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오후 9시 30분. 비가 내리고 있다. 하늘은 검다. 천둥번개도 도우미처럼 지금의 폐쇄적인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번갯불에 맞춰 드러나는 마천루의 실루엣은 더없이 불길했다. 검은색 우비를 맞춰 입은 전경대원들이 나름대로 대열을 맞춰 아스팔트 위 에 앉아있다. 그 처량한 꼴은 마치 장마에 대비해 묶인 벼들을 연상시킨다. 검은 덩어리들 사이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전투경찰대 상급 자들은 비상대기 시 흡연을 자제하라고 일러두지만 실제상황에서 그런 말은 통하지 않는다. 담배를 문 대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퓰리처상 후보에 오를 자격이 있을 만 큼 처절했다. 공포와 피로에 주름진 그들의 얼굴 위엔 빗방울이 을씨년스럽 게 흘러내렸다. ?으흑.? 누군가의 흐느낌이 들렸다. 대원들의 얼굴이 순간 확 달아올랐다. ?어떤 자식이야!? ?죽고 싶어!? 언제까지고 조용할 것 같던 대원들이 크게 술렁였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육두문자가 하늘에 난무했다. 깊숙이 깔려있던 그들의 공포가 한순간에 집 단 히스테리로 발전한 것이다. 구타 직전까지 간 상황을 무마시킨 것은 무전기를 들고 있던 대대장의 목소 리였다. ?닥쳐, 자식들아! 니들은 언제 안 그랬어? 남한테 욕지거리 할 힘이 있으 면 총이나 점검해! 물이 들어가서 못 쐈다고 나중에 헛소리 하지 말고!? 전경대는 다시 조용해졌다. 사건의 발단이 된 전경은 손가락을 깨물어 울음을 참았다. 이빨과 살가죽 사이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몸 전체는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밑에선 지린내 까지 났다. 옆에 있던 전경은 오늘 아침 배치된 그 운 없는 후배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 다. ?괜찮아. 5분만 버티면 돼. 그럼 살 수 있어.? 그러나 주름덩어리로 변해버린 전경의 눈은 떠지지 않았다. 그는 눈물이 잔 뜩 스며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번 부대의 최 상경님도 그랬습니다. 5분만 버티면 된다, 그러면 그 날은 편히 잘 수 있다. 하, 하지만 우리 부대는 3분 만에 괴멸직전까지 갔 습니다. 절 위로해주신 최 상경님은 머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분의 머리는 결국 못 찾았습니다. 정말 좋은 분이셨는데… 좋은 분이셨는데!? ?자식!? 순간 K-8돌격소총의 개머리판이 그 전경의 머리에 꽂혔다. 그냥 거꾸러진 전경의 몸 위로 수십 번의 발길질이 가해졌다. 주위에 있던 전경의 대부분이 그의 구타에 가담했다. 그를 위로했던 전경은 저 멀리 밀려난 상태다. 그는 반쯤 미친 동료들을 말리려고 생각했지만 결 국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전경들 사이에서 욕이 터져 나왔다. ?너만 살고 싶은 줄 알아! 너만 동료를 잃은 줄 알아! 전부 죽어도 싼 놈 들이라 죽은 줄 알아!? ?징병되기 싫었으면 손가락이라도 잘랐어야 할 거 아냐! 괜히 나와서 지랄 하고 있어!? ?네가 운다고 그놈들이 안나올 것 같아! 이 또라이 자식!? 그 소동은 대대장이 공포탄을 발사하면서 겨우 끝났다. 구타에 참여한 전경 들은 따로 분류됐고 만신창이가 된 전경은 들것에 실려 후송차로 향했다. 들것을 움직이던 전경이 피투성이가 된 전경에게 충고하듯 말했다. ?이 병신아. 전부 오줌 싸기 직전인 상황에서 똥을 싸면 어떡해? 재수가 없었으면 동료한테 총 맞아 죽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 ?…….? 전경은 그저 눈물만 질질 흘릴 뿐이었다. 그를 후송차에 집어넣은 전경들은 손을 털며 빗속을 걸어갔다. 감옥 같은 후송차에 홀로 남겨진 전경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때 우두둑 하는 소리가 머리맡에서 들렸다. ?의무병이 있었구나.? 그는 웃으며 눈물을 닦았다. 남 보기가 무서웠는지 눈은 그대로 감았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 ?아무래도 부대를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이대로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혹시 좋은 부대로 가는 방법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 대답이 없다. 숨소리만 들린다. 한심해서 그렇겠지. 라고 생각한 전경은 벌써 두툼히 부어버린 눈을 희미하 게 떠봤다. ―카악. 그가 입을 벌리고 있다. 동굴처럼 생긴 그 입속에서 오장육부를 울리는 악 취가 스며 나왔다. 끈적끈적한 점액이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흘러내렸다. 전경의 이마에 떨어 진 점액은 기름처럼 원을 그리며 퍼졌다. ?끄아악!? 이윽고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졌다. 후송차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경들은 반사적으로 소총을 잡았다. 직사각형으로 생긴 차량유리는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처음엔 손이, 그 다음엔 이마가 충돌했다. 얼마 후엔 사람의 구성물로 보이는 분홍색의 물체 들이 들러붙었다. ?이런 젠장, 바이오 버그다! 으아아아!? 전경들은 괴성을 지르며 방아쇠를 당겼다. K-8소총의 뭉툭한 소염기에서 5. 56㎜탄의 불꽃이 뿜어졌다. 우습게도 후송차량은 방탄처리가 되어있었다. 차량 안의 그 생물은 전경들 이 제정신을 차릴 때까지 마음 놓고 포식을 계속했다. 60발들이 탄장을 비운 뒤에야 차량의 재질을 깨달은 전경들은 일단 문을 열 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을 없애야 더 이상의 피해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살 육의 시작일 뿐이었다. 그들이 도어 손잡이를 잡음과 동시에 사방에서 유리파열음이 들렸다. ―카아악! 아스팔트 위에 모여 있던 전경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도로와 맨홀을 통 해 나올 줄 알았던 그 생물, 바이오 버그들이 근처 고층빌딩의 창문을 통해 기습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의 저돌적인 발톱과 이빨 앞에 전경들은 무방비상태로 휩쓸렸다. 저항 하는 전경들의 팔과 다리, 머리와 몸, 상반신과 하반신이 차례로 떨어져나 갔다. 어떤 이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동료의 총까지 거머쥐고 사방에 총을 쏴댔지 만 소득은 없었다. 그 역시 좋은 사냥감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운이 좋게 포위망을 뚫은 전경들은 사력을 다해 총을 쏘며 전열을 가다듬었 다. 고함을 지르고 공포탄을 쏘던 대대장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없다. 그 밑 의 상급자들도 도망쳤는지 죽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전경들의 저 항하는 그 모습은 아름답다 생각될 정도로 침착하고 절도가 있었다. 근처 주민들의 안녕이나 대한민국의 평화는 사라진 상태다. 현재 상황에 대 한 저주조차 사라져 있다. 그들은 그저 살기 위해 훈련대로 움직였고 가족 을 다시 보기 위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들은 차근차근 뒤로 후퇴했다. 그들 외의 먹잇감을 모두 처리한 바이오 버그들은 살욕과 식욕으로 가득한 눈을 부라리며 그들에게 돌진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현재 나타난 바이오 버그들은 모두 E급이었다. 표피와 힘 이 모든 바이오 버그 중 가장 약한 종이다. 덕분에 대 바이오 버그 전용으 로 개발, 보급된 5.56㎜탄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 뚫리고 찢겨진 바이오 버그들의 육체는 거리를 가득 매웠다. 그러나 돌진하 는 바이오 버그의 수는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나타난 바이오 버그들의 숫자는 그만큼 어마어마했다. 전경들의 얼굴이 점차 흐려진다. 남은 탄창은 한두 개에 불과하다. 후퇴는 하고 있지만 속도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그냥 뒤돌아 뛰었다간 저항한 보람 없이 죽는다. 바이오 버그의 주 력은 사람이 절대 능가할 수 없다. 그들은 마지막 탄창을 갈아 끼웠다. 그리고 쐈다. 어찌나 필사적이었는지 그들은 자신들의 머리를 넘어 적 중앙에 떨어지는 포탄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거대한 폭음이 전방을 뒤흔들었다. 폭발에 휘말린 바이오 버그의 잔해가 건 물과 유리창을 더럽혔다. 무턱대고 돌진하던 바이오 버그들은 예상치 못한 사태에 주춤했다. ?지원이다!? 몇몇이 소리를 치며 뒤를 돌아봤다. 강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그들의 눈을 괴롭혔다. 불빛 중앙엔 육중한 몸집의 남자가 있었다. 인간이 들기엔 너무나 큰 무기 를 손에 쥔, 아니 손에 장치한 그 남자는 포의 두꺼운 장전봉을 당겨 새로 운 포탄을 밀어 넣었다. 또 한번의 폭음이 들렸다. 이번에 떨어진 포탄은 폭발하지 않았다. 대신 이 상한 화학물질을 퍼트려 바이오 버그의 주위를 온통 연기로 가득하게 만들 었다. 틈을 만든 거한은 편한 손을 입 앞에 갖다댔다. ?433전경대대인가?? ?예, 그렇습니다!? 가장 계급이 높은 전경이 힘차게 대답했다. 거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작은 기계음이 들려왔다. 보아하니 얼굴과 머리를 제외 한 육체 대부분이 기계로 이뤄진 것 같았다. 그래도 편하고 믿음직스러운 인상이었다. 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얼굴의 혈색과 표정만큼은 평범한 사 람보다 더욱 인간미가 느껴졌다. 그가 말했다. ?BSP, 대한민국 수도방위지부의 그렌 헤이그 소령이다. 본 작전은 지금 이 시각부터 UN과 대한민국 정부사이에 채결된 조항에 따라 우리 BSP가 맡겠 다. 허락해 주겠나?? ?예! 잘 부탁드립니다!? 전경들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거한의 뒤에서 그림자 하나가 솟구쳤다. ?이얏호!? 한순간 불어온 바람처럼 가볍게 날아오른 그 그림자는 체조선수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전경들과 바이오 버그 사이에 착지했다. 꽤 큰 키의 남자였다. 자신을 그렌 헤이그라 밝힌 사이보그 소령보다는 작 았지만 그래도 190㎝은 충분히 되어 보였다. 빗속에서 흩날리는 금발과 파란 재킷, 그리고 허리에 찬 일본식 도검이 묘 한 조화를 이뤘다. 허나 재킷 등판에 쓰인 BSP라는 글자는 더없이 믿음직해 보였다. 그는 손에 낀 펑크 글러브를 물고는 쭈욱 죄어 당겼다. ?늦어서 미안해, 친구들. 저 녀석들이 곳곳에서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도 착이 늦어버렸어. 하지만 안심해!? 그는 뒤로 휙 돌며 엄지를 펴보였다. 전경들은 그 남자의 자신감 넘치는 퍼 포먼스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무적의 남자! BSP의 아이콘!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그 이름도 찬란 한 지…….? ?지크, 이 녀석!? 헤이그 소령이 순간 불호령을 질렀다. ?협의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선 나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잖나! 넌 지금 월권행위를 하고 있어! 처크 지부장님을 또 곤란하게 만들 생각이냐!? 그러자 금발의 남자는 자신의 검은 눈썹을 불균형하게 위치시켰다. ?에이, 그래도 고발하는 사람은 없었잖아요. 그리고 선배님이 포탄을 쏘는 거랑 제가 몸을 날리는 거랑 무슨 차이가 있어요? 없다구요. 제가 잘못했나 요, 여러분?? 남자는 매우 명랑하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전경들의 얼굴은 좋지 않았 다. 그 BSP청년의 뒤로 바이오 버그 한마리가 슬금슬금 접근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크악! 기회를 노리던 이형의 생물은 곧장 몸을 날렸다. 뒤로 잔뜩 당겨진 팔엔 힘이 잔뜩 실려 있다. 청년의 금발머리를 단숨에 박 살내고도 남을 기세였다. 퍽 하는 소리가 건물 사이를 메아리쳤다. 뭔가 부서지는 끔찍한 소리였다. 그런데 전경들은 조용했다. 몇 분전처럼 공포에 질린 게 아니다. 황당해하 고 있었다. 바이오 버그의 육체가 아스팔트 위에 엎어졌다. 공중에 떴을 때 취한 자세 그대로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하나, 흉물스런 머리가 바위에 부딪힌 듯 깊 게 찌부러져 더욱 흉하게 변해 있다는 점이었다. 반면 청년은 그 바이오 버그가 날아온 방향으로 주먹을 뻗고 있었다. 상황은 대강 짐작이 가능했다. 망치로도 부수기 힘든 바이오 버그의 머리를 청년이 맨손으로 으깬 것이다. 초인적인 힘. 그 말 외엔 설명하기 힘들었다. ?헤헷, 성불(成佛)이야.? 기습을 간단히 막은 그 BSP청년은 다시 전경들을 바라봤다. ?자, 다시 해봅시다. 제가 잘못했나요, 여러분?? 그는 손을 휘리릭 돌려 자신의 귀에 갖다댔다. 대답은 간단했다. ?우오오!? 전경들은 박수를 치며 열렬히 환호를 보냈다. 휘파람 소리도 높게 들렸다. 청년은 보란 듯 어깨를 으쓱했다. 헤이그 소령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덮었 다. ?맘대로 해, 맘대로.? 허락을 받아낸 청년은 글러브를 다시금 죄었다. 찌익 하는 가죽 특유의 소 리와 함께 빗물이 스며 나왔다. 손가락의 실루엣 사이로 청년의 눈동자가 빛났다. 화학물질의 방해에서 벗 어난 바이오 버그의 대군이 그 틈 안에서 꿈틀댔다. 그는 웃었다. ?드디어 쇼 타임이다, 베이비.? 서기 2013년. 미국. 미국 서부에서 동부로 넘어가는 초고속화도로. 다른 외곽도로도 마찬가지지 만 완공 된지 얼마 안 된 이 도로엔 12년 전까지만 해도 볼 수 없었던 특이 한 것들이 있다. 다름 아닌 주의표지판으로, 그것들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높게 올려진 콘크 리트 보호장벽 위에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내용은 이랬다. [주의, 바이오 버그] 수년 전부터 출몰하기 시작한 그 단순한 이름의 괴물들 덕분에 몇 개월에 한번 볼까말까 한 엽기적 살인이 현재는 미국 전역의 도로에서 자주 발생한 다. 광인의 살인과 바이오 버그 습격의 차이는 구분이 쉽다. 간단히 시체가 있나 없나만 확인하면 80% 이상은 맞아떨어진다. 그들이 처음 출몰한 해, 미국 국민들은 그 이형의 생물들이 주는 공포를 이 기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젠 세계 어 디에서도 바이오 버그의 습격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어느덧, 바이오 버그 에 의한 식인사건은 신문을 보는 사람들에게 일기예보만큼이나 익숙한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공포에도 불구하고 초고속화도로를 질주하는 한 웨곤이 있었다. 그 커피색의 웨곤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앞서가는 몇몇 차량을 이리저 리 곡예 하듯 앞지르며 달렸지만 총을 쏘며 그 차를 추격하는 다른 차는 없 었다. 하지만 차에 탄 사람의 표정은 스턴트맨보다 훨씬 더 긴장되어 있었다. ?젠장,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내가 이 고생을 사서 해야하는 거지? 내 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 빌어먹을, 빌어먹을!? 심하게 투덜댄 남자는 얼마 남지 않은 커피를 모두 비운 후 담배를 물었다. 라디오를 켜거나 TV를 켜는 여유 따위는 남자에게 없었다. 지금 남자에게 필요한 것은 부인이 결혼하기 전에 사준 라이터였다. 남자의 두꺼운 손에 헤집어지기 시작한 포켓 위엔 작은 신분증이 매달려 있 었다. 「처크 켄트. 펜타곤 산하 생물병기연구소 Z팀 팀장. 보안등급 A.」 라이터를 겨우 찾은 남자는 내일 0시 부로 쓰레기가 되는 그 전자신분증을 거칠게 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의 끝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그 직후 약간의 연기가 남자의 코에서 밀 려나왔다. 얼마간의 흡연이 꽤 효과가 있었는지 남자의 표정은 약간이나마 풀려 있었 다. 남자는 마지막 연기와 함께 담배를 끄며 중얼댔다. ?후, 나도 미쳤지. 어쩌자고 저 괴물단지를 이렇게 필사적으로 빼낸 걸까? 정상적으로 성장한다 해도 밥만 축낼 거야. 아니, 바이오 버그보다 더 골치 아픈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과는 달리 남자는 씁쓸하게나마 웃고 있었다. 남자는 백미러에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하여튼 너, 착하게 살아야한다. 내 손으로 널 죽이지 않게 해줘, Z타입. ? 그가 바라보는 백미러 안엔 은회색의 거대한 강철 통이 있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몰라도 통 안에서 나온 여러 개의 파이프는 별도의 기계장치와 이유식 같은 물질이 들어있는 또 다른 통에 복잡하게 연 결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차의 흔들림과는 상관없이 약간씩 꿈틀대기까지 했다. 그때 남자의 품안에서 전화벨소리가 들려나왔다. 연구소에 들어가기 직전 구입한 위성전화였다. ?뭐야 또?? 다시 표정을 구긴 남자는 조심스럽게 전화의 폴더를 열었다. ?처크 켄트입니다.? ?여보, 저예요. 괜찮아요?? 부인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처크의 얼굴은 잠시나마 홀가분하게 변 했다. ?아아, 리사. 지금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니 걱정하지 마.?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사실 방금 전에 펜타곤에서 사람들이 왔었어 요.? ?뭐? 펜타곤에서? 녀석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는데?? ?10분 정도요. 당신이 없다는 것만 확인하고는 바로 돌아갔어요.? ?그, 그래? 알았어. 아무래도 좀 늦게 도착할 것 같으니 오늘은 편히 쉬 어. 언제 도착할지 정해지면 다시 연락해 줄게. 애는 괜찮아?? 그들 부부 사이엔 현재 임신 7개월 째에 접어들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걱 정을 들은 부인은 따뜻한 목소리로 남편을 안심시켰다. ?예, 잘 있어요. 지금도 제 안에서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걸요.? ?후후, 그렇군. 그럼 내 걱정하지 말고 잘 자 여보. 내일 꼭 전화해줄게. ? ?알았어요. 그럼 조심하세요.? ?음.?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남자는 옆 좌석을 향해 전화를 집어 던졌다. ?제기랄!? 남자는 생각했다. 펜타곤에서 자신이 폐기처분될 실험모델을 빼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인 가? 아니, 그럴 리 없다. 만약 진짜로 알아냈다면 자신은 지금 위성레이저 공격을 받고 저 세상에 가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펜타곤에서 집에 사람을 보낸 것인가. 남자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할 수 없지. 일단 몇 년간은 고아로 만드는 수밖에. 그래야 나도 살고 너 도 살겠지.? 남자, 처크 켄트는 차에 부착된 항법장치를 켜고 워싱턴 주위에 있는 고아 원을 찾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가까스로 고아원을 찾아온 처크는 앉기 편한 나무의자에 피곤한 몸을 얹고 눈을 감았다. 원장수녀가 자신이 준 데이터에 신경을 쓰는 동안 잠깐이나마 눈을 붙여보자는 생각이었다. 모니터를 통해 오늘 들어온 아이의 신상을 검토하던 원장수녀는 피부색과는 정 반대의 하얀 테 안경을 벗으며 물었다. ?아이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켄트 씨? …처크 켄트 씨?? ?음? 아, 예. 그러니까…….? 붙었던 눈을 겨우 뗀 처크는 머리를 긁적이며 오늘 자신이 맡긴 아이의 이 름을 생각해 봤다. ?어라, 큰일이네.? 막상 생각해 보려니 적당한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는 한도 내의 모든 흔한 이름들을 떠올리던 그의 머릿속에 아이의 모델번호인「Z-sniper type 01」이 불현듯 떠올랐다. ?지크… 스나이퍼입니다.? ?지크 스나이퍼? 흐음, 괜찮은 이름이군요. 스펠링은 어떻게 됩니까?? 스펠링은 가벼운 문제였기에 처크는 여유 있는 얼굴로 대답했다. ?Z. I. C… 아아, J. I. C. K로 하죠. 스나이퍼는 S. N. I. P. E. R입니 다.? ?지크 스나이퍼……. 알겠습니다.?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의 이름을 입력했다. 생일 등은 고아원에 들어온 날로 가볍게 처리되었다. 그 이후엔 복잡한 절 차가 없었기에 아이의 고아원 입양절차는 순조롭고도 간단하게 끝났다. 모든 절차를 끝낸 원장은 한숨을 쉬며 다른 수녀의 품에 안겨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정말 훌륭한 일을 하셨군요 처크 씨. 바이오 버그에게 습격 당해 부모를 잃은 아이를 구출해 그 먼 서부에서 여기까지 데려오시다니 말입니다. 그런 데 아이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요? 제가 알기로 바이오 버그는 저항하지 못 하는 아이를 먼저 잡아먹는다는데 말입니다.? ?예?? 처크의 얼굴은 잠시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순발력 있게 이내 미소를 지었 다. ?아, 하하하. 악운에 강한 녀석인가 보죠. 그럼 지크를 잘 부탁드립니다. 전 지크가 열 살이 되는 해에 다시 오겠습니다.? ?예? 그 사이엔 찾아오시지 않을 생각입니까?? 꽤나 깐깐한 수녀였다. 나름대로 다급한 상황인 처크는 속에서 밀려오는 오 만가지 욕을 참으며 대답했다. ?하핫, 당연히 자주 들려야죠. 하늘이 저에게 내려주신 아이나 마찬가진데 어찌 한번도 안볼 수 있겠습니까?? 생각 같아선 절대 보고싶지 않았지만 자주 오긴 와야 했다. 사실 처크는 지금 자신이 맡긴 아이가 어떻게 자랄지 알지 못했다. 바이오 버그 이상의 괴물이 될지, 아니면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한 보통의 아이가 될 지는 그 누구도 대답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됐건 처크는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럼 수녀님들 말씀 잘 듣거라 지크. 나중에 다시 오마.? 수녀 품속의 아이는 남자의 거친 키스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잠을 잤다. 고아원을 나선 처크는 일단 웃으며 나오긴 했지만 속으론 상당히 불안했다. 펜타곤에서 자신을 추궁해 저 아이를 찾아낸 후 깨끗이 제거할지도 모르고 그 이전에 고아원 사람들을 모두 죽여 뉴스거리가 될 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이가 10살이 되는 해에 아이를 찾아가겠다 했지만 그때 가서 어떻게 하겠 다는 계획도 사실 세워진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처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암담했다. ?그래, 일단 집에 돌아가자. 쉬고 나면 머리가 좀 정리되겠지.? 처크는 슬슬 고개를 저으며 차에 몸을 실었다. 커다란 짐을 잠시나마 벗었다는 것 때문인지 그는 홀가분하게 담배를 물고 TV를 켰다. 그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TV나 라디오의 뉴스를 들은 적이 없 는 상태였다. ?바이오 버그 뉴스가 나오면 꺼야지. 이젠 지겨워.? 그러나 아쉽게도 그가 틀자마자 나온 뉴스는 바이오 버그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TV를 끄지 않았다. TV화면 구석에 자신이 어제까지 근무했던 연구소의 모습 일부가 나타난 것이다. 「이번 연구소 습격사건은 지금까지 사건 당 열 마리 이상을 넘지 않았던 바이오 버그들이 수백 개체 이상 한꺼번에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연구소는 안에서 무엇을 개발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 도로 무참히 파괴당했으며, 바이오 버그들은 병력 출동 이전에 모두 사라졌 습니다.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뉴스를 지켜보던 처크의 바지 위로 길게 늘어진 담배의 재가 떨어졌다. 잠 시나마 뜨거운 기운이 몰려왔지만 처크는 그 재를 털지도, 다 탄 담배를 끄 지도 않았다. 처크는 눈을 질끈 감으며 나지막이 중얼댔다. ?테레사가 알아차렸군. 이럴 수가!? 처크의 바지에 떨어져있던 담뱃재가 차의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의 이 마도 널따란 경적기의 버튼 위에 떨어졌다. 차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한 소음에 행인들의 인상은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하지만 처크는 머리를 들지 않았다. 이렇게 경찰에 잡혀가고 싶을 정도로 그의 심정은 암담했다. 퉁퉁.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찰이겠지 생각한 처크는 고개를 들고 자신의 신분증이 있는 포켓을 향해 손을 집어넣었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상당히 단련된 듯한 남 자의 우악스러운 손이 처크의 팔과 몸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경찰이 이래도 되는…….? 처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그를 끌어낸 남자는 검은 양복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의 뒤에 선 남자 서넛 역시 같은 스타일이었다. 언뜻 보기엔 마피아의 클리너들 같았지만 그들은 클리너에 비해 상당히 정 중했다. 클리너였다면 그대로 목에 칼을 댔거나 권총을 이마에 들이댔을 것 이다. 남자는 다른 동료와 함께 처크를 양쪽에서 결박했다.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는 처크는 순순히 그들의 행동에 따랐다. 그를 완전히 결박한 후 양복의 남자 중 하나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저희는 UN(United Nation)의 요원이며, 저는 1급 요원 존 맥클리라 합니 다.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처크 켄트 박사님.? ?UN?" 처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요원, 존은 처크를 어디론가 끌고 가며 얘길 계 속했다. ?당신이 바이오 버그와 테레사에 대한 1급 권위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힘이 급히 필요해 이런 거친 행동을 하게 됐으니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테, 테레사? UN이 어떻게 테레사를 안단 말이오!? 그러나 처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그의 목에 다가온 권총형 주사기에서 바람소리가 난 뒤였다. 축 늘어진 그의 몸은 잠시 후 달려온 검은색 고급 승용차에 태워져 그곳에 서 사라졌다. 남은 것은 라디오가 켜진 처크의 차량과 그가 납치되는 것을 목격한 몇몇 행인들의 수군대는 모습뿐이었다. ※※※ 어둠의 왼쪽에 뭔가 밝은 것이 느껴졌다. 그리 부드럽지 않은 매트와 담요 의 감촉이 몸을 뒤덮고 있었다. 시력뿐만 아니라 몸의 전체적 감각이 차츰 살아났다. 자신이 어딘가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은 처크는 일어나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움직이는 것 은 목청 뿐, 약에 의해 마비된 몸은 쉽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우욱.? 완전히 일어나는 데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가까스로 일어나 벽에 등 을 붙인 처크는 희미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정신병원의 병실을 연상케 하는 방의 허망한 인테리어는 그의 기분을 최악 으로 몰고 갔다. 하얀 침대와 철제 탁자, 작은 의자, 플라스틱제 물병과 컵 하나, 그리고 철 제 문. 영락없었다. 병실과 다른 점이라면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과 비정상적으로 커다 란 거울이 자신의 맞은편 벽에 붙어있는 것이다. 처크 자신이 입고 있는 옷 이 끌려올 당시 입은 평상복이란 것도 차이라면 차이였다. 한참 거울을 노려보던 처크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젠장, 어서 날 꺼내주지 않으면 대통령 엉덩이에 뭐가 붙어있는지 대대적 으로 밝혀버릴 거야! 난 자세히 알고 있다고!? 이윽고 정장 차림의 남자 서넛이 문을 열고 안에 들어왔다. 한 사람은 처크 이상의 풍채와 수염을 가진 남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미 육 군 고위장성이었다. 그 외엔 둘 중 한 명의 비서로 보이는 여성과 자신을 연행한 요원들로 이뤄져 있었다. 처크는 두 남자 모두를 알고 있었다. 반항기가 역력했던 그의 표정은 점차 펴졌다. ?데리 헌트 UN사무총장님과 짐 타스커 육군참모총장님 아니십니까?? ?그래. 오래간만일세, 처크.? 수염의 신사, 데리 헌트는 구면인 처크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역시 구면 인 짐 타스커는 모 치킨회사의 전설적 인물처럼 생긴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 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온 방법은 마음에 들었나? 자네가 과학자치고는 힘이 좋다는 말을 해서 그런지 요원들이 예의를 과다하게 갖춘 것 같군.? ?좋은 꿈을 꾸지 못해 아쉬울 뿐입니다.? 처크는 씁쓸함을 지우지 않았다. 6개월 전, 처크는 자신이 만들던 생물병기들의 중간 브리핑 때 둘을 처음으 로 보게 된다. 생물병기와 바이오 버그에 대해 당시 참여했던 그 어떤 인사보다도 관심을 가졌던 둘은 이후 처크를 주목하게 되고, 그것이 인연이 된 셋은 가끔 만나 회식을 하는 등 사회적 관계를 차차 쌓아간다. 처크에게 있어서 그들은 얘기를 잘 이해해주는 선배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에 의해 오늘과 같은 대접을 받게 된 처크로선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사과하지.? 데리 총장이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자네를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네. 물론 자네가 바이오 로이드 하나를 허술하게 빼돌린 덕분이었지만 말일세.? ?…….? 들켰구나 생각한 처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 걱정하지 말게. 자네가 불순한 이유로 그랬다고는 생각 안 하니까. 일단 자네를 이곳으로 데려온 우리의 이유를 말해주겠네. 아, 그리고.? 짐 타스커는 잠깐 말을 쉬었다. ?대통령 각하의 엉덩이엔 아무 것도 없네. 아기처럼 뽀얗지.? 처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미소를 지은 짐은 품속의 서류를 처크에 게 건네주었다. ?읽어보게.? ?예? 뭡니까 이건?? 짐이 건네준 서류의 표지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는 백지였다. 처크가 당 황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짐은 대답 대신 윙크만을 던졌다. 처크는 서류의 내용을 읽어 나갔다. 준 사람의 직위를 보아 쓸데없는 내용 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기에 그는 마치 학생처럼 차근차근 눈을 움직였다. ?BSP(Bio Bug sweep police)? UN의 이름으로 대 바이오 버그 경찰을 만들 겠다는 건가?? 처크는 다음을 읽지 않고 곧장 질문을 던졌다. ?중화기로 싸우실 생각이십니까?? ?쭉 읽고 얘기하세.? 데리 총장의 목소리는 근엄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자신도 모르게 뻣뻣이 굳어버린 처크는 맑게 고친 시선을 서류로 돌렸다. ※※※ ?내가 만약 그것을 읽지 않고 내팽개친 후 집에 돌려보내 달라고 몸부림을 쳤다면 난 아마 미국 구석퉁이의 제약회사에서 바퀴벌레 약이나 만들며 편 히 지내고 있었을 걸세.? ?하핫, 선배님도 참.? 한 남자의 말에 곁에 앉은 두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유머를 던진 남자는 처크 켄트였다. 건강하게 늙은 그의 얼굴엔 약간의 주 름과 기미가 뿌려져있긴 했지만 건강을 의심하게 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가 말했다. ?아, 농담이 아닐세. 바이오 버그 녀석들이 사라진 후 인류를 위협할 생물 은 다시 바퀴벌레가 될 테니 말이야.?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하하하.? 같이 앉은 사람들과 한바탕 웃은 처크는 앞에 놓인 글라스를 잡았다. 얼음 에 뒤섞인 발렌타인 12년산의 황갈색 액체는 몇 번의 흔들림을 거친 후 처 크의 입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그의 앞에 앉아 20여 년 전의 얘기를 듣고 있는 남자, 그렌 헤이그도 술잔 에 손을 가져갔다. 그의 손은 특수고무로 덮인 기계였다. 손뿐만 아니라 팔도, 어깨도, 몸 전 체도 육중한 기계였다. 오직 그의 안면과 인공 두개골속의 뇌만이 순수한 단백질로 이뤄져있을 뿐이다. 그는 말 그대로 사이보그였다. 그것도 건물 하나쯤은 언제든지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상위랭크의 전투 사이보그였다. 그러나 처크와 함께 술잔을 부딪치는 지금만큼은 선배를 앞에 둔 온화한 후배였다. 그렌이 술잔을 놓으며 말했다. ?그래도 그 서류를 읽으신 덕분에 제가 선배님을 뵐 수 있게 되지 않았습 니까.? ?그건 그렇지. 처음 만났을 당시 자네는 애를 둔 과학자를 굴리지 못해 안 달이 난 교관이었지 아마?? ?정확히 네이비 씰 교관이었죠.? BSP계획의 참여가 확정된 직후, 처크는 2박3일간의 휴가를 집에 보낸 뒤 네 이비 씰 훈련소로 들어가게 된다. 한 달간 쉴 틈 없이 진행된 네이비 씰의 강인한 훈련은 담배와 만성피로, 콜레스테롤에 찌든 처크를 육체적으로 강하게 만들어줬을 뿐만 아니라 이후 1기 BSP멤버라 불리는 사람들과의 깊은 인연을 맺어준다. 그렌도 그때 만든 인연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선배님은 같이 온 다른 과학자들과 너무도 달랐습니다. 차를 타지 않으면 100미터를 14초 안에 달려가지 못하는 점은 같았지만 눈빛만큼은 투 지 그 자체였죠. 과학자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던 저에겐 큰 귀감이 됐었습니다.? ?덕분에 자네 부인이 날 10년 동안이나 저주했었지. 자네가 날 따르겠다며 BSP의 전투사이보그 계획에 자원하는 바람에 엘렌과 톰 이후로 애가 태어나 지 못하게 됐지 않나.? ?하하, 둘만으로도 허리가 휘청거린답니다, 선배님.? 처크는 입가에 두툼한 시거를 가져갔다. 그렌은 곧장 라이터를 가져가 그 끝에 불을 붙여주었다. 향기만큼이나 풍부한 시거의 연기 속에 그렌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건 그렇고 선배님. 지크 말입니다, 언제쯤 우리 지부에 합류하는 겁니 까?? ?내일이야.? 지크라는 이름이 나오자 처크의 표정은 단숨에 진지해졌다. 그는 누가 들을 새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지크의 존재는 UN안에서도 최고급 기밀일세. 기밀치고는 전 세계적으로 사건사고를 많이 저지르긴 했지만 말일세. 어쨌거나 녀석의 활동에 기대가 되는 건 확실하지. 그 괴물 녀석이 이제 표면에서 움직일 생 각만 하면 온 몸이 부르르 떨린다네.? 그렌이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나타냈다. ?물론입니다 선배님. 아직 정식테스트를 받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녀석의 기록은 현재 활동 중인 그 어떤 BSP보다도 뛰어나죠. 미국, 멕시코, 캐나다, 영국, 중국, 일본 등등 녀석이 거쳐 간 모든 BSP지부에서 녀석을 탐내고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하아, 내일이라. 정말 기대되는군요.? 그렌은 기쁜 나머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덕분에 크게 울린 유압실린더와 모터의 소리는 주위사람들의 시선을 잠시나마 모으기에 충분했다. 수많은 시선을 느낀 그렌은 즉시 손의 힘을 빼고 자중을 했다. 처크는 그런 후배를 보며 고개를 슬며시 저었다. ?후후, 그렇게 기쁜가, 그렌?? ?아, 죄송합니다, 선배님. 하지만 기쁘지 않을 수 없죠. 힘들어진 만큼 말 입니다.? ?음.? 처크와 그렌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전 세계적으로 퍼진 BSP지부 중에서 특별히 힘들지 않은 곳은 없었지만 처 크가 맡고 있는 대한민국 지부는 BSP의 공동묘지라 불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바이오 버그관련 사건이 터지는 횟수도 그랬지만 대한민국과 그 수도인 매 트로(Metro) 서울에서 출현하는 바이오 버그는 다른 나라의 바이오 버그보 다 훨씬 강하고 지능도 뛰어났다. 서울의 E급 바이오 버그는 타국의 D급과 같은 수준의 강력함을 지녔고, 또 한 같은 종이라 해도 격이 달랐다. 그런 탓에 용기 있게 대한민국 지부로 자청해온 BSP중에서 1년을 멀쩡히 버틴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처크가 직접 차출한 BSP대원 네 명만이 꾸준히 활동해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젠 옛말이 되고 말았다. ?케빈과 챠오의 힘은 이제 한계입니다. 몇 달 전 들어온 리진은 탈진하기 가 일쑤입니다. 저도 그렇고… 모두가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렌이 한탄하듯 말했다. 처크는 어느새 비워진 그렌의 잔을 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 그래서 지크를 부르는 것 아닌가. 하지만 솔직히 걱정이 되 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 모르나? 작년에 멕시코 지부에서 녀석을 1개월 간 임시로 사용할 때 들어간 돈이 1200만 달러였네.? ?1200만 달러? 지크가 그렇게 많은 돈을 요구하는 스타일이었습니까?? 그렌의 의안이 의구심에 반짝였다. 처크는 연기를 두세 번 내뿜은 뒤 하기 싫은 얘기를 시작했다. ?후, 그랬으면 지부장 자리를 때려치우고 녀석의 매니저를 했겠지. 믿기 힘들겠지만 그 돈은 모두 손해배상으로 나갔다네. 녀석은 건물 일곱 채를 반파시킨 것도 부족해서 멕시코 대통령의 팬티에까지 구멍을 냈지.? ?예에?? ?난 맥시코 지부장에게 분명히 경고를 했었네. 그 인간 재해발생장치를 꼭 사용하고 싶다면 UN으로부터 지원금을 두둑하게 받아놔야 할 거라고 말이 네. 그 경고를 무시한 그 지부장은 결국 한 달도 안돼서 지크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쫓아내고 말았지.? ?…….? 그렌은 뭐라 할말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아,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진 말게. 그런 손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멕 시코 지부에선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거든. 물론 지크가 있는 동 안 말이네.? ?목숨대신 손해배상이란 말이군요.? ?말하자면 그렇지.? 처크는 유리로 된 재떨이에 시거를 끄며 말을 맺었다. ?좋은 야생마일수록 길들일 때 입는 상처가 큰 법이야. 제대로 다루기만 한다면 지크가 입힐 금전적 손해는 약간이나마 줄일 수 있을 걸세. 녀석은 무턱대고 말을 안 들어먹을 나쁜 녀석이 아니니까. 물론 녀석의 뒷다리에 얻어맞거나 낙마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지.? ?후후, 그렇군요. 그럼 BSP최고의 조련사라 불리는 선배님의 실력을 믿어 보겠습니다.? ?허허허, 너무 의지하진 말게. 내가 없을 땐 자네가 조련해야 하니까. 아, 지크가 온다는 사실 말일세.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지?? ?물론입니다. 지크를 아는 대원도 없으니 말 할 필요도 없었죠.? 그러자 처크는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음? 자네 모르고 있었군?? ?예? 지크를 아는 대원이 있었습니까?? ?있지. 한 3년 전인가? 난 중국지부의 소개에 따라 지크를 중국의 고명한 무술집안으로 보낸 일이 있다네. 여기까지 얘기하면 알 텐데?? ?…….? 그렌에게 처크의 말은 상당한 의외로 다가왔다. 처크가 조카손자로서 데리고 있는 존재, 지크는 예비 BSP로서 뽑히기 전부 터 UN의 주목을 받는 인물이었다. 지크가 열여덟이 되던 해, 그를 예비 BSP로서 비밀리에 뽑은 처크는 자신의 연결고리 속에서 최고의 인물들을 뽑아 그를 훈련시키게 된다. 나이 상으로 보자면 무리였지만 지금껏 지크가 훈련에 실패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덕분에 지크의 이름은 전 세계적으로 괴물 그 자체로서 인식되게 된다. 그의 훈련반경은 고유무술이 있는 모든 나라였는데, 특히 중국과 대한민국, 타이, 그리고 일본은 그의 주된 훈련장소가 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 만 메모리 속에 쌓아두기만 했던 그렌은 추리를 끝낸 뒤 이내 허탈한 웃음 을 지었다. ?챠오 말입니까?? ?그렇지. 재미있게도 챠오가 중국지부 BSP가 되길 거부하고 이곳으로 온 이유는 바로 지크 때문이야.? ?호오, 둘이 그런 사이였습니까, 선배님?? 처크는 연속으로 놀라는 중인 후배를 향해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불타는 사이라는 건 확실하지. 다만 그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 복수심이라 서 문제지만.? ?예에?? 그렌은 어이가 없었다. 처크는 넘어가자는 듯 시가를 든 손을 휘저었다. ?하여튼 그런 일이 있다네.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가세. 아, 저기 하사장 이 오는군.? 뒤로 돌려진 그렌의 눈엔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중년의 남자 한 명이 있었 다. ?아이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선배님들. 이사님들이 통 놔주질 않으셔서 요.? 호리호리한 몸에 말쑥한 양복차림을 한 그 남자, 하지혁은 자신의 뿔테안경 을 매만지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현재는 대규모 무역회사의 사장이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렌과 같 은 현역 BSP였다. 비전승(秘傳承) 태권도인 용살문(龍殺門)의 54대 전승자로서 대한민국 BSP 1기 멤버가 된 그는 1기 멤버로서 높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으며 젊은 시절 엔 대통령 훈장을 두 번이나 받은 최고급 실력자이기도 하다. 처크는 그렌과 자신 사이에 앉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하하, 늦어도 괜찮네. 결혼한 시점 외엔 모든 것이 늦기로 유명한 자네 아닌가.? 하지혁의 안경 밑이 붉게 물들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부끄러워지는군요. 그런데 무슨 얘기들을 나누고 계셨습니까?? 그렌이 대답했다. ?음, 내일 선배님의 조카손자인 지크가 우리 BSP에 합류한다네. 그것에 대 해 잠시 얘기를 나누고 있었지.? ?…….? 하지혁의 얼굴에서 순간 미소가 사라졌다. 갑자기 변한 그의 분위기에 당황 하고 만 그렌과 처크는 급히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왜 그러나 지혁? 무슨 문제라도 있나?? 처크의 물음에 하지혁은 고개를 떨어트리고는 무겁게 말했다. ?리진을 내일 부로 BSP에서 제외시켜 주십시오.? 처크와 그렌은 또 한번 놀랐다. ?응? 무슨 말인가? 자네 도대체 왜 그래?? 선배의 물음에 하지혁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그 인간재해에게 제 딸의 목숨을 맡길 순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선 배님!? 처크는 묵묵히 이마를 짚었다. 그렌은 미간을 좁힌 채 글라스를 입으로 가 져갔다. 짜증을 내는 둘의 모습에 정신을 차린 하지혁은 입을 막았으나 일 은 이미 터진 뒤였다. ?약속시간에 늦는 건 괜찮아. 20년 넘게 당한 일이니까. 그러나 나이를 생 각해서라도 갑작스레 흥분하진 말게. 제발 부탁이네. 자넨 더 이상 젊다는 이유로 용서받을 수 없어.? ?죄, 죄송합니다, 선배님.? 하지혁이 갑작스레 흥분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10년 전 벌어진 모종의 사건 때문이었는데, 그 이후로 지크라는 존 재는 하지혁에게 인간재해 이상의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 ?사건?을 알고 있는 처크는 또 하나의 시거를 물며 충고를 던졌다. ?그때 일은 어린애들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단순한 해프닝이었지 않나. 냉철하게 현실를 생각해주게, 지혁.? ?예. 알겠습니다, 선배님.? 그러나 지혁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 처크의 품속에서 작은 신호음이 들려왔다. 지부장급만이 가질 수 있는 BSP전용의 위성전화였다. 지혁과 그렌에게 눈짓을 보낸 처크는 작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켄트 지부장이다. 오, 루이. 무슨 일이냐? 아, 그래? 그럼 전경대를 우선 급파하도록 해라. 케빈 혼자 싸우게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렌과 함께 곧 가마.? 전화를 접은 처크는 곧장 그렌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세. 올림픽 주 경기장이 있는 J-3지역에서 바이오 버그 녀석들이 체육 대회를 하고 있다는 군.? 그렌이 즉시 외투를 걸치며 물었다. ?종류와 수는 어느 정도입니까?? ?20개체 정도 되고, E급 ?알렉트로?와 ?알리오라?가 주를 이룬다더군. 전경대만으로 처리할 수 있겠지만 ?랙스? 급의 괴물이 나타날 수도 있으 니 일단 출동명령은 내렸네. 아, 지혁은 어찌할 텐가?? ?늦은 죗값은 몸으로 치러야겠죠.? 지혁이 몸을 풀며 일어나자 처크와 그렌은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듯 반가 운 표정을 지었다. 대한민국 1기 BSP멤버 중에선 최고의 격투능력을 자랑한 건 물론이고 현재 솜씨도 예전보다 못하지 않다는 평을 듣는 그였기에 둘의 반가움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뿐이었다. ?제가 뛰는 대신 리진은 오늘 좀 빼주시면 안될까요, 선배님? 리진이 요즘 너무 힘들어해서 말이죠.? 다시 딸을 둔 아버지가 되고 만 후배의 모습에 처크는 또다시 어이가 없다 는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아, 이건 방학숙제가 아냐! 하여튼 빨리 움직이세!? 술값을 급히 지불한 처크는 그렌, 하지혁과 함께 술집을 나섰다. ※※※ 2035년. 늦봄. 강변도로를 따라 한강 위를 떠다니는 애드벌룬의 전광판엔 어젯밤 잠실에서 벌어진 격전의 내용이 천천히 흘렀다. 사망자 세 명에 부상자 열두 명. 끔 찍했지만 바이오 버그 사건의 결과 치고는 나은 편이었다. 여담이지만 그 부상자 명단 속엔 전직 BSP이자 무역회사 사장인 하지혁의 이름도 있었다. 그러나 자기부상 차량을 이용해 강변도로를 달리는 시민들의 눈엔 그런 내 용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자기 집 문틈에 매일같이 끼워지는 광고전단지를 유심히 살펴보는 사람이 드문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그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소음 없이 매끈하게 움직이는 차량들 틈에서 육중한 소리를 지르고 있 는 2륜 오토바이였다. 자기부상차량이나 자기부상 오토바이가 보편화된 요즘도 바퀴를 이용해 움 직이는 차량은 존재했다. 화물트럭이나 레미콘, 승합차 같은 대형차량들은 아직도 합성고무와 튜브로 이뤄진 바퀴를 이용한다. 그러나 그것들 외엔 모든 차량들이 자기부상 시스템을 이용하기에 2륜 오토 바이가 신기한 볼거리가 되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주차위반 딱지도 안 붙였는데 왜 이리 쳐다봐? 미국사람 처음 보나?? 용감하게도 헬멧을 안 쓴 오토바이의 주인은 사람들의 시선이 불쾌한 듯 인 상을 구겼다. 청색의 가벼운 스포츠 재킷과 청바지를 입은 그 백인 청년은 강바람에 섞여 날렵하게 흩날리는 머리의 감촉이 좋은 듯 금세 표정을 풀고 악동의 미소를 지었다. 그가 탄 아메리칸 스타일의 육중한 오토바이는 주인의 성격대로 거침없이 도로를 밟았다. 고래 등처럼 크고 넓은 연료통의 옆엔 할리 데이비슨의 마크와 팻 보이(Fat Boy), 타이푼 블링거(Typhoon Blinger) 커스텀 버전이라는 문자가 운치 있 게 쓰여 있었다.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듀얼 샷건형 배기관은 특유의 배기음 으로 옛 오토바이 매니아들의 피를 들끓게 만들었다. 말만 구식이었지 그 오토바이의 가격은 어지간한 승용차 네 대를 사고 추가 로 오디오까지 최고급으로 뜯어고칠 수 있을 정도로 비쌌다. 팻 보이 자체 의 가격도 그랬지만 수공예 제품에 가까운 커스텀 버전이라면 가치는 더욱 높았다. 하지만 오토바이의 주인은 자신이 타고 있는 존재를 돈 덩어리라 생각지 않 는 듯 했다. 액셀을 돌리는 그의 손짓은 거칠면서도 섬세했다. ?저게 대한민국 BSP지부인가?? 시야에 푸른색 유리로 꾸며진 75층짜리 대형 빌딩이 들어오자 오토바이의 주인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 건물은 대한민국 BSP의 심장이자 아시아의 눈이었다. 지역 BSP의 총괄적 관리를 하는 것은 물론 대한민국 상공에 떠있는 극동아시아 전용 BSP종합위 성의 제어를 맡기에 그 건물의 중요성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 이상이었다. 언론기관에 공개된 BSP지부는 지하 주차장과 31층까지였다. 주차장 아래에 들어선 무기관리, 생산시설과 32층부터 꾸며진 BSP 종합오퍼레이팅 시스템 은 그 어떤 언론에도 공개되지 않은 비밀의 화원이었다. 공개를 위해 잠입을 한 기자가 몇 명 있었지만 아무리 해병대나 특전사 출 신의 기자라 해도 32층 이상 올라가는데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 사 들어왔다 하더라도 필름과 테이프, 그리고 당시의 기억을 잃은 채 쫓겨 나기가 일쑤였다. 기밀로만 똘똘 뭉쳐진 그 건물 앞엔 오토바이의 주인이 어느새 도착해 있었 다. 건들거리며 로비 안으로 들어선 청년은 자신과는 달리 제복을 정갈하게 입 은 여성안내원 앞에 섰다. ?안녕, 아가씨.? 웬 괴한이 카운터에 팔꿈치를 기대고 서자 안내원은 움찔하며 정체를 물었 다. ?무, 무슨 일이시죠?? 청년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오늘 부로 이곳에 발령된 BSP대원이죠. 이름은 지크 스나이퍼고, 고유번 호는 JISP052313이에요.? ?…….? 안내원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청년을 바라봤다. 아무 반응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 청년은 검은 눈썹을 살짝 일그러트렸다. ?문제 있어요?? ?아니요, 문제 있는 건 아니지만… 혹시 인간재해라 불리는 그 지크 스나 이퍼씨인가요?? ?헤헷, 감전된 얼간이라고도 가끔 불리죠. 아, 스펠링 불러드려요?? ?아닙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내원이 자판을 두드리는 사이 청년, 지크는 BSP건물의 로비를 천천히 둘 러봤다. 로비는 관광용으로 꾸며져 있었다. 고급 호텔을 연상시키는 분수와 깔끔한 인테리어의 식당 및 커피숍, BSP팜플렛 창구, 각종무기와 특수차량 전시관 등등 BSP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요소들이 다분했다. 일반시민 들이 가진 BSP의 궁금증, 특히 기밀사항에 대한 것을 누그러트리려는 시설 이었지만 나름대로 충실했다. ?여기 장사는 어때요?? 지크의 물음에 안내원은 아쉬운 미소를 지었다. ?캐릭터 상품을 팔지 않아서 그런지 백화점보다는 덜하네요.? ?그렇군요. 하긴, 할아버지는 장사엔 소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어머니께서 내내 말씀하셨죠.? ?할아버지요?? ?예. 수염 많이 나고 덩치도 큰 사람 있어요.? 안내원은 그가 과연 누구일까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앞에 있는 청년과 가족 이라 생각되는 내부 사람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처리완료라는 메시지가 모니터에 떠올랐다. 안내원은 즉석에서 발급된 임시카드를 지크에게 주며 말했다. ?자, 됐습니다. 이 카드를 엘리베이터의 단말기에 꽂고 73층을 누르신 후 지부장실로 가십시오.? ?73층 누르고 카드 꽂으면 안돼요?? ?후후, 기관총이 튀어나와 난사를 하진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비상 신호를 받은 듯 안내원은 귀에 낀 헤드 셋의 버튼을 재빨리 눌렀다. ?네, 로비입니다 지부장님. 예, 도착하셨습니다. 네? S-27구역에 C급 경보 라고요? 예, 아직 앞에 계십니다. 네? 그쪽으로요? 하지만 제가 가진 카드 로는 그분께 무기지급이 불가능합니다. 보호구 역시… 아, 스나이퍼씨!? 안내원의 애타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지크는 번개처럼 건물을 나섰다. 주차 된 오토바이에 몸을 날린 그는 항법장치를 켜고 안내원의 입에서 나온 S-27 구역을 찾기 시작했다. ?S-27, 구(舊) 삼성동이라… 오, 가까운 곳인데? 그럼 즉시 가주마!? 굉음과 함께 출발한 오토바이는 도로를 쏜살같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바이오 버그 경계령이 내려진 탓에 거리는 매우 한산했다. 사이렌 소리만이 멀리서 들릴 뿐, 깨끗이 비워진 거리에선 사람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 다. 그런 거리의 모습에 지크는 한탄만을 늘어놨다. ?젠장, 벌써 다 쓸고 지나간 거 아냐? 공식 데뷔전부터 허탕 치면 재미없 다구.? 그때 그의 시선이 앞으로 쏠렸다. 인간의 것을 초월한 그의 청각이 위험신 호를 보낸 것이다. ?…….? 오토바이를 멈춘 그는 묵묵히 주위를 돌아봤다. 그의 표정은 진지함 그 자 체였다. 안내원을 상대할 때의 장난기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이윽고, 날카로운 그의 시선이 도로 중앙 쪽에 고정됐다. 수십 미터 전방에 위치한 맨홀 뚜껑이 미약하게나마 들썩대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오호라, 거기냐?? 지크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순간 시커먼 물체가 그의 머리를 향해 날았다. 경이적인 순발력을 동원해 허리를 뒤로 젖힌 지크는 탄환이 된 맨홀뚜껑이 자신을 지나간 직후 그대로 몸을 말아 오토바이에서 내려왔다. 텅 소리가 그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맨홀뚜껑이 건물 벽에 처박힌 것이다. 벽을 절반 이상 파고 들어간 그 원반을 잠시 바라본 지크는 씨익 미소를 지 었다. ?헤헷, 날 그냥 보기가 미안했나보지? 하지만 철로 만든 피자는 입맛에 안 맞는다구. 8달러에 두 판을 주는 동네 피자라도 좋으니 다음엔 좀 정상적인 걸 주시지.? 뚜껑이 사라진 맨홀에선 포유류도, 파충류도, 곤충도 아닌 이형의 생물들이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건물 벽에도 그들과 같거나 비슷한 모습의 생물들이 어느새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보통의 BSP라면 분명 도망을 치거나 다급히 지원요청을 할만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지크는 달랐다. 그는 더욱 밝게 웃었다. ?호오, 미국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도 이 지크 스나이퍼님의 팬클럽이 있 었구먼? 동료들이 생각보다 많구나, 친구. 그렇다면 나도 보답을 해줘야겠 지?? 지크는 오토바이 옆에 준비된 긴 가방의 자크를 내렸다. 그 안엔 일본식으로 보이는 도검 한 자루가 우아한 자세로 자리 잡고 있었 다. 까만 색 칼집에 담긴 그 도검을 꺼내 허리에 찬 지크는 자신을 향해 조 심스레 접근하고 있는 그 생물들, 바이오 버그를 향해 도발적으로 손짓을 했다. ?오너라. 관중이 너희들 밖에 없긴 하지만 짜릿함만큼은 확실히 보장해 주 지.? 그렌 헤이그가 사용하는 순찰차는 다른 대원들의 것과 달리 바퀴가 달린 4 륜 구동의 육중한 BUV(Battle Utility Vehicle: 전투용 다목적 차량)다. 부피로 따지자면 보통 지프라고 불리는 4WD차량의 1.5배는 된다. 2미터 9센티, 247㎏에 달하는 그의 엄청난 기계식 육체가 그런 괴물 같은 차량의 가장 큰 지급이유지만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상황에 따라 장비를 바꾸는 그의 전투스타일이다. 그 증거로 BUV 트렁크엔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각종 무기와 탄약, 특수 장 비, 그리고 구급장비가 산처럼 쌓여있다. 그렇다고 장비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선배님. C급인데 우리 둘이서 괜찮을까요?? 그렌의 옆자리에 앉은 여성이 걱정스레 물었다. 기계이긴 하지만 보통 인간 의 것보다 따뜻해 보이는 그렌의 의안이 그녀에게 향했다. ?S-27구역만 바쁜 게 아니잖아. 어쩔 수 없지.? ?그래도요. 하다못해 챠오라도 같이 왔으면 좋잖아요.? 그녀의 얼굴에 짜증이 실렸다. 스무 살을 갓 넘겼거나 아직 안된 듯 약간 앳된 외모를 가진 그 여성BSP는 왠지 불길한 듯 출발할 때부터 대선배에게 짜증을 연발하고 있었다. 그렌은 웃었다. ?걱정하지 마. C급 정도는 나 혼자서 어찌어찌 처리할 수 있으니까. 그건 그렇고… 아버지는 괜찮으신가?? 아버지라는 단어가 나오자 그녀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일 나가지 말고 간호나 해달라고 말씀하셨어요. 물 론 가볍게 묵살했지만요. 하여튼, 우리 아빠만큼 엄살을 피우는 사람도 없 을 거예요.? ?엄살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사랑이 깊은 것이겠지. 지혁은 원래 그랬어. 리진이 태어난 날, 자신의 딸을 고아로 만들 수 없다며 기습사표를 내기도 했으니까. 후후, 딸의 입장에선 기분 나쁜 일이 아니잖아?? ?그래도 창피하잖아요.? 꿍한 얼굴을 차창으로 돌리는 그녀, 하리진은 현 대한민국 수도방위지부 BS P중 유일한 대한민국 국민이자 전설의 BSP인 하지혁의 장녀다. 올해 초, BSP사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수도방위지부에 배치된 그녀는 대한 민국에 BSP사관학교가 생긴 이래 두 번째로 좋은 성적을 내며 졸업한 전적 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점수는 필기시험 성적이 아니라 실전전투 성적이다. 사관학교에 입 학할 때부터 천재로 이름을 날린 만큼 현장에 대한 조기배치는 예견된 바였 다. 그러나 학교와 실전은 엄연히 격이 다른 법. 그녀는 임무를 마친 뒤엔 탈진 하기 일쑤였고 임무성공률 역시 굉장히 낮게 평가되었다. 한번은 커다란 실수를 저질러 동료 모두를 전멸의 위기에 빠트리기도 했다. 당시엔 미합중국 워싱턴DC지부에서 파견된 BSP요원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목 숨을 건졌지만 그로 인해 리진은 오랫동안 대인기피증을 겪게 된다. 지금은 많이 회복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오히려 안정감을 얻었다 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수도방위지부 BSP의 모두는 아직도 그녀를 섬세 하게 대한다. 그리고 당시의 사건을 리진 앞에서 꺼내놓지 않는다. 하지혁이 은퇴한 몸으로 리진을 대신하려 했던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다. 이윽고, 그렌의 순찰차가 전경부대가 만든 서쪽구역 안전선 밖에서 멈췄다. 여느 때처럼 잔뜩 긴장한 채 대기하고 있던 전경대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 며 안내신호를 보냈다. 차에서 내린 그렌의 앞에 대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전경대원이 달려왔다. 그 는 절도 있게 경례를 붙이며 현재상황을 설명했다. ?233전경부대의 대장인 박원일 대위입니다. 예상보다 빨리 오셨지만 때맞 춰 오신 건 아닙니다. 민간인의 대피는 완료되었으나 신분미상의 남자 한 명이 위험구역 안에 있습니다.? 그렌의 인상이 대번에 변했다. ?예? 민간인의 대피가 완료되었다면서 한 명이 남아있다는 건 무슨 말씀이 십니까? 게다가 신분미상이라니요?? ?그, 그게…….? 대위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리진이 재촉하듯 발끝으로 땅을 톡톡 두드리 자 그의 말이 이어졌다. ?처음엔 민간인인줄 알았지만 민간인 치고는 너무 강했습니다. 이곳, 그러 니까 위험구역 서쪽에 출몰한 바이오 버그 50여 개체 전부를 혼자 휩쓴 것 도 모자라 지금은 남쪽까지 정리하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니라면 BSP본부에서 보내주는 레이더 자료가 잘못된 것이 겠죠.? 그렌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리진을 멍하니 바라봤다. 리진 역시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 사람, BH(Bio bug Hunter: 상금을 목적으로 바이오 버그를 사냥하는 사람의 총칭)인가요?? 리진의 물음에 박 대위는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네. 우린 그가 파란 재킷을 입은 남자라는 사실 밖에 모르네.? ?파란 재킷?? 그렌은 혹시나 하며 턱을 매만졌다. ?설마, 지크인가? 하지만 내가 알기로 그 녀석은 오늘 저녁에나 올 텐데? ? 어쨌든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던 그렌은 즉시 장비를 챙긴 뒤 위험구역 안으로 들어갔다. 회전식 기관포의 검고 굵은 여섯 개의 총열이 그의 오른팔 위에서 번뜩였 다. 총과 등에 장비한 백팩(Back Pack: 장비와 탄약, 여분의 에너지를 보관 하는 금속제의 가방) 사이엔 탄띠가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나무에 걸린 뱀 처럼 길게 늘어진 탄띠는 그렌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백팩 아래엔 1.5미터 길이의 툼스톤(Tomb Stone) 바주카포가 단단하게 매달 려 있었다. 그것은 C급 이상의 대형 바이오 버그나 다수의 E급 바이오 버그 를 상대할 때는 필수적인 장비였다. 무기뿐만 아니라 그의 전신은 추가장갑으로 더욱 단단하게 다져져 있었다. 착탈식의 그 장갑판은 그렌의 모습을 하키경기의 골키퍼처럼 꾸며주었다. 그렇게 중무장한 그렌과 달리 그를 따라오는 리진의 장비는 매우 간단했다. BSP전용 권총인 블래스터와 오른 팔뚝에 장비한 사이킥 소드(Psychic Swor d), 그리고 두껍지 않은 방탄복이 전부였다. 겉으로는 부실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이킥 소드 하나만으로 그녀의 가치는 충분했다. 인간의 염동능력을 절삭능력이 강한 에너지로 바꿔 출력하는 이 무기는 특 별한 방어구가 아니면 막을 수 없는 절대적인 파괴력을 자랑한다. 사용자가 전 세계의 BSP 사이키커 중 최상위권에 속하는 리진이라면 위력을 의심하는 것은 헛일에 불과하다. 그렌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전진했다. 리진 역시 그를 따라 발걸음을 뗐다. 그렌의 시야는 디지털식이다. 특별한 장치 없이 모든 정보를 눈앞에서 받아 들이고 처리할 수 있다. 그가 받아들이는 정보리스트엔 BSP본부에서 송출해 주는 레이더 데이터도 들어있다. 20개가 조금 안되는 개의 노란색 점이 그의 레이더 범위 내에 차츰 들어왔 다. 점의 크기로 봐서 E급이 분명했다. 하지만 문제의 C급은 없었다. 그렌은 걱정과 안도를 동시에 하며 발을 멈췄 다. ?준비하지, 리진.? ?예, 선배님.? 항상 어둠으로부터 나오는 것들. 어느 순간부터 세상을 공포의 도가니 안에 밀어 넣은 존재. 만물의 영장을 먹고 마시며 자라는 새로운 강자. 그들, 바이오 버그가 거리로 스멀스멀 몰 려나왔다. 극점의 혹한과 사막의 폭염 속에서도 문제없는 강인한 육체. 세상에 존재하 는 그 어떤 야수보다 빠르고 험악한 팔과 다리. 투우의 머리뼈조차 한번에 씹어 삼키는 원시적인 턱. 그리고 기괴한 목소리. 그것들이 융화되어 벌이는 피의 전주곡은 아무리 급수가 높은 BSP라도 긴장 시킨다. 그렌과 리진은 각자의 무기를 들고 정신을 집중했다. 기관포의 총열이 돌고 사이킥 소드의 끝에 빛이 맺혔다. 고밀도 키틴질과 아스팔트 사이에 연속적인 굉음이 터졌다. 너덧 마리가 한 꺼번에 거리를 질주해오고 있었다. 그렌의 기관포가 불을 뿜었다.분당 6000발을 뿜어내는 그 위력 앞에 처음 돌격해왔던 바이오 버그들은 모조리 핏덩이가 되어 바닥을 적셨다. 남은 바이오 버그들이 뒤이어 돌격해 들어왔다. 대부분은 바닥을 기어왔고 몇몇은 벽을 탔다. 일부는 곤충처럼 가로등 사이를 뛰기까지 했다. 바이오 버그 특유의 입체적인 공격이었다. 아무리 그렌의 기관포가 위력이 좋아도 지금 같은 전면돌격엔 어찌할 수 없 었다. 그런 그렌의 약점을 보충해주는 존재가 바로 파트너인 리진이다. 그렌이 땅과 벽의 바이오 버그를 물리치는 동안 가로등을 타고 온 몇 마리 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들은 이빨과 손톱을 앞세워 그렌의 머리를 노렸다. 바이오 버그는 인간을 상대할 때 머리를 먼저 노리는 전통이 있다. 순간 황색의 빛이 바이오 버그 사이에서 번뜩였다. 두 마리의 바이오 버그 가 머리를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소득 없이 착지한 나머지 녀석들은 잔뜩 몸을 웅크린 채 그렌 주위로 흩어졌다. 뒤이어 리진이 체조선수처럼 우아하게 바닥을 밟았다. 그녀의 오른팔엔 80 센티 정도로 길게 뽑힌 사이킥 소드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크악! 바이오 버그 한 마리가 리진을 향해 뛰어올랐다. 그의 공격을 작은 동작으 로 피한 리진은 한쪽 다리를 올리며 몸을 돌렸다. 바이오 버그를 코앞에 둔 사람으로선 생각하기 힘든 대담한 동작이었다. 상대의 위치를 잃어버린 바이오 버그의 머리에 강한 일격이 떨어졌다. 리진 의 뒤축이 도끼처럼 내리꽂힌 것이다. 입에서 분수처럼 피를 뿜은 바이오 버그는 이내 자리에 누웠다. 즉사였다. 보기엔 빈약해보여도 리진의 반월축(半月蹴)이 가진 파워는 2톤이 넘는다. 또 다른 바이오 버그가 몸을 날렸다. 리진 역시 이를 악물고 그에 대적했 다. ?오려면 한꺼번에 오던가!? 한 점을 향해 떠오른 두 생물의 모습은 일갈과 함께 충돌했다. 바이오 버그 의 복부에 팔꿈치를 꽂은 리진은 타고 오는 반동을 이용해 그대로 몸을 돌 렸다. 살기를 띈 황색의 나선이 바이오 버그의 육체를 휘감았다. 그 빛에 휘말린 바이오 버그는 네 조각으로 나뉘어 바닥에 떨어졌다. 다른 바이오 버그들이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춤추는 플라밍고 처럼 화려한 그녀의 발기술 앞에 E급 바이오 버그들은 너무도 무력했다. 아 버지에게 배운 리진의 태권도, 용살문의 위력은 유구의 세월동안 비밀로 전 승되어온 만큼 강렬했다. 그 무렵 그렌은 지상과 건물 벽을 이용해 달려들던 바이오 버그의 대부분을 처리해 놨다. 왼팔 장갑판에 바이오 버그 한 마리가 이빨을 박았다. 자칫 잘못하면 머리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렌은 그것을 무시하고 기 관포의 트리거를 놓지 않았다. 괜히 멈춰서 여러 마리에게 당하는 것보다 한 마리에게 당하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다행스럽게도 바이오 버그는 장갑판만 물어뜯을 뿐,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대충 상황을 끝낸 그렌은 오른손으로 바이오 버그의 목을 잡아 내 동댕이친 뒤 발로 머리를 짓이겼다. 사지를 쭉 뻗은 바이오 버그는 몇 번을 부르르 떨다 이내 조용해졌다. 레이더에 더 이상의 반응이 잡히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렌은 한숨을 내쉬었 다. ?휴우, 아찔하군. 리진은 괜찮나?? 리진은 얼굴에 붙은 바이오 버그의 체액을 닦으며 대답했다. ?지저분해진 것 빼고는 괜찮아요. 선배님은 어떠세요?? 그렌은 왼팔을 들어보였다. 바이오 버그에게 뜯긴 추가장갑판이 심하게 손 상되어 있었다. ?여기가 좀 상했어. 거머리처럼 붙더니 결국엔 씹어대더군. 물론 머리가 씹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겠지만.? ?에이, 무서운 말씀은 하지 마세요. 그런데 오늘은 애들이 의외로 적네요? 스무 마리가 좀 안되는 것처럼 보이던데…….? ?그렇긴 해. 평상시 같으면 서른 마리는 기본인데… 음?? 그렌의 거대한 몸집이 꿈틀했다. ?왜 그러세요, 선배님?? 그렌은 대답대신 손을 뻗어 리진의 입을 멈추게 했다. 레이더의 끝부분에 커다란 황색 점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이다. 자신이 가 진 레이더의 범위가 200미터 정도인 것을 감안할 때 C급 이상의 대형 바이 오 버그가 그 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나간 게 확실했다. ?녀석이 슬슬 이쪽으로 오는 것 같군. 준비하지.? 그렌은 백팩 아래에 준비된 바주카를 들어 왼쪽 어깨에 장비했다. 리진은 사이코 소드의 스위치를 사격 쪽으로 돌려놨다. 준비를 마친 둘은 C급의 반응이 있던 곳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C급의 대부분은 몸길이 13미터, 어깨높이 6미터 이상의 대형 종이 대부분이 다. 공룡이 살던 시대에서나 나올 법한 이 대형 바이오 버그들은 폐쇄된 구 세대 지하철역과 통로를 이용해서 서울의 거리를 이동한다. 그러나 BSP치고 대형 C급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느리 고 우둔하며 힘만 센 C급은 처리하기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극소수인 소형 C급이었다. 인간보다 약간 큰 몸집이면서 도 무서울 정도의 지능과 힘, 기동력을 갖춘 이들 소형 C급들은 어지간한 상위랭크 BSP가 아니면 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하다. 전경부대 한두 개 로는 어림도 없다. 고층빌딩을 끼고 교차로를 돈 두 명의 BSP는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S-27구역.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의 부와 젊음을 상징하는 몇 개의 구역 중 대표적인 지역. 그 지역이 잔혹한 지옥으로 변해있었다. 파란 하늘을 완벽에 가깝게 반사하고 있던 건물의 유리벽은 엉망으로 짓이 겨진 바이오 버그들이 그득그득 달라붙어 있었다. 맵시 있게 생긴 스포츠카 들이 시원스레 달리던 거리도 환경미화원이 걱정될 정도로 엉망이었다. 처 형된 마녀처럼 가로등마다 내걸린 바이오 버그의 시체도 압권이었다. ?세상에.? 리진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렌도 기관포 끝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경악했다. 죽은 바이오 버그의 수는 적어도 100, 200마리 정도는 돼 보였다. 이 정도 의 숫자가 경보가 발령된 지 20분 만에 휩쓸린 것은 그야말로 사건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자기들끼리 싸우다 이렇게 된 건가?? 헤이그의 말도 안 되는 물음에 리진은 정신없이 대답했다. ?그런 것 같진 않아요. 하지만 BSP중에서도 이런 전투능력을 가진 사람은 단 한사람 밖에 없는데?? 리진은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설마 그가 돌아온 건가?? 아쉽게도 시간은 그녀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정면 50여 미터 앞에 위치한 건물의 외벽이 굉음을 내며 터져나간 것이다. 쏟아지는 유리와 콘크리트, 철근 사이로 생물의 거대한 머리가 모습을 드러 냈다. 이번 사건의 주인공인 대형C급이었다. 보통보다는 약간 큰 녀석 같았다. 머리의 크기로 봐서 어깨높이가 적어도 9 미터 이상은 되는 괴물이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건물 속을 파고들어간 것만 봐도 다른 것들처럼 우둔하진 않아보였다. ―쿠오오오! 괴성, 상어를 연상시키는 이빨과 비공, 그리고 두꺼운 비늘은 위압감을 주 기 충분했다. 그 갑작스런 압력에 맞서 그렌과 리진은 그 괴물의 머리를 노 렸다. 장애물 없이 일직선상에 놓인 지금이라면 처리하기에 딱 좋았다. 그때, 푸른색의 섬광이 BSP와 바이오 버그 사이에서 솟구쳤다. ?거기 숨으면 못 찾을 줄 알아!? 순간 푸른색의 거대한 반월이 바이오 버그의 머리 뒤에서 승천했다. 괴성을 지르던 괴물의 흉측한 머리는 이윽고 깨끗이 잘려 지상으로 떨어졌다. 연녹색의 체액이 단면에서 뿜어졌다. 몸집만큼이나 뿜어지는 압력도 강해서 그렌과 리진의 발은 금방 젖어들었다. 냄새나고 기분 나빴지만 둘은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전의 광경은 그만큼 충격을 안겨주고 있었다. 괴수와도 같은 바이오 버그의 머리를 단칼에 떨군 그 청년은 손에 든 도검 을 한바퀴 빙글 돌려 칼집에 넣었다. 그리고는 영화배우처럼 잔뜩 폼을 잡 은 채 그렌과 리진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누구에게서 태어났는지, 어디를 가는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속박 도, 지배도 당하지 않는다. 자유보다 더욱 자유로운 존재,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바람이라 한다.? 이윽고 청년의 얼굴에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가 흘렀다. ?바람은 곧 나, 나는 곧 바람! BSP의 아이콘, 세계의 구세주! 지금 이 자 리에 등장! 으하하하! 이거 만드는 데 두 달이나 고생했다구! 만든 보람이 있어! 내가 만들었지만 너무 멋있는 등장인 것 같아!? 주먹을 불끈 쥔 청년은 어린아이처럼 큰 웃음을 터트렸다. 반면 그렌과 리진의 표정은 돌처럼 굳어졌다. 특히 그렌은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변한 게 하나도 없군.? ?누구죠, 저 인간은.? 리진의 힘없는 물음을 들은 그렌은 대답을 위해 입을 떼었다. 그러나 청년이 한발 빨랐다. 그는 리진의 눈앞에 얼굴을 불쑥 들이밀며 대 답했다. ?누구냐고 물으시면 대답을 해드리는 게 인지상정! 본좌의 이름은 지크 스 나이퍼! 세계에서 가장 날랜 남자입니다! 크하하!? 당황한 리진의 얼굴에 곧 이상한 미소가 흘렀다. ?이 사람이 오늘 온다는 추가대원이라면 난 그만두겠어. 동생이랑 집에서 십자수나 뜰 거야.? BSP 수도방위지부 본부의 지상 출입금지 구역인 오버 서티원(Over Thirty O ne), 즉 32층부터는 극비이면서도 극비 같지 않은 BSP의 본업이 이뤄진다. 존재와 하는 일이 극비라고는 해도 사건이 없는 시간의 분위기는 보통의 회 사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서브 오퍼레이터들과 그 밖의 직원 대부분은 업무 외의 시간을 게임과 대화로 보내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70층부터 73층까지를 차지한 주관제실은 언제나 긴장감이 흘렀다. 메인 오퍼레이터들은 식사 같지 않은 영양혼합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 다. 게다가 일에 대한 부담과 피로는 2주일에 한명 꼴로 그들에게 병원신세 를 지도록 만들었다. 몇 분 전, S-27구역과 G-12구역의 비상해제를 선포한 메인 오퍼레이터들의 대부분은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소수는 계기판 위에 쓰러져 피로를 풀었 다. 오늘의 결과는 매우 좋은 편이었다. BG(바이오 버그의 약자)의 난동과 동시 에 운 없이 당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대피와 처리 모두 예상 이상으로 깔끔 했다. 특히 크게 확대될 거라 생각됐던 S-27구역의 일이 G-12구역 쪽보다 빨리 정 리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것 때문에 S-27구역을 맡은 메인 오퍼레이터 들은 사건처리에 참여한 그렌과 리진, 두 대원에 대한 얘기로 정신이 없었 다. 동료들이 기적이니 어쩌니 하며 떠들거나 기판 위에 쓰러져있는 동안 주관 제실과 수도방위지부의 통합관리장치인 베스(VUIS:Virtual User Interface System)에 앉은 ― 앉았다기 보다는 들어가 있는 ― 한 여성은 오늘의 사건 에 대한 정리와 분석으로 분주했다. 인스턴트커피로 휴식을 하던 남자 직원들은 그녀의 그런 모습에 고개를 내 저었다 ?치프(Chief)는 여전하군. 오늘처럼 일이 좋게 끝난 적도 드문데 저렇게 열심히 일하시다니, 졌어 정말.? ?오늘은 특히 열심인 것 같은데? 결과가 너무 좋아서 그런가?? 그때 베스의 대형 디스플레이가 위로 젖혀졌다.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둥근 테의 안경을 벗고 분홍색 손수건으로 얼굴의 땀 을 닦았다. 손수건 사이로 간간히 보이는 얼굴은 꽤 단아해 보였다. 제복과 안경, 그리고 미소녀의 조합을 이상한 쪽으로 좋아하는 사람에겐 이상형에 가까운 외모였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렌 헤이그 소령과 하리진 소위 말고 다른 존재는 발견하지 못했나 보군 요.? ?예? 하지만 화면에 잡힌 존재는 그분들뿐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나머지 요원들은 전부 G-12구역에 있었는데…….? ?그 두 사람의 전투능력을 아직도 파악하지 못했습니까?? 안경을 다시 쓴 그녀는 베스의 뒤쪽에 붙은 메모리 칩을 뽑으며 말을 계속 했다. ?오늘 S-27구역이 출현한 BG는 C급이 한 개체, E급이 200여 개체가 넘었습 니다. 다른 날이었다면 그렌 소령과 리진 소위는 시체조차 찾지 못하게 됐 을 지도 모를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오퍼레이터들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걸 알기에 기적이라며 떠들어댔던 그 들이었다. ?그럼 오늘의 전적은 어떻게 된 겁니까? BH라도 개입한 겁니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정식승인절차를 아직 밟지 않은 추가요원이 두 요원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실제로는 그가 대부분의 BG를 처리했다고 보셔도 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자리에 있던 여성 오퍼레이터가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기겁했다. S-27구 역의 레이더 기록을 살피던 그녀는 혼자 보기에 아까웠는지 메인화면으로 자신이 본 것을 옮겼다. 정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200여 개체에 가까운 BG의 포인트들이 등화관제가 걸린 도시의 불빛들처럼 삽시간에 사라졌다. 그렌, 리진이 도착함과 거의 같은 시각에 벌어진 일이 어서 대부분의 메인 오퍼레이터들이 그 상황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세상에, 저게 누굽니까? 설마 워싱턴DC 지부의 레오나르도 칼킨이 이쪽으 로 돌아온 겁니까?? ?레오나르도 칼킨이라면 IFF(아군과 적군을 자동으로 식별하는 장치)가 응 답했을 것입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 추가요원은 정식승인을 받지 않았습 니다.? 오퍼레이터들은 심하게 웅성댔다. 이 정도의 가공할만한 전투능력을 지닌 존재가 또 있다는 사실에 그들은 두려움까지 느끼고 있었다. ?대체 누굽니까, 치프? 그 레오나르도 칼킨과 맞먹을 정도의 능력을 지닌 BSP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그녀, 치프 오퍼레이터의 얼굴이 조금 안 좋게 변했다. 귀찮음과 싫 음이 역력히 드러난 얼굴이었기에 사람들은 또 한번 놀랐다. 그녀의 매력 포인트가 포커페이스임을 안다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혹시 인간재해라는 별명의 남자를 아는 사람, 있습니까?? 그녀의 질문에 소수의 오퍼레이터들이 반응했다. 대표로 얼굴에 비해 커다 란 뿔테안경을 쓴 소녀가 손을 들고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알아요, 루이 치프! 몸값 100만 달러의 소녀를 구하기 위해 300만 달 러의 건물을 폭파시킨 남자 말이죠?? ?그건 실베스터 스텔론의 영화에서 나오는 얘기야, 류페이.? 옆에 앉은 여자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치프 오퍼레이터는 고개를 끄 덕였다. ?류페이의 말은 사실입니다. 그 남자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파괴사건을 직접 저지른 전적이 무려 열다섯 건이나 있습니다. 참고로 그 남자의 이름 은 지크 스나이퍼입니다.? 순간 주관제실은 찬물을 맞은 듯 조용해졌다. ?거짓말.? 한 남자직원이 나직이 중얼대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다른 사람들도 거의 비슷한 반응이었다. ?이건 재앙이야.? ?지부장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독을 제거하기 위해 독을 쓴다는 건가? 아아, 이럴 수가.? ?사직서를 내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그런 반응을 예상했던 치프 오퍼레이터, 루이 켄트는 사건기록이 담긴 메모 리 칩과 노트북을 들고 주관제실의 출입구로 향했다. ?오후 브리핑이 끝난 뒤 돌아오겠습니다. 여러분의 심정은 저도 잘 이해하 고 있지만 수도시민의 안전이 더 중요하니 마음을 정리하고 일에 전념하여 주십시오.? ?예.? 경례를 붙이긴 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루이는 부하 직원들의 소리 없는 원성을 뒤로 한 채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의 2중문이 열리자마자 보인 것은 의자 뒤로 고개를 젖히고 앉아있는 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회의실 탁자에 다리를 떡하니 올려놓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그는 루이가 들어온 것을 보고 활짝 웃었다. ?이야아, 루이 이모님 아니신가! 출세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진짜네?? ?…….? 루이는 별다른 대답이 없었으나 청년은 무엇이 그리도 반가운지 억지로 포 옹까지 하며 재회를 기뻐했다. ?너무 기뻐서 말이 안 나오나보네. 하하, 어떻게 지냈어? 만져보니 살 좀 찐 것 같네? 그러기에 너무 앉아만 있으면 몸에 좋지 않다고 했잖아. 먹는 것도 불규칙 한가? 그러니 햄 샌드위치는 좀 자제하라구. 좋아하는 건 알지 만…….? ?본부 내에선 호칭을 쓰시죠, 스나이퍼 씨.? 청년의 말을 당차게 끊은 루이는 그의 팔을 떠나 자기자리에 앉았다. 머쓱 해진 청년, 지크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후후, 변한 게 없구나. 하이스쿨 때도 넌 그랬지.? 루이는 여전히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의자에 앉은 지크는 루이가 들어오기 전의 자세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한테 얼핏 들었는데, 너 재수 없는 케이스로 이곳에 들어온 거라 며? 덕분에 처크 할아버지도 옷 벗을 뻔 했고…….? ?그만해.? 안경 안에 비친 루이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그녀의 사정을 아는 지크는 금 방 손을 저었다. ?오오, 알았어. 걱정 되서 그런 거니까 화내지 마. 하여튼 오늘부터 같이 일하게 됐으니 마음 푹 놔라. 할머니하고의 약속은 잊지 않았으니까 말이 야.? ?…….? 노트북을 펴던 루이의 손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그렌 소령님과 리진 소위는?? ?얘기할 게 있다며 나만 남겨두고 나갔어.? 지크의 얼굴에 불만이 어렸다. ?그렌 아저씨는 그렇다 쳐도 리진? 그 시끄러운 애는 뭐야? 아무리 봐도 열아홉 밖에 안 된 것 같은데 왜 그리 난리를 쳐? 돌아오는 길에서도 모자 라 엘리베이터 안에서까지 투덜대더라구. 그 애, 정말 정식 요원 맞아?? ?그런 질문은 리진이 나에게 할 줄 알았는데?? ?오옷, 그럼 내가 열아홉으로 밖에 안보인단 말이야? 그거 좋군!? 엄청난 얼버무림이었다. 말로선 그를 당하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아는 루이는 아무 것도 없는 천장을 흘끔 본 뒤 일에 몰두했다. 잠시 후 회의실 문을 열고 그렌과 리진이 들어왔다. 지크가 있는 것을 본 리진은 행동까지 섞어서 굉장한 거부감을 나타났다. ?윽! 당신 집에 안 갔어?? ?집 살 돈부터 주시지. 내 주머니엔 여권과 신분증, 그리고 코 묻은 돈 밖 에 안 들었어. 그리고 난 새로 온 동료라니까. 왜 날 못 보내서 안달이야? ? ?그, 그러니까…….? 리진이 빈틈을 보이자 지크는 기다렸다는 듯 특유의 연속공격을 날렸다. ?나한테 냄새라도 나? 내가 범죄인인가? 언더테이커(대표적인 악역 프로레 슬러-필자 주)야? 그러면 수갑 채우고 감방에 보내시지. 아아, 난 냄새나는 나쁜 사람인가 봐. 어쩌지? 그렌 아저씨, 저를 구해주세요.? 지크는 양손을 모아 그렌에게 내미는 둥 행동까지 곁들여 협박에 가까운 생 트집을 잡았다. 생각지도 못한 상대의 말발에 리진은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 알았으니 그만해요. 농담도 못하게 만드네.? 승리를 거둔 지크는 모두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그렌은 너무도 변함없는 그의 모습에 같이 웃고 말았다. 그는 지크 옆에 앉으며 물었다. ?마지막 훈련장이 어디였지, 지크? 꽤 여러 나라를 다녔다고 들었는데.? ?멕시코 지부에서 쫓겨난 다음에 일본으로 갔죠. 거기서 별의 별 사람을 다 만났어요. 괜히 제 칼을 보여 달라고 했다가 허리 다친 사범님도 여럿이 었고, 손에서 불을 낼 줄 안다고 까불다가 저에게 터진 녀석도 둘인가 있고 … 뭐, 그랬죠.? ?인적 손해나 물적 손해는?? ?에이, 제 나이가 몇인데요. 그런 일은 거의 없었어요. 그쪽 BSP는 저만 나타나면 이상할 정도로 집중력이 좋아지더라고요.? ?으음.? 그렌은 진지한 얼굴로 생각했다. ?역시 그랬군. 어쩐지 일본 지부의 후배가 저 녀석의 대한민국 정식발령사 실을 듣고 이상하게 좋아한다 했지.? 그의 속을 알 리가 없는 지크는 명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처크 할아버지 말로는 이제 대한민국 사람 다 됐다고 하시던데요?? ?후후, 여기에서 일한지가 벌써 몇 년인데? 그렇게 안되는 게 이상하겠지. 그리고 요즘 세상에 국경을 나누는 것만큼 웃기는 일이 어디 있어?? ?하긴, 그러네요.? 둘은 허물없이 웃으며 서로를 토닥였다. 행동과 표정을 보니 평소에도 잘 알고 지내는 동네 아저씨와 청년 같았다. ?두 분, 언제부터 알고 지내신 거죠?? 리진의 물음에 그렌은 머뭇거림 없이 대답해 주었다. ?4년 전인가? 하이스쿨(현재의 고등학교)을 졸업한지 일주일도 안 된 지크 를 미해군 특전단 네이비 씰로 데려가 특별훈련을 시킨 사람이 바로 나야. 당시 지크는 화약무기를 다루는 데엔 부족한 면이 많았거든. 우리의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됐지.? ?네이비 씰이요? BSP라면 BSP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는 게 정상 아닌가요? ? 사관학교 출신인 리진이 의문을 제기했다. ?원래는 그렇지.? 합성수지로 덮인 그렌의 손이 지크의 어깨에 올려졌다. ?하지만 지크의 육체적인 강함은 열아홉 살인 당시에도 BSP의 톱클래스였 어. 괜히 사관학교에 보내서 다른 학생들의 사기를 꺾어놓을 필요는 없다는 켄트 지부장님의 생각에 따라 네이비 씰로 가게 된 거야. 지크는 거기서 총 기에 대한 훈련만을 받았지. 육체적 훈련은 거의 받지 않았어.? ?그랬군요.? 리진은 의외라는 듯 지크를 바라봤다. ?그렇다면 지크씨, 무술훈련은 어디서 받았나요? 동작이랑 체형을 보니 하 나 이상의 무술을 익힌 것 같은데요?? ?당연하죠!? 지크는 V자 형으로 손가락을 펼쳤다. ?지난 4년간 무술이 있는 곳이라면 세계 어디든지 다녔답니다! 아시아, 아 메리카, 아프리카, 유럽 등을 여행하며 실전에 가장 쓸모가 있는 무술만을 배웠죠. 중국은 무술의 역사가 가장 긴만큼 오랫동안 머물었는데, 그 나라 의 여러 권법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역시 ?삼황오제권(三皇五帝拳) ?이었죠. 오랫동안 비밀리에 전승된 무술인 만큼 강력하고 실용적이었어 요.? ?삼황오제권?? 리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챠오가 사용하는 권법인데? 혹시 린 챠오라는 여자를 아세요?? ?린 챠오? 알고는 있는데, 왜요?? 때마침 회의실 문을 열고 한 여성이 들어왔다. 여자 치고는 상당히 큰 키에 어깨도 꽤 넓었다. 근육으로 단단히 다져진 목 뒤로 흑갈색의 긴 포니테일이 흔들렸다. 화장기가 없는 얼굴이었지만 이목 구비가 워낙 뚜렷한 덕분에 굳이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군청색의 BSP제복 코트로 몸을 단단하게 감싼 그녀는 예상치 못한 신입대원 의 모습에 발걸음을 멈췄다. 회의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둘 사이의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자료정리에 열중하던 루이마저 둘이 있는 쪽을 바라볼 정도였다. 잠시 동안 시선만을 주고받던 지크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우와, 챠오 아니야? 이게 무슨 인연이야 그래? 하하핫! 와, 정말 반갑다! ? 그는 팔을 활짝 벌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서양식의 인사를 할 셈인 듯 했 다. 순간 코트 주머니 밖으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워낙 빨라서 루이는 아예 보지도 못했다. 탁 하는 소리가 둘 사이에서 울렸다. 정신을 차린 그렌과 리진, 루이는 갑 자기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미간을 노리고 들어온 그녀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막아낸 지크는 아 까 전과 조금 다른 미소를 지었다. ?강권을 익혔구나? 아빠가 허락해 주시든?? ?…….? 그녀, 린 챠오는 묵묵부답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짙은 갈색 눈동자 속에선 강한 증오가 불타고 있었다. 그때 한 남자가 챠오 뒤로 머리를 내밀었다. ?지부장님은 아직 안 오셨나? 이번에도 늦으면 큰일 날 줄 알라고 하셨는 데… 응?? 베이지색 코트를 헐렁하게 입은 그 남자는 예상치 못한 그 상황을 보고 눈 을 휘둥그레 떴다. ?어이어이, 갑자기 웬 싸움이야? 진정하라고, 챠오. 근데, 댁은 누구요?? 턱과 코에 옅은 수염을 기른 그 남자는 인상을 쓴 채 지크를 위아래로 바라 봤다. 그러나 챠오만큼의 악의는 없어보였다. 지크는 곧장 표정을 바꿔 그 남자와 반 강제로 악수를 나눴다. ?오늘 도착한 추가대원인 지크 스나이퍼입니다! 하하, 잘 부탁드립니다!? ?응? 당신이 추가대원? 하하, 그랬군. 반갑소, 미들슈터 포지션의 케빈 브 라이언이라고 하오. 본명은 케빈 크리스챤 브라이언, 이탈리아인이오.? 그는 왼손을 뻗어 악수한 위를 감쌌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지크역시 다른 손으로 그 위를 감쌌다. 리진은 빨리도 친해지는 사람들이구나 생각했지만 그렌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둘 다 어쩔 수 없는 킬러군.?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케빈은 챠오의 주먹을 받고 있는 지크를 보자마 자 왼손에 총을 들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그 모습이 챠오와 케빈의 코트로 철저히 가려져 있었던 탓에 다른 사람은 볼 수 없었으나 지 크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즉시 상대방과 강제로 악수를 나눴다. 여차하면 팔을 당겨 중심을 잃게 할 속셈이었다. 지크가 소개를 빨리 한 탓에 오해는 풀렸지만 하마터면 챠오의 건보다 더 큰 사고가 날 뻔한 순간이었다. 둘 사이에 있던 챠오는 별말 없이 등을 돌렸다. ?어디가, 챠오?? 리진이 물었다. ?집.? ?집?? ?집.? 리진은 황당한 얼굴로 자리를 떠나 그녀의 팔을 잡았다. ?좀 있으면 오후 브리핑이란 말이야. 그리고 갈 땐 가더라도 지부장님은 뵈어야지!? ?조퇴로 해줘.? ?학교가 아니라는 거 알면서 왜 그래? 그리고 아픈 데도 없잖아?? ?나쁜 걸 봐버렸어.? ?나쁜 거?? 리진의 시선이 지크 쪽으로 슬며시 움직였다. 지크는 능청스레 웃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결국 모두들의 설득 끝에 챠오는 자리에 앉았으나 둘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는 끝없이 지속됐다. 잠시 후 처크 켄트가 회의실에 들어왔다. ?다 모였나?? ?예, 지부장님.? 루이를 시작으로 지크를 제외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를 올렸다. 이 런 것에 대해 전혀 듣지 못했던 그는 황급히 일어나려 했으나 처크는 손으 로 그를 제지했다. ?아아, 괜찮아. 아직 정식요원이 아니니까 넘어가자고.? 상석에 앉은 처크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은 뒤 얼굴을 감쌌다. 왠지 조 금 피곤한 기색이 보였다. 그는 잠시 후 눈을 뜨고 모두를 바라봤다. ?내가 오기 전에 서로 대충 소개는 했겠지만 일단 저 친구를 정식으로 소 개하겠다.? 그는 손을 지크 쪽으로 향했다. ?지크 스나이퍼, 올해 23세. 미합중국 출신이다. 하이스쿨 1학년 시절, D 급의 BG 다섯 개체를 맨손으로 눕힌 것으로 유명해졌고 이곳으로 오기 전에 받은 테스트에서 사이킥 테스트를 제외한 모든 테스트를 S랭크로 클리어한 대단한 전적도 가지고 있다. 4년간의 특별 교육투어를 하며 다른 나라 BSP 지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는데, 덕분에 인간재해, 액시던트 머신(Ac cident Machine), 손해의 남자, 감전된 얼간이 등등 화려한 별명으로 BSP에 비공식 데뷔를 한 상태다. 참고로 지크가 지난 2년간 BSP에 끼친 손해는 무 려 5억 달러에 이른다. 그러나 표면적인 가격이며 희생물로 따지자면 값을 말할 수 없다. 런던 브릿지, 천총운검, 잉카 황금가면 등이 대표적인 희생 물이며, 특히 황금가면에 경우 그걸 쓰고 할로윈 축제에 나갔다가 두 쪽을 내기도 했다.? 그 시점에서 그렌과 케빈은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이마를 감싸는 등 웃음을 참느라 온 힘을 다했다. 챠오와 루이는 여전히 석고상 같았고 리진은 어이 가 없는 듯 입을 조금 벌린 채 옆자리의 지크를 쳐다봤다. 처크는 헛기침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우리의 구역인 매트로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BG들이 나오기로 유 명하다. 덕분에 이 회의실의 테이블에 놓였던 백합의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지크 스나이퍼는 여러분들과 함께 이런 매트로 서울에 가장 어울리는 남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해주길 바라며, 지금 이 시간 부로 대한민국 수도방위 지부의 정식 요원이 된 지크 스나이퍼 소 위를 따뜻이 환영해주도록.? 챠오를 제외한 대원들은 박수를 치며 지크를 환영해 주었다. 물론 따뜻함이 담기거나 하진 않았다. 처크에게서 쏟아져 나온 지크의 전적이나 그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신입대원으로서 성대히 환영받은 사람치고 1개 월을 버틴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반면 그저 그런 환영식을 하거나 발령 당일 초비상이 걸린 탓에 환영식은커녕 전투부터 하게 된 챠오와 리진, 케빈은 몇 개월 이상을 버텨왔다. 일종의 징크스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미신을 잘 믿지 않는 처크 지부 장마저도 지금의 징크스는 상당히 믿는 쪽이었다. 그래서인지 처크는 대원 들의 불성실한 박수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크 역시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그럼 오늘부터 생사고락을 같이 할 동료들을 소개를 하겠다.? 처크는 가장 먼저 그렌에게 손을 뻗었다. ?그렌 헤이그. 너와는 구면일 것이다. BSP 1기 멤버이자 최초의 사이보그 BSP대원이기도 하다. 계급은 소령이며 포지션은 디펜더다.? ?잘해보자, 지크.? 그렌은 씩 웃으며 엄지를 내밀었다. 지크 역시 비슷한 포즈로 답해주었다. 다음은 케빈이었다. ?케빈 브라이언. 전 세계의 BSP중에서 가장 강력한 사격능력을 자랑하는 남자다. 원래는 유럽과 북미지역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클리너(Cleaner:살인 청부업자)였으나 나와 인연이 닿아 작년에 BSP로 들어왔다. 계급은 중위이 며 포지션은 미들슈터다.? 케빈은 옆자리에 앉은 새 동료를 향해 찡긋 윙크를 했다. ?죽지 말라구, 인간재해씨.? ?당신이야말로, 케빈씨.? 둘은 아까와는 달리 정식으로 악수를 나눴다. 이어서 루이 켄트의 소개가 이어졌다. ?루이 켄트. 대한민국 수도방위지부의 치프 오퍼레이터다. 사적으로는 지 크, 너와 친척이지만 공적인 상황에선 치프 오퍼레이터의 대우를 확실히 해 주길 바란다.? 루이는 말 대신 눈을 돌려 지크를 돌아봤다. 지크는 그에 맞춰 혀를 내밀고 눈 밑을 잡아당겼다. 루이의 목 위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얼굴부터 목까지 심한 발화가 생기는 특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어흠, 그럼 다음 사람을 소개하겠다.? 헛기침으로 현재 상황을 무마한 처크는 챠오 쪽으로 손을 뻗었다. ?린 챠오. 육탄전 능력만으로 따졌을 때 전 BSP의 2, 3위를 다투는 인물이 다. 역시 구면이겠지만 옛날과는 상황이 다를 테니 첫 대면이라 생각하고 예의를 지켜주길 바란다. 계급은 소위이며 포지션은 파이터다.? ?…….? 지크와 챠오는 인사는커녕 다른 곳에 시선을 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둘 사 이의 일을 대강 알고 있는 처크는 지체 없이 마지막 대원을 소개했다. ?그리고 하리진. 수도방위 지부의 유일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발령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실전경험이 조금 부족하지만 능력 면으로는 최고 클래스 다. 수도방위 지부에서 1개월 이상 무사히 근무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실력을 입증할 수 있다. 계급은 소위이며 포지션은 사이킥커다.? ?잘 부탁합니다.? 리진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의 검고 긴 생머리가 무릎 아래로 쏟아 졌다. 지크 역시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이쪽이야말로.? 소개를 마친 처크는 한숨을 쉬었다. 그로선 고개 하나를 넘은 순간이었다. 그는 이야기의 배턴을 루이에게 넘겼다. ?자, 루이. 우리 BSP가 하는 일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해 주게.? ?알겠습니다, 지부장님.? 루이의 길고 가는 손가락이 노트북의 키보드 위를 달렸다. 그에 맞춰 회의 실을 둘러싼 다중 스크린과 처크 뒤에 위치한 메인 스크린에 영상이 각각 떠올랐다. ?BSP의 주된 일은 BG, 즉 바이오 버그라 불리는 수수께끼의 생물집단을 처 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외에도 일반 경찰력으로는 처리할 수 없다 판 단되는 사건이 생기면 수도경찰과의 협의 후에 일을 맡게 됩니다. 그 예로 서 각종 바이오해저드(Bio Hazard:생물학적 위험물질, 상황의 총칭)로 인한 부산물의 처리와…….? 좋지 않은 퀄리티의 현장사진들이 메인 스크린에 차례로 떠올랐다. 사진의 대부분은 시체와 건물잔해를 배경으로 한 흉측한 모습의 사이보그들이 차지 하고 있었다. ?이들, 일명 워 피겨(War Figure)라 불리는 사이보그 테러리스트 집단의 처리도 BSP에서 대부분을 맡습니다. 전직 군 사이보그들인 이 워 피겨들은 어떤 면에선 BG보다 더욱 파괴적이고 잔인한 존재들입니다. 프로급의 전투, 전술능력과 커스터마이징된 강력한 장비, 그리고 해커그룹과의 연합에서 비 롯된 뛰어난 정보망은 이미 세계적인 위협이 되어 있습니다. 불행히도 그들 의 수는 점차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처크가 부연설명이 뒤를 이었다. ?그들의 총수는 1900년대에 일어난 배트남전, 걸프전, 아프가니스탄전 등 한국전을 제외한 실전전투라는 실전전투는 모조리 거친 존 드보어, 코드네 임 워 브레인이라는 괴물노인이다. 지금은 사이보그니 나이를 따질 필요는 없겠지. 현재는 그의 젊었을 때 사진 외엔 어떠한 자료도 남아있지 않기 때 문에 워 피겨에 대한 설명은 여기까지 하기로 한다.? ?그 외의 사항에 대해서 질문이 있으십니까?? 루이의 말에 지크가 손을 들었다. ?제네럴 블릭사(社)에 대한 건 없나요?? 그러자 처크는 실소를 터트렸다. ?그 빌어먹을 회사에 대한 건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넘어가기로 하 자. 오후 브리핑은 이것으로 마치겠다. 지크 대원은 수속절차가 남아있기 때문에 급한 상황이 없으면 오늘은 투입하지 않겠다. 그것 때문이니 지크와 루이는 5분 후에 내 방으로 오도록. 오늘의 야간순찰은 그렌과 케빈이 맡기 로 한다. 그럼 이상.? 처크가 일어남과 동시에 전 대원도 일어나 경례를 붙였다. 이번엔 지크도 빠지지 않았다. 그가 나간 뒤 회의실은 한숨이 흘렀다. 챠오는 숨 돌릴 틈도 없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케빈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어이, 지크.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런 과민반응을 보이 는 거요? 어지간해선 눈썹 하나 떨지 않는 챠오가 오늘은 꼬리에 불붙은 토 끼처럼 저러니 이해가 안가네?? 그것은 모두가 궁금해 하는 사항이었다. 모두의 눈빛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음을 안 지크는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저랑 챠오는 원래 장래를 약속한 사이였죠. 식까지 올렸어요.? ?뭐라고!? 모두는 폭풍이라도 맞은 듯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지크는 더욱 고 민스럽게 변한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그러나 첫날밤 직전에 제가 도망쳤어요. 여기서 제 미래를 끝낼 수는 없 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챠오라면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결국 저렇게 되 어버리고 말았군요. 후후, 모두 제 실수입니다.? 지크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챠오와 동갑이자 가장 친 한 친구인 리진은 그의 뒷모습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랬구나. 그래서 챠오가 그런 거친 반응을……. 하지만 저 남자도 아직 챠오를 사랑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안 될까?? 지크는 회의실 출입구의 개폐스위치를 눌렀다. 그 순간, 회의실 안의 모든 사람은 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열기를 온 몸으로 느꼈다. 그 기운의 근원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맞이한 지크는 무슨 죄를 지었는지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기, 기다려, 챠오! 아니 챠오님! 아직 내 말은 끝난 게 아냐!? 그는 손을 휘젓는 등 모든 수단을 썼으나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그리고 5분 후. 자신의 방에서 지크와 루이를 맞이한 처크는 굉장히 난감한 표정으로 지크 를 바라봤다. ?오다가 넘어졌니?? ?인간적인 사건이 있었을 뿐이에요.? 지크는 벌겋게 부어오른 얼굴의 반쪽을 부여잡은 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처크가 서류를 찾는 동안 루이는 팔꿈치로 동갑내기 조카의 팔을 툭툭 쳤 다. ?아까 그 말, 진짜야?? ?이 나라에선 구라라 칭하더군.? 루이의 얼굴이 다시금 발화를 일으켰다. 지크는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웃었 다. ?실험이었어. 그 애가 내 말을 엿듣지 않고 그냥 갔으면 변한 거라 생각하 려 했는데 밖에서 얌전히 엿듣고 있더라고. 변한 게 없는 거지 뭐. 얼굴에 철판만 좀 깔은 것뿐이지.? 루이의 얼굴색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정말? 그런 걸로 알 수 있는 거야?? ?당연하지. 챠오랑 1년이나 한솥밥을 먹었는데 그런 걸 모르겠어? 그리고 너도 변한 게 없더라.? 지크의 말에 루이는 얼른 정색을 했다.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지난 4년 동안 걸어온 길을 무시하겠다는 거야?? ?허허, 글쎄. 얼마나 험한 길일 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본성만큼 변하기 힘든 건 없어.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구.? 가만히 듣고 있던 처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 말이 맞다, 루이.? ?아빠!? ?정말이야, 넌 변한 게 거의 없어. 대신 성장했지. 인간의 성장은 키만 자 라는 게 다가 아니잖니. 지난 4년 동안 넌 정신적으로 훌륭하게 성장해 주 었단다.? ?…….? 루이는 머쓱한 표정으로 안경을 매만졌다. 지크가 처크의 이야기를 거들고 나섰다. ?할아버지 말씀이 맞아. 흥분하면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히는 것도 그렇 고, 변한 게 하나도 없다니까. 오늘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잖아.? 왠지 좋은 말 같이 들렸는지 루이는 더욱 더 무안해했다. 허나 지크는 그 상황에서 일격을 날리고 만다. ?물론 살은 좀 쪘지. 그것 때문에 변한 거라고 한다면 아무 말 않겠어.? 처크가 움찔했다. ?오, 그래서 냉장고에 다이어트 식품이 있었구나? 난 또 네 엄마가 사놓은 건 줄 알았지.? ?…….? 루이의 얼굴이 다시 붉게 변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그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두 남자는 거리낌 없이 방담을 나눴다. ?그래도 여자는 살이 좀 있는 게 좋잖아요. 근육하나 없이 마르기만 한 애 들은 보기에도 좀 그렇죠.? ?그렇지. 장작개비를 최고의 몸매라고 생각하는 건 큰 착각이야. 여자들은 자고로 볼륨감이 좀 있어야…….? ?지부장님,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루이의 엄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입을 멈춘 두 남자는 잠시 후 똑같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어험, 그러자꾸나.? 처크는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바꾼 뒤 얘기를 시작했다. ?우선 이걸 받아라, 지크. 너와 레니가 사용할 집과 땅의 문서, 그리고 4 년 동안 네가 벌어둔 아르바이트 비용이다. 오늘 준다고 약속했지?? 지크의 앞엔 두 개의 서류와 전자통장 하나가 놓였다. 합성수지의 전자통장 은 통장자체와 마찬가지로 부드럽고 유연한 특수액정화면까지 외부에 마련 되어 통장잔액을 즉시 알아볼 수 있었다. ?하하! Thanks, 할아버지!" 지크가 가장 먼저 집어든 것은 통장이었다. 지문검식을 통해 잔액을 확인한 그의 눈은 동전만큼 크게 벌어졌다. ?우와, 이게 얼마야? 아르바이트 비용치고는 너무 많은데요?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될 정도네요?? 그러자 처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할 것 없어. 네 엄마가 입국하면 즉시 그 애 소유가 될 테니까.? ?예? 제가 번 건데 왜 엄마 소유에요!? ?아직 스물 셋밖에 안된 녀석이 무슨 돈타령이야? 게다가 넌 돈쓰는 방법 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지 않냐. 그러니 잔말 말고 맡겨라. 이건 BSP지부장 을 떠나서 집안 어른으로서의 말이다.? 그래도 지크는 불만스런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상당히 동양적으로 말씀하시네요.? ?당연하지. 이 나라에서 내가 몇 년을 있었는데?? ?예예, 알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건요?? ?BSP내 최고미녀의 안내를 받으면서 본부를 구경하면 끝이야. 제대로 구경 도 못하고 저세상으로 간 대원이 하도 많아서 특별히 서비스하는 거다.? 지크의 얼굴에 좋지 않는 미소가 떠올랐다. ?혼자 돌아다니면 안 될까요? 그 미녀가 누군지 알 것 같아서…….? ?하라면 해. 장비지급도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어. 그리고 그것이 끝나면 집으로 가도 좋다. 레니가 내일 입국하는 건 알고 있으니 내일도 특별한 상 황이 없으면 부르지 않겠다. 집 정리나 잘해.? 처크의 방을 나선 지크는 루이의 안내를 받아 지하층으로 내려갔다. 원래는 건물 중앙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하는데 지크가 떼를 쓰는 바람 에 루이는 하는 수 없이 외부식 엘리베이터를 이용했다. 하강이 주는 상승감은 지크의 마음을 한결 부드럽게 해주었다. 엘리베이터 밖으로 보이는 매트로 서울의 전경과 한강의 모습은 그를 조용히 들뜨게 해 주었다. ?이 동네 괜찮네? 80년 전에 초토화 됐던 도시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데? 저번에 왔을 때는 이렇게 높은 곳을 갈 기회가 없어서 몰랐지만 지금 보니 대단하네.? 내려가는 동안 안경을 벗은 루이는 안경알에 입김을 부으며 틈틈이 말했다. ?성격이 급하고 이기주의적이면서도 이상하게 승부엔 강한 민족. 평소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다가도 때가 되면 나라를 위해 뭉치고 목숨을 버리 는 사람들. 강한 지도자를 만나면 국민들 역시 더욱 강하고 위대하게 되지 만 그런 좋은 지도자가 그야말로 100년에 한번 날까말까 하는 나라. 그리고 기적을 일으키는 게 취미인 나라. 그런 나라가 바로 이 대한민국이야.? ?호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민족이란 말인가? 그래서 이 땅에서 나오는 바 이오 버그는 다 그렇게 강한 거야?? ?근거 있는 말이야.? 루이는 안경을 고쳐 쓰고 말했다. ?아프리카의 사바나에선 BG에게 습격당한 야생동물이 거의 없어. 하지만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선 BG의 수가 엄청나지. 매트로 서울의 경우가 그래. 그리고 사람들이 강할수록 BG도 강해. 따라서 지크의 말은 일리가 있어.? ?그렇군.? 엘리베이터 안에 조명이 들어왔다. 지하로 들어간다는 신호였다. 지면을 통과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문 밖으로 보이는 것은 창고처럼 지붕이 높고 넓은 공간이었다. 그 안엔 블록형의 작은 건물들이 선적 직전의 컨테이너처럼 나란히 자리 잡 고 있었다. 그것은 BSP 전용의 무기와 장비들이 보관되는 특수 창고였다. 루이는 그 중 녹색의 밴드로 표시된 건물들로 지크를 인도했다. ?기본 장비 외에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말해줘.? ?S&W제 오토매그넘 있을까? BSW-G4라는 44구경의 녀석 말이야.? ?BSW-G4? 있긴 있지만 그건 지크가 사용하기엔 너무 위력이 약하지 않아? 표준형보다 약할 텐데?? ?괜찮아, 난 정확도랑 장탄수가 우선인 남자니까. 그럼 그 녀석으로 두 정 부탁해.? 루이는 허리에 찬 PDP를 꺼내 지크가 원하는 무기의 위치를 검색했다. ?W-3번 창고에 있어. 아, 저쪽이야.? 둘은 3이라는 숫자가 녹색으로 그려진 창고 앞에 섰다. 지문과 망막, 음성 등의 보안절차가 끝나자 3번 창고의 문이 위로 활짝 열렸다. ?이야, 총 냄새 죽이는데? 전부 신품이잖아?? ?한번 이상 사용한 무기는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파쇄 되어 재활용 처리가 되지. 지문인식 시스템 때문에도 그렇지만 죽은 사람이 사용한 무기는 징크 스 거리로 남기 때문에 그렇게 처리하는 게 단체적으로는 좋아.? ?헤에, 그렇군.? 지크는 권총을 집기 전에 더블 홀스터(권총집)를 꺼내 허리에 맸다. 이어서 두 자루의 중형자동권총이 그의 손에 들렸다. 전장 25cm, 인치로 따지자면 6인치 정도의 묵직한 권총들이었다. 강력하고 부피 있는 44구경 리볼버용의 탄환을 사용하기 때문에 탄창 역시 묵직하고 두툼했다. 총구 아래에 장치된 레이저 포인터 옆에 파란 불이 들어왔다. 첫 지문인식 의 신호였다. BSP의 무기들은 군이나 민간에서 사용하는 것보다 강력한 것들이 대부분이 기에 BSP외의 단체엔 절대 공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보안과 안전을 위해 지 문을 등록한 무기의 주인 외엔 절대 BSP의 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 소형 PDP, 단거리통신기와 비상용 신호기, 구급약, 이틀 분량의 영양제 등 으로 장비지급을 마친 지크는 더 이상의 미련 없이 무기창고를 나섰다. ?자, 갈까?? 정리를 마치고 뒤따르던 루이가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그 칼은?? ?칼? 무슨 칼?? ?무명도인가 하는 칼 말이야. 오늘 가져오지 않았어?? 지크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녀석? 내 귀염둥이에 놔두고 왔지.? 그 순간 루이는 아연실색했다. ?뭐라고? 그 귀한 물건을 어쩌자고 주차장에 놔두는 거야! 그곳은 BSP본부 내에서 가장 보안이 허술한 곳이란 말이야!? ?길 한가운데에 놔둬도 괜찮아. 그 녀석은 정말 나밖엔 들 수 없으니까. 옛날에 할아버지가 그걸 들려다가 허리 다치셨던 거 기억 안나?? ?무거워서 그랬던 게 아니야?? 지크는 코웃음을 쳤다. ?길이 120cm밖에 안되는 녀석이 무거워봤자 얼마나 무겁겠어? 하지만 나 외의 다른 사람 손에선 이상하게 무거워지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안심하고 돌아다닐 수 있지.? ?그래?? 고개는 움직였지만 루이의 의문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BSP 상부에 보고 된 지크에 대한 자료 중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바로 그만 이 쓸 수 있는 무기, 무명도였다. 지크가 열 살 때 정체불명의 사람으로부터 획득한 것으로 알려진 그 칼은 전 세계의 과학자와 도공, 그리고 검 수집가들의 관심을 아직까지도 모으고 있는 대단한 물건이다. 외모는 일본식 도검, 일명 카타나(刀의 일본식 읽기)라고 불리는 형식의 칼 과 비슷하지만 표준보다는 전장이 길고 검신은 조금 얇다. 반사광은 연한 파란색을 띄며 검막(劍膜)은 위아래가 긴 직사각형을 이룬다. 휘지 않은 듯 하면서도 휘어진 칼의 곡선은 지크가 일본에서 수련할 때 만난 도공들로 하 여금 스스로 무릎을 꿇고 절을 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예술적이다. 그것을 누가, 왜 지크에게 넘겨주었는지. 그리고 지크 외엔 아무도 사용할 수 없는지에 대해선 밝혀진 바가 없다. 지크 자신도 칼을 준 사람이 누구인 지는 모른다고 말한다. 처음 처크가 칼의 정체에 대해 물었을 때도 자신만 이 쓸 수 있는 선물이라고 밖엔 말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집으로 가면 되는 건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지크가 물었다. ?아빠, 아니 지부장님 말씀대로 집에 돌아가면 돼. 더 있어봤자 환영받진 못할 거야.? ?왜?? ?궁금하면 나와 주관제실로 가보면 돼. 꽤 흥미로운 반응들이 나올 테니 까.? ?그래? 그럼 가보지 뭐.? 지크는 실실 웃으며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루이는 불쌍하다는 듯 고 개를 저으며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주관제실의 반응은 나름대로 뜨거웠다. 루이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오퍼레이 터들은 두려운 눈빛을 지크에게 보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은 지크는 짓궂은 성격대로 모든 오퍼레이터 들과 악수를 나눴다. 그와 악수를 하는 오퍼레이터들의 표정은 정말 가관이었다. 억지웃음은 보 통이었고 여성들의 경우 눈물까지 흘려댔다. 일부는 악수를 한 뒤 물수건으 로 몰래 손을 닦기도 했다. 지크를 제대로 환영해준 사람은 중국계의 최연소 메인 오퍼레이터인 쟌 류 페이, 그녀뿐이었다. 그녀는 수첩을 들이밀며 사인까지 요구하기도 했다. 쟌 류페이. 나이는 비록 열다섯이지만 중국에서 시행하는 영재교육이란 영 재교육은 모두 통과한 천재소녀다. 대한민국 지부에 있는 이유는 BSP북경지 부의 치프 오퍼레이터가 되기 전에 실전경험을 쌓기 위해서였다. 모두와 악수를 나눈 지크는 씩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죄송하지만 여러분들께 아쉬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에 주관제실이 술렁댔다. ?저는 사실 정식발령을 받아서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견학을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 순간 루이와 다른 오퍼레이터들 사이에 희비가 교차했다. ?오오, 정말입니까!? ?언제 가시는 겁니까!? 남자 오퍼레이터들이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크는 표정을 유지한 가운 데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여길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우와아!? 오퍼레이터들은 앞에 있던 서류와 두루마리 휴지를 일제히 하늘에 던졌다. 어떤 이들은 서로 껴안기까지 했다. 국대급 경기가 벌어지는 축구경기장에 서나 겨우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광경이었다. 예의상 ?좋다? 내지는 ?신이난다? 라는 말은 철저하게 안했지만 그들의 얼굴엔 평화와 희망, 기쁨이 가득했다. 반면 지크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알고 있는 루이는 노트북과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지크의 다음 말이 터지 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지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뻥입니다!? 오랫동안의 경직이 주관제실을 내리눌렀다. 오퍼레이터들은 하나둘씩 힘을 잃고 쓰러졌다. 그들은 겨우 열렸던 하늘이다시금 먹구름에 휩싸이는 모습을 보는 듯한 얼굴로 지크를 바라봤다.지크가 다시 한번 큰소리로 말했다. ?다 알아. 인간재해니 손해의 남자니, 그런 별명이 나에게 따라다니는 거다 안다 이거야. 그런 얘길 들은 이상 당신들도 날 가까이 하기 싫겠지. 그런데 말이야.? 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당신들, 오늘 말고 날 실제로 본 적 있어? 나보다 나에 대해 더 잘 알아? 우리 엄마만큼 내가 어떤 놈인지 잘 알아? 대답해 보시지, 똑똑한 양반들.? ?…….? 오퍼레이터들의 분위기가 조금 변했다. 지크는 파도처럼 그들을 몰아붙였다. ?사람에 대해서 좋고 싫고를 판단하고 싶으면 일단 코빼기라도 보고 판단하 시지? 그게 예의 아닌가? 내가 당신들에게 뭐라고 한 적 있어? 당신들 세상 일 다 알아? 만물상 할아버지인가? 노스트라다무스야? 내가 한 일에 대해선 무슨 얘기를 해도 좋지만 겪어보지도 않고 나에 대해 마음대로 판단하는 건 나쁘지. 난 물건이 아니라서 객관적인 데이터로 평가받을 수는 없어.? 할 얘기를 다 한 지크는 출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여튼 같이 열심히 해보자고. 당신들이나 나나 별 거 아닌 것 가지고 감정 집어넣는 꼬마들이 아니라 프로잖아, 안 그래?? 주관제실의 문이 잠깐 열렸다 닫혔다. 지크가 나간 뒤였지만 오퍼레이터들은 서로만 흘끔흘끔 바라볼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윽고 하나, 둘씩 자기 자리로 돌아가 헤드 셋을 썼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나사가 조금씩 풀어진 것 처럼 보였던 그들의 모습이 지금은 약간이나마 진지해 보였다. 루이 역시 자기자리로 돌아갔다. 지크가 온 것을 처음 확인할 때와 달리 그녀의 표정은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조금은 걱정을 덜해도 되겠네.? 한강에 노을이 질 무렵, 본부의 지부장실에서 환풍기의 회전소리가 들려왔다. BSP의 지부장, 처크 켄트는 애연가다. 필터담배는 피우지 않는다. 철저한 시거 매니아다. 젊었을 적엔 잠시 끊은 적도 있지만 40대에 들어서면서 시거에 맛을 들였다. 향과 연기가 풍부한 시거를 좋아하기 때문에 지부장실은 항상 시거연 기로 가득 찬다. 지금처럼 환풍기를 쓰지 않으면 방문객이 불편해진다. 창가에 서서 황적색으로 변한 한강을 가만히 바라보던 처크는 입에 문 시거를 재떨 이로 가져갔다. 시거는 불씨만 살짝 없애면 전부 태울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태울 수 있다.그는 뒤에 있는 그렌에게 물었다. ?지크 녀석, 어떤가?? 의자에 앉아 보고서를 살피던 그렌은 PDP를 놓으며 대답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이 성장한 느낌입니다. 말버릇이나 행동은 여전하 지만 예전처럼 물불을 안 가리고 막나가지는 않더군요.? ?그런가? 그렇다면 야생마 길들이기의 첫 번째 관문은 그럭저럭 통과한 셈이군.? ?그런데, 지부장님. 지크와 챠오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챠오 가 회의실 안에서 폭력을 써야 할 정도로 심각한 관계였습니까?? 처크의 눈썹이 선글라스 위로 올라갔다. ?응? 그럼 지크를 두들겨 팬 사람이 챠오였나?? ?아, 예. 말려봤지만 사건이 이미 터진 뒤라서…….? 그렌은 면목이 없는지 고개를 숙였다. 혹시라도 챠오가 징계를 받지 않을까하는 걱정도 섞여있었다.처크는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 괜찮아. 멍이나 타박상 정도는 몇 시간 지나면 회복되는 특이한 녀석 이니 그런 것 정도는 넘어갈 수 있어. 그리고 둘 사이에 대해선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신경 쓰지 말게.? ?정말 괜찮겠습니까?? ?괜찮다니까.? 처크의 눈에 오토바이를 타고 본부를 나서는 청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육중한 소음과 함께 강변고속도로를 달리는 그의 모습은 파란 옷의 바람요정처럼 보였다. ?내가 녀석의 칼, 무명도에 대해 물었을 때 그 녀석이 말했지. 바람을 이해하는 자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어떤 할아버지가 줬다는 거야. 허무맹랑한이야기 같지만 실물과 증거가 너무 뚜렷하나 믿을 수밖에 없지.? 그렌이 의아해 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노인인가 뭔가 하는 사람도 지크에게 희망이 보이니 그런 큰 선물을줬지 않겠나. 그래서 나도 한번 걸어보는 걸세.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이미 생활이 되어버린 BG와의 전쟁. 그 희망 없는 전쟁을 끝낼 계기가 녀석이 아닐까 하는 것에 말일세.? ?교회를 다니지 않은지 오래 되서 좀 어설프겠지만 저도 한번 빌어보겠습니다. 지부장님의 도박이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고맙네. 그럼 아까 얘기를 계속 하지.? 처크는 자기자리로 돌아갔다. 그렌은 다시 PDP를 들었다. ?예. 후지바라 와카루 박사에 대한 것입니다. 최근 격리시설에서 나온 뒤로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합니다.? ?좋은 쪽으로인가, 아니면 나쁜 쪽으로인가?? ?정확하진 않지만 제네럴 블릭과 관계가 있는 듯 합니다.? 처크의 표정이 금세 흙빛으로 변했다. ?사실이라면 더 이상 나쁠 수가 없겠군. 거기서 뭘 한데나?? ?불확실한 정보이기 때문에 무엇을 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양측이 접촉했다는 것만큼은 사실인 듯 합니다.? ?그렇군. 다른 정보는?? ?홍콩 마피아인 흑사회(黑蛇會)의 거물, 루이스 츄가 내일 모레 대한민국에 입국한다고 합니다.? ?루이스 츄? 그 약장수가 왜?? ?신종마약인 엔젤 블러드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대한민국 경찰에서 우리BSP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음, 일단 서두르지 말기로 하지. 이번엔 녀석의 해결사에게 당할 일이 없을 테니까.? 공기의 온도가 점차 내려갔다. 직사각형으로 나뉜 건물들의 창에도 하나 둘씩 어둠이 빠져나갔다. 매트로 서울의 야경이 점차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 수도방위지부의 역사적인 하루는 그렇게,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마무리 되었다. 한편, 자신의 새 집에 들어온 지크는 가구 하나, 카펫 한 장 없는 거실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설마 했지만 소파 하나 없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근처 캠핑용품점에서 사온 침낭을 거실 중앙에 깔았다. 그 옆엔 편의점에서 사온 과자와 음료수, 인스턴트식품이 산을 이루었다. 그는 BSP전용 PDP를 TV모드로 맞춰 놨다. 시간대가 맞지 않아서인지 화면에선 뉴스밖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얼굴은 좋아보였다. 정식으로 취직을 한 첫날이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퍼레이터들의 생각 없는 행동이 그를 조금 불쾌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그런 불쾌감을 가슴속에 오랫동안 남겨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동물적인 육감도 조금은 느슨해진 듯 했다. 지크의 집을 지켜보는 두 개의 그림자 가 있었다. 근처 건물 옥상에 제각각앉아있는 둘은 자신들이 주시하고 있는 존재에 대해 회의를 벌였다. ?그가 맞을까?? 낮고 맑은 음성이 들렸다. 성우나 가수가 한 수 접을 정도의 타고난, 아름다운 남자의 음성이었다. ?지금 들이닥쳐 보면 알겠지. 테스트가 우선 아니겠어?? 그와는 반대로 거친 기색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 자체는 거칠지 않았지만 말투는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전의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림자 뒤로 보통사람보다 긴 둘의 머리가 보였다. 한 쪽은 여 성의 머리카락처럼 깔끔하고 날씬했다. 그러나 다른 한 쪽은 빗질과 다듬질을 전혀 하지 않은 듯 터프한 실루엣과 움직임을 보였다. ?성급하게 움직이지 말자. 제한시간이 없는 일이니까.? ?후훗, 좋아. 하지만 나를 너무 말리지 않는 게 좋아. 말리면 말릴수록 녀석에 대한 테스트가 거칠어질 테니까.? ?…….? 흘러가던 구름이 달을 가렸다. 아주 잠깐 빛이 없어졌을 뿐이다. 그러나 다시 달이 나타났을 때 두 남자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2화 대한민국 지부에 정식으로 발령을 받은 지 일주일. 그리 긴 시간이 아닌 만큼 지크의 모습엔 큰 변화가 없었다. 파란 스포츠재 킷에 흰 면T, 청바지도 그대로였다. 굳이 변화를 찾는다면 재킷 어깨부분에 새로 달린 BSP 엠블럼이었다. 검은색 바탕에 방패와 시베리아 호랑이의 머리를 노란색 무늬로 형상화한 그 엠블럼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 초기 제작당시 왜 사자가 아니라 호랑이냐는 소수의 반발도 샀지만 어디까지나 소수일 뿐, 그 엠블럼은 BSP가 처음 발주한 2015년부터 전 세계적으로 꾸준히 사용되어왔 다. 영광 그 자체라 불리는 엠블럼을 어제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지크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아침뉴스를 보는 그의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다. ?지크, 식사하렴.? 한 여성이 부엌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지크와 마찬가지로 환한 금발을 한 그녀는 아무 것도 없던 일주일 전의 집 과 지금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다. 이웃사람들은 그녀가 지크의 부인 내지는 동거하는 여자친구라고 생각하지 만 그렇지 않다. 사실은 지크의 어머니였다. 레니 켄트. 그녀는 대학 2학년인 스무 살 때 삼촌인 처크의 부탁으로 지크 를 입양하여 그의 어머니가 됐다. 덕분에 빼어난 미모와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결혼을 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불운한 여성이 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 때문에 처크의 집안에선 지크를 곱게 보지 않았다. 고아 한 명 때문에 집안사람 하나가 처녀귀신이 되게 생겼으니 그러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레니 자신은 불만이 없었다. 지금의 생활에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 었고 무엇보다 지크는 그녀에게 있어서 훌륭한 아들이었다. 지크는 터벅터벅 걸어와 식탁에 앉았다. 힘이 빠진 아들의 모습은 레니의 표정마저 흐리게 만들었다. ?일이 힘드니? 아니면 처크 삼촌이 힘든 일만 골라서 시키는 거야?? ?아뇨, 그렇진 않아요.? 지크는 대답과 함께 샌드위치 하나를 베어 물었다. ?그럼 왜 그래? 어제 저녁부터 표정이 좋지 않던데…….? 입에 든 샌드위치를 불만스레 우물거리던 지크는 잠시 후 우유로 입가심을 한 뒤 말했다. ?그게 말이죠.? 지크의 입에서 나온 이유는 레니를 조금 당황하게 만들었다. 5일 전부터 이 상한 괴한 두 명이 서울 시내 곳곳에서 나타나 BSP대신 바이오 버그들을 휩 쓸고 있다는 것이었다. 둘이 같이 나타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한 명씩 따로따로 활동하고 있는데 사람들의 진술과 나타난 시간대를 봐서 동일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아니, 누군가가 일을 대신 해주면 BSP로서도 좋은 거 아니니? 굳이 화를 낼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물론 좋죠. 하지만 그 두 슈퍼맨 때문에 시민들 반응이 안 좋아요. 특히 여자들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죠.? ?여자들이? 왜?? 이유는 두 남자의 인상착의 때문이었다. 둘 중 한 명은 파란 장발에 조각 같은 미모, 그리고 패션쇼에나 나올 멋진 붉은색 코트를 입고 있다 한다. 화염으로 휩싸인 창을 사용하는 그 남자는 예술적인 동작과 강력한 힘으로 BG들을 압도 한다 전해진다. BSP나 전경들이 도착했을 때 거리에 남은 것은 넋이 나간 여성들과 BG로 보 이는 잿더미뿐이었다. ?그래? 와, 정말 멋진 남자인가 보구나?? 레니마저 두 손을 모으고 감탄하자 지크의 얼굴은 더욱 구겨졌다. ?아직 하나 더 남아있어요.? 다른 하나는 폭염과 같은 붉은 장발에 구릿빛 피부, 그리고 어지간한 남자 연예인은 가볍게 능가하는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한다. 옷은 회색 망 토와 가죽토시 등 놀이공원의 판타지 쇼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을 걸쳤지만 보라색 대검을 터프하게 휘두르며 싸우는 모습만큼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멋지다고 전해진다. BSP가 도착했을 때 거리에 남은 것은 전의 경우와 비슷했다. 다만 BG들은 폭탄에 얻어맞은 듯 산산이 부서지고 찢겨 있었다. ?그 남자도 멋있는 것 같네?? 레니의 감탄이 다시 이어졌다. 지크의 분위기는 점차 바닥으로 떨어졌다. ?흠, 아무튼 BSP에서 지정한 그 두 녀석들의 호칭은 태극형제에요.? ?태극형제? 왜?? ?붉고 파랗잖아요. 이 나라의 국기처럼.? 그러자 레니는 조금은 어이가 없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 그거 네가 지어준 별명이지?? 지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너 말고 그런 네이밍 센스를 가진 사람이 누가 있겠니? 후후후, 질투가 나는 건 알겠지만 태극형제가 뭐니?? ?…….? 지크는 멋쩍은 듯 머리만 긁적였다. 레니는 어린아이 다루듯 아들의 머리를 만지며 빙긋 웃었다. ?너도 잘생겼어. 다만 여자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지 않을 뿐이 야.? ?정말이요?? ?그럼, 여자로서 말하는 건데 틀릴 리가 있겠니? 아마 너와 한 달 이상 같 이 있어본 여자라면 너만큼 멋진 사람이 없다는 걸 잘 알게 될 거야.? ?…….? 그러자 지크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1년 동안 같이 있었던 애는 다짜고짜 주먹부터 휘두르던데…….? ?응?? ?아, 아니에요. 그럼 출근할게요.? 지크는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물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레니는 출근하는 아 들의 뒤를 지켜보며 한숨을 쉬었다. ?한 가지 더. 인간관계의 기본은 기브 엔 테이크(Give&Take)란다. 여자들 에게 인기를 얻고 싶으면 일단 뭔가를 보여줘야지, 안 그래? 돈이든 멋진 모습이든…….? 그녀의 혼잣말이 아들에게 들릴 리는 없었다. 본부에 출근한 뒤에도 지크는 괴롭기 그지없었다. 일명 ?태극형제?라 불리는 그 수수께끼의 남자들 때문에 언론에선 BH 두 명보다 못한 수십억 몸값의 영웅들이라며 BSP수도방위지부의 모두를 비꼬았 다. 5일 내내 뒷북을 치고 다녔으니 그럴 만도 했다. UN에선 그 두 남자를 스카우트 하는 게 어떠냐며 공문을 보내오기까지 했 다. 덕분에 처크 켄트의 자존심은 이만저만 상한 게 아니었다. ?지난 5일 동안의 사건 처리확률이 0%야! 이게 말이나 되나? 선수를 빼앗 겨도 분수가 있지 않나!? 처크의 거친 목소리와 함께 회의실의 테이블이 울렸다. 처크가 흥분한 나머 지 테이블을 내려친 것이다. 그렌과 챠오를 제외한 모두는 움찔하여 처크를 바라봤다. 처크의 분노는 계속됐다. ?그 녀석들은 거미줄을 타고 도심을 헤집으며 다니나? 아니면 전신에 3도 화상을 입고 돌아온 지옥의 사자야? 녀석들은 신출귀몰을 하는데 위성레이 더까지 사용하는 우리는 왜 5일이란 긴 시간 동안 뒷북을 치고 다녀야 하나 ! 누가 이유를 좀 말해봐!? 루이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BSP가 사건발생지점에 도착하는 시간은 평균 5분 정도입니다. 조금 먼 지역의 경우 전투경찰이 우선 투입되지만 전투경찰 역시 5분에서 10분 사이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문제가 된 그 2인조의 경우 사건발생부터 평균 1분에서 2분 만에 현장에 나타납니다. 처리시간 역시 BG 의 개체 수에 관계없이 그 정도여서 BSP나 전투경찰이 뒷북… 아니 뒤늦게 도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해결방법은 있나?? ?BG의 활동패턴을 예상할 수 없는 현재로선 없다고 보시는 게 좋습니다. 순찰 중에 맞닥뜨리거나 그 남자들이 활동을 중단하지 않는 한 현재 상황에 대한 해결은 거의 불가능 합니다.? ?끄응.? 처크는 불만스레 고개를 돌렸다. 상황이 이렇다는 것을 그 역시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프라이드가 높기로 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그였으니 방금 전처럼 폭발적인 반응은 어찌 보 면 당연했다. 회의실의 공기가 잠잠해졌다. 대원들이 한숨을 돌리는 동안 처크는 다른 쪽 으로 생각을 바꿨다. ?좋아, 영웅놀이는 영웅에게 맡기자. 그 동안 우리는 다른 일을 맡는다.? ?다른 일이요?? 케빈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처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외적인 일이다. 루이, 사건코드 20350328번에 대한 브리핑을 부탁한 다.? ?네… 예? 0328번 말씀이십니까?? 영원히 차분할 것만 같던 루이의 표정이 도중에 변했다. ?그래.? ?지부장님, 너무 이릅니다. 사건에 대한 정보수집도 아직은 부족합니다.? ?남는 시간 동안 BSP사인회를 열어 대중의 인기를 회복하는 것보다는 낫겠 지. 게다가 그것 외엔 없지 않나.? 루이는 고개를 갸웃거린 뒤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모든 대원은 메인 스크린을 주목해 주십시오.? 그녀의 지시에 따라 지크를 비롯한 모두는 처크 뒤에 마련된 메인스크린에 눈을 돌렸다. 그 사이 루이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사건코드 20350328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사건은 어제, 정확히는 3월 28일 부로 서울경찰청에서 수도방위 BSP로 공식 이전되었습니 다. 사건관련코드는 2번, 4번입니다.? ?2번과 4번?? 지크가 작은 소리로 중얼댔다. 옆에 앉은 리진이 그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설명해주었다. ?코드 2번이란 건 워 피겨 관련사건이란 말이고, 4번이란 건 강력사건이라 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매뉴얼 좀 읽고 다니라니까요!? ?헤헷… 실례, 실례.? 메인스크린에 동양계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길쭉하고 마른 두상에 찢어 진 눈매가 매서웠다. 머리는 옛날 중국식으로 땋아 내렸으며 양쪽 볼에 그 어진 긴 흉터는 그의 분위기를 더욱 돋우었다. 루이의 설명이 이어졌다. ?홍콩의 3대 암흑조직, 흑사회의 마약담당 중 최고의 거물인 루이스 츄입 니다. 중국식 이름은 주천영입니다. 대한민국 경찰과 BSP 사이에서도 소개 가 필요 없을 정도의 유명인사입니다.? ?루이스 츄!? 지크가 짧게 읊조렸다. 케빈이 의외라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호오, 잘 아나봐? 지크씨?? 그는 대답에 잠시 뜸을 들였다. 처크의 눈치를 본 지크는 조금 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내가 잘 아는 어떤 동물이랑 이름이 비슷해서. 저 녀석도 양 볼과 몸에서 전기를 뿜을 수 있을까?? 처크와 그렌 등 애니메이션 및 팬시에 전혀 관심이 없는 두 남자는 무슨 소 리냐는 듯 서로를 번갈아 바라봤다. 반면 지크의 말을 이해한 루이와 리진 은 속으로 이를 부드득 갈았다. 가까스로 냉정을 되찾은 루이는 헛기침을 한 뒤 설명을 계속했다. ?루이스 츄의 경우 우리 수도방위 BSP와 몇 번 충돌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증거부족 및 방해물들에 의한 도주로 번번이 놓치곤 했습니다. 방 해물이란 BSP의 제2의 문젯거리인 워 피겨를 말합니다.? ?워 피겨? 그 고철아저씨들이 왜?? 지크의 말에 케빈이 주석을 달아줬다. ?고철아저씨들은 테러리스트이자 용병이잖아. 약장사(마약거래)는 예나 지 금이나 돈이 많이 되는 사업이고 피카… 아니, 루이스 츄의 경우엔 세계에 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약장수니까 그 아저씨들이 안 붙을 리가 없지. 지난번에 거리에서 싸움이 났을 때도 그 아저씨들의 방해 때문에 경찰 사상 자만 수십이었어.? ?무섭네.? 지크가 혀를 내둘렀다. 루이의 브리핑이 계속됐다. ?케빈 중위의 말씀대로 루이스 츄의 경호는 워 피겨들이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성원은 워 피겨 내에서 상위랭크에 속하는 이들로서, 한 사람 당 몸값이 400만 달러에 이를 정도로 비싸고 강력한 존재들입니다. 이번에 같이 입국한 경호원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루이스 츄의 사진 대신 두 남자의 사진이 떠올랐다. 사이보그라는 설명과 달리 의외로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그들은 운동선수처럼 선이 굵은 외모 를 가지고 있었다. 한 사람은 짧은 금발에 턱수염을 길렀고 다른 한 사람은 갈색 스포츠머리에 눈에 띄는 굵은 턱을 가지고 있었다. ?NFL(National Football League:북아메리카 프로미식축구리그)선수들인가? ? 워 피겨에 대해선 무지한 지크로선 그들이 누군지 알 리가 없었다. 반면 그 렌과 케빈은 눈을 감거나 휘파람을 부는 등 강자에 대한 예의를 갖췄다. ?이런, 400만 달러짜리가 아니잖아?? 케빈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댔다. ?누군데요?? 지크만큼이나 워 피겨를 모르는 리진이 큰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대답은 그렌이 대신 해주었다. ?금발에 턱수염은 잭 레논, 일명 ?드래곤 잭?이라고 불리는 A랭크의 워 피겨야. 잭 레논은 몰라도 드래곤 잭은 알겠지?? 지크의 얼굴이 단숨에 변했다. ?드래곤 잭? 나노 블레이드(Nano Blade:나노테크놀러지를 이용해 제련된 칼날-작가 주)를 장치한 사이보그 말인가요?? ?맞았어. 철근콘크리트든 방탄차량이든 가리지 않고 절단 내는 무시무시한 녀석이지. 육탄전이 약한 경찰이나 BSP라면 가장 만나기 싫은 녀석 중 하나 일 거야. 옆에 있는 갈색머리도 만만치 않지. 본명은 듀어 존슨, 별명은 ? 피어셔(Piercer)?다. 20미리 발칸포를 양팔에 장치한 녀석인데, 사용하는 탄환이 모두 철갑탄이라서 그런 별명이 붙었지.? 케빈이 부연설명을 했다. ?녀석 앞에선 탱크고 뭐고 남아나질 않아. 게다가 티타늄 합금 재질의 단 단한 장갑을 전신에 두르고 있지. 수류탄 정도로 어찌할 수 있는 레벨이 아 니야. 대전차포를 정면에서 먹여도 뒤로 밀려나갈 뿐일 거야. 움직이는 구 축전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드래곤 잭 말고 피어셔라는 이름까지 들어본 적이 있는 지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간이 큰 그라도 그런 고명한 워 피겨들이 상대라면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괴물들을 왜 데리고 들어왔데요? 혹시 이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서? ? ?그건 나도 모르지.? 처크는 씩 웃었다. 사실 그가 원래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다. ?바로 너 때문이다.? 처크는 이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들어온 지 일주일 밖에 안 된 신입대 원을 그렇게까지 띄워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2개의 조로 나뉘어 매트로 서울을 수색한다. 범위는 넓지 않다. 강남의 A구역과 강북의 S구역이다. 그 외의 구역은 경찰에서 맡기로 했으니 우리는 루이스 츄가 나올 가능성이 가장 높은 그 두 개 지역을 맡는다. 그 리고 조를 짜야 하는데…….? 처크의 눈동자가 선글라스 속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누군가에 대한 거부감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우선 1조는 그렌과 케빈, 그리고 챠오다. 나머지 두 명이 2조를 맡는다. ? 그리고 말을 잠시 끊었다. 반발이 있을 것에 대비해서였다. 그런데 막상 지크와 한 조가 된 리진은 별다른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처크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며 지시를 내렸다. ?1조가 맡을 구역은 강북의 S구역이다. 2조는 강남의 A구역을 맡는다. 루 이스 츄와 그의 경호원들에 대한 몽타주는 루이가 각자의 PDP로 전송해줄 것이다. 오늘은 오후 브리핑이 없다. 대신 무전으로 야간순찰대원과 추가지 령을 전해주겠다. 그럼 이상.? 오전 브리핑이 끝난 뒤 지크를 비롯한 대원들은 조대로 짝을 지어 회의실을 나섰다. 지크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세계적인 강적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 조금은 부담됐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기대하는 눈치였다. ?좋아, 이번이 진짜 데뷔전이다. 이 지크 스나이퍼님의 진짜 실력을 유감 없이 보여주겠어. 덤으로 그 태극형제까지 잡아들이면 내 인기는 하늘을 찌 르겠지. 후후, 좋은 기회다, 최고의 기회다, 베스트 찬스다!? ?자, 리진양. 오늘도 열심히 잘해봅시…….? ?제발 바꿔달란 말이야!? 리진은 챠오를 붙잡은 채 통사정을 하고 있었다. 지크의 몸과 혀는 석화주 문이 걸린 듯 우지끈 멈췄다. ?싫어.? 챠오는 짧고 강하게 리진의 부탁을 거절했다. 하지만 리진은 포기하지 않았 다. ?좀 봐줘! 저 남자에게 내 목숨을 맡길 순 없단 말이야! 챠오는 강하니까 혼자서 어찌할 수도 있을 거 아냐!? ?싫어.? ?치킨피자 사줄게! 일주일 동안!? ?싫어.? 그 희극을 앞에 둔 그렌과 케빈은 여기서 웃어야 할지, 아니면 둘 중 하나 를 말려야 할지 매우 난감해했다. 결국 챠오의 양보를 받아내지 못한 리진은 아쉽고도 짜증스런 얼굴로 순찰 차에 올라탔다. 그녀가 옆자리에 앉은 지크의 표정을 본 것은 본부를 출발 한지 5분 뒤였다. ?워 피겨랑 붙어본 적 있나요, 지크씨?? ?…….? ?지크씨? …앗.? 하얗게 사색이 된 지크의 얼굴에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때 는 늦어있었다. ?미, 미안해요! 진심으로 그런 게 아니에요! 당신이 싫어서 그런 것도 아 니고…….? 운전을 항법장치에 맡긴 그녀는 당시 상황을 이리저리 둘러댔으나 어둠에 물든 지크의 정신은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목표지점인 강남 A구역에 도착할 때까지 지크와 리진은 단 한 마디의 얘기 도 나누지 않았다. 지크는 계속 뚱한 얼굴이었다. 리진은 뭐라 말하기조차 미안했는지 머리만 계속 매만졌다. 기회는 계속 노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한 행동이 얼마나 심한 것인지 알기에 사과조차 쉽게 꺼내지 못했다. 목적지에 다다랐을 무렵, 지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치즈버거 두 개에 감자튀김 하나, 그리고 콜라 하나.? ?예?? 갑자기 나열된 패스트푸드 이름에 리진은 당황했다. 그녀가 눈을 깜박이며 자신을 바라보자 지크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댔다. ?그거 사주면 없던 일로 할 게요.? ?정말이요?? 리진은 혹시나 했지만 햄버거를 씹는 지크의 얼굴은 생기발랄 그 자체였다. 정말로 잊은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아침 안 먹고 왔어요? 아직 10시 밖에 안됐는데 햄버거 두 개에 감자튀김 이라니…….? ?제가 좀 많이 먹어요. 그리고 미국식 햄버거랑 한국식 햄버거는 양이 다 르잖아요.? 지크는 보란 듯이 두 개째의 햄버거를 개봉했다. ?음, 그렇군요.? 리진은 자기 몫의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목이 말라서가 아니라 뭔가를 묻 기 전에 오는 긴장감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정말 이걸로 괜찮겠어요?? ?더 사주려고요?? ?아뇨, 그게 아니라…….? ?헤헷, 괜찮아요.? 지크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알아요. 게다가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잖아요. 세상엔 잘못을 한 자신을 쉽게 용서해 버리는 사람이 너무 도 많아요. 리진양이 그런 사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 해요.? ?…….?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일주일 동안 알아온 지크 같지 않았다. 뭔가 철학 적이면서도 어른스러워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저랑 같은 조가 되는 게 처음이네요?? 리진이 손가락을 들며 말했다. 그녀는 뭔가 떠오르면 항상 오른손 검지를 치켜든다. 버릇이었다. ?그 동안 리진양이나 챠오와는 철저히 다른 조로 편성됐죠. 뭐, 일주일 밖 에 안됐지만 말이에요. 제 이모가 워낙 질투가 심해서요.? ?예? 루이 언니가요?? 햄버거를 모두 처리한 지크는 감자튀김으로 손가락을 옮겼다. ?옛날부터 그랬어요. 저랑 다른 여자가 함께 있는 꼴을 두고 보지 못했죠. 10살 때 처크 할아버지랑 어머니 밑으로 입양되면서 처음 만났는데, 그때부 터 저랑 루이는 하이스쿨까지 같이 붙어 다녔어요.? ?입양이요?? ?예, 고아였데요. 처크 할아버지께서 갓난아기인 채로 버려진 저를 구해 고아원에 보내주셨죠. 그리고 10년 뒤에 입양하셨고요. 뭐, 미국이란 나라 가 대한민국과는 달리 입양이 흔하고 가족개념 역시 미묘하게 틀리니까 이 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네요.? 갑작스런 얘기를 들은 리진의 마음은 점차 복잡해졌다. 옆에 있는 남자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화제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때일수록 자연스럽게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루이 언니는 어땠어요? 지금처럼 냉정하고 침착했나요?? 지크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냉정하고 침착하다기 보다는 엘리트 의식이 강했죠. 사람들 앞에서 뭐든 지 잘하려고 그랬고 혹시라도 실수를 하면 그걸 만회하기 위해 남몰래 열심 히 노력했어요. 거기까진 좋은데 사람들을 너무 깔보는 면이 있어서 친구가 거의 없었어요. 따돌림도 많이 당했고… 그럴 때마다 나서서 구해준 게 저 였어요.? ?호오, 정의의 사자였네요?? ?거의 그랬죠. 하지만 저도 루이 덕 많이 봤어요. 숙제나 시험공부는 루이 가 거의 다 책임져줬거든요. 덕분에 낙제점은 면할 수 있었죠. 그래서 생긴 별명이 인형과 기사였어요.? ?어찌 들으면 로맨틱하네요, 후후.? 로맨틱이라는 말에 지크는 뭔가 넘어올 듯한 얼굴로 손을 저었다. ?에이, 얘기만 들었으니 그렇게 느끼겠죠. 실제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요. 그 잔소리 귀신의 옛날 얼굴만 떠오르면… 어휴.? ?하하하, 알았어요. 일이나 해요.? 이른 아침이었지만 A구역은 사람들로 분주했다. 2000년대 전부터 대한민국 의 젊음과 사치, 향락의 전통을 가진 복잡한 지역이었지만 그런 것만이 A구 역의 모든 것은 아니다. 그곳은 건전한 쪽으로 자신의 인생을 발전시켜나가 는 젊은이들의 장소이기도 했다. 항법장치에 의해 자동으로 운행되는 BSP순찰차는 겉으로 보기에 곱게 다니 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차량 사방에 붙은 카메라를 통해 근처 를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오늘 수록된 용의자들의 입체몽타주와 하나하나 대조하고 있었다. 카메라뿐만 아니라 지크와 리진의 눈도 분주했다. 몽타주 대조식 범인추적 시스템이 아직은 완전치 못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걸음걸이가 이상하거나 덩치가 큰 사람이 지나가면 둘의 시선은 여지없이 꽂혔다. 그러기를 두 시간. 조금 지친 듯 지크는 눈을 비비며 한숨을 돌렸다. ?리진양은 왜 BSP가 됐어요? 아버지 때문에 그랬어요?? ?예? 아빠를 아세요?? ?당연히 알죠. 어렸을 때 한번 뵌 적 있어요.? ?어, 그래요? 그럼 저랑 동생과도 만난 적 있나요?? 지크는 잠시 눈동자를 굴렸다. ?아뇨.? 그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한 리진은 자연스레 자신의 얘기를 시작했 다. ?아빠랑 엄마와는 관계없어요. 아빠는 오히려 반대하셨는걸요. BSP가 된 건 순전히 저의 의지였어요.? ?그래요?? ?예. 꼭 BSP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야 제 화가 풀릴 것 같았거든요.? ?…….? 지크는 그녀에게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프 라이버시에 관련된 것은 묻지 않는 그의 성격 탓도 있었지만 상황이 갑작스 레 변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 ?다음 스토리는 투 비 컨티뉴(To be continue)로 해두죠.? 지크는 뒷좌석에 손을 뻗어 그곳에 놓아둔 자신만의 무기, 무명도를 거머쥐 었다. 리진은 깜짝 놀라 브레이크를 밟았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지크는 보란 듯이 턱을 앞으로 움직였다. 그가 가리킨 곳엔 대형 의류매장이 있었다. 여름 맞이 바겐세일이라는 플래 카드로 거의 도배되다시피 한 매장의 모습은 화려하다 못해 대단하기까지 했다. 아니, 그것 말고 더욱 대단한 게 있었다. 베이지색의 양복을 걸친 금발의 남자가 검은 양복의 사내들과 함께 순찰차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찰차의 자판을 두드려 그곳을 확대한 리진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베이지색 양복의 남자는 아침 브리핑 때 봤던 세 명의 남자 중 한 명이었 다. ?잭 레논… 드래곤 잭!? 삑 하는 경보음이 순찰차 안에서 들렸다. 몽타주 대조장치가 뒤늦게 반응한 것이다. 지크는 그 소리를 뒤로 한 채 차에서 내렸다. ?저렇게 기다리고 있는 걸 보니 스토리가 조금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군 요. 내려요.? ?…….? 리진은 침을 꿀꺽 삼키며 문을 열었다. 상대와 갑작스레 맞닥트린 만큼 긴 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크와 리진, 두 BSP는 남자들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들을 주시 하고 있는 A랭크의 워 피겨, 드래곤 잭은 씩 웃으며 검지와 중지를 마주쳤 다. 그 신호에 맞춰 옆에 있던 검은 양복의 청년들이 담배와 불을 대령했 다. 길고 얇은 슬림형의 담배였다. 브랜드 특유의 초콜릿 같은 담배 맛이 그의 입안을 부드럽게 해주었다. 흠뻑 빨아들인 연기를 길게 내뱉은 드래곤 잭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지크 스나이퍼… 현존하는 BSP중 레오나르도 칼킨과 함께 최강의 스트라 이커라 불리는 남자. 후후, 첫 출근에 대한 환영인사가 좀 늦었지만 대신 재미를 듬뿍 주마.? 짙은 담배연기가 그의 시야를 방해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연기를 뚫고 지크의 얼굴이 코앞에 다가왔다. ?쇼핑하러 왔나, 아니면 약을 팔러 왔나?? 그의 질문과 동시에 십여 개의 칼날이 지크의 목과 가슴, 배를 노리고 밀려 들어왔다. 드래곤 잭의 부하들이 어느 순간 아크로바틱한 포즈를 잡은 채 지크를 둘러싸고 있었다. 뒤따라오던 리진은 움찔하여 권총을 뽑았으나 칼날은 지크의 몸속에 들어가지 않았다. 옷깃도 스치지 않았다. 위협의 뜻이 담긴 바리케이드였다. 잭이 부하들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대한민국은 옷이 싸고 좋지. 약을 좋아하는 얼간이들도 많아. 그러고 보니 나에겐 더없이 좋은 나라라고 할 수 있겠군.? 드래곤 잭이 다시금 담배연기를 뿜었다. 지크의 머리는 구름에 덮인 산봉우리 처럼 연기로 뿌옇게 뒤덮였다. ?하지만 둘 다 볼일이 없다. 오늘의 목표는 너다, 지크 스나이퍼.? ?그래?? 짧고 강한 바람이 연기의 벽을 꿰뚫었다. 양손을 청바지 주머니에 꽂은 지크는 불량한 포즈로 잭을 바라봤다. 허리를 굽혀 아래에서 위로 상대를 보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불량배였다. ?이유를 말해보시지, 도마뱀 잭 아저씨?? ?이유?? 잭은 입에 문 담배를 엄지와 검지에 끼웠다. 아주 천천히, 슈퍼슬로우 비디오에 찍힌 주인공처럼 천천히 담배의 끝을 입에서 떼었다. 자세가 워낙 스타일리쉬 (Stylish) 했고 분위기마저 압도적이었기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드래곤 잭에게 시선을 두었다.이윽고 지크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네 시체를 비싸게 사줄 사람이 있거든.? 순간 붉은 실선이 잭의 손가락 사이에서 뻗어나갔다. 탄환처럼 튀어나간 것은 다름 아닌 담배꽁초였다. 담배가 손에서 떠남과 동시에 잭의 앞차기가 터졌다. 기계의 힘을 빌린 가공할만한 파괴력의 발차기였다. 일반인이 그것을 맞는다면 그 자리에서 몸에 구멍이 나거나 신체 일부가 떨어져 나갈 것이다. 지크는 허리를 젖혀 그 공격을 피했다. 머리부터 무릎까지는 일직선이었지만 무릎 아래는 땅과 수직을 이뤘다. 마치 림보(Limbo:수평으로 걸린 장대의 아래를 통과하는 춤)를 하는 듯한 자세였다. 양손은 여전히 주머니 안에 있었다. 게다가 자세를 고정한 채 상대를 바라봤다. 초인적인, 아니 초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묘기였다. 꽁초는 10미터 정도 떨어진 건물까지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꽁초는 벽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 동시에 잭의 엘레강트한 표정을 뚫고 살의가 번져 나왔다. ?아름답게 썰어주마, 지크 스나이퍼!? 그는 뻗고 있던 다리를 굽혀 발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했다. 지크를 그대로 밟으 려는 심산이었다. 지크가 텀블링으로 자리를 떴지만 드래곤 잭의 발은 기어코 내리꽂혔다. 스티로폼처럼 보도블록을 내려앉힌 잭은 양복 상의를 벗어 지크를 향해 던졌다. 모든 동작에 망설임이란 없었다. 대본을 외운 베테랑 스턴트맨처럼 물 흐르듯이 움직였다. 상의는 넓게 퍼져 지크에게 다가왔다. 그냥 던진 게 아 니라 상대방의 시야를 가리기 위해 기술적으로 던진 것이다. ?해보시지!? 지크의 다리와 허리, 상체가 속도를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돌았다. 돌려차기였다. 공격이 꽂힌 곳은 양복 상의였지만 옷은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밀려나지 않았다. 어딘가에 끼인 것처럼 공중에 정지했다. 상의 건너편엔 드래곤 잭이 있었다. 지크와 마찬가지로 차기자세였다. 둘의 발바닥은 양복을 사이에 둔 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대어져 움직이지 않았다.지크는 씩 웃었다. ?나만 시야를 가리는 게 아니지.? 잭도 웃었다. ?그렇군, 그럼 누가 이기나 내기할까?? ?맘대로!? 지크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둘의 발이 기관총처럼 뻗어나갔다. 둘은 서로를 보지 못한다. 잭이 입고 있던 양복은 다른 사람이 입으면 코트가 될 것 같을 정도로 사이즈가 컸다. 시야를 가리는 장막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도 둘의 발은 단 한번의 뒤틀림 없이 맞아떨어졌다. 세계의 모든 무술이 종합된 듯한 둘의 발차기 퍼레이드로 인해 양복 상의는 공중에서 서서히 분해 되었다. ?차앗!? ?하앗!? 쌍방의 기합만큼이나 커다란 소리가 터졌다. 다시금 마주친 둘의 발 사이에 양복의 모습은 없었다. 대신 베이지색의 헝겊조각들이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지크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젖혔다. ?여기까진 무승부인가?? ?그렇겠지.? 둘은 서서히 발을 떼었다. 그 사이에 집혀 있던 마지막 헝겊이 하늘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잭은 준비운동을 하듯 부딪쳤던 쪽의 발목을 빙빙 돌렸다. 지크의 목이 양쪽으로 크게 움직였다. 우두둑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잭이 말했다. ?프롤로그는 끝났다, BSP보이.? ?이쪽이 할 대사야, 아저씨.? 지크는 합성가죽의 펑크글러브를 입으로 물어 바짝 당겼다. 잭은 목 뒤로양손을 넘겼다. ?약속대로 썰어주마.? 잭은 만세를 부르듯 손을 위로 뻗었다. 뭔가 반짝 했지만 구경꾼들은 그가뭘 했는지 알지 못했다. 반면 동체시력이 월등한 리진은 긴장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나왔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풍기의 날개처럼 무딘 것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공중에서 배회하던 두 개의 커다란 칼날이 잭의 손에 잡혔다. 분자를 가르는 칼날, 나노 블레이드였다. 아니, 팔뚝 아래에 장치됐다. 그가 팔을 휘두르자 공기가 베이는 깔끔한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왼팔은 뻗고 오른팔은 위로 굽혔다. 칼날과 팔을 이용해 커다란 ?ㄷ?자를만든 잭은 도발하듯 노란 수염이 무성한 턱을 끄덕였다. ?오너라. 내 수고를 덜어주는 거다.? ?아, 숨쉬기 싫다고?? 가볍게 받아친 지크는 무명도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다리를 벌리고 몸을 숙였다. 칼집을 쥔 왼손을 45도 좌측 밑으로 내렸다. 오른손은 검막(劍膜) 바로 밑에 가져갔다. 발도(拔刀)자세였다. ?흡!? 그의 코와 입에서 숨이 멎는 소리가 났다. 있는 대로 자세를 낮춘 그의 몸 위로 사마귀를 연상시키는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섬광과 함께 양팔을 좌우로 펼친 잭과 지크가 아슬아슬하게 교차해지 나갔다. 둘은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서로가 빠르고 베는 무기를 사용하는 만큼 붙어있으면 위험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좀 더 원초적인 이유가 있었다.―끼익. 속을 긁는 듯한 쇳소리와 함께 지크의 옆에 있던 철제 가로등이 3등분되며둘 사이에 넘어졌다. 일반 검도를 배운 사람이 진검으로 대나무를 자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광경 이었다. 가로등의 단면은 뭔가를 바른 것처럼 반짝였다. 표면을 만져본 사람은 없었으나 유리처럼 매끈했다. 강철을 이렇듯 단숨에, 깔끔하게 벨 수 있는 건 나노테크놀로지로 만들어진 칼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의는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고 했던가. 지크의 이끌림에 맞춰 무명도의 칼날이 공기를 맞았다. 그 어떤 금속도 흉내 낼 수 없는 파란 색의 반사광과 깨끗한 금속음이 구경꾼들의 감각을 사로잡았다. ?무명도인가?? 잭이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말했다. ?소문은 익히 들었다. 멕시코와 일본 녀석들은 특히 몸서리를 치더군. 그 녀석 역시 강철을 자를 수 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궁금하면 몸으로 알아보시지. 아저씨도 철이잖아.? 지크의 칼끝이 도발적으로 움직였다. 잭은 웃었다. ?말보다는 힘으로 타일러야 하는 타입이군. 그럼 계속 해보자, 지크 스나이퍼.? 그가 다시 ㄷ자의 자세를 취했다. 지크는 대답대신 땅을 박차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쌍방의 칼날은 부딪히지 않았다. 공기만을 가를 뿐, 제대로 된 일격은 날리지 못했다. 하지만 둘의 옷과 얼굴 등엔 베인 자국이 생겨났다. 칼날이 초고속으로 공기를 가를 때 생기는, 면도날보다 날카로운 진공의 파편이 둘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둘이 싸우는 동안 리진은 시민들을 대피시켰다. 둘의 전투가 지금보다 격렬해지면 잘리는 것은 가로등뿐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시민들은 그런 구경거리를 쉽게 놓치려 하지 않았다. 덕분에 리진은 지원요청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오는 통신까지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한편 다른 하나의 수색지역인 강북의 S구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강남 A구역에 드래곤 잭이 나타난 대신 그곳에선 듀어 존슨, 일명 피어셔라불리는 워 피겨가 출현해 있었다. 그런데 둘의 방식은 너무도 달랐다. 조용히 지크를 기다린 드래곤 잭과 달리 피어셔는 전용의 트레일러에서 내리자마자 부하들과 함께 총기를 난사하며 사거리 중앙을 점령했다. 총에 맞은 일반시민은 없었지만 건물과 기타 기물의 파손은 막대했다. S구역의 자랑거리이기도 한 기마경찰은 어디에도 없었다. 주인을 잃고 거리를방황하는 말 몇 마리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의도적인 행동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얘들아, 더욱 더 세게 밀어붙여라! 지크라는 너구리 녀석은 웬만한 연기로는 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검은 양복의 사내들을 지휘하는 피어셔의 모습은 압도적이었다. 인간의 외모를 가진 드래곤 잭과 달리 피어셔는 특수헬멧을 쓴 머리를 제외한 전신이 기계뭉치로 이루어져 있었다. 키는 3미터에 가까웠고 몸무게도 거의 1톤 정도는 되어 보였다. 장갑으로 싸인 팔다리는 기형적으로 두꺼웠고 몸뚱이 역시 소형 자동차를 연상시킬 정도로 컸다. 양팔에 장치된 20미리 발칸포의 위용 역시 피어셔의 트레이드마크인 만큼 대단했다. 전봇대를 연상시킬 정도로 커다란 6문의 총열뭉치는 가공할 만한 속도로 회전하며 철갑탄을 뿜어냈다. 목표가 된 건물과 차량은 순식간에 벌집으로 변해 바닥에 내려앉았다. 케빈과 그렌, 챠오가 뒤늦게 도착했지만 셋은 그들에게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다. 일단 피어셔의 공격이 워낙 거셌고 그 부하들의 무장 역시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이거 탱크라도 오지 않으면 힘들겠는데?? 동료들과 함께 건물 뒤에 숨은 그렌은 힘든 얼굴로 중얼댔다. ?이런 식으로 마주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케빈은 담배의 필터를 앞니로 씹으며 투덜댔다. 얼굴은 웃고 있었기에 그렌처럼 진지한 맛은 없었다. ?자네 실력으로 어떻게 안 되겠나? 나갈 구멍이 안 보이는군.? 그렌의 물음에 케빈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무기를 퍼부어도 피어셔의 장갑을 뚫지 못해요. 장갑차용 램제트 라이플(Ram Jet Rifle)이 아니면 헬멧도 날리기 힘들죠. 지원이 올 때까지 부하들부터 처리하는 게 좋을 걸요?? ?그럼 그렇게 하지. 챠오, 리진과 지크에게는 연락해봤나?? ?안 됩니다.? ?뭐? 연락이 안 된다고?? 챠오의 무표정하면서도 진지한 얼굴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통신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오퍼레이터들에 의하면 드래곤 잭과 교전 중에 있다고 합니다.? ?드래곤 잭? 이런 젠장!? 그렌은 답답한 듯 손으로 머리를 덮었다. ?녀석들이 원하는 게 도대체 뭐지? 이건 약을 팔러 온 자들의 모습이 결코아니야!? ?A랭크의 워 피겨가 두 군데에서 동시에 난리를 치는 것 역시 흔하지 않죠.? 계속 편할 것처럼 보였던 케빈의 얼굴도 조금은 진지해졌다. ?제가 전방에서 녀석의 부하들을 처리해볼 테니 선배님과 챠오는 뒤로 돌아 들어가십시오. 피어셔 녀석은 무게 때문에 방향전환이 느릴 테니 잘 하면 우리 셋만으로도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좋아, 그럼 해보지.? 그렌과 케빈은 각자의 무기를 점검하며 나갈 태세를 갖췄다. 그때 챠오가 둘 앞에 손을 번쩍 내밀었다. ?응? 왜 그래, 챠오?? 그렌의 물음에 챠오는 말 대신 제스처로 전방을 가리켰다. BSP와 시민들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모두의 시선 속엔 도로 중앙선을따라 사거리를 향해 걷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있었다. 회색의 정장에 검은색 목T를 입은 그 남자는 거리에 널린 건물파편과 사방으로 날아가는 탄환이 무섭지 않은 듯 주저 없이 계속 걸음을 옮겼다. 건물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그 남자의 파란 장발이 옆쪽으로 너울댔다. 그로 인해 드러난 남자의 얼굴은 사람들의 숨을 한순간 멎게 했다. 황금비를 정확히 맞춘 조각 그 자체였다. 190센티는 족히 넘어 보이는 큰키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남자로서 가질 수 있는 미모의 극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그 얼굴엔 분노나 안타까움 등의 감정은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 더없이 편안하고 침착했다. 그의 거침없는 전진에 피어셔와 부하들의 사격이 멈췄다. 피어셔는 어이없다는 듯 자신의 굵은 턱을 씰룩이며 외쳤다. ?어이, 거기 있는 애송이! 뭘 믿고 이쪽으로 오는지 몰라도 어서 꺼져라! 너 같은 소시민에겐 볼 일이 없다!? ?…….? ?꺼지라고 했지 않나! 그렇지 않으면 가루로 만들어 주겠다!? 피어셔의 오른팔에 붙은 기관포가 불을 뿜었다. 그로 인해 남자의 앞에 위치한 아스팔트 일부가 진흙처럼 파였다. 그런 위협사격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감은 듯 만 듯한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피어셔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1회용 가스라이터였다. 피어셔와 그의 부하들은 더욱 어이없어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BSP와 시민들까지 당황스러워했다. 비공식 사건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남자는 라이터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칙 하는 가스소리가 크게 터지는가 싶더니 이내 긴 불꽃이 남자의 손에서 일어났다. 손뿐만 아니라 남자의 전신이 불꽃에 휘말렸다. ?새로운 분신자살 방법인가?? 케빈은 잠깐 동안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 착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없는 공간으로 사라졌다. 불꽃은 남자의 옷을 모두 태웠다. 일부 여성들은 얼굴만큼이나 예술적인 알몸이 나올까 생각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불꽃은 만화나 판타지 쇼에서나 나올 법한 멋진 디자인의 코트로 바뀌었다. 불꽃의 색보다 더욱 진한 붉은 색이었다. 팔과 다리엔 간단한 갑주까지 생겨났다. 남자의 손아귀에서 일어나던 불꽃은 창의 모습을 갖췄다. 특이한 적갈색 표면에 기묘하게 꼬인 창의 끝이 인상적이었다. 길이도 3미터 이상이었다. ?태극형제!? 케빈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최근 출몰하는 수수께끼의 남자들 중 한 명과 인상착의가 비슷했다. 그가 잠시 후 초인적인 능력마저 펼친다면 케빈의 외침은 사실이 될 것이다. 푸른 장발의 남자는 왼손 엄지와 검지를 모아 입술에 가져갔다. ―휘익. 휘파람 소리가 다이내믹하게 거리를 울렸다. 그에 맞춰 거리를 방황하던 경찰 소속의 말 중 한마리가 그 남자를 향해 뛰어왔다. 말의 모습엔 힘이 넘쳤다. 방금 전 주인을 잃은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눈빛은 초롱초롱했고 자세도 안정되었다. 말이 질풍처럼 남자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대로 거리를 질주하는 말의 등엔 자세를 숙인 남자의 모습이 있었다. 그가 어떻게 말에 올라탔는지 제대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계식 눈을 가진 그렌과 피어셔 조차도 희미하게 볼 수 있었을 정도였다. ?이런, 쏴라! 가루로 만들어버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피어셔는 즉시 기관포에 불을 댕겼다. 그의 부하들 역시 그 정체불명의 기사(騎士)를 향해 탄을 쏟아 부었다. ?…….? 남자는 창을 든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와 동시에 와이드TV의 화면과도 같은 직사각형의 불의 장막이 말의 코앞에 펼쳐졌다. 철근콘크리트조차 뭉개던 피어셔의 탄환이 순식간에 숯덩이로 변했다. 부하들의 탄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쏘고 또 쏴도 화염의 커튼은 그 자태를 유지했다. ?이럴 수가!? 그렌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케빈의 입술에 달라붙어있던 담배는 지지할 곳을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챠오의 심장박동수도 크게 올라갔다.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었다. 전차의 장갑도 꿰뚫는 20미리 철갑탄을 순식간에 탄소덩어리로 만드는 불의 장막이라는 건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남자는 오른손을 다시 뻗었다. 그러자 방패의 역할만을 할 것 같았던 장막이 폭염의 해일로 변해 거리를 내달렸다. ?으아악!? 피어셔와 그의 부하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파괴해 쓰러트린 거리의 파편들이 그들이 발목을 잡는 트랩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피어셔와 그 일당들은 폭염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들을 머금은 화염의벽은 폭발하여 지옥의 도가니로 변했다. 그 연옥 속에서 남자들이 울부짖었다. 양복과 속옷에 이어 피부까지 타들어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피부가 눌어붙지 않고 분해 되어 사라졌다. 마지막에 남은 것도 인간의 골격이 아니라 그와 비슷하게 생긴 기계뭉치였다. 워 피겨의 구성원 모두가 사이보그라는 말은 역시나 사실이었다. 골격은 그 불길 속에서도 무사했지만 피어셔의 부하들은 하나 둘씩 쓰러졌다. 전신 사이보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인공 두개골 속의 뇌가 찜통 속의통닭신세가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피어셔는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어 불을 빠져나왔다. 전신에서 연기가 뿜어졌다. 장갑판과 그 위의 페인트가 타는 것이다. 검녹 색이었던 그의 몸체는 대장간의 쇠처럼 시뻘겋게 달궈져 있었다. 그는 소화전을 발로 걷어찼다. 수 미터의 높이로 뿜어진 물은 비가 되어 피 어셔의 몸에 떨어졌다. ?아아, 기분 좋군.? 피어셔는 식어가는 몸의 느낌이 좋은 듯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아니, 미 소를 짓는 것 같았다. 그의 피부조직 역시 부하들의 것과 마찬가지로 훌러 덩 타 없어진 상태였다. ?최고의 사우나였다. 네이팜탄 대응장치가 없었다면 다른 녀석들처럼 뇌가 익어버렸을 거야. 그건 그렇고, 넌 누구지? BSP냐, BH냐, 아니면 동화에서 뛰쳐나온 왕자님이냐?? ?…….? 남자는 대답대신 창을 돌려 기마전(騎馬戰) 자세를 취했다. 피어셔의 헬멧 속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쿠쿡, 문답무용(問答無用)인가? 갈수록 마음에 드는 녀석이군.? 피어셔는 왼팔의 기관포 세트를 떨어뜨려냈다. 대신 팔 안쪽에 장치된 길이 1미터의 초대형 나이프가 반월을 그리며 튀어나왔다. 오른팔의 기관포와 이 상하리만치 어울리는 군용 사이보그 나이프였다. ?잭 녀석만큼 칼을 잘 쓰진 못하지만 하품할 수준은 아닐 테니 걱정하지 마라. 자, 오너라. 말을 탄 왕자님이 이길지, 아니면 이 괴물이 이길지 해 보자구.? ?…….? 남자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그와 동시에 피어셔의 거체가 아스팔트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우오오오!? 괴성을 지르며 달리는 피어셔의 모습은 가히 원초적이었다. 반면 말을 모는 남자의 모습은 승마의 마장마술(馬場馬術)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예술적이었다. 이윽고 두 남자의 상반된 모습이 충돌했다. 피어셔의 나이프와 남자의 창이 불꽃을 내며 마찰했다. 3미터에 가까운 키 덕분에 피어셔는 말을 탄 상대와 대등한 높이에서 싸울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300마력에 가까운 피어셔의 무시무시한 힘에도 불구하고 상대방 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말 역시 다리만 조금 움직일 뿐, 힘겨워하지 않았 다. ?내 시각센서가 잘못됐나?? 그렌이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댔다. 케빈 역시 눈을 비벼댔다. ?저도 안과에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정도로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가장 경악하고 있는 사람은 피어셔였다. 그는 지금의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 는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헬멧 속의 인조 안구가 크게 흔들렸다. ?뭐, 뭐냐! 어째서 밀리지 않는 거냐! 나는 무려 300마력의 힘을 낼 수 있 단 말이다!? ?그거 좋겠군.? 그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물론 피어셔는 그런 것에 감탄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남자의 두상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악력으로 그의 머리를 으깰 심산이었다. 남자는 고삐를 잡고 있던 손으로 피어셔의 손을 막았다. 손의 크기와 양감 은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으나 이번에도 피어셔의 힘은 통하지 않았다. 남자는 손을 내려 피어셔의 팔목을 잡았다. ?이유를 말해라.? ?이, 이유라니, 무슨 말이냐!? 감겨있는 듯한 남자의 눈이 슬그머니 뜨였다. ?어째서 지크 스나이퍼를 찾고 있나.? ?크윽…….? 그의 인공성대가 움직이진 않았지만 뇌는 그렇지 않았다. 피어셔는 하마터 면 자신도 모르게 말을 꺼낼 뻔 했다. 상대의 흑갈색 눈동자는 그만큼의 위압감을 던져주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의 공포를 떨쳐내려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너 같은 기생오라비에게 들려줄 말은 없다!? ?그런가?? 남자의 말이 끝남과 함께 피어셔의 팔이 조금씩 밀렸다. 피어셔는 있는 대 로 힘을 올렸다. 이대로 밀린다면 그 후의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자존심까지 건 노력에도 불구하고 힘의 균형은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피어 셔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오른팔의 기관포를 움직였다. 그때 우직 하는 소리가 그의 오른팔에서 들렸다. 남자에게 잡힌 손목이 알 루미늄 캔처럼 크게 뒤틀리고 있었다. ?으윽, 아아악!? 피어셔는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으나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까보다 더 큰 소리가 터졌다. 90도로 꺾인 팔목의 장갑판 사이로 실린더 의 기름이 길게 뿜어졌다. 그 높이와 모습은 동맥이 터진 사람의 그것과 비 슷했다. ?이, 이런 괴물 같은 녀석!? 피어셔는 부러진 팔을 부여잡은 채 뒤로 물러섰다. 남자는 말에서 내려 그 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다시 기회를 주겠다. 지크 스나이퍼를 찾는 이유를 말해라.? ?닥쳐라! 나는 자랑스러운 워 피겨의 A랭크 전사다! 의뢰사항을 남에게 말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를 죽일 수는 있어도 내 명예를 더럽힐 수 는 없을 것이다!? ?…….? 남자의 검붉은 장창이 피어셔의 복부에 꽂혔다. 팔에서 나온 것과 비슷한 색의 오일이 그 틈새에서 뿜어졌다. 남자는 창을 수직으로 세웠다. 피어셔 역시 그대로 들어올려졌다. 창끝에 매달린 피어셔는 이런 것을 예상한 듯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럼 명예를 택해라.? 남자는 창 아래로 바닥을 찍었다. 그와 동시에 큰 폭발이 창끝에서 일어났 다. 공중으로 튀어 올라간 피어셔의 거체는 화염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이윽 고 대 폭발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 일을 끝낸 남자는 창을 잡은 손을 활짝 폈다. 그의 창은 처음처럼 한줄기 화염으로 변해 이내 사라졌다. 그는 자신과 함께 잠시 수고한 말의 머리와 목을 쓰다듬었다. 말 역시 머리 를 남자의 몸에 부비며 아쉬움을 표현했다. ?어이, 이젠 우리와 얘기를 좀 했으면 하는데?? 말의 뒤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남자의 시선이 간 곳엔 검고 큰 리볼버 권 총을 든 BSP, 케빈이 있었다. 케빈뿐만 아니라 그렌과 챠오도 전투준비를 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케빈은 새로 핀 듯한 담배를 씹으며 말했다. ?설득력이 떨어질지 모르지만 예의상 말하도록 하지. 손들고 움직이지 마. BSP다.? ?…….? 남자는 예상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케빈은 씁쓸히 웃었다. ?좋아, 손들라는 말은 취소할게. 대신 우리랑 같이 좀 가줘야겠어, 태극형 제씨. 당신과 당신 동료 덕분에 우리는 5일 동안 엑스트라 역할만 했지. 아, 당신이 죄를 졌다는 건 아니야. 대신 얘기를 좀 나눠보자는 거지. 잘만 되면 BSP에 무료로 가입시켜줄 수도 있어.? 남자의 표정이 꿈틀했다. ?비에스피… 당신들의 이름이오?? 생각을 벗어난 그의 반응에 케빈은 조금 황당한 듯 그렌과 챠오를 번갈아 쳐다봤다. 방금 그의 말은 BSP를 모른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이번엔 그렌이 나섰다. ?당신들이 우리 BSP대신 수도시민의 귀중한 인명을 지켜준 것에 대해선 수 도방위 BSP 전체를 대신해 고맙게 생각하오. 하지만 우리는 궁금하오. 물론 어째서 그런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또 당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선 묻지 않겠소. 다만 한 가지, 당신들이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선 매우 궁금하오. 말해줄 수 있소?? ?…….? 남자는 대답 대신 등을 돌렸다. 발끈한 케빈은 자제력을 잃고 총의 해머를 당겼다. ?나한테 등을 보이면 죽어!? ?케빈!? 그렌과 챠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케빈의 총은 불꽃을 뿜었다. 그리고 탄환 은 남자의 등판을 그대로 뚫었다. 그렌과 챠오는 총상을 입은 시체를 예상하고 고개를 돌리려 했다. 허나 쓰 러지는 남자의 몸은 불덩이로 변해 그대로 사라졌다. ?서, 선배님?? 충동적으로 총을 쐈던 케빈은 넋을 잃은 얼굴로 동료들을 바라봤다. 그렌은 한숨을 쉬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래도 우리가 건들 수 있는 존재는 아닌 것 같군. 그나저나 오늘은 약 을 안 먹고 왔나? 왜 그랬어?? ?…죄송합니다.? 케빈은 고개를 숙였다. 권총을 잡은 그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챠오는 주위를 둘러봤다. 표정이 워낙 없어 겉으로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 는 고양이처럼 신체의 모든 감각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었다. 반면 그렌은 시원섭섭한 얼굴로 무기를 거뒀다. ?그 남자, 죽은 걸까?? ?예?? 선배를 돌아본 케빈의 얼굴은 어느새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잠시 할 말을 잃은 그렌은 곧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순찰차에 가서 쉬게, 케빈. 보고는 우리가 하지.? ?예.? 케빈은 권총을 품안에 넣으며 거리 저편으로 걸어갔다. 그렌은 그의 힘없는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 일은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아물지 않을 상처라는 의사의 말이 맞긴 맞나 보군. 챠오, 기록은 다 해놨나?? ?…….? ?챠오?? 챠오는 한 건물의 옥상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렌의 부름을 뒤늦게 인식한 그녀는 권총을 내리며 대답했다. ?기록 작업에 문제는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아닙니다. 복귀하겠습니다.? 챠오는 짧게 경례한 뒤 순찰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가 특출한 감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그렌은 생체레이더로 즉시 주위를 확인 해 봤다. 그러나 눈에 띌만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군.? 그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후배들의 뒤를 따랐다. 챠오가 보고 있던 건물 옥상에 불꽃이 번쩍였다. 그곳에서 나타난 것은 케 빈의 총에 맞은 줄 알았던 파란 장발의 남자였다. 그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옥상 난간에 한쪽 발을 디딘 채 아래를 내려다봤 다. ?좋은 동료들 같군.? 그의 눈에 들어온 BSP들은 보고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무슨 이유 때 문인지 뒤늦게 도착한 경찰들은 오랫동안 공포에 떨었던 시민들로부터 원성 을 사느라 정신이 없었다. 잠시 후 돌아선 그는 멀리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중얼댔다. ?오늘도 만나지 못하는 건가?? 이윽고 또 한 번의 불꽃이 옥상에서 일어났다. 그 직후 파란 장발 남자의 모습은 옥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같은 시각, 지크와 리진이 있는 강남 A구역은 이미 전경이 투입된 상태였 다. 리진을 괴롭히던 수많은 구경꾼들은 투입된 전경들의 요청에 따라 전투지역 을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피신 ― 쫓겨났다는 표현이 옳다 ― 했다. 덕분에 리진은 수고를 덜었지만 지크의 수고는 여전했다. 드래곤 잭과 지크의 격전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격렬하기 그지 없었다. 반경 50미터 내의 가로등과 기타 시설물은 이미 깨끗이 잘려 바닥을 굴러다 녔고 건물들 역시 주인들을 쓰러지게 할 정도로 칼집이 나 있었다. 둘의 빠른 움직임은 둔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드래곤 잭이야 사이보그니까 피로감이 없다 치지만 그렇지 않은 지크가 순 간시속 400km 이상의 초고속 격투를 15분 이상 소화하면서도 숨 한번 몰아 쉬지 않는 것은 대단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엄청난 운동량이네? 약이라도 먹은 거 아냐?? PDA에 내장된 카메라로 현장을 찍던 리진은 혀를 내둘렀다. 그녀가 지금까 지 만난 무술인 중에서 저런 모습을 보여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전 BSP 중 최강의 육탄전투력 소유자라는 이름은 허구가 아니었다. 전경이 거리를 정리하긴 했지만 건물 안엔 여전히 많은 구경꾼들이 있었다. 모두는 눈에 보이는 멋진 장면이 터질 때마다 탄성을 질렀다. 파란 재킷을 입은 금발청년의 다이내믹한 움직임과 양팔에 칼날을 단 사나이의 스타일리 쉬한 자세는 대한민국에 전해지는 말처럼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있는 게 아 니었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코웃음을 치는 사람이 있었다. 카페의 창가 끝에 홀로 앉은 그 남자는 턱을 괸 채 지크의 싸움을 지켜봤 다. 그가 머리를 흔들었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올 듯한 엄청난 붉은 장발이 그 의 T와 검은색 진위로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정돈되거나 다듬어지지 않았지 만 그 자체만으로도 멋은 충분했다. 소매 없는 마색의 T밖으로 적동색의 근육질 팔이 불끈댔다. 가장 두꺼운 부 분의 둘레는 50센티에 가깝거나 그 이상으로 보였다. 지크와 잭의 싸움이 있기 전까지 주인의 얼굴과 함께 카페 안의 사람들을, 특히 여성들을 사로 잡고 있던 장본인이었다. 또 한번의 탄성이 사람들 사이에서 터졌다. 지크의 일격을 막은 드래곤 잭 이 크게 밀려 의류매장 속으로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지크는 이를 악물고 매장을 향해 돌진했지만 이번엔 그가 밖으로 튕겨져 날 아갔다. 넘어질 뻔한 것을 핸드스프링으로 막은 그는 착지 후에 고개를 흔 들었다. 쉽지 않은 상대라는 뜻이었다. 보기에도 일진일퇴 그 자체였다.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지만 붉은 장발의 남자는 또다시 코웃음을 흘렸다. ?단순한 광대군. 저런 기계인형을 상대로 저것 밖에 못하다니, 형편없어. ? ?어이, 거기 있는 오빠.?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코앞까지 흘러내린 그의 붉은 머리 사이로 검은 눈 동자가 움직였다. 그를 부른 장본인은 속옷에 가까운 미니스커트 차림의 한 여성이었다. 그녀 는 비슷한 차림의 여자친구들과 함께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 아까부터 저쪽을 계속 비웃고 있는데, 당신은 저렇게 할 수 있어? 저 BSP오빠처럼 싸울 수 있냐고?? ?…후.? 남자는 실소를 터트리며 시선을 돌렸다. 화장기 짙은 그녀들의 얼굴이 꿈틀 했다. ?뭐야, 얼굴만 잘생기면 다야? 어디서 운동 좀 하고 왔다고 뻐기나본데, 당신 같은 사람 어지간한 헬스클럽에 가면 흔해! 얼굴은 어디서 좀 뜯어 고 쳤을 테고. 얼마 들었어? 나 좀 소개시켜 주시지? 꽤 잘하는 병원 같은데… ….? 그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발끈한 여성은 주스가 든 유리컵을 그대로 집어던졌다. ?사람 무시하지 마!? 순간 펑 하는 소리가 남자의 테이블에서 터졌다. 남자의 얼굴을 향해 날아가던 유리컵은 테이블 위에 거꾸로 처박혀 있었다. 테이블의 절반을 파고든 그 컵 안엔 담겨있던 주스가 그대로 머물고 있었 다. 남자는 위로 향한 컵의 바닥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그의 준수한 얼굴엔 카 페의 구경꾼들 전부를 얼어붙게 만들 만큼 섬뜩한 미소가 흘렀다. ?너 같은 쓰레기의 짖어댐에 내가 꼭 반응을 해야겠나? 직접적으로 피해를 준 게 아니라면 가만히 계시지. 토막 내서 쓰레기봉투에 담아버리기 전에 말이야.? 건달이나 양아치가 그랬다면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겠지만 반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생전 느껴보지 못할 실전의 살기였다. 그 위압감에 사람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알량한 자존심으로 이겨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 사이 거리의 상황은 조금 변했다. 드래곤 잭이 싸우다 말고 핸드폰을 꺼 내든 것이다. 지크는 어이가 없는지 전의를 상실한 채 팔을 늘어트렸다. 리진 역시 입술 끝을 부르르 떨었다. 한편 전화를 받는 드래곤 잭의 얼굴은 점차 흙빛으로 변했다. 동료이자 전 우인 피어셔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정말인가?? 그는 소식통에게 다시 한번 확인을 부탁했다. 하지만 소식통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피어셔는 5분 전,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살해당했소. BSP인지 경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덕분에 작전이 변경됐소. 어르신이 부르시니 지금 즉시 돌아 오시오.? ?…….? 통화의 끝을 알리는 전자음이 들렸다. 휴대폰의 폴더를 닫은 드래곤 잭은 전의가 없음을 알리듯 나노 블레이드를 등 뒤에 넣었다. ?미안하게 됐군, BSP보이.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오늘의 일은 나 중에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군.? ?뭐?? 지크의 눈썹이 불균형하게 일그러졌다. 넝마가 된 그의 파란색 재킷 사이로 팔 근육이 불끈댔다. 오랜만에 만난 좋은 상대를 이대로 보내기엔 그의 투 지가 가만있지 못했다. 그의 굶주림은 이기든 지든 결판을 내야만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드래곤 잭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동료들에게 들어보도록. 그럼 다음에 만나자, 보 이.? ?누구 맘대로 가겠다는 거지, 아저씨?? 드래곤 잭의 어깨 위에 무명도의 날이 올라왔다. 잭의 발걸음은 곧 멈췄다. 지크는 상대의 뒤통수를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운동 할 거 다 했으니 그냥 가시겠다고? 여기가 무슨 헬스클럽인줄 아나? 미안하지만 끝을 내고 가셔야겠어, 도마뱀 잭 아저씨.? ?후후, 심정은 이해한다.? 잭은 유리그릇을 검사하듯 손가락 끝으로 칼을 튕겼다. 팅 하는 금속음이 그와 지크 사이에 울렸다.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미뤄야 한다. 미루는 것뿐이야. 도망 치지도, 숨지도 않는다. 만약 의뢰가 취소된다 해도 너와의 대결은 꼭 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아저씨 말을 어떻게 믿지?? 지크는 무명도를 칼집에 넣으며 물었다. 드래곤 잭은 낮게 웃었다. ?그럼 이걸 받아라.? 잭은 두 개의 나노 블레이드 중 하나를 꺼내 지크에게 내밀었다. ?가지고 있어라. 내가 그걸 받으러 올 때가 결전의 날이다.? 의외의 물건을 저당 잡은 지크는 진지한 미소로 답했다. ?맘에 들었어, 아저씨.? 드래곤 잭과 그의 부하들은 골목으로 사라졌다. 전경들이 허겁지겁 뒤쫓았 지만 그들은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전경들의 통행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사람들이 물밀듯 거리로 쏟아졌다. 그 중에 꽤 많은 사람들이 거리 한 가운데에 있는 지크를 향해 달려갔다. 그럴 것을 미리 대비한 리진은 재빨리 지크의 팔을 잡아당겨 순찰차로 이끌 었다. 순찰차는 연예인을 실은 승합차처럼 훌쩍 출발했다. 차량의 방향까지 미리 바뀐 것을 봐서 리진의 치밀한 계획임을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신인 BSP를 가까이에서 보려 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리진은 A구역을 대강 벗어나자마자 항법장치에 운전을 맡겼다. 피곤해서가 아니라 오늘의 일을 따지기 위해서였다. ?이봐요 지크 스나이퍼 씨!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예?? 잭이 맡긴 나노 블레이드를 보고 있던 지크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어깨선을 따라 나노 블레이드의 끝이 리진의 턱 아래까지 다가왔다. ?으악! 조심해요!? 반사적으로 칼날을 피한 리진은 더욱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신이 오늘 뭘 했는지 알아요? 민간과 대한민국 정부의 기물 및 건물을 파손을 했어요! 그것도 심각하게! 쓰레기차가 실수로 구멍가게를 갔다 박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손해를 입혔단 말이에요!? 잭의 칼날을 뒷좌석에 던진 지크는 김이 빠진 콜라를 쭉 빨았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에이, 사람 목숨이 날아가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BSP규칙에도 민간인의 생명을 우선으로 한다, 라고 되어있었어요. 저는 드래곤 잭으로부터 시민들 을 구하기 위해…….?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당신은 드래곤 잭과 싸우는 걸 즐기고 있었 어요! 그것 때문에 가로등이든 쓰레기통이든 가리지 않고 베어버렸고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크는 멋쩍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다음부터 주의할게요.? ?진짜요?? 리진이 의심어린 눈을 했다. 지크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배시시 웃어버렸다. ?약속은 못해요.? ?…….? 리진은 결국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쳤다. ?보고부터 하자. 보고를 하면서 냉정을 되찾는 거야.? 리진은 주관제실과의 통신을 열었다. 연결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오늘 일 어난 상황을 머릿속에서 차근차근 정리했다. 한편, 그녀의 분위기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지크는 화재를 바꿔보 려는 듯 농담을 던졌다. ?저기, 만원에 두 판 오는 동네 피자를 설사 나도록 먹어본 적 있나요?? 순간 리진의 표정에 공허함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이상한 세계로 여행을 떠 난 리진의 의식은 잠시 후 불이 붙은 채 주인에게 돌아왔다. ?무슨 소리에요, 그게! 당신 도대체 뭐야! 뭐냐고!? ?뭐라뇨, 당신 동료죠.? ?동료라는 사람이 동네피자랑 설사 얘기를 왜 하는 거야! 지금 상황이 어 떤 상황인지 알기나 해!? ?아니, 나는 리진양의 분위기가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분위기 전환을 좀 해보려고…….? ?그런 지저분한 분위기 전환은 필요 없어!? ?거 참, 소리는 왜 지르고 난리야! 안 좋으면 안 좋다고 말로 하면 어때서 !? ?뭐? 당신, 지금 나랑 붙어보자는 거야!? ?자신 있으면 해 보자고! 차 멈추란 말이야!? 이후 전개된 그들의 대화는 1시간 뒤, 긴급 브리핑이 열린 회의실에서 그대 로 재현되었다. 자신이 통신을 열어뒀다는 사실을 깜박 잊은 리진의 실수였 다. 처크는 자신의 의자에 붙은 스위치를 다시 눌렀다. 통신기록의 재생이 끝난 회의실의 분위기는 대한민국 수도방위지부 BSP가 창설된 이래 가장 최악의 경우를 달렸다. ?하아.? 처크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의 손과 얼굴 사이에서 뜨거운 김이 세어 나왔다. 최고책임자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 리진의 안색은 빠르게 흙빛으로 변했 다. 반면 사건의 주범인 지크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편안한 얼굴이었다. ?역시나.?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녀는 이런 일이 터질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레니에 이어서 지크를 가장 오랫동안 접한 여성이 그녀이니 그럴 법도 했다. 이윽고 처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크.? ?네?? ?싸우는 건 좋아. 팀워크를 위해선 작은 다툼도 필요하지. 그런데 왜 공개 적으로 싸워야 하는 거지? 그것도 UN 데이터베이스에 직접 저장, 관리되는 상황보고용 통신망을 이용해서 말이야.? 지크는 오리처럼 입술을 내밀었다. ?제가 안 켰어요.? 처크의 손이 슬쩍 내려왔다. 드러난 그의 눈엔 엄청난 기운이 도사리고 있 었다. ?그래, 보고 중에 싸움이 날 수도 있지. 인간은 가능성의 동물이니 말이 야. 하지만 왜 그런 저급한 대사가 들어가야 하지? 동네피자는 그렇다 쳐도 액상에 가까운 대변의 줄임말(설사)이 왜 나오는 건가?? 지크는 흠칫 놀라 변명을 늘어놨다. ?아니, 저는 리진양이 조금 긴장하고 화가 난 것 같아서 분위기 전환을 좀 해보고자…….? ?…….? 잠시 그를 쳐다본 처크는 다시 한숨을 쉬며 얼굴을 덮었다. ?루이, 문제가 된 통신기록을 지울 수 있겠나?? ?정식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해킹 해.? ?예?? ?책임은 내가 진다.? 처크는 더없이 진지했다. 코미디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예, 알겠습니다.? 루이가 작업을 하는 처크는 정상적인 쪽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태극형제… 아니, 블루1과 접촉했다고?? 블루1(Blue One)이란 파란 장발의 남자를 일컫는 말이다. 다른 쪽에서 나타 나는 붉은 장발의 남자는 레드1(Red One)으로 기록된다. 원래는 지크의 건의대로 태극형제라 칭하려 했지만 세계적이지 못하고 영문 으로 바꿔서 기록하기 힘들다는 루이의 강한 건의에 밀려 정식명칭은 그렇 게 결정되었다. 처크의 질문을 들은 그렌의 얼굴엔 곤란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게… 직접 접촉은 했지만 영상기록으로는 남기지 못했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BSP와 경찰용의 기록 모두 해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노이즈가 끼어 버렸습니다. 제 눈과 연결된 영상기록장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술부 에 도움을 청했지만 현재의 기술로는 이해하기 힘든 무형의 힘이 가해졌다 고 밖엔 설명할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남은 것은 기억 밖에 없습니 다.? ?그런가? 뭐, 됐네. 직접 접촉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겠지. 그럼 상황설명을 해보게.? ?예.? 그렌의 보고는 믿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모델과 같은 남자가 불꽃으로 복장을 바꾸고 20미리 기관포의 탄환을 화염 의 장벽으로 막아내는 것도 모자라 A랭크의 워 피겨인 피어셔를 장난감 가 지고 놀 듯 했다는 말은 정말 상식적이지가 않았다. 그러나 보고를 하는 사람이 가장 믿을만한 부하이자 후배인 그렌이었고 그 혼자만 그런 광경을 목격한 게 아니었다. 아무리 처크가 전직 과학자라 해 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마지막엔 어떻게 됐나?? 그 질문만은 피하고 싶었던 그렌이었다. 케빈은 미리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이윽고 그렌이 한숨을 쉬듯 말했다. ?케빈이 블루1의 등에 사격을 가했습니다.? ?…….? 처크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그렌은 변명하듯 계속 말했다. ?