즈 골렘의 잔해가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것을 본 데이몬의 뇌리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참 러셀런트.” 고개를 돌린 데이몬의 눈동자가 커졌다. 전장 구석에 처참하게 파괴된 채 널브러진 러셀런트를 발견한 것이다. 깜짝 놀란 데이몬이 러셀런트에게 다가갔다. “아이언 골렘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줄 알았는데■■.” 가까이 다가간 데이몬은 러셀런트가 당한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데이몬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베르키스 이 개자식!.” 러셀런트의 동체는 태반이 녹아 있었다. 한 눈에 보더라도 베르키스의 독문마법인 파이어 볼에 당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상태를 보아 러셀런트는 아이언 골렘과 싸 우다 파이어 볼에 등판을 얻어맞은 것 같았다. 물론 마무리는 아이언 골렘이 했을 터였다. 접전에 몰입하느라 데이몬은 미처 러셀런트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러셀런트. 일어나라.” 그러나 완전히 파괴된 러셀런트는 데이몬의 부름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의 형태였던 시체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드래곤을 사냥하는데 가장 혁혁한 역할을 했던 러셀런트는 이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399회. 러셀런트의 잔해를 쳐다보던 데이몬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베르키스가 직접 나서서 러셀런트를 처치한 것을 보니 뭔가 노리는 것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놈이 노리는 것은……." 그는 급히 크로비츠를 불러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용사들을 뿔뿔이 산개시키시오. 놈은 분명히 공중에서 공격을 가해올 것이오." 잠시 당혹해 했지만 크로비츠는 군소리 없이 명령을 받들었다. 용사들은 지시에 따라 서로간의 거리를 넓게 벌렸다. 얼마 남지 않는 마법사들을 철저히 보호하는 형상으로 말이다. 그들은 이제부터 공중전을 벌여야 했다. 베르키스에겐 아직까지 서른에 가까운 리치가 남아있었고 러셀런트가 당한 상황에서 그들을 막을 방법은 용사와 마법사의 조합 밖에는 없었다. 다행히 살아남은 마법사들은 대부분 6서클을 넘어서는 고위급 마법사들이었다. 때문에 공중전을 벌이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그러는 사이 마침내 베르키스가 출현했다. "후후후. 이제 마지막 결전이 남았는가?" 용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로 쏠렸다.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레드 드래곤의 그림자가 지상에 길게 드리워졌다. 베르키스는 높은 고공에서 용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그 모습을 보자 데이몬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배알도 없는 자식. 아이언 골렘과 싸우는 틈을 타서 러셀런트를 기습하다니……. 드래곤 중에 너 같이 비열한 놈이 있을 줄은 몰랐다." "원래 내가 드래곤 중에서 좀 특별한 편이야. 그리고 당한 쪽이 바보 아닌가?" 베르키스는 적어도 입담에서만큼은 결코 데이몬에게 밀리지 않았다. 이를 부드득 갈아붙인 데이몬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괜히 뒤통수 칠 생각하지 말고 리치들을 꺼내라. 네놈에게 아직까지 많은 리치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베르키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동원할 리치는 이곳에 없다. 게덴하이드가 그들을 데리고 모종의 임무를 수행 중이니까……." "후후후. 그까짓 거짓말을 믿을 것 같으냐?" 베르키스는 무표정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쏘아보았다. 데이몬은 지지 않고 시선을 맞받았다. "애당초 리치들이 있던 없건 상관없지 않나? 자신 있다면 덤벼 보아라." "물론 자신이 없을 턱이 없지." 거칠게 내뱉은 데이몬이 즉시 마나를 재배열했다. 마나가 희박한 데다가 흐름 또한 극도로 불규칙한 곳이라 마법을 전개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9서클의 마스터인 만큼 순식간에 마나가 재배열되었다. 끼야아악. 음산한 부르짖음과 함께 생겨난 것은 팬텀 스티드였다. 뼈만 남은 유령마(幽靈馬) 여덟 마리가 어른거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본 마법사들은 깜짝 놀 랐다. "역시 9서클의 마스터답군." 한 번에 여덟 마리의 팬텀 스티드를 소환해 내는 것은 평범한 마법사로써는 불가능했다. 6서클 이상의 마법사도 고작해야 두, 세 마리가 한계였다. 마법사들은 경의 어린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이몬은 소환해 낸 팬텀 스티드에 데스 나이트들을 탑승시켰다. "자 가라. 가서 놈을 끝장내 버려라." 명령이 떨어지자 4대 기사와 함께 포탈에서 거둔 데스 나이트 중 살아남은 넷이 팬텀 스티드에 타고 날아올랐다. 여덟 명의 데스 나이트를 태운 팬텀 스티드는 베르키스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올랐다. 그러는 동안 슈렉하이머를 위시한 나머지 마법사들은 묵묵히 마나를 끌어 모았다. 디스펠 될 경우를 대비해서 언제든지 팬텀 스티드를 소환할 채비를 갖추는 것이다. 팬 텀 스티드를 타고 날아오르는 데스 나이트들을 본 베르키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조심성이 많군." 데스 나이트들은 용의주도하게도 서로간의 거리를 넓게 벌린 채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디스펠 한 번에 여덟을 모두 거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오로지 범위 마법으로 지정해야만 여덟 마리의 팬텀 스티드를 모두 없앨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마나의 흐름이 극도로 불규칙한 노스우드. 제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마나 소모가 극심한 범위 지정 디스펠을 무한정 사용할 수가 없었다. 데이몬은 그 것을 염두에 두고 여덟만 올려보낸 것 같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기에 베르키스는 어쩔 수 없이 디스펠을 시전할 수밖에 없었다. 펑. 굉음과 함께 팬텀 스티드 여덟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기세 좋게 날아오르던 데스 나이트들은 그만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맥없이 추락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하 지만 팬텀 스티드들이 사라지는 순간 또 다른 팬텀 스티드가 공간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슈렉하이머를 비롯한 마법사들이 소환해 낸 여분의 팬텀 스티드였다. 그것들 은 떨어지는 데스 나이트들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털썩. 인간과는 달리 추락하는 와중에서도 의식을 잃지 않았던 데스 나이트들은 날렵한 동작으로 몸을 날려 팬텀 스티드에 탑승했다. 그들은 진형을 넓게 벌리며 베르키스를 향 해 날아올랐다. 다시금 디스펠을 걸려던 베르키스가 멈칫했다. 지상의 인간 마법사들이 모아놓은 마나의 기척을 간파한 것이다. 눈 앞의 팬텀 스티드를 없애더라도 또 다시 생겨날 터였다. "차륜 전법이라……. 훌륭한 방법이지." 비릿한 미소를 지은 베르키스는 재차 디스펠을 전개했다. 마치 뒷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펑. 팬텀 스티드를 잃은 데스 나이트들은 또다시 추락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되었다." 데이몬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이제 용사들을 올려보낼 차례였다. "조금 전의 접전을 통해 베르키스는 많은 마나를 소모했다. 고위급 마법을 펑펑 쏟아 부었으니 마나가 충분할 턱이 없다. 그것도 마나가 극도로 희박한 노스우드가 아닌가 ? 두 번이나 전개한 이상 범위 지정 디스펠을 더는 펼칠 수 없을 것이다." 추락하던 데스 나이트들을 향해 또 다른 팬텀 스티드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소환해 낸 것이다. "이제 공격할 시간이오." 데이몬의 신호를 받은 크로비츠가 장검을 들어 하늘을 향해 치켜세웠다. "일제히 공격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남은 마법사들은 일제히 팬텀 스티드를 소환했다. 앞서의 결전에서 많은 마법사들이 죽어 충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용사들의 반 정도는 태울 수 있는 수의 팬텀 스티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용사들은 서둘러 팬텀 스티드에 탑승했다. 이미 그들은 공중전에 대한 훈련을 충분히 한 상태였다. "와아아아." 백여 명의 용사들이 팬텀 스티드를 타고 날아오르는 장면은 한 마디로 장관이었다. 남은 용사들은 마법사를 빈틈없이 에워싸 보호했고 마법사들은 디스펠 당할 때를 대 비해서 또다시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데이몬 역시 직접 소환해 낸 팬텀 스티드를 타고 날아올랐다. 카심 용병단원과 슈렉하이머 역시 데이몬을 지원하기 위해 날아올랐다. 오직 일루미나만이 율리아나를 보호 하기 위해 남았을 뿐이었다. 마침내 베르키스가 그토록 우려하던 인간들의 총 공세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몰려드는 기사들을 보면서도 베르키스는 별달리 동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범위 지정 디스펠을 펼치려 하지도 않았다. "이제 마지막 안배를 펼칠 시간인가?" 쇄도하는 용사들을 쳐다보며 베르키스는 입을 좍 벌렸다. 천둥 같은 포효소리가 천지를 뒤덮었다. 크롸롸락. 그것이 신호였다. 구름 속에서 마치 화답이라도 하듯 찢어지는 듯한 기성이 터져 나왔다. 캬아아악. 이어 수많은 그림자들이 구름 속에서 튀어나왔다. 10미터 남짓한 키에 드래곤을 축소시켜 놓은 듯한 외형. 앞발이 없는 비룡 와이번이었다. 어림잡아 300마리가 넘는 와이 번들이 구름 사이에서 출현했다. 와이번은 머뭇거림 없이 용사들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리치일 줄 알았는데 와이번이라니……." 깜짝 놀랐지만 데이몬은 동요하지 않았다. 수가 많긴 했지만 급소가 존재하기 때문에 와이번은 오히려 리치보다 편한 상대였다. 그것을 떠올린 데이몬은 지체 없이 매직 미사일을 준비했다. 하지만 베르키스가 데이몬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네놈은 내 몫이다." 자신을 향해 내려꽂히는 베르키스의 기세에 데이몬은 황급히 마나를 풀어버렸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임무는 데스 나이트들을 엄호하는 일이다. 이미 데스 나이트들은 베 르키스를 목표로 쇄도하고 있었다. "와이번은 어쩔 수 없이 용사들에게 맡겨야겠군." 데이몬은 빠른 속도로 팬텀 스티드를 몰아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면서 그는 포탈에서 거둔 데스 나이트 넷에게 전장을 이탈한 뒤 와이번을 상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베르키스를 상대하는데 있어 실력이 떨어지는 그들은 고작해야 데이몬의 정신만 분산시킬 뿐이었다. 지금은 베르키스를 상대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할 때였다. "네놈들도 꽤나 끈질긴 놈들이로군." 베르키스의 일성과 함께 4대 기사들이 타고 있던 팬텀 스티드들이 그 자리에서 퍽 하고 꺼져버렸다. 또다시 디스펠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들은 오래지 않 아 추락하는 신세에서 벗어났다. 데이몬과 슈렉하이머에 의해 또 다른 팬텀 스티드가 소환된 것이다. 분노에 불타는 네 명의 데스 나이트들은 머뭇거림 없이 베르키스에 게 접근을 시도했다. 그 뒤에는 데이몬과 슈렉하이머가 튼튼하게 뒤를 받쳤다. 팬텀 스티드에 탑승한 1백 명의 용사들은 3백이 넘는 와이번을 맞아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우선 제 아무리 팬텀 스티드에 탑승했더라도 기본적으로 비행능력은 와이번 쪽이 우위였다. 또한 와이번들은 앞서의 중형 몬스터나 오크 전사들처럼 버서크 마법에 걸려 있었다.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덤벼드는 와이번에게 다수의 기사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날 카로운 이빨에 물어뜯기거나 발톱에 채여 거꾸로 떨어지는 기사들도 심심지 않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와이번들이 용사들의 검에 육신이 양단되었다. 창공은 인간과 와이번이 서로 죽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카심 용병단원들 역시 험악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아가리를 좍 벌리고 달려드는 와이번의 이빨을 카심이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젠장. 연습을 했지만 쉽진 않군." 욕지거리를 내뱉은 카심이 팬텀 스티드를 몰아 조금 전 자신을 공격했던 와이번을 추격했다. 하지만 비행속도 면에서 와이번이 월등히 빨랐기에 카심은 오래지 않아 추격 을 포기해야 했다. 다른 목표물을 물색하고 있는데 갑자기 뇌리에서 위험신호가 전해졌다. "에잇." 카심은 그대로 힘을 주어 몸을 솟구쳤다. 이어 뭔가가 빠른 속도로 그가 타고 있던 팬텀 스티드를 덮쳤다. 퍽. 와이번의 날카로운 이빨에 물린 팬텀 스티드는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팬텀 스티드를 공격한 것은 다른 와이번이었다. 핏발 선 눈에서 광기가 어른거렸고 날카로운 이빨 은 강철 갑옷이라도 그대로 씹어버릴 것 같았다. 다른 희생물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와이번은 뭔가가 등판 위에 내려앉는 것을 느끼고 머리를 돌렸다. 순간 섬뜩한 느낌이 목을 파고들었다. 슈가각. 이어 전해진 통증, 와이번은 단말마의 기성을 내질렀다. "끼아아아……." 하지만 와이번의 비명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잘려나간 목줄기에서는 핏둥치와 함께 바람 새는 소리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머리가 떨어져나간 와이번의 동체는 곧 끝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와이번의 동체를 디디고 선 카심은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대로 와이번과 추락했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기 전에 주인 잃은 팬텀 스티드를 찾아 탑승해야 했다. 하지만 눈에 띄는 녀석이 하나도 없었다 . 지상의 마법사들 역시 한계에 달한 듯 더 이상 팬텀 스티드를 소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카심은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 때 등뒤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장. 어서 뛰어내려요." 고개를 돌려보자 패터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주인 잃은 팬텀 스티드를 하나 끌고 오는 것을 보아 자신의 뒤를 따라온 것이 분명했다. 카심의 얼굴에 화색이 어렸다. "지금까지 패터슨 네가 이토록 반가웠던 적은 처음이다." "그 기분 죽을 때까지 잊지 말아요." 패터슨이 끌고 온 팬텀 스티드에 탑승한 카심은 또 다른 목표물을 향해 쇄도했다. [다크메이지]14장 예상 못한 반전 400회. 노스우드 평원에서 벌어진 공중전 역시 난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무수한 와이번이 요격당해 추락했지만 용사들의 피해 역시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용사들을 괴롭힌 것은 베르키스가 전개하는 디스펠이었다. 틈틈이 전개하는 디스펠에 걸려 팬텀 스티드를 잃은 용사들 중에서 희생자가 속출했다. 데이몬과 4대 데스 나이트가 연신 공격을 퍼부었지만 애당초 비행 능력 면에서 월등한 베르키스는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용사들만을 집중적으로 요격했다. 아무래도 놈은 용사들을 먼저 전멸시키려는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젠장. 러셀런트만 건재했다면……." 하지만 러셀런트는 이미 세상에 없었다. 와이번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수가 줄어갔지만 용사들 역시 그에 비례해서 소모되었다. 무엇보다도 베르키스가 건재한 것이 용사들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었다. 데이몬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놈에겐 아직까지 리치들이 남아있다. 이대로 가다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현재로써는 맞서 싸우더라도 감히 이긴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베르키스에겐 손짓 한 번으로 팬텀 스티드를 소멸시킬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베르키스가 적극적으로 도망 다니는 탓에 지금까지 제대로 된 접전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맞서 싸운다면 싸움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때문에 데이몬은 도박을 걸기로 작정했다. "팬텀 스티드로 베르키스를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다크 쉐이드라면……." 데이몬은 정신을 집중해서 어둠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동안 물 쓰듯 사용했기 때문에 단전에 모여있는 어둠의 마나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크 쉐이드 하나 둘 정도는 소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승정. 데스 나이트들을 부탁하겠소." 뒷일을 슈렉하이머에게 맡긴 뒤 데이몬은 전력을 다해 다크 쉐이드 소환에 나섰다. 정신을 집중시킬수록 데이몬의 몸에 어린 어둠의 기운이 짙어지고 있었다. 다크 쉐이드. 가공할 전투력으로 인해 인간들에겐 공포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인 마계의 악당이었다. 이미 데이몬은 아르네 영지에서 두 마리의 다크 쉐이드를 소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악명을 떨치는 다크 쉐이드도 드래곤이 상대라면 큰 소용이 없었다. 드래곤의 손짓 한 번이면 강제 귀환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마계에서 불러들인 마물 최대의 단점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으로써는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크 쉐이드를 불러들여야 했다. 현재로썬 베르키스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다크 쉐이드 뿐이었다. 콰콰콰콰. 마력이 집중되며 허공에 기괴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마계의 다크 쉐이드를 인간계로 불러들이는 마법진이었다. 그와 동시에 방대한 어둠의 기운이 허공으로 뿌려졌다. 물론 베르키스가 그 기미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흥. 기껏 생각해 낸 것이 마물 소환인가?" 코웃음을 친 베르키스는 지체 없이 마나를 재배열했다. 소환된 마물이 접근할 경우 강제로 귀환시키는 마법이었다. 잠시 후 공간을 열고 시커먼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작 다크 쉐이드였나?" 베르키스의 얼굴에 비웃음이 어렸다. 제 아무리 다크 쉐이드라 해도 베르키스의 관점에서 별다른 위험요소가 되지 못했다. 양쪽으로 접근하는 데스 나이트를 슬쩍 피해낸 베르키스는 속도를 부쩍 올려 데이몬을 향해 접근했다. 속도가 워낙 빨랐기 때문에 팬텀 스티드를 탄 데스 나이트들은 미처 베르키스를 따라잡지 못했다. 데이몬의 옆에는 어느새 네 마리의 다크 쉐이드가 날카로운 발톱을 빛내며 유유히 떠 있었다. 드래곤을 상대로 싸워야한다는 사실에 질렸는지 바짝 얼어있는 모습이었다. 베르키스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다크 쉐이드를 향해 강제귀환 주문을 외웠다. "온 곳으로 돌아가라. 헉." 베르키스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강제 귀환 주문을 외웠음에도 불구하고 다크 쉐이드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크 쉐이드들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듯 유유히 날개를 퍼덕거리고 있었다. "이제 어찌된 일이지?" 데이몬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흐흐흐. 기문둔갑술로 만들어낸 분신에게 강제귀환의 술이 먹힐 리가 없지." 애당초 데이몬이 소환해 낸 다크 쉐이드는 그것들이 아니었다. 중원의 술법인 기문둔갑술로 만들어낸 분신이었던 것이다. 진짜 다크 쉐이드는 마법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데이몬은 거듭 술법을 시전해서 다크 쉐이드의 수를 불렸다. 무슨 방법으로든 베르키스가 진짜를 판별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했다. 넷에서 여덟, 여덟에서 열 여섯. 다크 쉐이드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다. "미러 이미지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베르키스가 이번에는 디스펠을 걸었다. 이미 무수하게 불어난 다크 쉐이드들이 자신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미심쩍었지만 생소한 이계의 술법에 대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 밖에는 없었다. "역시." 생각대로 디스펠은 먹히지 않았다. 부아가 치민 베르키스는 직접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그가 쏘아낸 다수의 에너지 볼트가 다크 쉐이드들을 노렸다. 콰콰콰콰. 적어도 서너 마리가 격중되었지만 에너지 볼트는 마치 구름을 통과하듯 다크 쉐이드를 지나가 버렸다. 베르키스의 눈가에 당혹감이 어렸다. "도대체 무슨 마법이지? 실체가 전혀 없는 환영이라니……." 머뭇거리는 사이 수십 마리로 불어난 다크 쉐이드가 어느덧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팬텀 스티드를 탄 데스 나이트들도 지근거리까지 육박한 상태였다. "파리 같은 놈들." 눈살을 찌푸린 베르키스는 몸을 빙글 돌리며 디스펠을 전개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게 팬텀 스티드가 사라지며 데스 나이트들은 또다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추락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보고 있던 슈렉하이머가 즉시 소환을 시도했다. 하지만 마나를 재배열하던 슈렉하이머는 팬텀 스티드를 소환하지 못했다. "헉." 시기적절하게 날아든 에너지 볼트에 슈렉하이머는 혼비백산해서 몸을 피했고 데스 나이트들은 고공에서 끝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소환하려면 시간이 걸릴 터." 회심의 미소를 머금은 베르키스는 광범위한 뇌격 마법을 전개했다. 블루 드래곤의 전유물인 뇌격 마법이었지만 베르키스의 마법실력이 워낙 탁월한 덕택에 어렵지 않게 마나가 재배열되었다. 파지지직. 하늘에서 쏘아진 수십 가닥의 뇌전 줄기가 다크 쉐이드들을 덮쳤다. 다크 쉐이드들은 이미 수십 마리로 불어나 베르키스를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는 상태였다. 뇌전 공격은 대부분의 다크 쉐이드를 허무하게 지나가 버렸지만 단 하나는 아니었다. 베르키스의 날개 쪽으로 접근하던 다크 쉐이드 하나가 뇌전에 격중되어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악. "네놈이 진짜였군." 냉혹한 일갈과 함께 엄청난 에너지 파동이 다크 쉐이드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퍼퍽. 다크 쉐이드의 육신은 악명에 어울리지 않게 허무하게 흩어져버렸다. 단 한 방에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던 다크 쉐이드의 반이 사라졌다. 베르키스는 깜짝 놀랐다. "하나가 더 있었군." 다시금 뇌격마법을 전개하려는데 오른쪽 날개 죽지에서 따끔한 통증이 전해졌다. 고개를 돌려보자 다크 쉐이드 하나가 날개에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이런 하찮은 마물이……." 날개를 할퀸 다크 쉐이드는 분노한 베르키스의 공격에 의해 그대로 공중분해 되어버렸다. 하지만 다크 쉐이드는 발톱에서 강력한 신경독을 분비하는 마물이다. 날개가 저릿저릿 저려오는 것을 느낀 베르키스는 혀를 찼다. "쳇. 여기까지가 한계로군." 사방을 둘러보자 전장은 차츰 정리되고 있었다. 와이번 군단은 거의 전멸한 상태였고 용사단 역시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었다. 데스 나이트들은 슈렉하이머가 간신히 소환해 준 팬텀 스티드를 타고 다시금 창공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저들이 도착할 경우 상황은 깨끗이 종료될 터였다. 날개가 마비된 터라 더 이상은 데스 나이트들을 피해낼 수 없었다. 하지만 베르키스의 얼굴에서 낭패감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때가 무르익었는가?" 머릿속의 계획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본 베르키스는 그대로 날개를 접었다. 거대한 레드 드래곤의 동체는 땅을 향해 쏘아지듯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15권......한번 빠져~~봅시다 마왕의길 - 마룡의 노림수 - 영의 세계에서 벌어진 공방전 - 성녀의 선택 - 대마왕의 부활 - 칠종단금술의 묘용 - 나이델하르크의 진정한 힘 - 현경의 벽을 뚫다 - 마왕의 길 - 작가의 말 1. 마룡의 노림수 베르키스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땅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거대한 레드 드래곤의 동체가 내뿜는 풍압은 실로 엄청났다. 몇 몇 기사들이 팬텀 스티드를 탄 채 베르키스를 향해 육박해 들었 지만 목적을 이룬 자는 아무도 없었다. 비교적 속도가 느린 팬텀 스티드로는 가속이 붙어 추락하는 레드 드래곤을 따라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기사들은 포기하지 않고 베르키스를 추격했다. 이미 와 이번 군단은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멸했고, 적이라고는 오직 베르키스만 남은 상태였기 때문에 기사들은 눈동자에 희대의 마룡 베르키스를 이참에 반드시 처치해버리겠다는 결의가 번뜩 이고 있었다. "반드시 동료들의 빚값을 받아내겠다." 그대로 대지에 곤두박질 칠 것처럼 추락하던 베르키스. 그러나 그는 땅이 가까워지자 날개를 활짝 펼쳤다. 쿠아아앙 베르키스의 거대한 동체가 급격히 상승했다. 땅에서 겨우 일 미터도 떨어지지 않을 곳이었는데 뱃가죽이 땅에 닿을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그 탓에 추락지점으로 맹렬히 달려가던 기사들이 여지없이 헛물을 켜야 했으니........ 간발의 차이로 충돌을 피해 날아오른 베르키스는 다시 고도를 낮췄다. 지상 십 미터 남짓한 지점에 도착하자 그는 날개를 펄럭거리며 그 자리에 몸을 고정시켰다. 지상의 기사들이 검을 던지더라도 어렵지 않게 막거나 피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이였다. 하지만. 팬텀 스티드를 타고 내리꽂히는 기사들에게도 공격하기에 가장 적합한 높이임에는 틀림없었다. "도망칠 수 없다." 목표물을 확인한 기사들이 앞 다투어 몰려들었다. 베르키스만 처치한다면 위협요소가 모두 사라지기 때문에 기사들 역시 필사적이었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베르키스의 입가에는 도리어 조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제 마지막 공격을 가할 시간이로군" 비릿한 일성과 함께 마나가 맹렬히 재배열되었다. 추락하는 동안 끌어 모은 마나를 이용하여 최후의 마법을 전개하려는 모양이었다. 마지막 공격인 만큼 더 없이 위력적일 것이 분명했다. 콰콰콰콰 베르키스의 몸을 축으로 가공할 만한 마나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마나의 재배열에 대해 무지한 기사들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파동이었다. "이, 이것은?" 마나의 재배열과정을 읽은 데이몬의 얼굴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냅다 고함을 질렀다. "모, 모두 대지에 근접한 곳으로 피하라. 매스 디스펠(Mass dispel)이 펼쳐질 것이다." 매스 디스펠. 지금껏 베르키스가 여러번 시전 했던 마법으로 광범위한 지역 전체에 디스펠을 거는 고위급 마법이다. 하지만 이번에 펼쳐질 매스 디스펠은 앞서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거듭해서 팬텀 스티드를 소환하느라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극도로 지친 상태였으며 디스펠의 범위 역시 앞서의 것보다 훨씬 넓었다. 게다가 고도가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위험했다. 기사들 대부분이 지상에서 그리 높지 않은 곳을 날고 있었다. 추락할 경우 목뼈가 부러지기에는 충분할 정도의 고도였다. 때문에 기사들은 미처 팬텀 스티드를 갈아탈 만한 틈도 없이 바닥으로 추락해 버릴 터였다. 데이몬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끝까지 악랄하게 나가겠다는 건가?" 버럭 고함을 내지른 데이몬은 즉시 마나를 끌어 모았다. 매스 디스펠이 적시에 펼쳐진다면 상상도 못할 참극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든 그전에 대비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데이몬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저 가능한 한 많은 팬텀 스티드를 소환해 내어 기사들을 구해내는 방법밖에는. 데이몬의 경고성을 들은 기사들은 베르키스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하강을 시작했다. 하지만 매스 디스펠은 그들이 미처 안전한 곳에 이르기 전에 완성되고 말았다. 콰콰콰콰 베르키스의 몸을 축으로 엄청난 빛 무리가 폭사되었다. 빛 무리는 닿는 모든 곳에 위치한 마나의 흐름을 여지없이 깨어버렸다. 마나의 흐름이 깨어지면 마법은 더 이상 실현될 수 없다. 기사들을 태운 채 허공을 질주하던 팬텀 스티드들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마치 거짓말처럼. "헉!" "이, 이런........" 팬텀 스티드를 잃은 기사들의 몸이 맥없이 추락을 시작했다. 사색이 된 기사들이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갈아탈 만한 팬텀 스티다의 모습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허공에는 오로지 팬텀 스티드를 잃어 추락하는 기사들로 가득했다. 절망감에 젖은 기사들의 시선이 지상의 마법사들을 향했다. 그러나 마법사들 역시 무력감에 젖어 있었다. 극도로 지친 데다 마나의 흐름마저도 깨어져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마법을 시전할 수 없었다. 7써클을 넘어가는 마법사 몇이 간신히 팬텀 스티드를 소환해 냈지만 기사들을 모두 태우기에는 현저히 부족한 양이었다. 결국 대부분의 기사들은 무방비 상태로 대지를 향해 거꾸로 추락해버렸다. 둔탁한 소리가 거듭 들려왔다. 인간의 육신이 대지에 부딪히며 나는 소리였다. 이어 들려오는 단말마의 비명소리. "크아악!" 그리 높지 않은 곳을 날고 있던 기사들은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었다. 팔다리 하나 부러지는 것으로 액운을 넘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머지 기사들에겐 그런 행운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땅위에서 살아가는 종족이다. 제 아무리 검술실력이 뛰어난 기사라도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도 무사할 수는 없다. 그곳에는 곧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극이 벌어졌다. 목뼈가 부러져 즉사한 기사들은 비교적 행복하다 볼 수 있었다. 목이 돌아가거나 전신이 으스러진 채 극한의 고통에 떨고 있는 기사들이 사방에 부지기수였으니까. 그들이 살아날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다. 동료들의 처참한 모습은 지상에 있던 기사들에겐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든 비애를 주고 있었다. 또한 이런 일을 불러일으킨 희대의 마룡에 대한 증오심까지. "이런 개자식." 데이몬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매스 디스펠 한 번으로 무수한 기사들을 허무하게 잃었으니 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피해는 정말 엄청났다. 데이몬을 위시한 마법사들이 가까스로 소환해낸 팬텀 스티드는 겨우 열 남짓. 나머지 기사들은 속절없이 지상으로 추락한 것이다. 데이몬은 착잡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상에는 고공에서 추락해 절명한 기사들의 시신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 사이에서 시커먼 갑옷을 입은 데스 나이트들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카심 용병단원들이 무사하다는 점이다. 슈렉하이머가 간신히 소환해 낸 팬텀 스티드 두 마리가 대원들을 안전하게 대지에 내려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이로군." 결정적인 순간, 데이몬은 데스 나이트들을 포기했다. 언데드인 그들은 나중에라도 복원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데스 나이트 여섯은 펜텀 스티드를 배정받지 못하고 속절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소환해 낸 팬텀 스티드에 탑승한 데이몬은 순차적으로 팬텀 스티드를 소환하여 추락하는 기사들에게 날려보냈었다. 가장 먼저 구함을 받은 자는 크로비츠였다. 뛰어난 실력을 과시하듯 날아든 팬텀 스티드를 가뿐히 잡아 탄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상으로 향했다. "고, 고맙습니다, 데이몬." 팬텀 스티드에서 뛰어내린 크로비츠가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사색이 된 그의 얼굴은 발을 땅에 디디고 나서야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지럽게 널려 있는 부하들의 참혹한 시체를 보자 크로비츠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그들은 결코 쉽사리 길러낼 수 없는 검의 고수들이었다. 그런 용사들을 너무도 어이없이 잃었으니 허망함이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용사들이 속속 크로비츠의 옆으로 내려앉았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크로비츠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 살았어." 마지막 용사가 대지위에 내려앉는 것을 본 데이몬은 그 즉시 어둠의 마력을 뽑아 올렸다. 이젠 베르키스를 상대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아야 할 때였다. 분노로 인해 그의 눈빛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런 간악한....... 네놈의 저주받은 생애에 기필코 종지부를 찍어주마." 다크 쉐이드를 소환하느라 어둠의 마력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데스 나이트들의 원기를 회복시키는 데는 충분했다. 어둠의 마력을 주입받자 데스 나이트들의 검에서 소름끼치는 데스 블레이드가 솟아올랐다. 콰콰콰콰 그들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베르키스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는 동안 데이몬은 서둘러 마나를 재배열했다. 베르키스의 몸을 허공에 띄워주는 부유마법을 파훼하기 위해서였다. 마법만 흩어버린다면 성난 데스 나이트들이 베르키스의 몸을 사정없이 난자해버릴 터였다. 매스 디스펠을 전개하느라 마나를 모두 소모했는지 베르키스는 이렇다 할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데이몬은 놈의 상태를 깨닫곤 황급히 마법방해를 전개했다. "잠깐......" 절체절명의 순간, 베르키스가 갑자기 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데이몬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머리가 비상한 베르키스에겐 빈틈을 보여선 안 된다. 조금이라도 틈을 주었다간 엄청난 재앙으로 돌아온다. 지금까지의 접전을 통해 데이몬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었다. 마법방해는 결국 이루어졌고, 베르키스의 몸을 허공에 띄우고 있던 부유마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펑 서서히 하강하는 베르키스의 주위로 성난 기사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베르키스가 지근거리에 닿을 경우 수십 자루의 장검을 박아 넣을 태세를 갖춘 채. 데이몬은 눈빛을 번들거리며 베르키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네놈의 목숨을 끝내주마." 하지만 데이몬은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었다. 접전에 너무 몰입한 탓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베르키스의 말에 데이몬은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성녀를 구하고 싶지 않은가 보지?" 데이몬은 결국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베르키스는 데이몬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약점을 쥐고 있는 존재였다. "마법방해를 풀지 않는다면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내밀어진 손이 부르르 떨렸지만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데이몬은 한숨을 내쉬며 재배열된 마나를 흩어버렸다. 퍽 떨어지던 베르키스의 몸이 하강을 멈췄다. 기사들의 공격이 먹히지 않을 정도의 높이였다. 하지만 4대 기사들에게 오 미터 정도의 높이는 결코 장애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굽혀 도약하려 했다. 그러나 데이몬이 고개를 흔들어 그들을 만류했다. "잠깐 기다려라." "역시 머리 회전이 빠르군." 회심의 미소를 지은 베르키스는 손을 들어 뒤쪽을 가리켰다. 정확히 베르하젤의 신전이 위치한 곳이었다. "인질을 한번 보겠나?" 반사적으로 그곳을 쳐다본 데이몬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다, 다프네." 그곳에는 데이몬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가 슬픈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데이몬은 베르키스의 존재감을 깡그리 잊어버린 듯 멍하니 그쪽을 쳐다보았다. 성녀의 몸을 타고났지만 드래곤에게 사로잡혀 오백 년 동안 돌이 되어있어야 했던 비운의 소녀. 다프네는 지금 아름다운 눈동자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하염없이 데이몬을 쳐다보고 있었다. 꽃잎 같은 입술이 벌어지며 가녀린 음성이 새어나왔다. "아, 아저씨." "다프네." 거듭 이름을 되뇌었지만 데이몬은 쉽사리 다프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다프네의 가냘픈 몸을 거대한 강철 거인이 거머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베르키스가 만들어낸 골렘 기술의 정화. 본 드래곤 러셀런트를 파괴시켰던 아이언 골렘이 다프네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아이언 골렘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손아귀에 조금이라도 힘을 준다면 다프네의 가녀린 몸은 그대로 으스러져 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데이몬은 결코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귓전으로 이죽거리는 듯한 베르키스의 음성이 전해졌다. "네놈이 조금이라도 마나를 재배열한다면 성녀는 뼈와 살이 한데 뒤섞이는 신세가 될 것이다." 으드드득 참을 수 없는 분노에 거듭 이를 갈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프네는 지금껏 데이몬이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했던 원동력. 그런 그녀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만은 좌시할 수 없었다.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낀 데이몬은 맥없이 팔을 늘어뜨렸다. "크으으." 베르키스의 시선이 이번에는 데스 나이트와 기사들에게 향했다. 그들은 검을 꼬나 쥔 채 빠져나갈 수 없는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저들 역시 뒤로 물려라." 데이몬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스 나이트들을 뒤로 물러나게 한 뒤 그는 공허한 시선으로 크로비츠를 쳐다보았다. "크로비츠 대장, 내 간곡히 부탁하겠소. 그러니 부하들을 뒤로 물려주시오." 크로비츠는 불타는 듯한 눈빛으로 데이몬과 베르키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달려들어 베르키스의 몸을 사정없이 난자하고 싶었다. 이 희대의 마룡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부하들이 죽어갔던가? 하지만 크로비츠의 입장에서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베르키스를 처치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데이몬의 조력이다. 게다가 크로비츠 자신조차 그로 인해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지 않았던가. 그는 결국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물러난다." 물만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기사들은 묵묵히 명에 따랐다. 기사들이 일정거리 밖으로 물러나자 베르키스는 느릿하게 날개를 접었다. 거대한 레드 드래곤의 발이 대지를 굳건히 디뎠다. 쿵 거대한 레드 드래곤을 수십 명의 기사들이 포위한 상태로 묘한 대치가 시작되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베르키스였다. "역시 인간들의 목숨이란 질기군. 그토록 열심히 싸웠는데도 아직까지 오십 남짓 남아있다니 말이야." 그 말에 기사들의 눈에서 불똥이 튀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동료들의 목숨을 앗아간 혈투를 베르키스는 마치 간단한 유희처럼 표현하고 있었다. 보고 있던 데이몬이 한 마디 내뱉었다. "도대체 바라는 것이 뭐지?" 베르키스의 시선이 느릿하게 데이몬 쪽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데이모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네놈의 꿍꿍이를 알고 싶다. 전력을 다해 싸웠다면 넌 날 충분히 궁지에 몰아놓을 수 있었다." 데이몬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베르키스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다. 나와 데스 나이트를 건성으로 상대한 반면 용사들을 죽이는 데에만은 집요할 정도의 집착을 보였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는 건가?" 베르키스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드래곤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표정만은 놀라울 정도로 인간과 닮아 있었다. "멍청하긴........ 음모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 성립되는 법이다. 미안하지만 말해주고 싶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는걸?" "그렇다면 성녀의 목숨을 대가로 나에게 뭘 요구할 생각이냐? 내 목숨이냐?" 베르키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목숨까지 요구하는 것은 너무 가혹할 것 같군. 좀 치사하기도 하고....." 데이몬은 가슴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지 않아도 네놈은 충분히 비열하고 또한 치사하다. 그러니 긴 말 하지 말고 요구사항을 밝혀라." "생각보다 성질이 급한 녀석이로군." 당면한 상황이 몹시 유쾌하다는 듯 미소 짓고 있던 베르키스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요구조건을 듣고 싶다면 날 따라와라." "널..... 따라오라고?" "그렇다." 고개를 끄덕인 베르키스가 손을 들어 운집한 기사들을 가리켰다. "대신 저 떨거지들은 이곳에서 기다려야 한다. 물론 그것은 죽지 못한 저 망령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싫다면?" "그렇다면 네놈은 으스러진 성녀의 잔해만을 얻을 수 있겠지." 데이몬은 얼굴근육을 푸들거리며 웃었다. "후후. 유인해 가서 조용히 처리하겠다는 뜻인가?" "알 것 없지 않나? 아무튼 성녀를 온전히 넘겨받고 싶다면 날 따라와라." 더 이상 입씨름하지 않겠다는 듯 베르키스는 냉랭히 걸음을 옮겼다. 쿵쿵 그가 걸어가는 방향은 신전이 벽이 위치한 곳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데이몬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가지 마십시오." "함정이 틀림없습니다." 카심 용병단원들이 만류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데이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라. 어차피 이것은 나의 일이었다." 베르키스를 따라 걸어가는 데이몬을 보며 대원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성녀를 움켜쥔 아이언 골렘이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기에 섣불리 걸음을 내딪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로서는 그저 데이몬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베르키스는 신전의 성벽이 있는 곳 가까이 걸어갔다. 데이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를 따랐다. 거의 허물어져 있었지만 몇몇 부분은 그래도 성벽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거대한 아이언 골렘이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물론 골렘의 손에는 다프네가 잡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베르키스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제 결말을 낼 시간이로군." "......." 다프네는 큰 눈동자에 두려움을 가득 담은 채 베르키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진 마라. 그래도 너만은 바람을 이룰 수 있을 테니까." 한동안 다프네의 얼굴을 들여다본 베르키스가 몸을 돌렸다. 그 곳에는 데이몬이 눈빛을 이글거리며 서 있었다. 베르키스의 입가에 모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둘이서 조용히 대화를 나눌 시간이 왔는가?" 데이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베르키스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베르키스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성녀와 해후할 시간 정도는 주지. 벌레의 마음을 헤아려 줄 여유는 없지만 너에겐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다시 말해 널 평범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생각해라." 데이몬은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너 따위에게 인정받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다프네를 쳐다보았다. "오랜만이로구나, 다프네." 베르키스를 의식해서 인지 별반 표정변화가 없었지만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음성만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격정 때문인지 그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 아저씨. 흑흑" 다프네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고 말았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외로움 때문이었다. 지인 들은 벌써 오래 전에 세상에서 사라졌고 오직 그녀만이 세상에 남았다. 아무리 심안을 가지고 있는 성녀라도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한 이상 쉽사리 극복하기 힘든 시련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녀를 기억해 주는 자는 오직 한 사람. 데이몬만이 남아 그녀에게 말을 걸어주고 있었기에 그녀는 다소나마 슬픔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계속해서 흐느끼는 다프네를 보며 데이몬은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다프네." 마음 같아서는 다가가서 어깨를 얼싸안고 다독여 주고 싶었지만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다프네가 흐느끼는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데이몬은 마음을 굳힌 듯 고개를 돌려 베르키스를 쳐다보았다. "이쯤에서 요구조건을 밝히는 것이 어떤가?" 베르키스의 눈가에 이채가 떠올랐다. "원한다면 시간을 더 줄 수도 있다. 오백 년 동안 보지 못했으니 나눌말이 많지 않은가?" 하지만 이어진 데이몬의 말에 베르키스는 말문이 콱 막혀 버렸다. "네놈을 처치하고 난 뒤 나눌 생각이다."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이곳에서 살아날 자신이 있나보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베르키스가 정색을 하고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한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말하라." 베르키스는 손을 들어 시립하고 있는 4대 기사들을 가리켰다. "저것들을 소환하는 데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사용했나?" "........" "저 데스 나이트들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다 다시 말해 나이델하르크의 진신마력이 아니면 저 정도 데스나이트를 만들어 낼 수 없다." "그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 "물론이다." 그 말을 들은 데이몬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애초에 인크레시아를 빼낸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역시 그랬었군. 그렇다면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는 어디에 있나? 인크레시아 속에 보관해 놓았다.?" 데이몬의 입 꼬리가 기괴하게 말려 올라갔다. "질문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나? 시시껄렁한 얘기 따윈 집어치우고 이만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때?" "요구조건을 말하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이다. 그러니 질문에 답하라." 대답을 듣기 전에는 물러나지 않을 기세였다.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데이몬은 천천히 손을 뻗어 아랫배 부분을 가리켰다. "봉인구는 이곳에 있다." "네 몸속에 말인가?" "그렇다." 대답을 들은 베르키스의 얼굴에는 놀랍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봉인구를 몸속에 품은 상태로 마력을 뽑아내다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야." "네놈 따위에게 찬사를 듣고 싶은 생각은 없다." 냉랭하게 쏘아붙였지만 베르키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베르키스의 입가에 희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더욱 잘된 일이로군. 봉인구가 몸속에 있다면 부활한 나이델하르크가 더욱 수월하게 놈의 몸을 차지할 수 있을 테니.......' 베르키스의 노림수는 바로 대마왕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암흑전쟁 당시 어둠의 군대를 이끌고 인간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던 대마왕 나이델하르크. 그에겐 충분히 인간을 멸망시킬 능력이 있다. 베르키스가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던 제3의 힘은 바로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였던 것이다. 거듭된 상념으로 인해 베르키스의 머리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암흑전쟁 당시 나이델하르크는 아르카디아의 지원으로 말미암아 최후의 결전에서 대패했다. 휘하의 병력을 모두 잃고 패퇴한 그는 몇 남지 않은 심복들과 함께 펠루시아 산맥으로 숨어 들어갔다. 산맥 너머에 있는 몬스터의 고분에서 어둠의 병사들을 조달하여 다시 한 번 재기를 꿈꾸려는 생각에서 였다. 하지만 나이델하르크는 애석하게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왕의 분탕질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결정 하에 드래곤 로드인 크라누스를 위시한 드래곤들이 그를 급습했던 것이다. 부하들을 모두 잃었고 마력마저 소진된 나이델하르크로서는 그들에 저항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는 결국 드래곤들의 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구슬에 봉인이 되어 마계로도 돌아갈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당시를 떠올려 본 베르키스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나이델하르크의 힘은 강하다. 사로잡는 과정에서 드래곤 둘이 죽었을 정도로...... 만약 나이델하르크에게 걸어놓은 봉인주문을 풀어준다면 놈은 충분히 인간들을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나이델하르크를 직접 봉인한 드래곤이 바로 베르키스였다. 로드인 크라누스보다 뛰어난 마법실력을 인정받아 대마왕을 봉인하는 영광을 누렸던 것이다. 베르키스의 봉인은 완벽했고 나이델하르크는 결국 구슬에 갇힌 채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져야 했다. 그러나 지금 베르키스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봉인한 나이델하르크를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봉인에서 풀려난다면 나이델하르크는 제일 먼저 놈의 육신을 차지할 것이다. 흑마법사인 만큼 놈은 결코 나이델하르크에게 저항할 수 없다.' 베르키스가 바라는 것은 2차 암흑전쟁이었다. 이미 트루베니아 전체가 전쟁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고, 하루하루가 더 없이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대마왕 나이델하르크가 준동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조건은 없는 것이다. '인간과 오크가 정신없이 싸우는 동안 나이델하르크는 무리 없이 어둠의 군대를 키울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상황이 꽤나 볼만해지겠군.' 물론 나이델하르크가 깨어난다고 해서 베르키스가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나이델하르크는 분명 데이몬 못지 않게 드래곤들에게 원한은 품고 있을 터였다. 게다가 그를 직접 봉인했던 베르키스 그 자신 아니던가. 베르키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드래곤들이 힘을 합한다면 제아무리 대마왕이라고 해도 배겨낼 수 없음을 나이델하르크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또한 나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상념을 거듭하는데 귓전으로 불퉁한 음성이 들려왔다. "도대체 뭐하는 건가?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부아가 치밀 대로 치민 데이몬의 음성이었다. 베르키스가 요구사항을 밝힐 생각은 하지 않고 생각에만 잠겨 있으니 화가 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퍼뜩 정신을 차린 베르키스가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아, 미안, 미안. 요구조건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아서 말이야." "빌어먹을 도마뱀 자식." 거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지만 베르키스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대마왕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소멸되어버릴 존재였기에 최대한 아량을 보일 작정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베르키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요구조건을 말하겠다. 이것은 네가 응하든 응하지 않든 실현될 것이다."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내 요구조건은 너에게 한가지 마법을 거는 것이다." 베르키스가 내건 조건을 듣자 데이몬은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정신마법을 써서 날 세뇌할 생각인가?" "알 필요 없지 않나?" "나에겐 중요한 문제다. 네놈의 꼭두각시가 되느니 그냥 죽어 버리고 말 테니까." 정색을 하고 대드는 데이몬의 모습에 베르키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일단은 아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정신마법을 쓸 생각이 없다." "진정이냐?" "그렇다." 대답을 들은 데이몬은 생각에 잠겼다. 베르키스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런 제안을 했을까. 하지만 해답은 오로지 베르키스 본인만 알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데이몬은 베르키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이상 베리키스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아무도 몰랐다. 오직 당사자의 결정에 달려 있는 것이다. 또한 베르키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충분히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드래곤이었다. '놈은 필경 정신마법을 사용할 것이다. 놈이 곤경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것밖에 없으니까." 만약 데이몬이 정신마법에 걸릴 경우 그 파급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터였다. 상황에 따라서는 그가 보유한 막강한 무력인 4대 데스 나이트들이 베르키스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신마법에 걸리 경우 자신은 베르키스의 명을 결코 거역 못한다. 데스 나이트들 역시 자신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 때문에 데이몬은 베르키스의 정신마법에 대해 모종의 대비책을 세워놓고 있었다. '생각해 온 대비책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쉽사리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데이몬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베르키스가 마침내 마법의 구현에 들어갔다. "이제 네놈에게 마법을 걸도록 하겠다." "좋을 대로하라." 태연스러워 보이는 말과는 달리 데이몬은 바짝 긴장한 채 베르키스가 마법을 펼치기를 기다렸다. 베르키스의 손에서 일어나는 푸른 섬광이 서서히 접근해 오자 데이몬의 이마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법을 시전하고 있는 베르키스 역시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우선 봉인을 푸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대마왕을 오백 년 동안 속박해 놓은 만큼 봉인의 수준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높았고, 그런 탓에 푸는 것이 쉬울 턱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베르키스는 세심하게 신경 써서 봉인을 순차적으로 풀어나갔다. 데이몬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업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는 편이었다. '이제 몇 분 후면 대마왕 나이델하르크가 되살아나겠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베르키스는 마침내 봉인을 부는 마지막 단계에 진입해 들어갔다. 그런데 마지막 봉인에 접하는 순간 베르키스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뭐, 뭐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베르키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봉인이 이미 풀려 있잖아?' 얼마나 당황했는지 베르키스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행했던 최후봉인은 이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럴 것이라곤 짐작조차 하지 못했기에 베르키스는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는 곧 정신을 수습하고 상황파악에 나섰다. '상황을 보니 봉인은 안쪽에서부터 파괴되었다. 다시 말해 나이델하르크가 순수한 본신의 힘으로 봉인을 해체했다는 뜻이지. 하지만 나이델 하르크는 놈의 몸을 떠나지 않았다. 놈에게서 느껴지는 충만한 마력은 나이델하르크가 아직까지 놈의 몸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생각을 거듭한 끝에 베르키스는 마침내 나이델하르크의 노림수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마왕 나이델하르크는 지금 인간계에 현신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순간을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언제든 데이몬의 심신을 차지할 수 있지만 대마왕은 결정적인 순간에 현신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을 깨닫자 베르키스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많이 영리해졌군. 오직 힘만으로 밀어붙이던 오백 년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인걸? 현신하기에 가장 적합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최종봉인을 자력으로 파훼한 이상 나이델하르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현신할 수 있다. 그로 인해 베르키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언제라도 현신할 수 있다. 그로 인해 베르키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계획이 조금 틀어졌지만 그는 아직까지 결과를 낙관하고 있었다. '후후. 나설 때를 기다리고 있다면 간단하게 해결해 주지. 내가 때를 만들어 주마. 정신마법을 장악을 시도한다면 너도 더 이상 숨어있지만은 못할 것이다.' 베르키스는 생각할 것도 없이 마나를 재배열했다. 그는 데이몬을 정신마법을 장악할 작정이었다. 비록 기이한 힘이 데이몬의 정신세계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자신이 전력을 다한다면 파훼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훼방놓을 만한 자들이 주변에 없기 때문에 베르키스는 이번 기회에 반드시 데이몬의 정신세계를 허물어뜨릴 작정이었다. '데이몬을 세뇌한다면 네놈은 빙의할 몸을 잃을 테지. 그렇게 되면 현신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베르키스는 그 즉시 정신마법을 시전했다. 그의 손에서 생겨난 푸르스름한 빛이 데이몬의 얼굴을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화아악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해 베르키스는 데이몬에게 정신마법을 걸게 되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순순히 당하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는 무방비 상태로 당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도 나름대로 해결책을 준비해 온 상태였다. 기이한 기운이 머리를 감싸는 것을 느낀 데이몬은 어금니를 꼭 깨물었다. '역시 예상대로 정신마법을 쓰는군.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순순히 당하지 않는다. 아니, 내 생각이 정확히 맞아떨어진다면 의외로 쉽게 상황을 타개할 수도 있다.' 대비책을 준비하며 데이몬은 묵묵히 정신을 통일했다. 정신계 마법. 대상의 정신세계를 조작하여 시술자의 충실한 수족으로 삼는 명실상부한 10서클의 마법이었다. 물론 지능이 낮은 하급 몬스터라면 낮은 서클의 마법으로도 세뇌가 가능하다. 4서클의 유저 정도라면 패밀리어 계약을 통해 하급 몬스터를 수족으로 부릴 수 있다는 점이 그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된 정신마법이 아니었다. 독자적으로 사색할 수 있는 지능을 가진 인간 이상의 생물을 대상으로 펼칠 수 있는 것이 바로 정신마법인 것이다. 지금껏 같은 인간을 대상으로 정신계 마법을 쓸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데이몬조차도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 정신마법이었다. 그런 까닭에 정신계 마법은 오랫동안 드래곤의 전유물로만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었다. 정신마법이 여타의 위력이 뛰어난 다른 마법들을 제치고 10서클의 마법으로 자리 잡게 된 배경은 바로 전개과정의 난해함 때문이었다. 정신마법을 펼칠 경우 시술자는 마법의 힘을 이용해서 대상의 정신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벽을 허물어뜨린다. 그런 다음 서로의 영이 직접 연결되는 통로를 만들어 내는데, 그것을 실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시술자의 정신력이었다. 적어도 시술 받는 자의 정신력을 몇 배 능가하는 정신력을 보유하지 못한다면 상대의 정신세계를 무너뜨릴 수 없을 뿐더러 통로조차 제대로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드래곤은 정신마법을 시전하기 가장 적합한 생물이라 할 수 있었다. 적어도 드래곤의 정신력을 견뎌낼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상대의 정신세계를 무너뜨린 뒤 통로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정신마법이 바로 구현되는 것은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통로를 이용하여 대상의 모든 기억을 빨아들은 다음 거기에 손을 보아 다시 주입해야만 정신마법이 구현되는 것이다. 베르키스가 크라누스를 살해할 때 조력했던 크로센 기사단의 부단장 카시모프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 세뇌된 경우였다. 바로 그런 과정의 난해함 때문에 드래곤조차도 동시에 다수의 인간에겐 정신마법을 걸 수가 없는 것이다. '이놈은 특히 신중하게 세뇌해야 한다.' 준비를 마친 베르키스는 머뭇거림 없이 데이몬의 정신세계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데이몬의 정신세계를 둘러싸는 벽을 먼저 무너뜨리는 것이다. 정신세계의 벽은 의지력에 비례하여 두터워진다. 그런 만큼 무수한 고난을 겪어온 데이몬은 벽은 더할 나위 없이 두터울 것이 분명했고 제 아무리 베르키스라 해도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데이몬에겐 베르키스조차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기이한 기운이 존재했다. 바로 그 기운이 데이몬의 정신세계가 허물어지지 못하도록 방어하고 있었고, 그 이유 때문에 베르키스는 펠드리안에서 데이몬을 세뇌하는 데 실패했다. 일단 벽을 무너뜨려야만 서로의 영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실수를 되풀이 할 순 없지.' 그때의 경험 때문에 베르키스는 더욱 집요하게 데이몬의 정신세계를 공략해 들어갔다. 베르키스의 방대한 정신력은 데이몬의 정신세계를 거칠 것 없이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2. 영의 세계에서 벌어진 공방전 베르키스의 손에서 뻗어 나온 푸른 기운이 데이몬의 머리를 덮는 광경을 본 카심 용병단원들은 애가 탔다. 상황은 그들에게 의심의 여지를 전혀 주지 않았다. "틀림없어. 베르키스 놈은 데이몬을 세뇌하려는 거야."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었지만 놓인 입장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 한쪽 손에 성녀를 움켜쥔 아이언 골렘이 그들 사이에 버티고 서서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로비츠의 생각은 카심 용병단원들과는 사뭇 달랐다. 데이몬이 세뇌되어 버릴 경우 가장 까다로운 적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에 그로서는 독한 마음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그에게 성녀의 생사따윈 관심 밖의 일이었다. 마음을 정리한 크로비츠는 검을 그러쥐며 기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모두 공격 준비를 하라. 이참이 놈을 쓰러뜨리지 않는다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다." 하지만 카심 용번단원들이 순순히 명령에 복종할 리가 없었다. 카심이 앞으로 나섰다. "그럴 순 없소. 우리가 움직인다면 성녀는 그 즉시 죽을 것이오. 그여는 데이몬에게 있어 목숨보다도 소중한 존재요." 크로비츠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쩔 수 없소. 이대로 상황을 좌시하다간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번져갈 것이 분명하오. 내가 보기에 데이몬에게 희망이 전혀 없소. 그러니 지금 베르키스를 제거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영영 불가능할 것이오." "그래도 그의 여인을 포기할 순 없습니다." "물론 나도 이러고 싶지 않소. 하지만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구려. 데이몬에게 훗날 목숨으로 사죄하겠소." 조용히 카심을 외면한 크로비츠는 공격 명령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데스 나이트와 슈렉하이머가 바람처럼 날아와서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에겐 데이몬의 안전이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했다. "이런." 크로비츠는 맥이 탁 풀렸다. 데스 나이트들의 실력을 알고 있는 탓에 쉽사리 공격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데 카심 용병단원들이 하나씩 걸어가서 데스 나이트들 뒤에 버티고 섰다. 미첼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뽑아들었다. "우린 데이몬을 믿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기다릴 시간이 없소. 만약 데이몬 마저 세뇌된다면 인간의 운명은 장담할 수 없소." 카심이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역시 크로비츠의 판단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도저히 데이몬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우린 생사를 함께 하기로 한 동료들입니다. 그에게 해가 되는 일은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눈빛을 본 크로비츠는 카심을 설득하는 것이 글렀음을 깨달았다. 게다가 무력으로 누르는 것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현재 그가 보유한 기사들은 고작해야 오십 명 남짓. 그나마 태반이 부상자였다. 그런 전력으로 막강한 4대 데스 나이트들을 돌파할 자신은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데이몬이 세뇌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에 그는 간절한 눈빛으로 하인리히를 쳐다보았다. 포위망 바깥에 있는 그들로 하여금 베르키스를 공격하게 하려는 것이 크로비츠의 의도였다. 하지만 제럴드와 하인리히는 그럴 수 없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죄송합니다, 대장님. 저희들은 아직까지 카심 용병단원입니다." 그 말에 극도로 낙담했지만 크로비츠는 그래도 둘을 탓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카심 용병단원들의 동료애가 어떤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너희들로선 어쩔수 없겠지.' 기묘한 대치상태가 이어지는 동안 장내에서 서서히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군." 베르키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예상과는 달리 데이몬의 정신세계를 허물어뜨리는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리 만만치 않았다. 고도의 마법을 수련한 만큼 의지력이 뛰어날 수밖에 없었으므로 데이몬은 한동안 끈질기게 베르키스의 정신마법을 버텨나갔다. 하지만 데이몬은 어느 순간 허무하달 정도로 손쉽게 허물어졌다. 얼굴에 갑자기 멍한 표정이 떠오름과 동시에 방어를 위한 노력이 일순간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잘 되었다고 생각한 베르키스는 정신력을 더욱 집중시켰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지만 나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베르키스는 이것이 끝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데이몬에게 정신세계를 방어하는 기이한 힘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데이몬의 정신세계가 허물어지려는 순간 기이한 힘이 발동했다. 소림성승이 시전한 칠종단금술이었다. 이 천고의 정신금제법은 데이몬의 정신을 장악하려는 베르키스에 맞서 치열한 혈투를 벌였다. 기이한 것은 데이몬의 반응이었다. 베르키스의 정신마법과 칠종단금술이 정신세계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지만 데이몬은 방어를 위한 일말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 통증이 적지 않을 텐데도 전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그저 멍한 표정으로 맥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마치 백치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칠종단금술이 사력을 다해 버티고 있었지만 애당초 역부족이었다. 이미 상대가 칠종단금술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르키스의 집중된 정신력에 칠종단금술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동시에 데이몬의 정신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벽도 함께 얇아졌다. 출렁 데이몬의 몸속에 잠재한 어둠의 마력이 눈에 띄게 요동치는 것을 느끼자 베르키스의 입가에 희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숙주가 위기에 처하는 것을 좌시 할 수만은 없겠지?" 정신세계가 완전히 허물어진다면 나이델하르크는 더 이상 데이몬의 몸에 남아있을 수 없다. 물리적인 육신이 없다면 제아무리 대마왕이라도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놈이 빙의할 수 있는 인간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베르키스는 바로 그 때문에 인간들과 떨어진 곳으로 데이몬을 유인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나이델하르크의 입자에서는 정신계 마법에 완전히 넘어가기 전에 반드시 데이몬의 심신을 장악해야 한다. '걱정하지 말도록. 넌 날 대신해서 인간들을 멸망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널 소멸시킬 생각은 전혀 없다.' 베르키스는 더욱 힘을 집중했다. 나이델하르크가 견디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현신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번에도 그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요동치는 것처럼 보이던 어둠의 마력이 서서히 진정될 기미를 보이자 베르키스의 눈매가 급격히 치켜 올라갔다. "뭐야?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금방 이라도 뛰어나올 것 같아 보였지만 나이델하르크는 결국 현신 하지 않았다. 정신없이 들끓던 어둠의 마력은 고요한 바다처럼 가라앉아 버렸다. 데이몬의 정신세계를 방어하던 벽이 거의 허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베르키스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젠장. 생각대로 되는 일이 왜 이렇게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이판 새판이다. 일단 데이몬이란 놈을 세뇌시켜놓고 뒷일을 생각하겠다." 베르키스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정신을 집중했다. 펑 데이몬의 정신세계를 방어하던 벽은 집중된 힘에 의해 허무하게 부서져버렸다. 하지만 나이델하르크는 여전히 현신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베르키스가 이어 영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조바심이 치민 베르키스는 데이몬의 정신세계에 존재하는 기억을 모조리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우선 놈을 세뇌하여 데스 나이트들을 손에 넣어야 겠다." 베르키스는 카시모프의 경우처럼 데이몬을 세뇌시킬 생각이었다. 대마왕 나이델하르크를 이용하려는 계획이 무산된 이상 어떻게든 힘을 손에 넣어야 했다. 지금으로선 데이몬이 보유한 데스 나이트들이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정신세계를 연결하는 통로가 만들어졌으니 베르키스에게 다음 일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기억을 흡수하여 적당히 손본 뒤 다시 밀어 넣는다면 데이몬은 어쩔 수 없이 충실한 심복이 될 터였다. 만들어진 통로를 통해 데이몬의 기억이 밀려드는 것을 느낀 베르키스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일단 목적을 이룰 때까지만 널 살려두도록 하겠다. 물론 쓸모가 없어지면 최대한 비참한 방법으로 죽을 것을 각오해야겠지만." 데이몬에 대한 경계를 모두 접어버린 베르키스는 곧이어 튀어나올 나이델하르크를 직접 상대할 방법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그를 다른 인간의 몸에 빙의시켜 세상을 휘젓겠다는 것이 베르키스의 의도였다. 콰콰콰 데이몬의 정신세계에 쌓여 있던 기억들이 빠른 속도로 베르키스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데이몬은 일말의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베르키스에게 몸을 내맡겼다. 그런데 베르키스의 의도는 여기에서 또다시 빗나갔다. 기억흡수에 몰두하던 베르키스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이, 이건?" 베르키스가 가진 고룡으로서의 직감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있었다. 이미 베르키스는 전력으로 정신마법을 시전하고 있는 상황. 예상대로라면 데이몬이 가진 기억은 하나도 남김없이 머릿속으로 들어왔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그가 얻은 기억은 거의 없었다. 흡수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텅 빈, 그저 공허한 기억만이 흡수되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베르키스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고민을 거듭하던 베르키스에게 불현 듯 한 가지 경험이 떠올랐다. 오래 전 정신마법을 연구하느라 여러 종류의 인간을 잡아와서 정신마법을 펼치던 때의 기억이었다. 그때를 떠올려본 베르키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랬어.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를 상대로 정신마법을 전개했을 때가 바로 이랬어." 그는 다급히 데이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예상대로 데이몬의 얼굴은 백치와 진배없는 멍한 표정만이 떠올라 있었다. 베르키스는 비로소 모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놈은 나에게 벗어나기 위해 다른 인간의 놈을 빼앗았다. 그렇다면 육신과 정신을 분리시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터, 그렇다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다." 정황을 알아차린 베르키스는 불같은 분노에 사로잡혔다. 데이몬은 영과 육신을 분리하는 방법으로 베르키스의 정신마법을 회피해 낸 것이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베르키스는 즉시 정신마법을 거두었다. 세뇌시키는 것이 수포로 돌아간 이상 다른 해결책을 강구해야 했다. 하지만 베르키스는 서두른 나머지 자신이 크나큰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서로의 정신을 연결하는 통로를 제일 먼저 닫지 않은 것이 그가 범한 가장 큰 실수였다. '흐흐흐. 이제 눈치 챘는가?' 정신마법이 거둬지는 순간 데이몬의 눈동자에 총기가 빛났다. 베르키스의 예상대로 데이몬은 영과 육신을 분리하는 방법으로 정신마법을 회피했던 것이다. 그러다 다시금 육신과 하나가 되지 데이모은 제일 먼저 몸의 상태를 살폈다. 베르키스의 정신과 연결된 통로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데이몬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크크크. 하늘이 날 돌보는군.' 데이몬은 다급히 사술을 펼쳤다. 상대의 심령을 순간적으로 금제하는 사술인 섭혼술이었다. 섭혼술은 사로잡은 적을 심문할 때 사용하는 초보적인 사술로, 의지력이 깊은 상대에겐 통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수준이 낮아 금방 전개할 수 있다는 장점 또한 존재했다. 그리고 이처럼 서로의 영이 통해있는 상태에서 전개되는 사술은 상대의 정신세계에 정통으로 먹혀 들어간다. 뭔가가 자신의 정신세계를 파고 들어오자 베르키스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베르키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자식이....." 통로를 파고 들어오는 것은 기초적인 수준의 정신마법이었다. 설마 인간에게 정신마법으로 공격받을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기에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마법인지는 모르지만 수준 자체가 무척 조잡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베르키스는 정신력을 집중했다. 파팍 베르키스의 정신세계를 미꾸라지처럼 파고 들어가던 섭혼술은 허무하게 흩어져버렸다. 생소한 형태의 마법이라서 그냥 힘으로 눌러버린 것이다. 그리곤 반격을 가해 상대를 다시 제압하려는 것이 베르키스의 생각이었지만 데이몬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네놈에게 생각할 틈을 주면 안 되겠지?" 서로의 영이 연결된 통로를 통해 계속해서 데이몬의 사술이 펼쳐졌다. 마치 잔 주먹을 계속해서 날리는 듯 기초적인 사술이 거듭 시전 된 것이다. 과거 사술의 대가로 불렸던 데이몬에겐 결코 힘들지 않은 공격이었다. 하지만 베르키스는 데이몬보다 몇 배나 힘을 들여 사술을 방어해야 했다. 생소한 이계의 술법이라서 힘으로 깨뜨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공방전.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종족인 베르키스는 거듭되는 공격을 하나도 허용하지 않고 방어해 냈다. 그러나 그는 데이몬이 그것까지 계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흐흐흐. 이것도 한번 막아보아라." 괴소와 함께 뭔가 음침한 기운이 영의 통로를 통해 베르키스에게로 날아갔다. 지금까지 공격과 마찬가지로 수준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파악한 베르키스는 살짝 정신력을 집중해서 기운을 흘려버리려 했다. 하지만, "응?" 기운이 느닷없이 두 배로 증폭되는 것을 느낀 베르키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으로 방어가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부아가 치민 베르키스는 정신력을 한층 더 집중시켰다. 콰콰콰콰 집중된 정신력이 파고드는 사술을 사정없이 터뜨려 버리려는 듯 세차게 압박해 들어갔다. 그러나 베르키스의 방어는 이번에도 허사로 돌아갔다. 파고든 사술은 집중된 정신력을 흡수라도 하는 듯 또다시 두 배로 불어나 있있다. 상상치 못했던 반응에 베르키스는 깜짝 놀랐다. "뭐, 뭐야?" "놀랐나? 귀령제혼술(鬼靈制魂術)이란 이름을 가진 술법이야. 지크레이트가 여기에 당했지. 물론 그때보다 위력이 월등히 강해졌으니 실망하지 않아도 될 거야. 어디 한번 막아 보라고." 귓전으로 느물거리는 데이몬의 음성이 전해졌다. 그가 펼친 것은 지크레이트를 제압할 때 사용했던 술법인 귀령제혼술이었다.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여 상대를 제압하는 배교 독문의 심령금제술. 베르키스에겐 미처 데이몬의 말에 대꾸할 틈도 없었다. 데이몬이 펼친 이계의 술법이 금방이라도 뇌리를 파고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연결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베르키스는 더욱 곤란을 겪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방어하기가 이토록 힘들지는 않았을 터였다. 비록 이 술법에 지크레이트가 굴복했다 해도 베르키스는 그와는 차원이 다른 드래곤이다. 그러나 펼쳐진 술법의 구조를 전혀 모르기에 베르키스는 오로지 힘만으로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귀령제혼술은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여 힘을 불려나가는 술법. 계속해서 베르키스의 정신력을 빨아들이던 귀령제혼술은 오래지 않아 그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팽창했다. 힘을 얻은 귀령제혼술은 곧 베르키스의 정신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공략을 시작했다. 상황이 이대로 진행된다면 애초의 의도와는 반대로 자신이 세뇌되어 버릴 터였다.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베르키스가 비명을 내질렀다. "시, 실수였어." 베르키스가 범한 가장 큰 실수는 상대와 영적으로 연결된 통로를 닫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상대의 술법이 힘을 흡수하며 자라난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 차리지 못한 것 역시 치명적인 실책임에 틀림없었다. 베르키스로서는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다. 이계의 술법이간 하지만 귀령제혼술은 충분한 완성도를 가진 고도의 정신마법이었다. 구조와 공식을 세세히 알지 못한다면 파훼할 방법이 없었다. 베르키스의 고전하는 것을 본 데이몬이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실낱같은 가능성을 믿고 몸을 내맡겼지만 다행히 성공해냈군. 만약 놈이 날 세뇌시키려 하지 않았다면 내 계획은 십중팔구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데이몬 역시 반격할 여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귀령제혼술을 전개하는 데 모든 힘을 소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이미 베르키스가 귀령제혼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귀령제혼술은 이미 자신조차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불어난 상태였다. "트, 틀렸어......." 베르키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데이몬이 전개한 이계의 술법은 이미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결국 술법에 말려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자신이 데이몬의 꼭두각시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어이가 없었는 베르키스는 힘겨운 신음을 흘렸다. "크으으. 인간 따위가 건 정신마법에 당할 줄은......."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네놈을 요리해 주지. 산채로 본 드래곤을 만드는 것도 고려중이니 걱정하지 말도록." 이제 데이몬은 확실하게 여유를 되찾은 상태였다. 그것을 보며 베르키스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에인션트급 드래곤인 내가 이토록 허망하게 당할 줄은 몰랐군. 하지만 순순히 당할 순 없다." 베르키스는 마침내 최후의 방법을 떠올렸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인간의 꼭두각시로 전락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이미 뇌리의 일부분이 상대의 술법에 잠식당한 상태. 이제 믿을 것이라곤 데이몬의 몸속에 단단히 똬리 틀고 있는 대마왕 나이델하르크밖에 없었다. 그것을 떠올린 베르키스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부탁한다, 나이델하르크 텔레파시의 형태로 전해진 음성은 다행히 데이몬에게까진 전달되지 않았다. 베르키스는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영의 폐쇄에 들어간다. '드래곤의 육신을 나이델하르크 따위의 마왕에게 준다는 것이 어처구니없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 육식을 차지한다면 놈은 비약적으로 강해진다. 확실하게 인간들을 없애줄 기틀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영의 폐쇄. 고도의 지능을 가진 드래곤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영을 외부와 단절시켜 스스로 백치가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 방법을 쓴다면 시시각각 자신을 옥죄어 오는 이계의 술법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폐쇄된 영이 두 번 다시 육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영이 사라지고 육신만 남은 백치가 되어 버린다는 뜻이다. 그러나 베르키스는 이미 자신의 육신을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에게 넘길 생각을 굳힌 상태였다. 방대한 영적 능력을 가진 나이델하르크가 강력한 드래곤의 육신을 얻는다면 지금껏 존재한 적이 벗는 강력한 대마왕이 탄생할 터였다. 베르키스는 오직 그것 하나만 믿고 자신을 불사를 마음을 굳혔던 것이다. "콰우우우......" 베르키스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영과 육신을 강제로 단절시키는 과정에선 엄청난 고통이 수반된다. 이것은 공포의 마룡이라 불렸던 베르키스가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내뱉은 음성이었다. 흐릿해진 시야를 통해 데이몬의 모습이 들어오자 베르키스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려 했다. '역시 대, 대단한 놈....... 하, 하지만 너의 우, 운은 여기까지다......' 그 생각을 끝으로 베르키스의 의식은 시커먼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 쳤다. 의식을 잃은 레드 드래곤의 거대한 동체가 맥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쿵 쓰러진 레드 드래곤의 몸은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희대의 마룡 베르키스에겐 허망한 최후였다. 데이몬은 경계 어린 눈빛으로 널브러진 베르키스의 동체를 들여다보았다. 이미 그는 자신이 전개한 귀령제혼술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베르키스가 두 번 다시 깨어나지 않는다는 사실까지도. 데이몬은 이미 베르키스의 서가에서 현재의 상황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을 얻은 상태였다. 그 지식대로라면 베르키스는 돌이킬 수 없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 분명했다. "영의 폐쇄인가? 이해할 수가 없군. 드래곤이라는 자부심 강한 생명체가 이토록 쉽사리 생을 포기하다니........ 그것도 베르키스같은 희대의 마룡이 말이야."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거듭 흔들었지만 베르키스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떠난 것이다. 물끄러미 베르키스를 쳐다보던 데이몬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치열한 혈투로 말미암아 잠시 잊고 있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다프네." 데이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아이언 골렘을 향해 달려갔다. 아이언 골렘은 무너진 신전 성벽 위에 철벽같이 버티고 서 있었다. "드디어 데이몬이 성공했어." 그 모습을 본 카심 용병단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크로비츠와의 묘한 대치상황은 이미 깨끗이 해소된 상태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데이몬이 베르키스와의 싸움에 승리한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토록 거침없이 아이언 골렘을 향해 뛰어갈 수는 없었다. 모로 쓰러진 레도 드래곤의 모습은 거리가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내의 모든 기사들에게 똑똑히 보였다. "데이몬." 미첼은 즉시 데이몬을 향해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는 채 몸을 날리지도 못하고 억센 손에 부여 잡혔다. 카심이었다. "안돼. 아이언 골렘이 아직까지 파괴되지 않았어." "하지만 베르키스 죽었는데....." "골렘은 조종하는 마법사가 죽어도 마지막으로 받은 명령을 계속해서 수행한다. 골렘이 던젼의 가디언으로 많이 활약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 아쉽지만 데이몬이 해결할 때까지 이곳을 벗어나면 안 될 것 같다." 미첼은 결국 카심의 말에 수긍했다. 데이몬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직까지 아이언 골렘이 성녀의 몸을 꽉 움켜귀고 있었기에 지금은 최대한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그들은 조바심을 억누르며 데이몬이 신호할 때를 기다렸다. "믿을 수가 없군." 크로비츠는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데이몬이 분명 베르키스의 정신계 마법에 걸리는 것을 보았건만 상황이 전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다. "설마 데이몬이 정신마법으로 베르키스를 제압한 것일까?" 생각을 거듭했지만 크로비츠는 도저히 해답을 도출해 낼 수가 없었다. 그저 데이몬이 하는 양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수밖에.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데이몬에 대한 경계심이 모락모락 자라나고 있었다. '데이몬은 감히 인간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 지금은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상황이 바뀐다면 페르슈타인 전하의 앞날에 크나큰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하다.' 크로비츠는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목숨을 건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엄청난 능력과 힘을 보유한 데이몬에게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비록 동료지만 적으로 돌변할 경우 데이몬은 사상 최악의 적이 될 것이 분명했다. 크로비츠가 머리를 굴리는 사이 데이몬은 마침내 다프네에게 가까이 다가서 있었다. 아이언 골렘은 앞에 도착한 데이몬은 고개를 들어 다프네를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의 눈동자에는 부드러운 빛이 가득했다. "다프네. 드디어 널 구할 수 있게 되었구나." 다프네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또다시 수막이 서렸다. "아저씨." "이렇게 널 만나게 되다니...... 조금만 기다리거라. 아저씨가 널 구해주마." 얼마나 울었는지 다프네의 얼굴은 퉁퉁 부어있었다. 보기만 해도 끔찍한 혈투를 바로 지척에서 지켜봤으니 충격을 받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노스우드 평원에서 스러진 수많은 죽음. 그로 인해 그녀는 심신 양면으로 지대한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울다 지친 나머지 이젠 눈물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이제 깨끗이 종료되었다. 무적이라 생각했던 드래곤 베르키스는 이제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데이몬이란 이름의 한 인간에 의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을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의 얼굴에는 담담함 표정만이 가득했다. 그것을 통해 그녀는 데이몬이 지난 세월 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을 구해내기 위해 오백 년 동안이나 분투했다는 사실을. "이제 이놈을 해결해야 할 차례인가?" 데이몬은 조심스럽게 아이언 골렘의 전신을 살폈다. 주인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언 골렘의 투구사이에서는 섬뜩한 광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직까지 작동하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아이언 골렘은 데이몬이 하는 양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오직 멀리 서 있는 용사들만 멍하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카심의 예측이 여지없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아이언 골렘에게 접근하는 것이 허락된 인간은 오직 한 사람 데이몬밖에 없었던 것이다. 골렘의 전신을 샅샅이 살피던 데이몬은 탄성을 내질렀다. "정말 괴물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도리가 없군." 아이언 골렘은 그야말로 무적이라는 이름에 전혀 부끄럽지 않은 전투병기였다. 전신에 빼곡히 새겨진 마법진들은 데이몬조차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다시 말해 데이몬조차도 마법공격으로 타격을 입힐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인간 마법사의 공격이라면 아이언 골렘에게 흠집조차 낼 수 없을 터이다. 데이몬은 연신 감탄했다. "엄청난 마법 방어력에다 상상도 할 수 없는 파워, 심지어 본 드래곤조차 적수가 되지 못한 괴물이 바로 이놈이로군." 하지만 지금은 아이언 골렘의 파위 따위에 매료될 때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 골렘의 몸속에 박혀 있는 마법석의 위치를 찾고 있었다. 그래야만 다프네를 무사히 구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이언 골렘의 마법방어력이 워낙 막강한지라 마법석의 위치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부드러운 눈빛으로 다프네를 한번 쓸어본 뒤 데이몬은 캐스팅을 시작했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지만 데이몬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렸다. 모든 것이 오직 하나 다프네를 구해내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이미 데이몬은 물리적인 방법으로 아이언 골렘을 파괴시키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그렇게 한다면 꽉 쥐어진 아이언 골렘의 주먹에서 다프네를 빼낼 방법이 없었다. 데스 나이트들의 데스 블레이드라면 불가능할 것도 없었지만 다프네가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데이몬은 아이언 골렘을 직접 제어해서 다프네를 빼낼 생각이었다. "마법석을 찾아내어 조작한다면 아이언 골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 9서클의 마스터인 데이몬에겐 충분히 마법석을 조작할 능력이 있었다. 생각을 마친 데이몬은 계속해서 탐색 마법을 시전하여 마법석의 위치를 추적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아 곧 마법석이 박혀 있는 곳을 찾아 낼 수 있었다. "이곳이로군." 아이언 골렘을 통제하는 마법석은 왼쪽 옆구리 부분에 위치해 있었다. 한참동안 탐색마법을 전개한 끝에 이뤄낸 성과였다. 목표를 찾아내자 데이몬은 즉시 마나를 재배열했다. 파파파팟 아이언 골렘의 옆구리 부근에서 자욱한 스파크가 피어올랐다. 아이언 골렘을 둘러싸고 있는 마법 방어막을 무력화시키는 작업이었다. 그래야만 골렘의 마법석을 빼낼 수 있었기에 데이몬은 세심하게 신경써서 마법방어진을 하나 하나 해제해 나갔다. 처음에는 쉽지 않아 보였지만 작업은 비교 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이언 골렘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캐스팅을 거듭하던 데이몬이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만약 골렘이 나에게도 반응했다면 난 이미 죽은목숨이겠군." 따지고 보면 아이언 골렘의 마법방어막을 해제하는 작업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반격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더라도 오우거보다 바른 아이언 골렘을 붙잡아놓고 마법을 거는 것은 드래곤조차 불가능한 작업이니까. 그러나 명령할 주인을 잃은 탓에 이 최강의 전투병기는 오직 최후에 받은 명령만 수행했다. 멀리 떨어진 기사들이 접근하는 것만 감시할 뿐 몸을 헤집고 있는 데이몬은 그냥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후, 힘들군." 비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닦은 데이몬은 쉴 겨를도 없이 캐스팅에 들어갔다. 파파팟 아이언 골렘의 옆구리를 구성하는 부분이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곳으로 시퍼렇게 빛나는 마법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은 물체를 잠시 동안 다른 차원으로 옮겨놓는 8서클의 고위급 마법이었다. 그것은 이미 세바인의 동굴에서 한 번 구현시켰던 마법이었는데 마법석에 충격을 추지 않기 위해 데이몬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아이언 골렘의 마법석은 마침내 데이몬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석은 영롱한 빛을 내는 어른 주먹만한 보석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법석을 매만졌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고비다." 베르키스가 불어넣은 명령을 소멸시키고 자신의 명령을 각인 시킨다면 아이언 골렘은 데스 나이트처럼 데이몬의 충실한 수족이 되어 줄 것이다. 엄청난 위력을 가진 아이언 골렘을 손에 넣는 순간이었지만 데이몬은 전혀 희열을 느끼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다프네를 구해내는 데에만 있었다. 오백 년 동안의 기다림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순간이었기에 데이몬은 극도로 정신력을 집중해서 마법석을 개조해 나갔다. 그 시간은 지루할 정도로 길었다.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데이몬은 가까스로 마법석의 개조를 마칠 수 있었다. "끝났어." 작업을 마친 순간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들었지만 데이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제 다 되었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다프네를 올려다본 뒤 데이몬은 골렘에게 말을 걸었다. "내말이 들리나, 아이언 골렘?"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실패했나?" 데이몬은 조바심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골렘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다프네를 구해내는 것이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데이몬은 재차 말을 걸자 마침내 기다리던 대답이 들려왔다. 묵직하고 억양이 전혀 없는 음성이 마치 텔레파시와 같은 형태로 데이몬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마스터 데이몬은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베르키스가 만들어낸 최강의 전투병기를 마침내 자신의 것으로 만든 순간이었다.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졌지만 데이몬은 안간힘을 써서 몸을 지탱했다. "너와 함께 하게 되어 기쁘구나. 이제부터 넌 나의 명령에 절대 복정해야 한다. 알겠는가?" 아이언 골렘의 대답은 즉시 들려왔다. -명심하겠습니다. 마스터. "이름이 무언가?" -탄타로스입니다. "좋아, 탄타로스. 그럼 나에게 충성의 서약을 하도록 하라." 골렘은 머뭇거림 없이 데이몬에게 고개를 숙였다. 강철로 된 동체가 유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데이몬에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가져다주었다. -저 탄타로스 지금 이 순간부터 마스터의 명에 절대 복종할 것입니다. 또한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마스터의 명령을 수행할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데이몬의 얼굴에 만족감이 어렸다. "탄타로스, 너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리겠다. 지금 즉시 손에 든 여인을 내 옆에 내려놓아라." 탄타로스란 이름을 가진 아이언 골렘음 머뭇거림 없이 데이몬의 명령을 수행했다. 베르키스가 보았다면 땅을 칠 정도로 원통할 일이지만 그는 이미 세상과 단절되어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탄타로스는 명령대로 조심스럽게 다프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마법의 효력이 다한 탓인지 옆구리에 난 구멍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앞으로 데이몬 외에는 그 누구도 탄타로스의 마법석을 볼 수 없으리라. 속박에서 풀리자 다프네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심신 양면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은 탓에 긴장이 풀리자 더 이상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괘, 괜찮니?" 깜짝 놀란 데이몬이 서둘러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마나 그 역시 지치기는 마찬가지인지라 몇 걸음 내딛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고개를 든 데이몬에게 보인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눈동자였다. 다프네는 더없이 고혹적인 눈빛으로 그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고마워요, 아저씨." 그 한 마디에 데이몬은 오백 년 동안 겪었던 고생을 말끔히 잊어버릴 수 있었다. 설령 그보다 더한 고생을 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침내 목적을 이뤘다. 그 누구도 불가능 할 것이라 치부할 일을 당당히 해낸 것이다. 순한 고난과 역경을 모조리 극복한 채 다시금 다프네와 마주 앉게 된 지금 데이몬은 벅차오른 희열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다프네......." 데이몬은 조용히 손을 뻗어 다프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마치 눈에 넣어버리려는 듯 다프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은하수를 옮겨다 놓은 듯 초롱초롱한 눈망울, 오뚝한 콧날에 꽃잎 같은 입술, 손을 대면 묻어날 듯 하얀 피부, 오백 년 전에 보았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다프네와 시선을 맞추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어왔다. 마치 지옥에서 오백 년을 견딘 후 천국으로 올라왔을 때의 기분이 이럴까? 행복에 겨운 나머지 데이몬에겐 멀리서 카심 용병단원들이 달려오며 내지르는 소리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멋져요, 데이몬!" "역시 데이몬이라니까!" 카심 용병단원들은 왁자지걸하게 떠들며 데이몬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성녀가 아이언 골렘의 손아귀에 벗어난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들에겐 더 이상 걸리 것이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크로비츠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휘하 기사들을 이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에게 데이몬이 영략없이 인간의 탈을 덮어쓴 괴물로 보였을 터였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로군." 그들이 달려오는 발자국소리를 흘려들으며 데이몬은 조용히 손을 뻗어 다프네의 얼굴을 감쌌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는 다프네의 얼굴에는 홍조가 짙게 떠올라 있었다. 부끄러움을 이지 못한 듯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절 구하기 위해 아저씨께서 그토록 애쓰셨을 줄은 몰랐어요." 데이몬은 아무 말 하지 말라는 듯 손가락으로 다프네의 입술을 눌렀다. 마치 널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고생도 아니다, 라는 듯. 살포시 미소를 지은 다프네는 조용히 데이몬에 볼에 입을 맞춰 주었다. 오백 년만에 다시 겪는 입맞춤이었지만 데이몬은 이번에도 수백 발의 라이트닝 볼트가 전신을 관통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네 입맞춤은 여전하구나." 데이몬은 입맞춤의 답례로 다프네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내 모습이 많이 바뀌었지?" 다프네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눈빛만은 바뀌지 않은 걸요? 전 아저씨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어요." 데이몬은 다시 한 번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수한 인간들 중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이는 오직 다프네뿐이었다. 그녀라면 피폐하고 메마른 자신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줄 수 있으리라. 데이몬은 그녀와 두 번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리라 다짐했다. "이젠 걱정하지 말아라. 그 누구도 널 나에게서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내겐 그럴 만한 힘이 있다." "........" 데이몬은 마치 독백이라도 하듯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 내 숙명은 모두 끝났다. 베르키스를 처단하고 널 구해냈으니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비록 작은 복수가 남아있긴 하지만 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깨끗이 포기하겠다." 놀랍게도 데이몬은 사준환에 대한 원한을 깨끗이 잊어버리려하고 있었다. 다프네라는 한 여인 때문에. "난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권력, 명예, 재산 따윈 나에겐 하등 부질없는 것에 불과하다. 내 바람은 오직 하나, 너의 행복뿐이란다. 이 자리에서 약속하겠다. 내 모든 것을 걸고 널 행복하게 해줄 것을." 데이몬의 눈동자는 모정의 결의로 번뜩이고 있었다. "난 오래 전부터 네 꿈을 이뤄줄 계획을 짜 왔단다." 그 말에 다프네의 눈동자에서 이채가 떠올랐다. "아직까지 제 말을 기억하고 계세요?" "물론이다. 바다가 보이는 어촌마을, 정다운 마을 사람들, 널 위해 내가 직접 작은 집을 지어 주마. 그리고 널 위해 밭을 갈고 고기를 낚아 주겠다. 영원히 네 곁을 지켜주겠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소원의 전부다." 다프네는 다소곳이 고개를 수기린 채 데이몬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카심 용병단원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기세 좋게 달려오긴 했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 때문에 그 누구도 끼어 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서서 데이몬의 독백을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동료들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데이몬은 아랑곳없이 심중의 말을 풀어나갔다. "솔직히 난 지금까지 사랑이란 것이 뭔지 잘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한 여인을 내 몸보다 아끼고 그녀의 행복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으며 목숨을 바쳐 그녀를 지켜주는 것이 사랑이라면 난 충분히 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구나." 그 말에 다프네는 고개를 들어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다소 놀란 듯한 기색이었다. "아, 아저씨." 데이몬은 조용히 다프네의 말을 잘랐다. "그렇다고 너에게 뭔가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 마음을 받아주고 날 옆에 머물 수 있게 해 준다면 난 그것을 충분히 만족한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네가 말했던 사랑에 대한 개념이 떠오르는 구나 "........."