그러나 블루1이 죽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시체도 남지 않았고 챠오가 일이 끝난 뒤에 그의 기척을 조금 느꼈다고 했으니 블루1만의 방법으로 탄 환을 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확인해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음, 알았네. 그럼 S구역에 대한 기타사항은 나중에 논의하기로 하고 드래 곤 잭에 대한 얘기를 해보지. 지크?? 처크가 만화에 나오는 인물처럼 씩 웃으며 지크를 바라봤다. 그 가식적인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지크는 진지하게 보고를 시작했다. ?저희들이 드래곤 잭과 접촉한 시간은 오전 10시 40분경이었습니다. 우연 히 접촉한 게 아니라 상대방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죠. 잭 아저씨도 그렇게 말했고요.? ?너를 기다려?? ?예, 제 시체를 비싸게 사줄 사람이 있다면서…….? ?시체?? 처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한하군. 네가 아무리 희귀종이라 해도 박제로 만들어 전시할 필요까지 는 없을 텐데?? ?…….? ?농담이야. 인상 쓰지 마.? 지크는 처크의 말을 잊으려는 듯 고개를 저은 뒤 이어서 말했다. ?어쨌든 저는 드래곤 잭을 잡기 위해 격투를 벌였죠. 덕분에 4년 전에 졸 업선물로 사주신 재킷도 이렇게 너덜너널 해졌어요.? 그는 자랑스레 재킷을 들어보였다. 전체적으로 칼집이 난 재킷의 모습에 처 크를 제외한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재킷은 그 모양인데도 몸은 멀쩡하네?? 그렌이 대표로 묻자 지크는 기다렸다는 듯 소리쳤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바람을 자를 수 있는 칼날은 없죠! 예(Yeh)!? 그는 동료들을 향해 엄지를 불끈 펼쳤다. 모두의 한숨 속에 처크는 얘기를 계속 하라는 듯 손을 저었다. ?그런데 잭 아저씨가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더라고요. 그러더니 급한 일이 있다며 돌아갔어요. 대신 나중에 찾겠다면서 저에게 나노 블레이 드 한 짝을 맡겨놨죠.? 순간 처크의 선글라스 위로 주름이 일어났다. ?뭐? 그냥 보내줬다고?? 지크는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앉은 리진은 앞날을 예감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말했다. ?물론이죠. 남자의 승부는 후에 미뤄질 수도 있거든요. 시간은 저나 상대 방 모두에게 공평한 법이니…….? ?이 멍청한 녀석! 간다는 걸 진짜로 보내주는 녀석이 어디 있어!? ?예? 하지만 남자의 승부는…….? ?시끄러워! 여기가 일본이야? 지금이 전국시대(戰國時代)야? 네가 있는 곳 은 2035년의 대한민국이야! 그 녀석은 사무라이가 아니라 국제 테러리스트 인 워 피겨의 드래곤 잭이고! 그 영특한 녀석이 그깟 칼날 한 짝 맡겨놨다 고 다시 돌아올 것 같아?? ?예.? ?뭐?? 처크는 당황했다. 그 뿐만 아니라 대원들 전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지? 근거는 있나?? 처크의 물음에 지크는 상당히 진지한 표정으로 엄지를 뻗어 자신의 왼쪽 가 슴을 찔렀다. ?있죠. 바로 이 마음!? ?…….? ?사나이들끼리만 통하는 뜨겁고 순수한 마음! 그것 이상의 근거가 어디 있 나요, 할아버지!? 처크는 할 말을 잃은 듯 고개를 숙였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루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른 대원들 역시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였다. ?내일부터 혈압 약을 꼭 챙겨야겠군.? 선글라스를 벗은 처크는 엄지와 검지로 눈 위를 마사지하며 말했다. ?좋아, 그럼 오늘의 야간순찰은 미치도록 뜨겁고 순수한 지크와 그의 오늘 파트너가 맡기로 한다. 그럼 해산. 단, 케빈은 남도록.? ?예!? 긴급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지크는 소나기와 같은 리진의 잔소리에 시달려야 만 했다. 지크 덕분에 일정에도 없는 야간순찰을 하게 됐으니 그녀가 그러 는 것은 무리도 아니었다. 모두가 나간 뒤 케빈은 처크의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그가 오늘 충동적으로 한 행동은 그에게 있어 서 그만큼 큰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지부장님.? 케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 처크는 축 처진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 자네 탓으로 생긴 일이 아니지 않나. 자네는 그걸 치료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왔어. 난 그 모습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봐 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사람을 진짜로 쏠지 모릅니다. 지금 당장 이 총을 놓지 않으면…….? 케빈은 품에서 권총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텅 하는 묵직한 음이 빈 회의실 안에서 메아리쳤다. 그 권총은 검고 길었다. 리볼버(Revolver)식이다. 센티미터로 따지자면 40 센티는 족히 되어 보였다. 트럭엔진의 실린더를 연상케 하는 두꺼운 원형 탄창 속엔 666구경의 대형탄 환(지름 약 1.7㎝) 여섯 발이 깊숙이 몸을 담고 있었다. 그 앞엔 다른 권총 과 달리 직육면체 모양을 한 두꺼운 총신이 자리 잡았다. 그곳엔 하데스 웨 폰(Hades Weapon)이라는 글자가 음각으로 깊숙이 새겨져 빛을 빨아들였다. 상아로 만든 듯한 백색의 그립(Grip:손잡이)엔 십자가를 거꾸로 삼킨 해골 이 퀭하니 뚫린 눈을 천장에 두고 있었다. ?약한 소리 말게. 쟈니 리(Johnny Lee)가 그 총을 자네에게 맡긴 건 자네 가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어.? ?하지만 점차 지배되고 있습니다. 이 총에…….? 케빈은 고개를 저었다. 하데스 웨폰. 쟈니 리라는 이름의 건 스미스(GunSmith:총포공)에게 제작된 지 올해로 35 년이 된 그 권총은 총을 벗 삼아 살아가는 자들 사이에선 아더왕 전설의 신 검, 엑스칼리버와 맞먹는 존재로서 알려져 있다. 달궈진 쇠를 특별히 조합된 동물의 피에 담가 식히고 그것을 공업용 모조품 이 아닌 천연의 다이아몬드로만 깎아 완전한 형체를 만들었다는 쟈니 리의 말도 안돼는 제작기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하데스 웨폰을 전설의 존재로 부각시킨 건 제작기가 아니다. 10킬로그램에 가까운 총의 무게는 물론이고 손뼈를 뭉갤 듯한 666구경 탄환 의 강력한 반동 때문에 하데스 웨폰은 객관적으로 사람이 쓸 수 있는 무기 가 아니었다. 그러나 하데스 웨폰의 역대 주인들은 총의 무게나 반동에 전 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들이 하데스 웨폰을 쓸 때 느끼는 충격은 보통의 소구경 권총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상식 밖의 정확도를 가지고 있었다. 탄환에 눈이 달린 게 아닐까 싶 을 정도로 하데스 웨폰에서 뿜어지는 탄환은 거의 백발백중이었다. 그 명중 률은 강풍이나 폭우 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유지됐다. 마지막으로 하데스 웨폰의 사용자는 항상 그 끝이 똑같았다. 그들은 동료나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의 등을 쏘고 그 직후 자결을 했다. 케빈도 마찬가지였다. BSP가 된 후엔 아직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 이다. 처크는 테이블에 놓인 하데스 웨폰을 바라봤다. 음산한 기운이 총에서 흘러나오는 듯 했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총이 놓인 곳의 주위가 왠지 모르게 서늘했다. 그것이 첫경험은 아니었다. 그는 그 검은 권총을 케빈에게 다시 밀었다. ?좋아, 알겠네. 그럼 자네의 요청이 있을 때까지 하데스 웨폰을 무기고에 격납시키도록 하지. 오직 자네만 열고 닫을 수 있도록 해둘 테니 오늘은 걱 정하지 말고 푹 쉬게.? ?예, 감사합니다.? 총을 품안에 넣은 케빈은 즉시 회의실을 나섰다. 회의실 밖의 라운지엔 지크와 리진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오늘의 야간순 찰에 대한 궁리를 하는 게 아니라 소처럼 소리를 지르며 싸우고 있었다. ?당신 때문에 집에 못 가게 됐잖아! 오늘 내 동생 생일이란 말이야! 그래 서 야간순찰을 미리 돌아놨던 건데 왜 방해를 놓는 거야!? ?그게 내 잘못이라 이거야? 그럴 거면 녀석이 도망칠 때 나섰어야 할 거 아냐! 가만히 있었던 주제에 왜 남한테 잘못을 돌려!? ?내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서 그랬잖아! 붙어서 이길 수 있었던 상 대라면 분명 달려들었을 거라고!? ?아, 그래? 그렇다면 우리 집엔 금송아지가 있다고 하지!? ?뭐? 당신 진짜 이럴 거야!? ?내가 어쨌는데!? 둘의 이마는 어느새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케빈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굽히지 않는 리진의 모습에 아연실색했다. ?어이, 둘 다 뭐하는 거야? 이미 결정된 일이니 화해하고 좀 쉬는 게 어때 ?? ?상관 말아요!? 둘은 동시에 외침으로서 케빈을 물리쳤다. 새우등이 터질 뻔한 케빈은 실소 를 지으며 둘을 뒤로 했다. ?리진이 저토록 신나게 싸우는 건 참 오랜만이군. 그때 일은 다 잊은 건가 ?? 케빈은 슬쩍 고개를 돌려 라운지를 다시 쳐다봤다. 둘은 여전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싸우고 있었다. ?뭐, 잊었다면 다행이지만.?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케빈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 오후 여덟시. 강북 J구역에 위치한 한 대형 호텔의 로비는 마치 구정이나 추석 때를 연상 시킬 만큼 조용했다. 일반인의 통행은 없었다. 거리 곳곳에 배치된 호텔직원들이 미리미리 사람 들의 통행을 제한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오버해서 일하는 이유는 오늘 호텔을 떠나는 한 VIP때문이 다. 아니, 그 VIP에게 일반인들이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오늘 매트로 서울에서 나타난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로비와 정문 앞에 가득 모여 있었다. 양쪽 품이 두툼한 것을 봐서 하나 이상의 총기류를 장비한 게 분명하다. 어느 순간 그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들의 고용주가 로비로 내려온 것이 다. 그는 키가 작았다. 검은 색의 중국식 복장을 입었고 머리를 땋아 내렸기에 뒤에서 얼핏 보면 앳된 소년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면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홀쭉한 양 볼엔 긴 흉터가 각각 나있 었고 눈매 역시 매서웠다. 눈에 서린 위엄은 그냥 관광을 하러 온 사람의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가 바로 흑사회의 마약담당 중 최고의 거물인 루이스 츄였다. 그 뒤를 드래곤 잭이 따랐다. 그는 아침과 마찬가지로 베이지색 양복을 멋 스럽게 입고 있었다. 허나 표정은 달랐다. 구겨진 얼굴을 선글라스로 최대한 가린 그는 몇 걸음 더 걷다가 이내 멈춰 섰다. ?정말로 관광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오신 겁니까, 미스터 츄?? 그의 질문이 로비의 싸늘한 공기에 섞였다. 루이스 츄는 걸음을 멈추고 그 를 돌아봤다. ?아닐세.? ?그럼 왜 지금 떠나시려는 겁니까? 죽은 것은 피어셔와 그의 부하 몇 명뿐 입니다.? ?그렇지, 자네 말이 맞아.? 루이스 츄는 드래곤 잭 앞에 섰다. 머리가 잭의 가슴팍까지밖에 오지 않았 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잭의 양복을 검지로 찔렀다. ?내가 떠나려는 이유를 가르쳐줄까? 난 자네들에게 실망했네. 피어셔인가 하는 얼간이는 괜히 난동만 부리다가 목숨을 잃었지. 500만 달러라는 돈값 을 못했어. 몸값만큼 거리를 부쉈다면 모를까, 그렇게 하지도 못했네. 자네 는 그나마 괜찮지. 지크 스나이퍼와 직접 접촉을 했으니까. 하지만 자네 역 시 돈값을 하지 못했어. 하다못해 지크 스나이퍼의 살점 하나라도 가지고 오라고 했지 않나? 그런데 오히려 칼 하나를 기념품 주듯 주고 와?? ?…….? 당신이 불러서 그런 게 아니냐. 드래곤 잭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 았다. 워 피겨의 철칙 상 계약이 끝날 때까지 고용주에 대한 반항은 금지되 어 있었다. 루이스 츄는 돌아서며 말했다. ?자네와의 계약만료는 홍콩에 돌아갈 때까지네. 그때까지 호위나 잘 부탁 하네. 그건 할 수 있겠지? 그래야겠지. 자네까지 피어셔라는 얼간이처럼 죽 어 나가면 워 피겨의 명예가 손상될 테니까.? 순간 잭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럼 계약을 포기하지요, 미스터 츄.? ?뭐라고?? ?위약금이 세 배였습니까? 그럼 1500만 달러군요. 좋습니다, 드리지요.? ?1500만 달러라는 돈을 우습게 보는군. 그 돈은 워 피겨가 지불하는 게 아 니라 자네 혼자서 지불하는 걸세.? 루이스 츄가 경고하듯 말했다. 드래곤 잭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 다. ?당신, 아니 흑사회가 제네럴 블릭의 요청을 받아 움직인다는 건 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지크 스나이퍼의 시체를 가지고 제네럴 블릭을 찾아가 면 1500만 달러를 따내는 건 문제도 아니겠지요. 틀린 말입니까?? ?…….? 루이스 츄의 눈빛이 한층 더 매서워졌다. 드래곤 잭은 선글라스를 벗고 응 시했다. ?그 제네럴 블릭인가 뭔가, 어디 붙어있나?? 로비 입구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루이스 츄와 잭, 그리고 그들의 부하 들은 모두 그쪽을 돌아봤다. 호텔의 출입구엔 이상한 복장의 남자가 서있었다. 짙은 회색의 망토 위로 붉은 산발을 늘어트린 그 남자는 연극을 보는 사람처럼 흥미가 담긴 눈으로 루이스 츄와 잭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이스 츄는 시답지 않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저 코스플레이 바보는 뭐지? 밖에 있는 녀석들은 뭘 한 건가?? ?궁금한가?? 붉은 장발의 남자는 대답대신 호텔의 정문을 열어 젖혔다. 밤바람을 타고 비릿한 냄새가 호텔 안에 쏟아져 들어왔다. 피 냄새뿐만 아 니라 독한 오일냄새도 섞여 있었다. ?모두 죽였지.? 남자는 장난스레 말했다. 그의 말대로 호텔 앞은 어느새 지옥의 수라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제대로 모습을 갖춘 시체는 없었다. 가장 가벼운 게 팔 한 쪽, 다리 한 쪽 이었다. 그 외의 대부분이 포탄이나 대구경 기관포에 맞은 듯 산산조각 나 있었다. 그것은 정상인도, 사이보그도 마찬가지였다. 호텔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분수는 안을 피와 분홍색 내장으로 가득 채운 채 물을 토해냈다. 놀라운 것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그 누구도 문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 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 안쪽에 서있던 경호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 안팎의 시간이 갑자기 차이가 나거나 찰나의 속도로 일이 일어나지 않으 면 불가능한 경우였다. 지옥을 만든 장본인은 선혈과 오일이 묻은 왼손을 들어보였다. ?나름대로 재미있었어. 사람을 죽이는 건 질릴 정도로 익숙하지만 그 고철 덩어리들을 죽이는 건 새로운 경험이었거든. 몸을 치면 쇳조각이 튀어나오 고 머리를 치면 뇌가 튀어나오더군. 후후, 짜릿해. 그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어. 바이오 버그인가 하는 벌레들보다도 나아.? 웃는 그를 향해 입구 안쪽에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 둘이 발을 뻗었다. 둘 다 사이보그다. 그 남자와 두 경호원 사이의 거리는 5미터도 채 안된다. 전투사이보그의 경이적인 순발력을 감안할 때 그 남자의 운명은 뻔했다. 순간 그의 허리춤에서 보라색 섬광이 번뜩였다. 폭음이 일어났다. 남자를 향해 달려들던 두 사이보그는 몸뚱이가 산산조각 나며 호텔의 바닥을 나뒹굴었다. 사이보그의 머리통이 데굴데굴 굴러 남자의 발 앞에 닿았다. 목의 단면에서 오일과 생체기름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남자의 오른손엔 어느새 칼이 들려 있었다. 시시한 단검이 아니라 길이 1.3 미터 정도의 묵직한 대검이었다. 손잡이를 제외한 검 전체에 보라색이 흘렀다. 칠한 게 아니다. 재료자체가 보라색이다. 굉장히 신기했지만 루이스 츄나 드래곤 잭에겐 그런 것을 생각 할 틈이 없었다. 남자는 검의 끝으로 사이보그의 머리통을 찔렀다. 어린아이가 포크로 미트 볼을 찍는 듯 아무 거리낌 없는 모습이었다. ?어이, 형님들께 작별인사 좀 하시지?? 남자는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검에 관통당한 사이보그의 머리가 꿈틀했다. 턱이 크게 벌어졌다 닫혔다. 움직임으로 봐서 비명을 지르는 듯 했지만 성 대역할을 맡은 기관이 없기에 희미한 기계음 외엔 들리지 않았다. ?하하하, 더 소리쳐 보라고! 전혀 안 들리지 않나! 살려달라고 외쳐! 외쳐 보란 말이다!? 결국 소리는 나지 않았고 인공안구에 돌던 빛은 서서히 사라졌다. 남자는 고장 난 장난감을 던지는 아이처럼 미련없이 머리를 구석으로 치웠다. ?시시하군. 자, 즐기는 건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어째서 지크 스나 이퍼의 시체를 노리는지 말해보실까?? ?말 하면 살려줄 건가?? 드래곤 잭이 양복 상의를 벗으며 다가왔다. 그의 얼굴엔 진지한 미소가 어 려 있었다. 붉은 장발의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내 칼에게 물어보는 게 더 빠를걸?? ?후후, 실력엔 자신이 없나? 의지가 없는 검에게 물어보라니 말이야.? ?호오, 입은 살아있군.? 입을 동그랗게 모은 남자는 검 끝을 잭에게 뻗었다. ?칼은 좀 쓰나?? 대답 전에 잭의 등에서 나노 블레이드가 튀어나왔다. 그것을 잡아 오른팔에 장치한 잭은 손가락으로 칼날을 두드렸다. ?아주 잘 쓰지. 우리들, 워 피겨 사이에선 열 손가락 안에 든다. 그러는 너는 어떤가? 아까 휘두르는 걸 보니 속도와 파워는 대단하더군. 지크 스나 이퍼만큼 강한가?? ?그 녀석만큼 강하냐고?? 붉은 장발의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쓰레기와 나를 비교하다니, 너무한 거 아닌가? 후후, 하하핫!? 그는 이내 안면을 부여잡고 웃었다. ?이거 미치겠군. 난 인생을 헛살았나봐. 그런 나무늘보 같은 녀석이 내 평 가기준이 되다니, 너무 웃겨서 돌아버릴 지경이야! 하하하하!? ?뭐라고?? 잭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남자는 웃음을 멈추고 자세를 잡았다. 어딘가 정신이 나간 듯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광기와 폭력성 대 신 그를 채우고 있는 것은 살기와 투기였다. 망토자락 뒤로 남자의 진지한 눈이 보였다. ?와라. 그리고 죽어라.? 목적이 분명한 말이었다. 드래곤 잭은 조금 후 자세를 잡았다. 그의 부하들은 자신의 상관이 조금 틈을 둔 것에 조금은 의아해했다. 평소 의 잭이라면 시작하자마자 나노 블레이드를 뽑고 달려드는 게 정상인데 지 금은 과속방지턱에 걸린 스포츠카처럼 시간이 걸렸다. 이유는 잭의 생각을 엿보면 알 수 있다. ?상대가 좋지 않군.?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위압감이 잭의 뇌와 척수를 압박해왔다. 권총을 들 고 전차 앞에 선 느낌이었다. 상대는 무형의 결계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눈엔 보이지 않았지만 드래곤 잭의 눈엔 똑똑히 보였다. 그 결계라는 것은 뭔가를 막아내거나 할 때 쓰는 것이 아니라 무술에서 말하는 공격범위다. 그런데 사각이 잘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이상한 무기를 든 게 아니라 검 하 나를 들었을 뿐인데 거의 모든 각도가 막힌 것처럼 보였다. ?범위… 녀석이 만든 저 공격범위 내에 들어가면 무조건 베인다. 아니, 베 이기보다는 터져 나가겠지. 사이보그 둘을 대전차포로 날리 듯 산산조각 내 는 파워를 가진 녀석이니 아무리 나라 해도 멀쩡할 수 없을 거다. 그나저나 뭐하는 녀석이지? 이 정도의 강자라면 조금이라도 소문이 있었을 텐데… 하 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직접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겠지!? 잭이 뛰어올랐다. 그가 디딘 바닥은 해머에 맞은 듯 움푹 들어갔다. 그만큼 잭은 빨랐다. 스피드로 유명한 지크와도 맞먹을 정도이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상대의 복부에 큰 틈이 보였다. 잭은 그곳을 향해 벌처럼 칼날을 세웠다. ?기선제압!? 목표지점을 향해 파고드는 잭의 나노 블레이드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 만큼 잭이 노린 상대의 틈은 틀림없었다. 순간 텅 하는 소리가 로비 전체를 뒤흔들었다. 지진과도 같은 충격파가 지면을 타고 흘렀다. 호텔의 유리창이 모조리 터져 나가고 벽을 덮은 대리석 판도 툭툭 금이 갔다. 사람들도 흔들렸다. 루이스 츄와 함께 서있던 자들뿐만 아니라 공격을 위해 땅을 디뎠던 잭도 만취한 듯 휘청댔다. ?뭐야!? 중심을 완전히 잃을 뻔한 잭은 회복하자마자 진동이 일어난 곳을 바라봤다. 충격파의 시발점엔 대단한 광경이 있었다. 붉은 장발의 남자가 칼을 바닥에 꽂은 것이다. ?저것만으로 이런 수준의 충격파가 나오다니!' 잭은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사이보그가 아니었다면 식은땀이 흘렀을 것이다. 잭은 인공의 침을 삼키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렇군, 피어셔. 너도 저 괴물에게 당한 건가? 그렇다면 안심이야. 잠시 나마 너에게 실망한 것을 사과하지. 난 네가 네 실수로 죽은 줄 알고 있었 다.? 붉은 장발의 남자가 움직였다. 이상한 자세도, 저돌적인 모습도 아니었다. 그저 검을 어깨에 기댄 채 한 발자국씩 떼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잭에겐 더없이 두려웠다. 남자가 말했다. ?죽기 위해 온 게 아니었나? 그렇다면 실망이군.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네가 어느 쪽의 길을 택하든 그 끝은 죽음이니까.? ?지크 스나이퍼에 대한 얘기는 듣고 싶지 않나? 우리가 왜 그를 쫓는지 알 고 싶지 않나?? 잭은 자신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단순히 시 간을 끌고 싶었을까?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어느새 잭의 눈앞에 다가온 남자는 처음처럼 살기어린 미소를 지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너희들처럼 지크 스나이퍼를 노리고 달려드는 녀석들을 하나하나 치다가 근원까지 깔끔하게 없애면 오늘처럼 지루하게 스무고개를 할 필요는 없겠지. 아니면…….? 남자가 잠시 말을 끊었다. 그의 붉은 장발이 깨친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바 람에 넘실댔다. 잭이 재촉했다. ?아니면??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크 스나이퍼 녀석을 쳐 죽이면 되겠지.? 그가 검을 쳐들었다. 남자는 잭의 의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우선 너부터 잠재워주마. 넌 다른 녀석들과 달리 조금은 반항을 할 수 있 을 것 같거든.? ?…….? 이후 잭은 최선을 다했다. 다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깨끗이 죽을 뿐이 었다. ※※※ 지크는 순찰차의 뒷자리에 타고 있었다. 그는 하얀 면T차림이었다. 본부에 서 다른 재킷을 제공하려 했지만 그가 모양과 색이 마음에 안 든다며 거절 했다. 운전석은 아침과 마찬가지로 리진이 맡았다. 지크가 운전을 못해서 운전석 에 앉지 않는 것은 아니다. 차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리진이 그에게 운전대 를 맡기지 않은 것뿐이다. 전방을 주시한 채 운전하던 리진이 갑자기 빙긋 웃었다. ?고마워.? 그 따뜻한 말에도 불구하고 뒷좌석의 지크는 무표정했다.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님을 그는 알고 있었다. 리진이 감사를 표한 대상은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었다. ?됐어.? 짧게 대답한 그녀, 챠오는 평소대로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지크는 뭐가 그 리 불만인지 그녀의 뒤를 향해 갖은 표정을 지어댔다. 뒤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지 못한 리진은 마냥 즐거운 얼굴이었다. ?아아, 챠오가 자진해서 날 도와줄 줄은 몰랐어. 아마 챠오도 알고 있겠지 ? 저 남자랑 단 둘이 밤을 보낸다는 건 정말 지옥과도 같을 거야.? ?어이, 그럴 거라는 증거는 없잖아. 확신하듯 말하지 말라구.? 지크가 퉁명스레 말했다. 그러자 리진은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낮 내내 지옥이었어. 밤이라고 다를 리 없잖아?? 리진의 말에 지크 역시 이상한 미소를 뗬다. ?호오, 이 나라에선 ?아무 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의 준말이 지옥 이었나? 그럼 앞으로 그렇게 알아주지.? ?뭐라고!? 리진의 눈썹이 다시금 쭈뼛 섰다. 둘이 다시 투탁거리는 동안 챠오는 자신의 PDA를 통해 차량을 조작했다. 만 약의 경우에 대비해 준비된 기능이었다. 그 기능은 차량운전자의 육체나 정신이 매우 위험하거나 의식이 불분명할 때 외엔 사용이 제한된다. PDA운전을 함부로 사용하면 징계를 받을 수도 있 다. 챠오는 리진의 현재 상태가 위에 거론 된 것들 중에 하나에 속한다고 판단 한 듯 했다. 그때 비상경보음이 순찰차의 내부 스피커를 뒤흔들었다. 그와 함께 메인 오 퍼레이터 중 한 명의 목소리가 다급히 들렸다. ?비상사태 2호 발생! 야간순찰대원, 들리십니까? 여기는 본부, 들리면 응 답하십시오! 반복합니다, 비상사태 2호 발생! 야간순찰대원은 즉시 응답하 십시오!? 비상사태 2호라는 것은 경찰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강력사건, 즉 BG가 아 닌 다른 존재에 의해 벌어진 테러나 폭동을 말한다. 리진은 싸움을 멈추고 수신버튼을 눌렀다. ?야간순찰조의 하리진 소위, 순찰승인번호 3738134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 ?강북 J구역의 L호텔에서 비상사태 2호에 준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속 히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네비게이터에 최단거리 데이터를 전송하겠 습니다!? ?알겠습니다!? U턴한 리진의 순찰차가 굉음을 일으키며 거리를 질주했다. BSP만의 사이렌 소리와 경광등의 불빛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운전 중 인 시민들은 재빨리 차선을 바꿔 그들의 진행을 도왔다. 협조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BSP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도는 그만큼 높았다. 현실상 세금 이상으로 가장 두려운 존재가 바이오 버그니 지지는 당연했다. 리진은 차창 구석에 떠오른 네비게이션 맵(Navigation Map: 길안내 지도)을 보며 액셀을 최대한 밟았다. 그러면서 경찰청 관제실에 무전을 넣었다. ?여기는 BSP 야간순찰조의 하리진입니다. 비상사태 2호에 대한 제5조항에 따라 현장상황 전송에 대한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여기는 매트로 서울 경찰청입니다. 요청을 허가합니다. 하지만 기대는 하 시지 않는 게 좋습니다.? 경찰청 오퍼레이터의 말에 리진과 지크의 표정이 변했다. 지크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머리를 불쑥 내밀며 말했다. ?어이, 목소리 좋은 아가씨. 그건 또 무슨 말이우?? ?네?? 스피커에서 황당함이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하마터면 핸들을 놓칠 뻔 했던 리진은 룸미러로 지크를 쏘아보며 말을 돌렸다.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경찰청 CCTV에 문제가 생겼습니까?" ?그렇습니다. L호텔에 설치된 CCTV가 사건발생 직후부터 마비되었습니다. 카메라에는 문제가 없지만 화상은 전혀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챠오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리진에게 사인을 보냈다. 통신을 끊으라는 뜻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통신을 끊은 리진은 시선을 전면에 둔 채 물었다. ?무슨 일이야, 챠오? 아는 상황이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블루 원… 아니, 레드 원일지도.? 그녀답게 짧은 말이었지만 리진은 얼른 이해했다. ?아, 그렇구나! 태극형제!? 그들이 나타났을 때는 주위의 모든 카메라가 이상현상을 일으켰다. 이것은 위성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오전에도 그랬으니 CCTV에 이상이 없다면 그렇 게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오오, 좋아! 내가 기대하던 상황이야!? 지크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그의 놀라운 전투력을 눈앞에서 봤던 리진 은 어느 정도 기대감이 들었는지 아까처럼 심한 소리는 하지 않았다. ?괜찮겠어, 지크군?? 반나절동안 싸우느라 호칭이 바뀐 상태다. 지크는 걱정 말라는 듯 자신 있 게 엄지를 펴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싸우는 건 맡겨주시지. 난 그걸 위해 이곳에 온 사람이 야.? ?후후, 좋아. 이번엔 점수 좀 따보라고, 지크씨.? 리진도 엄지를 내밀었다. 옆에 앉은 챠오는 여전히 묵묵했다. 거기까진 자신감에 넘쳤지만 도착한 직후 셋의 표정은 단숨에 뒤바뀌었다. 호텔 정면을 온통 뒤덮은 시체와 고철의 산에 리진은 뭐라 말을 꺼내지 못 했다. 챠오도 인상을 가득 썼다. 미리 도착해있던 전경들도 인상은 마찬가지였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전 경대원들은 구석에서 단체로 구토를 하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응?? 차에서 내린 리진은 챠오를 붙잡고 물었지만 챠오라고 해서 대답해줄 수 있 는 상황은 아니었다. 한발 늦게 내린 지크는 무문도의 칼집을 불끈 쥐었다. 그는 상당히 긴장하 고 있었다. 이유는 시체였다. 이곳저곳에서 시체를 많이 봐온 그가 어째서 시체를 보고 긴장한 것일까? 이유는 시체의 상태였다. ?도대체 어떤 괴물이 와 있는 거지?? ?괴물이라니?? 가뜩이나 불안해하고 있던 리진은 더욱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지크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이 시체들… 사이보그까지 포함해서 모두 10초 안에 한꺼번에 사망했어. 그것도 한 녀석에게.? ?뭐라고? 그럴 리가! 족히 20명은 돼 보이는데?? ?사실이야.? 챠오가 말했다. ?시체의 체온이 거의 똑같아. 위치에 따라 아주 약간 다를 뿐이야. 베인 흔적은 똑같아. 같은 검기(劍技:검의 기술)를 지닌 자에게 당했다는 증거 야.? ?맞았어.? 지크가 맞장구를 쳤다. ?문제는 도대체 누구냐는 거야. 나도 이렇게는 못해. 절대로… 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자신이 없다는 건 맞아.? 지크의 말엔 농담이 섞여있지 않았다. 팔짱을 낀 리진은 다시 한번 시체를 돌아봤다. ?그렇다면 확실히 블루 원이야. 그렇지 않으면 아니면 레드…….? ?살려줘!? 순간 귀를 찢는 듯한 남자의 비명이 들렸다. 한 남자가 쫓기는 동물처럼 로비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 자신의 피가 아니라 남의 피를 뒤 집어 쓴 것이다. 그의 얼굴을 본 리진은 또 한번 할말을 잃었다. 자신들을 향해 뛰어오는 그 남자는 다름아닌 흑사회의 거물, 루이스 츄였다. 마약에 중독 된 어린아이가 금단증상에 괴로워하다 죽는 것을 최고의 쇼로 여긴다는 그였지만 지금은 공포에 질린 양에 불과했다. 그는 양팔을 허우적대며 계속해서 달렸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유 일한 삶의 희망을 지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는 그를 보지 않았다. 그의 머리 위로 솟아오른 검은 실루엣에 짧게나마 집중하고 있었다. 실루엣의 두상, 파도처럼 흔들리는 붉은 장발 속에서 두 개의 붉은 섬광이 번뜩였다. ?네가 마지막이라고 했잖나!? 보라색의 번개가 루이스 츄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충격파만으로 호텔로비 를 엉망으로 만드는 그 파워를 루이스 츄의 육체가 견딜 리는 없었다. 그의 육체가 풍선처럼 터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분홍색과 적갈색의 내용물 들이 이리저리 날아 가로등과 바닥, 벽에 늘러 붙었다.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한 지크와 BSP, 전경들은 악 소리도 못 내고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루이스 츄가 있던 자리엔 회색 망토의 남자가 검을 바닥에 꽂은 채 반쯤 앉 아있었다. 몸을 서서히 곧추세운 그의 얼굴엔 광기어린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름대로 영광이라니까 왜 피하나? 도망가지 않았으면 이렇게 속보일 일 도 없었지 않나? 후후후.? 회색의 망토와 장발은 피에 젖었다. 몸에선 피비린내가 났다. 얼굴은 웃고 있고 눈에선 시뻘건 안광이 도사렸다. 진짜로 악마가 있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리진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뒤로 물러섰다. ?레, 레드 원…….? 그 목소리에 반응하듯 남자의 붉은 시선이 움직였다. ?호오, BSP인가 하는 녀석들이군. 게다가 지크 스나이퍼. 난 운이 좋은 건 가?? 남자가 BSP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움직이자 주위에 있던 전경들이 모조 리 총을 겨누었다. ?꼼짝 마라! 넌 완전히 포위됐다!? ?…….? 붉은 장발의 남자는 전경대장의 확성기 소리가 불쾌한 듯 눈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경대장은 꿋꿋이 확성기를 놓지 않았다. 투철한 경찰 정신 내지는 맛이 간 것, 둘 중에 하나였다.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투항하라! 반항하면 가차 없이 사격을 가할 것이다 ! 넌 범죄인에 대한 국제조약에 따라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으…….? 순간 슝 하는 소리가 전경대장과 그의 옆 사람 사이에서 들렸다. ?으악!? 소리가 들린 쪽의 고막이 터지듯 울렸다. 이어서 갑작스런 돌풍까지 불었 다. 진짜 사건은 그 다음이었다. 확성기와 연결된 전경용 장갑차가 장난감 변신 로봇처럼 좌우로 깨끗이 나뉘어 내려앉았다. 붉은 장발의 남자는 귀를 부여잡은 채 앉아있는 전경대장을 향해 검 끝을 움직였다. ?다음엔 네 목청이다. 싫으면 닥쳐라.? ?…….? 대답대신 주루룩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에 맞춰 전경대장의 바지 사이가 급속도로 젖어들었다. 대장이 그 꼴이 되니 대원들마저 흔들렸다. 그들을 비교적 평화롭게 정리한 붉은 장발의 남자는 칼끝을 지크에게로 움직였다. ?자아, 악당이 나타났다, 지크 스나이퍼. 게다가 그 악당은 네 목숨을 노 리고 있다. 어쩔 거지? 가만히 있을 건가?? ?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지크는 남자의 갑작스런 도발에 움찔했다. 그는 방금 전 일어난 상황 때문에 정신이 혼란한 상태였다. 상대는 검으로 만든 진공의 충격파만으로 장갑차를 갈랐다. 이것은 지크 자 신은 물론 그가 알고 있는 그 누구라도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분명 꼬리를 내리거나 도망쳤을 것이다. 상대가 얼마나 강 한지 뻔히 보이는 상황이니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리진이나 챠오는 지크를 비난하기는커녕 같이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크는 달랐다. ?가만히 있으면 재미없지.? 그는 들고 있던 무명도를 머리 위로 뻗었다. 검은색의 물체가 하늘 높이 솟 아올랐다. 무명도의 칼집이었다. 칼은 지크의 손에 잡혀 시퍼런 속살을 드러냈다. 힘의 정점까지 떠오른 칼집은 이내 주인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졌다. 지크가 앞으로 발을 내딛자 칼집은 그의 벨트와 바지 사이에 정확히 꽂혔다. ?뭐하는 녀석인지 모르겠지만 얼마나 강한지 한번 보여줘 봐, 친구. 얼마 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매겨지는 점수가 다를 거다.? ?후후, 그래? 후한 점수를 받으려면 한 가지 방법 밖에 없겠군.? 남자는 자세를 바꿨다. 드래곤 잭을 상대할 때 잡았던 그 자세였다. ?죽여주마.?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광기 대신 살기와 투기가 전신에서 뿜어졌다. 리진의 다리가 갑자기 휘청거렸다. 챠오는 그럴 뻔한 것을 겨우 참아냈다. 지크역시 그리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일반인에 가까운 전경들은 그냥 오싹한 느낌을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심신 의 감각이 예민한 그들은 일순간 몸이 마비될 정도의 느낌, 아니 충격을 받 았다. ?후우.? 지크는 심호흡을 했다. 싸우기 전에 호흡을 가다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숨을 내뱉지 않으면 영원히 숨을 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는 씩 웃었다. ?저 녀석,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아. 일말의 가능 성도 떠올리지 않고 있어. 하지만 방심하는 게 아냐. 나도 녀석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니까.? 이윽고, 지크가 자세를 잡았다. 리진과 챠오가 그를 향해 뭐라고 소리쳤으 나 그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지크는 전에 없이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상대한 녀석들과는 격이 틀리다. 말 그대로 최강 이야.? ?덤벼라!? 그의 목에서 전에 없이 큰 목소리가 터졌다. 그만큼 기 싸움에서 밀리고 있 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붉은 장발 사이로 보이는 상대의 눈은 더없이 냉정했다. ?내가 수고할 가치가 있을까?? 남자의 말에 지크의 눈에서 순간 불똥이 튀었다. ?이 녀석!? 지크의 몸이 초원의 치타처럼 탄력 있게 튀어나갔다. 반면 상대는 자세를 유지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위험하다니까!? 챠오가 외쳤다. 그녀는 지크가 자세를 잡을 때부터 그 말을 반복하고 있었 다. 그러나 발사된 탄환은 되돌릴 수 없듯 지크 역시 멈추지 않았다. 순백의 빛이 지크와 남자 사이에서 번쩍였다. 무기와 무기가 부딪힌 것만으 로도 그런 백광(白光)이 터진 것이다. ?크악!? 비명과 함께 지크의 몸이 멀찌감치 밀려나갔다. 양쪽 발을 땅에 딛고 있었 지만 그가 받은 힘은 신발밑창의 저지력을 가볍게 넘어섰다. 지크를 멈춰준 것은 전경버스의 옆면이었다. 버스의 옆면을 파고들다시피 한 그의 몸은 반동에 의해 힘없이 앞으로 밀렸다. ?윽!? 비명과도 같은 기합을 지르며 몸을 추스른 지크는 상대를 쏘아봤다. 붉은 장발의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세를 유지한 채 가만히 있었다. 남자가 웃었다. ?왜 그러지? 발이 엉켰나? 칼슘이 부족한 모양이군.? 이어서 비웃음소리가 들렸다. 지크는 이래저래 화가 났지만 뭐라고 한마디 하지 못했다. 그는 서있는 것 을 유지하는 것부터가 힘든 상황이었다. ?단 한 방에 이렇게 되다니! 물리적인 힘 자체가 다르다! 폐차장의 해머기 계로 두들겨 맞아도 이 정도는 아닐 거야! 그래도… 아직 이야!? ?갚아주마!? 지크의 전신에서 파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전기적인 스파크였다. 지크의 몸이 피복이 벗겨진 초고압전선처럼 스파크에 휘감겨 번쩍이고 있었다. 살기와 여유가 공존하던 남자의 표정이 어느 순간 바뀌었다. ?전기? 바람이 아니라??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덤벼! 날이면 날마다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 아니 란 말이다!? ?…….? 생각에 잠긴 남자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뭔가에 미쳐있는 듯 했던 이전 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생각을 끝낸 남자의 얼굴은 다시금 살의에 물들었다. ?실패작인가? 그렇다면 폐기처분이다.? 그가 한발을 내딛었다. 지크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긴장시켰다. 부풀어 오른 전신의 근육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몸에 흐르는 스파크도 더욱 강해졌다. 상대는 내딛은 것뿐이다. 그러나 지크는 전에 없는 프레싱을 받고 있었다. ?온다!? 그가 받은 첫 일격은 상대에게 있어서 장난에 불과했다. 막말로 그냥 툭 친 것뿐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승패는 그곳에서 이미 갈렸다고 할 수 있다. 모든 면에 서 큰 차이가 나니 확률적으로 따져 봐도 지크가 패배할 확률은 100%에 가 까웠다. 그런데 지크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대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그것 보다 상대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고 기대가 됐다. 멍청하다 생각될 정도의 투쟁본능이었다. ?죽어라!? 붉은 안광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보라색의 섬광이 커브볼처럼 휘어져 들어왔다. 지크는 검신에 팔을 대고 그 공격을 막았다. 칼로만 막았다가는 칼을 놓치거나 손목이 나갈 수도 있었 다. 상대의 파워는 그만큼 무지막지했다. ?으악!? 막았다고 생각한 순간 지크의 몸이 지면에서 떨어졌다. 그의 몸은 옆쪽으로 붕 날아가 아스팔트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지크는 즉시 일어났다. 누워있으면 까마귀 앞에 시체나 마찬가지다. 상대는 어김없이 밀고 들어왔다. 가공할만한 파워의 수직 베기가 무명도의 검신에 떨어졌다. 폭음과 함께 지크가 딛고 있는 아스팔트가 움푹 파였다. 지크의 발만 쏙 들 어간 게 아니라 지면 자체가 반원모양으로 눌렸다. 문제는 아스팔트가 아니다. 지금까지 날아온 세 번의 공격으로 인해 지크의 몸은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 그는 전신의 뼈가 질러대는 울림을 느끼며 속으로 소리쳤다. ?튕겨 내거나 흘릴 수준이 아니다! 무섭도록 정확하고 빨라! 칼이 나빴다 면 칼과 함께 동강이 났을 거야!? 게다가 상대는 한 손으로 칼을 휘두르고 있다. 양손으로 힘겹게 막아내는 지크와는 너무도 큰 차이였다. ?이 녀석은 최고다!? 비명이 아니라 감탄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지크의 얼굴에서 고통을 찾기 는 힘들었다. 힘들지만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 표정을 본 붉은 장발의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죽는 게 즐거운가?? 지크 역시 그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너 같은 녀석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게 너무 기뻐. 난 나보다 강한 놈을 별로 못 만나봤거든.? ?호오, 그래? 그거 안됐군.? ?어디서 수련했는지 좀 물어봐도 될까? 나도 거기서 하고픈데?? ?어째서?? ?널 이겨보고 싶어졌거든!? 지크는 남자를 밀치듯이 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급히 반전하며 칼을 휘두를 준비를 했다. 그러나 상대의 모습이 없었다. 순식간에 어리바리해진 지크는 상대의 공격 에 여지없이 당하고 말았다. 큰 충격이 지크의 등판에 꽂혔다. 그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엎어 졌다. 양발을 모아 도장 찍듯 상대를 찍어 내린 붉은 장발의 남자는 공격할 때의 자세를 유지한 채 발 밑의 지크를 내려다 봤다. ?미안하지만 너에게 기회는 없다. 시간은 너와 나, 모두에게 공평하기 때 문이지.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네 인생은 여기서 끝이거든.? 남자가 검을 들었다. 지크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쏘아봤으나 그것으로 흔들 릴 상대가 아니었다. ?푹 쉬어라.? 남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탕. 무슨 일이 있었을까. 살과 뼈가 갈리는 소리 대신 맑은 금속음이 들렸다. 지크는 움찔하며 눈을 떴다. 움직일 수 있는 걸 보니 살아있는 게 분명했 다. 고개를 돌리니 보라색의 검 끝이 보였다. 그것 말고 적갈색의 창끝도 보였 다. 그 낯선 모습에 지크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붉은 장발의 남자 앞에 파란 장발의 남자가 있었다. 아침에 피어셔를 쓰러 트린 바로 남자이자 지크에게 들어오는 칼을 막아준 장본인이었다. 붉고 푸른 그 두 남자는 서로를 잘 아는 듯 살의나 전의를 보이지 않았다. 다만 파란 쪽은 조금 불쾌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성급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 않나, 리오.? ?흥, 걸려버렸군. 하지만 큰일은 안 났으니 됐잖아?? 붉은 장발의 남자는 지크에게서 내려와 검을 거뒀다. 하지만 파란 장발의 남자는 여전히 굳은 표정을 지었다. ?넌 진심으로 이 남자를 죽이려 했어. 그건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짓이다. ? ?호오, 일러바칠 생각인가? 네가 그런 고자질장이일 줄은 몰랐는데, 슈렌? ? 파란 장발의 남자는 짧게 한숨을 지었다. ?없던 일로 하지.? 남자가 창을 놓았다. 아래로 떨어질 줄 알았던 창은 그대로 불꽃으로 변해 사라졌다. 그는 오른손을 펴 지크에게 내밀었다. ?실례했소, 지크 스나이퍼. 내 형제의 무례를 용서하시오.? ?무례? 실례? 어이, 사람을 죽이려고 해놓고는 그게 다야?? 지크는 엎어진 채로 투덜댔다. ?오, 그럼 죽여줄까?? 붉은 장발의 남자가 씩 웃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농담이 섞여 있었다. 지크는 대답 대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지크는 일어나려 했지만 허리와 다리에 힘이 쉽게 들어가지 않았다. 아까 받은 충격 탓이었다. ?일어날 필요는 없어. 지금의 너에겐 그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리니까.? ?뭐라고!? ?아아, 흥분하지 마. 지금의 네가 날 이길 수 없다는 건 네 자신이 더 잘 알 텐데?? ?…….? 그 남자의 말 그대로였다. 지금의 지크는 그와 싸우는 것은 물론 일어서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가능성은 보였다. 포상으로 유예기간을 주지. 두 달 후 다시 돌아 와서 너를 확인하겠다. 좀 빡빡하겠지만 그때까지 강해져봐라.? 남자는 지크의 어깨를 두드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집에 가면 선물이 있을 거다. 잘 받아서 써라.? ?선물?? ?너한테 무명도를 준 사람이 추가로 주는 거다. 황송하게 생각해.? ?뭐? 무슨 말이야!? 지크가 고개를 들었을 때 두 남자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경찰과 BSP들의 급박한 하루는 그렇게 끝났다. 호텔에서 벌어진 사건의 결과는 사망자 47명에 부상자 1명. 끔찍했지만 경 찰들에게 있어서 그 수치는 귀찮을 뿐이었다. 호텔 직원을 비롯한 근처의 민간인들은 사망자나 부상자 명단에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사망자 모두가 루이스 츄를 비롯한 그의 부하들이었고 부상자 로서 살아남은 단 한 명은 드래곤 잭이었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그날의 사건 역시 영상기록에는 남지 않았다. 사람들 의 기억에만 확실히 남아있을 뿐이었다. 부상당한 지크는 구급차로 병원에 후송됐다. 그러나 그를 위해 비워두었던 응급실엔 가지 않았다. 구급차에 실을 때만 해도 전신마비에 가까운 환자였지만 막상 병원에 도착 하니 자기 발로 차에서 내려 병원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구급차 대원들 과 병원관계자들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지크는 면회사절 푯말로 문을 막고 시간을 보냈다. 그렌이 부랴부랴 면회를 왔지만 그마저도 괜찮다는 말로 돌려보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오늘의 일을 회상했다. 오늘이라고는 했지만 오직 한 가 지만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처절한 패배를 안겨준 자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 녀석, 리오라고 했나?? 파란 장발의 남자가 그를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너무 강해.? 지크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힘은 물론 가장 자신 있는 분야인 속도에서도 밀렸다. 제대로 대결해보지 못해서 기술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는 건 사치였다. ?녀석을 이길 방법이 없을까? 아니, 녀석만큼 강해질 방법이 없을까??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눈을 뜬 그는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 다. 창밖은 파랬다. 새들의 지저귐 소리까지 들렸다. 병실 밖은 사람들의 웅성 거림과 안내방송 소리로 약간 소란스러웠다. ?그냥 잤군.? 이래서 자신이 한심하다는 소리를 듣는 걸까. 지크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 에서 일어났다. 어제 당한 상처는 거의 다 회복되어 있었다. 등이 아직 뻐근했지만 걷지 못 할 정도는 아니다. 이것마저도 오늘 오후 정도면 말끔해진다. 자신이 이런 생체회복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건 고아원 시절, 아주 어렸을 때였다. 그는 농구를 하던 중 아이들과 엉켜 다리를 크게 다쳤다. 상처는 매우 심했 고 피와 고름이 금세 그의 바지를 적셨다. 그와 엉킨 아이들도 마찬가지였 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이 약을 바르는 동안 그의 상처는 말끔히 나았다. 그게 다쳤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건 구멍이 난 바지와 혈흔뿐이었다. 지크 자신도 놀랐지만 아이들과 약상자를 가져온 수녀까지 기겁을 하고 말 았다. 이후 친구들과 수녀들은 그를 멀리했다. 보통사람이라면 2주는 갔을 상처가 20분도 안되어 말끔히 나아버렸으니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결국 지크는 몇 개월 뒤 처크의 손에 이끌려 고아원을 나서게 된다. ?이 병원, 좀 시끄러워지겠군.? 좋지 않은 추억을 되살렸던 지크는 씁쓸히 웃었다. 밖에서 급한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지크는 그 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아는 듯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지크!? 하얗게 질린 얼굴로 병실에 쳐들어온 사람은 바로 지크의 양모인 레니였다. 그녀는 생각보다 멀쩡한 지크의 모습을 보고 긴 한숨을 쉬었다. ?아아, 처크 삼촌이 또 나쁜 농담을 하셨구나. 크게 다쳤다고 해서 달려 와보니 환자복도 안 입었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전신불구였어요.? 지크는 어깨를 으쓱댔다. 레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아들의 이마를 살짝 쳤다. ?이 녀석, 그런 무서운 얘기를 잘도 하는구나.? 간호용 의자를 끌어다 앉은 레니는 들고 온 종이쇼핑백을 지크에게 건네주 었다. ?이거 입어봐. 선물이야.? ?선물이요? 웬일로?? 지크는 재빨리 쇼핑백을 뒤집어 내용물을 꺼냈다. 백 안에 들어있던 건 재킷과 청바지, 장갑, 신발이었다. 그 중에서 대번에 지크의 눈을 만족시킨 건 재킷이었다. 밝은 적색의, 최고급 스포츠카를 연상케 하는 붉은 색의 멋진 재킷이었다. 어제의 사건 때문에 붉은 색이라면 치가 떨려야 할 지크였지만 재킷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은 사방으로 날아가 버렸다. 지크 자신을 이토록 만족시키는 옷은 거의 처음이었다. ?우와, 어디서 사신 거예요? 그러고 보니 어디서 만들었다는 표시도 없네 요? 설마 손으로 만든 것?? 아이처럼 좋아하는 지크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레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몰라.? ?예?? ?미안하지만 내가 산 게 아니야. 네 한국친구들이 BSP대원이 된 걸 축하한 다며 사왔더구나.? ?한국친구요?? 지크는 어리둥절했다. 그는 한국에서 사귄 친구가 없었다. 억지로 꼽자면 하리진과 그녀의 부친이었다. 그때 문득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 사람, 혹시 파란 장발이었나요?? ?응, 맞아. 키는 너보다 조금 더 컸고 정말 잘생겼더라. 혹시 탤런트니?? ?아, 아뇨. 서커스에서 불 쇼를 해요.? ?불 쇼?? ?그, 그렇죠. 근데 자주 나오진 않아요.? ?으응.? 레니는 지크의 표정이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그냥 넘어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같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자, 나가있을 테니 한번 입어보렴. 출근도 해야 하잖아?? ?출근이요? 전 어제 입원했다고요!? ?나도 알아. 하지만 처크 삼촌께서 네가 어제 입원했다며 난리를 치면 꼭 끌고 나오라고 하셨지.? ?…….? 강적은 그 붉은 장발의 남자만이 아니었다. 그것을 확실히 깨달은 지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을 했다. ?알았으니 퇴원수속이나 밟아주세요. 옷 갈아입고 나갈게요.? ?으응, 그럼 밖에서 보자.? 레니가 나간 뒤 지크는 즉시 재킷을 들어 몸에 걸쳤다. 어제까지 입던 파란 재킷과는 상당히 틀렸다. 좀 묵직하긴 해도 몸에 딱 맞 았다. 거울에 비춰보니 자신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그는 신이 난 나머지 거울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중얼댔다. ?이야, 젊은 오빠는 누구야? 옷 멋진데? 얼굴을 보니 여자들 꽤 울리고 다 니겠어? 하지만 나를 따라오려면 멀었다구. 하하하.? 너무 신이 나서일까. 그는 퇴원수속 확인을 위해 들어온 간호사와 의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리진. 19세. BSP, 대한민국 수도방위지부의 주 전투요원 중 유일한 현지인. 사이킥 능력은 S랭크. 격투능력, 그리고 전술능력을 비롯한 대부분의 능력 이 A랭크이며 오직 사격능력만이 B랭크인 최고급의 올라운드 플레이어다. 그녀의 부친은 대한민국 사상최고의 BSP로 꼽히는 하지혁이다. 게다가 그녀 의 어머니는 역사상 최고 클래스의 사이키커 중 한 명인 김미린이다. 둘의 장점만을 깨끗이 이어받은 그녀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BSP사관학교에 들어간다. 그녀가 무슨 이유로 잘 다니던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사관학교에 갔는지는 그녀와 그녀의 가족 외엔 아무도 모른다. 어찌됐든 당시 하지혁은 차도에 드러눕기까지 하며 딸의 길을 막으려 했다. 전직 BSP인 만큼 그 직업이 얼마나 고되고 위험한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라 해도 자식의 고집을 당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 어엿한 주 전투요원이 된 리진이었으나 그녀가 싫어하는 것에 는 변함이 없었다. 바로 지금, 가족과 함께 하는 아침식사 시간이었다. 모친의 요리가 형편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모친의 요리는 아파트 전체와 친가, 외가에서 알아줄 정도로 수준급이다. 주된 이유는 바로 부친의 질문 및 잔소리였다. ?오늘은 야간순찰 안하지?? 이마에 반창고를 붙인 지혁은 오늘도 어김없이 질문을 꺼냈다. 그 상처는 얼마 전 리진을 대신해 비상작전을 수행하다가 얻은 훈장이었다. 리진은 구겨질 뻔한 인상을 최대한 펴며 대답했다. ?그저께 끝난 사건 덕분에 당분간은 없어요.? ?미진이 생일선물은?? ?오늘 사줄 거예요.? 리진의 대답에 옆에 앉은 동생, 하미진이 눈을 크게 떴다. ?응? 언니, 정말이야?? ?생일파티에 못 온 대신 좋은 걸로 사줄게. 걱정하지 마.? ?진짜? 작년처럼 십자수 세트 사주고 ?만들어서 가지고 다녀!?라고 하진 않겠지??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줄게.? ?…….? 미진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언니의 말투가 평소에 비해 너무도 쌀쌀맞아서 였다. 하지혁은 걱정스런 얼굴로 수저를 놓았다. ?힘든 일이라도 있니, 리진아?? ?없어요.? ?정말?? ?예.? ?진짜?? ?예.? ?진실로?? ?…….? 연속되는 같은 질문에 리진의 눈썹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괜찮다니까요, 아빠. 이상한 사람 때문에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이상한 사람? 설마 스토커라도 붙은 거니?? 이번엔 그녀의 모친이 기겁을 했다. 그 모습에 리진은 허탈이 웃었다. ?아니에요, 엄마. 스토커라면 차라리 낫게요.? ?그래? 그럼 그 이상한 사람이라는 게 도대체 누구니?? ?있어요.? 리진은 짧게 대답함으로서 화제를 끝내려 했다. 그런데 그녀의 동생이 도화 선에 불을 붙였다. ?지크라는 사람이야?? 그 순간 물을 넘기던 하지혁의 목젖이 멈췄다. 컵을 잡은 손은 심하게 떨렸 고 이마엔 식은땀이 맺혔다. 부친의 상황을 모르는 리진은 동생을 팔꿈치로 찔러댔다. ?아니라니까! 내가 그깟 멍청이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해? 하 하, 절대 아니야! 그럴 리가! 난 남자보는 눈이 높다고! 언니를 무시하지 마!? ?헤헷. 알았어, 언니. 무리하지 말고…….? ?그 놈은 안 된다!? 장난을 치던 자매의 동작이 일순간 멎었다. 야생호랑이처럼 소리를 지른 지 혁은 숨을 가삐 몰아쉬며 말했다. ?지크 스나이퍼, 그 놈만은 절대 가까이 하지 말거라! 아빠가 요즘 그 녀 석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걸 모르는 거냐!? 테이블 주위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지혁의 두 딸과 부인은 흥분한 가장의 모습을 넋 나간 듯 바라봤다. ?여보, 그때의 일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부인이 기습적으로 묻자 지혁의 얼굴색이 또 한번 바뀌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나, 난 먼저 출근하겠소!? 지혁은 도망치듯 양복상의를 챙겨 집을 나섰다. 부친의 그런 모습을 거의 처음 보다시피 한 리진과 미진은 무서운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서로를 바라봤다. ?어, 언니? 아빠께서 왜 저러시는 거야?? ?나, 나도 몰라. 엄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불안한 딸의 얼굴에 모친인 김미린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걱정하는 얼굴아 아니라 짜증이 섞인 얼굴이 었다. 미린은 조금 거칠게 수저를 들며 말했다. ?너희들은 몰라도 돼. 그리고 신경 쓰지 말거라. 전부 아빠의 개인적인 사 정이니까.? ?예?? ?너희 아빠가 원래 좀 사소한 걸로 지나친 행동을 한단다. 결혼하면 좀 나 아지려나, 했는데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틀리지 않더구나. 하여 튼 그놈의 속담은 나쁜 쪽으론 전부 들어맞는단 말이야.? 미린은 밥과 반찬을 거칠게 집어 들었다. 자매는 부친에 대한 의문을 품에 안은 채 식사를 계속했다. ?아참, 다음 주에 외할머니께서 올라오신단다. 방 정돈 잘 해두렴, 미진 아.? ?예? 또 제 방에서 주무시는 거예요?? 미진이 울상을 지었다. 김미린은 엄한 표정으로 딸에게 말했다. ?언니 방에선 주무시지 못한다고 말했잖니. 작년까지는 아무 말도 안 하더 니 올해는 왜 그래?? ?작년이야 초등학생이었지만 올해는 아니잖아요. 저도 제 나름대로의 프라 이버시가 있단 말이에요, 엄마.? 김미린은 실소를 지었다. ?후후, 알았으니 어서 식사나 끝내렴. 오늘 주번이라 일찍 가야한다고 했 잖니.? 그렇게 일상적인 대화가 오고 가는 한편으로 리진의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 했다. 부친과 지크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부친에 대한 생각은 출근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덕분에 오전 브리 핑 중에 딴생각을 한다며 처크에게 크게 혼이 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녀가 부친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리라 마음먹은 건 그날 점심시간, 패스트푸드 점이었다. ?어이, 지크.? ?응?? 그녀의 부름에 옆자리에서 햄버거를 씹던 남자가 반응했다. 지크 스나이퍼. 올해나이 23세. 얼마 전 BSP, 대한민국 수도방위지부에 들어온 남자이자 사이킥 능력을 제 외한 모든 능력이 S인 최고급의 BSP요원이다. 그러나 이상한 성격을 가진 탓에 주위사람들은 그의 엄청난 전투능력을 종종 잊곤 한다. 그 ?주위사람? 중 한 명인 리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 아빠, 알고 있다고 말한 적 있지?? ?응? 아아, 알고 있지. 잘 아는 사이지만 지혁 아저씨랑은 별로 친하지 않 아. 미린 아줌마와는 조금 친하지.? ?그래? 서로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대답을 기다리는 리진의 귀에 이윽고 후루룩 하는 스트로우 소리가 들렸다. 그만큼 뜸을 들이고도 모자랐는지 지크는 머리를 긁적이는 등 잡다한 행동 을 하며 시간을 늦췄다. ?대답하기 곤란한 일이야?? 리진의 재촉에 지크는 떨어트리듯 종이컵을 놓았다. 빈 컵이라 얼음끼리 부 딪히는 소리만 요란하게 났다. ?대답해주면 난 네 아빠한테 크게 혼날 거야. 지혁 아저씨, 아마 지옥 끝 까지라도 날 쫓아올걸?? ?뭐? 어째서?? ?그 ?어째서?라는 질문에 대답하면 혼난다니까.? 이후 리진은 틈이 있을 때마다 물었지만 지크의 입은 의외로 열리지 않았 다. 결국 그날 하루는 그렇게 저물었고 리진은 다음날부터 다른 방향을 통 해 의문해소작업을 시작했다. 지크에 이은 2차 목표는 그렌이었다. 리진은 오전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그렌에게 달라붙어 어제와 비슷한 질문을 했다. 그러나 그렌 역시 입이 무겁긴 마찬가지였다. ?지크와 지혁의 관계? 그건 왜?? ?당연히 알고 싶어서죠, 선배님. 아빠께서 요즘 지크 얘기만 들리면 이상 하게 변하시거든요. 혹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아시나요?? ?으음…….? 그렌은 굉장히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생각이 많아지 면 발동하는 그의 버릇이었다. ?음, 전부 얘기해줄 수는 없어.? ?예? 왜요!? ?지혁이랑 약속을 했거든. 리진도 알다시피 지혁은 나와 가장 친한 동료이 자 후배야. 그런 사람과의 약속인데 여기서 깰 수는 없지. 하지만 지혁과 지크와의 관계까지는 말해줄 수 있어.? 만족스럽진 못했지만 그래도 단서가 될만한 얘기 같았기에 리진은 쾌히 고 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잠시 10년 전, 지크가 열세 살이 되던 해로 돌아간다. 처크의 초대로 대한민국 땅을 처음으로 밟은 지크는 대한민국 최강의 무술 이라 칭해지는 비전승(秘傳承) 태권도, 용살문의 본당을 가장 먼저 방문한 다. 그곳에서 지크를 기다리던 사람이 바로 하지혁과 그의 부인 김미린이었 다. ?그때 지크는 격투에 대한 소질에 이미 눈을 뜬 상태였지. 게다가 육체적 인 능력도 좋았어. 그때 지크의 키가 168센티였나? 아마 그랬을 거야. 키뿐 만 아니라 덩치도 꽤 좋았지. 하여튼 지부장님이 지크를 지혁에게 소개해준 것은 용살문의 기술을 녀석에게 가르치기 위해서였는데, 당시 지혁은 지크 를 굉장히 깔보고 있었어.? 그렌의 회상대로 지혁은 지크에게 동네 태권도 도장에서나 가르쳐줄법한 기 초의 기초를 가르쳤다. 지크가 태권도의 기초인 기마자세조차 몰랐다면 상황은 좀 달랐겠지만 지크 는 기마자세가 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그 자세 만을 강요당한 지크는 결국 화를 내며 사건을 저지른다. ?사건이요?? ?응, 지크가 지혁에게 대련을 신청한 거야.? ?대련이요? 열세 살 꼬마가 용살문의 정통후계자에게? 하하하!? 리진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렌은 조금 미안한 얼굴로 다음 얘기를 계속했 다. ?그런데 지혁은 지고 말았어.? ?…….? 지크는 대련이 시작되자마자 지혁의 가슴에 주먹을 갖다 댔다. 친 게 아니 라 댄 것뿐이었다. 근육으로 탄탄히 뭉쳐진 지혁의 가슴이 그런 것에 흔들 릴 리는 없었다. 단순한 아이의 재롱이라 생각한 지혁은 어린 상대를 가볍게 넘어트리기 위 해 몸의 힘을 풀었다. 그러나 그 순간 진짜 공격이 이어졌다. 퍽 소리와 함께 지혁의 육체는 3미터 가까이 뒤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가슴을 부여잡은 채 바닥을 구른 지혁은 소년이 쓴 기술이 뭔지 눈치 채고 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꼬마 지크가 쓴 기술은 분경(分勁)이었다. 중국권법 중엔 발경(發勁)타법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호흡으로 빚어진 체내의 기를 한순간에 폭발시켜 인체 밖으로 뿜어내는 고도의 기술이다. 발경은 거리에 따라 척(尺), 촌(寸), 분(分)으로 나뉜다. 척경(尺勁)은 멀리서, 촌경(寸勁)은 가까이서, 분경(分勁)은 상대와 완전히 밀착한 상태에서 발경타법을 쓰는 것이다. 척경과 촌경을 쓰는 사람은 BSP중에서도 많지만 분경을 쓰는 사람은 적다. 척경과 촌경은 몸을 움직여 기를 압축시킬 최소한의 공간이라도 존재하지만 분경은 그런 공간이 없다. 오로지 근육과 뼈의 움직임만으로 기를 압축시켜 야 한다. 나이 지긋한 권법가들도 하기 힘든 고도의 기술을 열세 살의 꼬마가 사용했 다는 사실에 지혁은 넋이 나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거기까지 들은 리진은 기가 막힌 듯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아빠께서 그거 한방에 무릎을 꿇으셨다고요?? 그렌은 씩 웃었다. ?그랬으면 리진이 궁금증을 가질 일은 없었을 거야.? ?예?? 용살문 전승자로서 자존심이 상한 지혁은 지크에게 정식으로 대련을 신청한 다. 김미린은 남편을 말렸으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어른이 도끼눈을 뜨고 덤비겠다는데도 지크는 여유 만만했다. 결국 둘은 싸 움에 가까운 대련을 했고 냉정을 잃은 지혁은 객관적으로 뛰어난 기량과 육 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패배의 구렁텅이로 빠진다. ?당시 지혁은 꼬마에게 두들겨 맞았다는 충격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했 어. 비디오게임이나 간단한 운동이 아닌 무술대련에서 패했으니 그럴 만도 했지. 이후 지혁은 지크와 눈도 마주치길 꺼려했고 지크 역시 지혁과는 거 리를 두고 살았어.? 그렌의 말을 들으니 어렸을 때의 일 하나가 떠올랐다. 항상 온화하고 따뜻 하고 깔끔했던 부친이 어느 날 갑자기 멍이 들어 집에 들어온 것이다. 지혁은 자신을 보고 겁에 질린 두 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방으로 슬그머니 사라졌다. 당시 네 살이었던 리진의 동생, 미진은 괴물을 본 듯 폭풍처럼 울어댔고 뒤늦게 들어온 김미린과 리진은 놀랜 동생을 달래느라 진땀을 빼 야 했다. ?아빠께서 당하신 날이 그날이구나.? 그렌에 대한 심문(?)은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지부장님께 여쭤볼까? 하지만 지부장님만큼 입이 무거우신 분은 없는데… ….? 리진은 의문을 품에 안은 채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났다. 회의실의 분위기는 그날따라 매우 가라앉아 있었다. 처크는 회의시작 10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이 도 조용히 모니터를 지켜볼 뿐이었다. ?불안하게 왜들 그래요? 뭐 죄라도 지은 거 있어요?? 지크가 참다못해 재촉했다. ?지금은 죄를 짓고 감옥으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야.? 처크의 말에 지크를 포함한 대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얘기는 그로부터 시작됐다. ?그렌, 미안하지만 후배들을 위해서 소울게터(Soul Getter)에 대한 설명을 좀 해주게.? ?네? 소울게터라고 하셨습니까?? 그렌이 흠칫 놀라 물었다. 확인을 요구하는 그렌을 향해 처크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렌의 표정이 처크와 비슷해졌다. 뜸을 들이던 그는 굳게 마음을 먹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두들 잘 듣도록. 소울게터는 19년 전, 그러니까 BSP가 발주한지 1년 뒤 에 나타난 변종의 BG를 말한다. 몸은 중형이지만 분류상으로는 B+클래스인 무시무시한 녀석이지.? ?B+라고요?? 지크가 소리쳤다. BSP대원들의 생명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C급 정도의 바이오 버 그다. 몸집이 4미터 내외인 중형의 경우 전 세계에서 베스트 클래스에 드는 BSP가 아니면 1대1로 상대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하다. 그보다 강한 C+나 B급이 나타나면 다른 지역의 BSP까지 동원되어 특별소탕 작전에 나선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도시 하나가 괴멸되는 것도 시간문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거론된 소울게터는 B+라는, 아주 환상적인 급수의 BG였다. ?당시 우리 BSP는 소울게터를 잡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아끼지 않았 어. 경기와 강원, 황해, 평안의 BSP들과 연합까지 했지만 녀석은 잡을 수 없었지. 잡기는커녕 우리만 당했어. 피해가 날로 심각해질 무렵, 우리는 뜻 하지 않은 외부인의 도움을 받아 녀석을 분쇄하는데 성공했어. 대신 BSP역 사상 가장 강력한 사이키커 중 한 명인 김미린을 잃고 말지.? ?예? 저희 엄마 말씀이세요?? 리진이 펄쩍 뛰었다. ?잃었다?라는 불길한 말을 들었으니 그렇게 흥분하 는 것도 당연했다. 그렌은 힘없이 웃었다. ?은퇴했다는 말이야. 그 사건 때문에 김미린은 모든 사이킥 파워를 잃고 말았지. 대신 우리는 목숨을 건졌고 소울게터는 영원히 사라졌어.? 소울게터 사건은 상당히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자 가장 이해하기 힘든 변 종이 나타난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장비나 경험이 변변치 않고 대원들의 무력도 전체적으로 낮은 BSP 초창기시절의 사건이기 때문에 BSP 3세대인 지 금은 결과가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질문이요.? 지크가 손을 반쯤 들었다. 처크가 웬일이냐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말해봐.? ?소울게터라는 녀석, B+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A급 BG은 도대체 어떤 괴물 이죠?? ?A급? 음, A급이라…….? 처크는 백지를 앞에 둔 화가처럼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씩 웃었다. ?A급은 없어.? ?예?? ?BSP역사상 가장 강한 BG는 7년 전에 나타난 A-급의 ?아수라?야. 일본에 서 나타난 BG인데, 그 녀석 하나 때문에 도쿄 지부는 자신들의 의지와 관계 없이 깨끗이 물갈이가 됐지. 전투요원이 전부 죽어버렸거든. 게다가 아수라 는 잡지도 못했어. 큰 상처를 입혔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지.? ?호호, 오싹 한데요.? 지크는 장난을 치듯 자신의 몸을 감싸며 웃었다. 이윽고 그렌이 물었다. ?그런데 지부장님. 소울게터에 대한 말씀을 왜 꺼내신 겁니까?? 처크는 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 녀석이 다시 나타났네.? ?…….? ?자세한 사항을 알려주겠네. 루이, 부탁해.? ?예.? 대답에 이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이즈와 함께 메인스크린에 뜬 것은 피해자들의 모습이었다. BG사건의 희생자는 대부분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뜯어 먹히거나 신체 일부를 잃은 상태로 자료화면에 담긴다. 그런데 지금은 정 반대였다. 화면에 나타난 사람들 모두는 넘어져서 생긴 상처 외엔 외상이 거의 없었 다. 생물학적으로 봤을 때 그들은 살아있었다. 대뇌, 소뇌 모두 제대로 움직였 고 심장도 뛰었다. 주사로서 연명을 시키면 배설까지 제대로 해낸다. 하지만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정교한 밀랍인형을 보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루이씨, 저 사람들 뇌사상태요?? 팔짱을 낀 케빈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아닙니다. 저번 주부터 하나 둘씩 발견된 피해자들은 극히 작은 외상 외 엔 신체에 아무 상처도 입지 않았습니다. 뇌사 역시 아닙니다.? ?그럼 왜 저렇게 인형처럼 변한 거요?? ?소울게터에게 당한 자들의 특징이지.? 루이대신 대답한 처크는 어느새 두꺼운 시거를 물고 있었다. ?소울게터는 이름 그대로 소울, 즉 영혼을 먹네. 먹어서 뭐에 쓰려는지 모 르겠지만 녀석에게 당한 피해자들은 오직 영혼만을 빼앗기네.? ?영혼이요? 그게 가능합니까?? 케빈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담배를 물었다. 처크의 것과 다른 일반적인 필 터담배였다. 불을 붙이는 그의 앞에 니켈의 재떨이가 기계손에 의해 밀려왔다. ?나도 19년 전엔 말도 안 되는 얘기라 생각했네. 하지만 사실이었어. 당시 영상을 보고 싶으면 영상자료실로 가보게. 심령사진을 마음껏 볼 수 있을 거야.? ?…….? 그렌의 여유 있는 웃음이 케빈에겐 왠지 두렵게 느껴졌다. 처크의 얘기가 계속됐다. ?다른 BG들과 달리 인간의 피부나 내장은 전혀 건들지 않아. 하지만 꽤 사 나운 편이라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 3주 전부터 하루에 10여 명씩 인형신 세가 됐지. 그리고 그 수치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어.? ?3주라고 하셨습니까?? 그렌의 목소리엔 상당한 유감이 담겨있었다. 3주 동안 아무 것도 안하고 가 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물론 처크는 사건을 앞에 두고 넋을 놓을 아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이 사건에 대해 비공식적으로 알게 된 것은 약 1주일 전이네. 매트 로 서울 경찰청의 친구에게 들은 것이지. 그 친구와 난 범인이 소울게터가 확실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경찰에게 사건을 넘기라고 요구할 수 는 없어.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에겐 협조요청권한만이 있을 뿐, 강제요구권 한은 없거든. 하여튼 경찰 쪽에서 우리에게 이 사건을 넘긴 건 어제오후네. 피해자가 200명을 넘어갔으니 그들도 겁이 났겠지.? ?그렇군요.? ?후후, 왜? 내가 사무실에만 멍하니 있을 줄 알았나?? 처크의 짓궂은 웃음에 그렌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부터 소울게터라고 생각되는 괴 생명체에 대한 사냥 에 나선다. 아직은 소울게터일지, 아니면 정신 나간 무속인이 사고를 친 건 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니 일단 괴 생명체로 해 두지. BG라고 판명되면 그때 부터는 소울게터 세컨드라고 이름 짓는다. 자세한 사항은 10분 뒤 전송될 데이터를 참고하도록. 그럼 이상.? 브리핑을 마치고 나온 리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뒤따라 나오던 지크가 그 소리에 놀랄 정도였다. ?어이, 리진. 고민 있어? 무슨 한숨을 그리 크게 쉬어?? ?응? 아냐, 별로.? 리진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어깨도 축 쳐진 것으로 봐서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듯 했다. 이유를 골똘히 생각하던 지크는 이상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렇군, 오늘이 마법에 걸린 날이었나?? 순간 리진의 얼굴이 불끈 달아올랐다. 지크는 그녀의 어깨에 자연스레 팔을 걸치고는 평소처럼 신나게 떠벌리기 시작했다. ?이래서 여자들은 불편하단 말이야. 우리 엄마도 그날이면 평소보다 음식 을 못 만드시더라고. 하지만 숙명인 걸 어찌하오. 그래, 오늘은 집에 가서 쉬어. 내가 네 몫까지 열심히 싸워주… 크억!? 비명을 지른 지크는 명치를 감싸 쥐고 쓰러졌다. 주먹을 불끈 쥔 리진은 사 천왕의 지국천왕처럼 시뻘건 인상을 쓴 채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그리고 그것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고! ? ?그, 그럼 뭐야. 명치를 때려야 할 정도로 심각한 일이야?? 지크가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진은 대답을 망설이다가 힘겹게 말 을 꺼냈다. ?난 귀신을 싫어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크는 언제 맞았냐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허허, 누군 껴안고 사니? 그런 황당한 말이 어디 있어?? ?진짜야! 난 어렸을 때부터 귀신을 볼 수 있었단 말이야!? ?뭐?? 지크의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는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싶으면 귀신이 보였어. 아니, 귀신뿐 만 아니라 모든 영체들을 눈으로 볼 수 있었어. 도깨비니 뭐니, 민화에서나 나올 법한 귀신들까지 보였지. 그래서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외할머니 댁 에서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살았어.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런 현상 은 사그라졌어. 할머니께 그 힘을 조절하는 법을 배웠거든. 지금은 사이킥 파워를 과다하게 사용하지 않는 한 귀신을 보진 않아.? ?아직도 보고 싶으면 볼 수 있다는 말이네?? ?굳이 말하자면 그렇지.? ?으음.? 지크는 팔짱을 끼고 뭔가는 골똘히 생각했다. 그 사이 리진은 회의 내내 쌓 아두었던 불안감을 모두 털어놨다.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에게 소울게터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아. 무력은 아빠 혼자서 도저히 당해낼 수준이 아니었고 흡수한 영혼을 이용해서 특별한 공격까지 할 수 있었데. 게다가 어지간한 수준의 사이키커 들은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나봐. 녀석에게서 뿜어지는 영력이 워낙 강해서 일반적인 사이키커들은 힘이 몸속에서 역류했데. 만약 진짜 소울게터라면 정말 힘들 텐데…….? ?그래, 결정했어!? 지크가 진지한 얼굴로 리진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움찔한 리진은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결정하다니, 뭘?? ?내가 네 매니저가 돼주겠어.? ?…….? ?TV쇼에 나가는 거야! 억울하게 죽은 영혼과 대화를 하는 신비의 소녀! 이 걸 슬로건으로 해서 각종 미확인 사건들을 처리하자! 잘만 되면 해외진출도 문제없어! 떼돈은 식은 죽 먹기야! 자, 어때?? 반대편 복도에서 커피를 마시던 케빈은 잠시 후 지크의 긴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그렌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늘도 어김없군.? ?아침에 닭이 우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질 정도네요.? 케빈은 킥킥 웃으며 손에 든 종이컵을 10미터 앞의 쓰레기통에 던졌다. 컵 은 종이컵 전용으로 만들어진 원통 입구에 정확히 꽂혀 아래로 빨려 들어갔 다. 오늘 리진의 파트너는 지크와 챠오였다. 머릿수가 맞지 않기 때문에 챠오는 격일제로 그렌과 리진의 팀을 옮겨 다녔다. 덕분에 그녀는 씩씩대며 출발하는 리진의 모습을 격일로 볼 수 있었다. 멍 이든 지크의 얼굴은 보너스 아닌 보너스였다. 리진은 오늘도 어김없이 흥분하여 급출발을 했다. 챠오는 순찰차의 엄청난 가속을 몸으로 느끼면서도 별다른 표정변화를 주지 않았다. ?너무 흥분하지 마. 날 태우고 있는 게 싫다는 건 알겠지만 나랑 동반 자 살하는 건 더 싫을 거 아냐.? ?시끄러워! 이게 싫으면 네 구린 오토바이를 타!? ?성질머리 하고는…….? 지크는 투덜대며 얼굴을 매만졌다. 출발할 때보다 붓기가 많이 줄긴 했지만 멍은 여전히 뚜렷했다. ?그리고 그 오토바이를 너무 무시하지 마. 가격으로 치자면 BSP순찰차 몇 대는 살 수 있어. 성능도 그런 형식의 오토바이 중에선 최고라구. 차원이 다른 녀석이란 말이야.? 그러나 흥분한 리진은 자제력을 잃은 채 반격에 나섰다. ?그래봤자 구린 오토바이야!? ?구리지 않다니까?? ?아, 그래? X차가 왜 X차인지 알아? X을 싣고 다니기 때문에 X차인 거야! 그러니 네 오토바이도 구린 오토바이라 이거야!? ?…….? 리진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과격한 말이었다. 지크는 물론이고 가만히 있던 챠오까지 놀라 그녀를 바라볼 정도였다. 리진이 진정된 것은 두어 시간 뒤였다. 특별한 일이 없던 것은 물론 지크 역시 조용히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나쁜 기분이 있어도 한번에 확 씻어 내리는 화끈한 면이 있었다. 어 지간한 일이 아니면 마음속에 앙금을 남기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특성을 몇 주 동안 익힌 지크는 적당한 시간에 맞춰 다시 얘기 를 꺼냈다. ?소울게터에 대한 얘기, 어디까지 알고 있어?? 시내를 서행하던 리진이 눈썹을 움직였다. ?오늘 지부장님께서 말씀하신 것보다는 자세해.? 화가 난 듯한 말투는 아니다. 지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럼 그 ?뜻하지 않은 외부인?이 누군지도 알겠네?? 19년 전, 소울게터의 처리를 위해 BSP를 지원해준 사람에 대한 물음이었다. 리진은 실소를 흘렸다. ?당연하지. 우리 외할머니신걸?? ?외할머니?? ?그럼! 우리 외할머니께서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모를걸?? 리진은 운전을 아예 컴퓨터에게 맡긴 뒤 본격적인 자랑을 시작했다. ?우리 외가는 조선시대, 그러니까 600여 년 전부터 대대로 무당을 해왔어. 당시엔 조선왕가의 총애를 입어서 아무런 해를 받지 않고 역사의 뒤편에서 명맥을 이어내려 왔지만 조선시대 말기에 외국종교들이 들어오면서 조금 시 들해졌고 결국 근대부터는 존재 자체가 희미해져 버렸지. 하지만 무당으로 서의 피와 기술은 끊임없이 전해져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어. 어때, 우리 외가 참 대단하지?? ?호오, 네가 그래서 귀신들을 볼 수 있었구나?? ?말하자면 그렇지.? 챠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진의 사이킥 파워가 다른 사이키커들과 는 조금 틀리다는 것을 예전부터 느끼고 있던 그녀로선 의문을 풀 수 있는 대목이었다. 리진이 말은 계속됐다. ?우리 외할머니의 퇴마기술은 조상님들까지 따져도 역사상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셔. 하지만 기술을 발휘하기 위한 염력(念力)은 조금 부족하시지. 소울게터를 잡을 때 우리 엄마가 사이킥 파워를 잃으신 것도 그 때문이야. 엄마는 할머니의 부족한 염력을 대신하기 위해 자신의 염력을 모두 꺼내셨거든.? ?그렇군.? 지크는 대답한 직후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소울게터를 잡는 데 퇴마기술이 필요했단 말이야?? ?응. 소울게터는 섭취한 영혼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힘이 강해지는 특 성이 있었거든. 특이하게도 녀석에게 먹힌 영혼은 모조리 원혼으로 바뀌었 어. 어째서 그렇게 됐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원혼들이 가진 한(恨)의 수준은 전쟁터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강력했데. 그래서 가 장 강력한 퇴마기술이 필요했지.? ?그래? 귀찮게 됐네.? 지크는 씁쓸한 표정으로 차창 밖을 바라봤다. 리진은 그가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알게 된 것은 점심 시간, 지크가 먹을거리를 사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뭐야, 저 녀석. 누군 귀찮지 않은 줄 알아? 운이 없으면 나도 엄마처럼 조기은퇴하게 생겼는데…….? 리진의 투덜댐 속엔 깊은 공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공포는 소울게터 얘기가 처음 나왔을 때부터 생겨났다. 리진이 다른 날 보다 화를 더 낸 것도 그것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모친이 사이킥 파워를 잃고 얻은 후유증 때문에 얼마나 고생 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후유증은 처절할 정도였다. 온 몸의 근육이 뒤틀리고 호흡의 리듬이 엉켰다. 기억까지 잠깐 동안 상실 했다. 가쁜 숨과 지옥과도 같은 근육통 속에서 자신의 누구인지, 누가 자신 의 딸이고 남편인지 모르는 상황이 닥쳐온다. 이것은 생지옥이나 다름없었 다. 고통은 김미린만을 괴롭힌 게 아니다. 괴물처럼 눈을 허옇게 뒤집은 채 꿈 틀대며 게거품을 흘리는 엄마의 모습을 리진은 여덟 살이 되는 해까지 매일 처럼 봐야만 했다. 이윽고 챠오가 말했다. ?지크는 귀신과 싸운 적이 있어.? ?뭐?? 챠오가 지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와 지크의 관계를 거의 모르는 리진은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벌리 고만 있었다. ?지크가 우리 집에 온지 반년 쯤 됐을 무렵이었어. 마을사람의 실수로 인 해 전설로만 존재한다 생각했던 마을의 수호령이 악령으로 실체화 하여 마 을을 불태우고 다녔지. 할아버지와 아버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모두 나 섰지만 그 수호령은 물리치지 못했어. 주먹이나 기로 물리칠 수 없는 영적 인 존재였거든.? 챠오가 이렇게 길게 얘기하는 것도 리진으로선 처음이었다. 챠오 특유의 돌 덩이같이 묵직한 표정은 그대로였으나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놀라움은 계속됐다. ?그때 지크가 나섰어. 지크의 실력이 아직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아는 우 리 가족은 지크를 말렸지만 그는 방법이 있다면서 만류를 뿌리쳤어. 결국 그는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싸운 끝에 수호령의 분노를 잠재우는 데 성공했 지.? ?정말? 그 강력한 영(靈)을 그 얼간이가 물리쳤단 말이야?? ?응.? ?어떻게?? 그때 순찰차의 문이 벌컥 열렸다. 햄버거 특유의 진한 양념냄새가 차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심부름을 다녀온 지크였다. 상황을 모르는 그는 덤덤한 얼굴로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치킨햄버거 두 개에 불고기햄버거 네 개, 콜라 셋, 감자튀김 셋, 이거 맞 지?? ?…….? ?어이, 맞느냐고 물었잖아. 먹고 나서 불평해도 소용없어.? ?응? 아아, 맞아 맞아. 수고했어.? 리진은 어설프게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다. 점심을 먹는 동안 리진은 챠오의 눈치를 봤다. 지크가 어떻게 수호령을 이 겼는지에 대한 것을 묻기 위해서였지만 챠오는 철저히 시선을 피했다.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무슨 일 있어? 왜 챠오를 자꾸 쳐다봐?? 지크가 짓궂게 물었다. 리진은 움찔했지만 겉으로는 당당히 받아쳤다. ?뭐야, 지크야말로 나만 쳐다보고 있었던 거 아냐? 혹시 나한테 관심 있어 ? 하긴, 내가 좀 예쁘게 생겼지, 후후후. 하지만 날 넘볼 생각은 하지 마. 나랑 연애를 하려면 아빠한테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해.? ?허락?? ?그래, 허락. 우리 하씨 가문의 공주님이랑 사귀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알았어?? 지크는 곤란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허락은 옛날에 받았어.? ?아, 그래? …뭐라고!? 리진이 순간 발칵 뒤집혔다. 지크는 진정하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냥 그렇게만 알아둬. 그리고 넌 감정이 얼굴에 다 나와 버린다구. 무슨 일이 있으면 표정이 대번에 바뀌지. 그걸 보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은 거 야.? ?정말? 거짓말하지 마!? ?정말이라니까? 의심나면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 지크는 턱으로 챠오를 가리켰다. 리진은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눈을 돌렸 다. ?챠오, 진짜야?? 챠오는 빨대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동조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리진은 처참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트렸 다. ?무, 무슨 소리야? 거짓말이겠지? 난 BSP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했어. 필기는 좀 못 봤지만 실기는 거의 만점이었다고. 엘리트란 말이야! 내가 그렇게 단순한 여자일리가 없어!? 지크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알았으니 통신이나 받으시지, 엘리트씨. 긴급신호잖아.? ?앗!? 화들짝 놀란 리진은 급히 통신버튼을 눌렀다. 뭔가 안 풀려도 단단히 안 풀 리는 날이라는 생각도 함께 했다. ?한강남부지역 순찰조의 하리진 소위, 순찰승인번호 3738134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여기는 BSP본부입니다! 현재 무역센터 남쪽에 강력한 바이오 버그가 출현 했습니다! 레이더를 통해 추정되는 BG랭크는 C+이상입니다!? 리진은 기다렸다는 듯 패달을 밟았다. 현재위치에서 무역센터까지는 차량으 로 10분 내의 거리니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핸들을 컴퓨터에 맡긴 리진은 동료들과 함께 장비를 챙기는 한편 오퍼레이 터에게 현재 상황을 물었다. ?피해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전투경찰은 도착했습니까?? ?그게…….?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조금 희미했다. 오퍼레이터 자신도 지금부터 말해줄 상황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피해자는 아직 없습니다. 레이더 상으로 따졌을 때 목숨을 잃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뭐라고요?? 리진과 동료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통상적인 바이오 버그 사건의 경우 BG출현과 동시에 수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최악의 경우 반경 50미터 이내의 모든 생물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BG들은 항상 습격의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사상자의 발생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피해자가 한 명도 없다고 한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쳤다는 말과 같으니 그들이 놀라는 건 당연했다. ?에이, 일단 가보자!? 지크의 강렬한 목소리에 맞춰 순찰차의 스피드도 더욱 빨라졌다. 한편 무역센터와 그 주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사람 과 차량의 파도는 어떻게든 그곳에서부터 멀어지기 위해 애를 썼다. 그로 인해 전투경찰들은 사건발생지점으로 접근조차 못했다. 사태가 더욱 극심한 곳은 지하시설, 코엑스몰이었다. 미로 정도는 아니었지 만 복잡하다면 복잡한 그곳은 출입구마다 탈출하려는 사람들의 인파로 새까 맣게 물들어 있었다. 가장 사람이 없는 곳은 이벤트 코트였다.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수 십 여명의 사람들이 이벤트 코트와 그 주위시설에 뒤섞여 쓰러져 있었다. 그들 모두가 자신들의 정면을 바라봤다. 바닥이든 천정이든 가리지 않았다. 그냥 정면에 시선이 있을 뿐이다. 쓰러진 사람 모두가 혼이 없는 마네킹 같 았다. 그 중앙엔 보라색의 껍질을 한 생명체가 있었다. 전체적인 모습은 사람과 흡사했다. 타이트한 스타일의 보라색 갑주를 걸친 전사와도 같았다. 다만 둔부 뒤에서 꿈틀대는 검고 긴 꼬리가 인간이 아님 을 첫 번째로 증명해 주었다. 갑주, 아니 외골격의 사이사이에서 연푸른색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보통의 연기처럼 자유롭게 흩어지거나 상승하지만은 않았다. 이따금씩 괴성을 지르 는 데스마스크의 형상을 갖추기도 했다. 그가 천천히 팔을 들어올렸다. 쓰러진 사람들의 머리 위에 하얀색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혼(魂)이었다. 불이라기보다는 연기에 가까운 그 혼불은 보라색의 생명체를 향해 조금씩 모여들었다. 생명체는 양손가락을 가슴팍 사이에 끼웠다. 두 번째 마디까지 파고든 손가 락이 좌우로 크게 움직였다. 좌우로 넓게 벌려진 생명체의 가슴 사이로 벌레구명과 같은 이상한 기관이 보였다. 숨을 쉬듯 벌렁거리는 그 구멍을 향해 혼불들이 무서운 기세로 빨 려 들어갔다. ―후욱. 혼불을 모조리 빨아들인 생명체는 가슴판을 닫고 긴 호흡을 내쉬었다. 그런 초자연적인 과정이 끝나자 외골격 사이에서 뿜어지는 연기가 더욱 강해졌 다. ?다시 나타났군, 소울게터. 소문은 들었다.? 멀리서 사람의 목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생명체는 다른 이의 접근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양복을 깔끔히 차려입은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실제 나이는 40대 중반이었지만 그냥 보기엔 30대라고 해도 믿을 법할 정도 로 동안이었다. 그러나 그의 소년처럼 짙은 눈썹과 맑은 눈빛은 알 수 없는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우리 회사 밑에 나타난 걸 환영한다. 설마 나에게 기회가 올 줄은 몰랐 어.? 그는 뿔테안경과 상의를 벗었다. 결혼반지를 빼고 시계도 풀었다. 벨트도 조금 느슨하게 했다. 넥타이 역시 풀어내렸다. 젊은 것은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20대도 따라오지 못할 늘씬한 육 체가 와이셔츠 위로 드러났다. 그는 무술의 자세를 취했다. 리진과 같은 태권도, 용살문의 자세였다. ?내 딸은 미린처럼 만들지 않겠다, 절대로. 그러니 넌 여기서 죽어줘야겠 다.? 그 남자, 하지혁은 한 마리의 호랑이처럼 복도를 질주했다. 보라색 생명체 역시 지혁을 향해 움직였다. ?하앗!? 기합과 함께 지혁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양 다리를 접은 채 날던 지혁은 생명체가 근접한 순간 발을 뻗었다. 앞으로 내뻗은 족도(足刀)의 각도가 더 없이 날카로웠다. 용살문의 공중기술인 용두참(龍頭斬)이었다. 턱 아래를 정확히 가격당한 생명체는 꺽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착 지한 지혁은 다시 뛰어올라 체조선수처럼 공중회전을 했다. 지면을 향해 모아진 지혁의 양발은 생명체의 머리를 정확히 조준했다. 이윽고 바닥이 꺼지는 소리가 터졌다. 지혁의 구둣발은 이벤트 코트의 단단 한 바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놓쳤다!? 지혁은 앞을 바라봤다. 방금 전의 공격을 몸을 굴려 피한 생명체는 지혁을 등 뒤에 놓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혁은 놓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렸다. 일반 태권도에도 있는 중단 돌려차기였으나 파워는 일반인과 틀리다. 30cm두께의 벽돌벽 정도는 간단히 부술 수 있다. 발끝이 닿기 직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생명체의 등판이 잠시 일그러지 더니 일순간 앞면으로 변했다. ?윽?? 지혁의 발차기를 간단히 막은 생명체는 지혁의 다리를 잡고 반대편 팔꿈치 를 들었다. 그대로 내리 쳐 그의 다리를 부술 생각인 듯 했다. 그에 앞서 지혁의 반대편 다리가 생명체의 머리에 꽂혔다. 머리에 타격을 받은 생명체는 크게 비틀거렸고 중심을 잃은 지혁은 바닥에 쓰러졌다. 몸을 굴려 뒤로 물러선 지혁은 재빨리 자세를 고쳐 잡았다. 상대는 다시금 공격을 받아줄 만큼 허약하지 않았다. 지혁이 준 충격은 이미 옛날 일이 되 어 있었다. 생명체는 양팔을 벌렸다. 외골격에 벌어지면서 연기의 기세가 더욱 강해졌 다. ?쉽진 않겠군.? 지혁은 다리를 모으고 양팔을 얼굴 앞에서 교차했다. 잠시 동안 호흡을 조 절한 그는 번개처럼 기마자세를 취했다. ?하압!? 거센 기합이 이벤트 코트를 뒤흔들었다. 지혁이 내딛은 바닥은 거인의 해머에 맞은 듯 푹 꺼졌고 상점의 유리창은 기의 폭발이 만든 풍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나갔다. 용살문 비기(龍殺門 秘技), 마호태세(魔虎態勢). 기를 압축시켜 그 다음에 이어질 공격의 위력을 최대한 강화시켜주는 내공기술이다. 원래는 임진왜란 중 당시의 용살문 정통후계자가 죽는 바람에 전수가 중단 되었지만 지혁의 할아버지가 중국무술의 내공을 바탕으로 하여 가까스로 부 활시킨 초절의 기술이다. 그러나 부활만 됐을 뿐, 미완성이기 때문에 공격을 단 한번만 강화시켜줄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지혁이 자세를 잡고 있는 동안 자신의 힘을 더욱 강화한 생명체는 준비가 끝나자마자 지혁을 향해 달려갔다. 이번엔 BG답게 네 발로 바닥을 디뎠다. 이윽고 생명체가 도약했다. 생명체의 외골격 사이에서 뿜어지던 연기가 그 의 오른쪽 팔에 모여 응축됐다. 그 한방에 모든 것을 걸려는 듯 했다. 지혁도 거의 같은 시각에 강렬한 정권지르기를 날렸다. 용살문 비기 중 하 나, 용왕격살퇴(龍王擊殺槌)였다. 황색의 빛에 휘감긴 지혁의 권과 생명체의 연푸른색 권이 중앙에서 충돌했 다. 작은 빅뱅이 터졌고 쌍방은 폭음과 함께 좌우로 튕겨 날아갔다. 생명체는 상점 몇 개를 뚫고 처박혔다. 반면 지혁은 바닥을 몇 번 구른 것 으로 끝냈다. 결과는 지혁의 승리였다. 대신 지혁의 와이셔츠는 절반이 날아가고 말았다. 드러난 지혁의 상체에선 흰 연기가 뿜어졌다. 모공에서 흘러나와야 할 땀이 체열로 인해 기화되는 것이다. 팔이 쓰렸다. 움직이지도 않았다. 마호태세에서 비롯된 용왕격살퇴는 그만 큼의 희생을 요하는 강력한 기술이었다. 그래도 지혁의 얼굴엔 미소가 흘렀다. ?후우, 다행이군. 아직 혼을 덜 빨아들였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더 늦었더 라면 내가 저 꼴이 될 뻔 했어.? 생명체가 마지막으로 처박힌 옷가게에선 고막을 찢는 듯한 귀곡성이 들려왔 다. 생명체에게 흡수됐던 영혼들이 원혼으로 변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멀리 서 보면 불로 인해 생긴 연기처럼 보였다. 지혁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19년 전에도 똑같은 광경을 본 그였다. 그가 정작 놀란 건 그 다음이었다. 사방으로 날아갈 것이라 생각한 원혼들 이 갑자기 방향을 바꾼 것이다. 죽은 줄 알았던 생명체가 옷더미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지혁과 충돌했던 오른팔은 어깨까지 사라져 흉한 광경을 만들었다. 그래도 그 정도면 지혁의 예상보다 멀쩡한 것이다. 생명체가 가슴을 열어젖혔다. 생명체 주위를 떠돌던 혼불들이 또다시 흡수 되었다. 조금 뒤, 거대한 촉수가 팔의 단면에서 튀어나왔다. 공사장의 전기배선처럼 바닥에 길게 늘어진 촉수는 휘리릭 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춤을 추더니 이내 팔의 모습을 갖췄다. 부서진 팔을 외골격까지 깨끗이 재생시킨 생명체는 기괴한 음성을 내며 몸 을 숙였다. 이젠 하지혁이 노려지는 처지가 된 것이다. 지혁은 납으로 변한 듯 무거워진 팔을 가까스로 추슬러 자세를 고쳤다. ?좋아, 날 죽여 봐라. 하지만 너도 같이 죽는다! 너를 내 딸과 마주치게 할 순 없다!? 생명체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지혁은 어떻게든 반격을 해보려 했으나 무거워진 몸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아저씨, 실례!? 순간 지혁의 등판에 충격이 왔다. 쓰러질 정도의 강한 충격은 아니었기에 지혁은 자신을 발판삼아 뛴 존재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상대보다 더 높게, 더 빨리 뛰어오른 사람은 다름 아닌 붉은 재킷의 청년이 었다. 몸을 돌린 청년은 프로 족구선수처럼 다리를 뻗어 생명체의 머리를 찍어 내 렸다. 상대는 배구공처럼 바닥에 떨어져 원래 있던 곳으로 죽 밀려나갔다. 안전하게 착지한 청년, 지크는 씩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오랜만에 봐요, 지혁 아저씨.? ?지크.? 지혁은 떫은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거부감과 반가움이 6대4의 비율로 섞인 이상한 인사였다. ?입국했다는 말은 오래전에 들었다. 우리 사이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인사 는 하러 오는 게 예의 아니냐?? 지혁의 말에 지크는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호오, 제가 인사 안 드려서 섭섭하셨나 보네요? 에이, 그러실 거면 진작 전화를 주시죠. 리진에게 전해주셔도 될 텐데…….? ?내 딸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했잖나!? 지혁의 눈에서 다시금 투지가 불타올랐다. 그는 지크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 을 옮겼다. ?좋아, 잘 만났다, 지크! 이왕 만난 거, 예전에 한 약속에 대한 담판을 짓 자!? ?예?? 지크는 흠칫 놀라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뒤를 보라는 눈짓도 계속 보냈지만 딸의 일이면 이성을 잃다시피 하는 지혁에게 지크의 보디랭귀지는 통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한 입으로 두 말을 안 하는 사람이라지만 그것만큼은 다르다 ! 그때 약속은 취소야! 정 원한다면 내 목을 가져가라! 절대로 너에게… 읍 !? ?아저씨, 그만!? 지크는 급히 지혁의 입을 막았다. 지혁은 그의 팔을 잡고 발버둥을 쳤지만 지크는 예전에 만난 열세 살 꼬마가 아니었다. 그래도 어디에서 힘이 솟았는지 지혁은 지크의 손아귀에서 입을 떼는데 성 공한다. ?놔라! 할 말은 해야겠다! 가져가고 싶으면 내 목을 가져가라니까 왜 말을 안들…….? ?아빠!? ?…….? ?아빠?라는 원초적인 호칭 한마디에 지혁의 얼굴이 바뀌었다. 괴 생명체 를 앞에 두고도 절대 두려워하지 않던 그가 지금은 공포에 질린 어린 양이 되어 있었다. ?리, 리진?? 예상대로 그의 뒤엔 리진과 그녀의 동료, 챠오가 서있었다. 리진은 아버지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약속이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으, 응? 아, 아무 것도 아니란다, 리진아. 오늘은 강남 쪽 순찰인가보네? 힘들진 않지?? 지혁은 언제 싸웠냐는 듯 환히 웃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알고 있는 지크는 더 이상 못 보겠다는 듯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이번엔 리진이 발끈했다. ?약속이 뭔지 말씀해 주세요! 설마 큰딸을 이상한 도구로 사용하시진 않았 겠죠? 아니라면 말씀해 보세요!? ?아, 아니야! 절대 아니야! 난 아무 약속도 안했어! 그렇지, 지크? 우리 친하잖아! 뭐라고 말 좀 해줘!? ?…….? 못 볼 것을 보고 만 지크는 결국 할 말을 잃었다. 다시 되새기는 것이지만 하지혁, 그는 대한민국의 BSP중 으뜸으로 꼽히는 전설적인 남자다. 불굴의 투지와 용기를 논할 때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지혁이란 이름을 거론한다. 또한 상당수의 소년들이 하지혁을 본받겠다며 BSP사관학교에 들어온다. 그러나 지금, 딸 앞에 선 지혁은 그런 것들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였다. ?아저씨, 그건 좀 있다가 얘기하면 안 될까요?? ?음?? 지크 쪽을 돌아본 지혁은 슬슬 일어나고 있는 괴 생명체의 모습을 볼 수 있 었다. 지혁은 진지한 얼굴로 투지를 불태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금 물리쳐야 한다, 지크. 여기서 놓치면 악몽이 다 시 재현된다.? ?알고 있어요.? 지크는 가죽장갑을 단단히 죄었다. 리진에게서 19년 전의 이야기를 들은 이 상 그도 각오를 다지지 않을 수 없었다. ?부탁한다.? 지혁은 지크의 등을 두드렸다. 지크와 리진은 의아한 얼굴로 지혁을 돌아봤 다. 딸의 시선까진 느끼지 못한 지혁은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너만큼 의지가 되는 녀석은 없겠지.? ?…….? 지크는 말없이 웃었다. 막 칭찬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였다. 한편 리진은 조금 놀라고 있었다.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남을 칭찬하는 건 본 일이 없는 그녀였다. ?어이, 리진!? 지크의 부름에 리진은 움찔하여 그를 쳐다봤다. ?왜?? ?그 약속이라는 거 말이야, 너와는 아무 상관없는 거야. 알았지?? 순간 지혁의 표정이 다시 납덩이처럼 변했다. ?이 녀석, 그런 얘기를 하면 더 의심할 거 아니냐!? 그는 마음속으로 하염없이 외쳤다. 그러나 현실은 지혁의 예상과는 동떨어 졌다. ?흥, 누가 그럴 거라 생각했을까봐? 꿈도 꾸지 마!? 리진은 지크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요즘 여성 치고는 꽤 순수 하다고 할 수 있었다. 지혁은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내 딸이 이렇게 단순했단 말인가.? 지크는 한 아버지의 한탄을 뒤로 한 채 걸음을 옮겼다. 그는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생명체를 향해 턱을 움직였다. ?어이, 벌레 녀석. 네가 그 유명한 소울게터냐?? 생명체는 대답 대신 몸을 날렸다. 아무런 기교가 실리지 않은 본능적인 발 차기였다. 왼팔로 공격을 가볍게 쳐낸 지크는 씩 미소를 지었다. ?아, 미안. 소울게터 세컨드라 이거지? 하여튼 잘 만났다.? 깨끗한 금속음이 이벤트 코트 안에서 울렸다. 지크의 붉은 재킷 위로 파란 색의 반사광이 드리워졌다. 공기 중에 속살을 드러낸 무명도는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워 보였다. ?네 전설도 여기서 끝이다, 귀신벌레. 넌 오늘 잘못 걸린 거야.? ―크악! 생명체, 소울게터의 보라색 마스크 안에서 괴음이 들렸다. 지금껏 조용히 있던 소울게터가 뭔가에 반응하듯 격렬히 몸을 떨었다. 외골격의 틈에서 새 어나오는 영체들도 급격한 움직임을 보였다. 지크나 리진, 챠오 등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지만 지혁은 알고 있었 다. ?조심해라, 지크! 사령포(死靈砲)다!? ?네?? 지크가 지혁을 돌아본 순간 소울게터의 왼팔이 꽃봉오리처럼 활짝 열렸다. 그 중앙엔 검은 동굴이 있었다. 동굴 안에선 연푸른색의 빛이 끓어올랐다. 갈수록 세기를 더해가던 빛은 이윽고 광학무기처럼 긴 잔광을 남기며 앞으 로 뿜어졌다. 빛의 표면은 무수한 데스마스크가 붙어 울부짖고 있었다. 사령포는 과학적 으로 확인된 에너지 덩어리가 아닌 원혼들의 집합체였다. ?같잖은 녀석!? 파란 반월이 지크 앞에서 번뜩였다. 무명도에 베인 사령포의 탄환은 둘로 나뉘는가 싶더니 귀곡성을 울리며 흩어져 사라졌다. ?사령포를 자르다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지혁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의 상식 안에서 사령포를 제대로 막은 사 람은 단 한사람, 그의 장모뿐이었다. 방탄조끼는 물론 전차에 쓰이는 열화우라늄 멀티장갑도 막아내지 못한 게 바로 사령포다. 구성원이 영체이기 때문에 보통의 물질로는 절대 막을 수 없다. 목표에 도달한 사령포의 탄환은 원혼의 한과 죽음의 공포를 에너지로 바꿔 폭발을 일으킨다. 그 폭발력은 같은 부피의 C4(Composition-4:플라스틱 고 폭탄)를 몇 배나 능가한다. 19년 전, 그로 인해 사망한 BSP와 전투경찰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런 대단한 공격이 칼 한방에 무로 돌아갔으니 지혁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지크는 자신이 지금 뭘 했는지 모르는 듯 실실 웃기만 했다. ?잘못 걸렸다고 했잖아, 귀신벌레. 미안하지만 이 무명도는 특별한 녀석이 야. 너 같은 녀석들에겐 특히 쥐약이지.? 소울게터는 두어 차례 더 사령포를 쐈지만 전부 무로 돌아갔다. 탄환이 잘 리는 모습과 곡을 하며 사라지는 원혼들의 모습을 자세히 보던 지혁은 혹시 나 하는 생각에 중얼댔다. ?저 무명도, 혹시 BSP 도쿄지부의 최고무기인 귀절환(鬼切丸)과 같은 종류 인가?? ?귀절환이요?? 리진이나 챠오로선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귀절환, 일본식 읽기로는 오니키리마루라 불리는 카타나로서, 전설상에선 악귀, 키하치(鬼八)의 몸을 절단한 칼로 유명하다. 원래는 다카치호(高千穗) 신사에 보관되어 있었지만 BSP사상 최강의 BG라 불리는 아수라를 잡기 위해 꺼내진 이후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전해진다. 지혁이 귀절환에 대한 설명을 더했다. ?나도 자세히 들은 건 아니지만 귀절환은 특별한 공정을 거쳐서 제작된 칼 이라고 하더구나. 알다시피 칼이란 것은 쇠와 불이 필요하지. 일반적인 칼 은 쇠의 재질과 도공의 실력에 따라 성능이 좌우되지만 귀절환은 불이 틀렸 다는군.? ?불이라면……?? 리진이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귀신을 연료로 하여 태운 불이지. 귀화(鬼火)라고 한단다. 그것으로 제련 한 덕분에 귀절환은 귀신을 벨 수 있는 특이한 칼이 되었지. 지크의 무명도 도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칼일지도 몰라.? 그런 사실을 소울게터도 알고 있었을까. 연속되는 원혼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소울게터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기세를 잡았다 생각한 지크는 자신 있게 앞으로 걸어갔다. ?귀신덩어리 몇 번 쏜 게 네 전부냐, 귀신벌레? 좀 더 노력해봐. 그렇지 않으면 좀 더 사납게 대해주겠어. 엉덩이를 몇 대 때려준 뒤 네 엄마한테 이를 거야.? 그때, 뒷걸음질치던 소울게터가 갑자기 멈췄다. ?응??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지크뿐만 아니라 지혁과 리진, 챠오의 감각이 고 양이털처럼 곤두섰다. ?……!? 챠오는 급히 BSP용 PDA를 꺼내 생체레이더를 확인했다. 예상대로 그들 주위에 노란색의 점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바이오 버그들이 었다. 점의 크기로 봐서 E급 정도였지만 그 수가 엄청났다. 떠오르고 있는 것 말고 떠올라 있는 것만 봐도 50여 개체가 넘었다. 거의 비슷한 시각, 리진의 귀에 낀 통신기에서 긴급호출음이 들렸다. 리진 은 재빨리 수신버튼을 눌렀다. ?하리진입니다!? ?여기는 BSP본부입니다! 코엑스몰에 있는 모든 BSP는 즉시 그 자리를 떠나 십시오! 구 지하철 2호선으로 통하는 격벽이 방금 전 파괴됐습니다! 엄청난 숫자의 BG가 그곳을 향해 몰려가고 있습니다!? 구 지하철이란 BG대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용된 지하철노선을 말한다. 현 재 제대로 운영되는 곳은 단 한 구간도 없으며 대부분의 지하철 통로는 BG 의 소굴 및 이동통로로서 사용된다. 소탕작전도 많이 전개됐지만 그때마다 허무하게 끝났다. 목표가 된 BG들이 어느새 냄새를 맡고 도망친 뒤였다. 전경과 BSP 앞에 남은 건 음식찌꺼기 또는 탈피하고 남은 허물 뿐이었다. 구 지하철로 통하는 모든 통로는 어지간한 폭약에도 파괴되지 않을 두꺼운 격벽으로 봉쇄되어 있다. 그것이 파괴됐다는 말은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 있 어서 절망 그 자체였다. 리진이 급히 물었다. ?전경들은 어찌됐습니까!? ?현재 도착한 전투경찰들은 시민들의 대피를 돕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을 지원해드릴 수 없습니다! 다음 전투경찰들은 약 5분 후에 도착합니다! 속히 피신하십시오!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시끄러워!? 통신회선에 큰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지크였다. 왠지 모르게 흥분한 그는 통신기에 입을 바짝 대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몇 만 마리가 오든 상관없어! 내가 다 없애버릴 거야! 그리고 여기서 소 울게터를 놓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잖아!? ?하지만 소울게터라고 확인되진 않았…….? ?닥쳐! 내가 소울게터라면 소울게터인 거야! 증인도 있어!? 지크는 지혁을 바라봤다. 혹시라도 자신이 틀린 게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지혁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받은 지크는 다시 소리쳤다. ?소울게터, 아니 소울게터 세컨드를 잡겠어! 여기서 잡지 못하면 19년 전 의 일이 다시 벌어진단 말이야! 그게 얼마나 끔찍한 사건이었는지는 공부했 으니 잘 알겠지? 자, 지부장님이 뭐라고 하면 명령위반이라고 할 거면 나한 테 뒤집어 씌워! 다른 둘은 내가 협박해서 끌어들인 거라고 보고해!? ?…….? 통신기 저편에선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이름모를 오퍼레이터가 다시 목소 리를 낸 것은 지크가 통신기를 집어던지기 직전이었다. ?무운을 빕니다, 지크 스나이퍼 소위.? 그 말에 통신기를 잡았던 지크는 손을 놓고 씩 웃었다. ?좋아, 나중에 저녁식사나 하자고, 오퍼레이터 언니. 지크 스나이퍼, 아웃 (Out).? 통신기를 끈 지크는 무명도를 거둔 뒤 재킷의 팔을 걷어 붙였다. 원목같이 단단한 팔뚝이 크게 불끈댔다. ?네가 친구들을 불렀냐?? 지크의 질문에 소울게터는 말이 없었다. ?좋아, 묵비권을 행사한다면 받아주지. 대가는 죽음이다!? 그의 몸이 순간 흐릿해졌다. 어딜 갔을까 싶을 무렵 그의 주먹이 소울게터 의 두상에 정확히 꽂혔다. 실로 경이적인 스피드였다. 일격을 먹은 소울게터는 뒤로 멀찌감치 날아갔다. 지혁이 혼신의 힘을 다해 쳤을 때보다 더 강렬하고 빨랐다. 날아가는 BG의 옆으로 붉은 잔상이 꿈틀댔다. 방금 전 공격을 날렸던 지크 가 맞고 날아가는 소울게터보다 더 빨리 움직이고 있었다. ?저럴 수가!? 지혁은 어이가 없는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10년 전 처음 맞닥트린 그의 소질도 놀랐지만 지금의 광경은 정말 대단했 다. 다른 건 몰라도 속도 하나만큼은 지혁의 상식을 벗어나고 있었다. 소울게터의 낙하지점에 먼저 도착한 지크는 있는 힘을 다해 돌려차기를 날 렸다. 타점이 상당히 높은 차기였다. ―컥! 이상한 소리가 소울게터의 머리와 등판에서 터졌다. 위로 휙 떠오른 BG의 육체는 천정에 강렬히 처박혔다. BG의 육체와 천장의 파편이 우수수 떨어졌다. 지크는 놓치지 않고 무명도에 손을 가져갔다. 파란 섬광이 소울게터의 몸 중앙에서 번뜩였다. 단 한번의 베기에 좌우로 나뉜 소울게터의 육체는 양쪽으로 나뉘어 날아갔다. 바닥에 떨어진 소울게터의 육체에서 대량의 원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와 함께 소울게터의 육체도 녹이 슨 쇠처럼 조금씩 허물어져갔다. ?잡은 건가?? 지혁이 들뜬 목소리를 냈다. 지크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사방으로 날아가는 원혼들을 긴장한 얼굴로 지 켜봤다. ?이 녀석들……?? 잠시 후 원혼들이 모두 사라졌다. 대신 이상한 기운이 사방에서 끓어올랐 다. ―우웅. 무명도가 떨렸다. 지크가 의도적으로 흔든 게 아니다. 실로폰처럼 미세한 진동에 휩싸여 알 수 없는 음을 내고 있었다. 이건 아무리 지크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 PDA의 레이더 화면을 지켜보던 챠오가 짧은 소리를 질렀다. 바이오 버그의 위치를 표시하는 노란색 점이 좀 더 색을 더해 주황색으로 바뀐 것이다. 레이더가 없이도 지크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씁쓸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 봤다. ?이런, 더럽게 재수 없군.?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리진이 다급히 물었다. 지크는 대답하기에 앞서 무명도를 거두고 권총 두 자루를 꺼내 들었다. ?너, 귀신을 볼 수 있다고 했지?? ?뭐?? ?볼 수 있으면 물리칠 줄도 알겠네? 귀신 쫓는 기술 아는 거 있어?? 그냥 질문에 불과했지만 리진에겐 엄청난 압박감을 주었다. ?기, 기본적인 것밖에 몰라. 게다가 부적기술이라서 지금은 쓸 수 없어. 근데 왜?? 그때였다. 이벤트 코트와 이어진 통로의 저편, 어둠 속에서 BG특유의 소리가 들렸다. 가장 약한 E급의 목소리였지만 평소와 조금 달라보였다. 붉은 빛들이 하나둘씩 켜졌다. 수가 점차 들어나더니 수십에 가까워졌다. 그것을 본 지크는 씁쓸히 말했다. ?귀신들린 바이오 버그, 혹시 봤어?? 불빛들이 빛의 커튼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예상대로 E급 BG들이었으나 풍기는 기세는 D급 이상이었다. 지면을 밟는 동 작부터 붉게 빛나는 안광까지, 모든 게 예사롭지 않았다. 또한 챠오가 가진 PDA도 그들의 랭크를 불확실한 D급으로 분류했다. 퇴로는 순식간애 막혔다. 이벤트 코트로 들어가는 두개의 큰 길 모두 BG들 로 꽉 찼다. ?빙의(憑依:귀신들림)인가?? 지혁이 중얼댔다. ?설마 BG들도 빙의가 될 줄은 몰랐군. 사람을 포함한 동물에게만 빙의가 되는 줄 알았는데… 녀석들도 생물은 생물이라 이건가?? ?아무려면 어때요?? 지크가 지혁의 말꼬리를 잡았다. 그는 손에 든 권총의 해머를 젖히며 이어 서 말했다. ?빙의가 됐든 어쨌든 이곳에서 탈출하려면 녀석들을 없애야 돼요. 연구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 일단 싸우자고요. 싸울 힘은 남아있죠?? 지크가 온 이후부터 충분히 휴식을 취한 지혁은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네 걱정을 들어야 할 정도로 늙진 않았다.? ?헤에, 그럼 몸으로 증명해 보시죠.? 지크는 앞쪽에 시선을 돌렸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그는 지혁의 실력을 상 당히 믿고 있었다. BG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소울게터가 뿜어낸 원혼에 빙의된 BG뒤로 보통 의 BG들이 보였다. 원혼의 숫자만큼 빙의가 된 듯 했다. ?리진, 괜찮니?? 지혁의 물음에 리진은 자신 있게 웃었다. ?아빠랑 같이 있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겠어요? 전 아빠랑 아빠가 가르쳐 주신 무술을 믿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지혁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속으론 한없이 뿌듯했으나 현재상황은 큰 제스 처를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래? 고맙다. 그럼 챠오는?? 챠오는 대답대신 PDA를 벨트의 포켓에 넣었다. 입고 있던 BSP코트를 벗고 권법자세를 취했다. 그녀가 워낙 무뚝뚝하다는 걸 알고 있는 지혁은 마지막으로 자세를 잡았다. 그와 리진이 나란히 갖춘 용살문의 준비자세는 그 절도에 있어서 아름다움 까지 느껴졌다. 지혁이 말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출구는 계곡길(또는 Canyon Walk)쪽에 있다. 일단 그 쪽으로 탈출하자.? ?좋아요! 제가 녀석들의 전진을 막을 테니 아저씨랑 다른 사람들은 그쪽으 로 가는 길을 뚫어줘요!? ?부탁한다!? 지혁과 리진, 챠오는 계곡길에 있는 BG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이 움직이 자 반대편 길의 BG들이 괴성을 지르며 앞으로 뛰었다. 그와 동시에 지크의 권총들이 폭음과 불꽃을 뿜었다. ?너희들은 한발자국도 못 움직인다!? BSW-G4의 44구경 철갑탄이 BG들의 외골격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그냥 보면 지크가 마구 쏘는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BG의 머리를 정확히 겨냥했고 결과 역시 좋았다. 거의 원샷원킬(One Shot One Kill)이었 다. 그런데도 쏘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보통 인간의 한계를 훌쩍 넘어선 동체시력과 집중력 덕이었다. 상당수의 BG들이 시체가 되어 쓰러졌다. 빙의된 BG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빙의가 되어 강력해졌다 하더라도 뇌를 당한 이상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죽은 BG의 육체에서 원혼들이 빠져나왔다. 그 혼들은 근처를 지나가는 BG의 육체에 다시 스며들었다. 그래서 BG의 숫자는 줄어도 빙의된 BG는 줄지 않 았다. 권총에 탄환이 떨어지자 지크는 팽이처럼 몸을 돌리며 탄창을 뺐다. 손잡이 에 붙은 탄창 멈치만 누르면 탄창은 알아서 흘러내리게 되어있다. 원심력으로 인해 허리춤에 매달린 예비탄창 두 개가 좌우로 튀어나갔다. 지 크가 미리 덮개를 열어둔 것이다. 카멜레온이 혀로 곤충을 잡듯 지크는 빈 권총으로 예비탄창들을 낚아챘다. 탄이 떨어진 뒤부터 재 장전까지 1초도 걸리지 않는 기술적인 광경이었다. 지크의 권총이 다시 불을 뿜었다. 그가 길을 막고 있는 사이 지혁과 리진, 챠오는 퇴로를 뚫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지혁의 힘 있는 공격은 BG들의 육체를 뭉개기에 충분했다. 정권지르기와 차 기 한방에 BG들은 깡통처럼 찌그러져 바닥을 굴렀다. 즉사를 겨우 피한 BG 는 아버지의 뒤에 선 리진의 사이킥 소드에 베여 쓰러졌다. 챠오 쪽도 무리가 없었다. 그녀가 혼자서 쓰러트린 BG의 숫자는 지혁과 리 진이 쓰러트린 것보다 조금 적었다. 격투능력만으로 쳤을 때 전 BSP의 3, 4 위를 다투는 그녀의 엄청난 실력이었다. ?챠오, 위험해!? 둘의 뒤를 서포트 하던 리진이 갑작 소리쳤다. 수 마리의 BG들이 그물처럼 포메이션을 짜고 챠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흡!? 기합과 함께 챠오는 한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양손을 뻗었다. 폭발음과 함께 황색의 벽이 나타나 BG들을 때렸다. 챠오의 권법인 삼황오제권의 대(大) 발 경타법, 사자장성(獅子長城)이 펼쳐진 것이다. 기의 충격파에 부딪힌 BG들은 대형트럭에 치인 것처럼 피떡이 되며 날아갔 다. 그들에게 충돌한 BG들도 마찬가지로 큰 타격을 입거나 즉사했다. 그들 하나하나가 포탄이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처참히 당하는데도 BG들은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 다. 더욱 광폭하게 이를 드러냈다. 피 냄새를 맡은 식인상어보다도 더욱 사 나웠다. ?이제 육박전으로 가보실까?? 여분의 탄환까지 다 쓴 지크는 총을 접고 무명도를 꺼내들었다. 무명도의 공명음이 이벤트 코트에 울리자 빙의된 BG들이 움찔했다. ?성불시켜 주는 걸 고맙게 여겨라!? 시퍼런 섬광이 BG들 사이에서 어지러이 춤췄다. 분쇄기에 들어갔다 나온 종 이처럼 잘게 썰린 BG들의 시체가 총에 쓰러진 BG들 위에 흩뿌려졌다. 지크가 싸우는 곳은 공간이 넓다. 그만큼 많은 숫자의 BG들이 지크를 공격 할 수 있었다. BG의 수가 너무 많아지자 지크는 곤란하다 싶었는지 다른 수를 꺼냈다. 텀블링으로 BG들로부터 멀찌감치 물러선 지크는 허리에 매달린 무명도의 칼 집을 풀었다. 불편해서 떨구려는 게 아니다. 그는 칼집을 왼손에 단단히 거 머쥐었다. 무명도는 칼뿐만 아니라 칼집도 단단했다. 나무였지만 나무 같지 않은 신비 한 소재였다. 덕분에 칼집 자체도 충분히 무기로 쓸 수 있었다. ?이건 어떠냐! 진공격살(眞空擊殺)!? 지크는 골프를 하듯 칼집을 아래에서 위로 강하게 휘둘렀다. 그로 인해 순 간 몇 십 배로 압축된 공기가 지크의 앞에서 하얗게 달아오르며 회전했다. 레이싱 타이어가 아스팔트 위에서 공회전하는 듯한 고음이 났다. ?가랏!? 지크는 무명도와 칼집을 한데 모아 회오리를 내리쳤다. 올려칠 때보다 더한 속도로 휘둘러진 두 물체에 의해 공기덩어리는 사나운 야수로 변하여 지면 을 내달렸다. 공기의 분노는 폭포길(Waterfall Walk)로 이어지는 통로를 뒤흔들었다. 범 위 안에 있던 BG들은 충격파를 이기지 못하고 모조리 찢겨 날아갔다. 빙의 해 있던 원령들은 귀곡성을 지르며 다른 BG들을 찾아 움직였다. 상당수의 BG들을 한꺼번에 일소한 지크는 양손에 든 무기를 도발적으로 꺼 떡였다. ?계속 옮겨 다녀라! E급 녀석들은 시시해서 상대를 못하겠으니 힘 좀 실어 주라고! 이거 기분 죽이는데! Wowooooo!? 마치 야구장에서 막대풍선을 들고 응원하는 사람 같았다. 전투가 심각해지 면 심각해질수록 피로를 느끼기는커녕 더욱 신을 내는 게 그의 특징이었다. 반면 방금 전 지크가 일으킨 충격파 때문에 귀가 멍해진 지혁들은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우리 뒤를 받쳐주는 거야, 아니면 방해를 하는 거야!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리진이 냅다 소리쳤으나 지크는 들리지 않는 듯 바람처럼 이리저리 몸을 움 직이며 BG의 처리를 계속했다. 전투에 집중했다기보다는 전투에 빠져 있었 다. ?저 녀석은 그때도 그랬지.? 지혁은 씁쓸히 웃었다. 10년 전, 어린 지크에게 분경을 맞아 쓰러진 뒤 지혁은 그에게 정식대련을 요청한다. 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와의 싸움을 시작한 그는 예 상을 뛰어넘는 지크의 실력에 감탄한다. 당시 지크의 키는 168cm였다. 174cm인 지혁에게 신장, 체중, 힘에서 크게 밀리지 않았다. 팔다리는 오히려 지혁보다 길었다. 지혁의 팔다리가 짧은 게 아니라 지크가 길었다. 기술도 다양했다. 일반식 태권도는 물론이고 절권도와 쿵푸, 합기도, 무에 타이, 유도, 프로레슬링 등 일반에 공개된 무술의 대부분을 자기 식으로 익 히고 있었다. 이런 것들을 어디서 배웠냐는 지혁의 질문에 지크는 당돌한 대답을 했다. ?TV에서 본 걸 따라하는 거예요.? 그러나 따라하는 것 치고는 너무도 살인적이었다. 기술이 나가는 폼은 엉성 했으나 하나하나가 전신의 급소를 정확히 노리고 들어왔다. 그때 지혁은 느꼈다. ?이 꼬마는 급소의 위치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서브미션, 즉 관절기술의 사용도 매서웠다. 인간의 관절이 어디서 어떻게 꺾여야 큰 고통을 주는지 꼬마는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용살문과 같은 비공개 무술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는 사 실이었다. 만약 지크가 중국 본토무술이나 일본 고류무술을 정식으로 알고 있었다면 지혁은 목숨이 위태로웠을지도 모른다. 지혁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무술을 사용하자 꼬마지크는 상당히 당황해했 다. 용살문은 그만큼 비밀스러운 무술이었다. 기술의 월등함과 격투의 노하 우에서 월등히 앞선 지혁은 유리한 고지에 점점 더 올라섰다. 지혁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꽤 밀리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크의 눈동자는 힘을 잃지 않았다. 그 아이는 강한 상대와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즐거워했다. 대놓고 웃 진 않았지만 지혁은 아이의 즐거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역사대로 지혁은 패했다. 물론 지혁이 패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존재했다. 지크가 무슨 신기한 기술을 쓴 건 아니다. 말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지혁은 이성을 잃고 마구잡이로 공격을 날리다가 결국 카운터 한방에 KO되고 만다. 이후 지혁은 지크를 멀리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아이에 대한 기대감을 더 욱 키웠다. 무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탐내고 부러워할 소질, 격투 그 자체를 순수하게 즐기는 무인의 마음을 지크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물리쳤을까. 전투는 거의 10분 가까이 계속됐다. 지크 쪽이든 지혁 쪽이든 BG의 숫자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BG들의 시체가 거의 안보였다. 없어진 게 아니라 다른 BG들의 발에 밟혀 외 골격이며 내장이며 할 것 없이 전부 바닥에 눌어붙은 것이다. 현재 깔린 BG 들의 숫자를 가늠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소울게터와의 전투 때 힘을 너무 많이 썼던 지혁은 지치는 기색이 역력했고 리진과 챠오의 체력 역시 슬슬 바닥을 드러냈다. 처음처럼 팔팔하게 움직이 는 사람은 지크뿐이었다. 초반에 상당히 벌어졌던 지크와 지혁들의 거리는 상당히 좁혀졌다. 지혁들 이 그만큼 밀렸다는 증거였다. 결국 지크는 꺼놨던 통신기를 다시 켰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은 몰라도 동 료들이 위험했다. ?어이, 지원은 언제 오는 거야! 10분이 넘도록 아무도 안 오는 건 도대체 뭐야! 전경들 버스에 펑크라도 난 거야? 길이 막히나? 대답해!? 그에 대답하는 오퍼레이터의 목소리는 처절하기까지 했다. ?현재 지원이 불가능합니다! 전투경찰들은 무역센터, 코엑스몰 사방에서 B G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다른 BSP대원들도 현재 외부에서 전투중입 니다! 자력으로 탈출하시는 것 외엔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죽으라는 소리야, 뭐야!? ?저희들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재 매트로 서울 외곽지역의 전투경찰들과 BSP경기도 지부의 BSP들이 무역센터를 향해 공중으로 이동하고 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지금 당장 어떻게 하냐고! 그 녀석들이 순간이동 해서 이곳에 올 수 있는 게 아니면 아예 말을 하지 마!? 지크는 일갈과 함께 무명도와 칼집을 크게 휘둘렀다. 그의 주위를 둘러싸려 했던 BG들이 일순간 일어난 진공폭풍에 휘말려 찢겨졌다. 그들의 빈자리를 다른 BG들이 다시 채웠다. 역시 머릿수에는 장사가 없었다. 뭔가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젠장, 할아버지한테 또 욕먹겠군.? ?예?? ?치프 오퍼레이터 바꿔! 당장!? ?아, 알겠습니다!? 치칙 하는 전자음과 함께 다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프 오퍼레이터입니다. 말씀하십시오, 지크 스나이퍼 소위.? 안정적이고 냉정한 목소리의 소유자, 루이였다. 지크는 조금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큰 소리로 말했다. ?브로큰 에로우(Broken Arrow)!? ?뭐라고? 잠깐! 코엑스몰은 비싼 건물이야!? 루이가 당황했다. 그녀 말고 지혁과 리진, 챠오 모두 꿈틀했다. 전쟁 시 브로큰 에로우는 아군과 근접한 적군에게도 가능한 모든 공중화력 지원을 퍼붓는, 한마디로 자살에 가까운 최후수단의 코드다. BSP에서 말하 는 브로큰 에로우는 건물이나 기타 구조물의 파괴에 대한 허가요청 코드다. 심각하지 않은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 건물 및 기타 구조물엔 돈으로 따 질 수 없는 문화재나 유물도 포함되어 있다. 블로큰 에로우에 대한 허가가 떨어졌을 땐 이집트 피라미드나 스핑크스를 부숴도 대원은 책임추궁을 받지 않는다. 루이의 반발은 당연히 거셌다. 지크는 놀리듯 여유 있게 말했다. ?그럼 죽을까?? ?…….? 전파의 건너편, 주관제실의 루이는 통합관리장치인 베스의 디스플레이 콕핏 트를 열었다. ?손해의 남자가 드디어 눈을 떴군.? 벗어뒀던 안경을 쓴 그녀는 지부장실 직통라인에 통신기를 연결했다. ?지부장님, 지크 소위로부터 브로큰 에로우의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통신기 속의 처크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왜 안하나 했어. 좋아! 브로큰 에로우, 승인!? ?알겠습니다.? 루이는 통신회선을 지크 쪽으로 전환했다. ?브로큰 에로우, 승인. 적당히 부수라고, 지크.? ?좋아!? 승인이 떨어지자마자 지크는 무명도를 거뒀다. 맨손으로 뭔가를 해결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무쇠같이 다져진 그의 주먹으로부터 전신에까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파직파직 하는 소리가 지혁들의 귀에 들렸다. 지크의 그런 모습을 처음으로 보는 지혁은 크게 당황했다. ?뭐야, 전기인가?? 지크의 전신에서 스파크가 일어났다. 정전기가 일어날 때 볼 수 있는 귀여 운 것들이 아니라 번개와 같이 굵직한 것들이었다. ?일단 탈출구를 만든다!? 지크의 몸을 타고 흐르던 스파크가 오른손으로 모였다. 이어서 권격의 자세 를 취한 지크는 머리 위의 천장을 쏘아봤다. 그 자세를 본 지혁과 리진은 크게 놀랐다. 지크가 쓰려는 것은 다름 아닌 용살문 비기, 용왕격살퇴의 자세였다. ?어느 사이에 우리 기술을!? 리진의 외침에 지크는 대답에 앞서 연어처럼 탄력 있게 뛰어올랐다. ?노코멘트야!? 한껏 웅크렸던 지크의 팔이 천장을 향해 뻗어 올라갔다. 그 순간 지크의 주 먹을 중심으로 용과 같이 길쭉한 뇌광이 위아래로 뿜어졌다. ?용왕! 격살퇴!? 무역센터 지상에서 힘든 싸움을 하던 전투경찰들은 갑작스런 폭음과 진동에 놀라 총을 멈췄다. 잘못하면 앞쪽의 동료를 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 스럽게도 BG들 역시 동작을 멈췄다. 코엑스 전시장 옆에서 거대한 먼지구름이 솟아올랐다. 전경대장은 당황한 얼굴로 본부에 무전을 쳤다. ?중앙관제실! 가스폭발인가, 아니면 대형 BG인가! 불확실하면 세틀라이트 (Satellite:인공위성) 화상을 보내봐!? ?현재 BSP대원, 지크 스나이퍼 소위에게 브로큰 에로우 코드가 승인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폭발은 코엑스몰의 천장, 아니 무역센터 지반을 뚫으면서 생긴 것입니다!? ?뭐?? 전경대장은 멍한 얼굴로 주위사람들을 쳐다봤다. ?뭘 뚫어? 이봐, 관제실! 거짓말 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무역센터 지반이 무슨 문풍지인줄 아나!? 그의 짜증 섞인 목소리로 얼마 가지 않았다. 동물적인 놀람에서 회복한 BG 들이 다시 공격을시작한 것이다. ?대장님!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쏴! 쏘란 말이야! 녀석들이 무역센터 밖으로 나가는 걸 막아라! 절대 막 아야 한다!? 전투경찰들의 K-8자동소총이 다시 불을 뿜었다. 후방에 위치한 중기관포 등 의 지원화기들도 일제히 가동됐다. 전경들과 BG들의 격전이 재개된 사이 동료들과 코엑스몰에서 탈출한 지크는 자신이 뚫은 구멍을 혼자 지키기로 했다. 이곳에서 BG들이 쏟아져 나온다면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는 전경과 BG의 균형이 깨질 수도 있었다. 지혁과 다른 동료들은 그렌과 케빈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 지원이라기보다 는 피신과 보급이었다. BSP 대원들에겐 특별한 각성제가 제공된다. 중독성이 있는 과거의 것과 달 리 유전자 합성방식으로 만들어진 활성물질, BP-08이다. 24시간에 2㎎씩 주사하면 최대 10일 가량 잠을 자지 않고도 체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론상으론 1년이라도 가능하지만 잠에 대한 본능을 완벽하게 억 제할 수는 없기에 실제적으론 10일이 한계다. 격렬한 전투 이후 사용하면 소모된 체력도 말끔히 채워진다. 피로가 사라지 고 근력이 회복된다. 그런 과다한 편리성 때문에 일반에겐 절대 보급되지 않고 오로지 BSP에게만 보급된다. 그러나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표준치 이상을 과다하게 주사를 하 거나 몸이 멀쩡한 상태에서 주사를 하면 신체에 과다활성화가 일어나 혈압 상승 및 심장박동수 상승, 비정상적인 뇌기능에 의한 정신장애가 발생할 수 도 있었다. 원래는 순찰차에 마련된 특수구급상자에 비치되지만 지크와 리진, 챠오 중 에서 BP-08을 가지고 나온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설마 이 정도 숫자의 BG 들이 나타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BP-08을 항상 몸에 지니고 있는 사람은 사이보그인 그렌 밖에 없었다. 지혁 들이 그렌에게 간 것은 BP-08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런 장기전 준비에도 불구하고 BG들은 단 한발자국도 나오지 않았 다. 닭 쫓던 개처럼 지붕의 구멍만을 바라보다가 이내 하나도 남김없이 사 라졌다. ?이 자식들, 도대체 뭐하자는 거야?? 지크는 차라리 구멍을 무너트리고 다른 곳으로 갈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 럴 만한 중화기도 없거니와 부수면 그만큼 BSP의 재정부담이 가중되고 처크 로부터 듣는 욕의 수준도 높아지기 때문에 파괴는 최대한 자제했다. BG들이 사라진 건 코엑스몰 뿐이 아니었다. 무역센터에 나타났던 BG들까지 한꺼번에 사라졌다. BSP본부의 레이더는 그곳에서 더 이상의 BG반응을 잡아 내지 못했다. 사건종결 뒤에도 지크들은 무역센터를 떠나지 못했다. 구 지하철로 통하는 격벽이 뚫린 이상 BG는 언제라도 대량출몰을 할 수 있었다. 덕분에 BSP대원 전원은 격벽봉쇄작업이 끝날 때까지 무역센터에서 대기해야만 했다. BSP 대기용 막사는 취재가 일체 허용되지 않은 가운데 불만과 탄성이 흘러 나왔다. ?이곳의 격벽이 허술하다고 10년 동안 얘기를 했건만 결국엔 대형사건이 터지는군. 하여튼 뭐 잃고 나서 고치는 건 세계 어딜 가나 마찬가지라니까. ? 불쾌한 얼굴의 그렌은 머그 컵에 든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2시간 가까이 내버려둔 것이라 그가 인공 혀를 데일 염려는 없었다. 군용 건설장비의 시끄러운 소리가 막사 한쪽을 훑고 지나갔다. 일반장비는 위험대비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BG에 관련된 일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군 용장비를 사용한다. 군인이었던 그렌에게 있어서 군용장비의 소음은 고향의 소리라 할 수 있을 만큼 친근한 것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소리를 듣던 그가 이윽고 다시 말했 다. ?그건 그렇고, 소울게터가 다시 나타났다고?? ?그렇습니다.? 몸 이곳저곳에 가볍게 붕대를 댄 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퇴한 BSP라 해 도 현장책임자의 판단과 당사자의 의지가 있으면 언제든지 정식으로 일에 투입될 수 있다. ?외형과 능력 모두 19년 전에 나타난 소울게터와 똑같았습니다. 아직 혼을 덜 섭취한 까닭인지 크게 강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D+급은 되어 보였습니다. ? ?그런데 지크가 이겼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지크는 씩 웃으며 엄지를 내밀었다. ?당연하죠! BSP의 절대무적 아이콘이잖아요!? 그 이상한 자신감에 그렌은 억지에 가까운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뭐, 절대무적까진 모르겠지만 하여튼 잘 했어. 하지만 완전히 물리쳤다고 는 볼 수 없어.? ?예? 왜요? 둘로 쪽 나눠놨는데요?? ?19년 전에도 그랬거든.? 지크의 엄지가 힘을 잃고 내려갔다. 막사 입구에 모여 앉아있던 케빈과 챠 오, 리진은 흠칫 놀라 그렌을 바라봤다. 그렌은 깍지 낀 손에 턱을 대고 당시의 일을 말했다. ?소울게터가 처음 나타났을 때 나와 지혁은 녀석을 가볍게 없앴지. 절반으 로 나눈 것도 아냐. 산산조각을 냈어. 그런데 24시간도 안 지나서 녀석이 다시 나타났어. 잠실야구장 중앙에 떡하니 나타났지. 코리안 시리즈 5차전 이 열리던 때였나? 그랬을 거야 아마.? 지혁이 말을 받아 이었다. ?다시 나타난 소울게터는 만원관중 절반의 영혼을 먹어치웠어. 지금과 마 찬가지로 인형을 만들어 버렸지. 녀석이 영혼을 흡수할수록 강해진다는 사 실은 덕분에 알게 됐어. 처음 나타났을 때는 D-급에 불과했던 녀석이 그 사 건 직후 단숨에 B+급으로 성장한 거야. 참극은 그때부터 벌어졌지.? B+라는 등급이 처음 생긴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런 강력한 BG를 처음 접한 수도방위 BSP는 결국 인접지역의 BSP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매트로 서울전 체를 무대로 한 참혹한 전투가 시작됐다. 그렌이 말했다. ?당시 작전에 참가한 BSP는 50여명이었어. 꽤 대규모지. 그러나 작전이 끝 나고 남은 수는 20명도 채 안됐어. 소울게터는 그만큼 강했고 우린 무력했 지. 장비와 능력 모두 현재에 비해 뒤져 있었거든. 지금도 B+급 BG가 나타 나면 3개 지역의 BSP가 나설 정도니 19년 전엔 어땠겠어? 원시인이 창으로 매머드를 잡는 꼴이나 다름없었지. 결국 우린 미린의 건의를 받아 외부인의 도움을 받기로 했지.? ?그 분이 바로 우리 장모님이야.? 지혁이 자랑스레 말했다. 지크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오오, 무당 할망구 말인가요?? ?그래, 무당 할망구… 뭣이!? 지혁의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지크는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댔다. ?에에, 농담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으음…….? 웃는 얼굴에 침을 뱉긴 힘들다고 하던가. 불쾌한 심정을 가까스로 억누른 지혁은 과거순례를 계속 하기 위해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말해도 되겠나?? 막사의 입구에서 여성의 주름 깊은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 그대로 노파였다. 검은 색의 두루마기를 걸친 노파는 천천히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저 할머니는?? 지크와 케빈은 똑같은 말을 속으로 하며 검은 두루마기를 걸친 노파를 쳐다 봤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비난하긴 좀 힘들었다. 노인치고는 허리가 곧고 힘이 있어 보였다. 눈빛도 맑았다. 기세에도 빈틈이 없었다. 한마디로 예사 롭지 않은 인상이었다. ?할머니!? 리진이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그녀는 아이처럼 노파에게 훌쩍 안겨들었고 노파는 리진의 검은 생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가 고생하는구나. 별 일 없었지?? ?네, 할머니. 이상한 사람이 있어서 그렇지 아무 일도 없어요.? ?이상한 사람?? 노파는 인상을 쓰고 주위를 슥 둘러봤다. 그 눈에 제일 먼저 띈 사람은 다 름 아닌 지크였다. ?저 양놈이냐?? ?양놈?이라는 원초적인 말에 지크와 챠오를 제외한 전원이 실소를 터트렸 다. 지크가 불만어린 눈을 하는 동안 지혁이 노파에게 나가가 허리를 굽혔 다. ?어서 오십시오, 장모님. 오시는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후후, 지금 보니 자네가 더 고생인 것 같군. 나이를 좀 생각하게나.? ?아, 예.? 지혁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어서 그렌이 노파에게 인사했다. ?잘 오셨습니다, 봉성(鳳聲)선생님. 선생님이 오시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 리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이오, 로보캅 양반. 전혀 변한 게 없구려.? 노파는 그렌과 악수하며 한없이 반가워했다. 잠시 후, 그렌은 BSP전원을 불 러 모아 노파를 소개했다. ?이분이 바로 19년 전, 소울게터의 처리를 도와주셨던 봉성선생님이시다. 대한민국을 포함해 동아시아 지역 최고의 무당이자 퇴마사이시지. 이번에도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친히 이곳까지 오셨다.? 노파, 봉성선생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늙은이를 잘 부탁하오, 여러분.? 그렌은 이어서 BSP대원들에 대한 소개를 했다. ?왼쪽부터 지크 스나이퍼, 케빈 브라이언, 린 챠오입니다. 19년 전과는 비 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친구들이지요.? ?호오, 그렇소? 그런데, 저 꼬마가 지크라고 하셨소?? 봉성의 주름진 시선이 지크에게 다시 꽂혔다. 그렌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 다. ?그렇습니다만, 혹시 지크를 아십니까?? ?알다마다. 사위랑 딸에게 저 꼬마의 이름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 그 부부가 설날이랑 추석 때마다 저 꼬마 얘기를 하며 내 앞에서 싸운다오. 난리지, 난리야.? ?예? 아아, 그렇군요.?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그렌은 낮게 웃었다. 반면 그 사실 을 전혀 몰랐던 리진은 옆에 선 아버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아빠, 진짜에요?? ?…….? 지혁은 묵묵부답이었다. ?자, 그럼 본론에 들어갑시다.? 봉성은 사위를 위기에서 탈출시켜줄 겸 얘기를 시작했다. ?오늘 이후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렇다면 이 노파의 얘기를 들 어보시오.? 봉성은 임시 브리핑용 PDP(Plasma Display Panel)앞에 섰다. ?소울게터라는 녀석은 이론적으로 봤을 때 영혼을 담는 주머니와도 같은 녀석이오. 어떻게, 무슨 수로 영혼을 원혼으로 바꿔서 자신의 몸속에 가두 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원혼의 에너지를 자신의 힘으로 삼는다는 것은 분명 하오. 어쨌거나 더 이상의 큰 사고가 없는 걸 보니 소울게터가 큰 타격을 입은 건 분명하오. 녀석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을 만큼 바보는 아니거든. ? 지크가 손을 반쯤 들었다. ?그럼 녀석이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말인가요?? ?물론이지.? 봉성이 말했다. ?소울게터에게 흡수당해 원혼이 된 영혼들은 소울게터가 완전히 제거되면 성불을 하게 되어 있지. 그런데 내 느낌상 원혼들은 그대로 남아있어. 여러 분들에겐 들리지 않소? 이 주위를 떠돌며 슬퍼하는 원혼들의 목소리가 말이 오.? ?안 들리는데요.? ?…….? 봉성을 비롯한 모두는 지크를 바라봤다. 생각 없이 솔직한 말을 내뱉었던 지크는 움찔하며 동료들에게 눈을 돌렸다. ?응? 누구 들은 사람 있나?? 지크의 말대로 원혼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없었다. 그런 얘기를 꺼낸 봉 성만이 희미하게 듣고 있을 뿐이었다.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봉성은 지크를 흘끔 쏘아본 뒤 얘기를 다시 했다. ?이건 예상에 불과하지만 소울게터는 아직 이곳에 있을 가능성이 있소. 원 혼들이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는 걸 봐선 거의 확실하오. 막사에 오기 전에 이곳 주위에 결계를 쳐 두었으니 움직임이 있으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오. 그럼 난 지시를 기다리겠소이다.? 봉성이 자리에서 물러난 뒤 이어서 그렌이 통신을 켜며 대원들 앞에 섰다. ?이후의 작전을 위해 오후브리핑은 이곳에서 하기로 한다. 루이, 준비됐나 ?? 말이 끝나자마자 PDP화면에 전원이 들어왔다. 잠시 후 화면이 진정되자 처 크와 루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처크는 여유 있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오늘 수고 많았네, 제군들. 그리고 잘 오셨습니다, 봉성선생님.? 봉성은 빙긋 웃었다. ?오히려 폐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되는군요. 여하튼 지부장님의 건강한 모 습을 뵈니 매우 기쁩니다.? ?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그럼 제군들, 오후브리핑을 시작하겠다.? 브리핑 시간은 평상시보다 훨씬 길었다. 오후브리핑이 있기 전까지의 상황 보고 때문도 그랬지만 현재 상황에 대한 대처방안 마련으로 인해 시간은 끝 없이 지연됐다. 결론은 팀을 다시 둘로 나누어 한쪽은 무역센터에 대한 수색을, 다른 한쪽 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BG의 출현을 막기로 했다. 무역센터에 대한 수색 은 그렌과 케빈, 챠오, 리진이 맡기로 했고 외부순찰은 지크 혼자서 맡기로 결정됐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지혁 아저씨랑 챠오, 리진 모두 자기 체력이 아니에요! 이러다가 소울게터가 더 강해져서 다시 나타나면 어쩌려고요!? 지크는 강하게 반발했지만 그렌은 처크의 판단에 동의했다. ?지크, 진정하고 들어라. 네가 오늘 큰 활약을 했다는 건 인정하지만 우린 소울게터만을 처리하기 위해 BSP가 된 게 아니야. 너까지 이곳에 있다가 다 른 곳에 BG들이 나타나면 그땐 정말 힘들어진다.? ?…….? 지크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합성수지로 싸인 그렌의 손이 그의 어깨를 짚 었다. ?너 하나만을 순찰시키는 건 너 혼자서도 큰 몫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 리 모두가 인정하기 때문이야. 만약 위험해지면 반드시 널 부르마. 그러니 넌 네 몫을 다해주길 바란다.? ?알았어요.? 지크는 어깨에 놓인 그렌의 손을 두드렸다. 화면속의 처크가 말했다. ?지크, 네 귀염둥이를 보냈으니 잘 써라. 5분전에 보급장비와 함께 트레일 러에 실어 보냈으니 얼마 안 있으면 도착할 거다. 수고해라. 나머지 대원들 도 조심해서 임무를 실행하길 바란다. 그럼 이상.? PDP화면이 꺼지고 그렌이 그 앞에 섰다. ?자, 그럼 지크를 제외한 나머지 대원들은 봉성선생님의 협조를 받아 무역 센터를 수색하기로 한다. 수색장비는 A클래스로 지급될 것이다. 장비가 도 착할 때까지 쉬도록.? ?예!? 지크는 그렌이 말이 끝나자마자 막사를 슬그머니 나섰다. 그답지 않게 워낙 조용한 행동이어서 동료들 대부분은 그가 나간 것을 알지 못했다. 그를 따라 나온 사람은 지혁, 단 한 명이었다. ?휴우.? 지크는 양 팔을 꼬아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웃고는 있었지만 아쉬움을 지우지는 못했다. ?섭섭하니?? 뒤에 서있던 지혁이 말을 걸었다. 그의 손엔 케빈에게서 얻어온 담배가 들 려있었다. 지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 혼자만 싸우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요. 그런데 아저씨, 담배도 피우셨어요?? ?은퇴한 뒤부터 와이프 몰래 한두 대씩 피웠지. 한달에 한 개비 정도라 폐 에 기별도 안가지.? 지혁은 연기를 길게 빨아들였다. 순간 그는 담배를 처음 피우는 사람처럼 크게 기침을 하며 괴로워했다. ?우욱, 이 담배는 도대체 뭐야? 필터가 없나?? ?하이필터 담배가 아니라 구식의 노멀필터 담배잖아요. 케빈은 그런 것만 피우더라고요.? 지크는 킥킥 웃었다. ?그렇구나.? 지혁은 작전을 바꿔 아주 조금씩 연기를 흡입하기로 했다. 속이 진정되자 그는 얘기를 다시 꺼냈다. ?넌 싸우는 게 그렇게 좋니?? ?왜요?? ?1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넌 싸울 때면 항상 즐거워 보이더 라.? ?아, 그거요? 뭐, 격투도 어찌 보면 스포츠잖아요. 몸이 격렬하게 움직이 면 움직일수록 기분이 좋아져요. 주먹이나 발에 좋은 타격감이 느껴지면 굉 장히 짜릿하죠. 아저씨는 안 그래요?? ?난 폭력을 싫어해.? ?예? 하하, 거짓말 하지 마세요.? 지크에겐 상당히 의외였다. 그도 사실 지혁만큼 투지가 좋은 사람은 별로 못 봤기 때문이었다.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진짜야. 난 바이오 버그 외의 존재를 치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아. 그건 그렇고 네가 약속을 그렇게 잘 지킬 줄은 몰랐다.? ?뭐가요?? ?10년 전 한 약속 말이야. 그걸 리진 앞에선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는 걸 정말 잘 지켜줬더구나.? 또 한번 칭찬을 받은 지크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 뭘요. 그때 그 말은 아저씨도 진심으로 꺼낸 게 아니잖아요. 그걸 꼭 자랑하고 다닐 필요는 없죠.? ?그런가?? 지혁은 다시 담배를 빨았다. 아직 독하긴 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나았다. ?너, 리진이 왜 BSP가 됐는지 아니?? ?모르죠.? ?나랑 와이프 때문이야.? 지혁은 다음 얘기를 하기 전에 잠시 뜸을 들였다. 표정이 워낙 진지하고 깊 었기에 지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BSP대원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져 있 어. 사람들은 그래서 BSP를 좋아해. 현재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존 재인 BG를 처리하는 영웅들이자 실제 초인들이기 때문이야. 하지만 싫어하 는 사람도 많아. 아니, 질투한다고 보는 게 낫지.? 긴 연기가 지혁의 입과 코에서 뿜어졌다. 지크는 가만히 그의 얘기를 경청 했다. ?리진이 중학교 때였나? 체육행사가 있었는데 나랑 와이프는 학교에 가고 도 부모들의 행사에 참여하지 못했어. 전직 BSP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거 든. 학교에서 대놓고 우리의 참가를 말리더구나. 예상했던 것이지만 그 일 이 리진에겐 큰 충격이었나 봐.? ?…….? ?그 다음날이었을 거야. 리진이 나랑 와이프 앞에서 BSP가 되겠다고 당차 게 선언했지. 밤새 울었는지 눈도 벌갰어. 난 왜 BSP가 되겠냐고 물었는데 리진이 이러더군. BSP가 이상한 괴물이 아니라는 걸 친구들과 자신에게 증 명시키고 싶다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화가 안 풀릴 것 같데. 난 말렸지만 그 아이는 결코 굽히지 않았어. 결국 리진은 BSP사관학교에 들어갔지.? ?그랬군요.? 지크는 그제야 리진이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화를 풀기 위해 BSP가 됐 다는 그녀의 말엔 깊은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지혁은 좀 더 깊이 담배를 빨아들였다. ?넌 모르겠지만 리진은 정식 BSP가 되고 난 뒤 큰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 어. 그 때문에 그렌 선배를 비롯한 모든 BSP대원들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 지고 말았지. 당시엔 운 좋게도 희생자 없이 일을 넘겼지만 그로 인해 리진 은 또 한번 큰 상처를 받았단다. 대인기피증까지 생겼지. 그런데 리진은 굽 히지 않고 자신을 이겨냈어. 그리고 나에게 말했지. 아빠가 어째서 BSP라는 직업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고 말이야.? 지혁은 진지한 얼굴로 지크를 바라봤다. ?그러니 너에게 부탁한다. 리진이 계속 BSP로 있을 수 있게 도와줘라.? ?예? 저에겐 인사권한이 없어요.? 상대방의 조크에 지혁은 쓴 웃음을 지었다. ?알고 있어. 내 와이프처럼 모든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달라는 말이 야.? ?아…….? ?난 그 애가 더 이상 상처받는 것을 볼 수 없다. 한번만 더 그 애가 상처 를 받게 된다면 난 아빠로서 실격이다. 아니, 이미 실격한 건지도 모르지. 딸이 BSP라는 빌어먹을 직업을 계속 하길 바라고 있으니까.? ?…….? 소울게터 때문에 지혁의 부인, 김미린이 사이킥 파워를 잃었다는 것을 지크 는 잠시 잊고 있었다. 잠시 동안 바닥을 바라보던 그는 곧 버릇대로 실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후후, 설마 아저씨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네요.? ?너만 몰랐던 게 아냐. 나도 내가 너에게 이런 부탁을 하게 될 줄은 꿈에 도 생각 못했어.? 지혁은 지크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수고해라.? ?예, 아저씨도요.? 저 멀리서 거대 트레일러트럭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지크는 트럭을 향해 팔을 흔들며 신호를 보냈다. 잠시 후 육중한 배기음이 고요한 무역센터를 뒤흔들었다. 지크의 오토바이, 타이푼 블링거 커스텀이 만들어내는 예술적인 음색이었다. 지혁은 오토바이를 타고 무역센터를 나서는 지크를 장모와 함께 지켜봤다. ?저 녀석이 손자사위 후보감이라고 했나?? 봉성의 말에 지혁은 움찔했다. ?아, 아닙니다, 장모님. 아직 모자라도 한참은 모자란 녀석입니다. 그리고 리진은 아직 어립니다.? ?후후, 나도 농담으로 해본 말일세. 하지만 꽤 좋은 젊은이군. 혼이 살아 있어. 혼에서 풍기는 힘이 바람처럼 시원해. 어딘지 모르게 깨어나지 않은 듯하지만 흔하지 않은 젊은이야.? ?예. 장모님 말씀대로 보기 드문 녀석이죠. 제 예상이지만 소울게터와의 싸움도 녀석이 결정지을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해 져서 돌아왔거든요.? 봉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런가? 그럼 나도 그렇게 되길 빌겠네. 리진을 위해서라면 그 편이 훨씬 나을 테니까.? 노파는 막사로 돌아갔다. 장모의 느릿느릿한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지 혁은 지크가 사라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 있겠지?? 지크에게 들릴 리는 없었지만 지혁은 그 말을 꼭 하고 싶었던 듯 했다. 그 는 장모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BSP대원들이 내부수색에 들어간 사이 무역센터 사방에 배치된 전투경찰들은 뒤늦은 점심식사시간을 가졌다. 2000년대 초반까진 빵과 단체도시락 등으로 끼니를 때운 그들이었지만 현재 는 달랐다. BG로 인해 전경들의 중요성이 군인들보다 높아진 지금은 정규군 과 마찬가지로 전투식량으로 식사를 한다. 비상시였지만 분위기는 그리 딱딱하지 않았다. 전경 측의 희생자가 거의 없 었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이 즐기고 있는 화젯거리는 오늘 있었던 일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코엑 스몰의 천장을 맨손으로 뚫은 신인 BSP요원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 노란머리, 대단하던데? BSP대원 중에서 그런 파괴력을 보여준 사람은 그 녀석이 처음인 거 같아.? ?아까 조사반 얘기를 들으니까 그 녀석 혼자 없앤 BG가 100마리가 넘는다 고 그러더라고. 그 짧은 시간 동안 혼자서 100마리라니, 정말 대단해. 전 B SP중 최강에 속한다는 말이 사실인가 봐.? ?그러면 큰일이네? 노란머리 녀석, 아까 보니 오토바이를 타고 여길 나가 더라고. 그 녀석이 없는 데 벌레 녀석들이 다시 나타나면 우리나 BSP나 다 위험할 거 아냐? 100마리나 더 있는 상황이랑 똑같으니 말이야.? 모여 앉은 전경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러자 식량배달차량 담당 경관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그 녀석 없을 때도 별 일 없었으니 이상한 생각 말고 너희들 앞가림이나 잘 해!? 전경들은 순간 물 맞은 병아리처럼 조용해졌다. 중년의 경관은 트럭의 화물 칸에서 미 개봉된 전투식량을 꺼내 흔들었다. ?잔말 말고 남은 녀석이나 처리해! 선착순으로 준다!? 전경들은 우악 소리를 내며 식량수송트럭으로 달려갔다. 경관은 조카 같이 젊은 전경들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때였다. 트럭 밖으로 합성수지 껍데기들이 튀어나갔다. 전투식량 케이스의 파편이었 다. 그것 말고도 함께 튀어나온 오물까지 뒤집어 쓴 전경들은 넋이 나간 얼 굴로 트럭 안쪽과 담당경관을 번갈아 바라봤다. ?…….? 인형처럼 가만히 있던 경관은 순간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몸을 띄우며 권총 을 뽑았다. ?모두 피해!? 경관은 화물칸 안쪽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그러나 그런 용감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길쭉한 무언가가 화물칸에서 튀어나와 경관의 명치를 뚫었다. ?컥!? 단단한 물체가 등 뒤로 나온 느낌이 들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창과 같은 보라색의 물체가 복부에 박혀 있었다. 그는 아득해지는 의식 속에서 방아쇠를 계속 당겼다. 이렇게라도 해서 시간 을 끌지 않으면 전경들이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경관의 몸이 물체 위로 푹 쓰러졌다. 그의 몸에서 하얀 색의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공처럼 둥글게 뭉쳐졌다. 코엑스몰에서 BSP들이 목격했던 것과 같은, 틀림없는 혼불이었다. 훅 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괴물이 숨을 들이마시는 듯한 소리가 화물 칸 안에서 들렸다. 혼불은 연푸른색으로 변하여 화물칸 안쪽으로 빨려 들어 갔다. ?경장님!? 전경들이 일제히 사격에 나섰다. K-8돌격소총은 젊은이들의 분노를 이어받 아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렬한 불꽃을 뿜어냈다. 트럭은 순식간에 벌집이 되더니 이내 폭발했다. 폭발이 부른 화염과 검은 연기는 전경들의 손을 하나 둘씩 멎게 했다. 불꽃 안에 검은 색의 인영(人影)이 보였다. 전경들은 다시 한번 사격을 개 시했다. 그 사이 통신을 맡은 경찰은 통신기의 마이크를 붙잡고 처절한 비명을 질렀 다. ?여기는 무역센터! 미확인의 적이 나타나 현재 교전중입니다! 지원을 요청 합니다! BSP에 협조를 요청합니다!? ?상황을 확실히 말씀하십시오!? 참 야속한 말이었다. 경찰은 욕이 나오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다시 소리쳤 다. ?전경들이 순식간에 쓰러지고 있습니다! 몸에서 이상한 불꽃같은 게 튀어 나옵니다! 보라색의 거인이 그걸 흡수하고 있습니다! 아, 몸이 점점 커집니 다! 이쪽으로 다가옵니다!? ?보라색의 거인? 소울게터입니까? 말씀하십시오! 응답바랍니다!? ?…….? 경찰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힘없이 테이블 위에 엎어진 그는 혼이 빠진 듯 오로지 정면만을 주시했다. 그의 뒤를 지나친 보라색의 거인, 소울게터는 남은 전경들을 향해 눈을 돌 렸다. ―후우. 소울게터의 외골격 사이에서 연푸른 연기가 뿜어졌다. 연기 속에서 꿈틀대 는 데스마스크들은 무엇이 그리도 고통스러운지 오만상을 찌푸렸다. 우두둑 하는 소음이 소울게터의 전신에서 울려 퍼졌다. BG의 몸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좀 더 전투적인 모습을 향해, 좀 더 두려 운 모습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듯 했다. 코엑스몰을 수색 중이던 BSP대원들은 한걸음에 지상으로 뛰어올라왔다. 걸음이 느린 봉성을 등에 업은 그렌은 대 참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 있는 건 혼을 잃은 5백여 명의 전경대원들이었다. ?이럴 수가……!? 뒤통수를 맞아도 크게 맞은 상황이었다. 주범인 소울게터는 처음의 매끈한 모습에서 벗어나 우락부락하고 두꺼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투우처럼 두꺼운 가슴과 활처럼 휘어진 머리의 뿔에선 살기가 넘쳐흘렀다. 전봇대같이 굵어진 팔뚝 옆으로는 칼과 같은 날카로운 물체가 솟아 있었다. 다리 역시 크게 성장한 상태였다. 케빈과 지혁, 리진, 챠오는 각자 전투태세를 튀했다. 그렌의 등에서 내려온 봉성도 수인(手印)을 짜며 특기인 퇴마술을 준비했다. 그렌의 시야 옆에 BG레이더 창이 떠올랐다. 소울게터를 나타내는 동그라미 는 선명한 붉은 색을 띄었다. ?벌써 B+급으로 성장했군. 19년 전보다 훨씬 빠른 성장속도다!? 이것은 대단한 위협이었다. 그는 귀에 장치된 통신버튼을 재빨리 눌렀다. ?본부, 들리나? 그렌 헤이그 소령이다. 현재 소울게터와 교전 중, 아니 교 전하기 직전이다. 현재 순찰중인 지크 스나이퍼 소위와 직접연결을 부탁한 다.? 지크의 목소리가 들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지크는 명랑한 말투로 그렌의 부름에 응답했다. ?여기는 지크 스나이퍼. 잘 들리세요?? ?아, 잘 들리니 어서 귀환해라. 소울게터가 다시 나타났다.? ?그래요? 아아, 그렇단 말이죠? 하지만 즉시는 못가요.? ?뭐라고?? 헤이그는 무척 당황했다. ?여기도 조금 바쁠 것 같아요. 이 녀석들, 아무래도 머리를 좀 쓴 것 같거 든요?? 지크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겐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가 순찰하 려 했던 지역에 대량의 바이오 버그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신기하게도 BG들은 시민들을 아예 건들지 않았다. 마치 데모를 하듯 거리를 점령한 채 지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덕분에 사람과 차량 모두 썰물이 빠지 듯 거리에서 사라졌다. 지크는 씁쓸히 웃으며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좋아, 그럼 여기부터 정리해주고 가마. 조금 만 기다려라, 귀신벌레 녀석!? 그렇게, BSP와 소울게터의 대결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4화 [The Soul Getter] (후편) BSP본부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현장책임자인 그렌으로부터 소울게터의 재 출현보고를 받은 처크는 곧장 자 신의 큰 몸을 이끌고 주관제실로 달려갔다. 주관제실은 의외로 조용했다. 물론 넘치는 긴장감의 양은 그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BSP대원들은 두 패로 나뉘어 한쪽은 B+라는 엽기적 랭크의 바이오 버그(이하BG)와 대치 중이고 다른 한쪽, 아니 다른 한 명은 홀로 300여 개체에 가까운 BG들을 상 대하기 직전이었다. 상식을 넘어선 그 상황은 모두의 말문을 가로막았다. 그 와중에서 자신의 할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루이, 단 한 명뿐이었다. 통합관리장치, 베스(VUIS)안에 탄 그녀는 안에 탑재된 마이크를 향해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크, 일단 피해! 거기서 무역센터까지는 10분도 걸리지 않으니 돌아가서 본대를 지원해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관제실 내부의 스피커가 쩌렁쩌렁 울렸다. ?웃기지 마! 내가 여기서 피하면 이 지역의 사람들은 어쩌라는 거야! 포기 하라는 거야?? ?대피가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으니 하는 말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험 범위 밖으로 피신하거나 비상대피소에 피신하고 있어!? ?대피라고? 그럼 그 대피가 제대로 먹혀들어간 적이 있어?? 루이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매트로 서울의 곳곳엔 대 BG용 비상대피소가 마련되어 있다. 대피소 하나 당 50여명의 시민을 일주일간 보호할 수 있는데 그것이 사실 완벽하진 않았 다. BG들이 총 공격을 펼치거나 대형 BG가 공격을 할 경우 대피소의 셔터나 외벽이 버틸지에 대해선 아직까지도 의문이었다. 시뮬레이션만 몇 번 해봤 을 뿐, 실전테스트는 거의 해본 적이 없었다. BG가 나오라고 있다 해서 나 올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피커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잔말 말고 통신 끊어! 이 녀석들, 내식대로 쓸어버리고 갈 거야!? ?무리야! 적 개체는 무려 300마리야! 그 이상의 숫자가 대기하고 있을 수 도 있어!?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지크의 물음에 루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주관제실의 오퍼 레이터 모두가 곁에 있는 동료와 화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퍼레이터 중 한 명은 아예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한 시간 전에 지크를 담당했던 바로 그 여성 오퍼레이터였다. 털이 숭숭 난 손이 그녀의 검은 단발을 향해 다가왔다. 그녀가 미처 반응도 하기 전에 헤드 셋을 집어 올린 손의 주인은 다름 아닌 처크였다. ?지부장님!? 그녀의 외침에 주관제실의 전원이 술렁댔다. 처크는 검지를 입술에 댐으로 서 그들을 진정시켰다. ?루이, 이 회선을 지크와 연결해주게.? 그의 요구에 따라 회선은 즉시 연결됐다. 헤드 셋에 녹색불이 들어오자 처 크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고한다, 지크. 네 팬들이 널 기다리고 있었다면서?? ?엇? 할아버지? 거기서 뭐하세요?? ?뭐하긴, 지부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지. 어쨌거나 너, 그곳을 돌파 할 수 있겠나?? 그 말 한 마디에 주관제실은 매우 미세한 비명으로 가득해졌다. ?지부장님! 무모합니다!? 루이가 즉시 반대하고 나섰지만 처크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다시 묻겠다. 돌파할 수 있겠나?? ?돌파요? 당연하죠! 덤으로 쓸어버릴 수도 있어요!? 지크의 목소리엔 힘이 넘쳤다. 처크는 씩 웃었다. ?그럼 최대한 빨리 BG들을 제거하고 동료들과 합류해라. 지부장이 직접 내 리는 명령이니 허술하게 처리하지 말길 바란다.? ?맡겨줘요!? 지크와의 통신이 끝난 직후, 루이는 베스의 영화 속의 미라처럼 디스플레이 콕핏트를 열고 뛰어나왔다. 처크가 지금 내린 결정에 대해 따지기 위해서였 다. ?지부장님,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오퍼레이터에게 헤드 셋을 돌려준 처크는 옷매무새를 바로하며 반문했다. 루이는 기가 막혔다. ?무모합니다! 아무리 지크가 괴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지만 300여 개체 에 가까운 BG들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전투경찰이나 수도방위 사령부의 특별지원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게…….? ?그게 저 녀석들의 목적이야.? ?예?? 처크는 대답에 앞서 오른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한 손임에도 불구하고 키보드를 치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키보드를 꽤 만진 사람이 양손으로 치 는 것 이상의 수준이었다. 메인화면에 위성레이더 화면이 떠올랐다. 지도상으로 봤을 때 BG들은 사거리의 3면을 장악한 뒤 그 가운데에 지크를 놓고 있었다. 그들이 차지한 지점은 무역센터로 통하는 길이었다. 처크가 말했다. ?지금 지크 앞에 나타난 BG들은 지크를 소울게터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 기 위해서 나와 있지. 야생동물보다 더 야생적이던 녀석들이 어째서 지금처 럼 머리를 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내 예상은 거의 맞는다고 할 수 있 어. 잘 봐.? 지도의 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파란색의 점은 지크였고 노란색의 점들은 BG를 나타냈다. 지크 주위의 노란 점들이 하나 둘씩 사라졌다. 근처의 BG들은 조금씩 지크 로부터 물러났고 그 외의 BG들은 아예 움직이지도 않았다. 벌 떼처럼 목표를 향해 단숨에 모이는 평소의 모습과는 전혀 틀렸다. ?지크가 도망치려고 하면 녀석들은 분명히 녀석이 도망가지 못하게 할만한 행동을 취할 거야. 건물을 부수든 비상대피소를 부수든 하겠지. 그리고 지 크가 덤비려고 하면 저렇게 움직이면서 시간을 벌려고 할 거야. 그런 상대 에게 가장 좋은 약은 빠르게 없애버리는 것뿐이지.? ?하지만 지크대원 혼자서 저 많은 숫자를 다 없앤다는 건 무리입니다.? 처크의 말을 들어서인지 루이는 아까보다 진정된 어투로 말했다. 처크는 인 정한다는 듯 힘겨운 목소리를 냈다. ?그렇지. 현재로서는 큰일이 생기기 전에 지크가 도착하기를 바라는 수밖 에 없어. B+로 성장해버린 소울게터는 그렌들에게 있어서 너무도 부담스러 울 테니까.? ?타 지역의 BSP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건 어떻습니까?? ?이미 해놨어. 매트로 서울과 인접한 위성도시 다섯 곳에 지원을 요청해둔 상태야. 그러나 지원이 문제가 아니야. 그렌들이 당하기 전에 지크가 도착 해야 해. 봉성선생이 계시긴 하지만 녀석이 만약 면역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봉성선생의 능력도 소용이 없을지도 몰라.? ?…….? 처크는 주관제실 중앙에 마련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모든 오퍼레이터들은 듣도록. 지금 이 시각부터 우리 대한민국 수도방위 지부는 3급 비상체계로 들어간다. 전투요원들과 링크한 어시스트 오퍼레이 터들은 일단 요원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도록. 지크 소위가 합류할 때까 지 소울게터 세컨드와의 정면대결은 최대한 피하게 한다. 대원들에 대한 2 차 보급은 B옵션으로, 모니터링은 상황 C에 맞춘다. 그 외의 지역에서 BG사 태가 벌어지면 경찰청의 협조를 우선으로 한다.? 처크의 지시가 끝나자마자 주관제실은 시동이 걸린 엔진처럼 급박하게 돌아 갔다. 어시스트 오퍼레이터, 별칭으로 어시스턴트라 불리는 사람들은 위성과 현장 의 카메라를 통해 들어오는 여섯 개의 화면을 통해 상황을 분석했고 매트로 서울의 모니터링을 맡은 오퍼레이터들은 바쁘게 키보드를 움직였다. 루이는 베스에 다시 몸을 담고 최종조율에 들어갔다. 그 사이 처크는 깍지 낀 손 위에 코와 입술을 올려놨다. 평소엔 선글라스로 표정과 감정을 최대한 가리고 있는 그였지만 지금의 모습은 로댕의 예술품 보다도 더 고민스러워 보였다. ?지금 와서 나 혼자 고민하긴 뭐하지만 어째서 소울게터가 다시 나타난 거 지? 유전자 변이가 19년 만에 똑같이 일어날 가능성은 금붕어가 바다에서 생존할 수 있는 확률만큼이나 낮은데…….? BSP에서 BG를 분류할 때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눈다. 일반에게 판매되는 승용차처럼 똑같은 크기에 똑같은 습성, 똑같은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대량으로 발생하는 BG의 경우엔 제너럴(General) 클래스 로, 이번에 나타난 소울게터처럼 현재까지 확인된 BG와 일치하는 점이 전혀 없으면서 극소수로 발생하는 BG의 경우엔 유니크(Unique) 클래스로 분류한 다. 유니크 클래스의 BG들은 대부분 강력한 능력과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으 며, 때로는 하급의 BG들을 통솔하기까지 한다. 유니크들이 어째서 발생하는 지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없지만 일단은 돌연변이로 판단하고 있다. 처크는 유니크 BG들의 발생원인을 상당히 궁금해 했다. 전직 과학자로서, 그리고 모든 BG의 발생원인을 아는 극소수의 사람으로서. ?지부장님!? 그때 한 오퍼레이터의 외침이 처크의 의식을 일깨웠다. ?무슨 일인가?? ?지크 스나이퍼 소위가 대치하고 있는 구역의 카메라가 모두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인공위성 카메라 역시 불통입니다!? ?불통? 그게 무슨 말인가! BG에 의한 방해인가?? ?아닙니다! 레드 원, 블루 원이 출현했을 때와 같은 상황입니다!? ?뭣이라고?? 처크는 크게 당황했다. 당황하고 있는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현장에 있는 지크역시 불태우던 전의를 잃을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자신도 모르게 욕을 뱉은 그의 시야엔 회색망토로 몸을 감싼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 주위엔 그가 없앤 것으로 보이는 BG들의 잔해가 바람에 날린 밀 가루처럼 원형으로 퍼져 굴러다녔다. 몇 주 전에 귀신처럼 나타나 지크를 짓밟았던 레드 원, 바로 그였다. 그의 붉은 장발이 흔들렸다. 그의 눈이 붉은 잔광을 남기며 지크에게 향했 다. ?오랜만이다, 지크 스나이퍼. 여전히 약하군.? ?뭐?? 그 도발성 인사에 발끈한 지크는 주먹을 굳게 움켜쥐었다. ?그런 말 하려고 왔으면 빨리 덤벼! 우선 네 녀석을 밟아준 뒤 이 벌레 녀 석들을 처리하겠다! 칼을 뽑아라, 빨간 머리!? 소리는 질렀지만 지크의 모습엔 긴장이 역력했다. 만약 그가 적으로서 나타 난 것이라면 지금은 동료들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붉은 장발의 남자는 검 대신 특유의 비웃음을 흘렸다. ?후훗, 흥분하지 마라. 나에게 널 죽일 생각이 손톱만큼이라도 있었다면 넌 지금쯤 저승으로 가는 열차에서 삶은 계란을 까먹고 있을 거다.? ?으윽……!? 분했지만 지크는 반론을 펼치지 못했다. 그가 지크에게 다가왔다. 새로운 존재가 등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BG들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공격이 목적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 목이었다. 지크와 남자는 선풍기의 날개처럼 방향을 다르게 하여 어깨를 맞댔다. 지크 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곳에 온 목적이 뭐지? 나와 저 녀석들의 싸움을 관람하기 위해 왔다면 요금을 내시지?? ?나도 좋아서 이곳에 있는 게 아니니 닥치고 있어라. 관람료를 원한다면 금으로 네 무덤을 만들어주지.? ?흥, 알았으니 목적이나 말하시지.? ?네놈의 감전된 뇌로는 얼른 이해하기 힘들 테니 나중에 얘기해주지.? 남자는 검을 뽑아들었다. 볼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드는 보라색의 대검이었 다. 그가 낮게 말했다. ?가라.? ?뭐?? ?여긴 내가 맡는다.? 남자는 그 말과 함께 검술자세를 잡았다. 전신에 살기가 흘렀다. 압도적이었다. 허연 입김을 뿜으며 헐떡대던 BG들의 움직임이 얼어버린 듯 멈췄다. 밤바람 속에서 붉은 장발이 너울댔다. 적일 때는 몰랐지만 지금 상황에서 보니 느껴지는 게 달랐다. 아무렇게나 기른 산발임에도 불구하고 장엄한 분위기가 흘렀다. 마치 한 나 라의 국기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머리카락 사이로 흘끗흘끗 보 이는 검의 보라색 표면은 보는 이의 혼을 빨아 챙기는 듯 했다. ?멋지다.?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할 뻔한 지크는 얼른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이런! 너에겐 절대로 지지 않아!? 남자는 무슨 소리냐는 듯 지크를 흘끔 쳐다봤다. 돌발적으로 그런 말을 해 버린 지크는 몹시 당황한 얼굴로 손을 저었다. ?모, 못들은 걸로 해! 알았지!? 남자는 다시 BG들에게 눈을 돌렸다. ?길을 터주마. 방향을 정해라.? ?내가 가는 쪽이야!? 거의 날듯이 오토바이에 올라탄 지크는 시동을 걸자마자 있는 대로 액셀을 돌려 급출발을 했다. 그러나 좀 이른 행동이었다. 붉은 장발의 남자는 아직 길을 터주지 않았다. 성격 급한 지크로선 참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봐! 멋은 있는 대로 부려놓은 녀석이 꼼짝도 않는 건 또 뭐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의 검이 위로 움직였다. 지크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검을 잡은 손과 교차한 반대쪽 손등에서 시뻘건 문양과 함께 빛이 피어올랐 다. 그 빛의 정체가 뭔지 모르는 지크로선 그저 구경만 할 뿐이었다. 문양에서 피어오른 빛은 곧 화염이 되어 검에 옮겨 붙었다. 남자의 팔이 사인을 하는 스타의 손처럼 재빠르게 움직였다. 화염의 잔광이 검이 간 길을 따라 공중에 문양을 만들었다. 이윽고 폭음이 교차로를 뒤흔들었다. 건물의 유리창이 터져 나가고 전깃불 이 가물댔다. 이어서 강렬한 후폭풍이 밀려왔다. 바람이 가신 뒤에야 눈을 뜬 지크는 입 을 다물지 못했다. 가장 빠른 길을 막고 있던 BG들의 무리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그 자리 를 대신 차지한 건 엉망진창이 된 아스팔트뿐이었다. 잘게 깨어진 고층건물의 유리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다시 밝아진 전깃불이 유리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빛을 머금은 그 유리 의 비는 밤하늘의 별이 작정을 하고 쏟아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 다웠다. 붉은 장발의 남자는 그 속에서 천천히 검을 돌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의 검과 망토, 탄탄한 근육질 위로 떨어진 유리알들은 궤도를 달리해 다시 떨 어졌다. 지크의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이를 악문 채 붉은 장발의 남자를 바 라봤다. 넋이 두 번이나 나갔다. 처음엔 그렇다 쳐도 두 번째는 아니었다. 실력과 카리스마, 그 모든 것에서 밀렸다. 뇌는 아니라고 발버둥쳤지만 몸은 이상한 소름이 돋은 채 떨렸다. 지금, 지크의 가슴속에선 과할 정도의 투지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투쟁본능 에 의해 생겨난 그 감정은 남자들만이 느끼는, 강자에 대한 순수한 질투였 다. 이것으로 인해 자신이 어떻게 바뀔 것인가. 지크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자신 의 미래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지크는 그 남자의 뒤쪽으로 오토바이를 몰고 갔다. 그냥 갈 줄 알았던 그가 멈추자 붉은 장발의 남자는 다시 눈을 흘끔 돌렸다. ?또 찡얼댈 생각이라면 닥치고 가라. 귀찮다.? 그런데 지크의 눈빛이 조금 달랐다.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있던 예전의 눈 동자가 아니었다. 조금 화가 난 듯 하면서도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그 때문에 남자의 생각도 조금은 바뀌었다. 지크가 말했다. ?너, 이름이 뭐지?? ?뭐 하러 묻나.? ?너만 내 이름을 아는 건 불공평하잖아. 어서 이름을 말해. 체포해버리기 전에.? 그러자 남자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조소를 흘렸다. ?후후, 웃기는 녀석이군. 좋아, 말해주지.? 남자는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리오, 리오 스나이퍼다.? ?스펠링은?? ?꺼져라.? 퇴짜를 맞은 지크는 입술을 씰룩대며 오토바이를 몰았다. 파편덩이로 변한 아스팔트를 뚫고 대로에 올라선 오토바이는 장쾌한 배기음을 내며 거리를 달렸다. 지크가 움직이자 BG들도 같이 움직였다. 그러나 그들의 진출로는 붉은 벽에 단단히 막히고 말았다. 리오라는 이름의 그 남자는 잔인한 미소를 지은 채 BG들에게 말했다. ?좋은 시간이 왔는데 어딜 가나? 나에게 죽을 수 있는 영광을 너희들에게 주마.? 잠시 주춤했던 BG들은 괴성을 지르며 남자를 향해 몰려들었다. 시간을 끌려 던 방금 전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한편, 무역센터에서 소울게터와 싸우고 있는 그렌들의 상황은 점차 나빠졌 다. 최전방, 디펜더 포지션을 맡았던 그렌의 티타늄 육체는 군데군데 큰 상처가 났고 반쯤 부러진 왼팔에선 유압실린더의 오일이 새어나와 팔의 가동을 방 해했다. 무기는 탄이 거의 떨어져 효용가치를 점차 잃고 있었다. 그래도 중장갑의 사이보그에다 초 베테랑인 그렌이었으니 이 정도에서 끝난 것이다. 그렌과 함께 협공을 했던 다른 대원들은 소울게터가 가만히 있는 사이 BP-0 8을 주사했다. 피로에 지친 몸은 점차 활기를 되찾았지만 심리적 압박감은 가시지 않았다. 소울게터는 그만큼 강력했다. 특히 19년 전, 소울게터를 직접 상대했었던 그렌과 지혁, 그리고 봉성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렌은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자신들을 바라보는 소울게터를 분한 얼굴로 바라봤다. ?모든 공격이 무위로 끝났다. 리진의 사이킥 능력도, 내 무기도, 지혁의 용살문도 통하지 않았어. 봉성선생의 퇴마술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통한 건 차오의 권법과 케빈의 사격뿐이야.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 는 거지?? 소울게터는 BSP들의 공격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 가볍게 피했다. 그렌의 공격은 사각지대를 찾아 교묘히 움직였고 지혁과 리진의 용살문은 패턴을 읽고 반격까지 했다. 특히 봉성의 퇴마술이 통하지 않은 건 그녀의 능력을 믿고 있던 BSP들에게 있어서 강렬한 충격이었다. ?로보캅 양반.? 봉성이 작은 목소리로 그렌을 불렀다. ?우리말이오, 19년 전에 저 녀석을 정말로 없앤 것 맞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의 술법은 성공적으로 통했고 이후 힘을 완전히 잃은 소울게터는 제가 대(對) BG용 미사일로 완전히 날려버렸습니다. 잔해도 확인했죠.? ?그건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이상하오.? ?이상하다니요?? ?이건 늙은이의 노망일 수도 있지만 일단 들어보시오. 지금 우리 앞에 있 는 소울게터는 19년 전에 만난 소울게터와 똑같은 영파(靈波:영적 파장-작 가 주)를 뿜고 있소.? 봉성의 말에 그렌의 안면이 꿈틀했다. 다른 멤버들의 표정도 마찬가지로 바 뀌었다. ?그렇다면…….? ?그렇소. 19년 전에 나타난 녀석과 동일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이오.? ?그럴 리가! 불가능합니다, 장모님!? 지혁이 외쳤다. 어찌나 목소리를 크게 냈는지 전혀 풀릴 것 같지 않던 소울게터의 팔짱이 서서히 풀렸다. 하지만 지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당시 남겨졌던 소울게터의 잔해는 2주일간의 수색 끝에 모두 찾아내어 소 각되었습니다! 지금 그 녀석이 다시 날뛴다는 건 19년 전의 희생이 모두 무 (無)로 돌아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흥분하지 말게나.? 봉성이 고개를 저었다. ?나 역시 그때의 일을 돌이키고 싶지 않은 사람 중에 하나일세. 당시 가장 많은 친구를 잃기도 한 사람이 바로 자네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진정하게. 냉정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거야. 자네가 미린을 나에게 맡길 때처럼 말일세.? ?…….? 부인의 이름이 나오자 지혁의 흥분은 금세 가라앉았다. 그뿐만 아니라 리진 과 그렌도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19년 전엔 어떻게 하셨죠?? 뒤에서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케빈이 나섰다. 봉성이 그에게 시선을 돌 렸다. ?어떻게 하다니?? ?정확한 과정을 말씀해 주시죠. 그걸 들으면 전술적인 힌트를 약간이나마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글쎄, 말해줄 기회가 있다면 해주겠네.? 봉성은 다시 소울게터를 바라봤다. 그 강대한 BG는 그렌들을 향해 아주 천 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건 제 예상인데 말이죠.? 케빈은 말을 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순식간에 소나기처럼 뿜어진 케빈의 탄 환은 첫발만 빗나가고 모조리 적중했다. 그것도 모조리 안면이었다. 첫발을 맞추지 못한 건 다른 탄환을 맞추기 위한 그의 속임수였다. 덕분에 소울게터의 움직임이 조금 느려졌다. 그 사이 케빈은 새 탄창을 끼 우며 말을 이었다. ?저 녀석, 바퀴벌레와 같은 녀석일지도 몰라요. 아시다시피 요즘 바퀴벌레 는 10년 전에 발매된 살충제가 전혀 통하지 않죠. 약에 면역이 되서 그런 건데, 저 녀석 역시 19년 전에 당한 기술엔 철저히 면역되어 있을지도 몰라 요.? ?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혁이 반론을 폈다. ?하지만 아침엔 통했네. 내 기술이 정확히 들어갔단 말일세.? ?선배님의 기술을 피할 육체적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럴 수도 있죠. 알면서 도 당할 수밖에 없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일리가 있군.? 그렌이 동의했다. ?녀석을 쏠 때 느낀 것이지만 왠지 내가 쏠 것을 알고 미리 피하는 느낌이 었어. 내 방식대로 조준해서 쏜 건 모두 벗어났고 무차별로 쏜 게 오히려 효과가 있었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명왕현신지술(明王現身之術)도 먹히지 않을 수 있다는 거겠지.? 봉성이 그렌의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 사이 완전히 회복된 소울게터는 아까와 달리 매우 거칠게 달려들었다. 케빈이 급히 총을 쏴 막으려 했으나 소울게터는 팔로 얼굴을 막은 채 그대 로 전진했다. 결국 그렌은 왼쪽어깨에 장비한 방탄쉴드를 앞세워 소울게터 에게 돌진했다. ?하아앗!? 우지끈 하는 소리가 그렌과 소울게터 사이에서 터졌다. 대량의 오일이 둘 아래로 떨어졌다. 이어서 커다란 기계덩어리가 떨어졌다. 그렌의 왼팔이었다. 소울게터의 공격은 두께 10센티의 방탄실드를 완전히 뭉갠 것도 모자라 그 의 왼팔까지 떨어트릴 정도로 강렬했다. 꽤 큰 데미지였으나 그렌은 계속해서 소울게터를 밀어붙였다. 그 사이 동료 가 소울게터를 공격해주길 바라고 하는 행동이었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챠오가 맹렬한 기세로 달려 나갔다. 그녀의 몸이 살짝 뜨는가 싶더니 마루운동을 하는 체조선수처럼 맨땅에서 텀블링을 하기 시작했다. 네 차례의 텀블링으로 운동에너지를 끌어올린 그 녀는 이윽고 한 마리의 새처럼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착지가 걱정될 정도의 높은 점프였다. 일반적인 체조선수는 흉내도 못 낼 초인적인 모습이었다. 몸을 꼬며 회전하는 그녀의 양손에서 은색의 호선이 반짝였다. 점프와 동시 에 허리에 차고 있던 대형 나이프를 꺼내든 것이다. 잔광을 뿌리며 날던 두 나이프가 소울게터의 머리에 정확히 꽂혔다. 흑표범 처럼 야성적인 모습으로 티타늄의 이빨을 박아 넣은 챠오는 뒤로 몸을 감으 며 뛰어올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착지했다. 챠오의 공격이 적중한 것을 확인한 그렌은 즉시 뒤로 물러났다. 소울게터를 밀던 왼팔의 단면부에서 또다시 대량의 오일이 뿜어졌지만 그는 눈 하나 깜 짝하지 않았다. ?된 건가?? 그렌이 외쳤다. 챠오가 꽂은 나이프는 소울게터의 정수리에 정확히 박혀 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끝났다고 봐도 좋았다. BG역시 생물인 만큼 뇌를 당하게 되면 그대로 게임오버였다. 허나 소울게터는 일반적인 BG가 아니었다. 뿔처럼 머리에 꽂혀 있던 나이프가 갑자기 소울게터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 갔다. 거의 변화가 없는 챠오의 얼굴도 꿈틀했다. 펑 소리가 소울게터의 가슴에서 터졌다. 그와 동시에 그렌의 몸이 뒤로 튕 겨져 날아갔다. ?크억!? 쓰러진 그렌의 몸은 마찰불꽃을 튀기며 바닥을 긁었다. 쓰러진 그의 가슴 중앙엔 차오가 꽂았던 나이프 중 하나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소울게터가 몸속에 흡수한 칼을 역으로, 그것도 대포처럼 뿜어낸 것이다. 그렌은 쓰러진 채로 소리쳤다. ?챠오, 피해!? 또 한 번의 폭음이 터졌다. 포탄이 된 나이프의 목표는 챠오의 머리였다. 허나 챠오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을 빠르게 뻗어 올렸다. 일직선으로 날아가던 섬광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챠오가 손으로 날을 쳐 나이프의 운동방향을 바꾼 것이다. 챠오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올라갔다 떨어지던 나이프의 손잡 이에 그녀의 전투화 끝이 닿았다. 강렬한 돌려차기에 맞은 나이프는 다시 한번 소울게터를 향해 날아갔다. 그 러나 BG는 목을 살짝 움직여 나이프를 피했다. 건물 벽에 꽂힌 나이프는 파 르르 떨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동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챠오의 격투 능력과 동체시력이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음속에 가까운 속도 로 날아오던 나이프를 쳐올려 반격까지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챠오 혼자서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그렌 선배가 막지 않았 으면 공격은 처음부터 통하지 않았어.? 리진은 안타까운 눈으로 동갑내기 동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그 누군가가 이렇게 눈에 밟힐 수가 없었다. 이런 생 각을 하게 될 날이 올 줄 몰랐던 그녀는 안타까우면서도 화가 치밀어 올랐 다.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리진은 결국 눈을 부릅뜨며 봉성에게 다가갔다. ?할머니, 우리 해봐요.? ?응?? 봉성과 지혁이 움찔했다. 그녀의 말뜻이 뭔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리진아.? 딸의 이름을 부른 지혁은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입안에서 도는 말은 수백 마디가 넘었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전부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봉성 역시 안타까운 얼굴로 손녀를 바라봤다. 주름진 손이 리진의 손 위에 서 끝도 없이 움직였다. 리진은 애써 웃었다. ?어쩔 수 없어요, 할머니. 한번만 더 녀석을 놓치게 되면 정말 누구라도 막을 수 없게 돼버려요. 아시잖아요.? 리진이 말하는 동안 챠오는 소울게터와 육박전을 벌이고 있었다. 기술에선 챠오가 훨씬 앞섰으나 싸움에 필요한 원초적 능력인 힘과 속도에선 소울게 터 쪽이 훨씬 위였다. 그녀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몇 분이었다. 그걸 아는 리진으로선 결심 을 더욱 굳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리진아.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지혁이 외쳤으나 그의 딸은 이미 마음을 굳게 먹고 있었다. 리진은 아버지를 보며 빙긋 웃었다. ?19년 전의 엄마도 지금의 저와 같은 심정이었을 거예요.? ?…….? 지혁은 결국 고개를 돌렸다. ?난 또 한번 무력해지는구나.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멜로영화의 여주인공처럼 가녀리게 떨리는 그의 어깨를 누군가가 따듯이 두드려 주었다. ?여기서 울면 미린 아줌마한테 이를 거예요.? 지혁의 머리가 순간 크게 쳐들렸다. 그뿐만 아니라 소울게터와 대치중인 챠 오까지 뒤를 쳐다봤다. 그곳엔 숨을 심하게 헐떡이고 있는 지크가 땀에 범벅이 된 채 서있었다. ?제 애마가 좀 느린 것 같아서 아예 세워두고 뛰어왔어요. 저 잘했죠?? 씩 웃은 지크는 팔뚝으로 얼굴의 땀을 훔쳤다. ?이 녀석!? 지혁이 소리쳤다. 소리만 쳤을 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 서 보자면 지금 상황에 대한 최고의 감탄사였다. ?지크!? 그렌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크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예예, 대령했습니다. 좀 늦어서 미안해요, 그렌 아저씨. 좀 많이 다치셨 네요?? ?기껏해야 팔 한쪽이 날아간 것뿐이야. 그런데 넌 괜찮은 거냐? 좀 지쳐 보이는데?? ?기분은 최고에요.? ?응?? 그렌은 지크의 분위기가 뭔가 틀림을 느꼈다. 하이스쿨 졸업 후 네이비 씰에 들어간 지크는 한번도 만져본 적이 없는 총 기와 화약에 대한 훈련을 받으며 있는 고생 없는 고생을 다 했다. 게다가 그렌의 훈련이 워낙 엄했기에 그가 받는 스트레스와 피로는 더욱 심했다. 하지만 지크는 힘들다는 말을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팔팔할 때 그 런 말이 자주 나왔다. 자신이 모르는 것, 또는 자신을 능가하는 무언가와 마주쳤을 때마다 지크는 땀에 젖은 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최고의 기분이라며 짧게 말했다. ?오는 도중에 누굴 만난 건가?? 그렌은 묻고 싶었지만 물어볼 상황이 아니었다. 지크는 벌써 저만치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 다가오는 지크를 묵묵히 바라보던 챠오는 곧장 몸을 돌려 동료들이 있는 쪽 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지크는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어이, 잠깐.? 지크가 챠오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세웠다. 챠오는 조금 불쾌한 듯한 얼굴 로 그를 쳐다봤다. 동시에 챠오의 한쪽 볼이 움푹 들어갔다. 어깨를 잡은 손의 중지에 볼이 찔 린 것이다. ?윽!? 챠오는 당황한 나머지 지크의 팔을 강하게 걷어냈다. 지크는 장난스레 웃으 며 소울게터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잠시 동안 바라본 챠오는 한 숨을 쉬며 갈 길을 갔다. 지크는 소울게터로부터 약 1미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소울게터는 아무 소리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지크를 지켜봤다. 지크가 말했다. ?너, 재수 옴 붙었구나.? 소울게터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지크는 팔다리를 돌리며 몸을 풀었다. B +급 BG를 앞에 둔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여유였다. ?오늘이 무슨 날인줄 알아? 시동이 걸린 날이야. 이상한 건달 녀석 하나 때문에 내 머릿속에서 잠자고 있던 시동스위치가 눌려 버렸어. 그것도 두 번이나.? ?…….? ?그것 때문에 열 받아서 여기까지 뛰어왔지. 오토바이에 궁둥이 붙이고 편 하게 올 기분이 아니더라고. 넌 이런 내 기분 이해하냐?? 몸을 다 푼 지크는 심호흡을 한 뒤 똑바로 섰다. ?하여튼 넌 오늘 죽었다. 널 곤죽으로 만든 다음엔 바로 달려가서 그 녀석 의 머리털을 뽑아 산타팬티를 만들 거야. 내 말 알겠냐!? 그러나 소리친 것과는 달리 지크는 소울게터의 주먹 한 방으로 동료들의 곁 에 돌아왔다. 맞기 직전에 팔로 막아 치명타를 피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턱이 돌아갈 뻔한 상황이었다. 동료들 앞에 대(大)자로 쓰러진 지크는 멍한 얼굴로 밤하늘을 바라봤다. 별 은 보이지 않고 그냥 불그스름했다. ?저 녀석, 강한데?? 그의 말에 그렌을 비롯한 모두는 탄식을 했다. 그것은 믿음이 무너질 때 나 는 가슴 아픈 소리였다. ?잠시나마 감동했던 내가 싫어졌어.? 리진이 대표 격으로 중얼댔다. 지크는 당황하여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 다. ?이, 이봐! 저번보다 강해졌다는 말이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하지만 동료들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몸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지크는 핸드스프링으로 일어나 다시 소울게터에게 달려갔다. ?망신은 한 번 뿐이야!? 지크의 주먹이 소울게터의 가슴을 노리고 뻗어나갔다. 그러나 몇 시간 전보 다 훨씬 강해진 소울게터에게 그런 기본적인 기술은 통하지 않았다. 흥분한 BSP대원의 주먹을 팔로 간단히 흘린 소울게터는 발을 빠르게 뻗었 다. 지크역시 어렵지 않게 막았으나 상대의 공격은 예상 이상으로 묵직했 다. 이후 무시무시한 격돌이 펼쳐졌다. 쌍방은 서로 뒤엉킨 소용돌이처럼 맹렬 히 충돌했고 그 사이에 휘말린 주위의 구조물들은 남김없이 가루가 됐다. 둘 다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기술과 속도에선 지크가 앞섰지만 힘과 정확 도에선 소울게터가 앞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지크 쪽이 점차 밀렸다. 