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없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었지? 솔직히 그땐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다프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데이몬의 말을 듣고 있었다. "너에게 라면 내 모든 것을 아무런 조건 없이 줄 수 있을 것 같구나." 대답해 달라는 듯 데이몬은 다프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데이몬은 몸을 일으켰다. 다프네가 다소 난처해하는 것 같아 분위기를 돌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 동료들을 소개해 줄까?"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은 데이몬은 카심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이 녀석은 카심이란. 원래는 촌놈이었는데 아저씨 만나서 엄청나게 출세했지." 카심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목례를 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데이몬께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는데 직접 만나 뵈니 더욱 미인이시군요." 다프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심을 쳐다보았다. "제..... 얘길 들었다고요?" "그럼요. 주책없는 데이몬은 해만 뜨면 아가씨 칭찬을 늘어놓더군.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귀에 못이 막힐 정도랍니다. 캑!" 우아한 동작으로 카심의 목덜미를 휘감은 데이몬은 턱을 뻗어 미첼을 가리켰다. 와이번과의 전투에서 다쳤는지 전신이 피투성이 였지만 미첼은 빙긋이 미소를 지어주었다. 일루미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팔에 난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었다. "저 녀석은 미첼이야. 엘프 아가씨의 사랑을 얻어 입이 귀에 걸린 녀석이지. 좀 뺀질거리는 경향이 있지만 그런 대로 쓸 만한 녀석이야." 평소 아버지로부터 호된 교육을 받은 탓에 미첼은 전혀 흠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예를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가 바로 뺀질이 미첼입니다. 입이 귀에 걸린 것은 사실이지만 데이몬에 비하면 새 발의 피죠, 저기 있는 드래곤의 시체를 데이몬 입에다 한번 집어넣어 볼까 생각중인데, 제 생각으로 충분히 들어갈 것 같은..... 케엑!" 반격을 가한 죄로 미첼은 카심과 같은 처지에 놓여버렸다. 데이몬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목을 휘감아버린 것이다. "젠장! 늙은이가 왜 이렇게 힘이 쎈 거야?" "임마, 원래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괴력을 발휘하는 거야. 켁!" 악의 없이 주고받는 농담에 다프네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을 대하자 데이몬은 또다시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의 미소가 주는 충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양쪽 팔뚝에 카심과 미첼의 머리통을 사이좋게 끼워 넣은 상태로 데이몬은 멍하니 다프네의 얼굴을 주시하고만 있었다. 보다 못한 다프네가 만류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만하세요. 아저씨." "아, 알았다." 데이몬은 두 말도 하지 않고 카심과 미첼을 풀어주었다. 그 모습에 대원들은 혀를 내둘렀다. "세, 세상에......" 데이몬의 이런 모습은 그들에겐 하나의 충격이었다. 드래곤 로드 앞에서도 거침없이 독설을 퍼붓던 데이몬. 심지어 지옥의 대왕 앞에서도 전혀 꿀리지 않을 것 같았던 데이몬이었다. 그런 그가 한 여자 앞에서 영락없이 고양이 앞의 쥐로 전락해 버렸다.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데이몬이 눈앞의 소녀를 목숨보다도 사랑한다는 사실을.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데이몬은 계속해서 대원들을 소개해 나갔다. "저 녀석들은 제럴드와 하인리히야. 아직까지 솜털이 빠지지 않은 애송이 들이지."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 명 한 명 진행되어 나가던 데이몬의 소개는 마침내 크로비츠에게까지 닿았다. 그는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크로비츠를 쳐다보았다. "저기서 폼 잡고 있는 녀석은 크로비츠라고 하지. 모르긴 몰라도 자기 주인을 위해 어떻게든 날 없애려는 마음을 먹고 있을걸?" 데이몬에 말에 크로비츠는 뜨끔했다. 내심이 정확히 들켜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니까 굳이 부인할 필요 없어. 게다가 걱정할 것은 없어. 난 은거해서 세상에 나오지 않을 생각이야. 앞으로 자네 주군 앞에 나타날 일은 없을 테니까." 데이몬은 쩔쩔매는 크로비츠를 두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슈렉하이머와 4대 기사를 소개할 차례가 되자 슬며시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성녀인 다프네가 어둠의 존재인 그들을 어떻게 생각할 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다프네는 밝은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말고도 절 아시는 분들이 또 있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하지만 슈렉하이머와 4대 기사들은 그녀가 다가선 만큼 뒤로 물러났다. 언데드인 탓에 다프네의 존재가 무척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이 녀석들이?" 데이몬의 얼굴이 굳어질 즈음, 슈렉하이머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오백 년만에 다시 뵙게 되는군요.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성녀님." "저 역시 대승정님을 다시 뵙게되어 반가워요." 다프네는 슈렉하이머에게 머뭇거림 없이 대승정이라 칭했다. 슈렉하이머의 눈구멍에서 기이한 빛이 일어났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데이몬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참 율리아나를 어떻게 소개한다?' 대원들을 하나하나 소개할 때 공교롭게도 율리아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을 떠올린 데이몬은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를 소개하는 것이 데이몬에게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지. 어차피 나에겐 다프네 밖에 없으니......' 두리번거리던 데이몬에 눈에 미첼의 뒤에 쪼그려 앉아있는 율리아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쉴 새 없이 어깨를 들썩이는 것을 보니 흐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심호흡을 크게 내쉰 데이몬은 그녀에게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이리 오너라, 율리아나. 너에게 다프네를 소개해 주겠다." 하지만 율리아나가 고개를 들자 데이몬은 초난감해졌다ㅡㅡㅋ.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분명 다프네를 향한 자신의 고백을 모두 들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녀의 심사가 고울 리가 없었다.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데이몬은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었다. "오백 년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내가 사랑을 얻었단다. 그러니 날 축하해 주지 않겠니?" 율리아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에는 전혀 초점이 잡혀 있지 않았다. 그저 공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프네를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갈 뿐이었다. 때마침 다프네도 율리아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다프네가 먼저 인사를 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제 이름은 다프네랍니다." 대답할 기력도 없었는지 율리아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프네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율리아나를 마주 쳐다보았다. 그러는 동안 대원들이 음성을 낮춰 수군대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용사들 역시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똑같이 생겼군. 눈, 코, 입 어디 하나 다른 곳이 없잖아?" "아냐. 분위기는 확실하게 달라. 율리아나에게서는 말괄량이 같은 당찬 분위기가 느껴지지만 성녀는 전혀 그렇지 않잖아? 마치 티없이 맑으며 순수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분위기는 정반대로 볼 수 있어." "쌍둥이라고 해도 뭐랄 사람이 없을 것 같군. 오백 년이란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말이야." 대원들이 수군대는 것을 듣고 있던 데이몬이 조용히 다프네에게 걸어갔다 어떻게 해서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둘 사이에 끼어든 데이몬은 손을 뻗어 두 소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데이몬은 먼저 다프네를 쳐다보았다. "다프네." "예, 아저씨." "그녀는 아저씨의 동료란다. 지금껏 우리들은 한 몸이 되어 수많은 일을 해결해 왔다."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데이몬은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동료라고 칭하는 순간 율리아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니 더욱 그랬다. 데이몬은 두려웠다. 자제심을 잃어버린 율리아나가 행여나 훼방을 놓을지도 몰랐다. 최악의 경우 자신이 가르쳐 준 칠종단금술의 강제발동 주문을 이 자리에서 읊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데이몬이 정녕 두려워하는 건 그것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 다프네가 조금이라도 상처를 받을까바 마음 졸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데이몬의 마음을 알았는지 율리아나가 얼굴을 폈다. 눈물을 훔친 그녀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요. 다프네라고 했나요?" 다프네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네." "제 이름은 율리아나예요. 설명 들으셨듯이 전 데이몬 영감탱이의......" 잠시 말을 끊고 데이몬을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절친한 동료랍니다. 말이 동료지 데이몬 영감탱이는 사실 동료가 아닌 골칫덩어리로 생각할 거예요." 퉁퉁 부운 얼굴로 익살을 떠는 율라아나의 모습에는 뭔가 비애가 짙게 서려 있었다. "설마 그럴 리가요?" "아니, 맞아요. 솔직히 사고뭉치인 제가 속을 좀 많이 썩혔지요. 그렇지 않아요, 영감탱이?" 율리아나는 농지거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무심코 대답하려던 데이몬은 멈칫했다.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에서 한없이 슬픔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데이몬은 조용히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비록 자신이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율리아나의 심사를 자극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했다. 데이몬은 조용히 다가가서 다프네를 부축했다. "안색을 보니 휴식을 좀 취해야 할 것 같구나. 동료들과 함께 뒷마무리를 할 동안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련?" "그럴 게요." 다프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데이몬이 소리쳐 크로비츠를 불렀다. "대장, 혹시 살아남은 마법사가 있소?" 크로비츠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몇 명 있습니다만 무슨 일로......" "슬 만한 마법사 한 명만 이리로 보내주시오. 적어도 6서클의 마스터 이상이어야 하오." "알겠습니다.." 잠시 후 데이몬은 도착한 마법사로 하여금 다프네를 치료하게 했다. 별다른 상처는 없었지만 연이은 충격으로 심신이 무척 허약해진 상태였다. "최대한 신경 써서 치료해야 하네." "아, 알겠습니다." 늙수그레한 마법사는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상대는 드래곤과 정신마법을 펼쳐 이긴 9서클의 마스터였다. 마법사에겐 한 마디로 전설과도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데이몬은 괜찮다는 다프네에게 우격다짐으로 마법사를 붙여 주었다. 눈짓을 하자 슈렉하이머와 4대 기사들은 다프네와 조금 떨어진 곳에 버티고 섰다. 목숨을 걸고 다프네를 지킬 기세였다. 그런 다음 데이몬은 크로비츠에게로 걸어갔다. 그는 뭔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다프네를 치료하는 마법사를 주시하고 있었다. '상태가 훨씬 심각한 부상자가 넘쳐나는 판국인데...... 제기랄, 자기가 익힌 마법은 뒀다가 국 끓여 먹으려고 하나?" 상황은 크로비츠가 충분히 애태울 만했다. 뼈가 부러지고 머리가 터진 기사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신음을 흘리는 상황이었다. 그가 지켜보는 중에도 중상을 입은 기사 하나가 절명하여 머리를 떨궜다. 모든 마법사들이 달라붙어 부상자를 치료하고 있는 상황에서 6서클의 마스터 하나를 빼내어 가니 크로비츠의 심사가 고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모르고 있는 한 가지가 있었다. 사실 데이몬은 다프네를 직접 치료할 수 없는 처지였다. 실력은 충분했지만 그는 마왕과 계약한 흑마법사. 어둠의 기운이 섞인 마나로 성녀를 치료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기에 부득이 치료를 백마법사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데이몬이 다가가서 크로비츠가 급히 얼굴을 폈다. 데이몬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불만이 많은가 보군." "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급히 손사래를 쳤지만 데이몬의 얼굴에 서린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해하게. 그녀는 나에게 있어 모든 것이나 다름없네 만약....." 데이몬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크로비츠를 쳐다보았다. "누군가가 다프네를 건드린다면 말일세....... 난 보복으로 범인이 속한 국가의 인간 모두를 죽여 버릴 생각이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말이야." 듣고 있던 크로비츠는 모골이 송연해 오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는 다프네를 볼모로 삼아 데이몬을 전쟁에 이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졌었다. 데이몬이 가진 파괴력은 그 정도로 강력했으니까. 하지만 적절한 때에 가해진 엄포로 말미암아 그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다급해진 크로비츠는 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데이몬과 마찬가지로 다프네 님 역시 공작 전하께는 최고의 귀빈이십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을 경우 제가 제일 먼저 범인에게 죄를 물을 것입니다." 그 말에 냉기가 풀풀 흐르던 데이몬의 표정이 확 풀려 버렸다. "그런가? 고맙군. 대장의 마음을 알았으니 그럼 베르키스 놈의 몰골이나 구경하러 가볼까?" "예." 크로비츠는 두 말 하지 않고 데이몬의 뒤를 따랐다. "같이 가요." 마룡 베르키스의 최후를 목격하려는 생각에 카심 용병단원들 역시 뒤에 따라 붙었다. 그들은 길게 늘어진 레드 드래곤의 동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베르키스의 몸은 희대의 마룡답지 않게 무척 아름다웠다. 붉은 비늘에 덮인 동체에서는 강인한 힘이 느껴졌고, 우아한 몸의 곡선은 마치 드워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작품을 연상시켰다. "죽은 것입니까?" "죽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깨어날 수 없으니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지." "이것을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데이몬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떻게 해야 완벽히 망가뜨릴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영이 사라지고 육신만 남았지만 그래도 데이몬은 베르키스를 용서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베르키스에 대한 원한은 그 정도로 지대했다. 몸을 갈기갈기 찢은 뒤 광장에 넓게 펼쳐놓아 오가는 사람에게 마구 짓밟히게 만들어도 한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생각을 거듭하던 데이몬이 심호흡을 했다. "일단 이것을 이곳에서 옮겨야겠다.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요리할 생각이니 서두를 필요가 없지." "인크레시아 넣어 가실 생각이십니까?" 카심의 질문에 데이몬이 고개를 흔들었다. "생명체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인크레시아에 집어넣을 수 없다." "조금 전에 시체나 다름없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 않다. 움직일 순 없지만 심장은 뛰지 않느냐? 생명체를 인크레시아에 넣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조그마한 움직임이 있어도 인크레시아는 그것을 수납할 수 없다. "그렇군요." 카심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놈을 숨이 붙어 있는 상태로 옮길 생각이다." 그 말을 들은 크로비츠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모르긴 몰라도 데이몬의 말대로 라면 거대한 레드 드래곤의 동체를 살아 남은 기사들이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이몬과 시선이 마주치자 크로비츠의 얼굴에 떠오른 불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내심을 읽었다는 듯 데이몬이 실소를 머금었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 부하들을 혹사시킬 생각이 없으니까. 나에겐 이것을 옮길 훌륭한 일꾼이 있지." 말을 마친 데이몬이 고개를 돌렸다. 난데없이 그쪽에서 묵직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기이잉 쿵 지축을 울리며 다가오는 것은 거대한 아이언 골렘이었다. 신장이 육 미터가 넘는 아이언 골렘이 위압적인 기세를 풍기며 다가오자 기사들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져 버렸다. 아이언 골렘은 존재감 자체만으로 엄청난 공포를 안겨주는 괴물이었다. 위압감을 견디지 못한 크로비츠가 검을 뽑아들었다. 챵 멍하니 아이언 골렘을 주시하고 있던 카심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호, 혹시 아이언 골렘을 손에 넣으신 겁니까?" "맞아. 베르키스란 놈에게 워낙 당했으니 뭐라도 하나 건저야 겠더군. 그래서 저놈을 내 것으로 만들었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카심은 입을 딱 벌렸다. 아이언 골렘이라면 4대 기사에도 능히 맞서 싸울 수 있는 전력이었다. 데이몬이 보유한 힘은 이제 어지간한 국가를 능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음만 먹는다면 일개 국가를 멸망시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쨍그렁 크로비츠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핏기가 사라진 그의 얼굴은 마치 백짓장 같았다. '이, 이건 악몽이야.' 재미있다는 듯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이 고개를 돌려 아이언 골렘을 쳐다보았다. "네 옛 주인의 육신을 대하는 소감이 어떤가?" 탄타로스의 대답은 오직 데이몬에게만 전해질뿐이었다. -제게 주인은 오직 한 분뿐입니다.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은 탄타로스에게 머뭇거림 없이 명령을 내렸다. "이것을 옮길 준비를 하라. 먼 거리를 가야 하니 들것을 만들어 싣고 가는 것이 낫겠군. 지금 즉시 행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탄타로스는 즉시 가까운 산 쪽으로 몸을 날렸다. 엄청난 거구가 마치 바람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기사들은 질린 듯한 표정으로 아이언 골렘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빙긋이 미소를 지은 데이몬이 크로비츠를 쳐다보았다. "시신의 운반은 저 녀석에게 맡기게. 힘이 좋은 녀석이니 크게 걱정할 것은 없을 거야." "아, 알겠습니다." 전사자와 부상자 처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피해는 상상외로 컸다. 전원이 팔라딘 이상으로 구성된 용사 사백 명이 왔지만 생존자는 부상자를 합쳐 오십여 명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모조리 노스우드 평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죽은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기사들의 얼굴에는 살아남았다는 희열과 함께 씁쓸함이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료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이곳은 영혼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죽음의 절지. 죽은 동료들의 영혼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이곳을 영원히 배회해야 할 터였다. 키심 용병단원들 역시 그 속에 끼여 일손을 거들고 있었다. 예외적으로 카심 용병단에서는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데이몬이 그들의 안전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피해가 워낙 컸기 때문에 기들도 마음이 무겁긴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오래지 않아 무거움을 떨쳐버릴 수 있을 터였다. 1차 용사단과는 달리 그들은 임무를 훌륭히 완수했다. 희대의 마룡 베르키스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고, 패전을 거듭하는 오크 족은 더 이상 인간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때문에 용사들의 가슴속에는 자부심과 함께 전쟁에서이길 수 있다는 희열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이언 골렘은 베어온 나무를 이용해서 들것을 만드는 작업에 열중해 있었다 나무를 가지런히 늘어놓자 기사들이 가죽끈을 이용해 그것을 엮었다. 오래지 않아 뗏목 형태로 만들어진 들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들것이 완성되자 아이언 골렘이 베르키스에게로 다가갔다. 크아앗 힘을 주자 에인션트급 레드 드래곤의 거대한 동체가 번쩍 들려 졌다. 한때 주인의 몸이었지만 아이언 골렘은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은 듯 무감각하게 베르키스의 몸을 들 것 위로 옮겼다. 기사들이 가죽끈으로 베르키스의 몸을 들것에 고정시키는 것을 본 데이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는가?' 베르키스를 싣고 난 뒤 남은 공간에는 전사자의 시신과 가들이 사용했던 병기가 실릴 터 였다. 무게가 만만치 않았지만 탄타로스에게 충분히 그것을 끌고 갈 능력이 있다. 마무리가 거의 끝난 것을 확인 데이몬은 다프네에게로 걸어갔다. 얼굴에 모호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이젠 녀석들과 헤어질 시간이군.' 데이몬은 여기서 대원들과 헤어지려 하고 있었다. 우연찮게 만났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한 몸이 되어 많은 일들을 해냈다. 하지만 그들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내는 것이 좋으리라. 데이몬은 다프네만을 데리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사라질 생각이었다. '앞으로 녀석들을 만날 일이 거의 없겠군.' 헤어지기로 마음먹었지만 데이몬은 마음이 비교적 가벼운 편이었다. 대원들에게 각자 몸을 의탁할 만한 곳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여기서 용병단을 해체한다면 카심은 아르네로 돌아갈 터였다. 그곳에는 사랑스런 아내 마틸다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미첼은 펜슬럿 근위기사의 자격으로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일루마나의 용모는 미첼을 돋보이게 하는 데 추호도 모자람이 없었다. 제럴드와 하인리히 역시 듀크 나이츠라는 쟁쟁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 패터슨과 잭슨만은 아직까지 갈 곳이 없었지만 데이몬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팔라딘이라는 실력을 감안할 때 그들이 몸을 담을 만한 곳은 널려있을 터였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전혀 없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율리아나는 어떻게 하지?' 그녀를 떠올리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러나 데이몬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다프네를 구한 상황에서 그녀마저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잘 설득해서 고향인 카르셀로 돌려보내야겠군.' 마음을 정리한 데이몬은 다프네가 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곳에서 대원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결정을 밝힐 생각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의 생각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어긋나고 있었다. 3. 성녀의 선택 "그. 그게 무슨 소리지?" 경악으로 인해 데이몬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다프네가 내뱉은 한 마디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아저씨. 전 아저씨를 따라갈 수 없어요." 다프네의 얼굴에는 서글픈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데이몬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농담이지? 그렇지?" "........" "날 놀리지 말거라. 아저씨에게 제발 농담이라고 말해주렴?" 다프네는 절박함이 감도는 데이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잠시 후 결심을 굳힌 다프네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제겐 가야할 길이 있어요. 저 역시 아저씨와 함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프답니다." 데이몬은 여전히 현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누구냐? 도대체 누가 널 힘들게 하는 거지? 말해라. 내가 한 방에 박살을 내 놓으마." 다프네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가 흑마법사이기 때문이냐?" "........."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네가 바란다면 흑마법을 버릴 용의가 있다. 아니, 반드시 버리겠다. 네 옆에 머무르기 위해서 난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 "........." "너도 나와 함께 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니? 난 그 말을 지금껏 단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다프네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럴수록 데이몬의 마음은 더욱 타 들어가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기 위해 데이몬은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도무지 어찌 해야 할지를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제가 누군지 아저씨는 잘 알고 계실 거예요." 데이몬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정확히 말해 전 세상에 존재하는 베르하젤님의 눈과 입이랍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이미 인간계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제가 이곳에서 할 일이 모두 끝났다는 뜻이지요." "그럼 더 잘 되지 않았느냐? 나와 함께 이곳에 살자꾸나. 응?" "그럴 수 없습니다. 전 베르하젤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 말을 듣자 데이몬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다프네는 처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돌이 되어 있는 동안 전 하루도 빠짐없이 꿈을 꾸었답니다. 베르하젤님은 그 꿈을 통해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지요. 아울러 제가해야 할 바에 대해서도 말이에요." "........" "그분께서는 저에게 품으로 돌아올 것을 명하셨습니다." "가지 말아라. 다프네." 충격으로 인해 데이몬의 얼굴은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었다. "제발 부탁이다. 내 옆에 남아다오." "그럴 순 없어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젓는 다프네를 보자 데이몬은 애가 탔다. "베르하젤이 겁나느냐? 그의 보복이 두려운 것이냐?" "........" 말문을 잃은 다프네를 보며 데이몬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주먹을 불끈 거머쥔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얼굴에서 살기가 맹렬히 피어났다. "그렇다면 베르하젤을 없애주마. 이미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베르키스까지 쓰러뜨린 나다. 창조주 베르하젤이라고 해서 감당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지 마세요, 아저씨." 다프네가 조용히 데이몬을 불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알지 못할 슬픔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저씨가 하신 말씀이 떠오르는 군요. 그때 아저씬 제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준다고 하셨죠?" "물론이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네 소원만은 들어주겠다." 데이몬은 필사적으로 다프네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을 듣자 데이몬은 말문이 콱 막혀버렸다. "그렇다면 절 보내주세요. 전 베르하젤님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저, 정녕......" 데이문의 얼굴근육이 푸들푸들 떨렸다. 그가 심적으로 어떠한 충격을 받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마음을 굳힌 데이몬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순 없다. 모든 것을 들어줄 수 있지만 그것만은 예외다." "제발 부탁이에요, 아저씨." 데이몬은 핏발 선 눈동자로 다프네를 응시했다. 가늘게 떨리는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설마 내가 싫어진 거니? 마음이 변한거야? 그런~거야~ㅡㅡ?" "........" "하지만 상관없다 네 곁에 머물 수 있다면 그 어떤 대가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 데이몬은 굳은 표정으로 다프네를 향해 다가갔다. 모여 있던 대원들은 데이몬의 기세에 눌려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손을 뻗어 다프네의 양어깨를 감싸 쥔 데이몬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넌 내 것이다. 그 누구도 나에게서 널 빼앗아가지 못한다." "하지만........" "네가 말했지?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고. 나도 그 사실을 알지만 어쩔 수 없구나. 널 기필코 내 곁에 두어야겠다." 그 말을 듣자 다프네의 얼굴에 한 줄기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물을 본 데이몬은 못 견디게 가슴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다프네의 슬픔은 몇 배로 증폭되어 데이몬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떠나보낼 수 없었기에 데이몬은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울먹이는 다프네의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아저씨께서 처음으로 절 슬프게 하시는군요." 가슴이 저려왔지만 데이몬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버텨냈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프네의 말은 그의 가슴에 여지없이 못을 박아 버렸다. "전 오백 년 동안 드래곤 로드에게 잡혀 있었어요. 그런데 아저씨마저 또 다시 절 잡아 놓으려 하시는 건가요?" "다, 다프네....." 데이몬은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마치 모닝스타에 정통으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뭐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쉽사리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다프네는 데이몬의 눈을 올려다보며 또박또박 내뱉었다. "행복하길 바라신다면 절 보내주세요. 전 반드시 베르하젤님께 돌아가야 해요." "......."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 저 역시 베르하젤님의 품을 떠나 살 수 없어요." 그 말에 데이몬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녀를 더 이상 강압적으로 밀어붙일 수 없었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처지를 떠올려 보았다. 자신은 마음에게 영혼 판 흑마법사, 반면 다프네는 창조주의 눈과 입 역할을 하는 성녀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임에는 틀림없었다. 데이몬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동자에는 공허함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극복할 수 있다고 여겼건만.......' 귓전을 통해 다프네의 음성이 계속 전해졌다. "아저씨 곁에 남아 있게 되면 전 결코 행복할 수 없어요." 다프네의 말이 이어질수록 데이몬은 가슴에 못이 박히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발작이라도 하듯 고개를 쳐들었다. 눈시울이 뜨겁게 젖어 있었다. "함께 가면 안 되겠느냐?" "........" "네 옆을 떠나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다." 다프네의 얼굴에서도 어느덧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아저씨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 데이몬은 절망했다. 그녀를 더 이상 붙잡아 둘 자신이 없음에. 강제로 붙잡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데이몬은 모든 것에 앞서 다프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그녀의 눈에서 더 이상 눈물이 흐르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그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데이몬은 다프네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직시했다. 꽉 메인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토록 가고 싶으냐?" "네." 머뭇거림 없이 대답하는 다프네의 모습에 데이몬은 또다시 소리 없이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그를 지탱해 주었던 삶의 의미가 눈앞에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알겠다. 네가 더 이상 눈물 흘리는 것을 볼 수 가 없구나." 데이몬은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무력감이 전신을 감돌았고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생에 대한 의욕은 이미 저 만치 사라진 다음이었다.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가 품속을 파고들었다. "고마워요, 아저씨는 역시 좋은 분이세요." 데이몬은 품속을 파고든 다프네의 어깨를 조용히 감싸 안았다. 떠나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데이몬은 속에 없는 말을 늘어놓아야 했다. "잘 가거라. 어디에 있든 난 너의 행복만을 기원하겠다." 다프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몬의 품에서 몸을 뺀 그녀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럼 저 갈게요." "잠깐." 다프네의 발걸음이 딱 멈췄다. 데이몬은 간절한 눈빛으로 다프네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갈망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내가 널 배웅해 주마" 잠시 망설이던 다프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데이몬의 얼굴에 희망이 빛이 떠올랐다.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곁에 두고 싶은 것이 그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몸을 돌리 다프네는 대원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대원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엉거주춤한 기색으로 인사를 받아들일 뿐이었다. 데이몬의 심정을 느꼈는지 하나같이 얼굴이 굳어 있었다. 오백 년만에 이루어진 사랑이 이토록 허무하게 깨어질 줄 그 누가 짐작이라도 했으랴. 다프네는 그런 대원들에게 하나 하나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 인사를 받아들이는 대원은 아무도 없었다. 데이몬의 마음이 어떤지 알고 있는지라 그들에겐 다프네가 한없이 야속하기만 했다. 오직 율리아나만이 다프네의 인사에 밝게 웃으면 답할 뿐이다. "잘 가요, 다프네." 데이몬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인해 그녀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정말 고마워요.' 율리아나는 뒷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지어준 다프네가 몸을 돌렸다. 신전 중심부를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뒤를 데이몬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저벅버적 걸어가면서도 둘은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둘의 모습은 오래 않아 일행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여기저기서 침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떠나버리다니......" "기분이 정말 착잡하군요. 오백 년 동안 기다려온 사랑이 이렇게 끝나다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미첼이 뭔가 생각이 난 듯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일루미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첼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당황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미, 미첼......." 빠져나오려고 버둥거리는 일루미나의 귓전으로 미첼의 속삭임이 흘러 들어왔다. "일루미나, 당신은 날 떠나지 말아요, 만약 그랬다간......" "........" "죽어버릴 테니까......" 미첼의 품에 안긴 일루미나는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그런 미첼이 결코 싫지는 않았다 일족을 떠나온 뒤 일루미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뭔지 서서히 알아가고 있었다. 잠시 후 카심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데이몬이 돌아오면 가급적 말을 걸지 말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라. 아마도 그는 혼자 있고 싶을 것이다." 한 번 헤어져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카심은 이별의 아픔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에 일행은 숙연해졌다. 말을 하진 않았지만 데이몬의 슬픔을 나눠 갖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또한 데이몬을 저버리고 떠난 다프네에 대한 분노가 새록새록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율리아나의 얼굴에는 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전장의 정리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용사들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데이몬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이 내려졌기에. 베르하젤의 신전 중심부에 위치한 넓은 홀. 과거에는 수많은 신자들이 모요 북적대었을 곳이었지만 지금은 황량함만이 감돌고 있었다. 형편없이 허물어진 상태로 비바람에 풍화된 구조물들에서는 괴기스러움마저 느껴졌다. 데이몬은 홀 한복판에 서서 한쪽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듯한 눈빛,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이 쉴 새 없이 들썩였지만 데이몬은 입 밖으로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오직 공허한 부르짖음만이 입속을 맴돌 뿐이었다. '제발 가지 말아라, 다프네.' 그의 앞에는 다프네가 두 손을 맞잡은 상태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살포시 눈감은 얼굴에는 평온함과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마치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그녀의 행복한 표정. 보고 있는 데이몬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느꼈다. '정녕 떠나는 건가?' 가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을 보니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소리 없이 눈물을 삼키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볼밖에. 조용히 기도하던 다프네가 눈을 떴다. 그리고 처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저씨, 그럼 안녕히......" 그 말은 들은 데이몬이 눈을 크게 떴을 때 눈부신 광휘가 다프네의 전신을 휘감았다. 천상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빛이었다. "다, 다프네......" 데이몬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콱 그러쥔 주먹에서 핏물이 배어 났지만 그는 통증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파파파팟 다프네를 휘감은 천상의 광휘는 점점 세력을 넓혀나갔다. 어둠의 존재와는 상극인 속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광휘에 접하자 데이몬은 심각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통증을 꾹 눌러 참으며 다프네의 모습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광휘는 데이몬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범위까지 퍼져나갔다. "크윽" 결국 견디지 못한 데이몬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타격이 만만치 않아 입가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눈부시게 빛나는 광휘로 말미암아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다프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담기 위해 데이몬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강렬한 자극에 동공의 실핏줄이 터져 혈안이 되어버렸지만 데이몬은 아랑곳없다는 듯 광휘 속에 쏘아보았다. 다프네와 자신을 갈라놓은 광휘가 미워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데이몬이 쏘아보고 있는 사이 광휘가 서서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퍽 마치 단말마의 비명처럼 강렬한 빛을 마지막 내쏜 뒤 광휘는 사라져버렸다. 빛 무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다프네의 가녀린 몸이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다, 다프네." 데이몬은 정신없이 다프네를 향해 뛰어갔다 한달음에 달려가 그녀의 몸을 안아 일으켰지만 그녀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다.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한 데이몬이 다급히 팔목을 거머쥐었지만 맥도 뛰지 않았다.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만이 데이몬의 곁에 남아버린 것이다. 서서히 식어 가는 다프네의 몸을 안은 채 데이몬은 야수처럼 울부짖었다. "으아아아!" 절규는 계속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았을 때도 울지 않았던 데이몬. 하지만 그는 지금 한 여인 때문에 이성을 잃고 있었다. 다프네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데이몬에겐 그의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상태로 데이몬은 계속해서 울부짖었다. 기력이 빠져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털썩 절규를 멈추고 그 자리에 주저앉은 데이몬은 공허한 시선을 들어 하늘 올려다보았다. 삶에 대한 욕구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다음이었다. 삶에 대한 욕구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다음이었다. 맥 빠진 듯한 음성이 갈라터진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이젠 다프네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하겠군. 어둠의 존재인 내가 감히 천상으로 갈 순 없으니까." 그때 벼락같은 음성이 뇌리를 관통했다. -방법이 없진 않다 데이몬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주변에 자신에게 말을 걸 만한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는데 예의 그 음성이 또다시 들려왔다. -천상의 방어가 만만치 않기는 하지만 난공불락의 절지는 아니다. 쓸만한 부하들을 끌어 모은다면 한바탕 분탕질치는 것은 가능하다. 물론 곧이어 이어질 천족들의 반격을 걱정해야겠지만...... 데이몬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웬 놈이냐?" -버르장머리없는 놈이로군. 감히 주인에게 그따위 망발을........ 분기충천한 음성이 들려왔다. 돌연 아랫배에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데이몬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크으으" 고통으로 혼미해진 데이몬의 뇌리로 기괴한 목소리가 계속 전해지고 있었다. -기다림이 꽤나 길었군. 하지만 그 대가로 많은 것을 얻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드래곤을 상대할 해법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나에겐 충분히 만족할 만한 시간이었다. 데이몬은 억지로 통증을 눌러 참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너, 넌 누구지?" -나? 누구일 것 같나? 무척 재미있는 문제이지 않나?" "잔말 말고 정체를 밝혀라!" -이미 밝히지 않았나? 네놈의 주인이라고. 순간 데이몬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최근 자신에게 나타난 이상함과 베르키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그것을 떠올려 본 데이몬은 등골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설마 나이델하르크?" -생각보다 똑똑하군. 데이몬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해할 수 없다. 내가 계약한 마왕은 케루빔이다. 그런데 어째서......" -멍청하기는. 케루빔은 나의 충실한 부하다. 수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만큼 너 역시 나의 종복일 수밖에 없다. "인정할 수 없다." 세차게 고개를 뒤흔들었지만 음성의 주인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머지않아 케루빔을 만나게 될 것이다. 게덴하이드가 모종의 장소에서 그를 인간계로 소환하는 의식을 치르고 있으니 말이다.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게덴하이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클클클. 베르키스란 놈이 나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장난질을 좀 쳤지. 수족으로 삼았던 게덴하이드까지 풀어주었으니 말이야. 최후의 순간에 자신의 몸까지 바쳤으니 놀라운 일이지. 드래곤의 육체라서 조금 탐나기는 하지만 놈이 나에게 한 짓을 생각하니 별로 갖고 싶은 생각이 없군. 무엇보다도 내 계획을 실현시키는 데는 네 육체가 드래곤보다도 훨씬 적합하다. "그, 그래서 게덴하이드를 위시한 리치들이 최후의 결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건가?" -그렇다. 난 베르키스에게서 풀려난 게덴하이드에게 케루빔을 소환하라는 명을 내렸다. 아마 지금쯤이면 인간계로 소환되어 있을 것이다. 데이몬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려했던 일이 마침내 닥친 것이다. 사력을 다해 정신을 다잡은 데이몬이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넌 언제 깨어난 건가?" -무슨 뜻이지? 인상을 구긴 데이몬이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 "베르키스가 널 깨웠나보군. 빌어먹을 자식.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는군." - 네말은 틀렸다. 베르키스 녀석이 날 깨우기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 이미 오래 전에 깨어나 네 녀석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비로소 데이몬은 지난 일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유 모를 살심은 바로 나이델하르크의 장난질이었던 것이다. -아르카디아에서 네 녀석이 베르키스 놈과 싸운 뒤 혼절했을 때 난 깨어났다. 그때서야 놈의 봉인에서 자유로워진 것이지. "그렇다면 왜 진작 나타나지 않았지? 무얼 바라고 기다린건가?" -난 그 동안 네놈의 행동을 계속 관찰해 왔다. 네 녀석이 쓰는 전략이 꽤나 쓸만하더구나. 인간의 몸으로 데스 나이트를 진두지휘하여 드래곤을 셋이나 처리하다니 말이야. 아니, 베르키스까지 처치했으니 모두 넷인가? 아무튼 네놈에게서 배울 것이 많을 것 같아 지금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데이몬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결국 난 네놈의 의도대로 움직인 셈이군. 쓸모가 없어졌으니 이제 날 소멸시킬 생각인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나와 하나가 되는 것이지. 어둠의 계약을 마친 이상 넌 그것을 회피할 수 없다. 어둠의 마력이 점점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기이한 기운이 스멀거리며 피어올라 몸을 장악해 가기 시작했다. 데이몬의 얼굴에 절멍이 어렸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 동안 수고했다. 잘 가거라 몸이 서서히 마비되는 것을 느낀 데이몬이 최후의 발악인 양 고함을 내질렀다. "하늘이시여, 너무 가혹하시오. 나에게서 다프네를 빼앗아간것도 모자라 이젠 영혼마저 빼앗아가려는 것이오? ㅠㅠ" 하지만 빌어먹을 하늘은 대답하지 않았다. 부르짖음을 끝으로 데이몬의 의식은 어둠의 구렁텅이로 내동댕이쳐졌다. 이후로 남은 것은 끝없는 암흑뿐이었다. 데이몬이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던 미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지 않나?" "글세?" "고함소리 같기도 한데, 거리가 멀어서 알아듣지 못했어." 대원들은 조바심을 억누르며 데이몬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게 기다리길 한참여. 마침내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전의 벽 사이로 걸어나온 그림자가 일행을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왔다. "왔다." 일행은 서둘러 데이몬을 마중할 채비를 했다. 모습을 드러낸 그는 조용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카심이 서둘러 그를 마중 나갔다. "오셨군요, 데이몬." 카심을 힐끔 쳐다본 데이몬이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쪽에는 슈렉하이머와 4대 기사들이 서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마치 데이몬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데이몬의 눈동자에 기이한 광망이 떠오르자 그들의 몸에서 일어나는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데이몬은 그들을 향해 느릿하게 손짓을 했다. "오라." 그들은 두말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데이몬 앞에 도착한 4대 기사들은 공손히 예를 올렸다. 지금껏 데이몬에게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공손한 태도였다. 한쪽 무릎을 꿇은 상태로 양손을 모아 검을 곧추세운 데스 나이트들은 깊숙히 머리를 조아렸다. 포탈에서 거둔 데스 나이트들중 살아남은 둘도 4대 기사와 마찬가지로 예를 취하고 있었다. 그것은 슈렉하이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마치 독실한 신자가 지상에 현신한 신을 대할 때처럼 열과 성의를 다해 예를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대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리지?" 저들은 지금껏 데이몬에게 저런 태도를 취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그들과 데이몬과의 관계는 주종관계가 아니라 거의 동료사이에 가까웠기에 대원들은 돌변한 데스 나이트들의 태도를 기이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을 쳐다보고 있던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드디어 때가 되었군." 그는 몸을 빙글 돌렸다. 예를 마친 데스 나이트들은 날렵한 동작으로 몸을 날려 데이몬 뒤에 시립했다. 이맛살을 찌푸린 카심이 데이몬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괜찮으십니까, 데이몬?" 데이몬의 시선이 카심에게 와서 닿았다. 안광을 접한 순간 카심은 신음을 흘리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데이몬의 눈동자에 범접하기 힘든 기이한 힘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뭐가 말인가?" 잠시 망설이던 카심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해서든 데이몬을 달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축복은 망각입니다. 비록 지금은 힘드시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녀가 떠난 빈자리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데이몬에겐 저희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힘내십시오."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그러니까 자넨 지금 나를 걱정해 주는 건가?" "그 그렇다기보다는....." 데이몬은 어이가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그까짓 멍청한 계집아이 하나 때문에 힘들어 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네. 날 거부하고 베르하젤을 택한 계집아이 따위는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이니 걱정하지 말게." 카심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데이몬의 태도가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다. 조금 전에 처절했던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다프네 님이 떠난 충격이 상상외로 컸나?' 데이몬은 머리속으로 온갖 상상을 하고 있는 카심을 보고 히쭉 웃었다. "왜? 놀랐느냐?" "솔직히...... 그렇습니다." "후후후. 원래 생각이란 변하기 마련이지." 그때 크로비츠가 데이몬에게 다가왔다. 빨리 돌아가고 싶었는지 얼굴엔 조바심이 어려 있었다.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데이몬. 어두워지기 전에 출발을 서두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페르슈타인 전하께서 눈이 빠지도록 일의 경과를 기다리실 겁니다." 하지만 데이몬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잠깐 기다리시오, 크로비츠경. 아직까지 할 일이 남아 있소." "네? 무슨 일이 남아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데이몬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베르키스를 처치하긴 했지만 아직까지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오. 오크가 남아있는 이상 우린 앞으로도 많은 전쟁을 치러야 하오. 그렇지 않소?" "그, 그렇습니다만." 데이몬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한 크로비츠는 그저 눈알만 데룩데룩 굴릴 뿐이었다. 데이몬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이곳은 죽음의 절지인 노스우드 평원. 대장도 알다시피 이곳에 죽은 영혼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지." 그 말에 크로비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죽은 기사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이다. 하지만 크로비츠에겐 그들의 영혼을 구원해 줄 능력이 없었다. 애만 태우고 있는 그에게 데이몬이 귀에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죽은 기사들의 영혼을 이곳에서 빼낼 수 있는 방법이 있소." "저, 정말입니까?" 크로비츠는 깜짝 놀라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데이몬의 얼굴에는 모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대장이 한번 판단해 보시오. 내 제안대로 한다면 죽은 기사들의 영혼을 이곳에서 데리고 나갈 수 있을뿐더러 오크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강력한 전사들을 얻을 수 있소." "도대체 어떤 방법이기에.....?" 데이몬은 느릿하게 몸을 돌려 시립해 있는 데스 나이트들을 가리켰다. "간단하오. 그들의 영혼으로 데스 나이트를 탄생시키는 것이지." 대답을 들은 크로비츠는 깜짝 놀랐다. 설마 데이몬이 그런 제안을 해올 줄은 몰랐다. 예상대로 그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죽은 기사들의 영혼을 모독할 수는 없으니까요." "어째서 영혼이 모독당한다고 생각하시오? 어차피 그들의 영혼은 영원히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세상의 끝날 때까지 방황해야 할 처지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데스 나이트로 만들어서 생전에 못 다한 충성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 "데스 나이트들의 위력이 어떤지는 대장도 겪어 보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데이몬은 은근한 어조로 크로비츠를 설득해 나갔다. "전쟁이 이 상태로 지속되면 오크는 분명 뿔뿔이 흩어져 유격전을 벌일 터. 놈들은 유격전에 탁월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종족이오. 상황이 그렇게 전개되면 정벌군도 쉽사리 승기를 잡을 수 없지. 하지만 오크 토벌에 최고 정예인 데스 나이트들을 투입시킨다면 어떻겠소?" 크로비츠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몬의 말에 충분히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데스 나이트들로 구성된 부대가 투입되면 오크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할 것이오. 놈들에겐 말 그대로 최악의 재앙이 닥치는 것이지." "하지만 그래도....." "데스 나이트는 결코 강압적인 방법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오." 데이몬은 다시 손가락을 뻗어 베르키스 옆에 실려 있는 사망자들의 시신을 가리켰다. "데스 나이트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반드시 죽은 영혼들의 동의가 필요하오. 기사들의 영혼이 동의하지 않으면 데스 나이트를 만드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오. 수백 명의 네크로맨서가 달라붙는다고 해도 이루어지지 않소. 내 생각은 이렇소 죽은 기사들에게 의향을 직접 물어보는 것이오. 그들 중 데스 나이트가 되어 충성을 이어가고 싶은 영혼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것이지. 어떻소?" 크로비츠는 침묵을 지켰다. 쉴 새 없이 눈동자를 굴리는 것을 보아 심각한 고뇌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데이몬은 크로비츠의 마음을 잘 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우선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염두에 두어야 하오. 만약 드래곤들이 약속을 저버린다면..... 조약을 깨고 정벌군을 공격해 온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이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을 적대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그들은 오백 년 전 트루베니아의 인간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전례가 있소. 드래곤들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지 않으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소." 데이몬은 손가락을 뻗어 이번에는 베르키스의 시신을 가리켰다. "드리곤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옛말이오. 베르키스만 해도 지금껏 헤아릴 수 없는 거짓말을 하며 인간들을 농락해왔소. 그 사실은 대장도 잘 알고 있지 않소?" "......." "드래곤에 대한 대비는 기회가 있을 때 미리 해 두어야 하오." 크로비츠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데이몬의 말대로 드래곤은 항상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데이몬께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말씀해 보시오." "이곳에서 데스 나이트를 몇이나 만드실 수 있겠습니까? 데이몬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데스 나이트를 만드는 데에는 변수가 무척 많소. 가장 중요한 것은 계약에 동의한 영혼의 숫자요. 또한 동원할 수 있는 어둠의 마력 역시 없어서는 안 될 요인이지. 지금 나의 몸 상태를 감안할 때는 잘 모르지만 열 명 정도는 가능할 것 같소." 그 말을 들은 크로비츠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숫자라면 그리 큰 위협거리는 되지 못했다. 이미 데이몬은 그 정도는 가볍게 눌러버릴 전력을 보유한 상태였다. 4대 기사도 그랬고 아이언 골렘 역시 마찬가지 였다. "알겠습니다. 데이몬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탁월한 판단이오. 그럼 난 지금부터 작업에 들어가겠소."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이 몸을 돌렸다. "이곳에서 기다리시오. 혹시라도 어둠에 마력에 영향을 받을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데이몬의 시선이 카심 용병단원들에게로 향했다. "너희들도 여기서 기다리거라.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예, 데이몬." 데이몬은 평원의 중심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소환에 필요한 마법진을 그리기 위해서는 넓은 공간이 필수였다. 크로비츠는 다소 불안한 눈초리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설마 다른 마음을 먹진 않았겠지? 그럴 사람 같지는 않지만 속마음이란 아무도 모르니...... 아무튼 경계해야 할 위험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용사들과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데이몬은 두 손을 마주잡았다. 그 몸 부근으로 방대한 마나의 파동이 일어났다. 영혼을 불러들이기 위해 마나를 재배열하는 모양이었다. 번쩍 마주잡은 데이몬의 손에서 느닷없이 빛무리가 일어났다. 소름끼치는 빛은 점점 세력을 불려나갔다. 보고 있던 기사들의 오금이 저릴 정도로 끔직한 느낌을 주는 빛 무리였다. 잠시 후 빛 무리는 데이몬의 몸을 축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콰콰콰콰 빛이 퍼져나가는 순간 용사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눈을 감아야 했다. 강렬한 빛이 동공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통증으로 인해 용사들은 한참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빛은 눈을 감은 기사들의 몸을 휘감으며 노스우드 평원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빛의 발산은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다. 용사들은 눈을 꼭 감은 상태로 소환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크로비츠를 비롯한 카심 용병단원의 머릿속엔 한 가지 의문점이 모락모락 자라나고 있었다. '이상하군. 데이몬의 몸 상태가 이렇게 좋았나? 베르키스와의 싸움에서 체력을 모두 소진한 줄 알았는데......' 데이몬은 베르키스와 어우러져 엄청난 혈투를 치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 달을 꼬박 누워있어야 겨우 회복될 정도였다. 하지만 데이몬의 모습에서 피로감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기사들은 데이몬을 초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빛이 잦아드는 것을 느낀 카심이 슬며시 눈을 떴다 "헉." 순간 그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데이몬 주변에 벌어진 일을 보고 난 뒤의 일이었다. 그를 시발점으로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크로비츠마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데이몬 주변을 쏘아보고 있었다. 4. 대마왕의 부활 "후후후." 데이몬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의 옆에는 헤아릴 수 없는 그림자들이 검 손잡이를 움켜쥔 채 도열해 있었다. 검은색 일색의 투구와 갑옷. 가슴팍에 아로새겨진 마왕의 문장. 투구의 얼굴가리개 사이로 뿜어지는 소름끼치는 빛은 그들이 데스 나이트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생겨난 데스 나이트의 숫자는 엄청났다. 일견해도 백을 훌쩍 넘어 보이는 데스 나이트 군단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채 데이몬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손을 들자 4대 기사와 슈렉하이머가 조용히 다가가서 데스 나이트들의 앞 열에 자리 잡았다. "어둠의 마력이 모자라서 많이 소환하지 못했군. 하지만 저것들을 상대하는 데는 이 정도도 충분하지." 혼잣말을 내뱉은 데이몬이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데스 나이트 군단이 질서정연하게 뒤따랐다. 철컹 철컹 백 명이 넘는 데스 나이트들이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발자국 소리와 갑옷 소리는 마치 한 명이 움직이는 것처럼 동일하게 들렸다. 용사들은 얼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데이몬을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크로비츠의 얼떨떨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뭐가 말인가?" "어떻게 해서 이토록 많은 데스 나이트들이......?" 데이몬은 빙그레 웃으며 크로비츠의 눈빛을 받아넘겼다. "이곳의 영혼들은 드래곤에 대해 엄청난 적개심을 품고 있더군. 베르키스덕분이지. 영혼들 대부분이 베르키스로 말미암아 처참한 죽음을 당했으니 말일세. 드래곤을 상대로 복수할 수 있게 해 준다고 하니 이들은 두말하지 않고 데스 나이트가 되겠다고 나섰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크로비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데이몬의 뒷말이 비로소 귀에 들어온 것이다. "드래곤을 상대로 싸운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일세. 난 이들을 이용해서 트루베니아와 아르카디아 양 대륙의 드래곤들을 모두 사냥할 생각일세. 단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그 말을 들은 용사들은 전산에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을 느꼈다. 드래곤의 씨를 말리겠다고 공언하는 인간이 세상에 출현한 것이다. 말은 쉽지만 그것은 결코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드래곤들은 기울어져가는 전황을 하루아침에 바꾸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종족이었다. 그들의 파괴력은 그 정도로 뛰어났다. 데이몬이 보유한 전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승산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므로 기사들은 하나같이 데이몬의 장담을 만용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크로비츠가 굳은 표정으로 한발 앞으로 나섰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페르슈타인 전하께서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드래곤에 대한 공격은 결코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어째서 그런가?" "지금은 모든 힘을 모아 오크를 상대해야 할 때입니다. 전하께서는 오크를 모두 토벌하려면 족히 십년 이상 걸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부디 마음을 돌려주십시오." 데이몬은 모호한 눈빛으로 크로비츠를 쳐다보았다.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겠는걸?" "......." "자고로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난세를 노려야 하는 법일세. 내 목적을 이루기에는 오크가 완전히 토벌되지 않은 지금이 가장 적기일세." 그 말에 크로비츠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거기까지 말이 나왔는데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는 백치 아니면 바보였다. 살아남은 용사들의 얼굴에 서서히 긴장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전하를 배신하실 생각이십니까?" "배신이라니, 그 무슨 섭섭한 소리를 하나? 그와 나는 어차피 생각하는 바가 달랐어." 크로비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결국 여기서 본색을 드러내시는군요." "글세 말이야. 아무튼 미안하네. 이 사실이 페르슈타인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니 부득이 자네들을 살려둘 수가 없구먼." "저희들을 죽여 살인멸구를 하시려는 겁니까?" ㅡㅡ 알면서 왜묻나 크로비츠는 바짝 긴장한 채 뒤로 물러났다. 데이몬이 이처럼 빨리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 그런 줄도 모르고 데스 나이트를 소환 할 시간을 주었으니 데이몬에 음모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조용히 휘하기사들의 수를 가늠해 본 크로비츠의 안색이 어두워 졌다. '동원할 수 있는 자가 고작해야 스물도 되지 않으니...... 힘들군.' 살아남은 기사들은 대부분 소드 마스터였다. 실력이 떨어지는 자들은 일찌감치 떨어져나갔고 알짜배기들만 남은 것이다. 하지만 그들로도 승산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살아남은 기사들은 여러 나라의 근위기사단에서 모인 자들이었다. 크로센 기사단이나 듀크 나이츠 출신은 고작해야 자신을 비롯해 열 다섯뿐이었다. 물론 다른 왕국 출신의 기사들이 페르슈타인 공작의 편을 들어준다는 보장도 없다. 특히 펜슬럿 기사들은 페르슈타인 공작보다도 데이몬에 대해 더욱 친숙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카심 용병단원들은 이미 적이라고 봐야했다. 그들과 데이몬은 뗄래야 뗄 수 없는 한 몸이었으므로. 데이몬이 한 마디를 더 내뱉자 분위기는 더욱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크로센 제국이나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충성하지 않는 자는 빠져라. 중립을 지키는 자는 공격하지 않겠다. 단 오늘 일에 대해 결코 발설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지금까지 함께 싸웠던 용사들이었지만 출신 국가별로 편이 갈리고 있었다. 예상대로 카심 용병단은 데이몬 옆에 가서 섰다. 상황이 조금 석연치 않기는 했지만 그들로서는 도저히 데이몬을 배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카심의 머릿속에는 상황을 보아 데이몬을 설득하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대놓고 페르슈타인 공작을 적대하려는 데이몬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도 없었다. 펜슬럿과 테제로스, 테르비아 출신 기사들은 중립을 지키기 위해 한쪽으로 모였다. 그들에겐 데이몬에 맞서 싸울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결국 크로비츠의 옆에는 크로센 기사단과 듀크 나이츠만이 남았다. "너희들은?" 데이몬 옆에 서 있는 제럴드와 하인리히를 보자 크로비츠는 착잡한 감정이 들었다. 크로비츠를 볼 면목이 없는 듯 그들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너희들로서는 어쩔 수 없겠지. 충분히 이해한다.'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드는 크로비츠의 얼굴을 데이몬이 재미있다는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 때 옆에서 카심이 말을 걸었다. 어떻게든 데이몬을 설득해 싸움을 회피하려는 일념에서 였다. "죄송하지만 제말을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말하라." "주제넘은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 페르슈타인 공작을 적대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트루베니아엔 아직까지 많은 오크가 존재합니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오크를 먼저 처리하는 것이......." 데이몬은 냉정하게 카심의 말을 잘랐다. "주제넘은 생각이란 사실을 알고 있으니 다행이로군." "........" "지금껏 난 대장의 의견을 여러 번 존중해 주었다. 그렇지 않은가? 카심?"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내 뜻을 따라주면 안 되는가? 진심으로 부탁하네." 뭔가 할 말이 잇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카심은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데이몬은 지금껏 카심을 명실상부한 대장으로 인정해 주었고 어떠한 경우에도 지휘권을 지켜주었다. 그런 데이몬의 부탁이니 더 이상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여기서 싸우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카심은 아직까지 데이몬을 굳게 믿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마음을 먹으셨는지 원. 우리야 따라야 하는 입장인..... 뭐 생각이 있으시겠지.' 미첼을 비롯한 대원들 역시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다. 지금껏 함께 생사를 넘어왔던 크로센의 기사들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미 그들은 데이몬의 부탁이라면 목숨까지도 내놓을 각오를 한 상태였으니까. 크로비츠가 굳은 표정으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마음을 바꾸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원하신다면 없던 일로 해드릴 수 있습니다." "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으니 말일세." 데이몬의 대답을 들은 크로비츠는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검을 뽑아 들었다. "당신을 잠시나마 존경했던 내가 미워지는군요. 좋습니다. 이 곳을 떠나시려면 저와 부하들의 시신을 밟고 지나가셔야 할 것입니다." 크로비츠는 검집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부하들 역시 마찬가지 행동을 하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무언의 시위인 셈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거기에 전혀 감동 받지 않은 눈치였다. "길을 뚫으려면 당연히 그리 해야겠지." 데이몬인 손을 들자 4대 기사들이 앞으로 쓱 나섰다 그들이 검을 뽑아들자 백 명의 데스 나이트들 역시 검을 뽑아들었다. 챠챵 백 자루의 장검 뽑히는 소리가 일사불란하게 들려왔다. 보고 있는 카심은 애가 탔다. 인간들끼리 싸워선 안 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기에 가슴이 답답했다. '슈렉하이머, 당신이 데이몬을 좀 말려주시오.' 카심은 데이몬 뒤에 공손히 시립해 있는 슈렉하이머에게 계속 해서 눈짓을 했다. 하지만 그는 그저 못 본 척 외면할 뿐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카심은 그때까지도 데이몬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데이몬이 손을 들었다. 공격 명령이 내려지려는 순간이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크로비츠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잠깐. 부탁이 있습니다." "뭔가?" "비록 싸워야 하는 처지에 놓였지만 한 가지만은 약속 받고 싶습니다." "말하라." "죽음을 겁내진 않습니다. 하지만 나와 내 부하들을 데스 나이트로 만들지는 말아 주십시오. 설령 영원히 이곳을 배회하는 망령이 되더라도 데스 나이트만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결의에 차 있는 크로비츠의 눈을 들여다보던 데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어차피 너희들 말고도 데스 나이트로 만들 영혼은 넘쳐나니까." "고맙소." 고개를 끄덕인 크로비츠가 검을 고쳐 잡았다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또다시 외마디 음성이 터져 나왔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날카롭게 날이 선 여자의 음성이었다. 다프네가 사라진 이후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인간 여자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깜짝 놀란 크로비츠가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지?" 다른 기사들의 시선 역시 율리아나를 향해 집중되었다. 그녀는 지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쏘아보고 있었다. 큰 충격을 받은 듯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데이몬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났다. "무슨 말이냐, 율리아나?" 율리아나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당신은....... 당신은 데이몬이 아니에요." "무슨 소리냐? 내가 데이몬이 아니면 누가 데이몬이냐?" 데이몬이 당치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지만 율리아나는 몰아 붙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거짓말, 데이몬의 눈빛은 당신과는 판이하게 달라요. 당신의 정체는 도대체 뭐죠?" 율리아나의 눈에서 눈물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유, 율리아나." 카심이 율리아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다가갔다. 하지만 그녀는 냉랭히 카심의 손길을 뿌리쳤다. "할 말이 있어요. 그러니 모두들 잘 들어주세요."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을 늘어놓았다. "일전에 데이몬은 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어요. 바로 마왕에게 몸을 빼앗길 때를 대비한 부탁이었어요." 그 말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지금껏 데이몬의 정체에 대해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크로비츠마저도 데이몬이 다른 존재일 거란 가정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귀로 절규에 가까운 율리아나의 음성이 계속 울려 퍼졌다. "데이몬은 흑마법사였어요. 따라서 오래 전부터 마왕에게 몸을 빼앗길 것을 걱정해 왔지요." 데이몬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율리아나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의 봉인구를 몸속에 품고 있었어요. 따라서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해버릴지도 모른다고 제가 누누이 말해왔지요." 감정이 고조된 율리아나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당신은 데이몬의 몸을 차지한 마왕이 분명해요." "도대체 어떤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여자로서의 직감이죠. 여자란 자고로 사랑하는 사람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기 마련이니까. 이젠 진실을 밝힐 때가 되지 않았나요?" 그녀의 말은 장내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가장 먼저 카심 용병단원들이 데이몬의 옆에서 떨어졌다. 율리아나의 말대로 그의 정체가 마왕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립을 지키려던 기사들은 묵묵히 크로비츠의 옆에 모여들었다. 데이몬의 정체가 마왕이라면 그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고금 이래로 마족은 모든 인간들의 적이었다. 용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데이몬의 입을 주시했다. 정체를 밝히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데이몬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간단히 처리하려 했는데 여기서 어긋나 버리는군." 쿵 그 말은 데이몬 자신이 마왕임을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장 먼저 움직임을 보인 쪽은 카심 용병단원들이었다. 얼빠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카심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율리아나를 안아든 카심이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미첼을 필두로 나머지 대원들도 뒤를 따랐다. 그들은 지금껏 대립하고 있던 크로비츠 쪽으로 이동해갔다. 크로비츠 역시 조금 전의 일을 까맣게 잊은 듯 그들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스릉 안전한 곳에 도착한 카심 용병단원들은 그 즉시 무기를 뽑아들었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의리 없는 놈들. 날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겠다던 녀석들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배신할 줄은 몰랐군." 카심이 한 발 앞으로 나서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우린 데이몬에게 맹약을 한 것이다. 마왕 따위에게 지킬 의리란 없다." 데이몬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너희들은 뭔가를 잘못 생각하고 있군. 물론 내가 마왕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데이몬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데이몬은 이미 나, 나이델하르크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말에 율리아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역시......." 넋이 나간 듯 그녀는 맥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프네가 떠남으로서 데이몬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희망도 잠시, 데이몬은 또다시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연신 도리질치는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 나쁜 자식. 감히 날 버리고 떠나다니....... 흑흑." 충격이 심한 나머지 그녀는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데이몬은 무표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쓸어보았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이 카심 용병단원들에게로 향했다. 날카로운 눈빛이 대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훑었다. "카심, 너를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나는군." "........" "비록 조그마한 용병단의 대장이었지만 카심 너의 배포와 통솔력은 정말 탁월했었다. 무엇보다도 동료를 아끼는 면이 참으로 대단해보였기에 난 너와 동료가 되려는 마음을 가졌다." 카심의 얼굴에 잔잔한 떨림이 스쳐지나갔다. "혹시 기억나는가? 우린 함께 하며 많은 일을 해결했었지. 그 동안 넌 한 번도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돈트렐에 잡혀 있을 때 날 부정하지 않은 것에서부터 지금껏 말이다. 마틸다를 만나고 나서도 나를 따르기로 마음먹었을 때가 가장 고마웠었지 그러고 보니 자네가 쉬르나크의 정체를 밝혔을 때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는가?" 격정으로 인해 카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 그 사실을 어떻게......" " 내가 말하지 않았나? 데이몬은 나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내가 데이몬이 아니라 말할 수 없다. 그의 기억은 곧 내 것이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이번엔 미첼을 쳐다보았다. "미첼. 너와의 만남은 처음부터 그리 순탄하지 못했지. 솔직히 넌 그때 허영심에 사로잡힌 철부지였으니까. 하지만 산중에서 너와 율리아나를 괴롭혔던 일은 지금까지 후회하고 있다. 대신 너에게 깨달음을 주어 소드 마스터의 길로 이끌어 줬으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미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지금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는 데이몬이 확실했다. 적어도 미첼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섭섭하지 않습니다. 데이몬께서 제게 해주신 것이 더욱 많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지." 말을 마친 데이몬은 또 다른 대원들을 쳐다보았다. 그의 입을 통해 지금까지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흘러나왔다. 제럴드와 하인리히의 얼굴도 여지없이 과거의 추억을 더듬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데이몬과 동료가 된 덕택에 듀크 나이츠가 될 수 있었고 또한 오랜 숙원을 풀 수 있었다. 제럴드는 가문의 복수를 이뤘고 하인리히는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 모든 것은 데이몬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데이몬은 조용히 대원들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날 대신해 죽었던 헬튼과 비에리의 얼굴이 떠오르는구나. 정말 멋지고 훌륭한 녀석들이었는데....." 이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대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저토록 세세한 일까지 기억하는 자를 감히 데이몬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보고 있던 크로비츠는 슬그머니 조바심이 치밀어 올랐다. 카심 용병단원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역력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다 못한 그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카심 용병단원들이 등을 돌리기 전에 먼저 처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카심 용병단원들의 실력은 그 정도로 뛰어났다. 크로비츠가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카심이 데이몬에게 말을 걸었다. 마음을 정리한 듯 눈빛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데이몬, 전 도저히 당신을 부정할 수가 없군요. 당신은 데이몬이 확실합니다." 목적을 이룬 듯 데이몬의 입가 미소가 번져갔다. "내가 누군지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섭섭하군. 이리로 오게나, 카심. 동료들은 언제 어디에서건 함께 움직여야 하는 법일세. 자네들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이어진 카심의 말에 미소는 나타날 때보다도 빨리 사라져 버렸다. "용서하십시오. 죄송하지만 저희들은 데이몬의 뜻을 더 이상 따를 수 없습니다." 침묵을 지키던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어째서 그런 결정을 내렸지? 날 동료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지금까지는 언제나 동료라고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닙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냐?" "저희들은 오직 데이몬을 위해 이러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인간입니다. 하지만 데이몬 당신은 이미 마왕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더 이상 당신의 동료가 될 수 없습니다." 말을 마친 카심은 검을 치켜세웠다. "저희들은 마왕의 발호를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생각입니다. 데이몬, 이런 우리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주십시오." 대원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카심의 말로 인해 흔들리던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원들은 데이몬을 향해 공손히 예를 올렸다. "이해하십시오, 데이몬. 그리고 이럴 수밖에 없는 저희들을 용서하십시오." "배신한다 말하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저희들은 데이몬을 진정으로 좋아했습니다. 데이몬께 입은 은혜는 죽어서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넉살좋은 패터슨의 입담이 이어졌다. "어쩌면 우리가 다시 동료가 될 확률도 있겠군요. 저희들이 죽고 난 뒤 영혼을 언데드로 만든다면 말입니다. 카심 대장님이나 미첼 교관님은 확실하게 데스 나이트가 될 수 있겠지만 저는 좀 힘들 것 같군요. 그래도 옛 정이 있으니 좀 봐주십시오. 구울이나 스켈레톤이 되고 싶지 않거든요." 왁자하게 웃음이 터져 나올 상황이었지는 웃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데이몬에 대한 미안함과 인간계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모두들 머리가 터질 것 같았으니까. 이 같은 혼세에 마왕이 강림했으니 엄청난 비극이 초래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카심의 결단으로 인해 크로비츠는 불안함을 모두 털어 버릴 수 있었다. 반대로 데이몬의 얼굴에서 가식적인 미소가 싹 사라져버렸다. "역시 영리하군, 카심. 쉽게 처리하려고 생각했는데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 버리는군. 율리아나와 너 때문에 말이야. 할 수 없지. 그렇다면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버리는 것만 남았나?" 돌변한 데이몬의 태도로 인해 대원들은 마음속의 짐을 덜어버릴 수 있었다. 마침내 상대가 데이몬이 아니라 나이델하르크란 사실을 똑똑히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던 상황을 조심스럽게 주시하던 크로비츠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현저히 열세이긴 해도 순순히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이델하르크, 인간계는 마왕 따위가 분탕질을 칠 수 있을 정도로 호락호락 하지 않다." "글세? 내 눈에는 호락호락해 보이는데?" 뭔가가 생각난 듯 나이델하르크는 이마를 딱 쳤다. "그렇군. 나의 숨겨진 힘을 아직까지 보여주지 않았어. 그러니 저 머저리가 큰소리를 쳐 댈 만도 하지 조금만 기다려 보겠나?" 말을 마친 나이델하르크가 손을 들어올렸다. 순간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크와아아악 나이델하르크의 손짓에 호응이라도 하듯 여기저기서 거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잠시 후 드러난 장면에 용사들은 혼비백산했다. 펑 퍼펑 지축이 사정없이 터져 나갔다. 그곳을 통해 기괴한 생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몬스터라 부를 수도 없는 생물들 그것들은 바로 마계의 괴수들이었다.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마계마물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용사들은 넋을 잃었다. "세상에......" "엄청난 놈들이로군, 수를 헤아릴 수도 없어." 기하급수적으로 수가 불어난 마계마물들은 차례대로 나이델하르크의 뒤에 도열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꽂힌 것은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공포를 가져다주는 마물 다크 쉐이드였다. 열 마리나 되는 다크 쉐이드들이 나이델하르크의 몸을 빈틈없이 에워쌌다. 뒤이어 등장한 것은 대원들이 지금껏 단 한번도 보지 못한 마물들이었다. 투구풍뎅이의 몸에 사마귀의 상체를 달고 있는 놈에서부터 지네와 도마뱀을 합쳐놓은 듯한 놈까지. 하나같이 강력해 보이는 각양각색의 마물들이 쉴 새 없이 생겨났다. 한 가지 공통점은 마물들의 덩치가 엄청나다는 점과 두꺼운 껍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얼핏보더라도 통상적인 공격으로는 별다른 타격을 입힐 수 없을 것 같았다. 등장한 마물들은 나이델하르크의 뒤쪽, 데스 나이트들이 도열한 옆에 버티고 섰다. 족히 이 백은 넘어 보이는 숫자였다. 용사들은 서서히 기가 질리는 것을 느꼈다. 일백 명의 데스 나이트도 감당할 수 없는 판국인데 거기에 마물들까지 가세하다니........ 크로비츠는 어금니를 으스러져라 깨물었다. "도대체 저 마물들을 누가 소환했다는 말인가?" 크로비츠의 의문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서른에 가까운 리치들이 소리 없이 날아와 나이델하르크의 옆에 내려앉았다. 그들 사이에 게덴하이드가 끼어있는 것을 보자 크로비츠는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저들이 마물을 소환한 장본인이로군." 베르키스의 가디언이었던 게덴하이드가 도대체 어떤 연유로 마물들을 소환했는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이 순간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전하께 알려야 할 텐데......' 하지만 크로비츠는 누구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용사들이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진지 오래였다. 너무도 압도적인 전력차이에 도무지 희망을 떠올릴 수가 없는 것이다. 질려있는 기사들의 귓전으로 또다시 규칙적으로 울리는 굉음이 들려왔다. 쿵 쿵 아이언 골렘이었다. 놈은 베르키스의 동체가 들린 들것을 매단 상태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에인션트급 드래곤이 실린 만큼 들것의 무게가 엄청날 테지만 아이언 골렘은 조금도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들것을 한쪽에 내려놓은 아이언 골렘이 나이델하르크에게로 다가갔다. 아이언 골렘은 지켜보는 마왕을 향해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크아아아 그 모습에 기사들은 또다시 기가 꺾이는 것을 느꼈다. 아이언 골렘조차 나이델하르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보니 데이몬이 나이델하르크의 일부가 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절망감에 젖은 용사들은 체념한 채 조용히 최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델하르크는 용사들을 쉽게 끝낼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후후후. 죽음의 공포에 질려 있군. 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이것이 끝이 아닌데 말이야." 빙그레 웃은 나이델하르크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습을 드러내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이델하르크의 바로 옆에서 눈부신 광휘가 일어났다. 번쩍 광휘는 나타날 때보다도 더 빨리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새하얀 그림자가 표표히 서 있었다. 그 광경을 본 기사들 중 몇의 가슴속에 희망이 피어났다. 나타난 존재가 더없이 아름다운 천사였기 때문이다. 지극히 아름다운 용모에 새하얀 날개로 몸을 감싼 천사는 한없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로 인해 선두에 선 기사들의 눈동자가 몽롱해졌다. 천사의 아름다운 자태에 혼백이 빠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이델하르크의 음성이 분위기를 여지없이 깨어버렸다. "나에게로 오라, 케루빔." 나이델하르크에게로 다가간 천사는 공손히 예를 올렸다. 보고 있던 기사들의 희망을 덧없이 깨어버리며. "다시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나이델하르크님. 정확히 567년 만이로군요." "그렇구나, 케루빔." 나이델하르크는 빙그레 웃으면 케루빔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데이몬이 계약을 맺었던 마왕 케루빔이 마침내 인간계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나이델하르크는 기이한 눈빛으로 케루빔을 쳐다보았다. 외견상으로 케루빔은 완벽한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마에 아로새겨진 마왕의 문장만 빼면 그 누구도 케루빔을 천사가 아니라고 의심하지 않을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원래부터 천족이었다. 제2계급의 지천사로서 천상을 수호하는 수많은 케루빔(Cherubim)중 하나가 그의 전신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천사가 아니었다. 천족의 권태로운 삶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그만 나이델하르크의 꾐에 빠져 타락해 버렸던 것이다. 나이델하르크는 부하가 된 그녀에게 방대한 어둠의 마력을 허락함과 동시에 의도적으로 케루빔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지천사를 상징하는 케루빔이라는 명칭을 타락한 천족의 이름으로 삼은 배경에는 조금이라도 천상을 능멸하려는 나이델하르크의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이후 케루빔은 나이델하르크의 수족으로 많은 일을 처리해 나갔다. 용장이라기보다는 뛰어난 지략을 보유한 지장으로 마왕 군을 이끄는 군단장에까지 오른 케루빔은 나이델하르크 휘하의 당당한 마왕으로 자리잡았다. 그런 케루빔의 과거를 떠올려 본 나이델하르크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마계의 사정은 어떠하더냐?" 케루빔은 무감각한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나이델하르크가 워낙 오래 자리를 비운 탓에 그가 다스리던 마계왕국에는 수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정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여러 번의 마계전쟁에서 패배하여 적지 않은 영토를 잃었습니다. 나이델하르크님의 빈자리가 상상외로 컸습니다." 그 말에 나이델하르크의 얼굴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어떤 자식들이 내 영토를 빼앗아갔느냐?" "셀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영토를 빼앗아간 마왕은 바알과 위리놈입니다. 절 위시한 8대 마왕 군단장들이 끝가지 분투했지만 결국 영토를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럴 것이다. 마계전쟁에서 대마왕이 가세하지 않은 군대는 그렇지 않은 군대에 결코 이길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걱정 말아라 인간계는 오래지 않아 내손에 들어온다. 수없이 죽어 가는 인간들의 고통과 원념은 내 힘의 원천. 점진적으로 원념을 흡수한다면 나의 군대는 오래지 않아 무적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계 통일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바알과 위리놈을 위시한 마왕 놈들은 내 영토를 빼앗아간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야."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 김창후 버전 ㅡㅡㅋ 말을 마친 나이델하르크의 입가에 기괴한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할 일이 있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케루빔을 쳐다보았다. "지금 나에겐 네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것 때문에 게덴하이드에게 최우선적으로 널 소환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감정이 고조되었는지 케루빔이 흥분된 어조로 대답했다. "명령을 내려만 주십시오. 저 케루빔은 언제든 나이델하르크님의 명령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좋다. 지금 즉시 나에게로 오라." 케루빔은 머뭇거림 없이 나이델하르크에게 다가갔다. 그는 가까이 다가온 케루빔의 양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나이델하르크의 얼굴에 떠오른 기괴한 표정을 보자 케루빔은 깜짝 놀랐다. "나, 나이델하르크님......." "미안하구나, 케루빔. 나에겐 순수한 어둠의 마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따라서 너에게 허락한 어둠의 마력을 다시 흡수해야 할 것 같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이델하르크의 눈동자에선 전혀 미안한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번들거리는 눈빛을 본 케루빔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어둠의 마력은 그를 지탱하는 원동력이었다. 어둠의 마력을 빼앗긴다는 것은 그의 존재 자체가 무로 돌아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타락한 천족이긴 하지만 생명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다. 나이델하르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케루빔은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사, 살려 주십시오, 나이델하르크님. 전 아직까지 소멸되고 싶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다, 케루빔. 널 흡수함으로써 나는 부족한 마력의 절대량을 채울 수 있다. 또한 암흑군대를 더욱 완벽하게 정비할 수 있다. 그러니 날 위해 희생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 "하,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라. 내 눈을 통해 마계가 일통되는 순간을 목격하게 해 주마." "아, 안 돼." 그 말이 케루빔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나이델하르크가 입을 쫙 벌리는 순간 그의 몸은 마치 공기가 새어나가듯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케루빔은 거기에 일말의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툭 케루빔이 남긴 것이라곤 얇은 거죽뿐이었다. 몸속에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나이델하르크가 삼켜버렸다. 유일하게 흡수되지 않은 새하얀 날개가 케루빔의 최후를 슬퍼하듯 거죽 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나이델하르크는 만족한 표정으로 입맛을 쓰윽 다셨다. "천족 출신이라 그런지 맛이 유난히 좋군. ㅋㅋ" 케루빔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데리고 온 마계마물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마물들에게 케루빔은 단순한 지휘관에 불과했다. 애당초 나이델하르크의 명을 따르는 마물들이었기에 케루빔의 소멸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다. 몸을 일으킨 나이델하르크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세, 세상에 천사를 먹어치워 버렸어." 용사들의 경악 섞인 눈빛이 집중되었지만 나이델하르크는 그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이델하르크는 리치들이 도열해 있는 곳에 멈춰 섰다. 시선이 느릿하게 게덴하이드를 향했다. "명을 훌륭히 수행했구나, 게덴하이드."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나이델하르크님." 게덴하이드는 공손히 예를 올렸다 케루빔의 소멸을 목격한 때문인지 몸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역시 나이델하르크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흡수될 수밖에 없었다. 리치라서 표정변화가 드러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나이델하르크님께 누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정신마법을 극복하지 못해 베르키스 놈의 수족이 되었던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명령을 내려 주신다면 몸이 가루가 될 때까지 수행하겠습니다." "좋다." 나이델하르크는 손을 들어 넓게 펼쳐진 노스우드 평원을 가리켰다. "이곳에는 드래곤에게 원한을 가진 수많은 영혼들이 있다. 오백 년 전 죽은 놈부터 금방 죽은 놈까지, 수많은 망령이 안식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하나같이 데스 나이트로 만들기에 모자람이 없는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내 너에게 충분한 어둠의 마력을 나눠줄 테니 그들을 모두 데스 나이트로 만들어라." "하, 하지만 데스 나이트를 만드는 데에는 반드시 영혼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나이델하르크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걱정하지 말아라. 드래곤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과 기회를 준다고 하면 영혼들은 두말없이 동의할 것이다. 데이몬이란 녀석 사용했던 방법인데 효과가 탁월하더구나." "아, 알겠습니다." "일이 예상대로 진행된다면 난 엄청난 숫자의 데스 나이트 군단을 보유할 수 있게 된다. 난 그들을 중심으로 2차 암흑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해 나갈 것이다. 그러니 지금 즉시 대법을 시행하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게덴하이드의 몸속으로 방대한 어둠의 마력이 전이되었다. 소멸된 케루빔으로부터 흡수한 마력이었다. "그럼 대법을 시작하겠습니다." 마력을 넘겨받은 게덴하이드는 그 즉시 몸을 날리려 했다. "잠깐. 너 혼자서는 힘들 것이다. 그러니 슈렉하이머를 데리고 가라. 그 역시 상당한 실력을 보유한 리치. 그와 힘을 합쳐 소환을 진행한다면 시간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슈렉하이머를 불러낸 나이델하르크는 그에게도 어둠의 마력을 나눠주었다. 한때 베르하젤 교단의 대승정이었던 슈렉하이머는 뱀파이어를 거치 리치가 되었고, 마지막으로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의 수족이 되는 지경에 처했다. 정말 기구한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로서는 나이델하르크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애당초 그를 리치로 만든 것이 나이델하르크의 마력이었기 때문이다. 게덴하이드는 서늘한 눈빛으로 슈렉하이머를 쏘아보았다. "시간이 없다. 가자." 둘은 부유마법으로 몸을 날렸다. 그 뒤를 서른 남짓한 리치들이 뒤따랐다. 한때 베르키스의 가디언들이었지만 게덴하이드에 의해 세뇌된 탓에 리치들도 완벽한 나이델하르크의 수족이 되어 있었다. 일을 일단락 지은 나이델하르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흐흐흐. 데스 나이트 군단이 완성된다면 더 이상 드래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데이몬이란 놈에게서 드래곤을 상대하나는 방법을 확실하게 배웠으니 놈들은 더 이상 내 발목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이델하르크는 가슴이 설레었다. 이번에야말로 틀림없이 인간계를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백 년 전에는 준비부족과 예상치 못한 아르카디아의 지원으로 패배했지만, 이번에는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었다. 데이몬에게서 얻은 많은 전술들이 인간계를 정벌시키는 데 가장 큰 밑거름이 될 터였다. "데이몬 녀석이 고맙게도 정벌군 총사령관의 머릿속에 종속의 혈충을 심어놓았지. 간단히 말해 정벌군을 내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다. 거기에다 게덴하이드는 오크의 군대를 지휘할 수 있다. 난 이 두 집단을 쌍방의 희생이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몰고 갈 것이다. 그 와중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시체는 나의 군대가 될 것이며, 원념은 내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다. 그렇게 된다면 단숨에 아르카디아를 압도할 수 있는 대군이 만들어진다.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가능 한한 많은 데스나이트들이 필요하겠군." 그의 시선이 데스 나이트 군단의 앞에 도열한 4대 기사에게 멎었다. 