아침에 수백 마리의 BG를 혼자 물리친 것부터 시작해서 소울게터를 상대할 때까지 제대로 쉴 틈이 없 었던 게 이유였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BP-08을 맞지 않았지?? 그렌의 말대로 지크는 BP-08을 주사하지 않았다. 리진은 어이가 없다는 표 정을 지었다. ?예? 왜요!? ?흥분할 건 없어. 평소의 지크였다면 24시간 전투를 해도 체력엔 문제가 없었을 거야. 녀석의 체력은 특별하거든. 물론 보통의 E급 BG를 상대할 때 의 얘기지만 말이지. 지크 자신도 소울게터가 이렇게 빨리, 그리고 강하게 다시 나타날 줄은 몰랐을 거야. 그러니 사나이 어쩌고 하면서 BP-08을 맞지 않았겠지.? 지크가 싸우는 동안 응급수리를 끝낸 그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 해도 지크를 비난할 수는 없어. 소울게터는 그만큼 강하거든. 녀 석이 아니었으면 우린 이렇게 얘기를 나누지도 못해.?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리진이 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지크 혼자서 저렇게 싸우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잖아요! 어떻게든 지원을 해줘야 해요! 지크도 우리의 동료잖아요!? ?동료니 뭐니 해도 소용없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으 니까.? 케빈이 말했다. 조금 빈정대는 투였지만 그의 분위기는 냉정하면서도 어딘 지 모르게 깊어보였다. ?둘 모두 보다시피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어. 덕분에 총에 의한 원거 리 지원은 나라 해도 불가능해. 조준할 수가 없으니까. 지크가 녀석을 붙잡 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만… 그건 요구하기가 좀 힘들어.? 그의 첫말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 말은 조금 이상했다. 리진의 표정 이 다시 일그러졌다. ?어째서죠?? ?간섭을 싫어해.? 챠오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지크는 원래 간섭을 싫어해. 우리 마을에서 수호령이 폭주할 때도 그랬 어. 자기 싸움에 누군가가 참견하려 하는 걸 절대 두고 보지 않아. 만신창 이가 되는 한이 있어도 혼자 싸웠지.? ?챠오 말대로야.? 그렌이 이어서 말했다. ?녀석은 아무리 모욕적인 말을 들어도 웃으며 넘기거나 농담으로 받아치 지. 맞지 않을 능력이 되면서도 일부러 맞아주곤 해. 그건 리진도 잘 알거 야.? ?…….? 리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지크가 파트너가 된 뒤 지크는 하루도 빠짐없이 농담을 했고 리진 자신은 그에 맞춰 욕설을 퍼붓거나 심지어는 그를 때리기까지 했 다. 장난수준이긴 했지만 보통사람이라면 진짜로 화를 내거나 상대 자체를 꺼릴 것이다. 그런데도 지크는 지치지 않고 농담을 했으며 진짜 아프게 맞아도 금방 웃곤 했다. 그렌은 슬쩍 웃었다. ?리진이 지크의 파트너가 된 건 사실 내가 지부장님께 부탁을 한 거야. 나 나 케빈, 챠오가 파트너가 되면 리진은 항상 긴장을 해버리거든. 그때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엔 안 그랬지만…….? 그 사건이라는 것은 리진의 실수로 BSP요원 전부가 최악의 위기에 빠진 것 을 말한다. 그때 일이 떠올라서인지 리진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졌다. ?하지만 지크와 파트너가 됐을 때는 이상할 정도로 건강해졌어. 게다가 실 적도 좋았지. 뭐랄까, 긴장을 적절히 하고 있다고나 할까? 하여튼 자연스러 웠지.? 긴장을 풀어주고 나쁜 일을 잊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존재. 지크는 짧은 시간 만에 그런 존재로서 리진에게 인식되어 있었다. ?하지만 싸울 때의 지크는 그렇지 않아. 그 녀석이 이 싸움은 자신만의 싸 움이라고 생각해버리면 그것을 절대 건드려선 안돼. 다른 건 몰라도 지크는 싸움에 대한 자존심만큼은 절대 지키려고 하지. 그것마저 건드려버리면 녀 석은 정말 화를 낼 거야.? 지혁과 봉성, 케빈, 챠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모습을 본 리진은 화가 났다. 오직 자신만이 지크에 대해서 전혀 모 르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윽고 리진은 양손을 입가에 모았다. ?힘 내, 바보야! 여기서 당하면 평생 널 미워할 거야!? 그 목소리에 지크의 오른쪽 귀가 꿈틀했다. 말도 못할 정도로 심각했던 그 의 얼굴에 점차 화색이 돌았다. ?갑자기 그렇게 나오면 부담스럽다구.? 순간 지크의 팔과 소울게터의 팔이 뒤엉켰다.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든 지 크는 상대를 보며 씩 웃었다. ?강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강해. 하지만 아니야. 그 녀석만큼 강하진 않아! 절대로!? 붉은 장발의 남자가 지크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환영이었다. 그의 잔혹한 미소가 지크에게 이상할 정도로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네놈을 없애지 못하면 그 녀석도 이기지 못해!? 지크의 무릎이 소울게터의 복부에 꽂혔다. 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복부의 외골격이 크게 부서졌다. 몇 번의 무릎차기가 계속해서 터졌다. 팔을 봉쇄당해 방어할 수단을 잃은 소울게터는 큰 충격을 받은 듯 휘청거렸다. 깨어진 외골격에서 연푸른 연기가 흘러나왔다. 소울게터에게 먹힌 원혼들이 었다. 그러나 상처는 금방 아물어들었다. 지크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아예 팔을 풀고 연속공격을 퍼부었다. ?회복의 시간은 없다!? 머리와 가슴, 복부에 큰 구멍이 난 소울게터는 빠져나간 원혼 탓에 힘을 잃 었는지 크게 휘청댔다. 손으로 자신의 구멍을 막아보려 했지만 섭취한 원혼 의 양이 워낙 막대했는지 그것도 쉽지 않았다. 찬스를 얻은 지크는 오후 들어 단 한번도 뽑지 않은 무명도를 뽑아 자세를 잡았다. ?너를 위해 남겨둔 한 방이다!? 지크의 전신에서 스파크가 일어났다. 아침에 본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 청난 기세와 양이었다. 스파크는 지크의 팔을 따라 무명도에 모여들었다. 하나의 번개덩어리가 된 무명도는 귀를 마비시킬 정도의 맹렬한 공명음을 터트렸다. 그렌을 제외한 모두가 귀를 막았다. 뿐만 아니라 봉성이 무역센터 주위에 쳐둔 결계까지 뒤흔들렸다. ?뭐야, 이 소리는! 아아악!? 케빈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다른 사람들 역시 하나 둘씩 무릎을 꿇었 다. 그러나 그렌은 무슨 소리냐는 듯 동료들을 돌아봤다. ?소리라니?? ?당신에겐 들리지 않을 거요!? 지팡이에 의지한 채 쓰러지는 것만 겨우 막고 있던 봉성이 힘겹게 말했다. ?이건 명계의 소리요! 수천, 아니 수만의 영혼이 한꺼번에 울부짖는 것이 오! 살아있는 육신의 귀를 가진 사람이라면 들을 수 있겠지만 기계의 몸을 가진 당신은 들을 수 없소!? ?예? 아니, 그런 엄청난 수의 영혼이 왜 지크의 칼에서……!? 그러나 봉성은 대답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렌과 지크를 제외한 전원이 의식을 잃고 바닥에 누웠다. 여기서 만약 지크의 공격이 실패한다면 상황은 겉잡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술법으로 소울게터의 영혼흡수를 막고 있는 상황에서 술법의 주체인 봉성이 의식을 잃었으니 전원몰살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닥칠 수도 있었다. 그렌은 급히 통신기를 들었다. 몸에 내장된 통신기는 현재 사용이 불가능했 다. ?이런! 본부, 들리나! 여기는 그렌! 1급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급히 지원 을…….? 순간 우직 하는 소리가 그렌의 귓가에 들렸다. 들고 있던 통신기가 뾰족한 물체에 부서진 것이다. ?쓸데없는 짓은 안하는 게 좋아, 기계 아저씨.? 누군가가 그렌의 어깨를 짚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인가? 등골이 오싹해진 그렌은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 가장 처음 보인 것은 붉은 장발이었다. 그 밑으로 적동색의 준수한 얼굴이 보였다. 회색망토의 앞자락으로 목과 입가를 슬쩍 가린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렌을 긴장시킨 것은 지크와 챠오, 리진의 보고에 따라 작성된 몽타주와 닮은 남자라는 사실이었다. ?레드 원!? 그가 엄청나게 강하다는 말을 지크에게 들었던 터라 그렌은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허나 그 남자는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긴장하지 않아도 돼. 당신을 고철로 만들어 엿을 사먹을 생각은 없으니 까. 그건 그렇고 당신 부하들에게 실망이군. 영적 방어능력이 이렇게 낮아 서야 어디에 쓰겠나? 하긴, 저런 쓰레기 같은 녀석을 최강이니 어쩌니 하며 철석같이 믿고 있는 집단이니 내가 이해를 해줘야겠지.? 그렌으로선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었다. ?그런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나?? ?음? 아아, 실례되는 말이었군. 사과하지.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당신들 을 구해주기 위해서야. 당신들이 소울게터라 부르는 녀석은 단순한 BG가 아 니거든.? ?뭐라고?? 붉은 장발의 남자는 앞쪽으로 조금 걸었다. ?저 녀석이 나타난 건 19년 전일 거야. 그런데 녀석이 죽을 무렵에 그 근 처에서 신기한 일이 벌어졌지.? ?신기한 일?? ?그래, 당신들의 상식으론 이해하기 힘든 일이야. 혹시 타임머신이라고 아 나? 내가 본 자료에선 이 세계에 그런 제목을 가진 소설이 있다고 하던데… ….? ?시간여행에 대해서 쓴 공상과학소설 말인가?? ?맞아. 19년 전의 어느 순간, 소울게터의 근처에서 시공간이 찢어졌지.어 째서 시공간이 뒤틀렸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당신들이 싫어할 일 이 생긴 건 확실해. ? ?…….?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렌은 그의 말을 허무맹랑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가 지크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 자체가 믿지 못할 사실이기 때문 이었다. 한편 지크는 소울게터를 칠 준비를 완전히 끝냈다. 무명도에서 튀는 스파크 가 주위의 철제에 튀며 또 다른 불꽃을 일으켰다. 지크는 그 상태에서 상대를 향해 돌진했다. 상대는 무방비상태에 가까웠다. 지크의 공격이 먹히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 었다. ?먹어라!? 커다란 베기가 소울게터의 어깨와 배를 대각선으로 갈랐다. 그것을 시작으 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베기가 연속으로 들어갔다. 소울게터의 육체는 정육점의 고기처럼 부위별로 떨어졌다. 팔에 이어서 다 리, 가슴 머리가 차례로 튀어나갔다. 상황으로 봐선 완전히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크의 공격은 끊이 지 않았다. ?나쁜 느낌이야! 아무리 쳐도 그 느낌이 사라지지 않아!? 그의 느낌은 정확했다. 사방으로 떨어진 소울게터의 육체가 지크의 뒤쪽에 서 스멀스멀 모여들고 있었다. 그것은 곧 창처럼 뾰족하게 바뀌어 지크의 등판을 향해 날았다. 그런 상황 의 지크를 구한 것은 초감각에 가까운 그의 본능이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몸을 젖힌 지크의 옆으로 소울게터의 일부가 스쳐 지나 갔다. 재킷에 큰 구멍이 났지만 몸이 뚫린 것보다는 나았다. ?이런 제길!? 지크는 빠르게 물러났다. 그 사이 소울게터는 다른 부위들과 뭉쳐 원래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충격을 전혀 받지 않았잖아!? 허무감과 함께 극도의 피로가 몰려왔다. 무명도를 바닥에 꽂아 몸을 유지한 지크는 분한 눈으로 소울게터를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지? 어떻게 해야 녀석을 매장할 수 있는 거야?? 그는 다시 일어나기 위해 몸의 기를 모았다. 그러나 소모된 기의 양의 워낙 막대해서 호흡조차도 쉽게 하지 못했다. ?여어, 힘든가??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가 지크의 귀청에 꽂혔다. 피곤함에 흐려졌던 지크의 눈동자가 다시금 생기를 찾았다. ?빨간 머리!?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느새 지크의 옆에 와있었다. ?지금의 너로서는 녀석을 이기지 못할 것 같군. 기술은 저 녀석을 쓰러트 리기에 충분했지만 칼로 물을 베는 격이었기에 효과가 없었어. 네 입장으로 보자면 아쉽기 그지없군.? ?닥쳐! 혹시라도 내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라면 꺼져버려! 저 녀석은 내가 없앨 거야!? 지크의 고함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조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럴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으니 안심해라. 나보고 저런 빈약한 녀석을 상 대하라는 건 날 욕하는 것과 같지. 대신 너에게 다시 싸울 기회를 주겠다. 받아들이겠나?? ?…….? 지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상대가 던진 제안은 지크에게 있어서 달콤 하기 그지없었다. ?대가는 뭐지?? ?대가?? 붉은 장발의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것을 바라진 않았던 모양이 다. ?대가를 주겠다면 나야 거절할 게 없겠지. 그럼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걸 로 알겠다.? 남자는 검을 뽑아들었다. 그 모습에 지크는 움찔했다. ?이봐! 녀석은 내가……!? ?기회만 준다고 했을 텐데?? 그는 왼손 검지를 칼날 위에 미끄러트렸다. 붉은 선혈이 그 상처의 끝에서 배어나왔다. 그는 검지로 검의 표면에 주문을 써내려갔다.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적색 의 알 수 없는 글자가 표면을 뒤덮었다. 이윽고 비릿한 냄새와 함께 주문이 황색의 빛을 뿜었다. 장발의 남자는 그 상태로 바닥에 검을 내리꽂았다. 순간 지진과 같은 진동이 무역센터 지하에서 일어났다. 지크와 그렌이 놀라 는 동안 진동은 점점 더 심해졌고 결국 거대한 비석과도 같은 네 개의 돌기 둥이 소울게터를 중앙으로 하여 솟아올랐다. 소울게터는 그 자리를 피하려 했으나 돌기둥들은 그보다 더 빨리 소울게터를 움켜쥐었다. 진동이 멈춘 뒤 남은 것은 거대한 돌무더기뿐이었다. 소울게터의 모습은 어 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저 봉인이 녀석의 힘을 이겨낼 수 있는 시간은 지금부터 약 24시간 후다. ? ?24시간 후? 왜 그렇게 짧아!? 지크는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그러나 남자의 얼굴엔 변함이 없었다. ?그럼 내가 죽일까?? 남자는 검을 뽑았다. 그가 썼던 주문은 시커먼 재가 되어 아래로 흘러내렸 다. ?해줄 건 다 해줬다. 24시간 사이에 강해져야겠지? 그렇지 않으면 이 녀석 은 자유롭게 풀려나서 다시 영혼들을 흡수하고 다닐 거다. 그때 가서 울며 보채지 마라.? ?농담 좀 작작해!? 지크가 남자의 망토자락을 움켜쥐었다. ?24시간 안에 강해지라는 말은 둘째 치자. 그때 가서 울며 보채지 말라고? 넌 사람들의 목숨이 우습게 보이는 거야?? ?사람들의 목숨? 후후.? 남자는 망토를 낚아챈 지크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쓰기 위해서 30년 만에 이곳에 돌아온 게 아니야. 난 너랑 저 돌무더기 안의 녀석에 대한 얘기만 들었지.? ?뭐, 30년?? ?그래, 말 그대로 30년이다. 정확히 따지자면 30년 하고도 1년이겠지. 너 에겐 몇 주 전의 이야기이겠지만.? 그는 뒤에 있는 그렌을 흘끔 바라봤다. ?일단 그에 대한 건 나중에 얘기해주지. 넌 집에 갈 궁리나 해라.? ?집?? ?그래, 약속한 대가를 지불해야하지 않겠나?? 지크는 그가 도대체 뭘 요구할지 매우 걱정됐다. 그리고 30분이 흘렀다. 현장에 도착한 BSP의 BG처리반과 처크, 그리고 전투경찰들은 거대한 돌무덤 을 보고 오랫동안 넋을 잃었다. 저게 뭐냐는 처크의 물음에 지크와 그렌은 레드 원이 만든 것이라고 솔직하 게 답했다. 소울게터가 24시간 후에 풀려난다는 얘기도 잊지 않았다. 처크로선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냥 척 봐선 돌이 쌓인 것뿐인데 이것이 소 울게터 같은 괴물을 24시간씩이나 봉쇄할 것이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았 다. 그렇다 해서 대원들에게 철야감시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그렌은 심각히 파 손되었고 지크는 피로가 심한 듯 자신의 오토바이 위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그 외의 대원들은 이미 구급차에 실려 간 상태였다. ?그 24시간이란 말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겠군.? 결국 그렌 이하 모든 대원들에겐 22시간의 특별휴식이 주어졌다. 그렌은 보고를 끝낸 뒤 BSP본부로 후송됐다. 수리 및 휴식을 위해서였다. 그렌은 전투용 사이보그로서 특별히 설계됐기 때문에 뇌만 무사하면 1시간 이내로 완벽수리가 가능하다. 처크는 그의 조카손자에게 병원이나 본부에 가서 수면장비를 이용해 쉬라는 제안을 했지만 지크는 막무가내로 귀가를 요청했다. 결국 요구대로 귀가 조 치된 지크는 피로와 싸우며 오토바이를 몰았다. 길을 가는 어느 순간부터 오토바이 뒷자리가 묵직해졌다. 붉은 장발의 남자 가 벤치에 앉듯이 옆으로 앉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집까지 오래 걸리나?? ?보채지 마.? 지크는 이럴 것을 예상이나 한 듯 그리 놀라지 않았다. 사실 지크는 소울게 터가 봉인될 때부터 그 장발의 남자가 뭘 해도 놀라지 않겠다는 다짐을 이 미 해둔 상태였다. ?그 대가라는 것에 대해서 말해 보시지? 혹시 내가 해주지 못할 일을 요구 하진 않겠지?? ?당연하지. 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걸 해줄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아.? 남자의 말에 지크의 눈썹이 꿈틀했다. ?뭔데 그래? 제대로 말해보시지, 남의 속 긁지 말고.? 남자는 잠시 후 웃었다. 조롱이나 살의가 담기지 않은, 지크로선 처음 보는 순수한 웃음이었다. ?난 죽고 싶어. 죽여줄 수 있겠나?? ?…….? 지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농담 같으면서도 진실했기에 평소처럼 받아 치지 못했다. ?어, 어이. 너무 피곤한 거 아냐? 그런 나쁜 농담은 안 하는 게 좋아.? ?나쁜 농담? 농담이 아니야. 그리고 너 역시 바라고 있잖아? 자신이 평범 한 인간처럼 되는 것을 말이야.? 지크는 더더욱 할 말을 잃었다. 그 남자는 어항을 바라보듯 자신의 마음속 한 구석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남자는 다시 웃었다. 평상시와 같은 조소였다. ?후후, 지금까지의 말은 잊어버려라. 그럼 요구사항을 말해주지.? ?음.? 지크의 청각이 긴장한 만큼 예민해졌다. 이윽고 남자가 말했다. ?따뜻한 식사와 잠자리다. 넉 달 이상 노숙을 하는 바람에 몸이 좀 뻐근하 거든.? ?뭐? 진짜?? ?왜, 너무 어렵나?? ?응? 그, 그건 아니지만… 왠지 너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어울리지 않는다고? 마치 내 모든 걸 안다는 듯한 말투로군. 이렇게 똑똑 한 녀석과 한 자리에 있으니 나에겐 극상의 영광인걸.? 지크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제멋대로 남에 대해 말하는 것. 그것은 지크가 가장 싫어하는 요소 중에 하 나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이 하고 말았으니 지크로선 어지간히 부끄러울 수 가 없었다. ?아아, 알았으니 어서 가자. 원하는 대로 먹여주고 재워주지.? 지크는 액셀을 강하게 꺾었다. 급가속의 상황임에도 장발의 남자는 오토바 이에 붙은 장식품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 든 균형 감각이었다. 집에 돌아온 지크를 반겨준 것은 역시나 그의 양모인 레니였다. 처크에게 미리 연락을 받았던 터인지 그녀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문을 열어주었다. ?지크, 괜찮니?? 잘 왔다는 인사보다 안부가 먼저 나왔다. 지크는 어깨를 으쓱댔다. ?좀 피곤할 뿐이에요. 그것보다 옷에 구멍이 났는데…….? 지크는 오토바이의 화물칸에 넣어두었던 재킷을 꺼내들었다. 그의 재킷은 소울게터와 싸울 때 커다란 구멍이 나고 말았다. 하지만 재킷을 받아든 레니의 얼굴엔 더 큰 근심이 어렸다. ?피곤하기만 한 게 아니구나?? ?예? 무슨 말씀이세요?? 레니는 반문하는 아들을 향해 보란 듯 재킷을 펼쳐보였다. ?어?? 지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구멍이 난 줄 알았던 그의 재킷은 찢어진 흔적 은커녕 새것처럼 윤기를 내고 있었다. ?이럴 리가! 말도 안돼요! 분명히 뒤에서부터 구멍이 났단 말이에요!? 그래도 재킷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레니는 한숨을 쉬며 아들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혹시 머리를 세게 부딪쳤니?? ?아니라니까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팔을 쳐내고 고함을 질렀다. 놀란 레니는 이윽 고 울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난 그저 네가 걱정됐을 뿐인데…….? ?아, 알았어요, 엄마! 제가 피곤해서 이상한 소리를 했나 봐요! 잘못했으 니 제발 울지 마세요! 아들이 이렇게 빌고 있잖아요!? 지크는 허겁지겁 레니를 달랬다. 그가 인간적인 관계에 있어서 처크보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레니 였다. 처크의 언변과 호통은 어찌어찌 버텨낼 수 있었지만 레니의 울상과 눈물만 은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저 잘못했다고 비는 것 외엔 해결책이 존 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전통은 지크가 그녀의 밑으로 입양될 때부터 지 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레니를 겨우 달랜 지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본론에 들어갔다. ?아, 오늘 친구를 데려왔거든요? 저랑 같은 고아원 출신인데, 신기하게도 저랑 같은 성을 쓰고 있어요. 오늘 같이 자도 될까요?? ?그래? 어디 있니?? 다시 미소를 되찾은 레니는 현관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현관문에 의해 가려진 지크의 옆엔 검은색 진(Jean)에 소매가 없는 마색 T 를 입은 붉은 장발의 사내가 있었다. 그 후 지크는 몇 시간동안 이상한 긴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떤 면에선 불청객이라 할 수 있는 장발의 남자, 리오 스나이퍼가 혹시나 자신의 어머 니에게 불쾌감을 줄만한 행동을 하진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매우 조용했다. 처음 자신을 소개할 때도 그랬고 식사를 할 때 도, 차를 들며 TV를 볼 때도 파탄에 가까운 그의 성격은 나오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 무렵, 지크의 불안은 방향을 바꿨다. 소울게터가 봉인을 풀고 다시 튀어나올 때까지 이제 20시간도 남지 않아서였다. 그런데도 원인제공자라 할 수 있는 리오는 거실에서 TV만 볼 뿐, 아무 얘기 도 하지 않았다. 레니가 잠자리에 든 자정 이후, 결국 지크는 그에 대해 따 지고 나섰다. ?어이, 이제 열아홉 시간 하고도 30분 남았어. 어떡할 거야?? 리오는 이제 막 시작한 심야영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싸울 사람은 내가 아니고 너야.? ?그건 알아! 하지만 녀석을 물리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기 위해선 더 많 은 시간이 필요하단 말이야! 남은 시간은 피로회복용 시간조차 안돼!? ?이 세계에선 그렇지.? 지크의 눈썹이 위아래로 올라갔다. ?뭐?? 리오는 TV를 끄고 지크를 바라봤다. 검은색의 맑고 깊은 눈동자가 불만어린 지크의 모습을 가득 담았다. 분위기는 겁이 날 정도로 진지했다. ?너를 위해 충고를 하나 하도록 하지. 이제부터 네가 갈 길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추악하고 잔인하다. 너도 분명히 나와 같은 말을 할 거야. 울며 애 원할지도 모르지. 자길 죽여 달라고 말이야.? ?어이, 무슨 말이야!? 지크는 레니가 깨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소리를 높였다. 리오는 대답대신 검지를 들었다. ?너도 이런 경험이 있을 거다.? 그의 손가락이 왼쪽 팔뚝에 꽂혔다. 두꺼운 근육을 뚫고 박힌 손가락의 아 래로 붉은 선혈이 걸쭉하게 흘러내렸다. 지크는 입을 딱 벌린 채 그대로 굳어졌다. 리오는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손가락을 뽑았다. 팔에 뚫린 구멍에서 더 많 은 피가 흘렀지만 그것도 잠시, 피는 증발하고 상처는 연기와 거품을 낸 뒤 깨끗이 사라졌다.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치유능력, 아니 재생능력이었다. 리오는 상처가 있던 곳을 지크에게 내밀었다. ?어때, 너도 이런 경험이 있지?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자주 있었을지도 모 르겠군. 어쨌든 이것으로 너와 나의 공통점 중 하나가 밝혀진 셈이다.? ?공통점?? ?그래. 그럼 시간에 대한 얘기로 다시 돌아가 볼까? 아까 난 너를 31년 만 에 만났다고 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 네가 날 본 것은 몇 주 전일 텐데 난 31년 전이라고 헛소리를 하고 있어. 그러나 너도 진실이고 나도 진실이 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달력을 잘못 뜯었겠지.? 지크의 농담에 리오는 실소를 지었다. 하지만 지크는 자신이 한 농담을 전 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거의 무아지경의 상태였다. ?하여튼 너에게 남은 시간은 19시간이 될 수도 있고 19일이 될 수도 있어. 원한다면 19년으로 맞춰줄 수도 있지. 하지만 넌 결심해야 해. 네가 23년 평생 가지고 있던 상식이 무참히 깨져도 버틸 수 있어야 하지. 그로 인한 공포는 사람을 재미있게 바꿔놓기에 충분하거든. 어때, 그래도 해보겠나?? 지크가 대답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지크 는 자신의 결심을 보이듯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꼬실 대로 꼬셔놓고 어쩔 거냐고 묻는 건 또 뭐야? 이 지크님이 새로운 경험 따위에 두려움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면 지금 당장 그 돌무더기를 치우 시지. 지금의 나로도 충분히 없앨 수 있어.? ?후후, 만용은 여전하구나. 좋아, 그럼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마. 준비 하고 내려와라.? ?좋아!? 준비는 간단했다. 무명도와 재킷만 갖추면 끝이었다. 지크의 준비가 완료되자 리오는 허공에 손가락을 뻗어 이리저리 움직였다. 오색의 아름다운 빛이 손끝에서 반짝였다. 빛의 잔광은 오랫동안 남아 허공 에서 맴돌았다. 이윽고 뜻을 알 수 없는 글자와 도형으로 가득한 원반의 형 상이 만들어졌다. 크기는 지름 2미터 정도로 매우 넓었고 두께는 종이만큼 이나 얇았다. ?오오, 이것이 마법진이라는 건가? 만화에서 자주 봤어!? 지크의 목소리엔 수학여행지에 도착한 학생의 그것처럼 기대감이 어려 있었 다. 리오는 그런 지크를 보이지 않게 비웃으며 말했다. ?자, 이곳을 통과해라.? ?통과하라고?? ?이걸 보면 설명이 쉽겠지.? 리오는 팔을 빛의 문양에 가져갔다. 팔이 문양을 관통하자 은은한 빛이 접촉부에서 아른거렸다. 그런데 신기하 게도 팔이 뚫고 나와야 할 반대편에선 리오의 팔이 보이지 않았다. 빛에 팔 이 증발되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만한 광경이었다. ?다른 공간으로 가는 문이다. 공간이동의 자격을 지닌 자만이 만들 수 있 지. 물론 기준 이상의 마력을 가진 존재라면 억지로 열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강력한 부작용이 생기고 말지.? 문양에서 돌아온 리오의 팔엔 아무 일도 없었다. 그것을 보고 더욱 결심을 굳힌 지크는 이를 악물고 그곳을 향해 뛰어들었다. ?죽으면 죽는 거야!? 일순간의 백광이 지크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빛이 사라진 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아프리카의 초원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들판이었다. 지크는 주위를 둘러봤다. 말도 아니고 소도 아닌, 생전 처음 보는 동물들이 멀리 보이는 호수에서 뛰 어다녔다.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들의 모습도 달랐다. 그 어디에서 볼 수 없 는 신기한 모양새였다. 그의 바로 뒤엔 거실에 만들어진 문양과 좌우가 대칭되는 문양이 두둥실 떠 있었다. 잠시 후 리오가 그곳에서 튀어나왔다. 지크는 그가 나오자마자 안도의 한숨 을 쉬었다. 혼자 이상한 세계에 떨어져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시나 마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이, 여긴 어디야?? ?보다시피 또 다른 세계다. 네가 살던 세계는 절대 아니지.? ?그래? 그럼 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건가?? 리오는 어깨를 으쓱했다. ?엘리스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네 입장에선 이상한 세계인 건 확실해. 참 고로 이 세계는 인간이 전혀 살지 않는다.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에 가까운 지능적 존재도 살지 않지. 네가 끼칠 지도 모르는 문화적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특별히 배려한 것이니 고마워해라.? ?그래? 그거 아쉽네.? 지크는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세계로 떨어졌다는 불안감이나 공포 등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너 무 신기한 경험을 한 덕분에 혼란이 와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일단은 무 리가 없어 보였다. 리오는 자신들이 나온 문양을 제거하며 얘기를 계속했다. ?네가 있던 세계에서의 1시간은 이 세계에서 1개월이다. 네가 이 세계에서 19개월을 살면 저쪽 세계에선 네가 없어진지 열아홉 시간이 흐른 게 된다. 강마다 물의 속도가 다르듯이 각 차원계마다 시간의 흐름이 다르기 때문이 지. 하지만 시간은 절대 뒤로 흐르지 않아. 1시간, 1분, 1초라도 흐르고 있 어. 그래서 역행은 있을 수 없지.? ?…….? 지크는 조금 이해가 안 되는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오는 한 숨을 쉬며 다시 말했다. ?간단히 말해서 너에겐 19개월의 시간이 생긴 거다. 됐나?? 지크는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오, 그렇군! 하지만 원래 세계에 있던 사람보다 1년 이상이나 더 나이를 먹게 되는 거잖아? 그건 좀 나쁜데?? ?그건 걱정하지 마라. 이곳에서 100년이 흘러도 넌 지금 모습 그대로니까. ? ?뭐? 왜?? ?나만 해도 벌써 300살이 넘었거든.? ?…….? 지크는 다시금 멍하니 리오를 바라봤다. 리오는 지크가 이제야 상황을 좀 파악했겠구나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넌 성격파탄이 아니라 노망이었구나.? ?…….? 리오는 그리 좋지 않은 얼굴로 위쪽에 시선을 두었다. 어처구니가 없을 때 자주 나오는 행동이었다. 곧이어 지크가 따지고 들었다. ?사람이 어떻게 300살을 살 수 있어? 게다가 늙지도 않았잖아? 괜히 나한 테 거짓말하는 거 아냐??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게 살 수 있지.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리오는 야릇한 미소를 지은 채 지크를 바라봤다. 지크는 크게 당황했다. ?뭐? 무슨 소리야! 난 엄연히 사람이라고! 가족도 있어!? 그는 정색을 한 채 소리쳤다. 그런데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탈출구를 만들어 얘기를 끝내고 싶어 하는 듯 했다. 그러나 리오는 모든 것을 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럼 네 혈액형은 뭐지? A형인가? B형? AB? 아니면 O형? 후후, 그 어떤 것도 아니겠지. 혈액을 채취하기도 힘들 뿐더러 채취했다 하더라도 분석이 불가능했을 테니까 결과를 알 리가 없지.? 지크는 단 한 마디의 변명도 꺼내지 못했다. 다른 BSP동료들은 몰랐지만 처크와 그렌은 밝혀지면 귀찮은 지크의 비밀 몇 가지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리오의 말대로 그의 혈액형은 불명이었다. 조사결과 불명이 아니라 조사 자 체가 불가능해서 불명으로 처리되었다. 그것 말고 신장과 체중도 20세 이후 거의 변함이 없었다. 더 이상 자라지도 않았고 몸무게가 불거나 줄어들지도 않았다. 과식을 하거나 며칠을 굶어야 만 겨우 변화가 있을 뿐이었다. 어떤 생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체의 재생능력 역시 비밀 아닌 비밀이 었다. 그런 사항에 대해선 지크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남들에게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사실이 그것이기도 했다. 리오가 말했다. ?넌 단순한 인간이 아니야. 수백, 수천의 해를 지금 이 상태로 젊게 보낼 수 있지. 팔이 잘려도 재생이 가능하고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그건 네 의 지에 따라 조정되지 않아. 죽고 싶어도 못 죽지. 아, 좋은 건 하나 있군. 네 노력여하에 따라서 넌 무한에 가깝게 강해질 수도 있어. 보통 인간처럼 육체적인 한계와 시간의 제한을 가지고 있지 않거든.? 그 얘기를 모두 들은 지크는 바닥에 두고 있던 시선을 리오에게 돌렸다. ?그럼 뭐야? 내가 괴물이라는 거야?? 지크의 목소리와 얼굴엔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리오가 이곳 에 오기 전에 예고했던 공포였다. 둘의 옆에서 리오가 만든 것과 똑같은 문양이 떠올랐다. 리오는 그것을 보 며 대답했다. ?괴물? 후후, 그런 낭만적인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지.? 이윽고 문양이 완성됐다.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예전에 리오와 함 께 나타났던 파란 장발의 남자였다. 그는 인사대신 감은 듯 만 듯 한 눈으로 리오와 지크를 번갈아 돌아봤다. 상반된 그들의 표정을 통해 그는 자신이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 강 짐작할 수 있었다. ?설명은 끝났나, 리오?? ?그럭저럭. 타임게이트에 대해선 조사해봤나?? ?악의적인 목적에 의해 열린 것이 아닌 것과 BG라는 생명체가 휘말렸다는 사실만은 확실해. 하지만 누가 열었는지, 게이트를 통해 무엇이 오고 갔는 지에 대해선 철저하게 감춰져 있다. 조사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야.? ?피엘 비서관은?? ?그녀도 난감해 하더군.? ?재미없는데.? 리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파란 장발의 남자도 그리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지크는 둘 사이에 가만히 서있었다. 그들의 말리 들리긴 했지만 인식되진 않았다. 그는 자신이 누군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위해 숨을 쉬 는지 알기 위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고민해봤자 소용없어.? 리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은 너 역시 반쯤 합의한 상태에 서 이뤄진 거야.? ?합의? 무슨 소리야! 난 이렇게 만들어달라고 빈 적 없어!? ?빈 적은 없겠지. 속았을 뿐이야. 아무튼 증거는 거기 있다.? 리오는 지크의 허리춤에 매달린 무명도를 가리켰다. ?회색 옷의 빌어먹을 노인에게 그걸 받았을 거야. 넌 그걸 받은 순간부터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됐지. 고통 같은 건 없었을 거야. 개조는 일순간이거 든.? ?…….? 지크는 무명도를 보며 옛 일을 회상했다. 고아원을 떠나는 것이 결정된 날, 어린 지크는 고아원 근처의 산에서 자신 이 10년 동안 살았던 장소를 지켜봤다. 농구공을 품에 안은 채 바위 위에 웅크려 앉은 꼬마의 눈엔 깊은 우수가 맺 혀 있었다. 그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은 원장수녀 뿐이었다. 그 외의 어른들과 고아원 가족들은 그를 피한지 오래됐다. 한순간에 사람들이 변할 줄은 그도 몰랐었다. 이런 이상한 몸을 지니고 있는 게 자신의 탓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그를 철 저히 피했다. 고아원 사람들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까지 얼씬도 안했다. 심지어는 처음 보는 어른들까지 나타나 이상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며 주위 를 맴돌았다. 그러나 지크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자신이라도 그랬을 것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아쉬워했다. 몸의 상처만큼이나 마음의 상처도 회복됐으면 얼마 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농구를 할만한 곳이 아니구나.? 옆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위아래가 긴 가방을 든 노인이었다. 이 근방에 선 처음 보는 인물이라 지크는 그를 조금 경계했다. 노인은 꽤나 개성이 있었다. 회색 양복에 회색 지팡이, 그리고 가슴까지 내 려오는 긴 회색수염은 정말 만화에나 나올 법한 스타일이었다. 덕분에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지크에겐 큰 거부감을 심어주지 않았다. ?옆에 앉아도 되겠니?? 지크는 고개를 끄덕여 노인의 제안을 허락했다. 노인은 지팡이를 앞에 둔 채 천천히 바위에 앉았다. ?무슨 일로 혼자 이곳에 있느냐? 친구들하고 싸웠니?? ?…….? ?허허, 곤란한 질문을 한 것 같구나. 그럼 이 장소를 좋아하니? 앉은 폼을 보니 꽤 많이 온 것 같다만…….? ?좋아해요.? ?그래? 어째서?? ?바람이 불거든요.? 노인은 조금 어이가 없었는지 실소를 지었다. ?바람은 어디서든지 불지 않느냐?? ?이곳은 항상 똑같아요. 항상 같은 방향으로만 불죠.? ?그래? 하지만 바람은 자유의 대명사 아니냐. 항상 같은 방향의 바람이 좋 은 이유라도 있느냐?? 지크는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에 부는 바람은 분명히 다른 바람들에게 따돌림 당했을 거예요. 뭔가 특이하고 이상했나 봐요. 그러니 항상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향으로만 불겠 죠. 그래서 이곳에 오는 거예요. 저라도 있으면 덜 외로울 거 아니에요.? ?…….? 지크는 품에 안은 농구공을 위로 던졌다. 빙그르 돌며 솟은 공은 다시 지크 의 품에 떨어졌다. ?지금은 작별인사를 하고 있어요. 전 이제 이곳에 오지 못하거든요. 하지 만 어쩔 수 없어요. 이제 이 바람도 혼자라는 것에 익숙해져야 해요. 그렇 지 않으면 같은 일에 또다시 상처를 받게 돼버려요. 그리고 설득하고 있어 요. 제가 떠나듯이 너도 떠나보라고, 새로운 바람들을 만나서 새롭게 살아 보라고, 옛 친구들을 미워하지 말라고. 그리고…….? ?…….? 꼬마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노인은 뭔가를 느낀 듯 팔을 벌려 꼬마의 어 깨를 따뜻이 감싸주었다. 그 온기가 자극이 됐을까. 지크는 농구공에 얼굴을 묻으며 겨우 말을 맺었 다. ?난 괴물이 아니라 외치라고…….? 조금 후, 노인은 지크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가방을 맡겼다. ?바람친구에게 말해주렴. 나중에 커서 강해지면 이것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을 지켜주라고 말이야.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대로, 그야말로 바람처럼.? 그리고 노인은 어디론가 걸어갔다. 호기심 강한 지크는 눈가를 훔친 뒤 가 방을 열었다. 꼬마의 손에 이끌려 가방에서 나온 것은 한 자루의 긴 칼이었 다. 회상에서 돌아온 지크는 무명도의 자루를 불끈 거머쥐었다. ?어이, 19개월이라고 했지?? ?음?? 파란장발의 남자와 더 얘기를 나누던 리오는 지크를 돌아봤다. 얼굴에 꽤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음속의 공포는 어느새 사라지고 대신 의 지가 굳게 자리를 잡은 듯 했다. ?괴물이니 뭐니, 다 필요 없어. 지금은 그 재수 없는 BG를 때려눕히기만 하면 돼. 대신에 날 지금보다 강하게 만들어줘. 너희들, 인정하긴 싫지만 나보다 강한 것 같으니까.? 리오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옆에 선 남자도 그랬다. ?자기 자신에 대해 인정을 한건가, 아니면 포기하고 뒤로 접어버린 건가? 잘은 모르겠지만 조금은 쓸만해졌군. 나야 편하지.? 생각을 끝낸 리오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실수로 죽일 수도 있으니 날 원망하지 마라. 실력차는 어쩔 수 없지.? ?상관없어. 다시 살아난다며?? 지크는 씩 웃었다. 이어서 파란 장발의 남자가 지크 앞에 다가왔다. 항상 과묵할 것처럼 보이 던 그의 얼굴엔 처음의 어색함이 실린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들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 난 슈리메이어 반 스나이퍼, 줄여서 슈 렌이라고 불리지.? ?스나이퍼? 너도 성이 스나이퍼야?? 지크는 껄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앞에 선 두 남자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혹시 둘이 형제야?? ?형제는 형제지만 의형제지. 같은 성을 지니면서 흔하지 않은 직업을 가지 는 건 보통 인연이 아니잖아. 일 몇 가지를 같이 하다가 친해져서 그냥 형 제하기로 했지. 하지만 형 동생은 없어.? 리오의 설명에 지크는 흥미롭다는 듯 자신의 턱 아래를 매만졌다. ?오, 그래? 그럼 나도 껴줘. 네 말대로 보통 인연이 아니잖아.? 그러나 리오의 반응은 싸늘했다. ?너같이 약한 녀석을? 우리 둘과 네 힘은 너무 차이가 나. 게다가 살아온 기간도 다르지. 수준이 좀 맞아야 형제 아닌가? 부하로 써달라면 좀 생각해 보지.? ?어이, 너무 그러지 마. 나도 너희들만큼 살면 너희들만큼 강해질 수 있다 고. 미리 예약을 해놓는 거라고 생각하고 좀 껴줘.? ?봐서.? ?어허, 빼지 말라니까.? 지크의 보챔과 슈렌의 설득으로 인해 결국 지크는 리오, 슈렌과 의형제를 맺기로, 아니 예약하기로 한다. 서로에 대해 좀 더 알아야 얘기가 통하지 않겠냐며 리오가 따졌지만 슈렌은 19개월이란 시간이면 충분하다며 그를 다 시 설득했다. ?그런데, 직업이라고 했지? 직업 이름이 뭐야?? 지크의 질문에 리오와 슈렌은 서로를 쳐다봤다. ?없어.? 슈렌이 짧게 대답했다. 지크의 표정이 다시 이상해졌다. ?뭐? 이름 없는 직업이 어디 있어?? ?직업이름으로 먹고 사는 녀석들이 아니라서 그렇지. 아무튼 일종의 기사 단 같은 거야. 기사 같지 않은 기사들이라서 문제지.? ?그래? 너희들 말고 또 있단 말이야?? ?두 명.? 슈렌의 대답은 이번에도 짧았다. 지크가 다음 얘기를 기다리겠다는 듯 팔짱 을 끼고 자신을 보자 슈렌은 한숨을 쉬었다. ?빛과 어둠의 힘을 각각 지닌 남자들이지. 선배들이라고 할 수 있어.? ?그래? 그럼 녀석들도 강하겠네?? 슈렌은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리오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이 일을 하게 된지 벌써 300년이 넘었지만 둘 다 만나보지 못했어. 슈렌은 만나봤지만 그것도 스쳐 지나가면서 한번씩 본 것뿐이야. 하지만 강 하긴 강한 모양이더군. 만나는 악마나 천사들마다 녀석들 이름만 들어도 벌 벌 떨었으니까.? 그 말에 지크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 넘어야 할 산이 많단 말이군! 좋아, 이번 특별수련을 거친 뒤 녀석들 에게 도전하겠어!? ?…….? 리오와 슈렌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직접적으로 눈을 돌리지 않아 지크는 몰랐지만 둘은 그 누군가를 상당히 불쌍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보스는 누구야?? ?보스?? ?우리들에게 일거리를 주는 사람 말이야. 고용인이라고 해야 하나?? 지크의 말에 리오는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아, 사기꾼 영감 말인가? 너도 만나봤을 거다. 온통 회색으로 도배하고 돌아다니는 이상한 할아버지를 말이야.? ?어? 나에게 무명도를 준 할아버지 말이야?? ?그렇지. 원래는 신중의 신, 주신(主神)이야.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서 속이고 고용해 버리는 아주 나쁜 신이지.? ?그래? 그렇다면 우린 신의 사자(使者) 같은 건가?? ?음.? 슈렌이 짧게 대답했다. 이후 지크는 팔짱을 끼고 한참을 고민했다. 뭔가 심각히 생각하는 것 같아 보였기에 리오와 슈렌은 지나가는 동물들과 구름들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지크가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우리 조직의 이름을 정하자! 멋진 이름이 생각났어!? ?뭔데.? ?가즈 나이트라고 하자! 신의 기사!? ?…….? 리오와 슈렌은 못마땅한 듯 표정을 흐렸다. 표정변화가 거의 없는 편인 슈 렌까지 눈썹을 아래로 늘어트렸으니 그들의 심정이 어느 정도인지는 두 말 하면 잔소리였다. 리오는 조금 뒤 조소를 터트렸다. ?후, 그런 유치한 이름을 달고 싸우라 이건가? 웃기는군. 너의 멍청함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쓰고 싶으면 너나 쓰시지. ? ?뭐가 어때서! 나름대로 혼신의 힘을 다해 지은 이름이란 말이야!? 그렇게 말은 했지만 지크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조금 아닌 듯 느껴진 모양이다. ?알았으니 준비나 하시지. 처음엔 죽을 염려가 없는 훈련부터 해보자.? 리오는 망토를 벗고 검을 풀었다. 지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 너 무기로 싸우는 게 특기 아니었어? 맨손으로 나에게 덤비는 건 위 험할 텐데?? ?맞고 울지나 마시지.? 리오는 여유가 가득한 얼굴로 주먹을 풀었다. 분위기가 조금 불안했지만 지크의 자신감과 맨손격투에 대한 자존심을 사라 지게 할 수준은 아니었다. 지크는 간단한 맨손체조로 몸을 풀며 외쳤다. ?좋아, 그럼 지금까지 너에게 당한 걸 전부 갚아주마! 약국 없는 세계에서 나와 싸우는 걸 후회하게 해주겠어!? ?기대하지.? 리오는 씩 웃었다. 슈렌은 뒤에 보이는 낮은 바위 위에 앉았다. 깔끔히 기른 장발의 끝이 바위 위에 살짝 내려왔다. 겹쳐진 무릎 위에 팔꿈치가 올려졌다. 팔로 만들어진 탑의 정점엔 조각도 흉내 내기 힘든 아름다운 곡선의 턱이 닿았다. 턱을 괸 슈렌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지크를 바라봤다. ?우선은 한계를 알아야겠지.? 지크는 무술의 자세를 잡았다. 성격은 이상해도 자세 하나만은 정통이라 불 리는 그였다. 반면 리오는 이도저도 아닌 자기식대로의 자세로 지크가 오기 를 기다렸다. 뭔가 무시당하고 있다 느낀 지크는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전부터 말하고 싶었지만, 넌 얼굴부터 재수 없어!? ?그럼 쳐 봐.? 둘의 맨손격투는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상황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리오는 서있었고 지크는 누워있었다. 기술은 분명히 지크가 위였다. 현란하다 못해 화려함의 극치였지만 리오의 공격은 단순 그 자체였다. 허나 결과는 지크의 깨끗한 패배였다. 지크는 바닥에 엎어진 채 힘없이 중얼댔다. ?거, 거짓말…….? ?흥.? 한번 피식 웃은 리오는 슈렌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슈렌은 기다렸다는 듯 지크에게 손을 뻗었다. 은색의 빛이 지크의 몸을 휘감았다. 그의 몸과 얼굴에 생긴 상처는 어느새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슈렌은 지크를 치료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뿐이었다. ?젠장! 다시 한번!? 이후 지크는 몇 번이고 도전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어떤 기술도 실리 지 않은 주먹과 발 공격에 지크는 허무하게 쓰러졌다. 지크가 포기를 선언한 것은 슈렌이 밤을 대비해 모닥불을 지필 무렵이었다. 땅에 대(大)자로 뻗은 지크는 멍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봤다. 눈에 들어온 창공은 누군가의 머리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상처투성이였다. 왼쪽 눈두덩은 크게 부풀었고 코와 입가엔 피 가 흘렀다. 몸도 그리 정상은 아닌 듯 했다. 지크는 장갑 밑으로 피를 닦으며 말했다. ?어이, 왜 내 기술이 전혀 먹히지 않는 거야?? 그의 물음에 리오와 슈렌은 서로를 바라봤다. 누가 대답을 해줄 것인지 결 정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선택된 사람은 슈렌이었다. ?네 기술은 훌륭해. 하지만 인간의 한계에 맞춰진 기술이기 때문에 그 한 계를 훨씬 뛰어넘은 존재에겐 통하지 않아. 돌팔매가 아무리 정확해봤자 드 래곤을 잡을 수는 없는 것과 같지.? ?뭐?? 지크가 고개를 훌쩍 들었다. ?그럼 지금까지 배운 내 기술이 전혀 쓸모가 없다는 말이야?? ?그렇진 않아. 문제는 네 자신이야.? ?내 자신?? ?그래. 넌 자신이 배운 기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남이 만든 한계 안에서 자신의 육체적 능력을 썩히고 있지.? 슈렌의 말이 끝나자 곧바로 리오가 말했다. ?소울게터라고 했나? 내가 보기에 그 녀석은 흡수한 영체를 이용해 육체를 구성하고 에너지를 얻는 것처럼 보이더군. 알다시피 영체라는 것은 자유자 제야. 물처럼 모습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지. 그런 녀석을 자르거나 두들겨 패서 없앨 수 있을 것 같나?? ?…….? ?네 세계에 존재하는 무술은 오로지 인간을 상대하기 위해 개발된 것들이 야. 인간이 아닌 존재에겐 통하지 않아. 소울게터처럼 급소도 없고 관절도 없고 동맥도 없는 녀석에게 인간에 대적하기 위한 기술이 통할 리는 만무하 지.? 이야기를 마친 리오는 검을 들었다. 저녁식사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기 위해 서였다. ?오늘부터 19개월 간 즐거운 야영이니 너무 인상 구기지 마, 예약형제씨. 약한 건 죄가 아니야.? 그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지크는 갑자기 몸을 돌려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 다. ?으악! 저 재수 없는 녀석! 저놈의 뼈를 갈아 마셔야 속이 시원해지겠어! 어떻게 하면 녀석을 박살낼 수 있는 거지? 아아악!? 슈렌은 누운 채로 버둥대는 지크를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19개월이라… 길겠군.?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지크는 계속해서 리오에게 도전했다. 그러나 시 간이 갈수록 지크가 알게 되는 것은 자신과 리오의 실력차이 뿐이었다. 리오와 슈렌은 그의 부족한 점과 장점을 계속해서 설명해 주었지만 지크에 겐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리오를 이기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을 뿐, 강해지겠다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냐는 슈렌의 물음에 지크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 녀석은 강자야! 내가 저 녀석을 이긴다면 나도 강자가 되겠지! 강자가 아니면 녀석을 이길 수 없잖아!? 어이가 없는 그의 말 만큼이나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나중엔 리오까지 투쟁심에 휩싸여 살의까지 보이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그럴 때마다 슈렌이 나서서 가까스로 둘을 제지했다. 2주가 되는 날의 아침, 슈렌이 지크 앞에 나섰다. 리오 대신 나선 그의 모 습에 지크는 어리둥절해 했다. ?이봐,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일정변경이다.? 슈렌은 코트의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냈다. 손가락이 절반 정도는 없는 적갈 색의 장갑이었다. 재질은 가죽인 듯 연한 광택을 냈고 두께는 지크의 장갑 만큼이나 두꺼웠다. 장갑을 낀 슈렌은 오른쪽 손을 살짝 벌렸다. 주먹만한 작은 불꽃이 손바닥 위에서 피어올랐다. ?원래는 치료와 식사담당이었지만 너에게 꼭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떠올랐 다.? ?가르쳐주고 싶은 것? 뭔데?? 불꽃이 갑자기 강하게 솟아올랐다. 한없이 퉁명스럽고 반항적일 것 같던 지 크도 그 기세에 놀라 움찔했다. 길게 늘어난 불꽃은 한 자루의 창으로 변해 슈렌의 손에 내려왔다. 창의 이름은 그룬가르드였다. 슈렌의 설명에 의하면 원래는 화염의 신이 사용하던 두 개의 창 중 하나라 고 한다. 어디에서 얻었냐는 지크의 질문에 슈렌은 어쩌다가 얻은 것에 불 과하다고만 할 뿐,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불꽃으로 이뤄진 곡선이 슈렌의 주위에서 타올 랐다. 단순히 창을 돌리는 것뿐이었지만 다른 때의 슈렌과는 분위기가 틀렸 기에 지크는 입을 꾹 다문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평상시의 슈렌은 지크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었다. 듣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말을 아끼는 것일 뿐이었다. 덕분에 무슨 얘길 해도 대부분 무시하기 일쑤인 리오와는 달리 슈렌과는 빠르게 친해졌다. 그런 그가 정색을 하고 있으니 지크가 가만히 있는 것은 당연했다. 이윽고 슈렌의 창이 멈췄다. 그 끝은 지크의 코앞에서 멈춰 있었다. ?넌 무엇을 위해 강해지려 하나.? 평소에 생각하고 있을 만한 문제가 아니라서 그런지 지크가 대답을 하는 데 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잠시 후 대답을 찾은 지크의 얼굴엔 진지함이 배여 있었다. ?난 내가 가진 힘으로 사람들을 지킬 거야.? 그러자 근처 바위에 누워있던 리오에게서 실소가 터졌다. 지크는 당연히 매 서운 눈초리를 보냈고 리오는 고개만 슬쩍 돌렸다. 슈렌이 물었다. ?그럼 왜 조급해하지?? ?뭐? 내가 언제 조급해 했다고 그러는 거야!? 지크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슈렌은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조급해하고 있어. 한시라도 더 빨리 리오를 쓰러트리기 위해 안 간힘을 쓰고 있지. 아닌가?? ?…….? ?넌 네 말과 달리 강해지고픈 욕망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지키려고 하는 그 무언가는 이미 네 기억 속에서 지워져 있어. 그런 너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리오 말고도 넘어야 할 벽이 있다는 걸 확실히 가르쳐 주겠다.? ?이, 이봐.? 지크는 무슨 말을 하려다 멈췄다. 창술의 자세를 잡은 슈렌의 얼굴에선 농 담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지크는 생각했다. ?내가 잊고 있다고?? 그러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빨리 강해지겠다는 생각이 앞선 나머지 소울게터와 BSP동료들, 특히 리진에 대한 것은 어느새 잊혀져 있었다. 이유가 떠오르니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지크의 분위기가 달라지자 슈렌 의 창끝도 조금 내려갔다. ?사실은… 조급했던 이유가 있어.? ?…….? ?그 소울게터라는 녀석, 19년 전에 내 선배들에 의해 큰 타격을 입고 사라 졌어. 그때 수많은 희생자가 있었는데, 그 중엔 내 동료의 부모님도 계셨 어.? 지크는 리진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녀의 모친이 초능력을 잃은 뒤 후유증 에 시달린 것, 그것이 다시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것, 그 때문에 그녀가 불 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했다. 그가 말하는 동안 슈렌은 창을 거뒀다. 리오역시 귀는 열어두었다. ?그 녀석, BSP라는 일을 정말 좋아하고 있어.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죽어 도 시체조차 못 건지는 게 다반사인 이런 위험한 일을 말이야. 그건 어지간 한 여자라면 생각할 수 없는 거야. 그래서 난 녀석이 BSP로서 계속 살아가 게 해주고 싶어. 내 눈 앞에서 은퇴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단 말이야.? ?…….? ?그래서 강해지려고 한 거야. 그 생각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녀석과 동료 들에 대한 것은 까맣게 잊어버렸어. 난 너희들과 같은 가즈 나이트이기 이 전에 BSP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잠시나마 동료들을 저버리고 말았 어. 슈렌, 네 말이 맞아.? 슈렌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들려있던 그룬가르드는 다시 불꽃이 되어 사라졌다. 리오도 바위에서 내려왔다. 물론 반응은 그답게 비아냥스러웠다. ?그 가즈 뭐시키라는 말은 네 자신에게만 해당시키시지? 제발 나까지 그 얼굴 팔리는 그룹에 소속시키지 말아줘. 너처럼 약해지는 기분이 들거든.? ?뭐라고!? 지크는 진지해진 만큼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금방이라도 한 대 날릴 듯한 기세였다. 상대는 검을 어깨에 댄 채 서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지크 의 얼굴에선 분노가 싹 가셨다. 리오는 씩 웃었다. ?수업시작이다, BSP씨.? ?쳇, 항상 맘에 안 드는 녀석.?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크역시 웃고 있었다. ※※※ 22시간의 평화는 점점 끝을 향해 치달았다. 퇴원하자마자 현장에 달려온 지혁과 케빈, 챠오, 리진, 그리고 봉성은 무역 센터 앞에 생긴 거대한 돌무더기를 보고 잠시 넋을 잃었다. ?레드 원이 만든 거라고요?? 리진의 질문에 그들보다 앞서 와있던 그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신기한 기술이었어. 말로만 듣다가 직접 보니 적으 로 두기엔 너무 부담스러운 남자더군.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일까?? 그렌에겐 그것 말고도 또 하나의 의문이 있었다. ?그 남자, 지크를 잘 아는 것 같던데…….? 실제로 본 이상 그 정체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알 길 은 막막했다.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보는 편이 차라리 속 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지크는 아직도 연락이 안 되고 있나?? ?네. 집에서조차 행방을 물어보시더라고요.? 대답을 한 리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바보 녀석, 자기가 혼자 다 처리할 것 같이 말하더니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나타나면 꼭 한 대 날려야겠어!? 화를 내는 딸의 모습을 뒤에서 본 지혁은 긴 한숨을 쉬었다. ?아아, 내 딸이 남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어.? 안타까움이 어찌나 깊었는지 지혁은 한심함이 담긴 장모의 시선을 전혀 눈 치 채지 못했다. 시간은 흘러 남은 시간은 10여분 남짓이 되었다. 소울게터가 다시 나타날 것을 예고하듯 단단하게 뭉쳐져 있던 돌무더기들이 조금씩 흔들리며 무너져 내렸다. 현장에 와있던 처크는 야전지휘시설이 마련된 간이테이블을 주먹으로 후려 쳤다. ?지크, 이 바보 녀석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하도 세게 치는 바람에 헤드 셋이 떨어지고 모니터가 넘어졌지만 처크를 말 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크뿐만 아니라 현장에 배치된 모든 BSP요원들 대부분이 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돌무더기 주위에 설치된 자동화기 담당자도, BG용 배리어 필드 담 당자도, 그렌을 비롯한 전투요원들도 각자의 방법으로 다급해했다. ?죽겠군.? 투덜댄 케빈은 비상용으로 준비한 담배 한 갑을 뜯었다. 한 시간 만에 두 갑을 피운 뒤였다. 혼자서 피웠다면 아무리 그라도 머리가 멍해졌겠지 만 도와주는 이가 있어서 조금은 덜했다. 바로 지혁이었다. 챠오는 팔짱을 낀 채 리듬을 맞추듯 오른쪽 발바닥으로 땅을 두드렸다. 리 진은 손톱 끝을 물었고 그렌은 한숨만을 계속 쉬어댔다. 그나마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봉성이었다. 노파의 앞엔 수십 개의 부적이 깔려 있었다. 그녀의 최대 술법이자 19년 전 소울게터에게 치명타를 입힌 ?명왕현신지술?을 위한 주문진(呪文陣)이었 다. 그 때문에 리진은 손톱을 뜯으면서도 할머니의 눈치까지 봤다. 정식 BSP가 된지 몇 달도 안 되서 은퇴하게 생겼으니 당연했다. 그렇다 해서 대놓고 싫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 술법 외에 적당한 대처방법 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아버지 외의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무덤의 흔들림이 더욱 강해졌다. 결국 처크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지시를 내렸다. ?전 대원, 전투준비. 필드 팀은 작전대로 배리어 필드를 시동하도록.? 그의 지시에 옆자리에 앉은 필드팀 팀장의 얼굴이 변했다. ?예? 하지만 아직 지크 스나이퍼 소위가 도착하지 않았습…….? ?하라면 해!? ?아, 예! 알겠습니다!? BG용 배리어 필드는 강력한 방탄능력을 지닌 일종의 플라스마 장벽이다. 원 래는 월면기지나 대형위성이 운석이나 기타 우주부유물질로부터 보호되도록 개발된 것이지만 BG사태가 일어난 뒤엔 지상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도록 개량 되었다. 현장에 배치되기 시작한 것은 약 10년 전부터이며 주로 대형 BG를 가두거나 대량의 BG가 발생한 지역을 다른 지역으로부터 격리시킬 때 사용된다. 팀장의 조작에 맞춰 배리어 필드의 컨트롤러가 가동됐다. 무역센터 주위에 놓인 여덟 개의 이동식 오벨리스크가 높은 음색의 소음을 내며 파란 빛을 머금었다. ?배리어 필드, 스탠바이! 완전 가동까지 앞으로 1분! 59초! 58초……!? 팀장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처크는 헤드 셋을 놓고 나직이 중얼댔다. ?도망친 거냐? 아니면 무슨 일이 생긴 거냐?? 배리어 필드가 완전 가동되면 필드 내부로는 그 어떤 존재도 들어오지 못한 다. 필드의 에너지를 소모시킬만한 힘이 있다면 억지로 들어갈 수는 있겠지 만 오벨리스크 8대 분량의 필드라면 항공기로 융단폭격을 하지 않는 이상 필드는 찢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지크가 늦게나마 오더라도 배리어 필드가 걷히지 않는 한 소울게터 와의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가장 강력한 전력인 지크가 빠진 상태에서 소울게터와 싸운다는 것은 무모 한 일이다. 하지만 그를 무작정 기다리다가는 매트로 서울의 시민들이 위험 에 빠질 수도 있었다. BSP 수도방위지부 총 책임자인 처크의 입장에서 배리 어 필드의 가동은 어쩔 수 없었다. 필드의 가동신호를 받은 그렌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힘들게 됐군.? 대원들 모두 비슷한 반응이었다. 특히 리진의 속은 타들어가다 못해 검게 변했다. ?리진아.? 봉성이 리진을 불렀다. 조용하면서 묵직했지만 리진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 리였다. ?이리 오너라. 명왕현신지술을 쓸 수 있도록 도와다오.? ?싫어요.? 리진의 대답에 봉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기분은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네 동료들과 도시사람들이 이 대로 죽어나가는 걸 보고만 있을 셈이냐?? ?하지만 억울하단 말이에요! 어째서 제가 이런 일을 떠맡아야 해요! 누구 를 위해서! 엄마가 그렇게 됐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았어요! 시내 한가운데에서 엄마가 쓰러져도 사람들은 위대한 BSP대원, 김미린이라 생각하지 않고 애를 데리고 나온 간질병환자라며 손가락질을 했 다고요! 전 그렇게 되긴 싫어요!? 봉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혁은 침통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고 다른 대원들 역시 씁쓸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돌무더기는 거의 다 무너져 내렸다. 정상에 놓여있던 돌이 아래로 떨어지자 흙투성이의 보라색 손이 튀어나왔 다. 그것을 본 봉성의 마음은 다급해졌으나 써야 할 술법은 억지로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영력을 대신 사용해줄 사람이 인(仁)의 마음을 가지고 집중을 해주어야만 하는데 리진은 그럴 상황이 절대 아니었다. ?그럼 넌 왜 BSP가 됐지?? 조금 큰 목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렸다. 완성되기 직전의 배리어 필드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온 남자, 지크는 동료들 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왔다. 걸음걸이나 얼굴 모두 조금 지쳐보였지만 그래 도 모든 BSP관계자들을 안심시키기엔 충분했다. ?여, 오랜만이야 모두들. 잘 있었지? 그렌 아저씨도 별 일 없었어요?? 지크는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렌은 통신기를 그의 손에 올려주며 허 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루밖에 안됐는데 세계여행이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말하는구나. 잠을 그렇게 깊이 잤나? 도대체 어디 있었어?? ?좀 멀리요. 주사도 좀 주세요.? ?주사? BP-08말이냐?? ?감기약이겠어요, 설마.? 지크가 BP-08을 싫어하는 걸 잘 아는 그렌으로선 의외의 사건이었다. 그렌은 대퇴부의 장갑판을 열어 손바닥만한 특수용기를 꺼냈다. 그것은 BP- 08을 포함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각종 주사제가 골고루 들어있는 고마 운 마법 상자였다. 그렌은 원통처럼 생긴 BP-08 하나를 꺼냈다. 병원에서 쓰는 주사와 달리 BP -08등의 BSP용 주사제는 급속주사용 알루미늄용기에 들어간다. 지크는 손가락 두 개를 흔들었다. ?하나 더요. 하나론 좀 부족할 거 같아요.? ?뭐? 하지만 정량은 하나야.? ?제가 좀 많이 먹잖아요.? 지크는 자기 손으로 BP-08하나를 더 꺼내 챙겼다. 엄지손가락만한 두 개의 은색 원통이 지크의 팔뚝에 올려졌다. 지크는 용기 의 끝을 강하게 내리쳐 주사를 개시했다. 주사시간은 거의 찰나였다. 상쾌한 감각이 핏줄을 타고 온몸을 적셨다. 두개의 용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지크는 주사한 자리를 주무르며 리진을 바 라봤다. ?넌 사람들 위해서 목숨을 버리려고 BSP가 된 게 아니었어? 그런 각오도 없이 BSP가 됐다면 넌 뭐야? 부모한테 혼나기 싫어서 아무데나 진학하는 바 보랑 다를 게 없잖아?? ?…….? ?BSP가 연예인인줄 알아? 그냥 단순히 BG잡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에 불과 해. 이 세상을 지키는 숭고한 전사도, 억대 연봉을 받는 잘난 사람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사람들한테 고맙다는 인사 받으려고 BSP대원이 됐다면 민원실로 꺼져. 욕이든 감사든 전화는 많이 받을 수 있겠지.? 리진은 분한 눈으로 지크를 쏘아봤지만 대꾸는 하지 못했다. 지크는 그녀의 앞에서 재킷의 팔뚝을 걷어 붙였다. ?진짜 BSP의 싸움을 보라고, 이제부터.? 흘러내리는 돌무더기의 수가 더 많아졌다. 소울게터의 육체는 벌써 상체까지 드러나 있었다. 팔을 휘저으며 하반신을 빼고 있는 소울게터의 모습은 흡사 알에서 깨어나는 악어처럼 처절하면서도 신비롭게 보였다. 지크는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소울게터로부터 흘러내린 작은 돌들이 그의 전투화 앞에서 멈췄다. 상당량 의 흙먼지가 얼굴로 날아왔지만 지크는 팔짱을 낀 채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혼자 싸울 생각이냐?? 처크로부터의 통신이 들어왔다. 지크는 팔을 풀고 통신기의 버튼을 눌렀다. ?같이 싸울 상대가 아니잖아요.? ?그러다가 놓칠 뻔 했잖아. 설마 하루 만에 결과가 바뀌진 않겠지?? ?뭐, 기적이 일어나면 가능하겠죠.? ?기적?? 꽤 자신감이 들어간 목소리였다. ?하긴, 이 녀석은 자신감과 멍청함이 빠지면 시체지.? 속으로 중얼댄 처크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턱수염을 긁적였다. ?좋아, 마음대로 해봐. 그런데, 이번에도 레드 원이 나와서 널 도와주진 않겠지?? ?도와줘요? 그 녀석이? 저를? 말도 하지 마세요. 그 녀석의 세 가지 취미 가 뭔지 아세요? 남을 무시하기, 타인을 무시하기, 다른 사람을 무시하기란 말이에요.? ?호오, 무시무시하군.? ?아무튼 그 녀석이 절 도와줄 리는 없어요. 만약 도와준다고 해도 거절할 거예요.? ?그렇군. 그런데 그에 대해 어찌 그리 잘 아냐?? ?…….? 약점을 찔렸는지 지크에게선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처크 는 능구렁이 같은 얼굴로 지크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신호음이 났다. ?제가 사주팔자를 좀 배웠거든요.? ?그래?? 처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쿵 하는 소리가 통신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뭔가 큰 녀석이 땅을 내딛는 소 리였다. 지크와 처크, 그리고 둘의 농담을 즐기던 BSP들은 정신을 퍼뜩 집 중했다. ?소울게터, 확인됐습니다!? 현장에 파견된 오퍼레이터가 소리쳤다. 결국 돌무덤에서 빠져나온 소울게터는 24시간동안 참았던 모든 것을 포효로 바꿔 몸 밖으로 내질렀다. 그 우렁찬 함성은 지크를 제외한 모두의 정신과 육체를 압박할 만큼 강렬했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군.? 처크는 씁쓸히 웃었다. 대범하기로 소문난 그의 이마에도 어느새 땀이 맺혀 있었다. 19년 전의 악몽이 눈앞에 다시 아른거린 탓이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처럼 마네킹이 되진 않았다. 마이크를 잡은 그는 부하직 원들의 정신도 깨울 겸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지크 소위가 전투불능상황에 빠지기 전까지는 어떤 공격도 하지 말도록! 소울게터의 힘이 빠지길 기다리는 거다!? 그 말에 지크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지크가 이기길 기다려라, 라고 해주면 안 되나? 뭐, 어때.? 지크는 쏜살같이 주저앉았다. 그의 목이 있던 자리엔 보라색의 잔광이 일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직선의 끝엔 소울게터와 그의 팔뚝에서 솟아난 칼날이 번뜩였다.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잖아!? 지크는 제비처럼 공중에 뛰어올랐다. 그가 있던 자리에 소울게터의 공격이 다시 파고들어왔다. 공중에서 무명도를 잡은 지크는 착지하자마자 소울게터를 향해 뛰어들었다. 무명도의 날이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칼집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발도술(拔 刀術)이었다. ?배!? 지크의 지적대로 시퍼런 섬광이 소울게터의 배에서 번뜩였다. 그러나 지크 의 공격도 빗나갔다. 상대의 모습이 흐릿해지나 싶더니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물리법칙이 무 시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엄청난 움직임이었다. 그래도 지크는 당황하지 않았다. ?버릇없이!? 공격을 하려던 소울게터의 관자놀이에 칼집의 끝이 꽂혔다. 지크가 반전하 며 넣은 공격이었다. 사람이었다면 즉사였겠지만 소울게터에겐 관자놀이라는 급소가 없었다. 칼 집이 머리의 반을 파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울게터는 팔뚝에 달린 칼날을 움직였다. 몸을 젖혀 상대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한 지크는 뒤로 멀찌감치 떨어졌다. ?젠장, 피곤한 녀석이군.? 지크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상대는 역시나 만만치 않았다. 무역센터 건너편 옥상엔 두 명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지크와 19개월간 합숙 을 한 리오, 그리고 슈렌이었다. 리오는 지크가 소울게터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하자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다시 19개월 전으로 돌아가 버렸군, 멍청한 녀석. 급소를 노리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도대체 뭘 하는 거야?? ?…….? 슈렌은 말없이 표정을 흐렸다. 리오는 앉은 그대로 옥상에 드러누웠다. ?뭐, 죽든 말든 상관없어. 어차피 몇 개월 있다가 다시 살아나는 녀석이니 한번쯤 죽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겠지. 녀석이 죽으면 깨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슈렌의 손이 움직였다. 눕자마자 신호를 받은 리오 는 더욱 짜증스런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벌써 죽었어?? ?아니.? 리오는 곧장 허리를 들었다. 슈렌은 이런 걸로 장난을 칠 남자가 아니었다. ?기척을 숨겨.? 짧게 말한 슈렌은 눈짓으로 무역센터 근처를 가리켰다. 그들이 있는 곳으로 부터 조금 떨어진 건물의 옥상에 또 하나의 인영이 보였다. 둘은 시각을 집중했다. 거리상으로 따졌을 때 500여 미터 정도 됐지만 그들 의 입장에선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 그림자는 다름 아닌 긴 갈색 머리의 여성이었다. 백인종도, 황인종도, 그렇다고 흑인종도 아닌 특이한 얼굴형이었지만 그래도 꽤나 미인이었다. 1 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인 듯 얼굴은 조금 앳되어 보였다. 그녀처럼 종을 따질 수 없는 얼굴의 리오, 슈렌은 그녀에 대한 강한 의문을 가졌다. ?저건 누구지? BSP인가?? 리오의 물음에 슈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에 맞춰 그의 푸른 장발이 넘실댔 다. ?BSP라면 저 이상한 결계 안에 들어가 있겠지.? 둘은 계속해서 그녀를 관찰했다. 기척에 대한 감각은 조금 떨어지는지 그녀 는 리오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슈렌이 말했다. ?이 세계의 사람은 아니군.? ?음, 마력이 느껴지는 걸 보니 그런 것 같아. 그런데 저기서 뭘 하는 거지 ?? ?누군가를 보고 있는 것 같군.? 슈렌의 말에 따라 리오는 그녀의 시선을 추적해 봤다. 그녀가 보고 있는 사 람은 다름 아닌 지크였다. ?왜 저 놈을 보고 있는 거지? 녀석을 아는 사람인가?? ?글쎄.? 곰곰이 생각하던 슈렌은 뭔가 떠오른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방화범은 현장에 반드시 나타나는 법.? ?응?? ?리오, 저 여자의 나이가 몇으로 보이나.? ?겉보기로는 20대 초반 정도? …설마?? ?가능성이 있어.? 그때 둘의 초감각이 반응했다. 배리어 필드 안에서 강한 투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크인가.? ?녀석, 결국 그걸 쓰는군. 진작 쓸 것이지.? 리오는 씩 웃었다. 처크를 포함한 전 BSP들은 소울게터가 다시 나타났을 때만큼 긴장했다. 지 크의 전신에서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강력한 스파크가 뿜어지고 있었다. 힘을 모으고 있는 지크의 얼굴엔 어느새 몇 가닥의 붉은 실선이 그려져 있 었다. 그것도 잠시, 상처들은 연기를 내며 복원되었다. ?피니시 무브(Finish Move)는 마지막에! 그것이 프로레슬링의 법칙! 널 위 해서 자존심 깎아가며 만든 사상 최고의 기술이다!? 지크의 기가 어느 한도를 넘어서자 강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그를 받치 던 지반이 갈라지고 주위의 대기가 뒤흔들렸다. 돌격하려던 소울게터도 밀 려나갈 정도였다. 지크가 뿜어내고 있는 기의 수준은 실로 놀라웠다. 봉성은 감탄을 금하지 못했고 지혁 역시 혀를 내둘렀다. 내공에 대해 특히 잘 알고 있는 챠오는 더했다. ?어제와는 달라. 단 24시간 만에 이 정도 수준으로 변하다니!? 스파크가 점점 더 강렬해졌다. 소울게터가 다시 돌격하려 하자 지크는 교차 하던 팔을 풀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초절의 속공기(速攻技)! 받아봐라!? 지크의 발이 지면에서 떨어졌다. 상대를 향해 달려가는 지크의 모습은 한줄 기의 번개, 그 자체였다. 둘이 부딪혔다 생각한 순간 무서운 소음이 터졌다. 소울게터는 어느새 떡이 되어 뒤로 밀려나가고 있었다. 소울게터가 맞는 것은 보였지만 때리는 지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실제 로는 소울게터의 전면에서 모든 각도로 움직이며 공격을 날리고 있었다. 그 속도는 그야말로 안보일 만큼 빨랐다. 이윽고 공격이 끝났다. 거의 빈사상태가 된 소울게터는 크게 비틀대며 뒤로 물러났다. 뒷걸음이라 기보다는 거대한 찰흙뭉치가 뒤로 꿈틀대는 느낌이었다. 소울게터 앞에서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던 지크는 무명도를 뽑아 마지막 공 격을 날렸다. ?너와의 썩을 인연도 여기서 끝이다!? 지크의 스파크가 무명도에 모여들었다. 어제 날린 것과 똑같은 공격이었지 만 이번엔 무명도의 공명음이 들리지 않았다. 두 번의 섬광이 소울게터의 육체를 베었다. 네 조각으로 나뉜 소울게터의 육체는 부정형으로 변해 바닥에 떨어졌다. 힘이 빠졌는지 어제처럼 회복을 하진 못했다. 조금씩 부풀었지만 달라붙을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풍선처럼 크게 부푼 보라색 덩어리들은 마른 빵처럼 갈라졌다. 커다랗게 열 린 크레바스에선 음울한 빛과 함께 엄청난 숫자의 영혼들이 은하수처럼 쏟 아져 나왔다. 지크는 엔진이 퍼진 스포츠카처럼 전신에서 연기를 뿜으며 무릎을 꿇었다. 지혁이 마호태세에 이은 용왕격살퇴를 쓴 이후 발산된 땀이 증발된 것과 같 은 현상이었다. 물론 그 수준은 천지차이였다. 지크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입만 벌리고 있을 뿐, 숨은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않았다. 전신의 체력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였다. ?지크!? 리진이 놀라 그를 불렀지만 지크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다만 눈을 부릅 뜨고 숨을 쉬기 위해 마지막 힘을 짜냈다. 이윽고 그의 가슴이 크게 부풀며 큰 숨소리가 났다. 그는 숨이 트이자마자 봉성을 돌아봤다. ?할멈! 영혼들을 성불시켜! 하나라도 남으면 녀석이 부활하니까!? ?아!?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봉성은 급히 수인(手印)을 짜고 술법을 전개했다. 그 녀의 전신에서 파란색의 오오라가 피어올랐다. 봉성의 빛은 강한 기세로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갔다. 하늘에서 떠돌던 수많은 영혼들은 먹이를 찾는 반딧불처럼 빛을 향해 달려 들었고 조용히 빛을 따라 배리어 필드를 뚫고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 어떤 것도 통과시키지 않는다는 인공의 결계도 영적인 세계에선 통하지 않았다. 잠시 후 모든 영혼들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검게 타버린 소울게터의 잔해 뿐이었다. 봉성은 긴장이 풀린 듯 비틀대며 손녀에게 몸을 의지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던 BSP대원들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해냈구나, 이 멍청이 녀석!? 그렌이 흥분한 목소리를 내며 지크에게 달려갔다. 그는 금방이라도 춤을 출 것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점잖은 편인 그가 이렇 게 기뻐하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모두에겐 비밀이었지만 그는 사실 작년에 은퇴를 결심했었다. 20년 가까이 최악의 장소에서 최악의 일을 해왔으니 그라도 지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 그를 돌려세운 것이 지크가 곧 합류할 거라는 처크의 한마디였다. 언 제 합류할 것인지 확실한 기약이 없는 말이었으나 그렌은 곧장 은퇴를 번복 했다. 지크가 오면 좀 더 편해지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에서 그런 것이 아니다. 네이비씰에서 지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한 가지 재미에 빠졌다. 스 펀지처럼 한없이 빨아들이며 강해져가는 한 젊은이의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고 궁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크는 이번에도 강해졌다. 무슨 수로 하루 만에 강해졌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 렌은 그저 기쁠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육중한 기계 몸이 길을 뛰며 만드는 소음은 공사장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시끄러웠지만 모두에겐 영화의 엔딩 송처럼 감미롭게 느껴졌다. 바닥에 쓰러진 지크는 그렌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아니, 들어올려졌다는 게 맞다. ?정신 차려! 네가 이겼다고!? 지크는 가까스로 눈을 뜨고 그렌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힘없이 웃었다. ?헤헷, 완성했어요. 극뢰(極雷)를.? ?극뢰?? ?기의 흐름을 조절해서 몸을 빠르게 만드는 기술이에요. 녀석의 재생속도 를 능가할 만한 빠르기의 공격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요. 근데 아직 적응이 안 되서 쓰고 나면 이 꼴이죠. 그리고 이거 만드는데 엄청나게 고생했다고요.? ?그래?? ?이름 짓는데 무려 4개월이나 걸렸어요.? ?…….? 잠시 아찔했던 그렌은 정신을 차리고 지크를 등에 업었다. ?쉬러 가자. 뒤처리는 동료들에게 맡겨라.? 지크는 말없이 그렌의 등판에 이마를 댔다. 눈을 감고 있는 그의 귀에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다섯 이상이었다. ?지크, 괜찮아? 선배님, 지크 괜찮은 거예요? 예?? 리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그렌은 괜찮다며 그녀를 달랬지 만 리진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지크는 다시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리진이 울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 의 얼굴을 한 채 옆에 서 있었다. ?좀 쉬자. 시끄러워서 눈도 못 감잖아.? 순간 리진의 주먹이 지크의 옆구리에 꽂혔다. ?이 바보야! 진짜 BSP 어쩌구 하며 멋은 다 부려놓고 이게 뭐야! 괜히 이 상한 짓해서 사람 울리지 말란 말이야! 어쩌자고 이랬어!? 지크는 웃었다. 옆구리가 심하게 따끔했지만 그런 말을 들으니 절로 웃음이 나오는 모양이다. 킥킥대던 그는 곧 주먹을 쥐고 엄지를 치켜 올렸다. ?은퇴연장, 축하한다.? ?…….? 리진은 뭔가에 얻어맞은 듯 그대로 굳어졌다. 그렌은 멀리 보이는 구급차를 향해 움직였다. 지크는 다시 눈을 감고 머리 를 내렸다. 리진을 포함한 BSP들은 부자(父子)처럼 보이는 둘의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 봤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리진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하 염없이 중얼댔다. 미안하다고. 그녀의 어깨 위로 지혁과 봉성의 손이 올라왔다. 손에 막혀 있던 리진의 울 음소리는 점차 커져 지혁의 품까지 들어왔다. 지크와 수수께끼의 미녀를 관찰하던 리오, 슈렌은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났 다. 그녀가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리오는 바람에 날리는 붉은 장발을 손으로 내리누르며 투덜댔다. ?이런, 생각보다 재빠르군. 우리가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나?? 거칠게 움직이는 리오의 머리채와 달리 슈렌의 머리채는 붓으로 훑은 듯 정 갈하게 움직였다. 슈렌은 입술에 묻은 파란 실선들을 손으로 훑어냈다. ?그럴지도. 아무튼 다행이군.? ?뭐가?? ?지크, 해냈잖아.? ?흥, 못하면 죽일 생각이었어. 저런 것도 처리 못하면 우리 틈에 낄 자격 이 없지.? ?음.? 슈렌은 긍정과 부정이 반 쯤 섞인 대답을 내놓았다. ?그래도 예약이란 머리말은 뗄 수준이잖아.? ?예약?? 리오는 의아한 얼굴로 슈렌을 바라봤다. ?예약형제.? ?아아.? 그의 말을 이해한 리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형제면 형제지 예약이라는 게 어디 있어. 애초부터 없었다고. 자, 가자. 여긴 더 이상 볼 일이 없어.? ?후후.? 슈렌의 웃음과 함께 둘의 모습은 곧 사라졌다. 지크가 구급차에 실려 현장을 떠난 뒤에도 처크와 BSP 직원들은 소울게터의 흔적을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남은 것은 소울게터를 이루고 있던 잿더미뿐 이었다. 재의 회수와 수색이 끝난 것은 지크가 떠난 지 약 한 시간 뒤였다. 처리가 끝났다는 보고를 들은 처크는 굵은 시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아아, 나도 병원이나 갈까?? 그는 조금 나온 배를 쓰다듬었다. 왠지 모를 위경련이 그를 아까부터 괴롭 히고 있었다. 그래도 천천히 양팔을 올려 머리를 기대는 그의 모습은 평화 롭기 그지없었다. ?하여튼, 사건종료.? 그는 가볍게 엔터 키를 눌렀다. 지크가 퇴원한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처음 실려 왔을 때는 극도의 탈진상 태였지만 약은 죽음에 가까운 수면과 4인분의 푸짐한 아침식사 정도였다. 그의 모친은 웬일인지 오지 않았다. 당연히 올 줄 알았던 사람이 오지 않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 로비에서 집에 전화를 해본 그는 잠시 후 알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이게 된다. ?응? 퇴원했구나. 못가서 미안해. 엄마가 가려고 했는데 네 친구라는 사람 들이 어제 저녁 방문하는 바람에…….? ?친구요?? ?응. 그저께 왔던 사람 있잖아. 그가 다른 고아원 친구라면서 또 한사람을 데리고 오더구나. 파란 장발에 정말 멋있게 생긴 사람이었어. 그쪽 고아원 출신 사람들은 다 미남이니?? ?…….? 지크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 친구들이란 자들의 정체가 뭔지 그는 이 세 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레니의 말이 계속됐다. ?네가 우리 집에서 자라는 말을 했다고 그러던데, 맞니? 너 말고 다른 남 자들과 한 집에서 지내는 건 익숙하지 않아서 좀 걱정되네. 그것도 두 명이 나 되니까……. 아, 그 친구들을 의심해서 이러는 건 아니니 기분나빠하지 마.? 지크는 가까스로 흥분을 감추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저도 제가 병원에 올 정도까지 싸우게 될 줄은 몰랐거든 요. 그래서 우리 집으로 그냥 가라고 친구들한테 말했었어요. 미리 전화 못 드려서 죄송해요.? ?응, 아니야. 매너 좋은 사람들이고 든든해 보이기까지 하니 도둑 걱정은 안 들더라. 호호호.? ?몇 만 명이 쳐들어와도 괜찮을 걸요.? 마음속으로 중얼댄 그는 이리저리 얘기를 돌린 끝에 일찍 들어가겠다는 말 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병원을 나선 지크는 사람들이 보는 와중에서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쁜 녀석들! 우리 집이 무슨 노숙자 갱생원이야? 말도 없이 쳐들어가는 건 도대체 뭐야! 리오 녀석은 그렇다 쳐도 슈렌 녀석까지 그럴 줄은 몰랐어 ! 에잇, 더러운 놈들!? 투덜대는 그의 앞에 차 한대가 섰다. BSP순찰차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차에서 내린 사람은 바로 리진이었다. ?건강해보이네.? 리진이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반면 지크는 짓궂은 반응을 보였다. ?어라, 그럼 내가 침대에 뻗어 있길 바라고 있었단 말이야? 이거 아쉬운데 ?? 리진은 발끈했지만 다른 때처럼 난동을 부리진 않았다. ?어서 타. 집까지 데려다 줄게.? ?…….? 그녀의 제의에도 불구하고 지크는 가만히 있었다. 두 번째 발끈한 리진은 이번에도 화를 가라앉혔다. ?타지 않고 뭐해?? ?혹시 날 납치해서 어디다 팔려는 건 아니겠지?? 세 번째 발끈한 리진은 마지막이다 생각하며 불길을 잠재웠다.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녀는 먼저 차에 탔다. 당연히 올 줄 알았던 욕을 기다린 지크는 웬일일까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이번엔 리진이 출발을 하지 않았다. 5분 가까이 그녀가 아무 말도 않고 있 자 지크의 눈썹이 꿈틀했다. ?집에 데려다 준다며?? 리진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집이 어디야?? ?…….? 지크는 아무 말 없이 그녀와 자리를 바꿔 앉았다. 그 촌극을 지켜본 병원 관계자와 환자들은 출발하는 BSP순찰차를 넋 놓고 바라봤다. 오래간만에 운전대를 잡은 지크는 옆에 앉은 리진을 흘끔 바라본 뒤 물었 다. ?할 말이라도 있어? 왜 무리해서 날 데리러 온 거야?? ?응? 응…….? 그녀는 잠시 동안 뜸을 들였다. 머리를 만지고 오디오를 켜는 등 말은 않고 난리를 피웠다. 지크는 그런가보다 하고 운전에 집중했다. 그녀가 말을 할 결심을 한 것은 차가 지크의 집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빠한테 들었어. 10년 전의 약속이라는 거.? 순간 지크의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무, 무슨 소리야! 지혁 아저씨가, 네 아빠가 그걸 다 말씀하셨다고?? ?응. 대련에서 이기면 큰딸을 주겠다는 약속이었지, 아마?? ?…….? 지크는 눈을 질끈 감으며 운전대에 얼굴을 묻었다. 리진도 만만치 않게 붉 어진 얼굴로 얘기를 계속했다. ?아빠가 그러시더라고. 이기면 진짜 주시는 거죠? 라는 지크의 말에 이성 을 잃어서 패배하셨다고 말이야. 역시, 아빠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거 같아.? 지크는 말이 없었다. 남녀 사이엔 이상한 공기가 돌았다. 지크는 창밖에 눈을 두었고 리진 역시 무릎만 쳐다봤다. 처음으로 말문을 연 사람은 지크였다. ?뭐, 관계없잖아. 옛날 얘기니 그렇게 크게 신경 안 써도 되고, 또 지혁 아저씨도 당시 약속을 부담스러워 하시는 것 같고……. 잊어버려. 나도 그 때 뭐가 뭔지 모르고 응했던 거니까.? ?정말?? ?당연하지. 그리고 난 스무 살이 안 된 여자에겐 관심 없어. 아, 이거 챠 오에게 말하지 마. 그 애가 이 얘기 들으면 날 또 죽이려 들 거야.? ?뭐? 챠오?? 리진의 얼굴색이 단숨에 변했다. ?너, 챠오랑 무슨 관계야! 그러고 보니 챠오랑 몇 년 동안 한 집에서 지냈 다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뭐?? ?잔말 말고 대답해!? 지크는 갑작스런 리진의 분노에 당황한 나머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지크의 방 창가에서 순찰차를 내려다보던 리오는 짧게 한숨을 지었다. ?거기서 그 말을 왜 하냐? 바보 녀석.? 정오뉴스의 시작소리가 방안에서 들렸다. 책에서 TV로 눈을 돌린 슈렌의 눈엔 소울게터 격퇴라는 문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5화 [Code Name - Final] 제네럴 블릭(General Bleek). 인력을 이용한 작업이 힘든 해저와 우주, 사막, 그리고 BG의 출현빈도가 극 히 높은 대도시 지하에 대한 일이 점차 많아지던 2010년 후반부터 급성장을 하여 현재 전 세계 최고의 로봇회사 겸 무기회사가 된 거대기업이다. 그들이 만드는 산업용 로봇과 군용 로봇은 세계 각지에서 환영을 받을 정도 로 성능이 뛰어난데, 특히 도심전투용으로 개발된 BX(Bleek's Xanthippe)시 리즈는 경쟁회사들이 따라올 수 없을 만큼 강력한 AI와 합리적인 무기체계, 그리고 간단한 조작과 정비로 호평을 받고 있다. 덕분에 전 세계의 국경 어디를 가도 초기형 BX인 BX-00부터 최신형인 BX-03 까지의 시리즈 중 하나 이상은 볼 수 있다. 하지만 대 BG용 병기의 납품과는 인연이 없었다. BSP에 종사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BSP상부에서 정한 BX시리즈 사용 불가 방 침을 납득하지 못했다. 사람은 부서지면 죽거나 병원신세를 지지만 로봇은 수리만 하면 언제든지 출격이 가능하고 파손이 심할 경우 AI만 새로운 본체 에 옮기면 끝이었다. 무엇보다도 한달 유지비가 BSP 전투요원의 월급보다 적다. 구입이 비싸긴 해도 A클래스 요원 한명의 월급이면 최신형 머신인 BX-03을 다섯 대나 유지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BSP의 일은 BX시리즈에게 맡기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BSP상부는 제네럴 블릭을 포함한 모든 로봇회사의 전투머신에 대한 사용불가방침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이유는 1급 기밀로서 공개되지 않 았다. 그래도 제네럴 블릭은 포기하지 않고 BSP에 대한 BX시리즈의 납품을 기획하 고 있었다. 현 시점에서 BSP만큼 돈이 되는 고객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 고 수년에 걸친 개발 끝에 그 결실이 맺어졌다. 미국 서부에 위치한 제네럴 블릭의 비밀공장 겸 테스트 스타디움에선 개발 이 끝난 BX시리즈의 최신작, BX-F의 비밀 시연회가 열렸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4미터에 가까운 콘크리트로 중무장된 관람박스엔 제 네럴 블릭의 중역 10여 명이 모여앉아 BX-F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시연 회는 이미 끝난 상태다. 그 중에서 상석을 차지한 감색 양복의 중년신사는 스크린을 통해 사막과 정 글, 산악을 비롯한 각종 지형이 마련된 테스트 스타디움의 전경을 돌아봤 다. 지형에 설치된 가상목표와 적으로 설정된 BX시리즈는 완전히 초토화된 상태 다. 훌륭한 결과였다. 그러나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그의 말이 시작되자 중역들은 대화를 멈추고 바짝 긴장했다. ?BX-F는 범죄에 가까운 수법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우리 제네럴 블릭의 최 고 걸작이오. 이번만큼 산업스파이를 많이 사용한 적도 없고 개발 중에 땅 에 묻힌 과학자들의 수도 예전의 경우를 합친 것보다 많소. 그리고 결과는 지금과 같소. 최고지. 아마 그 어떤 BSP라도 단독으로 BX-F를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오.? 남자는 파이프 담배를 물고 연기를 마셨다. 담배의 진한 향이 중역들의 콧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그 남자, 제네럴 블릭의 총수이자 재계 최고 거물인 마크 레일로지는 잠시 간의 침묵으로 자신에 대한 집중도를 높인 뒤 이야기를 재개했다. ?하지만 BSP에서 우리 BX-F를 사용해준다는 보장은 없소. 그들은 우리의 시연회조차 거절했지. 얼마나 정의로운 집단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결과보다 는 과정에 더 집착하는 모양이오. 후후, 물질적으로 부족한 게 없으니 그토 록 깔끔하게 살겠지. 어쨌거나 우리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오. 어떻게 해야 BSP에서 BX-F를 인정하도록 만드느냐, 이것만큼 중요하고 어려 운 문제는 현재 없소. 이제부터 의견을 나눠봅시다.? 그러나 회장이 두 번째 담뱃가루를 태울 때까지 그 어떤 의견도 나오지 않 았다. BSP에게 좋지 않은 회사로 낙인찍힌 제네럴 블릭이 그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레일로지 회장이 세 번째 담뱃가루를 넣을 무렵, 관람박스의 구석에 서있던 한 노인이 손을 들었다. ?제가 의견을 내 봐도 되겠습니까, 회장님?? 회장의 부리부리한 눈이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엔 작은 체구의 동양인 노인이 있었다. 마르고 주름진 얼굴엔 검은 수염이 거칠게 묻어 있었고 가운 안의 하늘색 와이셔츠는 며칠을 입었는지 쭈글쭈글하고 색이 바랬다. 가장 눈에 띄는 특 징인 까까머리는 백발이 촘촘히 박혀 멀리서 보면 회색으로 보였다. ?말씀해 보시오, 닥터 와카루.? 회장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노인은 밑으로 조금 흘러내린 안경을 바로 했 다. ?BX-F를 시내에서 디스플레이 하는 게 어떻습니까? 광고효과는 최고겠지 요.? 그러자 중역들 사이에서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이 상황에서 농담을 하시다니, 과연 와카루 박사답소!? ?그것도 괜찮겠구려. 눈요기 거리로 변한 지상최강의 전투머신이라, 하하 하!? 그러자 와카루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올려붙였다. ?섭섭한 말씀들이십니다. 전 진담입니다.? ?…….? 중역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회장은 흥미가 생겼는지 즉시 파이프 안에 불을 댕겼다. ?자세히 말해보시오. 자동차처럼 미녀들과 함께 디스플레이를 하겠다는 말 은 아니겠지요?? ?허허, 물론 아닙니다.? 와카루는 까까머리를 긁적였다. ?아시다시피 BX-F의 인공지능 설계는 제가 맡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 이 닥쳐야 우리 마스코트가 무기를 가지지 않은 시민들을 덮치게 되는지도 잘 알지요.? 순간 중역들의 표정이 변했다. ?인공지능 폭주를 말하는 것이오? 당치도 않소! 회사 이미지만 나빠질 뿐 이오!? ?대외적인 이미지야 나빠지겠지요. 하지만 그런 적이 한두 번입니까? BX-0 0부터 BX-03까지, 머신이 새로 나올 때마다 인공지능 폭주는 한번 이상 일 어났습니다. BX-F라 해서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은 없지요. 그럴 때마다 여 러분께선 폭주가 일어난 나라의 언론부터 시작해서 정부까지, 모든 방면의 입을 막는데 성공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니 일으켜도 제네럴 블릭 자체엔 충 격이 없을 겁니다. BX-F의 실전 테스트를 위해서도 좋겠지요.? 좋지 않은 약점을 찔린 중역들은 불쾌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BX-F가 가진 전투능력이라면 시민들의 피해가 막대할 것이오. 자 칫 잘못하면 거대한 재앙이 초래될 수도 있소.? 다른 중역이 이의를 제기했다. 와카루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받아쳤다. ?BX-F에 죽는 것도 어찌 보면 영광일 수도 있지요. 조금 아프긴 하겠지만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지 않습니까?? ?인명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은 어쩌란 말입니까?? ?허허, 보험이 있잖습니까. 그리고 머리는 변호사들이 쓰지 당신들께서 쓰 시진 않죠.? ?…….? 와카루는 보통사람과 사고방식 자체가 틀리다. 그런 말을 회장에게 익히 들 었던 중역들이었으나 지금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중역들은 잠자코 회장의 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회장이 물었다. ?그럼 목표는 어디요? 적당한 지역이라도 생각해 두셨소?? ?물론이지요.? ?어디요?? ?대한민국, 매트로 서울입니다.? ※※※ 소울게터가 사라진지 2주일째. 매트로 서울은 예전과 다름없이 돌아갔다. 작은 BG사건들이 간간히 터질 뿐, 굵직한 사건은 터지지 않았다. 덕분에 지 크를 비롯한 BSP 전투요원들은 비교적 편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정식 BSP가 된 이후 처음으로 비번이 된 지크는 집 앞마당에 해변용 벤치를 놓고 누워있었다. 초여름의 어설픈 열기와 어색한 바람이 그의 몸을 타고 흘렀다. 지크는 선글라스를 벗고 하늘을 바라봤다. 날씨는 집에 있기 화가 날 정도 로 좋았다. ?아아, 평화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도 좋으니 계속 이랬으면 좋겠 어.? 하지만 표정은 좋지 못했다. ?그런데 너희들, 왜 돌아가지 않는 거야!? 그는 옆쪽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간이 테이블에 음료수를 놓고 앉은 두 남자, 리오와 슈렌은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쳐다봤다. ?임무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슈렌의 조용한 말에 지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팔을 벌렸다. ?그래도 그렇지, 벌써 2주 동안이나 신세를 지고 있는 건 뭐야! 도가 지나 치잖아!? 리오는 피식 웃었다. ?후, 우리에게 19개월 동안 신세를 진 건 생각 못하나보군. 하긴, 그런 것 을 기억할 정도로 네 머리가 좋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만…….? ?닥쳐! 아무튼 그 임무인가 뭔가 빨리 끝내고 돌아가! 너희들 때문에 모처 럼 얻은 휴일도 제대로 보내고 있지 못하잖아!? ?제대로 못 보내고 있다고?? 리오는 이번에도 비웃음을 실었다. ?그럼 제대로 보내는 게 어떤 건지 좀 가르쳐 주시지. 성심성의껏 도와줄 테니까.? ?…….? 언변에서 밀린 지크는 몸을 옆으로 휙 돌렸다. 승리를 쟁취한 리오는 고개 를 흔들며 음료수를 마셨다. ?그런데, 찾고 있다는 사람의 단서는 찾았어? 19년 전에 미래인지 과거인 지에서 왔다는 그 목표물 말이야.? ?전혀. 갈색 머리의 미녀라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어.?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예쁘긴 진짜 예쁜 가봐?? 지크는 리오가 여자를 보고 예쁘다고 말하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TV를 보면서도 그랬고 길거리를 같이 가면서도 그랬다. 리오는 턱을 만지며 지크의 말을 곰곰이 되뇌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내 타입은 아냐.? ?오, 그래? 그럼 네 타입은 뭔데?? ?여자라는 생물에 대해 관심을 끊은 지 오래돼서 기억 안나.? 리오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러자 지크의 눈가에 그늘이 졌다. ?너, 혹시……?? ?음?? ?괜히 슈렌이랑 같이 다니는 게 아니었군!? 지크에게 온 것은 대답이 아닌 음료수 캔이었다. 이마에 빈 캔을 정통을 맞 은 지크는 무엇이 그리도 아픈지 이마를 감싼 채 몸을 꼬았다. ?으윽, 넌 장난이라는 걸 모르는구나! 캔에 기를 실어서 던지다니!? ?쓸데없는 말은 관두고 휴일이나 조용히 보내시지, 형제씨. 영원히 쉬도록 배려해주기 전에 말이야.? ?나쁜 녀석.? 지크는 투덜대며 선글라스를 다시 썼다. 거의 매일같이 일어나는 둘의 싸움이었다. 슈렌은 옅게 웃은 뒤 책에 눈을 돌렸다. 그때 전자신호음이 지크의 바지 안에서 들렸다. BSP전용 통신기였다. 지크 는 절망적인 얼굴로 통신기를 꺼내며 투덜댔다. ?하여튼 넌 재수가 없어! 넌 나에게 불운을 가져다준다고!? 리오는 대답 대신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얼마 전 지크에게서 배운 욕이었다. ?예, 지크입니다.? 지크는 리오의 손짓을 애써 못 본 척 하며 통신을 받았다. ?치프 오퍼레이터, 루이입니다. 긴급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지금 이시간부 로 지크 스나이퍼 소위의 휴일을 취소합니다.? 지크는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특이한 성격답게 부질없는 저항 을 시도했다.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없는 국번이오니…….? ?장난치지 마.? ?알았어. 그런데, 무슨 일이야? 이 지크님이 휴가를 날려야 할 만큼 큰일 이어야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거야. 혹시라도 같잖은 일이라면 네가 낚싯줄 던지다가 자기 치마를 걷어버린 사건을 전부 불고 다닐 거야. 나이 열일곱 에 물방울 팬티였다고까지 말하면 너도 데미지를 피할 수 없겠지.? 다음 얘기는 잠시 동안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생각하며 기다리던 지 크의 귀에 의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지크.? ?네?? 갑자기 처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지크는 바짝 긴장했다. 한숨소리에 이어 서 처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방금 전의 통신은 주관제실의 전체가 들을 수 있는 공개통신이었어.? ?…….? 상황을 파악한 지크의 얼굴은 회색으로 변했다. ?루이의 얼굴색은 어때요?? ?빨간색보다 더 빨개.? ?아아.? 자신의 미래를 감지한 지크는 절망적인 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큰일인가요?? ?아아, 매우 큰일이지. 잘못하다간 매트로 서울의 시민 전체가 대피해야 할지도 몰라. 아무튼 빨리 이쪽으로 오길 바란다.? ?예, 알았습니다.? 통신기를 끈 지크는 벤치 위에 벌렁 누웠다. ?아아, 이 도시가 지옥이라는 말이 맞긴 맞구나. 소울게터 녀석을 작살 낸 지 2주밖에 안됐는데 이번엔 시민 전체가 대피해야 한다니, 빌어먹을. 이 도시엔 분명히 마가 끼었어.? 용수철처럼 탄력 있게 일어난 그는 현관으로 달려갔다. 집으로 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잠시 동안 지켜보던 슈렌은 다시 책에 눈을 돌리며 중얼댔다. ?물방울 팬티라…….? 지크의 벤치에 대신 눕던 리오가 순간 움찔했다. ?뭐라고?? ?아냐.? 그로부터 한 시간 뒤, 회의실엔 케빈을 제외한 전원이 모여앉아 처크가 오 기를 기다렸다. 모두의 시선은 지크의 얼굴에 향해 있었다. 한참동안 그를 지켜보던 그렌은 귓속말로 리진에게 물었다. ?오늘도 때린 거야?? ?요즘은 안 그래요.? 그때 케빈이 짧은 말총머리를 휘날리며 허겁지갑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왼손엔 방금 뽑아낸 인스턴트커피가 들려 있었다. ?아아, 미안합니다. 이런 비상시에도 자판기 아줌마가 관리를 하시더라고 요. 응?? 자리에 앉던 케빈은 옆자리의 지크를 보고 흠칫 놀랬다. 초인적인 균형감각 덕분에 커피가 쏟아지진 않았지만 케빈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크의 왼쪽 볼엔 손바닥 모양의 붉은 문양이 커다랗게 찍혀 있었다. ?오늘은 누구한테 맞은 거야? 리진? 챠오?? 지크는 맞은 부위를 손으로 가리며 루이를 가리켰다. ?치프 오퍼레이터가?? 케빈은 더욱 놀란 얼굴로 루이를 바라봤다. 루이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케빈은 곧 커피를 테이블에 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아, 물방울 팬티 말이군! 하하, 걸작이었어! 로비를 맡은 언니까지 그 얘기를 알고 있더라고. 근데, 정말이야?? 지크는 묵묵부답이었고 루이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조금 후 처크가 회의실에 들어왔다. 그는 자신의 자리로 급히 걸으며 손을 휘저었다. ?인사는 생략한다. 루이, 브리핑을 시작해.? ?예, 지부장님.? 루이의 조작에 따라 메인 스크린에 떠오른 것은 장수풍뎅이와 비슷한 모습 의 보행 전차였다. 두툼한 장갑으로 접힌 여섯 개의 다리와 앞쪽으로 크게 솟은 뿔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처크가 설명을 덧붙였다. ?제네럴 블릭에서 얼마 전에 개발한 신형 고기동(高機動) 보행전차, BX-F 다. 이 녀석에 대한 자세한 스펙(Spec: Specifiction-제품의 성능내용)은 제네럴 블릭에서 아직 공개하지 않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녀석이 이 매트로 서울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다.? 지크의 얼굴이 구겨졌다. ?들어온 게 비상은 아니잖아요? 광고 찍으려고 왔을 수도 있고…….? ?AI폭주를 일으킨 상태로 들어왔으니 문제지.? ?에이, 한 대 정도야 가뿐하죠.? ?세 대다.? 처크의 대답은 점점 나쁜 상황으로 치달았다. 덩달아 루이까지 설명을 덧붙 였다. ?BX-F의 개발에 참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정보에 따르자면 BX-F 1기의 성능은 구형인 BX-03 10대 분량의 전투능력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무장은 3 0미리 ?디스트로이어? 기관포 2기에 95미리 LRG(Linear Rail Gun: 화약 대신 강력한 자력으로 탄환을 쏘아 보내는 무기) 1기, 4 식 다목적 미니 미사일 2기, 대인용 클레이모어 발사기 1기 등이며 방어 장치로는 클로킹 이펙트(Cloaking Effect), 스텔스 이펙트(Stealth Effect), 대(對) GPS 클 로킹, 배리어 필드 등이 있습니다.? 화려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그 스펙 앞에 현대무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케빈과 그렌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완전히 괴물이잖아? 클로킹 이펙트도 모자라서 배리어 필드까지 사용이 가능하단 말이야? 거기다가 95미리 LRG라니, 이건 녀석의 공격을 막을 만한 엄폐물이 없다는 말이잖아!? 케빈이 문제 삼은 95미리 LRG는 작년 말, 2034년에 제네럴 블릭에서 개발한 최신형 대전차 무기다. 리니어 레일건의 특성상 무화약 탄두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폭발에 의한 피해는 입히지 못하지만 관통력만큼은 최고였다. 첫 시험에서 미육군 최신 예 전차 ?레이건?의 몸체를 지우개 뚫듯 일격에 관통했을 만큼 막강했다. 그렌이 이어서 말했다. ?LRG만이 아니야. 디스트로이어도 그렇고 클레이모어도 막기 힘들어. 인간 이 총 하나만 믿고 덤빌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더 문제가 되는 건 고기동 보행전차라는 점이야. 작년 말에 제네럴 블릭에서 공개한 테스트 모델, BX- X가 수직경사의 콘크리트 벽을 시속 60km의 속도로 기어 올라갈 수 있었지. 마치 곤충처럼 말이야. 만약 BX-X가 BX-F의 테스트 모델이었다면 이건 공포 그 자체야. 초고층 빌딩의 벽에 달라붙은 채로 리니어 레일건을 이용한 지 상저격이 가능하다는 얘기와 같지.? 회의실의 분위기는 단숨에 가라앉았다. 비보는 계속됐다. 처크는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목표는 BX-F 세 대다. 녀석들이 인천공항에서 경찰 장갑차 다섯 대를 떡 으로 만들고 탈출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시간 전이다. 시간과 이동루트 로 봤을 때 지금쯤은 매트로 서울의 경계선에 있거나 내부에 들어와 있겠 지. 하여튼 이번 작전은 대한민국 육군 수도방위사령부와 경찰, BSP가 합동 으로 실시한다. 외곽은 육군이, 그리고 내부는 경찰과 BSP가 맡는다. 시민 들에 대한 비상경계령은 앞으로 30분 후나 방어병력과 접촉한 직후에 내려 질 예정이다. 그럼 여러분의 무운을 빈다.? 회의가 끝나고 처크가 자리를 떴다. 하지만 전투요원들은 자리에서 움직이 지 않았다. 그렌은 손으로 자신의 대머리를 감싸 쥐었다. ?최악이군. 1년에 한번 있을까말까 하는 대형 사건이 한달도 안돼서 또 터 지다니, 미칠 지경이야.? 다른 이들도 그렌과 같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지크만은 달랐다. 그는 BSP전 용 PDA를 통해 집에 전화를 하고 있었다. 식객에게 밥값을 하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화장실에 몰래 숨어들어간 지크는 누군가가 받길 오랫동안 기다렸다. 공개 적으로 할 부탁이 아닌 만큼 숨어서 해야만 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슈렌이었다. ?스나이퍼씨 댁입니다.? ?아아, 집 잘 보고 있지?? ?음.? ?부탁할 일이 생겼는데, 들어줄 수 있어?? ?부탁?? 지크는 현재 상황에 대한 자초지종과 문제가 된 BX-F가 어떤 괴물인지를 설 명해 주었다. 지크가 극비에 해당하는 것을 이렇게 얘기해주는 것엔 이유가 있었다. 슈렌 은 그만큼 믿을만한 사람이었다. 입이 좀 무겁긴 해도 냉정하고 빠른 사고력을 가진 것은 물론 경험도 많아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주곤 한다. 리오와는 머리색만큼이나 다른 사람이 었다. 만약 리오가 전화를 받았다면 지크는 상황설명 같은 것 없이 다짜고 짜 도와달라는 말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크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할 수 없어.? ?뭐라고!? ?우리가 이 세계의 일에 간섭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어. 그런 대형 사 건까지 돕게 되면 우리들의 존재가 이 세상에 대대적으로 알려지게 될 수도 있지. 우린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아.? ?하지만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문제야! 녀석들은 대량살상무기라고! 그깟 정체 좀 드러나면 어때!? ?미안하다.? 지크는 좀 더 그를 설득해보려 했지만 들려오는 것은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 뿐이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혀도 제대로 찍힌 지크는 허망한 얼굴로 화장실 천장을 바라봤다. ?아아, 내가 저런 놈들과 의형제를 맺었다니……. 피도 눈물도 없는 놈들. ? 한편 매정하게 전화를 끊은 슈렌은 전화기를 놓자마자 리오의 감탄을 들었 다.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냉정하신가? 드디어 영양가 없는 일엔 관심이 끊기 신 건가?? ?BX-F인가 하는 것은 네가 맡아줘. 난 지크 주변에 있도록 하지.? 전화를 할 때와는 다른 말이었다. 리오는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이봐, 도와주지 않겠다고 한 사람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면 곤란하잖 아.? ?일단 지크를 최대한 궁지에 몰아넣어야 한다.? ?궁지?? 그 말에 리오는 의아한 듯 눈썹을 꿈틀했다. 슈렌은 나갈 준비를 하는 듯 거실을 대충 정리하며 말을 계속했다. ?그 여자가 정말로 지크와 관련이 되어 있다면 녀석이 위험할 때 분명히 나타날 거야. 예상이긴 하지만 맞을 확률은 높다. 난 그것을 노려보도록 하 지.? ?그렇다면 나야 좋지. 녀석의 비실대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 ?그럼 가자.? 현관문을 잠그는 것으로 뒷정리를 마친 둘은 곧장 그곳에서 사라졌다. ※※※ 인천국제공항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관문은 수도방위사령부의 병력으로 완전 히 차단되어 있었다. 헬기로 긴급 공수된 대전차와 장갑차, 헬기, 대한민국 육군 전용 BX-03, 그 리고 그 밖의 중화기들이 도로를 가득 채웠지만 병사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올 때가 됐는데…….? 현장지휘자는 애꿎은 담배필터만 열심히 씹어댔다. 대전차 세 대에 장갑차 일곱 대, 헬기 세 대, BX-03 10대라는 엄청난 전력의 뒤에 있었지만 상대가 성능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최신형 BX시리즈이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담배라도 피울 수 있는 것은 진동감지기 덕분이었다. 하늘에서 오지 않는 한 반경 5킬로미터 이내의 지상 움직임은 전부 포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예상도착시간이 지나도 세 대의 BX-F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도로 로 우회하거나 길이 아닌 곳을 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해왔다. ?내 입장에선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지휘자는 새 담배를 꺼내며 꽁초를 바닥에 뱉었다. 꽁초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펑 하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렸다. 지휘자는 라이터에 불을 켠 채 그곳을 올려다봤다. 2년 전에 AH-66 코만치의 자리를 대신해 새로 배치된 AH-90 샤이엔 한 대가 동체에 구멍이 난 채 허무하게 추락하고 있었다. 다른 두 대의 샤이엔도 하 얀 실선에 관통되어 추락하거나 공중에서 폭발했다. ?초음속탄! 리니어 레일건인가!? 진동감지기의 범위 밖에서 순간에 가까운 사격을 할 수 있는 무기는 X선 레 이저 같은 광학무기나 레일건밖에 없었다. 헬기들이 탄에 맞자마자 폭발하 지 않고 추락하거나 잠시 후 폭발한 것만 봐도 확실했다. 현장지휘자는 라이터를 주머니 속에 구겨 넣으며 소리쳤다. ?전원 전투준비! 놈들이 왔다!? 그의 목소리에 맞춰 진동감지기가 반응했다. 감지기를 맡은 병사가 자기 성 대의 한계를 시험하듯 외쳤다. ?확인미상의 물체 셋이 도로를 타고 이쪽으로 옵니다! 속도는 시속 120키 로!? ?120키로? 그런 터무니없는!? ?아, 중앙의 한 대가 감지기에서 사라졌습니다!? ?뭐라고!? 그 순간 일그러진 공간 하나가 전차와 장갑차로 이뤄진 방위선 위로 떠올랐 다. 상황이 하도 급박했기에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쿵 하는 소리가 후방에서 들렸다. 현장지휘자를 비롯한 병사들은 일제히 그 쪽을 바라봤다. 작은 전자음과 함께 청색의 기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 것도 없는 백지 에 신이 그림을 그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장수풍뎅이와 같은 두툼한 외모에 두꺼운 장갑으로 뒤덮인 여섯 개의 다리, 회전을 하기 시작한 두 개의 30미리 디스트로이어 기관포. 녀석이었다. ?피해!? 지휘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관포 특유의 둔탁한 폭음이 터졌다. 소나기 처럼 뿌려진 30미리 철갑탄은 범위 내의 인간과 장갑차의 외관을 종이 뚫듯 꿰뚫었다. 범위에 들지 않은 현장지휘자와 다른 병사들은 급히 수송용 장갑차로 달려 갔다. 맨몸으로 어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전방에 위치한 전차들은 후방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포탑을 돌렸다. 무장된 장갑차들도 그쪽으로 포구를 돌렸다. BX-F의 것과 같은 30미리 발칸과 105미리 주포가 복수의 불꽃을 뿜었다. 일 제사격을 당한 BX-F는 금세 폭발과 화염에 휩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윽고 사격이 멈췄다. 적의 파괴상황을 보기 위해서였다. BX-F가 자리 잡고 있던 도로는 유실되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완전히 파 괴되어 있었다. 그러나 BX-F는 흠집 하나 없이 멀쩡했다. 비웃듯 광택까지 반짝였다. 또다시 발칸이 불을 뿜었으나 탄환은 BX-F에 닿기도 전에 좌우사방으로 튕 겨 날아갔다. 탄이 닿은 부분엔 파란색의 파문이 일어났다. 장갑차 안에 몸을 숨긴 현장지휘자는 넋을 놓고 중얼댔다. ?배리어 필드……! 전차보다 작은 녀석이 단독으로 배리어 필드를 전개하 다니, 도대체 어찌된 녀석이야!? 그들이 한 대의 BX-F에 전념하는 동안 전차의 뒤에서 클로킹 이펙트의 페이 스오프(Face off)가 개시되었다. 노란색, 붉은 색으로 도장된 나머지 두 대 의 BX-F였다. 전투는 5분도 안되어 끝났다. 포탑을 잃거나 구멍이 난 전차는 이제 움직이지 않았다. 장갑차는 BX-03의 잔해와 뒤섞여 폐허가 된 도로를 굴러다녔다. 그것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였다. 훼방꾼들을 처리한 BX-F들은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 점프로 상대를 넘어 교 란작전을 폈던 파란색 BX-F는 자신을 가장 많이 공격했던 30미리 발칸차량 에 붙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BX-F의 측면 장갑이 열리고 매직핸드(다용도 기계손)가 튀어나왔다. 발칸의 탄약실을 헤집은 매직핸드는 무사한 30미리 탄띠를 죽 잡아끌어 BX-F의 탄 약실에 옮겨 넣었다. 약탈을 통해 이번 전투로 소비된 탄을 보충하는 것이다. 파란색이 보급을 끝내고 출발하자 다른 두 대가 뒤를 따랐다. 외곽의 1차 방어선이 뚫린 것을 알아챈 수도방위사령부는 즉각 2차 방어선 을 구축하면서 매트로 서울 전 지역에 비상대피령을 내렸다. 대전차 세 대, 헬기 세 대라는 전력이 5분이라는 시간에 전멸된 상황은 그 야말로 농담이 아니었다. 군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2차 방어선을 믿고 시민 들의 눈과 귀를 가리는 것은 같이 죽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시민들의 대피는 경보가 울린 이후 30분 만에 대부분 끝났다. 경찰청에서 대피령이 내려지는 걸 대비해 경찰들을 미리 배치시킨 덕분이었다. 세계 어 느 곳에 내놓아도 쳐지지 않을 만큼 시끄러운 도시, 매트로 서울은 그렇게 조용해졌다. 현재시각은 정각 3시. BSP들은 4차 방어선을 여의도로 잡고 경찰과 군이 제 공하는 정보에 눈과 귀를 집중했다. 그들이 여의도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방송국과 국회의사당 같은 주요 시설 들에 대한 방어 때문이었다. 인공지능으로 운용되는 병기들은 폭주를 일으키면 대부분 그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을 노리고 이동하게 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지만 BX- F의 움직임을 알 수 없는 현재로선 확률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대전차용 램제트 라이플을 점검하던 케빈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게를 잡고 있 는 지크를 흘끔 바라봤다. ?회의 끝난 뒤부터 농담 한 마디 안하네? 소울게터 때도 청산유수처럼 말 을 하더니 오늘은 왜 저래?? 그가 본 그대로 지크는 오토바이에 기댄 채 가만히 시간을 보냈다. 왠지 화 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고독을 씹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탓인지 리진도 그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주위만 맴돌았다. 다른 때의 지크라면 그녀의 표정이 조금만 이상해도 무슨 일이 있냐며 물어봤겠 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리진의 그 모습이 하도 애처로웠기에 결국 케 빈이 대신 물어봤다. ?리진, 뭐 놓고 온 물건이라도 있어? 안절부절못하네.? 지크가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가 자신의 고민을 들어주길 바랐던 리진은 망 설임 없이 대답했다. ?오늘 동생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현장학습에 갔거든요. 아아, 그 학교는 왜 오늘 같은 이상한 날에 현장학습을 계획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럴 때 BX-F가 그쪽으로 간다면 정말 위험한데……!? ?너희 집안은 어째 사사건건 걸리냐??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지크가 투덜대듯 중얼댔다. ?저번엔 지혁 아저씨랑 무당 할머니가 걸리더니 이번엔 네 동생이야? 다음 엔 미진 아줌마겠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위험한 건 내 동생뿐만이 아니라 서울시민 전체 란 말이야!? ?그래도 걱정하는 비율이 같다고는 말 못하겠지?? 역시나 강력한 언변이었다. 리진은 꾹 다문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지크는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면 용산에 있잖아? 여기서 멀지도 않으니 걱정 말고 서 울시민 전체에 신경 쓰셔. 설마 내가 거기까지 커버 못하겠어?? 리진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기면 가 줄 거야?? ?그러려고 우리 모두 여기까지 소풍 나온 거잖아.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가 주겠지.? ?그, 그렇겠지.? 리진은 어색한 얼굴로 그의 말에 동의했다. 둘의 대화를 듣던 케빈은 씩 웃으며 총의 점검을 계속했다. ?꼭 사족을 달아서 여자를 실망시킨다니까.? 그때 그렌이 지축을 울리며 저편에서 달려왔다. ?2차 방어선이 BX-F와 접촉했다!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 것 같으니 모두 준 비해! 지원에 나선다!? ?예.? 힘없이 대답한 지크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다가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땅을 걷어찼다. ?젠장, 그 녀석들! 이런 상황에서 왜 움직이지 않겠다는 거야! 리오 녀석 은 그렇다 쳐도 슈렌 녀석은 움직여 줘야 할 거 아냐!? 평소의 지크를 생각하면 정말 흔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인상도 그랬고 행동 도 진지하다 못해 겁이 나기까지 했다. 막 출발하려던 BSP들에게 비보가 날아든 것은 그렌이 준비를 지시한지 1분 도 안된 시점이었다. ?지원취소! 지금 BX-F 한 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나타났다! 2차 방어선에 나타난 녀석은 두 대 뿐이야! 한 대가 다른 길로 빠져나간 모양이다!? ?뭐라고요!? 리진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녀는 그렌에게 달려가 다짜고짜 묻기 시 작했다. ?언제 나타났데요? 사상자가 있데요? 어느 정도죠? 빨리 말씀해 주세요!? ?이봐, 진정해! 지금 전투경찰들과 대치 중이야! 민간인 사상자는 아직 없 어!? 그렌이 리진의 양 어깨를 잡고 크게 흔들었다. 눈을 크게 뜬 채 숨을 몰아 쉬던 리진은 이내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곳에 제 동생이 있단 말이에요!? ?미진이가?? 그렌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내렸다. 그렌과 지혁이 절친한 선후배 사이인 것처럼 두 가족도 친척처럼 친했다. 그렌이 걱정이 배로 뛴 것은 이상한 일 이 아니었다. 두꺼운 배기음이 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지크였다. ?알았으니 빨리 가자고요! 일단 저 먼저 출발할게요!? 지크의 오토바이는 기세 좋게 아스팔트를 치고 나갔다. 뒤이어 그렌과 케빈이 탄 BUV와 리진, 챠오가 탄 순찰차가 출발했다. 임시 베이스에 남은 비 전투 요원들도 급히 장비를 챙겨 트레일러에 실었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의 밖에선 중무장한 전투경찰과 BX-F의 격렬한 전투가 벌아지고 있었다. 전경들의 저항은 거의 무의미하다 싶을 정도였다. 105미리 전차주포도 통하 지 않는 BX-F의 배리어 필드에 5.56미리 라이플 탄과 수류탄 같은 대인병기 가 통할 리는 만무했다. 완전히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형국이었다. 상황을 모르는 박물관 내부의 민간인들은 폭음과 전경들의 비명이라는 끔찍 한 배경음 속에서 공포에 떨었다. 어른들은 물론이고 현장학습을 온 학생들 도 마찬가지였다. 경비원까지 어머니를 찾으며 우는 와중에서도 멀쩡한 정신을 가진 소녀가 있었다. 여느 또래의 학생들과 달리 염색을 하지 않은 그 단발의 소녀는 또렷한 눈 동자로 친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아. 조금만 참으면 우리 언니가 구하러 와줄 거야. 그러니 울지 마. 반드시 아빠엄마를 만날 수 있어.? 소녀의 친구들은 울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녀의 언니가 뭘 하는 사 람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키가 작았다. 나이가 어려서도 그랬지만 또래의 친구들과 비교해서 도 작았다. 150cm가 겨우 넘거나 조금 안되는 듯 했다. 그러나 친구들 사이 에서 소녀가 차지하는 비중은 키의 곱절도 넘어 보였다. 겁이 없다고 느껴 질 정도의 조숙함이었다. ?어?? 소녀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밖에서 들리던 총성이 멈춘 것이다. 그녀는 들뜬 목소리로 친구들을 불렀다. ?봐, 끝났잖아! 언니가 온 거야, 이제 우린 살았어!? ?정말?? ?와, 진짜 BSP가 왔나봐!? 소녀와 그녀의 친구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주위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안도 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판단대로 밖의 전투상황은 끝났다. 하지만 전투라는 것은 좋은 쪽이 든 나쁜 쪽이든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있었다. 외벽에 오렌지색의 점이 찍혔다. 돌이 융해되며 만드는 빛이었다. 그 빛은 지름 1미터 가량의 원을 그렸고 벽은 그 선에 맞춰 떨어져 내렸다. 소녀를 비롯한 사람들의 얼굴은 곧장 굳어졌다. 구멍에서 나온 것은 그들을 마중 나온 구조요원이 아니라 SF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갑질의 카메라였 다. 카메라는 안쪽의 상황을 파악한 뒤 다시 구멍 밖으로 사라졌다. 이어서 외벽이 큰 충격을 먹고 부서져 내렸다. 돌가루가 만든 틴들현상의 커튼 뒤로 곤충의 외양을 가진 거대한 기계덩어리의 실루엣이 보였다. 기계의 양옆에서 굵은 모터소리가 들렸다. 디스트로이어 기관포의 총열이 회전하는 소리였다. ?아아악!?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다른 곳으로 도망치려 애썼다. 그러나 사람들이 대 피한 방은 문이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큰 문이 아니라 사람 두 명이 무리해 서 나갈 수 있는 보통의 문이었다. 그곳으로 몰린 사람들의 모습은 원시적이란 단어를 넘어 아비규환에 가까웠 다. 넘어지고 밟혔다. 다시 일어나고 싶어도 그 위를 덮치는 사람들의 수가 더욱 많아졌다. 기계덩어리, BX-F는 그것을 즐기는 듯 계속해서 기관포의 총열을 회전시켰 다. 회전속도가 늘었다 줄었다 했다. 이것은 유린이었다. AI도 지겨움을 느끼는 것일까. 회전이 줄어들지 않고 빨라졌다. 어느 한도 에 이르자 둔탁한 폭음과 함께 30미리 탄환이 광선처럼 뿜어졌다. 첫 목표 는 완전히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학생들이었다. 탄환이 날아들기 직전, 작은 그림자가 BX-F의 앞을 막아섰다. 그 그림자를 중심으로 대기의 파문이 일어난 것을 사람들은 거의 보지 못했다. 이윽고 기관포 소음이 멈췄다. 소변의 비릿한 냄새가 대피실에 진동했다. 신기하게도 사상자가 없었다. 사람들에게 깔려서 부상을 당한 사람은 있어 도 기관포에 당해 죽은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을 노리고 날았던 기관포의 탄환들은 공중에 멈춘 채 움직이지 않았 다. 오직 탄환에게 주어진 시간만이 멈춘 듯한 광경이었다. 탄환들의 앞엔 양팔을 벌린 채 땀을 쏟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힘 있는 목 소리로 친구들을 위로하던 바로 그 소녀였다. ?미진아!? 소녀의 친구가 소리쳤다. 소녀가 팔을 내리자 탄환들이 낙엽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 하미진은 턱에 맺힌 땀을 교복 소매로 닦으며 쓰린 웃음을 지었다. ?두 번은 힘든데…….? BX-F의 어딘가에 숨겨진 카메라가 미진의 몸을 살폈다. 방금 전 탄환을 막 은 그 파워와 소녀의 신분데이터를 동시에 검색한 BX-F는 몇 초 안되어 상 대방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B급 사이킥커. 위험하지만 가치가 있음. 투항하라.? BX-F의 외부 스피커에서 기계음성이 들려왔다. 미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 었다. ?투항하면 살려줄 거야?? ?당신 외의 인간은 사살한다.? ?그럼 나는?? ?당신은 제네럴 블릭의 생체연구소로 데려가 해부한다. 그것은 죽음이 아 닌 영광이다.? ?그런 영광이라면 거절하겠어.? 미진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 죽으나 나중에 나이가 들어 죽으나 똑같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만용이었 다. 디스트로이어 머신건의 총열이 다시 회전을 개시했다. 추가로 95미리 LRG의 포신까지 움직였다. ?셋의 여유를 주겠다. 그때까지 투항하지 않으면 전력을 다해 당신을 쓰러 트리겠다.? ?좋을 대로 해!? 미진의 전신에서 파란 빛의 아지랑이가 솟아올랐다. 자신의 힘으로 BX-F의 공격을 다시 막아보겠다는 심산이었다. BX-F의 차가운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하나.? ?…….? ?둘.? ?…….? ?셋.? 레일건의 발사음과 기관포의 폭음이 동시에 터졌다. 미진은 눈을 꼭 감은 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아까와 달리 기관포 소리가 그리 길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이 만든 장벽도 충격을 받지 않았다. ?어?? 미진은 눈을 떴다. 보라색의 검이 보였다. 그것은 부채꼴의 잔광 서너 개를 그리다 옆으로 누 웠다. 그것을 든 사람은 붉은 장발의 남자였다. 몸 위에 걸친 회색의 망토 위로 검을 올린 그 남자는 멀찌감치 밀려나 나뒹 굴고 있는 BX-F를 보며 짧게 중얼댔다. ?그리고 넷, 이겠지?? 미진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BX-F가 뚫은 외벽에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바람의 손길은 쏟아지는 화 염처럼 붉게 늘어진 남자의 장발을 흔들었다. 그 밑에서 같이 너울대는 회 색의 망토는 불길을 받치는 성화대처럼 보였다. 햇빛 때문에 뒷모습만이 보이는 게 안타까웠다. 그래도 미진에게 있어서 그 의 뒷모습은 아버지의 경우 이후로 가장 멋있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큰 키와 덩치 때문에 동화 속의 왕자가 될 수는 없었지만(?) 기사는 충분하 고도 남았다. 이제 앞모습만 공개되면 미진의 점수채점은 끝났다. ?어이, 꼬마.? 남자가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흘러내린 붉은 머리 사이로 적동색의 얼굴이 보였다. 길고 짙은 눈썹에 성 숙함이 가득한 눈매가 매력적이었다. 그 밑도 더할 나위없는 균형미를 유지 했다. ?여기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마. 괜히 내 칼에 맞아서 죽어도 난 책임 안 진다. 아니, 귀찮은 나머지 널 베어버릴 수도 있어.? 미진은 채점을 끝내고 결과를 외쳤다. ?100점 이상의 점수는 없는 건가? 아아, 나의 기사님!? ?어이, 안 들리나? 꾸물거리지 말고 거기서 물러서. 귀찮은 꼬마네?? 그 남자, 리오는 계속해서 미진에게 충고를 날렸지만 소녀는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미 정신이 반 쯤 나간 상태였다. ?미치겠군.? 고개를 흔든 리오는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BX-F가 텀블링하듯 탄력 있게 몸을 뒤집고 전투태세를 갖춘 것이다. BX-F의 주포와 기관포, 그 외의 각부가 움찔움찔하며 움직였다. 컴퓨터가 시동 직후 간단한 자기테스트를 하는 것과 같았다. 이상 없음이란 결론에 도달한 BX-F는 앞에 나타난 붉은 물결에 카메라를 고 정시켰다. 예상 밖의 상대에 대한 분석이었다. ?사이킥 능력, 감지되지 않음. 근접전투능력, 미상. 확인되지 않은 전투능 력의 보유자. 위험. 능력측정을 위해선 사건과 시간이 필요함.? 디스트로이어 기관포의 총열이 다시 회전했다. 검을 어깨에 댄 채 BX-F의 기동을 기다리던 리오는 버릇대로 코웃음을 쳤다. ?알았으니 빨리 덤벼라, 장난감. 난 관중들이 너무 많으면 힘을 잘 못 내 거든.? ?근거 없음.? 이어서 기관포가 죽음의 실선을 날렸다. 장갑차의 껍질 따윈 일순간에 걸레 로 만드는 사신의 하수인들이 떼를 지어 리오에게 날아들었다. ?후.? 짧은 웃음소리와 동시에 리오의 모습이 흔들렸다. 보통사람들에겐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가공할만한 속도로 땅을 달리고 있었다. BX-F의 카메라는 그 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사격을 가했으나 탄환이 도달하는 속도보다 리오 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BX-F를 향해 돌진한 리오는 상대와 밀착하자마자 참수 직전의 집행인처럼 검을 높게 들어올렸다. ?죽어라!? 강렬한 수직 베기가 BX-F의 전면에 떨어졌다. 검으로 쳤는데 폭발음이 들렸다. 힘으로만 공격을 한 게 아니라 기까지 잔 뜩 실려 있는 공격이었다. ?큭!? 공격 직후 리오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검이 BX-F의 본체에 닿지 않 고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파문만 일으킨 것이다. ?저번에 본 그 이상한 결계와 비슷한 건가? 빌어먹을!? 그래도 BX-F를 날리기엔 위력이 충분했다. 해머에 맞은 공처럼 뒤로 죽 밀 려나간 BX-F는 멈추자마자 다시 본체 각부에 대한 테스트와 상대에 대한 분 석을 개시했다. ?충격량, 427톤. 이동속도, 마하 1.2. 현재까지 확인된 전투능력… 비교대 상 데이터 검색 불가. 측정불가. 매우 위험. 모든 성능을 발휘할 필요가 있 음.? ?오, 그래? 전력을 다 하겠다?? 리오의 앞에서 보라색의 검광이 춤을 췄다. 약간의 검무로 자세를 바꾼 그 의 눈에선 어느새 붉은 섬광이 도사렸다. ?죽이겠다는 말은 취소하지.? 쿵 하는 폭음이 터졌다. 방금 전의 일격으로 인해 피어오른 흙먼지가 그를 중심으로 하여 천천히 움직였다. 엄청난 기운이 그의 몸에서 느껴졌다. 무술의 자질이 없는 일반인들까지 압 력을 느낄 만큼 강렬한 힘이었다. ?기계니까 죽진 못하겠지? 그러니 박살을 내주마!? 그의 모습이 다시 흐려졌다. 그의 돌진이 시작되자 BX-F가 빠르게 후진했 다. 그러면서 등판의 한 구석으로부터 몇 개의 물체를 쏘아 올렸다. 커다란 알루미늄 캔처럼 생긴 원통형의 물체였다. 깡통은 바닥에 떨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에 무엇인지 모르고 움직이던 리오는 순간 흠칫 하며 땅을 박차고 올랐다. 물체가 폭음과 함께 터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깡통이 있던 곳을 중심으로 반경 200여 미터 내의 모든 물체가 장대비에 맞 은 모래성처럼 부서졌다. 바닥, 가로등, 쓰레기통 할 것 없이 모조리 벌집 이 되며 찢겨져 나갔다. 기로 그 공격을 막은 리오는 착지와 동시에 자세를 바꿨다. 그와 함께 은색 의 비가 주위에 쏟아져 내렸다. ?구슬?? 리오가 본 그대로 그것은 합금제의 구슬이었다. 방금 전 폭발과 함께 사방 으로 튀어나가 파괴를 저지른 장본인이었다. ?그렇군. 깡통에 담겨있던 건 화약과 구슬들이었어. 폭발에 힘입어 튀어나 가니 구슬 하나하나가 탄환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겠지. 저게 지크가 말한 ?클레이모어?라는 병기인가?? 접해보지 못했던 병기에 잠깐 놀랐던 리오는 긴장을 풀려는 듯 고개를 흔들 었다. ?좋아, 재미있어!? 검을 오른손으로 잡은 리오는 왼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가 낀 검은 장갑 의 위로 붉은 색의 도형이 떠올라 빛을 발했다. ?어깨너머로 배워서 완전하진 않지만 장난감을 박살내기엔 충분할 거다! 기념으로 삼아라!? 도형은 이내 불꽃으로 변했다. 리오는 손을 휘감은 불꽃으로 자신의 검을 매만졌다. ?뭐야, 저건?? 미진을 비롯한 구경꾼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상식을 넘어선 광경이 계속 해서 펼쳐지는 탓에 BX-F에 대한 공포는 어느덧 사라져 있었다. 리오의 손에서 흔들리던 불이 검으로 옮겨 붙었다. 검 표면에 기름을 바른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불은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타올랐다. 준비를 마친 리오는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이번엔 불의 잔광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각오해라!? 그가 낮고 빠르게 지면을 달렸다. BX-F는 95미리 LRG와 디스트로이어 기관 포, 클레이모어를 전부 동원해 리오의 전진을 막으려 했지만 좌우로 끊임없 이 움직이는 상대의 기동력은 중력조차 무시하는 듯 한없이 빨랐다. 상대와의 거리가 0이 되자 BX-F는 자동적으로 배리어 필드를 펼쳤다. 리오 는 그것을 기대한 듯 거세게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과 배리어 필드의 충돌 점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방금 전과는 그 성 질부터 확실히 달랐다. BX-F는 또 한번 크게 밀려났다. 리오는 놓치지 않고 즉시 파고들어갔다. ?나를 시험하기에 앞서 네 동력부터 걱정해야 할 거다!? 무자비한 연타가 시작됐다. 전기의 파문과 폭염이 박물관 사방팔방에서 터 졌다. 대전차 미사일을 능가하는 상대의 공격 한 방 한 방은 배리어 필드만이 아 니라 필드 안에 보호되고 있는 BX-F의 동체마저도 조금씩 갉아먹었다. 충격 량이 커서도 그랬지만 전후좌우 가릴 것 없이 공격이 터지니 필드의 회복이 좀처럼 따라가 주지 않았다. 얼마나 두들겨 맞았을까. BX-F의 동체 안쪽에서 파직 하는 소리가 터졌다. 배리어 필드의 기세는 그 것으로 끝났다. 리오의 공격이 BX-F의 동체에 직격했다. 폭발과 함께 장갑이 터져 나가자 리오는 승리를 앞둔 맹수처럼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끝이다!? 전력을 실은 베기가 BX-F의 동체 전면에 떨어졌다. 힘이 너무 과했는지 골프공처럼 튕겨져 나간 BX-F는 공중에서 연쇄적으로 폭발하더니 결국 크게 터지며 고철더미로 변했다. 리오는 마무리로 검을 휘둘렀다. 검 표면에서 타오르던 화염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공포 그 자체? 괴물? 후, 웃기지도 않는군.?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리오는 검을 거두며 중얼 댔다. ?하여튼 저 녀석은 너무 늦다니까.? 그의 모습은 금세 사라졌다. 말을 걸어보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왔던 미진은 그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 고는 실망한 듯 긴 한숨을 쉬었다. ?아아, 저런 류의 사람들은 왜 끝나자마자 사라지는 걸까. 5분이 흐르면 변신이 풀리나??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BSP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상당히 당황스러워 했다. 지크는 특히 더했다. 그는 앞에 떨어진 BX-F의 파편을 툭툭 차며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도와주지 않겠다면서 말을 뒤집는 건 또 뭐야? 진작 이랬으면 경찰들도 덜 죽었을 거 아냐?? 그는 BX-F를 고철로 만든 장본인을 의심의 여지도 없이 리오로 꼽았다. 슈 렌이었다면 근처 기물에 큰 피해를 입히지 않고 처리했겠지만 리오는 그렇 지 않았다. 지크 자신 이상으로 파괴를 일삼는 스타일이었다. BX-F를 파괴하는 것까진 좋았지만 박물관 앞은 완전히 폐허로 변했다. 적어 도 3개월 이상의 수리기간을 필요로 하는 상태였다. ?오해하지 마. 내가 부수지 않았어.? ?아, 그래?? 주위에 있던 BSP들이 모두 그를 바라봤다. 지크가 갑자기 혼잣말을 해버린 것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깜짝 놀란 지크는 헤 웃으며 손을 저었다. 동료들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슬그머니 자리를 옮긴 지크는 머리를 감싸 쥐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누구야! 누가 내 머릿속에 대고 말하는 거야!? ?나지 누구야, 멍청한 놈. 전음도 모르나?? ?리오?? 전음, 그것은 내공을 이용해 자신의 의사를 남에게 전하는 것으로 상당한 수준의 기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실행조차 불가능한 고급기술이다. 챠오 의 할아버지에게 배운 적이 있는 지크였지만 쓸 일이 별로 없었기에 지금까 지 쓰지 않았다. ?너 어디야? 돕지 않는다며?? ?그건 슈렌의 말이지.? ?그, 그런가? 아무튼 다행이네. 너라도 도와주니…….? ?너무 좋아하지는 마. 다른 두 대는 네 힘으로 부서야 돼.? ?뭐? 어째서!? ?내 맘이지.? 지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하늘을 쳐다봤다. 그러다 곧장 표정을 바꿔 벽면 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라는 걸 너도 잘 알잖아!? ?난 너처럼 정의의 사자가 아니라서 그딴 건 잘 몰라. 아무튼 그 장난감 녀석에 대한 걸 말해주지.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너도 무리 없이 녀석을 없앨 수 있을 거야.? ?뭔데?? ?너도 알다시피 녀석은 결계를 치기도 하고 투명하게 변하기도하지. 결계 상태일 때는 쉽게 치지 못할 거야. 내가 전력을 다해 때려도 큰 충격을 입 지 않았으니까. 너와 나의 파괴력 차이를 안다면 어느 정돈지 알겠지?? 지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과 슈렌, 리오 이렇게 셋을 놓고 봤을 때 리오가 내는 파괴력은 둘을 합친 것보다 강했다. 게다가 지크와는 거의 10배에 가까운 차이가 있었다. 기술은 둘째 쳐도 근본적인 힘과 속도의 수준이 너무도 틀리다. 지크가 느낄 때도 괴물이니 이 세계의 사람들이 리오를 봤을 때 슈퍼맨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리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지만 그 결계를 걷어내면 깡통일 뿐이야. 너라도 충분한 충격을 줄 수 있어. 그러니 녀석이 결계를 치기 전에 때려봐.? ?젠장,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녀석이 배리어 필드를 치는 시간은 거의 순식간이라고!? ?그보다 더 빠르면 되잖아. 자신 없나?? ?…….? ?넌 아직 속도 말고는 명함도 못 내밀어. 바꿔서 말하자면 속도 하나는 그 럭저럭 믿을 만 하다는 거지. 잘해봐. 괜히 못한다고 징징대지 말고.? ?내가 언제 징징댔어!? 리오는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어디로 갔거나 말을 않는 것이다. ?재수 없는 녀석.? 한마디 내뱉으며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지크는 꽤 큰 목소리로 말다 툼을 하고 있는 리진, 미진 자매를 볼 수 있었다. 둘의 상황은 이미 그렌이 말릴만한 수준을 떠나 있었다. 주요 쟁점은 미진이 초능력을 사용한 사실이었다. ?쓰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잖아! 넌 몸이 약해서 능력을 오래 사용하지 못 한단 말이야!? ?그럼 친구들이 죽는 모습을 그냥 보고 있으란 말이야? 난 못해! 힘이 있 으면서도 써야 할 때 쓰지 않는 건 비겁한 거라고 아빠가 그랬잖아!? ?그러다 네가 죽으면 어떡해! 그건 허무한 일일 뿐이야!? ?언니도 죽기를 각오하고 BSP일을 하는 거잖아! 능력이 있으니까!? ?죽기를 각오하긴 했지만 죽으려고 일을 하는 건 아냐!? ?언니는 죽는 게 그렇게 두려워? 두렵냐고!? ?당연히 두렵지, 바보야!? 둘의 말싸움은 결국 뜯어말리는 것으로 끝났다. 그렌은 진술을 들어야겠다 며 미진을 먼저 끌어 당겼고 챠오는 말없이 리진을 팔로 감아 반대편으로 당겼다. 그래도 리진의 마지막 공격은 큰 효험이 있었다. ?너, 내가 오늘 저녁부터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해봐! 그 괴물기계한테 당해서! 어디 간 게 아니라 죽어서 말이야! 넌 그 빈 공간을 넌 참아낼 수 있어? 있냐고!? ?…….? 그 말을 끝으로 리진은 순찰차 안에 태워졌다. 그녀를 거의 억지로 밀어 넣 은 챠오는 짧게 한숨을 지었다. ?리진의 집안도 복잡하네.? 구경하던 지크의 옆으로 담배향이 밀려왔다. 말총머리의 케빈이 어느새 옆 에 서 있었다. 담배에 막 불을 붙인 그는 피우는 담배만큼이나 독한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지크, 혹시 리진에게 관심 있어?? ?난 정신감정을 받을 일 없어.? ?후후, 알았어. 그럼 흘리는 것으로 치고 들어봐.? 케빈이 말하려던 것은 지크가 오기 몇 개월 전에 들은 미진에 대한 얘기였 다. ?리진과 미진은 알다시피 살아있는 전설, 김미린 선배의 딸이야. 호랑이는 강아지를 낳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그것처럼 리진과 미진은 강력한 사이킥 능력을 물려받았어. 리진은 키가 175인가 할 정도로 몸집이 크고 운동신경 도 좋지. 그 육체적 바탕 덕분에 김미린 선배를 뛰어넘을 수 있는 사이키커 로서 가능성을 인정받은 상태야. 사이킥 능력도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최 대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거든.? ?그런데 미진은 아니라, 이거지?? ?그래. 잘 아네?? 지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무술의 소질 정도는 가볍게 볼 수 있지. 미진이는 운동을 할 몸이 아니 야. 몸을 유지하기 위한 가벼운 체조는 몰라도 리진이나 챠오처럼 우악스럽 게 움직였다가는 금방 쓰러져 버릴 거야. 뼈대도 약하고 심장이나 폐도 튼 튼하지 않아. 근육도 그렇고… 한마디로 약골이지.? ?음. 네 말대로 미진이는 사이킥 능력을 함부로 쓸 수 없는 몸이야. 그래 서 작년인가, BSP 사관학교 예비명단에서 삭제됐지.? ?…….? ?아, 미진은 자신이 명단에 포함됐다는 사실조차 몰라. 나도 리진에게 들 은 거고. 그런데 문제가 있었어. 리진이 좀 겁이 많은 성격인 것과 달리 미 진이는 장군감처럼 겁이 없었던 거야. 자기 아빠 이상으로 말이야. 게다가 네가 오기 전엔 사고까지 쳤지. 학교 근처에서 발생한 BG사건을 자기가 처 리하겠다며 나섰고 BSP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시민들을 BG들로부터 방어했 어. 대단하지. 대신 미진은 탈진해서 병원에 실려 갔어.? ?허허.? 지크는 황당한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케빈도 웃었다. ?BSP의 사이키커가 되려면 1000PP(Psychic Power)의 사이킥 능력을 10분 이상 발휘할 수 있어야 돼. 그래야 전투에 투입될 수 있지. 미진은 측정해 본 결과 무려 2500PP의 사이킥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어. 리진이 현재 약 4 000PP고 김미린 선배가 약 5000PP였던 것을 생각하면 열 셋 먹은 꼬마치고 대단한 거야. 근데 미진은 1000PP의 능력을 10분 발휘하면 죽어.? 지크는 깜짝 놀랐다. ?죽는다고?? ?응. 운이 좋으면 뇌사고 더 좋으면 탈진이야.? 조금 충격을 받은 지크는 저 멀리서 그렌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미진을 바 라봤다. 그 아이가 BX-F의 디스트로이어 기관포를 막아낸 것은 정말 목숨을 걸고 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눈앞에서 희생당하는 것을 볼 수 없다. 지크도 그런 생각을 가지 고 사는 사람 중 하나다. 그런데 미진이 모르는 한 가지를 그는 알고 있었 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도 알고 있다. 케빈의 얘기는 계속됐다. ?미진도 그걸 알고 있어. 함부로 능력을 발휘하지 않아. 하지만 상황이 벌 어지면 주저 없이 사용하고 말지. 이러니 리진이 그 애를 걱정하는 건 당연 해. 리진은 알고 있거든. 근처의 누군가가 죽었을 때 생기는 그 빈공간이 얼마나 크고 슬픈지 말이야.? ?음…….? 그때 그렌이 팔을 크게 휘저었다. ?2차 방위선이 방금 붕괴됐다! 전원 탑승해! 전경과 육군이 만든 3차 방어 선에 합류한다!? ?예!? 대답한 지크와 케빈은 각자의 차량을 향해 급히 뛰었다. 오토바이에 시동을 건 지크는 출발 전 미진을 다시 쳐다봤다. 가만히 서서 리진이 탄 순찰차를 바라보는 그 소녀의 모습은 상당히 쓸쓸해 보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어이, 리오! 듣고 있다는 거 다 아니까 내 말 잘 들어! 남은 두 대는 내 가 부순다! 하지만 저 꼬마는 네가 맡아! 저대로 집에 들어가게 하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대답은 없었다. 그래도 지크는 주저 없이 오토바이의 액셀을 당겼다. BSP들이 떠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미진은 나지막이 중얼댔다. ?빈 공간이라…….? 그녀는 리진이 한 말을 계속 되뇌었다. 바위에 깊숙이 박힌 말뚝처럼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미진아!? 뒤에서 상당수의 학생들이 미진을 향해 뛰어왔다. 그녀의 반 친구들이었다. 학생들은 끝내기 홈런을 날린 영웅을 얼싸 안는 선수들처럼 무서운 기세로 미진에게 달려들었다. ?아, 이러지 마!? 피할 틈도 없이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미진은 상당히 난처해했다. 하지만 울 며불며 안겨드는 친구들을 매몰차게 밀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네 덕분에 우리가 살았어! 앞으로 네 말이면 뭐든지 다 해줄게!? ?네가 이렇게 대단한 애인 줄은 몰랐어!? ?너랑 같은 반인 게 천만다행이야!? 그런 말을 하는 친구들에게 미진은 아무 말 없이 쑥스러운 웃음만 지어주었 다. 학생들의 감정은 의외의 상황을 당했던 만큼 격앙되어 있었다. 부모의 손을 잡고 박물관을 찾았던 아이들 역시 그랬다. 하지만 어른들은 달랐다. 경찰과 보험회사, 그리고 집에 전화를 하느라 바쁠 뿐, 미진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예 미진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미진은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화를 내거나 친구들에게 억울함을 호소 하지도 않았다. 사실 미진에게 있어서 처음 겪는 상황은 아니었다. 예전에 BG들로부터 시민들을 지키고 입원했을 때 그녀에게 온 감사는 몇 개 의 꽃다발뿐이었다. 이후에도 당시 그녀가 지켜낸 사람들 중 그녀에게 직접 적으로 고마움을 표현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아무튼 일이 끝나고 긴장이 풀리니 생물적인 욕구가 꿈틀댔다.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겨우 그곳에서 빠져나온 미진은 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다. 박물관 내부엔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서 목숨을 버릴 뻔 했으니 아무도 들 어오고 싶지 않을 것은 당연했다. 박물관을 뛰던 미진의 다리가 조금 느려졌다. 초능력을 사용할 때 걸렸던 체력의 부담이 지금 나타난 것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앉을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벽에 기대어 바닥에 앉은 미진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이러고 있으니 방금 전 봤던 어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미진은 무릎사이에 얼굴을 묻으며 힘겹게 중얼댔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만 해줘도 좋잖아.? 아무래도 마음이 상하긴 한 듯 했다. ?저 녀석들은 원래 저래.? 웬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깜짝 놀란 미진은 주위를 둘러봤으나 주위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고대 고구려의 혼례식 의상을 차려입은 밀랍인형들 만이 있을 뿐이었다. ?저런 이기적인 녀석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려고 하다니, 꽤 억울하겠어. 도대체 왜 저 녀석들을 살려주려 한 거지? 그렇게나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싶었나?? ?그런 소리 말아요! 저는 제가 옳다고 생각한 행동을 한 것뿐이에요!? ?아무 대가도 없는데?? ?그런 걸 원하고 한 일이 아니에요! 뭐, 말이라도 들으면 기분이야 좋겠 죠.? ?하지만 저들은 널 구해주지 않을 거야. 네가 그대로 쓰러져서 버둥대도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집으로 가겠지. 어린애들이 떨고 있는데 자기들끼리 만 살겠다고 서로를 밟으며 허둥대던 녀석들이야. 무리가 아니라고. 억울하 지 않나?? ?하지만 제 친구들은 고마워하고 있어요!? 예상치 못한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그거야 친분이 있으니 그렇지. 게다가 애들이잖아.? ?그럼 그 기사님은 뭐죠? 그분도 저랑 아무 관계도 없는데 저를 도와주셨 어요!? ?난 거치적거리는 걸 싫어해. 내가 말했을 텐데? 귀찮게 하면 죽이겠다고. ? ?예?? 순간 미진의 눈앞에 거대한 물체가 떨어졌다. 엉겁결에 소리를 지른 미진은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그쪽은 벽이었다. ?이런, 자세히 보니 완전히 애군. 이래선 재미가 없겠어.? 미진은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봤다. 그는 전에 봤던 그 붉은 장발의 남자 였다. ?기사님??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남자, 리오의 오른손이 미진의 앞에서 빛났다. 그러자 미진의 팔다리가 자 유를 잃고 사방으로 당겨졌다. ?아악!? 공중에 뜬 대(大)자가 되어버린 미진은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움직이려 했으 나 제대로 움직이는 건 목 위쪽뿐이었다. ?이러지 말아요!? 미진은 정신을 집중해 리오를 겨냥했다. 그를 떨쳐내지 않으면 굉장한(?)일 을 당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리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망토자락만이 조금 흔들릴 뿐이었 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네가 가진 염동능력은 나에게 있어서 실바람보다도 못해. 지금은 그냥 봐 줬지만 한번만 더 쓰면 힘을 역류시켜 버리겠어. 의식을 잃고 동물처럼 되 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 리오는 조금 이상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손마디를 풀었다. ?자, 병원놀이를 좀 해보실까.? 그는 미진의 교복 상의를 휙 걷어 올렸다. ?악! 왜이래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이건 도덕적으로 나쁜 짓이에요!? ?시끄러워. 입도 막아버리기 전에 가만히 있어.? 리오는 왼손을 하얗게 드러난 미진의 복부에 갖다 댔다. 남자의 거친 손길이 미진의 신경을 타고 뇌를 자극했다. 생각지도 못한 그 감각에 소녀의 입은 꾹 막혀 비명조차 새어나오지 않았다. ?으, 으윽.?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미진은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온갖 상상을 다 해봤다. TV와 신문, 인터넷상에서 봤던 비도덕적인 사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물론 결과는 모두 좋지 않았다. 하지만 리오의 생각은 많이 달랐다. ?뭐야, 이건?? 그의 손에 전해지는 미진의 기류(氣流)는 상당히 특이했다. 기의 흐름이 어 느 한 곳에 집중되어 쉽게 순환되지 않았다. 피의 흐름으로 치자면 심각한 동맥경화증에 걸린 사람과 비슷했다. ?부모 중 한 명의 몸에 이상이 있었던 건가? 기의 흐름이 비정상적이군.? 기의 흐름을 파악한 그는 시선을 미진의 얼굴에 돌렸다. 소녀는 거의 울다 시피 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분위기가 좀 이상하군.? 그는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미진에게 물었다. ?태어날 때 아버지나 어머니 몸에 이상한 구석이라도 있었나?? ?네?? ?대답해. 안 그러면 네 상상대로 될 거야.? ?아, 알았어요! 좀 기다려 주세요!? 미진은 필사적으로 옛 일을 떠올려봤다. 그러고 보니 한참동안 잊고 있던 모친에 대한 일이 떠올랐다. ?그때 엄마가 아프셨어요.? 미진은 당시에 대한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와 비슷한 스토리를 지크에게 들 은 적이 있던 리오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물었다. ?네 언니라는 사람, 혹시 지크라는 녀석과 동료 아닌가?? ?예? 지크 오빠를 아세요?? ?바보라는 것만 알지.? 리오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에 기를 모았다. 미진은 리오의 손을 통해 복부 에 따뜻한 기운이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뭐하시는 거예요?? ?별 거 아냐.? 리오는 손바닥을 떼고 다섯 손가락으로 복부에 대한 지압을 개시했다. 상복 부에서 하복부까지, 미진의 기가 이상하게 흐르고 있는 모든 부분에 대한 치료였다. ?네 언니라는 사람은 운이 좋아서 멀쩡하게 태어났겠지만 넌 아냐. 당시의 네 모친과 마찬가지로 몇 년 치의 기력과 정신력을 한꺼번에 소모한 사람처 럼 기의 흐름이 뒤엉켜있어. 그것 때문에 체력이 약하고 정신능력 사용 시 체력소모도 큰 거다. 그래서 지금 네 기의 흐름을 정상적으로 돌려놓고 있 는 거야.? ?정말이요?? 미진은 그래도 미덥지 못한 듯 이상한 시선을 리오에게 던졌다. 그래도 방 금 전 앙탈을 부리던 때와 비교해서는 많이 부드러워진 편이었다. 리오는 씁쓸히 웃었다. ?어떤 녀석이 널 그대로 집에 보내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더군. 녀석의 집에서 별 탈 없이 신세를 지내려면 하라는 대로 해야겠지.? ?…….? ?왜?? ?아뇨, 이유가 너무 단순한 것 같아서…….? ?좋을 대로 생각해.? 리오는 미진의 치료에 신경을 집중했다. 뭔가에 진지하게 전념하는 남자의 모습은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리오의 모 습은 그 말 그대로였다. 위치상 그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봐야 하는 미진 의 입장에서 붉은 산발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준수한 얼굴은 감동에 가까웠 다.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너보단 많겠지.? ?애인은 있으세요?? ?그런 거 챙겨줄 시간 없어.? ?시간이 생기면요?? 계속되는 미진의 질문에 리오는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친구 소개시켜달라는 말 안할 테니 가만있어. 치료받기 싫어?? 더 이상 말을 걸었다간 정말 혼날 것만 같았다. 미진은 속으로 꿍얼대며 시 선을 돌렸다. 복부 전체를 감싸고 있는 뜨거운 기운은 곧 온기로 변해 미진의 전신을 타 고 흘렀다. 그래도 덥지 않았다. 오히려 시원한 느낌이었다. 치료를 끝낸 리오는 한숨과 함께 손을 떼었다. ?다 됐어. 가봐.? ?예? 자, 잠깐만요! 저 아직 아픈 데 많아요! 요즘 장도 안 좋고…….? ?다이어트랍시고 굶지 말고 운동을 해.? 리오는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러자 미진의 몸을 잡고 있던 알 수 없는 힘이 풀렸다. 아무 예고도 없이 한 일이라 공중에 조금 떠있던 그녀의 몸은 바닥 에 곤두박질쳤다. ?으악! 너무하잖아요! 풀어주실 거면 미리 얘기를 하셔야죠!? ?너부터 미리 얘기를 하는 게 어때?? ?예?? 리오와 미진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복도 저편을 향해 걷던 리오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네 멋대로 사는 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만 네 주위에 있는 사람들 생 각 좀 해. 넌 죽을 각오가 되어 있을지 몰라도 그들에겐 그렇지 않아. 네 죽음에 대해선 전혀 각오가 되어있지 않지. 목숨 걸고 일하는 사람이 죽은 것과 평범한 학생이 죽은 것 중 어느 쪽이 더 충격적일까?? ?…….? ?어른들은 네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어서 난리를 치는 게 아니야. 걱정이 지. 다만 그 방법에 네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야. 남을 바꾸고 싶다면 너부 터 바꿔봐. 그런 작은 것조차 하지 못하고 대범하게 정의를 논하겠다면 관 두시지.? 리오의 모습은 복도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다음엔 만나지 말자. 난 좋은 상황에선 필요 없는 사람이니까.? 그것으로 그와의 두 번째 만남은 끝났다. 미진은 헝클어진 상의를 바로 했다. 방금 전 언니인 리진과 말다툼을 한 것 이 새롭게 떠올랐다. 정말로 심한 말을 한 것은 언니가 아닌 자신일 것이라 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저녁, 꼭 들어올 거지? 언니야.? 박물관 저편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친구들이었다. 미 진은 멀리 보이는 출입구를 향해 뛰었다. 육군과 경찰이 연합하여 여의도에 구축한 3차 방어선은 예상대로 고전을 면 치 못했다. 헬기로 긴급 공수된 전차와 BF-03들은 건물 사방에 뿌려진 진동 감지기 덕분에 허무하게 쓰러지진 않았지만 변변한 무기가 없는 경찰장갑차 들은 주력을 지키는 바리케이드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군인들과 전경들은 건물 내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총은 통하지도 않을뿐더러 떼로 몰려 나가봤자 클레이모어의 제물이 될 뿐이었다. 상황이 바뀐 것은 BSP들이 합류하면서였다. 지크를 포함한 BSP전원이 3차 방어선에 도착하자 BX-F의 공격이 멈췄다. 격 전을 예상했던 지크는 현재 상황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도망친 것이냐, 기척을 숨긴 것이냐는 것인데 그렌은 아는 한도 내에서 대답해 주었다. ?당연히 전력분석을 위해서 이곳 어딘가에 있겠지. 녀석들의 AI가 무엇을 위해서 움직이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무튼 지금까지 개발된 AI전 투병기 중에선 가장 지능이 뛰어난 것 같아.? ?왜요?? ?보고에 따르자면 녀석들은 자신이 파괴한 전차와 장갑차로부터 탄환을 약 탈했다고 하더군. 이건 역사상 유래가 없는 행동패턴이야. 그리고 전술적인 능력도 좋아. 셋 중 하나를 다른 곳으로 보내서 방어하는 쪽의 전력을 분산 시킨 뒤 2차 방어선을 격파해버렸지. 유인을 맡은 녀석이 예상치 못한 상대 를 만나서 부서졌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3차 방어선도 위험할 뻔 했어.? ?음.? 지크는 주위를 돌아봤다. 사방에 깔린 고층빌딩들 사이에 이상한 공기가 흘렀다. 감각이 미치는 반경 안에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두루뭉술했다. 어 둠이 깔린 공간 저편에서 짐승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무엇이 자신을 향 해 수군거리는 것만 같은 그런 불쾌한 느낌이었다. ?그 기계 녀석만 있는 것 같지가 않아. 누군가 날 계속 지켜보고 있는 느 낌이야. 오늘 내 컨디션이 안 좋은 건가??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지크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주위에 신경을 쓰는 것과 달리 챠오는 본부를 출발할 때부터 지크를 주시하고 있었다. 처음엔 지크와 마찬가지로 희미한 느낌에 불과했으나 여의도에 4차 방어선 을 구축했을 때, 그리고 중앙박물관으로 긴급출동을 했을 때 그 느낌은 확 실해졌다.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계속해서 자신들을, 아니 지크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녀가 그 사실을 눈치 챈 것은 인영이 움직이는 각도의 중심에 항상 지크 가 있다는 사실이 확실해지면서였다. ?젠장, 엿 같군.? 지크는 거칠게 투덜대며 발길을 돌렸다. ?잠깐.? 챠오가 그를 불러 세웠다. 지크에게만큼은 절대 말을 걸지 않는 그녀가 그 랬기에 지크 외의 사람들까지 움찔하며 하던 일을 멈췄다. ?나?? 지크가 엄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확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지 못할 상황 이어서였다. 챠오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오른쪽 위. 보험회사 건물 옥상.? 들릴까말까 한 작은 목소리였다. 지크는 딴청을 피우며 앞에 보이는 건물에 눈을 돌렸다. 거울 같은 건물의 유리를 통해 보인 반대편 건물 옥상엔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옥상 구조물에 몸을 반쯤 숨기고 있어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체형과 긴 머리를 봤을 때 여자가 틀림없었다. ?여자인가? 여자 맞지?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던 거야?? ?출발할 때부터.? ?뭐? 그럼 우릴 계속 따라다녔단 말이야?? ?정확히 너.? ?나? 그걸 어떻게 알았어?? ?네 시야만 철저히 피하고 있어.? ?…….? 둘의 대화는 다른 사람들에게 거의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며 묻고 싶 어도 분위기가 하도 진지해서 섣불리 접근할 수도 없었다. 가장 신경을 쓰는 사람은 리진이었다. ?저 둘, 얼마나 같이 있었죠?? 그 질문에 그렌은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1년이지.? ?같은 집에서요?? ?그렇지. 처음엔 사이가 꽤 좋았다나봐. 챠오 성격도 원래는 저렇지 않았 는데 지크가 다음 훈련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챠오네 집을 떠난 이후 바뀌었 다는군.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왜??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리진은 대화가 끝난 직후 전의가 가득 실린 몸짓으로 팔짱을 꼈다. 그렌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은 채 지크를 바라봤다. ?저놈도 미래가 피곤하겠군.? 그의 고민거리는 얼마 못가 바뀌었다. ?그나저나 BX-F는 뭘 하고 있는 거지? 우리가 도착한지 10분이 넘도록 움 직이지 않고 있잖아? 루이, BX-F가 이동한 흔적이 있는지 확인해줄 수 있나 ?? 그의 귀에 내장된 통신기에서 반응이 왔다. ?현재 상황으로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뭐? 무슨 말이야?? ?현재 대한민국 BSP전용 다목적 위성이 해킹에 의한 정보장애에 빠져 있습 니다.? ?해킹이라고?? ?그렇습니다. 위성의 자체 방어프로그램 기동으로 인해 현재 그 어떠한 정 보라도 교환이 불가능합니다. 이 상황은 수도방위지부 뿐만 아니라 대한민 국 BSP 전체가 해당됩니다. 하지만 비상시이니 만큼 허가가 있다면 임기응 변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루이가 말한 임기응변이란 것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던 그렌은 곧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런 뒤 루이와의 1:1회선으로 통신을 바꿨다. ?좋아, 시작해줘.? ?맡겨주십시오.? 본부의 루이는 베스의 버추어 디스플레이를 향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 다. 그녀의 눈앞에 거대한 건축물의 도면과도 같은 입체도형이 떠올랐다. 그 도 형의 앞엔 제네럴 블릭이란 영문자가 문지기처럼 버티고 있었다. ?최고레벨의 파이어 월(방화벽: 보안프로그램) 시스템… 역시 제네럴 블 릭. 하지만 그 뿐이지.? 양쪽에 위치한 개별키보드의 위에서 루이의 손가락이 바삐 움직였다. 주관제실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처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시작했군.? BX-F의 제작사인 제네럴 블릭에 대한 해킹은 사건발생 직후 루이가 몇 번이 고 건의한 사항이다. BX-F가 제네럴 블릭의 위성을 통해 각종 정보를 얻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선 제네럴 블릭의 위성에게만큼은 위치를 알려야 하니 괜히 레이더로 고생을 하며 찾는 것 보다는 위성을 해킹하는 것이 나을 거라는 얘기다. 하지만 처크는 반대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선 약 1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니 네가 날 장기에서 이기지 못하는 거다, 루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네럴 블릭은 제품시연회를 하기 위해서 BX-F 세 대를 대한민국에 들여 왔어. 그리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폭주를 일으켰지. 이건 제네럴 블릭의 입장에서 봤을 때 최고의 호재야. 왜냐하면 그들의 제품이 폭주한 곳은 군 사력 세계 5위에다가 가장 강력한 BSP가 존재하는 땅이니까. 만약 우리 BSP 와 군대 모두가 BX-F를 막지 못했다고 가정하자. 그건 전 세계적으로 이슈 가 될 것이고 그와 동시에 BX-F의 강력함 역시 알려지게 되지.? ?그렇다면 제너럴 블릭에서 일부러 이번 일을 계획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계획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 맞겠지. 확실한건 우리 위성이 위치를 알 수 없는 고급 해커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공격의 목적이 위성의 완벽한 해킹이 아닌 방어프로그램 기동에 있다는 것이야.? ?그렇다면 자신들에 대한 해킹까지 대비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현재 BX-F의 위치를 가장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제네럴 블릭의 BX시리즈 관리 위성 뿐이니까요.? ?맞아. 그러니 아직은 해킹하지 않는 게 좋아. 그건 마지막 일격을 날릴 카드로 남겨놔야겠지.? 그리고 그 카드를 뒤집을 시점이 바로 지금이었다. 같은 시각, 제네럴 블릭의 본사 중앙통제실에선 한 일본인 노인이 구석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며 체스게임을 하고 있었다. 정규직원들은 그 게스트 멤버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 노인이 하는 것이라곤 구질구질한 노트북으로 체스게임을 하는 것과 자 판기의 커피를 소비시키는 것, 그리고 금연지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뿐이 니 불만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반발하는 직원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 노인이 회장 권한으로 중앙통제실에 들어온 것은 물론 BX-F의 AI를 단 몇 주 만에 완벽 히 설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노인, 와카루 박사의 노트북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가 이어폰을 연결 한 덕분에 다른 사람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노트북 모니터의 구석에 귀여운 디자인의 원숭이가 나타났다. 원숭이는 화 가 난 듯 씩씩대며 공중재비를 돌았다. 그것을 본 와카루는 자기 주위에 있는 통제실 직원들을 흘끔 훑어봤다. ?역시나 얼간이 녀석들이군. 해킹이 있을 거라고 분명히 얘기를 했는데 농 땡이나 부리고 앉아있다니, 쯧쯧.? 그는 체스게임의 메뉴를 열어 간단한 조작을 했다. 그러자 체스 말이 놓이 는 가상의 판이 적색과 검은색으로 물들어 호전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자아, 대한민국 BSP의 해킹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볼까? 기계성능만 믿고 덤볐다간 망신만 당할 걸세.? 그의 키보드 조작이 급속하게 빨라졌다. 그래도 신경을 쓰는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와카루의 미소로 가득한, 하지만 즐겁진 않은 얼굴이 맘에 들지 않 아서였다. 해킹을 개시한 BSP본부의 루이는 움찔했다. 제네럴 블릭의 중추시스템 방화 벽을 거의 돌파해가는 시점에서 이상한 프로그램이 자신의 프로그램을 가로 막은 것이다. 처음 보는 프로그램이었다. 뭔가 원시적이면서도 투박했으나 매우 훌륭했 다. 특정 기업에서 방어용 프로그램이랍시고 내놓은 소프트웨어와는 차원이 틀렸다. 루이는 공격소스를 몇 차례 바꾸고 새로 재조합해봤지만 방어프로그램은 꿈 쩍도 하지 않았다. 공격의 성질이 바뀌면 방어프로그램의 성질 역시 틈을 주지 않고 바뀌었다. ?암호나 역추적에 의존하는 수동적 방어프로그램이 아니야. 능동적이야.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내 공격에 대응하고 있어. 도대체 누가 만든 프로 그램이지?? 루이는 작전을 바꿨다. 뭘 해도 통하지 않으니 가만히 있어보기로 한 것이 다. 그러자 방어프로그램이 전진해왔다. 이번엔 BSP 메인컴퓨터의 방어프로그램 이 하나 둘씩 파괴당했다. 루이는 방어벽 사이에 재빨리 미끼를 던졌다. 성질이 완전히 다른 다섯 개 의 얇은 벽을 원래의 벽 사이에 배치시킨 것이다. 공격성질이 맞아 떨어지 면 파괴당하고 틀리면 빗겨나가는 특별한 소스였다. 이윽고 다섯 개의 미끼 중 하나가 파괴당했다. 그 즉시 자신만의 방어프로 그램을 가동시킨 루이는 결과를 보고 허무해했다. ?C언어라고? 설마 내 공격프로그램을 하나하나 수학적으로 계산해서 푼 다 음 막았단 말이야? 이건 프로그램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리고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P2P(Peer to Peer: 사용자 대 사용자)……? P2P 방어프로그램이라고?' 상대방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이다. 루이가 본 방어프로그램은 전자공간 에서 존재하는 상대방의 분신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루이는 다시금 공격을 감행했다. 방어프로그램, 아니 상 대방도 방향을 바꿔 루이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주력했다. 상대방의 실력은 가히 엄청났다. 어떤 머신을 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실력 만으로 따지자면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고도 남았다. 루이가 맞상대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사용하는 컴퓨터, 베스의 압도적인 성능 덕분이었다. ?저쪽에서 내 프로그램을 분석해서 깨는데 걸리는 시간은 20초 내외… 나 와 비슷해. 520테라(1조) 헤르츠의 CPU 다섯 개로 돌아가는 이 베스와 맞먹 는 머신을 사용하는 건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베스의 성능은 단일머신 으로는 최고야. 그렇다면 실력차이인가?? 이대로 가다간 끝이 없다. 최악의 경우 BX-F가 진동감지기의 탐지범위를 벗 어나서 다른 곳으로 고속 이동하여 후방을 칠 수도 있다. 루이는 점차 초조해졌다. ?장기랑 비슷해. 저쪽과 이쪽 중 누구의 머리가 더 뛰어나느냐에 따라 승 패가 바뀌는 거야. 하지만 시간이 없어. 어쩌지?? 그때 루이의 머릿속에 BX-F의 모습이 떠올랐다. 전투요원들은 치를 떨고 있 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루이에게 있어서 복덩이였다. ?이제부터 나와 베스가 보여줄 마법을 즐겁게 감상해봐, 해커씨.? 베스의 버추어 디스플레이가 두 개로 나뉘었다. 그에 맞춰 루이의 양손이 제각각 움직였다. 움직임이 어찌나 다른지 마치 한쪽 손에만 귀신이 들린 것처럼 보였다. 주관제실의 모두가 루이에게 집중했다. 오퍼레이터들은 믿을 수 없다는 얼 굴이었고 처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다, 루이. BSP의 최고기밀이 담긴 UN의 중앙컴퓨터를 해킹한 것 도 바로 그 기술이었지. 일명 더블 스펠… 2중 주살(二重 呪殺)!?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루이의 방어프로그램이 차츰 밀렸다. 반면 루이와 1:1 대결을 하고 있는 와 카루는 여유가 있었다. ?허허, 그럼 그렇지. 이 게임에서 날 이길 순 없다네, BSP양반. 난 장기에 선 누구에게도 져본 일이 없거든. 그럼 마무리를 해주지.? 와카루의 주름진 손이 키보드를 탄력 있게 두드렸다. ?체크메이트.? 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흘렀다. 동시에 상대방의 장기 말이 화면상에서 모조리 사라졌다. 프로그램 해체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화면 구석의 원숭이가 사라지고 BSP의 마크가 떠올랐 다. 그것도 모자라 사라졌던 상대방의 장기 말이 외통수의 위치에 다시 나 타났다. 와카루의 얼굴이 단숨에 변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그가 당황하는 사이 그의 장기 게임이 사라지고 커다란 메시지가 대신 떠올 랐다. ?이건 체스가 아니다, 룰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이런 젠장.? 와카루는 실소와 함께 무릎을 쳤다. ?간단한 AI를 만들어서 가짜 프로그램을 움직이게 하고 자신은 진짜를 움 직여 내 뒤를 파고들었다 이건가? 그 사이에? 허허, 한사람이 했다면 이거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군. 양손으로 각기 다른 프로그램을 돌리거나 프로그래밍 할 수 있어야 할 테니까. 하하하하.? 와카루는 웃으며 다른 프로그램을 기동시켰다. 그러자 제네럴 블릭의 중앙 통제실의 전원이 단번에 꺼졌다. 무사한 컴퓨터는 와카루의 노트북뿐이었 다. 직원들 사이에선 대 혼란이 벌어졌다. 해킹을 당했느니 어쩌니 하며 그들이 날뛰는 사이에 와카루는 한숨을 쉬며 담배를 물었다. ?이제 내 아이들의 힘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군.? 한편 BSP가 참가한 3차 방어선에선 두 번의 총성이 터졌다. 케빈이 루이로 부터 BX-F의 위치정보를 받자마자 대전차용 램제트 라이플을 당긴 것이다. 탄환이 박힌 곳은 고층건물의 유리창이었다. 군경들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BSP들은 전투준비를 마치고 적이 나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두 개의 거대한 물체가 케빈의 탄환이 꽃인 건물외벽을 뚫고 공기 중에 나왔다. BX-F였다. 두 보행전차는 건물파편과 함께 지면에 착지했다. 말끔하던 외관엔 램제트 라이플에 당한 것으로 보이는 작은 흔적이 생겨있었다. BSP를 포함한 전 부대의 포격이 BX-F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BX-F의 배리어 필드를 뚫기엔 역부족이었다. 포격이 잠시 주춤한 사이 BX-F가 건물 외벽을 향해 도약했다. 그 속도는 상 당히 빨랐다. 게다가 여섯 개의 다리를 건물 외벽에 박아 곤충처럼 벽을 탔 다. BX-F가 지나간 건물의 벽은 총에 맞은 듯 완전히 부서졌다. 전차의 무게를 지탱해야 하는 만큼 벽을 파고드는 BX-F의 다리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러니 비바람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일반건물의 외벽이 그 힘을 견딜 리는 없었다. 군경의 사격은 시속 6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움직이는 표적을 맞출 수 없 었다. 애꿎은 건물만 부술 뿐이었다. 가장 효과 있는 공격은 케빈의 사격이 었지만 BX-F의 카본파이버 장갑은 램제트 라이플의 탄환을 훌륭히 방어해냈 다. ?뭐 저런 경우가 다 있지?? 케빈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은 BX-F에게 한 것이 아니다. 벽에 붙은 기계를 쫓아 그 이상의 속도 로 벽을 달려 올라가는 존재에게 한 말이다. BX-F를 앞질러 더 높은 곳으로 간 지크는 자신이 계산한 거리에 상대가 들 어오자마자 공중으로 점프했다. ?떨어져!? 그의 강력한 공중수직차기가 BX-F의 배리어 필드에 꽂혔다. 방어벽을 뚫기 엔 한참 모자랐지만 벽에 붙은 상대를 떨어뜨리기엔 충분했다. 바닥에 거꾸로 떨어진 BX-F는 아스팔트를 뚫고 지하도에 처박혔다. 지크를 포함한 모두는 꽤 큰 충격을 줬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상대는 곧장 몸을 뒤 집고 튀어나와 반격을 준비했다. 배리어 필드가 땅에 떨어질 때의 충격을 막아준 덕분이었다. ?이런!? 지크의 등판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는 땅에 있을 때와 달리 공중에선 중력 의 이끌림을 받아 떨어지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지크를 디스트로이어 기관포가 여지없이 노렸다. 우렁찬 소음과 함께 적황색의 빛줄기들이 하늘로 뿜어져 나왔다. 지크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양팔을 뻗었다. 무형의 구(球)가 그의 몸을 중심으로 퍼져나가 쏟아지는 탄환들을 튕겨냈다. 발경(發勁)이었 다. 지크의 기합이 밀어낸 것은 탄환만이 아니었다. 주위의 공기까지 갑자기 밀 려나가는 바람에 양쪽에 위치한 건물의 유리창마저 부서졌다. 가까스로 지상에 안착한 지크는 급히 건물 옆으로 숨었다. BX-F는 엄폐물이 있건 말건 그가 있는 곳을 향해 기관포를 계속 쏘아댔다. 30미리 철갑탄이 라면 민간건물의 콘크리트 정도는 몇 초면 부술 수 있기 때문에 나오는 행 동이었다. ?무식한 놈!? 건물이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지크는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 그의 몸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어라?? 마취제에 맞은 사람처럼 주저앉은 지크는 아차 하며 기를 집중했다. 방금 전 무리하게 발경을 쓰느라 몸의 기가 꼬였고 그 때문에 힘이 빠져버린 것 이다. 지크가 기를 정돈하는 사이에도 BX-F의 공격은 끊임없이 계속됐다. 벌써 몇 개의 벽을 돌파한 탄환들은 앞으로 몇 초 후면 지크의 머리와 몸에 도달할 것이다. ?모두 움직여!? 그렌의 어깨에 장비된 바주카포가 불을 뿜었다. 그에 맞춰 케빈도 램제트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겼다. 상대가 공격을 위해 필드를 걷은 지금이야말로 기회였다. BX-F는 공격을 멈추고 필드를 전개했다. 간발의 차이로 포탄과 탄환을 피한 기계괴물은 둘의 공격이 잠깐 멈춘 틈을 이용해 클로킹 이펙트를 발동시켰 다. 부웅 하는 소음과 함께 BX-F의 모습이 지워졌다. 들리는 것은 BX-F의 빠른 발자국소리뿐이었다. 그 사이 다른 BX-F는 전력을 다해 군경의 방어선을 녹다운 시켰다. 거의 쓰 지 않던 95미리 LRG도 몇 발이나 쐈고 클레이모어는 거의 뿌리다시피 했다. 기관포 역시 탄환을 아끼지 않았다. BSP들이 도착하기 전까진 보이지 않던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BSP본부도 급박하게 돌아갔다. ?잠자는 사자의 콧수염을 건든 격이군.? 처크는 쓴맛을 다셨다. 지금까지 나온 인공지능병기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똑같은 전투능력을 발 휘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런데 그 상황이란 것이 지형이나 기상조건 같이 비 교적 단순한 상황으로 맞춰져 있을 뿐, 갑작스런 보급중단이나 적의 기습, 포위에 의한 고립 같은 갑작스러운 위기에 대해선 능동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BX-F는 달랐다. 상대방의 전력이 대수롭지 않을 때는 물자의 소비를 최소화 하여 싸우다가 적 지원군의 등장과 위성사용불가라는 위기상황에 빠 지자 100%의 능력을 발휘하여 전투에 임했다. 다시 한번 제네럴 블릭의 네트워크를 해킹하여 BX-F를 불리한 상황에 빠트 릴 수는 없었다. 루이의 해킹이 성공하자마자 제네럴 블릭의 모든 네트워크 의 전원이 꺼져버린 것이다. 잠깐이나마 BX-F의 위치를 알아낸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이젠 힘과 힘의 대결뿐인가? 2035년 치고는 원시적이군.? 처크의 걱정은 더욱 깊어졌다. 지크가 다시 움직이게 된 시점은 군경의 방위선이 괴멸되기 직전이었다. 겨 우 몸을 추스른 그는 날렵한 몸짓으로 BX-F를 향해 돌진했다. ?네놈의 상대는 나다!? 경찰장갑차를 부수던 BX-F는 지크를 감지하자마자 배리어 필드를 전개했다. 지크는 방어벽이 구축된 것을 알면서도 주먹을 날렸다. 자신의 공격이 과연 어디까지 통하나 궁금해서였다. 이윽고 두 물리력이 충돌했다. 지크 쪽에 힘이 꽤 실렸음에도 불구하고 BX-F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배리 어 필드 역시 약간의 파문만이 일어날 뿐이었다. ?빌어먹을!? 지크는 자신의 힘이 만들어낸 반동에 못 이겨 뒤로 넘어졌다. 오른손이 욱신댔다. 골절까지는 아니었지만 결코 멀쩡하다고는 할 수 없었 다. 처음 맛보는 배리어 필드의 감각은 단단하면서도 무엇이든 튕겨낼 수 있는 탄력 그 자체였다. ?리오 녀석, 이 괴물을 어떻게 부순 거야!? 리오도 배리어 필드에 대해선 단단히 경고를 했었다. 그러나 지크가 기억하 는 것은 리오가 BX-F를 고철로 만들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피해!? 그렌이 소리쳤다. 지금의 지크는 식탁에 놓인 음식처럼 무방비상태였다. 만 약 BX-F가 그대로 공격을 가한다면 지크는 최소 사망이었다. 그러나 물러난 쪽은 BX-F였다. 뒤로 빠르게 후진한 BX-F는 배리어 필드를 걷고 동료와 마찬가지로 클로킹 이펙트를 발동하여 몸을 숨겼다. ?어라?? 당연히 공격이 들어올 줄 알았던 지크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재빨리 동료들에 게 돌아왔다. 혼자서는 이기기 쉽지 않은 상대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 이다. 그렌은 건물 사이에 숨어 바주카와 기관포의 탄약을 보충했다. 그 사이에도 몸에 장치된 모든 센서를 동원해 BX-F의 색출을 잊지 않았다. 그의 옆으로 달려온 지크는 양손을 모으고 기를 모았다. 방어와 공격을 한 차례씩 한 덕분에 그의 기력은 상당히 고갈되어 있었다. ?그 녀석, 저를 왜 공격하지 않았을까요?? ?나야말로 궁금해.? 그렌은 박스처럼 생긴 기관포 탄약통의 뚜껑을 닫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한 어떤 위험인자를 느꼈나보지. 그게 아니라면 물러나 숨을 이유가 없어. 아무튼 너로선 다행이야.? ?위험인자?? 지크는 리오와 슈렌을 떠올렸다. 하지만 둘은 가능성이 없었다. 살기와 위압감, 육신을 가지지 못한 기계들은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감각이 다. 반면 사이보그, 예를 들어 뇌와 척수가 존재하는 그렌은 느낄 수 있다. 슈렌이 싸우는 건 본 일이 없어서 모르지만 리오는 공격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시점부터 방대한 살기를 뿜는다. 보통사람이 접촉하면 그냥 주저앉을 수준이었다. 만약 둘이 공격을 하려 했다면 BX-F보다는 지크 자신이 먼저 느꼈을 것이 다. ?지크, 듣고 있나?? ?아, 예.? 그렌이 무슨 말을 한 듯 했다. 지크는 멋쩍어했고 중년 사이보그는 한숨을 쉬었다. ?다시 말해줄 테니 잘 들어. 현재 적의 최대 강점은 배리어 필드라는 역사 상 최고의 방어 장비를 가지고 있다는 거야. 하지만 그 장비에도 약점은 있 어. 뭔지 아나?? ?공격할 때는 펼치지 못한다는 거죠.? ?맞았어. 그래서 말하는 건데, 미끼가 되어줄 수 있겠나?? ?미끼요?? ?그래. 미끼이자 마지막 일격을 날릴 탄환이지.? 그렌은 눈짓으로 건물 저편을 가리켰다. 반대편 건물의 뒤에 리진과 챠오가 숨어있었다. ?아까 박물관에서 미진이 한 일, 들었지? 그 정도는 리진이라면 간단하게 할 수 있어. 그 보다 더한 일도 가능하지.? ?…….? ?이번 작전이 성공하면 한 대는 부술 수 있어. 그리고 성공하기 위해선 네 능력이 꼭 필요해. 어때, 해보겠나?? 지크는 주저 없이 엄지를 내밀었다. ?당연하죠. 주연을 마다하는 배우는 없잖아요? 작전설명이나 해주세요.? ?좋아.? 그렌의 설명이 시작되는 한편으로 근처의 건물 옥상에선 두 남자의 대화가 있었다. 기척을 최대한 숨긴 리오와 슈렌이었다. 리오는 지크와 그렌, 리진, 챠오, 그리고 건물 내부에 숨은 케빈의 위치를 보며 중얼댔다. ?저 녀석들, 뭔가를 꾸미는 것 같군. 발악이라도 하는 건가?? ?아니, 훌륭한 작전이다.? 슈렌은 다른 곳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지크의 동료 중 한 명은 상당한 수준의 염동능력을 가지고 있지. 너와 만 난 아이와 비교해서 몇 배는 될 거야. 그녀의 능력을 이용한다면 가능성이 있어.? ?그래? 하지만 그래봤자 한 놈만 부술 수 있을 텐데?? ?그게 문제긴 하지만 의외의 변수는 있어.? ?저 여자 말인가?? 리오의 시선이 슈렌과 같은 쪽으로 맞춰졌다. 반대편 건물의 옥상엔 갈색머리의 여성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지상을 바라 보고 있었다. 예전과는 달리 리오와 슈렌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 했다. 항상 감은 듯 만 듯 한 슈렌의 눈도 지금은 작게나마 벌어져 있었다. 잔뜩 집중된 그의 짙은 갈색의 눈동자는 세공된 보석처럼 빛을 발했다. ?지크나 그 외의 사람들은 마력을 감지하는 능력이 없어서 그녀의 존재를 몰랐겠지만 저 기계는 그렇지 않아. 마력을 느꼈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머 리 위에서 갑작스런 입자가속(粒子加速)이 일어나는 걸 느끼고 위험하다 판 단했겠지. 아무튼 저 여자, 상당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아아, 나도 놀랐어. 3급의 뇌격(雷擊)계 마법을 순식간에 발동시키더군. 저건 나도 못하는 일이야. 도대체 누구지?? 슈렌은 대답대신 자신의 기척을 더욱 죽였다. 리오 역시 마찬가지로 기를 죽이고 아래쪽을 바라봤다. ?어쨌든 재밌어지는군. 잘 해봐라, 바보 지크.? 그러나 기대를 하고 있던 리오의 표정은 일순간 뒤바뀌었다. ?저 바보가 뭘 하는 거지?? 건물에서 빠져나온 지크는 도로중앙선을 향해 걸어갔다. 은폐물을 거치거나 속도를 높여서 가는 게 아니라 거리를 걷는 사람처럼 바지주머니에 손을 꽂 은 채 천천히 가고 있었다. 멈춘 뒤엔 중앙선 위에 가만히 서있었다. 이것은 자신을 표적으로 삼으라는 광고나 다름없었다. 그 위험한 상황 속에서 지크는 그렌이 말해준 작전설명을 떠올렸다. ?녀석은 네가 상대라면 분명 리니어 레일건을 이용한 저격으로 나올 거다. 디스트로이어 기관포는 발사를 위해선 총열의 회전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 이면 네가 충분히 피할 수 있기 때문이지. 넌 레일건을 피하면 돼. 그러면 리진이 배리어 필드가 전개될 공간에 자신의 힘을 밀어 넣어 필드전개를 막 아줄 거야.? 작전은 대강 이랬다. 설득력 있는 작전이긴 했지만 지크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나보고 95미리 LRG를 피하란 말이야? 농담이겠지. 녀석의 발사속도는 초 음속이라고. 탄 자체를 피하는 건 가능할지 몰라도 탄환이 몰고 다니는 충 격파에 휘말려서 몸이 날아갈 수도 있어. 다음 공격을 위해 움직이기 힘들 어진다구.? 초음속으로 움직이는 물체는 일단 공기의 저항을 이겨내야 한다. 어떤 물체 든 이동을 하기 위해선 공기를 해쳐나가야 하는데, 사람이나 동물의 이동 같은 낮은 속도에선 그 저항이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고속에선 무시할 수 없는 벽이 된다. 물체가 초음속으로 이동하면 물체에 밀린 공기는 극한으로 압축되고 결국 폭발하게 된다. 그로 인해 발생한 충격파는 물체의 크기가 클수록, 속도가 빠를수록 위력이 더해진다. 지크가 걱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굳게 팔짱을 꼈다. ?하지만 녀석의 클로킹을 막을 만한 장비가 없는 지금으로선 그 이상의 적 당한 방법이 없어. 그럼 어쩌지? 이대로는 날아갈 뿐이야.? 상대의 공격을 피한 직후 반격을 날릴 수 있는 방법. 그것을 생각하던 지크 는 이윽고 뭔가 결론에 도달한 듯 허리의 무명도를 풀었다. ?밤송이를 까라면 까는 거지, 뭐.? 씩 웃은 그는 무명도의 칼집을 왼손으로 굳게 거머쥐었다. 발도자세였다. 피하라는 것만 요청했던 그렌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동료들도 마 찬가지였다. 그렌은 즉시 통신기 버튼을 눌렀다. ?뭘 어쩌려는 건가? 피하면 된다고 했잖아! 공격은 케빈이 맡을 거다!? ?제가 마지막 일격을 날릴 탄환이라고 해놓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피하면 공격을 못하잖아요. 전 탄환이 가져온 충격파에 휘말려서 날아가 버 릴게 뻔하다고요.? ?그러니까 뭘 어쩌려는 거냐고 묻지 않나!? ?베어내는 거예요, 충격파까지.? ?뭐?? ?탄환도 베어본 적 있어요. 걱정 말고 통신이나 끊어주세요. 집중이 안 되 니까요.? ?이봐, 지크! 그건 무모해! 듣고 있나, 지크!? 지크는 통신기 스위치를 내렸다. ?그 고철들은 내가 부순다, 라고 호언장담했어요. 속도 외엔 그 엉터리 형 제들에게 명함도 못 내미니 속도로 처리하는 게 뭔지 보여줘야죠.? 지크의 오른손이 재킷 주머니로 향했다. 그가 꺼낸 것은 오토바이를 탈 때 쓰는 고글이었다. 그것을 눌러 쓴 지크는 눈을 감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겉으로 봐서는 모르 지만 지금 지크는 그만의 재주를 사용하고 있었다. ?지크, 도대체 뭐하는 거야?? 리진의 눈썹이 불균형하게 일그러졌다. ?바람을 읽고 있어.? 챠오가 대답했다. 리진의 어깨가 들썩였다. ?바람?? ?응.? 챠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가 조부님과 친지들 앞에서 몇 번 시범을 보인 적이 있어. 공중에 무 작위로 구슬을 띄워도 그 개수와 위치를 정확히 맞추지. 그래서 바람을 읽 는다고 하지. 단,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하지 못해. 그리고 집중하는데 시 간이 오래 걸려.? ?그, 그래?? 리진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엔 지크에게 접근조차 안하면서도 그가 하는 일은 모두 알고 있다. 표 정이나 걸음걸이만 봐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맞춘다. 리진은 그런 챠오의 모습에 왠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에게 챠오가 과묵한 시선을 던졌다. ?집중해.? ?아, 응!? 한편,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지크의 감각이 신호를 보냈다. 사람들은 눈을 감으면 암흑을 본다. 하지만 지크의 경우 지금처럼 바람을 읽는 상태에선 하얀 색의 물결이 넘실된다. 그 바람의 신성한 움직임을 방해하는 무언가가 저편에 있었다. ?커다란 관이 움직인다. 레일건의 포신인가? 역시나 나에게 돌리는군. 좋 아, 보인다. 정면이다.? 지크는 더욱 집중했다. ?전방 247미터. 높이 31미터. 건물 옥상인가? 아냐, 옥상에 설치된 대형전 광판 위다. 좋은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구나, 고철 녀석.? 그의 오른손이 무명도의 자루 위에서 꿈틀댔다. ?한번에 벤다. 속도에서 밀리면 안돼. 밀리면 칼날을 안은 채로 나한테 박 힌다!? 순간 쾅 하는 폭발음이 터졌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그리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하얀 연기로 이뤄진 도넛의 물결이 거리 한가운데에서 흘렀다. 공기의 벽이 뚫린 것이다. ?빌어먹을!? 바닥에 쓰러진 지크는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붉은 재킷은 등판이 절반 이상 찢어져 있었다. 공기라는 거대한 괴물 에게 잡혀 뜯긴 자국이었다. ?젠장, 한 대가 더 있다는 사실을 잊었어! 하필이면 건물 안에 숨을 게 뭐 야!? 지크가 발견한 BX-F는 바람이 가르쳐준 대로 건물의 대형전광판 위에 있었 다. 그리고 나머지 한대는 바람이 통하지 않는 건물 내부에 숨어있었다. 특 수임무용 레이저 절단기로 벽을 조각내고 내부에 잠입한 것이다. 지크는 최대한 빨리 몸을 추슬렀다. 이대로 있다간 다른 BX-F의 공격에 희 생될 뿐이었다. ?다시 한번 가르쳐줘, 제발!? 눈을 감은 그의 앞에 다시금 바람의 흐름이 보였다. ?이거야!? 지크의 오른손이 사라지고 푸른색의 섬광이 번뜩였다. 일직선으로 정직하게 만들어진 흰색의 흔적이 지크의 앞에서 Y자로 나뉘었 다. 그의 뒤로 늘어선 마천루는 정체불명의 물체에 의해 나란히 긁혀져 나 갔다. 거울을 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리 양쪽이 똑같이 파괴되었다. ?정말로 잘랐어, 저 바보!? 거리로 뛰쳐나온 리진은 멀리 보이는 목표물을 향해 곧장 자신의 능력을 발 휘했다. 그녀의 황색재킷이 돌풍을 맞은 듯 크게 펄럭였다. 레일건의 발사로 인해 클로킹 이펙트와 배리어 필드 모두가 해제된 BX-F는 강력한 염동능력에 둘러싸여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4209PP의 사이킥 능력 감지. 본체, 지시에 관계없이 상승 중. 지극히 위 험. 지극히 위험.? BX-F는 급히 배리어 필드를 전개했으나 리진이 만든 보이지 않는 올가미는 필드의 결합을 완벽하게 방해했다. 리진은 씩 웃으며 팔을 움직였다. ?배달해 주겠어, 초강력 멍청이 앞으로!? BX-F의 동체는 거인의 손에 휘둘린 공처럼 아스팔트 위에 처박혔다. 그 자 리를 향해 한 줄기의 스파크가 지면을 달려 나갔다. ?너와의 썩을 인연도 여기서 끝이다!? 스파크를 머금은 지크의 스트레이트가 곤충의 머리와 비슷하게 생긴 BX-F의 정면에 꽂혔다. 그 한 방에 BX-F의 동체가 들썩였다. 대전차용 램제트 라이플의 탄환도 방어하는 카본파이버 장갑이 산산이 깨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밑을 받치는 티타늄 복합장갑도 크게 우그러들었다. 지크는 무명도를 들어 자신이 만든 구멍에 꽂아 넣었다. 칼날이 어느 정도 파고들자 강한 전류가 칼을 타고 지크의 몸에 흘러들었다. 보통사람이라면 즉사했을 초고압전류였지만 지크의 몸엔 아무런 이상이 없 었다. 오히려 그의 투지를 불태우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윽고 BX-F의 동체 뒤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그와 함께 리진의 염 동능력에 막혀 전개되지 못하던 배리어 필드의 파란 빛도 사라졌다. 무명도를 뽑은 지크는 BX-F앞에서 자세를 잡고 호흡을 조절했다. 그에 맞춰 몸에 흐르는 스파크도 더욱 더 강렬해졌다. ?그제 저녁에 이름을 완성한 기술이다! 극뢰, 세컨드! 백뢰살(百雷殺)!? 그 직후 그렌들이 본 것은 수십 줄기의 번개에 휘감긴 BX-F의 모습이었다. 디스트로이어 기관포와 레일건의 포신, 그리고 다리가 가지치기 당하듯 차 례로 픽픽 떨어져 나갔다. BX-F의 색적(索敵)시스템은 전력을 다해 지크의 위치를 파악하려 했으나 상 대는 완전히 근접한 상태에서 부담스러울 정도의 고속으로 움직였다. 가장 최선의 대응책은 이동을 하여 반격의 기회를 잡는 것이지만 다리를 잃어 이 동수단이 없어진 만큼 그것도 불가능했다. 장갑판마저 하나 둘씩 떨어져나가는 최악의 상황 속에 결국 BX-F의 AI는 마 지막 수단을 쓰기로 결정한다. 동체의 측면장갑이 터지며 뭔가 길쭉한 것이 튀어나왔다. 적의 물자를 빼앗 을 때 쓰던 매직핸드였다. 그것이 지크의 발목을 휘어잡았다. 예상외의 도구에 당해버린 지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뭐야!? ?매직핸드?? 그렌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저항할 수단이 없는데 억지로 잡는 것은 한 가지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거리로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지크, 피해! 자폭이다!? ?예?? 지크가 그렌에게 눈을 돌린 순간 BX-F의 동체를 중심으로 백광이 번쩍였다. 여의도 전체를 뒤흔들만한 폭음이 거리를 울렸다. 폭발에서 비롯된 강한 폭 풍이 유리를 날리고 건물을 부쉈다. 어찌나 강한 폭발이었는지 건물 뒤에 몸을 의지하고 있던 리진과 챠오까지 폭풍에 휘말려 바닥을 굴렀다. ?이런, 세상에……!? 라이플로 저격준비를 하고 있던 케빈은 피어오르는 먹구름을 넋을 잃은 채 바라봤다. ?케빈, 무슨 일인가! 응답하게! 해당지역의 모든 카메라가 마비됐어!? 통신기에서 처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빈은 통신기 버튼만 누르고 있을 뿐, 세 번째 호출음이 들릴 때까지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구급차! 구급차를 불러주세요, 어서!? 당황한 그의 시야엔 거리로 뛰어나오는 리진, 챠오의 모습이 있었다. 리진의 발걸음이 도로 중앙에서 멈췄다. 챠오는 건물더미에 깔린 그렌을 향 해 계속 달려갔다. ?거, 거짓말이야. 이건 거짓말이야!? 리진은 BX-F와 지크가 있던 장소를 향해 소리쳤다. 그곳엔 아무 것도 없었다. 깊고 크게 패인 인공의 분화구와 커다란 바위 하 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챠오의 부름에 의식을 회복한 그렌은 더미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부에 미약한 손상이 있긴 했지만 전투가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렌은 자기 몸을 걱정할 정신이 없었다. 그 역시 리진처럼 폭발장 소를 바라보기만 했다. ?지크 녀석, 설마…….?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하자 리진이 금방 막아섰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분명 어디 숨어서 우리를 놀리는 거라고요! ? ?…….? 그렌은 굳게 눈을 감았다. 그도 다음 말은 하기 싫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는다 해서 현실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그의 흙투성이 기계손이 어깨에 와 닿자 리진은 울컥 눈물을 쏟았다. 둘 뒤 에 선 챠오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BSP전원의 통신기가 시끄럽게 울려댔다. 케빈이었다. ?아직 한 대가 남았어!? 경고가 끝나기 무섭게 그렌들 앞에 커다란 무언가가 떨어졌다. 클로킹 이펙트 특유의 페이스오프 음색이 시끄럽게 들려왔다. 요술스티커의 그림처럼 스르륵 나타난 것은 파란색으로 도장된 마지막 BX-F였다. ?위험요소 없음. 제거작업 돌입.? 합성음성과 함께 디스트로이어 머신건의 총열이 회전을 시작했다.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진 건 바로 그 다음이었다. 하늘은 맑았다. 흰 구름 몇 점만이 평화롭게 창공을 여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줄기의 두꺼운 번개가 BX-F의 동체에 직격했다. 그렌들이 뒤로 물러서자 몇 줄기의 번개가 추가로 내리쳤다. 자연의 번개처럼 한번 치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폭포처럼 끝없이 내리꽂혔 다. 게다가 시작점은 아무 것도 없는 하늘이었다. BX-F는 수십억 볼트, 수만 암페어라는 가공할만한 위력 속에서 가학적인 춤 을 췄다. 모든 전기장치가 꼬이고 탔다. 다리 역시 제어를 잃고 후들거리다가 주저앉 았다. 고압전기 방어장치는 무용지물이었다. 낙뢰가 끝난 뒤 남은 것은 검은 연기를 내뿜는 기계덩어리 뿐이었다. 겉은 멀쩡했지만 CPU를 포함한 모든 전자부속이 타버렸으니 고철덩어리나 다름없 었다. 극소수만이 내막을 아는 BX-F의 폭주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 기적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즐거워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렌은 담담한 목소리로 상황을 보고했다. ?그렌 헤이그 소령입니다. 방금 전 마지막 BX-F가 정지했습니다.? ?그런가? 수고했네, 그렌. 자세한 보고는 나중에 듣도록 하지.? 전파 저편의 처크도 꽤나 담담했다. 대원들이 죽었다는 소식은 항상 처크의 목소리를 가라앉게 한다. 그것을 누 구보다 잘 아는 그렌은 최선을 다해 냉정을 유지하며 다음 말을 꺼냈다. ?지크 스나이퍼 소위의 시신은 최선을 다해 수습해 보겠습니다.? ?음, 부탁하네.? 통신은 그렇게 끝났다. ?시신을 수습할 수나 있을까요? 뼛조각도 못 찾을 것 같은데요?? 뒤늦게 합류한 케빈이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임무 후엔 항상 담배를 무는 그였으나 지금은 말끔했다. ?관례대로 유품 하나만 찾으면 돼. 어차피 우리에겐 한두 번 있는 일이 아 니잖나.? ?그거야 그렇지만… 너무 아쉽네요.? 케빈의 말투는 매우 가벼웠다. 전직이 클리너, 즉 살인청부업자인 만큼 그 는 지금 이 장소에 있는 누구보다도 죽음에 대해 냉정할 수 있었다. ?일단 저 바위부터 치워보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르지만 엄청나게 크 군.? ?그렇군요.? 케빈은 슬그머니 담배를 물었다. 그렌은 분화구 옆에 놓인 바위에 다가갔다. 순간 바위에 쩍 하며 금이 갔다. 움찔한 그렌은 폭발의 영향이 지금 나타나 나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댔다. 그런데 바위의 균열 사이에서 사람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으악!? 분화구를 멍하니 보고 있던 리진이 비명을 질렀다. 그렌과 챠오도 놀랐고 케빈역시 입에 문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무지막지하게 단단할 것만 같던 바위가 달걀껍질처럼 갈라졌다. 돌조각과 모래더미를 헤치며 나온 존재는 다름 아닌 지크였다. ?후아, 죽을 뻔 했네. 도대체 이건 뭐야? 갑자기 사람 몸에 들러붙더니 놔 주질 않네? 젠장, 주머니에 모래가 잔뜩 끼었잖아!? 몸을 털던 지크는 문득 동료들에게 눈을 돌렸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유령을 본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있었다. ?어? 다들 왜 그래요? 이러고 있을 상황이 아니잖아요! 아직 BX-F가 한대 더 남아있다고요!? 그렌은 표정을 유지한 채 뒤를 가리켰다. 지크는 연기를 뿜고 있는 보행전 차의 모습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우와, 어떻게 된 거에요? 나도 겨우 한 대 날린 것 같은데? 신무기라도 들고 나오셨나요?? ?너야말로 어찌된 거야!? 순간 리진이 그의 멱살을 잡고 앞뒤로 뒤흔들어댔다. ?솔직히 말해! 우릴 놀리려고 한 거지! 아까 떨어진 번개도 네 짓이지! 할 거면 대놓고 하지 왜 돌 속에 숨어서 하냐고! 이유를 대!? ?번개라니, 무슨 소리야? 난 저 안에서 꼼짝도 못했단 말이야!? ?웃기지 마!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땅속에 묻어버리겠어!? ?진짜라니까! 어지러우니 그만 흔들어!? ?시끄러워! 어서 대답이나 해!? 리진과 싸우는 지크의 모습은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 그렌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케빈, 챠오를 바라봤다. ?기적이 있긴 있군.? ?믿긴 힘들지만요.? 케빈은 새 담배를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챠오는 평소대로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시끄러워진 지상을 편히 웃으며 지켜보는 존재가 있었다. 리오, 슈렌 이 지켜보던 바로 그 갈색머리 여성이었다. ?다행이네요, 지크씨.? 그녀는 홀가분한 얼굴로 돌아섰다. 동시에 그녀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녀의 눈앞엔 파란 장발의 사내가 있었다. 그 남자, 슈렌은 오른손에 든 적갈색의 창을 들어보였다. ?마법은 쓰지 않는 게 좋소. 거칠게 대하긴 싫으니 순순히 우리의 묻는 말 에 대답해 주시길 바라오.? ?안돼요.? 그녀가 강하게 저항했다. 귀여운 스타일의 얼굴엔 어느새 엄숙함이 자리 잡 고 있었다. 그녀의 양손을 중심으로 커다란 마법진이 생성됐다. ?지금의 슈렌님은 저를 막을 수 없어요. 마력 면에 있어선 현재 제가 여러 분 이상입니다. 길을 비켜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다치실 거예요.? ?과연 그럴까?? 그녀의 목 언저리에 금속의 차가운 감촉이 와 닿았다. 마법진을 유지하던 팔도 어느 순간 우악스레 봉쇄당했다. ?리오… 스나이퍼님!? 그녀는 자신의 뒤에 선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대수롭지 않게 칼을 들이대 던 리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호오, 슈렌뿐만 아니라 내 이름도 알고 있군? 넌 도대체 누구지? 우릴 언 제 만난 적이 있나?? ?…….? ?대답하지 않으면 저승구경을 하게 될 거야. 난 여자들 목도 가볍게 날리 는 사람이지.? 리오의 검이 꿈틀했다. 그녀는 할 수 없다는 듯 긴 한숨을 쉬었다. ?저는 여러분을 뵌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도 나눴고 큰 실례도 저질렀죠. 하지만 여러분은 오늘이 저를 처음 보시는 날일 겁니다.? ?뭐라고?? 리오는 그녀가 낸 수수께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슈렌 역시 눈살만 구길 뿐 이었다. 그녀는 자유로운 왼손을 뻗었다. ?주신의 사자이신 여러분들은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저에게 아무 것도 물 으실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녀의 손바닥에 작은 도형이 떠올랐다. 그것을 본 리오와 슈렌의 눈이 크 게 흔들렸다. ?시간의 여신의 문장……!? 그녀는 문장을 거두며 말했다. ?빛과 어둠이 한 자리에 모이고 한 마리의 어린 양이 차원의 틈새로 빠진 뒤에 저를 다시 찾아주십시오. 그때가 되기 전까지는 저에게 역행(逆行)을 허락해주신 여신의 이름으로 여러분들을 거부하겠습니다.? ?…….? 그리고 그녀는 사라졌다. 리오와 슈렌은 각자의 방식대로 무기를 거뒀다. ?헛고생을 한 건가?? ?그럴지도.? 리오는 바닥에 떨어진 돌조각을 발로 걷어찼다. ?젠장, 그 빌어먹을 피엘 비서관은 제대로 조사를 한 거야? 시간의 여신이 직접 과거로 돌려보낸 존재라는 걸 미리 알아냈으면 이런 헛고생도 안하잖 아?? ?아냐. 임무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어.? 슈렌은 손안에 남은 불씨를 꾹 쥐어 완전히 소멸시켰다. ?우리에게 내려진 임무는 이 세계의 시간으로 19년 전에 시간이동을 한 어 떤 존재를 찾아내는 것이었지. 소울게터 역시 시간이동을 한 존재야. 그렇 다고 하면 우린 이미 임무를 달성한 거라 할 수 있어. 소울게터는 소멸됐으 니까.? ?그럼 지금은 임무 외적인 일을 한 거란 말이야?? ?아마도. 그리고 현 시점에선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겠지.? ?호오, 그래? 너무 기분이 좋아서 욕이 나올 지경이군.? 리오는 끊임없이 투덜댔다. 슈렌은 아직도 리진과 싸우고 있는 지크를 보며 중얼댔다. ?잠시 동안 이별이겠군.? BX-F의 폭주사건이 끝난 뒤 세계의 주식시장은 크게 변동했다. BSP에 무기 를 납품하는 회사들은 주식이 크게 떨어진 반면 제네럴 블릭과 그에 연관된 회사들은 큰 폭의 주가상승을 얻었다. 세계최강이라 불리는 대한민국 매트로 서울 담당의 BSP들이 죽을 고비를 넘 기면서 BX-F를 겨우 부쉈다는 뉴스가 세계적인 속보로 나간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덕분에 제네럴 블릭의 총수, 마크 레일로지 회장의 얼굴엔 일주일 내내 미 소가 흘렀다. 폭주계획을 제안한 와카루 역시 제네럴 블릭으로부터 회장권 한으로 각종 편의와 연구시설을 제공받아 이득을 누렸다. 그들을 더욱 고무시킨 것은 BX-F에 대한 주문이 전 세계적으로 쇄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제네럴 블릭의 숙 원인 BSP에 대한 무기납품이 성공하긴 했으나 그 수량은 단 한 대 뿐이었 다. 게다가 주문해서 새것을 사들이는 것이 아니라 파괴된 BX-F를 재생해서 사 용하겠다는 요청이었다. 중역들은 그 상황에 대해 반대를 했지만 마크 회장은 대한민국 수도방위 BS P의 요청을 허가하기로 한다. ?BSP가 우리 제품을 쓴다는 것 하나만으로 족하오. 그들 덕분에 예상 이상 의 소득을 올렸으니 그 정도는 내줘도 괜찮겠지. 게다가 달라는 것이 다 부 서진 고철 아니오. 기체를 재생한다 해도 와카루 박사만큼의 AI 프로그래머 가 있지 않으면 현장에 투입시킬 수 있을 만큼 완벽한 재생은 힘을 것이오. 걷게 할 수나 있을까?? 하지만 그 결정은 마크 회장의 실수였다. 얼마 뒤, 제네럴 블릭으로부터 고철 BX-F의 정식 사용승인 메일을 받은 처 크는 앞에 앉은 루이에게 회심의 미소를 보냈다. ?믿는다, 내 딸.? ?후후후.? 루이의 안경 밑으로 의미심장한 웃음이 흘렀다. BX-F의 폭주사건이 끝난 뒤 한달 하고도 보름이 지났다. BSP는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위험하면서도 안전하게 돌아갔다. 눈에 띌 정도 의 큰 BG사건은 없었고 그 외의 상황 역시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이 폭주사건 전과 비교해서 매우 달랐다. 일단 루이의 모습이 안보였다. 무슨 도를 닦는 사람처럼 기술실 창고에 틀 어박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은 그녀의 출퇴 근시간 뿐이었다. 그리고 지크가 새벽같이 본부에 출두했다. 퇴근도 매우 늦었다. 순찰시간 외에 그가 머무는 곳은 트레이닝 룸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한달이 넘도록 웨이트 트레이닝을 계속 하고 있었다. 그가 휴일까지 반납하고 트레이닝을 하기 시작한 것은 파괴된 BX-F의 블랙 박스 정보가 유출되면서부터였다. 당시 레드 원, 아니 리오에게 파괴당한 BX-F는 최고 800톤에 이르는 엄청난 충격을 짧은 시간동안 십여 차례가 넘게 받았다. 배리어 필드가 버텨내지 못하고 무너진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반면 지크의 공격은 배리어 필드에 거의 통하지 않았다. 리오와 그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바로 물리력. 리오는 지크의 몇 배가 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블랙박스 정보를 본 지크는 곧장 트레이닝 룸에 있는 충격계측기로 달려갔 다. 그 기계는 격투를 즐겨하는 BSP대원에게 자신의 파워가 어느 정도인지 가르쳐주는 친절한 도구였다. 지크가 전력을 짜내어 만들어낸 숫자는 197톤. 리오의 4분의1 수준이었다. 허나 정작 지크에게 충격을 준 것은 숫자의 차이가 아니라 200톤이 안되는 공격을 한 후 숨을 돌리느라 정신이 없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800톤에 가까운 충격을 십여 차례 내고도 별다른 체력적 문제를 보이지 않 던 리오. 그에 충격을 만들어낸 뒤 정신을 못 차리는 자신. 이것은 속도로 어떻게 뒤집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지크가 선택한 것이 바로 웨이트 트레이닝이었다. 물 론 일반인에 맞춰진 기구가 아닌 BSP전용의 특별한 기구에 의한 훈련이었 다. 지크는 지금까지 무술훈련에 전념했을 뿐,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육체적 힘을 기르진 않았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다. 속도는 물론이고 물리력에서 그를 능가하는 상대는 거의 없었다. 사실 리오 나 소울게터 같은 존재가 나타나기 전까지 그는 거의 무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확실히 아니었다. 리오, 슈렌과 함께 한 19개월의 시간은 그의 기력을 배에 가깝게 끌어올려 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물리적 힘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어주지 않으면 그것마저도 다루기 힘들었다. 결국 그는 생전 처음으로 기구를 통한 훈련에 돌입했다. 그리고 한 달 반이 지난 지금은 어느 정도 성과가 나타났다. 아침 7시 반. 이른 시간의 트레이닝을 마치고 충격계측기 앞에 선 지크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지난달에 좌절을 겪은 뒤 처음으로 충격계측기를 이용하는 그였다. ?두 배 정도만 나와 주면 좋을 텐데…….? 추리닝처럼 생긴 펑퍼짐한 상의를 벗어 던진 지크는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 켰다. 근육의 두께와 양감은 거의 차이가 없었지만 분위기만큼은 묘한 차이 가 있어 보였다. ?흡!? 짧은 기합과 동시에 그의 주먹이 충격계측기의 타격점을 강타했다. 그의 상 체에 묻은 땀이 소나기처럼 계측기에 들러붙었다. 이어서 큰 진동이 계측기 와 계측기가 매달린 지면을 타고 흘렀다. 지크는 즉시 전광판을 쳐다봤다. ?젠장.? 그는 김이 샌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광판에 표시된 숫자는 281톤이었다. 예전과 비교해 약 100톤 가까이 오른 수치지만 지크를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했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그 정도의 충격량을 발휘하고도 체력적인 부담을 거 의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그는 수건으로 얼굴과 상체의 땀을 닦으며 생각했다. ?좀 더 훈련을 해봐야 하나??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가 사용한 트레이닝 기구는 무게 가중치의 한 계점에 다다라 있었다. 그 이상으로 무게를 불리면 기구는 한계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부서질 것이다. 벤치에 옮겨 앉은 지크는 안면을 수건으로 덮은 채 머리를 숙였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더 강해질 수 있는 거지? 기계나 도구만으로 훈련 하는 건 이제 한계야. 뭔가 좀 더 획기적인 훈련법이 필요해. 그건 그렇고 리오 녀석은 도대체 뭘 먹고 힘이 세진 거야? 산삼? 웅담? 이해가 안 가네. ? 그의 탄식은 끝이 없었다. 트레이닝 룸의 자동문 쪽에서 바람소리가 났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온 모양이다. 지크는 수건을 내리고 그쪽을 봤다. 챠오였다. ?어라?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냐?? ?…….? 지크와 마찬가지로 펑퍼짐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챠오는 대답 없이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긴 포니테일을 흔들며 트레이닝 룸 구석으로 향했다. ?벙어리가 됐나…….? 지크는 속으로 꿍얼대며 땀을 계속 닦았다. 벤치 프레스로 간 챠오는 바벨을 보자마자 흠칫 놀랐다. 바벨이 최고 한도 무게인 5톤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BSP전용 바벨의 추는 중력식으로 되어있어 크기는 보통의 것과 비슷하다. 물론 무게는 천지차이 다. 이 정도라면 추를 갈아 끼우는 것도 챠오에겐 큰일이었다. 그녀가 우물쭈물하는 것을 본 지크는 조금 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어이, 갈아 끼워줘?? ?…….? 지크와 바벨을 번갈아 쳐다본 챠오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피식 웃은 지크 는 러닝셔츠로 상반나신을 가리고 일어났다. 바벨 끝의 특수나사를 풀어낸 지크는 추를 빼며 물었다. ?무게는 어느 정도로 해줘?? ?1톤.? ?1톤? 너 2년 전엔 300킬로그램짜리도 겨우 들었잖아?? 하지만 챠오의 무덤덤한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1톤.? ?아아, 알았어. 해줄 테니 보채지 마.? 지크는 추를 빼고 그녀가 원하는 무게를 맞춰주었다. 착석한 챠오는 1톤의 바벨을 가볍게 내린 뒤 들어올렸다. 규칙적인 호흡과 함께 바벨을 드는 그녀를 보며 지크는 혀를 내밀었다. ?우와, 너 정말 노력 많이 했구나? 네 오빠들도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그녀는 이번에도 대답 없이 운동을 계속했다. 불만스레 입술을 내민 지크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여자는?? 갑작스레 들린 챠오의 목소리에 지크는 조금 당황한 듯 눈을 멀뚱거렸다. ?여자? 무슨 여자?? ?옥상 위에 있던.? ?옥상?? 챠오의 짧은 말을 가만히 생각해보던 지크는 잠시 후 무릎을 쳤다. ?아, 그 스토커 아가씨 말이지? 모르지, 나라고 별 수 있겠어? 그때의 그 실루엣 말고는 그녀에 대해 아무 것도 밝혀진 바가 없잖아. 그리고 날 따라 다니는 여자가 어디 한둘이어야지.? ?…….? ?농담이야. 도끼눈 뜨지 마.? 챠오는 계속해서 바벨을 들어올렸다. 수건을 목에 건 지크는 그 끝을 각각 잡고 좌우로 움직였다. 수건과 뒷목의 마찰이 그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그나저나 너도 참 많이 변했다. 오빠, 오빠 하면서 날 쫓아다니던 때가 어제 같은데 지금은 근육질의 무서운 여자로 바뀌었으니 말이야. 아, 나쁘 다는 뜻은 아냐.? ?리진은?? 그녀가 리진에 대해서 묻자 지크의 눈썹이 위아래로 꿈틀했다. ?리진? 그 말괄량이는 왜?? 챠오는 말이 없었다. 지크는 자신의 턱 밑을 매만졌다. ?음, 무슨 뜻으로 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애는 너무 괴팍해. 겁이 많은 것 같으면서도 툭하면 사람을 치잖아. 그리고 난 스무 살이 안 된 여자에겐 관심 없어.? 순간 쿵 하는 소리가 챠오의 벤치 프레스에서 터졌다. 지크는 돌처럼 굳었 고 바벨을 거칠게 놓아버린 챠오는 무서운 눈으로 그를 쏘아봤다. ?어, 어이! 진정해!? 지크는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챠오는 전차처럼 성큼성큼 상대를 향해 다가왔다. 트레이닝 룸 근처를 지나던 사무직원의 귀에 지크의 비명이 들린 건 잠시 후였다. 시간은 흘러 오전 브리핑 시간이 되었다. 회의실에 착석한 BSP 전투요원들은 오랜만에 지크의 얼굴에 주목했다. 가장 먼저 질문을 던진 사람은 옆자리에 앉은 케빈이었다. ?간만에 얼굴이 상했네? 오늘은 누구야?? 케빈은 리진 쪽을 바라봤다. 리진은 당연히 손과 머리를 가로저었다. ?전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그럼 챠오?? 챠오는 묵묵부답이었다. 때맞춰 문을 열고 처크가 들어왔다. 그의 뒤로는 피로에 찌든 얼굴의 루이 가 따라 들어왔다. 간단한 인사 후 처크는 오늘의 용건을 꺼냈다. 그 전에 지크의 얼굴을 흘끔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얼굴을 보는 건 정말 오래간만이군. 아무튼 오늘은 새로운 멤버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루이, 준비해주게.? ?예, 지부장님.? 루이는 씩 웃으며 안경을 매만졌다. 그때, 지크가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신입대원은 어떤 사람이야? 남자? 여자? 사이보그? 파이터? 슈터? 사이키 커?? ?여자야. 꽤나 귀여운 여자지.? ?오오, 그래? 드디어 여자다운 여자를 이 회의실 안에서 보는 건가?? 신이 난 지크는 들뜬 목소리를 내며 즐거워했다. 리진은 그의 모습이 불쾌 하게 느껴진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 누가 여자답지 못하다는 거야?? ?호오, 염색체만 여자 아니었나?? 둘은 테이블을 가운데 둔 채 으르렁대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흠.? 조금 큰 헛기침으로 둘을 침묵시킨 루이는 출입문을 향해 몸을 살짝 돌렸 다. ?비록 임시이긴 하지만 오늘부터 여러분들과 함께 일을 할 새로운 멤버 중 한 사람입니다. 들어오도록 하세요.? 그녀의 부름에 맞춰 회의실 문이 열렸다. 실내보다 밝은 복도의 불빛을 타 고 들어온 존재는 BSP들에게 있어서 상당히 낯이 익었다. 양쪽으로 둥글게 말아 묶은 머리에 뿔테안경, 총명함으로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작은 키를 가진 동양인 소녀. 지크를 포함한 전투요원 대부분은 그녀를 알고 있었다. 가장 놀란 사람은 챠오였다. ?류페이?? 그녀의 말대로 회의실에 들어온 소녀는 어제까지만 해도 주관제실에서 일하 던 오퍼레이터, 쟌 류페이였다. 그 중국계 소녀는 예의바른 자세로 인사를 했다. ?쟌 류페이입니다. 오늘부터 임시로 여러분과 함께 현장에서 뛰게 되었습 니다.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고 많은 가르침을 전해주십시오.? ?아, 아아. 잘 부탁한다, 류페이.? 그렌은 류페이를 반겨주면서도 이게 어찌된 일이냐는 얼굴로 처크를 쳐다봤 다. 그가 베테랑답게 어느 정도의 가식을 둔 것과 달리 지크는 성격대로 그 자 리에서 들고 일어났다. ?어이, 꼬마! 뜸들이지 말고 그 새로운 멤버라는 사람을 어서 데리고 와! 이곳은 애들이 놀 만한 데가 아니야!? 그의 예상치 못한 강력한 반응에 류페이는 밝은 곳에 나온 두더지처럼 움츠 러들었다. ?예? 제, 제가 새로운 멤버입니다만?? ?웃기지 마! 어른한테 거짓말하면 못써!? ?사, 사실입니다만…….? ?시끄러!? ?…….? 류페이가 안고 들어왔던 기대감과 두려움은 곧 좌절감으로 바뀌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심하게 내몰릴 줄은 몰랐던 그녀는 울기 직전의 얼굴로 아랫입 술을 물었다. 결국 보다 못한 처크가 나섰다. ?이봐, 지크.? ?예?? ?류페이의 말은 사실이야. 그녀는 오늘부터 전투요원들과 함께 현장에 투 입된다. 임시긴 하지만.? ?뭐라고요?? 지크는 경악 속에서 류페이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머리는 좀 쓸 것 같지만 무술에 대한 소질은 느껴지지 않았다. BSP를 하기 에 적당한 사이킥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다. 안구 역시 사격을 하기엔 마땅치 않았다. 한마디로 현장에서 전투요원을 하기엔 부적합한 인물이었다. 지크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언론플레이라도 하실 생각이세요? BSP엔 저런 꼬마도 훌륭히 활동을 하니 우리 모두 BSP를 불쌍히 여깁시다, 하고? BSP의 전투요원은 언제 죽어도 이 상하지 않는 장소에서 활동을 해야 한단 말이에요! 무술이나 사이킥 능력에 대한 소질도 없는 애를 왜 현장에 투입시키겠다는 말씀이세요!? 어느새 담배를 문 처크는 한숨과 함께 연기를 뿜었다. ?사람 말을 좀 끝까지 들어. 류페이는 오늘 소개될 멤버 중에 한 명이야. ? ?예?? ?하여튼 잠자코 있어. 루이, 설명을 계속하게.? ?예, 지부장님.? 루이는 류페이를 달래어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처크에게 제지를 받은 탓에 더 이상 말은 안했지만 지크는 여전히 류페이를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봤다. 지금 그의 모습은 다른 동료들에게 있어서 상 당히 의외였다. 케빈은 불을 붙이지 않는 담배를 물고 지크를 유심히 바라봤다. ?평상시처럼 농담으로 생각하고 적당히 넘어갈 줄 알았는데 도대체 왜 저 렇게 화를 내지? 그것도 아직 어린 류페이에게…….? 그렇게 생각하는 건 리진, 챠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렌은 지크가 그 렇게 나오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저 녀석, 4년 전의 일을 아직도 머리에 담고 있는 건가?? 그 사이 루이의 노트북 세팅이 완료되었다. ?여러분, 메인 스크린을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녀의 지시대로 모두가 메인 스크린에 눈을 돌렸다. 잠깐의 로딩이 끝난 뒤 화면에 뜬 것은 다름 아닌 BX-F였다. 전에 나타난 BX-F와 같은 모델이었다. 자세히 말하자면 정체불명의 낙뢰를 맞고 쇼트다운이 된 파란 색의 기체였다. 차이점은 기체 옆구리에 BSP의 엠 블렘과 BX-Fb라는 텍스트가 도장된 것이다. ?저건 또 뭐야?? 지크의 표정이 점점 더 험악해졌다. 루이는 특유의 쿨한 표정을 유지한 채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보시는 BX-F는 BSP의 현실에 맞게 개조된 특화모델입니다. 전투성능 은 예전에 폭주사고를 일으킨 BX-F와 동일하지만 스텔스 이펙트 발생장치가 제거되어 있습니다. 바이오 버그에겐 레이더 은폐장치가 거의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기체는 오늘부터 우리 대한민국 수도방위 BSP에서 실전 테스트를 받게 됩니다.? ?뭐라고? 하하하…….? 지크는 기가 찬 듯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다 곧장 표정을 바꿔 노기를 뿜었 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저 녀석이 또다시 AI폭주를 일으키면 어쩌겠다는 거야! 나보고 또 부수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부숴달라는 부탁은 들어주겠지 만 저 녀석이 우리 뒤통수에서 폭주를 일으키는 건 사양하겠어!? 지크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루이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AI폭주에 대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지크 스나이퍼 소위. 저 기체엔 기 체 전체를 컨트롤하는 고성능 AI가 탑재되지 않습니다. 저 기체에 들어가는 AI는 다른 군용병기에 탑재되는 것과 같은 기초적인 무기관제프로그램 뿐입 니다.? ?응? 그럼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게임기처럼 조이패드를 두드려서?? 루이의 눈썹이 울컥 꿈틀댔다. ?아닙니다. 파일럿이 따로 존재합니다.? 루이는 말을 맺으며 류페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렇다면 저 꼬마가 BX-F에 탑승해서 조종한단 말이야?? ?BX-F가 아니라 BX-Fb입니다. 그리고 꼬마가 아니라 쟌 류페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후로는 확실히 숙지해 주십시오, 지크 스나이퍼 소위.? ?…….? 지크는 루이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진지하진 못했지만 일단 졌다는 표시였 다. 이번엔 케빈이 의문을 제기했다. ?루이 치프. AI폭주가 일어나지 않게 됐다는 건 환영하지만 전투차량에 대 한 조작을 해본 적이 없는 류페이가 AI만큼 BX-Fb의 성능을 끌어낼 수 있겠 습니까? 어느 정도 숙련된 파일럿이 아니면 세밀한 조작은 힘들 거라고 생 각합니다만.? ?그 점 역시 안심하셔도 됩니다. BX-Fb의 조작은 종래의 아날로그 방식과 는 다릅니다. 파일럿의 동물적 감각이 아닌 두뇌 순발력에 성능이 좌우되지 요. AI대신 인간의 뇌를 사용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 말에 그렌이 반응했다. ?두뇌 순발력이라면 6년 전 NASA에서 완성한 포제션(Possession) 드라이브 시스템을 사용한 건가?? ?그렇습니다.? 포제션 드라이브. 그것은 뇌파로 물체를 움직이는 일동의 구동지시장치다. 2000년대 초엔 눈동자의 움직임을 읽어 파일럿이 보는 물체를 조준하는 수 준이었지만 지금은 전투기 같은 복잡한 기계도 조작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 라가 있다. 문제는 기계가 복잡할수록 운전자가 골머리를 썩는다는 것이다. 운전자의 뇌와 정신에 부담이 걸리는 건 아니지만 기계의 속도조절과 상하좌우조절, 적 포착 및 추적 같을 일을 수학공식 풀 듯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그렌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류페이만한 적임자가 없겠지. 수학식 계산만큼은 류페이가 루이 보다 더 뛰어나니까.? 그렌의 칭찬에 류페이의 얼굴에 낀 구름이 확 사라졌다. 루이 역시 만족스 러워했다.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아시다시피 류페이는 BSP에서 실행하는 수학공식 시험에서 최고 기록을 수립한 전적이 있지요. 제 기록을 깬 무서운 아이입 니다.? 그러자 처크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참고로 지크는 100점을 맞았지.? 순간 리진과 그렌이 폭소를 터트렸다. 반면 지크의 얼굴은 검게 타들어갔 다. 수학공식 시험을 치르지 않았던 케빈은 그들의 박장대소 이유가 매우 궁금 했다. ?선배님, 100점이면 만점 아닙니까?? 그렌은 씩 웃었다. ?수학공식 시험은 1000점 만점에 기본점수가 300점인 주관식 시험이네. 참 고로 루이와 류페이의 점수는 똑같이 998점이었네. 하지만 문제를 다 푼 시 간이 5분 정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류페이가 최고 기록자가 됐지.? ?예? 기본점수 300이라면 최저가 300점이 되어야 하는데 지크는 왜 100점 입니까?? ?마구잡이로 답을 쓰는 바람에 감점을 당했거든.? ?하하하!? 케빈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웃어댔다. ?축하해, 100점의 남자. 하하하!? ?…….? 지크의 얼굴은 아예 흙빛이 되었다. 케빈을 비롯한 다른 대원들의 웃음이 대강 진정된 뒤 처크가 오늘의 안건을 말했다. ?오늘 류페이가 참가함으로서 전투요원은 여섯 명이 되었네. 그럼 사이좋 게 두 명씩 팀을 이룰 수 있겠지? 그런 고로 팀의 재편성을 하겠다. A조는 그렌과 챠오, B조는 케빈과 리진, C조는 나머지 두 명이다.? ?뭐라고요!? 푹 숙여졌던 지크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왜 저런 꼬맹이랑 한 조가 되어야 하죠?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처크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하라면 하는 거야.? 지크는 붕 뜬 표정으로 처크를 바라봤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처크는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 ?에잇, 없어요! 없다고요!? ?있어.? ?없어요, 없어요, 없어요!? ?있어, 있어, 있어.? 싸움의 승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처크였다. 결국 지크는 절망감에 휩싸 인 채 처크의 다음 얘기를 들었다. ?팀의 편성이 끝났으니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제군들도 알다시피 지난주부 터 매트로 서울은 괴이한 BG사건에 휘말려 있다. 10여 개체 정도로 이루어 진 BG의 집단이 조직적으로 은행을 털고 있는 것이다. 보통의 BG라면 은행 이 됐든 상가가 됐든 닥치는 대로 부수는 게 당연하지만 이번 BG들은 오로 지 은행만 습격하고 있지.? ?게다가 금괴만 털고 있습니다.? 그렌이 덧붙였다. ?그렇다네. 어제까지만 해도 이 사건에 대한 정황이 거의 기록되지 않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오늘 새벽에 꽤 중요한 단서가 포착됐다. 루이, 자료를 준비해주게.? ?예, 지부장님.? 곧이어 메인 스크린과 서브 스크린에 사진자료가 떠올랐다. 사진의 배경은 습격을 당한 은행이었다. 잘 닦인 바닥엔 BG와 시체들이 널 브러져 있었지만 BG사건치고 시체의 상태가 너무 깨끗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BG들 중앙에 위치한 그림자였다. 그림자만이 보였을 뿐, 본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그림자는 대단한 충격을 몰고 왔다. 그것은 날개와 같은 무언가를 등에 단 사람의 그림자였다. ?저 그림자는 뭡니까?? 그렌의 질문을 받은 처크는 겨우 매달린 담뱃재를 아슬아슬하게 떨어뜨린 뒤 편한 자세로 대답해 주었다. ?기술부에 문의한 결과 저 사진은 조작되지 않은 게 확실하네. 그리고 사 진을 보내온 제보자의 말에 따르자면 등에 날개가 달린 존재가 맞는 것 같 아. 하지만 사람은 아니라더군.?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럼 새로운 BG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우리의 상식을 벗어난 그 어떤 존재일지도 모르지.? ?그 어떤 존재요? 무슨 말씀이시죠?? 리진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처크의 담배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입과 코로 연기를 뿜으며 예를 들 어주었다. ?굳이 말하자면 악마라고 할까나?? 그리고 한 시간 정도가 흘렀다. 어제까지와는 달리 지크는 홀로 오토바이를 타고 자신의 구역을 달렸다. 오토바이가 내는 중후한 배기음과 위에서 흩날리는 붉은 재킷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했지만 지크의 표정은 예사롭지 않았다. ?악마라고?? 그는 BX-F의 사건이 끝난 뒤 곧장 집을 떠난 의형제들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들이 신의 일을 대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엔 천사와 악마 모두 존재하지. 네가 있는 이 세계는 조금 특별해서 그 녀석들이 나타날 확률은 다른 곳보다 낮지만 만약 나타난다 해도 놀라지 마. 녀석들의 입장에선 네 가 괴물일 테니까.?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은 지크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가 일본에 있을 때 배운 것 중엔 음양오행술이나 퇴마술도 있었다. 그 술 법의 대상이 귀신이나 악령인 만큼 천사나 악마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나 타나도 큰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실제로 나타났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금 긴장이 되긴 했다. ?만약에 상대가 악마라면 소울게터 때처럼 일반적인 권법은 통하지 않겠지 ? 그렇다면 조금 귀찮을 텐데…….? 그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부담감을 떨쳐보려는 퍼포먼스였다. ?지크 선배님,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귀에 낀 통신기에서 류페이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아이를 둔 부모라던가 아이를 이상한 쪽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천사의 목소리처럼 느껴질 정도로 맑고 고왔으나 지크는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퉁명스레 대답했다. ?몰라.? ?…….? 통신기에선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지크는 조금 미안했는지 말의 방향 을 조금 바꿨다. ?잘 따라오고 있어?? ?아, 네. 소음억제장치와 클로킹 이펙트 덕분에 시민들의 혼란도 없습니 다.? ?그래? 그럼 계속 잘 따라오고…….? 순간 쿵 소리가 지크의 머리 위에서 들렸다. 깜짝 놀란 지크는 오토바이를 세우고 근처 건물의 옥상을 둘러봤다. 10층 정도 되는 빌딩의 옥상에 설치된 송신탑이 크게 휘어 있었다.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은 무슨 일이냐며 혼란스러워했고 지크는 얼굴을 감싸 쥐었 다. ?왜 그랬어.? ?으앙! 죄송해요, 선배님! 통신에 집중하느라 장애물을 보지 못했어요! 아 아, 전 바보인가 봐요!? 우는 소리가 지크의 귀를 괴롭혔다. ?젠장, 애라서 화도 못 내겠네.? ?알았어. 내가 경찰 아저씨들과 BSP본부에 잘 얘기할 테니 거기서 빨리 나 와. 수위 아저씨한테 걸려서 욕먹기 전에.? ?네, 선배님.? 류페이의 훌쩍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충돌지점에서 솟아올 라 반대편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그녀가 풀려버린 클로킹 이펙트를 재 기동 하지 않은 것이다. ?아…….? 지크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 혼란에 빠졌다. ?으아, 괴물이다!? ?뭔가가 옥상 사이를 뛰어다니고 있어!? 패닉에 빠진 사람들 속에서 지크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아, 누가 날 좀 구해줘.? 전투요원으로서는 초보인 류페이의 신고식은 그녀의 어린 나이에 비해 너무 도 가혹했다. 지크는 경찰, 본부를 상대로 피곤한 언쟁을 계속했고 덕분에 그녀의 눈물은 점심시간까지 그치지 않았다. 류페이와 만나기로 약속한 패스트푸드 음식점 앞에서도 지크의 통신은 끊이 지 않았다. ?알았으니 그렇게 좀 처리해줘. 그래, 그럼 잘 부탁해, 루이.? 통신을 끊은 지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적은 내부에 있었네.? 그렇게 기다린 지 몇 분 후, 류페이가 저 멀리서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녀는 역시나 징징대고 있었다. 양 주먹으로 눈을 부비며 오는 그녀의 모 습은 귀엽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했다. 지크는 어이가 없는 나머지 웃음을 터트렸다. 목적지에 도착한 류페이는 벌겋게 부은 눈으로 지크를 올려다봤다. 그가 제 법 무서운 눈을 하고 있자 결국 중국계 소녀는 대성통곡을 개시했다. ?으흑, 죄송해요! 어서 절 혼내주세요, 선배님! 전 그냥 꼬마일 뿐이었나 봐요! 으아앙!? 그녀가 어찌나 크게 울어댔는지 주위를 지나는 사람마다 지크를 이상한 눈 으로 쳐다봤다. 그가 만약 BSP 엠블렘을 어깨에 달고 있지 않았다면 신고 같은 큰 봉변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지크는 보는 눈이 무서워서라도 류페이를 어르고 달랬다. ?어서 들어가자. 실수 몇 번 한 거 가지고 왜 그래? 점심 맛있게 먹으면서 기분전환 좀 해보자.? ?으흐흑, 저는 먹을 자격도 없어요!? ?괜찮다니까. 계속 이러면 나 진짜 화낸다?? ?예…….? 류페이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지크의 손을 잡았다. 의외의 기습을 당한 지 크는 어떻게 할까 고민했지만 결국 그녀의 손을 잡고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식사를 하면서도 류페이의 분위기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햄버거 두 개와 감자튀김 두 봉지를 일찌감치 비운 지크는 가슴속에 쌓인 것을 씻 어내려는 듯 콜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어이, 꼬마.? ?네?? 류페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는 상당히 겁에 질려 있었다. 지크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BSP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까? 혹시 알 고 있어? 내가 런던 타워브릿지를 두 동강낸 사건 말이야.? ?아, 데이터베이스에서 본 적이 있어요. BG들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그 러셨죠?? ?응, 그랬지. 그때 내가 그걸 부수지 않았다면 왕세자 아저씨랑 그 가족은 더 이상 스캔들에 휘말릴 일이 없었을 거야. 근데 BSP 런던지부에선 나한테 욕이란 욕은 다 하더라고. 내 능력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인데도 불구 하고 일부러 국보급 보물을 망쳤다나 뭐라나. 젠장, 난 개폐교 하나 부순 것뿐인데 말이야.? ?그때 처크 지부장님께서 중재해 주셨죠? 타워브릿지 같은 건 몇 개라도 다시 만들어준다, 그 대신에 왕세자를 살려달라는 소리를 한 번만 더 하면 다리 위에 매달아 버리겠다고 하시면서요.?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지크는 놀랍고 신기한 듯 웃었다. 류페이는 부끄러운 듯 머리를 조아렸다. ?당시의 전화내용은 모두 공개채널을 통했거든요. 그래서 데이터베이스에 전부 기록되어 있죠. 그 정도는 저도 기억할 수 있어요.? ?그래? 하하, 처크 할아버지도 망신살 단단히 뻗으셨네.? ?예? 호, 혹시 제가 지부장님께 실례되는 말을 한 건가요?? ?아냐.? 지크는 재차 콜라를 마셨다. 목을 충분히 적신 그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얘기야. 고위층에선 특히 더 유명하지. 아 무튼 네가 오늘 한 것에 대해 얘기하자면…….? 그는 다시 컵을 잡았지만 음료수는 충분치 않았다. 결국 컵의 뚜껑을 열고 안에 든 얼음을 입에 물었다. 우두둑 소리가 그의 입안에서 들렸다. 류페이는 지크가 다음에 할 자신에 대한 얘기가 무엇일지 매우 궁금했으나 그는 뜸을 들이듯 잘게 부서진 얼음 을 몇 번 더 씹은 뒤에야 얘기를 계속해주었다. ?네가 오늘 한 일은 내가 한 일에 비해서 별 거 아니라는 거야.? ?예?? ?생각해봐. 그깟 통신용 철탑이 얼마나 비싸겠어? BX-F로 사람 깔아뭉갠 것보단 낫잖아. 그 외의 사항도 그리 큰일은 아냐. 넌 어차피 테스트를 받 는 것뿐이라구. 그 정도의 실수는 이미 예상되어있다는 말이랑 같아.? 그렇게 위로를 했지만 류페이의 얼굴엔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루이 선배님을 비롯해서 다른 분들 모두 저에게 기대를 하고 계셨 는데…….? ?기대? 웃기지 마.? 지크는 코웃음을 쳤다. ?BSP가 무슨 모범택시기사 집단인줄 알아? 네가 한 일은 초보운전자가 후 진 주차하다가 범퍼 긁는 수준의 일 밖에 안돼. 루이가 너에게 퍼펙트를 바 랬다면 그건 루이가 잘못인 거야. 실수 할 수도 있는 거잖아. AI가 아니라 사람이니까.? ?…….? ?AI는 프로그램을 수정하거나 덧붙여서 실수를 없앨 수 있어.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야. 누구든지 다 실수하면서 배우는 거란 말이야. 너도 그렇고, 나 도 그렇고.? 지크는 감자튀김 하나를 집은 후 끝에 케첩을 발라 내밀었다. ?알았지? 함께 실수를 줄여보자.? ?네, 선배님.? 류페이는 지크가 준 감자튀김을 조심스레 받아 꼭꼭 씹어 삼켰다. 이후 지크와 류페이에겐 오후 브리핑 때까지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렌 과 챠오 쪽에 작은 BG사건이 벌어졌을 뿐, 그날도 오후 브리핑 전까지는 예 전과 다를 바 없었다. 회의실에 일찍 도착해 있던 지크는 뒤이어 들어오는 리진에게 쓴 소리를 들 었다. ?이봐, 지크. 무슨 생각으로 그랬어?? ?응? 뭐가?? ?통신철탑을 부순 것도 모자라 건물 위에서 이상한 차림으로 날아다녔다며 ? 어쩌자고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한 거야?? 지크의 옆에 있던 류페이의 어깨가 들썩였다. 지크는 그녀에게 눈을 돌리기 는커녕 어깨를 으쓱댔다. ?아아, 사람들이 너무 풀이 죽은 거 같아서 쇼를 좀 했지. 담엔 너도 같이 할래? 꽤 보람있다구.? ?관두시지. 류페이 앞에서 그러고도 부끄럽지도 않았어?? ?스트리킹을 한 것도 아닌데 뭐.? 지크는 입을 비죽 내밀었다. 이후에 들어온 동료들 모두 그 일을 꺼내들었다. 그럴 때마다 지크는 비슷 한 대처로 상황을 넘겼다. 그럴수록 류페이의 얼굴엔 그늘이 졌지만 지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처크와 루이가 빠른 걸음으로 회의실에 들어왔다. 그는 일어나려는 대원들을 손으로 사양하며 자리에 앉았다. ?인사를 할 시간조차 없게 됐다, 제군들. 아침에 소개됐던 그 정체불명의 존재가 10분전에 미끼를 물었다. 즉시 출동하도록. 사건설명은 가면서 듣도 록 하길 바란다.? 처크는 의자 쿠션의 바람이 빠지기가 무섭게 일어나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루이 역시 그 뒤를 따라 나섰다. 대원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처크처럼 휙 나가진 않았다. 그들에겐 나 름대로 할 일이 있었다. 모두는 돌아가면서 류페이를 축하해줬다. 시작은 그렌부터였다. ?오늘 비상이 걸리다니 운이 좋구나, 류페이.? 다음은 케빈이었다. ?오래 살 거야.? 챠오가 뒤를 이었다. ?축하해.? 리진도 가세했다. ?이런 축복을 받다니, 부러운 걸?? 축하를 마친 모두는 곧장 회의실을 나섰다.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한 류페이 는 아무 말도 못하고 지크를 바라봤다. ?어떻게 된 일이죠?? ?아, 징크스야.? ?징크스요?? 지크는 빙긋 웃었다. ?이곳, 수도방위 BSP엔 징크스가 있지. 배치를 받자마자 비상에 휘말린 신 입대원은 오래 살 수 있다는 거야. 처크 할아버지도 인정하실 정도로 강력 한 징크스라서 나도 변변치 못한 환영을 받았다구.? ?그, 그런 터무니없는……!? 류페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세상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일들이 꽤 있다구. 자, 나가자.? ?예.? 류페이는 지크와 함께 일어나 출입구로 걸어갔다. 그러다 뭔가를 떠올리고 는 지크의 옷자락을 잡았다. ?아, 선배님. 고맙습니다.? ?뭐가?? ?제가 들을 말을 대신 들어주셨잖아요. 너무 죄송해요.? 소녀는 크게 허리를 굽혔다. 지크는 부끄러운 듯 뒷머리를 긁어댔다. ?아, 그거? 뭐 어때. 나야 늘 듣는 말인데 뭐. 아무튼 이제부터는 실전이 니 실수하면 안돼, 알았지?? ?네!? 힘을 얻은 류페이는 기운차게 회의실을 나섰다. 다른 대원들과 달리 격납고로 내려간 류페이는 기술부 직원들에게도 대대적 인 축하를 받았다. 그들 역시 징크스에 대해 알고 있는 터였다. ?이야, 류페이! 넌 역시 행운아라니까? 오늘 비상이 걸릴 줄 누가 알았겠 어? 하하하! 적어도 반년의 목숨은 건진 셈이구나!? 기술부 부장인 박병우, 일명 드라이버 박이라 불리는 남자가 마지막으로 그 녀를 축하해 주었다. 류페이는 어설픈 몸짓으로 감사를 표했다. ?벼, 별말씀을요.? ?그래, 아무튼 수고하길 바란다. 그건 그렇고 우리 귀염둥이에 난 상처는 뭐냐?? ?네?? ?앞쪽 실드범퍼에 작은 흠집이 있더구나. 어딘가에 부딪힌 거니?? ?예?? 통신철탑에 부딪히면서 생긴 것이 분명했다. 류페이는 사실대로 말을 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박부장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초음파 검사로 겨우 발견해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흠이니 신경 쓰지 않 아도 되지만 그래도 조심해라. 루이 치프가 혼신의 힘을 다해 재생한 놈이 니 망가트리면 곤란하겠지.? ?네…….? ?뭐, 그래도 기계 때문에 목숨을 버리진 말거라. BX-Fb가 네 관이 되는 게 더 나쁜 일이니까 말이야. 너무 어려운 일이다 싶으면 지크 녀석에게 맡겨 버리고 넌 그냥 도망쳐버려.? ?예?? 류페이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너무 비겁한 짓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박부장의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흘렀다. ?별 뜻은 없어. 난 녀석의 팬이거든.? ?팬이요?? ?그래. 숨겨진 팬이지. 작년이었나? 일본 오사카 지부에 있을 당시 아르바 이트로 온 지크 녀석이 싸우는 걸 본 적이 있어. 본부에 침입한 C+급 중형 BG와 녀석이 1대1로 붙었는데 그때의 모습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지.? 박부장은 손가락을 튕겼다. 직원들은 그 신호에 맞춰 보급이 끝난 BX-Fb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사이 박부장은 당시의 얘기를 계속했다. ?녀석이 싸우는 모습은 예술 그 자체야. 액션영화? 그런 건 상대도 안돼. 보통 때의 녀석은 그냥 괴상할 뿐이지만 싸울 때의 녀석은 한 마리의 뇌룡 (雷龍)이야. 내가 이곳으로 소속을 옮긴 것도 그 녀석이 싸우는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였어.? ?그렇군요.? 사실 류페이 역시 지크가 싸우는 걸 직접 본 적은 없다. 영상으로도 접해보 지 못했다. 지크는 정식발령을 받은 지 얼마 안 되고 그 동안 심각한 전투 만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 영상에 담길 틈이 별로 없었다. 박부장의 말을 들으니 그의 전투모습을 직접 보고픈 마음이 들었다. ?아, BX-Fb엔 영상송신장치가 있죠?? ?아무렴. 슈퍼슬로우가 가능할 정도의 최고급 디지털 카메라가 내장되어있 지. 축구중계를 하듯 BSP위성을 거쳐 곧장 주관제실의 데이터베이스에 보낼 수 있어. 그런데, 그건 왜?? ?한번 찍어보려고요. 사실 지크선배의 영상정보는 많지 않거든요.? ?그래? 그거 좋군! 그럼 좋은 각도로 부탁해!? ?예!? 류페이의 뒤로 외부장갑이 모두 열린 BX-Fb가 옮겨졌다. 탑승용 계단을 올 라 좁은 콕핏트에 들어간 그녀는 내부에 마련된 키보드를 꺼내 시동암호를 넣었다. 수소 터빈엔진의 시원한 기동음이 격납고 내부에 울렸다. 간단한 테스트를 끝낸 류페이는 키보드를 접고 포제션 드라이브용 헬멧을 썼다. 이윽고 콕핏트와 외부장갑이 굳게 닫혔다. 소음억제장치가 가동된 듯 BX-Fb 의 모든 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류페이는 주위를 둘러봤다. BX-Fb의 카메라가 그녀의 눈 대신 전후좌우로 움직였다.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아 후방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충분 했다. ?BX-Fb, 출발합니다.? 거대한 기계곤충이 미끄러지듯 조용하고 빠르게 격납고 출입구로 사라졌다. 박부장과 직원들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흔들며 그녀의 건투를 빌었다. BX-Fb가 주차장을 통해 본부 밖으로 나왔지만 주위를 지나는 시민 중 그 누 구도 그쪽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클로킹 이펙트 덕분에 BX-Fb의 호전적인 모습은 완벽에 가깝게 감추어졌다. 앞서 출발한 전투요원들은 그룹주행을 하며 시민들의 협조를 구했다. 지크 의 오토바이가 앞장을 섰고 뒤로 리진, 챠오가 탄 순찰차가, 마지막으로 그 렌과 케빈이 탄 BUV가 차례대로 뒤따랐다. BUV의 뒤로 쿵 소리가 들렸다. 류페이의 BX-Fb가 뒤따라온 것이다. 백미러로 류페이의 위치를 확인하려 했던 그렌은 실소를 터트렸다. 뒤에 류 페이가 있긴 있었지만 보이는 건 멀리 떨어져 있는 스포츠카뿐이었다. ?사고 위험이 있겠지?? 그렌이 케빈에게 조언을 구했다. 양팔로 팔베개를 하고 있던 케빈은 팔을 슬쩍 펼쳐 어쩔 수 없지 않냐 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류페이, 내 말 들리나?? ?예, 잘 들립니다. 그렌 헤이그 소령님.? ?클로킹 이펙트의 사용을 중단하고 비상등을 켜도록. 잘못하면 안전거리 미확보에 의한 교통사고가 날 수 있으니까.? ?예? 괜찮을까요?? ?이 도시의 시민들은 슈퍼맨이 나타나도 촌스러운 타이즈를 입었다며 놀릴 사람들이야. 30년 전 사람들은 꿈에도 못 꿀 장면들을 한 달이 무섭게 보니 BX-Fb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도 이상할 건 없겠지. BSP 엠블렘까지 찍혀 있으니 안심할 거야.? ?아, 네, 알겠습니다.? 곧 클로킹 이펙트가 사라지고 BX-Fb의 위용이 도로 위에 나타났다. 뒤에 있 던 운전자들은 그렌의 예상대로 놀라기는커녕 무슨 일이 터졌구나 하며 한 숨을 쉬었다. 이윽고 본부로부터의 무전이 들어왔다. ?루이입니다. 지금부터 이번 임무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현재 목 표가 탈취한 금괴들 속엔 특수발신기가 내장된 금괴가 숨어있습니다. 발신 신호의 이동상황은 여러분께서 가지고 계신 PDA에 전송해 드리겠습니다. PD A를 GPS모드에 맞추십시오.? 오토바이 핸들 사이에 PDA를 설치해둔 지크는 루이의 말에 따라 기계를 조 작했다. PDA 화면에 떠오른 매트로 서울의 지도에 붉은 색의 점이 나타났다. 그 점 의 이동모습을 본 지크는 미간을 찌그러트렸다. ?어라? J-1구역으로 가잖아? 지금은 한참 막힐 시간인데 어떻게 저렇게 빨 리 이동할 수 있지?? ?그에 대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목표는 폐쇄된 구 지하철의 선로를 통 해 이동하고 있습니다. BG들이 구 지하철 선로를 이용하는 것은 예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니 놀라실 필요도 없습니다. 목표의 이동루트를 봐서는 시청 쪽으로 갈 확률이 높습니다. 만약 목표가 구 지하철 시청 역에서 멈춘다면 J-1구역의 3번 홀로 집결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면 1킬로 미터 이상의 거리를 두고 추적해주시기 바랍니다.? ?1킬로미터의 거리? 좀 힘들 것 같은데?? 지크의 눈에 이상한 생기가 돌았다. 다리를 통과하던 차량들이 에어브레이크를 가동하며 자리에 멈췄다. 자기부 상 승용차는 바퀴를 사용하는 자동차와 달리 직접적인 마찰에 의한 급정거 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항공기처럼 공기저항을 극대화하는 판을 펼치고 역추 진 가스를 뿜어 전진을 멈춘다. 차를 멈춘 시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로로 나와 마라톤 선수들처럼 단체로 뛰었다. 그들이 타고 있던 승용차 위엔 하얀 색의 육체와 뱀의 머리를 가진 BG들이 표범처럼 올라서서 포효를 하고 있었다. 상당수의 BG들이 교각을 타고 다리위로 올라왔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한강 수중에도 100여 개체의 BG들이 식인고기처럼 돌아다녔다. 선행차량의 급정거에 맞춰 BSP 대열도 정지했다. 하지만 지크는 그대로 오 토바이를 몰고 나갔다. ?류페이. 전투훈련은 충분히 받았겠지?? ?예? 바, 받았습니다만…….? ?좋아, 지원사격을 부탁해. 저 D급의 ?무찰린다?는 원거리 공격이 가능 한 녀석들이라서 좀 귀찮거든. 그렌 아저씨, 저랑 류페이가 길을 뚫을 테니 앞으로 슬슬 나오세요.? ?아아, 기다리지.? 통신을 끊은 그렌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굶주려 있었군, 저 녀석.? 오토바이의 급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지크의 몸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BG 들은 배를 내밀어 복부 위에 튀어나온 늑골들을 일으켜 세웠다. 가시와도 같은 늑골의 끝은 송곳 이상으로 길고 뾰족했다. 연녹색의 체액과 함께 뼈들이 미사일처럼 무수히 튀어나갔다. 목표는 공중 에 뜬 지크였다. ?괜히 날아올랐나?? 지크는 무명도를 뽑아 그 날로 뼈들을 튕겨냈다. 베어낼 수도 있었지만 하 나하나 베어내기엔 숫자가 너무 많았다. 겨우 착지에 성공한 지크는 BG의 군집을 향해 질주했다. BG들은 계속해서 뼈를 날렸지만 상대는 공중에 있을 때와 다른 경이적인 기동력으로 공격을 피했다. ?이 몸을 무사히 땅에 돌려놓은 게 최대 실수라고!? 지크의 강렬한 베기가 가장 앞에 위치한 BG의 머리에 떨어졌다. 뼈가 갈리 는 스산한 소리와 함께 두 쪽이 난 BG는 체액을 뿜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사방으로 뿜어지던 체액이 한쪽으로 쏠렸다. 지크가 빠른 움직임이 만든 바 람에 분출된 체액이 휘말린 것이다. 폭풍과 검광이 채찍처럼 탄력 있게 BG들을 때렸다. 검광 한 번에 한 마리씩 차례대로 죽어나갔다. BG들은 나름대로 저항을 해 봤지만 지크의 속도와 파워는 그들의 본능적 기량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그보다는 못했지만 지크의 반대쪽, 하행선에서 싸우는 류페이도 그럭저럭 쓸만했다. 도로와 기물의 보호를 위해 30미리 특수 고무탄과 고무로 된 클 레이모어를 써서 파괴력은 오리지널 BX-F보다 못했지만 BG들은 거의 접근조 차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차량 밖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던 그렌은 기가 막힌 듯 자신의 대머리를 매 만졌다. ?지크 녀석,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군. 속도도 더 빨라 졌고 파워도 강해졌어. D급을 E급처럼 베고 자르는 걸 보니 내가 다 긴장되 는데?? 반대편 문에서 구경하던 케빈도 동의했다. ?지금 보니 거의 무인지경이네요. 소울게터에게 고생하던 녀석이라고는 전 혀 생각할 수 없는데요?? ?그렇군. 헌데 좀 이상하지 않나?? ?이상하다니요?? 케빈의 연갈색 눈썹이 위로 훌쩍 올라갔다. ?지금 지크가 베고 있는 BG는 자네도 알다시피 D급의 무찰린다야. 강하고 유명한 BG긴 하지만 아시아 지역에선 거의 발견되지 않는 녀석이지. 남미를 포함한 아메리카지역에서나 자주 볼 수 있는 녀석인데, 어째서 이곳에 나타 난 거지? 게다가 저렇게 많이 말이야.? 말을 듣고 보니 이상했다. 케빈은 수염이 옅게 발라진 자신의 턱을 매만지 며 머리를 굴려봤다. ?무찰린다가 매트로 서울에 출몰한 일이 있었나요?? ?내 두뇌에 장치된 보조메모리가 정확하다면 한 번도 없어. 이번이 데뷔 지.? ?음…….?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케빈은 PDA로부터 데이터케이블을 뽑아 귀에 낀 통신 기에 연결했다. 그리고는 그의 PDA에만 있는 프라이버시 모드를 이용해 전 화연결을 시도했다. ?여어, 로마리오. 그 동안 잘 있었어? 후후, 나야 그냥 그렇지 뭐. 한 가 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는데, 괜찮겠어? 아, 다행이군. 그럼 그 쪽에서 대한민국으로 밀반입된 컨테이너가 있는지 알아볼 수 있겠어? 아아, 한두 개가 아닌 건 알아. 내가 직업상 흥미를 가질만한 것만 말해주면 돼. …오, 그래? 언제 반입된 건데? 약 2주 전이라고? 그럼 밀반입한 사람이 누 군데? 뭐? 워 피겨?? 워 피겨라는 말에 그렌과 다른 대원들 모두 표정이 바뀌었다. 케빈은 모두 에게 조용히 해달라는 제스처를 보인 뒤 통화를 계속했다. ?워 피겨가 왜? 응… 하기야, 자네들은 운반책이니 알 리가 없겠지. 그래, 내일쯤 통장정리나 해봐. 하하, 고맙긴 뭘. 그럼 다음에 보자고.? 전화를 끝낸 케빈은 그렌에게 찡긋 윙크를 했다. ?의외로 일이 쉽겠는데요? 혹시 아크엔젤이라는 워 피겨에 대해서 알고 계 신가요?? ?아크엔젤?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 녀석이 2주 전 대한민국에 컨테이너 여섯 개를 들여왔다고 하 더군요. 상품명은 냉동식품인데 그럴 리는 없겠죠?? ?과연 그렇군.? 그렌은 예전에 처크가 말했던 케빈의 영입이유를 떠올렸다. ?케빈의 사격능력은 최고야. 거의 돌연변이 수준이지. 하지만 그의 능력만 큼이나 도움이 되는 건 그의 정보망이야. 세계정상의 클리너였던 만큼 각종 밀매와 거물급 인사의 이동, 소문에 대해선 BSP 중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큰 정보망을 가지고 있어.? 그때를 잠시 회상한 그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남미 최고의 밀매조직 보스인 로마리오 베스푸치와 저렇게 간단히 연결되 는 사람은 드물지. 아무튼 적으로 돌리기엔 너무 무서운 친구라니까.? 그때 그의 통신기에서 강한 경보음이 울렸다. ?무슨 일이야, 류페이?? ?11시 방향으로부터 정체불명의 비행물체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 다! 식별코드도 없고 레이더 방해가 심해서 자세히 알아볼 수는 없지만 오 고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뭐라고?? 류페이의 경고대로 11시 방향 상공에 작은 점이 보였다. 시력을 최대한 확 대한 그렌은 그것이 날개를 단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에 경악을 금 치 못했다. ?저건 뭐야?? 물체가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오자 BG들이 한꺼번에 뒤로 물러서더니 모조 리 강물로 뛰어들었다. ?어라? 투신자살이야?? 지크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뭔가 시커먼 물체가 그의 앞에 떨어졌다. 기 척을 느끼지 못했던 지크는 엉겁결에 뒤로 물러났다. 몇 발자국 앞에 날개로 몸을 감싼 정체불명의 존재가 있었다. 날개는 멀리서 봤을 때 악마의 날개처럼 보였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모습만 그럴 뿐, 인공의 냄새가 짙게 배어나왔다. 날개의 뒤로 검은 색의 매끈한 갑주가 보였다. 무엇으로 표면처리가 되어있 는지 몰라도 흑진주처럼 오묘한 광택이 흘렀다. 날개 때문에 머리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괴한은 날개를 펼쳐 등 뒤로 접었다. 검은 투구가 보였다. 투구의 앞엔 황금색 가면이 붙어있었다. 그리스의 조 각상처럼 무표정한 미남의 가면이었다. 신장은 약 2미터 정도였지만 몸은 호리호리했다. 갑주 안에서 들리는 모터 소리는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주었다. 그가 천천히 양팔을 좌우로 뻗었다. 춤을 시작하기 직전의 발레리노와도 같 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가면의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가 소문의 지크 스나이퍼입니까.? 남자의 것 치고는 깔끔하고 음색이 높은 목소리였다. 그런 목소리에 대한 거부증세가 있는 지크는 껄끄러운 얼굴로 목덜미를 긁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어쩔 건데?? 상대는 왼팔을 들며 오른팔을 뻗었다. 뭔가를 권하는 듯한 오른손의 모습과 각도가 심상치 않았다. ?자아, 함께 춤을 춥시다. BSP의 기사, 지크 스나이퍼 경이여. 이 몸의 부 끄러운 이름은 아크엔젤. 우리 워 피겨의 위대한 총수, 워 브레인님의 가녀 린 하인입니다.? ?아크엔젤? 호오, 네가 바로 그 아크엔젤이냐?? ?으음? 이 미천한 몸을 아시는 것입니까?? ?당연히 모르지!? 순간 지크의 돌려차기가 그의 안면에 날아들었다. 춤을 추듯 가볍게 스핀을 하며 공격을 피한 사이보그, 아크엔젤은 오른손 검지를 들고 좌우로 저었 다. ?신사의 도를 지켜주십시오, 지크 스나이퍼 경.? ?닥쳐!? 또 한 번의 발차기가 아크엔젤의 복부에 날아들었다. 그는 이번에도 상대의 공격을 가볍게 피했다. 한쪽 다리를 수직으로 들며 몸을 뒤로 젖힌 아크엔 젤은 팔을 뻗어 지면에 댄 뒤 그대로 몸을 뒤집어 제자리에 섰다. 뭔가 좀 다른 상대 같았다. 지크는 상황을 정비할 겸 뒤로 조금 물러섰다. ?목소리만큼이나 재수 없는 움직임이군. 날 보러 온 이유가 뭐지?? 아크엔젤은 다시금 지크에게 손을 뻗었다. ?저의 목적은 순수합니다. 오직 당신, 당신의 춤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자 아, 어서 보여주십시오. BSP 최강이라 불리는 당신의 춤을!? ?…….? 지크는 움직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뭐라고 소리를 치던지 기습을 하던지 했을 텐데 이번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고수 대 고수의 싸움. 마구잡이로 주먹과 무기를 날리는 건 아마추어의 싸움이다. 어느 정도 도가 튼 존재들은 비슷한 급과 대결할 때 상대가 무엇으로 나올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우선적으로 알아본다. 지크는 오른쪽 눈썹 끝을 훌쩍 올렸다. ?성격은 역겹지만…….? 기술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태권도, 무에타이, 복싱, 쿵푸, 공수도, 프로레슬링 등 세상의 모든 격투기 란 격투기는 거의 다 섭렵한 지크인데도 아크엔젤이 사용할 기술이 무엇인 지 알 수가 없었다. 자기류의 무술은 더욱 아니다. 같은 자기류 무술을 쓰는 지크가 그것을 모 를 리는 만무하다. ?동작이 괴이해.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도대체 저 녀석, 무슨 기술을 쓰 는 거지?? 그때 지크의 통신기가 울렸다. ?상대는 일반적인 무술을 사용하지 않아.? 챠오의 목소리였다. 지크는 꿈틀했다. ?일반적인 무술이 아니라고?? ?조부님의 말씀을 기억해봐.? 지크는 기억을 되짚어봤다. 챠오의 조부이자 삼황오제권의 현 당주인 린 쉐이롱은 자신의 가족 모두에 게 항상 이런 말을 했다. ?주먹을 휘두르고 발을 휘둘러야만 무술이 아니다. 인간의 육체라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단련이 된다면 그 방식에 맞는 흉기로 변한다. 그러므로 세상에 무술이라고 알려진 것만이 반드시 무술이라고 할 수는 없다. 모든 무술은 단지 오랜 세월동안 전해져 내려온 경험의 실체일 뿐이다.? 그 말을 기억해낸 지크는 쓴 웃음을 지었다. ?뭐, 복잡하게 생각할 건 없겠지. 간다!? 그는 한 마리의 치타처럼 맹렬히 다리 위를 질주했다. 그에 맞춰 아크엔젤 은 오른팔을 위로 들고 왼팔을 옆으로 뻗으며 다리를 모았다. ?단순함은 예술적으로 용서되지 않습니다, 지크 스나이퍼 경.? ?시끄러!? 지크의 오른쪽 권이 상대의 가슴을 노리고 앞으로 뻗어나갔다. 단순한 스트 레이트였지만 공격에 실린 박력과 파워는 예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거 의 포탄수준이었다. 그런데 그 공격이 빗나갔다. ?이런!? 공격에 실패한 지크는 곧장 뒤로 몸을 돌렸다. 전진할 때의 속도가 워낙 빨 랐던 탓인지 그의 몸은 관성에 따라 몇 미터 가량 뒤로 밀려나갔다. ?젠장, 순간속도가 빠르군. 내 공격이 너무 단순했나?? 아크엔젤은 힘이 빠진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다 멈췄다. 자세는 처음 그대로 였다. ?그대의 강점은 경이적인 속도와 기동력입니다. 오직 속도만을 앞세운 단 순한 공격은 저를 실망시킬 뿐입니다. 자아, 다시 와주십시오. 당신의 진정 한 춤을 저에게 보여주십시오!? 그의 정성이 담긴 목소리와 달리 그의 상대는 코웃음만을 쳤다. ?흥, 너에게 왜 보여줘야 하는데? 그걸 밝혀야 춤을 보여주든지 지옥을 보 여주든지 할 거 아냐? 자, 대답해 보시지?? 지크는 도발적으로 턱 끝을 움직였다. ?음, 실례를 저질렀군요.? 아크엔젤은 들고 있던 팔을 가지런히 내렸다. ?얼마 전, 당신이 제가 아끼는 부하인 드래곤 잭과 싸웠다는 얘기를 들었 습니다. 그 싸움에서 드래곤 잭이 자신의 칼날 중 하나를 당신에게 드렸다 고 하더군요. 그는 총명하고 멋을 아는 남자였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하사 받은 칼날, 나노 블레이드를 목숨보다 소중히 아꼈지요. 그런데 그걸 당신 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그가 왜 당신에게 호감을 가졌는지 그 이유가 궁금 할 뿐입니다.? ?호오, 잘도 둘러대는군. 그럼 금괴를 훔친 건 뭐지? 훔친 금괴를 숨겨둔 장소가 걸릴까봐 허겁지겁 날아온 게 아닌가?? 그러자 아크엔젤은 충격에 빠진 역을 하는 배우처럼 한쪽 볼을 이두박근 쪽 에 대며 슬픈 목소리를 냈다. ?훔쳐? 훔친다는 건 도적질… 그 지저분한 행동을 제가 했다고요? 당치도 않습니다! 허겁지겁? 그런 저급한 말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는 주 인을 찾지 못하고 슬피 우는 그들의 육신을 어둠 속에서 구원했을 뿐입니다 ! 진정한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서! 저에게 더 이상 실례를 저지르지 말아주 십시오!? ?아아, 알았어. 흥분하지 말고 진정해. 네 소원대로 해줄 테니 말이야.? 지크는 장갑을 죄며 아크엔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아크엔젤은 다시 팔 을 들었다. ?오오, 드디어 저와 파드되를 추실 마음이 갖춰지셨습니까? 좋습니다, 매 우 좋습니다, 훌륭합니다!? ?파드되? 그건 발레에서 남자랑 여자가 추는 거 아니었나??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위해선 성별 역시 무시될 수 있는 것입니 다! 개의치 마십시오!? ?싫어!? 지크의 공중차기가 아크엔젤의 머리를 노리고 들어왔다. 아크엔젤은 상체를 뒤로 움직여 그의 공격을 피했다. 두 번째, 세 번째 차기가 연속으로 뻗어 나왔다. 공중에 뜬 상태로 전진하 며 계속 차는 고난이도의 기술이었다. 그러나 여섯 번째의 차기까지 모두 빗나갔다. 지크는 결국 아무 소득 없이 땅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아크엔젤의 몸이 공중에 떴다. 지크는 정면공격에 대비해 방어와 회 피, 두 개의 카드 중 어느 것을 뒤집을지 고민했다. 순간 상대의 몸이 공중동작을 하는 체조선수처럼 옆으로 꼬였다. 그것도 모 자라 일순간 사라지기까지 했다. 지크는 머리 양쪽에 가드를 올렸다. 두 번의 타격음과 함께 아크엔젤의 몸 이 지크의 뒤에 떨어졌다. ?막았습니까? 대단합니다. 보통의 무술가라면 엉겁결에 이마나 후두부를 막을 텐데 관자놀이를 정확히 막다니, 감탄사만이 나오는 군요.? ?아직 멀었다니까.? 지크는 조금 얼얼한 팔을 턴 뒤 다시 자세를 잡았다. 지크의 공격부터 아크엔젤의 공격까지 걸린 시간은 시계의 초침을 한 칸 밖 에 움직이지 못했다. 다른 이들의 시간을 초월했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스피 드였다. ?우와!? 크게 벌려진 리진의 입에서 감탄사가 새어나왔다. 그녀가 본 것은 아크엔젤 이 슬쩍 뜨는 모습뿐이었다. 무슨 공격이 어떻게 들어갔는지는 전혀 보지 못했다. 그녀보다는 자세하게 상황을 관찰했던 챠오 역시 내심 감탄을 아끼지 않았 다. ?순간속도가 대단해. 전체적인 속도로 보자면 지크가 앞서지만 공격을 피 할 때의 순발력은 사이보그 쪽도 만만치 않아.? 아크엔젤이 또다시 아름다운 손짓을 지크에게 보냈다. ?다시 말씀드리지요. 당신의 강점은 속도와 기동력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 로는 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길 수 없다고?? ?예, 이길 수 없습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이길 수 없습니 다. 결단코 이길 수 없습니다! 자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저에게 당신의 진정한 춤을 보여주십시오!? ?같잖은 놈.? 지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아크엔젤은 실망한 듯 손끌을 내렸다. ?으음? 그런 저급한 말투는 무엇입니까!? ?감상이지 뭐긴 뭐야. 아무튼 고마워. 그 정도 스피드로 이길 수 없다면 더 빨리 움직여줘야겠지?? 그는 발목을 천천히 풀었다. ?너, 알아? 지금까지 나와 1대1로 붙어서 날 뒤엎은 놈은 딱 둘 밖에 없 어. 그 녀석들의 스피드와 파워는 거의 외계인 수준이었지. 하지만 넌 아 냐. 이 세상의 물리법칙에 몸이 익어있으면 날 이기지 못해.? 지크는 오른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것을 기점으로 지크의 전신에 스파크가 일어났다. ?박살을 내주마.? 아크엔젤은 고개를 저었다. ?아아, 그만해 주십시오. 그런 말투는 저에게 있어서 고문입니다. 좀 더 아름답고 고귀한 말로 저를 상대해 주… 흡!? 그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아크엔젤의 검은 육체가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그의 날개가 그에게 양력을 부여해준 것이 아니다. 그와는 상관없는 물리력이 그를 쳐 올린 것이다. 한 줄의 스파크가 승천하듯 다리의 교탑을 타고 올라갔다. 아크엔젤이 상승 하는 속도 이상이었다. 교탑에서 떨어진 뇌룡이 아크엔젤의 육체를 스치고 지나갔다. 토스가 된 배 구공처럼 또 한 번 뜬 그는 어느새 반대편 교량을 타고 날아온 지크에게 맞 아 반대편으로 튀었다. 그것이 무서운 속도로 반복되었다. 스파크의 잔광은 교탑사이를 순식간에 어지러이 연결했다. 그렌들은 공중에 만들어진 뇌력의 거미줄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크엔젤은 그 중앙에서 유린당했다. 자신의 의사대로 떨어지지도, 올라가 지도 못한 채 죽음의 파드되를 계속해서 추었다. BX-Fb 안의 류페이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 지크의 모습을 잡기 위해 애를 썼 다. 기술부 박부장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하지만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움 직이는 그의 모습은 카메라의 기동한계를 일찌감치 벗어나 있었다. ?아아, 어쩌지? 이대로는 제대로 된 기록화면을 만들 수 없어!? 그렇게 걱정하는 것도 잠시, 통신기에서 지크의 목소리가 터졌다. ?꼬마! 상행선 중앙으로 이동해서 배리어 필드를 쳐! 최대한으로!? ?아, 선배님?? ?잔말 말고 어서!? ?네!? 지크가 싸우는 상행선으로 훌쩍 건너온 BX-Fb는 지시대로 최대출력의 배리 어 필드를 전개했다. 그 너머로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아크엔젤의 모습이 있었다. 그를 한껏 유린한 지크는 류페이가 있는 반대쪽으로 전력 질주하다 방향을 바꿨다. 그의 발밑에서 스파크와 함께 고무 타는 냄새가 확 올라왔다. 도로엔 레이 싱 트랙에서나 볼 수 있는 스키즈 마크(바퀴자국)가 진하게 그어졌다. ?간다!? 스타트와 동시에 길쭉한 스파크가 도로 중앙을 타고 아크엔젤에게 향했다. 처음엔 빗나갔지만 지금은 명중률이 100%에 가까웠다. 상대방은 중력의 이 끌림에 따라 추락만을 계속했다. 저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크의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아크엔젤의 등판 정 중앙에 정확히 꽂혔다. 배 트에 맞은 공처럼 튕겨나간 아크엔젤의 육체는 류페이가 쳐놓은 배리어 필 드에 내던져졌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무리!? 지크의 어깨가 배리어 필드에서 떨어지려는 아크엔젤을 다시 밀어붙였다. 충격은 배리어 필드의 반발력 덕분에 배가되어 주위의 공기마저 뒤흔들었 다. 둘 사이에 끼어버린 아크엔젤은 지크의 어깨가 느슨해지자 바닥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지크의 전신에서 수증기가 뿜어졌다. 극뢰 발동 후에 나타나는 상황과 비슷 했지만 지크는 사실 극뢰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가벼운 조깅을 한 뒤의 중년처럼 몸을 풀며 상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쓰러진 아크엔젤을 내려다봤다. 상대는 죽은 듯이 가만히 바닥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흥, 느끼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녀석이었어. 하지만 난 썩을 인 연이다 싶으면 끝내지 않고는 못 버티는 성격이거든. 푹 쉬라고. 살아있든, 죽어있든.? 지크는 동료들을 향해 양팔을 흔들었다. 승리의 기쁨에서 나온 포즈이기도 했고 이 정도면 강해지지 않았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승부는 아직 이었다. 기뻐하는 지크의 뒤로 거대한 악마의 날개가 서서히 펴졌다. ?지크! 뒤를 봐!? 모든 동료들이 그에게 뒤를 보라는 제스처를 날렸다. 그들의 다급한 모습과 달리 지크는 여유만만이었다. ?또 해보자고?? 그는 뒤를 흘끔 돌아봤다. 공중에 저만치 떠있는 것을 봐서 상대는 그럴 마 음이 없는 듯 했다. 아크엔젤은 유감이라는 듯 양팔을 슬쩍 벌렸다. ?당신에 대한 테스트는 충분했습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교체한 육체가 아니었다면 아름답지 못하게 죽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대비하길 잘했습니다. ? 그는 등 뒤에서 무언가를 뽑아 지크에게 슬며시 던졌다. 그것은 캡슐에 싸 인 발신기였다. 금괴도난사건에 대비해 특별히 삽입된 게 분명했다. 지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알고 있었나?? ?그런 아름답지 못한 발신기로는 저를 속일 수 없지요. 그럼 기회가 되면 다시 뵙겠습니다. 저는 빼앗긴 걸 꼭 되찾아야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남자지 요. 자아, 아디오스(Adios)!? 아크엔젤의 모습은 하늘 저편으로 멀찌감치 사라졌다. BSP의 추적은 그렇게 실패로 끝났다. 그래도 아예 허탕은 아니었다. 금괴 강탈사건의 주범이 워 피겨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BG를 다룬다는 사 실을 밝혀낸 건 꽤 큰 소득이었다. 소득만큼이나 큰 압력이 되기도 했다. 두뇌플레이로 유명한 워 피겨가 BG들 을 전략적으로 사용한다면 이것은 명장이 명마 위에 올라탄 것과 마찬가지 였다. 전투요원들에게 귀환지시를 내린 처크는 선글라스를 벗고 눈 사이를 마사지 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아는 오퍼레이터들은 아무 말 없이 처크를 바 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고민을 끝낸 처크가 입을 열었다. ?루이, 자네라면 D급 BG인 무찰린다를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다루겠나?? ?정상적인 방법이라면 불가능합니다. 아니, 정상적이지 못한 방법이라도 불가능합니다. 정확한 이유는 최고기밀사항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밝힐 수는 없습니다.? ?그래?? 처크는 또다시 침묵에 빠지는가 싶더니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 ?후후, 저번에도 말했지만 자넨 장기로는 나에게 이길 수 없어.? ?예?? ?음, 그 얘기는 좀 있다가 하기로 하지.? 처크는 담배를 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원들이 귀환하면 즉각 회의실로 소집해주게. 그 외의 직원들은 특별한 지시가 있을 때까지 비상 대기하도록.? 대원 전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관제실을 나서는 처크에게 경례를 붙였다. 10여분 뒤, 처크의 지시에 따라 귀환즉시 회의실로 돌아온 전투요원들은 침 묵 속에 시간을 보냈다. 가장 여유가 있는 사람은 지크였다. 그는 권총의 탄창에서 빼낸 탄환으로 이리저리 장난을 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표정은 평소와 달리 묵묵했 다. 케빈이 그렌의 옆에 앉는 바람에 지크의 옆자리는 리진이 차지하게 됐다. 오늘 나타난 BG에 대해서 한참 고민하던 그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아크엔젤이라는 녀석, 지크의 그런 공격을 받고 어떻게 그렇게 멀쩡할 수가 있는 거지? 아무리 신체가 단단한 사이보그라 해도 배리어 필드의 탄 력까지 이용한 공격을 받으면 몸속이 엉망이 될 텐데?? 리진은 팔꿈치로 지크의 옆을 찔렀다. ?아까 그 녀석 말이야, 좀 봐준 거야?? ?설마.? ?그런데 왜 그렇게 멀쩡해?? ?아, 그거?? 지크는 다음 말을 이으며 탄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벌려둔 탄환을 집어넣었 다. ?일단 녀석의 몸이 단단… 아니, 충격에 강한 구조라는 게 첫 번째 이유겠 지. 말투만큼이나 몸이 느글느글 하더라고.? ?느글느글하다고?? ?응. 무슨 스펀지를 두드리는 느낌이었어. 신체를 이루는 소재가 뭔지는 몰라도 꽤 부드러웠지. 일반적인 사이보그들은 내부부품을 기초가 되는 프 레임(Frame)에 매달거나 안에 집어넣은 뒤 그 위에 외부장갑을 두르잖아? 근데 그 녀석은 구조 자체가 틀렸어. 아무튼 때리기조차 싫은 몸이었어.? ?으음,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두 번째라…….? 지크는 다 채운 탄창을 권총 안에 밀어 넣었다. ?너도 봤지? 그 녀석, 순발력이 아주 좋아. 나한테 엉망으로 두드려 맞으 면서도 치명타만은 피했지. 가장 큰 충격을 준 건 마지막 공격뿐일 거야.? ?그렇구나. 그럼 그 녀석을 어떻게 없애지?? ?베면 되지 뭐.? ?…….? 리진은 어이가 없었다. ?그걸 알면 일찌감치 칼 빼서 벨 것이지 왜 지금 말하고 있어?? ?그게 쉬우면 네 말대로 일찌감치 베었지.? ?뭐?? ?그 녀석, 예상이지만 내 마지막 공격도 일부러 맞아줬을 거야. 에이, 몰 라. 더 이상 묻지 마.? 지크는 왼손을 펄럭거려 거부의사를 밝혔다. 둘의 대화가 끝나자 그렌이 말했다. ?그 사이보그 말인데, 혹시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 있나? 내가 가진 워 피 겨의 정보 중엔 아크엔젤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이보그는 없거든. 그 무시무 시한 드래곤 잭을 자신의 부하라고 하는 걸 보니 꽤 높은 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모두는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렌이 포기하려던 순간 가만히 있던 류페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어, 슬쩍 본 적은 있습니다만…….? ?오, 그래? 그럼 아는 대로 말해줄 수 있겠나?? ?네.? 류페이의 말에 따르자면 워 피겨의 총수인 워 브레인은 자신의 밑에 열 명 의 직속부하를 두고 있는데, 그들의 정체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한다. 그나마 조금 알려진 것은 그들이 천사의 계급을 사용하여 자신들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그럼 이번에 나타난 아크엔젤은 워 브레인 바로 밑의 거물이라는 말인가? ?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 보여준 전투능력으로만 따져도 충분합니 다.? ?으음.? 그렌은 고민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손으로 비볐다. ?실제로 그렇다면 그런 거물이 이곳에 왜 온 거지? 겨우 금괴를 털려고??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케빈의 목소리가 담배연기와 함께 밀려왔다. ?그 버터로 튀긴 천사 녀석, 분명히 BG들을 조종하고 있었어요. 만약 워 브레인이 BG의 조종방법을 알아냈다면 이게 더 큰 문제죠. 세계정복도 무리 는 아닐 겁니다.? ?음…….? 말은 안했지만 그렌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BG의 조종방법을 알아냈다면 BSP쪽에서 먼저 알아냈을 것이다. 전 세계의 과학자들은 BSP가 창설되기 전부터 BG의 박멸을 위해 모든 기술 을 총동원해왔다. BSP 창설 이후엔 천문학적인 투자를 바탕으로 한 집단적 이고 체계적인 연구까지 이뤄졌다. 하지만 번번이 헛수고로 끝났고 결국 지 금은 언제 끝날지 모를 소모전을 치르고 있다. 아무튼 BG의 조종은 원초적으로 무리였다. 이유를 아는 만큼 그렌은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BSP 전 체가 뒤흔들릴 수 있는 비밀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지크가 말을 꺼냈다. ?오늘 나타난 BG, 무찰린다는 별로 신경 안 써도 될 거에요." 모두의 시선이 다시 지크에게 쏠렸다. ?어째서?? 리진의 큰 눈이 반짝였다. 지크는 글레이즈의 기운이 사라져 조금 떠버린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푹 내리눌렀다. ?가짜거든.? ?가짜?? 리진과 모두가 놀라는 사이 처크와 루이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자기자리에 앉은 처크는 지크의 외의 모두가 놀란 얼굴을 하고 있자 덩달아 의아해 했다. ?무슨 얘기를 나눴기에 분위기가 이런가?? ?가짜 무찰린다 얘기죠.? 지크가 대답했다. ?가짜 무찰린다? 호오, 빨리도 얘기했구나.? 처크는 씩 웃었다. 자신들의 우두머리까지 그렇게 나오자 모두의 궁금증은 더했다. ?지부장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짜 BG라니…….? 그렌이 대표로 묻자 처크는 바턴을 지크에게 넘겼다. ?우선 지크 소위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지. 농담으로 한 말인지, 아니면 진 짜인지 알아봐야 할 거 아닌가?? 처크의 응원을 뒤에 업은 지크는 여느 때와 달리 당당한 미소로 얘기를 시 작했다. ?무찰린다는 멕시코 지부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몇 번 싸워봤죠. 그래서 잘 아는데, 오늘 나타난 무찰린다는 진짜와 비교해서 다른 점이 몇 가지 있 었어요. 녀석들이 도로를 점령했을 때 시민들이 차에서 내려 마구잡이로 도 망쳤죠? 진짜 무찰린다였다면 저보단 그들에게 먼저 늑골을 날렸을 거예요. 모두 알다시피 BG의 1차 목표는 저항할 수 없는 인간이잖아요.? ?아.? 그렌이 오른 주먹으로 반대편 손바닥을 쳤다. 다른 대원들 역시 일리가 있 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크엔젤이 BG를 조종할 수 있다면 그런 기본적인 공격성향도 조 절할 수 있지 않을까요?? 루이가 반론을 폈다. 지크는 문제없다는 듯 받아쳤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어. 일단 녀석은 약해. 내가 멕시코에서 만난 무찰 린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육체적 능력이 떨어진다구. 벨 때의 느낌 부터가 다르다니까? 예를 들어 BX-Fb에 지급된 고무탄과 고무 크레이모어는 BG에게 치명적 충격만을 주도록 설계되어 있어. 관통용이 아니야.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찰린다의 몸은 스티로폼처럼 숭숭 뚫렸지. E급 BG의 껍질도 고 무탄에 뚫리지 않는 마당에 D급의 껍질이 뚫린다면 뭔가 이상하지 않아?? 그건 확실히 조종과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루이는 인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진은 놀란 얼굴로 지크를 바라봤다. ?잘도 아네? 100점의 남자치고.? ?수학하고 상관없는 얘기니까.? 처크가 이어서 말했다. ?좋아, 제군들. 일단 지크의 말은 맞다. 하지만 반은 틀리지.? 모두는 처크가 낸 수수께끼로 인해 또 다른 의문으로 빠져들었다. 처크는 씩 웃으며 품에서 메모리 카드 하나를 뽑았다. 카드엔 영문자 A가 적색으로 도장되어 있었다. A급 기밀이라는 뜻이었다. BSP의 기밀사항은 A급부터 AA, AAA급까지 세 종류로 분류된다. A급은 지부장 재량으로 소위 이상의 계급을 지닌 대원들에게 공개할 수 있 으며 AA급은 소령 이상, AAA급은 BSP 최고 책임자인 데리 헌트 총장의 직접 허가 아래 지부장 이상의 계급을 가진 인물들만이 열람할 수 있다. 처크는 그 카드를 루이에게 넘겨주었다. ?루이, 이 카드의 인물파일 21번을 열도록. 아, 미안하지만 류페이는 잠시 나가주었으면 하는군. 알다시피 A급 기밀은 소위 이상의 계급만이 열람할 수 있으니까.? ?예, 지부장님.? 류페이는 경례를 한 뒤 아쉬운 얼굴로 자리를 떴다. 그녀가 나간 뒤 메인스크린엔 한 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작은 체구에 까 까머리를 한 일본계 노인이었다. 처크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 노인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이 노인의 이름은 후지바라 와카루, 1978년생. 현재 BSP와 인터폴 등에선 그를 1급 지명수배자로 지목해 추적하고 있다. 그렌 외에 이 노인에 대해서 아는 사람 혹시 있나?? 모두는 서로만 바라봤다. 루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를 수밖에. 그럼 노인의 프로필을 말해줄 테니 잘 듣도록. 이 노인의 최종학력은 고졸이다. 집이 워낙 가난해서 대학엔 가지 못했다고 하더군. 그러나 지금 이 노인은 AI설계와 생물병기 제조, 해킹 등 이 세 가지 방면 에서 전 세계 톱클래스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생물병기와 AI 분야는 톱클 래스가 아니라 아예 톱이다. 그 누구도 이 노인의 실력과 경험을 능가하지 못하지.? ?…….? ?이 노인이 어느 정도로 괴물인지 설명해주지. 이 노인은 BG의 유전자 공 식을 해석한 세계최초의 인물이자 유일한 인물이다.? ?예?? 모두가 놀랐지만 특히 루이가 가장 크게 놀랐다. 그녀의 기억 안엔 BG의 유 전자 공식을 완전히 해석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처크는 손을 뻗어 모두를 진정시켰다. ?물론 비공식적인 일로 기록되어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그 래서 이 노인의 존재는 A급 기밀로 분류된다. 그럼 지금 이 노인을 소개하 는 이유를 말해주겠다.? 처크는 시거담배의 끝을 재떨이 안에 밀었다. 담배의 두툼한 몸체를 잡아 재떨이 바닥에 끝을 부비며 재를 떨고 끝을 동그랗게 다듬었다. ?이 노인이 유전자 공식을 해석한 BG는 다름 아닌 무찰린다다. 해석된 유 전자 지도를 맘씨 좋게 BSP에 넘겼다면 괜찮겠지만 와카루 박사는 그것을 개인적인 돈벌이에 이용했지. 무찰린다의 유전자 지도를 중동의 분쟁지역과 테러리스트들에게 팔아넘겼어. 인터폴과 BSP에서 기적적으로 유전자 지도의 유출을 막고 와카루 박사를 검거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잔가지 하나를 놓쳤더군.? ?그게 워 피겨라 이거죠?? ?맞았어.? 지크와 처크는 서로를 보며 빙긋 웃었다. ?결론적으로 이번에 워 피겨, 아크엔젤과 함께 나타난 BG는 BG이면서 BG가 아니다. BG의 유전자 공식을 이용해 만든 생물병기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게 밝혀졌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우리는 녀석들이 어째서 금괴를 털고 있는지, 또 왜 하필 우리들의 동네에서 난리를 치는지를 알아내야 한 다. 그에 대한 사항은 본부 내에서 알아서 할 테니 제군들은 다음에 일어날 지도 모를 녀석들의 행동에 대비해주기 바란다. 그럼 이상.? 그렌을 필두로 한 전투요원들은 경례 후 회의실을 나갔다. 루이와 단 둘이 남게 된 처크는 또다시 선글라스를 벗고 미간을 마사지했 다. 노트북을 덮던 루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자신과 단 둘이 있을 때나 집에선 넉넉한 아버지였지만 본부에선 냉정하고 결단력 있는 지 부장으로 변한다. 특히 BG와 관련된 일에 대해선 극성이라 생각될 정도의 열의를 보인다. 어렸을 때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그녀를 BSP로 만든 어떤 사건을 겪은 이후 루이는 아버지의 그 열의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BG에 대해선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걱정?? 처크는 피식 웃었다. ?후후, 그에 대한 걱정은 워 피겨에게 돌리는 게 나을 거다. BG가 왜 발생 했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르는 이상 녀석들은 자멸할 수밖에 없어. 너도 이유를 알 거 아니냐?? ?…….? ?내가 가장 껄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와카루야.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 노인네는 BG의 생물병기화가 불가능하다는 걸 애초부터 알고 있었어. 알 면서도 팔아먹은 거지. 내가 직접 심문할 때 알아서 불더군. 그래서 이유를 물었더니 어이없는 대답을 하는 거야. 재미가 있을 것 같아서라나? 아무튼 범상치 않아. 인류역사에 기록될 정도의 큰일을 벌릴 것만 같은 노인이야. ? 처크의 입과 코에서 담배연기가 흘러나왔다. 잠시 동안 생각하던 그는 품에서 또 다른 카드를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카 드 표면엔 AA(더블에이)가 크게 찍혀 있었다. ?무찰린다의 유전자 지도야. 혹시 모르니 참고로 사용해.? ?AA클래스의 기밀사항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일을 위해서니까 괜찮겠지. 설마 네가 날 데리 헌트 총장에게 고발하겠니 ?? 처크의 농담에 루이는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루이는 카드를 받아 품에 넣었다. 처크의 지시가 뒤를 이었다. ?가장 신경 쓰이는 건 금괴야. 워 피겨가 자금을 모으기 위해 금괴를 탈취 하는 건지, 아니면 금괴가 꼭 필요한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한번 알아봐. ? ?예, 지부장님.? 동료들이 쉬는 사이 지크는 본부의 지하 21층으로 내려갔다. 누군가를 만나 기 위해서였다. 일곱 개의 보안절차를 거쳐 그가 다다른 곳은 다름 아닌 구치소였다. 물론 BG를 잡아 가두기 위한 구치소는 아니다. BG는 무조건 살상 및 소각이 원칙 이기 때문에 구치소가 필요 없다. 지크가 들어간 방은 매우 좁고 작았다. 은행금고처럼 크고 두꺼운 문 여섯 개와 한 대의 컴퓨터만이 덩그러니 있었다. 컴퓨터 앞에 앉은 지크는 또 한 번의 보안절차를 거친 뒤 면회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모니터에 뜬 여섯 개의 박스는 하나 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어 있었다. 지크는 남자의 얼굴이 뜬 박스를 체크했다. ?오랜만이야, 도마뱀 잭 아저씨. 몸은 좀 괜찮나?? 그가 마이크에 대고 말을 하자 스피커에서 반응이 왔다. ?음? 누군가 했더니 BSP보이(Boy)군. 내 몸을 걱정하고 싶다면 일단 몸을 좀 주는 게 어떤가?? ?아차, 아저씨는 몸이 없지? 아픈 구석을 찔렀군. 아무튼 지낼 만 해?? ?그럭저럭. 내 뇌에 대한 관리를 워낙 잘해줘서 오히려 시원하기까지 하 군. 인터넷까지 검색할 수 있으니 질리지도 않아. 다만 내가 좋아하는 미트 스파게티를 먹지 못한다는 게 아쉬울 뿐이야.? ?호, 그렇군. 사이보그는 갇혀 있기도 편하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육체적인 고통은 없으니까.? 지크와 드래곤 잭의 대화에서 볼 수 있듯이 사이보그의 격리 및 수용은 일 반인과 다르다. 일반인의 경우 쇠창살과 수갑, 두껍고 습한 콘크리트 벽 등 듣기에도 껄끄 러운 장비들을 필요로 하지만 사이보그의 경우, 특히 드래곤 잭과 같은 전 신 사이보그는 두뇌와 두뇌를 보호하는 유닛만 꺼내어 생존 장비만 붙여두 면 된다. 금고문은 다른 이들이 죄수를 꺼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격리체일 뿐이다. ?그런데, 무슨 용건으로 날 찾아왔나? 설마 날 꺼내주려고 온 건…….? ?당연히 아니지.? 지크는 의자를 조금 뒤로 뺀 후 다리를 컴퓨터가 놓인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귀찮은 녀석이 나타나서 그래. 혹시 아크엔젤이라는 녀석에 대해 알고 있 어?? ?아크엔젤? 그게 누구지?? ?말 돌리지 마. 그 녀석이랑 한 판 붙고 오는 길이란 말이야.? ?호오, 그래? 하지만 믿지 못하겠군. 증명을 해봐라. 그는 어떤 남자지?? ?어떻긴, 니글거리지.? ?흠, 만난 게 확실하군. 그럼 얘기를 해줄 테니 마실 것 좀 넣어줘. 보드 카로.? ?보드카? 왜?? ?느끼한 것을 지우려면 독한 술이 최고거든.? ?오오.? 지크는 키보드를 조작해 드래곤 잭의 격리실에 보드카를 넣었다. 실제로 뇌 에 보드카를 주입하는 건 아니다. 보드카를 마셨을 때의 감각, 즉 맛과 향 등의 특유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전자신호를 약간의 알코올과 함께 전해주 는 것뿐이다. ?아아, 죽이는군. 전자신호인 걸 알면서도 취기를 느끼는 내가 싫을 정도 야. 그럼 아크엔젤에 대한 얘기를 해주지.? ?좋아.? ?아크엔젤은 워 브레인 총수의 직속부하라 할 수 있는 10천사 중 한 명이 다. 부하서열로 따지자면 5위정도 되지. 그리고 난 아크엔젤 소속의 전사 다.? ?오, 그렇군.? ?알겠지만 아크엔젤은 굉장히 느끼하다. 부하로 지내기가 괴로웠을 정도 지. 아무튼 그의 전직은 발레리노다. 워 피겨 중 유일하게 군인출신이 아니 지.? ?발레리노?? ?그렇다. 이름은 모르지만 소년시절엔 천재 중에 천재라고 불렸다더군. 하 지만 대학에 진학하기 직전 그의 나라에 내전이 일어나면서 어쩔 수 없이 군에 들어갔고 매번 내려오는 상부의 무리한 작전으로 인해 결국 한 쪽 다 리를 잃었지.? ?음.? ?내전이 끝난 뒤 그는 발레강사를 하며 생활을 했지만 춤을 추지 못하는 발레리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 알다시피 휴먼드라마는 아무데서나 찍는 게 아니잖나. 결국 폐인이 되어 도시를 떠돌던 그는 운이 좋게도 우리 총수 의 눈에 띄어 워 피겨에 들어오게 된다.? ?오호, 그런 역사가 있었군.? ?총수는 아크엔젤을 사이보그로 만들 때 당시 축적된 자본의 절반 이상을 투자했다. 덕분에 10천사 중에선 가장 많은 투자를 받은 인물이 됐지.? ?그래? 왜 그렇게 돈을 퍼다 부었어? 당신네 총수는 느끼한 걸 좋아하나? ? ?물론 이유는 따로 있지. 말해줄 수는 없고… 어쨌든 그와 싸워봐서 알겠 지만 그에겐 어지간한 직접타격은 거의 소용이 없다. 그것 때문에 좀 답답 했을 거야.? ?응, 어떻게 알았어?? ?모를 리가 없지. 그가 사용하는 외부장갑은 나노 스킨이다. 1제곱 센티에 1만 달러나 하는 고가의 소재지. 수십 톤 이상의 충격도 스펀지처럼 흡수해 버리니 값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신품으로 바꾼다는 일정이 있었는 데 너랑 싸우기 전에 바꿨나보군.? ?음, 그런 거 같아. 좋아, 정보 고마웠어. 그럼 나중에 보자고.? ?아, 잠깐.? 드래곤 잭이 말했다. ?아크엔젤과 다시 싸울 기회가 오면 그땐 주의해라. 말투와 목소리는 느끼 할지 몰라도 실력 하나는 확실하다. 괜히 우리 총수가 총애하는 10천사가 아니니까.? ?응, 알았어. 꽤나 친절하시군.? ?후후, 그의 날개에 현혹되지 마라. BSP보이.? 구치소를 나온 지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노 스킨에 대한 생각을 계속했 다. 어느 정도 파워와 스피드가 붙은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충격을 거의 주 지 못한다면 나중에 싸울 때에도 큰 고민거리가 될 게 분명했다. ?좀 더 수련해야 하나? 하지만 무슨 수로 더 강해지지?? 그가 탄 엘리베이터가 지상으로 올라왔다. 점차 짙게 깔리는 어둠만큼이나 그의 고민도 깊어져갔다. 그날 저녁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조용하게 지나갔다. 아크엔젤도 활동하지 않았고 BG역시 휴가를 간 듯 조용했다. 덕분에 집에 돌아올 수 있었던 지크는 의외의 손님을 맞이하게 된다. ?슈렌?? 현관문을 열자마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슈렌 의 모습이었다. 슈렌은 손을 슬쩍 들어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의 파란 장발과 미모, 그리 고 과묵함은 여전했다. ?오랜만이다.? ?여어, 간만이야. 우리 엄마는?? ?시장을 한 번 더 갔다 오시겠다며 나가셨지.? ?호오, 그렇군. 그런데 리오 녀석은 어디 있어? 내 방에서 자고 있나?? 지크는 소파 등받이를 훌쩍 넘어 슈렌의 맞은편 앉았다. 슈렌은 들고 있던 찻잔을 놓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근신처분을 받은 상태다.? ?뭐?? 반가움으로 밝게 펴져있던 지크의 얼굴이 일시에 굳어졌다. ?근신이라니, 도대체 누가? 누가 녀석처럼 강한 놈을 근신시킨단 말이야? ? ?주신이다.? ?주신?? ?그래. 하지만 뭐라고 할 수는 없어. 근신은 리오 스스로 자초한 거다.? ?…….? 이야기는 당분간 계속되지 못했다. 지크의 어머니, 레니가 때마침 돌아온 것이다. 얘기가 다시 시작된 건 저녁식사가 끝난 후였다. 슈렌은 지크의 방에서 잠 시 중단되었던 리오에 대한 이야기를 재개했다. ?리오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강하지 않아.? 슈렌의 첫 말은 상당히 의외였다. 지크는 기분 나쁜 얼굴로 의형제를 응시 했다. ?무슨 소리야? 강하지 않다니?? ?넌 모르겠지만 리오에겐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 그 때문에 자신에게 내려 진 임무를 제대로 성공한 적은 거의 없지.? ?정신적인 문제라고?? 잠깐의 침묵이 지크의 방에 감돌았다. 벽에 기대어 앉은 슈렌은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며 얘기를 계속했다. ?리오는 검에 대한 최고의 자질을 가지고 있어. 너를 포함해 지금까지 가 즈 나이트가 된 다섯 명 중 베스트에 들지. 너도 직접 느껴봤겠지만 그의 압도적인 파워와 스피드, 순발력은 누가 가르쳐줘서 이루어진 게 아니야. 녀석의 훌륭한 재능이지. 하지만 녀석은 가즈 나이트가 된 뒤로 점차 나약 해졌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자신의 육체와 끊임없이 계속되는 이별, 임무가 되풀이될수록 강해지는 적의 존재. 그 모든 것이 녀석의 정신을 폐 퇴시켰지.? ?…….? ?녀석이 가장 충격을 받은 건 자신이 예전에 임무를 맡았던 세계에 다시 돌아갈 기회가 왔을 때야. 50년 만에 돌아간 그 세계는 모든 것이 달라진 상태였어. 처음 왔을 때 만나 사귀었던 친구들은 대부분이 세월을 이기지 못해 죽었거나 노인이 되어 있었지.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되돌아온 리 오를 봤을 때 모두 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해.? ?무슨 말인데?? ?왜 당신은 하나도 변한 게 없느냐, 라고.? 지크의 표정이 그 자신도 모르게 일그러졌다. 슈렌은 그를 보며 나직이 말 했다. ?화낼 건 없어. 그들은 그저 신기해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야. 악의는 없었 지.? ?하지만……!? 지크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한 이유는 자신 이 리오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슈렌이 말했다. ?처음의 리오는 그저 조금 말투가 거칠 뿐인 남자였어. 용기와 패기는 지 금의 너 이상이었지. 하지만 정신적인 충격을 수백 년 가까이 받으면서 그 감정은 점차 사라졌고 나중엔 모든 것을 부정하기 시작했어. 누군가 자신과 가까워질 것 같으면 반쯤 죽이기까지 하며 떼어놨지.? ?…….? ?결국 그는 마지막에 내려진 임무를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이 간 세계를 멸 망시켰어.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와 동식물을 막론하고 모든 것 을 파괴했다. 마왕처럼.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 파멸시켰지. 물론 그 자신은 3개월 후 부활했지만.? ?뭐라고?? 지크는 지금 슈렌이 한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럴 리가! 그 녀석, 말투는 좀 거칠지 몰라도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니야! 아니라고!? ?악당은 아니지.? 슈렌은 얼음처럼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눈을 지크의 눈과 마주했다. ?하지만 한 세상을 멸망시킨 건 사실이다. 이유가 어찌됐든 그건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야. 불쌍하다고 할 수도 없어. 그런 걸로 따지자면 녀석에게 죽은 존재들이 더 불쌍하겠지. 수개월에서 수십 년에 이르는, 그 어떤 것으 로도 바꿔줄 수 없는 그들의 소중한 시간들을 녀석은 칼질 한번에 끝낸 거 다. 넓게 보자면 미래까지 끝낸 거지. 물거품처럼.? ?으음…….? 지크는 괴로운 목소리를 냈다. 의형제나 친분을 떠난 문제였다. 싸우는 모습 하나만으로 자신을 몇 번이고 감동시켰던 존재가 그렇게 무너졌다는 말에 가슴이 저려왔다. 슈렌은 머리를 벽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리오는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하면 큰 벌을 받고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 지게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어. 자신이 원하는 죽음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 한 거지. 하지만 주신께선 그걸 알고 계셨어. 그리고 근신이라는 약한 벌을 내리셨지. 물론 녀석의 입장에선 가장 큰 벌이겠지만.? ?…….?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지크는 벌떡 일어나 슈렌 앞에 섰다. ?가자, 슈렌.? ?…….? ?리오 녀석을 만나겠어! 그 녀석, 그렇게 사라지면 안돼! 내가 넘어야 할, 내가 언젠가 이겨야 할 녀석이 그렇게 어이없이 사라지면 나마저도 죽을지 몰라! 녀석을 다시 일으켜 세울 거야!? 슈렌은 고개를 흔들었다. 순간 이마에 핏발이 선 지크는 거친 손짓으로 슈 렌의 멱살을 잡아 강제로 일으켰다. ?의형제잖아! 의형제가 그렇게 무너지는 꼴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거야? 너 그렇게 잔인한 녀석이었어?? ?잔인한 건 너다.? ?뭐?? 지크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놓았다. 그에게 꽂힌 슈렌의 시선은 그 정도의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넌 의형제라고 자기 입으로 주절거리면서 리오의 강함 만을 알고 있을 뿐 이야. 그러고도 네가 의형제인가?? ?…….? 지크는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고 고개를 숙였다. 슈렌의 그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넌 리오를 동정할 자격이 없다. 너 같이 나뭇잎 하나에 집착해 숲을 볼 줄 모르는 애송이에게 위로를 받느니 혼자 격리되어 있는 게 더 낫겠지.? 지크는 다시 발끈했다. ?젠장, 그럼 왜 나한테 리오 얘기를 꺼낸 거야! 이런 말을 할 거라면 왜 얘길 했어!? ?네가 나, 그리고 리오와 의형제이기 때문이다.? 지크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슈렌은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손님은 침대에서 자게 하는 지크 의 성격을 그는 알고 있었다. 침낭에 의지해 바닥에 누운 지크는 불이 꺼진 천정을 가만히 바라봤다. 오 늘의 일과 슈렌의 얘기, 리오의 얘기를 어둠 속에서 가만히 되씹었다. ?슈렌, 자고 있어?? ?아직.? ?그래? 그럼 말이야… 오늘 리오 얘기만 전해주려고 온 거야?? ?아니.? ?그럼 왜 왔어?? ?네가 스스로의 한계를 느낄 때가 됐다고 생각해서 왔지.? 지크의 자리에서 머리를 긁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 잘도 알고 왔네. 어떻게 알았어? ?이 세계엔 널 크게 능가할만한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곳엔 있나?? ?나와 리오, 그리고 그 밖의 가즈 나이트들은 시작부터 악마와 천사, 마 족, 마수 등 이 세계의 상식을 초월한 존재들과 몇 백년간 싸워왔다. 그들 의 능력에 맞게 우리들의 전투능력 역시 비약적으로 발전했지. 네가 이 편 한 세계에 있는 한 그런 상대와 싸울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으음…….? ?원래는 너에게도 우리들과 같은 환경을 소개해 주려고 했지만 오늘 네 모 습을 보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넌 충분히 강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골치 아픈 녀석들이 꽤 많단 말이야. 오늘만 해도 한 놈 만났고…….? ?그건 네가 머리를 못 쓰기 때문이다.? ?…….?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지만 지크의 얼굴은 말도 못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 렇다고 악의가 담긴 표정은 아니었다. 이번엔 슈렌 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벽 쪽으로 돌아누운 그는 잠에 잦아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네가 지은 가즈 나이트라는 이름은 많이 알려지게 됐다. 악마나 천사 들은 대부분이 알고 있지.? ?오, 그래? 그건 좋은 소식이군.? ?하지만 이름을 들은 대부분은 유치하다고 하더군.? ?…….? 둘은 이후 별다른 대화 없이 그대로 잠들었다. 다음날, 일찌감치 일어난 지크는 슈렌을 깨워 아침을 권했다. 5시라는 시간 을 본 슈렌은 왜 이리도 일찍 식사를 하느냐는 얼굴로 지크를 응시하며 샤 워실로 향했다. 식사는 토스트와 수프 등으로 매우 간단했다. 지크가 햄을 올리고 버터니 잼이니 하는 것들을 마구잡이로 발라 먹는 것과 달리 슈렌은 토스트만을 그 대로 먹었다. 신체대사량이 많아 배가 자주 고픈 편인 지크로선 그런 슈렌의 모습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예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렇게 먹고 배고프지 않겠어? 리오 녀 석도 거의 나만큼 먹던데…….? ?전투스타일의 차이다.? ?그래?? 슈렌이 싸우는 걸 본 적은 없지만 성격이나 평소행동을 생각하면 지크 자신 같진 않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지크의 머릿속에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 다. ?오늘 시간 있어?? ?내일까지는.? ?오, 그래? 그럼 나 좀 도와줘.? 슈렌은 지크를 응시함으로서 무슨 말이냐는 질문을 대신했다. 지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 대신 싸워달라는 말은 아니니 염려하지 마. 대신 보디가드를 좀 해달 라는 거야.? ?보디가드?? ?어제 나타난 어떤 놈과 그놈의 부하들 때문에 나랑 동료들 모두 요즘 머 리가 아파 미칠 지경이야. 우리가 다른 곳에서 싸우는 사이 그 놈들이 나타 나면 정리 좀 해줘. 단 하나, 내가 말한 놈만 남겨두면 돼. 그 놈은 내가 없앨 거니까.? ?그 자의 인상착의는?? ?매우 느끼해.? ?…….? 슈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토스트 조각을 입에 넣었다. OK사인을 받아낸 지크 는 씩 웃으며 다음 용건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어.? ?뭐지?? ?네 무술을 좀 보여줘. 단 5분만이라도 좋으니까.? ?스타일이 다를 텐데?? ?괜찮아. 기대하고 있단 말이야.? 지크의 소원이 시작된 건 BX-F와 싸우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레니의 부탁으로 슈렌이 심부름을 간 사이 리오는 지크에게 슈렌대한 얘기 를 잠깐 해주었다. ?너, 나와 슈렌이 붙으면 누가 이길 거라고 생각해?? 슈렌에 대해서 잘 모르는 지크로선 리오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 큼 리오의 인상은 지크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그러나 리오의 대답은 의외였다. ?열 번 싸우면 5대5에서 6대4로 내가 조금 밀려. 저 녀석, 보기에 비해서 상당히 강하지.? ?뭐라고? 거짓말이겠지!? ?정말이야. 슈렌의 창술은 아직 신계에서 인정을 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기 술만큼은 수준급이라고 평해져. 힘이나 속도 같은 체력적인 면에선 내가 훨 씬 앞서지만 녀석의 기술은 그것을 커버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나지.? ?그, 그 정도란 말이야? 누구에게 배웠는데?? ?처음엔 현재 주신의 비서인 피엘 플레포스에게 배웠다고 하더군. 소문으 로는 그 여자도 꽤 한다더라고. 하지만 슈렌이 어느 순간 그녀의 실력을 뛰 어넘어버리는 바람에 결국 다른 사람에게 잠시 동안 맡겨졌지. 헌데 그가 누군지는 나도 몰라. 소문으로는 선신계 최고의 창술가인 가브리엘과 맞먹 을 정도의 강자라고 하더군.? 지크가 슈렌의 무술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부터였다. 집을 떠난 지 한 시간, 지크와 슈렌은 BSP본부 내의 제2트레이닝 룸에 도착 했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위한 제1트레이닝 룸과 달리 제2트레이닝 룸은 대련을 위한 넓은 공간과 구급장비 등의 안전시설로 꾸며져 있었다. ?어때, 시설 좋지? 예전에 날 데려갔던 그 초원보다는 나을 거야.? 지크는 부동산 업자처럼 트레이닝 룸의 구석구석을 보여주며 자랑스러워했 다. 지면과 벽면을 이리저리 살핀 슈렌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큰 기술을 쓰기엔 무리 같군.? ?…….? 슈렌은 복장을 바꾸고 그룬가르드를 꺼냈다. 어디에 쓸 것인지는 몰라도 30 0킬로그램짜리 중력식 아령도 옆에 가져다 두었다. 적갈색의 장창이 주인의 손에 따라 바람을 가르며 회전했다. 창을 멈춘 슈렌은 곧장 기본자세를 취했다. 오른발로 바닥을 짚으며 손목을 튕겨 끝을 한번 떨어준 뒤 그대로 고정했 다. 위쪽 끝은 약간 비스듬히 아래로 향한 채 고정했다. 꽤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상당히 멋들어졌다. 특히 손목으로 창을 떨 때는 주위의 공기가 더욱 조용해지는 듯 했다. ?검이나 도(刀)에 비해 창은 다루기가 매우 어렵다. 대부분의 창이 사람의 키보다 길기 때문에 무술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잡으면 빈틈투성 이가 되어 상대에게 난도질을 당하기 십상이다. 창술의 기본기는 다른 무기 에도 그대로 응용할 수 있다. 하지만 고난이도의 기술은 고도의 수련을 거 치지 않으면 익힐 수 없다.? 슈렌은 몸을 돌리며 창을 회전시켰다. 단순히 돌리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일정한 스텝에 맞춰 창의 양끝이 모든 각도로 움직였다. 칼과 달리 한쪽 끝에만 공격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반대편 끝도 뒤에 있을 지 모를 상대의 급소를 정확히 찌르고 있었다. ?창술은 찌르기, 떨치기, 덮치기, 때리기가 주된 동작이다. 덮치기와 때리 기, 찌르기는 어떤 면에서 검술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떨치기는 창이 가진 고유의 동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룬가르드의 끝이 일순간 멈췄다. 관성이 만들어낸 강한 진동이 그 끝을 흔들었다. ?창의 무게를 다룰 만한 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건 휘두르는 속도와 정확성, 그리고 마음가짐이다. 무풍지호(無風之湖)와 같은 침착하고 냉정한 마음을 유지하지 못하면 상대에게 크나큰 틈을 허용하게 된다.? 슈렌은 창으로 옆에 놓아둔 아령을 공중에 쳐 올렸다. 묵직하게 떠오른 아 령은 깃털처럼 살포시 그룬가르드의 끝에 내려왔다. 상당한 무게를 끝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슈렌의 팔이나 창은 전혀 떨리 지 않았다. 지크의 그 좋은 눈도 아주 약간의 진동조차 감지하지 못했다. ?창은 점(點)과 선(線), 면(面), 이 세 가지를 만들 수 있다. 술자의 능력 에 따라 점은 한없이 작아질 수도, 선은 굴곡 없이 깨끗해질 수도, 면은 더 없이 넓어진다.? 세 번의 자세변환이 아령 밑에서 일어났다. 놀라운 것은 아령이 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에 매달아둔 듯 그 자리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지크는 넋이 나간 얼굴로 슈렌의 연무를 지켜봤다. 온 몸에 화염을 휘감은 불사조가 하늘로 나르듯, 지저분한 모든 것을 태우 고 점차 꺼져가는 성화가 마지막 힘을 발휘하듯, 식사를 위해 피워진 불꽃 이 배고픈 이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채워주듯 슈렌의 창술은 다양하면서도 강력했고 또한 잔잔했다. 10분여 가까이 동작이 계속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령은 움직이지 않았 다. 자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래위로 고도가 바뀌긴 했지만 좌우만큼은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슈렌은 마무리로 창끝을 튕겨 아령을 공중에 띄웠다. 그것으로 손으로 받아 가볍게 내려놓은 그는 숨을 고르기 위한 심호흡을 하였다. ?자아, 됐나? 장소가 적당치 않아서 이런 기본적인 것만 보여줄 수 있었 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상급 기술을…….? ?됐어.? 지크는 흐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엄지를 불끈 펴 슈렌에게 보 였다. ?네가 왕이다.? ?…….? 그룬가르드를 불로 바꿔 없앤 슈렌은 이어서 복장역시 이 세계에 맞게 바꾸 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 이용해봐라. 너도 알다시피 강함이라 는 것은 힘과 스피드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신체적 능력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내는 훌륭한 기술 역시 필요하다.? ?으음.? ?네가 만든 극뢰와 그 파생기술인 백뢰살은 너의 신체적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기술이야. 그러나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는 할 수 없어.? 지크는 미완성의 기술이기 때문이라고 반론을 펼치고 싶었지만 방금 전 기 술의 극치를 보여준 남자에겐 쉽사리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슈렌의 얘기는 계속됐다. ?면을 베는 것은 선이고 면을 뚫은 것은 점이다. 선으로 면을 뚫기 위해선 점을 이룰 만큼의 수많은 선이 필요하다. 백뢰살은 분명 훌륭한 기술이지만 점을 만들기엔 불필요하다. 그러니 이제 점을 만들 새로운 기술을 생각해봐 라.? ?기술을 만들라고? 하지만 그건 무리야. 큰 문제가 있단 말이야.? ?문제?? ?이름을 새로 짓는 건 매우 힘들다구.? ?…….? 얼마간의 대화 후 슈렌은 지크의 부탁을 이행하러 간다며 트레이닝 룸을 나 섰다. 넓고 큰 공간 속에 혼자가 된 지크는 트레이닝 룸 중앙에 앉아 기술에 대한 궁리를 해봤다. ?점을 만드는 새로운 기술을 만들라고?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봐도 슈렌의 말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지크는 두 팔을 뻗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냥 직설적으로 얘기해주면 안되나? 간단히 말하면 될 걸 왜 이리저리 꼬아서 얘기를 하는 거야? 빌어먹을.? 그는 트레이닝 룸의 높은 천정을 바라봤다. 어젯밤부터 이상할 정도로 천정 을 자주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속이 답답하다는 증거였다. ?리오 녀석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혼자 있을 텐데.? 지크는 손등으로 이마를 툭툭 쳤다. ?아냐, 잘 견뎌내겠지. 녀석이라면 충분히 이겨내고 다시 나타날 거야. 우 선 내 걱정이나 좀 하자.? 포켓에서 PDA를 꺼낸 지크는 통화버튼을 누르고 통신기를 귀에 꼈다. 기술 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아, 챠오? 난데, 지금 어디야?? ?본부.? ?본부? 본부 어딘데?? ?트레이닝 룸.? ?아, 그래? 마침 잘 됐네. 그럼 제2트레이닝 룸으로 좀 와줘. 네가 도와줄 게 좀 생겼어.? ?거절.? ?윽, 그러지 말고 좀 와줘. 권법에 대해 궁금한 게 생겨서 그렇단 말이야. ? 통신은 곧장 끊겼다. 지크는 그녀가 올지 안 올지 매우 궁금했지만 다행스 럽게도 그녀는 5분도 안되어 제2트레이닝 룸으로 들어왔다. ?여, 왔어?? 지크는 손을 흔들며 그녀를 반겨주었다. 챠오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포니테일을 흔들며 그에게 다가갔다. ?용건은?? ?기술 한 가지만 가르쳐줘. 점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라고 해야 할까?? ?…….? 묵묵히 생각하던 챠오는 이윽고 지크에게 일어나보라는 손짓을 했다. 지크 가 일어나는 동안 챠오는 펑퍼짐한 트레이닝복 상의를 벗었다. 지크는 챠오의 갑작스런 과감함에 움찔했지만 다행이도 그녀는 안에 스포츠 형 탱크톱을 입고 있었다. 남자만큼은 아니었지만 단단히 뭉쳐진 팔과 어깨, 목, 그리고 복부의 근육 은 섹시함을 넘어선 멋을 뿜었다. 그것은 그냥 단련해서는 만들어질 수 없 는 육체였다. 챠오는 지크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흡을 가다듬고 권법의 자세를 취 했다. ?삼황오제권, 강권. 일점집중의 타격권 중 그 첫 번째.? 그녀의 권이 공기를 가로질러 앞으로 뻗어나갔다. 단순한 지르기로 보였지 만 주먹을 쥐는 형태가 조금 달랐다. 중지가 조금 앞으로 튀어나온 형태, 일명 용두권(龍頭拳)이라 불리는 형태였다. 그 상태에서 챠오의 상반신이 크게 진동했다. 그러자 중지의 앞쪽으로 실과 같은 황색의 섬광이 번뜩였다. ?권 전체에 실리는 충격을 한 점에 집중. 이것이 바로 점경(點勁). 이론은 분경(分勁)과 같음.? ?오호.?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챠오는 자세를 바꾸며 지크의 팔을 잡아 들어올렸다. ?일점집중의 타격권, 그 두 번째.? 그녀는 무방비상태가 된 지크의 겨드랑이 사이로 빠르게 파고들며 오른쪽 어깨로 늑골 부위를 들이받았다. 시범인 만큼 지크에게 전해지는 충격은 미 약했다. ?제1점, 붕산고(崩山?).? 챠오의 몸이 튕기듯 탄력 있게 뒤로 물러나는가 싶더니 오른쪽 팔꿈치가 또 한번 지크의 늑골에 닿았다. 팔을 잡은 손은 그대로였다. ?제2점, 암추(岩?).? 또 한번의 물러섬에 이어 그녀의 오른손바닥이 지크의 턱밑에 닿았다. ?제3점, 호포(虎咆). 1점부터 3점까지의 연속이 바로 양화(煬火).? 챠오는 손을 떼고 자세를 정돈했다. 지크는 그녀의 손바닥이 닿았던 턱을 매만지며 불만스레 중얼댔다. ?네 집안에 이런 기술이 있었단 말이야? 난 이런 거 배운 적 없는데?? 챠오는 대답 없이 트레이닝복을 다시 입었다. ?젠장, 집안의 비밀기술이라 이거지? 좋아, 알았어! 해내면 될 거 아냐! 두고 보라고!? 지크는 타격연습용 마네킹이 비치된 창고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트레이닝 룸을 나선 챠오는 머리끈을 풀고 안에 맺힌 땀을 날렸다. 허리까 지 내려오는 그녀의 긴 머리가 더없이 윤기를 냈다. 그녀는 머리를 다시 묶으며 나직이 중얼댔다. ?기본기술이라 안 가르쳐주셨을 뿐이야.? 한편, 본부에서 밤을 샌 루이는 커피로 의식을 바로하며 연신 키보드를 두 드렸다. 아크엔젤과 워 피겨가 금괴를 터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아쉽게도 밤새 모은 정보로는 그들이 금을 모으는 목적을 도저히 알아낼 수 가 없었다. 어둠의 세계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워 피겨가 보유한 자금은 매우 충분하 며 거기다 현금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걱정이 없다고 한다. 자금규모로 보자 면 전 세계 BSP의 1년 예산과 맞먹을 정도였다. 다른 목적으로 금을 모으는 거라고 밖엔 생각할 수 없었는데 거기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잠이나 잘까.? 그녀는 마지막이다 생각하며 처크가 준 무찰린다의 유전자 지도를 검색해봤 다. 그녀로선 반쯤 포기하고 한 행동이었다. 광물질인 금과 생물인 BG의 관계는 도저히 등식이 성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 실로 결정적인 단서가 있었다. ?이럴 수가……!? 어이없는 사실을 알아낸 루이는 처크에게 급히 전화를 했다. 바빠진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대 BG용 레이더를 지켜보던 숙직 오퍼레 이터 역시 비상 신호용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알려드립니다! 현재 300개체에 이르는 대규모의 BG들이 본부로 접근 중! 신호형태는 D급, 무찰린다입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7화 [Point] (후편)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습격으로 인해 BSP본부는 일순간 난장판이 됐 다. 처크와 리진을 포함한 대부분의 중요인사들은 출근 전이었고 그렌과 케 빈은 야간순찰로 인해 귀환하려면 20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본부를 지킬 수 있는 전투요원은 지크와 챠오, 류페이, 그리고 루이뿐이었 다. 처크의 부재중엔 루이가 임시로 최고책임자가 된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영특하고 냉철하다 해도 처크가 없는 실전상황이 처음인 만큼 부작용은 있 었다. 본부를 1차로 수비해야 할 자동방어무기의 작동이 1분 가까이 늦어져 버린 것이다. 이것은 자동방어체계를 담당한 경비부장의 부재가 원인이었지만 그보다는 루이의 지령이 경비부서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게 더 컸다. 그로 인해 방어무기의 절반은 고철이 된 채 지상으로 올라와야 했다. 1차 방어망을 간단히 뚫은 무찰린다와 그들의 통제인인 아크엔젤은 주차장 안내표지판을 따라 여유 있게 BSP의 앞마당을 거닐었다. 가장 보완이 약한 지하주차장을 통해 BSP본부에 침입하려는 심산이었다. 1차 방어망을 돌파할 때부터 아크엔젤은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황금색 가 면이 붙은 그의 검고 둥근 투구엔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지만 행동은 불만으로 가득했다. ?방어 장치의 배치가 마음에 안 들어. 아름답지 못해! 아아, 드래곤 잭이 여. 나의 심복인 그대가 수개월 동안 이런 평범한 장소에서 고통스러워했을 생각을 하니 너무도 가슴이 아프오.? 그는 안타까운 듯 손으로 가면 위를 살며시 훑어 내렸다. ?그건 그렇고, BSP제군들의 행동도 아름답지 못하군. 1차 방어선을 통과당 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다니, 나를 무시하는 건가?? 턱을 괸 채 고민하던 그는 순간 손가락을 강하게 튕겼다. ?그렇군, 나와 내 군대의 전진이 보여준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도저히 움직 일 수 없었던 것인가! 아아, 이런 일이. 나의 아름다움은 투쟁이라는 이름 의 본능마저 무력화시키는구나!? 그는 왼손을 가슴에 얹고 오른팔을 쭉 폈다. 적진 한가운데에서 하는 행동 치고는 너무나 대담했다. 마치 수천의 관중 앞에서 신들린 듯 노래를 부르 는 오페라 가수의 모습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대들을 더 이상 감동시킬 수는 없지. 난 단지 나의 심복을 구출 하러 온 것일 뿐, 그대들을 나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서가 아니오. 나의 이 슬픔을 이해해 주시오, BSP제군들.? 아크엔젤은 주차장을 향해 발을 내밀었다. 갑자기 훅 하는 소리가 아크엔젤의 코앞을 지나갔다. 뱀의 혀처럼 일순간 날름거린 한줄기의 화염은 사이보그로 하여금 반사적으로 피하게끔 만들었 다. ?누구십니까!? 가면의 콧등을 부여잡은 채 시선을 돌린 아크엔젤은 이내 석상처럼 멈추었 다. 그곳엔 가로수가 있었다. 초여름의 싱그러움 밑엔 적색의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좋은 각도로 기대고 있었다. 적당히 습기를 머금은 아침바람이 나뭇가지와 잎사귀, 그리고 남자의 파란 색 장발을 차례로 쓰다듬었다. 염색약품으로 가볍게 만들 수 있는 파란색이 아니었다. 색의 깊이와 윤기 모두 잎사귀의 녹색과 같은 자연의 색이었다. 그 밑으로 보이는 하얀색의 얼굴은 아크엔젤의 황금가면보다도 더 멋진 조 형미를 뽐내었다. 감겨있는 눈 때문에 그런지 엄숙함마저 느껴졌다. 살짝 엮어진 팔의 안쪽엔 한 자루의 적갈색 장창이 가녀린 여인처럼 다소곳 이 안겨 있었다. 창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 남자의 품에서만큼은 그 렇게 보였다. 정말로 그림이 되는 남자였다. 그 모습에 넋을 빼앗겼던 아크엔젤은 검지와 중지로 이마를 잡고 좌우로 천 천히 흔들었다. ?아, 이 아름다움…….? 탄식에 가까운 감탄에 이어 아크엔젤의 손이 그 남자에게 향했다. ?BSP에도 이런 분이 계셨군요. 저의 아름다움에 걸맞은 훌륭한 분이십니 다. 당신의 빛에 마음을 빼앗긴 이 미천한 자의 이름은 아크엔젤. 송구스럽 지만 당신의 존함을 듣고 싶습니다.? 남자는 말없이 등을 떼고 아크엔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크엔젤을 코스플레이 변태라고 오해했다 쳐도 그의 주위에 깔린 수백 마 리의 생물들은 오해의 소지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누가 봐도 위협적 이고 강력한 BG들이었다. 그런데도 상대는 창 하나만을 든 채 걸어왔다. 이 세상에 창을 쓰는 인간은 거의 없다. 대부분이 총이라는 간편한 무기를 쓴다. 칼처럼 상대적으로 원시적인 무기 는 무술에 대해 어느 정도 눈을 뜬 사람들밖에 쓰지 않는다. 창은 특히나 흔치 않다. 뿐만 아니라 수백에 달하는 BG와 워 피겨 최강의 사이보그 중 한 명인 자신 을 향해 대담하게 다가오고 있다. 모든 상황을 종합했을 때 보통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당신의 존함을 듣고 싶습니다.? 아까와 달리 불쾌감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멈추지 않았고 결국 아크엔젤을 스쳐 지나갔다. 남자가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냄새가 나는군.? 아크엔젤의 몸이 순간 뭍에 나온 고기처럼 펄떡였다. ?내, 냄새?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에겐 냄새를 풍길만한 인간 의 육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깔끔하고 스마트한 강철의 육체만이 있을 뿐 입니다! 그런 아름답지 못한 거짓말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거짓말이라… 아무튼 넌 내 상대가 아니다.? 그는 반쯤 뜬 눈으로 앞에 포진된 BG들을 바라봤다. ?각자의 일에 집중하도록 하지.? ?각자의 일?? ?네가 만약 네 목적을 무사히 달성한다면 내 이름을 가르쳐 주겠다.? ?…….? 그림을 감상하듯 남자의 모습을 잠시 바라본 아크엔젤은 가면의 턱을 쓰다 듬으며 말했다. ?BSP가 아니군요. 혹시 당신이 바로 그 유명한 블루 원입니까?? ?그렇다면?? ?후후후.? 아크엔젤은 웃었다. ?당신에 대한 정보는 조금 있습니다. 드래곤 잭과 함께 제가 아끼는 심복 중 하나인 피어셔를 아름답게 산화시킨 인물이라 들었습니다. 당시의 화상 데이터가 전혀 저장되지 않아서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는데, 잘 됐군 요. 당신을 아름답게 죽여 드리겠습니다!? 아크엔젤의 주먹이 상대의 등판을 향해 검은 광선처럼 뻗어나갔다. 큰 폭음에 이어 연기구름이 BSP본부의 건너편에서 피어올랐다. 누군가가 건 물 벽면을 부수고 내부에 처박힌 것이다. 뿌옇게 올라오는 흙먼지를 뚫고 올라온 것은 검은색의 손이었다. 충돌지점 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온 아크엔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저 멀리 보이는 상 대를 바라봤다. ?무, 무슨……! 이런 어처구니없는 파워가 도대체 어디에서!? 아크엔젤의 가슴팍 중앙에서 짧은 스파크가 일었다. 나노 스킨이 충격을 흡 수하지 못하고 고장을 일으켜 발생한 현상이었다. 그 남자, 슈렌은 뒤로 뻗었던 창끝을 제자리로 돌리며 나직이 중얼댔다. ?그 모습, 아름답지 못하군.? 그 말을 들은 아크엔젤의 육체가 또 한번 꿈틀했다. ?으윽, 치십시오! 저 남자를 치십시오, 나의 군대여!? 흥분한 아크엔젤의 목소리에 맞춰 그때까지 양떼처럼 조용하던 무찰린다의 무리들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무쇠도 씹어 뚫는다는 무찰린다의 날카로운 송곳니와 손톱이 남자의 사방에 서 날아들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무섭도록 침착했다. 마치 검을 잡듯 창 아래를 길게 잡고 등 뒤로 넘겼다. 창에 실린 원심력에 이끌리듯 남자의 몸이 무릎정도의 높이로 떠올랐다. 그 순간 아크엔젤의 기계 눈엔 그 남자와 주위의 모든 것이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지크가 이 자리에 있다면 외쳤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풍지호(無風之湖), 바람이 없는 호수라고. 잔잔하게 흐르던 남자의 파란 머리가 파도처럼 일그러졌다. 이어서 또 한번 의 폭음이 주위를 뒤흔들었다. 20층 높이까지 치솟은 화염은 환상이었을까. 남자, 슈렌의 주위는 파괴된 바닥과 가로수, 그리고 압력에 짓눌린 BG들의 잔해만이 뒹굴 뿐, 불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을 뿐, 존재했다. 슈렌 그 자체가 하나의 보이지 않는 화염이 되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불꽃이 보였을까. 바보처럼 주저앉아있던 아크엔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기당천(一騎當千), 아니 만부부당(萬夫不當)… 그 자체로군요. 아름답 습니다. 당신이라면 제 마음 속의 이야기를 해드릴 수 있겠군요.” “…….” 슈렌은 묵묵히 그를 바라봤다. 아크엔젤은 손을 위로 올려 두 번 박수를 쳤다. 그러자 강 저편에서 몇 개 의 반짝이는 물체들이 하늘로 쏘아 올려졌다. 600ml 음료수통과 비슷한 크기의 물체였다. 올라가는 각도가 위협적이지 않 아 슈렌은 가만히 보고 있었지만 그 물체가 터지면서 상황은 변했다. 슈렌과 슈렌의 주위가 온통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통의 내용물은 다름 아닌 금가루였다. 아크엔젤은 쏟아지는 금가루들을 보며 말했다. “제 자신, 아니 워 피겨의 전체는 오직 하나, 평등을 위해 싸웁니다.” “평등?” 아크엔젤의 말은 슈렌이 되물을 정도로 의외의 것이었다. 자기 자신의 몸을 억지로 기계화한 그들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장례식장에 붉은 나비넥타 이를 매고 나타난 것과 비유할 수 있을 만큼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크엔젤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렇습니다, 평등입니다.” 그 사이 바닥에 내려앉은 금가루를 향해 BG들이 달려들었다. 슈렌에 대한 공격은 머릿속에서 잠시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들이 개미핥기처럼 금가루를 핥아먹는 동안 아크엔젤의 얘기는 계속됐다. “저를 제외한 워 피겨 전원은 전직군인입니다. 저도 군에서 활동하긴 했지 만 다른 분들에게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요. 아무튼 우리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싸웠습니다. 청춘과 가족으로부터 외면을 당해도 결코 굴 하지 않고 싸웠습니다! 조국을 위해! 국민들을 위해!” 여느 때의 아크엔젤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그래서 슈렌도 BG들의 움직 임에 신경을 쓰는 한편 아크엔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약간의 위로금 과 국립묘지에 갈 수 있는 자격까진 괜찮습니다. 어째서 전사에게 장애인이 라는 꼬리표를 달아주는 것입니까! 어째서 그들의 미래와 가족의 행복을 빼 앗는 것입니까! 전사들에 의해 평온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국민들까 지 그들을 전사로서 대해주기는커녕 더럽고 지저분한 장애인으로서 취급하 고 있습니다! 장애인 전용이라는 작은 공간 속에 전사들의 숭고한 영혼을 가두고 있단 말입니다!” 아크엔젤의 목소리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르자 슈렌의 주위에서 이상한 일들 이 벌어졌다. 금을 섭취한 BG들이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상태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무찰린다들은 방금 살에서 떼어낸 지방질처럼 뭉글뭉글하게 변했다. 그리고 는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나뉘었다. 실로 그로테스크한 장면이었 다. 그렇게 분열한 BG, 무찰린다들은 순식간에 성장하여 완전체로 변했다. 크기 만 조금 작을 뿐이었다. 평온하던 슈렌의 미간은 금세 일그러졌다. 아크엔젤은 완전히 포위된 슈렌을 뒤로 한 채 목표지였던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아무튼 저는 제 부하를, 아니 동료를 구하러 이곳에 왔습니다. 그것이 저 의 목적입니다. 당신을 다시 뵐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부디 다시 뵙 길 바랍니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그런 가치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아크엔젤의 검은 모습은 하얀 BG들에게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슈렌은 짧게 한숨을 쉰 뒤에 창을 고쳐 잡았다. “평등이라… 겁쟁이 집단이군.” 이어서 수백의 BG들이 다시금 송곳니를 드러내고 달려들었다. 화염에 뛰어 드는 불나방의 맹목적인 모습과도 같았다. ※※※ “금이 무찰린다의 수를 늘린다고? 그럴 리가! 금은 생물과는 전혀 상관없 는 물질이 아닌가!” 루이의 보고를 들은 처크는 기가 막힌 듯 소리쳤다. 경찰헬기를 타고 본부로 가는 중인 그는 재빨리 냉정을 되찾고 물었다. “자세히 설명해 주겠나?” “네. 아시다시피 금은 공기나 물에서 변하지 않으며 빛깔의 변화도 없습니 다. 어지간한 산화제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염산과 질산의 혼합액인 왕수(王水)에는 녹아 염화금산(HAuCl4)으로 변합니다. 무찰린다의 소화액은 왕수에 가까우며, 그로 인해 변한 염화금산은 일정량이 쌓이면 무찰린다의 모든 체세포를 자극하여 배아형태에 가깝게 퇴화시킨 뒤 두 개 이상의 개체 로 급격히 분열하게 만듭니다. 분열을 끝낸 배아는 급속도로 성장하여 성체 가 됩니다.” “그럼 클론(Clone)이 만들어진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비록 몸은 분열 전보다 작지만 영양분이 충분하다면 분열하 기 전과 같은 크기로 자라는 것 역시 금방입니다.” “으음, 그럼 그 과정에서 필요한 금의 양은 얼마나 되나?” “한 마리당 대략 200에서 300그램 정도입니다.” “빌어먹을.” 처크는 기가 막힌 듯 안면을 감싸 쥐었다. 금이 워낙 귀한 물질이긴 하지만 이번에 탈취당한 금의 양은 막대했다. 현 재까지의 양만으로도 어림잡아 네 자릿수의 무찰린다를 충분히 뽑아낼 수 있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건 분열된 직후의 무찰린다였다. BG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전투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을 습격, 섭취하여 영양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그것을 생각했을 때 분열직후의 무찰린다는 격 감된 전투능력을 보충하고 성장하기 위해 인간에 대한 습격을 할 것이 뻔하 다. 그 포악성은 그 어떤 BG보다도 맹렬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사상 최악의 BG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처크는 어렵사리 다음 말을 꺼냈다. “현재 본부의 상황은 어떤가?” “방금 전 아크엔젤로 보이는 사이보그가 100여 마리의 무찰린다와 함께 본 부 지하주차장으로 돌입했습니다. 본부 밖에도 수백 마리의 무찰린다가 있 지만 현재 외부 카메라로는 상황이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뭐라고? 카메라가 부서진 건가?” “아닙니다. 현재 블루 원이 단독으로 무찰린다와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 “블루 원?” 처크는 그 이름을 어렵지 않게 기억해냈다. 예전에 그렌들을 대신하여 워 피겨의 사이보그인 피어셔를 물리친 파란 장발의 남자였다. 그와 함께 나타나는 레드 원의 경우를 봐서라도 그는 적대적인 존재는 아니 었다. 그렇다 해서 절대 안심할 수는 없었기에 처크의 근심은 더욱 높이 쌓 여만 갔다. “그럼 그의 상황은 어떤가?” “멋있습니다.” “…….” “아, 대단한 전투능력입니다. 눈으로 밖엔 확인할 수 없지만 완벽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무찰린다들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본부 내부에 침입 한 아크엔젤입니다.” “어디까지 침투했나?” “현재 지하 4층까지 침입한 상태입니다. 경비요원들이 막고는 있지만 시간 지연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다.” “으음.” 무거운 신음을 흘린 처크는 눈을 감고 전략을 세웠다. 지하시설의 청사진과 현재 본부 내부에 남아있는 전력이 번개처럼 떠오르고 사라졌다. 생각을 마친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하 18층까지 통하는 모든 통로를 개방하도록.”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크엔젤의 목적은 BSP 본부에 대한 전면공격이 아닌 것 같아. 최고보안 시설이 오버서티원에 있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인데 지하시설 을 공격하고 있지 않나? 아무래도 21층에 감금된 드래곤 잭을 구출하려는 것 같군.” “근거를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워 피겨는 응집성이 좋은 집단이야. 잔챙이 부하는 몰라도 중요인사를 버 려두는 일은 결코 안하지. 아무튼 18층까지 개방하되 지크를 비롯한 전투요 원의 도착에 맞춰 시간을 지연하도록 해봐. 18층에 보관중인 기타장비는 상 황이 끝날 때까지 포기한다.” 처크가 말한 18층은 무기를 제외한 통신장비 및 각종부품, 비상식량 등이 보관되는 대형 창고다. 그 규모가 꽤 크고 내부시설이 비교적 단단하기 때 문에 본부 안에서 결판을 내기엔 가장 좋은 장소 중에 하나였다. “예,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좋아. 그리고 그쪽으로 가고 있는 그렌과 케빈, 리진에겐 모든 수단과 방 법을 동원해서 블루 원의 데이터를 모으라고 지시하게. 그가 얼마나 멋있는 지 나도 좀 봐야겠어.” “아, 알겠습니다.” 통신이 끝난 뒤 처크는 헬기 파일럿을 재촉했다. 볼 기회를 번번이 놓쳤던 존재 중에 하나인 블루 원을 직접 볼 기회니 그러는 것도 당연했다. 한편, 처크의 지시를 루이로부터 전달받은 지크는 기다렸다는 듯 주먹으로 반대편 손바닥을 강타했다. “좋아, 우리차례다! 이번만큼은 그 느끼한 녀석을 놓치지 않겠어! 꼬마, 자신 있지?” 그의 부름에 류페이는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조, 조금 무서운데요.” “괜찮아!” 지크는 손으로 그녀의 작은 머리를 매만져 주었다. “녀석의 느끼함은 이 지크님의 바람으로 날려주겠어! 콜라를 마실 필요조 차 없다고! 하하하!” “예…….” 물론 류페이가 두려워하는 건 아크엔젤의 느끼함이 아니었다. “자, 가자! 우리들의 전장, 18층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는 지크의 모습은 상당히 활기에 넘쳤다. 그런 기세가 좀 부담스러웠는지 류페이는 자신 없는 얼굴로 챠오에게 말했다. “괜찮을까요, 선배님? 저 아무래도 실수할 것 같은데…….” 사실 챠오와 류페이는 본부 내에 마련된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쓴다. 같은 중국출신이기 때문도 있었지만 챠오에 대한 류페이의 존경은 매우 각별했 다. 그것을 안 처크가 알게 모르게 같은 방을 쓰도록 배려해준 것이다. 류페이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챠오는 묵묵했다. 그로 인해 류페이는 더욱 자 신감을 잃었지만 챠오의 침묵은 지크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 뒤 곧장 사라졌다. “걱정하지 마.” 챠오는 류페이를 양팔로 안고는 등을 따스하게 두드려 주었다. “저런 모습의 지크는 꽤 믿을 만해.” “정말이요?” 류페이의 반문에 챠오는 활짝 웃으며 소녀의 통통한 양 볼을 매만졌다. “지크는 항상 그랬어. 3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렇군요. 그럼 저도 믿을게요.” 류페이도 빙긋 미소를 지었다. 다른 멤버들이 만약 이 광경을 봤다면 경악을 하다못해 쓰러졌을지도 모른 다. 그만큼 챠오의 미소는 구경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희귀한 모습이 었다. “그럼 18층에서 만나자. 조심해서 가.” “예, 선배님!” 챠오는 격납고로 뛰어가는 류페이의 뒤를 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챠오! 안 갈 거야? 두고 가는 수가 있어!” 지크를 향해 돌아선 챠오의 얼굴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냉랭했다. 그 전 의 상황을 모르는 지크는 그녀가 뜸을 들인 이유가 궁금하기만 했다.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인 지하 18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지크는 오른손을 연신 쥐었다 폈다 하면서 긴장감을 달랬다. 리진이 있었다면 뭐하는 짓이냐며 물었겠지만 챠오는 엘리베이터에 표시되 는 숫자만을 묵묵히 지켜봤다. 무관심이라 그러는 게 아니다. 처음 보는 모습이 아니라서 그렇다. 3년 전, 챠오의 집에 처음 들어올 때도 지크는 그랬다. 당시 열여섯 살의 챠오에겐 그 낯선 외국인의 모습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기분이 좋은 건지, 공포에 질린 건지, 아니면 미친 것인지 알 수 없는 이상 한 미소를 지은 채 계속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으니 그럴 것도 당연했 다. 왜 그러냐는 챠오의 질문에 지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날기 직전의 기분, 알고 있어?” 그리고 지크는 테스트로 벌어진 대련에서 당주인 린 쉐이롱을 제외한 일가 (一家)의 남자 전원을 쓰러트렸다. 그때를 회상하던 챠오는 문득 자신의 몸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엘리베이터 가 멈춘 것이다. 지크는 문이 열리자마자 우리에서 나온 야수처럼 성큼성큼 밖으로 나섰다. 지하 18층, 기타물류 창고는 어둡지도, 밟지도 않았다. 천장까지의 높이는 대략 15미터였고 넓이는 축구 그라운드와 맞먹을 정도로 넓었다. 그 공간엔 컨테이너처럼 생긴 수많은 구조물들이 군데군데 놓여있었다. 구 조물의 주 재료인 알루미늄 합금의 진한 냄새가 지크, 챠오의 후각을 자극 했다. 지크는 공기를 흠뻑 빨아마셨다. 뭐가 어찌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그의 각 오이자 적을 부르기 위한 준비였다. “어이, 들리나? 아크엔젤인지 하는 녀석, 어서 나와! 어제의 승부, 이곳에 서 결판을 내 주겠다!” 창고 저편까지 울려 퍼진 목소리에 반응하듯 창고 중앙에서 검은 날개 한 쌍이 솟아올랐다. 틀림없는 아크엔젤이었다. “오오, 이런. 협잡한 고성입니다, 지크 스나이퍼 경. 이런 밀폐된 공간에 선 조용조용히 말씀하셔도 되니 좀 더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 주십시오.” 지크의 입술 사이에서 바람소리가 났다. “흥, 그 느글느글한 말투는 여전하군. 밖에서 만난 녀석이 뭐라고 하지 않 던가?” “외부에서 접촉한 분? 설마 그 블루 원이라는 분과 아는 사이십니까?” “그럭저럭. 아무튼 녀석이 약속을 지켜줘서 다행이군. 내가 널 엉망진창으 로 혼내줄 수 있게 됐으니까 말이야. 사실 다른 놈들은 전부 잿더미로 만들 어도 너만은 남겨 달라 했거든.” 지크는 씩 웃었다. ‘역시, 아는 사이인가?’ 예전부터 지크와 레드 원, 블루 원 사이에 뭔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느낀 챠오는 지금 나온 지크의 말을 통해 그 느낌을 확신으로 바꿨다.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지크의 소질과 그들의 강함… 분명 관계가 있어. 하지만 지크는 어째서 그들의 정체를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 거지? 그들이 라면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줄 텐데?’ 그녀의 고민을 알 턱이 없는 지크는 아크엔젤에게 전의어린 손짓을 했다. “아무튼 좀 내려와 봐. 네놈의 언어사용에 대한 토론을 좀 해보자고. 격렬 하게.” “후후, 좋습니다. 당신을 지그시 지르밟아드리지 않으면 제 목적 역시 이 룰 수 없으니 이번엔 진지하게 상대해 드리지요. 워 피겨 서열 5위의 전사, 아크엔젤이 갑니다!” “오너라!” 지크와 아크엔젤, 양측이 서로를 향해 몸을 던졌다. 중간지점에서 부딪힌 둘은 하늘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매와 독수리처럼 치고받으며 지상으로 내 려왔다. 그 사이 챠오는 권총을 꺼내고 주위를 둘러봤다. 극한에 가깝게 단련된 그 녀의 감각이 아크엔젤 외에 또 다른 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컨테이너 위에서 하얀색의 출렁임이 일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그것도 100여 개체는 충분했다. 챠오는 하나 둘씩 자신의 근처로 모여드는 무찰린다들을 보며 통신기를 눌 렀다. “도착했나?” 답신은 곧장 들어왔다. “예, 지금 천장 위에 있습니다.” “적의 수는?” “아크엔젤을 포함하여 116개체입니다.” “그럼 115를 맡자. 지원 부탁해.” “예, 선배님!” 너덧 마리의 무찰린다가 모인 컨테이너에서 굉음이 울렸다. 잔인하게 우그러든 컨테이너 위엔 짓밟혀 터진 무찰린다의 시신이 깔렸다. 육중한 물체가 그들 위로 떨어진 것이다. 챠오에게 집중되어 있던 무찰린다 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어떤 물체가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존재했다. 뭔가 있긴 있었으나 무찰린 다들은 그것에게 공격을 퍼붓지 않았다. 상대가 정확히 보이지 않을뿐더러 그것이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할지도 불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시원스러운 모터소리와 동시에 수백발의 탄환이 사방으로 날았다. 탄도에 맞춰 황색 실선이 그어지는 걸로 봐서는 어제 사용된 고무탄환이 아니라 실 탄이 확실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온 강력한 공격으로 인해 많은 수의 무찰린다들이 분해 되어 핏덩이로 산화했다. 공격범위 밖에 있던 무찰린다들은 그 이상한 물체를 요주의의 적으로 인정하고는 급히 컨테이너 아래로 내려가 몸을 숨 겼다. 그 아래엔 잠시 잊고 있던 또 다른 적이 있었다. “헙!” 기합과 동시에 챠오의 정권이 떨어지는 무찰린다의 등판에 박혔다. 챠오의 권을 중심으로 무찰린다의 표피가 회오리처럼 말리며 요동쳤다. 고 급 발경타법 중 하나인 용권경(龍卷勁)이었다. 발경을 맞은 BG의 육체 반대편이 부풀 틈도 없이 터졌다. 공격당한 무찰린 다는 볼 것 없이 즉사였다. 그때에 맞춰 지면에 발을 댄 무찰린다들은 이를 드러내며 챠오에게 달려들 었다. 챠오는 즉시 합장 후 양팔을 펼쳤다. 황색의 빛이 챠오를 중심으로 폭발했 다. 타점이 변경된 사자장성의 또 다른 모습, 사자포효(獅子咆哮)였다. 기의 폭발은 무찰린다 말고도 범위 내의 컨테이너까지 밀어냈다. 기의 장벽 과 컨테이너 사이에 낀 무찰린다는 저항 없이 압착되어 종잇장처럼 구겨졌 다. 그렇게 해서 위험을 물리쳤지만 무찰린다의 수는 여전히 넉넉했다. 그들은 밀물처럼 몰려왔고 기를 크게 소모해버린 챠오는 권총으로 그들을 견제하며 뒤로 재빨리 물러났다. 무찰린다와의 거리가 조금 벌어지자 챠오는 크게 소리쳤다. “류페이! 12시 방향에 클레이모어, 25%로 1발!” 그녀의 지시에 따라 은색의 깡통 하나가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무찰린다 사이에 깊숙이 떨어진 깡통은 폭발하여 죽음의 파편을 사방으로 뿌렸다. 컨테이너와 무찰린다의 육체가 초대형 산탄총에 맞은 것처럼 산산이 부서졌 다. 25%의 위력을 가진 녀석이어서 파괴반경은 50미터 정도였지만 일단 범 위 내에 들어있는 물체에겐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무찰린다들은 클로킹 이펙트로 몸을 숨 긴 BX-Fb의 디스트로이어 기관포에게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소수의 무찰린다들이 극적으로 탄막(彈幕)을 벗어났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챠오의 사격이었다. 사람 셋이 겨우 지날 법한 컨테이너 사이를 무찰린다들이 뛰어갔다. 이 정 도의 공간이라면 보이지 않는 괴물에게서 사격을 당할 일이 없다는 판단에 서였다. 그런데 머리 위로 탄환의 비가 떨어졌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의 사격에 놀 란 무찰린다들은 위를 올려다봤다. 그곳엔 권총을 든 챠오의 상반신이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다리를 앞뒤로 곧게 펼치고 발끝을 양쪽 컨테이너에 올려 몸을 지지했다. 극한의 유연성과 힘이 어우러진 묘기였다. 권총의 탄을 모두 쓴 챠오는 총 대신 두 개의 나이프를 거머쥐었다. 보통사람이라면 지금의 상황에서 어떻게 자세를 바꿀지 고민하겠지만 챠오 는 앞일조차 모르고 묘기를 부릴 바보는 아니었다. 그녀가 제비처럼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힘을 쓸만한 공간이 없어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다리, 정확히 말해 허벅지의 힘과 몸의 탄력만으로 양 다리 를 벌린 상태에서 뛰어오른 것이다. 그녀의 착지와 함께 두 마리의 무찰린다가 양쪽으로 쓰러졌다. 뱀 모양의 머리엔 나이프가 박혔던 자국이 선명했다. 주먹과 나이프, 발차기가 유연성과 남성 이상의 파워와 맞물려 일격필살의 효과를 냈다. 인간의 물리적 운동범위를 벗어난 것처럼 현란하기 그지없는 발차기, 쏘아 올려진 바위처럼 빠르고 묵직한 주먹. 그리고 안정된 호흡에 서 얻어진 강렬한 발경. 챠오는 평정심을 잃고 닭처럼 뛰어다니는 무찰린다들 사이에서 피를 베어 문 한 마리의 학처럼 날고 있었다. 이것이 전 세계 BSP중에서 격투로 2, 3위, 혹은 3, 4위를 다투는 린 챠오의 모습이었다. 무찰린다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크엔젤은 지크와 의 싸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와 싸우는 게 좋아서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 한시라도 정신을 팔다간 크 게 당하여 즉사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도, 자신이 어디의 누구라는 것도, 자신이 사이보그 라는 것도 잠시 잊어야 했다. 오로지 살기 위해, 그리고 이기기 위해 몸의 모든 것을 바쳐야 했다. 두 남자의 팔이 크게 충돌했다. 아크엔젤의 오른팔과 지크의 왼팔이 교묘한 각도로 뒤엉켜 서로를 향해 으르렁 거렸다. “후후, 하하하.” 아크엔젤의 헬멧 밑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지크의 검은 눈썹이 위 아래로 움직였다. “뭐야, 잘못했다고 비는 거냐?” “아니, 제가 실례를 했습니다. 상대가 누구인지 깜박 잊고 있었으니 말입 니다. 아름답지 못한 실례로군요. 이제야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기억났습니 다.” “호오, 그래? 내가 누군데?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내 기분이 조절될 테 니 알아서 해.” “좋습니다.” 두 남자의 팔이 풀리고 수차례의 권이 오고 갔다. 혹시나 빈틈이 생길지 모 른다는 아크엔젤의 생각은 그렇게 무용지물로 돌아갔다. 또 한번의 마찰음이 들렸다. 방금 전과는 반대쪽의 팔이 뒤엉켰다. 아크엔젤은 힘으로 팔을 풀려 했다. 방금 전에도 이렇게 팔을 풀었으니 이 번에도 간단할 것이다. 헌데 그렇지 않았다. 지크의 팔 힘에 의해 아크엔젤 자신의 팔이 안쪽으로 서서히 꺾이고 있었다. ‘뭐냐, 이 아름답지 못한 물리력은! 300마력에 가까운 나의 팔 힘을 능가 하다니!’ 지크는 가까이 끌어들인 아크엔젤의 헬멧에 얼굴을 들이댔다. “어이, 알고 있나? 난 엄마한테 참을성이 부족하다는 말을 종종 듣지. 토 스트가 채 익기도 전에 꺼내먹을 때가 자주 있거든. 왜 그런 줄 알아? 배가 고파서야. 무지하게. 지금도 똑같아. 난 지금 싸움이 고프다구. 무지하게. 그러니 빨리 말해. 더 이상 날 자극하지 말고.” “흥!” 아크엔젤의 반대편 팔이 지크의 안면을 향해 날아들었다. 상대가 팔을 풀고 공격을 피했지만 아크엔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유를 위한 위협 일 뿐이었다. 그가 외쳤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누가 뭐라고 토를 달 수 없는 BSP 최강의 사나이! 그 리고 아름답지 못한 남자입니다!” 아크엔젤은 날개를 펼치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천장 끝까지 올라가 저편 으로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아무리 지크라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지크는 불쾌한 얼굴로 투덜댔다. “뭐야, 도망치는 건가?” “도주? 후후후, 천만의 말씀. 한 조직 최강의 남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려 는 것뿐입니다.” 아크엔젤의 검은 날개가 크게 펄럭였다. 마치 날개로 자신의 몸 전체를 감 싸는 듯한 모습이었다. “당신은 천사의 단말마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천사의 뭐?” 지크는 상대의 뜬금없는 소리에 짜증과 의문을 섞었다. 아크엔젤의 몸은 날개로 단단히 감싸여 아예 번데기처럼 보였다. 그 번데기 안에서 그의 고운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단말마입니다. 고통스럽게 숨이 끊어지는 순간… 그 성스러운 순간을 이 제 당신에게 전해드리겠습니다.” “호오, 그래? 거부하겠다면?” “당신에게 선택권은 없습니다.” 아크엔젤의 날개가 활짝 펴졌다. 동시에 검은색의 깃털들이 무수히 펼쳐졌 다. “어라?” 지크는 흠칫 놀랐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아크엔젤의 날개는 박쥐의 그것처럼 가죽 외엔 아무 것도 붙어있지 않다. 그런데도 날갯짓 한번에 창고의 절반을 뒤덮을 대량의 깃털이 쏟아져 나왔 다. 깃털들은 지크의 몸에 닿자마자 눈 녹듯 사라졌다. 게다가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실체가 아니라 허상이 분명했다. 하지만 보통의 허상이 아니었다. 순간 지크가 중심을 잃고 무너졌다. 오른쪽 무릎으로 땅을 디뎌 쓰러지는 것만은 겨우 면했지만 상황은 최악이었다. ‘뭐야, 이건? 몸이 우주공간에 떠있는 것 같잖아?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아! 균형을 잡을 수가 없어!’ 그가 당황하는 사이 시커먼 물체가 눈앞에 떨어졌다. 아크엔젤이었다. “비명을 지르십시오!” 그의 돌려차기가 들어왔다. 차는 속도가 머리에 계산될 정도로 단순무식한 공격이었지만 지크는 피할 수 없었다. 그의 감각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었다. 이윽고, 강한 충격이 지크의 복부를 밀고 들어왔다. “크악!” 야구공처럼 튕겨나간 지크는 컨테이너 외벽을 뚫고 안에 처박혔다. 그 굉음 은 챠오와 류페이의 시선을 자연스레 그쪽으로 돌리게끔 만들었다. 아크엔젤은 날개를 펄럭이며 아래로 내려왔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그는 오른손을 지크가 있는 컨테이너 쪽으로 펼쳤다. “그대, 살아있습니까?” 칠흑으로 가득한 컨테이너의 구멍에선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크 엔젤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후후, 생체반응은 있지만 대답이 없군요. 기절하신 겁니까? 그렇다면 사 양 않고 저의 승리를 선언하겠습니다. 이제 당신의 동료들을 상대해 드리지 요.” 그가 다시 날아올랐다. “다음 상대는 누구입니까? 몸을 숨긴 비겁자입니까, 아니면 포니테일의 프 리마돈나입니까? 결정하십시오.” 그때 창고의 한쪽 구석에서 머신건의 소음이 터졌다. 류페이였다. 디스트로이어 기관포의 탄환은 매섭게 공기를 가로질렀다. 하지만 아크엔젤 은 솜털처럼 가볍게 공중을 배회하며 탄환을 피했다. 아크엔젤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모르셨습니까? 클로킹 이펙트는 생명체의 눈을 속일 수 있지만 가시광선 이외의 것도 볼 수 있는 사이보그의 눈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대 의 무지를 깨우쳐 드리겠습니다!” 그의 팔뚝에서 칼날과 같은 긴 조직이 떨어져 나왔다. 아크엔젤은 그것을 잡아 탄환이 날아오는 쪽으로 던졌다.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 무엇인가가 잔상처럼 흩뿌려졌다. 그것을 똑똑히 본 챠오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깃털?’ 칼날은 어느 한 공간에 부딪혀 깨졌다. 모래처럼 잘게 부서져 흩어진 파편 은 이내 격렬한 반응을 일으켰다. 마치 화약가루가 터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 반응은 숨겨져 있던 BX-Fb의 모습을 강제로 드러나게 만들었다. 클로킹 이펙트가 뜻하지 않은 공격으로 인해 무효화된 것이다. “아아아악!” 챠오의 통신기에서 비명이 터졌다. 류페이의 목소리였다. 비명과 함께 BX-Fb의 동체가 크게 흔들렸다. 방금 전에 지크가 그랬던 것처 럼 중심을 잃고 아래로 풀썩 주저앉았다. “류페이!” 무슨 일이 벌어져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챠오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괜찮아? 괜찮은 거야, 류페이?” “괘, 괜찮습니다. 저에겐 이상이 없지만 BX-Fb의 운전 장치가 알 수 없는 물체의 영향을 받아 잠시 흔들렸습니다. 클로킹 이펙트 발생기는 현재 기능 을 상실했습니다. 배리어 필드도 같은 이유로 전개 불가능입니다. 아, 어쩌 면 좋죠?” “…….” 챠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만큼 상황은 나빴다. 어차피 지크가 움직이지 못하는 시점부터 최악이었다. 무찰린다는 그녀와 류페이가 분발하면 잡을 수 있었고 실제로 거의 대부분을 소탕한 상태다. 하지만 아크엔젤은 어떻게 이겨야할지 도저히 감이 안 잡혔다. 지크를 쓰러트린 능력은 보지 못해서 알 수 없지만 BX-Fb를 간단히 다운시 킨 능력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만약 류페이가 전투불능이 되면 챠오가 그 를 상대해야 하는데, 챠오의 격투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톱클래스의 전투사이보그인 아크엔젤을 이기기는 힘들었다. 승기를 잡은 아크엔젤은 천천히 날개를 펄럭이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자아, 함께 춤을 춥시다. BSP의 기사들이여.” ※※※ 모든 멤버들 가운데 가장 늦게 본부에 도착한 사람은 리진이었다. 본부로 통하는 모든 교통수단이 통제된 탓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동생의 자전거를 빌려 본부까지 와야만 했다. 본부 근처는 전경들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어 있었다. 기자들은 언론의 자유 를 보장하라며 난리를 쳤지만 전경들은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것은 처크의 특별지시였다. 본부가 습격당한 사실이 부끄러워 통제를 지시한 건 아니다. 본부 앞에서 홀로 싸우고 있는 한 남자를 언론에게 내비쳐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런 것이다. 그들, 레드 원과 블루 원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모든 영상기록 장치를 마비시킨다. 무슨 수로 위성 카메라까지 마비시키는지는 몰라도 모습이 드 러나면 곤란하다는 뜻이 담긴 것만은 자명했다. 덕분에 블루 원, 슈렌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무찰린다와 싸울 수 있었다. 대신 처크와 그렌, 케빈, 그리고 몇몇 관계자에게만 자신의 모습을 허락했 다. 그 행운은 몇 번의 신분확인을 거치고 온 리진에게도 제공되었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리진은 자전거를 세우고 처크들에게 달려왔다. 그녀의 인사에도 불구하고 처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정면 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뒤에 서있던 그렌이 그녀를 불렀다. “리진, 인사는 나중에 해도 돼.” “예?” 그렌은 보란 듯 본부 쪽을 가리켰다. 그곳은 본부 지하주차장 입구였다. 편도 10차선에 진입로까지 포함된 그 넓 은 공간에서 한 남자가 수많은 무찰린다들 사이에서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리진은 그 남자를 한번 본 적이 있었다. 레드 원에게 당할 뻔한 지크를 구 해준 블루 원이었다. 그가 레드 원에 비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은 그의 싸움을 목격한 그 렌, 케빈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챠오는 그를 중국의 고대 명장, 관우 운 장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그땐 챠오가 왜 그를 관우에 비유했는지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관우 운장은 수염이 아름다웠다지? 저 남자는 두발이 아름답네.’ 창을 휘두르는 모습도, 공격할 때마다 흩날리는 화염도 아름다웠지만 그보 다 더 아름다운 것은 한줌의 흐트러짐도 없이 가지런히 흔들리는 그의 파란 장발이었다. “저 남자, 정말 대단하군.” 담배연기 섞인 케빈의 감탄이 리진의 의식을 깨웠다. “자, 잘 싸우긴 하네요.” 리진은 의미 없이 맞장구쳤다. 눈치가 빠른 케빈은 웃음을 실어 말했다. “잘 봐. 저 남자의 모습을. 몸에 체액(體液)이 전혀 묻어있지 않아.” 순간 리진의 머릿속에서 모든 생각이 지워졌다. 일반적으로 BSP들은 BG들과 한바탕 전투를 치른 뒤엔 반드시 몸을 세척한 다. 전신에 BG의 체액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혈액의 역할을 대신하는 BG의 체액은 인간을 포함한 보통의 동물들에 비해 몇 배나 강한 압력으로 흐른다. 그로 인해 탄환을 맞든 주먹을 맞든 일단 몸에 균열이 생기면 짧게는 10여 미터, 길게는 수십여 미터에 달할 정도로 체액이 뿜어진다. 때문에 아무리 총으로 싸우는 케빈이라도 BG들의 체액세례는 피하지 못한 다. 근접하여 싸우는 지크나 챠오, 리진 등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대량살 상을 하는 지크의 경우엔 글리세린이 잔뜩 담긴 수조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 람처럼 걸쭉하게 적셔진다. 그런데 블루 원의 붉은 코트엔 한 점의 체액도 묻어있지 않았다. 베어지고 뚫리고 뭉개진 무찰린다들에게선 체액이 어김없이 뿜어졌지만 그 방향은 남 자와 전혀 상관이 없는 방향이었다. 오히려 동료들의 움직임을 방해할 뿐이 었다. 그렌이 말했다. “아무 생각 없이, 피에 미친 귀신처럼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게 절대 아니 야. 동작 하나 하나에 치밀한 계산이 섞여있어.” 이어서 처크가 말했다. “이건 내 예상일뿐이지만 저 남자, 지금 자신의 주위에 있는 무찰린다의 수와 위치, 능력, 그리고 지형에 대한 정보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모든 것 을 머릿속에 넣고 있을 거야. 심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무찰린다를 쳤을 때 어떤 각도와 속도, 압력으로 무찰린다의 체액이 뿜어지고 그 체액이 어떤 식으로 다른 무찰린다의 움직임을 방해하는지, 시체는 어떻게 쓰러져 지형 을 바꿀지, 자신은 어떤 식으로 공격해야 할 것인지를 전부 그리고 있다는 것이지.” “그, 그런 게 가능한가요?” 리진이 넋을 잃고 물었다. 처크의 선글라스 밑에 의미 있는 미소가 드리워 졌다. “모르지. 아무튼 지크가 투귀(鬪鬼)라면 저 남자는 투신(鬪神)이야. 후후, 너무도 탐이 나는 남자로군.” “허어, 그럼 스카우트라도 하실 생각이십니까?” 케빈이 반 농담, 반 진심으로 물었다. 처크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생각은 없어.” “예? 탐나신다면서요? 만약 스카우트가 성공한다면 대단한 전력이 될 겁니 다.” “그렇기야 하지만…….” 처크는 머리를 긁적였다. “저 남자는 확실히 강해. 상상 이상의 능력이지. 하지만 BG에 어울리는 강 함이 아니야. 아무래도 저 남자는 자신의 능력에 어울리는 상대와 싸우기 위해 저런 힘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지금의 전투는 단순한 번외(番外)겠지. 진짜 상대는 우리가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괴물 일지도 몰라.” 처크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달은 밤하늘에 떠 있어야 아름다운 법이네. 아름답다는 이유로 무턱대고 대낮에 가져다 놓을 수는 없지. 물건은 제자리에 있어야 제 맛 아니겠는가? 그것과 같은 이치라네.” 그의 튼실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철학적인 얘기였다. 그때, 무찰린다 사이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슈렌에 대한 무찰린다의 공세가 갑자기 멈췄다. 뿐만 아니라 모든 무찰린다 들이 머리를 감싸고 괴성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이런 상황을 예상치 못했던 슈렌은 눈을 부릅뜬 채 무찰린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백사(白蛇)처럼 하얗던 무찰린다의 육체는 점차 검게 물들었다. 그렌이 무거운 목소리로 처크에게 말했다. “역시, 이렇게 되는군요.” “그렇지. 그런 것이지. 아마 와카루도 알고 있었을 거야.” 선글라스를 고쳐 쓰는 처크의 입가엔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BG는 본능적으로 창조주의 손을 벗어나지 못해. 잠시 외출만 할 수 있을 뿐이야.” “이제 생물병기가 아니라 진짜 BG군요.” 그렌은 짧게 숨을 내뱉었다. 상황은 지하 18층에서도 똑같이 벌어졌다. 남아있던 60여 마리의 무찰린다들이 모조리 시커멓게 변하자 챠오와 류페 이, 그리고 아크엔젤은 싸움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봤다. “어, 어찌된 영문입니까? 무찰린다들에게 저런 아름답지 못한 재주가 있다 고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챠오와 류페이에게 한 질문이었다. 챠오는 묵묵부답이었고 류페이는 BX-Fb의 탐색기능을 동원해 무찰린다의 상 태변화를 체크했다. “현재로선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무찰린다의 전신에 유전자적 변이가 일어 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표피의 강도가…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윽고 무찰린다의 변화가 끝났다. 외형상으론 변한 게 전혀 없었지만 검게 변한 피부색과 멋스럽게 그어진 노 란 색의 줄무늬는 뭔가 더욱 강력해졌음을 광고하는 듯 했다. 색 말고도 전신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틀렸다. 어딘가 부족해 보였던 예전의 모습과 달리 지금은 상당히 호전적이고 적극적이었다. 또한 주인인 아크엔젤마저 적으로 돌리고 있었다. 증명이라도 하듯 한 마리가 아크엔젤을 향해 돌진했다. 어렵지 않게 쳐내긴 했지만 아크엔젤의 몸짓엔 당황함이 묻어나있었다. “어째서 나의 통제를 받지 않는 겁니까! 생물병기로서 만들어진 주제에!” 아크엔젤이 외쳤지만 무찰린다들은 그의 목소리를 간단히 무시하고 자신들 이외에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아크엔젤은 챠오, 류페이에게 손을 뻗었다. “할 수 없군요! 3자 구도는 불리하니 잠시나마 휴전, 아니 동맹입니다! 여 러분들과의 승부는 이들을 처리한 뒤에 계속하기로 하겠습니다!” “음.” 그리 탐탁치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크엔젤이나 무찰린다 모두 자신들을 노리는 건 확실했지만 위험하기로는 무찰린다 쪽이 더했다. 그들이 힘을 모아 대항하는 동안 몇 마리의 무찰린다가 지크가 있는 컨테이 너 쪽으로 달려갔다. 생물병기에서 완전한 BG로 변화된 무찰린다에게 있어 서 전투불능의 생명체는 최고의 먹을거리였다. 가장 먼저 도착한 무찰린다가 컨테이너의 구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안 쪽은 어두웠지만 야간에도 시야를 쉽게 잃지 않는 BG에게 있어서 심각한 방 해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어둠 속에서 뭔가 반짝였다. 한 쌍의 파란 불빛이었다. 투기를 한껏 머금은 그 불빛에 무찰린다는 원시적인 살기로 대응하며 안으 로 돌진했다. “건방진!” 고성과 동시에 두 개의 물체가 반대편 컨테이너로 튕겨 날아갔다. 표면에 부딪혀 바닥으로 흘러내린 것은 깨끗이 나뉜 무찰린다의 몸과 머리였다. 구멍 주위에 있던 무찰린다들이 허겁지겁 물러났다. 그 틈을 이용해 컨테이 너 속에 있던 지크가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어르신께서 생각할 시간을 방해하다니, 간이 부었군. 색깔까지 바꾸고 뭘 하는 거야?” 그는 무명도를 휘둘러 날에 묻은 체액을 털어냈다. 그때 머리와 몸이 으깨진 무찰린다가 지크의 옆에 떨어졌다. 이어서 아크엔 젤이 날개를 펄럭이며 그 위를 지나갔다. “상황이 이상하게 됐습니다, 지크 스나이퍼 경.” 아크엔젤의 목소리엔 뭔가 복잡함이 서려있었다. 지크의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어이, 네 부하들 아니었나? 무슨 변덕이야?” “방금 전까진 저의 충실한 부하였지만 뭔가 가당치 않은 일이 일어난 듯 합니다. 저까지 적으로 돌리더군요. 아아, 아름답지 못한 일입니다.” “흥, 녀석들도 느끼한 게 싫어졌나보지.” 지크는 씩 웃으며 무명도를 휘둘렀다. 덤벼들던 무찰린다들은 깔끔히 목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무명도입니까? 마음 놓고 쓰시는군요. 상황이 정리되면 저에게도 쓰실 겁 니까?” 아크엔젤은 접근한 무찰린다들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쳐 쓰러트렸다. 지크 역시 달려드는 적들을 차례차례 베어 나갔다. “만약 쓰면 네놈이 그렇겠지. 아름답지 못할 정도로 비겁하다고. 그런 말 듣기 싫어서라도 안 쓸 거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저와 당신 사이엔 애초부터 같은 조건이라는 것이 존 재하지 않습니다.” 아크엔젤은 검지를 펴고 좌우로 흔들었다. 지크는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째려봤다. “왜?” 아크엔젤은 날개와 양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며 말했다. “제가 당신보다 몇 배나 더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하하하하!” “…….” 지크는 끓어오르는 파괴욕구를 참으며 무찰린다들을 베었다. 아크엔젤의 협력 덕분인지 무찰린다의 수는 게 눈 감추듯 빠르게 감소했다. 그들이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처음 상태보다 강해졌을 뿐, 실제 능력은 오리 지널 무찰린다와 거의 비슷했다. 60여 마리 정도로는 최고 클래스의 전투 사이보그와 최신예 보행전차, 그리고 최정예 BSP를 상대하기엔 무리였다. 지크와 아크엔젤이 마무리 작업에 들어갈 무렵, 류페이에게 외부로부터의 통신이 들어왔다. “류페이, 그쪽 상황은 어떤가?” 처크였다. 류페이는 창고 내부를 한 번 더 꼼꼼히 검색한 뒤 상황을 보고했 다. “현재 남은 무찰린다의 수는 네 개체 정도입니다. 아, 지금 방금 전멸했습 니다. 이제 남은 것은 아크엔젤뿐입니다.” “그렇군. 무찰린다들이 아크엔젤을 공격했나?”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아신 거죠?” “그냥 그럴 것 같았어.” 처크의 말은 상당히 논리적이지 못했다. 루이라면 분명 따지고 들었겠지만 마음 약한 류페이로선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여담이지만 사실 류페이는 처크를 상당히 무서워한다. 이유는 단순했다. 처 크가 아이들이 보기에 상당히 무섭게 생겨서일 뿐이다. 어찌됐든 처크는 류페이에게 무찰린다 변형 이전의 상황을 물었다. 어째서 아크엔젤이 지금까지 살아있냐는 질문을 좀 길게 한 것이다. 류페이는 지크가 당했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아크엔젤이 사용한 천사 의 단말마, 그로 인해 생겨난 무수한 깃털들, 그리고 순식간에 중심을 잃어 버려 무방비 상태가 된 지크 등등. 설명을 끝까지 들은 처크는 가장 의심 가는 부분을 먼저 꺼냈다. “깃털이라고?” “예, 검은 색의 깃털들이 사방을 뒤덮었습니다. 하지만 실체는 아닌 듯 합 니다. 지면을 포함한 장애물에 닿으면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다? 음… 알 것 같군. 워 피겨 녀석들이 재미있는 장치를 도입한 것 같아.” “재미있는 장치요?” “그래. 그럼 지금 지크는 뭘 하고 있나?” “현재 아크엔젤과 대치중입니다.” 류페이의 설명대로 지크는 컨테이너 위에서 아크엔젤을 주시하고 있었다. 공중에 떠있는 아크엔젤 역시 진지한 분위기로 지크를 바라봤다. “두 번째 막을 여시겠습니까?” “받아주지.” 지크는 씩 웃었다. 아크엔젤은 날개를 한껏 편 뒤 자신의 몸을 감쌌다. “아까는 어찌어찌 살아남으셨지만 이번엔 틀림없이 당신의 목숨을 아름답 게 접수하겠습니다.” “오, 그래? 그럼 그 소원까지 부숴주지.” “후후, 당신은 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저는 어디든 자유로이 날아갈 수 있는 날개가 있지요. 땅에 있는 당신이 하늘에 있는 저를 어떻게 이기시겠 단 말입니까?” 아크엔젤이 말하는 동안 지크는 재킷의 양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고 있었다. 소매를 단단히 걷은 뒤 그가 말했다. “어떻게? 헤헷, 모르나?” 지크는 양팔을 위로 올리며 훌쩍 털었다. 움직이는데 최대한 편하도록 하려 는 것이다. “바람은 원래 날개가 없어!” 지크의 얼굴과 목소리는 매우 비장했지만 아크엔젤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 다. “당연한 소리를 매우 힘차게 하시는군요. 어쨌거나 다시 한번 받아보시기 바랍니다. 천사의 단말마를!” 아크엔젤의 날개가 다시 한번 크게 펼쳐졌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검은 깃털들이 창고의 절반을 가 득 매웠다. 지크의 몸이 움찔하며 흔들렸다. 몸의 중심이 또다시 흐릿해지는 것이다. 지크의 속은 무릎을 꿇다 못해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불쾌했다. 억지로 균 형을 잃는다는 것은 그만큼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크는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고 아크엔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뭔가 이유가 있어. 고작 깃털들 때문에 세반고리관이 마비될 이유가 없어 !’ 일격을 맞고 컨테이너에 처박혔을 때부터 지크는 자신이 왜 균형을 잃었는 지에 대해 생각해봤다. 모든 경우를 따졌을 때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몸의 평형감각을 맡는 세 반고리관의 마비였다. 문제는 어째서 고막 뒤에 있는 세반고리관이 마비됐느냐 하는 것인데, 지금 눈에 보이는 깃털들이 그 원인 중 하나일 것이라는 추측만이 있을 뿐, 아직 정확한 이유는 알아내지 못했다. 지크가 쉽게 쓰러지지 않자 아크엔젤 역시 공격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정 신을 필사적으로 집중하고 있는 상대에게 어줍지 않게 돌격했다가는 커다란 역습을 당할 수가 있었다. 서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오랫동안 계속됐다. 시간이 흐를수 록 공중에 뿌려졌던 깃털들은 점차 사라졌고 지크의 감각도 그에 따라 회복 되었다. 아크엔젤은 박수를 쳤다. “훌륭합니다.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하늘인지도 모를 상황 속에서도 그렇 게 집중하시다니,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다시 받아보십시오!” 아크엔젤은 다시 날개로 몸을 감쌌다. ‘젠장, 어쩌지?’ 이번 공격은 못 피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차츰 지크의 머릿속을 지배 해왔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런데, 저 녀석 왜 공격을 안했지? 나만큼이나 빠르고 기동성 좋은 놈이 내가 정신을 집중했다고 못 덤빌 이유가 없는데?’ 지크는 그것을 토대로 작은 가설을 세워봤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명도를 칼집 째로 빼들었다. “으음? 자신이 한 말을 어기시려는 겁니까?” 아크엔젤의 물음에 지크는 고개를 슬쩍 움직였다. “걱정하지 마. 칼이라는 건 꼭 베려고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는 검지를 까딱였다. “다시 써봐. 천사의 단말마라는 거, 이 지크님이 확실히 깨주지.” “오오,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매우 즐겁습니다, 하하하하. 그럼 다시 받 아보십시오! 천사의 단말마, 세 번째 악장입니다!” 또 한번 검은 깃털들이 지크를 향해 몰려나왔다. 지크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정신을 집중했지만 아크엔젤의 말대로 두 번은 힘들었다. 그의 양 무릎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도 모자라 헛구역질까지 났다. 평형 감각 상실에서 오는 후유증이었다. 비교하자면 처음 당했을 때보다 정도가 더 심했다. 누가 봐도 지크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챠오 선배님, 도와드려야 해요! 지크 선배님을 도와드려야 해요!” 류페이의 목소리와 동시에 BX-Fb가 움직였다. 그러나 챠오는 발을 떼지 않 았다. 오히려 팔을 내밀어 BX-Fb를 막았다. 위기에 빠진 동료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한 행동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 다. 이것은 아무리 착한 류페이라고 해도 화가 날만한 상황이었다. “선배님!” “가만히 있어!” 챠오는 류페이의 요구를 강하게 뿌리쳤다. “지크는 아직 진 게 아니야! 기다려!” “예?” 류페이는 당황했다. 분명 지크는 아직 진 게 아니다. 하지만 진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아닌 가. 허나 챠오의 눈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불안 대신 뭔가를 기다리는 마 음이 간절하게 느껴졌다. 그 사이 아크엔젤은 최후의 일격을 날릴 준비를 끝마쳤다. “자아, 영원의 세계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날개를 한번 펄럭인 아크엔젤은 미사일처럼 탄력 있게 떨어져 내렸다. 아까 와 마찬가지로 매우 단순했지만 그 종착역은 지크의 목숨이었다. ‘온다!’ 지크는 혼신의 힘을 다해 무명도로 바닥을 짚었다. 상하좌우가 분간되지 않았어도 어디가 바닥인지는 알게 됐다. 덕분에 지크 는 아크엔젤의 공격을 피할 수 있게 됐고 아크엔젤의 돌격은 무위로 끝나게 됐다. “이 녀석!” 지크는 아크엔젤이 자신의 위를 지나감에 맞춰 주먹을 휘둘렀다. 그의 공격 이 상대의 날개에 적중한 순간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지금까지 봐온 검은 깃털들이 뭉텅이로 지크에게 쏟아진 것이다. “으악, 뭐야 이건!” 지크는 깜짝 놀라 얼굴을 털었다. 그러자 검은 연기와도 같은 것이 그의 얼 굴에서 피어올랐다. 뭐가 묻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피부의 감각기관이 느끼는 선을 벗어나지 못할 만큼 작은 물질이 분명했다. 지크는 몰랐지만 류페이는 알 수 있었다. BX-Fb에 내장된 탐색카메라 중엔 미립자의 운동까지도 잡아낼 수 있을 만큼 고성능의 것도 존재했다. 류페이는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나노머신(Nano machine)!” 나노머신, 그것은 10억분의 1미터의 초 기술, 일명 나노테크놀로지에 의해 만들어진 기계의 이름이다. 의학용 나노머신의 경우 세포만큼 작거나 그보 다 작은 것도 있는데, 아크엔젤이 사용한 나노머신은 신경치료용의 것을 전 투용으로 개량한 것이다. 보통은 나비 날개에 붙은 인분(鱗粉)처럼 아크엔젤의 날개 밑에 붙어있지만 때가 되면 공기 중에 퍼져 깃털 모양의 홀로그램(입체영상)을 투사, 상대방 의 귀에 들어가 세반고리관을 마비시킨다. 나노머신의 가동시간 및 존재시간은 몇 초에 불과했다. 작은 만큼 공기 중 의 불순물과 그밖의 모든 상황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나노머신 은 몇 초 후 아예 사라지게 된다. 그래도 그 수가 워낙 막대하기 때문에 상 대는 평형감각을 30초 가까이 잃어버리게 된다. 깃털 모양의 홀로그램이 투사되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렇게 해야만 더 아름 답지 않겠냐는 아크엔젤의 의견에 따른 것이다. “나노머신이라고? 호오, 재미있군.” 수수께끼에서 해방된 지크는 당당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무명도는 허 리에 다시 매달았다. “좋아, 다시 와 봐! 화끈하게 혼내주겠어! 껍데기를 벗겨주마!” 지크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아크엔젤은 흔들리지 않았다. “후후, 나노머신에 대해 알아내신 건 훌륭하지만 세포만큼 작은 나노머신 들을 당신이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가당치 않습니다. 당신의 종말 은 제가 상대일 때부터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운명인 것입니다!” 아크엔젤의 날개가 앞쪽으로 뻗었다. 그 힘을 타고 수많은 나노머신, 아니 깃털들이 엄청난 숫자로 밀려왔다. 그러나 지크는 물러서지 않았다. “같잖은 놈!” 순간 지크의 전신에서 스파크가 일어났다. 그 전기적 장벽에 부딪힌 나노머 신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유성처럼 반짝이며 사라졌다. “너와의 썩을 인연도 여기서 끝이다!” 지크는 고성을 지르며 앞으로 뛰었다. 자신과 아크엔젤 사이에 놓인 컨테이 너들을 징검다리 건너듯 차례로 건너뛴 그는 마지막으로 목표를 향해 드높 이 점프했다. “호오, 빠릅니다!” 아크엔젤의 감탄이 끝나기도 전에 지크의 주먹이 그의 가슴팍으로 날아 들 어왔다. 기세는 훌륭했다. 그러나 상대는 오른팔로 간단히 그 공격을 막았 다. “이런!” 지크는 허무감에서 오는 분노를 토하며 바로 아래쪽 컨테이너에 발을 붙였 다. 아크엔젤의 웃음소리가 창고에 울려 퍼졌다. “하하하, 아직도 이해를 못하십니까? 제가 하늘에 있는 한 당신의 공격은 아무 쓸모도 없습니다!” 그의 말은 무슨 뜻일까. 손과 발을 이용한 대부분의 권법은 발을 지면을 딛고 있어야만 완전한 파괴 력을 낼 수 있다. 충격을 위한 물리적 받침대가 필요한 것이다. 지크의 주먹이 지상에서 아무리 300여 톤에 가까운 파괴력을 낼 수 있다 하 더라도 그만큼의 힘을 받쳐줄 받침대가 없다면 그 위력은 끝없이 감소된다. 침대 매트리스 위에서 주먹을 뻗어도 파괴력이 떨어지는데, 하물며 지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공중에서는 어떻겠는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아크엔젤은 검지를 뻗어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다. “당신이 음속 이상의, 아름답지 않은 속도로 점프를 할 수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결과는 똑같습니다. 땅 위에서의 전투에 익숙한 당신이 공중 을 무대로 삼는 저를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물리법칙상으로도 저에게 패배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당신과의 썩을 인연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군요.” “그래?” 상대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지크는 씩 웃었다. “네 말을 들으니 내가 확실히 패배한 것 같군. 하지만 얘기했지? 바람엔 날개가 없다고 말이야.” “날개뿐만 아니라 다리도 없습니다.” 아크엔젤의 비아냥거림으로 인해 지크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쳇. 아무튼 네가 날고 있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이곳은 내 홈그라운드 야. 이점은 최대한 살려야겠지?” “호오, 방법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이지!” 지크는 컨테이너에서 내려와 벽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크엔젤은 순간 흠칫 놀랐다. 상대방의 속도가 평상 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증가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슨!” 그가 놀라는 사이 한줄기의 스파크가 90도의 벽을 수직으로 올라갔다. 그것 도 모자라 천장까지 타고 내달렸다. 지크는 천장을 박차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크엔젤은 그의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것과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교차된 아크엔젤의 양팔에 두꺼운 낙뢰가 떨어졌다. 그는 충격을 이기지 못 하고 튕겨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콘크리트 바닥이 깨져나갈 정도로 강하게 떨어진 아크엔젤은 농구공처럼 바 운드되며 바닥을 굴렀다. 그러면서 그의 날개도 엉망으로 구겨졌다. 그가 최초로 떨어진 지점 옆엔 조각난 황금가면과 헬멧 파편이 널려있었다. 지크는 그것들을 좌우로 걷어차며 길을 열었다. “허, 얼굴이 드러났겠는데? 어디 얼마나 아름다운 면상을 가졌는지 볼까? 추락한 천사양반.” 컨테이너에 걸려 쓰러져있던 아크엔젤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힘겹게 일 어났다. “저, 저의 추악한 얼굴을, 생각하기도 싫은 치부를 드러내시다니… 너무 잔혹합니다! 지크 스나이퍼, 당신이란 인간은 그렇게 잔인한 존재란 말입니 까!” 아크엔젤은 얼굴에서 손을 떨치고 지크를 쏘아봤다. “…….” 지크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챠오와 류페이의 얼굴도 비 슷하게 변했다. “어, 어이. 그렇게 자학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지크가 어색한 얼굴로 그를 위로했다. 그러나 아크엔젤은 진심이었다. “아닙니다! 아니란 말입니다!” 그의 턱 아래로 굵은 눈물이 맺혔다. 길지 않은 반 곱슬의 금발 아래로 고전 유화에서나 나올 법한 준수한 얼굴 이 보였다. 이 정도라면 밖에 있는 슈렌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외모 였다. 아크엔젤이 슬피 소리쳤다. “당신들의 기준으로는 잘생겼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미남이지요! ” “…….” “그러나 덕분에 저는 모진 고통을 당했습니다! 시기, 질투, 편견 등등, 보 통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답지 못한 시련들을 이 추잡한 외모 때문에 겪어야 했단 말입니다! 유구의 세월동안!” “아, 그래? 안됐군.” 지크는 대충 그의 이야기를 받아 넘겼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크 엔젤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이해를 못하시는군요!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당신은 저만큼 아름 답지 않으니까! 고통 받을 일이 없으니까!” 그의 알 수 없는 이야기로 인해 지크의 당황은 일순간 짜증으로 바뀌었다. “그럼 영원히 고통 받지 않도록 해주마!” 지크는 고함을 지르며 맹렬히 달려들었다. 아크엔젤은 표정을 바꾸고 자세 를 잡았다. “아름답지 않은 방법은 사양합니다!” 둘은 그렇게 본격적으로 주먹을 나누었다. 방금 전과 달리 아크엔젤의 모습은 매우 진지했다. 물론 아름답니 어쩌니 하는 것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일단 여기서 지크를 누르지 못하면 드래곤 잭을 구한다는 그의 1차 목표는 무용지물이 되고 자신 역시 무사하지 못하게 된다. 2차 목표인 복제 무찰린 다의 테스트는 알 수 없는 요소로 인해 무용지물 됐으니 생각할 필요도 없 다. 무조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지크가 느끼는 아크엔젤은 어제보다 빠르고 강했다. 전체적인 속도는 지크보다 느렸지만 순간속도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발 레자세를 응용한 그의 공격기술은 유연함과 파워 모두를 겸비하고 있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아크엔젤의 외피로 쓰인 나노 스킨이었다. 공격을 순식간 에 흡수해버리는 그 놀라운 성능으로 인해 지크는 번번이 위기에 몰렸다. “귀찮은 놈!” 지크의 주먹이 아크엔젤의 복부에 적중했다. 그러나 아크엔젤은 충격을 아 예 받지 않은 듯 그대로 몸을 앞으로 밀어 팔꿈치를 뻗었다. “큭!” 짧은 비명과 함께 지크의 머리가 휘청했다. 아크엔젤은 틈을 노리고 재차 공격을 노렸지만 갑자기 날아온 지크의 발차기로 인해 두 번째 공격은 들어 가지 않았다. “후, 필사적이군요.” 아크엔젤은 씁쓸히 웃었다. “너야말로.” 지크는 왼쪽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훑었다. 긴 혈흔이 그의 장갑과 이마에 묻어났다. 상대의 팔꿈치를 피하면서 피부가 찢어진 것이다. 꽤 긴 상처였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지크의 상식을 초월한 재생력 덕분에 상처는 연기와 거품을 내며 순식간에 아물었다. 흘러내린 피 역시 알코올처 럼 증발되었다. 아크엔젤은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지크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는 있었지만 직접 보니 확실히 느낌이 틀렸다. “아름다운 회복력이군요. 어쨌거나 고집은 그만 부리십시오. 당신은 무명 도를 쓰지 않으면 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제 몸을 이루고 있는 나노 테크 놀로지의 갑옷은 주먹이나 발 같은 시시한 공격엔 절대 뚫리지 않습니다.” “음…….” 지크는 고민스런 소리를 냈다. 상대가 하늘에 뜨는 건 어찌어찌 봉쇄했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나노 스 킨의 엄청난 충격흡수력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 았다. ‘젠장, 그냥 눈 딱 감고 칼로 베어버릴까?’ 그는 자기 자신과 타협하려 했지만 성격은 도저히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슈렌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면을 뚫는 것은 점이고 면을 베는 것은 선이다.’ 그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해본 지크는 곧 자세를 바꿨다. 이때까지 사용하던 것과 달리 몸의 중심은 낮고 양팔과 손은 조금 개방적인, 무형유형(無形有 形)이면서도 유형무형(有形無形)인 자세였다. 그 모습을 본 챠오는 미간을 찡그렸다. “절권도?”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지만 아크엔젤의 귀엔 또렷이 들렸다. 그는 흥미 롭다는 듯 자신의 갸름한 턱 선을 매만졌다. “무슨 생각으로 자세를 바꾸신 겁니까?” “자세를 바꿔? 무식하군.” 지크는 씩 웃었다. “내가 어머니의 집에 처음 왔을 때 본 게 뭔 줄 알아? 브루스 리의 영화였 어. 어머니는 브루스 리의 팬이었거든. 무술에 관심이 있었던 나에게 그의 영화는 상당한 충격이었지. 난 그걸 보면서 무술을 익혔어. 나중엔 도장도 다녔지.” “후회하십니까? 후후, 걱정 마십시오. 그 나이 때는 다 그렇습니다.” 아크엔젤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지크의 얘기는 계속됐다. “브루스 리가 이런 말을 했지. 잔에 술을 담으면 그것은 술잔이고 물을 담 으면 그것은 물잔이다. 잔에 무엇을 담을 지는 자신의 몫이며, 절권도는 잔 을 만드는 법과 사용하는 법만을 가르쳐준다. 난 자세를 바꾼 게 아니라 생 각을 바꾼 거야. 잔에 든 내용물을 바꾼 거지. 네 몸을 파괴하기 위한 것으 로 말이야.” 그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아크엔젤은 양 어깨를 슬쩍 올렸다 내렸다. “좋을 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순순히 받아드리지는 않을 겁니다.” “바라지도 않아!” 지크는 스텝을 빠르게 옮겨 상대에게 접근했다. 평소처럼 맹렬히 달려가다 가 공격을 뿜는 것과는 매우 달랐다. 하지만 아크엔젤로선 그게 더 부담스러웠다. 지금의 지크는 준비자세가 따 로 없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공격 그 자체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크엔젤이 몸을 빙글 돌리며 공중에 떠올랐다. 