나이델하르크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난 데스 나이트들을 내 군대의 각급 지휘관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질보다는 양적인 면에 치중했지.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오산이었다." 나이델하르크는 느릿하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4대 기사가 소리 없이 다가와 부복했다. "너희들의 몸속에는 엄청난 어둠의 마력이 깃들어 있다. 통상적인 데스 나이트라면 족히 이백 명을 넘게 만들 수 있는 양이지." 헬버트론이 무감각한 어조로 대답했다. "필요하시면 거두어 가십시오. 저희들은 오직 나이델하르크 님의 명에 따를 뿐입니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들은 이제부터 나의 명에 따라 드래곤을 상대해야 한다. 너희들에게 게덴하이드를 위시한 리치들을 모두 붙여 부겠다. 데이몬과 여러 번 손발을 맞춰 드래곤을 사냥해 보았으니 잘 해낼 것이라 생각한다." 헬버트론을 위시한 4대 기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애당초 나이델하르크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터라 결코 명을 거부할 수 없었다. "맡겨만 주십시오. 대마왕님의 기대에 결코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들을 믿는다." 4대 기사로부터 시선을 거둔 나이델하르크는 이번에는 아이언 골렘을 쳐다보았다. "후후후. 이 녀석도 꽤나 쓸만하군. 그러고 보니 데이몬이란 녀석에게서 받은 선물이 무척 많은 걸? 무엇보다도 놈에게서 배운 전략이 가장 쏠쏠했다. 역시 인간이란 상당히 재미있는 종족이야." 하지만 아이언 골렘 옆에 놓여 있는 베르키스를 보자 나이델하르크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로 인해 오백 년 동안 봉인되어야 했던 아픈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베르키스, 오백 년 동안 줄곧 네놈을 산채로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꿈만을 꾸었다. 네놈을 반드시 내 손으로 처치하고 싶었는데......." 베르키스는 이제 육체만 남은 상태였다. 다시 말해 복수를 할만한 대상이 결코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베르키스가 생전에 사용하던 껍질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이델하르크는 그나마도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한 일념으로 나에게 육신을 제공한 점은 가상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네 육신을 쓸 생각은 없다. 인간을 멸망시키는 데에는 너보다 데이몬의 육신이 더욱 쓸모 있으니까. 하지만 쓸데가 전혀 없지는 않다. 나는 네놈의 육신을 본 드래곤으로 만들겠다. 데이몬이 그랬던 것처럼 네놈을 승용으로 쓸 생각이니까." 본 드래곤으로 전락할 처지에 놓였지만 베르키스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의 영은 완전히 육신과 단절되어 있었다. 상념을 마친 나이델하르크가 몸을 돌렸다. "후후후." 그의 관심이 드디어 용사들에게로 향했다. 바짝 긴장한 용사들은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분전하겠다는 듯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나 열심히 전의를 다지고 있는 그들의 모습도 나이델하르크에게 애당초 가소로운 몸짓일 뿐이었다. 그가 공격 명령을 내린다면 오십 명의 용사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전멸 당할 것이었다. 그것은 카심 용병단도 마찬가지 운명이었다.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사들은 누구 하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이미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이제 너희들을 해결할 차례가 되었구나." 용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친 나이델하르크가 손을 들자 데스 나이트들이 일사불란하게 걸음을 옮겼다. 착착착 마치 한 명이 움직이는 듯한 발자국 소리. 용사단 지척에 접근한 데스 나이트 군단이 일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제일 앞에는 데이몬과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4대 기사들이 소름끼치는 광망을 뿜어내며 용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카심 용병단원들은 깊은 비애를 느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그들은 절친한 동료였다. 대련상대가 되어주고 위험에 처할 때 가장 먼저 구해주는 든든한 동료. 악의 상징인 데스 나이트였지만 그 누구도 그들이 동료란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마왕의 충실한 꼭두각시일 뿐 더 이상 동료가 아니었다. 명령이 떨어진다면 그들은 서슴없이 카심 용병단원들의 몸에 검을 박아 넣을 터였다. 카심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이렇게 싸우게 되다니 정말 기구하구려, 헬버트론." 헬버트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심을 쏘아보고 있었다. "당신과 많은 대련을 했지만 이번만은 사정이 다를 것 같군요. 솔직히 말해 당신 손에서 일 분 이상 버틸 자신이 없소. 대련할 때도 버티지 못했는데 실전이라면 더 이상 생각해 볼 여지가 없겠지? 하지만 난 최선을 다할 생각이오. 그러니 옛정을 생각해서 깔끔하게 끝내주길 바라오." 하지만 헬버트론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는 뼛속까지 나이델하르크의 충실한 수족이 되어 버렸다. 미첼 역시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다. 헬버트론, 라인델프, 프림베르그, 사라미스. 어제까지는 더없이 믿음직스러운 동료들었던 그들이 이제부턴 칼을 겨누고 싸워야 하는 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강력한 실력을 가진 적. 카심 용병단원들을 비롯한 용사들은 조용히 최후를 맞이하려했다. 하지만 나이델하르크는 그들을 그리 쉽게 끝낼 마음이 없는 듯 했다. "너무 긴장하지 말게. 간단히 보내진 않을 테니." 그 말에 크로비츠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우린 명예로운 기사들이. 농락하지 말고 어서 끝내라!" "성급하기는. 나에겐 아직까지 할 일이 남았다." 빙그레 웃은 나이델하르크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율리아나가 새파랗게 질린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혼절한 상태로 카심의 품에 안겨 있던 그녀는 바로 직전에 깨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뭔가를 결정한 듯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나이델하르크는 그녀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물어볼 것이 있다, 율리아나." "......" "날 아직 사랑하느냐?" 뚱딴지같은 말에 율리아나의 눈이 커졌다. "터무니없는 소리하지 말아요. 내가 마왕 따윌 사랑할 까닭이 어디 있어요?" 신경질적인 반응이었지만 나이델하르크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사실을 모르는 구나. 난 대마왕이며 또한 데이몬이기도 하다. 데이몬의 모든 것이 곧 내 것이니까. 그런 점에서 넌 나에게 각별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넌 내 본모습을 보고도 마음을 준 두 번째 여인이다." "......." "아니, 이젠 유일한 여인이 되었구나. 다프네가 날 저버리고 베르하젤의 품으로 돌아갔으니 말이다." 말을 마치자 나이델하르크이 모습이 서서히 변했다. 잘 생긴 금발 청년의 모습은 사라지고 더 없이 추악한 이방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배교의 교주였던 독고성의 모습이었다. 데이몬과 하나가 된 이후 나이델하르크는 이제 역체변용술까지 구현할 수 있었다. "데, 데이몬......" 그 모습을 보자 율리아나의 눈매가 잔잔하게 떨렸다.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나이델하르크의 회유가 시작되었다. "구태여 나에 대한 마음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 동안 표현하지 못했지만 난 너에게 진정으로 고마워했었다. 추악하게 태어난 이유로 숱한 멸시와 냉대를 받아온 나에게 지금껏 마음을 준 여인은 오직 둘뿐이다. 그중 날 버리지 않은 유일한 여인이 바로 너다." 나이델하르크는 손을 들어 율리아나를 가리켰다. "이제 네 사랑을 받아주겠다. 나에게로 오너라, 율리아나." 하지만 율리아나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상대가 데이몬인지 나이델하르크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델하르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손짓을 했다. "솔직히 말해 널 버리고 싶지는 않구나. 버림을 받아 본 자의 아픔을 나만큼 절실하게 느껴본 이는 없다. 그러니 나에게로 오너라 그런 아픔을 너에게 안겨 주고 싶지 않다." 율리아나의 눈동자에는 온갖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보고 있던 카심이 조용히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괴롭겠지만 조금만 참으십시오. 기억만 공유하고 있을 뿐 그는 데이몬과 원천적으로 다른 존재입니다." 카심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율리아나의 갈등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나이델하르크의 얼굴에 단단히 못 박혀 있었다.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눈 속에 넣어버리려는 듯이 카심의 설득이 이어졌다. "나이델하르크는 분명 뭔가를 바라고 이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때 나이델하르크의 노성이 들려왔다. "그렇다면 카심, 율리아나가 너희들과 함께 죽음을 당하는 결과를 바라느냐?" "........" "나에게 오지 않을 경우 그녀에게 돌아가는 것은 죽음밖에 없다. 그런 결과를 바라지 않는다면 끼여들지 마라." 연이은 호통에 카심은 조용히 입을 닫았다. 나이델하르크의 말은 사실이었다. 율리아나가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경우 남겨지는 것은 처참한 죽음밖에 없다. 대마왕에겐 그녀를 살려놓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카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차라리 그쪽이 나을 것 같군. 죽지는 않을 것 같으니.......' 훼방꾼을 간단히 처리한 나이델하르크는 다시금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율리아나. 사랑을 얻고 싶다면 나에게 오너라." 그때 마침내 율리아나의 입술이 열렸다. "제가 간다면 데이몬과 함께 있도록 해줄 건가요?" "물론이다. 고작해야 백 연도 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만약 네가 나에게 온다면 영원히 데이몬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널 마후로 만들어 내 옆에 둘 생각이니까." 그 말을 들은 율리아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당신의 뜻에 따르겠어요."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나이델하르크에게로 향했다. 그 모습을 기사들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말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애석하게도 명분이 없었다. 남아 있어봐야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처참한 죽음 뿐일 테니까. 상황은 극기 절망적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게덴하이드와 슈렉하이머가 만들어 낸 데스 나이트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씩 가세하고 있었다. 데스 나이트들의 총수는 이제 이 백을 훌쩍 넘긴 상태였다. 노스우드 평원을 배회하는 기사들의 영혼은 족히 그 두 배에 달했고, 그들 모두가 계약에 동의한다면 나이델하르크는 사백명으로 구성된 막강한 데스 나이트 군단을 보유할 수 있으리라. 율리아나가 접근하자 헬버트론과 라인델프가 나와서 그녀를 맞아들였다. "배신자들......." 율리아나가 못마땅하다는 듯 그들을 쏘아보았지만 그들은 아무런 표정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나이델하르크를 모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할 수 없는 일이지' 길게 한숨을 내쉰 율리아나는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나이델하라크의 앞으로 나아갔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요." "말하거라. 율리아나." "날 유혹한 이유가 혹시 데이몬이 일러준 강제발동주문 때문이었나요?" "........" "주문을 외우면 생명이 위험해지기 때문에 억지로 날 유혹한 것인가요?" 나이델하르크는 담담히 웃었다. "넌 아직까지 데이몬을 잘 모르는구나? 데이몬은 그리 만만한 녀석이 아니란다." 율리아나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렇다면 주문을 거짓으로 가르쳐 준 것인가요?" "거짓은 아니다. 하지만 주문을 발동시키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하나 빠졌다." 나이델하르크는 찡끗 눈짓을 했다. "그 주문은 내공, 즉 정제된 마나를 끌어올린 상태로 외어야만 효력을 발휘한다. 데이몬은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너에게 주문을 일러준 것이다." 율리아나가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거짓말. 전 믿을 수 없어요." "내 말은 모두가 사실이다. 만약 네가 주문을 외웠다면 난 결코 널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날 버리고 베르하젤을 택한 다프네와 다름없는 행동이니까. 하지만 넌 주문을 외우지 않았다. 왜냐하면 넌 데이몬이 주문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 않으냐?" "......." 나이델하르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네 사랑에 대한 보답을 해 주겠다." "절 어쩌실 건가요?" "마후로 만들어 나의 아내 중 하나로 삼을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넌 영원히 데이몬과 함께 할 수 있다. 말했다시피 난 나이델하르크이며 또한 데이몬이다 앞으로 넌 수명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까지나 데이몬의 옆에서 향락과 영생을 누릴 수 있다." "그리 나쁘지 않은 조건이군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게 도대체 뭐죠?" 나이델하르크는 조용히 눈짓을 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는 다크 쉐이드 하나가 다가왔다. 다크 쉐이드는 양손에 받쳐들고 있던 장검을 쥐고 살며시 뽑아들었다. 스릉 암흑의 기운을 머금은 검날이 사이롭게 빛났다. 다크 쉐이드는 장검을 율리아나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나이델하르크의 보충설명이 이어졌다. "마후가 되기 위해선 먼저 인간의 육신을 버려야 한다. 이 검은 암흑투기의 정화를 머금고 있는 마검이다. 이 검으로 네 심장을 찔러라." "뭐라구요?" 율리아나는 깜짝 놀랐다. 스스로 자결하라고 하는데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이델하르크는 머뭇거림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쓸데없는 인간의 육신 따윈 벗어버려라. 그 대가로 너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미래가 주어질 것이다. 데이몬이며 또한 대마왕인 나 나이델하르크 옆에 영원히 머물 수 있는 영광까지 그러니 부디 현명한 선택을 바란다." 나이델하르크는 망설이는 율리아나를 내버려 둔 채 몸을 돌렸다. 데스 나이트들은 이미 사백 가까이 수가 불어나 있었다. 놀랍게도 이곳을 배회하던 영혼들은 거의 대부분이 데스 나이트가 되는 길을 택했다. 드래곤에 대한 깊은 원한으로 말미암아 마왕의 휘하에 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4대 기사의 뒤에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데스 나이트 군단은 마물 군단과 더불어 용사들의 심금을 서서히 저리게 하고 있었다. 나이델하르크는 마침내 용사들을 처리하려는 생각을 굳혔다. "네가 인간의 육신을 버리는 동안 난 저들을 처리하겠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명령에 따라 암흑군대가 전투대형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아이언 골렘이 가장 앞에 섰고, 그 뒤를 마계마물들이 받쳤다. 다크 쉐이드들은 공중에 떠서 용사들의 심장에 손톱을 박아 넣을 순간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집단인 데스 나이트 군단은 전투에 가세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게덴하이드를 위시한 리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십 명 남짓 남은 용사들 정도는 아이언 골렘과 마계마물들만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이제 최후의 결전이 시작되려는가?" 용사들은 바짝 긴장하며 싸움이 시작될 때를 기다렸다. 전술이나 전략따윈 없었다 힘이 닿는 데까지 싸우다가 처절하게 옥쇄하는 것이 그들이 걸어야 할 운명이었다. 전투준비를 마쳐 가는 암흑군대를 쳐다보던 나이델하르크가 율리아나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저들을 처리하고 난 뒤에 다시 오겠다. 그때까지 인간의 육신이 남아있다면 그땐 널 마후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럴 경우 내가 직접 널 죽일 생각이다." 그 말을 듣자 율리아나의 떨림이 멎었다. 그녀는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이델하르크를 쳐다보았다. "결정을 내렸어요." "......." "전 마후가 되지 않겠어요." 율리아나의 폭탄선언에 나이델하르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녀의 선택이 이해가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리석구나. 한낱 목숨에 연연해 영생을 누릴 기회를 차버리다니....." 율리아나가 잘라 말했다. "목숨 따위에 연연해하진 않아요. 대신 다른 길을 선택할 생각이거든요?" "무슨 계획이냐?" "아까 말했죠? 당신은 데이몬과 동일인물이라고." "물론 그랬다." "그렇다면 전 데이몬에 손에 죽임을 당하는 길을 택하겠어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목숨을 맡기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봐요." 말을 마친 율리아나는 옆에 서 있는 헬버트론에게 다가갔다. "헬버트론, 잠시 검을 빌려주시겠어요?" 하지만 헬버트론은 미동도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나이델하르크가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검을 빌려주어라." 헬버트론은 그때서야 허리의 장검을 풀어 율리아나에게 내밀었다. 스릉 장검을 뽑아든 율리아나는 나이델하르크를 향해 조용히 걸어왔다. "이 검으로 날 죽여줘요. 그렇게 되면 서로에게 좋은 일이 되잖아요? 난 사랑하는 사람에게 목숨을 맡길 수 있게 되고, 당신은 비밀을 아는 골칫덩이 하나를 없앨 수 있게 되니 말이에요." "......." "전 마후건 영생이건 관심 없어요. 오직 데이몬의 사랑을 얻고 싶을 뿐이에요. 전 그의 손에 목숨을 맡김으로써 사랑을 얻으려해요." 나이델하르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율리아나를 쏘아보았다. 그로서는 영원한 삶을 버리고 인간으로 죽음을 택하는 율리아나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나이델하르크는 결국 율라아나가 내민 검을 받아들었다. "좋다. 죽음을 원한다면 소원대로 해 주마." 검을 받아드는 순간 그의 움직임이 잠시 경직되었다. 뇌리 속을 스쳐지나가는 한 가지 생각 때문이었다. '칠종단금술이라.... 데이몬은 그 정신금제를 병적으로 두려워했었지.' 물론 나이델하르크가 칠종단금술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오랫동안 데이몬을 옥죄어 왔던 천고의 정신금제술 칠종단금술. 나이델하르크는 데이몬이 가졌던 모든 것을 흡수했다. 칠종단금술 역시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나이델하르크는 칠종담금술의 존재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데이몬은 그가 누천년을 걸쳐 흡수한 수백, 수천이 넘는 존재중 하나일 뿐이었다. 게다가 인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고도의 정신체계를 가진 대마왕에게 칠종단금술이 먹힐는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살인을 하려 하자 꺼림칙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술법이니......' 율리아나를 마후로 만들려던 것도 바로 그 꺼림칙함 때문이었다. 데이몬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한낱 핑계에 불과했다. 칠종단금술을 발현시키는 주문을 알고 있다는 것이 그녀를 마후로 만들려는 가장 큰 이유였다. 자신이 열렬한 추종자로 만들어야만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이델하르크는 잠시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율리아나가 계속해서 재촉을 해 왔다. "뭐해요? 빨리 끝내줘요." 결국 나이델하르크는 마음을 굳혔다. '대마왕인 내가 그까짓 인간이 만든 정신금제술 따위에 얽매일 리는 없다. 앞으로 내가 걷는 길에는 헤아릴 수 없는 인간의 시체가 쌓일 것이다. 난 그들의 고통과 절망, 원념을 흡수하여 힘을 얻는 대마왕이다. 이 계집아이를 시발점으로 난 꺼림칙한 모든 것들을 과감히 떨쳐버릴 것이다. 나이델하르크는 장검을 들어 율리아나의 가슴에 댔다. 시퍼런 검날이 심장어림에 닿았지만 율리아나는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나이델하르크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하려는 듯한 기색이었지만 입술이 떨어지기 전에 나이델하르크가 손에 힘을 주었다. 슈각 예리한 장검이 율리아나의 가슴을 거침없이 뚫고 들어갔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이델하르크의 얼굴을 적셨다. 심장에서 전해지는 아릿한 통증 의식이 혼미해짐에도 불구하고 율리아나는 미소를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육신은 점점 정신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데이몬의 얼굴이 점점 흐릿하게 변한다는 것을 느낀 그녀는 마지막 힘을 모아 고함을 질렀다. "사랑했어요. 데이몬 진정으로......." 율리아나는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진 그녀의 핏기 없는 얼굴에는 아직까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최후였다. "율리아나!" 동시에 용사들이 있는 곳에서 거센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첼의 눈은 찢어질 듯 부릅떠져 있었다. 오랫동안 동고동락했던 율리아나의 죽음에 넋이 나간 듯 그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대원들의 얼굴에도 망연자실함이 가득했다. 어떻게든 살리려고 떠나보냈던 율리아나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카르셀의 왕녀로 우연히 데이몬을 만나 금지된 사랑을 시작한 율리아나는 이렇게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은 아직까지 여운이 남아 카심 용병단원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델하르크는 미처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워어어억!" 고통에 겨운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율리아나의 심장을 터뜨리는 순간 엄청난 고통이 나이델하르크이 뇌리로 밀려들었던 것이다. 지금껏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강렬한 통증이었다. 나이델하르크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서, 설마 칠종단금술?" 그로 인해 나이델하르크는 뇌리가 하얗게 비는 것을 느꼈다. 칠종단금술이 대마왕인 자신에게도 발동할 줄은 몰랐다. 또한 고통이 이토록 강력할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나이델하르크는 머리를 감싸 안은 채 바닥을 마구 뒹굴기 시작했다. (아 손가락도 아프고 ㅡㅡ; 벌써 여섯시간째 치고 잇네 훌쩍 ㅠㅠ) 5. 칠종단금술의 묘용 바짝 긴장하고 있던 용사들의 눈에 어이없다는 듯한 빛이 떠올랐다. "뭐야? 왜 저러지?" "뭘 잘못 처먹었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대마왕의 공격명령을 내리는 순간 세상과 이별할 것이 확실했기에 마음을 정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대마왕이 난데없이 머리를 얼싸안고 바닥을 뒹구는 쌩쑈를 연출한 것이다. ㅡㅡㅋ "대마왕이 고통을 느끼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지만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유일하게 비밀을 알고 있는 율리아나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카심 용병단원들의 반응은 달랐다. 그들은 핏발이 곤두선 눈빛으로 늘어진 율리아나의 시체를 쳐다보고 있었다. "크으윽"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해 하나같이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율리아나의 심장에서 피가 콸콸 흘러나오는 순간 카심 용병단원들은 맹목적으로 앞을 가로막은 마물들을 공격하려 했다. 함께 했던 율리아나의 죽음을 도저히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막은 것은 카심의 외미디 일성이었다. "멈춰라. 이대로 나간다면 개죽음이다. 이왕 죽을 운명이라면 조금이라도 적에게 타격을 더 입혀야 한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라." 분노에 휩싸인 상황에서도 카심만은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대원들은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카심의 말대로 마물을 하나라도 더 없애려난 살아남은 용사들이 한데 뭉쳐야 했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마왕의 힘을 소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 특히 제럴드의 눈빛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으득 연모했던 율리아나가 바로 눈앞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럴드가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마왕에 대한 끝없는 증오심 때문이었다. 또한 율리아나의 죽음에 이어 벌어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은 그들 모두를 쉽사리 행동에 나서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첼은 아직까지 제정신을 차리 못하고 있었다. 율리아나의 죽음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끄아아악!" 나이델하르크는 지금 극렬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발동된 칠종단금술이 주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칠종단금술이 얕잡아본 대가였다. 칠종단금술의 위력은 제 아무리 마왕이라고 해도 감히 얕잡아 볼 수 없을 절도로 강력했다. 소림성승이 시전한 이 천고의 정신금제술은 시술대상자의 자아와 함께 끝없이 성장하는 특징을 가졌다. 시술대장자가 강해질수록 칠종단금술 역시 그만큼 발전하는 것이다. 데이몬은 지금까지 그 어떤 인간도 겪을 수 없는 처절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 만큼 현재의 칠종단금술은 애초에 시술되었던 금제술의 경지를 넘어 독자적인 경지를 구축할 만큼 성장했던 것이다. 그 진실한 위력은 심지어 데이몬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데이몬의 모든 것을 차지한 나이델하르크조차 미처 위력을 예측할 수 없었다. 지금껏 데이몬은 여러번 살심을 떠올린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예외 없이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혼절해야 했다. 고통에 익숙한 데이몬이었지만 칠종단금술의 뇌리에 직접 가하는 고통은 육체적인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살심을 떠올린 것이 아니라 직접 살인을 했다. 그런 만큼 뇌리에 가해지는 고통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정신체계를 가진 마왕인 만큼 정신세계에 직접 가해지는 고통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또한 데이몬과는 달리 혼절도 하지 못했다. 그저 몸을 비비꼬며 고통을 고스란히 감수할 수밖에. "세, 세상에...... 이, 이런 고통이 조, 존재한다니......." 후회가 물밀 듯 밀려들었다. 칠종단금술을 얕잡아 봤던 조금전의 결정이 후회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크락?"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는 나이델하르크를 마물들이 곤혹스런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대마왕이 괴로워하는 이유도 몰랐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정도 아니었기에 그들로서는 막연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점점 나아지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칠종단금술이 주는 고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증폭되었다. 모든 힘을 다해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지만 헛수고였다. 마침내 나이델하르크는 이대로 가다간 결국 최후를 맞을 것이란 불안감 휩싸였다. "내, 내가 이까짓 고통 따위에......" 나이델하르크는 수많은 역경과 전투를 치러가며 이 자리에 오른 마계의 군주였다. 하지만 그를 괴롭히고 있는 고통은 지금까지 그가 예상했던 범주를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지금 그를 괴롭히는 고통에 비하면 연옥의 백대독형 정도는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했다. 여태껏 세상에 이런 고통이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벌레처럼 버르적거리던 나이델하르크의 얼굴에 회한이 어렸다. "실, 실수였다. 데, 데이몬의 모든 것을 바,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어." 칠종단금술의 고통이 이 정도일 줄 알았다면 나이델하르크는 데이몬을 흡수하는 것을 심각히 고려했을 것이었다.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이런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니...... 나이델하르크는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이, 이대로 가다간 영원히 이런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어떻게든 놈과 나를 분리해야 해." 다른 존재를 흡수할 수 있는 만큼 다시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다. 문제는 나이델하르크에겐 한번 삼켰던 존재를 분리해 본 경험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럴 필요도, 그럴 이유도 전혀 없었다. 흡수한 존재는 흔적도 없이 나이델하르크와 융화되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달랐다. 나이델하르크에게 데이몬은 독 그 자체였다. "크으으으......" 나이델하르크는 지금 다른 생각을 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상태였다. 시시각각 엄습해오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식이 혼미해져오는 상황에서도 나이델하르크는 사력을 다해 정신을 집중시켰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밖에 없었다. "노, 놈의 잔재를 없애야 해, 놈이 지녔던 모든 것을 남겨두고 몸을 분리해야만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어. 영원히 이런 고통속에서 살 순 없어." 흡수했던 데이몬을 반드시 토해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칠종단금술이 주는 고통에 영원히 시달려야 하리라. 죽거나 혼절하지도 못하고....... 다급해진 나이델하르크는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활용해서 데이몬을 분리해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극심한 고통속에서도 대마왕의 뛰어난 머리는 원활히 움직이고 있었다. "먼저 데이몬의 의식을 잘라내야 해." 하나가 된 의식을 분리한 뒤 흡수했던 모든 것을 밀어 넣은 나이델하르크는 자신에게 흡수되었던 데이몬의 육신마저 원상태로 복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 나이델하르크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데이몬에게서 흡수했던 기억만은 도저히 분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제 아무리 대마왕이라도 한데 섞여 버린 기억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했다간 자신의 의식세계까지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이몬의 것을 남겨둘 수 없었기에 나이델하르크는 분리 대신 기억의 복제를 선택했다. 자신의 모든 기억에서 데이몬에 대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기억을 고스란히 복제해서 옮겨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뭐 컴퓨터 하드디스크냐ㅡㅡㅋ 고스트 이미지 복제도 아니고) 거기에도 걸림돌이 전혀 없진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자신이 옮겨갈 만한 다른 육신이었다. 고통에 시달리며 작업에 열중하던 나이델하르크가 다급히 마물들을 쳐다보았다. "이, 인간한 놈을 잡아와라. 시, 시간이 없다....." 급한 대로 용사 하나 잡아와서 그의 몸을 차지하려는 것이 나이델하르크의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래지 않아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겐 베르키스가 물려준 강력한 드래곤의 육신이 있다. 에인션트급 레드 드래곤의 몸은 그 어떤 인간과도 비견될 수 없는 훌륭한 빙의대상이니까, 게다가 영과 육이 단절되어 있는 만큼 드래곤의 몸을 장악하는 데에는 아무런 걸림돌이 없다. 고통 때문인지 자존심 때문인 나이델하르크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크큭. 베, 베르키스 놈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군. 이, 일단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 이다." 데이몬의 육신을 차지하는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이상 차선책은 베르키스의 몸에 빙의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인간의 몸에 빙의하는 것보다 몇 배 이상 강해질 수 있을 터였다. 마음을 정리한 나이델하르크가 아이언 골렘에게 베르키스의 육신을 이쪽으로 가지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쿵쿵쿵 아이언 골렘이 베르키스의 몸이 실린 들 것을 끌며 나이델하르크를 향해 다가왔다. 만약 데이몬의 몸을 분리해 낼 경우 더 이상 아이언 골렘을 통제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었다. 슈렉하이머나 게덴하이드를 시킨다면 아이언 골렘을 또다시 개조할 수 있을 터이니까. "놈의 모든 것을 분리한 뒤 순간적으로 베르키스에게 빙의해야 한다. 그래야만 빌어먹을 칠종단금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일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칠종단금술은 데이몬과 함께 남겨질 터. 그럴 경우 칠종단금술이 주는 고통을 데이몬 혼자서 고스란히 덮어써야 할 것이다. '인간의 몸으로 그 고통을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 모르긴 몰라도 데이몬은 고통으로 인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이델하르크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이미 데이몬의 효용가치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 놈이 고통을 겪건 말건 나이델하르크에겐 하등 상관이 없는 것이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념으로 나이델하르크는 마지막 단계까지 돌입했다. 마음이 워낙 급했기 때문에 그는 상당량의 마력까지 포기해야 했다. "아깝지만 할 수 없이." 흡수했던 데이몬을 다시 분리하기 위한 대가로 많은 것을 잃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이델하르크에겐 시시각각 엄습해 오는 칠종단금술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지금이다." 데이몬이 완벽히 분리된 것을 확인하자 나이델하르크는 베르키스의 몸으로 전이를 시도했다. 이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해왔던 일이라 전이는 순간적으로 시행되었다. 슈르르르 데이몬의 칠공을 통해 희끄무레한 기운이 빠져나왔다. 회색 안개 같기도 한 기운 빠져나오자마자 한 줄기 빛줄기로 변해 장내의 한쪽으로 쏘아졌다. 그쪽에는 들것에 실려 있는 베르키스의 육신이 놓여 있었다. 회색 빛줄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콧구멍을 통해 베르키스의 몸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번쩍 무언가가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베르키스의 몸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자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거대한 레드 드래곤의 동체가 미미하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꿈틀거리는 모습이 매우 그로테스크했다. 잠시 후 꽉 닫혀 있던 눈두덩이가 서서히 움직였다. 검은자위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눈동자에서 섬뜩한 광망이 흘러나왔다. "후후후. 성공이로군." 베르키스의 몸을 차지한 나이델하르크는 괴소를 흘렸다. 고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내 칠종단금술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이다. 게다가 에인션트급 레드 드래곤의 몸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파워는 그를 매료시키기에 조금의 모자람도 없었다. "역대를 통틀어 에인션트급 드래곤의 몸을 차지한 마왕은 내가 처음인가?" 드래곤은 인간계에선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최강의 생물이다. 그런 만큼 인간계에 강림한 마왕에게 드래곤의 육신은 가장 훌륭한 빙의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럴 경우 드래곤의 철저한 보복을 각오해야 했지만 반대급부가 확실했기 때문에 많은 마왕들이 드래곤을 노렸고 또 성공했다. 그러나 그 모두는 웜급 드래곤을 죽이고 그 육신을 빼앗은 경우였다. 에인션트급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베르키스 놈에게 좋은 선물을 받았군." 나이델하르크는 괴소를 흘리며 기지개를 켰다. 투툭 몸을 묶은 가죽 끈이 맥없이 터져 나갔다. 애당초 몸을 들것에 고정시키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강인한 드래곤을 힘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대지를 단단히 딛고 선 나이델하르크는 새로 얻은 몸을 세세히 가늠해 보았다. 전신 근육에서 강력한 힘이 느껴졌고 드래곤 하트 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마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이델하르크를 기쁘게 한 것은 칠종단금술로 인한 고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너무도 끔찍한 기억이었기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정말 생각하기조차 싫은 고통이었어." 말을 하다 말고 나이델하르크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조금전까지 그가 차지하고 있던 몸 즉, 데이몬의 육신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지를 맥없이 늘어뜨린 채 끊임없이 경련하고 있는 데이몬의 참혹한 모습에 나이델하르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불쌍한 녀석." 하지만 나이델하르크는 곧 관심을 지웠다. 죽여줌으로써 고통을 덜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애당초 나이델하르크에겐 그럴 만한 자비심이 없었다. 그는 인간의 고통과 증오심을 통해 힘을 얻는 대마왕이었다. 고개를 돌린 나이델하르크의 시선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용사들에게 향했다. "세, 세상에......." 그들은 경악 어린 눈빛으로 나이델하르크를 쳐다보고 있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베르키스가 되살아났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델하르크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예상치 못한일로 생명을 얼마 더 연장했군. 하지만 그런 행운은 두 번 다시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마음을 정리한 상태였다. 저들을 모두 죽여 버린 다음 남은 영혼으로 하여금 또다시 데스 나이트를 만들어내는 것이 새로 결정한 계획이었다. 저들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동의여부가 필요 없는 언데드인 듀라한이나 스펙터로 만들어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인간계를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완벽해야 했다. 적어도 오백년 전의 실수를 되풀이 할 수 없었다. "데이몬이란 놈이 종속의 혈충을 심어둔 덕택에 난 정벌군의 총사령관을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다. 또한 게덴하이드에겐 오크의 대군을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 난 이 둘을 움직여 전황을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난전으로 이끌 생각이다. 거기서 발생하는 천문학적인 원혼을 이용해 어둠의 군대를 계속적으로 불려 나간다면......"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는 듯 나이델하르크가 미소를 지었다. 원래 계획에서 조금 빗나가긴 했지만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전력은 인간 쪽이 월등히 우세하다. 데이몬의 신분을 이용해 그 우세를 조금 감소시켜 주려고 했지만 뜻밖의 상황으로 인해 어긋나 버렸어 부득이 차선책을 택해야겠군." 그는 슈렉하이머에게 중대한 역할을 맡길 생각이었다. 그를 데이몬으로 분장시킨 다음 4대 기사를 비롯한 데스 나이트 군단을 주어 오크의 군대에 합류시킨다면 두 종족간에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출 수 있을 터였다. 나이델하르크가 바라는 것은 쌍방에 가능한 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이었다. 생각을 마친 나이델하르크는 슈렉하이머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데이몬의 얼굴가죽을 비롯한 전신 가죽을 벗겨라." "가, 가죽을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벗겨낸 가죽을 네가 걸친 다음 데이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차피 넌 뼈만 남은 리치 몇 가지 마법처리를 가미한다면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화신할 수 있을 것이다. 슈렉하이머는 더 이상의 머뭇거림 없이 데이몬에게로 다가갔다. 아직까지 숨이 끊어지지 않았는지 데이몬의 몸은 쓰러진 상태로 계속 경련하고 있었다. 시선을 거둔 나이델하르크의 관심이 마침내 용사들에게 향했다. "먼저 데이몬을 아는 놈들을 이 자리에서 깨끗이 없애야겠군. 적어도 슈렉하이머의 정체가 탄로 나게 해서는 안 될 테니 말이야." 나이델하르크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우두커니 서 있던 마물들이 뒤로 물러나가 시작했다. 그 자리를 질서정연하게 행군해 온 데스 나이트 군단이 채웠다. 철컹 철컹 그 선두에는 4대 기사가 소름끼치는 광망을 토해내며 서 있었다. 나이델하르크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가급적 데스 나이트들을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으니 할 수 없군. 이들이라면 최대한 신속하고 깔끔하게 처리하겠지?" 말을 마친 나이델하르크가 몸을 돌렸다. 사백의 데스 나이트 군단이라면 오십 명의 용사들 정도는 불과 몇 분 사이에 전멸시켜 버릴 것이다. 그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채 나이델하르크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우선 데이몬의 가죽이 잘 벗겨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슈렉하이머를 쳐다보았다. 순간 그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뭐, 뭐야?" 그곳에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면목없습니다. 데이몬." "자책하지 마시오, 대승정. 대마왕의 명령에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은 나 역시 뼈저리게 실감했었소." 감회 어린 표정으로 슈렉하이머와 담소를 나누는 이는 데이몬이었다. 산채로 가죽이 벗겨지고 있어야 할 그가 멀쩡히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더 이상 고통을 느끼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과 입가에 비친 핏기만이 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극심한 고통에 휩싸여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케 했다. 고통의 잔재를 털어 버린 데이몬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나이델하르크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주었다. "많이 놀랐나보군. 나이델하르크." "어, 어찌된 일이냐?" 얼마나 놀랐는지 나이델하르크는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데이몬이 칠종단금술의 고통에서 벗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나이델하르크의 당황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이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는 듯 진저릴 쳤다. "그토록 많이 겪어보았지만 이놈의 빌어먹을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더군. 네놈도 많이 힘들었지? 나도 이해하지, 암." 나이델하르크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어떻게 해서 고통이 사라졌는지 고하란 말이다!" 데이몬은 검지를 들어 느릿하게 흔들었다. "성급하긴. 간단한 문제 아닌가? 율리아나를 죽인 것은 바로 너다. 그런데 네가 내 몸에서 빠져나갔으니 칠종단금술이 더 이상 나에게 고통을 가할 이유가 없지 않겠나?" "믿을 수 없다. 그 계집애를 죽이는 순간에 너와 나는 하나였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였지만 지금은 둘로 분리되었지. 명심해라. 칠종단금술은 통상적인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금제술이다. 나도 아직까지 칠종단금술의 진정한 묘용을 알지 못한다. 말을 잊은 듯 나이델하르크는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그의 눈동자에서 광망이 뿜어져 나왔다. "그 가증스런 금제에서 벗어나다니 놀랍군. 하지만 결정적으로 너는 되살아나지 말았어야 했다." "산채로 가죽이 벗겨질 때까지 잠자코 있어야 했다는 뜻인가?" "그렇다. 수고를 끼치게 한 대가로 나는 너에게 가장 끔찍한 죽음을 내리겠다. 우선 네놈에게 작은 고통을 안겨 줄 것이다. 보통 인간들은 동료들의 죽음에 무척 민감하게 반응하더군." 말을 마친 나이델하르크는 4대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한 놈도 살려둬서는 안 된다." 하지만 데이몬은 동요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측은하다는 눈빛으로 나이델하르크를 쳐다보고 있었다. "멍청한 녀석. 데스 나이트들이 네 명령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나?" 나이델하르크는 신경 쓸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나는 마계의 군주, 어둠의 존재는 그 누구도 나의 명령을 거절하지 못한....... 헉." 나이델하르크는 깜짝 놀랐다. 예상과는 달리 데스 나이트들이 그의 명령을 받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명령을 받지 않은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그들의 모습에 나이델하르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감히 나의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뜻인가? 명령이다. 지금 즉시 저들을 죽여라." 나이델하르크가 재차 명령을 내렸지만 데스 나이트 군단은 요지부동이었다. 마치 석상처럼 우두커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분기가 치솟기 시작한 나이델하르크의 귀로 데이몬의 유들유들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내 몸에 많은 것들 남기고 갔더군. 잠시나마 내 몸을 가졌던데 대한 선물치고는 과분할 정도로." "........." "마력의 원천을 절반이나 두고 가다니..... 꽤나 급하긴 급했나 보지?" "뭐, 뭐라고?" 깜짝 놀란 나이델하르크가 다급히 몸 상태를 살펴보았다. "이, 이런!" 순간 그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어 들어갔다. 데이몬의 말대로 마력의 원천이 절반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력의 원천. 말 그대로 순수한 어둠의 마력을 생성해내는 기관이었다.(에반게리온 S2 기관도 아니고 ㅡㅡ;) 헤아릴 수 없는 마계의 존재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대마왕만이 보유할 수 있는 기관이기도 했다. 여기서 만들어내는 어둠의 마력으로 부하들을 통솔하고 병사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기에 마왕에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었다. 심지어 순한 전투력이 마왕을 넘어선다는 존재인 발록조차도 이 마력의 원천만은 보유하지 못했다. 오직 마계의 군주가 아니고서는 마력의 원천을 보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귀중한 기관을 반이나 버려두고 오다니..... 나이델하르크는 등골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분리과정을 곰곰히 생각해보던 나이델하르크는 모든 것이 칠종단금술 때문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칠종단금술로 인해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와중에서 급히 분리를 시도했기 때문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 것이다. 지금껏 흡수한 존재를 분리해 본 경험이 한 번도 없었기에 나이델하르크는 그 사실을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렇군. 그래서 데스 나이트들이 명령을 받들지 않았군." 그는 그때서야 작금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데이몬이 몸속에 마력의 원천을 일부나마 품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마물들이나 데스 나이트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데이몬도 마왕으로 인식할 터였다. 그렇다면 상황은 심각했다. 모여있는 마물들이 누굴 따를지는 오로지 자유의사에 달려 있었다. 다시 말해 마졸들이 섬길 마왕을 선택하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나이델하르크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실수가 조금 컸군." 침음성을 내뱉은 나이델하르크가 데이몬을 향해 한 발 앞으로 나갔다. 그의 몸에서 살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실수란 수습하면 그만이지. 지금 이 자리에서 네놈을 죽여 마력의 원천을 회수하겠다." "그럴 순 없지. 한 번 당한 것으로 족해." 나이델하르크가 버럭 노성을 질렀다. "감히 나에게 대항하겠다는 뜻이냐?" 데이몬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 귀하다는 마력의 원천을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호락호락하게 당하면 안되겠지?" 나이델하르크가 차갑게 냉소를 지었다. "멍청한 녀석. 마력의 원천을 얻었다고 해서 네놈이 감히 그것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나?" 하지만 이어진 데이몬의 대답에 나이델하르크는 또다시 굳어버려야 했다. "왜 안되지? 고맙게도 네놈은 기억까지 고스란히 남겨뒀더군. 그로 인해 머리가 터질 것 같지만 적어도 마력의 원천을 운용하는 방법은 확실하게 배웠다." "......." "그뿐인 줄 아느냐? 네놈이 다스리던 마계 왕국에 대한 모든 것. 네 부하들의 편성. 마계 왕국간의 알력. 거기에다 네놈이 흡수한 존재들의 기억까지 모두 내 머릿속에 있다. 선물치고는 과분하지만 네놈이 나에게 한 짓을 생각해서 고맙게 받도록 하겠다." 말을 마친 데이몬의 전신에서 점차 살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거기다 네놈은 율리아나를 죽였다. 네놈이 말했던 그 아인 나의 진면모를 알고도 마음을 준 유일한 여인이다. 때문에 난 네놈에게서 반드시 그녀의 목숨 값을 받아낼 생각이다. 그녀의 희생 때문에 이렇게 몸을 되찾게 되었고 마력의 원천까지 얻었으니 복수를 해줄 능력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 말에 나이델하르크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놈, 네가 베르키스의 육신을 차지한 날 당해낼 수 있을 것 같나?" "왜 안 되지? 나 역시 무수한 싸움을 겪어온 몸. 거기에다 나에 수많은 조력자들이 있다." 말을 마친 데이몬은 고개를 돌렸다. 데스 나이트들이 시립해 있는 곳이었다. "헬버트론, 라인델프, 프림베르그, 사라미스. 나에게로 오라. 나에겐 너희들의 힘이 절실히 필요하다. 너희들과 내가 힘을 합친다면 세상에서 당해내지 못할 존재란 없다." 데이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4대 기사들이 몸을 날렸다. 바람처럼 움직인 그들은 데이몬의 뒤에 공손히 시립했다.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다, 데이몬" "몸이 가루가 될 때까지 싸워주겠다." "너와 함게 싸우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한다." 데이몬을 향해 한 마디씩 내뱉은 데스 나이트들이 데스 블레이드를 자욱하게 내뿜기 시작했다. 데이몬의 안색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놈들..... 나이델하르크에게는 감히 개기지도 못하면서 나에겐 반말 짓거리나 늘어놓다니....." "어쩔 수 없다. 네놈이 우리들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니." 얼굴을 구기며 툴툴거린 데이몬이 고개를 돌렸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 할 수 없지." 급히 표정을 고친 데이몬이 나이델하르크를 향해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네놈도 알다시피 이곳에는 두 명의 마왕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마물이나 언데드들은 자체적으로 섬길 마왕을 선택해야 한다. 일단 4대 기사는 날 따르겠다고 결정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스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데이몬 당신께 충성을 바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슈렉하이머의 음성이었다.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이제 다섯으로 늘었군. 그럼 이제부터 편가르기를 본격적으로 한 번 해 볼까?"