상대가 갑자기 거리를 좁히 자 지크의 신경이 극도로 곤두섰다. 아크엔젤은 한발로 착지하여 한 손을 앞으로, 다른 한 손과 다리를 뒤로 길 게 뻗었다. 발레에서 아라베스크라 불리는 자세였다. 상당히 멋진 자세였지만 지크에게 있어서 그것은 가슴을 노리고 들어오는 차기공격이었다. 양팔을 교차해 공격을 막은 지크는 반격을 위해 팔을 풀었 다. 그때 지크의 머리 위에서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들렸다. “윽!” 엉겁결에 고개를 숙인 지크는 머리털 끝에 뭔가 닿았음을 느꼈다. 아크엔젤의 발뒤축이었다. 전갈의 꼬리처럼 뒤로 크게 휘어져 들어온 아크엔젤의 발끝은 상당한 살기 를 지니고 있었다. 만약 지크가 공격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의 머리는 지금 쯤 큰 구멍이 났을 것이다. 아크엔젤은 뒤로 뻗어 올린 다리를 되돌린 뒤 촙을 날렸다. 날카롭게 모인 그의 손끝은 철판이라도 뚫을 것처럼 기세등등했다. 그것이 기관포의 탄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스피드와 정확도, 파워 모두를 갖춘 그 공격을 지크는 권투선수처럼 상체를 흔들며 피했다. 피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재킷과 팔, 얼굴 곳곳에 생채기가 생겼다. 상처가 쓰린 건 물론이고 공격받는 것 자체가 괴로웠지만 지크는 눈을 피하거나 놓 치지 않았다. 그때 칙 하는 소리가 터졌다. 가죽이 타는 매콤한 냄새도 동반했다. 아크엔젤의 뽀얀 얼굴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자신의 오른팔이 상대에게 붙 잡힌 것이다. “네 갑옷의 성능을 테스트해주지!” 지크는 무방비상태가 된 아크엔젤의 겨드랑이 사이로 빠르게 파고들었다.챠 오가 가르쳐준 붕산고의 자세였다. 그런데 조금 달랐다. 챠오가 몸의 탄력을 최대한 이용해 상대를 어깨로 들 이 받는 것과 달리 지크는 어깨를 그냥 갖다 대기만 했다. 순간 지크에게서 이상현상이 발생했다. 전신이 강한 충격을 받은 소리굽쇠 처럼 진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흡!” 짧은 호흡과 함께 아크엔젤의 몸뚱이가 지크의 반대쪽으로 펄떡 움직였다. 형체를 볼 수 없는 강한 충격이 아크엔젤을 강타한 것이다. 원래는 바깥쪽 으로 튕겨 나가야 하지만 지크가 팔을 잡고 있는 탓에 그러진 못했다. 챠오가 소리쳤다. “분경(分勁)!” 그녀의 말대로 지크가 사용한 것은 분경, 즉 발경 타법이었다. 보통사람들은 경(勁)에 대해 흔히들 손바닥이나 주먹, 발과 같은 신체의 끝 부분을 통해서만 발산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은 충격을 가할 수 있는 모든 부위, 심지어는 몸 전체로도 발산할 수 있다. 경을 발산하는 것, 즉 발경의 이론은 자동차가 움직이는 것과 같다. 흡입, 압축, 폭발, 배기와 일맥상통한다. 발에 대해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압축단계를 거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거리 가 필요하다. 힘을 뿜을 수 있는 탄력을 얻기 위해 허리나 다리를 돌리고 팔을 뻗을 수 있을만한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척경이나 촌경, 분경같이 상대와 밀착한 상태, 즉 30센티 이하의 거 리에서 내는 경은 자신의 몸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고수들만이 사용할 수 있다. 지크의 분경을 클린히트당한 아크엔젤은 몸 전체를 울리는 충격에 고통스러 워했다. 그가 자랑하던 갑옷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그 내부는 엉망이 되기 일보직전이었다.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다음은 이건가?” 지크는 허리를 조금 젖히는가 싶더니 오른 팔꿈치로 아크엔젤의 늑골부위를 찍었다. 몸이 개조되어 실제 늑골은 없지만 초경합금으로 이뤄진 내부 프레 임이 늑골의 역할을 대신했다. 1단계 공격은 역시나 효과가 없었지만 진짜는 그 다음이었다. “점은 면을 뚫는다!” 또 한번의 분경이 아크엔젤을 때렸다. 이번엔 어깨보다 타점이 작은 팔꿈치 였기에 아크엔젤이 느끼는 고통은 송곳에 찔린 것과 비교할 수 있을 만큼 날카로웠다. “크억!” 아크엔젤은 비명을 터트리며 멀찌감치 날아갔다. 지크가 놓쳐서 날아간 게 아니다. 그의 오른팔은 여전히 지크의 손에 들려 있었다. 지크는 아깝다는 듯 혀를 찼다. “쳇, 하나 더 남아있는데……. 어쨌거나 정신이 드나? 이번 건 조금 아팠 을 텐데?” “으, 으으윽…….” 아크엔젤은 비틀대며 일어났다. 그의 팔이 있던 부분에서 갈황색의 걸쭉한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윤활유와 충격흡수제, 실린더용 기름 등등이 뒤섞인, 어찌 보면 아크엔젤의 피와 같 은 물질이었다. 지크는 생기를 잃은 아크엔젤의 팔을 야구배트처럼 들고 자신의 어깨를 툭 툭 쳤다. 의형제인 리오가 자주 보여주던 모습이었다. “자아, 계속할래? 상황은 그리 아름답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야.” “후후, 그렇군요.” 아크엔젤은 힘겹게 몸을 옮겨 컨테이너에 기대섰다. “일단은 당신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제 팔은 어디에 쓰실 겁니까?” 의외의 질문이었지만 지크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글쎄? 일단 나보다는 기술부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하겠지. 워 피겨 중에 서도 열손가락 안에 드는 사이보그의 몸은 꽤 가치가 있을 테니까.”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안타깝군요. 저는 낯선 사람이 즐거워하는 걸 보면 꼭 저를 비웃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지요. 그러니 그걸 막 아야겠습니다.” “뭐?” 지크가 들고 있던 아크엔젤의 팔에서 순간 백광이 번뜩였다. 그리고 작지 않은 폭발이 지크의 상반신을 감쌌다. 고막을 파열시킬 듯한 폭발음이 창고 내부를 휩쓸고 지나갔다. 챠오와 류페이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예상 치 못한 일이었을 뿐 아니라 거리, 시간 등등 모든 상황이 그들을 가로막았 다. 창고 전체를 울리던 폭음이 점차 잦아들었다. 연기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지크는 분명히 서있었다. 챠오와 류페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그는 이내 불에 탄 고목나무처럼 뻣뻣하게 쓰러졌 다. “지크!” “지크 선배님!” 둘은 전력을 다해 지크 쪽으로 달려갔다. 10분 뒤, 앰뷸런스 한 대가 본부를 출발하여 강변도로를 질주했다. 그 뒤를 한 대의 BSP 순찰차가 바짝 뒤따랐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존재가 건너편 고수부지에 있었다. 중세시대에 나 나올 법한 흑색 로브로 몸 전체를 뒤덮은 남자였다. 오른팔 부위가 푹 들어가 보였다. 그 밑으로 진득한 액체가 계속해서 흘러 내렸다. 몸 전체에 짧은 경련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는 앰뷸런스가 사라진 곳을 보며 낮게 웃었다. “서로 아름답지 못하게 됐군요. 아무튼 당신이란 존재에 대해 많은 걸 배 우고 갑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사라진 오른팔에 대한 빚도 꼭 갚아 드리지요.” 그의 뒤로 검은 양복의 남자가 다가왔다. “아크엔젤 장군, 드래곤 잭의 보호가 끝났습니다.”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세르게이 장군.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좋습니다. 그럼 출발하지요.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가 좋겠습니 다.” 남자는 두건을 걷으며 승합차로 향했다. 맑은 금발이 강바람에 흔들렸다. 8화 [R.E.D Blues] 아크엔젤, 아니 크게 봐서 워 피겨의 BSP본부 습격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지부장인 처크 켄트의 출근길은 매우 고되었다. 각종 언론매체가 어제 일어 난 일에 대한 인터뷰를 요구하며 개미떼같이 몰려든 것이다. 지상 최강의 무력집단인 BSP중에서도 최고라 일컬어지는 대한민국 수도방위 지부의 습격사건은 모든 이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 중에서도 워 피겨가 바이오 버그를 생물병기로서 사용했다는 사실은 가장 큰 이슈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블루 원에 대한 언론조작이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가 싸울 때 기자들의 접근을 원천봉쇄한 것도 성공의 비결이지만 일단 그 가 찍힌 사진이 없다는 게 가장 큰 힘이 되었다. 그런 경우를 항상 당해왔던 BSP들에겐 예상했던 결과였으나 만약 그의 모습 이 조금이라도 노출됐다면 처크는 UN본부에 소환 당했을지도 모른다. 처크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기자들은 슈퍼볼 선수들처럼 달려들었다. 순식간 에 둘러싸인 처크는 자신이 왜 헬기를 타고 오지 않았을까 후회하며 길을 얼어나갔다. “어제의 습격은 어찌된 일입니까? BSP본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입니까,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입니까?” “노코멘트입니다.” “대원들은 무사합니까? 지크 스나이퍼 소위가 큰 부상을 당했다는데, 사실 입니까?” “현재 치료중입니다.” “적을 본부 내부에서 막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확인해 주십시오!” “모릅니다.” “워 피겨가 바이오 버그를 사용했다고 들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노코멘트입니다.” “지부장님은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 몇몇 부분에 대한 것은 노코멘트로,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대해선 무시로, 그나마 좀 편한 질문들에 대해선 대충 대답하며 엘리베이터로 도망친 그는 넥타이를 조금 늦추고 길게 숨을 돌렸다. “다음부터 일이 터지면 반드시 헬기를 써야겠군. 저 친구들 덕분에 2년은 더 늙은 것 같아. 아니, 이 말은 이제 하지 말아야겠군. 그렇게 따지자면 내 나이가 300살이 넘어야 할 테니까.” 투덜대며 지부장실로 들어간 그는 의자에 앉자마자 그렌을 불렀다. 다른 대원들은 몰라도 그렌은 큰 사건 뒤엔 반드시 본부에 남는다. 반면 처 크는 어지간하면 집에 돌아간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바뀐 게 아닌가 생각 할 수도 있지만 그런 패턴은 그들이 매트로 서울에 온 이후 계속됐다. 그 시작은 일의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삼는 처크의 생각에서 비롯됐다. 처크는 집이 아니면 생각의 정리를 완벽히 해내지 못한다. 그리고 밤샘을 잘 못하기 때문에 괜히 본부에 남아봤자 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 대신 큰일에 대한 처리는 다음날 확실하게 한다. 그렌은 사이보그이기 때문에 하루 정도 밤을 샌다 해서 부담이 따르지 않는 다. 그리고 사건의 뒤처리 정도는 그의 운영능력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 다. 두 베테랑의 관례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그렌의 부인 외엔 아무도 없다. 일이 확실하게 처리됐으면 처리됐지 허술하게 떠버리는 일은 단 한 차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부장실에 들어온 그렌은 간단히 경례를 붙인 후 처크 앞에 앉았다. “들어오시느라 고생 좀 하셨겠습니다.” 시거에 불을 붙이던 처크는 쓴 웃음을 지었다. “후후, 언젠 안 그랬나? 밤사이에 특별한 일은 없었지?” “없었습니다. 아, 지크는 03시 (새벽 3시) 무렵에 의식을 회복했다 합니 다.” “그래?” 처크는 연기를 흘렸다. “다행이군.” 상당한 틈 뒤로 이어진 말이었다. 그렌은 낮게 웃었다. “상당히 걱정하셨군요.” “음.” 처크는 부정하지 않았다. “녀석이 이렇게 크게 다친 건 처음이거든. 그래도 녀석이니까 살았지, 다 른 사람 같았으면 지금쯤 자네와 나 모두 검은 옷을 입고 국립묘지에 갔을 거야.” “그렇겠죠. 그나저나 지크 녀석, 정말 알 수 없는 육체를 가지고 있군요. 처음 앰뷸런스에 실릴 때는 두개골이 드러날 정도의 치명적인 화상을 입고 있었는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멀쩡히 의식을 회복했으니 말입니다.” “그러게 말일세.” 처크는 이번에도 부정하지 않았다. 드러내진 않았지만 지크의 부상은 처크를 전에 없이 긴장시켰다. 지크의 비 밀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그마저도 이번만큼은 그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 다. 아예 죽을 거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렌이 말했다. “지크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의 진단은 뇌진탕에 뇌출혈, 우측 안구 파열, 고막 파열, 두부 4도 화상에 상반신 3도 화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정 경엔 화상이 대부분 치유된 건 물론 두발까지 원상태로 돌아왔습니다. 고막은 06 시경에 회복되었고 뇌진탕과 뇌출혈, 그리고 안구 역시 차츰 원상복구가 되 고 있습니다.” “…….” “병원 관계자들에겐 환자가 특이체질이기 때문에 그런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난 거라고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저도 믿기지 않습니다. 정 상적으론 죽어야 당연한 게 아닙니까?” “그렇지.” 처크와 그렌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처크가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렌은 잠시 후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는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잊으려는 듯 짧게 고개를 흔들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드래곤 잭은 아크엔젤에 의해 탈취, 아니 그의 도움 으로 탈옥했습니다. 지크가 쓰러진 직후 10여분 만에 일어난 일이라는 걸 생각했을 때 아크엔젤은 우리 본부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들어 온 게 분명합니다.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합니다.” 처크는 그렌을 슬쩍 쳐다봤다. “이사를 갈까?” 둘 사이에서 폭소가 터졌다. 처크는 웃느라 조금 흘러내린 선글라스를 아예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후후, 대책이 없지 않나.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본부는 20년 동안 같은 자리에 있었네. 거쳐 간 사람도 수천 명에 육박하지. 그러니 내부구조에 대 한 정보가 새는 건 어쩔 수 없어. 아니, 지금까지 습격이나 침입을 당하지 않은 게 이상한 걸세. 정말 이사를 가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네.” “그럼 본부를 옮기실 생각은 있으십니까?” “글쎄, 매트로 서울은 땅값이 워낙 비싸서 말이야. 그리고 새 본부를 짓는 다 해도 몇 년이 걸릴 걸세. 이 건물을 짓는데 설계까지 해서 5년이 걸렸으 니 새 본부는 더 걸리겠지.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져 박히지 않는 한 이사는 무리네.” “그렇겠군요.” “다른 일은 없나?” “아, 챠오가 현재 지크가 있는 병원에서 요양하고 있습니다.” “하긴, 녀석의 그 꼴을 가장 가까이에서 생생하게 봤으니 그럴 만도 하지. ” 그렌의 표정이 좀 변했다. “아,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뭐라고? 부상은 없었다고 들었는데?” “그게… 챠오의 집안에서 경고했던 적안(赤眼)현상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지크의 부상을 목격한 직후 정신적 충격을 받아 적안이 떠오른 듯 합니다.” “…….” 처크는 이마를 감쌌다. “골치 아프게 됐군. 린 쉐이롱 선생이 그렇게 경고했는데…….” 그렌 역시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현재 시각, 임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인원은 저와 케빈, 리진, 그리고 류페이 이렇게 네 명입니다.” “알았네. 다른 일은 없나?” “예. 레드 원에 대한 것입니다.” “레드 원?” 처크의 표정이 단숨에 변했다. 어제 블루 원의 강력함을 몸으로 실감한 그 였으니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도 매트로 서울에 다시 나타난 건가? 이거 구경거리가 많아지니 신이 절로 나는군.” 처크는 농담 삼아 말했지만 그렌의 표정은 진지했다. “아닙니다. 이건 오늘 07시 무렵에 들어온 정보입니다만… 레드 원의 출현 장소는 미국 텍사스입니다.” “텍사스? 그 친구가 거긴 왜?” “예. 이곳 시간으로 04시 28분경에 휴스턴의 BSP와 접촉했다 합니다. 그 결과 휴스턴 지부의 대원 한 명이 사망했고 세 명의 대원은 중상을 입었습 니다.” “뭐라고? 그가 BSP를 공격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사진이나 영상자료는 역시나 훼손되어서 정말 레드 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공된 인상착의로 봤을 때 레드 원이 분명합니다.” “붉은 장발에 회색 망토, 적동색 피부, 그리고 진보라색의 대검 말인가?” “그렇습니다.” 처크는 어째서 그런 일이 생겼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듣기로 레드 원은 블루 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다고 한다. 그러 나 그에게 살해당한 존재는 워 피겨 소속의 사이보그와 루이스 츄의 부하, 그리고 바이오 버그 밖에 없었다. 지크가 그에게 당하긴 했지만 목숨을 잃 을 정도는 아니었다. 깔끔하다면 깔끔할 수 있는 그가 어째서 BSP를 직접적으로 공격한 것일까? 이래저래 고민하던 처크는 일단 사건정황을 들어보기로 한다.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겠나? 휴스턴에서 일어난 일을 말일세.” “예. 레드 원이 나타난 것은 휴스턴의 BSP가 그리 대수롭지 않은 BG사건을 처리한 직후였습니다. 처음엔 경고 및 위협사격으로 그를 막으려 했지만 레 드 원은 경고를 무시하고 대원 중 한 명을 살해했습니다. 다른 대원들이 그 를 체포하기 위해 무력을 행사했지만 잡기는커녕 중상만 입었습니다. 레드 원은 그대로 사라졌습니다.” “그렇군. 사망한 대원의 이름은?” “챌시 더글러스, 올해 25세의 여성 대원입니다. 휴스턴 지부장의 말로는 꽤 쓸만한 사이키커였다고 합니다.” “음…….” 뭔가를 생각해보려 했던 처크는 결국 포기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군. 챌시 더글러스가 누군지는 알지만 그녀가 왜 레드 원에게 살해 당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어. 떠오르지가 않아. 이거 무슨 추리소설의 시 작부분 같아.” 그렌은 특유의 후덕한 미소를 지었다. “지부장님께서 고민하실 필요는 아직 없습니다. 레드 원과 블루 원은 아군 으로 판명되지 않은 미지의 존재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원칙적으론 말이지요.” “음, 알았네. 그 외의 문제는 없나?” “아크엔젤과 무찰린다에 의한 기물파손문제 정도입니다.” “그렇군. 그럼 오전 브리핑 준비를 하게나. 시작까지 20분 정도 남았으니 그때 보세.” “예, 알겠습니다.” 그렌은 경례를 붙인 뒤 절도 있게 돌아서서 지부장실을 나섰다. 처크는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편하게 시거를 즐겼다. 사망한 BSP의 일이 조 금은 마음에 걸렸지만 처크는 일단 그렌의 말에 따라 그 일에 대한 고민을 당분간 끊기로 했다. ※※※ 병원신세를 다시 지게 된 지크는 멀쩡한 왼쪽 눈으로 하얀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 머릿속까지 하얘지는 것 같아.’ 위급상황에서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머리는 여전히 띵했고 오른쪽 눈은 한없 이 간지러웠다. 신체 조직이 급속도로 재생되면서 오는 감각이었지만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그는 강하게 콧김을 뿜었다. 어제의 일이 생각나서였다. ‘망할 자식, 남한테 주기 싫었으면 도로 달라고 하지 왜 터트리고 난리야. 하마터면 죽을 뻔 했잖아.’ 생각 같아선 큰소리로 외치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그의 모친인 레 니가 바로 옆의 간이침대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크가 병원에 이송된 뒤 한걸음에 달려온 그녀는 지크가 의식을 되찾으면 서 거꾸로 스르륵 잠들었다. 어머니가 아니면 느낄 수가 없는 엄청난 긴장 감이 한번에 풀리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레니에게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을 덮어준 그는 심심함을 달랠 겸 오른손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봤다. ‘피부는 말끔해졌네. 새벽까지만 해도 조금 쭈글쭈글 했는데 말이야. 눈은 아직 멀었나?’ 그 손으로 눈가를 더듬었다. 아직까지 간지러운 것을 보니 완전히 회복되려 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지크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의안을 박아야 할 텐데… 이거 기뻐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슬퍼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가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레니가 부스럭 일어났다. “지크, 일어났니?” 아들의 일을 걱정하다 잠이 들어서 그런지 그녀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가 지크의 애인이 아니라 어머니라는 사실을 안 간호원들의 얼 굴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아, 벌써 일어나셨어요? 더 주무시죠?” “아냐, 됐어. 배고프지 않니?” “아직 뭘 먹을 만한 정신은 아니에요. 나중에 많이 먹을게요.” “응…….” 지크는 평소처럼 명랑하게 웃으며 사양했지만 그 모습을 보는 레니의 마음 은 평소와 달랐다. 아들의 얼굴이 절반이나 붕대에 감겨 있는데 좋아할 부 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레니는 결국 용기를 내어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지크, 미국으로 돌아가자.” “예?” 모친의 뜬금없는 말에 지크의 안색이 변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럼 전 어쩌라고요?” “잊는 거야. 오늘로 그만두려무나. 처크 삼촌께도 내가 얘기할게.” “…….” 지크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레니는 전에 없이 진지했다. “그 지옥에 돌아갈 생각은 아니겠지? 응? 넌 상반신 화상에 안구파열, 고 막파열에 뇌진탕, 뇌출혈 등을 당했어. 보통사람이라면 더 이상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아니 이미 시체가 됐을 수도 있을 상황이야! 그런 꼴을 당하고도 다시 BSP 활동을 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란 말이야!” 지크는 침대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옛 일이 떠올랐다. 하이스쿨 졸업을 얼마 앞둔 어느 날의 일이었다. BSP에 들어가겠다는 지크의 폭탄선언으로 인해 레니는 아들과 처음이라 해 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심한 말싸움을 벌였다. 레니는 지크의 말을 머릿속에 넣으려 하지도 않았다. BSP가 되겠다고 하는 것도 모자라 처크가 있는 매트로 서울로 가겠다고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 다. 그곳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BG지역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 는 상식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온갖 단어를 동원해 아들을 말렸지만 지크는 완강 했다. 왜 하필 매트로 서울이냐는 이유를 물어도 지크는 끝까지 말하지 않 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그날의 사건은 친척들의 입을 거쳐 대한민국에 있는 처크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결국 지크는 처크의 도움으로 허락을 받아낸다. 처크는 레니에게 그녀의 아들을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죽지 않을 만큼 강하 게 키운 뒤 BSP로 정식발령을 내리겠다고 한다. 지크가 아무리 봐도 어설플 경우엔 반드시 돌려보내준다는 단서조항도 있었다. 레니는 지크가 훈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돌아오길 빌었다. 성공하면 아들이 부와 명예로 가득한 곳에 가는 게 아니라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지옥으로 가 게 되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녀의 소원과 달리 지크는 몇 년 후 전 세계의 BSP 중 최강이라는 호칭까 지 받으며 용처럼 떠올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레니를 찾아와 아들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며 감사를 표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 모두 그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그로 인해 레니의 걱정은 조금씩 희석되었다. 그가 처음 병원에 입원했을 때까지만 해도 일이 일이니만큼 그럴 수도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어제의 일로 인하여 그녀는 깨끗이 초심(初心)으로 돌아 왔다. 지크는 눈을 돌려 모친의 얼굴을 봤다. 단단히 각오한 표정이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았 다. 이런 상황에서 싫다는 말을 꺼내면 분명 말싸움이 날 것이다. 지크는 하는 수 없이 애매한 말을 꺼냈다. “생각해볼게요.” “아니, 확실히 말해줘. 그만둘 건지, 아니면 계속 BSP에 있을 건지.” 레니는 엄한 목소리로 아들을 재촉했다. 이런 정신적인 부담을 제일 싫어하 는 지크에겐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다. “도망칠 수는 없어요.” “응? 뭐가?” 레니의 눈동자에 불안이 감돌았다. 지크의 머릿속에선 더 이상 말해선 안 된다는 외침이 울리고 있었지만 그는 기어코 얘기를 꺼냈다. “저밖에 할 수 없는 일에서 도망칠 수는 없어요. 제가 아니면 안돼요. 이 곳엔 제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만 이 도시의 모두가 안심하고 살 수 있어 요. 엄마가 그러셨잖아요. 용기 있는 사람이 되라고, 자신의 일에서 도망치 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요.” “그렇다고 죽으라는 소리는 아니잖니!” “죽지 않아요! 전 이번에도 죽지 않았어요! 살아서 엄마랑 얘기하고 있잖 아요! 그리고 전 앞으로도 죽지 않아요!” 레니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고개를 돌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 충격을 받은 것이다. 지크는 다시 말했다. “4년 전에 엄마 곁을 떠나면서 말씀드렸잖아요. 좋아하는 사람 품 안에선 절대 개죽음 하지 않겠다고요.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을, 제 일 사랑하는 사람을 놔두고 죽을 것 같아요?” “지크…….” 가만히 아들을 바라보던 레니는 손을 뻗어 지크의 머리카락을, 볼을 차례로 훑어 내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서 엄마 곁을 떠날 거지? 다른 아이들처럼…….” 지크는 찰나에 가까운 시간동안 그녀에게 사죄했다. 앞으로 할 말은 거짓말 이라며 골백번 마음속으로 외쳤다. “아뇨, 절대로.” 그는 두 팔로 레니를 안았다. 레니는 솜털처럼 가볍게 그의 품으로 끌려왔 다. 붕대 위로 그녀의 눈물이 낙숫물처럼 한 방울씩 떨어졌다. 감정이 격해서였을까. 지크와 레니는 병실 안에 누군가가 들어왔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똑똑. 두 번의 노크소리가 병실 안 쪽에서 났다. 모자는 깜짝 놀라 그쪽을 바라봤 다. 검은 양복에 검은 와이셔츠, 연보라색 넥타이 차림의 슈렌이 문가에 기댄 채 서있었다. 오른손이 문 위에 있는 걸로 봐서 노크의 주인공은 그가 틀림 없었다.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예. 어서오세요, 슈렌씨.” 레니는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왔다. 슈렌은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지크에게 다가갔다. “지크와 단 둘이 하고픈 얘기가 있습니다. 잠시 자리를…….” “아, 그러세요. 무슨 일이 있으면 날 부르렴, 지크. 밖에 있을 테니까.” “네. 혹시 누가 오면 밖에서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해주세요.” 지크는 단단히 부탁했다. 혹시라도 BSP의 동료들이 찾아올까봐 한 말이었 다. 만약 그들이 기습 방문하여 슈렌을 목격한다면 슈렌뿐만 아니라 자신까 지 귀찮아질 수 있었다. 레니는 아들의 머리를 만져준 뒤 밖으로 나갔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지크는 팔베개를 하는 등 최대한 편히 자세를 잡았 다. “오늘은 웬일로 왔어? 간다고 하지 않았어?” 슈렌은 응답 대신 오른손을 들고 주문을 외웠다. 주문이 완성되자 은색의 빛이 그의 손 위에서 천천히 피어올랐다. 지크는 뚱한 얼굴로 그 빛을 쏘아봤다. “회복마법인가 하는 거지? 나야 좋지만 의사들이 날 의심할 텐데?” “그렇다고 해부를 하진 않겠지.” “흠, 하긴.” 슈렌의 손에서 머물던 빛이 지크의 상반신을 감쌌다.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이 상처부위에서 맴돌았다. 재생되고 있던 눈의 가려움도 빠르게 사라졌다. 주문을 마무리한 슈렌은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 다시 왔다. 너로선 큰일이 될 수도 있으니 진지하 게 들어봐.” “큰일?” “음, 리오에 관한 일이다.” 그리고 슈렌의 얘기가 시작됐다. 그 사이 지크는 머리를 감싼 붕대를 천천 히 풀었다. “리오가 근신처분을 받았다는 건 저번에 얘기했을 거다. 그런데 그가 지금 이 세계에 와있다.” “뭐? 그럼 탈출한 거야?” “탈출이랄 것도 없지. 리오는 감금을 당한 게 아니니까. 근신 중엔 임무만 내려오지 않을 뿐이야. 어찌 보면 좀 괴로운 휴가라고 할 수 있지.” “아, 그렇군. 그럼 지금 어디에 있는데?” “이 세계의 사람들은 그곳을 미국이라 부르더군.” “미국? 그럼 나한테 말을 하지 그랬어? 거긴 내 고향이란 말이야. 내가 마 이애미 쪽은 확실하게 꿰뚫고 있으니 나만 있으면…….” “흠.” 슈렌은 주먹을 입에 대고 짧게 헛기침했다. “관광을 목적으로 간 건 아닌 듯싶다.” “응? 그럼?”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 나라가 위험할 수도 있어.” “뭐라고?” 붕대를 풀던 지크의 손이 멈췄다. “지금 리오의 상태는 매우 불안정하다. 지난번에 한 세계를 멸망시키면서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심각한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는 건 물론이고 공 격성도 증대되어 극도로 위험하다. 어디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을지는 아무 도 모른다.” “…….” 지크는 잠시 넋을 잃었다. “자, 잠깐만. 간단히 말하자면 리오 녀석이 지금 미쳐 날뛰고 있단 말이야 ?” “날뛰기 직전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단언할 순 없어.” “음…….” 지크는 다시 붕대를 풀었다. 사건 직후 숯처럼 탄화(炭化)되었던 그의 피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 게 회복되어 있었다. 주위의 피부와도 이질감이 전혀 없었다. 눈도 멀쩡했다. 현재 그에게 있어서 가장 다쳤다고 할 수 있는 부위는 붕대 에 눌린 머리카락뿐이었다. “만약 리오 녀석이 또다시 난동을 부리면 어떻게 되지?” “막아야겠지. 내가 실패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막을 거다. 이 세계의 파멸 만큼은 막을 수 있지만 최악의 경우 리오의 존재 자체가 소멸될 수 있다. 문제는 그거야.” 항상 무덤덤하던 슈렌이었지만 지금은 조금이나마 고민이 보였다. 지크는 손가락을 굽혀 눌린 머리를 긁적였다 “하아, 그 녀석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정신 사납게 시리.” “…….” 고민으로 시간을 보내던 지크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하필이면 왜 이 세계일까? 내가 듣기로는 너희들이 갈 수 있는 세계는 거의 한계가 없다며? 널리고 널린 세계 중에서 왜 하필 이곳이 야?” “글쎄.” 손으로 코 아래를 받치고 있던 슈렌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몸 괜찮아?” 노크도 없이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루이였다. 꽃다발을 안고 들어오던 그녀는 문득 그 자리에서 멈췄다. “어?” 하얀 루이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변했다. 슈렌이 그녀를 돌아보는 것과 거 의 동시였다. “브, 블루 원!”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지크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 ‘어, 어쩌지?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지? 이제 와서 그는 의형제야, 라고 할 수는 없잖아! 아, 그래! 슈렌에게 암살을 당할 뻔 했다고 하는 거야! 그 렇게 하면 넘어갈 수 있겠지!’ 찰나에 가까운 지크의 생각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슈렌이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접근 속도가 너무 빨라 루이는 비명 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의 손과 루이의 눈 사이에서 강한 플래시가 터졌다. 움찔한 루이는 건전 지가 빠진 마네킹처럼 조용해졌다. 슈렌이 손을 떼자 완전히 풀린 루이의 눈이 보였다. 슈렌은 한숨을 쉬며 자 신의 옷을 정돈했다. “흠.” 그의 숨소리는 무거웠다. 크게 드러내진 않았지만 긴장한 것만은 확실했다. 지크가 놀라 물었다. “어떻게 한 거야? 루이는 무사한 거야?” “무사하다. 병실의 문을 열 때부터 방금 전까지의 기억을 지웠을 뿐이다. 아직 완벽히 배운 술법이 아니라서 시간을 정확히 맞추지 못했을 수도 있지 만 지금 나를 본 것만큼은 확실히 잊었을 거다.” “그래? 하아, 다행이네. 넌 정말 별 걸 다 할 줄 아는구나.” 지크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난 가보도록 하지. 저녁에 집에서 보자.” “응, 알았어. 들키지 않게 조심해서 가.” 지크는 팔을 흔들어 형제를 배웅했다. 문을 닫고 나선 슈렌은 전화박스 쪽에서 걸어오는 레니를 볼 수 있었다. 그 녀가 전화를 걸러 간 사이 루이가 온 것이었다. “아, 벌써 가시나요? 점심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그녀가 아쉬운 얼굴로 물었다. “아닙니다. 곤란하시지 않으시다면 저녁때 다시 뵙겠습니다.” “후후, 그러세요. 아, 슈렌씨. 한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말씀하십시오.” 슈렌은 크게 곤란한 질문은 나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그녀의 요구를 받아 들였다. 한편, 그와 레니는 몰랐지만 슈렌 주위엔 알 수 없는 영역이 형성되어 있었 다. 병원의 간호원과 의사, 환자 등 각계각층의 여성들이 병원입구부터 화 제를 몰고 온 슈렌을 구경하기 위해 구름처럼 몰린 것이다. 그들은 슈렌의 몸짓과 표정, 목소리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그가 머리를 쓸 어내릴 때마다 수많은 여성들의 심박수가 상승했다. 레니가 물었다. “직업을 여쭐 수 있을까요? 외모나 복장을 보면 대단한 일을 하시는 것 같 아서 말이죠. 처음 뵈었을 때부터 궁금했어요.” “음…….” 슈렌은 잠시 고민했다. 레니는 그의 대답을 가만히 기다렸다. 주위에 깔린 구름들도 마찬가지였다. 직업에 대해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슈렌에게 가짜 직업은 잘 떠오르지 않았 다. 거짓말을 잘 못하는 그의 성격 탓도 있었다. 그때 어제 지크가 해준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보디가드입니다.” “아, 그러셨군요. 멋진 직업을 가지고 계시네요.” “아닙니다.” 슈렌은 자신의 거짓말을 더욱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 추가로 말했다. “지금은 일을 쉬고 있습니다. 항상 환영해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로 자택 외의 연락처와 주소를 주시면 언제든지 가서 일을 봐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수였다. 순간 한 여성이 둘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정장을 곱게 차려입은 그녀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저기, 저요! 저는 공인회계사고 연봉이 5천만원이예요! 요즘 밤길이 무서 워서 그러니 좀 부탁드립니다! 여기 명함이요!” 그것은 재앙의 시작이었다. “저는 전문모델이에요! 처녀자리에 A형이고 취미는 수영이에요! 저혈압 때 문에 아침 내내 힘드니 좀 부탁드립니다!” “대학교수고 나이는 스물여덟이에요! 요즘 학생들이 저를 보는 눈이 이상 해서 무서워요!” “저는 연예인 지망생이고 이번 여름에 음반이 나와요! 팬이 많아질 것 같 으니 보디가드도 필요하겠죠? 부탁드려요!” “환자들이 가끔 성추행을 해요!” “의사 선생님께서 청진기를 이상한 곳에 대실 때가 있어요!” 순식간에 둘러싸인 슈렌은 별다른 말없이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다. 레니는 이미 벽쪽으로 튕겨나간 상태였다. ‘나의 부주의로군.’ 그는 그냥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병실 밖에서 소동이 벌어지는 사이, 슈렌의 술법에서 풀려난 루이는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어, 내가 왜 병실에 들어와 있지? 방금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데?” 슈렌이 기억봉인의 시간을 잘못 맞춤으로 인해 온 부작용이었다. 조금 어이 없는 광경을 목격한 지크는 속으로 꿍얼댔다. ‘병실 문을 연 뒤가 아니라 엘리베이터 문을 연 뒤가 돼버렸네. 하긴, 아 무리 슈렌이라 해도 이런 것까지 완벽할 순 없겠지.’ 지크는 시치미를 뗐다. “빈혈 때문에 그럴 거야. 기억 안 나? 학교 다닐 때도 자주 그랬잖아.” “그랬던가?” 지크의 말을 그냥 믿어버린 루이는 병원에 온 김에 진찰을 받을까 생각하며 슈렌이 앉아있던 의자에 앉았다. 물론 알고 그런 것은 아니다. “몸은 괜찮아 보이네? 아니, 아주 멀쩡한데? 눈도 그렇고.” 루이는 손가락으로 지크의 오른쪽 눈을 벌려봤다. “아무리 봐도 신기하단 말이야. 아무리 특이체질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회 복이 빠르고 깨끗한 사람은 너 뿐일 거야. 게다가 한번 망가지면 끝인 안구 까지 이렇게 재생되다니 말이야.” “알았으니 해부만은 하지 말아줘. 그런데 웬일이야? 꽃다발까지 사오고.” “내키진 않았지만 시간 남는 사람이 나 뿐이라 어쩔 수 없었어.” 그 말에 지크는 떫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투가 원래 그렇고 악 의가 없다는 걸 알기에 그도 가볍게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너랑 챠오가 빠지는 바람에 전투요원들은 도저히 올 수 없는 상황이고 아 빠는 어제 일에 대한 뒤처리로 바쁘셔. 엄마는 있다가 점심 지나서 오신다 고 했어.” “그래? 챠오는 왜 빠졌어?” 루이는 어깨를 으쓱댔다. “자세히는 몰라. 적안 현상이 발생해서 그렇다고만 알고 있어.” “뭐?” 지크가 깜짝 놀랐다. “정말이야? 어디까지 진행됐는데? 본 사람은 몇 명이야?” 그가 전에 없이 진지하게 물었다.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루이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그건 잘 몰라. 그런데, 진행되다니? 혹시 적안에 대해 알고 있어?” “음…….” 지크는 대답에 상당히 뜸을 들였다. 루이는 상당히 비밀스러운 사항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곤란한 사항을 접한 지크는 항상 지금과 같은 얼 굴로 고민하며 시간을 끄는 경우가 많았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적안 현상은 챠오의 가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일종의 신체적 특징이야. 적안, 말 그대로 눈동자가 붉게 변하는 것을 시작으로 신체 전체 에 어떤 일이 일어나지.” “어떤 일?” “응. 미안하지만 거기까진 말해줄 수 없어. 그 외의 사항에 대해 말해주자 면… 적안의 기원은 약 2000년 전이야. 몸이 약해 도저히 무술을 연마할 수 없었던 린 무차이라는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앞으로 태어날 자신의 아이만 큼은 강한 몸을 주고 싶었데. 그래서 여러 가지 비법을 찾아 중국 전토를 돌아다녔고, 도중에 우연히 만난 황룡의 딸과 결혼했데. 그들 사이에서 태 어난 아들이 바로 삼황오제권의 시조야.” “음.” 루이는 PDA를 꺼내 지크의 말을 메모했다. 지크는 그녀답다 생각하며 얘기 를 계속했다. “그 사람은 특이하게도 붉은색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났데. 하지만 보통의 사람은 생각할 수 없는 강대한 신체적 능력까지 지니게 됐지. 그 때문인지 챠오의 가문 사람 모두는 일반인의 신체능력을 가볍게 뛰어넘고 있어. 무술 을 배우지 않은 사람도 어지간히 운동한 사람 이상의 체력을 가질 정도야. ” “호오.” 루이는 안경을 고쳐 쓴 뒤 계속해서 메모했다. “시조 이후 대를 거듭하면서 적안의 피는 점차 희석됐지만 가끔 적호(赤 虎)의 상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시조만큼이나 강력한 적안의 피가 생긴데.” “그게 바로 챠오?” “그렇지.” 한참 메모하던 루이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 적안이라는 게 나쁜 거야?” “음…….” 지크는 또다시 뜸을 들였다. “일단 그 질문은 사양하겠어.” “흠, 좋아.” 루이는 의외로 깨끗이 포기했다. 허나 지크에게만 포기한 것 뿐, 그녀는 챠 오와 관련된 사람들을 두뇌 속의 검색리스트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것을 알 턱이 없는 지크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네가 모르는 걸 보니 심한 정도는 아닌 것 같군. 하긴, 심했으면 주위 사 람 모두가 난리법석을 떨었겠지. 다른 일은 없어?” “있지.” “뭔데?” “레드 원이 미합중국, 정확히 텍사스의 휴스턴에 나타났어.” “오오, 그래?” 슈렌에게 들어서 알고 있던 지크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휴스턴의 BSP를 공격해서 한 명을 살해하고 수 명에게 중상을 입혔어. 그쪽이 레드 원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 사건이 좀 커진 것 같아. 우리 같으면 아예 덤비지도 않았겠지만…….” “뭐라고? 한 명을 죽였다고?” 지크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루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지만 휴스턴 지부는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다친 대원들 을 걱정하는 눈치야.” “어? 왜?” “이유는 나도 몰라. 그 사람들이 사람 죽는 것에 익숙해서 그럴 수도 있 고, 아니면 죽은 대원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 환영받지 못했었을 수도 있 고. 혹시 챌시 더글러스라는 여자를 알아? 죽은 사람은 그녀야.” “난 모르겠는데, 왜?” “아니, 아빠는 아시더라고. 혹시나 해서 물은 거야.” “그래?” 지크는 한숨과 신음을 섞으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리오 녀석, 설마 정말로 미쳐버린 건 아니겠지?’ 슈렌의 얘기를 듣고 쌓였던 그의 걱정은 루이의 얘기를 통해 몇 배로 증폭 되었다. 그는 리오가 미쳐 날뛰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현재 이 지구상에서 리오를 제대로 막을 사람은 슈렌, 그리고 조금 무리해 서 자신 밖에 없었다. 워싱턴 지부에 레오나르도 칼킨이라는 강자가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리오를 이길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심하게 말하자면 핵폭탄이라도 쓰지 않는 이상 리오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 다. 그의 고민을 모르는 루이는 테이블에 놓아둔 꽃을 들었다. “혹시 꽃병 있어?” “몰라. 우리 엄마한테 물어봐.” “흥, 퉁명스럽긴. 그건 그렇고 고모는 어딜 가셔서 이렇게 안 오시는 거야 ?” 루이와 지크는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동에 대해 아직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순전히 병실 방음이 잘 된 탓이었다. ※※※ 휴스턴에서 비극이 일어난 다음날. 밤인데도 불구하고 샌안토니오의 거리 절반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시가전을 연상케 하는 대대적인 총격이 일어났다. 경찰의 빔 라이트와 함께 사방에서 탄환이 날고 건물 파편이 튀었지만 그 총격에 대한 응답은 없었다. 총성은 계속해서 이동했다. 차량 소리도 맹렬했다. 사냥을 위해 샌안토니오 의 전 경찰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안엔 샌안토니오 지부의 BSP들도 끼어있었다. 동료를 둘이나 잃었지만 그들의 표정에서 안타까움이나 괴로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추적행렬의 맨 앞엔 BSP용으로 개조된 페라리360 Modena가 있었다. 년도로 따지자면 초 구형 머신이었지만 그 성능만큼은 신형 순찰차가 따라가기 힘 들 정도로 여전히 뛰어났다. V8, 3586cc, 400마력 엔진의 힘을 느끼며 달리는 운전자는 차의 외모만큼이 나 튀는 청회색 머리를 휘날리고 있었다. “이거 BG를 쫓는 것보다 더 신나는데? 하긴, 우리나라에 이 정도의 괴물이 나타난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지. 죽은 놈들에겐 미안하지만 말이야! 하 하하!” 그의 옆에 탄 여성 동료는 한숨을 내쉬었다. “쫓아서 뭘 할 건데? 매트로 서울 지부에서 온 공문 못 읽었어? 살고 싶으 면 레드 원은 절대 건들지 말라고 했단 말이야. 처크 켄트 지부장님의 말이 니 확실하다구.” 그러나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흥, 그건 매트로 서울의 BSP들이 얼간이라 그렇겠지! 너도 알겠지만 난 달라! 난 샌안토니오의 푸른 늑대, 숀 드렉스톤이란 말이야!” “아아, 알았어. 묘비에 확실히 적어주지.” 동료는 비아냥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통신기가 울렸다. “어이, 숀! 레드 원의 위치가 포착됐다! 네비게이터에 표시해줄 테니 당장 그쪽으로 가!” “오, 좋았어!” 페라리의 맹렬한 드리프트음이 거리에 울려 퍼졌다. 숀이 목표지점에 도착했을 때 본 것은 부상을 입은 채 뒹굴고 있는 경찰과 동료 BSP들이었다. 그의 초감각은 죽은 사람이 없다고 알려왔지만 상황은 매우 끔찍했다. 정말 죽지만 않았을 뿐이었다. 저 멀리에 드리워진 어둠 저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숀은 라이트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경찰용 빔 라이트들은 토네이도에 밀린 것처럼 이리저 리 쓰러져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기척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인영(人影)이 흐릿하게 보였다. 키가 꽤 커보였다. 적어도 190이상이었다. ‘지크 정도 되려나? 아니, 녀석보다 좀 더 커 보이는데?’ 그는 심호흡으로 긴장을 풀고 계속 다가갔다. “어이, 내 동료를 죽이고 이 샌안토니오에 물질적 피해를 입힌 게 너냐?” “…….” 그림자는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뭐, 힘들면 대답하지 마. 무슨 말이든 질질 늘어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 지. 이 푸른 늑대, 숀 드렉스톤이!”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그의 동료와 경찰들은 숨을 죽이고 숀을 지켜봤다. 그래도 숀이라면 할 수 있다. 텍사스, 아니 서부지구 최강의 BSP라 불리는 남자가 바로 이 숀 드렉스톤이 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하나같이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윽고 그림자가 움직였다. “호오, 푸른 늑대라고? 이거 잘됐군. 난 늑대는 쳐 죽여본 적이 없거든.” “뭐?” 움찔한 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림자가 돌아섰다. 그와 함께 한 쌍의 붉은 섬광이 숀이 있는 쪽으로 방향 을 잡았다. 좌우로 길게 찢어진 그 빛,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그것은 단 한 개의 단어만을 내제하고 있었다. 죽음. 숀의 몸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숀은 물러나지 않았다. “눈빛만으로 날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이런 사기 마술쇼에 넘어 갈 내가 아니다! 각오해라, 레드 원!” 고함과 동시에 숀의 몸 전체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그의 청재킷과 바지가 뜯어지며 백색의 속살이 올라왔다. 손과 발은 길어졌 고 얼굴골격도 완전히 틀려졌다. 청회색의 털이 머리부터 목을 타고 전신으로 흘러내려왔다. 아니, 전신에서 청회색의 털이 솟아올라왔다. 손톱과 발톱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고 단단해졌다. 둔부 사이 에서 길고 튼실한 꼬리가 벌컥 뿜어졌다. “우오오오!” 이윽고, 긴 울음소리가 마천루 사이에서 밤하늘을 수놓았다. 숀이 자신만의 독특한 전투형태인 웨어울프(WereWolf)로 변하자 그의 동료 들과 경찰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늑대의 모습으로 변한 숀이 얼마나 강한지 그들은 다른 지역의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붉은 안광은 그것을 비웃듯 조금 가늘어졌다. “재미있는 재주로군.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다. 그럼 선물을 주지.” “뭐?” 순간 안광이 눈에 부실 정도로 강해졌다. 레드 원이 있는 곳으로부터 바람 과 같은 이상한 기운이 숀과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덮쳤다. 사람들이 일시에 주저앉았다. 거의 순간에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전신이 땀 에 젖고 심박수가 올라갔다. 근육은 뇌의 명령을 무시하고 경련을 일으켰 다. 숀은 가만히 서서 정면을 주시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안광이 흔들렸다. 발자국 소리가 났다. 다가오고 있었다. 이윽고 빛의 영역 안으로 붉은 장발의 남자가 들어왔다. 적동색 피부에 정말 준수한 외모였지만 살의가 어린 미소만큼은 피하고 싶 을 정도로 섬뜩했다. 그가 바로 코앞에 다가왔지만 푸른 늑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레드 원은 손으로 숀의 머리를 쓰다듬고 턱 밑을 매만졌다. 마치 애완동물 을 다루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말했다. “넌 개다.” “…….” “그 증거로 짖어봐라. 멍, 하고. 그러면 너와 여기 있는 사람들의 목숨은 거둬들이지 않겠다.” 숀의 눈에 핏발이 맺혔다. 죽고 싶을 정도로 치욕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거 역한다면 그의 말처럼 될지도 모른다. “멍.” 숀의 동료들이 눈물을 터트렸다. 이건 숀만의 치욕이 아니라 샌안토니오 BS P 전체의 치욕이었다. 남자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개는 이런 걸 좋아하지?” 그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휠 커버를 들었다. 그리고는 숀의 동료들 앞으로 그것을 던졌다. “물어 와라. 네 발로 기어서.” “…….” 숀은 휠커버가 있는 곳을 향해 기어갔다. 네 발로. “후훗, 후후후후, 하하하하하! 꼬리와 엉덩이를 흔들어라! 돌아오면 상을 주지! 과자가 좋은가, 아니면 개 껌이 좋은가? 하하하하!” 남자의 웃음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굳게 다물어진 숀의 입에선 피가 배어나 오고 있었다. 다음날. 샌안토니오 BSP의 분위기는 전에 없이 침울했다. 숀의 얼굴은 아예 잿빛에 가까웠다. 놀랍게도 동료 두 명이 어제 나타난 미치광이에게 살해당한 사실 때문에 그 런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서부지구 최고 에이스인 숀이 상상도 못할 치욕을 당한 탓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죽은 동료들은 그리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BSP라는 직 업 자체가 가장 죽기 쉬운 직업이긴 하지만 그것이 이유는 아니었다. 그들이 죽어서 오히려 시원하다는 이상한 생각만이 그들의 머릿속에 있었 다. 오전 브리핑이 끝난 후에도 샌안토니오의 대원들은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어제의 일이 가져다준 여파였다.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은 숀이었다. “이상하지 않아?” “뭐가?” 옆에 앉은 여성 대원이 물었다. 다른 동료들도 그녀와 같은 얼굴로 숀을 주 시했다. “레드 원 말이야. 녀석은 어제까지 해서 세 명의 BSP를 죽였어. 그런데 그 외의 사람은 중상을 입혔으면 입혔지 죽이진 않았지. 그 살인귀 같은 녀석 이 말이야.” 동료들은 숀의 의견에 동감을 표시했다. “음, 들어보니 좀 이상하네?” “그렇군. 눈으로 보기엔 몇 만 명이라도 거뜬히 죽일 듯한 인상이었는데? ” “그것뿐만이 아니야.” 숀이 두 번째 의문을 제기했다. “죽은 BSP들 말이야. 그들이 죽는 모습을 본 사람은 있어도 시체를 본 사 람은 단 한 명도 없어. BSP본부에선 허겁지겁 사망처리를 해버렸지. 목격자 의 말로는 레드 원이 칼로 머리를 날리고 사지를 자른 뒤 몸뚱이를 박살냈 다는데, 우리가 도착했을 땐 그 흔적조차 없었어.” “그렇군.” 레슬러처럼 육중한 몸매의 흑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숀의 말대로 살점 하나라도 떨어져 있거나 혈흔이라도 묻어있어야 했지. 하지만 녀석들이 죽은 장소는 염산으로 닦지 얼마 안 된 변기처럼 깨끗했 어.” “지부장도 그에 대한 얘기는 피하던데?” “음…….” 이어서 숀이 마지막 의문을 던졌다. “죽은 세 명 말이야. 공통점이 있어.” “공통점?” “셋 모두 비슷한 시기에 BSP에 들어왔고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지. 사람 을 피하고 밤에만 활동한다는 것, 소각 처리되어야 할 BG의 시체를 몰래 훔 쳐다가 구워먹는다는 것, 그리고 사이킥 능력을 발동할 때 음산한 느낌이 든다는 것. 마지막으로 동부지구의 에이스이자 매트로 서울의 지크 스나이 퍼와 맞먹는 강자인 레오나르도 칼킨과 잘 아는 사이라는 것.” “…….” 숀의 동료들은 침묵한 채로 서로를 바라봤다. 나름대로 생각하던 숀은 의자에 걸쳐둔 청재킷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기다려.” 옆에 앉아있던 여성 대원이 그를 붙잡았다. 숀의 파트너이자 어제 숀의 페 라리에 함께 타고 있던 그녀였다. “또 왜?” 숀은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숀은 BSP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동갑내 기인 그녀에게 하는 일마다 약 70%의 확률로 제지를 당해왔다. 그것은 그만 큼 숀의 성격이 급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녀가 말했다. “조사를 말리려는 건 아니지만 주의하는 게 좋을 거야. 느낌상 이번 일은 우리의 영역을 초월한 일인 것 같아. 레드 원의 경우만 봐도 그렇잖아.” “…….” “매트로 서울에서 보내준 자료에 의하면 레드 원은 그 강력한 지크 스나이 퍼를 어린애 다루듯 한 건 물론이고 BX-F조차 몇 분 만에 고철로 만들 정도 로 강해. 게다가 살기라는 개념 하나만으로 우리들을 전투불능으로 만들었 어. 이 정도라면 이 세상의 힘이 아니라고 밖에 볼 수 없어.” “그래서?” 숀은 퉁명스레 물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너무 깊게 개입하면 강아지 흉내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어. 조심해. 그 뿐이야.” “…….” 숀은 말없이 브리핑 룸을 나갔다. 페라리를 끌고 도시로 나온 숀은 천천히 거리를 달렸다. Modena의 늘씬한 바디 위로 도심의 더운 바람이 시원하게 미끄러졌다. 그러 나 숀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어처구니없는 상대에게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고 그것도 모자라 강한 의문 까지 생겼다. 치욕은 잊으면 된다지만 의문은 그의 성격상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어디에 가서 뭘 알아봐야 하나?” 그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해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고민 끝에 그가 선택한 곳은 슬럼가였다. 소설 속에서 빠져 나온 듯한 복장 의 남자가 사람들의 큰 의심을 받지 않고 숨을만한 곳은 그곳 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숀은 그곳에서 의외의 성과를 얻는다. 그 남자, 레드 원의 목격자를 꽤 많 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가장 먼저 만난 목격자는 슬럼가 입구에서 채소가게를 하는 노인이었 다. 그와 안면이 있는 숀은 부담 없이 그에 대한 것을 물었다. 대답은 바로 나왔다. “붉은 장발에 회색 망토를 뒤집어 쓴 남자? 키는 한 192에서 193정도 되고 ?” 노인은 잘 익은 사과 하나를 숀에게 건네주었다. 반가움의 표시였다. 재킷 으로 사과를 닦아 광을 낸 숀은 일단 한 입 베어 물고 일을 계속했다. “잘 아시네요. 혹시 본 적 있어요?” “물론 있지. 어제 아침, 그러니까 가게를 열 무렵에 이곳에 들어왔었어. 복장도 희한하고 키도 커서 눈에 확 들어오더군. 그런데 무슨 일로 그를 찾 나?” “그냥, 물어볼 게 있어서요.” “그래? 흠, 죄를 지을만한 청년은 아닌 것 같던데…….” “뭐요?” 숀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노인을 쳐다봤다. 노인은 자신을 의심하느냐고 묻듯이 먼지떨이의 끝으로 숀의 가슴과 복부를 쿡쿡 찔렀다. “젠장, 속고만 살았나? 정말이라니까. 조금 지쳐 보이긴 했지만 뭘 훔치거 나 때려 부술 것 같은 인상은 아니었어. 조용했다구.” “…….” 숀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다시 한번 레드 원의 인상착의를 말했다. 붉은 장발에 준수한 얼굴, 적동색 피부, 회색의 망토 등등. 동일인임을 확인하지 않고는 노인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가 어제 본 레드 원은 조용함이나 평화로움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괴물이었다. 그것 은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틀림없다는 말로 못을 박았다. 숀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보기 위해 근처의 길거리 농구장으로 갔다. 그 곳은 오후엔 농구를 즐기기 위한 청소년과 젊은이들로 꽉 차지만 저녁엔 노 숙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방인에 대한 정보를 얻기에 더없이 좋 은 곳이기도 했다. 레드 원을 목격한 사람은 그곳에도 있었다. “붉은 장발의 남자요? 아침까지 있었어요.” 자칭 미래의 NBA 선수라며 떠들고 다니는 흑인 소년이 바로 두 번째 목격자 였다. 매일 새벽 농구를 하기 위해 이곳에 온다는 그 소년은 아침에 일어난 일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다른 노숙자들은 제가 들어오면 시끄러워서라도 떠나는데, 그 사람은 제 친구들이 온 뒤에도 계속 저기에서 가만히 있었어요.” 소년이 가리킨 곳은 농구코트 옆의 담벼락이었다. “그냥 가만히 있었어?” “예. 귀머거리라서 가만히 있는 건가 생각했는데 공 좀 주워달라고 하니까 별 말 없이 던져주더라고요. 같이 농구하자고 했더니 그냥 씩 웃고 말던데 요?” “칼을 휘두른 게 아니라?” “네?” 소년과 소년의 친구들은 이상한 사람 보듯이 숀을 쳐다봤다. 움찔한 숀은 곧장 표정을 바꿨다. “아, 미안해. 그럼 그 남자는 언제 떠났지?” “오전 여덟시 무렵인가? 그럴 거예요. 우리가 아침을 먹고 왔을 땐 없었어 요.” “어디로 갔는지 본 사람은 없고?” “글쎄요? 쉬러 갔을 지도 모르겠네요. 꽤 피곤해보였거든요. 여관가로 한 번 가보세요” “여관가라… 그래, 고맙다. 운동 열심히 해.” “네, BSP아저씨.” 소년들과 헤어진 숀은 여관가로 향했다. 사람들의 말을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숀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어제 그가 본 괴물과 슬럼가의 붉은 장발은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숀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허름한 여관이었다. 여관 주인인 흑인노파는 그가 이곳에 있다고 말한 뒤 숀을 끌고 밖으로 나 왔다. 그녀는 5층 오른쪽 구석의 방을 가리켰다. 창문엔 커튼이 쳐져 있었는데, 커튼이 납작하게 눌려있는 것으로 봐서 가구나 그 외의 큰 물체로 또 한 번 창문을 덮은 듯 했다. 그런데 숀은 왜 노파가 자신을 데리고 나왔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아니, 왜 이러세요? 그냥 방 번호만 가르쳐 주시면 안 되나요?” 그러자 노파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난 그 청년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소이다. 어제 새벽에 직업소개소에서 사람이 왔었는데, 그 바보 같은 남자가 그 청년의 방에 실수로 들어갔다가 5층부터 똥오줌을 싸면서 내려왔수. 도대체 뭘 본건지 모르겠지만 얼굴이 하얗더라구. 덕분에 4년 만에 복도랑 계단을 청소했지.” “그렇군요.” 숀은 그가 이곳에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어제 그가 맛본 레드 원의 살기는 단련되지 않은 보통사람이 받는다면 정신 이상이 될 수 있을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 정도의 기운을 거의 실체화해서 뿜어낼 수 있는 사람은 숀이 알기로 지크 스나이퍼와 레오나르 도 칼킨, 그리고 자신 밖에 없었다. 레오나르도 칼킨은 워싱턴 DC에, 지크 스나이퍼는 매트로 서울에, 그리고 자신은 여기 있으니 남은 사람은 레드 원 뿐이었다. 여관으로 들어가려던 숀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필요 없겠지. 당할 거라면 뽑을 틈도 없이 머리가 날아갈 테니까. 그리고 괜히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어.’ 그는 가슴과 허리, 팔, 등판에 장비한 권총과 샷건을 풀어 노파에게 맡겼 다. 노파가 낑낑대며 무기들을 옮기는 사이 숀은 레드 원이 있는 방으로 향했 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본부나 집으로 돌아가고픈 생각이 강해졌다. 재수 없으 면, 아니 높은 확률로 이 여관이 자신의 무덤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숀은 계속 올라갔다. 이윽고, 방문 앞에 선 숀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가볍게 노크했다. “…….” 안에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문을 재차 두드렸지만 역시나 조용했다. 숀은 죽으면 죽는 거다 생각하며 방문의 둥그스름한 손잡이를 돌렸다. 문은 의외로 잠겨있지 않았다. 방의 안쪽은 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안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도 않을 정도 였다. ‘까다로운 녀석이군. 있긴 있는 거야?’ 그는 눈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그의 검은색 눈썹이 청회색으로 바 뀌었다. 눈가에도 같은 색의 털이 무수히 돋아났다. 늑대의 시각만을 빌려오는 그의 능력이었다. 늑대의 피가 옅은 저급 늑대인간의 경우엔 어느 한 능력만을 빌려오는 것이 불가능하다. 지금처럼 어두운 곳을 보기 위해선 몸 전체를 바꿔야 하는 불 편함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급 늑대인간인 숀은 그것이 가능했다. 방이 조금 환하게 보였다. 침대, 의자엔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대신 방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 한 남 자가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그는 망토로 보이는 회색의 천으로 머리를 비롯한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두 무릎은 바짝 모아 굽히고 양팔로 감싸 안았다. 얼굴은 무릎 사이에 묻고 있는 듯 했다. 그 옆으로 빈 통조림 몇 개와 음료수 병이 굴러다녔다. 어제 본 그 살벌한 남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처량한 모습이었다. “어, 어이.” 숀은 너무 어이가 없었는지 자신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 상황은 그 순간 뒤바뀌었다. 머리 앞에 열린 망토의 틈새 사이에서 붉은 섬광이 번뜩였다. 늑대의 시각 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한 빛이었다. 전신의 털이 살기에 반응해 곤두섰다. 숀은 그 느낌을 목 뒤로 삼켰다. ‘제대로 찾아오긴 했군.’ 잠시 후 적광(赤光)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호오, 누군가 했더니 어제 만난 개로군.” 숀은 씁쓸히 웃었다. “어제처럼 개 흉내를 내라고 하진 말아줘. 오늘은 보는 사람이 많을 것 같 으니까.” “관중이 있어야 즐기는 재미도 있는 법이지.” “오, 그럼 또 시킬 건가?” 숀은 양 어깨를 으쓱 올렸다. “복수를 하러 왔나?” 안광이 잔영을 남기며 위로 올라갔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두 개의 살벌한 빛덩이가 천천히 방 중앙으로 이동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 지만 빛이 있는 범위로는 절대 오지 않았다. “늑대인간은 자존심이 강해서 자신에게 치욕을 준 존재를 지옥까지 쫓아온 다더군.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그 습성 때문에 내가 있는 곳 으로 온 건가?” “후후.” 숀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 선조들을 타락시키고 동족 전체를 멸망으로 이끈 것이 바로 그 알량한 자존심이야. 우리 가문은 머리가 좋아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지.”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어제 자네가 나에게 한 행동은 치욕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생 각이 들더군.” “그래? 나만 정신이 나간 게 아니었군.” 어둠 속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숀이 말했다. “난 어렸을 때부터 눈치가 좋기로 유명했어. 그 증거로 사기를 당한 적이 한번도 없지. 난 목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거든.” “그래서?” “자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자기 자신을 망가트리고 있는 것 같더군. 일부러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마치 비난을 받 고 싶은 사람처럼 말이야.” “…….” 안광이 가늘어졌다. 살기도 한층 가벼워졌다. 힘을 얻은 숀은 계속 말했다. “아무튼 자네가 살해한 BSP대원들에 대해 조사를 해봤네. 하나같이 음산하 고 신기한 놈들뿐이었지. 난 자네가 그들을 죽인 이유가 궁금해서 찾아왔 어.” “그런가? 그렇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건 없어.” “왜지?” 안광이 다시 커졌다. “생명이 죽는 건 당연한 이치야. 이 시간에도 늙어 죽든 사고를 당해 죽든 꾸준히 죽어 나가지.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하면 돼. 너에게 있어서 가장 중 요한 건 네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 뿐일 텐데?”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자네도 알 텐데?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살아있다 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아. 공기에 대한 감사도, 물에 대한 찬양도 하지 않지. 그것이 자신을 살아있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 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떻게 재물을 축적할지, 축적 한 재물을 어떻게 사용할지만 중요하게 여길 뿐이야. 오직 숨이 막힐 때, 목이 마를 때, 그리고 죽기 직전일 때만 갈망을 하지. 그게 사람이고 그게 생물이야.” “…….” 대화는 한참동안 중단되었다. 둘이 다시 말을 나누기 시작한 것은 숀의 시 계에서 정각을 알리는 신호음이 난 뒤였다. “넌 속죄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남자의 물음에 숀은 고개를 갸웃댔다. “속죄? 말 그대로 죄를 씻는 것 아닌가?” “그렇지. 물질적으로나 그 밖의 방법으로 죄를 씻는 것이 바로 속죄다. 그 러나 그런 것만으로 한번 지은 죄가 사라질 수 있을까? 뭘 바치던, 무슨 일 을 하던 부서진 물건이 다시 붙진 않는다. 죽은 자 역시 살아 돌아오진 않 아. 속죄라는 건 인간이 자기합리화를 위해 만든 도피도구에 불과하다.” “…….” “내가 죽여야 할 존재는 앞으로 셋이다.” “세 명? 모두 BSP인가?” “모른다. 지금까지 죽인 세 명 모두가 BSP대원이었으니 그럴 확률이 높지. 그것으로 나의 작은 속죄는 끝난다.” 숀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어떻게 속죄가 된단 말인 가? 그러나 상대방의 목소리는 진지하고 확고했다. 안광의 밝기가 차츰 줄어들었다. 슬슬 지쳐가는 것처럼 보였다. “쉬고 싶군. 동료들과 함께 나를 치려면 지금이 기회일 거다. 그러니 가봐 라.” “아, 내가 자네의 휴식을 방해했군.” 희미해진 불빛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숀은 가볍게 웃었다. “일이 끝나면 이곳으로 가봐. 집 주인이 좀 후덕해서 몇 달이든 편히 쉴 수 있을 거야. 단, 집주인은 자극하지 마. 나도 두 손 들어버릴 만큼 거친 녀석이니까.” 그는 명함 한 장을 어둠 속으로 던졌다. 그리고 문을 닫기 전에 작별인사를 겸하여 말했다. “오늘은 자네의 입장을 최대한 생각해서 말했지만 밖에서 만날 땐 아닐 거 야. 자네가 죽일 사람이 앞으로 세 명인 걸 알았으니 나와 내 동료들은 그 걸 막기 위해 전력을 다 할 걸세. 아무리 재수 없는 놈들이라 해도 동료는 동료거든. 그럼 건투를 비네.” 문이 닫히고 방은 완전히 어둠으로 변했다. 방 중앙에서 하얀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둥글게 뭉쳐 방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녔다. 아무리 봐도 자연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그 혼불과도 같은 물체가 정지한 곳은 레드 원, 리오의 눈앞이었다. 혼불에서 뿜어지는 희미한 빛이 리오의 얼굴을 비추었다. 숀이 예상했던 대 로 그는 상당히 지쳐있었다. 눈은 반쯤 풀렸고 호흡도 일정치 않았다. 리오는 자신의 무릎 위에 내려앉은 혼불을 보고 슬쩍 웃었다. “또 왔나? 후훗, 그렇지. 넌 그런 녀석이야. 내가 조금씩 미쳐가는 걸 눈 앞에서 즐겨야 성이 차겠지.” 혼불이 두어 번 반짝였다. “아니라고? 농담하지 마. 나한테 달라붙은 건 너야. 네가 아니었으면 난 이렇게 되지도 않았어. 하지만 널 물리치진 않아. 어차피 내가 선택한 길이 니까.” 리오는 옆에 놔둔 망토를 펼쳐 머리와 몸을 감쌌다. 망토 밖으로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나머지 셋 모두 깨끗이 죽여주지.” 그는 잠들 듯 바닥에 쓰러졌다. 혼불도 소리 없이 사라졌다. 숀이 레드 원과 접촉한지 이틀이 지났다. 그 사이 다른 도시의 BSP 두 명이 레드 원에게 살해됐다. 소식을 접한 숀은 동료들의 걱정과 달리 그다지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사실 레드 원 앞에서 그의 행동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고 말은 했지만 막을 수 있는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힘으로 막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 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아무리 숀이 서부지구 최강의 BSP라 해도 거의 불특 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대의 목표를 미리 예측해 보호할 수는 없었다. 살해과정은 똑같았다. 레드 원은 희생자의 머리와 사지를 자르고 몸통을 부 쉈다. 덤벼들었던 BSP나 경찰은 당연히 중경상을 입고 병원신세를 졌다. 뿐 만 아니라 희생자의 시체가 깔끔하게 사라졌다는 것마저도 같았다. 덕분에 사건에 대한 숀의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오전 브리핑이 끝난 뒤 숀은 커피를 뽑아들고 전망대로 올라갔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발동하는 그의 버릇이었다.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샌안토니오의 전경은 매우 깔끔하고 단정했지만 구 경하기 가장 좋은 자리에 앉은 숀의 시선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그는 사라져가는 카푸치노의 거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허나 그의 머 릿속에선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이번에 죽은 두 명 모두 레오나르도 칼킨을 아는 음침한 녀석들이었어. 남은 건 한 명이야. 하지만 어디의 누구지? 칼킨을 알고 있는 음침한 BSP는 한 둘이 아니라구. 빌어먹을, 레드 원에게 조금만 더 물어볼 걸 잘못했나? ’ 그때 너무 폼을 잡으며 레드 원과 헤어진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었다. “아직도 그 망령의 검사에 대한 고민이야?” 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숀과 항상 아등바등하며 지내는 동갑내기 동료, 체이시였다. 숀은 짜증을 내듯 거의 다 식은 카푸치노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망령의 검사는 또 뭐야?” “몰랐어? 레드 원의 또 다른 별명이야. 휴스턴에 있는 내 친구가 만든 별 명인데, 지금은 이 나라 전역에 널리 퍼져있어.” “그래? 그런데 왜 하필 망령의 검사야? 다른 멋진 별명도 많을 텐데?” “그가 나타나기 전에 반드시 하얀 색의 혼불이 도시를 떠돌아다닌다나봐. ” “혼불?” 숀의 눈과 귀가 번쩍 뜨였다. 그의 앞자리에 앉은 체이시는 씩 웃었다. “본 사람은 별로 없을 거야. 내 친구는 바티칸의 엑소시스트 출신이라서 그런 건 잘 보거든. 아무튼 그래서 망령의 검사가 된 거래.” “그럼 그 혼불에 대해 밝혀진 건 있어?” 숀이 갑자기 진지하게 나오자 체이시는 피곤한 일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한 숨을 쉬었다. “친구가 느낀 걸 그대로 얘기해주자면… 뭔가를 애타게 찾고 있다는 느낌 이 들었데. 하지만 그 이상은 알 수 없어. 영혼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굉 장히 어려운 일이거든.” “왜?”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그 영혼이 있는 영역에 가까워지도록 조절해야만 가능해. 간단히 말해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되어야 하지. 그건 훈련받지 않은 일반인이 마라톤을 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야. 그리 고 그 영혼의 경우엔 접근하는 게 불가능했다고 친구가 말했어.” “어째서?” 계속되는 숀의 질문에 체이시의 인내심은 점점 한계에 달했다. 그녀는 이번 이 마지막이겠거니 생각하며 대답해 주었다. “지옥의 영역에 있는 존재래. 그 영혼과 대화를 하려면 자신의 영혼을 지 옥 근처까지 옮겨가야 한다는 말이 되는 거지. 그 정도의 영역에 인간이 접 근하는 건 불가능하데. 그랬다가는 지옥문을 지키는 개, 켈베로스에게 잡혀 그대로 지옥에 빨려 들어간다더라고.” “음…….” 동료가 얘기하는 사이 카푸치노를 다 마신 숀은 잠시 후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이런, 더 복잡해졌잖아! 도대체 어디서부터 조사를 해야 이 빌어먹을 궁 금증을 날려버릴 수 있는 거지? 응?” 체이시는 숀의 그런 모습을 보며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고민되면 일단 탐문부터 해보는 게 어때? 수사의 기본은 목격자들 에게 진술을 들어보는 거잖아.” “뭐라고!” 숀은 버럭 소리치며 체이시를 바라봤다. 표정은 진지하고 패기가 넘쳤다. 체이시는 다음에 뭐가 나올지 알고 있다는 듯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귀도 마음속으로 반쯤 막았다. 그가 또 한번 소리쳤다. “역시 넌 대단해! 머리 좋아! 탐문수사라니, 멋지군! 남자에게 어울리는 단어야!” 숀은 그대로 전망대를 뛰쳐나갔다. 체이시는 덜컹거리는 전망대 출입구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지크 스나이퍼를 능가하는 남자 콤플렉스 환자… 역시나.” 아무튼 숀은 가장 먼저 휴스턴 BSP에 전화를 걸었다. 당시 사건의 목격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운이 좋게도 사건현장을 가장 먼저 목격한 사람은 체이시의 친구였다. 망령 의 기사라는 별명을 퍼트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숀이 당시 상황을 묻자 한참동안 머뭇거렸다. 당시 느낀 공포감이 플래시백처럼 되살아난 탓이었다. 그녀가 입을 연 것은 약 10여 분 뒤였다. “당시 레드 원은 그의 사지를 자른 뒤 이렇게 소리쳤어요. 너희들이 아무 리 강해져봤자 한 세상을 구하진 못한다, 나조차 구하지 못했는데 너희들이 라고 다를 바 있겠느냐, 라고 말이죠. 그리고는 그의 머리를 자르고…….” “아, 됐습니다.” 그녀의 감정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낀 숀은 거기서 상대의 말을 끊었 다. 꽤 적절한 조치였다. “그 레드 원이 다른 얘기는 안했습니까?” “예, 그녀가 있는 곳에서 기다리라고 말했어요.” “그렇습니까? 예,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숀은 곧 병원으로 달려가 입원 중인 자신의 동료를 찾아갔다. 샌안토니오 BSP중에서 가장 먼저 레드 원에게 중상을 입은 남자였다. 그 역시 전의 경우와 비슷한 진술을 했다. 물론 차이점도 있었다. “그가 죽은 녀석들을 상대하기 직전에 한 말이 있어. 난 너희들에게 닥쳐 올 미래를 조금 연장시켜주려고 온 것뿐이다, 라고 했었나? 비슷할 거야.” 그리고 그날 오후, 노을이 질 무렵. 숀은 본부에서 오늘 들은 진술과 레드 원에게 들은 말을 종합해봤다. 그는 다섯 잔째의 커피를 머그 컵에 따르며 종이에 쓴 항목을 읽어 내려갔 다. “레드 원은 소위 속죄라는 것을 하기 위해 BSP들을… 아냐, 이것보다는… ….” 그는 펜으로 BSP라는 문자를 검게 칠하고는 다른 글을 써 넣었다. “속죄를 하기 위해 여섯 명의 목표를 설정했다. 그 중에 이미 다섯 명은 레드 원에게 살해됐다. 그 다섯 명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고 그들 모두 레 오나르도 칼킨을 알고 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재수 없는 놈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쓴 문구가 웃겼는지 킥킥대며 커피를 마셨다. 앞자리에 앉은 체이시와 다른 동료들은 한숨을 내쉬거나 고개를 흔들었다. “레드 원은 목표들에 대한 어떤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사실은 밝혀진 바가 없지만 레드 원의 말을 종합해보면 그들은 강해지기 위해 뭔가를 한 것이 분명하다. 음, 좋아.” 그는 펜을 공 던지듯 필통에 던져 넣었다. “결론은 레오나르도 칼킨이야. 그가 뭔가 열쇠를 쥐고 있음이 분명해. 워 싱턴 DC에 전화를 해봐야겠어.” “간도 크시네.” 체이시가 그를 막았다. 70%의 확률에 다시 걸린 숀은 답답하다는 얼굴로 양 팔을 휙 벌렸다. “아니, 또 뭐야? 무슨 문젠데?” “레오나르도 칼킨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어?” “당연히 알지. 전에 죽은 녀석들만큼이나 재수 없는 놈이잖아. 싸울 때 온 갖 멋은 다 부리는 것도 모자라 남을 무지하게 깔보지.” “게다가 당신보다 강해.” “흥, 강해봤자 전화로 하는데 어쩌겠어? 지가 날 찾아와서 칼이라도 들이 대겠어? 아무튼 날 말리지 마. 절대로 말리지 마.” “아아, 마음대로 해.” 숀은 체이시가 백기를 드는 것과 동시에 전화기를 들었다. “주관제실인가? 나야, 치프. 워싱턴 DC의 레오나르도 칼킨에게 연결해줘. 제정신이냐고? 여기서 구구단이라도 외워볼까? 알았어, 책임은 내가 질 테 니 어서 연결이나 해줘.” 그러나 잠시 후. “뭐라고? 녀석이 휴가를 떠났다고? 어디로? 대한민국? 그것도 매트로 서울 ? 이런 젠장!” 숀은 전화를 던지듯 끊었다. 체이시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은 입을 막고 웃음을 참았다. 허나 숀은 한없 이 진지했다. “웃지 마! 마지막 희생자는 매트로 서울에 있어!” 동료들의 웃음이 멈췄다. 숀은 그들에게 사건개요가 적힌 종이를 내던지며 외쳤다. “칼킨 녀석과 관계있는 일이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녀석이 그곳으로 간 거 야! 아직 모르겠어? 칼킨 녀석이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이야!” 체이시가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만해, 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잖아? 그리고 이번 사건은 이미 우리 의 손을 떠났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도대체 왜 숀이 이 사건에 관여하 는 거야? 당신이 사립탐정이야? 이유가 없잖아?” “…….” 숀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삼시 숨을 고르며 감정을 가라앉힌 숀은 옆자리 동료의 담배를 빌려 입에 물었다. “모두 알고 있지? 내가 상대의 목소리만 들어도 감정을 읽을 수 있다는 것 말이야.” 동료들은 말이 없었다. 긍정의 뜻이었다. 숀은 독한 담배연기를 강하게 들이마신 뒤 천천히 내뱉었다. 하이필터 담배 여서 몸에 해롭진 않았지만 매캐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가 말했다. “레드 원은 강해. 정말 괴물처럼 강해. 게다가 성격도 더러워서 나에게 개 같은 치욕을 안겨주기도 했지. 그런데 말이야… 그 녀석, 속으로는 울고 있 었어. 죄책감을 견디다 못해 하는 짓이라고 목소리에 박혀 있었다구. 내 양 심상 그런 건 못 넘어가.” “…….” “그리고 BSP가 관련된 일이야. 우리가 알지 말아야 할 사실일지도 모르지 만 그렇다고 남의 일인 양 두고 볼 수도 없어. 이건 싸움이야. 너희들도 알 지? 늑대인간은 싸움에 대해선 자존심이 강해. 난 이유를 알 때까지 물고 늘어질 거야.” 모두 잠잠한 가운데 체이시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매트로 서울 행 비행기, 예약해줄까?” “아니, 가진 않아. 이곳을 내버리고 갈 만큼 어리석진 않다구.” “그럼?” “대타를 내보내야지.” 숀은 씩 웃으며 전화를 들었다. ※※※ 오전 8시 반 무렵. 퇴원 뒤 첫 출근한 지크는 아침의 상쾌함 대신 짜증이 실린 얼굴로 주관제 실에 들어섰다. 그가 들어오자 오퍼레이터들은 꼭 있어야 할 사람 외엔 황급히 자리를 떴 다. 그런 표정의 지크는 매우 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 다. 운이 없게도 지크에게 온 전화를 받고 만 오퍼레이터는 겁에 질린 얼굴로 지크를 불렀다. “저, 저어… 여깁니다, 지크 스나이퍼 소위.” “흠.” 지크는 더욱 인상을 구기고 그쪽으로 향했다. 전화기를 받아든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어이, 누가 전화했다고?” “예? 그, 그게… 샌안토니오 지부의 숀 드렉스톤 중위입니다.” “숀 드렉스톤? 젠장, 오늘 밥맛은 다 버렸군.” 그는 투덜대며 전화기를 귀에 댔다. “나야.” “여, 지크. 잘 있었나? 남자는 좀 됐고?” “흥, 난 원래 남자야. 근데 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국제전화로 영업방해 를 할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접으시지?” “후후, 진지한 문제니까 잘 들어. 요즘 레드 원이 우리나라에서 설치고 있 는 거, 잘 알지?” 레드 원, 즉 리오의 얘기가 그에게서 나오자 지크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음, 알지.” “잘 하면 그가 매트로 서울에 나타날 것 같아.” “뭐? 정말?” “응.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말이지…….” 숀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숀의 말이 끝에 다다를수록 지크의 표정은 점차 진지해져갔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칼킨이란 놈까지 이쪽에 온단 말이야?” “그 녀석이 매트로 서울에 간다는 건 확실해. 하지만 내 예상대로 레드 원 과의 문제 때문에 가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아. 레드 원이 그쪽에 갈지, 아 니면 다른 곳에 나타날지는 모르지. 아무튼 레드 원이 나타나면 나대신 잘 처리해줘.” “알았어, 맡겨둬.” “오, 좋은 반응이군. 아, 그런데 너 말이야. 지난번에 레드 원에게 엉망으 로 깨졌다면서?” “이런, 끊어!” 화를 내며 전화를 끊은 지크는 히스테릭하게 머리를 긁으며 자리를 떴다. “아우, 뭐가 이렇게 복잡해! 빌어먹을!” 휴지통 하나가 그의 발에 맞고 공중으로 떴다. 쓰레기를 비운 뒤여서 아무 것도 떨어지진 않았지만 주관제실 내의 공포분위기는 더욱 가중되었다. 그러나 지크는 한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최악의 사태, 즉 리오가 이성을 잃고 난동을 부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해도 자신과 슈렌이 있는 곳에서 하는 게 그나마 나았다. 그 외의 지역에 사건이 터지면 리오가 만들 희생자는 막대할 것이다. 막을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리오가 과연 난동을 부릴까?’ 지크는 그런 의문에 봉착했다. 숀에게 들은 얘기를 따져볼 때 왠지 최악의 사태까지 가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도를 걷던 지크는 문득 창밖에 시선을 돌렸다. 현재 대한민국은 여름이다. 30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에 높은 습도까지 겹 쳐 맨몸으로 밖을 다니기가 괴롭다. 그런데 창밖엔 계절과 전혀 상관이 없 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라, 눈이 내리네?” 그의 말대로 매트로 서울 전역엔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기온도 급강하하여 반팔을 입고 나왔던 시민들은 서둘러 지하철과 건물 안으로 대피하듯 달렸 다. “여름에 눈 내리는 거 처음 봐?” 복도 저쪽에서 리진이 다가왔다. 양손에 커피가 들려있는 것을 봐서 지크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온 듯 했다. “이 동네는 여름에 눈이 내리나봐?” 지크는 리진이 주는 커피를 받으며 물었다. 리진은 창틀에 앉아 지상을 내 려다봤다. “내가 태어날 무렵에 생긴 이상기후야. 서머 화이트(Summer White)라고도 하고 요설(妖雪)이라고도 해. 벌써 20년 가까이 반복된 탓에 지금은 매트로 서울의 명물이 됐어.” “호오, 그렇군. 재미있네?” “한번 내렸다 하면 일주일가량 계속 내리지. 온도도 상당히 떨어져서 이 기간 중엔 기온 차 때문에 감기에 걸리는 사람이 많아. 기상청에서 예고를 할 수 없는 현상이라 어쩔 수 없어. 그런데, 몸은 다 나은 거야?” “물론이지. 난 무적이잖아.” 지크는 오른팔을 보란 듯이 굽혔다. 반팔처럼 접은 재킷의 소매 밑으로 이 두박근이 단단하게 솟아올랐다. 리진은 황당함이 실린 미소를 지었다. “대단하네. 류페이 말로는 보통사람이라면 즉사할 상황이었다던데 며칠 못 가서 이렇게 멀쩡해지다니 말이야. 챠오도 아직 복귀를 못했는데… 하여튼 특이체질이라 좋겠네?” “좋은 것도 많지만 나쁜 것도 많아. 우선 제대로 쉴 수가 없거든. 어지간 히 큰 부상이 아니면 이틀에서 사흘 내에 다 나아버리니까 말이야.” “그래도 병상에 누워서 신음하고 있는 것보단 낫잖아.” “그렇긴 하지.” 그때 본부 내의 스피커에서 루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본부 내의 전투요원들에게 알려드립니다. 09시부터 오전 브리핑이 시작되 오니 모든 전투요원들은 빠짐없이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 드리겠습니다. 09시부터…….” 안내방송을 들은 리진은 한숨을 쉬며 창틀에서 내려왔다. “아아, 오늘도 일이 시작되는구나. 자, 가자.” “음. 아, 그런데 동생은 요즘 어때?” “미진이? 걔는 왜?” “그냥, 궁금해서.” 정확한 이유는 미진이 리오에게 치료를 받은 후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였 다. 어쨌거나 동생에 대한 것을 떠올리는 리진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녀가 얘기를 시작한 건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후였다. “요즘 걔 때문에 미치겠어. BX-F사건 이후 예전보다 말을 잘 듣긴 하는데 … 바람이 나버렸다니까?” “바람?” “응. 집에서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 일쑤고 혼자 킥킥대며 웃기까지 해. 학교에서도 그러는지 저번 주에 엄마가 학교까지 다녀오셨어.” 지크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남자친구 정도는 사귈 수 있잖아. 그리고 때가 어느 땐데…….” “그게 문제가 아냐. 그 애가 좋아하는 남자가 누구냐가 문제지.” “그래? 도대체 누군데? 연예인?” 엘리베이터 도착을 알리는 맑은 신호음이 들렸다. 리진은 안으로 들어가며 대답해 주었다. “레드 원이야.” “…….” 지크는 그대로 굳어진 채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놈이 그때부터 미쳐있었구나! 도대체 애한테 무슨 짓을 했기에!’ 그의 속을 알 리가 없는 리진은 성격대로 짜증을 부렸다. “뭐해? 안 탈거야?” “아? 미안.” 지크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에 맞춰 다시 물었다. “왜 하필 레드 원이야? 그때 구해준 것 때문에?” “일단 그렇겠지. 게다가 레드 원이 잘 생겼잖아. 학술적인 면으로 보자면 블루 원이 좀 더 잘 생겼지만 레드 원도 만만치는 않지. 저번에 슬쩍 떠보 니까 꿈에 그리던 기사님이 튀어나온 거라며 기뻐하더라고.” 들어보니 미진의 일방적인 짝사랑 같았다. 지크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고개 를 끄덕였다. 흥분한 리진은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남자는 생긴 게 전부가 아니란 말이야. 안정적인 경제적 능력과 뚜렷한 사회관이 있어야 미래가 편하다구. 레드 원처럼 정체 불명에다가 싸움만 아는 원시적인 남자는 가정에 도움이 되지 못한단 말이 야.” 그 말에 지크는 붕 뜬 미소를 지었다. ‘그놈은 여기보다 원시적인 세계를 담당하니 괜찮다구.’ “그건 그렇다 치고, 미진이는 건강해?” 지크가 본론으로 들어가자 리진은 빙긋 웃었다. “응, 요즘은 밥도 잘 먹어. 게다가 조금 심한 운동을 해도 괜찮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많이 건강해졌어.” 그녀의 미소는 평소에 보기 힘들 정도로 밝고 맑았다. 형제에 대한 걱정으 로 많이 가라앉아있던 지크의 마음마저 부드럽게 풀어줄 만큼 좋았다. “그래? 정말 기쁜가보네?” “물론이지!” 둘은 크게 웃었다. 사실 지크도 그녀만큼이나 기뻤다. ‘봐라, 리오. 너도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잖아. 그렇게 자기 자신을 망가 트리지 않아도 된단 말이야.’ 그러나 그 마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아침 브리핑이 시작되자마자 처크는 진지한 얼굴로 모두에게 말했다. “레드 원이 매트로 서울로 온다는 정보가 있다. 얼마 전엔 블루 원에게 도 움을 받은 우리지만 레드 원은… 아무래도 적으로 인식해야 할 것 같다.” 지크 외의 모두는 긴장어린 한숨을 쉬었다. 드러내진 않았지만 지크의 속은 뒤집어지기 직전이었다. 리오가 이렇게 간단히 적으로 지명됐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매우 화가 나는 일이었다. 추가로 스스로를 이렇게까지 몰아버린 리오가 미울 정도로 안타 까웠다. 선글라스로 감춰진 처크의 눈은 그런 지크를 가만히 주시했다. 잠시 후 그가 정황을 설명했다. “지금까지 레드 원은 다섯 명의 BSP대원을 살해하고 수백 명의 시민과 경 찰, BSP대원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기물파손은 말할 것 없지. 그러던 중 워 싱턴 DC의 레오나르도 칼킨 중위가 레드 원이 우리 매트로 서울 지부의 직 원 중 한 명을 노리고 온다는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우리 직원 중 한 명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렌이 놀라 물었다. 처크는 시선을 루이에게 돌렸고 그녀는 키보드를 조작 해 메인 스크린을 작동시켰다. 스크린에 뜬 사람은 서브 오퍼레이터인 샤논 더글라스라는 이름의 여성이었 다. 프로필에 나온 소속을 봐서는 분명 대한민국 수도방위지부 직원이 맞았 지만 지크를 비롯한 전투요원 모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사람이 우리 지부에 있었나?” 최고참인 그렌이 그렇게 말할 정도였으니 다른 직원들도 불 보듯 뻔했다. 처크는 씁쓸히 웃었다. “그럴 걸세. 워낙 내성적이고 조용한 아가씨라 쉽게 눈에 띄진 않았을 거 야.” “그렇군요.” 담배를 문 채 가만히 있던 케빈이 슬쩍 손을 들었다. “저 아가씨가 레드 원의 표적이라는 근거는 뭡니까?” “음, 말해주는 걸 잊었군.” 처크는 말하기에 앞서 시거를 물었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레드 원에게 가장 먼저 살해된 피해자는 챌시 더글 라스다. 목표가 된 샤논양의 언니가 되지. 다른 네 명의 피해자들은 성씨가 다르지만 그 두 사람과 한 집에서 같이 컸네. 더글라스 집안의 양자라고나 할까?” “그런 연관성이 있었군요. 하지만 왜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겁니까? 알 았다면 즉시 막을 수 있었을 텐데요?” 케빈이 깊숙이 따지고 들었다. 처크의 코 밑으로 연기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피해자들이 그걸 밝히지 않았어. 양자라는 것도, 서로 알고 지낸다는 것 도 말일세.” “음…….” 케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명을 들었지만 왠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이 들 어서였다. 처크가 지시를 내렸다. “정보 제공자인 레오나르도 칼킨 중위가 오늘 오전 11시 경에 이곳에 도착 할 걸세. 상대가 레드 원이니만큼 그의 힘도 필요하겠지. 우리의 목표는 샤 논 더글라스를 보호하는 것일세. 그럼 해산하도록.” “예!” 모두는 경례를 붙인 뒤 웅성이며 자리를 떴다. “아, 지크는 잠깐 남아봐.” 가장 먼저 회의실을 나서려던 지크는 처크의 부름에 말없이 응했다. 단 둘이 있게 된 처크는 자신의 자리에 마련된 회의실 밀폐장치를 켰다. 회 의실의 대화내용이 밖으로 세지 않도록 하는 특별한 장치였다. 가까이 다가가 앉은 지크는 그가 말하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처크가 입을 연 것은 회의실 내부가 시거의 연기로 뿌옇게 될 무렵이었다. “지크, 넌 지부장이라는 자리가 어떤 자리라고 생각하지?” 사적인 질문인지 공적인 질문인지 잘 분간되지 않았다. 지크는 고민 끝에 편하게 대답했다. “어려운 자리죠.” “그렇지? 정답이야.” 처크는 또 한 번 연기를 들이마셨다. “지부장인 난 어느 순간엔 감정을 자제해야 할 필요가 있어. 널 포기하는 대신 시민을 살릴 수만 있다면 난 주저 없이 널 포기할거야. 대신 다시는 레니를 보지 못하겠지. 그리고 집에 돌아온 뒤에야 난 네 이름을 부르며 울 수 있단다.” “…….” 지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는 뜻이었다. 선글라스를 벗은 처 크는 두툼한 손으로 조카손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도 알다시피 BSP엔 온갖 초인들이 존재하고 있어. 너와 잘 아는 사이인 숀은 늑대인간이야. 유럽 지부엔 뱀파이어 출신인 BSP가 꽤 많지. 그처럼 U N은 바이오 버그 소탕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모았단다. 그런데… 실수도 있었어.” “실수요?” “그렇지. 지크, 넌 악마라는 존재를 믿고 있냐?” 지크는 눈을 부릅떴다. 처크는 씩 웃었다. “너에게만 솔직히 얘기하마. 그에게 죽은 BSP대원 모두는 악마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얻지 말아야 할 힘을 얻은 존재들이야. 지금은 비록 그 힘을 사람 들을 위해 쓰고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그런 류의 대원들이 점차 늘 어나고 있는 추세란다. BSP 중앙본부에선 악마와의 계약을 주선해주기까지 하지.” 순간 지크가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그런 일이, 말도 안돼요! 아무리 BG를 없애는 게 목적이라고 하지 만 악마라니요!” 처크는 어깨를 으쓱댔다. “할 수 없어. 악마와 계약한 자들이 특별히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고 일도 잘 하니 중앙본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말 굿(Good)이거든. 난 후일을 감당 할 수 있겠냐며 반대했지만 씨도 안 먹혔지.” “…….” “이 사항이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 BSP의 존재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단다. 그래서 다른 대원들에겐 거짓말을 했지.” “그럼 저에겐 왜 말씀하시는 거죠?” 지크는 의아함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처크는 무겁게 되물었다. “넌 네가 날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네? 무, 무슨 말씀이세요?” 지크는 등골이 서늘했다. 워낙 기습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어서 제대로 둘러 대지도 못했다. 반면 기선을 잡은 처크는 또 한 번의 일격을 날렸다. “레드 원, 블루 원과 아는 사이지?” “아, 아니에요! 제가 두 녀석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시잖아요!” “너는 몰라도 그들은 아닌 거 같던데? 왜 네 일이라면 사사건건 그들이 관 련되는 거지?” “시민들을 구하고 싶었나보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아니야. 위기에 닥친 불쌍한 사람들은 이 매트로 서울 말고도 많아. 매트로 서울의 시민들이 그 둘에게 특별대우를 받을 이 유는 없어.”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크는 끝까지 저항하려 애썼다. “명예시민권을 받고 싶은가보죠.” “…….” 처크의 짙은 눈썹 사이에 주름이 우두둑 잡혔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게 진 지하지 못한 대답이라는 것을 아는 지크는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생각하신 대로에요. 레드 원과 블루 원, 둘 모두 저랑 알고 지내는 사이 에요.” 체크메이트였다. “역시 그렇군.” 처크는 미소를 지었다. 한결 여유를 얻은 그는 자신이 지크의 비밀을 알게 된 과정을 설명해줬다. “그 둘이 나타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이었어. 난 레니가 낯선 나라에서 잘 적응하고 있는 지 궁금했지. 그런데 그 애가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더군. 네 고아원 친구들이 자주 놀러 와줘서 심심하진 않다고 하더구나.” “예?” 지크는 아차 싶었다. 레니에 대해서 전혀 생각을 못한 것이었다. 이것은 물건을 꼭꼭 숨긴다면서 목격자는 놔두고 자신의 입만 틀어막아버린 꼴이나 다름없었다. “난 친구 누구냐고 물었지. 그런데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 나오더군. 리오 와 슈렌이라고 했던가? 붉은 장발에 적동색 피부의 청년이 리오 스나이퍼, 파란 장발에 굉장한 미남이 슈렌 스나이퍼라더군.” “하아아.” 지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처크는 그런 조카손자의 모습을 보며 껄껄 웃었다. “그래도 처음엔 반신반의했어. 확신을 가지게 된 건 아크엔젤이 쳐들어왔 을 때였지. 내 눈으로 직접 본 그 블루 원은 레니가 말해준 슈렌 스나이퍼, 네 친구와 똑같았단다.” “…….” 더 이상 변명할 여지는 없었다. 이미 자백한 뒤이기도 했지만 처크가 말해 준 그 과정은 뭐라 토를 달 수 없을 정도로 확실했다. 처크는 재떨이를 끌어당겨 시거의 불을 껐다. “그 둘과 얼마나 친하지?” “예? 꽤… 친하죠. 의형제니까요.” “의형제? 누가 형인데?” “그런 건 없어요. 친구 같은 의형제죠.” “그렇군. 아무튼 좋은 사람들이겠구나.” “예? 어떻게 아세요?” 처크는 빙긋 웃었다. “네가 좋은 놈이니까.” “…….” 지크는 다시 할 말을 잃었다. 갑자기 말문이 막혀버렸다. 오늘만큼 자신의 할아버지가 멋지고 다정하게 보인 적이 없어서였다. 지크는 그것이 너무 기뻐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 다. “아무튼 레드 원, 아니 리오 스나이퍼에 대해선 너에게 모든 걸 맡기마. 무슨 사정이 있어서 악마와 계약한 대원들을 노렸겠지. 그러니 나중에 만나 면 주의를 줘라.” “뭘요?” “레오나르도 칼킨을 조심하라고 일러줘.” “칼킨이요? 에이, 설마요. 저랑 엇비슷한 수준이라는 칼킨에게 리오가 당 할 수는…….” “칼킨은 약하지 않아.” 그 무거운 한마디는 지크의 말문을 다시 막았다. “너와 칼킨이 비슷하다는 말이 나온 근거는 공개된 수치상의 데이터 비교 일 뿐이야. 둘 중에 누가 강한지 실제로 붙어본 적이 없지 않느냐? 만나본 적도 없고.” “그, 그거야 그렇지만…….” “아무튼 칼킨에 대한 건 네가 직접 만나보고 판단해라. 네가 강한지, 아니 면 칼킨이 강한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둘 다 내 상식을 벗어난 존재니까.” 그것으로 둘만의 비밀회담은 끝이었다. 처크는 지크와 리오들과의 관계를 비밀에 붙이기로 약속했다. 또한 비밀유 지에 대한 방법을 지크에게 알려주었다. 남을 속이는 게 어설픈 지크라면 또다시 이런 일에 휘말려 곤란을 겪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지크가 회의실을 나간 후 처크는 새 시거를 물고 생각에 잠겼다.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 준 것이 잘 한 일인지, 아니면 그른 일인지 아직 확 실히 판단하기 힘들었다. 전자는 가족으로서의 입장이고 후자는 지부장으로 서의 입장이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건 말없이 기뻐하는 지크의 모습이었다. 그걸 다시 되 새겨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내가 말한 대로 할지 모르겠네, 저 녀석. 동료들이라면 모를까, 기자나 다른 지부 녀석들에게 걸리면 굉장히 곤란한데…….” 그가 걱정하는 동안 지크는 동료들을 찾아갔다. 레오나르도 칼킨에 대한 것 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레오나르도 칼킨에 대해 알고 싶다고?” 류페이를 제외한 전투요원 모두는 칼킨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를 만나게 된 계기가 바로 하리진의 실수였기 때문이다. 지크가 들어오기 한참 전, 풋내기 신입이었던 리진은 J구역의 실내 놀이공 원 탈환이라는 어려운 임무에 투입된다. 그녀가 맡은 구역은 구지하철 2호선으로 가는 길을 막은 격벽이었다. 전투 와는 상관이 없는 간단한 구역이었지만 혹시라도 그곳이 무너지게 되면 엄 청난 숫자의 BG가 뛰쳐나오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구역이 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구역을 이탈하면 안됐지만 리진은 동료들의 포위망에서 벗어난 한 마리의 BG를 잡기 위해 구역을 벗어나고 만다. 결국 격벽은 타이 밍 좋게 깨졌고 리진을 포함한 모든 BSP대원들은 부서진 벽을 통해 밀려나 온 수백 마리의 BG들에게 역으로 포위되었다. 전멸이라는 단어가 모두를 짓누르기 직전, 모두의 눈앞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전혀 생각지 못한 BSP 대원 한 명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그 대원은 가공할만한 힘으로 절반에 가까운 BG들을 몰살시킨다. 덕분에 모 든 BSP들이 무사히 햇빛을 볼 수 있었고 리진은 일주일간의 근신이라는 가 벼운 처벌을 받게 된다. 당시 나타났던 그 대원이 바로 레오나르도 칼킨이다. “그에 대해 얘기해도 괜찮겠나?” 그렌이 리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아요, 선배님. 이젠 다 잊었어요.” 리진은 담담히 허락했다. 그렌은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속으로 읊조리며 안 도의 한숨을 쉬었다. 칼킨에 대한 얘기는 케빈이 먼저 시작했다. “칼킨이라… 복장은 검붉은 색의 가죽코트에 같은 색의 테가 엄청나게 넓 은 모자를 썼어. 생긴 건 카우보이 모자였는데, 대신 테가 거의 어깨너비에 맞먹었을 거야. 난 처음 봤을 때 무슨 마법사인줄 알았다니까? 무기는 짧은 샷건이랑 길이가 넉넉히 잡아도 180cm 정도는 되어 보이는 큰칼이었어. 칼 디자인은 무명도인가? 자네가 가진 거랑 비슷할 거야. 그러고 보니 이름도 비슷하네?” “그래? 칼 이름이 뭔데?” “무문도(舞雯刀)였을 거야. 맞죠, 선배님?” “음, 확실해.” 그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료화면도 있으니 잘 봐. 당시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찍은 거야.” 그는 휴게실에 마련된 TV에 다가가 오른쪽 가슴의 장갑판을 열었다. 사물함 문처럼 열린 장갑판의 뒤로 여러 가지 케이블이 보였다. 데이터 교 환 및 영상자료 공개용이었다. 사실 그렌과 같은 커맨더(commander) 타입의 BSP 사이보그는 본부의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는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움 직이는 야전사령부로서도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렌은 케이블 중 하나를 꺼내 TV에 연결했다. 곧이어 화면엔 검붉은 코트 에 검붉은 모자를 쓴 칼킨의 실제모습이 떠올랐다. 말은 ‘검붉은’이었지만 완전히 피 색이었다. 같은 색의 모자엔 검고 윤기 가 흐르는 깃털 하나가 멋스럽게 꽂혀 있었다. 모자 밑으로 보이는 얼굴은 눈처럼 하얗고 싸늘했다. 얇고 짙은 눈썹은 그 의 차가움을 한껏 더해주었다. 그 뒤로 굵게 땋아 내린 머리가 등판까지 흘 러내렸다. 등에 매달린 칼, 무문도는 마치 만곡(彎曲)한 장대처럼 보일 정도로 길고 늘씬했다. 칼집과 자루, 코등이(칼자루 목 쪽에 감은 쇠 테)의 디자인은 케 빈의 말대로 무명도와 흡사했다. 그의 오른손엔 약 50센티 정도 길이의 샷건이 들려 있었다. 윈체스터 M1897 커스텀, 이 시대에선 찾아보기 힘든 레어(rare) 아이템이었다. “오리지널 M1897은 아니겠지?” “그렇겠지, 아무래도. 저번에 소리를 들어보니 내부 부품이 다른 것 같더 라고.” 귓속말로 대화를 나눈 두 남자, 지크와 케빈은 사실 클래식 총기류라면 이 성을 잃는 총기 매니아다. 이윽고 화면 속의 칼킨이 움직였다. 양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은 채 맹렬히 질주하던 칼킨은 BG들로부터 몇 발 자국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러자 급브레이크가 잡힌 스포츠카처럼 양발을 땅에 붙인 채로 쭉 미끄러졌다. 그가 손을 칼 쪽으로 가져가자 무문도의 칼집이 좌우로 쪼개졌다. 무문도는 엄청난 길이 때문에 칼집에서 뽑아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 직후 원형의 섬광이 BG들 사이에서 번뜩였다. 한 차례 칼을 휘두른 칼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서서 칼을 제자리 에 넣었다. 무문도의 코등이가 칼집에 닿는 순간 검광의 범위 내에 있던 BG들이 모조리 두 동강이 나며 바닥으로 흩어졌다. 쓰러진 BG들의 빈자리를 다른 BG들이 보충했지만 칼킨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샷건을 내밀었다. 그가 뒤로 물러나며 방아쇠를 당기자 샷건 특유의 둔탁하면서도 경쾌한 소 음이 터졌다. 두세 마리의 BG들이 한꺼번에 누더기로 변하여 날아갔다. 보통의 샷건으로 는 생각할 수 없는 경이적인 위력이었다. 칼킨은 핸드그립 아래에 붙은 고리모양의 장전손잡이에 손가락을 걸친 채 샷건을 몸쪽으로 돌렸다. 원래는 장전손잡이를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올려야 하지만 지금처럼 돌려도 같은 과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칼킨은 탄이 떨어질 때까지 쏘고 돌리기를 반복했다. 샷건 하나만으로도 BG 들의 숫자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탄이 떨어지자 칼킨은 다시 칼을 빼들었다. 칼의 길이만큼이나 길고 넓은 검광이 BG들 속에서 죽음의 그림을 그렸다. BG들은 칼킨에게 제대로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공격범위가 워낙 범위가 넓 고 속도역시 빨랐다. 그 움직임의 축인 칼킨의 몸짓 또한 지크가 자신도 모 르게 탄성을 지를 정도로 훌륭했다. BG들의 무리는 삽시간에 정리됐다. 당시 그렌과 케빈, 챠오, 리진 등이 그 와 함께 싸우긴 했지만 체력과 물자 모두 떨어진 그들의 상황을 생각했을 때 칼킨 혼자서 쓸어버린 거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기록재생이 끝난 뒤 지크는 모두를 보며 물었다. “저 녀석, 정말 나랑 비슷한 수준이야?” 지크의 말에 모두는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던 중 대표 격으로 리진이 말했 다. “무슨 소리야? 누가 봐도 비슷하잖아?” 그녀는 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다. “지크도 평소에 저 정도는 해준단 말이야. 의심나면 기록실에 가서 영상자 료라도 한번 찾아봐. 요즘엔 더 강한 거 같던데?” “맞아요.” 류페이도 동감했다. “아크엔젤과 싸우실 때의 데이터와 지금 칼킨의 데이터를 비교해보자면 선 배님이 좀 더 우위에 있어요. 물리력 면에선 선배님이 훨씬 앞서시죠.” “그런가?” 지크는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얘기는 거기서 끝났지만 칼킨에 대한 지크의 의문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그 녀석, 너무 여유로웠는데……. 마치 리오가 BG들을 상대할 때의 모습 같았어.’ 1000cc급 엔진의 오토바이로 100km/h라는 속도를 내는 것과 150cc급 엔진의 오토바이로 같은 속도를 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지크가 본 칼킨은 대형 오토바이를 생각나게 할 만큼 여유로웠다. 그것도 예전에 본 리오만큼의 여유였다. 칼킨은 약하지 않다. 지크는 처크가 해준 그 말이 그렇게 불길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다른 대원들이 오늘의 안건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사이 류페이는 지하철에 서 창밖을 보는 꼬마들처럼 창가에 붙은 소파에 무릎을 대고 올라갔다. 하늘과 거리는 어지러이 내리는 폭설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오전 브 리핑이 끝난 뒤 항상 이 자리에서 매트로 서울을 내려다보는 류페이에겐 매 우 아쉬운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멀리 보이는 건물들 사이에서 붉고 푸른빛이 갑자기 번뜩였다. 처음엔 이벤트성 불꽃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좀 지나니 그게 아니라는 생 각이 들었다. 그 주변 건물에서 폭발과 화재가 차례로 발생하기 시작한 것 이다. “그렌 소령님! 저길 좀 보세요!” 류페이의 비명에 그렌이 눈을 돌릴 무렵, 본부의 스피커에서 기나긴 비상사 이렌이 울려 퍼졌다. 사건이 벌어진 지역은 대피하는 사람들로 대혼란을 이뤘다. 오로지 이상기 후만을 대비했던 경찰들로선 속수무책의 상황이었다. 혼란의 원인인 두 개의 불빛은 민간인과 기물의 피해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 해서 격돌했다.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유리창은 힘없이 대파됐고 빗나간 공격을 대신 얻어 맞은 건물외벽은 포탄에 맞은 듯 가루가 됐다. 이윽고 두 불빛이 주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옥상에 내려왔다. 한 사람은 칼킨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레드 원, 리오였다. 각각 푸른색과 붉은색의 기운에 둘러싸인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숨을 돌렸다. 칼킨은 여기저기 흠집이 난 자신의 모자를 왼손으로 깊숙이 내리눌렀다. 모 자의 넓은 테 위로 떨어진 눈송이는 그가 내뿜는 기의 열로 인해 순식간에 증발됐다. 그가 말했다. “소문대로군, 리오 스나이퍼. 멋진 전투능력이다.” 그의 날카롭고 곱상한 외모와는 약간 어울리지 않는 굵은 톤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핏빛 의 옷으로 몸을 두른 칼킨의 모습은 분위기가 넘쳤다. 리오의 얼굴 앞으로 작은 입김이 피어올랐다. “그런가?” 그는 웃고 있었다. 그러나 왠지 힘겨워보였다. 이마에서 목까지, 전신이 땀 에 젖어 하얀 김을 공중에 퍼트렸다. “그런데, 넌 도대체 누구지? 누군데 나를 공격하나?” 리오가 묻는 사이 칼킨은 무문도를 바닥에 꽂고 장갑을 고쳐 끼웠다. 그는 자신의 다섯 손가락을 좀 얇게 보이는 검은색 장갑 속으로 착실히 밀어 넣 으며 말했다. “워싱턴 DC소속의 BSP, 레오나르도 칼킨이다.” “오, 그러신가? 동료들의 복수를 할 생각으로 왔다면 기꺼이 받아주지. 칼 을 들어라.” 리오는 오른손에 든 보라색 대검의 끝을 움직였다. 하지만 칼킨은 움직이지 않았다. 의구심이 섞인 눈으로 리오를 바라볼 뿐이 었다. “그들이 내 얘기는 하지 않던가?” “그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리오의 반응을 본 칼킨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흠, 이미 갈 곳까지 간 상태였군. 그렇다면 한 가지 충고를 하겠다, 리오 스나이퍼. 넌 나머지 한 명을 절대로 죽이면 안 된다.” 그 말에 리오는 금방 정색을 했다. “너도 관련자인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그러나 난 널 막아야 한다. 네가 만약 마지막 남 은 계약자를 처리하게 되면 이 도시는, 아니 이 세계는 쑥대밭이 된다. 네 가 멸망시켰던 세계와 똑같이 말이다.” 순간 리오의 팔과 목에 힘줄이 솟았다. “닥쳐!” 리오의 기운이 태풍처럼 강해졌다. 그가 밟고 있던 콘크리트 지면은 쩍 소 리를 내며 갈라졌고 건물의 유리창은 그가 있는 옥상을 시작으로 중간층까 지 모조리 박살났다. 광기와 노여움이 담긴 붉은 빛이 리오의 두 눈에서 뿜어졌다. 일그러진 그 의 얼굴은 귀신을 연상케 할 정도로 흉악했다. 그가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이 닿을 때마다 지면이 깨지고 파편이 튀어 올 랐다. “네놈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 대해 꽤나 자세히 알고 있구나, 불쾌 할 정도로! 그 대가로 없애주마!” 칼킨은 묵묵히 무문도를 빼들었다. “불쾌한 얘기를 하나 더 해주지. 지금의 너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 지금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지. 다시 한 번 경고한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으면 여기서 포기해라.” “시끄러워! 만약 이 세계가 멸망된다 해도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네가 여기서 죽은 뒤의 일이니까!” 리오의 검이 공기를 가르며 칼킨을 노렸다. 칼킨은 그에 대항해 칼을 잡고 옆으로 돌았다. 이윽고 쌍방의 무기가 충돌했다. 건물 옥상을 중심으로 원형의 파문이 대기를 훑으며 퍼져나갔다. 대피하던 사람들은 뒤쪽에서부터 퍼져온 그 파문을 보고 그 자리에 멈췄다. 대기는 고요했다. 바람은 물론이고 끝없이 내릴 것만 같던 요설도 무슨 이 유에서인지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전 시내를 뒤흔들만한 폭음이 사람들을 짓눌렀다.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유 리창은 모조리 깨졌고 지진 및 각종 재난에 대비해 만들어져있던 건물들도 상층부부터 금이 갔다. 이어서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강한 폭풍과 눈보라가 그 지역의 시민들을 뒤덮었다. 충격파로 인해 잠깐 밀린 대기가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생긴 현상 이었다. 그런 혼란과 공포는 BSP들이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인파와 차량에 밀려 도착이 늦어진 BSP들은 아연실색했다. 불과 5분여 만에 수십 층이 넘는 초대형 빌딩 10여 채가 철거를 생각해야 할 정도로 반파된 것이다. 그들을 더욱 황당하게 만든 것은 매트로 서울 전체를 날릴 것만 같던 상황 이 자신들의 도착 직전에 거짓말처럼 끝나버렸다는 사실이다. 현장에 남아있는 사람은 오직 칼킨, 단 한 명뿐이었다.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없었으나 사람들의 정신적, 물질적 피해는 어마어 마했다. BSP와 경찰에선 천재지변에 가까운 사태여서 어쩔 수 없다고 했지 만 건물주들과 시민들은 범인을 당장 잡아내라고 아우성이었다. 아크엔젤 사태에 이어 또다시 언론의 공격을 받게 된 처크는 끓어오르는 짜 증을 삭히며 회의실로 돌아왔다. 처크는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다들 모였나?” “예, 지부장님.” 그의 걸음걸이와 억양을 본 그렌은 내심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기자들과 한바탕 싸우고 오셨군.’ 그의 시선이 회의실 구석 쪽으로 향했다. “말씀하신대로 레오나르도 칼킨 중위의 입실을 허가했습니다.” 칼킨은 회의실의 구석, 처크의 자리에서 보자면 오른쪽 코너라고 할 수 있 는 곳에 서있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가만히 서있는 그의 모습은 처크를 포함한 모든 BSP 대원들에게 이상한 중압감을 주었다. 그의 분위기 자체가 워낙 어둡고 무거 워서도 그랬지만 그가 레드 원을 격퇴시켰다는 사실이 중압감의 가장 큰 이 유였다. “어험.” 처크는 칼킨에게 말을 걸기에 앞서 헛기침으로 자신의 기분을 바꿨다. “여전히 자리에 앉지 않는군, 칼킨. 매트로 서울 지부에 방문한 걸 환영하 네.” 칼킨은 고개를 살짝 굽혔다. “저의 부족함으로 힘든 일을 겪으시게 된 것에 사과드립니다, 처크 켄트 지부장님.” “후후, 대답도 자네답군. 그럼 오늘 일에 대한 보고를 좀 해주게. 레드 원 과 어떻게 접촉을 했으며 어떻게 일이 마무리됐는지 좀 들어야겠어. 그걸 알아야 좀 덜 힘들 것 같거든.” “기꺼이.” 칼킨은 모자 끝을 잡아당겨 더욱 깊게 얼굴을 감췄다. “레드 원과 접촉한 것은 이곳으로 오는 도중이었습니다. BSP본부를 향해 걸어가고 있더군요. 저는 그가 그 강력한 레드 원이 맞는지 의심스러웠습니 다. 얼굴은 초췌했고 옷차림은 걸인이 떠오를 만큼 지저분했습니다. 옷에 구멍이 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지요.” “…….” 지크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의 입장으로선 그리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잠자코 테이블 위를 주시했다. 여기서 흥분해봤자 이득 되는 건 없 었다. 오히려 처크에게 해가 될 뿐이었다. 그는 몰랐지만 칼킨은 모자 밑으로 지크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잠시 틈을 두었던 그는 얘기를 계속했다. “경찰 몇 명이 그를 조사하려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는 경찰을 쳐서 부상을 입혔고 시민들은 그때부터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가 레드 원임을 확 인한 저는 즉시 그를 막았습니다. 그와의 전투는 그때부터 시작됐습니다.” 그 사이 시거를 문 처크는 연기를 옆으로 훅 불어낸 뒤 물었다. “그렇군. 하지만 이해가 안되는 게 있네. 그렇게 강력한 레드 원을 어떻게 자네가 격퇴시킬 수 있었지?” 칼킨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소문과 달리 형편없었습니다. 외모에 맞게 지저분할 정도였지요.” 순간 쩍 하는 소리가 테이블에서 났다. 굳게 쥐어진 지크의 주먹 밑엔 거미줄 같은 균열이 있었다. 쳐서 일으킨 게 아니라 눌러서 만든 것이다. 지크의 팔뚝엔 굵은 힘줄이 불끈거렸다. 동료들은 지크가 왜 저렇게 흥분을 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처크는 속으로 한탄했다. ‘참아라, 지크. 네가 여기서 흥분하면 변명거리가 없어진다. 다른 사람들 의 입은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칼킨의 입은 막을 수 없어.’ 칼킨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는 지크에게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는 지 묻지도 않고 자신의 얘기를 계속했다. “레드 원은 몇 번의 저항을 했지만 기대 이하였습니다. 자신이 만든 동작 에 대한 컨트롤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지요. 그의 공격은 계속해서 빗 나갔고 그로 인해 주위의 건물들은 쓸데없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 지크는 눈을 부릅뜬 채 계속해서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칼킨은 지크가 괴 로워하는 것을 아는 듯 얘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중엔 저에게 살려달라고 빌더군요. 저는 죽일 생각은 없으니 순순히 투 항하라고 했으나 그는 비겁하게도 꼬리를 내리고 도망쳤습니다. 도망치는 것만큼은 제가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빨랐습니다. 상황보고는 여기까지입니 다, 지부장님.” 처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군. 어찌됐건 자네가 와서 참 다행…….” “어이, 칼킨이라고 했나?” 지크가 처크의 말을 끊고 불쑥 나왔다. 처크는 순간 정신이 아득했다. ‘내가 무리한 꿈을 꿨군.’ 지크가 끝까지 참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러나 그 기대가 물거품이 된 지금으로선 사건이 어떤 쪽으로 갈 지 그로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지크는 사건 쪽으로 방향을 잡지 않았다. “그 레드 원 말이야. 당신 만나기나 했나? 말로는 알 수 없잖아. 증거사진 도 없고 말이야. 내 생각에 상대가 진짜 레드 원이었다면 당신이 이곳에 멀 쩡히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되는데?” 칼킨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 “질투인가?” “뭐?” “자신이 이기지 못한 상대를 내가 이겼다고 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좀 유치하군, 지크 스나이퍼 소위. 어른스러운 생각을 가지는 게 어떤가?” “뭐라고?” 지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유치한 녀석에게 맞아봐라!” 동료들은 그를 말리려 했지만 상황이 워낙 순간적으로 일어났기에 아무도 손을 쓸 수 없었다. 강한 섬광이 회의실 안에서 터졌다. 이어서 칼킨의 모자가 UFO처럼 하늘거 리며 공중을 배회하다가 바닥에 안착했다. 지크의 발끝은 칼킨의 관자놀이에 닿아 있었다. 그에 질세라 칼킨의 무문도 는 지크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공격은 칼킨이 먼저 거두었다. “질투심이 생길만 하군.” 그가 한 마디 남긴 데 이어 지크도 공격을 거두었다. “넌 레드 원을 절대 못 이겨.” 지크는 조용히 착석했고 칼킨은 모자를 집어 다시금 깊숙이 썼다. 일이 크게 번지지 않았기에 처크는 지금 상황을 말없이 넘어갔다. 물론 지 크는 임시회의가 끝난 뒤 그렌과 다른 동료들에게 크게 혼이 나고 말았다. 그날 저녁, 지크는 다른 때보다 퇴근을 서둘렀다. 리오가 자신의 집에 올 수도 있기에 그런 것이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리오는 집에 오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오늘 아침까 지만 해도 있던 슈렌까지 보이지 않았다. 집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레니뿐이었다. 상황을 모르는 레니는 아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웬일로 일찍 왔니? 아침에 본부 근처에서 사고가 났다고 들어서 늦게 올 줄 알았는데?” “그냥 그렇게 됐어요.” 지크는 터벅터벅 거실로 들어가 TV를 켰다. 레니는 아쉬움이 가득한 지크의 모습을 보고 의아해 했지만 이유를 묻진 않았다. 뉴스에선 아침에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시끌벅적했다. 별 생각 없이 뉴스를 지켜보던 지크는 긴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 녀석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 Y구역. 지금은 경인공업지대의 중요도가 떨어져 1980년대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그 래도 유동인구의 숫자와 중저가 물품이 주가 되는 시장의 규모는 여전히 무 시할 수 없을 만큼 큰 곳이다. 저녁 무렵의 지하상가인파를 뚫고 지상으로 나온 사람들은 입김을 후후 불 며 요설이 몰고 온 추위를 물리치기 위해 애썼다. 그 중에서 편의점 안의 군밤을 유심히 쳐다보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뭔가를 회상하는 듯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서있었다. 바바리코트에 뿔테안경을 쓴, 전형적인 화이트컬러의 외모를 한 그 남자의 뒤로 교복코트 를 입은 소녀가 후다닥 뛰어왔다. “아빠!” 소녀는 남자의 목 뒤에 아기 코알라처럼 매달렸다. 남자는 껄껄 웃으며 뒤 로 돌아 소녀를 안아주었다. “좀 늦게 끝났구나, 미진아.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소녀, 하미진의 단발이 흔들렸다. “아뇨. 할머니 선물로 뭘 살까 고민하다가 늦은 거예요. 그런데, 또 군밤 구경하고 계셨어요?” “응.” 하지혁은 또다시 웃었다. “네 엄마랑 내가 젤 좋아하는 게 군밤이었거든. 연애할 때 얼마나 많이 먹 었는지 몰라. 한번은 둘이서 군밤을 만들겠다고 본부 옥상에서 밤을 굽다가 밤을 전부 터트린 적도 있었지. 칼로 흠집을 내서 구워야 한다는 걸 전혀 몰랐던 거야.” “어, 그래야 돼요?” “물론이지.” 부녀는 손을 잡고 백화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진이 낀 벙어리장갑과 지혁의 까만 가죽장갑이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아빠 나이대의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된다는 걸 거의 모른단다. 도시출신 은 특히 그렇지. 내가 어렸을 때는 할머니들이나 아주머니들이 껍질을 까서 팔았어. 연탄에 슬슬 구워서 말이야. 혹시 너 연탄이라는 거 아니?” “백과사전에서 본 적은 있어요. 어떤 건데요?” “응, 그건 말이야…….” 순간 골목 쪽에서 커다란 뭔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순발력이 좋은 지혁은 본능적으로 미진의 앞을 막아섰고 주위사람들은 그보다 좀 늦게 사방으로 물러났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피가 흠뻑 묻은 회색의 망토를 머리 위까지 뒤집어 쓴 거한이었다. 결정타를 맞은 권투선수처럼 비틀대던 그 남자는 눈이 덜 녹아 지저분해진 길바닥 위로 털썩 쓰러졌다. 리진은 아버지의 옆으로 배꼼 고개를 내밀었다. 쓰러진 남자의 모습을 본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아버지의 코트를 불끈 움켜쥐었다. ‘레드 원!’ 지혁은 코트에 가해진 힘을 느끼고 직감했다. ‘미진이가 저 남자를 알고 있는 건가? 하지만 이 남자는…….’ 그는 남자를 자세히 살펴봤다. 조금 지저분하긴 했지만 붉은 장발과 준수한 얼굴, 회색의 망토, 그리고 적동색의 피부 등의 외모는 소문의 레드 원과 똑같았다. ‘그러고 보니 와이프가 미진이 때문에 레드 원 얘기를 조금 했던 것 같은 데?’ 그가 고민하는 사이 사람들이 호기심에 이끌려 조금씩 모여들었다. 마지막 엔 교통정리를 하던 경찰까지 달려왔다. “여러분, 경찰입니다! 잠깐만 비켜주십시오!” 사람들 틈을 비집고 현장에 도착한 청년 경찰관은 쓰러진 남자의 모습을 보 고 할 말을 잃었다. 피로 얼룩진 망토를 뒤집어쓴 거한이라니, 이건 무슨 영화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다. 그는 무전기를 들었다. 지원요청을 하기 위해서였다. 쓰러진 남자를 보니 혼자서 옮기기엔 무리일 듯싶었다. 키가 못해도 190cm 정도는 되었고 덩치 역시 상당한 근육질이어서 몸무게가 90kg이상, 100kg정 도는 돼보였다. 연결신호음이 나던 순간 그의 무전기 전원이 툭 하고 나갔다. 지혁이 무전 기의 전원버튼을 눌러버린 것이다. 당황한 경찰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지혁을 바라봤다. 그뿐만 아니라 미진도 놀라 말을 잃었다. “아니, 뭐하시는 겁니까?” 경찰이 언성을 높이자 지혁은 미안하다는 듯 손을 저으며 웃었다. “아, 미안합니다. 제 개인적인 문제라서 그렇습니다.” “예? 아니, 아무리 개인적인 문제라 하셔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제가 함부 로 공권력을 남용하는 것도 아닌데 함부로 무전기를 끄시다니…….” “이거면 되겠습니까?” 지혁은 양복 안쪽에서 지갑을 꺼냈다. 젊은 경찰은 그가 돈을 꺼낸다면 당장 그를 꾸짖으려 했으나 상대는 현금 대신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신분증을 이리저리 확인한 경찰은 순간 마네킹처럼 경직되어 경례를 붙였 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크나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하지혁 대위님!” 경찰의 입에서 하지혁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시민들이 크게 술렁였다. “하지혁? BSP의 하지혁?” “어? 저 사람이 그 하지혁 대위야?” “맞는 것 같은데? 맞아! 매트로 서울 1천만 시민의 영웅, 하지혁 대위야! ” 여기저기서 감탄과 놀라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진은 잘 몰랐지만 사 실 지혁은 정식으로 은퇴를 하기 전까지 영웅으로서 남녀노소에게 추앙받는 존재였다. 오랜만에 영웅소리를 듣게 된 지혁은 부끄러운 듯 머리를 매만지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 대강의 인사를 끝낸 지혁은 조금 두툼한 카드를 꺼내 엄지로 이리저리 표면을 조작했다. 그것은 승용차용 카드키였다. 카드 표면의 키를 조작하면 차는 알아서 주차 장을 떠나 주인이 있는 곳으로 달려온다. 주차료는 자동차 번호판을 통해 자동결제가 되고 자동운행 역시 차량의 인공지능과 자동차 회사의 인공위성 항법장치를 통해 제어되기 때문에 도중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 다. 차를 부른 뒤 지혁은 경찰에게 다시금 사과를 했다. “미안하지만 이 청년은 제가 맡겠습니다. 월권행위인 건 알지만 안면이 있 는 사람이니 좀 부탁드립니다.” 지혁의 간곡한 부탁에 오히려 경찰관이 미안해했다. “아, 아닙니다. 자진해서 구호활동을 하시는 거니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 아도 됩니다. 무전기에 대한 건 염려치 마십시오. 제가 실수로 끈 거라고 보고하겠습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대, 대신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경찰은 놀란 지혁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어렸을 때 대위님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대위님을 뵙게 되 다니, 저로서는 대단한 영광입니다.” “하하, 영광이랄 것까지야…….” 때마침 지혁의 차가 비상등을 켠 채 천천히 접근해왔다. 지혁은 경찰의 부 탁대로 사인을 해준 뒤 쓰러진 남자를 운전석 뒷자리에 실었다. 미진을 태우고 운전석에 앉은 지혁은 운전석 옆에 둔 생수를 마시며 숨을 돌렸다. “이런, 이런……. 내가 보통사람들보다 좀 별난 경험을 많이 할 팔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레드 원이라니, 앞이 깜깜하구나.” 아버지의 입에서 레드 원이라는 말이 나오자 미진은 흠칫 놀랐다. “어? 아빠, 알고 계셨어요?” “당연하지. 좀 유명한 친구가 아니잖아. 밖에서는 물론이고 집에서도 레드 원 얘기를 하루가 멀다 하고 듣잖니.” “예? 집에선 왜요?” “네 엄마랑 언니가 나한테 레드 원 얘기를 얼마나 한 줄 아니? 저번에 레 드 원을 실제로 본 뒤 계속 저 친구만 생각한다며?” 순간 미진의 얼굴이 푹 익어버렸다. 지혁은 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씩 웃었 다. “괜찮아, 사춘기 때는 다 그래. 하여튼 어서 집으로 가자.” “병원이 아니라요?” “병원에 가면 저 친구랑 내가 좀 곤란하겠지. 주민등록번호가 없으니 받아 주지도 않을 걸?” “아하.” “그리고 치료는 걱정하지 마. 너희 할머니랑 엄마가 사람 고치는 건 또 전 문가 아니겠니.” “그래요?” “그렇고 말고.” 지혁은 그에 관련된 옛날 얘기를 해주며 차를 몰았다. 순전히 딸을 안심시 키고 자신도 진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뒷좌석에서 풍겨오는 피 냄새는 좀처럼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불길하군.’ 그런 생각을 하며 도로를 달리던 지혁은 순간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벌렸다. 항법장치에 운전을 맡긴 터라 사고의 위험은 없었지만 지혁의 가슴은 천근 만근 무거웠다. 만화와 같은 아버지의 오버액션에 미진은 움찔했다. “왜 그러세요, 아빠?” 딸의 물음에 지혁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할머니 생신선물.” “아…….” 레드 원에게 정신을 팔려 본래의 일을 잊어버리고만 부녀는 깊게 후회했지 만 차는 이미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가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어준 사람은 평소와 달리 지혁의 부인인 김미린이 아니라 장모 인 봉성선생이었다. 소녀처럼 기대감에 차있던 봉성은 선물 대신 사위의 등에 업힌 청년을 보고 한참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반응에 지혁과 미진은 누가 부녀지간 아니랄까봐 똑같은 미소를 지어 무언(無言)의 설득을 했다. 결국 봉성은 한숨을 쉬며 뒤로 물러났다. “내 생일선물 치곤 너무 젊군.” 장모의 뼈있는 농담을 들은 지혁은 도망치듯 집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으로부터 갑자기 풍겨온 냄새에 놀란 지혁의 부인, 김미린은 앞치마를 두른 채 부엌에서 뛰쳐나왔다. 그녀 역시 전직 BSP였던 만큼 피 냄새만큼은 민감했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도대체 누굴 데려온 거죠?” 지혁은 장모에게 보였던 것과 똑같은 미소를 지었다. “응, 그렇게 됐어. 리진은 아직 퇴근 안했나?” “오늘은 야간근무라서 내일 밤에 들어온다고 했어요. 어머니 생신이야 내 일이니 괜찮지만…….” 김미린의 걱정스런 시선은 청년에게서 떠나지 못했다. 청년, 레드 원을 소파에 눕힌 지혁은 장모와 부인에게 그에 대한 얘기를 대 강 해주고 치료를 부탁했다. 그러나 청년을 진찰해본 두 사람은 지혁이나 미진의 예상과 다른 결론을 내렸다. “뭐? 부상을 입은 게 아니라고?” 남편의 물음에 미린은 그에 대한 대답과 설명을 해주었다. “확실해요. 근육이나 뼈, 내장기관 모두 아무 문제가 없어요. 옷과 망토… 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걸치고 있던 것들에 묻어있는 피는 좀 오래된 것들 이죠. 적당히 잡아서 1주일 이상?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 냄새가 가 시질 않아요. 마치… 냄새가 혈흔 주위를 떠도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 에요.” “…….” 봉성이 이어서 말했다. “청년의 상태는 심신이 지쳐있는 거라고 보면 되네. 물론 좀 피곤한 게 아 니라 보통사람이라면 몇 번이고 죽었을 정도의 과로지. 더 재미있는 얘기를 해줄까?”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봉성은 사위를 뒤로 한 채 뒷짐을 지고 베란다로 나갔다. “저 청년의 영혼은 저승과 이승 사이에 걸쳐져있네. 그냥 저승도 아니고 지옥이지.” 지옥이라는 말에 지혁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인간이라면 불가능하지.” 봉성은 말하기에 앞서 곰방대를 꺼내 끝에 불씨를 넣었다. 곰방대 끝과 봉성의 입에서 연기가 올랐다. 일반 담배가 아닌 듯 연기의 냄 새가 매우 향긋했다. 마치 신선처럼 곱게 연기를 내쉰 봉성은 사위와 딸, 그리고 손녀를 보며 말 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나의 주 직업은 무당이야. 무당은 정신적 교신을 통해 저승에 있는 영혼의 목소리를 현세의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지. 그 교신작업을 사람들은 신들림이라 부르네. 그런데 교신을 할 수 있는 영혼은 따로 있어. 극락과 지옥이라는 절대영역에 있는 영혼과는 교신할 수 없네. 오로지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과 교신할 수 있지.” “…….” “하지만 그 절대영역에 아예 도달할 수 없는 건 아니야. 나 정도의 능력을 지닌 최고급 무당이나 샤먼, 엑소시스트라면 극락과 지옥의 영혼들과도 접 촉이 가능하지. 단, 천국의 문지기와 지옥의 문지기에게 들키면 곤란해. 그 들에게 들키면 아예 그 영역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지. 아무리 강력한 영 혼을 지닌 사람이라 해도 그들의 힘을 이겨낼 수는 없거든. 그런데 저 청년 은 그렇지 않아.” 봉성은 다시 연기를 빨아들였다. 지혁이 물었다. “그렇지 않다 하시면……?” “얼마나 오래됐는지 모르겠지만 어림잡아 한 달? 그 이상의 시간 동안 자 신의 영혼을 이승과 지옥의 영역 사이에 두고 있지. 지옥의 문지기에게 영 혼을 잡히지 않고 말이야. 그건 사람의 능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해. 몇 백 년 이상 살면서 심신을 단련할 수 있다면 모를까.” “몇 백 년?” 지혁과 미린, 미진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청년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의 얼굴은 나이를 아무리 많게 잡아도 30대 초반이나 중반이었다. 봉성이 말한 단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였다. “아무튼 저 청년에게도 한계가 온 듯 하군. 더 이상 영혼을 이승과 지옥의 사이에 둔다면 청년의 영혼은 그 틈새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 황에 이르게 될 걸세.” “그렇군요. 하지만 장모님, 그가 어째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계속 하 고 있는 겁니까?” 지혁은 말을 한 뒤 자신이 왜 이런 질문을 했나 생각해봤다.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저 레드 원은 아무 상관도 없지 않는가? 아직까지 도 의(義)와 협(俠), 그리고 인(仁)에 따라 행동하려는 것인가? 가장으로서 통장의 잔액과 직업, 의식주라는 현실로부터 지켜야 할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은데?’ 지혁은 속으로 자신을 비웃었다. 자신은 왜 ‘그렇다’는 대답밖에 하지 못 하냐면서. 사위의 망설임을 조금 느꼈던 봉성은 의미 있는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지.” 봉성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인을 맺고 주문을 외웠다. 주문이 길어질수록 방이 점차 어두워졌다. 미진은 형광등을 의심하고 그쪽 을 올려다봤다. 형광등의 빛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 주위에 구름을 연상시키는 하얀 연기 들이 보였다. 그것들을 자세히 쳐다보던 미진은 순간 기겁하며 모친의 팔에 달라붙었다. 놀랍게도 그 연기 덩어리의 표면엔 사람의 얼굴과도 같은 음영이 존재했다. 게다가 그 음영들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다양한 표정을 연출했다. 연기들은 형광등 주위를 잠시 머물다 물고기처럼 허공을 헤엄쳐 사라졌다. 그런데 그 뒤로 다른 연기들이 벽을 뚫고 들어와 주위를 이리저리 배회했 다. 주문을 끝난 봉성은 수인을 맺은 채 말했다. “가로와 세로가 3미터, 높이가 2미터 정도 되는 작은 공간이지만 이곳이 바로 저승과 이승의 틈새네. 공중에 떠다니는 저 허여멀건 한 것들이 바로 이승을 떠도는 영혼들이지. 지금은 술법을 일부러 완전하게 전개하지 않아 서 저들에게 영향을 받을 일은 없으니 안심해.” “저어, 영향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미진이 두려움에 휩싸인 목소리로 물었다. 강아지처럼 모친의 뒤에 숨어있 는 손녀의 모습에 봉성은 싱긋 웃었다. “최악의 경우 육체를 빼앗길 수가 있단다. 보통 귀신이 들렸다고들 하지. ” “…….” “아무튼 저 청년이 지키고자 하는 게 바로 저기 있네.” 봉성은 수인을 풀고 곰방대의 끝으로 청년을 가리켰다. 그의 가슴팍 위엔 하얀 구체 하나가 내려와 있었다. 그것은 크기도 비교적 클뿐더러 다른 영혼들에 비해 훨씬 하얗고 빛이 밝았다. 곰방대를 입에 문 봉성은 그 구체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한참 후, 무 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저 청년,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 것 같아.” 봉성은 베란다 앞에 놓인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저 영혼은 보통의 것과 달라. 지옥에서 온 혼불이야. 게다가 제물이지.” “제물이요?” “그래. 악마에게 육체를 뜯어 먹힌 제물이야.” “…….” 그녀가 수인을 다시 맺고 주문을 외우자 거실은 다시 환하게 바뀌었다. 거 실 사방에 있던 영혼들 역시 원래대로 모습을 감췄다. 오랜만에 술법을 쓴 봉성은 피곤한 듯 몇 번이고 자신의 주름진 얼굴을 쓰 다듬었다. “몇몇 어리석은 인간들은 우리보다 고등의 생물이라 할 수 있는 존재, 악 마와의 계약을 통해 강력한 힘과 재물, 능력을 얻는 경우가 있네. 자네도 알다시피 계약이라는 건 주고 받는 것이지. 악마와 계약을 하려면 얻는 힘 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악마들은 계약자의 신체 중 일부나 가장 소중한 물건, 또는 산 제물을 요구하는 수가 있네. 저 청년이 사력을 다해 보호하고 있는 영혼은 바로 그 산 제물이야.” “그렇습니까?” 지혁은 한탄하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부인 역시 시무룩한 얼굴로 딸의 머리를 매만졌다. 미진이 곁에 있었기에 말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BSP 중에 악마와 계약해서 힘을 얻은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언젠가 큰 사건을 몰고 올 거라 예상은 했지만 지금처럼 불길한 현실로 닥쳐오니 한없이 막막했다. “어험.” 봉성의 헛기침 소리가 부부의 의식을 일깨웠다. “자세한 사항은 저 청년이 깨어나기 전까진 알 수 없을 것 같네. 일단 저 청년은 빈방으로 옮겨서 재우도록 하지. 청년의 힘이 완전히 떨어져서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청년의 옆은 내가 지키겠네.” “예, 장모님.” 청년을 빈방에 옮긴 뒤부터 샤워를 하고 식탁 앞에 앉았을 때까지 지혁의 불길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혁은 지금의 현실이 매우 두려웠다. 두 번에 걸친 소울게터 사건을 거치 며 상식 밖의 일에 대한 공포를 여실히 느낀 그였다. 그런데 이번엔 악마라 는, 생전 만나보지 못했던 초현실적 존재가 관련된 일에 얽히고 말았다. 모든 것이 레드 원을 집에 들여놓으면서부터 알게 된 사실이다. 아무리 지 혁이 강단 있는 인물이라 해도 지금은 좀 후회가 들었다. 김미린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걱정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그들의 분 위기 때문인지 식탁 위는 매우 조용했다. 좀 심하게 말해서 젓가락 부딪히 는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둘 사이에 낀 미진은 아버지의 눈치를 계속 봤다. 뭔가 묻고 싶은 게 있는 눈치였다. 평소였다면 눈치 빠른 지혁이 먼저 물었겠지만 그에겐 지금 딸을 볼 정신조차 없었다. 이윽고, 지혁이 수저를 놓고 물을 들었다. 미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었 다. “아빠, 한 가지 여쭤 봐도 돼요?” “응? 말해봐.” “어째서 저 분을 구해주셨나요?” 그러자 지혁은 씩 웃으며 딸의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인정상 그런 것도 있고, 또 그냥 가버렸으면 우리 미진이한테 나쁜 소리 를 들을 것 같았거든.” “…….” “아빠 잘 했지?” “아빠는 항상 최고에요.” 미진은 아빠의 허리를 꼭 껴안아 고마움을 표시했다. ※※※ 눈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몇 천, 몇 만, 정도 되는 사람들이 도화지 처럼 그저 하얗기만 한 평면공간에 이리저리 서있었다. 어떤 이는 농사를, 어떤 이는 교사를, 어떤 이는 군인이었다. 여자와 아이 들, 노인들도 보였다. 전부 각자의 인생을 나름대로 영위하며 살아가는, 매 우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 한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그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마는 금세 식은땀으로 범 벅이 됐고 손과 팔에도 땀방울이 맺혔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가운데 놓고 모여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왜 그러세요, 영웅님.” “어서 정신을 차리고 우리를 도와주세요.” “저희는 평화로운 세상을 원하고 있어요.”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어요.” “당신만이.” “오직 당신만이.” 남자는 자신의 풍성한 붉은 장발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만해, 난 그런 대단한 존재가 아니야!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야 ! 날 제발 가만히 놔 둬! 내가 뭘 하든 상관하지 마!” 그러나 사람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몇 만 명이 하나가 되어 외치는 그 목소리는 그 어떤 압박보다도 강렬했다. “그만 하라고 했잖아! 그만해! 계속 이러면 모두 죽여 버리겠어!” 순간 인파의 저 끝에서 피의 분수가 올랐다. 사람들의 목이 뭔가에 잘린 듯 이리저리 떨어졌다. 머리들이 한꺼번에 핏물 위로 떨어지며 내는 소리는 남자의 의식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가, 갑자기 왜 그래? 또 뭐야! 또 뭐냐고! 도대체 누가 이러는 거야!” 그는 사방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그러나 보이는 건 목의 단면에서 피를 뿜 으며 서있는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그때,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머리통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와 남자의 발에 부딪혔다. 남자는 겁에 질린 눈으로 그쪽을 바라봤다. 피로 흠뻑 젖은 아이의 눈동자가 그를 번쩍 응시했다. 남자의 몸이 경기를 일으키듯 들썩였다. 아이의 조그만 입이 피를 토하며 움직였다. “진짜 우리를 죽였네?” “으, 으아아아아악!” 그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어딘지 모를, 끝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세계 를 향해. 그리고 눈을 떴다. “…….” 눈앞에 낯선 책장이 보였다. 연청색의 깔끔한 벽지와 아로마 램프에서 풍겨 오는 안정적인 향기가 조화를 이룬 아담한 방이었다. 자신은 상반신을 일으킨 채 숨을 헐떡이고 있다. 전신은 땀과 경련으로 엉 망이다. 지금 보고 느끼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은 청년, 리오는 땀에 흠뻑 젖 은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또 그 꿈인가…….” 그의 손에 둔한 촉감이 왔다. 리오는 깜짝 놀라 옆을 돌아봤다. 처음 보는 노파가 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아니, 처음 보는 게 아니다. 어디선가 얼핏 본 것 같았다. 그런데 언제, 어 디에서 봤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악몽을 꿨소?” 노파의 주름진 입술이 움직였다. 리오는 말없이 수건을 받아 얼굴과 목을 닦았다. 노파는 묵묵히 그를 지켜 봤다. 잠시 후 리오가 물었다. “여긴 어디지?” “내 사위의 집이오. 그리고 오늘은 내 생일이지.” 농담 같은 노파의 대답에 리오는 실소를 터트렸다. “후, 축하하오. 그런데 내가 왜 당신 생일날 당신 사위의 집에 있는 거요? ” “어제 내 사위가 만신창이가 된 당신을 끌고 이곳으로 왔소. 기억나지 않 소?” “…….” 수건으로 입가를 덮은 채 가만히 생각을 하던 리오는 순간 움찔하며 주위를 돌아봤다. “내 검과 망토는?” “저기에 놨소.” 노파는 리오의 바로 뒤쪽을 가리켰다. 그녀의 말대로 보라색 검은 이불처럼 접힌 회색의 망토 위에 가만히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리오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드러누웠다. “소중한 물건이오?” 노파가 다시 물었다. 리오는 누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날 영웅으로 생각지 않는 친구들이거든.” “하긴, 물건은 솔직한 법이외다.” 노인은 씁쓸히 웃었다. “배고프지 않소이까?” “조금. 하지만 대접할 필요는…….” “미진아! 미진이 있니?” 노파는 리오의 말을 무시하듯 방문을 향해 소리쳤다. 빠른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작은 키의 소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 어왔다. 멜빵바지 차림의 그 단발머리 소녀를 보던 리오는 흠칫 놀랐다. 처음엔 좀 낯이 익다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녀가 누군지 확실히 떠오른 것이 다. “너는……?” 소녀, 하미진은 조금 부끄러운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오, 오랜만이에요, 기사님.” 잠시 후, 리오는 미진이 가져온 빵과 우유로 허기를 달랬다. 밤새도록 그를 지키고 있던 봉성은 좀 쉬겠다며 방을 나갔다. 결국 방엔 리오와 미진만이 남게 되었다. 리오는 빵을 묵묵히 입안에 구겨 넣었다. 먹는 속도가 빠르지 않았기에 미 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어, 빵이 맛없나요?” “응.” 그의 대답은 매우 짧고 간단했지만 미진의 기를 팍 꺾는데 부족함이 없었 다. “죄송해요, 엄마께서 아침운동을 가신 시간이라 드릴게 그것 밖에 없었어 요.” “…….” 리오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분위기가 점점 어색해짐을 깨달은 미진은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문득 옛 일을 떠올렸다. “아, 그건 그렇고 정말 오랜만에 뵈어요. 그땐 정말 고마웠어요. 기사님 덕분에 지금은 몸도 많이 좋아졌고 언니와도 사이가 좋아졌…….” “볼 일 다 봤으면 꺼져.” “네?” 미진의 얼굴은 순간 백짓장처럼 변했다. 리오는 자못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봤다. “말 못 들었나? 꺼지라고 했잖아!” “시, 실례했습니다.” 미진은 그야말로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제길.” 리오는 굳게 닫힌 문을 보며 씁쓸히 중얼댔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방이 어두워졌다. 창문에 빛이 환하게 어린 것을 봐서는 먹구름이 해를 가리는 등의 자연적 현상과는 상관이 없는 상황임이 분명했 다. 전신을 휘감는 오싹한 느낌, 그리고 그 느낌을 배가시켜주는 어둠. 이런 것 엔 이미 익숙해진 리오는 악에 받힌 듯한 미소를 지었다. “너냐? 후훗, 오늘은 왜 안나오나 했다.” 리오의 앞에 깔린 어둠 속에서 하얀 색의 둥근 빛덩이가 떠올랐다. 리오의 앞으로 스멀스멀 다가온 구체는 그의 주위를 배회하며 여러 차례 빛을 반짝 였다. 마치 구조대원들이 조난자의 상태를 보기 위해 플래시 라이트를 비추 는 듯한 모습이었다. 리오는 벌레를 쫓듯 손으로 구체가 있는 쪽을 슬쩍 휘저었다. “내가 무슨 꿈을 꾸든 너랑 무슨 상관이지? 그래, 네가 본 게 맞아. 난 그 사람들을 죽였고 그 세계를 멸망시켰어. 그 때문에 계속 그런 거지같은 꿈 에 시달리는 거야. 이제 됐나? 궁금증이 풀렸으면 썩 꺼져. 난 더 쉬어야겠 어.” 투덜대며 자리에 누운 리오는 이불을 머리 위에까지 덮음으로서 귀찮다는 의사를 확실히 전달했다. 하지만 구체는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리오의 주위를 배회했다. 빛이 반짝이 는 속도도 평소에 비해 빨랐다. 그렇게 10여분이 지나자 결국 리오는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내가 왜 그 꼬마한테 사과해야 하는데? 난 꺼지라고 한 것뿐이야, 귀찮다 고! 내가 그 꼬마를 죽이기라도 했어? 아니잖아! 네가 상관할 이유가 없어! ” 그가 언성을 높였음에도 불구하고 구체는 계속 빛을 뿌리며 그를 재촉했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한 리오는 손으로 구체를 움켜쥐었다. 그의 손 안에서 구 겨진 구체는 작지만 강한 스파크를 뿌리며 파르르 떨었다. “잘 들어. 너도, 그 꼬마도,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내가 뭘 하든 상관 할 자격이 없어. 난 그냥 누가 시키는 대로, 내가 내키는 대로 할 뿐이야! 난 더 이상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그저 싸울 수만 있는 인형에 불과 해!” 리오는 구체를 맞은편 벽에 집어던졌다. 벽에 부딪힌 구체는 잠시 그곳에 붙어 있다가 다시금 리오에게 다가가며 빛 을 반짝였다. 그러자 리오의 얼굴이 도끼질 당한 거목처럼 심하게 일그러졌 다. “뭐라고? 너…….” 그는 기가 막힌 듯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사이 구체는 훌쩍 사라졌고 방을 휘감은 어둠도 말끔히 걷혔다. 리오는 가만히 벽을 바라봤다. 방금 전 구체, 아니 영혼이 한 말은 그에게 상당한 충격을 준 듯 했다. “겁쟁이?” 그는 웃었다. 그리고는 헝클어진 장발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겁쟁이라고? 그래, 겁쟁이라면 어쩔 건데? 빌어먹을 귀신 대가리 같 으니…….” 강하게 되뇐 그는 망토와 검을 챙겨들고 방문을 열었다. 행동이 좀 다급한 것으로 봐서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어 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방문을 열자마자 뒷짐을 진 채 서있는 봉 성을 본 것이다. 봉성은 근엄한 얼굴로 리오를 바라봤다. “벌써 나가는 것이오?” “그럴 거라면?” 대답은 상당히 시비조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불쾌감을 가졌겠지만 나이만큼 이나 산전수전 다 겪은 봉성에겐 그저 웃음만 나오게 할 뿐이었다. “그냥 가면 못쓰지. 어제 우리 사위와 손녀가 젊은이를 그대로 놔두고 왔 다면 아침이 좀 달랐을 것이오. 경찰 유치장에서 보호를 받으며 맛없는 인 스턴트식품으로 끼니를 때웠겠지. 조사도 좀 받았을 것이고.” “그래서?” “약간의 고마움이라도 표시했으면 좋겠다는 말이오. 괜히 우리 손녀만 화 나게 하지 말고.” 봉성은 엄지로 자신의 어깨너머를 가리켰다. 노파가 가리킨 곳, 거실 소파엔 미진이 꽤 화가 난 얼굴로 씩씩대고 있었 다. 침대에 틀어박혀 울고 있을 거라는 리오의 예상이 멋지게 빗나가는 순 간이었다. 리오는 봉성의 말을 의연하게 받아넘겼다. “아, 그런가? 그럼 날 구해준 대가로 할멈과 할멈 가족을 살려주지. 원래 날 본 사람은 다 죽어야 하거든.” “…….” “잘 있으시지. 나에 대한 건 잊어.” 리오는 봉성의 옆을 돌아 현관으로 향했다. 그 순간, 봉성의 손이 리오의 앞을 막았다. 리오는 눈을 부릅뜨고 봉성을 바라봤으나 노파의 표정엔 한 치의 변함도 없었다. “덩치는 커가지고… 생각하는 건 애들 반 푼어치도 안 되는군.” 리오가 꿈틀했다. “호오, 날 자극하는 건가? 이러면 수명에 도움이 안 될 텐데?” 그는 웃었다. 그의 미소는 미진의 화를 단숨에 냉각시킬 정도로 살기등등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성도 웃었다. 노파는 경직된 리오의 팔을 손으로 툭툭 쳤다. “이 살기… 그리고 이 힘. 이 세상의 기운이 아니로군. 도대체 얼마나 많 은 사람들을 저세상으로 보냈기에 이런 기운을 내뿜을 수 있는 건가?” “할멈의 흰머리 개수보다 많을 걸, 아마도.” 그의 비아냥거림에도 불구하고 봉성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리오와 시선을 마주했다. “역시 그렇군. 그럼 사람들과 친해지는 게 어지간히 싫겠군. 아니, 어렵다 고 해야 하나?” “…….” “강력한 힘과 재주를 가진 사람은 어느 시점까지는 순수하지만 얼마 뒤엔 상당히 우쭐해지게 되오. 자신이 사람들에게 칭송되고 전설이 되어간다는 걸 직접 느낄 때부터일 거요. 처음엔 신이 나지만 뒤로 갈수록 그건 부담이 되지. 자신의 실수, 그로 인해 닥쳐오는 사람들의 실망은 최고의 두려움으 로 다가오게 된다오. 결국 그때부터 사람들을 피하게 되지.” 봉성은 슬슬 걸음을 옮겨 미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나이 탓인지 오래 서있 기가 조금은 힘든 모양이었다. 미진은 그런 할머니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눈앞의 신기한 광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던 리오가 웬일인지 가만 히 서서 봉성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가 나서 그런 게 아니라 뭔가 를 기다리는 듯한 눈치였다. 봉성은 곰방대를 꺼내 불을 붙인 뒤 얘기를 계속했다. “젊은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검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구려. 물론 강하겠지. 하지만 그 강함이 진정한 강함 은 아닐 거요. 이렇듯 아이처럼 남에게 해답을 바라고 있지 않소?” “…….” 뭐라 반문할 거리를 찾지 못한 리오는 그냥 가만히 있기만 했다. 봉성은 노파답지 않게 껄껄대며 웃었다. “허허헛,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건 없소. 살기를 뿜으며 검을 휘두르는 모 습, 지금처럼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 그리고 상처받기 싫은 나머지 모든 이 들을 배척하는 모습… 그 모든 모습들이 하나로 모여 젊은이 그 자체를 이 루는 것이외다.” 잠시 후, 리오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럼 난 어떻게 하면 좋은 거지?” “그냥 받아들이시오, 자신이 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젊은이에게 생긴다면 자연스레 옳은 답 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봉성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리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렇게 추상적으로 말고, 좀 더 확실하게 해줄 수는 없나?” 그 말을 들은 봉성은 담배연기를 길게 뿜으며 고개를 저었다. “답답하긴……. 인생이라는 것은 수학이 아니오. 젊은이에게 닥친 인생문 제에 대해서 내 어찌 대답해줄 수 있단 말이오? 1만의 사람이 있으면 살아 가는 방법 역시 1만 가지인 것을. 난 그저 조언만을 해줄 수 있다오.” 봉성이 답답해하는 것만큼 리오가 느끼는 답답함도 깊었다. 리오는 뜨거운 사우나에 들어온 사람처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좋아. 다시는 보지 말자고. 난 좋은 상황에선 필요 없는 사람이니까. ” “어허, 대가를 지불하라니까?” 봉성이 언성을 높였다. 결국 리오의 답답함은 극에 달하고 말았다. “대가? 방금 전에 말했잖아! 살려주겠다고!” “아, 그거? 그건 그렇다 치지. 하지만 상담비용은 받아야겠소.” “그래? 그럼 뭐든 말해보시지. 누굴 죽여줄까? 말만 해. 한 두 사람 정도 는 신문에도 나지 않을 정도로 깨끗이 죽여주지.” 그러자 봉성은 기다렸다는 듯 옆에 앉은 미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 손녀가 지금 내 생일케이크를 사러 가려 한다오. 같이 좀 갔다 와 주 시오. 요즘 세상이 좀 험해서 말이지.” 리오는 반 쯤 넋을 잃고 봉성을 바라봤다. 봉성은 왜 그러냐는 듯 웃었다. “뭐든 말해 보라고 하지 않았소?” “…….” 리오는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슬그머니 미진을 바라봤다. 봉성의 기습적인 발언에 놀란 건 리오뿐만이 아니었다. 미진 역시 붉게 달 아오른 얼굴을 어찌 주체하지 못한 채 할머니 뒤에 반 쯤 숨어있었다. 당황함과 놀라움이 시간 속에 희석될 무렵, 리오는 도망을 포기한 야수처럼 힘없이 한숨을 쉬었다. “좋아, 저 꼬마랑 함께 케이크를 사다주면 되는 거지?” 봉성은 승리를 거머쥔 여장군처럼 당당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 그럼 준비하고 나오렴, 미진아.” “네.” 힘없이 대답한 미진은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손녀의 방에서 옷장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봉성은 진지한 얼굴로 얘기를 꺼 냈다. “그런데, 자신이 있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리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일?” “마지막 계약자까지 모두 죽였을 때 벌어질 일을 감당할 수 있느냐는 말이 외다.” 리오의 분위기가 봉성만큼 진지해졌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봉성이 하고자 했던 얘기였다. “어디까지 알아낸 거지?” 리오가 물었다. 봉성은 대답하기에 앞서 곰방대를 물고 연기를 흡입했다. “젊은이가 데리고 있는 영혼에게 대부분 들었소. 밤새 그대의 주위에서 떠 돌더군. 덕분에 힘 안들이고 접촉할 수 있었지. 내 지식으로는 이해 못할 얘기도 많았지만 확실히 알아낸 건 젊은이가 번지수를 잘못 택했다는 것이 오. 하필이면 왜 그 영혼을 돕기로 한 거요? 자칫 잘못하면 이 세상이 멸망 할 수도 있단 말이오.” 리오는 고개를 거실의 어항 쪽으로 돌렸다. 형형색색의 열대어들이 파란 빛 깔의 수조 속에서 조용히 헤엄치고 있었다. 분위기를 아는 것인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난잡한 것과는 친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말했다. “그런 최악의 상황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어.” 그 말에 봉성의 하얀 눈썹이 꿈틀했다. “무모하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행동을 했단 말이오?” “말하자면 그렇지.” 너무도 무책임한 말이었다. 이번엔 봉성이 기가 막혔다. “이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젊은이의 과거가 용서받거나 사라질 수는 없소 ! 끔찍한 기억과 후회가 하나 더 생길 수도 있단 말이오!” “알고 있어!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야!” 방문을 열다가 리오가 소리치는 모습을 본 미진은 흠칫 놀라 다시 방문을 닫았다. 그러다가 다시 문을 살짝 열고 바깥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리오가 말했다. 감정이 격앙되었는지 주먹까지 불끈 쥐었다. “나 하나 때문에 이 세상이 멸망될 수 있는 것도 알고 무모한 짓이란 것도 알아! 할멈이 말했지? 내 스스로 내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고, 그것이 진짜 로 강한 것이라고! 이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 만큼은 확실히 받아들였어!” “무엇을?” “올바른 것을 위해 망설임 없이 움직이는 내 모습이야! 설령 그것이 또 다 른 자들의 올바름을 어기게 되는 것이라도 난 눈앞에서 벌어진 일로부터 도 망치지 않아! 지금은!” “…….” “난 나가있도록 하지.” 리오는 현관문을 열고 훌쩍 밖으로 나갔다. 봉성은 씁쓸히 웃으며 곰방대의 담뱃재와 불씨를 재떨이에 떨어트렸다. “이런, 이런…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군.” 그녀는 미진의 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진아, 혹시 논어(論語)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 방문 뒤에 숨어서 얘기를 엿듣고 있던 미진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거실로 나 왔다. “그, 그건 춘추전국시대에 공자(孔子)가 쓴 책이잖아요? 요즘 배우고 있어 요.” “그렇구나. 그 논어엔 이런 얘기가 있지. 논어 2편 위정(爲政)엔 자왈(子 曰), 견의불위(見義不爲) 무용야(無用也)라고 해서, 그 뜻은 의(義)를 보고 도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라고 한단다.” “네…….” 뒤에 주석을 달아주지 않았으면 뜻을 알 수 없을 뻔한 미진은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봉성은 씩 웃었다. “저 청년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어. 물론 논어니, 공자니 하는 것을 알 리 는 없지. 하지만 몸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그것을 깨우치고 있다는 것이지. ” 노파는 한탄했다. “얼마나 많은 싸움을 외롭게 해왔으면 저리 됐을꼬. 그 누구도 저 젊은이 의 속을 알아주지 않고 그의 능력과 외모만을 따져 그를 영웅취급 했을 텐 데……. 만인 속의 고독이란 것은 이런 걸 말하는 건가?” “…….” 미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속이 뜨끔해서였다. 아무리 그가 걱정되고 그의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해도 그가 그것을 받 아들일 리는 없다. 자기 자신부터 그를 능력과 외모만으로 따져 영웅이라 부르지 않았는가? 그런 사람이 자신 뿐만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미진 자신 말고도 앞서 그를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영웅시 하며 칭송했을 것이다. 그런 일 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면 그 누구라도 상처를 입고 외로워할 수밖에 없을 것 이다. 미진은 생각했다. 마음의 벽을 처음 쌓기 시작한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를 영웅이라 부르는 모든 사람들일지도 모른다고. 그 생각은 소녀에게 뭔가 결심을 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저, 가볼게요.” 짧게 인사한 미진은 서둘러 현관 밖으로 나갔다. 봉성은 소파 깊숙이 몸을 밀어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의 준비를 굳게 해둬야겠군. 악마를 상대하긴 처음인데 말이야…….” 그의 깊은 걱정에도 불구하고 어항 속의 열대어들은 여전히 한가로워 보였 다. ※※※ 오전 순찰을 마치고 본부로 돌아온 지크는 피곤한 듯 휴게실 벤치에 드러누 웠다. 사실 그가 피곤해할 일은 없었다. 어제 사건의 뒷정리는 군과 매트로 서울 에서 맡았고 오늘은 이렇다할 BG사건도 없었다. 정확히 말해 차만 타고 왔 다 갔다 했을 뿐이었다. 피로의 원인은 바로 그의 형제였다. ‘리오 녀석, 정말 그 재수 없는 녀석한테 진 거야?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그 질문을 어젯밤부터 계속 되풀이하고 있는 그였다. 그의 곁으로 커피를 손에 든 리진이 다가왔다. 그 옆엔 류페이와 오늘 복귀 한 챠오도 있었다. 리진이 무릎으로 그의 어깨를 살짝 눌렀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왜 이렇게 늘어져있어?” “몰라.” 이유를 솔직히 말할 수 없는 지크로선 그렇게 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성의 없는 대답에 리진은 발끈했지만 최선을 다해 참았다. 최근 스트 레스 때문에 피부가 나빠지는 게 아니냐는 얘기를 들어서였다. 양손에 커피를 각각 들고 있던 류페이가 왼손에 든 것을 지크에게 내밀었 다. “고민이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혹시 모르잖아요.” “음…….” 지크는 상체를 일으켜 커피를 받아들었다. 그때 뭔가 번쩍 하고 떠올랐다. “꼬마, 혹시 사논 더글라스라는 여자 알아? 어제 얘기가 나왔던…….” “아, 샤논 씨요? 물론 알죠.” 지크는 커피를 후루룩 마셨다. “어떤 여잔데?” “음… 그 분이 안 계신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하기엔 좀 그렇지만 지나치 게 조용하신 분이세요. 다른 분들과 친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조용하시기 만 해요.” “그래? 그 외에 특이한 점은 없고? 음침하다던가.” “거, 거기까진 저도 잘… 그냥 상견례만 했을 뿐이에요. 아, 그러고 보니 아까 31층 휴게실에서 칼킨 씨와 만나고 계셨어요.” “정말?” “네. 하지만 지금은 계실지 모르겠네요.” “좋아, 알았어.” 지크는 농구를 하는 듯한 자세로 빈 종이컵을 종이컵 전용 재활용통에 던졌 다. 그가 간 뒤 리진은 곧장 불만을 터트렸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사건의 주범인 레드 원이 사라져서 더 이상 특별 한 일도 없는데 어째서 아직도 신경을 쓰는 거지? 레드 원을 자기가 잡지 못한 게 그렇게 억울한가?” “아니야.” 챠오가 짧게 말했다. 리진은 놀란 눈으로 슬그머니 챠오를 돌아봤다. “아니라면?” “승부욕과는 별개의 문제야. 사건 자체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거겠 지.” “뭐? 어째서? 사건은 어제부로 종결됐다고 지부장님께서 말씀하셨잖아?” 챠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 사건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어. 적어도 그런 눈치 야.” “음,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류페이도 거들었다. “어제 지크 선배님께서 레드 원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지나치게 흥분하 신 것, 기억하시죠? 제가 듣기로는 사건해결을 칼킨 씨께서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흥분하신 건 아닌 것 같았어요. 오히려 레드 원에 대한 변호를 하시 는 듯 했죠.” 듣고 보니 리진도 그렇게 생각됐다. “음… 그렇다면 혹시 이런 게 아닐까?” 그녀가 검지를 펴고 의견을 제시했다. “레드 원을 짝사랑하는 거야, 지크가! 저번에 보니까 레드 원이라는 남자, 생기긴 꽤 잘 생겼던데?” “…….” 챠오는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리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류페이는 둘을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노, 농담이야! 농담이라구! 그런 사이는 아니더라도 일단 아는 사이라는 느낌은 드네? 그렇지? 에이, 너무 신경 쓰지 마, 챠오. 하하하.” 그렇게 둘러대긴 했지만 리진의 얼굴빛은 가히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류페이의 말에 따라 31층 휴게실로 간 지크는 운이 좋게도 휴게실에서 막 나오는 칼킨, 그리고 샤논 더글라스와 마주쳤다. 처음 보는 샤논의 이미지는 평범 그 자체였다. 그냥 그런 금색 곱슬머리에 헤어밴드를 한 평범한 외모 등,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특별하지 않았다. 특 징을 꼭 집어내자면 보이지 않는 음침한 오오라 같은 것이 미세하게 느껴진 다는 것뿐이었다. 칼킨은 별 말 없이 지크를 지나쳤지만 샤논은 지크를 상당히 경계했다. 심 각한 대인기피증 환자처럼 보일 정도, 아니 실제 환자처럼 보였다. 둘은 그렇게 지크를 뒤로 했으나 샤논을 그냥 보기만 하기 위해 온 것이 아 닌 지크로선 봐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이, 모르는 게 있어서 그러는데… 시간 좀 있나?” “잡스러운 건 BSP내부의 BBS를 사용하시지.” 칼킨은 그냥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샤논은 지크에 게 길을 가로막혀 그를 따라가지 못했다. “너한테 물어본 게 아니야, 토성머리. 볼일은 이 아가씨한테 있어.” “아, 그런가?” 자신의 테 넓은 모자를 빗댄 지크의 말에 칼킨은 쓴 웃음을 지었다. “알아들었으면 꺼져. 자, 나랑 얘기 좀 해보실까? 샤논 더글러스양.” 지크는 양손을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고 샤논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뒷골목 패거리들이 시비를 거는 양 매우 불량스러운 자세였다. 그런데 놀란 사람은 샤논이 아니라 지크였다. ‘어라?’ 샤논의 크지도, 작지도 않는 눈과 마주친 지크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악령이나 귀신에게서 느껴지는 그 특유의 느낌과 비슷했지만 좀 더 어둡고 음침했다. 이것은 그녀의 표정이나 외모, 성격에서 뿜어내는 느낌이 절대 아니었다. 그 느낌 때문에 지크는 하고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반면 샤논은 잔뜩 긴장 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자신이 그런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듯 했다. 그때 칼킨의 손이 지크의 어깨에 와 닿았다. “옥상으로 가자.” “뭐?” 지크는 한쪽 눈썹을 구기며 칼킨을 돌아봤다. “한 판 붙자는 거냐?” “아니.” 칼킨은 표정변화 없이 대답했다. “네 형제에 대한 얘기다.” “…….” 지크는 또 한 번 움찔했다. 지크의 신상명세서엔 가족이 레니뿐이다. 형제 아닌 형제가 있다는 사실은 레니와 처크 외엔 알지 못한다. 처크의 발설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칼킨이 농담을 했다고 보기도 좀 그랬다. 분위기로 봤을 때 칼킨은 어이없는 농담을 할 만한 존재가 아니 었다. 결국 지크는 칼킨을 따라 옥상으로 향했다. 홀로 남겨진 샤논은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가 아래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옥상에 도착한 두 남자, 지크와 칼킨은 오랫동안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고층빌딩의 옥상인 만큼 바람도 강했다. 그 바람을 한껏 맞으며 서있던 지 크는 상대방의 얘기가 나오길 기다리겠다는 듯 바닥에 정좌를 하고 앉았다. 반면 칼킨은 가만히 서서 멀리 보이는 매트로 서울의 남산타워를 주시했다. 40년 전이었다면 독한 스모그로 인해 보여도 희미하게 보였겠지만 대기오염 만큼은 걱정이 없는 지금은 오늘처럼 맑은 날엔 뚜렷이 보인다. 칼킨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보이던 구름뭉치가 왼쪽으로 이동할 무렵, 지크 는 기다리기 지쳤는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어이, 얘기를 할 거면 빨리 해! 뜸들이지 말고! 셋을 셀 동안 말하지 않 으면 날개 없이 비행하게 만들어 주겠어!” “그렇다면 말을 해야겠군.” 이윽고, 칼킨이 돌아섰다. “네 형제, 리오 스나이퍼는 지금 이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기 위해 안간힘 을 쓰고 있다.” “뭐?” 지크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그러다가 그는 양 어깨를 슬쩍 올리며 빙긋 웃었다. “무슨 소리지? 리오 스나이퍼? 그런 바보 같은 이름은 들어본 적 없어. 아, 그러고 보니 나랑 성씨가 똑같군. 스펠링까지 똑같나? 누군지 소개 좀 시켜줘.” 그러자 칼킨은 코웃음을 쳤다. “네가 지었다는 가즈 나이트라는 이름, 이미 우리들 사이에선 유명한 고유 명사가 됐다. 어지간히 급수가 낮은 악마들은 그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지. ” “…….” 가즈 나이트라는 말에 지크의 안색이 대번에 바뀌었다. “그럼 내 소개를 먼저 하마, 정식으로.” 칼킨은 모자를 벗어 자신의 가슴팍을 덮듯 대었다. “내 이름은 레오나르도 칼킨. 워싱턴 DC의 BSP… 이기에 앞서 이 세계와 지옥을 연결하는 데빌 커미셔너(Devil Commissioner)다.” “데빌 커미셔너?” “그렇다. 지옥의 악마와 지상계의 인간 사이에 계약을 주선해주는 역할을 하지.” “그럼 악마란 말이야?” “악마이긴 하지만 완벽하게 악마라고 할 수는 없지. 이 세계의 특성상 완 벽한 악마는 주신계와 악신계, 선신계의 3계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 의해 특 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면 일정기간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다. 그것이 다른 고급악마들에 비해 강하지 않은 내가 커미셔너라는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이유지.” “…….” 지크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칼킨이 악마라는 것도, 지금 칼킨이 한 말도 어 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반면 칼킨은 여전히 흐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곤란해 할 건 없다, 지크 스나이퍼. 너도 어차피 일반사람이 아닌 가즈 나이트가 아닌가? 피차일반이라고 생각되는데?” 지크는 그 말을 듣고 보니 머리가 좀 개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틈을 두어 생각을 정리한 그는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네가 악마라는 걸 모르는 거야?” “그렇진 않다. BSP의 최고위관계자, 즉 처크 켄트 지부장 이상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악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악마와 계약한 BSP 대원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 그럼 꼭 너를 통해야만 계약할 수 있는 건가?” “그렇지. 아까 말했듯이 3계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 의해 어지간히 강한 악 마가 아니라면 지옥으로부터 이곳으로 통하는 문을 함부로 열지 못한다. 열 수 있는 악마라 하더라도 힘의 소모가 크기 때문에 나를 통하는 것이 더 빠 르고 편하지.” “호오, 그렇군. 그럼 너를 없애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얼간이 클럽은 신 규회원 가입을 못 받는다는 말이겠네?” 그의 뼈있는 농담에 칼킨은 또다시 코웃음을 쳤다. “새로운 커미셔너가 나타날 때까지는 그렇겠지.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계 약자들을 만드는 건 내가 아니라 계약자 자신과 BSP의 핵심부다. 필요가 있 어야 공급을 하는 것이 경제의 기본 아닌가?” “…….” 거기에 대해선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칼킨은 검지를 펴서 지크를 가리켰 다. “계약자들이 BSP에서 천사 행세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BSP 자체 부터 부숴야 할 것이다, 지크 스나이퍼.” 듣고 보니 그랬다. 소위 계약자라고 불리는 존재는 예전에 처크가 말 한대로 BSP 자체에서 원 하고 있다. BSP 자체를 뜯어고치거나 계약자의 위험성을 만 천하에 알리지 않는 한 계약은 계속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에 대한 특별한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너희들이 먼저 그들을 꾀지 않았으면 계약자라는 것 자체가 없었 을 텐데?” “후후, 무식하군.” 칼킨은 고개를 슬며시 흔들었다. “커미셔너를 통한 악마와 인간의 계약은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관례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 아니지. 차이는 그 계약이라는 것이 조금은 표면으로 떠오른 것뿐이다. 아직도 모르겠나? 우리가 인간을 원하는 게 아 니라 인간이 우리를 원하는 거다. 마약이 인간을 잡아먹는 게 아니라 인간 이 마약을 흡입하는 것과 같지.” “…….” “이런 어려운 얘기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아까 네 의형제, 리 오 스나이퍼가 이 세계를 멸망시키려 한다고 했지? 왜 그런지 궁금하지 않 나?” “궁금하지.” 지크가 어린아이처럼 곧장 대답하자 칼킨은 속으로 연거푸 웃었다. 물론 대 놓고 웃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좋지 않은 일을 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일단 대답하기에 앞서 지난 일에 대한 것을 얘기해주지. 2년 전, 내 전자 메일에 여섯 명의 리스트가 들어왔다. 계약에 대한 의뢰였지. 하지만 여섯 명을 한꺼번에 계약시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어지간한 악마라 해도 두 명 이상과 동시에 계약해서 힘을 주는 건 힘들거든. 없는 힘을 주 는 것은 그만큼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칼킨은 벗고 있던 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계약을 해도 될 만큼의 대가를 치를 수 있었다. 그 래서 난 적당한 악마를 소개하여 그들과 계약을 맺게 했다. 하지만 그 악마 는 교활하게도 대가에 합당한 힘을 그들에게 주지 않았지. 특히 마지막에 계약을 한 샤논 더글러스는 네가 봤던 대로 형편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 리 악마의 지식이나 악마의 힘 따위는 받지 못했지. 그저 악마의 기운만을 받았을 뿐이다.” “음, 그래? 그런데 그게 멸망이니 뭐니 하는 것과 관계가 있나?” “물론이다. 아까 말하지 않았나? 어지간한 악마도 두 명 이상과는 계약하 기 힘들다고 말이다.” 그 말을 되새긴 지크는 흠칫 놀랐다. “그렇다면… 그 바보들이 여섯 명과 동시에 계약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악마와 계약했단 말이야?” “그렇다. 첫 번째 문제는 그 악마와 계약한 여섯 명이 스스로가 아닌 타인 의 힘에 의해 죽을 경우 마지막 계약자가 죽은 땅에 계약을 맺은 악마가 소 환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두 번째 문제는 그렇게 소환된 악마 의 경우 3계가 맺은 조약과 관계없이 무한정 이 땅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는 사실이다.” 지크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흠, 그래? 그럼 죽이면 되잖아?” “후후, 네 말대로 간단히 죽일 수 있다면 일은 간단하다. 커미셔너인 나도 관례상 신경 쓸 바가 아니지. 그러나 그 악마를 소환된 즉시 죽이지 못하고 지체하게 된다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뭔데?” “지옥에서 이 세계로 통하는 문은 열기가 쉽지 않다. 반면 이 세계에서 지 옥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 하급악마도 수십 개 정도는 대번에 만들 수 있지.” “…….” “그들이 계약한 악마는 고위급 악마인 분노와 폭력의 아이슈마(Aeshma)다. 악마왕이나 악마대공 같은 초고위급 악마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일 주일 정도면 세계 인구의 4분의 1정도는 쉽게 줄일 수 있지. 아이슈마 자체 의 강함도 있지만 바이오 버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물량공세도 있을 테니까. 부하가 꽤 많거든.” “그, 그래? 아이슈마라는 녀석, 얼마나 강한데?” “지금의 너와 리오 스나이퍼, 그리고 슈렌 스나이퍼라면 셋이 힘을 합해도 절대 이기지 못한다. 그는 어지간한 투신 수준이거든. 간단히 죽일 수 있는 상대라면 내가 참견할 이유도 없겠지.” 칼킨이 설명을 대강 끝내고 목을 쉬는 동안 지크는 안절부절 못했다. “이런… 리오 녀석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 그 녀석, 정말로 미친 거 아냐? 응? 빌어먹을!” 그는 벙벙 뛰어다니기 직전에 가까울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칼킨은 고개를 옆으로 살짝 숙이며 웃었다. “그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그리 나쁜 게 아니야. 오히려…….” “젠장, 그 녀석을 붙잡아야겠어! 아직 이 도시에 있겠지? 그렇지?” “그렇기야 하지만…….” “좋아, 네 놈에게 질 정도라면 나도 막을 수 있겠지! 리오 녀석을 막겠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거야!” 지크는 비상이 걸린 소방차처럼 계단을 향해 맹렬히 뛰어갔다. 그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칼킨은 손으로 모자를 내리누른 채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이유만 놓고 보자면 숭고하지. 그리고… 난 그를 이긴 기억이 없어.” 그렇게 말은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빵집의 분위기는 매우 묘했다. 유니폼을 곱게 맞춰 입은 여직원들과 빵집을 찾은 손님, 우연히 빵집의 쇼 윈도우를 바라본 사람들 모두가 한 남자와 소녀에게 눈을 빼앗겨 버렸으니 정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관심의 대부분은 남자 쪽에 쏠려있었다. 소녀 쪽도 또래의 아이들 중에서 상당히 예쁘고 귀여운 편이었지만 남자 쪽은 그걸 가릴 만큼 강렬한 매력을 풍겼다. 붉은 장발에 큰 키, 검은색 진에 소매 없는 갈색 T. 선명한 적동색 피부와 너무도 어울리는 단단한 근육. 반항적인 느낌의 준수한 외모 등등, 그 남자 가 가진 모든 것이 스스로를 빛나게 하고 있었다. 반면 옆에 있는 소녀는 그런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진열된 생일케 이크에만 시선을 집중했다. “이거 어때요?” 소녀, 미진은 하얀색 케이크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나 붉은 장발의 남자 는 다른 곳에 시선을 둔 채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주위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움찔한 미진은 그제야 매장 안팎의 여성 들이 자신의 동행인, 리오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 어쩌지? 빨리 나가지 않으면…….’ 그러나 외할머니의 케이크를 대충 고를 수는 없었다. 오랜 고심 끝에 케이크를 구입한 미진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빵집을 나섰다. 옆에 계속 서있던 리오는 묵묵히 그녀를 따랐다. 가는 도중에도 그 두 사람은 상당한 시선을 받았다. 그럴 것을 예상한 미진 은 일부러 인적이 뜸한 길을 선택했다. 리오는 올 때와 길이 다르다는 걸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드레일이 설치된 언덕길을 내려가니 집이 있는 아파트가 슬슬 보였다. 이제 집에 돌아가면 옆에 있는 남자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가 약속한 시간은 지금이 전부였다. 결국 미진은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저어, 옷은 언제 갈아입으신 거예요?” “갈아입은 게 아니라 마법으로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것뿐이야. 살아있는 육체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지만 무생물, 즉 옷과 검 등을 바꾸는 건 어렵지 않지.” 좀 바보 같은 질문이 아닐까 했지만 뜻밖에도 리오는 순순히 대답했다. 덕 분에 용기를 얻은 미진은 다음 질문을 계속했다. “혹시 해서 여쭙는 건데요, 기사님은 다른 세상에서 오셨죠?” “날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리오는 무서운 눈으로 미진을 바라봤다. 기사라는 호칭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미진은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그럼 성함이라도 가르쳐 주세요. 당신이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그쪽이라 고 부르기도 그렇잖아요?” “…….” 리오는 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찡그렸다. 곤란해서 그러는 것인지, 짜증이 나서 그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미진은 가만히 그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리오.” “네?” “리오 스나이퍼, 그게 내 이름이야. 이제 됐나?” “그렇군요! 와아, 드디어 기사님, 아니 리오 씨의 이름을 듣게 됐네요! 정 말 고마워요, 얼마나 궁금했는데요!” 미진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 모습을 한심한 듯 바라보던 리오는 한숨을 쉬 며 걸음을 옮겼다. “아, 잠깐! 아직 대답 안 해주셨잖아요!” 미진은 급히 리오의 팔을 잡아당겼다. 리오는 또 한번 눈을 감고 인상을 구 겼다. “또 뭔데?” “다른 세상에서 오신 게 맞는지, 좀…….” “아, 그거? 그래, 네 말대로 다른 세상에서 왔지. 됐나?” “그래요? 그럼 무슨 일 때문에 오셨나요? 어제 할머니께서 리오 씨가 누군 가의 영혼을 지키고 있다며 걱정하셨거든요. 그 영혼이 악마의 제물이라는 말씀도 하셨고요.” 리오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상대의 계속되는 질문에 화가 나서 그러기 보 다는 뭔가를 회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미진은 혼 자만의 생각을 계속 떠벌려댔다. “음, 아무래도 심각한 일이겠죠? 지옥이니, 악마니 하는 단어가 나오니까 말이에요. 그러면 정말 고생이시겠어요, 그렇죠?” “…….” 리오는 도로와 인도를 가로막은 가드레일 위에 걸터앉았다. 보통사람 허리 이하의 높이여서 사람이 앉기엔 무리가 없었다. 그렇게 앉으니 리오와 미진의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리오는 머리카락 사이 로 흐릿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은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네?” “보호하고 있다는 영혼 말이야. 그때 무시하고 건들지 않았으면 됐을 텐데 …….” 리오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미진은 자신의 마음이 가라앉 음을 느꼈다. 그렇게 슬프고 힘겨운 듯한 미소는 BSP가 된 것을 후회할 때 의 언니, 리진이 보여준 이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난 이곳에 오기 전에 명계에 있었어. 죽은 자들을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 놓는 바로 그 장소지. 왜 거기 있게 됐냐고? 당연하지 않겠어? 죽었으니 거 기 있었겠지.” “…….” “난 죽어도 죽지 못해. 죽은 후 3개월이 지나면 죽은 장소 근처에서 다시 살아나지. 왜 그런 줄 알아? 영웅이라서 그래. 그 빌어먹을 별칭을 내내 달 고 다녀야 할 운명이라 그런가봐.” 미진은 집을 나서기 전에 할머니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리오라는 남자 는 역시나 그 영웅이라는 단어에 대해 깊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 난 명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어. 내가 죽은 세상이 완전히 소멸된 상 태였거든. 되살아날 장소가 없었기에 나에게 명령을 내리는 존재가 새로운 지시를 내려주기 전까진 그곳에 있어야만 했어. 그런데, 거기서 그 녀석을 만났지.” “영혼 말인가요?” 미진의 물음에 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 거 아닌 영혼이었을 뿐이야. 명계에선 널리고 널린 게 영혼이라 볼 가 치도 없었지. 하지만 그 영혼은 자신을 지옥으로 데려가려는 저승사자의 손 길을 완강히 거부했어. 사실 그런 일은 흔치 않거든. 죽은 자의 영혼은 명 계에 오면서 삶에 대한 의지와 속세에 대한 욕망, 미련을 전부 잃어버리기 때문에 반항이란 있을 수 없어. 그러나 그 영혼은 아니었지.” 자기부상식 스포츠카 한 대가 쏜살같이 리오의 뒤를 지나갔다. 그의 붉은 장발이 바람에 흔들리는 불처럼 옆쪽으로 훨훨 타올랐다. 리오는 휘날리는 머리를 손으로 정돈하며 얘기를 계속했다. “난 왜 그러냐고 물었어. 영혼이 말했지. 자신은 꼭 돌아가야 한다고, 가 서 그들을 구해야 한다고 말이야. 그때 그 영혼을 데려가려던 저승사자가 시비를 걸었지. 네가 붙잡고 있는 저 덩치 좋은 녀석은 자신의 나약함에 미 쳐 수 천 만을 죽이고 세상을 박살낸 애송이라고 칭찬을 해주지 뭐야?” “네?” “‘네’는 무슨 ‘네’야. 내가 들은 그대로야. 난 수 천 만을 내 손으로 직접 베어 죽이고 마지막엔 세계 자체를 박살낸 남자야. 아, 이래서 내가 영웅이라 불리는 건가? 사람 하나를 죽으면 살인자고 천 명을 죽이면 영웅 이라는 말이 있잖아. 후후…….” “…….” 미진에겐 실로 충격적인 얘기였다. 그녀가 충격으로 인해 부들부들 떠는 것 을 본 리오는 씩 웃었다. “욕을 하고 싶으면 해. 하지만 고민해야 할 걸? 어지간한 욕은 나한테 통 하지 않을 테니까. 명계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 일 때문에 비난을 받았거든. 후후,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난 인정해야 해. 내가 잘못했다는 것 만은 사실이니까.” 미진은 손으로 가슴을 눌러 가빠지는 숨을 진정시켰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리오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리오는 그녀를 칭찬해주고 싶었다. 극악한 죄를 지은 상대방을 두려워하지 도, 피하지 않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미진 또래의 아이들에 겐 더욱 그랬다. 엄청난 바보나 호걸이 아닌 이상 지금 같은 상황을 만들 수는 없었다. “왜 그러셨는데요?” “…….” 리오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턱을 괴고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시험문제가 풀리지 않아 고민하 는 학생처럼 순수한 모습이었다. 도저히 사람들을 죽이고 세상을 멸망시킨 남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윽고, 그가 대답했다. “그렇게 하면… 그렇게 죄를 지으면 내가 소멸될 줄 알았거든. 불량품이라 는 이유로 주인에게 버려지는 물건들처럼 말이야. 그러면 더 이상 영웅이라 는 오해도, 기대도 받지 않을 거고 죽어도 다시 살아날 일이 없을 거라 생 각했어. 그러나 아무리 사람을 죽여도 난 소멸되지 않았어. 오히려 죄와 후 회만이 늘어갈 뿐이었지. 결국 난 아무도 남지 않은 그 세상을 부쉈어. 나 자신마저도. 하지만 명계에서 눈을 떴을 때 저승사자는 전과 똑같은 말을 했지. 다시 만나게 되서 반갑다고, 이번엔 왜 죽었냐고 묻더군. 결국 바뀐 건 아무 것도 없었어.” 마지막 말을 하는 리오의 모습은 매우 힘겨워 보였다. “그랬군요. 그래서…….” 미진은 그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자신의 영역을 뛰어넘는, 뭐라고 말 을 해도 전혀 위로해 줄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것인지 느 끼는 순간이었다. 리오가 다시 말했다. “내가 한 죄는 영원히 씻겨지지 않아.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한 절대 변할 수 없어. 설령 나에게 죽은 사람들이 날 용서해준다고 해도 말이야. 그래서 난 배우고 싶었어. 명계에서 만난 그 영혼에게서. 불가능인 것을 알면서도 덤비고 바꾸려 하는 그 의지를, 그리고 자신을 죽인 사람들조차 용서하고 걱정하는 그 마음을.” “왜요?” 미진은 짧게 물었다. 리오는 어깨를 으쓱댔다. “그냥,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아서.” “…….”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리오의 목소리로 들으니 왠지 모르게 쓸쓸했다. 다시 한번 세찬 바람이 불어 리오의 머리카락을 뒤흔들었다. 차가 지나간 건 아니다. 그렇다고 날씨에 걸맞은 냉풍이 분 것도 아니다. 리오는 바람이 불어온 쪽을 돌아봤다. 미진 역시 그쪽에 눈을 돌렸다. 언덕의 맨 위쪽, 편의점의 광고간판이 서있는 그곳엔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한 남자가 고개를 삐딱하게 꺾은 채 리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크.’ 리오는 가드레일에서 일어났다. 의형제를 만난 것에서 오는 반가움 때문이 아니라 의형제에게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투기가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이 다. “지크 오빠?” 미진은 의아한 얼굴로 중얼댔다. 리오는 앞으로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예고하듯 오른쪽 손목을 슬슬 풀며 물 었다. “저 녀석을 알고 있나?” “네, 우리 언니의 직장 동료에요. 