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나이델하르크가 매서운 눈빛으로 4대 기사를 노려보았다. "어둠의 존재로서 감히 날 배신하다....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4대 기사는 조금도 꿀림 없이 나이델하르크의 눈빛을 맞받았다. "우린 섬길 마왕을 선택한 것뿐이오." 마력의 원천 덕택에 데이몬은 이제 마왕에 거의 육박하는 반열에 올라 있었다. 이미 그를 섬기기로 마음먹었으므로 4대 기사들은 아무 무리 없이 나이델하르크의 눈빛을 맞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럴 때가 아니지. 일단 수하들을 끌어 모아야겠군." 결사적으로 흥분을 가라앉힌 나이델하르크가 마물들이 모여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충실한 부하들이여." 마계에서 온 괴수들은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이 나이델하르크의 명령에 따랐다. 이백에 달하는 마계마물들이 나이델하르크의 뒤에 질서정연하게 도열했다. 나이델하르크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이제 우세가 뒤집혀졌군 이들은 마계에 있을 때부터 나의 충실한 수하들이었다. 배신한 떨거지 다섯 정도는 한 방에 박살을 내버릴 것이다." "미안하군, 떨거지가 다섯이 아니라서."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마자 데스 나이트 군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컹 철컹 질서정연하게 걸음을 옮기던 데스 나이트들은 놀랍게도 데이몬의 뒤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데이몬을 섬기기로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단 두 명의 데스 나이트만이 나이델하르크의 옆에 시립 했다. 포탈에서 거둔 녀석들 중 살아남은 놈들이었다. 4대 기사를 위시해서 노스우드 평원에서 거둔 데스 나이트들은 모두 데이몬의 편에 붙었다. "이런." 그 모습을 지켜본 나이델하르크는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백에 달하는 데스 나이트 군단이 몽땅 넘어갔다면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이, 이게 어찌된 일이지? 나의 마력으로 소환된 녀석들이 어찌해서...." 귓전으로 데이몬의 이죽거리는 음성이 파고들었다. "멍청한 자식. 이들은 드래곤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데스 나이트가 되는 데 동의했다. 그런 이들이 베르키스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네놈을 선택할 것 같았나?" "........" "이들은 악과 욕망에 찌든 영혼들이 아니다. 복수를 위해 자신을 불사른 숭고한 영혼들이지. 미안하지만 네놈은 빙의할 몸을 잘못 선택한 것 같군. 고작 드래곤의 육신 하나를 얻는 대가로 사백의 데스 나이트를 잃다니 말이야." "크으....." 데이몬의 뒤에 도열한 사백의 데스 나이트 군단을 쳐다보며 나이델하르크는 침음성을 내질렀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이 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당장이라도 어둠의 마력을 회수하여 저들을 원래의 형태인 망령으로 되돌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마력의 원천이 데이몬에게도 있기 때문에 나이델하르크로서도 섣불리 손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데이몬의 말에는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드래곤에 대한 끝없는 증오심으로 데스 나이트가 되는 길을 선택한 영혼들이 베르키스의 몸을 차지하고 앉은 자신을 고운 눈으로 쳐다볼 리가 없었다. 말을 마친 데이몬이 느긋한 눈빛으로 나이델하르크를 쳐다보았다. "이제 상황이 역전되었군. 만만치 않아 보이는 마물들이지만 나의 군대도 섣불리 얕잡아 볼 수 없을 것 같지 않나?" 나이델하르크가 멍하니 서 있는 사이 편가르기가 점점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게덴하이드는 예상대로 휘하의 리치 삼십을 데리고 나이델하르크의 뒤에 섰다. 두 명의 데스 나이트와 삼십의 리치라면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그럼에도 나이델하르크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줄은 몰랐군. 하지만 오산하지 말아라. 역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마계대전을 치러온 마왕이 바로 나다. 자고로 마계대전이란 지휘하는 마왕의 능력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네놈은 결코 날 감당할 수 없다. "후후, 그것 미안하군, 나 역시 싸움이라면 이골이 난 몸이야. 그리고 나에게 힘을 빌려줄 또다른 세력 있지." 말을 마친 데이몬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한데 뭉쳐있는 용사들을 향했다. "녀석들....." 데이몬이 얼굴이 갑자가 부드러워졌다. 익숙한 얼굴들을 다시 보게 되니 감회가 이만저만 새롭지 않았다. "카심, 날 알아보겠느냐?" 카심이 얼른 앞으로 나섰다. 데이몬과 나이델하르크가 나누는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었기에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데이몬이십니까?" "그렇다. 나이델하르크가 아니라 확실한 데이몬이다." 잠시 주저하던 카심이 만면에 미소를 떠올렸다. "다시 뵙게 되어 더 없이 반갑습니다, 데이몬." "나 역시 그렇다. 카심"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이 말을 이었다. "긴말하지 않겠다. 카심 용병단은 이제부터 본연의 임무인 사냥을 시작한다. 이번에 사냥할 대상은 드래곤이 아니라 드래곤의 탈을 뒤집어 쓴 대마왕이다. 사냥하기가 만만치 않을 테니 마음 단단히 먹도록 해라." 카심은 추호도 머뭇거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랄 데 없는 사냥감이로군요.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카심이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드이어 카심 용병단원들이 활약할 때가 왔다. 사냥할 대상은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와 그의 마계 똘마니들이다. 힘껏 싸우자." "와아아아!" 카심 용병단원들은 살기를 줄기줄기 내뿜으며 손에 든 검을 들어올렸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반드시 율리아나의 핏값을 받아내겠다는 결의가 번뜩이고 있었다. 미첼과 제럴드가 제일 선두에 선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들 둘은 율리아나의 죽을을 특히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던 미첼은 물론이었고, 암암리에 율리아나를 연모하고 있던 제럴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이참에 반드시 대마왕의 명줄을 끊어놓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미소 띤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던 데이몬이 이번에는 크로비츠를 쳐다보았다. 데이몬은 이번에도 길게 말하지 않았다. "대마왕을 상대로 싸우지 않겠는가?" 크로비츠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한 손 거들게 해 주신다면 필생의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데이몬." 크로비츠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의 휘하 기사들도 기쁜 표정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조금 전과는 달리 그들의 얼굴에는 새로운 희망이 피어나고 있었다. 마왕의 군대를 상대로 싸우는 것은 변함없었지만 그들에겐 수많은 우군이 생겼다. 데스 나이트로 이루어진 언데드 군단이었지만 데이몬이 통제하는 이상 든든한 동료들임에는 틀림없었다. 촤촹 그들은 크로비츠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이동을 시작했다. 목표는 지금껏 대치하고 있던 데스 나이트들의 대열이었다. 흡족하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의 시선이 이번에는 아이언 골렘에게로 향했다. 이제부터 있을 전투에서 아이언 골렘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탄타로스, 이리로 오너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굵직한 저음과 함께 와이언 골렘이 쿵쾅거리며 이쪽으로 뛰어 왔다. 순순히 보낼 수 없다는 듯 마계마물 두 마리가 앞을 막아섰다. 거대한 쥐며느리의 몸에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있는 모습의 마물과 투구풍뎅이에 사마귀의 상체가 달려있는 놈이었다. 아이언 골렘에 육박할 정도로 거대한 녀석들이었지만 탄타로스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를 향해 두자루의 긴 낫이 날아갔다. 마물 중 한 놈이 휘두른 공격이었는데 애석하게도 탄타로스는 낫의 궤적에 걸리지 않았다. 부우웅 탄타로스가 특유의 비행능력을 사용하여 공격을 사뿐히 비해낸 것이다. 하늘로 솟구친 탄타로스는 그대로 바닥을 향해 내려 꽂혔다. 콰직 강철로 된 거대한 발이 사마귀 모양을 한 마물의 상반신을 그대로 으깨어 버렸다. 시커먼 마물의 피가 사방으로 튀며 악취가 풍겨져 나왔다. 느닷없이 동료하나가 횡사하자 쥐며느리 형상의 마물이 돌연 몸을 공처럼 둥그렇게 말았다. 구형 동체에서 돋아난 가시가 대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가시가 돋힌 거대한 공이 된 마물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며 탄타로스를 향해 돌격을 시작했다. 콰콰콰콰 금방이라도 깔려 짜부라질 것만 같았지만 탄타로스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마물이 가까이 접근하기를 기다린 뒤 탄타로스는 손에 든 타워실드를 비스듬히 땅 속으로 박아 넣었다. 사십 오도 각도 비스듬하게 세워진 방패는 그 어떤 공격이라도 허공에 흘려버릴 수 있었다. 푸캉 예상대로 마물은 방패에 부딪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거의 동시라고 볼 수 있는 순간에 거대한 그레이트 액스가 마물의 몸을 파고들었다. 탄타로스가 덮어놓고 그레이트 액스를 휘둘러버린 것이다. 퍽 검은 피가 자욱하게 뿜어졌다. 허무하게 쪼개진 마물의 동체가 맥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캬아아악 피를 보자 마물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탄타로스는 그 모습을 보지도 않고 몸을 날렸다. 베르키스가 만들어 낸 회심의 역작답게 마물 두 마리 정도를 식후 운동거리로 간단히 처리해버린 것이다. 아이언 골렘이 달려가는 방향에는 데이몬이 버티고 서 있었다. 아이언 골렘이 다가오자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대마왕 슬레이어 군단이 완성되었군. 대마왕을 사냥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겟는 걸?" 졸지에 사냥감으로 전락해버린 나이델하르크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건방진 인간, 죽고 싶으냐?" 하지만 데이몬이 거느린 전력은 그가 경거망동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하지 않았다 나이델하르크는 직감하고 있었다. 이 싸움 이 평생을 통틀어 가장 험준할 것이란 사실을. 하나의 산에 범 두 마리가 양립할 수 없듯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이 자리에서 죽어야 했다. 그래야만 반쪽 짜리 마왕이 하나로 온전히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기억을 공유한 덕분에 둘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데이몬과 나이델하르크가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는 사이 양측군대는 서서히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느 한 쪽이 전멸되어야 끝날 전투였다. 데스 나이트 군단과 마물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선택한 마왕이 승리를 거둬야만 자신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름끼치는 데스 블레이드를 뿜어 올리며 데스 나이트들이 선두에 섰다. 전열의 가운데에는 용사들이 검을 그러쥔 채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마물들 역시 기성을 질러대며 전의를 북돋웠다. 게덴하이드를 위시한 리치들은 벌써 허공에 솟구친 채 마법공격을 퍼부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데이몬이 탄타로스의 어깨에 올라탔다. 베르키스의 육신을 차지했기에 나이델하르크는 이제 비행능력까지 보유했다고 봐야 했다. 리치들 역시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마법공격을 퍼부을 수 있다. 반면 데이몬이 보유한 전력 중에서 날아다닐 수 있는 존재는 아이언 골렘밖에 없었다. 바로 그 때문에 데이몬은 탄타로스의 어깨에 탑승한 채 싸움을 치르려는 것이다. 4대 기사가 그를 바짝 따라 붙었다. 이제부터 그들은 대마왕을 상대해야 했다. 본 드래곤 러셀런트가 빠지고 아이언 골렘인 탄타로스가 끼어들었지만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왔던 터라 손발을 맞추는 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을 터였다. 물론 대마왕 나이델하르크를 상대로 손쉬운 승리를 예상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 어둠의 존재로 구성된 양측 군대는 서서히 거리를 접혀 나갔다. 캬오오 전의를 불태우려는 듯 마물들이 포효를 내지르자 데스 나이트들은 질세라 데스 블레이드를 뿜어냈다. 숨막힐 듯한 긴장의 순간이 지나가고 마침내 결전이 시작되었다. 쾅 콰쾅 황량한 노스우드(ㅋ 웰라멧은 아니고 ㅡㅡㅋ)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는 지금껏 인간계에서 일어난 그 어떤 전투보다도 치열했고 또한 처참했다. 6. 나이델하르크의 진정한 힘 마물들의 집게발과 가시, 거대한 꼬리가 사방을 맹렬히 후려갈겼다. 거기에 질세라 소름끼치는 데스 블레이드가 흙먼지를 뚫고 자욱하게 뿜어져 나왔다. 하늘이 놀라고 땅마저 까무러칠 정도의 처절한 격전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해 둘로 나눠진 마력의 원천. 그 때문에 둘로 갈라져야 했던 어둠의 군대는 치열하게 상대를 죽여 나갔다. 어디 한 곳 물러남이 없는 비정한 공방전이었다. 모두가 전투가 주는 광기에 사로잡혀 제 몸 따윈 전혀 돌보지 않았다. 나이델하르크가 이끄는 마계마물들은 상상을 불허하는 전투력을 보유했다. 검이 박히지 않을 만큼 두껍고 견고한 껍질과 엄청난 괴력, 다소 둔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날렵하다고 소문난 오우거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의 몸놀림 게다가 대부분 가시나 피에 맹독을 품고 있어 인간들이 상대하기에는 극히 까다로운 괴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마물들에 맞서 싸우는 주력은 인간이 아니었다. 같은 어둠의 계열이지만 속성은 판이하게 다른 존재, 움직이면서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언데드, 그 중에서도 당당히 수위의 전투력을 차지하고 있는 데스 나이트였다. 원래 데스 나이트란 타락한 기사의 영혼으로 만들어지는 존재였지만 이들만은 달랐다. 드래곤에 대한 순수한 복수의 일념으로 영혼을 불사른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허공에서는 열 마리 남짓한 다크 쉐이드와 리치들이 매서운 지원사격을 퍼붓고 있었다. 펑 퍼펑 강력한 전투력과 뛰어난 지능으로 마계에서도 수위를 차지하는 마물 다크 쉐이드. 온갖 종류의 마법에 능숙하며 강철조차도 갈기갈기 찢어버릴 만큼 날카로운 손톱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 다크 쉐이드의 강점은 단연 독이었다. 스치기만 해도 전신이 마비되는 맹독에는 라이프 드래인(life drain) 기능이 포함되어 있어 중독된 상대를 급격히 노화시킬 수 있다. 암흑 전쟁 당시 혼자서 오백 명의 병사를 전멸시켰다는 기록까지 남아있을 정도로 다크 쉐이드는 강력한 마물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무시무시한 악명을 보유한 다크 쉐이드도 데스 나이트를 상대로는 변변한 활약을 펼칠 수 없었다. 독이 전혀 통하지 않을 분더러 마법저항력까지 보유한 탓에 다크 쉐이드가 데스 나이트에 대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날 수 있다는 비행능력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다크 쉐이드는 허공을 배회하면 지원 사격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게덴하이드가 이끄는 리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데스 블레이드에 적중될 경우 본체가 그대로 박살나 버릴 것이기에 공격이 미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집중포화만을 퍼붓고 있었다. 쾅 쾅 난전 중에 가해지는 마법공격은 효과가 만점이었다. 평상시라도 빠른 몸놀림으로 회피해버릴 데스 나이트였지만 마물들과 치열하게 싸우는 와중에서는 쉽사리 마법공격을 피해 낼 수 없었다. 공격을 가하는 리치들은 대부분 6서클 이상. 마법저항력이 뛰어난 데스 나이트라도 정통으로 얻어맞는다면 크나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콰콰콰쾅 5서클의 마법 익스플루전에 얻어맞은 데스 나이트 하나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순간 맞서 싸우던 마물의 꼬리가 바람처럼 대기를 갈랐다. 마친 전갈과 흡사하게 생긴 마물이었다.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것은 마계마물들에겐 이미 본능에 속했다. 퍼퍽 날카로운 꼬리에 몸통이 꿰뚫린 데스 나이트의 몸이 허공에서 명렬히 내저어졌다. 평범한 인간기사라면 독으로 인해 벌써 절명했겠지만 데스 나이트는 아니었다. 검을 휘둘러 꼬리를 베어버린 데스 나이트의 몸이 맥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순간 데스 나이트를 향해 엄습해 들어오는 막강한 기운. 재빨리 몸을 굴렸지만 애석하게도 한 발 늦어버렸다. 뭔가가 데스 나이트의 몸을 강하게 짓눌렀다 콰지직 데스 나이트의 하체가 허무하게 으스러졌다. 거대한 코끼리 모양의 마물이 기다리고 있다가 덮어놓고 그를 밟아버린 것이다. 하반신이 완전히 결딴났음에도 데스 나이트는 죽지 않았다. 전신이 산산조각 나지 않는 한 죽지 않는 언데드답게 데스 나이트는 도리어 자신을 공격한 마물의 발에 장검을 깊숙이 찔러 넣고 있었다. 데스 블레이드가 충만히 깃든 장검이 마물의 가죽을 뚫고 뼈와 살을 갈랐다. 쿠에에엑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마물이 발을 마구 짓찧었다. 발에 밟힌 데스 나이트가 가루가 될 때까지. 투구까지 납작하게 짜부라든 데스 나이트는 결국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를 소멸시킨 마물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생전에 뛰어난 기사였던 만큼 데스 나이트들은 동료를 죽인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않았다. 부근의 데스 나이트들이 눈에 불을 켜고 모여들었다. 코끼리를 닮은 마물은 오래지 않아 서너 명의 데스 나이트에게 둘러싸였다. 그리고 최후를 맞이했다. 데스 나이트를 하나 소멸시킨 죄로 전신이 데스 블레이드에 난자 당해 수십 토막으로 나뉘어버린 것이다. 상황은 이처럼 혼전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쌍방이 모두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마물과 언데드들이었기에 몸의 일부만 남아도 적을 공격하는 일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콰콰콰쾅 전장의 중심부에서는 양쪽의 수뇌들이 힘겨운 접전을 치르고 있었다. 탄타로스에 올라탄 데이몬과 4대 기사들은 나이델하르크를 맞아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베르키스의 육신을 차지한 나이델하르크의 공격은 가공할 만했다. 거대한 동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강한 힘을 아낌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공격이 만만치 않았기에 데이몬이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젠장! 이놈은 베르키스보다 더하군." 드래곤의 육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이델하르크의 공격패턴은 일반적인 드래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우선 드래곤들은 주공격이 마법이었다. 드래곤 하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한한 마나를 이용해 고써클의 마법을 마구 난사했고, 몸을 이용한 격투는 최후에나 선택하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나이델하르크는 달랐다. 강력하고 거대한 동체가 가진 힘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직접적인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이것은 데스 나이트들에게 유리할 수도 있었다. 그들에겐 베지 못할 것이 없다는 비기인 데스 블레이드가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상황은 누구도 예상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가가각 나이델하르크의 한쪽 발을 가격한 장검이 허무하게 퉁겨져나왔다. 데스 블레이드가 자욱하게 서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이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공격을 가한 기사는 프림베르그였다. 그의 자이언트 킬러에 실려 있는 힘을 감안한다면 정말 어이없는 결과였다. 그러나 이 같은 실패는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벌써 수십 번이나 데스 블레이드에 적중되었지만 나이델하르크의 몸에는 흠집하나 나지 않았다. 나이델하르크의 몸을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는 거무스름한 기운이 데스 블레이드의 침습을 전혀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후후후. 날 드래곤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난 수없는 마계대전을 승리로 장식한 대마왕 나이델하르크다!" 나지막한 비웃음소리와 함께 거대한 꼬리가 휘둘러졌다. 데스 나이트들은 분분히 몸을 날려 공격을 피했다. 공격이 먹힐 경우 흔적도 없이 바스러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나이델하르크의 위력은 탄타로스가 충분히 겪어 보았다. 강철로 된 강인한 몸을 믿고 가장 선두에서 서서 싸운 탓에 탄타로스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한쪽 팔과 다리가 떨어져나갔고 거대한 배틀 액스도 부스러진지 오래였다. 퍼퍽 나이델하르크의 동체를 가격하자마자 그레이이트 액스는 맥없이 부스러져버렸다. 오러가 깃들지 않은 병기는 심지어 나이델하르크의 몸에 닿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고 있었다. 이어진 앞발 공격으로 탄타로스의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고, 급히 뒤로 물러나다 꼬리에 얻어맞은 탓에 다리마저 두 동강 나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빈사상태의 중상을 입은 탄타로스. 몸 전체가 강철로 이루어진 아이언 골렘의 벙어력을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데이몬은 질색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 이건 괴물이로군." 데이몬 역시 손을 쓸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이 장기는 마법을 이용한 방해와 공격이다. 하지만 나이델하르크의 몸에는 마법공격이 일체 먹히지 않았다. 그 어떤 마법도 나이델하르크의 몸을 덮은 거무스름한 기운에 가로막혀 덧없이 스러질 뿐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마법을 쓰지 않으니 데이몬의 장기인 마법방해 역시 힘을 발휘할 리가 없었다. 데이몬은 상대에게 자신의 능력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나이델하르크는 마법이 그리 능숙하지 못했다. 그가 쓰는 범위 공격은 눈에서 발사되는 살인광선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광선공격에는 전율스러울 정도의 위력이 담겨 있었다. 4대 기사들조차 맞받아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전력으로 회피해야 할 정도였다. 데이몬이 보고 있는 와중에서도 나이델하르크의 눈에서 광선이 불을 뿜었다. 거무스름한 광선은 라인델프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빗겨나 바닥을 때렸다. 화르르르 광선에 적중된 대지가 그대로 없어져 버렸고 그 자리에는 사방 사미터 남짓한 구덩이 패였다. 보고 있던 데이몬의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강력한 위력이었다. "제길. 이건 헬 파이어보다 더 하잖아? 도대체 뭐지?" 나이델하르크가 힐끔 고개를 돌려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눈초리에 비웃음이 짙게 서려있었다. "암흑투기라고 하지. 이것으로 만들어진 마력결계에는 마법이나 물리적인 공격이 일체 통하지 않아 그뿐 인줄 아느냐? 암흑투기를 공격에 운용할 경우 상상도 하기 힘든 위력을 발휘한다. 비록 네놈이 지식을 얻은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네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암흑투기를 운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직 마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이몬에겐 대답할 틈이 없었다 나이델하르크의 두 눈에서 또다시 빛줄기가 발사되었기 때문이다. 빛줄기가 정확히 그를 노리고 날아왔다. 탄타로스가 급히 방패를 내밀었다. 반사시킬 요량으로 비스듬이 들어 막은 것이다. 콰쾅 방패의 반쪽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방패에 그려진 대마법방어진은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만약 비스듬히 막지 않았다면 방패를 쥔 왼팔까지 날아갔을 터였다. 데이몬은 또다시 가슴이 섬뜩해 오는 것을 느꼈다. "에인션트급인 베르키스가 설치한 대마법 방어진인데....." 나이델하르크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후후후. 이것은 평범한 마법이 아니다. 마법에 암흑투기를 섞는다면 그 위력은 상상을 불허한다. 하지만 네놈은 흉내도 낼 수 없을 것이다. 지식을 얻더라도 곧바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설령 네놈이 방법을 찾았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암흑투기를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데에는 인간의 수명보다 긴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 "이익!" 데이몬은 이를 갈았다 나이델하르크의 말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데이몬은 이미 암흑투기를 느끼고 있었다.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마력의 원천에서 분수처럼 솟아오른 이질적인 기운. 그것은 어둠의 마력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상반된 두 가지의 기운 한꺼번에 솟구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나이델하르크가 사용하는 암흑투기란 사실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사용할 수는 없었다. 급한 마음에 어둠의 마력을 운용하는 방식대로 해 보았지만 암흑투기는 옴싹달싹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방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옴에도 전혀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나이델하르크의 말대로 지식을 얻더라도 그것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련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데이몬에게 그럴 시간이 있었을 리 만무했다. "마왕의 힘이란 역시 명불허전이로군." 고개를 돌리자 팽팽히 진행되는 전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예상 밖으로 데스 나이트 군단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육상전력은 압도적으로 강했지만 나이델하르크에겐 날아다닐 수 있는 마물들이 많이 있었다. 데스 나이트 군단은 그들의 집중 포화에 발목이 잡혀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슈렉하이머만이 분전하고 있었는데, 그 역시 위태위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덴하이드가 기를 쓰며 그를 따라다녔기 때문에 피하느라 여념이 없는 것이다. 데이몬의 얼굴에 다급함이 서렸다. "일단 저들을 도와야겠군." 어차피 마법공격이 먹히지 않은 이상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다. 나이델하르크와의 싸움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이델하르크를 잡지 못하니 놈의 수족부터 먼저 잘라내야겠군." 비록 나이델하르크에겐 어림없었지만 데이몬은 엄청난 능력을 보유한 실력자였다. 그가 힘을 보탠다면 전황을 충분히 우세하게 이끌 수 있었다. 나이델하르크의 수하들을 모두 전멸시킨 다음 데스 나이트군단을 이용해 나이델하르크를 상대하게 하려는 것이 데이몬의 생각해 낸 계책이었다. "서둘러야 겠군." 마음을 정리한 데이몬이 탄타로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떨어져 나갔지만 탄타로스에겐 아직까지 비행능력이 남아있었다. 허공에 떠오른 탄타로스의 거구가 바람처럼 날아갔다. "어딜!" 데이몬의 의도를 간파한 나이델하르크가 힘을 내어 4대 기사를 뿌리쳤다. 탄타로스의 도주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길이 곧 막혔다. 데이몬의 명령에 의해 열 명의 데스 나이트가 그의 앞길을 막아선 것이다. 콰직 나이델하르크의 공격에 두 명의 데스 나이트가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하지만 나머지 데스 나이트들은 동요하지 않고 차분히 나이델하르크의 공격을 막아나갔다. 뽑아든 장검에서는 데스 블레이드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무시할 수 없는 공격이었기에 나이델하르크는 어쩔 수 없이 암흑투기를 뽑아 올려 전신을 방어해야 했다. 가까스로 시간을 번 데이몬은 탄타로스를 탄 채 빠른 속력으로 전장을 벗어났다. "우선 다크 쉐이드와 리치를 견제할 놈들을 만들어 내야해." 데이몬의 몸속에는 엄청난 기운이 들끓고 있었다. 마력이 원천에서는 끊임없이 어둠의 마력과 암흑투기가 생성되었다. 그것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기에 데이몸의 몸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팽해진 상태였다. 인간의 몸으론 감당하기 힘든 양이었기에 어떤 방법으로든 소모시켜야 했다. 때문에 데이몬은 어둠의 마력을 이용해서 다크 쉐이드와 리치들을 견제할 수 있는 언데드들을 탄생시킬 생각이었다. 서둘러 소모하지 않는다면 몸이 터져 버릴지도 몰랐기에 데이몬은 다급해졌다 암흑투기를 이용할 수 없을 지언정 어둠의 마력은 충분히 운용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적어도 백 명의 넘는 마법의 영혼이 떠돌고 있다. 그들을 이용해 다크 후드를 만들어낸다면 놈들을 어느 정도 견제 할 수 있을 것이다." 다크 후드(Dark Hood)란 칠흑의 로브가 속이 텅 빈 채 공중에 떠있는 모습의 언데드였다. 원한을 남긴 채 죽은 마법사의 영혼이 마왕이 발산하는 어둠의 마력과 합쳐져 만들어지는 것으로써 데스 나이트와 는 달리 저급의 언데드였다. 말도 할 수 없을뿐더러 독자적인 사고 역시 할 수 없다. 그다지 수준 높은 마법을 구사하지는 못하지만 대신 마법의 연사력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것이 바로 다크 후드였다. 파이어 볼이나 라이트닝 볼트, 매직 애로우 따위의 기초적인 마법을 짬없이 연달아 퍼부을 수 있는 다크 후드였기에 당면한 상황에서 충분히 활약할 수 있을 터였다. 데이몬은 그 때문에 다크 후드를 만들 생각을 떠올렸던 것이다. 생각을 마친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어둠의 마력을 개방했다. 파파파팟 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어둠의 마력이 사방으로 발산되었다. 데이몬의 입술을 비집고 괴기스런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일어나라, 한 많은 영혼들이여. 일어나서 나에게 힘을 빌려다오. 그대들의 원한을 발산할 상대가 여기에 있다." 데이몬이 주문을 마치자마자 허공에서 뭔가 시커먼 것들이 뭉클뭉클 생겨났다. 거무스름한 기운 점차 뭔가의 형상으로 맺혀 들었다. 마법사들이 즐겨 입는 로브와 동일 모습, 그러나 속은 텅 비어 있었다. 허공에 뜬 텅 빈 로브. 그것이 바로 다크 후드였다. 비교적 수준이 낮은 언데드라서 소환과정은 극히 간단했다. 하지만 이토록 간단히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 못했기 때문에 데이몬은 경탄성을 내질렀다. "마력의 원천에서 생성되는 마력이 극히 순수하기 때문인가?" 하지만 상황은 여유를 가질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다크 후드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다크 쉐이드들이 쏜살같이 이쪽으로 난입해 들어왔다. 충분한 수가 모이기 전에 처리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놈들에게 틈을 줄 데이몬이 아니었다. "먹어라. 이놈들아!" 서너 발의 헬 파이어가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강력한 마법저항력을 가진 다크 쉐이드라서 어줍잖은 마법 따위는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한 공격이었다. 헬 파이어에 격중되면 제 아무리 강력한 마계 생물이라도 소멸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다크 쉐이드들은 분분히 몸을 날려 피했다. 그 틈을 타서 데이몬은 다크 후드를 거듭 소환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스무 기의 다크 후드가 모였다. "가거라. 가서 나의 적들을 한 방에 날려버려라." 데이몬은 생성된 다크 후드를 모조리 전장으로 투입했다. 물론 다크 후드가 리치들을 궤멸시킬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적을 조금 교란시킬 목적으로 보낸 것뿐이었다. 데이몬은 한가닥 기대를 품고 계속해서 다크 후드를 소환했다 어둠의 마력을 조금이라도 더 소모시켜야 했다. "다크 후드는 세 기가 모여야 기껏 리치 하나를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원천적으로 강력한 마법저항력을 가진 존재이니 쉽사리 당하진 않을 것이다." 어둠의 마력을 물처럼 쏟아 부은 끝에 데이몬은 무려 팔십여 기에 달하는 다크 후드를 소환해 날 수 있었다. 데이몬은 그것들을 모두 전장에 투입시킨 다음에야 다시 나이델하르크가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부우웅 탄타로스가 엄청난 파공음을 내뿜으며 전장의 한쪽으로 날아갔다. 나이델하르크가 있는 쪽을 본 데이몬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황이 최악이로군." 발목을 잡기 위해 투입했던 십여 기의 데스 나이트들은 단 하나만 남아 있었다. 4대 기사들이 사력을 다해 분전하고 있었지만 나이델하르크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말 그대로 간신히 발목을 잡고 있을 뿐이다. 데이몬이 보고 있는 동안 마지막 데스 나이트가 나이델하르크의 꼬리 공격에 명중되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대마왕의 전투력은 두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데이몬의 대응 역시 적절했다 다크 후드의 가세로 인해 전체적인 전황이 서서히 호전되고 있었다. 파팡 파파파팡 숨을 몰아쉴 틈도 없이 연달아 퍼부어 대는 다크 후드 마법공격. 마치 가벼운 잽을 연달아 날리는 형국이었지만 리치들의 마법공격을 방해는 데는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마법을 펼치는 데는 고도의 정신집중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다크 후드들이 거듭해서 소란을 피우는 탓에 리치들은 쉽사리 정신 집중을 하지 못했다. 물론 다크 후드의 마법공격에 리치들이 당하는 일은 없었다. 수준이 낮은 마법은 어떠한 경우에도 수준 높은 마법사의 실드를 뚫지 못하는 법이니까. 끼아아아 오직 다크 쉐이드들만이 미쳐 날뛰며 다크 후드를 때려잡고 있었다. 강력한 마법저항력을 가진 다크 쉐이드들은 다크 후드의 마법공격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정통으로 얻어맞아도 거의 타격을 입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다크 후드의 속도는 다크 쉐이드와 맞먹을 정도로 빨랐다. 다크 후드들은 다크 쉐이드에겐 신경 쓰지 않고 빠른 속도로 전장을 누비며 오직 리치들만을 노렸다. 그들이 마법공격을 하지 못하도록 교란하는 데 전념하는 것이다. 그것은 데이몬이 내려놓은 명령이었다. 그러자 힘을 얻은 것은 데스 나이트들이었다. 리치들에게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마물들을 상대할 수 있게 되자 전황은 급격하게 기울어갔다. 마계마물들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데스 나이트 두셋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는 없다. 생전에 뛰어난 기사였던 만큼 데스 나이트는 효과적으로 싸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한 명의 데스 나이트가 마계마물의 공격을 정면으로 막아내는 동안 다른 데스 나이트들은 마물의 약점을 파고 들어갔다.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 발이 잘려나가고 급소에 장검이 박히자 마물들은 맥을 추지 못했다. 쓰러진 마물들은 더욱 비참한 지경에 처해야 했다.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데스 나이트들이 전신을 수십 토막으로 잘라버렸던 것이다. 마물들이 하나둘 쓰러질수록 데스 나이트 군단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싸우던 상대를 쓰러뜨린 데스 나이트들이 머뭇거림 없이 다른 싸움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백에 달하던 마물들은 예상 밖으로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대마왕 나이델하르크가 그런 기미를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잇달아 강력한 공격을 퍼부어 4대 기사들을 멀찍이 떨어뜨린 그가 데이몬을 놀려보았다. "영리한 놈이로군. 그 와중에서도 다크 후드를 소환해내어 전세를 뒤집다니 말이야 놀라울 정도의 상황 판단력이로군. 반드시 죽여야 할 놈이 아니라면 휘하에 거두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미소에는 자신감이 다분히 깃들어 있었다. "미리 말하지 않았나 나도 많이 싸워본 몸이라고. 비록 네놈이 강한 것은 인정하지만 부하들이 모두 전멸된다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한 손으로는 여러 손을 막을 수 없는 법. 네놈은 결국 데스 나이트 군단에 둘러싸여 처참한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이델하르크가 말없이 비웃음 흘렸다. "인간계의 전쟁은 마계대전과는 많이 다르다. 넌 그것을 간과한 죄로 처참하게 당할 것이다. 이제부터 네놈에게 나의 진정한 위력을 보여 주겠다." "위력은 다 보여준 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장난이었어. 그러나 내 군대가 밀리는 것을 보니 나서지 않을 수 없군." 말이 끝나는 순간 나이델하르크이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퍼져 나갔다. 4대 기사들조차 견디지 못하고 뒷걸음질 정도로 강맹한 기운이었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데이몬의 얼굴이 딱딱하게 질렸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기괴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베르키스의 탈을 둘러쓴 나이델하르크가 난데없이 변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와아악 괴악스런 포효와 함께 나이델하르크이 몸이 급격히 불어났다. 마치 풍선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배가량 부풀어 오른 것이다. 선홍빛 동체가 시커멓게 물들며 거죽에서 날카로워 보이는 가시가 삐죽삐죽 돋아났다. 등뼈를 따라 가지런히 솟아오른 가시는 왠만한 기사들의 랜서보다도 길었다. 얼굴에서도 변화가 일었다 송곳니와 발톱이 길게 자라나며 눈동자에서 소름끼치는 빛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뿔이 길게 자라나서 물소의 뿔처럼 뒤틀렸고, 콧잔등과 입 꼬리에서도 새로운 뿔이 생겨났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나이델하르크의 변신. 변신이 끝난 뒤에는 더 이상 드래곤의 모습이 존재하지 않았다. 선사시대에나 존재했을 법한 마룡이 섬뜩한 눈빛을 뿜어내며 일행을 응시하고 있었다. 생전에 마룡이라 불렸던 베르키스가 죽은 뒤에는 확실한 마룡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후후후. 이제 좀 싸울 맛이 나는군." 나이델하르크는 느긋하게 데스 나이트들을 둘러보았다. 그런 태도에 울컥한 데이몬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몸집이 좀 커졌다고 여전히 비대한 도마뱀일 뿐이다. 지금까지 했던 대로 상대하면 된다. 조금만 버티면 데스 나이트들이 마왕의 군대를 깡그리 섬멸하고 가세할 것이다. 힘을 내라." "비대한 도마뱀이라.....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로군." 나이델하르크의 입 꼬리에 차디찬 미소가 걸렸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4대 기사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가 이윽고 몸을 날렸다. 슈우욱 거의 거대한 동체가 갑자기 길쭉해진다 싶더니 바람처럼 대기를 갈랐다. 몸놀림이 워낙 빨라 보였기에 생긴 현상이었다. 그가 노린 목표는 가장 선두에 서서 달려오는 라인델프였다. 흠칫 놀란 라인델프가 급히 몸을 회피했다. 그랜드 마스터급 데스 나이트답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몸놀림으로 옆으로 죽 밀려났다. 하지만 나이델하르크의 속도는 라인델프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변신 전보다 족히 세 배 이상 빨라 보였다. 쾅 나이델하르크의 몸통박치기에 먼가가 격중되었다. 라인델프가 들고 있던 방패였는데, 드래곤 본이 코팅된 강철제 방패가 마치 모래처럼 부스러져버렸다. 부딪히는 순간 그대로 으스러져 버린 것이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급박히 방향을 바꾼 탓에 라인델프는 무사했다. 방패 하나로 피해를 최소화시킨 회피능력은 그가 왜 그랜드 마스터급으로 불리는 지를 잘 말해 주었다. 하지만 나이델하르크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까불만한 실력이지만 더 이상 어림없다." 노성과 함께 이어진 공격. 난입해 들어가는 나이델하르크의 몸놀림은 회피하던 라인델프보다 몇 배나 빨랐다. 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직감한 라인델프가 반격에 나섰지만 애석하게도 한 발 늦을 수밖에 없었다. 콰콰쾅 나이델하르크의 몸통 공격에 격중된 라인델프의 몸이 훨훨 날아갔다. 강인한 데스 나이트의 육체는 이미 산산이 으스러진 상태였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데스 블레이드를 뿜어내어 몸을 감쌌지만 나이델하르크의 몸을 감싼 암흑투기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거의 이백 미터 가까이 날아가 바닥에 처박힌 라인델프의 몸에서는 더 이상의 움직임을 찾아볼 수 없었다. 라인델프를 가볍게 처리한 나이델하르크는 머뭇거리지 않고 옆에 있는 사라미스를 덮쳐갔다. 푸학 푸학 사라미스가 연달아 데스 블레이드를 뿜어내며 회피했지만 나이델하르크는 먹이를 노리는 바다뱀처럼 집요하게 사라미스를 추적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였다. 떨칠 수 없다는 사실을 느낀 사라미스는 도주를 포기하고 맹렬히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덩치가 월등한데다 자신보다 훨씬 빠른 나이델하르크를 떨어버릴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동귀어진도 불사하겠다는 듯 맹렬이 검을 휘둘렀지만 나이델하르크의 몸과 부딪히는 순간 사라미스의 저항은 덧없이 꺾여 버렸다. 파팍 애검은 프로스트 소울이 맥없이 박살났다. 데스 블레이드의 뿜어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나이델하르크의 몸을 감싼 암흑투기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나이델하르크는 거대한 아가리를 쫙 벌려 검을 잃은 사라미스의 허리를 덥썩 물어버렸다. 사라미스가 미처 몸을 빼내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우지직 이빨에 지그시 힘을 주자 갑주가 맥없이 으스러졌다. 사라미스가 필사적으로 데스 블레이드를 끌어올려 저항했지만 나이델하르크의 이빨에는 이미 암흑투기가 깃들어 있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갑주 속을 파고들수록 사라미스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가 옅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헬버트론이 섬뜩한 광망을 뿜어내며 달려들었다. 동료인 사라미스가 당하는 꼴을 멍하니 지켜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나이델하르크에게 채 다가서기도 전에 사라미스의 상체와 하체가 따로 떨어져나갔다. 데스 블레이드가 깨어지는 순간 날카로운 나이델하르크의 이빨에 동강이 나버린 것이다. 가슴어림 근처에서 토막이 난 사라미스의 상체가 맥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무릎어림에서 잘린 다리 두 쪽도 마찬가지였다. 입속에 들어있는 몸통부분은 이미 나이델하르크가 마구 짓씹고 있었다. 콰직 콰직 프림베르그가 달려들어 떨어져나간 사라미스의 상체를 수습했다. 안광이 거의 꺼진 상태였지만 언데드의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탓에 사라미스는 아직까지 소멸되지 않았다. 프림베르그가 사라미스의 잔해를 안은 채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나이델하르크는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입속에 들어 있는 부분을 마구 짓씹는데 열중했다. 잠시 후 나이델하르크는 가루가 된 사라미스의 잔해를 뱉어냈다. "더럽게 맛없군." 그때 헬버트론이 공격을 개시했다. 몸에서 뿜어져 나온 데스 블레이드가 전신을 완전히 감싼 상태였다. 슈각 순식간에 14검을 떨쳐낸 헬버트론. 르헤르트 세이버에는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끌어낸 데스 블레이드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검에 걸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거대한 드래곤의 육신을 가졌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나이델하르크는 그랜드 마스터급인 헬버트론의 공격을 가볍게 회피해낸 것이다. 위기감을 느낀 헬버트론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집었다. "반응이 느리군." 비릿한 냉소와 함께 뭔가가 엄청난 힘을 품고 날아왔다. 예리한 가시가 돋쳐있는 나이델하르크의 꼬리였다.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힘과 속도였다. 다행히 사력을 다해 몸을 날리 덕분에 헬버트론은 겨우 첫 번째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콰릉 하지만 꼬리 공격은 헬버트론조차 제대로 식별하지 못할 정도로 거듭 이어졌다. 치고 후리고 터는 위력적인 연환 공격, 헬버트론이 사력을 다해 몸을 날렸지만 벗어날 수가 없었다.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 헬버트론의 눈빛이 암울하게 젖어들었다. 콰지직 방패와 함께 왼팔이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 사력을 다해 몸 틀어 치명상을 입은 것은 회피한 결과였다. 그러나 나이델하르크의 꼬리에는 시퍼런 빛을 뿜어내는 가시가 빙 둘러 박혀 있다. 그 가시에 걸리자 드래곤 본 재질의 갑옷이 호기 흉하게 패여 들어갔다. 가가가각 심지어 구멍이 뻥 뚫린 곳도 있었다. 인간 기사였다면 벌써 즉사해 버렸을 법한 상처였다. 데스 나이트의 강인한 육신을 가진 헬버트론은 그 상태에서도 반격을 시도했다. 뽑아 올릴 수 있는 모든 힘을 르헤르트에 집중시킨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나이델하르크이 꼬리를 가격했다. 곤두선 채 등판을 향해 엄습해오는 공격 따윈 그냥 무시해버렸다. 그의 모든 것을 건 일격이었다. 콰앙 꼬리에 서린 암흑투기가 흩어졌다 비늘이 쩍 갈라지며 검은색 피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공격을 날린 대가로 헬버트론은 거대한 꼬리가 복부를 뚫고 나오는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관통상이라 표현할 수 없었다. 꼬리에 돋아 난 가시가 함께 뚫고 나오며 헬버트론의 전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던 것이다. 르헤르트 세이버를 집은 팔이 떨어져 나갔고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공격을 허용한 뒤 헬버트론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머리와 가슴 반쪽뿐이었다. 4대 기사들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헬버트론이 순삭간에 무력화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이델하르크의 꼬리에 생겨난 상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스르르 아물어버렸다. 목숨을 담보로 가한 헬버트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 버리는 순간이었다. "감히 내 몸에 상처를 내다니......"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나이델하르크가 거대한 발을 들어 꿈틀거리는 헬버트론의 머리통을 냅다 짓밟으려 했다. 제 아무리 데스 나이트라도 머리가 파괴될 경우는 끝장이다. 헬버트론의 생이 꼼짝없이 이곳에서 다하는 것 같았다.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헬버트론을 살린 것은 프림베르그였다. 죽은 후에도 기사의 서약을 따르는 데스 나이트답게 프림베르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동료를 포기하지 않았다. 휘익 프림베르그가 몸을 날려 헬버트론의 머리를 낚아챘다. 동료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 때문이었는지 그는 자신의 목숨 따윈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간발의 차이로 나이델하르크의 거대한 발이 그곳을 짓밟았다. "쥐새끼 같은 놈." 성난 노성과 함께 굉음이 터져 나왔다. 퍼퍽 프림베르그의 몸이 허공에 붕 떴다 프림베르그는 방패와 하반신이 으스러진 처참한 상태로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헛발질로 화기 치민 나이델하르크가 냅다 걷어차 버린 것이었다. 헬버트론의 머리를 수습하는 게 급했던 프림베르그에겐 미처 방비할 틈이 없었다. 그저 몸을 웅크려 충격을 극소화시키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이델하르크의 발에 걷어 채인 곳은 무릎 부분. 그러나 나이델하르키의 발에 서린 암흑투기로 인해 프림베르그는 허리 아랫부분이 몽땅 으스러진 상태였다. 한참을 날아가 볼썽사납게 나동그라진 프림베르그. 다행히 그의 양손에는 헬버트론과 사라미스의 잔해가 굳게 움켜줘어져 있었다. 그 상태로 프림베르는 데이몬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데이몬, 어서 우리를 복원시켜다오. 시간이 없다." 아직까지 투지를 잃지 않았지만 프림베르그는 이미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물론 데이몬에게서 어둠의 마력을 공급받는다면 복원은 가능했다. 하지만 거기 에는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이처럼 몸이 처참히 박살날 상태에서는 복원시간이 더욱 오래 걸릴 터였다. 그러나 나이델하르크가 그럴 만한 틈을 줄 리 만무했다. 용케 몸을 복원시킨다 하더라도 승산은 없긴 마찬가지였다. 넷이 멀쩡한 상태에서도 순식간에 깨졌는데 다시 덤빈다고 무슨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림베르그는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물러서거나 포기하는 것을 모르는 데스 나이트였다. "뭘 하고 있는 건가?" 프림베르그의 외침을 들었지만 데이몬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4대 기사들이 처참하게 당하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처지에 몰려 있었다. 몸속에서 생겨난 극도의 고통으로 인해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 제길...... 이런 현상이 일어나다니....." 데이몬의 몸은 마치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눈알이 불룩 튀어나왔고 코와 입에서 핏줄기가 비치고 있었다. 엄청난 압력이 신체 내부에서 가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신의 혈맥이 부풀어올랐고 근육이 이완과 수축을 거듭했다. 미증유의 거력이 계속해서 불어나 몸을 부풀리고 있는 고통. 그로 인해 데이몬은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프림베르그에게 어둠의 마력을 보내기란 요원한 일. 접근해오는 나이델하르크를 보자 데이몬의 눈동자가 절망감으로 암울하게 물들었다. "그, 그렇군. 암흑투기였군." 몸속에서 팽창하듯 불어나는 기운은 바로 암흑투기였다. 다크 후드 팔십여 기를 소환한 직후 그는 서둘러 데스 나이트들에게로 돌아왔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데스 나이트를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비록 전투를 지원하거나 직접적으로 가세할 수는 없었지만 그에겐 나름대로 할 일이 있었다. 데스 나이트들에게 계속 어둠의 마력을 보충해 주어야만 그들이 상처 입은 몸을 복원하며 싸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장에 도착한 순간 그의 계획은 물거품처럼 헝클어져 버렸다. 몸속에서 폭발적으로 불어나는 암흑투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은 다크 후드를 소환하기 위해 많은 양의 어둠의 마력을 소모했다. 어둠이 마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그 자리를 마력의 원천에서 새어나온 암흑투기가 채웠다. 그리고는 끊임없이 증식하기 시작했다. 데이몬의 몸속을 순식간에 가득 채운 암흑투기는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는다는 듯 끝없이 증식을 거듭했다. 만약 데이몬이 얼마 남지 않은 어둠의 마력을 돋워 몸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불어난 암흑투기로 인해 벌써 몸 뻥하고 터져 버렸을 것이다. 극도의 통증 속에서 데이몬은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규, 균형을 깬 대가치고는 참담하군." 데이몬은 이것이 어떻게 해서 일어난 일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나이델하르크가 남겨둔 방대한 기억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에 의하면 이것은 어둠의 마력과 암흑투기간에 균형이 깨어져서 생겨난 현상이었다. 언데드를 생성하고 통제하는 어둠의 마력, 그리고 마왕이 지닌 힘의 근간이 되는 암흑투기, 나이델하르크의 기억대로라면 이 두 가지 요소의 균형은 어떠한 경우에도 깨서는 안 된다. 깨어질 경우에는 대마왕이라도 무사하지 못한다. 그런데 데이몬은 다크 후드를 소환하느라 그 균형을 생각 없이 깨어버린 것이다. 그 대가로 데이몬은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후후후." 나이델하르크는 고통에 겨워하는 데이몬을 흡족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그는 이 현상이 무얼 뜻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한낱 인간의 몸으로 암흑투기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나?" 데이몬의 운명은 이제 완벽히 나이델하르크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그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한다면 언제라도 데이몬의 목숨은 끝장날 터였다. 그런데 나이델하르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이참에 데이몬에게서 자신에게 불손하게 대한 데 대한 대가를 확실하게 받아낼 생각이었다. "고통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어디 죽을 때까지 한번 참아보도록." 말을 마친 나이델하르크이 눈에서 섬광이 번뜩했다. 그 섬광은 우두커니 서 있던 탄타로스의 가슴에 정통으로 명중했다. 콰쾅 두터운 장갑판이 맥없이 터져 나갔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탄타로스의 몸이 기우뚱하고 넘어갔다. 