예전에 저희 집에 식사를 하러 온 적이 있어서 그때부터 잘 알고 지내죠. 혹시 지크 오빠를 아세요?” 리오는 잠시 후 씩 웃었다. “아니.” 그 말을 들은 듯 멀리 보이는 지크 역시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지크는 터벅터벅 걸어 언덕 아래로 내려왔다. 리오는 가만히 서서 그를 기 다렸다. 두 남자 사이에선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어렴풋이 그것을 느 낀 미진은 뭐라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시선만을 앞뒤로 옮겼다. 이윽고, 두 남자가 마주섰다. 둘의 키는 비슷했다. 자세히 보면 지크가 조금 더 작았으나 압도적인 차이 는 아니었다. 많이 잡아봤자 3센티미터 정도였다. 덩치도 리오 쪽이 더 좋았다. 지크도 일반인과 비교해선 상당히 좋은 편이 었지만 리오만큼 양감이 풍부하진 않았다. 지크는 쓰고 있던 고글을 벗고 리오와 시선을 맞췄다. 리오 역시 가만히 그 를 응시했다. ‘잘도 날 찾아왔군.’ 지크의 머릿속에서 리오의 목소리가 울렸다. 전음이었다. 지크는 똑같은 전음을 통해 말했다. ‘어렵진 않았어. 좀 미약하긴 해도 네 놈의 기척이 느껴졌거든.’ ‘후후, 그래? 내가 긴장을 놓고 있었나보군. 어쨌거나 날 아는 척 하지 마.’ ‘어째서?’ ‘여기서 네가 형제니 뭐니 하면 너나 나나 처지가 이상해지니까.’ 지크는 미진을 흘끔 바라봤다. 더 이상 형제라는 것이 밝혀지면 곤란해진다. 알고 있는 사람은 처크만으로 충분하다. 리오가 그것까지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에 지크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어이, 미진.” 지크는 자신과 리오 옆에 서있는 미진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집에 돌아가 봐. 이 오빠랑 할 얘기가 있거든.” “그래요? 그럼 싸우실 건가요?” 미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덕분에 당황한 지크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 다. ‘하여튼, 언니보다 겁이 없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지크가 고민에 빠진 것을 본 리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남자들은 가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지.” 그 말로 인해 미진의 불길함은 현실이 되었다.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생각을 하던 그녀는 곧 고개를 들어 리오를 바라봤다.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나요?” 리오는 그녀를 보지 않고 대답했다. “난 좋은 상황에선 필요 없는 사람이야.” 리오의 입장에선 아예 만나지 말자는 말이었다. 하지만 미진은 진취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럼, 나쁜 일이 벌어지면 꼭 오실 거죠?” “…….” 이번엔 리오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지크는 자기 차례라는 듯 씩 웃었다. “꼭 올 거야. 내가 보장하지.” 그러자 미진은 흠칫 놀랐다. “어? 아는 사이세요? 모르는 분들끼리 어떻게 보장을…….” “…….” 지크의 얼굴은 납빛이 되었다. 그것을 통해 뭔가를 느낀 미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집을 향해 발길을 돌렸 다. “그럼 좋은 얘기 나누세요! 너무 심하게 하지 마시고요!” 한 손에 케이크를 굳게 든 그녀는 팔을 흔들며 저편으로 걸어가 이내 골목 안 쪽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간 뒤, 리오는 가볍게 냉소를 지었다. “후, 네놈이 그렇지, 뭐.” “웃기지 마! 저 꼬마의 눈치가 빠른 것뿐이야! 들통 나고 싶어서 난 게 아 니란 말이야!” 지크는 버럭 화를 냈다. 리오는 가만히 형제를 바라보기만 했다. 한 대의 대형 트럭이 지축을 울리며 언덕을 내려갔다. 트럭의 큰 덩치에 의 해 잠시 보이지 않았던 리오의 모습은 어느새 회색 망토 차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자아, 그럼 본론에 들어가 보실까?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그의 물음에 지크는 정색을 했다. “확인하기 위해서지. 네가 정말로 정신이 나가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아 니면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이런 건지 말이야.” “호오, 그런가? 하지만 분위기는 설문조사를 하기 위해 온 녀석은 아닌 것 같은데?” “물론 그렇지. 네가 말했잖아. 남자는 다른 방식으로 얘기를 나눌 때가 있 다고 말이야.” 리오와 지크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이 급속히 고조됐다. 시선을 마주한 두 남자는 이미 마음속으로 결심한 상태였다. 만약 누군가가 이들 사이에 끼어든다면 큰 봉변을 당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랑 붙고 싶나?” “물론이지. 칼킨이라는 놈이 헛소리 한 게 열 받아서도 이유지만… 넌 여 전히 최고거든. 슈렌도 강했지만 난 너에게 받은 임팩트가 더 커. 그래서 붙고 싶은 거다.” “그래? 그럼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날 이긴 다음엔 어찌할 건가?” 리오가 조금 거만한 얼굴로 물었다. 지크는 당연하지 않냐 하는 반응을 보 였다. “파티를 열어야겠지.” “좋아, 그럼 소원대로 해주지. 하지만 파티의 주인공은 내가 될 거다.” “누구 맘대로!” 지크의 주먹이 독기를 품은 코브라의 머리처럼 튀어나갔다. 고개를 옆으로 젖혀 첫 공격을 간단히 피한 리오는 오른손으로 망토의 반대 편 끝을 잡고 세게 펄럭였다. 생각 이상으로 빠르고 넓게 펼쳐진 망토의 압박은 강했다. 망토 뒤편에 있 는 리오의 모습이 지크에겐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망토가 회오리처럼 회전한다고 느껴진 순간, 보라색의 커다란 반월이 리오 의 앞에서 번쩍였다. 그 범위 안에 든 가드레일과 가로등은 거짓말처럼 깨 끗이 잘려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반 토막이 났어야 할 지크의 모습은 없었다. 리오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자신의 보라색 검을 위로 올렸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오르막길 가운데에서 울려 퍼졌다. 리오의 검 끝에 지크의 무명도 끝이 닿아 있었다. 칼로 리오의 머리를 노렸 던 지크는 자신이 공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곰처럼 아슬아슬하게 올려져 있 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녀석!” 리오의 검에서 뛰어오른 지크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착지했다. 리오는 천천히 검을 돌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리오는 턱을 움직여 상대를 도발했다. “다음은 어떤 재주를 부릴 건가?” 그에 대답하듯 지크는 무명도를 들고 잠깐의 연무를 선보였다. 몸과 마음을 가다듬기 위함이었다. 리오의 검무가 동작이 크고 시원시원하다면 지크의 것은 동작이 빠르고 스마트했다. “아직 많다. 지루해 할 필요는 없어!” 지크의 몸이 탄환처럼 튀어나갔다. 이윽고 리오와 지크 사이에 무수한 난타전이 벌어졌다. 공사장 절단기에서 나 튀는 화린(火鱗)이 둘 사이를 중심으로 사방팔방 날았다. 머신건의 탄환 처럼 끝없이 쏟아지는 지크의 공격도 대단했지만 그것을 일일이 받아치는 리오 역시 만만치 않았다. “흥!” 순간 리오가 지크의 가슴팍에 어깨를 들이밀었다. 초당 십수 발에 가까운 지크의 빠른 공격타이밍을 정확히 맞춰 들어온 훌륭한 공격이었다. “커헉!” 리오의 어깨에 받힌 지크의 몸이 크게 꿈틀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지 지크의 입에선 기침에 가까운 같은 거친 음색이 흘러나왔다. 눈앞이 흐려지고 전신의 감각이 둔해졌다. 이대로 누워 편해지고 싶을 정도 였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상대는 이미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이런, 안돼! 이렇게 허무하게 끝낼 순 없어!’ 지크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으나 그의 동작은 너무도 둔했다. 지금 상태 라면 유치원생이 휘두르는 가방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후후.” 리오는 내리치려던 검을 웃으며 뒤로 뺐다. 지크는 형제의 여유 만만한 얼 굴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자아, 1대0이다. 보여줄 게 많다고 주장을 하니 이렇게 끝낼 수는 없지. 안 그래?" “이, 이 녀석!” 발끈한 지크는 등을 펴려다가 욱 소리를 내며 다시 굽혔다. 아직 리오에게 당한 충격이 고스란히 남은 상태였다. 그들이 그렇게 승부를 즐기는 한편, 사건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쪽으로 흘러갔다. “케빈, 지크는 아직도 응답이 없나?” “신호조차 가질 않습니다. GPS로도 찾을 수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지크의 PDA가 파손되거나 고장이 난 것 같습니다.” “허어, 이거 골치 아프군.” 그렌은 합성수지로 덮인 자신의 손으로 대머리를 매만졌다. 케빈도 고민스 레 담배를 물었다. 그들의 뒤로 분대 규모의 전투경찰들이 열을 맞춰 지나갔다. 거리 저편에선 추가병력을 실은 버스까지 접근해왔다. 현재 BSP와 전투경찰들은 오래간만에 일어난 대규모 BG사건을 처리하기 위 해 모여 있었다. 점심시간 직후에 터진 일이라 다른 BSP대원들의 소집엔 문 제가 없었지만 오직 한 명, 지크만이 연락두절로 도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 편으로는 걱정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지크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레오나르도 칼킨이 임시로나마 합류해 있기 때문이었다. “지부장님께서 아시면 또 난리를 치시겠군.” 그렌은 고개를 저으며 귓가를 눌렀다. 그의 인공 귓바퀴 속에 내장된 버튼 을 눌러 통신주파수를 바꾸는 것이다. “그렌 헤이그 소령이다. BG들의 움직임은 어떤가?” “지금 확인된 개체 수는 약 400정도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건물 안이나 지 하에 숨어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까지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 “알았다. 상황이 바뀌면 즉시 연락 바란다.” 귀에서 손을 뗀 그렌은 주먹으로 이마를 치며 긴장을 풀었다. “하아, 어찌될지 막막하군.” “선배님은 언제나 그러시는군요.”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케빈이 씩 웃었다. 그렌 역시 웃었지만 조금은 힘이 빠진 듯한 미소였다. “이 일을 20년 가까이 한 나지만 작전 전에 긴장이 되는 것만큼은 정말 어 쩔 수 없군. 자네는 괜찮나?” “괜찮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기저귀를 차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한다 니까요?" 두 남자는 폭소를 터트렸다. 옆에 있던 리진과 류페이도 싱긋 웃었다. 가만히 있는 사람은 챠오와 칼킨뿐이었다. 그런데 둘의 침묵은 그 내용이 달랐다. 한 쪽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누군가를 걱정하느라 웃지 못한 것이 고 다른 한 쪽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민거리 때문에 도저히 웃을 상 황이 아니었다. 잠시 후, 칼킨이 그렌에게 다가갔다. “소령님, 정찰을 허가해 주십시오.” “정찰? 갑자기 무슨 말인가?” “BG들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입니다. GPS탐색기가 제대로 작동 하지 않는 상태라면 직접 정찰이 가장 좋습니다.” “그건 알지만 녀석들의 숫자가 너무 많네. 게다가 이 지역은 고층빌딩과 지하시설 등의 은폐물이 많아서 정글이나 다름없어. 아무리 자네라도 위험 해.” “정확히 5분 뒤에 돌아오겠습니다.” 칼킨은 그렌에게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였다. 그가 이렇게 고집이 센 남자인 줄 몰랐던 그렌은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실소를 터트렸다. “허허, 이거 지크 이상이로군. 하지만 안돼. 설령 지부장님께서 자네에게 정찰임무를 맡긴다 해도 내가 현장책임자인 이상 절대 허락할 수 없네.” “…….” 무모함 보다는 안정을 중요시하는 그렌의 성격상 칼킨의 요청은 터무니없는 허언에 불과했다. 그의 방침이 워낙 확고했기에 칼킨 역시 함부로 뭐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단 몇 초 만에 바뀌고 말았다. 한 젊은 전투경찰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렌 소령님! 긴급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말은 긴급사태였지만 그렌이나 다른 BSP들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BG관련사 건이 워낙 변수가 많은 일이기 때문에 무슨 큰일이 발생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무슨 일인가?” 전투경찰은 일단 경례를 붙인 뒤 보고를 개시했다. “민간인 한 명이 전투경찰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위험구역 안으로 진입했습 니다!” “뭐라고?” 듣고 보니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큰일이었다. 잠시 정신이 아뜩했던 그렌은 곧 고개를 흔들어 냉정을 되찾았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도대체 몇 명이 배치됐기에 민간인 한 명 을 못 막아!”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전경의 양 어깨가 움찔했다. “그, 그게 불가항력이었다고 합니다. 네 명의 전투경찰들이 그 여성분을 막았지만 웬일인지 제지에 나섰던 전경 모두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합니 다.” “쓰러져? 게다가 여자라고?” “예, 젊은 여자라고 합니다. 더욱 곤란한 건… 그 여성이 BSP복장을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BSP? 전투요원용 복장 말인가?” “아닙니다. 사무원 복장이었다고 합니다.” “사무원? 이런, 도대체 누구야! 누가 장난을 친 건가?” 그렌은 땅을 쳤다. 지금은 아무리 그라 해도 이성을 잃는 게 당연할 만큼 어렵고도 희귀한 상황이었다. 민간인이 금지구역에 무단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종종 있다. 다수가 정신이 상자고 극히 일부는 BG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시체조차 건지지 못하고 황천행을 한다. 멀쩡히 살아남는 사람은 정말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BSP직원이 들어간 경우는 이번이 처음 이었다. 대한민국 처음이 아니라 세계최초였다. 그때 칼킨이 말했다. “제가 민간인 구출에 나서겠습니다.” 그가 다시 말을 걸자 그렌은 전에 없이 화가 치밀었다. 솔직히 말해서 칼킨 의 얼굴이라도 한 대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의 말 이 농담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니 현재 문제가 된 사람을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구 할 수 있는 사람은 칼킨뿐이었다. 지크가 없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렌은 주먹을 뻗는 대신 칼킨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쩔 수 없군. 부탁하네.” “그럼.” 칼킨은 새장에서 풀려난 새처럼 재빨리 바리케이트를 넘어 금지구역 안으로 들어갔다. 그렌은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본부에 무전을 넣었다. “그렌 헤이그 소령이다! 지금 본부의 직원들 중 자리를 무단이탈한 사람이 있나?”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위험구역 안에 BSP직원 복장을 한 여성이 무단으로 침입했다는 보고 가 들어왔다! 진짜 우리 직원인지, 아니면 광인이 옷만 차려입고 들어간 것 인지 확인하고 싶다!” “아, 알겠습니다! 즉시 조사해 보겠습니다!” 무전을 끊은 그렌은 장갑차의 장갑판을 살짝 치는 등, 전에 없이 흥분한 모 습을 보였다. 미처 생각지 못한 상황이 한 번 도 아니고 세 번이나 연달아 터지니 아무리 넉넉한 성격의 그라 해도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편, 민간인 구출에 나선 칼킨의 얼굴색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어째서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건가, 샤논.’ 그는 문제가 된 민간인이 샤논 더글러스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물증은 없지 만 심증은 확고했다. 사실 그는 지크와 얘기를 끝낸 뒤 곧장 샤논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샤논을 만나지 못했다. 유일한 목격자라고 할 수 있는 로비의 직원은 샤논이 급한 심부름을 간다며 본부를 빠져나갔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사방팔방으로 샤논을 찾았지만 넓고 복잡하기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매트로 서울에서 사람 하나를 찾는 건 가시덤불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 어 려웠다. 그러다가 BG사건이 터졌고 칼킨은 수도방위 BSP들과 함께 현장으로 출동했 다. 그가 오로지 BG때문에 이곳에 온 건 아니다. 만약 레드 원, 아니 리오가 그 녀를 잡아 처리한다면 역사상 최악의 BG사건 중 하나인 ‘아수라’ 사건을 능가하는 대형 참사가 발생한다. 그것을 확실히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자신뿐인데도 그가 소집에 응한 이유는 샤논에게 미약하게나마 부여된 악마의 능력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육감이 이끄는 곳을 향해 계속해서 달렸다. 건물 곳곳에 숨은 수많은 BG들이 그를 주시했지만 공격을 위해 달려 나오진 않았다. 이것은 정상적인 상태의 BG라면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한참을 달리던 칼킨은 한 고급 커피숍 앞에서 멈췄다. 대형유리로 꾸며진 투명한 벽 뒤로 한 명의 여성이 보였다. 김이 작게 올라 오는 머그 컵을 두 손으로 꼭 거머쥔 그녀는 바로 칼킨이 찾던 샤논 더글러 스였다. 그 커피숍만이 문을 열었을 리는 없다. 현재 BSP와 경찰이 설정해놓은 위험 지역 안엔 칼킨과 샤논 외에 사람의 형상을 한 존재는 마네킹 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BG의 구역질나는 숨소리들이 들려왔다.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의 오케스트라였다. 하지만 칼킨은 심호흡을 한 뒤 샤논이 있는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커피숍의 카운터 뒤로 짙은 그늘이 깔려 있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화 재에 대비해 일대의 전기를 모두 끊은 탓이다. 그늘의 뒤로 생물 아닌 생물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건물뿐만 아니라 샤 논이 있는 커피숍 안까지 전부 바이오 버그로 꽉 들어차 있었다. 누가 봐도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칼킨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호흡과 맥박 도 정상적이었다. 그는 샤논의 맞은편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 “마실 걸 주겠나? 쉬지 않고 뛰어오느라 목이 좀 타는군.” “…….” 샤논은 카운터로 가서 얼음물 한 잔을 만든 뒤 칼킨 앞에 놓았다. 컵 받침 대와 빨대까지 챙겨서 온 것을 보니 그녀도 칼킨 못지않게 독한 마음을 먹 고 있음이 분명했다. 칼킨은 빨대를 빼고 물을 들이켰다. 커피숍에 가득 들어찬 바이오 버그 때 문에 냄새는 좋지 않았지만 물은 시원하고 깨끗했다. “후우.” 그는 컵을 내려놓았다. 샤논은 여전히 머그 컵을 두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컵 안의 커피는 더 이상 김을 내지 않았다. 식을 대로 식은 커피를 손에 쥐고 있다는 건 그녀의 마 음이 극도로 불안하다는 증거였다. 잠시 후 칼킨이 말했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샤논은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저는 죽기 싫어요.” 그러자 칼킨의 모자 밑으로 차디찬 냉소가 흘렀다. “악마와 계약한 자가 삶에 대해 집착한다? 후후, 드문 경우로군. 넌 살아 있을 자격이 없어. 생물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샤논이 들고 있는 머그 컵이 버럭 떨렸다. “아, 알고 있어요. 저와 제 언니, 오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잘 알아요. 하지만 그건 복수를 위해서였어요! 아버지를 죽인 바이오 버그들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고요! 그러나 우리들에겐 힘이 없었어요. BSP가 될 자격조차 없었죠. 그래서 힘을 얻으려 한 거에요! 복수할 힘을!” “그래서 BG들을 조종하는 건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잖아요! 이대로 레드 원에게 죽을 수는 없어요! 제가 죽으면 아이슈마가 이 세상에 나온단 말이에요! 세상이 멸망한다고요!” “아, 그래? 별 걱정 다 하는군.” 칼킨이 고개를 들었다. 모자의 테 밑으로 그의 싸늘한 눈초리가 보였다. “어차피 이 세계의 BG가 모두 죽으면 너희들은 계약완료 상태가 되어 지옥 으로 끌려가게 되어있어.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죽던, 화장실에서 단체로 볼일을 보던 너희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 그냥 죽기 싫어서 이러는 게 정 답이 아닐까?” 그는 컵 속에 남은 물을 한번에 비웠다. 그가 컵을 내려놓자 얼음끼리 부딪 히는 차디찬 소리가 커피숍 안에 흘렀다. “너희는 상당히 운이 없는 케이스야. 힘을 얻기 위한 제물의 선정부터가 문제였지. 우리들, 커미셔너의 책임자인 마스터 커미셔너는 뒤처리가 깨끗 하지 못할 것 같은 계약자는 받아들이지 말라는 충고를 항상 했어. 그런데 난 단 한번 그 충고를 무시했지. 그게 바로 너희 형제들이야.” “…….” “물건이나 계약자의 신체 중 일부 같은 제물은 후에도 아무런 탈이 없지. 한을 품을 이유가 없거든. 그러나 다른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나중에 큰 재 앙을 초래할 수가 있지. 난 그것을 너희들에게 확실히 말해줬지만 너희들은 내 경고를 무시했다.” “하지만 엄마는 허락하셨단 말이에요!” 커피숍 안에 긴 정적이 흘렀다. 그럴 리는 없지만 BG들은 칼킨과 샤논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듯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칼킨은 코트 안에서 자신이 아끼는 총, 윈체스터 M1897과 샷건 탄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는 건전지처럼 생긴 탄을 한 발씩 차례로 장전하며 말했다. “그래, 그녀는 너희들의 영혼이 지옥에 끌려가 아이슈마의 노예가 된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그저 너희들이 잘 되기만을 빌었겠지. 어머니로서.” 그는 장전을 마친 총을 다시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총구를 샤논 쪽으로 돌 렸다. 그가 샤논에게 방아쇠를 당길 이유는 없다. 쏘는 즉시 게임은 끝이었 다. “너희들의 어머니는 너희들 덕분에 온 몸이 뜯어 먹히게 됐음에도 불구하 고 죽는 순간까지 너희들을 탓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어찌된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그랬지. 오히려 너희들을 구하기 위해 끝까지 발버둥치다가 레드 원, 아니 리오 스나이퍼라는 존재를 이 세상에 불러들였다. 하지만 넌 그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더욱 나쁜 결과를 초래했지.” 그러자 샤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지금 이 지역에 있는 BG들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어요! 당신 생각과는 다르다고요! 누가 저를 죽이러 오든 상관없어요! 저 는 여기 있는 BG들을 이용해 제 자신을 지킬 거예요!” “그래? 그럼 넌 BG들을 몇 번이나 조종해봤지? 오늘 내내 리오 스나이퍼를 막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이 있나?” 샤논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신 몇 마리의 BG들이 카운터를 넘어 칼 킨을 향해 슬금슬금 걸어왔다. “후, 이것이 대답이로군.” 칼킨은 조소를 터트렸다. 그리고는 모자를 슬쩍 올려 샤논과 눈을 맞췄다. “자신의 처지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나?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꼭 남의 힘을 빌려야 하나? 운명이라는 게 그렇게 두려운가?” 샤논은 고개를 휙 돌렸다. 순간 칼킨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양 볼을 잡고 억 지로 목을 돌렸다. “나는 반인반마다. 아버지가 인간이고 어머니가 악마지. 그것 때문에 난 인간계에서도, 악마계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어.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가 있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바로 인간과 악마의 계약을 주관하는 커미셔너지. 이 세계는 좀 특별해서 반인반마가 아니면 커미셔너를 맡을 수 없거든. 난 결국 수많은 지원자들을 뚫고 커미셔너가 됐다. 가능하다고 생 각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는데도 말이지.” “웁, 우웁!” 샤논은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녀를 잡고 있는 칼킨의 악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칼킨은 더욱 힘을 내어 그녀를 얼굴 가까이까지 끌어당겼다. “그런데 넌 뭐지? 끝까지 남에게 의지해서 자신을 바꾸려고 하는 넌 뭐냔 말이다! 인간인가? 악마인가? 아니면 나처럼 반인반마인가?” “…….” 칼킨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샤논의 눈빛은 바뀌지 않았다. 결국 칼킨은 던지 듯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며 자리에서 일어 났다. “넌 이도저도 아닌 쓰레기다. 쓰레기답게 죽어라.” 그는 돌아서서 커피숍의 문을 열었다. 샤논의 BSP제복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화장기 없는 그녀의 두 눈엔 커다 란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막 나가려던 칼킨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럼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나와 언니, 오빠들은 아무런 재주도 없는 평 범한 사람일 뿐이었어! 당신처럼 특별한 구석이 없었단 말이야! 하고 싶은 데 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자격과 능력이라는 현실에 부딪히 면 어떻게 해야 하냔 말이야!” “특별한 구석이라…….” 칼킨은 천천히 그녀를 돌아봤다. “반인반마의 커미셔너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자격이 무엇인 줄 아나?” 샤논은 말없이 칼킨을 쏘아보기만 했다. 잠시 후, 칼킨은 고개를 제자리에 돌리며 말했다. “아버지 쪽이 악마여야만 한다.” 그 말을 남긴 칼킨은 커피숍을 나서서 거리 저편으로 걸어갔다. 멍한 얼굴 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샤논은 시체처럼 고개를 떨어트렸다. “엄마, 난 어쩌면 좋아요……?” 그때, 칼킨을 노렸던 BG들의 눈이 샤논 쪽으로 움직였다. 잠시 후, 기괴한 비명이 들렸다. 샤논이 앉아있던 유리창에 피와 살점이 튀 었다. 누군가가 죽고 뜯어 먹히는 소리를 생생히 들은 칼킨은 모자를 더더 욱 깊게 눌러썼다. “이제 이 세상은 끝이군.” 처음 칼을 부딪친 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리오와 지크, 두 의형제의 대결은 여전히 치열했다. 가드레일, 도로, 쓰레기 수거함 등 언덕 내의 모든 시설물은 완파 된지 오 래된 듯 먼지조차 날리지 않았다. 그나마 남아있던 제설용 모래함도 방금 전 폭파되듯 부서졌다. 모래함이 있던 자리엔 붉은 재킷의 남자가 모래를 뒤집어 쓴 채 쓰러져 있 었다. 그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엔 리오가 지면에 칼을 꽂은 채 자신이 쓰러트린 상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7대0이다. 계속 하겠나?” “물론이지!” 지크는 모래를 해치며 일어났다. 큰 부상은 없었지만 몸의 움직임은 조금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검에 베이지만 않았을 뿐, 몸에 입은 보이지 않는 타박상으로 인해 지크의 체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기세만큼은 대단했다. 사자를 눈앞에 두고도 이를 드러낸 늑대처럼 보였다. 그때 뭔가가 툭 하며 모래바닥 위로 떨어졌다. 지크, 리오 모두 전의를 없 애고 그곳에 눈을 돌렸다. 떨어진 것은 거의 두 조각이 나다시피 한 지크의 PDA였다. 지크와 리오는 말없이 시선을 맞췄다. 둘 다 불길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젠장, 전화! 전화 어디 있어!” 지크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지만 전화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마침 유모차를 밀고 언덕길로 나온 젊은 부인이 보였다. 지크는 그녀를 보 자마자 질풍처럼 내달렸다. “아줌마, 전화! 전화 좀 빌려줘요!” “네?” 움찔한 여성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지크에게 넘겨주었 다. 거의 가로채다시피 하여 핸드폰을 손에 넣은 지크는 BSP 대원들만이 아 는 주관제실의 직통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에 이어 대원번호와 비밀번호를 넣으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지시에 따라 번호를 넣은 직후, 전화 속에서 폭풍과도 같은 목소리가 터졌다. “이 녀석, 지크!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게야!” 목소리를 들어보니 처크였다. 지크는 큰일이 나긴 났구나 생각하며 최대한 상냥한 음성으로 물었다. “지, 지금 나름대로 복잡한 일에 휘말려 있거든요? 레드 원이랑 교전을 하 고 있어요, 할아버지.” “아, 그래? 그럼 PDA라도 멀쩡하게 유지해야 할 거 아닌가! 언제 무슨 일 이 일어날지 모르는 이 매트로 서울에서 PDA를 박살내고 다니면 어쩌자는 거야!” “죄송하다니까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나요?” “일? 아, 물론 있지! 지금 A-27구역에 약 400개체의 BG가 모여 있다! 아직 교전이 벌어지진 않았으니 즉시 그쪽으로 가!” 전화를 받으며 이리저리 눈을 돌리던 지크는 어느 한 곳을 멍하니 바라봤 다. “A-27구역이요?” “그래!” “저어, A-27구역이라면 지금 검은 빛이 올라오고 있는 장소인가요?” “뭐?” 리오와 지크, 그리고 지크에게 전화를 빌려준 아기엄마는 도시 저편에서 벌 어진 이상현상에 시선을 모았다. 하늘을 덮은 먹구름을 뚫고 솟구치는 검은 색의 빛. 그 두께는 어지간한 고 층빌딩과 맞먹을 정도로 두꺼웠다. 지크는 전신에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그가 허리에 찬 무명도도 가냘프게 떨렸다. 여태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괴기스럽고도 압도적인 기운이었다. “이, 이게 뭐지? 기분이 이상한데?” 질문과도 같은 지크의 말에 리오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악마다. A클래스의 강마(强魔), 분노와 폭력의 아이슈마다.” “뭐라고?” 칼킨에게서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던 지크는 핸드폰을 주인에게 돌려준 뒤 리오에게 뛰어갔다. “그럼 아이슈마라는 녀석이 나타났다는 거야? 저곳에?” “그래, 소위 말하는 지옥문이 열린 거다. 지금은 닫혀가는군.” 그의 말대로 검은 빛은 서서히 사그라졌다. 그러나 빛만이 사라졌을 뿐, 불 길한 기운은 더욱 더 강해지고 있었다. 리오는 가슴팍에 손을 대 힘을 집중했다. 그러자 하얀 구체가 불쑥 튀어나 와 그의 손에 잡혔다. 그는 그것을 지크에게 건네줬다. “잠깐 맡고 있어. 내가 먼저 저곳으로 갈 테니 천천히 따라와라.” “뭐? 이게 뭔데?” 리오는 형제를 향해 씩 웃었다. “선생님이지.” 이어서 리오의 몸이 거짓말처럼 공중에 솟구쳤다. 지크는 저 멀리 날아가는 형제의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녀석, 저런 것도 할 줄 안단 말이야? 젠장, 어떻게 하는 건지 좀 가르 쳐주지…….” 투덜대던 지크는 문득 손에 들린 구체에 눈을 돌렸다. “선생이라고? 이게? 별 거 아닌 것 같은데?” 그때 구체가 몇 번 반짝였다. 흠칫 놀란 지크는 핸드폰을 빌려주었던 부인 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줌마, 저한테 말시키셨어요?”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구체가 또다시 반짝였다. 지크는 그제야 자신에게 말을 건 존재가 바로 그 구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응? 자기가 이번 일의 주범이니 리오 녀석을 오해하지 말라고? 당신 도대 체 누군데? 뭐? 샤논 더글러스의 엄마라고?” 구체가 또다시 반짝였다. 지크는 적당히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오토 바이를 세워둔 곳으로 뛰며 말했다. “좋아, 그럼 가는 동안 이번 일에 대해서 좀 설명을 해줘! 알아듣기 쉽게! ” 잠시 후 오토바이의 중후한 배기음이 언덕 위에서 들려왔다. 아기와 함께 남겨진 여성은 멀리 사라져가는 오토바이 소리를 들으며 유모차 안의 아이 를 바라봤다. “오늘은 엄마가 좀 피곤한 모양이구나, 아가야. 아빠 들어올 때까지 집에 서 쉬자, 응?” 엄마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아기는 손과 발을 꿈틀대기만 했다. 한편, A-27구역에 대기하고 있던 BSP와 전투경찰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한 곳 에 시선을 모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뿜어진 검은 빛이 사라진 후 그들의 눈앞에 거대한 생명체가 나타났다. 들소의 하반신과 인간의 몸뚱이 위에 산양의 머리가 놓여 있었다. 둔부 사 이에서 흔들리는 꼬리의 정점엔 뱀의 머리가 달려 독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림에서 본 것 같은 악마의 형상이었지만 알몸은 아니었다. 괴물의 몸 전 체에 난 검은색 잔털이 괴물이 입은 흑록색의 전신갑주 위로 흉하게 비어져 나왔다. 어깨까지의 높이는 약 3미터 정도였으나 몸을 굽히고 있는 형태여서 실제 키는 약 5에서 6미터 정도 되어 보였다. 어깨가 워낙 넓고 덩치가 좋아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따지자면 정말 움직이는 집과도 같이 보였다. 괴물의 오른손엔 그로테스크한 디자인의 대검이 들려 있었다. 적어도 2미터 이상의 길이에 폭은 건장한 사람의 어깨너비와 맞먹었다. 표면엔 로댕의 작 품인 지옥의 문을 연상시키는 인간의 끔찍한 군상이 양각으로 새겨져 공포 감을 더했다. 코와 입에서 하얀 김을 뿜어내던 악마는 웅크린 몸을 일으켜 숨을 한껏 들 이마셨다. 그리고 숨을 내쉬자 신경을 마비시킬 것 같은 악취가 BSP대원들 과 전투경찰들에게 밀려왔다. “후우, 매우 좋군. 이것이 바로 완전중립세계의 냄새인가? 확실히 지옥보 다는 상쾌하구나.” 그는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꽂았다. 큰 충격음과 함께 아스팔트가 깨지고 건물 유리창에 금이 갔다. 팔짱을 낀 괴물은 눈앞의 사람들을 보며 씩 웃었다. “이게 바로 중립세계의 인간들인가? 후후, 실망이군. 죽이고 싶은 생각이 안 들어. 좋아, 봐주지. 집으로 돌아가라. 내일쯤 되면 내 부하들이 너희들 을 방문해서 지옥으로 끌고 갈 테니 잘 씻고 준비하도록 해라. 나의 인자함 을 칭송해도 좋아. 후후후…….” 그렌을 비롯한 BSP들과 전투경찰들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도망치자는 말도, 싸우자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는 눈앞에 벌어진 말 도 안 되는 상황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가장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가장 경험이 많은 그렌이었다. “이봐, 케빈. 한 가지 묻고 싶은데 괜찮겠나?” “제가 대답해드릴 수 있는 걸 말씀하시면 한 가지가 아니라 몇 가지라도 대답해 드리죠.” 케빈은 넋이 나간 얼굴로 말했다. “우리 BSP의 지침사항 중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 때 어떻게 대처하라는 글귀가 있나?” “글쎄요? 저기 있는 괴물이 BG라면 무조건 공격이겠지만 BG가 아니라면 강 력사건으로 봐야겠죠.” “그래? 그럼 일단 공격을 해야겠지?” “일단 왜 저기 있지 물어보는 게 좋겠죠. 영화용 특수세트일 수도 있고 근 처의 누군가가 거인이 나오는 램프를 비볐을 수도 있으니까요.” 넋 나간 질문에 넋 나간 대답이었다. 그렌은 확성기를 꺼내들었다. “몇 가지 물어봐도 되겠나?” 기계음 섞인 그렌의 목소리를 들은 괴물은 또다시 웃었다. “후후, 좋아. 일단 내 이름을 가르쳐주지. 난 아이슈마, 분노와 폭력의 악 마다. 방금 전 지옥에서 올라왔지.” “…….” 악마라는 대답에 그렌과 케빈은 서로를 바라봤다. 둘 다 악마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렌은 BSP 중에서 악마와 계약하여 힘을 얻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 었고 케빈은 자신이 얼마 전까지 사용하던 권총, 하데스 웨폰이 악마의 무 기와도 같은 불가사의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어지간한 초자연적 현상은 믿는 편이었다. 추가로 예전에 겪은 소울게터 사건 덕분에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 아무튼 확실했다. 소문과 이야기로만 접하던 악마, 그 초현실적인 존재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렌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질문을 계속했다. “좋아, 당신이 악마라고 하지. 그럼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곳에 온 건가? ” “이곳에 온 목적? 음, 글쎄?” 아이슈마는 길쭉한 턱 밑에 난 작은 수염뭉치를 매만졌다. “그렇게 질문을 하니 뭐라고 대답하기가 좀 그렇군. 정직하게 대답하면 너 희들이 도망칠 것 같고… 그렇게 하면 나로선 재미가 없겠지? 아, 그럼 돌 려서 말하도록 하지. 난 이 세상의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왔다.” “뭐라고?” 그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슈마는 껄껄대며 웃었다. “하하, 이해가 안가나? 이 세계에서 서식하는 인간이라는 생물들의 숫자를 0에 가깝게 줄이기 위해 왔다 이거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인간들을 모두 죽이러 온 거지. 이 세계는 우리 악마들에게 있어서 대단한 가치가 있 기 때문이다.” “…….” 대답을 들은 이상 그렌이 택할 길은 단 하나였다. 그는 한숨을 쉰 뒤 다시 확성기를 들었다. “농담인가, 아니면 진담인가?” “알고 싶으면 지금 시험해보는 게 좋을 거다. 10분간 기다려줄 테니 뭐든 해라, 인간. 화장실을 다녀와도 좋다.” 아이슈마는 도발하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지금까지의 광경은 카메라를 통해 BSP본부와 경찰청, 시청, 청와대까지 들 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대중매체로 흘러나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일은 겉 잡을 수 없이 커질 게 뻔했다. 관계자들 중에서 아이슈마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대통 령을 비롯한 대한민국 정부 관계자들은 군에 연락을 넣었고 경찰청에선 지 원 병력의 숫자를 대폭 늘렸다. 그 중 가장 냉정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처크였다. BSP의 지부장인 만큼 온갖 비상사태를 다 겪은 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직원단속에 지나지 않았다. 악마라는 존재와 실제로 맞 닥뜨린 일이 없는 이상 확실한 대처법을 내놓는 것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했 다. 시거를 문 채 화면속의 아이슈마를 쳐다보던 처크는 이윽고 재를 다급하게 털며 말했다. “루이 치프, 자네가 나라면 어떻게 하겠나?” 처크의 맞은편 자리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루이는 그냥 고개를 들고 아버지 를 바라볼 뿐, 대답은 하지 못했다. 현장의 그렌은 묵묵히 본부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를 포함한 모두가 시계에 시선을 집중했다. 아이슈마가 말한 10분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들은 본능적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이거,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의 심정이네요.” 케빈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담배를 물며 중얼댔다. 그렇게 큰 목소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BSP대원들과 전투경찰들은 거의 울 듯한 얼굴로 케빈을 바라봤다. 그렌 역시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그런 기분을 아나?” “물론이죠. 클리너 시절에 사형언도만 세 번을 받았는걸요.” “…….” 물은 게 실수다. 그렌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슈마를 바라봤다. 아이슈마는 근처에 주차된 자동차 하나를 끌어다 의자로 삼고 있었다. 길 중앙에 떡 버티고 앉아있는 그 악마의 모습은 역시나 압도적이었다. 자신들이 들고 있는 것은 화약을 이용한 원거리 무기이고 상대방이 들고 있 는 것은 검이라는 근거리 무기다. 과학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이쪽의 무기 가 더 강력하고 실용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검을 든 쪽이 상식 밖의 존재라 면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그렌은 그 사실을 지크와 레드 원을 통해서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아이슈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아, 10분이 흘렀다, 인간들이여. 이제부터 너희들의 숫자를 좀 줄여보 도록 하지.” 그러자 그렌이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사격개시!” BSP와 전투경찰, 그리고 각종 지원차량들의 화기가 한 곳을 향해 불을 뿜었 다. 30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일시에 탄환을 쏘는 것은 정말 장관이었다. 비 처럼 떨어진 탄피들은 진짜 빗방울처럼 사람들 사이를 지나 하수구에 들어 갔다. 목표 주변 건물들과 아스팔트 및 각종 구조물들은 탄환에 의해 순식간에 초 토화가 되어 먼지를 일으켰다. 그렌의 예상을 뛰어넘은 무지막지한 공격이 었다. 이것은 아이슈마라 때문에 전투경찰들이 얼마나 긴장을 했는가 알려주는 대 목이었다. 전투경찰들은 그 증거를 확실히 보여주겠다는 듯 그렌의 사격중 지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탄창을 두 개나 더 비워버리고 말았다. 화약연기와 흙먼지가 거리 전체를 뿌옇게 뒤덮었다. 1미터 앞도 제대로 보 이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렌은 자신의 전자시각을 최대한 가동시켜 아이슈마를 찾았다. 죽었든 살 았든 일반 발견을 해야 다음 지시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낙 불투명한 시계(視界) 때문에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케빈, 어떤 것 같나?” 그의 물음에 케빈은 어깨를 으쓱였다. “땅과 자동차, 건물이 박살나는 소리는 들렸지만 그 외의 소리는 안 들렸 어요. 녀석의 몸이 두부처럼 부들부들해서 탄이 모조리 관통했던가, 아니면 한 발도 맞지 않았던가, 둘 중에 하나에요.” “그래? 자네는 어느 쪽에 걸겠나?” “저는…….” 그때 그렌의 몸이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공중으로 훅 떠올랐다. 못 볼 것 을 본 케빈은 또다시 넋이 나간 얼굴로 말을 마저 했다. “후자에 걸죠.” 이어서 쿵 소리가 스모그 저편에서 들렸다. BSP대원들을 포함한 모두가 소 리가 들린 쪽에 눈을 돌렸다. 스모그의 커튼 저편으로 두 개의 붉은 빛이 보였다. 그 빛은 모두가 가지고 있던 일말의 희망마저도 사신처럼 말끔히 거두어갔다. “훌륭한 쇼였다, 인간들이여” 강한 바람이 거리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불었다. 태풍을 연상시킬 정도로 강 한 그 바람은 시야를 방해했던 스모그들을 한순간에 밀어냈다. 모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완전히 박살이 나야 할 아이슈마는 원래 있던 자리에 멀쩡하게 서있었고 총 책임자인 그렌은 그의 발 앞에 쓰러져 있었 다. 아이슈마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렇게 느려터진 무기로 날 없앨 생각을 했다니, 칭찬해주고 싶 군. 아, 한 가지 충고를 해주지. 너희들이 자랑하는 최고의 무기인 원자폭 탄이나 수소폭탄, 중성자폭탄이 아니면 나를 죽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 다. 그 녀석들이 가진 위력은 나도 솔직히 두렵거든. 물론 그 무기들을 나 에게 맞출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 그는 오른발을 들어 그렌의 하체 위에 발굽을 올려놨다. “이 자가 너희들의 리더인 것 같군. 하등한 동물일수록 우두머리를 죽이면 전의를 잃게 마련이지. 자아, 우선 가지고 놀아 볼까?” 이어서 우지끈 하는 소리가 터졌다. 단단하다는 소재는 전부 밀어 넣은 그 렌의 하체가 압축기에 들어간 음료수 캔처럼 납작하게 짓이겨졌다. “으아아악!” 그렌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모두의 귀를 괴롭혔다. 사이보그인 만큼 하체 가 부서지는 통증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뇌에 직접 전달되는 진동만은 끔찍 한 두려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그만해!” 잠자코 있던 하리진이 벌떡 일어나 양손을 뻗었다. 그녀의 긴 머리와 재킷 이 바람에 휘날리듯 너울거렸다. 그녀의 장기인 염동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밀려나가거나 충격을 받아야 할 아이슈마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리진 쪽으로 돌렸다. “호오, 염동능력이군. 하지만 상대가 틀렸다, 인간. 나와 같은 고등악마들 은 지금 네가 준 압력 이상의 힘을 항상 받으면서 살아가거든. 너희들이 일 정 기압 속에서 사는 것처럼 말이다.” 리진은 그 말을 부정하듯 다시 한번 힘을 사용했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아이슈마는 또 한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진짜 염동능력을 보여줄까? 고등악마의 정신능력이 어떤 것인 지 보여주마!” 아이슈마는 거리 저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팬터마임 배우가 창문 을 열듯 허공에서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건물을 철거하는 듯한 굉음이 저 멀리에서 터졌다. 리진과 다른 모 든 사람들은 이후 벌어진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8층짜리 건물 한 채가 택배박스 움직이듯 아이슈마의 손짓에 따라 자리이동 을 해버린 것이다. 밑동이 뽑힌 건물이 반대편 건물에 충돌하는 웅장한 모 습에 모두는 전의를 완벽히 상실하고 말았다. “이제 현실을 알겠느냐? 너희들이 상대해야 할 존재가 누군지 알겠느냐? 너희들의 미래가 어떤 것인지 알겠느냐? 후후, 알아들었으면 조용히 목을 내밀어라. 살려달라는 소리는 하지 않아도 돼. 자비를 배풀 생각은 전혀 없 으니까.” 아이슈마는 검을 들어 그렌의 머리 위에 맞추었다. “너희들의 희생은 악신계의 부흥과 선선계의 타락을 위한 최고의 발판이 될 것이다! 자아, 죽어라, 첫 번째 희생자여!” 그렌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부인과 딸, 아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악마의 대검에서 야릇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아이슈마는 검을 한껏 치켜 올 리며 외쳤다. “자아,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분노를 나에게, 이루지 못한 폭력에 대한 갈 망을 나에게 뿜어라! 그 모든 것은 나의 힘이 될 지어니!” “싫다면?” “음?” 순간, 둔탁한 파열음이 아이슈마의 뒤통수에서 터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해버린 악마는 볼품없이 앞으로 엎어져 아스팔트를 굴렀다. “스타일 센스가 형편없다는 말은 자주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그냥 소다리에 양머리 바보가 아닌가?” 인기척이 들렸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그렌은 발자국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동계통에 이상이 있는지 움직임은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노이즈가 심하게 낀 그의 전자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회색의 망토자 락이었다. ‘레드… 원?’ 그렌은 자신을 구해준 이가 누구인지 확인한 직후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리오는 손으로 그나마 낯익은 BSP대원들을 불렀다. “어이, 거기서 떨지 말고 당신네들 대장이나 대려가. 여기서 계속 놔두면 싸움에 휘말려서 어찌 될지 모른다고.” 케빈과 리진, 챠오들은 서로를 이리저리 바라봤다. 상의할 것도 없이 자신 들이 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이 힘을 쓸 일은 없었다. 클로킹 이펙트로 몸을 숨기고 있던 류 페이의 BX-Fb가 재빨리 달려온 것이다. “그렌 소령님은 제가 본부로 후송하겠습니다! 뒷일을 부탁드립니다!” BX-Fb의 외부 스피커에서 류페이의 급박한 목소리가 나왔다. 현장절차상 그 렌 대신 책임자의 위치가 되어버린 케빈은 엄지를 들어 허락과 건투를 빌었 다. 그렌과 류페이가 떠난 뒤에도 리오의 충고는 이어졌다. “당신들도 여길 떠나. 나와 저 녀석의 싸움은 일반인이 구경하고 있을 만 한 게 못돼.” 그러자 케빈이 실소를 지었다. “이봐, 우리가 유치원 소풍 나온 줄 아나? 철수라는 건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내릴 수 있는 사항이 아니야. 우리 입장도 좀 이해를…….” “건방진 녀석!” 그때 쓰러져 있던 아이슈마가 괴성을 지르며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막대한 압력의 투기와 살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투기를 정면으로 받아버린 건물은 엿가락처럼 휘고 뒤틀렸다. 손에 든 검으 로 투기를 막은 리오 역시 그리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일단 덕분에 말이 끊겼던 케빈은 일단 침을 꿀꺽 삼킨 뒤 이어서 말했다. “최대한 빨리 철수해보지.” 그가 철수를 위해 각지에 연락을 하는 동안 아이슈마는 성큼성큼 리오에게 다가갔다. “소문대로 기습에 능하구나, 리오 스나이퍼. 다른 녀석들에게 듣자니 가장 극적인 때 나타나는 게 네 특기라고 하더군.” “가장 극적인 상황일수록 그 상황을 즐기는 자는 판단력이 흐려지기 때문 이지.” 리오는 씩 웃었다. 한편, 후퇴를 준비하던 리진은 방금 전 들은 아이슈마의 말에 고개를 갸웃 거렸다. “리오 스나이퍼? 그게 레드 원의 이름인가?” “음.” 챠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네? 지크랑 같은 성씨잖아? 생긴 거랑 하는 행동은 전혀 다른데 말 이야. 지크가 알면 좀 불쾌해 하겠는데? 같은 남자로서 질투할 수도 있겠 네, 하하핫.” 대답은 안했지만 챠오는 동감을 표하듯 슬며시 웃었다. 레드 원, 아니 리오가 지금은 일단 아군이라는 것을 확인해서인지 BSP와 전 투경찰들은 차츰 냉정을 되찾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의 강력함 만큼은 이쪽 계열의 사람들 사이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눈앞의 광경은 만화나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바로 그 장면, 미스터리 한 매력의 슈퍼영웅과 사악한 몬스터가 지금 막 대 결하려고 하는 바로 그 장면처럼 보이는 듯 했다. 아이슈마는 왼손을 리오에게 뻗었다. 공격을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의 손 위엔 여섯 개의 붉은 구체가 놓여있었다. 구체의 표면엔 괴로움에 떠는 인간의 얼굴이 하나씩 박혀 분위기를 으스스하게 만들었다. “이게 무엇인지 알고 있나?” 리오는 여유 있게 대답했다. “내가 죽인 얼간이들이 아닌가? 하나 빼고는 전부 친근한 얼굴들이야. 그 런데, 이게 뭐 어쨌다는 거지?” 아이슈마는 구체들을 불끈 움켜쥐었다. “난 네가 뭘 하려고 이들을 죽였는지 알고 있다. 우리들과 계약한 인간의 영혼은 계약이 만료되거나 도중에 불의의 사고로 죽었을 경우 지옥으로 끌 려 들어와서 무한에 가까운 시간 동안 노예처럼 부려지게 되지. 단, 계약을 한 악마가 죽으면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나거나 성불하여 영원한 휴식을 얻 게 된다. 넌 그걸 노리고 있는 거겠지? 이 바보들의 어미에게 부탁을 받아 서 말이야.” “잘도 아는군. 나대신 복습을 해주니 너무 고마운데?” 리오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나타냈다. 아이슈마는 낮게 웃었다. “하지만 번지수를 잘못 택했다, 리오 스나이퍼. 미안하지만 난 너에게 죽 을 만큼 약하지 않아. 객관적으로 봐도 난 너보다 강하다. 넌 날 이길 수 없어.” “그래?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거지?” “다른 게 있겠나? 너와 나의 직접적인 힘의 차이는 네 스스로가 알 거다. ” “후, 후후후.” 리오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지금 가장 다행으로 여기는 게 뭔 줄 아나?” “무엇이냐?” “네 다리가 두 개라는 점이야. 들소의 하반신을 하고 있다 들어서 소처럼 다리가 넷인 줄 알고 있었거든. 다리가 네 개였으면 어쩔 뻔했나? 지금보다 더 폼이 안 났을 텐데 말이야.” “이, 이 녀석……!” 자존심을 공격당한 아이슈마는 부들부들 떨며 분을 감추지 못했다. 리오는 검을 어깨에 걸친 채 왼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와 보라는 신호였다. “네가 나보다 얼마나 강한지 한번 보여 봐라. 그것이 말에 지나지 않았을 경우엔 각오하는 게 좋아. 난 지금 기분이 상당히 나쁘거든.” “건방진 녀석!” 아이슈마는 자신의 대검을 거머쥐고는 맹렬히 거리를 내달렸다. 이윽고 둘의 대검이 충돌했다. 그로 인해 터진 폭음은 후퇴를 하려던 이들 의 발을 멈추게 했다. 모두의 눈앞에서 거짓말 같은 전투가 벌어졌다. 아이슈마의 검은 주인의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민첩했다. 움직임이 너무 빨 라서 하나의 시커먼 회오리바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에 맞서는 붉은 폭풍도 만만치 않았다. 육체적 차이로 봐서 밀리고도 남 을 것 같았지만 만만치 않은 파워와 탄력으로 상대의 검을 받아쳤다. 두 재해에 휘말린 가로등은 수수깡처럼 부러지거나 잘려나갔고 건물은 깻묵 처럼 으깨졌다. 만약 구경꾼들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면 그로 인한 발생 한 인명피해는 생각하기 싫을 정도였을 것이다. “쿠오오옷!” 아이슈마의 대검이 일직선을 그리며 리오에게 떨어졌다. 공격이 너무 단순 했는지 목표물은 회색잔광을 남기며 옆으로 피했고 목표를 잃은 검은 애꿎 은 건물을 때렸다. 1층은 말할 것도 없고 건물의 2, 3층까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폭탄에 맞 은 것처럼 터졌다. 검으로 낸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대단한 파괴력이 었다. 그 공격을 피해 상대의 뒤를 잡은 리오는 그 동안 쌓였던 정신적 고통을 한 번에 날리듯 시뻘건 안광을 뿜으며 검을 휘둘렀다. “죽어라!” 그의 보라색 검이 아이슈마의 허리를 갈랐다. 하지만 정말로 잘린 것은 먼지구름이었다. “허술하구나!” 아이슈마는 건물을 발판삼아 뛰어올랐다. 도약을 한 체조선수처럼 머리가 아래로 향한 형국이었다. 리오는 움찔하여 머리 위를 올려다봤다. 아이슈마의 그로테스크한 대검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쳇!” 리오는 눕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손으로 땅을 짚었다. 그가 그대로 텀블링 하여 위치를 바꾸기가 무섭게 상대의 공격이 지면을 때렸다. 아이슈마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몸을 돌려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경직이 없는 연속공격이었다. 그것까지 간파하지 못한 리오는 급히 검을 세우고 반대편 팔로 검의 뒤를 받쳐 상대의 공격을 받아낼 준비를 했다. 이어서 공사장의 파일드라이버가 철근을 잘못 때린 듯한 굉음이 터졌다. 리 오는 방어자세를 취한 채 뒤로 죽 밀려나갔다. 검뿐만 아니라 리오의 전신이 울렸다. 검이 아니라 몸으로 받았다면 산산조 각이 나고도 남았을 만한 힘이었다. 아이슈마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자신 있게 떠벌릴 자격이 있구나! 오랜만에 즐거워지는군!” “이 정도로 감동하는 건가? 보기보다 센티멘털하군!” 둘은 다시금 이를 악물고 격전을 벌였다. BSP와 전경들은 숨을 죽인 채 둘의 모습을 지켜봤다. 후퇴나 도망 같은 본 능적인 생각은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들은 프로레 슬링 경기장의 관중들처럼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에 모든 관심을 집 중하고 있었다. “저 친구, 우리한테 괜히 튀라고 말한 게 아니었군.” 케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BX-F의 배리어 필드를 칼로만 뭉개놨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었어. 도대체 사람의 몸으로 어떻게 저런 파워를 낼 수 있는 거지? 휘말리면 끝장일 거 같아.” “아셨으면 빨리 후퇴를 재촉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전부 구경꾼이 돼버렸 잖아요. 이러다가 파편이라도 잘못 튀면 큰일이 날 수도 있다고요.” 리진이 투덜대듯 말하자 케빈은 자신의 말총머리를 손가락으로 빙빙 꼬았 다. “그거야 그렇지만… 저런 건 놓칠 수 없는 구경거리라고. 방송 편성표에 맞춰서 리모콘만 누르면 볼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럼 계속 보고 있겠단 말씀이세요?” “그, 글쎄? 무리가 없다면.” 케빈의 인간적인 말에 리진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제가 본부에 연락할게요. 선배님은 구경이나 하세요.” “아, 그래주겠어? 고마워.” 케빈은 싱글벙글 웃으며 맨 앞자리로 달려갔다. 그가 자리를 잡기 위해 전 투경찰들과 말싸움을 하는 동안 리진은 통신기의 주파수를 다시 돌려 본부 와의 통신을 재개했다. “하리진 소위입니다! 현재 정체불명의 괴물은 레드 원과 교전을 벌이고 있 습니다. 화면에 잡힙니까?” “치프 오퍼레이터인 루이입니다. 지금 화면엔 아무 것도 잡히지 않습니다.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기계에 이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다른 카메라 역시 들어오지 않습니까?”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원즈 이펙트’(One's Effect)같습니다.” 원즈 이펙트란 레드 원이나 블루 원이 나타날 때만 모든 화상기록장치가 마 비되는 현상을 일컫는 것이다. 화면에 대한 것을 포기한 리진은 다음 사항으로 화제를 넘겼다. “이대로 대기해 합니까, 아니면 후퇴를 해야 합니까? 그에 대한 지시를 내 려주십시오.” “처크 켄트다. 자체적으로 위험한 상황이라 판단되지 않으면 전원 대기하 도록. 최대한 자세히 구경하길 바란다. 단, 퇴각은 자율에 맡긴다.” “네?” 리진은 처크의 말을 이해하기가 조금 힘들었다. BG들을 격멸하기 위해 파견 된 BSP와 전투경찰들을 불가사의한 사건의 확실한 목격자로 만들려는 것인 지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의심만 할 수 있을 뿐,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기에 반발 할 구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자율퇴각 지시까지 덧붙여져 있으니 더욱 그랬다. “그럼 본부의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좋아. 아, 지크 소위는 도착했나?” “예? 으음…….” 리진은 대답하기에 앞서 주위를 돌아봤다. 자신이 통신에 집중한 사이에 지 크가 도착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저 멀리서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지크의 모습이 보였다. “아,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그럼 상황변화가 있으면 즉시 보고해주기 바란다.” “알겠습니다.” 통신을 끊은 리진은 지크를 향해 팔을 흔들었다. “어이, 여기야!” 지크는 슬쩍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동작이나 얼굴 모두 보통 때에 비해 상 당히 시무룩해 보였다. 그걸 본 리진은 쀼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지부장님께 혼이 날까봐 저러나? 왜 저러지?” 인파를 피해 오타바이를 멀찌감치 세워둔 지크는 저 멀리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형제, 리오의 모습을 바라봤다. 무엇이 그리도 서러웠을까. 리오는 벌써 상처투성이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고 싸웠다. 그에 대적하는 아이슈마 역시 만만치 않게 필사적이었 다. 도와줄 틈은 없었다. 저 둘의 싸움은 지크 자신의 영역을 저만치 넘어서고 있었다. 만약 도와줄 수 있다 하더라도 지크는 끼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좋게 끝나 든 그렇지 않게 끝나든 이번 일은 리오 혼자서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당사 자인 리오 역시 그것을 원했기에 지금껏 아무런 변명도 없이 혼자서 싸워오 지 않았는가. “무엇을 그리도 걱정스레 보고 있나?” 지크의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크는 슬그머니 뒤쪽을 돌아봤 다. “할멈.” “후후, 호칭엔 여전히 변함이 없구나.”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오던 봉성은 씁쓸히 웃었다. 지크의 옆에 선 노파는 발끝을 살짝 들어 저 멀리 보이는 격전을 바라봤다. “휴우, 잘도 싸우는군. 아무도 말릴 수 없겠어.” “응. 녀석은 나보다 강하니까.” 지크의 말에 봉성의 하얀 눈썹이 훌쩍 올라갔다. “호오, 웬일이냐? 네가 다른 사람의 힘을 인정하는 건 처음이로구나.” “쳇, 사실을 말한 것뿐이잖아. 그런데 할멈, 여긴 어떻게 온 거야?” “택시를 잡아타고 왔지. 안 태워주기에 압구정까지 따블(더블)이라고 하니 까 그제야 태워주더구나.” “…….”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던 지크는 이내 웃었다. “하여튼, 할멈 앞에선 무슨 말을 못하겠다니까. 저 악마에 대해서 느끼고 온 거야?” “그런 것도 있고… 나타나기 전부터 냄새가 좀 났거든.” “그렇군. 그나저나 할멈도 참 대단하네. 생일날 별 구경 다 하잖아?” “좋지 뭘 그러냐. 후후후…….” 봉성은 아스팔트 위에 정좌를 하고 앉았다. “넌 누구의 잘못으로 일이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느냐?” “그, 글쎄? 저 시커먼 악마가 잘못한 거 아냐?” “그래? 그럼 저 악마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 “…….” 지크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처음 대답부터 충동적으로 한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봉성은 들고 있던 지팡이의 끝으로 그의 머리를 툭 때렸다. “이 녀석, 네가 그래서 우리 손녀한테 단순한 녀석이라고 욕을 먹는 게야. 좀 깊이 생각을 못하는 게냐? 나이가 몇인데 그렇게 직선적으로 생각을 하 는 게냐?” “그, 그럴 수도 있지, 뭘.” “생각 없이 사고를 친 뒤에도 그럴 거냐? 너 때문에 사람이 죽어 뻗은 상 황에서도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둘러댈 거냔 말이다.” 지크는 맞은 부위를 문지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봉성이 말했다. “저 청년이 죽인 사람들은 BG에게 아버지를 잃은 나머지 복수를 위해 악마 와 계약을 했지. 그리고 계약을 위해 어머니를 제물로서 바쳤어. 아이들이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을 뒤늦게 안 어머니의 영혼은 지옥에서 저 청년을 만 나 아이들을 구해달라고 했지. 대충 스토리는 이런가?” “응.” 리오로부터 받은 구체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들은 지크는 고개를 끄덕 였다. 봉성은 지팡이로 아스팔트를 때리며 의문을 제기했다. “자아, 그럼 생각을 해보자꾸나. 악마는 뭘 했지? 계약을 했을 뿐이야. 제 물은 관례대로 먹어치웠지. 그에 대해선 먹힌 사람조차 뭐라고 토를 달수가 없어. 서로 합의한 상태에서 진행된 일이니까. 그리고 악마는 계약에 의한 절차대로 지상에 나왔단다. 자신이 불려질 것을 미리 알고 정복이니 뭐니 하며 계획을 짰겠지만 최초로 잘못을 한 존재는 저 악마와 계약을 하기로 마음먹은 여섯 명의 가련한 영혼들이야. 아, 가련하지도 않지. 바보라고 해 야 하나?” “…….” 지크는 눈을 부릅뜬 채 리오를 바라봤다. 자칫 잘못하면 리오가 지금 하는 일에 대해서 자신이 부정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선생의 말이 맞습니다.” 지크는 움찔하며 옆을 바라봤다. 칼킨이 어느새 자신의 옆에 서서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어라? 너 언제 왔어?” “그게 문제가 아니지.” 칼킨은 모자 밑으로 지크를 바라봤다. “넌 악마가 왜 나쁜 존재라고 생각하나?” 질문을 받은 지크는 오늘이 자신의 일생 중 최고로 머리가 복잡한 날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 글쎄? 옛날부터 그랬잖아? 악마는 사람들을 기만하고 괴롭히는 것을 낙으로 삼는 그런 존재라고 세계 각지에서 전해져왔어. 어디든 그런 얘기는 많다구.” “그래, 그런 인식의 출발은 선신계의 사자들이 내려와 퍼트린 얘기부터 시 작된다. 이후로 사람들은 생전 만나보지도 못한 악마들을 그저 악한 존재로 만 인식하기 시작했지. 넌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 선신계의 사 자들부터가 거짓말을 한 거라고, 자신의 세력권을 늘리기 위한 발판으로서 사람들을 기만한 거라고 말이야.” “…….” “어느 순간부터 이 세계는 선신계의 사자도, 악신계의 사자도 올 수 없는 공간이 되었다. 다만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떠벌리는 사기꾼들만이 존재하 게 됐지. 지금 이 세상에서 ‘구원’이란 것은 자신이 이루는 게 아니라 남 에게 돈을 주면 이뤄지는 거래의 일종이 된 지 오래다.” “간단히 말해 사기라고 하지.” 봉성은 씩 웃었다. “저 악마에게도 생명이 있고 삶이 있단다. 사건의 발단은 여섯 바보일 뿐 이야. 저 청년은 여섯 바보들의 어머니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저 악마를 죽 이려 하고 있어. 저 악마가 처음부터 위해를 가한 게 아닌데도 말이야. 저 건 청부살인이나 마찬가지지. 내 말이 틀렸느냐?” “하아.” 지크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어설픈 반응이었다. 칼킨이 이어서 말했다. “일단 아이슈마는 여기서 죽어야 한다. 저대로 놔두면 이 세상 전체가 악 신계의 손에 떨어지게 되지.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모두의 이야기를 들은 지크는 마음이 착잡했다. 리오는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가. 단순히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아니면 이 세상이 악마의 놀이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결론은 낼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리오만이 이 싸움의 이유와 그 마지막을 알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런 대화는 리오와 아이슈마 사이에서도 말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둘은 검을 맞댄 채 힘을 겨뤘다. 둘의 강렬한 투기가 서로를 제압하기 위해 아우성을 쳤다. 때문에 주위의 건물과 지면은 깨끗이 밀려나갔다. 어느 한 쪽도 밀리지 않았고 밀지도 못했다. 아이슈마는 예상을 넘어선 상 대의 힘에 감탄했고 리오는 뭘 어찌 해도 앞설 수 없는 현실에 한탄했다. “대단하구나, 리오 스나이퍼! 나를 상대로 이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니, 소문으로 듣던 애송이와는 다르군!” “흥, 듣기 싫은 말은 아니군.” “후후, 하지만 궁금한 게 있다. 넌 어째서 날 죽이려 하는 거지? 내가 맡 고 있는 영혼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아, 그건 아니야. 난 그런 착한 일을 하기엔 세상을 너무 많이 알고 있거 든.” “그래? 그럼 이유가 뭐지?” “나를 위해서다. 내 스스로를 위해서, 내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 “뭐라고?” 아이슈마는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정의니 뭐니 주절거리는 덜떨어진 놈들하고 나를 똑같이 보지 마. 내가 그 영혼을 도와준 건 널 불러내기 위함일 뿐이었어. 널 부르면 이 세계가 멸망되느냐, 아니면 그대로 돌아가게 되느냐 하는 열쇠는 내가 가지게 되겠 지. 널 막을 존재는 나밖에 없으니까.” “네 녀석, 설마……!” “그래, 그 설마다. 그런 상황이 되면 더 짜릿하지 않겠나? 세상 하나를 뒤 집어엎은 내가 이번엔 세상을 구할 영웅이 된다. 상황역전이야, 인생반전이 라고. 이걸로 난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어.” 리오와 아이슈마의 검 사이에서 불똥이 튀었다. 제자리에서 위아래로 마찰 하는 것뿐이었지만 맞부딪히는 것 이상의 박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또 하나! 이런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흥, 어리석은 녀석!” 순간 검은 색의 길쭉한 물체가 리오의 등판을 가격했다. 시야 밖의 공격을 당해버린 리오는 입에서 피를 뿜으며 힘을 잃었다. 아이슈마의 어깨 위에서 뭔가가 휘익 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돌았다. 다름 아닌 그의 꼬리였다. 악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소형차를 연상케 하는 그의 두꺼운 발굽이 반월을 그리며 리오의 머리에 적중했다. 돌려차기였다. 아이슈마는 몸의 회전을 그대로 살려 검을 아래로 휘둘렀다. 강렬한 소음에 이어 리오의 육체가 공처럼 날아가 반대편 건물 안쪽에 처박혔다. 건물 3층 깊숙이 파고들어간 리오는 사무실 기자재와 서류 속에 파묻힌 채 피를 흘렸다. 그의 품안엔 보라색 검이 있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검을 들어 치명상만은 막은 것이다. 만약 검을 들지 않았다면 그의 목숨은 끝났을 것이다. 리오는 비틀대며 상체를 일으켰다. 얼굴은 피범벅이었다. 아이슈마의 발굽 에 맞아서인지 이마가 크게 찢어져 있었다. “빌어먹을.” 검에 의지해 일어나려던 리오는 움찔하며 앞을 바라봤다. 아이슈마가 건물 의 구멍 앞에 입을 벌린 채 매달려 있었다. “가만히 놔둘 거라 생각했나! 지옥의 화염 속에서 괴로워하며 죽어라!” 뼈가 꺾이고 탈골되는 소리를 내며 아이슈마의 입이 비정상적으로 벌어졌 다. 거의 180도에 가까운 각도였다. 이어서 검은 색의 불꽃이 그의 입에서 뿜어졌다. 리오가 있던 3층 전부가 폭염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폭발하여 무너져 내렸다. 아이슈마는 무너지는 건물 속으로 들어갔다. 구경꾼들은 도대체 뭘 위해 저 러는지 궁금해 했지만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건물이 완전히 무너지기 직전에 빠져나온 아이슈마의 손엔 엉망이 된 리오 가 들려있었다. 그는 리오의 목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리오는 의식을 잃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좋아, 다 좋다, 리오 스나이퍼. 그러나 넌 어쩔 수 없는 현실을 간과했 다. 내가 너보다 강하다는 현실을 말이다!” 아이슈마는 리오를 아스팔트에 패대기쳤다. 숨을 강하게 내쉰 아이슈마의 코와 입가에서 검은 불길이 살짝 뿜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전경들이 술렁댔다. 여러 가지 말이 나왔지만 도망쳐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케빈과 리진 등도 비슷했다. 후퇴를 해야 할지, 레드 원을 도와 싸워야 할 지 망설여졌다. 그냥 좀 강한 BG라면 당연히 돕겠다는 생각을 했겠지만 상 대는 입김 한 방으로 건물 하나를 날리는 괴물이었다. 그런 그들 사이를 지크가 비집고 나갔다. 왠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그의 뒷모습을 보고 리진은 이유 없이 발끈했다. “이봐, 지크!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뭐하는 거야!” 지크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후퇴해.” “응?” 리진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지금 그의 모습은 여태까지 그녀가 본 지크와는 달랐다. 한없이 밝고 명랑 하기만 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매우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지크는 다시 말했다. “모두 데리고 가. 구경꾼은 더 이상 필요 없어.” “무슨 소리야? 지크가 저 괴물을 막겠다는 소리야?”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데려가. 큰일은 없을 테니까 PDA 남는 거 있으면 두고 가. 마지막 보고는 내가 할게.” “하지만…….” 그때 PDA하나가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지크에게 날아갔다. 그것을 가볍게 잡은 지크는 챠오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미 등을 돌린 챠오는 나직이 말했다. “빌려주는 거야.” 지크는 씩 웃었다. “아아, 꼭 돌려주지.” 챠오와 지크를 번갈아 바라본 리진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팍 쓴 채 돌아섰다. 잠시 동안 지크를 보던 케빈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프로 클리너들의 철칙이 뭔 줄 알아? 동료, 아니 동업자가 죽으면 그냥 튀는 거야. 개죽음을 당할 확률이 높아졌기 때문이지.” “…….” “이제는 BSP니까 좀 달라져야겠지? 너 다음엔 우리야. 알아두라고.” 케빈은 엄지를 들어 보인 뒤 물러섰다. 지크 역시 엄지를 들어 그를 배웅해 줬다. 얼마 후, BSP와 전투경찰들을 실은 차량이 긴 행렬을 지어 사라졌다. 리오 외에 남은 사람은 지크와 봉성, 칼킨뿐이었다. 상황이 정리되자 지크는 팔뚝을 매만지며 앞으로 걸었다. “자아, 내 차례인가?”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이슈마는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 하하하하! 내가 적당히 밑을 보였나보군. 이런 애송이까지 나에게 덤비려 하다니, 완전히 망신인데? 뭘 믿고 나에게 덤비려 하는 건가, 꼬마? ” “글쎄?” 지크는 웃을 뿐, 전혀 멈추지 않았다. “오지 마!” 쓰러져 있던 리오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지크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 췄다. 리오는 비틀대며 일어났다. 그의 전신에 난 상처에서 피가 쏟아졌다. 구멍이 난 쌀자루에서 쌀이 비어 져 나오는 마냥 처참한 모습이었다. 전투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리오의 붉은 눈빛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투지가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와 악이었다. “아직 내 싸움은 끝나지 않았어! 녀석을 상대하고 싶으면 내가 죽은 다음 에 해! 지금 날 방해하는 녀석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여 버릴 거야!” “리오…….” 지크는 안타까운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말 걸지 마, 귀찮게 하지 마, 꺼져버려!” 리오는 소리쳤다.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그의 육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지크를 치기는커녕 더 이상 움직일 힘도 없었다. 뒤에 서있는 아이슈마가 검을 휘두르면 그는 그대로 끝장이었다. 지크는 손으로 형제의 어깨를 짚었다. 리오는 어깨를 움찔할 뿐, 아무런 행 동도 하지 못했다. “됐어, 이제 됐으니까 그만해. 넌 아무 잘못도 없어.” “닥쳐!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당연히 모르지, 모른다구! 하지만 지금 널 말려야 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 어! 더 이상 싸워봤자 너에게 이득될 건 없단 말이야!” “이득이 되건 말건 너랑 무슨 상관이야! 아, 내 뒤에 있는 녀석과 싸우고 싶나? 그런 건가? 그럼 내가 죽은 다음에 실컷 싸워! 지금 날 방해하지 말 고!” 결국 지크의 입 안에서 으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닥쳐야 하는 건 너야!” 그의 주먹이 리오의 볼에 꽂혔다. 크게 비틀거리던 리오는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지크는 형제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젖먹이 같은 투정은 대충 부려! 네가 네 손으로 세상 하나를 박살내는 거 랑 네가 멸망을 초래하는 거랑 뭐가 틀려? 지금은 또 뭐야!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밖에 안되잖아!” “…….” “네가 세상을 멸망시킨 건 어쩔 수 없어! 지나간 일이고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니 미련을 버리고 그냥 받아들이란 말이야! 나중에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면 되잖아!” “그게 그만큼 단순한 일인 줄 아나? 교회 가서 목사 붙잡고 회개하면 백지 가 되는 일이 아니야!” “그럼 이건 옳은 일이야? 네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이냐고! 아니잖아!” “그럼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지크의 팔뚝 밑으로 핏물이 떨어졌다. 조금씩 떨어지던 핏물의 양은 점차 많아졌다. 맑은 물과 피가 반쯤 섞인 그 물의 출발점은 리오의 눈 밑이었 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검을 휘두르는 것 밖에 없어. 게다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들을 죽이기 위해 움직이는 것일 뿐이야! 죽고 싶어도 못 죽어! 쉴 수가 없어! 밤이고 낮이 고 피 냄새만 맡아야 돼! 너처럼 밤마다 따뜻한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는 음 식을 먹으며 쉴 수가 없다고! 이런 내가 영웅이야? 영웅이 아니라 단순한 살인청부업자에 불과해! 네 눈엔 내가 영웅으로 보여?” “아니.” 지크는 팔을 벌렸다. 상처 입은 야수의 몸은 힘없이 형제의 품안에 안겼다. “그냥 바보야.” “…….” “하지만 괜찮아. 난 바보의 마음조차 모르는 진짜 바보거든.” “…….” “쉬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돼. 슈렌이랑 함께 같이 놀자구. 널 영웅 취급하는 얼간이들을 실컷 씹으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거야. 여긴 놀기 딱 좋은 곳이고… 또 우리들의 집이 있는 곳이니까.” “윽, 으으윽…….” 리오는 눈을 질끈 감은 채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지크의 재킷은 붉었지만 그가 흘리는 핏물은 더욱 붉었다. 뒤에서 가만히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슈마는 검을 바닥에 꽂고 팔짱 을 끼었다. “들어라, 리오 스나이퍼. 절대 선과 절대 악은 그 누가 정의를 내린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의 정의와 그것에 반대되는 정의, 그리고 미치광이가 있 을 뿐이다. 지금까지의 넌 아직 자신의 정의를 만들지 못한 애송이에 지나 지 않았다.” 그는 왼손을 들어 불끈 쥐었다. 이어서 손을 펴자 여섯 개의 하얀 영혼이 부드럽게 춤을 추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에 맞춰 지크의 손에서 하얀 구체가 튀어 올라 그 속에 합류했다. 잠시 후, 일곱 개의 영혼들은 산산이 흩어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됐다. “리오 스나이퍼, 너를 구속하고 있던 업보(業報)는 사라졌다. 이들의 옳고 그름은 저승의 왕인 하데스께서 공정하게 심판을 내려주실 것이다.” 리오는 지크의 품어서 벗어나 아이슈마를 바라봤다. “무슨 뜻이지?” 아이슈마는 검을 들어 리오에게 끝을 돌렸다. “지금 이곳엔 악신계의 세력 확장을 바라는 자도, 자신의 정의를 찾아 방 황하는 자도 없다. 오로지 두 명의 전사만이 있을 뿐이다.” “…….” “검을 들어라, 리오 스나이퍼. 그리고 새로 얻은 너의 정의를 나에게 보여 라.” “원한다면.” 아대로 얼굴을 대강 훔친 리오는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보라색 검을 들었 다. “아, 잠깐.” 지크는 다시 형제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가 내민 것은 BP-08이라 쓰인 세 개의 작은 원통이었다. “이걸 주사해봐. 네 덩치면 세 개 정도는 맞아야 할 거야.” 리오는 순순히 그것을 받아 그 끝을 팔에 내리쳤다. 시원한 기운이 몸 전체를 타고 흘렀다. 얼굴과 몸의 상처가 연기를 내며 급 속히 재생되었다. BP-08의 약효가 육체적 피로를 없애준 것뿐만 아니라 리 오의 신체재생능력을 최대로 활성화시킨 것이다. 리오는 문득 머리를 매만졌다. 머리카락이 땀과 오물에 잔뜩 젖어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았다. 그는 아대를 고정한 끈 중 하나를 풀어 머리채를 묶었다. 위에서 묶어 아래 로 내린, 챠오와 비슷한 스타일이었지만 훨씬 더 풍성하고 날카로웠다. 마 치 가시가 많은 드래곤의 꼬리처럼 보였다. 가르마 때문인지 앞머리가 왼쪽으로 크게 몰렸다. 산발이었을 때는 몰랐지 만 머리를 묶으니 더욱 그렇게 보였다. 리오는 눈을 똑바로 뜨고 아이슈마를 쏘아봤다. 항상 붉게 빛나던 그의 눈 이 어렴풋하게나마 파란 빛을 뗬다. “이젠… 망설이지 않는다.” “그래? 그럼 몸으로 증명해라.” 아이슈마는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잠시 후, 오로지 싸움에만 집중한 두 전사의 결투가 벌어졌다. 갖가지 기술과 트릭이 유감없이 펼쳐졌다. 분노와 피해의식, 슬픔 같은 값 싼 감정들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오직 순수한 투쟁심만이 현장을 지배했 다. 둘의 처절한 싸움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시간으로만 따졌을 때 세 시간이 었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지크와 봉성, 그리고 칼킨에겐 순식간이었다. 마침내, 둘 중 한 명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하늘에선 때마침 눈이 내렸다. 일기예보엔 오늘 내리는 눈이 금년의 마지막 요설이라고 했다. 하얀 눈송이가 파괴된 도시의 잔해 위에, 그리고 지친 두 전사의 육체에 춤 추며 내려와 앉았다. 전투 내내 숨을 죽이고 있다가 끝나자마자 내려온 것 을 보니 눈의 요정은 역시나 겁이 많은 모양이다. 리오와 아이슈마는 묵묵히 서로를 바라봤다. 둘 다 지금 상황에 대한 후회 나 탄식, 기쁨은 없는 듯 했다. “전사로서의 명예와 경의를, 아이슈마.” “명예와 경의를, 리오 스나이퍼.” 아이슈마의 거체가 굉음을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어서 리오가 한쪽 무릎 을 땅에 떨어트렸다. “끝인가? 후후…….” 리오는 머리끈을 풀었다. 아래로 흘러내리는 머리채 때문에 그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리오!” 지크가 달려와 리오를 부축했다. 칼킨 역시 쓰러진 아이슈마를 일으켜 세웠 다. 칼킨은 아이슈마의 갑옷 탓에 조금 비틀어진 자신의 모자를 제대로 눌러썼 다. 그의 넓은 모자 위로 많은 눈송이가 떨어졌다. 그는 모자 밑으로 리오를 바라봤다. “후회는 없나?” “이제 됐다. 충분해.” 칼킨은 이어서 지크에게 눈을 돌렸다. “난 아이슈마님을 모시겠다. 돌아올 때까지 뒷일을 부탁한다.” “응? 뒷일이라니?” 칼킨은 눈짓으로 거리 저편을 가리켰다. 한 대의 승용차가 눈발을 해치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차가 누구의 소유인지 알고 있는 지크는 씩 웃었다. “걱정 마라.” 그 직후, 아이슈마와 칼킨의 육체는 무서운 소리를 내며 땅속으로 사라졌 다. 그들이 사라진 곳엔 끝을 알 수 없는 검은 구멍이 있었는데, 구멍은 차 가 도착하기 전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차는 천천히 걷는 봉성과 지크 사이에 멈췄다. 차에서 헐레벌떡 내린 사람 은 다름 아닌 처크와 루이였다. “지크, 어떻게 된 거냐? 이 꼴은 뭐고?” 지크는 사방을 살폈다. 화려하기 그지없던 A-27 구역은 며칠 동안 시가전이 벌어진 것처럼 완전히 대파되어 연기를 뿜어댔다. “좀 부서졌네요.” “부서진 건 나도 알아!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냐고!” “보험회사가 알아서 하겠죠. BG들이 난동을 부렸다고 하세요.” “뭐라고?” 지크, 그리고 리오는 당황하는 처크를 보고 실소를 터트렸다. 처크는 할 말을 잃은 듯 고개를 저었다. 언론과 시청, 그리고 대한민국 정 부에게 앞으로 당할 고초가 눈에 선해서였다. “뭐, 좋아. 그렇다 치자. 네가 부축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냐? 이 근처에서 코스플레이 행사라도 있었나?” 지크는 리오와 눈으로 사인을 주고받은 뒤 말했다. “레드 원이에요.” “레드 원? 저 친구가?” 처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드 원 치고는 좀 많이 다쳤는데?” 그 말에도 둘은 킥킥 웃기만 했다. 고개를 저은 처크는 시거를 물고 끝에 불을 놓았다. 하얀 연기가 눈송이 사 이에서 춤추며 올라갔다. “리오 스나이퍼라고 했나?”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리오의 발이 멈췄다. 더불어 지크의 발도 멈췄다. 무 슨 영문인지 모르는 루이는 깜짝 놀라 아버지를 쳐다봤다. “자네가 뭘 하는 사람인지 좀 가르쳐 주겠나? 이것도 인연이니 말일세.” “…….” “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난 입이 무거운 사람이니까. 게다가 난 지크의 할아버지라고. 설마 손자한테 해가 되는 일을 하겠나?” 리오는 지크와 처크를 차례로 바라봤다. 그러다가 잠시 후,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냥 떠돌이 기사요.” 두 남자의 모습은 눈발 저편으로 차츰 사라졌다. 봉성이 처크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냥 그렇다는구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처크는 피식 웃었다. “후후, 그런가보죠. 댁에 가십니까?” “그렇소. 오늘 생일인데 운동 한번 죽이게 하는구려. 태워다 주시겠소?” “제가 설마 거절하겠습니까. 루이, 모시고 타거라.” “네.” 처크의 승용차는 폐허를 뒤로 하고 거리를 달렸다. 잠시 후, 비상해제를 알 리는 사이렌이 매트로 서울 사방에 울려 퍼졌다. 리오를 뒤에 앉힌 채 오토바이를 몰던 지크는 사이렌을 울리며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소방차의 빨간 불빛들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비록 소리는 틀리지만 카페의 폐점을 알리는 블루스의 음색도 이렇듯 쓸쓸 하지 않을까. 왠지 그럴 것 같았다. “붉은 블루스(Red Blues)구나. 안 그러냐?” 죽은 듯 잠이 든 리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8화 [R.E.D Blues] 끝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10화 [Stay With Me] 그녀의 의식이 돌아온 것은 건물붕괴 후 5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눈앞엔 어둠 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콧속과 피부 위에 흙먼지가 쌓 이는 걸 보니 무너진 건물의 잔해 속에 갇힌 것 같았다. 8월의 열기와 습도가 그녀의 모든 감각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외부 온도 말 고도 그녀의 품안에 있는 또 하나의 36.5도가 기온을 더욱 높이고 있어서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품안에 느껴지는 사람의 몸. 더듬어보니 남자는 아니다. 살이 부드럽고 골 격이 작았다. 여자였다. 그 촉감은 사고 직전의 기억을 조금씩 되살려 주었다. 자신을 비롯한 BSP들은 BG의 습격을 받은 대형 백화점을 탈환하고 생존자들 을 구출하라는 임무를 받아 Y구역으로 출동했다. 임무는 매우 쉬웠다. BG들은 모두 E급 정도로 매우 허약했고 머릿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한 시간에서 길게는 두 시간 정도면 끝날 일이었다. 진짜 문제는 BG들을 대부분 소탕할 무렵에 발생했다. 백화점이 무너져 내리 기 시작한 것이다. 조사해본 결과 구 지하철 노선과 연결됐다는 이유로 폐쇄된 백화점의 지하 가 BG의 알에서 흘러나오는 강산성 물질에 부식되어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 다가 오늘 사건발생과 동시에 도시가스가 폭발하면서 전체적인 붕괴로 치달 았다. BSP본부에선 생존자의 대피를 우선으로 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그녀와 동료 들은 생존자 구출에 전력을 기울였다. 일은 아슬아슬하게 순조로웠지만 마 지막 생존자인 여고생 한 명을 대피시킬 때 건물이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 다. 지금 그녀가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여고생이었다. 그녀는 몸을 움직여봤다. 허나 아쉽게도 머리를 제외한 전신이 건물더미에 방해를 받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붕괴 직전에 발경(勁)을 시전하지 않았다 면 방해 정도가 아니라 전신이 으스러졌을 것이다. 그녀의 얼굴 위로 땀이 흘러내렸다. 산소는 희박해지고 기온은 더욱 올라갔 다. 의식도 점차 흐려졌다. “린 챠오 소위! 린 챠오 소위, 들리십니까? 들리면 응답하십시오! 여기는 BSP본부입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들리십니까? 린 챠오 소위!” 허리춤에 매달린 PDA가 계속 불을 뿜으며 그녀를 부르는 메시지를 전달했지 만 그녀, 챠오는 PDA를 잡을 수도, 응답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생과 사를 좌우에 둔 인생의 저울은 점차 나쁜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죽음에 가까워지면 지난날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런지 좋고 나쁜 옛 기억들이 거짓말처럼 생생히 떠올랐다. ※※※ “챠오, 일어나렴, 챠오! 손님 맞으러 일찍 나가야 한다고 엄마가 어제 말 했잖니!” 아침마다 들리는 시끄러운 목소리. 개가 방울소리에 반응해 침을 흘리듯 소 녀의 눈도 자연스레 떠졌다. “일어났어요.” 힘겹게 대답한 그녀는 아직 잠기운이 가득한 눈을 돌려 방문 위에 걸린 시 계를 바라봤다. 오전 6시 30분. 꽤 이른 시간이었다. 오늘부터 신세를 진다는 손님이 시내에 도착하는 시간은 8시로 예정되어 있 었다. 무려 한 시간 하고도 30분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친이 지 금 그녀를 깨운 이유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집이 워낙 고산지대에 위 치해 있기 때문이었다. “이사를 가자니까, 제발.” 칭얼대며 침대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종이를 단단히 바른 고풍스러운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녀의 탱크톱과 핫팬츠 위로 꽤 강한 빛이 쏟아졌다. 햇볕의 따사로움과 아침바람의 차가움이 합해진 언밸런스한 감촉이 그녀의 잠을 멀리 내쫓아주 었다. 그녀는 다리를 곧게 편 채 허리를 굽혀 손바닥을 땅에 닿게 했다. 흑갈색의 긴 머리카락이 방바닥 위로 흘러내렸다. 허벅지와 무릎 모두 무리 없이 직선을 유지하는 것을 봐서 하루 이틀 운동한 몸이 아닌 듯 했다. 게 다가 복부엔 얇은 주름만이 잡힐 뿐, 군살로 이루어진 산맥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허리를 편 그녀는 거울 앞으로 달려가 머리를 묶었다. 끈을 입에 물고 머리 채를 모으는 그녀의 얼굴은 화장을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처 럼 짙은 눈썹과 큰 눈 덕분에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좋아.” 머리손질을 마친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씩 웃은 뒤 세면실로 향했 다. 그녀, 챠오의 집은 사당처럼 생긴 3층의 커다란 건물을 중심으로 몇 개의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녀의 집안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중간 규 모의 절처럼 보이는 형식이었다. 가족이 약 30여 명 가까이 되는 초 대가족이기에 그런 것이다. 2032년 현재 의 세계에선 TV프로그램에나 나올 법한 상황이었지만 챠오의 가문 사람들은 그다지 큰 불만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운동장을 연상시킬 정도로 넓은 집 마당엔 10대로 보이는 소년소녀들 10여 명이 나와 청소를 하고 있었다. 한 가족이어서 그런지 아이들의 머리색과 얼굴생김새는 비슷비슷했다. 헤어스타일이 조금씩 다를 뿐이었다. 가족 자체가 원래 밝은 분위기였지만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밝았다. 오늘 일어날 특이한 이벤트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오늘 온다는 그 사람, 미국인이라면서?” 아이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있어 보이는 소년이 말을 꺼냈다. 그러자 근처 에 있던 아이들 중 가장 어린 아이가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응, 엄마가 그랬어. 양키답게 키가 꽤 크다던데?” 순간 꼬마의 머리에서 충격음이 터졌다. 서열상 두 번째로 보이는 소녀가 꿀밤을 준 것이다. “그런 말 쓰지 마. 할아버지에게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그렇다고 세게 때릴 것까진 없잖아.” 머리를 양손으로 부여잡은 아이는 눈물이 찔끔 맺힌 눈으로 자신을 때린 소 녀를 째려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소녀가 무서운 얼굴로 다시 주먹을 치 켜들자 꼬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빗자루를 들고 고개를 돌렸다. 소녀는 맨 처음 얘기를 꺼낸 소년에게 물었다. “그런데, 차이 오빠. 왜 챠오 언니가 그 사람을 마중 나가는 거야? 어른들 께서 차를 타고 마중 나가셔도 되잖아.” 소년은 양손을 좌우로 펼쳤다. “글쎄? 챠오 누나가 피자를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닐까? 미국사람들은 피자 를 좋아한다며. 게다가 옌옌처럼 성격이 나쁜 것도 아니고… 윽!” 차이는 움찔하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그의 목이 있어야 할 자리엔 대나무 빗자루의 끝이 탄력 있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협지의 삽화에서나 나올 법한 훌륭한 봉술자세였다. 물론 그 공격을 피한 소년의 자세 역시 매우 깔끔했다. 나이에 맞지 않는 능숙한 모습이었지만 그런 것을 재미있게 바라보고 있는 꼬마의 표정 역시 현실적이지는 못했다. 소녀, 린 옌옌은 꼬마를 때릴 때처럼 무서운 눈으로 차이를 쏘아보며 말했 다. “다시 말해보시지?” “농담이야, 농담이라고.” 차이는 손을 흔들며 몸을 곧추세웠다. “야, 너희들 또 싸우는 거야? 어머니들께 이른다!” 멀리서 제법 큰 목소리가 들렸다. 청바지에 하얀 남방셔츠를 깔끔히 차려입 은 챠오가 자전거를 끌고 나타나자 청소를 하고 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갔다. “챠오 누나!” “언니!” 챠오는 팔을 흔들어 아침인사를 대신했다. 팔을 흔들 때마다 좌우로 움직이 는 포니테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생동감이 넘쳐보였다. 가장 먼저 그녀에게 도달한 것을 10세 이하의 집단이었다. “누나, 햄버거 좀 사다줘! 못 먹은 지 한 달이 넘었단 말이야!” “나는 아이스크림!” “난 피자랑 치킨!” “나는 캐러멜!” 갑작스레 쏟아지는 주문에 챠오는 아쉬운 미소를 지었다. “아아, 그만 해. 언니는 놀러 가는 게 아니란 말이야. 그리고 이 시간에 여는 햄버거집이 어디 있어?” “그럼 캐러멜! 문방구에서 팔아!” “거기서 파는 건 불량식품이야.” 꼬마들의 불만스러운 표정 뒤로 나이가 좀 있는 아이들이 다가왔다. “누나, 미국인이면 조심해야 돼. 특히 남자는 말이야.” 챠오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린 차이가 경고하듯 말했다. 챠오는 눈을 휘둥 그레 떴다. “어? 왜?” “그쪽 사람들은 인사라면서 다짜고짜 껴안고 뽀뽀부터 한데. 누나는 아직 키스해본 적 없잖아. 남자 손도 못 잡아봤고.” “손뼈를 으스러트려줄까?” 상쾌히 웃으며 말하는 챠오의 모습에 차이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제발 그런 얼굴로 이상한 말 좀 하지 마.” 이어서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소년, 린 찬이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자전거 타고 갈 거야?” “그럼 어쩌라고?” “후후, 내 애마로 데려다주지. 나와 함께 레이싱 오토바이의 매력에 빠져 보자고.” 찬은 길게 내린 앞머리를 손으로 훑으며 미소를 지었다. 챠오는 느끼한 것 을 먹은 사람처럼 혀를 내밀었다. “너랑 함께 곡예를 하느니 걸어가겠어.” “후, 오늘도 사양하는군.” 찬은 이마를 짚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그런 모습에 챠오와 아이들은 기 다렸다는 듯이 집단구타를 날렸다. 물론 양쪽 모두 장난이었다. “그럼 언니 갔다 올 테니 청소 잘 하고 있어, 알았지? 이왕에 오는 손님이 고, 또 오래 머물 분이니 좋은 첫인상을 보여주는 게 좋잖아.” “네에.”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한 뒤 사방으로 흩어졌다. 챠오는 자신의 MTB자전거를 끌고 별채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많은 어른들 에게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이들만큼이나 어른들도 많아서 챠오를 포함한 아이들은 인사만으로 아침 을 보내는 게 일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어른들이나 무술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은 집을 떠나 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별채에 도착한 챠오는 자전거를 세우고 깊숙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 대상은 마루 중앙에 바위처럼 굳건히 정좌를 하고 앉은 노인, 린 쉐이롱 이었다. 백발을 깔끔히 넘겨 묶은 쉐이롱의 얼굴은 그 어떤 신상(神像)보다도 근엄 하고 무게가 있어 보였다. 코 밑과 입가를 덮은 흰 수염, 그리고 눈 아래까 지 길게 늘어진 눈썹 등으로 인해 그의 모습은 신선보다도 더 신선처럼 느 껴졌다. “아침인사 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 감겨있던 쉐이롱의 눈이 슬며시 뜨였다. “이제 가느냐?” “예, 할아버지.” “음, 이리 오너라.” 쉐이롱은 가까이 다가온 손녀에게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손님께 아침식사를 대접해라. 이곳에 도착하면 10시가 넘을 테니 시내에 서 식사를 하고 오는 게 낫겠지.” “예, 알겠습니다.” 봉투를 받은 챠오는 그것을 가슴에 안고 다시 한번 인사를 했다. 쉐이롱은 물러서려는 손녀를 다시 불렀다. “아, 손님이 미국인이니 만큼 네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네?” 쉐이롱은 수염을 슥 훑어 내리며 말했다. “그가 아무리 원해도 피자는 안 된다.” “…….” “너, 어제도 먹었지? 아무리 성장기라지만 칼로리 과도는 무도가에게 있어 서 금물이야. 고기를 먹고 싶다면 만두로 해라.” “……네.” 조금 힘이 빠진 듯한 목소리로 대답한 챠오는 조심스레 별채를 떠났다.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선 챠오는 산길을 조심스레 내려갔다. 집을 떠나 시 내로 들어가려면 5킬로미터에 가까운 산길을 타야 하는데, 보통 승용차로는 들어오기도 힘든 험한 산길이어서 산악용 MTB자전거가 아니면 오고가기도 힘들다. 챠오는 덜컹덜컹 비명을 지르는 자전거의 핸들을 꽉 잡은 채 투덜댔다. “할아버지도 참, 아침부터 피자를 먹는 사람이 어디 있어! 만두는 또 뭐야 ? 시내에서 파는 만두는 가뜩이나 맛도 없단 말이야! 그냥 고기만 들어있을 뿐이라고! 그리고 칼로리 과도? 자전거로 이 산길을 오가는 게 얼마나 힘든 지 아시긴 아시는 거야?” 한참을 투덜댄 챠오는 결의에 찬 얼굴로 중얼댔다. “꼭 유학을 갈 거야. 좀 더 사람답고 멋진 생활을 할 거라고. 다른 언니들 처럼 산속에서 식모살이를 할 수는 없어!” 린 챠오, 금년으로 16세를 맞이한 그 소녀의 결의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 지는 아침햇살보다도 강렬했다. 출근시간이 가까워지자 시내는 점점 복잡해졌다. 하지만 인접한 대한민국이 나 일본 내지는 같은 중국이면서도 다른 나라에 가까운 홍콩과는 매우 달랐 다. 무려 2030년대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차 대신 자전거로 북적였다. 그 자전거의 무리 안엔 챠오도 끼어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약속장소인 버스터미널 앞에 도착한 챠오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터미널은 다른 곳과 비교해서 매우 한산했다. 덕분에 은은하게 불어오는 아 침바람이 매우 시원하게 느껴졌다. 말끔한 복장을 입고 긴장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기다릴 것만 같 은 미국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보이는 것은 자전거에 비해 괴 물처럼 크고 두꺼운 아메리칸 스타일의 오토바이와 그 위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파란 재킷의 남자였다. 남색 야구 모자를 얼굴에 덮고 있어서 인상착의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모자 밑으로 나온 금발과 동양인과는 차이가 있는 하얀 피부는 그가 서양인이라 는 것을 말해주었다. 왠지 그가 확실할 것 같았다. 챠오는 그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저어, 린 쉐이롱 선생님을 찾아오신 분인가요?”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정말로 잠이 든 모양이다. 챠오는 좀 더 목소리를 높였다. “린 쉐이롱 선생님을 찾아오신 분인가요?” 그는 이번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조금 짜증이 난 챠오는 더욱 큰 목소리를 내기 위해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 장갑을 낀 그의 손이 불쑥 올라왔다. 얼굴 앞에서 정확히 멈춘 남자의 손에 놀란 챠오는 그만 기침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뭐하시는 거예요!” 그녀가 불쾌한 듯 소리치자 남자는 손을 슬슬 흔들었다. “아아, 미안. 한 타임만 더 기다리면 안 될까? 한번만 더 감상하고 싶어. ” ‘한 타임? 감상?’ 챠오는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남자를 쳐다봤다. 잠시 후, 바람이 불어왔다. 챠오의 머리와 남자의 재킷이 함께 흔들렸다. 모자 밑으로 슬쩍 보이는 남자의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아아, 이거야. 흔하지 않은 바람. 다른 곳에선 느끼기 힘든 깨끗한 바람 이라고.” 남자는 그제야 오토바이에서 등을 떼었다. 그는 모자를 제대로 쓰며 말을 계속했다. “매연에 찌든 힘없는 바람이 아니야. 바람 스스로도 기뻐하며 불고 있어. 정말 자유롭게 말이야. 넌 못 느끼겠니?” 그는 챠오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금발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 눈썹에 얼굴선이 꽤 날카로운, 그러면서도 소년 같이 밝게 웃는 것이 어울리는 준수한 얼굴이었다. 왠지 좋은 느낌이었다. 미국인이기 때문에 어울리기 힘들 것이라는 불안감 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청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챠오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물었다. “그런 걸 어떻게 아세요?” “좋아하니까.” 남자는 또 한번 웃었다. 바람을 좋아하는 남자. 챠오가 느낀 그 남자의 첫인상은 왠지 모르게 동화 처럼 신비로웠다. “마중 나온 거야?” “예, 린 챠오라고 합니다. 쉐이롱 선생님의 손녀에요.” “그래? 난 지크 스나이퍼야. 그냥 지크라고 불러.” 거기까진 좋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물론 세계최강의 남자라고 불러주면 더욱 좋지.” “네?” “아, 의아해 할 건 없어. 당연한 얘기니까! 하하하!” “…….” 챠오의 마음속에서 뭔가가 산산이 부서졌다. 바로 첫인상이라는 물건이었 다. 남자, 지크는 즉시 표정을 바꿔 이리저리 불만을 늘어놓았다. “바람은 좋은데 도시는 구리군. 지금이 어느 때인데 NBA를 틀어주는 곳이 없는 거야? 지금 파이널이라고, 파이널! 올해에는 반드시 킹스가 레이커스 를 꺾고 반지를 껴야 한단 말이야!” “저, 저어…….” “어이, 좋아하는 팀 있어? 어, 설마 농구를 싫어한다고는 하지 않겠지? 보 니까 키도 다른 애들이 비해서 좀 큰 것 같은데? 키가 몇이야?” “네? 176센티미터인데요?” “오, 그래? 나이는?” “열여섯이요.” “열여섯? 오오, 다 크면 한 180센티미터 정도 되겠는데? 남자친구는 있어? ” “그, 그만 하시고 아침식사나 하러 가시죠. 대접해드리라는 할아버지의 당 부가…….” “아침? 난 먹었는데? 라면이랑 햄버거를 잔뜩 먹어서 배불러.” “…….” 챠오는 순간 정신이 아뜩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복잡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때 따뜻한 감촉이 그녀의 어깨를 둘러왔다. 지크가 그녀의 어깨 위에 팔 을 걸친 것이다. “하지만 미소녀가 사는 식사는 충분히 넣어줄 수 있지. 실망할 필요는… ….” “무, 무슨 짓이에요!” 얼굴이 당근이 된 챠오는 비명을 지르며 팔을 움직였다. 그러자 지크의 몸 이 붕 뜨더니 바닥에 처박혔다. 호신술이었다. 챠오는 숨을 몰아쉬며 지크를 쏘아봤다. “만난지 10분도 안됐는데 이게 무슨 실례에요! 남녀가 유별한데 매너가 있 으셔야죠! 그리고 전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천한 여자가 아니에요!” 지크는 바닥에 엎어진 채 희미한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놨다. “오, 오해하지 마. 스킨십이야. 미국식 스킨십……. 난 네가 긴장한 것 같 기에…….” 하지만 깨어진 챠오의 첫인상을 되살리기엔 이미 늦어 있었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뒤, 챠오의 자전거는 집으로 가는 산길을 달렸다. 올 때와는 달리 오토바이의 묵직한 배기음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챠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더불어 지크의 표정 역시 좋지 않았다. 다행스 럽게도 인간관계가 그 원인은 아니었다. 모자를 뒤집어 쓴 지크는 한손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투덜댔다. “도대체 저 동네의 만두는 어떻게 만든 거야? 고기만두가 아니라 고기가 몸을 문지른 빵이잖아? 게다가 국수는 또 뭐야? 어째서 밀가루 냄새만 나는 거지?” 앞서가는 챠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오늘은 좀 나은 거예요. 국수 같은 경우엔 제가 고등학교에 입학 한 이후 가장 잘 만들어진 편이죠. 처음 갔을 때는 국수가 덜 익어서 나왔 다니까요.” “뭐? 진짜야?” 지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예. 그래서 원래는 피자를 사드리려고 했는데, 시간이 워낙 일러서 그렇 게 해드릴 수가 없었어요. 할아버지께서도 피자만큼은 사드리지 말라고 당 부하셨고요.” 챠오의 말을 들은 지크는 이상하다 싶었는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니, 피자만큼은 사주지 말라는 말은 뭐야?” “네?” “내가 피자 좋아한다면 피자를 사줘도 나쁘지 않잖아? 피자 냄새만 맡아도 코가 썩는 체질도 아닐 텐데 왜 그래?” “예? 그, 그렇긴 하지만…….” 그녀가 제대로 대답을 못하자 지크는 그제야 이유를 알았다는 듯 입 꼬리를 올렸다. “너, 피자 좋아하지?” “…….” 정곡을 찔린 챠오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지크는 기다렸다는 듯 크게 웃었다. “어쩐지, 너 피자대장이구나? 얼마나 피자를 많이 먹어댔으면 손님을 만나 도 피자만은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 하하하! 한번에 얼마나 먹어? 키를 보 니 한 판 정도로는 어림도 없겠는데? 하지만 무리하지 않는 게 나아. 피자 는 칼로리가 높거든.” “…….” 외간남자에게 이토록 수치를 당한 적이 있었을까. 챠오는 이대로 낭떠러지 를 향해 돌진하고 싶었다. “그건 그렇고, 여기서 집까지 얼마나 걸려? 꽤 오랫동안 온 것 같은데?” “아직 한 시간 정도는 더 올라가야 해요. 직선거리로는 멀지 않은데 산세 가 워낙 험해서 어쩔 수 없어요.” “한 시간?” 지크는 또 한번 놀랐다. 그럴 것이, 산길의 형세나 각도를 봐선 도저히 자전거로 한 시간을 달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프로 자전거등반 선수라 해도 30분 정도면 탈진해버릴 수준의 험악한 지형이었다. 그런데도 챠오는 평지를 가는 사람처럼 숨 한번 몰아쉬지 않고 길을 올라가 고 있었다. 이것은 상상을 초월한 체력이었다. 할 말을 잃은 지크는 혀를 불쑥 내밀었다. “네 각선미가 보통이 아니라고 느끼긴 했는데, 이유가 있었구나.” “이, 이상한 농담은 하지 말아주세요.” 경고를 하는 챠오의 얼굴은 어느새 귀까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산 중턱에 도달한 챠오는 지크와 대화가 끊긴지 30분 정도 됐다는 것을 깨 달았다. 아무리 괴팍한 성격의 손님이라 해도 이건 예의에 어긋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으로 대화거리를 찾던 그녀는 문득 그가 온 목적에 대해 궁금해졌다. “저어, 지금 여쭙기는 죄송한데요, 무슨 일로 우리가문을 방문하시는 건가 요?” 나름대로 신나게 경치를 구경하던 지크는 오토바이의 액셀을 돌려 챠오의 옆에 바짝 붙었다. “별 거 아냐. 우리 할아버지가 삼황오제권을 배워보는 것도 좋을 거라고 하셨거든. 그래서 그걸 배우려고 가는 거야.” “예에?” 이번엔 챠오가 어이없어 했다. 그녀의 가문은 중국 본토의 권법 중 최강이라 불리는 삼황오제권의 종가이 다. 삼황오제권은 기술의 위험성으로 인해 가문 외의 사람에겐 전혀 전승되 지 않을 뿐더러 가문 내의 사람에게도 몸과 마음에 소질이 없는 자에겐 절 대로 전승되지 않는 철칙을 가진 권법이다. 그 철칙은 2000년이 넘도록 지 켜져 왔고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옆에 있는 남자는 삼황오제권을 배우기 위해 왔다고 당당히 말 했다. 그것은 챠오로서는 실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챠오를 더욱 당황케 한 것은 그의 소질이었다. 척 봤을 때 육체적 능력은 매우 좋아보였다. 몸은 조금 마른 듯 보였지만 전신이 충실한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팔과 다리도 무술의 이상에 가깝 게 길었다. 동양인과 비교해서가 아니라 서양인 중에서도 긴 편이었다. 하지만 무술에 대한 능력은 도저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버스 터미널에 서 챠오 자신이 전개한 기초 호신술조차 피하지 못한 남자가 아니었던가? 그녀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어봤다. “저어, 정식으로 무술을 배우신 적은 있나요?” 지크는 씩 웃었다. “전혀. 어렸을 때 동네에서 태권도랑 합기도 배운 정도? 하지만 무술영화 나 경기를 보는 건 정말 좋아하지. 그 중에서 프로레슬링을 아주 좋아해.” “…….” 챠오는 할 말을 잃었다. 이건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경우였다. 막말로 번데 기조차 되어보지 못한 애벌레가 하늘을 날겠다며 나무 아래로 떨어지는 형 국이었다. 집안 외의 사람에게 무술을 전승하는 철칙까진 예외로 친다 해도 소질이 없 는 사람에게까지 억지로 가르침을 할 할아버지와 어른들이 아니었다. 분명 테스트를 거친 뒤 이 남자를 정중히 하산시킬 것이다. 그것이 지크라는 남 자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좋은 일이었다. ‘이 사람이랑 그리 긴 인연은 아닌 것 같구나.’ 그렇게 생각한 챠오는 남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친절하게 대해주자고 마음먹 었다. 하지만 지크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했다. “린 쉐이롱 선생님은 얼마나 강하셔?” “네? 무슨 말씀이세요?” “응, 적어도 날 가르칠 정도는 돼야 하니까. 만날 때 말했잖아. 난 세계최 강의 남자라고 말이야.” “…….” 그는 너무나도 엄청난 말을 바람처럼 가볍게 내뱉고 있었다. “가, 강하시죠. 예, 강하세요.” 챠오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대답했다. 나중에라도, 할머니가 될 때까지도 지금만큼 당황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챠오의 집까지 가는 길은 험하기 했지만 절경이었다. 힘 있게 튀어나온 근 육처럼 거대하게 불거진 돌산들과 녹음이 너무도 짙은 나머지 검게 보이는 숲, 그리고 사이사이에 놓인 계곡을 흐르는 깨끗한 물은 도심에 찌들어있던 이방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씻어주었다. 그 절경의 끝엔 큰 규모의 가옥이 보였다. 중앙에 위치한 큰 건물을 중심으 로 여러 개의 집이 모인 고풍스러운 모습이었다. 지크는 감탄하듯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멋진데? 하지만 인터넷이랑 수도, 전기 같은 건 들어와? TV는 나오 나?” 누구나 해볼만한 의심이었다. 챠오는 자랑스레 가슴을 펴고 말했다. “집은 오래된 것처럼 보여도 인터넷이랑 TV는 통합 새털라이트(Satellite: 인공위성) 방식을 써요. 좀 비싸긴 하지만 화질도 괜찮고 인터넷 속도도 매 우 좋죠. 수도는 지하수를 이용한 개인수도시설을 구축해서 쓰기 때문에 역 시 문제없어요. 따뜻한 물도 잘 나오고 화장실도 좋아요.” “그래? 의외인데? 하지만 그 정도 시설이면 설치비도 그렇고 유지비도 꽤 들 텐데?” “엄마 말씀으로는 은행 이자만으로도 충분하데요.” “…….” 일순간 벙어리가 된 지크는 문득 챠오가 탄 자전거에 눈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저 자전거도 록키 마운틴(Rocky Mountain)제네? 게다가 저건 어지간한 차보다 비싼 거잖아?’ 역시, 사람은 겉으로 봐선 알 수 없는 법이었다. 그는 압도적인 부의 차이 를 마음속으로 느끼며 챠오의 집 대문을 통과했다. 그가 오토바이에서 내릴 무렵, 열 댓 명의 아이들이 챠오와 지크를 향해 우 르르 몰려왔다. 형색색인 아이들의 모습에 지크는 또다시 놀라야만 했다. “우와, 무슨 애들이 이렇게 많아?” “다섯 째 작은 아버지까지 모두 한 집에 계셔서 그래요. 몇몇은 고모님들 아이들인데, 무술에 대한 소질이 있어서 이곳에 있죠.” “그, 그렇구나.” 열 살이 안 된 아이들은 챠오에게 달라붙었고 열 살이 넘거나 챠오와 나이 가 비슷해 보이는 아이들은 지크의 주위에 거리를 두고 섰다. 지크는 인디 언에게 포위당한 카우보이처럼 씁쓸히 웃었다. 챠오는 서둘러 아이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얘들아, 뭐하는 거야? 손님께 인사해야지? 미국에서 오신 지크 스나이퍼 씨야.” “처음 뵙겠습니다.” 아이들은 공손히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하나같이 단정하고 예쁜 아이들의 모습 덕분에 긴장을 푼 지크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피자대장이 소개한대로 난 지크 스나이퍼라고 해. 그냥 지크라고 불러도 돼.” 피자대장이라는 말에 아이들은 폭소를 터트렸다. 어떤 아이는 힘겨운 나머 지 바닥에 주저앉기까지 하며 웃었다. 그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아이들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정곡을 찌르는 그의 유머 덕분에 아이들이 가지고 있던 경계심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우와, 형도 알고 계셨군요? 챠오 누나가 피자를 얼마나 잘 먹는데요!” “큰 조각만 골라서 여덟 조각을 채워요. 실제로는 한 판 반이죠.” “닌자 거북이보다 더 많이 먹어요.” 아이들 사이에서 또 한번의 웃음이 터졌다. 덕분에 지크와 아이들 사이의 벽은 상당히 얇아졌지만 덕분에 희생된 챠오 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그녀는 구석에서 탈출할 겸 아이들을 추슬렀다. “아, 아무튼 모두 도장으로 가자. 손님맞이 해야지. 지크씨도 저를 따라오 세요.” “OK.” 지크는 챠오와 아이들을 먼저 출발시킨 뒤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가는 곳은 가옥 중앙에 자리 잡은 3층 규모의 대형 건물이었다. 그곳은 삼황오제권의 시초를 기념하여 만든 도장으로서, 겉으로 보기엔 3층 이었지만 실제로는 천장이 높은, 간단히 말해서 원통처럼 된 1층의 건물이 다. 내부엔 삼황오제권의 시조와 시조의 아버지를 신에 가깝게 형상화한 목조상 과 각종 중국식 병장기 같은 고전적 시설, 그리고 초현대식의 각종 트레이 닝 머신과 영상분석시스템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시설수준으로만 따지자면 웬만한 선진국의 선수촌을 능가할 정도였다. 모래주머니나 팔이 여러 개 달린 목각인형, 큰 술통 등 옛날 홍콩영화에서 나오는 소품들을 예상했던 지크는 내심 아쉬워했다. 하지만 도장에 들어선 순간 느껴진 선선한 공기는 그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하아, 좋은데?” 그는 심호흡을 하며 도장의 두 번째 출입문을 통과했다. 도장의 안쪽은 대낮처럼 밝았다. 아침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내부에 설치된 특수 조명장치 덕분이었다. 도장의 천장 중앙에 박혀있는 그 조명장치는 척 보기에도 비싸 보였다. 네 츄럴 라이트(Natural Light)라 불리는 녀석이었는데, 그냥 비싼 것이 아니 라 인간이 육체를 단련하기에 가장 알맞은 수준의 빛을 도장 내부에 뿌려주 는 대단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지크의 시선을 끈 존재는 도장 북쪽에 세워진 삼황 오제권 시조, 그리고 그 부친의 목조상이었다. 중국 특유의 화려한 색체가 인상적인 그 조각상을 잠시 바라보던 지크는 곧 인사를 하듯 씩 웃었다. 도장 안은 린 쉐이롱의 일가(一家)로 가득했다. 당주인 린 쉐이롱과 그의 아들 들은 부인, 그리고 성인이 된 아들들과 함께 미리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금 막 들어온 챠오와 아이들은 자신들의 자리 를 찾아 다람쥐처럼 조용하고 빠르게 이동했다. 이제 서있는 사람은 지크뿐이었다. 머쓱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지크는 정문 옆에 보이는 간이의자를 잡아다가 앉았다. 모두가 자리를 잡은 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한없이 장난을 칠 것 같 던 아이들도 지금만큼은 엄숙한 얼굴로 분위기를 맞췄다. 이윽고, 린 쉐이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가문을 방문해 주어서 고맙소. 난 우리 가문의 가장이자 삼황오제권 의 당주인 린 쉐이롱이라 하오.” “아, 예.” 지크는 어설픈 몸짓으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큰 키에 맞지 않는 그의 우 스꽝스러운 모습에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꼬마들이 엄마들의 제지로 입을 다무는 동안 린 쉐이롱과 그의 아들들, 그 리고 가문의 청년들은 서있는 지크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청년의 몸집을 본 쉐이롱은 속으로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소개를 받았을 때는 그저 가르칠 맛이 날 청년일 거라고 들었지만 직접 보니 그 이상이군. 그야말로 무술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몸이 아닌가? 신체 적으로도 그렇지만 전신에서 발산되는 저 힘과 기력은 사람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해. 하지만…….’ 쉐이롱의 눈이 멈춘 곳은 지크의 얼굴이었다. 긴장감이 어린, 관중을 처음 앞에 둔 유치원생과 같은 그의 얼굴을 주시하던 노인은 불안한 듯 들리지 않는 한숨을 쉬었다. ‘터무니없이 위험해. 칼집 없는 칼날과도 같아. 무(武)는 그렇다 쳐도 도( 道)는 알고 있을까?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옳은 마음이 바탕이 되지 않는 한 그것은 끝없는 폭력을 낳을 뿐이거늘.’ 노인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소질 하나만으로 자신을 두렵게 만든 그 청년 은 지금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어설프게 목례만을 했을 뿐이다. 만난지 몇 분 안돼서 사람을 완전히 평가한다는 것이야말로 예의에 어긋나 는 것이 아닌가? 자신을 꾸짖은 쉐이롱은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고 말했다. “이름이 지크 스나이퍼라고 했소? 처크 켄트 지부장으로부터 젊은이에 대 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소이다.” 처크 켄트라는 이름이 나오자 지크의 표정이 단숨에 바뀌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또 제 험담을 하시던가요?” “음? 무슨 말이오?”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쉐이롱은 눈동자를 크게 키웠다. 그러자 지크는 입술 옆으로 쓴 웃음을 흘렸다. “흥, 그럴 줄 알았지. 모르실까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우리 처크 할아 버지는 손자 험담을 못해서 안달이 나신 분이죠. 제가 네이비 씰에 있었을 때는 간 지 하루도 안돼서 놀림감이 됐다니까요? 거기 있는 군인아저씨들이 저만 보면 배를 잡고 웃으면서 콧구멍에 코드를 꽂아 전자레인지를 돌릴 수 있는 얼간이라고 놀려댔죠. 실제로 할 수 있긴 하거든요.” 지크는 옆에 보이는 낡은 선풍기의 플러그를 들어 그 끝을 콧속에 넣었다. 그리고 힘을 약간 가하자 스파크와 함께 선풍기 날개가 빙글빙글 회전했다. “…….” 꿈에도 보지 못한 그 경이적인 장면에 쉐이롱을 비롯한 일가는 석상처럼 굳 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크는 계속해서 입을 움직여댔다. “젠장, 특이체질일 뿐인데 뭐가 그리 웃긴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분이 중국을 시작으로 해서 저에 대한 전 세계적인 험담을 기획하시려나 본데, 소용없어요. 할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다 거짓말이 에요! 전부 다!” “하하하!” 순간 쉐이롱이 대소를 터트렸다. 이어서 그의 아들들을 비롯한 일가 전체가 거의 바닥을 구르다시피 하면서 고통스레 웃었다. 웃음이 겨우 진정된 시점은 어느새 자리에 앉은 쉐이롱이 눈물을 닦을 무렵 이었다. “하하, 이거 민망할 정도로 웃어버렸군. 미안하오, 젊은이. 정말 실례했 소.” “괜찮아요. 이런 상황엔 익숙해요.” 지크는 씁쓸히 웃었다. 악의 없이 장난기만 어린 표정이었기에 쉐이롱도 내 심 안심을 할 수 있었다.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군. 다른 사람 같으면 자존심이 상했다는 티를 내 외적으로 낼 텐데 말이야. 좋아, 그러면 슬슬 시험을 해볼까?’ 쉐이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가문의 권법을 배우고 싶소, 젊은이?” 그러자 지크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강하다면서요?” “후후, 매우 강하지. 하지만 삼황오제권은 단순한 무술이 아니오. 다른 모 든 권법들과 마찬가지로 육체의 단련을 통해 정신적 성장을 이룬다는 궁극 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 그야말로 하나의 철학이지. 기술의 파괴력이 높은 만큼 위험성도 크기 때문에 근본이 깨끗한 사람이 아니면 가르쳐줄 수 없 소.” “에이, 유머가 좀 심하시네요.” 지크는 코웃음을 쳤다. 물론 쉐이롱을 비롯한 가문 전원의 표정은 나쁜 쪽 으로 변했다. “이 동네엔 바이오 버그가 잘 나타나지 않아서 모르시겠지만 매트로 서울 이나 뉴욕, 동경 같은 대도시에선 농담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편의점에서 파는 껌처럼 녀석들에게 매일같이 먹히고 있어요. 그 때문에 세상이 원하는 건 무도가가 아니라 인간병기에요. 좀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BG를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요.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선 말이죠.” “흠, 서양식 사고방식이군. 젊은이의 말도 일리는 있소. 하지만 싸우기만 해서는 너무 슬프지 않겠소?” “그렇긴 하죠.” 지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슬프니 뭐니 하는 것도 다 몸이 편할 때의 일이에요. 배고파서 잠 도 못자는 사람에게 품위를 논하는 것만큼 바보짓은 없잖아요. 지금 세계는 그런 상황이에요.” “그렇다면 젊은이는 그런 세계를 위해서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소?” 쉐이롱의 질문에 지크는 씩 웃었다. “희생할 각오까지는 몰라도 BG의 엉덩이를 걷어 차주고 싶은 마음만은 간 절하죠.” 그의 대답을 들은 쉐이롱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역시, 위험하긴 위험해. 하지만 지금껏 나에게 무술을 배우겠다며 싸구려 정의를 내뱉던 자들 보다는 솔직하지 않나?’ 쉐이롱은 다시 일어났다. “그렇다면 젊은이에 대한 간단한 시험을 하겠소. 마음가짐은 그렇다 쳐도 육체적인 조건이 되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소? 괜히 어설픈 몸으로 삼황오 제권을 배우려 한다면 젊은이가 오히려 해를 입는다오. 받아들이겠소?” “그쪽에서 봐주지 않는다면야.” 그의 당찬 말에 쉐이롱과 그의 아들들을 제외한 젊은이들 모두의 가슴이 후 끈 달아올랐다. 아까부터 그랬지만 눈앞에 보이는 젊은 이방인의 행동은 도 저히 봐줄 수 없을 정도로 건방졌다. 시비를 거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불러올 정도였다. 쉐이롱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만약의 경우… 젊은이의 시체는 어떻게 하면 좋겠소?” 순간 챠오를 비롯한 아이들과 젊은이들은 오싹한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지 금까지 자신들이 들어왔던 조부의 목소리 중 가장 싸늘한 목소리였다. ‘할아버지, 진심이시잖아?’ 챠오는 어찌된 영문이냐며 묻듯이 자신의 아버지인 린 파이추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버지의 근엄한 눈매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런데 쉐이롱의 질문에 대한 지크의 답변도 만만치 않았다. “중국에서 가장 높은 산 위에서 던져줘요. 날개 없이 하늘을 날아보는 것 도 좋을 것 같거든요.” 정말 터무니없는 녀석이다. 모두는 그렇게 생각했다. 쉐이롱이 말했다. “그럼 시험방식은 1대1 승부로 하겠소. 파옌, 나오너라.” 그는 손자들 중 한 명에게 손짓을 했다. 지명이 된 사람은 올해로 스무 살 을 갓 넘긴 린 파옌이라는 청년이었다. 앞머리가 좀 긴 스포츠머리에 모범생적인 마스크를 가진 파옌은 모친으로 보이는 여성의 격려를 받으며 지크 앞에 섰다. 파옌은 약간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상대가 너무 강해보여서 그런 게 아니 라 조부가 자신을 가장 먼저 지목할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파옌이 긴장을 풀 겸 준비운동을 시작하자 지크 역시 파란색 야구재킷을 벗 고 몸을 풀었다. 재킷을 입고 있었을 때는 몰랐지만 벗고 보니 상당했다. 몸이 무거워보이진 않았지만 가벼워보이지도 않았다. 힘과 빠르기가 적절히 조화된 멋진 근육 들이었다. 그 사이 챠오는 조부와 파옌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녀뿐만 아니라 린 쉐이 롱과 어른들을 제외한 모두가 쉐이롱의 결정에 의아해하고 있었다. ‘파옌 오빠 정도라면 하산한 언니오빠들 만큼이나 강한데, 어째서 첫 상대 로 고르신 거지? 저 남자는 내 호신술도 제대로 못 피하는 사람이란 말이 야.’ 하지만 그것은 챠오만의 생각인 듯 했다. 쉐이롱은 눈앞에서 움직이는 지크의 육체를 유심히 감상하고 있었다. ‘절권도… 아니, 완전한 자기류의 격투스타일이 담긴 몸이다. 뭐가 튀어나 올지 모르겠군.’ 그는 한숨을 쉬었다. ‘예상대로 강해. 처크 지부장이 무슨 생각으로 저 청년을 이곳에 보냈는지 모르겠어. 아니지. 내가 너무 늙어서 사람 구분을 잘 못하는 것일 수도 있 어. 계속 지켜보는 게 좋겠군.’ 지크, 파옌의 준비가 끝나자 쉐이롱은 시작신호를 보내기 위해 오른손을 뻗 었다. 손을 올리기 전, 쉐이롱은 진지한 눈으로 파옌을 보며 말했다. “봐주겠다는 생각은 버리고 본심을 다해 상대해라.” 내색은 안했지만 마음을 읽혔던 파옌은 마음을 바꾸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든 뒤 준비자세를 잡았다. 반면 지크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피식 웃고는 양손을 청바지 주머니에 꽂았다. ‘뭐야, 저 사람은?’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판단한 파옌은 언짢은 표정을 잠깐 지었다가 풀었다. 그는 흥분이 가장 큰 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똑똑한 청년이었다. 이윽고, 쉐이롱의 팔뚝이 수직으로 솟구쳤다. “시작!” 신호가 떨어지자 파옌은 상대를 향해 질풍처럼 접근했다. 기선제압을 위해 서였다. 그러나 파옌은 말발굽을 본 두더지처럼 움찔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지크가 위협적인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저 어깨를 살짝 움직였을 뿐이 다. 하지만 파옌은 그 이상의 것을 본 사람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 다. 놀란 것은 10세 이하의 꼬마들과 일부 부인들을 제외한 쉐이롱의 가문 전체 였다. 무술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그들에게 방금 전 지크가 한 행 동은 상당한 충격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물론 챠오도 그 안에 끼어있었다. ‘파옌 오빠의 공격코스를 완전히 읽다니!’ 파옌이 하려던 공격은 긴 다리를 이용한 공중상단돌려차기였다. 무술가가 발차기를 할 때는 다리보다는 어깨가 먼저 움직이게 된다. 상대가 방어를 할 소지를 주는 그런 예비동작은 오랜 수련을 통해서 줄일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줄이게 된다. 파옌의 예비동작은 호흡을 할 때 일어나는 몸의 움직임만큼이나 작았다. 적 절한 속임까지 섞여서 동네 도장을 다닌 일반 무술가라면 멍하니 서서 당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크는 파옌이 공격할 방향을 향해 자신의 어깨를 움직 여서 그의 공격을 미연에 방지했다. 파옌의 입장에선 마음을 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지만 지크에겐 그런 초 능력은 없었다. 그저 상식을 초월한 순발력이었다. 파옌이 물러난 것을 본 지크는 오른손을 주머니에서 뽑아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얼마나 얕보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어설픈 공격은 그만 두는 게 좋 아. 이래봬도 난 싸움에 있어선 프로라고. 아빠랑 엄마가 보는 앞에서 뒤통 수가 아작 나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해.” 지크는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파옌으로선 화가 나는 발언이었다. “당신부터 예의를 갖춰주십시오. 상대를 얕보고 있는 쪽은 당신이지 않습 니까.” 아까부터 지크의 건방진 자세에 대해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던 파옌이었다. 그러자 지크는 코웃음을 쳤다. “얕보고 있다고? 난 이게 준비자세야. 의심나면 쳐 봐.” “…….” 파옌의 말끔한 얼굴에 깊은 골이 파였다. 그러나 파옌은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어 냉정을 유지했다. 무도의 예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상대에게 흥분하여 패배하는 것은 치욕이 아니겠는가?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다. 진정해라, 파옌. 이것도 하나의 수련이다.’ 그는 스스로를 다그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정신을 집중하여 가슴 속에 끓고 있는 분노를 삭였다. 그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지크는 인상을 팍 구기더니 상대를 향해 성큼 성큼 걸어갔다. “쳇, 지겨운 녀석. 그렇게 머리를 식히고 싶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주마.” 상대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파옌은 눈을 뜨고 자세를 바로 했다. ‘온다!’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파옌에게 가장 먼저 들어온 공격은 단순한 스트레이 트 펀치였다. 빠르긴 했지만 막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옆으로 몸을 비켜 상대의 팔을 잡은 파옌은 그대로 몸을 돌려 팔을 꺾었다. 관절기술이었다. 관절을 꺾음으로서 생기는 고통을 통해 상대를 제압하려 했던 파옌은 흠칫 놀랐다. 상대의 팔이 위험각도 이상으로 꺾이지 않는 것이었다. 상대가 힘 으로 버틴다는 것을 느낀 파옌은 작전을 바꿔 편한 팔의 팔꿈치를 상대의 관자놀이 쪽으로 휘둘렀다. 급소이니 만큼 적중한다면 상대는 그대로 기절 이었다. “뭐야, 이건?” 지크는 손으로 파옌의 팔꿈치를 막았다. 하지만 거기까지 예측했던 파옌은 상대의 다리를 차서 중심을 잃게 했다. 지크가 넘어지려는 순간 파옌은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몸을 움직여 상대의 오른팔과 어깨를 몸 전체로 감쌌다. 유도에서 쓰이는 십자꺾기였다. 둘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오른팔을 봉쇄당한 지크는 가슴 위에 놓인 파옌의 다리를 보며 쓴웃음을 지 었다. “어이, 사기라고. 중국 본토의 권법이라면서 유도 기술이 왜 나와?” 파옌은 그의 팔을 더욱 힘 있게 꺾으며 대답했다. “삼황오제권의 본질은 무가 아니라 도에 있습니다. 당신처럼 무도가 아니 라 싸움을 하는 남자에겐 알 수 없는 개념이겠지요.” “쳇, 그럴 수밖에 없지. 내가 상대할 녀석들은 예의범절 같은 건 전혀 모 르는 놈들이거든.” “예? 무슨… 윽!” 손님의 말에 강한 의문을 품었던 파옌은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의 몸이 압도적인 힘에 들려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지크는 파옌의 힘을 무시한 채 팔을 올렸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코알라 신 세가 된 파옌은 기술을 풀고 떨어졌다. 그대로 바닥에 내리쳐지게 되면 상 대의 힘을 생각했을 때 승부는 그걸로 끝이었다. 파옌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크는 뒤로 몸을 굴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다음 상대를 만나볼까?” 지크의 긴 다리가 파옌의 머리를 노리고 채찍처럼 뻗어나갔다. 그 가공할만 한 속도의 돌려차기를 기적적으로 피한 파옌은 또 한번 놀라움에 사로잡혔 다. 발차기가 머리 위를 스쳐지나감과 동시에 머리카락이 빨려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터무니없는 속도다! 마치 봉을 휘두르는 것 같아!’ 그는 반격을 위해 낮은 차기를 시도했다. 상대의 정강이를 노린 공격이었지 만 지크는 그것을 기다린 듯 했다. 지크는 낮게 뻗어 나온 상대의 다리를 손으로 짚고는 공중에서 몸을 돌린 뒤 오른팔로 상대의 목을 휘어 감았다. 지크의 체중과 힘에 의해 파옌의 상 반신은 자연스레 뒤로 쏠렸다. 그 직후 지크는 포물선을 그리며 뒤로 뛰었 고 지크의 등 뒤로 튀어나온 파옌의 머리는 대못이 박히듯 뒤통수부터 바닥 에 꽂혔다. 프로레슬링에서 볼 수 있는 리버스 DDT의 강화판이었다. 힘이 과하게 실렸는지 파옌은 머리를 바닥에 둔 채 잠시 동안 거꾸로 서 있 다가 이내 엎어졌다. 그것을 본 파옌의 모친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기술의 특성상 파옌과 같이 누워야 하는 지크는 곧장 핸드스프링으로 자리 에서 일어났다. “하하, 좋아! 다음 상대 나와! 난 오늘 컨디션이 좋다고!” 쉐이롱과 그의 가족들은 복잡한 마음으로 이방인을 바라봤다. 아이들은 자신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평을 받는 파옌이 이토록 처참하게 당한 것에 충격을 받았고 어른들은 쓰러진 파옌을 걱정하면서도 예상 외로 뛰어난 지크의 기량에 내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은 지크가 소리를 지른 직후였다. 리버 스 DDT를 맞고 혼절해야 할 파옌이 스르륵 일어난 것이다. 뒷머리를 만지며 일어난 파옌은 지크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봐주셨군요?” 지크는 피식 웃었다. “당연하지, 대련일 뿐이잖아. 아무튼 상대해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부족한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파옌은 절도 있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뒤 자리로 돌아갔다. “이보게, 젊은이.” 가만히 있던 쉐이롱이 지크를 불렀다. “왜요?” “지금 그 기술, 사람에게 몇 번이나 써봤나?” 그 질문에 지크는 검지를 지켜들었다. “한 번이요. 이번이 처음이죠. TV로는 많이 봤는데 실제로 써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 “왜요?” “아닐세, 아무것도.” 쉐이롱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후 쉐이롱의 아들들, 즉 집안의 어른들이 지크를 상대하기 위해 차례로 나섰지만 결과는 동일했다. 당하긴 했으나 큰 부상이 없다는 사실조차 똑같 았다. 결국 마지막으로 나선 사람은 쉐이롱이었다. 장남이 가슴을 부여잡고 밖으로 나감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쉐이롱은 박수를 치며 대련장 가운데로 나왔다. “좋아, 젊은이는 합격일세. 오늘부터 우리 가문에서 수련을 해도 좋네.” 린 가문으로선 정말 역사적인 날이었다. 처음으로 가문 외의 사람에게 수련 을 허락한 날이고 그 대상이 동양인이 아니라 서양인이기 때문이다. 지크에게 패한 집안사람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쉐이롱과 함 께 박수를 쳐주며 그를 환영해 주었다. 하지만 주인공인 지크는 그리 기뻐하지 않았다. “말씀은 고마운데… 할아버지 분위기는 영 그러네요?” 비꼬는 듯한 그의 말에 쉐이롱은 빙긋 웃었다. “당연하지. 학생이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확실히 알아야 가르 칠 메뉴를 짤 것 아닌가?” 그러자 지크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것뿐이에요?” “물론 아니지.” 쉐이롱 역시 비슷한 미소를 뗬다. “솔직히, 자네가 내 아들들까지 이길 줄은 생각도 못했네. 자랑은 아니지 만 내 아들들은 삼황오제권의 최종수련만을 거치지 못했을 뿐, 어디 나가서 질 수준은 절대 아니거든.” “하긴, BSP안에서도 최고급이실 것 같던데요.” “그렇지. 아무튼 자네 덕분에 30년 가까이 잠잠하던 무술가로서의 피가 끓 어오르는군. 자네 같은 훌륭한 상대는 만나기 쉽지 않거든.” “오오, 붙자는 건가요?” “물론일세. 자네가 원하는 대로 무(武)니 도(道)니 다 벗어 버리고 남자대 남자로서 한번 붙어보세.” “Hell Yeah, 좋아요.”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 지금까지 조용하던 도장은 크게 술렁거렸 다. 당주이자 가장인 쉐이롱이 지크의 수련을 허락한 것도 모자라 도전장을 내민 것은 정말 큰 사건이었다. 불길한 느낌을 받은 챠오는 옆에 앉은 아버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빠, 괜찮을까요? 아무리 할아버지가 강하셔도…….” 지크에게 맞은 가슴 부위를 살피던 챠오의 아버지, 린 우첸은 걱정이 가득 낀 막내딸의 머리를 웃으며 매만져 주었다. “괜찮아. 할아버지께서 패배하실 확률은 한없이 0에 가깝단다. 삼황오제권 의 최종수련을 거친 자의 힘이 어떤 것인지 잊었느냐?” “…….” 삼황오제권에 대한 자신감과 부친에 대한 믿음이 실린 말이었지만 챠오의 표정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사실 불안한 건 장남인 린 우첸도 마찬가지였다. 몸을 푸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던 우첸은 웬일인지 평소에도 잘 잡지 않 던 딸의 손을 잡고는 고해성사를 하듯 나직이 말했다. “챠오야. 우리 모두는 오늘 이 자리에서 전무후무한 체험을 할지도 모른단 다. 물론 이건 내 착각일 수도 있어. 솔직히 말해서 착각이길 바라고 있기 도 하지.” “네?” 아버지의 말에 챠오의 크고 또렷한 눈이 반짝였다. 그녀뿐만 아니라 우첸의 동생들도 큰형에게 눈을 돌렸다. “괴물 스펀지 같아. 희생자의 피를 빨아들여 더욱 무겁고 축축해지는 스펀 지 말이야. 얼토당토않은 말이지만 파옌이 상대할 때랑 내가 상대할 때가 조금 달랐거든. 모든 면이. 그러니 아버지께서 저 청년에게 도전하시려는 거겠지. 얼마나 더 빨아들이고 얼마나 더 강해질지 궁금하셨을 테니까.” “…….” “잘 봐두렴, 챠오. 이제부터가 진짜니까.” 오랜만에 느낀 아버지의 손은 따뜻했지만 챠오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몸을 경련시키고 있는 그것이 정말로 불안감인지는 그녀 스 스로도 명확하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이에 안맞는 고난이도의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쉐이롱은 손님과 마찬가지 로 준비자세 없이 분위기를 잡았다. “시작할까?” “좋죠, 할아버… 지!” 지크는 자신도 모르게 말끝을 터트리며 가슴팍을 막았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엄청난 충격이 교차된 그의 팔에 꽂혔다. 그 힘을 이 겨내지 못한 지크는 뒤로 밀려 쓰러지고 말았다. 앞에 두었던 오른팔에 경련이 왔다. 팔 근육의 저지력을 넘어선 공격을 당 해버린 것이다. “제길!” 일어나려던 지크의 시선에 검은 실루엣이 들어왔다. 한없이 천장에 가깝게 떠오른 그 그림자의 정체는 노인, 쉐이롱이었다. 5미터, 아니 6미터 정도는 되는 듯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초인적인 도약 력에 놀란 지크는 반사적으로 몸을 굴렸고 그의 온기가 남은 대련장엔 쉐이 롱의 무릎이 낙뢰처럼 꽂혔다. 두꺼운 나무로 된 바닥은 기계해머를 맞은 듯 파열음을 내며 움푹 들어가고 말았다. 실로 초인적인 힘이었다. 이제까지 지크가 상대한 존재들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엎드린 채 그 놀라운 광경을 똑똑히 본 지크는 반 쯤 넋이 나간 미소를 지으며 감탄했다. “이야, 오늘 무슨 반찬을 드셨나요?” 쉐이롱의 주름진 얼굴에 웃음이 보였다. “고기 좀 먹었지.” 순간 쉐이롱의 주먹이 지크의 머리를 향해 들어왔다. 핸드스프링으로 급히 자리를 뜬 지크는 반격을 위해 다리를 뻗었지만 노인은 어느 틈에 자신의 발차기 위로 도약하여 몸을 회전하고 있었다. ‘어라?’ 뼈와 살이 부딪히는 소리와 동시에 지크의 긴 육체가 공중을 날았다. 바닥 을 몇 번 구르다가 멈춘 그는 잠든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어서 착지한 쉐 이롱은 조금 흐트러진 자신의 백발을 쓸어 넘기며 여유를 보였다. “끝났군.” 우첸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반면 챠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 었다. “아, 아니에요, 아빠. 제대로 맞지 않았어요.” “뭐라고?” 우첸이 챠오를 돌아보는 사이 지크는 유령처럼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쉐이롱의 공중회전차기는 10톤에 가까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보통 건물 의 콘트리트 벽은 쉐이롱의 발을 보호해줄 수건만 있다면 어김없이 구멍이 난다.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알고 있는 린 가문의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크는 조금 부은 볼을 매만지며 씩 웃었다. “당신이 진짜였군, 할아버지. 아들이랑 손자는 왜 내보낸 거요?” “메인 이벤터(Main Eventer)는 항상 마지막에 나오는 법이지.” “…….”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쉐이롱 역시 프로레슬링 팬이었다. “아, 그래요? 그럼 전 뭐죠? 악역인가요?” “후후, 아무튼 맞으면서 몸을 젖힌 건 칭찬해주지. 자네가 그런 순발력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어.” “흥, 전 총알도 눈으로 보고 피하는 사람이에요. 무시하지 말라고요.” “그래? 그럼 내가 총알보다 더 빠르면 되겠군!” 쉐이롱이 잠깐 몸을 굽히는가 싶더니 이내 지크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어왔 다. 들어온 것뿐만 아니라 또다시 공중에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지크는 공격을 막기 위해 회전 방향으로 팔을 들었지만 결과는 전혀 틀렸 다. 지크의 가드 반대방향으로 쉐이롱의 발차기가 들어온 것이다. 그 공격을 가까스로 피한 지크는 등에 땀이 흐름을 느꼈다. ‘공중에서 회전방향을 바꾸다니, 이런 법이 어디 있어!’ 그렇게 감탄할 겨를이 없었다. 쉐이롱의 공격은 물 흐르듯 끊임없이 들어왔 고 지크는 그것을 막고 피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반격할 구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듯 했다. 일방적으로 공격을 하는 쉐이롱이었지만 그는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왠지 실수하는 듯한 기분이군.’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제대로 맞춘 것은 한 번 밖에 없다는 것을. 지크라는 이름의 이방인은 빗발치는 자신의 공격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 학생의 눈이자 우리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 는 야수의 눈이기도 했다. ‘모조리 읽고 머릿속에 넣고 있지 않나! 이런 괴물이 있었다니!’ 쉐이롱은 미친 듯이 감탄하며 뺨을 때리듯 손바닥으로 지크의 팔뚝을 쳤다. “응?” 그 팔로 복부를 막았던 지크는 의외의 공격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장(掌) 을 이용한 공격 치고는 너무 허약해서였다. 물론 진짜는 그 다음이었다. 순간 엄청난 물리력이 지크의 팔을 뚫고 복부에 직격했다. 발경이었다. 그 무형의 힘에 인해 지크는 배구공처럼 붕 떠올랐고 쉐이롱은 표범이 새를 낚 아채듯 양팔로 지크의 머리를 잡은 뒤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큰 소음이 터지고 대련장 전체가 들썩였다. 뒤통수부터 바닥에 떨어진 지크 는 나무 바닥의 반동에 튕겨져 올랐다가 옆으로 돌며 얼굴 쪽으로 다시 떨 어졌다. 쉐이롱을 비롯한 일가 모두는 거기서 승부가 갈렸을 거라 생각했다. 바닥에 대(大)자로 뻗은 지크는 쉐이롱이 땀을 닦기 위해 수건을 집을 때까지 본능 적으로 숨만 쉴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 저 청년을 별채로 데려가거라. 한 2, 3일 있으면 깨어날 테니 이불도 잘 덮어주렴.” “…….” 가족들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쉐이롱은 안면에서 수건을 떼었다. “어이, 안 끝났어요.” 누군가가 뒤에서 자신의 어깨를 짚었다. 쉐이롱은 공포영화의 주인공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며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완전히 기절해 있어야 할 지크가 멀쩡하니 서있었다.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혹시 죽어서 귀신이 된 건가?” “흥.” 지크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어서 노인의 콧수염을 한 줌 잡아 아래로 내 렸다. “악!” 쉐이롱은 입가를 부여잡고 몸을 숙였다. 예상을 뛰어넘은 그 행동은 린 가 문의 모든 이들을 빈사상태로 몰고 갔다. 예의를 벗어난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크의 표정은 당당하기만 했다. “아프죠? 귀신은 이런 짓 못해요.” “사, 살아있는 사람은 더욱 안 할 걸세.” 쉐이롱은 뽑힐 뻔한 수염을 매만지며 다시 대련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는 약간 헝클어진 옷을 정리하며 방금 전 상황에 대해 물었다. “무슨 수로 정신을 차린 건가? 아프지 않았나?” “낙법으로 충격을 줄였죠. 그래도 아프긴 하네요.” 지크는 뒷머리를 슬슬 매만졌다. “낙법? 발경을 정통으로 맞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텐데?” “아, 그거요?” 씩 웃은 지크는 왼손을 뒤로 돌려 자신의 등판을 쳤다. “저도 그거 할 줄 알아요. 이런 식으로 발경을 날려서 상쇄시켰죠. 하지만 할아버지의 발경이 워낙 강해서 공중으로 튀어 오르더라고요.” “…….” 쉐이롱은 할 말을 잃었다. “자네, 도대체 얼마나 진지하게 상대를 해줘야 하는 건가?” 지크는 무슨 소리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봐주는 게 어디 있어요. 남자대 남자의 승부를 하자고 말한 사람은 할아 버지라고요.” “뭐, 그렇긴 하지만… 자네 정말 죽을지도 몰라.” 쉐이롱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지크는 희희낙락 했다. “할아버지의 예상은 벌써 깨지지 않았나요?” 생각해보니 그랬다. 결정타라고 생각했던 발경과 공중 떨어트리기 모두 실 패로 돌아가지 않았나? 허탈이 웃은 쉐이롱은 결국 준비자세를 다시 잡았다. “소원대로 해주지. 후회하지 말게.” “알았다니까요.” 지크 역시 자세를 잡았다. 조용해진 가운데 쉐이롱의 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몇 번의 심호흡이 계속되 던 끝에 쉐이롱의 검은색 옷자락이 선풍기 바람을 맞은 듯 펄럭였다. 사방이 봉쇄된 도장 안에 바람이 불 리는 만무했다. 인간이 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대량의 기(氣)였다. 기의 농도가 짙어지 자 쉐이롱의 몸 주위에 하늘색의 아지랑이가 보였다. “호오?” 그것을 본 지크는 웃었다. 기분이 좋은 건지, 공포에 질린 건지, 아니면 미친 것인지 알 수 없는 이상 한 미소를 지은 채 계속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도 모자라 작은 경련까지 일어나는 듯 했다. 분위기가 정말 이상했다. 누구 하나가 죽어 나가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것 만 같았다. 그래서 챠오는 두려웠다. “아, 아빠. 저사람 도대체 왜 저러는 거예요?” 아버지에게만 한 질문이었으나 목소리는 매우 컸다. 긴장해서인지 그녀 자 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새어나온 것이다. 지크는 그녀에게 눈을 돌렸다. “어이, 챠오라고 했나?” “네?” 챠오는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지크는 다시 쉐이롱에게 시선을 맞추며 말했 다. “날기 직전의 기분, 알고 있어?” 그것은 스타트 버튼이 눌리는 소리였다. 그 신호 직후 린 가문 전원이 오래 도록 잊지 못할 장면이 펼쳐졌다. 지크의, 이방인의 전신에서 파직 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터진 것이다. 코에 플러그를 꽂아 선풍기를 회전시킨 건 그냥 특이체질이 빚어낸 개그로 생각됐으나 지금 그의 몸에 흐르는 전류는 무섭도록 강력해 보였다. 쉐이롱은 당황했으나 정신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웃으며 물 었다. “이보게, 나를 감전시킬 작정인가?” “걱정 말아요. 맞아서 감전한 사람은 못 봤거든요.” “코로 선풍기를 돌리고 그런 말을 하면 설득력이 떨어져.” “흥, 하지만 너무 마음 놓진 마세요. 맞고 멀쩡히 걸어 다닌 사람도 못 봤 으니까.” “그래? 하긴, 그런 시시한 주먹은 전부 피했을 테니까.” 순간 두 남자의 정권이 둘의 중간지점에서 부딪혔다. 직접 충돌한 건 아니 지만 기와 기의 반탄력 때문에 둘의 충돌은 덤프트럭끼리 정면으로 충돌한 것처럼 박력이 있었다. 둘은 서로의 반탄력을 뚫기 위해 전력을 다했으나 쉽지 않았다. 밀릴 것 같 으면서 밀리지 않았다. 그런 아슬아슬함 때문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노인 과 청년은 결국 고함을 지르며 마지막 힘을 쏟아 부었다. 펑 하는 폭발음이 터지고 지크와 쉐이롱은 서로의 반탄력에 밀려 크게 뒷걸 음질쳤다. 지크와 힘을 겨뤘던 쉐이롱의 주먹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지크의 주먹에 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경합에 의해 생긴 가혹한 신체발열로 인해 모공에서 나올 땀이 곧장 수증기로 변해 나오는 것이다. 둘은 굽히지 않고 난투를 벌였다. 비명과도 같은 기합이 노인과 젊은이의 목청에서 수없이 터졌다. 기술은 쉐이롱이 확실히 좋았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의 환상적인 기술 로 인해 지크는 곳곳에 부상을 입었다. 이마가 찢어지고 입안에서 핏물이 튀었다. 반면 저돌성만큼은 지크가 위였다. 좋은 테크닉과 체력을 앞세워 돌진해오 는 상대 앞에 방어를 책임진 쉐이롱의 팔다리는 전에 없는 통증을 호소했 다. 결정타를 날릴 수 있는 상황은 쉽게 오지 않았다. 둘 다 결정타를 날리지도 않았다. 그랬다간 정말 사생결단이 날 수도 있었다. 이윽고 쉐이롱과 지크 모두 대련장 양쪽으로 물러났다. 지크는 지친 듯 숨을 몰아쉬었다. 쉐이롱 역시 좋은 컨디션은 아닌 듯 했 다. 노인은 대련장 옆에 놓인 스포츠 음료를 잡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통의 절 반을 해치운 쉐이롱은 수염에 묻은 음료수를 소매로 닦으며 젊은이에게 물 었다. “정말 강한데? 나와 이렇게까지 경합을 벌인 사람은 자네가 처음일세. 이 정도로 강하다면 더 이상 강해질 필요가 있나? 자네가 서른 살까지만 열심 히 수련을 한다면 자네를 상대할 수 있는 인간은 극소수일 거야. 나도 자신 없어.”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난 더 강해져야 돼요. 말했잖아요, BG들을 없애 기 위해서 라고요.” 쉐이롱은 들고 있던 음료수통을 던졌다. 그것을 받아 마신 지크는 잠시 틈 을 둔 뒤 말을 이어서 했다. “나 혼자서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요. 그렇다고 해서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한 사람이라도 더 나서야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요. 그래서 힘이 필요한 거예요. 절대적인 힘이!” “하지만 힘들고 외로울 텐데? 맞고 아픈 건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지만 마 음의 아픔과 피로는 오래 간다네. 그것을 언제까지 참을 수 있나? 혼자서. ” “…….” 지크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챠오는 뭔가에 홀린 듯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 남자는 홀로 오토바이 위에 누워 기다리고 있었다. 바 람을 즐기던 그때의 분위기와 마중 나온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의 분 위기는 매우 달랐다. 피자대장이니 뭐니 하며 생판 처음 보는 남을 놀려대 는 것은 물론 매우 호전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람들과 빨리 친해졌다. 만난 지 몇 시간도 안됐지만 챠오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가족들은 이미 그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 다. 원래 저 자리에 있던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어째서 그렇게 다른 걸까. 처음 본 게 환상이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들었 다. 바람은 분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물들을 시원하게 해주며 자유롭게 여행 한다. 사람들은 그런 바람을 거리낌 없이 맞아들인다. 그러나 자신들 사이 에 당연히 섞여있는 존재라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바람의 실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챠오는 이런 가설을 세워봤다.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감추는 게 아닐까. 좀 더 사람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서. 사람들 사이에 더 오랫동안 있고 싶어서. “그러지 말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도장 안에 흘렀다. 예상치 못했던 챠오의 말에 지크는 그녀를 훌쩍 돌아봤다. 가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그녀의 어머니가 딸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챠오야, 괜찮니?” “앗!”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챠오는 형용할 수 없는 수치심에 못 이겨 고개를 숙 였다. 얼굴이 붉어진 것도 모자라 목덜미와 손까지 물들었다. 지크는 그녀를 보며 킥킥 웃었다. “그러지 말라니, 뭘?” 챠오는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망설였다. 더 이상 자신을 속이고 희생 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하지 못했다. 만약 말하게 되면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남 자에게 너무 미안해질 것만 같았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녀는 그냥 그렇게 말했다. 그도 그걸 바라고 있을 지도 모를 거라는 생각 이었다. 쉐이롱은 수건을 대련장 밖에 던지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자, 계속해볼까?” “좋죠.” 지크 역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번엔 봐주지 않을 거예요. 확실히 엉덩이를 차 드리죠.” “후후, 내 엉덩이에 관심이 많은가보군. 나에게 아직 그런 매력이 남아있 었나?” 한바탕 크게 웃은 둘은 다시 폭풍처럼 격돌했다. 챠오는 또다시 할아버지와의 싸움을 즐기는 그 남자를 보며 마음속으로 빌 었다. ‘언젠가, 꼭꼭 숨겨진 그의 진짜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나타 나 주기를.’ ※※※ 눈앞이 확 밝아졌다. 신선한 공기가 폐 안에 밀려들어왔다. 몸도 시원했다. 챠오는 눈을 떴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킬 것 같은 지하의 어둠 대신 지상의 밝은 빛과 매트로 서울의 마천루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 살 수 있다. 그런 느낌이 확실히 들었다. 그녀는 현재 구급대원들의 들것에 실려 어디론가 옮겨지고 있었다. 옆을 보 니 그녀 말고 한 명이 더 있었다. 챠오가 사력을 다해 보호한 여고생이었 다. 안도의 한숨이 그녀의 산소마스크 안에서 돌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 바로 근처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젠장, 녀석들이 또 나타난 거야? 이 자식들은 핸드폰도 아니면서 때와 장 소를 구분 못하는군!” 낯익은 목소리가 거칠게 들렸다. 락 그룹의 보컬을 해도 좋을 만큼 크고 시 원시원한 목소리였다. “알았으니 욕만 하지 말고 빨리 와! 챠오는 이상 없다고 의무반이 그랬잖 아!” “어떻게 알아? 그 애는 낯짝이 얇아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 는 바보란 말이야!” “어? 지크야 말로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둘이 무슨 관계야!” “아아, 그 말 좀 그만하시지, 하리진양! 지겹지도 않아?” “좋아, 일 끝나고 보자구!” 누군가와 싸우는 듯한 그 목소리는 점차 멀어졌다. 챠오는 그 목소리를 찾아 고개를 돌렸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디에도 보 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쓸쓸하고 가슴이 아파왔다. 구급차에 실리기 직전, 또 한 차례 고함이 터졌다. “이 자식들, 이번엔 봐주지 않는다! 찍소리도 못하게 확실히 엉덩이를 차 주지! 너희들과의 썩을 인연도 여기서 끝이야!” 구급차의 문이 닫혔다. 방음이 잘 된 탓인지 이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 다. 챠오는 나지막이 중얼댔다. “변한 게 없네…….” 그녀의 작은 목소리는 사이렌 소리에 묻혀 어디에도 들리지 않았다. 11화 [Half Sister] “이름.” “…….” “이름.” 10세 정도로 보이는 금발의 소녀는 어떤 생물을 표현한 것인지 모를 인형을 꼭 안은 채 가만히 눈만 끔벅였다. 하얀 드레스에 크고 파란 눈동자가 귀엽 고 인상적이었지만 이름을 묻는 남자에겐 별다른 감흥이 없어보였다. 펜과 종이를 든 남자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섬뜩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한 점의 변 화도 없는 표정이 그런 분위기를 더욱 돋우었다. 깜짝 놀란 소녀는 허겁지 겁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루, 루이체요. 루이체라고 해요.” 남자는 종이 위에 자신이 들은 이름을 적었다. 그는 적는 도중 고개를 슬쩍 쳐들어 조금 흘러내린 자신의 금발을 다시 올 렸다. 입고 있는 백색의 코트만큼이나 깔끔하고 세련된 마스크의 소유자였으나 표 정은 얼음보다도 더 차가워 보였다. 그것 때문인지 소녀, 루이체는 안고 있 는 인형을 평소보다 더욱 힘주어 안았다. 그는 모든 사항을 다 쓴 종이를 반으로 접은 뒤 루이체에게 건네주었다. 아 이의 고사리 같은 손에 종이가 쥐어지자 남자는 길고 얇은 담배를 물고 그 끝에 불을 지폈다. “이제부터 넌 당분간 지상계에서 살게 된다. 원래는 리오 스나이퍼나 슈리 메이어 반 스나이퍼(슈렌)에게 너를 맡기려 했지만 둘 모두 임무 때문에 너 를 양육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고로, 현재 테스트 중에 있는 그들의 의 형제에게 너를 맡길 것이다.” “…….” “원래 주신계 천사에겐 패밀리 네임(Family Name:성씨)이라는 것이 없지만 그들 형제에게 양육이 결정된 이상 넌 그들의 패밀리 네임을 따라야만 한 다. 그리고 네가 가는 세계는 신계니, 악마계니 하는 것과는 전혀 친하지 않은 중립공간이다. 괜히 천사라는 것을 티내서 해부당하지 말도록. 네가 해부당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로 인해 발생할 문제는 주신계의 입장에서 매우 귀찮으니 각별히 주의해라.” 아이에겐 매우 어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루이체는 뭔가 결심을 한 듯 입 술을 꼭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물고 있던 담배를 빼고 길게 연기를 뿜었다. 어린아이 앞에 대놓고 뿜는 형국이었지만 키 차이가 워낙 커서 루이체에게는 영향이 없었다. 남자가 말했다. “오늘부터 네 이름은 루이체 스나이퍼다. 잊어버리는 것은 내가 알 바 아 니지만 네 자신을 위해서는 반드시 기억해라.” “…….” “그리고 날개는 감춰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꺼내지 마라.” 루이체는 자신의 뒤를 돌아봤다. 등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금발 뒤로 한 쌍 의 하얀 날개가 작게 팔락이고 있었다. 그 날개는 이내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자신이 한 일이지만서도 소녀에겐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다. “출발이다.” 남자가 차원문을 여는 마법진을 그리는 동안 루이체는 뒤에 놓인 큰 가방을 낑낑대며 옮겼다. 아이가 옮기기엔 너무 큰 가방이었지만 남자는 단 한 번 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눈물이라도 찔끔 뺄 만큼 서러운 상황이었지만 루이체 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힘이 들수록 더욱 더 힘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 조금 뒤, 루이체는 남자와 함께 차원문을 통과하여 생전 온 적이 없는 다른 세계에 도착했다. 백광이 사라진 뒤 루이체의 큰 눈에 들어온 것은 빨간 지붕의 2층 집이었 다. 동이 막 틀 무렵인 듯 했으나 거리에 사람은 없었다. 공기가 꽤 습하고 더 웠다. 지상계엔 여름이라는 계절이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 정도로 불쾌할 줄은 몰랐던 루이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남자는 작은 시계탑에 시선을 멈췄다. 시침과 분침이 가리 키는 시간은 5시 30분이었다. “좀 있으면 저 집에서 그가 나올 것이다. 녀석의 이름은 지크 스나이퍼다. 자료에 따르자면 판단력과 지능지수가 기준치 이하인 것 같지만 성격이 나 쁘진 않다고 한다. 그럼 이곳에서 가만히 기다려라.” 남자는 아직 남아있는 차원문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 직후 차원문은 곧 장 사라졌고 루이체는 홀로 남겨졌다. “…….” 소녀는 안고 있던 인형을 현관 계단 앞에 놓았다. 인형이 옆으로 넘어지자 다시 잘 세운 뒤 인형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미안하다는 표시인 듯 했다. 그녀는 쪼르르 달려가 길가에 놓아둔 가방을 질질 끌고 왔다. 더위로 인해 그녀는 금세 땀에 젖고 말았다. 계단 앞까지 가방을 끌고 온 루이체는 일을 마친 농사꾼처럼 땀을 닦으며 인형 옆에 앉았다. 그녀는 가방을 열고 음료수가 담긴 작은 병과 분홍색 손 수건을 꺼내 더위를 식혔다. 긴장감 탓에 힘이 들었는지 루이체는 인형을 끌어안고 얼굴을 푹신한 그 위 에 묻었다. 통통한 얼굴 전체에 느껴지는 인형의 따뜻한 감촉. 그 감촉이 좋아 지금의 인형을 선택했던 루이체지만 지금은 그 감촉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저 꿈 이라고만 생각하고 싶었다. 단 며칠 만에 이렇게 되고 말았다. 루이체의 부모는 신중의 신이자 전 차원계의 균형을 관장하는 주신(主神)이 있는 주신전에서 함께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 일어난 고신, 즉 고 대에 존재했던 신 중 한 명의 반란에 휘말려 다른 동료들과 함께 사망하고 말았다. 기적적으로 신계에 침입한 고신이 주신전 중앙에 마법을 사용해버 린 것이 원인이었다. 마침 그곳에 있던, 일명 광황이라 불리는 남자의 힘에 의해 더 이상 큰일은 없었지만 루이체의 부모는 더 이상 외동딸의 곁에 돌아올 수 없었다. 주신의 직속비서에게 그 소식을 직접 전해들은 루이체는 깊은 슬픔에 잠겼 다. 그녀를 맡아줄 사람이 있다는 소식은 빨리도 찾아왔지만 그녀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보니 잠이 쏟아졌다. 아이는 가방 줄을 한쪽 팔에 꼭 끼우고는 그대로 잠에 빠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루이체는 누군가가 자신을 흔드는 것을 느끼고 잠에서 훌쩍 깨어났다. 정신 없는 그녀의 눈앞엔 폭포처럼 쏟아진 긴 금발이 있었다. ‘엄마?’ 그렇게 소리칠 뻔한 루이체의 시선 속에 생전 본적이 없는 여성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엄마처럼 상냥한 얼굴의 미인이긴 했으나 엄마는 아니었다. 그녀가 물었다. “깨워서 미안해. 혹시 길을 잃었니? 무슨 일로 우리 집 앞에서 이렇게… ….” 그녀는 걱정스레 물었다. 현실을 직시한 루이체는 눈을 부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 줄은 놓았지 만 인형만은 놓지 않았다. “저어, 혹시 지크 스나이퍼라는 분을 아시나요?” 그러자 상대방 여성은 의아해했다. “지크? 우리 아들인데, 왜?” 제대로 찾아와서 다행이었다. 루이체는 허리를 꾸벅 굽혀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이체라고 해요. 지크 스나이퍼님… 이 아니라 스나이 퍼씨를 찾아왔습니다.” “그, 그래?” 루이체를 전체적으로 돌아본 그녀는 조금 이상한 표정을 지은 뒤 집 안 쪽 에 눈을 돌렸다. 이유는 몰라도 갑자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뭔가 실망하는 듯한 얼굴이시네. 나 때문인가?’ 루이체는 그런 걱정에 불안했으나 상대방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진정을 한 그녀는 애써 웃으며 루이체의 어깨를 만져 주었다. “이, 일단 들어가자. 밖에서 기다리느라 고생했겠구나. 짐은 내가 들어줄 게.” “감사합니다.” 루이체는 두근두근하는 얼굴로 여성을 따라 집안에 들어갔다. 안은 겉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깔끔하고 시원해 보였다. 공기도 왠지 모르게 바깥보다 시원했다. 거실에 들어서니 소파에 앉아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상당히 불량스러운 포즈로 소파에 눌러앉은 그 남자는 슬그머니 루이체를 돌아봤다. 얼굴선이 날카로워 말라보이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외 모였다. 특이하게도 금발이지만 짙은 검은색 눈썹을 가지고 있었다. ‘저 사람이 지크 스나이퍼? 꽤 무섭게 생겼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 그 남자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린 채 루이체 와 그녀를 데리고 들어온 여성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걔는 누구에요?”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던 여성은 그리 좋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널 찾아왔다는구나. 그것 때문에 그러니 엄마랑 얘기 좀 하지 않으련?” 뭔가 나쁜 느낌을 받은 듯 남자는 더욱 인상을 구겼다. “저 아무 짓도 안했어요. 제 나이가 몇인데요?” “사고는 사춘기 때부터 칠 수 있어!”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었다. “예?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의심은 제가 해야 정상이잖아요!” “난 남자랑 손도 제대로 못 잡아본 처녀야! 게다가 너랑 항상 같이 있었는 데 아이를 가질 틈이 어디 있니!” “기러기 아저씨가 놓고 갔나보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차라리 산타할아버지 선물이라고 하지 그러니?” 모자(母子)가 그렇게 싸우는 동안 작은 의자에 앉은 루이체는 가방에서 음 료수 병을 꺼내 홀짝홀짝 마셨다. 싸우는 소리는 무서웠지만 이상하게도 걱 정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기까지 했다. ‘나쁜 사람들은 아닌 것 같네.’ 소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싸움은 한층 격렬해졌다. “아니, 왜 저를 의심하시는 거예요? 사고는 많이 쳤지만 그런 쪽으로 사고 를 친 적은 한 번도 없다고요! 전 열 일곱 살까지도 애가 뽀뽀만 하면 생기 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내숭이었겠지! 아무튼 난 애를 가진 기억이 없어! 게다가 이 아이는 너와 같은 금발이야!” “엄마도 금발이잖아요!” “그럼 이 애는 누구야! 널 찾아왔다고 하잖아!” “저도 모른다니까요! 이런, 출근할 시간 지났잖아요!” “그건 내가 처크 삼촌께 말씀드릴 테니 어서 솔직히 얘기해!” “아, 글쎄 모른다고 했잖아요!” 그때 루이체가 입을 열었다. “우리 엄마 아빠는 돌아가셨어요.” “거 봐요! 돌아가셨다잖… 아요.” 남자는 표정을 바꾸고 말끝을 흐렸다. 여자의 안색 역시 대번에 변했다. 루이체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무릎 아래를 의자 밑으로 흔들며 음료수를 마셨다. 그런 순진한 모습으로 인해 아들과 어머니가 느끼는 죄악감은 더욱 커졌다. 남자는 멋쩍은 얼굴로 연신 입가를 쓰다듬었다. 여자는 붉게 물든 얼굴을 반 쯤 가린 채 고개를 돌렸다. 루이체는 그런 둘을 보며 물었다. “말씀 끝나셨어요?” “응? 그, 그렇지. 항상 있는 일이야. 신경 쓰지 마, 하하하.” 그렇게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남자의 표정은 영 나아지지 않았다. 의자에서 내려온 루이체는 드레스의 앞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남자에게 건 네주었다. “소개장이에요. 이걸 드리면 된다고 휀 라디언트님께서 말씀하셨어요.” “휀 라디언트?”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쪽지를 받아들었다. 쪽지 안엔 소녀의 이름과 여러 가지 사항이 쓰여 있었다. 처음 보는 문자였 지만 남자의 눈엔 이상할 정도로 이해가 되었다. ‘아이의 이름은 루이체 스나이퍼… 스나이퍼? 왜 또 스나이퍼야? 하늘나라 에선 굴러다니는 성씨인가? 어라, 아니군. 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우리 형제에게 맡긴다 이거지? 그래서 성씨가 맞춰졌군. 나이는 이곳 세계로 9세 정도고… 근데 왜 하필 우리야?’ 그 이유는 바로 밑에 쓰여 있었다. ‘잠자코 맡아라.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루이체를 쳐다봤다. “이거 쓴 녀석이 누구야?” “아까 말씀드린 휀 라디언트님이세요.” “그래? 그놈이 도대체 뭐하는 놈인데?” “별칭이 광황이시래요. 저도 한 번 밖에 못 뵈어서 잘 모르겠어요.” “광황? 젠장, 광황인지 부황인지 몰라도 다음에 만나면 예절을 좀 가르쳐 줘야겠군!” 그는 투덜대며 쪽지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 ‘그 아이는 혈통이 좋은 주신계 천사로서 잘 키우기만 하면 너희들의 일을 서포트 할 수 있는 훌륭한 전사로서 자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다른 방향 으로 키워도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아무튼 동생이 생긴 것을 축하한다. 기뻐해도 좋다. 내가 허락한다.’ 그는 다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뭔데? 이런 웃기는 놈을 봤나?’ 그는 인내심을 발휘해 맨 밑에 쓰인 추신을 읽었다. ‘추신, 아이에게 이상한 행위는 하지 말도록.’ 할 말을 완전히 잃은 남자는 눈을 반 쯤 뒤집으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여자 는 아들이 왜 그러는지 궁금하여 그가 읽던 쪽지를 들었지만 그 안엔 읽을 수 없는 문자들로만 가득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그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눈앞엔 루이체가 음료수병과 인형을 안은 채 가만히 서있었다. 그는 씩 웃으며 루이체의 머리를 매만졌다. 루이체도 싫진 않았다. 엄마나 아빠가 만져주는 것보다는 좀 거칠었지만 그래도 따뜻했다. “루이체라고 했지?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고생했다.” “…….” 그 말에 루이체의 작은 몸이 꿈틀했다. 왜 그런지 눈치를 채지 못한 남자는 우선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를 소개했다. 그는 우선 자신을 엄지로 가리켰다. “내 이름은 지크 스나이퍼야. 오늘부터 네 위대한 오라버니가 될 사람이 지. 저기 계신 저 분은 내 어머니시지. 아, 이젠 우리 어머니라고 해야 하 나?” 소개를 받은 그녀, 레니는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레니 켄트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반갑습니다.” 루이체는 처음보다 좀 어두운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아까 자신과 레니랑 싸운 것 때문에 애가 이러는 것이라 생각한 지크는 활 짝 웃으며 아이 앞에 앉았다. 눈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자아, 그럼 가족이 된 기념으로 뭘 선물해줄까? 뭐든지 한 가지만 말해 봐. 이 오빠는 바람의 마법사라서 착한 아이의 소원은 꼭 들어줄 수 있다 구.” “…….” 루이체는 가만히 지크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음료수병을 잡은 팔로 눈가를 가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이, 이봐? 왜 그래? 갑자기 울면 곤란하잖아? 소원을 말하라니까?” 양팔을 곧게 내린 루이체는 고장이 난 자동차처럼 훌쩍대며 가까스로 말했 다. “엄마, 아빠… 보고 싶어…….” 띄엄띄엄 소원을 말한 소녀는 다시 울음보를 터트렸다. 흐느낌에 불과했던 소리는 점점 소리를 높이더니 이내 대성통곡에 가까워졌 다. 부모가 일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후로 단 한 번 흘리지 않았 던 눈물이 한꺼번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크는 아무래도 놓칠 것 같은 아이의 음료수병을 받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이의 몸을 꼭 안아주었다. “미안하다. 난… 그 분들을 잊게 해주는 마법밖엔 할 줄 몰라.” 아이는 자신의 소원을 이뤄줄 마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안고 있는 사람을 미워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지크가 출근할 수 있었던 시간은 그로부터 30여분이 흐른 뒤였다. 루이체는 레니의 침대 위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아이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레니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지크는 그곳에서 재킷을 챙겨 입은 채 어머니가 나오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레니는 아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 힘들었던 모양이구나, 저 아이. 도대체 무슨 일로 부모를 잃었으면 아이가 저렇게 힘들어할까?” “쪽지엔 그냥 사고라고만 적혀있었어요.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응? 뭐가?” “저 때문에 식구가 더 늘어난 거 말이에요. 저만 챙기기도 힘드실 텐데… ….” 아들의 걱정에 레니는 고개를 저었다. “으응, 아냐. 저렇게 귀엽고 착한 딸이 생겼는데 싫을 건 없지. 좀 갑작스 럽긴 하지만 괜찮아. 곧 적응이 되겠지. 저 아이나, 나나.” “그럼 다행이네요. 저, 가볼게요.” “아, 잠깐만.” 레니는 가려는 아들을 불러 세웠다. “왜요?” “궁금해서. 넌 나를 만나기 전에 어땠니? 아빠랑 엄마가 생각날 때면……. ” 레니는 루이체가 우는 모습에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지크는 볼을 긁적이다가 대답했다. “도화지를 썼어요.” “도화지?” “예. 얼굴은 본 적 없지만 엄마라는 존재가 그리워지면 도화지로 입가를 가렸고, 아빠라는 존재가 그리워지면 눈가를 가렸어요. 이건 엄마의 모습, 이건 아빠의 모습이라면서요. 자식은 부모를 반 씩 닮는다는 원장님 말씀을 그대로 믿은 거죠.” “지금은?” 레니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지크는 씩 웃으며 그녀의 양 볼을 손으로 감쌌다. “이렇게 손만 대면 닿잖아요. 그럼 가볼게요.” “으, 응. 몸조심해라.” 레니는 볼에 남은 아들의 온기를 만지며 그를 배웅해 주었다. ※※※ 이유 있는 지각 덕분에 오전 브리핑을 놓친 지크는 중간에 파트너인 리진과 합류하기로 하고 본부로 향했다. 우선 지부장실로 달려간 그는 적당한 이유를 원하는 듯, 무서운 표정을 하 고 있는 처크를 상대해야 했다. “무슨 핑계를 댈지 기대가 되는군.” 그렇게 말함으로서 분위기를 잡은 처크는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처럼 담배연 기를 진하게 흘렸다. 그의 옆에 선 루이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안경을 고쳐 쓰는 포즈는 이상하리만치 냉혹했다. “훗, 전 할아버지의 반응이 기대되는군요.” 평소 같으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을 지크지만 이번만큼은 당당했다. 덕분 에 처크는 의아한 얼굴로 지크를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주 큰일이죠. 오늘 오전 부로 할아버지께선 또 한 명의 손자를 보셨습 니다.” “뭐라고?” 처크는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돌려 루이와 시선을 맞췄다. 루이 역시 아버 지와 마찬가지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소리야? 범인이 누군데? 너야, 아니면 레니야?” “후후, 그렇게 불결한 쪽으로 생각을 하시면 섭섭하죠.” 지크는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성격 급하기로는 지크에게도 지지 않는 처크 는 답답한 나머지 시거를 비벼 끄기까지 했다. “알았으니 어서 대답이나 해. 손자라니?” “오늘 아침에 여자아이 하나를 입양했어요. 제 동생이니 할아버지 입장에 선 손녀죠.” “…….” 묵묵히 지크를 바라보던 처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알았으니 어서 돌려보내. 아무리 동생이 필요하다 해도 납치는 범죄야.” “아, 아니에요! 납치는 무슨 납치에요!” “그럼 뭔데? 애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했단 말이야? 애가 무슨 우박 인줄 알아? 다리 밑에서 주워왔나? 어떤 다린데? 한강대교? 오, 큰 다리에 서 주워왔으니 나중에 큰일을 할 아이가 되겠군.” 처크 특유의 비아냥거림에 화가 난 지크는 결국 양손으로 테이블을 부서지 지 않을 만큼 내리쳤다. “젠장, 진짜라니까요!” “그럼 설득력 있게 말해봐! 거짓말이면 잘못했다고 빌던가!” “왜 제 말을 못 믿으세요! 그 애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친구의 딸이라고요 !” “친구의 딸?” 처크가 말을 잃은 동안 지크는 괴로운 얼굴로 자신의 이마를 감쌌다. 물론 진짜 괴로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스토리를 짜내느라 그러는 것이었다. “제가 2년 전에 러시아에 간 적이 있잖아요. 그때 친하게 지냈던 사람의 딸이에요. 그가 얼마 전에 부인과 함께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뜬 모양이에 요. 죽기 전에 그 아이를 저에게 맡긴다고 했더군요. 그 꼬마가 편지랑 인 형을 들고 저를 맡아주세요, 하는데 어떡해요. 그래서… 제가 맡기로 했어 요.” “음,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처크는 진지하게 조카손자의 말을 받아들였다. 반면 루이는 지크와 처크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저 신파극을 진짜로 믿으시는 건가?’ 하지만 처크가 너무 진지했기에 그녀는 뭐라고 말을 건네지 못했다. “알았으니 어서 리진이랑 합류해. 그 애가 정신적으로 안정이 됐다 싶으면 우리한테도 소개시켜줘. 이제 가족이 됐으니까. 얼마나 귀여운 손자인지 보 고 싶군.” 처크는 잘 보여주지 않는 푸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덕분에 힘을 얻은 지 크는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럼 가볼게요!” 지크는 뛸 듯이 기뻐하며 지부장실을 나갔다. 잠시 이어진 침묵 후, 처크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실소를 터트렸다. “멍청한 놈. 그런 뻥을 누가 믿으라고?” 아버지가 지극히 정상이라는 것을 확인한 루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왜 그냥 넘어가셨죠?” “왜긴, 그냥 지각한 걸 무마하기 위해 하는 거짓말치고는 필사적이더라고. 스토리는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를 맡은 건 확실한 것 같아. 자세한건 레니 에게 전화해서 확인해보면 되겠지. 그리고 뭐 어때? 납치만 아니면 됐지.” “…….” 처크의 대승적인 말도 일리는 있었으나 루이는 개운치 못한 표정이었다. 딸 의 그런 얼굴을 본 처크는 왜 그러냐는 듯한 얼굴을 했다. “왜? 넌 저 녀석이 누군가를 책임지지 못할 만큼 약한 녀석이라고 생각되 니?” “네.” 루이답게 스트레이트한 대답이었다. 처크는 빙긋 웃었다. 그는 새 시거의 끝을 자르고 불을 지폈다. “네 생각이 맞을지도 몰라. 하지만 몇 개월 전, 레드 원을 부축하고 돌아 가는 지크는 좀 달랐단다.” 처크는 2개월 전 일어났던 레드 원, 아이슈마 사건을 딸에게 되살려 주었 다. 당시의 사건은 지크가 미확인의 공격성 생물체를 처리한 것으로 되어있다. 공식적인 입장에서 레드 원이 어쩌고, 악마가 어쩌고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는 처크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처크가 말했다. “누군가를 책임지지 못할 만큼 약한 녀석이라면 책임지는 방법을 배울 기 회를 줘야겠지.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고 남을 평가하는 건 좋지 않단다. 뭔가 배우지도 못한 초보자를 숙련자의 입장에서 평가하면 결과는 뻔하지 않느냐?” “…….” “녀석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서라도 부양가족이 있는 건 괜찮을 거야. 그 아이 덕분에 녀석이 한층 더 성장할지도 모르지. 녀석 혼자서 애를 키우겠 다는 것도 아니니 일단 지켜보자꾸나.” “네.” 대답은 했지만 루이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녀가 지크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불신감을 가지는 데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하이스쿨 1학년 시절, 그러니까 그녀가 열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당시 그녀와 지크, 그리고 그 학교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떠났는데, 지크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나름대로 즐겁게 여행을 했지만 친구가 없는 루이에 겐 지루한 시간일 뿐이었다. 사고가 생긴 것은 수학여행이 시작된 지 이틀 째 되던 날이었다. 루이가 소 속된 클래스의 남학생과 여학생 몇 명이 루이를 악의적으로 따돌렸고, 그로 인해서 그녀는 야생동물이 마음껏 살 정도로 깊은 산속에 홀로 버려지고 만 다. 때문에 담당교사들은 난리가 났고 이유를 모르는 학생들은 혹시나 하는 불 안감에 떨어야 했다. 같은 학교였던 지크는 루이를 찾겠다며 숙소를 나가려 고까지 했다. 그의 초인적인 힘을 알지 못한 교사들은 그를 말렸다. 야간에 산에서 곰이 나 기타 위험생물 내지는 혹시 나타날지도 모르는 BG에게 걸려든다면 목숨 을 부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크는 쥐도 새도 모르게 숙소를 빠져나갔다. 덕분에 루이는 실종 하루 만에 돌아올 수 있었다. 신체적으로 문제는 없었지만 산을 헤맬 당시 받은 충격과 공포감 때문에 그 녀는 수학여행을 마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물론 그녀를 따돌린 소년 소녀들 역시 루이가 간 다음날 이유를 알 수 없는 정신이상 반응을 보여 집 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유는 지크만이 알고 있었다. 지크 덕분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에 대해 불신 감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사실 그녀는 악동들에게 속기 전부터 뭔가 불안하다는 뜻을 계속 지크에게 밝혀왔다. 허나 지크는 설마 큰일이 벌어지겠냐며 그녀의 말을 반 쯤 무시 하고 말았다. 그는 결국 사건이 터진 뒤에야 후회를 했지만 루이는 오랫동 안 그를 용서해주지 않았다. 그것이 루이가 가진 불신감의 이유였다. 그런 것을 꿈에도 모르는 지크는 본부 앞에서 리진과 만나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갔다. 옆자리에 앉자마자 한숨을 쉬는 그의 모습에 리진은 상당히 의아해했다. 처 크에게 혼이 났을 거라 생각했지만 혼이 난 사람 치고는 얼굴이 너무 밝아 서였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아, 그럭저럭. 오늘 부로 동생이 생겼거든.” “뭐라고? 동생?” 리진은 화들짝 놀랐다. “무슨 소리야? 저번에 레니 언니를 뵈었을 때는 전혀 몰랐는데? 아빠가 누 구야?” “없어. 오늘 부로 열 살짜리 애 하나를 동생으로서 입양하기로 했지. 그 애는 집에 있고.” “입양?” 입양이라는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리진은 설마 하는 얼굴로 지크를 바라 봤다. “납치를 해서라도 동생을 만들고 싶었어?” 지크의 얼굴은 금새 구겨졌다. “어이, 그만해.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보여?” “그, 그건 아니지만… 이건 사건이잖아! 놀랄 수밖에 없단 말이야! 아, 이 건 나만 알기엔 너무 강력한 일이야.” 그녀는 지크가 말릴 틈도 주지 않고 무전기를 들었다. “여기는 하리진입니다! 선배님, 들리십니까?” “아, 잘 들린다, 리진. 비상 회선이 아닌 걸 보니 나쁜 일은 아닌 듯 하 군. 지크는 합류했나?” “예, 합류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얘기를 합니다.” “이상한 얘기?” “예, 오늘 아침 부로 어린아이 하나를 입양했다 합니다.” “입양?” 높은 톤의 목소리가 들린 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설마, 납치를 한 건 아니겠지?” 그렌의 목소리 뒤로 케빈의 것으로 보이는 웃음소리가 멀찌감치 들렸다. 박 수소리까지 들리는 것을 봐서 웃어도 보통 웃는 게 아니었다. 덕분에 지크 의 얼굴은 아예 흙빛이 되었다. 그는 리진의 무전기를 빼앗아 들었다. “아저씨까지 이러실 거예요?” “하하, 농담이야. 그런데, 어쩌다가 입양을 하게 된 거야? 누구의 아이인 데?” “그렇게 됐어요. 암튼 그것 때문에 좀 늦었어요.” “그렇군. 여자아이야, 아니면 남자아이야?” 그 말이 나오자 지크는 기다렸다는 듯 빙긋 웃었다. “여자애죠. 아주 귀여워요.” “그래? 그럼 나중에 꼭 소개시켜줘. 여자 보는 눈이 높은 네가 귀엽다고 할 정도라면 대체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가질 않는군.” “걱정 말고 기다리세요. 그럼 나중에 봐요.” “좋아. 오후 브리핑 때 보자고.” 통신을 종료한 지크는 다시 한숨을 쉬며 무전기를 내렸다. “소문 한 번 크게 나는군. 내가 애 하나 입양한 게 그렇게 신기한 일인가? ” 그때까지 지크를 계속 보고 있던 리진은 못들을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말했다. “그것보다는 지크가 여자 보는 눈이 높다는 게 더 놀라워.” “무슨 소리야?” 인상을 쓴 그에게 리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생각을 위해 고 개를 갸웃대는 것에 맞춰 길고 윤기 있는 검은머리가 그녀의 황색 재킷 좌 우에서 춤을 췄다. “그냥 그렇다는 거지, 뭐.” “쳇, 시시하긴.”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들은 지크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좀 더 푹 쉬려는 듯 재킷의 팔에 묶어둔 고글까지 빼서 눈에 썼다. 중심가의 도로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었다. 리진은 법규에 맞춰 순찰차를 횡 단보도 앞 정지선 앞에 세웠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횡단보도 위를 거닐었다. 강남지역의 중심가라 서 그런지 신호등이 표시하는 시간 내에 전부 지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이용했다. 고글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크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상태로 오늘 기습적으로 생긴 동생, 루이체에 대한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무슨 마법에 걸린 것일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밝아진 그의 시야 안에 들어온 것은 인파 틈에 보이는 한 명이었다. 하얀 베레모에 어울리는 동색(同色)의 산뜻한 세일러 스타일의 옷이 인상적 인 소년이었다. 길이가 긴 반바지와 운동화 사이로 살짝 보이는 하얀 속살이 눈부실 정도로 깨끗했다. 블루블랙의 머리를 쓸어 올리는 하얀 손과 가는 팔은 이 세상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지크의 멍한 시선을 느꼈을까. 소녀인지 소년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신비로운 마스크가 그를 향해 움직였 다. 파란 색의 눈동자였다. 백인에게 볼 수 있는 그런 파란색이 아니라 사파이 어의 그것과도 같이 아름다운 색이었다. 웃으면 남자나 여자 몇 명쯤은 우습게 쓰러트릴 것 같은 얼굴을 배경으로 한 그 눈은 지크의 시선이 불쾌하다는 듯 주름으로 장식됐다. 인상을 쓴 그 소년은 고개를 돌리고 갈 길을 갔다. 신호가 끝난다는 경보음 이 그와 그의 동행을 재촉하고 있었다. 지크는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고정했다. 그 어떤 미녀를 봐도 동 요함이 없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왠지 달랐다. 이윽고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잠시나마 지크와 같은 곳을 보고 있던 리진은 차를 출발시키며 감탄했다. “우와, 모델을 하는 앤가? 저렇게 예쁜 애는 패션잡지에서도 본 적이 없는 데? 혹시 봤어? 지금 지나간 하얀 옷의 애 말이야.” “…….” “지크?” “응? 못 봤어. 못 봤던 것 같아.” “그렇지? 하지만 좀 이상한 점이 있던데?” “뭔데?” 지크는 눈을 감았다. 그 소년인지 소녀인지에게 관심이 간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과는 인연이 없을 거라며 대범하게 넘기려는 노력이었다. 그것을 모르는 리진은 자신이 본 것에 대해 말했다. “귀가 일반인에 비해서 좀 뾰족했어. 그것 때문에 사람 같지 않다는 생각 이 들던데…….” “장식품일지도 모르지. 요즘 애들이 그렇잖아. 피어싱도 하고, 문신도 하 고.” “음, 그런 건가?” 하지만 그런 장식물이 있다는 것을 듣도 보도 못한 리진은 이상하다는 생각 을 끊임없이 했다. “그건 그렇고 벌레 녀석들, 요즘은 정말 조용하네.” 지크의 한가한 말대로 최근 3일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BG관련 사건이 단 한 건도 접수되지 않았다. 하루평균 사건 발생 건수가 최소 열 건 정도 되 는 것을 생각했을 때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게? 꼭 호랑이가 나온 산 같아.” “호랑이라… 뭔가 대단한 존재라도 이 도시에 나타난 건가? 어쩐지, 요즘 조용하다 했더니…….” 지크는 대작 영화의 예고편을 본 사람처럼 즐거워했다. 반면 리진은 울상을 지었다. “그, 그런 말 하지 마. 괜히 불안해지잖아.”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벌어지긴 할 거 아냐. 왜, 무서워?” “안 무서운 사람이 어디 있어? 지크는 무섭지 않아?” “글쎄…….” 말끝을 흐린 지크는 조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섭지, 엄청 무섭지.” “…….” 의외의 대답에 리진은 상당히 당황했다. 평소 같으면 리진을 놀리지 못해서 안달이었을 텐데 지금은 현실성 있는 말을 하니 그녀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크는 이내 씩 웃었다. “하지만 그 공포라는 놈을 당당히 받아들이고, 그 녀석의 엉덩이를 머릿속 구석으로 차버리는 재미도 쏠쏠하지. 