막강한 아이언 골렘이 단 한 방에 전투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비록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할 터였다. 나이델하르크는 탄타로스가 행여나 데이몬을 데리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손을 쓴 것이다. 골렘에게 복원기능이 있다고는 하나 이 정도 상처를 단시간 내에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이델하르크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탄타로스를 완벽히 파괴시키지 않았다. "머지않아 있을 암흑전쟁에 아이언 골렘을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고통에 겨워하는 데이몬을 만족스런 눈길로 쓸어본 나이델하르크가 몸을 돌렸다. 데이몬이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자, 잠깐 기다려라." 나이델하르크의 무표정한 눈동자가 데이몬에게로 향했다. 고통에 겨운 나머지 음성이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나, 날 죽여다오. 그렇게 한다면 데스 나이트 군단을 다시 네, 네 수하로 쓸 수 있지 않나?" 비릿한 미소를 지은 나이델하르크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난 지금까지 나에게 대적한 놈들을 단 하나도 살려둔 적이 없다. 저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고, 곧이어 있을 암흑전쟁에서 저들의 힘이 필요하잖나?" 나이델하르크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짙어졌다. "지금 나에게는 저것들 거두는 것보다 네놈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욱 즐거우니까. 심지어 영혼조차 무사하지 못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난 네놈의 영혼을 연옥 깊숙이 박아 놓고 끝없이 윤회되는 고통을 가할 것이다. 그뿐인 줄 아느냐?" 말을 마친 나이델하르크가 느릿하게 손을 뻗어 전장을 가리켰다. "내 손은 죽은 계집애의 영혼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베르하젤의 힘이 미치는 성지. 여기에서 죽은 인간의 영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나에겐 이곳의 영혼들을 다른 곳으로 빼낼 능력이 있다." "다, 다른곳이라니?" "어디긴 어디겠나? 마계지. 너와 네 동료, 그리고 율리아나의 영혼은 내가 고이 거두어 마계로 데리고 가겠다. 그런 다음 연옥에 박아놓고 억겁의 세월동안 요리해 주겠다. 알겠느냐?" 고통으로 일그러진 데이몬의 눈동자에 극심한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극도의 통증으로 인해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압력을 견디다 못해 터져버린 고막으로 나이델하르크의 이죽거림이 희미하게 파고들었다. "율리아나와 네 동료 놈들은 네놈으로 인해 영원히 연옥에서 고통받는 신세가 될 것이다. 크하하하!" 그 말을 남긴 뒤 나이델하르크는 미련 없이 몸을 날렸다. 데이몬의 동료들을 비롯한 데스 나이트 군단을 자기 손으로 직접 정리할 생각에서 였다. 그것을 보면서도 데이몬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계속 증식하는 암흑투기에 저항하는 것도 어느덧 한계에 달해 있었기에. 콰콰쾅 데스 나이트와 마물들이 한데 어우러져 싸우던 전장의 한 귀퉁이가 그대로 터져 나갔다. 나이델하르크가 사정 볼 것 없이 난입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쪽 부분에 위치한 채 접전을 펼치던 데스 나이트 셋과 마물 두 마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공격을 감행함에 있어 나이델하르크는 부하의 안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후후후, 싹 쓸어버리겠다." 나이델하르크는 기괴한 미소를 머금은 채 데스 나이트를 닥치는 대로 때려잡기 시작했다. 그의 몸을 감싼 암흑투기에는 그 누구도 당해내지 못했다. 암흑투기에 닿는 물체는 그 어떤 것도 무사하지 못했다. 검, 방패, 갑주, 심지어 강인한 데스 나이트의 육신까지도 퍼퍼퍼퍽 데스 나이트 군단의 진형을 무인지경으로 휩쓸고 있는 나이델하르크. 그의 앞에 거치적거리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무사하지 못했다. 심지어 불운하게 걸린 마게마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로막은 것은 닥치는 대로 때려부수고 보는 것이다. 무차별적인 파괴를 거듭하는 나이델하르크의 눈동자는 어느덧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전투였다. 그럼에도 데스 나이트들은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항거할 수 없는 상대였지만 머뭇거림 없이 달려들었고 몸이 부서지면서도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나이델하르크에게 공격을 가함과 동시에 데스 나이트의 검과 육신은 흔적도 없이 부스러졌다. 대마왕의 몸을 감싸고 있는 암흑투기에는 그 어떤 것도 견뎌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데스 나이트들은 불을 보고 모여드는 불나방처럼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세, 세상에......" 그 모습을 본 용사들은 기가 질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들의 반응은 무감각하게 목숨을 바치는 데스 나이트와는 사뭇 달랐다. 서서히 호전되는 전황에 다소나마 희망을 품었던 용사들. 하지만 나이델하르크의 가세로 인해 전황은 눈 깜짝할 사이에 뒤바뀌어버렸다. 대마왕의 힘이 이렇게 강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들이었다. 가로막은 모든 것을 때려부수며 나아가는 나이델하르크의 위용에 기가 질린 용사들이 조심스럽게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명을 재촉할 줄을 아무도 몰랐으니..... "가증스러운 인간들이 여기 모여 있었군." 나이델하르크는 기다렸다는 듯 용사들을 덮쳐갔다. 물러서는 용사들이 한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이미 그는 최우선적인 공격목표로 인간들을 노리고 있었다. 이 자리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을 죽이고 영혼마저 능욕하여 데이몬에게 아픔을 더해주는 것이 그의 의도였으니까. 데스 나이트들이 달려들어 앞을 가로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퍼퍼퍽 암흑투기에 닿는 순간 모래알처럼 부서지는 데스 나이트의 육신. 데스 나이트들의 전열을 단숨에 무너뜨린 나이델하르크가 거침없이 용사들 사이로 난입했다. 이후 이어진 것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7. 현경의 벽을 뚫다. "크으으......" 데이몬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이델하르크를 격동시킨 것이 이토록 후회스러울 줄은 몰랐다. "차리리.... 차라리 칠종단금술이 풀리지 않았다면.... 그냥 조용히 죽어줬다면....." 그랬다면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율리아나와 동료들의 영혼이 나이델하르크이 손아귀에 넘어가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괜히 나서서 일을 그르쳤다는 자책감이 가슴이 시커멓게 썩어 들어갔다. 절친한 동료들의 영혼이 억겁의 세월동안 고통받을 것을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방도가 없었다. 시시각각 증식을 거듭한 암흑투기는 이미 데이몬이 버틸 수 있는 한계점까지 도달해 있었다. 이대로 가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몸이 터져 버릴 터였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자신이 소멸될 경우 방출된 암흑투기와 의지할 곳을 잃은 마력의 원천은 나이델하르크에게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대마왕의 지식을 얻은 탓에 데이몬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너, 너무 성급하게 판단을 내렸어." 마력의 원천과 대마왕의 지식을 얻었다고 성급하게 나선 것이 화근이었었다. 마력의 원천은 애당초 인간의 육신으로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드러난 결과를 살펴보면 모두가 자신의 오판 때문에 일어난 것뿐이었다. 나서지 않고 조용히 죽었다면 동료들의 영혼이 더럽혀지지 않았을 뿐더러 4대 기사들 역시 죽지 않았을 터였다. 물론 대마왕의 수하로 남아 인간들에게는 엄청난 재앙으로 닥치겠지만. 가중되는 압력으로 인해 데이몬의 눈알이 툭 불거져 나왔다. "마, 마력의 원천이 바, 발산하는 암흑투기가 이, 이토록 방대할 줄은..." 데이몬은 이미 평소의 세배나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눈동자에는 암울함이 자리 잡은지 오래였다. "이제 끝인가?" 그때 데이몬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한가지 생각이 있었다. "혹시 암흑투기를 내공심법에 따라 운용한다면....."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면 암흑투기는 마나나 마력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데이몬은 이미 어둠의 마력으로는 운공조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바 있다. 하지만 암흑투기를 내공처럼 운용해 본적은 없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데이몬은 즉시 운기를 시작했다. 단전을 잃은 원래의 몸이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육신은 어차피 알카리스의 것이었다. 단전이 존재했기 운공은 가능했다. "한번 해 보자."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최강의 내공심법인 천자혈마공을 택했다. 동남동녀 천 명의 정혈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저주받은 마공. 한번도 운기해본 적 없는 몸이라서 버틸 수 있을 자신이 없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콰르르르 혈맥을 개방하자 몸속에 가득 채운 암흑투기가 봇물처럼 밀려들어갔다. 굳이 힘을 주어 내력을 일주천 시킬 필요가 없었다. 길만 열어주면 암흑투기가 알아서 밀려들어갔다. 마왕의 권능인 암흑투기가 역대 최초로 인간의 내공심법에 따라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데이몬이 암흑투기를 제일 먼저 인도한 곳은 염천혈이었다. 내공을 익히는 무인이라면 가장 먼저 활성화시키는 혈도가 이곳이다. 데이몬 역시 염천혈을 뚫는 것을 시발점으로 내가고수의 길에 입문했다. 늦게 시작했다는 이유로 여러 번의 시행착오도 겪었었다. 그래서 염천혈을 타동시키는 데에는 꼬박 이 년이 걸렸다. 상식적인 관점에 처음 운공을 시작한 자가 곧바로 염천혈을 타동시키는 경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머뭇거림 없이 밀어붙였다. 그는 지금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여기서 데이몬은 암흑투기의 성질이 내공과는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암흑투기는 폭급하며 거칠었고 또한 강력했다. 내공을 백 배 가량 농축해야 겨우 암흑투기와 견줄 수 있을 정도였다. 쾅 그것을 증명하듯 암흑투기는 데이몬의 염천혈을 단숨에 굴복시켜버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내력의 경우에는 단전에 쌓이는 기운을 일주천시키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여분의 진기로 염천혈을 타동한다. 충분한 내력, 적어도 이십 년 이상의 고련한 진기가 있어야 염천혈의 타동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 역시 쉬운 것이 아니었다. 진기를 제대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 즉시 주화입마에 들기 때문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데이몬은 아주 손쉽게 염천혈을 타동했다. 마력의 원천에서 생겨난 방대한 암흑투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염천혈을 굴복시켜 버린 것이다. 두 번째는 승장혈이었다. 이미 데이몬은 운기조식 과정에서 주의해야할 사항 따윈 머릿속에서 모조리 떨쳐버렸다. 지금 데이몬에게 두려운 것은 주화입마 따위가 아니었다. 동료들의 영혼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일념 하나도 인해 극히 무리한 운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통 따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미 칠종단금술이라는 극한의 고통을 겪은 그에게 운공할 때의 통증 따윈 전혀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쾅 승장혈이 맥없이 허물어졌다. 원래대로라면 이 과정에서 정신을 잃어야 정상이었지만 데이몬의 정신은 한없이 맑고 맑았다. 그가 보유한 또 다른 마왕의 권능인 어둠의 마력이 데이몬을 철통같이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암흑투기가 공격적인 성향을 가졌다면 어둠의 마력은 반대로 몸을 회복시키고 언데드를 복원하는 능력을 보유했다. 완파된 언데드를 원래대로 복원시킬 수 있는 이 마왕의 두 번째 권능은 운공과정에서 데이몬에게 타격이 생기는 즉시 치료해주고 있었다. 혈맥에 생기는 상처 따윈 생기자마자 사라져버렸다. 승장혈을 허문 암흑투기는 밀물처럼 데이몬의 장강혈과 대추혈로 향했다. 콰콰콰콰 장강혈과 대추혈 이 두 혈도를 뚫는 순간 내가 고수의 경지에 들어설 수 있다. 그런 만큼 매우 중요한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아르카디아 식으로 따지자면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경지인 팔라딘이 될 수 있는 순간이었다. 파파파팟 암흑투기의 거칠고 폭급한 기운이 한 번도 내공이 오고간 적 없는 혈맥을 거침없이 뚫고 지나갔다. 거치적거리는 부분은 거침없이 확장시켰다. 그 과정에서 몇몇 혈맥이 파열했지만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어둠의 마력이 기다렸다는 듯 파열된 부분을 이어버렸고 상처는 순간적으로 치료했다. 노도처럼 밀려간 암흑투기는 이번에도 예외 없이 장강혈과 대추혈 두 혈도를 타동시켜 버렸다. 그 충격으로 인해 데이몬의 입에서 분수처럼 피보라가 토해졌다. "푸아아아" 원래대로 라면 여기서 운공을 멈춰야 했지만 데이몬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다. 데이몬에겐 노도 같은 암흑투기의 흐름을 제어할 능력이 없었다. 단지 가야 할 길로 간신히 인도할 뿐이었다. 노도와 같은 암흑투기의 물결이 처음으로 멈춘 곳은 데이몬의 백회혈 이었다. 천령개에 위치한 독맥의 마지막 관문인 백회혈은 지금까지의 혈도 와는 달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암흑투기의 물결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여기서 데이몬은 한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암흑투기가 원 주인인 나이델하르크의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사실, 가로막는 것을 모조리 깨부수고 지나간다는 면에서 암흑투기와 나이델하르크는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데이몬의 경험에 의하면 암흑투기와 내공은 속성 면에서 원천적으로 달랐다. 굳센 저항에 부딪힐 경우 내공은 자동적으로 방향을 돌린다. 상대적으로 저항이 적은 곳을 찾아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을 제어하여 올바른 길로 돌리는 것이 운공조식이었고,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실패할 경우 그 즉시 주화입마에 드는 것이다. 하지만 암흑투기는 그렇지 않았다. 저항에 직면하지 암흑투기는 극도로 분노한 듯 부글부글 끓었다. 그리고 백회혈을 향해 재차 부딪혀갔다. 뚫릴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없이 말이다. 쾅 쾅 쾅 제어할 능력이 없는 데이몬으로서는 백회혈이 뚫리기만을 망연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몸은 더 이상 부풀어오르지 않았다. 마력의 원천에서 뿜어져 나오는 암흑투기가 생성되자마자 전신혈맥을 따라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혈맥을 벗어난 암흑투기는 데이몬의 몸속에서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데이몬의 머릿속에서 천둥소리가 터져 나왔다. 콰쾅 마침내 백회혈이 허물어진 것이다. 혈도가 타동되는 순간 데이몬은 뇌리가 하얗게 비는 것을 느꼈다. 원래대로라면 혼절해야 했다. 거기서 깨어날 경우 절정의 경지에 접어드는 것이다. 아르카디아에서 말하는 마스터의 경지였다. 하지만 데이몬의 경우는 그런 수순을 전혀 밟지 않았다 우선 데이몬은 혼절하지 않았다 몸속에 깃든 어둠의 마력이 정신을 잃지 않도록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임독양맥의 타동으로 데이몬의 단전은 더 많은 내력이 저장될 수 있도록 확장되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찌 보면 암흑투기에 의해 강제로 확장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다. 이처럼 제 정신을 유지한 상태에서 임독양맥을 타동한다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기적을 이룬 데이몬은 사력을 다해 노도 같은 암흑투기와 흐름을 생사현관으로 돌렸다.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인 생사현관. 이곳마저 타동할 경우 데이몬은 헬버트론을 위시한 4대 기사와 동일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그랜드 마스터급에 오르는 것이다. 결코 만만치 않은 혈도 였지만 생사현관은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암흑투기의 물결은 어떠한 경우에도 강행 돌파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힘이 모자라자 데이몬의 몸속에 가득 차 있는 나머지 암흑투기마저 끌어오기 시작했다. 푸우우우 터질 듯 부풀어 올랐던 데이몬의 몸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근육과 피, 세포 사이에 넓게 퍼져있던 암흑투기들이 잇달아 데이몬의 생사현관으로 몰려들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상처는 어둠의 마력이 말끔히 치료했다. 마력의 원천에서 생성되는 암흑투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데이몬의 몸속에 존재하는 모든 암흑투기가 생사현관을 뚫기 위해 집중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을 이루었다. 콰쾅 데이몬의 생사현관이 뚫려졌다. 원래대로라면 혼절하는 것이 정상이었고, 그럴 경우 몸은 자동적으로 환골탈태를 시작한다. 몸속의 불순물을 모두 배출하는 과정인 환골탈태, 뼈를 바꾸고 태를 빼낸다는 뜻으로 이것을 통해 인간의 경지를 초월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이번에도 혼절하지 않았다. 환골탈태의 과정도 생략되었다. 이미 데이몬은 어둠의 마력으로 말미암아 몸속에서 불순물이 모두 제거되어버린 상태였기에. 그렇다고 해도 데이몬이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내공 대신 암흑투기가 이용한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데이몬은 마침내 중원에 있었을 때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바로 초절정의 경지였다. 운공은 거기에서도 끝나지 않았다 나이델하르크는 이미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4대 기사를 장난처럼 짓밟아버렸었다. 그를 막기 위해서는 보다 강해져야 했다. 동료들의 영혼이 고통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데이몬은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결정에는 초절정의 경지로도 아직까지 암흑투기를 원활히 제어할 수 없다는 점이 작용했다. '암흑투기를 원활히 제어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싸운다면 백전백패일 뿐이다.' 그는 폭풍처럼 흐르는 암흑투기를 다음 관문으로 몰았다. 여기서 운공을 멈추고 암흑투기를 이미 뚫린 길로만 인도한다면 확실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나이델하르크를 이길 수 없음은 물론이었고, 계속해서 불어나는 암흑투기를 통제하기도 요원했다. 때문에 데이몬은 사력을 다해 암흑투기를 다음 관문으로 인도했다. 주화입마에 대한 우려 따윈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은 아직까지 데이몬이 가보지 못한 경지였다. 바로 현경의 길에 이르는 초입이었기 때문이다. 영호명이 도달했다는 경지인 현경. 데이몬은 일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암흑투기를 인도하는 데에만 모든 것을 전념할 뿐이었다. 콰콰콰콰 암흑투기는 거침없이 현경의 벽을 향해 밀려들었다. 관문을 뚫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을 알았는지 잔뜩 성나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현경의 벽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도달하기가 극히 힘든 장벽이다. 내공을 아무리 많이 쌓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중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내공을 쌓은 자들이 존재했다. 흡성대법 따위의 내공심법을 이용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공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현경의 벽에 도전했다. 과거의 데이몬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자의는 아니었지만 천 명의 동남동녀들에게서 갈취한 정혈을 바탕으로 연성한 천자혈마공은 그를 비약적으로 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현경은 그들 중 누구에게도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아니, 그들에게는 초절정의 경지조차 쉽지 않은 벽이었다. 데이몬 역시 우연한 기회에 깨달음을 얻었기에 겨우 초절정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산공의 고통을 겪으며 허무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서야 했다. 내력이 정순 하지 못하다는 치명적인 약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데이몬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달랐다. 데이몬의 혈맥 속을 무자비하고 휘저으며 폭주하는 암흑투기는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기운이다. 흡성대법으로 끌어모은 혼탁한 진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심지어 도가나 불가의 정순한 내공이라도 암흑투기만큼 순수하지 못할 정도였다. 암흑투기는 마왕이 가진 권능. 데이몬은 이런 암흑투기의 특징을 이용해서 현경으로의 길을 강제적으로 뚫고 있었다. 깨달음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택할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데이몬의 마음은 그만큼 절박했다. 쿠쿠쿠쿠 쾅 거센 파도 같은 암흑투기의 물결이 현경의 관문을 잇달아 두들겼다. 밀려나도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달려드는 암흑투기의 물결. 데이몬의 몸속에 존재하는 암흑투기는 모조리 그쪽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자신의 주인을 초인으로 만들기 위해 끝없는 도전을 거듭하는 것이다. 데이몬에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현경에 들어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 그리고 또 한 번. 굳건하던 벽이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암흑투기는 어느덧 새로운 주인을 닮아가고 있었다. 포기할 줄 모르는 데이몬의 성격처럼 좌절히지 않고 끝없이 관문을 두들기고 있는 것이다. 마치 벽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는 것이 지상과제라는 듯. 대략 천 번 이상 두들겼을까? 마침내 현경의 벽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약해진 부분을 암흑투기가 반사적으로 파고들었다. 쩌저저적 점점 벌어지는 균열. 집요하기 균열 속으로 파고들려는 암흑투기. 새로운 주인에 동화된 탓인지 암흑투기는 한 번 드러난 약점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결국 현경의 벽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현경의 벽이 무너지는 소리는 데이몬의 몸 밖에까지 널리 울려 퍼졌다. 데이몬의 운공조식을 하고 있는 동안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아 가고 있었다. 이미 데스 나이트 군단의 절반이 전멸한 상태였다. 항거할 수 없는 적에게 무모하게 달려든 대가였다. 용사들은 고작해야 열 명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모두가 나이델하르크의 손에 처참하게 당한 죽음이었다. 느닷없이 싸움터로 뛰어든 나이델하르크가 압도적인 힘으로 데스 나이트들을 짓뭉개 나가자 용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의를 잃었다. "세, 세상에......" 도저히 맞서 싸울 상대가 아니었다. 용사들 중에서 슬그머니 전장을 이탈하는 자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덧없이 개죽음을 당하느니 차리리 후퇴해서 정벌군 지휘부에다 마왕이 강림했다는 사실을 알리자는 생각으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빠져나갈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마물들에게 물샐틈없을 정도로 단단히 포위 당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우선 많은 마물들이 데스 나이트 군단과 싸우느라 목숨을 잃었다. 그로 인해 포위망이 다소 옅어진 면도 있었지만 또 다른 이유는 나이델하르크 때문이었다. 나이델하르크가 다가가면 그쪽에 위치한 마물들은 썰물처럼 물러난다. 마계마물들에게도 생명에 대한 애착이 있기 때문이다. 나이델하르크는 앞을 가로막는 것은 데스 나이트이건 마물이건 신경 쓰지 않고 무조건 박살냈다. 단지 거치적거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포위망은 그 덕분에 풀렸다. 게다가 게덴하이드를 위시한 리치들이 다크 후드와 싸우느라 신경을 쓰지 못한다는 점도 큰 역할을 했다. 빠져나가려면 지금이 가정 적기였다. 크로비츠는 결국 그들의 결정을 승인했다. "허락한다. 재주껏 후퇴해서 이 사실을 수뇌부에 알려라." 결정이 내려지자 이십 명 가량의 용사들이 검을 거두고 후퇴했다. 실력이 뛰어나고 몸이 빠른 기사들 중에서 상처를 입지 않은 자들로 구성된 이들이었다. 하지만 크로비츠는 그들을 따라 후퇴하지 않았다. "난 남겠다. 나에겐 남은 부하들을 지휘하고 보호할 의무가 있다." 크로비츠의 뜻에 감명받은 기사들이 숙연해졌다. 수하들을 위해 죽음 길을 자청해서 선택한 상관에게 감동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지체할 만한 시간이 없었다. "대장님. 그럼 보중하십시오." 그들은 최대한 기척을 죽여 전장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들이 나이델하르크이 이목을 피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했다. "한 놈도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나이델하르크가 데스 나이트들을 학살하다 말고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안 돼!" 크로비츠가 서둘러 기사들을 규합하여 나이델하르크의 앞을 막아섰다. 하나, 나이델하르크는 한 번의 도약으로 그들을 가볍게 뛰어 넘어버렸다. 그리곤 두 번 다시 땅으로 내려서지 않았다. 화라라락 날개를 활짝 펼친 나이델하르크가 쏜살같이 활강을 시작했다. 자신의 강림사실이 정벌군 지휘부에 전해진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에 그로서는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크로비츠를 비롯한 남은 기사들은 멍청한 표정으로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분산하라." 대마왕이 접근해오자 용사들은 본능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단 하나라도 살아남아서 정벌군 수뇌부에 이 사실을 전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망치는 곳은 끝없이 광활한 노스우드 평원이었고 몰을 숨길만한 곳도 없었다. 허공에서 내려꽂히는 나이델하르크를 피할 방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감히 내 계획을 망치려는 놈들. 용서할 수 없다!" 나이델하르크의 눈동자에서 붉은색 광선이 발사되었다. 파지직 비명도 없었다. 광선에 적중된 용사 한 명이 그 자리에서 재가되어 버렸다. 시커멓게 그을린 장검만이 맥없이 그 자리에 내동댕이쳐졌다. "크아악!" 따라잡힌 용사 하나가 또다시 나이델하르크의 날카로운 손톱에 잡혀 갈가리 찢어졌다. 마치 독수리의 발톱을 피해 달아나는 들쥐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은폐물이 없는 곳이라면 들쥐는 결코 독수리를 피할 수 없었다. 도주를 선택한 용사들은 차례대로 나이델하르크의 손에 생을 마감했다. 혼비백산한 용사들이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지만 소용없었다. 날아 다니는 나이델하르크의 추적을 따돌리기엔 처음부터 역부족이었다. 뿔뿔이 흩어졌다는 이유로 숨쉴 수 있는 시간만 약간 연장되었을 뿐이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도주를 결심한 용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목숨을 잃었다. 반면 죽음을 각오한 채 남은 기사들은 아직까지 숨이 몰아 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 또한 바람 앞에 촛불이나 다름없었다. 나이델하르크의 관심이 용사들에게로 돌아간 덕택에 데스 나이트 군단이 붕괴되는 속도가 조금 지연되었다. 그 틈을 이용해서 데스 나이트들은 또다시 전열을 재정비했다. 하지만 희망이 없었다. 카심 용병단원들 역시 후퇴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미 그들은 데이몬과 함께 이곳에다 뼈를 묻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동료의 피를 두명이나 본 상태였다. "아아악!" 마물들에게 둘러싸인 잭슨의 몸이 갈가리 찢어지는 순간 카심용병단원들은 탈출을 포기했다. 동료와 마지막을 함께 한다는 약속에 전원이 이 자리에서 옥쇄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어차피 데이몬을 두고 떠날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전황은 굳은 결의로도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치달아갔다. 전정을 종횡무진 누비며 걸리는 것을 닥치는 대로 때려부수던 나이델하르크의 눈에 하인리히가 걸렸다. 우연히 눈에 띈 그를 나이델하르크가 가만히 내버려둘리 없었다. "크하하! 데이몬의 동료 놈을 여기서 한 놈 찾았구나." 나이델하르크는 머뭇거림 없이 하인리히를 덮쳐갔다. 하인리히가 사력을 다해 회피했지만 4대 기사들마져 가볍게 거꾸러뜨린 나이델하르크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순순히 당할 수 없다는 듯 하인리히가 공격을 시도했지만 암흑투기에접촉하자마자 장검은 과자처럼 부스러져버렸다. 몸이 산채로 으스러지는 통증에 하인리히는 목청이 터져라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악!" 피와 육편이 사방에 흩뿌려졌다. 나이델하르크의 몸통에 충돌하는 순간 하인리의 몸이 그대로 터져 버린 것이다. 그것이 하인리의 최후였다. 견습 용병의 신분으로 데이몬을 만나 듀크 나이츠가 된 하인리히. 아버지에게 인정받겠다는 염원을 간신히 이루긴 했지만 그는 이곳에서 덧없이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것도 대마왕의 손에 의해. "하인리히!" 절친한 친구의 죽음에 정신이 나간 제럴드가 목청이 터져라 하인리히를 불렀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나이델하르크를 향해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는 오래가지 못하고 카심의 손에 붙들렸다.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제럴드가 발버둥 쳤다. "이것 놓으십시오." "그만둬. 역부족이다. 차리리 마물을 한놈 더 잡는 것이 낫다." "하, 하지만......" "아마도 하인리히는 너마저 개죽음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가는 카심의 몸도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는 이미 싸울 능력을 잃은 상태였다. 마물들에게 둘러싸여 분전을 거듭하다 검을 쥔 오른팔이 떨어져나갔기 때문이다. 미첼이 달려들어 구해냈지만 이제 그는 두 번 다시 검을 휘두를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나머지 대원들도 성한 이가 하나도 없었다. 미첼의 등에는 축늘어진 일루미나가 업혀 있었다. 다크 쉐이드의 손톱에 당한 듯 등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다크 쉐이드의 손톱에는 생명력을 소진시키는 독이 분출된다. 만약 인간이었다면 생명력이 빠져나간 탓에 급속히 늙어버렸겠지만 수명이 긴 엘프라는 이유로 일루미나의 외모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의식을 잃었기에 더 이상 싸울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미첼은 그런 그녀를 등에 단단히 비끄러맸다. 죽건 살건 운명을 함께 할 것이란 무언의 시위이기도 했다. "이제 누구도 우리 사이를 갈라놓지 못한다." 패터슨 역시 전신이 상처투성이였다. 참담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전의를 잃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데이몬이 현경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소리는 바로 그때 울려 퍼졌다. 콰르릉 우드득 나이델하르크의 손에 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도주하던 용사들중 마지막으로 남은 자의 최후였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잔해를 미련 없이 던져버린 나이델하르크가 몸을 돌렸다. 공교롭게도 그때 현경의 벽이 허물어지는 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뭐, 뭐야?" 깜짝 놀란 나이델하르크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그이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찌 이런 일이......." 나이델하르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일어난 상황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처음 폭발이 있어 났을 때 나이델하르크는 데이몬의 몸이 불어 난 암흑투기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 버린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착각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산산이 터져 나갔어야 할 데이몬의 몸은 멀쩡했다. 부풀대로 부풀어 오른 모습 역시 예전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게다가 데이몬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 아지랑이 같은 기운. 나이델하르크는 그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잘 갈무리된 암흑투기잖아? 그것도 나의 암흑투기보다 더욱 순수해 보이는......." 믿을 수 없는 일에 나이델하르크는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했다. 데이몬이 무표정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몸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만천하를 꿇어 엎드리게 할 것 같은 위압감이었다. 줄기줄기 피어오르는 막강한 기세는 쳐다보는 자의 숨을 콱 막히게 할 정도로 강렬했다. 후광처럼 피어오르는 거무스름한 암흑투기가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었다. 대조적으로 착 가라앉은 눈빛에서는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잔잔한 호수와도 같이 침잠해 있는 것이다. 데이몬의 등장으로 인해 장내의 접전은 소강상태로 접어 들어갔다. 마물들을 진두 지휘하던 나이델하르크가 침묵을 지키고 있어서 일어난 일이기도 했지만, 전투를 중지시키는 데는 느닷없이 나타난 데이몬의 존재감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치열한 접전 중간에 펼치진 고요한 적막감. 나이델하르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데이몬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치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전장을 쓸어보았다. 순간 그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전장의 한켠에 널브러져 있는 라인델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전신의 갑주가 형편없이 으스러진 상태로 라인델프는 몸을 미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언뜻 보더라도 생명력이 경각에 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허리 아래가 으스러진 프림베르그가 헬버트론과 사라미스의 잔해를 꼭 끌어안은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안광이 눈에 띄게 옅어진 것으로 보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은 것 같았다. 데이몬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수고들 했다. 내 명령을 지키느라 만신창이가 되었구나." "......." 유일하게 운신이 가능한 프림베르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이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데이몬은 슬며시 손을 들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뻗었다. "어둠의 마력을 제공해 줄 테니 일단 몸을 복원시키도록 하라."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 마자 4대 기사들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어둠의 마력이 파고들어 전신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슬며시 스며드는 어둠의 마력은 더 없이 순수했다. 설사 나이델하르크의 진신마력이 할지라도 이보다 순수하지는 못할 터였다. 촤르르르 으깨진 갑옷이 서서히 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투구 사이로 흘러나오는 안광이 점차 강렬해졌다. 그와 동시에 전장에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던 4대 기사들의 신체 조각들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소멸된 부분은 늘어진 헬버트론과 사라미스의 몸에서 생겨났다. 쓰쓰쓰쓰 몸의 태반이나 사라졌던 헬버트론의 몸이 서서히 복원되기 시작했다. 사라미스 역시 마찬가지 였다. 위에 걸쳐 입었던 갑주까지 재생되지는 않았지만 데이몬에 의해 탄생될 때 생성되었던 기본 갑주는 완벽히 제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으깨어졌던 프림베르그의 하체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 옆에는 라인델프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것을 보니 아직까지 정상이 아니었지만 형편없이 으스러졌던 몸체는 부분 복원된 후 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어둠의 마력이 공급되었다. 언데드에겐 생명수나 다름없는 어둠의 마력을 바탕으로 4대 기사는 나이델하르크와 싸우며 입은 상처를 천천히 치료해나가기 시작했다. 무표정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데이몬의 귓전으로 성난 음성이 재차 파고들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듣자 데이몬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나이델하르크의 모습이 들어왔다. 대마왕인 자신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을 하지 않고 딴청만 피우고 있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데이몬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 미안, 미안. 일부러 무시한 것은 아니었어." 데이몬의 태평스런 대답에 나이델하르크는 더욱 분노했다. "네놈이 아직까지 쓴맛을 충분히 보지 않았나 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나이델하르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데이몬이 말꼬리를 잘랐다. "쓴맛은 충분히 봤으니 화내지 말라고, 더 이상 보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느물거리는 데이몬의 태도에 나이델하르크는 결국 자제심을 잃어버렸다. "이놈!" 나이델하르크의 눈에서 시뻘건 빛줄기가 폭사되었다. 탄타로스를 파괴시키고 여러 명의 용사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공포의 살인광선 이었다. 빛줄기는 피할 틈도 없이 데이몬의 가슴팍에 틀어박혔다. 콰르릉 나이델하르크는 흠칫 놀랐다. 정통으로 명중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이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격중되는 순간 데이몬의 가슴팍에 어린 암흑투기가 순간적으로 짙어지며 나이델하르크가 발사한 살인광선을 흩어버렸다. 다시 말해 데이몬은 암흑투기를 능숙하게 이용하여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나이델하르크가 어가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네놈이 어찌 암흑투기를...." 데이몬이 재빨리 나이델하르크이 말꼬리를 끊었다. "운용할 수 있냐는 말이냐?" "......." "그리 어렵진 않았어. 호신강기를 운용하는 방식으로 펼치니 간단하더군." "헛소리! 암흑투기는 한낱 인간 따위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대마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이다.!" 데이몬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것 같지 않던데? 아마도 암흑투기를 내공과 동일 용도로 운용할 수 있다는 사살을 안 것은 인간들 중에서 내가 처음일 것이다. "뭐, 뭐라고?" "네놈도 알다시피 난 한때 초절정에 올랐던 무인이었다. 그러므로 강기를 운용하는 방법은 거의 몸에 배어있다고 해도 과인이 아니지. 비록 다른 몸이라 처음부터 운기조식을 새로 시작해야 했지만 한 번 갔던 길에 도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어." "......" 데이몬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점차 짙어졌다. 그와 함께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암흑투기도 더욱 진하게 흘러나왔다. "덕분에 좋은 것을 알게 되었지. 암흑투기를 내공과 동일한 용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곧 내 과거의 무공을 되찾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난 너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이미 오래 전에 포기했던 무인의 길을 또다시 걸을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말을 하는 와중에서도 데이몬의 몸에서는 끊임없이 암흑투기가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안개처럼 흐릿했지만 계속 짙어져갔다. 암흑투기는 오래지 않아 검은 윤기가 흐르는 갑옷의 형태로 변해서 데이몬의 몸을 빈틈없이 감쌌다. 쓰쓰쓰쓰 마치 검은색의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듯한 형상이었다. 보고 있던 나이델하르크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떨고 있었다. "아, 암흑투기를 저 정도로 정형화시킬 수 있다니....." 나이델하르크는 몰랐다. 중원에 있을 당시 데이몬은 강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던 초절정 고수였다는 것을.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데이몬의 뇌리에는 그때의 경험이 뚜렷이 각인 되어 있었으며 실전경험 또한 충분하다 못해 넘쳐날 지경이었다. 웅후한 내공을 바탕으로 미증유의 거력을 뿜어내는 천자혈마공. 이 저주받은 마공이 마침내 트루베니아 대륙에 현신하는 순간이었다. 데이몬은 이제 천자혈마공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는 초인으로 변해 있었다. 내공 대신 암흑투기를 운용한다는 면이 다르지만 위력 면에서는 한층 더 뛰어날 터였다. 데이몬은 느릿하게 주먹을 매만졌다. "애석하게도 스파이크드 건틀릿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군. 꿈에도 그리던 경지에 올랐으니 더 이상 무기 따윌 쓸 이유가 없지." 쓰쓰쓰 데이몬의 주먹 끝에서 돌연 검은색 빛줄기가 솟구쳤다. 삽시간에 자라난 검은 색 빛줄기는 강기로 이루어진 다섯 줄기의 칼날로 화했다. 그것은 본신의 내력을 몸밖으로 표출하여 형상화시킨 오러의 병기였고, 데이몬이 현경에 올랐다는 것을 확실하게 반증해주고 있었다. 초절정의 경지, 즉 화경을 돌파한 고수들은 병기에서 일정길이의 강기를 내뿜을 수 있다. 성취가 높을수록 강기의 길이가 길어진다. 단순히 병기에 응축시키는 절정의 경지와는 달리 오러를 정형화 시켜 내뿜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경은 거에서 더 나아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다 강기를 정형화시킬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병기가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경지인 것이다.(니미 지롤 먼치킨을 지대로 만드누만 아쥬 ㅡㅡ...) 촤촤촤 강기의 칼날은 삽시간에 일 미터 남짓 자라났다. 양 주먹에서 도합 열 개의 오러 칼날이 생겨났다. 형태는 일반적인 스파이크드 건틀릿과 사뭇 달랐다 오히려 전체적인 형상은 데이몬이 중원에서 즐겨 애용하던 병기인 호조와 닮아 있었다. 아니, 순수한 강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만 다를 뿐 한 치의 틀림도 없이 동일했다. 검은 예기가 좌르르 흐르는 칼날들 들여다보며 데이몬이 감탄어린 탄성을 토해냈다. "내력으로 일으킨 강기보다 훨씬 강하고 예리하군. 이거 암흑투기의 효용에 홀딱 반할지도 모르겠는걸?" 혼잣말을 지껄이며 이리저리 강기로 된 호조를 돌려보는 데이몬의 태도에 결국 나이델하르크는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대마왕을 모욕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아예 무시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노옴!" 일순간 쭈욱 늘어나는 것처럼 보였던 나이델하르크의 몸이 벼락처럼 데이몬을 덮쳐갔다. 속도가 워낙 빨랐기에 몸을 날린 순간 이미 데이몬의 앞에 육박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박살을 내어 주마." 나이델하르크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앞발로 데이몬의 몸을 후려갈겼다. 길게 자라난 손톱에서 암흑투기가 검게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휘이잉 앞발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만 허공을 후려 갈겨버린 것이다.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나이델하르크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어이없게도 데이몬은 나이델하르크의 팔뚝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너무나도 느긋한 태도로. "이놈이?" 나이델하르크는 다른 손으로 데이몬을 또다시 후려갈겼다. 제대로 식별하기조차 힘든 속도로 이루어진 공격이었지만 데이몬은 이번에도 걸리지 않았다. 퉁기듯 자리를 박차고 오른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나이델하르크의 팔 위를 질주했다. 검은 태풍이 몰아치듯 빠른 속도로 나이델하르크의 가슴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당황한 나이델하르크가 놈을 비틀며 뒤로 빠졌다. 데이몬이 이렇게 빠를 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니 대응할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이미 나이델하르크의 가슴에 거의 도착한 후였다. "어디 인사치레 삼아 한 방 먹여볼까?" 허공에 도약한 데이몬은 주먹에 암흑투기를 맹렬히 끌어올렸다. 뒤로 회피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데이몬 역시 나아가고 있었기에 거리는 벌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데이몬의 정확한 계산 하에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정확히 복부 근처에 도착한 데이몬은 그 즉시 주먹을 날렸다. 어느새 강기의 칼날이 사라지고 잔뜩 끌어올린 암흑투기가 주먹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콰앙 암흑투기와 암흑투기가 격돌하는 순간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주위의 마물들마저 진동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충격은 강렬했다. 아랫배에서 저릿한 통증을 느낀 나이델하르크의 눈썹이 위로 휘청 치켜 올라갔다. 이미 그는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다. "이런 쥐새끼 같은 노옴!" 순간 두 번째 충격이 전해졌다. 이번 충격은 조금 전과는 조금 달랐다. 격돌하는 순간 무언가 음산한 기운이 암흑투기를 뚫고 뱃속을 파고들었다. 퍼석 동시에 뱃속에서 뭔가가 깨지는 듯한 감촉이 전해졌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나이델하르크가 공격에 나서려는 순간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끼아아악!" 비명소리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있던 게덴하이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게덴하이드는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그 옆에는 서너명의 리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사람들을 저승에 보낸 게덴하이드. 드높은 악명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허망한 최후였다. 그 모습을 본 나이델하르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서진 것이 혹시 라이프 포스 베슬?" 그는 다급하게 몸을 날렸다 상황으로 보아 베르키스가 리치들의 라이프 포스 베슬을 뱃속에 보관해 둔 모양이었다. 더 이상 리치들을 잃을 수 없었기에 나이델하르크로서는 어떻게든 데이몬을 뿌리쳐야만 했다. 반면 데이몬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생각 외의 수확이로군. 게덴하이드를 이토록 쉽게 처리하게 될 줄은 몰랐어. 라이프 포스 베슬을 삼켜버리다니, 베르키스놈이 머리를 좀 썼군 그렇다면 나머지 리치들 역시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지." 데이몬은 황급히 몸을 날렸다. 라이프 포스 베슬이 깨어진다면 리치는 그 즉시 소멸되어버릴 터였다. 만만치 않은 리치들을 쉽사리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이대로 놓칠 수 없었기에 데이몬은 암흑투기를 쭉 뽑아 올리며 신법을 전개했다. 파파파팟 데이몬의 몸이 바람처럼 나이델하르크의 뒤를 따라붙었다. 나이델하르크보다 족히 배이상 빠른 속도였다. 암흑투기를 운용한 경공법이 사상 처음으로 선보이는 순간이었다. 경공법은 기본적으로 내공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신법이다. 그러므로 내력이 깊을수록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중원에서는 내공의 성취를 측정하기 위해 종종 경신법을 펼쳐보이게 한다. 익힌 경신법에 따라 얼마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내공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우열이 금세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체내에 거의 무한에 가까운 암흑투기가 받쳐주고 있는 데이몬의 경신법은 위력이 이미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이델하르크 역시 암흑투기를 운용하긴 했지만 데이몬에 비해 효율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데이몬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중원의 내공 운용 방법은 오랜 세월을 거쳐 완벽하게 완성된 상태다. 다시 말해 같은 양의 암흑투기를 운용한다면 내가 더욱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뜻이지." 데이몬은 이미 나이델하르크의 머리 뒤에 바짝 붙어있는 상태였다. 쓰쓰쓰쓰 강기의 칼날을 뽑아 올린 데이몬은 나이델하르크의 목덜미를 냅다 후려쳤다. 쾅 암흑투기가 맹렬히 충돌하며 자욱한 스파크를 퉁겨냈다. 흠칫 놀란 나이델하르크가 꼬리를 뻗어 휘저었지만 이미 데이몬의 몸은 그곳에 없었다. 슬쩍 몸을 피한 데이몬은 강기의 칼날을 갈고리처럼 변화시킨 뒤 앞으로 쭉 뻗었다. 철컹 끝이 휘어진 갈고리가 나이델하르크의 목을 정통으로 휘감았다 암흑투기 때문에 목으로 파고들지는 못했지만 데이몬이 노린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팔에 힘을 주어 회전을 먹이자 데이몬의 몸이 나이델하르크이 앞으로 빙그르르 돌아갔다. 바로 정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이델하르크가 흠칫 놀라는 것을 본 데이몬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미안하지만 할 수 없다. 내 입장에서는 리치들을 반드시 없애야 하니까." 암흑투기를 머금은 주먹이 대기를 갈랐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회전하며 나아간 주먹은 정확히 나이델하르크의 복부에 명중했다.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대비가 있을 수 없었다. 콰쾅 스파크가 튀며 복부를 감싼 암흑투기가 눈에 띄게 옅어졌다. "크욱......" 놀랍게도 나이델하르크가 몸을 구부리며 괴로워했다. 복부에 직접 꽂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유는 바로 발경 때문이었다. 겉을 두드려 속을 파괴시키는 고도의 내가 기공 발경. 거기에다 회전력을 이용한 전사경이 가미되어 있었다.(ㅡㅡ; 발경이 단골이구만 이냥반은) 내장기관에 정통으로 경력이 파고들었으니 고통이 없을 리 없었다. 하지만 데이몬의 의도는 단순히 나이델하르크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었다. 데이몬의 연이은 공격으로 나이델하르크의 몸속에 보관되어 있던 라이프 포스 베슬들이 차례로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콰직 암흑투기를 뚫고 나이델하르크의 내장기관으로 파고든 경력은 리치들의 생명력이 저장된 라이프 포스 베슬을 가볍게 깨뜨려버렸다. 키아아아 라이프 포스 베슬이 부서질 때마다 리치 서넛이 머리를 부여 쥐고 비명을 내질렀다. 경련 하던 그들의 몸은 순차적으로 가루로 변해버렸다. 나이델하르크가 통증으로 멈칫하는 그 짧은 순간동안 데이몬은 무려 열두 번의 공격을 퍼부었다. 뱃속에 모여 있던 아리프 포스 베슬을 모두 깨뜨리기에 충분한 공격이었다. 쾅 콰콰콰콰 데이몬의 연환공격이 끝나자 남아있는 리치는 단 하나도 없었다. 다시 말해 라이프 포스 베슬이 모조리 부서져버린 것이다. 워낙 공격이 빨랐기에 나이델하르크로서는 멍하니 손놓고 그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잠시. "이노옴!" 분노에 휩싸인 나이델하르크는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나는 데이몬을 그대로 들이받아 버렸다. 콰앙 데이몬의 왜소한 몸이 실 끊어진 연처럼 맥없이 날아갔다. 나이델하르크는 때를 놓치지 않고 데이몬을 바짝 따라잡았다. 분노로 인해 그의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가루로 만들어버리겠다!" 나이델하르크의 앞발에서 손톱이 길게 돋아났다. 암흑투기를 머금어 예리하게 빛나는 손톱이 데이몬의 몸을 사납게 난자해 들어갔다. 챵 하지만 공격은 덧없이 가로막혔다. 데이몬의 주먹에서는 어느덧 강기의 칼날이 자라나 있었다. 암흑투기를 이용한 공격이 강기의 칼날에 가로막힌 것이다. 압도적인 힘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밀려나지 않았다. 나이델하르크의 손톱에 실린 막강한 힘을 한쪽으로 흘려버렸기 때문이다. 초절정 고수였던 과거의 경험을 십분 되살린 방어였다. 손톱과 칼날을 맞댄 자세로 데이몬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미안해서 한방 맞아준거라 생각해. 리치 서른을 전멸시킨 대가치고는 싸지 암." 느물거리는 태도와는 달리 데이몬의 눈동자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진득한 살기가 피어오르는 눈빛에 나이델하르크는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이, 이놈이....." 