그런 재미조차 없으면 세상 살겠어? 못살지.” “그래?” 의외로 배울 점이 많다. 리진은 가끔 지크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지금도 그랬다. “나도 지크처럼 할 수 있을까?” 진지한 질문이었다. 지크는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한 뒤 역시 진지하게 대 답했다. “아니.” “뭐? 왜?” “다이어트에 실패한 BSP는 절대 불가능해.” “…….” 확 펴진 리진의 얼굴에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 지크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 해서 주절댔다. “이렇게 더운데도 2킬로그램 쪘다며? 시트가 눌리는 깊이를 보니 소문보다 더한 것 같군. 안되지, 그럼. 우선 그것부터 반성해. 목표는 마이너스로 이 루는 게 아니야.” 눈을 감은 지크는 턱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아랫입술에 힘을 주었다. 그래 서 그런지 주먹을 드는 리진의 모습은 전혀 보지 못했다. BSP 순찰차는 방음이 완벽하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도청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덕분에 순찰차를 뒤따르는 일반 승용차들은 순찰차가 조금 과하 게 흔들린다고만 느낄 뿐이었다. 다만 차의 오른쪽을 지나던 택시운전사는 색다른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TV에서 자주 보던 남자 BSP의 얼굴이 유리창에 짓눌려 있는 것이었다. “훈련의 일종인가? 뭔지는 몰라도 BSP답게 열심히 하는군.” 택시운전사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며 자신의 일에 전념했다. 루이체가 자는 동안 레니는 그 옆에서 아이가 끌고 온 가방을 열고 안에 있 는 물건들을 정리했다. 원래는 운영하고 있는 문구점에 나가야 했지만 레니 는 자는 아이를 내버려두고 일터에 나갈 만큼 비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가방 안엔 옷가지가 대부분이었다. 전부 상표가 없는 옷들뿐이어서 이상하 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보통의 옷들과 차이가 없어서 크게 신경 쓸 일은 아 니었다. ‘애 엄마가 직접 만들어준 옷인가? 정말 잘 만들었네?’ 옷 다음으로 나온 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그 안엔 환하게 웃고 있는 루 이체와 세 명의 남녀가 있었는데, 얼굴을 보아하니 루이체 좌우에 있는 둘 은 부모 같았다. 허나 가운데 위쪽의 남자는 누군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루이체 부모의 친구인가?” 네 명 모두 금발이었지만 레니가 보는 그 남자의 머리색은 다른 이들에 비 해서 좀 더 환했다. 태양의 코로나처럼 흩날리는 그의 화려한 머리는 색과 어울려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표정이 왜 이렇지?” 그의 표정은 상당히 싸늘했다. 그러면서도 강해보였다. 인생풍파에 찌든 사 람은 결코 지을 수 없는, 한 나라의 황제를 연상시킬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 치는 표정이었다. “신기하네. 이 세 사람은 웃고 있는데, 왜 이 남자만 웃지 않는 걸까?” 레니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사진 속의 루이체를 다시 봤다. 아무 걱정 없이 부모 사이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은 지금 과는 너무도 달랐다. 사진을 덮은 유리 위엔 뭔가 떨어져 흘러내린 듯한 자욱이 있었다. 눈물자 국이었다. 레니는 수건을 들어 그것을 닦았다. ‘그냥 자국이라면 이렇게 지울 수 있지만…….’ “이때처럼 웃게 해줄 수 있을까? 나랑 지크가?”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바로 지크의 모습이었다. 그 어떤 어려움이 닥 쳐도 씩 웃으며 받아들이고 도전하는 그의 모습은 아들과 어머니라는 차이 를 넘어 본받을만한 점이었다. 그때, 어딘가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출처를 확인해보니 루이체의 배에 서 나는 소리였다. 너무 배가 고팠는지 루이체는 세 번째 소리가 날 때쯤 눈을 떴다. 부스스한 아이의 모습을 본 레니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래, 차근차근 해 나가는 거야.’ 그녀는 헝클어진 아이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질해줬다. “배고프지 않니?” 루이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지 않았을 뿐, 그녀는 상당한 공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 뭘 해줄까? 좋아하는 음식이 있니? 내가 할 수 있는 음식이면 최대 한 맛있게 해줄게.” 루이체는 그냥 배가 고프다는 일념 하나로 말했다. “비모네스 스프요.” “응?” 레니는 처음 듣는 요리였다. 당황한 그녀의 얼굴을 본 루이체는 등골이 서 늘해졌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한 말이 떠오른 것이다. ‘괜히 천사라는 티내서 해부당하지 말도록.’ 진짜 그렇게 된다면 상당히 곤란해질 것이다. 루이체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 아줌마가 내 배를 다시 예쁘게 꿰매줄 수 있을까? 아냐, 무리라고 봐. ’ 루이체는 고개를 마구 저은 뒤 다시 말했다. “스파게티랑 오므라이스요.” 드디어 일반적인 요리 이름이 나왔다. 레니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 스럽게도 그녀가 가장 잘 하는 요리였다. “그렇구나. 그럼 우선 씻자. 예쁜 얼굴이 엉망이네?” “네.” 레니와 함께 목욕탕에 가는 동안 루이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런데, 스파게티인가 하는 건 맛있는 음식일까 ?’ 사실 루이체는 자신이 말한 음식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먹고 싶은 음 식이 있다면 무조건 스파게티와 오므라이스라고 말하라는 조언에 따른 것뿐 이다. 아이를 목욕실에 데려다준 레니는 즐거운 얼굴로 요리를 시작했다. 한편, 세면대를 앞에 둔 루이체는 긴장한 얼굴로 세면대와 그 위에 올려진 비누, 샴푸 등을 바라봤다. “어떻게 쓰는 거지?” 루이체는 눈앞에 있는 물건들을 써본 일이 단 한번도 없었다. 요리 때와 마 찬가지로 지금이 그 물체들과 처음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우선 세면대 중앙에 보이는 은색의 길쭉한 물건에 손을 댔다. 그러 자 막대처럼 생긴 곳에서 물이 흘러나왔다. 다시 손을 대니 물이 멈췄다. “오오.” 사실은 적외선 감지식 수도꼭지였는데, 이런 것을 처음 본 루이체에겐 정말 대단한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물이 세면대 밑에 보이는 배수구로 모조리 빠져나가 버렸다.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배수구엔 철로 만든 버섯처럼 보이는 물체가 있었다. 그것을 누르니 수도꼭 지 뒤에 보이는 막대가 위로 솟았다. 그것을 목격한 루이체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막대를 눌렀고 그에 따라 배수구의 마개가 솟아올랐다. “좋아.” 자신감을 얻은 루이체는 다시 배수구를 막고 물을 받았다. 세면대를 마지막 으로 쓴 레니가 물을 ‘미지근함’ 쪽으로 맞춰놓은 것은 그녀로선 행운이 었다. 가까스로 물을 받는데 성공한 루이체는 다음 문제에 부딪히고 만다. 비누, 샴푸, 린스라는 괴물들이었다. “음.” 소녀는 동그스름한 턱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놓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우선 비누를 만져봤다. 물기를 잃은 비누는 딱딱하고 거칠었다. 이것을 세 척용 도구로 사용하는 게 무리라 판단한 소녀는 샴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뚜껑을 여니 향긋한 냄새가 났다. 그 안엔 진득해 보이는 정체불명의 분홍 색 액체가 가득 들어있었다. “아하.” 뭔가 깨달은 그녀는 샴푸 통을 기울여 안에 있는 액체를 물에 넣었다. 실례 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적당히 넣은 소녀는 손을 넣고 물을 휘저었다. 거품이 일면서 물이 미끌미끌해졌다. 향도 확 풍겨왔다. 왠지 기분이 좋아진 루이체는 씩 웃었다. “감 잡았어.” 루이체는 그 물로 얼굴과 머리를 씻었다. 물을 빼고 얼굴을 씻는 것은 이제 일도 아니었다. 세면과 머리감기를 마친 소녀는 샴푸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후 수건으로 기 분 좋게 물기를 닦으며 목욕실을 나섰다. 부엌으로 간 루이체는 터번을 쓰듯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테이블 앞에 앉 았다. 다리를 흔들던 루이체의 배에서 또 한번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음식냄새를 맡으니 배가 더 고파진 것이다. 그 소리를 들은 레니가 자신을 보고 웃자 루이체는 인상을 살짝 쓴 채 배를 힘주어 쓰다듬었다.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해보려는 것이었다. 식사준비를 마무리하던 레니는 아이의 그런 귀여운 모습을 보고 절로 미소 를 흘렸다. ‘아아, 역시 지크 때와는 달라! 인형보다도 더 인형 같은 아이가 내 딸이 라니!’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지크와 그녀는 처음부터 친한 게 아니었다. 성인이든 어린아이든 남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던 그녀는 지크를 처음 만 난 날 자신 있게 스파게티와 오므라이스를 해보였으나 어린 지크는 너무 솔 직한 반응을 보였다. “내 취향이 아니에요.”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레니는 그럼 무슨 음식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지크는 엄지를 치켜들며 대답했다. “유부녀죠!” “…….” 사실 지크의 대답은 당시 방영되던 드라마의 바람둥이 남자주인공이 자주 하는 대사였다. 지크는 멋모르고 따라한 것뿐이었지만 그 드라마를 본 적이 없고 이런 경우를 당해보지도 못했던 레니는 당시 너무 당황한 나머지 눈물 까지 흘렸다. 물론 그 사건은 후에 진실이 밝혀져서 별 탈 없이 끝났다. 아무튼 당시의 지크와 지금의 루이체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루이체는 어 딘지 모르게 품위 있고 조용했으며 눈치도 빠른 듯 했다. 어린 지크보다 훨 씬 귀엽다는 것도 항목에 포함되어 있었다. “자아, 다 됐다.” 레니는 어린아이 한 사람이 먹기에 적당할 만큼 나눈 스파게티와 오므라이 스를 루이체 앞에 가져다 놓았다. “오오.” 눈앞에 차려진 음식을 본 루이체는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며 감탄했다. 자기 몫의 스파게티를 가져다 맞은편에 앉은 레니는 싱긋 웃었다. “맛있게 먹으렴, 루이체.” “잘 먹겠습니다.” 예절바르게 인사한 뒤 포크를 잡은 루이체는 우선 스파게티에 눈을 돌렸다. 소녀는 레니가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본 뒤 그녀가 했던 대로 면발을 포크 로 빙글빙글 돌려 둥글게 만 뒤 입에 넣었다. 상당히 맛있었다. 생전 처음 접하는 그 맛에 놀란 루이체는 눈을 크게 뜨고 레니를 바라봤다. 놀란 사람은 루이체뿐만이 아니었다. 아이의 그런 반응에 놀란 레니는 불안 감을 느낀 나머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마, 맛이 없니?” “정말 맛있어요!” “아, 그래?” “네, 제가 먹어본 음식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 루이체는 정말로 기쁜 듯 했다. 기뻐하는 아이의 모습에 레니는 정말 눈물 이라도 흘리고 싶었다. “그, 그렇구나. 그럼 많이 먹어. 오므라이스도 먹어보고.” “와아, 이것도 맛있어요!” 루이체는 오므라이스에 대해서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정말 기특한 것은 배가 많이 고플 텐데도 불구하고 꼭꼭 씹어 먹는 걸 잊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 자리에 지크가 있었다면 더 이상 좋을 수 없었을 것이다. 레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식사가 끝난 뒤 레니는 손수 루이체의 머리를 말리고 빗질해 주었다. 빗질을 하는 동안 레니는 손에 느껴지는 머리카락의 감촉에 의아해했다. 이 건 머리카락이 아니라 실크 그 자체였다. ‘애라서 그런가? 하지만 이 정도로 머릿결이 좋은 사람은 처음인데?’ 그래도 문제 삼을 일은 아니었다. 레니는 그냥 빗질에만 전념했다. 루이체는 앞에 놓인 거울을 통해 새엄마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는 진짜 엄마처럼 행복한 얼굴로 자신의 머리를 빗겨주고 있었다. 정말 좋은 사람 같았다. 레니의 마음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은 일말의 가식도 담겨있지 않았다. 진심으로 루이체 자신을 아껴주기로 마음먹고 있 는 듯 했다. 진짜 걱정되는 것은 바로 지크라는 남자에 대해서였다. “저기요.” 루이체가 뭔가를 묻기 위해 자신을 바라보자 레니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평 소보다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말해봐.” “지크라는 분에 대해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어떤 분이세요?” “지크? 으음…….” 레니는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대며 고민했다. 어떻게 말을 해줘야 아들에 대 해 좋은 인상을 심어줄지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단, 내 아들이지. 하지만 내가 낳은 아이는 아니야. 나랑 나이 차이도 열 살인가 밖에 나지 않아. 내가 스무 살 때 입양했거든.” “그렇군요.” “처음에는 좀 괴팍한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용기가 넘치 는 훌륭한 아이라는 걸 알게 됐지. 후후, 지금은 용기가 너무 넘쳐서 걱정 이지만. 아, 내 아들이라서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니야. 그 아이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이 그렇게 느낀단다.” 마음의 느낌을 보아하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루이체는 그래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가지를 더 물어보기로 했다. “그분, 여자친구는 있으신가요?” “여자친구?”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고 대답하기도 힘들었기에 레니는 천장을 보고 잠시 생각했다. “음… 애인은 몰라도 여자친구는 많아. 하지만 지크의 말투가 워낙 괴팍하 고 워낙 사람을 잘 놀려서 여자들이 그 애에게 깊이 접근하는 걸 좀 힘들어 하더구나.” 그의 말투가 예사스럽지 않다는 것은 아침에 벌어진 말싸움을 통해 어느 정 도 느낄 수 있었던 대목이었다. 루이체는 기업의 사장처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적으로 어떤 경우가 있나요?” 아홉 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른스러운 질문이었다. 레니는 힘 없이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녀는 첫 번째로 저녁식사를 하러 몇 번 온 하리진의 경우를 들었다. “리진이라고, 지크랑 자주 티격태격하는 아이가 있단다. 아직 열아홉 밖에 안 된 예쁜 아이지. 지크랑 얘기하는 걸 들어보면 마음속으로는 지크를 꽤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 애가 진지한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지크가 농담을 꺼내서 분위기를 망치지. 지크가 일부러 그러는 것을 보니 아직 여자를 깊 게 사귀고 싶진 않은가봐. 그 때문에 리진이는 속이 상해서 집에 갈 때가 많지만 그런 건 빨리 잊어버리는 성격이라 큰일은 없었어.” 그녀는 이어서 챠오의 경우를 얘기했다. “리진이 만큼이나 지크를 좋아하는 애가 있어. 챠오라는 아이인데, 겉으로 는 굉장히 무뚝뚝하고 냉정하지만 지크에 대해서 정말 많이 알고 있지. 1년 동안 같이 생활한 적이 있어서 그런가봐. 어지간히 심한 농담이 아니면 그 냥 못들은 척 하지. 지크가 왜 그렇게 농담을 하는지 알기 때문에 그러는 것 같더구나.” “네.” 루이체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과외선생과 함께 공부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래서는 좀 곤란하다 생각한 레니는 대화의 방향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루이체는 지크의 첫인상이 어땠니?” “좋은 분 같았어요.” “그래? 그래서 지크에 대해 궁금했던 거로구나?” “아뇨, 그것보다는… 그냥 접근하긴 쉬워도 깊게 알긴 힘든 분 같았거든 요.” “그, 그래?” 아이로선 솔직한 말이었으나 레니에겐 섬뜩하게 들렸다. 그녀 자신도 지크 에게 가끔 그런 느낌을 받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좋은 오빠가 되어주실 것 같아요.” 루이체는 빙긋 웃었다. “그래, 꼭 그럴 거야.” 레니는 아이의 통통한 볼을 만져준 뒤 빗질을 계속했다. ※※※ 오후 브리핑에 맞춰 본부로 돌아온 지크는 회의실에 들어오자마자 테이블에 다리를 걸치고 길게 앉았다. 처크나 그렌이 아직 들어오지 않은 탓에 그에 게 호통을 칠 사람은 없었다. 지크의 그런 불량한 포즈를 한두 번 본 것이 아닌 리진은 한숨을 쉬며 테이 블에 엎드렸다. “하아, 지루해.” “응.” 그녀의 힘 빠진 한탄에 지크 역시 힘 빠진 목소리로 동의했다. 아무 사건도 없다는 현실과 30도를 웃도는 무더위는 그들의 의욕을 바닥으 로 떨어트렸다. 그들뿐만 아니라 본부에서 근무하는 비 전투요원들 역시 마 찬가지로 흐늘흐늘했다. 지크는 왼손에 찬 전자시계를 흘끔 바라봤다. 오후 브리핑이 시작되려면 앞 으로 30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그는 팔을 늘어트리고 눈을 감았다. “심심하지 않아?” 리진이 물었다. 지크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심심하지. 어제도 똑같은 질문 하지 않았니?” “했지. 특별히 해결책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야.” “음… 병원놀이라도 할까?” “총으로 쏘겠어.” “농담이야.” 지크는 손을 한번 흔든 뒤 다시 떨어트렸다. 그때 그의 PDA에서 신호음이 들렸다. 발신지는 로비였다. “예, 지크입니다.” “로비에서 알려드립니다. 지크 스나이퍼 소위께선 특별한 일이 없으시다면 지금 바로 로비에 와주시기 바랍니다.” “예? 왜죠?” “지크 소위를 찾아온 손님이 와 계시는데, 벌써 1시간가량 소위를 기다렸 습니다. 그리고… 아무튼 좀 곤란한 상황입니다. 급히 내려와 주십시오.” “음, 알았어요.” 지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를 떴다. “이 시간에 손님이라니, 도대체 누구야? 어머니는 아닐 테고…….” 손님의 정체가 매우 궁금하긴 했지만 급하다는 로비 담당직원의 말과 곤란 한 목소리는 무시할 수는 없었다. 로비로 한걸음에 달려온 지크는 정말 의외의 손님을 보게 된다. 오전 순찰 때 스치듯 목격했던 블루블랙 머리의 미소년이었다. 소년의 중성적인 얼굴 역시 지크를 보자마자 일그러졌다. 소년 옆엔 남녀 한 쌍이 호위병처럼 서있었다. 여성은 30대 중반, 남성은 2 0대 초반처럼 보였고 둘 다 소년과 마찬가지로 귀가 뾰족했다. 눈동자도 청 색이었다. “이 분들이 절 찾아오신 손님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로비의 여직원은 지크를 보자마자 안도한 표정으로 그를 반겼다. 예상치 못 한 반응에 놀란 지크는 입을 비죽 내민 채 손님들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지구상에선 보기 힘든 인종이란 말이야? 전 세계를 돌아다녀 봤지만 저런 인종은 본 일이 없어. 뭐하는 족속이지?’ 지크와 소년 사이엔 약간의 긴장감이 흘렀다. 초면의 머쓱함도 그 곤란한 분위기에 한 몫 했다. 소년은 긴장감을 풀기 위해 몇 번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지크 스나이퍼, 맞소?” “그런데요?” “밖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소? 그대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이야기라 이곳에 서는 하기 힘들 것 같소.” 얼굴도 그랬지만 목소리도 중성적이었다. 하지만 말투는 일부러 위엄 있어 보이기 위해 연출한 게 아닌 듯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 소년이 어떤 중요한 얘기를 할지는 알 수 없었으나 사인을 해달라거나 나무에 매달린 고양이를 구출해 달라는 등의 이상한 부탁을 할 것 같진 않 았다. 세 명 모두 분위기는 진지했다. 지크는 일단 얘기를 들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려울 건 없지만 오래 얘기는 못해요. 아침 일정도 늦었는데 오후 일정 까지 늦어버리면 이 건물 주인이 절 죽이려 들 거예요.” “그대를 죽인다고?” 소년은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곧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어떤 존재이기에 그렇소? 그렇게 강하오?” “…….” 지크와 로비 담당 여직원은 할 말을 잃은 듯 서로를 쳐다봤다. 그들뿐만 아 니라 소년과 같이 온 남녀 역시 곤란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소년은 조금 크게 헛기침을 했다. “험, 아무튼 긴 얘기는 아니니 어서 자리를 옮깁시다.” “그럽시다.” 지크는 뒷일을 부탁한다는 사인을 여직원에게 보낸 뒤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간 곳은 BSP본부 바로 옆에 마련된 작은 공원이었다. 잘 정돈된 나 무와 꽃, 깔끔한 디자인의 벤치는 물론 고풍스러운 팔각정까지 세워져 있는 곳이어서 BSP의 직원들 말고도 근처 회사의 직원들이 자주 찾는 훌륭한 장 소였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이 끝난 직후여서 그런지 청소를 맡은 미화 원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소년은 자리를 잡기 무섭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대, 리오 스나이퍼의 의형제라고 들었소.” “리오?” 형제의 이름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지크는 의문이 들었다. ‘이것들은 뭐야? 오늘은 도대체 무슨 날이기에 평소생활과 관계없는 일이 계속 벌어지는 거지?’ 지크는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부정을 하기로 했다. “그게 누구요? 나랑 성씨가 같다고 해서 다 내 형제라고 생각하면 곤란하 지.” 그러나 소년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주신의 직속비서에게 직접 들었소. 그대와 슈리메이어 반 스나이퍼, 그리 고 리오 스나이퍼는 의형제 사이라고 말이오. 가즈 나이트라는 유치한 이름 도 그대가 만들었다 하더군.” 거기까지 나오자 지크도 발을 뺄 순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벤치 위에 앉았다. “그냥 시험 한번 해봤수. 리오를 찾는 거요?” “그렇소.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오?” “알긴 하지만… 왜 찾소?” 소년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와 함께 온 남녀는 왕을 모시듯 허리를 굽히며 그를 응원해 주었다. ‘뭐하는 종자들이야, 도대체? 저 꼬마가 사우디 왕자라도 되는 건가?’ 소년이 대답을 한 것은 지크의 인내력 눈금이 경고지점에 다다르기 직전이 었다. “리오 스나이퍼는 과인의 친구요.” “친구? 과인? 당신 도대체 누군데?”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옆에 있던 여성이 나서서 소년을 소개했다. “감히 소개 올리겠습니다. 이 분은 전 차원 서룡족의 위대하신 제왕이십니 다.” “아, 그래요?” 겉으론 웃고 있었으나 지크의 인내력은 그 순간 한계를 초월했다. “어이, 꼬마. 서룡족 제왕인지 동룡족 제왕인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가서 우유나 더 드시지. 믿을만한 얘기를 해야 내가 성심성의껏 대해줄 거 아냐? 안 그래? 도대체 뭐가 필요한 거야?” 지크는 소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거칠게 나왔다. 그의 분위기 가 갑자기 반전되자 소년과 일행은 상당히 당황스러워했다. “과, 과인은 최대한 성실하게 그대를 대하고 있소! 그리고 동룡족의 우두 머리는 제왕이라 칭하지 않고 주룡(主龍)이라 칭하오!” “…….” 소년의 눈과 일행의 분위기를 보니 자신을 속이거나 할 것 같진 않았다. 경 계심을 늦춘 그는 진지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좋아, 친구라고 하지. 리오는 왜 만나려고 하는데?” 그의 입에서 반말이 나오자 소년과 일행은 또다시 당황했다. “마, 말조심 하시오! 과인은 서룡족의 제왕으로서…….” “에이, 내 형제의 친구라며. 뭘 또 까다롭게 그러시나.” “과인이 그대와 친구는 아니잖소!” 지크는 소년의 목을 팔로 휘감았다. 소년은 그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 낑낑 댔지만 지크의 팔 힘을 이겨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친구 하기로 하지 뭐. 친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잖 아, 안 그래?” “그, 그래도 이건 억지요!” “괜찮아. 난 나쁜 사람 아니니까 친구 해도 돼. 그나저나 너, 남자야, 아 니면 여자야? 몸이랑 얼굴 모두 그 사이에 딱 낀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 거든?” 순간 소년의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아직 결정하지 못했소!” “뭐?” 지크는 무슨 소리냐는 듯 소년의 일행을 쳐다봤다. 서로를 바라보던 남녀는 눈으로 사인을 주고받은 후 그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모든 서룡족은 태어난 직후엔 중성 성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후 성장기 를 거치면서 남성을 택할 것인지, 여성을 택할 것인지 자신의 의지를 통해 결정하게 되는데, 전하께선 특별하시기 때문에…….” “오, 그럼 지금은 둘 다라는 말씀인가요?” “…….” 세 사람은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정체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성격의 지 크는 자신의 페이스대로 대화를 다시 이끌었다. “뭐, 그렇다 치자고. 너, 이름은 뭐야?” “뭐라고! 이건 실례가 과하지 않소!” “친구잖아, 친구. 흥분하지 말고 좀 가르쳐줘. 너도 존칭은 빼. 그게 편하 니까.” 소년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대답했다. “바이칼이오. 바이칼 레비턴스라고 하오.” “에이, 존칭 빼라니까.” “아, 알았다.” “헤헤, 좋아.” 지크는 소년, 바이칼을 자신의 건너편 벤치에 앉혀주었다. “리오는 일단 여기에 없어. 오딘인가 하는 옛날 신에게 수련을 받으러 떠 났지.” “오딘님에게?” 놀란 바이칼은 이내 쓸쓸히 한숨을 지었다. “그건 몰랐나보네? 하지만 이제 거기로 가서 만나면 되잖아? 서룡족 제왕 이나 되니까 별 문제 없지 않나?”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바이칼은 제법 위엄 있게 말했다. “오딘님이 계신 곳은 그 누구라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는 걸 몰랐나보 군. 그분의 허락이 없으면 주신이라 하더라도 들어갈 수 없지.” “오오, 그렇군. 그럼 이제 어쩌나? 리오는 당분간 못 만나겠네?” “아쉽지만 그럴 수밖에.” 바이칼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이, 그렇다고 실연당한 여자처럼 그럴 건 없잖아.’ 지크는 속으로 중얼대며 웃었다. “리오는 왜 만나려고 한 건데?” 바이칼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친구가 친구를 만나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 좋은 말이었다. 지크는 할 말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짧지만 나쁜 시간은 아니었다, 지크 스나이퍼. 도움이 됐다.” 바이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표정이 상당히 거만 했다. 그러나 허물은 없어 보였기에 지크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별 말씀을. 오후 일정에 늦지 않았으니 내가 더 고맙지. 이제 어디로 갈 거야?” “드래고니스로 돌아간다.” “드래고니스?” “서룡족의 성전이자 이 몸의 궁전이고, 또한 전 차원계 최대의 초 차원 요 새다. 지금 차원간의 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지.” “그래? 그럼 나중에 구경 한번 시켜줘. 그리고 심심하면 우리 집에 놀러 와도 돼.” “흥, 인간의 가정엔 볼 일이 없다.” “어, 그런 말을 하면 섭섭하지. 우리 어머니가 요리를 얼마나 잘 하시는데 ?” “뭐라고?” 움찔한 바이칼은 이윽고 진지한 얼굴로 지크 앞에 섰다. “사실인가? 거짓말이면 처단하겠다.” “거, 거짓말은 아냐. 자타가 공인하지.” “그렇다면 기대하겠다. 다음 기회에 다시 보도록 하지.” 소년은 훌쩍 길을 떠났다. 지크는 그의 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알았어. 그럼 조심해서 가. 여러분도 수고하시고요.” 바이칼의 수행원들은 정중히 인사를 한 뒤 주군을 따랐다. 그들이 횡단보도를 건너 거리로 사라지는 것을 본 지크는 기지개를 켜며 몸 을 풀었다. “아아, 오늘은 정말 일이 많구나. 그나저나 용족이라니, 새롭군. 내가 모 르는 세계가 아직 많긴 한가봐.” 그는 새로운 경험에 대한 여운과 함께 본부로 발길을 돌렸다. 순간 몇 개의 기척이 바이칼이 간 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기척 자체가 워 낙 미약해고 빠르게 이동해서 적의를 가지고 있는지는 파악되지 않았다. 그쪽을 잠시 바라보던 지크는 가벼운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호위겠지. 제왕이니 뭐니 하는데 설마 두 명 밖에 안 붙었겠어?” 오후 브리핑은 지크가 돌아온 후 10분 정도가 지난 뒤에 시작되었다. BG에 관련된 사건사고가 없었기에 처크 역시 별다른 지시사항을 내리지 않 았다. 그저 열심히 하자는 말 뿐이었다. 덕분에 브리핑 시간은 매트로 서울 에 BSP가 들어온 이후 최단기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짧았다. 처크는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인간적인 본론으로 들어갔다. “입양한 아이 말이다.” 그가 대놓고 루이체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지크의 얼굴은 이상하게 변했다. “말씀하시죠.” “후후, 어떻게 생겼는지 좀 얘기해 주지 않으련? 여자아이라는 것밖엔 듣 지 못해서 상당히 궁금하구나. 일도 손에 안 잡히더군.” “할아버지 마음은 이해하지만 제 묘사능력을 너무 과신하시는군요.” 지크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때 류페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정 궁금하시면 화상모드를 통해서 전화를 해보세요. 지금 집에 계시지 않 나요?” “오오, 그렇군!” 처크와 지크는 동시에 엄지를 내밀었다. 너무나 닮은 그 둘의 모습에 루이 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연결해 드릴까요, 지부장님?” “좋지, 부탁하네.” “예.” 직책을 부름으로서 아버지를 진정시키려 노력했던 루이는 결국 노트북을 조 작하여 메인 스크린을 화상전화와 연결했다. 신호음에 이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지크 스나이퍼씨 집입니다.” 틀림없는 레니였다. 처크는 루이가 건네준 마이크를 들었다. “여어, 레니. 오래간만이구나.” “아, 처크 삼촌! 무슨 일이세요? 지크가 또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나요?” 그녀의 걱정 어린 질문에 그렌과 케빈, 류페이, 리진이 한꺼번에 웃음을 터 트렸다. 챠오는 평소대로 묵묵했고 지크의 얼굴은 흙빛으로 물들었다. 처크는 껄껄대며 웃었다. “아아, 저질렀지. 나도 모르게 꼬마아이 하나를 입양했다며?” “아, 네. 그렇게 됐어요. 설마 그것 때문에 전화하신 건 아니시겠죠?” “하하, 내 성격 알잖아. 모니터를 좀 커주겠니? 너랑 그 아이의 얼굴을 좀 보고 싶구나.”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웃음 섞인 레니의 목소리에 이어 메인 스크린이 환하게 밝아졌다. 약간의 조정 작업 후 레니의 얼굴이 뚜렷이 잡혔다. “잘 보이세요?” “아, 잘 보인다. 넌 볼 때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구나.” “후후, 아직 서른 셋 밖에 안됐어요. 그런데, 그쪽에서는 화면을 켜지 않 으셨네요?” “응, 화상전화로 하는 게 아니거든.” 초고속 회선을 이용한 화상전화는 사용자 임의로 화면을 보낼 것인지 결정 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원래는 프라이버시 보호관계로 양쪽 모두 화상전화 를 이용해야 화면을 켤 수 있지만 루이의 해킹기술이라면 문제될 것은 없었 다. “그렇군요. 그럼 조금만 기다리세요.” 빙긋 웃은 레니는 옆쪽으로 손짓을 했다. “자아, 루이체? 이쪽으로 오렴. 할아버지께서 널 보고 싶다고 하시는구나. 아, 너무 무서워 할 것 없어.” 잠시 후, 루이체의 얼굴이 화면 아래쪽 구석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졌다. 토 끼 같은 그 모습이 너무도 귀여웠는지 처크는 턱 밑을 만지며 어쩔 줄을 몰 라 했다. 루이체가 다시 화면에 나타난 것은 레니가 몇 차례 설득을 한 후였다. 조심 스레 화면 중간에 나타난 아이의 모습에 처크와 BSP직원들은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토실토실한 볼에 커다랗고 맑은 눈, 잘 빗어 내린 금발은 그야말로 그림이 었다. 부끄러운 듯 조막만한 주먹을 입가에 대고 있는 모습은 처크와 대원 들에게 결정타를 날리기 충분했다. 처크는 마이크를 손으로 급히 막았다. “지크, 저 아이의 이름이 뭐라고?” “루이체에요. 성씨는 저랑 같고요.” “좋아.” 처크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마이크에서 손을 떼었다. “안녕, 루이체? 만나서 반갑구나.” 그의 목소리가 들린 듯 루이체는 전화기의 카메라에 눈을 돌렸다. 그러다가 손가락으로 화면 쪽을 가리키며 레니를 쳐다봤다. 이곳에다가 말하면 되냐 는 물음이었다. 레니는 웃으며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자, 같이 하자.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하,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아이, 좀 더 밝게.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루이체는 방긋 웃으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처크는 넋이 나간 듯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화면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갑 자기 눈가를 가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 내가 처크 할아버지란다.” 그러자 루이체는 화들짝 놀랐다. “할아버지, 우세요?” “응? 아냐. 루이체를 만난 게 너무 기뻐서 그런단다.” 지크, 루이, 그리고 그렌을 제외한 모두는 갑작스런 처크의 반응에 당황해 했다. 아이도 귀엽고 레니 역시 행복해 보이는데 그가 왜 우는지 그들로선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이유를 알고 있는 셋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 다. 그때 회의실의 스피커에서 비상벨소리가 터졌다. 이어서 오퍼레이터의 급박 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부장님, K-7구역에서 4번 상황 발생입니다! 반복합니다, 4번 상황 발생 입니다!” 4번 상황이라 함은 경찰력으로 어쩔 수 없는 강력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처 크는 언제 눈물을 쏟았냐는 듯 선글라스를 썼다. “루이, 연결해주게.” 그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루이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키보드를 조작했다. “네, 지부장님. 연결됐습니다.” “처크 지부장이다. 무슨 일인가?” “예, 지금 K-7구역의 경찰들이 4번 상황이 발생했다고 판단, 우리에게 긴 급지원요청을 해왔습니다. 현재 K-7구역에선 다섯에서 여섯으로 보이는 숫 자의 괴한들이 시민들과 경찰을 살해하고 한 소년을 추격하고 있다 합니다. ” 지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오퍼레이터의 말이 사실이라면 다섯에서 여섯이 라는 숫자는 자신이 바이칼과 헤어지면서 느낀 기척의 수와 일치하는 것이 었다. ‘호위가 아니었잖아! 빌어먹을!’ 처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주관제실로 간다. 더욱 자세한 보고 및 상황은 그곳에서 받기로 하 겠다.” “알겠습니다.” 주관제실과의 통화를 끝낸 그는 곧장 브리핑 룸의 전투요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우선 지크와 리진 조가 출동하여 현지상황을 파악하고 응급조치를 취하도 록 한다. 나머지 조는 자세한 상황이 보고되기 전까지 B클래스 무장을 하고 대기하도록. 그럼 이상.” “아, 잠깐만요!” 브리핑 룸을 나가려던 처크는 지크의 제지를 받고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인가?” 처크의 냉엄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지크는 메인 스크린 쪽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마무리를 지으셔야죠.” “마무리? …아.” 그는 아차 하며 메인 스크린에 눈을 돌렸다. 그곳에 있는 루이체와 레니는 서로와 카메라 쪽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 역시 뭔가 일이 터졌 음을 직감한 것이다. 처크는 한숨을 쉰 뒤 마이크를 들었다. “루이체, 미안하지만 할아버지에게 급한 일이 생겨버렸구나. 우리 귀여운 손녀에게 내 얼굴을 보여주지 못해서 어쩌지?” 그의 목소리를 들은 루이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괜찮아요, 할아버지. 꼭 무사하셔야 해요.” “후후, 물론이지. 가능하면 오늘 보자꾸나. 내가 못가더라도 네 할머니와 언니는 꼭 보내도록 하마. 엄마랑 잘 놀고 있으렴.” “네, 할아버지. 지크 오빠에게도 조심하라고 전해주세요.” 처크는 지크를 바라봤다. 지크는 말 대신 엄지를 슥 내밀고 윙크를 했다. “알았으니 나중에 다시 보자꾸나. 레니도 걱정 말고 있어라.” “네, 삼촌. 그럼 조심하세요.” 곧이어 통화의 끝을 알리는 규칙적인 신호음과 함께 메인스크린은 검게 변 했다. 다시 키보드를 조작하여 전화를 끊은 루이는 노트북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죠, 지부장님.” “…….” “지부장님?” 처크는 그녀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지크에게 눈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 다. 지크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묻듯 빙긋 웃은 채 그를 응시했다. 처크가 말했다. “너, 이젠 꼭 살아서 돌아가야겠구나. 너보고 오빠란다.” “흥, 걱정 마세요. 저승사자가 눈앞에 보이면 엉덩이를 차서 돌려보내죠. ” “후후, 건투를 빈다.” “예!”지크는 자신과 출입구 사이에 놓인 테이블을 미끄럼틀 타듯 넘어 밖 으로 나갔다. 처크는 들고 왔던 서류와 커피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오랜만에 일이 터지는군. 즐겨 볼까나?” 뒤따르던 루이는 보이지 않게 고개를 흔들었다. ‘둘이 똑같다니까.’ ※※※ K-7구역은 BG라도 나타난 것처럼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경찰들은 무엇에 맞았는지 몸에 구멍이 뚫린 채 시체로 변해 있었다. 몇몇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당한 상처는 총상도, 물어뜯긴 자국도 아니었다. 상식을 뛰어넘은 어떤 힘에 의해 만들어진 자국이었다. 자동차가 다녀야 할 거리에선 2대 6의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쫓기는 둘은 바이칼과 여성 수행원이었고 쫓는 여섯은 검은 옷에 검은 삿갓을 쓴 괴한들이었다. 갑작스레 일을 당한 탓인지 바이칼과 여성은 그저 도로 위를 빠르게 뛰기만 할 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보이지 않는 힘이 뒤따랐다. 괴한들의 손을 떠난 충 격파는 방금 전 인간의 육체를 꿰뚫듯 아스팔트마저 시원하게 꿰뚫었다. 바이칼은 숨이 턱까지 오는 듯 매우 힘들어했다. 자동차보다 빨리 달리고 있으니 힘이 들만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들어도 멈출 수는 없었다. 멈추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을 제왕으로서 모시고 있는 종족 모두가 끝장 이었다. “도대체 왜! 어째서 동룡족이 이 세계에 있는 건가! 난 주신에게 동룡족이 이 세계에 들어올 수 없도록 한다는 조항을 걸고 이 세계에 왔어!” 그의 뒤를 따르는 여성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전하께서 이곳에 오시기 전에 자객이 미리 들어왔다면 조항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곳에 오신다는 정보가 미리 새어나갔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쳇……!” 바이칼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긴 속눈썹 옆으로 맑은 눈물이 흘러나왔 다. “데이브가, 데이브가 저 녀석들에게 죽었어! 이제 막 전룡단에 들어온 젊 은 녀석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발자크를 데려왔어 야…….”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그를 따르던 여성은 이미 시신이 되어 먼지로 변해 가고 있었다. 바이칼은 다리를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괴한들은 먼지로 변한 여성의 옷가 지를 발로 짓밟으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들 중 가장 앞에 선 남자 ― 대장으로 보이는 ― 가 손을 뻗었다. 멈추라 는 뜻이었다. 이어서 그의 눈을 제외하고 얼굴 전체를 감싼 두건이 조금씩 움직였다. “여기까지다, 서룡족의 우두머리여. 당신이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다.” “…….” “당신이 나이가 어려 사리분별을 정확히 못한다고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우리 동룡족이 그대를 노릴 것을 뻔히 알면서 그렇게 자랑하 는 전룡단을 거느리지 않다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애송이 하나와 시 녀 하나로 우리 특무부대(特武部隊)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바이칼은 눈을 돌려 자객들을 살폈다.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살의가 없는 게 아니라 감추고 있는 것이다. 그들 은 그만큼 강했고 또한 냉철했다. 특무부대라며 자신들을 소개할 만큼의 가 치가 충분히 있었다. 그들의 대장이 이어서 말했다. “제1전룡단 단장, 발자크 발레트가 이 자리에 나타난다면 모를까, 당신이 우리들에게서 벗어날 가능성은 극히 적다. 그러니 반항하지 말고 우리들을 따르기 바란다. 우리는 그대를 포로로 삼고 싶을 뿐, 살해하고 싶지는 않 다.” 바이칼은 이를 악물었다. “웃기지 마라! 너희들처럼 미천한 것들에게 내 몸을 맡길 성 싶은가!” 그는 두 손을 모았다가 좌우로 펼쳤다. 그의 손 사이에서 만들어진 빛은 이 내 한 자루의 검으로 변했다. 하얀색 자루에 날이 약간 휘어진 장검이었다. 길이는 1미터가 조금 넘어보였지만 작고 약한 그에겐 너무도 컸다. 그러나 바이칼은 예상을 깨고 자유자제로, 절도 있게 휘둘렀다. “이 몸은 서룡족의 제왕이다! 무시하지 마라!” 하지만 자객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흠, 그것이 바로 전대 용제, 알렉산더가 인간을 위해 남겼다는 용살검, 드래곤 슬레이어인가? 보여준 것은 고맙지만 다시 경고하겠다. 쓸데없는 행 동은 삼가라.” “닥쳐라!” 소년은 자객들을 향해 돌진했다. 허나 그의 용기와 기상은 몇 초 지나지 않 아 무로 돌아갔다. 팅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바이칼의 검은 공중으로 핑그르르 솟아올라 건물 벽에 박혔다. 바이칼은 검을 들고 있던 손을 부여잡은 채 분한 얼굴로 뒷걸 음질을 쳤다. 특무부대 대장의 손엔 검고 큰 도검이 들려있었다. 일본도에 가까운 디자인 이었지만 날이 양쪽에 있다는 점과 코등이의 형태 등이 틀려 어렵지 않게 구별할 수 있었다. 바이칼이 뒤로 한 걸음 내딛을 때 특무부대 대장은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 었다. 거리는 좁혀지지도, 벌어지지도 않았다. “뭐야, 이건? 어디서 활극이라도 찍는 건가?” 어딘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특무부대 전원과 바이칼이 움찔했다. 일제히 뒤를 돌아본 특무부대는 붉은 재킷의 청년이 귀를 파며 자신들에게 다가오 는 것을 목격했다. 청년, 지크는 뭐가 그리 반가운지 손을 슬쩍 들며 웃었다. “여어, 수고하는군. 카메라는 어디 있지? 복장을 보니 싸구려 활극의 배우 들은 아닌 것 같군. 언제 개봉하는 영화야?” 특무부대 중 한 명이 청년에게 손을 뻗었다. 그것을 본 바이칼은 흠칫 놀라 소리쳤다. “피해라!” 그 목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을 저승으로 보낸 무형의 힘이 지크에게 날 았다. “어이쿠.” 지크는 귀를 파던 손으로 그 힘을 공 잡듯 낚아챘다. 특무부대의 눈은 크게 벌어졌고 바이칼 역시 조금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참공포(斬空砲)를 맨손으로? 보통 인간이 아니군.’ 특무부대 대장의 붉은 눈동자가 작게 일그러졌다. 지크는 손아귀 안에서 이글대는 힘을 그대로 쥐어 터트렸다. 힘이 사라진 그의 손에선 작은 스파크가 잠시 끓어올랐다. “이야, 이거 재미있네? 이런 기술이 있을 줄은 몰랐어. 그건 그렇고… 너 희들이 경찰 아저씨들이랑 시민들을 살해한 범인인가?” 특무부대 대장이 앞으로 나섰다. “부정하진 않겠다. 넌 누구냐? 용제를 보호하기 위해 온 무사인가?” “무사? 뭐, 비슷한 거지. 아무튼 내 친구나 이쪽으로 보내. 그 다음에 너 희들을 혼내줄 테니까.” “혼내준다? 인간 주제에? 후후, 겁을 상실했군. 참공포를 잡아 터트린 것 은 놀랍지만 네가 인간인 이상 우리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 대장은 도중에 말을 멈췄다. 지크가 가운데 손가락을 뻗은 채 그것을 굽혔 다 폈다 하며 자신들을 도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았으니 닥치고 와라.” “후.” 그의 두건 밖으로 작은 입김이 뿜어졌다. 그는 검지와 중지를 모아 편 뒤 그것을 지크 쪽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자객 중 사이드에 위치한 한 명이 쏜 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내달리던 그의 앞쪽으로 은색의 섬광이 번뜩였다.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휘두른 것이다. 하지만 두 동강이 나야 할 지크는 바지주머니에 양손을 꽂 은 채 자객의 옆쪽에 서있었다. “흐흥, 첫 손님.” 능글맞은 웃음 위로 검은 물체가 떠올랐다. 그에게 배를 걷어 채인 자객의 몸뚱이였다. 지크는 떨어지는 자객의 육체를 재기 차듯 이리저리 차올리며 유린했다. 양 손은 주머니 속에 여전히 들어있었고 왼쪽 다리는 축으로만 사용될 뿐, 전 혀 움직이지 않았다. 반면 오른쪽 다리는 채찍처럼 현란하게 움직였다. 지크는 입술을 씩 쪼갰다. “오면서 보니까 사람들 몸에 바람구멍을 냈더군. 더위를 해소시켜주려고 그렇게 한 건 이해하겠지만 영원히 더위를 못 느끼게 해주면 안 되지.” 말은 재미있게 했으나 자객의 몸뚱이는 여전히 땅에 내려오지 못했다. 이윽고, 그의 미소에 살기가 맺혔다. “왜 안 되는지 가르쳐줄까?” 일갈과 함께 강렬한 차기가 터졌다. 자객은 의식을 잃은 채 공중으로 붕 떠 올랐다. 높이는 건물 4층에서 5층 사이였다. 다리를 제자리로 돌린 지크는 양손을 뽑아 등 뒤로 돌렸다. 자객을 향해 다 시 뻗은 그의 손엔 두 자루의 BSW-G4 권총이 각각 들려있었다. “우선 그 사람들 입장이 되어 보시지!” 권총 끝에서 무수한 불꽃이 뿜어졌다. 총구에서 벗어난 44구경의 탄환은 자 신의 의지에 상관없이 공중부양을 하는 자객의 몸을 파고들었다. BG의 육체 를 뚫는 강렬한 관통력에 힘입어 탄은 자객의 몸마저도 간단히 뚫고 반대편 으로 유유히 튀어나갔다. 걸레처럼 된 자객의 몸은 둔탁한 소음을 내며 추락했다. 권총 한 정당 12 발, 합이 스물 네 발의 탄이 남긴 탄피 역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지크의 손가락이 만든 경이적인 속사로 인해 만들어진 광경이었다. 그는 권총 끝을 앞으로 모아 입김으로 연기를 날렸다. “후, 어때? 시원한가? 아니면 기분 더럽나?” 자객의 사체는 대답 없이 먼지로 변해 사라졌다. 남은 것은 그가 입고 있던 옷과 각종 소지품뿐이었다. 지크가 총의 탄창을 가는 동안 특무부대 대장은 부하들을 이리저리 둘러봤 다. 그냥 어리둥절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전음으로 지금 상황에 대해서 토 론하는 것이었다. 그가 말했다. “이 세계의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군. 일반적인 인간의 한계를 생각했 을 때 우리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법이라도 쓰지 않고서는 말이지. 넌 누구냐?” 권총을 허리 뒤의 홀스터에 집어넣은 지크는 킥킥 웃었다. “나? 액션영화를 너무 많이 본 사람이지.” 특무부대 대장은 그에 맞춰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이번엔 대장을 제외한 자객 전원이 지크에게 달려들었다. 가장 앞선 자객의 얼굴에 지크의 발차기가 꽂혔다. 그들이 공격할 틈도 주 지 않고 빠르게 접근하여 날린 공격이었다. 달리던 도중 머리를 얻어맞은 탓에 자객은 누운 채로 아스팔트 위를 미끄러 졌다. 관성이었다. 죽을 정도는 아니겠지만 잠시 동안은 어디가 하늘이고 땅인지 구분 못할 것이다. 나머지 셋이 한꺼번에 공격을 날렸다. 한 사람은 칼로, 한 사람은 무술로, 나머지 한 사람은 암기를 던져 지크를 다중으로 공격했다. 무명도를 빼들어 칼 공격을 막은 지크는 재빨리 자신의 칼을 상대방의 칼 위로 둔 뒤 그것을 받침대로 하여 뛰어올랐다. 동시에 면도날 같은 돌려차 기가 지크가 있던 자리를 갈랐다.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십여 개의 표창이 공중에 뜬 지크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말이 표창이었지 속도는 탄환에 가까웠다. 끝에 실린 무게는 훨씬 더했다.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날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지크의 가슴팍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 수는 정확히 수리검의 숫자와 일치했 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리진의 눈엔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보였 다. “저걸 다 튕겨 내다니, 뭐야 도대체?”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만 깜박였다. 얼마 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지금의 지크와 처음의 지크는 그 강력함에서 상 당한 차이를 보였다. 성격이나 말투, 지능지수는 별로 변한 게 없어보였지 만 전투능력 만큼은 하루가 다르게 상승했다. 최근엔 D+급의 BG가 다수 나 타나도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그녀를 포함한 BSP동료들은 몰랐지만 레드 원, 아니 리오 스나이퍼는 그의 성장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꺾기는커녕 상대할 때마다 번번이 그에게 패배했으나 그와의 싸움은 지크에 게 있어서 커다란 재산이 되었다. 그의 압도적인 강함을 조금이라도 따라가 고픈, 아니 어떡해서든 능가하고픈 그의 강렬한 소망은 육체적 능력마저도 주인 몰래 강화시켜주었다. 그 결과가 지금 나오고 있었다. 수리검을 모두 튕겨낸 지크는 조금 떨어진 곳에 착지한 뒤 앞으로 번개처럼 튀어나갔다. 칼을 들고 있던 자객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그가 검 끝을 앞세우고 들소처럼 돌격하자 지크는 몸을 옆으로 꺾어 공격을 피했다. 이어서 두 번째 자객이 바닥을 쓸 듯 아래쪽으로 다리를 휘둘렀다. 지크는 뒤로 공중재비를 돌아 두 번째 공격을 피했다. 사람 머리높이 이상 으로 떠오른 그를 향해 세 번째 자객의 공중 발차기가 날아들었다. 신발 끝 에 박힌 금속제 징은 정확히 머리의 급소를 노리고 있었다. “엿차.” 지크는 짧게 기합을 내며 상대의 정강이를 손으로 짚었다. 그는 담을 넘듯 상대의 다리를 짚고 다시 날아올랐다. 자객은 상대가 자신의 뒤쪽으로 떠오르자 급히 대응하려 했으나 그럴 틈은 없었다. 머리를 지면 쪽으로 한 채 상대의 뒤를 완전히 포착한 지크는 팽이 처럼 몸을 돌리며 발차기를 날렸다. 목표는 후두부, 숨골이었다. 급소를 정확히 강타당한 자객은 제어능력을 잃고 날아가다가 먼지로 변해 흩어졌다.즉사였다. 그때, 처음에 발차기를 맞고 쓰러져있던 자객이 어느새 일어나 지크를 노리 고 달려들었다. 그는 처음처럼 기세 좋게 칼을 휘둘렀지만 지크는 착지하기 무섭게 다시 한번 뛰어올라 공격을 피했다. 그냥 뛰어오른 게 아니라 도중에 상대의 머리를 잡았다. 그것을 철봉삼아 몸을 돌린 지크는 두 발로 상대의 등판을 밀쳤다. 배구공처럼 앞으로 튀어나간 자객은 건물 벽에 그대로 충돌했다. 정면 전체 로 대리석과 콘크리트의 조합을 받아버린 그는 충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비 틀대다 쓰러졌다. 지크는 양손을 허리에 대고는 감탄하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야, 몸 한번 어지간히 좋군. 보통사람 같으면 지금쯤 저승사자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 있었을 텐데 말이야. 안 그래?” 그는 나머지 두 명의 자객을 흘끔 돌아봤다. 동료들을 너무도 간단히 잃은 그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멍하니 서있었다. 지크의 시선은 특무부대 대장에게로 맞춰졌다. “당신 부하는 별로 영양가가 없군. 자아, 어떡하겠나? 이제 슬슬 당신차례 인 것 같은데?” 가만히 지크를 바라보던 대장은 눈을 시선을 가늘게 좁혔다. “그렇군.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주신의 꼭두각시가 바로 너였나? 보통 인 간 치고는 너무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만약 그렇다면 자연스레 설명이 되겠 군.” “잘도 맞추네? 5점을 주지.” 지크는 씩 웃었다. 대장은 주위상황을 살폈다. 자신의 목표인 용제는 너무 멀리 떨어져있고 생각지 못한 적은 예상 외로 민첩했다. 게다가 부하들은 싸울 의지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아무튼 불리했다. 상대의 힘은 자신과 비슷할 것 같았지만 만약 용제가 미 약한 힘이나마 보탠다면 임무의 성공 가능성은 그대로 0이 될 게 뻔했다. 그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 “주신의 사자여, 혹시 차원문을 열 줄 아나?”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배우려고 했는데, 내 형제들이 난 아직 그런 거 배울 필요 없다면서 안 가르쳐줬어. 그건 왜?” 상대의 엄청난 솔직함에 특무부대 대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적당한 때 다시 오겠다. 독안에 든 쥐가 너무 강하니 전력보강 을 할 필요가 있겠군. 그럼 긴장을 늦추지 마라, 주신의 사자여.” 수인을 맺은 그의 모습이 안개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지크가 움찔하는 사이 나머지 두 명도 기절한 동료를 데리고 자취를 감췄다. “이런, 젠장.” 적들을 눈앞에서 모두 놓쳐버린 지크는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 가 눈앞에 보이는 새 친구를 향해 손짓했다. “어이, 다친 데 없어?” 지크를 잠시 바라보던 바이칼은 곧 그를 향해 달려왔다. 울상이 된 얼굴을 보니 금방이라도 뛰어 안길 것만 같았다. ‘하긴, 무서웠겠지. 이럴 때는 남자의 가슴으로 위로를…….’ 그는 넉넉히 팔을 벌려주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 다. “이 바보 녀석!” 소리를 지르며 달려든 바이칼은 유도를 하듯 지크의 옷자락을 잡고는 사납 게 뒤흔들기 시작했다. “네가 무슨 주신의 사자야! 차원문을 열지 못한다고 솔직히 말하면 어떡해 ! 이제 곧 녀석들의 지원부대가 이쪽으로 들이닥칠 거란 말이다!” 어찌나 세게 흔들었는지 지크의 분노지수도 올라갔다. “이런, 그럼 네가 열면 되잖아! 용제라며! 드래고니스인지 테니스인지 하 는 것도 차원간의 틈에서 널 기다린다고 말했으면서 거길 못가?” “이 몸은 전지전능하지 않아!” “전지전능하고는 상관없는 얘기잖아! 네가 익히지 않은 거지!” “이 몸은 용제다! 그런 걸 익힐 필요는 없어!” “그렇게 따지자면 나도 익힐 필요가 없어! 난 이 동네를 떠날 일이 아직 없단 말이야!” “아무튼 네가 날 책임져라!” “뭐? 웃기지 마! 난 오늘 동생 하나를 입양한 사람이야! 허리 휜다고!” “하나를 입양하든 둘을 입양하든 이 몸은 모른다! 이 몸에 맞는 숙소와 식 사, 그리고 신변보호를 제공해라!” “닥쳐! 우리 집이 무슨 탁아소인줄 알아!” “너야말로 닥쳐라!” 그렇게, 둘은 서로의 멱살을 잡은 채 오랫동안 낑낑댔다. 상황종료 보고를 마치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 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싸울 때도 저 꼴이란 말이지? 아아, 피곤해.” 그녀의 한숨 뒤로 BSP와 경찰의 사이렌 소리가 혼합되어 길게 들려왔다. ※※※ “뭐하는 놈들인지 모른다고?” 처크의 목소리 톤은 매우 높았다.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 쫓아갔죠. 맞으면 먼지로 변해서 부서지고 그러는 신기한 놈들이라 어쩔 수가 없었어요.” “음…….” 처크는 선글라스를 벗고 인상을 찡그렸다. 방금 전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시민 세 명과 경찰 두 명이 미확인 무기 또 는 능력에 의해 현장에서 즉사했다. 게다가 범인은 잡히지도 않았다. 출동 한 대원들이 데리고 온 것은 지크가 구출했다고 하는 블루블랙 머리의 소년 이었다. 현재 그 소년, 바이칼은 브리핑 룸 밖에 앉아서 회의가 끝나길 기 다리고 있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임시 브리핑은 사건에 대한 조사와 소년의 처리문제를 위한 것이다. 처크는 시거를 물며 말했다. “그들이 노리는 건 브리핑 룸 밖에 있는 애라 이거지?” “그렇죠.” “그럼 저 소년인지 소녀인지 분간하기 힘든 애는 도대체 누구야?” “역시 모르죠.” “아까 밖에서 싸우는 꼴을 보니 너랑 잘 아는 사이 같던데?” “제가 사람을 좀 빨리 사귀잖아요.” 요점을 회피하려는 듯한 지크의 대답이 연속되자 처크는 실소와 함께 연기 를 뿜었다. “미치겠군.” 경고가 담긴 그의 중얼거림에도 불구하고 지크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 었다.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바이칼에 대해 솔직히 말했다가는 정말 곤란해 지기 때문이었다. 인상을 쓴 채 지크의 상태를 관찰하던 처크는 결심을 한 듯 다른 대원들을 바라봤다. “모두 자리를 비켜주겠나? 지크 스나이퍼 소위가 아무래도 낯을 가리는 모 양이군.” 지크와 단 둘이 얘기를 하겠다는 정중한 표현이었다. 결국 그렌을 필두로 하여 류페이까지, 지크와 처크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브리핑 룸을 나섰다. 처크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레드 원, 블루 원과 관련이 있는 일이냐?” “그렇죠.” 지크는 그제야 터놓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가 말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애가 리오를 만나기 위해서 절 찾아온 것은 확실해요. 그리고 저 애를 보호할 수 있는 건 저 밖에 없어요.” “왜?” “저 애를 본부에 놔뒀다가는 본부가 쑥대밭이 될 수도 있어요. 나름대로 세력을 갖춘 녀석들이 저 애를 노리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도 너희 집보다는 낫지 않을까?” “차라리 저희 집이 났죠. 소식을 들으면 리오 녀석도 올 테니까요.” 그 말에 처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오, 그렇다면 믿을만하군.” 지크는 할 말을 잃고 씁쓸히 웃기만 했다. 시거를 태우며 잠시 동안 생각하던 처크는 곧 마음을 정했다. “좋아, 그렇다면 저 소년은 너에게 맡기마. 그런데, 소년이 맞나, 아니면 소녀가 맞나?” “네?” 그에 대해선 지크도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역시 혼동되는 부분이었 다. 처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 이상하거든? 얼굴 생김새도 그렇고, 체형도 그렇고… 겉으로 보기엔 1 0대 초반의 여자아이 같은데 분위기는 또 아니야. 성질 사나운 남자아이 같 단 말이야? 요즘 애들이 아무리 예쁘장하다지만 저 정도는 아닌데…….” “음, 그럼 제가 집에 가서 확인을 해보도록 하죠.” 그러자 처크는 진지한 얼굴로 조카손자를 바라봤다. “덮치진 마. 자연스럽게 해.” “물론이죠.” 둘은 서로에게 엄지를 펼쳐 보이며 무언의 다짐을 했다. 그런 무서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모르는 바이칼은 지크가 나오기 전까 지 침묵 속에 있었다. 지나가는 BSP직원들과 브리핑 룸에서 쏟아져 나온 전 투요원 모두 그에게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움직인 것은 지크가 나온 직후였다. 지크는 자리에서 일어난 바이칼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 우리 집으로 가자. 일찍 퇴근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어. 가서 저녁 이나 먹자고.” 바이칼은 지크의 동료들을 흘끔 둘러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안내해라.” 소년의 말투에 모두가 의아해했다. 지크는 그냥 넘어가자는 제스처를 보인 뒤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내일 보자고요, 모두.” “음, 조심해서 가라.” 모두를 대표해서 손을 흔들어준 그렌은 슬쩍 웃었다. “아무튼 저 녀석의 주위엔 신기한 사람들만 모인다니까.” 그러자 리진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우리도 포함된 건가요?” “어느 누구도 평범하진 않잖아.” 대신 대답한 케빈은 킥킥대며 웃었다. 새 친구와 함께 지하주차장으로 간 지크는 창고에서 얻어온 헬멧을 바이칼 에게 건네주었다. 두꺼운 풀 커버 헬멧이었다. “이거 써.” 그 검고 커다란 보호 장비를 본 바이칼은 눈썹을 구겼다. “뭐지, 이건?” “뭐긴 뭐야, 헬멧이지. 헤어스타일은 좀 구겨지겠지만 만약의 사고에 대비 한 거니까 꼭 써.” “만약의 사고?” “응, 혹시라도 오토바이에서 미끄러지면 뒤통수가 아작 나거든. 두개골이 깨지고 내용물이 흘러나오지. 머리색이 블루블랙인 애들이 특히 더 그래.” “…….” 그 농담을 들은 바이칼은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본 지크는 농담이 라고 말하려 했지만 바이칼 쪽이 더 빨랐다. “정말?” “응? 그, 그럼. 아주 위험하지.” 뭔가 새로운 경험을 해버린 지크는 주차장 저편으로 친구를 안내했다. “자아, 이게 내 애마(愛馬)야. 어때, 멋지지?” 지크는 자신의 검은색의 멋들어진 오토바이를 가리키며 씩 웃었다. 그러나 헬멧을 품에 꼭 안고 있는 바이칼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흥, 그런 거짓말이 나에게 통할 것 같나.” “뭐? 무슨 소리야?” “이게 어딜 봐서 말(馬)인가?” “…….” 순간 정신이 아뜩했던 지크는 인내심을 발휘해 바이칼의 헬멧을 빼앗아 그 에게 씌웠다. “알았으니 어서 타.” “흥, 버릇없는 녀석.” 먼저 오토바이에 올라탄 지크는 키를 꽂고 시동을 걸었다. 이어서 바이칼이 그의 뒷자리에 앉았다. “자, 가자.” 그러나 지크는 무엇이 문제인지 한숨을 쉬며 오토바이 계기판에 이마를 갖 다 댔다. 바이칼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출발하지 않고 뭘 하나?” “그쪽이 아니야.” 지크는 오토바이 뒤쪽을 보고 있는 친구를 일으켜 제대로 앉혀주었다. 집으로 가는 동안 지크는 감각을 최대한 예민하게 하여 따라오는 자가 없는 지 살폈다. 자신과 바이칼이 이 세계 어느 곳으로도 도망칠 수 없다는 게 밝혀진 이상 언제든지 공격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가 현관문을 열 때까지 그 어디에서도 불순한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다행이었지만 그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어차피 일어 나야 할 일이 뒤로 미뤄진 것뿐이었다. “다녀왔어요.” 지크는 힘없이 인사했다. 레니는 그 소리를 듣고 루이체와 함께 부엌에서 나왔다. “지크 왔니?” “예. 별 일 없었죠? 루이체도 잘 있었지?” “…….” 허나 레니와 루이체 모두 대답이 없었다. 움찔한 지크는 다시금 신경을 곤 두세우고 주위를 살폈다. ‘어라? 아무 것도 없는데?’ 그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둘 다 왜 그래요?” 레니는 백일몽에서 깬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 미안.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런데, 뒤에 같이 들어온 사람은 누구니? ” “예? 아, 소개가 늦었네요. 오늘부터 신세를 지게 될 바이칼…….” 지크의 환한 얼굴은 뒤에 서있는 친구를 보자마자 흙빛이 되었다. 그의 친 구는 여전히 헬멧을 쓰고 있었다. 바이칼은 헬멧의 창을 통해 지크를 째려봤다. “문제라도 있나?” 그 순간, 지크의 인내심은 한계를 돌파했다. 그는 식충식물처럼 손을 뻗어 바이칼이 쓴 헬멧을 감싸 쥐었다. “이런, 젠장! 벗어, 벗으란 말이야!” “이, 이게 무슨 짓인가!” “무슨 짓이긴 무슨 짓이야! 내가 제일 싫어하는 놈이 누군지 알아? 남의 집 거실까지 헬멧을 쓰고 들어오는 멍청이야! 네가 무슨 오토바이 택배 아 저씨인줄 알아? 어서 벗어!” “닥쳐라! 헬멧의 끈은 풀고 벗겨야 할 것 아닌가!” “에잇, 몰라! 암튼 벗어!” 레니와 루이체는 부둥켜 싸우는 둘을 묵묵히 지켜봤다. 레니에겐 가끔 보는 일이라 익숙했지만 루이체에겐 그렇지 않았다. ‘역시, 위험한 사람이었어.’ 잠시 후, 레니는 루이체와 함께 아이의 옷을 살 겸 바이칼의 옷도 사기 위 해 밖으로 나갔다. 바이칼의 요청도 있었지만 거리에서 있었던 추격전 탓에 그의 하얀 옷은 꽤나 더럽혀져 있었다. 바이칼이 지크가 가르쳐준 대로 샤워를 하는 동안 지크 본인은 TV를 켠 채 생각에 잠겼다. 루이체의 일은 그렇다 쳐도 새로운 친구의 일은 상당히 심 각한 문제였다. ‘그 녀석들, 분명히 다시 올 거란 말이야? 만약 떼로 몰려오면 나도 힘들 지 모르는데?’ 서룡족과 동룡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잘 모르는 그로선 불안한 게 당연했다. 그들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미지수고 어떤 존재인지도 파악 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는 것은 서룡족은 눈동자가 파랗게 동룡족은 붉다는 차이 뿐이었다. “슈렌이라도 오면 좋을 텐데…….” 그는 막연한 기대감에 혼잣말을 흘렸다. 왠지 힘든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뭘 그렇게 넋 놓고 있나?” 샤워를 마치고 나온 바이칼의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아, 그냥.” 지크는 힘없이 웃으며 그를 돌아봤다. 머리에 수건을 덮은 바이칼은 지크가 준 하얀 면T와 검은색 핫팬츠를 임시 로 입고 있었다. 지크에 비해서 너무 작은 몸이었기에 T는 어깨에 반 쯤 걸 쳤고 허리를 조일 대로 조인 핫팬츠는 치마에 가까웠다. 신체 사이즈를 봐 서는 레니의 것을 주는 게 옳았지만 여자의 옷은 죽어도 입기 싫다는 본인 의 요청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모습을 다시 넋을 잃고 바라본 지크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자앤지 남자앤지 구분이 안가네, 진짜.” “…….” 바이칼은 기분이 나쁜 듯 뚱한 표정을 지었다. 지크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 는지 손을 저었다. “아, 나쁘게 생각하지 마. 하지만 신체사이즈부터가 그렇잖아. 키가 150센 티미터 조금 넘는데 허리가 20인치 안되면 이건 문제가 있는 거라고. 더욱 문제인 것은 그러면서도 몸이 적당해 보인다는 사실이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바이칼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게 변했다. 움찔한 지크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 그냥 그렇다는 거지, 뭐.” “흥, 여자애처럼 보인다 이 말이겠군. 그런 건 이해해줄 수 있으니 안심해 라. 죽이진 않지.” “뭐?” 소파에 앉은 바이칼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얘기를 계속했다. “너, 내 나이가 몇으로 보이나?” “그, 글쎄? 열… 셋? 열넷?” “인간의 시간으로 치자면 400살이 조금 넘었지.” “…….” 지크는 입을 딱 벌렸다. 바이칼은 품위 없다는 듯 짧게 한숨을 지었다. “잊었나? 난 서룡족이다. 너희들 인간이 소위 드래곤이라 부르는 종족이라 이거다. 그래서 인간의 나이로 환산하자면 열 넷 정도 되지.” “오? 오오, 그렇군! 그래도 열 넷이면…….” “작은 거다. 내 몸은 일반 서룡족 청소년들의 평균 신체사이즈에 비해서 작다. 그리고 체형도 이상하고 몸의 구조도 특이하지. 만져보면 알 거다.” 바이칼은 지크에게 불쑥 팔을 뻗었다. 지크는 자신감 없는 미소를 짓고는 조심스레 친구의 팔을 매만졌다. “으으으윽.” 그의 비명만큼이나 이상한 감촉이 지크의 손끝을 타고 팔 전체로 흘렀다. 남자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아니 여성의 것보다도 훨씬 부 드럽고 탄력 있는 피부였다. 즉시 손을 뗀 지크는 대놓고 소리쳤다. “넌 여자야!”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고 했지 않나. 간추려서 설명해주지.” 그가 말했다. “일반적인 서룡족은 5세 무렵에 자신의 성별을 결정한다. 부모가 결정할 때도 있고 스스로 결정할 때도 있지. 그 후 간단한 의식을 거쳐 완전한 남 성, 그리고 여성이 된다.” “오오, 근데 넌 왜 아직 이래?” “이것은 아바마마와 어머니께서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다섯 살 무렵, 이 몸은 자신의 성별을 남자로 택하여 의식을 거행했지만 실패했다. 이유를 알고 보니 용제의 피는 신의 힘과 결합하게 되면 수명을 일반적인 용제보다 배가 넘도록 늘려주는 대신 성장을 더디게 만든다. 그래서 이 나이에도 불 구하고 이런 허약한 몸을 가지게 된 것이다. 추가로 성별결정 역시 늦어져 서 아직까지도 너 같은 놈들에게 오해를 사는 것이다.” “그렇군. 서글프겠는데?” “흥, 그런 값싼 감정 따위는 없다. 몸이 어찌됐든 내가 용제라는 것은 변 하지 않으니까.” “음… 아, 그런데 아버지는 아바마마라고 부르면서 어머니는 왜 그냥 어머 니야? 어마마마 아닌가?” “이 몸의 모친은 신의 위치에 계신다. 생명체인 서룡족에 속하실 이유가 없는 분이기 때문에 굳이 어마마마라는 호칭을 쓸 필요는 없지.” “으음.” 지크는 이해한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오늘 널 습격한 놈들은 누구야? 동룡족이라고 말은 하는데 난 처음 듣거 든?” 그의 질문에 바이칼은 짜증을 내듯 인상을 구겼다. “너, 정말 주신의 사자인가?” “너무 그러지 마. 난 리오랑 슈렌하고는 다르다니까. 아직은 견습에 불과 해.” “흠… 그럼 말해주지. 그 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조건?” 지크는 어려운 얘기도 아닐 것 같은데 무슨 조건이냐는 표정으로 친구를 바 라봤다. 그때, 타이밍 좋게 바이칼이 입은 면T 아래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바이칼 의 얼굴은 벌겋게 됐고 지크는 특유의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TV나 보고 있어. 마침 나도 배가 고프니 어머니 오시기 전에 간단하게 먹 자고. 고기류를 좋아해, 야채류를 좋아해?” “드래곤은 육식동물이다.” “오케이.” 부엌에 들어간 지크는 대형 핫도그용의 커다란 소시지를 두 개 꺼내 전자레 인지에 데웠다. 그것을 막대에 꽂아 우유와 함께 건네주자 바이칼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배가 많이 고팠었는지 그는 소시지와 우유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그가 다 먹을 동안 반도 먹지 못한 지크는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바이칼이 다시 얘기를 시작한 건 휴지로 입가의 기름기를 말끔히 닦은 후였 다. “얼마 전, 서룡족과 주신은 조약을 하나 맺었다. 그 조약에 따라 의해 나 를 포함한 모든 서룡족은 모든 차원계의 인간을 함부로 살해하지 않기로 했 지. 대신 주신은 서룡족과 동룡족 사이에 무력충돌이 있을 경우 자신의 전 사들을 지원해주기로 했다. 동룡족으로선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만약 휀 라디언트 같은 자들이 우리를 지원해준다면 전세는 단숨에 역전되니까. ” 아침에도 들은 이름이 다시 나오자 그에 대한 지크의 궁금증이 다시 살아났 다. “휀? 그놈이 그렇게 강해?” “자존심 상할 정도로 강하지.” “나보다 더?” 바이칼은 대답 없이 침묵한 채로 시간을 보냈다. 지크는 불길한 느낌 속에 그가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말하기 전에 묻지. 넌 신을 사냥해본 적이 있나?” “사냥? 만나보지도 못했는데?” “그럼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다.” 바이칼은 남은 우유를 훌쩍 마셨다. 극렬한 수준차이. 바이칼의 말 속에 녹아있는 그 뜻을 알아챈 지크는 허탈 한 듯 웃기만 했다. “아, 참. 너랑 같이 왔던 사람들 말인데…….” 지크가 그 말을 꺼내자 바이칼의 얼굴에 잠깐 먹구름이 끼었다. 재빨리 정 색을 한 그는 당당한 어투로 말했다. “그들은 이 몸을 지키기 위해 장렬히 산화했다.” “그래? 음…….” 무슨 말을 하려 했을까. 지크는 소리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 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똑똑히 목격한 덕분에 입이 조심스러워진 것이다. 지크는 TV에 시선을 돌렸다. 특별히 볼 게 마땅치 않았던 바이칼 역시 마찬 가지였다. TV에선 요즘 한창 인기인 코미디프로가 진행 중이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 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웃을 내용이었으나 지크와 바이칼의 표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둘 다 눈만 그곳에 가있을 뿐이었다. 한쪽은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다른 한쪽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친구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바이칼이었다. “넌 상처 입은 자들에게 위로가 가장 큰 배려가 될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 러나 가끔은 상처 입은 자 스스로 상처를 꿰맬 수 있게끔 가만히 놔두는 것 도 좋아. 그것도 배려의 일종이다. 그러니 이 몸을 내버려 둬라.” “음, 알았어.” 지크는 한 방 먹었다는 듯 힘없이 웃었다. ‘말로만 제왕이 아니었구나, 이 녀석.’ 그는 왠지 대단한 친구가 생겼다는 느낌에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 바이칼과 루이체의 옷을 사기 위해 대형 할인매장으로 간 레니는 스타 아닌 스타가 되어 있었다. 이유는 그녀의 출중한 외모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 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루이체 때문이었다. 쇼핑을 나온 부부들을 시작으로 미혼남녀, 노인, 심지어는 또래의 아이들까 지 자신들 옆을 지나가는 루이체의 천사 같은 모습에 입을 딱 벌렸다. 어떤 중년신사는 루이체의 머리색과 옷에 딱 어울리는 베이지색의 민무늬 빵모자 를 자비로 사서 선물로 주기까지 했다. 그런 것이 부담스러웠던 레니는 평소에 느끼지 못한 엄청난 피로로 인해 땀 까지 흘렸으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는 게 처음이었던 루이체 는 그저 신기한 듯 자신을 보고 인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답례를 잊지 않았 다. 그렇게 정신없는 상황이 계속 이어져서일까. 레니는 자신의 뒤쪽으로 괴한 이 스쳐 지나갔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소매치기였다. 레니의 지갑을 손에 넣은 펑크머리의 청년은 휘파람을 불며 화장실로 들어 갔다. 바이칼의 옷을 사느라 지크의 지불카드를 손에 들고 있었던 레니는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모른 채 옷값을 지불하고 아동복 매장으로 갔 다. 루이체가 들고 온 옷도 나쁘진 않았지만 사실 동네나 학교를 오고 가며 입 기엔 너무도 고급스러웠다. 다른 사람들 눈을 의식해서라도 평상복 몇 벌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다는 그녀의 생각이었다. 루이체도 새엄마의 생각에 반대하지 않았다. 레니와 루이체가 옷을 고르는 동안 그녀의 지갑을 훔친 청년은 화장실에서 지갑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가죽장갑을 잘라 만든 어설픈 펑크글러브를 나름대로 멋스럽게 낀 그 청년 은 지갑에 있는 신용카드 한 장과 현금카드 한 장, 사진 몇 장을 차례로 꺼 내 변기 속에 떨어트렸다. 이어서 신분증이 그의 거친 손에 들려나왔다. “호오, 지금 보니 꽤 미인이네?” 청년은 감탄하듯 보통사람에 비해 앞으로 튀어나온 자신의 입술을 더욱 앞 으로 내밀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레니의 사진에 진한 키스를 했다. “서른셋이라… 나이가 생각보다 많지만 못 봐줄 정도는 아니지. 지갑을 주 웠다면서 접근해볼까?” 그는 코 밑을 손등으로 부비며 웃었다. 손의 움직임에 맞춰 코의 피어싱이 반짝였다. “일단 챙길 건 챙기고 봐야지.” 청년은 닭 벼슬을 연상케 하는 녹색의 펑크머리를 흔들며 지갑 안에 든 현 금을 모조리 빼 주머니에 넣었다. “자, 슬슬 나의 이브(Eve)를 찾아보실까?” 문을 열고 나온 청년은 순간 움찔하며 멈췄다. 낯선 남자가 화장실 세면대 옆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큰 키의 남자였다. 입고 있는 흰색 드레스셔츠는 소매 단추까지 모자라 위에서 두 번째 단추까 지 풀었다. 옷깃 사이로 보이는 흉근의 계곡은 도구로 파서 사포로 매끈하 게 다듬은 조각상의 그것보다도 단단해 보였다. 밑에 입은 검은 색의 정장바지는 모델만큼이나 늘씬한 그의 육체를 더욱 날 카롭게 다듬어 주었다. 불꽃처럼 흩날리는 정열의 금발 밑엔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이 눈을 감고 있 었다. 그 언밸런스함에서 풍기는 카리스마는 소매치기 청년의 가련한 영혼을 얼어 붙게 만들 만큼 강렬했다. “다, 당신 뭐야? 누군데 이곳에서 폼을 잡고 있는 거야?” 청년은 궁지에서 벗어나려는 쥐처럼 제법 큰 소리로 외쳤다. 천천히 눈을 뜬 남자는 바지주머니 속에 있던 오른손을 청년 쪽으로 뻗었 다. “정리해서 내놓도록.” “뭐?” 청년은 가슴이 뜨끔했다. 호주머니 안에 있는 지갑이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 다. 기분 상 그런 것이지만 경찰에게 들켰을 때보다 더한 압박감이 밀려왔 다. “뭘 말이야? 난 아무 짓도 안했어? 당신이야말로 금연구역에서 담배를 피 우고 있잖아! 경비원을 데려오겠어!” “좋을 대로.” “…….” 뭔가 상대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청년은 다급한 나머지 뒷주머니에 숨겨둔 잭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어디서 시비야! 너도 이 지갑을 노린 거야? 아니면 그 여자 남편이야? 젠 장, 너 오늘 잘못 걸린 거야! 난 이 칼로 사람을 찌른 적이 있어! 그 때문 에 교도소에서 살아본 적도 있다고! 난 사람 한 둘 찌르는 건 문제도 아니 야!” 그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내민 손 역시 마 찬가지였다. 그가 말했다. “고해성사가 끝났으면 변기 속에 넣은 것을 빼라.” “이 자식이!” 무시당했다는 것에 발끈한 청년은 이성을 잃고 나이프를 휘둘렀다. 하지만 남자가 물고 있는 담배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청년의 손에 잡혀있던 나이프는 어느새 남자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붙들려 좌우로 흔들렸다. 남자가 벽에서 등을 떼고 청년에게 다가왔다. 나이프가 반사하는 빛에 이성 을 되찾은 청년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쳤다. “찌, 찌르지 마!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 남자는 칼을 쓰레기통에 던지고는 다시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싸구려 나이프가 아니라 지갑과 네 값싼 목숨이다. 더 자 세한 설명이 필요한가?” “으, 으아아!” 청년은 미친 듯이 소리치며 양변기 물속에 손을 넣었다. 자신이 던졌던 카 드와 사진들을 뺀 그는 휴지와 옷으로 그것들을 깨끗이 닦았다. 처절할 정 도의 모습이었다. 평소엔 애인과의 약속도 잊어버리는 그였지만 지금은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 을 발휘해 그것을 원위치로 돌려놨다. 추가로 신분증과 지폐까지 곱게 집어 넣었다. 화장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청년은 지갑을 양손에 잡고 남자에게 바쳤다. 손끝은 떨렸고 몸은 땀투성이가 되었다. 얼굴은 더 이상 창백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여, 여기 있어요! 신분증이랑 카드 모두 깨끗이 닦았어요! 그러니 제발 살려주세요! 이제부터 똑바로 살게요! 다시는 소매치기 같은 거 안 할 테니 목숨만은 봐주세요! 어머니랑 동생들이 집에 있단 말이에요!” 남자는 묵묵히 지갑을 받았다. 이어서 담배를 입술에서 떼었다. “내가 알 바 아니지.” “아, 안돼요! 제발! 구두에 키스라도 할 테니 제발!” 청년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면도를 하여 맨들맨들한 청년의 두피에 담배 끝이 닿았다. 남자는 재떨이에 하듯이 담배를 두피 위에 천천히 비볐다. 단백질 타는 냄새가 풍겼다. 그 역겨운 냄새는 엄청난 열과 함께 청년을 괴 롭혔다. 그러나 청년은 입술을 떼지 않았다. 떼면 그대로 죽을 것만 같았 다. 잔인하게 담배를 끈 남자는 별 일 없었다는 듯 돌아서서 화장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청년은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다. 치욕 때문이라기보다는 죽지 않았다는 기쁨에서 나오는 눈물이었다. 한편, 레니는 루이체에게 옷을 입혀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진에 나온 아동복 모델보다도 옷이 잘 어울렸다. 무슨 옷을 입어도 괜찮 았기에 이것저것 입혀보는 재미가 있었다. 아동복 매장 직원들까지 나서서 그녀를 진심으로 도와줄 정도였다. 그렇게 고르는 도중, 한 매장 직원이 레니에게 물었다. “아이가 정말 예쁘고 귀엽네요. 따님이신가요?” “네? 아, 네.” 레니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진실을 알 리가 없는 직원은 루이체가 옷 입는 것을 도와주며 말했다. “아이가 어쩜 이렇게 조용하고 착할까요? 요즘 애들은 여기저기서 난리를 치고 말썽을 부리는 게 보통이라서 매일같이 정신이 없거든요.” “네.” 사실 지크는 옷을 사러 어디에 나가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어렸을 때는 특히 더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을 스스로 골랐으면 골랐지 레니와 함께 가는 것은 결사적으로 피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였을까. 레니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루이체의 옷까지 모두 산 레니는 지크의 카드와 영수증을 넣기 위해 지갑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을 보낸다 해도 아무도 모르게 소매치기 당한 지갑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아, 이럴 수가.” 결국 찾기를 포기한 레니는 긴 한숨을 쉬었다. 생전 처음으로 소매치기를 당한 그녀는 앞이 깜깜했다. 크레디트 카드와 현 금지불카드, 신분증뿐만 아니라 대학시절 찍은 귀중한 사진까지 지갑에 있 었기에 그녀는 정말 울고만 싶었다. “왜 그러세요?” 옷이 든 쇼핑백을 가슴에 안은 루이체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레니는 허탈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자, 집으로 돌아가자.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니?” “아뇨, 괜찮아요.” 루이체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한 듯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 었다. 일찌감치 포기하고 집으로 가려는 그녀에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 진 것은 그때였다. 입구 쪽으로 돌아서자마자 그토록 찾던 지갑이 보였다. 게다가 그 지갑은 처음 보는 남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아!”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지른 그녀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덕분에 쇼핑을 하던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그쪽으로 쏠렸다. 지갑을 든 금발의 남자는 손에 든 물건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걸 찾으십니까.” “아, 네. 그렇습니다만…….” 레니는 지갑을 받으면서 남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상당히 차가운, 그러면서도 카리스마가 넘치는 얼굴의 소유자였다. 불꽃처럼 흩날리는 화려한 금발과 지크만큼이나 큰 키, 그리고 잘 단련된 듯 하면서도 시원스러운 몸매는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지금까지 그 어떤 남 자를 봐도 동요하지 않던 레니의 가슴마저 두근거리게 만들 정도였다. 반면 루이체는 경악했다. 그녀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휀 라디언트님이잖아! 아침에 떠나셨던 분께서 왜 또 오신 거지?’ 그녀의 속말대로 지금 레니에게 지갑을 주는 남자는 새벽에 루이체를 지크 의 집 앞에 놓고 떠난 남자, 휀 라디언트였다. 어찌됐건 지갑을 건네준 휀은 잠시 동안 레니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무의식적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한 레니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현재를 보는 게 아니라 과거를 보는 듯 했다. 눈앞에 있는 레니 자신 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되짚고 있는 것만 같았다. 레니는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지, 지갑은 어디서 찾으셨나요?” “루이체가 이곳에 들어오는 걸 우연히 보고 따라 들어왔다가 발견했습니 다.” “네? 루이체를 아세요?” “친구의 딸입니다.” 그 말에 레니의 머릿속에서 사진 한 장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 침에 루이체의 가방 속에서 발견한 사진 속의 그 남자였다. “아, 그러셨군요! 어디선가 뵈었다 했는데… 제가 당황한 나머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해요.” “아닙니다.” “아아, 아무튼 지갑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를 대접해드려도 될까요? ” 남자, 휀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루이체가 잘 있는 것을 봤으니 충분합니다. 앞으로도 루이체 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음… 알겠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뵙겠습니다.” 레니의 인사에 휀은 살짝 목례로 답했다. 그는 가기 전에 허리를 굽혀 루이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레니는 그 가 무뚝뚝하지만 상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실상은 아니었다. 휀은 손을 통해서 루이체의 의식에 직접 말을 하고 있었다. ‘실수한 건 없나.’ ‘아니요, 아직은…….’ ‘그럼 계속 수고해라.’ 휀은 손을 떼었다. 그러나 루이체가 재빨리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의식간의 대화는 그렇게 재개되었다. ‘저어, 휀님. 정말로 우리 아빠랑 친구사이셨나요?’ ‘…….’ 휀은 대답 없이 손을 놓고 사람들 틈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동안 바라보던 레니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지갑을 들춰봤다. 돈과 카드, 신분증, 사진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하아, 오늘은 정말 일이 많은 날이구나.” 그녀에게 오늘만큼 하루가 긴 날은 없었다. 뜬금없이 아이 하나를 입양한 것은 물론 지크의 또 다른 친구를 만났고, 그것도 모자라 지갑까지 잊어버 릴 뻔 했다. 오늘 같은 날이 계속 이어진다면 보통사람인 그녀는 탈진하여 쓰러질지도 모른다. ‘설마, 더 심한 일이 생기진 않겠지.’ 문득 옆에서 시원하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아이스크림 가게였다. 개인적으 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그녀는 잠시 쉬자 생각하며 루이체를 데리 고 그곳으로 갔다. “아이스크림 좋아하니?” “네? 그, 그럼요.” 대답은 했지만 루이체는 아이스크림이라는 음식이 뭔지 전혀 모르고 있었 다. 아이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새엄마와 함께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 쇼핑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온 레니와 루이체는 또다시 말싸움을 벌이고 있 는 지크와 그의 친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싸움의 이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먹으라는 걸 확실히 먹어야 할 거 아냐! 내가 거기서 레이저 나온다고 몇 번이나 말했어! 그거 못 먹으면 보스를 죽이기 힘들단 말이야!” “레이저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닌가! 좀 더 구체적 이고 확실한 설명을 이 몸에게 해라!” “젠장, 리오나 슈렌은 알아서 잘했다고!” “이 몸이 그 전투기계들이랑 똑같나!” 둘은 손에 든 조이패드를 사방으로 흔들며 격렬히 논쟁을 벌였다. 그들 앞 에 놓인 TV에선 최근에 나왔다고 하는 슈팅게임이 불꽃을 뿜고 있었다. 레니는 한숨을 쉬며 아들의 어깨를 쳤다. “다녀왔어.” “앗!” 모친과 동생이 들어온 것을 그제야 알아챈 지크는 움찔하며 그들 쪽으로 고 개를 돌렸다. 바이칼은 언제 게임을 했냐는 듯 패드를 놓고 근엄한 자세를 취했다. 지크는 게임기를 끄고 일어났다. “벌써 오셨어요?” “응, 특별한 일은 없었지?” 레니는 바이칼을 위해 사온 옷을 지크에게 건네주었다. 지크는 그것을 친구 에게 넘기며 말했다. “방금 전에 할머니께서 전화하셨어요.” “할머니? 리사 숙모(처크의 부인: 작가 주)님이?” “예. 원래는 할아버지 등살에 오늘 오시려고 했는데, 오늘 가는 건 루이체 에게 너무 갑작스런 일이 될 것 같다고 하시면서 다음에 오신다고 말씀하셨 어요.” “그렇구나. 그럼 언제 오신데?” “내일이요.” “…….” 레니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긴, 숙모님도 처크 삼촌만큼이나 성격이 급하 시지. 그럼 내가 다시 전화드릴 테니까 루이체 옷이나 좀 봐주겠니?” “네.” 레니는 전화를 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지크는 루이체가 들고 있는 쇼 핑백을 받아 옷을 하나씩 꺼냈다. “음, 이 나라는 옷이 참 잘 나오네. 고향에서 파는 건 값만 더럽게 비쌌 지, 품질은 영 그랬는데 말이야. 어? 이 모자는 뭐야?” 지크는 루이체가 쓰고 있는 베이지색 빵모자를 가리켰다. 루이체는 바닥에 내려다놓은 아이스크림 상자를 들며 대답했다. “어떤 인상 좋은 아저씨가 저한테 사주셨어요. 아, 이거 드실래요?” “뭔데?” “아이스크림이요. 정말 맛있어요.” 순간 바이칼의 뾰족한 귀가 쫑긋 움직였다. 그것을 미처 보지 못한 지크는 고개를 저어 사양했다. “아냐, 어렸을 때 너무 많이 먹어서 요즘은 잘 안 먹어. 아이스크림 좋아 하나봐?” 루이체는 빙긋 웃었다. “좋아하게 됐어요. 처음 먹어보거든요.” “오, 그렇군. 그럼 틈이 나는 대로 사줄게. 직장 동료 중에 아이스크림 귀 신이 있어서 이 도시에서 맛이 좋기로 유명한 집은 거의 다 아니까.” “정말이요?” “당연하지. 우리 귀여운 동생에게 그런 것쯤은 별 거 아니라구.” 지크는 양손으로 루이체의 볼을 비볐다. 좀 거칠지만 따뜻한 느낌이 좋은 듯 루이체는 미소를 지은 채 눈을 꼭 감았다. “질문을 해도 되나.” 그때, 바이칼이 둘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뭔데?” 지크는 퉁명스레 되물었다. 바이칼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왜 나에겐 아이스크림을 권하지 않는 건가.” “…….” 지크는 루이체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루이체는 지크와 바이칼을 번갈아 바라보며 긴장된 목소리를 냈다. “드, 드시겠어요?” “사양하진 않겠다. 뜯어라.” “네.” 결국 지크와 루이체, 그리고 바이칼은 한 자리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 다. 처음엔 사양했던 지크였지만 지금은 머리를 식힐 겸 조금씩 먹고 있었 다. 레니, 지크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루이체는 다음 목표를 바이칼로 잡았 다. “저어, 오빠는 어디서 오셨나요?” “너랑 무슨 상관이지?” 그가 퉁명스레 말하자 지크가 묵묵히 팔꿈치를 내밀어 그를 응징했다. 바이 칼의 얼굴이 괴롭힘을 당하는 동안 루이체는 미안한 표정으로 그것이 끝나 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소녀가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이 중립세계에선 흔히 뵐 수 없는 서룡족의 일족 같으셔 서요.” 바이칼은 움찔하며 루이체를 쳐다봤다. 그냥 보통 인간인 줄 알았던 꼬마가 서룡족을 운운했으니 당연했다. “너도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닌가?” “네. 전 사실 주신계의 천사예요. 얼마 전에 부모님께서 돌아가셔서 오늘 입양됐어요.” “입양?” 바이칼은 이마를 감싼 채 가만히 생각했다. “너, 혹시 얼마 전에 사고로 죽은 주신전의 고등 비서관, 로우난의 딸인가 ?” 루이체는 깜짝 놀랐다. “네? 아빠를 아세요?” “주신계와 서룡족 사이에 조약을 채결할 때 서룡족의 입장에서 조약서를 만든 남자다. 그 남자 덕분에 주신은 불평등 조약을 채결했다는 말은 면하 게 됐지. 그의 부인과 네가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진짜일 줄은 몰 랐군.” “네? 그럼 혹시, 오빠께서 서룡족의 제왕이신…….” “그렇다. 이 몸이 바로 용제, 바이칼이다.” 그러자 루이체는 기겁을 하며 바이칼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해요! 저같이 미천한 존재가 전하와 같은 고귀하신 존재를 오빠 라는 저급한 단어로 부르다니, 면목이 없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용서를 구하는 아이의 모습을 별 감흥 없이 바라보던 바이칼은 이윽고 손을 털었다. “흥, 꼬맹이 천사의 실례 정도는 용서해줘야 제왕이라고 할 수 있겠지.” “아, 감사합니다!” “그 대신 이 아이스크림은 전부 내거다.” “…….” 루이체는 울상을 지은 채 바이칼을 쳐다봤다. 먹을 것을 쟁취한 어린 제왕 은 기분 좋게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그런 폭정을 보고만 있을 지크는 아 니었다. “웃기는 짓은 그만하고 어서 먹기나 해. 루이체도 어서 먹어.” “예? 하지만…….” 루이체가 머뭇거리자 지크는 보란 듯이 바이칼의 정수리에 팔꿈치를 내고 문질렀다. “얘가 원래 농담을 잘 해. 그렇지? 농담이지?” “제왕은 농담을 하지 않아.” “에이, 그러지 말고.” 지크의 팔에 보이지 않는 힘이 들어갔다. 움찔한 바이칼은 괴로운 듯 얼굴 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노, 농담이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셋은 다시 사이좋게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통화를 마치고 거실로 나온 레니 는 좋아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행복한 듯 웃었다. 그러나 바이칼의 속마음은 달랐다. ‘이 녀석… 위험하군!’ 그는 지크를 위험인물 제1호로 등록하고 있었다. 자신을 이토록 험악하고 기품 없이 다룬 사람은 그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여기서 베어버리지 않으면 서룡족의 미래와 제왕의 기품은 없다!’ 그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동안 레니는 저녁식사 준비를 위해 부엌에서 앞치마를 둘렀다. “아이스크림 너무 많이 먹지 말아요, 모두. 저녁 먹어야죠.” “네에.” 대답하는 지크와 루이체 틈엔 바이칼도 끼어있었다.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였을까. 지크는 자신의 집이 길 건너에 서있는 괴한들 에게 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퇴근길을 재촉하던 사람들은 인도 한쪽을 점거한 채 서있는 괴한들의 모습 에 누구 할 것 없이 발걸음을 멈췄다. 하나같이 몸이 좋은 그들은 검은 삿갓과 두루마기를 연상케 하는 검은 웃옷 을 입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운데에 위치한 자는 특별히 황색 삿갓을 써서 자신을 드러냈다. 복장을 봐서 오후에 바이칼을 습격했던 바로 그 남자들이 분명했다.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자들은 자신들 옆에 멈춰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 었다. 어서 가라는 신호였다. 그들의 배려 덕분에 길을 통과한 사람들은 허 겁지겁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황색 삿갓의 남자는 입에 문 곰방대를 떼고 빙긋 웃었다. “정말 평화롭군. 물론 내가 너희들의 기(氣)를 중화시킨 덕분이겠지만 말 이야.” 삿갓 밑으로 남자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다른 자들과 달리 그는 두건으로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덕분에 턱까지 내 려오는 검은 구레나룻과 굵은 턱의 선이 어둠 속에 드러났다. 그는 바로 옆에 서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이보게, 대장. 그 주신의 꼭두각시… 지크 스나이퍼라는 자의 실력은 어 땠나?” 질문을 받은 남자는 오후에 지크가 만났던 특무부대의 대장이었다. 그는 눈 을 날카롭게 빛내며 대답했다. “당시의 상황만을 놓고 봤을 때는 소인 이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 은 능력까지 따진다 해도 자이몬님의 실력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하하, 그래야 자네가 나를 부른 이유가 성립되겠지.” 짧게 웃은 그는 곰방대를 털어 안에 있는 불씨를 떨어트렸다. “슬슬 시작해보지. 아무래도 저녁식사를 하려는 것 같으니 그 전에 끝내는 게 좋겠군. 조금이라도 힘을 더 빼놔야 하지 않겠나?” “예,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특무부대 대장은 왼손을 펴서 힘을 집중했다. 황색의 기가 올라오는가 싶더 니 그것은 이내 호박(琥珀)으로 만든 듯한 투명한 구슬로 변했다. 대장은 수인(手印)을 이리저리 맺으며 주문을 외웠다. 그에 맞춰 구슬 역시 신비한 빛을 발했다. 그러기를 2분여, 두건 사이로 보이는 대장의 눈가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주위의 자객들은 숨을 죽인 채 주문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주문이 끝났다. “헙!” 대장은 기합을 지르며 손으로 구슬을 밀쳤다. 도로 중앙을 향해 죽 밀려나 던 구슬은 순간 번쩍이며 사방으로 빛의 파장을 날렸다. TV를 보며 저녁식사를 기다리던 지크, 루이체, 그리고 바이칼은 갑자기 스 쳐지나간 서늘한 느낌에 서로를 쳐다봤다. “뭐야? 지금 뭐가 지나갔나?” “그, 그런 것 같아요.” 루이체의 말에 이어 스스로의 몸을 팔로 감싼 바이칼이 말했다. “불길한 기운이다. 익숙하긴 하지만 뭔지 잘 모르겠군. 설명하기가 힘들 다.” 그때 부엌에서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불안해하던 지크는 레니의 신 변에 무슨 일이 생겼음을 깨닫고는 총알처럼 소파를 박차고 달려갔다. “왜 그러세요!” “…….” 그릇을 떨어트린 레니는 가만히, 옷가게의 마네킹처럼 풀린 눈으로 천장 쪽 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크와 루이체가 몇 차례나 그녀를 불렀지만 소용없었 다. 그녀의 모습을 뒤늦게 본 바이칼은 뭔가 떠오른 듯 흠칫 놀라 중얼댔다. “정혼술(停魂術)! 동룡족의 정혼술인가!” “정혼술?” 지크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바이칼은 자신의 갸름한 턱에 검지 두 번째 마디를 대며 기억을 더듬었다. “정혼술은 동룡족이 사용하는 술법 중 꽤 고위에 속하는 술법이다. 시술자 가 정한 기준치에 정신방어력이 미치지 못하는 존재들은 술법발동과 동시에 혼이 멎어버리지.” “혼이 멎어? 그게 무슨 소리야!” 지크가 버럭 소리를 치자 루이체는 깜짝 놀라 어깨를 꿈틀했다. 반면 바이 칼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육체에 피가 흐르는 것처럼 영혼 역시 육체 안에서 일정한 흐름을 가진 다. 그 흐름을 통해서 비로소 육체와 하나가 되지. 그러나 흐름이 멈추면 육체의 교감이 끊어진다. 인간들이 흔히 뇌사라 부르는 상태와 비슷하게 되 는 거다.” “뇌사라고? 그럼 우리 엄마는 어찌되시는 거야!” “정혼술이 풀리면 그 즉시 문제는 없어진다. 하지만 저대로 오랫동안 방치 하면 영혼은 육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죽는 거지.” “…….” 지크는 기가 막힌 듯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바이칼은 얘기를 계속했다. “문제는 저 여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내가 느낀 것이 옳다면 이 근 방에서 서식하는 모든 인간과 각종 생명체들이 저 여자처럼 되어있을 것이 다. 나와 너희들은 인간보다 정신방어력이 높기 때문에 멀쩡할 수 있었지. ” “뭐라고? 이런 빌어먹을!” 분노한 지크는 부엌을 박차고 거실로 나왔다. “어디의 어떤 녀석들이야! 누군지는 몰라도 머리통을 박살내 도로에 뿌려 버리겠어!” “파동의 시작점은 바로 이 근처였다.” “아, 그래? 그거 잘 됐군!” 지크는 성큼성큼 집밖으로 나갔다. 숨을 씩씩 몰아쉬며 나온 그는 길 건너편에 모여 있는 자객집단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오후에 봤던 그자들이라는 것을 확인한 지크는 큰 소리로 외쳤다. “어이, 정혼술인가 뭔가를 사용한 사람이 너희들이냐? 어서 대답해!” “그렇다면 어쩔 건가?” 자객들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놀리는 듯한 그 말투에 지크의 분노는 더욱 치밀어 올랐다. “어쩌긴 뭘 어째! 목숨이 아까우면 당장 술법을 풀고 꺼져! 난 지금 장난 할 기분이 아니야!” “호오, 우리가 소중한 사람이라도 건드린 건가? 꽤나 화를 내는군, 주신의 사자.” “뭐라고?” 자객들 틈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황색 삿갓을 쓴 바로 그 남자였다. 다른 자객들과 복장도 달랐고 분위기도 틀렸다. 다른 자객들에게선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투기가 느껴졌으나 눈앞의 남자에게선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남자가 존재하는 공간만 구멍이 뻥 뚫린 듯 공허했다. 리오가 뿜어내는 가공할만한 살기와도, 슈렌이 흘리는 묵직한 투기와도 달 랐다. 원래 뿜어내야 할 살기를 자신의 몸 안으로 모조리 수습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조금 얼빠진 듯한 지크의 표정에 남자는 씩 웃었다. “하하, 나와 같은 존재는 처음 보는 모양이군. 어째서 살기나 투기가 느껴 지지 않는지 궁금한가?” “…….” 대답은 없었지만 지크의 씁쓸한 표정은 그의 속내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 었다. 남자는 왠지 끈끈해 보이는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자네는 상대방이 인상을 쓰고 있으면 기분이 어떤가? 나쁘겠지? 그것과 같네. 굳이 살기나 투기를 쏟아내서 적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 난 자네와 싸울 생각이 없네. 이렇게 인구밀도가 높은 장소에서 자네와 진짜로 싸웠다 가는 정혼술로 인해 죽는 사람보다 싸움에 휘말려 죽는 사람이 더 많지 않 겠나?” “뭐라고?” “싸우지 말고 해결하세. 자네는 용제를 우리에게 넘기게. 우리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네. 그러면 정혼술을 풀지. 얼마나 간단하고 깔끔한 방식인가? ” “같잖은 소리 집어 치워!” 지크는 늑대가 분노하여 울부짖듯 험악하게 소리쳤다. “너희들이 먼저 정혼술인지 뭔지로 시비를 걸었잖아! 너희들 동네에선 협 박이 간단하고 깔끔한 방식이냐? 뭐하는 녀석인지 몰라도 어서 덤벼! 그쪽 방식이 그렇다면 난 내 방식대로 해주마!” 상대방의 분위기를 본 남자는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흠, 말이 통하지 않는군. 그렇다면 이렇게 하지.” 남자는 두루마기 앞자락을 풀고 뭔가를 불쑥 드러냈다. 칼자루였다. 자루 전체의 디자인은 지크의 무명도와 비슷했지만 조금 더 화려했다. 장식용의 고급 일본도처럼 보였다. 남자가 말했다. “실력을 겨루어보세. 자네가 나를 이긴다면 우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 가겠네. 동룡족 고위무사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지크의 눈썹이 꿈틀했다. 상대방의 얼굴과 분위기를 보아하니 거짓말을 할 사람 같지는 않았다. 만약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나쁠 것은 없었다. 다른 자객들은 오후에 붙은 자들과 다를 바 없는 투기를 흘리고 있었다. 이 남자만 이긴다면 그 이후는 확실히 쉬웠다. “하지만 못 믿겠어. 동룡족 고위무사의 이름이란 게 뭔지 몰라도 우리 동 네에선 만원의 가치도 없을 것 같거든?” 그때, 바이칼이 지크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대, 동룡족 고위무사라고 했나?” 그가 직접 나서자 남자는 정중히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서룡족의 제왕이시여. 소인의 이름은 자이몬, 동룡족 고위무사 중 한 명입니다.” “그렇다면 스승은 누구요? 짐은 동룡족 고위무사는 스승의 인가를 받은 후 에야 동룡족의 조정에서 받아들인다고 들었소만?” “6대 군주 중에 한 분이신 무룡왕, 올파드님이십니다.” 올파드라는 이름에 바이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올파드? 그렇다면 그의 인장은 가지고 있소?” “물론입니다.” 남자, 자이몬은 왼손을 펼쳤다. 그의 기가 개방됨과 동시에 황색의 문양이 그의 크고 두꺼운 손바닥 위에 떠올랐다. 바이칼은 다른 동룡족의 인장은 몰라도 올파드의 인장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현재 서룡족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남자의 문장이기 때문이었다. 자이몬이 보여준 인장은 확실히 진짜였다. 동룡족이 만든 인장은 지문처럼 각각 고유의 파동을 지니고 있는데, 그 파동은 어지간한 상급신 이상의 존 재가 아니면 절대로 복제할 수 없는 정밀한 것이다. 그가 올파드의 제자라는 것을 확인한 바이칼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나쁘군.” 그는 씁쓸히 중얼댔다. 그러나 불안한 사람은 바이칼뿐인 듯 했다. 지크는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칼에 자신 있다 이거지? 좋아, 거기 꼼짝 말고 기다려라. 채로 썰어주마! ” “그럼 나도 준비하도록 하지.” 자이몬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지크는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에서 재킷과 무명도를 들고 나온 지크는 현관을 나서기 전에 부엌으로 들 어갔다. 루이체는 레니의 앞에 바짝 붙은 채 덜덜 떨었고 레니는 여전히 의식 없이 위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크는 자신이 본 어머니의 모습 중 최고로 안타 까운 모습이라 느끼며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우선 루이체를 안심시켜 주었다. “루이체, 괜찮니?”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루이체는 새엄마마저 이렇게 잃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으로 인해 울지도, 화내지도 못한 채 가만히 레니의 손을 붙잡 고 있었다. 지크는 아이의 길고 부드러운 금발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 엄마 좋아하지?” 루이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는 평소와 달리 진지하고 뚜렷한 얼굴로 아 이를 바라봤다. “네 옛날처럼은 되지 않아, 절대로. 그때는 내가 없었지만 지금은 내가 있 어. 엄마는 꼭 돌아오실 거야. 그러니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 착한 아이는 두려워하는 게 아니야.” 루이체는 물기가 맺힌 눈을 지크에게 돌렸다. “그럼 소원을 말해도 돼요? 오빠는 착한아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바람의 마 법사라면서요.” 아침에 지크가 했던 말이었다. 졸지에 마법사가 된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 다. “당연하지. 뭐든지 말해봐.” 잠시 머뭇거리던 루이체는 이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저를 또 혼자로 만들지 마세요, 제발…….” 지크는 그때 느꼈다. 이 아이가 자신을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려 한다는 것 을. “그런 소원은 들어줄 수 없어. 이룰 수 없는 걸 이루는 게 마법이야.” 의외의 대답에 루이체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지크는 그런 아이의 얼굴을 향해 씩 웃었다. “동생 혼자 두는 오빠가 어디 있어? 그건 사람이 공기를 마시는 것만큼이 나 당연한 거잖아.” “…….” “내가 올 때까지 엄마 잘 지키고 있어, 알았지?” “네!” 아이의 밝은 대답을 들은 지크는 이어서 레니에게 눈을 돌렸다. “들었죠? 조금만 참아요. 아직 엄마한테 못한 말 많으니까 기다려 봐요. 이대로 가버리면 영원히 미워할 거예요.” 지크는 레니의 볼에 키스를 한 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상대가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본 자이몬은 두루마기와 삿갓을 부하들에게 넘겨주었다. 그가 입은 옷은 겉에 두르고 있던 두루마기만큼이나 고전적이었다. 흑회색의 폭이 넓은 저고리 안으로 우람하진 않지만 단단한 맨살이 보였다. 검은색의 펑퍼짐한 바지는 하얀 색의 띠로 허리를 칭칭 감아 고정했다. 짚 신처럼 보이는 신발은 발목 위까지 노끈으로 감아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도 록 했다. 헤어스타일 역시 대충 뒤로 묶은 봉발이었다. 일반인이 보면 과거에서 건너 온 무사로 착각할 만 했다. 자이몬은 4차선 도로의 중앙선 쪽으로 걸어갔다. 지크 역시 상대에게 눈을 떼지 않고 그쪽으로 향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바이칼이 자이몬에게 물었다. “한 가지 묻겠소. 자객들과 함께 미리 이곳에 온 것이오, 아니면 조약을 어기고 무단으로 이 차원에 들어온 것이오?” “물론 무단입니다.” 자이몬은 까슬까슬한 턱수염을 매만지며 빙긋 웃었다. “하지만 각오할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동룡족에게 있어서 최대의 가치를 지니는 당신이 이처럼 무방비상태로 있는데 그깟 조약위반이라는 것 이 무서워 그 기회를 놓친다면 정말 우습겠지요.” “…….” 바이칼은 분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처음부터 자신의 안이함이 만 든 결과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자이몬은 시선을 지크에게 돌렸다. “준비는 됐나?” 지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하지만 복고풍(復古風), 너 말실수한 거 알고 있나?” ‘복고풍?’ 그 말의 저의를 이해 못한 자이몬은 잠깐 딴 곳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 다. “모르겠는데?” “흥, 너 내 친구가 무방비상태라고 했지? 그건 좀 틀렸어. 이 지크 스나이 퍼님이 계시다는 걸 잊었나?” “…….” 자이몬은 가만히 지크를 보다가 이내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이런, 이런……. 자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뭐?” 지크의 인상이 구겨졌다. 자이몬은 웃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내가 자네와 대결하자고 했던 건 자네가 강해서 그런 게 절대 아니야. 그 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랬던 거야. 자네도 알잖나? 죽기 싫어서, 지기 싫 어서 발광하는 상대일수록 강자에게 재미를 주는 법이네. 그냥 픽 죽어버리 면 정말 허무하지. 그런데 자네는 그럴 것 같지가 않았거든. 제법 몸부림을 칠 것 같더라고.” “…….” 치욕이었다. 지크의 목에 퍼런 핏줄이 솟았다. 자이몬은 분노한 지크의 모 습을 즐기듯이 죽 바라봤다. 긴 한숨이 지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으로 폭발할 뻔한 감정을 추스른 그는 악의가 실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내가 이기면 어떻게 할래?” “어쩌다니? 용제를 포기하고 돌아가겠다는 말을 했을 텐데?” “흥, 그건 바이칼에게나 좋은 일이잖아. 녀석은 녀석이고 나는 나지.” “그래? 그럼 무엇을 원하나?” 지크는 대답하기에 앞서 무명도를 뽑고 자세를 잡았다. “청소를 좀 해줘야겠어. 우리 집 지붕을 네놈의 예의 없는 혀로 윤기 있게 닦아줘야겠다. 어때, 괜찮지 않나?” 자이몬 역시 대답하기 전에 칼을 뽑아들었다. “좋군. 대신 내가 이기면 넌 나와 내 부하들의 신발 밑을 핥아야 할 거다. ” “그래? 그렇다면 발목부터 잘라주마!” 일갈과 동시에 지크의 전신에서 스파크가 일어났다. 그것을 본 자이몬은 재 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건 또 뭔가?” “저승으로 가는 선물이다!” 땅을 박차고 나가는 지크의 뒤로 전규의 궤적이 남았다. 그 폭발적인 스피 드로 인해 근처를 굴러다니던 종이들이 허공으로 딸려 올라가 춤을 췄다. 초승달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도광(刀光)이 자이몬이 있던 자리에서 번뜩였 다. 뒤로 피하며 칼을 치켜 올린 자이몬은 빠르게 팔을 내렸다. 하지만 피 하느라 허리를 제대로 젖히지 못한 듯 칼끝에 실린 힘은 그리 자극적이지 않았다.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낸 지크는 칼을 돌려 맞붙어있는 상대의 칼을 흔들었 다. 상대의 생각지 못한 잔재주에 칼의 균형을 잃어버린 자이몬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에 맞춰 지크의 돌려차기가 바람을 갈랐다. “큭!”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파열음이 자이몬의 머리 쪽에서 났다. 직격만은 가까 스로 피했지만 그 대신 앞 머리카락의 일부가 대포에 맞은 갈대처럼 뜯어져 나간 것이다. 타격의 정점에 제대로 맞았다면 끝장이 났을 것이다. 혀로 지붕을 핥는 선 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대로 머리가 터져 즉사할 뻔한 상황이었다. 그제 야 상대의 실력이 보고 즐길만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자이몬은 진지하 게 임하기로 결심했다. 몇 번의 공방이 오고 가던 중 자이몬은 칼을 거꾸로 잡고 자루의 끝으로 지 크의 복부를 끊어 쳤다. 명치에 정확히 일격을 맞은 지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배를 움켜쥐었다. 그가 비틀대는 사이 자이몬은 결정타를 날리려는 듯 칼을 자루에 넣고 발도 술의 자세를 취했다. “여기까지!” 순간 칼의 빗발이 지크의 몸 전체에 쏟아졌다. 초당 수십 번의 횟수를 자랑 하는 자이몬의 연속 발도술로 인해 지크의 재킷과 면T는 순식간에 넝마로 변했다. “이런!” 지크는 무의식에 가까운 상태로 무명도를 휘둘렀다. 그에 부딪힌 자이몬의 발도술은 곧장 멈췄고 지크는 재빨리 뒤로 몇 보 후퇴했다. “빌어먹을!” 지크의 얼굴과 가슴, 복부, 팔 등은 면도날에 베인 듯한 상처로 무성했다. 상의 쪽은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엉망이 되어버렸다. “너, 꽤 하는데? 하마터면 갈은 고기가 될 뻔 했어.” 지크는 재킷을 벗고 면T를 좌우로 잡아 찢었다. 선이 뚜렷한 그의 상체근육 이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드러났다. 피부와 근육의 굴곡을 타고 흘러내리던 피는 이내 연기를 내며 사라졌다. 상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이몬은 지크와 자신의 칼을 한번씩 쳐다봤다. 뭔가 이해가 가지 않는 상 황이 그에게 발생했던 것이다. ‘봐 줄 생각은 없었어.’ 더욱이 지크는 급소를 맞아 그의 초고속 발도술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 태였다. 그러나 발도술은 모조리 빗나갔다. 그저 의미 없는 상처만을 남겼 을 뿐이다. ‘피한 건가? 나의 공격을? 무방비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피한 건가?’ 자이몬은 등골이 오싹했다. 자신이 뭔가 어처구니가 없는 상대와 싸우고 있 다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우연이겠지.’ 그가 자기위로를 하는 사이 지크의 몸에서 다시 한번 스파크가 일어났다. 무명도를 굳게 잡고 자세를 고쳐 잡은 그는 시원스레 미소를 지었다. “기브 엔 테이크(Give and take)야. 받은 만큼 돌려주마.” 스파크의 힘이 더욱 강해졌다. 땅을 타고 주위의 가로등까지 기어 올라간 전류는 기어코 전구마저 터트렸다. 불빛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전류에 휩싸 인 한 남자의 실루엣이었다. 지크는 전신에 힘을 넣었다. 근육이 부풀고 힘줄이 솟아올랐다. 지크는 그 상태에서 시작을 알리듯 크게 외쳤다. “초음속의 사신과 키스해봐라!” 폭음과 동시에 주위 가옥들의 유리창이 터져나갔다. 자객들과 바이칼, 그리 고 소리에 놀라 뛰어나온 루이체의 눈엔 아스팔트 뒤에서 춤을 추는 한 마 리의 뇌룡이 있었다. 실로 엄청난 속도였다. 백뢰살(百雷殺), 그것은 발도술처럼 칼날을 칼집에 미끄러트리며 하는 것과 달리 관성을 벗어난 듯한 가공할만한 운동량으로 모든 각도에서 공격을 퍼 붓는, 어찌 보면 정말 비효율적인 공격기술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자이 몬은 뇌룡의 품에 갇힌 무녀(巫女)처럼 춤을 추듯 이리저리 몸을 흔들고 있 었다. 백뢰살이라는 이름 답게 지크의 공격은 딱 1백번에서 멈췄다. 힘을 너무 과하게 썼는지 기술 시전을 끝낸 지크는 자이몬으로부터 비틀대 며 물러났다. 자이몬은 칼끝을 바닥에 대고는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땀에 흠뻑 젖은 그는 비틀대는 지크를 보며 씩 웃었다. “나의 승리다.” 순간 지크의 가슴팍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이어서 어깨와 목, 등 판에서도 피가 뿜어졌다. 지크는 자신의 핏물 위로 엎어졌다. 그가 흘린 피와 상처는 이내 사라졌지 만 신체의 충격이 큰 듯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자이몬은 힘겹게 일어나며 말했다. “대단했다. 어지간한 녀석들이라면 100번은커녕 스무 번도 견디지 못하고 죽었을 거야. 하지만 너무 생각 없이 들이미는군. 수비자가 나 정도의 동체 시력과 순발력을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공격하는 네가 더 위험하다. 공격하 다가 지쳐버리거든.” “…….” 지크는 아무 말도 없었다. 한숨을 길게 쉰 자이몬은 천천히 바이칼을 향해 걸어갔다. “자, 패배를 인정해라. 아, 그럴 상황도 아닌가? 하긴, 급소만 찔렸으니 대답할 기운도 없겠군. 그럼 용제는 우리들이 데려가겠다.” 그는 바이칼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바이칼은 그를 뿌리치기 위해 저항했지 만 힘의 차이는 너무도 현격했다. 그때 딱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단단한 물체가 아스팔트를 짚는 소리였 다. “아직 안 끝났어!” 자이몬은 움찔하여 도로 쪽을 바라봤다. 지크가 무명도와 칼집에 의지해 겨 우겨우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무서운 눈으로 자이몬을 쏘아봤다. “네 맘대로 남의 이야기에 마침표 찍지 마! 닥치고 그 손 떼!” “호오, 일어났나?” 자이몬은 바이칼에게 슬쩍 목례를 한 뒤 다시 도로 중앙으로 나갔다. “의지는 알겠지만 자네가 방금 전 쓴 기술은 나에게 통하지 않았어. 백번 을 휘둘렀지만 백 번 모두 안 먹혔지. 살아날 기회를 다시 주겠네. 패배를 인정하게.” “못해!” 지크는 왼손에 든 무명도의 칼집을 길가 잔디밭에 던졌다. 그리고는 호흡을 조절하여 흐트러진 기를 다시 모았다. “백번이 안 된다 이거지? 그렇다면 천 번이다!” “뭐?” 지크의 몸에서 또다시 스파크가 흘렀다. 자이몬의 얼굴엔 당황함이 깃들었 다. “천 번이라니, 무슨……!” “알고 싶으면 받아봐! 비록 미완성 기술이긴 하지만 지겹도록 공격해주마! ” 지크는 무명도를 앞으로 던졌다. 멀찌감치 날아갈 것만 같던 칼은 유령이 깃든 물건처럼 주인의 손이 닿을 거리에서 멈추더니 지면과 수직이 되어 둥실 떠올랐다. 지크는 자신의 가슴높이로 떠오른 칼을 잠시 보다가 눈을 감고 수인을 맺었 다. 하나로 모아진 지크의 손에서 파란색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무명도에서도 그에 반응하듯 똑같은 색의 아지랑이가 스며 나왔다. 전신에서 흐르는 땀으로 인해 지크의 육체가 반짝였다. 원래도 군살 없이 단단한 근육이었지만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쳐 보였다. 육체 의 변화는 아니다. 육체미 선수의 몸이 오일로 인해 더욱 돋보이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무명도의 모습이 안개에 휩싸인 듯 아지랑이 속에서 흐릿하게 변했다. 지크 는 그제야 눈을 뜨고 자이몬을 바라봤다. “넌 오늘 건들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린 거야. 일단 우리 어머니!” 지크가 레니의 얘기를 하자 두려움으로 가득 차있던 루이체의 정신이 번뜩 깨었다. 바이칼 역시 그에게 눈을 돌렸다. “우리 어머니의 평생소원이 뭔지 알아? 바로 예쁜 딸을 낳으시는 거야. 하 지만 불가능해. 왜냐고? 어머니는 선천적으로 아이를 낳지 못하시거든.” 그 순간 루이체는 숨을 뚝 멈췄다. 지크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아이에게 있어서 너무도 강하게 밀려왔다. 바이칼 역시 조금은 놀란 듯 눈가에 힘을 주었다. 지크가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나를 어머니께 맡긴 이유도 그것 때문이야. 위로 차원이 지. 그런데 그 소원이 오늘 아침에 풀렸어. 저 아이가, 내 동생이 우리 집 으로 온 거야. 어머니 입장으로는 오늘이 최고의 날이라고. 내 할아버지도 그것 때문에 기뻐서 우셨어.” 그가 말하는 동안 흐릿해져 있던 무명도가 두 개로 나뉘었다. 모습은 똑같 았다. 놀랍게도 세포처럼 복제분열이 되고 있는 것이었다. 지크는 분열을 마친 무명도 두 자루를 각각 거머쥐며 외쳤다. “그런데 너희들이 어머니의 인생을 끝내려 하고 있어! 그것도 오늘! 난 용 서 못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과의 썩을 인연을 여기서 끝내 버리겠다!” 그의 육체에서 대량의 스파크가 튀었다. 그 전기적 현상은 잠시 후 시퍼런 연기로 변해 불꽃처럼 너울댔다. 그것을 본 바이칼의 얼굴엔 경악이 서렸 다. ‘플라스마? 녀석의 몸에서 뿜어지는 스파크가 플라스마화(化) 되고 있지 않나!’ 지크는 친구에게 더 이상 놀랄 틈을 주지 않았다. “받아봐라! 뇌천살(雷千殺)을!” 지크의 얘기를 지루하다는 듯한 얼굴로 듣던 자이몬은 그제야 자신의 도검 을 굳게 거머쥐었다. “인간도 아닌 주제에 인간적인 지껄이고 있구나! 백 번을 휘두르던 천 번 을 휘두르던 결과는 같다! 네가 열 배 더 다친다는 것 외엔 말이다!” 자이몬은 지금껏 몸 안으로 수습하던 기를 일시에 개방했다. 그 압력으로 인해 그가 밟고 있던 아스팔트들이계란껍질 벗겨지듯 산산 조각나며 흩어졌 다. “오너라!” “하아앗!” 둘의 칼이 정확히 가운데 지점에서 충돌했다. 이어서 그라인더로 쇠를 갈 때 튀는 작은 불꽃이 자이몬의 육체를 중간으로 하여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보이는 것은 파란 연기와 화린(火鱗) 뿐, 둘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 았다. 엄청난 난투가 벌어지는 것만은 확실했지만 구경하는 사람 그 누구도 둘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그들의 동체시력마 저 완전히 돌파당한 것이다. 이윽고. “크악!” 지크가 비명을 지르며 난류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자동차 사고를 당한 사 람처럼 아스팔트를 구르던 그는 기능을 상실한 가로등에 부딪혀 겨우 멈췄 다. 반면 자이몬은 기류에 휩싸인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상황은 누가 봐도 뻔했다. 자이몬의 부하들은 안도의 숨을 쉬며 조용히 승리를 만끽했 다. “오빠! 지크 오빠!” 루이체는 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달려갔다. 우물쭈물하던 바이칼 역시 한 탄하듯 고개를 저은 뒤 아이의 뒤를 따랐다. “오지마!” 엎어져있던 지크가 외쳤다. 한없이 뛸 것만 같던 루이체와 바이칼의 다리는 그 자리에서 멈췄다. 지크는 잡고 있던 칼에 의지해 다시금 일어났다. 베인 상처와 아스팔트에 긁힌 상처가 그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그의 경 이적인 재생능력은 그것마저도 거짓말처럼 되돌렸으나 죽을 듯이 몰아쉬는 숨은 지크의 체력이 한계에 달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크는 반쯤 풀린 눈을 비볐다. 자이몬을 뚜렷이 보기 위해서였다. 뭔가를 확인한 듯 씩 웃은 지크는 인도 위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크게 웃었 다. “헤헤, 하하하핫! 죽어버려!” 자이몬의 몸을 휘감고 있던 기류가 사라졌다. 그 직후 그의 전신에서 시뻘 건 피가 파열된 상수도관에서 물이 뿜어지듯 분출되었다. 뇌천살이 만든 초 음속 기류의 압력에 눌려있던 피가 기류가 사라지면서 상처 밖으로 일시에 빠져나온 것이다. 자이몬은 칼마저 놓친 채 자신의 피로 만들어진 호수 위에 큰 대자(大)로 뻗었다. 죽진 않았다. 갑작스런 출혈로 인해 온 쇼크로 잠시 정신을 잃었을 뿐이다. 달려온 부하들의 회복술로 인해 겨우 정신을 차린 그는 넋이 나간 얼굴로 저 멀리 있는 지크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네 녀석……. 네 녀석이 감히 무룡왕, 올파드님의 제자인 나를! 주신 에게 개조된 전투기계일 뿐인 녀석이!” 그 말을 들었는지 지크는 보란 듯 상대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알았으니 이거나 먹고 꺼져. 정원청소는 봐 주마, 인간적으로.” 이어서 루이체가 뛰어와 두 팔로 그를 안았다. 지크는 자신을 껴안은 채 울 어대는 동생의 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너, 샴푸로 세수했지?” 울던 루이체는 흠칫 고개를 들고 지크를 바라봤다. 지크는 너무 지친 나머 지 눈을 감으며 말했다. “뭐,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루이체는 다시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싸움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자이몬은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부하들을 모두 떨쳐내며 괴성을 질렀다. “용서 못해, 용서할 수 없다! 내 인생 최대의 치욕을 여기서 묻어버리겠다 !” 그의 전신에서 황색의 빛이 뿜어졌다. 그것을 보고 당황한 자객들은 손을 흔들며 그를 말렸다. “지, 진정하십시오, 자이몬님! 이 세계에서 함부로 실체화를 하신다면 그 때는 정말 겉잡을 수 없게 됩니다! 신룡, 브리간트님께서… 으악!” 조언을 하던 자객의 육체는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앞발에 눌려 짓이겨졌다. 지크와 바이칼, 그리고 루이체는 눈앞에서 떠오르는 길고 거대한 존재를 보 며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은 용(龍)이었다. 머리의 뿔과 뱀의 몸통,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네 개의 다리, 그리고 오른 손에 든 여의주. 옛날 그림책이나 사찰 또는 광고에서 나오던 바로 그 모습 이었다. 현실의 창공에 떠올라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 그 흑룡은 백광이 번 쩍이는 눈을 지크에게 돌렸다. 지크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댔다. “어이, 이건 반칙이야.” 흑룡이 입을 벌리고 외쳤다. “승부는 이제부터다, 주신의 전사! 네가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 만큼 나 역 시 그래야겠지?” 흑룡의 목소리는 틀림없이 자이몬의 것이었다.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지크 는 힘없이 웃었다. “이래서 동룡족인거야? 미치겠군.” 흑룡, 아니 자이몬이 든 여의주에서 영롱한 빛이 흘러나왔다. 오늘 매트로 서울의 하늘은 구름 없이 맑았다. 그러나 여의주의 빛에 이끌 린 듯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란운이 어디선가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하늘을 덮은 구름으로부터 천둥소리가 들렸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구름 사이에서 번뜩이는 번개의 모습은 한없이 위협적이었다. 자이몬은 여의주를 지크에게로 뻗으며 말했다. “아까 보니 몸에서 전기를 잘도 뿜어내더군.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힘으로 너를 상대해주마! 동룡족의 술법이 가진 무서움을 확실히 보여주마!” 여의주가 플래시처럼 강하게 빛을 냈다. 그 순간 지크는 무의식적으로 루이체의 몸을 들어 바이칼에게 던졌다. 엉겁 결에 아이를 받은 바이칼은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피해!” 그의 안타까운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지크의 육체 위로 굵은 번개가 떨어졌 다. 일반적인 번개와 달리 유지시간이 가혹할 정도로 긴 번개였다. “으아아악!” 지크의 비명과 함께 번개가 꽂힌 지점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장난감처럼 튕 겨져 나간 지크의 육체는 근처에 주차된 차량 위에 떨어졌다. 승용차를 반파시키며 처박힌 지크는 입에서 피를 뿜었다. 그는 다시 일어나 기 위해 팔을 움직였으나 체력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또 한번의 낙뢰가 지크를 때렸다. 이번엔 아스팔트 위로 지크의 몸뚱이가 떨어졌다. 자이몬의 여의주가 더욱 강한 빛을 뿜었다. “끈질긴 녀석이구나!” 한 개의 낙뢰가 지크의 몸을 깔아뭉갰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몇 줄기의 번 개가 추가로 떨어져 지크에게 고통을 주었다. “으윽, 아아악!” 전신이 타들어가고 뼈가 꺾이는 듯한 압력으로 인해 지크는 비명을 지르고 또 질렀다. 사지가 경련을 일으켰다 그가 흘린 피는 금방 비릿한 냄새를 풍 기며 증발했다. 낙뢰가 끝나고 남은 것은 완파된 지면과 김을 뿜는 지크의 육체였다. 자이 몬은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댔다. “대단하군. 원래는 시커멓게 타서 부서져야 할 텐데 용케도 몸을 유지하고 있구나. 이것이 주신의 힘인가?” 지크는 말이 없었다. 술법이 준 고통으로 인해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것이다. 자이몬은 다시 여의주를 뻗었다. 지금 그 투명한 구슬이 뿜어내는 빛은 여 태까지 나왔던 것 중에서 가장 강력했다. 먹구름 사이에서도 번개가 흘러 한군데로 크게 모였다. 방금 전 나왔던 술 법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 느껴졌다. 이것은 최후의 일격을 위한 준비였다. 바이칼은 두 주먹을 거머쥔 채 고개를 떨어트렸다. “끝인가.” 그의 목소리 속엔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한없는 책망이 섞여 있었다. 그에 게 안긴 채 하늘을 쳐다보던 루이체는 뭔가 결심한 듯 그에게서 벗어났다. “어이, 꼬마!” 바이칼은 깜짝 놀라 아이를 잡으려 했지만 루이체는 이미 지크를 향해 달리 고 있었다. “네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하지만 루이체는 막무가내였다. 자이몬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지크에게 당한 것 때문인지 그의 모든 신경 은 그에게만 쏠려 있었다. 그는 통쾌한 듯 웃었다. “이걸로 끝이다! 이 정도의 술법이라면 너 뿐만 아니라 이 인간냄새로 가 득한 동네마저 날아가겠지! 너와 네 가짜 어미를 구할 길은 이제 없다! 우 리 동룡족에게 영광을!” 결국, 여의주에 모인 빛이 개방됐다. 빌딩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낙뢰가 하늘에서 지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건 번개라고 하기 보다는 뇌신의 망치질이라 해도 틀림이 없을 규모였다. 낙뢰와 지크 사이로 하얀 빛이 반짝이며 날아들었다. 그것은 하얀색의 날개를 등에 단 소녀이자 오늘 아침에 지크의 집을 찾아온 루이체였다. ‘주신계 천사!’ 자이몬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마 저 꼬마, 주신계 천사들에게 전해진다는 절대방어술, 레이스프리드 를 사용할 줄 아는 건가? 만약 사용할 줄 안다면 큰일이다! 조금이라도 시 간이 지체되면 브리간트님의 노여움이……!’ 그가 고민하는 사이 루이체는 지크로부터 10여 미터 위의 허공에 자리를 잡 고 주문을 외웠다. 아이를 중심으로 떠오른 3차원 술법진의 형태는 자이몬 의 예상대로 레이스프리드였다. 레이스프리드, 그것은 주신이 만들고 주신이 배포한 주신계 술법 중 하나로 서 기준치 이하의 마법, 즉 입자가속을 이용해 직접적인 핵융합폭발을 일으 키는 플레어를 제외한 모든 원소마법을 막아내는 고위술법이다. 주신계 마법은 인간이나 용족 및 기타 생명체들이 사용하는 흑마법이나 원 소마법과는 동작체계가 원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주신계 천사나 신 급의 정신생명체가 아니면 주신계 술법은 절대로 사용할 수 없다. 그 중에서 레이스프리드와 같은 고위술법은 주신계 천사 중에서도 훌륭한 혈통을 타고난 자가 아니면 배우는 것부터가 힘들다. 지금 루이체가 레이스 프리드의 술법진을 전개하는 것부터가 그녀의 혈통을 증명하는 것이다. 루이체는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고 빠른 손짓으로 주위에 퍼진 수십 개의 술 법진을 짜 맞췄다. 주신계 술법은 큐브(Cube)라 불리는 술법진, 즉 정신적 입체회로를 술법에 맞춰 차례대로 조합하여야 비로소 동작된다. 덕분에 일반마법보다 정신력 소모가 덜하고 침묵주문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지상계의 마이크로프로세서보다 수천 배나 복잡한 구조를 가지는 큐 브의 동작원리 및 조합경로를 이해하는 능력은 선천적으로 부여된다. 배워 서 되는 게 절대로 아니었다. 그래서 선천적 능력, 즉 천사의 혈통이 중요 하다는 것이다. 자이몬은 아이의 손짓을 유심히 살폈다. 다른 종족이라면 입만 벌리고 있었 겠지만 동룡족 중에서 엘리트인 그라면 적어도 큐브의 흐름만큼은 어느 정 도 느낄 수 있었다. 루이체의 작은 손이 마지막 큐브를 끼워 맞추자 술법진이 빛을 발했다. 걸 린 시간은 짧았다. 인간의 입장에선 일순간이었다. 자이몬은 발동되는 레이스프리드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끝이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은 시술자인 루이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술법전개를 계속했다. 죽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게 더욱 훌륭한 일 이라는 것을 그녀는 친부모에게 잘 배워서 알고 있었다. 자이몬은 결말이 뻔하다는 것을 피력하듯 고개를 돌렸다. 낙뢰가 지면을 강 타할 때 발생하는 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순간 무서운 기운이 느껴졌다. “아니?” 지면에 떨어져야 할 번개는 루이체의 머리 위에서 수직으로 꺾여 자이몬에 게 날아오고 있었다.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번개를 피한 자이몬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루이체 쪽을 바라봤다. “거짓말이다! 꼬마의 레이스프리드는 실패했단 말이다!” 번개가 꺾인 지점은 번개가 남긴 잔광으로 인해 환히 빛나고 있었다. 덕분 에 술법이 튕긴 이유는 즉시 알 수 없었다. 그 빛이 서서히 사라졌다. 눈을 꼭 감은 채 레이스프리드를 발동하던 루이체는 뭔가 이상하다 느낀 듯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그녀가 사용한 레이스프리드는 어설펐다. 원래는 지름 십여 미터의 거대한 빛의 원반이 만들어져야 하지만 지금 그녀의 머리 위에 떠있는 것은 그냥 작은 접시에 불과했다. 진실은 그보다 좀 더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라지는 빛의 아래로 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태양처럼 흩날리는 머 리, 그리고 코트로 보이는 긴 옷. 그가 금발이고 입고 있는 코트가 백색이 라는 것은 빛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낙뢰를 막은 팔을 내린 남자는 싸늘한 눈으로 루이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날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꺼내지 말라고 했다.” “아…….” 그 남자는 자신이 했던 경고를 아이에게 되새겨 주었다. 하지만 루이체는 용서를 빌기는커녕 다짜고짜 울음을 터트렸다. 그것은 안도의 눈물이었다. 한편, 그 남자의 모습을 본 자이몬과 그의 부하들은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 는 듯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 사이 지상에 내려온 그 남자, 휀은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는 천천 히 앞으로 걸어갔다. 경이적인 위압감이 자이몬과 자객들을 내리눌렀다. 상대는 그저 걸어오는 것뿐이었지만 그 누구도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했다. 자이몬은 긴장한 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남자가 바로 광황, 주신의 검, 신의 무력을 대행하는 자, 대 천사장 미카엘을 꺾었다는 전설의 존재, 그리고 최강……!’ “우오오!” 자이몬은 괴성을 지르며 여의주를 뻗었다. 지크에게 사용한 것과 똑같은 낙뢰가 금발의 남자에게 떨어졌다. 분명히 직격했지만 남자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약간의 연기가 코트 주위에서 맴돌다가 사라질 뿐이었다. 이후 수차례에 걸쳐 낙뢰가 시도됐으나 자이몬은 상대에게 상처 하나 입히 지 못했다. 심지어는 걷는 속도마저 줄이지 못했다. 이윽고,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손가 락 사이에 끼웠다.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자이몬은 다시 한번 낙뢰를 떨어트 렸다. 이번에도 역시 변화는 없었다. 굳이 찾자면 담배 끝에 불이 붙은 것뿐이었 다. 눈을 감고 담배연기를 흠뻑 빤 그는 길게 연기를 뿜으며 비로소 말했다. “너는 세 가지 사항을 위반했다. 첫 번째, 주신계의 눈을 피해 멋대로 이 세계에 들어온 것. 두 번째, 신룡 브리간트님의 허락 없이 이 세계에서 실 체화 한 것. 그리고 마지막, 내 담배에 멋대로 불을 붙인 것.” 그러자 자이몬의 눈에 핏발이 맺혔다. “웃기지 마라! 네가 얼마나 강한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우리의 임무를 끝낼 수는 없다! 나와 동룡족의 무사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서룡족의 우두머리 를 우리 본거지에 데려갈 것이다! 명예를 걸고!” 그러나 금발의 남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구름 낀 하늘을 바라보 며 말했다. “구름 낀 하늘에서 죽고 싶나, 아니면 맑은 하늘에서 죽고 싶나?” “뭐? 건방진!” 자이몬은 또다시 여의주를 뻗었다. 남자 역시 그에 맞춰 왼손을 들었다. “죽어.” 순간 거대한 빛의 파동이 남자의 손을 떠나 자이몬의 긴 육체를 휘감았다. 그러고도 여력이 남았는지 하늘을 덮은 먹구름까지 꿰뚫었다. “으, 으아아아!” 빛의 기둥 속에서 한없이 몸부림치던 자이몬은 결국 재로 변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것을 본 바이칼은 입안에 맺힌 침을 삼키며 중얼댔다. “광황포(光皇砲)!” 잠시 후 빛이 사라졌다. 먹구름 역시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다. 덕분에 하늘은 처음처럼 별의 바다가 되어 있었다. 금발의 남자는 이어서 동룡족 자객들에게 눈을 돌렸다. 자객들은 완전히 얼 어붙어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물었다. “상관의 뒤를 따르고 싶나?” 자객 모두는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으로 상황은 끝이었다. 그들이 사라진 뒤 금발의 남자는 바이칼에게 다가갔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용제.” 바이칼은 불쾌한 듯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여전히 존칭을 쓰지 않는군, 휀 라디언트. 다시 말하지만 난 용제다. 서 룡족의 제왕이란 말이다.” 그 남자, 휀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랬었나? 알고 있으니 다행이군.” “뭐라고?” 상대방의 독설에 바이칼의 불쾌감은 더욱 높아졌다. 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얘기를 계속했다. “방금 전까지 이 세계에 일어난 일은 모두 너의 아둔함과 허약함에서 비롯 된 것이다. 네가 좀 더 똑똑했다면 더 좋은 호위병을 데려왔을 것이고 네가 좀 더 강했다면 이 세계가 이렇게 혼란스러울 이유도 없었다. 전대 용제, 알렉산더라면 고위무사 정도는 가벼웠겠지.” “닥쳐라! 이번 일이 전부 내 탓이란 말인가!” “뻔한 대답은 생략하겠다.” 휀은 길게 담배연기를 뿜었다. 반박할 여지를 찾지 못한 바이칼은 분한 듯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휀이 다시 말했다. “난 클로머트 장로의 부탁으로 널 데리러 왔다. 이번 일에 대해서 주신계 는 책임추궁을 할 뜻이 없으니 안심해라. 지금 드래고니스로 통하는 차원문 을 열어줄 테니 기다리도록.” 말을 끝낸 그는 즉시 차원문을 여는 마법진을 눈앞에 그렸다. 묵묵히 그 모 습을 지켜보던 바이칼은 시선을 지크와 루이체가 있는 곳으로 돌렸다. 지크는 여전히 의식을 잃고 있었다. 루이체가 간단한 술법으로 그를 깨우려 했지만 술법에 미숙한 루이체는 번번이 실패하기만 했다. 동룡족이 걸었던 정혼술은 외곽부터 서서히 효력을 잃고 있었다. 시술자가 도망친 덕분이었다. 이번 일이 그렇게 정리됨을 느낀 바이칼은 조용히 한숨 을 쉬었다. “난 어찌하면 좋은가?” 마법진 제작에 여념이 없는 휀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바이칼은 그러건 말 건 자신의 얘기를 계속했다. “입으로는 용제라고 부르짖으면서 새로 사귄 친구와 그의 세계에 피해만을 끼쳤다. 게다가 데리고 온 시종들은 허무하게 잃었지. 과연 나에게 서룡족 용제의 자격은 있는 건가?” “없다.” 휀의 대답은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고 심플했다. 그는 원래 그런 인물인 듯 했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너 말고 용제의 자리를 대신할 존재가 없다는 사실 이다. 네가 전대 용제인 알렉산더와 별의 여신 빌라이저님 사이에서 태어나 지만 않았다면 넌 먹는 것만 밝히는 쓰레기 드래곤에 불과하지. 하지만 걱 정하지 마라. 클로머트 장로와 그 밖의 네 신하들은 자기 우두머리의 부족 함을 이미 계산에 넣고 있다. 넌 꼭두각시처럼 그들의 말만 잘 들으면 된 다. 그들의 뛰어난 능력을 봐서 적어도 욕은 먹지 않겠지.” 더욱 잔인하면서 현실적인 말이 바이칼의 귀에 꽂혔다. 불끈 쥔 바이칼의 주먹에선 결국 핏물이 맺혀 떨어졌다. 분노와 수치심이 하나로 어우러져 그의 마음속에서 춤을 췄다. 그런 거센 감정은 소년 제왕의 마음을 점차 뜨겁게 달궈놓았다. ‘강해지겠다, 절대로! 오늘의 수치를 절대 잊지 않겠다!’ 이윽고 차원문이 열렸다. 지크를 돌보던 루이체는 할 수 없다는 듯 오빠의 볼에 입술을 댄 뒤 그쪽으로 달려왔다. “가시는 거예요, 용제전하?” “뒷일을 부탁한다.” 바이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원문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옆에 선 휀을 바라봤다. “전하께서 화가 나셨나 봐요?” “그럴지도.” 차원문에 뒤따라 들어가려던 휀은 잠시 발을 멈추고 지크의 집에 눈을 돌렸 다. 창문을 통해 정혼술에서 풀려나지 못한 레니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휀은 고개를 저은 뒤 발길을 돌렸다. 차원문이 사라진 직후, 집안에서 레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내가 그릇을 왜 떨어트렸지? 어머? 시간은 또 왜 이렇게 흘렀을까? 이상한 일이네?” 그녀의 목소리는 부엌에서 거실로 옮겨졌다. “지크, 루이체, 어디 있는 거야? 바이칼 군도 사라졌잖아? 전부 방에 올라 갔나? 얘들아, 거기 있니?” 루이체는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 난장판이 된 도로와 의식을 잃은 지크가 그녀의 큰 눈에 들어왔다. 이건 보면 볼수록 뒷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아이는 한숨을 푹 쉬며 중얼댔다. “저보고 어쩌란 말이에요, 용제님.” 그녀는 뒷일을 부탁한다는 바이칼의 빈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 한 지역의 사람들이 똑같이 수십 분 동안 의식을 잃은 그 사건은 불가사의 로 처리되어 서류 밑에 묻혔다. 도로가 파괴되고 가로등 시설들이 망가졌지 만 사실을 아는 사람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기에 경찰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병원에 실려 간 지크 역시 자신도 의식을 잃었다며 억지를 부렸다. 결국 그 는 하루 만에 퇴원하여 BSP에 복귀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그날, 처크의 도움으로 루이체의 법적 입양을 마친 레니는 홀가분한 마음으 로 저녁을 준비했다. 거실에선 일찍 퇴근한 지크와 루이체가 TV를 즐기며 과자를 먹고 있었다. 일주일 전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었지만 이젠 일상적 인 상황이 된지 오래였다. “어이, 동생. 과자 좀 그만 드시지? 내 동료처럼 다이어트에 목숨을 걸고 싶어?” “난 리진이 언니랑 틀리다, 뭐.” “허어, 진짜? 여기 잡히는 뱃살은 뭐지? 일주일 만에 불쑥 늘었네?” “아, 그만해, 오빠! 엄마, 오빠가 괴롭혀요!” 루이체의 볼멘소리를 들은 레니는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지크, 그만하고 창고에서 치즈나 좀 꺼내오렴.” “네.” 지크는 길게 대답하며 창고 쪽으로 걸어갔다. 과자와 TV를 독차지하게 된 루이체는 신이 난 듯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채 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났다. 과자를 내려놓으려던 루이체는 혹시나 하는 생각 에 다시 과자를 들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인터폰 밑엔 전에 없던 작은 의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루이체는 그것을 밟 고 올라가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인터폰 화면엔 붉은 장발의 청년과 파란 장발의 청년이 떠올랐다. 루이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들에게 물었다. “누구세요?”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둘은 움찔하며 서로를 바라봤다. “어, 누구야, 이건? 웬 애가 이 집에 있지? 우리가 집을 잘못 찾아왔나?” 붉은 장발의 청년이 놀란 투로 묻자 파란 장발의 청년은 말없이 고개를 저 었다. 루이체는 좀 수상한 사람들이라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 “저어, 어떤 분을 찾아오셨나요?” “아, 지크를 찾아온 그의 형제들입니다. 혹시 집에 있습니까?” 붉은 장발의 청년은 조금 어설픈 목소리를 냈다. 루이체는 혹시나 하는 생 각에 그들에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오빠! 지크 오빠!” 루이체가 지크를 부르기 위해 달려가는 동안 화면 속의 두 남자는 각각 놀 란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오빠? 무슨 소리야? 지크 녀석이 애를 납치해서 세뇌라도 한 건가?” “모르겠군.” 오는 동안 좋은 귀로 그들의 얘기를 똑똑히 들은 지크는 문을 여는 버튼을 누르며 투덜댔다. “어째 만나는 사람마다 납치라고 하지? 내가 그렇게 악독한가?” 옆에 선 루이체는 진지하게 말했다. “과자 뺏어먹는 사람은 다 나빠.” “어이, 그게 누구 돈으로 산 과잔데 그래?” 남매가 다시 토닥대는 동안 손님, 리오와 슈렌은 현관을 거쳐 집안으로 들 어왔다. 낯선 그들의 모습을 본 루이체는 얼른 지크의 뒤에 숨었다. 그 모습을 똑똑히 본 리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지크에게 물었다. “진짜 납치야?” “그만해.” “그럼 걔는 누구야?” 지크는 기다렸다는 듯 씩 웃으며 루이체를 안아 올렸다. “우리 동생이지. 자, 인사해, 루이체. 내 형제들이자 네 오빠들이야. 빨간 머리는 리오고 파란 머리는 슈렌이야. 저번에 얘기했지?” “아, 안녕하세요.” 루이체는 고개를 꾸벅 굽혀 인사를 했다. 작금의 상황에 대해 전혀 듣지 못 했던 리오와 슈렌은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11화 끝 12화 [Strike Force] Special thanks Man: Y.I.S 저녁식사를 끝낸 지크와 루이체, 그리고 두 손님은 일주일 전 일어났던 일 에 대해 천천히 얘기를 나눴다. 그들은 레니가 오기 전에 휀과 루이체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했다. 시작은 슈렌이 의문을 제기하면서부터였다. “이건 전혀 듣지 못한 얘기다.” 슈렌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지크, 그리고 리오를 푸근한 의자삼아 앉아 있는 루이체는 놀란 듯 서로를 쳐다봤다. “무슨 소리야? 휀이라는 놈이 나에게 맡긴다고 편지까지 썼단 말이야.” 지크에 이어 루이체가 말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왔는데요?” “음…….” 목에서 중저음을 낸 슈렌은 옆에 놓인 시원한 녹차를 한 모금 들이킨 뒤 말 했다. “내가 들은 얘기는 달라. 얼마 전에 유명을 달리한 고등 비서관 로우난의 딸, 그러니까 루이체는 원래 휀이 맡기로 했어. 그와 로우난은 각별한 사이 였지.” “뭐라고? 사실이야?” “주신전에서 일하는 천사들의 대부분은 그렇게 알고 있지. 그리고 루이체 를 맡겠다는 말은 휀 스스로가 한 거야.” “…….” 지크와 루이체는 다시 서로에게 눈길을 돌렸다. 지금 그들이 들은 얘기는 일주일간 알고 있던 스토리와는 전혀 달랐다.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리오는 피식 웃었다. “애 보기가 귀찮았나보지.” 지크는 그 말에 발끈했지만 리오는 적동색 손으로 루이체의 머리를 만져주 며 마저 말했다. “우리는 아이를 돌볼 만큼 여유로운 존재가 아니야. 언제든지 출동해서 피 를 봐야만 하지. 휀 녀석이 아이를 너에게 맡긴 건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몰라. 우리들 중에서 하루 세 끼 다 먹으며 신나게 출퇴근하는 사람은 지 크, 너밖에 없으니까.” “…….” 반박할 여지를 잃은 지크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왜 하필 나야? 다른 사람도 많이 있잖아?” 그의 물음에 슈렌이 대답했다. “휀의 일처리 방식은 지나다 싶을 정도로 합리적이고 비정해. 그래서 선신 계든 악신계든 가릴 것 없이 적이 많아. 루이체는 그를 해하기 위한 인질로 서 이용될 가능성이 높지. 다른 아이 같았으면 눈앞에서 죽든 말든 상관하 지 않는 남자지만 그의 유일한 친구라 할 수 있는 로우난의 딸이라면 얘기 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음, 그렇군. 이제 알겠어.” 지크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휀이라는 녀석도 나를 강자라 인정한거군! 안심하고 친구의 딸을 맡길 수 있는!” 하지만 반응은 좋지 않았다. 슈렌은 묵묵히 녹차를 마셨고 리오는 특유의 비웃음을 흘렸다. “아니면 잠시 정신이 나갔거나.” “이봐.” 지크는 슬쩍 주먹을 뻗었다. 리오는 얼굴로 다가오는 형제의 주먹을 잡고는 장난스레 웃었다. 지크 역시 마찬가지로 웃었다. “수련은 끝난 거야?” “수련? 아, 오딘님의 수련 말이군. 끝나긴 했는데 그냥 그래.” 리오는 뭔가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다 배웠지만 기술 하나를 마무리하지 못했어.” “기술? 뭔데?” “지하드라고… 말로는 최고의 파괴력을 가진 검술이라는 데 잘 모르겠어. 그 외팔이에 외눈박이 노인네조차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엉터리 기술이지. ” 그의 퉁명스런 목소리를 들은 지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그럼 너 거기에 왜 간 거야?” “몰라. 아무튼 끝났으니 나가라고 하더군. 근신도 좀 있으면 풀릴 듯해서 늦기 전에 놀러온 거야.” “흠, 그렇구나.” 지크는 아쉬워했다. 하지만 겉으로만 그럴 뿐, 리오와 자신간의 차이가 크 게 벌어지진 않은 것에 내심 기뻐했다. “아, 그런데 루이체.” “응? 왜, 오빠?” 지크는 아직도 리오 위에 앉아있는 루이체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 “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깡패 위에 앉아있는 거야? 저 놈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 루이체는 손바닥만큼 둥글고 넓은 과자를 입에 물며 고개를 휙 돌렸다. “에어컨 바람이 차가워.” 처음 왔을 때와 달리 루이체는 간편한 반팔T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하지 만 그렇다 해서 추위를 느낄만한 온도는 아니었다. 짓궂은 생각을 떠올린 지크는 능글맞은 미소를 아이에게 들이밀었다. “너, 우리 셋 중에서 누가 제일 좋아? 말해봐.” 그러자 루이체는 인상을 살짝 썼다. “그런 구시대적 질문은 거절할래.” “…….” 한순간에 바보가 된 지크는 붕 뜬 얼굴로 아이를 바라봤다. 리오는 루이체 의 볼을 양손으로 만지며 크게 웃었고 슈렌도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아.” 지크는 배신당한 사람처럼 몸을 숙이고 이마를 짚었다. 그를 흘끔흘끔 보던 루이체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얼른 리오에게서 벗어나 지크의 등 뒤에 매달렸다. “오빠가 제일 좋아.” “어라, 날 놀렸겠다! 지크는 그대로 루이체를 들어올려 목마를 태웠다. 그가 이리저리 상체를 흔 들자 아이는 지크의 머리를 꼭 붙잡은 채 깔깔대며 웃었다. 부엌에서 과일을 내오던 레니는 그 모습을 보고 행복한 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지크의 주머니에 있던 BSP용 PDA가 요 란한 소리를 낸 것이다. 지크는 루이체를 다시 리오에게 맡긴 뒤 PDA를 꺼내 폈다. “네, 지크입니다.” “비상사태 발생이야. 지금 집인가?” PDA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렌이었다. 지크는 한숨을 폭 쉬며 대답 했다. “네. 어디로 가면 되요?” “B-9지역이야. 지금 미확인 생물체 하나가 다수의 BG를 이끌고 난동을 부 리고 있어. 전경들과 챠오, 류페이 팀이 먼저 갔지만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아. 빨리 그쪽으로 와줘.” “당장 날아가죠.” PDA를 접은 지크는 소파를 뛰어넘어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지크가 있던 자 리에 앉아 과일을 올려놓은 레니는 걱정스레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일까요?매일같이 있는 일이지만 언제나 걱정되는군요. ” 리오와 슈렌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큰일이라면 그들 자신 이 지크보다 먼저 감지하기 때문이었다. 리오는 방울토마토를 입안에 던져 넣으며 말을 내뱉었다. “설마 죽겠습니까?” “…….” 그의 무책임하면서도 솔직한 말은 사과를 깎는 레니의 손을 잠시 멈추게 만 들었다. 잠시 후, 옷을 차려입고 나온 지크는 모친 옆에 놓인 사과 한 알을 들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다녀올게요!” 방금 전의 일 때문에 전에 없이 불안해진 레니는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아 들을 배웅했다. “지크, 죽으면 안돼!” “네? 아, 네.” 지크는 고개를 갸웃대며 차고로 향했다. ※※※ BG들의 처리는 순조로웠다. 챠오와 류페이만이 있었을 때는 좀 어려웠지만 다른 BSP들과 지크가 합류하면서 일은 쉽게 진행됐다. 그런데 문제는 마지막에 생겼다. 이번 비상의 주범인 미확인 생물체는 근처의 BG들이 모두 죽자 뒤도 돌아보 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사람처럼 사지와 머리, 몸통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연체동물같이 미끌미끌 하고 흐늘흐늘했다. 피부는 은색으로 매끈했고 굴곡은 거의 없었다. 온몸을 펄럭이며 도망치는 그 생물의 모습은 그런 류를 혐오하는 리진에겐 거의 독약이나 마찬가지였다. “아, 보기만 해도 올라와.” 그렇다고 해서 일까지 소홀이할 수는 없었다. 30분이 넘도록 이어진 추적 끝에 경찰과 BSP는 목표물을 포위하는데 성공한 다. 그리고 BSP에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가장 확실한 멤버를 내세워 마지 막을 장식하기로 한다. “이럴 때만 확실하지, 뭐.” 지크는 씩 웃으며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빔 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생물체는 자신이 포위되었다는 것을 아는지 도로 가운데에 가만히 있었다. 은색의 육체는 거울처럼 반짝였다. 물기 같진 않았다. 금속의 느낌이었다. BSP본부에선 일단 그 생물체를 가능한 포획하기로 결정했다. 건물과 구조물 을 파괴하긴 했지만 그보다 파괴하기 쉬운 시민들은 전혀 건들지 않은 것부 터 시작해서 전혀 BG같지 않으면서도 다수의 BG들을 조종했다는 사실은 BSP 에게 있어서 매력적인 요소였다. 물론 새로운 BG라는 것이 밝혀지면 그 자리에서 처형이었다. 지크는 무명도를 흔들며 천천히 걸어갔다. “일주일 전에 만난 놈들보다는 편하겠지.” “일주일 전? 무슨 소리지? 누굴 만났다는 거야?” 귀에 낀 통신기에서 루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시 일은 처크가 증거도 없고 사상자도 없으니 그냥 넘어가자는 식으로 말 했고 지크역시 의식을 잃어 아무 것도 모른다며 억지를 부려 루이가 시도했 던 진상조사는 흐지부지해졌다. 그런 참에 시비를 걸만한 얘기를 들었으니 루이가 가만히 있을 리는 없었다. 뜨끔한 지크는 특유의 순발력을 발휘해 둘러대기 시작했다. “교, 교회 아줌마들. 저녁에 찾아와서 교회 다니라고 그러더라고. 다섯 팀 이나 찾아왔다니까?” “아, 그래? 그랬군.” 루이의 목소리엔 가시가 돋아있었다. 지크는 등골에 흐르는 땀을 느끼며 걸 음을 계속 이어나갔다. 지크와 미확인 생물체 사이의 거리는 대략 5미터. 현재의 지크라면 땅을 딛 지 않고 공격을 날릴 수 있는 거리였다. 한없이 은색일 것만 같던 생물체의 상단, 사람의 머리처럼 생긴 부위의 중 앙에서 주먹만한 돌기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눈이었다. 불길하게 생긴 그 외눈은 지크의 모습을 위아래로 재빨리 훑어봤다. 지크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통신기에 손을 댔다. “저 녀석이 내 몸매를 감상하는데, 어쩌면 좋지?” “일단 선제공격은 하지 마.” 임시로 그의 오퍼레이터를 맡은 루이가 말했다. “아직은 널 직접적으로 위협하지는 않잖아. 인간 정도의 지능을 가진 돌연 변이일 수도 있고 외계에서 온 지적(知的) 생명체일 수도 있어.” 이른바 외계인일 수도 있다는 말에 지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 아직도 외계인이 있다고 믿는 거야? 열다섯 살 때 네 방 창문에 매달 린 건 나였고 네 얼굴을 탐색한 광선은 내 손전등이었다 말했잖아.” “난 가능성을 얘기한 것뿐이야. 그리고 잡담은 사양하겠어.” “그러신가? 좋아, 그럼 기다려보지.” 지크는 통신기에서 손가락을 떼고 팔짱을 꼈다. “그건 그렇고, 빔 라이트는 언제 봐도 밝단 말이야.” 그는 눈을 찡그리며 경찰의 빔 라이트 차량에게 눈을 돌렸다. 덕분에 그는 자신을 향해 훌쩍 넓어진 미확인 생물체의 모습을 미처 보지 못했다. “아악! 지크!” 리진의 비명이 터졌다. 다른 동료들과 함께 권총으로 미확인 생물체를 조준하고 있던 리진은 자신 이 본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보자기처럼 넓어진 그 생물체가 지크를 단숨에 집어삼킨 것이다. 지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있던 자리엔 심하게 꿈틀대는 물컹한 은색의 덩어리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럴 수가!” 그렌은 반사적으로 팔에 장치된 기관포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하지만 발사 하진 않았다. 저 속에 지크가 있다면 그건 동료를 구하는 게 아니라 벌집을 만드는 일밖에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는 최대한 머리를 차갑게 했다. 그의 뇌를 감싸고 있는 인공 두개골의 냉 각장치와는 무관했다. 현장 책임자로서의 당연한 자세였다. “모두 침착해! 본부의 명령을 기다린다!” 하지만 카메라를 통해 지크가 당하는 장면을 똑똑히 본 본부에서도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항상 빠른 결정을 내리던 처크마저도 침묵을 지 켰다. 루이는 류페이의 BX-Fb에 장치된 X선, 적외선, 초음파 탐색기들을 동원해 생물체를 투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못했다. 미확인 생물체의 형태 외 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텅 비어서 그런 게 아니라 내부 투시 자체가 불가능했다. ‘초음파까지 통하지 않다니, 어떻게 된 거지? 형태로 봤을 때 분명 생물체 인데?’ 침묵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생물체의 움직임이 멎는가 싶더니 생물체 밖으로 지크의 육체가 튕겨 나온 것이다.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지크는 몇 번 바닥을 구르다가 이내 자세를 바로 하 여 일어났다. “젠장! 기분 한번 더럽군!” 지크는 매우 멀쩡했다. 신체적 손상도 없었고 몸에 그 어떤 물질도 묻어있 지 않았다. 흡수당하기 전과 다를 바가 전혀 없는 상태였다. 동료들의 안도 속에 그는 무명도를 빼들었다. “깔끔히 베어주마! 감히 누굴 삼켜!” 허나 상대는 액체처럼 변하더니 곧장 근처의 배수구로 돌진하여 그 속으로 사라졌다. 지크는 급히 뒤쫓았지만 아스팔트를 전부 들어내지 않는 한 추적 은 불가능했다. 지크는 멍한 얼굴로 그렌을 바라봤다. 최고참 전투요원은 한숨을 쉬며 본부 에 무전을 넣었다. “목표상실, 추적이 불가능합니다. 상황을 종료하겠습니다.” “빌어먹을!” 지크는 오른발을 강하게 구르며 분을 토했다. 본부로 돌아온 지크는 곧장 격리되어 CT촬영 등의 정밀신체검사를 받았다. 루이와 처크가 모두 참석한 가운데 시행되었으나 지크의 신체 내외에선 아 무런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귀가를 허락받은 지크는 동료들을 만나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슈렌이 나 리오라면 오늘 일어난 신기한 일에 대해 뭔가 알지도 모른다는 예상이었 다. 그러나 둘 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은색의 이상한 생물체? 그런 허접한 녀석은 몰라. 먹혔다가 도로 뱉어졌 다면 샤워나 하고 오시지.” 리오는 별 관심 없이 심야방송에 눈을 돌렸다. 그나마 관심을 쏟아준 사람 은 역시 슈렌이었다. 레니와 루이체가 잠들어있는 것을 확인한 슈렌은 일단 간단한 마법진을 그 려 정사각형의 넓은 판을 만들었다. 오묘한 빛으로 이뤄진 그 판은 마치 문 처럼 지크 앞에 놓였다. “그것을 지나가라.” “지나가라고?” 지크는 손가락을 그 마법의 판 쪽으로 뻗었다. 빛에 닿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았다. 차원문과는 달리 판에 들어간 손가락은 반대편으 로 튀어나왔다. “이게 뭐야? 신기한데?” “음…….” 슈렌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어찌하면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까 고민하는 것이었다. “이 세계의 단층촬영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원래 존재하지 말아야 할 육체적 이상이 있으면 곧바로 잡아주지. 아무런 부작용이 없는 마법이니 어서 지나가봐.” “좋아.” 지크는 가볍게 그 판을 지나갔다. 슈렌은 판을 작게 축소한 뒤 그것을 손바닥에 놓고 가만히 지켜봤다. 이윽 고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육체적 이상은 없으니 안심해도 좋아. 식사한 것 말고는 그 어떤 것도 네 몸속에 침투한 흔적은 없어.” “그래? 그럼 정신적으로는?” “우리들의 정신방어력은 꽤 높은 수준이기 때문에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정신을 지배당하거나 침해당할 염려는 거의 없어.” “오오, 그렇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지크는 한시름 놓은 듯 길게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 았다. “이상 없다는 건 좋은 말이지만 기분은 더럽군. 도대체 어떤 녀석이기에 날 삼켰을까? 난 맛도 없을 텐데?” 리오는 시선만 잠깐 돌렸을 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슈렌은 차를 들며 계속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은색의 이상한 생물체… 생물체라……. 흡수당했을 때의 기분은 어땠나? ” “기분? 굳이 말하자면 진한 기름 속에 빠진 느낌이랄까? 아무튼 미끌미끌 하고 불쾌했어.” “…….” 좀 더 생각을 해본 슈렌은 곧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생명체나 종족 중에 그런 생물은 없어.” “그럼 내가 본 건 뭔데? 헛것이야?” 지크는 실소를 지으며 따졌다. 평소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 그였지만 오늘 당한 것이 분하긴 분했던 모양이었다. 슈렌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진정시켰다. “흥분하지 마. 그런다고 해서 없는 지식이 생기진 않아. 일단 쉬어라.” “흠, 알았어. 화내서 미안해.” 지크는 슈렌과 오른손을 마주친 뒤 자기 방으로 가기 위해 재킷을 들었다. 그때 심야방송에서 명랑한 음악소리와 함께 TV애니메이션이 시작되었다. 그 런 것을 싫어하는 리오는 중얼대며 채널을 바꿨지만 그때 지크의 머릿속에 서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저건 바이칼이 좋아하던 거잖아? 그러고 보니 리오녀석에게 물어보는 걸 잊었네?’ 그는 발길을 멈추고 리오를 바라봤다. “어이, 리오. 혹시 너 바이칼 레비턴스라고 알아?” 미식축구에 채널을 맞춘 리오는 화면에 눈을 둔 채 말했다. “뭐하는 놈인데?” “자기 말로는 서룡족 제왕이라는데, 꽤 나쁜 놈이야. 그 녀석 때문에 전기 구이 통닭이 될 뻔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사 한마디 없이 사라졌지.” 그러자 리오는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서룡족 제왕? 후후, 그런 대단한 놈은 만나본 적 없어. 난 용족 같이 비 린내 나는 족속하고는 전혀 인연 없으니 안심해.” “그래? 하지만 그 녀석은 널 알고 있던데…….” “아무튼 난 몰라. 아쉬운 놈이 나중에 찾아오던가 하겠지.” 리오는 딱 잘라 말했다. 지크는 이상하다 생각하며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 다음날, 기자들을 피할 겸 새벽 5시 무렵에 출근한 처크는 지부장실에 들어 가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커피기계를 돌렸다. 잠을 세 시간 밖에 못잔 탓인지 항상 맑고 또렷했던 그의 눈동자는 안개가 낀 듯 흐릿했다. 그는 몇 번이고 눈을 비벼 정신을 차려보려 했으니 오래 가진 못했다. 컴퓨터에서 메일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벨소리가 들렸다. 처크는 하품을 크 게 하며 의자에 앉아 전자메일을 열었다. 그 직후 처크의 잠이 반쯤 깼다. BSP 중앙본부에서 보낸 지부장 전용의 보 안메일이었다. “이건 뭔가? 이 사람들이 또 무슨 일로 날 괴롭히려고 이러지?” 처크는 투덜대며 보안해제용 ID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의 남은 잠이 깬 것은 메일의 내용을 반 쯤 읽었을 때였다. “임시 치프 오퍼레이터? 루이의 자리를 잠시 대신해서 미확인 생물체 사건 을 처리할 거라고? 아침부터 이게 무슨 소리야? 사건은 어제 일어났단 말이 야!” 나머지 내용을 읽어보니 북미지역에선 어제 나타난 은색 생물체로 인해 이 미 몇 건의 사고가 있었던 듯 했다. 사상자가 없고 물질적 피해밖에 없어서 당분간 공개하지 않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가? 어째서 임시 치프 오퍼레이터까지 보내 면서 난리를 치는 걸까?” 인상을 쓴 처크는 메일에 첨부된 대원 프로필 파일을 열었다. “어디보자… 피엘 플레포스? 성씨 한번 특이하군. 특별한 경력은 없고… 어라? 수학공식시험 최고 기록자라고? 그것도 1000점 만점을 맞았잖아? 게 다가 해킹테스트 점수도 5000점 만점이네?” 처크는 혀를 내둘렀다. 기록상으로만 보자면 루이보다도 훨씬 더 나은 인재 였다. “아니, 이런 인재가 있는데 내가 왜 몰랐지? 내가 요즘 그렇게 정신이 없 었나?” 당황해하는 그의 귀에 커피기계의 신호음이 들렸다. 그는 불을 붙이지 않은 시거를 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은 흘러 오전 브리핑 시간이 돌아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근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맞춘 지크는 허겁지겁 회의 실 안으로 들어왔다. “늦을 뻔 했습니다!” 지크는 처크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그의 미소는 오래 가지 못했다. 처크의 옆에 서있는 낯선 여성 때문이었다. 연한 황색의 단발머리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칼로 벤 듯한 날카로운 라 인이 인상적인 헤어스타일이었다. 테가 없는 직사각형 렌즈의 안경과 주황색의 치프 오퍼레이터용 제복은 같 은 복장을 한 루이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항상 싸늘한 분위기의 루이 와 달리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깔려있었다. 그녀는 지크를 보자마자 빙긋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살짝 움직였다. 그녀의 인사에 조금 당황한 지크는 뒷머리를 매만지며 어설픈 목례를 했다. 자리에 앉은 지크는 옆에 있는 케빈을 팔꿈치로 툭툭 건드렸다. “저 여자는 누구야?” 그의 속삭임에 케빈은 팔짱을 낀 채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몰라. 와보니까 있더라고.” “그래?” 지크는 동료들을 돌아봤으나 그렌 이하 류페이까지, 모든 동료들이 자기들 도 모른다는 반응을 보였다. 지크의 시선은 루이가 앉은 쪽에서 멈췄다. ‘어라, 쟤는 또 왜 저래?’ 루이는 뭔가 신경질이 난 듯 상기된 얼굴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노 트북으로 어떤 자료를 찾는 눈치였지만 번번이 실패하는지 그녀의 눈썹은 리듬을 타고 일정하게 꿈틀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처크는 코 밖으로 긴 숨을 내쉰 뒤 그녀를 불렀 다. “루이, 오전 브리핑을 시작하세.” “…….” “루이?” 루이는 흠칫 놀라 처크를 바라봤다. 처크는 씩 웃었고 그녀는 동그란 테의 안경을 고쳐 쓰며 자세를 바로 했다. “죄송합니다, 지부장님. 그럼 오전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지크 스나이 퍼 소위는 도착하셨습니까?” 그러자 지크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루이를 바라봤다. “어이, 오늘 뭐 잘못 먹은 거라도 있어? 왜 그래?” “아…….” 지크가 온 것을 그제야 확인한 루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자신을 질책했다. 처크는 헛기침을 하여 시선을 모은 뒤 옆에 서있는 여성에게 오른손을 폈 다. “브리핑에 앞서 제군들에게 소개할 사람이 있다. BSP중앙본부에서 파견한 임시 치프 오퍼레이터, 피엘 플레포스양이다.” 처크의 소개를 받은 그녀, 피엘 플레포스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피엘 플레포스라고 합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여러분께 좋은 인상을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프로필은 잠시 후 여러분의 PDA에 전송될 것입 니다.” “음, 오느라 수고 많았네. BSP, 대한민국 수도방위지부에 온 것을 환영하 네.” 처크는 정식으로 그녀와 인사를 나눴다. 곧이어 전투요원 각자의 PDA에서 신호음이 났다. 모두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PDA를 꺼내 피엘의 프로필을 확인했다. 가장 관심을 가진 사람은 지크였다. 그는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불 가사의한 기운 때문에 오래간만에 호기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나이는 29세에… 러시아 출신이라고? 러시아에 플레포스라는 성씨가 있었 나? 아무튼… 우와! BSP 수학공식시험에서 1000점 만점을 받았잖아! 게다가 해킹테스트에서 5000점 만점이고! 그 밖에 치러진 비 전투 시험에서 모조리 만점이야! 사람인가?’ 지크는 멍한 얼굴로 피엘을 바라봤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의 테스트 성적을 본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특히 류페이는 감격한 표정이었다. “와아, 대단하세요! 어떻게 수학공식시험에서 만점을 받으실 수가 있으셨 죠? 마지막 문제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관련된 것인데 말이에요!” “운이 좋았지요.” 피엘은 빙긋 웃기만 했다. 한편 그렌은 그녀의 프로필을 의심했다. 도저히 인간이 낸 성적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적인 성적을 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피엘 플레포스라 는 이름은 그렌의 기억 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함부로 의심할 수는 없었다. 만약 해킹을 통해 BSP내부에 침입한 존 재라고 한다면 루이가 당장에 알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는 뜨거운 입김 만 씩씩대며 뿜어낼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처크는 손뼉을 두어 번 쳐서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자, 그럼 피엘양이 우리 지부에 온 이유를 말하겠다. 어제 저녁에 일어났 던 사건, 모두 기억하나?” “은색 물컹이 말씀이시죠?” 지크의 말에 처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다. 그럼 피엘, 설명해주겠나?” “예. 모두 메인 스크린을 주목해 주십시오. 루이씨, 잠시 노트북을 빌릴 수 있을까요?” “아, 네.” 루이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녀의 노트북을 대신 잡은 피엘은 호주머니에서 데이터 카드를 꺼내 노트북에 삽입했다. “사건의 발단은 정확히 1개월 하고도 8일 전입니다. 미합중국 네바다 공군 기지에서 일어난 작은 사고로 인해 그곳에 있던 실험용 슈퍼컴퓨터가 실종 되었습니다. 그 슈퍼컴퓨터는 최신의 바이오테크놀로지를 바탕으로 만들어 진 전략무기로서, 평상시엔 일정한 형태가 없는 부정형의 모습을 하고 있지 만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자신의 형태를 바꿀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상 수도관이나 하수도관을 통해 목표가 되는 상대방 건물 및 컴퓨터 시스템에 투입되어 모든 데이터를 통째로 빼낸 뒤 문제없이 탈출할 수 있는 것입니 다.” 그렌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럼 어제 우리가 봤던 미확인 생물체가 바로 그 슈퍼컴퓨터라는 말씀입 니까?” “그렇습니다. 정식명칭은 AX-D001, 코드네임은 도플겡어(Doppelganger)입 니다.” 그런 초병기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BSP요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걱정을 드러냈다. 리진이 손을 들었다. “저어, 그 도플겡어라는 병기가 BG까지 조종할 수 있나요? 어제 보니까 BG 들을 데리고 다니던데요.” “그것은 BG가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그렇습니다. 그 생물체는 BG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유기체일 뿐입니다. 현재 확인된 바로, 처음에 일어난 사고로 인해 도플겡어는 생물학적 데이터 까지 수집할 수 있도록 업그레이드되어 있습니다. 그로 인해 재료만 있다면 얼마든지 자신이 수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똑같은 생명체를 즉시 복제할 수 있습니다. 복제뿐만 아니라 강화 및 보완까지 가능하지요.”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지크에게로 쏠렸다. 미확인 생물체, 아니 도 플겡어에게 지크가 먹히는 것을 똑똑히 본 그들이었다. 리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가 또 하나 늘어난다는 말씀인가요?” 피엘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인간의 복제는 아직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조사는 필요하겠지요. ” “…….” 모두의 얼굴엔 짙은 그늘이 들어찼다. 리진이 말한 바보 이야기는 물론 농담이었다. 모든 전투요원들은 지크의 놀 라운 능력을 그대로 가진 존재가 적이 되어 나타났을 때 벌어질 상황을 걱 정하고 있었다. “정말 큰 문제로군.” 시거를 문 처크는 고민스레 불을 댕겼다. 그에 따라 같이 담배를 문 케빈은 손을 슬그머니 들었다. “도플겡어를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BSP들에겐 꽤 중요한 질문이었다. 피엘은 가뿐히 대답했다. “도플겡어 자체엔 전투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방어능력이 뛰어나서 총이나 칼 같은 무기는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뚫려도 재생되고 베여도 다 시 하나가 됩니다. 섭씨 수천 도 이상의 고열이나 물질을 완전히 분해 시킬 정도의 초진동 공격이 아니면 도플겡어를 침묵시킬 수 없습니다.” 그 말에 모든 이들이 의아해했다. 류페이가 대표로 손을 들고 질문했다. “그런 엄청난 소재가 네바다 공군기지 산하의 연구소에서 개발됐다는 말씀 이신가요?” 피엘은 빙긋 웃었다. “미합중국 정부에선 도플겡어를 이루는 소재에 대해 전혀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과 도플겡어에 대한 간단한 데이터 만을 넘겨줬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도플겡어의 처리를 부탁하고 있으니 우 리 BSP로선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 진 집단도 우리뿐이니 어쩔 수 없겠죠?” 말끝을 올리는 그녀의 모습은 나이에 맞지 않게 귀여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그녀의 이미지에 어울렸다. 루이의 접근하기 힘든 차디찬 분위기와는 영 딴 판이었다.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도플겡어의 진정한 위험은 자신이 모은 생물체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더욱 발전된 생물체를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재료 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어제 겪으셨던 다수의 BG는 장난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고로, 우리 BSP의 1차 목적은 도플겡어의 데이터 수집을 차 단하는 것이 됩니다.” “저기요.” 이번엔 리진이 손을 들었다. 피엘은 손을 살짝 뻗어 그녀에게 발언권을 주 었다. “예, 말씀하십시오.” “다 좋은데요, 어떻게 데이터 수집을 차단하나요? 매트로 서울에 있는 모 든 생명체를 밖으로 이주시킬 수는 없잖아요.” 그에 대한 대답은 처크가 대신했다. “뻔하잖아. 도플겡어를 잡아서 가둬야지, 뭐.” “…….” 모두가 할 말을 잃은 가운데 피엘은 들릴 듯 말 듯 조그맣게 박수를 쳤다. “훌륭하십니다, 지부장님. 현명하신 답변입니다.” “그, 그런가? 고맙군.” 처크는 알다가도 모를 여자라 생각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어서 피엘의 마지막 당부가 이어졌다. “도플겡어는 노린다 해서 잡힐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께서는 일단 평상 시와 같이 활동하여 주시되, 만약 도플겡어를 발견하시게 된다면 목표에게 위협을 주지 마시고 조용히 추적해 주시길 바랍니다. 만약 위협적인 행동을 하신다면 도플겡어는 그 자리에서 추적이 불가능한 도주방법을 선택할 것입 니다.” 어제 도플겡어가 배수구를 통해 탈출한 것을 기억하는 모두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처크가 말했다. “그럼 평상시대로 순찰을 시작한다. 도플겡어 사건 외엔 특별한 사건이 없 으니 모든 사항은 어제와 같다. 마지막으로… 질문 있나?” 그의 목에서 다음 말이 나올 찰나, 류페이가 다시 손을 번쩍 들었다. “저어, 질문 있습니다!” “음.” 처크는 말해보라는 듯 턱을 움직였다. 류페이는 루이를 잠깐 바라본 뒤 말 했다. “피엘 치프께서 계시는 동안엔 루이 치프께선 무엇을 하시나요?” 질문을 들은 처크는 잠시 턱을 괴고 생각하다가 흘리듯 말했다. “피엘 치프가 이번 일에 대한 권한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으니… 루이는 당분간 그녀의 보조 역할을 하겠지.” 루이의 어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꿈틀했다. 처크는 그것을 봤음에도 불구 하고 얘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피엘 치프가 우리 지부에 빨리 적응을 해준다면 메인 오퍼레이터 들의 관리만을 맡겠지. 물론 두고 봐야 아는 얘기겠지만. 자, 더 이상 질문 이 없다면 오전 브리핑을 마치겠다. 제군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자리에서 일어난 처크는 빠른 걸음으로 브리핑 룸을 나섰다. 반면 항상 그 와 함께 나가던 루이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방금 전 처크가 한 말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자존심에 금이 갔군.’ 지크는 속으로 혀를 찼다. 리진이 그를 두드리며 루이를 어떻게 해보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괜히 건드렸다가는 그녀의 상 처가 더 벌어진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지크 스나이퍼 소위?” 피엘이 그를 불렀다. 지크는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시죠?” “잠시 저와 시간을 내주실 수 있습니까? 도플겡어와 접촉하신 만큼 조사가 필요합니다.” “조사요?” “오래 걸리진 않으니 안심하십시오. 그럼 본부 옥상에서 뵙겠습니다.” “옥상이요?” 지크는 황당했지만 피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쳇, 할 수 없지. 하루 종일 찜찜하게 다니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 어이, 리진.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어.” “알았어.” 지크는 파트너에게 손을 건들건들 흔들며 브리핑 룸을 나갔다. 자리에 도로 앉은 리진은 고개를 갸웃댔다. “참 이상하네? 그렌 선배님, 피엘 플레포스라는 이름, 혹시 들어보셨나요? 저런 대단한 경력의 소유자라면 우리가 모를 리 없잖아요?” 류페이와 순찰에 대한 얘기를 나누느라 아직 나가지 못했던 그렌은 동의하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하지만 문제되는 사항이 없잖아? 본부에서 지금껏 공개를 하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고…….” “너무 완벽해요!” 순간 루이가 브리핑 룸의 테이블을 손으로 펑 치며 일어났다. “뭐, 뭐가?” 그렌이 당황하여 묻자 루이는 안경 밑으로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모든 데이터가 정상이에요! 해킹을 한 흔적도, BSP 중앙본부에서 데이터 를 조작한 흔적도 없어요! 수학공식시험에 응시한 증거도, 해킹테스트에 응 시한 증거도 모두 존재해요! 심지어는 언제 어디서 출생하고, 어느 유치원 을 졸업해서 어느 대학을 나왔다는 것까지 모두!” “그럼 우리가 몰랐나보지.” 그렌은 힘없이 웃었다. 케빈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상 없는 거잖소? 루이 치프가 그렇게 신경을 쓸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느낌이 이상해요! 잘 짜여진 소설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요! ” “…….” 그것은 루이만이 느끼는 게 아니었다. 그렌과 케빈 역시 그와 비슷한 생각 을 하고 있었다. “그럼 테스트를 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치프.” 여자 치고는 낮고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태까지 팔짱만 끼고 있던 챠 오였다. “테스트?” “아, 그래요! 테스트에요! 해킹 대결을 해보시는 게 어때요, 루이 치프?” 류페이가 기대감이 잔뜩 실린 표정으로 일어나 말했다. 턱 밑에 검지를 댄 채 잠시 생각하던 루이는 곧 씩 웃었다. “호오, 테스트. 후후후.” 그녀 특유의 의미심장한 웃음을 들은 모두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 다. 같은 시간, 옥상에서 피엘과 만난 지크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녀 에게 설렁설렁 접근했다. “여기서 조사를 어떻게 한단 말이에요? 기구도 없잖아요?” 피엘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조사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을 이곳으로 부른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입니 다.” “다른 이유요?” 지크의 한쪽 눈썹이 불쑥 올라갔다. 그때 그녀의 양쪽으로 큰 키의 두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이 세계의 차림을 한 리오와 슈렌이었다. 지크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어, 너희들 뭐야! 집이랑 루이체는 어쩌고 여기에 왔어!” 리오는 바지에서 검지를 빼들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엔 카드 키가 끼워져 있었다. “집은 잠갔고 루이체는 저 밑에서 기다리라고 했지. 쉴만한 장소가 있더 군.” 지크는 본부 옆의 작은 공원을 떠올렸다. “아, 거기? 그런데 왜 여기에 온 거야? 그 여자랑은 무슨 관계고!” “그럼 소개하지.” 슈렌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선글라스를 벗었다. 안경다리를 입술로 접어 정 장 포켓에 끼운 그는 곧 피엘을 향해 정중히 손을 뻗었다. “이 분의 성함은 피엘 플레포스. 주신, 하이볼크님의 직속비서이자 우리들 의 관리자다.” “뭐라고?” 지크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사람처럼 그대로 굳어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슈렌의 소개대로 주신의 직속비서이며 주신전의 비서관들이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임무를 만들어 리오, 슈렌 등에 게 전달해주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임무를 위해 직접 내려온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피엘은 미안함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잠시 속인 것은 사과드리죠. 하지만 도플겡어와 관련된 일은 제가 직접 나서야 할 만큼 중요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네?” 지크는 즉시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제가 도플겡어라고 이름을 지은 그 부정형 컴퓨터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닙 니다. 그것은 ‘아네라’라고 불리는 초 고위 종족이 창조한 존재입니다.” “아네라요?” “그렇습니다. 아네라는 신계와 인간계를 포함한 그 어떤 세계에도 포함되 지 않는 독립적 소수 종족이며, 사실상 법(法)이란 개념의 최고위 종족입니 다. 덧붙여서 그들이 가진 기술력은 모든 종족 중 최고입니다.” “그, 그래요? 그럼 강한가요?” 지크의 버릇이 또다시 발동되자 리오는 실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피엘은 웃으며 대답했다. “매우 강합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적절치 않은 이야기이니 나중에 다 시 말씀드리지요.” “음, 좋으실 대로.” 지크는 아쉬운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도플겡어는 재료만 존재한다면 모든 생명체와 기계를 복제할 수 있습니다. 복제뿐만 아니라 조합 및 강화도 가능하지요. 브리핑 때는 인간의 복제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복제 및 생산이 가능합니다.” “예?” 지크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럼 또 하나의 제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피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심하셔도 됩니다. 여러분의 육체는 하이볼크님의 힘으로 보호되기 때문에 그 어떤 수단을 사용한다 해도 근본적인 복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 서 멀쩡히 튕겨 나오신 것이죠.” “그래요? 그럼 원래는 어떻게 되는데요?” “수집 및 조사를 위해 원자단위로 분해 됩니다. 한 마디로 먼지가 되는 것 이죠.” “…….” 순간 등골이 서늘해진 지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피엘이 말했다. “도플겡어는 한번 조사한 생물체와 같은 종은 또다시 건드리지 않습니다. 더 이상 인간이 분해 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BG라고 불리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종이 다양하고 유전자적으로 강력합니다. 더욱이 조합 및 대량생산에 딱 맞는 신체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태까지 지크 스나 이퍼님이 상대한 BG와는 차원이 다른 괴물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아네라족의 정보에 따르면 도플겡어가 복제 및 생산한 생물체는 도플겡어가 파괴되면 그 즉시 죽거나 분해 됩니다. 그리고 도플겡어는 자기방어 외엔 생물병기를 생산하지 않습니다. 도플겡어의 존재 이유가 생명체의 데이터 수집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무기라면 우리들이 얘기하고 있는 시간에도 공장처럼 생물병기들을 찍어내고 있겠지 요.” “음…….” 지크는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그런 녀석이 왜 이 세계에 나타난 거죠? 위험하잖아요?” “원래 도플겡어는 아네라 족이 이 세계에만 있는 특이한 생명체, 즉 BG에 대해서 연구하기 위해 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데이터 수집 작업 도중 도플 겡어가 미지의 존재와 접촉하면서 폭주, 아네라의 제어를 벗어나게 됐습니 다.” “미지의 존재요?” “그렇습니다. BSP에선 그 존재를 MOTHER라고 부르더군요.” “머더?” 지크로선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게 뭔데요?” “죄송하지만 주신계에서도 MOTHER에 대해선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 니다.” “음…….” 다시 고민하던 지크는 이내 양손으로 머리를 파팍 긁었다. 고민을 포기할 때 자주 보이는 그의 버릇이었다. “좋아요, 그럼 어떻게 녀석을 없애죠?”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던 피엘은 활짝 웃었다. “원래는 지크님과 제가 처리해야 하지만…….” 그녀는 도중 말끝을 흐리며 옆에 선 두 남자의 등판을 살며시 쳤다. “이 두 분께서 저에게 아무런 보고도 없이 이 세계에 놀러 오신 덕분에 제 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 지크는 할 말을 잃은 듯 리오와 슈렌을 번갈아 쳐다봤다. 리오는 멋쩍은 듯 볼을 긁적였다. “떡 팔러 왔다가 할머니 업어준 격이라고.” “흠.” 슈렌은 다른 곳에 눈을 돌린 채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지크는 씁쓸히 웃었다. “너희도 운이 어지간히 없구나.” “더럽지.” 리오 역시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자아, 그럼 여러분?” 피엘은 손바닥을 한번 마주치며 빙긋 웃었다. 마치 유치원 선생이 아이들을 부르는 모습과도 같았다. “여러분께선 평소대로 활동해주시면 됩니다. 단, 저의 지시가 있을 때는 지체 없이 움직여 주십시오. 만약 실수로 인해 일이 실패한다면 저는 원칙 대로 주신께 리오, 슈렌님의 무단이탈을 보고할 것입니다. 하이볼크님과 함 께 반성의 시간을 보내고 싶진 않으시겠죠?” 그러자 리오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아, 난 사양하겠어. 절대로. “음.” 슈렌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그렇게 위축되는 것을 처음 본 지크는 하이볼크라는 존재가 뭔가 대 단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수고해 주십시오.” 피엘은 밝게 웃었다. 그것으로 얘기는 끝났다. 리오와 슈렌은 루이체가 있는 곳으로 곧장 사라졌 다. 지크와 피엘은 옥상에서 내려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가는 동안 지크는 이것저것을 물었다. 처음 나온 질문은 ‘반성의 시간’에 대한 것이었다. “아니, 그 반성의 시간이라는 게 뭐기에 저 녀석들이 얼어붙는 거죠? 혹시 그 할아버지가 사람을 때리나요?” 피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굳이 이 세계에 맞춰 비교를 하자면… 조용한 예배당에서 맛없는 식빵으로 끼니를 때우고, 추가로 재미없는 덕담을 하루 종일 듣는 거라고 할 수 있겠죠. 주신께선 말재주가 별로 없으시거든요.” “그, 그렇군요.” 지크는 두려움에 휩싸인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런데 BSP엔 어떻게 잠입하신 거예요? 중앙본부는 나름대로 보안이 철통같은 곳인데?” “후후, 인간계의 컴퓨터는 주신계에서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단순한 계산 기나 다름없죠. 없는 사람을 만드는 것 정도는 간단하답니다. 사람의 경우 는 집단최면술을 사용하면 괜찮죠.” “오오.” 지크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엔 피엘이 그에게 물었다. “지금까지의 생활은 어떠시죠? 불편하시거나 후회되는 일은 없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후회되는 일은 없냐는 질문만큼은 지크로선 그냥 넘기기 힘 들었다. 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후회한다고 하면 어쩔 건데요?” 그 말 속에 숨은 뜻을 쉽게 이해한 피엘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실언입니다. 죄송합니다.” 지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괜찮아요. 지금은 꽤 신나는 일이라 생각하니까요. 그럼 들키지 말아 요.” 그는 엄지를 내민 뒤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피엘은 들릴 듯 말 듯한 엘리베이터 소음을 감상하듯 눈을 감았다. “신나는 일… 그래요, 절대로 절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남자처럼 약 해지면 안돼요.” 