전력을 다한 몸통박치기에 격중 당하고도 무사한 인간. 나이델하르크이 머릿속엔 만만히 대할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갔다. 그런 마음을 짐작한 듯 데이몬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대마왕인 네놈도 역시 전형적인 악당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군." "무슨 소리냐?" "기회를 잡았을 때 확실하게 끝냈으면 이런 일이 없을 것 아니가? 통상적으로 악당들에겐 이런 경향이 많더군. 비록 나 역시 악당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긴 하지만." "......." "괜히 여유부리다 뒤통수 맞은 소감이 어때?" 으득 나이델하르크는 이를 갈았다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데이몬의 말대로 기회를 잡았을 때 깔끔하게 끝냈다면 이런 지경에 처하지 않았을 터였다. 상대에게 고통을 조금이라도 더 안겨주기 위해 미적거렸다가 뜻밖의 강적을 만들었으니 속이 편할 턱이 없었다. '그 짧은 시간에 암흑투기의 사용법을 깨달을 줄은 몰랐어.' 하지만 나이델하르크는 아직까지 정확한 사실을 몰랐다. 데이몬이 이미 자신보다 더욱 능숙하게 암흑투기를 운용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음을. 나이델하르크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데이몬은 느릿하게 손을 들어올렸다. "이제 결판을 볼 시간인가?" 철컹 이백 남짓 남은 데스 나이트 군단이 데이몬에 호응하듯 검을 치켜세웠다. 몸의 복원을 마친 4대 기사들 역시 데스 블레이드를 뿜어내며 다가왔다. 데이몬은 그들에게 별도의 지시를 내렸다. "너희들은 다크 쉐이드를 처치해라. 다크 후드의 통제권을 너희들에게 넘겨주겠다. 그들을 잘 이용한다면 마물들을 전멸시키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다." "나이델하르크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놈은 내가 맡겠다." "알겠다" 고개를 끄덕인 4대 기사들이 다크 쉐이드가 부유하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십 기 남짓 남은 다크 후드들이 그의 명령을 받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도열해 있던 데스 나이트들이 서서히 안광을 내뿜었다. 이제 그들에겐 최후의 결투가 남은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결과는 그들의 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었다. 최후의 순간에 각성한 데이몬과 나이델하르크, 이 두 마왕의 승패가 모든 것을 결정할 터였다. 캬아아악 단말마의 비명과 시커먼 핏뭉치가 사방으로 뿜어졌다. 치이익 흩뿌려진 선혈이 대지에 닿자마자 타오르는 것을 보면 평범한 피가 아님이 분명했다. 그 위에는 핏발이 선 거대한 눈동자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여진 눈동자는 이미 동공의 빛을 일은 상태였다. "내, 내가...... 이 나, 나이델하르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뇌까리는 음성의 주인공은 바로 나이델하르크였다 마룡 베르키스의 몸을 얻어 인간계 정벌을 꾀하던 마계의 군주. 강인한 드래곤의 몸을 차지한 덕분에 감히 맞설 적이 없을 것이라 예상되던 대마왕. 그러나 나이델하르크는 무적이 아니었다. 강인한 동체에는 보기에도 흉측한 상처가 수도 없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미치 수십 수백 자루의 장검에 갈가리 난도질당한 듯 한 상처였다. 몸을 보호하던 암흑투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일반적인 병기로는 암흑투기를 뚫을 수 없다지만 단 한가지 그보다 더 강한 암흑 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이델하르크의 상세는 위중했다. 사지의 근맥이 모조리 잘려 나가고 꼬리마저 근육이 끊겨 더 이상 휘두를 수 없었다. 그 외에도 많은 상처가 동체의 곳곳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위중한 부분은 목에 난 상처였다. 이미 목의 반 이상이 찢겨나간 상태였고. 힘의 원천인 드래곤 하트가 외부에 훤히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나이델하르크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것은 상처 따위가 아니었다. 다섯 줄기의 빛이 응축된 듯한 검은 기운이 드래곤 하트를 빈틈없이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번쩍 검은 광택이 일렁이는 기운은 더 없이 예리해 보였다. 그것은 바로 암흑투기의 정수가 맺혀 형성된 칼날이었다. 나이델하르크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칼날 다섯 개가 나이델하르크의 턱을 파고 들어가 뇌를 지그시 압박하고 있었다. 데이몬이 조금이라도 힘을 준다면 나이델하르크는 그 즉시 뇌와 드래곤 하트를 함께 잃어버리는 지경에 처할 터였다. 인간에게 완벽하게 제압된 대마왕. 나이델하르크는 지금 일어나서도 안되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을 몸소 겪고 있었다. "크으으으." 끊임없이 경련 하던 나이델하르크의 머리통이 칼날을 쥐고 있는 주인에게로 느릿하게 향했다. 아직까지도 눈동자에서는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빛이 흐릿하게 흘러나왔다. 자신이 패한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 어떻게.....?" "믿어지지 않나 보군." 데이몬의 얼굴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코와 입으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눈이 퀭하게 들어간 것이 그의 현 상태를 말해주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예리했다. 마치 칼날과도 같은 기운이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데이몬의 몸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양손 주먹에서 길게 자라난 오러의 칼날이었다. 이전에는 고작해야 일 미터 남짓한 길이였지만. 지금 그 길이의 열 배가 넘었다. 그것은 암흑투기를 다루는 데이몬의 실력이 한층 더 완숙해졌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손에서 십 미터 이상 뻗어 나와 나이델하르크의 몸을 제압하고 있었지만 암흑투기는 전혀 빛을 잃지 않았다. 꼬박 한 나절 동안의 사투는 이렇게 해서 승패가 갈렸다. 승리의 여신은 결국 데이몬에 미소를 지어주었다. 어찌 보면 이건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암흑투기를 나이델하르크보다 더욱 능수능란에게 운용하는 덕분에 데이몬은 싸울수록 강해졌다. 운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내공과 암흑투기의 미세한 차이는 접전하는 와중에 극복할 수 있는 사소한 문제였다. 승패를 결정지었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데이몬의 실전경험이었다. 중원의 고수들과 무수히 싸워본 충분한 실전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최후의 순간에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 데이몬은 조금전에 벌어졌던 처절했던 나이델하르크와의 접전을 떠올렸다. 콰콰콰콰 암흑투기의 힘을 빌려 더욱 강력해진 천자혈마공이 나이델하르크를 강력하게 압박해 들어갔다. 그 강력한 힘은 나이델하르크의 몸을 보호하던 마력결계를 산산이 부숴버리기에 충분했다. 더욱 정제되고 가다듬어진 암흑투기와 그렇지 못한 암흑투기와의 대결이었기에 결과는 자명했다. 반면 나이델하르크의 공격은 데이몬의 방어를 전혀 뚫지 못했다. 극도로 정제된 암흑투기가 데이몬의 몸을 마치 풀 플레이트 메일처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4대 기사들과의 대결에서 상당량의 암흑투기를 소모한 나이델하르크로서는 애초부터 가망이 없었던 전투였다. 휘하 세력들이 전투 역시 오래 전에 결판난 상황이었다. 데이몬의 주위에는 일백오십 명 가량의 데스 나이트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다크 쉐이드를 비롯한 마계마물들은 바로 그들의 손에 깨끗이 전멸되었다. 거기에는 다크 후드와 효과적으로 연수하여 다크 쉐이드를 궤멸시킨 4대 기사들의 공이 컸다. 다크 후드를 딛고 뛰어오르며 휘두르는 4대 기사들의 데스 블레이드를 다크 쉐이드들이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데스 나이트들 역시 수적인 우세를 살인 포위공격으로 마계마물들을 효과적으로 섬멸시켰다. 고작해야 오십 마리 남짓 남은 마계마물들은 변변찮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하나씩 대지에 몸을 눕혔다. 게덴하이드를 위시한 리치들이 모조리 전멸한 상태라서 승리를 방해할만한 자는 없었다. 결과는 압도적인 승리. 인간계에서 벌어진 두 마왕의 전투는 이렇게 해서 데이몬의 승리로 돌아갔다. 대마왕인 나이델하르크와 그의 휘하 세력들을 모두 꺾은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데이몬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나이델하르크의 생사여탈권을 거머쥐긴 했지만 데이몬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소감이 어떤가, 나이델하르크?" "........" "이제 난 네놈을 소멸시킬 것이다. 율리아나와 잭슨, 그리고 하인리히를 죽인 대가이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후후후. 고작 인간 셋을 죽였다는 이유로 대마왕을 소멸시키겠다니..." 나이델하르크는 이제 겨우 냉정을 되찾았다. 어처구니없이 패하긴 했지만 대마왕으로서의 자존심을 굽힐 생각은 없었다. 또한 거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대마왕은 인간계에서는 기본적으로 임모탈(immortal)이다. 비록 타격을 받을 받을지언정 죽지는 않는다. 단지 마계로 강제 귀환될 뿐이다. 마계에 위치한 나이델하르크의 마궁. 그 지하에 있는 모종의 장소에서 나이델하르크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단지 부활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나이델하르크의 눈동자에는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원념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 힘을 길러 반드시 놈에게 복수하고 말리라. 나의 힘으로 부족하다면 다른 대마왕의 힘을 빌려서라도....' 그런 나이델하르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이몬이 무정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네놈처럼 여유를 부릴 생각이 없다. 왜인지 아는가?" "......" "할 일이 무척 많기 때문이다. 그럼 가거라." 푸학 소름끼치는 파육음과 함께 핏뭉치가 뿜어져 나왔다. 뿜어지는 핏줄기 속에는 선연한 우윳빛 뇌수가 섞여 있었다. 나이델하르크의 정수리를 뚫고 솟구친 다섯 개의 검은 칼날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데이몬은 나이델하르크의 턱에 대고 있는 손을 통해 암흑투기를 일직선으로 분출해버린 것이다. 다른 손으로는 이미 드래곤 하트를 뽑아내고 있었다. 우직 드래곤이 지닌 생명의 원천이 뿌리채 뽑혀 나왔다. 제 아무리 대마왕이라도 이런 상처를 입고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콰우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나이델하르크의 거대한 몸이 부르르 경련 했다. 전신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이 나이델하르크가 느꼈던 마지막 감각이었다. 의식이 심연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끝으로 나이델하르크의 동체가 서서히 옆으로 넘어갔다. 쿵 그것이 대마왕 나이델하르크의 최후였다. 1차 암흑전쟁에서 드래곤에 손에 사로잡혀 오백 년 동안 봉인되어야 했던 대마왕 나이델하르크. 봉인에서 깨어나 인간계를 다시 한 번 피로 물들이려던 그는 전혀 생각지 못한 존재인 데이몬에 의해 마계로 강제 귀환되는 처지에 몰려버렸다. 최후가 이렇게 귀결될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데이몬은 무심한 눈빛으로 식어 가는 나이델하르크의 몸을 쳐다보았다. 이후로 이어진 것은 고요한 침묵의 시간이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데스 나이트 군단은 조용히 도열한 채 데이몬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고, 4대 기사와 슈렉하이머도 무심히 눈빛을 빛낼 뿐이었다. 나이델하르크의 시체를 쳐다보든 데이몬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간신히 살아남은 용사들조차 감히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드러난 사실이 그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으으으." 간간히 흘러나오는 것이라고는 부상자들의 고통에 겨운 신음소리 뿐이었다. 잠시 후 침묵을 깨는 누군가가 있었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데이몬." 데이몬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갔다. 시선이 닿는 곳에는 초췌한 몰골의 카심이 서 있었다. 오른팔이 잘려나간 참혹한 몰골. 좌수검법을 익히지 않는 한 두 번 다시는 검을 쥘 수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심의 얼굴에는 기쁨이 일렁이고 있었다. 데이몬의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는 표정이었다. 그것을 본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역시 대장이로군. 가장 먼저 축하를 해 주다니 말일세." 쓴웃음을 지은 카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솔직히 말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마치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럴 거야. 나조차도 도무지 현실로 인지되지 않으니 말일세." "아무튼 대마왕이 죽은 것은 확실한 것 같군요. 그럼 저희들은 목숨을 건진 것입니까?" "아마 그럴 걸세." 데이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무척 많은 일을 겪어야 했기에 머리가 복잡했다. 나이델하르크를 물리쳤던 일이 도무지 현실로 인식되지 않을 정도였다. 혈맥 속을 노도처럼 질주하는 암흑투기의 기운으로 말미암아 데이몬은 겨우 현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반나절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피로감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몸속에 충만한 어둠의 마력이 이미 전신의 상처를 깨끗이 치유했기 때문이었다. 이질적인 기운을 감지하자 데이몬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맺혔다. "아무튼 마왕이 된 것만은 확실한 것 같군. 그러고 보니 내 인생도 정말 기구하기 이를 데 없어. 배교의 교주에서 시작해서 펠드리안의 경비병, 베르키스의 리치, 흑마법사를 거쳐 종국에는 마왕이 되다니 말이야." "예? 무슨 말씀이신지?" 데이몬은 카심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난 이제 인간이 아니네, 카심" "......." "멍청한 나이델하르크 녀석이 내 몸에다 마력의 원천을 남겨두고 간 까닭에 두 번 다시 인간이 될 수 없다네." "그, 그렇다면....." "간단히 말하면 마왕이 된 것이라 생각하게. 그것도 온전하지 못한 반쪽 짜리 마왕." 카심은 이미 데이몬과 나이델하르크 사이에 오간 대화를 통해 상황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금을 통틀어 인간이 마왕이 된 경우는 전무했다. 그것도 마계에 총 열 여섯밖에 존재하지 않는 대마왕 나이델하르크를 꺾지 않았던가? 경과를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카심은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세상에는 알아야 할 일과 알지 말아야 할 일이 분명히 존재했다.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데이몬의 얼굴 가득 미소가 떠올랐다. "사람들을 불러 보은 다음 일단 부상자를 치료하도록 하게. 내 자네들에게 단단하게 할 말이 있으니 전장을 정리할 때 까진 쉬고 있게." "알겠습니다." 카심은 두말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용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사이 데이몬은 데스 나이트들에게 명을 내려 전장을 정리하게 했다. 마계마물들의 시체 따윈 묻을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완전히 죽지 않은 동료들을 수습하는 일이었다. 몸의 일부만 남았더라도 완전히 죽지 않았다면 어둠의 마력을 투여해서 원상태로 복원시킬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데스 나이트가 가진 가장 큰 강점이었다. 데스 나이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생존자를 찾는 사이에 데이몬은 나이델하르크의 시신을 향해 걸어갔다. 뚜벅뚜벅 엄연히 따지면 그것은 나이델하르크의 시신이 아니었다. 나이델하르크의 영은 이미 마계로 강제 귀환된 상태였고, 남은 것은 철저하게 파괴된 베르키스의 육신일 뿐이었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나마도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베르키스의 계책으로 인해 너무도 큰 아픔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네놈으로 인해 난 두 여인을 모두 잃었다. 다프네야 어차피 떠나갈 사람이었지만 율리아나는 그렇지 않았어. 네놈의 수작이 아니었다면 율리아나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데이몬의 눈가에 모호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율리아나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다프네에 이어 두 번째로 자신에게 마음을 준 여인.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데 대한 자괴감이 가슴으로 저려왔다. 지금껏 그녀를 무시하고 슬프게 한 것이 그토록 후회될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 아이의 마음을 받아들였을 것을....."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율리아나는 이미 죽었고, 그녀의 영혼 앞으로 억겁동안 이곳을 배회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데이몬은 그것을 좌시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율리아나, 너희 희생으로 인해 나이델하르크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놈을 물리치고 마왕이 될 수도 있었지. 이 모든 것은 너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널 이곳에 남겨두지 않을 생각이다." 말을 마친 데이몬이 느릿하게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그의 옆으로 공간이 활짝 열렸다. 마법보고 인크레시아였다. 데이몬은 차가운 눈빛으로 베르키스의 시체를 노려보았다. "일단 네놈의 육신으로 본 드래곤을 만들 생각이다. 한 짓이 있으니 그리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비록 영혼은 떠낫지만 육신은 평생 동안 날 섬기며 지은 죄를 씻어야 할 것이다." 허공에 생겨난 인크레시아는 거대한 베르키스의 시체를 간단히 삼켜버렸다. 데이몬은 그 모습을 보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이번에 그가 향한 곳은 탄타로스 널브러져 있는 곳이었다. 슬쩍 훑어본 것 같았지만 데이몬은 한눈에 탄타로스의 상태를 알아 차렸다. "다행히 완전히 파괴되진 않았군." 데이몬은 조용히 수인을 맺었다. 탄타로스를 복원시키려는 생각에서 였다. 부근의 마나를 끌어 모아 재배열시킨 데이몬은 그것을 탄타로스에 주입했다. 파파파팟 탄타로스의 전신에 새겨진 상처가 급속도로 복구되기 시작했다. 파괴된 부위에 대한 복구속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현경의 벽을 뛰어넘은 무인이 되었지만 데이몬은 여전히 9서클의 대마법사였다. 다시 말해 그가 가진 마법사로서의 능력이 사라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데이몬은 이제 무공과 마법 두 방면에서 절대적인 입지를 굳힌 초인이 되었다.(그래 잘낫다 먼치킨. 소드엠페러에서도 그러더만 ㅡㅡ..) 인간의 범주를 훌쩍 넘어선 경지가 아닐 수 없었다. 탄타로스는 오래지 않아 언제 파괴되었냐는 듯 멀쩡한 모습으로 일어섰다. 그리곤 데이몬을 향해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주인님. 데이몬역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반갑다, 탄타로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이 말을 이어나갔다. "네게 시킬 일이 있다." -말씀만 하십시오. 데이몬이 느릿하게 손을 뻗어 베르하젤의 신전을 가리켰다. "저 신전을 때려 부숴라. 기둥뿌리 하나 남지 않게 철저히 무너뜨려야 한다." -알겠습니다. 탄타로스는 그 즉시 걸음을 옮겼다. 신전을 무너뜨리는 일 따윈 엄청난 힘을 가진 아이언 골렘에게 극히 간단한 일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데이몬은 아직까지 성에 차지 않는다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4대 기사를 위시한 데스 나이트들은 살아 있는 동료를 수색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그들 중 반 이상을 불러모았다. "너희들도 가세하라. 신전이 있었던 흔적조차 남지 않아야 한다." 탄타로스에 이어 일백 명에 가까운 데스 나이트들이 신전파괴에 투입되었다. 데이몬의 얼굴에는 굳은 결의 번뜩이고 있었다. "신전을 없앤 다음 이곳에 작용하는 베르하젤의 권능을 깨끗이 말소시킨다면 영혼들이 자유롭게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나이델하르크의 기억을 얻은 덕분에 데이몬은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중 첫 번째가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윤회에 관한 것이었다. "율리아나, 이미 죽은 너를 되살릴 순 없겠지만 모른 척 내버려둘 생각은 없다. 인간의 영혼은 반드시 환생하는 법. 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널 돌봐주겠다. 비록 나에 대한 기억은 이미 사라졌겠지만 말이다." 베르하젤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천신이다. 나이델하르크 정도 되는 대마왕조차 감히 범접할 수 있을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데이몬에겐 자신이 있었다. 베르하젤은 이미 인간계에 관심을 끊은 상태. 따라서 이곳에 작용하는 베르하젤의 권능은 극히 미약할 터였다. 그러니 지금의 데이몬에게 베르하젤의 권능을 말소시키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될 수 없었다. 쿠쿵 탄타로스와 데스 나이트들에 의해 베르하젤의 신전이 맥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철저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무감각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이 몸을 돌렸다. 그에겐 아직까지 할 일이 남아 있었다. 8. 마왕의 길 "피해는?" "살아남은 데스 나이트는 저희들까지 합쳐서 도합 152명입니다. 그 외 되살릴 수 있는 이들은 정확히 56명. 나머지는 영혼마저 완전히 소멸되었습니다." 슈렉하이머의 보고를 들은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용할 수 있는 데스 나이트가 도합 208명이라.... 마계마물 이백을 처리한 대가치고는 피해가 생각보다 크진 않군." "모두가 마스터 급이었습니다. 만약 나이델하르크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피해가 이 정도로 커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럴 거요. 저들은 오로지 드래곤에 대한 처절한 복수심으로 데스 나이트가 된 이들이니 말이오. 영혼이 타락하지 않은 만큼 강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이 냉큼 몸을 일으켰다. "부상당한 데스 나이트들을 한곳에다 집결시켜 놓으시오. 일단 인간들에 대한 일을 먼저 해결한 뒤 그들을 복원시킬 계획이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동료였건만 데이몬은 카심을 비롯한 용사들을 태연히 인간이라 칭하고 있었다. 그 말에 조금 놀란 듯 슈렉하이머의 눈빛이 빛났다. "그들을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왜? 혹시나 죽일까봐 그러는 것이오?" "......" "걱정하지 마시오. 마왕이 되었다고 해도 저들은 영원히 나의 동료들이오." 말을 마친 데이몬이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슈렉하이머는 그 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새로 탄생한 인간 출신의 마왕을. "괜찮소, 크로비츠 대장?" 데이몬이 다가와서 인사말을 건네자 크로비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아릴 수 없는 상처가 전신을 빽빽이 뒤덮고 있었지만 다행히 치명적인 부상은 입지 않은 듯 했다. 그의 검술실력이 매우 뛰어났기에 그 아수라장에서 이 정도로 무사했던 것이다. 크로비츠는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복잡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오셨습니까, 데이몬." "그렇소, 그런데 피해.....가 엄청나구려." 눈살을 찌푸린 데이몬이 말꼬리를 흐렸다. 용사단이 모습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기 때문이다. 사백의 고급기사들로 위풍당당하게 출발했건만 남은 자들은 고작해야 열 다섯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팔다리가 날아간 참혹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백에 달하는 용사들 중 대부분이 노스우드 평원에 묻힌 것이다. 이런 결과를 초래했을 줄은 총사령관인 페르슈타인 공작도 몰랐을 터였다. 착잡한 표정을 지은 데이몬의 시야에 카심을 비롯한 대원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미첼이 정신을 차린 일루미나를 꼭 끌어안고 있었는데 다행히 큰 부상은 입지 않은 것 같았다. 패터슨은 피가 배어 나오는 옆구리를 누르고 있었다. 그 옆에 앉아 있는 제럴드의 얼굴에는 도무지 핏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절친한 친구였던 하인리히의 죽음을 아직까지 극복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토록 친했으니.....' 데이몬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대원들의 눈망울에 떠오른 호기심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두들 궁금할 것이다." "......." 대원들의 시선이 일시에 데이몬에게 쏠렸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선 너희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대원들은 조용히 데이몬의 입을 주시했다. "앞으로 나이델하르크는 두 번 다시 인간계를 피로 물들이지 못할 것이다." 대원들의 얼굴에 잔잔한 떨림이 번져갔다. 나이델하르크. 그 얼마나 두려웠던 이름이었던가? 후퇴하던 용사들을 마치 파리 잡든 죽여 없애던 나이델하르크에게서 그들은 결코 대적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공포를 느껴야 했다. 그런 가공할 만한 존재가 인간계에서 사라지다니....... 카심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나이델하르크는 영원히 죽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 빙의한 육신이 소멸되었기에 마계로 강제 귀환된 것뿐이다." "그렇다면 또다시 인간계를 노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왕은 인간계에서는 결코 죽지 않는 존재. 그러므로 언젠가는 부활할 것이 확실합니다." 데이몬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놈은 부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내가 마계로 건너가서 놈을 확실하게 소멸시킬 계획이기 때문이다." 듣고 있던 용사들은 깜짝 놀랐다. 마계로 건너가서 부활중인 마왕을 죽여 없애겠다는 말이 섣불리 가슴에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그것 가능한 일입니까?" "물론 가능하다. 왜냐하면 내 몸 속엔 마왕의 권능이 깃들어 있으니까." "......." "익히 짐작하고 있겠지만 난 마왕이 되었다. 나이델하르크가 내몸에 마력의 원천을 남겨둔 순간부터." 대원들은 말문을 잊었다. 인간이 마왕이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데이몬은 그런 그들을 향해 그간의 일을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설명한 것은 자신에게 걸려 있는 천고의 정신 금제법인 칠종단금술에 관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인을 할 수 없다는 사연을 밝히자 대원들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랬군요." "어쩐지...." 그런 다음 데이몬은 나이델하르크와 얽히고 설킨 사연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나이델하르크가 칠종단금술의 고통에서 벗어나가 위해 데이몬의 몸속에 마력의 원천을 남겨두는 실수를 한 것에서부터, 데이몬이 암흑투기의 운용방식을 파악하여 상황을 반전시킨 것까지. 데이몬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경천동지할 사연에 용사들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설마 그런 일이 벌어졌을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로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데이몬의 설명이 아니고는 지나간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간의 일을 간략하게 털어놓은 데이몬은 조용히 안색을 굳혔다. "그렇게 해서 난 나이델하르크를 간신히 마계로 강제 귀환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나이델하르크는 언젠가는 부활해서 인간계에 대한 복수를 꾀할 터. 따라서 난 마계로 가서 놈을 확실하게 끝장낼 생각이다. "........" "완벽한 마왕이 되겠다는 뜻이다. 마계에 가서 부활중인 나이델하르크를 확실하게 죽여 없애고 놈의 몸속에 있는 마력의 원천을 흡수한다면 난 온전한 마왕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인간계는 더 이상 마왕의 강림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때 크로비츠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그로서는 마왕이 된 데이몬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얼굴에는 불신 어린 기색이 가득했다. "하지만 마왕이 되었으니 심성이 변할 가능성이 없진 않습니다. 그러므로 데이몬께서 인간계에 다시 눈독들이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분노를 각오하고 솔직히 털어놓은 말이었지만 데이몬은 도리어 미소를 지었다. "멍청하긴." "........." "나이델하르크도 칠종단금술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나?" 그말이 끝나자 용사들이 얼굴이 환해졌다. "그, 그렇다면....." "그렇다. 설사 온전한 마왕이 되더라도 난 여전히 살인을 할 수 없다. 그런 내가 어찌해서 인간계에 눈독을 들일 생각을 하겠나? 한 명의 인간도 죽일 수 없으니 인간계를 정복하기란 불가능한 일 아니겠나?" 용사들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나이델하르크를 없애는 것은 길 쉬운 일이 아니다. 마계의 마궁에는 놈이 거느리고 있는 8대 군단장. 으음, 케루빔이 소멸되었으니 7대 군단장이겠군. 아무튼 나이델하르크의 부하들과 헤아릴 수 없는 어둠의 군대가 있다. 그놈들을 모두 죽여 없애야만 마궁의 중심부에 있는 나이델하르크를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다. 설령 성공한다 하더라도 일이 거기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기존의 대마왕들이 나를 마왕으로 인정할지는 의문이다. 최악의 경우 그놈들과 또다시 전쟁을 벌여야 할 수도 있다. 그러니 너무 낙관하지는....." "전 믿습니다. 데이몬께서는 반드시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카심, 자넨 날 너무 높이 평가하는군." "어차피 인간의 몸으로 대마왕을 꺽은 데이몬 아닙니까? 데이몬께서는 명실상부한 초인이십니다. 이제 마왕까지 되신 마당에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어디 있습니까? 묵묵히 카심을 쳐다보던 데이몬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럴 듯하군. 좋다, 카심" "말씀하십시오." 데이몬은 대원들의 얼굴을 하나씩 둘러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부로 카심 용병단은 해산이다. 이제부터 각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 솔직히 말해 너희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마계까지 데리고 갈 마음은 없다." 카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저희들 역시 마계로는 가고싶지 않습니다." "솔직해서 좋군. 아무튼 우리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났다. 그간 날 믿고 따라줘서 정말 고마웠다." 하나씩 몸을 일으킨 대원들이 데이몬에게 공손히 예를 취했다. "데이몬을 만난 것이 저희들이 잡은 최대의 행운이었습니다. 비록 다시 만날 수 없을 지라도 저희들은 데이몬과 함께 했던 나날들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녀석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너희들은 정말 훌륭한 동료들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이 카심과 미첼을 쳐다보았다. "너희들은 걱정이 없겠구나. 제럴드는 듀크 나이츠가 될 테고.... 크로비츠 경." "말씀하십시오." "제럴드를 잘 부탁하오." 다소 얼굴이 풀린 크로비츠가 염려 말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데이몬이 아니었다면 인간계는 큰 혼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죽어 이곳을 정처 없이 떠도는 망령이 되었겠지요. 그러니 제 명예를 걸고 제럴드를 훌륭한 듀크 나이츠로 키우겠습니다." "부탁하오."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이 패터슨을 쳐다 보았다. "그러고 보니 네놈만 갈 곳이 없구나. 그러나 날 따라가지 않겠느냐? 아까 구울이나 와이트는 싫다고 말했지? 좋다 쓸만한 데스 나이트로 만들어 줄 테니 날 따라가자." 패터슨의 얼굴이 삽시간에 사색이 되었다. "지, 진정이십니까ㅡㅡ?" "농담이었다 ㅡㅡㅋ" 표정변화가 없이 이어진 말에 패터슨은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대신 대원들이 왁자하게 폭소를 터뜨리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지만. "그럴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아마도 네 녀석의 입담이 그리울 것 같구나." 카심이 웃는 낮으로 다가와서 패터슨의 어깨를 두르렸다. "이 녀석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저번에 보니 아르네 영지에 경비병이 모자라는 것 같더군요." 그 말에 패터슨이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래봬도 전 엄연히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팔라딘입니다. 그런 인재를 한낱 영지 경비병으로 써먹다니 도대체 말이 되는...." "아르네를 떠나기 전 마틸다에게 은밀히 부탁해 둔 것이 있다. 아리따운 신부감을 좀 물색해 보라는 부탁이었는데...." 이어진 카심의 말에 패터슨은 더 이상 듣지도 않고 호탕하게 가슴을 두드렸다. "핫핫핫! 농담이었습니다. 한번 대장은 영원한 대장인 법. 영원히 충심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일행들은 또다시 폭소를 터뜨렸다. 데이몬 역시 흐뭇한 미소를 떠올렸다. "아마도 너희들이 그리울 것 같구나. 그럼 이만 채비를 갖추도록 하라. 내가 너희들을 직접 본영으로 데려다 주겠다. 마침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부탁할 일도 있고." "하, 하지만 이곳은 공간이동이 불가능한 곳이 아닙니까? 러셀런트가 파괴된 상황에서 어떻게....." 눈을 크게 뜨던 카심이었지만 이어진 데이몬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아이언 골렘에게 비행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벌써 잊었느냐?" "그, 그렇군요." "조금만 기다려라. 상처 입은 데스 나이트들을 복원시킨 뒤 출발하도록 하겠다. "알겠습니다." 데스 나이트의 복원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데이몬의 몸속에 방대한 어둠의 마력이 들끓고 있기 때문이었다. 암흑투기를 운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데이몬이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의 총량은 현저히 늘어난 상태였다. 양도 양이었지만 이전보다 더욱 순수해진 어둠의 마력은 데스 나이트들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시키기에 충분했다. 스르르르 머리나 가슴 등 몸의 일부만 남은 데스 나이트들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오십여 명의 데스 나이트를 복원시키는데 불과 한 나절밖에 걸리지 않았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데이몬은 베르키스의 시체를 인크레시아에서 꺼냈다. 이참에 확실하게 본 드래곤으로 만들어버리려는 심산에서 였다. "이곳은 극한의 절지인 노스우드. 이곳의 냉기는 본 드래곤을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곳에서 완성시키는 게 낫겠군." 베르키스를 서둘러 본 드래곤으로 만들려는 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비록 탄타로스가 비행능력이 있다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비행마법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마나의 흐름이 극도로 불규칙한 노스우드에서는 비행능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데이몬은 정벌군 본영뿐만 아니라 아르카디아에도 다녀와야 했다. 집정관인 테오도르에게 작별인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장거리 비행에는 탄타로스보다 본 드래곤이 월등히 유리했다. "녀석에 부탁할 것도 있으니...." 마음을 굳힌 데이몬은 지체없이 본 드래곤 제작에 들어갔다. 베르키스를 본드래곤으로 만드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둠의 마력과 냉기가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데이몬은 슈렉하이머를 불러 모종의 명령을 내렸다. "슈렉하이머, 당신은 게덴하이드가 케루빔을 불러들였던 소환 장소를 찾아 주시오. 상당한 마력이 들끓고 있는 곳이니 찾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오." "마법진을 역이용해서 마계로 가시려는 것입니까?" 이미 슈렉하이머와 4대 기사들은 데이몬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4대 기사들은 나이델하르크가 다스리는 마계왕국을 침공한다는 말에 모종의 희열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데스 나이트들을 비롯한 언데드들은 여간해서는 마계로 갈 수 없다. 강림했던 마음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계로 돌아갈 때에도 언데드들은 고스란히 인간계에 남겨지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백이 넘는 대규모의 데스 나이트 군단을 통솔하여 마계로 건너가게 되었으니 흥분이 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방법에 대해서는 일체 걱정하지 마시오." "하지만 저희들 모두를 마계로 데리고 가는 일이 그리 만만치는 않을 텐데요?" 데이몬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인크레이시아 있지 않소?" "하지만 인크레시아를 마계에서도 열 수 있을 지는 미지수....." 슈렉하이머는 말을 하다 말고 조용히 입을 닫았다. 데이몬의 머릿속에 나이델하르크의 지식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그 지식대로라면 뭔가 방도를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알겠습니다. 명령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잘 부탁하오." 본 드래곤 베르키스가 완성되는 데는 단 삼 일이 걸렸다. 러셀런트를 본 드래곤으로 만드는 데 꼬박 육 개월이 걸린 것을 감안하면 놀랄 만한 속도 였다. "훌륭하군" 데이몬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데르키스를 쳐다보았다. 베르키스는 나이델하르크가 변신했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드래곤이 아니라 지옥의 마룡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머리 양옆과 콧등, 입가와 아래턱을 합쳐 도합 여덟 개의 뿔이 나 있었고 동체 역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가시가 돋아나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등뼈를 따라 돋아 있는 뿔은 강철판이라 할지라도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덩치도 이전보다 월등히 커져있었다. 생전에 레드 드래곤이었음에도 만들어진 베르키스의 동체는 검붉은 빛을 때고 있었다. 나이델하르크의 마력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무표정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나의 노예가 된 기분이 어떠냐, 베르키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베르키스는 이제 완벽한 본 드래곤이 되어버렸다. 시키는 일만 수행할 수 있을 뿐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한참동안 베르키스를 쳐다보고 있던 데이몬이 손짓을 했다. "모두 탑승하라." 용사들이 부상당한 동료들을 부축해서 걸어왔다. 그들이 베르키스에 탑승하는 장면을 잠시 지켜본 뒤 데이몬이 고개를 돌렸다. 베르하젤의 신전은 이미 흔적도 없이 파괴된 상태였으며 신전 바닥에 건설되어 있던 마법진 또한 데이몬의 마력에 침습되어 제 기능을 상실했다. 어둠의 마력에 오염된 탓에 이곳은 더 이상 성지라고 말할 수 없었다. 조금전 데이몬은 똑똑히 목격했다. 이곳을 배회하던 망령들이 자유를 되찾아 앞 다투어 승천하는 장면을 마왕이 된 이후 데이몬을 그 동안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었다. 승천하는 망령들 속에는 율리아나의 영혼도 섞여 있을 것이 분명했다. 데이몬은 쓸쓸히 뇌까렸다. "마왕의 손에 죽임을 당했으니 아마 천국으론 가지 못할 것이다. 지옥에 있다면 돌봐주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터 걱정하지 말아라, 율리아나 반드시 나이델하르크를 제거하고 온전한 마왕이 되고 난 뒤 널 영원히 돌봐주겠다." 데이몬의 얼굴에는 결연함이 감돌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이것은 데이몬에게 있어 다행일지도 몰랐다. 다프네가 떠나간 뒤 데이몬은 살아가야 할 목적을 잃었다. 마음속이 텅 빈 공허한 상태였기에 나이델하르크는 손쉽게 데이몬을 장악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데이몬에게는 유일하게 자신을 버리지 않은, 그리고 자신을 나이델하르크에게서 구해낸 여인을 돌봐줘야할 의무가 생겼다. 데이몬은 언젠가는 환생할 율리아나를 돌봐줌으로써 그녀에게 대한 미안함을 갚고 은혜에 보답할 작정이었다. 마음속의 짐을 덜 수 있는 순간까지. 생각을 거듭하던 데이몬이 별안간 툴툴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갚아야 할 빚이 남아 있군. 중원에 말이야. 후후후, 사준환 네 녀석도 참 운이 없군. 마왕의 복수를 몸소 겪어야 할 테니. 내가 네놈을 찾는 순간까지 부디 죽지 말기를 바란다." 잊어버리려 했던 원한을 다시 한 번 떠올린 데이몬이 차가운 미소를 그렸다. 한번 진 빚을 잊지 않는 성품은 데이몬이 마왕이 되었어도 변하지 않았다. "나이델하르크를 없애고 온전한 마왕이 되면 가장 먼저 중원에 건너가야겠군." 생각을 마친 데이몬이 고개를 돌렸다. "그럼 출발해 볼까?" 4대 기사를 위시한 데스 나이트 군단은 이미 인크레시아에 들어간 후였다. 이곳에는 슈렉하이머와 이십 여명의 데스 나이트가 남았다. 그들은 게덴하이드가 케루빔을 불러낸 장소에서 머무르며 데이몬이 돌아올 때까지 마법진을 지킬 터였다. 모두가 탑승하자 베르키스가 긴 목을 쳐들고 포효성을 내질렀다. 콰루루루 러셀런트보다 훨씬 힘차고 기괴하게 기성을 내지른 본 드래곤 베르키스는 날개를 활짝 펼쳤다. 날개가 강력하게 대기를 휘감으며 거대한 본 드래곤의 동체를 가뿐히 허공에 띄웠다. "자, 가자 정벌군 본영으로" 순식간에 까마득한 창공으로 날아오른 베르키스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서남쪽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무수한 용사와 마물의 시신을 노스우드에 남겨놓은 채. 꼬박 하루 동안의 비행 끝에 정벌군 본영에 도착한 데이몬은 페르슈타인 공작의 환대를 받았다. 노스우드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일에 입이 딱 벌어진 페르슈타인 공작은 거듭 고개를 숙여 데이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럴 것이 데이몬이 아니었다면 인간계에 엄청난 참사가 벌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마계의 대마왕이 발호하고 있었다니.... 그 사실을 짐작한 자는 정벌군 수뇌부 중에서 아무도 없었다. 데이몬은 그곳에서 살아남은 용사들과 크로비츠, 그리고 제럴드를 내려놓았다. "베르키스를 처치했으니 내가 할 일은 모두 끝났어. 카심 용병단은 이미 해체된 상태. 난 이대로 떠날 생각이오." 그러자 페르슈타인 공작이 다급히 데이몬을 잡았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데이몬께 부탁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데이몬에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적이 떠올랐다. "공작께서 나에게 부탁할 일이라니..... 공께서는 이미 휘하에 헤아릴 수 없는 기사들을 거느리고 있지 않소?" "예상외의 변수가 생겼습니다. 그러니 데이몬께서 보유하신 데스 나이트들의 힘을 잠시만 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설명을 한번 해 보시오." 페르슈타인 공작이 돌아가는 전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데이몬은 건성으로 들을 뿐이었다. 어차피 마왕이 된 그에게 인간계의 소식 따윈 하등 관심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페르슈타인 공작의 말에 그는 귀가 솔깃하는 것을 느꼈다. "그래, 패잔병 중에서 오크의 대영웅이 탄생했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놈은 오크 패잔병을 규합하여 철저히 유격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미 놈은 오크 사이에서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신출귀몰하는 놈의 유격대 때문에 북방을 맡은 두 개 군단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우스운 일이구려. 고급기사들로 구성된 기사단을 파견하여 놈을 암살하면 간단히 해결될 것을....." 페르슈타인 공작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몇 개 기사단을 보내보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인원이 놈의 함정에 빠져 괴멸되었습니다. 지능이 떨어지는 오크라 얕본 면도 없지 않지만 위험을 회피하는 본능이 한마디로 하늘에 닿은 놈입니다. 게다가 놈은 특유의 교활함과 함께 팔라딘과 일 대 일로 붙어도 지지 않을 정도로 무술실력이 뛰어납니다. 어디서 얻었는지 모르지만 오러 블레이드가 통하지 않는 도끼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놈의 손에 무려 스물에 가까운 고급기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때문에 패전을 거듭함에도 불구하고 오크의 사기는 전혀 떨어지지 않고 있습......" 데이몬이 조용히 공작의 말을 끊었다. "그래, 놈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그랬소?" "투르카입니다. 오크들 사이에서는 황야의 두 번째 무법자로 불린다고 하더군요." 데이몬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물론 그가 투르카를 모를 리가 없었다. 베르키스의 레어를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우연히 만난 츄가르 부족의 젊은 오크 전사. 데이몬으로 인해 헛된 망상을 품어 떠돌이 오크의 길을 자신해서 선택한 철부지가 바로 투르카였다. 그런데 그가 힘을 얻어 황야의 두 번째 무법자라는 이름을 얻다니.... '황야를 헤매다 죽을 줄 알았는데 예상을 뒤엎고 훌륭히 성장한 모양이로군. 생각할수록 재미있는 일이야.' 생각을 마친 데이몬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물론 투르카에게 손을 댈 생각 따윈 없었다. 남은 싸움은 철저히 인간과 오크가 해결해야 했다. "제의를 거절하겠소. 내가 보기에 그것은 공작이 해결해야 할 문제 같소." "하, 하지만...." "우리 사이의 거래는 조금 전 종속의 혈충을 제거해 준 것으로 모두 끝났소. 난 이만 가보겠소." 몸을 일으킨 데이몬은 머뭇거림 없이 본 드래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심과 패터슨, 미첼과 일루미나가 베르키스의 등위에서 데이몬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트루베니아에 남지 않을 예정이었다. 어쩔 수가 없어진 페르슈타인 공작은 얼굴에 떠오른 섭섭함을 급히 지우며 뒤를 따랐다. 베르키스를 보자 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마룡 베르키스를 본 드래곤으로 만드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생각 같아서는 본 드래곤보다 더한 것으로 만들고 싶었소. 아무튼 베르키스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말을 마친 데이몬을 몸을 날렸다. 데이몬이 탑승하자마자 베르키스가 날아올랐고, 페르슈타인 공작은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랜드 마스터급 데스 나이트 넷과 본 드래곤의 힘이라면... 후우, 아깝군 데이몬이 도와준다면 제국을 건설하는 일이 더욱 수월할 텐데 말이야. 생각할수록 아깝지만 할 수 없지. 일단 데이몬이 이곳을 영원히 떠나주는 것만으로 만족해야지.' 어찌 보면 데이몬이 마왕이 되어 마계로 떠나는 것이 차라리 공작에는 잘된 일이었다. 데이몬이 보유한 엄청난 전력을 적으로 삼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세상일이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법. 페르슈타인 공작은 시원섭섭한 눈빛으로 데이몬이 사라진 창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데이몬은 또다시 장도에 올랐다.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펼친 베르키스는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아르카디아를 향해 날았다. 본 드래곤 위에서 내려다 본 바다는 고요하기 서울역에 그지 없었다. 드래곤 로드의 마법이 풀린 탓에 파도는 잔잔하기만 했다. 그 때문에 베르키스는 러셀런트보다 이틀 빠르게 아르카디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단 팔 일 만에 대륙을 건너는 전대미문이 일을 해낼 일행은 가장 먼저 카르셀 왕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미첼과 일루미나를 내려줄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카르셀 왕국의 근교에 도착하지 미첼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걱정입니다. 율리아나의 죽음을 카르셀 국왕전하께 어떻게 알려야 할지...." 카심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대로 얘기하는 것이 나을 거야." "카심 용병단원의 일원으로 마왕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렇게 말입니까?" 데이몬의 표정도 그리 밝지 않았다. "마계로 건너갈 경우 최선을 다해 율리아나의 영혼을 돌봐줄 생각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미첼이 일루미나와 함께 베르키스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이제 미첼 너와도 이별이로구나." "그렇군요." 데이몬을 쳐다보는 미첼이 눈동자에는 묘한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잠시 후 미첼은 데이몬을 향해 공손히 예를 올렸다. 주군을 향해 올리는 기사로서의 예였다. "일전에 말씀드렸듯 데이몬을 만나게 된 것은 제 일생일대의 행운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데이몬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녀석......"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이 손을 내저었다. "어서 가거라. 어버지께 어여쁜 신붓감을 보여드려야지. 아마 널 무척 자랑스러워하실 게다." 그 말에 일루미나의 얼굴에 홍조가 서렸다. 미첼이 다정하게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노스우드 평원에서의 혈전을 통해 두 연인의 사이는 한결 가까워져 있었다. 데이몬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난 이만 가보마. 부디 건강하거라." "예. 데이몬 님도 부디 원하시는 바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데이몬은 미첼과 일루미나의 영접을 받으며 기운차게 날아올랐다. 베르키스의 모습이 하늘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두 연인은 허공을 하염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미첼과 헤어진 데이몬은 곧장 아르네 영지로 향했다. 베르키스의 속도가 워낙 빨랐기에 그들은 하루가 지나기 전에 아르네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데이몬은 이번에도 카심을 아르네 외곽에 내려주었다. 미련이 남은 눈빛으로 미적거리는 카심을 본 데이몬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도 이제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야겠지?" "의당 그래야겠지만 이대로 데이몬을 떠나보내려니 조금 섭섭하군요." "섭섭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데이몬이 슬쩍 눈짓을 했다. "부디 오래 살게. 마계에서 목적을 이룬다면 한 번 방문하겠네. 그러니 부대 그때까지 살아있어야 하네." "하, 하지만 인간계로 오시기가 그리 쉽지 않을 텐데요." "걱정하지 말게. 테오도르 녀석에게 한가지를 부탁해 놓을 참이니까. 그녀석이라면 잘 조처해 줄거야." 데이몬이 머릿속에는 기발한 생각이 하나 떠올라 있었다. 하지마 그것은 카심이 들어서는 곤란한 종류의 일이었다. 생각을 접은 데이몬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럼 잘 있게. 자넬 만나 행복했었네." "저 역시......." 데이몬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날아올랐다. 남겨진 카심과 패터슨은 미첼이 그랬던 것처럼 본 드래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창공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제국의 수도 펠젠틴에 도착한 데이몬은 조용히 황궁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현경의 경지에 오른 무인답게 그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집정관인 테오도르를 만날 수 있었다. 테오도르의 저택에서 하루를 머물며 많은 대화를 나눈 뒤 데이몬은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났다. 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오직 당사자들만 알뿐이었다. 이후 데이몬의 모습은 아르카디아와 트루베니아 양 대륙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단지 오크 패잔병 토벌에 나선 기사들에 의해 거대한 본 드래곤이 노스우드 방향으로 날아갔다는 보고가 페르슈타인 공작에게 올라갔을 뿐이었다. 그것이 데이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힘을 잃은 상태로 트루베니아에 건너와서 온갖 역경을 거쳐야 했던 데이몬. 우여곡절 끝에 마력의 원천을 얻은 그는 마왕이 될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완전한 마왕이 되기 위해 마계로 떠난다. 그가 마왕이 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그 자신밖에는 다크메이지 1부 끄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