신호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눈을 뜬 피엘은 지적인 걸음걸이로 그 안에 탔다. ※※※ 공원 벤치에 가만히 앉아있던 루이체는 움찔하며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리 오와 슈렌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었다. “이제 오셨어요?” 루이체는 폴짝 뛰어 벤치에서 내려왔다. “음.” 리오는 아이의 머리를 만져주며 간단히 대답했다. 반면 슈렌은 묵묵했다. 두 남자를 이리저리 바라보던 루이체는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아. 피엘 누님을 만나고 왔거든.” 리오는 떫은 투로 말했다. 그에 대해 전혀 몰랐던 루이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피엘 비서장님께서 이곳에 계시다고요? 그분께서 인간계엔 무슨 일로 오 셨는데요?” 루이체는 피엘이 직접 움직이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리오는 표정을 유지한 채 대답했다. “뻔하잖아, 나쁜 일이지. 놀러왔는데 피곤하게 생겼어. 젠장, 이럴 줄 알 았으면 주신계에서 가만히 있을 걸 그랬군. 하여튼 이 동네만 오면 귀찮아 진다니까?” 리오는 옆에 떨어진 알루미늄 캔을 발로 띄운 뒤 쓰레기통에 차 넣었다. 얼 마나 강하게 찼는지 뭔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루이체는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그녀는 왠지 나서기 힘든 지금의 분위기 가 힘들었는지 풀이 죽은 얼굴로 다른 곳을 돌아봤다. “어이, 루이체.” “네?” 루이체는 조심스레 리오를 돌아봤다. 그는 아이를 별 감정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까 들었다시피 나와 슈렌은 이제부터 좀 바빠질 거야. 꽤 귀찮은 녀석 이 이 세계에 내려와 있거든. 그러니 앞으로 너와 놀아줄 시간은 없어.” “네…….” 루이체는 말끝을 흐렸다. 사실 그들은 본부만 잠깐 들렀다가 지크가 소개해준 실내놀이공원으로 직행 하려던 참이었다. 그럴 계획이 없었다면 루이체는 레니와 함께 있었을 것이 다. 루이체는 최대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아쉬움은 역력했다. 처음 놀이공원에 간다는 설렘으로 잔뜩 부푼 와중에 그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으니 루이체가 아쉬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자, 가자.” 리오는 루이체를 번쩍 들어 자신의 한쪽 어깨에 올려놨다. 리오의 반대편 어깨를 손으로 짚은 아이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디로요?” “어디긴, 놀이공원이지. 앞으로 놀 시간 없다고 했잖아. 그러니 오늘은 신 나게 놀자고.” “정말이요? 하지만 피엘님께서 직접 오실 정도라면 급한 일일 텐데, 괜찮 으시겠어요?” “괜찮아. 지크 녀석이 있잖아.” 그래도 루이체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일이 더 커지면 어쩌 나 하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리오와 슈렌은 더 이상 불편한 말은 하지 않고 일정을 강행했다. 루이체는 몰랐지만 둘은 단순히 그녀와 놀기 위해서 놀이동산에 가는 게 아 니었다. 그 내면엔 슈렌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있었다. 놀이공원에 도착한 셋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몰린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위치변화와 갑작스런 중력변화를 이용해 스릴을 불러오는 각종 놀이기구는 리오, 슈렌에게 큰 재미를 주지 못했다. 특히 시끄러운 분위기를 싫어하는 슈렌에겐 상당한 고역이었다. 하지만 루이체가 좋아하니 그들도 어쩔 수 없 었다. 하지만 열기구와 비슷하게 만든 실내 관람시설은 좋은 반응을 얻었다. 비록 천장에 붙어 다니는 것에 불과했지만 밑으로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 은 그들에게 꽤나 볼만한 구경거리인 듯 했다. 리오는 뭔가를 털어버리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에 맞춰 붉은 장발도 크게 너울댔다. “사람, 사람… 사람들. 그래, 영역이 달라.” 그가 중얼댔다. 슈렌에게 안겨 경치를 구경하던 루이체는 그에게 고개를 돌 렸다. “영역이 다르다니요?” “살고 있는 영역 말이야. 사람들 속에 뒤섞여있는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벽은 항상 존재하지. 내가 항상 피를 흘리며 싸워도,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절망해도 저들의 생활은 변함이 없어. 난 겉모습만이 존재할 뿐, 그들 어디 에도 존재하지 않아.” 리오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천천히 내뱉으며 마저 말했다. “지금 당장은 날 좋아하고 영웅취급 한다 해도 그 시간은 짧아. 곧바로 자 신들의 인생에 치여 나를 잊어버리게 되지. 그렇다면 싸우는 보람이 있을까 ? 나에게 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데 말이야.” 상당히 쓸쓸한 느낌이 들었지만 루이체에겐 이해하기 힘든, 매우 아득한 얘 기했다. 가장 근접한 존재인 슈렌은 그저 묵묵히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남는 게 있었어. 나를 기억해주고, 나를 좋아했던 모든 이들의 모 습이 나에게 그대로 남아있다는 걸 어느 순간 알게 됐지. 비록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런 기억을 수집하는 것도 꽤 좋을 것 같더라. 어떻게 생각해?” 루이체는 빙긋 웃었다. “저는 오빠의 모습을 오랫동안 기억해 드릴게요. 저는 천사라서 오래 사니 까요.” “…….” 리오가 바라는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웃었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그럼 약속.” 루이체 역시 손가락을 내밀어 굳게 걸었다. “약속.” “그래, 꼭 지키는 거야.” 리오는 루이체의 볼에 키스를 해준 뒤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구에서 내린 리오들은 근처에서 열리고 있는 피아노 회사의 이벤트에 눈 을 돌렸다. 이벤트의 주 내용은 피아노의 특징과 성능을 설명하는 것, 그리고 구경꾼들 에게 직접 피아노를 만지게 해주는 것 등이었다. 하지만 그리 신통치는 않 아 보였다. “남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 리오는 피식 웃으며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슈렌은 그와 반대방향으로 걸었 다. 그는 무슨 생각인지 루이체와 함께 시연대로 가고 있었다. 둘과 떨어져버린 리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갈 리가 없지.” 업체 관계자와 도우미, 그리고 이벤트를 구경하기 위해 온 구경꾼들은 시연 대 위에 올라가는 슈렌의 모습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와 함께 있는 루이체 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우물쭈물했지만 슈렌은 그 어디에 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저 피아노에만 넋을 두고 있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그는 선글라스를 벗고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려놨다. 간 단히 건반을 두드려본 그는 만족한 듯 옅게 미소를 지었다. 왠지 그림처럼 보였다. 순백색의 피아노와 검은 정장, 그리고 결이 좋은 파 란 장발은 일부러 맞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어울렸다. 사람들 은 연예인을 동원한 깜짝 쇼가 아니냐며 수군댔으나 확신하는 사람은 아무 도 없었다. 이윽고, 부드러운 선율이 이벤트 현장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잔잔하면서도 평화로운, 하지만 깊이가 있는 곡이었다. 그에 걸맞게 곡을 연주하는 슈렌의 모습도 벽난로의 모닥불처럼 은은하면서 강렬했다. 그의 두 손은 어느 영역을 초월하고 있었다. 손이 아니라 은반 위에서 움직 이는 한 쌍의 남녀처럼 보였다. 어깨의 움직임, 손목의 움직임, 건반 사이 를 부드럽게 오고가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이미 피아노를 두드리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와 대화하듯 건반을 어루만지는 남자의 예술적인 모습에 남녀노 소 할 것 없이 매료되어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연주가 끝났다. 슈렌은 다시 선글라스를 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이체를 비롯한 주위의 모든 이들이 퇴장하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재촉하듯 루이체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루이체는 오빠를 따르지 않 았다. 아이는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박수를 쳤다. 그것을 시작으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오직 한 사람, 리오만이 박수를 보내지 않았다. 그는 근처의 벽에 기댄 채 슈렌과 루이체가 오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붙잡는 업체 관계자와 사인을 부탁하는 인파들을 겨우 뚫고 나온 슈 렌은 리오와 합류하자마자 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를 따라오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사라진 그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던 사람들은 아예 절망했다. 신기하게도 그를 찍 은 장면만이 심한 노이즈에 걸리거나 아예 검게 나와 남길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리오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놀이공원 외부에 마련된 인공 섬으로 달려갔 다. 인공호수 가운데에 놓인 그 섬은 중앙에 작은 성을 두어 아이들이 좋아할만 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물론 그보다 더 대단하고 환상적인 광경을 매일 같이 본 리오와 슈렌, 루이체에겐 그리 큰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벤치에 루이체를 앉힌 리오는 숨을 가볍게 내쉬며 슈렌을 쳐다봤다.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피아노랑 말만 보면 왜 사람이 변해?” “…….” 슈렌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루이체가 그 에게 느낀 의외의 감동은 가시지 않았다. 의자에서 내려온 루이체는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환호를 보냈다. “왜요, 정말 대단했어요! 슈렌 오빠가 그렇게 피아노를 잘 치실 줄은 몰랐 어요!” “음, 잘 칠 뿐만 아니라 정말 좋아하거든.” 리오는 루이체 옆에 앉으며 말했다. “겉보기엔 그렇지 않은 것 같아도 슈렌은 우리들 중에서 가장 화끈하게 취 미를 즐기는 사람이야.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취미는 별 볼일 없는데, 슈렌만큼은 승마랑 피아노를 전문가 이상으로 즐기지.” “그렇군요! 그럼 리오 오빠는 취미가 뭐예요?” “내 취미?” 가장 자신 없는 질문을 접한 리오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 다. “생각해보니 새로운 자연풍경을 접할 때마다 기분이 좋았던 것 같아. 그럼 여행이 취미인가? 확답은 못해주겠군.” “네? 하지만 지크 오빠는 취미가 다양하던데요?” “그거야 이 세계가 워낙 놀기 좋으니까 그렇지. 기계문명의 발달로만 따지 면 이곳이 최고거든. 게다가 인간 이상의 고등생물이나 인간을 주식으로 하 는 대형동물들이 드물고, 덕분에 개인용도의 살상무기를 함부로 지니지 못 하기 때문에 인구도 많아. 덕분에 놀이문화도 엄청나게 다양하지.” “그래요?” 지금 있는 세계와 주신계 외엔 가본 적이 없는 루이체에겐 매우 생소한 이 야기였다. 근처에서 모이를 먹고 있던 하얀 비둘기들이 뭔가에 놀란 듯 한꺼번에 날아 올랐다. 루이체는 그 모습에 감탄했지만 리오와 슈렌은 비둘기들이 있던 장 소를 돌아봤다. 그곳엔 순은색의 인간형 물체가 호수의 물을 뚝뚝 흘리며 서있었다. 어제 지크가 없애지 못한 바로 그 미확인 생물체, 도플겡어였다. 새들이 루이체와 슈렌, 리오 사이에 다시 모여 앉았다. 본능적으로 의지가 되는 존재를 찾는 듯 했다. 리오는 씩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슈렌의 계산은 확실하다니까?” “네?” 뒤늦게 도플겡어를 목격한 루이체의 얼굴은 금세 얼어붙었다. 사람들이 웅성대며 모여들었다. 각종 깜짝 이벤트가 자주 일어나는 놀이공 원인 만큼 도플겡어 역시 그런 이벤트 중에 하나로 생각한 것이다. 관광객 중 한 명의 애완견이 주인의 품에서 빠져나와 도플겡어 앞으로 달려 갔다. 자신의 애완견이 평소보다 시끄럽게 짖어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 완견의 주인과 그의 가족들은 그저 웃기만 했다. 도플겡어의 머리 쪽에서 눈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 외눈으로 애완견을 잠시 바라보던 도플겡어는 이어서 몸을 풀고 있는 리오에게 눈을 돌렸다. 잠시 후, 도플겡어의 한쪽 팔이 훌쩍 늘어나 애완견을 통째로 삼켰다. 뱀에 게 삼켜진 새처럼 꿈틀대던 애완견의 형체는 마치 소화가 되듯 팔 중간치에 서 후루룩 사라졌다. “으, 으아악!” 애완견의 가족들이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사람들은 식인동물에게 쫓기듯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한 채 사방으로 도망쳤다. 하체에 이어 상체를 풀던 리오는 마무리로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중얼댔 다. “주신계 천사는 한 번도 맛을 못 봤겠지? 아무튼 찾아다닐 수고를 덜어줘 서 고맙다.” 그의 눈동자에 붉은 빛이 감돌았다. 살기에 반응한 새들이 다시금 후루룩 날아올랐다. 루이체는 하얀 비둘기들의 어지러운 모습과 흩날리는 깃털 때문에 눈을 제 대로 뜨지 못했다. 아이의 귀여운 손가락 사이로 리오의 모습이 보였다. 날아오르는 백색의 장막 사이에서 서있는 리오는 어느새 회색의 망토를 두 껍게 걸치고 있었다. 루이체는 마법과도 같은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때 슈렌의 팔이 그 녀의 몸을 휘감았다. “가자.” “네? 아악!” 슈렌은 루이체를 안은 채 그 자리에서 뛰었다. 그가 호수 중앙으로 뛰자 이 곳저곳에 숨어있던 모든 이들이 경악했지만 슈렌은 물새처럼 가볍게 수면을 차고 호수 건너편 숲으로 사라졌다. 도플겡어는 즉시 슈렌이 간 쪽으로 도약했다. 모든 신경을 미확인 생명체에게 집중했던 탓일까. 은색의 액체기계는 자신 의 뒤쪽으로 떠오르는 붉은 그림자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내 인사가 아직 안 끝났는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듯 전면에 위치해있던 도플겡어의 눈이 사라지 고 뒤통수 쪽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생기 없이 반짝이는 그 눈동자에 비춰진 것은 무섭게 꺾여 들어오는 보라색 섬광이었다. 폭음이 터진 직후, 도플겡어는 파리채에 맞은 곤충처럼 바닥에 곤두박질쳤 다. 얼마나 강하게 부딪혔는지 지상엔 도플겡어의 두 다리만이 나와 있었 다. 슈렌과 함께 숲 속에 숨어있던 루이체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터트렸다. “우와, 리오 오빠는 강하시군요! 아빠께 붉은 머리의 사신에 대한 소문은 들었는데, 그 이상이에요!” “음.” 하지만 슈렌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전투에 몰두했을 때의 리오가 어떻게 변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바닥에 착지한 리오는 마사지를 하듯 손에 든 보라색 검으로 자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넌 위험에 빠지면 보디가드를 만든다며? 어떤 쓰레기를 만들어낼지 모르 겠지만 한번 해봐라. 그런 희망 따위, 박살을 내주지.” 리오는 웃었다. 새빨간 안광과 함께 대량의 살기를 뿜는 그의 모습은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보다도 더욱 사악해보였다. 그가 그런 모습을 보일 줄은 전혀 몰랐던 루이체는 놀란 얼굴로 침을 꼴깍 삼켰다. 도플겡어가 꿈틀했다. 하늘을 향해 뻗어있던 도플겡어의 다리가 한데 뭉쳐져 상반신을 이루었다. 그와 반대로 땅에 처박혀있던 몸체가 좌우로 나뉘어졌다. 형체가 없으니 사 람처럼 제대로 일어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팔이 뻗어 나오지 않았다. 물론 공격을 위한 준비는 절대 아니었다. 리오의 검이 어깨 위에서 멈춘 순간, 도플겡어의 육체에서 은색 실선이 무 수히 뿜어졌다. 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튀어나온 그 실선들은 모조리 호 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윽고 실선들이 꿀떡대며 움직였다. 뭔가를 흡입하고 있는지 그 실선 속으 로 방추형의 물체들이 줄줄이 빨려 올라갔다. 그것을 본 슈렌의 미간이 좁아졌다. “물고기?”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지금 도플겡어는 놀이공원의 사육사를 기절시키기 충분한 숫자의 물고기들을 호수에서 빨아들이고 있었다. 빨아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도플겡어의 몸뚱이도 불어났다. 터트리고 싶 은 마음이 들 정도로 빵빵해진 그 부정형의 컴퓨터는 리오보다 두 배는 커 진 육체를 자랑하듯 뒤뚱대며 뒤로 물러났다. “…….” 묵묵히 그 과정을 지켜보던 리오는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댔다. 뭔가 이상해서였다. ‘저 녀석은 바보인가?’ 그의 시선은 곳곳에 숨어있는 사람들에게 차례로 옮겨갔다. ‘부피로 봤을 때 물고기를 빨아들이는 것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빨아들 이는 게 더 실용적일 텐데? 그러고 보니 아까 나타날 때도 강아지만 빨아들 였잖아? 저 녀석, 인간은 재료로 쓰지 않는 건가?’ 그의 생각이 끝날 무렵 도플겡어의 복부가 좌우로 커다랗게 벌어졌다. 그 속에서 괴성과 함께 두 마리의 생물체가 튀어나왔다. 몸길이는 적어도 3미터였다. 개의 머리에 몸 전체를 덮은 물고기의 비늘, 마치 칼처럼 1미터 가량 비어져 나온 손톱, 그리고 BG의 육체를 가진 진짜 괴물이었다. 꼬리를 시작으로 몸 전체를 흔들어 양수(羊水)를 털어낸 괴물은 곧 리오에 게 눈을 돌렸다. “쿠오오!” 두 마리는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했다. 숨어있던 사람들은 더욱 공포 에 질렸으나 리오는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쌍둥이인가? 이거 축하해야겠군. 받은 보험금으로 한 턱 내는 건 어때?” 말이 끝나자마자 괴물 두 마리 모두가 리오에게 몸을 날렸다. 괴물의 손톱이 리오의 보라색 검을 강타했다. 피할 수 있었던 공격을 일부 러 막은 리오는 움찔하며 빠르게 물러났다. 상대는 의외의 힘을 가지고 있 었다. ‘힘은 꽤 쓸만한데? 예전의 지크 녀석 이상이잖아?’ 다른 한 마리가 리오의 허리 쪽을 파고들어왔다. 힘을 시험할 필요가 없어 진 리오는 여유 있게 몸을 비켜 상대의 공격을 피했다. 그는 회피와 동시에 괴물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렸다. 거의 차기에 가까운 그 공격에 중심을 잃은 괴물은 놀이공원의 깔끔한 바닥에 그대로 엎어졌다. “맷집은 어떠신가?” 치기 딱 좋은 상황을 만든 리오는 장작을 패듯 괴물의 몸통을 검으로 내리 쳤다. 그리고 경쾌한 쇳소리가 창공에 울려 퍼졌다. “크윽!” 리오는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물러났다. 그의 검은 소리굽쇠처럼 강렬히 진동하고 있었다. ‘보통비늘이 아니잖아!’ 괴물의 몸을 감싼 비늘은 물고기 비늘과는 전혀 틀렸다. 리오 자신이 지금 까지 부숴본 갑옷 중에서도 가장 단단한 축에 들 정도였다. 그의 검과 오른손, 오른팔 전체가 징 하며 울렸다. 그런 틈을 괴물들이 놓 칠 리가 없었다. 그들은 무지막지한 속도로 공격을 퍼부었고 리오는 손의 감각이 회복될 때까지 이러 저리 몸을 피했다. 확실히 빠르긴 했다. 그러나 리오에게 부담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인지 리오는 피하면서도 도플겡어를 살폈다. 자신이 이러고 있는 동안에 도 플겡어가 도망친다면 루이체를 일부러 사람 많은 곳에 데려온 보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신기하게도 도플겡어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드러낸 채 리오 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움직임을 기록하는 건가? 하긴, 아네라의 기계라면 충분히 가능하겠 지. 그렇다면 질질 끌 이유는 없다!’ 리오는 편한 왼손에 검을 바꿔 들었다. “헙!” 그의 몸이 팽이처럼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그로 인해 괴물의 공격은 또 다시 빗나가고 말았다. 리오는 회전을 그대로 살려 괴물 한 마리의 목을 노렸다. 움직임을 위해 그 나마 비늘이 얇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둔탁한 소음이 터지고 괴물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리오의 표정은 그리 시원하지 않았다. 그의 보라색 검은 목의 절반 밖에 들어가지 않았다. 예상대로 비늘이 얇긴 했지만 그래도 뚫기엔 쉽지 않은 수준이었다. 괴물의 목을 파고들던 힘이 갑자기 사라졌다. 리오가 검을 완전히 놓은 것 이다. “하앗!” 기합과 동시에 괴물의 후두부에 리오의 돌려차기가 작렬했다. 괴물은 바닥 에 엎어졌지만 검은 여전히 괴물의 목에 박혀 있었다. 이것은 계산대로였다. 리오는 주먹으로 괴물의 목 아래를 강타했다. 검을 억지로 빼는 것보다는 반대편에서 충격을 가해 검을 더욱 밀어 넣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판단 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돌이 깨지는 파열음과 함께 괴물의 목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것으로 숨이 끊긴 괴물은 프라이팬 위에 놓인 버터처럼 지글지글 끓어 바닥 위로 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다른 괴물은 미처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뒤늦게 내달렸지만 상대는 이미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리오의 망토가 크게 펄럭였다. 그의 기가 눈에 보일 정도로 농도가 짙어진 채 전신에서 뿜어졌다. “후우.” 깊은 호흡에 맞춰 기운이 검에 몰렸다. 실체화 한 기가 워낙 두꺼워서 검 위에 거푸집이 씌워진 것처럼 보였다. 리오는 그것으로 자신에게 달려오는 괴물을 후려쳤다. 강력한 파워에 밀려 날아간 괴물은 간이음식점 몇 개를 부순 뒤 화장실 건물 안으로 밀려들어갔 다. 기를 다시 몸속으로 되돌린 리오는 눈을 감고 오른손을 뻗었다. 갈색의 가죽 아대로 감싸인 그의 팔뚝위에 적색의 고리들이 입체적으로 떠 올랐다. 고리들은 하나같이 알 수 없는 글자와 문양으로 가득했다. 리오는 금고의 다이얼을 맞추듯 손을 좌우로 돌리며 고리들을 이리저리 짜 맞췄다. 그것을 본 루이체는 경악했다. “저건 화염계 고위주문, ‘파이젠델’이잖아요! 저 정도의 주문이라면 저 놀이공원의 절반이 날아가고 말아요!” 그녀가 당황한 것은 주문의 강력함 뿐만이 아니었다. 리오의 손바닥은 실내 놀이공원의 중심부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나 슈렌은 고개를 저었다. “저건 파이어 크래이브야.” “네?” “가속성(加屬性) 공격술, 즉 마법검 전용 마법이야. 파이젠델을 변형시킨 것이지.” 그의 설명에 루이체는 또다시 놀랐다. “마법검이요? 하지만 파이젠델 클래스의 마법을 검에 단독으로 거는 것은 …….” 루이체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려다가 다시 삼켰다. 리오가 어떤 존재인지 잠시 잊고 있던 그녀였다. 슈렌은 여동생의 긴 머리를 만져주며 말했다. “리오의 검은 완전 무속성 금속인 락토레리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마법 검에 제격이지. 그 어떠한 마법검 기술도 100% 소화할 수 있어. 그래서 마 법검은 그에게 딱 맞는 기술이야. 그 전까진 이곳저곳을 돌며 스스로 익힌 어설픈 마법검을 썼지만 지금은 오딘님에게 정식으로 배운 상태지.” “락토레리움이라면… 저 보라색 검이 바로 5신검 중에 하나인 디바이너인 가요?” “음.” 슈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렵, 리오가 짜 맞추던 마법진의 다이얼이 맞아떨어졌다. 커다란 화염 과 함께 붉은 빛을 낸 마법진은 리오의 팔에 흡수되어 문신처럼 맺혔다. 팔과 손에서 흐르는 빛은 찬란했지만 눈을 뜬 리오의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 져 있었다. ‘주문완성속도가 너무 느려! 빌어먹을, 이러면 어지간히 강한 녀석들에겐 쓸 수 없단 말이야!’ 그는 자신을 책망하며 주문이 맺힌 오른손을 검에 가져갔다. 주문이 옮아간 리오의 검, 디바이너의 표면에 붉은 색의 글자가 떠오르고 화염이 맺혔다. 그 사이 리오에게 맞아 날아간 괴물은 터진 수돗물을 맞으며 건물더미 밖으 로 나왔다. 심하게 비틀거리는 것으로 봐서 육체적 충격은 아직 가시지 않은 듯 했다. 그 증거로 리오에게 맞은 복부의 비늘이 심하게 떨어져나가 있었다. 목표를 포착한 리오의 눈이 또다시 붉게 빛났다. “아무튼… 없애버리겠다!” 리오는 검을 오른손에 바꿔들고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달려간다고 하기보다는 땅 위를 미끄러져간다는 표현이 더 옳았다. 상대의 맹렬한 돌격에 괴물은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다. 도플겡어 역시 가 만히 있었다. 보라색 검의 끝이 괴물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비늘이 떨어져 나간 곳을 정 확히 노린 공격이었다. 몸 전체에 전해지는 극심한 고통에 괴물은 심한 발악을 했지만 리오는 냉정 히 검을 양손에 쥐고 팔을 들어올렸다. 수직으로 들린 검을 타고 괴물의 혈액이 흘러내렸다. 보통의 포유류와 같은 붉은 색의 피였다. 핏방울이 리오의 안면에 떨어졌다. 그는 가뭄에 비를 만난 농부처럼 만족스 레 웃었다. “후후, 하하하! 꺼져버려!” 검에 쓰인 붉은 글자들이 새하얗게 빛났다. 곧이어 거대한 폭발이 검 끝에서 일어났다. 폭음이 터지고 하얀 색의 충격 파가 원형으로 퍼졌다. 슈렌은 급히 루이체를 품에 안고 등을 돌렸다. 폭발로 인해 발생한 후폭풍이 놀이공원 전체를 덮쳤다. 폭발이 지면과 떨어 진 곳에서, 그것도 창공 방향으로 터졌기에 물이 밀리고 유리창이 터지는 것에 그쳤지만 만약 리오가 지면 위에서 터트렸다면 옆에 있는 실내 놀이공 원까지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사건을 마친 리오는 도플겡어에게 눈을 돌렸다. “다음은 너다.” 그러나 도플겡어는 재빨리 액체로 변해 배수구로 피했다. 잠시 그쪽을 바라 보던 리오는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슬그머니 검을 접었다. “이러니까 위협을 주지 말고 조용히 추격하라 이건가? 흠, 성격에 안 맞는 군.” 그때 인공 섬과 실내놀이공원을 잇는 출구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전투경찰들과 BSP들이었다. 그 무리의 가장 앞쪽에 선 남자는 공교롭게도 지크였다. “어이, 어디야! 그 은색 물컹이는 어디 있는 거야!” 리오는 변함없이 활기찬 형제의 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흘렸다. ‘녀석, 오긴 오는군.’ 한편, 비웃는 그를 발견한 지크는 움찔하며 그 자리에 멈췄다. “리… 아니, 레드 원!” 그를 따라오던 리진과 챠오, 케빈 등은 레드 원이라는 말에 돌이 된 듯 굳 게 멈췄다. 레드 원의 전설을 알고 있는 전경들 역시 그 자리에 얼어붙었 다. ‘저 녀석, 루이체는 어디다 두고 여기서 뭐하는 거야!’ 지크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가 머뭇거리는 동안 리진이 용기를 내어 리오에게 총을 겨눴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세요! 당신을 기물파손 및 사적인 시설에 대한 무단침입 혐의로 체포합니다!” 그러자 리오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기물파손은 모르겠지만 무단침입은 아니야. 여기 영수증 있다고.” “…….” 리오가 꺼내 보인 것은 실내놀이공원의 영수증, 즉 입장권의 일부분이 확실 했다. 그로 인해 당황한 리진은 일순간 할 말을 잃었다. 리오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없었으면 이곳 사람들 전부 그 은색 괴물에게 먹혔을 걸? 소문에 듣 자하니 당신들 어제 그 녀석이랑 만났다며?” “은색 괴물? 어이, 도플겡어가 이곳에 나타났단 말이오?” 소총을 어깨에 올리고 있던 케빈이 물었다. 리오는 보란 듯 사방에 숨어있 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못 믿겠으면 물어보시지.” 경찰과 BSP 덕분에 조금이나마 머리를 내밀고 있던 사람들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참, 보고하기 힘들게 만드는군.” 케빈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 사이 지크는 전음을 통해 리오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루이체는 어찌됐어? 너희들이랑 같이 온 거 아냐?’ ‘슈렌이 보호하고 있지.’ ‘그래? 그럼 다행이네. 너희들이 있는 곳에 도플겡어가 나타날 줄은 몰랐 어.’ 그러자 리오는 씩 웃었다. ‘그렇진 않아. 나타날 걸 예상하고 있었지’ ‘뭐?’ 지크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무슨 말이야? 예상했다니?’ ‘흠, 듣지 못했나? 도플겡어는 생명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게 1차 목 적이야. 일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생명체를 1차 목표로 설정하지. 그 녀 석, 주신계 천사에 대한 데이터는 전혀 수집해본 적 없을걸?’ ‘뭐라고? 그럼 너, 루이체를 미끼로 쓴 거야?’ 지크는 리오에게 모든 것을 국한시키듯이 말했다. 사실과 달랐지만 리오는 그것을 쾌히 받아들였다. ‘말하자면 그렇지.’ 지크는 기가 막혔다. ‘아무리 녀석이 위험하다고 해도 동생을 미끼로 쓰는 오빠가 어디 있어! 그러다가 루이체가 진짜로 먹혀서 분해 되면 어쩌려고 그래!’ ‘그걸 막을 자신이 있어서 이렇게 한 거야. 게다가 루이체의 보호는 슈렌 이 맡고 있지. 그 녀석이 너나 나처럼 실수를 할 것 같나?’ ‘…….’ ‘과정보다는 결과가 더 중요할 때도 있는 법이지.’ 순간 지크의 목에 핏대가 솟았다.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그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전음을 잊고 실제로 소리치며 리오에게 달려들었 다. 리진과 챠오, 케빈은 혹시 하는 생각을 가졌다. 지크와 리오, 아니 레드 원이 처음 붙었을 때 그 결과는 지크의 완패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지크는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있었다. 덕분에 이번만큼은 지크가 형편없이 쓰러지진 않을 거란 기대를 했 다. 하지만 지크는 동료들의 머리를 넘어 호수 속으로 떨어졌다. 기대가 여지없 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발차기 한 방으로 지크를 날린 리오는 수면으로 돌아가는 물보라를 보며 고 개를 저었다. “거기서 머리나 식혀라.” 이윽고, 흙먼지와 함께 리오의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케빈이 전경들에게 시민들의 안전 확보에 대해 지시를 내리는 동안 리진과 챠오는 지크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호수 쪽으로 향했다. 호수 속에선 공기방울이 보글보글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 던 리진은 멍한 눈으로 챠오에게 물었다. “죽진 않았겠지?” “음.” 챠오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짧게 대답했다. 잠시 후 거품이 사라지고 지크의 형체가 보였다. 해달처럼 배를 위로 한 채 둥실 떠오른 그는 힘이 빠진 얼굴로 하늘을 쳐다봤다. 그는 리오에게 맞은 것보다 리오와 슈렌이 루이체를 이용했다는 사실에 충 격을 받은 상태였다. 리오는 그렇다 쳐도 슈렌까지 그랬기에 그는 배신감마 저 느끼고 있었다. ‘그 녀석들이 똑똑한 거야, 아니면 내가 바보인 거야?’ 고민하던 그때, 리진이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 “어이, 지크! 살아있어?” “응.” “그럼 그러지 말고 빨리 올라와. 여기 물은 그리 깨끗한 편이 아니란 말이 야.” “…….” 지크는 리진을 흘끔 바라봤다. “한 가지 물어봐도 돼?” “응? 뭔데?” “네가 꼭 잡으려고 하는 악당이 있는데, 그 악당을 잡기 위해선 네 동생을 미끼로 써야만 하거든? 넌 할 수 있어?” “동생? 미진이 말이야?”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진은 고개를 갸웃대며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대답했다. “언니의 입장에선 못하겠지. 세상에 어느 누가 동생을 미끼로 쓸 수 있겠 어?” “그렇지?” 지크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러나 리진의 대답은 끝난 게 아니었다. “그래도 BSP의 입장이라면 해야 할지도 몰라.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그 악당들이 어디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 가급적 빨리 잡는 게 좋지. 물론 미진이는 무사해야겠지만.” “…….” 지크의 표정은 차츰 굳어졌다. 그의 사정을 알 턱이 없는 리진은 순진한 얼 굴로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누가 루이체를 노린데?” “아냐, 아무것도.” 한숨쉬듯 대답한 지크는 천천히 배영을 하며 호수를 빠져나왔다. BSP와 전경들이 뒤처리를 하는 동안 리오와 슈렌, 루이체는 근처의 아이스 크림 가게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리오, 슈렌은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음료수를 마셨지만 루이체의 얼굴은 좋 지 않았다. 리오가 지크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 때문이었다. 동생의 그런 표정을 본 리오는 스트로우를 입에서 떼었다. “지크 때문에 그래?” 루이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전혀 마주치지 않는 것을 봐선 빨간 머리의 오빠를 피하려는 것 같았다. 리오는 턱을 괸 채 가만히 생각했다. 미끼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히 말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몇 번 보지 못할 동생이니 미움을 받아도 상관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 은색 물체는 널 노리고 있어.” “네?” 루이체는 움찔했다. 리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슈렌이 먼저 해버린 탓 이다. 슈렌은 우선 도플겡어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해주었다. 그에 대해 전혀 모 르는 상태에서 충격을 받는 것보다는 나을 게 분명했다. 리오는 얘기를 해주고 있는 슈렌을 가만히 지켜봤다. 복잡한 루이체의 얼굴 역시 놓치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뭔가 결심을 한 듯 쓴 웃음을 지었다. 설명을 끝낸 슈렌은 이어서 자신이 짰던 계획을 솔직히 말했다. “지금 이곳엔 도플겡어가 데이터를 수집하지 못한 생명체가 있어. 바로 주 신계 천사야.” 그 주신계 천사가 자신을 지칭한다는 사실을 모를 루이체가 아니었다. 아이 가 움찔한 것을 본 슈렌은 굳은 마음으로 얘기를 계속했다. “우린 도플겡어가 언젠가는 너를 노리고 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오늘 없애기로 한 거지.” “맞아.” 그때, 리오가 타이밍 좋게 그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좋게 말하자면 피해가 더 발생하기 전에 막으려 했다는 거고, 나쁘게 말 하자면 좋은 미끼가 있을 때 해보자는 거였어. 아, 계획은 슈렌이 짠 거지 만 실행은 내가 한 거야. 아까 봤지? 난 원래 그런 놈이거든.” “…….” 루이체는 말이 없었다. 슈렌도 침묵을 지켰다. 계산을 하고 계획을 실행한 사람은 분명 슈렌 자신이었다. 그것을 밝혀서 리오를 변호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슈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어린 동생에게, 오늘 겨우 만나고 친해질 수 있었던 여동생에게 미 움 받을 각오를 한 자신의 형제를 무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리오가 다시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도 네가 도플겡어를 잡는 미끼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 좋 든 싫든 해야 돼. 아, 물론 걱정하지 마. 나와 슈렌이 옆에 있을 테니까. 네가 없으면 도플겡어를 잡기는 매우 힘들어지거든.” “…….” 루이체는 대답 없이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아이의 턱 아래로 눈물이 고여 떨어졌다. 그 속엔 진한 실망감과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리오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슈렌은 형제의 그 런 모습을 도저히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미안하다.’ 슈렌은 마음속으로 연거푸 그 말을 되뇌며 루이체를 달래주었다. 놀이공원에 갈 때와 집에 돌아갈 때는 그림이 많이 달랐다. 슈렌과 루이체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나란히 걸었으나 리오는 그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서 뒤를 따랐다. 리오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루이체가 의도한 상황이었다. 루이체는 아이 스크림가게를 나가자마자 슈렌을 잡고 길을 재촉했다. 이유를 아는 리오로 선 바짝 붙어 따라갈 이유가 없었다. 집에 돌아가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먼저 집에 와있던 레니는 리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루이체를 알 수 없 다는 듯이 쳐다봤지만 이유를 알기엔 너무도 막막했다. 저녁식사 시간에도 리오는 약속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비웠다. 루이 체는 리오를 단 한번도 찾지 않았고 슈렌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식사를 마친 후, 슈렌은 레니가 권하는 후식도 마다한 채 지크의 방에 올라 갔다. 힘없이 침대에 누운 그는 묵묵히 천장에 시선을 두었다. 만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교한 그의 코와 입술에선 흔들림 없는 호흡 이 왕래했다. 하지만 그의 감정은 불안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왜 말하지 않았나, 슈리메이어.’ 루이체를 이용하자는 계획을 짜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로 한 사람은 슈렌, 자신이었다. 물론 아무리 슈렌이 냉정한 사람이라 해도 오늘 만난 의동생을 미끼로서 이 용할 만큼 각박하진 않았다. 피엘, 지크와 얘기를 끝내고 루이체에게 가기 전, 그는 리오에게 자신의 계 획을 말하고 조심스레 동의를 구했다. 만약 리오가 반대했다면 그는 즉시 계획을 거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오는 쾌히 동의했다. “좋아, 해보자. 네 예상대로라면 도플겡어인가 하는 녀석, 즉시 걸려들겠 지. 일이 의외로 빨리 끝나겠는데?” “음. 하지만 루이체와 지크가 이 일을 안다면…….” “괜찮아. 욕은 내가 먹을 테니까.” 그는 슈렌의 어깨를 두드려 그를 안심시켰다. “네가 미움을 받는 것보다 내가 받는 게 더 어울리지 않겠어? 너도 알잖아 ? 주신계 천사들이 나만 보면 도망 다니는 걸 말이야. 루이체도 언젠가는 날 피할 거야. 그 시간이 좀 더 빨리 오는 것뿐이겠지. 자, 우선 놀이공원 인가 하는 곳부터 가자.” 리오는 그렇게 말하며 밝게 웃었다. 회상을 끝낸 슈렌은 눈을 감았다. 몸도 뒤척여봤다. 그러나 그때 본 형제의 얼굴은 눈앞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좋을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만약 지금, 지크와 루이체에게 오늘 벌어진 일에 대해 정직하게 말한다면 리오에 대한 오해는 풀리고 자신이 비난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 다면 리오의 각오를 무시하는 처사가 되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대로라면 리오는 지크와 루이체에게 인간적으로 영원히 배척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의 고민이 심화되려 하는 순간, 지크가 방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리오 녀석, 어디 있어!” “…….” “어디 있냐고! 이 녀석, 오늘 날 진짜 화나게 만들었어!” 지크는 예상대로 펄펄 뛰었다. 얼굴을 보니 농담은 아닌 듯 했다. 슈렌은 묵묵히 일어나 앉았다. 지크는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무리 그 물컹이가 루이체를 노린다 해도 대놓 고 이용하는 건 너무하잖아! 그 녀석, 정말 제정신인 거야? 아직도 미쳐 날 뛰는 거야?” “아니.” 슈렌의 조용한 대답은 지크를 더욱 어이없게 만들었다. “무슨 소리야! 정신이 제대로 박힌 놈이 어째서 그런 짓을 해!” “그럼 더 좋은 방법이 있나?” “뭐?” 지크의 얼굴이 확 펴졌다. 평소와 달리 제대로 눈을 뜬 슈렌은 자못 엄숙한 얼굴로 형제를 바라봤다. “도플겡어의 목적은 불분명해. 무엇을 위해서 활동하는지, 어째서 인간만 큼은 건들지 않는지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상대를 넌 어떻게 잡을 거지?” “그, 그건…….” 지크는 대답하지 못했다. 슈렌이 다시 말했다. “루이체를 미끼로 쓴 건 확실히 도덕적으로는 나쁜 일이지만 도플겡어를 잡기 위해선 최선의 방법이야. 만약 오늘 도적적인 방법으로 도플겡어를 놔 뒀다가 내일 네 동료 중에 한 명이 도플겡어 때문에 죽으면 그땐 어떻게 할 거지? 땅을 치면서 후회할 건가, 아니면 자신의 가족이 아니니 괜찮다고 할 건가?” “하지만 루이체가 위험하잖아!” “그래, 위험하지. 하지만 나중에 도플겡어가 만들어낸 극악의 생명체에게 위협을 받는 사람들에 비해선 덜 위험해.” “…….” 침대에서 일어난 슈렌은 지크의 책상 위에 놓인 주전자를 들어 컵에 물을 따랐다. 맑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그는 물 한 잔을 더 따르며 말했다. “네 입장에선 네가 옳아. 그리고 리오 입장에선 리오가 옳지. 차이는 누가 더 효율적인가야. 만약 네가 리오보다 더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면 네 방식대로 도플겡어를 잡아봐. 방법이 있다면 말이지.” 가만히 서서 생각하던 지크는 이내 주먹을 꾹 쥐었다. “좋아, 알았어. 그럼 난 내 방식대로 할 거야! 내가 그 물컹이 녀석을 잡 겠어, 반드시!” 지크는 거칠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다시 혼자가 된 슈렌은 물을 마시며 자신의 감정을 추슬렀다. 그가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리오는 홀로 밤거리를 거닐었다. 표정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러나 분위기만큼은 리오 자신조차도 이해 할 수 없을 정도로 침울했다. 아무리 걸어도 분위기가 바뀌지 않았다. 취미에 맞지 않게 나이트클럽에 가 봤지만 여전했다. 그는 자리를 잡고 병맥주를 주문했다. 시대에 맞지 않게 오프너를 이용해야 만 하는 맥주였으나 리오는 먼지 날리듯 엄지로 가볍게 병뚜껑을 날렸다. 체질상 그의 몸엔 알코올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가 굳이 취하려고 한다 면 모를까, 평상시의 그에게 술이란 것은 그냥 쓴맛 나는 음료에 불과했다. 머리를 금색으로 물들인 여성 한 명이 그의 앞을 지나갔다. 리오 자신은 신 경 쓰지 않았지만 그녀는 박물관의 전시품을 감상하듯 일부러 걸음을 늦추 고 시선을 돌렸다. 그의 준수한 외모와 붉은 장발, 소매가 없는 검은색T 밖으로 보이는 적동색 의 근육질, 맥주를 병째로 마시는 터프한 모습 등은 접근하기 곤란할 정도 로 반항적이면서 섹시했다. 감탄이 절로 날 수준의 남자를 오랜만에 목격한 여성은 의도적으로 그의 앞 자리에 앉았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 봐요? 오빠 분위기가 영 안 좋네?” 리오는 그녀를 흘끔 쳐다봤다. 짙은 화장의 얼굴보다 금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니 속이 더 가라 앉았다. ‘루이체의 머리는 더 예뻤지.’ 그 말을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내뱉은 리오는 잊으려는 듯 병을 다시 기울 였다. 분위기 파악을 못한 여성은 슬금슬금 엉덩이를 움직여 그의 옆으로 바짝 붙 었다. “직업이 뭐예요? 회사원? 모델? 아니면 연예인? 음, 모델이겠다. 연예인 중에서 오빠 같은 사람은 본적 없거든. 오늘 시간 많아요?” “…….” “그런데, 이 머리는 어디서 염색했어요? 정말 멋있네?” 그녀는 손으로 리오의 머리를 빙빙 꼬았다. 리오는 피식 웃으며 병을 내려놨다. “어이.” “왜요?” 리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여성의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얼굴을 최대한 가까이 하며 물었다. “넌 남을 이용하는 게 어떤 거라고 생각해?” “이용이요? 나쁠 건 없죠. 그 사람한테 해가 되지 않는다면 좋은 거잖아요 ? 뭐, 해가 된다고 해도 인연 끊으면 그만이죠.” “…….” 그의 얼굴이 아래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여성은 참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하 면서도 그의 두꺼운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그 순간 리오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후후, 그렇지. 인연 끊으면 그만이지.” 그는 여성의 금발을 손으로 확 감싸 쥐었다. 워낙에 기습적으로 머리채를 잡힌 여성은 비명을 지르며 팔을 휘저어댔다. 그 소리에 놀란 주위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쪽에 눈을 돌렸다. 리오는 그대로 여성을 바닥에 굴렸다. 그리고는 남은 맥주를 그녀의 머리 위에 부어버렸다. “다음부터는 눈치를 좀 보고 접근하시지? 난 지금 금발만 보면 피가 거꾸 로 솟거든? 자, 꺼져. 아니, 내가 사라져주지.” 리오는 병을 테이블 위에 툭 내던진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웬 덩치 좋은 남자가 리오의 어깨를 잡았다. “어이, 너 뭐야! 누군데 우리 집 분위기를 망쳐!” 하얀 양복에 촌스런 셔츠를 입은 그 남자는 리오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해 팔에 힘을 넣었다. 듬직한 덩치는 확실히 리오 이상이었다. 하지만 리오의 몸은 마치 전신주처 럼 돌아가지 않았다. 리오는 특유의 시니컬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돌아봤다. “기세 좋은데? 뭘 믿고 이러냐?” “뭐, 뭘 믿다니! 너, 우리 형님이 누구신지 알기나 해? 이 일대의 나이트 클럽은 전부 우리 형님 거야!” “아, 그래?” 순간 리오의 주먹이 남자의 복부에 꽂혔다. 우악스런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뚱이는 상부 시설을 뚫고 천장에 처박힌 뒤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리오는 의식을 잃은 남자의 머리를 발로 건드리며 웃었다. “난 네가 슈퍼맨 똘마니인 줄 알았지. 워낙 기세가 좋아서 겁이 나더라고. 그럼 푹 자라. 시간 늦었다.” 그가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사람들이 한꺼번에 좌우로 비켜섰다. 리오 는 자연스레 만들어진 길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쓸쓸히 길을 걷는 리오의 곁엔 서늘한 공기만이 있을 뿐이었다. ※※※ 아침이 됐어도 리오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이룬 지크는 짜증을 감춘 채 아침식사를 했다. 슈렌 역시 마찬가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러나 둘 다 하룻밤 샜다 해서 표시가 나는 존재는 아니었기에 레니와 루이체 모두 그들의 속을 알지 못했 다. 식사를 마친 지크는 밤사이에 생각했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루이체를 불 렀다. “어이, 루이체. 너 오빠랑 같이 출근할래?” 어제의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루이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눈을 크 게 떴다. “오빠랑? 왜?” 지크는 레니가 들을까 귓속말로 이유를 말했다. “은색 괴물이 널 노린다며. 오빠가 본부에서 널 지켜줄게. 이럴 땐 BSP본 부만큼 편한 데도 없다구.” “정말? 그럼 리진이 언니도, 챠오 언니도 볼 수 있는 거야?” “물론이지. 어때, 갈래? “음…….” 루이체는 부엌에서 차를 마시는 슈렌을 잠깐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래.” “좋아, 가자! 어이, 슈렌!” 슈렌이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자 지크는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루이체는 내가 맡을게. 그래도 되지?” “…….” 사실 불안했지만 어제 일을 생각하면 루이체가 리오와 같이 있으려고 하진 않을 것 같았다. 자신은 BSP본부 밖을 지키면 되고 본부 내부엔 피엘이 있 으니 그렇게 문제될 건 없어보였다. “좋아.” 그의 동의를 얻은 지크는 레니에게 간단히 둘러댄 뒤 루이체와 신나게 집을 나섰다. 헬멧은 물론 혹시 있을지도 모를 일을 대비해 무릎과 팔꿈치 패드 등도 마 련했다. 출근이 아니라 어디론가 드라이브를 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와 루이체가 떠난 뒤, 슈렌은 반쯤 남은 차를 모두 마시며 생각했다. ‘리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군.’ 만약 리오가 온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걱정을 하며 찻잔을 세척기 안 에 넣었다. 뒤에 루이체를 태운 덕분에 지크의 운전은 평소처럼 다이내믹하지 않고 조 심스러웠다. 그래서 원래 도착해야 할 시간보다 조금 늦은 그는 루이체를 안다시피 한 채 엘리베이터로 뛰었다. 각종 무기와 보호구로 중무장한 지하주차장 보안요원들은 지크가 웬 아이와 함께 오자 움찔하며 그를 막아섰다. “잠깐, 같이 오신 분은 누구십니까?” “내 동생인데요?” 그의 솔직한 대답에 요원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아시다시피 상부에 허가를 받지 않은 민간인은 로비 이외의 장소에 출입 할 수 없습니다. 허가를 받은 민간인이라 해도 오버서티원 이상은 올라갈 수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어? 이번 임무랑 관련된 사람인데도 그래요?” 요원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임무라고 하셨습니까? 정확히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는 지부장님께 그 어떤 지시도 받은 일이 없습니다.” 그러자 지크는 웃으며 그들의 어깨 보호구를 두드렸다. “이 애는 보호 및 경호대상이에요. 워낙에 긴급을 요하는 일이라서 제대로 보고가 들어가지 않았을 거예요. 못 믿겠으면 할아버지, 아니 지부장님께 말씀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연결하겠습니다.” 보안요원들은 CCTV의 카메라를 조작해 루이체의 얼굴을 화면에 잡았다. 그 런 뒤 절차대로 주관제실에 연락을 넣어 처크와의 직접 연결를 시도했다. 이윽고, 처크의 목소리가 그들의 PDA에서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예, 지금 지크 스나이퍼 소위께서 동생이라는 분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뭐라고? 동생? …루이체잖아! 어찌된 일이야!” 처크의 격앙된 목소리를 들은 지크와 루이체는 서로를 보며 킥킥 웃었다. 보안요원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예. 소위께선 보호 및 경호의 목적을 띄고 모셔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에 대한 지시를 부탁드립니다.” PDA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처크의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놈 바꿔.” “네? 아, 알겠습니다.” 요원은 즉시 자신의 PDA에 연결된 무선 통신기를 지크에게 건네주었다. BSP 에서 사용하는 PDA는 두 가지 방식으로 통화가 가능한데, 하나는 PDA에 입 을 대고 직접 통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선 통신기를 통해 하는 것이 다. 지크는 웬일인지 즉시 통화하지 않고 루이체에게 통신기를 넘겨주었다. 그것은 계략이었다. “자, 할아버지께 인사해.” “알았어.” 지크가 PDA를 쓰는 걸 몇 번 본 루이체는 그가 하던 대로 송수화기를 귀에 꽂았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응? 으, 응. 잘 지냈지?” “네, 보고 싶었어요.” 처크는 적잖이 당황한 듯 했다. 지크에게 욕을 실컷 하려던 참에 조카손녀 의 목소리가 들리니 아무리 그라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크는 루이체에게 윙크를 보냈다. 약속된 사인이었다. 루이체 역시 찡긋 윙크를 했다. “무슨 일로 온 거니? 할아버지가 너무 궁금하구나.” “사실은요, 어제 밖에서 놀다가 이상한 은색 괴물한테 쫓겼어요. 너무 놀 라고 무서워서 엄마한테는 말도 못했어요.” “뭐라고! 사실이냐!” “네. 할아버지, 저 아직도 무서워요.” 루이체의 가식적인 목소리와 현재 떠오른 과제인 도플겡어 사건은 처크의 판단력을 멋지게 흐려 놨다. 통신기 속의 처크는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 다. “알았으니 어서 들어와라! 보안요원 아저씨들 좀 바꿔주겠니?” “네.” 루이체는 요원들에게 통신기를 전해주었다. 그리고는 지크에게 엄지를 불쑥 내밀었다. 지크 역시 만족한 듯 엄지를 내밀었다. 처크의 지시를 받은 보안요원들은 루이체에게 임시 출입증을 발부해 주었 다. 그것으로 오누이의 작전은 일단 성공이었다. 루이체와 함께 브리핑 룸 앞에 도착한 지크는 출입구 근처의 벤치로 동생을 안내했다. 오는 도중에 산 음료수병을 아이에게 들려준 그는 머리를 만져주며 말했다. “잠깐 여기에 앉아있어. 할아버지한테 얘기하고 다시 나올게.” “빨리 나올 거지?” “헤헷, 물론이지.” 지크는 루이체의 볼에 키스한 뒤 출입구로 향했다. 그는 도중에 발길을 멈추고 동생을 돌아봤다. “너, 리오가 미워?” 루이체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버릇처럼 다리를 앞뒤로 흔들던 아이는 이윽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르겠어.” “응, 알았어.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지크는 브리핑 룸 안으로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루이체는 양 팔꿈치를 무릎 위에 놓은 후 턱을 괴었다. 손으로 볼을 감싼 아이는 말끔한 바닥을 보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창가 쪽으로 달려갔다. 창밖으로 매트로 서울의 복잡한 도심이 보였다. 강변 쪽 창문이 아니어서 아쉬웠는지 루이체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때, 창문 근처의 천장에서 듣기 싫은 금속성 마찰음이 새어나왔다. 그쪽 으로 고개를 돌린 루이체는 심하게 진동하는 스프링클러의 모습을 볼 수 있 었다. 한편, 브리핑 룸에 들어간 지크는 처크에게 한바탕 쓴 소리를 들어야만 했 다. “어제 루이체에게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 보고해야 할 거 아닌가! 가족 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떠나서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된 도플겡어와 관련된 일인데 어째서 아닌 밤중에 홍두께처럼 이러는 거야?” “루이체가 아침에 말한 걸 어떡하라고요. 그래서 부랴부랴 데려온 거예요. ” 지크의 변명을 들은 처크는 시거의 연기를 사납게 뿜어냈다. “흠, 골치 아프게 됐군. 좋아, 알았으니 루이체는 당분간 BSP본부에서 지 낼 수 있도록 배려해주지. 레니도 이 일을 아나?” “걱정하실까봐 말 못했어요. 천천히 얘기하려고요.” “음… 그래.” 처크는 웅얼대듯 말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피엘은 걱정스런 얼굴로 지크에게 물었다. “루이체는 지금 어디 있죠? 브리핑 룸 밖에 있나요?” “네. 벤치에서 잠깐 기다리라고 했는데요?” “뭐라고요?” 피엘이 높은 톤의 목소리를 내며 경악했다. “안됩니다, 복도는 위험합니다! 도플겡어는 스프링클러를 통해서도 얼마든 지 건물 내부에 침입할 수 있는……!” 순간, 브리핑 룸 밖에서 유리 파열음이 들렸다. 피엘은 무슨 일인지 안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멍하니 그녀를 보던 지크 는 테이블을 넘어 브리핑 룸을 뛰쳐나갔다. 강한 바람이 복도에 불고 있었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루이체가 가지고 있던 음료수병과 부서진 판유 리의 파편만이 굴러다닐 뿐이었다. 지크는 집으로 정신없이 오토바이를 몰았다. 그는 리오나 슈렌이 자신에게 나쁜 장난을 친 것이길 바랬다. 도플겡어와는 절대 연관시키고 싶지 않았다. ‘수집 및 조사를 위해 일단 원자단위로 분해 됩니다.’ 피엘의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와 어울려 루이체와 함께 했 던 지난 일주일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처럼 지나갔다. 집에 도착한 지크는 인도에 오토바이를 그냥 세우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현관에서 막 나가려던 슈렌과 마주쳤다. 슈렌은 백지장처럼 하얀 형제의 얼 굴을 보고 미간을 구겼다. “무슨 일이지?” 지크는 대답 없이 그의 옆으로 빠져 들어갔다. 거실엔 지금 막 들어온 리오가 소파에 앉아 쉬고 있었다. 옆엔 아무도 없었 다. 지크는 처절하게 외쳤다. “루이체, 루이체 어디 있어!” 가만히 TV를 보던 리오는 움찔하여 지크 쪽을 바라봤다. “네가 데려갔다며?” “…….” 일말의 가능성마저 꺼지자 지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꼴을 본 리오 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 자식!” 그는 지크의 목을 잡아 번쩍 들어올렸다. 반 쯤 정신이 나간 듯한 미소를 띤 리오는 초점을 잃은 지크의 눈동자를 무섭게 쏘아봤다. “우리 간단한 게임 하나 할까? 질문과 대답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 해! 루이체가 당했다고 대답하면 죽여 버리겠어!” 리오가 뿜어내는 분노와 살기는 가공할만했다. 이건 진짜였다. 그에게 이런 살기를 직접 맞은 일이 없던 지크는 전에 없이 겁에 질린 얼굴 로 말했다. “나, 난 루이체를 본부 복도에 앉혀놨었어. 조금만 기다리라고 한 다음에 음료수를 주고, 그리고…….” “이런!” 리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목이 졸린 지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슈렌은 리오를 말리려 했으나 그는 의외로 지크를 손쉽게 놔주었다. 눈을 감은 채 잠시 동안 자신을 추스른 리오는 바닥에 쓰러진 형제를 건너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구하러 간다.” “어, 어떻게? 루이체는 원자단위로 분해 됐을 거란 말이야!” “그래? 네가 봤나?” 지크는 입을 다물었다. 리오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여전히 잔인한, 하지만 평소와는 왠지 다 른 미소였다. “구할 수 없으면 원자가루라도 구해 오마.” 그의 회색의 망토 위로 붉은 장발이 흔들렸다. 지크는 밖으로 나가는 형제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13화 [Rescue] - 下 BSP본부의 옥상엔 맑은 날에도 꽤 강한 바람이 분다. 보통사람이라면 현기증이 날 정도이기 때문에 옥상 문이 개방되어 있어도 그곳에 올라가려는 직원은 거의 없다. 그런데 오늘은 세 명이 올라와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지크였다. 빨간 가죽재킷 소매를 팔뚝 위까지 걷어붙인 그의 단단한 육체는 전에 없이 긴장되어 있었다. 몇 시간 전, 그의 실수 아닌 실수로 인해 그의 동생인 루이체가 다른 차원 의 과학병기인 도플겡어에게 납치되고 말았다. 그것을 들은 그의 의형제, 리오는 자신이 찾겠다며 홀연히 사라졌다. 처음 일을 당했을 때보다는 심리적으로 많이 나아졌지만 동생에 대한 걱정 은 그를 끊임없이 초조하게 만들었다. 현재 그는 슈렌과 함께 피엘에게 현재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도플겡어에 대해 그녀만큼 자세히 알고 있는 이는 없기 때문이 었다. “24시간이라고요?” 지크는 희망 반, 절망 반이 섞인 목소리를 냈다. 24시간의 여유를 말한 장본인은 바람에 흔들리는 단발머리를 손으로 누른 채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선신계 천사는 몸 전체가 물질에 가까운, 정형화된 아스트랄 바디(Astral Body:영체(靈體))로 이루어집니다. 겉보기엔 인간과 같지만 전혀 다릅니다. 하지만 주신계 천사는 선신계 천사와 달리 육체구조가 인간에 가깝습니다. 다만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 즉 세포가 인간과 비교해서 훨씬 복잡하고 하 나하나가 영적인 결합을 하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분석하기가 매우 어렵습니 다. 분석하는 입장에선 수천, 수만 개의 영적 방어벽을 돌파하는 것과 마찬 가지가 되는 것이죠. 물론 분석이 아닌 물리적인 힘 앞에선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지만요.” 그녀의 설명은 자세했다. 슈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신계 천사라는 루이체의 특성 덕분에 완 전분해에 어느 정도 시간이 생길 것이라는 그의 예상이 맞아 떨어지는 순간 이었다. 그러나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인 지크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답답한 듯 두 손을 연신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이런, 좀 더 간단히 말해주세요!” 장소가 BSP본부의 옥상이니 더 크게 소리를 쳐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게다 가 이곳에 있는 사람은 피엘과 슈렌, 지크뿐이었다. 피엘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했다. “알았으니 진정하세요, 지크 스나이퍼님. 얘기는 간단합니다. 도플겡어가 루이체를 완전히 분해하여 분석하기 위해선 최소 24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 요합니다. 제가 아네라로부터 전달받은 도플겡어의 능력이 정확하고 루이체 의 정신능력이 제가 아는 바와 일치한다면 말이지요.” 피엘은 왼팔에 찬 시계를 들었다. “도플겡어가 루이체를 습득한 시간은 9시 무렵이었습니다. 현재 오전 11시 가 좀 넘었으니 이제 남은 시간은 약 21시간입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 도플 겡어를 찾아내야만 합니다. 그러나 제 말을 너무 과신하시지는 말아주십시 오. 24시간이라는 시간은 어디까지나 예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결코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찾아내야만 합니다.” 그러자 지크는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그녀의 말은 친절하고 정확했으나 작게나마 피어있던 지크의 희망을 꺼트리기에 충분했다. 그의 목에 다시금 핏대가 솟았다. “최대한 어떻게 빨리요! 위치 자체를 파악할 수 없는데 무슨 수로 찾아내 란 말이에요! 방법을 말씀해 주셔야죠!” 슈렌이 눈을 돌렸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팔짱을 풀지 않을 것 같던 그 미형(美形)의 남자는 팔 을 뻗어 형제의 어깨를 잡았다. “진정해. 너답지 않아.” 슈렌은 필요할 때만 말을 하는 성격이다. 자신의 말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 이 아니라면 그는 대부분 침묵을 유지한다. 그만큼 그의 말은 파괴력이 있었다. 그러나 야생마처럼 흥분한 지금의 지크 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지크는 마치 원수를 대하듯 형제의 팔을 뿌리쳤다. “젠장, 그럼 어떻게 하라고!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넓은 도시를 오락가락 할 수는 없잖아! 시간이 얼마 없다고!” 지크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생각의 범위는 좁았다. 슈렌은 지크에게 밀려난 팔을 툭툭 털며 조용히 말했다. “잘 생각해봐. 도플겡어가 예전처럼 추격이 불가능한 방식으로 도주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뭐?” 지크의 머릿속에서 흐르던 분노가 잠시 멈췄다. 슈렌은 좀 더 명확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플겡어는 루이체를 집어삼켰을 거야. 하지만 분석 및 분해가 힘들기 때 문에 몸속에 넣고 다닐 확률이 커. 그 때문에 하수도나 상수도로 들어가거 나 그 외에 추격이 힘든 도주방식은 택할 수 없을 거야.” “이 도시를 떠났을 수도 있잖아?” “지금은 낮이야. 게다가 이 도시는 인구밀도가 지극히 높기 때문에 대놓고 도망치기는 힘들어. 멀리가지는 못했을 게 분명해.” “음…….” 지크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머리를 움켜쥐고 좌우로 오락가 락했다. 잠시 동안 고민한 그는 이윽고 헝클어진 머리를 제대로 쓸며 말했다. “그럼 발로 뛰어서 찾는 수밖에 없다 이거지?” “말하자면.” 도플겡어가 어디로 갔는지, 루이체가 과연 스물 한 시간을 버틸 수 있을지 는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추적이 불가능한 형태로 변해서 도망칠 수 없 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지크의 재킷 속에서 전자신호음이 났다. 전투요원 전용의 PDA에서 들리는 신호였다. 지크는 조금 큰 보청기와 같이 생긴 무선 통신기를 꺼내 귀에 끼우고 PDA의 통신기 연결버튼을 눌렀다. “예, 지크입니다.” “지금 어디야! 휴게실에 있겠다고 하더니 어딜 간 거야!” 리진 특유의 시끄러운 목소리는 지크의 눈을 자연스레 일그러트렸다. 지크 는 통신기 중앙에 자리 잡은 커다란 소프트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본부 안에 있으니까 걱정 마. 무슨 일이라도 있어?” “당연히 있지! 지금 Y-13구역에서 도플겡어와 미확인 생물체 다섯이 레드 원과 싸우고 있어!” “정말이야? 루이체는! 루이체는 발견됐데?” “그건 몰라! 그곳의 카메라가 모두 불통이라서 확인할 수가 없어! 주차장 에 있을 테니 어서 내려와!” “알았어!” 지크는 통신이 끊기자마자 옥상 출입구 쪽으로 내달렸다. 슈렌도 그를 뒤따 르려는 듯 걸음을 옮겼다. “아, 잠깐 기다리세요.” 피엘이 그를 불러 세웠다. “도플겡어를 직접상대하시기 전에 반드시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리오님이 그곳에 계신 것이 확실하다면 조금 늦는다 해도 문제되지 않으니 꼭 들어주십시오.” 직접상대라는 말에 슈렌의 미간이 꿈틀했다. “도플겡어가 자신의 적을 직접 상대할 수 있습니까? 전투능력이 전혀 없고 방어능력만이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만.” “전투능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전투에 도움을 주기 위한 능력만큼은 충분 히 가지고 있습니다.” 피엘은 자신의 귀고리에 매달린 팔면체 크리스털을 떼어 손에 들었다. 투명 한 하늘색의 크리스털은 주신의 손 위에서 빛을 내며 몇 개의 직사각형 창 을 만들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창엔 뜻을 알 수 없는 문자와 복잡한 도형들이 어지러이 휘감겨 있었다. 그것을 하나하나 눈으로 살핀 슈렌은 무거운 한숨을 흘렸 다. “멀티플 스펠 배리어…… 다중 주문 방어막을 사용할 수 있군요. 그것도 최대 1천장을. 그렇다면 도플겡어를 일격에 처리할 수 없다는 뜻입니까?” 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플레어에 직격한다 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열기를 막는 방어막과 충격을 막는 방어막을 중첩시켜서 외부에 깔게 되면 방어막은 사라지겠지만 도플겡 어 본체엔 전혀 무리가 가지 않게 됩니다. 원래는 비전투용으로 만들어졌지 만 전투용으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라진 방어막의 복원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까? 기 계로 주문 방어막의 생성을 처리하려면 주신계의 기계로 약 세 시간이 소요 되는 것으로 압니다만.” “아네라의 정보에 따르자면 도플겡어는 초당 800장의 속도로 방어막을 복 원할 수 있습니다. 아네라의 기계다운 처리능력이지요.” “그렇군요.”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나 슈렌의 눈동자 속에는 전에 없는 긴장감이 서 려있었다. 피엘의 말에 숨은 뜻은 간단했다. 도플겡어의 방어막 복원속도를 능가할 만 큼의 엄청난 공격을 퍼붓지 않으면 도플겡어를 절대 소거할 수 없다는 것이 다. 더 큰 문제는 리오, 슈렌, 지크, 그리고 피엘까지 통틀어 초당 800장이라는 경이적인 방어막 복원속도를 깰 만한 기술을 가진 존재 역시 없다는 사실이 었다. 피엘이 말했다. “지금까지의 자료를 살펴보면 도플겡어는 생물의 재조합을 통해 전투생물 을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도플겡어는 기계 역시 복제 및 재생산이 가능 합니다. 지금까지 생산한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전투생물을 창조할 수 있 는 것입니다. 도플겡어는 확보한 자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 할 테 니 충분히 주의해 주십시오.” 그때 슈렌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도플겡어가 무엇을 위해서 자료를 수집하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알고 계 십니까?” “아네라의 제어로부터 벗어난 현재, 도플겡어가 무엇을 위해서 정보를 수 집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MOTHER라 불리는 미확인 존재가 직접 지시를 내리는 것 같습니다만…….” 피엘은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모르는 사실을 슈렌이 지금 당장 밝혀낼 수는 없었다. 이제 남은 일 은 리오, 지크와 합류해 도플겡어를 잡는 것뿐이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슈렌은 가볍게 목례를 했다. 피엘 역시 목례로 답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슈렌은 옥상 저편을 향해 달렸다. 도중 그의 전신이 화염에 휘감겼다. 그가 원래 입고 있던 정장이 불타고 원 래 복장이라 할 수 있는 적색의 코트가 나부꼈다. 불꽃이 사라지자 그는 지면을 박차고 옥상 밖으로 뛰었다. 멀리 보이는 고 층건물 위에 착지한 그는 이어서 다른 건물의 옥상을 향해 또다시 뛰어올랐 다. 안경을 벗은 피엘은 저 멀리 사라지는 슈렌의 모습을 지켜봤다. 인간의 영 역을 초월한 시력을 가진 그들에게 사실 안경이란 물건은 필요 없다. 분위 기를 위한 코디네이팅에 불과했다. 어찌됐든 안경을 벗은 피엘의 모습은 썼을 때와 비교해서 많이 달라보였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였던 그녀가 지금은 대학교를 갓 입학한 사 람처럼 어려 보였다. 그녀의 시야에서 슈렌이 사라졌다. 피엘은 중얼거렸다. “최악의 경우로 가면 안 되겠지만…… 제 예상은 이미 그쪽을 가리키고 있 군요.” 안경을 다시 쓴 피엘은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 Y구역의 대형 교차로 중앙엔 다섯 마리의 괴물과 리오, 그리고 순찰차를 바 리케이드로 삼은 경찰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일은 교차로 중앙에 도플겡어가 떨어지면서부터 시작됐다. 주위에 있던 교통경찰관은 즉시 지원을 요청했고 근처에 있던 일반경찰들이 몰려와 도플겡어를 포위했다. 도플겡어는 경찰에 대항해 정육점을 급습했다. 그 안에 놓인 생고기들을 모 조리 흡수하여 경찰에 대항할만한 전투생물을 만들어낸 도플겡어는 근처 건 물에 달라붙어 전투생물과 경찰들의 싸움을 지켜봤다. 경찰들이 하나 둘씩 쓰러져갈 무렵, 어디선가 붉은 장발의 남자가 나타나 전투생물을 가루로 만들었다. 리오, 즉 레드 원이 나타나자 경찰들은 내심 환호를 질렀으나 도플겡어는 지지 않고 또 다른 전투생물 다섯 마리를 생산해 풀어놓았다. 그들은 황소의 머리에 두꺼운 인간의 육체를 하고 있었다. 신화에 자주 등 장하는 미노타우르스와 매우 비슷한 외모였으나 껍질 없이 근육이 생으로 드러난 모습은 흉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전투생물들과 몇 번의 공방을 주고받았던 리오는 목 바로 아래의 망토자락 을 올려 눈 밑과 볼, 입가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망토가 세무가죽과 비슷 했기에 땀을 닦는데 무리는 없었다. 이번의 전투생물들은 만만치 않았다. 어제 놀이공원에서 만난 괴물과는 힘 과 스피드의 차원이 달랐다. 훨씬 더 강력하고 영악했다. 날도 더워서 땀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이마를 타고 흐른 땀은 검은색에 가 까운 붉은색 눈썹 위에 맺혀 반짝였다. 리오는 시선을 도플겡어에게로 돌렸다. 번데기처럼 건물 외벽에 찰싹 달라붙은 도플겡어의 중앙엔 무언가가 불쑥 불거져 나와 있었다. 그것의 내부에선 황색의 은은한 빛이 새어나왔다. 틀림없이 그 안엔 루이체가 들어있을 것이다. 동생이 아직 분해 되지 않았 음을 확인한 리오는 시니컬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좀 예뻐 보이는군. 만약 루이체를 분해했다면 이 꼴도 보기 싫은 도시랑 함께 날려버렸을 텐데 말이야.” 리오는 손에 든 검, 디바이너를 크게 한 번 휘두른 뒤 준비자세를 잡았다. 눈을 지그시 감은 그는 숨을 깊게 몰아쉰 뒤 조용히 내뱉었다. 그에 맞춰 발밑에 있던 먼지가 보이지 않는 힘에 밀려 원형으로 퍼졌다. 준비를 끝낸 그가 나직이 말했다. “지금 이 시간, 이 자리, 이 상태로 끝을 내주마. 고민할 필요는 없어. 선 택권은 너에게 없으니까.” 그의 눈이 다시 뜨였다. 눈두덩이 만든 그늘 속에선 붉은 색의 안광이 맹렬 히 불타고 있었다. “알아듣겠나! 없애버리겠다!” 일순간 방출된 기의 압력은 폭음을 내며 대기를 뒤흔들었다. 깨어진 아스팔 트를 해치며 튀어나간 리오는 가장 앞에 보이는 전투생물의 정수리에 디바 이너의 일격을 꽂았다. 뭔가를 할 틈도 없이 공격을 당해버린 괴물은 앞으로 거꾸러져 머리부터 아 스팔트 바닥에 떨어졌다. 검에 실린 힘이 워낙 강했는지 괴물은 그 상태로 10여 미터를 밀려났다. 바닥에 닿은 유일한 부분인 머리는 강판에 갈린 무 처럼 붉은 찌꺼기를 바닥에 남겼다.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괴물은 부글부글 끓어 형체를 잃었다. 리오의 눈이 다음 상대를 찾아 움직였다. 붉은 잔광이 눈의 움직임에 맞춰 길게 늘어졌다. 남은 네 마리의 괴물들이 그를 향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그들의 손은 전체적으로 소의 발굽과 비슷했으나 원래의 것과 달리 뭉툭하 지 않고 꼬챙이처럼 길게 앞으로 뻗어 나와 있었다. 지면을 딛고 힘을 내기 위한 구조가 아니라 적을 뚫고 그 안을 휘집키 위한 목적이 담겨있음을 노 골적으로 드러낸 모습이었다. 일반인에 불과한 경찰들은 그것에 찔리고 내장이 뒤흔들릴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두려워했다. 전장에 있는 자들을 좌지우지하는 가장 큰 힘, 바로 공포였다. 그러나 괴물들의 진짜 상대인 리오는 그저 웃고만 있었다. 그보다 더 흉한 괴물도, 그보다 더 잔인한 광경도 수없이 보아왔던 그였다. 괴물의 손톱이 엄청난 힘을 앞세워 돌진해 들어왔다. 특별할 것이 없는 승 용차 정도는 단숨에 두 조각을 낼 기세였다. 그런데 괴물은 어이없이 바닥에 엎어졌다. 리오가 괴물의 발목을 발로 걷어 찬 것이다. 리오는 검을 반대로 잡아 쓰러진 괴물의 등판에 꽂았다. 척추로부터 오른쪽 으로 조금 치우친 장소였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비명과 함께 붉은 피가 수십 미터의 높이로 치솟아 올 랐다. 심장을 정확히 찌른 것이다. 피분수의 바로 위에 서있던 리오는 비릿한 검붉은 액체를 흠뻑 뒤집어썼다. 지상에 떨어지는 혈우(血雨)를 뚫고 다른 괴물이 공격을 해왔다. 두 마리가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하는 형국이었다. 리오는 왼쪽에 위치한 괴물의 두상을 짚고 공중에 몸을 띄웠다. 빠른 움직 임으로 인해 그의 몸에 묻은 피가 부채꼴로 공중에 흩뿌려졌다. 괴물의 반대편에 착지한 리오는 어깨로 괴물의 등판을 들이받았다. 그 충격 에 앞으로 밀린 괴물은 동료의 품에 안긴 꼴이 되고 말았다. 검을 양손에 잡은 리오는 기합을 내며 괴물의 허리를 베었다. “하앗!” 포개어진 두 마리의 상체가 단번에 잘려나갔다. 베여진 쪽에 들어간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괴물들의 상체가 하체의 단면으로부터 조금 뜬 채 풍차처 럼 빙글빙글 돌았다. 관성에 맞춰 그 자리에 있으려는 상체와 국소부위에 가해진 리오의 힘이 만들어낸 물리적인 광경이었다. 원심력에 의해 안쪽의 내용물들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경찰들의 안면과 순 찰차는 금세 피범벅이 됐다. 가장 가까이 있는 리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몸 위에도 무언가가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사방에 피와 내장을 뿌리며 돌던 몸뚱이들은 이윽고 바닥에 떨어졌다. 리오는 가슴과 어깨에 걸쳐진 분홍색의 길쭉한 물체를 들어 아래쪽에 버렸 다. 그것들은 주인들의 육체와 함께 서서히 분해 됐다. 이어서 오른손에 묻은 피를 서둘러 망토에 닦았다. 검이 혹시라도 미끄러질 수도 있고 말라붙은 피 때문에 손의 감각이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남은 한 마리의 괴물을 보며 씩 웃었다. “동료들의 속은 어떻던? 후후, 걱정하지 마. 너도 크게 다를 건 없을 테니 까.” 전투생물은 두려움 없이 달려들었다. 머리에 난 한 쌍의 작은 뿔이 갑자기 불쑥 길어졌다. 길어진 것만으로는 부 족했는지 화살촉처럼 역방향의 돌기가 튀어나왔다. 만약 그것에 찔리거나 관통당한다면 구멍만 멀쩡하게 나진 않을 것이다. “재미있군!” 리오는 두 손으로 잡은 검을 몸과 평행이 되도록 하여 앞으로 뻗었다. 투우사처럼 옆으로 피할 생각으로 서있는 게 아니었다. 이대로 정면대결을 하겠다는 모습이었다. 그 무모한 모습으로 인해 구경하던 경찰과 시민들의 조바심은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다. 괴물의 뿔끝이 리오의 검을 통과했다. 한쪽은 검의 위쪽에, 다른 한쪽은 자 루의 밑쪽에 놓였다. 뿔이 피부에 닿기 직전, 리오는 전력을 다해 검을 돌렸다. 딱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괴물의 뿔이 좌우로 튕겨 날아갔다. 그대로 부 러진 것이다. 뿔은 부러졌지만 괴물은 맨머리로 리오의 복부를 들이받았다. 그것까지는 생각 못했는지 그는 괴물의 머리에 매달린 채 근처의 건물까지 끌려가 벽에 충돌했다. “큭!” 건물 벽이 부서지면서 피로 범벅이 된 리오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장이 파열되거나 늑골이 부러지진 않았지만 충격은 무시 못 할 정도였다. 괴물은 이대로 상대를 짓누르려는 듯 계속해서 다리를 움직였다. 지면의 마 찰을 넘어선 다리 힘으로 인해 괴물의 발굽은 수차례 미끄러졌다. 하지만 처음의 충격을 받고도 별다른 육체적 손상이 없었던 리오가 그런 압력에 어 떻게 될 리는 없었다. 그는 검을 높이 들었다. 자루 끝으로 등판을 쳐 척추를 부순다면 괴물의 저 항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러나 리오는 검을 왼손에 바꿔 잡은 뒤 오른손을 편하게 했다. 그의 팔뚝을 중심으로 파란색의 고리들이 떠올랐다. 그 마법의 다이얼을 맞 추는 리오의 얼굴엔 잔악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알아듣진 못하겠지만 설명해주지. 이건 마법검 전용의 대기계(大氣系) 고 위주문인 아트모 크래이브다. 원래는 검에 거는 주문이지만…….” 완전히 맞춰진 다이얼에서 바람과 함께 파란 빛이 뿜어졌다. 마법진이 자신 의 팔로 흡수되자 리오는 손을 괴물의 머리에 갖다댔다. “검이 아닌 생명체와 이렇게 직접 접촉하면 이상 작용이 일어나고 말지. 그게 뭘 것 같나?” 그의 손가락이 괴물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두개골 안까지 이물질이 들어온 것을 느낀 괴물은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상대의 힘은 그것을 압도 했다. 괴물의 볼과 목이 풍선처럼 훅 부풀어 올랐다. 이어서 등과 어깨, 가슴, 복 부, 둔부, 다리까지 곳곳에서 팽창이 계속됐다. 너무 부푼 나머지 원래 형 체마저 잃은 괴물은 꿈틀대기만 했다. 리오는 웃으며 말했다. “마법검 주문이 생물에 직접 걸릴 경우 본래의 주문인 에일라이드의 파괴 력은 그 생물의 육체에만 국한된다! 건물 몇 채는 날리고도 남을 대기의 파 괴력이 오로지 네 육체에만 집중된다는 거다! 기분이 어떤가? 날아갈 것 같 나? 하하하하!” 하염없이 팽창하던 괴물의 육체는 이윽고 대형 기구가 터지는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핏물을 또 맞은 리오는 얼굴을 닦으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선은 도플겡어에게 향해있었다. 도플겡어 역시 눈을 내밀고 리오를 관찰 했다. “후후, 다음은 너다.” 전신에 피를 뒤집어 쓴 채 웃는 그의 모습은 경찰들과 구경하러 나온 시민 들 모두를 경색시켰다. BSP와 BG들의 전투도 끔찍하긴 마찬가지였으나 지금의 끔찍함은 조금 달랐 다. 좀 더 깔끔하게 끝낼 수 있으면서도 붉은 장발의 남자는 일부러 호러블 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상대와 자신의 거리가 좁혀지자 도플겡어는 몸체로부터 실선들을 다시 뿜어 냈다. 새로운 전투생물을 창조하기 위한 재료를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리오는 실선들의 끝이 어디로 가는지 지켜봤다. 그것들은 모두 경찰과 순찰 차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드디어 인간을 재료로 쓰겠다는 건가?’ 그 예상은 간단히 빗나갔다. 실선들은 경찰들이 바리케이드로 삼고 있는 순찰차 몇 대와 근처의 트럭들 을 집어 삼켰다. 물고기나 생고기처럼 작은 물체들이 아니어서 그런지 차들 은 삼켜지자마자 훌쩍 분해 되어 도플겡어의 부피를 증가시켰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고기를 빼앗기지 않은 나머지 정육점들도 습격했 다. 리오의 검붉은 눈썹이 꿈틀했다. ‘기계?’ 도플겡어가 생명체 말고도 기계까지 재조합할 수 있다는 얘기를 익히 들었 던 리오였지만 기계의 흡수를 막상 직접 보니 왠지 낯설고 신선하다는 느낌 이 들었다. 부풀대로 부푼 도플겡어의 밑 부분이 활짝 열렸다. 그곳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인간의 모습과 근육을 가진, 하지만 몸체 대부 분은 기계로 구성된 새로운 전투생물들이었다. 강철로 된 골격 위로 근육이 있고, 그 위로 간단한 보호 장갑이 드리워진 형태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검과 방패를 들고 있었다. 마치 고대의 전쟁에서 죽은 병 사들이 그대로 일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몇몇은 자신의 키만큼이나 큰 칼을 들고 있기도 했다. 갑옷과 칼의 디자인은 형편없었지만 기능성만큼은 좋아보였다. 칼은 면도날 을 연상케 할 정도로 매우 날카로웠고 방패는 듀얼 임팩트 바가 붙은 자동 차의 문보다도 단단해 보였다. 리오는 망토 앞자락을 들어 얼굴의 핏자국을 훔쳤다. “검과 방패라…… 좋아, 마음에 들어. 딱 내 전문이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20마리에 가까운 숫자는 좀 부담스러워 보였다. 만약 저들이 기계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인다면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상처 없이 끝내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대형 오토바이의 중후한 배기음이 리오의 귓가에 들렸다. 리오는 조금 떫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 저 녀석을 잊고 있었군.’ 전투가 잠시 중단된 Y구역의 교차로는 모두가 잠든 밤처럼 고요했다. 적어 도 1분전까지는 그랬다. 그런 분위기를 깬 장본인인 지크는 인도 위에 오토 바이를 세우고 고글을 벗었다. 항상 여유와 미소가 가득했던 그의 인상은 아스팔트에서 밀려나오는 열기만큼이나 구겨져 있었다. 그는 액셀을 돌려 오토바이의 엔진을 강하게 공회전 시켰다. 일부러 머플러 에 구멍을 뚫은 오토바이의 경우보다는 중후했지만 교차로에 있는 이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엔 충분했다. 사람들은 그가 왜 그러는지 이유가 궁금해졌다. 시간이 지나니 짜증도 조금 났다. 지크가 자신의 오토바이를 혹사시키는 이유는 단 하나, 리오에게 자신이 왔 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리오는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 다. 오히려 꺼지라는 듯 가볍게 손끝만 움직여댔다. “빌어먹을 녀석.” 그가 투덜대는 사이 다른 BSP들의 차량이 도착했다. 류페이의 BX-Fb도 클로 킹 이펙트를 걷고 홀연히 나타났다. 시민들은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 누구 편인지 분간이 안 되는 레드 원과 달 리 BSP는 시민들에게 있어서 확실한 아군이자 믿음직한 일꾼이었다. BSP들은 각자의 장비를 점검하며 도로에 나왔다. 라이플을 들고 나온 케빈은 입술을 움직여 그 사이에 물린 담배를 위아래로 끄덕댔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나오는 그의 버릇이 었다. “다섯 마리라고 해서 가볍게 왔더니 스무 마리 정도 되네요? 이게 어찌된 일이죠?” 그와 같은 차를 타고 온 그렌은 씁쓸히 웃었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오른손에 장비한 사이킥 소드의 버클을 단단히 죈 리진은 평소와 마찬가지 로 짜증이 서린 표정을 지었다. “햇빛이 좀 안 드는 곳에서 싸우면 안 되나? 오늘은 자외선 차단 크림을 못 발랐단 말이야. 아, 오늘따라 왜 이리 날씨가 좋은 거야?” 뽀얀 피부의 리진과 달리 공사장 인부처럼 검게 탄 챠오는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들 사이를 지크가 빠른 걸음으로 뚫고 지나갔다. 리오에게 성큼성큼 걸어 간 그는 손으로 상대의 어깨를 잡아 자신을 보게끔 만들었다. “얘기 좀 할까, 레드 원씨?” 리오는 자신보다 조금 작은 지크를 내려다보며 비꼬듯 말했다. “동생 관리도 제대로 못하는 놈의 안면 따위는 보기 싫은데, 어쩌지?” 아픈 곳을 찔린 지크의 볼이 꿈틀했다. “네가 루이체를 이용해서 그런 거잖아!” “너처럼 헛짓은 안했지.” “넌 결과가 그렇게 중요해? 도중에 뭐가 어찌 돌아가든 상관없이 결과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그러자 리오는 보란 듯 건물에 매달린 도플겡어를 손으로 가리켰다. “자, 저게 그 증거다. 과정은 네가 더 좋았을지 모르지만 결과는 이렇지. ” “큭……!” “과정에 대한 칭찬 따위는 네 엄마한테 가서 들어라. 목숨이 오락가락 하 는 곳에서 행복하게 할 얘기가 아니야.” 싸늘하게 돌아선 리오는 천천히 준비자세를 잡았다. 또다시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지크는 리오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봤다. 잠 시 후, 그는 허리에 찬 무명도를 빼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난 네가 마음에 안 들었어.” 칼과 칼집 사이에서 들리는 마찰음은 극점의 냉풍만큼이나 차가웠다. 그의 동료들은 그가 레드 원의 뒤통수를 치려는 게 아닌가 하며 움찔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자신이 더 마음에 안 드는군.” 지크는 조금 걸음을 옮겨 리오의 옆에 섰다. 리오의 한쪽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방해하면 죽인다.” “그럼 우리 엄마가 너한테 밥을 안 줄걸?” 지크 역시 쓴 웃음을 흘렸다. 그들이 대화하는 동안 전투생물들은 서서히 움직여 지크와 리오, 그리고 BS P들을 포위했다. 그들의 빈틈없는 자세와 동작들로 인해 BSP와 리오는 거의 밀착되다시피 했다. 포위망에 들어있지 않은 사람은 오직 류페이뿐이었다. “소령님, 저는 어쩌면 좋죠?” 류페이의 볼멘 목소리가 그렌의 귀에 들렸다. 그렌은 귓불을 눌러 류페이와 의 통신을 열었다. “백병전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BX-Fb의 화력이 퍼부어지면 곤란하니까 지시 가 있을 때까지 대기해. 혹시라도 BG까지 나타나면 류페이가 막아야 하니 까,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통신을 끊은 그렌은 조금씩 접근해오는 적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팔 자체가 칼인 녀석들은 많이 상대해봤지만 칼을 든 상대는 처음이군. 이 친구들 상대할 만 하오?” 그렌은 앞에 서있는 리오에게 농담조로 물었다. 리오는 시선을 전방에 둔 채 대답했다. “베는 맛은 좋을 것 같소.” 이번엔 리진이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 이름이 리오 스나이퍼라면서요? 제 동생이 저번에 말해주더라고요. ” 리오의 머릿속에 한 소녀의 얼굴이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래서?” “뭐, 별 거 아니에요. 제가 아는 누구랑 성씨가 같아서요.” 지크는 순간 긴장했으나 리오는 가볍게 넘겼다. “그 누군가처럼 눈치 없이 시비를 거는 바보는 아니니 걱정 놓으시지.” “앗, 그렇다면 환영이에요. 잘 부탁해요, 빨간 머리 오빠.” 이어서 매콤한 담배연기가 밀려왔다. 케빈이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우린 당신을 꽤 신뢰하는 편이야. 성격은 좀 더러울지 몰라도 실력 하나만큼은 인정하고 있어.” “…….” “아무튼 같이 싸우게 되서 영광이야. 잘 해 보자고.” 리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등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남에게 등을 맡기고 싸워본 게 언제였지?’ 사실 그의 기억 속엔 수많은 동료의 얼굴과 이름이 있었다. 어느 세계, 어느 장소에 가도 수많은 전사들이 그의 실력과 알 수 없는 매 력에 이끌려 그와 함께 싸우기를 원했다. 남녀노소도 구분되지 않았다. 리 오가 무엇을 위해 싸우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맹목적인 이도 있었다. 처음엔 심심하지 않고 좋았지만 뒤로 갈수록 그에겐 괴로움이 되었다. 하는 일이 궁극적으로 목숨을 빼앗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니만큼 많은 사람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갔다. 어떤 이는 전투의 공포를 이기 지 못한 나머지 제 발로 떠나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동료는 없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혼자 싸우는 것이 더 편했다. 누군가가 죽는 모습을 볼 일도 없었고 죽음에 가까운 위기 가 닥친다 해도 남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럴수록 그의 전투는 난폭하고 잔인해졌다. 뿜어지는 피와 내장, 산산조각 이 나 굴러다니는 시체들의 모습에서 이상한 희열감마저 느끼기까지 했다. 이러던 어느 날, 리오는 자신이 리오 스나이퍼라는 이름 말고 또 다른 이름 으로 불리는 것을 알게 된다. 붉은 머리의 사신(死神). 그것이 어느 순간 붙은 그의 별명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주신계 어디를 가도 그에게 아는 척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를 변함없이 환영해주는 사람은 주신과 피엘, 그리고 슈렌뿐이었다. 피엘 이 업무에 밀리고 슈렌도 임무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버린 상황에선 그를 받아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숙소에 가만히 누워있으면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누군가를 찾아 베어버리고 싶어졌다. 손에서 맴도는 살과 뼈의 감촉, 그것 은 마약의 금단증상처럼 그를 괴롭혔다. 회상을 마친 리오는 고개를 짧게 흔들었다. ‘더우니까 별 게 다 떠오르는군.’ 전방에서 쇳소리가 들렸다. 상황만을 살피던 도플겡어의 전투생물들이 슬슬 살의를 띄고 있었다. 리오는 다시 주위를 살폈다. 자신과 지크는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아닌 밤중에 홍두께처럼 갑자기 참여 한 BSP들은 조금 문제였다. 검과 방패를 쓰는 존재를 상대해본 경험이 없을 게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모두에게 충고 하나 하지.” 리오의 말에 모두는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저 녀석들의 검은 가급적이면 막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아. 쇠를 두드 려 만든 칼이 아니라 분자단위에서 재구성된 검이기 때문에 어설픈 방어구 는 그냥 베일 거야. 방패의 강도는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내가 가진 지식으로 봤을 때 당신네들이 타고 다니는 차보다는 단단할 거야. 가급적이 면 몸체를 직접 노려. 그 중에서 머리를 노리도록 해.” 그 말을 들은 케빈은 놀란 얼굴로 입술 사이에 물린 담배를 씰룩거렸다. “아니, 검이나 방패의 강도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소? 좀 두드려 봐야 아 는 것 아니오?” “그런가? 당신은 내가 지금까지 본 검이나 방패가 몇 개라고 생각하지?” 케빈은 자신을 바라보는 붉은 머리 남자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리오 는 다시 전방에 고개를 돌렸다. “선수끼리 그런 걸 물으면 곤란하오.” 그 방면에 대해선 자신이 프로다. 그러니 자신의 말을 믿으라는 소리였다. 케빈은 인정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라이플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한편 지크는 의아한 얼굴로 리오를 계속 쳐다봤다. ‘이놈이 뭘 잘못 먹었나?’ 그가 알던 리오라면 찌꺼기들은 꺼지라고 하며 자기 혼자 나섰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같이 싸울 것을 다짐하듯 모두에게 주의와 충고를 주었다. 사실 지크를 비롯한 BSP모두는 리오의 진의를 알지 못했다. 지금의 공동전 투는 리오의 예상이 상당부분 깔려있는 상태였다. “온다!” 리오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가장 먼저 표적이 된 사람은 겉보기에 가장 약한 리진이었다. 달려오던 괴물의 철검이 리진의 정수리를 노리고 떨어졌다. “으악!” 리진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젖혔다. 검은 실들이 그녀의 눈앞에서 퍼졌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조금 잘려나간 것이다. “이게 여자의 생명을!” 그녀는 곧장 앞차기로 반격했다. 가슴에 정확히 맞긴 했지만 리진이 몸을 젖힌 상태에서 나온 공격이었기에 파괴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 큰 충격을 받지 않은 괴물은 기계로 된 턱을 한껏 벌리며 다시 검을 올렸 다. 아직 자세를 제대로 잡지 못한 리진에겐 절명의 순간이었다. 순간 챠오가 둘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그녀가 손을 뻗자 괴물은 반사적 으로 방패를 들어 앞을 보호했다. 챠오는 손바닥을 방패에 갖다 댔다. 숨을 들이마신 그녀는 일순간 숨을 멈 추며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황색의 기운이 잠깐 보였다 싶더니 괴물의 각부에 매달린 근육들이 한꺼번 에 터졌다. 강철 두개골에서도 이상한 액체들이 쏟아졌다. 발경으로 인한 근육 및 내부조직의 파괴였다. 겨우 위기에서 벗어난 리진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 챠오! 고마워!” “조심해.” 챠오는 전투능력을 상실한 괴물을 밀친 뒤 다른 괴물들에게 눈을 돌렸다. 그것을 지켜본 리오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저 정도의 낮은 기합으로도 육체가 파괴되다니…… 아까 전에 상대한 껍 질 벗겨진 소라면 끄덕도 하지 않았을 거야. 그렇다면 예상대로군.’ 두 마리의 괴물이 턱을 철컥대며 리오에게 달려왔다. 검을 오른손에 굳게 잡은 리오는 야구공을 치듯 검으로 상대의 방패를 가볍게 후려쳤다. 도플겡어 바로 밑쪽에 뭔가가 날아와 부딪혔다. 리오가 쳐 날린 괴물 중 하 나였다. 건물 벽에 처박힌 괴물은 강판에 충돌한 탄환처럼 납작하게 눌린 채 혈액인 지 오일인지 모를 액체를 뿜었다. 도플겡어의 눈동자가 다시 튀어나왔다. 리오는 그 눈을 응시하며 발밑에 깔 린 괴물의 잔해를 보란 듯이 발로 짓밟았다. “이런 놈들로는 날 막지 못할 거다. 좀 더 강한 놈들을 만들어봐.” 하지만 도플겡어의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기계에게 도발은 시 간낭비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리오는 괴물들에게 눈을 돌렸다. BSP와 리오들이 도플겡어의 괴물들과 격전을 벌이는 동안 슈렌은 근처 건물 의 옥상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특별히 나설 필요는 없었다. 지금 나타난 괴물들은 리오와 지크, 둘만 으로도 충분히 제거할 수 있을 만큼 빈약했다. 생긴 게 그로테스크할 뿐이 었다. 슈렌은 도플겡어를 가만히 살폈다. 지금까지 그가 분석한 도플겡어의 행동패턴은 이러했다. 수집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를 발견했을 때 도플겡어는 수단과 방법을 가 리지 않고 접근하여 대상을 확보한다. 그 와중에 방해가 되는 존재가 나타 나면 전투생물을 만들어 방어에 나서는데, 도플겡어는 전투생물이 죽은 뒤 에야 모습을 감춘다. 그 중에서 뒷부분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방어를 위해, 즉 자신에게 닥쳐오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전투생물을 만든다 면 어째서 도플겡어는 전투생물 생산 후 자리를 피하지 않는 것인가? ‘모를 일이군.’ 해답을 얻지 못한 슈렌은 도플겡어의 감시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도플겡어의 눈동자는 자신의 창조물들이 하나씩 쓰러져가는 모습을 차갑게 지켜보고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인간 몇 명과 사이보그 한 명에게 기준을 맞추다보니 이번에 생산한 전투생물들은 분석이 불가능한 인자를 지닌 두 명에게 장난감처럼 부서졌다. 그들은 상당히 강했다. 붉은 머리는 분석의 가치가 가장 높았다. 전투능력 으로 따지자면 도플겡어 자신의 진짜 창조주인 아네라의 중급 전투기사와 맞먹었다. 지르콘 나이트로 대표되는 최상급 전투기사보다는 형편없었지만 능력적 한계는 예상하기가 힘들었다. 지금 자신이 확보한 분석대상을 완벽히 분해하여 정보를 얻는다면 상당한 도움이 될 듯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현재는 벅찬 상황이었다. 일반적인 생 물의 경우와 달리 세포들이 영적인 결합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분해를 위해서 는 그 결합부터 제거해야만 했다. 모든 결합의 제거에 필요한 예상시간은 약 20시간. 도플겡어는 자신이 그 시간동안 분석대상을 계속해서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분석이 끝날 때까지 대상을 확보하려면 좀 더 강력한 전투생물을 생산하여 적대적인 생물들을 모두 침묵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도플겡어 자신을 이루는 인공지능의 제1철칙, 즉 수집대상을 제외한 모든 지성생물에 대한 선제공격과 살상을 금지하는 조항은 초강력 전투생물 의 제조를 원천적으로 가로막았다. 그렇다고 도주를 택하기는 힘들었다. 확보한 분석대상 때문에 형태변화가 제한되어 추적을 완벽히 피할 확률은 0에 가까웠다. 게다가 붉은 머리와 맞 먹을 정도의 생체에너지를 지닌 또 하나의 존재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고뇌하는 도플겡어에게 변화가 나타난 것은 현재 생산된 전투생물들 의 대부분이 능력을 상실할 무렵이었다. 도플겡어의 일부분이 길게 늘어져 지하로 스며들어갔다. 두더지처럼 지하를 헤집던 그 끝은 이윽고 목적지인 네트워크 케이블에 연결되었다. 도플겡어는 그것을 통해 자신의 현 주인에게 지금의 상황을 문의했다. 어느 곳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하지만 분명히 이 세계 어딘가에 있는 그 인공의 지적 존재는 도플겡어의 고민을 간단히 해결해 주었다. ‘제1철칙…… 수정. 정보수집 및 분석을 방해하는 모든 생명체를 전투불능 상태로 만들라.’ 문제점을 해결한 도플겡어의 눈동자는 이윽고 불길한 청백색을 띄었다. 그 무렵 마지막 괴물이 지크의 발차기에 직격하여 쓰러졌다. 상당히 강할 것 같던 괴물들은 오히려 BG들보다도 약했다. 처음엔 조직력을 조금 보이는가 싶었지만 그것도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다. 적이 약한 것도 있지만 레드 원의 압도적인 전투력도 한 몫 했다. BSP 사이 에선 최고라 불리는 지크를 가지고 노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았지만 싸우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니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그는 부글부글 끓어 사라지는 괴물들 사이에 서있었다. 역겨운 냄새가 섞인 연기 속에서 땀에 젖은 장발이 반짝였다. 도플겡어에 시선을 둔 채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는 그의 뒷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정말 스카우트를 하고 싶군.’ 그의 강력함에 일찌감치 매료되어 있던 그렌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참기를 반복했다. 그는 레드 원에게 자신들과 함께 일을 하자는 말을 하고 싶어 미 칠 지경이었다. 지크이상으로 반항적인 것은 물론 잔악무도하기까지 했으나 근본까지 썩어 문드러진 것 같진 않았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과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다보니 그런 거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기요.” 리진이 작은 목소리로 리오를 불렀다. 도플겡어에게 집중하느라 그것을 흘 려들은 리오는 당연히 묵묵부답이었다. “이봐요, 리오씨.” 리진은 리오 옆에 바짝 붙어 그를 다시 불렀다. 키 차이가 워낙 나서 귀에 직접 대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이번엔 리오도 확실히 그녀를 인식했다. “용건이라도 있나?” 그의 냉랭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리진은 궁금증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것만 큼은 언니나 동생이나 똑같았다. 그녀는 조금 용기를 내어 말했다. “당신, 왜 도플겡어를 쫓는 거죠? 혹시 도플겡어에게 잡힌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인가요?” “아니야!” 지크가 갑자기 소리를 치며 그녀의 앞을 불쑥 가로막았다. 루이체 때문에 자신과 리오의 관계가 들통이 난다면 곤란해지기 때문에 그 런 행동을 한 것이지만 그것은 너무도 경솔한 판단이었다. 그런 급작스런 행동은 오히려 질문을 한 리진의 의구심을 괜스레 증폭시키기만 했다. 리진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뭐가 아닌데?” “응? 아, 그게 말이야…… 그래! 이 녀석은 나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어!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자신이 처리하려고 들지!” “…….” 리진은 리오와 지크를 번갈아 쳐다봤다. 리오는 아예 신경을 끈 듯 도플겡어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반면 지크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동료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그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지크, 이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 중에 하나가 뭔지 알아?” “응? 그, 글쎄?” 리진은 검지로 지크의 가슴팍을 밀며 말했다. “라이벌을 실력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깔아뭉개려 하는 거야. 저 사람이 지 크를 라이벌로 생각한다고? 설마, 그 반대겠지.” “…….” 지크는 왠지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를 물리친 리진은 방금 전의 질문을 다시 했다. “자, 어서 말해줘요. 도플겡어를 왜 쫓는 거예요?” 리오는 검을 바닥에 꽂고 손의 관절을 풀었다. 그의 손목과 손가락이 움직 일 때마다 관절에서 경쾌한 소리가 터졌다. 리진을 일부러 위협하기 위해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도플겡어의 불룩한 부분, 루이체가 있을 거라고 예상되는 지점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진지하면 서도 쓸쓸했다. 그렇게 시간을 끌던 리오는 이윽고 나지막이 말했다. “난 저 아이를 이용하고 있어.” “뭐라고요?” “도플겡어는 원래 내 몫이야. 루이체라고 했나? 난 도플겡어가 루이체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계속해서 저 아이의 곁에 붙어있었지. 같 이 놀이공원에도 갔었어. 아직 애라서 그런지 낯선 사람들을 잘도 쫓아오더 군.” 리진과 BSP모두는 리오와 놀이공원에서 만난 것을 떠올렸다. 당시 그 사건을 목격한 시민들은 금발의 아이와 파란 장발의 남자도 같이 있었다는 진술을 했지만 BSP중 어느 누구도 금발의 아이가 루이체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리오는 이어서 말했다. “도중에 일이 틀어져서 이렇게 되긴 했지만 상관없어. 아이를 데리고 있는 한 저 녀석은 도망도 제대로 칠 수 없지.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루이체는 내 기대 이상으로 역할을 잘 해주고 있어. 저 녀석은 한번 도망치면 잡기가 힘 들거든. 나로선 잘 된 일이지.” 리진은 입을 다물었다. 다른 BSP요원들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지크는 리 오의 말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코에서 뜨거운 김을 연신 뿜어냈 다. 그때 리진이 픽 웃었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리오의 눈썹이 꿈틀댔다. 리진은 양손을 허리에 댄 채 당당히 말했다. “정말로 당신이 저 아이를 이용할 목적이었다면 남한테 고백하듯 말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런 눈으로 저곳을 보고 있지도 않을 거고요. 자, 말해 봐 요. 진짜 이유가 있죠?” “…….” 리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진은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는 응원하듯 높은 곳에 위치한 리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뭐,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당신 일이니까 크게 상관 하진 않을게요. 아무튼 힘 내봐요. 그러면 루이체도 당신을 다시 좋아하게 될 거에요.” 리진은 홀가분한 얼굴로 동료들이 있는 곳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리오는 다시 검을 들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구하고 떠나면 돼. 그 애가 날 어찌 생각하던 상관없어. 아니, 루이체로 서는 나를 잊어버리는 게 훨씬 낫겠지. 난…… 좋은 상황에선 필요 없는 사 람이니까.’ 그의 망토가 아스팔트의 열기 속에서 크게 너울댔다. 격한 감정의 변화와 맞물려 그에게서 뿜어지는 기의 압력이 높아진 것이다. 그에 맞춰 도플겡어의 상황도 변했다. 기계가 몸을 맡기고 있는 건물이 은색의 실선에 휘감겨 누에고치처럼 변했 다. 건물의 형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고 은색 고치는 점차 크기가 줄어들 었다. 질량보존의 법칙에 위배되는 듯한 광경이었다. 20여 미터에 가깝던 고치는 7, 8미터 내외로 줄어들었다. 부피 역시 크게 줄었다. 불쑥 튀어나와있던 부분, 즉 루이체가 갇힌 부분은 고치의 안쪽으 로 밀려들어갔다. 리오, 지크의 표정도 좋지 않게 변했다. 불길한 느낌이 그들의 본능을 자극 하고 있었다. “어이, 분위기가 좀 안 좋은데?” 지크의 물음에 리오는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나타냈다. “괴물 생산 따위와는 틀려. 뭔가 이상해. 마치 직접 전투에 나서겠다는 것 같은데…….” 직접 의견을 나눈 것은 아니지만 슈렌도 같은 생각이었다. ‘거대한 전투생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전투에 참여하겠다는 뜻 이다. 그렇지 않고는 루이체를 안쪽에 집어넣는 행동을 설명할 수 없어.’ 이윽고, 고치의 가운데 부분이 찢어지면서 은색 실선들이 좌우로 활짝 펴졌 다. 리오를 비롯한 모두는 숨을 죽이고 그곳을 지켜봤다. 은색으로 펄럭이는 장발을 가진, 돌과 철근 등으로 이루어진 단단한 육체의 거인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때까지 도플겡어가 생산했던 전투생물처럼 흉측한 디자인이 아니었다. 오 래된 거인의 갑옷처럼 중후하면서도 강력한 인상이었다. 거인의 이마, 정확히 말해서 투구엔 또 하나의 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정상적인 위치의 눈엔 황색의 빛만이 아련히 어른거렸으나 투구의 눈은 이 리저리 움직이며 상대의 위치를 찾았다. 아무래도 그 눈이 진짜고 다른 눈 은 장식인 듯 했다. 갑옷은 매우 우람했다. 철근 콘크리트가 압축되어 만들어진 회색의 돌 갑옷 위로 검은 색의 강철 프레임이 단단히 뒤덮여진 형태였다. 내부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는 의문이었으나 단백질로 구성되지 않은 것 만은 확실했다. 건물 내부에 인기척이 없었을 뿐더러 정육점이나 음식점같 이 육질을 구성할만한 물체를 제공할 장소도 없었다. 아무튼 강해보였다. 압도적인 디자인도 그랬지만 일단 풍기는 분위기가 심 상치 않았다. 그 거인, 도플겡어를 잠시 바라보던 지크는 옆에 있는 리오에게 넌지시 물 었다. “어이, 난 저 녀석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지? 난 저렇게 큰 녀석은 상대해 본 일이 별로 없어.” 그러자 리오는 실소를 터트렸다. “후, 그럼 집에 가서 엄마랑 냉면이나 먹어라. 그 동안 내가 끝내놓지.” “뭐라고!” 땀에 젖은 지크의 이마에 힘줄이 불쑥 솟았다. 그들 뒤에서 누군가가 땅을 딛는 소리가 들렸다. “일단 사람들부터 피신시키는 게 좋을 것 같군. 주변의 인구밀집도가 너무 높아.” 지크, 그리고 리오 사이에 선 남자는 슈렌이었다. 주변의 열풍이 그의 파란 장발을 흔들었지만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리오는 검으로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역시, 큰 기술이 필요하겠지?” 슈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악의 경우 데이브레이크를 동원해야 할 수도 있어. 상대는 1000개의 멀 티플 스펠 배리어를 사용한다. 데이브레이크의 파괴력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문제는 충전시간을 어떻게 조절하느냐다.” 데이브레이크란 말에 지크의 귀가 솔깃했다. “데이브레이크? 그게 뭔데?” “리오가 주신, 하이볼크님께 직접 배운 기술 중 하나야. 태양에너지를 무 속성의 고폭(高爆) 에너지로 전환해서 범위 내의 모든 물체에 타격을 입히 는 대단위 기술이야.” 슈렌의 설명은 역시나 친절하고 자세했다. “오오, 그래? 그럼 강한가?” 지크의 질문을 들은 리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슈렌은 턱을 쓰다듬 으며 잠시 생각한 뒤 답해주었다. “태양에너지의 충전시간과 리오의 에너지 전환능력에 따라 다르긴 한데, 이론상 5분 정도 충전하면 이 나라를 포함한 대륙의 지형이 완전히 바뀔 거 다. 행성의 중추 핵까지 충격이 들어간다면 행성 자체가 끝장나겠지.” “…….” 지크의 안색이 대번에 바뀌었다. 리오는 킥킥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슈렌은 지크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네 동료들에게 주변 사람들을 대피시키라고 부탁해줘. 적어도 반경 5킬로 미터 밖으로 대피해야 할 거야. 물론 네 동료들도 함께 대피해야겠지.” 지크는 조금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남는 게 당연하겠지. 지금의 너는 귀중한 전력이니까.” “오, 그래? 괜한 걸 물었군, 하하하! 그럼 조금만 기다려!” 칭찬과도 같은 슈렌의 말에 힘을 얻은 지크는 활짝 웃으며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리오는 의아해했다. “저 녀석이 정말 도움이 될까?” “도움은 기대하지 않지만…….” 슈렌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만약 전투에 끼워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곳에 오는 족족 이번 일을 가지 고 시비를 걸겠지. 꽤 괴로울 걸로 예상되는군.” 반은 농담, 반은 진담이었다. 리오는 동의를 나타내듯 씁쓸히 웃었다.그들 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도플겡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선제공격할 생각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상대가 적의를 드러내지 않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동료들에게 시민들의 대피를 부탁한 지크는 의외로 반대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처크의 허가 없이는 마음대로 대피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주 이유였 다. BSP만의 대피가 아니라 인근 시민들의 대피까지 겹쳐있으니 현장 책임 자인 그렌 혼자서 결정할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지크는 처크에게 직접 요청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처크 역시 쉽사리 허가를 내리지 않았다. “아직은 허가할 수 없어. 상황을 좀 지켜본 후에…….” “왜 안 된다는 거예요! 사람 몇 명 죽거나 일대가 전부 쑥밭이 되고 난 다 음에 허가하실 거예요?” 주관제실 내에 지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원즈 이펙트, 즉 레드 원 과 블루 원이 나타날 때만 생기는 괴현상으로 인해 그의 표정은 화면에 나 오지 않았지만 처크에겐 안 봐도 비디오였다. 처크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만만치 않게 큰 목소리를 냈다. “내가 이 매트로 서울 전체의 대장이었으면 당연히 대피시켰겠지! 하지만 반경 10킬로미터 내의 전 주민을 대피시켜야 할 정도로 대단한 사항은 내 권한 밖이야! 대한민국 정부와의 협의가 있어야 한단 말이다! 이건 불이 난 유치원 밖으로 애들을 끄집어내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 “그럼 어떻게 해요! 지금 일촉즉발의 상황이란 말이에요!” 처크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마이크를 끄고 투덜대듯 말했다. “도대체 뭐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아야 협조를 요청할 거 아닌가? 누구랑 싸우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사진 한 장이라도 찍어 보내면 괜찮겠는데 …….” 고뇌하는 처크의 선글라스에 하얀 손이 올라왔다. 루이의 자리에 대신 앉아 있는 피엘이었다. “괜찮은 의견이라도 있소, 피엘?” 피엘은 빙긋 웃으며 팔을 내렸다. “제가 원즈 이펙트를 제거해 보겠습니다.” “뭐라고? 그게 가능하오?” “그렇습니다.” 놀란 것은 처크뿐만이 아니었다. 거의 반년 가까이 레드 원, 블루 원이 나타날 때마다 맹인 신세가 되어야 했던 모든 오퍼레이터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당황스러워했다. 그 속엔 루이도 끼어있었다. 그녀는 옆에 앉은 피엘을 의심스러운 얼굴로 쏘아봤다. “위성 카메라조차도 마비시키는 그 현상을 어떻게 제거하시겠다는 거죠? 이건 카메라 렌즈를 닦는다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녀의 질문을 들은 피엘은 이지적인 손길로 안경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완전한 제거는 불가능하겠지만 카메라의 입력신호를 방해하는 요소를 어 느 정도 줄일 수는 있을 겁니다. 제 예상이 맞는다면 말이지요.” 만족스럽지 못한 설명이었으나 현재의 처크로선 무엇이든 시도해봐야 했다. 지크의 말대로 몇 명의 사상자가 난 뒤에야 대피가 진행된다면 BSP와 대한 민국 정부 모두 피할 수 없는 원성을 살 것이 불 보듯 뻔한 탓이다. “아무튼 해 보시오! 필요한 장비는 있소?” 피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루이 전용의 컴퓨터인 베스(VUIS)쪽으로 걸어갔다. “저 장비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주관제실의 모두는 또 한번 놀랐다. 지금까지 베스를 제대로 조작한 사람은 오로지 루이 한 명 뿐이었다. 천재 라 불리는 류페이조차 베스만큼은 효율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원래 루이 전용으로 만들어진 머신인데다가 버추얼 유저 인터페이스(VUI) 자체가 일반 퍼스컴의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를 사용하던 사람들에겐 적응하기 힘든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루이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객기(客氣)인가?’ 그녀는 왠지 피엘이 일부러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루이가 어찌 생각하든 결정은 처크의 몫이었다. 루이와 피엘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가하지.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겠소.”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이의 한탄 속에 피엘은 베스의 콕핏트를 열었다. 그녀는 안경을 벗으며 베스의 내부구조를 면밀히 살폈다. ‘원시적이고 비효율적인 시스템이긴 하지만 이곳에서 본 머신 중에선 가장 나을 것 같군. OS는 괜찮을까? 처리속도가 느리지 않으면 좋겠는데.’ 잠시 후, 베스 안에 탑승한 피엘의 눈엔 가상공간이 펼쳐졌다. 수많은 메뉴 와 아이콘, 그리고 베스 전용의 프로그램 툴이 보였다. 피엘은 그 중에 하나를 열어 BSP의 화상시스템, 특히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Y구역의 화상시스템에 접근했다. ‘출력프로그램의 루틴을 조금 변경해서 암시를 바꾸면 되겠지. 그러면 리 오와 슈렌, 두 사람의 모습만 보이지 않게 할 수 있을 거야.’ 원즈 이펙트(one's effect), 그것은 사실 기계의 문제가 아닌 단순한 최면 에 의해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리오나 슈렌의 모습이 카메라에 찍혔을 때 그 영상은 화학적 변화를 이용한 방식, 즉 필름을 이용한 고전적 방식이 됐든 디지털 기술을 사용한 최신기 술이 됐든 인간에게 최면을 걸게 된다. 그들이 뿜어내는 최면파 때문이다. 직접 눈으로 그들을 보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기록으로 남길만한 매체를 통 해서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물론 그들이 지금까지 찍은 영상은 모두 온전하다. 다만 버려졌을 뿐이다. 지금 피엘이 시도하는 것은 영상출력 프로그램을 만져서 사람들에게 걸리는 암시를 바꾸는 작업이다. 지금까지의 ‘리오나 슈렌이 속한 모든 영상을 볼 수 없다’라는 암시가 이제부터는 ‘영상에서 리오와 슈렌만을 볼 수 없다 ’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녀의 프로그램 변경작업이 끝나자 지금까지 흐릿했던 영상들이 모두 제대 로 들어왔다. 거인의 모습을 한 도플겡어와 파괴된 Y구역의 교차로가 선명 하게 보였다. 다만 리오와 슈렌의 모습은 노이즈로 처리되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 정도면 만족할만한 모습이었다. “오오, 성공했군! 대단해! 내가 왜 저런 인재를 최근까지 모르고 있었지? ” 처크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오퍼레이터들 역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렇게 빨리 베스를 다 루는 사람은 루이 이후 처음이었다. 그들이 감탄하는 만큼 루이의 감정도 가라앉았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피엘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아무튼 환호도 잠시, 처크는 화면에 잡힌 도플겡어의 모습을 보고 인상을 구겼다. “뭐지, 저 괴물은? 저렇게 거대한 괴물은 처음 보는데?” “도플겡어입니다.” 베스에서 나온 피엘의 말에 처크는 상당히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도플겡어? 내가 알기로 도플겡어는 은색의 물컹한 모습이라고 들었는데? ” “원형은 그렇습니다만 지금의 형태는…… 아무래도 전투를 위한 형태인 것 같습니다. 머리부위를 확대해 주시겠습니까?” 카메라 조작을 맡은 오퍼레이터는 즉시 손가락을 움직여 도플겡어의 머리를 확대했다. “헬멧 중앙부분을 보시면 또 하나의 눈을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형태 를 봐서 저것은 도플겡어의 눈이 확실합니다. 원래 도플겡어는 자신의 보호 를 위해서 또 다른 전투생물들을 생산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른 듯 합니 다.” “직접 전투를 한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럼 능력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소?” 피엘은 어찌 대답해야할지 잠깐 망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매트로 서울 자체를 완전히 포기하고 리오의 데이브레이크 로 날려버리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도플겡어를 지키는 1000장의 멀티플 스펠 배리어는 그만큼 막강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루이체의 생사는 포기해야 했다. 아니, 사실 피엘은 도플겡 어가 루이체를 확보한 순간부터 그 아이를 포기하고 있었다. 단순히 도플겡어를 제거하는 것과 도플겡어를 제거하면서 루이체를 구하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도플겡어의 창조주인 아네라가 직접 나타난다면 괜찮겠 지만 그들은 애초부터 도플겡어가 자신들의 제어에서 벗어났으니 주의하라 는 말만 했을 뿐, 개입할 의사는 전혀 비추지 않았다. 제거하는 게 좋을 거 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아네라는 어느 순간부터 인간계나 천상계, 지옥계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을 절대 거부했다. 그들도 예전에는 협상조건이 맞는다면 어디든 모습을 드러냈지만 어떤 세계 에서 악마대공이 일으킨 사건으로 인해 아네라 역사상 최강의 지르콘 나이 트 중 한 명을 잃으면서 그들은 철저히 배타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아네라가 협력할 가능성이 제로(Zero)인 현재, 도플겡어를 무력으로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은 리오와 피엘 자신뿐이었다. 슈렌도 리오 못지않게 강했으나 그는 도플겡어의 배리어에 절대적인 타격을 줄만큼 강력한 일격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지크는 완전히 열외였다. 저 자리에 지크가 있다는 것부터가 피엘로서는 납 득하기 어려웠다. ‘의외의 가능성조차 노릴 수 없을 텐데, 왜?’ 지크는 빠르다. 하지만 그 빠르다는 개념은 속도를 위주로 한 전투방식이 주가 되기 때문에 붙은 미사어구일 뿐, 현실적으로 리오나 슈렌보다 빠르다 는 말은 결코 아니었다. 그가 도플겡어의 배리어에 조금이라도 타격을 입힐 수만 있으면 오히려 다행이었다. 아무튼 리오, 슈렌, 그리고 지크는 도플겡어를 지켜보며 시민들의 대피를 기다렸다. 대피는 BSP의 영상이 대한민국 정부에 제공된 후 5분이 지난 뒤부터 시작되 었다. 지크를 제외한 다른 BSP들은 시민들의 대피를 돕기 위해 급파된 전투 경찰들과 함께 움직였다. 도플겡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공격을 하기 위해 움직이면 그만큼 능력을 배분해야 하고, 능력을 배분하게 되면 루이체의 세포에 걸린 영적 결합을 푸는데 드는 시간이 더 길어질 뿐이었다. 언제가 됐든 상대는 공격을 해온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도플겡어는 그들 이 먼저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대피가 진행되는 동안 리오와 슈렌은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을 의자삼아 힘 을 아꼈다. 앉은 자세는 매우 틀렸다. 다리를 가볍게 꼬고 앉은 슈렌은 팔짱을 살며시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분위기에 맞게 차분한 모습이었다. 반면 리오는 어깨너비로 벌린 무릎 위로 양 팔꿈치를 대고 손은 깍지를 꼈 다. 턱과 입은 겹쳐진 엄지 위에 놓았다. 붉은 장발 속의 눈동자는 뚜렷하 고 엄숙했다. 다분히 전투적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속은 똑같았다. 둘 다 도플겡어의 멀티플 스펠 배리어를 어떻게 무 력화시킬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루이체를 구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 득했다. 지크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크에 대한 걱정까지 할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북적대는 소리가 점차 멀어질 무렵, 슈렌이 넌지시 물었다. “지하드는 어떤 기술이지? 지금까지 얘기해준 것 말고 좀 자세하게 말해주 면 좋겠군.” 형제에게 흘끔 눈을 돌린 리오는 시선을 다시 도플겡어에게 두며 말했다. “검술을 초월한 검술이야.” “검술을…… 초월한 검술?” “음. 오딘이 말하기로, 지금의 주신 할아범과 맞서 싸우기 위해 만들어낸 최고의 기술이라더군. 하지만 대세가 일찌감치 기우는 바람에 직접 쓸 기회 는 별로 없었다나봐. 아무튼 위력이 대단하다고는 하는데… 그걸 가르쳐준 오딘조차 제대로 쓰는 꼴을 안 보여줬으니 나도 어떤 기술이라고는 정확히 얘기 못해. 다만 배울 때 느꼈던 건 일반적인 검의 기술과는 몸에 걸리는 압력이 좀 틀렸다는 사실이야. 뭐라고 해야 할까…….” 리오는 눈을 감았다. 지하드를 배울 당시 자주 느꼈던 그 특이한 느낌을 기 억해내기 위해서였다. “아, 그래. 이렇게 말하면 되겠군. 죽을 때의 느낌과 비슷해. 몸 전체가 굳어지면서 내 자신의 감각이 나로부터 해방되는 그 느낌…… 이젠 적응이 되서 그렇게 신기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런 느낌이 오지. 왜 그런지는 나 도 몰라. 지하드를 정상적으로 사용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미지의 영역이군.” “말하자면 그렇지.” 리오는 두 눈썹을 위로 크게 올렸다 내렸다. 슈렌은 지하드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을 해봤다. 리오가 오딘에게 검을 배운다는 이야기는 신계의 천사들뿐만 아니라 신들에 게도 큰 화제였다. 나이가 그리 많지 않거나 오딘에 대해서 어설프게 알고 있는 하급 신들은 주로 리오의 신변문제를 논했다. 망나니가 과연 환골탈태를 할 수 있을 것 인가, 아니면 그대로 피에 고픈 짐승이 될 것인가 하는 게 주된 이야깃거리 였다. 하지만 신계의 혁명 이전부터 존재했거나 지식이 깊은 상급 신들은 그 문제 를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리오가 오딘에게 배운다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오딘이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대단 한 일이었다. 슈렌이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빠짐없이 나온 단어가 있었다. 바로 지하드였다. 하지만 그 어떤 신도 지하드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 다. 그저 대단한 기술이라고만 말할 뿐이었다. 그때, 뭔가 따뜻한 물체가 슈렌의 어깨에 와 닿았다. 진한 고기냄새와 양념 냄새도 함께 풍겨왔다. 그것은 햄버거였다. 커다란 종이봉투를 한 팔에 안은 채 햄버거를 내민 지크는 빙긋 웃으며 형 제를 재촉했다. “일단 점심이나 먹자고. 배에 아무 것도 안 넣고 힘쓰기는 좀 그렇잖아.” “음.” 고기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슈렌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순순히 그 패스트푸 드를 받아들였다. 지크는 이어서 리오에게도 햄버거를 던져주었다. “너도 먹어. 음료수랑 감자튀김은 여기 있으니까 알아서 꺼내먹도록 해.” 그는 리오와 슈렌 사이에 종이봉투를 내려놓았다. 그곳에서 음료수를 빼 목을 축인 리오는 입안에서 터지는 기포의 느낌에 만 족스러운 숨을 내쉬었다. 햄버거를 이어서 씹던 그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어디서 사온 거야? 근처 사람들은 대부분 대피를 했을 텐데?” “그냥 가져왔지.” “…….” 리오는 씹는 것을 멈추고 지크를 쳐다봤다. 탄산음료 대신 주스를 마시던 슈렌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을 번갈아 쳐다보던 지크는 이내 웃으며 솔직하게 말했다. “농담이야. 문 닫고 가려는 사람 붙잡고 달라고 했지. 그러니까 기꺼이 주 더라고.” “민폐군.” 슈렌은 나직이 중얼댔다. 봉투 안의 음식들이 줄어들수록 거리도 조용해졌다. 대피는 순조로웠다. 혹 시라도 BG들이 나타날까 걱정했지만 그들도 이번만큼은 봐주는 듯 했다. 경찰의 사이렌소리조차 멀어질 무렵, 리오는 다 마신 음료수 컵을 종이봉투 안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슈렌, 지크도 이어서 일어났다. 리오는 아스팔트 바닥에 꽂아놨던 자신의 검, 디바이너를 뽑았다. 여름햇볕 에 적당히 데워진 그 보라색의 바스타드 소드는 주인의 손에 자신의 체온을 듬뿍 전해주었다. 리오는 고개를 돌려 지크를 쳐다봤다. 망토의 어깨자락과 붉은 머리카락 사 이로 보이는 그의 눈은 지크에게 미묘한 느낌을 주었다. 뭔가 중요한 말이 나올 듯한 분위기였다. 지크는 그것이 무엇인지 매우 궁 금했지만 리오가 먼저 말하기 전까지는 반응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조금이나마 리오를 위한 길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이윽고, 리오가 말했다. “한 가지 묻지.” “뭔데?” “만약 루이체를 구할 수 없게 된다면 넌 어떻게 할 거지?” 리오의 목소리는 낮고 억양이 한결같았다. 매우 차갑고 싸늘했다. “무, 무슨 말이야?” 지크는 말을 조금 더듬었다. 그런 말이 나올 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직접 듣고 보니 당황스러웠다. 리오는 고개를 앞쪽으로, 도플겡어 쪽으로 돌리며 다시 말했다. “글을 쓰고 싶지만 팔이 없어 쓸 수 없고, 보고 싶지만 눈이 보이지 않아 볼 수 없어. 걷고 싶지만 다리가 없어 걸을 수 없고…… 구하고 싶지만 능 력이 되지 않아 구할 수 없어. 넌 그럴 때 어떤 기분이 들 것 같나?” “…….” “말이 생각나지 않나? 그래, 좌절감에 빠진다. 극도의 패배감과 울분이 원 래 자리 잡고 있던 패기를 없애고 정신을 지배할 거야. 보너스로 오랫동안 뇌리에서 지워지지도 않지. 즐거운 일은 쉽게 지워지는데 말이야. 신기하지 않나?” 지크는 리오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주먹을 꾹 쥐었다. 장갑의 가죽 사이에서 내는 마찰음이 조용한 가운 데 울려 퍼졌다. “네가 무슨 말을 할 건지는 알아. 하지만 난 포기할 수 없어! 루이체도 겨 우 마음을 열기 시작했는데, 오빠들이 생겼다며 좋아했는데 이제 와서 죽는 다니 말이 돼? 난 그 불쌍한 아이를 더 불쌍하게 만들 수는 없어!” “후, 멍청한 놈.” 리오는 피식 웃었다. “내가 묻는 건 그 불쌍한 천사 아가씨의 기분이 아니야. 네 기분이다. 루 이체를 구하지 못했을 때 네가 버텨낼 수 있겠냐는 말이다.” “…….” “루이체는 이번에 일이 잘못되면 영영 안녕이야. 보고 싶어도 다시는 못 보지. 하지만 나와 슈렌은 널 지겹게 봐야 한다. 알겠나? 난 루이체를 잃고 징징 짜댈 네 꼬락서니를 보기 싫어서 이렇게 충고하는 거다.” 리오는 검을 들어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목을 이리저리 돌려 긴 장을 풀었다. 지크는 리오의 그런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분해서도, 미워서도 아니었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형제가 그저 놀랍기만 했다. “내 경험상 비춰볼 때, 구하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못 구해서 땅을 치는 것 보다 구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귀로 듣는 게 열이 덜 받더라. 책임회피 비슷 한 건데, 그렇게 하니 의외로 죽은 사람이 잘 잊혀지더군.” 지크의 장갑에서 나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리오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 다. “자, 충고는 끝났다. 여기 계속 죽치고 있을 건가, 아니면 동료들과 함께 모여앉아 결과를 기다리겠나? 둘 중에 하나를 골라봐.” 지크는 곧바로 대답했다. 어차피 리오의 말이 시작됐을 때부터 답은 나와 있었다. “3번을 택하겠어.” 리오, 슈렌은 동시에 지크를 쳐다봤다. 그는 양손으로 형제들의 어깨를 각각 짚으며 말했다. “일단 해보자. 희망이 있기 때문에 절망도 존재하는 거니까.” “…….” 희망. 리오에겐 왠지 아득한 단어였다. 자신도 처음엔 그 말을 믿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빠져도 그것을 믿고 이겨내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멀어지기만 했다. 대신 찾 아온 것은 자기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실망과 절망뿐이었다. 지크는 어째서 이렇게 당당히, 듣는 리오 자신의 얼굴이 팔릴 정도로 크게 희망을 부르짖는 것일까. 아직 겪어본 일이 많지 않기에 그럴 수도 있고 희 망과 절망을 구분 못할 정도의 바보라서 그럴 수도 있다. 어찌됐든 리오는 웃었다. 슈렌 역시 지그시 미소를 띠었다. 그들이 움직이자 도플겡어도 꿈틀댔다. 그 거대한 갑옷의 움직임은 압도적이었다. 지면을 타고 오는 무게감과 힘은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준이 아니었다. 리오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지금 도플겡어가 뿜어내는 힘은 현재 셋 중 에서 가장 강한 물리력을 지닌 그조차도 부담스럽게 느낄 정도였다. “엄청난데? 저런 힘이 도대체 어디서 나는 거지? 특별한 동력원이라도 있 는 건가?” 오른 팔로 얼굴 앞을 막은 슈렌은 힘겹게 대답했다. “도플겡어의 구성요소인 블록, 즉 생물에게 있어서 세포의 역할을 하는 그 부분에 극소형의 전원과 컴퓨터가 각각 내장되어있다고 들었어. 한 블록의 크기는 일반적인 세포 하나의 크기와 비슷해.” “그래? 그럼 그 블록이라는 게 몇 개나 뭉쳐서 저 녀석을 이루는 건데?” “약 50조(兆) 개체다.” “50조?” 전혀 예상치 못한 엄청난 숫자가 나오자 리오의 표정은 단숨에 변했다. “놀랄 것 없어. 인간의 육체는 60조의 세포로 구성되어있으니까. 아무튼 그 천문학적인 숫자의 블록들이 한꺼번에 힘을 낸다면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이 힘을 설명할 수 있겠지.” “후, 그래? 그렇군.” 리오는 검을 굳게 거머쥐었다. “자아, 이제 요리를 시작해볼까? 어이, 희망의 남자. 아이디어가 있으면 한번 내 보시지?” 그의 부름에 지크는 응답하지 못했다. 그는 현재 도플겡어의 힘에 눌려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그는 두 가지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첫 번째는 도플겡어의 힘이었고 두 번째는 리오와 슈렌이 이 가공할만한 힘 의 기류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리오는 완전히 얼어붙은 형제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도망치려면 지금이야.” “우, 웃기지 마! 누가 도망을 쳐!” 지크는 있는 힘을 다 해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리오는 호흡을 조절했다. 슈렌 역시 규칙적인 호흡을 하며 기를 끌어올렸 다. 지금까지 그들은 아주 제한적인 힘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평상시처럼 힘을 썼다가는 그 여파로 지역의 주민이나 시설물에 큰 피해를 입힐 우려가 있었 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큰 방해물인 시민들이 5킬로미터 밖으로 대피한 지금은 부담가 질 필요가 없었다. “흡!” 짧은 기합과 동시에 리오의 망토가 크게 너울댔다. 새파란 파동이 그의 몸 으로부터 밀려나왔다. 슈렌 역시 기합을 개방했다. 그는 리오와 달리 약간의 화기(火氣)가 파동에 뒤섞였다. 지크도 지지 않겠다는 듯 기를 올렸다. 전신에서 뿜어지는 스파크의 모습은 강렬했지만 왠지 다른 둘에 비해서는 어설퍼보였다. 상대의 힘으로부터 약간 여유를 얻은 리오는 턱을 앞으로 한 번 내밀었다. 슈렌은 그 신호에 따라 앞으로 나갔다. 그의 오른팔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팔을 타고 손까지 내려온 화염은 길 게 뻗어나더니 창의 모습을 갖췄다. 슈렌은 창의 밑으로 바닥을 찍었다. 그러자 도플겡어의 주위에 커다란 화염 의 원이 그려졌다. 지면 위에서 타오르던 화염은 슈렌이 창 밑을 바닥에 마찰시키면서 화염의 기둥으로 변해 거인을 집어삼켰다. 그 폭발적인 기세의 화염은 도플겡어가 뿜어내는 힘을 일순간 차단했다. 덕 분에 우물쭈물하던 지크도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젠장!”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지크는 뭔가를 하기 위해 무명도를 뽑아들었 다. 지금 이 상황에선 주먹이나 발이 소용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 다. 그런데 앞쪽에서 냉기가 확 밀려왔다. 그 중심점인 리오의 왼팔엔 하얀 색의 소용돌이가 맺혀 있었다. 여름의 폭 염 속에서 새하얀 냉기를 뿜으며 회전하는 소용돌이의 모습은 매섭기까지 했다. 리오는 왼손을 검 위에 두며 몸을 띄웠다. 도플겡어의 머리높이 이상으로 뛰어오른 그는 정점에 다다르자마자 매처럼 빠르게 떨어졌다. 그가 지나간 곳엔 하얀 흔적이 남았다. 검의 냉기로 인해 대기의 수증기가 응결되면서 만들어진 현상이었다. 리오는 그대로 화염 속에 떨어졌다. 지크가 어찌 반응하기도 전에 화염 속에서 백색의 폭발이 일어났다. 공중제 비를 돌며 그곳에서 벗어나는 리오의 뒤로 거칠게 비어져 나온 얼음의 감옥 이 보였다. 지크 옆에 착지한 리오는 인라인스케이트를 멈추듯 죽 미끄러지다가 한바퀴 돌며 도플겡어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꽤 깔끔하고 스케일이 큰 공격이었지만 기술을 쓴 리오의 표정은 매우 나빴 다. “온도 차이도 통하지 않다니, 농담이 아니군.” “그럼 실패란 말이야?” “보면 알잖아.” 이윽고 얼음이 깨지며 도플겡어의 거대한 몸체가 튀어나왔다. 리오의 말대로 손상은 전혀 없었다. 주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서너 번 정도 반짝였을 뿐이다. 부서진 얼음조각을 짓밟으며 나온 도플겡어는 오른 주먹을 번쩍 들었다. 풍 부한 양감의 그 석재 주먹은 공사장의 해머 이상으로 강력해 보였다. 중량 때문에라도 한 번 맞으면 살아남는 생물이 없을 것 같았다. 도플겡어는 그 거대한 흉기를 리오를 향해 휘둘렀다. “피해!” 리오는 옆에 있는 지크를 발로 차며 자리를 벗어났다. 형제에게 걷어차인 지크는 멀찌감치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평소 같으면 펄펄 뛸 일이지만 지크는 리오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들이 있 던 자리에 꽂힌 도플겡어의 주먹은 근처 건물들의 유리창을 모조리 부술 만 큼 거대한 충격을 주위에 불러 일으켰다. 유리창뿐만 아니라 조금 오래된 건물의 외벽에도 금이 갔다. 이것은 거의 지진 수준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바닥에 주저앉은 지크는 넋이 나간 얼굴로 도플겡어를 쳐다봤다. 지면에서 주먹을 뽑은 상대의 웅장한 모습은 지크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 한 느낌을 주었다. 압도적인 크기, 인정하기 힘든 힘, 그리고 경이적인 방 어력 등, BG나 사이보그들과는 너무도 다른 조건을 가진 존재였다. 그런데도 리오와 슈렌의 표정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들은 처음의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금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저 녀석들, 도대체 어떤 괴물들이랑 싸워온 거야?’ 그때 지크의 뇌리에 일주일 전의 일이 떠올랐다. 흑색의 거대한 용. 동룡족의 무사가 변신한 그 생물체에게 자신은 아무런 공격도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당시 그 흑룡은 술법이라는 것을 썼다. 멀쩡한 하늘에 구름을 불러일으켜 번개를 꽂는 비현실적인 공격기술이다. 지금 리오와 슈렌도 마법이라는 것 을 써서 불과 냉기를 불러내어 싸우고 있었다. 그가 알던 물리적 전투방식과는 너무도 차이가 컸다. 굳이 비유하자면 특수 효과가 잔뜩 들어간 영화와도 같았다. 도플겡어의 팔이 불쑥 늘어났다. 근처에 주차된 차량들에게 손대는 것을 보 니 차량들을 흡수하여 뭔가를 만들려는 듯 했다. 국물을 삼키듯 차량들을 후루룩 흡수한 도플겡어는 팔을 즉시 제 위치로 돌 렸다. 거인의 팔뚝과 종아리가 뭉글뭉글해진다 싶더니 한 개씩의 대형 분사구가 튀어났다. 마치 로켓에서 떼어온 것 같은 그 장치는 제대로 굳어지자마자 고음을 지르며 불꽃을 뿜었다. 도플겡어의 거대한 몸체가 무게에 맞지 않는 맹렬한 속도로 움직였다. 그 경이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아스팔트는 소나무 껍질처럼 부서져 날아갔고 대 기마저 진동했다. 목표는 리오였다. 그가 훼방꾼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사실을 거인은 잘 알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대의 속도에 제대로 준비를 못한 리오는 팔을 교차한 상태로 기를 전방에 모았다. 굳게 여문 기의 방패 위로 도플겡어의 주먹이 꽂혔다. 그 원시적인 공격은 리오를 길 저편의 건물 쪽으로 간단히 날려버렸다. 기로 몸을 방어한 덕분에 충격을 거의 받지 않은 리오는 공중에서 몸을 돌 려 건물 벽에 발을 디뎠다. 리오는 순간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주위가 너무 어두워서였다. 그는 고개를 쳐들었다. 도플겡어의 펀치가 건물에, 정확히 말해 리오의 머리에 직격했다. 건물의 파편이 날고 휘어진 철근이 흉하게 튀어나왔다. “리오!” 지크가 놀라 소리쳤다. 슈렌이 리오를 구하기 위해 뛰었지만 도플겡어는 이 미 같은 지점에 초당 수십 발이 넘는 속도로 주먹을 쏟아 붓고 있었다. 도플겡어는 마지막으로 손을 맞잡은 뒤 그대로 건물을 휘갈겼다. 이미 엉망 이 되어버린 건물은 그 일격으로 인해 형체도 남지 않았다. 날아가는 파편 속엔 리오의 모습도 있었다. 힘없이 날아갈 것만 같던 그의 몸이 갑자기 반전했다. 이리저리 긁힌 그의 근육질 팔엔 하얗게 빛나는 문자들이 한가득 떠 있었다. 팔에서 떨어져 나간 문자들은 이중원형으로 배치된 뒤 각기 다른 방향으로 회전했다. 마법진이었다. 리오는 맹렬히 회전하는 마법진의 중앙에 오른손을 뻗었다. “먹어 봐라! 커미트!” 순간 마법진이 사방으로 확장되면서 거대한 빛의 기둥을 내뿜었다. 6층의 건물 정도는 간단히 먹어치울 만큼 두꺼운 빛이었다. 대기를 흔들며 뻗어나간 빛은 도플겡어와 주변 건물을 머금고 계속해서 전 진했다. 마법의 범위 내에 들어있는 모든 구조물들은 마법이 주는 물리적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분해 됐다. 마법시전이 끝나자 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리오는 공중에 몸을 띄운 채 호흡을 조절했다. 망토 안에 숨겨진 그의 두꺼 운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었다가 단단히 긴장되었다. 마법에 휘말린 지역은 거인의 손톱에 긁힌 듯 깨끗이 밀려 있었다. 남은 것 은 아무 것도 없었다. 파손된 상수도관에서 뿜어지는 몇 개의 물줄기가 그 곳에 건물이 있었음을 쓸쓸히 증명할 뿐이었다. “이럴 수가!” 지크는 탄성을 질렀다. 리오의 마법에 감탄한 것이 아니다. 생전 처음 보는 강력한 공격을 맞고도 멀쩡히 서있는 도플겡어의 모습에 놀란 것이다. 도플겡어의 육체 주변엔 전에 보였던 빛들이 반짝였다. 공중에서 그것을 지 켜보던 리오는 숨을 강하게 뿜었다. 그의 상처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졌다. 연기가 사라진 뒤에 나온 것은 새로 운 피부였다. 그렇게 간단히 부상을 회복한 리오는 휘날리는 산발을 긁적였 다. “커미트로는 배리어를 서른세 개 밖에 날리지 못하는군. 예상보다 단단한 데?”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기척을 느껴보니 시민들의 대피는 완전히 끝난 듯 했다. ‘플레어라면 위력을 계산해봤을 때 전부 날릴 수 있겠군. 하지만 너무 가 까워. 내가 쓰는 플레어의 파괴반경은 1킬로미터지만 후 폭풍에 의한 추가 파괴가 10킬로미터다. 대놓고 쓸 수는 없어. 그렇다면…….’ 리오는 디바이너에 눈을 돌렸다. 검의 진한 보라색 표면은 주인의 영혼마저 빨아들일 것처럼 야릇한 반사광을 뿜었다. “좋아, 이놈으로 직접 먹여주지.” 뭔가를 결심한 듯 리오는 슈렌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렵지 않게 그의 뜻을 이해한 슈렌은 멍하니 서있는 지크에게 다가가 그의 등판을 쳤다. “정신 차려.” “응?” 도플겡어에게 시선을 두고 있던 지크는 백일몽에서 깬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뜬 채 슈렌을 돌아봤다. 슈렌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응, 이 아니야. 움직이자.” “어, 어디로?” “도플겡어가 리오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는 거다.” “뭐? 하지만 내가 가진 기술로는 저 녀석을 어찌할 수가 없어! 미동도 하 지 않을 거란 말이야!” “…….” 슈렌은 지크의 얼빠진 모습을 잠시 쳐다봤다. 이윽고 그의 왼손이 지크의 어깨에 놓였다. “네가 가진 희망은 이렇게 값싼 것이었나?” 형제의 뼈있는 말에 지크는 바보처럼 눈만 껌벅였다. 슈렌의 손이 조금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찰싹 하는 소리가 그의 손과 지크의 재킷사이에서 났다. “따라와라.” 그는 도플겡어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의 손에 잡힌 그룬가르드가 손가락 의 움직임에 맞춰 천천히 회전했다. 그가 말했다. “지금 필요한 건 희망이라는 애매모호한 개념이 아니라 기회다. 우리는 스 스로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 기회를 만들어야만 해. 불확실한 확률 에 모든 것을 걸을 수는 없어. 자기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타인들의 목숨 까지 오고 가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행동이나 생각은 무용(無用)이다.” 슈렌은 창끝에 손을 댔다. 작은 화염이 이리저리 교차된 창끝 아래에 맺혔 다. 그는 점점 커지는 불꽃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나와 리오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잊어버린 지 꽤 됐어. 이유가 뭔지 아나? ” “그, 글쎄?” “우리가 희망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지크는 또 한번 뇌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도플겡어의 힘에 눌러 아무 것도 못하고 있을 때 리오와 슈렌은 아 무런 흔들림 없이 맞서 싸웠다. 자신들의 공격이 통하지 않아도 크게 당황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 해결책을 찾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들이 자신보다 강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들은 희망이니, 노력이니, 자신만의 방식이니 하는 미사어구 따위에는 전 혀 신경 쓰지 않았다. 기계처럼 철저하게, 쓰러트려야 하는 상대의 모든 것 을 계산하고 그에 맞춰 공격했다. 그렇지 않으면 패배한다. 그뿐이었다. 지크는 시선을 리오에게 돌렸다. 그는 왼팔에 마법진을 띄우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싸움에 임하는 모든 존재들이 그렇겠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가슴이 찡할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슈렌은 창을 높이 들었다. 창끝에 붙은 불은 이내 기세 좋게 활활 타올랐 다. 둘 다 전의 외엔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은 한 가지를 맹렬히 바라고 있었다. 구하고 싶다. 언제 분해 될지 모르는 여동생을 구하고 싶다는 그 일념이 그들을 무섭게 집중시켰다. 리오와 자신과의 거리는 100미터 남짓 된다. 슈렌은 불과 몇 발자국 앞에 있다. 하지만 지크에겐 그 틈이 밑도 끝도 없이 멀게 느껴졌다. 지크는 자신의 발끝을 바라봤다. ‘움직여.’ 그의 다리가 꿈틀댔다. ‘움직여줘, 제발!’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슈렌의 옆에 선 지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뭘 하면 되지?” “리오를 보호한다.” 슈렌이 말했다. “지금 리오는 도플겡어의 배리어를 일격에 날릴 만한 기술을 준비하고 있 어. 하지만 도플겡어가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겠지. 우린 그걸 막 는다.” “어떻게?” “내가 공격을 가하면 배리어에 틈이 생긴다. 넌 그 배리어가 그냥 닫히게 두면 안돼.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공격하는 거야.” “그래? 좋아!” 지크는 그답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데 얼마 못가 걱정이 생겼다. “만약 리오의 공격이 실패하면 어쩌지?” “카드는 몇 장 더 남아있으니 걱정하지 마. 자, 시작한다.” “음!” 슈렌이 먼저 움직였다. 지크는 무명도를 뽑아들고 형제의 공격이 적중하기 를 기다렸다. 한 마리의 봉황처럼 붉은 코트를 휘날리며 도약한 슈렌은 창을 옆으로 늘어 트렸다. 그에 맞춰 창의 화염이 폭음을 내며 늘어났다. 화염은 넓고 길었다. 마치 불로 만들어진 거대한 칼날이 창끝에 덧붙여진 듯한 모습이었다. 리오에게 집중하고 있던 도플겡어는 갑작스레 감지된 거대한 기운에 놀란 듯 고개를 급히 돌렸다. 화염의 칼날이 도플겡어의 머리에 직격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도플겡어의 배리어에 떨어진 것이지만 충격량이 워낙 컸는지 거인의 몸체는 폭발과 함 께 뒤로 꿈틀했다. 슈렌은 착지하자마자 다시 점프해 똑같은 지점을 다시 쳤다. 이번엔 제대로 방비를 했는지 도플겡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양손을 편 거인은 벌레를 잡듯 슈렌 쪽으로 손바닥을 모았다. 그 죽음의 박 수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슈렌은 창의 뒤쪽을 머리 위로 올렸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지크가 그것을 딛고 도약했다. 무명도를 양손에 거머쥔 그의 몸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일어났다. 번개처럼 굵직한 스파크는 지크의 팔을 따라 무명도에 모였다. 이를 악문 지크는 고함을 지르며 칼을 휘둘렀다. 목표지점은 슈렌의 공격이 적중한 바로 그곳이었다. “먹어라! 뇌명(雷鳴)!” 도플겡어의 머리에서 섬광이 번쩍 터졌다. 슈렌이 했던 공격만큼 강하진 않 았지만 찢어진 도플겡어의 배리어가 회복되지 않도록 하기에는 전혀 모자라 지 않았다. 이번엔 슈렌이 지크의 어깨를 밟고 올라가 일격을 가했다. 그 다음엔 지크 가 슈렌의 등판을 밟고 올라갔다. 불과 번개의 현란한 콤비플레이는 도플겡어의 배리어를 천천히 깎아먹었다. 도플겡어는 팔을 휘두르며 저항했으나 둘의 공격속도가 빠르고 슈렌이 지정 해주는 공격각도가 워낙 교묘해서 쉽사리 떨쳐내지 못했다. 그 광경을 주관제실의 스크린을 통해 구경하는 BSP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생전 본 적이 없는 싸움이었다. 묘기라면 만점을 줘도 아깝지 않을 수준이 었다. 처크의 바지에 잔뜩 떨어진 담뱃재는 그들이 얼마나 몰입되어있는지 를 말해주었다. 그 와중에서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피엘뿐이었다. ‘저렇게 공격할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20여초. 그 이후에는 도플겡어가 나름대로의 방어 전략을 짜서 대응해올 거야. 그 전에 리오님의 마법검이 완성돼야 하는데……!’ 그녀의 걱정대로 리오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검 기술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플레어 버스터의 주문을 완성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플레어 버스터의 원래 주문인 플레어는 최상위 마법인 만큼 주문도 길고 정신력의 소모도 상당했다. 그냥 외울 수 있다고 해서 될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이마의 땀이 그의 적동색 얼굴을 타고 흘러 턱밑에 맺혔다. 벌써 몇 방울이 떨어졌는지 그의 망토자락은 이미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래도 주문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 듯 왼팔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고리가 단 하나로 압축됐다. 그 사이 슈렌, 지크의 공격패턴을 파악한 도플겡어는 양 주먹을 불끈 쥐고 지면을 후려쳤다. 그 때문에 발생한 충격파는 두 남자의 육체를 저편으로 간단히 날려버렸다. 슈렌은 창으로 지면을 긁어 충격을 완화했다. 하지만 지크는 중심을 잡을 틈도 없이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으아악!” 한없이 구를 것 같던 지크의 몸은 부서진 아스팔트에 걸려 겨우 멈췄다. 근 처에서 땅을 디딘 슈렌은 급히 리오에게 눈을 돌렸다. 리오의 주문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반면 도플겡어는 그를 공격하기 위해 두꺼운 다리를 뒤뚱뒤뚱 움직이고 있었다. 슈렌은 즉시 투창자세를 잡았다. 똑바로 뜨인 그의 눈에서 황색의 백광(白 光)이 터졌다. 이어서 그의 몸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불의 창인 그룬가르드에서 샘솟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기(氣) 자체가 화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흡!” 슈렌의 짧은 기합이 터졌다. 그가 던진 그룬가르드는 화염의 탄환이 되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창이 지 나간 자리에선 불꽃의 길이 너울댔다. 도플겡어의 배리어에 광선처럼 꽂힌 창은 반발력에 밀려 튕겨나가지 않았 다. 오히려 공을 찌그러트리듯 배리어의 형태를 뭉개며 도플겡어를 밀어냈 다. 배리어와 창 사이에 놓인 건물파편들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창에서 흘러 나오는 가공할만한 열기는 암석을 용융점에 도달시킬 만큼 강력한 수준이었 다. 창이 닿은 지점에선 빛들이 무수히 반짝였다. 물리적 힘과 방열을 담당한 배리어들이 파괴와 조립을 수없이 반복하며 슈렌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 다. 도플겡어는 오른손을 뻗어 그룬가르드를 붙잡았다. 창과 손 사이에서 배리 어가 붕괴될 때 생기는 불꽃이 무수히 튀었지만 도플겡어는 아랑곳하지 않 고 반대편 손을 뻗어 나머지 부분마저 붙잡았다. 수수깡처럼 창을 양손에 잡은 거인은 있는 힘을 다해서 손을 비틀었다. 그 룬가르드를 그대로 꺾어버리려는 심산이었다. 창이 조금씩 휘는 걸 보면서도 슈렌은 가만히 있었다. 충격에서 겨우 벗어 나 일어난 지크는 그 꼴을 볼 수 없다는 듯 고함을 질러댔다. “뭐하는 거야! 저러다가 창이 부러지면 어떡해!” “괜찮아.” “뭐?” 슈렌 특유의 무겁고 냉정한 목소리를 들은 지크는 그 순간 형제의 관심이 다른 곳에 가있다는 것을 느꼈다. 슈렌의 창은 도플겡어의 막강한 물리력에 의해 조금씩 휘어지고 있었다. 회 전은 이미 멈추었으나 창이 뿜어내는 열기는 여전했다. 그 강력한 힘이 도 플겡어를 집착하게 만들었다. 아니, 눈을 멀게 했다는 표현이 옳았다. 리오의 왼손에서 회전하던 고리가 빛을 발하며 주인의 팔에 흡수됐다. 자신 의 손에서 주황색의 빛이 뿜어지자 리오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정말 고생시키는군.” 그는 검에 왼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검의 보라색 표면이 주황색으로 바뀌며 맹렬히 진동했다. “크윽!” 리오는 급히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검은 오른손의 힘 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튕겨나갔을 것이다. 양손에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디바이너는 야생동물처럼 이리저리 몸을 흔들 었다. 리오가 제대로 제어하지 못할 정도의 강력한 힘이 검에 걸려있다는 증거였다. 어렵사리 검의 중심을 잡은 리오는 멀리 보이는 도플겡어를 무서운 눈으로 쏘아봤다. “이걸로 끝이다.” 이윽고, 주황색의 유성이 도플겡어를 향해 떨어졌다. 그에 맞춰 슈렌이 손가락을 튕겼다. 탄성의 한계까지 휘어졌던 그룬가르드 는 순간 불꽃으로 변해 거인의 손에서 사라졌다. 팔을 치켜든 바보가 되어버린 도플겡어는 고개를 돌려 리오 쪽을 바라봤다. 리오는 확신했다. 상대는 절대 피할 수 없다. 만약 버틴다 해도 피할 수 없 는 충격을 입을 것이다. 위력측정을 잘못해서 루이체가 다칠 수도 있었지만 거기까지 생각할 틈은 없었다. 이미 동전은 던져진 상태였다. “하아앗!” 리오는 일갈을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슈렌은 이제 일어날 핵융합 폭발로부 터 자신과 지크를 지키기 위해 보호막을 쳤다. 주황색의 반월이 그려졌다. 마법검, 플레어 버스터가 작렬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고요했다. 뜨거운 여름날씨 속에 습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리오의 머리카락을 가냘프게 흔들었다. 흔들리는 붉은 실선들 속으 로 리오의 눈이 보였다. 그의 눈은 당황함에 젖어 있었다. ‘이런!’ 맞추지 못했다. 정확히 말해 도플겡어가 그의 검을 피한 것이다. 거인의 앞면엔 몇 개의 분사구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팔과 다리에 나온 것과 같은 것들이었다. 그것으로 순간적인 스피드를 내서 피한 게 분 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유 중에 하나였다. 가장 큰 이유는 리오에게 있었다. 도플겡어에게 일격을 날리는 순간, 그의 팔이 검에 걸린 힘을 버티지 못하고 흔들린 것이다. 100분의 1초, 1000분의 1초를 다투는 그들의 싸움에서 그 잠깐의 흔들림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리오의 검엔 여전히 주황색의 빛이 어려 있었다. 공격이 스치기라도 했다면 플레어의 기운이 사라졌겠지만 아예 스치지도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기회는 충분히 남아있었다. 거인의 거대한 주먹이 서서히 위로 들렸다. 자신의 발 앞에 중심을 잃고 서 있는 적을 그대로 깔아뭉개려는 심산이었다. 팔뚝에 붙은 분사구에 불꽃이 맺혔다. 리오가 중심을 잡고 벗어나기 전에 일격을 먹여야 한다. 이번 공격이 실패하면 자신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도플 겡어는 잘 알고 있었다. 슈렌과 지크는 거리상 리오를 구할 수 없다. 리오는 플레어 버스터의 실패 로 인한 균형붕괴로 인해 움직이지 못한다. 절호의 기회를 잡은 도플겡어는 자신 있게, 그리고 정확하게 공격을 날렸 다. 폭음이 터지고 흙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도플겡어, 그리고 리오의 모 습은 그 황색의 장막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슈렌은 눈을 부릅떴다. 반대로 지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젠장, 빌어먹을!” 지크는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지르며 땅바닥에 주먹을 내질렀다. 희망이 절 망으로 바뀔 때 오는 허탈감과 분노로 인해 그의 전신은 심하게 후들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슈렌이 무겁게 말했다. 지크는 벌떡 일어나 형제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났잖아! 리오가 떡이 된 마당에 어떻게 할 거야! 또 다 른 카드인지 뭔지 어서 꺼내보라고!” 슈렌은 고래고래 소리친 형제를 흘끔 쳐다봤다. “오해하지 마.” “뭐?” 지크는 움찔하며 뒤를 돌아봤다. 도플겡어는 머리 쪽의 배리어가 조금 뭉개진 채 비틀대고 있었다. 그 사이 중심을 회복한 리오는 마음껏 검을 휘둘렀다. “이건 못 피한다!” 그의 고함이 터진 직후, 백광의 분수가 하늘을 뒤덮을 듯이 치솟아 올랐다. 슈렌이 급히 친 마법의 보호막에 강렬한 충격파가 밀려왔다. 양손을 펼쳐 보호막을 전개한 슈렌의 인상이 전에 없이 일그러졌다. 지크는 자세를 낮춘 채 충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플레어의 원래 위력이라면 반경 1킬로미터 내의 모든 물체가 폭발 시 발생 하는 열에 의해 증발해버리고 약 10킬로미터까지는 폭발이 불러일으킨 후폭 풍의 충격을 받는다. 허나 지금 리오가 사용한 플레어 버스터는 마법검인 만큼 파괴규모는 축소되지만 위력은 압축되어 피해는 훨씬 증폭된다. 모니터를 통해 현장을 지켜보던 본부 직원들은 하얗게 물든 화면을 보며 결 과를 기다렸다. 전투지역 밖으로 대피한 전투요원들은 시민들과 함께 임시 화면을 보며 빛과 희미한 충격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슈렌의 보호막이 걷혔다. 일어나는 지크의 귀에 거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긴장감이 가득한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서서히 뒷걸음질치는 리오의 모습 이었다. 축 늘어진 그의 어깨너머로 상반신 절반이 날아간 거인의 모습이 보였다. 폭발이 만든 거친 단면에는 새의 알처럼 보이는 반투명의 매끈한 물체가 보 였다. 그 안엔 금발의 작은 소녀가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리오는 희미하게 보이는 소녀의 뽀얀 얼굴을 보며 힘없이 웃었다. “루이체.” 형제의 그 목소리를 들은 슈렌은 지그시 웃었다. 지크는 골을 넣은 축구선 수처럼 양팔을 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우와, 해냈어! 해냈다고! 루이체를 구한 거야! 넌 정말 대단해!” 그는 리오를 뒤에서 껴안으며 기뻐했다. 리오는 형제에게 기대듯 몸의 중심 을 뒤로 옮기며 긴 한숨을 쉬었다. 슈렌은 리오의 플레어 버스터가 터지기 직전을 회상했다. 리오가 공격당하기 직전, 연보라색의 빛덩이가 도플겡어의 머리에 혜성처럼 꽂혔다. 슈렌의 눈이 확실하다면 그것은 일명 저격마법이라고 불리는 고위 주문, ‘리벤스톨’이었다. 이곳의 단위로 따졌을 때 약 10킬로미터 밖에서도 상대를 정확히 명중시킬 수 있는 그 주문은 정확도와 위력이 좋지만 주창(呪唱:주문을 외우는 것)의 시간이 터무니없이 길기 때문에 고위마법사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어려 운 주문이었다. ‘도대체 누가 리벤스톨을 사용한 건가? 피엘 비서관은 아닐 테고…….’ 슈렌의 뇌리에 문득 갈색 머리의 여성이 떠올랐다. 자신들 이상으로 마법을 잘 쓰고 비밀이 많으며 시간의 여신의 문장까지 지닌 수수께끼의 여성, 오 직 그녀만이 리벤스톨를 도플겡어에게 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운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오는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돌렸다. 플레어 버스터의 충격을 가장 가까이 에서 막아야 했기에 그의 체력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옆에 있는 지크의 다리를 툭툭 건들며 말했다. “루이체를 데리고 나와. 불편하게 보인다.” “알았어, 맡겨두라고.” 총알처럼 튀어나갈 것만 같던 지크는 고작 두 걸음을 옮기고 멈췄다. 리오 는 의아한 눈으로 형제를 바라봤다. “뭐야, 또?” “음, 아냐.” 지크는 다시 리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이체는 네가 꺼내야 돼. 네가 구해낸 거잖아.” “그런 절차를 위해서 고생한 게 아니야. 피곤한 사람 건들지 말고 네가 해.” “그러지 마.” 지크는 리오를 억지로 잡아 일으켰다. “오해를 풀어야 할 거 아냐. 넌 네 스스로 루이체를 꺼내면서 그 오해를 풀어야 해.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꼭 밝혀야 한다고.” “좋은 사람? 관둬. 그런 건 너나 해.” 형제의 팔을 뿌리친 리오는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크는 어떻게 좀 해보라는 듯 슈렌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웃으며 고개 를 저었다. “나쁜 녀석.” 지크는 투덜대며 루이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리오는 그대로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망토 덕분에 피부가 직접 땅에 닿진 않았지만 더운 날씨가 불러온 지면의 열기는 그대로 전해져왔다. 그것이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더운찜질을 받을 때와 느낌이 비슷했다. 그는 맑은 하늘에 눈을 돌렸다. 끝없이 펼쳐진 그 천공의 바다는 큰일을 끝 낸 그의 마음을 시원하게 어루만져주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홀가분히 중얼댔다. ‘이제부터 좋은 상황인가? 후후, 그럼 난 필요 없겠군. 언제 떠나면 좋을 까나?’ 리오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빛이 너무 밝게 느껴졌다. 그의 전신은 어느 때보다도 편하게 보였다. 그런데 그의 위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훌쩍 지나갔다. 리오는 눈을 부릅뜨고 일어나 뒤를 쳐다봤다. 루이체를 구하러 갔던 지크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뭔가 큰 것 한 방을 맞는 듯 그의 전신이 크게 꿈틀댔다.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인간의 것이 아닌,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도 더 묵직하고 힘이 있는 존 재의 발자국 소리였다. 리오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도플겡어였다. 그 거인은 부서지지 않은 팔을 땅에 박은 채 리오에게 천천히 다가오고 있 었다. “어째서…… 어째서!” 리오는 검을 다시 거머쥐고 일어났다. 도약하여 아직 회복되지 않은 도플겡 어의 단면을 검으로 내리쳤다. 파편이 튀고 거인의 몸뚱이가 부서졌지만 거 인의 재생속도는 그보다 훨씬 위였다. 루이체가 갇힌 곳은 조금씩 숨겨졌다. 리오는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아 이를 구하려 했다. 그 충격 때문이었을까. 갇혀있던 루이체가 희미하게 눈을 떴다.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리오를 본 루이체는 금세 눈물을 쏟았다. 그녀는 검을 휘두르며 싸우는 리오의 모습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미끼라는 말을 서슴없이 꺼내던 냉혹한 모습과는 전혀 맞지 않는 처절한 모 습이었다. 루이체는 손을 뻗었으나 반투명의 장막은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렸으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리오는 머리를 흔들며 자신을 부르는 아이의 모습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다. 더욱 빨리, 더욱 강하게 공격을 날렸다. 허나 그 모습은 조금씩 감춰졌다. 어느 정도 회복된 도플겡어의 주먹이 리오의 정면을 강타했다. 검으로 공격 을 막긴 했지만 리오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나뒹굴었다. 그는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났다. 쓰러져 있을 틈이 없었다. 배리어가 완전 히 갖춰지지 않은 지금만이 루이체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러나 조그만 틈새로 보이던 루이체의 모습은 결국 완전히 차단되고 말았 다. 도플겡어의 몸체도 완벽히 재생되었다. 반짝이는 빛과 함께 배리어들도 단 숨에 회복되었다. 리오는 멍하니 거인을 쳐다봤다. 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검을 잡은 손은 더없이 떨렸다. 이윽고, 그의 적동색 목에 핏대가 솟았다. “으아아아아!” 슈렌은 리오의 고함을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지크 역시 쓰러진 채 주먹 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BSP본부에서도, 전투요원과 시민들이 모인 스크린 앞에서도 탄식이 터졌다. 처크는 선글라스를 벗고 눈 사이를 마사지했다. 루이는 한숨만 쉬었다. 피 엘은 엄숙한 얼굴로 화면을 지켜봤다. ‘도플겡어…… 플레어 버스터에 맞는 순간 자신의 조직을 다른 곳으로 돌 렸어. 리오님은 루이체가 다치지 않도록 몸체에 직격을 날리지 않았지. 결 국 도플겡어의 본체는 건드리지 못한 거야. 부서진 건 껍질에 지나지 않았 어.’ 그녀는 안경을 벗으며 결론을 내렸다. ‘이제 남은 것은 데이브레이크뿐이야.’ 하지만 그것은 루이체의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최악, 최후의 길이었다. 그때, 피엘의 눈동자가 떨렸다. 리오의 전신에서 녹색의 빛이 흐르는 것을 본 순간이었다. 피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말로 쓸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성공시킨다면 결과는 틀려!’ 리오의 모습을 지켜보는 모든 이들은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녹색의 빛과 함께 지금까지 단 한번도 화면에 보이지 않았던 남자, 레드 원 의 모습이 뚜렷이 잡혔다. 그는 소문대로 붉은 장발을 가지고 있었다. 회색의 망토, 단단한 근육질, 준수한 외모, 그리고 영혼을 빨아들일 듯한 진보라색의 검.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은 것은 그런 외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전신이 피와 땀으로 얼룩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의 뒷모습은 힘이 넘쳤 다. 어깨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은 뭔가를 바라는 의지로 더없이 반짝였다. 도대체 무엇이 넝마가 된 저 남자에게 기대를 가지게 만드는. 그저 모습을 보는 것뿐인데도 왜 이리 안타까운 것인가. 모두의 궁금증과 기대감 속에 리오는 검을 들어 그 끝을 도플겡어에게 맞추 었다. 그는 낮게 중얼댔다. “없애버리겠다.”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지크와 슈렌은 리오를 중심으로 밀려오는 압력에 이를 악물었다. 지크로선 지금까지 느껴본 일이 없는 특이한 기운이었다. 수압처럼 전신을 짓누르면서도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불편하지는 않았다. 처음 보기는 슈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나직이 외쳤다. “저것이 지하드……!” 지하드. 이름의 뜻은 성전(聖戰). 신을 죽이지는 못하지만 상식을 뛰어넘은 그들의 육체를 털끝하나 남기지 않고 분해할 수 있는 초파괴 검술. 그러나 기술을 가르쳐준 오딘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그는 지하드의 기본만을 가르쳐주었을 뿐이다. 이 기술을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지 리오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이것을 실패한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 이 도시 뿐만 아 니라 행성을 송두리째 날릴 지도 모르는 데이브레이크 밖에 없었다. 준비를 하는 동안 리오는 오딘과의 대화를 하나씩 회상했다. 그 외눈박이 늙은 고신(古神)은 지하드를 가르쳐주기 직전에 이런 말을 했 다. “지하드는 인간이 절대로 사용할 수 없는 기술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인간 은 목숨이 하나뿐이지. 그래서 자신은 죽음을 각오했다고 해도 본능적으로 죽음을 피하려 하기 때문에 지하드는 절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말에 리오 자신은 코웃음을 쳤다. “그럼 난 성공하겠군요. 지금까지 몇 번을 죽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또 죽는 것도 이력이 났으니까요.” 코웃음을 치기는 오딘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네 머릿속의 생각일 뿐이야. 몸은 다르다, 절대로.” 이후 오딘은 몇 번이고 지하드를 전개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리오는 사기 치지 말라는 식으로 그를 무시했지만 오딘은 딱 잘라 말했다. “난 신이 아니다. 한 번 죽으면 더 이상 부활할 수 없지. 그래서 실패하는 것이다.” 아무튼 스승과 제자 모두 지하드를 사용하지 못했다. 결국 지하드는 리오의 기억 속에서 미완성으로 남은 채 조금씩 잊혀져가고 있었다. 리오는 디바이너에 눈을 돌렸다. 그 보라색 검은 불이 꺼진 장작처럼 연기를 내뿜었다. 플레어 버스터가 걸 렸을 때도 흔들리기만 했던 검이 지금은 지하드 전개로 인해 전해지는 기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다. 사실, 붕괴되는 건 그의 검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손과 팔, 몸 전체가 조금 씩 흐트러지고 있었다. “…….” 리오는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봤던 루이체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는 아이를 향해 마음속으로 말했다. ‘한 가지 고백하마. 루이체, 난 사실 널 처음 봤을 때 정말 기뻤어. 세상 을 모르는 순진한 너라면 살인자에 불과한 나를 피하지 않고 위로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인가? 넌 나와 약속했지. 이런 나의 모습을 오랫동안 기억해 주겠다고 말이야.’ 리오는 검을 양손으로 굳게 거머쥐었다. ‘그 약속, 반드시 지키게 해주마.’ 도플겡어 역시 앞으로 나왔다. 양팔의 분사구에서 불꽃이 뿜어졌다. 거인의 두 주먹은 이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리오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리오는 이전에 없던 집중력으로 그 공격을 모두 피하며 기회를 노렸다. 느 낌상 지상에서 지하드를 사용했다가는 슈렌과 지크 모두 피해를 당할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루이체를 구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결정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슈렌은 뭔가 느낀 듯 그룬가르드로 투창자세를 취했 다. “성공해라, 리오!” 슈렌은 전력을 다해 그룬가르드를 집어던졌다. 화염의 탄환이 된 창은 공기 의 장벽을 뚫으며 거인에게 날아갔다. 거인의 등판에서 시커먼 물체가 솟아올랐다. 또 하나의 팔이 즉석에서 만들 어진 것이다. 그룬가르드는 예상치 못한 방해물에 걸려 목적을 다하지 못하고 위로 튕겨 나갔다. 슈렌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일순간 생긴 틈을 놓치지 않은 리오는 몸을 돌려 거인의 몸뚱이를 올려쳤 다. 도플겡어는 팔로 급히 방어했으나 가해진 힘이 워낙 강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리오는 오른손에 검을 들고 양팔을 좌우로 폈다. 조용해졌다. 바람이 멈췄다. 슈렌과 지크를 누르던 압력도 풀렸다. 오로지 정적만이 그 일대를 지배했다. 몸 전체가 녹색으로 물든 리오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잠시 후, 리오와 도플겡어가 공중에서 충돌했다. 전투지역 밖으로 대피해있던 시민들과 BSP요원들은 저 멀리서 녹색의 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고 자세를 낮췄다. 햇빛을 넘는 그 강렬한 빛으로 인해 빛 주위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슈렌과 지크에겐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지하드는 그들의 청각을 넘어선 소음을 내고 있었다. 그만큼 강력한 수백, 아니 수천 개의 섬광이 빛의 중점을 향해 꽂혔다. 이윽고 거대한 충격파가 빛의 고리로 바뀌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가공 할만한 충격파는 공중에 떠있는 구름들마저 저 멀리 밀어냈다. 사방이 다시 잠잠해졌다. 빛은 아직 남아있었지만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지 는 않았다. 지크는 슈렌의 부축을 받아 똑바로 일어났다. “어떻게 된 거야? 이긴 거야? 아니면 또 실패한 거야?” 그의 질문에 슈렌은 고개를 저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의 분말들이 눈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시 간이 길어질수록 빛의 크기도 점차 줄어들었다. 조금 뒤 어른 몸뚱이만한 물체를 든 리오가 아래로 서서히 내려왔다. 그가 든 알 속엔 루이체가 몸을 웅크린 채 앉아있었다. 동생이 다시 내려오는 것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지크는 의아해했다. 리오의 전신이, 심지어는 그의 붉은 장발까지 연한 회색으로 물들어있었기 때문이 다. 멍한 얼굴의 리오는 착지하자마자 왼손에 들고 있던 알을 바닥에 내려놨다. 이어서 검으로 그것을 세차게 내리쳤다. 한 번으로는 깨지지 않았다. 리오는 시니컬하게 웃으며 다시 검을 들었다. “동생을…… 내 동생을 내놔.” 반투명의 장막은 몇 차례 검을 맞고 나서야 깨졌다. 그와 함께 루이체의 작 은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리오의 검, 디바이너도 바닥에 떨어졌다. 그 순간 지크와 슈렌은 숨을 멈췄다. 형제들이 경악하는 가운데 리오는 한쪽 무릎을 꿇어앉고 루이체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회색빛 왼손에 실크와 같은 루이체의 금발이 부드럽게 흘러내 렸다. “아…….” 아이의 입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힘겹게 눈을 뜬 아이는 리오의 모습이 보 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리오 오빠!” “응.” 리오는 빙긋 웃었다. 여태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따뜻한 미소였다. 모든 게 회색으로 물들긴 했지 만 그의 마음만은 확실히 전해져왔다. 동생이 구출됐음에도 불구하고 슈렌과 지크는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다. 지 크의 볼엔 눈물이 흘러내리기까지 했다. 화면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 역시 입을 벌린 채 말을 하지 못했다. 상당 수의 사람들은 지크처럼 눈물을 보였다. 리오의 왼팔이 움직였다. 루이체를 안으려는 듯 아이의 머리께로 들리던 그의 팔이 갑자기 아래로 후 루룩 사라졌다. 그의 팔 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회색의 재로 변해 바람에 흩날렸다. 떨어진 디바이너의 자루엔 리오의 오른팔이 달려있었다. 일찌감치 떨어진 그 팔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루이체는 그런 리오의 모습을 보고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오, 오빠?” 아이는 떨리는 손으로 리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그의 어깨가 바 닥에 툭 떨어져 부서졌다. 루이체는 반사적으로 손을 뺐다. 하지만 리오의 분해는 멈추지 않았다. 분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모 래성처럼 그의 생명은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그는 루이체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다시 한번…… 안아보고 싶었는데…….” “오빠! 안돼, 리오 오빠!” 루이체는 비명을 지르며 그의 몸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결국 리오의 모 든 것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남은 것은 바닥을 뒹구는 디바이너 한 자루 뿐이었다. 그것도 오래 가지 않 아 주인을 따르듯 연기를 내며 사라졌다. 루이체는 그제야 울음을 터트렸다. 지크와 슈렌의 품에 안겼어도 아이의 울 음은 그치지 않았다. 도플겡어 사건은 그렇게 끝났다. ※※※ 사건이 끝난 지 이틀이 지났다. 말도 안 되는 전투가 벌어진 Y구역은 복구공사가 한창이었다. 피엘의 집단 최면에 의해 원인제공자가 되어버린 미합중국 정부는 주민대표들과 손해배 상에 대한 논의를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수많은 중장비들이 폐허를 정리하기 위해 분주했지만 단 한 곳만은 건드리 지 않았다. 한 남자가 재로 변해 사라진 곳, 그곳엔 하나씩 놓인 백합과 카드들이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수북이 쌓여있었다. 병원에 입원 중인 루이체는 병원 측의 협조와 처크의 압력에 힘입어 언론과 완전히 단절된 채 병원 침대 위에서 편하게 쉬었다. 병문안이 허락된 사람은 루이체의 보호자인 레니와 지크, 루이, 처크, 그리 고 BSP 요원들뿐이었다. 그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루이체와 리오의 관계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지크가 그렇게 부탁한 건 아니었다. 둘의 관계가 궁금하긴 했지만 리오가 그 아이를 소중하게 여겼다는 것만은 직접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루이체는 종이학을 접었다. 손동작은 어설펐지만 열심이었다. 슈렌이 떠나 기 전에 준비해둔 어항에는 아이가 접은 종이학 몇 개가 다소곳이 모여 있 었다. 준비해온 음식꾸러미를 풀던 레니는 조심스레 이유를 물었다. 아이가 혹시 라도 자폐증에 걸려 그러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예상외로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슈렌 오빠가 그랬어요. 하루에 10개씩, 3개월 동안 꾸준히 접으면 리오 오빠가 돌아온다고 말이에요.” “그래? 그렇구나.” 레니는 웃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무거웠다. 종이학을 몇 만 마리 접는다 해 서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녀의 상식선 내의 생각일 뿐이었다. 레니는 음식들을 병원 침대의 간이식탁에 올려놓았다. 알아서 식기를 꺼내 고 냅킨을 두른 루이체는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레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엄마, 있잖아요.” “응?” “리오 오빠는 나쁜 사람이었나요?” “리오씨가? 왜?” 루이체는 궁금해 하는 엄마에게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리오 오빠는 말투도 거칠고, 하는 행동도 거칠고, 또 다른 사람이 랑 어울리지도 못했잖아요. 그래서…….” 잠시 생각하던 레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안심해. 누가 봐도 그는 좋은 사람이었어. 우리 루이체가 생각하는 그대 로 말이야.” “그렇죠? 다행이네요.” 루이체는 다시 웃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구나. 지크도 아침에 너랑 똑같은 질문을 했거든?” 그러자 루이체는 귀엽게 인상을 구겼다. “뭔가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 거예요.” “그, 그렇구나.” 레니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이의 냅킨을 다시 만져주었다. “그래도 난 루이체가 돌아온 게 제일 기뻐.” “저도요, 엄마.” 모녀는 서로를 안으며 또 한번 체온을 나누었다. 커튼의 틈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어항 속에 든 종이학들은 그 빛을 받아서인지 원래보다 더 밝고 화사하게 보였다. 13화 끝. 14화 [Replacement] Y구역. 한 남자가 먼지로 변해 사라진지 일주일이 지났다. 주변은 복구공사에 동원된 건설장비와 인력들의 규모만큼이나 시끌벅적했 다. 일주일 전과 달리 일반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인부들의 표정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이곳에 무 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했지만 지금은 작업에 쫓긴 나머지 한없이 냉정하 기만 했다. 먼지와 자재로 가득한 그곳에 중후한 디자인의 대형 오토바이 한 대가 나타 났다. 작업 중이던 인부들은 그 위에 걸터앉은 붉은 재킷의 청년에게 슬쩍 눈을 돌린 뒤 다시 일에 전념했다. 오토바이가 멈춘 곳은 백합이 가득 쌓인 장소였다. 바이크에서 내린 청년은 안장 옆에 아무렇게나 끼운 백합 한 송이를 다른 백합들 위에 던졌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구나.” 청년, 지크는 숨을 내쉬듯 허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어깨 뒤로 엄지를 내밀었다. 손가락의 끝은 안장 뒤에 묶인 짐을 가리 켰다. “보이지? 나 이곳을 잠시 떠나기로 했어. 강해지고 싶어졌거든.” 말을 읊는 그의 표정은 평소처럼 재미있지 않았다. 자못 엄숙했다. 그에게 있어서 일주일 전의 사건은 평생 처음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충격 이었다. 당시 그는 칼을 조금 쓸 줄 아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도움은커녕 볼품없 는 모습만을 보여줬을 뿐이다. 루이체는 구했지만 리오는 쓸쓸히 먼지로 사라졌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어처구니없는 법칙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슈렌은 리 오가 자신이 죽을 것까지 계산해서 지하드를 억지로 사용한 것이라 설명했 다. 리오의 지하드는 사실 실패였다. 상대방에게 가해지는 충격만 생각하고 자 신에게 가해지는 충격은 계산하지 못한 탓에 결과는 동반자살로 이어졌다. 지크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사자에겐 위로가 되지 못했다. 오랫동안 자신에 대해 고민하던 지크는 결국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몇 개 월이 됐든 지금보다 훨씬 강해지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처크도 반대했다. 장난을 잘 친다는 것 말고는 매트로 서울 BSP의 최고 전력인 지크가 장기간 자리를 비운다는 건 모두를 위해서라도 좋지 않 은 일이었다. 그러나 지크의 결심은 더없이 확고했다. 결국 처크는 어제 아침, 그의 여행 을 허락한다. 자신이 빠져도 괜찮겠냐는 지크의 뒤늦은 걱정에 처크는 걱정하지 말고 수 련에만 전념하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처크가 충동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지크는 걱정을 끊 고 모두에게 작별을 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이곳 에 들른 것이다. 지크는 다시 오토바이에 오르며 말했다. “3개월이라고 했지? 그때 보자, 형제. 혼자 영웅이 된 대가를 치르게 해주 지.” 그는 그렇게 기약 없는 여행길에 올랐다. ※※※ 지크가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브리핑 룸의 자리는 빽빽했다. 그가 사용했던 자리는 케빈이 대신 앉았다. 그리고 케빈의 자리는 루이가 맡았다. 루이의 자리, 즉 치프 오퍼레이터의 자리는 놀랍게도 피엘이 사용했다. 루 이는 도플겡어 사건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녀가 계속 있는지 따졌지 만 반감을 가진 사람은 그녀 뿐, 처크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매우 반기는 입장이었다. 우선 일처리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루이 이상이었다. 게다가 냉정하면서도 모든 이들에게 친절했다. 다른 사람이 자문을 구하면 피엘은 편안한 말투로 현명한 답을 제시해 주었다. 루이의 냉랭한 말투와 불편한 분위기에 익숙해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피엘은 정말 천사와도 같은 존재였다. 처크가 계속 있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피엘은 그의 제의를 일단 거절했다. 하지만 처크는 지크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라는 단서를 두어 그녀를 다시 설 득했다. 처크가 그렇게 열심인 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대한민국 수도방위지부 에 필요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는 피엘을 통해서 루이의 나쁜 점을 고치려 하고 있었다. 루이는 나이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콧대가 높았다. 피엘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녀를 모든 면에서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때문 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인정하면서도 인간적으로 접근하기 힘들어했다. 덕분에 본부 내에서 그녀를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은 처크와 그렌, 그리고 지크뿐이었다. 아무튼 피엘은 지크에 대한 걱정과 혹시 있을지 모를 도플겡어의 잔재여부 를 확인할 겸 처크의 제의를 허락했다. 그로 인해 더욱 더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게 된 루이는 최악 의 기분으로 브리핑 룸 의자에 앉아있었다. 뒤늦게 브리핑 룸에 도착한 처크는 시거에 불을 붙임으로서 오전 브리핑의 시작을 알렸다. “피엘, 오늘의 안건을 말해주겠나.” “예, 지부장님.” 피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빙긋 웃으며 노트북을 두드렸다. “모든 요원께서 아시다시피 지크 스나이퍼 소위는 어제 부로 무기한 휴가 에 들어갔습니다. 그에 맞춰 우리는 전력누수를 방지하기 위한 대체요원을 BSP중앙본부에 요청했고, 다행스럽게도 그 사항은 즉시 처리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그렌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말씀 그대로 다행이군요. 그럼 대체요원은 언제쯤 도착하게 됩니까?” “일정상으로는 지금 이 자리에 계셔야 하지만 약 한 시간 전, 인천국제공 항에서 대체요원들 사이에 작은 충돌이 발생해서 조금 늦어지게 됐습니다. ” 피엘에게서 복수를 지칭하는 말이 나오자 모두는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리진이 모두를 대표해서 물었다. “저기요, 대체요원들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한 명이 아닌가요?” 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두 분입니다.” 그러자 케빈이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옮기며 말했다. “호오, 그렇습니까? 실력은 괜찮은 친구들인가요? 어지간한 레벨의 요원들 은 우리 지부에서 하루도 못 견딜 텐데요?” 피엘은 안심하라는 듯 편한 미소를 지었다. “그분들의 실력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부장님, 소개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녀는 처크가 그들의 존재를 깜짝 선물처럼 숨기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속마음을 깨끗이 들킨 처크는 턱수염을 긁적이며 곤란해 했다. “음……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한 친구들이라고만 해두지. 오후 브리핑 때 만날 수 있을 테니 걱정 말게. 그럼 피엘,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 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그렌을 비롯한 모든 요원들은 둘의 웃음이 왠지 두렵게 느껴졌다. 브리핑이 끝난 뒤 요원들은 누가 제의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휴게실에 모 였다. 뭔가 중대사항이 있을 때마다 그곳에 모이는 것은 어느덧 관례로서 그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모두는 오늘 온다는 대체요원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매트로 서울에 걸맞게 강한, 그 리고 지크를 대체할 수 있을 레벨의 요원은 전 세계를 통틀어 10명도 되지 않았다. 그렌은 자신이 알고 있는 후보자의 이름을 꺼냈다. “일단 1순위는 레오나르도 칼킨이 되겠지. 전 세계적으로 지크와 맞먹을 수 있는 전투요원은 그뿐이니까.” 모두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리고 2순위로는 서부지구의 에이스, 숀 드렉스톤이라고 생각해.” “숀 드렉스톤? 강아지 숀 말인가요? 케빈의 눈썹이 불쑥 올라갔다. 그렌은 씁쓸히 웃었다. “뭐, 그렇지. 오랜만에 듣는 별명이군.” 다른 사람들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럴 것이, 케빈과 그렌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분이 누구신데요?” 류페이가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옆에 있는 리진의 눈동자도 호기심에 반 짝거렸다. 그렌은 기계손으로 자신의 널찍한 턱을 매만졌다. “음, 숀 드렉스톤은 현재 텍사스의 샌안토니오에서 활동 중인 BSP야. 북미 대륙에선 칼킨에 이어서 두 번째로 강한 남자로 유명하지. 본인은 절대 첫 번째라고 하지만 아무도 그 말엔 신경 안 써. 그러나 실력 하나는 확실해. ” “지크랑 비슷하네요?” 리진이 농담 식으로 말하자 그렌은 씩 웃었다.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이지. 지크에게 남자가 무엇인지 가르쳐준 장본인이 바로 숀이거든.” “…….” 리진의 얼굴이 불안한 각도로 구겨졌다. “그리고 제 3순위는 린 파옌이 되지 않을까?” 그렌이 3순위 후보를 말하자 덤덤하던 챠오의 어깨가 꿈틀했다. 사실 린 파 옌은 그녀의 사촌오빠였다. 챠오보다 일찍 BSP가 된 파옌은 현재 중국 북경지부 최고의 전투요원으로 유명했다. 지크가 그녀의 집에서 수련을 마치고 떠남과 동시에 BSP에 들어간 파옌은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까지도 지크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고 있었 다. 그의 동료들은 파옌이 BG를 잡기 위해 BSP에 들어온 게 아니라 지크를 잡기 위해 들어온 것이라고 가끔 농담 삼아 말하기까지 했다. 그렌은 계속해서 4순위 후보를 말했다. “러시아 지부의 브람 보덴부르크도 꽤 쓸만하지. 하지만 대한민국 지부엔 오지 않으려고 할 거야.” “왜요?” “대한민국은 그의 활동영역에 비해서 일조량이 많거든.” 질문을 했던 류페이는 고개를 갸웃댔다. “예? 일조량이 많으면 좋지 않나요?” “우리한테는 좋지만 그 친구와 그 친구 일족에게는 좋지 않아. 뱀파이어거 든.” 이번엔 리진의 몸이 움찔했다. 유령이니, 몬스터니 하는 것과는 전혀 친하 지 않는 그녀였다. “뱀파이어가 BSP요원으로 활동한다고요?” 그녀는 소리를 지르듯이 물었다. 그렌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예민할 건 없어. 그 친구는 BSP이기에 앞서 세금 꼬박꼬박 잘 내는 모범적인 시민이야. 결혼해서 아이도 두 명이나 있지. 유럽지부에서 주는 좋은BSP아버지 상도 받았을 걸? 아, 리진의 아버지도 받은 적이 있을 거야. ” 그렌의 침착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리진의 심령 공포증은 가시지 않았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뱀파이어에요, 뱀파이어라고요!” “알았다니까.” 그렌과 류페이가 리진을 진정시키는 사이 5순위 후보는 케빈이 대신 말했 다. “제 생각인데, 5순위로는 일본 오사카 지부의 후마 토마루가 낫지 않을까 요?” “후마 토마루?” “네. 일본 최고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쓸만하잖아요? 스무 살도 안됐는데 닌자 마스터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렌은 즉시 손을 내저었다. “실력은 나도 인정하겠지만 토마루는 대한민국에 절대 오지 않을 거야. 일 본축구의 광적인 팬이라서 대한민국에 대한 콤플렉스가 꽤 심하거든.” “호오, 그렇겠군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